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본질적 사명(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불을 켜기 위하여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네게로 가져오게 하여 계속해서 등잔불을 켜 둘지며 아론은 회막안 증거궤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불을 정리할지니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레 24:1-3)
그러면 목회자가 어떻게 진리의 말씀으로 준비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 레위기 24장을 보겠습니다. 벌써 여러 해 전의 일입니다. 6, 7년 전에 아침에 이 성경 본문을 읽다가 커다란 깨달음이 있어서 얄팍한 책 한 권을 쓸 정도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때 받은 내용들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리려고 합니다.
여기에는 모세가 어떻게 성막을 짓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나오고 그 성막을 어떤 식으로 관리해야 될지를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막은 직사각형으로 된 방이었습니다. 직사각형으로 된 텐트였고 하나의 방이 12평 정도의 크기였고 그 안에 있는 더 작은 방은 6평 정도의 크기여서 도합 18평이 좀 넘는 크기의 직사각형의 텐트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 주위에는 막이 쳐져 있어서 울타리 역할을 했고 그 앞에서는 번제단이 있고 거기 성막의 뜰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 중에 이동식 성전으로 하나님이 짓도록 명령하신 것이고, 지어진 성전이 성막이 중심이 되어서 어느 곳에서든지 성막이 펼쳐지면 그 성막을 중심으로 12지파들이 진을 쳤고 낮에는 하나님이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 성막의 갈 길을 인도하시면서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이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성경에는 이러한 성막에서 나오는 특별히 등잔불에 관한 규례입니다. 이 성막의 큰 방을 성소라고 불렀고 더 작은 방을 지성소라고 불렀는데 성소에는 제사장까지 들어갈 수가 있었고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 일 년에 한 차례씩 속죄일에 들어가서 이스라엘의 죄를 위해 대속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이 이 성막을 만드실 때에 지붕 덮개를 물 돼지가죽을 사용하도록 지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물 돼지가죽으로 이루어진 지붕 자재로 완전히 싸였기 때문에 그리고 창문이 없었기 때문에 일체 바깥에서 빛이 들어 올 수 없었습니다. 캄캄한 어두움이었습니다. 그러니 거기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당연히 불빛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등잔불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재미있는 영적인 사실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구약의 이 성막은 아무렇게나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모세에게 지정해 주신 제도를 따라서 그 양식대로 이루어진 것이고 그것 하나하나에 아주 깊은 구속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질문을 해봅니다. 왜 하나님은 그렇게 성막을 불편하게 만드셨을까? 천정을 약간 밝은 빛이 들어오게 하신다든지 아니면 창문을 만들어서 햇빛이 비치게 해서 그 빛을 받으면서 안에 있는 사물들을 분별하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만들지를 않고 빛을 완전히 차단하게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하나님이 당신을 섬길 때 이 세상에 있는 상식과 세상의 이치에 관한 빛이 아니라 오직 구별된 진리의 빛으로 교회를 섬기게 하시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구속사적으로 해석해 낼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들이 교회를 운영해 나아갈 때 세상에 돌아가는 지식들과 일반적인 학문의 지식들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께 속한 최종적인 진리에 대한 지식과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자연적인 지식들은 그것들이 올바로 축적되기만 했다면 매우 놀라운 연결과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모든 이세상의 학문과 인간의 지혜가 발견한 모든 지식들 중, 올바른 지식은 모두 원래 하나님 것이다.” 그 발견한 지식들을 사람들이 잘못된 지혜로 연결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가 잘못 사용되어서 오히려 지식 때문에 세계가 하나님의 뜻에서 더 멀어지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의 사명은 바로 그렇게 하나님께만 속한 진리들이 무엇인지를 찾아내고 찾아낸 것들은 잘못 연결해서 사용해서 그 지식을 주신 의도가 아닌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을 근절하고 올바른 결과를 만들어 내어 그 지식들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특별히 목회자들에게,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인 지성인들에게 주신 사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학문이라는 것을 공부할 때는 항상 피라미드의 원리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신학을 공부하기 전에 인간으로서의 상식을 쌓고, 그 다음에 대학에 가서 어떤 학문을 공부하고, 거기에서 인문학적인 토양을 마련하고, 인생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거기에 대한 답으로서 사상과 철학을 공부하고, 최종적으로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내려주는 신학을 공부함으로써 학문이 피라미드의 구조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사명은 세상에 유통되고 있는 많은 학문들을 모두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지식의 세계를 이해하고 그것을 정확하게 비판하고 그 중에서 사람들에 의해 발견된 하나님의 진리를 건져내고 그것들이 잘못된 방식으로 오용되고 있는 것들을 밝혀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지식이 해석되고 사용되어질수록 성경과 신학을 통해 그것들을 해명해주는 지성적인 작업을 목회자들이 해야 합니다.
이런 모든 지식의 통합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인간에게 가르쳐주는 삶의 지혜의 선생님이 목회자였습니다. 그래서 18세기 전까지만 해도 원래 신학은 목회자가 하는 학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든지 해야 되는 학문이라고 이해되었습니다. 18세기에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 이후에 계몽주의 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신학이 모든 성도들이 공부해야 될 필요가 있는 과목이 아니라 목회자가 직업 활동을 위해서 공부해야 하는 특수한 과목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8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교회는 항상 신앙을 가르칠 때 하나님과 온 세계와 인류와 우주에 대한 지식을 한꺼번에 가르쳐서 자기가 한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세계와 역사와 심지어는 자연환경과 어떤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야 될지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팜페디아’의 방식, 즉 ‘범교수학적인’ 방식으로 신앙교육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오늘 날 우리가 깊이 회개해야 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잘 가르치지 않는 것입니다. 잘 가르치는 데 성경을 중심에 놓고, 현대의 사상들을 극복할 수 있는 방식으로 통합적인 방식으로 학생들과 성도들을 교육을 해서 한 사람 한 사람을 크리스천 사상가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회자 자신이 많은 양의 독서와 사색을 통해 기독교 사상가로서의 삶을 살아서 그 사상을 가지고 오늘날의 역사를 보고 환경을 보고 교회를 보고 인간 사회를 보고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는 적절한 시야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성인으로서의 목사의 사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이야기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지식을 전달해주는 유통업자 같은 목회자가 되어서는 안 되고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해석해서 최종적으로는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야 할 사람이 바로 목회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진리의 중심에는 바로 성경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성경을 철저히 연구하고, 성경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신학을 탐구하고, 신학을 제대로 연구하기 위해서 일반 학문을 함께 공부하면서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과도 서로 사상적으로 학문적으로 지식적으로 교통할 수 있는 소통능력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버너드 램(Bernard Ramm)이라고 하는 유명한 복음주의 신학자는 자기의 책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성경과 신학을 공부함으로써 목회자가 되지만 그러나 우리가 신학으로 성경을 공부한다 할지라도 사용하는 언어는 계몽주의의 언어를 사용하여야 한다. 그 계몽주의 언어를 가지고 불신자들과 소통하면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 신앙과 성경의 가르침이 이 세상의 어떤 철학적인 체계와 사상의 틀보다도 우월하고 우리 인류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사상의 체계라는 것을 설득할 수 있어야 된다.”고 말입니다. 그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대학에서 8년 정도 교수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어서 다 팽개치고 일곱 명의 성도들과 함께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사실 학교에 교수생활을 할 때는 공부를 못했습니다. 맨날 똑같은 과목을 가르치고, 그때 제가 구약학과 설교학을 가르쳤는데, 박사과정을 공부하니까 어느 날 너무 싫은 것입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공부가 있는데 그래서 교수 사표를 내니까 더 이상 학교가 시키는대로 공부해야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저 나름대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부족하지만 교회를 개척하기 전부터 시작해서 25년 세월이 흘러오는 동안에 최선을 다해서 공부했습니다. 제가 설교하러 예배당에 올라갈 때 항상 이 가방을 메고 올라갑니다. 이것이 나 자신에 대한 확인입니다. “나는 훌륭한 설교자도 큰 교회 목회자도 아니다. 나는 학생이다. 공부하다가 방금 내려온 학생이다.” 설교 끝나면 다시 짊어지고 올라가는데 “이제 다시 공부하러 가야 된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주일 날 몸이 너무 아파서 설교를 못해도 월요일에 공부하러 정확하게 교회 연구실에 나옵니다. 최선을 다해서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목회자의 마음속에는 항상 전하고 싶은 진리가 넘쳐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하면 교만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20년 목회를 하면서 도대체 다음 주에 무엇을 설교해야 되나 하고 성경을 뒤적거릴 때가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몇 번 안 됩니다. 아주 상태가 안 좋았을 때이고 대부분은 전할 말이 설교시간보다 항상 많았습니다. 그래서 주일에 설교를 하고 나면 ‘또 일주일을 기다려야 다음 것을 설교할 텐데.’ 그래서 20년 동안 부흥회를 80번을 했는데 항상 제가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저보다 못할 것이라고 생각되어서가 아니라 이것을 쏟아놓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치열하게 해야 됩니다. 그러나 설교단상에 오르면 이 세상의 상식과 세속적인 지식을 가지고 성도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감동을 주기 위해서 목회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풍선 같은 설교자가 있고 빙산 같은 설교자가 있습니다. 풍선 같은 설교자는 설교시간에 한 것이 아는 것의 전부입니다. 물 위에 풍선이 딱 떠있지 않습니까? 빙산 같은 설교자는 설교시간에 전달하거나 강의 시간에 전달한 내용이 10분의 1도 안 됩니다. 나머지는 더 많은 양이 수면 아래 감추어져 있습니다. 거기에서 설교자로서의 자신감과 진리의 말씀을 대변할 때에 말하자면 유장함 같은 것들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이 진리의 빛을 전달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태양빛을 차단하시고 감람유의 기름으로 켠 불꽃을 도움을 받으면서 하나님을 섬기게 한 것입니다.
교회가 아무리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 없이 그 일을 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냥 종교적인 노동일뿐입니다. 성도들이 이 일을 하면서 이 일이 가지고 있는 진리적인 의미, 그리고 다양한 일들을 위해서 수고함으로써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계획이 무엇일지를 알게 해주어야 합니다. 말씀의 봉사를 통해 불신자들은 그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믿음을 가짐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신자가 된 사람들은 그 말씀과 진리의 힘으로 더욱 더 자기 자신을 깨뜨려 새 사람이 되어가서 어린 아이 같았던 사람들이 지식과 사랑에 있어서 온전한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 나라에 살면서 이미 왔지만 아직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실제의 삶과 인격 속에서 보여줄 수 있는 성도들을 길러주는 것이 목회자의 사명입니다.
그 일을 위한 가장 중요한 도구가 바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설교자의 지성과 삶 속에 깊이 축적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로 섬김을 받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제가 그 성경구절로 420페이지짜리 책을 한 권 썼는데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이라는 책입니다. 기회가 되면 한번 꼭 읽어보십시오. 예수님이 그 성경 구절에서 처음으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는 이 빛에 대한 풍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를 들면, 시편 119편에 나오는 “여호와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라고 할 때 희랍어의 ‘포스’가 히브리어로 ‘오르’라는 단어입니다. 그 ‘오르’가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할 때 바로 그 ‘빛’이고 발광체들이 빛을 담지 한 물질로 제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의 빛이 신약에서 나온 생경한 개념이 아니라 이미 구약에 풍부한 뿌리를 두고 이 진리가 빛을 비추는 놀라운 힘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빛은 물리적이기도 하지만 물리적인 단순한 빛이 아니라 입자인 동시에 파장입니다. 광자 덩어리인 동시에 파장이고 빛은 자기가 무엇인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물들을 그 빛이 없으면 올바로 볼 수 없도록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구약에서는 이 빛을 예외 없이 지식, 혹은 진리라는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그 지식과 진리를 온 몸에 담지하고 진리 자체로 오신 분이 계셨는데 그분이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고 보여주신 삶의 모본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하나님의 성품의 현시를 통해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밝혀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빛의 개념입니다. 이러한 진리의 빛이 신학적으로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결국은 이것이 진리를 의미하는데 하나님의 성막에 이 진리의 빛만이 그 성막 안에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경배하는 일에 사용되었다고 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실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어려움은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하는 개념이 총체적으로 위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교회 다니는 사람? 그래서 빌 하이벨스 같은 사람은 쳐치 맨(church man)이라고도 이야기 했습니다. 기독교문회에 익숙해진 사람? 아니잖습니까? 그러면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이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발견하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서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사람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의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꼭 필요한 것이 중생과 회심입니다. 오늘날 이 중생과 회심이 거의 기독교에 의해서 폐기되었습니다. 양보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벌써 한 30년 전에 교수이신 장로님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3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자기는 교회에서 회개하라는 생생한 설교를 마지막으로 들어본 게 30년 전이었다고 하니까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목회자는 교회에 나오면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배운 신학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기독교 문화에 익숙해져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죄를 진실하게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사람들만이 진실한 신자입니다. 그들의 구원은 취소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교회의 관심이 “너는 정말 구원받았느냐?”라는 질문을 직선적으로 사람들에게 하지 않는 분위기가 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2세 교육의 심각한 문제로 나타납니다. 목회자의 정직한 양심으로 볼 때 예수 믿는 집안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는 많은 자녀들이 불신자 상태입니다. 제가 한번 지방에 집회 내려갔습니다. 한 3000명 정도 모이는 교회였는데 시종일관 목회자 한 사람이 자기네 교회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좋은 것도 있고 배울 것도 있으니까 같이 대회를 나눴습니다. 누군가 했더니 한 교회에서 교구를 담당하고 있는 부목사였습니다. 그래서 신학을 어디서 했느냐고 했더니 총신에서 신학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중생과 회심을 알지 않느냐고, 그렇다고 합니다. 그러면 당신이 맡고 있는 교인이 얼마나 되느냐고 그랬더니 한 800명쯤 된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 얼마나 당신의 목회자 양심으로 볼 때에 구원을 받았느냐고 했더니 30퍼센트 미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나한테 지금 무엇을 자랑하고 있습니까? 당신이 맡고 있는 영혼 중에 70 퍼센트가 구원을 못 받았다 이야기입니다.”
영적으로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은 아주 현저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신령한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은혜의 세계를 모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교회 안에서 목회사역을 통해 이런 진실한 중생과 회심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교회가 진리의 말씀, 특별히 복음으로 목회를 승부하려는 강한 의욕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성도들이 교회에 등록을 해서 편안하게 신앙생활 할 수 있도록 모든 편의를 제공하고 모든 시스템들을 현대화 하되, 예배시간에 울려 퍼지는 설교는 아주 고전적이고 더 엄격해서 사람들이 그 설교를 듣고 ‘내가 정말 회개하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라고 하는 영적인 도전을 느낄 수 있도록 설교를 해야 합니다. 회개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위로를 하면서 다음에도 또 회개할 기회가 있다고 설명을 해주어야지, 현실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복음의 엄연한 증언을 덮어버리면 목회는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목회자에 대한 하늘나라의 상급은 그의 목회의 성과를 보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성과가 있다고 하더라도 다 자기가 한 것입니까? 성도들이 애써서 봉사해서 한 것이지. 윌리암 포사이스라는 설교학자는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설교의 열매를 보고 상급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하기까지의 그의 과정을 보시면서 상급을 결정하신다.” 하나님이 그렇게 쓰시기 위해서는 교회의 예배와 모든 것의 중심이 철저하게 진리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복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 문을 작성한 다음에 이 설교가 성도들에게 얼마나 감동을 줄 것인가 하는 것은 두 번째 문제이고, 이 설교의 내용이 진리의 내용을 얼마나 담고 있는지 본인이 판단하든지 아니면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게 판단을 해달라고 해서라도 그 시간에 움직일 수 없는 피 묻은 진리가 선포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이 50세가 넘으셔서 교회를 개척하셨습니다. 그때의 재미있는 일화입니다. 어느 이단의 교파에 속하는 여교수 한 사람이 박 목사님 교회에 저녁 예배에 나왔습니다. 한 6개월 쯤 다닌 다음에 부목사가 물었습니다. “교수님, 이제 박 목사님 설교를 들으시면서 기독교가 이해가 되십니까?” 그랬더니 이 여 교수가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사실 난 아직도 우리 교주의 말이 맞는지 박 목사님 설교가 맞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6개월을 다니고 나서 분명히 깨닫게 되는 것이 하나 있는데 저 분이 외치는 말씀이 진리인 것 같습니다. 진리가 아니라면 저 연세에 저렇게 매 시간마다 피를 토할 듯이 자기의 온 마음을 실어서 외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자기 자신을 진리의 말씀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시간에 그것을 터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성경을 철저히 공부하고 그리고 성경의 해석을 올바르고 풍성하게 하는 신학적인 책들을 읽고 일반학문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항상 이 진리를 향한 탐구의 열정을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오늘 젊은 목회자들 많이 오셨는데 그런 것에 있어서 노력을 안 기울이고 한 10년 지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제가 눈물로 당부를 드립니다. 젊음은 속히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치열하게 공부하고, 내가 오죽했으면 우리 후배들에게 공부하지 않는 목회자들하고는 놀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족구를 해도 공부하는 사람들끼리 하라고 그래야지 족구를 한 다음에 책을 보겠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공부해야 합니다. 그래서 진리의 말씀이 쌓여가야 합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그 말씀을 외칠 그런 준비를 갖추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진리의 빛을 탐구하는 가장 중요한 지침은 성경을 잘 읽고 성경 말씀을 잘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성경 해석을 풍성하게 하는 신학적인 책들을 꾸준히 읽는 것입니다. 특히 교리와 조직신학에 관한 책, 교회 역사에 관한 책, 그리고 성경 신학에 관한 책, 그리고 목회를 어떻게 하고 설교를 어떻게 하고 교회를 운영할 것인가 하는 실천적인 책, 이러한 책들이 네 개의 기둥이 되어서 골고루 꾸준히 읽어가야 하고 그 외에 펼쳐서 오늘날 사회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많은 문제들, 오늘날의 사회가 어떤 시대정신에 의해 출렁거리고 있는지 오늘날의 현대 도시화와 현대의 사상 현대의 철학 사회학 과학 이런 책들도 꾸준히 틈나는 대로 읽어가면서 자기 자신의 지성을 함양해야 합니다. 결국은 모든 공부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하고 사람들이 믿고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것 외에는 참된 희망이 없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잘 준비해서 쏟아놓는 목회의 자세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보면 거기에 사용되는 재료가 있었는데 그것이 오직 찧어낸 기름을 사용을 합니다.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내게로 가져오게 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기름’은 의심할 여지없이 성령의 역사를 예표합니다. 결국은 우리의 목회의 사역은 병을 고치고, 무엇인가 이적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빛을 우리에게 밝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각 사람의 마음속에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고유한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시면 내가 너희에게 전한 모든 것들을 생각나게 할 것이고 너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게 할 것이라는 가르침도 거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성령에 깊이 감화되었을 때 성경의 진리를 잘 발견하게 되고, 성경의 진리를 잘 발견해서 성도들에게 전할 때 성령이 함께 하시면 어눌한 설교를 통해서도 성도들이 주님을 깊이 만나고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깨달은 지식을 가지고 죄와 유혹이 많은 세상에서 굳건하게 믿음을 지키면서 자기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추동력을 제공하는 것도 역시 성령의 은혜인데 이것을 성경은 다른 말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가 됩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목회를 하다가 너무 힘들고 안 되니까 불건전한 성령 운동에 눈길을 돌리는 것입니다. 한때 토론토의 영향을 받아서 사람들을 쓰러뜨리는 것이 한참 유행하더니, 또 사람들 데려다 집회해서 금이빨 만드는 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자꾸 그것이 사실이냐고 누가 물어보는데 사실이면 어떻고, 사실이 아니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애굽의 술사들은 그보다 더한 것도 했습니다. 또 최근에는 관상기도까지 있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도 제가 논문을 발표했습니다만 이것이 전부다 우리 개혁주의의 건강한 'spirituality'가 아닙니다. 참된 하나님과의 사랑에서 오는 경건의 맛을 본 사람들은 그러한 미신적인 성령 운동에 의해서 매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참 아내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거리의 여자에 눈길을 주지 않듯이 비교될 수 없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으로 말미암는 참되고 순수한 경건, 사랑의 감화와 은혜의 체험들이 정통적인 성경의 가르침 속에서 사라지고 나니까 황폐한 정통주의가 되고, 지식도 올바르지 않으니까 사람들이 그런 이교도적인 영성운동에 무분별하게 빠져서 교회가 혼란스러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쪽 지역도 아마 신천지에 많은 피해를 보았겠지만 저희 지역에서도 많은 피해가 있었습니다. 우리 인근지역에서는 교구 하나가 전부 다 넘어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끌고 간 사람이 신천지에서 스며들어온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신천지를 공부하다가 감동을 받아가지고 스스로 갔는데 부목사하고 장로부인이 교인 70명을 데리고 넘어가 버렸습니다. 이유는 그렇게 재미있는 성경 해석을 본 적도 없고 그렇게 감동을 받아본 적도 없고 그런 성령의 은혜도 받아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내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남성이 길거리 여자들에게 눈길 끌리듯이 간 것입니다. 그러고는 법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흥분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모아놓고 그랬습니다. 그것도 해야 되겠지만 올바른 것을 잘 가르쳐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이고 성경의 진리가 얼마나 예쁜지를 터득하고 나면 누가 가겠습니까?
그것입니다. 이러한 순수한 성령의 역사가 교회 안에 일어나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풍부하게 체험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교회는 한마음이 되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교회가 건물을 크게 지으면 사람들이 저절로 모이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아주 적대적이고 기독교 인구가 줄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교회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디에선가 진리의 말씀을 뜨겁고 올바르게 전하고 그 진리 안에서 성령의 사랑을 나누면서 살아가는 행복해 보이는 거룩한 성도들이 있는 교회에는 무엇인가 그 사람들을 잡아끄는 힘이 있어서 그들과 함께 신앙생활 하고 싶어 합니다. 교회가 처한 상황을 분석해서 성령의 순수한 역사가 너무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자각해서 일깨워야 합니다. 성령을 사모하고 목회 사역에 이러한 순결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서 죄인들을 회심시켜 예수를 믿게 만들어야 합니다. 예수 믿은 사람들을 변화시켜 시련을 이기게 만들고, 거친 사람들을 변화시켜 팔복의 사람들로 만들어주는 성령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아 심각하게 도전해야 합니다. 성령의 축복이 사라진 교회의 현장에 대해서 가슴아파하며 그것이 나의 죄 때문인 것처럼 사람들로 하여금 가슴을 찢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구역장입니까? 교사입니까? 은퇴한 장로입니까? 누가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여러분과 제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목회하는 것이 하도 답답하고 교역자들이 새벽기도를 안 나오고 하니까 장로님이 너무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서 일주인 동안 아침 금식을 하고 당회 시간에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래서는 안 되겠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 정말 회개하고 열렬히 기도합시다.” 당회 분위기가 은혜로운 것이 아니라 썰렁합니다.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목회자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을 생각해 보십시오. 바벨론에서 포로 귀환하여 돌아왔을 때 부패가 만연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에스라가 엎드려서 성전 문 앞에서 울었습니다.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모이면서 유명한 에스라의 대각성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는 순수한 성령의 역사가 너무 희미해졌습니다.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가 갈망이 없습니다. 옛날에 우리는 삐뚤어진 열정을 보면서 가슴아파하고 저것을 올바르게 하지 않아서 한국교회가 잘못된다고 했는데 지금은 삐뚤어진 열정도 없습니다. 삐뚤어졌어도 좋으니까 한번 보고 싶습니다. 정말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20년 전, 30년 전만해도 기도원에 가면 금식하는 목회자들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그런 기도원들은 문을 닫고 콘도미니엄 같은 수양관만 사람들이 모입니다. 그것을 내가 굳이 다시 되살리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목회자의 정신들이 물질적인 번영과 사회적인 안정 속에서 약해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런 성령의 순수한 역사, 그 기름으로 불을 밝혔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교회에 이러한 성령의 역사가 다시 재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는 이 기름을 내는데 찧어낸 감람기름입니다.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이라는 구절이 히브리어 성경에 “세멘 자이트 자크 까띠뜨”라고 나옵니다. ‘세멘’은 ‘기름’이라는 뜻이고 ‘자이트’는 ‘감람’입니다. ‘자크’는 ‘순수한’이라는 뜻이고 ‘까띠뜨’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것이 분사입니다. ‘까따뜨’라는 단어의 남성분사입니다. ‘까따뜨’는 ‘때리다, 부수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얻어맞은’, ‘깨어진’, 혹은 ‘부서진’ 그런 의미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람유로 기름을 짰는데 그 방법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빻은 다음에 누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많은 양의 기름이 나옵니다. 지금 우리가 참기름을 짜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대신 그것은 순수한 기름이 아닙니다. 양은 많이 나오지만 불순물이 그 안에 섞여 있습니다. 그런데 깨뜨려서 연자 맷돌 같은데다 돌려놓으면 가만 내버려둡니다. 그러면 기름이 그대로 흐릅니다. 그것을 채집합니다. 절구 같은데 쿵쿵 빻은 다음에 짜지를 않고 가만히 기울여서 기름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양은 적어도 기름이 순수합니다. 짜낸 기름은 불을 붙이면 그을음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것은 순수하고 아주 밝은 불꽃이 나옵니다.
제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 기름을 얻기 위해서 감람열매들이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정말 살아있는 설교가 되기 위해서는 주석과 설교 노트 사이를 오가는 설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주석가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지 자기 설교가 아닙니다. 그것이 진짜 자신의 설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 말씀이 먼저 자신을 깨뜨려서 자신을 죽여서 거기에서 피가 흐르고 눈물이 흐르는 가운데 그것을 자신이 소화하고 다시 자신의 입으로 그 진리를 써낸 것이 설교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바둑의 역사에 보면 ‘토혈국’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본인방에서 있었던 일인데 양대 가문이 명예를 걸고 바둑을 둡니다. 그런데 결국은 한쪽이 집니다. 졌다는 사실이 확인이 되는 순간 바둑을 두던 사람이 너무 원통해서 피를 토하고 반상에 엎드려져서 절명을 합니다. 그것이 아직까지도 역사에 토혈국이라는 기보로 내려옵니다.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어떤 사람은 바둑을 두다가 안 되니까 피를 토하고 반상에 엎드려져서 절명을 해버렸는데 우리 목회자들에게는 왜 이렇게 열정이 없을까? 성도들이 볼 때 우리 목사님이 여러 가지 부족한 것이 있지만 그래도 확실한 것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 진리에 목숨을 걸었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저 사람은 진리의 말씀을 외치다가 설교단에서 피를 토하고도 죽을 사람이라는 인상을 왜 심어주지 못할까?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
개척교회를 일곱 명과 함께 시작을 해서 20년 세월이 흘러오면서 깨달은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목회자가 기도를 하면 교인들은 교회에 나옵니다. 목회자가 눈물을 쏟으면 교인들은 겨우 땀을 흘립니다. 목회자가 피를 쏟으면 그제서야 교인들의 눈에 이슬이 맺힙니다. 문제는 목회자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다.” 한 알의 밀알이 어떻게 땅에 떨어져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다시 한 번 이런 모임을 통해 우리 자신을 성찰하면서 오늘날 이 시대가 얼마큼 어두운 시대에 와있는지를 깊이 생각하면서 목회의 본질로 다시 돌아간다면 적어도 그 본질로 돌아가기 위해 몸부림치는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이라고 저는 굳게 믿습니다. 그러니까 목회자가 다양한 재능이 있고 그것은 또한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 만할 것입니다. 그러나 핵심에 충실하고 그것들이 바깥으로 퍼져가는 방식으로 사역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강의를 듣고 뭔가 질문할 것이 있으면 이메일로 보내주시면 제가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저는 목사님 하신 말씀에 대해서 기본적으로는 동의를 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이야기들은 금년에 처음 하는 것이 아니라 대형사건이 나올 때마다 계속 이야기를 했고 1960년, 50년대부터 회개운동을 한다고 해서 우리들이 여기가지 왔는데 저는 이것을 이렇게 정리하고 싶습니다. 세월호 사태 같은 사회적인 커다란 문제는 하나님과 우리가 어떤 관계를 맺는지, 그리고 교회가 신실하게 살았나 안 살았나 하는 특별은총의 영역과 정부가 인간의 상식과 법에 의해 보편타당한 원칙을 가지고 나라를 경영 하는가 하는 일반은총의 측면, 두 개가 결합이 되면서 사회를 형성해 나가는 것이지 결코 하나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국가를 개조하고 뜯어고친다고 난리를 쳐도 사람이 썩었는데 백번하면 되겠습니까? 또 한쪽에서 회개하고 뉘우치고 한다고 하는데 그것으로 끝나고 다시 현실로 돌아갔을 때 회개운동에 참석한 사람이 관청으로 돌아가서 다시 뇌물을 받고, 건축업자인데 다시 봉투를 갖다 주고 건축하고, 학교선생인데 다시 봉투 받고, 선박회사 직원인데 돈 주고 선박공사를 가짜로 받는다면 사회가 그것이 변화될 수 있는 추동력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사회를 개혁하시고 바꾸실 때는 사람과 함께 사람을 통해서 그 사람 안에서 일하시지, 사람 없이 사람 바깥에서 혼자 일하시지 않습니다.
저는 한 번도 우리교회를 대형교회라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대형교회라고 치켜세워주시니 고맙습니다만 다행히 장관님은 우리 교회에 한 명도 없습니다. 시골교회라서 그렇습니다. 자, 보십시오. 이것이 대형교회만 욕을 먹을 사실인가? 또 이야기해 봅시다. 어느 목사님이 선지자적으로 외쳤다고 칩시다. 그러면 들은 대로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삽니까? 기본적으로 우리들이 가져야 될 것은 성도들에게 구원과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소명이 무엇인지에 대해 제대로 가르치지를 않은 것입니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주일 날 주의 종을 대접하면 복 받는다는 이야기나 하고, 그렇게 해 가지고 교회를 하는데 교인들 중에 의식이 있는 사람들이 그 설교를 듣겠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르치는 내용도 없이 진리에 대한 진지한 몸부림이 없이 그냥 세월 흘러가듯이 보내버린 수많은 주일예배들이 쌓여서 그런 결과가 된 것입니다.
하나만 이야기해봅시다. 그러면 교회는 정의를 실현하고 있습니까? 교회도 세금을 제대로 안내지 않습니까? 저는 확신합니다. 여러분도 세금을 제대로 안 냅니다. 저 피아노 2천만 원쯤 가겠는데 2천만 원 주고 사오는데 세금안내지 않습니까? 그것은 다 탈세입니다. 성도들이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삶을 먼저 교회가 윤리적으로 실현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세법을 가지고 공부해보고 재정에 있어서 한번 한국에서 유래가 없는 깨끗한 교회를 만들어보겠다고 했는데 가시밭길입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점에서 완벽하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엄청난 희생이 따릅니다. 일 년에 최소한 몇 억 원의 돈을 세무서에 갔다 내야 합니다. 몇 억 원이 뭡니까? 훨씬 더 많은 돈을 내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안 합니다. 제가 궁금한 게 어느 교회 가면 강사를 했다고 상당한 액수의 돈을 그냥 주머니에 넣어 줍니다. 오면서도 계속 의문이 듭니다. ‘이것을 저 교회는 어떻게 회계 처리를 할까?’ 내가 사인도 하나 안 해주었는데. 어떻게 처리를 할까? 우리 교회에서는 와서 설교하고 가면 정확하게 세금 딱 떼고 원천영수증 해서 세무서에다가 아무개 목사님이 우리 교회에서 설교하고 얼마 받아 갔다고 세무서에 통보해 버립니다. 우리가 완전한 사람일 수는 없지만 교회가 철저하게 윤리적인 기준을 따르려고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오늘날 기준이 술 먹고 담배 먹으면 장로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골초와 술주정뱅이들을 장로를 세우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술 먹고 담배 안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금융 비리, 이런 데 연루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을 교회가 먼저 보여주고 성도들이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이 정말 이래서는 안 되겠다. 우리까지 이렇게 살면 정말 희망이 없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성경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한까지는 세상 속에서 타협하지만 자유를 주지 않는 한도에서는 요한 크리소스톰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세상아 네가 나를 버리려느냐. 나도 너를 버린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의 존재감을 명백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실직도 각오도 해야 하고 외톨이가 될 각오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대형교회 하나만의 문제이겠습니까? 그러면 대형교회는 예언자적인 설교를 목사가 안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비윤리적이고 작은 교회는 그런 설교를 안 해도 저절로 윤리적인 삶을 삽니까? 다 죄인들이 어떤 사람은 대형교회, 어떤 사람은 작은 교회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어느 교회 하나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목회자 자신이 설교하러 올라가기 전에 이런 문제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의분이 끓어올라야 합니다. 용기는 바로 그 분노에서 나옵니다. 그 속에서 분노를 그냥 쏟아 놓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통해서 명백하게 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니까 이런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고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날같이 다 굽어버리고 개판이 된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법대로 세금을 내고 살 수 있을까요?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많이 희생을 당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의사들이 정직하게 세금을 냈는데 동일한 규모의 병원의 두 배의 세금을 냈습니다. 그러면 세무서장이 표창장 줄 것 아닙니까? 감사반을 보냈습니다. 이 자식은 뭔데 이렇게 튀냐고 와서 며칠을 뒤져내는 것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썩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 길을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선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절대적으로 공부를 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지에 대해서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청교도들은 무지를 악이라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진리에 대해 알려는 몸부림이 적었던 것에 대해서 깊이 뉘우쳐야 합니다. 두 번째는 현실적으로 우리가 열심히 공부해야 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세 번째로는 “그러면 어떻게 공부를 해야 될 것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여러분에게 제일 권하고 싶은 방법은 우선 교리를 철저히 공부해서 개혁신학과 장로교가 무엇을 믿는 교파인지를 분명히 이해를 하고, 성도들에게 교리공부를 철저히 시키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두 번째로 충고드리고 싶은 것은 책을 읽되, 이 사람 저 사람 왔다 갔다 하면서 책을 읽지 말고, 한 사람을 끝까지 파십시오. 영어를 자유롭게 읽으실 수 있는 분들은 좋습니다. 그렇지만 영어가 자유롭지 않으면 한글로 번역된 책도 있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책도 한 80권 가까이 나왔고 스펄전의 책은 그보다 훨씬 더 많고 매튜 헨리의 책도 훌륭합니다. 이런 식으로 신학자들의 책을 읽어 가는데 조건이 있습니다. 탄탄한 학문을 가진 사람의 책이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속에 사상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저한테 질문을 하면 저는 네 사람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학교 다닐 때는 존 칼빈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 후에는 존 오웬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저는 존 오웬 목사님의 책을 영어 원서로 20년 이상을 읽었습니다. 그 후에 나를 깊이 변화시켜 주신 분이 조나단 에드워즈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집도 거의 20년 가까이 탐독을 했고, 예일대학에서 나온 28권짜리 전집을 읽었습니다. 서너 권 빼놓고는 거의 모든 책들을 읽었습니다. 한 20년 정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 다음에 저에게 영향을 많이 기친 사람이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였습니다. 지금도 역시 아우구스티누스를 읽고 있고, 그 외에도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라든지 철학자라든지 많은 사람들의 책이 있습니다.
어쨌든 한 사람을 끝까지 쭉 읽으면서 그 사람에게 심취하면서 멘토링을 받으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몇 달 읽어서 설교에 써먹을 그런 생각을 하지 마시고 설교와는 상관이 없이 자기 자신의 신학과 지성을 함양하기 위해서 부단하게 독서를 하십시오. 목회를 하는 사람들은 심방 등 수 없이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저도 엄청난 격무에 시달립니다. 그런데 결국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아무리 바빠도 합니다. 시간이 없어서 못한다는 것은 변명입니다. ‘목사의 운명은 독서와 공부를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내리는 정의는, 공부는 읽어야 할 책을 읽는 것이고 휴식은 읽고 싶은 책을 읽는 시간입니다. 온 마음을 다 하고 교회에서 주는 책값으로는 반드시 책을 사야 합니다. 그 책을 가지고 계속 탐구하면 그렇게 하는 분과 안 하는 분이 한 두 달에는 그렇게 차이가 안 나지만, 5년 지나고 나면 마주 앉으면 대화가 안 될 정도의 지식의 격차가 느껴지게 될 것입니다. 특히 여기 젊은 목사님들에게 제가 진심으로 충고합니다. 5년 뒤에는 여러분의 모습이 부끄러워지도록 진보를 이루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