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반기 교역자수련회1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녹취자 : 김세나
온전하라고 하는 이 말은 희랍어에는 완전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비슷한 말이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완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예수님의 명령은 예수님이 우리가 그 명령을 이행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그러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완전성은 우리가 성품상 본뜰 수 없는 것입니다. 피조물과 하나님 사이에 현저한 격차는 완전성의 차이입니다. 더군다나 여기에서 말하는 완전성이 바로 거룩에 있어서 도덕적 완전성의 차이입니다. 도저히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표준인데도 주님이 우리에게 이것을 주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어느 방향으로 우리의 인생이 가야할지, 우리의 사역이 어느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할지, 어떠한 태도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 해야 할지 보여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러한 것입니다. 북극성을 보고 계속 배를 몰거라 그러면 그렇게 명령하는 주인의 마음 속에는 배가 북극성에 도달하리라는 기대는 처음서부터 갖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고 가면 그것이 항로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길지 않은 사역의 세월들을 보내면서 82년도에 전도사가 되었으니까, 83년도인가 전도사가 되었으니까 생각해 보면 한 26년의 세월이 벌써 흘렀습니다. 수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붙잡힌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숨길 수 없는 차이가 있습니다. 머리가 좋은데도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사람이 있고, 또 공부가 남만큼 특출하지 못해도 주님의 손에 강하게 붙들린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숨길 수 없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온전하고자 하는 몸부림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대치가 높습니다. 사역에 있어서 기대치도 높고 사람 됨됨이에 대한 기대치도 높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충성하고자 하는 기대치도 높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기대치가 높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대치가 높이 서 있는 것은 성격이 무슨 성격인가 하면 하나님을 만난 깊이에 비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거룩하심과 그 은혜를 깊이 체험하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게 되면 그 자신이 체험한 하나님의 영광의 크기만큼, 자신이 체험한 하나님의 영광의 깊이만큼 자신이 꼭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결국 뭐냐 하면 사람이 그러한 방면에 있어서 목표가 없고 열정이 없는 것은 하나님을 못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만났다고 하더라도 아주 현저히 흐릿한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목표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렇게 하나님 앞에 온전하고자 하는 사람은 늘 노심초사 하고, 어떨때는 믿음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그것이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믿음이 오히려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인생의 날들은 정해져있고,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건강이라고 하는 자원이 한정이 있는데 그 한정된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쓰다가 결국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계속 허비하면서 그러면서도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지 못한다고 생각될 때, 그때 깊이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실제로 주위를 돌아보면 그런 사람들이 현저하게 많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본성적인 것과 신령한 것이 많이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존 오웬 목사님도 정확하게 구분해 내는 것은 쉽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 하나는 우리가 부름을 받아서 살아간다면, 그러면 우리가 목회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목표가 없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그 사람이 병든 것 아니겠습니까. 어떠한 목표가 있을 것입니다. 제일 먼저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신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면, 정상적인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가 성경을 정상적으로 살피면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표준이 있을 것이라면 그것이 자신의 마음을 뛰게 하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 아니라 그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다면 심히 철이 안 들었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고 사역자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인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나는 구원을 얻어서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받았는데,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자녀라고 부르시는데 성경을 보니까 나같은 사람은 아닙니다. 주님이 나에게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자녀의 삶은, 하나님의 자녀의 사람됨은 훨씬 높은 기준입니다. 구원을 얻었다는 점에서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자녀인데 주님이 나같은 인간에게서 기대하시는 바가 나보다 훨씬 더 높다는 것입니다.
요즘도 저는 그러한 세월들을 반성을 하는데, 신학교를 들어갔습니다. 81년도의 일입니다. 야간 신학대학에 들어갔는데 들어가기 직전에 결혼을 했습니다. 몇 년이나 될까. 1년, 2년, 3년, 4년 늘 있었지만, 그래도 집중적으로 된 기간이 한 3-4년 정도. 기도 제목을 많이 가지고 가도 기도해도 2/3가 나 자신이 절대 하나님의 자녀답지 않다는 것 때문에 가책을 받고 가슴 아파 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추억해 보면 그때의 나의 기도생활이나 이러한 것들을 하나님이 참 기뻐하셨던 것 같습니다. 내 생애에 있어서 그때 말고도 몇 번 있었지만, 깊은 신학적인 세계에 대해서 눈 뜨지는 못했을 때이지만, 그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하심을 참 풍성히 느꼈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것은 가장 기본입니다. 그것이 사실은 우리의 사역이나 미래에,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 자식들, 우리 가족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 보다도 더 중요한 관심사여야 합니다. 내가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의 표준은 무엇이고 나는 과연 거기에 미치는가 라고 하는 것에 대한 깊은 몸부림이 있으려면 온전하게 되고자 하는 목표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만하면 되었지, 어느 놈이 나보다 나은가. 그렇게 생각하면 회개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회개와 반성, 뉘우침, 도전, 이러한 것들은 항상 목표가 있는데 그것에 도달하지 못하였을 때 그렇게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한 점에 있어서 온전해 지고자 하는 그것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사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그리스도인에 대한 주님의 기대라고 하는 것은 제일 먼저 사람됨에 대한 기도 아닙니까. 그것이 산상수훈 첫 번째, 그 팔복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to have to do'가 문제가 아니라 ‘to be'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고민을 해야 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왜 나는 가난하지 않을까. 그것이 내가 변화 받은 다음에 정말 이해 안 가는 것은 어쩌면 사람이 가난하지 않을까. 그렇게 자신의 영혼이 거의 죽은 상태에 있고 자신의 삶에 하나님의 복이 없는데 그런데 그게 나는 정말 비참하다. 이렇게 해서 어떻게 살까.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나는 희망이 없다. 이러한 가난함을 가져야지만 기도가 터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난하자. 애통하자. 온유하자. 그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하자, ‘to do’의 문제가 아니라 애통하거나, 가난하거나, 온유한 행동을 하거라는 뜻이 아니라 그러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은혜만이 그러한 사람을 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무거운 역기를 수없이 들었다가 놓은들 알통이 나올지 모르지만, 내가 그것 때문에 가난한 사람이 되겠습니까. 수없는 사람을 구제하고 불사르게 내 몸을 내어준들 내가 그들을 위해 애통하는 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밖에서 일어나는 행동이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그렇게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하게 나는 왜 이렇게 가난한 마음이 없을까. 나는 항상 그러한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어디가서도 항상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안 느꼈을지 모릅니다. 나는 사역을 아무리 못해도 신앙생활 잘 하면 용서해 준다고 하는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정직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만 잘하면 사역은 죽을 쒀도 용서 한다 이것입니다. 나는 아직 한 번도 사역을 못했기 때문에 교역자를 내 보낸적은 없습니다. 진심입니다. 진심입니다. 세 번째, 네 번째 고려사항이 되었을 수는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안 했기 때문에 나는 헤어지고 싶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역자 중에 예배 안 나오는 사람 있습니까. 기도회 안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까. 새벽기도회야 나오고 못나오고 그러지만, 무엇이 차이가 있습니까. 그것은 신앙생활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사역도 신앙생활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그것입니다. 나는 왜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할까. 그것을 고민해야 합니다. 어떠한 점에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한가, 고민하고 그 다음에 내가 하나님의 자녀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습니다. 김준성 목사 있고 항상 말했습니다. 내 눈치를 보지 마라. 내 눈치 보지 말고 하나님 눈치를 더 많이 봐라. 부자연스럽다. 그것을 가지고 고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자기가 왜 이러한 존재 밖에 되지 않을까. 그래서 자기가 자기인 것이 수치스럽게 느껴질 때가 자주 있어야 합니다. 나도 나인 것을 용납할 수 없는 때가 있을 때 자기 자신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만이 이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고민이 맨 밑바닥 처음 고민입니다.
키에르 케고르는 천재였습니다. 말년에 기자가 그 대철학자에게 당신의 생애 최고의 비전이 뭐냐 하니까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일평생 나의 숙제입니다. 그것입니다. 다 두고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열린교회 담임 목사였던 것, 교회를 해서 개척을 해서 큰 교회가 되는 것, 선교를 했더니 놀랍게 부흥이 되었던 일들 다 두고 갑니다. 그리고 아무개 자매의 남편이었던 것도 다 두고 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딱 가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한 사람으로서 사람 됨됨이 그것만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마음 아픈 것이 그러한 고민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설교가 그 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 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설교가 그 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꿈꾸는 교회가 마케팅 교회라면 그것 아니고, 어떻게 하면 성공하드라 하면서 설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은 건조합니다. 몇 번 들으면 쌈빡할지 모르지만 몇 번 듣고 나면 지겨워집니다. 영혼이 변화되지 않는데 그것이 얼마나 흥미를 끌 수 있겠습니까. 모든 설교가 거기에서 나옵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설교의 원천은 자기가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이 정해주신 표준대로 살려고 몸부림 치는 가운데 나오는 거란 말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고, 기도를 하고, 사역을 하고, 모든 것을 참고 견디는 이 모든 과정이 자기를 그렇게 주님이 제시하시는 표준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 죽어도 도달하지 못합니다. 죽어도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이 성화를 완성시켜서 데려가시고 그것도 모자라서 영화시키시는 것입니다. 도달 못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도달하려고 하는 몸부림을 가지고 그에게 보상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리고 거기에서 나올 때만 기도가 강력한 힘을 가집니다. 기도 생활에 있어서 실패와 좌절, 그러면서도 다가가리라는 몸부림, 그 속에서 승리하고 외칠 때 그 외침이 피 붇은 외침이 되는 것이고, 원고 별로 필요 없습니다. 한 참 익숙해지고 나면 그렇게 별로 필요 없습니다. 그냥 이렇게 가지고 해나가면 됩니다. 공부는 공부대로 해 나가야 하지만,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자꾸 어떠한 사람이 한편 설교 준비하는데 몇 시간 걸리는가 맨날 물어보는데 짜증나는 질문입니다. 원래 든 것이 없는 사람은 열 시간 매달려도 그 수준을 못 벗어나는 것입니다. 똑같은 질문을 스펄전이 받았을 때, 평생 준비한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프롬프트 프리칭에 아주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설교가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이 설교하러 딱 올라갔을 때 어떠한 주제에 대해서 거칠고 투박하고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피 끓고 있다고 한다는 것은 그렇게 살아온 것입니다. 그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절대로 학문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죽어도 줄 수 없습니다. 학문은 요리의 기술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피 끓는 몸부림속에서 온전하게 되려고 애쓸 때, 애쓰는 것을 통해서 설교할 수 있는 질료가 주어질 때 덜컥 하고 주어지는 것입니다. 재료가 없는데 요리 기술이 아무리 좋으면 무엇합니까. 밥과 고추장과 무 몇 개 가져다놓고 제육볶음 만들라고 하는데 어떻게 만듭니까. 그래서 가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입니다. 그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직하게 목회자로서 손을 얹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최근에 기도하면서 사역이 안 되고, 이러한 것 말고, 담임 목사한테 싫은 소리 듣는 이러한 것 말고, 내가 나여서 어떻게 하나. 내가 나 인 것이 너무 죄송하다. 하나님 앞에. 그렇게 해서 눈물 흘린 적이 있습니까. 그것입니다. 그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만 있으면 그 사람이 아무리 못나고 사역이 진전이 없고 해도 너무 소중한 사람입니다. 언젠가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언젠가 고쳐서 쓰십니다. 그 표준이 있으니까. 이것이 바탕이 되지 않는 사역의 비전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영광을 위한 야망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 사람에게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니까 큰 교회만 하고 싶어 하고, 사람 많이 모으고 싶어 하고, 그게 무슨 큰 영광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정직하게 돌아가서, 현실을 보지 말고 성경으로 돌아가면 영국의 청교도들은 목사가 누구였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구약에서 피 뿌리고 죽어가는 선지자들과 신약에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다 죽어간 사도들의 후예라고 했는데 사도나 선지자들 중에 누가 다수의 사람에게 말씀을 전한다는 것 때문에 스스로를 영광스럽게 했던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대하면서 위대한 선지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그러한 것과는 상관없이 예레미야 선지자와 같은 사람은 수없이 말은 쏟아 놓았지만, 대부분은 그 시대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돌로 죽이려 했습니다. 그 때 우리들은 그 선지자들 중에 위대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그러한 것 가지고 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수준 높은 신학속에서 쏟아 놓고 자기가 쏟아놓은 말씀과 살아져 갔는가 그것을 보면서 우리는 선지자의 수준을 재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들의 후예라고 합니다. 똑같이 그러한 것에 목표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내 인생에 불 사를까. 불 사른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성공탑을 쌓아 올린다는 것이 아닙니다. 불 사르고 소멸하고 죽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불탄다는 것이 결국 무엇입니까. 진리를 그렇게 외치다가 작렬하게 산화하는 것 같은 그러한 개념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짧은 시간에 기껏해봐야 몇 천편 밖에 설교하고 죽는 이 짧은 인생 동안에 내가 무엇을 외치다가 죽을 것인가. 그리고 피 끓는 외침으로 내가 그것을 내 안에 있는 것을 다 쏟아 놓을 때까지는 나는 죽을 수가 없다. 찔러도 안 나옵니다. 왜 그렇습니까. 쌀이 가마에 가득 들었으면 포크로 확 찌르면 쌀이 확 쏟아져 나옵니다. 가마가 쿨렁쿨렁하면 찍어도 안 나옵니다. 이러한 이야기 하면 다른 사람들은 동의 안 할지 모르지만, 나는 중대한 이의를 제기합니다. 왜 여러분들 교회를 개척하고나서 설교를 담임 목사가 주일날 낮 예배 딱 하나하고 나머지 전부다 하청주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라고 말입니다. 말로는 부교역자들에게 설교할 기회를 준다고 하지만, 사실은 할 것이 없어서 그러는 것 아닙니까. 피가 끓는데. 로이드 목사님 말씀처럼 주일날 설교하고 나서 내려오시면서 ‘어떻게 하나, 일주일을 또 기다려야 하는데’ 말씀이 복받쳐 오는데 일주일을 기다려야 하니까. 그러한 피 끓는 외침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없는 것을 고민해야 하는데 그 고민이 바로 그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람됨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설교할 사람들은 목사가 아닙니다. 목사라고 하더라도 목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설교는 신자가 되라는 설교입니다. 그것은 자신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지금도 여러분들을 이렇게 보면서 항상 물론 사역과 자신의 신앙생활이 밀접한 연관관계가 있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항상 마음 아픈 것은 뭐냐 하면 그의 영혼이 아주 정상이 아닙니다. 굉장히 곤궁하고 그리고 어려운 상태입니다. 사역자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은, 다른 사람은 안타까워하는데 자신은 안타까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은 안타까워합니다. 그래서 눈물로 기도해 줍니다.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뭐가 없기 때문입니까. 온전해 지고자 하는 목표가 없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정주영 씨가 얼마나 재미있는 사람입니까. 자서전을 보니까 정부에다가 조선소를 짓겠다고 허가를 내달라고 하니까 웃으면서 아니 도대체 어디다가 무슨 기술과 무슨 돈으로 조선소를 짓는다는 말입니까. 계획서를 내 놓으니까 말도 되지 않는 소리 하지 말라고 그랬답니다. 자동차도 못 만드는 나라에서 무슨 조선소를 만드냐고 그랬습니다. 그래도 자기는 할 수 있으니까 허가만 내달라고 하니까 황당한 제안을 하였습니다. 배를 두 척 이상 우선 주문부터 받아가지고 오면 그것을 보고 조선소 허가를 내 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그리스로 달려가서 그리스에 있는 사람들을 설득해서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 큰 배 두 척을 아직 조선소도 안 만든 회사에 발주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싼 값에, 그래서 가지고 오니까 정부가 하도 기가 막히니까 도장을 찍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생긴 것이 현대 조선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언제 벌어졌는가 하면 배를 다 만들었는데 배라고 해봤자 벌크선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쨌든 우리나라의 힘으로 만들었으니까, 넘겨주는데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옥신각신하드니 주문한 배 크기랑 다른 것입니다. 왜 그랬냐 하니까 6m가 크게 나온 것입니다. 왜 그랬는가 하니까 연필심 굵기를 계산을 안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처음이니까 그랬던 것입니다. 연필심 굵기를 계산을 안 해서 배가 짝짝이가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 가져간다고 씨름을 하다가 결국은 자세한 내용은 안 써 있는데 내가 보니까 많이 깎아서 아마 양도를 했을 것입니다. 줄일 수 없으니까. 그것을 보십시오. 배 하나를 만드는데 연필 굵기를 고려를 안 했더니 6m가 차이 나는 배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목표를 세워서 이대로 하려고 막 몸부림을 치고 가책을 느껴도 이게 그대로 안 되는데, 절대로 그대로 안 됩니다. 여러분 중에 송구영신 예배 때 결심을 하고 마지막에 결심한 것 보다 훨씬 잘 했네, 그러한 해가 있으면 한번 말해 보십시오. 나는 한 번도 없습니다. 몇 번이나 이를 악물고 내가 이것은 해야지, 이것은 해야지, 이를 악물어봐야 입술만 아프지, 안 됩니다. 그런 것 많다 이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래도 나 자신이 얼마나 의지가 박약한 사람인가 하는 것을 최근에도 절실하게 느끼고 삽니다. 최선을 다 해도 잘 안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한 표준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안 가더라도 네비게이션은 가는 길을 딱 정확하게 가르쳐 줍니다. 안 갈지라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다른 길로 갔을 때, 아 잘못 갔구나 하면서 돌아올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것이라도 살아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사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대로 누군들 시켜보면 못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분명하게 내 사역에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그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 죄송스러워하고 몸부림치고, 모든 것을 나의 부족으로 해석하고 심지어 사역을 하면서 하나님, 이제 나의 사역에서 축복을 거두셨습니까. 그러면서 몸부림치는 그것은 온전하고자 하는 목표, 그것이 없으면 안 된다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도 뭐라고 했습니까. 푯대가 있다고 했습니다. 내게는 푯대가 있다. 위에서 부르신 부르심을 향하여 그 푯대를 바라보고 달려가리라. 한일 즉 뒤에 있는 일들은 잊어 버린다. 나는 그 푯대를 향하여 간다고 합니다. 거기에서 좌절과 용기, 도전, 희망,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 속에서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하여 집중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열열하게 구하는 것입니다. 보면 사람이 널널하고 좋아서 아등바등 하지 않고 사는 사람 있지 않습니까. 대부분 열열한 기도의 영이 없습니다. 사람이 좋을 뿐입니다. 그러한 몸부림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모든 사역에 있어서 온전함의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위해서 몸부림치는 수준은 자기가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는 그 수준을 능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우리 구역장 수련회에서 첫 번째 간증한 그 자매의 간증을 들으면서 참 많은 은혜를 받았는데 그 생각해 보십시오. 가서 지체들을 만나서 상담하고 같이 점심을 먹고 돌아와서 자기는 몸부림 치면서 막 통곡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원래 그런 사람이었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 영혼이 그렇게 살면 안 되는데 하는 그것을 보면서 ‘저 영혼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변화시켜 주시겠습니까? 아니면 나를 데려가시겠습니까?’ 그렇게 몸부림치면서 나오는 그것은 해본 거라는 것입니다. 해본 것. 사역을 잘 해서 그래도 이 교회에서 인정을 받고 부목사도 되고, 그래도 번듯한 교회라도 개척을 하도록 지원을 받았으면 좋겠다, 이러한 목표를 가지고는 이러한 마음이 안 나온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안 나옵니다. 그렇게 한 영혼이 너무 불쌍한 것을 알고 가슴아파하는 그것은 자기 영혼이 그렇게 불쌍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 남을 위해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영혼이나 너 영혼이나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것과 나 자신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과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그것이 일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전해지려고 몸부림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역에서 있어서나 모든 것에 있어서 항상 이러한 마음을 갖으면서, 어떻게 그렇게까지 해, 하지 말아야 하는데,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어. 그것은 안 됩니다.
제 서제에 책이 들어오는데 책이 비쌉니다. 일년에 교회에서 예산을 세웠어도 몇 권 못 삽니다. 너무너무 비쌉니다. 원서 한권에 10만원, 20만원, 30만원, 40만원. 어떠한 것은 한권에 60만원까지 들어옵니다. 어느날 새 책이 들어왔다고 들어왔는데 보니까 본 책입니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책이 중복이 되어서 툭툭툭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원한테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가. 이상하다. 이상하다. 이럴 수가 없다. 그래서 나중에 너무 화가 났습니다. 전체적으로 조사를 하라고 하고 야단을 쳤습니다. 조사를 해보니까 400만원 어치가 중복이 되어서 들어온 것입니다. 왜 그랬는가 했더니 그것을 확인하려면 여러 자료를 다 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네 돈이라면 이렇게 하겠느냐고 했습니다. 결국 그 책 못 쓰고 여러분 바자회 할 때 팔아 버린 것입니다. 얼마나 마음이 상했는지 모릅니다. 결국은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우리들이 온전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어서 그대로 하려고 몸부림칠 때에 하나님이 자기를 뭘 도와주셔야 되는지도 알고, 자기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도 알게되고, 자기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어떠한 도움을 받아야지만 함께 이 사역을 할 수 있는지도 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우선 온전한 사역이 어디까지인가 하는 것을 헤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학교 다닐 때 제일 염오하던 사람이 누구였는가 하면 교회가서 학교 핑계대고, 학교와서는 교회 핑계대는 사람이었습니다. 교수님이 레포트 왜 안 냅니까 하는데 교수님, 지난주에 교회에서 부흥회를 했습니다. 부흥회를 자기만 합니까. 부흥회는 부흥회가 자기는 자기인데. 어느 교수 한명이 혼을 내 놨습니다. 당장 교회 그만 두라고. 얼마나 고소했는지 모릅니다. 한번도 그런 적이 없습니다. 들어가면서 마음에 원칙을 세웠습니다. 교회에서 말도 안 되는 요구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절대 학교 핑계대지 않는다. 그리고 학교에 와서는 절대로 교회 핑계대지 않는다. 그 사이에서 나는 끼어서 부스러지더라도 나는 핑계대지 않는다. 절대 핑계대지 않는다. 교회가서는 절대 학교 이야기 하지 않는다. 학교가서는 절대 교회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렇게 몸부림칩니다. 다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것이 굳어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정신이 온전해 집니다. 한 사람이 설교할 때에 피를 토하듯이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라고 딱 한 마디를 외칠 수 있기 위해서는 피 흘리며 살아온 장구한 세월의 몸부림이 있어야지만 가능한데 이것이 없이 이야기 하면 주일학교 학생도 압니다. 뻥인 것을 주일학교 학생도 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자기 양심이 너무나도 잘 압니다. 어떻게 그렇게 설교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바이올리스트가 그랬습니다. 하루를 연습을 안 하면 바이올린이 알고, 이틀을 연습을 안 하면 내가 알고, 3일을 연습을 안 하면 청중이 안다. 그렇게 그러한 온전하고자 하는 몸부림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정신이 너무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러한 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데이비드 브래이너드의 일기를 읽으면서 우리들이 도전을 받는 부분들이 그러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삶의 모든 방면에서 도저히 그렇게 될 수 없는 것이 인간인데도 어쩌면 그렇게 몸부림칠까. 어떠한 사람은 그 책을 보면서 율법주의자라고 하는데, 율법주의자가 아니라 은혜주의자만 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만 그렇게 몸부림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의 고백록에서 인간의 오감을 향해 들어오는 인간의 욕망에 관해서 괴로워하면서 그러한 이야기를 합니다. 원래 음식이란 몸을 위하여 있고 몸은 영혼을 위하여 있는 것인데 이것은 잠자리와 같지 않아서 한번 결단을 하고 끊는다고 해서 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몸을 보양하기 위해서 음식을 먹는다 치더라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갑자기 내 목구멍에 이 입맛은 음식의 도락에 취하게 되는 것이니 나의 부패함이 어디까지 있나이까. 나는 신학적으로 그 말에 동의 안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앞에 그렇게 몸부림 친다라고 하는 그것, 눈코귀입 다 그것을 가지고 심지어는 냄새까지도 그렇게 몸부림을 치면서 온전해지고자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성경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성경 그 자체가 우리를 그렇게 온전한 사람 만들려고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막 살아서 다가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분발을 촉구하는 바는 뭐냐 하면 여러분들이 담임 목사로서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형제로서 여러분들의 사역에 하나님의 큰 복이 있고 여러분들 통해 잃어버린 영혼이 많이 돌아온다는 것 너무너무 반갑고 기쁜 소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역은 우리 자신 속에서 우러나와서 흘러나오는 사역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이 은혜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깊이 온전하고자 하는 몸부림이 있어야 합니다. 그 때, 여러분들이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이 그러한 사람들을 꼭 사용하시고 그 사역의 크기와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이 그러한 사람들을 받으십니다. 그래서 아주 작은 것에 있어서도 온전해 지고자 몸부림치고 다른 사람이 다른 사람을 보면서, 그러니까 온전해지고자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결함과 좋은 점이 있을 때 결함을 보면서 자신의 우월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 많은 결함중에서 한 가지 탁월하게 뛰어난 그것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깊이 몸부림치고 겸손해지고 온전해지고자 애쓰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 여러분들이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야지만 여러분들의 사역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와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