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 그 삶의 소명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가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함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딤전 3:16)
녹취자: 손지애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잠시 짤막한 설교를 한 편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면 펑펑 울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좋겠지만, 한 번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가, 그리고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행복하지 않고 불행해 보이는가, 한걸음 더 나아가서 오늘날 많은 비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인을 비난하는 것처럼 표리부동한 삶이 발생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을 한 번 여러분들에게 마음껏 설명해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설명하는 가운데 성령의 역사가 있으면 여러분들이 회심하게 될 것이고 또 깊이 회개하고 참다운 신앙을 갖기를 열망할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사도바울이 디모데 교회의 문제들을 다루면서 어떤 일꾼들을 세워야 할지를 3장에서 쭉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도 설명을 하고 통치자들과 다스림을 받는 일반 백성들과의 관계도 설명을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을 전부 다 다 아울러서 이야기하다가 3장 마지막에 결론을 내리면서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라는 선언으로 말머리를 맺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종종 사용하는 이 감탄사격인 크도다 경견의 비밀이여, 혹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의 부요함이여 이런 감탄사들을 토해 놓을 때에는, 자기 마음속에 있는 아주 많은 이야기들을 다는 못 하지만, 그것을 집약하여 토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남녀의 문제 그 앞에서는 배교한 사람들의 문제, 그리고 그 뒤에서는 교회의 일꾼을 세우는 문제들을 다 거론한 후에 깊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결국, 그렇게 잘못된 일꾼들이 세워지는 것, 가정에 있어서 아내와 남편, 가정의 질서들이 훼손되는 것, 한때는 하나님을 믿은 사람들이었지만 배교하고, 그리고 미끄러지는 이 모든 일들이 이 경건의 비밀과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경건의 비밀이라고 하는 것은 무어인가. 이 문제를 짚고 넘어가기 전에 제일 먼저 우리들이 분명히 해야 될 사실이 있습니다. 도대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가. 이것을 먼저 자리매김 할 때,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하는 자리매김을 분명하게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이 다음의 논의들을 이끌어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그리스도인을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오늘 아마 우리들은 그리스도인하면 떠오르는 그림이,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교회 다니는 사람, 혹은 믿는 집안에 태어나서 그저 다른 종교는 모르고 기독교에 자의 반 타의 반 묶여서, 가끔 교회에 빠지긴 하지만, 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고 결혼식을 교회에서 하고 할머니나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그 장례식을 교회 식으로 치르는 사람, 이런 것들이 모두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애매한 그림 속에 들어와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우리들 사이에 통용되는 견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이 사람들이 기독교를 욕할 때에 욕을 먹게 하는 사람들 중에 상당수는 지금 내리려고 하는 정의를 놓고 보면, 사실은 교회에 다니지만 그리스도인은 아닌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 그리스도인의 정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제일 먼저, 그 영혼이 하나님 앞에 거듭난 사람입니다. 즉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죽어 있는 영혼을, 하나님이 지극히 큰 능력으로, 마치 사람이 다시 출생하듯이 죽은 영혼을 다시 살아나게 하신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거듭났을 뿐 아니라 거듭난 그것이 자기의 의식 속에서 표출된 사람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회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영혼이 죽은 상태에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 이것은 하나님 홀로 행하는 것이지만, 거듭난 영혼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믿음을 가져서 거듭난 영혼이 자기의 의식 세계 속에서 받아들여져서 자기의 의식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살아가는 이 믿음 생활은 회심과 함께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회개하라’, ‘믿음을 가지라’고 구원의 조건으로서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된 사람이 교회에 속해서 영적으로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인바 되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서 그 신앙을 고백한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다 요약해 본다면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의 문제는 그리스도인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리스도인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것, 그리고 살아난 그 영혼이 의식 속에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참 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믿음을 가진 사람 회심한 사람 그게 내면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영적으로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보이는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모든 사람 앞에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성경이 참된 그리스도인이 누구냐 라고 하는 것은 이 참된 중생과 회심,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변화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어떤 사람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고, 기독교적인 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종교의 의무를 행하는데, 만약 그가 거듭난 사람이 아니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진실하게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적이 없는 사람이면 어떡하느냐,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교회에 소속돼 있으나, 영적인 교회에는 속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 번째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고 믿음을 갖지 않으면 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 할 수 없는가라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그리스도인이려면,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에게는 없는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관계를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우리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 관계가 없을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일정한 때가 되면 죽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생명을 거두시기 때문에 죽고, 부여하시기 때문에 태어나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말하는 관계라고 하는 것은 영적인 친교의 관계, 생명적인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고 난 다음부터는 모든 사람들이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른다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우리가 참다운 인간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정신적으로 영적인 것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는 것, 이것을 생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생명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끊어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말입니다. 중생과 회심은 그렇게 죽은 인간을 다시 살아나게 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연결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진리 속에서 아주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사람입니다. 어떤 변화가 일어났냐 하면, 우선 진리의 맛을 압니다.
그래서 참된 진리, 하나님이 누구이고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해 주는 참된 진리를 맛본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끊임없이 깨닫고 공급받음으로써 자기의 영혼의 양식을 삼을 수 있는 새로운 생명적인 관계가 수립된 사람입니다. 또, 이렇게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을 향하여 사랑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시는 것을 느끼고 자신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이 세상이 하나님의 의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받게 되면, 이제 그가 바라보는 이 세상에 대한 생각은 현저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고 바라보는 세상과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 분이 미 모든 세상을 만드셨다고 상객하며 바라보는 세상은 아주 현저하게 다른 세상입니다. 그런 신앙을 굳게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 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놀라운 비밀을 경건의 비밀로 축약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런 식으로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원래 이 ‘경건’이라고 하는 것은 희랍어로 ‘좋은 두려움’입니다. 풀이해서 설명하자면, 경건은 두려움과 사랑의 복합된 감정입니다. 그게 경건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제일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고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그 때 제일 먼저 우리의 마음속에 찾아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우리가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지극히 크신 능력의 하나님이시고 거룩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그 깨달음은 즉시 우리에 대한 견해를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어떻게 바꿀까요?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한마디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면 우리와는 비교될 수 없는 지극히 뛰어난 초월적인 존재이실 것입니다. 우리들이 옛날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조각이나 유적지를 보면서 우리는 그 사람들의 생각과 그 옛날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세계관과 혹은 정신과 힘의 크기를 상정하게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다고 보면, 하나님과 나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현저한 격차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은 온 땅과 만물 위에 지극히 높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나는 아주 티끌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라고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지 않습니까. 아직도 백여 명의 사람들을 못 찾았습니다. 어디 갔을까요? 없어진 것입니다. 어떻게 없어졌을까요? 사람이 있는데, 단 5초 만에 5층이 넘는 건물이 주저앉으면서 콘크리트 사이에서 사람들이 깔려버린 것입니다. 뼈와 살과 모든 것이 한꺼번에 으스러져서 마치 파리를 발로 밟은 것처럼 된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모두 말라서 가루가 돼서 없어진 것입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유한한 인간과는 비교되지 않는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인간은 자기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존재이고 그리고 하나님 처분에 달려 있는 아주 티끌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의 지극히 크신 위엄 앞에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자기 존재에 부여하던 가치를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동반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큰 두려움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간이 깨닫는 그 순간에 인간은 그 하나님 앞에서 번쩍 하고 들어오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 앞에서 단지 하나님의 지극히 크고 높음만을 경험하는 게 아니라, 그의 사랑, 자비, 능력, 정의 이 모든 하나님의 성품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성품의 빛 앞에 우리를 비추어 볼 때, 우리가 혼자 있을 때는 몰랐던 자신에 대한 인식이 생겨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기가 얼마나 불완전한 죄인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혹, 스승 가운데 신망이 두텁고 아주 훌륭한 인격을 가지신 선생님 앞에만 서도, 마치 자기 속을 선생님이 다 들여다보시는 것 같은 두려운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을 무한대로 확장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이 바로 그렇게 도덕적으로 완전하신 분으로서 자기 자신이 티끌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그 때에 자기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불결하고 매우 더러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러면서 처음으로 내가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면서 나를 신뢰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할 가치가 없고 신뢰할 만한 인간이 안 된다는 사실을, 내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빛 앞에서 깨닫게 되는 거십니다. 그게 큰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경건은 그것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예수 믿기 전, 여러분보다 어린 청년이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스무 살, 그 때였습니다. 저는 무지하게 방황했습니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 내가 인간인 것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오죽했으면 길거리에 풀 돌멩이를 보면서 부러워했습니다. 생각이 없는 이 돌멩이는 얼마나 좋을까. 내가 이 풀이라면 아무 걱정이 없을 텐데, 하고 말입니다. 바로 그러한 심리의 상태가, 자기가 이 우주 속에서 정말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나 중심이 무엇인지를 찾지 못했을 때에 느끼는, 인간의 방황하는 감정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우리가 듣게 되면, 그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보면서 우리는 무얼 깨닫게 되느냐 하면, 이렇게 무한히 높으신 하나님, 지극히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가 지은 죄가 너무 크고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수 없는 더럽고 죄악된 존재이기 때문에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지은 그 모든 죄 때문에 대신 하나님께 형별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에 대한 진정한 회개를 가져오는 원인입니다. 그러면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깊이 절망하게 되었을 때, 이때는 기쁜 것이 아니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경험입니다. 이것이 바로 경건의 한 요소인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 하나님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처참하게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을 보면서 저 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저 그 끔찍한 형벌이 나의 죄악과 허물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발견하게 될 때에 거기에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진노와 함께 나의 죄의 대가를 나에게 직접 묻지 않으시고 그리스도 예수에게 대신 물으신 것이 바로 나를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하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때문에 대신 죽으실지라도 우리를 용서하고 구원받게 하시기 위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두 개의 상반 된 감정, 한 편으로는 지극히 높고 위대하시고 지극히 완전하시기 때문에 그 앞에서 나는 티끌 같은 존재이고 아주 더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나는 정말 더러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커다란 두려움을 가져다주고, 바로 자기와 같은 인간이, 훅 하고 하나님이 한 번 부시면 재가 되어 흩어질 수밖에 없는 아주 초라하고 지극히 더러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내가 이 온 우주의 중심이고 이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동시에 바로 그런 인간인 나를 살리시기 위해서 당신이 지극히 사랑하시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다는 사실을 보면서, 왜 그런지 두려우면서도 도망칠 수 없는 사랑의 강한 이끌림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을 체험하면서 하나님을 두려워서 공포 때문에 도망치기에는 이끌리는 놀라운 사랑이 있고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함부로 대할 수 없게 하는 무한한 거리감과 그 도덕적인 완전성에서 오는 깊은 두려움이 함께 어우러진 감정, 이게 바로 경건입니다. 그래서 그 감정이 중심이 되어 감정만이 아니라 그 지식과 감정이 중심이 되어 우리를 바로 그러한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사랑 속에서 살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경건의 본질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그는,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이 얼마나 티끌 같은 존재인지를 깨닫고, 그리고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자기와 같은 죄인을 사랑하시기 위해 대신 십자가에 자기의 아들을 못 박으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동시에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경건은 한 번 우리의 마음에 심기어지면 그 경건의 능력이 증대하기도 하고 쇠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 번 중생과 함께 호심과 더불어 심겨진 그 경건은 그가 아무리 방종한 삶을 살아도 그의 마음속에서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을 요약을 하자면, 경건의 비밀을 간직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고 회심한 사람이 아니면 이 경건이 그의 중심에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에도 분명, 아직 예수 믿는 모양은 가졌지만, 예수를 믿으며 살아야 할 필연성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걸 아주 간단하게 얘기해서 비 회심자라고 말합니다. 모든 질병에는 징후가 뒤따르게 되듯이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지 자신이 회심하지 않았다는 증상을 보입니다. 다음에 말씀드리는 증상을 자신에게 비추어 보면서 내가 정말 회심한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니면 비 회심자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선 첫째는, 비 회심자는 모든 가치에 판단이 자기중심적입니다. 원래 이 죄라고 하는 것은 이런저런 나쁜 일을 하는 것이 죄가 아닙니다. 그것은 죄가 나타난 증상입니다. 예를 들자면, 감기에 걸리면 으슬으슬 춥고 콧물이 나고 그리고 덜덜 떨립니다. 이렇게 몸을 떨고 있다고 해서 감기가 이 안으로 들어오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안에 이미 어떤 질병이 있기 때문에 증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저런 죄를 짓는 것은 악을 행하는 것은 증상이라면, 이 증상은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그런데 콧물이 나오건 열이 나건 덜덜 떨리건 뼈마디가 쑤시건, 모두 이것은 감기 바이러스가 일으키는 징후입니다. 그 각 바이러스에 해당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게 바로 죄입니다. 그 죄가 무엇이냐 하면 자기를 하나님의 자리에 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이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자기의 행복이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고 나머지를 그 밑에 전부 다 굴복시키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이것이 회심하지 않은 표입니다. 그러니까 만약 여러분들이 인생사, 혹은 자기의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생각하고 현재를 판단하고 미래를 계획하거나 소망을 품는 모든 일에 있어서 여러분들이 여전히 중심이 되고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되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비 회심자입니다. 여러분에겐 예수님의 생명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죄를 죽이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여러분들은 결코 죄를 죽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여러분과 함께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과 원수 맺은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을 지겹게 미워하고 죽이려는 적의를 품은 사람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친절을 떨고 여러분들에게 아주 자비로운 것처럼 대한다면 두렵거나 혹은 더 가증스럽게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하나님을 향해 근본적으로 돌이키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교회 다니고 예수를 믿는 사람처럼 살아가는 그것 때문에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모순을 느끼고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여러분 혹시, 학교 다닐 때 선생님들 강의가 하도 후져서 국어 시간에 수학 공부 해 본 적 있지 않습니까. 사회 시간에 과학 숙제 하고 그래 본 적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정상적으로 공부가 됩니까. 머리에 막 버그가 나지 않습니까. 이쪽에서는 계속 국어 얘기가 들려오는데 여기서 수학을 푸는 겁니다. 선생님한테 걸릴지도 모른다는 죄책감도 있고, 선생님의 강의를 무시하고 있다는 그런 양심의 가책도 있습니다. 그리고 귀에서는 국어가 들려오는데 머릿속으로 수학을 생각해야 합니다. 저도 고등학교 다닐 때 몇 시간 그렇게 해 봤는데 그게 인성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렇게 공부한 것도 머리에 별로 남지 않고 이것도 별로 남지 않고 둘 다 신통치 않습니다. 그래서 신학교 들어가면서부터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교수님의 강의가 아무리 보잘 것 없어도 나는 모든 내용을 필기하고 착실히 수업에 집중한다. 그 일이 힘들면 수양의 기회로 삼는다. 그래서 지금도 그 노트를 펴 보면 가관입니다. 개소리 새소리 뭐 다 들어 있습니다. 노트할 가치도 없는 이야기가 말입니다. 그렇게 버그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한 인간으로서도 정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정말 기독교가 참으로 믿을만한 종교인지 확실하게 시험을 하고, 믿든지 안 믿든지 결정을 하는 것이 좋지 그렇게 애매모호한 태도로 교회를 다니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도 절대로 도움이 안 되고 교회에도 도움이 안 됩니다. 왜일까요. 예수 믿는 사람인데 그렇게 살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깊이 변화 받지 않으면, 그는 결코 신앙이 그의 인생에 행복에 도움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들이 경건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경건한 사람들은 비 회심자들의 그 특징인 자기중심적인 판단의 기준에서 떠나서 하나님 중심으로 옮겨진 사람입니다.
두 번째 비 회심자의 특징은, 그 관심이 자신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회심한 사람의 관심은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지극히 높으신 분임을 알고 그 앞에서 자기가 아주 티끌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 하나님의 완전하심 앞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깨달은 사람,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로서 자기가 날마다 새로워져 가서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 거룩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욕심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정말 진실한 사람이 됐으면,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찬양)
신자 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의 소원은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마음이 없습니다. 즉, 이런 것입니다. 회심한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서 자기 마음대로 하다가 어느 순간에 후회합니다. 후회하는데, 자신에 대해서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렇게 사는 모습을 주님이 바라보시면서 얼마나 마음 아파하실까, 내가 하나님 아버지께 죄를 지었구나, 나를 그렇게 사랑하신 예수님의 마음에 내가 못을 박았구나, 주님은 나의 이 모습을 보며 얼마나 마음아파하실까.’. 그런데 이런 생각이 비 회심자에게는 안 드는 것입니다. 이럴 수는 있습니다. ‘아이, 괜히 그랬나봐. 내가 이렇게 지금 고통을 받고 후회를 하고 있잖아. 아이 그 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건 비 회심자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찬양)
얼마나 아프실까
하나님의 마음은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네 번째, 하나님의 의지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설교를 듣거나 성경을 읽거나 심지어는 양심의 작용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은 그게 아니다 라는 것을 비 회심자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변명할 여지가 없이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 아니다, 혹은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을 설교를 통해, 성경을 통해, 혹은 다른 여러 가지 양심의 작용을 통해서 자기에게 깨닫게 되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아도 그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지를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비 회심자의 특징입니다. 하나님께 굴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 회심자에게는 자기 꺾임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너무 하기 싫은 일이었는데 계속해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설득하신, ‘네가 해야 된다. 네가 희생하야 된다. 네가 헌신해야 된다.’ 그 때 하나님 앞에, 자기는 너무 싫지만 무릎을 꿇고,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제가 주님의 뜻을 몰랐습니다.’ 이런 고백이 비 회심자에게는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화) 언젠가 제가 전도한 형제가 소명을 받고 신학교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신학생이니까 교회에서 어느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집사님이 계속 도와줬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좋은 의미에서 오지랖이 넓었습니다. 자기 친구가 또 하나가 신학교를 간 것입니다. 그런데 등록금을 델 아무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도와주는 집사님에게 찾아왔습니다. “얘도 도와주세요.” 그러니까 이 집사님이 짜증을 팍 내더라는 겁니다. 그 사실 우리라도 짜증나지 않겠습니까. 그냥 도움 받았으면 혼자 조용히 가면 되는데 데리고 와서, 뭐 전도해 오는 것도 아니고, 등록금이 일이십 만원입니까. “집사님 얘도 좀 해 주세요. 얘도 지금 집안에서 반대해서 신학교 가는데..” 짜증을 팍 내더라는 겁니다. “전도사님 하나만 도와드리는 것도 힘든데, 우리 그 정도로 그렇게 여우 없어요.” 그래서 이제 친구 둘이 나오면서 “에이 안 됐다 야, 너 어떻게 하냐. 이제 내일 모레 등록금 마감인데, 다른 데서 알아보자.” 그래서 낙심해서 있는데 새벽이 전화가 왔더랍니다. 전도사님 어제는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그렇게 전도사님한테 짜증을 확 내고 집에 가서 취침기도를 하는데 기도가 막 나오더랍니다. 회개의 기도가 말입니다. 그리고는 밤중에 전화할 수 없으니까 새벽에 전화를 해서, “전도사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오늘 그 등록금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이게 바로, 자기는 그것을 하고 싶지 않지만,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때 그것에 굴복할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비 회심자는 이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 판단이 틀려서 이 판단이 맞은 것 같다 해서 결정을 번복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나님 내가 잘못했습니다. 나는 하고 싶지 않지만 주님의 뜻이 그것이라니 제가 나의 뜻을 꺾겠습니다.’ 그게 비 회심자에게는 없다, 이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우리들이 과일이 아무리 맛있다고 해도 껍질을 까고 속을 확 뜯을 때에 그 맛이 느껴지는 거지, 망고가 아무리 맛있어도 그 껍데기만 계속 혓바닥으로 빨 때 망고를 핥아보는 거나 수박을 핥아보는 거나 아니면 계란을 핥아보는 거나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경건의 비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신앙은 모레를 씹는 것처럼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영혼을 어루만지셔서 초자연적인 변화가 여러분들의 영혼과 마음 안에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자기를 임금 삼으며 살고 싶고 자기의 생각대로 하고 싶고 나 원하는 대로 먹고 나 원하는 대로 자고 내가 원하는 것은 하고 원하지 않는 것은 안 하면서 사는 것이 인간에게 제일 편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면 희망이 없습니다. 왜 희망이 없는지 설명해 볼까요? 우선, 하나님 앞에 아주 추한 영혼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일주일을 하나님 앞에 굴복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배변하고 싶을 때 배변하고 자기 욕망을 따라 산 사람이 주일날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만난다면 코미디입니다. 또, 하나님이 그런 사람에게 은혜를 주셔서 무슨 삶을 살게 하실 것이 있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니까 주일 날 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면서 정말 은혜의 감격이 있기 위해서는, 한 주를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는 치열한 전쟁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이 그렇지만 나는 이 땅에 여러분 같은 젊은이를 보면, 정말 부잣집 젊은이도 만나고 끼니가 간 데 없이 고시원에서 간신히 생활하고 있는 가난한 형제들도 만납니다. 그런데 나는 그것 너머에서 그 사람의 행복과 불행을 판단합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정신이 살아 있는 사람들은 불행하지 않습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지만 젊어서는 소비의 즐거움에 너무 일찍 눈 뜨면 그 사람은 아주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는 아무데나 앉고 아무데서나 먹어도 되고 아무데서나 자도 불편하지 않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보다 높은 가치에 몰두하기 위해 자기를 기르고 거기에 집중해야 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예화) 대학에 있을 때, 특히 여학생들은, 그림같이 화장을 하고 뾰족구두를 신고 그리고 언덕을 뒤뚱거리고 올라옵니다. 그런 여학생들은 절대 가방 메고 안 옵니다. 왜냐하면 내가 메고 다니는 가방 같은 게 그 차림새에 어울리질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노트 몇 개 딱 들고, 그리고 딸깍딸깍 거리고 올라오는 것입니다. 공부 안 합니다. 물론, 도인처럼 운동화 꺾어 신고 세수도 안 하고 다니는 여학생들이 모두 공부 열심히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도 못 하고 저것도 못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전자의 자매들은 바람나서 시집이라도 갈 텐데, 후자는 취직도 안 되고 시집도 못 가고 정말 안 풀리는 게 아니라 덜 풀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묻고 싶은 게 뭐냐 하면, 인간으로서 어떻게 욕망이 없느냐 이 얘기입니다. 이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먹고 싶고 쓰고 싶은 그런 탐욕적인 욕망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내가 아닌, 또 다른 내가 되고 싶은 그런 욕망이 없느냐 이 이야기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데, 그것은 인간의 성품의 문제가 아니라 질병입니다. 정신적인 질병입니다. 열정이 없다고 하는 것은 질병입니다.
(예화) 일본에 바둑의 기보에 보면 토일국이라는 게 있습니다. 바둑의 기보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언젠가 흑백을 나누어지고 바둑을 대국하던 사람이 불계로 졌습니다. 불계라고 하는 것은 집을 헤아려 볼 필요가 없이 졌다는 것입니다. 그 졌다는 것을 딱 깨달은 다음에, 진 사람에 그 바둑 반상에 피를 쏟고 거기에 엎드려져서 거기에서 절명을 해 버렸습니다. 아니, 오락을 한 판 하다가도 지니까 너무 억울해서 피를 토하고 죽어버리는데,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사람들이 안생을 살면서, 하나님 앞에 내가 누가 되어야 되겠다, 그리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되겠다, 라고 하는 목표가 없고 뜨거움이 없느냐 이것입니다. 이것은 취향의 문제나 성향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병든 것입니다. 정신과 영혼이 병든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더 깊이 더 깊이 만나야 될 필요가 있다, 라고 하는 것은 인정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강하게 촉구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죽지 않고 살아있어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를 지금 마음속으로 세 가지만 이유를 들어 보십시오. 수련회 끝나고 내가 다들 데려가야겠다, 주님이 그러시는데, 아주 확고하게 주님 앞에서,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주님.’ 이렇게 말 할 수 있는 사람, 한 번 마음속으로 손 들어 보세요. ‘시집도 못 가 봤잖아요.’ 그런 이유 말고, ‘주님이 저를 아직 이 땅에 더 남겨 두셔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이 있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회심의 문제가 불분명하고 주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한 이것이, 우리의 인생을 지리멸렬하게 목표도 없이 계속 흘러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사실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이야기했듯이, 어찌 그것이 산 것일 수 있겠습니까, 라는 것 아닙니까. 그게 어찌 산 것일 수 있겠습니까. 좋은 집에서 아침에 잠 깨고 아침 퍼 먹고 배변하고 그리고 텔레비전 보고 잡지 보고 이것저것 즐거워하다가 잠드는 것, 그런 생활이 계속 반복되는 것이, 강아지나 짐승의 생활과 무엇이 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크게 죄 짓고 타락하지 않았지만, 삶의 방향 자체가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길을 걸어갑니다. 그런 사람들이 또 교회에 와서는 눈물로 기도합니다. 그러니까 이 회심의 문제, 주님을 만나는 이 문제는, 종교라고 하는 영역에 국한되어서 해결해야할 그런 문제가 아니라, 우리 인생 전체의 방향과 삶의 질을 결정짓는 결정적인 뿌리다 이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한 번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만약에 한 달 후에 죽어야 된다고 하면 우리가 이렇게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 달은 너무 기니까 그럴지 모릅니다. 일주일 남았다고 한다면 우리 이렇게 살지 않을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의 인생의 가는 끝에 대한 바뀐 견해는 우리에게 분명히 지금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삶의 방향을 바꾸라고 요구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성경적으로 말하자면 종말론적인 기대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자기가 부인할 수 없이,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나는 그 분의 손에 창조되었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계서서 나를 이 세상에 아직 데려가지 않고 두셨습니다. 그리고 난 아직 젊고 성장할 거고 결혼도 할 거고 직업도 가질 거고 무엇인가 무의도식하진 않고 이 사회에 이바지 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교회에든지 소속되어서 주님의 교회의 일원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것들이 장난입니까. 이런 한 가지 한 가지 사실 자체가 우리의 삶의 방향과 목표,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생존해야 하는 근거가 되지 않습니까. 그럼 거기에 맞춰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그런 목표에 대한 아무 생각이 없이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그냥 살아간다면 그게 무엇입니까? 뭘 의미하는 것입니까? 앞에 있는 모든 신앙의 전제들이 인정은 하지만 실제로서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상당수는 직업을 가졌거나 직업을 갖기 위해서 굉장히 애쓰고 있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많은 젊은이들이 사실은 제대로 된 직업을 갖기를 이미 포기한 청년들이 많습니다. 왜. 그 치열한 경쟁 속에서 이미 벌써 경쟁해 보기 전에 밀려난 것입니다. 젊은 청년들이 그 이 사회에서 나름대로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직업에 종사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그 열정은 굉장합니다. 여러분 모두 경험하는 바일 것 아닙니까. 어떤 자매는 아예 고등학교 때부터 아나운서로 취직할 뜻을 세우고, 스피치 훈련부터 시작을 해서 스펙을 쌓는 것부터 시작해서 심지어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연차적으로 부모의 후원을 받으면서 성형수술까지 하고, 운동을 하고 치열하게 자기 몸매를 가꿉니다. 옛날에는 목소리가 좋으면 방송국에 들어갔지만, 지금은 어림도 없습니다. 이제는 가수로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몸매를 가꾸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자기를 필요로 하는 그 크기와 그 정해진 형태에 어떡하든지 자기를 깎아서라도 완벽하게 만들어서, 거기에 딱 들어맞는 가치 있는 상품이 되기 위해 치열하게 자신을 위해서 투자합니다. 그걸 보면 정말 마음속으로 분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신은경이나 백지연 씨 같은 사람처럼, 한 번 이름난 앵커 하나가 되기 위해서 그렇게 가혹할 정도로 자신의 육체를 다루어 가꾸고 단련하고, 심지어는 얼굴에 칼을 대서 시청자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어 가고, 그리고 어학실력을 쌓고 스펙을 쌓고 상식을 넓히고 그 힘든 봉사활동 같은 거 하면서, 그러면서 그 회사에 들어가기에 적합한 자기 자신으로 피나게 깎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를 위해서 그렇게 노력을 하느냐 이 얘기입니다. 만약에 그런 노력에 십분의 일만 한다면 교회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경건한 젊은이라고 소문이 날 것입니다. 과연 그런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시라고 고백을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때는 그 사람들이 쓴 글을 읽어 보면 눈물이 납니다. 면접에서 60번을 떨어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면접 연습부터 시작해서 심지어는 머리 스타일부터 시작해서 하여튼 온 몸을 다 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바꾸어 보는 겁니다. 정말 그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직업 하나를 갖기 위해서 그렇게 가혹할 정도로 자신을 채찍질하고 자신을 절제하면서 거기에 딱 들어맞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지독하게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왜 그런 열정이 없느냐는 것이니다. 열정이 없는 것 자체가 사실은 죄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우리 안에 경건의 비밀이 있습니까.
(예화) 엊그제 심방을 갔습니다. 그 때 어느 남자 집사님이 한 마디 해보라 그러니까 한 마디 했습니다. 굉장히 착한 그리스도인인데, 저는 목사님이 설교하시고 우리를 책망하시고 하는 모든 말씀에 다 동의가 되는데, 한 가지 말씀에는 전혀 동의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그랬더니, 왜 목사님은 자꾸 우리에게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라고 그러시냐고, 자기는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지금이 그 때보다 주님을 훨씬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로 돌아가라고 하는 것은 신앙의 후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고백을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몇이나 되겠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얼마나 되겠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예화) 텔레비전에 나오는 어느 드라마를 보니까, 자매 하나가 어떤 영화에서는 65 킬로그램으로 나오고 어떤 드라마에서는 40 몇 킬로그램으로 나오는데, 그걸 그렇게 자기 몸매를 드라마에 맞게끔 찌웠다가 뺐다가 한답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그랬더니, 디립다 퍼먹고 밤중에 통닭까지 먹어서 47,8 킬로그램 나가던 자매를 65 킬로그램까지 찌워가지고 무슨 영화에 나왔더랬습니다. 완전히 딴 사람입니다. 그런데 요즘 보니까 완전히 삐쩍 말라서 죽어가는 여자로 나오는데, 석 달 동안 한 끼만 먹어서 13킬로그램을 뺐다고 합니다. 저는 그걸 보면서 마음속에 분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깟 드라마 하나 찍기 위해서 그렇게 치열하게 자기 자신과 싸워서 그 쓰임에 합당한 존재가 되려고 몸부림치는데, 우리 주님은 드라마에서 메가폰 든 감독 한 사람만도 못한 주님이신가, 라고 말입니다. 주님이 원하신다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니까 제일 먼저 우리가 이런 열정이 없는 것 자체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고 이것이 인간의 성향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을 정말 제대로 만난 사람인가하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기를 깎아서라도 자기가 사랑받고 싶은 사람에게 맞추려고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예화) 우리 교회에 간사하던 자매가 하나 있었는데, 채식밖에 하지 못합니다. 항상 고기집에 가면 자기는 꼭 다른 걸 시켜줘야 합니다. 그러더니 사랑하는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 사람은 고기만 좋아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몇 년 동안을 고기 좀 먹이려 해도 안 먹더니, 그 남자가 찔러주는 그 피 떨어지는 고기를 세 점이나 먹었답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정말 우리는 한 번 주님을 믿을 것인지 안 믿을 것인지 태도를 아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국내에 있으면서 교회를 돌아보고 교계를 돌아보고 사회를 돌아보면서도 할 일이 참 많다는 생각을 갖지만, 해외에 나가보면 헤아릴 수 없는 일들이 우리로 하여금 눈물을 짓게 만듭니다. 저기도 사람이 필요합니다. 누군가 가서 그들을 끌어안고 주님을 사랑하는 열정으로 섬기면, 수많은 영혼들이 살아나고 그곳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텐데, 하는 안타까운 일들이 이 세상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일이 없어서 놀고 있는 젊은이는 많은데 정말,
(찬양)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써 주소서
이런 삶이 없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열린교회를 맨 처음에 세우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하자고 해서 제가 이끌린 것이 아닙니다. 3일 동안을 밤중에 잠을 안 재우시고 침대 밑에서 기도하게 하셨는데, ‘너는 교회를 개척하라.’ 하나님의 소명이었어요. 무슨 교회가 될지 어떤 일을 만날지 그리고 목회를 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힘들고 쓰라린 눈물을 흘리게 될지, 이런 것은 아무 생각하는 것도 없이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많은 영혼들이 우리의 섬김을 통해서 눈처럼 뭉쳐 새 인생을 살게 해 주셨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 일이 어디 여기 하나만이겠습니까. 교회 안에도 하나님의 일이 살아나고 많은 영혼들이 주님을 만나고 변화되는 거가에는 누군가 애끓는 심정으로 그렇게 고생하고 수고하는 이름 모르는 어떤 지체들이 거기에 있습니다. 인간의 삶의 위대함은 크기나 모양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진실하게 살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가치 있는 위해 헌신하다 보면 왜 그렇게 시련이 많은지... 원래 부패하고 그리고 악이 침투하고 이러는 것은 항상 선하고 좋은 것에만 침투하는 것입니다. 청산가리가 벌레 먹었다는 이야기 들어봤습니까. 죄악이 쉬었다는 이야기 들어봤습니까. 독약이 너무 오래 두었더니 독약이 기운이 떨어져서 쓸모없게 되었다는 이야기 들어 본 적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한 의지를 가지고 주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면 고난도 많습니다. 때로는 억울하고 힘들고 견디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죽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목표가 나를 위한 길이 아니라, 나를 버리고 포기한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이 이제는 네가 살아야 할 길이다, 라고 하나님을 위해 보여주신 길이지않습니까. 그런데 내가 힘들고 고통을 받고 비난을 받는다, 라고 하는 것은 이 길을 못 가는 이유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가게 하는 그 무엇이 그 사람 속에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정말 주님을 제대로 만나고 일생 동안 몸부림치며 살아야 할 삶의 방향과 좌표를 분명히 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소명입니다. 너무 많은 사람이 목사가 되고 전도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 지금 이 젊은 청소년들이 무지하게 방황하고 있습니다. 언젠가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지마는, 나는 지금이 황금과 같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정말 교사가 되어서 거기가 어디든지 가서, 정말 소명 받은 마음으로, 봉투 받지 말고, 그리고 그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이제는 학교가 감당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게 다 무너져버렸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웬만한 사람들을 선생으로 알지 않는, 심지어 자기 선생님을 성희롱하고 일본 같은 데서는 강간까지 하는 사례들이 속출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그렇기 때문에 기회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옛날 훌륭한 선생님들이 살아계실 때에는 보통 치열하게 살지 않아서는 학생들 눈에 안 찼습니다. 저희 초등학교 다닐 때 생각을 해 보아도 한 20퍼센트 정도는 어린 눈에도 그건 선생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는 몰라도 최소한 30퍼센트가 넘는 선생님들은 정말 머리가 숙여졌습니다. 우리 학교 교장 선생님은 아침마다 제일 일찍 오셔서 집게 들고 하얀 장갑 끼고 다니시면서 운동장에서 휴지를 주우셨습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사람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게 나의 선교지다, 라고 생각하고 내가 학교에서 부자 될 마음 포기하고 그리고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면서 헌신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면,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은 너무너무 큽니다. 이렇게 말했더니 어떤 사람이 그럽니다. 저도 그런 소명이 있는데 아무래도 자기 실력으로는 학교 못 들어가겠다. 그러면 학원이라도 들어가면 되지 않습니까. 아니면 선교원이라도 가면 됩니다. 유치원이라도 가서, 그래서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충심으로 사랑하면서, 그러면서 그 아이들에게 무엇인가 참으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고 그리고 어떻게 그런 치열한 젊음에 방황에 아무것도 못해줘도 그렇게 청소년기에 죽음을 가까이 생각하고 죽을 것 같은 청소년들 옆에 있어서 그냥 손만 잡고 있어도 걔들에겐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었다고 하는 청년들임에도 불구하고 삶의 가치관 자체가 기독교 신앙으로서는 동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디 가서 연봉을 더 많이 받고 안락한 삶을 살까’, 소명이 아니라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라는 겁니다. 저는 직장생활을 8년이나 해 봤습니다. 그게 목회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정말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직장에서 열렬하게 살면서 인정하는 사람은 제가 경험한 한도 내에서는 너무 소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장 다닐 때 항상 가슴에 새긴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이 직장에서 너무 필요한 사람이 되자. 사람의 인정에 끌려서 사람들이 붙잡아주는 사람이 되지 말고 내가 이 직장에서 사라지면 고통 받는 직장이 되도록 만들자. 무슨 뜻입니까. 무슨 조작을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정말 내가 이 자리를 비우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그런 사람이 되자는 것입니다. 3년 동안은 정말 불행하게 직장생활 했고, 5년은 너무 행복하게 생활했습니다. 직장 그만 두고 5년 동안, 업무를 물으러 우리 집을 찾아왔습니다.
여러분, 정말 큰 꿈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사실 시집 장가가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꿈입니다. 도르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일생동안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옷이나 지어주던 바느질 장이였습니다. 그러나 도르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었고, 그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많은 사람들이 도르가의 시신 앞에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게 주님을 섬기면서 사는 것입니다.
(찬양)
섬길수록 더욱 더 귀한 주님
그래서 신앙과 우리의 삶의 영역이 완전히 담을 쌓고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묶어서 정말 주님을 경외하는 이 마음을 나의 일생동안의 삶의 방향에 매달아서, 그것을 엔진으로 삼아서, 내가 무슨 차를 타고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런 생각이 사실은 십대에 굳건해야 합니다. 초반이면 좋고 중반 아니면 후반. 이제 이십 삼심, 삼십이 넘어서 사십을 육박하는 대도, 진로도 모르고 지금이 있는 것도 그냥 떠밀리듯이 있는 것이고, 소명이 무엇인지, 그냥 남들은 실력이 없어서 여기 있고 나는 재수 없어서 여기 있다 생각하면서, 시간이 흐르면 뭐 좋은 길이 없을까 요행이나 바라고 산다면 인생이 너무 허무하지않습니까. 나는 지금 여러분들에게 엘리트가 되라고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화) 제가 대학에 교수로 들어가서 처음 조교를 데리고 있던 자매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전부 다 여러 아이 엄마가 되었겠지만, 동생이 있는데 그렇게 공부를 안 하더랍니다. 목포아이였는데, 반에서 30등정도 될까 말까 했었는데, 고 1 되기 직전 중3 졸업 때 겨울 수련회를 가서 주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그러고는 얘가 자기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되는가에 대한 답을 얻은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내가 주님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어야겠다.’ 그래서 사실 솔직히 얘기해서, 목포정도 되는 도시에서 한 반에서 30등을 못한다고 하면 서울에 대학을 진학하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온 가족이 건강을 염려할 정도로 공부에 올인을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할수록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셨다고 합니다. 결국은 중학교 때까지 그러던 아이가 3년 공부해서 서울대 독문과를 들어갔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은혜 받는다고 해서 그렇게 공부하지 않을 거고, 공부한다고 해서 모두 그 자매처럼 되지 않을 거라는 걸 압니다. 그러면, 그 방향이 아닌 다른 방면에서 여러분들이 주님을 향해 뜻이 정해진 사람이고 마음이 확정되어서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해 보라 이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난 신앙의 깊은 감격과 은혜를 자신이 가고자하는 사람의 방향의 엔진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 길을 가는데 능력이 부족하다면 울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겁니다. ‘하나님 정말 능력이 없습니다. 저를 좀 도와주세요.’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지혜를 주십니다. ‘힘이 없어요.’ 힘들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면 육체의 힘도 주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를 아주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공부 잘 하는 사람으로 생각을 하는데 전혀 아닙니다. 정말 못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공부가 싫었습니다. 그런데 신학을 공부하면서 하나님이 나에게 꿈을 주시고 목표를 주셨습니다. 학부 2학년 다니는데, 어느 날 간절히 기도하는데 아주 너무 선명하게 나에게 응답해주시는 것입니다. 내 마음 속에 이런 확신이 들었습니다. ‘나는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소명을 받았다.’ 의심할 수 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공부를 해야 되겠는데 사역은 많고 직장까지 다니니까 너무 괴로워서, 매일 학교 끝나면 채플실에 들어가서 울었습니다. 10시 10분에 끝나면 들어가서 한 11시까지 울었습니다. 전철 끊어질 때까지 울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렇게 했습니다. 주님은 나에게 얼마 후 신학교 선생님이 되라고 길을 보여주셨는데, 아무 것도 아는 것 없이 내가 목사 될 사람들에게 무얼 가르쳐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왜 그런지 나에게 시간을 안 주십니다. 노는 친구들 많이 잇는데.. 시간을 안 주시려면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든지 능력을 주셔야 됩니다. 기도할 때마다 마음이 물같이 녹아내렸습니다. ‘아, 난 티끌 같구나. 주님이 불러주신 소명은 있는데 내가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은 없구나.’ 정말 매일매일 울었습니다. 기도를 이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놀랍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를 배우면 둘을 알 수 있도록 그렇게 뇌를 열어주셨습니다. 예전에는 나 자신에게서 그런 가능성을 한 번도 발견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격려해 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 때 깊이 깨달았습니다. ‘아 그렇구나. 한 가지 사실을 내가 잊었구나.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없는 것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구나.’ 그걸 깊이 생각한 것입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이것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내 몸이 깨어지고 부수어져도 이 길을 걸어가며 살아서 이 어두운 세상에 한 줄기 빛이 되고 싶다는 목표, 어느 복음성가에 나오는 것처럼, 하늘 높이 솟은 봉우리가 될 수 없고 모든 사람이 기억해 주는 명산에 이르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작은 언덕이라도 돼서, 피곤하고 지친 사람들이 올라와 심호흡을 하고 소리를 칠 수 있는 작은 언덕이라도 되고 싶다 그 소원을 확고하게 발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이루어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심한 사람의 삶입니다.
자,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 너는 죄를 회개하고 십자가를 경험하지 않으면 너는 정말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십자가를 경험했다고 칩시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무엇을 위해 살고자 하는 목표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 많은 은혜를 어디다가 쓰겠습니까. 어디다 쓰겠습니까, 목표가 없는데 말입니다. ‘네 생명을 오늘 취해야 되겠다.’ 주님이 말씀하실 때, ‘취하는 것은 주님의 자유입니다마는 지금도 내 마음 속에는 이대로는 눈을 감을 수 없는 나의 소명이 있습니다.’ 그 고백이 있어야합니다. 오늘 경험하는 십자가의 감격을 가지고 주님을 위해 살 것이고 개별적인 삶을 거제로 드려서 하나님께 헌신을 할 때 그 개별적인 삶이 모두 묶어져서 무슨 일을 위해서 바쳐져야 할지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젊은 시절의 모든 게으름과 나태를 내가 이렇게 강력하게 탄핵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여러분들이 피 끓는 목표를 신앙 안에서 발견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 없이도 넉넉히 살아간다는 그 자체가 우리가 심각한 마음의 질병에 걸린 거라는 것입니다.
(예화) 아프간에서 미군이 테러리스트의 총격을 받고 전투 중에 쓰러졌습니다. 마침 그들과 동행해주던 군종 목사가 달려왔다고 합니다. 위생병도 왔지마는 이미 가망성이 없을 만큼 출혈이 심했습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이 너무 불쌍해서 품에 안고 눈물을 흘리면서 ‘많이 아프지..’ 그랬습니다. ‘괜찮아? 많이 아프지..’ 그랬더니, 피 묻은 손으로 육군 군복에다가 손을 덜덜덜 떨면서 스펠을 썼습니다. S.E.M.L.P.E.R.F.I.D.E.L.I.S . 셈페르 피델리스. 라틴어로, ‘항상 충성스러운’ 그 뜻입니다. 한 나라를 지키는 군인도 죽어가면서 셈페르 피델리스라고 쓰면서 죽어갔는데, 우리는, 주님이지 않습니까, 주님의 자녀지 않습니까. 주님이 없었더라면 영원히 멸망할 짐승처럼 살다가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인생의 가는 방향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안개처럼 스러질 이 비참한 인간을
(찬양)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그렇게 죽었지 않습니까. 주님이 그렇게 죽으셨지 않습니까. 그렇게 우리를 구원해 주셨고, 우리는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우리보다 더 유능하고 착한 사람이 세상에는 너무 많은데, 왜 그런지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셔서 하나님 자녀 삼으시고 그리스도의 교회에 접붙여 한 영적인 몸이 되게 하시고 먹여 주시고 입혀 주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 중에 예수님 통해 오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목표가 아직 없다는 게, 이게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 수 있는 겁니까. 그러면 언제쯤 되면 우리의 인생에 목표가 생길까요. 그런 거 없이, 바람에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물결치면 물결치는 대로 살아가겠다면, 그것도 충분히 괜찮은 인생이라고 생각하나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입니까. 그리스도인일 수 없는 것입니다.
(예화) 콧수염 붙이고 다진으로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사람이 자기 인생 전기를 썼습니다. <꿈이 있는 거북이는 지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한 권의 책으로 썼습니다. 인생 삼십이 되면 누구든지 그런 책 한 권을 쓸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이렇게 주님을 만났고, 이렇게 소명을 받았고, 그 소명에 합당하도록 나는 이렇게 몸부림치며 살고 있다, 라고 말입니다.
(찬양)
이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그 소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습니다. 문제는, 높고 존귀한 직업을 가지고도 자기를 섬기면 그것은 세속적인 인간일 뿐이고 그의 직업은 돈벌이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비천한 직업에 종사하면서도 주님을 섬기는 사람은 부끄럽지 않습니다. 말도 안 되는 얘기 하나 하겠습니다. 오래 전에 어느 교인 집에 심방을 갔습니다. 개업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갔더니 비디오 가게였습니다. 되게 미안해하면서 예배를 드리는 겁니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뭐가.” “저희들이 그냥 할 수 없이 비디오가게를 하고 있는데 이게 마음 편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예배를 드리자” 하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내가 말했습니다. 자매가 아주 말씀의 은혜를 많이 받은 자매였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마라. 여기에 기독교 사상하고 똑같은 비디오만 갖다 놓고 장사를 하면 사업이 되겠냐. 그러니까 여기에는 세속적인 이야기도 있고 폭력물도 있고 음란물도 있을 거다. 이런데 오는 사람은 심령이 평안하고 행복한 사람이 이런데 오지 않는다. 특히 저 귀퉁이 칸에서 뭘 뒤지는 사람들은 대부분 곤고한 사람이다” 그래서, 내가 지혜를 줬습니다. 교회에서 이러이러한 테이프를 이만큼 빌려줄 테니까 이것도 돈 받지 말고 그냥 빌려줘 봐라, 그러고 테이프를 밑에 넣어줬습니다. 단골로 계속 사람들이 오니까,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그러면서 비디오를 검정 봉지에 싸면서 체크를 하면서, “아유 모르겠어요. 하여튼 참 괴롭고 참 힘들어요.” “아빠는 어떻게 되시고요.” “계속 실직 중입니다.” 이제 친하니까 얘기하는 것입니다. “비디오 재밌으세요” “재미는요. 사는 게 하도 팍팍하니까 그거라도 보고 웃고 떠들다 보면 그 시간은 그래도 잊잖아요.” “이것도 한 번 들어보실래요? 시편 23편 강해인데..” 그런데 정말 놀랍습니다. 그걸 듣고 변화되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그럼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분식집을 하면 어떻고 신발 가게를 하면 어떻습니까. 중요한 건 사람이잖습니까. 그 속에서도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중이라고 확신하게 하는 그 무엇이 있고 그것이 소명을 이루는 수단이 되면 그것은 자랑스러운 직업입니다. 주님을 섬기고 있는 중인 것입니다. 주님을 경외한다고 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 예배시간에 흘리는 눈물이나 은혜의 감격, 그것이 경외가 아닙니다. 그것이 삶속에서 모두 표출이 되어서 우리의 인생의 방향 전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그런 두려운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알게 하고, 그런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주면서 살아가는 삶이, 이게 살아있는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문학적인 상상력을 갖고 신앙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우리가 모두 일생을 살고 주 앞에 갔을 때, 우리의 피 묻은 전투복을 벗기고 세마포 옷을 입히시면서 그러면서 주님이 눈물이 글썽글썽한 우리들을 어깨를 두드리거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일생동안 어떻게 나를 섬기면 살아왔는지 내가 잘 안다.’ 그런 사람들 속에는 변호사, 의사, 박사, 장관, 국회의원, 회사 사장, 이런 사람밖에 없는 겁니까. 우리가 그렇게 생각할 권리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백성도 아닌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면서도 주님께 인정을 받아서 하나님이 항상 아끼고 칭찬해 주시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내가 여러분들에게 열심히 공부하고 출세해서 엘리트가 되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노력을 해도 절대 그렇게 안 될 사람들도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 모든 면에서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지금 말하는 것은 삶의 외면이 아닙니다. 정말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발견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두려우시고 온 땅과 만물 위에 지극히 높으신 지존하신 하나님, 우리가 관계를 갖고 사랑하고 있는 그 주님, 그 분과 함께 관계를 갖고 누리고 행복해하는 그 마음을 가지고 우리는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소명을 발견해야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다면 미래에 언젠가 다가올 그 시점을 위해서 바로 그 소명에 적합하도록 우리 자신을 철저히 굴복시켜 그것을 준비하는 그 일에 우리의 혼신의 힘을 다 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오늘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 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태와 안일을 마치 뱀처럼 징그러워하고 미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우리의 마음속엔 우리는 지극히 연약하고 힘이 없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명을 따라서 우리가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때문에 그 때마다 포기하지 말고 바로 그 시점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야 할 바로 그 지점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그런 일들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는 목숨을 걸고 헌신해 보기 전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저는 세계적인 학자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들 중에 상당수는 대학, 심지어는 대학원을 들어갈 때까지도 학문의 능력을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 자신을 혼신의 힘을 다해서 쏟아부을 때, 이제까지 발견되지 않던 그 사람 안에 있는 놀라운, 신앙적이고 그리고 학문적인 혹은 직업적인 이러한 잠재되어 있는 능력이 발휘되는 것을 참 많이 보았습니다. 그것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 온전한 마음을 가지고 뜻을 정해야 합니다. 이런 건 어떻습니까? 이 설교를 들으면서도 이렇게 생각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목사님, 설교를 들으니까 마음에 감동은 되는데 난 아직도 뭘 하면서 살아야 될지, 주님이 나 같은 사람을 어디에 쓰려고 예수 믿게 만드시고 이 세상에 창조하셨는지 전 아직도 모르겠고, 어떻게 하면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여러분, 기차를 타느냐 비행기를 타고 갈 것이냐 자전거를 타고 갈 것이냐 빨리 뛰어 갈 것이냐는 목적지를 정한 다음에 생각할 일입니다. 가는 곳이 평촌이라면 비행기는 탈 수가 없습니다. 기차도 탈 수 없습니다. 시외버스를 타야 돼고 가는 곳이 숙소라면 뛰어가는 게 버스 타는 것보다 빠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느냐보다 어디를 향하여 가야 하느냐 라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설교를 듣고 나서 어떤 사람들은 가슴이 먹먹할지 모릅니다. 내 나이 삼십이 먹도록, 목사님이 너는 왜 사니 라고 물을 때 나는 살고자 하는 목표가 없었습니다, 라고 말해야 하니까 말입니다. 한 일주일 쯤 목숨 걸고 금식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나라면 한 번 이렇게 해보겠습니다. ‘하나님 나는 우연히 쓸 데도 없는데 빈대처럼 벼룩처럼 한 마리 모기처럼 딱정벌레처럼 아무 의미도 없이 그냥 태어난 것입니까. 그럼 제가 여기 살아있어야 무슨 필연성이 있습니까. 내 인생의 갈 길을 보여주시는지 날 데려가시든지..’ 한 번 목숨을 거는 건 어떻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안 보여주실 리가 없을 것입니다. 왜입니까. 여러분들이 인생을 낭비할 때 여러분들의 부모는 속이 터지고 목사인 나는 그것을 보면서 눈물 흘리지만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인생이 그렇게 낭비되는 그 안에서 낭비되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보시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값 주고 산 나의 자녀들인데..’ 라고 말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목숨을 걸고, ‘주님, 만약에 길을 보여주시지 않으면 나는 여기서 멈춰 한 걸음도 나가지 않겠습니다. 하나님 보여주세요.’ 그래서, 마음에 그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그 길을 걸어갔으면 하는 그 소원을 내 마음에 품고, 그리고 이제는 뒤돌아보지 말고 나의 모든 자원을 쏟아 부어서 그 길을 따라 걸어가는 것입니다. 비록 그 길이 꽃처럼 향기 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출세했다고 박수 갈채 받는 길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우린 그런 꿈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한아님의 자녀가 되려고 할 때 모두 세상에 버린 꿈입니다.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찬양)
주는 토기장이 나는 진흙
날 빚으소서 기도하오니
항상 진실케 내 맘 바꾸사
하나님 닮게 하여 주소서
그렇게 주님께 맡기며 사는 것입니다. 꽃처럼 향기 나는 생활 아니면 어떻습니까, 수많은 사람이 만나면, ‘너 출세했구나.’ 박수 받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주님이 불러주셨다고 믿고 그리고 거기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내가 사랑하는 주님을 섬기고 내가 거기에 있는 것을 바라보시면서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고 내가 거기에 있어서 누군가를 섬기고 소명을 따라 삶으로써 이 세상의 한 구석이라도 하나님 앞에 더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순종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존귀한 지위에 있어도 우습게 보이는 인간이 있고 사람들이 비천하게 생각하는 직업에 종사해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품위와 품격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도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 큰 천상적 자존심이 있지 않습니까.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도 피 흘리면서, ‘셈페르 피델리스’, ‘항상 충성’이라고 쓰면서.
다른 사람은 다른 모양으로 불러주셨고 나는 이런 몽양으로 불러서 하나님 섬기며 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지구의 한 구석 우주의 한 모퉁이에서 주님을 섬기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인간의 존귀함과 인생의 성공이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