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임교역자 심방교육
녹취자: 김경애
심방이라는 것이 사실은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정통물처럼 여겨지지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사를 다 추적할 필요는 없지만 초대교회를 보더라도 보면 목회자와 성도들의 만남이 아주 개인적인 만남이 굉장히 강조되었습니다. 무엇을 보면 알 수 있느냐 하면 로마서 마지막장에서 사도 바울이 사람들을 소개하면서 사람들의 이름들을 거명하면서 개인에게 감사하는 표현을 하면서 16명 이상의 사람 이름이 나옵니다. 그 대사도가 그런 사람들 하나하나를 기억하면서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개인목양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교회의 전통이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공인되고 로마의 국교로 지정되면서부터 찾아가던 심방이 사제들에게로 사람들이 찾아오는 구도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중에서도 수도사들이나 신실한 사람들은 병자들을 찾아다니고 구제하는 일들을 했지만 그러나 심방이 교회에서 무시되게 됩니다.
그러다가 심방이 종교개혁과 함께 다시 떠오르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보면 칼빈이 제네바에서 목회를 했을 때 부흥회를 다니느라고 대부분의 시간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크게 네 가지 정도의 사역이 있었는데 첫째는 자신의 말씀을 연구하는 사역에 온전히 헌신했고, 그 다음에는 치리회(Consistory)를 운영하는 사역, 그리고 콩그리가치오 라고 해서 목회자들을 위한 성경공부 모임을 매주 금요일마다 했습니다. 그 이외에 자신의 시간을 많이 사용했던 시간이 심방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제네바로 다시 돌아왔을 때 오천 명 정도 모이던 회중이 마지막 칼빈이 죽을 때는 만 오천 명이 되었다고 하니까 물론 한군데 놓고 목회한 것은 아니었지만 동역자들과 함께 회의를 하면서 끊임없이 심방을 하는 목회를 했습니다. 사실은 칼빈이 젊었을 때에는 논문을 많이 썼는데 목회를 하면서는 논문을 많이 못쓰게 됩니다. 관심사 자체가 달라진 것도 있겠지만 그만큼 시간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청교도들에게로 넘어오면 청교도들은 심방을 목회자의 아주 신성한 임무라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심방을 많이 하던 대표적인 사람이 리처드 백스터입니다. 리처드 백스터는 마을에 가서 선교할 때 키더민스터였는데 지금도 키더민스터에 가면 마을 어귀에 굉장히 높은 목자로서 사람들을 보듬고 있는 상이 서있습니다. 리처드 백스터의 ‘참목자상’이라는 책의 표지에 나오는 그림이 그것입니다. 심방을 정말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이 사람이 갔을 때 가정예배를 드리는 가정이 두 가정이나 네 가정 밖에 없었는데 사역이 모두 끝났을 때에는 예배를 안 드리는 가정이 두 가정이나 네 가정 밖에 없었답니다. 가구 수가 260여 가구가 넘는 마을을 전체적으로 복음화 하는 일에 헌신했고 너무 특이하게 토요일에 심방을 집중적으로 하는 날로 잡았습니다. 그래서 설교준비를 마치고 성도의 가정을 심방하면서 성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달아오르게 한 다음에 토요일에 와서 간절히 기도하고 주일에 열렬하게 그 마음으로 선포하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심방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한국교회는 사실 심방으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마실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는데 전통적으로 농촌마을에는 서로에게 절대적으로 무관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사도 ‘안녕하셨습니까? 밤새 평안하셨습니까?’라고 물어봅니다. 요즘과 같이 누가 고독사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 서로 돌아보는 것입니다. 아침에 누가 우물가에 안 보이는데 무슨 일이 있는지 가보자는 식으로 그런 문화 속에서 복음이 심겨졌을 때 사람들을 챙기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보면 전도부인들, 권서인들, 매서인들, 방물장수처럼 기독교 서적을 떠메고 다니면서 방방곡곡 다니면서 팔던 사람들인데 책을 파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도에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당연히 심방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때에도 여러분들은 믿지 못하겠지만 교육전도사일 때 목사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야간대학을 다니고 우체국장을 하다가 그만두니까 목사님이 만날 나이든 권사님들과 다니기 싫으니까 나를 심방가자고 그러셔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록이 21가정을 한 것이 기록입니다. 아침 새벽에 7시쯤 출발해서 밤 8시쯤 끝났을 것입니다. 그 대신 다 동네 안에 있었으니까 21가정 심방을 했습니다. 심방이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심방을 안 합니다. 여러분들이 학교에 가서 심방을 하는 사람이 있는지 알아보십시오. 없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목자의 마음에서 관리자의 마음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양을 치는 목자의 심정이 아니라 양통조림을 만드는 공장주인의 마음으로 넘어갑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참된 목자의 마음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중간결론을 내리자면 심방은 성경적으로, 교회사적으로, 한국교회사적으로 매우 매우 중요한 교회의 목회의 수단이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지금은 그런 것이 매우 약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느냐하면 지금은 단절의 시대입니다. 서로에 대한 관심사가 별로 없습니다. 그것이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낮추어서 말하는 것은 아닌데 어떤 목사님 한분이 오셨는데 6개월을 열린 교회에 있었는데 그가 심방한 가정수가 전에 있던 교회에서 5년 심방한 수가 맞먹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묻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뒤에 현황판을 만들어 놓고 아예 전도사, 목사 이름을 적어놓고 직접 글로 쓰게 합니다. 그렇게 관리하는 교회도 봤습니다. 내가 있던 교회가 그랬습니다. 나는 그런 적은 없습니다. 열린 교회에 와서 목회가 무엇인지를 배우고 나니까 누가 임무를 준 것이 아니라 나는 ‘김 목사님 있을 때 일주일에 15가정 심방을 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는 하지 않았습니다. 가서 교구를 맡고 일을 하다보니까 남이 하는 것을 보니까 교회의 시스템이 심방을 하지 않는 시스템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가 심방을 해놓고 그것을 본 전도사들이 학교에 가서 ‘열린 교회는 가기만 하면 빡세고 사람을 잡는다고 하더라! 졸도하든지 아니면 득도를 하던지 둘 중의 하나라고 하더라!’는 소문을 낸 것입니다. 그것은 잠잠하게 충성하는 사람은 그런 소문을 내지 않습니다. 대게 그런 소문을 내는 사람들은 하다가 중간에 탈락한 사람들이 가서 그런 소문을 냅니다. 기절할 정도로 일을 시킨다고 하는데 시킨 것이 아니라 함께 동역하는 사람들의 전체적인 구조가 그렇게 굴러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교회학교를 갑니다. 아무도 심방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전도사가 왔습니다. 전에 있던 교회에서 열심히 심방을 했습니다. 가서 열린 교회에서 배운 대로 대심방을 합니다. 그것을 못합니다. 선배들이 아주 꼽게 봅니다. 실제로 우리 교회에 있던 전도사 한 사람이 뒤로 들어가서 수석목사가 쟤 손 좀 보라고 하더랍니다. 데려가더니 조인트를 까고 때리더라는 것입니다. 조폭집단 아닙니까? 눈치 때문에 못합니다. 그런 식으로 한 4~5년 생활을 하다보면 자기도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라고 이야기 하는데 ‘수스께마티조’라는 단어인데 붕어빵을 찍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다이케스티에 부어서 찍습니다. 그런 것을 이야기합니다. 이 세대 자체가 똑같은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심방과 관련되어서 이야기하면 ‘요즘 같은 단절의 시대에 무슨 심방을 하냐? 프라이버시 시대에 무슨 심방을 하느냐? 전화나 하고 각자 개인이 알아서 하고 심방하지 마라.’ 우연히 이발소에 들어갔는데 이발소 사장님이 성당에 다니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는 성당에 다니다가 안다닌답니다. 그래서 ‘심방은 안 옵니까?’ 그러니 성당에는 심방이라는 것 자체가 없답니다. 사람이 죽는다든지 이런 때는 가지만 심방이 없답니다. 그냥 오면 목양해 주고 안 오면 그만인 것으로 이야기합니다. 충격이었습니다. 그런 것들은 성경적이 사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일이 사실은 남이 안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생각하면서 이 사역을 하면서 심방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에스겔 시대 때에 하나님이 당시 시대상을 에스겔 선지자를 불러서 한탄하면서 성전의 문을 닫아버렸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로 신앙이 타락하고 성직자들의 생활이 문란해지고 성전으로부터 영적인 영향을 거의 받지 못하는 시대가 됩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선지자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네 양들이 산에 흩어졌고 들에 흩어졌고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데…….’ 그런데 자기들은 그 양으로 가죽을 벗겨서 옷을 만들어 입고 고기를 썰어서 먹는데 무슨 이야기냐 하면 그 양들이 바치는 것을 가지고 먹고 살면서 양들을 돌봐야하는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인데 결국 목자들은 하나님이 심판하고 흩어진 양떼들은 당신이 직접 모으실 것이라는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실현이 되고 그러면서 마태복음 9장에서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방황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뭐냐 하면 ‘에스킬멘노이’와 ‘에르멘노이’ 라는 두 단어가 쓰이는데 방황하고 기진했다고 하는데 사실은 ‘립토’ (던져버리다는)라는 동사입니다. 그리고 괴롭게 하다는 동사의 수동분사 남성복수로 쓰입니다. 그러니 내동댕이쳐진 사람들,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들, 두 단어를 씁니다. 25년 전에 그리스 원문을 보면서 엄청나게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구절이 열린 교회를 개척하게 된 하나의 정신적인 토대가 되었습니다.
아무 대책 없이 백성들이 돌봐져야 하는데 내동댕이 처져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과 사단에 의해서 괴롭힘을 많이 당하고 있는데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이 버려진 것입니다. 그 광경을 보면서 예수님의 마음이 ‘에스프랑크니스데’ 라고 하는데 뭐냐 하면 ‘무브투언스바우어’라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의 창자에 이르기까지 마음이 감동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결국 무엇이냐 하면 ‘에스프랑크니스데’ 라는 단어 자체에서 ‘스프랑크’인가 그 단어가 창자와 관련이 됩니다. 그 당시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영혼의 자리가 창자라고 본 것인데 우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하는데 그 사람들은 배에 손을 얹고 생각하라고 합니다. 아프리카 콩고사람들은 간에 영혼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우간다의 이디아민 대통령이 폭정을 하고 정적을 죽여서 배를 갈라서 간을 씹어 먹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그냥 광기가 아니라 영혼이 자기 안에 갇혀서 다시 환생하지 못하게 하는 하나의 제의적인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말로 하자면 ‘예수님이 무리를 보시고 가슴이 찢어지게 아프셨으니’ 이렇게 해놓고 그 마음으로 10장에 넘어가서 무슨 일을 하셨느냐 하면 여태까지 자기 옆에서 모여 있던 제자들을 사도 삼으셔서 보내시는 것입니다. 심방의 구조에서 보면 이제까지는 예수님 앞에서 훈련을 받고 예수님이 가는 곳을 졸졸 따라다니던 제자들을 권능을 주셔서 파송을 해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게 하는 것입니다.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다시 찾아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찾아온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느 한 장소에 모은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주님의 뜻대로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심방은 그냥 찾아가는 것은 심방이 아닙니다. 그것은 방문입니다. 그것은 판매원도 하는 것이고, 검침원도 하는 것이고, 택배기사도 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심방은 찾아가서 그 사람의 마음에 뭔가 경건한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단순한 가르침이 아니라 인격 대 인격으로 만나서 그 인격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게끔 만들어 주어서 그 사람의 신앙에 쿵하는 울림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좌절하고 낙담한 사람은 격려하여 일으켜 세우고, 오류에 빠진 사람은 참으로 돌아오게 하고, 마음이 들뜬 사람은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 주고, 그리고 슬픈 사람은 위로하여 용기를 얻게 만들어 주는 것이 이것이 진정한 심방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활동이 그 안에 없다면 그것은 심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요즘 메타버스 어쩌고저쩌고 하는데 그것을 별로 신뢰하지 않지만 메타버스로 갈아타야 한다는 등등 이야기 하는데 과정이 많고 다음 세대가 IT기술로 인해서 사람들이 새로운 신세대의 문물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사회가 되고 사람들은 혼란을 느끼는데 자아가 몇 개냐는 것인데 예전에는 자아가 하나였습니다. 이제 실제 살아갈 때는 자아 하나가 아닙니다. 메타버스의 세계에서는 아바타가 자기의 자아가 됩니다. 여기서는 내가 자아이지만 SNS에서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과시할 때에는 또 다른 자아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자면 복합적인 자아적인 상태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진정한 자아에 대한 통찰은 흐려지겠습니까? 또렷해지겠습니까? 나도 거짓말하고 있는 내가 진짜 나인지? 속고 있는 내가 진정한 나인지? 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기 자신 속에서도 혼란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다음 세대의 교회는 쇠퇴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지금 국민소득이 38,000불이 넘었다고 하는데 40,000불이 넘어가는 국가 중에서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국가는 별로 없습니다. 45,000불 50,000불 넘어가게 될 때에 인간은 당연히 구라파 혹은 북유럽이 갔던 길을 가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확실한 사실 하나는 있습니다. 심방하는 교회는 살아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인간이 단절하고 아파트 아래층 사람이 죽은 지 두 달이 되어도 겨우 시체 냄새 때문에 알게 되는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사람들로부터 떨어지고 싶어 하면서도 사실은 사람들이 사람들과의 따뜻한 관계를 너무나 갈망합니다. 겉으로는 거부하지만 속으로는 너무 간절히 원하는 그런 상황이 되기 때문에 그런 외로움은 물질문명이 득세하면 득세할수록 더욱 심화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들어서 아주 훌륭하게 심방할 수 있다면 그 심방 때문에 교회가 몇 만 명, 몇 십만 명이 모인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그러나 행복한 교인들을 만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자훈련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것은 제자훈련이 가르치는 성경공부라든지 가르침의 내용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렇게 그 시대 때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에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함께 모일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고, 모인 사람들이 서로의 삶을 나눌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든다는 자체가 80년대에 있었던 산업화 사회의 혹독한 노동환경 속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살아남게 만드는 하나의 중요한 사회의 심리학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더라도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미래학자도 기술이 발달됨으로써 인간관계를 대체할 수 있는 세대가 올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가상의 세계를 현실처럼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사실은 진정한 현실을 갈망하는 것이 인간의 심정이기 때문에 앞으로 세대가 아무리 변해도 심방을 효율적으로 잘하면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목회자는 심방 때문에 몇 만 명의 사람을 모은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몇 백 명의 교회를 행복하게 목회할 수는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교인이 천명 모일 때까지 제가 모든 교인을 등록심방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멀어도 평택까지라도 차를 타고 가서 심방을 했고, 한 집안에 청년과 장년이 함께 나오면 장년 부부는 따로 심방을 하고, 청년을 따로 심방을 할 정도로 그렇게 심방을 했습니다. 천 명이 딱 되고 나니까 일주일 내내 심방을 해도 등록하는 사람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이렇게 하면서 목회자의 시간을 모두 써버리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해서 그때부터 심방을 안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말씀 사역하는 쪽으로 시간을 사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주 안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심방을 해야 합니다. 먼저 확신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한 번에 되는 것이 아니라 훈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전투에서 백병전을 하게 되면 평소에 얼마나 훈련이 잘되었느냐에 의해서 모든 것이 결정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훈련되지 않는 사람은 훈련된 특수부대 사람들과 20명이 한사람과 겨루어도 이길 수 없답니다. 이것은 현역장교가 얘기해준 이야기입니다. 아주 특수하게 훈련받은 사람 그러니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습니다. 대충 하다가 힘겹게 목회를 하면서 보람 없이 인생을 마칠 것인지 훌륭하게 훈련을 받고 유능하게 아주 멋있게 사역하다가 인생을 마칠 것인지 그것을 각자 선택에 달린 문제입니다. 여러분들이 그것을 먼저 가슴에 새겨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론으로 들어가서 그러면 어떻게 심방을 할 것인가 입니다. 심방을 하는 제일 첫 번째는 이유는 두 가지 동기가 있는데 하나는 내가 판단하는 목회자의 필요에 의해서 저 사람을 내가 한번 만나서 심방을 해야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결과적으로 저 사람이 나를 만나기를 원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상황을 전해주는데 만나지 않을 수 없는 요청이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시작되었든지 심방할 때 첫 번째는 그 사람에 대해서 될 수 있는 한 많은 정보를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쪽 만이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하는 것은 너무 좋습니다. 둘이 부부가 결혼한 지 몇 달 안 되었는데 대판 싸웁니다. 그때는 신혼부부들도 다 심방을 해주었습니다. 자매가 와서 펑펑 울면서 ‘우리 남편이 이런 사람인줄 몰랐어요.’ 왜 그랬느냐고 하니까 ‘저를 때렸어요.’ ‘말이 되느냐 결혼한 지 몇 개월밖에 안되었는데 말이 되느냐? 나쁜 놈 당장 감옥에 집어넣어야지!’ 그러고 나서 며칠 있다가 형제를 불렀습니다. ‘너는 도대체 무엇을 하다가 온 놈이냐? 열린 교회에서 그만큼 훈련을 받았는데 감히 여자한테 손찌검을 하느냐 치리 한번 받아 볼 테냐?’ ‘목사님 그것은 제가 진짜 잘못했습니다. 그런데 저도 너무 괴로웠습니다.’ ‘그것이 뭐냐?’ 석 달 동안 밥을 한 번도 안차려 주었답니다. 그런 사연을 당사자는 와서 다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이야기합니다. 어느 한편을 믿고 심방을 가기 전에 누구의 편이 되어서 가면 안 됩니다. 다 듣고 보면 아침도 차려주지 않고, 직장에 나가는데 이불을 뒤집어쓰고 네가 밥을 차려먹고 가든지 내가 밥을 차려주려고 결혼을 했느냐는 태도입니다. 3년을 연애를 했는데도 그런 진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밥을 해주고 안 해주는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인 인성의 문제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사람에 대해서 풍부한 정보를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두 번째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냥 가는 심방과 그 사람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가는 심방을 다릅니다. 간절히 기도하면서 그 사람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찾아가면 상태가 좋은 사람은 집에 방석 깔아놓고 다과도 차려놓고 기다립니다. 그런 심방은 사실 너무 쉬운 것입니다. 이미 마음에 목회자를 받아들일 마음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들어갑니다. 심방을 하면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지 않고 마음에 받아들인 자세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심방을 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일학교 같은 경우에는 심방을 피하는 애들이 많았습니다. 워낙 설교도 강하게 하고 아이들이 교회에 와서 심적인 부담을 느껴서인지 도망을 많이 갔습니다. 그럴 경우에 인내심을 가지고 열정을 가지고 심방을 해야 합니다. 만나자고 했을 때 만나주는 애들은 상태가 좋은 애들이고, 안 만나주는 애들은 친구들을 파악해서 동선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 정보는 노출이 안 될 수 없습니다. 자기들끼리 정보를 공유하기 때문에 ‘토요일 11시면 걔는 학원에 있습니다.’ 라든지 ‘학교도서관에서 네 시쯤 나와요.’ 라든지 등등의 정보가 있습니다. 도저히 안 되는 경우에는 도서관이나 학교에서 기다리다가 도저히 안 되면 집으로 들어올 것입니다. 집에서 기다립니다. 엄마 아빠가 들여보내지 않으니까 집 앞 골목에서 기다립니다. 얼마나 기다릴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차에 타고 기다리거나 여름에는 그 앞에 벤치에서 기다립니다. 그러면 터덜터덜 거리며 밤 9시쯤 되면 옵니다. 그러면 만나는 것입니다. 심방을 집안에서 잘되는 경우에는 가서 심방을 하시고, 심방할 때에는 설교보다도 질문을 너무 비비꼬인 질문 말고 명쾌하게 아이들이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준비해 가져와야 합니다. 많이 물어봐야 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목회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많이 물어봐야 합니다. 시작은 항상 그 아이나 그 사람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떡 장사하는 사람일 경우에 대화를 빨리 트는 것은 무엇에 대한 이야기이겠습니까? 떡 장사하는 사람 앞에게 항공기이야기 하면 이 사람은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떡 이야기를 합니다. ‘요즘 무슨 떡이 잘 나갑니까? 그 떡도 계절에 따라서 잘 팔리는 떡이 다릅니까?’ 그런 등등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집은 떡장수를 합니다. 옆집은 비행기 조종사입니다. 시작하면 비행기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합니다. 비행기가 어떤 종류가 있고 어떤 원리에 의해서 비행기가 뜨는지 알고 있어야합니다. 이분은 경제학교수입니다. ‘세계경제동향이 어떻습니까?’ 이야기를 하면 그 사람이 ‘그래도 말이 통하는 목사네!’ 옆집 생선가게 하는 사람에게 ‘요즘 부시리가 굉장히 많이 잡힌다죠?’ 공감대를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깊고 높은 지식이 아니라 얇고 넓은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심방해 버릇을 하면 이쪽에서 계속 들어옵니다. 내가 궁금한 것을 계속 물어보면서 나는 거기서 배우는 것입니다. 사람이 말을 많이 하고나면 마음이 열립니다. 가자마자 ‘요새 부부 싸움한다며?’ 이것은 시비조가 됩니다. 그렇게 마음을 열게 됩니다. 어느 집에 갔더니 도시계획 전문가입니다. 그래서 ‘요새 도시계획은 어떤 식으로 되어갑니까? 서울의 도시계획이 잘못된 것은 어떤 것입니까? 도시 계획 중 어느 일을 하셨습니까?’ 충분히 이야기하게 하고 ‘저는 도시계획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가지고 있는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내가 이야기했던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한강에 15층까지 밖에 지을 수 없게 아파트가 블록처럼 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다 헐어버리고 그냥 기분 내키면 75층까지 허가를 내줘서 15층짜리 5개를 합쳐서 위로 짓는 것입니다. 그것을 몰아버리고 나머지 ¾은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배정하고 그러면 이 도시가 굉장히 아름다워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우리 목사님이 도시미학에 대해서 탁월한 견해를 갖고 계시다니 맞습니다. 그런 식으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오세훈 시장이 있을 때부터 제가 이야기한대로 50층밖에 허가를 내주지 않았지만 나는 75층까지 허가를 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퍼지지 못하게 한데로 모아서 위로 올리고 나머지는 과감하게 자연녹지를 만들어서 한강 가에 있는 돌멩이들을 부수고 배들이 숲 사이를 지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몇 번 만나다보면 도시미학에 대해서 자연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한 수학교수를 만났습니다. 에르바르디의 직관수학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를 나누면서 상식을 넓혀가는 것입니다. 신문에 보면 그런 것이 들어오고 잡지에 보면 요즘 인터넷으로 보면 다 나옵니다. 그러면서 대화를 나눕니다. 지금은 훨씬 더 좋습니다. 예를 들어서 저 집이 배 만드는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면 가기 전에 한국의 조선산업을 보고, 현대중공업이면 현대중공업의 판금부를 들어가서 배의 판금작업이 어떤 것인지 정보를 가지고가면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너무 길면 안 됩니다. 그 이야기를 다 하다가 다과를 먹고 ‘다음에 또 오겠습니다.’ 그러고 가면 안 됩니다. 항상 자기의 임무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 온 사람이니 그런 이야기들이 많이 오고가고 나면 의외로 마음이 열리는 것입니다. 저 목사님은, 저 전도사님은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은 사람이라고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교제를 나눈 다음에 신앙적인 이야기가 오고가는 것입니다. 그래프를 그린다면 맨 처음에 영적이 이야기는 조금 들어가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그 사람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흘러가면서 신앙적인 이야기가 조금 더 많아지고 개인적인 이야기가 훨씬 더 많아지게 가다가 개인적이고 세상적인 이야기는 거의 사라지고 성경이야기로 꽉 채우는 이렇게 된 그래프를 양쪽으로 그리게 됩니다. 이해됩니까? 그렇게 하면서 다 무르익었을 때 ‘우리 예배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면서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어렵고 긴 찬송 부르지 마십시오. 내가 좋아하는 찬송이 반 토막으로 되어있는 찬송입니다. 아니면 2절이나 3절로 되어있는 찬송입니다. 아니면 ‘1절과 4절을 부르시겠습니다.’ 라든지 그 상황에 꼭 맞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많이 해봐야 합니다. 나는 심방하러갈 때 설교를 준비해간 적이 없습니다. 찬송을 부르는 사이에 생각이 성경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검색을 하면서 이 사람은 떡집을 하고 있고, 떡이 잘 안 팔리고 있고, 사업하는데 고생을 많이 하고 있고, 어머니까지 병에 걸렸으면 거기에 적합한 찬송을 찾는 것입니다. 찬송을 한번 부르는데 생각이 잘 안 나면 ‘한 장 더 부르십시다.’ 하면서 한 장 더 부르면서 찾는 것입니다. 거기서 핸드폰을 꺼내서 검색하면 안 됩니다. 기본적으로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낙심한 사람, 믿다가 실족한 사람, 옛날에 성경책을 보면 다 나옵니다. 아니면 오류에 빠진 사람, 정욕에 빠진 사람, 남의 말에 마음이 상해서 교회에 못나오는 사람, 성경을 읽으면서 메모를 해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 성경에 붙여놓고 다니는 것입니다. 죽어도 생각이 나지 않으면 할 수 없이 이것을 펼치고 보는 것입니다. 믿다 낙심한 사람이라면 히브리서 몇 장 몇 절입니다. 그러면서 성경을 펼치는 것입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리고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어떻게 하면 되느냐 하면 오늘 아침에 내가 직원예배 설교한 것처럼 설교하면 됩니다. 뭐냐 하면 무엇을 보고 하지 말고 그 사람들을 사랑의 눈으로 보면서 속에서는 아주 조리 있게 또렷하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그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길면 절대 안 됩니다. 길지 않고 아주 길어도 15분이고 10분이면 적합합니다. 그러면 또 어수선하면 사실 성경만 읽어주고 나와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잘 전해야합니다. 그런데 말씀에 은혜를 주시고 사람들이 너무나 진지하게 들으면서 감동을 받으면 조금 더해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긴 건은 감동을 떨어뜨립니다.
지금은 제가 직접 심방을 하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다 심방을 했습니다. 그러면 심방을 하고 오면 심방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몸에 손을 대지 마십시오. 요즘 같은 때에는 너무나 많은 오해가 많기 때문에 개척할 때에는 안수기도를 많이 해주었는데 그리고 특별히 원하는 사람이 있을 때 그럴 경우에는 해주어도 되는데 될 수 있으면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진실로 기도를 드리면 진짜 그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 사람의 마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간절히 기도해 주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심방대원들과 함께 가면 항상 타이르고 사전에 교육을 시키고 들어가십시오. 교사들을 데리고 탔는데 자기 세상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심방을 가는데 심방 받는 아이에 대한 생각은 거의 하지 않는 것입니다. 새 옷을 샀는데 어떻고, 구두가 어떻고, 직장이 어떻고, 수입이 어떻고, 이런 것을 하지 말라고 해야 합니다. 갈 때에는 최소한의 대화를 해야 합니다. 은혜로운 대화를 나누고 마음을 심방을 기다리고 있는 영혼에 집중하라고 타이릅니다. 그래서 대심방을 하기 전에 교사들을 다 모아놓고 다 정리를 해서 심방교육을 시킵니다. 가슴에 새기도록 합니다. 가서 심방을 하고 돌아와서는 타이프로 쳤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자와 같으니’ 타이프로 쳐서 요만하게 만들어서 일 년 동안 냉장고에 붙여놓도록 만들어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구절이 나오고 그 다음에 설교한 내용 중에 일부가 조금 나오고 그렇게 해서 주면 항상 성도 집에 나중에 심방가보면 연초에 심방했던 그것을 냉장고에 걸어놓고 나오면서 들어오면서 나오면서 그것을 보면서 금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지금은 그때에 비해서 예쁜 장신구들이 너무 많이 나오고 퓨리턴 도서관에만 가도 나무를 집어넣고 컴퓨터를 누르면 레이저로 각인이 되어서 나오니까 너무 많은 것입니다. 잘해서 사람의 마음을 사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일 경우에는 저는 주일학교의 경우에 중고등부 심방할 때는 항상 선물을 준비해갑니다. 선물이라고 해봐야 큰 것이 아니라 그 당시에 포켓에 넣어서 읽을 수 있는 책이나 아니면 커다란 귤 하나, 아니면 볼펜 한 자루, 아니면 예쁜 엽서 하나 ,그리고 심방 때 다 못하는 이야기를 미리 써 가지고 가서 주고 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내 마음속에 네가 있다 그리고 너를 목자로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뭔가를 갖추는 것입니다. 그것을 심방 간 다음에 두고 보면서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제일 큰 감동을 받는 것은 편지입니다. 그것도 컴퓨터로 막 쓰는 편지가 아니라 손으로 쓴 편지입니다. 예쁜 엽서에 깨알같이 가득 쓴 편지들입니다. 그런 것을 전해주고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고등부 때 보면 교사들이 심방을 안 합니다. 하여튼 안하는 이유가 성의가 없어서 안하기도 하는데 교역자들이 훈련을 시키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데리고 다니면서 심방교육을 많이 시켰습니다. 그리고 나는 선생과 상관없이 심방을 합니다. 주일날 항상 심방을 하는데 많으면 15명을 찾아다니면서 심방을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보통 7명 정도씩 심방을 합니다. 주일날 15명씩은 다 못하고 토요일과 주일에 걸쳐서 하면 15명씩 심방합니다. 그러면 10명은 교회에 나옵니다. 안 나온 애들은 엄청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다음에 연락을 해도 전화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런 Contact Point가 없으면 연락을 해도 연락을 받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너무 잘 알 것입니다. 그때는 카톡도 없었지만 카톡을 해도 문자도 보지 않습니다.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핵심을 이야기 하자면 방법도 중요하지만 마음을 진심으로 실어서 심방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열매가 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 자신을 위해서 너무나 좋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 중등부 애들 모두 평안하게 해주시옵소서.’ 그것은 사실 응답될 수 없는 기도입니다. 어떻게 걔네들이 모두 평안해질 수 있겠으며 또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그것을 응답받았다고 느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심방을 하고나면 구체적인 기도의 제목이 떠오르게 됩니다. 그래서 심방은 기도를 촉진합니다. 그렇게 눈물겹게 심방을 하고 왔는데 돌아와서 기도를 안 하는 것은 목자도 아닙니다. 심방을 가기 전에는 그 집에 문제가 있다고 들었는데 ‘하나님 저렇게 해주세요.’ 피상적인 기도를 했는데 가서 절절한 사연을 보고 나면 간절한 눈물의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주일학교 교사를 할 때에 카드를 파란 것, 빨간 것, 노란 것, 초록으로 네 가지를 만듭니다. 빨간 것은 위기에 처한 아이들입니다. 파란 것은 아주 신앙의 상태가 좋은 아이들입니다. 초록은 괜찮은 아이들입니다. 노랑은 경고의 의미입니다. 전철을 타고 출근을 하면서 빨강카드, 노랑카드, 초록카드, 파랑카드를 꽂고 다니면서 전철타면 무엇을 합니까? 졸아봐야 피곤하기만 합니다. 기도를 합니다. 어디서든지 심방을 했기 때문에 한 사람 한사람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간절한 기도가 됩니다. 어떤 때는 기도하다가 내 마음에 부흥이 일어나고 내가 이렇게까지 얘를 사랑했는가 하며 눈물이 나기도 합니다. 사람은 모르지만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기도를 하고 주일 아침에 걔네 집으로 교회로 데리러 가면 이상하게 영적인 권위가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따라옵니다. 그런 것들이 결국은 기도가 쌓이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간절한 기도 속에서 심방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목양하는 그 자체가 현저하게 달라집니다. 집단적으로 놓고 아까 너무 심했는지는 모르지만 양치는 목동의 마음으로 돌아가지 양통조림공장 주인의 마음으로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한 마리 한 마리의 양을 돌보면서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찾을 때까지 그것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목양을 하는 그것이 진짜 목회입니다. 그것을 양들로 보지 않고 통조림으로 보고 개수를 이리저리 옮기는 그것이 무슨 목회입니까?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오늘날의 목양이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목양이라는 자체가 사실 양떼의 필요를 알면서 양떼를 돌보는 것이고 양떼와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안다고 하는데 안다는 것 자제가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기노스코’라는 것인데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사랑하면서 알게 되기 위해서 심방은 너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심방을 후배들은 아직 못해봤지만 선배들은 다 해봤을 것입니다. 대심방 해봤습니까? 소감이 어땠습니까? 심방을 하기 전과 심방한 후에 어땠는지 이야기해 보십시오.
“예전에 한 프로그램을 보면서 한 사진기사가 나오는 프로그램을 봤는데 그 사진기사가 을지로에 있는 사람들을 사진 찍기 위해 갔는데 자기 마음대로 안 찍는다는 거에요. 느낌이 안 산다고 그랬어요. 이 사람들과 한 달간 살아봐야겠다. 한달간 살고 사진을 찍으니 진짜 그들의 모습을 알고 그들의 모습을 제대로 자기가 원하는 모습으로 찍을 수 있었다. 그런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심방도 이것과 비슷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명 한 명을 같이 살지는 못했지만 그들과 있으면 내 마음에 계속 있으면서 한 명 한 명 만날 때 이 친구가 이런 상황에 있고 이 친구의 가정은 이런 상황에 있고 이야기를 들으니 같이 살게 됬던 것 같고 그 이후에 그들에게 필요한 말씀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그들의 상황에 맞춰서 말씀을 전달하고 보니 아이들에게도 필요한 말씀과 말씀에 변화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심방하기 전에 설교단에 올라갔을 때에는 군중으로 보이는데 심방을 하고나서 설교단에 올라가면 자기를 바라보는 하나하나 아이들의 영혼이 대하소설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렇게 상처가 많고 이렇게 이렇게 어려움이 많은데 자신의 품속으로 양떼들이 들어오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러면서 설교를 하게 되니까 당연히 그 설교 속에는 간절한 사랑이 묻어나는 것입니다. 지금도 보면 심방을 잘하는 목회자들은 다른 교구에서도 부러워합니다. 나도 저런 심방을 받아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심방을 하면서 불신 남편들을 예수 믿게 만들고, 낙심한 사람들을 다시 용기를 갖게 만들고 그것이 한 번에 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그렇게 할 때 눈물을 흘리면서 심방을 하게 되면 그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나중에 돌아가셔서 ‘교사리바이벌’을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교사가 심방할 때’ 라는 항목이 있습니다. 내 이야기를 적은 것입니다. 내가 나오라고 그래도 안 나옵니다. 여선생하고 둘이 갔는데 그 여선생이 천하호걸이었습니다. 청바지를 입고 심방을 갔는데 심방을 다닐 때는 항상 셋이 다녔습니다. 나하고 총무선생님하고 담임 선생님하고 다녔는데 남녀 둘이 다니는 것이 너무 부담스러우니까 그리고 둘이 가면 유괴범인줄 압니다. 남녀가 섞여있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셋이 가면 ‘누구야?’ 부르면 ‘네’ 하고 대답했다가도 교회선생님이라고 하면 문을 잠가버리는 것입니다. 남자선생님은 주춤주춤하는데 여자선생님은 ‘너 거기 있는 거 다 알아! 빨리 나와! 안 나오면 선생님이 쳐들어간다.’ 청바지를 입고 진짜 담장을 넘는 것입니다. 문고리를 확 잡아당기니까 문고리를 붙들고 있다가 딸려 나왔습니다. 그 정도의 패기는 있어야 합니다. 심방을 가서 딩동 딩동 누르면서 ‘나오지 마라 나오지 마라’ 그러면 안 됩니다. 누군가 나오면 맞닥뜨려야 합니다. 그래서 전도훈련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만나서 결국은 그 놈을 보안등 앞에 세워놓고 눈물을 펑펑 쏟아놓게 만들고 돌아오는 것이 심방입니다. 그리고 따뜻하게 격려해야 합니다. 결국 이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부딪히는 것입니다.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의 지침에 불과합니다. 진짜 참된 목회자들은 심방할 때입니다. 사람들은 나를 아주 어떻게 보면 새로운 방식으로 목회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나는 옛 방식의 지지자입니다. 눈물로 기도하고, 진지하게 설교준비하고, 열렬하게 선포하고, 열심히 심방하고, 그런 전통적인 목회방식의 지지자입니다. 그것을 나머지 것들을 어떻게 시대에 맞게 적용하며 살 것인가는 또 다른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심방하면 반드시 마음에 놀라운 기쁨이 있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심방을 하고 왔는데 별로 기도를 하지 않게 된다면 근본적으로 심방을 잘못한 것입니다. 마음을 실어서 심방하지 않았습니다. 다방구 하듯이 그냥 찍고 돌아온 것입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가서 진심을 담아서 심방을 해야 합니다.
대심방을 하면 제가 했던 것을 참고하십시오. 대심방 계획을 짭니다. 선생님들이 의논을 해서 짜게 하는 것입니다. 한 2주간에 집중적으로 심방해서 약 80명 내지 90명을 심방했습니다. 어떻게 하느냐 하면 아침부터 짭니다. 1학년 1반 9시, 10시 반, 12시 이렇게 짜고 오후에 1학년 2반 이렇게 짭니다. 그러면 총무선생님하고 아니면 부장집사님하고 둘이 같이 출발하고 셋이서 기도하고 출발하면 세 사람이 심방이 끝나고 나면 선생님이 모이고 거기서 기다리고 있다가 태워서 그 다음 심방을 하고 눈이 온다든지 하면 그것은 그냥 캔슬합니다. 스킵하고 그 다음에 순서가 정해진 대로 하는 것입니다. 순서가 쫙 짜여있는데 뒤로 밀리는 것이 아니라 교통사고가 나든지 눈이 와서 길이 밀려서 심방을 못 가게 되면 3명은 빼고 그 다음으로 넘어갑니다. 빠진 사람은 나중에 날짜를 다시 잡아서 다시 심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도는 것입니다. 나도 그때 학교선생이었으니까 공부를 해야 했으니 시간이 너무 아까운 것입니다. 그것을 흐느적거리면서 심방하면 한 달이 되어도 못다 합니다. 2주일을 잡고 나는 이 심방과 기도에 올인 한다고 생각하고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부지런히 심방을 합니다. 그러면 일주일만 해도 주일까지 포함해서 7일간 어떤 때는 60명 가까이 심방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큰 불은 끄는 것입니다. 다음 주에 한 30명 정도 심방하고 마치는 것입니다. 그것을 두 번했는데 연초에 한번 그렇게 심방을 하고 걔네들을 모아서 겨울사경회를 하고, 수련회 가기 전에 쭉 심방을 해서 걔네들을 격려해서 수련회를 모두 데려가고 그렇게 두 번을 했습니다.
나는 착합니다. 여러분들에게는 한번만 하라고 합니다. 그것도 약화되어서 이제는 같은 부서에서 모두 심방하기를 바라지만 그것이 어려우면 일 년이 지나면 상황이 바뀝니다. 그것이 너무 어려우면 불러서 이야기하고, 심방을 못한 사람을 심방하고 보충심방을 하면 대개 150명 정도 출석할 경우에 첫해에는 150가정을 심방해야 하지만 그 다음에는 그저 50명 정도 심방할 정도면 됩니다. 다하면 좋지만 그렇게 심방을 연중에 나누어서 하고 심방을 연초에만 하고 안할 생각하지 말고 항상 자기 사역 중에서 심방부분을 떼어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일 오후와 토요일 오후에는 아이를 만난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 마음을 가지고 심방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맞는 가장 적합한 계획을 세워 놓으십시오. 그것을 가지고 심방을 하면 됩니다. 그리고 하고나면 배우게 될 것입니다. ‘아! 심방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깨달으면 주일학교 심방을 잘하던 교역자가 중고등부 심방도 잘하고, 중고등부 심방도 잘하던 교역자가 장년심방도 잘합니다. 지금은 심방을 못하게 하는 교회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부교역자가 영향을 끼칠까봐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그렇지 않고 심방을 적극적으로 권합니다. 심방을 하고 온 사람들은 가르침을 받으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데리고 성경공부를 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사가 심방할 때’ 꼼꼼히 읽어보시면서 열렬하게 심방하는 것입니다. 정치적인 심방이나 맹목적인 심방이 아니라 목양적인 심방을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질문 있으면 질문 하십시오.
코로나상황에서 방역 때문에 아이들이 어리다보니 대면으로 만나는 것이 어렵습니다. 물론 대면심방을 원칙으로 하고 아이들을 만나고 있지만 줌으로 대체해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줌으로 심방할 때 마음을 전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아이들의 마음의 문을 더 열 수 있을까요?
답) 줌으로 심방하는 경우는 어쩔 수 없는 경우입니다. 가능하면 만나서 심방하는 것이 가장 좋고 제일 좋은 것은 가정으로 가서 부모들과도 대화를 나누고 아이들과도 대화를 나누고 예배를 드려서 내가 이 아이들의 목자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이 좋고 그래야지만 그 아이들을 서로 협력해서 돌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안 된다고 하면 할 수 없이 교회에 오게 해서 방역이 문제가 되면 부모와 같이 오라고 해서 저 정도의 거리에 놓고 엄마와 아빠와 아이를 놓고 심방을 하면 됩니다. 특히 그 사람들이 우리 교회 교인일 경우에는 여러분들에게는 그럴 권위가 있습니다. 아이에 대해서 심방하고 싶다고 저와 함께 만나달라고 할 때 대부분의 부모들은 응할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멀리 떨어져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도 안 된다면 할 수 없이 영상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영상으로 하는데 아이하고 영상을 하면서 하나씩 아이와 대화를 하면서 아이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이해하게 만들고, 부모인 경우에는 아이하고 심방을 하고 난 다음에는 아이에게 중요한 정보가 있을 때에는 부모님과 만나자고 해서 대화를 하고 그것도 안 된다면 전화로 혹은 줌으로 하면서 ‘내가 심방해보니까 아이가 이러이러한 점에서 신앙적으로 잘 자라려면 부모님들이 이런저런 점에서 아이를 돌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이든지 도움이 필요하면 이야기 해주십시오.’ 라며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문고리심방도 했지만 선생님이 자기 집에 왔다갔다는 것은 굉장한 사건입니다. 그렇게 선물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편지를 써서 보낸다든지 얼마든지 다른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끊임없이 그런 방법들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위해서 소소한 것까지 사진을 붙이고 가족관계와 특별한 날, 그 아이의 심방 다녀온 것을 다 파일로 만들어서 다녔습니다. 나는 사람 얼굴을 기억을 잘 못해서 오면 항상 즉석 인화기로 사진부터 찍었습니다. 거기에 붙여서 ‘이 아이로구나!’ 하면서 기도할 때 그 카드를 넘기면서 기도하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부모를 만나는 것에 있어서 두려움을 느끼지 말아야 합니다. 과감하게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뭐가 됩니다.
질문2) (녹음음질불량)
답) 우선 가게 되면 기본적으로 심방을 가게 되면 혼자 가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여전도사와 같이 가든지 아니면 구역장과 같이 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항상 심방하는 목사의 자리는 주인이 지정해 줄 수도 있겠지만 항상 그 맞은편에 심방대상자가 앉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사공이 열이면 배가 다른 곳으로 가니까 말수를 줄이고 말을 하더라고 목회자가 그 심방에 중심이 되도록 사람들이 도와야 합니다. 말을 가로채서 심방이 산으로 가게 한다면 안 됩니다.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가 심방의 주체가 되도록 주의의 사람들을 교육해야 합니다. 말을 하는 것은 좋은데 가정형편이 어떠냐고 질문하는데 뜬금없이 부동산시세를 이야기하거나 자기가 맛있는 식당 갔다 온 것을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는데 있습니다. 눈치 없는 사람들은 그럽니다. 그것을 교육을 잘 시켜야 합니다. 먹는 것에 대해서는 이런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 집이 진심으로 식사를 대접하기를 원하는가? 그리고 또 경제력이나 그런 것을 생각하면서 과한 집으로 가려고 하면 저 같은 경우는 나는 오늘 냉면이 먹고 싶다고 한다든지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심방했는데 식사를 하지 않으면 섭섭해 하는 사람들이 있고,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있고 여러 종류입니다. 그것은 여전도사가 구역장을 통해서 그 사람의 진심을 알아보고 최대한 그 사람에게 맞춰서 그 사람의 마음이 편안한 상태에서 심방을 받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