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받는 섬김자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 1:8-9).
짧은 성경에 어떻게 그 사연을 다 기록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시아에 온 날부터 고생을 많이 했다는 이야기는 사도행전 20장에도 등장을 합니다.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너희가운데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는바니”라고 그랬습니다. 은밀한 고생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고난과 시련을 많이 겪으면서 사역을 하여야 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편지를 쓸 때에 고린도교회는 문제가 많은 교회였고, 첫째 편지로 많은 부분들이 교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번째 편지는 유실되고 세 번째 편지에서 사도는 이 낙심에 빠졌을 지도 모르는 고린도교회 사람들을 위로하고 싶은 어버이의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말합니다.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고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않는다.” 즉 ‘우리가 아시아에서 어떤 고난을 당했는지 기억해다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도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너희는 편안히 먹고 우리는 고생했으니 이제는 우리를 좀 섬겨다오 그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왜 물질적으로 환경적으로 여유 있고 넉넉한 고린도교회에다가 자신들이 고생한 것을 알아달라고 편지 서두에다가 이야기하는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고생을 해서 괴롭힘만을 당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사역을 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며 헤쳐 나갈지 아무 길도 보이지 않는, 지금 고생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여기를 어떻게 헤쳐 나가서 이제는 결국은 살아갈 길을 찾을 수 있을지, 모든 소망이 완전히 끊어진 가운데 있었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당신을 섬기기 위해서 복음사역의 길을 걸어가는 사도바울의 일행을 이토록 철저하게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마음에 사형선고까지 받은 줄로 알았다고 할 정도까지 그렇게 깊이 낙심하게 만들었을까?”하는 의문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이 의문에 대한 답과 왜 사도가 이 평안한 교회에 자기들이 과거에 아시아에서 고생한 이야기를 절실하게 적으며, 우리의 고생한 것을 기억해달라고 말하는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이 꼭 같습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일까요? 왜 이 평안하고 여유 있는 항구도시인 고린도교회에 자기들이 아시아에 들어와서 그렇게 고생하고 마지막에는 살 소망까지 다 끊어지고 마지막에는 마음에까지 사형선고를 받은 것처럼 여겨지도록 그렇게 되게끔 하나님이 내버려두셨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바로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이런 내용을 쓰는 것도, 하나님이 바울의 일행이 선한 목적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데 이렇게 커다란 고난을 겪으며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마음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것처럼 느끼게 만드시는 이유는, 일체 다른 것들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 한 분을 의지하라고 그것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깨끗한 사람만 가까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 창녀와 세리와 더러운 죄인들도 가까이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온전히 의지하는 절대의존의 마음을 통해서 얻는 의는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살아서 얻는 의와 비교할 수 없는 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 의존의 마음은 우리를 위해 자기를 버리신 그리스도를 믿는 의로 귀착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마음은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당신을 의지하지 않고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게끔, 그렇게 형통한 길로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사람들에게 그런 고난도 주시는 것이에요. 아마 신약성경에서 사도바울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사랑받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순수한 그 삶의 동기, 그리고 무제한의 헌신, 땅의 것을 초월하여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영원한 지복에 대한 갈망, 이런 것들을 누가 감히 사도바울을 능가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순수하게 하나님만을 위해 살고, 예수그리스도만을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평탄한 길을 걸어가도록 놔두시지를 않으셨습니다.
지금은 양식진주를 아주 많이 합니다. 그래서 중국에 소주 같은데 가보면 진주가 얼마나 흔한지 진주를 후춧가루 빻는 기계에 집어넣어서 그냥 갈아버립니다. 하얀 가루가 한 푸대씩 나온다. 한 봉지씩 사다가 여자들이 세수할 때 비누에다 섞어서 마대질을 합니다. 그래서 그 동네 여자들은 정말 예쁩디다. 정말 예뻐요. 열린교회의 성도들 정도는 됩니다. 정말 예뻐요. 그런데 그냥 전시장에 가면 몇 개씩 집어주어요. 그럴 정도로 흔합니다. 옛날에는 아주 진주가 귀했지요. 지금도 자연산은 큰 것 하나에 2백만원 3백만원 합니다. 진주가 그런데 어떻게 생기냐면, 조개가 입을 벌리고 바닷물을 먹고 뱉고 합니다. 사람이 두들기면 입을 꽉 다물고 있어요. 그렇게 하다가 사금파리같은 것이 들어옵니다. 조갯살은 아주 여리잖아요! 상처가 납니다. 그때부터 조개가 병을 앓기 시작합니다. 우리 같으면 암 같은 것이지요. 살을 찢으면서 고통스럽게 하니 거기에서 오는 어떤 해로운 작용 때문에 자기 몸을 헤치지 않기 위해서, 우리로 말하자면 호르몬제를 배출해가지고 그것을 계속 감싸주는 겁니다. 그러니 뭘 좀 먹으면 힘이 나기만 하면 그것을 쏟아내서 그것을 감싸니 이게 조개가 진주를 품은 조개는 까보면 먹을 것이 없어요. 살이 바짝 말라 있어요. 그러니 진주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자기의 온 진액을 쏟아 부으면서 그러면서 결국은 자신을 보호합니다. 어느 순간에 사람이 우연히 그것을 건져서 껍질을 까면 그 값지고 영롱한 진주가 조개껍질 속에 들어있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조개가 있게 되면 어떤 조개는 필리핀에 가면 조개를 삶아주는데, 도저히 먹을 수가 없습니다. 너무 끔찍합니다. 얼마나 큰지 바가지만 합니다. 그것을 꺼내는데, 조개 알갱이가 작은 통닭만 합니다. 못 먹겠더라고요. 조개가 쌀을 쪄서 튼튼한 조개가 되었다고 합시다. 그래도 마지막 껍데기 까면 한 조개는 퉁실하게 살이 많이 배어있고, 그래도 그저 한 번 물에 삶아서 사람들이 소금 찍어 먹으며 그것이 끝입니다. 바짝 말라있어도 껍데기를 열면 거기에서 태양빛에 빛나는 햇빛에 빛나는 찬란한 진주가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 조개의 가치는 그 둘을 서로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만나고 특별히 그런 사람들 중에서 주님을 섬기기로 부름을 받은 그 순간부터 우리는 이미 우리의 몸에 상처를 입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품은 사람이 되었어요. 그리스도가 우리를 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거꾸로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생명의 유익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분을 위해서 우리의 지성과 의지와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정신의 작용들과 육체의 힘을 사용해서 그분을 섬기며 살아가는 거에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진액을 짜, 우리 안의 그리스도를 더 온전한 형상을 이루는 방법이 바로 고난이에요. 우리를 의지할 수 없게 만들어요. 그래서 사람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시고, 이세상의 자원을 더더욱 불결하게 여기셔서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만을 온전히 의뢰하게 하시기 위해서 때로는 우리를 사랑하게 하심에도 불구하고 살 소망을 끊어지게 하시고 우리를 긍휼이 여기심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자녀인 우리의 마음에 사형선고 받은 줄 알기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내버려두시는 것이에요. 그러나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포기하거나 버리시는 것이 증거가 아니라, 당신이 우리 안에 더 충만히 계시는 방법으로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고난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어떤 마음인지 매 순간 확인해요.
(찬양) 시시때때로 주만 봅니다.
그래서 그런 살 소망이 끊어지고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을 때에 마음속에서 분노하는 마음과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시는 손길에 반항하는 마음과 그리고 자신을 파괴해버리고 싶은 그러한 솟구치는 그런 파괴의 감정이 일어날 때에는, 우리가 그만큼 주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을 깨닫게 하시기 우해서 하나님은 늘 같이 계신 것 같은 하나님이 멀리 계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에요.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 안에서 살면 이렇게 살 소망이 끊어질 때에, 이번에는 예수 안에 살 소망을 갖고 나와 더불어 살 희망을 버리는 대신 예수와 함께 살 꿈을 갖게 하시는 거에요. 그리고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에도,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거하고 싶은 소망 속에 우리의 마음을 불타게 하시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은 시시때때로 우리를 이끄셔서 아버지 앞에 세우시고 우리를 당신께 데려가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요한 칼빈 선생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깊이 인정하고 좋은 일이 우리에게 좋은 일이 될 수도 있지만, 나쁜 일이 될 수도 있고, 나쁜 일이 우리에게 나쁜 일일 수 있지만, 좋은 일이 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어떠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사느냐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생사 간에 주님 한 분 의지하면서 우리의 섬김과 삶 속에서 만나는 수많은 난관들에 매 순간 의지하고, 아버지 앞에 살아가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