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와 예배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녹취자: 김경애
오늘날 교회가 어려움에 처해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공감합니다. 물론 공감을 하지 않는 분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공감하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있는 이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교회들은 지금 동남아에 있는 교회들보다 훨씬 심각합니다. 제가 호주에 한번 갔더니 어느 목사님이 아주 재미있는 식당에 가보겠느냐고 해서 갔더니 예배당을 식당으로 만들었습니다. 교회의 십자가는 딱 끊어내고 그 건물이 워낙 오래된 건물이기 때문에 우리로 말하자면 문화재까지는 안 되더라도 역사적인 건물이 되어서 초창기에 지은 교회에서 그 건물을 훼손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겉모습은 그대로 나두고 내부만 수리를 해서 식당을 만들었는데 Pub Restaurant입니다. 맥주도 팔고 하는 집인데 똑같은 음식인데 가격이 세 가지입니다. 그래서 왜 그러느냐고 그랬더니 평신도석에서 먹으면 제일 싸고 성가대석은 조금 비싸고 강대에 식탁이 차려져있는데 그곳이 제일 비쌉니다. 그것을 보고 무엇을 먹겠느냐고 그래서 나는 싫다고 그러고 둘러만 보고 나왔는데 말로만 듣던 것을 거기서 보았습니다. 그 교회의 건물이 교인들이 모이지 않으니까 팔고 그것을 업자가 사서 수리를 해서 술집으로 만든 것입니다. 영국에서는 모슬렘들이 그것을 사서 모스크로 만들고 임대업자들이 사서 교회의 외관은 그대로 놔두고 이 안에다가 연립주택을 만들어서 팔고 있다는 이야기는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교회가 이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고 어떻게 하든지 이것을 극복하고 뭔가 도전해보려고 하는 몸부림들을 합니다. 그래서 이제 다양한 새로운 시도들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좀 건전하고 성경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졌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하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영향들을 대부분 미국으로부터 받게 됩니다. 벌써 몇 년이 지났습니다만 아시는지 모르겠는데 한동안 한국에는 금이빨 소동이 있었습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면 이빨이 금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운동이 있었는가하면 그 다음에 예전에 있었던 토론토글레싱의 여파를 가지고 신사도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극단적인 은사와 영적체험을 강조하는 집회에 그리고 이제 오늘날 미국에서 새로 일어나고 있는 신 번영주의 운동에 발맞추어서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는다는 메시지들이 다시 새로운 현대적인 옷을 입고 등장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이런 교회생활에 아주 식상한 사람들에게 중세의 수도원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서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떠들고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묵상하면서 그러면서 말하자면 수도원적인 정적주의를 배워가는 것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다시 각광을 받고 있는데 이런 것들이 현재의 답답한 선교적인 상황을 타계해보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2,000년도 초까지는 미국에서 마케팅교회들이 아주 굉장히 커다란 흥왕을 이루었고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윌로우크릭교회나 새들백교회의 뒤를 이어서 수많은 마케팅교회의 아류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교회들이 더 이상 성장하지 않고 멈추었습니다. 요즘은 오히려 조엘 오스틴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제창되고 있는 신번영주의적인 분위기들, 영지주의와 펠라기우스를 영합한 것 같은 이런 분위기의 목회방식들이 훨씬 더 많이 뜨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한국에서도 상황이 10년 전보다 훨씬 심각해졌습니다. 우선 가장 심각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교인들이 자꾸 줄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개척해도 사람들이 더 이상 모이지 않습니다. 이런 어려운 일들이 계속되면서 무엇인가 타개책을 찾기 위해서 교회는 굉장히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면 오전 내내 해도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야기지만 우리는 그러면 이 문제를 어디서 풀어야할 것인가 그것을 오늘 오전에 여러분들에게 도전을 하고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읽은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납니다. 그래서 이 여자와 대화를 나누시면서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십니다. 그리고 이 여자에게 주신 말씀이 바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사실은 신약성경에서 이 구절만큼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누구이시고 또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예배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이렇게 명쾌하게 보여주는 성경구절은 없습니다. 그럴 정도로 이 성경구절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사마리아의 역사는 여러분들이 이미 다 아시지만 남 왕국과 북 왕국으로 나눠지고 북 왕국의 수도였습니다. BC722년에 역사적으로 앗시리아에 의해서 멸망당하게 되고 이 나라를 정복한 앗시리아는 대대적인 삼인정책을 썼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수도에서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지워버리려는 시도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민족들을 사마리아에 보내고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주시켜서 섞습니다. 여기에서 인종의 혼합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남 왕국 유다사람들이 북쪽 사마리아 땅을 갈 때에 통과하지 않고 갈릴리 건너편으로 돌아가서 상종도 하지 않던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유대인과는 별도로 사마리아 오경이라는 성경을 가지고 그 사마리아 오경은 아람어로 되어있는 탈굼인데 모세오경에 대한 주석적인 성격을 가진 책입니다. 그것을 만들어서 자기 나름대로 토착화된 신앙을 가지고 꼭 하나님을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했던 여로보암의 토착화된 신학을 계승하면서 신앙생활을 나름대로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여자에게 말씀을 하시고 가르치시는 과정을 통해서 이 여자가 영생의 필요성 그리고 예수님이 참 선지자요 그리고 훌륭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중에 구주라는 사실까지 알게 됩니다. 그러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너희들은 예배의 장소, 예배의 방식을 가지고 고민하는데 이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야한다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와 관계가 있다며 하나님은 영이시니까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한다는 이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가 하면 우리의 예배가 본질적으로 어떠한 조건이 갖추어져야지만 예배로써의 본래의 목적에 이바지하는 예배가 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문제를 다루기에 앞서서 먼저 생각해보면 이스라엘백성들이 애굽에서 커다란 민족을 이루고 이 민족이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이동하지 않습니까? 이동을 하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애굽에서부터 시작해서 애굽을 떠나고 가나안에 도착할 때까지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끊임없이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미 아브라함이 소명을 받을 때에도 다신제도였습니다. 애굽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다음에 광야를 지나는 길에도 끊임없이 원주민들을 만나면서 이방종교의 유혹을 받습니다. 당시 가나안은 정말 이방종교의 천지였습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심으신 것입니다. 거기서 유일신인 여호와신앙을 야훼신앙을 보여주도록 삶과 사상과 언어와 모든 행실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보여주기 위해서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끊임없는 위협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두 개의 수단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율법, 그리고 제사였습니다. 이 두 가지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함께 하나님 앞에 드리는 속죄제, 화목제, 이런 것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모여서 하나님을 경배할 때에 주님의 임재를 경험함으로써 우리들이 하나의 백성이라는 것, 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강한 정체성을 심어주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혈통적으로 단일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나올 때 중다한 잡족들이 함께 따라 나옵니다. 대부분 탈출할 때부터 다민족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들어오면 핏줄이나 혈통 때문에 차별대우를 받지 않고 각 지파에 소속되어서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정체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과 제사 모두 함께 모여 하나님을 공동체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진정한 한 백성이라는 지체의식들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에 와서도 똑같이 재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 땅에 계셨을 때에 이미 교회가 설립된 것이지만 신학적인 진정한 의미의 교회는 성령이 강림하심으로써 비로소 선교의 시대가 열리고 신약시대의 교회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는 것입니다. 그때에 성령이 개인에게 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제자들이 모두 모여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홀연히 임함으로써 함께 하나님의 성령을 경험하고 하나의 예수 공동체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에 이런 것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 있는 신약시대의 예배의 전형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전부 다 아울러서 여러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교회가 우리는 하나님께 부름 받은 하나의 공동체라는 것을 뚜렷하게 경험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러니까 이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경험하고 이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를 경험하고 한 하나님을 함께 경험함으로써 우리가 함께 부름 받은 하나의 공동체라는 확실한 인식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오늘날 이런 예배의 엄청난 중요성들이 현실적으로 매우 간과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에 대한 관심까지 모두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미국과 한국에서 일어났던 80년대 이후의 어떤 찬양운동들 그리고 그 다음에 전통적인 예배를 깨뜨리고 공연처럼 하는 이런 모든 예배방식의 변화 같은 것들은 무기력해진 예배를 어떻게 하든지 활기를 불어넣고 다시 살려내고 싶은 욕구에서 시작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봐야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좋은 결실을 거두었느냐하는 문제는 부분적으로는 좀 더 두고봐야할 일이고 부분적으로는 오늘날에도 평가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제가 한 3년 전에 웨일즈를 방문했습니다. 웨일즈복음주의 신학교를 방문해서 학교관계자들도 만나고 학장님도 만나고 한국학생들도 만나서 강의할 기회도 있었는데 그때 여러분들이 잘 알다시피 19세기에 웨일즈에서 정확하게 말하면 1904년에서 1906년 사이에 그러니까 19세기를 지나서 그때 웨일즈에 대 부흥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회개를 하고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영국 사람들은 쿨 한 사람들입니다. 한국 사람들처럼 조금 은혜를 받았다고 촐싹거리지 않습니다. 웨일즈사람들은 더 그렇습니다. 엄청난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어오면서 예수를 믿게 됩니다. 어떤 날은 보니까 한 달 동안에 16,000명이 교회에 가입했다고 나옵니다. 엄청난 부흥이 일어납니다. 그때 중심에 섰던 인물이 크리스마스 에번스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이지만 그 교회의 장로님 한분이 나와서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부흥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그 사람들이 미국까지 부흥회를 다니고 그랬습니다. 원래 크리스마스 에번스는 광부였습니다. 그런데 부흥을 합니다. 제가 질문을 했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는데 어떻게 그 부흥이 100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흔적도 없고 100년까지 가지도 않았습니다. 이미 벌써 그때 부흥이 일어나고 나서 불과 얼마 안 되어서 부흥에 대한 기억들이 사라져갑니다. 왜 이렇게 큰 부흥이 일어나고 순수한 부흥임에는 틀림없는데 금방 사라지는가? 했더니 아주 의미심장한 진술을 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런 질문을 자기네들도 수없이 했고 외국에서 온 사람들도 질문을 하는데 그때 자기네들이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찬양과 열렬한 기도는 있었지만 하나님의 체계적인 신학과 말씀이 없는 부흥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흥의 불이 금방 꺼진 원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 예배가 어떻게 해야지만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예배 속에서 회중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만날 때 비로소 예배가 진정으로 예배다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의 목적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의 목표라고 할 때에는 목적보다는 낮은 단계이나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것인데 그 예배의 목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 이것이 예배의 현실적인 목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여러분들이 모두 알다시피 인간이 눈에도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혼이 변화되어서 깨어나서 그 하나님이 어떠하심을 알고 그분께 합당한 자세를 갖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혼의 변화이고, 마음의 변화이고, 우리 삶 전체의 변화를 이끄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정말 예배가 이렇게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데 이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회심하고 거듭나는 사람들이 목회가 되는 사람들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를 나온다고 말해도 그가 진정으로 자기의 죄에 대해서 십자가 앞에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고 그의 Lordship앞에 굴복한 사람이어야지만 목양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성령의 은혜로 그를 지도할 때에 이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구나 하고 깨닫고 거기에 복종하고 순종할 수 있는 목양이 가능해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렇게 변화되지 않을 때에는 목양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여기나 오늘날 한국의 목회지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기본적으로 같은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있다고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그럼 한번 우리가 어떻게 예배를 드리는지 생각해보십시다. 한국에는 11시에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는 10시 예배를 드립니다만 대부분 11시에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면 극장에 갈 때에는 15분전에 가는데 예배당에 올 때에는 15분전에 와서 조용히 기다리는 사람이 없습니다. 5분전이 러시아워입니다. 도떼기시장처럼 한꺼번에 몰려옵니다. 이해되는 측면이 있는데 뭐냐 하면 주차하기가 너무 어려우니까 그렇다고 그러는데 주차하기가 어려우면 차를 두고 오든지 그것을 계산해서 더 일찍 와서 차를 대고 예배당에 15분전이나 10분전에는 들어와서 예배를 준비해야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안합니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옵니다. 그리고 예배가 시작됩니다. 예배가 시작되는데 저는 주일학교 때부터 교회를 다녔는데 유치부 전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옛날보다 지금은 예배가 훨씬 순서가 많고 복잡합니다. 제가 전도사로 있던 교회에서는 20년이 넘었는데 서울시내에서 600명 700명 정도 모이는 사이즈의 교회였는데 예배순서가 23가지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이 11시에 시작을 해서 비가 오나 눈이오나 12시 5분에 마칩니다. 12시 5분에 마칠 수 없을 때에는 어떻게 하느냐하면 ‘찬송가 586장 1절만 부르고 마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시간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것도 잘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내 주는 강한 성이요 같은 것’ 1절만 하고 마치자고 하면 마귀를 향해서 천하에 누가 당하랴 아멘 하고 마치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고 65분에 마칩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시간은 짧아졌습니다. 우리가 주일학교를 다닐 때에는 목사님이 항상 설교할 때 ‘당신들이 주일날 교회에 와서 2시간 예배를 드리고 가면 신자인줄 아십니까?’ 라며 공격을 하셨는데 그때는 예배시간이 거의 2시간이 되었던 것인데 중학교 때쯤 되니까 당신들이 1시간 40분 예배를 드리면 교인인줄 아냐고 그러셨는데 그때는 1시간 40분이 정규적인 예배시간이었습니다. 지금은 1시간 40분씩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아마 흔치 않습니다. 사람들은 1시간 내에 모든 예배를 마치고 가고 싶어 한다고 통계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상적인 시간을 1시간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순서가 23가지가 되니까 어떻게 됩니까? 다른 것은 줄일 수가 없고 설교시간이 계속 줄어드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설교시간이 그저 1시간 정도내지는 80분정도였는데 이제는 줄어서 제가 전도사로 있었던 그 교회에서는 목사님이 설교를 21분에서 23분에 설교를 끝내셨습니다. 그런데 2층에서 이렇게 내려다보면 목사님도 원고를 읽어야하니까 고개를 숙이고 설교를 하고 그분이 머리가 없으시니까 이렇게 하면 저 멀리서보면 눈이 나쁜 사람들은 사람 얼굴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교인들도 모두 머리를 숙이고 그리고 설교를 듣는다기보다는 견디는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배시간에 사람들이 그 25분정도를 다양한 방법으로 견디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아예 예배가 시작되자마자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고 눈을 지그시 감고 묵상에 잠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푹 잡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들은 좌우로 운동을 합니다. 계속 조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보를 꺼내서 빨간 펜을 가지고 교정을 보기 시작합니다. 교정을 보면 무엇 합니까? 이미 다 나온 것인데 교회는 뒤편에 헌금까지 공개를 했습니다. 십일조헌금 5,000,000원 십일조 낸 사람 가로로 세어보고 세로로 세어보고 곱하기를 해서 명수를 가지고 5,000,000원을 나눠보고 곱해보고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헌금, 광고사항까지 쭉 읽고 그런가하면 옆 사람하고 소곤거리며 이야기를 하거나 주보에다가 필담을 나누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졸다가 성경책을 떨어뜨리는 사람, 하늘보다 높은 어디에서 전화가 왔는지 예배시간에 전화벨을 울리는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뛰어나가는 사람, 별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제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곳에는 하나님이 안계십니다. 헛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 의미 없이 예배라는 종교행위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이 거기에 왜 오시겠으며 혹시 하나님이 오신다고 그러면 제가 말리겠습니다. 그런 곳에 오셔서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이 세상에는 정말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렇게 아무 감각도 없이 그렇게 마치 민방위 교육을 나가서 억지로 교육을 받는 것처럼 있는 사람들 거기에 하나님이 오셔서 무슨 영광을 받으시겠습니까? 그러니까 매주일 그렇게 모였다가 매주일 그렇게 흩어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느냐하면 예배시간에 대한 아무 기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나오느냐하면 불안합니다. 뭔가 죄를 지은 것 같고 뭔가 잘못된 일들이 일어나서 예배에 안 나간 것에 대해 벌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주일날 교인들이 교회에 왜 나오는지 아십니까?’ ‘예배를 마치고 빨리 돌아가기 위해서 나옵니다.’ 그 정도입니다. 결론적으로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것은 죄입니다. 이것은 목회자로서는 아주 치명적인 의무 태만이고 그리고 자기의 직무에 대한 현저한 불성실이고 그런 예배에 참여해서 길들여지는 성도들은 그런 식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마음이 더 단단하게 굳어져서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에 변화를 받을 수 있다는 희망들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리고 예배가 끝났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나가는데 하나님을 만났으면 감격해서 기도를 좀 하다가 갈 것이고 못 만났으면 내가 도대체 어떻게 살았기에 이 예배시간에 하나님이 나에게 안 찾아오실까 하면서 회개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올 때는 늦게 온 사람들이 갈 때는 다 빨리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일시에 수천 명이 밀고나가는 것입니다. 저 멀리서 교회를 내려다보면 육중한 시커먼 문이 열리면 유리구슬이 토해져 나오는 것처럼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회자는 가운을 입고 거기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목회하고 나서 한 번도 예배가 끝나고 나서 거기에 서서 ‘감사합니다.’ 라고 말해본적이 없습니다. 무엇이 감사합니까? 교회가 무슨 음식점입니까? 식당입니까? 손님입니까? 그래서 전도사 때 목사님께 물어보았습니다. ‘목사님 무엇이 감사합니까?’ ‘교인이 와준 게 얼마나 감사합니까?’ 물론 그것도 감사하긴 합니다. 그리고 악수를 합니다.
그리고 어느 교회를 설교하러갔는데 하얀 옷을 입은 신사 한분이 저 뒤에 앉아서 예배시간 내내 몸을 가누지 못하고 주무시는 것입니다. 그 교회 담임목사였습니다. 교회에 집회를 하러 가면 예배태도가 제일 나쁜 사람들이 목회자, 장로, 목회자 아내 이런 순서입니다. 이것은 뭔가 우리들이 잘못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예배를 드릴 때에는 그렇게 우울하던 사람들이 예배가 끝나고 나니까 그렇게 행복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쏟아지듯이 환한 얼굴로 앞 다투어서 밀고 나옵니다. 천천히 나오면 어떻습니까? 끝나고 뭐 대단한 일이 있는가하면 그것이 아니라 식당으로 밥 먹으러 뛰거나, 주차장으로 가서 쇼핑을 가거나, 놀이를 가거나, 아니면 집으로 돌아가서 밥을 먹고 파자마바람으로 소파에 덜렁 누워서 TV나 보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를 마치고 너무 진리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가슴이 아파서 흐르는 눈물을 주먹으로 씻으면서 예배당에서 밖으로 나와도 이 세상이 변할까 말까인데 무슨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 실제로 어느 단체에서 그렇게 예배를 마치고 예배당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앙케트를 했습니다. 그 앙케트 중에 무엇이 있었느냐하면 한 20년 전 이야기니까 지금은 더 나빠졌습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설교를 들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오늘 목사님이 성경 어디를 설교하셨습니까?’ 95%가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95% 중에서 절반 이상은 방금 예배를 드렸는데 목사님이 구약을 설교했는지 신약을 설교했는지도 생각이 안 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5명이 정확하게 어디를 설교했는지를 대답했는데 그 사람에게 3일 후에 5명에게 다시 전화를 했더니 그중에 3명만 기억을 하고 두 사람은 3일 동안에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예배를 내버려둔 상태에서는 교회의 개혁이라는 여러 가지 다른 이야기를 해도 근본적인 교회의 위상을 세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목회를 해보셨으니까 너무 잘 아시겠지만 돈이 많은 사람이 헌금을 많이 합니까? 건강한 사람이 충성합니까? 말을 잘하는 사람이 전도를 많이 합니까? 아닙니다. 그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돈이 없어도 헌금을 하고 건강이 좋지 않아도 봉사하고 공부가 모자라도 전도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7, 8년 전에 새로 오는 사람들이 어떻게 왔는지 추적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 새로 온 사람들의 60% 이상을 교회에 나온 지 1년 미만의 사람들이 전도를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기라성 같은 장로님, 권사님들이 전도를 많이 했을 것 같은데 아닙니다. 오늘 따끈따끈하게 주님을 만나서 많은 은혜를 받는 사람들이 전도를 할 때에는 우리교회로 꼭 오라고 전도를 합니다. 왜? 여기서 예배를 드릴 때에는 너도 나처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실질적으로 이 문제는 단순히 원리적인 문제가 우리의 목회가 서느냐 쓰러지느냐하는 아주 근본적인 기로에 놓여있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가슴을 손을 얹고 정직하게 물어봅시다. 설교를 하고 예배를 인도하는 것이 목회의 주요 직무인데 최근에 우리가 예배를 인도할 때, 설교를 할 때에 그때에 예배가 끝나고 온 교인들이 주님을 만나서 차마 예배당을 뜨지 못하도록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감격을 한 예배가 언제가 마지막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교인들은 종종 완악하고 은혜 생활을 못해서 진짜 최선을 다해서 설교를 했는데도 은혜를 받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의 마음이 물같이 녹아서 내가 내 살점이라도 떼어서, 내 뼈라도 깎아서 저 영혼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갈 수 있다면 그래서 이 예배에 주님이 오셔서 저들에게 진정한 변화를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히 임한 날은 그 감격 때문에 자리를 뜨지 못하고 예배가 실패한 날은 이 모든 것이 나 때문이라는 자책감 때문에 괴로워해본 적이 언제입니까? 한국교회의 예배는 목사하고 장로들이 다 망가뜨렸습니다. 교인들이 무엇이 잘못이 있습니까? 물론 교인들도 잘못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혼을 내야합니다. 그리고 진짜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의 영광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문제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이것이 희랍어 성경에는 신령이 아니라 영입니다. ‘그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할지니라.’ 그래서 이 영이라는 단어 ‘스피리투스’ 라는 이 영이라는 단어는 뭐냐 하면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영이신 하나님, 영혼을 가진 인간존재, 이 죄인인 영혼으로 하여금 무한히 거룩하신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하게 만들어주시는 성령님, 이 삼자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게 모두 영적인 교통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영이신 성령을 통해 영적인 존재인 인간에게 어떤 교통을 주시는 시간이 예배의 시간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는 항상 하나님과의 교통 속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예배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탁월한 경배의 정신과 정서 속에서 실제적인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시간이 예배의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배시간은 아주 탁월한 기독교의 Spirituality를 가르칠 수 있는 최고의 시간입니다. 여기에서 인간이 형성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에이든 윌슨 토저는 자기의 책속에서 말하기를 ‘기독교 선교의 최종적 목표는 모든 사람을 진정한 예배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옵시며’ 라고 기도하도록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그 통치는 은혜의 통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통치는 사랑의 통치입니다. 그 사랑의 통치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고 이 통치를 받은 인간들이 인간들 속에서 그 통치를 구현해나가서 완전히 실현된 상태가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적인 나타남입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졌을 때 하박국 선지자가 말했던 것처럼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가득하게 되었을 때 그때에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가득차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충만해진 상태 그 하나님의 나라의 상태를 보여주는 최고의 모습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경배입니다. 여러분들이 요한계시록을 보면 천국의 그림이 나오는데 어떤 그림입니까? 24장로들과 거룩함을 입은 온 성도들이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영광을 경배하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입니다. 그에 대해 거치고 반항하는 모든 것들이 종식되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의와 거룩함과 진리가 온전히 회복된 가운데 인간들 속에 평화가 수립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평화가 이루어지고 그 하나님을 무한한 두려움과 사랑 속에서 경배하는 그 예배의 완성이 바로 실현된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이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경배라면 우리의 목회적인 일상 속에서 하나님 앞에 올리는 이 예배도 사적인 예배가 공적인 예배가 있는데 특별히 이 공적인 예배는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에서 이 공적인 예배에서 죄인들은 이 장소가 구별된 장소라는 것입니다. ‘여기 거룩하신 하나님이 계신 곳이구나!’ 하고 두려움 속에서 떨면서 기름을 붓고 자기가 있던 곳에서 도를 세우고 하나님 앞에 기름을 부어 주님을 경배했던 야곱과 같이 그렇게 예배 속에서 ‘아 여기가 구별된 장소구나!’그리고 ‘하나님은 온 땅과 만물위에 지극히 거룩하고 위대하신 분이시구나! 그 무한하신 하나님의 엄위 앞에서 나는 티끌 같은 존재일 뿐이구나!’ 하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는 그 장소 그 구별된 시간이 예배의 시간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예배를 이야기할 때 희랍어로 ‘라트레이아’ 라는 단어인데 구약성경 ‘에베드’를 옮긴 것입니다. 구약언어입니다. 넓은 의미의 예배와 좁은 의미의 예배를 함께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미국을 갔습니다. 무슨 일이었는지 모르지만 집회나 세미나였을 것입니다. 어느 집사님이 저를 데리러 나왔습니다. 그분이 자신의 교회로 나를 이동해가면서 테이프를 틀어주는 것입니다. 이게 뭐냐고 그랬더니 우리 담임목사님 강의를 들으시면서 가라고 그랬습니다. 그것은 평범한 이야기입니다. 거기서 결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여러분은 여태까지 교회는 세상과 구별된 곳이고 예배시간은 이 세상일과는 다른 일이라고 이원론적으로 배웠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디에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거기가 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고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한다면 우리에게는 거룩한 일과 속된 일의 구별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목회자는 뭔가 신학적으로 한쪽으로 치우쳤구나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이 이제 흔히 이원론과 일원론을 이야기하는데 이원론이 무엇입니까? 플라톤에 의해서 이원론이 세워집니다. 플라톤만의 사상은 아닙니다만 플라톤이 정리를 합니다. 잠깐 철학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플라톤은 눈에 보이는 이 모든 세계는 실제로 있는 세계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그 너머에 보이지 않는 세계 즉 보고 냄새 맡고 입맛을 느끼고 접촉하고 귀로 듣는 오관에 의해서 파악되는 세계는 잠세적인 세계이고 템퍼라 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변합니다. 그리고 소멸하기 때문에 항구적인 세계가 아니고 오히려 우리의 지성으로 직접 알 수 있는 세계 그 세계가 훨씬 우월하고 좋은 세계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소위 이야기하는 존재도라는 것을 만듭니다. Schale of Mean. 무슨 뜻이냐 하면 모든 사물의 본질이 ‘있음’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은 즉 하나님은 최고의 있음입니다. 그래서 있음이 100인 존재가 신입니다. 천사는 90쯤 됩니다. 인간은 80쯤 되고 동물은 50쯤 되고 식물은 30쯤 되고 그 다음에 흙이나 돌멩이는 10쯤 된다면 그러면 맨 위에서부터 우리들이 그려본다면 신은 존재도가 100이면 역삼각형이 그려집니다. 이 삼각형은 있음입니다. 그러면 신은 없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은 충만한 있음이기 때문에 선입니다. 천사는 조금 모자랍니다. 모자라는 것만큼 악입니다. 그러니까 위의 가지계의 영적 존재로부터 이 현상계의 물질적인 존재로 내려오면 내려올수록 있음이 줄어들고 없음이 많아지는데 그 없음을 악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물질 개악설의 유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이원론입니다. 그래서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들은 선하고 물질적이고 육적인 것은 악하다고 보는 것이 이원론입니다. 이 이원론이 기독교에 들어오면서 기독교에서 천사나 하나님이나 이런 신령한 가치가 있는 것들은 우위에 있고 이것들은 선하고 그 다음에 육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은 그것 자체가 신적인 것들을 결핍했기 때문에 결핍한 것만큼 악이라고 보는 것이 이원론입니다. 이런 것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우리가 예전에 보면 교회의 일은 하나님의 일이고 세상의 일은 쓸모없는 죄 된 세상에서 먹고살기 위해서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확실히 잘못된 이원론입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한 하나의 치유책으로써 그 목회자는 그런 식으로 강의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한국에 있는 이름만대면 알 수 있는 교회에서 있었던 일인데 이런 식의 사상을 강조했는데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교인들이 주일에 예배를 안 드리고 빈민봉사를 가는 것입니다. 왜? 결국 예배는 좁은 의미의 예배만이 아니라 가서 주께 하듯이 봉사하면 다 예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주일에 대한 모든 개념이 무너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순간은 그렇게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가 자기가 아무리 투철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계속 먹어야 삽니다. 여러분 금식해보셔서 알지만 열흘만 굶겨보면 이렇게 앉아있는 것도 힘듭니다. 그러면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흙으로 사람의 육체를 빚으셔서 영혼을 불어넣으셔서 인간을 만드시는데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두 가지 자원을 모두 필요로 합니다. 육체는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을 필요로 하고 영혼은 하늘로부터 오는 자원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공급받음으로 영혼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청년들이 주일개념이고 뭐고 다 무너지고 심지어는 우리가 왜 꼭 주일날 예배를 드려야하느냐 하며 그럴 필요가 있느냐하는데 그것은 결국은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격입니다. 실제로 성도들을 그렇게 살게 하고난 다음에 일반적인 삶의 영역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정신으로 꽉 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구별되었던 종교적이고 하나님 앞에 경건했던 이런 모든 틀들과 내용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것에 대한 하나의 성서적인 시각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원뿔이론이라고 제시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의 향한 종교의 영역과 그 다음에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의 영역 사이에는 확실한 울타리가 없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십니까? 그러니까 교회에서 하는 일은 우등하게 영적인 일이고 세상에서 하는 일은 열등하게 세속적인 일이라는 그런 식의 구분은 성경적으로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제의와 경배의 행위가 이 세상에서 행하는 모든 일반은총적인 직업 활동과 동일한 선상에 있다는 것도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보십시다. 하나님이 최초의 사람 아담에게 두 가지의 의미 있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것입니다. 땅을 다스리라고 명령합니다. ‘다스리다’라는 단어가 히브리말로 ‘야다’ 입니다. 이 단어는 린와이트 같은 사람들이 이것에 대한 기독교적인 해석을 문제 삼으면서 오늘날 환경파괴의 모든 문제가 이 가부장적인 성경의 해석을 통한 기독교의 포학적인 환경에 대한 태도에 원인이 있다고까지 이야기하게 됩니다. 이 해석은 상당히 설득력 있게 40여 년간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그 야다라는 단어가 구약성경에 무지하게 많이 나오는 단어입니다. 왕이 나라를 통치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면 왕이 나라를 통치할 때 그 통치가 어떤 식의 통치여야할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 통치는 한번 착취하고 다시 쳐다보지 않을 침략자같이 하는 것은 그것은 통치가 아닙니다. 자기의 백성들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비 되고 어미 된 마음으로써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로써의 통치이며 왕의 통치입니다. 그런데 그 세상을 정복하고 개척하고 통치하라는 사명이 주어지는데 소위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문화명령, 노동명령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후에 종교명령이 주어집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먹는 날에는 무트, 탄트,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You shall die. 화자의 의지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반드시 죽이리라는 것입니다. 두 가지 명령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두 가지 명령은 함께 준수되어야합니다. 단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안 따먹었으나 생육하지도 않고 번성하지도 않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가꾸고 다스리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생육하고 번성하고 다스립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묻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이냐 하면 이 두 명령이 어느 사이에 간격을 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왜냐하면 실제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고 언약을 지키는 일 없이는 생육할 수 없고 번성할 수 없고 땅에 충만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일부는 생육이 가능하겠지만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가 맨 처음에 창조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하와를 창조하시니까 하와가 나왔을 때 아담이 뭐라고 그럽니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결혼식 때 잘 쓰는 성경 본문인데 사실은 이것이 결혼식주례사로 쓰라는 본문이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모든 인간이 모두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하기를 원하면서 인간 사회를 만드신 것입니다. 모두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은 그 나라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하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가 올 때까지 과도기적으로 이미 미래에 성취될 하나님의 나라의 실제가 침투해 들어와서 현재 실현되고 있는 모습이 있는데 이것은 아직까지도 있는 이 세상나라의 잔재와 만나는 공통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으로 가득하게 될 때 그 교회는 교회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향해 목숨도 나눌 수 있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현실적으로 경험하게 만드는 수단이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둘 사이에 분명히 어떤 구분점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둘 사이에 층차가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제의적인 명령과 그 다음에 일반은총적인 명령을 이것을 원뿔의 관계로 보아야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지평으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에 칸막이가 없는 것은 분명한데 두 개 사이의 층차는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이 시간은 세속적인 것과는 구별되어서 둘 사이에 담장이 쳐져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보다 높은 제의적인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의 일반적인 삶보다 우월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이제 삶은 넓은 의미의 예배와 좁은 의미의 예배로 나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이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라고 할 때 이것은 주일날 11시에 모이는 예배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로써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삶 전체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의 예배입니다. 그러나 이 넓은 의미의 예배가 진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면서 우리의 삶을 드리는 삶이되기 위해서는 좁은 의미의 예배에서 확실하게 하나님을 만나는 이 예배의 감격이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신대원 때 기도원을 방학 때마다 갔습니다. 가서 일주일씩 금식기도를 했는데 그때에 아주 젊은 설교자 한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은 굉장히 자유로운 신학을 한 어느 교파에 소속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냥 훌륭한 선생님이지 무슨 구세주냐며 그리고 예수의 피가 우리를 구원했다고 믿는 것은 미신이라고 생각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극단적인 자유주의 신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독일로 유학을 갔습니다. 이 사람이 어느 날 너무 괴로운 일이 있었습니다. 기도원에 온 것입니다. 기도원에 와서 기도를 하다가 예수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완전히 복음주의자로 돌아갔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네 고향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하고 돌아온 교단에서도 인정을 못 받았습니다. 과거가 의심스러우니까 인정을 해주지 않고 저쪽에서는 현재가 변했으니까 인정을 안 합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저에게는 가끔 학생들이 목사님 어떻게 하면 훌륭한 신학공부를 잘할 수 있느냐고 물어봅니다. 내가 그럽니다. 좋은 예배자가 되라고 조언합니다. 거기에서 모든 훌륭한 신앙의 비밀이 있다. 그러면 이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이 몇 있는데 누구냐 하면 진정한 예배자였던 적이 없던 예배인도자, 하나님의 말씀에 훌륭한 청취자였던 적이 없던 열렬한 설교자, 개인적으로 기도에 열심을 품지 않았던 기도인도자, 교회의 치리에 복종해본 적이 없던 당회장. 이런 사람들은 모두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좋은 것들은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자기 자신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목회자가 예배를 인도하고 정말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던 예배입니다. 그런데 ‘뭐 어때? 이게 뭐가 문제야? 다 그런 거지!’ 그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 하면 그것은 목회를 하다가 배운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정말 하나님을 만나는 진정한 감격이 있는 예배가 무엇인지에 대한 기억이 없거나 완전히 흐려졌기 때문에 이것이 잘못된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신들에 대한 사상은 여호와에 대한 사상과 끊임없는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여러분들은 성경에 보면 소위 리브패턴이 나옵니다. ‘리브’는 히브리말로 다투다는 단어입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다툼패턴이 나오는데 그 리브패턴이 무엇이냐 하면 여러분들은 기억이 날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버렸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거나 선지자가 ‘너희는 여호와를 모두 버렸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기에 답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가 언제 당신을 버렸습니까? 우리가 당신에게 희생 제사를 드리지 않은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당신께 절기를 안 지킨 적이 있습니까?’ 선지자에게 똑같이 그렇게 대항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반론을 제기하는데 이런 것들을 리브패턴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리브패턴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이스라엘 사람들 속에 있는 고질적인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고대 근동에 있는 신들에 대한 사상에 끊임없이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에서의 신들은 제사에 대한 아주 새로운 견해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주 많이 가르쳐준 것입니다. 그중에 치명적으로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뇌물개념의 제사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종교학에서 이 원시종교에서 이 모든 제의는 기본적으로 이 뇌물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이런 개명한 시대에도 한국에서 건물을 지을 때 건축업자들이 건축주와 함께 돼지대가리를 갖다놓고 그리고 코에다가 만 원짜리를 꽂고 그 지성인들이 거기에 구부려 절을 합니다. 누구에게 드리는 제사냐 하면 터줏대감에게 올리는 제사입니다. 그러면 그 터줏대감에게 제사를 올리는데 여러분들이 한번 그 사람이라고 치고 무엇을 기대하면서 신이 있는지도 모르고 없다는 확신도 없지만 있다는 확신도 없는 그 불신자들이 그렇게 기초를 파놓고 거기에 돼지머리를 삶아놓고 구부려 절을 할 때 그 마음에 무슨 의도가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복을 달라는 의도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1층을 건축했는데 내일 아침에 보니까 3층이 올라가게 해달라든지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뭐냐 하면 이 돼지머리를 먹고 그리고 심술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일하다가 인부를 땅에 떨어뜨린다든지 아니면 콘크리트를 잔뜩 쳐놨는데 비가 쏟아진다든지 뭐 재수 없게 감사가 나와서 걸렸다든지 이런 일만 생기지 않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소극적인 개념의 뇌물개념입니다. 이게 당시에 있었던 개념입니다. 잠언은 뇌물에 대해서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뇌물은 눈을 어둡게 하나니’ 그리고 또 잠언은 ‘뇌물은 친구를 만드나니’ 그럽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그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하는 것이 원래 야훼종교의 이상이었는데 이것들이 고대 근동의 신들에 대한 사상의 영향을 받으면서 그렇게 변하는 것입니다. 중동의 신들은 보면 이렇게 늘 뭔가를 먹지 못해서 걸근대는 굶주린 신들입니다. 개떼처럼 몰려다니면서 먹을 것을 찾고 자기를 섬길 자들을 찾는 아주 너절한 신들입니다. 거기에 고도의 도덕성이라든지 그런 개념은 없습니다. 그 한 예가 ‘에너마엘리쉬’입니다. ‘에너마엘리쉬’에 보면 바벨론의 창조설화입니다. 우리는 홍수가 왜 났다고 말합니까?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의 딸들과 혼인하고 혈통을 더럽히니까 그런 도덕적인 불결함을 보면서 하나님이 심판하시는데 거기에서는 아닙니다. 신들이 쉬는데 인간이 안식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을 부어버려라!’ 그것이 홍수의 원인입니다. 그게 에아라는 그래도 의로운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이 홍수 속에서 방주를 만들어서 살아나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기에 ‘에너마엘리쉬’에 나오는 제도에 의하면 방주가 정사각형입니다. 정육면체입니다. 어떻게 되느냐하면 조선공학자들의 이야기는 그게 물위에 올라가면 공처럼 굴러다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도덕성이 결여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과는 상관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식의 소위 이야기하는 뇌물개념이 이스라엘의 끊임없는 영적인 축복을 방해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섬기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가장 치욕스럽게 느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면서 소위 이야기하는 제사제도를 무시하는 것 같은 비판들이 성경에서 나오는 것 그런 이유가 바로 이런 식의 리브패턴 속에 묻어있는 신학적인 고민들입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식의 뇌물개념의 하나님을 향한 경배사상이 그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침투해서 들어와 있습니다. 목표 자체가 무엇이냐 하면 오늘 하나님을 만나고 일주일 동안 불결해졌던 나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고 거룩한 하늘의 은혜를 거룩하게 가득 채워서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야겠다는 이런 목표가 아니라 또 안 나왔다가는 하나님이 심술이 나서 사업체고 뭐고 한번 휘둘러놓고 애들이라도 교통사고가 나면 어떻게 할까 하는 그런 것들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게 똑같은 패턴입니다. 이런 죄악들을 목회자가 방치하는 것은 직무유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회자는 사실은 목회를 하면서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정말 믿는 것이 이런 것이라는 것을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고 두 번째는 그 일주일에 한번, 혹은 세 번씩 드리는 공적인 예배 속에서 충만하게 주님을 만나고 ‘내가 여기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도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로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내가 죄인이옵나이다.’ 라고 고백을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예배를 인도 할 수 있다면 사실은 자신의 의무에 90%는 다했다는 것입니다. 한 4,5년 전이었습니다. 교회에 불교에 다니는 자매 하나가 결혼해서 한 40대 중반쯤 되었는데 자기 친구를 전도했습니다. 생전 교회를 나가지 않는 자매인데 데리고 교회를 왔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인생을 너무 곤고하게 사니까 불쌍해서 데리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하고 헤어지려고 이혼서류에 사인을 다했고 남편보고 너만 여기에 도장을 찍으면 우리는 갈라서는 것이라고 장롱에 넣고 잠을 잤는데 얼마나 남자가 속을 썩였으면 여자가 그러겠습니까? 속을 썩이면 안 되는데 어쨌든 그런 상태까지 갔습니다. 그리고 이 여자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교회를 갔습니다. 하필이면 그날 설교제목이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 이었습니다. 그런데 해마다 5월에는 가정시리즈를 하는데 그해에는 ‘부모를 공경하라.’ ‘자녀를 사랑하라.’ ‘동기간에 잘 지내라.’ 대게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 끝나는데 그해에는 갈 때까지 갔습니다. 그래서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 그 다음 주에는 ‘이혼을 해버린 그대에게’ 아무튼 끝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 자매가 그날 예배당 중간에 앉아서 회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간 것입니다. 남편을 부른 것입니다. 남편은 지금 이혼을 강요받고 있는 긴장상태니까 저 마누라가 또 나를 괴롭히려고 부르는구나 하고 애들도 있고 하니까 남편은 이혼을 하려고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고 간 거야?’ 도장을 찍으라고 그러는 사이가 무슨 정이 있겠습니까? 갑자기 이 여자가 그날 교회에 다녀간 여자가 남편이 들어와서 방 한가운데 서있는데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그리고 울면서 ‘여보 내가 잘못했어. 모든 게 나 때문이야.’ 남편이 발길을 차면서 ‘그것을 이제 알았냐?’ 그러겠습니까? 그러면 그게 인간입니까? 이 남편이 무릎을 꿇으면서 ‘아니야 내가 당신을 너무 괴롭혔어!’ 그러니까 기독교 예배가 가지고 있는 강한 힘이 바로 이렇게 인간은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태도를 바꿔놓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으로 모두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일단 자기가 수십 년 동안 생각하고 살아왔던 삶의 방향을 바꿀 결단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 세상에서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하면 하나는 영이고 또 하나는 진리입니다. 신령과 진정이라고 그러는데 전적으로 잘못된 번역입니다. 그래서 ‘엔토푸마알레데이아’입니다. 그래서 영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예배가 정말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오르간을 수십억짜리로 바꾸고 무슨 유급성가대들이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희 교회는 성가대가 없습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본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배 속에서는 크게 세 가지인데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만나려고 나오는 예배자, 그리고 그들에게 참된 진리를 선포하는 설교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의 만남을 북주시는 성령의 은혜, 이 삼자가 있을 때 그때 정말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인들은 상한 심령으로 예배에 나오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혹시 궁금하면 교회에 돌아가셔서 교인들에게 앙케트를 해보십시오. 일주일에 예배시간에 은혜를 받게 해달라고 얼마나 기도하는가? 그런데 특별히 설교하는 목회자를 위해서 얼마나 기도하는가? 성경에 보면 상한 심령, 통회하는 심령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상한 심령은 히브리말로 ‘레그니쉬바르’ 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뭐냐 하면 사바르가 깨진다는 것입니다. 수동태인데 뭔가 하나님의 율법이나 이런 것들을 통해서 각성된 상태를 나타낸 것이라면 통회하는 마음은 ‘레그다끄에’라는 것인데 ‘따끄에’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짐승 같은 것들이 차에 치였는데 친 짐승을 또 밟고 지나고 또 밟고 지나고 몇 번 밟고 지나가면 이 짐승의 뼈가 다 으스러져서 살코기와 한 덩어리가 되어버립니다. 그런 상태가 바로 ‘다끄에’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고집과 교만이 다 꺾인 상태에서 그 하나님을 향해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물같이 녹은 마음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기도와 예배, 그런 사람들의 제사와 헌신을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가난하다는 말은 ‘파산선고를 받은’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한번 우리의 교회를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이 교회의 숫자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저는 7명이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저와 우리 집사람을 포함해서 7명이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런데 적은 사람이 모였다고 설교시간에 기가 죽거나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7명이 모여도 일만 명이 모인 것처럼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7명이 모였을 때도 100분씩 110분씩 설교를 했습니다.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물론 더 많은 사람이 모이면 더 신이 날 것입니다. 그렇지만 없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밀물처럼 빠져나가는 것 보다는 두 세 사람이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주님만 만나면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더 큰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강의를 듣고 나셔서 여러분들의 목회에 다른 것을 가지고 고민하지 마시고 초점을 예배에 모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하는 이 목회의 복이 정말 예배 속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에 나오는 70명의 교인가운데 이 예배 속에서 주님을 만난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진지하게 물으면서 무감각한 예배가 계속되고 있다면 맨 처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예배를 인도하던 그때로 돌아가서 무엇이 나의 목회현장의 예배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하는 것을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먼저 되물어 보아야합니다. 교인들을 원망하기에 앞서서 먼저 자신에게 물어보아야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현실적으로 어떻게 해야지만 이렇게 거의 무기력하게 빠져있는 이 예배를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다시 살려낼 수 있겠는가? 점심 먹고 계속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