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음 깊이 사랑하는 교회가 있는가?
녹취자: 오희열
이번 공과는 “영원한 행복의 조건, 사랑”으로 다섯 과 정도를 넣었습니다.
1과는 “마음깊이 사랑하는 교회가 있는가?” 입니다. 이것은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 번 인생의 그래프를 그려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좋고 행복하고 기쁜 때가 언제였는지, 그리고 나쁘고 불행하고 슬플 때가 언제였는지 회고해보면서 여러분이 철들었을 때부터 시작해서 이런 식으로 그림을 그려보면 이렇게 나올 것입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계속 바닥으로 그려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답은 아니지만 행복했던 유년시절, 방황했던 청소년기의 고통, 그리고 회심의 기쁨.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젊음이 부러우신 분이 계시면 손 들어보십시오. 아무도 손을 안 드십니까? 계속 늙어 가십시오. 부러우신 분계십니까? 부러우신 분들이 계신데 사실 그것은 미성숙한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하나도 부럽지 않습니다. 물론 젊음 그 자체만 보면 허리도 아프지 않고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만 생각할 수는 없고, 젊었던 20대로 돌아가겠느냐고 물어본다면 저는 안 돌아갈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러실 리도 없지만 인생을 다시 한 번 살아보겠느냐고 해도 저는 “충분합니다.” 할 것입니다. 어쨌든 이런 그래프를 그려놓고 보면, 이 그래프도 제 생각에는 과장된 것이고 대부분 이렇게 나올 것입니다. 그렇게 그려지는 이유는 우리의 인생은 up and down 하면서 높아지고 낮아지는 때가 있는 것이고 앞으로도 우리가 자녀를 데리고 살아가는 한 우리의 행복이 나 혼자만을 되는 것이 아니라 거미줄처럼 다 연결되어 있어서 나에게는 아무 일이 안 일어나도 내 주위에 있는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그것이 내 삶 전체를 흔듭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가 인생의 기쁘고 슬픈 모든 순간들의 의미들을 찾아내고 그것을 때로는 객관적으로 보면서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지 못하면 우리의 인생이 요동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에서 신앙으로 들어오게 되면 여러 가지 그림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열린교회에 와서 처음 예수 믿고 신앙생활을 하신 분보다 여러 교회를 다니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분들은 이 그래프가 훨씬 더 많이 위 아래로 움직일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을 놓고 보면 이런 신앙의 그래프를 위로만 그리거나 밑으로만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우리 인생을 보는 관점처럼 신앙에도 고난이 오고 어려움이 오고 행복이 오는 모든 것들을 그 자체로 요동치기만하는 것도 우리 인생을 온전히 붙들어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생기는 많은 고난과 어려움, 기쁨들을 어떤 식으로 해석을 해서, 일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우리가 그것을 극복해 나가지 않으면 요동칠 수밖에 없는 것이 신앙에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문제 1번과 3번을 묶어서 해 보겠습니다. 읽어보겠습니다.
문제 1) 교회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 교회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문제 3) 시편 84편 1절의 말씀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실은 무엇입니까?
성경 시편 84편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읽어보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라는 것이 결국 무엇입니까? 교회라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몸입니다. 머리가 있고 몸이 있고 지체가 있습니다. 세 가지 지평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머리이신 그리스도, 머리와 몸, 몸과 지체, 이런 관계를 갖습니다.
요즘 “membership”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온갖 멤버십이 있던데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지체됨”입니다. “member” 라는 말 속에 “유기적”이라는 개념이 처음부터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그리스도에게 부어 주십니다. 그러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이 사랑이 교회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교회에 소속되어 있어서 이 사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 자체가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라고 하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통의 모상으로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삼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교회를 택하십니다.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교회를 사랑하게 됩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큰 아들이 진심으로 아버지를 사랑했으면 동생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와의 관계에 기쁨이 없기 때문에 아버지가 사랑하는 그 사랑에 참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똑같이 하나님은, 온 인류를 하나의 사랑으로 묶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 사랑이 바로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이렇게 한 개인에게서 하나님께로 상승하고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하강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사람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그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 때문에 교회와 모든 지체들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사랑의 원리입니다.
여기에서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에서 “장막”은 솔로몬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시점을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지만 일반적으로 볼 때 여기 “오엘”이라는 단어는 “천막”을 가리킵니다. “temple”이 아닙니다. 그 당시에 성전은 물돼지 가죽으로 만든 거무튀튀한 텐트로 되어있는 이동식이었습니다. 그것이 사랑스럽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거기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아름다운 것이고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아름다운 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아름답고 사랑스럽다고 묘사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 안에 있는 성도를 보여줍니다.
그 다음에 4번을 같이 읽겠습니다.
문제 4) 현대인은 교회의 전 포괄적인 목양을 부담스러워 합니다. 한 교회에 깊이 뿌리내리지 않은 채, 좋은 설교를 찾아 떠돌아다니고 스스로 필요하다 생각되는 목회서비스만 교회에 요청하며 자기 편의대로 신앙생활 하는 것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좋은 설교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은 그래도 좀 낫습니다. 뭔가를 들어보려고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목회 서비스를 교회에 요청할 때도 이런 것이라면 괜찮습니다. “나를 정말 잘 목양해 주는 교회는 어디인가?”, “나에게 그 맛이 쓰더라도 참 진리를 가르쳐주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혹은 “나에게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나를 훈련시켜줄 수 있는 교회는 어디인가?” 이런 것을 찾는 것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문제에서 말하는 목회 서비스는 자신의 편의를 위한 것을 말합니다. 요즘은 조금이라도 불편한 것을 참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 것이 종교에도 나타나게 됩니다.
그림에 보시면 이것은 야생마이고 이것은 잘 길들여진 말입니다. 야생마를 길들이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고 합니다. 야생마는 집에서 잘 자란 말보다 훨씬 강하고 힘이 있겠지만 통제가 잘 안 됩니다. 자기가 달리고 싶으면 달리고 달리기 싫으면 안 달립니다. 누군가를 자기 등에 태우고 달리는 것 자체가 익숙해지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외국에는 이런 대회도 있습니다. 사나운 야생마들을 데려다 놓고 실력이 뛰어난 조련사들이 그 등에 탑니다. 조련사가 말에서 떨어지지 않고 그 야생마가 사람을 태우고 똑바로 달리고 걷기 시작하면 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야생마들이 미친 듯이 몸을 흔들면서 올라탄 사람을 떨어뜨리려고 애를 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이런 것 느낀 적 없으십니까? 사람이 굉장히 헌신되어 있고 예의도 바르기는 한데, 무 같은 것을 보면 심이 박혔다고 하는데 무 안에 질긴 뼈대 같은 것이 생긴 것이 있을 때는 그것을 정상적으로 먹을 수 없고 파인애플처럼 속에 있는 그 심을 도려내고 먹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 마음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강하고 완고한 고집 같은 심이 있어서 누구도 꺾지 못하고 어느 한계까지만 다룰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데 결국 자신이 꺾어지지 않는 만큼 하나님의 사랑이 깊이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것은 결국 마지막에는 똑같습니다. 우리말에 “어떻게 부모가 자식을 이기겠느냐?”하는데 꺾는 부모들이 많습니다. 꺾지 못하는 이유는 부모가 그 자식보다 못나서가 아니라 자식을 너무 사랑하니까 상처받을까봐 차라리 부모가 꺾이고 마는 것입니다. 그게 꼭 부정적인 의미는 아닙니다. 모든 사랑은 결국 자기를 포기하게 만듭니다. 무엇이든지간에 말입니다. 그런 힘이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보겠습니다. 진리의 내용을 전달받지 못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갑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많은 성경지식을 제대로 전해주고 많은 가르침을 주면 그것으로서 자신의 신앙이 놀랍게 변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실 거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24년을 경험한 것입니다. 와서 그렇게 말씀에 은혜를 받고 마치 굶주린 아이가 밥을 퍼 먹듯이 미친 듯이 듣고 배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년에 1000개의 설교 테이프를 들은 사람을 보았습니다. 하루에 그 긴 설교를 세 편씩 들은 것입니다. 미국에서 만난 한 애독자는 두 달 반을 집 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고 하루에 열 시간 이상씩 설교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 노력이야 가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신앙은 지식을 습득하는 것만으로는 절대 무한대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지식 일변도로 신앙지식을 공급받으면서 자라도 그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는 깨닫는 기쁨들이 있겠지만 신자 안에 있는 죄가 인간의 지성이나 이성을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진리에 대해서 싫증이 나게 하고 세상 것들에 대해서 호기심을 갖게 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마음과 지성에 계속 영향을 미칩니다. 죄는 할 수 있는 한 궁극적으로 우리의 사고의 기능에 개입하고 싶어 하고 개입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 커다란 뿌리를 내리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공격을 합니다. 이런 경우에 뭘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렇게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말할 수 없이 중요하고 지식이 있어도 신앙이 잘못 될 수 있지만 지식이 없으면서 신앙이 탁월할 수는 없습니다.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런 지식을 배우면서 전방위적인 삶 속에서 그것을 적용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 것인가, 그것을 함께 고민할 수 있는 환경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에 나오는 것처럼, 마지막 때가 되면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 있는데 사람들이 신령한 목적을 위해서 모이는 것을 싫어하게 됩니다. 신앙을 위해서 모이는 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것을 위해서는 아주 탁월하게 사람들이 모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위해서는 모이기를 싫어하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공유하지 못한 채 지식만을 교회에서 얻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상적인 신앙생활이 될 수 없습니다.
때로는 외국에 나가 보면 열린교회의 설교를 정기적으로 청취하는 사람들이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정말 많습니다. 그 중에는 한두 번이 아니라 오래도록 장기적으로 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집회 앞자리에 앉아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듣는 사람들은 대부분 열린교회의 설교를 처음 듣는 사람이 아니라 오랫동안 들었던 사람들입니다. 집회가 끝나면 인사를 하면서, 이 사람은 7년 들었고 저 사람은 8년 들었고, 어떤 사람은 10년, 어떤 사람은 15년째라고 합니다. 그런데 참 특이한 것은 그 중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잘 합니다. 그중 한 자매가 미국에서 장문의 편지를 보냈는데 자기네 교회에 대해서 솔직하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네 교회 목사님의 설교는 그렇게 은혜롭지도 않고 교인들을 열심히 가르치는 교회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그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동네도 작고 교회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설교를 듣고 자기가 은혜를 잘 받은 다음에 자기네 구역식구들에게 가르쳐준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 사람이 신앙의 모본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렇게 가르치는 것을 교회에서 허락해 주겠습니까? 그 사람은 자기 교회를 너무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말씀을 듣고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섬기고 다른 사람들을 돌보고 봉사하고 선교하는 모든 삶의 과정 속에서 그 말씀이 삶 속에 어떻게 녹여지는지를 삶의 현장에서 체험하기 때문에 그렇게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에 어떤 교회가 한 사람에게 완전한 만족을 줄 수 있겠으며, 또 완전한 만족을 준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요구하는 것은 끊임없이 변합니다.
어떤 부부가 있었습니다. 결혼할 때는 당신을 만나서 행복하고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그렇습니까? 박희준 집사님, 그렇습니까? 그렇다고 큰 소리로 대답한다면 우리가 뇌물로 받아주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사랑하는 그 사람도 변하고 사랑을 받는 나도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부가 앉아서 이야기를 하는데 오래간만에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어느 날 생긴 것입니다.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나는 당신이 너무 사랑스러워.”, “그래서?”, “난 다시 태어나도 당신하고 결혼할거야.”, 아내가 짜증을 확 내면서 “당신은 왜 내세에도 자기 생각만 해?” 했답니다. 무슨 뜻인지 집에 가면서 생각해 보십시오.
전방위적으로 해야 합니다. 삶을 공유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면서 서로 삶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에 “내 삶은 부끄러운데 어떻게 하지?”할 수 도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부끄럽게 보인다고 “놔둬! 난 그냥 이대로 살 거야!” 한다면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옳은 줄 알았다고 돌이키는 사람을 보고, 잘못 나갔는데 그것을 거울삼아서 올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온 삶을 함께 공유하면서 서로 한 사랑으로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기를 힘쓰는 것을, 그것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 볼 수 있다는 것은 설교만 듣거나 책만 읽는 사람들은 도저히 따라 올 수 없는 세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지막 문제 5번입니다. 읽겠습니다.
문제 5) 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자신이 보다 온전해져 가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교회를 끝까지 사랑하는 일이 어려운 이유를 나누어 보고, 교회를 끝까지 사랑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가 얻게 될 유익은 무엇일지 생각해 보십시오.
삶에 다양한 상황이 찾아옵니다. 누구 한 사람도 대하소설의 주인공이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어느 정도 나이가 먹으면 길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신비롭게 보이는 때가 옵니다. 어떤 때는 가슴이 시려올 정도입니다. 버스 정류장 앞에서 혹은 백화점 앞길에서 혹은 학교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늙은 여자, 젊은 남자, 돈이 좀 있어 보이는 사람, 빈티가 나는 사람, 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신기하다. 저 사람이 태어나서 여태까지 살았네?” 살았다는 의미는 모든 환경을 헤치면서 어쨌든 살아온 것 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연이 있었을지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우열과는 상관없이 그렇게 역사를 짊어지고 헤치면서 살아 온 자체가 고귀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다 만납니다. 어떤 불행은 우리를 피해가지만 어떤 어려움은 우리를 정확하게 만납니다. 그래서 우리를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으로 데려갑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옛날에 교역자 한 사람이 저에게 “목사님, 건강관리 하셔야 합니다.”, “응, 그래.”, “요즘 남자의 평균 수명이 얼마인지 아세요?”, “78세라고 하던데.”, “목사님, 그것은 절반의 확률입니다.”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우리 모두 78세까지 살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기준으로 절반만 78세 이상까지 살고 절반은 그 전에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그 절반, 50% 안에 든다는 보장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교역자가 하는 말이 재밌습니다. “건강관리를 평균적으로 하셔야 78세까지 사십니다.” 너무 평범한 사실인데 섬뜩하게 다가왔습니다. 우리에게 무슨 일인들 오지 않겠습니까? 남의 일이겠습니까? 정말 무서운 것은 치매입니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때도 내 삶은 이어질 텐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데리다(?)처럼 엉금엉금 기어서 병원 옥상에서 추락하지는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두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 모든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것을 견디게 할 수 있는 힘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결국 그것은 “생명”입니다. 이 “생명”이 관계에 적용될 때, 관계와 관련지어서 이 “생명”을 말할 때 우리는 이것을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생명”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가장 고귀한 것은 바로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생명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데 우리가 전심으로 그 은혜를 구하면 하나님이 그 생명을 무한정으로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을 이기며 살아가게 만들어주십니다. 자신만 살 뿐 아니라 누군가는 그 에너지가 남아서 쓰러진 사람의 손을 붙들고 연약한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인생의 일부를 태워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하신 목적이고 이유이기도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