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된 자와 생명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하리로다 (시101:6)
녹취자: 김인철
I. 본문해설
이 표제에 기록된대로 101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과 은혜의 감사에서 지은 찬송의 시입니다. 여기에 지금 시인이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하리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II. 곤고한 삶: 생명의 결핍
A. 영적생명
우리는 누구도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없지만 현실을 보면 곤고한 삶을 살아가는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름이 아닌 생명의 결핍입니다. 그래서 곤고한 삶을 살아 가는 사람들은 결국은 영적인 생명이 결핍된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의 육체에는 육체를 위한 생명이 있고 영혼에는 영적인 생명이 있는데 그것은 사실은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생명에 대해 공부하면서 여러 사람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생명이 무엇입니까? 했더니 생물학을 하는 사람은 생명이 무엇인지 설명을 못했습니다. 그것은 생물학의 연구대상이 아니라고 합니다. 고맙게도 요즘 우리교회의 의사 선생님 한분이 저에게 의학을 가르쳐 주신다고 해서 공부를 2주에 한번씩 하려 하는데 똑같은 질문을 의사 선생님께 물어 봅니다. 인간의 생명은 무엇입니까? 의학, 의술이라는 것은 인간의 생명을 북돋우거나 장애를 만나서 소멸되는 것을 건져 주는 것이 의술입니다. 갑자기 소멸되기도 하고 서서히 소멸되기도 합니다. 그런것을 건져 주는 것이 의술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의학은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학문입니다. 수의학은 동물의 생명을 다루는 학문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무엇입니까? 아무도 이야기 못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확실히 고백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는 생명을 담고 있는 생명체이지 우리 자신이 생명은 아닙니다. 그래서 생명은 우리들이 형언할 수 없는 방법으로 외부로부터 덕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입니다.
(예화)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에이 우리 형은, 우리 삼촌은 진작 죽었어요!” “왜?” “게을러서 죽었죠!” “왜?” “숨을 안쉬더라구요!” 숨을 안쉬어서 죽었다고 합니다. 숨은 계속 쉬면 되는데... 그러면 무엇이 숨을 더 이상 못 쉬게 하는가? 저는 생명의 신비를 죽음의 경험을 통해서 터득했습니다. 제가 요즘도 저희 할머니 생각이 나서 가끔 마음이 아련한데 저를 이 세상에서 제일 많이 사랑해 주신 몇 사람 가운데 한분이 저희 할머니입니다. 그 할머니가 저의 품에서 운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안고 있는데 서서히 생명이 꺼져가기 시작하는것입니다. 그리고 시야가 흐려지시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약간 힘을 벌리시고 숨을 쉬다가 어느 순간에 탁 하고 호흡이 멈추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형언할 수 없었습니다.
B. 생명을 주시는 분
사랑하는 할머니가 돌아 가신다고 하는 육체적인 인연의 느낌 말고도 도대체 무엇이 이 호흡을 멈추게 하는 것인가? 반대로 말하자면 무엇이 이 호흡을 그렇게 긴 세월동안 한번도 안 끊어지고 그렇게 계속 해 오실 수 있도록 만들어 준 것은 무엇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굉장히 느낌을 느꼈고 그 때 깨달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생명은 죽음쪽에서 보아야지 보이고 죽음은 생명쪽에서 보아야지 보이지 그 안에서는 안 보인다고 하는 것이 그때 제가 터득한 단순한 사실이었습니다. 과연 우리 할머니는 숨쉬기 싫어서 돌아 가신것일까요? 누가 그럴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면 누가 그것을 멈추게 했을까요? 계속 되어 온 것은 무슨 힘에 의해서 되어 온 것일까요? 풀 수 없는 많은 의문이 꼬리를 무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이것을 해명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알 수 있는 사실은 한가지는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는 생명을 담지하고 있는 생명체이지만 생명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 힘 있고 있는 것입니다. 똑 같은 원리가 영혼에 적용이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찬송)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 중심에 있으니 유혹이 흔들어도 무너지지 않네 주님과 함께 있을 때 두려움 사라지네 주님이 항상 나를 지켜주시니
그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담지체입니다. 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동하고 생각하고, 생명이 꺼져가면 생각이 되지 않고 잃어 버리는 것입니다. 생각하고 아름다운것을 볼 때 감동이 일어 나고 갖고 싶은 욕망도 생기고 모든 생명이 우리에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똑같이 하나님의 영적생명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있지만 이 생명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성경을 읽으면서 은혜도 받고 아름다운 것을 볼 때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도 생기고 자기 죄를 발견할 때 아파하고 슬퍼하는 마음도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는가 하면 내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이 생명의 발원지라고 생각하는데 우리 자신이 생명의 발원지는 아닙니다. 언제 그것을 깨닫게 되는가 하면 예수를 믿으면서도 물러가 침윤에 빠져 거의 죽게 되는 때, 기도도 한마디도 할 수 없고, 성경을 읽어도 돌맹이를 씹는것 같고, 하나님의 일을 해도 추호의 기쁨이 없고 무엇인가 울분이 터져서 박차고 뛰어 나가든지 아니면 높은 하늘 꼭대기에서 시퍼런 바다로 떨어져 죽어 버리고 싶은것 같은 절망감이 밀려 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 비로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영적인 생명이 무엇이었는지를 잃어 버리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직장에서 짤린것도 아니고 아내가 보따리 싸서 나가라고 내 쫒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이들이 이제는 당신 아들, 당신 딸 안 하겠다고 데모 한것도 아니고 돈이 없어진것도 아니고 건강이 상한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이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그대로 있습니다. 어쩌면 더 좋아 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더 살기가 힘든 것입니다. 그때 비로서 그것이 바로 나를 사람답게 살게 하는 것이구나,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는 원동력이 바로 내 안에 있었구나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적인 생명력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라 졌는데 내가 불러 일으킬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그것은 외부에 덕을 입어서,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덕을 입히는지 우리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한가지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성령,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은혜, 우리의 영혼, 마음 이런 통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온 다는 것은 알지만 어떤 방식으로 오는지 그것이 물건도 아니고 물질도 아니니까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것이 우리에게 온다는 것만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있을때도 무엇인지 모르다 사라져버리고 나면 영적인 은혜가 소멸되었을 때 나타나는 우리의 증상을 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우리가 결국은 영적인 생명을 누려도 이 생명의 주인이 우리가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생명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그것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우리가 육적인 세계를 생각을 해도 하나님을 의지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명이 이렇게 유지되는것 자체가 정말 하나님이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이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매순간마다 죽음의 위협에 애워싸여 있으면서도 우리가 살아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영혼의 생명에 관해 생각해 보자면 육체의 생명은 자연법칙에도 많이 의존합니다. 물론 자연법칙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예화) 자! 예를 들어 보십시다. 지금 일본에서 나오는 생선이 생선중에서는 우리나라 근해에서 잡히는 것 다음으로 인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관리를 잘 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나라나 다른다라에서 잡히는 생선은 얼음을 채워 올 때 민물을 얼려 집어 넣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수입해서 들어 오는 생선은 바닷물을 얼립니다. 바닷물 얼음입니다. 그것을 가득 채워서 옵니다. 이것이 민물을 얼린 것이 녹으면 바다 생선에 계속 민물을 붓는 것입니다. 속히 상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닷물이면 녹아도 바닷물에 생선이 젖는 것입니다. 그래서 싱싱합니다. 그렇게 관리를 잘 합니다. 그런데 지금 먹지 않습니다. 그래서 직장 다니는 사람들 보니까 요즘 생전 안 먹는 것이 생선찌개 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상당한 양의 생선이 일본생선이니 안 먹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원자로 사건 때문에... 원자력 발전소가 파괴되고 오염된 것들이 지금도 쌀에도 묻어 나오고 하는 소식들이 올라 오니까 기분 나빠서 안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이렇게 우리들이 우리들의 육체적인 생활도 이렇게 죽음을 가져 오는 위협적인것에 애워싸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아주 쉽게 생명이 소멸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의 영혼의 생명은 얼마나 더 그렇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육체의 생명도 주시는 분이 있어서 자연의 법칙에 어느정도 의지하지만 영혼은 그것도 영혼의 법칙이 있지만 정말 전적으로 하나님에 달린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하나님의 의지 없이 인간에게 내리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당신 원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곤고한 삶을 살아 가는 사람은 바로 이렇게 영적인 생명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은혜를 주시고 인간이 누리면서 살아 가는 이 모든 과정 자체가 인간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으면 안되게끔 그런 구조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아주 독특한 특징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우리들이 진실한 신자라고 말하는데 물론 진실한 신자는 도덕적인 삶에 있어서도 다른 사람보다 나을 것이고 진실한 신자는 지식의 수준에 있어서도 막되먹은 신자와는 비교 될 수 없는 이성을 갖추고 있을 것입니다. 다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 진실한 신자의 특징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의 심정으로 살아 가는 인격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실한 신자의 특징입니다. 진실한 신자가 “이 정도 진실했으면 됐지 어떻게 인간이 이 이상으로 진실해 질 수 있겠어?” 아무리 진실해도 진실한 신자는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독특한 특징입니다. 그래서 좋은 신자는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는 상한 심령을 가진 신자입니다. 큰 일을 이루어 놓았다 할지라도 자신의 존재가 무한하신 하나님 앞에 얼마나 하챦은 존재인지를 깨달은 사람들은 자기가 큰일 했다고 주님을 덜 의지할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 분이신지를 깨달은 사람들은 자기가 조금 정결하게 살았다고 해서 하나님을 덜 의지하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때문입니까? 못하니까 안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제가 기도론을 한학기 동안 가르쳐서 학생들 채점하다가 내려 왔는데 거기에 여러 가지 내용들을 썼는데 그 중에 공통적인 내용이 그것입니다. 정말 기도하지 않았었는데 계속 말씀을 들으면서 기도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긴것이 나에게 있어 커다란 다행입니다. 그것이 무슨뜻인가 하면 의지로 기도를 안 하겠다고 작정한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 되니까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돌아 보십시요. 언제 기도가 잘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꽉 차 있을 때... 믿는 사람 있고 빽 있을 때 그것 의지할 때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도저히 누구도 의지할 것이 없고 인생의 벼랑끝에 선 것 같은 그때 하나님 의지할 마음이 생겼을 때 간절히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싶은 간구하는 욕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지 다 아시면서 우리에게 기도해야지만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면서 우리를 훈련시켜 가시는 것입니다.
III. 충성된 자와 생명
A. 충성스러운 삶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이렇게 당신의 충만한 생명의 은혜를 충성된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라고 했습니다. 나와 함께 거하게 한다 라는 단어는 사실은 가족이 한집에서 사는 것을 그림처럼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한집에서 사는 가족들을 생각해 보십시다. 지금은 산업시대에서 꼭두새벽에 가족들이 흩어져서 밤중에도 잘 못만나는 처지 이지만 이 시인이 있던 시대를 생각해 봅시다. 아침에 일찍 함께 일어나서 목축을 한다든지 밭일을 하고 그렇게 농사를 짓습니다. 그리고 함께 삼시 세끼를 같이 먹고 기쁨과 설움을 함께하며 동거동락하는 가족의 삶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라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그렇겠습니까? 다윗은 한 나라의 왕이었습니다. 왕에게 가장 보고 싶은 사람, 가까이 하고 싶은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얼굴 잘 생긴 사람이 아니라 정말 왕을 사랑하고 그 왕국을 위해 충성스럽게 살았던 사람 그런 사람들은 생각을 합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도 사면을 두루 살피시면서 충성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찿으시는 것입니다. 충성스러운 삶 이것이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비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이 하나님과 깊은 관계속으로 들어 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예외없이 빠지게 되는 것이 신비주의입니다. 신비주의는 그렇게 인간의 철저한 삶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한번에 아주 신비한 방법으로 하나님과 마치 이 세상 사람들이 신접하는것처럼, 귀신과 교통하는것처럼 하나님과 접촉하는 비결이 있다고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신비주의가 아닙니다. 경건의 신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왜 사도바울에게만 삼층천을 보여 주셨을까요? 무엇때문이었을까요? 그래서 내가 이 말을 하면 너희들이 여러 가지 상상을 할까봐 절제한다고 말했던 그 신비의 이유가 무엇때문이었을까요? 하나님은 당신을 향해 충성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충만한 생명, 당신과 함께 동행하는 신앙의 비밀들을 알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은 고백자의 삶이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독점적인 사랑의 관계라는 것을 자신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입증하면서 고백하면서 살아 가는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의 시간과 우리의 공간이 하나님께 올리는 편지지이고 우리의 삶의 고백으로 그 공간과 시간을 글자로 매꾸어 가면서 살아 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래서 마지막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왜 그런 삶을 살아야 했느냐?” 할 때 우리 각자는 모두 대답하여야 합니다. 지금 네가 왜 그렇게 살고 있느냐고 주님이 물으시고 여러분은 매순간 내가 이렇게밖에 살 수 없는지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여야 합니다. 그런 고백이 무슨 필요가 있어 하면서 무시하면서 사는 것은 영적으로 잠들어 있기 때문에 충분히 그렇게 살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예화) 인터쉽을 이번에 수료한 학생이 그랬습니다. 숙제를 하려는데 학교 숙제가 너무 많아서 인턴쉽 숙제를 못하고 그냥 잠이 들었다고 합니다. 밤늦게 잠이 들었겠죠? 그런데 새벽두시쯤 되었는데 제가 꿈에 나타나더랍니다. 그러더니 막 야단을 치더랍니다. 숙제도 안하고 자느냐고... 그러고나서 화들짝 놀라서 벌떡 깼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정신이 아주 맑더랍니다. 그래서 새벽에 그 숙제를 다 해서 왔노라고 자랑아닌 자랑을 했습니다.
B. 완전한 길로 행함
만약에 매 순간 주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지금 너는 왜 그곳에서 그 일을 하고 있니?” “너는 지금 무었 때문에 그곳에서 그렇게 살고 있니?” 라고 물으실 때 아주 또렷하게 “이래서 저는 여기 있고 지금도 하나님 앞에 살고 있는 중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가면 그런 충성스러운 삶을 사는 것이 너무 피곤하고 지치는 일이지만 주님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속에 있을때에는 그런 삶보다 행복한 삶이 없는 것입니다. 제가 종종 질문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봉사하는것보다 더 힘든 일은 자기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봉사할 수 없도록 차단 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충성스러운 삶입니다. 찰스스펄전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누구든지 설교하기 위해 부름을 받은 사람은 설교하여야 합니다. 설교하도록 하나님이 그 마음을 불 붙여 준 사람을 설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쏟아져 내리는 물을 종이컵으로 받으려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어떠한 고난이 와도 반드시 설교할 것이고 그 설교가 끝난 후에는 더 큰 고난이 온다 하더라도 그 다음에 설교할 기회를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할 것입니다. 이속에서 무엇인가 넘치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가슴이 터지도록 답답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 이 시대는 열정이 없는 시대입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데에는 미친듯한 열정이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 열정, 하나님 앞에 뜻을 세우고 그 뜻을 위해 살아야 되겠다는 열렬함이 없는 그 시대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이 충만한 영적 생명을 누리며 살아 가고 있는 가장 커다란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진실하게 섬기는 사람들은 절실하게 섬길수록 기도의 필요를 느낄 것이고 진지하고 애절하게 기도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해 불꽃처럼 섬겨야 할 강력한 욕구를 기도중에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런 기도없이는 삶도 지탱될 수 없고 그런 삶이 동반되지 않고는 그 뜨거운 기도를 한번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속적으로 그 열렬한 기도를 계속해 나가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은 충성된 자를 불러서 당신과 함께 거하게 하셔서 당신의 생명을 충만하게 누리게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바로 그렇게 충성된 사람이 어떤 삶의 양식을 택하는지를 보여주는데 그것이 완전한 길로 행하는 것입니다.
(예화) 우리들이 칠판에 아무리 동그랗게 그려 보려 해도 동그라미가 잘 그려지지 않습니다. 옛날에 고등학교 다닐 때 기하학을 가르치던 선생님이 있었는데 동경제대를 나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학생 쳐다 보고 동그라미를 그려도 칠판에 항상 찌그러지지 않은 완벽한 동그라미를 그리십니다. 그것은 수십년에 그려 통하는 것입니다. 학생들 쳐다 보면서 그리면 항상 동그란 그림입니다. 저것은 거의 신기에 가깝다고 우리들이 그랬습니다. 우리들은 해 봐도 안 됩니다. 그렇지만 동그라미 그리다 삼각형을 그렸지만 동그라미를 어차피 못 그릴것이 뻔하지만 그래도 그리는 사람 마음속에는 마치 내가 노력을 하면 완벽한 동그라미를 그릴 수 있을 것처럼 그려야지만 찌그러진 동그라미라도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도 마음속에 없으면 이것은 아무 모양이 나오지 않습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절대로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도 예수님처럼 살자고 주장하는 사람들보다 더 우스운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자고 할 때에는 그냥 비슷하게 가자는 뜻입니다. 어차피 우리들이 예수님처럼 똑같이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길이라도 그것을 정하고 가야지 계속 술 먹고 휘청거리며 갈지자 걸음을 걷는 사람을 모본으로 놓고 그림을 그려 무엇이 나오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완전에 이를 수 없고 완전한 인간한 인간도 아니고 완전하게 될 수도 없지만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것은 완전을 향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구도 나는 다 이루었다 나는 완전에 도달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잘 살았어도 항상 반성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충성되게 섬겼어도 항상 후회되는 일이 있고 아무리 희생했어도 거기에는 다 바치지 못한 헌신이 있기 때문에 항상 우리 자신을 돌아 볼 때 우리 자신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한계를 느끼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온전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일은 많이 했는데 스스로 걸어 가는 길은 굽은 길이었다면 인정해 줄 수 있겠습니까? 안될것입니다.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충성스럽게 살면서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살아 가려고 애 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일은 정말 잘 했지만 인격은 망가진 사람, 재능은 뛰어 났으나 순수하지는 않은 사람, 능력은 있지만 자기 아집에 사로 잡혔던 독선적인 인간 이런 오명을 남겨서는 그가 산 삶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한가지 사실을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영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고 싶으면 충성스럽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죽고 싶어도 눈을 감을 수 없는 이유를 가지고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셔서 “네 소원이 무엇이냐?” 라고 물을 때 눈물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부탁합니다. 금년 한해 정리하고 이제 새해가 옵니다. 내년에는 절대 무의도식 하지 마십시요. 세계는 넓고 할일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외국에만 나가면 목이 매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일이 많은데 우리가 놀고 있는 사람을 얼마나 많이 만나는지 모릅니다. 불신자가 놀면 원래 목표가 없으니까 논다고 합니다. 신자가 그것도 한때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지금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사람이 그렇게 살 수 있겠습니까? 내년에는 절대 무의도식하지 말고 그냥 다리 하나 걸쳐 놓은 일이 아니라 열렬하게 이 일이 이루어지면 나는 사라져도 좋다 라는 마음을 가지고 온 마음을 다해서 그렇게 주님을 섬기는 충성스러운 삶을 살아서 내년 한해에는 모든 무기력과 죽음의 기운을 떨치고 충만한 생명속에서 사는 신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