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령으로 섬기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롬1:9)
녹취자: 이새봄
신자가 일생을 사는 동안, 얼마나 그 인생이 가치있고 보람있는 인생이 되느냐 하는 것은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이 세상에서 잘 섬겼느냐 곧 그것입니다. 이 땅에서 시집가고 장가가고 높은 지위를 누리고 또 많은 사람들의 박수 갈채를 받고 많은 지식을 소유하고 활발하게 활동을 하면서 살고 이러는 모든 것은 삶의 한 양태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무엇을 했든지간에 그의 인생의 크기는 그가 일한 크기에 비례하는 것은 아닙니다. 의미에 있어서 그의 인생이 의미있는 인생이 되기 위해서는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다가 간 사람이느냐 이것입니다.
상관없어 보이는 본문 두 개를 읽었습니다만은, 사실 우리들이 죄가 들어오고 우리가 구원받은 다음에 이 세상은 아담이 맨 처음에 정복하고 다스리도록 명령을 받았던 그 세상과는 다른 세상이 되었습니다. 무슨 뜻이냐하면 죄가 들어오기 전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주님을 섬기려고 마음 먹으면 그냥 섬길 수 있는 그런 세상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바다와 땅의 기는 것과 하늘을 나는 모든 것들이 그에게 순종하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그의 모든 정서와 의지들이 그의 지성에 잘 굴복하고 있었습니다.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는 이런 모든 것들이 깨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도록 부름을 받기는 했지만 그러나 예전과는 다른 매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더 큰 싸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섬겼던 것보다는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삶이 훨씬 더 어려운 삶입니다.
어거스틴을 어제께 읽으면서 좀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이 있어서 오늘 사실 이 성경 본문을 읽었습니다. 그 는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우리 자신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섬긴다면 제일 먼저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섬길 것이며, 둘째는 우리가 아닌 다른 모든 것들이 우리를 섬길 것이며, 셋째로는 우리가 정복하기 가장 힘든 우리의 종국의 우리의 본성과 실제인 우리의 육체도 결국은 우리를 섬기게 될 것이다.”
그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여러분에게 우리 말로 하니까 별로 큰 감동이 안될지 모르겠지만, 그분이 쓴 그 원전을 보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오늘 사도는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뭐라고 말하냐 하면, 자기가 하나님을 섬기는데 심령으로 섬긴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의 인격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그 중심에서 하나님을 섬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말로 표현을 한다면, 우리의 뼈속에서 주님을 섬긴다고 표현할 수 있을 그런 내용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육체로, 우리의 겉모습으로만 하나님을 섬기며 이런 식으로 살아가면 모든 것들은 정복되지 않은 채 우리에게 항거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섬기려고 애를 써도 가시와 엉겅퀴가 가득한 그런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섬기려고 하는데 진전은 아주 적고 장애는 아주 많아서 결국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열심히 시간이라는 밭을 일구어 왔는데 뒤돌아 보면 열매는 얼마 없고 가시와 엉겅퀴가 가득한 그런 형국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기도를 마치고 사택에 올라가다가 들으니까 그 출근하는 방송이 나오더라구요.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깁시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의 섬김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인식하는 그 관계 안에서 우리의 중심을 하나님께 드린 그런 종류의 섬김이었는지를 매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영혼의 시선을 하나님께 집중하고 우리의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를 도와줍니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그쪽으로 가려고 하는 우리에게 계속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 줍니다. 그래서 은혜, 하나님의 은혜의, 우리 안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좋아하는 향취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좋아하는 향취는, 우리가 마음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것, 그 때에 은혜가 가장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주신 은혜는 잘 보존되고 새로운 은혜는 계속 우리 속에 불 일듯 일어난단 말입니다. 그래서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면 제일 먼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를 섬깁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가 주님을 심령으로 섬기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섬깁니다. 자, 예를 들어 볼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데 항상 같은 태도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우리의 마음이 모아집니다. 그리고 이 섬김을 잘 완수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고 싶다, 실패하거나 잘못되기를 바라지 않고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맡기기는 하지만 우리의 실수나 어리석음, 게으름, 나태, 이런 것들이 개입이 되어서 능히 이루어질 수 있는 하나님의 일이 망가뜨려질까봐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모아서 잘하려고 합니다. 그런 소원은 자연스럽게 기도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여기에 보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을 말하면서 그는 기도할 때마다 로마에 있는 교인들을 거명했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아무리 열심히 섬겨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기도는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의 그 내면의 세계에 대한 가장 숭고한 표현입니다. 그것에 의해서 그 사람의 심령이 하나님께 바쳐졌는지가 입증이 됩니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기도 자체가 영혼 깊은 곳에서 심령으로 하는 일입니다. 이게 육체의 힘으로 하는 일이거나 머리로 하는 일이 아니잖아요. 그죠?
그런데 그 사람이 자기가 의무를 수행하면서 하나님 앞에 늘 마음을 쏟아놓을 수 있다는 이야기는 뭐냐하면, 일하는 영과 기도하는 영이 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섬기게 되면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나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에 힘을 주시는 것이 느껴진단 말입니다. 힘을 주시는 것이. 우리가 어떤 일을 위해서 헌신하는데 그것이 잘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시키며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 쏟으면서 그 일을 해, 그 마음이 바로 기도의 영입니다. 그러니까 일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 사이에 아주 순식간에 스위치가 일어납니다. 일하는 그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면 간절히 그 기도가 쏟아져 나옵니다. 이렇게 할 때에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를 강력하게 후원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시편 138편 3절에서 138편에서 뭐라했냐면 “내가 부르짖는 날에 여호와께서 응답하셨고 내 영혼을 장려하셨나이다” 강하게 하셨단 말입니다. 힘을. 그것을 어거스틴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를 섬긴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가 영혼으로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섬기면 제일 먼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를 섬깁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은혜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일하는 사람이 은혜를 받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일하면서 심령이 짓밟히고 더러워지고 완악해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일하면서 그 마음이 정말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생명에 의해서 섬김을 받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어떨 때,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길 때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내가 아닌 모든 것들이 나를 섬깁니다. 내가 아닌 모든 것들이 나를 섬깁니다. 이제 예를 들어 볼까요? 우리가 다 경험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어떤 선한 뜻을 놓고 하나님 앞에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열심히 심령으로 헌신하며 기도하잖습니까. 그러면 여러분 이런 느낌 안 받으십니까? 그 상황 속에서 내가 주인공이고 나머지 사람과 환경, 여건, 심지어는 물질, 모든 것이 나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엑스트라로 다 대기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으세요? 조지 뮬러는 고아원을 운영하면서 일생에 5만 2천번을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빈부의 차이가 심한 아주 어려운 때였습니다. 조지 뮬러의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은 외출옷이 세벌씩이나 되었고 그리고 잘 먹고 잘 살았다고 합니다. 이 뮬러의 기도 때문이었습니다. 하루는 식탁에 모두 앉았는데 거기 총무가 말하기를 “창고에 우유가 없습니다” 그랬더니 조지 뮬러가 말하기를 “우리 모두 앉아서 하나님 앞에 감사기도를 하노라면 아마 주님이 우리에게 채워주실 것이다. 컵을 모두 갖다놓고 우리 기도하자”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나니까 그 기도가 마치자마자 바깥에서 벨소리가 들렸습니다. 목장을 하는 한 사람이 그것을 잔뜩 싣고 온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두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그것을 심령으로 간절히 품고 그리고 섬기면 그리고 그 일의 가치를 하나님이 인정하시면 나를 주인공으로 삼으시고 다른 모든 사람들이 마치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돕는 천사인 것처럼 하나님께서 사용하십니다. 생각지 않았던 돕는 사람을 보내시고 계획에 없었던 물질들을 보내십니다. 그것이 바로 두 번째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들이 그렇게 됩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사람이 없고 자원이 없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우리들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이 모두 우리 아닌 다른 것들이 우리를 섬기게 만들어줍니다.
그러면 이런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분들은 저렇게 설교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우리가 주님을 섬기다보면 부족한 사람이 있고 또 물질이 부족할 때도 있고 자원이 모자라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지연을 받을 때도 있으니깐요. 그런데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그 부족한 것 자체도 그 사람을 섬기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그럽니까. 고린도후서에서 그렇게 죽을 고비를 넘기고 고생을 하면서 자기가 사형선고 받은 자처럼 되고 미말의 찌끼, 만물의 찌끼와 같은 자처럼 되었다, 그러는데 마음으로는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사람도 그를 도와준 것이 아니고 자원도 그를 도와준 것이 아니잖습니까. 그래서 주님을 섬기는 그 일을 방해를 받은 것 아닙니까. 그렇죠? 그런데 뭐라고 고백하냐면 “이는 우리로 오직 하나님만을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 1:9)” 결국 사람이 도와주지 않았고 자원이 모자라기는 했지만 그 모자라는 것까지 모두 사도바울과 그 일행을 섬겨서 난관을 만났지만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아, 생사 간에 주님을 의지해야 되는구나.” 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예수 죽인 것을 날마다 짊어지는 것은 그가 원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힘든 일이었습니까. 살아가는 삶의 순간순간마다 고난을 봅니다. 그리고 예수 죽은 곳에서 자기도 죽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것이 그가 원하는 일이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모든 결핍과 도움이 없는 것을 통해서 오히려 예수의 생명이 그들의 몸에 나타났으니 결국 그것도 사도바울을 도와서 우리가 아는 사도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오늘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사람이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랬기 때문에 결국은 그 모든 것들이 그에게 도움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도움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아담을 창조하시고 명령하시기를 “정복하라. 땅에 충만하라. 땅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특별히 ‘다스리다’라는 단어는 ‘라다’라는 단어인데 뒤에 전치사가 ‘녜'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우리말로 번역을 하면, 영어로 번역을 하면 rule into정도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그 깊숙이까지 미치는 그런 통치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다스리기를 원하셨던 것이죠. 이 땅을 정복하고 충만하라는 이 명령과 짝을 이루는 것이 바로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리라”라는 그 말씀입니다. 이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서 망가진 이 세상을 고치는 재창조의 명령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훌륭하게 수행해낸 비결이 무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통치를, 우리의 통치권을 능력있게 하셔서 그래서 주님의 창조의 목적에 굴복하지 않는 이 세상을 고치게 하시는 데에, 그러기 위해선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중심으로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세월이 흐르면 망가진 하나님의 일과 재고품이 되어버린 자신의 영혼, 그것만 남게 됩니다. 그러나 심령으로 잘 섬기게 되면 그러면 거룩하게 된 영혼과 그 다음에 훌륭하게 완수된 하나님의 일들이 열매로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들이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심령으로 섬기는 사람들을 위해서 복종하게 되고 그리고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육체입니다. 우리의 육체이지요. 일생을 살면서 가장 무거운 십자가가 무엇일까요? 주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먹지 않고 자지 않고 고생하는 것, 그것도 고난입니다. 그러나 더 큰 고난은 좀처럼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우리에게 복종하지 않는 이 육체를 쳐서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뛰어난 하나님의 사람, 칼빈은 자신의 책속에서 ‘우리는 마귀가 우리의 신앙생활의 최대의 적이라고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최대의 적은 마귀도 아니고 세상도 아니고 자기자신이라고 했습니다. 자기 자신의 육체, 자기 자신의 옛 본성에 속한 이 육체, 이것이 자기 신앙생활에서 가장 어려운 것입니다.
마귀는 아무리 능력이 크지만 아무에게나 마음대로 그 마음의 문을 박차고 들어와서 지배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를 맞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하지 않으면 마귀는 절대로 우리를 깨뜨리고 들어오지 못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타락하고 더럽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그 세상을 붙잡지 않는 사람들을 세상은 더럽힐 수가 없습니다. 그 모든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죽을 때까지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대적은 자기자신의 육적 자아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런 육적 자아가 우리의 육체를 움직이게 될 때에 우리는 그런 많은 육적 자아의 본성을 따라서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섬기기가 너무 힘들어집니다. 이것을 굴복시키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정말 쉽지가 않습니다. 누가 이미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미 나의 이 육체는 정복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날마다 날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죽임을 당하는 것, 그것밖에는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도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라고 말한 바로 그 사람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결국은 우리의 육체의 모든, 육체가 날뛰는 그 모든 광기들을 잠재우게 만드는 그 놀라운 힘들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결국은 심령이 하나님을 섬길 때 그 모든 것들을 잠재울 수 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손끝하나 움직이는 모든 섬김을 통해서도 주님을 의식하며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될 때에 하나님이 그렇게 극복할 수 없었던 우리 자신의 육체를 복종시키시는 것입니다. 복종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게으름」이라는 책 속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죠? “게으른 자의 정욕이 그를 죽이나니”. 게으름은 정욕으로 발전하고 그 사람의 영혼을 죽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충심으로 섬기는 것, 그것이 자신의 영혼을 살게하는 방법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주님을 섬기며 강물처럼 흘러가고자 할 때 이 세상이 우리를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둡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는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한 힘이 요구됩니다. 때로는 잔잔하게 흘러가는 강물이 아니라 노도같은 물결이 되어서 가로막고 있는 담들을 허물어버려야 합니다. 그렇지요. 이러한 강력하고 놀라운 힘들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대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마음을 모두 모아서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중일 때, 그 때에 우리 밖에 있는 모든 난관들은 변하여 우리를 돕는 것들이 될 것이며, 강물처럼 흘러가기 위해서 우리는 자원의 부족이나 섬기는 사람들의 모자라는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섬기고 우리가 아닌 다른 모든 것들도 우리를 섬기고 마지막에는 가장 종국적인 본성이고 실재인 우리의 육체까지도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에게 순응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워할 것이 없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부흥이 일어났던 현장마다 그 부흥이 부흥의 불길이 번지는 발화점이 되었던 그 지점이 있습니다. 그 지점은 인간의 제도나 방법이 아니라 어떤 사람의 심령이 그 부흥의 발화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심령이 그 부흥의 발화점이 된 것입니다. 그 심령이 어떤 심령이냐하면 하나님께 모두 받쳐지는 심령, 그래서 그 깊은 중심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그 심령. 그들은 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심령을 모두 바치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원이나 능력, 그리고 자기의 힘으로 그런 일들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전심으로 의지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심령, 그 심령을 발화점으로 삼으셔서 거기에서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게, 그래서 각 사람의 마음을 붙게 만드셔서 그들의 마음을 또 똑같은 마음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활활 타오르면서 이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들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이러한 부흥의 발화점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죄와 그리고 오류, 미움과 고통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태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