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도의 사명
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않게 등불을 켜되 아론과 그의 아들들로 회막 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보살피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지킬 규례이니라 (출 27:20-21)
녹취자 : 이민희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은 모세가 이스라엘백성들을 광야에서 인도할 때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규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성막은 그렇게 화려한 양식을 가진 그런 종류의 종교적인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밖에서 보면 그것은 물 돼지가죽으로 만든 텐트였고 주위에는 하얀 장막이 쳐져있는 정말 평범한 물체였습니다. 물 돼지가죽은 세월이 지나고 비바람과 햇빛을 맞으면서 거무튀튀하게 변해갔을 것이고 외부에서 볼 때는 그 성막이 사람이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무 아름다운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성막은 오실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막 안으로 들어가 보면 청색 홍색 고운 실로 짜져있고 그리고 아주 많은 장식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내부는 아주 화려하였으니 이는 짧게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는 마른 땅에서 나오는 연한 줄기와 같았으나 그 분 자신 성품 안에는 하나님이시자 사람으로서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영광이 그 분 안에 가득했고 또 우리 같은 사람들이 그런 예수의 성품의 아름다움에 끌려서 그분을 사랑하게 된 것처럼 이러한 신앙의 이치를 성막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 성막 안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지 가르쳐주시는 가운데 특별히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필요한 빛을 어떻게 내는지에 대해서 가르쳐주셨습니다. 그것은 텐트의 윗부분에 구멍을 뚫어서 밝은 햇빛이 환하게 들어오게 하는 방식이 아니라 바깥에서 들어오는 빛을 완전히 차단한 가운데 오히려 하나님을 섬기는 이 성막 안에서는 햇빛과는 전혀 다른 빛을 만들어 주님을 섬기는 일을 위하여 조달하여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섬기도록 사용하도록 마련해주신 성소의 등잔불이었던 것입니다. 이 어둡고 캄캄한 성막 안을 환하게 비추는 유일한 빛이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등잔불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론의 사명은 언제든지 이 등잔불을 환하게 밝힐 수 있도록 밤이나 낮이나 이 등잔불을 최선의 상태로 관리하는 것이 아론의 자손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임무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오늘 신학을 하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제일 먼저 어두운 성막을 밝히는 환한 빛입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진리의 빛을 예표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성막과 같이 이 어두운 세상에 오셔서 당신자신을 통해 전능하신 하나님의 각양 속성을 찬란하게 드러내심으로서 특별히 복음을 통해서 그 빛을 찬란하게 비추심으로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보여주시는지를 예표하신 사건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이 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성육신하신 자신을 통해서 이 모든 세계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임무는 하나님 앞에 우리자신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스투데오 에르고스’ 이 말은 ‘나는 공부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배워야할 세가지 대상이 있으니 이것은 하나님과 세계와 그리고 인간에 대한 지식인데 일반적인 존재로서의 인간 일반과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인 나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가장 중요한 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인간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이 세상에 대해 공부하는 것은 살아서 숨 쉬는 동안 이 세상에 살아있는 이유이고 또 살아가는 목적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한 지식을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가장 잘 나타내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 대상에 대한 지식을 갖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삶의 질은 그 사람이 아는 지식의 크기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지식이 많아도 삶이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은 있지만 지식이 없는데도 삶이 진리에 부합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신학자의 사명은 바로 이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진리의 밝은 빛을 탐구하여 이 진리의 빛을 제일 먼저 자신의 어두운 영혼 안에 환하게 비추고 이어서는 그 빛을 이 어두운 세상에 비추어 사람들로 하여금 어두움에서 빛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지금부터 신학의 도상에 서 있는 도상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여야 할 것은 목회에서의 성공이나 혹은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박수갈채를 받는 인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신학의 도상에 서있다면 여러분들은 회심하지 안했을 때에 세상에서 추구하던 세상자랑과 욕망을 교회 안에 가지고 들어와서 추구하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여러분들로 하여금 이 세상의 34,000가지가 된다는 직업 활동 중에서 그 어떤 것도 포기하고 오직 목회로 여러분들의 일생을 드리겠다고 작정하게 만드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이 이곳에서 공부하고 유학을 하고 후에 여러분들이 목회를 함으로써 이 세상의 사람들이 여러분을 통해서 어떤 혜택들을 누리게 되기를 여러분들은 바라고 있습니까. 세상이 가르쳐줄 수 있는 많은 지식가운데 한두 개를 더 가르쳐줌으로써 여러분들이 그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 여러분의 사명이라면 여러분은 굳이 이 힘든 신학의 길을 걸어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미국을 기준으로 19세기 중반까지는 목회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정체성이 분명했습니다. 그것은 진리를 증거하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대중적인 합의였습니다. 여러분, 한 세기 너머 전에 영국에서 사역하던 찰스 스펄전 목사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가 목회를 할 때 커다란 교회당을 보면서 안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저 커다란 지붕이 있는 곳은 저 건물은 무엇에다 쓰는 곳입니까’ 그러자 안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에게 대답하기를 '거기는 하나님의 진리가 울려퍼지는 곳 이랍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의 빛이 없이 황제처럼 일평생을 살기보다는 진리의 빛 아래에서 노예처럼 1시간을 살다가 죽는 것이 행복하다고 말 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진리는 기독교의 교리입니다. 개혁파 전통주의자 페투로스 팔라트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 바로 신학지식의 목적이라고 우리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진리를 간절히 찾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공하려고 꿈꾸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것은 성공이 아니라 어두운 세상에서 그것을 기뻐하는 사람이 있던 지 없던 지 있어야 할 그 자리에서 진리의 빛을 비추는 것 그것이 여러분의 가장 중요한 사명인 것입니다.
저는 기회 있을 때만다 여기에서 여러분들에게 공부하도록 간절히 권면했습니다. 오늘도 같은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 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땡중과 고승의 차이를 아십니까. 그것인 절에서 차지하는 지위의 높낮이가 아닙니다. 땡중은 그저 경건이 없이 중 생활을 하는 사람이고 고승은 불교를 믿으면서도 부지런히 탐구하고 자신을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도 공부안하면 땡목이 됩니다. 밥벌이를 위해서 교회 한 구석에 있는 사람들인 것이죠. 공부를 해야 되는데 그 공부해서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 하는 공부라면 그것은 매춘행위입니다. 공부는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 혼자 성경을 읽으면서 도달할 수 없는 더 깊은 진리에 도달하여 그 진리 때문에 죄와 이 세상의 유혹의 얽매임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영혼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하나님 앞에 자신을 더더욱 바치는 데 필요한 진리를 탐구하는 수단으로서 신학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에 대한 공부는 언제나 성경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도록 만들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몇 주 전에 조지마스턴 교수와 대화하는 가운데 그분이 깊이 통탄하시길 오늘날 이 미국사회는 말할 수 없는 경박함이 교회를 지배하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분은 일평생 조나단 에드워드의 연구에 생애를 바친 분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조나단에드워드의 미학적 신학이 오늘날 필요합니다’. 그는 자신의 책 속에서 오늘날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성도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갈파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정수를 성도들에게 보여줌으로 자신이 사랑하던 이 세상과 육체가 육체를 사랑하는 그것은 정말 부끄러운 것이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 것이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이 목회자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진리입니다. 그리고 이 진리는 아무데나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야말로 이 모든 하나님의 진리가 녹아 있는 엑기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부지런히 탐구하고 진리의 빛을 하나를 발견하고 그 자체를 기뻐하고 대견해하는 그런 구도자적인 심성이 여러분에게 있어야 합니다.
아무것도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졸업하고 목회 현장에 개척을 하고 나가면 다 필요 없습니다. 오직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잘 전해서 그 영혼을 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하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재산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어느 날 갑자기 진리를 사랑하게 될 수가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지속적인 마음의 성향입니다.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지금부터 이 진리를 발견하고 기뻐하고 누군가 자신보다 더 놀랍게 진리를 발견했다고 하면 무릎을 꿇으면서도 배우고 싶은 겸손함을 가지고 그러면서 하나님의 진리를 매일매일 탐구하고 추구하는 그런 생활을 해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도의 삶이고 그 구도에서 도는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당신 자신이 친히 나는 그 길이요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날마다 그리스도를 추구하고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리를 알아가는 그 기쁨으로 가득 찬 삶이 도열의 삶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도열의 기쁨이 있습니까? 고난과 시련이 닥치고 사역에서 견디기 어려운 압박이 다가오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사 에서 시련과 고난이 우리의 마음을 뒤흔들어도 언제나 주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주님의 말씀을 탐구하면 그 속에서 밀려오는 도열의 기쁨!
(찬양)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고난과 시련을 진리의 말씀을 발견하는 기쁨 속에 모두 녹여내는 가운데 진리의 사랑으로 여러분, 그것을 위해서는 성경도 열심히 읽어야 하고 신학 책도 부지런히 탐구해야 하고. 온 마음을 다해서 탐구해야 합니다. 내가 학부에서 가르치면서 학생들에게 이야기하기를 ‘공부하지 않는 사람하고는 놀지도 말아라 너도 똑같아 진다’.라고 했습니다. 처절히 탐구해야 합니다. 저도 평생 공부하고 진리를 탐구하느라고 애써왔습니다만 이제 인생의 황혼에 서면서 나는 젊은 날 뼈저리게 후회할 게으른 시간을 보낸 적이 없고 신학대학원 3년은 부끄럼 없이 열렬히 살았지만 지금도 가슴 저린 후회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더 열심히 살았더라면. 흘려보낸 많은 시간을 진리를 탐구하는데 더 많이 헌신하였더라면 지금쯤 얼마나 목회가 더 비옥하게 되었을까하는 그런 그리움과 안타까운 마음을 만났습니다. 여러분들은 서재에 들어가 책꽂이 앞에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습니까. 학교에 다닐 때는 돈이 없어서 책을 못 샀는데 지금은 책 살돈은 있는데 시간이 없습니다. 종종 책을 만지며 눈물을 흘립니다. 우리 앞에 펼쳐진 이 드넓은 진리의 세계, 우리들이 아는 것은 너무나 적고, 또 이미 아는 것은 우리 마음까지 파고들지 못했고, 마음의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은 우리의 삶의 실천으로 옮기지 못했고, 이따금 실천한 것들은 아직 나의 인격으로 소화되지 못했으니 나는 진리로부터 얼마나 거리가 먼 사람인가. 종종 외국의 저명한 학자들을 개인적으로 만날 때마다 그들의 대가적인 면모를 보면서 나는 그 앞에 왜소한 존재인 것을 느낍니다. 왜 나는 똑 같은 시대에 태어나서 더 많이 학문을 탐구하고 열렬히 삶으로써 그 사람들을 대면했을 때 .들이 나보다 작아보이도록 진리를 추구하며 살지못했을까 하는 자괴감이 언제나 마음을 찌릅니다. 그러니 부지런히 진리를 탐구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여기에서 등장하는 것이 기름입니다. 이 기름은 두말할 필요 없이 성령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진리를 우리에게 전파하는 공생애에 들어서기 전에 제일 처음하시는 일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는 일이었고 갈릴리에서 첫 설교하실 때에 진리이신 그분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렇게 성령으로 충만해지실 그때에 예수님이 전하는 그 진리의 말씀은 권세 있는 자의 말씀과 같이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지식이 없는 사람들도 오히려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의 가르침과는 확연하게 구별된다 라고 하는 것을 터득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조나단 에드워즈는 당대의 최고의 지성인이었고 거기에 천재적인 소질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3살 때부터 자신의 사상을 글로 쓰기 시작하였고, 8살 때 유물론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고, 13세 때 히브리어, 히랍어, 라틴어를 거의 섭렵하고 예일대학에 우수한 성적으로 들어갔고 그리고 4년 후에 대학을 졸업하고 2년 뒤에 대학원을 졸업하고 2년 후에 그 학교의 강단에 섰을 때 그의 나이 약관 19세였습니다. 그리고 16세 때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답지 않게 자연과학에 관한 논문이 유럽의 유명한 학회지에 실릴 정도로 그는 천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도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경험해본 적이 없는 미국의 첫 번째 대 각성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역사상 일어났던 가장 순수한 부흥 한 복판에 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조나단 에드워드가 성령주의자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그는 극단적인 은사중지론자 입니다. 그는 자신의 여러 책속에서 성령의 놀라운 사역은 오직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주는 은혜의 저자라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하는 영광스런 때에도 사도행전에 일어났던 그런 은사의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못 박으면서 부흥운동을 타고 일어났던 수많은 은사주의자들과 신바주의자들과 결별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성령의 충만한 역사에 대해서 외면하고 있는 많은 메마른 정통주의자들에게 강력하게 도전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가 원래는 철저한 알미누스 주의자였는데 1773년 어느 날 말을 타고 숲속을 산책하다 디모데전서 1:17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경험합니다. ‘영원하신 왕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그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임재의 영광을 경험했습니다. 그 숲속에서 그는 통곡하며 자신의 죄를 회개하였고 그 후 그는 엄격한 칼빈주의자로 회귀하였습니다. 비록 그의 신학전체에는 당시의 계몽주의와 싸우면서 일어났던 철학적인 오류들과 우리 입장에서 동의할 수 없는 결함이 일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신학자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성령이 그것을 만들어주었던 것입니다. 부끄럽지만 저는 지금으로부터 약24년 전에 개인적으로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그날 거기서 제가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경험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신학교에서 수많은 신학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때 비로소 우리가 신학교에서 배웠던 그 많은 하나님의 지식이 이 영광을 가르치는 좌표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성령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그 위대한 영광을 주님의 위대한 임재 속에서 경험한 성령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드높으심과 여러분들의 죄악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는 충만한 성령의 경험이 여러분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그렇게 간절히 간구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주겠노라고 약속하십니다. 여름성경학교를 위해서 등록금을 위해서 혹은 병든 아내를 위해서 여러 가지를 위해서 여러분들이 간절히 하나님 앞에 매달린 적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의 영적인 수준이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으로 그 수준이 높아지기 위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 기도하는 일들은 더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계시의 빛과 성령의 충만한 기름이 합쳐져서 찬란한 불빛이 비취게 되는데 오늘 그런 기름을 감람유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가져오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찧어낸 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깤띠뜨’라는 단어입니다. ‘깎띠뜨’는 ‘깍닥드’라는 단어의 피동남성분사형태입니다. ‘깎닥드’라는 말은 깨다 부수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면 직역하면 감람을 깨뜨려 나온 기름을 순결한 기름을 켜기 위하여 가져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백성이 올리브열매에서 채집하는 일반적인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일반적인 방식은 올리브를 빻아서 프레스에 집어넣고 압착기를 돌립니다. 그러면 압착에 의해서 기름이 짜져서 나오면 그 기름으로 상처에 바르기도 하고 혹은 음식을 하는데 사용하기도 하고 약용으로 사용하기도하였습니다. 그것이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름을 조달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으로 기름을 조달하지 않고 ‘깎띠드’하는 방법으로 기름을 조달하도록 분부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올리브유를 탁하고 절구 같은 것으로 깨뜨리면 거기서 자연적으로 기름이 흘러나오는데 그것을 하나하나 채집해서 모은 기름으로만 성소의 등불을 밝히라는 것 이었습니다.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압착해서 쏟아져 나오는 기름은 양이 많지만 억지로 쏟아냈기 때문에 그 안에는 불순물이 들어가 있고 불순물이 들어가 있는 기름으로 불을 밝히면 그을음이 나오고 불빛의 조도가 순결한 기름만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막을 밝힐 자격이 없는 기름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진리는 객관적이고 성령은 하나님께서 주관적으로 우리 속에 임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이 둘 사이를 이어주는 아주 중요한 우리자신의 관계는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제가 말씀드리는 신학 함에 있어서 자기 깨어짐의 중요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알지만 우리가 모두 진리를 압니까? 또 알고 있는 진리는 모두 우리가 깨달은 진리입니까. 그리고 그 깨달은 진리는 모두 우리 삶에 적용된 진리입니까. 중요한 것은 진리에 관한 정보를 수집해서 정보를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진리를 우리가 채득하고 이것이 선지자처럼 우리 안에서 채화되어서 그래서 우리자신이 그 진리의 분신이 되어서 그래서 진리를 말할 수밖에 없는 사상의 체계에서 진리를 말하고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 진리에 메인 그런 사람으로 우리의 온 삶으로 이 진리를 증거 하는 그런 도인이 되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이 진리와 부합하지 않다는 것을 진리를 발견하면서 날마다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진리가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우리가 그 진리의 빛에 비추어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실을 깨닫습니다. 이 때에 이 각자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 야고보 선생이 말하는 것과 같이 거울을 보고 더러운 것을 발견하고 무관심한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진리를 파악하고는 그 진리에 부합하지 않은 자신을 보고 하나님 앞에 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깨뜨려지는 가운데 우리 자신이 이 진리에 합치되는 것입니다. 이 진리가 베리타스라면 이 진리에 우리자신이 합쳐지는 것이 베로 바로 진실입니다. 이렇게 진실해지는 가운데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새로워지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자신이 신학을 하는 이유이고 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공부하는 그 서재, 공부하는 그 공부방은 성소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드를 비롯한 많은 개혁신학자들이 자기의 서재를 ‘쌩추얼’ 성당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곳이 바로 예배의 장소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모든 사랑을 진리 탐구에 바치고 거기서 진리를 깨닫고 부합하지 않은 자신이 깨뜨려지고 회개하고 거기서 성령의 은혜를 경험하고 거기서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러는 가운데 지식이 경건을 경건이 지식을 불러오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그 자리가 하나님 앞에 가장 간절한 기도가 쏟아져 나오는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위대한 개혁파 전통주의 신학자 히스베리투스 피투스는 자신의 아스테띸까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경건의 가장 뚜렷한 표가 있는데 그것은 간절한 몸부림이 있는 기도라고 하였습니다. 그 위대한 신학자가 그 신학의 진수를 알았습니다. 여러분도 똑같이 말할 수 있습니까? 많은 학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이 모든 학문의 가장 중요한 진수는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영혼을 온전히 바쳐서 부르짖는 간절한 기도라고 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 앞에 산제사라고 불렀던 그것은 바로 통회하는 심령이었던 것입니다.
신학 책을 읽다가 회개해보신 적 있습니까? 성경을 읽다가 마음에 사무쳐서 자기가 한 없이 부끄럽고 더러워 본적 이 있습니까?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서재 속에서 진리의 빛을 발견하고 성령의 기름을 발견하면서 우리는 그 기름을 우리 안에서 부어주시는 방법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끊임없이 감람유가 깨뜨려지는 것처럼 깨어지는 가운데 그 안에서 주님의 생명이 그리고 거기서 성령의 놀라운 은혜가 우리 안에서 실제적으로 솟아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러면서 날마다, 날마다 주님을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신학을 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