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론
녹취자 : 장미연
교회의 정의는 이렇게 내립니다. 무형교회와 유형교회의 계보를 구별을 기본으로 하고 이렇게 이게 definition입니다. 무형교회는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부름 받아 택한 자들의 영적 무리. 이것은 교회의 영적 측면을 본 것이고 참신앙의 고백하는 자들의 단체. 이것은 무형교회는 천상과 지상 그 다음에 이미 믿고 하늘나라에 간 사람과 지금 믿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포함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믿게 될 사람들까지 확장하면 다 포함을 합니다. 그런데 유형교회는 열린 교회가 있잖습니까? 형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보일 수 있는 한계를 지닌 형태를 가지고 있는 교회를 유형 교회라고 말합니다. definition 정의를 내릴 때에는 교회는 무형교회와 유형교회로 나뉘는데..로 시작해서 무형교회는 이런 것이고 유형교회는 이런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무형교회와 유형교회의 회원은 완전히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건 3살 어린이는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이 부분은 진짜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무리이고 그 다음 이것은 지금 보이는 교회에 다니는 회원입니다. 이 중에는 이렇게 구원 받은 사람도 있겠지만 아직 구원 못 받은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요. 유형교회가 진짜 생명이 넘치고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르게 가르쳐지는 교회라면 이 폭은 점점 더 줄어 들겠지요. 그럼 묻고 싶겠지요? 여기에 구원 받은 사람 없을까? 없겠지요. 왜냐하면 만약에 그가 구원 받은 사람이라면 이미 이 범위 안에 포함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 이런 얘기 들어본 적 있으시죠? 만약에 그 교회가 이렇게 눈에 보이는 이 교회를 이야기 한다고 하면 그 말은 완전히 맞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무형교회를 기준으로 본 다면 여기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구원 받은 사람은 구원 받은 사람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극단적으로 이런 얘기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유형교회는 인정하지 않지만 무형교회는 인정하는 사람들. 무교회주의자들입니다. 무교회주의는 성경적인 신앙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믿은 사람들 가운데도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 없다. 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잘 가르쳐지고 말씀을 들을 수 없는 곳에서 구원 얻는 사람이 나온다. 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희박하고 어려운 거겠지요. 종종 사람들이 묻습니다. 가톨릭은 구원이 있나요? 정확하게 말하면 가톨릭이 가르쳐주는 대로 믿으면 구원에 이르기 매우 힘듭니다. 삐뚜로 믿으면 구원 받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 삐뚤게 우리 개신교에 가르쳐주는 대로 믿는다면. 거기도 구원 받은 사람이 없다.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구원 받은 사람이 있다. 라는 것 때문에 그 교회가 참 교회라는 문제는 다시 생각을 해봐야 하는 문제입니다.
그 다음 구원의 속성. 속성이 무엇인지는 이미 배웠지요? 한 부분이지만 그것 없이는 그 전체를 구성하는 그것이 될 수 없는 것. 그걸 가리켜서 우리들이 속성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신학적으로 속성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말할 때 ‘공무원의 속성’ 이라고 할 때 그것 하고는 어법이 다른 것입니다. ‘작가들의 속성이..’이럴 때 그런 약간 비아냥 거리는투로 이야기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똑같은 단어가 기독교 안에서와 기독교 밖에서와 다른 의미로 쓰여진 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정도 교리반까지 공부했으면 여기에 신학사전 혹은 성경 사전 정도는 하나 있어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될 것이 성경사전, 신학사전. 신학사전도 제가 쓰는 것 같이 방대한 것부터 얇은 것. 성경사전도 얇은 것부터 시작해서 심지어 1,500페이지 책 10권, 20권씩 되는 것 까지 엄청 종류가 많습니다. 그중에서 건전하게 쓰여진 것들을 보고 그게 어떤 건지 궁금하면 도서관 안에 있는 것 중 하나를 사시면 됩니다. 집에 책꽂이에 꽂아 놓고 더 욕심내면 성경지도 같은 좋은 것 놓고 그 정도는 기본적으로 있어야하지 않습니까? ESV는 옆에 항상 꽂혀있고.
교회의 속성은 개신교나 로마 가톨릭이나 대개 이렇게 크게 세 개로 봅니다. 그것에 대한 해석이 각 각 다릅니다. 통일성이라고 하는 것은 로마 가톨릭에서 보면 가톨릭의 교회 조직이 범세계적 이라는데서 통일성을 찾습니다. 그것이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교회의 속성을 찾습니다. 그런데 개신교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고 모든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머리로 하는 그 몸에 붙어있는 지체들이다.
(예화) 이번에 아프리카 가지만 예배드리는 거 보면 정말 웃깁니다. 나는 아주 죽는 줄 알았습니다. 예배를 거의 3시간을 드리는 겁니다. 나보고 설교를 하라고 그래서 25분 정도 설교했는데 예배 시간이 3시간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검은 옷 입은 사람들이 나와서 계속 춤추는 겁니다.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역시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라는 겁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머리로 하고 여기에 영적으로 성령 안에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몸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통일성으로 보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영적이기 때문에 교회의 속성도 영적인 측면에서 봐야한다 라고 하는 것이 기본적인 개신교의 생각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옛 영광에 대한 그리움이 있겠지요. 그들이 로마시대 때부터 시작을 해서 그 긴 세월동안 교회가 정권과 나란히 혹은 그 위에 정권이 서서 교회가 세속 권력을 지배하고자하는 경향이 많았고 그들이 스스로 말할 때 좋았던 때는 왕이 신앙이 독실해서 교황의 말 한마디에 껌벅 죽는 그런 시대였고 그렇게 자기에게 충성하는 왕들이 많아서 언제든지 군사를 동원할 수 있고 교황의 말을 안 들으면 왕의 자리가 위태로울 정도로 가는 시대에 대한 그리움이 있는 겁니다. 가톨릭의 복지 같은 것도 전부 로마 제국에서 따온 겁니다.
거룩성을 봅니다. 거룩성은 로마 가톨릭에서는 교리, 도덕적인 교훈, 예배, 권징, 의식 이런 것들이 교회의 거룩성이다 라고 보는데 개신교에서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진 모든 한 사람 한 사람이 구원을 받아서 죄로부터 깨끗해지고 또 성화의 삶을 살아와서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 거룩해져 가는 것 그것이 교회의 거룩성의 근거라고 보는 것입니다.
보편성에서는 로마 가톨릭에서는 전 세계의 모든 종파들의 총수보다 더 많은 회원을 가지고 있고 이 가톨릭을 믿는 나라들이 전 세계에 퍼져있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이게 보편적이다. 유니버셜하다 라고 보는 겁니다. 사실은 옛날에는 그랬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이슬람이 훨씬 더 많잖아요. 아직까지도 가톨릭은 받아들이지 않는 나라들도 아주 많이 있잖아요. 불교라든지 힌두교라든지. 그런 점에서 이게 좀 그렇지요. 개신교에서는 어떻게 보느냐면 구원 받은 자들이 모든 시대, 모든 지역, 모든 사람들을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니버셜하다. 보편적이다. 우주적이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래서 진정한 보편적인 교회는 무형교회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 공부하면서 교회는 하나입니다. 무형교회는 하나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우리들이 태어나서 하나님을 믿으면서 이 열린교회에 충성해서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어가는 것과 함께 이 교회가 모든 세계에 보편교회에 유익을 끼치고 더 나아가서는 세계에 무엇인가 영적인 지식을 나누어주는 그런 교회가 되는 것이 교회의 비전인 것입니다.
교회의 표지. 표지라는 것은 한자로 이렇게 씁니다. 사람들이 잘 못 읽는데 표식이잖아요. 그런데 식이라고 안 읽고 지라고 읽습니다. 표지. 이것은 표지입니다. 어떤 표가 있어서 그것을 가지고 지식을 전달하는 것. 그것입니다. 교회의 표지는 그걸 보고 교회인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유형교회에 속한 표지인데 다른 유형교회들과 그 속에서 참교회가 어떤 것인지를 구별해내는 것입니다. 참 교회는 세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우선 말씀의 참된 전파가 있어야 합니다. 말씀이 참된 전파라고 하는 것은 성경을 정통적으로 해석해 나오던 기독교의 큰 정통신앙의 흐름 안에서 성경 말씀이 전파되고 설교되고 가르쳐지고 목양하고 하는 모든 것이 성경적인 신앙을 갖게 하는 가르침이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설교를 통해서 나타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참된 전파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하나도 오류가 없다든지 그런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고 교파마다 교리의 차이도 있고 하니까요. 어쨌든 그것을 배우면 기독교 역사적으로 참된 기독교 신앙의 범위 안에 들어가는 가르침이어야지 삼위일체에 대해서 엉뚱한 이야기를 한다든지 그 설교를 잘 듣고 나면 정통 신앙에서 이탈해나가는 그런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성례의 정당한 집행. 성례를 정당하게 집행 안하는 것이 무엇일까? 이것은 성례는 세례와 성찬으로 나뉩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입을 하는 겁니다. 정확한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고 성찬은 교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들만 참석할 수 있도록 그렇게 관리하는 것. 그것을 성례의 정당한 집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권징은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는 신앙에서 어긋나 잘못된 신앙을 신봉하거나 혹은 도덕적인 심각한 하자가 있을 때 교회는 그 사람을 치리 합니다. 치리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권징이라고 부릅니다. 권면하고 징계한다는 뜻입니다. 이 세 가지를 갖추고 있어야지만 참된 교회다. 이렇게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참된 전파입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표지다. 말씀 전파가 기독교의 근본에 있어서 참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말씀 전파가 세 번째는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형식적인 겁니다. 이것은 실질적인 겁니다. 말씀 전파가 믿음과 행위에 지배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을 교회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혹시 이사를 가거나 멀리 가서 교회를 정하게 될 때 제일 중요한 게 예배를 드리면서 이 예배가 정말 살아있는 예배인가? 이 예배에서 선포되는 예배의 형식이나 선포되는 말씀이 성경 진리에 부합하는가? 이 설교를 들었을 때 내가 하나님의 참된 지식에 접근하고 있는가? 그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가 있는가? 이런 것들이 전부라고 말할 수 없지만 매우 중요한 기준 중에 하나가 되는 겁니다. 두 번째 성례의 정당한 집행. 이것은 말씀의 유형적인 전파라고 부릅니다. 이유는 성례 안에 세례와 성찬 안에 그것을 가리키는 중요한 내용들이 형상적으로 그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예식의 형식을 가지고 있지만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면 이것은 자신에게 별로 은혜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예식의 형태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지식을 가지고 믿음으로 이 예식에 참여하면 큰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 다음 성례는 합법적인 성직자들의 의해서 성도와 그의 자녀들에게만 집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찬은 담임 목사에게만 법적으로 성찬을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그 다음 권징의 신실하신 교리의 순수성을 유지한다. 이게 뭐지요? 성경이 가리치고 있는 올바른 신앙을 가르쳐 줬는데 현저하게 잘못된 것을 신봉해서 그 교리적인 영향을 자신이 받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오염을 시키면 교회적으로 참된 신앙에서 지체들이 멀어질 수 있잖아요. 그래서 이것을 권징을 하는 겁니다. 가벼우면 그렇게 하지 말라고 책망을 하고 심하면 성찬을 못 하게 합니다. 6개월 혹은 1년, 1년 반 이렇게 성찬에 참여할 수 없게끔 징계를 내립니다. 그 다음에 제명을 합니다. 너는 열린교인이 아니다. 제명하는 겁니다. 더 심한 것은 출교가 있습니다. 출교와 제명의 차이는 제명은 열린교회의 교인이 아니다. 혹은 열린교회 집사, 권사, 장로가 아니다. 이렇게 정리하는 겁니다. 그런데 출교는 이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라고 선언을 하는 겁니다. 정상적이라면 그 교인이 등록할 때 만약에 이 교회에 문의해서 그는 이 교회에서 출교 됐습니다. 그러면 그 교회에서도 받으면 안 되는 겁니다. 그게 출교입니다. 출교는 교회에서 축출한다 라는 뜻인데 영어로는 excommunication입니다. communion은 성도의 교통입니다. 거기서 잘라내는 겁니다. 그 사람에게 아무 희망이 없냐? 회개하면 다시 받아 줄 수 있습니다. 절차에 따라야 합니다.
교회의 정치와 권세. 23장까지는 교회란 무엇인가? 이렇게 배웠다면 24, 25, 26장은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나를 다루고 있습니다. 교회 제도의 근본 원리 네 가지입니다. 이것은 시험에 나올 가능성이 많아요.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영적으로 교회의 머리요. 모든 권위의 원천이시다. 교회의 본질이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연합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모든 권위의 원천이시다. 권위는 그리스도가 교회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그 분께로부터 부여받은 사람만이 어떤 권위를 갖게 된다. 이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말씀을 교회를 다스리신다. 교회를 보면 유치장이 없습니다. 그래서 뭘 잘못하면 교회에서 딱 수갑 채워서 지하 감옥에 집어넣는 그런 제도는 없습니다. 옛날에는 그런 일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영적인 영역,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을 영적으로 다스리는 곳이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은혜를 받으면 교회의 권위는 매우 높아지게 됩니다. 그것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권위라기보다는 교회를 통해 가르쳐지고 선포되는 하나님의 진리의 권리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교회에 주신 것이고 그 말씀은 목회자들에 통해 가르쳐지게 됩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 사람이 신앙이 없다면 ‘내가 왜 그 말씀에 순종 해야되? 난 그러니까 못하겠는데?’ 이럴 수도 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에게는 교회의 권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이겠는가? 라는 것은 우리가 다시 생각해야 될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말씀으로 교회를 다스리신다. 이게 진리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이 목회자들을 통해 전해지고 성도들은 그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을 익히면서 그리스도께서 그 말씀으로 자기를 통치하고 계신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으로 교회를 다스리시는 겁니다.
왕이신 그리스도는 교회에게 권세를 주신다. 왜 주실까요?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권위를 교회에 혹은 목회자들에게 교회의 직분자들에게 혹은 성도들에게 어떤 권위를 주었다면 이것은 이 사람들이 자의적으로 교회를 인도하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한을 유형교회에 행사하여 혹은 무형교회에 행사해서 이 왕이신 주님의 뜻이 이 교인들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하는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권위를 부여하신 겁니다. 그 권위를 가지고 그리스도 교회를 질서 있게 하시는 겁니다.
다스리는 권세는 기본적으로 지 교회다. 지라는 말이 나오는데 지는 가지라는 뜻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하나이지만 교회가 나뉘어져서 여기 열린교회, 평촌에 평촌교회, 신림동에 신림교회.. 이런 식으로 나뉘어져 있어서 그 교회가 실질적으로 보이는 교회 안에 모이는 성도들을 그 교회에서 다스린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새 중앙 교회 다리는 교인을 열린교회 목사가 가서 ‘너 다음 주 부터 교회에 다니지마.’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없다는 겁니다.
교회의 직원입니다. 직원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직임이라고 합니다. 직원이라고 얘기했는데 회사 직원 이런 식으로 쓰는 게 아니라 직은 오피스입니다. 이건 직임입니다. 어떤 직분을 맡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특수 직원입니다. 왜 특수하냐면 특수하다는 것은 반복되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끝났습니다.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이 다시 반복되지 않는 겁니다. 특수직원의 세 부류가 있는데 첫째는 사도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친히 선택하신 열두제자와 바울이 있고 그 중에서 가룟유다는 주님을 배신하고 자기 갈 길로 갔고 뒤에 선출을 통해서 맛디아가 뽑힙니다. 그때에 중요한 자격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본 사람. 이게 너무 중요한 겁니다. 그리고 그런 권위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건 좁은 의미의 뜻이고 좀 더 넓은 의미로 사용되면 예수께서 직접 부름을 받고 부활의 증인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기 위한 영감을 인식하고 이적을 행하고 사역의 충만한 복을 받은 사람들도 넓은 의미에서 사도는 아니지만 사도적 인물로 인정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야고보 선생, 누가 이런 사람들은 직접 열두 사도에 속하지는 않지만 사도적 인물로 권위를 인정받았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선지자들이 있습니다. 선지자들은 구약에 나옵니다. 삼직 설명하면서 했잖아요. 왕, 선지자, 제사장 이렇게 쓴다고. 선지자인데 이 선지자가 신약시대에도 등장을 합니다. 신약 성경이 완성된 것이 대게 AD 95년 정도라고 보는데 그때까지는 이 성경이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었지만 계시가 아직 완성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께로부터 직접 말씀을 받아서 예언자처럼 말해주거나 사도들이 전한 말씀을 해석해주거나 구약의 모세 율법을 신약의 정서로 해석해서 가르쳐주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거나 이런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교회에 대한 교훈을 말하도록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었고 신약 성경 완성 전까지 활동했고 신비를 계시하고 미래자를 예언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2장 같은 데를 보면 선지자의 직분이 나옵니다. 그것이 교회에서 인정받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완성 되면서 이 직분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됩니다. 세 번째는 전도자입니다. 전도자는 지금 우리 전도자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그때에 사도들의 일을 전적으로 돕던 자들로서 전도사역의 종사했던 사람들입니다. 빌립, 마가, 디도, 디모데 이런 사람들이 전도자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볼 수 있냐면 지금의 교역자들로 보면 안 될까? 생각되고 평신도들 중에서도 전적으로 헌신되고 말씀의 밝은 지식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자신의 신명을 바쳤던 인물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고 열두 사도가 있고 전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보통직원은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반복이 되는 직분입니다. 첫 째가 장로입니다. 장로를 두고 장로라는 말, 감독이라는 말이 같이 나오는데 장로라고 하는 것은 원래 이렇게 씁니다. 히브리말로는 자케니입니다. 늙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늙었다는 뜻이 매우 부정적이지만 이 당시에 늙었다고 하는 것은 히브리 사람들의 맥락에서는 지혜롭다라고 하는 것과 동의어였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이야 거의 다 했겠지만 한 10, 20년 전까지도 이스라엘 갔을 때 들은 이야기는 새로운 땅을 개간해서 거기다 기브츠라고 여러분 배웠지요? 히브리말로 구부츠라고 하는데 공동 농장을 만듭니다. 그런 구부츠를 만들 때 개간을 하잖아요. 그때 맨 앞장서는 사람들이 노인들입니다. 왜냐면 이렇게 새로운 농장을 일구는 데는 육체의 젊은 힘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오랜 세월을 이 일을 해온 노인들의 지혜가 필요하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노인들의 지혜와 젊은이들의 힘이 합쳐져서 공동체를 형성해 나가는 겁니다. 장로라고 부를 때 그런 의미입니다. 똑같은 직분을 감독이라고도 부릅니다. 이건 그야말로 교회가 잘 되어가는지를 감독하는 감시하는 적절하게 조치를 취하는 디렉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같은 직분을 두 개가 아니라 같은 직분을 장로라고 부르기도 하고 감독이라고도 불렀는데 목사의 기능을 이쪽에다 훨씬 더 중요하게 보는 사람들은 감리회 쪽으로 교리가 발달되고 그 다음에 이쪽으론 장로교 쪽으로 발달 된 거라고 봅니다.
교사는 주일학교 교사구나 그렇게 보면 안 되고 지금의 목사와 거의 같은 직분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사도, 선지자, 전도자들이 있어서 교사가 따로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면 사도, 선지자, 전도자들이 하나님 말씀에 매우 밝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교회에서 섬기면서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다 죽습니다. 1세대가 다 사라집니다. 그러고 나서 아, 이게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게 필요하구나. 특히 2세기에 이단들이 증가하고 로마의 사상적 박해가 증가하면서부터 1세기 때도 이단들이 있었고 2세기 때는 로마의 의한 사상적으로 박해가 주어집니다. 예전에는 뭣도 모르고 핍박했는데 이제는 기독교의 교리를 하나, 하나 뜯으면서 철학자들을 동원해서 아주 사상적으로 박해를 하는 겁니다. 거기에 변증하고 가르쳐야할 교훈의 직분이 필요성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전문적인 가르치는 사람이 등장하게 됩니다.
집사는 교회에서 이번에도 집사 교육을 140명이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집사를 신청 안하면 집사 될 수 없지만 처음에는 교리반 안 마치면 1년 집사도 안줬습니다. 그런데 너무 힘들어 하는 거 같아서 교리반에 들어오기로 서약을 하고 받아줍니다. 여기서 말하는 집사는 1년에 한 번씩 임명을 받는 서리집사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집사는 요즘으로 말하자면 안수 받고 세워지는 교인들의 투표에 의해서 세워지는 안수집사 이상의 집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목사와 장로는 어떻게 차이가 나느냐? 대한 예수교 장로회 이렇게 씁니다. 그래서 어떤 장로가 고시를 봤는데 교회의 주권이 어디에 있습니까? 장로에 있습니다. 한 겁니다. 왜 그러냐? 물으니 장로회가 아니냐? 그랬는데 우리들이 아까 이야기할 때 이게 elder 거든요. 늙은 사람이라는 뜻인데 이게 여기에서 장로는 presbyter입니다. 영어로는 Presbyterian Church in Korea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 정도는 알고 계셔야지요. 그래서 presbyter는 단순하게 나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presbyter는 근본적으로 장로와 목사가 결합된 단체를 presbytery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presbyter는 장로 혹은 목사를 가리키는 겁니다. 모두다 목사나 장로가 있는데 원래는 그냥 장로인데 장로 중에는 치리만 할 뿐 치리는 교회를 올바르게 보호하기 위해서 징벌을 내리고 교회에 대해서 교회를 보호하고 이런 기능들인데 치리를 하는게 장로의 중요한 일입니다. 장로는 커다란 교회의 결정을 내리고 교인들이 순수한 신앙에서 이탈했을 때 그것을 치리하는 겁니다.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고 심지어는 경고부터 시작해서 견책, 수찬정지 마지막에 제명, 출교에 이르기까지 이런 결정을 하는 게 장로가 하는 겁니다. 지금 우리들이 부르는 장로는 가르치는 권한은 없습니다. 피치 못할 경우 장로님들이 설교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장로님은 설교하지 않습니다. 목사는 치리할 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을 목사라고 합니다. 이 둘을 다 공통적으로 통용되는 용어가 presbyter라는 이 직분이 되는 겁니다. er이 붙어서 이 두 사람들이 교회에서 파송이 되어서 하나의 결정을 내릴 수 있는 큰 회의를 만든 것을 노회라고 부르고 그것을 presbytery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교회를 부를 때는 Presbyterian Church in Korea 이게 교단의 명칭입니다. Yullin Presbyterian Church in Korea 이렇게 부르는 겁니다. 하나의 장로가 있는데 그 장로 중에서는 치리만 하는 사람을 장로라고 부르고 치리도 하고 진리를 가르치기도 하는 두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목사라고 부르는 겁니다. 굉장히 중요합니다. 장로의 소속은 당회에 속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이 사임을 할 때도 당회에 사임서를 내고 무엇인가 당회원이 되는데도 잘못하는 수가 있겠지요. 그러면 당연히 징계를 받겠지요. 그렇게 되면 임명 교회에서 임명을 하기도 하고 당연히 그 뒤에는 교인들의 투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을 제명하거나 출교할 때는 교인 전체가 투표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회에서 아주 공정하게 재판 절차를 똑같이 거치게 됩니다. 이 장로가 이런 잘못을 했습니다. 이것은 성경과 교회의 법에 명백하게 위반됩니다. 나는 이 사람을 기소합니다. 라고 기소할 수 있는 겁니다. 고소장이 접수가 되면 당회는 재판국으로 변모합니다. 그러면 당연히 장로 중에서 어떤 사람이 이것은 우리가 조사를 해보니 사실이다. 나는 이 사람을 기소합니다. 하고 기소 위원들이 기소를 합니다. 당연히 그 안에서는 변호를 하는 사람이 변호도 합니다. 마지막에 그 모든 것을 법정처럼 놓고 심판을 하는 겁니다. 만약에 재판 결과가 무혐의로 나오면 아무 일도 없었던 거고 심의에 대해서 출교하게 되면 이는 우리 교회에서 장로가 되었지만 사실 알고 보니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잘못한 것은 없는데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교회에 나가고 떠난 그 사람과 접촉한 사람도 징계를 받습니다. 그게 excommunication 출교입니다. 그런가하면 목사는 제가 여기 있지만 열린교회 소속이 아닙니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 동서울 노회 소속 목사입니다. 그 노회가 제가 이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7명의 성도들과 함께. 그렇지만 450명 정도 모였을 때 전 노회에 가입을 했습니다. 노회에서는 제가 목사로서의 적절한 자격이 있는지를 다 심사해서 그 총회에서 저를 이 노회에서 일 할 만한 자격이 있도록 정상적으로 안수를 받은 목사다 라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 열린교회 교인들이 투표해서 우리는 이 분을 담임목사로 모시고 싶습니다. 라고 청원을 올리면 노회에서 심사를 해서 옳다 라고 판단이 되면 전체회의에서 통과를 시켜서 열린교회 담임목사로 파송 하는 겁니다. 당연히 저의 임명권은 교회에 있지 않고 노회에 있습니다. 노회가 저를 임면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장로는 당회에 소속이고 목사는 노회의 소속이다. 담임목사는 당연히 교인들의 투료에 의해서 청빙하고 청빙이라고 합니다. 초청하는 거를. 노회가 파송하고 본인은 교회에 부임해서 담임 목사직을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장로교회에서는 노회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자, 당회에 지 교회 목사와 장로들로 구성이 됩니다. 지 교회에 담임목사가 있지요. 우리 합동 측에서는 부목사들에게는 이 당 회의에 구성인 으로서 안 받아줍니다. 담임목사가 있고 장로들이 있습니다. 1인 이상의 장로만 되도 이것은 당회가 되는 것입니다. 한 30명 정도마다 1명씩 뽑을 수는 있지만 강제사항은 아니고 뽑을 수는 있습니다. 장로들이 X명이 있고 담임목사는 당연히 1명이 있고 이게 합쳐져 당회가 되는 겁니다. 노회가 제일 중요한데 이 당회에서 이 사람들이 우리 당회원이 12명입니다. 우리 노회의 산하의 교회가 120개 되는데 12명이 전부다 나오면 1,440명이잖아요. 12명이 안되는데도 있고 더 되는데도 있지만 회의가 되겠습니까? 안되지요. 담임목사는 당연히 노회의 소속이기 때문에 노회원이 되고 장로도 모두 노회원이지만 대표를 파송합니다. 그럼 당회에서 금년에 2번의 노회는 A씨, B씨, C씨가 당회를 대표해서 참석하시오. 의결을 합니다. 예를 들면 10명 가운데 3명만 대표로 참석하는 겁니다. 다 나오잖아요. 그럼 그 사람들이 모여서 노회를 구성하고 여기에서 장로와 목사들이 모여서 중요한 일들을 다 정하고 심지어는 목사의 직분을 박탈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장로를 세우는 거를 허락해주는 것, 교회를 설립했을 때 정상적인 교회로 인정해주거나 혹은 이 교회를 폐쇄하도록 결정하는 모든 권한을 교회가 가지고 있습니다. 대단하지요? 이런 노회가 굉장히 많겠지요? 노회 안에는 적게는 한 50개-80개 교회부터 많게는 옛날에 한 600교회까지 모여서 하나의 노회가 되고요. 총회 전체는 80개-90개 정도 되는 노회가 약 80개, 90개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약 100개 정도 되는 노회가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100개 되는 노회 안에 약 17,000 교회가 있는 겁니다. 그러면 100개를 잡으면 170개 교회가 있다는 얘기가 되는 거잖아요. 그러면 당연히 노회에서는 다시 사람들을 추려서 소수로 이리로 보냅니다. 총회가 전체 모일 때는 노회에서 파송된 대표단에 의해서 회의가 이루어지게 되는데 대게 한 800-1,000명이 모여서 회의를 하고 거기에서 매우 중요한 결정들을 하게 됩니다. 산하 교회가 모두 복종해야 할 굉장히 중요한 결정을 하고 심지어는 노회가 새로 생기고 갈라지는 것, 노회를 해산하라고 명령하는 것, 당회에서 재판을 했지만 불복해서 노회에 올라오고 노회에서 재판을 했는데 도 불복해서 총회에까지 올라오는 재판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들을 처리하는 것입니다. 1년에 한 번씩 모입니다.
교회의 회의. 지교회의 정치. 아까 다 얘기한 거지요. 그래서 교회에 의해서 피택 된 목사와 장로. 교인들이 선출한 장로만 되는 거지요. 다른 교회에서 이 교회로 오게 되면 엄격한 의미에서 그 사람은 이 교회와 상관이 없는 장로입니다. 다시 교인들에게 투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 교인들의 의해 선출되어서 인정받은 목사와 교인들에 의해서 선출된 장로. 이 사람들만이 당회를 구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장로는 교인들에 의해서 선택되지만 권위는 그리스도께 받음. 지 교회는 교회에 정치에 의해 충분함을 갖추는 완성적인 교회임. 지 교회는 당회가 그런 중요한 기관이 됩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하냐면 교회에 재산에 관한 것을 당회에서 결정을 해서 건물을 팔기도 하고 사기도 하고 당회에 의해서 교인들을 징계하기도 하고 공동의회가 교인 전체 회의니까 교회에서는 가장 권위 있는 회의입니다. 이 교회에서 무엇을 토론할지도 안건이 무엇인지도 당회에서 상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번에 우리들이 공동의회에서 다룰 안건은 예산, 결산에 관한 건과 무슨 건입니다. 라고 2개가 올라오면 그 2개만 공동의회에서 처리할 수 있지 기타 의견이 있는데 교육관 팔아 버립시다. 이런 건은 안건에 들어올 수조차 없습니다. 그거를 만약에 받아서 결정하면 그 결정은 무효입니다. 그렇게 결정한 사람들은 법적으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교회를 혼란케 한 죄를 져야 합니다. 장로교 체제 안에서는 교인들의 의해서 교회가 몇 사람에 의해서 휘둘리지 못하도록 잡아주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당회가 건강하지 못해서 이상한 사람들이 들어오고 해서 교회가 분란을 일으키고 하게 되면 교회는 마치 술 취한 사람이 운전대를 잡은 것처럼 복잡한 상황에 접어들게 되는 겁니다. 장로회 선거는 너무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밖으로는 어떤 교회의 종류에 정치에도 복종하지 않음. 다른 교회들과 공동적인 일치를 이루어 기출을 맺어야 된다. 이겁니다. 주요 회의 또는 대회의 입니다. 지 교회가 지역에 있는 교회가 교회 영적 통일을 위해 연합하는 경우에 대회의가 필요하다. 그래서 15장에서 혼란스러웠지요. 왜냐면 율법을 지켜야 되냐, 말아야 되냐 그러면서 할례를 받아야 되냐, 말아야 되냐 많은 문제들이 일어나게 된 겁니다.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다 뭐다 그래서 이제 사도행전 15장에서 사도들이 모두 모인 겁니다. 회의를 한 겁니다. 그러면서 거기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겁니다. 혼란스러운 교회를 깨끗이 정돈해 주는 겁니다. 이런 일들이 노회와 총회의 근거가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 회의는 교회적인 사건들 교리, 도덕, 교회의 정치, 권징만을 취급함. 교회의 회의는 이런 것만 취급하는 겁니다. 예를 들자면 교회가 이번에 어느 당을 지지 합시다. 이런 식은 안 됩니다. 선거철이 되면 우리 교회에 인사하고 싶어 하는 정치인들이 많습니다. 안 시킵니다. 한 번도 시킨 적 없습니다. 때로는 어려울 때도 있는데 그래도 교회는 그렇게 하면 안 되지요.
성질상 소회의에 속하지만 거기서 해결할 수 없는 사건들. 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났는데 아무리 회의를 해도 교회 안에서는 해결이 안 되는 것. 딱 정확하게 반으로 갈려서 공동회의에 성립도 안 되고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접어들었을 때 이때에는 노회에서 처리를 해주고 그 다음에 총회에서 처리를 해줍니다. 소회의에 속하나 일반 교회에 관련된 사건들. 이건 예를 들어서 주일날 어떤, 어떤 의무가 있는데 이건 개 교회에 문제가 아니라 판결 결과에 따라서 산하에 있는 모든 교회가 영향을 받게 될 때 이런 것들이 개 교회에서 결정하지 않고 상회라고 하는데 위에 있는 회의에 이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상회의 결정은 이것은 절대적이 아니라 권고하는 바이다. 그러면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됩니다. 그러나 그 표시가 안 되어 있으면 모두 지켜야 됩니다. 안 지키면 다시 처벌과 징계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심하면 열린교회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동서울 노회의 교회가 아니다. 교회 자체를 제명해 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많이 일어나진 않지만 심각해질 때 그런 일도 일어납니다.
교회의 권세. 권세의 본질이 무엇이냐. 권세의 본질입니다. 두 개입니다. 영적 권세이고 대리적 권세입니다. 영적 권세는 성령의 의해 주어지고 성령의 권세에 표현이고 신자들에만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게 권세를 주었지만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 이렇게 결정이 되었으니 이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교회를 운영하는 그러한 하나님의 교회의 법과 질서를 따라 이루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따라야 한다.’ 이럴 때 사람들 마음에 구속력을 갖게 되고 이런 것들이 권세의 표명이고 신자들에게만 반영 됩니다. 영적인 방법으로만 행사되는 겁니다. 예를 들자면 3번 연달아 교회를 빠진 사람은 지하 감옥에 가둔다. 그러면 안 되지요. 그렇게 되면 국가에서 개인의 권리를 침해했다고. 이단에 들어왔다 걸린 사람은 지하 2층 고문실에서 거꾸로 매달아놓고 고문을 한다. 그래서 자백을 받아낸다. 이것도 안 됩니다. 그런 점에서 영적인 방법이 행사되는 겁니다. 두 번째는 대리적 권세입니다. 교회의 권세는 교회 자체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 권세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시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3가지 권세가 있는데 첫 째는 교리권. 교리는 우리가 지금 배우고 있는 이 교리를 얘기 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치리권. 다스리는 것입니다. 봉사권입니다. 봉사하는 겁니다. 하나님께 봉사하는 겁니다. 받들어서 섬기는 겁니다. 교회의 3가지 권세는 교리권, 치리권, 봉사권. 교리권 혹은 교훈권이라고도 부릅니다. 가르치는 권세입니다. 교회의 하나님에게 교회는 진리를 수호하고 전파하고 고수하도록 위임을 받았다. 교회가 교리권을 가르치는 권세를 어떻게 행사 하냐면 말씀을 전파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해석하고 전파합니다. 두 번째는 신앙고백을 작성합니다. 그래서 개교회가 하는 건 아니지만 총회차원에서 신앙고백을 작성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믿는다. 다음 이것을 믿는다. 삼위일체를 믿는다 이렇게 가장 간단한 것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제가 믿사오며. 이게 가장 간단한 거고 간단한 것을 가지고 확장을 하면서 자기들만의 신앙고백을 하는 겁니다.
(예화) 예를 들자면 50년을 거꾸로 올라가면 환경문제 그런 거 없었거든요. 문제된다고 생각도 안 했고요. 그 다음에 컴퓨터 전혀 없었고요. 지적 재산권의 침해. 이런 거 없었고요. 성희롱 그런 거 있었지만 그렇게 이슈가 되지는 안았잖아요. 그런데 사회가 많이 변화가 되었어요. 이런 속에서 우리는 어떤 것을 믿는다고 가르쳐야 되나 이렇게 봐야 되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교회에서는 술을 먹는 것. 담배를 피는 것을 금하잖아요. 그런 것들이 교회 직분을 맡는데도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그것은 옛날에 술과 담배에 쩔어서 사람들을 망하게 하던 때에 가장 경계해야 될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도박, 주색, 흡연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중국은 기독교가 들어올 때 문맥이 아편이 너무 보편이 되어있어서 아편이 하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아주 중요한 표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술, 담배를 안 먹는 것 그런 전통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도 아주 아름답겠지만 그것과 함께 어떤 게 더 중요하냐면 지적재산권을 침탈한다던지 오늘날에 환경을 파괴하는 것, 금융범죄 이런 등등의 것. 그리고 인터넷을 이용한 범죄, 근거 없는 이야기로 특정인들을 모독하는 인심공격 이런 것들이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더 중요한 표지로 대두되고 있는 때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말씀드리지만 환경 그렇게 파괴하고 그러는 것 그리스도인으로서 할 일이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예전에도 그렇게 심하지 않았지만 환경 문제에 대해서 여러 번 수련회 때 설교를 했잖아요. 그때 이후로 제가 쓴 일회용 종이컵의 총 수가 10개가 안 됩니다. 10개도 많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안 쓰려고 굳게 마음을 먹고 예를 들어서 어디를 갔는데 너무 물이 먹고 싶은데 참습니다. 컵으로 먹으러 가는데 까지 참는 겁니다. 그러한 가치들이 오늘날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훈권을 행사하고 또 하나의 신학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신학 연구를 통해서 전수받은 진리는 잘 보존하고 발전시키고 새로운 진리를 깨달아서 후세에 물려주고 자기들이 그것을 누리고 하는 그런 것이 교회의 권세 중에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가 신학교를 후원하고 신학자들을 우대하면서 그들을 좋은 학문적인 성과를 통해서 성경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하는 기능들을 그런 일들을 돕는 것은 교회로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인들이 열심히 공부를 하고 그 공부를 배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치리권은 질서 유지권입니다. 순결 유지권입니다. 질서를 유지한다 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다 생각이 다르잖아요. 자기만 옳다고 떠들고 그러면 회의가 되겠습니까? 교회 질서가 다 깨지잖아요. 사람들을 모아서 규합을 해서 물리적인 힘을 쓰고 그런 사람에 의해서 교회가 결정되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교회에 치리권을 주신 겁니다. 심한 교회들은 교인들을 수시로 자릅니다.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너는 우리 교회에서 나가라.’ 1920년대 새문안 당회록을 보니까 매주 치리를 하는 겁니다. ‘아무 아무개는 누구한테서 돈을 빌렸는데 몇 번씩 갚지 않아서 채무자가 교회 와서 호소 하길래 불러서 몇 번에 걸쳐서 변재를 하도록 지시하였고 갚을 능력이 있어 보이는데 끝까지 채무 이행을 안 하고 있다. 너는 우리 교회의 교인이 아니다. 제명.’ ‘아무 아무개는 첩을 얻었다.’ 그 당시 첩은 20년대에는 보편적인 것이었잖아요. 분명히 그러지 말도록 교회는 엄중히 경고했고 언제까지 그 이중생활을 정리하도록 요청하였으나 당사자가 끝까지 응하지 않으므로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제명. 장부 하나 하나가 피 바다가 될 정도로 치리를 한 겁니다.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권리나 이런 걸 행사할 때는 법과 규칙을 따라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정관 만드는 그것도 3년 가까운 세월이 걸렸던 이유도 그렇게 어려운 겁니다. 노회에서도 이미 표준 정관을 만들고. 우리가 새로 만든 게 아니라 대부분은 노회에서 법률관들이 목사들이 장로들이 모여서 의논해서 만든 기본 틀입니다. 그걸 우리들이 받아서 몇 가지를 참고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신조나 교회의 환전 같은 것을 재정할 권리. 성경적 원리에 기초를 둔 것입니다.
질서 유지권입니다. 교회는 권징을 적절하게 시전하기 위해서 순결이 교리적 순결, 도덕적 순결입니다. 잘못된 것을 믿는 사람들 끊어내는 것. 도덕적으로 잘못된 사람들이 교인 행세를 하고 다니고 성찬에 참여하고 하는 것들을 못하게 하는 겁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교회는 순결을 유지하게 되고 권징의 목적은 교인들의 입교와 출교에 관한 그리스도의 법을 시행한다. 입교는 들어오는 거고. 들어올 때 예를 들어 징계를 받았었는데 충분히 회개를 했다고 인정이 되고 해벌이라고 합니다. 그 벌을 해지해주면 다시 정식적인 교인의 권리를 갖게 되는 것이고 교인들이 그리스도에 순종케 함으로써 은혜를 받아서 영적인 건강한 생활을 유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봉사권. 섬기는 것입니다. 사도시대대에 특별 은사들. 12장에 보면 수많은 은사들의 목록이 나오잖아요. 그런 은사들은 계시가 종결되면서 중지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아주 굉장한 신학적인 문제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강해, 33개 시리즈 된 설교를 모두 들으면 좋겠습니다. 반드시 변화될 것입니다. 교회의 일은 자선의 봉사에 국한됨. 주님은 자선을 교회의 임무로 암시하심.
25장. 은혜의 방편입니다. 방편이라고 하는 것은 방도와 수단입니다.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수단이 뭐냐? 라고 할 때 말씀과 성례다. 라고 보는 것입니다. 은혜의 방편은 일반적으로 이렇게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가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방편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말씀은 두 가지로 구성이 되는데 율법과 복음입니다. 율법에 대한 지식과 복음에 대한 지식은 모두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통하지 않고는 복음을 알 수 없고 복음을 안다면 반드시 율법의 뿌리를 알아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과 복음으로 이루어진다. 성례는 성찬과 세례로 이루어집니다. 기도를 은혜의 방편에 넣는 신학자들도 많습니다. 기도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도 기도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도고도 기도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는 간구도 기도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남을 위해서 하는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중보기도라는 말은 신학적으로 사용하면 안 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중보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이 비록 남을 위해 대신 기도해 주어도 우리는 그것을 중보기도라고 부르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섬김 기도로 통일을 했습니다. 남을 위한 섬김 기도다. 하나님의 말씀은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말씀은 성경이고 교회에서 전파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은혜의 방편은 가장 좁게는 바이블. 성경이고. 이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한 설교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조건이 무엇이냐 모든 설교가 다 하나님의 말씀이냐? 그렇지는 않고요.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여 설교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됩니다. 그런데 성경도 하나님의 말씀이고 성경을 올바로 선포한 설교도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성경은 원천적 권위이고 설교는 종석적 권위입니다. 성경은 누가 입증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설교는 그것이 건전하고 올바른 성경 해석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한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과 설교다. 성경은 원천적 권위이며 설교는 종석적 권위이다. 은혜의 가장 중요한 방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찬보다 더 중요 합니다. 성례보다. 왜냐하면 성례의 모든 모양새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과 복음입니다. 모든 신자들의 의해 전달될 수 있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역사함. 전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은 목사가 할 수 있지만 설교를 잘 듣고 사람들에게 올바르게 전달해주는 것도 충분히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과 설교가 있지만 이것에 성령이 함께 역사하실 때 효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하게 되고 믿음이 생기게 되고 순종하고 싶어지고 죄를 버리고 하나님 뜻대로 살고 싶은 감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말씀의 두 부분은 율법과 복음입니다. 율법은 죄를 자각하게 하고 율법의 요구에 응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 인도한 몽학 선생의 역할을 합니다.
(예화)몽학선생은 여러분 옛날 영화. 19세기 영화 보면 귀족 집안의 아이가 학교 갈 때 혼자 안 가고 마부가 마차를 운전하지요. 그러면 도련님을 옆에 태우고 옆에 나이가 지극히든 하인이 옆에 탑니다. 그런데 하인 같질 않아요. ‘도련님 오늘도 학교 가서 말썽 부리시면 안 됩니다. 친구들하고 떠들거나 장난쳐서 선생님에게 지적 받으시면 절대 안 됩니다. 약속하실 수 있겠어요?’ 학교 끝나면 기다리고 있다가 인사를 하고 차에 타면 ‘도련님 오늘 학교에서 공부 잘 하셨습니까? 말썽 안 피우셨지요?’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 사람이 바로 신분은 하인이지만 그러나 나이가 아직 어린 주인집 도련님이 신분에 있어서는 자기 상전이지만 주인의 허락 하에 이 아이가 일정한 나이에 도달해서 판단력과 이해력을 가질 때까지 돌보는 선생님의 역할을 하게 해주는 것이 몽학선생입니다. 당연히 아이가 다 커지고 성숙하고 어른이 되면 이 분은 필요가 없지요.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이 분에게 간섭받고 ‘오늘 직장에 가셔서 정신 똑바로 차리셔야 합니다. 오늘 사장님한테 지적 안 받으셨지요? ’이렇게 물어보지는 않잖아요. 성인이 되었으니까
그런 점에서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데려가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했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은 다음에는 더 이상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직접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선 율법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려고 했는지를 깨닫게 된다 라는 것입니다. 신자들의 의무를 상기시키고 구원의 길로 인도합니다. 율법이 없으면 우리가 의무가 무엇이고 본분이 무엇인지 뭘 회개하고 뭐가 잘못됐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지요 .똑바로 살아야할 길이 무엇인지 깨달을 때 내가 어디로 빗나갔는지를 알게 되잖아요. 율법에 대한 지식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구원의 길에 대한 명백한 표시. 이게 복음입니다. 복음이 제일 짧은 단어는 Jesus die for us. 예수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더 이상 요약할 수 없는 복음입니다. 조금 늘리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고 다시 부활하셨다. 이게 복음입니다. 좀 더 확대하면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구원과 생명을 주신다. 좀 더 확대하면 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다시 오신다. 이런 식으로 계속 화대가 되면서 한 없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죄인들이 그리스도께 와서 믿고 회개하도록 권고하고 현재와 미래에 구원의 축복을 약속하고 복음을 믿는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성례. 성례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직접 제정하신 거룩한 제도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세례를 받으시지요?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이렇게 성찬을 하라고 말씀하시잖아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가 감각적인 표지입니다. 감각적인 표지는 sensual.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포두주도 눈에 보이고 떡도 눈으로 보이는데 왜 포도주 조금하고 떡도 한 덩어리도 아니고 요만하게 떼어 먹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무엇 때문입니까? 감각적 표지 안에 있는 그 뜻을 알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성찬 받을 때 옆에서 눈물을 뚝 뚝 흘리고 성찬을 받는 성도들 봤지요? 그 감각적인 표지 너머에 있는 의미를 안 사람들만이 그런 반응을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은혜의 방편으로써 완전합니다. 그런데 성례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주려면 한 잔 주지. 요만하게 그렇게 주고 떡도 좀 한 덩어리를 주지. 인심 사납게 요만큼을 줄까?’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말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이해한 사람들이 그 성찬을 받는 겁니다. 말씀은 믿음을 일으키며 강화합니다. 일으키면서 강화 합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 신앙을 줍니다. 그러나 성례는 믿음을 강화할 뿐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을 위한 성례이지 불신자들을 위한 성례가 아닙니다. 세례를 받을 때도 믿으니까 세례를 주는 거지 세례를 일단 받으면 너를 믿을 거라고 기대하고 세례를 준다. 그러지는 않는 거지요. 그 다음에 전 세계에 전파되지만 이건 신자와 그의 후손들에게만 시행되는 것입니다. 성례의 구성은 세 개로 구성이 되는데 우선 외적이가 가변적인 표지입니다. 떡이고 포도주입니다. 떡이라고 해서 어느 교회에서 시루떡을 잘라서 하는데 알포스라는 히랍어 단어가 그 당시에 쓰던 빵입니다.
(예화) 빵이 어떤 빵이냐면 설탕도 안 들어가고 아무것도 안 들어갑니다. 이스트를 가지고 구워서 소금만 살짝 넣어서 반죽을 아주 치대서 잘해서 화덕에 구워낸 것입니다. 그것을 터키 브래드라고 우리들이 그렇게 말하잖아요. 터키빵이라고. 아무 양념이 안 된것입니다. 그걸 뜯어서 하나씩 먹으면 아무 맛도 없는 것 같지만 꼭꼭 십으면 밀가루 고유의 풍미가 납니다. 밀가루가 그 쪽에 밀가루를 써야지 맛있습니다. 우리 열린공간에서 나오는 빵이 터키 밀가루를 쓰는 겁니다 .프랑스까지는 아니지만. 우리나라 밀가루보다 훨씬 질이 좋습니다. 먹으면서 빵의 고유한 맛을 느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스트만 뺀 겁니다. 왜냐면 무교병이니까. 그걸 그대로 한 게 성찬때 받는 그 떡입니다.
그것이 가변적인 표시입니다. 내적, 영적 은혜의 표징입니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해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바 나의 몸이니.” 그러잖아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언약을 의미하는 것이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믿음과 회개를 가리키고 그렇게 떡을 먹고 포도주를 먹는 과정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연합이 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소위 얘기하는 외국어에서 등가번역이라고 하잖아요. 등가번역이라고 하는 것은 예를 들자면 서구쪽의 문헌이 될 때 양귀비가 있었는데 하면 양귀비가 누군지도 모르잖아요. 그런데 중국에 클레오파트라가 있었는데 이렇게 얘기하면 등가번역이 되는 겁니다. 이거를 예수님이 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하셨을 때 이건 그 당시에 사람들의 대표적인 음료와 주식입니다. 빵이 우리로 말하자면 밥입니다.
(예화) 그 당시 사람들이 물을 안 먹고 포도주를 먹었던 이유는 석회석이 많아서 지금도 유럽 사람들이 문젠데 물을 계속 먹으면 석회석이 몸에 쌓여서 밑으로 내려와서 여자들은 다리가 퉁퉁 붓는 겁니다 .그래서 이상한 체형이 되는 거지요 .그래서 비싼 돈을 내고 알프스에서 공수해온 물들을 먹고 그러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애비앙 같은 게 인기가 있는 게 그겁니다. 아세요? 여러분 애비앙 생수 한때는 애비앙 이라고 붙였는데 원산지 하면 제주도 이렇게 나오는 거 아세요? 상표만 파는 거지요.
당시의 사람들이이것 없이는 살 수 없었습니다. 이걸 등가번역을 하면 나는 밥이요. 나는 물이니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밥과 물은 생명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되는 거지요. 그것 없이는 살 수가 없는 거지요. 그런 점에서 그걸 먹음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그리스도의 피에 우리가 참여하게 되는 거지요 .고난에 참여하게 되는 겁니다. 표지와 표징의 연합입니다. 그래서 성례의 본질이 바로 이것이고 성례가 믿음으로 받아들여지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는 것입니다 .의미를 모두 알고 받으면 그 포도주를 마시면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피를 느끼는 것입니다.
성례의 수. 구약시대에는 할례와 유월절이 있었습니다. 유월절은 절기이고 할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례를 받음으로서 그 백성에 속하는 것이라면 유월절은 그 절기를 지킴으로서 이 모두가 피를 흘려야 되는 성례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여기서는 어린양을 잡아서 문지방에 바르고 죽음의 사자가 넘어간 것을 유월이라고 하잖아요. 신약시대에는 세례와 성찬입니다. 피가 없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를 포도주로 상징하고 그리스도의 살을 빵으로 상징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실제적인 피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희생을 드린 후에는 더 이상 피 흘림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신약의 성례와 구약의 성례는 약간 다른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는 연속성을 가지고 있고 차이점은 구약 성례는 국가적인 국면을 지니고 있고 구약성례는 다가올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고했다면 신약의 성례는 완성된 희생을 예고하고 신약의 성례는 국가적인 면이 아니라 영적인 나라의 국면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고 영적인 은혜의 풍부함에 있어서는 신약의 성례가 훨씬 더 큰 것입니다.
27과. 세례입니다. 세례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세례를 제정하셨고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령 하십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걸 뜻합니다. 공인된 목사에 의해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시행된 세례가 합법적이다. 교회에서는 담임목사 이외에 누구도 세례를 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우리 교회 말고 다른 교회서 어떻게 선언을 하지요? “내가 예수를 믿는 자 김 아무개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많이 들어봤지요? 여러분도 아마 그렇게 받으셨지요? 그때 그림이 어떤 그림입니까? 세례를 주는 내가 지금 예수를 믿는 김 아무개에게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내가 권위를 부여 받았기 때문에 내가 너에게 이 세례를 준다. 정확히 그 뜻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여러분들이 이해하고 있었던 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런 뜻으로 대부분 이해하셨을 걸요? 저도 그맘때 그렇게 이해를 했으니까. 그게 아닙니다. 히랍어 원문에 그리스어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그 이름 속으로 세례를 주노라.” 이렇게 나옵니다. 제가 그렇게 선언을 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면 에이스입니다. 히랍어에서는 인투의 의미를 가진 겁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목사가 신자가 된 이 사람이 믿고 신앙을 고백하니까 절차를 다 밟은 후에 세례를 줍니다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여기 이렇게 없고 성부, 성자, 성령 이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게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 속으로 세례를 주노라. 내가 주는 행위. 나는 중요하지 않고 이 세례를 받으므로 이 사람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연합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제일 중요합니다. 오해하고 있었던 것을 여러분에게 밝히는 겁니다. 그러면 왜 세례를 줄 때 저 목사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 속으로 세례를 주노라 이렇게 말씀 하셨을까? 그림이 떠오르게 되는 것이지요. 이해됩니까? 감동적입니까?
세례의 바른 양식. 침례교에서는 세례에 합당한 양식은 물에 풍덩 담그는 거라고 강조를 합니다. 그러나 세례에 근본적인 관념은 그런 형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사람이 휙 집어 넣는 게 아니라 성직자가 그 사람을 데리고 물속으로 들어 가잖아요 .이렇게 들어가서 이렇게 나오는 물속에 들어가는 건 죽는 것이고 그 다음에 다시 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데 원래 세례의 형태다 그러는데 사실은 반론도 많습니다. 원래의 세례의 합당한 양식이 침례였다는 것에 대해선 동의를 하는데 불변의 법칙이었느냐에 대해서는 좀 의구심을 갖는 것이지요.
(예화) 왜냐하면 3천명이 세례를 받았다고 요단강에서 받았다고 했는데 요단강 가보신 분들은 절대 3천명이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는 강이 아닙니다. 오죽했으면 성지순례 갈대 우리 집사람이 개울가에 쭈그리고 앉아서 아니 요단강을 건너야 되는데 우린 언제 가는 거야? 그런데 알고 보니 요단강이었는데 과장을 좀 하자면 제가 한 백미터 바깥에서 열심히 달려오면 어쩌면 뛰어서 건널 수도 있을 정도의 넓이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과장을 많이 했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평지 그건 밭이고요 언덕 이것은 산이고요. 호수는 바다고 강은 개울이고요. 개울은 실개천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성경은 세례의 본질이 성결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물을 부리거나 붓는 형식에 의해서도 상징될 수 있다. 물을 뿌려도 좋고 물을 부어도 됩니다. 물속에 풍덩 집어넣어도 괜찮습니다. 그 형식이 더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께서 세례의 어떤 형식을 제정하지 않으셨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세례의 대상은 성인입니다. 그래서 신자와 후손을 위해 제정된 것이기 때문에 믿지 않는 자는 세례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교회는 세례를 받고자하는 모든 성인에게 신앙고백을 요구해야 합니다. 여러분 다른 교회에서 세례 받으시길 잘 했습니다. 우리 교회 굉장히 어렵습니다. 완벽하게 교리문답을 다 외워야 합니다. 그래서 장로님 두 분하고 목사님 한 분하고 3인이 한 조가 되어서 묻고 개인적인 신앙고백, 어떻게 신앙생활을 할 것인지 진짜 이 사람이 거듭난 사람인지 다 검증합니다. 그리고 세례 교육 받고. 신앙고백이 세례보다 앞서야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오순절 베드로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다는 겁니다. 어른들의 경우에 반드시 회개하고 믿은 흔적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영화, 세례는 성경에 단일 구절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경적 사상에 산물이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영적 언약이고 그래서 할례를 주게 되지요. 영적 언약의 표와 인입니다. 이 언약은 아직도 유효하고 신약 때에 새 언약과 본질적으로 동일합니다. 영아들은 은혜 언약의 참여합니다. 할례의 표를 받고 이스라엘의 회중에 한 부분으로 관제 되었습니다. 신약에 와서 할례는 패지 되었으나 세례는 은혜 언약으로 들어가는 표와 인이 되고 영아를 제외하지 않은 온 가족이 세례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집안에서 자녀들이 태어났고 그 아이들이 어려서 죽었을 경우에 주님을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의 어린 나이에 죽었을 경우에 우리는 그 아이가 믿는 자녀로서 구원을 받았을 것이다. 라고 추정하는 것입니다. 영아 세례의 근거는 여기서 영아라고 하는 것은 4세 미만입니다. 교회에서 4세 넘으면 영아세례 안줍니다. 가능하면 2년 안에 받기를 권합니다. 중생의 약속을 포함한 하나님의 총 포괄적 언약적 약속에 근거해서 세례를 받음. 언약적 약속은 영아세례의 확실하고 객관적인 근거를 제공함. 은혜의 방편으로서 영아세례. 영아들이 세례를 받을 때 중생했다고 가정하면 마음에 내재하는 중생의 생명을 신비적인 방법으로 강화할 것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나 세례의 의미가 분명히 이해된 후에는 장성한 후에 갓난아기가 아니라 큰 아이가 되어서는 그 믿음이 더 견고해질 수 있다고 보고 세례의 작용이 한 순간에만 국한된다고만 말할 수 없다. 세례를 통한 은혜의 작용이 그렇게만 볼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27장 성찬입니다. 성찬은 그리스도께 돌아가시기 전 유월절에 제정되었고 떡과 포도주. 주님의 찢어진 살과 흘리신 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먹고 마심은 희생의 열매에 대한 영적 유용성을 나타내고 그리스도의 구속적 죽음에 대한 계속적인 기념입니다. 성찬으로서의 표징과 인침으로서의 성찬. 표징이라고 하는 것은 상징이고 인침은 셀링 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수표를 발행했는데 거기다가 도장을 찍지 않으면 그 수표는 꽝입니다. 도장을 찍는 순간 이것은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수표를 가진 사람에게 돈을 지급하겠습니다. 라는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그걸 인침이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표징은 빵이 뜯어집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몸이 찢기신 겁니다. 그 다음에 죽으신 후 3일 만에 부활하십니다. 우리가 그 죽으심에 참여합니다. 그리고 이걸 먹음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받았으니 나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내가 죽기까지 주님께 죽기까지 충성하겠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표징이라면 이렇게 함으로써 믿음으로 여기에 참여할 때 진짜로 은혜를 받으면서 구원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과 풍요로움을 실제로 누리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덕과 포도주를 먹으면서 아무 느낌이 안 드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걸 받으면서 한 없이 눈물을 흘리고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 구원의 실제적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이게 인침입니다. 그래서 성찬은 우리에게 표징이 될 뿐만 아니라 신앙 안에서 인침이 되는 사건입니다. 표징과 인침으로서의 성장. 표징은 떡과 포도주고 그 다음에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떡을 먹으면서 그리스도와 나의 몸이 관계가 있다는 것. 내 몸이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셨다는 것. 포도주를 마시면서 그분의 피가 나를 속죄하셨다는 것.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인침은 성찬이 표징 일뿐 아니라 날인. 보증이고 시련의 보증하는 것이고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 보이셨잖아요. 살이 찢어지고 피를 흘리셨으니까 그것을 통해서 ‘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이걸 성령 안에서 깊이 체험하는 것입니다. 언약의 약속과 복음 풍성함이 믿는 우리들의 것임을 확신 하는 거고 구원의 축복이 실제로 자신 안에 있다는 것. 이 구속과 속죄 은혜를 내가 누리고 있다는 것. 이것을 믿음으로 참여하는 그 성찬의 행위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찬에 참여할 때는 오래도록 기도하고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한 후에 성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성찬에 있어서 성찬이라는 떡과 포도주의 이것을 먹고 마시는데 있어서 그리스도가 어떤 식으로 임재하시냐?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 견해가 나뉘느냐할 때 로마 교회는 이것을 화체설이라고 합니다. 이건 우리가 그냥 있을 때에는 떡과 포도주인데 성찬을 위해서 이것이 공여될 때 그때 이것은 실제로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한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천주교 다니는 친구가 있었는데 성찬하려고 떼어놨는데 성찬에서 떡이 남았는데 그 다음날 가보니까 진짜 살이 되어서 피가 뚝 뚝 떨어지고 있더라. 이런 미신적인 이야기를 믿는다고 얘기를 하더라구요. 마르틴루터는 공제설이라고 합니다. 공제설이라는 것은 함께 있다라는 뜻입니다. 떡과 포도주 그 안에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감춰져 있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물리적으로는 안보이지만 영적으로는 예수의 살이요 피라고 보는 것입니다. 가톨릭 쪽에 많이 가깝지요? 우리는 이 이론도 좋지 않게 봅니다. 츠빙글리는 이걸 기념설이라고 했습니다. 기념설은 그냥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을 기념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가장 성경적이라고 보는 것은 영적 임재설입니다. 이것은 비록 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은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실한 믿음으로 참여하고 지식과 믿음으로 참여하고 성령님의 역사하실 때 그 성찬을 받는 사람들 속에 그리스도께서 오신다. 그것이 성령의 은혜라고 보는 것입니다. 압도적으로 칼빈의 견해를 우리는 지지합니다. 로마 교회의 견해는 화채설로 봅니다. 루터파는 공제설. 덕과 포도주는 그대로 있지만 그리스도의 전인격적인 몸과 피는 요소들 속에 요소들 밑에 요소들과 함께 임재 한다고 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그러려면 모든 공간에 다 있어야 된다. 이런 복잡한 문제를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배울 때 신성은 편재하지만 인성은 장소가 정해져 있다라고 배웠잖아요. 그런 견해를 취하면 이 견해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떡과 포도주 이런 것 속에 예수님의 인성이 배어져 있어야하니까 좀 이상하잖아요. 츠빙글리의 견해는 기념설이고 칼빈은 영적 임재를 가리킵니다.
성례의 깊은 은혜와 신비적 교통. 성찬은 신자를 위해 행하신 날인과 보증으로 여기고 희생과 공로의 효과는 능력에 의해 실제적으로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성찬의 참여자. 참여자는 성찬의 의미를 분별할 수 있는 신자들만을 위해 제정된 것입니다. 은혜의 역사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강화하는데 기여하고 성례와 말씀의 종류는 종류에서 다르지 않음. 성례는 말씀의 효과와 이미 받은 분량에 더 가해진 것임.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식 없이는 성찬에 참여할 수 없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성찬은 엄청나게 감동적인 장면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성찬에 참여하는자 만이 성례의 영적인 유익을 누릴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