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붙어야 할 목표가 있는가
녹취자: 오희정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 12:25)
여기에 보면은 ‘자기 생명을 미워한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히브리 사람들에 문학적인 관습을 알아야지만 이해가 됩니다. 아,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 이 ‘미워한다’는 것은 혐오하고 싫어하기 때문에 미워하는 것도 미워한다고 표현하지만 또 하나 특이한 것은 사랑하는 것을 강조할 때에는 그 사랑의 관심사에 들지 못하는 것을 이런 식으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보면 ‘누구든지 자기 처자를 미워하지 아니하면’ 이게 나오죠. 근데 그 핵심은 자기에 처와 자식들을 미워해야지만 하나님에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다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너무나 사랑한다는 거 그거를 강조한 겁니다. 그걸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예화) 우리가 애를 둘을 키웠는데 둘째, 그러니까 딸이 시샘이 참 많습니다. 지금도 조금 회심한 다음에 성화되긴 했지 만은, 지금도 아직까지도 그런 게 되게 많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작년 같은 경우에 기도제목 이였습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게 뭐냐 면은 저한테 항상 잘해주다가 오빠한테 뭐 하나만 잘해주잖아요? 그러면 오빠한테 잘해준 거 잖습니까? 근데 얘는 뭐라고 말하냐 면은 “엄마 아빠는 나만 미워해” 정확한 히브리적인 표현법 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가만 내비두고 다른 사람은 더해줬는데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그 사람을 사랑한다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자기를 미워한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니까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히브리 문학이.
그럼 이제 여기서 그런 맥락에서 이 의미를 바로 잡으면은 이런 얘기입니다. ‘누구든지 자기에 생명을 미워하면 생명을 얻을 것이요, 사랑하면 그 생명을 잃을 것이다’ 이거거든요.
그러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앞에 나오는 자기가 미워 해야 할 생명은 뭐고 또 그걸 통해서 얻게 되는 생명은 뭘까? 라고 하는 겁니다. 앞에 이야기하는 생명, 주어인데 뒤에 나오는 거와 똑 같은 단어입니다. 근데 이 두 생명이 하나는 미워해야 할 생명이고, 하나는 그런 것들을 미워하면 얻게 되는 생명입니다. 첫번째 이 생명은, 생명이라는 말 자체가 우리에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힘과 그 담에 작용의 원천입니다. 그거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생명은 어떤 의미에서 영혼입니다. 고대 사람들은 이거를 같게 생각을 한다고요. 그래서 영혼이라는 거 자체가 고대에 사람들은 사지를 이렇게 움직일 수 있도록 꽉 묶어주는 끈과 같은 거라고 봤다 이겁니다. 그래서 생명이 탁 사라지면 어떻게 되죠? 사지가 탁 풀어져 버리는 거죠. 그래서 속에서 뭐가 있어서 이거를 꽉 잡아 댕겨주고 흩어지지 않게 만들어주는 그런 거라고 본겁니다. 생명은 있는데 생명에 기운이 뚝 떨어져. 그럼 어떻하죠? 팔다리가 확 풀리고 기운이 없어서 적합한 자세는 앉거나 서거나 뛰는 게 아니라 그냥 이불 위에 엎어져서 그래서 팔다리를 쭉 벌리고 풀어지는, 생명이 감퇴된 상태란 말입니다. 그런 생명입니다.
앞에 나오는 생명은 우리로 하여금 옛 성품을 따라서 살게 하는 육적 생명을 가리키는 겁니다. 꼭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생명만이 아니라 육적 삶을 살아가게 하는 그 작용과 그리고 존재의 양식의 근원이 되는 에너지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거를 미워하면 생명을 얻을 것이요, 그 생명이 뭐냐 하면 주님을 누리는, 그리스도 자신이 생명이죠, 그리스도 자신을 누리면서 사는 것, 그 분에 생명, 그 분에 사랑, 이것으로 자기 자신이 가득 찬 가운데 살아가는 것, 그겁니다. 그러면 옛 사람은 죄를 쫓고 악을 행하여 악덕의 사람이 되지만 새 사람은 새로운 생명을 쫓아서 살 때에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살고 그 속에서 의덕의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후자의 사람이 후자의 생명이 약화되고 전자의 생명이 강화되면 사실은 살았다곤 하지만 그 삶은 진정한 의미에서 산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또 만약에 두 번째, 후자에 이 사람이 정말 살아있고 생명이 있는 삶을 살아간다면은 전자에 사람이 죽으면 죽을수록 이 생명은 번창 하게 되는 겁니다. 그 삶이 바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고, 창조에 목적을 이루는 삶이고, 우리 자아를 완성해 가는 삶입니다. 자아를 완성해 가는 삶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라는 겁니다. 인간에 진정한 행복이 바로 그 후자의 삶에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지런하게 살아야 합니다. 부지런히 살아야 됩니다. 그렇게 부지런하게 살지 않는 것은 그 자체가 죄입니다. 그래서 안드로 보나르는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게으른 목회자는 태만한 그리스도 인을 양산 합니다’ ‘게으른 목회자는 태만한 교인들을 양산 합니다’ 그러니까 게으른 사역자는 형식적이고 부패한 그리스도 인들을 계속 만들어 내는 겁니다. 그런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이 게으르다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악입니다. 그 자체가 악입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살아야 됩니다. 부지런히 살아야 됩니다. 그러니까 젊고 건강하고 특별한 질병이 없는데 잠에 절제가 없어서 말이죠, 그 뭐 일곱 시간씩 여덟 시간씩 그렇게 자고, 그 담에 저녁시간에 잠자리에 들어야 되는데 방종하게 시간을 보내서 그래서 건강을 헤치고 수면에 절제가 없어서 아침에 출근시간도 허덕대서 나오고 이러면 그 사람에 영혼은 건강할 수 없습니다. 절대로 건강할 수 없습니다.
(예화) 제가 어저께 몸담고 있던 안양대학교에 설교하러 갔습니다. 한 대 여섯번 연락이 왔습니다. 그런데 일체 안 갔습니다. 내가 ‘에이 내가 뭔데?’ 그러고 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반가워 하더라구요, 나는 좀 의외였습니다. 총장님 이하 뭐 전부다 들, 아주 젊고 빠릿빠릿하고, 저 보다는 훨씬 뒤에 후배 교수로 들어온 사람들이 머리가 허옇게 되고 벌써 뭐 학장님 원장님 하는걸 보면서, 참 세월이 많이 지났구나 그런걸 느꼈습니다. 근데 그 설교한 곳이 바로 위에 있는 운동장이었는데 그 운동장을 안 깍으면은 대학 허가를 안 내준다고 그래 가지고 부랴부랴 깍은 겁니다. 그때는 뭐 법률 요건을 맞추기 위해서 깍은 운동장이었기 때문에 별 그렇게 올라가는 학생들도 없고 뭐 한참 고바위로 헉헉거리고 올라가야지 나오는 운동장이었습니다. 근데 거기에 뭐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서고, 2000명도 안 모이던 학교가 지금은 뭐 6000명 가까이 됐다니까 많이 발전 했죠. 거길 올라가면서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그 동산이 바로 제가 새벽기도 한동안 다니던 동산이었거든요. 인천에서 학교를 오는데 출근시간에 차가 보통 밀리는 게 아니예요. 그 담에 생각을 바꿔서 5시쯤 일어나 가지고 세수하고 보따리 싸 가지고 바로 학교에 오는 겁니다. 그러면 뭐 길거리가 뻥 뚫렸죠. 한 30분이면 오죠. 쉭 해서. 와선 그 다음에 방석하고 파카하고 가지고 뒷산으로 올라가면은 그때 겨울이니까 아직 춥거든요. 11월 이때쯤에, 두둑하게 옷을 입고 그러고 이제 뒷산에 올라갑니다. 춥긴 하지만 거기 엎드려서 한 두시간 간절히 기도하고 내려오면은 학생들이 저 밑에서 강의시간에 늦어서 헉헉거리고 막 뛰어 올라오는 겁니다. 근데 저는 마음에 여유가 있어요. 그리고 아침이 그렇게 싱그러울 수가 없어요. 오늘 하루를 잘 살아야 되겠다는 의욕이 마음속에서 가득 넘칩니다. 걸레를 빨아 가지고 내 책상을 깨끗이 닦으면서 음악을 들으면서 그렇게 해놓고 나도 수업시간까지 한 40분 여유가 있는 겁니다. 창문을 활짝 열고 그 창가에 앉아서 성경 묵상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부지런하게 살아야 됩니다. 정말 부지런하게 살아야 됩니다. ‘게으르면은 죽는다’ 그렇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부지런하게 살아야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부지런하게 살기만 하면 되나? 또 무엇 때문에 그렇게 부지런해져야 되나 하는 문제죠. 다시 말해서 부지런해져야 할 어떤 목표가, 그 부지런하고자 하는 사람에 마음에 불을 부쳐야 됩니다. 그런 거 아닙니까? 가슴에 불을 부쳐야 됩니다. 근데 그 목표가 없어. 그러면 그 사람이 부지런하게 살 수가 있겠습니까? 살 수가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날 설교를 들었더니 잠을 오래 자는 것이 얼마나 타락한 거고 영혼에 해가 되는 지를 강력하게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새벽 4시에 일어났습니다. 목욕재계하고 가만히 앉아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그게 뭐예요? 아 그냥 자지 일어나서 새벽4시에 멍하니 앉아서 뭐해? 더군다나 새벽4시에 텔레비를 틀었다. 그래서 OCN이나 본다. 그럼 이제 자는 게 나아. 잘 때 제일 죄를 안 져. 잘 때. 죽으면 더 안 짓고. 잘 때 제일 죄를 안 져요. 그냥 가만 그럼 그냥 자아. 부지런해 질 수록 그 사람은 하나님에 나라에 자꾸 손해를 끼치는 겁니다. 그냥 자요. 자.
그래서 중요한건 미워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부지런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 불타는 목표가 없는 거, 이런 삶은 살았으나 실제론 죽은 삶입니다. 살았으나 사실은 죽은 삶입니다.
그 사람이 아마 이명희 였죠? 혼불이라는. 기억하세요? ‘혼불’이라는 소설을 쓴 사람. 최명희야 이명희야? 최명희라는 사람이 그 혼불이라는 책을 썼잖아요? 암에 걸려서 거의 죽어갔죠? 근데 딱 이불로 자기 받치고 죽어가는 순간까지 글을 쓰고 그 담에 그 글 쓰고 바로 죽었습니다. 사형선고 받고. 그러니까 이 세상에 있는 사람도 그런 하찮은 목표를 가지고 목숨을 걸어, 그럼 난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은 겁니다. 그렇게 절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아주 절실한 목표가 있는지 내가 묻고 싶습니다.
어제 청년부하고 장년부하고 설교를 틀린걸 했습니다. 청년부는 독신과 결혼에 대해서 했거든요. 독신이라는 게 세속적 독신이 있고 그 담에 신령한 독신이 있습니다. 세속적 독신이 둘로 나뉘어 지는데 자의적 독신과 타의적 독신으로 나뉘어집니다. 자의적 독신이라는 건 뭐냐 하면은 자기가 더 좋은 목표가 있기 때문에 결혼 보다 좋은 목표가 있기 때문에 자기가 선택을 하는 겁니다. 무슨 소명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안젤리나 졸리라는 유명한 여배우가 있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뭐 일년 반 만에 결혼 생활을 끝냈습니다. 아직 젊은 나인데, 그래서 기자가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결혼 생활을 그렇게 금방 끝내셨냐 어려움이 있었냐 이러니까 고개를 절래 흔들면서 그런 거 말도 부치지 말라고 세상에 못할게 그 결혼이라고, 그러면서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고. 이게 뭐냐 하면 자기가 가고자 하는 아주 분명한 목표가 있는데 결혼이 방해가 되는 겁니다. 사라 브라이트만 같은 경우도 세 번이나 결혼을 했다 이혼을 합니다. 대부분이 전부 다 자신의 일 때문이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안드로이드 웨버하고도 또 헤어졌습니다. 유명한 작곡간데. 모두 일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독신을 선택합니다. 그게 자의적 독신입니다. 타의적 독신은 하다가 보니까 잘 안 된 겁니다. 근데 오늘날 젊은 형제 자매들을 보세요. 압박감을 느끼면서 막 결혼 할려고 막 안달을 합니다. 근데 뭘 위해서 결혼을 하고 뭘 위해서 혼자 사느냐 이겁니다. 그런데 그런 목표도 없어요. 그냥 빨리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집에서 못살게 군다는 겁니다. 사실은 그건 뭐냐 하면은 똑 같은 겁니다. 새벽 4시에 너 그렇게 잠자면 게으르면 나쁜 거다 그러고 설교를 했더니 은혜를 받고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목욕재계하고 그러고 가만히 앉아 있는 거나 똑 같은 거다 이겁니다. 아무렴 어때 아무렴. 어차피 생명이 없는데.
내가 여러분들에게 한번, 장가 안간 사람에게 묻고 싶어요. 결혼이 세속적인 거야? 아니면 굉장히 거룩한 겁니까? 그러면 내가 묻고 싶어요. 그러면 왜 소돔과 고모라 성의 타락을 이야기 했을 때 하나님이 그들을 멸망 시킬 때 까지 그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갔느니라 그러고 얘기 했느냐구요? 이게 가장 세속적인 일로 묘사가 되는 겁니다. 목표가 없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거 그것이 시집가고 장가가는 거 때문에 사람들이 뭘 잊어버렸다는 거야? 종말을 잊어 버린 겁니다. 하나님에 심판을 잊어 버린 겁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걸 잃어 버렸다 이겁니다. 정신이 팔려서. 그러니까 그런 것들은 삶에 양태야, 중요한 건 뭐냐 하면은 결혼할 수 밖에 없는 목표, 그리고 독신으로 살 수 밖에 없는 목표, 오늘 새벽 4시에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목표, 적게 먹고 체력을 비축해야 할 목표, 무릎을 꿇고 간절히 부르짖어야 할 목표, 땀을 흘리며 다른 사람들이 노는 시간에 자기를 다 쏟아 부어야 할 양보할 수 없는 목표, 그것이 있느냐 이겁니다. 그게 없으면 생명이 없는 삶입니다. 죽은 삶입니다. 그건 이 세상에서 정말 불행한 삶입니다. 그것은 마치 산에 모양은 있으나 나무가 심겨지지 않은 산과 같고, 강의 모양은 있으나 흐르는 물소리가 들리지 않는, 개울의 모양은 있으나 흐르는 물소리가 들리지 않는 개울과 같은, 아무 재미가 없는 삶입니다.
생명이 없는 삶입니다. 그런 사람이 돈이 많아서 부를 누리면 무슨 소용입니까? 가난하게 살아서 고통을 받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겁니다. 어차피 물이 흐르지 않는데 작은 개울이나 큰 개울이나 무슨 의미가 있으며 어차피 나무가 심겨지지 않아서 찾아오는 새들도 없고 꽃도 피지 않는데 큰 산이면 무슨 소용이 있고 작은 산이면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이겁니다. 아무 상관, 우리 그리스도 인들은 양으로 사는 삶이 아니라 질로 사는 삶입니다. 아무 의미가 없는 삶이라 이겁니다.
정말 불꽃처럼 살았던 주에 사람들 가운데는 웨슬레처럼 그렇게 90이 넘는 삶을 산 사람도 있지 만은 대부분 일찍 죽습니다. 대부분. 그 이유가 뭐냐 하면은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자기가 쏟아 놓을 수 있는 에너지에 양이 한계가 있습니다. 그거를 한참 목표의식에 불타고 무엇인가를 이루어야 할 불 붙는 목표가 있는 사람들은 젊은 시절에 막 쏟아 놓는 겁니다. 근데 결국은 노년에 자기를 지탱할 에너지가 모자라는 겁니다. 그래서 죽는 겁니다. 한의사들이 하는 이야기가 보약을 너무 신뢰하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보약을 먹는 거는, 저는 잘 안 먹는데, 보약을 먹는 거는 노년에 건강을 가불하는 거랍니다. 꼭 너무 힘들 때는 그 보약의 도움을 받지만 이걸 남용하면은 노년에 건강을 가불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에 자연적인 힘으로, 뭐 특별한 때에야 약의 도움을 받지만 이렇게 살아갑니다. 대부분 다 일찍 죽습니다. 할머니 아버지 이렇게 돌아가시는 걸 보면서, 저는 사실은 예수 믿기 전에 제 손금이 특이합니다. 수명 선이 앞으로 돌아왔어요 이게. 이게 어떤 분이 그래요, 일 만 명에 한 사람 나올까 말까 한 손금이라고, 수명 선이 여기서부터 이렇게 해 가지고 앞으로 올라왔다고, 그러면서 그 사람 하는 이야기가 90을 못 살면 자기가 책임을 진다고 그랬습니다. 내가 책임질 사람 필요하지도 않지 만은, 일찍 죽을 거라고 저는 확신을 합니다.
그래서 요새는 20년 인생계획을 자꾸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 장로님 돌아가시는 거 보면서도. 근데 자기 자신을 다 쏟아 붓고 살면은 일찍 죽습니다. 튜머스가 열정이 충만한 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오래 사냐 하면은 점액질에 사람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되는 것도 별로 없고 안 되는 것도 없고, 좋은 사람도 없지만 싫은 사람도 없고, 뼈빠지게 사랑하는 거도 아니지만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그리고 욕심도 없고 잃어버려도 상실감이 없는, 그런 사람이 오래 삽니다. 오래. 오래 삽니다. 근데 그러고 오래 사는 게 그게 생명이 있느냐 이겁니다. 잃어 버리질 않으니까 얻는 것이 없는, 그러니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들이 열렬히 기도하라고 그러지만 사실은 열렬한 목표가 없는데 어떻게 기도 하느냐 구요? 하나님에 은혜를 갈망하라고 그러지만 선한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진짜 온전하게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목표가 없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향한 은혜의 갈망을 자신 속에서 유지할 수 있겠느냐 이겁니다. 그럴 수 없다 이겁니다.
그럼 오늘 여러분에 이 아침에, 여러분들 움직이고 있는 목표는 뭡니까? 목숨을 양보하고라도 할 수만 있다면 얻어야 되는 것들이 여러분들에게 있는지 내가 한 번 묻는 겁니다. 목숨을 걸고 라도 얻지 않으면 안 되는 그 어떤 목표가 여러분들에게 있는지 한번 내가 묻고 싶은 겁니다. 그거는 무엇이라도 괜찮습니다. 아무 거라도. 하나님과 관련이 되면은 다 괜찮습니다. 그런 목표를 가지고 있느냐 이겁니다. 그러니까 계속 헛도는 겁니다. 잠을 줄이려고 맘을 먹고 새벽 4시에 일어나도 그게 진짜 게으름을 물리치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4시에 일어나서 하지 않으면 안될 양보할 수 없는 목표가 있어야 됩니다. 양보하지 않으면 안될 목표가 있어야 됩니다. 목표가 있어야 됩니다.
그때에 그 사람에 삶이 자기를 미워할 이유를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목표를 찾아 가려고 할 때 자기가 그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일을 방해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내 오늘 협동 가서 세 분을 왜 일어서라 그랬냐 면은 많은 간사들하고 일했습니다. 여러분들은 내가 여러분들 잘 안보는 것 같애도 전 소상하게 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앞으로 인생을 살아갈 때에 어떤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라고 하는 것이 일을 하는 것을 보면 대개 알게 됩니다. 재매들보고 “얘야, 저런 사람한텐 절대로 시집가지 마라, 너 죽도록 고생한다.” 왜? 일을 하는 그 자체가 그 사람에 성품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보여줍니다. 어떤 사람은 와서 일한 지 6개월이 넘었는데 예전에, 지금 다들 사라져 갔지만, 밤에 와서 경비를 서거나 관리를 서거나 특히 관리간사 일을 하거나 뭘 하거나 가끔 얼마나 하는지 내가 물어봅니다. 야 이건 어떻게 된 거냐? 알고도 물어보고 어떤 땐 모르고도 물어봅니다. 근무한지 6개월이 지났는데 스위치가 어디 있는지도 몰라. 근데 이런 사람들은 성품, 그 어떤 성품,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인생을 살아가면서 목표의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일 먼저 자신이 어떤 일에 딱 들어가게 되면은 그 일이 자신에 목표가 되야 됩니다. 그걸 통해서 하나님을 섬겨야 됩니다. 지난 주에 설교한 게 그 내용 이었잖아요?
그러면 목표를 세우고 그거를 잘 하려다 보면은 뭐가 발견이 되냐 하면은 그렇게 남들이 잘 하는 일을 나는 잘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 바로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예를 들자면, 하기는 열심히 하는데 난관에 부딪혔을 때 쉽게 무릎을 꿇는데 다른 사람은 그걸 극복합니다. 어려움이 왔을 때에 쉽게 무릎을 꿇지는 않는데 지혜가 없어서 그것들을 빗겨가는 방법을 잘 터득하지 못합니다. 업무에 대한 지식이 자기가 모자란 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속에서 자기가 어떤 사물들을 보면서, 어떤 사물들을 보면서 그것들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이런 논리적인 성품이 모자란다는 것을 깨닫게 되거나 아니면 자기가 어떤 일들을 하면서 난관에 부딪히면은 쉽게 꺽이는 의지가 박약하다는 것들을 거기서 터득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거는 내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일생을 신자로 살아가야 할 내가, 나 자신을 이 일을 통해서 검증을 해보고 나니까 ‘아 나에게는 의지가 심히 약하구나’ 그걸 깨닫는 겁니다. 그럼 어떠케 해야 될 것인가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를 고쳐가는 기회로 삼는 겁니다. 그리고 그 견디는걸 삼는 겁니다.
(예화) 언젠가 한번 야간 경비를 서던 형제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다 없지 만은. 돈이 없어서 쩔쩔매, 그래서 뭐 조금 뭐 도와주고도 했던 모양입니다 지체들이. 그래서 내가 바로 불러서 그랬습니다. 너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야간 경비를 해라 그러면 너 일주일 하고 일주일 쉬고 일주일하고 일주일 쉬면은 집에다 손 안 벌려도 되고 시골에 있는 엄마한테 돈 부치라고 안 그래도 되지 않냐? 네가 아무리 낮에는 근무하고 뭐 한다고 하더라도 저녁땐 와서 일할 수 있지 않냐? 그래서 뭐 방윈가 뭔가 그런 거 하면은 낮에 가서 일해야 되잖아요, 그래 해라. 그래서 근무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두 주 세 주 지나서 두어달 지나서, 한 한달 즘 지나 그러니까 뭐 벌써 야간에 경비를 두 주나 한 거 아닙니까? 저 불을 꺼야 되는데 스위치가 어디 있냐? 사방을 찾아도 못 찾아요. 그러더니 한 한달 있더니 그만 둬야 되겠습니다. 왜 그러냐? 저 너무 힘듭니다. 해라, 힘들어도 계속해라. 아 너무 힘이 든 데요. 네가 앞으로 하나님에 일을 하려는 사람인데 이런 정도에 난관도 극복을 못 해 가지고 네가 어떻게 지도자가 되겠느냐?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더 편한걸 좋아하는 사람 데리고 하나님이 주신 목표를 위해서 그거를 이루기 위해서 고통과 많은 희생이 따르는 그 길을 넘어가야 됩니다. 근데 지위자가 넘어갈 수 없는 길을 어떻게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걸 넘어가라고 가르칠 수 있느냐 이겁니다.
(찬양) 거친 바다 험한 산 비가 맺혀도 십자가 내가 지고 끝내 이 길이
그렇게 살아서는 인생에 목표를 가진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삶은 부패한 삶입니다. 그거는 세상에 나아가면, 사업을 하면 경쟁자들에 의해서 망하고, 직장을 들어가면 사람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그리고 혼자 자신이 무슨 일을 하려면은 발전하는 다른 사람들을 따라갈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에 생애를 생각해 보십시오. 죄도 없으신 그 분이 일생을 사셨는데, 긴장과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왜?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겁니다.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긴장하실 수 밖에 없었고, 목표가 있으셨기 때문에 그 목표를 향해 올곧게 가려고 하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박해하고 미워했습니다. 그게 바로 그런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 안에서 예수의 흔적을 갖게 되는 비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그러니까 잘 들어보십시오 마지막으로. 자신의 힘으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은혜의 필요를 느끼겠습니까? 은혜의 필요를 느끼겠냐구요. 나 지금 여기 돈 있어요, 이따 내려가서 3000원주고 밥 먹을 돈 있다 이겁니다. 근데 오늘 내가 주님에 은혜가 아니면은 내가 점심을 먹을 수 없나이다 도와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할 수 있냐 이겁니다. 사람이 자기에게 이미 있는 능력 안에서 목표를 세우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말로 주님에 은혜 의지하지만 절대 주님에 은혜 기대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자연적인 성품으로 할 수 없는 일에 도전할 때 은혜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는 겁니다. 내 용서할 수 없어 저 인간, 내 자연적인 성품으로는 백번을 머리를 굴려도 용서할 수 없어, 어떻게 인간이 그러냐 이거예요, 아 나 못해. 내가 바보야? 내가 왜 저런 인간한테 씹히면서 사냐 이거야, 나 용서 못해. 그 순간 이 사람은 은혜를 구할 수가 없습니다. 무슨 은혜가 필요하냐 이겁니다. 미워하는데 은혜가 필요해? 근데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인간도 아니예요, 상종도 하기 싫어 근데 그럼 안 될꺼 같애, 그래도 용서해야 될꺼 같애, 근데 나에게 그게 없어. 그때부터 무릎을 꿇으면 기도가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 용서해야 됩니다. 이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인데 나는 나 자신을 꺾을 수가 없어, 내게 저를 용서할 수 있는 사랑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떻해든 주님이 주셔야 됩니다. 도와주십시오. 어떤 일을 아주 훌륭한 일이 있어요, 근데 목표를 세워, 근데 충분히 내 능력으로 내 모든 것들로 충분히 수 있는 일이예요. 수 없이 해온 일이예요, 하나님에 은혜 잘 안 구해요, 목표를 고상하게 세워요, 일을 아니면 목표를 질적인 목표를 고상하게 세우는 겁니다. 그럼 하나님에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미디어실 내가 예를 들어서 미안한데, 예를 들면, 홈페이지를 새로 단장하라, 그럼 하나님에 은혜 필요 없어요, 거 뭐 늘 하는 일인데, 그래서 뭐 요렇게 요렇게 하고 해. 그거는 자기가 자기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설교를 듣는 사람이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서 회심하게 하라 그거는 인터넷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죠? 그럼 그때부터 기도하게 됩니다. 만들면서도 기도하는 겁니다. 만드는 건 우리가 만들지만 이거를 듣고 사람들이 회심하는 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에 은혜가 필요합니다. 기도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시키신 그 일들이 유효하게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린 도처에서 하나님에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걸 배우게 됩니다. 그러니까 보십시오, 만나서 교제할 때 충심으로, 가식이 아니라 충심으로, 아 하나님에 은혜가 아니면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에 은혜가 아니면은 도저히 섬길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기운이 빠진 것처럼 말하지만 씩씩한 사람들이 갖지 못한 높은 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높은 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도처에서 하나님에 은혜가 아니면은 할 수 없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그게 우리에 신앙 생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