세 가지 준비
“갈대아 땅 그발강 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네 위에 있으니라”(겔 1:3)
에스겔은 모든 많은 선지자들 가운데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몇 가지 점에 있어서 특별했는데 그의 신령한 세계에 대한 경험에 있어서 매우 특별했습니다. 에스겔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 주신 신령한 예언의 이상들이 많이 등장을 하는 것도 그런 이유였습니다. 구약에 선지자들이 많지만 모두 같은 사람들이 아니고 신약에 사도들이 여럿 있지만 모두 수준이 꼭 같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에스겔 선지자는 탁월한 신령한 세계를 바라보는 경험을 가졌다는 점에서 특별했습니다. 또 하나 특별한 점은 이 에스겔이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으로서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다는데 있어서 매우 특별합니다. 이런 유를 찾기가 선지자들에서는 쉽지가 않은데 전통 가문의 사람으로 태어나서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원래 이 제사장 가문과 선지자 가문은 자칫하면 사이가 안 좋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은 백승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가는 사람이니까 언제나 사람 편에 서기 쉬운 그런 위치를 가지고 있고 선지자는 계시의 말씀을 가지고 백승들 앞에 나오는 사람이니까 사실은 하나님 편에 서기가 쉬운 사람들이어서 제사장들은 대개 계시보다는 전통의 편에 서 있고 선지자들은 전통 보다는 계시의 편에 서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종종 갈등이 빗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제사장의 전통 가문에서 태어나서 제사장이 된 사람으로서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다는데 특이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에스겔서를 읽어보면 전광석화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칼날 같은 하나님의 계시와 그 다음에 목자가 되어서 그 양떼들을 끌어안고 흐느끼는 제사장적인 연민이 함께 어우어진 탁월한 작품입니다.
세 번째는 에스겔이 사역을 하는 동안 일생에 걸쳐서 하나님과 말할 수 없는 친교를 누렸다는 사실에 의해서 에스겔 선지자의 특이성이 나타납니다. 언제가 에스겔서 전체를 펴 놓고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말씀하시기를, 말씀이 에스겔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이것이 몇 번 나오는지 다 세웠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그 횟수를 지금 제가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는데 오십 몇 회까지 제가 세웠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그건 선지서에 있어서도 상당히 특이한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과의 교통 속에서 끝임 없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산 그런 신령한 교통의 사람이었다고 우리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네 번째 이 사람의 특이성은 비극적인 역사를 끌어안은 선지자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보다시피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것이 나라가 다 망해버린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어떻게 보면 에레미아와 같은 깊은 고통을 함께 소유했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포로기에 예언을 하여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에스겔 선지자의 특이성들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특별한 선지자가 훌륭하게 하나님 앞에 선지 사역을 감당해 나가고 그리고 에레미아도 할 수 없었던 놀라운 일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불행한 이스라엘 역사의 그 껍질을 깨고 태어나게 될 그리스도의 찬란한 왕국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면에 있어서는 사실은 다니엘과 또 유사한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신령한 세계를 놀랍게 보여주는 그러한 역사적인 역할들을 이 선지자가 수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에스겔 선지자는 육적 이스라엘이 끊어지고 영적 이스라엘로 나가는 수문과 같은 위치에 있는 구속사적 인물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아무렇게나 살다가 죽어버리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더욱이 한 때에 사명을 받아서 신학을 공부를 했거나 또 하려고 마음을 먹거나 사실은 하려고 마음만 먹는 사람들은 데려 오지 말라 그랬는데 그런 사람들도 많이 보이네요. 큰일 났어요. 이제. 그런 사람들이나 혹은 사명을 현재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대충 살다가 빨리 죽자. 그런 사람 없습니다. 원통해서 어떻게 눈을 감겠습니까?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큰일을 한번 해 보고 죽고 싶다는 야망을 예수 믿기 전에는 가졌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나면 사실 그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인생에 대해서 뭔가 큰 뜻을 품는 다는 것은 큰일을 하다가 죽겠다든지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제 가끔 말씀드리지만, 저도 못 가보았습니다만 이 세상에서 에베레스트 산이 제일 높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산이 제일 멋있다고는 생각 안합니다.
전 옛날에 살던 동네에 맞은편에 내다보이는 도봉산도 참 멋이었습니다. 산을 아는 어떤 사람이 이야기하는데 자기는 세계를 다여 바도 큰 도시 주위에 도봉산과 같이 그렇게 아름답고 예쁜 산 처음 봤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늘 보아도 가서 삼겹살이나 구워 먹으니 그게 좋은지 모르지만 그런 것 입니다. 그래서 산이 꼭 에베레스트 산이 가장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 산이 제일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그것 보다 높이가 낮아도 예쁜 산들이 많고 세계에서 높은 건물이 많이 있지만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처럼 높지 않아도 예쁜 건물이 많습니다. 평촌에도 있습니다.
제가 이야기 하려는 것은 그것입니다. 이 세상에 정말 할일 없는 사람이 높이를 경쟁하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내가 아니었으면 도저히 살 수 없는 아름다운 삶 그런 것이 중요 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 믿고 나서 교회 와서 은혜를 받고 신학 적으로 정리가 되고 나니 이제 진실한 신자가 되는 것이 우리의 일생에 접을 수 없는 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편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며 사는 것은 개별적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직업을 택한다고 해서 진실한 신자가 되고 어떤 직업을 택한다고 해서 못된 신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입니다. 보편적으로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진실한 신자가 되어서 창조의 목표에 부합하는 인생을 살고 싶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내가 무엇을 하고 살 것인가? 그건 뭐든지 귀한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그러니까 에베레스트 산과 같은 것들을 꿈꾸면서 높이가 적어도 칠천 미터 안 되는 것은 산도 아니다. 그것은 동산이다. 동산은 산도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은 사실은 앞에 이야기한 보편적인 가치인 그 진실한 그리스도인도 될 가능성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는 그런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화) 지금은 제 곁을 멀리 떠났지만 제 가까이에서 섬기던 형제 하나가 있었고 교회에서 교역자도 잠깐 했습니다. 그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하여튼 그 친구가 제 심부름을 많이 해 주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책을 많이 쓸 때니까 지금은 뭐 택배도 있고 뭐도 있고 그러는데, 전 학교에서 교수 생활을 하고 너무 바쁘니까 하여튼 그 친구가 원고 심부름부터 다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저는 이렇게 예수를 믿고 목사님 설교 듣고 회심도 경험하고 그리고 이렇게 교회 한 모퉁이를 섬기고 있는데 솔직히 이야기해서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전 별로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럼 뭐냐” “ 어쨌든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리고 내게 맡겨준 일을 성실하게 수행을 해서 누구를 통해서든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내가 그 일에 보탬이 된다면 나는 그 일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만족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난 항상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쓰실 것인가? 하나님께서 크게 쓰실 것인가? 작게 쓰실 것인가? 작게 쓰실 것인가? 그것은 작게 쓰시는 사람이 질적으로 나쁜 사람이 아니고 크게 쓰임 받는 사람들이 질적으로 훌륭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것이 전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러니까 가치관을 새롭게 정립해야 됩니다.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쓰심에 합당하도록 우리가 그렇게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런 면에 있어서 가치관을 제 정립해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제일 바보 같은 사람이 큰 일 하려고 마음먹는 사람입니다. 큰일 하는 사람들이 큰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큰일을 내더라고요. 사고를 친다는 말입니다. 그런 것들을 접고 인생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너무 짧습니다. 우리 김경애 전도사님도지만은 학교에 만나서 교수실에 모여 앉아서 성경공부 하면서 조국 교회를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2년 13년이 지났습니다. 얼마나 빨리 지나 갔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빨리 지나갑니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가치관을 빨리 정리를 하고 그리고 철저하게 내가 가고자 하는 길에 주님을 꺾어서 맞추려고 하지 말고 순리대로 주님께서 나를 쓰시려고 하는 그기에 나를 맞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시대에 태어나서 조국의 교회의 한 모퉁이에서 작은 일이라도 주님이 나를 세워 주신 그 자리에서 잘 감당해 나가야 되겠다고 하는 그런 생각을 가져야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크게 쓰시던지 작게 쓰시던지 그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인데 우리는 최상의 준비를 갖춘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를 쓰시려고 하실 때에 그곳이 높은 자리든지 낮은 자리든지 큰 일든지 작은 일이든지 주님의 손에 잘 붙잡혀서 사용되는 그러한 도구로서 자기 자신을 준비해야 되는 것입니다. 전 성격이 그래서 그러는지 넥타이도 메면 하나만 계속 메서 다 떨어지도록 메고요. 요즈음은 좀 나아졌습니다. 넥타이들을 하도 선물을 많이 해 주어서, 연필을 쓰도 전 그 연필이 없으면 필기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제 손에 딱 맞아서 쓰기가 좋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데리고도 일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꼭 쓰시고 싶어 하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데리고 하나님은 일하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려고 하실 때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잘 준비되는 것은 그 분의 손에 기분 좋게 그 손 안에 들어가는 그러한 연장이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셔서 즐겁게 당신의 일을 하시고 우리는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이 에스겔은 바로 그렇게 구속사에 있어서 수문과 같은 역할을 한 예언자인데 사실 하나님 앞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을 때에 다른 선지자들 앞에 훨씬 뛰어난 타고난 영적인 축복을 이 사람이 받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이 신령한 관계 속에서 그와 교통하시고 마지막에 될 위대한 계시와 영광들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또 능력 있게 예언하고 담대하게 그 시대에 불의한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을 향해서 외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에게 임한 영적인 축복은 세 가지였습니다. 우선 첫째는 하늘이 열리고 그에게 이상이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하늘이 열리는 이 사건은 신적인 인제를 의미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기사가 예수그리스도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똑같이 하늘이 열리고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그에게 들렸습니다. 성령은 비둘기와 같이 임하실 그 때에 이는 사랑하는 내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 하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요한이 밧모섬에서 계시를 받을 때에도 하늘이 갈라지고 그리고 마지막 때에 될 위대한 계시가 그에게 빗줄기처럼 쏟아 부어 졌습니다. 한 사람이 그 위에서 하늘이 열리고 더군다나 그 위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거나 계시의 빛이 내리 때 그것은 예수님과 같은 신적 존재임을 암시하거나 혹은 신적 존재이신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매우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열리며”라고 되어 있는 이 부분이 히브리어 성경에는 보면 니팔 동사로 되어 있습니다. 니팔 동사는 수동태입니다. 누군가가 여신 분이 있었기 때문에 하늘이 열렸고 그리고 하늘이 열려지게 되자 이상이 내리 비쳤고 그리고 에스겔은 그 경험을 통해서 선지자로 부름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 이것을 명심해야 됩니다. 선지자였기 때문에 하늘을 열어서 보여 주신 것이 아니라 하늘을 열고 보여 주심으로 이 사람이 선지자가 되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수동태로 되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누군가가 그 하늘을 여신 분이 있는데, 누구냐는 것입니다. 하늘을 열고 닫는 그 절대적인 주권은 오직 누구에게만 있습니까?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그래서 계시록 2자에서 빌립보교회를 향해서 뭐라고 그랬습니까? 내가 너에게 열린 문을 두었으니 또 닫으면 열자가 없고 그 절대 주권을 누가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직접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고 주님의 일꾼이 될 때에 신령한 사람이 되는 이 모든 비밀은 누가 그 주권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제가 몇 해 전에 벌써 여러 해 됐는데 포니 싸젼트라고 하는 사람이 로이드 존스 목사님 교회에서 부목사를 오래 하고 그 분의 설교를 수 천편을 들은 사람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로이드 존스 목사님에 대해서 나오는 논문 가운데는 그분의 논문이 결정판이었습니다. 박사학위 논문이었는데 그 토니 싸젼트의 “위대한 설교자 로이드 존스”라는 책을 읽으면서 상당히 두껍습니다. 한 칠백페이지 정도 됩니다. 미국서 오는 비행기에서 그 책을 읽으면서 엄청난 은혜를 받았습니다.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로이드 존스가 생각하는 설교자에 대한 관점입니다. 설교자 그 사람은 비상하리만치 신령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단순히 경건하고 착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 설교자 그 사람은 비상하리만치 신령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저의 표현을 빌리자면 땅의 언어를 가지고 하나님과 신앙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이지만 사실은 땅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람과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 많은 이 땅에서 아담의 자손으로 부패한 욕망을 가지고 태어난 그래서 끝임 없이 죽여도 잔존하는 죄가 여전히 남아있는 그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신령한 사람이 될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을 열고 신령한 세계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경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순간의 경험일 수도 있고 이 사람처럼 그것이 계속해서 성숙되어 가는 경험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불교에서 도노 논쟁입니다. 도노점수 논쟁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오와 수가 있습니다. 오는 뭐냐 하면 번쩍하는 빛으로 이 진리를 깨닫는 것이고 수는 끝임 없이 탐구하면서 그 진리의 세계를 알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서히 이루어지는 지적인 탐구를 통해서 진리의 세계를 깨달아 간다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수양을 훨씬 더 중요시 하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어느 한순간에 탁하고 깨닫게 되는 것은 오성의 깨어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문제냐? 번쩍하고 깨닫게 되면서부터 차근차근 이 지식을 쌓아가서 진리의 세계에 대한 이해를 깊이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견해가 있고 아니다. 진리라고 하는 것은 단박에 깨달아 지는 것이고 그리고 그 후에 천천히 하나씩 알아 가는 것이다. 또 반대로 그게 아니라 하나하나 배워 가는 가운데 어느 한순간에 기회가 오면 단박에 깨달아지는 계기가 온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든 가르침 가운데 가장 치열한 이 구도자의 삶을 살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도노돈수입니다. 도노돈수는 무엇인가하면 번쩍하며 깨달아 지고 그 다음에 깨달은 진리를 매순간 치열하게 붙들고 연구하며 살아 갈 때 그가 진리의 세계에 대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이야기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마지막이 가장 성경적이다. 그건 무슨 뜻이냐 하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성화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도노돈수적인 그 말하자면 삶이다.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께서 단박에 깨닫게 만들어 주시고 깨달은 그 때에는 그 진리를 단박에 붙들고 치열하게 이게 쌓인 것이라기보다는 매순간 치열하게 그 단박에 깨달은 깨달음이 가져다 준 그 지식을 붙들고 치열하게 매순간 이 지식이 마지막 지식인 것처럼 치열하게 살아갈 때 새로운 깨달음이 간단없이 이어지고 그럼으로 종말론적인 긴장을 유지한 채 기독교 진리의 위대한 세계에 대한 인식의 지평들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향해서 열어 주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놀고 있는 에스겔에게 허리가 아프고 소변이 마렵도록 퍼질러 자고 있는 에스겔에게 개꿈 꾸듯이 보여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조금 있다가 풀어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오늘날의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이러한 기독교 신앙의 세계 자체가 신령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신령한 세계를 보여 주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그 신령한 세계를 경험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들을 다 형이 화학적인 세계로 끌어 내려서 그래서 육적인 경험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직접 제가 들었습니다. 이름만 대면 여러분들이 다 알 수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조직신학 교수입니다. 그분이 로마서에 나오는 그 동족을 향해 애통하는 심정을 가진 내가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내 골육지친 중 몇을 구원할 수 있다면 내가 원하는 바로다. 이 로마서에서 나오는 그 위대한 본문을 붙들고 설교를 하는데 나라사랑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하셨습니다. 마지막 결론은 뭔지 아십니까? 제산 세 제때 내고 쓰레기는 반드시 분리수거 합시다. 그게 결론이었습니다. 그래서 정부시책에 나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적극 협조합시다.
전 그 예배 시간에 진짜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당대 최고의 학부를 나와서 한국을 대표하는 조직신학자 가운데 한사람이 어떻게 그 영광스러운 본문을 마지막에 쓰레기 종량제 봉투 사용하는 것으로 결론을 낼 수 있을까? 그것도 유월 달에 말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그러나 그분이 게을렀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닙니다. 철저하게 설교 준비를 했지만 신령한 세계에 대한 인식이 없으니까 결국은 적용 점 자체가 그렇게 형이 화학적인 것으로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설교란 무엇인가? 설교는 설교자가 설교시간에 모든 회중을 데리고 하늘나라에 올라가서 보여주고 기도와 함께 다시 땅으로 내려놓는 것이 설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설교자가 고향이 이 세상이어서는 안 됩니다. 세레 요한에 대해서 말하기를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 났나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 하러 왔으니 빛에 대해서 증거하고 자기를 인하여 많은 사람들로 그 빛을 믿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보며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왜. 그에게는 하나님 곁에 있다 온 흔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난 흔적, 영광스러운 하나님 곁에 동거하면 있었던 그 거룩한 흔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세계를 보고 눈뜬 그 흔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왔을 때 정치적인 견해가 우파든지 좌파든지 모두 공통적으로 요한은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다. 하는 일치된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사람들입니다. 땅의 것에 코 박고 살아가는 이 사람들에게 지성을 통해서도 알 수 없고 스스로 탐구해서 알 수 없는 신령한 세계를 보고 와서 그것을 증언해 줄 사람, 그런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이런 하늘이 열리고 하늘의 신령한 세계를 하나님이 비쳐 주신 경험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뭔가 하면 “여호와의 말씀이 특별히 임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실 히브리어 성경에는 특별히 라는 말이 없습니다. 강조 용법으로 되어 있는데 뭐라 그럴까요. 해석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필연적으로 임하고 아니면 계속해서 임하고 정령 임하고 뭐 그런 정도의 뜻입니다. 그걸 의역을 해서 특별히 라고 번역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임하고”라고 하는 단어, 히브리말로 “바이 예히 핫다바르 엘로힘” 혹은 아도나이 엘 누구누구로 이어지는 이 공식화 되어 있는 선지자 소명에 기사는 굉장히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그 중에 일부를 제가 지지난 주일에 잠깐 설명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지금 시간이 없으니까 제가 장황하게 설교 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이런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다.”라는 것이 히브리어 성경으로 보면 존재한다. 혹은 비컴으로도 해석이 됩니다. 비 혹은 비컴으로도 해석이 되고 그런데 그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한다.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냐 하면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이 누구누구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구약에 이미 잠언서나 이런데 나오는 것처럼 이 구약에 하나님의 말씀이 의인화된 지혜로 나타나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다. 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하나님 자신이 임재 한다. 라고 하는 것과 때어 놓을 수 없는 또 다른 표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그에게 입술의 말씀을 주셔서 내일 가서 이렇게 전파할 수 있는 말씀을 주신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이 선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신탁의 말씀을 받아서 들은 대로 가서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것이 그의 본무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사역 중에 지극히 작은 일부였고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해 주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니까 모세를 하나님이 불렸을 때 모세가 뭐라고 변명을 합니까? 나는 입니 뻣뻣해서 말을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랬더니 말 잘하는 네 형 아론이 있지 않느냐? 그가 너를 위해서 선지자가 될 것이다. 무슨 뜻입니까? 동생이 뭔가 말할 것이 있어도 말을 못하는데 그것을 동생의 마음속에 뭐가 있는지를 끌어내어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기 쉽게끔 해석해 주는 사람이 선지자여야 됩니다. 여기서 또 선지자의 지성의 문제도 또 나옵니다. 뭐 곁가지로 가면 너무 길어지니까, 그래서 결국은 선지자는 단순하게 목격하고 와서 그것만 달달달달 얘기 해 주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모세가 선지자의 비조였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은 계시는 일부에 불과 합니다. 모세오경이 어떻게 쓰여 졌습니까? 그것들을 풍부하게 모세가 해석을 합니다. 특히 신명기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지자는 가만히 있다가 하나님께로부터 뭔가 직통으로 계시를 받고 또르르르 전해주는 그런 점쟁이나 말하자면 주술사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하나님께로부터 뭔가 계시를 받으면 그것을 액면 그대로 글자도 틀리지 않게 이야기해 주어야 할 때도 있었지만 그것들을 가지고 자기의 지성 속에서 해석을 해서 본 뜻을 충분하게 드러낼 때에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당신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지성의 양이나 질 이런 모든 인격적인 그릇의 크기에 의해서 이 사람의 예언 활동의 품질이 결정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거기는 그만 나가겠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냐 하면 하나님 임재의 현존적 경험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함으로 말미암아서 그 말씀이 임할 때 그 말씀이 그 사람 속으로 들어가서 그 사람의 지성과 감성은 물론이거니와 의지 이해의 작용 모든 형성된 가치관까지 파헤치면서 지나가는 것입니다. 마치 불이 그 사람을 관통하고 지나가듯이 확 파헤치고 지나가면서 한 시대에 태어나서 누구나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가치관, 땅에 속한 이해, 세상에 대한 사랑 그리고 육적인 생각들 이런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파헤치고 지나가게 됨으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확 뒤집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대와 완전히 다른 제품을 보면 메이드 인 코리아 이렇게 되잖아요. 메이드 인 히븐 하늘나라에서 만들어진 사람으로 바꾸어버리는 것입니다. 껍데기는 땅의 껍데기이지만 그 사람을 메이드 인 히븐을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됩니까? 수많은 사람들하고 가치관이 너무 다릅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기뻐할 때 선지자는 애통해 합니다. 먹고 마실 때에 금식하고 모든 슬퍼할 때에 신령한 하나님의 계시를 바라보면서 낙관하는 것입니다. 이게 선지자의 삶입니다.
호세아서 1장 3절에 보면 “비로소 여호와의 말씀이 호세아에게 임하니라.” “떼일라트”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떼일라트 디뻴 아도나이” 떼일라트는 처음으로 디빼르 말씀하셨다. 아도나이 하나님께서 그리고 호세아에게 베 호세아르 인투 호세아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호세아를 관통하며 지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면서 그 사람을 그 시대의 사람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확 바꿔 놓는 것입니다. 그게 말씀이 임하는 것입니다.
학교 가서 과정을 마치고 학사학위를 받고 석사학위를 받고 뭐 박사학위를 받아서 그렇게 해서 마음에 쌓이게 된 그 말씀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한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천국에 대해 증언하고 하늘나라 가치관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그 자신 속에 가히 혁명적인 변혁이 일어납니다. 이게 구약시대만이 아니라 신약시대에도 마찬가지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였습니까?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니라고 하는 것이 단지 예수그리스도께서 그를 찾아 오시니라하고 바꿨을 뿐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하는 사실과 자기들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그리스도께서 메시아로서 다시 사셨다는 사실을 목격하게 될 때에 그 지식이 그 시대에 두 가지 편견에 사로잡힌 이 사도 바울 하나는 심리적인 인종적 편견과 신학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일 수 없다는 이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을 파헤치면서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잘못된 편견을 모두 버리게 되고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길 뿐만 아니라 배설물과 같이 여기게 되고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 하다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 중보자에게 붙들려서 그 중보자를 통해서 창조의 위대한 역사를 보고 그리고 만물이 그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경륜 되어지는 것을 보고 마지막에는 이 창조된 모든 피조물이 그분께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라고 하는 역사의 위대한 비밀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우주관을 같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에스겔이 그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무얼 하고 살든지 간에 하고 있는 일이 그 사람의 영혼을 완전하게 지켜줄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을 잘 섬기고 훌륭하게 봉사하는 것은 너무 귀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신학을 하고 목회 사역을 하는 사람들의 영혼이 오히려 호떡 장사하는 평신도들의 영혼보다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중국에서 그리고 특히 홍콩에서 대만에서 사스가 발생했을 때에 가장 많은 희생자가 누구였습니까? 간호원과 의사들이었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이 교회는 죄가 많이 있습니다. 죄인들이 모인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감염될 가능성도 많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우리의 영혼을 완전하게 지켜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헛된 망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버려야 됩니다.
그래서 신학을 나왔기 때문에 다 주의 일을 하면서 거기서 밥을 먹고 살아야 된다고 하는 논리는 저는 성경적으로도 맞지 않고 그리고 심리적으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거기에 대해서 부자유함을 갖지 마십시오. 신학교 나온 것은 나온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은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새롭게 고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왕에 나왔으니 써먹자. 그런 것 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무슨 신학기 졸업장이 1종 보통 면허입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괜찮다 이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에스겔에게 특별하게 임했고 그래서 에스겔은 정말 새로워 졌습니다. 에스겔이 탕자처럼 막 가던 사람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제사자의 가문에서 태어나서 제사장이었습니다. 어떻게 막 가는 삶을 살았겠습니까? 여러분들은 방탕한 길을 가다가 전광석화와 같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회심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믿지 마십시오. 대부분이 거짓말입니다. 그런 어느 순간에 영웅심리에 빠져서 과장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 날 수 없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신뢰하기 어려운 측면의 그 감정이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절대 하나님의 방법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실 수도 있지만 우리가 무엇 때문에 수십만 명 가운데 한두 명 일어나는 회심을 기대하냐 이것입니다. 바보같이. 보편적인 것을 기대하면서 걸어 가다가 예외적인 것을 만나면 감사한거지. 그렇지 않습니까?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서 가치관은 확 바뀌는 것입니다. 이게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도 그러는 것입니다. 재미가 하나도 없습니다. 공장에서 찍어낸 사람들하고 똑 같습니다. 뭔가 사람은 달라야 되지 않습니까?
똑같은 것입니다. 신학교 졸업하고 어느 교회 어디 좀 가볼까? 배울만한 교회 좀 없을까? 사실은 교회는 배울 사람들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일할 사람들을 찾는데 말입니다. 배울만한 데는 없을까? 그 다음에 또 생활비라도 넉넉하게 주는 데는 없을까? 말이야 안 그렇다고 하지만 사실 그 마음이야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하고 어느 정도 준비가 되고 나름대로 자기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되면 그 다음에는 까치발을 뛰고 이제는 나를 찾는 데는 없을까? 어디 가서 나도 한번 내 사업을 하듯이 내 교회를 한번 해볼까?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모든 신학을 졸업한 사람들이 대부분 보편적으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산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 특별히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특별히 임해서 그 말씀에 강력하게 사로잡히게 되면 그런 가치관들을 결별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만히 보면 응답 받았다고 그러고 교회를 자꾸 옮기니 않습니까? 몇 만 명 모이는 교회의 목사님이 깊이 응답 받았다고 그러고 오십 명 모이는 교회로 가는 것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일은 거의 없습니다. 뭘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그분들을 잘못되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만큼 한때에 목숨을 걸고 주님을 위하여 살고자 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현재적으로 사심이 없이 순결하게 이 목회의 길을 걸어가는 것은 과거의 생애적인 회심이 우리에게 저절로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하나님 앞에서 순전하고 진실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갈 때에 그러한 삶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저는 이야기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을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신령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로 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세상에서는 수단 방법 안 가리고 높은 지위를 얻으려고 하고 많은 물질들을 소유합니다. 교회에 와서는 사람들에게 인증 받으려고 하고 그리고 중요한 책임을 맡으려고 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목회사역이나 설교로 인해서 존경을 받으려고 하다면 운동장만 달라졌지 똑같이 죄가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가치관 아닙니까? 전에는 세상에서 사람들 누려고 정치권력 지려 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교회 와서 마당은 교회고 교회 와서 교회의 권력을 쥐려고 하고 그리고 전에는 세상에서 높은 지위에 올랐던 사람들이 이제는 교회에 와서 서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려고 하는 이런 것들이 모두 다 운동장만 바뀌었을 뿐이지 죄 아래서 죄가 시키는 대로 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제사장으로서 그런 모든 일에 있어서 저련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에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임하는 경험을 하고 그것을 통해서 내적인 쇄신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경험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그 일이 일어난 년도와 날짜까지 정확하게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나이라고 믿어지는데 어째든 그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강력하게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을 내적으로 쇄신하는 가운데 선지자로 부름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깊이가 부단하게 하나님 앞에서 선지자로서 충성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탐구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과 함께 그 선지자의 선지 사역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 권능은 신적인 권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인간적인 권능과 신적인 권능이 있습니다. 나라에 큰 권력을 지고 지략패략 할 때 사람을 죽게 할 수도 있고 살게 할 수도 있습니다. 또 무력을 강하게 가지고 있을 때 그 사람의 목숨을 앗아 갈 수도 있고 그 사람의 목숨을 살려 줄 수도 있습니다. 수만 명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강력한 힘입니다. 엄청난 힘이지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나라가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으면 겁낼 것이 없습니다. 한판 붙어서 쓰러 버릴 수 있다. 라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게 되면 무시당할 나라가 없고 얕잡아볼 나라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도 부름 받은데 있어서도 이런 종류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만 그 힘의 종류가 다를 뿐입니다. 좀 전에 말씀드린 것은 모두 인적인 권능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를 섬기고 수종 덜고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권능은 이런 인적인 권능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권능은 신적인 권능입니다. 왜.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힘으로 오는 영적인 왕국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의 완고함을 제압할 수 있는 비상한 영적인 권능 다시 말하면 수많은 죄인들로 하여금 그 사람 앞에 서서 하나님과 그들의 인생에 관해서 논할라 치면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설교자 앞에서 한없이 초라하고 스스로 작게 여겨지도록 만들어 줄 수 있는 그런 그 무엇을 그는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항할 수 없는 권위로 투박하고 간략하지만 저항할 수 없는 권위로 다가오는 그 위대한 힘, 이런 것들은 커다란 영적인 권능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제가 한 때 깊이 흠모하던 개혁가 가운데 한 사람이 존 낙스 였습니다. 저는 그 사람을 그렇게 흠모하게 된 게 뭐냐 하면 다른 모든 개혁자들도 치열한 삶을 살았지만 그 사람과 비교될 수 없는 치열한 삶을 살았습니다. 스코틀랜드를 결국 종교개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러한 역사적인 얼마나 고난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는지 모릅니다.
왜냐 하면 뭘 보면 알 수 있냐 하면 그 사람의 설교가 별로 남은 것이 없습니다. 설교가 남기 위해서는 당대의 유명한 설교자들은 항상 필사 자들을 데리고 다녔습니다. 녹음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필사 자들을 데리고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왜 워낙 그의 신변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야밤에 도망가고 노예 선에서 노예처럼 배를 저어면서 연명을 하고 대륙으로 도망갔다가 다시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치열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종교개혁이 끝나고 나서 마지막에 장소 이름을 잊어버렸는데 그 동네에서 목회를 하셨습니다. 이미 늙었겠지요. 너무 늙어서 그 사람이 설교 단상에 오를 때에서 마차에서 내려서 부축을 해야지만 간신히 올라 갈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기력이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때 제임스 멜빌이라는 사람이 그의 필사자로 봉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다니엘서를 강론하고 있었습니다. 다니엘서 어느 부분을 한 30분정도 부드러운 어조로 강론 했습니다. 청교도의 시조로 불려지고 있는 사람이지요. 모든 청교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설교도 역시 본문에 대한 평이한 해설이 먼저 있고 그리고 그 해설이 딱 끝나면 그다음에 적용이 이루어지는 방식의 설교였습니다. 그런데 그 본문에 대한 해설이 상세하고 평화로운 해설이 모두 끝나고 난 다음에 적용을 부분을 시작할 때에 그는 불붙은 사람으로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분노하듯이 손을 높이 들어 설교단을 내리 칠 때에는 그기에 모인 사람들이 저 주먹에 이 강단이 반쪽이 나겠구나! 그렇게 느낄 정도로 그렇게 격렬한 설교를 했습니다.
제임스 멜빌이 30분 동안 잘 필사를 했는데 그 다음부터는 도저히 필사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이 진노와 그리고 두려운 심판에 대해서 적용하며 외치기 시작할 때에 이 필사자가 그 하나님의 위험에 신들린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도저히 이 필사 할 수 없는 강력한 신적인 그 엄위하심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간교한 메리 여왕이 카토릭을 한다고 그랬다가 또 장로교를 한다고 그랬다가 장난을 쳤습니다. 역사상 여왕을 향해서 “유 마담” 이라고 부른 유일한 사람이 바로 존 낙스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외쳤습니다. 그랬을 때 이 메리 여왕은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리면서 실신하듯 쓰러지고 사람들에게 부축을 받으면서 이 설교자 앞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시간만 나면 자신의 말 한마디면 목을 칠 수 있는 그 낙스 앞에서 얼마나 애교를 떨었는지 모릅니다. 자기가 그 존 낙스의 마음에 들게 하기 위해서 얼마나 애 썼는지를 심지어 역사에 보면 그가 낙스 앞에서 눈물을 흘린 기록이 나옵니다. 마치 세례 요한을 보고 두려워했던 것처럼 그녀는 그렇게 두려워했습니다. 해롯의 아내가 세례 요한을 보고 두려워했던 것처럼 그녀는 그렇게 두려워했습니다. 그런 강력한 영적인 권능이 필요한 것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한분이 아주 명쾌한 비유를 들어 주셨습니다. 종위를 놓고 한두 장을 놓고 정확하게 잘라 내는 데는 자와 예리한 면도칼이면 충분하지만 그러나 굳게 빗장으로 잠겨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기에는 그 예리한 면도칼로는 역부족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예리한 면도칼로 정확하게 주를 긋고 그래서 빗장을 정확하게 찾아내서 그것을 면도칼로 긋는다고 하더라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 필요한 것은 날이 약간 뭉툭해서 도끼를 가지고 힘 있게 내리 칠 때에 빗장은 빠개지고 오랫동안 다쳤던 문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예리한 칼날이 지성이라고 할 것 같으면 위로부터 내리 꼽는 그 묵직하고 강력한 파괴력은 영적인 권능입니다. 조금 지성적으로 모자라도 강력한 영적인 권세가 있으면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날이 정확하지 않으면 핀트가 빗나가기 쉽습니다. 빗장을 부수어야 되는데 기둥에 갔다가 꼽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일 좋은 것은 무엇입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도끼지만 날이 예리하게 벼려져서 칼과 같고 묵직해서 장사의 손에 높이 들려 내리 꽂으면 원하던 자리를 정확하게 맞추고 그 칼날에 의하여 그 칼날이 나무에 꽂히고 뒤 이어 따라 들어오는 그 무거운 중력이 면도칼이 해결할 수 없는 파괴력을 가져다주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탁월하게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권능을 하나님께서 이 에스겔이 소명을 받을 때 주셨던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우리에게 있어서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신령한 세계를 바라보는 그 비상함, 비상하리만치 신령함 그 다음에 하나님의 특별히 임하는 말씀 그 다음에 하늘의 위대한 영적인 권능자입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이러한 권능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처음 말씀드린 것과 같이 이 모든 것은 하늘이 열리음로서 시작이 되었고 그 문을 여시는 그는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그렇게 하신다고 해서 그것을 모두 숙면의 탓이라고 돌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주실만한 자들에게 주시고 거두실만한 자들에게서 거두십니다.
오늘 이 에스겔 선지자가 소명을 받은 곳이 어디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까? 그발강가였고 그발강가에 섰을 때에 상항은 포로 잡힌 상태였습니다. 그발강은 지금도 그 그발강이 남아 있는데 사실은 강이 아니라 개울 같은 작은 곳이라고 합니다. 저도 가 보지는 않았는데 폭이 아주 작은 좁은 개울 정도에 불가 했다고 합니다. 그럼 왜 그발강가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을까? 이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해 주는 성경의 기사가 시평 137편에 나옵니다. “우리가 바벨론 강변 거기 앉아서 예루살렘을 기억하고 울었도다.” 입니다. 이스라엘 백승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고 그 포로로 끌려 간 곳에서 그들이 처음으로 종사해야 했던 일들은 그야 말로 더럽고 힘든 노역이었습니다. 아마 저녁시간에는 자유가 주어졌던 것 같습니다. 하루의 고단한 삶을 접고 그들은 낯설고 물설은 이방의 땅에 포로로 끌려와 짐승과 다름없는 대우를 받으면서 유일한 위로가 되는 시간이 있었으니 아마 저녁 시간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모두 강가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예수살렘을 기억하며 울었습니다. 그 강변에서 울었습니다.
저는 교회를 세우기 전에 이 성경을 보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한 가지 일을 해보고 싶어서라도 목회를 해야겠다. 그건 무엇입니까? 나도 한번 교회의 동역자들과 함께 이렇게 예루살렘을 기억하고 울었던 이스라엘 백승들과 같이 그렇게 한번 울고 싶었습니다. 그 강가에서 눈물을 흘리며 예루살렘을 생각하고 흐느껴 울면서 그들이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소망 버드나무 가지에 걸었도다.” 사람들이 예루살렘 노래를 한번 불러 보아라고 하면 우리가 이방에 있으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르겠는가? 다시 말하면 가락을 끊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비통하리만큼 죄로 인해 망한 그 역사를 돌아보면서 뼈 저리는 회한의 시간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에스겔이 왜 그발강가에서 소명을 받았는지가 명백해 지는 것 아닙니까? 그런 경험 중에 일부라고 저는 확신을 합니다. 그발강가에 물고기나 잡아서 술이나 한잔 하러 나왔다가 소명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많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승들의 습관을 따라서 아마 이 날이 처음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날 동안 그발강가에 나왔고 거기서 해가 지는 석영을 바라보면서 예루살렘을 기억하며 나라가 망한 성품과 그리고 제사장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소를 잃어버리고 죄 많은 백승들을 하나님 앞에 인도 할 수 있는 섬김의 자리를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 아마 남다른 감회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의 마음은 가난해져 가고 더욱 가난해져 갔을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이렇게 하나님 만나고 싶은 것입니다. 하늘에 이상을 보고 싶고 특별한 말씀이 임해서 나 변화 시켜 주기도 바라고 영적인 권능을 하나님께서 듬뿍 주시겠다는데 그것을 싫다고 그러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뭔가 하면 따뜻한 안방에서 그런 일을 경험하고 싶은 것입니다. 외롭지 않은 술집 같은 곳에서 그것을 경험하고 싶고 친구와 이웃들과 화기애애한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그것을 홀로 경험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기이한 임재를 경험하고 주님의 사람으로 준비되었던 사람들은 모두 광야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광야라고 하는 말을 단순한 물리적인 말이 아니라 고독의 사람들이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광야에서 어떤 사람은 섬에서 어떤 사람은 벌판에서 그들에게 필연적으로 따라 다녔던 시간은 거룩한 고독의 시간이었습니다.
일상적인 신앙생활로 죄의식을 어루만지면서 내지 않은 죄를 죽이지도 않은 채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한 여러 가지 꿈을 꾸면서 인생을 살든 사람들은 모두 거품처럼 사라졌습니다. 너무나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런 놀라운 세 가지의 축복을 받았고 하나님 앞에 훌륭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그들 모두 행복한 삶을 산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들이 이 땅에 있는 동안 주님은 행복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는 생애를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고독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한 십여 년 전에 이런 문제를 깊이 묵상하면서 하여튼 생애 적으로 말씀에 잡혔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저 스스로 한 비유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책을 썼는데 어느 날 학생이 그 책을 읽고 저에게 편지를 보내 왔습니다. “교수님. 교수님의 책을 몇 권 읽었는데 다 설교집이시더군요.” 사실 저는 설교체로 썼으니까 설교 집은 아니지만 자기가 설교라고 생각했으면 자기마음이겠지요. “다른 것은 모르지만 권의 책을 읽으면서 설교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누가 저더러 설교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미담 서 정 주 “선생님의 국화 옆에서” 라고 하는 시입니다. 휙 던져 버렸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났는데 그것보다도 더 정확한 것은 없습니다.
가을철이 되면 국화전시회 같은 것들이 쭉 열립니다. 저도 국화를 참 좋아하는데 진짜 그 전시회에 가서 보면 화원에서 파는 그런 국화는 사다 놓고 싶지도 않습니다. 얼마나 예쁘게 길렀는지 모릅니다. 어떤 것은 대한민국 지도를 그려 놓았습니다. 제주도 독도까지 나옵니다. 그런 것은 10년 넘었는데 180만원씩 했습니다. 하나에. 그 불과 한 두 달 밖에 못 볼 텐데 그렇게 비쌉니다. 어떤 것은 국화를 키웠는데 수백송이가 한 화분에 심겼는데 그게 키가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심을 때 그 높이를 조절한 것인지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기르는 방법이 있답니다. 그렇게 기르면 똑같은 높이로 자란 답니다. 그런 국화를 보고 나서 감탄을 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후레쉬를 터뜨립니다. 야. 이 국화 누구네 집에서 길렀냐? 씨 받으려 그 집에 우르르 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세속적인 장사꾼들이 하는 짓이고 사실 그 국화꽃이 그렇게 찬란하게 꽃피기 위해서는 밝혀지지 않은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소쩍새가 뭔가 하면 올빼미 과에 속한 아주 부기 흉악한 새입니다. 낮에는 숲에서 자고 밤에만 나와서 우는 새입니다. 그 울음소리는 제가 못 들어 보았는데 하여튼 그렇게 사람의 마음을 찢는다고 합니다. 국화꽃은 시퍼런 줄기가 한 이월 달에 올라오고 그 때부터 이월 달에 싹이 나지 시작해서 삼월에 일부 국화꽃이 올라옵니다. 그때 소쩍새가 밤마다 와서 그 옆에서 울었습니다. 더디어 봄이 오고 그 춥던 꽃샘추위도 지나가고 가열게 봉오리가 맺었습니다. 그래도 밤마다 소쩍새가 와서 울었습니다. 그 뜨겁고 치열한 여름이 지나가고 이제 서리 내리는 가을이 왔습니다. 이른 봄을 지나 봄, 그리고 늦은 봄을 지나 초여름과 그 치열한 여름의 더위를 물리치고 초겨울이 지나고 본격적인 가을에 들어서서 이제 만취에 물들기 시작할 때 어느 날 소쩍새가 그 국화꽃 옆에서 피를 토하며 울다가 죽었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국화꽃이 찬란하게 터뜨려 진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찬란하게 국화꽃 핀 그 사연을 알고 싶어 하지 그 뒤에 국화꽃을 남기고 죽어야 했던 그 소쩍새의 통곡에 대해서는 알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한사람이 가보지 못한 하늘나라를 본 것처럼 증언하고 하나님께서 진리를 통해 계시하신 가치관에 목숨을 건 것처럼 증거 하기 위해서 그는 그 진리를 향해서 죽고 다시 태어난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그렇게 사람들에게 증언할 수 있는 목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너무 슬픈 것은 무엇인가 하면 끈기가 너무 없다는 것입니다. 전 정말 여러분들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생애 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정말 순교의 각오를 가졌던 많은 형제자매들을 이 십오 년이 넘는 설교 사역동안에 많이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생애 적으로 주님을 만나도 일생에 걸쳐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였습니다. 그들은 고독을 싫어합니다. 너무 무서워합니다. 언제 만날지도 모르는 주님을 뵈옵기 위해서 모래 바람이 일고 추위가 있고 밤이면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는 광야 한 복판에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엎드리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노고가 모두 헛된 것으로 끝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주님을 그렇게 광야에서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의 임함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소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참을 수 있는데 까지만 참는 것은 진정한 인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던 믿음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모세나 엘리아나 그리고 세례 요한이나 오늘 에스겔이나 혹은 이사야나 에레미아나 심지어 예수그리스도께서나 바울이나 모든 이렇게 하늘의 신령한 비밀을 가지고 와서 사람들에게 전해주던 탁월한 천적 선지자들은 모두 살을 찢는 것 같은 절대 고독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하나님 앞에 주의 말씀이 임하기를 기할 때 어두움이 그의 친구였고 고독이 이웃이었고 죽음의 공포와 가족이 그의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그는 오로지 하나님만을 바라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온전히 그 하나님을 갈망하면서 그들은 소쩍새 우는 사연의 역사들을 적어 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찬란하게 꽃이 핀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많이 참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 어느 날 한번 와서 은혜를 받고 땅 파듯이 쾅쾅 파다가 가서 다시 퍼 자고 놀다가 와서 심심하면 곤고하고 힘들면 와서 한번 또 신경질적으로 몇 번 파보다가 다시 싫증이 나서 주저앉고 이런 식으로 살아가면 결코 우리들은 이 에스겔이 주님을 만나고 경험을 했던 그 탁월한 영혼의 축복은 없습니다.
그래서 영혼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 시키고 세상에 있는 모든 행복과 통연 되는 모든 가치 그리고 예수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말미암아 이후에 확보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미래의 성공과 훌륭하게 하게 쓰임 받는 영광에 대한 기대까지도 모두 버리고 땅에 떨어진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고 주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 죄인들에 의해서 왜곡된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과 그리고 참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진 시대에 그 영광에 대한 갈망을 소유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수많은 무미건조한 사람을 보고 가슴을 치고 아파하였습니다. 그러한 심성을 소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코 대량생산에 틀에 찍혀서 나온 사람이 하나님의 위대한 일의 역사에 이처럼 동참할 수 없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온 사람들에게는 영적인 지문이 묻어 있습니다. 무엇을 말하든지 하늘의 명세가 나고 무엇을 말하든지 광야의 모래 바람의 소리가 들립니다. 조잡한 세상의 가치관에 물들지 않는 담대함과 신령한 꿋꿋함이 성숙된 연단이 그들의 말과 또 그들의 행동 속에 베어 나옵니다.
저는 오늘 아침도 기도 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얼마나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수많은 일들이 많이 생겨났는지 마치 수많은 일들이 내 몸에다가 빨대를 꼽고 진액을 빨아 먹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들이 안 해도 되는 일이면 모르는데 모두 해야 될 일들입니다. 그러면서 저는 몇 년 전서부터 왜 그렇게 사역의 초기에 영적인 총명을 간직하고 가슴의 열렬한 불을 간직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탁월한 헌신을 품었던 사람들이 무기력하게 그 노년에 변해가고 탐욕스럽게 변해 가는 가하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아! 이래서였구나!” 그래서 오늘 아침에도 새벽에 생각했습니다. “아! 그렇구나! 결국은 내가 마지막까지 싸워야 치열한 대적은 하늘에 있는 악의 영도 아니고 지옥에 있는 마귀의 권세도 아니고 그건 나 자신이구나! 나 자신.”
끊임없이 영혼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시키고 신령한 하나님이 만져주심 이외에 다른 어떠한 세상적인 위로로도 위로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게 하셔서 우리를 세상에 내어 놓으신다고 해서 우리가 쉽게 사역을 할 수가 있고 그리고 우리가 조금 일하고 우리들이 존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많이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삶은 더 치열해야 하고 주님의 신령한 세계의 비밀을 깊이 터득한 사람일수록 그는 보다 더 분투하는 삶을 고난 속에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역사를 보십시오. 그렇게 광야에서 주님을 깊이 만난 사람일수록 제 명에 죽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문제는 인내입니다. 뜻을 세우고 내가 무엇이 되어야 하고 어떠한 사람으로 살 것인가? 수많은 세속적인 사람이 그러하듯이 기독교라고 하는 이 꿀통 옆에 붙어서 꿀이나 빨아 먹다 죽은 수많은 파리 떼 같은 사람들 중에 하나가 될 것인가? 아니면 정말 몸은 이 더러운 세상에 살아도 내가 만난 하나님 내가 본 그 하늘나라의 위대한 위상 내 영혼을 파헤치고 지나간 그 하나님의 말씀이 나와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파헤치고 지나가 변화 받도록 하나님의 특별한 영적인 권능이 내게 있어서 얽매인 자들에게 자유를 주는 삶을 살 것인가? 여러분들이 선택해야할 목표인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전자의 길은 넓은 길이고 후자의 길은 아주 좁은 길입니다. 전자의 길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 걸어가는 길입니다. 새벽기도가서 설교하고 오면 항상 사람들이 설교 끝나고 나서 논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저렇게 살수 있고 살아야 한다. 한쪽에서는 어떻게 그렇게까지 살 수 있겠느냐. 아마 자기도 못 살 거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저의 마음속에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열린 교회를 크게 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해야 하겠다고 하는 열정에 사로잡힌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열정은 어느 정도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은 큰 교회가 되는 것은 싫지만 고통하고 아파하는 수많은 영혼들을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더 많은 영혼들을 보내 주셔야만 합니다. 정말입니다.
그렇지만 최근 몇 년 동안에는 그것보다 더 큰 기도 제목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나님! 저는 죽을 때까지 책을 쓸 것인데, 저는 진리만을 기록하고 싶은데 이것이 진리라고 하는 것을 나라고 하는 제품이 한번 보증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 저를 도와주십시오.”결국은 참된 신자가 되는 것으로 귀결이 되는 것입니다.
성공한 목회자 한 시대를 말씀으로 흔들어놓은 설교자, 그러한 평가보다는 정말 부러운 신앙을 가졌던 사람, 이 땅에 살면서 그토록 추구했던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연합의 신비가 무어인지를 보여 주었던 사람 그래서 고난도 그 연합을 막을 수 없고, 핍박과 시련에 의해서도 환란에 의해서도 끊어지지 않은 연합을 가지고 예수 안에서 복되게 죽은 사람 죽음과 함께 그 영광에 들어 간 사람, 어떻게 하면 그 완전한 연합 그리고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계셔서 주님이 마음먹은 것처럼 생각하고 주님이 사셨던 것처럼 살고 우리 주님이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 아버지의 마음이 한없이 기쁘셨던 것처럼 내가 그러한 삶을 살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내게 있어서는 커다란 숙제입니다
에스겔과 같이 하늘의 신령함을 보고 말씀이 특별히 임하고 영적인 권능을 하염없이 소유했다고 할지라도 내가 그런 진실한 신자가 되어서 주님의 마음에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어 가지 않는다면 나의 섬김과 그리고 나의 모든 행함이 저주스러운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누구를 위한 것이겠습니다. 누구를 위한 목회사역이고 누구를 위한 섬김이겠습니까? 마지막에 망가진 사역지와 고장난 영혼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처럼 폐품처럼 버려진바 된다면 이게 누구를 위한 사역이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 앞에 진실한 신자가 되기를 갈망하고 항상 그발강가에 선 그런 심정이 되어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심정이 되어서 바벨론에서 돈버는 일에 눈을 뜨고 바벨론에서 이방의 문화에 젖어서 그 선진문화의 맛을 보는데 제미를 붙이는 그런 삶을 만약에 에스겔이 선택 했더라면 이 강가에 섰을 수도 없을 것이고 거기서 선지자로 세움을 받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가보지 못한 강변이 눈에 떠오릅니다. 모두 강변에 나와서 예루살렘을 바라보다가 눈물을 씻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도 아마 에스겔은 마지막까지 석양이 지고 어두움이 깔릴 때까지 그 강변에 홀로 주저앉아서 예루살렘을 기억하며 울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죄와 강퍅함과 우리의 우상숭배 때문에 언약의 하나님이 당신의 백승들을 치시고 우리를 흩으셨도다. 목자 잃은 양같이 바벨론에 끌려 온 수많은 양떼들을 제사자의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그들을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제사를 드려 주는 것인데 그것조차 할 수 있도록 막힌바 된 상태에서 그 유리하는 수많은 양떼를 보며 울었을 것입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엄위와 그 심판으로 인하여서 버림받은 것처럼 유리하고 있는 그 가슴 아픈 백승들 사이에서 그는 가슴을 찢으며 슬퍼하며 울었을 것입니다.
사라진 하나님의 영광과 비참한 백승들의 실상을 보면 처절한 눈물을 흐리고 있는 이 에스겔의 마음에 무엇이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제사장의 지위나 안락한 삶, 높은 자리 따뜻한 음식, 좋은 잠자리 그리고 친한 벗들 다정한 이웃들 누구도 그를 위로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30세가 되는 4월 5일에 하나님께 부름을 받기까지 아마 그는 하나님과 그발강 흘러가는 강물만이 아는 수많은 날들을 거기에서 소쩍새 우는 사연을 적어 내려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은 영구히 계속 되지 않았습니다. 어느 순간 하나님께서 침묵을 깨고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찬란한 하늘의 위대한 세계를 보여 주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도 그렇게 강변에 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이외에 무엇으로도 위로받지 않으려고 하는 그런 치열한 마음, 하나님 이외에 어떤 것으로도 위로 받지 않으려는 고정된 마음, 주께서 일반적인 섭리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직접적인 손길을 내미셔서 신령한 세계에 대한 목마름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그리움으로 짓이겨진바 된 우리의 그 상한 마음을 친히 어루만져 주실 때까지 참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는 그런 시간들이 필요합니다. 삶을 단순하게 하고 그리고 매일 같이 그발강가에 선 그 치열한 자기결심 그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시겠습니까? 진리가 없어서 너무 어둡고 얽매인 이 시대에 방방곳곳에 어느 교회를 가든지 참된 기독교 신앙이 무엇이고 예수 믿고 구원 받는다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성도의 삶인지 이 땅에 있는 민초들이 모두 거짓 없이 명백하게 들을 수 있다면. 우리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시원하시겠습니까? 외치는 자 많지만 생명수는 말라있고 그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사람들도 시간이 지나면 부패하고 이렇게 약한 우리들이 이 때에 여러분들은 어떤 삶은 선택하려고 합니까? 파도위에 거품처럼 사라지고 좋은 제품 나타나면 쓰레기통에 던져져 버리는 상품과 같은 인생을 사시겠습니까? 작품과 같이 거룩한 인생을 사시겠습니까?
너무 끈기가 없습니다. 목숨을 걸어 보십시오. 이 광야에서 저를 돌이 되게 하시든지 저를 만나서 주님의 사람으로 만드시든지 주님이 광야에서 이 그발강가 강변에서 저를 만나 주시지 않으시면 저는 선채로 이 자리에 주님을 부르다가 화석이 되겠습니다. 생애를 건 치열한 싸움 그래서 철저하도록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고 싶어 그때까지 실패한다고 할지라도 다시 일어나서 다시 시작하고 실패한다고 할지라도 단시 일어나서 다시 시작을 하는 그런 결연한 각오, 혹은 울기도 하거니와 혹은 넘어지기도 하거니와 결단코 뒤돌아서서 배반의 길을 걸어가지는 않겠노라고 하는 결단! 그것이 너무 필요합니다.
일평생 주님의 제자가 되고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구도의 길을 가야 하겠지만 젊은 날에 주님을 만났고 자신의 갈 길을 정한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더군다나 자신의 영혼 속에 주님께서 자신의 영혼을 만지고 지나간 흔적이 있는 사람, 그래서 그 거룩한 부담감을 안고 그 주님이 만져 주심에 부합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 자기를 모두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 그래서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살기로 결심한 사람 온 땅 가득히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도록 피어린 갈망으로 그리워하며 매순간 치열한 깨달음 속에서 성도가 되어 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복된 사람들입니까? 우리가 이것을 사모하고 이렇게 되기를 힘쓰면서 살아갈 때 어느 듯 여러분들은 세례요한처럼 혹은 이 에스겔처럼 주님이 이미 빗고 세우신 특별한 사람으로 설 것이고 세월이 흐르면서 여러분들은 지금은 묘목 같지만 거목처럼 자랄 것이고 많은 제자들이 여러분들의 그 그늘 위에 깃들이고 거기에서 그리스도의 계절로 온 땅이 뒤 덥히게 하는 그런 꿈을 꿀 수 있을 것입니다. 한번 밖에 없는 인생을 그렇게 살지 않으면 주께서 오라고 부르시는 날 우리가 얼마나 많이 통곡하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