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한 말로 원망할 때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그 곳 이름을 다베라라 불렀으니 이는 여호와의 불이 그들 중에 붙은 까닭이었더라”(민 11:1-3)
녹취자: 김세나
Ⅰ. 본문 해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해서 시내산에서 머물게 되었습니다. 약11개월 동안 시내산에서 머문 후에 그들은 이제 행로로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시내산을 떠나서 3일 길쯤 가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이 일로 이스라엘의 진중에 불이 붙어서 화재가 나는 사건이 있었고, 그래서 이 장소의 이름을 ‘다베라’라 불렀습니다. 이것은 원망과 하나님의 진노가 어떤지를 그림처럼 생생하게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Ⅱ. 원망과 하나님의 진노
A. 이스라엘의 원망
제일 먼저 이스라엘의 원망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원망이 있었는데, 무엇 때문에 원망하였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원망하는 마음이 말로 표현되었습니다. 명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을 떠나서 행로로 진행하는 가운데 너무나 힘든 것 때문에 원망하였을 것이라 주석가들은 생각합니다. 암튼 원망하는 것이 마음으로 만의 원망이 아니라 그것이 구체적으로 말로 표현되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말로 하는 이 원망은 공동체에 대해서 아주 놀라운 전염력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도 안 좋아하시지만, 그것이 말로 표현되어서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놓고 하나님에 대해서 반감을 갖게 만드는 죄들을 결코 가볍게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보면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교회 안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원망하는 말을 할 때, 원망하는 말은 놀라운 파장력을 갖게 되는데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러한 사건을 통해서 누가 견실한 믿음 위에 서 있는가 하는 것을 한번 하나님이 확인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아주 놀라운 믿음을 가지고 있는 줄 알았던 사람들이 가벼운 몇 마디, 원망의 말에 마음이 요동치고 미끄러지게 됩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겉으로 보이거나 본인이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 있지 못하다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세상에서도 귀가 유난히 얇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와서 낙관적인 이야기를 하면 금방 마음이 하늘로 오를 것처럼 교만해지고 누군가가 비관적인 이야기를 하면 땅이 꺼질 듯이 한숨 쉬는 사람들 말입니다. 한 마디로 삶의 줏대가 없는 사람들 말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 위에서 삶의 사태들에 대해서 정확하게 판단하고 주관대로 살 수 있는 그러한 굳셈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아무 것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에게도 말씀드립니다만, 신문이나 TV나 인터넷의 뉴스를 볼 때 그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항상 그것을 비판적인 자세로 받아들여서 그러한 언론의 매체들이 자기 형성해 버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어떤 소식이나 논조가 있을 때 반대의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무 것도 올바르지 않은 정보나 지식들이 나를 종으로 삼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한 면에서 ‘인터넷 댓글 사건’ 같은 것은 굉장히 중요한 범죄입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들어가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어마어마한 큰 여론인 것처럼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마음과 정신의 판단력들을 흐려 놓습니다. 그것은 매우 질이 나쁜 범죄이고, 아주 엄격하게 벌에 의해 처벌받아야 하고, 포털 사이트들이 뉴스를 가지고 부당하게 장사를 해서 수익을 낼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이야기가 조금 곁가지로 간 것 같습니다만, 확실한 사실 하나는 원망하는 말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전염력을 말씀하고자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일로 크게 넘어졌습니다.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11장에서 이 일이 일어났는데, 14장에서 또 한 번 똑같은 죄로 크게 넘어집니다. 이러한 일들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반복되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민수기 11장에서 원망의 죄로 화재가 되는 징벌을 당하고서도 14장에서 또 그렇게 하나님을 원망하고 넘어졌는가,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 속에 내가 있다, 이것이 바로 나의 모습이다, 오늘은 내가 굳게 믿음으로 서 있는 것 같지만 누구의 원망하는 말 한마디에 마음이 뿌리 채 흔들려 나도 함께 넘어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며 신앙의 옷깃을 여며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진리가 아닌 누구의 말에 의해서 쉽게 자신의 판단력을 내어주거나 그러한 원망하는 말에 전염되지 않는 주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삶의 모든 사태에 대해서 자신이 올바르게 판단을 하는 것만이 그러한 휩쓸림으로부터 자기의 몸을 보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원망하는 마음을 하나님이 왜 이렇게 중요한 죄로 다루시는가, 어느 정도로 이것이 중요한가 할 때 일단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들게 되면 두 가지가막힙니다. 말씀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두 번째, 기도가 안 됩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크고 작은 많은 죄들을 알고 있지만 이렇게 한번 그 마음에 품었을 때 말씀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기도가 막힐 정도로 즉각적인 반응이 오는 죄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사람들은 원망의 죄가 이렇게 심각하고 큰 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사람을 향한 원망은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원망은 반드시 사람을 향한 원망을 내포하고 있고 사람을 향한 원망은 하나님께 대한 책임 추궁의 심리를 그 안에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에 대해서 이것을 심각한 죄라 생각하고 뉘우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원망하는 것을 그렇게 심각한 죄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사단은 자주 우리를 이 죄로 이끌어 갑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넘어지지 않는 것 같지만, 마음속으로는 크게 넘어져 절름발이 신앙을 되게끔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가 한번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한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기쁨과 감사의 정이 마음에 넘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성령 충만하였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에도 우리의 삶에 시련이 있고 속상하고 힘들었던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기쁨과 감사를 해치지 못합니다.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상황을 해석하니까 오히려 그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성품에 눈에 들어옵니다. 여러분들이 만약 오늘 예배가 끝나고 집에 가서 하나님 앞에 원망하였던 것을 깊이 회개하고 나면 기도의 문이 놀랍게 열리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원망하는 마음을 중대하게 여기시는 것이겠습니까? 그 정체가 무엇이겠습니까? 우선 이 원망하는 마음은 나의 판단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폐하는 것입니다. 원망이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을까? 왜 하나님이 그러한 식으로 상황을 만드셨는가, 그것보다는 이렇게 되었으면 훨씬 더 좋았을 텐데,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선하심을 자신의 판단으로 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원망하는 마음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하나님에 대한 미운 감정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분노하고 하나님을 향해 원수 된 감정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나님에 대해서 서운한 마음, 심지어는 토라진 마음, 이러한 것들은 모두 원망이 얼마나 깊고 심각한 죄인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도 우리 인간에게 원망의 대상이 되거나 혹은 판단의 대상이 되실 분이 아닙니다. 인간의 의무는 자신이 원하는 계획대로 인생사가 전개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주님의 선하심을 믿고 그 모든 것을 감내하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더욱이 자신의 판단대로 인생사가 전개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며 하나님에 대해서 미운 감정이나 서운한 마음, 그리고 토라진 마음을 갖는 것은 이것은 매우 잘못된 신앙의 태도인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과 하나님을 공경하고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을 누리는 그 마음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이 원망하는 마음은 하나님과의 연합을, 정확하게 말하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파괴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실재적인 연합이 느슨하거나 파괴된 것만큼 죄와 악에 매우 가까이 가 있게 만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원망을 중대히 다루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심판이 주어졌습니다.
B. 하나님의 심판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이셔서…”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불’이라는 표현은 성경에서 두 군데 나오는데, 이것은 하늘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열왕기하 1장 10절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엘리야가 오십부장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너와 너의 오십 명을 사를지로다 하매 불이 곧 하늘에서 내려와 그와 그의 군사 오십 명을 살랐더라” 엘리야가 그 악한 아합 왕의 시대에 와서 예언 활동을 하면서 만나는 대적들과의 사건을 소개한 것입니다. 더욱이 성경은 이 불은 태우는 것으로서, 그 태움의 대상이 된 것을 소멸하게 하는 힘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4장 2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특히 우상숭배로 인한 진노를 불에 표현하면서 그 붙은 것들을 소멸하는 신이라고 말합니다. 불이 붙으면 타고 남은 것들은 모두 무가치한 것이 됩니다. 백성들의 원망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준엄하였습니다. 이것은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 생활의 처음에 확실하게 바로 잡으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반영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장막을 중심으로 진들이 쳐져 있을 때, 불이 붙어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였을 때 그들의 두려움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더욱이 그것이 누가 실화로 말미암아 발생한 사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이 원망의 죄를 얼마나 중대하게 생각 하시는가 심판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망의 죄가 매우 크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원망하는 마음을 물리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원망으로 타오르는 우리의 마음의 불을 끄는 대신, 그러한 원망의 마음이 우리 안에 뿌려지지 못하도록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기쁨의 불꽃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항상 원망의 말이 한 사람의 마음에 씨앗처럼 떨어졌을 때 악한 뿌리를 내리고 삶을 흔들어 놓는 것은 이미 겉으로는 열심이 있어도 하나님을 향한 기쁨과 감사의 마음이 사늘하게 식어진 그 마음의 밭에서 그러한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항상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중대힌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의 죄, 개인이 아닌 공동체에 전염병처럼 넓게 퍼진 원망의 죄를 중대하게 다루시면서 하나님이 불을 보내어 그들을 화재에 휩싸이게 만드셨으나 그 진의 끝자락만을 그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마음으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그것을 말로 발하여 연약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미움과 원망의 씨를 뿌리는 이러한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죄를 매우 중요하게 다루시기 때문이니 삼가 경계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삶에서 돌이키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Ⅲ. 부르짖음과 모세의 기도
이러한 사태는 어떻게 정리가 되었습니까? 부르짖음과 모세의 기도를 통해서 정리 되었습니다.
A. 백성의 부르짖음
먼저 백성의 부르짖음이 있었습니다. 2절에서 말합니다.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음으로…”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이 아니었습니다. 왜 그러하였습니까?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있을 때 하나님께 직접 간절히 기도하고 매달리지 않고 모세에게 부르짖었던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아마도 이것은 그들의 마음이 이미 원망의 죄로 그들을 책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고 기도할 거룩한 열정을 갖지 못하였을 것이라 봅니다. 간절한 기도는 위기에 처한 모든 사람들에게서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혹시 그럴 때 없습니까? 상황을 보면 간절히 기도해야 할 상황입니다. 얼마나 가슴 아프고 견디기 힘든지 거침없이 눈물이 흐릅니다. 그 눈물이 흐를 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놀랍게 그 눈물이 그칩니다. 그리고 아까 울컥거리던 간절한 슬픈 마음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동시에 사늘하게 식습니다. 무엇입니까? 자신이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우는 것과 하나님 앞에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은 겉보기에는 똑같지만, 그것은 사실 다른 정신의 작용입니다. 그래서 안 되는 것은 안 됩니다.
그러니까 기도의 깊이는 고통의 깊이에 비례하거나 죄악의 깊이에 비례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무엇에 비례하겠습니까? 신앙의 깊이에 비례합니다. 요만한 죄를 지었습니다. 신앙이 깊습니다. 하나님을 너무 사랑합니다. 작은 죄로 하나님의 마음을 언짢게 해 드린 것에 대해서 매우 깊은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죄의 크기가 그러한 고통의 깊이를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들은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죄를 지으면서도 추어의 가책도 느끼지 않습니까? 왜? 양심에 이미 화인을 맞았기 때문입니다. 화인을 맞은 사람들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서 멀어져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진 사람들은 매우 큰 죄를 짓고도 마음에 깊은 슬픔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기도의 깊이는 죄의 크기나 깊이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깊이에 비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하나님을 향한 원망하는 마음이 꽉 찼는데 저 쪽에서 진 한끝에서 불이 붙어서 불길이 무섭게 번집니다. 두려웠을 것입니다. 타 죽을까봐 무서웠을 것입니다. 이러다 자식들까지 모두 다 잿덩어리가 되는 것 아닌가 생각하면서 공포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는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를 찾았습니다. 모세는 잘 나갈 때는 안 찾고 어려울 때는 찾거나 원망하거나 둘 중에 하나였습니다. 모세에게 부르짖었습니다. 그래도 타락한 중에도 모세를 하나님이 세운 사람인 줄을 알고 부르짖었던 것만으로도 다행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 대해서 하나님께 중재를 요청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보여줍니다.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보좌 우편에 계셔서 하시는 일이 있으니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 비시는 일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지 못하고 모세에게 부르짖었으니 이것은 하나님을 찾는 부르짖음이라기보다는 무서운 불을 빨리 끄도록 하나님께 요청해 달라고 하는 자기 사랑의 부르짖음이었습니다. 그랬더니 모세가 중재 기도를 합니다.
B. 모세의 중재기도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것은 명백히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 직의 예표입니다. 거룩한 하나님과 범죄한 백성 사이에서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모세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셔서 하나님의 진노의 불을 끄십니다.
오늘도 하늘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의 구속 사역은 모두 완성하셨으나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하시는 일이 있으니 이는 이 땅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를 위해서 비는 간구입니다. 모세가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과 거룩한 하나님 사이에서 간절한 중재의 기도를 올렸던 것처럼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진정한 희망은 이렇게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는 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 같지 아니하고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모세와 같은 사람이 우리의 중재자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의 공로가 우리 모두가 담대히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C. 하나님의 진노가 그침
모세는 이 중재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빌었고 언제나 그러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사랑하는 종, 친근한 모세의 기도를 들으사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가 그치게 한 것입니다. 2절은 말합니다.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붙이신 그 불은 물동이로 끌 수 있는 불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붙이신 그 불은 원망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였으니 하나님이 진노를 그치신 때에 꺼질 수 있는 불이었습니다. 그 불은 물로 끌 수 없는 불이었지만, 결국 모세의 간절한 기도는 하나님의 심판의 불을 끄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잠깐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말로 원망해서 모두 다 자신들이 걸어가고 있는 여정에 대해서 불평하며 원망하였을 뿐인데 왜 하나님이 이 죄를 중대하게 다루십니까? 그것은 원망의 끝이 무엇인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한 개인의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깊어질 때 그가 마지막 할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한 사람, 두 사람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불꽃이 꺼지고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어두움이 들어올 때 그것이 다시 언어로 표현되어서 연약하였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불꽃을 꺼져버려 어두움이 도입되게 한다면 그 끝은 무엇이겠습니까?
그 원망의 끝은 절망과 하나님을 욕하는 것입니다. 욥은 동방의 의인으로 하나님께서 대견하게 여기시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커다란 재앙을 만나게 됩니다. 재산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자녀들까지 잃어버리게 되는 커다란 비극을 당합니다. 가지고 있었던 재산을 모두 잃어버리고 집이 불 탄 가운데 온 몸까지 질병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때 광경에 대해서 욥기 2장 8-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이것이 원망의 끝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에는 모든 희망을 사라지게 만듭니다. 왜 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티끌만한 신뢰도 마음에 남기지 않고 그 원망하는 마음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상황을 내가 돌려놓을 능력은 없습니다. 마지막에 하는 것은 하나님을 욕하고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 과연 그러한 삶을 택할 수 있습니까? 많은 성도들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의 죄가 얼마나 큰지 모르고, 또 그 원망을 언어로 표현하여 꺼져가는 불꽃처럼 아주 작은 불꽃이 간신히 남아 있어서 누군가가 그 불꽃을 보호하고 계속 북돋아 줘야 할 연약한 사람들의 마음에 남은 희미한 사랑의 불꽃을 훅 꺼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섭섭함과 미움이 마음속에서 자라게 만듭니다. 원망하는 사람이 마음을 하나로 결탁하여 집단적으로 하나님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그 끝이 어디이겠습니까? 그래서 자신의 인생의 계획은 이러한데 저렇게 전개된 삶의 사태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미운 감정을 품은 그 끝은 어디입니까? 그 마지막 끝은 절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되돌릴 수 없는 삶의 사태 속에서 현실을 깡그리 부정합니다. 왜입니까? 다르게 전개될 수 있었는데, 하나님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 끝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는 것입니다. 다행히 하나님이 진정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그러한 죄에 영원히 빠지지 못하도록 붙들어 주시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은 더 깊은 영적인 수렁 속에서 인생을 불쌍하게 지낼 것입니다.
이 같은 이유로 하나님은 원망의 죄를 아주 심각하게 보시고 다루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이러한 원망의 깊은 DNA가 골수까지 깊이 사무쳐 있다는 것을 출애굽 때부터 시작해서 여기 올 때까지 보여주었고, 이것은 예고편일 뿐이고 이 후 민수기 14장부터 이스라엘 역사 내내 그들이 자유로운 삶을 살지 못하도록 발목을 붙드는 사건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마음 깊이 하나님에 대해서 섭섭한 마음을 품고 하나님을 원망할 때 어떻게 저렇게까지 될 수 있을까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일은 우리에게 매우 쉽게 일어납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기쁨과 감사로 가득하지 못한 마음은 이러한 원망에 매우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진영을 불로 태우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큰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큰 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심으로 원망의 죄를 짓지 말도록, 더욱이 말로 그 원망을 퍼뜨려 연약한 사람들에게 전향시키는 그 일을 하지 말도록 하나님이 중대하게 이 사건을 다루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실한 회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에서 그친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선택하신 백성들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긍휼한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Ⅳ. 적용과 결론
그러므로 우리들은 원망의 죄를 가볍게 여기지 맙시다. 사람을 원망하는 것과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하나이니, 사람을 향한 원망은 그러한 사람을 만나게 하신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담겨 있고 하나님을 향한 원망은 그 원망스러운 일에 도구가 되었던 사람에 대한 미움이 항상 그 속에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원망은 그저 우리의 마음에 달콤한 사탕처럼 쉽게 다가오고 그리고 그 원망을 극복하고 다시 하나님의 기쁨과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우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관계 전체를 개혁하기를 요구합니다. 그렇지만 그 하나님을 향한 절망과 그 배교는 일어나고야 맙니다. 그래서 이렇게 우리에게 늘 가까이 있는 이 원망의 죄에 대한 최고의 해결책은 그러한 원망하는 마음이 처음부터 우리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도록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매 순간 우리의 마음을 기쁨과 감사로 가득채운다면 어떠한 어리석은 사람이 마음이 원망의 어두움으로 가득차서 말로 우리를 전염시킨다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은 그러한 원망하는 마음에 오염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이 심히 부패한 상태에서 누군가로부터 시작한 원망의 말을 들었고 이것이 공감을 얻으며 그들은 일순간에 하나님을 향한 미움과 원망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중요한 심판으로 이 죄를 다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원망하는 마음에 대한 최고의 대비책은 우리의 마음을 순간순간 기쁨과 감사로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의 수중아래 있다고 하는 것을 굳게 믿으며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입니다. 칼빈 선생은 자신의 책 속에서 인간의 가장 중요한 의무를 견디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나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 현실에 매몰되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면서 모든 상황을 견디는 것이라 보았습니다. 결국 좋으신 하나님이 우리 속에 일어나고 있는 많은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일들, 그리고 때로는 억울하게 느껴지는 상황까지도 그것을 사람 앞에서 원망하는 마음으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충고였습니다. 그리고 신앙은 눈에 보이는 이러한 삶의 사태를 뛰어넘어서 신실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고 계시고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어도 섭리 속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좋으신 계획을 따라 우리를 이끌고 계실 것이라는 것을 굳게 신뢰하는 것입니다. 생활 속에서 어떤 증거를 보기 때문에 비로소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 마음 속에서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에 그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그러한 현실에 요동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이 원망의 죄에 빠질 위험이 현저히 줄어들고 그렇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섭리 속에서 이루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사람의 확고한 마음에는 타인을 원망하는 말이 그의 마음을 흔들 수 없습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면서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기쁨과 감사로 여러분들의 마음을 가득 채웁시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원망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가졌던 섭섭한 마음들이 그것이 사실은 어두움의 씨앗인줄 알고 그렇게 씨앗이 뿌려지도록 허락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고 새 마음을 주시도록, 나 같은 죄인을 구해서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깊이 감사하며 나는 만입이 있어도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향한 은혜를 헤아려야 합니다.
(예화) 오래전에 슬픔과 마음의 어려움으로 가득 찬 성도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하면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기도할 것입니다. 먼저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기도하지 말고 노트를 꺼내어 하나님 앞에 너무 감사한 것 50개를 찾도록 하였습니다. 그 분이 집에 가서 숙제를 하였습니다. 50개까지는 못 찾았습니다. 나중에 만나서 어떠했는가 물었습니다. 그것을 쓰다가 회개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지금은 잊어버렸지만 생각해 보니까 구원의 은혜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인생 굽이굽이 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신 순간들이 없었고,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할 때마다 지금보다 삶의 환경이 어려웠어도 하나님께 대한 소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환경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미움이 쉽게 일어나는 마음의 토양을 가진 사람들은 모든 삶의 상황이 잘 풀리면 교만해집니다. 그래서 미끄러집니다. 그러한 사람을 많이 봅니다. 시련 속에서 눈물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이 응답해주셔서 해결해 주니까 미끄러진 사람들이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얼마나 많이 보았습니까?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어렵습니다. 계속 시련이 닥칩니다.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마음이 커져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합니다. 항상 하는 이야기가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 일어나도 나쁜 것이고, 나쁜 일이 일어나도 나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나쁜 일이 일어나도 좋은 것이고 좋은 일이 일어나도 좋은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언제 우리의 인생이 우리 마음대로 일 년이라도 전개되는 때가 있겠습니까? 3년 쯤 전개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한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의 마음대로 전개가 안 되지만, 비교적 죄가 없어도 하나님은 또 다른 섭리 속에서 우리에게 어려운 길을 가게 하십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매일 매일 하나님을 붙들고 다시 태어나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단련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앞에서 전개되는 현실을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깊이 감사할 수도 있고 또 원망의 깊은 마음으로 빠져들어서 마지막에는 원망하고 하나님을 욕하고 죽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매 순간 우리가 이러한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면서 매순간 우리의 마음을 기쁨과 감사로 채워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의 밭이 원망의 씨앗이 떨어져봐야 소용이 없는 밭으로 우리 마음을 만들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과도한 욕망을 품으니까 불평과 불만이 생겨나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은혜를 알고 깊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였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고 이제부터 사는 인생은 덤으로 사는 것이니 할 수 있는 한 우리 주님의 이름을 높이며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원망의 죄를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기쁨과 감사의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