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과 총명의 목회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빌 1:9)
녹취자 : 오희열
두 번째는, 어떻게 그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 질 수 있을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지금 우리가 읽은 구절의 의미를 보자면 이런 뜻입니다. 사도바울이 기도하는 것이 있는데 그 내용이 9절, 10절, 11절, 이것이 기도 제목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 기도 제목이, “너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 사랑이 더 커졌으면 좋겠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커지느냐는 것입니다. “지식과 총명으로”입니다. 재밌는 것은 “지식과 총명으로”라는 말이 있는데 희랍어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엔 에키그노세이 카이 파세 에이스데세이”(ἐν ἐπιγνώσει καὶ πάσῃ αἰσθήσει). “지식과 지각, 혹은 총명”을 뜻합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지식”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에피그노시스”(ἐπίγνωσις)라는 단어입니다. “그노시스”는 “지식”이라는 뜻이고 “에피”는 “무엇에 관하여”, 혹은 “무엇 무엇 전체를” 이라는 뜻입니다. 희랍사람들이 지식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냥 근거가 없는 얕은 지식과 아주 깊이가 있는 완전한 지식을 구분했습니다. 소위 “독사”(do,xa)와 “에피스테네”(ἐπιστήμη,)라는 지식입니다. “독사”는 우리말로 번역을 하면 “사견”, “사적인 견해”입니다. 별 특별한 근거는 없지만 그냥 자기 느낌에 이렇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에피스테네”는 “온전한 지식”입니다. 예를 들면 “이 물건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물어볼 때, “그것은 에어컨을 끄고 켜는 거야.” 하는 것은 그냥 개인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이것이 완전한 지식이 되려면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고 무슨 원리에 의해서 이렇게 작동하는지를 모두 설명해 낼 수 있어야합니다. 다시 말해서 모르는 것이 거의 없도록 온전히 알고 있는 지식, 그것이 여기서 이야기하는 “에피그노시스”입니다. 전치사를 보면 “무엇 무엇 안에서”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이것은 수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풍성해지는데 무엇을 가지고 그렇게 사랑이 풍성해지게 하느냐 하면 지식과 총명을 가지고 풍성해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잊히지 않도록 그림처럼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불을 피웠습니다. 요만큼 불이 일어났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뭔가 태우는 것이 있어서 불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으면 다 탄 다음에 꺼질 것입니다. 불은 요만큼입니다. 맨 처음에는 아주 힘들게 불을 피웠습니다. 거기에 나무를 계속 집어넣습니다. 나중에는 잘 마른 장작을 거기에 계속 집어넣으면 처음에는 요만했던 불이 큰 불길로 일어날 것입니다. 거기에 제물을 올려놓으면 다 태워버릴 정도의 불길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 표현을 할 때, 작은 불을 장작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한다, 그때의 “장작으로” 라는 그 그림을 “지식과 총명으로” 라고 바꾸어 보십시오. 아까 어느 자매님이 오늘 말씀을 듣고 보니까 자기는 주님을 사랑한 적이 없다고 했는데 사실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만나서 조금씩 사랑을 합니다. 그러다가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 때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옛날에는 내가 그런 사람들을 사랑한 줄 알았는데 그건 사랑이 아니었구나!”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짜 사랑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크고 완전한 사랑을 깨닫게 되니까 그렇지 못한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중국교회나 한국교회를 보면서 제가 늘 마음에 염려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장작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많이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목숨을 버리면 하나님이 그것을 사용하십니다. 불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금방 꺼집니다. 특히 공동체 속에 붙은 불이 금방 꺼집니다. 더 많이 기도하면 물론 사랑의 불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렇지만 보다시피 여러분이 5년 10년 동안 매일 펑펑 울면서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수 입니다. 여러분 자신도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비유를 하자면, 불이 계속 일어납니다. 갈멜산에서 있었던 엘리야의 싸움을 기억해 보십시오. 불을 엘리야가 성냥으로 켰습니까? 하늘에서 떨어졌습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이 장작을 준비하라고 하셨겠습니까? 그냥 계속 하늘에서 불이 내리면 되는 것 아닙니까? 광야의 구름기둥, 불기둥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불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장작을 태운 후에는 꺼졌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섭리하신 것입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목회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계속 사랑의 불길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지식”이라는 장작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사람을 놓고 하나하나를 가리킵니다. 그러면 “아, 그렇구나!”, “아, 그렇구나!” 그걸 깨닫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알고 싶지 않은 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르나르드라는 중세의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배운 끌레르보의 베르나르드(Bernard of Claierveaux)입니다. 그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notitia est amor”, “지식은 곧 사랑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또 이런 말을 했습니다. “amor ipse notitia est” (love itself is a form of knowing)
요즘 한류 교류가 뜸하지 않습니까? 한국으로 중국의 많은 젊은 사람들이 옵니다. 겨울연가를 비롯해서 한류스타들이 영화를 찍은 장소 같은 곳을 방문하기를 좋아합니다. 거기 가서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두꺼운 책들이 팔립니다. 인터넷에서 그 사람에 대해서 찾아봅니다. 쓸데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좋아하니까 알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과 사랑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사랑에 빠지게 되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궁금해집니다. 뭘 잘 먹는지, 취미가 무엇인지, 가까이에서 보면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서 태어났는지, 키는 얼마나 되는지, 모든 것이 궁금해집니다. 사랑이 식고나면 아무것도 알고 싶지가 않습니다. 그게 바로 사랑의 특성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목회가 풍성한 사랑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여러분에게 진리에 대한 지식이 목회의 중요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편의 설교를 듣고 나면 몰랐던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깨닫게 됩니다. 한 번 같이 성경공부를 하고 나면 너무 재밌습니다. 그래서 더 배우고 싶습니다. 그것이 목회입니다. 교회의 가장 큰 재앙은 지식이 없는 목회자입니다. 두 번째 재앙은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교인입니다. 근본적으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교회에서 사랑이 불러일으켜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북경의 아파트인 것 같은데 사람들이 몰래 모였습니다. 거기서 설교를 하는데 사실 남의 나라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또 통역이 순차통역이라서 너무 힘이 듭니다. 불이 계속 나와야 하는데 툭툭 끊어지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통역도 누구였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참 잘 했습니다. 순차로 통역을 하는데도 말씀을 들으면서 몇몇 자매들이 계속 눈물을 흘렸습니다. 왜 울겠습니까? 새로운 지식이 주어진 것입니다. 울면서 온 것이 아니라 왔는데 새로운 지식이 주어진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하나님이 그런 분이었구나! 나를 그렇게 사랑하셨구나! 교회를 그렇게 불쌍히 여기셨구나! 그렇게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구나!” 이런 마음이 생겨나면서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장작입니다. 지식입니다. 그래서 공부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정말 주님의 은혜로 온 것 같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공부를 하지 못합니다. 너무 힘이 듭니다. 어제도 우연히 예전에 공부한 내용들, 그러니까 그동안 공부한 책들, 강의안들, 수집된 신학 자료들을 한꺼번에 모아 놓은 것을 보았는데 약 5만 건의 자료들이 들어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공부하고 가르친 내용들, 책을 읽으면서 깨달은 내용들, 어마어마한 내용들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때에는 정말 물불 가리지 않고 공부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요새는 옛날 공부한 것을 갖고 먹고 사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공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알기를 원하는 목회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 지식은 아무 지식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주님 사랑의 불이 붙었습니다. 그런데 세상 돌아가는 지식을 많이 이야기합니다. 그 사랑이 불붙을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여기서의 지식은 그리스도에 관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총명으로” 입니다. “총명”은 분별력입니다. 애매모호하고 혼란스럽던 것을 지식으로 딱 정돈해줄 때, 그 때 사랑은 점점 더 뜨거워집니다.
제가 아는 목회자 사모님의 이야기입니다. 자기 집은 재산이 꽤 있는 부자였는데 가난한 신랑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요즘은 법으로 정해져서 그렇지 않지만 한국이나 중국이나 여자는 유산 상속에 있어서 조금 소외된 적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오빠들에게 재산을 다 나눠주고 자기는 시집을 갔다고 조금밖에 주지 않았습니다. 너무 화가 나서 아빠 차라도 가져가겠다면서 차를 끌고 나왔습니다. 그 차를 운전하고 가는 중에 하나님이 판단력을 주셨다고 합니다. “너는 목회자다. 너는 목회자의 아내이다. 영혼을 위해 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다.” 가다가 차를 세워놓고 막 울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총명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목회자의 설교를 듣거나 가르침을 받고 나면 안개 속을 지나는 것 같다가 선명하게 길이 딱 보여야 합니다. 그것을 직접 가르쳐 줄 수도 있고 에둘러서 가르쳐 줄 수도 있지만 선악에 대한 분명한 판단력, 어떤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아주 총명한 판단력, 그런 것을 수단으로 해서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이 지식과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해지고” 그래서 목회자는 판단력이 올바른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총기를 구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영적인 지도력의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 말씀을 여러분 자신에게 적용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에 대한 많은 지식을 쌓아가고 있습니까? 그래서 교인들이 자신의 목회자가 점점 더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까? 한 5년 전에 봤을 때는 내가 조금만 노력하면 저 목회자만큼 잘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점점 더 저 사람이 앞으로 나아가서 나는 발 벗고 나서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겠구나 하지는 않으십니까? 한 10년 후에 와서 다시 설교를 했는데 저 사람이 그때의 그 목회자가 맞느냐고, 그때 그 촌스럽게 설교했던 목회자가 맞느냐고 눈을 부비면서 다시 쳐다보게 되는 그런 목회자가 되어야 합니다. 언제 저렇게 지식이 뛰어나게 발전했나, CRTS를 졸업하고 저렇게 훌륭한 목회자가 되었구나, WRTS를 졸업하고 저렇게 되었구나, 그런 말을 들을 수 있도록 발전해 가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 속담에는 “괄목상대”(刮目相對)라고 이야기 합니다.
사도바울이 생명을 바쳐서 추구했던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부활의 능력과 고난에 참여함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여 푯대를 향해 달려가노라.” 나는 사도바울이 일평생 추구했던 것이 선교가 아니라 지식이라고 보는 사람입니다.
(찬양)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앎이라
내 생애 가장 귀한 주 앎이라
주님을 알기를 간절히 원하네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앎이라
목회자의 기쁨은 성도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 그것도 기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성도들이 목회자를 사랑하는 것, 그것도 기쁨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언제나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많아지던 교인이 적어질 수도 있고 어제는 나를 천사 다음을 존경하던 사람이 내일은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에 우리의 기쁨의 근거를 두면 삶이 요동칩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 그분을 사랑할수록 배우는 총명, 그 속에서 기쁨을 얻는 목회자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공부도 별로 못합니다. 그런데 한 참 공부할 때는 밤 12시까지 혼자 공부하다가 내려옵니다. 그러면 마당에 바람이 확 붑니다. 혹은 옥상에 올라갑니다. 그러면 마음에 기쁨이 가득합니다. 어제보다 내가 이만큼 신앙적으로 지식적으로 자란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런 기쁨 속에서 사는 목회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장작 삼아서 성도들의 마음에 잘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면 그 불이 점점 더 뜨겁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불 하나하나가 모여서 교회 전체에 타오르는 부이 됩니다. 그 불을 온 세상에 실어 나르는 것, 그것이 목회입니다. 이것이 저의 두 번째 강의입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목회의 목표는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목회자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수단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총명입니다. 그 지식과 총명을 가르치기 위해서 목회자가 된 것입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에게 두 시간을 강의 했습니다. 시간이 많지는 않지만 두 번째 말씀에 대해서 여러분이 반응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두 분만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