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본질적 사명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불을 켜기 위하여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네게로 가져오게 하여 계속해서 등잔불을 켜 둘지며 아론은 회막안 증거궤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불을 정리할지니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레 24:1-3)
녹취자 : 조원정
오실 때 강의안을 받으셨을 겁니다. 어떤 것은 오래전에 썼고 어떤 것은 최근에 썼지만 정성껏 최선을 다해 쓴 원고입니다. 이 원고를 모두 강의하려면 오늘 저녁때까지 해도 다 못하기 때문에 원고하고 상관없이 제가 강의를 하고 여러분들은 집에 가셔서 읽으시면서 오늘의 강의를 지적으로 정리를 하시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 교회가 많은 문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 교회나 이런 문제들에 늘 직면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내놓은 대안들이 각각 다 다릅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목회자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입체적인 시야를 가지고 오늘날 직면하고 있는 선교 상황을 해결해 가야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이런 판단력에 있어서 지극히 감정적이고 미숙한 판단을 내려서 어느 한쪽으로 쏠려서 입체적인 감각을 잃어버린다면 교회를 전체적으로 지도해가는 올바른 일이 아니라고 생각이 듭니다. 우선 문제는 중심적이고 본질적인 것들과 본질적인 것들이 확산되어 가서 이것들이 어떻게 우리의 시대에 적용이 되고 전개되어야 할 것인가를 같이 고려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세월호 사태를 보면서 똑같은 문제들을 만나게 됩니다. 세월호 사태가 일어나서 매일 아침 신문을 보면서 울컥 눈물을 쏟은 것이 벌써 한 달 가까이 됩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한쪽에서는 정부를 규탄하고 사회가 썩었다고 하고 심지어 정권퇴진 운동까지 일어나고 목회자들도 이런 일에 가세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쪽에서는 이런 세월호 사태가 일어난 것은 다 교회의 죄 때문이라고 계속해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것이지만 내면화만 되었서는 안되겠고 사회 전체가 총체적으로 부패해서 뇌물과 뇌물, 사회전체가 부패와 부정, 탈법과 불법에 의해서 전부다 연결고리가 이루어지면서 사회 자체가 좌초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 사이에 정확한 균형을 잡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회개와 부흥이라고 하는 것, 현실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회를 개혁해 나가는 두 가지를 우리들이 같이 균형을 이루면서 해 나갈 때 그것이 진정한 이 시대를 섬기는 교회의 지도자들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태들을 깊이 내면화해서 우리 자신을 성찰하고 회개한 후에는 실제로 이렇게 거칠게 밀려들어오는 사회의 구조적인 악과 부패한 관행, 이런 것들에 대해서 순교의 각오를 가지고 싸우면서 성도들이 자신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법과 정의로 돌아가려고 하는 비장한 개혁운동이 함께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지도자들이 올바른 균형을 가져야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회라고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육체, 몸과 똑같습니다. 인간의 몸은 육체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영혼과 정신이 있고 육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둘 사이에 온전한 균형이 이루어질 때 진정으로 건강한 사람이고 육체는 신비한 방법으로 영혼과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 인간의 몸입니다. 우리의 사명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아무리 사회 정의를 부르짖는다 할지라도 우리가 정치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회를 수술하기 위한 메스를 들고 집도의가 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도록 열심히 노력을 해야지만 되는데 이런 사회의 거대한 부패하고 구조적인 비리와 탈법과 불법, 이런 모든 것 들 속에서 교회가 얼마나 순전하게 법을 법대로 지키고 도덕적인 생활을 영위하려 했는가? 그것에 저항해 부딪힐 때 얼마나 몸부림치면서 피를 흘리면서 살아왔는가 하는 깊은 실천적인 반성들이 있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 교회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발견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부름 받았다고 하는 것은 구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제입니다. 우리는 구원 자체를 아주 개인적으로 보지만 성경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때 보면 한사람, 한사람, 지옥 갈 사람들을 건져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이라는 큰 구도 속에서 우리들을 구원과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면서 살아야 할 소명을 부여받은 자로 부름을 받는 것입니다. 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그 사회 속에 살면서 아닌 것에 대해서 아니라고만 말할 수 있어도 그것 때문에 사회가 확 바뀌지는 않겠지만 이런 구조적인 악과 비리, 이런 것들이 통용되지 못하도록 여기저기서 방해물이 생겨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방식에 대해서 다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교회는 결코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고 사회사업이나 하라고 하나님이 세워놓으신 것이 아닙니다.
국가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정의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그 하나님의 정의가 어떻게 사랑에 의해서 완성되는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는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입 맞추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를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 교회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회변혁의 힘을 가진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 교회의 사람, 사람들이 어떻게 저항하기 힘들 정도의 사회악과 구조에 대해서 항거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되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내가 교회 집사가 되었다는 이유하나만으로 그런 사회의 구조, 뇌물이 통용되고, 핍박이 있고, 직장에서도 정직하게 직장생활을 하면 사람들에게 소외당하고 사업을 하면서도 당연히 탈세를 하고 불법을 저지르고 부당한 방법으로 비자금을 조성하고 이런 식으로 해서 관계의 로비를 하고 이렇게 해야지만 결국 사업이 될 수 있는 이런 구조에 대해서 항거하며 산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생각을 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번 세월호 사태 같은 경우에 엄청난 선교적인 해로운 결과를 우리 개신교에 가져왔습니다. 그 사람들은 구원파고 다 필요 없습니다. 다 개신교로 보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전도하러 나가면 사람들이 막 문을 닫으면서 막 욕을 하는 것입니다. 너네나 잘하라고 째려보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비장한 결단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맨날 우리들이 모여서 똑같은 얘기해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실제로 성도들이 자기 개인적으로 흩어진 사람 모였을 때만 아니라 흩어진 개인의 삶에서 윤리적이어야 하고 이 세상에 법과 정의를 따라서 살고 그 위에 하나님의 법을 따라서 살려고 하고 그로 말미암는 박해와 시련들을 이길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목회만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모릅니다. 특히 젊어서 대학 졸업하고 곧바로 신대원에 와 가지고 성직에 들어선 사람들은 직장생활을 성도들이 어떻게 하는지 지극히 이해가 피상적입니다. 치열합니다. 그리고 그 구조 속에서 과연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사회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많은 고통과 어려움과 모순들을 특히 젊은이들은 절절히 매일매일 느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쉽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데 어떻게 해야지 삶이 가능하겠습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위대한 힘이 두 기둥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상의 힘입니다. 지성과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상의 힘은 지식의 힘입니다. 어떤 지식인가 하면 세부적인 성경의 내용을 알고 그런 정도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세계가 무엇이고, 인간은 누구이고,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이런 독특한 세계관을 가지고 나는 이런 삶을 살 수 밖에 없다는 지식의 체계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교회에서 체계적으로 교육을 안 하는 것입니다.
몸은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하지만 지성적으로 사람들이 무장이 되지 않았습니다. 뭔가 마음에 밀려오는 종교적인 감흥이 있을 때는 그래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려고 하는데 그런 것들만 가지고 이렇게 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그 악과 더불어서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할 그런 것들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 있는 청년이 그럽니다. 이름만 대면 아는 큰 대형교회인데 젊은이들이 은혜만 받으면 직장을 그만두고 교회에 직원으로 들어오고 싶어 한답니다. 왜 좋은 직장을 버리고 교회 직원으로 들어오느냐 하니 너무 괴롭답니다. 맨날 술 먹으러 가자 하고 그 이상의 짓도 하고 맨날 이중장부 쓰라하고 업자들한테 뇌물 받아야 하고 줘야 하는 것이 싫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직장을 다 싫다 하고 교회 모이면 세상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것과 싸우라고 하나님이 보내신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이러한 지식의 체계들이 갖춰져 있는데 이것이 옛날에는 기독교 교리를 가르치면서 세계관을 형성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교리를 안 가르칩니다. 한심할 정도로 교리적인 지식이 심하게 결핍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꿋꿋한 뼈가 있어야 되는데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윤리의 힘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서 다른 사람과 다른 통치를 받으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늘나라의 윤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 믿는 그 순간 완벽한 윤리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그런 세계관과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의 윤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사람이고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윤리와 하나님의 나라의 윤리가 충돌을 할 때 기꺼이 하나님의 윤리는 이런 것이라고 말하면서 죽어가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순교인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이런 사상의 철저한 힘과, 윤리적인 힘 두 개가 교회가 세상을 이기는 힘인데 이것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이 두 개를 실제로 실현할 수 있도록 묶어주는 또 하나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은혜의 힘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힘입니다. 교회가 그런 위대한 지식은 평소에 철저하게 교인들을 가르침으로서 함양이 되고 윤리는 윤리적인 삶을 성도들이 실제의 삶에서 살아가야 하고 교회가 그런 점에 있어서 본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의 사람들에 입맛에 맞추려고 애를 쓴다고 생각을 합니다. 사실은 그럴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옳다고 생각되는 길을 가면 되는데 옳은 길을 가야 합니다. 자기네 교회가 신문에 나서 칭찬을 받았다고 흥분을 하고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옳은 길을 갈 수 있기 위해서는 교회의 지도자들 자신이 큰 소리가 나서 나를 향해 부르짖는다고 할지라도 놀라지 않을 수 있는 사자와 같은 심장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윤리적인 기반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공적인 자리이긴 하지만 한 가지 꼭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목회자들 왜 세금 안냅니까? 그것 가지고 지금 치고 받고 공청회를 한다고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다 잘못된 것입니다. 세금을 내게 되어 있으면, 이 땅에 살고 있으면 세금 내야 됩니다. 명칭이 뭐든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는 7년 전부터 세금을 냈습니다. 세금을 내겠다고 세무서 갔더니 내지 말라 합니다. 나라도 엉터리입니다. 왜 내시냐고? 안내도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니다. 우리는 내는 것이 맞으니 다 내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주 귀찮은 표정입니다. 이제 와가지고는 왜 그동안 세금을 안냈느냐고 합니다. 우린 전부다 세금을 냈습니다. 꽤 큰돈이었습니다. 교직원들이 내는 세금이 일 년에 일억이 넘습니다. 진작해야 할 일들입니다. 교회에 재정이나 이런 모든 것들도 거의 코스닥에 상장된 수준에 맞춰서 투명하게 재정을 집행해 나가고 그런 윤리적인 문제를 내부적으로 해결을 하고 그 다음에 할 이야기를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성도들이 아무리 떠들어야 소용이 없고 사회가 그것을 개혁하겠다고 아무리 얘기해야 필요 없습니다. 여기에 있는 목사님들이 결심하면 되는 것입니다. 장로들이 결심하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런 문제들을 정리한다고 칩시다. 그렇다고 모든 상황들이 나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철저한 사상에 대한 것과 두 번째는 철저한 윤리적인 삶, 이것을 성도들이 교회에 와서 배워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무슨 일을 처리하고 재정을 운용하고 하는 모든 절차들을 보면서 우리와는 정말 비교될 수 없는 윤리적인 모습이 교회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깊이 감동을 받고 자신의 삶을 성찰해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금 내는 것을 보면서 탈세하던 교인들이 생각을 다시 해야지 회개 실컷 해 놓고 세무사 불러서 탈세하고 해서 신문지상에 오르내리고 그러면 되겠습니까?
이런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해 주기 위해서는 목회자 자신이 철저하게 이 세 가지 준비가 이루어져야 된다고 봅니다. 첫째는 지식적인 준비, 다음 시간에 이야기 할 것입니다. 또 하나는 윤리적으로 제자도를 따라서 살되 언제나 그것을 따라 살려는 사람에게는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손해 볼 각오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하나는 그것들을 이어줄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매순간 임해서 그들이 지식이 새롭게 체험이 되고 용기와 결단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그 어떤 하늘의 동력들이 부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성경읽기나 큐티나 교제나 모든 것,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셔서 그런 하늘의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십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과는 비교될 수 없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매우 중요한 통로가 있습니다. 예배입니다.
구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혈통이 아닙니다. 것은 우리의 선입견입니다.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출애굽 할 때에 중대한 잡족들이 함께 나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온갖 나라의 수많은 백성들, 심지어는 가나안의 원주민들까지 섞여 있었습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의 이스라엘이 되었던 것입니다. 민수기 12장에서 모세가 아내로 취하였던 여인은 흑인이었습니다. 민족주의적인 편견을 가졌던 사람들은 뒤집어 진 것입니다. 어떻게 지도자가 저럴 수 있는가? 그런 다양한 잡족들이 모여서 어떻게 민족적인 이질성들을 극복하고 하나의 신앙공동체가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함께 거룩하신 하나님을 같은 장소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제적으로 그들 속에 하나의 유니티를 만들고 이스라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게 한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거기에 한번 비춰서 생각을 해 보십시오. 이러한 예배가 오늘날 어떻게 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사람들은 점점 예배에 흥미를 잃고 있습니다. 제가 예배의 감격이라는 책을 써서 십만 부 이상 보급을 한 것이 1997년도 일이었습니다. 지금 그 후로부터 17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때는 아주 염려스러운 예배 상황이었는데 지금은 개탄스러운 예배 상황이 되었습니다. 물론 소수의 교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소수의 교회들은 오히려 그때보다 훨씬 예배가 활성화되고 은혜롭기 때문에 성도들이 그런 예배를 찾아서 수평 이동을 하고 작은 교회들이 문을 닫는 현상이 생겨나고, 그렇지만 현재에서 17년을 돌아볼 때 지금 상황은 17년 전의 그 책을 쓸 때 상황보다 훨씬 더 나쁜 상황이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대개 열한시에 예배를 드립니다. 극장 구경을 가도 15분 전에는 도착을 해서 팝콘도 사고 콜라도 사고 경건한 마음으로 영화 시작을 기다리다가 들어가는데 예배당은 15분전에도 온 사람은 별로 안 됩니다. 10분 전에 오기 시작하고 5분 전에 러시아워를 이루고 주차장에 모두 차를 가지고 오는데 좀 안 가지고 오면 좋겠는데 현실입니다. 700대씩 800대씩 차를 몰고 오니까 주차하다가 시간을 다 버리는 것입니다. 예배 시작 시간에 우르르 도깨비 시장처럼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목사님이 늘 하시던 말씀이 있었습니다. 당신들이 일주일에 두 번 예배 드리면 신자인줄 아십니까? 중학교 때 가니까 목사님들이 그럽니다. 한 시간 사십분 예배드리면 교인인줄 아느냐고 지금 한 시간 사십분 예배드리는데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많지 않습니다. 제가 전도사로 있을 때 그 교회는 비가 오나 눈이오나 항상 똑같이 63분에 예배가 끝납니다. 만약에 안 끝나면 그렇게 끝냅니다. 찬송가 588장 1절만 부르고 마치겠습니다. 그렇게 바쁜 사람들이 뭐 하러 교회에 나옵니까? 그것도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이런 것은 1절만 부르면 큰일 납니다.
옛날에 장로교 예배는 정말 단순했습니다. 지금은 예배 순서가 되게 많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압박을 받는 곳은 어딘가 하면 설교시간입니다. 설교시간이 30분 정도가 기준이고 제가 아는 교회는 10분 데로 진행하는 교회가 많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성도들은 찬양을 좋아한다고 해서, 예배도 열린 예배로 한다고 해서 찬송 부르다가 목사님이 평범한 옷 입고 나와 가지고 설교하고 찬양하다가 그냥 끝나는 것입니다. 예배를 보십시오. 설교시간이 짧습니다. 예배를 뭔가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한없이 견디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러 올 때 그렇게 우울하던 사람들이 끝날 때는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사람들이 주일 날 11시에 왜 교회를 오시는지 아십니까? 스스로 답하기를 빨리 예배 끝나고 집에 가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설교가 시작이 됩니다. 이것은 모든 교회가 아니라 평균적인 교회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설교가 시작이 되었는데 성도들은 지성의 스위치를 끄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설교가 끝날 때까지 견디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설교와 상관없이 성경을 읽는 사람, 어떤 사람은 주보를 갖다 놓고 읽는 사람, 빨간 펜을 꺼내서 주보 오자를 고칩니다. 그러고 뒷 페이지 넘겨보니까 헌금 통계가 나옵니다. 십일조 낸 사람 명단을 헤아리고 금액하고 나누어 보고 곱해보고 일인당 얼마가 나왔는지, 넘겨보면 읽을 것도 많습니다. 목사님 수필도 나오고 또 넘겨보니까 누구 돌집, 백일, 다음에 누구 죽고, 시집 장가가는 얘기까지 다 나옵니다. 그래도 예배는 안 끝납니다. 하늘 보다 어디 더 높은 데서 연락이 왔는지 휴대폰 전화가 오면 그것을 들고 밖으로 뛰어 나갑니다. 졸다가 성경을 떨어뜨리는 사람, 낙서하는 사람, 별 사람 다 있습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신학자로서 저는 거기에 하나님 안 계시다고 굳게 믿습니다. 헛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오신다면 제가 말리고 싶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런 곳에 오시겠습니까? 민방위 훈련만도 못한 그 분위기에, 민방위 훈련 가보셨습니까? 제일 불쌍한 사람이 강사 그 사람입니다. 일간스포츠 펴놓고 있고 엎드려서 자고, 하나님이 거기에 오신다면 제가 말리겠습니다.
한 두주 그렇게 해보고 이것은 아니라고 뭔가 각성을 해야 하는데 매주 그렇게 예배를 드리면서 목회자는 예배가 끝나고 나면 까만 가운을 입고 저쪽 끝에서 미소를 띠우면서 그렇게 예배드린 성도들과 악수를 하고 계속 감사하다고 하는데 나는 뭐가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뭐가 그렇게 감사합니까? 와준 것만 해도 얼마나 감사합니까? 여기가 음식점입니까? 예배가 끝났으면 한쪽에서는 주님을 만난 감격 때문에 차마 자리를 뜨지 못하고, 음악회에 가서도 감동을 받고 못 일어나는데 좀 앉아서 기도를 하든지 회개를 하든지, 주님을 못 만났으면 내가 도대체 어떻게 예배를 드렸고 어떻게 살았기에 이런 예배를 드리고 가야하나 하며 회개를 해야 될 거 아닙니까? 이런 반성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통계를 냈습니다. 한국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사람을 불러서 교파를 초월해서 다 확인을 했습니다. 백 명한테 물어봤습니다. 오늘 목사님이 어디를 설교했냐고 했더니 95명이 모른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다섯 명은 기억을 했는데 나중에 다시 일주일 후에 전화를 걸어보니까 다섯 명중의 세 명은 일주일 사이에 까먹고 두 명은 그것을 기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들이 도시에서 변두리 지방으로 갈수록 점점 심해지는 것입니다.
예배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경배하는 마음의 최고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한 것만큼만 잘 살 수 있고 잘 사는 것만큼만 제대로 예배를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보면 넓은 의미의 예배와 좁은 의미의 예배의 불일치입니다. 성경에 예배라고 하는 말이 희랍어로 아보단인데 섬기다라고 나옵니다. 신약으로 넘어가면 레위뜨르기아인데 이것을 하나님을 향한 봉사와 예배를 같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좁은 의미에서 예배는 이렇게 정해진 시간에 와서 하나님 앞에 공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에서의 예배는 우리의 삶 전체, 로마서 12장에서 사도 바울이 이것이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구약의 정신을 그대로 잇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없이 제사를 드리는데 소위 얘기하는 리브패턴이라고 나오는데 리브는 히브리말로 다투다는 뜻이고, 리브패턴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선지자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투는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버렸다고 선지자가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버렸습니까? 너희들이 이런 식으로 제사를 하니까 나를 버린 것이 아니냐?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제사하지 않은 적이 있습니까? 절기도 지켰고 제물도 드렸습니다. 너희가 이 시간에 와서 좋은 제물로 나에게 예배를 드림으로서 예배가 열납 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예배를 드릴 때에 헌제자인 너희가 정말 하나님 앞에 자신을 바친 사람인가를 생각해 보라. 이렇게 바치는 꽃다발과 같은 이 예물이 하나님 앞에 열납되기 위해서는 이것을 들고 있는 이 사람이 살아온 삶이 하나님이 받음직한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이 제사는 제사가 아닙니다.
그것이 구약에서 왜 그렇게 날카롭게 비평을 받는가 하면 고대 근동의 문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고대근동이 이스라엘 역사와 가장 밀접한 영향을 주고받는데 이런 고대근동에서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신관과는 달랐습니다. 우리나라 전통적인 신관하고 아주 비슷합니다. 우리도 큰 건물 같은 것을 지을 때 땅을 파고 거기다가 돼지 머리를 놓고 코에다가 돈을 끼우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거기에서 절을 합니다. 터줏대감한테 절을 하는 것입니다. 복을 달라고 비는 것이 아닙니다. 심술 좀 부리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건물을 짓는데 심술을 부려서 건물이 무너진다든지 사고가 난다든지 그렇게 액이 없도록 도와달라고 비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중동사람이 가지고 있던 신관이 그런 신관입니다.
그들에 의하면 그 신들은 떼거지로 몰려다니면서 제사 음식을 탐하는 그런 무리들이었습니다. 누군가가 자기를 제대로 섬기지 않으면 심술을 부리면서 가서 깽판을 놓는 신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사람들이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인간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그 신을 그렇게 변덕이 심하고 인간에게 화풀이를 잘하는 그 신들을 어떡하든지 달래야지만 자신들의 삶이 평안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신앙이 떨어지니까 그런 신관을 가지고 하나님을 제사하는 일에 접목을 시킨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와서 짐승을 죽여서 제사를 드릴 때에는 짐승은 하나의 모의적인 상징이고 자신이 죽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실한 예배자는 먼저 참회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예배에 나오면서 그리스도의 구속을 힘입어서 예배를 드리는데 나의 삶을 돌아보니까 정말 잘못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진실한 회개와 함께 그 짐승을 죽이고 피가 낭자하게 뿌려지고 그것들을 태우는 속에서 참회의 정신과 함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헌제자의 마음을 받으시는 것을 제사에 드려지는 헌물을 받으시는 것과 일치를 이루면서 그런 제사의 과정을 통해서 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제사의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사람이 다윗입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다음에 제사로 해결하면 되지, 왕인데 뭐가 없었겠습니까? 수많은 짐승으로 제사를 드려보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받으시지 않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진짜 하나님이 받으시는 마음은 통회하는 마음이구나, 통회하는 마음이라는 것이 히브리 말로 레브 다끄헤라는 단어인데 무시무시한 단어입니다. 짓이겨진 마음입니다. 개나 이런 짐승을 갖다놓고 해머 같은 것으로 두들겨서 뼈가 다 으스러져서 뼈하고 살하고 다 뒤섞여진 그런 상태, 그것이 바로 다끄헤라는 단어의 뜻입니다. 형체를 잃어버릴 정도로 짓이겨진 마음입니다. 거기에서 통렬하도록 깨달은 것입니다.
벤자민 워필드라고 하는 구 프린스턴의 신학자가 52편을 주석을 하면서 다윗은 죄를 통해서 복음의 깊이를 깨달은 사람이라고 평가를 했습니다.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이 원래의 제사의 정신이었습니다. 교회 가서 성도들 보고 물어보십시오. 그렇게 거지같이 예배드리는데 왜 교회에 나오십니까? 대답이 간단합니다. 찝찝합니다. 왠지 주일을 안 지키면 뭔가 불행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랍니다. 지난주 예배가 뇌물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그 길이 아니라고 피를 토하면서 가르쳐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목회자입니다.
오늘날 조국교회의 예배의 상황을 보십시오. 예배의 태도가 제일 불량한 사람들이 집회가보면 교회의 중직자들입니다. 모든 교회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저의 경험이 그렇습니다. 이런 태도에 대해서 교회의 지도자들이 단 한번이라도 왜 우리는 이런 식으로 매주일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밖에 없느냐 하고 통렬하게 한번 반성하고 한편으론 신학적으로 자신들이 드리는 예배가 올바른지를 생각해 보고 영적으로 우리의 예배가 올바른지를 생각해 보고 이러면서 우리 자신들을 통렬하게 반성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제가 항상 신뢰하지 않는 사역자들이 있다고 후배들에게 가르칩니다. 진실한 예배자였던 적이 없는 예배 인도자, 통렬한 참회의 기도를 드려본 적이 없는 기도회 인도자, 교회의 치리에 복종해 본적이 없는 당회장, 모든 것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시작이 되어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목회자가 여기 서 있을 때 성도들을 예배 드려주기 위한 서비스맨으로 여기에 와 있는 것이 아니라 칼빈이 말한 바와 같이 자기 자신이 모든 양떼들 중에 한 마리의 양으로서 하나님 앞에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엉망진창으로 예배를 드리면서도 교회의 지도자들이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보면서 저 예배의 자세와 태도가 우리가 결핍하고 있는 예배의 태도와 정신이라는 것을 깊이 자각하고 반성할 수 있게끔 우리들이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토요일 마다 아니면 월요일 마다 자기가 인도한 예배가 이 정도 밖에 안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통렬하게 회개한다면 교회는 훨씬 더 변할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피나게 목회를 하고 열렬히 전도를 하고 심지어 이방에까지 가서 선교사들이 목숨을 걸고 전도하는 궁극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게 해서 우리가 원하는 데로 복음이 전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면 마지막에 이루어지는 지상의 현실은 어떤 현실이 되는 겁니까?
에이든 윌슨 토저라고 하는 사람이 그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의 모든 궁극적인 복음 사역의 목표는 이 세상의 모든 인류를 진정한 예배자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 예배자여야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에 복종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에 나오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삶을 살 사람들은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진정한 예배자인 사람들만이 그 삶을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그 예배가 참된 예배가 된다고 말하는가? 비본질적인 요소들은 여러 가지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의 관심사는 비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에 관해서 이야기 할 때는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무엇인가? 두 번째는 하나님은 이 세상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어떤 성품을 가지신 분이신가? 성경은 하나님이 사랑이 많으신 분이시고,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분이시고 많이 설명하지만 하님이 본질적으로 형이상학적으로 어떤 분이신가 하는 구절을 두 구절 정도 밖에 안 나옵니다. 출애굽기 6장에 나오는 나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이것이 다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을 어떤 방식으로 예배해야 하는지에 대해 사마리안 여인과의 대화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당신들의 이야기에는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예배해야 된다고 하고 우리 조상들은 여기에서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 사람들하고 상종을 안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리심산을 축복의 장소로 보고 거기서 하나님을 경배하되 사마리아화된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맛소라성경하고 다른 사마리아 탈굼이라고 하는 사마리아적 해석이 가미된 해석적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리심산에서, 예루살렘에서 이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신령과 진정으로’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번역이고 ‘영과 진리 안에서’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이제 새로운 시대가 왔으니 지금부터는 하나님을 예배하되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영이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방식이 중요하다. 그 방식은 영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여야 하고 진리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개가 예배를 위한 본질적인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예배가 그러면 어떻게 돼야지 된다는 말씀입니까? 진리 안에서 들여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옛날 성경에서 진정으로 번역한 것은 대단한 실수였습니다. 진리입니다. 예배가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에 따라서 드려져야 된다고 하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의미는 예배의 중심에 진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설교가 참으로 진리의 말씀을 전달하는 일에 충실한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인간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에 있어서 유익을 주는 올바른 이치들이 많이 있고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일리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누가 뭘 이야기 하면 그것은 일리가 있는 이야기이다. 우리에게 예배시간에 전달되어야 될 것은 일리가 아니라 진리입니다.
양쪽 눈을 수술하게 되었습니다. 한쪽 눈을 수술하고 한쪽 눈은 한 주 있다가 다시 수술했는데 교회를 갈 수가 없었습니다. 병원에서 가까운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는데 오전에는 장로교에서 오후에는 침례교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 교단은 아닙니다. 예배 끝나고 나오는데 속에서 화가 나는 것입니다. 50대 초반 정도 되는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주의 종 대접해서 복 받은 이야기로 그것으로 시작해서 끝이 납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어떻게 저 본문을 읽고 저 얘기를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저렇게 할 수 있는가입니다. 저녁때 침례교회를 갔습니다. 그래도 오전에 드린 장로교회는 주제라도 뚜렷합니다. 다 끝났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그래도 명색이 목사인데 내가 들어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매주일 수많은 사람이 예배를 드리면서 진리와 한 번도 만나지 못하고, 목회의 영광은 교회의 크기나 빌딩의 규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 모이는 목회가 좋은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남전도 회원만 60만 명이 넘었습니다. 마지막 결과가 뭐 그리 좋았습니까? 목회의 영광은 회심입니다. 사람들이 목회자의 설교를 듣고 깊이 회개하고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오니
우릴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예배 속에 왜 위로가 없는지 아십니까? 상처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위로가 없는 것입니다. 먼저 말씀에 상처를 받고 죄가 드러나고 쓰라리게 아픈 사람만이 주님이 그래도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고치리라. 내가 너를 다시 쓰리라. 위로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철저하게 설교를 하러 올라갈 때에는 자기가 먼저 이 말씀에 깊이 깨트려진 상태에서 올라가서 설교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제가 잘 하는 특강 가운데 하나가 일평생 설교준비 안하는 비결이라는 특강입니다. 부르시면 시간이 되면 오겠습니다. 설교를 위해서 설교를 준비한 설교보다는 내가 하나님께 설교를 듣는 마음으로 한 성경묵상이 설교의 재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가 예배되기 위해서는 설교가 진리를 전달하는 설교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어봐도 내용 자체가 없습니다. 마치 티비 방송에 나오는 아침마당 같은 그런 설교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주의 종 잘 대접하면 복 받는다는 그런 이야기를 해서 감동을 받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소중한 시간에 무엇인가 진리를 강하게 외치고 내려올 수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너무 죄송한 말씀이지만 목사님들 설교 준비를 얼마나 하십니까? 여러분 가운데 토요일에 주일 설교를 위해서 강대에서 엎드려 기도하시는 분이 얼마나 됩니까? 성도들이 말씀을 들으면서 뭔가 반응을 보이고 회개가 일어나고 하면 설교자가 계속해서 설교를 잘해야겠다는 도전이 옵니다. 한주, 두주, 세주, 그런 식으로 예배를 드리고 나가면 예배자만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 자신이 망가져 버립니다. 뭔가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 자체가 설교자 자신에게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설교가 부실해지는 가장 커다란 이유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공부를 안해서입니다. 목회자는 팔꿈치가 닳도록 책상에 앉아서 공부를 해야 됩니다. 그래야지만 깊이 있는 설교가 나오는 것입니다. 소수의 사람들 이외에는 공부를 잘 안합니다.
여러해 전에 우리 교회에 어느 잡지사에서 인터뷰를 하러 왔습니다. 전 그런 것 싫어하는데 기독교 잡지가 아니라 일반 잡지입니다. 왜 나를 인터뷰하느냐고 했더니, 정치, 종교, 경제, 문화 영역을 돌아가면서 인터뷰를 하는데 이번이 종교 차례이고 기독교 차례랍니다. 불교도 했고 카톨릭도 했고 이번에 개신교를 할 차례인데 목사님을 하고 싶다고 합니다. 그래서 얘기하자고 했습니다.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 도전적으로 묻는 것입니다.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 쭉 설명을 하고 왜 하나님께 순종을 해야 하는지에 다 설명을 했습니다. 한 시간 인터뷰를 하고 난 후 목사님 제가 많은 개신교 목사님 인터뷰를 했는데 목사님은 좀 다릅니다. 목사님은 목사님 같지 않습니다. 스님 같습니다. 그때 제가 받은 충격이 이 불신자 기자 눈에 스님은 철학자처럼 보이고 개신교 목사는 비즈니스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내 마음 속에 그것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공부해야 됩니다. 꾸준히, 목사님들이 일 년에 최소한 한 키의 책은 읽어야 됩니다. 성경을 철저히 탐구해서 그 속에서 진리를 뿜어낼 수 있어야 됩니다.
두 번째는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한다고 해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아주 듣기 좋은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불붙는 마음을 전달해 주는 것은 우리는 말씀을 전하지만 그것은 갈멜산 위에 쌓아올린 장작더미에 불과하고 하나님이 그 위에 불을 부어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강력한 회개의 역사,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성도들이 주님을 깊이 경험하고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이고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고 광대하신 분인가 하는가를 깊이 깨닫는 자각들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도전적으로 질문해 봅시다. 여러분들이 수없이 예배를 인도하셨습니다. 예배를 드리는데 어느 날 교회가 눈물바다가 되어 본적이 있습니까? 마지막이 언제입니까? 좋습니다. 양보해서 모든 사람들이 눈물바다 까지는 안 되더라도 분명히 여기는 예전 예배와는 다른 무엇이 있다. 수많은 성도들이 예배가 끝났는데도 미처 자리를 뜨지 못하고 흐느끼고 그 다음날 새벽에 교회 나오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무엇인가 뚜렷한 변화가 일어나고, 목사님 우리 남편이 어제 주님을 만났습니다. 이런 간증을 들어본 적이 언제입니까?
문제는 그런 일은 꼭 일어나야 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어느 교인이 우연히 목사님을 월요일에 만났습니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집사님 얼굴이 왜 이렇게 피곤해 보여요? 목사님 어제 저녁에 한잠도 못 잤습니다. 왜 불면증입니까? 어제 낮에 목사님 설교를 듣고 밤에 집에 와서 한잠도 못 잤습니다.” 목사님이 너무 감동을 받았습니다. 내 설교에 얼마나 찔림을 받았으면 밤새도록 고민을 했을까 하며 물어봤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목사님 때문입니다. 제가 뭘요? 저를 주일 낮 예배에 푹 재우셨잖아요?” 정말 회개해야 합니다.
저의 짧은 목회 경험에 의하면 교인들이 그런 식으로 예배를 드리면 나쁜 교인이 자꾸 되어 갑니다. 예배를 잘 드리지 못하면 은혜를 못 받는 것이 아니라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것들이 사라져 가면 교인들이 아주 마음이 거칠어지고 교만해지고 난폭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끊어 주는 것이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가 예배시간을 확 쓸고 지나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이 그런 은혜를 주시겠습니까? 성경은 답이 없습니다. 이런 것, 이런 것을 하면 성령님이 오셔서 예배시간에 은혜를 주신다는 것은 없습니다. 확실한 것 하나는 성령님은 진리의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진리의 말씀을 잘 준비하고 설교를 준비하는 일에 철저히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감동적인 설교를 할 수 없으면 차라리 다른 사람 설교를 가지고 잘 소화해서 스펄전이나 이런 사람들의 설교를 갖고 하는 한이 있더라도 어쨌든 신학적인 내용이 있는 설교를 갖고 설교를 해야 됩니다.
두 번째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예배를 위해서 내가 일주일을 살아 있다는 마음을 갖고, 저는 예배를 드렸는데 예배가 차갑게 아무런 감동이 없을 때 느낌이 제가 하나님께 버림 받은 느낌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구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나를 목회자로 여기에 서 있는 것을 기뻐하시는 징표를 예배를 통해서 보여주시도록 통렬하게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서 걸어가고 예배가 예배답지 않은 이 현실을 보면서 교회의 지도자들은 특히 장로와 목사들은 가슴 아파 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의 양심이 살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리처드 백스터가 유명한 얘기를 했습니다. 나는 매 설교할 때마다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죽어가는 한 사람으로서 설교한다. 그런 간절한 몸부림으로 우리들이 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은퇴할 때까지 은퇴하기 전에 죽을 수도 있겠지만 은퇴하기까지 몇 번을 더 설교할 수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열린교회를 세우고 20년을 설교했는데 지난 12월을 기준으로 5128번을 공식 예배에서 설교했습니다. 많이 한 것입니다. 지금은 나이가 들고 기력이 떨어지니까 아마 앞으로 남은 날 동안 그 절반을 못할 것입니다. 그럼 우리의 일생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설교한 몇 천편 하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생명을 보전해 주어야지만 이천 편, 삼천 편 되지 설교도 다 부교역자들 맡기고 하나만 달랑하면 그 편수도 안 됩니다. 정해진 설교 몇 편을 체크하다가 우리는 죽는 것입니다. 이제는 기회가 안 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목회하시는 교회에서 죽을 정도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제가 어디서 읽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아주 감동 깊은 이야기였습니다. 성경에서 진리의 말씀을 꺼내서 그 곡식을 잘 빻아서 그것을 눈물로 반죽을 해서 성령의 불에 구워서 그것을 성도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설교라고 했습니다. 설교할 때 어떤 사람은 현란하게 말을 잘할 수 있고 어눌할 수도 있는데 성도들이 들을 때 저 설교 속에는 저 목회자의 피 묻은 삶, 뜨거운 눈물,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과 사랑이 그 모든 것이 배어있는 것이 사람들에게 전달이 됩니다.
우리 교회에서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가 전도사 설교를 듣고, 목사 설교를 듣고가 아니라 선생님이 성경을 가르쳐 주는데 회심을 했습니다. 집에 가서 엄마한테 이야기를 합니다. “엄마 내가 오늘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받았어. 전도사님이 목사님이 십자가에 대해서 설교할 때에는 그것이 사실로 믿어지지 않았는데 오늘 우리 선생님이 예수님이 너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 눈물을 흘리시면서 말씀을 하실 때 모든 것이 믿어졌어.” 그것이 성령님의 감화입니다. 성령의 감화는 마음을 하나님께 다 드린 사람들에게 심령 속에 오시는 성령님의 감화입니다.
전해야 할 내용보다 아주 적은 것 밖에 전달 못했지만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예배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 이루어지고 그 위에서 이러한 사회의 개혁들에 대한 논의들이 이루어져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여러분을 통해 다시 거룩한 영광의 꽃을 피우게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