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의 품격이 있는 목회
잘 걸으며 위풍 있게 다니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짐승 중에 가장 강하여 아무 짐승 앞에서도 물러가지 아니하는 사자와 (잠 30:29-30)
녹취자 : 김세나
오늘 성경에 보니까 많은 짐승들을 그 지혜자가 생각하면서 그 잘 걸으며 위풍 있게 다니는 짐승이 몇 있는데,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는 이것을 하나의 품격이라고 봅니다. 품격. 모든 짐승이 걸어다니는 짐승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쥐 같은 것들이 걸어다니는 것을 보면 우리가 보기에도 참 가여워요. 바닥에 납작 기어서, 그래서 작은 머리를 좌우로 막 움직이면서 두려워하는 모습으로 조금 가다가 멈추고, 조금 가다가 멈추고 하면서 쥐가 이동을 합니다. 그런데 사자는 이제 위풍당당하게 탁 걸으면 위에서 뼈가 불쑥불쑥 튀어나오면서 어깨 위로 근육이 잘 빠진 근육에 지방질 없이 잘 빠진 근육에 이게 불뚝불뚝 근육이 움직이면서 위풍당당하게 재바른 걸음으로 걷는 것도 아니고, 천천히 걸으면서 자기 갈길을 가는데 추호의 방해도 받지 않은 짐승이 사자로 제일 먼저 거론이 되는 것입니다. 너무 좀 우화적인 지는 모르지만, 나는 여기에서 우리의 인생살이를 보게 됩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가는대도 품격이 있게 인생살이를 걸어가는 인생이 있고 품격이 가긴 가는데 품격이 훨씬 떨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면 어찌 안 살수가 있겠습니까. 이 사람에게도 인생살이이고, 저 사람에게도 인생살이에요. 주님이 우리를 목회로 불러 주셨으면 누가 목회를 안 하겠습니까. 누가 놀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은 품격이 있게 목회를 하고 어떤 사람은 품격은커녕 인간의 자존감까지도 거의 잃어버린 채 그렇게 추루하게 목회를 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뭐냐 하면 인간에 있어서 신앙 다음으로 가장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명예다. 그리고 그것은 품격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앙을 제외하고 그 다음에 나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돈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의 지위도 아니고, 그것은 품격이다. 그리고 이 품격은 남에게도 존중받아야 하고 나 자신도 가치 있게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품격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이것이 가장 아름답고 건전한 삶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을 좀 좁혀서 우리가 이제 그 뭐 얼마나 먼 길, 지구 반대편에서 여기까지 날라 오셨는데 목회와 관련해서 생각을 해 봅시다. 목회자의 인생을 걸어가면 목회자로 부름을 받았으면 누구든지 목회자로 살다가 죽는 것이고, 목회를 하다가 마지막에 장사를 하다가 끝내도 결국은 목회자였다고 불려지지 장사꾼이었다고 불려지지 않고 죽으면 자연히 아무개가 아니라 놀다가 죽었어도 목사 아무개로 기억이 됩니다. 관에까지 홍포에까지 묻어서 그렇게해서 결국은 마지막까지 가는데 우리 목사의 일생입니다. 그리고 목회자의 일생이죠. 그러면 우리들이 정말 한번 생각해 보자. 정말 이 시대에 품격있는 목회가 가능할까. 최근에 나도 들은 이야기인데, 나도 이 목사님에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고향에 있는 교회에 갔다 오더니만 그 고향 교회가 발칵 뒤집혔답니다. 왜 그러냐 하니까 돈 5만원 때문에 뒤집혔습니다. 왜, 목사님이 교회 이름으로 어느 단체에 매달 5만원씩 기부를 했는데 그것을 예를 들자면, 열린 교회로 기부를 했어야 하는데 담임 목사, 아무개로 기부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들고 일어나서 몇몇 사람이 그랬을 것입니다. 그 교회 당신 개인 이름으로 돈을 냈는데 왜 그 돈을 교회 돈으로 내느냐. 교회 돈으로 냈으면 열린 교회, 그렇게 해서 교회이름으로 내야지, 왜 김남준 이름으로 냈냐. 그래서 발칵 뒤집혔다고 하는데 그러한 속에서 정말 우리가 품격 있는 목회가 가능할까. 그러한 것들이 정말 우리에게 품격있는 목회가 가능할까. 오늘날 교회가 이렇게 어지럽고 질서도 없고 교인들이 목회자 알기를 안아무인으로 알고 덤벼들고 하는 상황에서 과연 품격있는 목회가 가능할까.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여기에서 품격이라고 하는 것 자체를 먼저 정말 복음적인 품격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먼저 정의를 하고 자리매김을 하고 그 다음에 우리들이 어떻게 품격있는 목회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렇게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세상에서의 품격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신분에 걸맞고 어울리는 대접을 받는 것을 가리켜서 품격이 있는, 대접을 받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품격이 있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복음적인 입장에서 보면 사실 우리는 바깥에서 그 사람들이 대접해주는 거기에 품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름에 합당하고 어울리게 살아가는 그 속에서 진정한 품격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성경적인 가치관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품격들을 멀리는 구약의 선지자들에게서 발견을 하고, 그리고 신약에 내려오게 되면 특별히 세례요한 같은 사람에게서 발견하게 되고, 사도들에게서도 발견을 하게 됩니다. 특히 이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되, 요단강이 있는 유대 광야에서 빈들에서 모래바람이 일어나는 곳에서 고고히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며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나와서 세레를 받고 회개하는 역사도 있었지만 헤롯 앞에서도 설교를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도 그는 자신의 품격을 상실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힘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니까 헤롯이 명령을 내리니까 그의 목이 땅에 떨어져 소반에 받쳐서 어린아이에게 주는 선물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만 그것으로서 헤롯이 세례요한의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품격에 티끌만큼도 떨어뜨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고난을 받느냐, 대접을 받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안에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발산하면서 살아가는 그 의연함과 고고함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목회를 우리들이 해나가야지만 그것이 참 좋은 것이고, 우리의 영혼에도 진정한 자유로움이 있다, 그런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 후배 목사님들에게 늘 이야기 하는 것이 큰 교회 가는 것 부러워 하지 말아라. 큰 교회에 가서 대접은 좀 더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뒤에 겉보기에는 대접이지 속에서는 그 신앙도 제대로 없는 사람들이 교회의 주도권을 잡고 목사를 마치 그 자기의 고용사장처럼 부리면서 그렇게 겉으로는 대적을 하지만, 결국은 조정을 하는 것인데 그런 속에서 무슨 품격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목회자의 품격은 하나님 이외에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는 그 속에서 자유가 나오고 자연스러운 품격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말씀 드리는 것이 교인을 사랑하고 아끼는 것은 사실 하나님 사랑과 나뉘어질 수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뭐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인을 사랑하는 것이 목회의 동기가 되는 것은 너무 슬픈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내가 이 사람들을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내가 사랑하지만 언제든지 헤어질 수 있다라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목회를 해야지 그것이 올바른 것이다. 왜, 하나님이 주님 때문에 우리들이 목회하는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께만 단단히 매인 사람이 되어서 그래서 주님이 부르시는 동기가 목회에 기본적인 기초가 되도록 우리들이 그렇게 살아야지만 의연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제 오늘 보면 그런 것이 참 품격 있고 의연한 삶이라는 것을 알지만 사실 그것을 몰라서 못 사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삶을 살 수 있기 위해서는 그럴 수 있어야죠. 짐승들이 여럿들이 별 짐승들이 다 있습니다. 사자가 한 마리, 미끈하게 잘 빠진 사자가 탁 나타납니다. 수사자가 갈퀴가 딱 있고 사자 몸을 보면 별로 살도 없는 것 같습니다. 갈비뼈까지 막 드러납니다. 그런데 쫙 뻗으면 활같이 휩니다. 그게 이제 어슬렁 어슬렁 품격 있게 걸어갑니다. 그런데 그렇게 걸어가는 것이 여우였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것은 뭐 숲속에서 기다리는 짐승이 저 도시락 그리고 덤벼들어서 단번에 먹습니다. 그러니까 그 품격을 사람들에게 발휘할 수 있는 something이 있으니까 유유히 짐승들이 보는 그 앞을 쫙 가로지르면서 하품을 길게 쫙 하면서 어깨의 뼈를 들썩들썩 하면서 빠르지도 않고 천천히 걸어가는 것입니다. 누가 덤벼들겠습니까. 그런데 걸어가는 것이 만약에 오소리라고 칩시다. 여유였다고 칩시다. 걸어가는 것이 토끼가 그렇게 나와서 한번 폼을 잡고 걸어갔다고 칩시다. 그러면 아마 포식자들이 숲속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왠 도시락 그러면서 덤벼들면서 눈 깜짝 할 사이에 네가 품격을 네가 폼을 잡고 천천히 걷는 것이 우리에게는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구나 하면서 잡아먹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뭐냐 하면 품격 있는 삶을 살 수 있기 위해서는 그 품격 있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그 무엇이 목회자이든 평신도이든 그 사람 안에 무엇이 있어야지만 그 품격 있는 삶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사자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 사자하고 호랑이하고 싸우면 누가 이길 것 같습니까. 이 목사님? 똑같은 크기의 사자와 호랑이, 똑같이 배고픈 놈 두 개를 탁 붙여 놓는다면? 정확한 대답입니다. 동물 전문가들에게 직접 질문을 했는데 그것은 짐승을 가지고 비교할 수 없고 case by case라는 것입니다. 똑같은 덩치에 똑같은 배고픈 상태에 호랑이와 사자를 싸움 시켰을 때 누가 이길지는 case by case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야생에서는 어떻게 되냐 했더니 야생에서는 호랑이와 사자의 싸움이 성립될 수 없답니다. 왜 성립할 수 없는지 아십니까. 아니에요. 만날 수 있는데 호랑이는 독립생활을 하는 짐승입니다. 그런데 사자는 호랑이와 싸워서 이길 수 있을 정도 힘을 가졌는데 이 놈들은 군집 생활하는 동물들입니다. 그러니까 사자를 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자는 홀로 있는 법이 없고, 호랑이는 홀로 유유히 다니는데, 사자는 홀로 있는 법이 없고 열 마리, 스무 마리씩 다니는 것입니다. 그것을 호랑이가 공격했다고 하면 그날은 호랑이가 초상날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굉장히 감동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우리 기독교에서 보면 말입니다. 자기가 조금은 잘 하면 항상 주위를 끊어버리고 독불로 나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사실 돋보이는 것입니다. 홀로 가는게, 그런데 사실은 사자는 그 호랑이와 둘이 맞붙어 싸워도 능히 이길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굉장한 짐승입니다.
(예화) 선교사 한 사람이 사우스 아프리카를 갔습니다. 미국 선교사가 부인하고 둘이 갔는데, 사파리에 내린 것입니다. 짐승들은 뭐 사실은 지루합니다. 수 없이 사람들이 돌아다니니까 그러니까 사파리 차 타고 가다가 사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자하고 사진을 찍는다고 슬슬 가는데 사자가 가만히 있었답니다. 그래서 남편이 가서 여보, 찍어 찍어 그런 것입니다. 카메라를 잘못 조정해가지고 후레쉬가 터진 것입니다. 이 사자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한 2-3초만에 남편을 갈귀갈귀 찢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그 올라가서, 사람을 공격할 때 사람이든 짐승이든지 사자가 확 하고 공격할 때 제일 먼저 쾅 문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앞발로 자기가 공격하려는 짐승을 칩니다. 그런데 이것이 2톤이라고 합니다. 이 스트레이트 펀치가. 탕 하고 칠 때 힘이 2톤입니다. 2톤. 2톤 정도의 그 세기가 아마 모하마드 알리같은 사람이 한참 때에 뻗었을 때의 힘 이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딱 맞으면서 죽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목격을 했습니다. 중국에 갔을 때, 집회를 갔다가 이제 그 교회 목사님이 나를 뭐 목사님 사례금은 드릴 수 없고 제가 여행이나 시켜 드리겠습니다, 이제 계림을 보내주었습니다. 계림을 갔는데 그랬더니 거기에 나를 우리 안내하기 위해서 온 사람이 이것은 꼭 보고 가십시오. 중국 이외에는 못 보는 것입니다. 중국을 갔는데 서양세계에서 그랬다가는 아마 바가지로 욕 먹습니다. 하루에 한번씩 호랑이가 소를 잡아 죽이는 그것을 실제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호랑이 밥을 하는 도시락이, 호랑이의 식사가 오늘 설교 재미있죠? 호랑이의 식사가 하루에 소 한 마리랍니다. 그것을 그냥 도축하느니 관광객들을 쫙 구름 다리 위에다가 뛰어놓고 커다랗게 펜스가 쳐져 있습니다. 굉장히 큽니다. 우리는 뭐 천 평도 넘을 정도로 큰데, 이제 호랑이를 굶깁니다. 3일동안 굶기고 소 한 마리를 풀어 놓는 것입니다. 소가 들어옵니다. 풀을 뜯습니다. 한가하게. 조금 있더니 저쪽 문이 덜컹 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호랑이가 걸어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 순간 직감적으로 소가 호랑이가 나오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 두려운 눈빛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도망을 치기 시작합니다. 사자가 달려갑니다. 호랑이가 달려가는데 그냥 뒷다리를 콱 물을 것 같은데 그렇게 안 하고 이게 도망을 가니까 뒤를 쫓아 가는 것이 아니라 옆을 쫓아 갑니다. 옆으로 막 쫓아가더니 점프를 붕 하더니 두 발로 어깨를 밉니다. 얼마나 세게 밀었는지 어깨를 점프를 부웅 하면서 앞발차기로 어깨를 탁 미니까 그 큰 소가 힘없이 퉁 하고 넘어지는 것입니다. 넘이지니까 딱 덤벼들어서 여기 목을 딱 무는 것인데, 여러번 우직우직 물지도 않고, 한번 탁 뭅니다. 그러니까 소는 가만히 있겠습니까. 500킬로나 되는 소가 그러니까 꽉 뭅니다. 소가 잠시 견디다가 나중에 너무 아프니까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니까 갑자기 이 호랑이가 자기 몸무게를 다 빼면서 그러면서 사자가 움직이는대로 자기가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만 안 놓는 것입니다. 딱 물고 그리고 계속 움직이는 것입니다. 20분 정도 있으니까 소가 눈이 탁 튀어 나오면서 절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 다음에 어디부터 먹냐 하면 꼬리부터 먹습니다. 신기합니다. 꼬리부터. 정말 끔찍했던 것이 꼬리를 꼬리를 잘라 먹었는데, 소가 깨어 난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또 도망을 갑니다. 그래가지고 마지막 물고 그 다음에 이제 먹는 것이 배쪽으로 내려가서 뱃살이 원래 생선회 때도 뱃살이 좋습니다. 뱃살을 뜯어서 먹는데, 그것은 못 하게 하고 싣고 갔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사자가 똑같은 방식으로 짐승을 공격을 합니다. 그 힘이 굉장합니다. 그런 힘이 있기 때문에 품격있게 걸어가는 것입니다. 무슨 짐승이 와서 자기를 먹겠다고 덤벼들어도 능히 그것을 정신만 차리면 한방에 제압할 수 있는 파워가 있기 때문에 품격있게 모든 짐승들이 보는 앞에서 그렇게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여기에서 우리들이 뭘 생각해야 하냐 하면,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있는 게 있을 때에 품격이 있는 삶을 살고 품격있는 목회를 하는 것이다 이것입니다.
오래전에 있었던 일입니다만, 외과 의사 한 사람이 책을 쓰는데 책 제목이 나는 외과 의사다 책 제목이었습니다. 외과가 외국은 모르겠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지망생이 거의 없고, 그리고 외과의사는 밤에 잘 때도 핸드폰을 옆구리에 차고 자야 합니다. 왜냐하면 언제 뛰어나가야 할이지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지망을 안 하는 것입니다. 특히 여성들은 더욱더 지망을 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외과의사가 진짜 의사입니다. 그런데 외과의사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외과의사의 중요한 자격이 셋이다. 그게 뭐냐 하면 독수리의 눈, 그게 뭐냐 하면 지성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많이 해서 아주 정확하게 그 병세를 찾아내고 그 집도를 할 수 있는 그러한 판단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목회자들은 끊임없이 공부해야 합니다. 제가 늘 고3이다라고 이야기 하는게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부목사님들, 전도사님들도 공부 열심히 하십시오. 항상 책을 놓지 말고 고민을 하되 그 목회를 하면서 책을 읽기 때문에 목회가 병드는 사람들은 나는 여럿 봤습니다. 그렇게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더 하나님을 잘, 지적인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더 하나님을 잘 믿고 잘 알기 위하고 더 잘 살기 위해서 그래서 계속 공부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탐구하고 공부하고 하는 그것이 자기 자신 속에서 정신이 사라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자신이 학자요 하지 말고, 이미 모든 것을 배웠다 생각하지 말고 공부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 목사님들에게도 제가 말씀 드리는 게, 제가 누구한테 그 말씀을 드렸는데 돌아가셨습니다만, 여태까지도 열심히 하셨겠고 유학까지 가신 분들이니까 열심히 하시겠지만 공부를 계속 하셔야 합니다. 그 이야기는 학교에 들어가서 박사과정을 밟으라는 뜻이 아니라 목회를 위한 공부를 꾸준히 계속해서 성경을 설교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파악하는데 유익을 끼치도록 여러분들이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는 항상 학생이다. 나 정체성을 그렇게 생각을 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숨쉬는 날 동안에는 모두 공부해야 합니다. 엊그제도 우리 집사람이, 어저께도 그럽니다. 여보. 내가 밤 중에도 책을 보고 있으니까 침대에서 여보, 왜. 그만 하고 좀 자. 우리 집안은 공부 하라고 하는 애들은 안 하고 안 해도 되는 사람은 저렇게 공부를 하겠다고 저렇게 사니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어제 밤에도 하라는 애들은 안하고 좀 그만 하라는 사람은 저렇게 제발 공부좀 그만해. 제발 공부좀 그만해.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여보, 당신 보기에는 내가 머리에 든 게 많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나는 오늘 아침도 삼위일체 쓰면서 나 자신에 대해서 나는 날마다 절망한다. 어쩌면 이렇게 바다야. 바다. 어마어마한 학문의 바다 속에 나는 정말 아주 작은 널빤지 하나에 간신히 기대어서 두 손을 헤비적 거리면서 바다를 헤엄치는 것 같은 처지라는 것을 오늘도 절실하게 느끼다가 왔는데 무슨 소리냐.
(예화) 이 세상에 오늘날 우리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개인과 사회의 모든 정보를 합하면 CD로 만들면 한 사람당 한 사람당 29장인가 CD에 담을 수 있다고 합니다. 정보의 양이. 그런데 그것을 모두 인류의 것을 모으면 여기에서 차곡차곡 CD를 쌓으면 달까지 도달할 수 있답니다. 지금 현재의 정보량이. 그런데 해마다 어마어마한 양으로 늘어나는데 더 재미있는 이야기는 달까지 가는 그 정보량이 우리 몸 안에 있는 DNA의 정보에 미치질 못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지식이, 물론 그 지식이 다 필요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 속에서 우리들이 사는데 우리들이 진리를 탐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품격있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교인들이 어려운 질문 하나 하면, 그저 핑계거리를 찾고 그저 두루뭉실하게 넘어가려고 그러면 우리에게 품격이 있는 목회가 가능하겠습니까.
그래서 이제 두 번째 외과의사의 자격을 이야기 하면서 사자같은 심장, 그래서 두려움이 없는 심장입니다. 그러니까 딱 판단을 해서 이것은 수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냥 한번에 갈비뼈를 톱질을 해가지고 우두둑 뜯어 낼 수 있어야 하고, 머리도 톱으로 확 돌려서 뚜껑을 확 열고 그 순두부를 들여다 볼 수 있을 정도의 그러한 담대함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목회자로서의 품격있는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려워 할 필요가 없고 담대하게 그 일들을 해나가고 그리고 태어나서 그저 밥 세끼 먹고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당연하게 우리들이 목회사역을 감당해 나가야지 그러한 사자같은 마음의 강한 심장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화) 병원 밖에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수술실에서 소리가 들렸답니다. 간호원 목소리였습니다. 너무 긴장하지 마십시오. 2cm만 자르면 됩니다. 그리고 꿰매지 않아도 되고 그저 간단하게 10분이면 수술을 끝낼 수 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걱정 마십시오. 무슨 소리인가 문을 열어 보니까 걱정 마십시오 하는 사람은 간호원이고 달달 떨고 있는 환자가 아니라 의사더랍니다. 칼을 들고. 사자의 심장이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목회 하면서 이 사자의 심장이 없기 때문에 본인은 절대 그러한 분이 아닌데, 결과적으로는 마지막에 야합이 되는 것을 참 많이 보았습니다. 이게 잘 될 때에는 그게 문제가 안 되지만, 잘못되면 항상 목회자를 원망하게 됩니다. 아닌 것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담대함을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야기 한 것이 나는 여자의 손길이다. 여자의 손길은 기술입니다. 목회의 기술. 그것을 가지고 이제 우리들이 외과의사의 자격을 꼽는데, 나는 어쩜 그게 그렇게 목회자의 자격하고 너무나도 똑같을까. 이제 무슨 뜻이냐 하면 사자같은 심장은 있어도 지성이 없어서 무엇이 진리이고 올바른 것인지 판단할 줄을 모르면 그것은 조폭의 심장이지 목사의 심장이 아닙니다. 조폭들은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조폭의 심장이지 목사의 심장이 아닙니다. 그래서 지성이 없으면 사자의 심장도 무모함이지 용기와 무모함은 판단이 올바르고 가치에 대한 생각이 규정되어 있느냐 아니냐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부지런히 공부를 하고 그렇게 하면서 실력을 쌓아가서 언제 어디에 내다놔도 내가 믿는 신앙과 목회사역에 대해서 확고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반대로 생각해 보십시오.만약에 이 사자같은 심장은 있는데 기술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가끔 후배들을 이렇게 목회하는 것을 이렇게 보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선배들한테도 그런 생각이 들지만 좀처럼 표명은 안 합니다. 이렇게 보면 사람도 진실하고 기도도 많이 합니다. 그리고 뭐 진짜 아까 말씀 드렸듯이 비굴하지도 않습니다. 품격도 있습니다. 그런데 뭐냐 하면 저것은 세상에서 장사를 해도 저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방법 자체가 틀렸습니다. 사람은 올바르고 한데, 전혀 그 방법이 결과를 산출해 낼 가능성이 없는 방법을 가지고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사자같은 심장이 있어도 그 힘이 엉뚱한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담대함이. 그러니까 기술을 배울 때에는 여러분, 생각을 해 보십시오.
(예화) 그 우리 TV에서 보면 생활의 달인이라고 해서 나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 한 사람이 나왔는데 우엉 껍질을 까는데 달인, 별 것이 다 달인입니다. 우엉 껍질을 깝니다. 우엉을 이렇게 껍질을, 연근이나 우엉을 껍질을 까서 팝니다. 뿌리 식물이니까 까야지만 하얗게 됩니다. 그런데 까는데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깝니다. 그러면 쓰레기처럼 쌓이면 갔다가 놓습니다. 이 사람은 쓰레기통을 쭉 놓고 턱턱턱턱 까면 쓰레기통으로 착착착착 들어갑니다. 나는 그 기술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어쨌든 어쨌든 우엉 하나를 까는데 6번을 칼질을 합니다. 쓰레기통 여섯 개를 놓고 착착착착 하면, 하나씩 들어가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참 대단하다. 그게 뭐냐 하면 기술입니다, 기술. 목회도 기술로 하면 아닌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자꾸 사람들이 목회를 기술로만 자꾸 생각을 하니까 그런 것에 대한 반발심이 생겨서 목회는 기술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는데 목회를 기술로 하는게 아닌 것은 사실이지만, 기술 없이는 목회가 안 되는 것입니다. 기술이 있는 사람이 하는 것과 기술이 전혀 없는 사람이 하는 것은 신뢰할 수 있고, 신뢰할 수 없고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위장에 큰 병이 있어서 수술을 해야 할 처지에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을 너무나 너무나 진실하게 사랑하는 훈련되지 않은, 여러분들을 너무나 너무나 사랑하는 의사 면허가 없는 오다리에게 수술을 받겠습니까. 아니면 여러분들과 별로 본 적도 없지만 돈 받고 자기 할 일을 해주는 그래도 면허장 걸어놓은 의사한테 수술을 받겠습니까. 여러분들 만약에 아파서 누워 있는데 여러분 부인이 여보, 다른데 가봐야 나만큼 당신 사랑하는 사람 없어. 나는 당신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것 알지? 그렇게 하고 쌍둥이 칼 들고 와서 여러분 배 걷으면 여러분들은 맡기겠습니까. 쌍둥이 칼에다가. 무슨 뭐 사시미야, 내 배가. 그러니까 기술이 없이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목사님들, 이렇게 후배 목사님들도 보고 동료 목사님들도 보면 말은 못합니다. 정말 답답하다. 저것은 옛날에 목회하면서 이미 해봐가지고 안 되는 것 뻔히 안 것, 그것을 지금 하겠다고 하는데 우리가 저것 하다가 일년 동안을 전부다 이게 결국은 많은 손해를 보고 저것은 아니구나 결론을 낸 것을 저 사람은 이제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한 교회에 가서 나 이런 것을 하려 하는데 이것을 해 보니까 어떱디까. 한번만 물어보면 일년 동안 죽 쓰지 않아도 되는데 왜 그렇게 하냐 이것입니다. 세상일도 그렇게 하면 절대 안 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결국 뭐냐 하면 목회의 기술을 본적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면 목회에 대한 사상도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지만 목회의 기술이 자기의 몸에 쭉 배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은 굉장히 많은 훈련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보면 군대 가면 총검술을 배우고 태권도에 가면 태극권부터 배웁니다. 총검술을 이렇게 하고 찌르고 합니다. 내가 묻고 싶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고 있으면 북한군이 이렇게 칩니까. 그게 그렇게 합니까. 그런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이게 뭐 매스 게임입니까. 그런데도 어리석게 이렇게, 그 다음에 이렇게 찔러 하는 것을 그대로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런 기본적인 동작을 계속 반복해서 자기 속에 기술이 익혀지면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총을 휘둘러도 각도에 정확하게 맞게끔 확 휘둘러서 이쪽 개머리판이 상대방 정수리에 딱 맞게끔 몸에 베이는 것입니다. 테니스 선수가 팔 다리를 쭉 뻗어서 위에서 확 내리꽂는 서브를 아주 멋있게 할 때 3만번 연습을 해야 한답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가 목회의 기술 자체가 체득이 되어야 합니다. 체득이. 그래서 자연 속에서 자기화 되어서 솟아나올 때 설교처럼 되는 것입니다.
(예화)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네 교회 전도사가 설교를 하는데 그 사모님이 설교를 듣더니 저것은 아무리해도 저 머리에서 나온 설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사모님도 참 짓굳습니다. 그러더니 그것 혹시 열린교회 김남준 목사님 설교 아니에요? 그랬답니다. 끝까지 말을 안 하더랍니다. 그런데 설교도 남의 것을 가지고 하면 금방 표가 나는데 저 사람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데 목회도 똑같습니다. 아하 이렇게 가지고 가면 그것을 해 보면 저것 저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닌데 이질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계속해서 practice를 하면서 이게 몸에 쫙 베어서 정신까지 흘러 들어올 때 자기의 목회 방법이 됩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찾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 뭐냐 가르쳐 달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은 전수 될 수도 없고 전수되어도 그것은 자기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렇게 공부한 것이 성공의 비결이 되는데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공부한 것이 실패의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정확하게 그 방법을 가지고 정신을 차려서 그것을 몸에 깊이 베인 가운데 사역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기술이라는 것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목회에 있어서 기술의 중요성들을 과소평가 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도 올바른 사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올바라서 자신이 목회를 하다보면 자기의 부족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하는 것입니다.
(예화) 그래서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30대 초반에 영국 청교도들을 만나서 내 인생이 바뀐 사람인데, 너무 좋아합니다. 오죽했으면 제가 청교도 책을 3000권 가량 모았습니다. 그렇게 좋아하는데 그러면 이야기 합니다. 청교도 좋아하는 사람은 나는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뭐냐 하면 자기의 정체성이 뭐냐 하면 나는 청교도 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도 안 하고 저것도 안 하고, 이것도 안하고 저것도 안 한다는 것이 자기의 정체성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는 목회가 안 됩니다. 그것은 신학교에서 그 공부를 가르치는 교수에게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실제 목회현장에서는, 나는 제자훈련도 안합니다. 찬양집회도 안 합니다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쭉 그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이야기 했습니다. 제자훈련은 이러한 동기에서 생겨났다는 것을 이해합니까. 당신은 제자훈련을 안한다고 하는데 그러면 당신 청교도 사상으로 제자훈련 대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말이 없습니다. 그러면 총동원 주일도 안 합니다 나도 싫어합니다. 나도 한적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쨌든지 간에 교인들이 안 모여서 몸부림 치는 것 아닙니까. 그렇답니다. 당신 대안은 무엇입니까. 뭐도 안 한다. 뭐도 안 한다. 그러면 도대체 뭐냐. 그리고 다 떼어내고 설교 하나 남는데 설교가 그렇게 전광석화 같은가, 그것은 수천명 수만명에 한두 사람이지, 옛날에 존 하우웨나 무슨 조지 윗필드나 이런 사람들처럼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 결국은 목회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목회의 기술들을 탐구하고 배워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17년전에 교회가 세워지고 한 10년 동안은 정말 기술을 배우는 일들에 몰두했습니다. 우리 스스로도 고민을 많이 하고 우리와 전혀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는 교회에도 사람을 보내어서 그래서 새신자는 어떻게 관리하는지 전도는 어떻게 하는지 나는 오히려 배워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교리를 배우는 게 아니라 그들의 전도하려는 열심과 이런 것들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온전한 신앙화 시켜서 우리들에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각도에서 우리들이 목회의 실제적인 기술들을 터득하고 해서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목회자의 영광은 교회의 영광인데, 교회가 정말 아름답게 꽃피고, 그래서 우리들이 눈을 감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정말 품격 있는 목회자의 삶이 아닌가.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거룩한 지성이 있고 사자의 심장이 있고 목회를 할 기술이 있으면 이 교회에서 나 싫다고 하면 다른 교회에서 오라고 하는 교회 많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만 붙들려서 우리들이 목회사역을 해야지 그게 목회자의 진정한 영광이다 생각합니다. 설교가 좀 길어졌습니다. 우리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