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혈의 목회로 나아가자
녹취자 : 조원정
Ⅰ. 들어가는 말
우리가 신학을 공부한다고 할 때 신학이 무엇입니까? 저는 최근에 신학이 무엇인가 하는 900페이지 책을 탈고를 했습니다. 책을 이년 쓰면서도 고민했던 것이 오늘날 우리들이 신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심각한 오해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짧은 시간에 긴 논변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이해하는 신학은 공부가 따로 있고 살아가는 것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슐라이어마허 이후에 생겨난 신학의 개념이고 전통적인 개혁교회에서 우리의 신학은 교부들의 시대까지 연결해서 모두 살필 때 신학이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학입니다.
처음부터 신학은 삶과 분리되는 어떤 지식의 세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런 신학의 대한 정의를 기초로 볼 때 그렇다면 목회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대답은 아주 간단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살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것이 목회입니다. 구체적으로 그 목적을 어떻게 성취해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을 나는 디모데에게 준 사도 바울의 교훈에서 찾습니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하면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목회는 정확히 성경이 우리에게 주신 목적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역시 똑같이 성경이 중심이 되고 그것으로서 지식과 결합된 삶을 살아내는 신학이 있고 나만 그렇게 살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렇게 살아서 교회가 교회가 되고 세상이 세상이 되도록 돕는 이것이 바로 목회라고 정의를 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들이 흔히 화학에서 엔트로피와 신트로피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엔트로피는 질서가 있던 물질의 체계들이 어떤 힘에 의해서 파괴되고 무질서해지는 것을 엔트로피라고 말합니다. 엔트로피는 바로 변이의 힘입니다. 이렇게 무질서해진 것을 다시 통합시켜서 원래의 질서로 돌아가게 하는 힘을 과학에서 신트로피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는 지극히 아름답고 선한 세계였습니다만 인간의 죄에 의해서 엔트로피처럼 작용하면서 무질서해져 버렸습니다. 이러한 무질서의 고통이 모든 자연의 세계를 비롯해서 인간의 삶속에서 나타나고 인간의 영혼 안에까지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들을 다시 원래 창조의 상태로 돌려놓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이고 이러한 일들을 위한 신트로피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고 우리는 그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을 힘입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토대로 신학적인 삶을 살아내고 다른 사람들이 그리로 돌아가도록 돕는 것이 우리 목회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여러분은 청교도와 개혁신학을 사랑하시니까 조나단 에드워즈의 천지창조의 목적이란 책을 읽으셨을 것입니다. 에드워드가 그 논문에서 갈파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결국 하나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망가진 이 세상을 본래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으로 회복되는 것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인간은 바로 그런 하나님의 영광의 회귀 안에서 인간도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행복사이에는 모순이 없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목회를 한다 할 때 이것은 바로 죄로 말미암아 망가지고 하나님의 관계가 끊어진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돌아간 그 사람들이 여전히 남아 있는 죄의 영향력들을 제어하고 이길 수 있는 은혜를 공급받으면서 거룩함의 삶을 살아가고 창조의 원래 목적을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목회의 사명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 일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어나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오늘날 인간 사회를 보며 절망하고 낙심합니다. 너무나 불의하고 부도덕하고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멀고 심지어는 기독교 안에서도 하나님이 성경을 주신 참 뜻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그러한 교회들이 우리 안에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을 이루기 위하여 가장 필요한 것은 회심입니다. 그래서 존 오웬 목사님은 자기의 책 속에서 우리의 목회의 본질을 두 가지로 요약을 했는데 회심과 회심의 은혜의 보존이라고 하였습니다.
신학적으로 회심(conversion)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중생은 하나님이 동력적인 사역으로 씨를 심으시지만 그러나 그것이 의식 속에서 나타나서 회개와 예수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회심입니다. 이 회심은 성경 속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협력하는 작용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중생을 촉구하는 명령은 나타나지 않지만 회심을 촉구하는 명령은 많이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회개하는 인간들을 하나님은 돌이키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목회의 최고의 영광은 회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우리가 아무리 작은 교회를 목회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예배시간마다 주님을 만나고 죄에서 돌이키고 예수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믿는 회심의 역사가 일어난다면 그 교회는 하나님 앞에 결코 작은 교회가 아닙니다.
이렇게 회심한 사람들은 단순한 복음의 선포로 회심할 수 있습니다. 저의 목회의 경험을 보면 죄인들을 회심하게 돕는 일도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회심한 사람들이 회심한 은혜를 보존하고 계속해서 거룩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게 하는 것은 회심을 하도록 돕는 일보다 열배 백배나 더 힘든 일입니다. 사람들을 회심하도록 돕는 것은 잘 정리된 설교와 강력한 성령의 역사만 있으면 설교자를 도구로 사용하셔서 얼마든지 많은 사람을 회심 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회심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신학공부가 필요하고 아주 치밀한 하나님의 말씀과 믿지 않는 죄인들을 승복시킬 수 있는 논리의 퇴로를 차단할 수 있는 더 상세한 논리와 신학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저의 생각으로 보면 오늘날 한국교회는 목회의 본질 두 가지가 모두 현저히 부족합니다. 점점 더 교회 안에는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고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조지위필드는 교회의 독이라고 했습니다. 특히 목회자들 가운데서도 회심하지 않은 사람이 있어서 당시에 위필도로 하여금 걱정하게 만들었다는 얘기는 당시에 유명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이런 속에서 사람들에게 과연 회심이 가능한가? 회심을 목표로 목회를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진지하게 물어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지난 한해 목회를 하면서 몇 명이 나의 설교 혹은 가르침을 통해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회개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만나 진정한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를 우리는 되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20년 동안 교회를 개척해서 이제껏 섬겨오면서 느낀 사실이 이것입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착해도 목양이 불가능합니다. 어느 청교도는 말하기를 회심하지 않은 선한 교인은 길들여진 짐승이라고 까지 얘기했습니다. 회심하지 않으면 하나님 사랑하지 않고 거룩한 교회에 대한 사랑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회심의 문제를 진지하게 되물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회심, 죄를 지적하고 그들이 거듭나고 중생케 하는 강력한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기 보다는 오히려 사람들이 있는 그 모습 그대로를 교회가 받아주고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모든 가르침들을 왜곡시켜서 그 사람들에게 맞추는 경향들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이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복음의 능력을 가지고 사람들을 회심하게 하는 놀라운 역사가 우리의 목회의 현장 속에서 일어나야 하고 이 일을 위해서 목숨을 걸지 않는 목회자는 선한 목자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Ⅱ. 개혁신학에 피를 바르라
A. 액체의 개혁신학
우리와는 신학이 다른 알미니우스적인 사상을 가진 청교도이긴 했습니다만 리처드 백스터라고 하는 목회자는 자기의 회심이란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 회중들에게 한 설교입니다. 나는 하늘나라에 갈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내가 맡았던 많은 영혼들이 지금 어디 있냐고 물을 때 내가 무어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쉼 없이 말씀을 전하고 눈물로 기도하며 복음을 외쳤으나 여러분이 믿지 않았다고 나는 주님께 말씀드려야 할 텐데 그때 내 눈에 눈물이 시냇물처럼 흐를 것입니다. 여러분이 없는 천국에 어떻게 천국일 수 있겠습니까? 그분이 비록 나와는 신학이 다르지만 청교도들 중에도 그렇게 절절한 애절함을 가지고 회심을 외친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목사님이 가신지 사백년이 지났는데 거기에서 만난 어떤 교인들은 보지도 못한 리처드 백스터 목사님을 아직도 열렬하게 그리워하고 있는 정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개혁신학, 혹은 청교도 신학에 피를 바르자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원래 개혁신학은 액체의 신학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생애는 액체의 생애였습니다. 땀 흘리신 생애였고 눈물을 쏟으신 생애였고 마지막에서는 십자가에서 자기의 피를 쏟아 우리를 구원하신 생애였습니다.
위대한 종교개혁자들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들 중 평탄하고 안일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누가 있습니까? 우리들이 알고 있는 존경할만한 모든 목회자는 탁월한 사람들이었지만 동시에 우리와 똑같이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도 여러 가지 오류와 문제들이 있었고 심지어 종교개혁가들 까지도 성적인 추문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살아냈던 훌륭한 삶은 결국은 고난의 연대기였습니다.
칼빈 오백주년을 기념해서 어렵게 여행을 했습니다. 마틴 루터의 유적을 돌아보는 동안에는 감동은 받았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사람과의 삶과는 비교될 수 없는 처지이고 두 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나도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저런 삶을 살았을 것이라는 자신이 추호도 들지 않았습니다. 감동이 되고 그저 은혜만 받을 뿐입니다. 그런데 루터의 유적지를 돌고 칼빈의 유적지를 갔습니다. 피에르 예배당에 가서 앉았는데 갑자기 눈물이 확 쏟아지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나와 너무 비슷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똑한 콧날에 세르베투스를 죽여 버린 사람이라고 오해되는 그 날카로운 이미지에는 맞지 않게 예배당에 있는 그 수많은 우상들이 그냥 있었겠습니까? 석상들, 그것이 칼빈입니다.
서른 한가지의 질병을 짊어지고, 어떤 심리학자들이 칼빈을 테스트를 했는데 심리학적으로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냥 조용히 앉아서 글 쓰고 선비노릇하고 수줍은 체 하다가 죽을 사람이지 그런 사역에 종사해서 역사를 움직일 그런 인물이 아닌 것입니다. 자기의 본성에 전혀 안 맞는 일에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목회를 했습니다. 그는 카리스마 넘치는 마틴 루터와 같이 혁명가 기질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설교시간에는 과격한 언어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가 남긴 기도는 그의 성격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설교하러 올라갈 때마다 나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나도 한 마리의 양으로서 양들에게 설교하니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합니다.
(예화) 여러분은 역사 속에서 칼빈이 제네바에서 쫓겨났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슈트라스부르크로 가서 아버지와 같은 마틴 부처 밑에서 진짜 목회다운 목회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오게 된 동기가 그 유명한 샤돌레트의 서신 아니었습니까? 공식적으로 샤돌레트가 공개질의서를 보냈는데 제네바 교회에서 보니까 신학적인 답변을 할 만한 사람이 칼빈 선생 밖에 없었습니다. 모셔왔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가 놀랍게 부흥을 했습니다. 칼빈이 목회할 때 오천 명 모이던 교인이 칼빈이 임종할 때쯤 만 오천 명이 넘었습니다. 시의회에서 무시할 수 없는 교회의 규모가 되었습니다. 그때에 카톨릭에 비해 개신교가 너무 부흥을 하고 수많은 난민들이 그곳에 와서 주님을 만나고 거룩하게 사는 모습들이 카톨릭 지도자들에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저 위대한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우리는 말만 하지 말고 칼빈이라는 위대한 사람을 한번 만나러 가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로마 교회의 유명한 사람이 칼빈을 찾아 갔습니다. 두드렸더니 종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가 칼빈 선생님 댁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난 카톨릭의 누구누구이다. 종의 모습이 바짝 마르고 키가 작고 구부정하고 초라한 옷을 입었습니다. 가서 선생님께 여쭈어라 우리가 왔다고 말하십시오. 칼빈이 제가 칼빈입니다. 거기에서 카톨릭의 사람들이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 이 개신교의 힘이 여기에서 나오는구나.’ 역사를 개신교 사람이 옮겼으니 감동적으로 각색을 좀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자신들은 지위만 높아지면 복장과 호사스러운 생활에 신경을 쓰는데 하인 하나 없이 살면서 종처럼 나와서 손님을 맞으며 제가 칼빈입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 연약한 사람이 온갖 시련에 시달렸습니다. 기억나는 것만 대충 얘기해 봐도 엄청난 시련을 당했습니다. 헤에르노볼셋 같은 사람이 칼빈을 동성애자로 묘사를 해서 최근 연구에 의하면 이백년 동안 유럽에서 칼빈 책이 읽히지 않게 하는데 성공적인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수많은 이단들과 맞서면서 고통을 받고 살았던 그 사람을 보면서 너무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내가 종교개혁 시대 때 태어나면 루터처럼 강해질 수는 없겠지만 칼빈처럼 약해질 수는 있었겠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습니다.
왜 종교 개혁자들을 그렇게 존경하고 심지어 우리 개혁주의에서는 칼빈이 마치 교주나 되는 것처럼 그렇게 떠받들고 옛날에 어느 교수님이 수업시간에 비꼬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총신에 와서 보니 바이블 새드 하면 토를 달아도 칼빈 새드 하면 토를 안 단다는 것입니다. 바이블 새드 할 때 토를 달면 학문이 깊은 사람이라고 이해하지만 칼빈 새드 했는데 토를 달면 이것이 비칼빈주의자임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과연 칼빈이 그런 식의 신학함을 원했겠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칼빈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넓은 지성의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최근 유럽에 가서 귀한 책 한권을 얻었는데 1905년도에 나온 불란서의 자료인데 제네바 아카데미에 모든 역사가 그 안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졸업생들 명단까지도 다 나옵니다. 그것을 보면서 제가 깊이 충격을 받았던 것이 신학교 교과목 3분의 2가 인문학입니다. 그리고 법률과 의학, 수학까지 제네바 아카데미 신학 과정에서 가르쳤습니다. 그것이 칼빈의 주도하에 짜여 진 커리큘럼이었습니다. 프랑스의 단내오라고 하는 종교개혁 신학자는 자기가 많은 신학교에도 불구하고 랑데르다노라는 신학교인데 그 학교에 입학 한 것을 무한히 자랑했는데 온 유럽에서 이러한 화려한 신학을 학문의 정수를 공부할 수 있는 이런 혜택을 주는 대학이 카톨릭을 제외하고 여기가 최고라는 것입니다. 인문주의에 산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청교도들의 신학을 그대로 전수받고 있는가 입니다. 칼빈 신학교란 학교에 가서 한 클래스에서 초청 교수로 강의를 하게 되었는데 기독교 강요를 읽어 본 사람을 손들어 보라고 했는데 60명 중에 2명이 손을 드는 것입니다. 칼빈 신학교에서도 그러니 다른 신학교에서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떠받들면서도 실제로 그렇게 탐구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우리의 마음속에 아이돌 가수처럼 칼빈이 자리 잡고 못생긴 사람이 화장품 광고 모델 보면서 자기도 좀 크림이라도 바르면 저 여자처럼 되려니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왜 그러면 종교개혁자들의 신학도 전수가 안 되고 신학은 어느 정도 전수가 된다고 할지라도 그 spirituality가 전수되지 않는가 입니다. 이것은 치열한 삶의 부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나는 여러분 모두에게 이해를 구하면서 농담반 진담반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사님 청교도 좋아하십니까? 물론 좋아합니다. 그리고 30대에는 청교도에 푹 빠져서 유학을 해서 공부한 것은 아니지만 틈나는 대로 책을 읽었고 지금도 영국 청교도 책만 3500권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랑했습니다. 제가 그 사람보고 얘기 했습니다. 나는 청교도를 좋아하지만 청교도 좋아하는 사람은 난 싫습니다. 왜 그러냐고 하기에 제가 얘기 했습니다. 청교도는 너무 좋아하지만 청교도 좋아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이유는 청교도 때문에 그 사람들이 싫은 것이 아니라 청교도를 잘 못 카피 하고 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이 있는데 그분도 개혁주의 청교도에 심취한 분이십니다. 자기 교회 부목사에 대해서 한탄을 합니다. 기도도 안하고 새벽기도 나오라고 하면 피곤하답니다. 어떻게 담임목사가 새벽기도 나오라고 하는데 요즘은 부교역자들이 간이 배 밖으로 나왔습니다. 어떻게 피곤하다고 합니까? 그리고 뭐라고 하는가 하면 풀타임 부목사들에게 제발 일주일에 다섯 가정만 심방해 달라고 애원을 하는데 안하는 것입니다. 그럼 뭐하냐고 했더니 언제나 강대로 돌진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합니다. 새벽기도 설교를 맡기면 오십분을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새벽기도 안 나와 버립니다. 이래서 청교도 좋아하는 사람은 난 싫다고 하는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보통 두 시간 세 시간 설교한 사람도 있다고 얘기를 합니다. 자기가 개척해서 그렇게 하라고 하십시오. 남의 교회에서 그러지 말고 말입니다. 그러니 담임 목사가 교회를 비우면 교인들이 새벽기도를 안 나오는 것입니다. 부목사 순서 끝날 때까지 안 나오는 것입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우리 심리에는 대리 만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방위 나온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화가 람보입니다. 못생긴 여자들이 즐겨보는 프로가 미녀들의 수다입니다. 그 수다에 참여하면서 들으면서 자신도 그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을 느낀 것입니다.
청교도를 엔조이하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은 그 시대를 살았고 우리에게는 우리의 시대가 있습니다. 모든 개혁신학주의 자들 가운데 온전한 모든 사람들은 개혁신학을 하는 목표가 청교도나 개혁신학을 하는 이 시대에 똑같이 카피하는 것이 청교도나 개혁신학의 목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대를 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처해 있는 이 삶의 상황과 시대의 상황 속에서 소명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청교도들과 개혁주의 신학을 잘 연구하고 연구하면서도 항상 역사 신학을 같이 공부해서 개혁주의를 사람들이 각자 이것이 개혁주의라고 이야기 하는데 스펙트럼이 무지개빛입니다. 그 많은 스펙트럼 중에서 모두를 따라갈 수 없으니까 자신이 어느 하나를 택합니다. 어느 하나를 택해도 좋은데 항상 그 넓은 스펙트럼의 개혁주의를 역사적으로 이해하면서 자기의 노선을 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학공부에 있어서 소위 이야기하는 우니베르따스, 스삐끼알리따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니베르따스는 보편성입니다. 우리들이 신학을 하게 되면 우리는 먼저 개별적인 스삐끼알리따스라고 하는 개별성으로 시작합니다. 장로교 집안에서 태어나서 고신측 사람입니다. 그러면 고신측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그것에 충실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그렇게 하면 충분할지 모르지만 목회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신학교에 가서 저기 초대교회 신학부터 배우고 신학의 영향을 믿던 철학부터 시작해서 유대교까지 광범위하게 공부하면서 우리가 믿는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것이 맨 처음 사도바울이 다 그려놓고 죽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구체화 되고 그것이 속사도 교부들을 통하여서 초대교회 교부들로 이어지고 이레네우스와 테레툴리아누스 같은 사람에 의해서 집대성이 되고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사람에 의해서 거대하게 구축이 되고 그것이 중세로 흘러가고 거기에는 옳은 것과 그른 것이 분출하는 화염처럼 섞여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보편성을 고려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생각할 때 소통이 가능해지고 양보하고 융통성 있게 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이고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들이 판단이 서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어느 교회에서 교회를 깨끗하게 리모델링했습니다. 교인들이 주일날 자꾸 커피 마시러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자판기를 몇 대 사다 놓으셨습니다. 장로님이 기도하러 올라가신 것입니다. 하나님 흑흑흑 드디어 우리 교회에 자판기가 들어왔습니다. 주님은 교회를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하셨는데 장사가 시작 됐습니다. 우리 장로들이 교회를 잘 못 섬겨서 이런 죄를 저지르고 있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그런 사람들하고 어떻게 대화가 되겠습니까? 목사님이 자판기 팔아 버리고 끝냈답니다. 또 한 교회에서는 하나님 거룩한 성전에 드디어 기타가 들어왔습니다. 어찌해야 합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풍금이거늘 어떻게 주의 성전에 세속적인 기타가 들어올 수 있습니까? 이것은 근본적으로 정신질환적인 현상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 지도자가 되면 안 됩니다.
좋은 신학에 피를 바르라 이 신학이 정말 목회 속에서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는 치열한 경건과, 경건의 실천과 목회의 삶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많이 염려하고 있는 것은 기도하지 않는 개혁주의는 아주 기형적인 바리새주의를 만들어 냅니다. 현저하게 기도가 약해진 것은 사실이고 자유주의 신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기도를 잘 안하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은혜의 수단을 믿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개혁주의는 아니지 않습니까? 박윤선 박사님이 자기 제자에게 쓴 편지를 한번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유학간 자기 제자에게 편지를 쓴 건데 ‘아무개 목사 기도 많이 하세요. 기도 안하면 자유주의자 됩니다.’ 그 분은 자유주의 모든 문제가 치열한 경건의 부재라고 본 것입니다.
B. 치열한 경건의 실천과 목회
좋은 개혁주의 사상을 가졌으면 열렬하게 기도해야 되지 않습니까? 칼빈은 기도의 사람이었고 마틴 루터가 두 시간씩 세 시간씩 기도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지 않습니까? 쯔빙글리, 블링거 모두 기도로 소문이 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철저한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배웠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기도안합니까?
(예화) 제가 어느 학교라는 이야기는 안하겠습니다. 제가 그 학교 교수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너무너무 가슴 아파했습니다. 당신네 개혁신학 가르치는데 내가 우연히 LA에 집회를 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목사님이 나를 집회가 끝난 다음에 당신네 학교 이야기를 합니다. 아무개 학교는 개혁주의를 가르친다고 소문은 났지만 이력서가 들어오면 일단 그 학교 사람은 다 제합니다. 깜짝 놀라서 왜 그러나 했더니 불평이 많다는 것입니다. 논쟁적이라는 것입니다. 희생이 없고 공손하게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역자를 원하는 교회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학교 출신들을 다 빼고 다른 학교들을 가지고 이야기 한다고 합니다. 너무 마음 아픈 이야기입니다. 그런 것은 개혁주의가 아닙니다.
개혁주의는 눈물과 피와 땀을 먹으면서 자라난 나무입니다. 치열한 기도와 경건의 실천이 없는 사람은 개혁주의를 말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개혁주의를 부르면서 실제의 삶은 개혁주의하고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말로는 굉장히 쉽습니다. 돌아서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야비한 교회의 정치와 교단의 부조리들이 나오는 것 아닙니까? 우린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목회라고 하는 것은 누구에게 배워서 들려주는 전수가 아니라 자기의 몸과 인격 속에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예화) 중국의 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신농이라고 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최초에 중국에 의학을 체계화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살았던 삶이 어떤 삶이었는지 아십니까? 스스로 산에 올라가서 자기의 발에 돌로 찧어서 상처를 내고 각종 풀을 발라 봅니다. 이 풀을 바르니 상처가 덧나더라, 이 풀을 바르니 부기가 가라앉더라. 온 몸을 마루타 삼아서 연구해서 약재에 관한 의학의 이론을 정립했습니다.
청교도들이 주석을 쓸 때 주석 앞에 프렉티컬이란 말을 잘 붙였습니다. practical commentarium psalm 130, 유명한 존 오웬의 시편 130편의 주석입니다. practical commentary, 무슨 말인가 하면 성경을 차갑게 주석만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신앙과 경건 속에 적용하고 치열하게 살고 난 다음에 그것이 진실하다는 것을 입증한 후에 가르쳤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들의 가르침에는 피 묻은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예화) 감동적인 예화가 있었습니다. 교회에 전해 내려오는 야사에 의하면 요한 사도가 나이 많아 늙어서 너무 기운이 없어서 부축하고 간신히 올려 와야지만 강대에 의지하여 설 수가 있었답니다. 올라와서 기운이 없어 말도 잘 못하는 사람이 손을 높이 들고 사랑하는 자녀들을 축복하면서 자녀들아 너희는 서로 사랑하거라 그것이 예수 안에서 마땅한 계명이니라. 한마디만 하고 가면 온 교인이 눈물바다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삶 속에서 우러나오는 교훈인 것입니다.
대쪽같이 올곧은 청교도 개혁주의 설교를 하는 것도 좋지만 그것이 정말 올바르고 잘 정리되었는데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할 때 거기에 무엇인가 결핍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즘은 특별히 목회가 되든 말든 상관 안하고 나는 내 길로 간다고 하는 개혁주의 같은 것들이 나옵니다. 교회에 열 명, 열 다섯 명 모입니다. 생활이 안 되니까 사모님은 직장도 다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교인이 안 모이는 것은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이고 자기네 교회 교인이 안 모이는 것은 워낙 순수한 진리만을 말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의 교회에 교인이 모이면 하나님이 축복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남의 교회 교인이 모이면 분명히 세속적인 방법을 썼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목회는 흑백논리로 간단하게 되지 않을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개혁 한글 성경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일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은 자니라. 새 번역에서는 향락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만 나는 옛날 번역이 훨씬 잘 된 번역이라고 봅니다. 여기에서 일락은 적극적으로 방탕에 빠지는 향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목표가 없는 생활과 모든 삶을 일락이라고 규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죄짓고 타락하고 이렇게 함으로서 일락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치열하게 오늘도 눈물 흘릴 수 있는 목표가 없고 목숨을 버릴 수 있는 목표가 없다면 그것은 살아 있으나 죽은 사람입니다.
(예화) 어느 가을에 어느 젊은 목사님이 교회 마당에서 저를 만났습니다. 나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선배님 능력 있는 목회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내가 어떻게 그것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나도 능력이 없어서 늘 하나님께 고민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이십년 세월을 지내오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목회자의 자기 죽음 이것이 놀라운 생명력 있는 목회의 비결입니다. 문제는 청교도와 개혁주의를 좋아하지만 그들이 갔던 죽음의 길은 싫습니다. 그러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60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세포는 3개월이면 모든 세포들이 3개월 전의 세포가 아니고 수명을 다해서 끊임없이 갱신되는 것입니다. 뇌세포만 예외입니다. 뇌세포는 한번 죽으면 생성이 안 됩니다. 세포가 죽는데 두 가지 종류의 죽음이 있습니다. 하나는 네크로시스의 죽음입니다. 이것은 세포가 타박상을 입거나 수명이 다해서 죽는 것입니다. 세포의 괴사라고 합니다. 아포토티스의 죽음이 있습니다. 이것은 과학도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살아 있는데 자살을 해 버리는 것입니다. 왜 자살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자살할 때 ATP라는 에너지를 옆에 보내고 그 에너지를 동력원 삼아서 옆에 세포가 공장을 돌리고 다시 세포를 분열하는 것입니다. 저녁 때 삼겹살 먹고 자면 아침에 배가 나오는 것입니다. 왜 죽는지 모릅니다. 비유하자면 우리 몸에 60조 개의 꼬마전구처럼 되어 있어서 깜빡 깜빡하면서 수없이 많은 세포들이 자살하며 죽는 것입니다. 그 죽음을 통해서 생명이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세포들은 안 죽겠다고 합니다. 살아 있으려니 양분을 막 빨아들이는 것입니다. 죽진 않으니까 양분을 가지고 계속 세포를 키우는데 이것이 암입니다. 암에 걸려 죽는다는 것은 죽는 세포 땜에 죽는 것이 아니라 안 죽으려는 세포 때문에 결국은 살아있는 몸 전체가 함께 죽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아포토시스의 죽음을 죽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이 목회자입니다. 목사들이 모여 앉아서 자기가 목회하는 교회에 대하여 울분과 상처를 털어 놓습니다. 충분히 동정이 됩니다. 목회를 십년 십오 년을 해도 백만 원을 쓸 수 있는 권리를 장로들이 안 줍니다. 최근에도 나와 같이 목회하던 형제가 있었는데 옛날에 담임 목사님 찾아가서 물어 봤답니다. 목사님 그때 왜 그리 전도사 월급을 짜게 줘서 굶느니 먹느니 하게 하셨습니까? 목사님이 은퇴하셨는데 눈물을 죽 흘리시면서 정말 미안하다며 자기에게 부교역자 월급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안 줬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제야 실토를 하는 것입니다. 어찌 울분이 없겠습니까? 인간적으로 깊이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간직하면서 목회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병이 되고 목회가 목회되기 어려운 것입니다.
저의 경험은 그렇습니다. 교인이 늘어나면 목회가 죽도록 힘이 듭니다. 사백 명에서 오백 명 될 때 죽을 것처럼 힘들었고 천명에서 천오백 명 될 때 죽을 것처럼 힘들었고 이천 오백 명 될 때 또 죽을 것처럼 힘들었습니다. 지금도 힘이 듭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수천 명을 목회하는 것이 힘들지만 그 정도 고생 안하고 밥 먹는 사람 없습니다. 그 정도 목사 대우 받으려면 세상에 가서도 그 정도 고생은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몇 천 명을 목회하는 것 보다 더 힘든 것이 있는데 한 사람을 목회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어느 목사님은 사모랍니다. 그러니까 목회가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의 말을 잘 듣습니까? 오죽했으면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런 말을 했겠습니까? 하나님 참 이상합니다. 내 마음이 손더러 명령하면 말을 잘 듣습니다. 발더러 명령하면 저리로 가라 하면 갑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내 마음에 명령하면 왜 내 마음은 그 명령을 안 듣는 것일까요?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 하니
우릴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설교원고는 주석에서 나오지만 말씀을 전할 때에 말씀이 충천하는 화염과 같이 성도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그 말씀이 자신에게서 체험된 말씀이어야 하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그 시간에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있습니다.
정말 열심히 전도하는 목회자들 있습니다. 이 사람들 불러다가 전도 강의를 시켜보니까 원고고 뭐고 다 필요 없습니다. 자기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면 그 자체가 도전이고 전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눈물을 흘리게 만듭니다. 기도 많이 하는 목사님은 기도 원고 필요 없습니다. 자기 삶을 이야기하면 기도 안하는 모든 사람이 부끄러워서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늘 탐구하고 학문에 헌신하는 목사는 따로 원고가 필요 없습니다. 자기가 평소에 살아가는 삶을 이야기하면 석 달이 지나도 책 한권 안 읽으면서 목회하는 사람들이 웁니다. 그럼 설교자는 이 셋 중에 어느 방면에 체험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세 방면 중에 어느 하나가 아니라 삶의 모든 방면에서 그런 체험을 간직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목회자의 삶이고 목회자가 하나님 앞에 살아가려고 하는 삶이 물속에 가라앉은 아홉 개의 얼음이라면 설교는 그 중에 하나이어야 되는 것이지 위로 올라온 것이 아홉 개고 아래에 있는 것이 하나 밖에 없는 그런 식의 얼음은 존재 할 수 없는 것입니다.
Ⅲ. 토혈의 목회로 나아감
(예화) 일본의 에도시대에 혼인보가의 쇼와라고 하는 명인과 이노우에가의 인데쓰라고 하는 바둑의 명인이 가문의 명예를 걸고 대국을 하게 되었습니다. 인데쓰가 흑을 잡았습니다. 놀랍게 바둑을 두면서 쇼와라고 하는 명인을 궁지로 몰아넣었습니다. 거의 패배하게 되었는데 대국은 바둑을 두며 쉬었다 하며 4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때 유명한 쇼왕의 제 3수라는 바둑이 나옵니다. 그 수를 두면서 판이 바뀌기 시작한 것입니다. 인데쓰는 쉬는 시간이 되면 잠을 못 이루면서 바둑만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저 사람을 꺾을까 고민을 하다가 결국 사일 만에 도저히 회복할 수 없게끔 패배가 명백해졌습니다. 그때에 나는 당신에게 졌습니다고 말하면서 너무 억울해서 피를 토하고 엎어져 버렸습니다. 역사에 지금도 내려오는데 토혈국이라는 기보입니다. 그리고 집에 가서 한달 동안 앓다가 죽었습니다.
오락을 두다가도 너무 좌절이 오면 피를 토하고 죽는 사람이 있는데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목회자가 되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으로 이 인류를 돌이키기 위해서 목회사역으로 우리가 부름 받았다는 사람들이 오락을 하는 인테쓰와 같은 사람 마음 안에 있는 열정만큼도 없다면 우리가 과연 예수의 사람입니까? 나는 목회하는 우리 후배들과 동료들을 보면 너무 많은 사람들이 열정이 없습니다. 이해는 갑니다. 그들도 처음에는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런데 장로들이 방해하고 교인들이 싫어하고 능력이 부칩니다.
(예화) 집회를 갔더니 어느 교회 젊은 목사가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나에게 하소연을 하는 것입니다. 제자훈련 해보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데 방 하나만 만들어 달라고 해도 안 해준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새로 짓겠다는 것이 아니라 있는 방 도배하고 새로 수리해서 제자훈련 할 수 있는 방 하나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장로들이 돈 아깝다고 안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빌딩 두 채를 가지고 있으면서 추수감사헌금을 이천 원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가슴에 맺힌 것이 많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러니 모든 열정이 다 죽는 것입니다. 원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 때문에 목회에 들어 선 것이 아닙니다. 넘을 수 없는 것은 물이 돌아갑니다. 그런 사람은 돌아가고 설득하고 그래도 안 되면 되는 한도까지 우리들이 최선을 다해서 목회를 해야 됩니다. 남의 교회 보듯이 집어 치우면 됩니까?
부교역자를 뽑을 때 뽑고 나서도 항상 물어봅니다. 담당이 뭡니까? 유년주일학교 전공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유년주일학교 사역을 가장 잘 하고 있는 교회가 어디입니까? 모르겠습니다. 유년주일학교 사역자 중에 당신이 그래도 본받고 싶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모르겠습니다. 국내에 없으면 그러면 외국을 이야기 해 보시오. 전 잘 모릅니다. 그러면 전 이야기 합니다. 당신은 두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전대미문의 유년주일학교 역사를 스승이 필요 없을 정도로 새로 써가는 사람이거나 우물 안에 개구리로 그저 내가 하는 것이 최고려니 하고 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래도 전자의 사람 같지는 않으니 다른 교회를 찾아보십시오. 나는 스승이 없는 학생은 유통기한이 표시되지 않는 제조사가 없는 비닐봉지에 들어 있는 식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아무리 싸도 그런 식품 사먹지 않습니다.
왜 배우지 않습니까? 개혁주의 목회 청교도 목회 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가르치려만 하고 배우려 안합니다. 새 가족 사역을 배우라고 했더니 거기는 알미니우스 주의이기 때문에 거기 가서는 배울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전대미문의 사역사를 쓰던지 똑같은 개혁주의 하는데서 배우든지 해야 되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진정으로 목회를 한다고 하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과 부활의 은혜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움직였던 위대한 소명의 출처가 바로 그것입니다. 유대교를 믿으면서 예수는 이단자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했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습니다. 혼란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저주를 받아 나무에 매달려 죽었으면 하나님이 살리셨을 리가 없고 살리실분이라면 죽으실 수가 없는 건데 어떻게 이 상반된 두 가지 사실이 양립할 수 있는가 입니다. 그때 깨달은 것이 그가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이지 자기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속의 교리를 발견하면서 소명이 불타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자가 되는 조건 목회자가 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십자가의 예수를 만나는 것 없이는 누구도 목회자와 신학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예화) 어느 투수가 스스로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한번 기가 막힌 변화구를 던지고 싶은데 신체적인 결함이 있습니다. 손가락이 짧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손가락 사이에 막이 너무 높습니다. 이 사람이 외과에 가서 찢어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손가락 1,2㎝찢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너덜너덜해질 것 아닙니까? 기형이 됩니다. 완치되고 나서 그렇게 좋아합니다. 드디어 원하는 공을 던질 수 있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목회자들 만나면 목사님 전도 좀 하시죠 하면 목사님 제가 달란트가 전도가 좀 약합니다. 달란트와 소명은 다른 것입니다. 달란트는 있으면 하고 없으면 못하는 것이지만 사명은 있어도 해야 되고 없어도 해야 됩니다. 사도 바울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랬습니다. 행정을 그렇게 해야 되겠습니까? 행정을 좀 똑바로 하십시다. 전 원래 설교에 달란트가 있지 행정에 달란트가 없습니다. 큰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설교는 아홉 번만 못하고 한번만 잘하면 교인이 아홉 번을 다 용서해줍니다. 다음에도 언젠가는 그 홈런이 터질 거라고 예상을 합니다. 그러나 행정은 백번 잘하다가 한번만 잘못되어도 교회를 시궁창에 꿇어 박으면 그 다음에서 부터는 여태까지 아흔 아홉 번 잘한 것 하나도 기억안하고 교인은 늘 불안한 것입니다. 뭔가 그 목사님이 결정하기만 할 것 같으면 왠지 뭔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이 드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농담 삼아 그러는데 자기가 여태껏 설교 못해서 쫓겨난 목사는 하나도 못 봤고 행정 못해서 쫓겨난 목사는 많이 봤답니다.
제가 아는 노회에서 한 목사님이 주례서달라고 해서 주례를 서줬는데 한 사람이 불신자입니다. 노회에서 면직 당했습니다. 얼마든지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목사들이 돈 떼먹었다고 막 신문에 나고 하는 것 실제로 떼먹은 것도 있지만 제가 아는 친구 목사 하나는 땅을 치면서 후회를 했답니다.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을 후회를 했습니다. 무엇이든지 치열하게 배워서 살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목회의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데 그 현실에 순응하는 것은 어떤 이유로든지 충성된 삶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자기의 생명을 방해하는 죽음의 세력과 마지막 숨넘어갈 때까지 싸우는 것이 생명의 정체입니다.
(예화) 싸워야 되는데 그 시간에 강의를 갔습니다. 친구목사가 이야기를 합니다. 이 시골에는 비전이 없다합니다. 비전은 무슨 얼어 죽을 비전인가? 여긴 다 노인네들 밖에 없고 전도사 좀 쓰려고 해도 시골이어서 안 온다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없는데 무슨 목회의 꿈이 있냐고 합니다. 당신이 그렇게 젊은이가 좋으면 신촌에서 교회를 개척해야지 왜 여기 와서 있냐고 했습니다. 당신의 비전은 여기 늙은 할아버지들 전도해서 열심히 말씀 전하라고 했더니 설교 준비해도 듣지도 않고 들으나 안 들으나 마찬가지랍니다. 그래도 힘써서 하고 죽으면 염해서 화장해주고 가족들 위로해주고 그렇게 해서 이 동네 사람 다 죽으면 당신 소명 끝나는 것입니다 하고 말했더니 목사님은 전혀 은혜를 안 받고 옆에 있는 사모님이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예화) 우리가 아웃리치를 여름마다 나갑니다. 교인들에게 엑기스 있는 청교도 설교를 먹입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운동을 해서 살을 빼야 됩니다. 여러분 애들 갖다 놓고 운동도 안하고 고칼슘에다 고칼로리로 퍼 먹이면 돼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해도 안 합니다. 우리는 17년 전부터 아웃리치를 갔습니다. 올해 아웃리치를 갔는데 2박 3일 갑니다. 1550명이 갔습니다. 다 자기돈 내서 이틀 동안 열렬하고 전도하고 옵니다. 그중에 한 교회인데 연천에 있는 교회입니다. 내가 봐도 그 교회는 농촌교회도 아니고 도시교회도 아니고 아주 애매합니다. 교인이 안 모입니다. 그 교회가 백년이 되었다고 하는데 자기가 가니까 교인 60명도 안 모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후배가 목회를 참 잘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나 했더니 감동적인 이야기를 털어 놓습니다. 아무리 여기에서 개혁주의를 외치고 해도 사람들이 들으러 오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기도를 많이 하면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더니 지혜를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서울 외곽지역이어서 비닐하우스가 수없이 많습니다. 거기에서 일하는 사람 외는 전도할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모두 직장가고 그래서 사모님이 아이디어를 발휘해서 고물상에 우연히 갔는데 빵 기계가 고물로 나온 것입니다. 오십 만원을 주고 빵 기계를 샀습니다. 사모님이 배워서 밀가루를 사서 빵을 거기에다 구운 것입니다. 돈이 없으니까 한 300개쯤 월요일마다 구워서 시원한 냉커피를 타서 비닐하우스에서 일하는 사람은 겨울에도 땀을 뻘뻘 흘린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쉬는 시간이 언젠가 하고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갓 구워온 빵을 한 개씩 주면서 커피를 따라 주니까 그런 것 왜 가지고 오냐고 부담스럽다고 싫다고 합니다. 그래도 가서 이야기 부치면서 동네사람이라고 하니까 쉬는 시간에 따끈따끈한 빵을 허기진 데다 냉커피까지 주니까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한번이 아니라 매주 쉼 없이 어떤 때는 일주일에 두 번씩 계속 하는 것입니다. 동네사람들에게 목사님이 엄청난 존경을 받습니다. 얼마나 재밌는가 하면 다음 주는 추수감사절이기 때문에 다음 주는 다 오셔야 됩니다. 하면 모두 봉투를 들고 동네 사람들이 온답니다. 추수 감사절 축의금 내러 왔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놀랍게 그 사람들 모두는 아니지만 그렇게 접촉점이 생기면서 그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니까 그 아줌마들의 전도를 받으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생겨나서 최근에 2-3년 동안에 60명을 전도 했다는 것입니다. 내일이 아닌데도 너무 감사하고 기뻤습니다. 나의 꿈은 제발 농촌에 있는 교회들이 이렇게 도시 교회들이 헌신해서 살아나기를 바라는 마음, 한때는 제 마음 속에 하나님 일천 개의 시골 교회를 저에게 주십시오. 텅 빈 교회들이 백 명씩만 꽉 찬다면 십만 명이 되는 것입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런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예화) 나는 여러분에게 이 강의를 마치면서 아주 감동적인 강의 하나를 드리고 이 강의를 마치려고 합니다. 1997년도 8월의 일이었습니다. 그때도 우리가 국내 아웃리치를 나갔습니다. 원래 이 취지는 사방 4㎞안에 교회가 없어서 복음을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 간 것이었습니다. 그 중에 가장 가까운 교회의 사람들하고 연결시켜주어서 예수 믿게 만들어 주는 것이 목표이었습니다. 그중에 간 교회 중의 하나가 고추장으로 유명한 임실 순창에 있는 임실 치즈로 유명한 임실에 있는 덕치 중앙교회라는 곳이었습니다. 아무 연고 없었지만 우리교회 전도사님이 그 교회 출신이어서 추천을 해 주어서 그 교회 전도하러 갔습니다. 그 교회에 12명의 청년과 장년이 갔고 전도 집회 하는 날 제가 가서 직접 전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강퍅한 마을인지 사람들이 전도하러 다니면 바가지에다 물을 끼얹고 빗자루를 집어 던지고 고무신으로 때렸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삽으로 흙을 파다가 청년들에게 막 던지는 것입니다. 그래도 생글생글 웃으면서 끈질기게 전도를 했는데 제일 좋아하는 것이 어깨 주물러 주는 것입니다. 어깨를 주물러 주면 처음에는 막 싫다고 하다가도 주물러 주면 시원하니까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그만두라는 말을 안 합니다. 그때 할 얘기 못할 얘기 다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 전도대원들을 찰거머리라고 불렀습니다. 처음에는 우리들이 도망을 다니는데 며칠 있다가는 그 사람들이 도망을 다니는 것입니다. 이 목사님이 우리 전도대원들과 같이 전도를 했는데 그때 갔을 때 그 교회는 열네 명의 교인이 모였고 목사님이 그 교회 부임한지는 6년이 지났고 목사님의 연세는 오십대 초반이었습니다. 4박 5일 동안 476가구 6개 마을을 다 전도하고 그 사람들의 회심 여부와 복음에 대한 태도까지 적어서 책으로 묶어서 목사님께 전도 자료로 주었습니다. 목사님이 우리와 함께 전도를 다니다가 깊이 주님을 만났습니다. 정말 주님을 만났습니다. 엄청나게 회개하면서 나한테 고백하기를 나는 게으른 목사였습니다. 6년이 되었지만 당신들 전도대원들이 3박 4일이면 다 도는 이 전도를 6년이 되도록 나는 다 못 돌았습니다. 그 다음부터 그 자료를 가지고 한 집 한 집 가서 예수 믿어야 된다고 전도를 했습니다. 추후의 거짓이 없습니다. 14명의 교인으로 문을 닫을 위기에 있던 교회가 6개월 만에 백 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를 듣고 회개할 것 같지 않는데 하나님이 영혼들을 너무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나 영양가 없을 것 같은 설교나 가르침인데도 하나님이 그것을 사용하셔서 노인들을 회개시키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해인가 어느 해인가 가서 우리가 복음을 열심히 전했더니 그 중 할머니가 듣다가 눈물 흘리며 청년을 나무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참 나쁜 아이들이라고 해서 할머니 왭니까? 했더니 그렇게 좋은 예수를 왜 이제야 나에게 말해 주는 것이냐 하며 할머니가 교회를 나오시는 것입니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인데 봉고를 몰고 노인들을 태우러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봉고차는 다 낡았고 미끄러우니까 할머니들이 안 오십니다. 목사님이 할 수 없이 교회 나오기 어려운 교인들을 찾아가는데 머리 하얀 할머니 한 분이 눈길위에 엎드려 울고 있는 것입니다. 깜짝 놀라서 이재실 목사님이 할머니 왜 그러시냐 했더니 내가 이제 늘그막에 예수님 만나서 이제 내가 교회가면 몇 회나 더 다니겠어? 난 눈이 와도 예수님 만나고 싶은데 미끄러워서 언덕을 못 올라가. 울고 있는데 보니까 고무신에 새꼬락지를 묶고 올라오다가 계속 미끄러져서 거기서 울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끌어안고 목사님도 울고 할머니도 울고 했습니다. 그 두부부가 얼마나 놀랍게 변화를 받았는지 없는 돈에 봉고 한 대를 더 사서 365일 하루도 안 빠지고 새벽 세시에 일어나서 교인들을 태우러 다니십니다. 그 시골교회에 새벽기도 사십 명씩 나옵니다.
열렬히 목회하다가 그만 암에 걸리셨습니다. 너무 안타까워서 입원비, 치료비 도와드리고 무기한으로 삼십만 원씩 생활비를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어제 그 목사님 돌아가셨습니다. 유언 비슷하게 이렇게 사연을 남긴 것을 가까이 있는 목사님이 나한테 보내 주었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저의 평생에 열린교회와 목사님을 만난 것이 큰 복이었습니다. 농어촌 전도의 첫 출발을 우리 교회에서 시작하셨습니다. 그때가 1997년 여름 8월 15일이 낀 주간이었습니다. 열두 명의 청년 전도 대원을 목사님이 보내주셔서 교회 전도에 커다란 힘이 되어 95명 전도가 처음에 교회 나오고 이후에 일 년 더 전도를 했는데 백 명이 넘는 영혼들이 교회에 찾아왔습니다. 천사도 흠모할 일들이 열린교회와 목사님의 기도와 협력으로 우리교회에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저 천국으로 목사님 먼저 갑니다. 목사님의 사역 위에 주님의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빕니다. 우리 주님이 기다리시는 저 하늘나라에서 그분을 뵙게 될 영광을 제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 지금은 떨립니다. 목사님과 교회에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어젯밤에 이 문자를 받으면서 교회에 일이 있어서 가지는 못했지만 같이 회의하는 중에 가슴속에 눈물이 한없이 흘렀습니다. 누가 그 목사님을 무명의 목사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누가 그 목사님을 작은 교회 목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목회입니다.
Ⅳ. 결론
희생이 없는 개혁주의는 말장난입니다. 그리고 개혁주의는 피와 눈물로서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혁주의에 헌신했던 목회자들 중에 꽃 상에 싸여서 호위호식하면서 죽은 목회자가 누구였습니까? 마틴 루터의 최후 여러분 알고 계시죠? 마지막 남긴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나 어릴 적 고향 아이슬레벤에 가고 싶습니다. 쯔빙글리는 마지막에 카펠 전투에서 죽어 시체가 다섯 토막으로 나고 각 한톤에 보내지고 다 불태워지고 악한 사람들은 그것을 빻아서 절구에 갈아서 돼지 사료에 섞어서 돼지들에게 뿌려버렸습니다. 이것이 개혁사상을 사랑하던 사람들의 최후요 희생이었습니다. 다행히 우리는 우리를 죽이는 시대에는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정신으로 오늘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하지 않습니까?
나는 어떤 성과를 이룬 목회자로서가 아니라 여러분과 똑같이 매일 죽고 매일 사는 목회자로서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풀잎에 이슬처럼 있다가 잠시 사라져가는 인생이고 이중에 어떤 분들은 은퇴를 십년도 못 남긴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남은 시간들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예화) 우리 노회에 은퇴를 앞 둔 목사님이 어느 날 특이한 간증을 하셨습니다. 밤에 자다가 잠을 깼는데 너무 무서운 꿈을 꾸어서 온 몸이 땀으로 젖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교회당에 있는데 예수님이 나타나셨답니다. 온 몸에 피투성이가 되고 가시면류관을 쓰고 나타나셔서 자기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꿈을 꾸었는데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답니다. 그리고는 그 밤중에 무엇인가 끌리듯이 예배당에 가서 밤을 새우며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이렇게 죽으셨는데 내가 이 정신으로 목회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이제 기회가 없습니다. 은퇴하셨습니다.
우리에겐 기회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 어제 죽어 간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 몸부림쳤던 내일인데 그들에겐 내일이 허락이 안 되었는데 우리에겐 허락이 되었습니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한번 토혈의 목회로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정말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릴 수 없다면 차라리 내가 강대에서 피를 토하고 죽어 버리겠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현실과 싸우고 몸부림쳐서 주님 앞에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인정을 받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