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03. 15 중화예수장로노회 개회예배
종과 증인으로 삼으심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행 26:16-18)
녹취자: 김경애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간증입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만난 예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것 때문에 사울은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 경험이 얼마나 생생한 경험이었는지 모릅니다. 사도행전은 이 간증을 세 번이나 인용합니다. 아마도 사울에게는 이 사건이 루터의 비텐베르크의 탑에서와 같은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하신 음성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이 긴말은 세 가지의 동사로 요약됩니다. ‘나타남’, ‘삼으심’, ‘보내심’입니다.
제일 먼저 ‘나타남’입니다. 나사렛의 젊은이 예수는 결코 메시아일 수 없고 부활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나타나셨습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커다란 충격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시 부활했을까? 부활한 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신 사람일 텐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죽은 사람 예수! 그가 어떻게 다시 살아났을까?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사람이라면 다시 살아날 리가 없고 다시 살리실 정도로 인정하신 사람이라면 죽게 하실 리가 없다.’ 이것이 사울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죽으신 것도 사실이었고 살아나신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목회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나타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 때문에 인생이 바뀐 사람입니다. 인생관이 바뀐 사람이고 세계관이 변화된 사람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입니까? 공부도 하고 졸업도 합니다. 절차를 밟습니다. 결국 강도사가 되고 목사가 됩니다.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가 나타나신 흔적이 잘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중국에도 무당이 있고 한국에도 무당이 있습니다. 그런데 무당들은 세 부류로 나뉩니다. 첫 번째가 ‘강신무당’입니다. 신이 강림하신 무당입니다. 귀신이 그에게 임하여 무당이 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부르심에 의해서 무당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사회적으로 잘 나가던 기업가가 그 많은 재산을 놔두고 무당이 됩니다. 얼굴도 예쁘고 방송도 잘하던 연예인도 무당이 됩니다. 그 사람들이 그 일을 좋아해서 무당이 되었느냐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하지 않으면 죽음의 문턱을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강신무당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세습무당’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의 가업을 물려받는 것입니다. 특별히 꼭 무당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특별히 다른 할 일을 찾지 못해서 그냥 가업을 잇는 것입니다. 그 다음 세 번째가 ‘학습무당’입니다. 가서 무당질을 하는 것을 잘 학습해서 무당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 종류의 무당 중 첫 번째 사람만 진정한 의미의 무당이고 나머지는 선무당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한국 속담에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돌팔이 의사가 사람 죽인다는 뜻입니다. 진짜 무당과 다른 무당의 차이는 신이 나타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주님을 깊이 만나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옛날이야기여서는 안 됩니다. 최근에도 앞으로도 계속되어야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삼으심’입니다.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내가 너를 종과 증인으로 삼으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그리고 증인으로 삼고자하신 것입니다. 여기 종이라고 번역되어있지만 사실은 정확한 번역이 아닙니다. 이것은 노예입니다. 종은 그 당시에도 월급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출근하는 종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종이라고 하면 안 되고 노예라고 번역되어야합니다. 중국어로는 무엇으로 번역되어 있습니까? 집사? 전부 다 잘못된 번역입니다. 노예를 중국어로 뭐라고 합니까? ‘노후?’ ‘노후(奴仆 [núpú])’로 부르신 것입니다. ‘노후’에게는 출퇴근이 없습니다. ‘노후’는 절대로 월급을 주는 법이 없습니다. ‘노후’가 아이를 낳아도 그 아이는 ‘노후’의 아이가 아니라 주인의 아이입니다. 마치 강아지의 ‘하이즈’가 강아지 것이 아니고 주인인 것처럼 ‘노후’의 ‘하이즈’도 ‘노후’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종이라도 죽이면 죄가 됩니다. 그러나 노예는 죽여도 죄가 되지 않습니다. 철저히 주인의 소유입니다. 우리 자신을 예수에 대해서 그런 사람으로 여겨야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면 우리들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증인을 삼으신다고 했습니다. 증인의 자격은 무엇입니까? 대학을 나와야 합니까? 만 20세 이상이어야 합니까? 언변이 능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증인의 자격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현장을 목격한 사람입니다. 한국에서 살인사건에 대한 재판이 있었는데 5살짜리 어린아이가 증인석에 선 적이 있습니다. 그 아이의 증언에 의해서 재판이 뒤집혔습니다. 판사는 그 아이가 어리다는 이유 때문에 증언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가 유일한 목격자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증인입니다. 보지 못한 예수를 옹호하는 변호사가 아닙니다. 자기에게 나타난 예수를 그대로 증거 하는 증인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목사의 사명은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로 보냄 받은 사람이 나타났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왔나니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것이 목사의 사명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보내심’입니다. 내가 너를 이스라엘과 이방인에게로 보낸다는 것입니다. 왜 여기에 계십니까? 내 발로 걸어서 비행기타고 오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보내셔서 여기에 온 것입니다. 우리는 심부름하러 여기에 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내셔서 신학교에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이 보내셔서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보내셔서 목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 예수님 대신에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 중국에서 박해가 있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잡혀가고 추방당합니다. 그래서 많은 목회자들이 두려워합니다. 나의 사역이 무너져버리면 어떻게 할까? 만약에 나의 사역지가 사라져버리면 어떻게 할까? 그러나 두 가지를 기억해야합니다. 선배들은 이것보다 훨씬 더 심한 박해를 견디었습니다. 이것은 핍박도 아닙니다. 공안이 들이닥치기는 하지만 우리를 칼로 찌르지는 않지 않습니까? 물론 공안이 들이닥치지만 총을 쏘며 들어오지는 않습니다. 우리 중 아무도 귀양 간 사람은 없습니다. 선배들이 보면 ‘이것은 박해도 아니다.’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찬송을 부르지 않았습니까?
(찬양)
복음 들고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멸시 천대 십자가는 내가 지고 가오리니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라
오늘 이 고백을 하고 있는 사도 바울도 순교했습니다. 그리고 가이사랴의 빌립보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 큰 칭찬을 받았던 베드로도 죽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는 각오를 하고 살아야합니다. 여러분이 학교에 들어오기 전에 지금만큼 힘들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심각했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을 떠나서 공항에 나오면서 ‘나는 체포될 것이다. 다음 주일에는 교회에서 설교를 못할 수도 있다. 그리고 맞을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공항을 떠났습니다. 항상 마음속에서 그렇게 준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한 가지 더 기억해야할 것은 우리에게 이런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예수가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보다는 작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때문에 많은 덕을 본 사람들입니다. 믿음 때문입니다. 그런데 빌립보서 1장 29절은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믿을 뿐 아니라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믿는 것은 그렇게 큰 비용이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난은 우리에게 많은 희생을 요구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그런 박해를 그리워했습니다. 핍박을 받을 때 고난 받기에 합당하게 여기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예수님이 보내셨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중국역사에서 황제의 명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그 명을 받들었는지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의 모든 황제를 합한 것보다도 높으신 분이십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를 왜 보내셨습니까? 어두움에서 빛으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첫 번째 어두움을 신학적인 어두움입니다. 신학적인 어두움은 예수를 모르기 때문에 겪는 어두움입니다. 그것을 깨뜨려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두 번째는 지성적 어두움입니다. 무지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로 깨우치라고 보내신 것입니다. 세 번째는 도덕적 어두움입니다. 그래서 빛 가운데 행하지 않고 어두움 속에 있으면서 온갖 인간의 정욕과 육신의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물리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기업을 얻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기업은 땅이나 건물이 아닙니다. 이 기업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받는 생명과 사랑, 구원과 진리입니다. 우리의 목회를 통해서 이 기업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자, 잊지 마십시오. 목회자는 예수가 나타난 사람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당신의 종으로 삼으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십니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돌아오게 하시려고, 사단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하시려고, 마지막으로 성도의 기업을 얻게 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부르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