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기독교 선비로 살다가 죽다
녹취자 : 조원정
Ⅰ. 들어가는 말
이 시간에 다룰 내용은 목사, 기독교 선비로 살다가 죽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아까도 잠깐 말씀드렸지만 목회자의 정체성이 무엇이냐고 할 때 현대 사회가 너무 많이 변하고 목회라고 하는 이 기능 속에서 요구되는 일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목회자 자신도 자기가 누구인지 모를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Ⅱ. 목회자를 세우신 목적
A. 목회자직의 이중적 목적
하나님이 목회자를 세우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이 무엇인가 하면 아까 말씀드린 것과 똑같이 목회자직의 이중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가 불신자를 믿어서 구원받게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케 하는 이 일은 인격과 성품을 완성하는 것이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하는 데 있어서 온전하게 하는 것이 목회자를 세우신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아닙니까? 원래는 하나님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셨는데 죄 때문에 사람이 사람다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사람이 사람다워지지 않으니까 결국 그 사람이 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얻고 하나님이 그에게 진리와 은혜를 주셔서 온전하게 하여야 하기 때문에 예수 믿는 것이 참 사람이 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B. 진리를 위한 사명
1. 실존의 아우라(aura)
목회자를 세우신 목적은 진리를 위한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실존의 아우라입니다. 아우라라고 하는 말이 일본어인줄 알지만 일본어가 아니라 라틴어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기풍, 혹은 영풍, 영기, 이런 뜻입니다.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기 때문에 독특하게 풍기는 향취, 그런 것을 가리켜서 아우라라고 부릅니다.
초대교회의 기록을 살펴보면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그런 아우라를 느낀 흔적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리스도교가 뭐하는 것인지 뭐하는 종교인지 몰랐지만 그리스도인이 정말 남다른 사람이라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건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에 대해서 아우라를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2. Kerygma와 Didache
성경의 교훈은 케리그마와 디다케로 나누어지는데 C. H. Dodd라고 하는 인물인데 73년도까지 사셨던 분인데 신약학자입니다. 이 사람이 사도들의 설교와 그 발전이라는 책 속에서 C. H. Dodd는 성경의 메시지를 둘로 나눕니다. 비 기독교인을 위한 공중적인 선포인 케리그마와 기독교인을 위한 교화인 디다케로 구분을 합니다. 성경 자체를 보면 이런 것들이 과연 뚜렷하게 나누어지는가 하면 그렇지가 않고 성경 속으로 들어가면 케리그마와 디다케는 함께 엮어지면서 하나의 구조를 가집니다. 이런 것들을 비판한 사람이 존 스턴트 목사님인데 예를 들자면 케리그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의 구원을 위해 오셨다.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이런 것들이 케리그마입니다.
케리그마가 기독교인을 위한 공중적인 선포라면 디다케는 교인들을 위한 교화인데 이 두 가지가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섞어지면서 기독교인에게도 케리그마가 전해지고 그 케리그마에서 어떻게 우리가 살아야겠다는 디다케가 나오는 것입니다. 복음의 기본적인 내용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성찰에서 삶의 교훈이 나오는 것이 이 케리그마가 없이 디다케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그 얘기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과 실제 살아가는 교훈들이 함께 엮어져야 할 필요성을 여기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Ⅲ. 목회자가 되는 길: 그리스도와의 만남
A. 십자가와 부활사건
한 사람이 목회자가 되는 것은 어떤 식으로 목회자가 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십자가와 부활사건에서 꼽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사건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사도바울은 크게 세 가지 배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주의입니다. 종교적으로는 유대주의입니다. 문화적으로는 헬라주의 시대를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철저한 유대교 종교지도자의 길을 걸었던 사람으로서 그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로 부름을 받고 거기에 헌신하게 됩니다.
계기가 무엇인가 하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었습니다. 그게 바로 사도바울을 경험과 소명입니다. 사도바울의 경험 속에서 이 소명은 운명처럼 다가옵니다. 그것이 어떤 논리를 통해 다가오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두고 두 개의 사실이 공유를 하게 됩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사도 바울에게 두 가지 확신이 있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두 번째는 유대인만 선민이다. 나머지는 다 쓰레기다. 나머지 민족을 이렇게 본 것입니다.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본 것입니다. 더욱이 이것을 유대인들이 아주 정교하게 기획을 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사형을 시킵니다. 죽이면 되지 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을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다음에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을 막기 위함입니다.
십자가는 나무입니다. 나무에 매달려 죽은 자는 신명기 28장에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입니다. 영원히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가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고 하는 인상을 깊이 찍어두기 위함이었습니다. 십자가에 죽습니다. 문제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사도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부활하셨습니다. 두 개의 팩트입니다. 하나는 나무에 매달려 죽었으니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다. 이것이 팩트 1번이고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 팩트 2번입니다. 이 두 개가 모순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저주하셔서 나무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사실이라고 하면 부활할 수가 없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부활의 이야기는 안 나오지만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모세가 부활했다고 믿습니다. 모세가 승천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에녹이나 엘리야 같은 사람들을 보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갑니다.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는 것은 로마서 1장에 기록되었듯이 하나님이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사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함을 받았으니 했습니다. 이게 모순입니다. 죽은 것이 저주 받은 것이라면 살아날 수 없고 하나님이 인정해주셔서 다시 부활시킬 사람이라면 저주하실 리가 없습니다. 이때에 성령의 역사로 한줄기 빛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대속의 교리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저주를 받고 죽은 것도 사실이고 부활한 것도 사실이라고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저주 받은 것도 사실이고 부활한 것도 사실이라고 보면 저주 받은 것이 자기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라면 오히려 대신 죽어서 우리를 구원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 속에 깊이 새겨지면서 하나의 운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 소명의 핵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운명이 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와 부활의 사실이 운명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언제 사도바울에게 너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너를 벌주겠다고 말씀 안하십니다. 자기는 그것을 운명처럼 느꼈기 때문에 내가 복음을 전파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지로다. 라고 하는 복음 전파의 화급성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 사람에 의해서 기독교의 판도가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두 개의 서신서를 씁니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를 씁니다. 이 서신의 깊이는 로마서보다 훨씬 더 깊은 것입니다. 예배소서는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 즉 하나님이 인간 세상과 세계와 관계를 맺으심에 있어서 당신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보여주시는데 결국은 구속 경륜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구속의 경륜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 세계에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 구속 경륜을 통해서 하나님이 위대한 일들을 이루어 나가시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하시고 사랑이 많으시고 위대하신 분이신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교회를 중심으로 설명하는 것이 에배소서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설명한 것이 골로새서입니다. 이것은 아주 우주적인 서신입니다. 철학적이고 우주적이고 굉장히 깊이가 있는 서신입니다.
단순히 구원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죽음과 부활이라고 하는 이 사건은 인류 역사 전체와 관련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있는데 이 교회는 교회가 가지고 있는 의미, 생각, 사상, 이것은 이것보다 더 큰 세계와 관련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맨 처음에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어떤 생각으로 창조하셨는가 하면 사회를 만들고 싶어 하신 것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창세기 2장 24절에 보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지 않아도 계속 자손들은 번성했을 것 아닙니까? 번성한 사람들이 서로를 어떻게 사랑하는 공동체를 이루려고 했던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이 이야기가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결혼식 주례사에서 쓰는 부부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는데 부부의 사랑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이런 사랑 속에서 살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가인이 아벨이 태어나는 것을 봤을 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했을 것이고 셋도 그랬을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면서 이 관계가 다 깨진 것입니다. 사랑의 관계가 부서지는 것입니다.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사랑의 관계가 우주와 하나님과 연결이 되면서, 사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면서 이 모든 관계가 파탄이 난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을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지 않고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시고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이루어질 사회를 마지막으로 최종적으로 완성을 하실 텐데 이것을 먼저 시범적으로 만드신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과 더불어서 하나의 사랑을 누리며 사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이렇게 해서 한 사회를 이루어 나가며 살아가게 합니다. 교회를 중심으로 설명한 것이 에베소서이고 그리스도를 우주적인 완성의 중심자로 보고 설명한 것이 골로새서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단순히 예수 믿고 구원 얻어서 지옥에 가지 않게 되었다. 아니면 천당을 가게 되었다. 은혜를 받게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방황하던 이 한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이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통해서 인생이 무엇인지 세계가 무엇인지 하나님이 누구인지 역사가 무엇인지 이것을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지혜를 얻기 위해서 부지런히 철학을 공부합니다.
B.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1. 나의 회심 이야기
제가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약간 열심히 안 다닌 적도 있지만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는 끊어지지 않고 다녔습니다. 우리나라 나이로 열다섯 살이니까 정확한 나이로 치면 열네 살 삼 개월 째 되던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제 나이 중학교 2학년이었는데 교회가고 있던 주일이었습니다. 교회를 가다가 논둑에 엎드려져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 이유가 뭔가 하면 너무 서러운 것입니다. 그 어린 아이가 뭐가 그렇게 서럽습니까? 도대체 인생이 무엇인가? 나는 왜 살아야 하나? 세계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정말 있는가? 그 어린 나이에도 죽는 것이 무섭지 않았습니다. 사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그것도 매일 눈뜨면 사람으로 하루를 살아가야 한다는 것, 길거리에서 구르는 돌멩이, 풀포기가 부러웠습니다. 넌 참 좋겠다. 아무 생각 없이 길가에 살아있기만 하면 되는데 나는 오늘도 왜 살아야 되나? 엎드려서 울었습니다. 교회 어릴 때부터 다녔지만 그때까지 회심하지 않았고 누가 친절하게 나를 붙들고 얘야,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란다. 너 구원 받았니? 인생이 무엇이고 세계가 무엇이고 하나님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지만 기억에 남는 선생님은 한명도 없고 더구나 나를 사랑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어린 아이 마음에 엎드려서 한참 동안 펑펑 울고 눈물을 씻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무신론자로 평생을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2.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의 교회가 이런 아이의 질문에 대해서 답을 안 해줍니다. 예수님을 열심히 믿어라. 왜 믿어야 하는지 나는 왜 사람으로 태어났는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대답을 안 해줍니다. 똑똑한 학생들은 교회에 안 붙어 있습니다. 생각 없이 교회 나오거나 아니면 몸만 교회 나오고 생각은 이 세상에서 가르쳐 주는 대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교회에 가봤는데 교회에 가보니까 “당신은 누구십니까? 우리는 누구입니까?” 교회에 가 봐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왜? 이 사람은 이렇게 믿고 저 사람은 저렇게 믿고 믿음직스러워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참 인간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살아서 우리 자신은 행복하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 때문에 좀 더 나은 세상이 되어서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르네상스 시대 때 르네상스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인간관과 크게 다르지 않는 고민을 기독교에서도 똑같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이 하고 있는 고민이 크게 두 가지인데 인간은 결국 불결한 존재이다. 그 인간이 신을 향해서 어떻게 깨끗한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첫 번째 고민이고 두 번째 고민은 아무리 생각해도 행복은 나만의 것이 아닙니다. 내가 행복할 뿐만 아니라 내가 여기에 살아 있는 것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유익이 되는 인생을 살아야 하는데 그 유익이 하나님이 동의해줄 수 있는 유익이어야 합니다. 그런 고민을 함께 하니까 철학에서 하는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이전까지는 자연이 무엇인가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사를 돌려놓으면서 우리가 한 인간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마땅한 것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 좋은 것인가? 이런 고민을 하게 만들었을 때부터 생겨난 이 모든 고민,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바둑판과도 같습니다. 내가 여기에 이렇게 있으면 나 혼자 여기 있어서는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격자처럼 짜여 있고 여기에 누군가가 있을 때에 내가 과연 누구인가? 왜 여기에 있는가? 하는 의미들이 규정되는 것입니다. 이 의미 규정이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규정에서 오는 존재입니다.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내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하는 목적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쓰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못을 박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지우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잘 쓰여 지고 잘 지워지면 이것은 좋은 것입니다. 도대체 사람은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졌나? 예를 들어 봅시다. 군인은 전쟁하는 사람입니다. 좋은 군인은 전쟁을 잘해서 이기는 사람입니다. 야구선수는 야구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야구를 잘해서 승리를 이루어내면 좋은 사람이고 연봉도 몇 천 억씩 올라옵니다. 축구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자기공은 도자기를 잘 만드는 사람입니다. 전부다 다 본질은 사람입니다. 군인이 은퇴하고 나면 군인이 아닙니다. 야구선수도 퇴직하고 나면 더 이상 야구 선수가 아닙니다. 도자기공도 눈멀고 손 잘리고 하면 더 이상 도자기공이 아닙니다.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 사람 중에서 좋은 사람이 무엇입니까? 이것을 찾아내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사람이 서 있고 위로도 이렇게 서 있습니다. 이 사람이 위로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 좌우로는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 아래로는 자연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를 알 때에 나라는 인간이 누군가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존재는 타자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지 자기 자신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결국 자신의 인생의 의미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다른 하나님은 물론 사람과 자연 이 다른 모든 것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를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서 자신의 인생의 의미가 설정됩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사람과 자연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 없이는 인간이 누구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를 규정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Ⅳ. 목회자로 살다가 죽는 길
A. 조선시대 선비에 관하여
1.유학자와 선비는 다르다.
여기에서 저는 동양의 선비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선비들의 사고방식 중에서 우리가 이러한 오늘날의 기독교가 잃어버리고 있는 통합주의적 사상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유학자와 선비는 다릅니다. 유학자는 학문과 윤리를 분리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학문은 출세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고 윤리적인 생활은 대충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유학자이긴 했지만 선비는 아니었습니다. 선비의 특징은 학문의 깊이가 얼마가 되든지 간에 학문과 윤리를 합친 사람입니다. 학문을 통해서 자아와 타자를 완성해간 선비입니다. 그래서 선비는 유교적인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조선사회의 지식인으로서 도덕을 추구했던 사람입니다.
2. 선비의 이상: “立身揚名”의 참 뜻 -“立身行道 揚名於後世”「孝經」
선비의 이상을 보면 입신양명입니다. 우리들은 오늘 날 나쁜 말의 뜻으로 씁니다. 출세하고 이름 내려고 쓰는구나? 합니다. 효경에 보면 입신행도 양명후세야, 도를 행함으로서 자신을 확립하고 그 이름을 후세에 드높인다는 뜻입니다. 자기시대에는 드높이지 못할까? 자기 시대에는 그 시대가 인정해 주지 않는 참다운 도를 따라 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얼마나 올바르게 살았는가 하는 것은 당대에는 인정을 못 받고 후세에 인정을 받고 귀감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선비들의 이상입니다. 현세에 인정을 받아야 돈도 나오고 집도 나오고 명예도 얻게 될 텐데 그것을 그 시대에 부합하며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항상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시대는 자기가 추구하고 있는 시대와 격차가 있는 시대였기 때문에 야합을 하지 않고는 그 시대에 이름을 드높이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3.「論語集註」에 나오는 유학자의 세 등급
논어집주에 보면 유학자의 세 등급이 나오는데 첫째가 도덕에 뜻을 둔 사람입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참된 도리를 완성하며 사는 것을 참된 보람이라고 여기는 곳입니다. 두 번째는 공명에 뜻을 둔 사람입니다. 이것은 아주 순수한 명예입니다. 명예에 살고 명예에 죽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세 번째 부귀에 뜻을 둔 사람, 이것은 돈 많이 벌고 잘 먹고 잘 살려는 사람입니다. 논어집주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도덕에 뜻을 둔 사람은 공명에 관심이 없다. 공명에 뜻을 둔 사람은 부귀에 관심이 없다. 그러나 부귀에 뜻을 둔 사람은 무슨 짓이라도 할 사람이다.
4. 조선중기 문장가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의 4체(體)
조선중기 문장가 한강 정구는 학문에 있어서 4체를 주장합니다. 여기에서 체라고 하는 것은 온몸으로서 체득한다는 것입니다. 체인, 어떤 학문을 인식함에 있어서 온몸으로 인식하고 그것이 정말 사실인지를 체찰, 온몸으로 살피고, 체험 그것이 진리라는 것임을 온몸으로 경험하고, 체행 이것이 진정한 선비의 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에 대한 탐구를 이야기 한 것을 체인이라고 한다면 그 말씀에서 진리를 깨닫고 나는 과연 그렇게 살고 있을까 하고 자기를 엄정하게 성찰하는 것은 체찰 입니다. 그 말씀을 굳게 붙들고 어떤 난관이 와도 그 말씀의 의미를 경험하려고 하는 것이 체험이라고 하면 어떤 고난과 역경이 와도 그 말씀대로 살겠다고 하는 환란과 결박이 날 기다린다 하나 예수께 받은 사명을 마치려 하면 목숨을 조금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체행입니다.
5. 자아의 완성은 타자의 성취와 함께
자아의 완성은 타자의 성취와 함께 이루어집니다. 데카르트는 “cogito ergo sum.”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여기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비판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부인할 수 있는데 까지 부인하고 나면 그래도 부인할 것이 없는 것이 있는데 그렇게 부인하는 나 자신은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이 마지막 남은 핵심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자크 라캉 같은 사람은 이런 데카르트의 사고를 정신착란적 사고라고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존재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 있지 자기 밑바닥을 들여다보면서 아는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기본적인 이상은 자기를 완성하고 자기와 함께 있을 완성에서 이상 사회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 나라의 덕목이 네 가지 있는데 인의예지(仁義禮智), 이것이 4당이라고 합니다. 실마리인데 인의지당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라면 의인은 정이고 예는 예이고 지는 지식입니다. 인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밑에 보면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개념이 나오는데 격이라고 하는 것은 때리다. 어떤 물건을 끝까지 탐구해 들어가서 그 이치를 깨우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의, 자기 뜻을 다해서 탐구해야 하고 이치가 무엇인지 깨달은 다음 그것에 초첨을 맞추어서 자신의 마음을 올바르게 하고 다음에 집안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리게 하고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것, 이것이 조선시대 선비로서의 이념이었습니다.
B. 기독교 선비로서의 목회자
1. 대의(大義)에 살고 죽음
목회자가 누구냐고 할 때 나는 가장 간단한 말로 조선시대의 선비와 같은 존재다. 기독교 선비이다. 이 선비는 대의에 살고 죽는 것이다. 우리들이 흔히 선비들의 이상, 유교의 이상을 수기치인(修己治人) 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혹은 수기안인(修己安人)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여기에서 치라고 하는 것은 다스린다는 것이고 안은 평안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갈고 닦으며 다른 사람을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을 다스린다는 것은 압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힘과 권력으로 폭압적으로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준이 있는데 자기를 규율하고 다른 사람을 규율하는 도, 우리에겐 예수그리스도입니다. 도에 맞게끔 도가 이렇게 되어 있는데 내가 이렇게 살아 끊임없이 반성해서 여기에 합치하는 것입니다. 나라가 사회가 군대가 안 맞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든지 이것을 깨우쳐서 돌아오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돌아오게 만들어서 이 하나의 도에 자기 자신과 사람들이 나라가 일렬로 존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바지하고 사는 사람들이 선비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모든 사람들은 가장 평안한 삶을 즐길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최근에 나온 영화중에서 ‘사도’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영조가 세자가 있는데 공부는 안하고 계속 강아지나 그리고 하니 마음에 안 드는 것입니다. 이 놈을 잘라 버리고 세자를 새로 세우고 싶은 것입니다. 왕이 저놈을 잘라라 하면 너무 체신 머리가 없으니 신하보고 네가 나한테 주청을 해라. 세자의 자격이 없는 줄 아옵니다. 저 사람을 폐서인 하시고 세자를 새로 세우십시오. 이렇게 나한테 아뢰라. 그러니 안 된다고 합니다. 왕이 끝까지 이야기 하니까 왕이여 그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닙니다. 유서를 남겨 놓고 목메어서 자살을 해버립니다. 왕이 저 놈이 죽었으니 네가 한번 아뢰라. 그랬더니 그 신하도 똑같이 자살을 해 버립니다. 세 명이 죽습니다. 결국 대의가 아니면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선비가 되는 그 순간 올바른 대의가 아니면 죽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기꺼이 죽겠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죽는 자체가 큰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 용기가 없습니다. 자기한테 불리하거나 욕먹을 일은 안하려고 합니다. 마른 땅만 밟고 살려고 하다 보니 세상이 이 모양이 되는 것입니다.
2. 대장부와 같은 삶
2번에 보면 제가 깊은 감명을 느낀 글인데 “居天下之廣居 立天下之正位 行天下之大道 得志 與民由之 不得志 獨行其道 富貴不能淫 貧賤不能移 威武不能屈 此之謂 大丈夫” 「孟子」, 縢文公 下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천하에 가장 넓은 집에 거하며, 이게 결국은 사랑, 인을 뜻하는 것입니다. 인자하게 대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람의 품안에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천하게 가장 넓은 집에 거하며, 천하에 가장 정확한 자리에 서며, 천하에 가장 큰 길로 행하며, 뜻을 얻으면 다른 사람과 함께 그 길을 걷고, 뜻을 얻지 못하면 혼자라도 그 길을 걷나니, 부귀가 그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못하며 빈천이 그의 뜻을 옮기지 못하리라. 위력과 무력이 그를 굴복시키지 못하나니 이를 가리켜 우리는 대장부라고 부른다. 기개가 넘치는 사람입니다.
한 사람이 세상에 대한 많은 지식을 공부하면서 그 지식을 가지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생각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면서 사랑을 가지고 가장 정의로운 자리에 서려고 하면 가장 큰 대의명분을 따라 살면서, 여기에서 음이라는 글자가 나오는데 음란할 때 음자인데 어지럽힌다는 것입니다. 부귀가 그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못하고 빈천이 그의 뜻을 옮기지 못하게 하며 위협과 무력이 그를 굴복시키지 못하나니 이런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대장부라고 부른다. 대장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대장부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믿고 성경과 모든 학문을 통해서 터득한 진리로 판단을 하고 대의를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빈부나 부귀, 귀천, 이런 것들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거나 않고 어지럽혀지지 않고 굴복하지 않고 하면서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대장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지위가 높은 지위에 있든 낮은 지위에 있든 넘치는 기개가 있는 것입니다. 올바른 인간으로서 살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는 기개가 있는 것입니다.
조선시대가 나중에 모순에 빠져서 나라가 망하지만 오백년이란 세월을 가게 된 중요한 비결이 있습니다. 절대 왕이 자기 마음대로 못합니다. 저는 최근에 자료를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이런 방에 앉아서 왕이 여기에 있고 서로 의논을 합니다. 왕이 워낙 말도 안 되는 명령을 하면 여기 신하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선비이어야 합니다. 선비가 아니면 이런 자리에 오를 수가 없습니다. 선비가 아닌 유학자이기만 하는 사람들이 올라서 나라를 어지럽히는 것입니다. 선비 정신으로 충만해야 할 사람들이, 왕이 말도 안 되는 명령을 할 때 세 가지 반박 방법이 있습니다. 왕이 말할 때 그것 말도 안 되는 줄 아오, 하며 한 번에 받아 치는 것입니다. 반박입니다. 두 번째가 함정이라고 하는 것인데 함이 고함을 지르고 정원에서 고함을 지른다는 뜻입니다. 왕이 말도 안 되는 결정을 합니다. 그 사람이 밖으로 튀어 나옵니다. 여기에서 입에다가 손을 대고 큰 소리로 이 마당을 향해서 왕께서 오늘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신다. 너희들이 이게 말이 되는 소리로 생각하느냐고 떠드는 것입니다. 떠드는 소리가 들리겠습니까? 안 들리겠습니까? 처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법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더 충격이었는데 여기에 이렇게 보면 계단이 있을 것 아닙니까? 난관이 있습니다. 왕이 이렇게 올라가서 용상에 앉는 것입니다. 그래도 왕이 말도 안 되는 결정을 계속 합니다. 그러면 여기에 있던 신하가 이리로 가서 이것을 확 뽑아서 왕 앞에서 부러뜨려 버립니다. 그래도 왕이 벌을 못 주게 되어 있습니다. 진짜 왕의 이야기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왜 그러십니까? 하는 의미로 이것을 손으로 확 뽑아서 부셔버립니다. 왕이 자기가 뭔 얘기를 하려고 하다가 이렇게 한방에 받아치면 찔끔하면서 보통 반대가 아니구나 하면서 여기에서 접어야 되겠다고 하고 그래도 더 얘기하면 나가서 떠들면서 깨닫는데 이리 와서 부러뜨리면 아 이건 이 사람들이 확고하구나.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럴 때 이 자식들 하면서 다 잡아들여 하면서 죽여 버리는 사람은 왕도 아닙니다. 연산군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 왕들은 반드시 불행하게 죽고 끝납니다. 최후가 불행하게 끝납니다. 그때에는 선비들이 이제는 단순히 고하는 게 아니라 혁명을 일으켜서라도 저런 자식은 잘라 버리고 정말로 백성을 위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임금을 세워야 된다는 혁명적인 사상까지 승인을 해주는 것입니다. 선비는 항상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시대의 선비들은 호사스럽게 사는데 관심이 없습니다. 그것은 관직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조선시대에는 사람 취급을 못 받습니다. 그것은 완전히 부패한 인간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유교의 이상하고 거리가 먼 인간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왕이 절대 마음대로 못했습니다. 위대한 나라였습니다. 이런 것들을 선비들이 서슴지 않고 행할 수가 있었습니다.
3. 도(道)의 사람으로서의 목회자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도를 이야기 할 때 도를 사랑하고 도 때문에 슬퍼하고 도 때문에 열렬해지고 도 때문에 기꺼이 죽는 이러한 삶이 바로 넓은 의미에서 기독교인의 삶이고 좁은 의미에서 목사, 혹은 복음 사역자로서 삶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배우는 모든 것을 삶과 연결시키면서 그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이 되어서 어떤 삶을 살 것인가 하는 것을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하나님을 향해 사는 진실한 신자의 삶이 하나님의 사람인 목사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거 위해서 공부도 하는 것이고 은혜도 받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 복음 사역도 하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C. 열심히 학문을 탐구함
“夫驥一日而千里, 駑馬十駕, 則亦及之矣” 「荀子」, 修身編 “천리마는 하루에 천리를 간다더라. 그렇지만 못난 말도 열흘을 가면 그것을 따라 잡을 수 있지 않겠느냐?” 무슨 뜻입니까? 열심히 공부를 하라. 뭔가를 열심히 하지만 탁월한 천재는 한 번에 저렇게 많이 하지만 이 천재에 미치지 못해도 이 사람이 하루에 한번 열흘이라도 꾸준히 노력하면 도달할 수 있지 않겠느냐 말입니다. 나는 여기에 해당 안 되고 저기에 해당됩니다. 잘 난 사람이 먹고 놀 때 나는 공부하고 더 노력을 해야 합니다.
D. 목회, 죽고 다시 사는 자의 길
이것은 지구로부터 약 6500광년 떨어진 거리에 있는 성읍입니다. 별들이 죽을 때 폭발하면서 내는 가스들로 모여진 기둥입니다. 여기에서 제일 긴 기둥, 여기에서부터 왼쪽 기둥 여기가 조그마하게 보입니다. 빛이 4년 동안 달려가야 도달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길이가 얼마나 되는가 하면 태양까지가 8분 정도 걸리고 달까지는 1.2초밖에 안 걸립니다. 4년 동안 빛이 달려가야 할 거리니까 상상도 안 가는 것입니다. 40조km 정도 됩니다. 차가운 수소분자가 먼지로 구성된 성운이고 여기에 반짝반짝 하는 부분들이 보입니다. 여기에서 별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창조의 기둥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별들이 태어나기 때문에 그렇게 부릅니다. 창조의 기둥을 포함하고 있는 독수리 성운인데 독수리 성운은 550만 년 전에 생성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아무도 없는 밤하늘에 이게 왜 생겨났냐고 이런 생각을 하는데 이것이 어디에서 생겨났냐고 하면 별이 수명을 다하게 되면 마지막에 어마어마하게 엄청난 폭발과 함께 그 별이 일생을 마칩니다. 폭발하기 직전에 백색왜성의 상태가 되는데 그때 크기는 태양이 수명을 다해서 그렇게 폭발하면 수금지화성까지 하나의 태양 속으로 들어갈 정도로 어마어마한 크기가 되고 폭발을 하면서 마지막에 사라져버리고 이런 먼지들만 남기게 됩니다.
이런 먼지들을 남기고 세월이 흘러 이 먼지들이 함께 뭉치면서 핵반응을 일으킵니다. 그러다가 엄청난 온도로 올라가게 되고 압축이 이루어지는데 축구장만한 수소가 압축이 되어서 축구 공 만하게 되면 약 6천도 정도의 열이 발휘가 됩니다. 이것들이 모여 핵반응을 일으키고 떨어져 나오면서 새로운 별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새로운 별이 만들어지는 것은 누군가 죽었던 별이 있기 때문에 그 죽은 별 때문에 새 별들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제가 어느 날 천문학을 한 1년 정도 과외선생님을 통해서 공부를 했는데 이것을 깨달으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똑같은 일이 의학에서 일어납니다. 이게 지금 암세포입니다. 이것은 백혈구인데 아포토띠세리라고 해서 죽는 것입니다. 세포가 우리몸 전체 60조개쯤 있는데 석 달이면 다 죽고 다시 살아납니다. 뇌세포만 빼고 석 달 전의 몸은 우리의 몸이 아닙니다. 다 완전히 다른 세포로 바뀝니다. 세포가 죽는 것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타살입니다.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아서 괴사하는 것, 죽는 것입니다. 네크로시스라고 하는데 죽는 것입니다. 아포토시스의 죽음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원인이 안 밝혀집니다. 세포가 스스로 죽습니다.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왜 죽는지 모릅니다. 죽으면서 ATP라는 화학에너지가 나옵니다. 그것을 바로 옆에 전달하면 그것을 에너지 삼아서 세포를 돌리고 세포를 분열합니다. 이렇게 세포가 죽습니다. 그런데 어느 지역에 세포가 아무도 자살을 안 하려고 합니다. 뭉칩니다. 죽지 않고 뭉치니까 더 많은 양분이 필요하니까 다른데 있는 양분을 막 빨아 들여서 온 몸을 바짝 마르게 합니다. 그것을 의학적으로 암세포라고 합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사도바울이 빌립보서 1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내안에 사는 이가 그리스도니 내가 죽는 것도 유익하니라. 자기 안에서 잘못된 자기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영혼 안에서 그리스도가 충만히 사시고 교회 안에서 이렇게 죽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 교회가 온전해 지고 사회에나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를 사랑하고 도 때문에 울고 도 때문에 죽어야 할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야 될 사람들인데 절대 안 죽는 것입니다. 자아가 씩씩하고 팔팔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 사람하나 그 목사, 그 선교사 하나 살리기 위해서 그 사람이 자기 배짱대로 살기 위해서 저렇게 암세포처럼 끌어 모으면서 교회를 죽이고 선교사역을 죽이는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Ⅴ. 적용과 결론
어떤 사람이 올바른 사람인지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모든 지식과 함께 연관이 되어서 이것들을 통해서 진리를 찾고 어떻게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들을 고민하는 목회자, 선교사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