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의 사람들
(2001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1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노아: 순종함으로 받은 두 가지 은혜(창6:22) 2001.6.3 주일오전 1
2. 아브라함: 두 가지 순종(창12:4) 2001.6.10 주일오전 7
3. 여호수아, 갈렙: 마음에 하나님으로 가득 찬 믿음(민32:12) 2001.6.17 주일오전 14
4. 다윗: 고난을 통해 배운 순종(시119:67) 2001.6.24 주일오전 26
5. 아사①: 순종을 통한 온전함(왕상15:14下) 2001.7.1 주일오전 38
6. 아사②: 순종과 헌신(왕상15:15) 2001.7.8 주일오전 38
7. 히스기야: 연합된 마음과 순종(왕하18:6) 2001.7.15 주일오전 38
8.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히5:8-9下) 2001.7.22 주일오전 38
1.노아: 순종함으로 받은 두 가지 은혜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창6:22)
예수님의 생애와 기도는 주일 오후로 내려갔고 오늘부터 몇 주 동안 순종하는 삶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이 노아는 구약 역사를 말함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는 한 나라의 제왕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수많은 전쟁터에서 외적을 무찌른 용맹스러운 장군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마 그 시대에 태어났던 많은 사람들처럼 그렇게 평범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실 때 이 사람을 사용하셨는데 노아를 검토하지 않고는 구약의 인류 역사를 살펴볼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소중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오늘 이 사람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이 신앙 생활에 있어서 순종의 중요성과 그리고 영성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세 아들을 주셨는데 가인과 아벨과 셋이었습니다. 아벨은 가인에 의해서 쳐죽임을 당했고 그 아벨 대신 하나님이 셋을 주셨으니 셋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경건한 혈통의 대표가 되었고, 가인은 범죄 한 후에 사방을 유리하다가 이제 정착을 해서 많은 자손들을 퍼트리며 그들 나름대로 문화를 이루어가게 되었으니 가인의 후예들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세상 백성의 그림자가 되었고, 그리고 셋의 후손들은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경건한 백성들의 그림자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지 알 수 없지만 상당히 긴 세월이 흘렀고 땅에는 이제 많은 백성들이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 경건한 혈통인 셋의 집안의 사람들에게도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으니 이제 그 양쪽의 사람들이 결혼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혼인을 통해서 양쪽이 혈통을 교류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경건한 신앙이 불 신앙의 가정으로 스며들기보다는 대부분의 경우 불 신앙이 경건한 가정의 혈통을 망쳐놓기가 십상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하나님께서 너무나 잘 아셨기 때문에 깊이 고민을 하시다가 결국은 이 세상을 모두 쓸어버리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신 것은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이 창조한 이 세계를 당신이 창조한 사람들에 의해서 더럽혀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시는 하나님이 이제 이 땅에 있는 인간을 비롯해서, 그리고 인간과 함께 필연적으로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 땅에 있는 모든 동물들, 그리고 심지어는 날아다니는 것까지 모두 쓸어버리시기로 작정하신 것인데 이것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니 하나는 패괴한 세상에 대한 심판을 행하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보이시는 것과 또 하나는 이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전혀 새로운 새 세상을 재창조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천지창조가 없는 데서 있는 것을 만들어 하나님께서 문자 그대로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이룬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이제 여기에 노아를 통해서 나타나는 두 번째 창조의 역사는 도덕적인 창조의 역사입니다. 물리적인 창조의 역사가 아니라 도덕적인 창조의 역사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노아 한사람을 통해서 이제 자기를 경외하고 사랑하는 진실한 백성들이 생겨나 옛날 하나님을 떠났던 그 온 세상의 패괴함과 결별하는 새 세상이 이루어지기를 주님이 기대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 장쾌한 드라마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데 그 구원 역사를 이루심에 있어서 하나님은 항상 사람을 사용하셔서 이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는 첫 장이 창세기 1장으로 시작이 되고 마지막 장이 계시록 22장으로 끝납니다.
창세기 1장을 펴자마자 여러분들은 무엇을 보게 될까요? 주께서 말씀하실 때 그대로 되는 기록들이 창세기 1장에는 가득 차 있습니다. 천지 창조의 기록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있고 그리고 “땅이 갈라져 뭍이 드러나라” 하매 그대로 되고 공중의 새가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가, 하여튼 주께서 명하신 대로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창세기 1장이라면 계시록 22장도 역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전히 새롭게 창조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성도와 천사들의 무리의 의해서 영광을 받으시고 찬송을 받으시는 하나님과 그분의 온전한 통치가 실현되는 광경이 성경의 마지막입니다. 그리고 그 중간에는 죄가 들어와서 이 세상이 하나님께 거스르는 불순종의 세력들이 이 땅을 지배하게 되는 이야기들이 나와 있는데 하나님이 그들을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항상 그 어두운 시대에서 자기에게 순종하며 살아가는 자기의 백성들을 두심으로 그들이 비록 소수일지라도 하나님께 창조된 인간의 본분이 무엇인지를 수많은 사람들에게 생각나게 하시는 그런 방식의 삶을 살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거스르는 불순종하는 세상 나라와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백성들이 모인 하나님의 나라가 갈등과 투쟁을 하면서 구속의 대 드라마를 엮어 가시는데 이런 구속의 대 드라마를 엮어 가신 기록이 바로 창세기 3장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에 계시록 21장까지 나온 이야기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들이 배우는 것은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의 구속의 대 드라마를 엮어간 하나님께 순종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 중의 한사람으로서 이 세상에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그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에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살아가는 백성들을 징벌하기도 하고, 정복하기도 하고, 때로는 선교하기도 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루실 새 하늘과 새 땅의 위대한 승리, 순종케 하셔서 당신의 모든 피조물들을 창조의 섭리에 승복하도록 만들어주는 그 시간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당신의 구속의 대 드라마를 엮어 가실 때는 항상 혼자 엮어가지 않으시고 반드시 당신의 도구로 사용되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 위대한 구속의 대 드라마를 엮어갔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인물들을 공부해가노라면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의 대 드라마에 대한 박진감 넘치는 소리들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오늘 노아도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온 땅이 패괴해지고 하나님을 거슬려서 아무 희망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땅을 모두 쓸어버리려고 하실 때에 한사람 샛별과 같이 빛나는 단 한사람이 하나님의 눈에 들어왔으니 그 사람이 바로 노아였습니다. 물론 그 사람은 하나님께 특별한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노아에게 각별한 사랑을 베푸신 것이 사실이었습니다만 그러나 이 노아는 다른 그 시대의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의 삶을 하나님 앞에 살아감으로서 주님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사람이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순종하는 삶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 마지막 절에는 “노아가 하나님이 자기에게 분부하신 모든 것을 행하였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노아가 행한 사실에 대해서 상세하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성경 2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그런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노아는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모든 것을 따라서 행했다” 그리고 그 뒤에 한마디를 덧붙이는데 “그렇게 그가 행하였다” 그러니까 성경을 기록하는 사람에게도 이 노아의 순종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그 순종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홍수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 사실은 이미 120년 전에 노아에게 계시되었습니다. 그리고 노아는 그러니까 120년 동안을 쉼 없이 방주를 만드는 이 일에 자신의 전 생애를 드렸던 것입니다. 틀림없이 나무를 깎아서 방주를 지었을 것이기에 노아의 방주는 산에서 건조되었고 그리고 120년의 세월동안 걸려서 노아의 방주는 완성되었습니다.
이것은 크기를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린다면 아마 오늘날에도 이것을 만들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는 배가 아니라 상자였습니다. “테바”라고 하는 이 히브리 단어는 원래 상자인데 어디에 쓰이는가 하면 미리암이 모세를 갈대 상자에 넣어서 나일강에 띄어보내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그 갈대 상자라고 할 때 그 상자라는 단어가 바로 이 “테바” 방주라고 말한 이 단어와 똑같은 것입니다. 어린이 동화책에 커다란 배가 있고 그리고 거기에 유리 창문이 나있고 노도 젓고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다 거짓말입니다. 그냥 상자입니다.
길이가 약 180미터, 그 다음에 폭이 약 30미터, 열심히 받아 적으시는데 아마 오늘부터 만드실 모양입니다. 만드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대신 180센티가 아니라 180미터입니다. 폭이 30미터, 높이가 18미터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3층으로 되어 있으니 정확하게 축구장 넓이만 하다고 생각하면 딱 맞습니다. 그것이 3층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축구 경기장 3개만 하고 그리고 농구경기장은 약 27개만 하다고 계산이 나옵니다. 그것을 철강 제가 있었던 시절도 아니었을 것인데 그것을 나무로 배를 만든다고 할 때에 이것이 보통 일이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을 만들기 위해서 노아는 자기의 전 생애를 드렸고 그리고 그것을 만들기 위해서 그는 사사로운 삶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 비가 올 만한 어떤 조짐, 그리고 그 방주가 물위에 뜨게 되고 모든 숨쉬는 것들이 물에 잠기게 되리라고 하는 어떤 조짐도 없었던 해맑은 120년 날 동안 노아가 방주를 지은 것을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해 받을 수 없는 인물이었을 것이고 그는 아마 그 시대의 철저하게 ‘왕따’가 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가족들과 함께 성실하게 그 방주를 지었고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자신의 전 생애를 드렸으니 오직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라고 하는 사실 한가지 때문에 그는 그 방주를 짓는 일에 자기를 다 드렸습니다.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을까요?
방주의 문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여러 개가 아니라, 여기 창이라는 말도 나오고 문이라는 이야기도 나오는데 하나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모든 짐승과 사람이 들어가고 탈칵 닫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배는 높이 떠올랐는데 높이가 18미터였다고 하는데 이곳이 8미터입니다. 그러니까 한 층의 높이가 이 정도 보다 약간 더 낮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것이 3층으로 되어 있으니까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엄청난 배였습니다. 거기에 수많은 짐승들과 먹을 것들이 실렸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명령하신 말씀에 순종했는데 오늘 본문은 모두 순종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이 만들라고 하는 대로 모두 만들었는데 문 하나만 만들면 되는데 그것에 순종하지 않았다고 칩시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온 땅에 물이 가득하고 이제 틀림없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물이 위에서만 내린 것이 아니라 밑에서 터지면서 물이 솟아오르는데 그때 커다란 해일과 같은 것들이 일어났을 것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때 만약에 문이 안 달렸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될까요? 방주를 만들어서 물에 떴는데 조금 있다가 상자 곽 속에 갇혀서 물에 가득 채워져서 가라앉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 노아가 완전히 순종한 것에 대해서 성경이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어째든 이 노아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한 사람의 대명사였고 그래서 그는 방주를 예비하는 이 일에 자기를 다 드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도 순종하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우선 11시 15분에 예배 나오라는 그 명령에 오늘 순종했습니다. 여기 모두 나왔습니다. 물론 늦게 오신 분도 있지만 그러나 하여튼 모두 나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 뜻은 우리들이 대충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을 지향한 순종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많이 순종하고 마지막에 얼마간 불순종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를 너무나 많이 보지 않습니까? 방주는 모두 만들었는데 문을 달랑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아서 낭패를 만나는 이런 경우와 같이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온전한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시는데 이렇게 순종을 한 이 노아에게 주신 축복이 어떤 것이었는가. 이것을 보면 우리들이 왜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살아야 하는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기서 두 가지로 크게 나누어서 노아가 받았던 축복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우선 첫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축복이었습니다. 오늘 성경에 분명히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라고 기록이 나옵니다. 히브리말로 “히트 할라크”라고 되어 있는 이 동행 하다는 에녹 한사람에게만 쓰여진 단어입니다. 이 바로 앞까지, 물론 노아 이전에도 경건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되는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아벨과 같은 사람이라든지 에노스와 같은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든지 혹은 에녹과 같은 사람이라든지 이런 사람들 말입니다. 그러나 에녹 한사람에게만 이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이 쓰였으니 그는 65세에 므두셀라를 낳고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한 후에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들리워 올라간 아주 전설적인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자기의 마음에 합당하고 맞는 사람에게 표현하실 수 있는 최상의 표현이 동행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다 마찬가지이겠습니다만 자기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하고 밥 먹는 것이 대게 힘듭니다. 이 이야기를 몇 번씩 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보다 더 힘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같이 여행을 하는 것입니다. 피치 못하게 어디를 가는데 둘이 진짜 난 그 사람이 싫은데 기차에 딱 마주보고 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모르는 사람이면 모자를 뒤집어쓰고 잠이나 자면 되는데 그럴 수도 없고 그러니 참 고역이 아닙니까. 식사야 빨리 먹고 나오면 되지만 부산까지 한번 여행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니 얼마나 괴로운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과 여행하는 것은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전혀 피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볼 것이 있으면 보아서 좋고 볼 것이 없으면 둘이 이야기나 하면서 한없이 긴 여행을 떠나도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도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같이 다니시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니까 하나님도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다니시는 것을 기뻐하시지 당신이 싫어하시는 사람과 함께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굉장히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십니다. 물론 이제 사회 생활을 하다가 보면 전혀 저 사람이 좋지 않은데 할 수 없이 밥을 먹을 때도 있고 같이 여행을 다녀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는 십자가 짐 같은 고생입니다. 희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똑같은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인격적이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해서 당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 그런 사람과 동행하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한사람과 동행한다고 하는 것은 그의 존재와 그의 삶을 모두 기뻐하신다고 하는 또 다른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오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는데 그런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었던 그 예수님이 바로 일평생을 하나님과 동행하신 분이었습니다. 요한 복음 8장에서 기록된 바와 같이 “그가 나를 기뻐하심으로 나와 함께 하시도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을 기뻐하심으로 하나님께서 항상 당신과 함께 하는 그런 삶을 이어갈 수가 있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별히 그의 영적인 삶 속에서 풍부하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동행해주시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과의 탁월한 친교의 세계가 있어서 그의 영혼의 세계는 기름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으로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임재하고 계시다 라고 하는 의식 속에서 사는 친교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영적 생활은 부요합니다. 하나님과의 친교가 있기 때문에 늘 그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있고 주님을 향한 경외심이 가득 찹니다. 그 사랑의 본성과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의 발로로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고 그렇게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기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행하든지 축복해주시고 은혜를 내려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특권을 주시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비옥한 영적인 생활이 있습니다. 항상 주님을 느낄 수 있고 주님이 친근히 대해주시고 주님의 임재 안에서 늘 살기 때문에 주님이 자기를 버리시지 않는 확증이 있습니다. 고난과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늘 낙망하지 아니하고 주님을 붙들며 살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납니다. 이런 은혜와 사랑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 그리고 주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오만가지 어려움을 만나기도 하고 또 여러 가지의 상황에 부딪치기도 합니다. 또 결핍을 만나기도 하고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견딜 수 없는 곤고한 상황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에 대한 대답은 하나로 충분합니다. 하나님이 동행해주시는 삶으로 충분합니다.
지금은 이제 애들이 다 커서 뭐 어디에 가자고 해도 잘 안갑니다만 어렸을 때는 시장에 가는 것을 참 좋아했습니다. 엄마가 시장에 가자고 하면 별로 애들이 안 쫓아갑니다. 가봐야 쇼핑백이나 들고 뭐 사달라고 하는 것도 안 사자주니까, 그런데 시장에 가면 나를 데리고 가려고 애를 씁니다. 아빠 같이 가자. 그래서 아빠가 옷을 입고 지갑을 뒤 주머니에 넣고 쫓아가면 이제 애들은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입니다. 아빠의 마음을 움직이기만 하면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옷을 사줘도 엄마보다는 좀 나은 것을 사준다는 확신이 있고, 뭘 먹겠다고 그래도 사주리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아빠와 함께 시장에 가는 날은 애들이 즐거운 날입니다. 환호성을 지르며 신발을 신고 앞으로 뛰어갑니다.
그렇습니다. 뭐 우리 인생에 필요한 것이 한 두 가지입니까? 진짜 필요한 것이 많습니다. 대답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동행하시면,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면 무엇을 안 주시겠습니까.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데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사랑하고 자기가 기뻐하는 사람에게는 자기가 희생을 해서라도 베풀어서 그를 누리게 하는 것이 자기의 마음에 기쁨입니다. 하나님께서 동일한 마음을 가지고 우리를 대하시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그것이 아닙니까? 하나님 없이 스스로를 돌보는 삶이 얼마나 곤고하고 어렵습니까. 돈이 없어서 돈을 벌려고 몸부림을 쳐서 어떻게 그래도 남부럽지 않게 돈을 모아놓고 나니까 이번에는 가정에 불화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다 뜯어진 가정을 꿰매보려고 그렇게 동분서주하면서 달래고 타이르고 뭘 사주고 해서 간신히 봉합을 해놓으니까 그 다음에 건강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런 것입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 묻는다면 ‘저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삶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동행해주지 않는 삶은 제왕의 면류관을 쓰고도 불행한 삶을 살겠지만 주님이 동행해주는 사람은 아주 비천한 직업에 종사하면서도 언제나 만족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 노아가 그런 축복을 하나님 앞에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왜 입니까? 그가 순종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열린 교회에 와서 인상깊게 들었던 시리즈 가운데 하나가 아마 패역을 고치는 길이라고 하는 설교였을 것입니다. 혹시 들어보신 일이 없으면 구해서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임직식 때도 그 테이프를 드렸습니다. 거기서 다루는 것은 패역입니다. 히브리말로 “마슈브”라고 하는 패역인데 오랫동안 마음속에 굳어져 있는 하나님을 거슬려 살려고 하는 강하게 눌러 붙은 어떤 경향성입니다. 그것이 패역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이야기할 때마다 잘 드는 예화가 있는데 전 알코올 중독은 걸려본 적이 없습니다만 담배에 중독 된 적은 있습니다. 한 갑 반씩 피었습니다. 예수를 믿고도 한참 피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들도 그래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그것을 친구들이 피니까 신기하게 보여서 핍니다. 하나도 기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은데 무슨 맛에 피는가 하면 사람들이 나누어주는 그 재미에 핍니다. 그러다가 한참 담배를 펴서 그 담배가 인이 배기고 나면 얼마나 비참해지는가 하면- 담배 없어져야 합니다. -쓰레기통을 뒤져서 가래침 묻은 것을 닦아내고 그것에 불을 붙여서 담배를 핍니다. 실제입니다. 저도 그래봤으니까요. 그래서 돈이 없으면 그렇게 라도 하고 더 심하면 구두 발로 밟고 지나간 것을 모아서 그것을 뜯어서 그 가루를 모아서 이런데다 싸서, 여기에 다 공감하는 사람이 다 있습니다. 그럴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자기가 담배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양의 니코틴이 매일매일 자기의 몸 속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정상적인 생활이 힘든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경향성들이 속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것들과 연결시켜서 이야기하면 패역입니다. 그 패역이 어떻게 고쳐지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매일 열린 신문 보기만 하면 내 패역이 아직도 안 고쳐졌다고 하는데 그것이 그렇게 쉽게 안 고쳐집니다.
그런데 알코올 중독 된 사람들은 더 비참합니다. 무슨 활동을 못하니까 덜덜 떨고 그리고 술을 먹는데 담배든 술이든 그 중독을 끊는 비결은 계속 먹으면서 중독을 끊는 비결은 없습니다. 계속 늘어나지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여튼 담배를 끊으려면 안 피어야지 됩니다. 그래서 패역을 만약에 이렇게 암 덩어리로 비유를 한다면 이 영양분을 무엇을 통해 공급받는가 하면 불순종이라는 라인을 통해서 계속 공급을 받습니다. 그래서 불순종이 계속 쌓여서 패역이 되는데 그 라인을 통해서 계속 공급을 받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더 패역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제일 먼저 조치해야 할 것은 더 이상 불순종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지 만 이 패역이 고쳐지기 시작합니다. 딱 끊어야 합니다. 그러면 영양공급이 중단되니까 비실비실 하게 됩니다. 이때 치료제를 투입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은혜를 받고 깊이 회개하고 기도의 은혜 속에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고 할 때 이 패역에는 아주 치명적인 치료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를 통해서 되는 것입니다. 나와서 예배 시간에 조금씩, 조금씩 은혜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조금씩 은혜를 받는데 한쪽으로 계속 불순종하고 있으면 이쪽에서 조금씩 은혜를 받아서 치료가 되는 것 같아도 불순종을 통해서 줄기차게 영양분을 공급받고 있기 때문에 이 패역의 암 덩어리는 점점 더 강하고 딱딱한 덩어리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비유가 좀 섬짓하지요? 어쩌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점점 커져서 마지막 목표는 무엇인가 하면 우리 몸 전체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 전에 어려서부터 생각하는 것과 계획하는 모든 것이 악하다고 그랬는데 그렇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 인격 전체가 하나님을 거스르고 대항하면서 사는 패역의 덩어리로 가득 차기를 원하는 것이 마지막 이 불순종이 노리는 목표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하나님과 교통하는 신령한 생활을 계속 이어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이 순종에 대해서 많이 배워야하고 그리고 이 순종을 통해서 어떻게 건강한 영적인 생활이 영위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깊이 깨닫지 않으면 이런 신령한 삶을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노아는 바로 그런 점에서 본받을만한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준행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은 침묵하고 있지만 술이나 마시고 개판처럼 살아가는 노아를 딱 부르셔서 120년 후에 홍수가 내릴 테니까 방주를 지어라 이렇게 말씀하셨고 그 후로부터 모든 것을 딱 끊고 순종하면서 배를 지었을 것이라고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이 그에게 나타나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위대한 비밀에 대해서 말씀해주시기 전에 이미 노아는 하나님의 시선에 들어온 사람이었습니다. 경건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사는 그 시대에 구별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결국은 그에게 마지막에 될 위대한 일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생활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영적인 삶을 가져옵니다. 영적인 삶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또한 주님이 동행해주시는 사람들의 놀라운 승리의 증거들을 주님이 보여주십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확연한 특징이 있는데 하나는 그들의 내면의 세계가 주님을 향한 사랑과 경외심, 거기에서 비롯되는 친교로 가득 찬다는 것이고, 또 한가지는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은 삶 속에서 늘 자주자주 승리를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특별히 사랑하셔서 이렇게 동행해주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흔히 우리가 풍성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세상의 풍조를 탓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오늘 노아가 입증해 보이고 있지 않습니까? 그 시대의 사람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열납 될만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이 선택한 세세 후손들 가운데서도 그런 사람들이 거의 모두 멸절 되었습니다.
그런 속에서도 노아는 하나님 앞에 경건하고 의로운 삶을 살았고 그리고 완전한 사람이 되어서 주님과 동행하는 그런 신앙 생활을 해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모든 하나님의 분부에 순종하면서 산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시대의 타락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그 부패한 시대는 오히려 그를 하나님의 눈에 더 잘 띄게 만들어준 배경 색깔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마치 검은 천 위에 떨어진 작은 유리 조각이 눈에 확연히 드러나는 것처럼 그 시대의 타락과 부패가 오히려 이 노아를 돋보이게 했지 노아를 똑같이 망가지게 만들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을 보면서 역시 그 시대의 풍조를 탓하면서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는 우리들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노아가 그렇게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대충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불순종을 하찮게 여기면서 살아간다면 언젠가는 우리의 몸과 온 영혼이 세상에 의해서 정복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따금 실패하고 회개하는 때가 있다고 할지라도 좀더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면서 살아가려고 애를 쓰는 삶을 우리들이 산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의 몸과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점점 정복될 것이며 그래서 우리의 몸과 마음,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붙잡힌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쩌면 대체로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온 사람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커다란 일에만 우리가 순종하기를 원하지 아니하시고 아주 작고 사소한 일에도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커다란 일뿐만 아니라 작은 일까지라고 순종하면서 살아서 하나님의 마음에 온전한 기쁨을 드리기를 원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동행의 축복들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영적으로 잠들어 있을 때에는 커다란 죄가 아니면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깊이 하나님의 은혜 속에 들어가게 되면 예전에는 아주 사소하고 하찮게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고 불쾌하게 하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사려 깊은 사람이 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하나하나 마음을 다해서 정성껏 행하는 사람이 되고 이런 삶이 점점 더 쌓여서 온전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안에 있는 패역을 내어쫓고 하나님의 은혜와 특별한 그 사랑에 붙들려서 살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런 특별한 은혜를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신령하고 하나님과 특별한 교제 속에서 사는 영적인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삶은 하루아침에 어떤 기적에 의해서 저절로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은 이처럼 매순간 순간 하나님과 동행하고자 하는 그런 갈망에서 비롯된 끊임없는 순종의 삶, 그리고 수시로 불순종하면서 사는 것이 훨씬 더 익숙해진 우리 자신의 본성을 날마다 쳐서 복종시키는 온전함을 추구하는 삶을 위해서 그의 삶이 하나님과의 탁월한 교제를 누리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분부하심의 말씀의 빛 앞에 자신들의 삶을 비쳐보고 그리고 어떤 것들을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며 어떤 것들을 순종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헤아리면서 여러분들이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는 이렇게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순종하고 그렇게 행함으로서 두 번째 축복은 구원의 은혜였습니다. 노아는 그 방주를 만들어서 하나님이 새롭게 재창조하실 세상에 종자들을 모두 방주 속에 들여보냈고 그리고 자신들도 그 방주에 탔습니다. 물론 노아가 이렇게 120년 동안 하나님의 명령을 가슴에 간직하고 방주를 만드는 이 일에 반항하지 않고 수종들 었을 것으로 보이는 가족들을 살펴볼 때에 그들 역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으나 그러나 성경은 모든 초점을 노아의 가족들이 아니라 노아 한사람에게 집중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노아 한사람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가족 모두를 구원하여 새로운 인류의 조상이 되게 했던 경륜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구약에서 불순종하는 사람의 대명사로 잘 일컬어지는 요나에 대해서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배를 타고 다시스로 가고 있던 사람들은 그런 풍랑을 만날만한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한사람 불순종하는 그 사람이 동승하자 다른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큰 풍랑을 만나고 모든 소유를 바다에 집어던지고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었습니다. 한사람의 불순종을 인해서 죄가 세상에 들어왔던 것을 기억해보십시오. 하나님이 한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해서 죄가 들어온 그 엄청난 죄의 세력들을 결정적으로 쳐부수실 때 한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순종을 통해서 그 일을 이루셨던 것을 여러분들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순종과 불순종은 자기 한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와 함께 하고 있는 온 가족과 교회, 나아가서는 나라, 인류와 관계된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노아 한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모든 하나님의 분부에 수종을 든 사람이 되었더니 하나님께서는 그 한사람을 도구로 하여서 그 가족 모두를 구원하여 소망이 없는 재앙의 날에 구원의 방주로 들어가게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들의 경험을 통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가정을 구원하실 때에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하시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언제나 하나님이 한 가정을 구원하실 때에는 어느 한사람을 택하셔서 그에게 은혜를 주시고 그를 순종케 하심으로 그 가족을 위한 한 알의 썩는 밀 알이 되게 만드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종종 한사람이 아니라 온 가족을 함께 교회에 나오게 만드셔서 단번에 소낙비와 같은 은혜를 주셔서 한순간에 온 가족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적도 있지만 그러나 경험적으로 볼 때 보다 더 많은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한사람을 먼저 예수 믿게 만드시고 주님의 은혜를 알게 하십니다. 자기 안에 불순종을 보게 하시고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면서 성화의 길을 걷게 하십니다.
그래서 가족들을 향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가족들을 향한 수많은 미움들을 포기하게 만드시고 오히려 그 가족들을 사랑할 수 있으리 만치 자기가 부서지게 만드시는데 그런 자기 부서짐의 전과정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이는 부서짐도 없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뭔가를 말씀하시는데 그냥 가슴이 아프고 내가 부서지는 것 같아.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래도 부족하지만 순종하려고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으니까 아픈 것이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 처음서부터 순종할 의지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은 말씀하십시오. 나는 다 흘려보내겠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닙니까?
세금 고지서가 날라 왔을 때 세금을 내려고 하는 사람은 근심을 하지만 탈세할 계획이 서 있는 사람은 하나도 근심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안 낼 것이니까. 당연하잖아요. 그러니까 한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때 주님의 뜻에 대해서 정직하게 알게 되었을 때에 그 고통스럽고 아프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 정도만 되어도 희망이 있습니다. 그 갈등을 통해서 어쩌면 그 갈등을 통해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어쩌면 불순종하겠지만 그런 마음의 작용조차 없는 사람은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무엇이? 불순종하면서 살기로 아주 뜻을 정하고 확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가족들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난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우리의 가족들이 구원받지 못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우리들이 어떻게 해야지 되는지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족들을 위해서 별로 기도도 쥐뿔도 안 하다가 어느 날 ‘온 가족 교회에 오는 날’ 하니까 가족들을 좀 잘 데리고 오라고 하였더니 어느 날 불쑥 나타나서 ‘엄마 회개하지 않으면 죽는 거야. 아빠 하나님이 화나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 단칼에 날려 버리는 거야’ 데리고 오라고 그랬지 누가 공갈을 치라고 그랬습니까? 오히려 우리가 회개하지 않을 때 오히려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을 회개하고 깊이 뉘우치고 새사람이 되면 우리가 바뀌는 것만큼 가족을 놀랍게 변화시키고 하나님이 고쳐나가십니다. 그것이 가족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본 사람들은 모두 가지고 있는 간증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금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지 보십시오. 모두 그런 간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노아를 보십시오. 한사람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니까 그 모든 가족을 하나님이 구원의 방주로 들어가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 우리 가족이 구원을 못 받는가. ‘우리 아빠가 아직 정신을 못 차려서 그렇다. 우리 엄마가 강퍅해서 그렇다. 우리 누나가 아직 심장에 철판을 깔아서 그렇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내가 먼저 우리 집안에 노아로 택함을 받은 내가 하나님이 모든 분부를 따라서 온전히 준행하는 삶을 살지 못하니까 내가 이렇게 가족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충분한 도구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의 죄와 악함을 고백하며 주님 앞에 깊이 뉘우칠 때 그때 하나님께서 오히려 우리를 노아와 같이 순종하는 사람으로 빗으시면서 우리가 빗어지는 것만큼 가족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선교도 교회 안에 사람이 붐비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큰 교회 작은 교회 요새 논쟁이 굉장히 벌어지고 있습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하면서 막 큰 교회 목사님과 작은 교회의 목사님들이 논쟁을 벌이는데 그럴 시간이 있으면 성경이라도 한 줄 더 보십시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아주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것입니다. 사람들이 영혼에 별 유익을 얻지도 못하면서 교회가 붐비는 그런 방식의 성장이 있고 그리고 사람들이 교회가 건강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성장하는 그런 것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때에 그런 건강한 교회의 성장은 누가 좌우하는가 하면 하나님 앞에 건강하게 자라가고 있는 성도들에 의해서 그런 성장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가 하나님 앞에 정말 온전히 순종해서 하나님의 깊은 은혜와 사랑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사람을 단지 교회에 데리고 오는 것만으로는 만족을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소원은 무엇인가 하면 그들이 진심으로 육신의 그리스도인의 껍질을 벗고 정말 은혜 받은 진실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온전히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예비하신 하늘의 신령한 축복과 은혜를 자기처럼 한 몸에 받으면서 살아가기 전까지는 그들을 위한 안타까운 마음이 단지 교회에 나오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이 노아를 보면서 깨닫는 것이 그것입니다. 한사람 노아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순종하니까 가족들이 모두 구원을 받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식구가 이렇게 많은데 자식들 중에 한 두 명쯤, 자부들 중 한 두 명쯤 반항을 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닙니까? 도대체 왜 매일 산에 가서 나무만 하라고 하는가 하면서 120년 동안 이 일을 우리들이 해왔는데 아직도 이 일을 해야지 되는가 하고 이 배가 정말 뜨겠는가 하고 누구 하나 이 일을 제기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닙니까? 모두 노아가 하자는 대로하면서 결국은 방주를 완성했습니다. 늙은 노아 한사람의 힘으로는 완성할 수 없는 방주였습니다. 그 위대한 일들을 이룰 때 온 가족들이 한사람 노아가 순종하니까 그 한사람의 순종이 영향을 미쳐서 가족들을 모두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바로 그런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사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한사람의 죄를 통해서 흘러 들어오게 된 이 불순종과 패역의 죄를 짊어지고 순종하라고 명령하시니까 예수님께서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 십자가를 지고 당신 자신이 완전히 복종하시니까 결국은 우리들을 위해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대충이 아니라 온전히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정도 구원하시고 그리고 교회의 선교 적인 영향도 넓혀 가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전도합니다. 그런데 아주 신앙이 부실한 사람이 전도를 했는데 그 사람을 능가하는 놀라운 은혜를 전도 받은 사람이 받아서 그래서 놀랍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경험적으로 보면 상당히 많은 경우에 전도한 사람이 교회만 데려다 놓으면 모를까 그 사람이 계속 교제를 가지면 자기하고 비슷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아주 그렇게 형식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떻게 전도도 아닌 하나 데리고 왔는데 꼭 자기 같은 사람을 만듭니다. 그런데 좋은 신자가 전도하면 그와 교제를 가지면 반드시 자기와 같은 사람을 만듭니다.
그렇게 하니까 한사람 한사람이 순종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면 그 사람들은 선교를 해도 마지막 목표가 그렇게 온전히 자기처럼 순종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친교 속에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을 보는 것, 단지 남전도회 여전도회 회원이 되어서 회비 내고 야유회에 가는 것만으로 만족이 안 되는 것입니다. 정말 와서 진실한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사는 그런 아름다운 성도가 되는 그것이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모든 순종하는 사람들이 그의 대해서 걸고 있는 가장 간절한 기대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성경에 이런 진술을 보면서 우리들이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나의 불순종은 또 많은 사람들을 불순종하게 만듭니다. 나의 순종은 많은 사람들에게 불순종을 버리고 순종의 길로 들어서도록 만들고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 은혜 속에서 살도록 그렇게 촉진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바로 이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으면서 살아야 할 세상이 우리 눈앞에 보이지 않습니까? 노아의 때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이 교회라는 방주를 보고 어리석다고 생각을 하고 매일매일 자기를 죽이면서 진실 되게 보이지 않는 교회를 지어 가는 우리들의 신앙 생활을 비웃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주께서 오시는 그 날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의 그 불같은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하나님의 교회, 보이지 않는 교회에 좋은 회원이 되는 것 이외에 무슨 희망이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아름다운 땅을 주시면서 그곳에 들어가기만 하면 순종하면서 살도록 당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를 우리의 땅으로 주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이제 들어간 우리 모든 사람이 그 안에서 순종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순종하는 우리의 행위를 통해서 우리의 많은 가족들이 또한 아울러 구원받게 되기를 하나님께서 간절히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백 사람의 형식적인 신자의 영향력보다는 한사람의 진실한 신자의 영향력이 탁월하다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진리입니다. 하나님 앞에 대충 살아가는 그런 그리스도인들의 수많은 무리보다는 하나님을 온전히 순종하는 한사람의 그리스도인을 통해서 당신의 더 크고 위대한 일들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이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하고 구원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해서 여러분들도 주님의 마음에 노아처럼 기쁨이 되는 성도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2.아브라함: 두 가지 순종
“이에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 세였더라”(창12:4)
구약에는 삼대의 조상이 나옵니다. 제일 처음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첫 번째 사람이라면 홍수로 온 땅을 진멸 하시고 새로운 조상이 되게 하신 노아는 그 두 번째 조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설교하려고 하는 이 아브라함은 창조나 홍수의 심판을 통해 새로운 시조가 된 사람은 아니었지만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의 선택된 백성의 조상이 된 영적인 조상인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성경이 오늘 기록하고 있고 또 오늘 우리들이 살펴보려고 하는 바입니다.
아브라함은 원래 그 이름이 ‘아브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갈대아 우르’라고 하는 곳에 살고 있었는데 그곳은 아주 번창한 곳이었습니다. 노아가 주전 3000년대의 사람이고 아브라함은 주전 2000년대의 사람입니다. 주전 22세기경이라고 여겨집니다. 그 노아의 생애와 아브라함 사이에 그 유명한 창세기 10장에 바벨탑 사건이 있다고 믿어집니다.
사람들이 흩어짐을 면하고 자기의 이름들을 온 지면에 내기 위해서 하늘에까지 닿을 수 있는, 높은 사람들이 오르내릴 수 있는 탑을 쌓고자 했습니다. 그 높이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가 없으나 감히 하늘에까지 닿을 정도로 탑을 쌓고자 하고 그 탑을 보면서 사방에서 그 탑을 건축한 자신들의 이름을 알게 하자고 했으니 그 탑의 높이가 만만하지 않았으리라고 하는 것은 알 수 있고 그렇게 높은 탑을 쌓기 위해서는 당시에 대단히 건축술이 뛰어났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이 짐작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갈대아 우르라고 하는 것은 그 당시 바벨론 문명의 중심지였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지였습니다. 인류 고대 문화에 발상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곳에 문명의 발달의 정도를 예측하게 하는 발굴 물들이 20세기에 속속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잠시 그 부분들을 연구해본 적이 있습니다만 아주 충격 받을 정도로 놀라웠습니다.
사실 100년 전까지만 해도 성경을 굳게 믿는 보수적인 학자들 가운데도 모세 시대에 글자가 있었겠는가 라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만 아브라함의 시대인 주전 22세기경에 이미 글자가 나무나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라고 하는 실제적인 증거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몇 개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어마어마한 문서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종이가 없었기 때문에 진흙과 같은 토 판에 조개 껍질이나 혹은 나무 가지 같은 것으로 찍어서 만든 여러분들이 학교에 다닐 때 배운 설형문자의 글자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잠시 공부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깜짝 놀랄 정도입니다.
이미 벌써 아브라함의 시대쯤에 벌써 물건을 사고 받은 영수증, 그리고 재판에 집달리의 통고문, 그리고 연애편지, 그리고 아버지와 자식 사이에 주고받은 서신들 이런 것들이 어마어마하게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정도로 문화가 발달되었으니까 문명은 이미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당시 갈대아 우르는 대부분 이층으로 된 집에서 사람들이 살았고 살림집은 이층에 있었고 빨래터나 부엌 같은 곳은 대게 일층에 있었는데 한 집에 보통 열 개내지 스무 개의 방을 가진 집들을 짓고 살았으니 그 건축술이나 이 문화 생활의 정도를 짐작하게 만들어줍니다. 더욱이 그런 아주 발달한 것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토 판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들은 기하학적인 공식들, 그리고 구구단, 그리고 생활 규칙 같은 것 이런 것들에 대한 아주 방대한 자료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얼마나 그 시대의 문화가 찬란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갈대아 우르의 영적인 상황은 문명처럼 그렇게 찬란하지를 않았습니다. ‘우르라고 하는 것이 아마도 빛일 것이다. 혹은 열, 이런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래서 아마 태양신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우르’라고 되어 있는 이 단어의 히브리 말이 ‘이르’라고 있는데 그 글자가 거의 같습니다. 히브리말에서 이르는 빛입니다. 그래서 이 우르가 아마 그런 단어일 것이라고 추측을 합니다. 그 히브리어와 고대 셈족의 언어에서 우와 이는 서로 이렇게 쉽게 교차를 하는 것을 고려해본다면 그 추측도 역시 상당히 근거 있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하여튼 이층을 짓고 살았는데 이층에는 거의 예외 없이 모든 집에 우상을 섬기는 신당을 모셔두었다고 하니 그들의 우상 숭배를 향한 열심은 참 탁월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제 이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고 하란을 거쳐서 가나안으로 가게 됨으로서 믿음의 조상, 영적인 조상으로서 성경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성경 창세기는 1장부터 50장까지 있는데 2부로 나뉘어있는데 1장부터 11장까지가 1부이고, 12장부터 40장까지가 2부인데 1부와 2부의 비율이 약 3대 1정도 됩니다. 다시 말하면 2부의 주인공이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는 한 가정의 역사를 창세기를 통해 기술하고 그 가정의 역사를 통해서 출애굽기로 넘어가면서 이제 한 가정이 한 민족이 되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아브라함은 정말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인물이고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의 진정한 시작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그런 사람입니다.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내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하나님의 분부를 받은 것이 갈대아 우르가 아니라 하란이었습니다. 하란에서 그 명령을 받게 되었는데 하란은 갈대아 우르와 가나안 사이에 있는 교통 요충지로서 번성한 도시였고 여러 지역으로 통하는 이 교통이 한 곳에 모이는 그런 심장부와 같은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 하란에서 사람들이 머물면서 쉬기도 하고 하면서 다음 목적지를 향해서 떠나가는 그런 동리였습니다.
우리가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은 사실인데 어떻게 해서 갈대아 우르를 떠났는지에 대해서는 상세한 기록이 나오지 않고 다만 하란에서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가나안을 향해 가는 것만 나옵니다. 어떻게 해서 그 아버지 데라와 함께 거기에서 그 좋은 도시, 번영하는 도시에서 떠났을까, 그리고 타관 땅에 왔을까 하는 것입니다.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가장 그럴싸한 추측은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무엇인가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에 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깊은 감화를 받았을 것이고 그 신앙의 감화는 아버지 데라와 함께 그 갈대아 우르를 떠나도록 만들었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문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럼 떠났으면 곧바로 가나안으로 가지 왜 거기 갈대아 우르를 떠난 사람이 하란에 머물렀을까 인데 이것도 역시 성경에 상세히 기록이 나와 있지는 않지만 사도 행전 7장에 그 아비가 죽자 하란을 떠났다는 기록으로 볼 때에 틀림없이 하란에 머물렀던 이유는 연로한 아버지 데라 때문이었을 것이고 거기에서 이제 더 이상 동행하기가 힘든 연로한 아버지 데라를 봉양하는 문제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길은 불행히도 우리 혼자 달음박질하는 길이 아니라 수많은 상황이 우리에게 잇대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족이나 혹은 우리와 연관된 많은 사람들이 우리와 관련이 되어 있고 그래서 우리들이 때로는 우리의 결심과 각오가 있어도 상황이 우리의 발목을 붙잡아서 그렇게 주님께서 명령하고 분부하신 길을 걸어가지 못하게 하는 그런 어려움이 우리에게 언제나 있게 마련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로 이런 어려움, 이런 곤경을 우리와 같이 그렇게 당했던 사람이고 그래서 하란에 상당 기간동안 머물러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아브라함이 이제 이 데라를 여위고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께로부터 분부를 받아서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올 때 가졌던 그 목적지를 향해서 다시 출발하는 광경을 오늘 우리들이 읽은 본문이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오늘 여기에서 살펴볼 것은 하나님께서 그 아브라함에게 베풀어주신 그 축복의 약속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는 이제 가족이 많게 되는 것이 그것이 곧 한 집안의 번영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노동력과 그 다음에 자기 가족을 지킬 수 있는 완력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식이 많고 손이 번성한 가정은 항상 당당하고 그리고 잘 살았습니다. 그리고 손이 번성하지 못한 집안은 늘 쇠약하고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런 축복을 주시고 또 그 이름을 아주 창대 하게 만들어서 그래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아브라함과 그 아브라함의 집, 그리고 아브라함을 무시할 수 없도록 만들어주시겠다고 하는 놀라운 약속, 그를 통해서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는 그런 놀라운 축복의 근원이 될 것을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아브라함은 이런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그 갈대아 우르에서 단지 우상이나 만들며 섬기면서 살아가던 그 쓸모 없는 사람을 불러서 이런 믿는 자들의 축복의 근원으로 삼으신 중요한 비결 하나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이 순종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한 나라를 움직이는 다윗과 같은 제왕도 아니었고 커다란 말씀의 권능으로 그 시대의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던 영력이 있는 예언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한 시대를 움직여놓은 그런 장수도 아니었고 제왕도 아니었고 예언자도 아니었던 평범한 가정의 가장을 사용해서 하나님이 이제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셔서 그를 이스라엘 백성의 그런 영적인 아버지가 되게 하신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커다란 섭리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으로 세우셔서 조상으로 만드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심, 그리고 하나님의 전적인 구원의 은혜라고 하는 사실을, 심지어 로마서조차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측면에서 본다면 아브라함에게는 한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었습니다. 한 나라를 움직이는 제왕이나 군인, 그리고 시인이나 혹은 훌륭한 재산가도 아니었지만 그러나 이 사람은 독특한 특징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보십시오. 완전히 타락하고 캄캄한 어두운 역사에서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준행하는 의로운 사람 노아를 만나셔서 이제 역사를 이어가시고 그 위에 긴 세월이 지난 후에 비록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이나 섬기고 있던 사람이지만 하나님이 부르실 때 그 부르심에 기꺼이 순종하는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을 통해 점과 점 사이를 이으면서 역사의 직선들이 달음질치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머리를 이으시면서 한 교회에 역사를 이어가시고 한 가정의 변화의 역사를 주도하십니다. 순종하는 지도자들을 통해서 한 나라의 역사를 바꾸시고 세계 역사의 판도를 바꾸어 나아가십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순종하는 사람들을 고귀하게 생각하십니다. 사람의 많은 학식이나 빛나는 그런 업적이나 싸움에 능한 무력보다도 당신을 온전히 의뢰하고 순종하는 이 믿음을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아브라함이 순종하는 믿음을 가졌다” 그랬는데 그 순종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1절은 두 가지를 말하고 있는데 하나는 “떠나라”고 하는 명령에 순종한 것과 또 하나는 “가라”고 하는 명령에 순종한 것, 이 두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당시의 문맥에서 본다고 할 것 같으면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는 것은 거의 죽음을 방불케 하는 형벌이었습니다. 당시는 농경사회요, 혹은 목축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회였고 그리고 함께 핏줄을 중심으로 얽히고 설 켜서 살아가던 그런 시대였습니다. 거기로부터 떨어져 나온다고 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외국에 가보면 한인들은 항상 약속이나 한 듯이 한 동네에 모여서 삽니다. 어디에 가든지 한인 촌이 있고 그렇게 모여서 삽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본토를 떠났어도 그래도 사람들을 의지하면서 사는 삶이 타관 땅에서 외톨박이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훨씬 쉽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이제 본토를 떠났어도 함께 핏줄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서 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시대의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고 하는 이 명령은 훨씬 더 심각한 명령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순종했고 성경은 그것을 믿음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작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고 하는 계시를 주신 것은 사실 보시는 바와 같이 우르가 아니라 하란이었습니다. 물론 우르에서도 유사한 명령이 주어졌을 것이라고 우리는 믿지만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우르가 아니라 하란에서 이 명령을 받았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얼마나 잔인한 명령입니까? 이제 오랫동안 피붙이들과 함께 어울려 얽히고 설키고 살았던 그 자신의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났고 그래서 하란에 도착을 했습니다. 얼마 동안 거기에 머물렀는지 모르지만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고 그곳에서 이제 새로운 생활을 시작을 했고 아버지 데라 때문에 떠날 수 없이 억지로 머무르기는 했지만 그러나 거기에서 사람들을 사귀면서 자기 나름대로 여러 가지의 생업을 꾸려가면서 삶의 터전을 이어갔을 것입니다.
지금도 부산에 내려가면 이북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전쟁이 나니까 그냥 기차를 타고 피난을 왔다가 거기 부산에 있게 된 것입니다. 올 때는 ‘전쟁이 끝나면 꼭 돌아가리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전쟁이나 피하는 것이지 거기 영원히 사는 것은 아니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만 살고 보니까 거기가 고향이 되고 말았고 거기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다른 곳으로 갈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이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하란은 바로 6.25때 피난 나온 이북 사람들에게 있어서 부산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이제 정붙이고 살만한 곳이었는데 하나님의 혹독한 명령이 주어졌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 본토는 이미 떠났고 이제 더 나아가서 친척들과 절연하고 아비와 함께 나누었던 모든 추억이 서려져있는 하란 조차도 결별하고 하나님이 약속해주신 곳으로 계속 가야만 했습니다. 이 얼마나 어려운 명령이었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갈대아 우르와 하란을 떠나고 나면 무슨 어마어마한 번영이 가나안 땅에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의 역사를 보면 아시지만 아브라함이 약속을 따라서 주님이 약속으로 주신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무슨 일을 만나게 되었습니까? 견디기 힘든 기근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약속의 땅에도 그런 기근이 온다는 말인가. 정답은 약속의 땅에도 기근이 올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그 시대에 생겨난 것인데 히브리라고 하는 뜻은 히브리말로 “이브리”인데 이브리는 무엇인가 하면 “아바르”라는 동사에서 왔는데 아바르는 “건너다”입니다. “이브리”는 무슨 뜻인가 하면 “건너온 사람들” 그런 뜻입니다. 강을 건너온 사람들, 그러니까 이쪽에서 하란 쪽에서 가나안을 건너기 위해서 유프라데스 강을 건너게 되는데 그 강을 건넌 것을 가리켜서 이제 히브리 강을 건너온 민족들이다. 그래서 히브리라는 이름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정도로 나그네 세월을 살게 되었습니다.
언뜻 보면 모순인 것처럼 보이는 성경의 이야기가 하나 나오는데 히브리서 11장 8절에 보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을 때에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으며....” 사실 창세기의 기록으로 보면 이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두 성경의 진술은 모순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혹은 하란에서 자기가 가야할 곳이 아주 분명하게 말해서 가나안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가나안이라고 하는 사실을 안다고 해서 그가 가야할 곳을 알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목적지는 정해졌지만 그러나 그 가는 길이 어떤 길인지 알지 못했고 그리고 그 넓은 가나안 땅 중에서 어느 땅에 자신이 정착을 하게 될 것인지도 구체적으로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는 것은 오직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그렇게 분부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과 그리고 그렇게 순종해서 그가 가나안에 이르게 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라도 하는 두 가지 단순한 믿음 이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가나안 땅을 알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가 성경이 그렇게 가나안 땅을 향해서 나아갈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 라고 묘사하는 것이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오늘도 아브라함을 순종하는 사람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두고 온 고향은 가야할 고향보다 훨씬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말하기를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게 되어서 두고 온 그 본향을 그리워하지 않게 되었다. 돌아갈 수 있었는데도 그 본향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보다 나은 본향을 사모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원한 성이라,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생겼던 하나님과 동거하는 신앙의 세계의 도성에 대한 천국의 소망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을 버리고 옛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게 만들었다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아무튼 아브라함의 순종의 이 본질은 둘로 나뉘어지는데 하나는 “떠나라”는 명령에 대한 순종이고 하나는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브라함에게 먼저 떠나라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보면 가혹할 정도로 힘든 명령을 아브라함에게 주셨습니다. 이상하게도 하나님께서는 복의 근원이 되고 축복을 주실 것이라고만 말씀하시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떻게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는 사람의 지적인 판단으로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게끔 친절하게 설명해주시지는 않으셨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서 내 명령에 어떻게 해서 필연적으로 내게 복을 받게 해주실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셨다고 할 것 같으면 아마 더 많이 순종할 수 있었을 텐데 하나님이 가르쳐주시지를 않으셨습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하다가 하나님께 응답을 받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어려움을 만났을 때에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해결해주실 것이라고 하는 강한 응답이 옵니다. 그러나 응답을 받고 기뻐하는 우리에게 ‘어떻게 된다는 말이야?’ 하고 누가 물어보면 대답할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 평강과 확실한 믿음을 통해서 응답은 받지만 어떻게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는 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구체적으로 알려주시지 않고 약속만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끝까지 시험하시고자 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무튼 첫 번째 명령인 이 “떠나라”고 하는 이 명령을 주시는 것입니다. 받아들이기 힘든 가혹한 명령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 명령을 주십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이 있는 그곳에서는 하나님이 그를 축복해주실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혈연과 함께 그것을 끊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는 그 관계를 통해서 끊임없이 우상 숭배의 죄들이 흘러 들어왔고 그는 어떤 식으로든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의 조상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복 주시기에 앞서서 먼저 떠나라고 명령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역시 신앙의 길을 걸어가면서 종종 이렇게 떠나야 할 때가 필요합니다. 때로는 우리들이 비록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때로는 일상적으로 계속해서 이어오던 일상적인 신앙생활에서 한번 떠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제껏 열심히 하던 일들에 손을 놓고 하나님만을 대면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들이 바쁘고 분주하고 수많은 일들이 우리를 부르고 있지만 종종 우리는 그 일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는 사람처럼 훌훌 떨쳐버리고 그 일로부터 떠나서 일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 한 분을 대면할 시간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정직하게 자기의 모습을 살펴보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자신의 신앙의 모습을 돌아보는 일이 필요합니다.
커다란 죄나 인생의 위기를 만나지 않아도 우리는 종종 특별히 작정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며칠 작정해서 특별히 금식하면서 자기의 마음에 묻은 더러운 때들을 닦아내고 주님의 눈빛 앞에 비친 자기 자신의 모습을 헤아려보는 일은 영혼에 건강과 그리고 순종하는 삶을 위해서 옛 삶으로부터 옛 자아의 집요한 추적으로부터 떠나는 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하나님만을 대면하는 고요한 시간과 그런 기회들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필요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마음은 너무나 많이 세속적인 것에 의해서 점령되어 있고 이른 아침 눈뜨는 시간부터 깊은 밤 잠든 시각까지 우리의 마음은 온통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우리는 잠시 이 세상이 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 지이기는 하지만 더 좋은 신앙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종종 우리는 우리가 오래 동안 친숙하게 살아왔던 삶의 환경으로부터 탈출하고 떠나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형식적으로 오래 동안 굳어왔던 그런 명목상의 신자의 생활과 결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집요하게 추적해오는 옛 자아의 추격으로부터 결별해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우리의 오래 동안 계속되었던 우리의 삶에 방식과도 결별을 선언해야 하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들이 오래 동안 사귀었고 정들었던 사람들과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작별하기도 해야 합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떠나는 일들이 없이는 우리가 결코 순종하는 삶을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이처럼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이 세상과 분리시키시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들로 구별하기 위해서 속된 세속으로부터 그들을 작별하게 하셔서 정결하도록 만드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제일 처음 여러분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로 들어오기 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이 세상 사람이오 약속을 향해서는 외인이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한동아리가 되어서 그들처럼 생각하고 그들처럼 먹고 그들처럼 살았습니다.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부인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즐거움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며 살았던 사람들이 바로 여러분들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세상을 너무 많이 사랑했고 그 세상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어느 순간에 은혜로 십자가의 복음을 알게 하시고 그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하신 그때에 여러분의 마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그 은혜로 구원을 받고 보니까 여러분들은 몸은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사실은 여러분들의 시민권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고 그 본향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아브라함이 떠났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길을 걸어가며 발견하게 된 믿음의 새로운 본향을 발견하고 나서는 두고 온 옛 본향에 대한 그리움을 잊을 수 있었듯이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우리가 사실은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 창조된 사람이라고 하는 것과 그리고 우리의 달려갈 길을 다 마친 인생을 살고 난 후에는 우리가 우리를 보내신 아버지의 곁으로 돌아갈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뒤에는 이 세상에 살아도 이 세상에서 우리가 나그네라고 일컬음을 받는 것을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고 하란을 떠날 때에 그곳을 떠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었던 이유이고 또 그 신앙의 본질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브라함과 같은 축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구원받지 못한 가정의 구원의 씨 종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렇게 주님께 구원을 받고 가족들의 구원을 위한 한 씨앗이 되기를 원하고 여러분 때문에 구원이 여러분들의 가정에 모두 이르기를 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서 깊이 변화를 받고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받아서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넘치는 복을 받으며 이 세상에 살아서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의 아름다운 신앙의 본을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남기고 싶어합니다. 이런 소망이 없는 사람들이 여러분께는 없을 것입니다. 고난과 어려움이 와도 그것을 신앙으로 극복하고 진실한 믿음의 사람으로 살았다고 하는 칭찬을 모든 사람들에게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여러분입니다. 그러나 그런 축복을 여러분들이 아무리 받고 싶어해도 하나님께 먼저 해야할 일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오래 동안 정들었던 옛 삶으로부터 결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의 발목을 잡고 더 이상 진전할 수 없도록 만드는 옛 자아의 추격으로부터 작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제는 이 땅에 살고 있으나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오 하늘나라에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이며 따라서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러나 땅에 것들을 위해서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신령한 것들을 위해서 살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화목제물이 되시기 전에 주님은 당신의 본향인 하나님의 나라를 떠나서 이 세상으로 오시는 그 떠남의 순종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영광과 경배가 기다리고 있는 천상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신 그 떠남의 순종이 있었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의 구속주가 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도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쉼 없이 순종을 배워 가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말하기를 “그가 아들이라도 고난을 통하여 순종을 배웠다” 그랬습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셨음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받으시면서 까지 순종을 배우셨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이 순종을 배워야 하는 사람들입니까?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보다 힘든 것은 자기가 사랑하는 옛 삶과 결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와 하란에서 작별시켜서 구별해내시고 그렇게 떠나게 하심으로서 만민의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한번 잠시 아브라함의 처지가 되어서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오래 동안 정들었던 갈대아 우르를 떠났고 아버지는 이제 마지막 자신의 정신적인 의지였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75세였습니다. 떠나온 고향은 돌아갈 수가 없고 주님께서 지시해주시는 본향은 어떻게 가야할지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지경에 있었는데 거기에서 마지막 정신적인 의지였던 아버지마저도 돌아가셨습니다. 부모님들이 살아 계신 동안에는 죽음이 실감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모님들이 돌아가신 후에는 죽음이 바로 자기 목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에는 그분들이 죽음의 방패가 되어주시는 것처럼 든든하지만 그러나 모두 여위고 나면 이제는 내 차례다 라는 두려움이 엄습하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사랑하는 본토도 떠났고 친척도 떠났고 아버지마저도 돌아가셔서 마음 둘 곳 없는 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 너는 내가 지시하시는 데로 가라 분부하셨습니다. 이제 모두 잃어버리고 떠나고 이제 마지막으로 타관 땅에서 정붙이고 살 수 있을 정도로 조금 정이든 뿌리를 내린 하란까지 마지막 작별하도록 주님이 분부하신 것입니다. 눈물로 보따리를 싸고 하란을 떠나면서 오늘은 어느 곳으로 가야할지 갈 바를 알지 못하며 마지막 하란을 떠남으로서 자기가 살았던 메소포타미아와 작별하는 이 아브라함의 뒤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그가 이제 의지할 분이 누가 있었겠습니까? 그가 이제 무엇을 바라보고 갈 바를 알지 못하는 그 길을 걸어갈 수 있겠습니까. 본토도 없고 친척도 없고 아비도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이 어깨에 그 모든 가족들의 행로에 책임을 지고 떠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얼마나 가난했을까요. 아마 여기서 아브라함은 절대적인 외로움을 경험했을 것이고 그리고 여기에서 아브라함은 이제껏 여러 차례 하나님을 만나기는 했지만 그러나 여기서 아브라함은 결정적으로 하나님만을 온전히 바라보고 그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의탁하는 그 순종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배우게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는 갈망이 있는 의뢰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런 복된 가난한 마음은 떠나는 결단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고 믿는 것들이 너무나 많고 의지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 없이도 넉넉히 살 수 있는 사람처럼 행동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만약에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고 할지라도 하란에서 마지막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일 것이다’ 생각하며 하란에서 마음을 붙이고 이웃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면서 주저앉았더라면 그의 이름을 성경이 이렇게 길게 기록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하나님에게 한때 부름을 받았으나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체로 마친 수많은 사람들 중에 한사람이 되어서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떠나지 못해서 불순종함으로 역사 속에서 잊혀진 사람 중 그 수많은 사람들 중 한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떠나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떠나고 자신이 어떻게 살지를 알지 못했으나 그는 결단하고 떠났습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 많이 의뢰했고 자기가 지금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하란에 머물며 누릴 수 있는 안락한 삶보다는 주님이 주신 그 명령에 순종하고 고난을 통과한 후에 받을 수 있는 축복이 더 크다는 것을 아브라함이 굳게 믿었기 때문에 눈에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어도 하나님의 약속 하나, 분부 하나만을 붙들고 그는 마지막 정들었던 하란 땅을 결별하고 가족들과 함께 떠났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살게 하시는 동안에 당신의 사람을 만드시고 당신에게 온전히 매인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때로는 가혹한 명령을 주십니다. 그래서 자기가 사랑하는 것들과 작별하게 하시고 그리고 자기가 이제껏 붙들고 의지해왔던 것들로부터 버림을 받게 하시거나 결별하게 하십니다. 그것은 우리들을 괴롭게 하심이 아니오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분이 하나님 한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시려고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옛 세상, 옛 삶, 그리고 죄악 된 삶으로부터 우리를 결별시키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이렇게 아브라함의 축복의 자리로 부르는지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 한사람을 불러서 여러분의 가족에 축복의 근원을 삼기를 원하시고, 여러분 한사람을 불러서 이 시대의 교회를 일깨워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복의 근원으로 삼기를 원하시고, 시대를 돌이켜 주님 앞으로 돌아오는 훌륭한 도구가 되게 하고 싶어하십니다. 부름 받은 사람은 많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이러한 축복을 유업으로 받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왜냐하면 부름은 받았으나, 한때는 하나님께 순종했으나 끝까지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용기를 내어 갈대아 우르를 떠났으나 하란에서 주저앉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의 근원으로 부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란 땅에서 아주 야비한 삶을 살아가는 사실상의 불신자와 다름이 없는 사람들이 또한 한때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었습니까?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배는 저 하늘에 있네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오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우리의 믿음에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떠나도록 명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세상을 떠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고 옛 자아와 결별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옛 습관과 옛 사람과 작별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도 그렇게 옛 생활, 옛 삶, 그리고 옛 세상과 작별하며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만 하나님의 축복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겉으로 보기에 그럴듯한 교회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오늘 이 시간에 내가 떠나지 못하고 있는 그것이 무엇인가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고 거기가 갈대아 우르요 또 하란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거기에서 떠나서 용기를 내어 결별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축복의 근원으로 삼으셔서 주의 놀라운 은혜를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두 번째로는 “가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것이 아브라함을 특별하게 여기신 두 번째 이유였습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가나안 땅이라고 하는 것은 알았으나 그 땅은 아브라함이 가본 곳도 아니었고 지금처럼 통신이 발달해서 소상하게 그 지방의 형편을 알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순종하며 하나님께서 지시해주신 땅으로 갔습니다. 살기 편한 곳으로 말하자면 갈대아 우르였고 그리고 번영한 곳으로 말해도 갈대아 우르였습니다. 아마 그 당시 가나안과 갈대아 우르의 비교는 한국에 아주 한적한 시골 도시와 그리고 뉴욕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의 문화적인 격차가 나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가나안 땅은 그 시대로 말하자면 불모의 땅이었을 정도로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현격한 생활수준의 차이가 나는 곳이었습니다. 가나안에서 누가 아브라함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애처롭게도 흉년 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주께서 주신 그 땅 가나안을 사모하고 그 곳으로 가기를 애를 썼던 이유는 거기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주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을 때 주님이 우리를 불러주시는 사명의 땅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불러주신 우리를 부르신 분명한 사명에 터전이 있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분명한 믿음 생활에 목표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항상 행복합니까? 예수를 믿고 주님을 믿으면서 살아갈 때 우리가 항상 즐겁습니까, 항상 행복합니까, 항상 맑은 날만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을 믿으면서 이 험한 세상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참 자녀로, 참 제자로 살아가는 그 길은 그렇게 간단한 길이 아닙니다. 때로는 어려움이 있고 고난이 있습니다. 특별히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물결이 치면 물결이 치는 대로 세상의 풍조에 떠밀려서 살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인식하고 그 사명을 인생의 존재의 이유로 삼으면서 살아가고자 하는 분명한 삶의 터전과 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 경우에는 더더욱 그들의 삶은 평안하고 안락한 것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고 말씀으로 변화를 받고 그리고 진정으로 순종하는 하나님의 일군이 되기 위해서 우리들이 걸어온 인생의 길을 돌아보십시오. 맑은 날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대학원을 졸업할 때가 되었을 때 그때 저는 궁금했습니다. 이제 이 대학원을 졸업하고 내가 사역자의 길로 들어섰는데 한 10년 후에 내가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한 15년 후에 난 어떻게 되어 있을까? 한번 살짝이라도 사진 한 장만 보여주시면 참 좋을 텐데. 그런데 보여주시지 않으셨습니다. 확실한 것 하나는 지금은 가난하고 고통스럽게 사역의 길에 첫 발을 딛지만 나를 불러주신 이가 주님인지 알고 징검다리를 건너는 마음으로 돌 하나 밝고 돌 하나 디디며 건너가노라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하시고 싶으셨던 그 상황, 한복판에 내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있게 되었습니다. 만족하지도 않고 그리고 부끄럽기 짝이 없는 모습이지만 그러나 그때 그렇게 한 장의 사진을 보기를 궁금했던 그 모습이 오늘 이 모습이라는 사실을 보면서 전 놀라운 감회가 교차합니다.
어제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 또 한번 15년 뒤, 그때 이제 내가 서서히 사역의 날개를 접어야될 때인데 그때는 내가 어떻게 되었을까, 그때에는 내 모습이 어떨까? 하나님 사진은 그만두고 필름이라도 좋으니 하나만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그 목표를 놓고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응답되지 아니하리라고 하는 것을 압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못해요
주님 가신 진리의 길
그렇게 보기를 원해도 보여주시지 않았습니다. 항상 선명하게 마음에 다가오는 주님의 생각은 이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은 너의 분깃이 아니다. 그것은 나만 알면 된다. 너는 중요한 것은 내일이 아니다. 모레가 아니라 오늘 나와 동행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작은 일이나 큰일이나 내 뜻에 순종하고 그렇게 살아가라. 그러면 그 그림을 만드는 것은 나다. 내가 만든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면서 우리의 인생을 이끌어 가십니다. 이게 어디 저만의 경험입니까? 정말 알고 싶습니다. 어떤 때는. 내가 몇 년쯤 더 살다가 인생의 날개를 접을까. 그리고 몇 년쯤 더 수를 누리다가 하나님의 안식의 품으로 들어갈까. 그리고 1-20년을 더 살면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정말 주님에게 보탬이 될까. 그리고 이렇게 눈물을 흘리며 한길 한길을 걷노라면 마지막에 이 교회는 그리고 여러분들은 어떻게 될까? 너무너무 알고 싶습니다. 한 장의 사진이라도 스치듯 이라도 한번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한번도 꿈에라도 보여주시지 않습니다.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은 미래의 꿈이나 생각에 대한 호기심 그것을 보고 들뜨는 마음보다 하나님이 가지시는 것은 오늘 하루의 삶, 오늘 하루 주님께 순종하는 하루하루의 인생이 구슬처럼 엮어져서 그래서 아름다운 우리의 인생의 목걸이를 만드는 것입니다. 바늘 한 땀 한 땀이 이어져서 천이 엮어져 아름다운 옷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우리 하루하루의 삶, 그것이 엮어져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런 인생의 계획들을 드러내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기대를 바라보면서 우리 안에 얼마나 불순종하고자 하는 악한 욕망과 하나님을 거스르고자 하는 강한 경향성들이 우리를 지배하고 하나님보다 그것을 더 순종하면서 살아가는가 하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순종하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성을 가진 사람들이 어떤 일에 있어서 결단을 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뼈마디 하나를 꺾는 것보다 훨씬 고통스러운 일인 것입니다. 그만큼 순종이 힘들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서도 깊은 은혜 속에 들어가서 변화되지 않은 우리의 아직 고쳐지지 않은 패역들은 우리로 하여금 순종하는 아픔이 있는 삶보다는 불순종한 평안한 삶을 택하도록 수시로 우리들에게 강요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익숙해진 우리의 옛 삶으로 돌아가게 하고 하나님 없이 살아가고 세상과 짝하면서 살던 옛 자아와 어울리면서 살도록 우리를 촉진하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들은 다시 한번 눈을 들어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건지신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받을 때에 우리에게 주셨던 삶의 푯대가 무엇인지를 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끝까지 가지 못해서 중간에 주저앉은 순례자는 차라리 그 순례의 길을 떠나지 못한 많은 사람들보다도 훨씬 그 처지가 불행합니다. 그들은 정든 고향도 잃어버렸고 다시 돌아가게 될 고향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본으로 주신 순종의 모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분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그 천상을 떠나셨을 뿐만 아니라 육체를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온갖 결핍과 고난 속에 사시면서도 그분의 눈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가라고 지시하신 한가지의 사명을 향해서 언제나 빛났습니다. 결핍과 가난, 고통과 배신, 그리고 핍박이 그분 주위에 언제나 있었으나 그러나 그런 것으로 인해서 약해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 그것은 당신이 사명의 길을 향해서 걸어가는 순례의 여정이라고 하는 사실을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마음을 두는 사람들은 늘 세상에 대한 집착을 갖습니다. 하늘나라에 마음을 둔 사람들은 언제나 하늘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아브라함은 순종하되 이처럼 사명의 길에 대해서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고 지시해주시는 그 분부에 대해서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였으나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눈에 보이는 육신에 판단을 믿고 의뢰하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지금은 고통스러워도 후일은 반드시 축복이 되리라고 하는 굳센 결단과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쓰러지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고 혹은 달려오기도 하면서 우리의 갈 길을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뒤돌아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것들뿐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들이 후회는 접어두고 이제 뒤에 걸어온 우리의 신앙의 길이 부끄러울수록 그 부끄러운 우리의 신앙의 길을 조금이라도 만회할 수 있는 것은 이제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에 남아 있는 우리의 인생의 길을 새롭게 사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불순종으로 일관하였던 그 길을 이제는 순종함으로 걷고 예전에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지 않고 하란 즘에서 주저앉았던 반쯤 순종했던 그 불순종을 돌이켜서 오늘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주님이 지시해주신 땅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는 아브라함과 같이 그렇게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무엇 하나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 있습니까? 재능에 있어서나 우리의 소유에 있어서나 이제껏 살아온 우리의 신앙의 발자취에 있어서나 우리 주님께 내세울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그래도 드릴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재능이 있는 사람, 물질이 있는 사람, 그리고 직분을 가진 사람이라도 순종하지 아니하면 그들 중 어떤 것도 주님의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부자가 와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십자가의 은혜를 알고 우리를 위해서 죽기까지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워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의 사랑에 사무쳐서 자기도 순종하며 살기를 결심해보십시오. 그의 많은 소유는 주님을 위해 훌륭하게 섬기게 될 것이며 많은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주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결심할 때에 그의 많은 재능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훌륭한 도구가 됩니다.
매일매일 날마다, 날마다 주님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순종하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우리 모두 불분명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푯대는 분명하고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죽지 않고 여기에 살려두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마른 뼈와 같은 신앙의 생활을 종식하고 인격적인 주님을 만나서 십자가의 사랑에 감화를 받도록 만드신 하나님의 계획이 희미할 수가 있겠습니까? 얼마나 분명합니까?
살아있는 동안 우리는 주님의 그 모본을 따라서 진실한 신자가 되고 살든지 죽든지 영혼을 위해 살고 교회를 위해 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되게 하시려고 남이 못 본 은혜의 세계를 보여주시고 남에게 주시지 않았던 놀라운 축복을 우리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들이 주께서 약속하신 그 기업을 얻기까지 전심으로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며 순종하고 예수님께 순종하되 갈대아 우르를 떠나기는 하였어도 우르에 주저앉은 사실상의 불순종이 아니라 부르심을 받을 때에 갈 바를 알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어린아이와 같이 아버지 되신 주님의 손을 붙들고 놓지 않으며 그 길을 걸어가고자 하는 그런 순종의 결단이 우리에게 너무나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람들로 붐벼도 그들이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교회가 아니라 짐승의 우리 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이 그곳에서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십자가에 사랑에 깊은 감화를 입고 자기를 온전히 버림으로 순종을 이루셔서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셨던 예수님처럼 살아서, 예수님처럼 떠나서, 예수님처럼 가서, 예수님처럼 순종하여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고 그 사명 이루어드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될 때에 그 교회가 진정으로 교회 된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란을 떠나는 아브라함의 뒤 모습을 지켜보시면서 대견하셨던 것처럼 여러분들도 이제껏 불순종하던 자리에서 떠나서 하나님을 향해 걸어가는 신앙의 봇짐을 꾸리고 담대히 일어서서 하란의 석양을 뒤로하고 약속의 땅을 바라보고 걸어갈 때 예전에 여러분들이 어떤 삶을 살았든지, 예전에 여러분들이 어떻게 지독하게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삶을 살았든지 주님께서 그것을 기억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순종을 향해 결단하고 한 걸음을 내딛는 여러분들에게 하늘의 성도들과 천군 천사들은 격려의 박수를 보낼 것입니다. 멀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는 회복될 것이며 순종하며 그 길을 걸어가려는 여러분들에게 이전에는 경험한 적이 없었던 놀라운 은혜의 능력을, 축복들을 하나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중에 주님이 구속하지 않으신 부분이 어디에 있습니까. 주께서 우리를 그 십자가의 피로 구원하실 때우리 인생 구석구석 우리의 것이 없이 모두 주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대체로 순종하는 삶이 아니라 교회에 와서만 순종하는 삶이 아니라 우리의 삶 구속구석 우리의 마음 곳곳, 그리고 우리가 걸어다니고 우리들이 숨쉬고 먹고 마시는 우리의 삶에 영역 곳곳에 그리스도 예수의 피묻은 깃발을 세우고 그리고 그 예수님의 깃발 아래 순종하는 사람들이 될 때 여러분들을 두 번째 아브라함으로 삼으셔서 여러분들을 축복의 근원으로 삼으실 것이고 여러분들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은혜의 복들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끊임없이 하란과 우르에 남아서 하나님께 근심거리가 되시겠습니까, 아니면 떠나서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시렵니까? 우리 기도하시겠습니다.
3.여호수아, 갈렙: 마음에 하나님으로 가득 찬 믿음
“다만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볼 것은 여호와를 온전히 순종하였음이니라 하시고”(민32:12)
오늘 이 부분은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한번 옛날에 일어난 일을 회고하면서 어떤 특정한 사건을 설명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그 사건은 다름이 아닌 가나안 정탐 사건이었습니다. 가나안 정탐 사건이 두 번이 있었는데 처음은 애굽에서 나와서 바로 가나안으로 가서 가나안을 정탐한 그 사건이고, 두 번째는 이제 광야에서 40년을 유리하다가 정말로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가나안을 정탐한 사건이었습니다. 첫 번째 정탐 사건을 회고하면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교훈하고 있는 이 장면은 오늘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어떻게 우리들이 순종할 수 있고 또 그 순종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는지를 아주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탈출해서 홍해를 지나 광야를 가로질러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까지 왔습니다. 거기에는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는 황량한 땅이 아니라 이미 발달한 선진 문명을 가진 가나안의 원주민들이 정착해서 농경문화를 토대로 아주 찬란한 문명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곳을 정탐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각 지파에서 이제 한사람씩 열 두 명을 뽑아서 그 땅을 탐지하고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두 번째로 읽은 민수 기 14장에 이스라엘 백성의 통곡하는 장면은 바로 그 보고를 받은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들이 가서 땅을 정탐한 목적은 군사적인 목적과 그리고 경제적인 목적이었습니다. 군사적으로는 그 땅에 군사가 얼마나 되며 쉽게 정복할 수 있는가, 그리고 침투로는 어떤 것인가. 그런 것들을 보기 위한 군사적인 것들이었고, 경제적으로는 그 땅에 정말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이 머물러 살만한 좋은 땅인가 하는 것을 판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드디어 정탐을 마치고 열 두 명의 사람들이 돌아왔는데 그들의 마음은 이미 가나안 땅을 정탐한 그때부터 마음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 둘로 나뉘어졌습니다. 돌아와서 이제 열 명의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 회중 앞에서 자신들의 정탐의 결과를 보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먼저 그 땅이 너무나 아름답고 훌륭하다고 하는 이 사실 대신에 비관적인 사실을 먼저 보고했습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엄청나게 키가 큰 사람들이다. 장부와 같고 우리는 그 앞에 서면 체격이 메뚜기와 같다. 그리고 그들은 틀림없이 좋은 요새를 갖추고 있었고 촌사람을 데려다가 뉴욕에 간 것같이 아마 어리둥절한 그런 찬란한 문화를 거기서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정착된 생활을 토대로 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고 그리고 외적의 침입에 철저히 대비하고 있는 것이 보고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술렁거리기 시작했고 우리 같이 이렇게 광야를 떠돌던 오합지졸과 같은 민병들을 가지고 어떻게 저 전문적인 군사들을 이길 수 있단 말인가. 더욱이 우리는 그 앞에서 메뚜기와 같다고 하지 않는가. 술렁대기 시작했습니다. 이어서 또 다른 보고가 이어졌는데 그 보고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그 땅은 기름진 땅이었고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복된 땅이었지만 그들은 말하기를 그 땅은 아주 몹쓸 땅이고 황량한 곳이라고 악평을 하면서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거기에 들어가게 되면 가나안 족속을 대면하여 싸우게 될 싸움에서 승산이 없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마음을 그 땅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떼어놓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슬피 울면서 통곡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에는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의 보고와는 전혀 다른 보고를 내놓았습니다. 맞다. 그들이 우리보다 체격이 훨씬 크고 발달한 병기와 요새를 가지고 있고 그리고 그들이 우리보다 강대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땅은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너무 아름다운 땅이다. 그들이 그렇게 강한 군사를 거느리고 있어서 우리가 그들과 더불어 싸워서 이기기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주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는 반드시 그 땅을 얻을 수가 있다. 이런 보고를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두 사람의 보고를 믿는 대신의 열 사람의 비관적인 보고를 믿었고 통곡하면서 그 밤을 지새웠습니다. 다시 말하면 말할 수 없는 절망 가운데서 이들이 통곡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건을 모세가 상기시키면서 하나님이 그때 주신 말씀을 말하는데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징벌을 내리시는데 이 십 세 이상 된 사람들 중에서는 누구도 약속의 땅을 볼 수가 없다. 한사람도 볼 수 없을 것이고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 그 땅을 보게될 터인데 그것은 그들이 나 여호와를 온전히 순종하였기 때문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궁금한 것은 이십 세가 도대체 무엇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이십 세는 부모의 간섭을 벗어나서 독자적인 성인의 삶을 이어가는 경계선에 있는 나이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구조사를 할 때도 이십 세 이상부터 계산을 하는 것입니다. 이십 세 아래는 그럼 어떻게 되는가. 부모의 슬하에 있는 자식입니다. 그들이 불 신앙적이면 그 불 신앙의 책임이 부모에게 있습니다. 심지어는 자식이 서원을 해도 부모가 ‘하나님, 애가 좀 무엇을 몰라서’ 그렇게 하면 그 서원이 취소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어린 자녀들은 부모의 슬하에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녀에게 있어서 부모에게 주신 권한은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째든 이십 세 미만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고, 어린아이들에게 있어서 책임을 묻지 않고 이십 세 넘어서 성인이 되어서 자기의 신앙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불순종하여 절망한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엄중한 책임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자, 우리는 여기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겼습니까? 아니면 온 백성이 간음을 했습니까? 아니면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모욕했습니까? 아니거든요. 무서워서 그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상을 섬긴 것보다 더 진노하셨고 다른 어떠한 괄목할만한 악을 행한 것보다 더 많이 분노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형벌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커다란 징벌을 약속하셨다가 마음을 돌이키시고 그들을 다시 사랑하신 적도 많이 있는데 이것은 돌이키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이 징벌의 약속, 이십 세 이상 된 자들은 결단코 누구도 내가 약속한 그 약속의 땅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이십 세 이상 된 사람들이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여러분들이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와서 보고를 하는데 안돼, 거기에 가면 큰일나. 그 말을 듣고 아이고 하며 운 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분노의 마음에 가득 찬 마음으로 너희들은 아무도 그 아름다운 약속의 땅을 못 볼 것이다. 아니 처단을 하시려면 그 열 명의 목을 자르셔야지. 그렇게 정확하게 설득력 있게 보고를 한 그것을 듣고 앉아서 끄덕이거나 훌쩍 훌쩍 운 사람들 그들에게는 너무 가혹한 형벌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주로 불순종하던 분들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억울하신 모양입니다. 너무 가혹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기서 무엇을 발견하게 되는가 하면 우리들이 생각하는 죄의 크기와 하나님이 생각하는 죄의 크기가 다르구나 하는 것을 여기서 보게 됩니다. 사소한 것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껏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오면서 이렇게 진노하신 적이 없을 정도로 막 진노하시면서 범죄를 한 어느 개개인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다 광야에서 묻으신 다음에 가나안에 들어간 것입니다. 자 그러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모세가 다시 상기시키는 말이 무엇인가 하면 이 백성들은 나를 온전히 순종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반대로 나 여호와를 온전히 순종한 사람 둘이 있었는데 그것은 갈렙과 여호수아였다. 이 두 사람은 보리라. 그 예언은 그대로 실행이 되었습니다. 이십 세 넘은 사람중 단 두 사람만 그 아름다운 땅을 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 선고를 들었을 때 아마 이렇게 쉽게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그렇게 믿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후로부터 다시 사십 년 가까운 세월을 광야에 유리하면서, 그러니까 이런 하나님의 심판의 관점에서 본다면 왜 그렇게 유리시킨 것인가 하면 필요 없는 떨거지들을 다 정리하시려고 그 사람들이 다 죽기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죽으니까 그 다음에 이제 자격이 없는 애들이 다 갔다. 자 이제 들어가자. 그리고 데리고 들어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하나님이 어떤 일들을 이루시기 위해서 정리해야할 대상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기가 막혀서 웃음밖에 안 나옵니다. 아무개 성도가 죽은 것은 너희 교회의 은혜이니라. 어째든 그렇게 해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오늘 관심인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에 포커스를 맞추어서 우리들이 살펴봐도 많은 진리가 나오겠지만 시간이 없으니까 오늘 순종이라는 시리즈를 우리들이 보니까 이 여호수아와 갈렙에게 초점을 맞추어서 우리들이 보겠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은 볼 것은 그들은 여호와를 온전히 순종하였음이라” 히브리어 성경에는 이 부분을 “미래우 아하래 야훼” 직역을 하면 야훼는 여호와고 그 앞에 있는 단어 아하래는 에프터입니다. “여호와의 뒤를 따라” “ 뒤” 그런 뜻이고, 미래우는 꽉 채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뒤를 따라 꽉 채웠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무슨 뜻인가 하면 “여호와의 뒤를 따라 그들 자신의 마음을 꽉 채웠다” 그런 뜻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에 대한 생각과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꽉 채우면서 그 하나님의 뒤를 따라가는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여기에서 순종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진리 하나를 만나게 되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순종 그것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를 보여주는데 순종은 하나님으로 가득 찬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온전히 순종하였음이라” 하는 것이 바로 앞에 나오는 “온전히 여호와를 순종하지 아니하였음이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단어, 똑같은 구절, 표현입니다. 그 두 개를 대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짓으로 보고를 하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보고를 들으면서 그렇게 절망하며 통곡하면서 그 밤을 지새웠던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마음속에 하나님으로 가득 차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비결입니다. 순종은 자기의 마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순종이 거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강의 시원지 라는 것을 아십니까? 강이라고 하는 것이 작은 개천들이 강에 유입되어 들어오면서 그것이 강이 됩니다. 그리고 바다로 흘러갑니다. 다시 커다란 내는 실개천과 연결이 되고 그렇게 되는데 그것은 시원지가 아니고 계속 그곳을 찾아 올라가서 맨 끝에 있는 그 물이 무엇인가. 그리고 조건이 있는데 그 물이 일년에 며칠 이상씩 계속해서 고여있을 것, 거기에서부터 물이 흘러나오면서 다른 것들이 보태어져서 결국 그래서 강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 강의 시원지를 찾아가 보면 작은 샘 같은 것이 있습니다. 양자강의 시원지를 조사한 것을 보니까 그 산 속에 작은 샘이 있습니다. 그렇게 크지도 않았습니다. 거기서부터 물이 24시간 일년 내내 소량의 물이 흘러내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양자강의 시작입니다. 내려오면서 실개천과 같은 작은 물줄기가 개울이 되고 개울이 강이 되면서 그러면서 대륙을 두루 적시면서 대륙을 관통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순종하는 삶이라고 하는 아주 뚜렷이 흐르는 강물과 같은 도도한 하나님의 백성의 숭고한 삶은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고 거슬러 올라가면 그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는 샘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부터 시작을 하게 되어서 강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 신앙의 반응을 보이면서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던 그 상황에서 보지 말고 저 뒤로 가서 보면 여호수아와 갈렙의 마음은 이미 이 순종과 불순종의 기로에 서기전에 이미 평소에 하나님으로 가득 채워졌던 마음이었고 비관적인 열 명의 보고를 들은 후에 절망하며 통곡해서 하나님의 분노를 샀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이미 그 사건이 일어나기 훨씬 이전에 이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없는, 하나님이 혹시 계셔도 하나님으로 가득 차지 않은 그런 고갈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이 중대한 결정적인 자리에 와서 순종과 불순종이 둘로 확 갈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되는 것입니다. 아니 뭐 비관적인 보고를 듣고 그럴듯해서 눈물 몇 방울 흘렸는데 그냥 단칼에 너 죽을 때까지는 가나안에 안 간다. 하나님이 어떻게 그러실 수 있는가. 그런데 그것이 눈물 몇 방울 흘린 그것이 아니라 그 절망을 통해서 이전서부터 그가 하나님 앞에 가지고 있었던 마음에 온전하지 않음에 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입증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래서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평소에 자기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가득 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때에 어느 기로에 딱 놓일 때 순종과 불순종을 탁 결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로에 놓였을 때, 평소에 그런 것들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한번은 차를 몰고 길을 달리는데 그 차를 3년 넘게 탔는데 지금도 잘 나갑니다. 그런데 여태까지 잘 나가던 차가 엔진이 멈추는 것이었습니다. 차는 계속 굴러가는데, 그럼 큰일나는데, 전부다 불이 계기 판에 들어오면서 엔진이 멈추는 것이었습니다. 차는 계속 달렸으니까 그냥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핸들이고 뭐고 파워이기 때문에 엔진이 꺼지면 전기 작동을 하지 않아서 이것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사고가 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기겁을 하며 식은땀이 흐르면서 막 차는 가는데 달려가는 길에 다행히 다시 시동이 걸렸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또 그런 일이 벌어지는가 하고 보니까 안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냥 갔습니다. 그날 저녁에 오자마자 공장에 갔다 맡겼습니다. 굴러간다고 계속 타면 안 됩니다. 지금은 잘 굴러가지만 공장에 맡겨서 무슨 문제가 있는지 점검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다시 주행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나님 앞에 무슨 인생에 커다란 갈림길이나 사건이 있을 때에 그때에 상황이 벌어지면 ‘내가 순종하리라.’ 그것은 자기 생각에는 그렇지만 실제로 해보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예배로 모이고 하나님 앞에 경건 생활을 하고 기도하면서 그때가 바로 무엇인가 하면 뭔가 순종을 결단해야할 일이 없다고 할지라도 여기가 바로 뭐 하는가 하면 마음을 정비하는 곳입니다. 다 뜯어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정비를 하는 것입니다. 자동차의 아주 밝은 사람들은 자동차 소리만 들으면 이 차가 몇 킬로만 안 가면 자동차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다 압니다. 기계를 아는 사람은 기계를 다 펼쳐보면서 닿아버린 베어링, 노후 된 기계의 한 두 부품을 보면서 몇 달 안에 이 차가 무슨 사고를 일으킬 것인지 그것을 짐작을 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아직은 사고가 나지 않았어도 그것을 정비해서 새차를 만들어서 끌고 다니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뭔가 순종과 불순종을 결단해야 할 상황이 오기 전에 먼저 이렇게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주님의 말씀으로 우리 자신의 마음을 정비해서 주님 자신으로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울 때 그때에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우리들이 순종할 수 있는 것이지 아무렇게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충분히 비유를 들었지만 하나 더 들어 보이겠습니다. 차가 이렇게 해서 직각으로 꺾어지게 되어 있다 그럴 경우에는 그 꺾어지는 지점이 나오기 전에 당연히 차가 수 십 킬로로 달리다가 브레이크를 밟고 속도를 줄이고 그리고 이렇게 도는 지점에 가서는 거의 시속 영 킬로가 되고 그리고 이렇게 차를 꺾으면서 그러면서 가는 것이지 180킬로로 들이 밟다가 결단의 순간에 꺾어 그리고 확 꺾으면 말할 필요도 없이 45도 각도로 차가 구르면서 저 앞에서 전복하고 다음날 신문에 납니다. 그렇습니다. 뭔가 마음이 이미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로 가득 채워있고 그리로 달음질치고 있는데 결단을 내린다고 해서 그것이 꺾어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되지 않습니다. 이론상으로만 되지 실제에서는 되지 않습니다. 궁금하면 저기 어디 광장에 가서 한번 해보십시오. 180킬로로 밟다가 확 꺾어보십시오. 보험은 꼭 들어야 합니다. 다 뒤집혀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주요합니다.
뭐 솔직히 이야기를 해서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은혜를 못 받는다고 해서 우리 인생에 폭탄이 떨어지는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은혜를 못 받았다고 해서 가다가 죽겠어요. 갑자기 무슨 집이 무너지겠어요. 회사가 망하겠어요. 아닙니다. 또 무슨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가자마자 금시발복을 하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 안 그럴 수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 자신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우는 은혜의 새로운 부어짐, 재충전 그것을 통해서 날마다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되지 않으면 우리들은 어느 한순간에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이렇게 그 절망 속에서 통곡해서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우리만 못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애굽에서 그 놀라운 기적을 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갈라진 홍해의 물 벽을 보면서 한복판을 지났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보았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와 인도하심을 생생하게 목격했다는 점에서 사실 우리보다는 풍부한 신앙의 체험, 그리고 홍해를 건넌 뒤에 그들이 불렀던 열렬한 찬양, 이런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풍부한 신앙의 경험을 가졌던 사람들도 마음이 하나님으로 가득 차지 못하니까 이렇게 결정적인 순간에 불 신앙으로 불순종하여 복된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버림받은 백성들이 된 것입니다.
보십시오. 어떻습니까? 우리는 항상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주님 자신에 대한 생각과 은혜로 가득 채워져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세상에 있는 것들이 가득 차면 우리는 세상을 열렬하게 추구하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의 마음에 명예에 대한 욕구가 있으면 그 명예를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 다니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우리의 마음 안에 주님이 계시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주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늘 어떤 경우든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의 잠긴 상태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일년에 한번 신년 사경 회 때에 마음이 그냥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는 것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수련회 때 한번 은혜를 받아보겠다고 하는 그러면 그것 가지고 또 한번 일년 버텨보자고 하는 그런 것 가지고는 안됩니다.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 중심에 있으니 유혹이 흔들어도 무너지지 않네
주님과 함께 할 때에 두려움 사라지네 주님이 항상 나를 지켜주시니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마음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찬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가진 것이 있습니까? 매순간마다 우리를 확인해보십시오.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까? 예전에 우리가 받은 은혜가 큽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전에 우리가 체험한 기적이 놀랍습니까? 그들은 불기둥과 구름기둥 아래서 살았습니다. 그들이 우리가 언젠가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으면서 인생을 결단했습니까?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피 뿌리면서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죽기까지 따르오리다. 결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시내 산에서 목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매일매일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가 예전에 어떤 신앙의 경험을 했든지 오늘 이렇게 불순종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뒤로 물러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에 나와 있는 여러분의 몸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이 날마다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차고 곤고하던 날에 인생의 벼랑 끝에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만을 사랑하고 주님만을 경외하면서 주님의 그 뒤를 따라가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던 그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하고 착한 마음, 주님이 나의 인생의 전부며 주님이 내가 사랑해야 할 유일한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이 고백이 그 고백할 수 있는 그 은혜가 우리 안에 매일매일 반복되어야 합니다. 계속 살아있어야 합니다.
잡았다 함도 아니오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오 다만 우리는 그런 은혜의 경험, 그런 말씀의 경험을 통해서 주님 앞에 붙잡혔던 그 때를 기억하면서 아직까지도 붙잡지 못한 그것을 잡으려고 끊임없이 따라가는 경주자의 삶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가 우리 안에 널리 역사 합니다. 언제든지 주님이 보실 때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마음, 그 마음이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감격은 새 가족 반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헌 가족 반에서 더 필요한 것입니다. 헌 가족 반이라고 하면 신통치 않으니까 넝마 가족 반, 너덜너덜 떨어진 그런 가족 반이 더 필요한 것입니다.
정말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큰사랑을 받고 주님에 대한 많은 것이 있고 지식이 있어도 오늘 이렇게 예배 시간에 나와서 하나님, 우리의 인생에 주행의 길을 달려갈 때 사고 나지 않고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다시 한번 우리의 마음을 예배를 통해 정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 뜯어서 그래서 불순물들을 꺼내고 이물질들을 꺼내고 대체로 은혜 가운데 살면서 은혜 안에 들어온 각양 탐심과 더러움들을 갈라내고 그래서 다시 우리의 마음을 주님 자신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 안에 사는 성도의 내면의 삶입니다.
그래요. 왜 그렇게 매일 기도해야지 됩니까? 주님을 위해서 주님의 뜻대로 살기로 마음이 확정되었고 또 확정되었는데도 새벽마다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앞에서 자기를 깎고 다듬고 그래서 새사람이 되기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이미 예전에 주님을 영접하고 자기의 죄를 모두 뉘우쳤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죽인 것을 오늘도 내 몸에 짊어지고 ‘나의 나된 것이 주님의 은혜라’고 고백을 하면서 주님의 그 십자가에 은혜 앞에서 우리의 무가치함을 확인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렇게 함으로서만 우리 안에 하나님 자신이 가득 차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폭탄이 떨어지는 것 같은 성령의 체험을 하고 창자가 뒤집히는 것 같은 회개를 경험했다고 하더라도 그가 매일매일 만져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지 않는다면 6개월도 가지 않습니다. 예전의 신앙이 자원이 되어서 오늘 주님의 만져주시는 은혜 없이도 저절로 굴러가는 신앙생활은 없습니다. 죄에 대해서 실패하고 유혹에 지고 불순종하는 삶을 사는데 그렇게 살게 하는 강한 힘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 힘 때문에 우리들이 불순종하면서 살고 하나님 거스르면서 살고 주님 대신에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며 살고 있습니다. 해결책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 불순종하며 살수 밖에 없게 만드는 그 힘보다도 더 큰 하나님의 은혜의 힘이 우리 안에 역사 할 때 그럴 때 우리 자신을 주님 자신으로 가득 채워주실 때 그때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삶을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배에 나와서 자신의 영혼을 만져주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다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자기의 가슴을 채울 수 없는 사람들은 정말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세상을 이기려고 합니까? 여러분들이 그렇게 자기의 마음을 정비해서 주님 자신으로 채우는 노력이 없이 미친 듯이 인생의 길을 달리다가 만날 수 있는 것은 인생의 대형사고밖에 없습니다. 언젠가 여러분들은 인생의 벼랑에 서게 될 것이고 언젠가 여러분들은 대체로 하나님을 따라온 그 오래된 신앙의 경력에도 불구하고 준엄한 하나님의 지적을 받을 것입니다. ‘너희가 마음으로 나를 버렸다’ 라고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일매일, 매순간, 매순간 그런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오늘 묻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마음은 오늘 하나님 자신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까? 정말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밖에 없습니까? 주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 십자가의 은혜밖에 없습니까? 여러분 스스로 죄인 된 것을 알고 그리스도 예수밖에는 여러분들을 구원하신 분이 없다라고 하는 사실에 대한 감동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있습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들 절망하고 비관할 때 하나님께 오히려 믿음으로 순종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서 오늘 우리들에게 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구원의 토대를 마련해놓으시고 그리고 우리에게 이 복음이 전해지게 하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풍성한 삶을 살아가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치 홍해는 건넜지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그 아름다운 실과를 맛보지 못하고 지금 광야에서 모두 정리대상이 되어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로 하여금 풍성한 삶을 살아가게 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들이 계속 불순종하며 살기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기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 자신의 마음을 거룩한 진리와 신령한 은혜로 하나님에 대한 생각으로 우리 자신을 가득 채우고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과 교통하면서 사는 은혜의 행복 속에서 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불순종하면서 사는 것이 아닐까요? 한때는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기를 구원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에 펑펑 우는 신앙의 감격을 지녔던 사람들의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가고 다시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서 버렸던 세상에 붙은 헛된 것들을 붙드는 욕심들이 마음에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순종의 삶을 살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신앙의 기본, 그런 것은 없습니다. 주님이 붙들어주시는 동안에만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주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을 점령하고 있는 동안에만 우리들이 순종의 삶을 살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 자신으로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하신 구속의 아름다운 사역을 기억하면서 그러면서 우리의 참된 본분이 주님을 사랑하며 사는 것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며 살 수 있는 것, 그것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것이며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은혜 안에서 살고 주님을 영화롭게 하면서 살다가 주님의 품에 잠드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행복이라고 하는 그 가치를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마음이 주님 자신으로 가득 차서 주님밖에는 사랑하는 것이 없고, 하나님의 계명 외에는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고, 내 평생의 즐거움이 우리 주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순종하면서 사는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그래서 여호수아와 갈렙이 주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가 반드시 이기리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뒤로 물러가지 마십시오. 언제나 어린아이와 같은 눈물을 간직한 사람, 주님만 사랑하고 주만을 의지하고 주만 붙들면서 살아가는 진실한 백성들 그런 사람들이 되십시오. 그래서 사나죽으나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셔서 자기를 내어주신 그 주님을 우리도 사랑하면서 예수 죽인 것을 우리의 몸에 짊어지고 주님의 생명이 우리의 몸에 나타나기를 힘쓰며 그래서 그 예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만 사랑하며 사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서 순종하는 주의 백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는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그렇게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었는가. 반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놀라운 기적을 보고 그때도 기적 아래 있었어도 그렇게 하나님께 불순종해서 결국은 비참하게 광야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죽어가야 했던 그 원인이 무엇이었는가. 같은 답입니다. 결국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10사람의 보고는 논리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 보다 훨씬 강하고 비교할 수 없는 군사들을 가지고 있다. 땅이 나쁘다는 것은 보조적인 보고였고 강한 군사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들을 대적할 수 없다. 백 번 싸우면 백 번지고 우리가 지고 나면 우리의 처자들은 죽임을 당하고 아마 우리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노예가 될 것이다. 그럴 바에야 우리가 왜 이렇게 비참하게 낯설고 물 설은 가나안 땅에 와서 죽임을 당하는 도륙의 경험을 하면서까지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가. 차라리 장관을 하나 세워서 모세가 아론 이런 애는 다 정리 해고시키고 그리고 애굽으로 돌아가서 바로에게 백배 사죄하고 다시 벽돌을 굽고 농사를 짓고 더러운 일을 하면서 우리들이 거기에서 종살이를 하겠습니다하면 다시 받아주지 않겠는가. 논리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아주 매끄럽고 아주 정돈된 논리를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설득했고 그 설득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커다란 반응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는, 그리고 연설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았습니다. 정말 그들이 강한가. 맞다. 최신 병기를 가졌는가. 그래. 요새도 튼튼해. 맞지. 군사가 많아. 맞아. 우리하고는 어때. 비교도 안 되지. 그럼 우리는 메뚜기지. 그럼 가서 싸우면 우리가 지겠네. 그럼 지지. 그런데도 저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밥이다. 그런데 그것은 논리가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함께 하실 지 안 하실 지도 모르고 또 하나님이 함께 해주신다고 치더라도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함께 해주신다고 치자. 백 번 양보해서 군사력도 열세이고 오합지졸과 같은 우리들이 그 강한 가나안의 군대를 꺾고 어떻게 정복할 수가 있는가. 논리적으로 우리를 설득해보아라.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구를 했다면 여호수아와 갈렙이 논리로 그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불가능한 양쪽 절벽을 뛰어넘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오 보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증거입니다. 우리 아무도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가르치니까 우리는 거기에 아멘 하고 믿는 것입니다. 믿음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 설득이 전혀 논리가 없는 것이었지만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는 너무나 논리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애굽에서 건져내실 때에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다. 그래서 수많은 기적을 거치면서 우리가 여기에 왔다. 하나님이 하시겠다고 하고 자기의 말을 식언하신 적이 있는가. 없으시다. 그러면 하나님이 반드시 주실 것인데 그런데 그 하나님은 전능한 하나님이시다. 그들이 아무리 군대가 강해도 하나님이 버리신 민족이고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민족인데 우리가 이길 수 없다면 사실은 우리가 이기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못 이기시는 것인데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는가.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럴 때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명쾌한 논리인 것입니다. 구절, 구절 아멘 이고 구절, 구절 믿습니다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너무 확실하니까. 그것이 바로 무엇인가 하면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명백하게 하나님의 말씀이 이것이다라고 하는 것을 알면서도 순종하지 못하는 것, 기로에 놓여있을 때에 순종할 수는 있는데 엄청난 희생이 기다리고 불순종하는데 희생이 거의 없을 때 그런 기로에 놓였을 때 순종의 길을 택하는 대신 불순종의 길을 택하도록 만드는 궁극적인 요인이 무엇 때문입니까? 믿음의 문제입니다. 두려움을 이기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어서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집착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순종은 육신의 얽매여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대부분의 순종은 항상 희생을 동반합니다. 희생을 동반하지 않는 순종은 거의 없습니다. 언제나 순종은 희생을 동반합니다.
자, 요새도 새벽기도를 열심히 나오는데 ‘충성’ 그리고 나오라고 그랬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 이행하시는 분들이 몇 분 계신데 일어나기 싫으면 ‘충성’ 그리고 나오십시오. 그런데 그 새벽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찾으라는 명령은 단순하지만 순종하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불순종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 없습니다. 그냥 퍼 자면 되는 것이니까. 나는 내일 기도하지 아니하기로 노력을 해야지 되겠다. 그렇게 결단을 하고 기도하려는 자기를 계속 죽이는 그런 것을 안 해도 충분히 불순종할 수가 있습니다. 개떡같이 예배를 드리는 것은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와서 뒤에 앉아서 깊이 졸거나 퍼 질러 자다가 가면 개떡같은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좀 일찍 나와야지 됩니다. 차가 왜 그렇게 매주 망가집니까? 일찍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준비를 해야지 됩니다. 불순종하는 데는 노력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이 본성 자체가 불순종하면서 살려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냥 경향성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냥 흘러갑니다. 순종하기 위해서는 항상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정직하게 한번 물어봅시다. 여러분들이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사업을 위해 주일 하루를 쉬면 손해를 볼지 모릅니다. 볼지 모르는 것이 아니라 볼 것입니다. 매출이 줄고 또 주일날을 지킬 수 없도록 근무를 강요하는 직장에서 견디다못해서 사직을 하고 나면 며칠 밥을 굶을지도 모릅니다. 집의 살림에 대책이 안 세워질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맡고 주님을 위해서 봉사하기 위해서 시간을 많이 쏟으면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의 다른 삶을 충실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모두 뇌물을 받는 직원들로 모인 직장에서 나 혼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깨끗하게 살아야 되겠다고 하면 그 모든 직원들이 여러분을 죽일 놈이라고 욕하며 ‘왕따’ 시킬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 적으로 보면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항상 이런 고난이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도 순종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순종하면 그러면 하나님이 당장은 우리들이 손해를 보는 것 같고 사람들로부터 ‘왕따’를 당하는 것 같고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 같아도 순종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그 이상의 것, 약속하신 것을 우리에게 주시리라고 하는 그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그 두려움을 뛰어넘고 순종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느 형제가 몇 해전에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그때는 교회가 작았으니까 이렇게 말을 해서 안 들으면 불러서 내 방에 들어오게 해서 1-20분 이야기를 합니다. 새벽 기도를 나와라. 그렇게 살아서 되겠냐. 그때는 많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확실히 그런 것이 호소력이 큽니다. 그런데 아주 난색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바쁘게 살고 그리고 새벽이면 온 몸이 두들겨 맞은 것 같이 천근만근이 되어서 일어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밤에 워낙 야근으로 늦게 자니까 새벽이라도 푹 자야지 제대로 하루 근무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워낙 다그치니까 ‘예’ 그랬습니다. 일주일만이라도 해봐라. 그러니까 ‘예’ 하고 갔습니다. 나중에 고백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런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사실은 제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옳은 생각이었지만 제가 한가지를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물었더니 ‘새벽에 일어나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고 진짜 어려운 것은 사실인데 새벽에 와서 기도의 문을 열어주셔서 흠뻑 한시간 기도하고 나니까 하나님이 새로운 힘을 공급해주셨다고 합니다. 그것을 자기가 계산을 안 했다는 것입니다. 신령한 은혜를 통해서 자기에게 부어주실 수 있는 하늘의 은혜로 내가 육체와 영혼의 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고 기도 그 자체가 일방적으로 힘을 쏟아 붓는 노동정도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더 피곤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게 아니라 하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그런 고백이었습니다.
그런 두려움들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삶의 도처에서 우리로 하여금 불순종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는 너무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논리를 뛰어넘는 것이 바로 무엇인가 하면 믿음입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논리를 뛰어넘게 만들고 불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설득할 수 없지만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아멘 하게 만드는 대목이 이게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논리인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여호수아와 갈렙이 하나님께 모든 백성들이 불순종하는데 유독 여호수아와 갈렙이 하나님 앞에 깊이 순종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상황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고한 신앙,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이 자리까지 왔기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에 가나안 땅을 보고 와서 가나안 땅을 보면서 그 큰 칼, 좋은 무기, 그 다음에 장부와 같이 엄청난 덩치에 그 백성들, 그 군인들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직 무엇이 들어왔는가 하면 아! 하나님이 이 땅을 우리에게 주시기로 약속을 하셨구나. 반드시 이루어지겠구나. 그것을 믿으니까 그까짓 무기, 그까지 칼 그런 것들이 하나도 눈에 안 들어왔습니다.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제 (?)목사님들을 만났는데 관심이 온통 우리 교회였습니다. 어떻게 지금 교회가 지어지는가. 언제 이사를 가는가. 잘 되어갑니다. 그러다 나중에 그래 참 대단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어. 대단해.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요즘 평안하고 아무 것도 근심이 안 되는데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이것이 믿음인지 배짱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믿음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지금 그 큰 칼, 많은 병사를 보면서 마음이 그야말로 물같이 녹은 것입니다. 그런데 두려움으로 마음이 막 녹은 것인데 그런데 이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약속을 워낙 굳게 믿으니까 그런 것들에 의해서 마음이 흔들리고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소한 것이다. 그것은 반드시 된다. 그러니까 확고한 신앙을 가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순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어려운 세상에 주님을 위해서 물질을 바치고 어떻게 살까, 이 어려운 세상에 바쁜 시간에 주님을 위해서 시간을 드리고 내가 어떻게 학업을 계속하고 내가 어떻게 사업을 하고 살까, 내가 이런 시간에 어떻게 어떤 것들을 주님을 위해서 희생할 수 있을까? 그 모두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세워주신 그 자리에서 주님이 우리를 거기에 세워주실 때 우리에게 주셨던 약속들, 그리고 우리의 인생에 대해서 풍성한 삶에 대해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그 수많은 언약들을 우리들이 굳게 붙들고 믿으면서 이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면서 살아가는 그 신앙이 우리로 하여금 순종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는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수시로 마지막 때가 다가올수록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우리를 부르고 그리고 우리를 조바심하게 하고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고전적인 신앙으로는 이 복잡한 세대에서 치열한 생존경쟁을 이기고 우리들이 행복한 삶을 살수 있을 것 같지 않다고 암시를 받는 때가 바로 이런 때입니다.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더 많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 그 약속의 말씀을 따라서 살면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리라. 이길 수 없는 싸움에서 이기게 하시고 견딜 수 없는 고난과 시련을 통과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 이 믿음이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믿음의 삶을 살아서 주님께 순종하는 주의 백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4.다윗: 고난을 통해 배운 순종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
지금이야 모두 넉넉한 삶을 살고 물건들도 얼마나 많은지 부족한 것이 없이 살고 있습니다만, 옛날에 저희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골목을 다니는 장사꾼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 장사가 잘 되는 장사꾼 하나가 ‘솥 때우시오, 냄비 때우시오’ 그렇게 다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못 때우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애들이 신고 다니다가 떨어진 그 검은 고무신을 때우는 것부터 시작을 해서 그리고 심지어는 양은 솥 뚫어진 것, 그것을 때우는 것을 보셨습니까? 리벳을 가지고 절묘하게 때웁니다. 그것부터 시작을 해서 온갖 것을 다 때우고 심지어는 장독대 깨트려진 것도 쪼가리를 들고 가면 그것을 이렇게 갖다가 올려놓고 뭐 이상하게 생긴 것으로 녹여서 붙이면 아주 훌륭하게 장독이 다시 쓸 수 있는 장독이 되게 했습니다. 바가지를 실로 기어서 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하여튼 그렇게 고쳐서 쓰던 시대였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큰사랑을 알기 전에는 주님을 몰랐으니까 제멋대로 살지만 그렇게 해서 주님을 믿고 나서 이제 새로운 삶을 살아야되겠다 라고 결심하고 하나님의 큰 은혜와 사랑을 받은 후에 그 다음에 즉시 이제 하나님께 잘 순종하면서 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 그것이 우리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경험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믿음으로 살아야 되겠다 라고 결심을 해놓고 그 이후로부터 끝까지 하나님께 순종만 하면서 사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알고 불순종한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버리지 아니하시고 마치 망가진 솥을 때우고 깨진 장독을 풀 발라서 쓰듯이 그렇게 해서 사용하십니다. 옛날에 양은솥은 유난히 구멍이 잘 뚫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아저씨가 솥을 때울 때는 어떻게 하는가 하면 솥을 얼굴에다가 뒤집어쓰고 하늘을 쳐다보면 거기에 이제 캄캄하니까 빛이 들어오면 그곳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호주머니에서 이제 알루미늄 리벳을 꺼내서 그것을 집어넣고 앞뒤로 두들기고 아주 심하게 뚫어진 데는 아예 네모나게 양철을 오려서 뒤로 붙이고 그 다음에 두들겨서 양발을 기듯이 기웁니다. 그래도 그렇게 뚫어진 것을 고친 데는 다시 안 뚫어집니다. 워낙 세게 붙여 났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훌륭하게 고쳐서 부엌의 살림살이로 씁니다. 그것을 우리들은 전혀 불편하다고 생각을 안 하면서 그렇게 해서 살았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해서 망가진 사람들, 사람들은 그저 한 두 가지를 보고 ‘저 사람 못쓴다. 나쁜 사람이다. 희망이 없는 사람이다.’ 그렇게 말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그를 고쳐서 사용하십니다.
오늘 이 시편 119편을 지은 사람이 다윗이라고 하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우선 그 문체가 그것을 입증해주고 또 거기에 나오는 많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 필체들이 이 119편 하나님의 말씀에 영광의 장이라고 불리 우는 이 아름다운 시편119편이 바로 다윗의 저작임을 확실히 인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오늘 여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다윗은 하나님께 선택을 받아서 왕위에 오를 때까지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세의 집안에서 태어난 아들 다윗을 만나니 그는 내 마음에 합한 자라. 그를 통해서 내가 모든 뜻을 이루리라”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다윗은 굉장한 인물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 맨 처음에 탁 열면 우리말 성경에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나오지만 희랍어 성경을 열면 다윗이 먼저 나옵니다. 그럴 정도로 이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정신적인 조상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만약에 혈통적인 언약의 조상이라고 말한다면 다윗은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그런 영광의 의미에서 신앙적인 조상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꿈꾸었던 시대는 항상 다윗의 시대였습니다. 왕은 하나님을 깊이 공경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고 그리고 나라는 강건하고 백성들은 경건하고 그래서 주위에 수많은 나라들이 조공을 드리러 오는 그런 영광이 있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민족적인 역사의 주인공이 바로 다윗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윗이 그렇게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잘 따랐지만 그 역시 완벽하게 일생을 순종으로서 산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우리들이 경험하는 각양 연약함과 불순종과 죄들을 경험했겠지만 놓치지 않고 성경이 집요하게 추적하고 폭로하고 있는 그의 대표적인 죄는 두 가지였으니 하나님께서 금하신 인구조사를 한 사건이었습니다. 왕으로서 인구조사를 하는 것은 행정적으로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인구조사를 하는 이유는 대게 군사력과 노동력을 세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윗이 자기네 나라의 군사와 그리고 백성들의 숫자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이 나라를 지키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확신 속에서 이 나라를 이끌어가기보다는 다분히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군대나 수많은 백성들,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나라를 이끌어 가는 것, 그런 시작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행정적으로 문제가 없었지만 신앙적으로는 그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제 그를 치시는 사건, 그것을 통해서 이 다윗은 물론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온역으로 말미암아 견디기 힘든 그런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이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인간적으로 보면 다윗을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가족들로부터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물론이거니와 동기간은 물론이고 아내는 물론이고 하여튼 참 그렇게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게 하게 위함이었는지 모르지만 어째든 이 사람은 그렇게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존경을 받고 이렇게 고임을 받아야 할 그런 관계에서 참 결핍 속에서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여자를 깊이 사랑하게 되고 그래서 그런 불륜의 관계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이 하나님의 사람 다윗에게 살을 에이는 것 같은 그런 고통과 아픔을 안겨다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나니까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서 더 큰 악을 행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자기에게 충성하는 그런 헷사람 우리아를 살인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자기의 범죄를 은폐해보려고 했지만 나단 선지자에 의해서 그의 모든 죄들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 시인은 이제 하나님 앞에 그야말로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의 인생에 발자취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전에도 다윗이 임금이 되기 전에도 사울에게 핍박을 받으면서 고난을 많이 당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자기의 잘못을 인해서 당하는 것이기보다는 하나님이 그 사건을 통해서 자기를 연단하게 하시기 위해서 당하게 하시는 그런 종류의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자기의 개인적인 범죄로 말미암아 당하는 이 고난의 밑바닥은 밑도 끝도 없는 그런 형편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이 시인은 많은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고백하는 것이 “고난 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으나 고난 당한 후에는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백했습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믿고 당신의 사랑을 안 다음에 우리 모두 변함이 없는 신앙의 정절을 유지하면서 하나님만 사랑하며 진실 되고 그리고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그렇게 완벽하게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거스르고 돌이켜 서서 다시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당신을 향해서 돌아오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무엇인가 하면 고난을 통해서 그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고통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면 그것이 모두 자기가 욥과 같이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실제 우리의 삶에 있어서 순결하고 정직하고 진실하기 때문에 그 신앙적인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고난을 당하기보다는 자기의 죄와 불순종을 인해서 당하는 고난이 훨씬 더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에게 순종하며 살지 않고 불순종하는 사람들을 돌아오도록 끊임없이 말씀하십니다. 모든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 다 고난을 당하고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을 당하지 않고 돌아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가 하면 말로 할 때 깨달아 듣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직 무슨 문제가 없습니다. 돈도 잘 벌고 집안에도 문제도 없고 누가 흔히 이야기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몸을 치셔서 병이 나서 입원을 하기 위해서 실려간 것도 아니고 뭐 불치병에 걸리거나 교통사고가 나서 숨이 껄떡거리는 것도 아니고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내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 넌 그렇게 살면 안 된다.’ 그러니까 자기 양심이 끊임없이 증거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는데 내가 이렇게 불순종하며 살면 하나님이 싫어하시지.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그래. 내가 이렇게 살다가 한번 혼나지’ 자기 스스로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해주십니다. 이렇게 깨닫게 하십니다. 그때에 참 놀랍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곤고한 영혼의 실체를 보는 것입니다. 자기 속에 있는 고쳐지지 않는 패역을 봅니다. 그리고 겉으로는 교회 나오면서 번지르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내가 버린 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정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고 그 사랑에 붙잡혀 살던 때에 그 아름다운 신앙의 추억, 그 관계의 추억을 생각하면서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구하고 그 사랑을 다시 구하고 주님의 그 은혜의 빛 앞에서 살고 싶어하는 그런 마음을 그가 다시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깊이 뉘우치고 그리고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주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면 다시 잘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했던 때도 우리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부단히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돌아오도록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시고 혹은 커다란 위험은 아니지만 작은 사건들 하나 하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그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불순종하면 그 다음에 할 수없이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시는 것입니다. 고난을 주면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게 되면 그에게 두 가지 뚜렷한 변화가 일어나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강력한 빛이 없어도 고난을 많이 당하게 되면 첫째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하면 자기가 이제껏 사랑하고 탐닉하던 것들을 시시하게 생각하는 마음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무슨 소리인지 아시지요?
그래서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술 먹고 담배피고 그래도 먹고 놀고 이러는 것도 그것도 건강해야지 재미있지 몸이 아파서 골골 하는데 무슨 재미가 있습니까? 저도 옛날에 담배를 피웠을 때 보면 담배를 이렇게 한 모금 피어서 몸이 건강할 때는 담배가 맛이 있고 몸이 병이 들었든지 하면 꼭 음식 맛하고 똑같습니다. 맛이 하나도 없습니다. 술은 그 정도 경지까지 못 들어갔는데 술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약 먹고 술 먹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맛이 있겠어요. 몸이 건강할 때 다 재미있는 것이지 재미없습니다. 쉽게 이야기를 해서 이빨 하나만 쑤셔서 정신을 못 차리게 치통이 일어나도 영화도 구경도 무슨 관광도 그런 것 하나도 재미없습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까? 자기에게 무엇인가 고통이 일어나면 이제껏 사랑하고 탐닉하고 집착하던 것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는 마음을 갖게 만듭니다.
두 번째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향해서 가난한 마음을 갖게 만듭니다. 그러니까 잘 나갈 때는 하나님을 별로 찾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이제 고통을 받고 마음이 곤고해지면 이제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불순종하는 사람들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한번에 덜컹 하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작은 것부터 경고하십니다. 하나씩, 하나씩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계속 무시하면 하나님이 엑셀을 밟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점점 정도가 높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사람의 성도가 불순종의 길을 가다가 덜컹 하고 큰 고난을 만났을 때 사람들은 뜻밖에 고난을 만났다고 말하지만 그 이전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수없이 그를 찾아오셔서 인격적으로 말씀하시고 양심에 말씀하시고 타이르시고 이러면서 그를 계속해서 설득하십니다. 돌아오라고 하나님이 간절히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래도 거스르면 하나님이 고난을 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시인이 바로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고난은 이루 필설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수많은 백성들이 온역에 걸려서 죽어나가는 온 나라에 온역에 걸려서 죽어나간 시체들로 가득 차고 장의사가 만원을 이루고 그리고 동네 골목골목마다 온역으로 죽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정에서 흐느끼는 통곡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그들의 죄 때문이 아니라 자기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백성을 사랑하는 다윗과 같은 임금의 마음에 그 고통은 자기가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그 사랑하는 백성들이 자기의 죄를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죽어나가는 광경을 보면서 다윗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은 그런 고통을 당했습니다. 더욱이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와 사건, 우리아를 죽인 그 사건 이후로 모든 만조 백관이 보는 앞에서 나단 선지자에게 떡이 되도록 얻어맞고 그리고 그는 눈물로 침상을 띄우면서 고통스러운 회개의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그 회개가 있기 전까지 그의 심령 속에서 있었던 고통, 죄의식 이런 것들이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그것뿐만 아닙니다. 그 후에도 자기의 배속으로 나은 자식들이 서로 싸우고 칼부림을 하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기를 향해서 반역을 하고 정처 없이 남의 나라로 망명의 길을 떠나는 그 눈물겨운 이야기들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모두 당하면서 그는 고통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새롭게 깨달았을 것입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아마 다윗의 일평생 소원은 아마 죽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충분하다. 그런 고통이 많이 찾아왔습니다. 실패 후에 찾아온 그 처절한 고통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이제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쉽게 간과할 수 없는 그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고 그래서 영혼의 한없는 고통을 경험했던 이 사람을 성경이 그 후에 하나님이 모든 왕의 행실을 잴 때에 기준으로 누구를 삼는가 하면 다윗을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막대 먹은 임금과 그 다음에 좋은 임금 둘을 대는데 하나는 여로보암이고 또 하나는 다윗입니다.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였더라.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제 볼 장 다 봤더라’ 그런 뜻입니다. ‘다윗의 길로 행하였더라’ 그러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입니다.
다윗 이후에 솔로몬이 임금이 되자마자 주님이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솔로몬에게 말하자면 그 언약을 맺으시는 것인데 언약을 맺으실 때에 하나님이 많은 축복을 약속하시는데 그 조건은 여러 개가 아니라 하나입니다. 그 조건이 무엇인가 하면 “네 아비 다윗의 길로 행하면”입니다. 그것 하나입니다. 그러니 이 다윗이 그런 실패 속에서 죽었지만 하나님 마음에 얼마나 합한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그 다윗이 죽었지만 역시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살아 있어서 그래서 다윗과 같은 사람을 찾으셨다 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이렇게 철저히 실패하고 깨트려지고 범죄하고 망가져서 심지어는 하나님에게 징벌을 받으며 고난을 당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두 사이의 간격을 매어주는 답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한때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나 이렇게 철저히 실패해서 하나님의 피할 수 없는 고난의 징벌을 받았던 아주 혹독한 징벌을 받았던 그래서 성령을 하나님이 거두시고 구원의 기쁨이 사라질 것 같은 영혼의 위기를 느꼈던 이 사람, 그렇게 바닥까지 내려가는 철저한 실패를 했던 사람인데 결국은 나중에 그 사람을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에 합한 대로 인생을 산 임금에 모본으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후대에 있는 많은 임금들에게 다윗처럼만 살라고 계속해서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이 둘 사이에 모순을 메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돌이키는 회개입니다.
오늘 시인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더니 고난 당한 후에는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깨어진 장독과 같고 그리고 구멍난 냄비와 같고 혹은 깨트려진 그릇과 같지만 그것을 때워서, 물론 새것만 못합니다. 새것만 못하지만 그래도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만약에 우리의 영적인 형편을 무슨 투시경이 있어서 우리를 다 본다고 할 것 같으면 놀라울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금 그릇도 있고, 은그릇도 있고, 또 무슨 그릇 질그릇도 있습니다. 그래요. 금 그릇처럼 고귀하게 쓰는 사람이 있고 질그릇처럼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금 그릇, 은 그릇, 질그릇 거기서 이야기하는 것이 금 그릇은 귀하고 질그릇은 천하다 그런 것보다도 금 그릇, 은그릇, 질그릇 모두가 말하자면 주인에 쓰심에 합당한 데로 주인이 담고 싶은 것을 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그릇을 가지고 있는데 교회도 물론 그런 그릇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영적인 투시경으로 다 본다고 하면 금 그릇은 은그릇과 다르고 질그릇은 또 금 그릇과 다릅니다. 큰그릇은 작은 그릇하고 틀리고, 작은 그릇은 큰그릇과는 또 다릅니다. 그런 점에서 그릇이 다 다르지만 색깔도 다 다를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리고 또 어떻습니까. 어떤 그릇은 잘 닦아서 반질반질하고 어떤 그릇은 금 그릇이지만 개밥이나 담아주기에 적합할 정도로 그렇게 더러운 그릇도 있을 것입니다. 다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금 그릇이나 은그릇이나 질그릇이나 모두 여러분들은 누덕누덕 기운 사람입니다. 아무도 아멘을 안 합니다. 그런 교만이 어떻게 있을 수가 있습니까. 기운 사람들입니다.
나를 일꾼 삼으신 주 크신 능력 주시어
언제든지 주 뜻대로 사용하여 주소서
이렇게 땜질해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물론 우리는 순전하게 사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지 못했을 때에는 또 다른 한 길이 있으니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땜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뚫어진 것은 때워서 막고 깨트려진 것은 접착제로 붙여서 그래도 다시 하나님이 사용해주시는 것이 좋지, 예를 들면 좋은 양은 냄비 같은 것, 구멍이 뚫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그 냄비를 때우는 장사가 올 때까지는 저 찬장 위에 얹혀있는 것입니다. 크기도 적당해서 사용하면 좋겠는데 끓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솥을 때우는 장수가 올 때까지 위에 올려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다시 그 장수가 와서 두들겨서 잘 때우고 가면 물도 끓이고 빨래도 삶고 하면서 집안 일에 아주 요긴하게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 완전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디 우리가 온전한 사람이 어디 있을 수 있겠습니까? (?)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고 주님의 마음에 합당했던 사람,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많이 알고 임금이면서도 항상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우러러보고 보이는 이스라엘 왕국의 껍질을 깨트리고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왕국이 아주 아름답게 서게 되는 그 놀라운 역사, 그런 놀라운 은혜를 볼 그런 사람도 고난을 통해서 징벌을 받고 다시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아서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회개, 그리고 두 번째는 순종이었습니다.
이 시인은 그의 죄도 소문났지만 회개는 더 많이 소문난 사람이었습니다. 밤마다 침상을 눈물로 띄우며 하나님 앞에 매달렸고 급기야 그런 몸부림과 하나님 앞에 회개의 몸부림을 통해서 이제 하나님께 다시 확신을 얻었던 사람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하나님 앞에서 깊은 회개를 통해서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회복하고 그리고 다시 순종하는 삶을 살았더니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들어서 잠시 멈추었던 당신의 일들을 다시 이루어 가시고 그래서 노년을 고난 속에서 더욱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을 의뢰하면서 사는 순결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실 신앙은 젊었을 때보다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위험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어렸을 때는 조잡하던 신앙이, 젊었을 때는 어설프던 신앙이 나이가 들면서 순도를 더하고 정결해지는 것은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찾아보기 어려운 현상입니다. 나이가 들면 신기하게 영력도 떨어지고 기력이 쇠해지면서 영적인 생명도 쇠퇴해갑니다. 젊었을 때 칼 같은 신앙은 무디어져서 타협하기 일쑤이고 젊었을 때에 부지런히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게을러지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젊었을 때에는 펄펄 나는 신앙으로 하나님과 생생한 교통으로 누리다가 마지막에는 겨우 신앙의 고백을 하고 하나님께로 가는 부끄러운 그런 노년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오히려 이런 고난을 통해서, 회개를 통해서 순종을 배우게 되었더니 이 배운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노년에 더욱더 풍부한 작품들을 남겼고 노년에 더욱더 하나님과 생생한 교제 속에서 젊었을 때 맛보지 못했던 장엄한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찬란한 영광을 목격하는 증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가 도달했던 영적인 깊이는 이 구약 시대로 본다면 이루 말할 수 없는 놀라운 깊이였습니다. 그런 깊이 있는 영적인 세계 속으로 들어간 신령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이런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다시 순종하는 것을 배웠기 때문에 그처럼 하나님께 고귀하게 쓰임을 받고 새로운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는 놀라운 축복을 누릴 수 있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들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깊은 섭리와 뜻 가운데서 이제껏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앞으로도 하나님 섬기고 주님께 쓰임 받으면서 살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십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랑 없이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도 여러분들이 살수가 있습니까? 그럴 정도로 담대한 악인은 우리 가운데 없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주님 없이 살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불순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스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입술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앙으로는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다고 고백하지만 그러나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곤고한 생활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시인은 같은 시편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말입니다. 그 시대에는 밤이 되면 암흑을 벗삼아야 하는 시대였습니다. 지체 높은 사람들은 밤길이 위험하기 때문에 항상 종자를 앞에 붙입니다. 막대기에 등을 꿰어서 주인이 걸어가는 걸음걸음 밟아야 할 그 장소를 비치고 주인은 그것을 보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떼어놓습니다. 그에게는 실족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등불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그 험한 광야에 길을 안전하게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은 밤에 비치는 찬란한 불기둥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그 백성들을 비추어주었고 그들이 안전하고 행복하게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많은 사랑과 은혜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지속적으로 비치는 하나님 말씀의 빛, 그리고 주님의 그 진리의 말씀이 한 걸음 한 걸음 우리의 인생 길을 걸어가는데 있어서 어디를 내딛어야 할지 비치는 등불이 되지 않는다면 비록 우리가 씩씩하게 걸어가지만 언젠가 우리는 벼랑 끝에 서게 될 것이며 지금은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가고 있지만 어느 시점에는 살려달라고 손을 흔들고 울부짖는 늪에 빠지거나 깊은 연못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오늘 주님의 말씀을 깨닫고 은혜 안에서 살면서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를 지켜주고 또 시인을 지켜준 경험입니다. 시인이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 그의 마음이 유혹에 지고 어두워지게 되니까 하나님의 큰사랑을 알고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던 사람, 그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많은 실패와 실수들이 나왔습니다. 깊은 수렁과 같은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고 그의 영혼은 한없이 고통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하나님 앞에 돌이키는 회개를 경험했습니다.
맞습니다. 순결하고 정직하게 불순종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매일매일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못 살았습니다. 잘못했지만 그러나 어떻게 합니까. 이미 일은 일어난 일인데 지금 후회한다고 해서 돌이킬 수도 없고 슬퍼한다고 해서 그것을 고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그 일이 일어났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불순종했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한참 걸어왔습니다. 이미 이루어진 일입니다. 어떻게 해야지 되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 자리에서 거기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내가 하나님께 불순종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제는 돌이켜서 예전에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던 때, 그 은혜와 쏟아지는 축복 속에서 살던 때,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있던 그런 신앙으로 돌아가야지 되겠다’ 생각하고 깊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실 정도로 그렇게 분노하실 정도로 죄와 불순종을 미워하시는 분이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회개하는 죄인들을 한없이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죄를 미워하지만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계속해서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거스르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돌이키기 위해서 회개하는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돌이키기 위해서 뉘우치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들이 오랫동안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 때는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가 거의 사라집니다. 예배는 지루하고 설교는 길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은 없고 누가 무엇을 새로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어도 그것들은 모두 진부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깨트리고 진심으로 깊이 뉘우치고 회개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놀랍게도 오랫동안 사라졌던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이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이 말씀하기 시작하십니다.
물론 우리들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이켜도 우리 가운데 있는 고통은 아직 사라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깨닫게 하시려고 치신 우리의 기업은 여전히 어려움 속에 있을 수도 있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우리를 치신 시련과 어려움은 아직까지도 남아 있어서 우리의 기도 제목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돌이키는 자의 마음속에 역사 하셔서 놀라운 말씀의 깨달음을 다시 주십니다. 예전에는 캄캄하고 어두운 길을 용감하고 씩씩하게 터지고 부러지고 찢어지면서 걸어가지만 이제는 그 어두움 속에서 한줄기의 빛이 비칩니다. 그리고 어느 길이 가야할 길인지 가지 말아야 할 길인지 깨닫는 놀라운 은혜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전수 받게 하시고 또 회복되게 하시는 그런 놀라운 은혜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시인이 하나님 앞에서 바로 그런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깊이 경험하고 그런 은혜와 사랑을 깊이 체험하고 이 시인이 매 발걸음마다 다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길을 하나님께로부터 제공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그 동안에 하나님을 거스르고 불순종했다고 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들이 돌이키고 이제는 더 이상 그 길로 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회개를 받으시고 여러분들에게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비치고 깨달아질 수 있는 영혼의 축복들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고,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세상이 있습니다.
주님이 어떻게 자기의 마음을 우리에게 전수시켜주시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깨달음이라고 하는 통로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마음을 전수해주시고 그래서 그 전수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수 있도록 매일매일 우리와 동행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돌이키는 사람들에게 이런 기회를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돌이킨 사람들에게 다시 순종하며 살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오늘 시인이 바로 그 일에 증인이 아닙니까? “고난 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더니 고난 당한 후에는 주의 말씀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지를 깨닫고 고난을 통해서 적절하게 신앙적인 반응을 보이고 나니까 그 고난은 시인으로 하여금 순종하면서 살게 하는 하나님의 중요한 선물이 되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의 선택에 달린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당하고 있는 많은 고난은 여러분들을 점점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과의 단절을 경험하는 영혼의 슬픈 자리로 여러분들을 데리고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번 여러분들이 돌이키고 다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고자 작정하시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예전과 같이 다시 용서하시고 순종하며 살아서 잠시 실패가 있었지만 결국은 여러분들 인생 전체는 하나님의 길로 걸어온 사람의 생애가 될 것이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살아온 사람의 생애가 되어서 후일 우리의 뒤를 잇는 많은 우리의 자녀들에게, 자손들에게 걸어야 할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오늘 이 다윗에게 은혜를 주시니까 견디기 힘든 그 고난이 오히려 이 시인으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 앞에 순종하면서 사는 훌륭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잘 순종하면서 다시 살도록 돌이키셔서 그래서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그 은혜 속에 살아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백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5.아사: 순종을 통한 온전함
“오직 산당은 없이 하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하였으며”(왕상15:14下)
다윗 이후로는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별로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성경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적어도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서는 그렇습니다. 그의 아들 솔로몬이 처음에는 하나님의 신에 크게 감동되고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을 많이 받았지만 그러나 교만하여져서 그래서 우상을 섬길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고 그 죄로 인해서 결국은 이스라엘이 두 동강이 나서 남북분단의 시대로 접어들게 됩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다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으로 이어지는 두 나라의 임금들의 역사는 그야말로 어두움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다가 북 왕국과 남 왕국을 통틀어서 하나님이 강력한 눈길을 보내시는 청사에 길이 빛날 샛별과 같은 임금이 등장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아사’라는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비야’ 혹은 ‘아비얌’이었습니다. 그는 아마 경건한 신앙과 부패한 죄악을 함께 가진 그런 임금이었던 것 같습니다. 성경에 어떤 기록에는 그가 대단히 경건한 사람으로 나오고 또 어떤 기록에는 그가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을 등지는 장면도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아비야, 혹은 아비얌이라고 되어 있는 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날 수 없을 그런 아들이 하나 나오게 되는데 그게 바로 ‘아사’라고 하는 임금이었습니다.
이제 설교를 통해서 여러분들이 파악하게 되시겠지만 이 아사가 유다는 물론이거니와 분단되어 있던 북 왕국 이스라엘까지도 미친 그 영향은 굉장했습니다. 그는 솔로몬이나 다윗과 같이 큰 영토를 다스렸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영향을 끼친 임금이 아니라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역사에 영향을 끼친 임금이었다는 점에서 그는 정말 어두운 밤하늘과 같은 이스라엘에 역사에 빛나는 샛별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아버지가 별로 그렇게 훌륭한 임금이 아니었는데 어떻게 아들이 청사에 길이 빛날 그런 신앙의 아들이 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 비밀이 무엇인가 하면 '아사랴'라고 하는 스승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늘 젊은이들에게 이야기를 하는데 부모를 못 만난 것은 어떻게 고칠 수가 없습니다. 부모를 바꿀 수도 없고, 그렇지만 좋은 선생님을 만나면 됩니다. 물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이야기할 때 부모를 잘못 만났으면 두 번째 기회가 있는데 그것은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스승으로부터 받는 훌륭한 영향이 부모로부터 받았던 잘못된 영향을 뒤엎습니다. 그것을 입증해주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아사입니다. 물론 부모로부터도 좋은 영향을 받고 또 훌륭한 스승을 만나서 영향을 받고 주님을 만나서 변화되고 그러면 얼마나 두말할 필요도 없이 ‘금상첨하’입니다.
그런데 이 아사에 대해서 성경이 오늘 아주 단순하게 평가를 하는데 “그러나” 그런데 히브리 성경에는 “라끄” 라고 되어 있는데 “오직” 그런 뜻입니다. “다만” “그러나”이기보다는 “다만” “오직” 그런 뜻입니다. “오직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여호와 앞에서 온전하였더라” 그랬습니다. 그것입니다. 여기에서 “온전하였더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히브리말로 “살렘”입니다. “샬롬”하고 같은 어근입니다. 살렘은 형용사고 샬롬은 명사입니다.
직접 이스라엘에 가보지는 않았습니다만 이스라엘에 가면 주식이 빵인데 빵을 큰 덩치로 굽습니다. 이것이 살롬, 혹은 살렘입니다. 그리고 반을 자른 것을 하찌라고 하는데 살렘이라고 하는 이 말은 “온전하다”라고 하는 이 말은 무엇인가 하면 주인이 맨 처음 만들어놓은 그대로 있는 상태입니다. 해치거나, 짤라지거나, 찢어지거나, 무엇이 묻거나, 더럽혀지지 않은 순전한 상태, 그것이 살렘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여호와 앞에 온전하였더라" 그렇게 되어 있는데 사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살렘 임 야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임”은 전치사인데 “임마누엘” 할 때 그 임입니다. 그러니까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 그런 뜻인데 그러니까 여기서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그의 마음이 여호와와 함께 온전하였더라” 그런 뜻입니다. 마음의 온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구속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주신 다음에 우리에게 가지고 계신 최대의 기대가 무엇일까요? 물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 속에서 세계의 선교의 역사를 움직이는 그런 아주 위대한 선교사가 나오기도 합니다. 불신자들 속에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우리들 속에서도 수많은 영혼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역사에 길이 빛날 위대한 목회자가 나오기도 합니다. 또 우리들 속에서 많은 재산을 하나님 앞에 바쳐서 커다란 역사를 이루는 그런 물질로 섬기는 일군들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실 우리 모두가 다 그렇게 모든 사람이 볼 때 눈에 띨만한 그런 특이한 삶으로 예전에 살아오던 삶과는 완전히 다른 삶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 믿고 주의 자녀가 되었어도 결혼해서 애들 기르고 빨래하고 밥하고 가정을 돌보던 주부는 그렇다고 무슨 그 위치가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사업을 하던 사람은 예수를 믿었어도 대부분 그냥 사업을 하고, 직장 다니던 사람은 예수를 믿었어도 그냥 직장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학생은 예수를 믿었어도 학교에 다니며 삽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님을 믿었어도 자신의 그 삶의 자리 그 자체가 완전히 바뀌는 변화 없이 그냥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런 사람들은 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하찮은 사람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람보와 같은 그리스도인들만 원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있으십니다.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주님을 믿은 후에 어떤 위치에 살든지 중요한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말씀하시는 가운데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5장에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또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에 대해서 말하기를 뭐라고 하는가 하면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완전케 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함이라” 그 “온전”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온전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속 제물로 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을 때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가 바로 그 온전입니다.
그 온전한 삶을 주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데 온전한 삶은 오늘 성경에서 보듯이 온전한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온전한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온전한 삶이 흘러나옵니다. 그런데 또 그 온전한 삶을 살면서 그 마음이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온전한 삶은 온전한 마음을 빗고 빗어진 온전한 마음은 통로로 통해서 온전한 삶을 흘러내리는 것입니다. 야비한 사람이 거룩한 삶을 살 수 없고 짐승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성자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온전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짐승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하고 짐승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온전한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두 가지는 성경 적으로 볼 때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너희가 주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과 뜻과 성품과 네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마음 따로 목숨 따로 모든 것이 따로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의 문학적인 수사법인데 한가지 핵심을 말하고 그 핵심을 강조하기 위해서 계속 덧붙여나가는 것입니다. 뜻과 성품과 목숨, 모든 것들을 좌우하는 한가운데 무엇이 있는가 하면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아사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 이레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들의 마음이 온전한지 알고 싶어하십니다. 그래서 순종하는 삶은 우리 안에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마음을 드러내 보여주는 아주 훌륭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리아 산에서 말입니다. 이삭을 묶어놓고 그 아이를 칼로 찌르려고 할 그때에 바로 그때에서야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데 그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는 이해하기가 좀 힘듭니다.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하면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아라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알았노라” 그러면 교리 적으로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의 전지 하심에 문제가 됩니다. 아니 그렇게 해야지 만 겨우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아신다고 할 것 같으면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 아시고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우리의 모든 심령 속까지 감찰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우리가 배웠는데 어떻게 하나님은 겨우 이삭에게 칼을 대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예전에는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잘 몰랐는데 이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을까? 그런 의문에 부딪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몰라주실 수 있지 않은가. 좋은 마음은 몰라주실 수 있고 나쁜 마음은 하나님 앞에 감추어질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순진한 마음에, 그러나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았노라” 한 이것은 하나님의 어떤 지식에 관한 문제이기보다는 하나님의 경험에 관한 문제입니다. 여기 이렇게 있는데 물이라는 사실은 아는데 그런데 이렇게 먹어보면 진짜 물이 시원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럴 때 머리 속에서는 이것이 물이요 얼음이 떠 있으니까 마시면 시원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두 번째 먹고 알았다는 것은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네가 이제야 나를 경외하는 줄 알았노라 한 것은 네가 나를 위하는 것을 내가 이제 경험했노라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지고 있는 어떤 마음을 시험하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 진실을 입증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창세기 22장에 나온 이삭의 시험 사건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순전히 아브라함 자신을 위한 시험 사건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질문을 하겠으니 한번 대답을 해보십시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백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서 죽여서 나에게 제물로 바쳐라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어떤 사람은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예’ 하고 아브라함이 바로 갔다고 그렇게 말하는데 사람이 누군지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밤새도록 고민을 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아브라함이 그 명령을 받고 고민을 하면서 밤새 장막에서 잠을 못 이루어도 하나님은 이 이튿날 아브라함이 그 명령에 순종하고 결국은 지정한 장소에 가서 자기의 아들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하나님은 알고 계셨습니까, 모르고 계셨습니까? 확실히 알고 계셨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넌 백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에 가서 제물로 바쳐라 그랬을 때 일반적인 인간의 심성을 염두에 두고 판단할 때 아브라함 자신은 모리아 산에 가서 아들을 그 하나님 앞에 죽여서 제물로 바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처음에 알 수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오히려 아브라함 자신은 확신하기가 힘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 것입니다. 일단 아브라함 속에 있으니까.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마음의 일차적인 주인은 아브라함인데 아브라함 자신도 자기의 마음에 대해서 확신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확신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해서 아브라함이 백세에 낳은 사랑하는 아이를 데리고 그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서 이제 제사를 드리려고 죽이려고 하는데 그때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그를 살려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미리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안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 속에 있는 믿음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백세에 낳은 아들이지만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께 드려야하니라. 그리고 이 아이를 죽여서 제물로 드리면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리시리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살아본 적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히브리 서에서 믿음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를 죽이려고 했을 때 아! 내가 이렇게 칼을 대면 목에 칼이 닿는 순간에 하나님이 하지 말아라 그러시겠지. 그것이 애들 장난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찌르면 들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으로서 살아있는 이 아들을 보는 것은 일단 마지막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서라. 그리고 이제 모든 것이 정돈되어서 끝나고 거기에 있던 짐승으로 제물을 드리고 아들과 함께 손잡고 내려오는 그 아브라함의 마음은 올라갈 때의 마음과 어떻게 달랐을까요? 이 심령에서 부흥이 일어나고 있었을 것입니다.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아! 그래 맞아. 아들이 무엇이고, 도대체 그 수많은 땅이 무엇이고, 제물이 무엇이고, 군대들이 무엇이고, 이방인들과 더불어 싸워서 이긴 승리가 무엇인가. 다 필요 없다. 나의 영원하신 기업은 오직 하나님뿐 이제 나의 인생은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그 하나님에 대한 생각과 사랑으로 내 전체를 채우면서 살아가리라. 그때 마음이 살렘의 마음입니다. 온전한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건을 이런 각도에서 봐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아브라함 자신을 하나님이 큰 약속을 주시고 그리고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기 위해서 그의 마음속에 한번 이 사건을 통해서 그 마음을 확 뒤집어서 대청소를 하신 것입니다. 완전히 불사르셨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오장육부에 묻어있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그 아름다움으로 가득 채우시려고 조금씩 붙어있던 찌꺼기와 더러운 것들을 그 사건을 통해서 확 쏟아내어 버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다시 온전하게 되어진 상태에서 하나님이 22장에서 한없는 복을 그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바로 살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주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농부는 농부로서 하나님을 믿다가 죽은 사람들이 농부를 버리고 선교사가 된 사람들보다 비할 수 없이 많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공무원으로 일하던 사람들은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그냥 죽은 사람들이 그것을 버리고 유명한 목회자가 된 사람보다 훨씬 많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 중에 특별한 사람들을 제외해놓고 대부분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하고 죄 죽임의 능력을 경험했다고 할지라도 계속 그렇게 살다가 죽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도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지위에 있고 어떤 영화를 누리며 또 어떤 일을 하면서 사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으로 살다가 죽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살렘의 마음입니다. 온전한 마음으로, 온전한 사람으로, 온전한 삶을 살다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살다가 가는 것이 신앙의 대의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생각하기에 세상에서 많은 일을 하면 하나님께 가서 많은 상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않은 사람이 이루어놓은 많은 일이라고 하는 것은 그와는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그 본인과는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사람이 열심히 일해놓은 많은 업적들은 그저 단지 일일뿐이지 그 사람이 그 일로 인해서 상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가 살았던 삶에 대해서 상 받기 위해서는 그 모든 삶의 동기가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삶의 그 과정에서 거둔 자연스런 수확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흔히 오해하기 일쑤입니다. 미가 선지자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죄악 가운데 살고 하나님의 율법에 불순종하면서 살면서도 ‘하나님을 어떻게 하면 기쁘시게 할까’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기껏해야 ‘천 천의 수양과 만만의 기름을 하나님께 바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 거스르고 불순종하면서 살면서도 특별한 제사를 드리면 특별히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는 이교도들이 하는 것처럼 자기 자식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면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섬김을 받으실까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자기 신앙은 개떡같이 하면서, 자식들은 제대로 교육도 못 시키면서 모두 주의 종이 되게 해달라고 그런 집안에서 그렇게 신앙교육도 못 받은 애들이 주의 종이 되면 그러면 교회가 얼마나 혼란스럽겠습니까? 그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전부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보상의식입니다. 자녀들의 신앙교육에는 열심을 쏟지 않고 자기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고 자식들을 모두 목회자로 만들고 선교사로 만들면 무슨 큰일이 일어날 것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을 확 쓸어버리면서 미가 선지자가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가 하면.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을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원하시는 것은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라
선지자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천 천의 수양과 만만의 기름, 자기 아들을 하나님 앞에 무슨 제물로 드리고 그런 것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너희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명령에 순종해서 의롭게 살고 그 다음에 주님께로부터 사랑에 빚진 것을 기억하면서 그 사랑을 받았으니까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아가페의 사랑으로 끌어안으면서 그 동족들을 깊이 긍휼히 여기고 하나님 앞에 한없이 낮아져서 모든 것이 ‘나의 나된 것이 여호와의 은혜로다’ 고 하는 고백 속에서 그분과 함께 손잡으면서 동행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면서 사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지 천 천의 수양, 만만의 기름, 자식들 신학교 보내는 것 그런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입니다.
여기에서 아사 왕의 성경의 평가도 바로 아사 왕이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시선을 한 몸에 모은 사람이었다는 것이 다윗 이레입니다. 후에 보면 아사가 경건하고 좋은 신앙을 잃어버리고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된 가운데 죽습니다. 그런데도 오늘 성경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면 ‘일평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보실 때 실패한 어느 한 부분을 보시고 말씀하지 않고 잠깐 성공한 어느 한 부분을 보면서도 우리의 인생을 평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인생을 살고 또 살고 나서 보면 그 중에는 후회가 되는 발걸음도 있을 것이고 넘어지는 데도 있었을 것입니다. 잘 걸었던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평생 그를 시종일관 계속 그를 지켜왔던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이었는가. 넘어지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했지만 그러나 일평생 그가 그렇게 되고 싶어했던 자신의 존재가 무엇이었는가. 일평생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고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 중심주의로 살았는가. 그것을 보시면서 하나님이 인생 전체에 대해서 평가를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실패하고 있는 사람들은 좌절할 필요도 없고 잘 살고 있는 사람은 교만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 선 사람이 넘어질 수도 있고 넘어진 사람이 다시 일어설 수도 있으니까. 아사를 보면서 우리는 그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사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온전한 생활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 자신으로 이렇게 가득 찬 사랑의 마음, 그렇게 하나님 그분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하고 그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복종하면서 살고 그러면서 성품과 인격이 주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점점 더 주님을 닮아 가는 그런 자로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입니다.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놓고 본다면 세속적인 의미에서 놓고 본다면 아사가 모든 임금들 위에 뛰어난 임금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사보다도 더 큰 영토를 거느렸던 왕들도 있었고 아사보다도 더 창대한 나라를 이루었던 강대국을 이루었던 임금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역사 속에서 잠깐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많은 왕들은 성경에 이름도 기록이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보기에는 그 사람들은 엄청난 역사적인 인물이었고 세상 전체를 움직이는 대단한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영적인 역사의 시각에서 본다면 그들은 집안 한구석을 기어다니다가 아무도 눈에 띄지 않는 헛간 한구석에서 말라 죽어버린 바퀴벌레 같은 의미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 아사, 불 신앙의 시대에 태어났던 이 아사는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서 그의 마음과 존재 삶 전체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임이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하나님이 그 온전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아사를 보실 때 그 마음이 순전했고 하나님 살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해주셨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오늘 우리가 궁금한 것은 어떻게 이 사람이 이렇게 불 신앙의 시대에 태어나서 어떻게 이렇게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어두움 밤하늘과 같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샛별처럼 빛나는 그런 아름다운 임금이 될 수가 있었을까? 그래서 하나님이 다윗 이레로 당신의 마음에 합한 한 사람을 만나셔서 그렇게 그의 마음이 온전하다고 칭찬하시면서 그의 나라를 축복하셨을까? 그것이 궁금합니다.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자면 그의 분투하는 순종의 삶이 그를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의 분투하는 순종의 삶이 그를 온전한 마음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어떻게 분투하는 삶을 살았나 하는 것입니다.
아사랴 라고 하는 훌륭한 선생님을 만난 것은 사실이었지만 좋은 선생님을 만난 모든 학생이 인생이 바뀌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어떻게 분투하는 삶을 살았기에 하나님 앞에 이렇게 온전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었는가. 아사가 이스라엘의 역사에 미친 영향은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의미보다는 영적이고 신앙적인 의미가 훨씬 큽니다. 그가 왕이 되어서 세 가지 중요한 일을 했는데 우선 첫째는 무엇인가 하면 궁중을 개혁하는 일이었습니다. 역사에 나타난 모든 임금들과 현대의 통치자들까지도 대부분 개혁이 왜 실패하는가 하면 자기부터 개혁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항상 힘없는 백성들부터 개혁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결국은 개혁이 계속 되는 동안에 그저 흐지부지 하면서 포기하게 되고 그 개혁의 여파가 자기와 자기의 측근에 오기 전에 모든 것이 다 끝나는데 사실 나라를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영향은 백성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있습니까? 지도자들과 궁중에 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청와대와 그 인근에 있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설교를 이 정권도 귀담아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개혁의 필요가 왔다고 하는데 언제 개혁을 해봤습니까 필요하게. 그런 원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달랐습니다. 자기부터 개혁을 한 것입니다.
여기 ‘마하가’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여기 ‘어머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추측하는데 학자들은 어떻게 추측하는가 하면 마하가가 어머니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상은 아마 할머니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아사가 어린 나이에 임금이 됩니다. 그때에 그 할머니가 섭정을 하고 섭정을 하는 가운데 세월이 흘러가서 이 아사가 철이 들면서 이제 개혁을 하는 것입니다. 41년 동안 나라를 다스립니다. 그러다가 이제 장성하고 나서 이제 신앙의 영향을 받으면서 이 사람이 개혁을 하게 됩니다. 그때 어떻게 했는가 하면 그 할머니, 혹은 어머니가 하여튼 태후가, 그 태후니까 그 품에서 자랐을 것입니다. 어머니라면 더더욱 젖을 먹으면서 자랐을 것이고 할머니라면 코 흘릴 적부터 기저귀 채우면서 길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할머닌지 어머닌지 태후를 잘라버리는 것입니다. 왜 우상을 계속 섬긴다는 이유 때문에 그냥 단칼에 날려버리는 것입니다. 태후의 위를 폐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역사에서는 폐서 인이라고 그랬습니다. 그것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이 쉽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품에서 자라난 그 임금이 신앙이 들어가서,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그렇게 본다면 그 태후와 신앙적으로 원수가 되었다는 것인데 그것을 단칼에 정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저항하는 세력들이 없겠어요. 없을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태후의 조정을 받아서 궁중 대신들이 우상을 섬기고 있었고 궁중에 우상이 많았고 전국적으로 그런 우상들이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어떤 정신적인 연대를 이루는 거대한 수구세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그 현실은 직접적으로 자신의 이익과 관련이 되는 것입니다.
옳은 것을 알아도 옳게 고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오랜 동안 그런 우상 숭배 역사가 있으면서 잘못된 제도 같은 것들이 있으면서 거기에서 피를 빨아먹고 사는, 젖을 먹고사는 그런 이익을 먹고사는 기득권 층이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 되었어도 그 제도가 바뀌면 당장 수입이 줄고 지위가 날라 가고 막 하니까 거대한 세력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세력이 커져서 어떻게 되는가 하면 좋은 왕이 나타나서 쓸어버리고 나라를 고쳐보려고 하면 왕을 그냥 죽여버립니다. 그것이 서양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그런 결단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외로운 투쟁을 했겠는가 보라는 것입니다. 할머니 혹은 어머니를 자기가 그 품에서 자랐는데 경고했을 것입니다. 여호와께로 돌아오고 참된 신앙을 가지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끝까지 듣지 않자 그냥 단칼에 날려버리고 그리고 모든 우상을 궁중에서 타파했을 때 그리고 백성들에게 이제 그 우상을 타파해나갔을 때, 그때 어떻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 일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개혁이라는 것은 자기부터 개혁을 해야지 되는 것이지, 나라의 중심부부터 개혁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대통령 측근에 있는 사람들이 매일 이것 해먹고 저것 해먹고 해서 신문에 오르내리고 바보 같은 사람들로 코미디에 등장을 하고 이렇게 해서 나라가 개혁이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부터 정리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적군이 바다를 넘나들어도 골프나 치고, 그리고 국민들에게 안보의식을 튼튼히 하라고 하고 대통령은 군부대에 내려가서 그 죄 없는 장병들에게 정신 바짝 차리고 나라를 잘 지키라고 그러고 아니 위가 잘해야지 아래가 잘하지. 그러니까 개혁이 안 되는 것입니다. 백 번 이야기를 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개혁이 피곤하다 피곤하다고 그렇게 말하는데 우리 백성들은 피곤한지 안 피곤한지도 모릅니다. 뭐가 피곤한지. 그 개혁을 하기 때문에 자꾸 시달리면서 뭔가를 포기해야지 되는 사람들이 그것을 붙들고 안 놓치려고 붙들고 몸부림을 치니까 피곤한 것입니다. 피곤하기는 언제 개혁을 해봤습니까? 피곤하게, 나라가 정말 걱정입니다. 나라를 위해서 기도해야지 됩니다. 지금이라도 대통령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자기 자신부터 칼날같이 개혁을 해나가야 합니다. 내가 이 정치 동지들과 영원히 등지고 내가 사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옳지 않은 자들은 필요 없다는 마음을 가지고 일평생 자신에게 충성을 다 바쳤던 부하라고 할지라도 그가 옳지 않으면 단칼에 날려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백성과 약속한 신의를 지키는 일입니다. 그게 지도자의 외로움입니다. 절대 여러분들이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사로운 정에 연연하는 것은 결국 훌륭하게 그 나라를 이끌어가고 교회를 이끌어갈 수 있는 그런 지도자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한 개인과의 신의나 한 개인과의 의리보다는 하나님과 맺은 약속, 그리고 백성과 함께 맺은 언약, 모든 성도들과 앞으로 이곳에 와서 성도가 될 사람들과 함께 누리면서 살아갈 신앙의 약속 이런 것들을 개인의 의리보다 훨씬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것들을 저버리고 개개인의 의리를 중시하고 그래서 그 인정에 이끌려서 개혁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모두 조직 폭력배의 그 똘마니들과 보수의 관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신앙적인 통찰력을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나에게 동지가 없다’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단칼에 날려버린 것입니다. 그 투쟁이 얼마나 처절한 투쟁이었고 몸부림이었을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두 번째 그가 한 일은 그때 유행하던 신상이 아세라 신상이었습니다. 이것을 모두 다 없애지는 못했습니다. 조금 남겼습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을 다 쓰러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남기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 두 가지로 생각될 수 있는데 그의 개혁이 철저하지 못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만 또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그만큼 우상을 섬기면서 살겠다는 백성들의 애착이 집요했던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집요하면 그것은 못 막습니다. ‘아브람 카이퍼’라고 하는 화란의 수상이 있습니다. 목사로서 수상이 된 사람입니다. 결국은 그가 그 나라에서 계속 내려오는 창녀촌 그곳을 못 없앴습니다. 그가 얼마나 경건한 목사인데, 그것도 공창이었습니다. 못 없앴습니다. 그만큼 어려운 것입니다. 그 아세라 상을 타파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열조부터 세운 할아버지, 증조 할아버지, 고조 할아버지부터 세우며 섬겼던 동네 한가운데 있는 우상들이 막 도끼에 맞으면서 무참하게 부서지는 광경을 보면서 그 백성들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여러분 보셨습니까? 소련이 무너지는 날 광장에서 레닌의 동상이 끌어내리고 머리가 잘라지고 사람들이 도끼로 막 두들기면서 부서질 때에 거기는 러시아 사람들의 가슴속에 있는 공산주의가 부서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체가, 이념이 부서진 것입니다. 단군 상을 없앤다고 하니까 못 없앤다고 난리 치면서 구속하고 그렇게 하는데 참 한심한 것입니다. 오죽 할 일이 없으면 그런 것을 세워서 정신적인 통일을 이루어보려고 하겠습니까. 민족이 얼마나 의지할 곳이 없으면 그런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탁 끌어내려서 산산조각이 나서 부서져버렸습니다. 그것을 이 아사가 한 것입니다. 왕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왕이 되어본 적이 없는 우리들의 생각이지 사실은 안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한 지도자 아래 있는 회원들은 보이는 저항을 받지만 최고의 지도자는 말로 표현되지 않는 저항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여러분과 같은 착한 성도들에게도 그런 저항을 제가 느낍니다. 그런데 하물며 그 부패한 시대의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우상숭배의 풍조를 타파하고자 할 때 그가 얼마나 외롭게 고군분투했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세 번째 그가 한 일이 무엇인가 하면 산당을 제하고 거기에 남색하는 자들을 쓸어버린 일입니다. 이것은 그 당시의 종교와 관련이 있는데 이방 종교들은 대게 가나안의 토착 종교였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바알 종교를 비롯해서 농경 신과 관련된 종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재미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 종교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바알을 비롯한 그 신들이 농경 사회를 풍요롭게 하는 권한을 쥐고 있는 신들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느꼈던 혼란이 무엇인가 하면 과연 가나안 땅에서도 여호와 한 분만으로 충분한가 이것입니다. 우리들이 생각할 때는 참 병신 같은 생각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심각하게 그들에게는 고민이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죄 많은 이 세상에 복음 하나로 충분합니까? 여러분도 지금 ‘아멘’ 하고 대답을 안 하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 하나님인데 여러분도 쉽게 대답할 수 없잖아요. 죄 많은 이 세상이 신앙 하나로 충분한가 할 때에 충만해서 ‘아멘 유일신 신앙이면 충분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소수였던 것처럼 그때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개선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도 섬기고 농경 신에게도 밉게 보이지 않는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혼합주의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를 완전히 버린 것이 아니라 여호와와 함께 농경 신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산에 산당들이 있는데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면서 그 제사는 여호와의 제사가 아닙니다. 이방 신들에게 제사를 드려서 풍년을 기원하고 복을 기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반드시 뭐가 행해지는가 하면 성적인 범죄가 행해졌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거기에 남자들이 있어서 이제 남자와 남자가 말하자면 성적으로 부끄러운 일을 하는 것입니다. 또 바알 종교 같은 곳에는 여성들이 거기에 있어서 제사를 드리러 올라가는 사람들이 품삯을 주고 거기서 성행위를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바알 신이 흥분해서 비를 계속 내려주실 것이라는 헤괴망칙한 교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웃지만 그 시대의 사람들은 굉장히 심각한 그런 것이었습니다.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었던 우상 숭배와 연관이 되어 있다는 것은 우상 숭배는 삶과 깊은 뿌리를 박고 있는 것입니다. 그 농경 사회라고 하는 삶과 깊은 뿌리를 박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아세라 상들을 막 쳐부수고 바알 상이 막 부서져 나갈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속에 신앙이 없으니까 어떤가 하면 ‘저렇게 바알을 막 대하다가는 재앙이 오지’ 이런 정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개혁이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생각해보십시오. 그 아비얌도 약간은 경건한 사람이었는데 그런데 이런 일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 앞에 왕도 마찬가지고 조금씩 다 그런 경건의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한 것입니다. 거기에서 오는 그 저항이 얼마나 크고 엄청났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불 신앙의 시대에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항상 외롭습니다. 외롭고 악이 보편화된 시대에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박해를 받고 고독합니다. 친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여기서 ‘살렘 임 야훼, 혹은 임 아도나임’ 여호와와 함께 그 마음이 온전하였더라. 하나님이 함께 해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위로를 받으면서 충전을 받으면서 그 어마어마한 개혁의 작업들을 수행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개혁의 작업이라는 것이 결국 무엇입니까? 왕이 무슨 정치적인 신념을 가지고 지금 마하가를 폐위하고 아세라를 쳐부수고 그 다음에 남색하는 자들을 토벌하고 하는 이런 일들을 한 것입니까? 산당을 부수고 그런 것입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아사의 마음에 불타고 있는 무엇이 이 일을 하게 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지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기서 이것을 기록하고 있지만 이런 삶의 태도는 그의 삶의 전 영역에서 구현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전 영역에서 구현된 철저한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장구한 신앙의 분투가 이 사람의 마음을 단련하고, 단련하고, 단련해서 온전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온전한 마음에서 온전한 삶이 흘러나와서 그 시대에 불 신앙의 사람들, 자기 선대와 후대에 있었던 불 신앙의 임금들과는 질적으로 비교가 안 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군주가 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들이 불순종하는 삶을 꺾고 순종하면서 살려고 하는 분투하는 몸부림이 없이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이 되어갈 수 없습니다. 그냥 너절한 사람으로서 그냥 근근덕신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할 수도 없고 그 십자가의 사랑에 감화를 받아서 그 은혜의 감격 속에 살수도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영혼에 놀라운 변화를 경험했을 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 마음과 온 영혼이 주님의 것이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나니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
주님의 뜻대로 나 항상 살리라
주님이 죽으신 고난 이 죄인을 위함이니
범죄한 날 위해 주 욕을 보셨네
나 무엇으로서 그 은혜 보답하리오
무한하신 주의 사랑 한없이 크도다
나 평생 사는 동안 주 위해 살리라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아멘, 그것입니다. 그런 분투하는 순종의 삶이 이 사람을 점점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갔던 것입니다. 온전한 삶이 온전한 마음을 빗고 빗어진 그 마음에서 온전한 생활이 흘러나와 그리고 그 마음과 생활이 하나가 되어서 우리를 온전한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주님과 함께 교통하면서 탁월한 친교 속에서 살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 하나님과 탁월한 친교 속에서 주의 은혜를 누리며 살았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기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지킨 사람들이었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지켜진 온전한 마음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 생활에 대해서 공을 들인 사람들입니다. 자기의 삶을 꼼꼼히 살피면서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일까. 내가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내 인생의 최고의 가치다. 그렇게 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뜻대로 사는 동안에 아사와 같이 결단과 개혁이 필요할 때도 있었고 그 결단과 개혁을 내리면 외톨이가 되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사람들이 다 버려도 그렇게 온전한 마음으로 주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과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그와 동행하시며 그의 살렘한 온전한 상태의 그의 마음이 유지되도록 만들어줍니다. 그것을 지키면서 살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면서 살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나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그 큰사랑, 십자가의 놀라운 은혜를 마음에 간직하고 그리고 분투하는 순종으로 이렇게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아사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어느 때보다도 캄캄하고 어둡습니다. 우리의 가정에도 영적인 어두움이 가득합니다. 이때일수록 심지어는 믿는 사람들조차도 어두움 속에 있는 이런 때일수록 아사와 같이 샛별과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런 온전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그런 한시대의 등불로, 한 시대의 북극성으로 삼아서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주님을 믿는 대의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 되어서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 안내하는 지시 판과 같은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6.아사: 순종과 헌신
“저가 그 부친의 구별한 것과 자기의 구별한 것을 여호와의 전에 받들어 드렸으니 곧 금과 은과 기명들이더라”(왕상15:15)
어두운 시대에 샛별과 같은 신앙을 가진 영명한 군주 아사는 “일평생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 온전한 자였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온전하다”라고 하는 이 말은 죄가 없고 순전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가 없는 사람일수가 있겠습니까? 약점과 결점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평생동안 무엇을 성실하게 찾으면서 살았는가 하는 것을 오늘 성경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한순간 믿음으로 산 것을 인해서 자만할 이유도 없고 지나간 일의 실패를 인하여서 우리들이 좌절할 필요도 없습니다. 한사람의 산 모든 인생은 그 사람 전체의 인생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평가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아사는 우리가 마음에 그리고 있는 것 같이 완벽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 뒤편을 읽어가 보면 이렇게 그 마음이 일평생 순전하고 온전한 사람이었다고 한 이 아사가 아람 왕 벤하닷에게 성전의 금은 보화들과 기명들을 가지고 가서 뇌물로 바치며 일생동안 적대관계에 있었던 이스라엘 바하사와의 동맹을 끊고 그리고 자기들에게 군사적인 도움을 주도록 요청하는 부도덕한 장면이 나옵니다. 그렇게 따진다면 아사의 삶을 재는 표준이 되었던 다윗은 완전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의 인생은 전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평가를 받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는 이 사람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마음이 온전하고 하나님과의 평화 속에서 살 수 있었던 것은 부단한 순종의 삶을 통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는 사실을 장시간에 걸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성경은 “아사가 일평생 여호와 앞에 그 마음이 온전하였더라”고 하는 기록 뒤에 마치 후기라도 쓰듯이 그가 한 일을 간략하게 첨가하고 있는데 이 속에서 오늘 우리들은 영적인 진리를 한번 살펴보고 우리에게 적용을 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후기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가 부친이 구별한 것과 그리고 자기가 구별한 것을 여호와 앞에 바쳤으니 곧 음과 금과 기명들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 기명은 살림살이입니다. 그릇 같은 것들을 비롯한 살림살이를 총칭하는 그런 단어입니다. 성전에서 쓰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구별했다”라고 하는 것은 “카도쉬”라고 되어 있는데 모두 부친의 것이나 또 아사의 것이나 모두 복수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그가 하나님 앞에 바친 예물들의 물량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구별한 것, 즉 이것은 하나님의 집에 바쳐야되겠다 라고 작정하고 선별해놓은 것을 하나님 앞에 바쳤다고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러나 아버지가 구별한 것을 하나님께 바쳤다 라고 하는 것은 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있지만 우리는 대충 이런 추측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먼저 바치려고 작정하고 구별해놓은 것들이 있었는데 일단 하나님 앞에 바치게 되면 그것은 다시 왕궁을 위해서 가져다 쓸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집에 바쳐진 것은 성물이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꺼내다 쓰면 그것은 아주 패역한 왕입니다. 꺼내다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랬는데 아마도 이 아버지가 부왕이 하나님 앞에 바쳐야되겠다 라고 작정을 한 것을 작정만 하고 실행을 안 했던 것 같습니다. 아사가 왕이 되고 깊은 신앙을 갖게 된 후에 이 문제의 잘못을 깨닫고 아마도 자기가 하나님 앞에 바치기로 작정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부왕이 하나님 앞에 작정은 했지만 미쳐드리지 못한 것을 부왕을 대신하여 속죄하는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 그 약속을 대신 이행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런 추측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째든 그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 금과 은과 기명들을 많이 바쳐서 왕궁에 있는 보물들을 하나님의 성전에 넣어서 그래서 구별된 물건으로 삼았다 그것을 덧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들이 오늘 중요한 진리를 하나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한사람의 하나님의 자녀가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 온전하여지는 그것은 순종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금하신 명령에 순종하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지 말라고 하시는 그 계명에 복종하는 것,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소극적인 순종과 적극적인 순종을 말합니다. 소극적인 순종은 무엇인가를 하지 말라는 금지 명령의 복종을 의미하는 것이고, 적극적인 순종은 하나님께서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에 대한 순종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도둑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이런 명령을 어긴 것에 대해서는 중대하게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 하라고 명령하신 긍정적인 명령에 불순종한 것에 대해서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금지 명령은 하나님의 명령이지만 행하라고 하는 적극적인 긍정에 명령은 하나님의 권고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구조를 보면 그 율법은 금지 명령은 항상 긍정 명령을 지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율법의 정신이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율법의 정신은 실현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너는 다른 신을 내 앞에 있게 하지 말라’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단지 우리가 불교를 믿거나 다른 종교를 하나님보다 더 믿지 말라는 명령이라기보다는 하나님만 섬기고 사랑하라는 계명이 아닐까요? 또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에 절하지 말라’ 하는 그것은 단지 우리로 하여금 우상에게 절하고 고사를 지내고 굿을 하고 하는 것을 금하는 명령이기보다는 영적 존재자시고 절대자이신 그리고 인격자이신 하나님 한 분을 그분의 존재와 영광에 합당한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라고 하는 그 계명이 아니겠습니까?
미움의 종착역은 살인입니다. 살인하지 말라고 하는 하나님의 계명은 결국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고 싶으셔서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순서가 좀 다르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라고 하는 계명은 단지 하나님의 이름을 섣불리 거명하지 말라고 하는 명령이라기보다는 일평생 살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면서 살라는 계명이 아닐까요? 이웃에 대해서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계명은 진실하고 정직하게 살라는 하나님의 긍정적인 명령을 오히려 최소화한 것 그것이 이웃에게 거짓증거 하지 말라고 하는 최하한의 금지 명령입니다. 그런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감에 있어서 금지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도 우리에게 중요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금지 명령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것을 위해 사는 것이 우리에게 보다 더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아사는 바로 이런 진리를 보여줍니다. 아사가 일평생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애씀으로 결국 그가 온전한 사람이 되었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려고 애쓰는 순종의 삶은 또 하나의 그의 신앙생활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었으니 그것은 헌신된 삶이었습니다.
요한 1서 3장 22절은 예수님이 이 지상에 계실 때에 하나님께 기도 응답을 받으시면서 사셨던 비결을 두 가지로 말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고 또 하나는 그의 기뻐하시는 바를 행하면서 사는 것,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그런 삶입니다. 같은 사실은 히브리 서에도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실 때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고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 자신의 삶이 경외하시는 삶이었기 때문에 그 경외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예수님의 기도에 응답해주셨다 라고 하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와 유사한 정신이 바로 요한 1서 3장에 나와 있는 구절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행하든지 그에게 구하는 바를 받는데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의 기뻐하시는 바를 행하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소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를 바치면서 살아가는 그 삶,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고 바라시는 바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이 아사는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같아서 정직하고 하나님과 화목 속에서 살았던 그 비결이 하나는 그가 하나님 앞에 순종을 통해서 온전함을 이루었지만 그러나 또 하나는 순종 그 위에 헌신의 삶을 살면서 그가 온전함을 배웠다고 하는 것입니다. 헌신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능히 누릴 수 있는 어떤 것을 주님을 위해서 그것을 희생하고 주님을 위해서 그것을 바침으로서 자신은 불편함이나 고통을 감수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런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을 보면서 보상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신앙, 그것이 바로 헌신의 삶입니다.
한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삶을 결정하지만 삶과 그 사람의 사람됨은 유통하는 관계에 있어서 한사람의 사람됨이 삶의 모양을 결정하기도 하지만 또한 그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그 사람의 사람됨을 결정합니다. 하나님께서 주님을 믿는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그 크기는 각각 다를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아무리 지극히 작은 사명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질적으로는 모두 지엄하신 하나님의 명령이고 부르심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우리들의 태도는 곧 하나님께 대한 태도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주님이 맡겨주신 일들을 통해서 헌신된 삶을 살 것이며 주님이 맡겨주신 일들에 대해서 헌신적으로 섬기면서 사는 사람들은 점점 더 그 일을 통해서 그런 삶의 방식을 통해서 자기에게 사명을 부여해주신 우리 주님의 성품을 본받아갈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은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 몸부림할 것이며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 힘쓰고 애쓰는 그의 삶은 그를 점점 더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들에 대해서 태만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지금은 태만한 삶이 좋아서 선택하지만 세월이 흐르면 그런 반복되는 그의 악한 삶은 그를 게으르고 쓸모 없는 사람으로 만들 것이며 결국은 그는 후에 하나님 앞에 진실한 사람이 되고자 선택을 해도 좀처럼 진실을 택할 수 없고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게 살려고 해도 살 힘이 없는 사람으로 전락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큰 일들을 이루시고 아직은 덜 준비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하고자 하시는 일들을 능히 감당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삶의 방식이 헌신되고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 사람들,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의 유익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자기의 명예를 기꺼이 희생하면서 주님을 섬기며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처음 하나님께서 일을 맡겨주실 때에는 인격적으로 능력에 있어서나 모자라는 것 투성의 사람이지만 그러나 그렇게 헌신되고 충성되게 살아가는 진실한 희생의 몸부림을 통해서 그는 점차 주님의 사람이 되어 갑니다. 우리들이 주님의 사람이 다 된 후에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할 것 같으면 아마 우리는 일평생 하나님의 일을 해보지 못하고 죽을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완벽한 사람을 만드셔서 당신의 일을 맡기신 사람이 누가 있었습니까? 불붙었으나 그러나 타지 않는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 민족의 해방과 구원을 위해서 부름 받았던 모세는 그 엄위하신 영광 가운데서도 혈기를 부리면서 하나님 앞에 대드는 그런 혈기 충만한 젊은이였습니다. 그를 들어서 하나님이 대업을 맡기시고 대업을 맡은 후 그는 그것이 자신의 사명인 줄 알고 회피할 수 없는 부르심에서 자기를 다 드리는 헌신적인 생애를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헌신적인 생애는 그의 인생 전체를 고난과 역경으로 가득 찬 형극의 길을 걷게 했고 그 속에서 몸부림치며 살아가면서도 이루었던 하나님과의 탁월한 교통을 통해서 그는 점점 더 온전한 사람으로 변하여 혈기 충만하던 젊은이가 비난받을 때 오히려 온유함이 지면에 있는 모든 사람보다 더 뛰어난 사람으로까지 변화되는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며 살아왔던 하나님 중심의 헌신된 삶이 그를 바꾸어놓았다고 우리는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펴보고 있는 이 아사도 결코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연약한 한 인간에 불과했고 그렇게 연약한 한 인간을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결국은 인생을 다 산 후에 그 사람의 인생에 대해서 일평생 하나님 앞에 그 마음이 온전하였던 사람이라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날마다 부패한 왕국에서 태어나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부왕의 모본을 버리고 그 시대를 본받고 자기에게 아첨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좋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그리고 자신의 민족의 소망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삼았던 헌신된 충성된 삶의 여정을 통해서 그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 되어갔다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흠이 없고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워 온전함에 이르시게 되었다고 할 것 같으면 예수님과는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죄가 많고 악하고 부패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많은 더러움들을 가지고 있겠으며 그것들을 정결케 하고 깨끗케 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할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말해서 아사는 비록 결점과 약점이 많은 사람이었고 허물도 많은 사람이었지만 하나님 앞에 정해진 자기의 중심,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서 살았던 자기의 소중한 것을 끊임없이 드리는 희생과 헌신의 삶을 통해서 결국은 그의 인생 전체의 하나님 앞에 온전함이라고 하는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모든 고난이 그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신앙이 없이 고난을 많이 당한 사람들은 성품이 파괴적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자기 혼자 힘으로 헤치면서 살아온 사람들은 강인함이라고 하는 남보다 좋은 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다른 사람을 이해할 줄 모르고 독선적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고난을 많이 받은 사람들은 상처도 많은 사람입니다.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잘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고난을 통해서 우리들을 온전한 사람으로 바꾸어 가신다고 할 때에 그 절대적인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난에 대해서 신앙으로 반응할 때에 그가 정말 그 고난을 통해서 거룩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의 길을 들어선 사람들을 보면서도 그런 것을 느낍니다. 어떤 목회자는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거룩하고 진실한 사람이 된 사람도 있지만, 하도 고생을 했기 때문에 이제는 일그러진 심성을 갖게된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은 무슨 이유 때문에 왔는가가 아닙니다. 비록 그 고난이 자기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징벌로 인하여 왔다고 할지라도 그 징벌도 하나님을 의뢰하는 신앙으로 받으면서 고난을 받으면 거룩해지지만 자기의 죄가 아니라 진짜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 고난을 받을 때에 그 신앙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면서 그 고난을 받지 못하면 고난이 복음을 위해서 받는 거룩한 고난인데도 그 사람을 아주 속된 사람으로 망가트리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에서 교인들이 상처를 받았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는데 받을 것입니다. 다 왕년에 한가락하던 사람들이 모인 곳인데 왜 상처가 없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다 그런 것은 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처받은 목회자들도 많습니다. 제가 목회자들을 여러 사람을 만나보면 어떤 사람은 그 상처가 너무 깊어서 교인들과 화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할 때 ‘목사의 인격이 그 정도 밖에 안 되나, 선한 목자는 목숨을 버린다고 그랬는데 그래 그것도 화해를 못하나’ 못하는 것은 못하는 것입니다. 안 되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그 사람도 따지고 보면 하나님 앞에서 한 마리의 어린양에 불과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 사람은 누가 목양해주나.’
그런데 이제 중요한 것은 헌신은 항상 고난을 가지고 옵니다. 고난이 없는 헌신은 없습니다. 항상 헌신은 고난을 가지고 옵니다. 어떤 중 고등부 녀석 하나가 우리 교회 아이인데 손에 물집이 잡혔습니다. 그래서 아프다고 그래서 왜 그런가 했더니 오락실에서 조이스틱을 하도 흔들어서 물집이 잡혔다고 해서 내가 뒤통수를 한 대 때려주었습니다. 오락에 빠지려고 그래도 그렇게 물집이 생기는 희생이 있는데, 화투를 치는 사람들은 밤새도록 고스톱을 치고 나면 새벽에 손이 발발 떨린다고 합니다. 웃으시는 분들은 다 전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희생이 없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헌신이라고 하는 말은 자기의 몸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제물이 기대하는 바는 무엇인가 하면 눈감고 죽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헌신입니다.
우리들이 각자 믿음의 분량을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에게는 커다란 것일 수가 있겠고 어떤 사람에게는 작은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모두 사람이 볼 때에 외형일 뿐이지 하나님이 큰 일을 맡긴 사람을 통해서 크게 영광을 받으시는 것도 아니고 작은 일을 맡긴 사람을 통해서 하찮게 영광을 받으시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 각 사람에게 주신 은혜를 따라 맡겨준 하나님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명을 따라서 사는 삶이 정말 헌신되고 진실하면 진실할수록 그 사람이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는 그 과정을 통해서 점점 온전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맡겨주셨을 때에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비교적 온전했는데 살아가면서 우리들이 점점 더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못한 사람이 되어간다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헌신의 방식의 문제가 없는지를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지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혼을 맡겨주셨다고 칩시다. 주님이 우리에게 영혼을 맡겨주셨을 때 우리들이 그 영혼을 어떻게 돌보고 감당해나가는가 하는 것은 아마 사람마다 다 다를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저 자기에게 맡겨준 영혼들이라고 하는 의식도 없이 그냥 한 주 한 주 그냥 감당해나가다가 자기에게 맡겨준 양들을 다 잃어버릴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특별히 가르침에 재주가 있고 그래서 마음을 쏟아서 영혼들을 섬기지 않았는데도 하나님께서 자연적으로 많은 영혼들을 주셔서 마치 겉으로 보기에 크게 성장한 것 같은 열매를 맺은 것처럼 그런 결과를 하나님께서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양쪽 그 어느 경우에도 결국 그 자신의 심령을 통해서 흘러나온 섬김이 아니기 때문에 그 일이 그 사람 자신을 바꾸어놓지 못합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도 바울이 편지를 쓰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기를 “내 심령으로 섬기는 내 하나님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하나님이 자기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인데 그 하나님은 자신의 그 깊은 심령 속에서 섬기는 그 하나님이라고, 다시 말하면 마음을 다 바쳐서 섬기는 하나님이라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반드시 우리를 바꾸어놓습니다. 나태하고 태만하던 사람은 하나님을 향해 충성된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바꾸어놓고, 악하고 조잡한 인격을 가졌던 사람은 진실하고 아름다운 신앙의 인격을 가진 사람들로 바꾸어놓고, 비겁하고 비굴하던 사람들은 용기 있고 담대한 사람들로 반드시 변화시키고야 맙니다.
자기에게 맡겨주신 그 영혼들을 하나님 앞에 소중하게 생각하며 그 영혼들이 아파할 때 함께 고통을 당하고 그 영혼들이 눈물을 흘릴 때 함께 통곡하며 그 영혼들의 안녕과 평화와 행복을 위해서 무엇인가 자기를 희생해서 주고자 하는 헌신된 마음으로 살았던 사람들, 그들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통곡과 눈물, 몸부림, 사랑, 열정, 격렬함, 몸부림 이런 모든 작용들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그런 마음의 결단과 작용들을 통해서 그들의 마음은 담금질되고 변화되어갑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이 더 순전하여지고 하나님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그의 내면의 세계에는 철저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고 그런 변화들은 그들의 삶으로 하여금 더더욱 주님의 성품을 본받게 만들어갑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 붙들고 헌신하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붙들고 헌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그는 일에 충성한 사람, 사람에 묶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과 일을 맡겨주신 하나님의 인격에 매인 사람이었습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 받는 연단이었고 그 하나님 앞에서 받는 고난이었고 시련이었고 그리고 단련이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 선생으로 있을 때 4-5월 달만 되면 애들이 데모를 했는데 데모를 하기만 하면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처럼 앞장을 서던 녀석이 하나 있었습니다. 공부 시간에는 매일 엎드려서 잠이나 자고 그러다가 어디 대자보가 붙었다 데모한다고 하더라 그러면 아주 진짜 충만해져서 나타나는 그런 자였습니다. 그래서 참 마음 고생을 많이 시켰습니다. 그런데 몇 해 후에 학교에 찾아왔는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무슨 일을 하느냐고 했더니 개척 교회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개척 교회를 해서 넌 잘못했어, 넌 나쁜 놈이야, 저것은 타도해야지 돼. 그런 식으로 설교를 해봐야 개척 교회에서 되겠습니까? 자기 말고 누가 남겠습니까. 그러면서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고 그러면서 목회를 하다가 보니까 완전히 사람이 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도 여러분들을 하나님이 그냥 바꾸어놓으실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바꾸시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못하시기보다는 그렇게 안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저를 더 진실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십시오. 백 번 기도해도 진실하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이 하는 기도가 아니면 하나님을 놀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어느 날 ‘응답’ 그렇게 해서 자고 일어나 보니까 진실한 사람이 되기를 기대합니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진실하게 살려고 애를 쓰지 않는 사람이 진실하게 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놀리는 것입니다. 저를 정말 성경에 나오는 훌륭한 인물들처럼 그렇게 충성되게 주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으로 나를 변화시켜주십시오 그럴 때 이미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가지고라도 충성되게 살려고 부족하나마 애를 쓸 때에 하나님이 그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는 것이지 매일 노라리 같이 영혼들을 맡겨주면 다 털어먹고 교회에서 직분을 맡겨주면 그냥 아무렇게나 팽개치고 살고 책임감도 없고 그렇게 살면서 충성되게 살도록 기도하는데 뭘 해야지 도와주지. 그렇지 않습니까?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마음이 합하다. 온전하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 앞에 정직하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제품자체가 처음에 정직하고 진실하고 온전하게 만들어진 제품으로 태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다윗이 나중에 뭐라고 고백을 했습니까? 그렇게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진실하고 하나님 앞에 온전하고 그 마음에 합해서 이후에 등장하는 모든 임금들의 삶을 재는 척도가 되었습니다. 그 다윗이 깊이 자기가 누군지 깨달은 다음에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나의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으며....” 자신 속에 있는 그 끝없이 더러운 밑바닥을 다윗이 보게 된 것입니다. 원래 제품이 그런 제품입니다. 그런 제품이었는데 그가 하나님 앞에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온전하고 순전한 삶을 살면서 주 앞에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았던 그 모든 사람들 중에 주님을 위해서 헌신된 삶을 살지 않았던 사람이 누구인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누가 있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주님을 위해서 섬기면서 그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모두 그런 길을 걸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헌신된 삶은 하나님을 닮는 첩경입니다. 하나님을 추구하라, 하나님을 찾으라는 이야기를 성경이 많이 하고 있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는 당부를 성경이 우리에게 주고 있는데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진실하고 헌신된 삶의 분투가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찾겠습니까? 왜 찾아요? 그저 오늘 하루 밥 먹고 짐승처럼 뒹굴뒹굴하면서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면서 세상과 더불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찾겠습니까? 하나님을 찾아서 뭐하겠습니까?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는데 하나님을 만나서 뭐하겠습니까?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어울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동행하심이 별로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동행해주셔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은 주님을 위해서 진취적인 모험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뚜렷한 목표가 있고 하나님을 위해서 성취해야 할 분명한 목적이 있고 그것을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라도 그것을 이루고자 하는 분명한 목표가 있을 때에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도와주셔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목표 속에서 연단 될 것이고 그 연단은 그들의 삶을 점점 더 순전하고 온전하게 만들어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주님을 믿고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가 무엇인지를 알고 난 다음에 여러분들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아주 진실하고 헌신된 삶입니다. 소극적으로는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는 것 하지 않고 순종하고 적극적으로는 그것을 뛰어넘어서 하나님이 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한 걸음 더 뛰어넘어서 어떤 것들을 할 때 하나님께서 정말 기뻐하시는지를 헤아리면서 자신이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삶의 가치가 하나님의 기쁨인 것처럼 살아가는 헌신된 삶, 그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정말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통해서 그 사람이 점점 더 하나님 앞에 온전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삶에 있어서 주님을 위해서 세운 목표가 있고 그 목표를 위해서 기꺼이 헌신하면서 살아가고자 하는 눈물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 일들이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는 것을 믿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고자 하는 눈물이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삶의 초점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기도에 관해서 설교하면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이런 질문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오늘 지금 주님이 여러분에게 오셔서 네가 가장 가슴아파하는 기도의 제목이 무엇인가 한가지만 말하라. 그러면 내가 들어주리라.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때 ‘예 또 그게 뭐더라. 그런데 그게 뭐더라. 예수님, 한 삼일만 시간을 주시면 안 되나요. 생각 좀 해보고요.’ 그럴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을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결국 무엇인가 하면 초점이 없는 삶을 삽니다. 그리고 초점이 없는 삶은 헌신이 없는 삶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분명히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주님을 위해서 헌신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아주 분명한 초점이 있는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온 마음과 심령의 눈은 그 한가지 목표를 향해 이글거리고 타고 있었고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으며 살신성인의 도를 실천하며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타는 듯한 목마름이 하나님을 향한 추구를 가져왔고 그것이 그 사람을 놀랍게 바꾸어놓았던 것입니다.
오늘 아사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에게 순종함으로서 온전한 사람이 되었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소중한 것을 하나님 앞에 구별 되이 드림으로서 그는 마음이 하나님 앞에 단련된 사람이 되었고 점점 더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서 그 살렘을 유지하면서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바로 그런 삶을 하나님 앞에 요구받고 있습니다. 제발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맡기셨든지 그것이 무슨 사명이든지 간에 주께로 받은 것이 분명하다고 할 경우에는 그 일의 크기에 상관없이 그 일과 관련된 분이 거룩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면서 그것을 위해서 최선의 것을 드려서 희생하면서 살려고 하는 헌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맡겨진 그 일이 영혼들을 돌보는 일이면 영혼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그 영혼들이 마치 우리 주님의 분신인 것처럼 섬기며 사랑하고 그들의 영혼의 잘됨을 인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위해서 희생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일이 교회를 돌보는 일이면 그 일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예수 죽인 것을 짊어지고 내게 맡겨진 이 일을 위해서 충성되게 살아감으로서만 내가 우리 주님을 본받아갈 수 있다고 하는 그런 각오를 가지고 주께 하듯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있어야 할 그 자리를 비우면 그 자리는 비어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자리를 비우고 사명을 저버리고 헌신을 싫어하면서 살아가는 나태한 그리스도인은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는 불순종하며 하나님을 거스르며 게으르게 살고 있는 중이며 그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기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보다 소중하게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 그에게는 어떠한 영혼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말씀이 머리에까지는 이를 수 있어도 그의 마음은 변화되지 않을 것이며 예전에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던 때와 차이가 있다면 예전에는 무엇인지도 모르고 공허한 마음이었으나 이제는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사람인지를 아는 상태에서 곤고함을 경험하고 살아가고 있을 따름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구속의 은혜를 입고 주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최대의 요구는 여러분들이 주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많이 소유한 사람이나 어마어마한 일로 그분을 감동시키는 사람이 되기 전에 하나님은 여러분들 존재 그 자체로 하나님이 기쁨을 느끼실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더 주님을 닮은 사람이 되고 더 순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어떠한 환경 속에 있든지 하나님과의 평화를 유지하면서 살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오늘 이 아사가 행했던 것처럼 자신을 드리는 헌신의 삶을 살지 않고는 여러분들이 결코 은혜의 중앙에 들어올 수 없는 것입니다. 수없이 주님의 주위를 맴돌고 복음의 진리 주변을 돌 수는 있지만 복음과의 만남은 없고 우리를 변화시키셔서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실전과의 만남이 없습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아사는 자기의 소중한 보물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부왕이 약속했으나 지키지 못한 것까지도 속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아비야와 같이 약속은 했으나 하나님 앞에 바치지 못하는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하나님 앞에 헌신된 삶을 살지 않는 그런 아사의 아비와 같은 삶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은혜를 위해 살지 못하는 것조차 마음 아파하며 하나님 앞에 자기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하나님 앞에 드리며 사는 헌신이 있는 삶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한번 마음에 손을 얹고 하나님 앞에 한번 대답해보십시오. 오늘 이 시점에서 저와 여러분들의 인생이 마름하고 우리 주님 앞에 선다라고 말할 때 그래도 이것만큼은 내가 하나님 앞에 섬기면서 희생하면서 헌신하면서 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하는 삶의 영역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니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으면 뭐라도 주님을 위해서 하면서 살아야지, 왜 놉니까? 아무 것도 안 하고 주일이 되면 그저 시계추 왔다가 가듯이 왔다갔다하는데 잠시 은혜가 있겠지만 삶으로 분투하는 체험이 없는 사람이 무슨 삶이 그렇게 대단한 삶이 있겠습니까? 한순간에 사람을 휘어잡는 매혹적인 영화도 몇 번 보고 나면 실증이 나고 나중에는 짜증이 나는데 매일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가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된 삶을 살지 않는데 어떻게 송이 꿀처럼 늘 달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이라고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서 그 피로 여러분들을 구했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지만 불순종하고 거슬려서 제 갈 길로 갔습니다. 불순종하고 걸어가는 그 길이 너무나 아프고 고달프다고 눈물을 흘렸더니 주님이 찾아오셔서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있는 많은 상처와 패역들을 또한 고쳐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셨고 인격적인 승복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게 하셨으며 주님의 은혜 안에서 살도록 주님이 불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를 주셨고 기도의 문을 열어주셨고 그리고 섬기며 살 수 있는 교회를 주셨고 사랑하고 돌볼 수 있는 영혼들을 맡겨주셨습니다.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목자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랬으면 이제 무엇인가 하나님을 위해서 하면서 살아야지 되지 않겠습니까? 왜 그냥 삽니까? 그것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악한 일이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한 달란트 맡은 종을 생각해보십시오. 주인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라고 욕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뭘 그렇게 악하게 살았습니까? 한 달란트 받아서 장사를 하다가 남기면 잃어버릴지도 모르고 그러면 주인은 엄한 사람이니 요절을 내리라 생각하고 땅에 묻어두었습니다. 돌아다니면서 주인의 욕을 한 것도 아니고 주인의 재산을 훔친 악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와서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말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가 아무런 헌신된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상상해볼 때 만약에 그 한사람이 한 달란트를 가지고 미친 듯이 일하고 그리고 그 주인을 위해서 주인이 맡겨준 이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헌신된 삶을 살면서 고생했는데 마지막에 또 한 달란트 겨우 본전을 찾았더라. 만약에 그랬다면 주인의 성품상으로 볼 때 주인에게 중요한 것은 달란트가 아니었습니다. 달란트 자체가 큰돈이기는 했지만 그 주인은 워낙 부자였기 때문에 그 달란트 몇 개 정도를 가지고 그렇게 사람이 좌우될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그 주인에게 종들이 그냥 주었습니다.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왜 주었겠습니까. 다 조금씩 상금으로 주었을 것입니다. 다 주었습니다. 주인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는 주인을 위해서 아무 헌신된 삶이 없었습니다. 그가 만약에 헌신된 삶을 살았더라면 한 달란트 도로 본전을 찾았다고 할지라도 주님은 그를 그렇게 매정하게 책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무엇인가 섬기며 살아가는 삶이 없이는 결코 우리들이 온전함을 이룰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산 속 수도원에서 갖는 신앙이 아닙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보면 4세기경부터 수도원이 생기기 시작했고 13세기까지 수도원 운동이 이어졌는데 그들은 간단한 논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너무 더럽다. 이런 곳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주님과 교제를 나누기에는 너무 부적절하다. 그래서 이 속된 더러운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서 ‘모너스’ 즉 홀로 있어야지 하나님과 신령한 교통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수도원은 속세를 떠났으나 그러나 속세는 거기까지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은 수도원이 속세를 떠났으나 그러나 정신적으로는 수도원이 속세를 찾아간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발견될 수 있는 모든 세속적이고 더러운 것들이 그 수도원 속에서도 발견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모든 부패와 그 문제가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모아지고, 모아지고 거룩한 긴장 속에서 신령한 목표를 인하여 마음 아파하고 분투하는 헌신적인 섬김의 삶이 없이 그가 아사와 같이 온전한 마음이 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 그냥 삽니까? 여러분 그냥 살다가 그렇게 해서 계속 세월만 허비하면서 시간을 보낼 때 마지막에 여러분 남는 것이 무엇이 있을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무엇이라도 하나님을 위해서 건강이 있고 물질이 있고 기력이 남아 있고 기력이 있을 때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지 되지 않습니까? 눈을 들어보십시오. 섬길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왜 그냥 살아갑니까? 뭐라도 섬기십시오. 한 영혼에게 복음을 전하기도 하시고 하다못해 주일 학교 교사라도 하고 그것도 가르칠 능력이 없으면 주일 학교 학생들의 신발이라도 정리해주고 그것도 할 수 없으면 신발 정리를 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라도 해주고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도 도저히 자기의 재능이 없는 것 같으면 가서 열심히 돈벌어서 교회에 헌금이라도 하십시오. 왜 아무 것도 하나님을 섬기는 것 없이 그냥 살아가려고 합니까? 그렇게 해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에서 사셨던 생애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분이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신 삶의 방식, 그 순종을 통해서 온전함을 이루신 삶의 방식이 어떤 것이었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마음속에 항상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열정과 누르면 쏟아질 것 같은 눈물 보따리를 가지고 사신 생애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돌아오지 않는 죄인들을 위해서 인도하여할 영혼들과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는 백성들을 인해서 항상 누르면 터질 것 같은 눈물을 간직하면서 사신 분이셨습니다. 그분의 마음속에는 항상 우리가 있었고 그분의 마음속에 우리가 있었던 것은 그분의 심령 속에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마음 중심으로 하나님을 향한 헌신이 우리를 향한 동기가 되어서 무엇인가 당신이 살아있는 동안에 때가 아직 낮일 때에 주님을 섬기고 우리들을 섬기는 그런 인생을 사셨습니다.
물론 우리는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면서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일도 지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양이 문제가 아니고 사람들이 우리의 인생에 대해서 인정해주는 박수 소리나 명성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가 정말 무엇을 위해 헌신하며 사는 사람들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헌신의 삶을 통해 우리가 점점 더 온전해져 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날마다 예수 죽인 것을 우리의 몸에 짊어지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으니 그렇게 흘린 피로 구속을 받은 우리들이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 마땅하다 라고 하는 신앙적인 각오를 가지고 주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많은 소유, 건강, 재능 이런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드리며 섬기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어디에 있든지 어떻게 살든지 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헌신하지 못하게 하는 내 마음에 악함과 싸우고 헌신하면서 주님을 더 사랑하고 해서 그 헌신된 삶의 반복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에 악함과 죄를 버리고 더 주님처럼 온전해져 가는 그런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주님이 우리에게 십자가의 사랑을 구속해주셨습니다. 또 그렇게 구속받은 우리들을 순종하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가지고 있는 이 온전하지 못함,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뒤로 물러가고 또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반복적인 많은 실패들, 이것이 혹시 우리의 삶에 목표가 없기 때문이 아닙니까? 헌신하고 쏟아 부어야 할 목표가 없는 삶, 그래서 그 목표 때문에 주님께 매달리고 그 목표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목표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하고 더 하나님의 마음에 온전한 사람으로 남고자 하는 몸부림이 있는 그런 삶을 살아갈 때 우리들이 그 헌신의 과정을 통해서 아사처럼 온전해져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7.히스기야: 연합된 마음과 순종
“곧 저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더라”(왕하18:6)
아사 이후에 유다 나라에 다시 영명한 신앙의 군주가 하나 나타났는데 그 사람이 바로 오늘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지키면서 살았다고 기록된 히스기야였습니다. 히스기야가 임금이 될 때는 이미 북 왕국 이스라엘은 망하고 왕의 이름이 나오지만 이들은 사실상 주권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앗수르 라는 나라의 괴뢰 정권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 남 왕국의 유다에 히스기야가 왕이 되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유다 나라를 기준으로 볼 때는 망하기 약 130년경 전의 사람이었고, 북 왕국 이스라엘로 보면 망한 후에 약 7-8년 정도 지난 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 임금 때에 일어났던 커다란 신앙의 부흥, 그리고 강력한 개혁으로 말미암아서 이제 이스라엘은 남 왕국뿐만 아니라 북 왕국까지 신앙 부흥에 강한 감화를 받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이 나라들이 이제 역사 속에 기울어가면서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무엇인가 신령한 영향력들을 간직하고 그리고 이제 중간사 시대로 들어가게 됩니다.
히스기야 임금이 한 놀라운 업적이 4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아버지가 아하스 라는 왕이었는데 이 왕은 신앙이 거의 없는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전의 문을 닫아버리고 폐쇄합니다. 그래서 정상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할 수 없게끔 성전이 차단되는데 히스기야가 왕이 된 다음에 그 성전을 다시 문을 열고 수리하는 쾌거를 이룹니다. 그래서 명실공히 이 성전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과 삶에 중심이 되도록 만들어준 그런 개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미친 의미랄까 영향은 아주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약에서의 신앙을 보면 철저하게 성전을 중심으로 한 신앙이었습니다. 국가적으로 어려운 일이 있거나 개인적으로 고통스러운 일이 있으면 항상 성전으로 올라가고 성전에 갈 처지가 안되면 성전을 향해서라도 기도를 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었는데 그 성전을 닫아버렸다는 것은 사실 유일신 신앙을 포기했다는 것에 다름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가 임금이 되면서 그 성전을 열고 다시 구석구석 성전을 구축하면서 새롭게 이스라엘 백성들 신앙 한가운데로 이 성전을 가져온 것입니다.
두 번째 이 사람이 한 일이 무엇인가 하면 산당을 훼파한 일이었습니다. 산당과 아세라의 목상과 우상들을 타파했습니다. 여기에서 이제 산당, 그 다음에 신당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두 종류입니다. 그러니까 우상을 섬기는 곳이 있었고 또 하나는 하나님을 섬기는데 이방 신을 섬기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종교적으로 보면 혼합주의입니다. 토착신앙과 여호와의 전통적인 종교가 혼합해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은 하는데 그 섬기는 방식이 이방 신들에게 절하고 제사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섬기던 산당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놓고 선왕들이 없애지를 못했는데 이제 히스기야가 그것들을 박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게 된 이면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하면 히스기야 임금은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통해서 여호와의 종교가 얼마나 영적 종교인지를 아는 참다운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종교의 영적 특성을 눈에 보이는 외부적인 특성보다 항상 우위에 놓고 종교 개혁을 해왔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제 산당을 훼파하고 이방의 신상들을 파괴한 히스기야의 행동은 이스라엘 백성들 한복판에서 왕궁이 중심이 되어서 유일신 신앙을 선포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으로 돌아가야 할 곳은 하나님 아버지뿐이다. 여호와 하나님밖에는 우리가 돌아갈 곳이 없다 라고 하는 아주 분명한 선언을 이제 이 백성들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적인 놀라운 변화를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세 번째 이 사람이 한 일이 무엇인가 하면 제사와 절기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주 성대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그리고 유월절을 크게 지킵니다. 번제는 우리들이 알다시피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상징이고 화목제는 그 하나님과의 평화로 말미암아서 언약 공동체의 모든 백성들이 화해를 이루면서 사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제사를 성대하게 드림으로 위로는 하나님께 헌신하고 그리고 아래로는 자기의 백성들이 한마음이 되어서 주님을 경외하는 유일신 신앙으로 뭉쳐진 평화로운 한 공동체가 되기를 원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유월절을 지키게 되었는데 사실 북 왕국은 정상적인 유월절이 없었습니다. 여로보암 이후로 나라는 갈라져서 북쪽이 훨씬 큰 나라가 되었는데 사실 정식적으로 유월절을 지키려면 율법에 의하면 예루살렘에 와야 되는데 그런데 예루살렘에 내려가면 적국으로 내려가는 것이니까 못 내려가게 막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비슷한 절기를 만들어서 거기 나름대로 절기를 지켰습니다. 그러니까 온전한 유월절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북 왕국은 분단 초기서부터 정치적으로는 힘이 강했으나 항상 종교적으로 신앙적으로는 유다가 본 줄기다 하는 것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나라가 망해서 괴뢰 정권이 있기는 했지만 나라가 망하고 주권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히스기야 임금 때 나라가 강성해지면서 그 나라가 이제 유월절 잔치를 지키면서 북쪽에 있는 백성들에게 초청장을 보내는 것입니다. 원한다면 내려 오라, 그래서 우리 모두 이 남쪽 성전에서 우리 함께 여호와의 유월절을 송축하자.
유월절은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하나님의 큰 능력으로 탈출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였습니다. 어린양이 그들을 대신하여 죽고 그 능력으로 그들이 애굽에서 탈출한 것을 기념하는 영원한 이스라엘 백성의 절기였습니다. 거기로 그들을 초청한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비웃고 욕했지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히스기야의 초청을 받고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 남 왕국 유다로 내려옵니다. 그리고 그 유월절 절기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분단 이래로 이런 하나됨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보면 히스기야가 정말 대단한 영적인 인물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치적인 이해관계나 이런 것에 의해서 남북이 갈라졌지만 분단된 그 나라보다도 훨씬 더 소중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영적인 왕국, 즉 남 왕국이나 북 왕국이나 모두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가 되어서 살아가야 할 영적이고 정신적인 언약 공동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히스기야가 얼마나 깊이 깨닫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히스기야의 이 생각은 북 왕국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커다란 감화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남 왕국에 대한 향수를, 신앙적인 향수를 부채질했습니다. 그래서 남쪽에서 일어난 신앙의 부흥이 북쪽에 있는 이스라엘 왕국에까지 강력한 영향을 미쳐서 그들이 이제 이후에 유다 나라까지 멸망당하고 바벨론 포로 시대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포로가 된 상황에서도 언약 공동체로서의 특성을 유지하게 하는 커다란 정신적인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제 이 사건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네 번째로는 이 사람이 한 개혁 가운데 하나는 민수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불 뱀에 물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에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놋으로 구리 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꿰어서 백성들에게 보여줍니다. 그것을 보는 자는 살았습니다. 그것이 두고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아주 엄청난 기적의 역사였고 또 살아난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본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 구리 뱀을 통해서 자기들을 살려두신 놀라운 증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애지중지하면서 잘 모셔두었습니다. 의미 있는 물건이니까. 요즘도 병원에 보면 막대기가 있고 이렇게 뱀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그것이 결국 성경에서 유례한 것입니다. ‘치료하시는 여호와’라는 뜻입니다. 그 사람들이 알고 그것을 달고 다니는지 모르지만 어째든 의미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관해온 것은 심정적으로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들을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고자 하는 이 마음과 함께 결탁이 되어서 어떻게 하든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형상화하려고 애를 쓴 것입니다. 그 구리 뱀, 그 형상에 대해서 보내는 존중심과 이 경외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참된 경배를 가로막는다고 생각이 되니까 칠 백년 동안을 내려오던 이 유서 깊은 왕궁의 보물을, 종교적인 보물을 그 자리에서 파괴해서 없애버리면서 ‘이것은 단지 놋쇠 조각일 뿐이다’ 고 선언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히스기야 임금이 정말 그 시대로서는 아주 탁월하게 여호와의 종교의 영적인 의미에 대해서 파악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아주 놀라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 보면 히스기야의 일련의 종교의 개혁들이 사실 그 시대의 부패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급진적인 개혁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급진적인 개혁을 수행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영향력은 이처럼 엄청난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왕이었으니까 그렇지 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 사람만 왕이었습니까? 아버지 아하스도 왕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왕이었는데 그들은 자신 속에 신앙이 없으니까 그런 신앙적인 영향력을 백성들에게 끼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사람이었고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는 드물게 여호와의 종교의 영적인 특성에 눈을 뜨고 무엇이 본질적이고 무엇이 본질적이지 않은가에 대한 뚜렷한 인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아사와 같이.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줄기차게 종교 개혁을 해나가고 개혁 속에 영적인 부흥이 꽃피어서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주 놀라운 신앙의 부흥을 가져오는 그런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히스기야가 그 시대로서는 쉽게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급진적이고 강력한 개혁을 통해서 하나님의 부흥의 경험까지 함께 그 역사에 가져왔는데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히스기야가 무엇인가 이 나라를 한번 뒤집어놓아야겠다는 혁명적인 사고 때문에 이런 일들을 이루었던 것은 아닙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걸출한 개혁가들이 나타나서 한 시대를 하나님의 진리와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뒤집어엎는 그 사건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운동가들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신앙의 개혁자들이 운동가와 다른 점이 무엇인가 하면 운동가들은 항상 출발을 상황에서 시작을 합니다. 그리고 모든 관심은 상황에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의 개혁자들은 출발 그 자체가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서 시작을 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다시 말하면 히스기야가 이루었던 급진적이고 엄청난 종교 개혁의 조치들이 사실은 아주 단순한 동기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순종하고자 하는 순종의 동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항상 순종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의 시대 사이에는 너무나 많은 격차가 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면서 산다라고 하는 것은 항상 불가능한 것이다 라고 변명을 합니다. 그러나 참된 영적인 변화를 경험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내적인 동기가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히스기야가 모세의 율법을 온전히 지켰다”라고 되어 있는데 모세의 시대와 히스기야의 시대는 약 700년의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700년이라고 한다면 언제쯤 될까요. 지금으로부터 7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도 세워지기 전에 고려 시대쯤 될까요? 고려 시대쯤 될 것입니다. 그런 시대 때에 쓰여진 어떤 신앙에 관한 가르침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산다라고 한다는 것은 그 당시 신앙이 없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처구니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사람이었고 또 순종하고자 하는 내적 동기를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시대와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은혜를 받고 성경을 읽으면 이것이 계속 가슴 깊이 다가옵니다. 이 말씀이 2000년 전의 말씀으로 다가오지 않고, 아사는 일평생 하나님 앞에 온전하였는데 나는 왜 온전하지 못할까. 히스기야는 이렇게 순전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았는데 나는 왜 그렇지 못할까. 이렇게 시간을 뛰어넘어서 우리에게 곧바로 다가와서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서 그 말씀의 요구대로 살게끔 만들어줍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제 우리가 신앙이 떨어지고 은혜가 식으면 그러면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도 그 말씀과 자신의 삶은 너무 먼 거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거리를 메우기 위해서는 적당하게 그 하나님의 말씀을 휘든지 왜곡하든지 뭔가 깎든지 뭔가 보태든지 해야지 겨우 우리가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자기의 상황 속에서 자기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화 받지 않고도 순종하지 않고도 살아가는 자신의 삶의 모습을 정당화할 수 있는 구실들을 적용이란 미명하에 자꾸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바로 그런 것들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 사람이었습니다.
항상 역사적으로 보면 어느 시대든지 자신들의 시대는 특별한 시대라고 생각했습니다. 50년 전에도 그랬고 17세기에도 그랬고 18세기에도 그랬습니다. 언제든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신앙의 참다운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은 자기들을 변화시키기 위한 새로운 말씀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평생에 듣던 말씀, 평생에 듣던 말씀 또 들려주시오. 그런 사실들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어째든 히스기야 임금이 이런 과감한 개혁을 시도하고 또 거기에서 하나님과의 영적인 부흥을 맛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순종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700년 전의 모세의 율법을 다시 꺼내어서 먼지를 털며 그것을 자신의 통치와 개인적인 삶에 표준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 모세의 율법대로 준행하며 순종하며 살기를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를 움직인 그 엄청난 개혁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려고 했던 순종의 결단에서 흘러나온 아주 자연스러운 결과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니까 히스기야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은 나라를 개혁하고 혁명적으로 나라를 바꾸어야겠다는 그런 것보다도 자신 속에서 참다운 영혼의 변화를 경험하고 나니까 자기가 믿고 따라야 할 여호와의 신앙이 자기의 백성들 가운데서는 실행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영혼에 변화를 받게 되면 그러면 반드시 우리 자신에게도 변화가 오지만 변화되지 못한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을 보고 ‘너나 잘 믿으라’고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자기만 잘 믿는 것을 가지고 만족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남도 잘 믿어야 합니다. ‘넌 네 일이나 하라’고 하는데 그것이 자기 일입니다. ‘왜 그렇게 간섭이 많은가’ 하는데 간섭이 사명입니다. 그것이 사명입니다. ‘나나 잘 믿으면 되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하나남이 그의 백성들에게 맡기신 그 뜻이 무엇인가를 안다면 그는 결코 자기 혼자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가지고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나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경배할 뿐 아니라 또한 나와 함께 살고 있는 모든 가족들, 그리고 모든 이웃들, 심지어는 이 땅에 살아 숨쉬는 모든 피조물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그 열망에 불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선교의 동기입니다.
밤중에 호텔에서 자는데 말만 호텔이지 호텔이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쥐가 들어와서 우리 가방을 다 쏠아먹었습니다. 그런데 거리에서 와 하는 함성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하면 북경 올림픽이 결정되는 순간입니다. 우리도 마음속으로 북경으로 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왜 기도를 했는가 하면 선교사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것이 되면 이번에 우리 나라에 온 탈북자 가족들처럼 국제적인 이목이 쏠리니까 자유화가 어느 정도 주어지고 그러면 기독교 선교에 대해서도 다소 너그러워질 수가 있다는 계산이 있고, 또 한국에 돌아와서 신문을 보니까 그렇게 해서 북경 올림픽을 개체하는데 약 26조원 정도를 8년 동안 쏟아 부어서 북경을 완전히 새 도시로 만들겠다고 하는데 그 중에 절반은 한국 몫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어찌 우리가 북경 올림픽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진짜 간절히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아주 짧은 시간 내에 응답을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아주 만나는 사람마다 축하를 한다고 그랬습니다. 싱글벙글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그렇게 바라고 그런 속에서 한쪽에서는 찬송도 못 부르면서 선교사들이 가슴을 졸이면서 집회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 양극화된 것을 보면서 그러면서도 우리들이 그렇게 애착을 가지고 그 선교 활동을 하고 그 선교사들을 뭔가 돕기를 원하는 것은 결국 우리들이 마지막에 우리들이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물론 중국이 잘 살기를 바라고 다 좋아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제 지금 8년 동안이 중국에서는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1-20년 지나면서 중국이 잘살게 된다고 하는 것은 전세계 누구든지 예측하는 것인데 이때에 복음의 강력한 영향력을 받지 않으면 대만처럼 되기 쉬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딱 잘살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더더욱 복음이 필요 없게 되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대만 선교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중국 선교보다 어렵습니다. 그런 선교 적인 차원에서도 우리들이 깊이 관심을 가지고 그렇게 중국이나 이런 미전도 종족들이 있는 그 땅에 대해서 애지중지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단순한 그들의 복지를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참사랑을 알고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나니까 나만 잘 믿는 것을 가지고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들도 예수를 믿고 그들도 하나님을 섬기고 그들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히스기야 속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종교 개혁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가 부패하고 세상이 어쩌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물론 세상에는 믿음대로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강한 저항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력들이 있습니다. 신앙을 따라 살지 못하게 하는 억압들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해결의 길은 무엇인가 하면 그런 억압과 저항보다 훨씬 더 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한 사람을 감화시키면 피 흘리면서도 거스르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교 역사고 그것이 개혁의 역사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니 공산주의 사상 하나에 미쳐도 목숨을 버리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미치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공산주의가 중국에서 한참 퍼져나갈 때 공산당들이 모여서 집회를 하면 펑펑 우는데 그 이유는 공산주의 치하에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불쌍한가 하는 이유입니다. 완전히 하나의 커다란 종교 집단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자기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맛본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지 않고 자기 안에 하나님의 사랑을 맛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아무런 마음의 변화도 없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진정한 영혼의 변화가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히스기야의 이 개혁은 개인적인 순종의 마음이 가지고 온 결과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한 나라의 왕이 되면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옛날에 왕을 지냈던 사람들에게 한번 물어보십시오. 절대 왕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의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아도 그러나 그 왕들의 입장에서 보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여기에는 산당을 섬기고 우상들을 섬기면서 이익을 보는 호족 세력들과 토착 세력들, 오랜 동안 불 신앙의 구조 속에 살면서 기득권을 키워온 그런 족속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들은 다 개혁의 저항세력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과 상관없이 칼을 휘두르면서 개혁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디서 온 동기였는가 하면 자기가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순종의 삶을 살고자 하는 진실한 결단, 그리고 이렇게 이 백성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유일신 신앙으로 꽃피는 나라가 되는 것이 부귀한 나라, 그리고 하나님 없이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나라가 되는 것보다 훨씬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신앙적인 가치에 대한 확신이 자기의 가슴속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개혁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가 어떻고 뭐 구조가 어떻고 그래도 개개인이 하나님 앞에 진짜 구조의 억압보다도 더 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만나면 거기에 거스르며 사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백성의 고난이 있습니다. 거기에 희생이 있고 거기에 고통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분투하는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주님을 향한 경외 심과 그리고 충성된 마음을 입증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궁금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히스기야가 그렇게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절대적으로 순종하고자 하는 개인적인 신앙이 이런 역사적인 개혁을 가지고 왔다고 할 것 같으면 그가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개인적인 신앙생활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캐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오늘 성경이 6절에서 아주 명쾌하게 이야기하는데 6절이 하반 절에서는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그의 삶에 대해서 말하고 상반 절에서는 그가 그렇게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었던 내면의 마음가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곧 저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여기에서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였다고 하는 것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특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연합한다라고 하는 말의 히브리어가 ‘다바끄’입니다. 다바끄 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가 제일 처음 쓰여진 것이 어디인가 하면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이 아담의 갈비뼈를 뜯어 하와를 만든 다음에 하와를 데리고 올 때에 이 아담이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둘이 합쳐져서 부부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결혼의 제도를 수립하십니다. 그때에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여자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룰지어다 라고 해서 그 연합하여가 바로 이 ‘다바끄’ 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된 것입니다.
그러면 봅시다. 그 창세기 2장의 문맥에서 살펴보면 이 다바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명백해지게 됩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뽑아서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죄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와를 이끌어 데리고 오시자 아담은 즉각적으로 그가 자기 분신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즉각적으로 자기가 자기에 대해서 느끼는 사랑을 그 여자에 대해서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즉각적으로 아담이 하와를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아담은 즉시 자기와 하나라는 의식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히브리 사람의 표현에 의하면 무엇 중에 무엇이라고 하는 것은 베스트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는 나의 많은 뼈 중의 하나라는 것이 아니라 내 뼈 중의 많은 뼈들은 그 중에 어떤 것들은 없어도 될 수 있는 뼈가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너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너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 그러니까 밥을 많이 먹어서 나온 기름진 배 살 정도는 없어도 살수 있지만 심장을 만들고 있는 살은 떼어내면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생각할 때에 하와는 살은 살인데 밥 먹고 기름으로 뭉쳐진 배 살이 아니라 심장이나 장기 같은 것들을 구성하는 결정적인 살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그 고백은 ‘네가 있음으로 내가 이제 온전한 사람이 될 수가 있다’는 그런 고백입니다. ‘나는 나 되기 위해서 네가 가장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것이 이 다바끄 라고 하는 단어의 숨겨진 의미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는 결혼할 때 생각합니다. ‘저 친구가 나를 벌어 먹일 수가 있을까? 얼굴은 왜 저렇게 못생겼어. 장가도 안 갔는데 배는 왜 저렇게 나왔어’ 별의별 생각을 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기준을 가지고 그 사람을 재고 평가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면 손해가 나지 않을까 계산하고 사랑합니다. 그러나 이때는 죄가 없는 시대였고 더군다나 모든 것이 넉넉히 있는 소유에 대한 욕망이 없는 때였습니다. 그때에 아담이 하와를 보면서 하와가 아담을 보면서 느낀 사랑의 정도는 우리들이 아마 유죄 시대에는 경험하기 힘든 연합이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다시 신약으로 건너가보면 다바끄의 정신을 에베소서나 골로새서에서 묘사하고 있는가 하면 남편과 아내의 연합의 정신을 그리스도와 교회, 신자와 교회,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연합을 이런 연합에다가 비유합니다. 그것이 바로 여기에서 히스기야가 경험했던 연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히스기야의 엄청난 개혁이 개인적인 순종의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가 일평생 그렇게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면서 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다른 사람과는 구별되는 특별한 내면의 세계를 지닌 사람이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 특별한 내면의 세계가 어떤 것인가 하면 하나님과 연합된 다바끄인 상태에서 산 것입니다.
주 내 마음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그런 정신으로 산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참된 만족을 왕궁의 보화나 확장되는 영토나 이런 것에서 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서 구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마음을 갖지 않고는 하나님과 다바끄 된 연합의 상태에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시편으로 내려가 보면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할 때 거기에 연합도 그것입니다. 그냥 같이 매일 둘러붙어서 라면이나 끓여먹고 차 마시는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적으로 같이 있어도 연합이 없을 수 있고 헤어져 있어도 연합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예전에는 나밖에 없는 줄 알고 막 살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났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그 은혜와 사랑을 알고 나니까 비로소 하나님이 나에게만 이런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많은 지체들이 바로 이처럼 하나님 앞에 죄의 용서를 받고 십자가의 사랑을 알면서 나의 형제가 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한사람 한사람이 자기처럼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하나된 하나 안에서 한 형제 자매로 살아가는 것이 한없이 기쁜 것입니다. 거기에서 연합의 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바끄입니다.
그러니까 이 히스기야가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그 시대의 조류에 물들지 않고 순종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의 철저한 연합, 거기에서 오는 탁월한 친교, 거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과의 친교와 연합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정신적으로 연합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자들에게 자기의 마음을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된 마음 상태를 통해서 느껴지는 것인데 그런 그리스도 예수를 마음속으로 깊이 사랑하고 연합을 느낄 때에는 그의 마음속에 항상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이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왜 어떤 무슨 일이 있든지 간에 그 빌립보 교회 교인들, 나아가서는 우리들에게 예수의 마음을 품은 사람이 되라고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일단 예수의 마음이 우리에게 품어지면 그래서 우리들이 그리스도 예수와 정신적으로 연합을 이루게 되면 그러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대체적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과 연합된 정신으로 살아가면 하나님이 하라고 명하신 일과 내가 하고 싶은 일과 충돌할 때 언제든지 나를 버리고 그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의 방식이 각각 달라서 하나님께 불순종하지 않고는 나를 사랑할 수 없을라치면 나를 항상 포기하고 주님을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가 다바끄 된 하나님과 연합된 마음의 상태 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순종하는 삶을 강조하면서 항상 병행하면서 강조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 마음의 순전함에 대해서 계속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히스기야 임금에서 나오잖아요. 다윗과 순종하면서 산 사람은 다 다윗과 같이 정직한 사람입니다. 그 앞의 부분은 내면의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후반부는 외면적인 삶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두 가지가 항상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계속해서 이 마음의 중요성에 대해서 쉼 없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충성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 마음이 충성된 사람입니다. 진실한 사람은 어떻습니까? 무엇을 하면 진실하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진실한 사람, 그 마음에서 진실한 삶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용기 있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그 속에 용맹스러운 마음이 불붙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내면의 세계와 외면의 세계가 항상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죄 많은 세상에서 완전히 다른 삶을 살도록 우리를 바꾸어놓으시는 방법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제일먼저 이 세상밖에 없는 줄 알고 천국과 지옥도 모르고 제멋대로 살던 사람을 하나님께서 만나주십니다. 자기 속에 있는 악함과 죄들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영적인 변화를 받게 하십니다. 그래서 내면의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십니다. 그리고 새로운 질서를 따라서 살게 하고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의 질서를 따르지 않는 이 구태의연한 세상에 항거하면서 살도록 만들어줍니다. 그것이 바로 선교 적인 개혁입니다. 히스기야가 바로 그런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아주 단순하게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아하스가 아하스의 삶밖에 살 수 없었던 것은 아하스의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여로보암이 여로보암의 방식으로 살수밖에 없었던 것은 여로보암의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다윗의 삶을 살수 있었던 것은 그 안에 하나님과 연합된 마음, 자기 자신의 욕망보다는 하나님의 마음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다윗의 마음, 그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다윗의 삶, 그런 것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 히스기야가 바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그렇게 하나님과 연합된 마음을 가지고 산 사람이었습니다.
작년에 말레시아 겐띵에 선교사들이 모여서 선교사 대회를 해서 제가 수련회를 갔습니다. 그 중에 평신도 선교사로 온 형제가 있습니다. 밝히지 않겠습니다. 중국에 있는 어느 학교로 들어가서 아주 탁월한 형제인데 30대 초반의 외국에 좋은 학교에서 학위를 받고 이제 자연과 계통의 교수로 갔는데 부인이 늘 염려를 했다고 합니다. 선교를 하러 왔는데 남편이 기도도 안 하고 늘 남편이 하나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는 것이 제목이었는데 그 겐띵 대회에 왔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셨는데 그 형제는 많이 주신 정도가 아니라 아주 진짜 생애 적인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니까 돌아가서 하루에 두 시간, 세시간씩 골방에 들어가서 내 사명은 오로지 중국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그 동안 내가 너무 기도하지 않았다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부인이 볼 때 자기가 기대한 것이 너무 확 지나간 것입니다. 이번에는 너무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그 형제가 58시간 기차를 타고 이번 수련회에 참석했습니다. 여기에서 간 우리들의 희생은 사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선교비만 좀 가지고 갔지. 비행기를 타고 세시간을 휙 날라 왔는데 58시간을 비행기를 타고 가는데 아마 아직도 도착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형제 하는 말이 그렇게 은혜를 받고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아침에 읽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입술로는 나를 경외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그 말씀을 읽는 순간에 순간적으로 가슴에 그 말씀이 파고 들어오면서 자신의 허위에 가득 찬 삶이 확 드러났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외면적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선교도 하면서 산다고 살았지만 그러나 속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마음이 없었던 것들이 그렇게 가슴이 아프고 죄송하게 파고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그 순간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부어짐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게 만들어줍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히스기야 속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순종의 삶이 가능했습니다. 어두운 역사 속에서 신앙 하나로 고난을 이기면서 믿음의 길을 걸어왔던 수많은 사람들은 바로 세상에 풍조에 마음의 영향을 받지 않고 은밀히 경건의 지성소에서 무릎을 꿇을 때 자기를 대면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그 영향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사역을 하는 동안에는 마음을 닫고 주님이 자기에게 주신 마음을 간직한 채 그 마음의 지도를 따라서 자기를 쏟아 부어서 희생적인 삶을 살고 그리고 조용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의 세계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그 은혜의 세계에 마음을 열며 그러면서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경험하면서 거기서 하나님의 마음의 부어짐을 경험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을 이기고 유혹을 이기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었습니다. 우리들을 공격해오는 사단과 마귀의 공격이 고전적이듯이 그런 것들을 이기고 꺾는 우리의 방법도 새로운 방식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언제나 고전적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알았던 바요 또한 경험했던 바였습니다.
여러분들이 적당히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적당히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거의 순종하지 않고 불순종하며 사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여러분 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연합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자산입니다. 내 마음이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의 마음이 내 안에 있어서 주님이 하고 싶으신 일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고, 내가 살고 싶은 그 삶이 주님이 나에게 살게 하시고 싶은 삶일 때 그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 그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며 살든지 그의 존재로 인하여 하나님은 늘 근심하실 것이고 살아 계신 하나님이 자기를 지켜보시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그는 늘 우울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순종하면서 사는 것, 그 은혜의 빛줄기 아래서 그분의 더할 수 없는 지복의 임재 아래서 사는 것 이외에 성도의 삶에 다른 행복은 없는 것입니다. 다른 것들을 통해서 얻게 되는 만족은 잠시 맛보는 만족일 뿐입니다. 다른 것을 통해서 맛보게 되는 기쁨은 잠시 얻게 되는 기쁨일 뿐이지 누려도 후회함이 없고 맛보아도 뉘우침이 없는 참된 만족은 오직 내 마음에 연합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만족이 아니겠습니까? 이 히스기야가 그런 만족 속에서 하나님과의 연합된 마음으로 산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사랑했다는 말보다는 훨씬 더 커다란 그림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였고 하나님과의 연합된 마음 그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고 하나님께 받는 사랑 받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연합된 그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마음에 불붙는 마음이 있고 불타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수 받는 이심전심의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연합된 그 속에서 바로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충성된 마음이 있습니다. 하여튼 하나님과 연합된 가운데 다바끄의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았다 라고 하는 것은 아주 세속적인 표현에 의하면 히스기야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전부였고 하나님에게 있어서도 히스기야가 전부인 것 같은 그런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 사람들이 캄캄하고 어두운 불 신앙의 시대에 횃불처럼 타올랐습니다. 그리고 자신 속에 일어났던 그 신앙의 불꽃을 그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지펴서 잃었던 유일신 신앙으로 수많은 백성들이 돌아오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시대가 어둡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빛이 비치는 사람들은 너무 수많은 사람들에게 잘 눈에 띱니다. 사랑이 메마른 시대이기 때문에 눈곱만큼이라도 십자가의 사랑을 안 사람들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살 사명감을 확인하게 됩니다. 언제까지 우리가 우리의 나약함, 이 시대의 불 신앙적인 사조만을 탓하고 구조타령만 하면서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정당화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이 다바끄이 마음이 필요합니다.
히스기야와 같이 그 시대의 어떤 왕으로 누릴 수 있었던 어떤 부귀와 영화, 영토와 연합된 마음이 아니라 자기에게 영원한 기업이 된 하나님과 연합된 마음, 그 마음이 그로 하여금 이 어두운 시대를 밝히는 순종의 불길이 되게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주님과의 연합된 마음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에 주님이 낯설면 순종이 낯설고 여러분의 마음에 주님의 이름이 너무나 사랑스러우면 여러분들은 순종하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며 주의 말씀대로 살기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주님의 뜻대로 사는 기쁨이 있을 것이며 그 뜻대로 살지 않고 불순종하며 거슬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는 안타까운 눈물이 있을 것입니다. 성도의 일생은 바로 이렇게 주님과 다바끄의 관계 속에서 그 마음을 함께 물려받고 주님과 동행하면서 사는 것, 그것입니다. 히스기야가 바로 그런 내면의 세계를 가졌기 때문에 순종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그런 하나님과의 연합의 마음을 회복할 수 있을까? 이 말씀을 정직하게 살피면서 우리 주에 많은 사람들은 고백할 것입니다. 확실히 히스기야의 마음은 나의 마음과 다릅니다. 히스기야의 마음은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으나, 그리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으나 나는 하나님을 떠났고 내 마음은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지 않습니다. 내 마음은 오히려 세상에 연합되어 있고 육체의 욕심에 연합되어 있고 주님의 영광보다는 내 영예에 연합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들 가운데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열 왕들의 역사를 보십시오. 그들의 마음은 고여 있는 물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므낫세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마지막 끌려간 왕입니다. 포로로까지 끌려가서 고통을 당하고 눈까지 빼진 왕입니다. 성경에는 그 사람의 회개의 역사가 잘 나오지 않지만 그러나 다른 문헌에는 그 사람의 회개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연합된 마음이 없었던 사람이 나중에 하나님과 연합된 마음을 갖기도 하고 아사와 같이 일평생을 하나님과 연합된 마음을 가지고 살다가 그 마음을 상실하기도 합니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과 연합된 마음을 가지고 살다가 범죄로 인해서 그 마음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뉘우침을 통해서 그 마음을 회복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고여 있는 호수가 아니라 흐르는 물입니다. 어디론가 흘러가려고 애를 쓰는 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이 백 미터 달리기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일평생을 두고 달리는 마라톤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을 놓고 보면 막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나 짧고 잘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깁니다. 한 석 달만에 끝난다고 할 것 같으면 금식이라도 하면서 석 달을 잘 살아보겠는데, 석 달도 깁니다. 하루라면, 하루라면 주일날 와서 흡족하게 은혜를 받은 김에 자기를 죽이고 기도 많이 하고 형제들을 사랑하며 용서하면서 살다가 저녁 때 죽으면 되겠는데, 그런데 이것은 잠깐이 아닙니다. 너무나 깁니다. 간직하며 살기에는 흐르는 물과 같은 우리의 마음이 쉽지 않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변합니다. 히스기야도 무슨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하나님과 연합된 마음을 가진 사람이겠습니까? 신앙의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과 연합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보면 히스기야가 또 육체로 끝을 맺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과의 친밀하고 연합된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채 죽습니다. 죄로 인해서, 그래서 이것을 보면서 우리들이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과의 연합을 이룬 다바끄의 마음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오 내가 이미 가졌다 함도 아닙니다. 가진 것 같고 또 앞으로도 계속 가져야할 것 같고, 주님이 주신 마음이 내가 지켜야할 마음인 동시에 또 앞으로도 계속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부어져야 할 마음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두 가지 교훈을 한꺼번에 줍니다. 하나는 이런 다바끄의 마음, 이런 연합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잘 지키며 살도록 긴장하게 만들고 그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는 소망을 주는데 어떤 소망을 주는가 하면 내가 지금은 잃어버렸지만 다시 그것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솔직히 왕년에 하나님과 연합된 마음 한 두 번쯤 없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이번 겨울 사경 회 때도 있었습니다. 지난 번 신문을 보니까 작년 여름 수련회 때도 있었습니다. 올 여름 수련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그러한 하나님과의 연합의 마음을 가지고 순종하면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경계를 주고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는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예화: 캐나다에서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의 일 - 옆 좌석에 앉은 어느 아주머님 이 경황없이 무엇인가 찾기에 왜 그런가 물어보니 여권을 공항에다 두고 온 것 같다고 하면서 사색이 질려있기에 안내원을 불러 사정을 이야기하니 비행기 상에 서 위성으로 출발한 곳에 전문을 치기까지 했지만 아주머님이 불안해서 식사도 하지 못하고 계속 찾더니 잠깐 일어났는데 엉덩이에 깔고 앉은 것을 모르고 그렇게 애타게 찾았다는 이야기)
그것이 바로 찾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한번 비행기에 타서 영어도 한마디도 못하는데 이쪽 나라에서 저쪽 나라 공산국가로 뜨는데 그런데 중간에서 잃어버렸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돌아갈 차비도 없고, 공항에서 사람을 만나서 이제 다 해결해주기로 했는데 그것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이 찾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하나님과의 연합된 마음을 한번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다시는 그런 연합을 안 주신다고 할 것 같으면 이 세상에 소망이 있는 인간이 누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다윗도 잃어버렸지만 다시 그런 연합된 마음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면서 승리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것을 찾는 길이 무엇인가. 진짜 찾아야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과의 다바끄의 마음을 찾는 것이 가장 소중하다. 그 이외에는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다라고 하는 절박한 마음으로 찾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반드시 회개를 가져옵니다. 왜 그것을 진정으로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잃어버린 것이 자기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괜히 그런 것을 가져가 버리셨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직까지도 주님을 찾는 마음이 적을 때에는 자기가 신앙을 잃어버린 것이 무엇 때문이었다고 핑계를 댑니다. 아직까지도 믿음으로 돌아가고 하나님과의 연합의 관계로 돌아가기를 사모하지 않는 동안에는 자기의 실패에 대해서 여러 가지의 변명을 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그 진정한 정신적인 문화, 영적인 문화 속에서 살기를 갈망하는 마음이 가득 찰 때는 그가 전적으로 자기가 잘못했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진정한 연합을 주시고 그 안에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전에 하나님과의 연합을 누리며 살았던 때가 있다고 칩시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들이 오늘 생각한다고 칩시다. 그 이전에는 하나님과의 연합을 누리면서 살지 못했지만 우리들이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고 그리고 주님 자신과의 화목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에 최대의 숙제라고 하는 사실에 눈뜨며 주님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되었을 때 주님이 우리에게 회복을 주십니다. 다시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이제껏 하나님과의 연합된 마음으로 순종하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경계를 받는 것입니다. 아! 이 히스기야와 같이 이런 사람도 결국은 마지막에 육체로 마칠 수 있었구나. 그렇다면 히스기야만도 못한 나는 얼마나 더 많이 근신하고 경계하면서 주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유지하고 주님과 연합된 마음으로 자기 성찰의 삶을 살아야 되겠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과의 연합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오늘 뉘우치면서 주님이 우리에게 이런 연합을 다시 주시도록 그래서 그 연합 속에서 정말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고 그래서 우리의 전 삶을 통해 주님을 인정하고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8.예수 그리스도의 순종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5:8-9上)
히브리서 5장은 대단히 감동적인 장입니다. 대제사장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약의 제사의 예법과 관련시켜 소개하면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우리의 영원한 속죄의 근거가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히브리서 기자는 특별히 예수님의 지상 생애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5장 7절에 보면 예수님이 이세상에 계실 때에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의 죄를 위해 하나님께 탄원하던 그 중보 기도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고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제사장이 되신 것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이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미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을 제물로 드리시기 전부터 제사장 적인 삶을 사셨습니다. 비참한 인간들을 위해 중보하신 것이 바로 그 중에 하나였습니다.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예수님께서 바치셨던 기도의 섬김과 헌신을 우리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죄도 없으신 그분이 우리의 죄와 허물을 인해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셨는데 그것은 단지 예수님의 기도가 열렬했기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부르짖는 기도에 귀를 기울이고 응답해주셨던 것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그 경외의 삶이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생애에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8절에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고난을 통하여 순종함을 배워 온전케 되셨은즉" 즉 예수님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상의 생애는 순종함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삶이 순종으로 나타났고, 그 순종은 고난을 통해 배울 수 있었으며, 그 순종의 과정을 통해 예수님은 온전해지실 수 있었다 라는 것이 오늘 이 8절에 대의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 의미심장한 구절을 하나씩, 하나씩 살펴보면서 예수님의 순종하신 지상 생애의 모범을 우리들이 한번 배워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선 첫째로 순종을 배우셨다고 하는 구절입니다. 예수님이 순종을 배우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애였는데 그 경외함은 순종하는 생활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순종하는 생활에 의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한 당신 자신의 경외심을 입증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늘 성경을 보면서 의미심장하게 떠오르는 단어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경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특별히 이 구약의 경외 사상은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그런 경외 사상이 신약으로 넘어가면서 오히려 경외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 그리고 그 다음에 경건, 이런 모습으로 많이 나타나고 복음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이런 것들로 많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것이든 저것이든 구별할 것이 없이 경외의 삶, 그리고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느끼며 그 사랑 안에서 살고 있는 영적 교제의 삶, 이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아주 신실하고 아름다운 성도들의 실질적인 생활은 순종의 삶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해가면서 종종 정말 이렇게 울컥 울컥 우리 속에서 정말 내게 무엇이 있으랴 생각합니다. 지난주간에도 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살아온 생애를 이렇게 돌아보니까 한 것이 없습니다. 이제 점점 나이는 기울어 가는데 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산 것은 아닌데 순간, 순간 우리 속에 이렇게 하나님을 향해서 솟구치는 어떤 사랑, 그리고 애정, 그 다음에 내게 경험되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있어서 너무 소중하고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며 산 사람이었다고 하는 것은 단지 그런 것을 경험한 것으로 입증되는 것은 아닙니다. 즉 그런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이고 영적이고 정신적인 경험이 진실한 것이라면 구체적으로 그것은 순종하는 삶을 가져온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포함에서 탁월한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산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 정성을 기울인 사람들입니다. 아무렇게나 살아가면서 이따금 느껴지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을 받고 그것이 말하자면 자신이 신령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입증해주는 것처럼 생각한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살아가면서 순종하는 삶이 철저한 순종의 삶으로 우리들이 매번, 매번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그런 삶이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애였지만 그 생애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은 순종하는 생활이었습니다.그런데 오늘 성경은 "예수님이 그 순종함을 배워...." 그랬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예수님이 미숙하셨기 때문에 불순종할 위험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하나님께 훈련을 받아서 겨우 순종하실 수 있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신성의 교리와 충돌을 일으킵니다.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흠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셨는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쯤 되어서야 흠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부단한 순종과 자기 극복의 삶을 사심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그분은 낳기 전에도, 인간으로 태어나신 후에도 그리고 인간으로 계시는 동안에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때에도 죽으신 후에도 그는 영원히, 영원 전부터 그리고 이제로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변함없는 아들이셨습니다.
그러면 그 아들이 순종을 배웠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예수님의 경험의 세계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예수님이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할지라도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내려오셔서 순종하면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경험하신 것은 하나님이셨지만 그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경험은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그 경험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 거나 혹은 그분이 그렇게 함으로서 결함을 극복하고 겨우 우리의 메시아가 되셨다고 말할 수 없지만 아주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사람의 모양으로 순종을 경험하신 그것은 예수님에게 있어서도 새로운 경험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경험을 통해서 예전에도 알고 계셨지만 인간의 나약함을 몸소 경험하게 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죄 가운데 둘러 쌓여 살고 있는지 그리고 넘어지기 쉬운 육체 가운데 에워 쌓여서 어떻게 많은 유혹에 시달리면서 살고 있는지 그리고 이 죄 많은 세상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께만 순종하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죄는 없으신 분이셨지만 그 모든 것을 다 경험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진정으로 우리의 편이 되셔서 우리의 입장에서 죄인인 우리의 편에 서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죄를 지었지만 이들을 긍휼히 여겨주시도록 한사람의 대제사장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우리를 위한 간구와 소원을 통곡과 눈물로 올리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 사시는 동안에 누구의 편이셨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그러나 죄인들을 진멸하시기 위해서 내려오신 하나님의 사자는 아니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언제나 하나님의 마음을 그 마음에 품으신 완전하신 하나님 자신이셨지만 그러나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그분은 우리들 편에 서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정죄하고 율법에 의해서 버림받은 죄인들을 몸소 찾아가시고 그들 편에 서셨습니다. 죄 가운데 있는 소망이 없는 악한 사람들 속에서 회복될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읽으셨고 용서받고 다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채 주님을 섬기며 살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을 읽어내셨습니다. 그래서 그들 편에 서셨고 그들을 위한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면서 저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그 기도에 모습 속에서 우리는 우리편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모습을 봅니다. 누구도 체휼하지 않았고 긍휼히 여기지 않았던 죄인들의 어찌할 수 없는 비참과 그 죄로 말미암는 비극을 예수님께서 그대로 보시고 그리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 편에 서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셨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두려워하고 죄 가운데 있을 때 그 하나님을 인하여 떨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나 그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심으로 영광을 감추고 이 세상에 내려오심으로 수많은 죄인들에게 그분의 가슴은 피난처가 되셨습니다. 죄 가운데 살고 있는 비참한 죄인들에게는 그분이 마지막 희망이 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놀라운 죄인들을 위한 피난처가 되시고 그들의 신앙이 되실 수 있었고 용서의 근원이 되실 수 있었던 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그분의 지상 생애의 모습 속에 가장 잘 나타났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진정으로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절실하게 경험하심으로서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구원받아야 할 당신 자신의 백성들을 향한 애정이 강물처럼 흐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심으로 순종을 배우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족하거나 모자라는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경험하게 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모습을 보면서 참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사람이시라고 하는 믿음을 공고히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의 죄를 멸하고 마귀의 일을 멸하고 악인들을 심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지만 동시에 회개하고 뉘우치고 하나님께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훌륭한 피난처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죄인들이 그분의 품에 안겼고 지금도 우리와 같이 죄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유일한 희망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가 없으신 데도 이처럼 순종함을 배울 수 있었다고 할 것 같으면 예수님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죄와 친숙해지고 그리고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고 싶어하는 불순종의 본성을 가진 우리들은 얼마나 더 많이 순종을 배워야 하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더 많이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주님은 우리에게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본성을 주시지만 그러나 여전히 불순종의 죄 가운데 살고자 하는 본성은 만만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충만한 기도 생활과 그 다음에 쏟아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 속에서 마음을 지키며 철저한 삶을 살지 않을 때에는 더더욱 우리 안에 예수의 생명은 약화되고 죄의 영향력은 증대됩니다. 그래서 순종하기가 더 힘들어지고 불순종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과는 다른 방식으로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어떻게 인간이 순종을 해야할지를 배우기 전에 먼저 순종이 무엇이고 그리고 순종이 왜 필요하고 불순종의 대가가 무엇이고 그 다음에 불순종하는 삶의 마지막이 무엇이며 순종하는 삶이 고난에 넘친 것 같아도 마지막으로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복락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배우고 철저한 삶의 실천과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죄에 대한 분투를 통해서 순종을 배워갈 때 우리들이 비로소 이 죄 많은 세상에서 우리의 믿음을 지키며 순종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하나님 앞에서 훈련시키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은 거룩한 삶을 살기를 포기한 사람들이며 이런 사람들은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사람들에게 이따금 간헐적으로 밀려오는 가뭄에 가끔 쏟아지는 소낙비와 같은 그런 일시적인 종교적 흥분과 그 다음에 신앙의 어떤 감동만으로는 결코 그를 구원에 합당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만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따금 찾아오는 간헐적인 은사의 체험이라든지 이따금 간헐적으로 밀려오는 감동이라든지 그런 정도를 가지고는 결코 그가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를 버려 구원하신 그 구원의 은혜의 부르심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종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항상 순종하고 말하면 영웅의 삶을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백세에 낳은 아들의 목에 칼을 대던 아브라함의 영웅적 순종, 그런 것, 일 천 번의 번제를 드리면서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았던 그런 솔로몬의 헌신적인 순종의 결단, 이런 영웅적인 삶을 먼저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모든 이치가 그러하듯 신앙에 있어서의 이치도 항상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큰 것이 아니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중요한 것은 손쉽게 순종할 수 없는 것보다도 우선 쉽게 순종할 수 있는 그 분야에서 먼저 순종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순종하는 사람에게 또 능력을 주십니다. 그리고 힘을 주십니다. 은혜를 주십니다.
여러분은 찰흙을 가지고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찰흙을 가지고 공작 시간에 좀 크게 사람 모양을 만든다고 칩시다. 어떻게 만들까요? 그것을 사람 모양으로 흙을 빚어서 세워놓으면 사람이 이렇게 주저앉습니다. 물렁물렁하니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는가 하면 우선 뼈대를 만듭니다. 뼈대도 노끈과 같은 것으로 감으면 나무가 불면서 늘어나서 조각이 다 터져 버립니다. 그러니까 제일먼저 나무로 사람 얼개를 만든 다음에 늘어나지 않는 단단한 철사로 꽉 붙들어맵니다. 그러면 나무가 물을 먹어도 늘어나지를 않기 때문에 조각이 터지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그 위에다가 흙이 잘 붙는 그런 헝겊이나 그런 재질을 감습니다. 그리고 이제 거기에 붙입니다. 그러나 붙여도 이게 워낙 클 경우에는 붙여나도 자꾸 형태가 변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조금을 붙여서 그늘에다 말립니다. 그 다음에 딱딱해지면 그 다음에 그 위에 다시 붙이고, 붙이고 붙여서 그래서 사람의 형태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불을 피우는 원리와도 비슷하지 않겠어요. 큰불을 피울 때도 제일먼저 작은 나무 가지를 모아놓고 훅 불어서 작은 불을 피운 다음에 그 다음에 그 위에 좀더 큰 나무 가지, 가지를 얹어서 하는 것입니다.
작은 일에 먼저 순종하고 실천하면 하나님께서 그 작은 순종 속에 능력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조금 더 증대되어서 그것보다 좀 더 어려운 일을 순종할 수 있게 되고 그 다음에 그것보다 더 어려운 일을 순종할 수 있게 되고 나중에는 목숨이 오고가는 일에 대해서도 순종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에 먼저 순종하는 생활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이 순종을 배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그는 순종의 학교에 입학한 사람입니다. 그 순종의 학교에 들어온 한 학생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순종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교장 선생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고 거기에 많은 선생님이 있는데 다양한 선생님이 있습니다. 고난도 있고 시련도 있습니다. 말씀의 깨달음도 있고 은혜도 있고 여러 가지 선생님들이 있어서 그 선생님들을 통해서 우리들이 순종을 배워나가게 되는데 그 선생님이 누구시든지 간에 들고 들어오는 교과서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순종을 배우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작은 것밖에 순종하지 못했지만 그 순종을 배우면서 우리는 순종의 기쁨을 맛보고 작은 일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작은 은혜를 주십니다. 큰일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큰 은혜를 주십니다. 작은 일에 순종하면서 작은 은혜를 받고 그 은혜를 힘입어서 그보다 더 큰 일에 순종하고 좀더 큰일에 순종하면서 우리들이 비로소 하나님을 위한 아름다운 순종의 삶을 살 수 있는 사람들로 순종을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여러예수 믿은 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신앙생활 하신 지 얼마나 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난 후에 몇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이 순종의 학교에서는 몇 학년쯤 되십니까? 6학년에 졸업을 한다면 몇 학년쯤 되십니까? 예수 믿은 지 1년밖에 안 되는 사람이 순종의 학교에 1학년으로 머물러 있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머리가 허옇고 수염까지 난 늙은 학생이 이제 갓 예수를 믿기 시작한 아주 어린 학생과 수십 년 동안 낙제를 통해서 동급생이 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부끄러운 것입니다. 같이 있는 동급생들은 그 사람을 보면서 저렇게는 살지 말아야지 그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늘 들어오셔서 우리를 순종하도록 가르치고자 하는 많은 선생님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도 깨닫지 못하는 여러분들을 보면서 늘 마음에 고통을 느끼는 그런 선생님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이제 예수를 믿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지만 부지런히, 부지런히 순종의 삶을 살아서 4학년이나 5학년쯤 되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정말 축하 받아야 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구원을 입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의 모든 축복을 누리면서도 자신이 순종의 학교에 입학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화)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당분간 엄마가 따라갔는데 아들의 짝이 되는 여자 아이에게 학 교에 다니기 힘들지 않는가 하고 물으니까 재미없다며 하는 말이 이번 달만 다니고 끊어야겠 다고 함.
여러분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은 싫지 않은데 순종 학교는 끊고 싶지 않습니까? 이 달만 다니고 끊어야지. 그러나 이 순종의 학교는 자기 마음처럼 끊을 수 있는 학교가 아닙니다. 한달 다니고 끊고 두 달 다니고 끊을 수 있는 학교가 아닙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순종의 학교에서 도망가고 강의실에도 안 들어오고 화장실 뒤에 주저앉아서 담배나 피고 그런 학생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월이 많이 흘러도 1학년에서 도망간 사람은 다시 1학년에서 시작합니다. 2학년에서 포기했던 사람이 다시 돌아오면 그 지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화) 15년 전 대구에서 목사님들과 함께 공부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중에 어느 목사님이 감탄 을 하시며 나이를 물으시면서 자신은 그만한 나이에 세상 모르고 살다가 50이 넘어 이제 신 학을 하고 목사의 길을 가는데 예전에 젊은 시절을 다 보내고이제야 목사가 되었으니까 하 나님이 늦게 돌아온 것을 고려하셔서 지난 것은 어쩔 수 없고 시작을 하게 하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늦게 돌아왔어도 맨 처음 자기를 통해서 하시고 싶으셨던 그 일들을 원점으로 돌아가서 거기부터 순종하라고 했는데 늦게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면 그저 목회를 하는 것이든지 주의 일을 크게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일보다도 그래도 신학교라도 들어가고 목사 안수라도 받으면 그것만으로도 하나님이 감지덕지하실 것이라고 생각해서 목사가 되었더니 이제는 개척을 하게 하시며 자기의 나이가 많은데 어떻게 이 나이에 개척을 할 수가 있는지, 그래도 하라고 하시는데 그것이 언제부터 했어야 했는지 생각하니 30대 초 반에 살았어야 할 그 삶이었다며 하시는 말씀이 자네는 세월을 벌었다며 자네의 인생은 자기 보다 훨씬 나을 것이라고 하면서부러워하셨다는 이야기)
그렇게 저를 부러워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 그 말이 맞는 말이었습니다. 우리들이 불순종하면 그러면 언젠가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 말씀 앞에 세우시는데 돌아가라는 지점이 어디인가 하면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전혀 씻기지 않은 그 지점으로 다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순종의 학교에는 월반이 없습니다. 이것이 참 괜찮은 표현입니다. 방금 생각이 난 표현입니다. 그리스도의 순종의 학교에는 월반이 없습니다. 아무리 유능해도 건너뛸 수가 없습니다. 하나하나 배워 가는데 예수님 자신이 그 일에 있어서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얼마나 더 그분을 따라가야겠습니까. 은사 받은 것 자랑하지 말고, 교회 몇 년 다녀서 교회의 비리는 속속들이 안다. 그런 경력 자랑하지 말고, 몇 개 교회를 다녔다며 그런 것 자랑하지 말고, 교회 개척을 몇 개 했다는 그런 것 자랑하지 말고, 교인 몇 명이 모인다는 그런 것 자랑하지 말고 순종의 사람 되게 하시는 주님을 자랑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순종의 학교에서 잘 배우고 잘 배우는 그런 학생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그럼 그 순종을 아까 말씀드리기를 순종의 학교에 예수님이 교장 선생님이고 선생님이 많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중에서 뛰어난 선생님이 한 분 계신데 그 선생님이 누구인가 하면 고난이라는 선생님입니다.성이 '고'씨고 이름이 '난'입니다. 고난이라는 선생님인데 그분은 항상 한 손에는 회초리를 한 손에는 성경을 든 선생님입니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밖에 없네
오랜 세월이 뭔 오랜 세월입니까?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뭔 오랜 세월입니까? 그냥 편안한 오랜 세월이 아니라 불 가운데를 통과하고 물 가운데를 지나고 시련의 비바람을 맞으면서 눈 못 뜨는 긴 세월이 지난 후에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뭐밖에 없다는 것을, 주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인간은 그렇습니다. 우리 애들이 공부를 안 하는 것을 보면 진짜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공부를 안 할 수가 있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뭐 하라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땅을 파라고 합니까, 돈을 벌라고 합니까? 먹여주고, 재워주고, 등록금 대주고, 옷 입혀 주고, 철철이 운동화사주고, 책 다 사주고, 그것도 모자라면 선생을 붙여주고, 학원에 보내주고, 덥다고 그래서 선풍기 달아주고, 또 컴퓨터가 필요하다고 해서 컴퓨터를 사주고, 눈이 안 보인다고 해서 안경 사주고 그러면서 뭐만 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공부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 합니다. 그것이 참 신기합니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한테 우리도 신기한 사람입니다. 그 아버지는 그 아버지에게 또 신기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렇게 야단칠 때는 자기가 학교에 다닐 때 뺀질거리고 공부 안 하던 생각은 새카맣게 잊어버리고 그리고 내가 모든 것을 다 해주는데 왜 못할까. 그런데 그게 잘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못 배우고 배움의 기회를 주었지만 성실하지 않아서 공부 안하고 일생을 다 보내고 나서 힘들게 사는 동안에 하나 뼈저리게 터득한 것이 있는데 '공부가 제일 쉬웠구나.' 그것을 터득한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어느 학생 하나가 내신 등급 10등급에다가 수능시험도 개판으로 치고 그래서 삼류 대학에 갈 실력이 되었다가 가스 배달을 하고 짜장면 배달을 하면서 철 가방 배달을 하다가 5년인가 불같이 고생을 하다가 마지막에 터득한 것이 공부가 제일 쉬운 것을 깨닫고 공부를 해서 서울대 문과대를 수석으로 들어간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책도 써내고 그랬습니다.
물론 학생들이 그 사람의 의견에 다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어째든 지간에 그것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는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아! 공부를 해야지 되는구나. 그런데 애들은 아직 모릅니다. 왜 공부를 못한 설음이 얼마나 뼈저린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공부하지 못한 설음이 얼마나 서러운 것인지를 모르고 공부를 못했기 때문에 놓쳐버린 기회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아직 모르기 때문에,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애들이 공부를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애들이 뺀질거리고 공부를 하지 않아도 그리고 자기들이 커서 공부를 제대로 안 해서 고생을 많이 하고 무식한 설음을 당하고 나면 이번에는 우리처럼 새카맣게 우리에게 야단맞은 것은 잊어버리고 자기 아들을 낳으면 공부해야지 된다고 또 나무라고 그렇게 합니다.
어떤 집 엄마는 하도 성질이 나니까이놈의 자식 그렇게 공부를 안 하는 너 같은 아들이나 낳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엄마가 얼마나 속썩는지 한번 네가 경험해보아라. 그런데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고난이 우리에게 공부의 필요성을 가르쳐줍니다. 이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 적용이 된다고 할 것 같으면 신앙에 있어서 아름다운 덕목인 순종을 배우기 위해서 고난이라고 하는 선생님이 우리에게 훌륭한 스승이 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들어보십시오. 한사람이 순전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까지에는 그의 발은 불순종의 가시밭길로 걸어간 그것으로 가득하고 어깨 위에는 징계의 채찍이 그득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한사람이 정말 순종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에 '베이브 루드' 라고 하는 전설적인 4번 타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야기를 어느 신문에서 읽었는데 그 사람의 홈런이 역사적으로 기록적이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것이 너무 기록적인 나머지 감추어진 사실이 있는데 스트라이크 아웃을 당한 것도 기록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홈런의 수가 뛰어나고 그것으로 기록을 세우니까 스트라이크 아웃을 당하고 힘없이 배트를 어깨에 메고 걸어나가던 그 모습은 사람들에게서 잊혀진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들이 여러 사람의 순종의 사람을 살펴보았는데 완벽한 순종의 사람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여러분들이 잘 아는 백세에 낳은 아들의 목에 칼을 대었던 순종의 대명사였던 아브라함이 순종의 삶만 산 사람이었습니까? 믿음이 없어서 여러 번 불순종해서 혼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온전히 합하던 다윗 그는 정말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크게 하나님 앞에 여러 번 불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극도로 칭찬하던 순종을 위해서 그렇게 분투하고 태후의 위까지 폐하던 아사 왕은 온전한 순종의 사람이었습니까? 히스기야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빼놓고 누구도 완전한 순종의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순종의 사람으로 기록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좋은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누구입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자, 우리가 고난받으러 가자고 말입니다. 그런데 고난이 우리에게 훌륭한 순종을 가르치시는 선생님이 되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고난이란 선생님이 항상 옆에 사랑의 매를 '정신봉' 그것을 갖고 계십니다. 정신차리라고 때리십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늘 아이들을 패는것을 취미처럼 생각하던 선생님이 계셨는데 항상 몽둥이에 써있습니다. '사랑의 매' 그리고 뒤에다 뭐라고 쓰였는가 하면 '너희들은 아프지만 내 마음에는 눈물이 흐른다.' 그런데 한번도 눈물을 흘리는 것을 못 보았습니다. 신들린 사람처럼 막 때렸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난 선생님이 몽둥이를 가지고 다니면서 잘못 하면 이제 예수님이 참고 또 참으시면서 인격적으로 설득을 하시다가 애가 위험하겠다고 생각되시면 안되겠다 하시며 가는 길을 막아서라도 더 큰 고난을 당하지 말아야 하겠구나. 그리고 이제 고난의 선생님을 시켜서 손 좀 봐라. 이제 때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고난이 오는 것입니다. 재산상의 손해가 오기도 하고 믿었던 사람들이 배신을 하기도 하고 건강의 위협을 느끼기도 하고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기도 하고 하여튼 고난이 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그 고난을 당한 사람들이 모두 순종을 배웠는가 하면 '아니오'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순종의 사람들은 많은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웠지만 고난 당한 모든 사람들이 순종을 배웠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냥 죽을 고생을 억수로 한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배우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고생만 죽어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무엇을 배웠는가. 아무 것도 배운 것이 없고 단 하나 배울 수 있는 것은매맞는 일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애들도 자꾸 때리면 매도 웬만큼 때려도 겁을 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심하게 죽을 정도로 맞고 그러면서 자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가서 선생님들이 때리면 그때는 정말 무식하게 때렸습니다. 박달나무를 목공소에 맞추어서 그것으로 때렸습니다. 1년 365일 두들겨도 부러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렇게 때렸는데 우리는 한 두 대만 때리면 퍽 주저앉습니다. 그런데 집에서도 늘 맞으면서 자란 아이들은 정말 열대씩을 때려서 나중에는 피가 흥건하게 고여도 자세하나 안 바뀌면서 딱 맞는 것입니다. 그렇게 맞고 나서 나중에 '나쁜 자식' 그러면서 선생님을 욕하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배운 것이 없습니다. 물론 두 대를 맞고 주저앉은 나도 배운 것이 없지만, 그러나 하여튼 배우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많이 매를 맞는 동안에 배우는 것이라고 그저 견디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이란 선생님이 우리를 혼내주실 때에 우리들이 그 고난을 통해서 순종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는 중요한 것이 하나 있는데 고난 자체만 가지고는 안 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건한 감화가 동반되어야 합니다. 시인이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고난 당한 후에는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할 때 그 고난을 통해서 그렇게 훌륭하게 배우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지요? 그렇게 고난을 통해서 순종해야 한다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 고난의 와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것에 감화를 받았기 때문에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싫어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기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기회로 삼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고난이 결국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감화를 받은 사람으로 바꾸었고 그런 말씀의 작용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순종의 사람으로 배워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고난이란 선생님이 한쪽은 성경을, 한쪽은 회초리를 가지셨다고 말씀을 드린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안 합니다. 고난을 당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순종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없기 때문에 불순종은 가속화되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없고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속에 없으니까 불순종이 가속화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지금 고난이 정신없이 몰려 닥치는데 언제 한가하게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집에서 테이프를 듣고 좀 어떻게 사람의 형편이 웬만해야지 그렇지 않느냐고 합니다. 그러니까 백날 살아도 똑같은 상황이 계속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몸부림을 치고 고난을 스스로 감당해보려고 몸부림을 쳐도 시련이 그치지 않고 고통이 끊이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다시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그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 특별히 고난 가운데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견디기 힘든 시련 가운데 앞을 헤아릴 수 없는 가운데 시련과 비바람을 맞으면서 여러분의 삶을 갈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는가 하고 제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잠시 여러분 자신의 삶의 상황과 싸우기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껏 까지 내 힘으로 해결해보려고 했던 교만한 마음들을 버리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주시는 은혜의 회복이 없어도 내 힘으로 내가 지금 당하고 있는 이 어려움을 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모든 지혜를 짜냈던 그 모든 노력들이 얼마나 열매를 거두었습니까? 이제 평안이 찾아왔습니까? 고난이 물러갔습니까? 이제 아픔이 끝났습니까? 이제 평화가 왔습니까? 정말 여러분들은 행복합니까? 이제 안전합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잠시 자기와 상황과 더불어 싸우던 것들을 포기하고 모든 순종을 배운 믿음의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사람을 향한 원망과 그리고 상황을 향한 불만들을 접고 그리고 내가 이 고난받는 이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의 어떤 모습을 보여주시려고 하는가. 고난받는 이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알려주시고 싶어하시는가 귀를 기울이면서 한쪽 손에서 주어지는 이 모든 고난의 선생님으로부터 맞을 것이 아니라 이제 그분이 깨달으라고 가르쳐주시는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고난의 궁극적인 원인, 그리고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돌이키게 하시고 싶은 그 목표를 가슴에 새김을 받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고난을 통해서 우리들이 순종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자세로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온전케 되셨은 즉" 그랬습니다. 여기에서 온전케 되셨다 하는 이 말에 대해서 이 의미는 "목적을 이루었다. 그리고 쭉 자라서 완전히 성장되었다"는 그런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이 의미는 무엇인가 하면 온전케 되셨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하면 완전하게 되셨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완전하게 되셨다고 해석을 하면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불완전하셨던 적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온전케 되셨다" 라고 하는 의미는 여기 문맥 자체가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을 대속 제물로 드리는 문맥입니다. 그러니까 대제사장 자기의 몸을 제물로 드리는 대제사장으로 쓰임 받을 수 있도록 다된 그런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 그럼 이제 설명을 더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을 때에 목표는 너무 분명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심으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세례를 받으러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뵈면서 한 고백이 무엇입니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로다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오신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예수님이 태어나실 것을 예고한 그 수태의 고지 가운데서도 예언되었습니다. '저가 자기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자라' 그것을 위해 오신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 세상에 오셔서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사실 그것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궁극적이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병 고쳐 주었는데 그 사람이 또 죽었습니다. 눈뜨게 해주었는데 나중에 죽으니까 눈이 감겨졌습니다. 그것이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할 수가있습니다. 아니 그러면 예수님이 한번에 기왕에 성령으로 사람을 태어나게 하셨는데 아담을 만드실 때 기저귀를 찬 갓난아이로 만들지 않고 성인을 만들어서 창조 된지 얼마 있다가 즉시 결혼할 정도의 사람으로 만드셨는데 그러면 예수님도 그렇게 해서 내려보내셔서 그냥 곧바로 골고다로 올라가셔서 죽으시면 기간도 짧아지고 모든 것이 효과적일 텐데 그러면 예수님이 온갖 쓰라린 고통을 맛보시지 않으셔도 되고 십자가의 죽으심만 맛보시면 되고 그렇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어떻게, 성령으로 마리아의 몸에서 수태되어서 어린아이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태어나셨을 때 그분이 메시아입니까, 아닙니까?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아닙니까? 기저귀를 차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말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태어나실 그때부터 이미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참 사랑이셨고 이 두 가지 성품이 통일성을 이루어서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 완전한 사람인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셨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랬는데 그분을 하나님이 그냥 제물로 쓰시지 않으시고 어떻게, 삼 십 년이라고 하는 자연적인 성장의 기간을 지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라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스러워 가는 기간도 있었고 성령을 배우는 기간도 있었고 그리고 자기 민족의 역사를 돌아보는 기간도 있었고 여행하는 기간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삼 십 년의 사적인 생애 속에서 온갖 인간의 연약함과 죄인들의 삶의 모습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삼 년 동안 다시 예수님께서 순종의 삶을 사시면서 이제 공적인 생애를 살며 주님과 영혼들을 섬기셨습니다. 일 자체를 위해서 섬기시기보다는 섬기는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죽으실 수 있는 완성된 한 제물을 만드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율법서를 보면 제사의 규례를 이야기한 가운데 일년 된 송아지 삼 년 된 송아지, 일 년 된 양 수양, 그러면서 몇 년 된 그런 이야기가 쭉 나옵니다. 양이면 어차피 하나님이 직접 잡수실 것도 아닌데 아무 것이나 죽이면 되지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제물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있었습니다. 물론 갓 태어난 양이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라감으로서 일정한 기간에 도달했을 때 하나님 앞에 제물로 쓰여질 수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 자신이 모자라거나 부족한 분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시는 하나님 앞에 속죄를 위한 완성된 제물이 되시기 위해서는 예수님 자신이 온전해지는 기간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단지 육체적인 성숙뿐 아니라 정신적이고 영적인 성숙, 심지어는 예수님의 마음속에 있는 정서적인 성숙까지 그런 것까지 모두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마지막 못 박히셨을 때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도록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그 광경을 보면서 우리들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약에 지상 33년의 생애,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그 영혼들과 부둥켜안고 자라오신 그 완숙의 33년이 있으셨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우리들을 위해 죽으실 때에 우리를 위한 중보의 그 기도는 예수님의 가슴에 사무치고 듣는 우리의 마음에 사무치고 그 기도를 듣는 아버지의 마음에 사무치는 기도와 그분 자신이 일치된 그런 모습이 될 수 있었다고 우리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성숙해 가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온전해지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좀 다를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완성의 의미와는 좀 다를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우리는 예수님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더 온전해질 필요아래 놓여 있는 죄인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젊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위해서 한번 위대한 일을 꿈꾸지만 실제로 위대한 일에 쓰임을 받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뭔가 하나님을 위해서 엄청난 일들을 이루고 싶어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쓰시되 야망을 보고 쓰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람됨을 보시고 쓰시는 것입니다. 꿈을 가져라, 야망을 가져라 그렇게 말하는데 안 가져도 됩니다. 필요하면 하나님이 넣어주십니다.
다윗이 이세의 집에서 아버지가 그 자식이 자식인지도 생각이 잘 나지 않을 정도로 이름 없이 양을 먹이고 젖이나 짜고 똥이나 치우는 그런 목 부였습니다. 그가 언제 한 나라의 왕이 되겠다고 그랬습니까? 한번 한 나라의 왕, 선지자가 되어서 이 시대를 흔들어보아야 되겠다는 그런 꿈을 가졌습니까? 그냥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으로 남았습니다. 그 사람을 하나님이 써야지 되겠으니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꿈을 넣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자기의 사람으로 세워서 이스라엘의 역사에 위대한 사람으로 사용해주셨습니다.
사울을 보면 더 재미있습니다. 기름을 부으려고 하니까 숨었고 도망 다녔습니다. 그때까지 사울은 그런 마음이 없었습니다. 자기는 전혀 하나님께 쓰임을 받아서 한 시대를 움직여야 되겠다는 그런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름 부어주시고 마음을 넣어주시니까 이스라엘의 첫 임금이 되었습니다. 임금이 되고 나서 이제 큰 왕국을 만들어서 뭔가 한번 해봐야겠다고 마음을 가졌는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않아서 하나님이 신을 거두시니까 그 꿈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됨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야망을 보고 사람을 쓰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람됨을 보고 하나님이 쓰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찾으시겠습니까? 할 수만 있으면 온전함에 도달한 가까운 사람들을 찾지 않으시겠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일군을 쓴다 그럴 때 어떤 방면에서 탁월한가를 보고 사람을 쓰는 것보다 더 안전한 것은 온전하지 못한 부분이 얼마나 적은가를 보고 사람을 쓰는 것이 안전합니다. 전자의 선택은 항상 모험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일에 있어서는 탁월한데 다른 점에 있어서 너무나 온전하지 못할 때는 그가 그것을 계기로 해서 온전하게 변해 가면 다행인데 변해가지 않을 때는 이제 교회에 견디기 힘든 누를 끼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고려할 것은 어떤 점에 있어서 탁월한가 보다는 온전하지 못한 점이 얼마나 적은가를 보면서 그 다음에 탁월함을 고려해서 사람을 써야 합니다.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준비된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 준비되었다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필요한 것은 모두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돈이 필요하면 창고를 열면 돈이 나오고 지혜가 필요하면 창문을 열면 지혜가 쏟아집니다. 힘이 부족하면 능력이 붉어집니다. 싸움이 필요하면 천국의 군대들을 보내십니다. 준비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야망에 불붙는 사람 아닙니다. 준비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온전하게 된 사람, 주님의 마음을 그 가슴에 가진 사람, 주님처럼 닮은 사람, 말에나 일에나 생각에 있어서도 주님의 모습을 많이 닮은 사람, 주님의 마음에 근접하고 주님의 마음에 근접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 성품이 주님을 반영하고 삶이 그분의 발자취를 반영하는 그런 사람, 그런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 그것이 또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함이 기대가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거룩함 속에서 온전하게 되어 가는 온전함의 진보가 무엇을 통해 이루어집니까? 순종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니까 자꾸 순종하면 순종하는 사람으로 변해갑니다. 의에 말씀에 계속 순종하노라면 의로운 사람으로 변해갑니다. 나는 악한데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노라면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들이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준비된 한 제물로 주님 앞에 드려졌는데 하나님이 우리도 쓰시려고 합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쓰시고 싶어하십니다. 그런 쓰임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준비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불안전하고 모나기 짝이 없고 부족한 것 투성인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정말 쓰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온전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그러니까 순종하고 싶어서 늘 울면서 괴로워하고 자기의 모남을 인해서 아파하는 사람이 눈물을 흘리면서 부르는 이 찬송은 하나님의 마음에 감동입니다. 아무리 온전해지려고 몸부림쳐도 내 안에 있는 수많은 나, 가시나무처럼 돋아난 내 안에 있는 패역 때문에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고쳐서 주님께 순종하는 사람되고 싶어하고 주님 앞에 더 온전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어서 몸부림치는데 잘 안됩니다. 하다가, 하다가 너무나 힘들어서 이제 내 힘으로 안 되고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내 모습 이대로, 하나님 저는 이것밖에 안 됩니다. 그리고 받으실 때는 하나님이 감동을 받으십니다. 그래. 네가 부족하지만 너 자신이 온전케 되기를 위해서 순종의 실천을 통해서 온전케 되려고 그렇게 몸부림치니 내가 너를 긍휼히 여기노라. 나 예수 그리스도도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있을 때에 그렇게 순종하는 삶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경험하였노라.그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그래, 네가 늘 울어도 몸부림쳐도 늘 깨트려져도 고쳐질 수 없는 이 부분을 내가 담당하마.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받아주시는 것입니다.은혜를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을 안 합니다. 순종하려고 애를 쓰는 것도 없고 불순종했을 때에 가슴아파하는 것도 없고 그 다음에 불순종하고자 하는 자신을 꺾기 위해서 싸우고자 하는 분투하는 힘도 없습니다. 그리고 나서 나와서 '이 모습 이대로 날 받으시옵소서' 이것은 완전히 배째라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온전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리고 아마 죽기까지 몸부림치며 아버지 앞에 성경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리고 찬송가를 끌어안고 가슴 아파해도 주님의 마음에 흡족할 정도로 온전한 사람은 못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서 33년의 그 피나는 생애를 온갖 수치와 고통 속에서 온전한 제물이 되시기 위해서 순종의 실천으로 고난의 삶을 사셨던 예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털끝만큼이라도 우리 속에 있다면 우리는 온전한 사람이 되고자 애쓰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분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지도 않고 또 그렇게 믿지도 않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순종하지 않을 수 없도록 우리를 재촉합니다. 본성이 부패하고 태생이 거칠어서 주님의 마음을 할퀴면서 사는 우리들이지만 그러나 그렇게 주님의 마음을 할퀴는 불순종의 삶을 살고 난 후에는 손톱 사이로 흐르는 주님의 피를 봅니다. 그리고 후회합니다. '아! 그럴 수 없다. 어떻게 주님이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고 온전한 제물이 되셨는데 내가 주님 앞에 아무렇게나 살 수 있을까.' 그리고 즉시 후회합니다. 뉘우치면 우리 속에 다시 착한 마음이 살아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지 않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주님의 마음을 활키다가 다시 정신 차리고 돌아가서 흐느끼고 용서를 빌고 그리고 더 주님 앞에 온전한 삶을 사는 사람이 되고자 순종할 결심을 다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히브리서를 장식하고 있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 그 중에 완벽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완전한 순종의 삶을 산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불순종을 극복하고 순종하는 사람이 된 은총의 승리를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 모두 불안전했기 때문에 온전케 하시는 이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본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지금의 불안전한 모습이 부단한 순종을 통해서 주님이 받으심 즉 한 더 온전한 모습으로 변해가도록 그래서 주님께 정말 귀하게 쓰임을 받아서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그분께 기쁨을 드릴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순종의 사람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