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2004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4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예수님의 마음으로 (빌2:5) 2004.7.18 주일오후 1
2. 버시를 아십니까? (롬16:12下) 2004.7.25 주일오후 13
3. 구속의 감격 없이 섬김 없다 (마26:7) 2004.8.1 주일오후 23
4. 말없이 눈물만 흘리며 (눅7:38上) 2004.8.15 주일오후 31
5. 비천한 자의 사랑 (눅7:38中) 2004.8.22 주일오후 40
6. 모두 바친 인격의 향기 (눅7:38下) 2004.8.29 주일오후 50
7. 속죄와 함께 드린 번제 (레5:7) 2004.9.5 주일오후 56
8. 이 땅에서의 섬김엔 끝이 있습니다(눅23:43) 2004.9.19 주일오후 64
1. 예수님의 마음으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
필리핀을 선교 차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선교지에서 일정이 끝나고 어느 오후에 필리핀에 있는 선교사 한분이 메모리얼 파크에 데리고 가셨습니다. 미국이 땅을 좀 얻어서 그 넓은 땅에 잔디를 예쁘게 가꾸고 회랑처럼 만들어서 천연 대리석으로 깎아 만든 곳이었는데 S자 길 양쪽 대리석으로 된 벽들에 2차대전 때 필리핀 지역에서 싸우다 죽은 미국 병사들이 모두 새겨져 있었습니다. 일등병부터 시작해서 계급이 꽤 높은 사람까지 그들이 언제 그 전쟁터에 와서 언제까지 싸우다가 죽었다는 기록이 이름과 함께 새겨져 있었습니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크지는 않았지만 너무 정성스럽게 잔디를 가꾸고 품위 있는 대리석으로 깎아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저는 거기에서 천국을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다가 하늘나라에 올라가면 거기에도 저런 것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생명수 강가 길을 따라서 이 세상에서는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운 돌들로 회랑을 만들고 ‘아무개가 언제 예수를 믿고 언제까지 주를 위해 살다가 죽다’라고 아로새겨져 있고 좀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누구누구는 예수 믿고 한동안 방황했지만 그 후에 복음의 참된 의미를 알고 어느 교회에서 몇 년 동안 주일 학교 교사로 또 몇 년 동안 교회의 여러 가지 직분으로 섬기고 봉사하고 충성스럽게 살다가 죽었다’고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훌륭하게 주를 위해 살다 죽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끄러운 얘기지만 별로 신통치 않게 살다가 죽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영적 탈영병들만 모아놓은 곳도 있을 것입니다. ‘누구누구가 언제 감격적으로 주님을 영접했고, 일평생 가끔 은혜를 받았지만, 곧 탈영하고 결국은 돌아오지 않고 노중에서 죽다. 가까스로 그리스도의 보혈로 충분히 천국에 들어왔다’고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한 시대의 역사가 전쟁을 치르고 나면 유명한 지도자들을 수없이 남깁니다. 전쟁과 함께 난세가 영웅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영웅들이 때로는 대권을 장악하고 한 시대를 호령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전쟁터에 나아가서 그 비 오듯 쏟아지는 포탄 사이를 누비며 그렇게 피 흘리면서 싸우며 죽어간 수많은 무명의 용사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지도자의 이름이 기억되고 승리한 전쟁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훌륭한 지도자를 사용하셔서 그 시대마다 위대한 하나님 나라 건설의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한 나라의 민족이 역사 속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땅을 파면 쏟아지는 유전이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도 훌륭하겠지만 그보다 더 훌륭한 것은 지도자를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훌륭한 지도자를 얻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한 나라와 민족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비록 가난하고 지금은 국력이 쇄약한 나라라고 할지라도 훌륭한 지도자가 나오면 그 지도자를 통해서 그 나라는 미래가 약속됩니다.
역사 속에 있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지만 하나님 혼자 일하지 아니하시고 잘 준비된 지도자를 통해서 당신의 나라를 건설해가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가 한 시대에 주님께로부터 부여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 가운데 하나는 좋은 지도자를 만나는 것입니다.
부분적으로 신학적 견해는 좀 다르지만 그래도 깊이 존경하는 그리스도인 가운데 한 사람은 ‘앤드류 머레이’ 목사님이십니다. 성화론에 있어서 입장이 좀 다르지만 정말 훌륭한 신학자요 선교사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영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저의 은사 목사님은 자신이 번역한 어떤 책에서 앤드류 머레이 목사님을 소개하기를 ‘엔드류 머레이 목사는 하나님이 그 시대 교회에 주신 최고의 선물이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정말 한 시대의 교회의 지도자를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해가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변함이 없는 사실이기는 하지만 결코 하나님은 한사람의 지도자 혼자서 일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수많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이름도 알려지지 않고 빛도 비치지 않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을 만났고 그 주님께 대한 진실한 사랑 때문에 일평생 하나님 앞에서 헌신적인 삶을 살다간 수많은 성도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한시대의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되어 가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는 1장 뒷부분부터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계획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얼마나 고마운 것입니까? 그래서 오늘 아침에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갈망이 없는 것은 곧 하나님 자신을 갈망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 불철주야 진실한 신자가 되기를 사모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를 진실한 신자로 만드는 모든 힘이 은혜의 힘이라고 하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구도의 길을 걷는 구도자의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언제나 상한 마음이 됩니다. 왜냐하면 더 많은 은혜를 갈망하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어떠한 소망도 없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의 빛 앞에서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간절히 그 은혜를 구하며 그 은혜를 사모합니다. 그 은혜를 부르짖습니다. 그렇게 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지면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넘치고 하나님을 더 많이 느낄 수 있고 그분께 사랑을 받게 되고 또 우리가 그분을 사랑할 수 있게 되고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움 연합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은혜를 받으면 너무 행복해집니다. 그렇게 될 뿐만 아니라 또 어떤 일이 주어집니까? 은혜가 넘치게 되면 아주 강력한 믿음을 소유하게 됩니다. 경험하지 못했을 때는 조금밖에 못 믿었는데 경험을 하고 나니까 온전히 믿고 의지할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 아닙니까? 그것이 은혜가 가져다주는 효능입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좋습니까?
그러나 거기에서 그치는 것은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의 목적이 아닙니다. 사도는 오늘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믿을 뿐 아니라-믿는다는 속에는 개인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행복, 은혜의 경험, 내적인 체험, 거기에서 오는 영적인 만족, 신령한 것들에 대한 빛, 이런 모든 것들을 포함한 것입니다-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고난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도가 고난을 이야기하면서 갑자기 아주 현실적인 문제, ‘무슨 권면이나 무슨 칭찬이나 무슨 기릴 것이 있다면 너희는 서로 한마음을 품어서 뜻을 같이하고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자기를 돌아볼 뿐 아니라 또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아서 내 기쁨을 충만케하라’고 합니다.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복닥복닥하며 살아가는 교회 생활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빌립보교회 교인들의 성도 안에서의 교제를 하며 살아가는 교회 생활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고난이라고 하면 장엄한 고난을 생각합니다. 어느 날 칼이 목에 들어오고 ‘예수를 계속 믿고 죽을래 아니면 안 믿고 계속 살래?’할 때 내 이 젊은 피를 장렬하게 뿌리고 역사에 길이 남도록 ‘오직 믿음으로’ 하고 장렬한 최후를 마치겠다고 하는 장엄한 순교의 장면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 여러분들에게는 그런 순간이 주어질 기회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너무 자유를 누리면서 신앙생활 하고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처럼 완벽한 신앙의 자유를 구가하는 나라가 없습니다. 기독교 국가에서도 이 이상의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이렇게 완전히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상황에서 그렇게 ‘예수 믿고 죽을래, 아니면 안 믿고 살래’ 할 때 ‘저는 끝까지 예수를 믿고 죽고 싶어요’ 하며 장렬하게 최후를 마치는 이승복 어린이 같은 장면은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구원의 계획이 장엄합니까, 아니면 왜소합니까? 장엄합니다. 우리 인간 하나하나가 하나님이 이 우주를 창조하신 목적과 관련됩니다. 그리고 결국은 우리가 영화의 상태에 들어가서 우주의 완성을 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장엄합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그런 장엄한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은 성도로서 마땅히 해야할 바지만 중요한 것은 너무 장엄해지면 안 됩니다. 현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영원한 나라에서 주님이 나를 영화의 상태로 데려갈 날, 그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날을 신음하듯이 기다리면서 오늘 죄와 더불어 싸우고 오늘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실제적인 삶이 필요합니다.
고난도 어느 한순간 장엄하게 두 팔 벌리고 목구멍에서 피 쏟으면서 죽는 그런 장엄한 순교만을 기대하지 말고 순생의 삶, 그렇게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이미 죽고 지금도 죽고 있는 사람으로서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 그러니까 ‘예수를 믿고 영원히 죽을래, 예수를 안 믿고 잠시 살래?’ ‘피뿌리는 순교를 할 것이냐, 배교자가 될 것이냐?’보다는 사실 현실적인 문제는 ‘오늘 교회에서 봉사를 해야 하는데 내가 게으름과 타협하고 드러누워서 내 시간을 보낼 것이냐 아니면 나를 희생해서 가서 봉사를 할 것인가’ ‘오늘 내가 배식 당번인데 꾀를 부리다가 가서 밥숟가락만 들고 나타날 것인가 무거운 밥판을 들고 3층으로 올라갈 것인가’ 이것이 훨씬 현실적입니다. 이것이 없는 고난에 대한 많은 생각,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주님을 위해 장렬히 죽는 고난에 대한 많은 상상, 이 모든 것들은 다 영적 허영입니다.
하늘나라의 상급은 상상 속에서 십자가를 지고 장렬하게 죽는 상상을 하는 사람에게 주는 상급이 아니라 실제의 삶에서 주님을 위해서 매순간 죽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고난당한 사람, 그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입니다. 상상 속에서 장렬하게 죽는 순교자적 삶 보다 중요한 것은 오늘 실제의 삶에서 자신의 게으름과 더불어 싸우고 남보다 자기를 더 낫게 생각하려고 하는 교만을 누르고 허리를 숙여 봉사하고 손을 거둬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그 삶이 바로 순생의 삶입니다. 그리고 순교의 정신으로 바로 그 순생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 앞에 더 아름다운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은혜를 주신 사람들에게는 이처럼 구체적인 고난이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구하는 것은 여러분 마음인데 은혜를 받으면 반드시 사명이 함께 깨달아지고 그 사명을 위해서 주님께 순종하며 살려고 하면 거기에는 항상 고난이 뒤따릅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1장 8절에서 사도 바울은 아들과 같은 디모데에게 권면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이 능력은 이미 하나님께서 디모데에게 주신 그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너에게 능력을 주셨으니 그 능력의 크기만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며 살아야 그것이 전도자의 삶이란다’하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느 지체에게 심방을 갔더니 하나님이 자꾸 은혜를 주시려고 하는데 불길한 예감이 들어 절제를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은혜를 조금만 더 받으면 하나님이 자기를 목사 되라고 할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절제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인생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고난이 사라진 자리에 고이는 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그럴지 모릅니다. 그런데 신앙의 세계에서는 안 그렇습니다. 지금 다 일자리 없어서 쩔쩔 맵니다. 그런데 누가 여러분 불러서 놀고먹어도 아무 조건 없이 매달 천만 원씩 주겠다고 하면 당장은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몇 달쯤 좋을 것 같습니까? 여러분이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여러분이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그 행복은 불과 석 달이 안갈 것입니다.
(예화:사회 심리학을 하는 학자 한 사람이 실험을 했다. 남대문 지게꾼이 하루 1000원 에서 1500원 벌 때 건장한 지게꾼 한사람에게 매일 2500원씩 줄 테니 ‘왜’라고 묻지 말고 쉬어가며 넓은 운동장을 도랑처럼 파라고 했다. 며칠에 걸쳐 다 파고 나니 그 다음날부터는 다시 묻으라고 했다. 닷새에 걸쳐 다 묻고 나니 그 다음날 부터 다시 파라고 했다. 결국 2500원 일당을 팽개치고 다시 남대문시장으로 갔 다고 한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워낙 돈 없어서 고생하고 백수로 있다보면 그리고 일을 너무 많이 해서 지친 사람들은 누가 공돈이라도 주며 놀고먹으라고 하면 ‘신나겠다’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삶의 정신이 없는 사람들이 그럴 수 있고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러고 살겠습니까? 가만히 있어도 1000만원씩 통장에 턱턱 들어오면 무슨 재미입니까? 사는 것입니까? 사육당하는 것이지. 좋은 직장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일 조금하고 돈 많이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한만큼만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너무 과합니다. 돌려드리겠습니다’할 수 있어야 그리스도인입니다.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고난을 안받는다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고 고난이 있다고 해서 고통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거나 역사를 보십시오. 하나님과 동행하는 말할 수 없는 행복을 누렸던 사람들은 모두 일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넘치는 노역의 연대기를 쓰면서 산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계획은 우리를 그 주님 사귀게 하고 그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게 할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곳에서 바깥으로 뻗어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해서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돌아오는 그 기쁨은, 그 고난 속에서 깃든 그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리차드 범브란트라고 하는 루마니아의 기독교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공산치하에서 체포되어 긴 세월을 지하 감옥에서 지냈습니다. 그러다 다시 석방되었습니다. 그때 기분이 어떠냐고 묻자 천국에서 땅바닥으로 딱 떨어지는 느낌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고난의 신비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못 받으면 고난이 없습니까? 고난이 넘칩니다. 죄를 지으니까 늘 두들겨 맞고 곤고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돈이 천만 원씩 통장에 들어오니까 이것도 사고 저것도 마셔보고 까불고 살지만 인생이 뭐가 재미있겠습니까? 노래방도 한두 번이고 비디오도 한두 개지 뭐가 그렇게 재미있겠습니까? 극장도 몇 번이고 놀러 다니는 것도 지겨울 것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뭔가 가치 있고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살 때 그 사람이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할 수 있고 거기에서 기쁨을 누리고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우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삶을 사는 삶, 거기에 인생의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가치는 결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얼마나 많은 물질을 누리고 얼마나 높은 지위에서 사람들에게 자기의 이름을 날리면서 사는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모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서 버렸던 이 세상의 길과 가치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의 계획에는 반드시 고난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신령한 기쁨이 함께 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고난은 잠깐이고 그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신령한 기쁨은 영원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 앞에 사명이 없이 주를 섬기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한번 보십시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소외된 영적인 좌절감과 마음의 소외감은 영원히 계속되고 이 세상에서 그 물질로 누릴 수 있는 쾌락과 기쁨은 허무합니다. 그리고 잠시 열렬하고 뜨겁지만 사라지고 나면 그것보다 더 강력한 공허가 대신 밀려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그 삶은 너무 재미없는 삶입니다.
그런데 그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아까 말씀드렸듯이 늘 이렇게 아주 현실적인 것입니다. 너무 장황해지지 말고 좀 현실적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세계적인 인물로 쓰셔서 역사를 움직이실 때만 헌신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하나님이 자기를 그렇게 안 쓰시고 동네적인 사람으로 쓰실 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인생은 없는 것입니까? 그러면 너무 불쌍하지 않습니까?
(예화: 한 목사님의 전도사시절의 간증-담임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저것도 설교 라고 하고 밥을 먹다니 참 기적이다’했는데 드디어 설교할 기회가 주어져서 밤새 로이드죤스 목사님의 설교를 베껴 설교했는데 성도들의 반응이 냉랭했다고 한다)
우리가 모두 세계적인 인물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모두 역사 속에 수십만 대군을 호령하던 전쟁터의 영웅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어쩌면 탄약이나 나르는 탄약수로 살다가 죽을 수도 있고 그것도 차례가 안와서 돌멩이 지고 공병대 하다가 죽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보는 그 삶의 크기가 하나님 앞에서의 삶의 크기일 수 있을까요? 하나님 앞에서의 삶의 크기는 그 사람의 삶의 결과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과정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삶의 과정이 어떠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많은 은혜는 그것을 장엄한 우리의 사고의 영역 속에 가두고 실제로 주님을 위해서 땀 흘리는 삶이 없는 그런 가공의 상상 속에서 부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은혜를 주셨으면 주님을 위해서 땀 흘리면서 살아가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생애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위대한 경험의 간증이 훌륭하지만 그러나 더 이상의 삶이 없는 은혜 체험에 대한 간증은 아무리 잘해봐야 입술의 면류관밖에는 받을 것이 없습니다. 삶은 하나도 없고 신기하고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어 정말 많은 사람에게 자랑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무슨 상을 주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상상과 말 속에서 받은 고난에 베푸는 상급이 아니라 실제 땀 흘리고 눈물 흘리며 걸어간 삶의 발자취 속에 남겨지는 그 흔적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상급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사람들을 향해 말하기를 ‘이후로 너희는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말했습니다. ‘너희는 말로 까불지만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면서 고난의 흔적을 가진 사람이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셨고 내가 사도가 아니고 주님이 나를 세워주시지 아니했더라면 내가 어떻게 그 많은 인내를 가지고 고난의 길을 통과했겠느냐? 사도로 불러주신 나와 함께 하신 나를 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이렇게 살게 만들었다’고 사도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흔히 은혜를 이야기할 때 너무 자기중심적으로 내면화된 은혜를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가끔 우리 주위에서 보면 고민을 많이 하며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나는 왜 이렇게 서러울까?’ ‘나는 왜 이렇게 죄악될까?’ ‘나는 왜 이렇게 하나님 앞에 변화되지 않을까?’ 그렇게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런데 성화에 있어서 거의 진전이 없이 쳇바퀴 돌듯이 고민만 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진정한 고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그렇게 아파하고 고민하면 성화에 진전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을 다 믿지 마십시오. 고민을 하는 것은 사실인데 그렇게 많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 하는데 사람들과 모여서 이야기하다보니까 많이 하는 것처럼 비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위선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많이 말하는 것도 위선입니다. 그것이 알려지기를 바라는 위선입니다. 자기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객관적인 증거가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을 인해서 그렇게 괴로워하는 사람으로 알려지기 원하는 위선입니다. 하나님 한분 앞에 섰을 때는 요만큼밖에 고민을 안 하면서 사람 앞에 섰을 때는 이만큼 고민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 전부 허식이고 거짓이고 사기입니다.
참된 성화는 하나님 앞에 느끼는 절망감, 그 속에서 주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갈망, 그 갈망에 대한 응답으로 오셔서 우리를 순결하게 하시는 성령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지 어떤 영웅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떠벌이는 언어에 의해서 성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입만 열면 자기 얘기를 폭포수처럼 쏟아놓고 남의 이야기는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는 그런 자기중심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오만함, 이런 것들은 모두 겸손과 자기 부족을 위장한 거짓입니다. 하나님 보실 때는 모두 역겨운 것들입니다. 그런 면에서도 좀 정직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이 고민할 때 ‘난 그런 것 때문에 고민해본 적이 없는데’하면 ‘젠 저 정도인가’하며 사람들은 웃을 것입니다. 없는 것을 없다고 했는데 그것이 뭐 어떻다는 것입니까? ‘오늘 친구들을 만났는데 저 친구들은 자기가 저렇게 부족하다고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는데 나는 항상 하나님 앞에 넘친다고 생각했으니 제가 뭐 잘못된 것 같습니다. 깨닫게 해주시고 성령님이 오셔서 나 자신의 비참함을 좀 보게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하는 것이 오히려 솔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정말 정직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은혜 받고 영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고 자기 깨어짐의 경험도 있는 사람들의 오류는 그러한 극렬한 자기 투쟁적인 삶을 지나치게 미화하는 것입니다.
물론 성화에 있어서 자기 자신의 악한 본성과 자기 자신에게 깊이 뿌리박힌 죄성을 미워하고 그것과 더불어서 싸우는 인내심으로 가득 찬 투쟁은 정말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신앙생활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그렇게 분투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분투하는 것이 살아있는 신앙을 갖지 않으면 행할 수 없는 것이지만 거기에 멈추고 거기에 갇히는 것은 정말 참된 하나님의 은혜의 계획이 아닙니다. 그 이상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이 이야기합니다. ‘너희 자신을 돌아볼 뿐 아니라 또한 다른 사람의 일도 돌아보아’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그것이 중심축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기의 부족을 깨닫고 거기에서 아파하고 거기에서 뉘우치고 참회하며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결국 경건생활의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제일 위험한 사람이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가지고 있는 관계에 대한 경건한 토대 없이 단지 교회에서 일만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일만 하면 다냐고 했더니 요즘은 일도 안하려고 한다는데 그것은 더 바보 같은 것입니다. 일이 자기를 망가트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가지고 있는 태도가 일 자체를 망가트리고 사람도 망가트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일을 하면 그냥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일을 하면 일을 하고 있는 것이고 놀면 노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일하는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일을 하면서 자기가 변화되어서 그렇게 하나님을 마음으로 사랑하면서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지, 참된 신자가 되기 위해서 일도 안하고 봉사도 안한다고 말한다면 다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이번에 120명의 청년들이 진도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거기에서 많이 은혜를 받고 얼굴이 천사처럼 빛나는 것을 보면서 여러분들이 수련회에서 받을 그 은혜와 종류는 다르지만 그에 못지않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참된 신자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분투하고 참회하면서 받는 그 은혜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는 반드시 삶의 지평으로 이어져야지만 그것이 열매를 맺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계획들이 찬란하게 드러나고 거기에서 은혜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는 놀라운 증거들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단지 상상 속에 머무르게 되면 삶이 없이 하나님이 자신의 마음에 주신 은혜를 오래도록 간직하며 살 수 있을 정도로 순결한 인간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래서 육체적인 게으름은 곧 영적인 권태를 가져오고 영적인 권태는 육체의 게으름과 손잡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정욕과 부패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라도 해야 합니다.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믿고 은혜를 받았으면서 아무 것도 섬기지 않고 있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굉장히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신앙과 은혜의 체험이 부패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뭐라도 섬겨야 합니다.
오늘 자기를 하나님 앞에서 돌아보는 그것을 중심으로 한 다음에 또 한 가지 축을 이야기하는데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아’라고 합니다. 흔히 그리스도인들이 ‘남의 일에 나서지 말자. 내 할일이나 잘하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성경의 정신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지랖이 넓어야 합니다. 여기 저기 나서지 않는 데가 없어야 합니다. 규모 있게 살아야 하지만 자기를 돌아볼 뿐만 아니라 또한 다른 사람들의 일을 애정을 가지고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병든 자 고치시고 주린 자 먹이시고 외로운 자를 위로하시고 무지한 자를 일깨우시고 소외된 자들의 친구가 되어주시기 위해서 ‘외로운 자들아 이라 와라 위로해 줄까?’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갈릴리로 데가볼리로 사마리아로 두루두루 다니시면서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처럼 남의 일에 많이 나서면서 사신 분 있으시면 한번 나와 보십시오. 예수님은 오히려 당신 자신에 관해서는 관심이 거의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영혼들과 병든 육체, 그리고 곤고한 인간들을 향한 관심과 연민에 넘치는 삶을 사셨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사랑의 열매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영성의 열매입니다. 핵심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은혜를 깊이 받고 그분의 사랑의 성품을 경험하고나면 이렇게 자기를 돌아볼 뿐만 아니라 또한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고 싶은 경건한 욕망이 생깁니다. 동기는 돌아보는 것입니다. 의사가 환자를 돌아보듯이 그렇게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온전케 하기 위해서 섬기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봉사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희생하고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예화: 이번 임직식 때 제일 고생한 사람이 식당에서 일한 사람이었는데 밥하기 전에 함께 예배드리고 찬송하면서 반찬 만들고 간증하면서 나물 다듬고 성도들이 은혜에 은혜를 받으면서 주방에서 봉사했다고 한다)
자기를 돌아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들을 돌아보는 정신이 없으면 그렇게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 안에 갇힌 영성입니다. 이기적 영성이고 반드시 부패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순결한 상태로 있는 것이 잠시 순간입니다.
어제 밤에도 저는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를 제 생애 여섯 번째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를 읽으면서도 똑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브레이너드는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우울증적 기질이 있다고 오해받으리만치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고민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알량한 내면주의자들과 달랐던 것은 넘치도록 수고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스물한 살에 회심하고 스물네 살에 선교사로 헌신해서 건강을 돌보지 않는 무리한 사역 끝에 스물아홉 살 꽃다운 나이에 피를 토하고 죽습니다.
언제나 그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루고 있어야 합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착하고 그 관계에서 멀어질까봐 괴로워하는가, 이 사람은 믿음이 별로 없나보다 하고 생각할라치면 그의 실제적인 삶을 보면 넘치도록 헌신하면서 삽니다. 그 사람이 일기 속에 적어놓은 시는 제가 곡을 붙여서 오래 동안 부른 노래가 되었습니다. ‘영혼을 주님께 인도할 수 있다면 내가 어디에 있든지 어떻게 살든지 또 무엇을 견디게 되든지 나는 관계치 않노라 잠을 자면 저들을 꿈꾸고 잠을 깨면 첫째 생각이 잃어버린 영혼들이라 잃어버린 영혼들이라 아무리 박식하고 능란하며 또 심오한 설교와 청중을 감동시키는 웅변이 있을 지라도 그것이 결코 인간의 심령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결핍을 대신할 수는 없노라’ 절대로 내면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바깥으로 확 넘쳐나는 삶을 산 것입니다.
여러분 어느 날 하나님 앞에 ‘주님의 사랑을 알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더 큰 사랑을 체험하게 해주십시오. 주님 오늘 저를 만져 주십시오’하는 기도가 응답되는 적은 정말 드믑니다. 오히려 정말 치열하게 ‘주님, 예수님이 오늘 저의 삶의 현장에 오시면 어디에서 눈물을 흘리실까? 거기에서 내가 닦아주는 그 눈물이 아마 예수님의 눈물일거야’하고 고통 받고 아파하는 사람들 가까이에 내려가서 도성인신의 정신을 가지고 그들을 섬기고 그들의 손과 발이 되어서 노예처럼 자신을 주고 살려고 하는 곳에서 하나님의 그 크고 오묘하고 위대한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천하는 삶의 현장을 갖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제가 몇 년을 고민하다가 1년 전부터 강력하게 푸쉬했습니다. ‘그러지 말자. 오늘날 우리 교인들은 영적인 비만에 걸려있다. 수시로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지만 자기도 소화하지 못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만에 걸려있다. 그래서 은혜를 사모할 줄 모르고 하나님의 말씀이 귀한 줄 모르고 살아가지 않느냐. 우리 그들에게 한번 하나님의 진실한 성도들이 눈물 흘리며 살아가는 삶의 현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들리는 그런 삶의 현장을 그들에게 보여주자. 그러려면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라 아골 골짝 빈들에도 소돔 같은 거리에도 사랑 안고 찾아 가겠습니다’하는 자기를 던지는 희생이 필요한 것입니다.
교회가 건강하고 훌륭하게 일하면 그 교회를 통해서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계속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을 세상에 내보내주는 것, 그것이 교회가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입니다. 요약을 하자면 신자가 이 세상을 위해 섬길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은 이 세상에서 참된 신자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최상으로 섬기는 비결은, 세상을 최상으로 섬기는 교회의 최고의 섬김은, 참으로 교회가 교회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수많은 진실한 사람들,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고자 하는 진실한 신자들이 거기에서 수없이 태어납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삽니다.
사실 이것이 말이 됩니까? 자기를 홍보하고 살아도 시원치 않은 세상인데 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삽니까? 그러나 그런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세상 부귀 안일함과 명성 원치 않으며 즐겨 고난 길 가도록 나와 동행 하소서’하면서 ‘주께로 가까이 주께로 가까이’합니다. (? 영어 문장) 이 순례자의 긴 길을 가는 방식이, 거기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식이 바로 그런 방식입니다. 그러면서 살아갑니다. 거기에서 참된 은혜 받은 그리스도인의 현재적인 경험이 거기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거기에서 어떻게 그 죽음을 이기고 예수와 함께 부활하는 것을 배웁니다. 거기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고 영원히 사는 것을 배워나갑니다.
여기에서 오랫동안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삶에 있어서 빠지지 않는 핵심적인 요소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간직하고 싶습니까, 쉬 버리고 싶습니까? 누구나 간직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왜 간직이 안 됩니까? 그것이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영적인 것이어서 매우 말랑말랑하고 가변적입니다. 이것을 단단한 용기에 담아야 합니다. 그것이 투철한 삶입니다. 자기에게 생명을 주고 복음을 주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은 그 정신에 입각한 삶, 그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을 보존하는 용기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속살을 다 드러내고 산다는 것입니다. 한번 죄의 화살에 맞으면 한번에 다 뭉개져버립니다.
올곧게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그 놀라운 은혜를 내게 주셨을 때 주님이 나를 세우신 자리가 어디인가? 어디에 주님이 나를 세우셨나?를 생각하고 그 세운 자리에서 비록 나의 구원은 장엄한 계획이 있지만 그 장엄한 구원의 계획의 실현을 기다리면서 오늘 내 앞에 펼쳐진 외면할 수 없는 삶의 참여자가 되어서 거기에서 주님의 마음을 품고, 거기에서 무릎을 꿇어서 섬기고 거기에서 허리를 숙여서 봉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요즘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왜냐하면 어느덧 우리들이 사치스럽고 부족한 것이 없는 신앙생활에 익숙해져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이름 없이 빛도 없이’의 정신이 너무나 많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지만 아무래도 이 넓은 교회당을 청소할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리 해도 안 되니까 청소하는 회사를 불러서 청소를 하자고 합니다. 저는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습니다. 어쩌면 항복하고 상황에 밀려서 그렇게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 정말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고급인력입니까? 무슨 고급인력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누구입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종 아닙니까? 주님이 우리를 자녀로 불러주셨지만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가는 면에 있어서는 우리는 주님의 노예로 자처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였다고 주인이 종에게 사례를 하겠느냐?’ 당신 자신이 그런 섬김의 정신을 몸소 친히 보여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정말 우리들이 그런 노예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이 아름다운 신앙의 구호를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깊이 간직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이 바로 5절에 나오는 예수의 마음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거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 마음을 품어야지만 비로소 많은 사람을 섬기는 노예처럼 살아갈 수 있고 그래서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않고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그들을 섬길 수 있는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답이 나왔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렇게 섬길 부분들이 많아도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나 엔죠이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즐기려고는 하지만 그 안에 예수의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어떤 마음입니까? 병든 자를 보고 고쳐주고 싶어 하시는 마음이고 주린 자를 보고 먹이고 싶어 하시는 마음이고 눈 먼 자를 뜨게 해주고 싶어 하시는 마음이고 진리를 모르고 어두움 속에 있는 사람들의 영혼에 빛을 주고 싶어 하신 현자의 마음이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내게 있는 모든 것은 다 그 영혼들을 위한 공적 자산이라고 생각 하신 것이 예수님의 마음 아니었습니까?
답은 딴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리는 깨닫고 그것을 엔죠이하지만 그야말로 그것을 유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뼈 속까지 깊이 들어가서 그 사람을 변화시켜서 나의 마음을 버리고 예수의 마음을 품게 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계시를 받을 때 천사의 음성이 하늘로부터 들려왔습니다. 두루마리를 주면서 ‘이 계시의 말씀을 받아먹으라’했습니다. 받아먹었더니 입에서는 너무나 달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져다주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속에서는 쑥처럼 매우 쓰게 되었습니다. 구토를 하고 싶을 정도로 쓰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은 어떤 즐거움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뼈 속 깊이 스며들어서 자기를 중심으로 살고자 하고 자기만을 위하고자 하는 이기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의 마음을 품게 되기까지 변화되게 하는 데는 반드시 영적인 깨어짐의 고통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들으면서도 그 실제적으로 하나님 앞에 섬기는 삶이 없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말씀 생활이 엔죠이 수준에 머물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쌓아올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은 교만해지는 것과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쓸 데가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정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 한분이 나를 기억해주는 것으로 만족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한번 토요일 저녁이나 주일 저녁 같은 때 청소에 동참해보십시오. 그것은 청소가 아니라 전쟁입니다.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합니다. 주일날 빠져나가고 다음 주일날 교회에 오면 모든 것이 그대로 정도 되어있지요? 장난이 아닙니다. 1천 사오백 명 먹는 밥을 한 곳에서 한다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뜨거운 밥판을 꺼내는 사람은 땀으로 흠뻑 젖습니다. 때로는 다치기도 합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 느지막이 양복입고 나와서 2부나 3부 예배드리면 되는데 1부 예배드리고 나와서 작업복으로 갈아입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수고와 이름도 없고 빛도 없이 섬기는 눈물과 땀과 피를 밟고 여러분들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의 마음과 예수의 생각을 품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수많은 희생 위에 군림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고급 인력은 아무도 없습니다. 카터 대통령이 임기 중에도 주일학교 교사를 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우리가 뭐가 잘났습니까? 장로님 한분이 계신데 여러 나라의 대사도 역임하고 미국의 여러 지역의 총영사도 역임하셨습니다. 그곳에 가니까 모두 그분을 칭찬했습니다. 대사님이 오셔서 주일학교 아이들 신발 정리하니까 온 교민이 신앙에 대해서 새로운 인상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쓰레기 같은 죄인들이었는데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 받은 죄인들일 뿐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능은 그분이 주신 것이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시간도 그분이 우리에게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기 때문이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물도 당신 잘 섬기라고 그분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들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귀를 기울이면서 정말 성령님의 흐느낌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우리의 이 안일하고 십자가 없는 신앙생활, 털끝만큼도 주님을 위해서 피 흘리고 땀 흘리는 희생이 없는 이 안분지족하는 자기만족적 신앙생활, 하나님의 말씀이나 젠틀하게 엔죠이하는 이런 가식적인 신앙생활을 통해서 우리가 정말 피 묻은 십자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정말 거기에서 하나님의 진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솟구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들을 변화시키는 그런 은혜의 경험들을 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자기를 다 바치고 섬기는 그 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그 속에 정결함이 있습니다. 거기에 순수함이 있습니다. 깊이 회개해야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정말 새털같이 많은 날을 살았지만 예수님 한분만을 위해서 산 날이 있었는지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고난 받은 흔적이 우리에게 있는지 한번 돌아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끝.
2. 버시를 아십니까?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롬16:12下)”
사도 바울이 회심하기 전에는 회심한 후와는 전혀 다른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전승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키가 작고 머리가 벗어지고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코는 붉고 목은 매우 짧고 배는 튀어나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상상할 수 있는 안 좋은 상황의 외모였을 것입니다.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대개 목이 짧고 광대뼈가 튀어나온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독선적이고 굉장히 감정적이기 쉬운 사람들입니다. 회심하기 전에 이 사람이 어떤 성품이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이 사람의 성품을 엿보게 하는 성경의 몇 부분을 보면 옛날 성품이 어떤 성품인지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스테반을 죽이는데 가편 투표를 했고 옷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옷을 지켰다는 것이 무슨 일이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 자리에 증인으로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스테반이 나쁜 사람이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에게 사형 집행하는 광경을 보러 가자고 하면 가겠습니까? 돈 주고 가자고 해도 아마 안 갈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 이 사람의 성품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넣기 위해서 대제사장의 공문을 청해서 권한을 위임 받아 다메섹으로 갔던, 뭔가를 한다면 하는 과격하고 독선적인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성격도 매우 불같았습니다. 예수 믿고 변화된 다음에도 불뚝불뚝 그런 것들이 나오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사도 베드로를 대놓고 면책하는 장면이나, 바나바가 자기를 예루살렘 교회에 소개시켜준 저명 인사였는데 그 대선배인 바나바와도 다투는 이야기 같은 것들을 보면 과거 회심하기전의 그 사람 성격도 우리 못지않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게 합니다. 그런데 어떻든 예수님을 믿고 변화된 다음에 정말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로마서를 쓸 때는 바울이 사도 된 지 25년쯤 지난 후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5년의 성화의 시간을 지내면서 많이 변화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사랑장을 쓸 때에는 사랑에 대한 보통의 통찰이 아닙니다. 이때는 이미 인격적으로 원숙해졌을 때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16장은 사실 없어도 되는 장입니다. 사람 이름만 35명인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진리의 내용도 별로 없는 것 같고 없어도 되는 장인데 볼 때마다 감동이 됩니다. 사도 바울이 이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도 이러했으니 자기가 직접 가서 세운 그 많은 교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었겠으며, 그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거의 기억하고 그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다는 것 자체가 참 놀라운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여기에 ‘버시’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여러분도 아마 오늘 성경 본문에서 처음 봤을 것입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 본 적이 있다면 그 성경은 문제가 있는 성경일 것입니다. 한번밖에 안나옵니다. ‘버시’가 이름인 것은 틀림없는데 희랍어로는 ‘페르시다스’라고 나옵니다. ‘다스’는 명사 변화를 일으켜서 목적격에 붙는 어미이니까 빼버린다고 치고 원형이 ‘페르시아’라고 봅니다. 희랍어에서 ‘시아’는 여성형입니다. ‘페르시아’가 무엇인지 어디에도 제대로 안 나와 있습니다. 찾아보니 지금 제가 추론하는 것과 같은 복잡한 추론은 필요 없고 의미는 무엇인지 모르고 그냥 ‘페르시아’라는 여성의 이름이라는 것으로 끝납니다. 라틴어도 된 이름들을 모두 모아놓은 문집이 있는데 거기에 이 ‘페르시다스’라고 하는 이름이 자유인의 이름으로서 많이 거론이 되는데 그러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이 이름이 ‘페르샤’에서 왔을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입니다. 그래서 ‘페르샤’에 여성형 어미 er을 붙여서 ‘페르시아’가 되어서 ‘페르샤 여자’라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자적으로 ‘페르시아’라고 하면 ‘페르샤 사람 중에서 특별히 여성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에 저희 동네에 ‘개동’이라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열릴 개(開), 동녘 동(東) 장엄한 이름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개동이라고 부르지 않고 ‘개똥아’라고 불렀습니다. 제 추측은 특별한 가문이 있는 여자가 아니었고, 자유인으로 나오기는 하지만 노예였을 수도 있어서 이름도 제대로 못 갖춰서 그냥 출신이 이름처럼 불린 여자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연변댁’이라고 부르다가 이름이 연변여자가 된 것처럼 보통명사가 이름 대신 쓰인 하찮은 이름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어떻든 ‘버시’라고 하는 이름의 문자적인 의미는 ‘페르시아’라는 뜻이고, 그 여자가 정말 페르시아 여자였는지 아니면 의미도 없이 우연히 이름을 붙이고 났더니 페르시아 하고 맞아떨어져 ‘버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하여튼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름으로 미루어보더라도 별 볼일이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버시라는 사람은 여기에서 한번만 등장을 합니다. 성경에 이름이 많이 등장한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닙니다. 가롯 유다도 꽤 여러 번 나옵니다. 좋은 사람도 여러 번 나옵니다. 다윗의 경우에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 그러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들이 인생을 살 때 가치관이 얼마나 큰 인생을 사느냐 그리고 한 시대를 흔들어 놓는 유명한 인물이 될 것이냐 하는 것들을 너무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동기에 따라서는 틀립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자원들도 사실은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에게 유업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불법으로 점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법적으로 점유이탈물 횡령 상태입니다. 횡령된 것을 다시 찾으려면 세상 법정에 가서는 안 됩니다. 세상 법정에 가서 여러분들이 ‘이 세상은 하나님 것인데 저 사람들이 불법으로 점유했으니까 이 이탈된 점유권을 나에게 다시 회복시켜 달라’고 하면 판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도 판결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공부해서 높은 자리에 올라서 믿는 여러분들이 높은 관직 하나 차지하면 안 믿는 사람들이 못 들어올 것 아닙니까? 그러면 거기에서 하나님 뜻이 이루어지도록 사회에 봉사하며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머니나 챙기려고 공직에 가면 안 됩니다. 사람들이 모든 것을 다 얻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공직에 봉사하는 보람을 얻으려면 배가 좀 고파야 합니다. 배가 좀 부르려고 하면 또 보람이 없습니다. 둘 다 가지려고 하면 문제가 됩니다.
사업을 하면서 ‘밥이나 먹고 살면 되지 제가 무슨 욕심이 있겠습니까?’하면 안 됩니다. 똥을 퍼도 열심히 퍼서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온 세상의 똥을 혼자 다 풀 각오를 해야 합니다. ‘똥 하면 나에게 맡겨라’고 할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밥이나 먹고 살면 된다는 것은 정말 무책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밥만 먹고 삽니까? 고기도 먹고 살고 못 먹는 사람도 좀 먹여주고 북한 사람도 먹여주고 아프리카 사람도 먹여주고, 우리가 안 먹여주면 누가 먹여주겠습니까? 돈 많아도 안합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해야 합니다. 동기가 올바른 데에 고정되어 있을 때 권유받을 수 있는 삶입니다. 그러니까 가치관 자체가 무조건 이름을 드러내고 유명한 사람이 되고 돈을 많이 버는 데 하나님이 옆에서 좀 거들어달라는 식으로 신앙을 이용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것을 고려해볼 때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건물과 유사합니다.
말레지아 쿠알라룸프에 가면 페트로나스빌딩이라고 있습니다. 쌍둥이 빌딩 두개가 있는데 하나는 일본에서 짓고 하나는 삼성에서 지어 올라갔습니다. 두 업체 중 누가 더 튼튼하게 빨리 짓나 내기를 시킨 것입니다. 한국에서 지은 것은 두 달 늦게 시작해서 사고 없이 잘 지었는데 일본에서 지은 것은 금이 간다고 합니다. 453미터 되는 높이니까 빌딩이 활시위 흔들리듯이 흔들리는 느낌입니다. 저는 멋있다는 느낌은 못 받았습니다. 큰 빌딩은 고도의 기술과 정밀한 작업, 그리고 어마어마한 돈이 투자되고 높으니까 잡지에도 많이 나고 기네스북에도 오릅니다. 그러나 그런 빌딩이 모두 예쁜 빌딩은 아닙니다. 한국의 평촌이라는 곳에 가면 3층 밖에 안 되는데도 예쁜 건물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마당만 들어와도 예쁘다고 합니다. 페트로나스빌딩과 재보면 높이는 50분의 1도 안되지만 예쁩니다.
산만 해도 그렇습니다. 제가 생각을 바꾸기 전에는 외국에 나가서 우리나라를 생각하면 ‘우리나라의 산은 왜 올망올망하고 앞 뒤 동산, 옆 동산 밖에 없을까? 저렇게 만년설이 하얗게 쌓인 산은 좀 없나?’합니다. 유치원 다닐 때는 백두산이 전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프스 쪽에 가보면 뒷동산도 안 됩니다. 7~8천 되는 영봉들이 줄로 서있는데 2743미터를 어디에 대겠으며 그나마 국토가 반 토막 나서 한라산이 높다 해도 1950미터밖에 안되는데 그것으로 산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생각했습니다. 알프스나 로키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4천 5천 미터의 영봉들이 펼쳐있고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산소가 모자라서 털썩 주저앉을 것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도 참 색다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생각을 바꿨습니다. 어릴 때 설악산이나 금강산에 등산 갔었다고 하면 대단하다고 하지만 도봉산에 갔었다고 하면 ‘에이’ 그럽니다. 그러나 전 세계를 다녀 봐도 도시 근교에 있으면서 그렇게 예쁜 산을 본 적이 없습니다. 특히 송추 쪽으로 넘어가서 뒤에서 도봉산을 보면 앞에서 보는 것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예쁘고 아름답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높은 빌딩은 물론 높습니다. 높으니까 신문 잡지에도 자주 나오고 기네스북에도 오릅니다. 그러나 거기 안 올라도 예쁜 빌딩 많고, 하늘을 찌를 듯 머리위에 하얀 눈을 만년동안 이고 있지 않아도 정말 아름답고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산은 많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선한 목적을 위해서는 이 세상의 자원을 많이 소유해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재분배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높은 지위도 필요하고 많은 물질도 필요하고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 지식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골고루 잘 갖추고 있을 때 정말 하나님이 쓰실만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창세기를 읽으면서 묵상했는데 은혜를 받았습니다. 늘 보든 성경이지만 요셉이 바로 앞에 설 때의 일이었습니다. 보니까 대부분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이었지만 어떻든 하나님이 쓰실만한 모든 것을 정말 갖춘 사람이었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교회를 생각할 때 기도만 많이 한다고 해서 교회가 저절로 되는 것도 아니고 성경만 잘 가리킨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조직만 잘된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상부 중부 하부 세 개의 구조가 있는데 그 구조가 모두 건강하고 튼튼할 때 교회가 힘차게 하나님을 위해서 역사하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제일 위가 spirituality(영성)입니다. 살아있는 복음이 선포되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사람들이 많을 때, 그리고 정말 하나님의 쏟아 부어지는 영적인 은혜는 상부 구조에 속하는 것입니다.
중부 구조는 function입니다. 조직이 잘 되고 합리적이고 일반 은총의 빛을 받으면서라도 모든 것들이 잘 정돈 될 때 힘차게 교회에 흐르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도들이 말씀은 제쳐놓고 과부들을 구제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것은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뒤엉킨 것입니다. 동기는 좋았는데 좋은 결과를 못 내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사도들의 명예에 누가 되고 권위가 흔들이면서 히브리파 과부들과 헬라파 과부들이 서로 원망했습니다. 그런데 깊이 기도해서 어느 날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라’하신 것이 아니라 궁리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반성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와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하는 일에 나서는 것이 옳지 않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세워서 만들자’하며 시스템을 조직했습니다. 그래서 집사를 세웠습니다. 그랬더니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 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중부 구조입니다.
하부 구조는 materiel(?)입니다. 사치할 필요는 없지만 좋은 환경이어야지만 교육이 됩니다. 제가 지금 똑같이 설교해도 터미널에 여러분들을 모아놓고 설교한다면 이런 느낌을 가지고 설교를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좋은 환경이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조심해야 될 것은 상부 구조가 모자라는 것을 중부 구조로 대신할 수 있다거나 하부 구조가 없어도 중부 구조만 있으면 충분하다거나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힘닿는 한도 내에서 이 세 가지 구조가 다 건강할 때 교회가 아주 힘차게 하나님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똑같습니다. 요셉은 이 세 구조를 모두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우선 첫째는 바로가 꿈을 꿨는데 일곱 마리의 암소가 올라왔는데 굉장히 실하고 좋았습니다. 조금 있더니 바짝 마른 소가 올라왔는데 소가 소를 먹었습니다. 먹었으면 소가 몸집이 커야하는데 몸집이 작은 것입니다. 그 꿈과 이삭에 관한 꿈을 모두 꾼 다음에 요셉을 불렀더니 요셉이 해석을 했습니다. ‘7년 동안 큰 풍년이 오고 7년 가뭄이 오는데 7년의 흉년이 얼마나 흉악한지 7년 전에 일곱 해 동안 계속되었던 풍년을 모두 잊어버릴 정도로 막심한 흉년입니다’ 그것을 해석한 것만 해도 감지덕지인데 비법도 알려줬습니다. 7년 동안 해마다 곡식을 5분의 1씩 거둬서 1년치 조금 넘는 곡식이 쌓이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온 세상에 흉년이 들어서 사람들이 양식을 구하러 오면 결국 온 땅이 바로의 것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뛰어난 사람을 세워서 그 일들을 하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바로가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을 어디에서 만나겠느냐’했습니다. spirituality가 입증된 것입니다.
그 다음은 function입니다. ‘이 사람 같이 지식과 지혜가 갖춰진 사람을 우리가 어디에서 구하겠느냐’ 즉 경영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수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 오기 전에 아버지의 집에서 경영을 얼마나 배웠겠습니까? 그러나 보디발의 집에 와서 가정 총무 일을 보면서 나라 살림살이를 해갈 수 있는 경륜을 터득한 것입니다.
마지막에 하드웨어까지 있었습니다. 외모가 준수했습니다. 보암직하고 세움직 했습니다. 거기에다가 왕이 ‘내가 너보다 높지만 의자 하나 높은 것뿐이다. 모두 네가 맡아서 해라. 네가 명령 안하면 손발 하나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애굽에는 없을 것이다’하며 전권을 위임했습니다. 이제 다 갖춰진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천하 만민이 멸망당하는 데서 건져내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요셉은 하나님 앞에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했지 세상의 구원자가 되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루하루의 삶에 충실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가치 자체를 필요하시면 하나님이 우리를 유능하게도 하시고 필요하시면 하나님이 우리를 높은 자리에 올리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가 그렇게 될 수 있지만 우리가 인생의 가치나 이 아름다움이 지위나 유명해지는 것에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다 허무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명해지기 전에는 행복했었는데 유명해지고 나서 매우 불행해진 사람이 많습니다.
버시라고 하는 사람은 성경에 딱 한번밖에 안나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결코 하나님 앞에 작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두 가지 때문에 그랬습니다. 첫째는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한 사람이었습니다.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이 사람은 자매였을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어떻든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는 ‘주 안에서 수고한’이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뒤에 나오는 버시는 ‘많이’라는 말과 ‘사랑하는’이라는 말이 첨가되었습니다. 앞에 나오는 두 사람이 들으면 실족할 수 있는 편지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마음에 주님을 위해서, 주님이 동기가 되어서 예수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한 사람들의 이름이 많이 그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버시’라고 하면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느낌이 있는데 그 인상은 ‘많이 수고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예수 믿고 나서 얼마 안 되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자’하는 설교를 수십 편 들은 것 같습니다. 부흥회 때도 하고 담임 목사님도 하셨는데 무슨 본문을 택하든지 대지는 이것입니다. ‘목사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라’ ‘성도들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라’에서 대개 끝나고 좀 길게 설교하시는 분들은 ‘세상 사람에게도 인정받는 사람이 되라’로 나갑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아라 교인들에게도 인정받아라 세상 사람들에게도 칭찬 받아라 다 동의가 되는데 마음에 안 드는 것은 두 번째였습니다. 교회를 일당 독재 체제로 만들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목회를 하고 세월이 지나면서 그것이 그런 뜻이 아니었다는 것이 이해가 됩니다.
목회자로서 교인을 위해 기도하면 어떤 사람은 교인이니까 그냥 기도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기도할 때 기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너무 슬프고 괴롭습니다. 이름 자체가 괴로움입니다. 이름이 떠오르면 떠오르는 그 순간부터 심령이 그렇게 아프고 상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름을 떠올리면서 기도할 때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아리는데 그 사람들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많이 수고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 그때 그 목사님이 일당독재체제를 구축하려고 그 말을 하신 것이 아니라 아마 이런 마음이었겠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의 상당히 많은 종류는 하나님의 마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때는 정말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면 마음이 녹아내립니다. 얼마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지 다 아는데, 얼마나 육신이 연약한 지도 아는데 얼마나 많은 고통과 견디기 힘든 시련이 있는 지도 아는데 충성스럽게 삽니다. 많이 수고 합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마음이 아립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주님이 보실 때 그냥 기도가 되는 사람, 그냥 기쁘기만 한 사람, 아니면 말할 수 없이 성령님이 여러분 속에서 탄식하며 기도하는 그런 사람, 아니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많이 수고하면서 살기 때문에 주님의 마음을 아리게 하는 사람, 어떤 사람입니까? 그런데 이렇게 주님을 위해서 많이 수고하고 고단한 섬김의 길을 걷는 사람들은 특징이 있습니다. 주안에서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대개 궂은 일로 하나님을 섬기다가 낙심하는 경우가 어떤 때인지 아십니까? 게으르고 자기 자랑하기 좋아하고 나태하고 농땡이 치는 교인을 보면서 실족하는 것입니다. ‘누구는 이렇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허드렛일에 봉사하면서 이렇게 힘쓰고 누구는 유람하듯이 교회생활 하고’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기쁨과 모든 것들이 다 사라지게 됩니다. 그것은 주안에서라고 하는 섬김이 아닙니다.
오늘 여기에 나오는 이 버시는 주 안에서 수고한 사람입니다. 여기에서 ‘주 안에서’라고 하는 것은 주님이 그 섬김의 동기가 되어서, 세상 사람이 나를 보고 뭐라고 하든지 다른 사람들은 어찌하든지 나는 주님의 군병이 되어서 따르는 군사가 되어서 살겠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일만 한 사람이 아닙니다.
받아 써 보십시오. ‘한 사람이 일하면 그냥 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일하면 거기에서 그가 하나님을 섬기는 중입니다’ 무슨 일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니엘의 직업이 공무원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관청에 가서 주보 만들고 회지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벨론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해서 정책을 결정하고 자문하고 각료회의를 주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리오 왕이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항상 섬기는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느냐’ 했습니다. 불신자인 다리오왕도 다니엘을 볼 때마다 그가 자기네 나라에서 월급을 받아먹고 살지만 자기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중이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일이 의미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과 신앙의 관계가 일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공식이 딱 맞습니다. 한 사람이 일할 때 그것은 일하는 것입니다.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 일하면 물론 그것은 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일하면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버시가 바로 그런 인격적인 특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지난주에 설교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지 않으면 우리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살 수 없습니다. 미쳤습니까? 생색나지 않는 삶을 왜 삽니까? 빛도 내지 못하고 이름도 없는 삶을 왜 삽니까? 빛내고 광내며 살아도 다 못사는 세상인데 누가 자기 돈들이고 자기희생하고 자기 시간을 바치고 자기 재물을 쏟아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사는 삶을 삽니까? 그럴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 삶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정말 그 일이 무슨 일이든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오래도록 봉사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 주님과 연합된 사람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오늘 묻고 싶습니다. 자신 있게 주님 앞에 서서 ‘하나님, 저의 젋음은 지금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근무 중입니다. 장소는 직장이고-장소는 나의 서업터고, 장소는 나의 학교이고- 또 장소는 나의 가정이기도 하지만 저는 항상 주님을 섬기는 중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말할 수 없다면 저는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누구를 섬기는 사람들입니까? 혹시 주님을 부리는 사람들은 아닙니까? 그렇게 사는 것은 정말 맛이 없는 삶입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 그 크고 놀라운 사랑이 우리 마음을 파헤치고 지나간 뒤에 우리들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을 무엇입니까?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누리고 살고 있습니다. 전 세계 그리스도인 가운데 1-2% 안에 들 정도로 모든 것을 누리면서 완벽한 신앙의 자유가 있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좋은 것만이 아니라 가슴 아프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걱정도 많이 되는 것입니다. 더 많이 깨어있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이 이런 좋은 환경을 주셨을까요? 그냥 헌금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향해 깊은 뜻이 있어서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좋은 환경 속에서 많은 것들을 주님께로부터 받은 다음에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살고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섬기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정말 이 세계를 가슴에 품고 도처에서 들려오는 주님의 흐느낌 소리를 듣는 젊은이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없는 것 없이 누리고 우리가 고민이 있고 우리를 좌절하게 하고 우리를 힘들게 한다고 내놓는 그 고통의 수많은 이유들도 사실은 하나님 앞에 감히 내놓기 부끄러운 것도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이번 무교회 지역 전도를 다녀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잠깐 동안 젊은이들이 가서 돕는데 목회자들이 그렇게 좋아했습니다. 우선 젊은이들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시골에서는 꿈이요 용기입니다. 왜냐하면 서리 하얗게 내린 할머니 할아버지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목회자가 청년 두 명만 있어도 힘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두 명도 없습니다. 계속 사람이 줄어듭니다.
그래서 제가 말합니다. 해외 단기 선교만 가지 말고 새털같이 많은 날에 졸업하고 취업도 안 되면 기도 많이 하고 가서 단기 선교사로 봉사하면 안 됩니까? 정말 가난하고 누구 돕는 사람도 구할 수 없는 동네에 가서 노인들이 가르칠 수 없어서 버려진 영혼들, 돌봐주어야 할 영혼들, 시골에 몇 명 안 남은 어린아이들이라도 정말 그 가슴 속에 예수 심어주고 1년이라도 봉사하고 와서 친구와 바통 터치 하고 하면 아마 한국 교회가 훨씬 새로워질 것입니다. 선교지가 많으면 뭐합니까? 아무 것도 몰라도 좋으니까 와서 우리 자녀들만이라도 한국말을 가르치면 힘이 되겠다고 하는 사람들 많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이 고민거리 근심거리 좌절하게 만드는 것, 그런 것들이 어떤 것들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정말 우리 너무나 잘 갖춰진 환경 속에서 사니까, 우리가 부패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점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을 섬기는 가치에 대해서 너무 희석되어있습니다.
그 증거 하나가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라. 아골골짝 빈들에도 소돔 같은 거리에도 사랑 안고 찾아가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라’ 찬송을 안 부릅니다. 왜 그럴까요? 부담스러워서 안 부릅니다. ‘아골골짝 빈들 빼고 소돔 같은 거리 빼고 사랑 안고 찾아가서’ 이런 생각뿐이니까 부담스러워서 못 부르는 것입니다. 그 찬송 우리나라에서 만들고 외국에서 엄청 많이 베껴서 갔습니다. 전 세계적인 찬송입니다. 그런데 정작 원 산지에서는 안 부르는 것입니다. ‘아골골짝 빈들에도 소돔 같은 거리에도’ 이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가 정말 주 안에서 섬기는 사람들입니까? 다른 사람들을 보고는 그렇게 섬길 수 없습니다. 주님을 보면서 섬기는 것입니다. ‘나를 여기에 세워주셨는데’하면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길 때, 심지어 주님에게서도 내가 감추어지고 싶다고 하는 그런 마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섬기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교회가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가만히 와서 편안한 환경에서 살짝 예배드리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사라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누군가가 그 짐을 져야 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이 빚쟁이입니다. 그러니까 섬겨야 합니다. 그러면서 정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의 정신을 가지고 섬겨야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여기 중요한 단서가 나오는데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했습니다. ‘사랑하는’의 주체가 버시가 아닙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아가페테스’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수동태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받는 버시’입니다. 영어 성경에 'be loved'라고 나옵니다. 누구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것일까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사도 바울에게 사랑을 받고 사도바울과 함께 동역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그리고 로마 교회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일을 충성되고 헌신되게 하는 사람들, 그래서 충성스러운 열심으로 불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개 거칩니다. 주위에서 보십시오. 열심을 내고 주님 위해서 열심히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 독선이 있습니다. 그러나 열심히는 섬기지만 사람들에게 사랑 받기는 굉장히 힘듭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게 섬기는 증거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 인격적인 미성숙에서 오는 사례들입니다. 물론 우리들이 주님을 섬기려고 하면 어느 정도의 거룩한 강인함(holy toughness)이 필요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열심, 그리고 사람들의 말에 쉽게 좌지우지하지 않는 자기 확신 같은 것들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물론 인정하지만 그러나 독선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흔들리지 않는 거룩한 강인함을 가지고 있는 것과 옳지 않은 방식으로 자기 아집을 붙잡는 불경건한 독선과는 다른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보면 일을 열심히 하는데 사랑은 못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냐면 일찍 와서 열심히 일하고 회의를 하면 ‘나 오늘 몇 시에 왔다. 이만큼 했다. 도대체 책임 맡은 사람들이 이게 뭐냐’합니다. 사실 늦게 왔으니까 입이 열개라도 할말은 없고 그가 자기보다 훨씬 일을 많이 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 사람을 향해 사랑이 안갑니다. 이런 것들은 인격적인 미성숙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자기가 열심히 한다는 것에 대해서 너무 강한 인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못하는 사람들을 결코 용납하지 않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랑받기 어려운 행동입니다.
버시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버시는 주 안에서 많이 수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애정을 한 몸에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을 섬기면서도 얼마나 인격적으로 성숙했는지 보여줍니다.
사실 우리의 섬김은 전투입니다. 궁금하면 오늘부터라도 남아서 청소에 동참해보십시오. 바지까지 땀이 흘러내립니다. 이것은 청소가 아니라 전투입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분들이 하루 동안 어지럽힌 이 교회를 원상태로 유지하는 것입니다. 월요일에 새벽기도 나오는 사람은 주일날 간 예배당에 자신들이 그냥 들어왔다고 생각하겠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땀을 뿌리고 지나간 것입니다. 만일 2주일만 그렇게 섬기지 않으면 볼 수 없을 정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전투적으로 열심히 살다가 보면 거칠어집니다. 그런데 이 버시는 사랑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버시’하면 진짜 벗처럼 느껴지는 사람, 친구처럼 느껴지는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페르시아 사람이었을지 모르지만 페르시아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고 자기 벗처럼 느껴지고 가족처럼 느껴지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인격입니다.
그래서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 일을 하면 그냥 일할 뿐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일을 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중입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면서 하나님을 많이 섬기다 보면 자기 자신이 일 때문에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계기로 해서 맺어진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에 자기가 날마다 거룩해져 갑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해놓으신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을 섬기고 일하면서도 동시에 성도들에게 진리 때문이 아닌, 한 사랑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함께 협의하고 사랑하고 하면서 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밥은 숟가락을 손에 끼워서 먹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가끔 손이 그 일을 안 하겠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발이 ‘너 잘렸어. 내가 할께’하며 발가락 사이에 숟가락을 끼고 먹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볼상사납겠습니까? 젓가락질을 한참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지 말고 오히려 손을 잘 설득하고 은혜를 받게 하고 이해를 시켜서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사로잡힌 사람들은 열심히 일을 하면서 오히려 사람들을 세워갑니다. 인격이 여물지 않은 사람들은 큰일을 맡기면 일하는 과정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갈라놓습니다. 그리고 서로의 관계를 파괴시킵니다. 그러나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일을 하면 그 일을 해나가면서 많은 사람을 일과 함께 세워갑니다. 주님의 사람으로 자라게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을 진실하게 섬기는 성도들이 될 때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이 지금은 근무 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생을 다 끝낸 후에 인생의 황혼이 깃들어서 이 땅의 수고가 끝날 때에
주님을 섬기다 평안히 가리라 사랑의 주 내주님께
내가 먼저 죽겠지만 나는 여러분 모두 묻힌 그 무덤에 이렇게 새겨주고 싶습니다. ‘성도 아무개 70년 동안 주님을 섬기다가 가다’라고 말입니다. 저도 그렇게 새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주님을 섬기다가 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름 없이 그리고 빛도 없이. 끝.
3. 구속의 감격 없이 섬김 없다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마26:7)”
오늘 설교는 이 긴 본문을 낱낱이 다 해설하는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수많은 메시지가 이 속에 숨어 있지만 우리들이 오후 예배 때 마다 듣는 시리즈에 부합하는 내용 중 일부를 깨달음으로서 은혜를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것은 결국 자기를 희생함이 없이는 섬기는 것이 불가능하고 또 자기희생 없이 섬긴다고 하면 사실 그것이 놀이이지 어떻게 섬김이 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고 지체들을 섬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희생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오늘 여기에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이 여인은 정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을 섬겼던 아름다운 모본 가운데 가장 뛰어난 모본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의 섬김에 얼마나 감동을 받으셨는지 ‘이 여자의 행한 것은 복음이 전파되는 모든 곳에서도 행하여 저를 기념하게 되리라’ 다시 말하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똑같이 이 여자의 행한 것 같은 일들이 일어나서 이 여자를 사람들이 생각하게 될 것이다’하는 이야깁니다.
우선 첫째로 이 여자의 섬김은 자신의 큰 것을 주님께 바친 그런 섬김이었습니다. 당시에 향유는 조금씩 모아서 그렇게 늘릴 수 있는 재산축적의 수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즘의 금이나 은같이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시장에 가지고 가 팔아서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유동성이 있는 재화였습니다.
이 여인이 죄 많은 여인이라고 나오는데 아마 창녀요 기생이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런 생활을 하면서 푼푼이 모은 이 향유는 돈 이상의 의미를 가진 것이었을 것입니다. 자기 인생이 담겨진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예수님께 바쳐지게 되었을까요? 성경 누가복음에 나와 있는 기록까지 미루어서 우리들이 짐작해볼 때 이 여인이 예수님을 처음 만나러 온 것이 아니라 예전에 이미 주님을 만났고 복음을 듣고 자신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경험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은혜에 깊이 감사하면서 이제 자신의 소유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제자들이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면 얼마나 좋겠느냐’하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러지 말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짧은 시간에 여기에 담긴 깊은 진리들을 다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특별히 여기에는 우리의 물질생활과 관련되는 아주 중요한 진리들이 담겨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 와서 옥합을 깨트려서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모두 부어버리게 되었는데 이것이 가르쳐주는 여러 가지 교훈들은 나중으로 미루고,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인생을 살면서 꿈이 바뀐 것입니다. 몸이나 팔고 그렇게 술이나 팔면서 여인이 돈을 모았다고 칩시다. 꿈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요즘으로 말하자면 돈이 어느 정도 모이면 시골에 땅이나 사서 전원생활을 하든지 아니면 개인택시라도 하나 사서 벌어먹고 살겠다는 꿈 아니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동족으로부터도 버림 받은 -그때 기생을 ‘조나’라고 했는데 사람 취급을 안 했습니다- 사람들이었는데 재산을 모으면서 귀족으로 신분상승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동족들이 그렇게 더럽게 여기는 자신의 신분으로부터 자신을 이탈시켜줄 도구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보니까 인생에 있어서 꿈이 바뀐 것입니다.
예전에는 이 돈 모아서 한번 신분의 변동을 꿈꿔보고 싶었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까 이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전에는 자신의 인생의 꿈과 희망이 물질이었는데 주님을 만나고 나니까 이제는 자신의 인생의 참다운 꿈과 희망이 주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향유를 부은 사건은 바로 이 여인이 자신의 인생에서 참되고 최종적이라고 믿었던 희망인 그 물질이 예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면서 깨트려져버린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여인의 참된 섬김을 봅니다.
그것은 이 여인으로 하여금 그 값비싼 향유를 모두 깨트려서 주님 앞에 모두 부어버릴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주었던 것은 이 여인이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한 칭찬이나 이 일을 함으로서 얻게 되는 평판,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만나고 개인적으로 죄의 용서를 경험한 놀라운 속죄의 경험입니다. 이것이 모든 섬김의 기초입니다.
저는 요즘 오후 예배 때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라는 시리즈를 여러분들에게 계속하고 있습니다. 정말 가슴에 아로새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책망을 받을 것은 섬김의 자세가 나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초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섬기는 사람이라고 할 때 자기를 하나님의 일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할 때 자리매김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일꾼이다. 모든 사람들은 나를 도와야 된다. 내가 적어도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데, 나를 힘들게 만들고 나를 방해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사람이다’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쓰레기 같은, 단 서푼어치의 가치도 없는 섬김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섬김의 내용은 바로 그 사람 자신의 성도로서의 품질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출발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셔서 예전에는 핍박자요 포행자이던 나를 충성되이 섬길 것이라고 기대하시면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의 일을 맡기셨구나’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섬기는 이것이 우리의 신앙을 뒤로 가게도 못하고 앞으로 가게도 못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어떤 자세로 섬기느냐에 따라서 이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온전히 사랑하게도 되고 혹은 하나님을 사랑하던 사람이 뒤로 물러나서 아주 너절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정말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나는 적어도 하나님의 일꾼이다’하는 자부심을 버리십시오. ‘나는 특별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은 내 얘기를 들어야 한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근무하는 중이기 때문에 나를 거스르면 곧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다’라고 하는 머저리 같은 논리를 버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부심이나 자기 인식의 출발이 여러분들을 어디로 데려갈 것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을 정말 하나님 앞에 교만하고 넘어지게 만듭니다. 출발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출발은 ‘나는 원래 쓰레기 같은 죄인이었는데 주님이 구원해주셔서 그 은혜로 나를 하나님의 교회와 이런 일을 섬기게 하셨으니 이것은 나에게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정말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한국이 나은 세계적인 신학자 가운데 한분, 김세윤 박사가 1970년대에 쓰신 박사 학위 논문이 있습니다. ‘바울복음의 기원’이라고 하는 책입니다. 굉장히 두꺼운 책인데 아주 해박하게 바울의 신앙의 경험을 논증했고 세계적인 학자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저서가 되었습니다. 그 책 속에서 사도 바울에게는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 같은 그런 억눌림을 가져다주는 뭐가 있었다. 그리고 사도 바울에게는 정말 이방인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신이 큰일 날 것이라는 뭐가 있었는데 그 핵심은 나같이 더러운 죄인을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구원해주셨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신적인 강제력을 느끼는 핵심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깊은 구원의 감격을 느끼고, ‘나같이 쓸데없는 인간을 주인이 구원해주셔서 지금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주시지 않았다면 뒷골목에서 술이나 마시고 나쁜 짓이나 하고 가난하면 악하게 살고 부유하면 더럽게 살 소망 없는 인간을 이렇게 하나님께서 건져주셔서 하나님의 교회에서 한 모퉁이를 거들며 성도를 섬기는 직분을 주셨구나. 나를 구원하신 이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어떻게 감사할까’하는 눈물을 흘리는 십자가에 대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그래 내가 적어도 하나님의 일꾼이지’라고 생각해도 괜찮습니다. 그런 인식이 그로 하여금 사명에 충실하도록 만들고 그로 하여금 성도들을 섬기게 만들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낮아지고 겸비해지게 만듭니다.
그런데 그러한 구속에 대한 인식이 없을 때 ‘나는 하나님의 일꾼이다’라는 생각을 가져보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역사에 있어서는 기독교 교권주의의 핵심인물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것은 쓰레기 같은 섬김들입니다. 돈 몇 푼만 주면 사람 불러서 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섬김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일평생 하나님의 일을 해도 그는 하나님을 한번도 섬긴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일 많이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항상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아닙니다.
한 사람이 일할 수밖에 없어서 일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냥 일할 뿐입니다. 그러나 한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할 때 그래서 일할 때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중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왜 교인들이 처음 교회당 문에 들어와서 화장실이 어딘지도 모를 때에는 그렇게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다가 뭐 좀 하라고 직분 맡겨서 세워놓으면 왜 이렇게 십자가의 감격이 사라집니까? 왜 그럽니까? 강퍅해져서 그런 것입니다. 은혜를 따라 살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나는 교회에서 일을 많이 하는 것에 비하면 너무 부당한 대접을 받는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국 한 가지 사실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언젠가 일꾼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데 어떤 사람이 ‘목사님, 제가 지난여름에는 힘에 지나도록 주님의 일을 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돌아가서 혼자 배꼽을 잡고 웃었습니다. 어떻게 낯 뜨겁게 자기 입으로 그런 얘기를 합니까? 힘에 지나도록 했다는 것은 주님이 ‘네 일생은 힘에 지나도록 나를 위해서 쏟은 생이었구나’하시는 것이지 자기가 자기 입으로 하면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생겨나는 각양 불만, 그리고 각양 원망, 이 모든 것들은 한 가지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나는 원래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던 흉악한 원수였는데 값없이 주님이 용서해 주셔서 나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셨을 뿐만 아니라 정말 영광스럽게도 나를 이 교회의 한 모퉁이에서 천하보다도 귀한 성도들을 섬기도록 세워주셨구나. 이것은 나같이 더러운 죄인에게는 정말 감당할 수 없는 명분이다’하는 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계속 봉사하면 그 사람의 영혼이 파괴됩니다. 그리고 아주 나쁜 신자가 되어버립니다.
우리 전통적인 교회에서 신앙생활해오면서 보면 이상하게 일은 많이 하는데 악한 사람들을 봅니다. 거칠고 독선적이고 아주 나쁩니다. 성화의 작용은 없고 질이 나쁘게 되어가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 여인을 보십시오. 더 이상은 이 여인에게 없었습니다. 어떤 순교자가 죽으면서 그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목숨밖에 못 드려서 너무 죄송합니다’
두 번의 교회를 옮기면서 저는 참 뼈저리게 느낍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사랑하는데 바칠 게 없을 때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위해서 종노릇하는 것보다 사랑하는 분을 위해서 더 이상 바칠 것이 없을 때 그것이 가장 가슴 아픈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의 마지막에 가서는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이 걸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아무리 설교를 듣고 배워도 십자가에 대한 구속의 감격, ‘하나님이 왜 날 사랑하셨을까? 왜 이 쓸데없는 인간을 구원하셨을까? 그러시면 안됐는데’하는 구속의 은혜에 대한 현재적인 자각이 없이는 누구도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길 수가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마치 굉장한 희생을 하면서 뭔가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그것은 너무 불행한 것입니다.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증거입니다.
주후 110년에 이그나티우스라고 하는 경건한 교우가 있었습니다. 그가 로마 조정의 부도덕을 공격한 죄로 감옥에 갇혀서 사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열심히 구명 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이그나티우스는 믿는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너무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런 인물을 죽이는 것은 로마를 위해서도 너무 아까운 것이라고 조금만 더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로마에서 목숨은 살려줄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마지막 면회를 왔을 때 이그나티우스가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 나를 구명하려는 운동을 하지 마십시오. 나는 살만큼 살았고 이제 내가 가지고 있는 최선의 것을 그분께 드리고 싶습니다’ 바로 그의 목숨이었습니다.
매순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그래서 섬기는 사람일수록 ‘나는 최소한 하나님의 일꾼이다’ ‘나는 이 교회의 집사다’ ‘안수 집사다’ ‘장로다’ ‘목사다’ 하는 것보다 ‘나는 한 사람의 용서받은 죄인일 뿐이다’하는 자각이 더 뛰어나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이 여인과 같이, 이그나티우스 같이 최선의 것을 다 드려서 하나님 앞에 섬길 수 있는 자세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 만나고 복음을 듣고 죄 용서를 받았습니다. 죄를 용서해주시면서 언제 예수님이 향유 가져오라고 했습니까? 여러분들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신 다음에 ‘너 구원 줄테니까 주차위원해라’하십니까? ‘너 구원 줄테니까 주방에서 밥 퍼라’하신 적 있습니까? ‘너 구원의 은혜 줄테니까 토요일마다 나와서 청소해라 그래도 네가 남는 거다’ 하나님이 언제 그러신 적 있습니까? 하기 싫으면 안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각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나를 구원해주셨고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래서 나의 사는 것도 그분의 은혜입니다. 내가 산 것이 그분의 은혜고 그분 덕분이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물질은 누구 것입니까? 그분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남다른 재능은 누구 것입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시간은 누구 것입니까? 목숨을 연장시켜주셨는데 자기의 시간도 소유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병원에 누워 링거 맞을 정도가 되면 자기가 교회에 와서 섬기고 싶어도 섬길 수가 없습니다. 건강을 누가 주셨습니까? 주님이 주셨지 않습니까? 그러니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이 쓸모없고 더러운 인간을 구속해 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을 내가 어떻게 합니까?’ 하고 펑펑 울면서
주 예수여 너그럽게 보옵소서
이렇게 깊이 고백하며 노래할 때 그때 이미 자신을 포함해서 자기 물질, 시간, 건강, 그리고 마지막에는 생명까지 다 주님께 드린 것입니다. 이 여인이 향유를 드렸을 때 왜 하필이면 향유였습니까? 그렇다고 목을 따서 피를 쏟아 예수님 머리에 부을 수는 없지 않았겠습니까? 자기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최상의 것을 하나님 앞에 드렸다는 것은 그것과 함께 자기의 생명도 하나님 앞에 모두 드렸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섬김의 출발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섬기면서 섬기는 것을 통해서 자기가 손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크게 회개하여야할 악한 마음입니다. 자기가 뭡니까? 주님이 우리를 불러서 주님을 섬기도록 우리를 각자 세워주셨습니다. 우리가 뭡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노예입니다. 아무 것도 자기의 소유가 없습니다. 노예는 새끼를 낳아도 주인 것입니다. 노예가 나가서 열심히 일궈서 밭에서 호박을 많이 땄다면 주인 것입니다. 장사를 나가서 돈을 많이 벌어왔다면 주인 것입니다. 마지막에 죽으면 시체도 주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종입니다’라고 하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종이라고 하면 뭐합니까? 실제로 자기가 기꺼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종인 것으로 만족케 하는 현재적인 경험이 없으니까 ‘종님’이라고 하는 웃지못할 이야기까지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여러분 나중에 굉장히 허무해집니다. 열심히 뭐라도 한다고 놀지 않고 이것저것 거들면서 인생을 살았는데 하늘나라에 가보니까 한번도 하나님을 섬긴 적이 없는 사람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셨습니까? 베세다 광야에서 오병이어를 베푸시고 하늘을 향해 축복하시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먹고도 남았습니다. 남은 것을 다 거두셨습니다. 그렇게 경제적이신 분이 이번에는 너무 쓰시는 것 아닙니까? 이천 몇 백만 원이 넘는 향유를 식사시간에 당신 혼자 다 부어버리고도 ‘괜찮다’하십니다.
여러분, 정말 가슴 속에 십자가의 부흥이 일어나야 합니다. 요 몇 주간 동안은 이 교회가 내 교회 같지 않았습니다. 아침 내내 마음속에서 비가 왔습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살까?’ ‘우리가 주님의 그 큰 사랑을 받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주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주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십니다’할 때 우리는 우리 인생을 전부 헌납증서에 도장 찍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께 귀 뚫고 종이 된 것입니다. 우리 것 없습니다. 우리 것 있다고 하니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못 섬기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때 우리가 눈물을 흘리면서 주님 앞에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니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라
험한 교인들이 많은 교회이기는 하지만 어느 목회자가 그 교회에 부임했는데 너무 부당하게 대우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좀 너무 했습니다. 너무 억울하다고 하기에 제가 말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라. 뭘 기대했는가? 회심하지 않은 교인들이 득실거리는 교회에 청빙을 받아서 갔을 때 그들이 당신에게 잘해주면 그것은 신앙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출발이니까 나중에 반드시 문제가 되고, 신앙적인 섬김을 기대하고 신앙적인 섬김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사랑하면 너무 아름답지만 그들이 회심하기 전에는 그런 일은 안 일어난다. 오히려 교회에 가서 한 두 사람의 성도라도 목회자인 우리를 따뜻하게 대우해주면 정말 분에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로구나 생각하며 살다 죽어야지 교회에서 상처 안 받지 너무 많은 것 기대하고 교회가 너무 사랑이 넘치는 데라고 생각하면 나중에 반드시 상처 받는다. 교인들이 모두 당신 좋다고 하고 너무 사랑 받으면 하늘나라에 가서 받을 상급이 없다. 욕하는 인간도 나오고 꼬장 부리는 인간도 나오면, 그래서 결국은 목회지에 모든 것을 쏟아 부어도 그 목회지가 영원한 천국은 아니다’하며 위로 했습니다.
이 여인을 보십시오. 자신의 최선의 것을 가지고 와서 섬겼습니다.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최선의 것입니까? 그리고 전부 다입니까? 정말 더 많이 섬기셔야 합니다. ‘섬김을 통해서 내가 유익을 얻고자 함이 아니요’ 그렇게 해야지만 좋은 신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 대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기 위해서는 섬김의 동기가 이 여인처럼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죄를 용서해주신 그 은혜가 너무나 커서 주님을 섬기는 가운데 일어나는 크고 작은 설움이나 크고 작은 어려움, 고통, 이런 것들은 그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할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섬기면 섬길수록 마음에 한이 맺히면서 한편으로는 ‘내가 이렇게 섬겼는데’하는 자기 의가 되는 것입니다. ‘내 재산을 다 쏟아 부었는데’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모두 웃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해주신 비유를 하나 변형시켜보겠습니다. 노예가 있었습니다. 정말 착하고 충성스러워서 일을 맡겼습니다. 점점 중요한 일을 맡겼습니다. 노예 밑에 또 많은 노예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일을 하더니 어느 날부터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인님 노예들이 말을 안 들어서 못해먹겠습니다’ ‘내가 이렇게 많이 당신을 위해 섬겼는데 언제 한번이라도 나를 대접해준 적 있습니까? 한번만 대접을 제대로 해줬어도 섭섭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제가 주인이라면 다음날 팔아버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밭에 나가서 많이 수고한 다음에 ‘많이 수고했다. 이리 와서 우리와 함께 밥 먹자’ 그럴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원래 누구였는지를 뼈저리게 깊이 알 때에만 비로소 잡음이 없이 섬김의 자리에서 주님의 사명을 감당해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일을 많이 배우지 말고 먼저 예수님을 배워야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 본보기입니다. 그렇게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하면서도 언제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는 유치부 학생이었습니다. ‘사도님, 이방인 선교의 아버지시오 신약성경을 반이나 쓴 저술가요’했지만 그것은 모두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고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는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나는 의로운 사람 스데반을 죽이는 데 가편 투표했고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던 자기 의에 가득 찬 짐승과 같은 인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 흘려서 나를 구원하셨는데 사도가 되고 일평생 살아오면서 한번도 그 사랑이 당연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이 고백이 죽을 때까지 살아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일을 많이 했는데도 우리처럼 강퍅해지거나 독선적이 되거나 나쁜 사람 되지 않고 오히려 일하면서 더 거룩해지고 신실한 성도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잘 되려면 처음 온 사람은 은혜를 좀 못 받아도 목사나 장로나 권사나 안수 집사나 교역자나 사모 같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은혜에 사로잡혀야 됩니다. 그래야지만 그들이 섬길 수 있습니다. 영혼이 망가지면서까지 하나님을 섬겨서 뭐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섬김 받으신 적도 없는데, 결국 그 사람은 교회에서 취로사업 한 것입니다. 그런 것은 섬김 중에서 아주 싸구려 섬김입니다. 인력 시장에 나가서 일당 몇 만원만 주면 불러와서 시킬 수 있는 그런 일입니다. 일한 적이 없다고 하는 이야기가 바로 그런 이야깁니다.
이 여인을 보십시오.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와서 자기가 아끼는 가장 값진 것을 깨트려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만일 이 여인의 마음속에 확신이 없었으니까 그렇지 예수님이 그것을 제일 좋아하신다고 했으면 갈비 살을 뜯고 심장을 꺼내서 예수님의 머리에 짜버렸을 것입니다. 향유를 가지고 와서 깨트렸습니다. 존귀하신 예수님께는 향유가 부어졌지만, 향유가 아무리 부어졌어도 그 향유가 예수님께 충분할 수 있습니까? 무엇을 예수님께 드린들 예수님의 존귀하심에 부합할 수 있겠습니까? 이 여인이 눈물을 흘렸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바치면서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것으로도 안 되는데’하며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쓸모없는 인간을, 이 더러운 죄인의 죄를 예수님이 용서해주셨는데 그 용서의 은총에 비하면 내가 주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사랑은 요만큼에 불과하고 더욱이 오늘 내가 일생을 모은 향유의 옥합을 깨트려서 주님 발에 붓는 이것은 그 사랑하는 크기의 절반도 안 됩니다’라고 고백하며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습니다.
이 기록의 특징은 단 한마디도 이 여인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침묵 속에서 향유와 뚝뚝 떨어지는 눈물과 흐느낌으로서 이어지는 섬김입니다. 정말 우리는 도처에서 쓰레기와 같은 섬김들을 봅니다. 그런 것 말고 자기를 깨트려서 부은 향유와 같은 섬김을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주님이 그런 섬김을 원하시지 않을까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큰 은혜를 생각하면서.
내 주 예수 주신 은혜 한없건만
나 주 위해 갚은 것은 참 적으니
주 예수여 너그럽게 보옵소서
세상과는 다릅니다. 세상은 자기 없이는 그 단체가 성립할 수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교회는 나 같은 인간은 아무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의 사랑이 그 구속의 은혜가 자기를 살려주신 그 속죄의 은혜가 감사해서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께 다 깨트려 드려서 오히려 나 같은 죄인을 통해 섬김을 받으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에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것이 바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그 섬김의 첫 번째 비결입니다. 이 마음이 바로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품도록 간절히 부탁했던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깊이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고 정말 변화되고 하나님 앞에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래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 앞에 섬기면서 살다가 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정작 주님 앞에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 인생 전체가 나를 섬기면서 살아온 인생이었구나’라는 칭찬을 듣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칭찬이 예상치 못했던 칭찬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래도 내가 한가닥 하는 섬김을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마지막에 ‘나는 너에게 섬김을 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는 예상치 못했던 주님의 응답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서 구석구석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발 씻겨주기 기다리고 섬김만을 받으려고 하고 섬기려고 하지 않는지 정말 주님이 아파하는 구석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섬기다 섬기다가 안 되겠으니까 돈 주고 사람 사다가 섬기자고 합니다. 정말 몇 주 동안은 내가 목회하는 교회 같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의 이름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의 이름입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nothing입니다. 있으나 마나한 존재,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나 많이 입었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아닌 존재, 이렇게 생각하는 것, 그래서 ‘섬기도록 세워주신 이 자체가 우리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은총이며 감히 감당할 수 없는 특권이라’ 말하자면 ‘토굴에서 채찍이나 만들면서 벌레나 잡아먹고 사는 노예가 좋은 옷을 입고 왕궁의 문지기로 선 것 같은 신분의 상승이라’고 생각해야합니다.
그래서 항상 이 감사가 만성이 되어서 잊혀지는 일이 없도록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정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존귀 영광 모든 권세는 그분께 돌려드리고 멸시 천대 십자가는 우리가 지고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끝.
4. 말없이 눈물만 흘리며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눅7:38)”
지난 시간에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시리즈를 설교하는 가운데 같은 기사를 마태복음에서 보면서 이 여인으로 하여금 이 같은 섬김을 감당하게 했던 것이 구속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구속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모든 섬기는 삶의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신자로서 가장 배은망덕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일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구원의 감격이 사라질 때 세상 사랑이 신자의 마음속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만일 정말 진실한 성도의 삶을 살고, 그래서 마지막에 이 세상을 하직하고 주님께 가는 그날에 우리의 성화의 상태가 가장 높은 수준에 도달하게 되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이 사실 우리의 가장 큰 소망 아닙니까?-그때 우리들이 마지막에 죽으면서 하나님 앞에 감격하게 될 찬송의 내용이 무엇일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좋은 옷 주시고 먹을 음식 주시고 세계 여행하는 것, 그것이 감사의 조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생이 사위어가면서 함께 다 사위고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마지막에 숨질 때가 되어서 우리들이 감격하면서 찬송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큰 찬송 제목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지금처럼 이렇게 구속의 감격도 없이 그냥 이렇게 마치 죽어도 살기 싫은 부부가 같이 사는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가정 밖 다른 데 있고 바람 난 남녀가 억지로 사는 결혼 생활처럼, 신앙 생활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구속의 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평생 우리의 마음속에서 그 구속의 사랑이 모든 하나님 앞에서의 순종하는 삶과 거룩한 삶의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토마스 구딘 이라고 하는 청교도가 남긴 이야기도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참된 은혜와 사랑이야말로 모든 복음적 순종의 원천이 되며 원리가 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우리의 영혼 속에 밀려들어올 때 그것이 바로 거룩한 삶의 동력이 되는 것이고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섬기며 살아가는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속에 대한 감격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은 신자로서 해야 할 어떤 일을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반 자체가 매우 부패하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위에서는 성화의 아름다운 나무들이 자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콘크리트를 부어놓고 거기에 나무를 박아버린 것과 똑같습니다. 거기에서는 결코 그 나무가 자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 인생의 문제가 많고 고민거리가 많은 것 같아도 사실은 하나가 없어서 문제입니다. 구속의 은혜에 대한 깊은 감격이 있으면 고민이 고민이 아닙니다.
오늘 여기에 그런 구속의 감격을 가진 이 여인의 섬김이 어떠했는가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우선 첫째는 말없는 섬김이었습니다. 이 여자의 향유 부은 사건을 다루는 이야기들은 그래도 복음서의 다른 기록에 비하며 꽤 길게 나옵니다. 그런데 저자의 설명과 예수님의 말씀, 그리고 예수님을 초대한 집주인 바리새인의 이야기만 나오지 이 여인의 대사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 여인이 말없이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여자는 억수로 할 말이 많은 여자였습니다. 왜냐하면 우선 자기를 꼬나보는 그 집주인 거만한 바리새인이 자기를 바라보는 눈빛이 ‘저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알았으면 예수님이 저렇게 가까이 안했을 텐데. 저 천하고 막 굴러먹은 계집이...’하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너 그 여자 그렇게 쳐다보고 평가하는데 너보다 이 여자가 훨씬 낫다. 너 발 씻을 물 한번 줘봤느냐’하셨습니다. 그러니 이 여자가 이긴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죄인이라고 하더라도 너와 무슨 상관이냐? 내가 예수님 좋아서 예수님한테 와서 지금 예수님 섬기는데 그런 식으로 이까짓 집하나 가지고 네가 재는 거냐?’라고 얼마든지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좀 낫습니다. 진짜 이 여자를 열 받게 했던 사람들은 제자들입니다. 성경은 점잖은 책이라 그렇게 표현하고 있지는 않지만 ‘저 푼수 없는 애미나이가 그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 나눠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 텐데 3백 데나리온이 넘는 향유를, 요즘으로 치면 2천만 원도 넘는 향수를 예수님에게 부어버리다니 저 푼수 없은 여편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웃기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무슨 상관입니까? 저라면 ‘내가 향유를 붓건 국물을 붓건 니들이 무슨 상관이냐. 그래 향유가 3백 데나리온 넘는다. 요즘 시가로는 2천 만원이 넘는다. 그런데 니들이 향유 모으는데 보태준 것 있냐? 내가 좋아서 예수님에게 내가 붓겠다는데 무슨 상관이냐? 너희는 향유는 그만두고 들기름이라도 한번 부어본 적 있냐? 내 향유로 내가 좋아서 내가 하는데 남인 너희들이 어디서 나를 비난하냐?’하고 싶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여자가 잘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지 말아라. 이 여자는 내게 좋은 일을 했다. 가난한 사람은 항상 너희들과 함께 있지만 이 여자는 내게 좋은 일을 했다. 그리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전파하여 기념이 되리라’하셨습니다. 그러니 ‘봐라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향유를 붓든 들기름을 붓든 내 것으로 내가 하는데 너희들이 뭐냐?’라고 얼마든지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이 여인은 아무 말이 없습니다. 그렇게 향유를 모을 때까지 얼마나 험한 생활을 하면서 살아왔겠습니까? 그런데 말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진짜 섬김입니다.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막달라 마리아 본 받아서
이 여자는 예수님 계신 곳에 들어올 때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안녕하세요? 예수님이 설교하실 때 은혜를 많이 받아서 제가 오늘 예수님을 특별히 한번 섬기려고 왔습니다. 제가 오늘 2천만 원짜리 향수 하나 쏠게요. 이 향수로 말할 것 같으면...’하고 너스레를 떨지 않았습니다. 아무 말 없이 예수님을 섬겼고 비난을 받는 가운데에서도 조롱하는 눈빛 아래서도 정말 말없이 섬겼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는 사연이 많은 법입니다. 섬기기 전에는 몰랐던 일들도 그 섬기는 자리에 있게 되면 많이 알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때로는 많은 아픔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 모두 가슴에 묻어두며 섬기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들이 하나님의 일을 더 효과적으로 잘 해나가기 위해서 서로 토론하고 문제점을 이야기하고 그래서 더 우리의 섬김이 하나님 앞에 빛나고 지혜롭고 아름답고 순전한 섬김이 되도록 애써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사람은 이것을 저것이라고 말하고 저것을 이것이라고 위장하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가 자기의 일에 대해서 무엇인가 불만들을 털어놓으려고 할 때 그것이 정말 자신의 이러한 의견과 증언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이 잘 되기를 원하는 사모함으로 가득 찬 동기에서 나오는 것인지 힘들어서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인지 하나님은 모두 아십니다. 하나님은 속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 많은 사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그것을 가슴에 깊이 묻어두게 만드는 것이 인내입니다. 인내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서는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향해서는 오래 참을 수가 없습니다.
바울이 사도인데 일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자꾸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고린도후서 12장 12절에서 사도 바울이 ‘나 진짜 사도다’하며 두 증거를 보여줬는데 하나는 자기를 통해서 일어난 표적과 기사였고 또 하나는 놀랍게도 주님을 위해서 오래 참은 인내였습니다. 그런데 그 두 가지 표적 중에서 인내가 먼저 나왔습니다. ‘나 진짜 사도다. 만일 내가 예수님이 세우신 진짜 사도가 아니라면 내가 어떻게 이렇게 오래 참을 수가 있겠니? 나 원래 예수님이 사도로 부르시기 전에 열 받으면 무서운 사람이었는데 주님을 만나고 주님이 사도로 불러주시고 나니까 이렇게 참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단다.’
십자가를 지고 자신의 사명의 길을 걸어가며 섬김을 다했던 사람들은 모두 과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연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리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더 잘 섬기려고 애쓰는 사람일수록 말할 수 없는 사연들이 더 많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피에 절은 사연들입니다. 그런데 가슴에 묻어두는 것입니다.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여인이 말없이 섬기는 자의 모본이 되었던 것입니다.
일평생 사랑하는 주님의 백성들의 종처럼 섬기신 예수님, 이제는 그분의 이름이 모두에게 알려졌지만 지상 생애 그분의 섬김을 보면 정말 이름 없고 빛도 없는 섬김의 생애였습니다. 그분이 자신의 섬김을 떠벌이신 적이 있습니까? 자신의 섬김을 자랑하거나 자신의 섬김에서 오는 불만을 하나님을 향해서나 인간을 향해서나 토로한 적이 있습니까? 십자가를 지는 그 순간 까지도 예수님은 그러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예수님 오시기 7백여년 전 이사야 선지자는 ‘그는 마치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과 같았다’고 예수님에 관해서 예언했습니다.
너무 말들이 많습니다. 섬김은 작고 말은 많으니까 섬기는 자리에서 주님의 영광을 돌려드리기 보다는 교회를 아프게 하고 오히려 지체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하나님의 마음에 아픔을 드리는 것입니다. 자기 딴에는 많이 고통을 받으면서 섬겼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고통은 주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마땅히 당해야 할 십자가라기보다는 인격적인 부덕함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초래하게 된 애매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섬기는 그 일이 성화에도 도움이 안 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구속의 감격을 가지고 섬겨야 합니다’라고 설교하니까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은 아마 이런 질문을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목사님, 요즘 제가 섬기긴 섬기거든요? 그런데 구속의 감격도 뚝 떨어졌거든요? 그런데도 섬겨야되겠나요? 구속의 감격 없이 섬기는 것은 섬기는 것도 아니라면서요?’ 그렇다면 관두십시오. 그런데 언제쯤 그 구속의 감격이 회복됩니까?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 집어치우고 놀러 다니는 사람 중에 구속의 감격으로 펑펑 우는 사람 본 적 있습니까? 물론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쥐뿔도 마음속에 구속의 감격이 없이 바리새인처럼 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구속의 감격이 없어서 집어치우고 이제 나는 자유하다 그리고 놀러 다닌다면 어디에 가서 구속의 감격을 회복하게 되는지 묻고 싶습니다. 자신 있으면 그렇게 하십시오.
죤 플라벨이라고 하는 청교도는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죄죽임이 없기 때문에 구속의 감격을 잃어버리고 산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칼빈에 의하면 죄를 죽이는 훌륭한 방법 가운데 하나가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자신을 성숙시키시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모든 고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제 분류에 의하면 그중에서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섬김의 자리는 절대적인 십자가에 해당됩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면서 그 속에서 고난을 받을 때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 고난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고통을 참고 섬기고 말없이 발을 씻기는 종의 본분을 다하면서 살아갈 때 그것을 통해서 자기 안에 죄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래 나 구속의 감격 없다. 관둬라’하며 집어치우고 뛰쳐나갔다면 어디에서 구속의 감격이 회복되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말없이 섬길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그런 점에 있어서 우리에게 커다란 감동을 줍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세상 끝날까지 이 여자의 행한 일도 전파되어 기념하리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정말 그렇게 이름 없이 하나님만 마음에 품고 섬기며 산 날들이 우리의 인생 가운데 몇 일이나 될까요? 하늘나라에 가고 싶은 소망은 가득 있어도 아직은 좀더 살아야 되겠습니다. 그 이유는 면목이 없기 때문입니다. 뭘 잘했다고 벌써 갑니까? 가서 주님이 그 비척거리면서 살아온 발자취를 다 보여주실 때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조롱하는 소리와 세상 유혹 속에도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하면서 단 1년이라도 온전한 신앙을 가지고 살고 그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존귀한 자들이 섬기지 않는 낮고 천한 자리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정말 주님만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섬기는 그런 삶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너무 말이 많습니다. 사람이 필요해서 임무를 주고 거기에서 섬기게 하는데 일은 해나가는데 유능한 사람은 유능해서 말이 많고 무능한 사람은 무능하니까 말을 많이 만들어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의 정신에 입각한 섬김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사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깊이 생각하면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섬기기 위해서는 정말 이렇게 말이 없는 섬김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쁨과 보람을 사람들의 칭찬이나 평판에서 찾지 않고 주님이 지켜보시고 오늘도 나의 이 섬기는 섬김을 통해서 주님을 만족하게 해드렸고 주님께 기쁨을 드렸으면 그렇게 기뻐하시는 주님 때문에 내가 만족할 수 있었다는 것 때문에 스스로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믿음, 그것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는 이 여자의 섬김은 눈물로 가득 찬 섬김이었습니다. 가득 찼다기보다는 넘쳐나서 예수님의 발에 흘러내리는 섬김이었습니다. 이 눈물의 의미가 무엇이었을까요? 부분적으로는 자기를 아니꼽게 꼬나보고 말도 되지 않는 어투로 자기를 헐뜯고 비난하는 제자들의 그 음성을 들으며 오는 설움도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것은 감사의 눈물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이미 예수님을 만나고 사죄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이렇게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으면서 그 값비싼 향유를 드리면서도 ‘이렇게 부당한 대우를 받지만 그러나 섬김을 받으시는 주님은 매우 크고 높으신 분이며 나는 이렇게 섬기는 것 자체도 내게 감당할 수 없는 은혜라’고 하는 감사의 고백이 가져다준 눈물이었습니다.
집회를 나가면 정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봉사하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예화: 강사 접대 위원장 이야기- 차도 강사 접대용 차로 안전한 차를 샀다)
얼마나 착한 마음입니까? 그런데 여러분에게 붇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돈이 있어서 좋은 차를 타고 다닐 수 있는데 1년에 한두 번 올까말까 하는 강사를 위해서 차를 여러분의 용도에 맞지 않는 다른 차로 바꿀 용의가 있는 분들이 여러분 중 몇 분쯤 될지 묻고 싶습니다.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또 그것을 해서 돈을 버는 것도 아닌데 말로는 쉬운 것 같아도 쉬운 것이 아닙니다.
집회를 나가면 새가족이 와서 강사를 접대하지는 않습니다. 다 헌가족들이 접대합니다. 그러면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말 겸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교회를 사랑하고 말씀을 사랑하고 젠틀합니다. 거룩한 성도는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니까 천천히 되도 우서 젠틀해야 합니다. 점잖고 기독교적인 교양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배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상스러운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우선 신사가 되고 숙녀가 되어야 합니다. 어디 가서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거나 교양 없음으로 인해서 개기는 거 나쁩니다. 그리고 절대 공짜바라지 마십시오. 또 무례하게 굴어서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거나 채신머리없어서 사람들에게 경박한 느낌을 주거나 작은 이익에 밝아서 이익다툼이나 하는 무례한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점잖은 교양이 배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디 내다놔도 신앙을 떠나서 정말 교양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집회에 가면 그런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가끔 드물기는 한데 왜 저 사람에게 내 밥을 사주라고 했을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짧은 시간 만난지 10분도 안됐는데 교회 흉보고 합니다. 그러면 다시 만날 것도 아니니 제가 그러면 안 된다고 혼냅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는 감사의 눈물이 있었습니다. 이 섬김이라는 것 자체가 서비스이고 영어로는 예배라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서비스가 라틴어의 세르비스에서 왔는데 노예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희랍어로 넘어가면 레이뜨루기아가 되는데 레이뜨루기아를 히브리어로 넘기면 아보다가 되고 아보다는 종으로서의 섬김(노동)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아보다의 동사는 아바디아이며 아바디아는 밭 갈고 섬기고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섬기며 봉사한다고 할 때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의 머리 속에 있었던 그림이 노예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섬김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섬길 수 없습니다. 섬김을 받기에 적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정말 하찮은 사람이라 여겨야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달은 다음에 시인이 뭐라고 했습니다. ‘다른 곳에서의 천 날 보다 주의 집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내게는 좋습니다’ 시인은 시편 23편에서 하나님의 그 크고 위대한 사랑을 마음껏 찬양하고 노래하다가 마지막에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했는데 여호와의 집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집이 어디입니까? 성전입니다. 그러면 성전에 왕의 용상을 버텨놓고 거기에 걸터앉아있겠다는 것입니까? 여호와의 집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제사장 아니면 제사를 드리러 오는 사람들입니다. 다윗은 제사장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생각한 것입니까? 여호와의 집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람들을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수종드는 일 속에서 자신이 행복을 느끼며 일평생 살겠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근거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니까 정말 자기를 중요하게 생각하고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일생을 살고나면 살기는 살았지만 정말 주님을 섬긴 날이 얼마나 될까요? 더군다나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나 같은 죄인을 이 섬김의 자리에 세워준 것 자체를 감사하면서 내게 섬길 수 있는 주님이 있고 나의 섬김을 기뻐해주시는 주님이 계시다는 사실 때문에 행복해하며 그 자리에 만족해하고, 세상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아니하고 이곳에 크고 좋은 평판이 뒤따르지 않아도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면서 산 날들이 얼마나 될까요?
이 여인은 우리보다 훨씬 비천한 여자였지만 그러나 주님을 섬겼습니다. 말없이 그리고 항상 감사의 눈물로 가득 찬 가운데 그 감사로 모든 비난을 이기고 조롱을 이기고 주님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다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산 난들은 모두 다 지나가고 마지막 남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며 산 날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눈을 들어서 보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들이 눈을 감고 있으니까 그렇지 눈을 뜨고 교회 구석구석을 돌아보면 얼마나 아픈 데가 많은지 모릅니다. 몸이 열이어도 다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섬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르는 사람 없고 강요하는 사람 없고 붙잡는 사람 없어도 주님의 사랑이 그를 붙잡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그 구석진 자리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치는 얼마나 이 세상에서 많은 재물을 누리고 높은 지위를 누리느냐가 아닙니다. 우리의 가치는 하나님의 만족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가 이 땅에 있는 것으로 인해서 만족해하시는가! 우리의 존재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만족해하시는가! 그것이 우리의 인생의 참된 가치입니다. 그것이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사는 일이고 그것이 바로 선한 일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일입니다.
여러분들을 메뚜기라 불러서 미안하지만 메뚜기도 한철입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무도 여러분들을 섬기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어려서는 철없어서 그냥 수많은 사람의 섬김을 받으면서 신세지면서 자랐고, 이제 그래도 섬길만해지니까 세상 사랑에 놀아나느라고 하나님을 섬길 시간 없고, 그리고 나이가 많이 든 다음에는 섬길 마음은 있는데 섬길 힘이 없습니다. 아무리 가진 것이 많고 훌륭해도 일정한 나이가 되면 섬김의 자리를 모두 비우고 떠납니다. 누구도 역사의 이 엄연한 법칙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메뚜기도 한철이라는 것입니다.
힘 있고 건강 주셨고 신앙이 있고 환경이 허락될 때 그때 하나님을 잘 섬기면서 살아야합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나님이 섬기는 가운데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지 그리고 섬기는 가운데 고난이 다가고면 예수님은 그 고난을 어떻게 이기셨는지 그 속에서 마음이 아프고 홀로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외로움을 느낄 때는 어떻게 그것을 극복하고 그 고난을 인해서 예수님과 더 하나 될 수 있는지 이런 비결들을 외로운 섬김의 과정들을 통해서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섬기는 과정에서 아프고 부당한 대접을 받는 것 같고 외치고 싶은 수많은 사연이 생겨나고 외롭고 힘들고 그럴 때마다 우리에게 큰 유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 더 귀하다
너무나 간절히 원합니다. 우리의 후패해져가는 육신을 벗고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나라에 가서 안식할 그날을 우리들은 간절히 사모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눈을 뜨면서 생각했습니다. ‘아 이 아침이 천국에서 맞이하는 아침이면 얼마나 행복할까?’ 여러분과는 헤어지지만 여러분보다 더 보고 싶은 사람들도 천국에 많습니다. 그런데 한 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눈물 흘림을 며칠 더 당코 행할 길을 아직은 더 가야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남았든지 가야합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하늘나라를 사모하고 이 세상을 하찮게 여기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아니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는 고백을 간직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살려두시는 동안 이 땅에서 이어지는 우리의 인생은 마치 깨끗하고 예쁜 편지지와 같습니다. 이 땅에서 펼쳐지는 우리의 인생이 없이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삶으로 고백할 수가 없습니다. 그 여백을 주님이 부르시는 날까지 잘 채워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수고와 슬픔뿐인 이 세상에서 주님이 부르시고, ‘이 땅의 고단한 수고를 끝내고 너는 내 품으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다시는 사망이나 애곡하는 것이 없으며 내가 다시는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게 하지 않고 사랑하는데도 사랑할 수 없는 일도 일어나지 않고 공간과 시간이 너희들을 갈라놓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런 곳으로 너를 불러 이 땅에서 흘린 네 눈의 눈물을 씻겨 주리라’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간절하게 기다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신음하듯이 그리워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번영하는 이 세상, 화려한 이 세상 속에 깃들여있는 유한자의 허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가 섬기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섬김은 영혼을 잇대인 섬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섬기다가 주님이 오라고 부르실 때 영광스러운 기쁨 가운데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하는 요한의 고백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내가 속히 오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어떻게 ‘아멘 아멘 주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가 만약에 화려한 왕국에서 호의호식하며 마음을 세상 사랑에 깊이 뿌리박고 살았더라면 아마 그럴 수 없었을 것입니다.
1장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나 요한이 복음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는 섬에 갇혔을 때에’ 복음을 증거하고 그래서 주님을 섬긴다는 죄목 때문에 박해를 받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졌습니다. 가본 적도 없고 다시 가볼 일도 없는 절해고도 외로운 섬에 유배되었습니다. 사랑하는 교회로부터 격리되고 보고 싶은 사람들은 물길이 너무 멀어서 만날 수 없었습니다. 요한이 극한 외로움 속에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복음을 증거하고 주님을 섬겼다는 죄목 때문에, 오직 그 일 때문에 그는 밧모라는 섬에 유배되었습니다.
한번 묵상해보십시오. 그 90노구를 이끌고 밧모라는 섬에 유배되어서 사랑하는 친구와 가족도 없고 그렇게 사랑했던 교인들도 없이 그 절해고도에 혼자 버려져 있을 때 그 요한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그 고난이 어떠했겠습니까? 먼저 순교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이 무거운 짐을 훨씬 덜 진 사람들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에게 사랑하는 것이 있었겠습니까? 그에게 이 세상이 그렇게 중요했을까요? 밧모라는 섬에 애착이 있었을까요 ?거기서도 그는 밥을 먹었고 잠도 잤고 할 수만 있으면 조금이라도 편한 잠자리를 만들고 잠들었을 것입니다. 가시밭 위에서 자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도 밧모라는 섬에 가면 사도요한이 거처하던 동굴과 그가 사용하던 밥그릇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그렇게 외로운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거기서는 놀았습니까? 거기서도 주의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고 주님이 천사들을 통해 계시해주시는 그 일을 다 기록해서 교회들에 보내야했습니다. 계시를 알아서 교회에 보내야 되겠는데 두루마리는 내려오는데 그 인봉을 뗄 자가 없다는 음성이 들렸을 때 이 노 사도는 어린아이처럼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그 계시를 보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섬기면서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내가 진실로 진실로 이르노니 내가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요한이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오셔도 그에게는 잃어버릴 것이 없었습니다. 모두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짧은 세상에 주님을 섬기지 않고 산 사람들은 주님이 오실 때 모두 잃어버릴 것들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예수 사랑에 목이 메어서 조국 교회의 한 모퉁이에서 주님을 섬기고 사는 사람들은 잃어버릴 것이 없습니다. 어차피 처음부터 세상은 그 사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섬기다 평안히 가리라
사랑의 주 내 주님께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에도 섬기고 있는 중에 부름을 받으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병상에 누워서 사람들을 괴롭게 하거나 할 때 말고 섬기다가 불현듯 부름을 받으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이 여인을 보십시오. 여인의 섬김은 말이 없는 섬김이었고 그 대신 눈물은 가득 찬 섬김이었습니다. 오늘 이기적인 자기 사랑으로 가득 찬 교인들이 교회당을 매우고 있는 이 때에 정말 필요한 섬김이 바로 이런 섬김입니다. 예수의 사랑에 매어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길 사람, 그 사람이 필요합니다. 끝.
5. 비천한 자의 사랑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눅7:38)”
지난 시간에는 이 여자의 섬김의 특징 두 가지를 살폈는데 말이 없는 섬김이라는 것과 눈물이 있는 섬김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세 번째로 이 여인의 섬김은 자기를 하찮게 생각하는 섬김이었습니다. 오늘 여기에 보면 예수님의 발위에 눈물을 뚝뚝 떨어트린 후에 그 눈물을 황망하게 머리털로 씻어내는 장면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당시 식사는 기다란 소파 같은 곳에 비스듬히 누워서 소파와 비슷한 높이의 탁자를 옆에 놓고 음식을 차려놓은 가운데 먹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팔레스타인에는 먼지가 많고 모래가 많습니다. 당연히 양말이 없고 즐겨 신는 신발은 샌들이었습니다. 그 샌들을 신고 돌아다니다가 집에 들어가게 되면 발에는 먼지가 가득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집에 들어갈 때나 남의 집에 방문할 때나 누가 오면 제일 먼저 발 씻을 물부터 내어놓고 발을 씻고 그 집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손님을 접대하는 기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나오는 예수님과 집 주인과의 대화를 보니까 그 주인은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렇게 대접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이유였는지 우리들은 알 수 없지만 어떻든 예수님이 그 집에 들어서셨을 때 발 씻을 물로 대접을 받지 못하셨고 그래서 식사 자리에 기대게 되셨으니 그 때 예수님의 발이 깨끗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때 그 여인이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문으로 걸어서 당당하게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정중하게 초대를 받은 지체 높은 집안의 마나님이었다면 그렇게 당당하게 귀부인의 복장을 하고 시몬의 집에 들어서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맥으로 볼 때 이 죄 많은 여인은 그 죄 많은 여인의 비천한 사회적 신분과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어떻든 그 집에 초청 받지 못했고 예수님이 물리치지 않고 그 여인을 기억했기 때문에 가까스로 그 집에 들어올 수 있었던 여인이었습니다.
집에 들어온 그 여인이 당당하게 걸어서 예수님 면전에 서서 ‘오늘 제가 주님을 좀 섬길 테니까 영광을 받으십시오’라고 말하지 못한 채, 예수님의 발치 근처로 들어와서 예수님의 발치 옆에 섰습니다. 비록 발치였지만 이렇게 예수님 가까이 선 것은 어쩌면 처음이었을지 모릅니다.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고 그 여인의 뜨거운 눈물은 예수님의 발에 떨어졌습니다. 사실 이 눈물이 얼마나 순수한 눈물입니까? 죄 많은 한 여자가 깊이 참회하고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용서해주시는 은혜에 감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와 같은 죄인을 구원해주신 예수님에 대한 말할 수 없는 감사에 눈물을 흘리게 되었는데 이 뚝뚝 흘리는 눈물이 예수님의 발에 떨어졌을 때 아무리 예수님이시지만 예수님 발에 묻은 먼지는 이 여인의 눈물만큼 깨끗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눈물을 흘려서 예수님의 발에 떨어트리자 마치 더러운 것이 예수님의 발에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황망히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에 떨어진 눈물을 씻어서 자국을 남겼습니다.
예로부터 여자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려온 것은 여자로서 기품의 상징이고 남자로 말하자면 수염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33편에 보면 하나님의 집에서 맛보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서의 아름다운 영광과 교제의 특권을 이야기할 때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가지 내림 같고’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수염은 남자에게 있어서 매우 존귀한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자에게 있어서 이 머리털도 대단히 존귀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가장 귀한 부분이 예수님의 온 지체 중에서 더러운 먼지가 묻어있는 발보다 훨씬 못하다고 하는 자기 비하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칼빈 선생은 이 죄로 가득 차고 부패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철저한 자기 비하의 삶, self-basement, 자기를 깊이 낮추는 전적인 자기 무가치에 대한 인식, 그것이 있을 때 비로소 성화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그리스도의 구속하신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하찮은 인간인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바로 그런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온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 뭐 좀 얻어먹으려고 온 것입니까? 뭔가 주님께 받아가기 위해서, 물질적인 도움을 위해서, 아쉬운 소리 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섬기려고 왔습니다. 그것도 거금 2천만 원이 넘는 향유를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자리를 빛내기 위해서 한번에 부으려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 들어오지도 못하고 예수님의 발치에 서서 예수님과 눈길도 마주하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리고 그 흘린 눈물이 예수님의 발등에 떨어지자 먼지 묻은 그 발을 풋미역 같은 검은 머리로 황급히 씻어냈습니다. 철저한 자기 비하,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하는 고백이 이 여자의 온 마음에 가득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없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을 섬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충성스러운 사람들도 꽤 있습니다. 그런데 착한 사람은 너무 소수입니다. 그래서 하고 있는 일은 거룩한 일인데 사람은 포악합니다. 거칠고 독선적입니다. 그리고 자기 일이 잘 되는 것 외에 인간에 대한 배려도 없고 예의도 없습니다. 심하면 다른 모든 사람을 자기 일에 이용하려고 합니다. 이런 것은 모두 신앙적인 섬김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철저하게 자기를 낮추면서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인식이 살아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 여인이 오늘 예수님의 발에 떨어진 눈물을 검은 머리로 씻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최고의 섬김을 주님께 드리면서도 이 섬김은 우리 주님께 충분히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위대하신 성품과 영광스러운 본성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이 모든 섬김은 철저하게 먼저 자신이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인가, 예전에 주님의 뜻을 저버리고 멀리 떠나서 허랑방탕하게 살 때에만 무가치한 존재가 아니라 지금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을 얻고 주님 앞에서 이렇게 섬기게 된 지금에도 우리의 존재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무가치한가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 자기 학대적인 해석이 가미된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왜 귀중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셨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고 주님이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들이 다른 사람을 얼마나 행복하게 하고 우리가 젊으니까 아직까지 우리의 남은 날을 통해 우리 주님께 영광 돌리고 주님이 우리와 동행하실 텐데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소중한 존재입니까? 그래서 성경도 우리에게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다 좋습니다. 그런데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문학을 좀 공부하십시오. 얼마나 모르면 그런 질문이 나옵니까? 지금 우리 자신의 존재가 하찮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하찮게 여기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이 너무 존귀하고 영광스러우시고 위대하시기 때문에 거기에 비출 때 우리는 가히 아무 것도 아니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그렇게 많이 받았던 사람들이 주님의 영광의 찬란한 빛이 비췰 때 자신들을 ‘티끌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십시오’ ‘주여 나는 깨닫지 못하기가 짐승과 같습니다’라고 말했던 사람들은 자기의 존재 가치를 부정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금욕주의나 자기 학대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졌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0을 1 앞에 세워놓으면 1이 열개가 모여야 10이 되니까 제법 큰 숫자입니다. 그러나 무한대 앞에 10을 세워놓으면 1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로 비춰오는 찬란한 은혜와 영광의 빛의 외현적 발현은 이 신자의 마음속에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인식을 가져다줍니다.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인식 정도가 아니라 존재해서는 안 되는 존재가 여기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질문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선지자였습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보기 전까지는 자기는 제법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영광의 빛이 찬란하게 비췄을 때 즉시 깨달은 것은 그 영광의 빛 앞에 드러난 자기의 모습은 너무 비참한 모습이어서 재앙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화로다 나여 이제 망하게 되었도다. 내가 입술이 부정한 자 중에 있으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 존재해서 죄송합니다’하며 존재에 대해서 하나님께 사과를 하는 모습입니다. 그런 영광을 경험해보셨습니까?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찬란한 영광과 위엄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닌가, 한걸음 더 나아가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죄송한 존재인가, 나는 감사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는 얼마나 죄송한 존재인가 하는 인식이 바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그 모든 아름다운 섬김의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일로 섬겨도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보고 그 찬란한 은혜의 영광의 외현적 발현에 의하여 자신의 실체를 인식한 사람들의 섬김은 다릅니다.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는 정신이 지배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주님에게 죄송스러운 하찮은 존재이다. 하찮을 뿐만 아니라 수시로 하나님의 영광과 창조의 목적을 복원하는 일에 역행하는 방해가 되는 해악스러운 존재로 내가 이 땅에 존재할 때가 있다. 그래서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주님께 너무 죄송하다. 존재하는 그 자체가 주님께 말할 수 없는 호의를 입은 사건이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진짜 자신이 주님 앞에서 얼마나 무가치한 죄인인가 하는 것을 본 것입니다.
이 여인이 그렇게 더러운 죄인이었는데 그 영광을 본 것입니다. 인간이 교만한 것은 그 영광의 빛을 보지 못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분명하게 이런 정신에 의해서 섬겨야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섬기라고 하지 말고 섬김을 받으라고 해야 합니다. 그 사람들은 아직 멀었습니다. 그러나 거들먹거리면서 주님을 깊이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일평생을 기대고 섬김을 받다 죽으면 그 사람의 인생은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생애인데 섬기기는커녕 늘 사람들에게 기대고 자기가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훌륭하게 섬길 사람들의 섬김에 타고 앉아서 그렇게 일평생을 제왕처럼 군림하며 살았던 사람의 인생은 허망한 삶입니다.
자신을 가치 있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보고 자기의 일을 보면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거기에 세워주신 섬김의 원천이 되시는 그분의 영광의 빛 앞에 자기를 비춰볼 때 자기가 서있는 이 섬김의 자리가 얼마나 과분하고 그분이 시켜주시는 일 가운데는 자존심 상할 정도로 하찮은 일이라는 것은 내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깊이 엎드려지고 깊이 사랑하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정신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지금이야말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세상의 좋은 평판에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에게 생명 주시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어드리기 위해서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자기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의 섬김을 본받고 그 섬김에 감화를 받아야할 때가 되었습니다. 자기를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수시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이 여인의 섬김은 애정이 있는 섬김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흘린 눈물을 황급히 닦아낸 사건이 이 여인 안에 있는 자기를 아무 것도 아닌 하찮은 자로 여긴 겸비함을 보여준 것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그 발아래 입 맞춘 이 사건은 거기에서 한걸음 더 지나가서 예수님을 사랑한 이 여인 속에 있었던 애정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사랑은 엎드려서 드리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경배의 정신이 포함되어있지 않은 모든 사랑은 우리 주님께 드리기에는 가당치 않은 사랑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입 맞췄을 때 어떻게 했을까요? 우리 무릎 정도 밖에 안 되는 탁자 옆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계셨고 이 여자의 키가 얼마나 됐을지 모르지만 160센티쯤 된다고 쳤을 때 50센티 정도 밖에 안 되는 데 예수님이 누워계셨을 때 예수님의 발에 어떤 방법으로 입 맞췄을까요? 자기는 뻣뻣하게 서있고 예수님의 발을 번쩍 들어서 발바닥에 입 맞췄을까요? 먼저 부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자기를 낮춰서 예수님의 발에 입 맞췄을 것입니다. 그 발에 입 맞춘 것은 최상의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거기에서 가톨릭 신자들이 교황의 발에 입 맞추는 습관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것은 지상 최대의 난센스입니다. 자기가 예수님입니까? 성도들에게 발을 갖다 대고 거기에 입 맞추게 하라는 본입니까? 머리가 그렇게 나쁩니까? 바보입니까? 영화 보면 주인공이 누구인지 모릅니까? 여기에서 본 받아야 될 것은 그 입맞춤을 당하는 예수님을 본 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여인입니다.
먼저 여인이 깊이 부복하고 무릎을 꿇어 그 바닥에 주저앉았을 때 자신의 인생의 모든 가치를 그분의 발 앞에 복종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이 하필이면 예수님의 그 발에 입 맞춘 것은 그 사랑의 표현 그 자체가 ‘내가 사랑을 드리니 내게 사랑을 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십시오’하면서 베푸는 듯한 자세로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다 낮추고 주님 앞에 하찮은 피조물로 깊이 엎드러지고 티끌과 같이 되었는데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주님을 향한 인격적인 깊은 사랑이었습니다. 그 부복하는 자세에서 그 사랑을 고백한 것이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춘 행동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모든 사랑은 피조물로서 위대한 창조주 앞에 자신의 철저히 가치 없음을 인식하고 자기 비하의 낮아짐 안에서 깊이 그 위엄 앞에 엎드린 상태에서의 사랑의 고백이 아니면 그것은 하나님께 바칠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친구나 애인끼리 주고받는 사랑이지 예수님께 바칠 수 있는 사랑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깊은 두려움과 경외심이 없는 자들의 사랑의 고백은 마치 폐품으로 만든 꽃과 같은 것입니다. 향기 나지 않는 더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그분을 깊이 사랑하기 전에 먼저 배우게 되는 것은 그분의 엄위입니다.
하늘 위에 주는 높이 들리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그 지존하시고 그 신실하신 궁창에까지 미칠 위대한 하나님 앞에서 자기는 기억조차 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하찮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 앞에서 감히 얼굴도 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의 사랑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섬김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없다고 하는 것은 그 섬김이 절대로 하나님이 받으실 수 있는 섬김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섬김의 원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인정하고 그 영광 앞에서 자기가 정말 하찮은 존재인지를 아는 그 부복된 경배의 정신 안에서 사랑이 신자의 마음속에 전달될 때 은혜와 함께 들어오게 됩니다. 그 사랑은 은혜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고 그 은혜는 곧 성령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깊이 들어와서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가득 차게 되면 자기 자신 안에서 하나님이 온전히 영광을 받으시도록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같은 정도로 꽉 차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영광을 받으시고 싶어 하시는 곳이 어디입니까? 신자의 마음입니다. 시베리아 벌판이 아닙니다. 마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대형집회와 열광적인 찬양은 하나님에게는 퍼부어지는 똥물과 같은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당신을 경배하는 곳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촉발되는 장면을 선지서 속에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대회로 성일로 모이는 무리를 보면서 하나님의 마음이 진노하십니다.
그러니까 ‘그 하나님 앞에 내가 뭘 하며 일생을 살까?’를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십시오. 뭘 하면 어떻습니까? 그 사람의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면 그 사람이 뭘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고 그 마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는 더러운 장소라고 할 것 같으면 그가 뭘 하든지 죄와 부패함이 그가 하고 있는 모든 일에 미치게 될 것입니다.
반짝하면 사라지는 불과 3-40년 되는 인생동안 장자리 한번 해보고 이름 좀 날리고 돈 좀 많이 벌어서 교회에 헌금도 하고 구제헌금도 내고 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그런 다른 모든 삶도 의미가 있는 것이지 마음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껍데기가 비슷하게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그 모든 것들, 사람은 보고 ‘아, 신실하다. 하나님만 섬기는구나’ 깜빡 속을 수 있지만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껍질 속에 있는 진심을 다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박하와 회향과 채소의 십일조까지 드린 그 열심 있는 바리새인들이 주님의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피눈물 나게 자기를 쳐서 복종 시키면서 의무를 이행했지만 주님의 눈에는 회칠한 무덤이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모릅니다. 이러한 인간의 마음이 주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은혜로 가득 찰 때 주님에 대한 인격적인 사랑으로 가득 찹니다.. 그래서 그분을 전심으로 사랑하게 될 때 비로소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이 이뤄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거듭나는 것을 통해서 이뤄졌지만 그보다 더 실제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연합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이 연합이 공고하게 이뤄졌을 때 신자는 ‘주님이 항상 나와 동행 하신다’하는 행복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천지창조의 목적과 관계가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고 그 결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인격적인 사랑이 우리 안에 가득 차게 되는 것이 왜 그렇게 필수적이냐면 성화의 모든 노력과 죄를 죽이려는 분투하는 싸움도 일단의 목표는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 안에 가득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렇게 주님을 향한 인격적인 사랑이 우리 안에 꽉 차게 될 때 우리는 그 꽉 찬 정도만큼 온전히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실 때 나를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아름다움에 있습니다. 아름다울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이 외형적이고 물리적인 아름다움이나 이 세상의 임금들이 꽃으로 꾸며 쓴 왕관을 써서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이 점에 대해서 개혁주의의 전통에 따라서 명료하게 해석하는데 깊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선하다는 뜻입니다. ‘선’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원래 의도하셨던 상태나 조건 아래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있을 때 그것은 가장 아름다운 것이 되고 동시에 가장 탁월함을 갖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떤 물체나 사람이 있을 때 이것이 아름답다고 하기 위해서는 이것 하나만을 가지고는 판단이 안 됩니다. 뭐에 쓰는 물건인지도 모르고, 화장실에 두는 것인지 지하에 묻어버릴 것인지 쓰레기통에 들어갈 것인지 안방에 놓을 것인지 건넌방에 놓을 것인지 매달 것인지 박아 놓을 것인지도 모르면서 아무 물건이나 갖다 놓고 ‘이거 예뻐요?’하고 물어보면 사람들은 그것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예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드워즈가 설명하기를 어떤 개체적인 존재물이 있을 때 이것의 아름다움은 이것이 부분으로 존재하게 된 전체의 디자인에 맞을 때 그것을 우리들이 아름답다고 부릅니다. 그래서 어떤 물건이 존재할 때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그것을 존재하게 한 원래의 원인자의 모든 존재의 계획과의 연관 속에서 한 부분으로서 이것이 가장 제대로 된 위치를 찾았을 때 이것을 가리켜서 아름답다고 말하는데 이 아름다움을 ‘코디얼 뷰티’라고 부릅니다. 핵심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만물을 존재하게 한 원인자의 모든 존재 계획에 모두 어울리는 아름다움은 아니지만 옆에 있는 몇 개와는 잘 어울려서 예쁘게 보이는 것 이것을 가리켜서 ‘내추럴 뷰티’라고 부릅니다. 자연적인 아름다움입니다. 결국 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이 설명한 이야기를 좀 쉽게 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설명에 의하면 인간 편에서 보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화: 이십 여명을 죽이고 심지어 그들 신체의 일부까지 먹은 사람)
아무도 그 사람이 행한 것이 아름답다, 좋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사람 자기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고 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완벽하게 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자유의지론 속에서 악이란 정적 개념이 아니라 동적 개념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보편적인 선, 만물을 존재하게 하신 궁극적 원인자가 되시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 가지고 있었던 존재하는 사물과 모든 개체의 존재의 계획과 그 얼개에 맞게끔 되어있는 그 선한 상태에서 좁은 의미의 선으로 이행하는 과정 그 자체가 악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일단 윤리적 표준으로서의 만물의 원인자가 되신 하나님이 만물을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신 그 개체에 관한 총체적인 계획으로부터 이탈되고 나면 그것을 아름답다고 여기게 만드는 부차적인 인접한 것들이 얼마이든지 그 크기는 문제가 안 됩니다. 왜냐하면 무한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같은 시간 안에서도 틀리고 시간이 지나간 다음에는 또 틀려지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월남 사람들에게 정말 미안합니다. 전쟁에 참여해서 물론 우리도 죽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때는 수많은 백성들이 깃발을 흔들면서 다 죽이는 것이 세계평화에 이바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간 것입니다. 아직도 거기 갔던 한국 군인들이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는데 지금은 악수하고 컴퓨터 팔고 전화기 팔며 잘 살아보자고 합니다. ‘옛날엔 미안했다’ ‘그럴 수도 있지’ 하며 어깨동무하고 삽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때는 그것이 선이라고 여겨졌는데 지금은 씻을 수 없는 악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만물의 궁극적 원인자가 되시는 하나님이 총체적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을 개체적으로 모두 연결시켜 놓으시려고 했던 그 원래의 디자인으로부터 벗어나서 선하다 악하다고 판단되는 것이 이렇게 허무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에드워즈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집을 세울 때 나무에 구멍을 파고 기둥을 세우고 대들보를 얹고 서로 끼웁니다. 그래서 딱 맞아 떨어졌습니다. 그때 ‘good’ 그럽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쪽 것에 대해서 참 아름답다-엑셀런트하다-합니다. 다른 쪽도 세웠습니다. 딱 하고 맞으니까 ‘good’, 아주 엑셀런트합니다. 그런데 목수가 잘못해서 두 배로 크게 만든 것입니다. 이 세 개는 good인데 집 전체로 봐서는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은 조그맣고 뒤는 들린 집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온전하고도 인격적인 사랑이 없으면 결국은 온전히 복종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표준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제 좋은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행하는 많은 행동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그렇게 섬기게 되면 주님을 사랑하게 되리라 생각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사랑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일이 그렇게 만들어주는 것도 아니고 일이 그것을 빼앗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 일속에서 주님과 맺고 있는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사랑을 유지하게 되고 또 그것을 잃어버리게도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철저히 영적인 문제입니다. 사랑의 싸움이 되는 것입니다. 온전히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이 뜨겁고 열렬하고 순전하면 자신의 모든 삶을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전방위적으로, 총체적으로 범위에 있어서나 전도에 있어서나 자기를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그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복종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경험이 만들어내는 순종의 틀입니다. ‘the frame of obedience’입니다. 순종의 틀은 곧 그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 찬 틀이 될 때 온전한 순종의 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이 지금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고 있습니다. 자기 같은 이 더러운 죄인을 위해서 용서해주시고 자기와 교제하고 자기에게 이 섬김을 받으시는 예수님을 향한 온전한 사랑이 이 여인의 마음속에 꽉 찬 것입니다. 예전에는 창녀요 기생이었을 것입니다. 화류계여성이었고 몸을 파는 아주 더러운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홍과 같은 더러운 죄가 깨끗이 씻겨지고 여인의 마음은 주님 한분을 향한 인격적인 사랑으로 꽉 차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자신의 모든 전 존재가 예수님의 뜻에 전적으로 부복하고 싶었고 심지어는 다른 사람을 도와서라도 그렇게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시고 구속해놓으신 목적에 부합하는 그런 세상이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역사나 우리의 개인적인 신앙의 경험을 보면 주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사랑하고 그 사랑이 내 인격 안에 은혜와 함께 꽉 차게 되면 행복한 것이 아니라 너무너무 아픕니다.
교회를 세우시고 이 땅 고쳐주소서
주님 나라 임하시고 주뜻 이뤄지이다
하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런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나온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 주기도문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이 오늘날 수없이 고난을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렇게 예수님이 아버지를 온전히 사랑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 몸부림 속에서 살았던 예수님의 고난 받은 생애, 그리고 목표가 있는 그의 구도자적 생애의 농축판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주기도문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많이 성화시키셔서 우리에게 마지막 살게 하시고 싶은 삶이 바로 그 주기도문의 삶입니다. 그래서 자기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지고 주님이 그 안에서 온전히 영광을 받으시고 그렇게 하나님 영광을 받으시는 이 내면의 세계를 볼 때 이 세상과 격차가 납니다. 이 격차가 날 때 비로소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반응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내 마음에 이뤄진 하나님의 나라와 같은 동질의 세상이 이뤄지길 갈망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의 무너진 교회와 병든 이 세상, 황폐한 땅, 창조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이 세상을 보면서 깊이 아파하고 눈물 흘릴 수 있는 이것이 이 땅에서 크리스천이 도달할 수 있는 영적 상태의 최고봉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도의 성화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겼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사라졌다가 다시 생기기도 합니다. 영적 상태와 성화의 수준뿐만 아니라 영적인 상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그들의 간구하는 기도를 들으시면서 그들의 기도로 포문을 삼아서 하나님 나라의 빗장을 여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요원의 불길처럼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이 온 땅에 번져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흥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예수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의 인격은 모든 은사보다 더 탁월하고 뛰어난 것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이 은혜의 가치는 탁월한 것입니다. 은혜는 항상 그리스도께 대한 온전하고 순전한 사랑을 동반하지만 은사는 항상 그런 것을 동반하지 않습니다. 이 여인이 이런 복음의 진수를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살았던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이 세상에 존재하는 지극히 짧은 동안에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누구를 위해서 살아야 되겠습니까? 누구를 사랑하며 살아야 되겠습니까? 사람을 사랑하면서 사는 일이 얼마나 피곤한 일입니까? 배신의 두려움도 있고 사랑이 깊은 것만큼 상처가 깊어질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자라는 것이 없습니다. 주님은 누구도 당신을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슴에 상처를 주신 일이 없고 많이 주님을 사랑하고 난 다음에 혼자 버려진 것 같은 외로움을 느끼게 되는 사랑의 후유증도 없습니다. 믿음도 폐하고 방언도 폐하고 소망도 이루어지면 끝나지만 그러나 영원히 있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모든 신령한 영적 삶의 처음의 열매이고 도 마지막 최종적인 열매입니다.
불결함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사랑이 마음에 없거나 현저히 모자라거나 조금 모자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순결은 이런 사랑으로 가득 찬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티끌과 같은 인간이지만 이 티끌과 같은 인간이 좋으신 우리 예수님을 사랑하는데 이것이 우주적 사건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장엄한 창조의 계획 속에 참여하는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을 노래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랑을 가진 사람이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그러므로 내가 말한다. 누구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지니라’라고 외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의 최고의 목표는 이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부를 누리고 얼마나 높은 지위에 있다가 사라지는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그 하나님께 많이 온전한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힘입어서 주님 앞에 하찮은 피조물로 서있는 이 자리에서 이 땅에 존재하는 동안에 그분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최대의 숙제입니다.
그 사랑을 소유한 자들은 비천한 자 같으나 존귀한 자들이요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들이요 버림받은 자 같으나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이런 사랑을 가슴이 가득 담고 존귀 영광 모든 권세를 주님께 돌려드리고 주님이 세워주는 곳이 어디이든지 그곳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그 사람들을 볼 때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기쁘시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많이 섬기고 많이 사랑하고 많이 착한 사람이 되어서 그렇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을 훌륭하게 섬기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이 아름다운 모든 섬김은 주님께 바치기에는 너무나 가치가 적은 것이라고 고백하고 주님이 그렇게 인정해주시고 사랑하시는데도 그 위대하신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이 세상 한 모퉁이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주님께 말할 수 없이 죄송한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 주님이 얼마나 사랑하실까요? 끝.
6. 모두 바친 인격의 향기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눅7:38)”
지난 시간에는 자기를 하찮게 여기는 섬김, 주님께 말할 수 없는 애정을 표현하는 입 맞추는 사건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향유를 부으니’ 부분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 향유는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당시 재산 축적의 수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모은 향유를 시장에 내다 팔면 금처럼 언제든지 현금으로 바꿔서 쓸 수 있는 재화였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고 되어있고 누가복음에는 발에 부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각기 다른 두 사건일 것이라고 보는데 예수님의 생애에 일어난 똑같은 기록이 약간 틀렸다고 해서 두 사건으로 보는 것은 왠지 마음에 동의가 안 됩니다.
가롯유다가 복음서에는 목매어 죽었다고 되어있고 사도행전에 보면 창자가 터져서 죽었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이 죽은 것이 아니라 어느 시점에서 사진을 찍었느냐하는 차이일 것입니다. 복음서에서는 목매어 죽은 것을 찍었고 목매었는데 줄이 떨어지면서 마지막 죽은 모습은 창자가 터져서 흘러나온 모습이었으니까 서로 틀린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보면서 차이를 명쾌하게 설명한 주석은 없지만 그냥 예수님 머리부터 향유를 부었는데 마태복음에서는 그 장면을 찍었고 누가복음에서는 발에 부은 장면을 찍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머리에 부었다고 말해도 문제가 아니고 발에 부었다고 말해도 문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발에 붓는 장면을 찍어서 우리에게 전달해주니까 여기는 여기대로 메시지가 있는 것입니다.
향유를 예수님께 부었는데 그 향유는 마태복음에 의하면 3백 데나리온이라고 했습니다. 1데나리온이 해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장정 한사람의 품값이니까 안쳐도 7만원은 쳐야할 것입니다. 좀더 위험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은 20-25만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어떻든 10만원씩만 쳐도 3천만 원이 넘는 돈이고 7만원씩만 쳐도 2천만 원이 넘는 거액의 향유였습니다. 그것을 예수님께 부어버렸습니다. 성경은 이런 저런 얘기를 안 하고 있지만 죄인인 이 여자에게 있어서 이 향유는 전 재산이었을 것입니다. 돈 많고 부유한 사람이 일부를 드린 것이 아니라 두랩돈을 바치고 주님께 칭찬을 받았던 그 과부처럼 자기의 모든 것을 드려서 주님을 섬겼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오늘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그 섬김은 자기를 다 드려서 섬기는 섬김입니다. 그것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섬김입니다.
우리들이 항상 하나님의 일을 섬기려고 할 때 힘들게 느껴지는 이유는 제한된 자원의 선을 긋고 내게 맡겨진 주님의 일을 위해서는 내가 이 정도까지는 쓸 수 있다고 하는 경계를 그어놓고 섬기려고 하니까 예상보다 더 많은 것을 드려서 섬겨야 하는 상황이 오게 될 때 우리의 마음에서 갈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안 섬기겠다는 것이 아니라 섬기겠다는 것인데 시간과 돈과 노력을 이 정도 선까지 바쳐서 드리려고 하는데, 하다 보니 주님의 일이 어려운 난관을 만나서 점점 더 많은 희생을 요구하게 되니까 갈등이 일어나고 마음속에서 처음에 하나님을 섬기려고 할 때 가졌던 순수한 마음에서 이탈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가 땅을 샀는데 거기에 건물이 있어서 그 건물을 고쳐서 쓸 것인지 부숴서 쓸 것인지 의견이 갈리게 되었는데 고쳐서 쓰자는 쪽이 30억 들었다고 하면 거기에 10억만 더하면 새로 지을 수 있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새로 짓기로 결정했는데 실제로 공사를 해보니까 계속 불어나서 100억 가까이 들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결국 거기에 동조했던 사람들이 다 등을 돌리면서 강력히 추진했던 사람들과 맞붙어서 의견대립이 되었는데 교회를 짓기 전에는 서로에 대해서 예의 바르고 인격적이던 사람들이 가슴에 미움이 생겨서 적극적로 대적하고 손가락질하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싸우는 식으로 바뀌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두 가지를 느꼈습니다. 첫째는 인간에게 정확한 판단이 참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지나간 일이지만 저도 교회 옮길 때 가슴 아픈 편지를 몇 통 받았습니다. 제가 뭘 지어본 적이 있습니까, 고쳐본 적이 있습니까? 해본 것이라고는 지하실에서 물 샐 때 퍼내본 것밖에는 해본 것이 없는데 이 어마어마한 것을 하는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정보를 주기는 하지만 그 사람들 역시 그런 일을 많이 해본 사람들입니까? 저는 여러분 편이니까 ‘그저 진리가 선포되면 됐지 비만 안 새면 된다’ 했는데 나중에 법을 다 뒤져보니까 사람이 들어가서 살기 때문에 우리만 좋아서 들어가면 되는 것이 아니라 법적인 요건을 다 갖춰야 했습니다. 그러려다 보니 비용이 막 늘어나는 것입니다. 또 돈을 14억씩 들여서 다 고치고 정상적인 건물로 만든 후 겉은 아무 것도 안하고 살 수 있겠습니까? 죽어가는 환자에게 옷을 선물하는 사람 봤습니까? 건강을 회복하게 되면 뭐부터 하겠습니까?
(예화: 아버님 퇴원하실 때 아프시기 전 것은 다 잊어버리시고 새 옷 입으시고 새 사 람으로 사시라고 속옷부터 양말까지 다 새것으로 사드렸다)
또 나중에 수리하려면 비용이 더 늘어나니까 할 때 하는 것이 더 경제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도 해봐서 알지만 판단이라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늘 하는 사람이면 몰라도 굉장히 어렵고 남이 와서 판단을 해준다고 해도 그것도 사람마다 생각이 제각각인데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정확한 판단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 한 가지는 그 사람들은 교회를 허물고 지을 때 어떻게 하든지 이 교회가 잘 지어져야 겠다 하는 것 보다는 비용의 선을 그어놓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둘 중의 하나만 충족되었어도 교회는 문제가 없다는 판단을 정확히 하든지 판단을 조금 잘못해도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예화: 아파트 24평짜리만 사서 가도 한 30만원만 들여 도배하려고 했다가 막상 조금 더 좋은 것으로 하다 보면, 그리고 조금 보기 좋게 가구, 문틀 등을 손보다 보면 3천만 원도 들 수 있다)
(예화: 티셔츠 하나만 사 입으려고 했어도 거기에 걸맞은 바지 구두를 갖추다보면 예 상치 못한 비용이 들게 된다)
그래서 어려운 일이 일어날 때는 리더십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교회는 큰 소동을 겪은 것이 아니지만 저도 그 목사님의 교회가 충분히 이해갔습니다. 아마 이렇게 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지으려면 65억쯤 드는데 그렇다고 하면 교인들이 동의를 안 할 것 같으니까 좀 줄여서 이야기했는데 이미 제시된 그 가격도 15억쯤 줄인 것인 줄 모르고 다시 줄여서 45억이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어느 건축업자의 이야기가 제 마음에 깊이 박혔습니다. (예화: 교회가 건축할 때 돈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 건축하면 평안하게 끝나고 돈 없 이 지으면 쪼개질 것 같지만 어느 교회는 건물을 지을 비용보다 30% 이상을 통 장에 넣어두고 시작했는데 교회를 지으면서 큰 분란을 겪었다)
그런가 하면 돈이 없이 시작했어도 교회를 짓고 온 교인이 한마음이 되고 믿음이 자라는 교회가 있습니다.
결국 이 차이는 안 섬기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안 짓겠다는 것이 아니고 봉사 안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인색하다는 것입니다. 선을 그어놓고 이것을 넘나들면 기분이 나쁜 것입니다. 이러면 이름 없이 빛도 없이의 봉사가 안 됩니다.
왜 안 되는 지 설명하겠습니다. 이름이 없이 봉사하려면 소리가 나지 말아야 합니다. 빛도 없이 봉사하려면 생색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름 없이 가 안 되는 것입니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면 자기가 이만큼 줄을 그어놓고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생각했다가도 예상했던 줄을 넘게 되면 자신을 다 드려야 겠다는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이 경계선이 철책이 아닙니다. 인생을 살면서 계획은 세워야겠지만 부득이 일을 하다가 자신이 머리 속에 그리고 있던 것보다 더 든다고 할 때 기꺼이 드릴 수 있으면 말이 안 납니다. 그래서 이름 없이의 봉사가 되는 것입니다. 생색을 안내면 빛도 없이의 봉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색하게 이만큼밖에 줄을 안 그어놨는데 하다보니 이것으로는 도저히 일이 안돼서 ‘나 혼자 이것을 다하라는 말이냐. 도저히 못 하겠다. 내가 이것 하는 동안 당신들은 뭐 보태준 것 있느냐’고 떠들기 시작하면 이름이 다 알려지게 됩니다. 생색내면 빛이 이미 났습니다. 그러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주님 앞에 보여드렸던 섬김이 자기의 것을 다 드린 섬김이었습니다. 그것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입니다. 그래서 작은 일에 종사 하는 사람들에게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작은 일을 해도 자기가 헌신할 경계를 인색하게 정해놓고 하고자 하는 과업과 자신의 예정된 헌신 사이에서 충돌을 일으키면 계속해서 이름이 알려지고 시끄러운 소리가 나고 자기는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결국 이름 없이 빛도 없이의 봉사가 안 되는 것입니다.
(예화: 영국 BBC에 여왕이 나와서 말하는데 뭐가 잘못됐는지 선이 없어서 어떤 사람 이 양쪽 전선을 붙들고 자기 몸으로 전기를 통하게 했다고 한다)
(예화: 야구하면서 굴러오는 공을 잡을 때는 몸으로 먼저 막으면서 잡아야 한다-몸이 아프더라도 점수를 잃지 않기 위해서)
운동선수들이 그렇게 자기 몸을 버리면서 운동경기에서 승리를 겨루기 때문에 부상자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렇게 이 세상에서 한 번 이기고 지는 경기에서도 그러는데 주님의 일을 하려고 할 때 -다 드려도 하나님이 다 쓰시는 것이 아니지만- 다 드린 사람들은 항상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봉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다 들릴 수 있었던 이유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헌신해야 될 것들에 대한 가치보다 이 헌신을 통해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일들에 대한 가치가 더 월등하게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이 어쩌면 일평생 모아왔을 3백 데나리온이 넘는 향유를 예수님께 부었을 때 예수님이 이 향유보다 귀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면 아마 부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부었다는 이야기는 예수님의 해석에 의하면 ‘이 여자의 사랑함이 많으니라’ 하셨습니다. 그렇게 섬겨야 합니다. 자기의 것을 하나님 앞에 헌신하되 무한대의 헌신이어야 합니다. 주님이 다 쓰시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우리에게 있는 것을 활용하실 때 우리의 있는 모든 것을 다 활용하실 수 있도록 내어드리는 섬김이 될 때 그것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의 섬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하나님의 일이 맡겨졌을 때 ‘이 일은 내 모든 것을 들여서 성취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때 거기에서 하나님의 도우시는 위대한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렇게 향유 옥합을 깨서 예수님께 다 부었습니다. 방 안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향기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앞 서 말씀드린 섬김의 원리를 따라 섬기면서 자기를 다 드리게 되면 이 섬김이 아주 아름다운 섬김이 되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섬김의 최고의 꽃은 인격의 향기가 번져나가는 섬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맡기면 일은 꼭 이루어지는데 심방해야 될 사람이 몇 사람 생겨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은 돼서 괜찮은데 사람들이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겨질 수 없습니다. 언젠가 교회에 큰 일이 있을 때 교역자들과 운영제직들을 모아놓고 이야기했습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이 지도자로서 하나님을 잘 섬기게 될 텐데 소인배 같은 지도자는 큰일이 한번 지나가고 나면 편이 갈라지게 만든다. 그런데 군자 같은 지도자는 큰일이 한번 지나가면 사람들을 모두 하나로 뭉쳐지게 하는 인격적인 향기를 갖는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인이 향유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깨트려 모두 부었을 때 그 집안에 향기가 가득했습니다. 이 여자는 냄새 풍기려고 향유 깨트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부어서 예수님 섬기려고 향유를 깨트린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만 섬겼을 뿐 아니라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꽉 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만 그 혜택을 누리신 것이 아니라 그 방에 들어온 모든 사람들이 그 향기의 혜택을 입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이렇게 신앙생활하고 일하지 않을 때에는 누가 누군지 모릅니다. 하다못해 토요일에 와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청소라도 하게 되면 가까이 있으면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1-2년씩 함께 예배 위원을 하거나 새가족 위원을 하거나 봉사 위원을 하다보면 서로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됩니다. 그러게 될 때 여러분들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것 같습니까? 주일날 먼발치에서 뵈면 은혜로운 집사님, 기도 많이 하는 권사님, 충성스러운 장로님이라는 평가를 받지만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면 혈기 충만하고 꽤 부리고 자존심 강하고 험한 일 안하려고 하고 남의 말 잘하는 악취 나는 인격의 냄새가 풍겨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절대 이름 없이 빛도 없이의 섬김이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함께 일해 보면 정말 알게 됩니다. ‘정말 저 사람은 성실하구나’ ‘저 사람은 궂은일은 자기가 하려고 하는 사람이구나’ ‘저 사람은 자신은 지위가 높아도 자기보다 사회적으로 못한 지체들도 존중히 여기고 인격적으로 대해주는 사람이구나’ 하는 속에서 그 사람의 인격이 느껴집니다. 그 향기가 아울러 풍겨나야 합니다.
꽃향기가 우리 즐겁게 해주려고 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꽃의 향기는 해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퍼트리는 방어수단이랍니다. ‘가시밭의 백합화 향기 날린다’하는데 이 백합화는 실제로 가시 같은 것에 자극이 되면 향기를 더 많이 발산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려고 하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도와서 순탄히 주님의 일이 흘러갈 때에는 별로 인격의 향기가 안 나타납니다. 그런데 어려움이 생기고 고통이 있고 더 많은 희생을 요구하고 예상하지 못한 고통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가운데 생각이 납니다. 그것이 가시가 되어서 자신을 찌를 때 그 찌르는 것만큼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말씀의 은혜를 받아서 그 찔리는 속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화된 인격의 향기가 퍼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그 반대입니다. 일이 잘 굴러갈 때는 밥도 잘 사주고 허허 하며 그렇게 호탕할 수가 없는데 뭐가 꼬이고 줄그어 놓은 경계선을 넘어오기 시작하면 다음에는 악취가 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되겠습니까? 안됩니다.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여러분에게는 벌떡 일어나서 묻고 싶은 질문이 하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줄을 그어놓고 일하다가 좋으면 헤헤대고 안 좋으면 혈기 부려서 악취가 나는데 어떤 사람은 그렇게 어려움이 올 때 오히려 그것이 가시가 되어서 향기가 잘 날 수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그 사람이 백합화니까 그렇습니다. 꽃 중에서 똥풀이라고 있습니다. 찌르면 똥냄새를 풍깁니다. 변화된 만큼 가시에 찔렸을 때 자기 안에 있는 것을 풍겨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또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아직 백합화가 못되었습니다. 아직 똥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어느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백합화겠습니까? 처음에는 다 똥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런 고비를 많이 넘기면서 자기가 죽고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또 죽고 주님의 사랑 생각하며 그어놨던 경계선 떼어버리고 하면서 자기를 꺾고 섬기는 동안에 똥풀에서 백합화로 변했습니다. 그러니 찔려도 예수 향기 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결론은 이제 마음대로 하십시오. 계속 똥풀로 존재하며 똥냄새 풍기면서 살다가 죽든지 아니면 이 어려움 속에서 자기를 꺾고 죄를 죽이고 더 많은 은혜, 십자가 지는 비결도 배우고 하면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해서 조금씩 조금씩 고난이 와도 예수 향기 풍길 수 있는 백합화로 변해가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섬김에는 항상 향기가 있었습니다. 주님이 가시는 곳에는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과 동시에 항상 예수님의 인격의 향기가 풍겨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라진 뒤에도 그 인격의 향기가 남아서 사람들을 감동 받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생각하면 너무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이 있습니다. 방배동 교회 예배당에 있을 때 식당에서 사람들이 봉사하면서 언쟁하거나 마음 상하는 이야기가 들려왔습니다. 교회 와서 주님을 위해 봉사하고 일하는데 그럴 일이 뭐가 있습니까? 흉금을 터놓고 형제자매로 손잡고 이야기하고 이해하고 다독이고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고 존중하면서 하나님 섬기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 많이 성숙해졌습니다. 그런데 아직 멀었습니다. 더 성숙해져서 여태까지는 많은 새로운 교인들이 여러분 예배드리는 것 보면서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데 이제는 섬기면서도 은혜를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바로 정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존귀 영광은 우리 주님께 돌려드리면서 섬기는 그런 섬김이구나’ 하면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계속 똥풀로 살지 말고, 오늘 섬기면서 자기를 죽이고 더 많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서 섬기고 섬기고 섬겨서 백합화같이 잘 성숙한 성도들이 되어서, 고난이 올 때 오히려 섬김의 고단한 현상 가운데에서 예수의 향기를 더 많이 날리는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끝.
7. 속죄와 함께 드린 번제
“만일 힘이 어린 양에 미치지 못하거든 그 범과를 속하기 위하여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여호와께로 가져가되 하나는 속죄 제물을 삼고 하나는 번제물을 삼아(레5:7)”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시리즈를 계속 하면서 오늘 레위기에서 제가 최근에 은혜를 받은 한 구절을 가지고 설교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여기에 보면 죄를 지었을 때 죄를 속하기 위한 제사의 규례가 나옵니다. 그 당시에는 제사를 드리는 것이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죄를 용서 받는 유일한 길이었으니까 사람들은 이렇게 해서 죄를 용서 받는 일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 그 죄를 속하기 위해서 원칙적으로 양의 암컷의 새끼나 염소가 제물로 필요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얼마나 무리가 없으신 하나님이신지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신 것이었습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참 은혜가 많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살 때 당당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높은 지위에 오르지 못한 그 사람의 신분이나 가난함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하나님을 믿고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런 것 때문에 스스로 주눅이 들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뿐만 아니라 또한 소극적일뿐 아니라 적극적으로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을 하나님 앞에서 구현하면서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헛된 것이야’하는 말은 솔로몬같이 왕위에 올라야지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젊음도 헛된 것이고 다 헛된 것이야’하는 말도 젊은 사람들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정말 헛되고 소망이 없어’하는 말은 돈 많고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만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본질을 깊이 꿰뚫어 본 사람이면 누구든지 다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 부분은 위로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죄를 용서받는 규례를 말씀하시면서 양 암컷 새끼를 혹은 염소를 자기의 죄를 위해 하나님 앞에 바치라고 말씀하실 때 가난해서 도저히 그것도 주님 앞에 바칠 수 있는 여유를 가지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배려를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위한 배려의 장면에서 이 구속과 섬김을 위한 상관관계를 설명해주는 그림과 같은 장면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 앞에 속죄 제사를 드리러 올 때 그 제물이 집비둘기나 산비둘기나 어떤 것이든지 두 마리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는 속죄 제사를 드리는데 다른 제사와 똑같이 손을 얹고 기도하면 제사장의 손에 의해서 그 죄가 전가되고 그것을 꺾어서 목을 자르고 피가 뚝뚝 떨어지면 그 피를 단 사면에 뿌리고 나머지 피는 단 아래 흥건히 흐르도록 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속죄의 제사입니다. 그래서 제사를 드리러 온 사람 자신의 죄를 위해서 그 비둘기가 대신 목이 잘리고 피를 흘리면서 죽어가는 광경을 보면서 죄의 무서움과 하나님의 공의의 엄격하심, 자기가 그렇게 목이 잘리고 피가 쏟아져야 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불순종했는데도, 짐승을 대신 죽여서 자기에게는 용서의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속죄의 사랑에 감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이어서 곧바로 등장하는 또 다른 제사입니다. 그것은 번제입니다. 이 번제는 태워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 번제는 온전한 헌신을 의미하는 제사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또 한 비둘기를 잡아서 올려놓고 태워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죄의 용서라고 하는 하나님의 행위 속에 이미 헌신을 향한 소명이 포함되어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섬김이나 헌신을 통해서 속죄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설명하면 구차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우리의 속죄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흘리신 보혈의 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직 그것에 의해서만 우리의 죄는 하나님 앞에 속해지고 그것에 의해서만 그리스도 예수의 우리를 위해 흘리신 그 보혈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유효한 효과를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건, 구속의 보혈을 우리 각 개인에게 적용되게 만드시는 분은 성령님이신데 우리의 믿음을 사용하셔서 은혜라고 하는 방식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 구원을 적용받게 해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과 그의 흘리신 피 이외에 다른 어떤 우리의 섬김이나 헌신도 우리의 구속을 가져오는 원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사실이지만 오늘 여기에서 보다시피 우리들이 제대로 구속의 의미를 깨닫는다고 하면 그 속에는 반드시 헌신의 소명이 함께 들어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여러분만 하던 20대 초반에 그렇게 사상적으로 방황하고 괴로워하다가 주님을 영접한 다음에 혼란스러운 부분 중 하나가 그것이었습니다. 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받았는데 가만히 살 수가 없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이 인생의 어두움 속에서 건져 주시고 도저히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버거워서 이 세상을 등지고 싶었던 젊은이에게 주님께서 참으로 그 구속의 은혜에 힘입어서 이 세상에 사람으로 살 수 있게 하셨으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데 그 큰 사랑과 용서의 은혜를 받았는데 가르쳐 주질 않아서 어떻게 살아야 되는 것인지 모르겠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그 답은 그냥 살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사람답게 살아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 심오한 답인데 하나님이 나를 구속의 은혜로 이렇게 살려 주셨고 거저 주신 은혜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성격이 거저가 싫었습니다. 한국 사람은 공짜 좋아한다고 하는데 저는 예외입니다. 저는 싫습니다. 불쾌합니다. 왜 거저 줍니까?
(예화: 주유소에서 휴지나 생수를 주는데 싫다. 기름 제대로 넣고 값이나 올리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런데 거저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주셨으니까 저로서는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거저 구원을 받았는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는 것입니다. 받을만한 정도의 선물을 받으면 부담이 안 되지만 전혀 그렇게 생각 안 되는 사람이 과분한 선물을 가져다주면 고통입니다. 그래서 무슨 꿍꿍이가 있나 하고 고민하게 됩니다.
(예화: 교수 시절에 학생이 선물하면 이것이 정말 나를 존경해서 주는 선물인가 점수 를 올려달라는 것인가 하고 성적표부터 보았다)
그냥 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엄청난 답이었습니다. ‘인간으로 사는 것이 그렇게 힘들었다고 하는데 나 예수 그리스도가 너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었으니 이제는 하늘 자원을 힘입어서 인간답게 참 사람으로 살아라’하는 것이 지금까지 싸우고 있는 숙제입니다. 이것이 정말 무거운 숙제입니다. ‘인간 같지 않게 살아라’하면 쉬운 숙제입니다. 그런데 ‘사람답게 살아라’하면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버렸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 속에는 이미 소명이 내재되어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섬김을 통해서 구원 받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속에는 이미 소명이 내재되어있습니다. 이유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거기에 소명이 포함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구원 속에 그런 소명이 포함되어있는데 사실 구원 받았을 때 우리에게 주신 소명은 총체적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으로 여러분들을 구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처음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만났습니다. 깊이 회심하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보니까 자기가 정말 인간 같지 않게 살아온 것입니다. 걸어온 걸음걸이마다 다 죄에 피 묻힌 발자취입니다. 그래서 깊이 회개하고 ‘예수님 왜 날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까? 주님의 은혜 너무나 감사 합니다’하고 깊이 통곡하면서 주님의 십자가를 영접했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은혜를 받았을 때 마음속에 떠오르는 기쁨은 ‘이 크고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받았으니 수재의연금 내러 가야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수재의연금 내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그것은 개별적이고 총체적인 인생에 대해서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만나고 나니까 나는 아직 그 계획이 무엇인지 모두 모르지만 그분의 마음 안에 있는 내 인생을 향한 모든 계획을 받아들이기 원하고 그것을 받아들인 가운데 내 인생의 하나의 계획이 완성되어가는 과정이 하나님이 이 온 우주를 창조하고 구속하신 그 계획에 기여하기를 바라는 진실한 마음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신학적이고 논리적으로 말하지는 못하지만 십자가 앞에 깊이 엎드려져서 흐느껴 울 때의 마음이 이미 그 마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경험 그 속에서 아는 속죄의 은혜는 소명을 포함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우리에게 총체적인 소명을 가져다줍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지식의 빛이 사라져 버리면 그렇게는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지 그렇게 하는지 모르고 방황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믿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회개의 눈물이 흐르자마자 책부터 봐야 합니다. 성경책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공부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사랑의 학교, 진리의 학교에 입학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진리를 탐구해가며 배워야 합니다. 첫째는 성경책을 읽고 있고 두 번째는 어떤 책을 읽고 있고 세 번째는 가슴이 미어지는 기도의 제목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매일매일 순종하며 살아가는 표징 중의 하나입니다.
그렇게 해서 총체적인 것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또 생각해야 될 것은 그 총체적인 것을 주님이 주시지만 그 총체적인 인생의 계획은 개별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계획의 연결 속에서 성취되어가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응답 받아서 대학에 들어왔으면 열심히 공부해서 잘 졸업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도 4년 걸립니다. 한 학기로 축소해서 생각하면 도저히 등록할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방법으로 등록금을 공급해주셔서 간신히 등록했습니다. 그러면 성실하게 한 학기를 잘 다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한번만 주어지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계속 은혜를 주십니다. 그 안에도 개별적인 소명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헌신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 개별적인 상황 하나하나에서 은혜를 매일 경험하며 그 은혜 안에 담긴 하나님의 소명을 느끼고 그 소명을 따라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면서 살아가는 삶이 모두 연결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간 하나님의 사람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학교 다니면 교회 와서 기타만 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낙제나 하면서 교회에 와서 기도가 됩니까? 기도가 되면 그 사람은 인생관과 세계관을 잘못가진 사람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노력하지 않고 방치된 삶의 영역들이 널브러져 있는데도 열렬하게 기도가 된다면 그 사람의 삶에 있어서 신앙은 전인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회사에서는 무능하고 게으른 사람으로 찍히면서 회사에서 주보나 만들고 앉아있고 구역식구 심방이나 한다면 제가 회사 사장이라고 해도 내보낼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상 없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개별적인 상황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그 은혜를 따라서 매 순간 개별적인 은혜를 받고 나면 그 은혜를 주시는 작은 소명들이 거기에 또 있습니다. 그러면 바로 그것이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라는 개별적인 상황 속에서의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매일매일 은혜 안에서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살기 원하시는지 그 소명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니까 순종하게 되고 순종하니까 열매를 맺게 되고 열매를 맺으니까 하나님께서 더 많이 당신 자신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성장이 이루어져 갑니다. 그러니까 미래의 커다란 꿈만 꾸지 말고 지금 당장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따라서 개별적인 상황에서 하나님 앞에 의무를 다하며 섬기도록 세워진 그 자리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 삶의 자세가 없으면 은혜의 공급도 끊깁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 그 은혜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보면서 은혜를 주십니다. 은혜를 보내주시는데 계속 속에 넣고 죄와 섞어서 계속 부패시키면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시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이 은혜를 주시면 그 주신 은혜를 순결하게 사용해서 안으로는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죄를 죽이고 밖으로는 그 은혜의 힘으로 주님을 위해서 봉사해서 주님이 은혜를 주실 때 전달해주시는 당신의 마음이 이 섬김을 통해서 바깥으로 유출되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마음이고 생각입니다.
그렇게 살려고 애를 쓰면 은혜가 고갈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서 은혜가 잘 보존된 위에 하나님이 더 많은 은혜를 계속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하나님의 성품을 섬김 속에서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구속 속에 깃들여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총체적인 삶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받아들이게 만들고 개별적인 상황에서 주어지는 또 다른 은혜들은 개별적인 상황에서 우리로 하여금 헌신을 향해 소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그렇게 하지 않을 때 그 은혜는 반드시 부패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죤오웬은 자신의 논문 속에서 쉽게 회복될 수 없는 불순종의 죄를 열거하는 가운데 중요하게 꼽고 있는 것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주님의 특별히 주신 은혜, 혹은 은사를 주님을 위해 사용하지 않을 때 그 불순종은 쉽게 용서받기 어려운 불순종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매일매일 사모하고 그리워하는 그 은혜 안에 헌신을 향한 소명이 담겨있는 지를 보여주고 그 소명을 따라서 섬기는 삶을 살 때 예수께서 우리를 구속해주신 그 구속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이전에 핍박자요 포행자였으나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충성되이 여기셔서 나에게 직분을 맡기심이니’하면서 감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속의 은혜를 받고 나니까 그 구속의 은혜 안에 이미 자기를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고난 받는 사도로 부르시는 소명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소명을 따라서 주님을 섬기면서 살다가 보니까 자기와 같은 죄인을 구속해주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했던 것입니다. 그 편지를 쓸 때 이 사도 바울이 감옥 속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놀라운 비밀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중 어떤 사람은 이렇게 꼭 묻고 싶으실 것입니다. ‘목사님,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잘 섬기면 구속의 은혜가 새로워진다고 말씀하셨는데 옛날에 여기저기서 많이 섬겼는데 탈진되기만 하고 구속의 은혜는커녕 소진되는 것 밖에는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일이 여러분들을 망쳐놓은 것이 아니라 그 일에 임하는 여러분들의 신앙의 방식이 여러분들을 망쳐놓은 것입니다. 일은 사람을 망쳐놓을 힘이 없습니다. 일은 일 그 자체로서는 우리의 영혼에 그런 죄악 된 영향을 미친다든지 신령한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거룩해 보이는 일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으면서 그 일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일로 인해서 거룩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 맡기신 일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방식대로 감당하지 않으면 그냥 그것은 일을 하는 것일 뿐이지 거룩하신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거룩의 영향력들은 우리 자체 안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과 접촉할 때에 비로소 우리들이 거룩의 경험들을 소유하게 되고 또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신령하다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냥 일을 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일을 해서 열매를 맺기 위해서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섬김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루고자 하시는 그 일의 성취를 우리 자신이 전심으로 기뻐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전심으로 기뻐하는 동기가 바로 순종의 동기입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그 열매를 맺음으로 말미암아 궁극적으로 성취하려고 하는 하나님의 일에 대한 계획을 우리가 전심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 계획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기뻐하고 있어야지만 순종이 가능한 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그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을 전적으로 기뻐하면서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것도 아깝지 않고 우리가 주님께 다 드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자기 사랑을 비워야합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자기’라고 하는 것은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자기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자신의 논문 속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기 사랑은 나쁘다고도 할 수 없고 좋다고도 할 수 없다. 다만 자기사랑이라고 할 때 그 자기가 어떤 자기이냐가 문제이다. 하나님 앞에 순전하게 섬기며 살아가려고 하는 그 자기일 경우에는 자기 사랑과 주님을 향한 전적인 사랑이 절대로 충돌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계획에 반하여 살려고 하는 그 자기를 사랑할 경우에는 우리를 구속하고 우리를 순종하도록 부르신 하나님의 총체적인 계획에 도전하지 않고는 자기를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 사랑을 비움으로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향한 전적인 사랑입니다. 그 안에 이미 이웃을 향한 사랑도 내포되어있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전적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하나하나의 기초를 밟고 움직여서 우리들의 영적 성장이라고 하는 것이 이루어지는데, 오늘 아침에 휘돌아가면서 성장하는 것에 대해서 그림처럼 묘사했습니다. 그 속에 반드시 나오는 것은 순종과 열매입니다. 아는 것도 이미 삶의 현장과 분리된 앎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하는 것은 더더욱 삶의 현장과 분리된 진공 상태에서의 감정의 경험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에는 피가 묻어있습니다. ‘예수의 사랑’하면 떠오르는 것이 붉은 피입니다. 진공 상태에서 흘린 피가 아닙니다. 삶의 현장에서 흘린 피입니다. 순종은 더더욱 치열하게 자기를 불순종하게 만드는 요소들과의 싸움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획득되는 순종입니다. 열매를 맺는 것이 이 세상의 대적하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맺어지는 인격과 삶의 열매입니다. 그러니까 이 네 개의 사이클 중 어느 것도 삶의 진지한 현실을 떠난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들이 삶의 현장에서 실제로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 아닌데 그 원리에서 이탈되었거나 잘못 섬기고 있거나 혹은 섬기지 않고 있는데 이 휘돌면서 영적인 성장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에 대한 부채를 갚는다는 개념에서 이 섬김이 이루어지면 안 됩니다. 자기 자신의 영적인 성장의 필수적인 현장인 것입니다. 그것이 큰일이냐 작은 일이냐는 문제가 안 됩니다. 그 일의 크기를 가지고 하나님이 그를 성숙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하는 방식, 그 일에 임하는 믿음, 그 일속에 드러나는 하나님과의 관계, 그 일속에서 입증되는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 이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를 성숙시켜 가시는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심지어는 소자 하나에게 냉수를 준 것도 그 상을 결코 잊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일의 크기가 문제가 아닙니다. 무엇을 하고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한 손에 세계를 다 움직이는 어마어마한 일을 하고 있어도 그가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교회 마당에서 쓰레질을 하고 걸레질을 하면서도 그 작은 섬김을 통해서 자신이 놀랍게 휘돌아 영적으로 성장하는 이 과정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이라도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세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렇게 진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영혼의 변화를 갈망하는 것만큼 그렇게 진지하게 중요한 과업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드러나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저는 너무 까다롭고 꼬치꼬치 따지고 자세하게 원리를 이야기하니까 교회에서 인기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다 인기 없어도 한분에게만 인기 있으면 됩니다. 그러니까 모든 일에 마음이 배이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인을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대 자신을 위해서 필요합니다. 그러면 놀라운 이 은혜가 우리 안에서 생겨나게 됩니다. 더군다나 그것이 정말 이름도 없을 때 빛도 없을 때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않을 때 그때에 그런 섬김이 우리 자신의 성화에 가져다주는 그 효과는 엄청난 것입니다. 섬김 자체가 우리를 성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서는 그 신앙의 자세와 그 영혼의 원리들에 의해서 그 섬김이 놀랍게 우리를 성숙시키는 그 놀라운 은혜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모여 앉아서 순결한 신앙에 대해서 공부를 몇 시간 하는 것도 우리에게 큰 은혜가 되겠지만 그 핍박과 고난이 있는 일제시대 같은 때 핍박과 고난 속에서 불결해 지도록 강요받는 상황 속에서 박해를 받으면서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피를 흘리는 잠깐 동안의 상상의 경험이 오히려 주님 앞에 순결해지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탁월한 통찰을 가져다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잘 간직하며 살기 어려운 이유, 그리고 그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이 성화의 원동력이 되기 때문에 그것을 그렇게 현재적으로 간직하며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데도 사람들이 그것을 잘 못하는 이유가 삶이 너무 합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기에 삶이 너무 합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게으름, 자기 자랑, 교만, 사람과 도저히 어울리지 못하는 독선, 인색함, 이런 것들로 범벅이 된 가운데 그런 자신의 잘못된 본성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 한도 내에서 이름 있이 빛도 있이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자세로 섬기는 섬김이 이 사람의 성화를 자꾸 저해하고 질이 나쁜 사람으로 변해가도록 만드는 역할을 할 뿐, 일을 정말 쇄신시키고 변화시키는 그런 것은 안 됩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요구되는 것이 올곧음입니다. ‘이것이 옳다면 내가 똑바로 이것을 행하며 살아야겠다’고 하는 일관된 의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 올곧음이 자신 안에 계속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끊임없이 정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성경의 예를 보자면 시인이 ‘내 마음이 확정되고 확정되었사오니 비파야 깰지어다 수금아 노래할 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했습니다. 고정되어서 ‘내가 이렇게 섬기면서 살아야 겠다’ 하는 것을 끊임없이 의지적으로 자신의 삶 속에 적용시키면서 고난이 오면 그 고난 속에 그리스도의 죽으심 속에 참여하고 기쁨이 오면 그 속에서 주님의 부활에 참여합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자기 성숙의 기회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나쁜 사람은 남이 알아줄 때 까지만 하는 것입니다. 안 알아주면 접습니다. 또 두 번째는 자기 싫증이 발생할 때까지만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참을 수 있을 때까지만 하는 것입니다.
쇠에 용접기로 불을 뿜으면, 고체는 자기의 존재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성격을 가지고 있으니까, 쇠 입장에서는 뜨거운 열을 통해서 자기의 성질을 변형시키려는 시도가 가해지는 것입니다. 계속 견디는데 견디고 있는 동안에는 변형이 안 생깁니다. 그런데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되는데도 더 많이 있을 때 녹아내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일 저일 많이 섬겼는데도 지겹게 성화가 안 된 사람이 있고 특별한 이력서에 남을만한 주의 일을 한 적이 없는데도 상당히 성화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불을 쬐어서 녹아내릴만한데 집어치워버린 것입니다. 거기까지 많은 고생을 해서 고난을 받았고 참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한계점에 와서 이제 녹아내리기 시작하고 변화가 일어나려고 하는데 집어치워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또 다른 상황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면 남이 보기에는 늘 일하는데 일할 뿐이지 주님의 손에 의해서 변화되고 빚어져본 적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그렇게 크고 괄목할만한 일은 아닌데, 조그만 일이고 어린 아이들 몇 명 가르치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거기에서 어느 한순간 깊은 고통이 느껴질 때 그것을 믿음으로 반응하면서 참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의 섬김에 복을 베풀지 않으실까. 이제 하나님의 은혜가 다하였는가.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었기에 나의 섬김에 축복이 사라지는가’하며 고통을 하게 되면 아픕니다. 그 속에서 자기가 끊임없이 죽는 것입니다. 그런 시간이 지나면서 녹아내리기 시작하며 변화가 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곳에서 계속 섬겼습니다. 그리고 그런 작용이 계속 주어졌습니다. 남이 볼 때는 크고 위대한 일을 한 것이 아닌데도 놀랍게 하나님께서 어루만지시면서 그를 새사람으로 고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까?
일 크게 해봐야 고생만 하는 것이지 뭐 신날 것이 있습니까? 사람들에게 박수갈채 받고 유명해시고 해봐야 고달프지 목욕탕을 마음대로 갑니까, 놀러를 갑니까? 가는 곳마다 아는 사람 만나는 것이 얼마나 싫은데요. 뭐가 좋습니까? 주님이 정말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주님이 가치 있게 생각하시는 것에 가치를 두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런 인생관을 안 갖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디에 세워주시든지 거기에서 못 박히신 주님을 만나고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나면서 섬길 때 그 구속의 은혜가 계속 생깁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신비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성화에 있어서 진전이 없다고 저는 굳게 믿습니다. conformity(?)의 교리, 그리스도에 의해서 찍혀 나오는 것, 그렇게 함으로서 그리스도를 본받게 되는 것, 그것을 통해서 계속 하나님을 닮아가고 주님과 함께 동행 하는 것을 터득해갑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은혜를 받고 구속의 은혜, 개별적인 상황에서 주시는 은혜를 받은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할 삶입니다.
여러분, 건강하시지요? 젊지요? 아직 매인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가진 재물은 충분하지 않지만 젊고 건강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어두운 이 세상을 보면 슬픔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이든지 주님을 위해서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사용해주시라고 주님께 기도하면 주님이 기가 막히게 섬길 곳을 보여주십니다. 거기에서 주님을 섬기면서 항상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러면서도 주님의 말씀의 은혜 안에서 자라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큰 사람의 인생입니다. 끝.
8. 이 땅에서의 섬김엔 끝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23:43)”
오늘 여기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마지막으로 구원하셨던 강도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 강도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신약에서 가장 럭키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마지막까지 하나님 안 믿고 자기 살고 싶은 대로 살다가 죽는 순간에 주님 영접하고 하늘나라에 갔으니까 참 행운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행복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렇게 해서 자기 살고 싶은 대로 신앙에 매이지 않고 살았더니 그 인생이 어떤 인생이었습니까? 강도짓이나 하며 산 인생이었습니다. 매일 체포당할 위험에 떨면서 훔친 돈으로 먹고 마시면서 그렇게 육체의 향락을 따라 살았던 사람입니다. 사실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이 사람의 인생이 많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인생을 주목하기 전에 먼저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한번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셔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셨습니다. 죽으시기 직전에 마지막 예수님이 이 땅에서 섬기신 섬김이 오늘 여기에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마지막으로 섬기신 그 섬김은 바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는 한 강도에게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비춰주시고 그 영혼을 구원하신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강도 둘이 십자가에 매달려서 함께 예수님을 욕했습니다. 야사에 의하면 이 두 사람의 이름이 ‘디마스’와 ‘게다스’라고 전해져 내려옵니다. 이름이 비슷한 것을 보면 형제였을 지도 모르고 어떻든 동업자였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자신들도 양쪽에 매달리면서 세상을 향한 분노에 가득 찼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십자가에 매달려서 ‘내가 정말 여러분들을 괴롭힌 죄인입니다. 저희는 죽어 마땅합니다’하는 반응을 보였을 리 없습니다. 그래서 그 분노가 옆에 계신 예수님께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욕을 퍼부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회개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영접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가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깁니다.
물론 거기에는 예수님의 섬김이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가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느 면으로 보나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죽어 가시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뵈오면서 이 사람의 마음에 아주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의 마음에 일어났던 놀라운 변화는 조금 아까까지 생각했던 그런 분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서서히 죽어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말할 수 없는 사랑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자기를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그 악한 무리들을 향해서 저희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그 모습 속에서 이 사람의 마음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죽어 가실 때 자기를 그 낙원에 데려가 달라고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살아온 삶이 너무 악하고 죄로 가득 찬 삶이었기 때문에 감히 예수님께 그렇게 말씀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하기를 ‘당신의 나라에 이를 때 나를 기억해 주시옵소서’ 마치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자기의 영혼을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신 예수님을 유일한 희망으로 알고 그 십자가 아래 엎드린 죄인처럼 그렇게 예수님께 자비와 은총을 구했던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는 동료 사형수에게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며 긍휼을 구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예수님의 섬김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유대 광야에서 기도하시며 그렇게 시험을 받으신 것이 예수님의 섬김의 시작이었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노라고 외치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섬김의 시작이었다면, 죽어가는 한 사람으로서 죽어가는 또 한사람의 영혼에게 당신의 복음을 전하셔서 그 영혼을 하늘나라에 이르게 하시는 그 일이 예수님의 생애를 마감지은 마지막 섬김이었습니다.
그 처음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이렇게 강도를 구원하는 섬김에 이를 때까지 예수님의 생애 전체는 액체의 생애였습니다. 피와 눈물과 땀으로 얼룩진 가운데 섬김을 다하신 종 된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 예수님의 본을 따라서 많이 종 되고 영혼들을 섬기고 주님을 섬기려고 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알려지시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섭리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강퍅한 가슴을 안고 살아가던, 이 철벽같은 가슴을 가진 이 강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며 죽어 가시는 주님의 섬김을 통해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생애입니다.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자기를 다 버리신 생애를 사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삶이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분의 생애를 많이 묵상하는 것만큼 도움을 주는 때가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있기까지 그분이 걸어오신 모든 발자취, 걸음걸음마다 자기를 낮추시고 일체 자기를 드러낼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철저히 종 되어 섬기신 예수님의 생애, 그 생애를 묵상할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빈둥거리며 놀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섬기면서 많이 헌신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결코 잘 섬기고 있으며 나의 섬김이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생애는 단순한 섬김, 그 이상의 자기를 쏟아 부은 고단한 생애를 사신 인생의 발자취를 남기셨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에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오셨고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미 채찍에 무수히 맞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서 양손에 못 박히고 다리에 못이 박혀 서서히 물과 피가 빠져나오면서 운명하고 계시는 중이었습니다. 흐르는 눈물, 타오르는 목마름, 그 피로 물든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죽어 가시면서 또한 죽어가는 사람을 섬기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분의 생애의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예수님의 큰 사랑, 희생의 공로에 의해서 구원을 받은 우리가 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없이 그냥 자기나 드러내기를 좋아하면서 인생을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을 말할 수 없이 부끄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가 정말로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고 그의 십자가의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진실로 깨달았다면 그런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강권하기 때문에 그렇게 평이하고 방종하고 나태한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못 박힌 강도보다 못 박힌 채로 그 죽어가는 강도를 구원하시고자 마지막 남은 모든 지성과 힘을 모두 쏟으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이러한 예수님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어느 한곳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주님이 나를 구원의 은혜로 불러주신 것은 바로 여기에 나를 세워주시기 위함이다’라고 하는 은혜 속에 담긴 소명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가슴조리며 섬기는 사람이 아니면 모두 부패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미 그의 삶의 초점은 자기 자신이고 그의 삶을 움직이는 동기는 비뚤어진 자기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의 인생에는 찬란한 은혜의 빛, 하나님과의 말할 수 없는 평화 같은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는 근무 중인 사람입니다.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항상 예수님에 대한 묵상, 그분이 우리를 위해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 앞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더러운 죄인들이었고 그렇게 불결한 죄인을 그 십자가에서 건져주신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소명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깊은 감화, 그런 은혜를 우리들이 마음 깊이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뒤따라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당신이 걸어가신 길을 걸어가며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기는 사람들에게 지식을 더해주십니다. 그래서 남이 알지 못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보게 해주시고 남이 깨닫지 못한 하나님의 놀라운 말씀의 세계에 대해서 알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빈둥빈둥 놀던 신령한 그리스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만약에 있었다면 그것은 가짜입니다. 진짜 신령한 그리스도인은 항상 피 묻은 전투복을 입고 이 세상에서 근무 중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 싸움이 내게도 있으니 지금도 너희가 듣는 바라’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할 때마다 우리가 무엇인가 조국 교회의 한 모퉁이에서 정말 소명의식을 가지고 섬기고 있어야 합니다. 미래가 아니라 지금 무엇인가 섬기고 있어야 하고 거기에서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셔서 그 섬김을 다하게 하시는 것을 경험하면서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강도를 보면서 우리들이 깨닫습니다. 이 사람은 일생동안 강도질하면서 산 사람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악한 사람이니까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인정이 없는 시선으로 강도를 보는 것입니다. 결국 강도를 이렇게 비참한 삶의 종말로 밀어 넣었던 것은 그가 악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가 어두움 가운데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누구신지도 몰랐고 죄가 무엇인지도 몰랐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도 몰랐고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그 죄에 형벌이 따른다는 사실도 몰랐고 죽은 후에는 지옥과 천국이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두움 속에서 자기의 육체의 악한 본성을 따라 살았고, 악을 저질렀기 때문에 형벌을 면하지 못하고 결국 오늘 사형 언도를 받고 십자가에 함께 매달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가장 절망적인 이 죄인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모든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이 자신이 너무나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생각하지 못하도록 입을 막아버리셨습니다. 가장 흉악하고 끔찍할 정도로 더러운 이 죄인이 낙원에 이르는 첫 번째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말입니다.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 사단의 권세에 사로잡혀서 육신의 욕망을 따라서 짐승처럼 살던 이 사람의 어두움은 십자가에 매달린 순간까지도 계속 되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순간 말할 수 없이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예수의 섬김으로 인하여 그의 어두운 영혼에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정말 기적과 같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기에서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복음의 빛이 들어오자 그는 지금 자기 옆에서 매달려 십자가에서 죽어가고 있는 나사렛의 이 젊은이가 자기와 같이 더러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여기에 매달린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를 확신하게 되었고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게 되었고 자기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지만 그분이 죽으시는 죽음은 지금 그분 옆에서 죽어가고 있는 자기 자신의 죽음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죽음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는 낙원이 있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고 죽음이후에는 엄중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지금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어가는 이 육신의 죽음보다도 더 커다란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인생이 끝나는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었으니 죽음 이후에 시작되는 새로운 생명이 견딜 수 없이 무서웠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찬란한 빛이 들어왔고 이 강도는 그 십자가에서 이제 자기를 어찌할 수 없는 이 비참한 상황에서 건져내셔서 자기를 그 영원한 죽음에서 벗어나게 해주실 수 있는 분은 아이러니 하게도 지금 또 다른 죽음을 죽어가고 있는 그 예수 그리스도 그분 밖에 없다는 사실을 굳게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분께 간절히 탄원했습니다. ‘나를 구원하시고 나를 건져주시고 나를 용서해주시고 나를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당신의 나라에 이를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당신이 아니면 아무 희망이 없는 정말 불쌍한 죄인이니, 너무나 죄 가운데 살았기 때문에 도와달라고도 감히 말할 수 없는 비천한 죄인이 당신 옆에서 십자가를 지고 죽어갔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십시오’한 것입니다. 사실 신약에서 이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굉장히 놀라운 믿음입니다. 티끌만큼의 의심도 없고 티끌만큼도 그리스도를 덜 의지하는 것도 없는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오직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그 예수 그리스도께 자기의 영원한 운명을 전적으로 의탁하며 용서를 비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만을 바라는 그런 죄인의 모습을 예수님께서 발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죄인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싶어 하셨는데 이렇게 당신을 온전히 의지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용서해주시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지극이 평온한 음성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어가고 있는 사형수의 음성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음성으로 죄인의 마음에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리고 이 흉악한 강도는 자기를 얽어맨 그 모든 사망의 줄을 끊고 그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손잡고 낙원에 오르는 첫 번째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얼마나 럭키한 사람이고 행복한 사람입니까?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 이 강도의 죽음을 보고 그것이 럭키하고 행복한 죽음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구원의 한쪽 측면만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 살았을 때에는 길을 몰랐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 수도 없었고 예수님을 섬길 수도 없었고 예수님이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을 도와드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두움 가운데에서 빛이 들어왔습니다. 찬란한 빛이 들어오고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눈뜨게 되었습니다.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제는 창조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알았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도 알았고 예수님 없이 살 수 없다는 것도 알았고 예수님의 은혜가 너무 크고 놀랍기 때문에 그 은혜를 간직하고 살아야 겠다는 것도 알았는데 그에게는 살아갈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이 강도가 구원 받은 후에 딱 한번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옆에 있는 강도가 예수님을 계속 욕할 때 그러지 말라고 하며 예수님의 역성을 든 것, 딱 한번 섬겼습니다. 그러나 그 딱 한 번의 섬김은 하늘나라 가기에는 너무 아쉬운 섬김이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에게 일주일의 말미를 더 주셨다면 이 사람이 일주일 동안 무엇을 했을까요? 예전에 털다 만 집을 다시 찾아서 강도질 했을까요? 자기를 고발한 사람을 찾아내서 복수하러 칼을 차고 길을 떠났을까요? 아니면 ‘일주일밖에 안남은 인생이니 오늘은 먹고 내일은 마시자’ 했을까요? 성경이 그런 경우를 상정하고 있지 않으니 우리도 상상할 수 없지만 그런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은 그는 그 일주일, 168시간을 촌음을 아껴 쓰며 하나님이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 자기에게 가장 살게 하시고 싶으셨던 그 일, 되게 하시고 싶으셨던 그 존재가 되는 그 일을 그 168시간을 모두 사용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째깍 째깍 째깍 ...... 초침 소리를 울려 퍼지는 종소리처럼 느끼면서 그는 매순간 순간을 최선을 다해서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갔을 것입니다. 아직도 이 사랑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대들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분이었으며 나를 구원하신 것이 바로 그 증거라고 외쳤을 것이며 주님이 끌어안으시며 아파하셨던 병든 자와 함께 살고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면서 자신에 대한 사랑은 아랑곳없이 168시간을 살았을 것입니다.
주님의 손을 잡고 이런 섬김의 기회도 누리지 못한 채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그 강도에게 이 땅에 살아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부러운 이웃들이었을까요? 이 세상에 살아있다고 하는 그 자체가 매우 특별하게 선택된 것입니다. 지금 여기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특별히 선택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오늘이 바로 어제 죽어간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내일입니다. 그들에게는 내일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내일을 오늘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이 날은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위한 최선을 요구하는 날입니다. 어제는 후회해도 이미 지나갔고 내일은 확신할 수 없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떨어질 지도 모르고 건강을 잃어버릴 지도 모르고 주님이 내 생명을 거둬가실 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오늘이라고 부르는 이 날에 소명을 느끼면서 하나님이 세워주신 자리에서 오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강도가 하루 휴가 내려온 날인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저는 시간을 허비하면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너무 아프고 그 사람이 특별히 젊은이일 경우에는 더욱 가슴이 아픕니다. ‘왜 저렇게 살까?’ 지금 게으르게 살면, 하나님을 특별히 섬기는 것 없이 살면, 지금은 자의에 의해서 그런 삶을 선택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타의에 의해서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게으름 속에서 주님을 위해서 섬기는 것 없이 방종하게 젊은 시절을 보내고 나면 주님이 순결한 사람을 쓰시고 싶으신데 순결하지도 않고, 재능 있는 사람을 쓰시고 싶으신데 땅에 깊이 묻어놨고 개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난 재능도 없습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말씀의 깊은 세계를 이해한 사람을 쓰고 싶으신데 항상 개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고 습득해야 할 의무에 충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총체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진리를 부르짖고 살지만 가슴 속에 담겨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젊어서는 스스로 태만한 삶을 택했지만 노년에는 하나님이 써주시지 않으셔서 태만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어제는 너무 바빴습니다. 저를 만나려고 두 팀, 세 팀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끝나면 또 들어오고 끝나면 또 들어오고 끝나기 전에 비서가 빨리 본관으로 가서 강의하라고 하고 강의 끝나고 오면 또 기다리고 있고, 너무 힘들었습니다. ‘목사님 너무 힘드시죠?’하는데 은혜가 떨어진 날이었다면 ‘정말 못 살겠다’했을 텐데 어제는 은혜가 충만했습니다. ‘여보, 그렇게 힘들어서 어떻게 해요?’하는 말에 ‘아니, 메뚜기도 한철이야. 칠십 넘어봐 오라고 하는 데도 없어’했습니다.
저는 돌아다는 것을 참 좋아하는 성격입니다. 변화 받기 전에 취미가 여행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돌아다니면 안 됩니다. 저는 스스로 제 별명을 ‘일일광부’라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제 속에 뭐가 든 게 있겠습니까? 매일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신앙의 학문을 탐구하지 않으면 꼴이 없습니다. 6개월만 여러분의 영혼에 말씀의 비가 내리지 않으면 강퍅해지지 않을 사람이 여기에 하나도 없습니다. 목초지가 변해서 독초지가 됩니다. 그러니까 매일매일 탐구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일일광부라고 생각합니다. 매일 땀 흘려서 진리의 세계를 파고 성경을 탐구함으로서 비로소 영혼들을 목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오라는 데는 많지만 안갑니다. 그렇게 돌아다니면 나중에 빈껍데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출판사에서 잡지사에서 원고 써달라고 합니다. 내가 꼭 써서 독자들에게 기여할 수 있는 것 아니면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신문 잡지 텔레비전에 얼굴 나는 것이 뭐 그렇게 대단합니까? 좋은 것 하나 없습니다. 불편합니다. 목욕탕 가도 ‘목사님, 안녕하세요?’ 슈퍼에 가도 ‘여긴 웬일이세요?’ 별로 안 좋습니다. 그래서 안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에 우리의 인생의 물리적인 길이는 잡아당길 수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이 여러분 인생의 수한을 80쯤으로 정했는데 여러분들이 170쯤으로 잡아당길 수 있습니까? 황우석 교수를 너무 기대어린 눈빛으로 쳐다보지 마십시오. 그런 기술이 발달된다고 하더라도 인생의 길이가 그렇게 늘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정해진 인생의 길이 아래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칩시다. 그 때 건성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일을 많이 한 사람과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일을 조금 한 사람 중에서 누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사람인지 문제를 낸다면 2번에 답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똑같이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었을 경우에는 조금 주님을 섬기다가 죽은 사람과 주님의 그 피어린 사랑을 자신의 섬김 구석구석에 배이게 하면서 많이 소진하도록 섬긴 두 사람 중에서 누가 더 많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느냐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2번을 택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강도는 적게도 많이도 그것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가장 행운아인 동시에 가장 구원의 참된 맛을 모르는 채 인생을 마친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손을 붙들고 십자가에 매달린 자신의 육체를 버려두고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그 강도는 얼마나 여러분들이 부러웠겠습니까? 영혼만으로는 이 지상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없지 않습니까? 육체가 있어야 되는데 육체는 이미 숨을 거두었습니다. 더 이상 그 육체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섬길 수 없었습니다. 연약한 자의 눈물을 씻겨줄 수도 없고 가난한 자를 섬길 수도 없고 무지한 자에게 예수님의 이 놀라운 사랑을 증거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것이 이 강도의 모습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땅에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선택된 것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체력과 지력과 물질적인 능력과 시간적인 여유와 재능과 모든 것을 가진 채 여기 서있고 누군가가 하나님을 위해서 여러분들을 부르고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여러분들이 가질 수 있다는 자체가 말할 수 없는 특권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있다고 하는 사실 자체는 아주 놀라운 특권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 우리는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견지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을 동시에 느끼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는 이 세상이 얼마나 허무하고 이 세상이 얼마나 철저히 소망이 없는 곳인가, 결코 최종적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사랑을 바칠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죄와 슬픔이 가득한 이 세상에는 고통이 끝이 없습니다.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 이 세상에 있는 지상의 자원이 부족해서 고갈을 느끼기도 하고 우리가 원하지 않는 죄로 말미암아서 하늘나라로부터 부여되는 신령한 공급이 끊어져서 영혼이 목마름 속에서 신음하기도 합니다. 견디기 힘들게 괴로워하고 아파합니다. 그러면서 인생을 삽니다. 이 세상이 바로 그런 곳입니다. 아침마다 매일매일 그것을 묵상해야 합니다. ‘오늘 아침이 주님이 나를 부르시는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날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괴롬과 죄만 있는 곳 나 비록 여기 살아도
빛나고 높은 저곳을 날마다 바라봅니다
내주여 내발 붙드사 그곳에 서게 하소서
그것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옵니다
주님을 섬기면서 살다가 고난이 겹치고 시련이 밀려들어서 인생의 무게를 감당하는 것이 너무 힘들 때 묵상해 보십시오. ‘잠시 머무는 이 세상은 헛된 것들이고 이 썩을 세상은 잠시 있다가 지나가는 나그네 길이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마음속에 찬연히 불타오르게 되면 우리는 눈앞에 펼쳐진 이 세상의 자원이 부족함으로 말미암는 많은 시련과 고통 너머에 있는 이 온 우주를 움직이시고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파도치는 이 현상의 세계의 피안을 향해 우리의 영혼은 기지개를 켜게 되고 거기에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해후를 기다리며 우리의 영혼은 고양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고 괴로움을 당하는 것을 인해서 불평하거나 불만하거나 괴로워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서 이 세상이 우리의 영원한 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젊은 나이에 이러한 지혜에 자주 잠길 때에 정욕에 눈멀지 아니하고 신령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또 하나 견지해야할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면서 내일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 앞에 선택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침에 눈 뜨고 일어나서 ‘하나님 또 이 지겨운 하루를 제게 주십니까? 살아있는 것이 십자가입니다’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좋아하시지 않으십니다.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하면서 일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 오늘 하루도 제게 주신 선물입니다.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도록 우리 예수님이 다시 오셨으면 하시고 싶으셨던 그 일을 계승하면서 오늘 하루를 살도록 도와주십시오’하며 희망차게 하루를 맞이해야 합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우리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저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산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부끄럽지만 그러나 미력이나마 조국교회의 한 모퉁이를 섬기면서 마음속에 항상 자리하고 있는 간절한 기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지혜를 주셔서 다른 사람보다 효율적인 인생을 살게 해주십시오’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순결한 마음, 주님을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 자기를 모두 깨트려 드리고자 하는 철저한 자기 파괴의 헌신, 이런 것들은 기본적으로 누구에게나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탁월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거기에 자기를 바친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그것 말고 또 하나입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이 주신 믿음과 은혜, 지성, 주님이 주신 건강과 인생의 경험, 모든 것을 사용해서 주님을 많이 섬길 수 있을까? 같은 공간 같은 시간 내에서 동일한 자원을 사용하고 더 많이 하나님을 섬겨서 어두움을 비추는 작은 불꽃이 타오르는 모닥불이 되고 치열하게 타올라가는 불길이 되고 마지막에는 하늘에 이르기까지 충천하는 화염이 되도록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이것은 하나의 자기 과시나 혹은 자기 번영을 향한 욕망이 아닙니다.
눈을 들어서 여러분 주위와 세상을 보십시오. 얼마나 하나님이 부르시는 음성이 많은 지 압니까? 곳곳마다 들려오는 상한 영의 탄식 소리, 곳곳마다 외치는 도움을 구하는 이들의 부르짖음, 주님이 이 땅에 계셨더라면 분명히 거기에 서서 영혼들을 섬기셨을 자리가 비어있는 것,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서 해야 할 일들은 길거리에 구르는 돌멩이처럼 흔합니다.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온전한 교회, 온전한 세상, 온전한 신자,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회를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도처에 버려진 사명이 눈에 띱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을 섬겨야 할 강력한 부르심을 느낍니다. 그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답하는 사람이 너무 소수입니다. 대답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너무 건성으로 섬깁니다.
외치는 자 많건마는 생명수는 말랐도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많이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주님을 사랑하되 통곡하듯이 사랑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자원을 박박 긁어서 주님을 위해서 모두 섬기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도 모자랍니다. 그렇게 양적으로 주님을 많이 섬기기 위해서는 두 가지 자세가 필요한데 하나는 부지런해야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시간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잘 사용하는 길은 부지런해야합니다. 게으름을 미워하고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부지런하게 살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효율적으로 사는 방법을 배워야합니다.
여러분들이 들으면 웃긴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제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간절한 계획이 이루어지면 여러분이야 못 볼 가능성이 많지만 저 죽은 후에 50년이 지나도 새 책을 계속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벌써 여러해 전에 제가 죽은 후 50년 내지 100년 출판 계획을 세워놓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간절히 원하는 것은 최소한 50년, 하나님이 허락만 하신다면 100년 정도 출간될 책들을 모두 준비하고 눈을 감는 것이 꿈입니다. 100권을 만들어놓고 죽는다면 1년에 두 권씩 누군가에 의해서 계속 출판이 되면 저자가 죽었는데도 50년 동안 신간서적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200권이면 100년 동안을, 그래서 세 세대가 바뀌도록 죽은 지 1세기가 넘는 사람에 의해서 오늘 처음 출간되는 새 책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이 땅에 있을 때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늘에 올라간 다음에도 우리가 이 세상에 저축해 두었던 섬김이 하나님 앞에 빛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겠습니까?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게 지혜가 필요합니다. 남들과 똑같은 시간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부지런하게 사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 변화를 주십시오’ 저는 지금도 그렇게 주님의 지혜를 구했고 하나님이 상당히 많은 부분 응답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동일한 조건에서 글을 쓰는 외국 저자들에 비해서 저는 두 배나 빨리 글을 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원하는 것은 깊이는 떨어지지 않고 시간은 빨리 글을 쓸 수 있는 그런 지혜를 주시도록 끊임없이 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날은 항상 봄날이 아닙니다. 한철입니다. 잠시 머무는 동안 우리가 가진 건강, 우리의 젊음, 그리고 우리가 가진 재능과 물질로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정말 한정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 주님을 잘 섬기지 아니하면 지금은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에 주님을 안 섬기지만 세월이 지나면 섬기고 싶어도 주님을 섬길 수 없는 무능한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오늘 이 강도를 생각해보십시오. 주님께 가면서 꼭 주님 섬기고 싶었는데 허락이 안됐습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고 싶고 섬길 수 있고 꼭 그렇게 살고 싶은데 생명이라는 선물이 허락이 안 되었습니다 그 강도가 못 받은 오늘을 여러분들은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놀지 마십시오. 무엇이든지간에 내가 이 땅에 살아있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기쁘고 이웃이 행복한 그 무엇을 섬겨야 합니다. 유명하게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자리면 어떻습니까? 존귀 영광 모든 권세는 그분께 돌려드리고 조국 교회의 어느 한 모퉁이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면서 마음껏 주님을 사랑하고 전심으로 그분의 명예를 위해서 사는 그런 아름다운 주님의 자녀들이 될 때, 비록 죄가 많고 슬픔이 가득한 세상이지만 우리의 존재는 이 어두운 세상에서 빛나는 샛별과 같을 것이며 황무지에 피어난 한포기의 풀과 같이 하나님에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들의 하루하루의 삶은 하늘나라를 향해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곡조가 될 것이고 우리와 접촉하고 만나는 많은 사람들은 하늘의 신령한 은혜와 빛을 우리의 인격과 삶 안에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순례자의 길을 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인간에게는 죄 많은 이 세상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하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외치지 않아도 그는 소리치는 사람이요 노래하지 않아도 그는 메아리치는 찬송(?)의 사람이며 그가 유명한 지위에 오르지 않아도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풍기는 아름다운 향기입니다. 바로 그렇게 소중한 사람으로 황무한 이 땅에 두시려고 무너진 교회의 시대에 우리를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주님의 부르심을 깊이 느끼면서 어디서든지 섬기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위로부터 부어져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전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며 그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께 사랑을 받으며, 이 땅에 속해 있으나 하늘에 속한 사람처럼, 이 땅에 서있으나 하늘에서 내려온 이 땅에 임한 하늘나라를 꿈꾸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디에 있든지 그렇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을 섬기는 주의 자녀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