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2011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11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1 (2011.10.17 가을말씀사경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2 (2011.10.18 가을말씀사경회)
1. 빛으로 부르신 사람들(마5:14) 2011.10.17 가을말씀사경회(저녁) 1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4 (2011.10.20 가을말씀사경회)
2. 세상을 비추게 하신 사람들(마5:14) 2011.10.18 가을말씀사경회(저녁) 16
3. ‘그 빛’의 가변성과 불변성(마5:16) 2011.10.19 가을말씀사경회(저녁) 31
4. ‘그 빛’과 선한 행실(마5:16) 2011.10.20 가을말씀사경회(저녁) 47
5. 세상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2011.10.21 가을말씀사경회(저녁) 6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75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1 (2011.10.17 가을말씀사경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2 (2011.10.18 가을말씀사경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4 (2011.10.20 가을말씀사경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5 (2011.10.21 가을말씀사경회)
2011 가을사경회 첫째 날 2011.10.17(월) 저녁집회
빛으로 부르신 사람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 5:14상)
I. 본문해설
II. 세상의 ‘빛’(φϖς)
A. ‘빛’의 용례
- 신약에서 75회 사용
1. 물리적 의미: 광학적 빛, 세상의 보화
2. 윤리적 의미: 진리의 효과
3. 신학적 의미: 하나님, 존재․가치 질서를 보여줌
B. ‘그 빛’(τὸ φϖς)인 신자들
1. 빛의 본질
a. 빛 자체가 존재임
b. 빛은 자신의 본질을 알려주지 않음
c. 빛은 자신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물을 보게 함
1) 빛을 인식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음(마 6:23)
2) 진리를 앎으로 빛의 효과를 나타냄
2. ‘그 빛’(τὸ φϖς): 발광과 반사
a. ‘토 포스’(τὸ φϖς)와 ‘하오르’(רוֹא,, light)
b. ‘오르’(רוֹא)와 ‘마오르’(רוֹא , light-bearer)
-기원으로서 빛 자체가 아닌 암체(暗體)임
-자신 안에서의 발산인 발광체(發光體)임
3. 그 빛은 자신 안에서 온 것이 아님
a. 인간 안에서 빛을 찾으려는 철학의 어리석음
b. 빛을 받아야할 인간이 스스로 빛인 줄로 여김
c. 남은 빛의 발견도 하나님 형상 때문임
d. 그 빛을 그릇 해석해 하나님을 떠남
C. 하나님의 영광과 ‘빛’(φϖς)
1.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직설법의 사실
2. 하나님의 영광과 빛
a. 영광의 세 가지 의미와 거룩한 빛
1) 영광의 의미
2) 세 종류의 영광
-본체적, 발산적, 효과적 영광
b. 효과적 영광(빌 2:15, 사 42:6)
3. 단수임: ‘너희’는 복수이나 ‘빛’은 하나임
a. 신자에게 기대하시는 바를 보여줌
-다양한 사람들을 하나 되게 하심
b. concordia et harmonia
III. ‘그 빛’으로 부르신 자녀들
A. 신학적 의미
1. 빛과 진리이신 그리스도(요 1:4, 14:6)
- ‘빛이신 그리스도’(요 1:4);신성의 빛 + 인성의 모범
2. 빛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
- 신적 영광의 빛이 지식을 남김
- 하나님․세계․인간을 앎
- 존재와 가치의 질서를 알게 함
- 진리인 성경을 통한 성령의 조명
3. 성령의 조명과 총명의 빛
- 우리가 빛임에도 의존하게 하심
B. 윤리적 의미
1. ‘그 세상의 그 빛’
2. ‘그 세상의’(του κόσμου): 사람들의 세상
a. 창조하신, 타락한, 구속 받아야 할 세상
b. 그 세상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줌
c.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보여줌
1)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줌
2) 관계 안의 행복을 보여줌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교회와의 관계 안에서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IV. 결론: 그 빛으로 부르심
2011 가을사경회 둘째 날 2011.10.18(화) 저녁집회
세상을 비추게 하신 사람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마 5:14하-15)
I. 본문해설
II. 동네와 등불의 비유
A. ‘산 위에 있는 동네’
1. ‘동네’(πόλις): 성(城)을 가리킴<#사진>
2. 성읍을 높은 곳에 세움
a. 높은 지대를 택함
b. 반복적인 문명의 텔(ל , tel)의 형성
3. 모든 사람들에게 보임
a. 공격에 노출 됨
b. 성 밖에 있는 사람들과 구별됨
c. 성에서 이루어지는 통치가 영광의 관건임
B. ‘등경 위에 둔 등불’
1. 말 아래 두지 않음
a. ‘말’(μόδιον); 로마시대 됫말 약 8.75 L
b. 말 아래 둔 등불과 그림자
2. 등경(λύχνίαν): 그 위에 둠<#사진>
a. 등대(히 9:2), 촛대(계 1:12) 교회를 상징
b. 뤼크노스(λύχνος):휴대용 등불과 다름(눅11:36,계11:38)
III. 모든 사람에게 비취는 빛
A. ‘집안 모든 사람’
1. 유대인의 가옥 구조
2. 어두운 밤을 상정하심
B. 방안의 등불의 역할
- 모든 사람들에게(πασιν τοις)
1. 모든 사람들에게 비춤
a.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보게 함
b. 진리의 빛이 자신을 보게 함
- 진리의 빛이 그를 행복하게 함
- 진리를 떠나 행복하기를 바라는 인간
2.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보게 함
a. 어둠 속에서 사물들을 비추는 빛
b. 인간과 두 가지 어두움
1. 객관적 어두움
2. 주관적 어두움
c. 모든 사람이 빛으로 어둠을 극복함
-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진리
- 소수가 누리는 진리
3. 그리스도인의 소명: 지혜의 빛
IV. 결론: 세상을 비추게 하심
2011 가을사경회 셋째 날 2011.10.19(수) 저녁집회
‘그 빛’의 가변성과 불변성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마 5:16상)
I. 본문 해설
II. 비추게 하여야 할 ‘그 빛’
A. “그 빛으로 비추게 하라”
1. 허락을 의미하는 명령
2. ‘너희의 그 빛’
a. 진리를 우리가 소유함
1) 우리 자신이 진리가 아님
2) 진리와 합치된 교회의 지체됨
b. 진리를 위탁하심
1) 성경으로 진리를 알게 하심
2) 진리를 교회에 위탁하심
- 성경이 교회에 주어짐
- 풍부한 해석이 교회에 있음
- 진리의 저자가 함께 하심
3) 목회 사역과 빛의 가변성
4) 신자로 하여금 빛을 가지게 함
c. 하나님의 나라는 빛의 확장
B. 명령형이 의미하는 바
1. “비추게 하라”: 빛나게 하라
-λαμψάτω τό φϖς ὑμϖν
-let your light shine
2. 비추게 되도록 허락하라
III. ‘그 빛’의 불변성과 가변성
A. ‘그 빛’의 불변성
1. 교회의 정체는 ‘그 빛’임
2. 성도들은 ‘그 빛’의 일부임
3. 어떤 경우에도 교회에는 빛이 있음
a. 성경을 아주 버리지 않는 한 그 빛임
-‘그 빛’은 ‘한 빛’이 아님
-성경에 대한 도전하는 세상의 정신
b. 꺼져가는 등불의 심지(사 42:3, 마 12:20)
1) 꺼져가는 심지도 등불임
2) 빛을 잃은 교회에 대한 심판과 긍휼
B. ‘그 빛’의 가변성
1. ‘그 빛’을 교회에 위탁하심
a. 진리의 운명이 인간에 달린 것처럼 경륜하심
b. 진리의 영원성과 불변성도 인간을 통해 알리심
c. 진리가 인간을 의존치 않고 인간이 진리를 의존함
2. 인간의 불의로 진리를 가로막음
a.“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롬 1:18)
b. 진리에 인간이 보탤 것이 없음; 훼방이 문제
1) 불신자들의 방해
- 사상적 도전
- 윤리적 도전
2) 신자들의 방해:
- 잘못된 교훈(자유화)
- 잘못된 생활(세속화)
3) 궁극적 원인: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
IV. 교회의 ‘그 빛’, 가변성의 경륜
A. 인간 창조의 경륜과 조화됨
B. ‘그 빛’의 공동체적 성격
1. ‘그 빛’에 참여한 교회
2. ‘그 빛’을 위탁 받은 교회
3. 성도들은 그 지체로서 ‘그 빛’을 누림
C.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함
1. ‘그 빛’의 누림이 하나님께 의존함
2. 교회와 성경 해석․생명의 역사
3. 풍부한 신학의 결과물로 자만하지 못하게 하심
V.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A. 하나님의 의존하는 경건
1. 산 같은 사상
a. 모든 삶을 지식의 기반에 세움
b. 모든 지식을 삶의 실천과 관계 지움
2. 물 같은 마음
a. 더 많은 빛을 우리에게- 성경의 지식
b. 더 온전한 삶을 우리에게- 성령의 은혜
B. 우리의 시대 안에서 충성함
1. 우리의 시대를 사랑함(마 16:3)
a. 우리의 시대를 움직이는 정신을 이해함
b. 그 정신을 꾸짖을 수 있는 지혜와 용기
c. 시대 속에 있는 사람들을 버리지 않음
d. 어그러진 시대에 빛들로 살아감
2. 개인적 실천
a. 성경과 신학을 통해 하나님을 힘써 알아감(호 6:3)
b. 온몸으로 진리를 따라 살고자 몸부림침
3. 교회적 실천
a. 지역교회를 위하여 기도함
b. 보편교회를 위하여 기도함
VI. 결론: 진리의 사람으로 남음
2011 가을사경회 넷째 날 2011.10.20(목) 저녁집회
‘그 빛’과 선한 행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마 5:16상)
I. 본문해설
II. ‘그 빛을 비취게 한다’는 의미
A. ‘사람들 앞에’(ἔμπροσθεν τϖν ἀνθρώπων)
1. ‘앞에’(ἔμπροσθεν); 장소적으로, 시간적으로 앞에
2. ‘그 사람들’(τϖν ἀνθρώπων): -에게, -를 위하여
B. 그 시대의 ‘사람들’ 앞을 비춤
1. 그 시대의 아들로 살아가는 사람들
a. 그 시대의 정신 아래서 살아감
b. 숨 쉬고 밥 먹듯이 자연스러운 문화 속에서
c. 신자들도 그런 세상에서 살아감
d. conformatio의 주체: 세상 + 그리스도
2. ‘그 빛’을 비취게 한다는 의미(1)
- 진리의 빛으로 사물에 내린 판단을 보여줌
a. 동굴의 비유: anabasis와 katabasis의 운명
b. 시대의 빛과 진리의 빛을 따르는 판단
1) 시대의 빛: 인간
- 창조: 단자(單子)로서, 물질적 필연 안에 있음
- 타락: 종교와 도덕의 개입으로 자유가 억압됨
- 구원: 개인의 동의 없는 도덕질서에서 벗어남
- 완성: 인간을 신화(神化)하여 할 존재로 봄
2) 진리의 빛
- 창조: 하나님 형상을 가진 지성․의지의 존재
- 타락: 질서 안에서의 자유로부터 이탈함
- 구속: 죄로부터 벗어나 창조 질서로 돌아감
- 완성: 창조하실 때 의도하신 피조물로 회복됨
3. ‘그 빛’을 비취게 한다는 의미(2)
- ‘그 빛’을 세상의 모든 영역에 비춤
a. 하나님의 창조하신 영역의 질서
1) 자연 세계와 인간 세계
2) 모든 삶의 영역과 통치 질서
3) 변하지 않은 인간의 지위와 소명
b. 모든 삶의 영역이 ‘그 빛’을 받을 때
1) 인간의 주인이 아님을 보임
2) 일반 은총의 영역의 질서를 바로 잡음
3)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음: 기도와 전도
4. 대적할 세상과 끌어안을 세상
a. 마귀와 세상의 정신을 적대함
b. 악인들조차 영혼 사랑으로 끌어안음
III. ‘착한 행실’과 ‘그 빛을 비춤’
A. ‘착한 행실들’(καλὰ ἔργα)
1. ‘행실들’
a) 공동체적 행위자들의 다수성을 보여줌
b) 한 두 번의 착한 행실로 세상이 바뀌지 않음
c) 착한 행실 자체가 아니라 뿌리인 진리로써 변함
2. ‘착한’(καλὰ); ‘선한’(בוֹט)
a) 궁극적으로 창조세계의 목적 관련 됨
b) 창조 세계의 목적
1) 하나님의 존재와 세계 창조
2) 세계 창조와 인간 창조
3) 세계와 인간의 목적으로서의 선(善)
3. 교회는 미담을 위한 공동체가 아님
a) 교회의 거룩함과 도덕성
b) 사람의 비난이 아닌 하나님을 바라봄
c) 종말적 기대 속에서 살아감
- 타계적 종말론도 종말 없는 소망도 아님
- 세상 스스로 완성될 수 없음: 타계적 소망
- 이 세상 안에서 이루어질 성취임: 현세적 소망
B. ‘그 빛을 비추는 것’과의 관계
1. 착한 행동으로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님
a) 세상 사람들과 도덕 경쟁하라는 부르심이 아님
b) 도덕의 실천으로 영혼의 생명을 대신할 수 없음
c) 자기의(自己義)화함은 도덕주의의 머슴이 되는 것
2. 진리로 비춘 사물의 판단을 삶으로 따름
a) 진리가 살아 있음을 보여줌
b) 선행으로 불신자들을 두렵고 부럽게 함
1) 가치 판단의 기준과 상벌을 보여줌
2) 도덕 생활 속에서 행복하게 살아감
3) 하나님과 평화: 내적 평안과 기쁨, 확신과 관용
3. 진리를 떠나 행복하기를 원하지 않음
4. 뜻과 마음을 다하여 섬김
a) 지성의 뜻으로 헌신함: 성경적 사상을 가짐
b) 마음의 의지로 헌신함: 단호한 실천으로 살아감
c) 하나님은 은혜가 필요함: 말씀의 빛과 성령의 불
IV. 결론: 비취게 한대로 살아감
2011 가을사경회 마지막 날 2011.10.21(금) 저녁집회
세상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하)
I. 본문 해설
II. ‘너희 선한 행실들을 보고’
A. ‘보고’(ἴδωσιν): 보다 + 알다.
1. ‘보다’; 문자적 의미 뿐 아니라, 상징적으로 여러 번 사용
2. 마음으로 봄: 사물의 배후를 통찰함
B. 도덕적 행동의 특성
1. 개별적 실천들을 통해 배후를 알게 함
a. 그 사람의 덕스러운 성품
b. 그 사람이 신봉하는 가치 체계
2. 사물들과의 관계로써 영적 실재를 알게 함
C. 도덕은 우리의 종교의 참됨을 입증함
1. 세상의 교만한 이성: 진리의 체계로 굴복시킴
2. 세상의 거만한 불신앙:
- 그것을 따르는 삶으로 굴복시킴(마 5:16)
- 성령과 복음의 능력으로 굴복시킴(고후 10:4)
III.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함
A. 하늘에 계신 하나님
1. 유대인의 ‘하늘’ 개념
a. 새들의 하늘
b.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의 하늘
c.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
2. ‘하늘’에 계신 하나님
a. 장소적 하늘이 아님
- 하나님이 하늘과 땅, 장소에 뻗어계심이 아님
- ‘하늘에 계심’은 땅을 비우셨다는 의미가 아님
b. 피조물과 하나님의 존재하심
- 세계 안에 계시나 물질․정신처럼 계시지 않음
-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벗어나지 못함
- 모든 피조물보다 가까이, 초월하여 계신 하나님
c. 인간과 인격적 관계를 맺으시나 전적인 타자이심
B. ‘너희 아버지’이신 하나님
1. ‘너희의 그 아버지’(τὸν πατέρα ὑμϖν)
- 많은 자녀들 한 아버지
- 가족 관계에서 사용된 호칭
- 하나님에게는 손자가 없음: 친자 관계
2. 친아들이 되는 감격: 사생자가 아님(히 12:8)
- 용서하시고 자녀로 삼으심(요 1:12)
- 법적 자격이 있는 후사들로 삼으심(엡 3:6)
C. 영광을 돌림
1. ‘영광을 돌리다’(δοξάσωσιν)
a.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
b. 영광을 돌리다=인정함
c. 하나님을 인정함: 새로운 가치와 질서를 따름
2. 세상의 존재 목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
a. 교회 뿐 아니라 세상도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함
- 교회와 세상 모두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
- 인간들의 창조 목적이 바로 그 것임
- 특별히 인간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입음
-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길을 주셨음
b. 교회, 완성의 날에 세상과 하나가 될 기관임
- 새로 회복될 세상의 종자씨로서의 교회
- 세상을 하시기에 교회를 사랑하심(요 3:16)
c. 신자는 교회, 교회는 세상, 세상은 그리스도 위함
d. 교회와의 성례전적 연합 속에서 충성하며 살아감
IV. 결론: 세상의 빛으로 살아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75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1 (2011.10.17 가을말씀사경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2 (2011.10.18 가을말씀사경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4 (2011.10.20 가을말씀사경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5 (2011.10.21 가을말씀사경회)
1.빛으로 부르신 사람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마 5:14)
녹취자: 윤은정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나오는 한 구절입니다. 여기에 보면 예수님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제일 먼저 궁금한 것은 ‘너희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문맥을 보면 5장부터 7장까지 산상수훈으로 이루어졌고, 많은 신약 학자들은 이것이 예수님이 한 번에 하신 설교였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 설교의 골자를 요약해 놓은 것이라고 추측을 합니다.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 좌정하시고 많은 무리를 보실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왔고, 예수님은 그 제자들과 무리를 향해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라는 유명한 팔복의 첫 번째 부분부터 선포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5장의 배경이 되는 4장의 마지막에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각색 병든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예수님께서는 불쌍한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5장이 등장하게 되는데, 아마도 5장 1절에 나오는 예수님을 따라 이 팔복 산에 올라왔던 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이렇게 병 고침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사람들이 제자들과 함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너희라고 하는 것은 제자들만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제자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던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Ⅱ. 세상의 ‘빛’(φϖς)
A. ‘빛’의 용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희랍어 성경에는 ‘너희는 그 세상의 그 빛이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빛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세상의 빛이라고 했는데, 희랍어에서 ‘포스’라고 하는 이 빛은 신약에서만 약 75번 정도 사용이 됩니다. 75번 사용되는 빛이라는 용례를 다 살펴보면 크게 3가지 정도의 의미로 사용이 됩니다.
1. 물리적 의미: 광학적 빛, 세상의 보화
우선 첫째는 물리적인 의미로 사용이 됩니다. 그 빛은 그야말로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 있는 광학적인 빛입니다. 어두움을 밝히는 자연적인 빛을 가리키기도 하고 혹은 이 세상의 많은 보화, 그 보화가 나타내는 영광, 이런 것을 빛이라고 묘사하기도 합니다.
2. 윤리적 의미: 진리의 효과
둘째는 윤리적인 의미인데 이것은 착한 행실이나 혹은 어떤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나타내서, 다시 말해 그가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올바르게 살아가는 삶이나 인격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 그 진리를 알게 하는 윤리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3. 신학적 의미: 하나님, 존재․가치 질서를 보여줌
마지막 셋째는 신학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인데, 이때에는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존재, 가치의 질서 이런 것들을 보여주는 말로 빛이라는 말이 사용이 됩니다.
B. ‘그 빛’(τὸ φϖς)인 신자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예수님이 바로 ‘너희들이 그 빛이다’라고 말씀하심으로서 신자들이 바로 ‘그 빛’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거기에는 예수 그리스도께 아주 헌신된 제자들도 있었을 것이고 병 고침 받아서 방금 믿기 시작한 사람도 있었을 텐데, 그런 신앙의 층차와 상관없이 예수님께서는 그들 모두를 ‘그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빛의 본질
이 문제가 무엇인지 살피기 위해서는 우선 ‘빛’이 무엇인지 생각을 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마 이 세상에 하나님이 만든 사물들 가운데 빛만큼 독특한 사물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빛은 그 자체가 존재입니다. 아직도 과학자들은 이 빛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밝히지를 못했습니다. 추측컨대 이 빛은 ‘입자’이기도 하고 또한 ‘파장이기도 할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빛은 태양으로부터 나오지만, 그 빛 자체가 존재입니다. 없는 것이 아니라 그 빛은 진짜 있는 어떤 사물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빛은 사물이지만 흙, 풀, 꽃, 새들처럼 자기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에게 명확하게 나타내 보여주지를 않습니다. 이 빛의 더 독특한 성격은 자신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물이면서, 이 빛 때문에 사람들이 다른 사물을 볼 수 있게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것입니다. 그래서 빛은 자신이 사물인 동시에 사람들이 다른 사물을 보고 확인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장 23절에는 만약에 빛이 있어도 우리의 눈이 어두워서 빛을 인식할 수 없다면, 그 빛이 있어도 소용이 없다고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빛이 환하게 비쳐도 만약에 우리가 소경이 되어서 어떤 사물을 볼 수가 없게 된다면, 그러면, 빛을 인식하지 못하는 장님이 될텐데, 그러면, 빛이 있는 것이 소용이 없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빛은 어떤 사물이기도 하고, 또, 그 빛은 그 빛을 통해서 사물을 보려고 하는 사람들 인식 속으로 들어가는 그런 독특한 사물입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이 너희는 이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빛은 그런 독특한 성격을 가진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변화된 어떤 존재인 동시에, 우리 때문에 사람들이 우리가 없었더라면 올바로 보지 못했을 그 무엇을 보게 만들어주는 빛의 역할들을 하도록, 그렇게 예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셨기 때문에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리를 빛의 자녀라고 그렇게 호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너희는 그 빛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정말, 진정한 의미에서 ‘정말로 우리가 그 빛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2. ‘그 빛’(τὸ φϖς): 발광과 반사
여러분, 밤하늘에는 지구에서 가장 가깝게 보이는 달이 떠있습니다. 그 달빛이 어떤 날 밤에는 매우 밝습니다. 가보지는 않았습니다만 미국의 콜로라도에서는 이 달빛이 지구상에서 가장 밝은데, 한 밤에도 그 강위에 배를 띄우고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달빛이 밝다고 합니다. 30만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그 달에서 비추는 빛이 얼마나 밝길래, 30만 킬로 떨어진 그 곳에서 달빛을 받아서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라 하니 그 빛의 밝기가 얼마나 놀랍겠습니까? 그러나 아시는 바와 같이 달은 스스로 내는 물체가 아닙니다. 태양의 빛을 받아서 반사해주는 빛일 뿐입니다. 그러면, 그런 물체를 가리켜서 우리들은 물리학에서 암체라고 부릅니다. 자신은 빛을 내지 못해 어두운 물체이지만, 빛을 받아서 반사함으로서 마치 자신이 빛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물체를 가리켜서 우리들이 암체라고 부릅니다. 우리를 예수님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불러주셨지만 사실은 그 빛이 우리 안에 스스로 나오는 빛이 아니라는 점에서 보면 우리는 발광체와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오히려 달과 같이 태양이 있기 때문에 빛을 발하는 그런 종류의 반사체일 뿐입니다. 언제가 태양이 빛을 잃으면, 아마 달도 그 빛을 함께 잃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신이 빛이 아니지만,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에게 비추어주신 그 빛 때문에 우리 자신이 그 빛을 반사한다는 점에서 보면, 우리는 예수님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불러주셨지만, 우리는 ‘암체와 같은 의미에서의 빛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서 빛이 거울이나 달 표면의 빛은 그것이 달이나 거울 내부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표면에 비쳐서 반사됐다는 점에서 우리가 예수님의 빛을 전달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이 우리의 표면에 비춰서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의 말씀이 어느 날, 우리의 생각의 껍질을 깨고, 우리의 지성 속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단단하고 껍질이 있었던 우리의 마음을 깨뜨리고 우리의 중심 속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사랑의 불을 지르고 은혜의 열을 불러 일으킵니다. 그래서 주님의 진리를 안 사람의 마음은 뜨겁고, 사랑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주님이 누구인지를 아는 진리의 빛과, 그 진리를 따라 살고, 사랑하고자 하는 뜨거운 은혜의 마음이 자신의 내부 속에 있어서, 그것이 매 순간 자신의 인격과 삶을 통해 언어로 자신의 삶에 고백되어 표출되어 나온다는 점에서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 자신이 그 빛의 기원은 아니지만 우리 안에 원래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우리 속에 들어와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고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진리라고 하는 점에서는, 또한, 우리가 발광체로서의 빛이라고도 부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빛이 반드시 우리 자신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3. 그 빛은 자신 안에서 온 것이 아님
일류의 역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였고, 그리고 이 모든 세계와 인간 자신을 이해하는 사람의 판단이 곧 하나님이라는 사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시의 책인 성경보다는 사람 자신 안에 있는 빛을 더 믿었습니다. 이것은 본성의 빛이고 자연의 빛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이 열심히 그 빛을 탐구하고 노력하면 반드시 그 빛을 찾아갈 수 있다고 믿었고 그리고 진리를 이해하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세월이 흐르면서 인간은 이것도 부족해서 사람이 어떤 원칙을 만들고 그것을 모두 사람들이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것이 곧 진리고 그 진리는 사람의 동의에 따라서 세월이 흘러가며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라고까지 이야기하게 되었으니 그 모든 진리의 빛이 사람들 속에 있다고 하는 자만심의 결과였습니다.
그 최종적인 열매로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진리에 관심이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진리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절대적인 원칙과 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곧 진리이고 다수가 그것에 동의하면 그 시대의 진리라고 하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결과 이미 기성세대들은 말할 것도 없고 특별히 자라나는 세대들에게는 도덕을 교육시킬 수 없는 무정부적인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이가 많이 든 사람들은 그래도 우리나라의 유교주의적인 관성에 의해서 그렇게 도덕적이지도 않지만 그래도 유교주의적인 관성에 의해서 아직까지도 희미한 도덕의 끈들을 붙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라나는 세대가 ‘그것이 왜 나쁘냐?’고 물을 때에는 누구도 그것을 적절하게 대답해 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미 그렇게 인간의 경험 밖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진리 그리고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에 심어놓은 양심의 빛 이런 것들을 이미 사람들은 헌신짝처럼 버렸고 그리고 그것이 모두 쓸모없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거창하게 나붓던 교육의 구호들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이 사회에 이바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한다고 하는 거창한 가치관은 이제 자라나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쓸모없는 가치관이 되었고 최고의 가치라고 해 봐야 개인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이어가고 그리고 개인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아가는 그것이 최고의 가치기준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도덕적인 허물어짐 들은 사회를 급속하게 병들게 만들었고 누구도 이것이 절대적인 가치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기준 자체를 모두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실용주의가 미국에서 한창 기승을 부릴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아주 단순하였습니다. 진리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 내는 것이다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또 사회는 각각 다양한 사회가 있으니까 그 다양성을 무시하고 하나의 진리를 만들어서 모든 사회를 짓밟는 것은 야만적인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도덕교육을 시키면서 이것을 학교 교육에 적용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학교에서 고민을 하며 학급을 운영해 나가는데 있어서 규칙과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 한번 학생들이 모여서 우리가 이 학급을 운영해 나가는데 있어서 가장 높이 평가해야할 가치가 무엇인지를 스스로 토론해서 정해보라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마약 섹스 게임 서너 가지가 자신들이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최고의 가치라고 대답을 했답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교육을 시켜야할까요? 결국은 이 빛이라고 하는 것 우리를 비추어 우리로 하여금 사람답게 살아가게 하는 진리라고 하는 것이 우리 너머에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직접 주어진 객관적인 것이고 우리가 성경을 통해 복음을 통해 그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깨닫고 그 빛대로 살아갈 때에 우리들이 진정으로 질서 있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하는 기준 자체를 모두 거절해 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행복하게 되었습니까? 잠시는 허울뿐이 가치의 기준들을 벗어버리고 자기의 욕망대로 살아갈 수 있는 근거를 발견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신나는 일이었겠습니까? 어떤 부도덕한 일을 하면서 살든 이제 이웃에게 심각한 해를 주지 않는 한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피터 싱어라고 하는 프린스턴의 교수 한 사람은 자기의 책속에서 결혼 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표명했습니다. 기독교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라고 하는 주장을 하는데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인간 우월주의의 산물이고 하나님의 형상 같은 것은 없고 인간은 동물로부터 점차적으로 진화된 존재이기 때문에 그들의 본 고장은 동물의 세계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가 혼인하여 한 가정을 이루는 것은 가장 커다란 편견이고 남자와 남자 여성과 여성은 물론이거니와 인간들끼리 결합하여 부부를 이루는 것도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놓은 커다란 굴레일 뿐이라고 주장하며 개와 인간의 부부됨 돼지와 인간의 결혼, 소와 사람의 성생활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공공연히 부르짖는 위치에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그 유일한 빛인 그 진리를 거부하고 자기 안에 그 진리가 있는 것처럼 스스로 자신들이 진리의 근원이 되는 것처럼 자기를 신뢰하고 수많은 진리들을 만들어내고 부수고 자기의 욕망에 따라 그 진리를 바꾸고 이렇게 하면서 살아갈 때 그 삶은 자신을 하나님처럼 숭배하는 사상이었습니다.
지난세기 가운데 18세기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19세기 20세기 21세기를 넘어오면서 엄청난 산업화와 공업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온 세계는 물질주의의 풍요로움 속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결과 20세기에 들어서서는 지난세기에는 볼 수 없었던 수많은 질병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특별히 정신병을 비롯한 자아 분열현상을 말해주는 수많은 심리적인 질병들이 수없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오늘도 우리 사회에서 젊은이들 10명을 만나면 단언하건데 그 중에서 3사람 내지 4사람은 결코 결혼생활을 지속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왜? 인성의 훈련이 안 돼 있습니다. 사회적인 훈련이 안 돼 있습니다. 사람의 모양을 하고 살아가지만 어떻게 사람과 관계를 맺고 그리고 자신을 낮추고 사람들을 섬기고 서로 양보하고 우애하며 공통의 가치를 찾아가고 도덕의 원칙을 분명히 가지고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그림이 전혀 없는 흔히 여러분들이 말하는 개념 없는 그러한 젊은이들이 10명이면 3명 내지 4명입니다.
오늘날 사실 이러한 현상은 너무 보편적이 되어서 이젠 자라나는 세대는 훨씬 더 심각한 문제들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는 이 도덕을 파괴하고 그리고 이 도덕을 무시하고 오히려 인간이 이제껏 세워놓은 도덕들을 짓밟고 파괴하는 것을 마치 자신의 사명인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고 이들에게 사상적인 무기들을 철학자들이 끊임없이 공급해 주면서 이 세상의 도덕세계를 어지럽히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말하기도 부끄러운 일이지만은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사이트들이 만들어지고 귀 뚫리고 들어보지도 못한 악행을 하는 사람들이 그 윤리적인 기준을 파괴하면서 그러면서 사이트들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그 일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내어놓고 물질을 투자해서 헌신합니다. 그런 끔찍한 도덕적인 타락들이 결국은 오늘날 태어난 세대의 사람들이 다른 시대의 사람보다 본질적으로 훨씬 악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온 것이 아닙니다.
무엇 때문이죠? 진리의 빛 오늘 단수로 나오는 그 진리의 빛 이라고 하는 기준 자체를 자기 밖에 있는 하나님의 진리에서 버렸기 때문입니다. 빛을 받아야 겨우 자신도 보고 남도 볼 수 있는 인간인데 오히려 자신이 스스로 빛인 줄 여기고 그리고 남아있는 빛의 작은 쪼가리라도 발견을 해서 무엇인가 하나님의 진리의 판단으로 볼 때에 그럴싸한 것이 티끌만큼도 나온다면 그것도 역시 하나님이 인간에게 남겨두신 빛이고 그 빛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도 인간이 하나님 앞에 여전히 받아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 때문인데 그 빛을 그릇 해석해서 오히려 그 빛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는 어리석은 인간들이 바로 진리의 객관적인 빛을 거절하고 자기중심으로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불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도 언젠가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처럼 그딴 진리 같은 것은 없다고 믿는 사람이었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도 그게 여러분 자신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진리를 모르고 혹은 그 진리를 버리고 살았기 때문에 힘이 남아 있고 육체의 정욕이 꿈틀거리고 있는 동안에는 편리하고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속에 이 세상 육체와 정욕을 따라서 어둠속에 살면서 영원히 만족할 수 있도록 우리를 내버려 두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에 주님을 알 수 있는 그리움을 주셨고 주님이 누구신지는 정확히 알지 못해도 그분께 사랑을 받지 않는 한 우리의 마음이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을 남겨두셨던 것입니다.
체스터 필드라고 하는 사상가는 자신의 글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한 사람이 사창가에 문을 두드릴때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쾌락에 탐닉하는 오늘날의 현대인을 비난합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야한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마음의 질병의 상태이고 극한 타락에 자기를 던지고 쾌락주의에 빠져 방탕하게 사는 현대의 삶은 결국은 주님을 향해 마음속에 남아져있는 막연한 그리움들을 진리의 올바른 빛으로 채우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이 엉뚱한 방향으로 발산된 것이 미친 듯 광기로 점철되는 광란의 타락이고 그리고 광란의 쾌락입니다. 언젠가 여러분들도 바로 그런 빛과는 상관없이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께 돌아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며 단정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누가 여러분들을 후려 쳤습니까? 누가 여러분들에게 협박 하였습니까? 누가 여러분들에게 더 이상 방탕한 삶을 살면 목숨을 거두겠다고 협박했습니까? 여러분 아무도 협박과 공포에 붙잡혀서 교회에 붙들려 메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전에는 죄악 된 세상을 방황하면서 하나님도 몰랐고 천국도 몰랐고 지옥도 모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나 자신이 우상이었고 내 고집대로 사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낙이었습니다. 어느날 내 어둡던 인생의 찬란한 한 빛이 들어왔습니다.
(찬양) 넘치소서 은혜와 긍휼을 열방중에 비추소서 빛되신 주의 말씀
찬란한 빛이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아주 두꺼운 철학책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2천년 전에 나무에 못 박혀 죽으신 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주었고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해 주시는지를 가르쳐주시는 그 순간 진리의 빛이 우리의 마음에 들어왔고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할 우리 인간, 죄지은 우리들을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 그 피로 속죄함을 얻는 구원의 길 구원받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지극히 큰 사랑 그리고 우리에게 몸담을 곳을 주신 교회 그 속에서 사랑하는 성도들과 함께 한 몸이 되어 주님을 믿고 따르며 사랑하며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의 본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 줄기 분명한 빛이 우리의 마음을 비출 때 우리가 누구인줄을 알았고 그 빛이 이 모든 세계를 비출 때 우리는 비로소 이 세상이 우리의 섬김을 받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요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 있는 것이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 존재하는 인간이라고 하는 사물의 질서를 올바로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이 세상을 찰떡처럼 사랑했고 이 세상 끈끈이에 우리의 모든 것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 우리들이 그렇게 우상처럼 섬기던 세상이 사실은 그렇게 우리의 섬김을 받아서는 안 되는 세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자리는 이제껏 몰랐던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찬양) 고집대로 영 죽을 험한 세상이 왜 이리 더러운지 이제야 아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어떻게 창조하시고 어떤 목적으로 이 세상을 지으셨고 지금도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는 지를 깨닫게 되었을 때에 이 세상이 더러운 것은 원래 더럽게 창조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바쳐야 될 영광을 탐욕과 더러움으로 물들였기 때문에 더러운 세상이요. 우리 자신이 이 세상을 하나님보다 더 높이며 사랑한 질서를 뒤집은 사랑이었기 때문에 이 세상이 더러운 세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였습니다. 빛이 없어서 어두움 속에서 살았던 날들이 서러워서 울었고 그리고 아직도 이 빛을 모르기 때문에 어두움 속에서 나처럼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 때문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시킨 것도 아닌데 우리는 이 빛을 전하는 전도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태어나서 남을 위해서 처음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수 있었고 그럴수록 나에게 정말 소중한 것은
(찬양) 잃었던 광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그 광명은 곧 생명이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땐 우리의 마음이 뜨거웠고 눈물이 쏟아졌고 너무 달콤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펼칠 때마다 진리의 빛이 거기에 있어서 우리를 보게 해 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이정도 밖에 안 되는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그 빛을 이 세상에 비추어 보니 주님이 선하게 창조하신 세상을 이 세상의 인간이 너무나 망가뜨린 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안타까워서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울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빛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효과였습니다.
C. 하나님의 영광과 ‘빛’(φϖς)
1.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직설법의 사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문법적으로 직설법으로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할 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빛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라고 기도를 합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왜요? 예수님이 빛이라 말씀하셨는데 아무리 내편을 들어봐도 빛이라고 양심적으로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빛이 아니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이 다음에는 빛이 되거라.’ 마치 어른들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이 다음에 훌륭한 인간이 되거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은 ‘너희는 빛이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이제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주님을 따르게 된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이 세상의 빛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그러나 이 빛은 모든 사람이 동일한 빛인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사람들에게 고백하는 것이 기독교 전체의 선교의 도움이 안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냥 그런 사람은 성경을 서류봉투에 넣고 교회 오는 게 선교의 도움이 되고 그리고 구내식당에서 밥 먹을 때 기도하지 않는 것이 선교에 보탬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어떤 사람들은 이 빛을 찬란하게 어떤 사람은 이 빛을 거의 꺼져가는 불빛처럼 그렇게 정도에 따라 각각 다르게 빛을 냅니다. 그 사람도 빛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은 절대 가질 수 없는 부인할 수 없는 빛이 있습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 내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 성경이 진리라는 것 이런 양보 할 수 없는 빛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빛이 없으면 자칭 그리스도인이지 그리스도인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빛이 어떻게 얼마나 사람들에게 빛을 빛다운 역할을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 빛 때문에 자기를 다시 보고 그 빛 때문에 예전에 내가 보았던 세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 세상을 볼 수 있게 해 줄 수 있느냐는 문제인데 이러한 효과는 그 사람이 이 빛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찬란한 하늘에 있는 별처럼 아주 찬란하게 빛나는 별처럼 인생을 살 수도 있고 거의 없는 것과 별로 다른 것이 없는 그 빛처럼 살 수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희미한 빛을 내면서 또 한편으로는 어두움을 뿜어내어 이미 비춘 다른 사람의 빛까지 가려버리며 살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은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가 계속해서 한번 주님께로부터 받은 진리의 빛을 간직하며 살아야 하고 그리고 그것이 자신 안에서 더욱 더 찬란하게 불타고 빛나도록 그래서 자신을 비추고 또 남을 비출 수 있는 빛이 되도록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빛이 확 들어오는 광채의 경험과 그 빛이 우리 속에서 서서히 혹은 급히 사라져가는 빛의 쇠퇴도 경험했을 것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합니다. 우리 교회에는 교회 오는 첫날 회심하는 사람들이 꽤 여럿 있습니다. 그야말로 그것은 희미한 빛이 아니라 어느 한 순간 다메섹을 가던 사도바울을 눈멀게 만들었을 정도의 그런 강력한 빛입니다. 비록 교리를 많이 배우지 못했고 성경전체를 여러 번 읽지 못했고 교회생활 하는 에티켓이 무엇인지 몰라도 회심과 함께 진리의 밝은 빛이 들어오게 되면 그렇게 총명할 수가 없습니다. 회심하게 된지 불과 며칠 되지 않았는데 죄를 지으면 마음의 괴로움이 밀려오고 눈물로 회개하게 됩니다. 가르쳐준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도 성경을 읽으면 꿀같이 달고 예배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기뻐하며 안아주신다고 하는 사랑의 감격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놀랍게 불과 몇 달 사이에 그 기쁨과 빛이 싹 사라지고 마치 시뻘겋게 달아올랐던 쇠가 식으면 더 굳어지듯이 마음이 굳어지고 그리고 마음이 강퍅해져서 예수 믿기 전에 행하던 악한 행실로 돌아가려는 유혹들을 강력하게 경험하게 됩니다. 마음에는 여전히 빛이 사라지지 않고 있지만 이 빛이 예전처럼 내 마음속에서 강하게 이글거리며 타오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 빛과 관련해서 신자의 의무는 한번 하나님께로부터 이 진리의 빛을 받는 것과 함께 받은 그 진리의 빛이 내 안에서 계속 비추도록 자신을 지키는 일입니다. 자신이 알게 된 것은 아주 작은 진리밖에는 아닙니다. 더 많은 진리들을 성경을 배우며 진리를 터득함으로서 이 진리의 빛이 자신 안에서 계속 불타오르도록 죽을 때까지 유지하면서 사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매일 성경을 읽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에 비추어서 회개하고 고치는 것 이런 생활이 지속되지 않으면 어떠한 사람 마음속에 있는 진리의 불빛도 그 빛을 제대로 발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시간에 졸고 태도가 불량한 것에 대해서 그렇게 무섭게 탄핵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영광과 빛
성경은 이 빛을 하나님의 영광과 밀접하게 관련을 짓습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영광과 빛이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고 또 우리는 매우 흔히 쓰이는 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합니다. 그 영광을 돌린다는 말이 무슨 뜻이에요? 영광을 이렇게 돌려요? 영광이 무슨 대보름날의 깡통도 아니고 뭘 돌린다는 것에요? 돌린다고 하는 것은 돌려 드린다고 하는 건데 그 영광이 우리에게 있다는 겁니까?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성경에 나오는 영광이라는 말을 모두 모아서 한번 분류를 해봐야 합니다. 그러면 크게 세 가지 범주로 이 영광이 분류가 됩니다.
첫째는 본체적 영광입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영광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영광이시기 때문에 사실은 진정한 영광은 하나님 자신이고 그래서 이 영광은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 웨슬레는 이 영광을 설명하기를 ‘하나님의 영광은 너무 찬란해서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들은 어둡게 보이는 것처럼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이렇게 알듯 모를 듯 설명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할 때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다’ 가르치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발산적 영광입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을 보면 어느 특별한 장소에 하나님의 영광이 찬란하게 나타나는 광경을 보실 것입니다. 예를 들면 모세가 기도하러 올라 간 시내산의 빽빽한 구름 그리고 광야를 여행할 때에 그 성막위에 머물렀던 구름 기둥과 불기둥 혹은 광야에서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 때로는 세미한 목소리로 때로는 큰 천둥소리로 들려오던 그 음성, 모세가 불붙었으나 타지 않는 가시나무 떨기를 보았는데 바로 그런 하나님의 장소적인 임재, 여기에서 나오는 하나님 자신이 거기 계신 표시 이것을 가리켜서 발산하는 영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이 세 번째 말하려는 영광인데 이 영광은 효과적 영광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당신의 이름은 이 땅에 두셨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있는 인간들은 하나님은 높일 수도 없고 낮출 수도 없지만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과 관계를 맺은 백성들이 욕을 먹일 수도 있고 높이 공경을 받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외국 여행을 해보면 한 30년 전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국에 나가면 지금 소말리아 사람정도 대접을 받았을 것입니다. 한 40년 전 정도 왜냐면 나가는 것 자체가 아주 기이한 일이었고 그리고 너무너무 가난한 나라라고 알려졌으니까 한 40년 전쯤 이면은... 그래서 돈을 가지고 유학 가는 것은 나라에서 허락을 안했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장학금을 준다는 보장이 있어야지만 갈 수 있었고 60년대에는 200달러까지 가지고 가도록 허락을 했고 나머지 재산은 한국에 남겨두게 했다니까 얼마나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지금은 제법 살게 되어서 어느 나라를 가게 돼도 한국을 대부분 압니다. 그리고 한국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동남아에 가면은 대접도 훨씬 더 달라졌습니다. 그런 것들은 무엇이냐면 바로 나라의 높아진 위상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개가 아무리 짖는다고 태양이 개 짖는 소리에 빛을 잃겠습니까? 그러나 구름이 두텁게 끼고 그 아래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때는 비도 내리고 어떤 때는 눈도 내리고 어떤 때는 우박도 맞습니다. 모두 지상 10킬로 이하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땅에서는 폭우가 퍼붓고 나이트를 켜지 않으면 차가 움직일 수 없는 어두운 거리가 되어도 비행기가 구름을 박차고 올라가면 거기에는 언제나 찬란한 태양이 있는 것입니다. 그 태양이 본질적 본체적 영광이라면 이 밑에 있는 태양빛은 효과적 영광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어디에 가서 정말 아름다운 인격과 아름다운 삶으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면 거기에는 열린 교회가 없지만 사람들이 거기에서 열린 교회 이름을 높이는 것입니다. 여기 와서 건물을 높이는 게 아니라 기껏 공사했는데 높이면 무너지지 않습니까? 이름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반대의 삶을 살면 떨어집니다. 짓밟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3. 단수임: ‘너희’는 복수이나 ‘빛’은 하나임
그러면은 예수님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그랬을 때에 그것은 이렇게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사람들로 이 세상을 살아라. 그래서 빌립보서 2장 15절에서 ‘너희가 어그러진 세상에서 빛들로 나타나며’ 사도바울이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소원을 그렇게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이 ‘너희’라는 말은 복수인데 ‘빛’은 단수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빛입니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보여 주냐 하면 우리는 다양합니다. 우리의 지문이 동일하지 않은 것처럼 우리 모두 아주 다양합니다. 본성과 성격이 다르고 자라온 배경과 재능이 각각 다릅니다. 지적인 수준도 다르고 육체의 힘도 다르고 사회적인 지휘도 각각 다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다른 것들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아주 중요한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 한 사람 한 사람들을 이 세계 전체를 창조하시는 계획안에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어떤 사람은 저렇게 다양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창조하신 그 사람이 바로 자신을 창조하신 그 목적에 맞게끔 살아가도록 부르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자기의 직업을 버리고 직업적인 전도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목회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를 그렇게 불러주신 소수의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장사하던 사람 예수 믿어도 장사하고, 회사 다니던 사람 예수 믿어도 회사 다닙니다. 재능이 없었던 사람은 예수 믿어도 여전히 재능이 없고 재능이 있는 사람은 예수 믿어도 여전히 그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각각 다른 삶의 영역에서 다른 일에 종사하면서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그것은 모두 크고 작은 거울이 되어서 하나의 빛을 반사하는 것입니다. 그 빛이 바로 하나의 빛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한번 마음속에서 이렇게 상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수천 명의 사람이 언덕에 서서 어떤 사람은 대문짝만한 거울을 어떤 사람은 핸드폰만한 거울을 어떤 사람은 손바닥만한 하트형 거울을 어떤 사람은 아주 조끄만 티스푼 보다도 작은 거울을 그런 거울을 수천 명의 사람이 하나씩 들고 동쪽에서 떠오르는 햇빛을 받아서 동쪽으로 반사시킨다고 생각을 해보세요. 거울의 크기와 모양은 다르고 반대편 벽에는 크고 작은 빛이 빛을 반사한 거울 모양의 빛들이 수 없이 떨어질 것입니다. 그죠? 그래도 모양은 각각 반사된 빛이 벽에 찍히는 모양은 각각 달라도 그 빛의 빛깔은 모두 똑같을 겁니다. 하나의 태양빛을 찬란하게 반사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 아름다움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태양은 동쪽에서 비추고 언덕에 수천 개의 크고 작은 거울이 반짝이고 바로 그 언덕 맞은편에 있는 높은 어두운 절벽에 그 찬란한 거울에 반사한 빛이 크고 작은 빛들이 떨어진다고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 반짝이는 다양한 크고 작은 거울이기 때문에 빛나는 그 빛은 얼마나 아름답겠습니다.
III. ‘그 빛’으로 부르신 자녀들
하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람으로 창조하시고 그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진리의 사람으로 다시 창조하신 이유는 바로 그렇게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이 언덕에 앉아서 크고 작은 거울로 찬란하게 비추는 것처럼 그 아름다운 반짝임에 한 빛을 더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제일 먼저는 그 빛을 하나님이 바라보시며 즐거워하시고 그 빛을 모르고 어두움 속에 살았던 사람들이 그 빛을 보면서 자기 등 뒤에 떠오르는 찬란한 태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 빛으로 부르신 자녀들이라고 우리를 칭하셨습니다.
A. 신학적 의미
우리를 그 빛으로 불러주신 자녀들이라고 할 때 이것이 갖는 의미가 크게 두 가지 입니다. 첫째는 신학적인 의미인데 이것은 빛과 진리이신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4절은 ‘예수그리스도는 빛이시라’고 이 비추는 ‘빛이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빛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빛은 시간세계 속에서 두 가지 방법으로 인간에게 찬란하게 비추어졌습니다. 하나는 신성의 빛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자신이셨기 때문에 그 찬란한 빛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만약에 이 빛을 추호도 감춤이 없이 모두 인간에게 확 비추었더라면 인간이 그 빛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찬란한 빛을 사람의 몸으로 인성으로 감추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러나 비록 사람의 인성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찬란한 빛을 감추고 내려오신 겸손의 모본을 보이셨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숨기신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올 때에 그분을 믿는 신앙으로 나아오는 사람들에게는 눈부신 찬란한 하나님의 빛이 사람들에게 비추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십니다’고 고백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귀신들조차도 그 발 앞에 굴복하며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인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신성의 빛은 믿음을 가지고 나아오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었습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리의 빛을 비추신 또 다른 방법이 있었는데 그것은 인성을 통해서 비추신 모범의 빛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관해 많이 배웠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오디오였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들었고 알았고 배웠지만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시는지는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내려오신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인간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어둠과 무지 속에 살아가는 죄인들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실 때에 죄의 결과인 죽음과 질병의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인간들을 바라보시며 흐느끼셨을 때 그들의 헌데를 어루만지시며 땀을 흘리셨을 때 더러운 인간들을 용서하시며 사랑하기 위해 그들의 발을 씻기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듣기만 했던 하나님이 어떠한 심정으로 자신들을 사랑하시고 자기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듣기만 하던 하나님을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 예수의 인성의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발견하게 되었고 무서운 율법의 칼을 들고 자신들에게 다가오기만 한 하나님이 아니라 한 손에는 우리를 때리시는 사랑의 회초리로 또 한손에는 우리를 치료하시고 싸매시는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읽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희망이 없던 바리새인과 희망이 없던 세리와 희망이 없던 창기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품안에서 위로와 안식의 장소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품은 완벽한 쉼의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품안에서 위로와 용서를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은 엄밀한 의미에서 절대로 빛이 아닙니다. 우리 중 누구도 그 빛의 근원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일 때 그 빛은 마치 나 자신의 거신 것처럼 빛이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고백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마음에 살아계셔서 당신의 찬란한 진리의 빛을 비출 때 그것은 우리의 지성과 우리의 감성과 우리의 의지에 영향을 미치고 우리의 마음속에 작용을 해서 그 진리를 나의 것으로 삼고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매일 매일 진리의 말씀과 은혜의 성령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이 세상에 빛으로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자신의 죄에 대해서 슬퍼하고 죄로 말미암아 지금 미치게 된 이 고통이 괴로워서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만나고 이제껏 내가 어두움 속에 살아왔다는 사실과 하나님 모르고 살아온 나의 인생의 날들이 추악하고 부끄러웠다는 것을 깊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그 마음속에 경험하는 일이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존귀한 형상을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은 찬란한 지식의 빛을 받게 되고 이 빛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세계가 무엇인지를 알고 인간이 누구인지를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살아 계시다는 사실 그리고 이 세계는 우리들이 하나님처럼 섬겨야 할 세상이 아니라 이 세계를 잘 돌보고 가꾸어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게 함으로써 주님께 기쁨을 드려야할 우리의 일터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고 나는 영원한 숭배의 대상일 수 없고 나의 진정한 보람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사람들에게 흘려보내는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가 되는 그 안에서 나의 가장 커다란 행복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세상이 여전히 살아있으나 예전과는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고 예전과 똑같이 살아있으나 예전과는 전혀 다른 가치의 질서를 가지고 사물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돈 벌면 호의호식하고 쾌락을 즐기고 싶었는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이 무엇인지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 지를 깨닫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질서를 따라 살아갈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이 세상에 썩어질 것들에 돈 모으고 헌신하였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업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직장생활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 세상에서 삶을 영위해가는 인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각각 있는 곳은 달라도 바로 있는 거기에서 그리스도의 나라의 군사들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로 자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빛이 우리 안에 계속 찬란하게 타올라야지만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붙들려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해 전에 은혜와 부패라는 시리즈를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아마 사경회 때에 설교했을 것입니다. 한번 가서 들어보십시오.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찬란한 빛을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물러가 잃어버려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고 이름 불리는 사람들이 사회의 지탄을 받는 악을 행함으로 신문지상에 오르내리고 심지어 영화관에 오르내립니다. 이래서 교회는 현저히 욕을 먹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야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짓밟습니다. 물론 그 사람 중에는 처음부터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던 사람들이 다수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한때에 주님을 사랑하고 헌신했던 사람들도 그 속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한때는 진리이신 예수를 만났고 그리고 고집대로 영 죽을 이 세상이 우리가 얼마나 더럽힌 세상인지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했고 눈물을 흘리며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기로 이렇게 부흥회 할 때마다 회개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지속적으로 진리의 말씀과 가까이 하며 살지 않았고 그 진리의 빛에 매일매일 자신의 삶을 비추어보는 자기 성찰을 포기했습니다. 그러자 껍데기는 예수 믿는 사람이고 마음은 짐승과 같은 야수의 마음으로 돌변했습니다. 성폭행하고 횡령하고 사회에 커다란 헤를 끼쳐서 기독교를 욕 먹이는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사람이 될 언젠가는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기억하면서 한번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생명과 빛을 인하여 교만하지 말고 오히려 지속적으로 그 빛 아래 머물고 그 생명 속에 살아가기를 죽는 날까지 힘쓰는 사람들이 될 때에 ‘너희는 이 세상의 빛이라’고 하는 주님의 이 말씀을 실현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B. 윤리적 의미
마지막 두 번째는 윤리적인 의미에서의 빛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그 세상의 그 빛’이라고 말합니다. 하필이면 예수님이 정관사를 붙여서 ‘그 세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또 다른 다른 하나의 세상이 아니라 그 옛날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세상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버리고 방탕했기 때문에 타락했던 그 세상 그랬기 때문에 구속받아야 할 그 세상 세상은 주님을 버렸으나 주님은 차마 자기가 창조하신 이 세상을 버리지 못해 자기의 외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구속의 주님으로 내려 보내시기까지 사랑하셨던 바로 그 세상에 우리들이 살면서 ‘그 빛’ 이여야 한다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일 먼저 우리에게 이 세상이 비록 진리를 잃어버리고 캄캄하게 어두운 절망적인 세상이 되었지만 하나님이 여전히 이 세상에 정말로 주고 싶어 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밝혀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인간에 모든 괴로움과 고통 그리고 그 쓰라림과 방황 이런 것들은 바로 궁극적으로는 진리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과학이 발달되면 인간의 생명을 현대의 판단으로 120세까지 연장할 수 있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행복할 것 같은 생각은 안 듭니다. 왜냐하면 특별히 건강관리를 하거나 운동을 하거나 이런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70세가 넘으면 노쇠 현상이 급속히 찾아오고 건강이 안 좋으면 70세 되기 전에도 삶의 질이 아주 떨어집니다. 그렇게 되어서 치매기도 오고 수족도 마음대로 놀릴 수도 없고 이런 사람을 120세까지 살게 만드는 것은 고문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많은 과학의 발달은 인간의 질병을 해결해 주겠죠. 과학의 많은 발달은 인간을 가난과 궁핍으로부터 해결해 줄 겁니다. 유전 공학자들은 심령의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다고 자랑합니다. 호박만한 쌀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수박만한 감자 몇 포기만 심으면 한 달 먹고 살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인간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첨단 과학의 기계들을 만들고 해도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저희 신학교 선배 가운데 한 사람이 옛날 80년대 특수 선교를 하시던 분이 있었습니다. 이 양반이 하는 일이 뭐냐 하면 소련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때는 공산주의 국가 시절이었습니다. 살살 다니면서 그리스도인들을 찾아내서 너무나 자유세계에 가서 신앙생활 하고 싶은 사람들을 탈출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걸리면 처형입니다. 그런데 하여튼 목숨 걸고 그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직접 간증을 하는데 엄청나게 007작전처럼 힘을 드려서 뇌물도 주고 이렇게 해가지고 소련에서 있는 어느 나이든 부부를 미국으로 말하자면은 빼돌렸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이제 미국에 정착을 하게 되는데 6개월인가 1년 흐른 다음에 선교사를 다시 만났는데 그러더랍니다. ‘우리를 다시 좀 소련으로 보내달라고...’ 너무 놀랐습니다. ‘왜 그러냐?’ 그랬더니 ‘거기가 신앙생활하기 훨씬 좋고 행복하다’고 그러더랍니다. 여기는 핍박도 없고 그리고 먹을 것이 지천이고 그러니까 서서히 심령이 부패하고 무장이 해제가 된다고 합니다.
실화인데요. 이것도 어느 의사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개안수술을 해주는 사람이었는데 신앙은 굉장히 좋은 할아버지였는데 눈을 뜨게 해 주었데요. 그랬더니 그분도 6개월이 채 안 되서 ‘나 다시 눈을 좀 보게 해 주면 안되냐’고 ‘왜 그러냐’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렇게 악한 줄은 몰랐다’는 것입니다. 눈뜬 세상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진리를 버리고 어두워진 세상에서 인간은 미칠 듯이 기술과 과학의 발전으로 수명도 늘어나고 그리고 행복하게 살 것입니다. 강남에서 어느 목사님이 ‘천국’ 설교를 했더니 예배 끝난 다음에 어느 돈 많아 보이는 아주머니가 나오더니 그러더랍니다. ‘목사님 잘 모르셔서 그러는데 강남에서는 아프지만 않으면 여기도 천국하고 비슷합니다.’ 그러더랍니다. ‘구지 천국 안가도 됩니다.’ 인간의 문명과 과학의 발달 자본주의가 우리를 절대로 죄로 말미암은 비참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도 이 세상에 진리의 빛을 던져주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 진리의 빛은 하나님이 허공중에서 비추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인을 통해 우리를 통해 이 진리를 사람들에게 비추시게 하시는 것입니다.
IV. 결론: 그 빛으로 부르심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해야 될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보면서 비록 나처럼 돈 많지 않고 나처럼 지위 높지 않아도 ‘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우리에게는 없는 평화가 있구나. 진정한 평안이 있구나. 저것은 지위와 돈 때문이 아니라 진리를 붙들고 살기 때문에 오는 그 참된 평안 어떤 시련과 환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확신 인생의 벼랑 끝에서도 진리이신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신념에서 나오는 확신이구나.’ 이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인간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예수 믿게 하신 것은 단지 예수 믿고 예수님 이용해서 신앙을 도구 삼아 이 세상에서 우리의 꿈을 이루다가 천국 가라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주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하시는 날까지 이 세상에서 진리의 그 찬란한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어두운 세상에 작은 별들처럼 여러분들을 여기에 두신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세상을 비추게 하신 사람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마 5:14)
녹취자: 윤은정
Ⅰ. 동네와 등불의 비유
A. ‘산 위에 있는 동네’
1. ‘동네’(πόλις): 성(城)을 가리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우리가 이 세상의 빛인 것을 두 가지 비유를 한꺼번에 들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산 위에 있는 동리와 등경위에 있는 등불의 비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산 위에 있는 동네’라고 했는데 이 동네라고 하는 말이 희랍어 성경에 ‘폴리스’라고 되어있고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 있는 영어의 ‘폴리스’의 어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도시’ 혹은 ‘성’ 그런 뜻입니다. 옛날에는 성을 세울 때에 성을 대부분 높은 곳에 세웠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이 이스라엘 지역에서 뿐만 아니라 고대 모든 나라들에게 있어서 이 성은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그 도시의 백성들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 성에는 왕이 묶는 궁궐을 둘러싸는 종류의 성이 있고 도시 전체를 에워싸는 성이 있습니다. 이걸 재성과 나성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성벽들을 에워싸서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일반적인 도시 형성의 방법이었습니다.
2. 성읍을 높은 곳에 세움
성경에 보면 수많은 왕들이 나오고 심지어는 창세기 같은데 보면 몇 십 왕들이 나오는 장면들이 나오는데 그 국가의 왕이라고 하는 것을 오늘날 국가처럼 생각하면 안 되고 그냥 동네하나 돌멩이로 담을 쌓고 성을 만들어서 거기서 각자 왕 노릇 했기 때문에 수많은 국가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폴리스라고 불리 우는 성은 높은 지대를 택해서 돌멩이나 혹은 벽돌로 성을 쌓고 그리고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했습니다. 높은 곳에 있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는데 우선 첫째는 높은 곳에 있으면 적의 공격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할 수 있습니다. 고대의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성을 넘어오거나 혹은 성을 부수는 것이었는데 성을 넘어온다고 하더라도 성이 높은 지대에 있어야지만 사람들이 성벽을 넘어오는 것을 어렵게 만들 수 있었고 또 성을 공격할 때에는 공성추 같은 도구를 가지고 와서 성벽 가까이에 붙이고 충격을 지속적으로 가해서 서로 이빨이 물려있는 돌멩이를 흔들어서 그 중에 몇 개가 빠지게 만든 다음에 성을 무너뜨려서 무너뜨린 그 성벽을 타고 군대들이 들어가서 성을 점령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낮은 지대에 성이 있으면 그런 도구들을 갖고 와서 성벽을 공격하는 것이 쉬웠기 때문에 아주 높고 가파른 곳에다가 성을 지었던 것입니다.
3. 모든 사람들에게 보임
또 하나의 원인이 있는데 도시라고 하는 것은 이 시대에는 여기에 도시하다가 그 다음에 다른 시대에는 이것을 완전히 버리고 허허벌판에서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하는 경우는 아주 극히 드뭅니다. 대부분 도시가 있었던 곳 위에 그 다음세대에 다시 도시가 서고 또 도시가 서고 또 도시가 서고 이렇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한 나라를 점령하게 되면 집이나 이런 것들을 다시 부수고 특별히 이 중동지방과 팔레스타인 지방에는 흙으로 된 건물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부수고 그 문명위에 또 다른 문명이 서고 도시가 섭니다. 또 무너지고 또 서고 하는 일들이 반복이 됩니다. 그러니까 지금도 로마문명의 터를 파보면 한참 파보면 밑에서 시루떡 나오듯이 그리스문명이 나오고 더 파들어 가면 그 전시대의 문명이 나오고 이렇게 됩니다. 그러면서 한 도시가 무너질 때마다 자꾸 성이 도시가 높아지게 되겠죠. 이렇게 올라온 것을 가리켜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히브리어로 ‘텔’(ל, tel)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텔 아비브’라든지 ‘텔 엘 아마르’라든지 어쨌든 이 ‘텔’자가 들어간 것은 모두 높은 지대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반복적인 문명으로 텔을 형성하고 여기에 성읍들이 자리하게 되는데 결국 모든 사람들에게 그 성은 보입니다. 그러니까 성이 사람들에게 보일 수밖에 없는 곳에 위치한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될 수밖에 없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낮에는 사람들이 성 밖으로 나와서 밭도 가꾸고 그리고 여러 가지 과수원도하고 목축도 하지만 그러나 밤이 되면 사람들이 모두 들어가고 그리고 성에 들어올 모든 사람들이 들어온 다음엔 성문이 굳게 닫힙니다. 그 성이 멀리 높은 곳에 있고 성 안에 있는 사람들과 성 밖에 있는 사람들은 뚜렷이 구별됩니다. 성 안에 있도록 허락이 된 사람들은 성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 사람들은 왕국의 통치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안에서 이루어지는 그 통치는 백성들 모두에게 미쳐서 그 성안에서 통용되는 법을 따라서 그 백성들이 살아가도록 이렇게 규정되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하는 요점은 이것입니다. 산 위에 있는 도시가 모든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처럼 너희도 만약에 나를 믿고 진실로 나를 따른다면 모든 사람들에게 구별되어 사람들 눈에 확연히 띄게 될 것이다. 그러면 왜 예수님을 다르면 마치 산 위에 있는 동리가 모든 사람들의 눈에 들어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세상의 사람들과 구별되게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나라에 속해있고 예수님을 따르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은 세상나라에 속해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나라와 세상나라는 장소로 구분되는 나라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 속에서 삶 속에서 그분과 관계를 맺고 거기에 복종하며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와 이 세상의 나라의 차이입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그리스도를 왕으로 삼아 그리스도의 통치에 의해 이루어지는 질서가 있고 세상나라에는 세상을 중심으로 삼아 이루어지는 통치의 질서가 있습니다. 세상나라에는 세상임금이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나라에는 그리스도가 임금이었습니다. 세상의 나라에는 창과 칼, 감옥소와 교도소, 형벌, 형벌도구, 고문, 숙청, 살인, 협박, 공갈, 세금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을 다스렸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나라의 통치의 질서의 반역하는 인간들을 처벌하는 그 역사적인 현장을 가서 보면 정말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의심하게 만듭니다.
여러해 전에 호주에 집회를 갔을 때 집회가 끝나고 점심시간에 그 도시에 있는 박물관에 갔습니다. 거기에 보니까 이제 영국 사람들이 거기에 와서 정착을 하면서 영국인의 통치에 항거하는 원주민들을 어떻게 처형했는지에 대해서 역사적인 모형을 그대로 그려놨는데 정말 아무리 모형이지만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을 땅바닥에다 네 발을 새말뚝에 묶어놓고 그리고 저 쪽에는 도끼가 매달렸는데 도끼의 크기가 그냥 우리들이 쓰는 그런 도끼가 아니라 커다란 트렁크만한 도끼입니다. 그리고 그 도끼가 천장에 매달려있고 저쪽에서 줄을 탁 끊으면 도끼가 휙 지나가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지나가는 게 땅을 긁으면서 지나가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도끼가 지나가는 그 자리에 사람은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여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사형 언도가 내리면 탁하고 끊으면 그 도끼가 휙하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저쪽에서는 높낮이를 조절하게 되어있습니다. 도끼가 힘차게 그 트렁크만큼 무거운 도끼가 좌우로 흔들리면서 서서히 서서히 내려오는 것입니다. 배가 나온 사람은 배가 제일 먼저 닿겠죠. 머리가 큰 사람도 머리먼저 닿겠고 그리고는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일직선으로 찢어진 채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정말 더 형언할 수 없는 잔인한 방법들이 그 통치의 질서에 반하는 사람들에게 형벌이 내려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나라는 그렇게 다루어지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그렇게 다루어지는 나라가 아니라 이 세상나라에서 자기를 주인 삼으며 이 세상 임금에게 복종하며 살던 사람들의 마음에 진리의 빛을 비추어서 정말 위대한 왕이 누구시고 그리고 이 세계가 누구에 의해 창조되었고 사람이 얼마나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인지를 일깨워주셔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을 얼마나 사랑하신지를 복음을 통해서 보여주심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 안에 나타난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대한 사랑을 깨닫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는 자신이 그 모든 질서의 주인이었고 왕에게 복종하고 권력에 아부하는 것 그리고 커다란 금전적인 이익에 굴복하는 것도 모두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모든 불행이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이 부족해서 생긴 불행이 아니라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를 깨달으면서 십자가 사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주님은 한분도 우리의 목에 칼을 대고 우리를 위협하거나 협박하지 않으셨지만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 모든 원인이 사실은 하나님의 통치에 거슬러 살려고 하는 우리의 죄와 악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는 이제는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에 마음이 녹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같이 존귀한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같이 더러운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었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의 커다란 감화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깊이 깨달으면서 그래서 주님의 사랑에 감화를 받고 이제는 ‘예수님이 하나님을 거슬러 산 나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니 이제는 내가 주님의 뜻을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의 통치 안에서 살겠습니다.’ 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성 밖에 있는 사람들은 그 성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들은 그 성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것과 성 안에 있는 그 백성들은 모두 한결같이 그 나라의 한 왕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그 사이에 뚜렷한 구별이 있다고 하는 것을 인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숨길 수 없는 특징은 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감출 수 없는 특징은 자신들과는 다른 통치를 받으며 다른 질서 속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두려워하는 때에도 이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무서워 벌벌 떠는 때에도 이 사람들은 평안합니다. 자신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일에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의 통치에 속한 사람들은 오히려 두려워하거나 분노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지키고자 할 때에 그 때에 그들은 각각 다른 질서 속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묻고 싶겠죠. 그러면 목사님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는데 이 사람들이 세상에 나가서 섞여 살 때에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고백을 하기 전까지는 다른 사람들이 전혀 예수 믿는 줄을 모르는데 그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게 바로 박쥐같은 신앙생활입니다. 날아다닐 때에는 새처럼 새 무리에 끼어서 날아다니고 조용히 앉아있거나 벽에 붙어있을 때에는 짐승인 것처럼 붙어있는 것입니다.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은 것입니다. 교회에 와 있으면 교회에 와 있는 데로 편안하고 세상에 나아가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살면 똑같은 사람으로 비취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세상에 가도 편안하지 않고 교회에 와도 편하지 않다 라는 뜻입니다.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빛이라고 말씀하셨고 너희들이 이 산 위에 있는 동리 혹은 산 위에 있는 성 혹은 마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한 그들은 그렇지 않은 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구별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예수 그리스도를 충실히 따라가다가 보면 그러면 이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어떠한 구별도 없다. 그러면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한 사람은 이 세상이 우연히 생겨났다고 믿는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의해 창조되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사람이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고 완전한 인간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또 한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철저히 타락한 죄인이라고 믿습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 없이도 넉넉히 살 수 있다고 믿고 또 한 사람은 하나님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나의 이성이 진리의 궁극적인 근원이라고 믿고 또 한 사람은 성경이외에는 우리에게 참된 진리의 근원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한 사람은 자기의 야망에 의해 지배받으며 인생을 살고 또 한 사람은 주님의 사랑의 감화를 받으며 삽니다. 한 사람은 이 세상에 있는 이웃들이 자기가 정복하고 지배하기 위한 대상일 뿐이고 또 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입니다. 한 사람에게는 이 세상인간이 사회가 원숭이로부터 진화된 동물의 고등한 단계일 뿐이고 또 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깨달을 수 있는 인간에게 마음을 주셔서 주님을 분별하면서 살 수 있도록 양심과 복음의 거룩한 빛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은 자기를 위해서 살다가 죽는 것이 꿈이고 또 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다가 죽는 것이 꿈입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의 삶의 양식이 분별할 수 없을 정도로 섞여있다 라고 하는 것이 그게 가당하기나 한 말입니까? 거짓말입니다.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자기가 정말 신앙의 원리를 따라서 최고의 성스러운 삶까지는 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핵심적인 진리의 가치를 붙들고 그 길로 걸어가면 며칠 지나지 않아서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나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 위에 있는 동리처럼 감출 수가 없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어떤 의미에서는 세상과 구별해야 됩니다. 저는 21살에 회심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나와 똑같은 인간이었으면 나는 교회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세속주의적인 방식이 신학적으로도 잘못됐고 심리적으로도 잘못됐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옛날에 회심하기 전에 이 세상에 방황할 때 가끔은 성당이나 교회, 절에 다니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에 거기가면 나 같은 인간이 득실거리고 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안가죠. 거기는 무엇인가 내가 살아온 세계와는 다를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나와는 다른 사람들이 거기에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니까 거기에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오게 하려면 문턱을 낮추어서 그래서 사람들이 아무런 저항감이 없이 교회에 쑥 들어왔을 때에 자기가 원래 있던 세상 거기에 또 다른 세상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받게 해달라고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그것이 선교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교회의 문턱을 낮추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종교를 가지려는 사람은 그 종교를 이미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과 많이 다르다는 사실에 대해서 자기가 종교를 가져야 될 필요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간증하나 할까요? 어느 청년이 교회에 있는데 하루는 친구 초청 잔치를 한다고 그러더랍니다. 그러더니 전도사라는 사람이 청년을 하나 부르더니 그래요. ‘야 너 이제 안 믿는 청년들이 많이 올 텐데 너한테 순서하나 줄 테니까 교회에서 유행가 한번 불러봐라.’ 그러더랍니다. 황당하지 않습니까? 이제 싫다고 그랬겠죠. ‘너는 왜 그렇게 생각이 짧으냐? 게네들은 다 안 믿는 얘들인데 우리가 찬송가만 부르면 게네들이 좋아하겠냐? 세상에서 듣던 노래 교회에서 한번 들을 수 있다고 그럴 때에 좋은 것이 아니냐?’ 이 자매는 이제 괴로움에 휩싸였습니다. 그리고 결정을 못하고 준비하는 단계였었다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이 자매는 우리교회에서 말씀도 듣고 그랬으니까 남의 교회지만 ‘전도사님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성도가 목회자한테 그건 또 아닌 것 같다고 그러니까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겠습니다. 그 다음 주에 이친구가 학교에 신학교에 다니는데 거기에 제가 개강 수련회 강사로 갔습니다. 그리고 3일 동안 집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셨습니다. 한 4년 전 일일 것입니다. 은혜를 주셨는데 그러고 나서 그 주일날 돌아와서 그 자매를 부르더랍니다. 그러더니 ‘너한테 할 얘기 있으니까 잠깐 나 좀 만나자’ 그러더랍니다. 이제 ‘혼나나보다.’ 그러고 따라갔더니 갑자기 눈물을 흘리면서 울더라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김남준 목사님이 우리 학교에 개강 수련회에 왔는데 네 말이 맞았다. 네 말이 맞았다.’ 그러면서 막 울더랍니다.
정말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생각하고 이 세상을 움직이는 정신이 무엇이고 무엇이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의 발목을 잡고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방해하는지를 공부하고 연구해야 됩니다. 정말 헌신해야 됩니다. 어마어마한 양의 공부가 필요합니다.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그건 분명하지만 그들과 교회가 곡 같이 세속화 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몰려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절대 사실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 그것이 성공을 하더라도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너희는 세상의 등불이니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불 꺼진 등을 잔뜩 갖다 달아 논들 그 뭐하느냐 이 얘기입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냥 그렇게 세상을 연구하고 어떡하든지 그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책임감을 느끼고 그들을 구원하고 그들을 빛 가운데 살아야 되겠다라는 생각은 잊어버리지 말아야 됩니다.
그러나 타협을 하고 그들과 꼭 같이 세속화될 때에 어떤 변화가 교회에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때 더 필요한 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은 누구도 의식하지 말고 예수 믿는 사람다운 삶으로 그 신념으로 그 한길로 계속 걸어감으로서 사람들은 처음에는 비난을 할지는 모르지만 ‘과연 예수 믿는 사람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또 다른 세계의 질서가 있구나’ 하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산 위에 있는 동리라고 비유하시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우리 나름대로의 질서가 있고 그 질서의 한복판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우리 각자 생각이 다르고 각기 판단력도 다르고 우리가 알고 있는 분야도 각각 다르고 우리의 성향도 각각 다르지만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길 이라고 하면 우리 모두 그 앞에 부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방법 하나님의 이 나라를 이루어가는 데에 있어서 어떤 것들이 중요한지에 대한 각각의 이해는 서로 차이가 있어도 우리 모두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됩시다. 그분의 통치에 굴복하는 사람들이 됩시다. 그래서 우리 각각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고 각각 다양한 의견을 가지고 살아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하나 ‘그리스도 예수가 저들가운데 다스리시는구나.’ 하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B. ‘등경 위에 둔 등불’
1. 말 아래 두지 않음
이어서 등경위에 둔 등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위에 두나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이 한번 수업시간에 자기가 처음 은혜를 받고 설교를 하면서 실수한 이야기를 하는데 이 ‘말’을 동물 ‘말’이라고 생각을 했답니다. 웃지 않으신 분은 그분도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설교를 막하다가 막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이제 그 정동이 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말 배 밑에 등불을 켜보십시오. 말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리고 교인들이 막 뜨겁게 ‘아멘’을 하더랍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뭔가 좀 이상하더랍니다. 집에 와서 찾아와 보니까 이 말이 그 말이 아니더랍니다. ‘모디온’이라는 희랍어 단어인데 이것은 우리들이 어렸을 때에 봤던 무게로 곡식을 달기 전에 되박에 되어서 팔았던 때가 있잖아요? 요즘에 되박 보지도 못했지만. 그것입니다. 그래서 말 한말이 희랍시대 때에 지금으로 따지면 소두 8되 내지 9되 우리 쓰는 10되짜리 소두 한말보다 약간 작은 것입니다. 8.75리터 정도 되는 그런 크기의 용기였습니다. 거기다 곡식 같은 것을 담아서 이렇게 된말로 거래를 하고 하던 그 말입니다.
자 그 말을 딱 엎어놓고 그리고 그 만약에 말 아래다가 말이 이렇게 있는데 말 아래다가, 말 속에다가 말 아래라고 하는 이것이 전 아직까지도 말로 된 용기 속에다가 촛불을 놓는다는 건지 아니면 그 옆에다가 놓는다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아마도 예수님이 말씀하시려는 이 의도 ‘등불을 켜서 말 아래두지 아니하노니’ 그런 것으로 보아서 저의 생각에는 이렇게 파여진 말 속에다가 불을 켜서 둔다는 것 같아요.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세요. 만약에 불을 켰는데 이렇게 움푹 파진 말 속에다가 깊이 집어넣어서 등불을 켰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죠? 동그랗게 천장에 동그란 빛이 나타나고 나머지는 캄캄할 것 아니에요? 그 당시 가옥 구조가 뭐 돈 많은 사람이야 좀 달랐겠지만 일반서민의 가옥구조는 대게 ㄷ자형이었습니다. ㄷ자형.
그래서 이렇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쪽에는 소나 이런 것들을 매달아놓는 우릿간이 있고 창고가 있고 그리고 요렇게 요렇게 해서 방이 몇 개 있고 이쪽에 왼쪽으로 대개 큰 방이 있어서 거기에서 대게 지금처럼 이렇게 카페트가 깔리거나 장판이 깔리거나 그런 것은 아니고 그냥 진흙으로 이렇게 발라서 바닥을 만든 다음에 그렇게 하고 아래쪽에는 깔개를 하나 깔고 그 다음에 두께는 그저 한 요정도나 될까요? 아주 상이라고 말하기보다 그저 도톰한 나무 요정도 높이 되는 것을 나무 판대기를 깔고 나무 판대기나 혹은 돌 판대기를 깔고 그것을 이제 식탁으로 삼아서 이제 밥을 먹었습니다. 윗목에서는 잠도 자고 위에는 거적대기 같은 것을 깔고 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람도 많고 하니까 창이 크질 않아요. 아주 작은 창이고 혹은 창이 없거나 그러면 거기에 식구들이 모두 모이면 낮에도 컴컴합니다. 그러면 등불을 켜서 이제 올려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등불을 켜면 어디다 좀 높은 곳에 올려놔야지만 그 빛이 이렇게 비쳐서 사람들이 얼굴도 분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걸 켜서 말 아래다 내려놓을 사람이 어디있겠느냐 이것입니다. 뭐 그 속에다 안 넣고 그 옆에다 놓는다고 하더라도 긴 그림자가 방안 가득히 채워서 사실은 그림자가 얼룩 거리면 차라리 그 빛이 없는 것보다 더 불편하지 않습니까? 그런 상황을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 등경(λύχνίαν): 그 위에 둠
절대로 사람들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는 법이 없다. 그러면서 ‘등경위에 두나니’ 그랬습니다. 이 등경은 히브리서 9장에서는 등대라고 번역이 되었고 계시록 1장에서는 촛대라고 번역이 되었는데 이게 ‘뤼크니아’라는 단어인데 남성형으로 쓰면 ‘뤼크노스’(λύχνος)에요. 그런데 남성형으로 이면 이것은 휴대용입니다. 휴대용. 왜 이렇게 등불을 들고 다니는 이렇게 옛날에도 등불을 막대기에 낀 것도 있고 이렇게 드는 것도 있잖아요? 그래서 구약성경에 보면 ‘주의 진리는 내 길의 빛이요. 내 발에 등이니이다.’ 할 때에 그 등이 바로 ‘네르’라고 하는 히브리어 단어인데 그게 바로 이렇게 한 걸음 한 걸음을 이렇게 비취면서 가는 휴대용 등입니다. 바로 그런 등이 누가복음 계시록 이런 곳에 나오는데 여기에 있는 이 등경은 그런 휴대용 등이 아니라 한 곳에 딱 세워놓고 그리고 그 위에 촛불이나 등잔불을 켜는 그것이 바로 등경이었습니다. 이 당시에는 대게 기름을 짜서 그 기름을 헝겊 심지로 만들어서 적셔서 그냥 접시에다가 기름을 따르고 심지를 그냥 담궈서 옆으로 떨어뜨려서 불을 붙여서 썼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로 말하자면은 한 5촉이나 될까? 한 3촉이나 될까? 한 희미한 옛날에 호롱불 같은 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 불을 비췹니다. 그 빛을 이렇게 비추면 어둠속에서 그나마 그 불빛을 보면서 서로를 확인하고 밤에 일할 것이 있으면 일도하고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냈던 것입니다.
Ⅱ. 모든 사람에게 비취는 빛
A. ‘집안 모든 사람’
그러면 한번 조용히 당시의 문맥으로 돌아가서 묵상을 해보세요. 이렇게 희미한 등불이 오늘날처럼 희왕 찬란한 전깃불 밑에서 생활하는 우리에게는 그렇게 대단한 것일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불빛하나 없는 캄캄한 밤에 그것도 이제 사방이 막힌 그런 어두운 방 안에서 그 작은 불빛은 얼마나 고마운 것이었을까요? 문만 열고 밖에 나가면 칠흙 같은 어두움이 가득한데 방안에는 그나마 그 불빛이 있어서 식구들의 얼굴을 알아보고 사물을 분간할 수 있도록 시야를 갖게 만들어 준 것이 등불이었습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방 안에 작은 등불이 빛나고 있었으니 사람들의 얼굴보다 방 안에 있는 물건보다 그 손톱만한 불꽃이 방 안에 들어온 모든 사람들 눈을 가득 채웠을 것입니다. 낯선 사람이 방문을 열고 들어와도 사람부터 보이질 않고 방 안에 그 불꽃 하나 있는 것처럼 불꽃이 제일 먼저 보였을 것입니다. 그것도 등경위에 있으니 사람들 눈높이에 맞춰서 더 잘 보였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등경위에 등불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B. 방안의 등불의 역할
그러니 등경위에 있는 등불이 우리에게 지시해주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그 등경에서 빛이 환하게 비친다는 것과 함께 어두움 속에서 그 등경의 불빛이외에 무엇이 보이겠느냐? 이런 뜻입니다. 결국은 똑같이 산 위에 있는 동리가 우리에게 암시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존재라고 하는 것은 노출될 수밖에 없고 사람들에게 들어낼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1. 모든 사람들에게 비춤
자 가슴에 손을 얹고 조용히 한번 생각해봅시다. 여러분 여러분은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 특별히 여러분의 가족이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볼 때 주일날 교회에 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여러분이 자신과 다른 사람이라고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들이 올바른 이 세상의 빛이 되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으로 느껴지지를 않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산 위에 있는 도시처럼 그리고 등경위의 어둠속에서 손가락하나 크기만큼 빛을 발하는 불빛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한번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교회에 와서는 예수 믿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살아갑니다. 교회 밖에 나가서는 이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함께 대화하고 먹고 마시며 사귀어도 추호의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세상 사람과 꼭 같은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자신들은 세상 사람들을 향해 품는 가슴이 크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자신과의 관계에서 자신들이 예수 믿는 사람과 조금도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여기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정체성을 잃고 있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은 죄 짓고 악을 행하고 형무소에 사는 사람이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술 먹고 담배 피는 사람이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을 다스리고 계시는 예수그리스도의 통치의 질서를 따르는 대신 겉으로는 신앙을 고백하나 이 세상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통치의 질서를 따라 사는 것이 그것이 세속적인 것입니다. 요즘은 그런 것도 아예 안 하더라구요. 언젠가 한번 어느 교회에 설교를 해달라고 해서 꾀 이름이 널리 알려진 교회인데 갔습니다. 로비에 들어서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교회 로비에 그것을 어떻게 가지고 들어왔는지 승용차가 있습니다. 그 옆에는 대형 오토바이들이 쭉 서있고 저쪽 끝에는 자전거가 서 있습니다. 승용차를 이렇게 눈 여겨서 봤더니 그 당시의 기아 아벨라 자동차였습니다. 빨간색 자동차인데 제법 예쁘게 생겼습니다. 거기에 1등이라고 써 붙였습니다. 그 다음엔 2등 3등 4등 이렇게 써 붙였습니다. 저게 뭔가 그랬더니 거기 부목사님이 설명하기를 저게 전도 왕에게 주는 1등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 밑에는 ‘아무개 장로님이 협찬 하셨음.’ 이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지금으로부터 약 한 십사 오년 전인데 지금보다 소득수준이 더 낮은 때였죠. 개인이 자동차 한 대를 덥썩 내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일까요? 어려운 일일까요? 매우 쉽다고요? 한 번 좀 다음 주에 해보세요. 교회에 몇 대 좀 업무용으로 쓰게... 한번 해놔 보세요. 기대하겠습니다. 쉬운 일 아니거든요. 그 당시에도 한 6백만 원 갔으리라고 생각되는데 어쨌든 그것을 내놨습니다. 오토바이 계속 줄이어서 세워있는 것입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 그것을 하기고 결정한 교회나 그것을 자기 생활비를 아껴서 내 놓은 장로님이나 그래도 자동차는 못 내놔도 오토바이라도 내 놓자고 월급을 턴 사람이나 아무도 나쁜 사람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어떡해요? 전도를 하자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나쁜 게 없습니다. 그런데 세속적인 것입니다. 그게... 목표는 올바르게 되어도 그 목표를 찾아가는 사고방식이 그리스도 예수의 통치를 받는 그런 사람다운 사고방식이 아니라 이것입니다.
전 실제로 직접 봤거든요? 쪽지를 하나 봤는데 저희 교회에 1000명을 등록시켜주시는 분께 32평형 아파트를 드리겠습니다. 진짜로 거기에 써있습니다. 물론 거기도 조건이 있겠죠. 뭐 등록을 하고 1년을 다녀야 된다든지 그런 게 있겠죠. 1000명을 언제 그 짓을 하겠습니다. 당첨될 사람이 없으니까 한번 해보는 거지. 그런데 뭐냐 하면 그렇게 교회를 부흥을 시키겠다는 마음은 동정이 가지만 ‘방법이 세속적이다’ 이것입니다. 방법이 세속적이다. 그래서 우리의 정체성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다시 한 번 가슴에 손을 얹고 그렇다고 내일부터 동네방네 뛰어다니면서 ‘나 예수 믿는 사람이다’라고 그러라는 게 아닙니다. 정말 어떤 사람은 제발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서류봉투에 성경 넣고 그리고 주일날 조용히 교회에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라는 뜻이 아니라 한 번도 내가 어느 교회에 다닌다고 뻥치지 않아도 사람들이 ‘저 분은 참 다르다’ ‘저 분은 정말 틀리다’ ‘저분을 다스리는 통치의 질서와 힘은 우리의 그것과는 참 다르다’ 그것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등경 위에 있는 등불로 예수님의 관심이 옮겨갑니다. 그러면서 ‘그 등불이 모든 사람들에게 비취는 빛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집안의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고 말입니다. 유대인의 생활습관에 의하면 이제 식사 때가 되면 사람들이 한 방에 모였습니다. 그래서 왼쪽으로 들어가면 일반적으로 제일 큰 방을 하나 마련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와서 사람들이 식구들이 와서 같이 밥을 먹고 그리고 함께 대화도 하고 하는 거실 같은 개념의 방이죠. 거기에 모인 시간은 캄캄한 어두운 밤입니다. 그리고 그 가족들은 하나의 등불 아래 오순도순 모여 있습니다. 그 등불이 그 빛이 희미하지만 어둠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에는 아주 충분한 빛입니다.
여러분 반딧불이 시골에 가면은 예전에 반딧불 한 마리 날아가지 않습니까? 서울에는 있지도 않거니와 여기에다가 반딧불을 확 풀어 나봐야 아무도 그게 반딧불인줄 몰라요. 왜? 온 도시가 불이 비치고 특히 우리 서울같이 이렇게 전기를 많이 쓰는 오늘도 사실은 전깃불을 많이 켜놔서 좀 미안하기는 한데 오다가 넘어 질까봐 밝게 켜놓은 거니까 이해를 하세요. 보통 때는 끕니다. 어쨌든 그런 불빛이 환한 곳에는 등불이 보일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시골에서 적막하고 캄캄한 밤중에 저 몇 십 미터 바깥에서 날라 다녀도 아주 또렷이 보입니다. 그러니까 그 등불자체는 그렇게 대단한 위력을 가진 것이 아니어도 주위가 워낙 어두우니까 그 불빛은 방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또렷이 보였고 거기에서 나오는 그 빛은 방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춥니다. 진리의 빛은 제일 먼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 자체에 눈을 끌도록 만들어 주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 진리의 빛이 자기 자신을 비추어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도록 만들어주고 또 그 빛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진리의 빛은 사물들을 보도록 만들어 주습니다. 확 보도록 만들어 주습니다.
이제 아주 어렸을 때는 별로 그러지 않는데 나이 한 40대 50대에 들어가게 되면 이제 인생도 많이 살았고 그러면서 이제 사람들이 먹는 것에 대해서 젊었을 때 보다 훨씬 집착을 하게 됩니다. 젊었을 때에는 그저 살아본 경험도 없고 하니까 주면 주는 대로 먹고 또 입맛이 너무 고급스러워도 문제죠. 젊은 주제에 뭘 먹겠어요? 어느 날 아내가 맛있는 한우 고기를 먹여서 식탁에 올렸데요. 그래서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둘이 앉아서 겸상을 하게 됬다고 합니다. 두 사람 다 솥이라도 먹을 정도로 배가 고팠데요. 아내가 맛있게 최고급 한 우 고기를 먹는데 양이 그렇게 많지를 않았데요. 그래서 이렇게 탁 내려놓으니까 아들이 젓가락으로 먼저 공격을 탁 했데요. 그러니까는 아버지가 젓가락을 탁 치면서 ‘네 이놈 너는 앞으로 살날도 많으니까 먹을 날도 많을 거다. 양보해라’ 그러고 아버지가 젓가락으로 집으려고 그러니까 아들이 젓가락으로 탁 치면서 하는 말이 ‘아빤 여태까지 많이 먹었잖아.’
그런데 우리 교인 하나가 있었는데 친구들하고 모여서 이야기를 하는데 무슨 얘기를 했냐면 ‘야 짜장면은 의정부 어디가 최고야’ 그랬더니 그것은 음식도 아니지. 그러면서 이야기를 하다가 생선회로 이야기가 옮아갔는데 생선회 어디가 좋고 ‘그런 거 다 필요가 없고 군산을 가야 진짜 생선회다운 생선을 먹지. 거기서 먹으면 여태까지 먹은 생선에 대한 기억이 다 지워질 거야.’ 그러니까 ‘야 그러면 우리 당장 한번 먹으러가자.’ ‘그래 가자’ 그러고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려가는 것입니다. 저녁때 한번 생선회 먹고 온다고 달린 것입니다. 갑자기 차가 꽉 밀려서 차가 안 가는 것입니다. 고속도로 나가지도 못하고 들어가지도 못하는데 이게 도대체 왜 그러냐 그랬더니 막 연기가 나고 저기서 앰뷸런스가 갓길을 달려오고 막 그러더랍니다. 가가지고 보니까 앞에 가던 차가 교통사고가 났는데 아주 박살이 나가지고 몇 사람이 아예 만신창이가 돼서 핏덩어리가 나뒹구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 그 순간 고요히 침묵이 흐르는데 그중에 한 친구가 그러더랍니다. ‘야 우리가 지금 뭐 하러 가는 거니? 돌아가자.’ 성경의 진리도 아니고 인간은 언젠가는 죽는 유한한 존재라는 본성의 빛을 그 고속도로의 사고에 사람들의 마음에 확 비치니까 ‘이 바쁜 시간에 할 일 팽개치고 이게 뭐하는 짓이냐?’하는 각성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맛있는 회는 다 사라지고 인생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니까 접고 돌아서 나와서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하는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의 빛이 주는 힘입니다. 이 세상의 본성의 올바른 빛도 그런 놀라운 힘을 주거늘 하물며 성경진리의 말씀이 죄인인 우리의 마음에 빛을 비출 때에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나겠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빛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빛이 되거라’ 혹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그럴 때에 그냥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을 많이 해드려서 세상 사람들이 ‘오 대단하구나. 네가 예수 믿는 사람인데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나쁜 짓만 하는 줄 알았더니 제법이구나.’ 이런 소리 듣는 것을 빛이 되는 거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아닙니다. 여태까지의 그런 생각을 지워버리세요. 그것은 이 본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중심적인 내용이 아닙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여러분 18세기의 복음전도자로 탁월한 헌신의 삶을 살았던 요한 웨슬레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 사람이 우리가 아는 감리교의 창시자가 되었고 이 사람의 영향은 영국뿐 아니라 뉴잉글랜드 즉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에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리고 길거리에서 열렬하게 복음을 전하는 그 처절한 복음 전도자들이 바로 웨슬리의 전도의 정신을 물려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신학적으로는 비난받을만한 것이 많고 그리고 우리와는 현저히 다른 입장의 신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만 이 이야기는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성경 본문을 이해하는데 적지 않은 빛은 던져줄 것입니다. 이 사람은 아주 일찌감치 아메리카 선교에 헌신했습니다. 그래서 전도하러 가기 위해서 그래서 미국으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당시 신대륙이죠. 그런데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그 배가 부서질 것 같은 풍랑을 만나서 이때에 이 폭풍 속에서 요한 웨슬레는 죽음의 심각한 위협을 느꼈고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이 그에게 엄습했습니다. 마치 에르푸르트 수도원으로 가던 마틴 루터가 떨어지는 벼락을 보면서 ‘제발 살려 달라’고 애원한 것 같은 그런 절박한 심정이 되어서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경건주의의 일파인 모라비아 교도들이 자기는 지금 큰 엄습한 큰 두려움 속에서 죽을 것 같이 불안해하는데 이 사람들은 조용히 둘러앉아서 자세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자신 안에는 무엇인가 심각하게 부족한 신앙의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신앙에 있어서 무엇인가 심각하게 부족하다는 사실을 최초로 이 웨슬레는 자각을 하게 되었고 도대체 저들 속에는 죽음을 코앞에 두고도 두려워하지 않고 고요히 지극한 평안 속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는 힘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그는 본질적인 회심에 이르게 됩니다. 그게 바로 빛입니다. 그 사람들이 모라비아 교도들이 믿음 없는 째째한 놈이라고 손가락질 하지도 않았고 자신들은 이런 사람이라고 자랑하지도 않았습니다. 풍랑 속에서 고요히 지극한 평온 속에서 생명을 주님께 맡기며 찬양하는 그 모습 속에서 자신은 누리지 못하고 있는 어떤 또 다른 빛을 그들을 통해서 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어두운 세상에서 예수 믿게 만들어 주신 것은 바로 우리가 삶으로 우리가 믿는 신앙으로 이렇게 우리 안에 있는 진리의 빛을 비추어 우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결코 그렇게 보았을 리가 없는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인생 이 세상 이 세상의 영광 모든 것들을 볼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 주도록 우리를 예수 믿고 이 어두운 세상에 남겨 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진리의 사람이 되고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만 하면 그의 존재 자체가 어두운 세상에 등불이 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그 예수 믿는 사람을 못 만났더라면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그런 방식으로 세상을 생각하고 이 세상의 재물을 생각하고 이 세상의 영광을 생각하고 내세와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이 어두운 세상에 두신 이유입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들은 아마 이런 질문을 하게 될 것입니다. ‘목사님 주님이 말씀에 의지해서 우리를 빛의 사람들 그리고 너희는 빛이라 너희는 등불이라 이렇게 불러주신 것만은 고마운데 사실은 우리는 진리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도 없고 진리대로 잘 사는 것도 없고 자꾸 빛이라고 그러시니까 낯이 참 간지럽습니다.’ 그런 불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세요. 주님이 빛을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찬란한 태양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낮에는 거의 보일 리 없는 그 등불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심지 하나에 의존해 희미한 불빛을 내고 있는 그 등불의 심지는 그 자체로서는 정말 밝은 빛이 아니지만 그러나 세상이 워낙 캄캄하고 어둡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빛을 보고서라도 인생을 의지하며 살아갈 어떤 불빛을 따라가고 싶은 것입니다.
벌서 한 10년이 넘었는데 어느 탤런트 여자 한 사람이 책을 하나 썼는데 대박이 터져서 그 책을 팔아서 인쇄만 한 5억을 벌었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그 책이 정말 야한 책입니다. 그래서 아예 책을 서점에서 열어보지 못하도록 비닐로 봉해가지고 뜯으면 무조건 사야 됩니다. 그런데 그 책 제목이 ‘나도 때로는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라고 하는 책이었습니다. 어느 잡지사에서 저보고 그 책을 평가해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책을 사서 뜯었습니다. 그리고는 정말 오래간만에 재미있는 책 한편을 봤습니다. 그리고는 그 서평을 썼습니다. 지금도 어느 인터넷에 가면 어딘가 있을 것입니다. 뭐 어느 여배우가 쓴 거였는데 쓰고 욕도 많이 먹고 그랬습니다. 얘기를 들어보니까 정말 황당한 이야기에요. 설교시간에는 감히 입에도 담을 수 없는 성의 자유를 부르짖는 자기의 경험을 적나라하게 얘기해서 경찰에 고발까지도 됐고 그래서 결국은 심사한 결과 무죄로 판명이 되어서 작품은 계속 팔려나갔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는데 전혀 동의 할 수 없고 이렇게 살아서 인생이 행복할 수 있을까? 그리고는 그 책을 쓰기 직전에 이혼을 하고 헤어졌습니다. 무슨 이윤지 모르고 그리고 그 여자는 스스로 성의 자유를 추구하면서 그것이 자신의 구원의 길인 것처럼 살아가던 사람이었고 그가 가정을 버리고 떠나 올 때 그 집 아이는 고등학교 여학생이었습니다. ‘너는 지금 이 에미의 마음은 모르지만 커서는 이 에미가 이렇게 살았던 것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고 쓴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뭐냐 하면 그 야한 책을 읽고 인생의 갈 길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른 새벽에 그 집에 가서 문을 두드리며 사살을 받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실화에요. 실화... 그것을 보면서 사실 그것을 써주고 인터넷에서 욕도 많이 먹었거든요. 그런데 뭐라고 썼냐하면 ‘이런 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고 이게 아주 부도덕하고 나쁜 여자다.’ 그러고 막 그랬으면 사람들이 박수를 쳤겠죠. 그런데 나는 그 책을 다 읽고 나서 울었습니다. ‘한 인간이 진리의 빛으로 멀어질 때 인생을 이렇게 생각을 할 수도 있구나.’ 그러면서 어떡하면 성관계에서 오랫동안 쾌락을 유지할 수 있는지 그 비법들을 전수하는 요령까지 거기에다가 쓴 것입니다. 그걸 가르쳐달라고 새벽부터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아니 지나가는 소리가 아니라 실화에요. 실화... 그 선생님한테 인생을 배우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울었습니다. 그러고 썼더니 ‘네가 목사냐. 가짜다. 너도 똑같은 사람이다.’ 막 도배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냥 웃고 말았습니다. 답글 한 번 더 쓰고 그 다음에 나중에 없애버렸죠.
참 그것을 보면서 정말 눈물이 나오더라구요. 어떤 사람은 그것을 읽고 너무 감동을 받아서 나한테 편지를 보낸 사람이 있습니다. ‘진짜 이런 사람들은 당신처럼 생각을 해 줘야 된다.’ 그러고 이제 편지를 쓴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말도 되지 않은 구정물을 먹으면서 그 안에서 위안을 느끼는 삶 이런 것들이 얼마나 비참한 삶이고 그리고 그 사람이 얼마나 어두움 속에 있는 사람인가? 만약에 저 사람도 진리의 빛을 알았더라면 절대 그렇게 살지 못했을 것이다’라는 그런 내용으로 썼거든요. 어떤 사람은 굉장히 감동을 받고 긴 팬레터를 나한테 응원하는 편지로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보면서 눈물이 났던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진리의 빛에서 멀 때 정말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중하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을 헛간대다 쓰고 우리스스로 불행을 향해 어두움 속으로 걸어 들어 가는가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그 여자 곁에 있어서 그렇게 성에 탐닉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서도 인간이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지를
(찬양) 주 내안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얼마나 주님 안에서 진리의 빛을 따라 가면서 행복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아마 단 한사람이라도 있었다면 아마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참 그 책을 다 읽고 나서 참 마음속으로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두운 방안에 등불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해서 세상 사람들이 머리 쓰다듬어주고 칭찬받으면 그걸 동네방네 떠들면서 우리도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다라고 이야기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기관이 아닙니다. 교회는 이 세상 사람들의 뉴스거리가 될 만한 미담을 생산해 내도록 부름을 받은 공동체가 아닙니다. 도덕적인 삶은 아름다운 것이지만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윤리적인 생활은 윤리자체를 따랐기 때문에 만들어진 삶의 열매가 아닙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신 주님의 분부를 따라서 거룩함을 추구하고 산 결과로 생겨난 것이 그게 바로 도덕적인 삶이고 윤리적인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이 세상 사람들에게 불교나 천주교 말고 개신교도 이렇게 착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선행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 세상 사람들은 무관심한 거룩하신 하나님 온 땅과 만물위에 홀로 뛰어나시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오늘도 우리의 삶의 목적과 이유가 되시는 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그 삶의 자연스런 열매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 도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불심이 깊어서 일생을 참선에 헌신한 스님들을 다비식에서 다 태우고 나면 뭐가 나오죠? 살의가 나오잖아요? 그런데 기도 많이 한 목사님을 태워도 살의가 나온다고 합니다. 그것은 일정한 자세로 장시간 똑같은 자세로 정신을 집중하고 오랜 세월을 지나오는 동안에 그런 것이 생겨난다는 이야기를 내가 어느 글에서 읽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들이 화장하는 사람들은 있겠지만 화장한 다음에 뼛속에서 살의를 찾는 유가족은 없지 않습니까? 그 스님들이 그렇게 일생동안 참선을 해서 살의가 생겨 난거지. 살의 만들려고 무릎 꿇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국수사리도 아니고 아니지 않습니까?
2.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보게 함
도덕이 바로 그런 관계에요.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예수의 통치를 기뻐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것처럼 이 세상에도 그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아직 그 나라가 완전히 오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 나라의 법을 따라 살아요. 그래서 때로는 이 세상에서 핍박도 받고 비난도 받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이유 때문에 고난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살아가요.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삶을 이 세상에서 올바르게 만들어주고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으로 사람들에게 비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그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보면서 ‘야 빛이구나. 야 저 사람이 진리구나’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캄캄하고 어두운 방에 등불이 빛나고 있으면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는 때에는 제일 먼저 불빛을 보겠지만 그 빛이 밝다고 그것만 들여다보고 있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다. 불빛은 자기 보라고 비추는 것이 아니라 등대 같은 경우도 자기 보라고 비추는 것이 아니라 ‘여기가 항구가 가까이 왔다.’ 그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 그 빛을 내는 것이고 방안에 어두운 불빛이 있는 등불은 ‘나를 힘입어서 거기에 문지방이 있고 거기에 오강이 있고 거기 솥단지가 있고 거기 뭐가 있으니까 걸려 넘어지지 말도록 조심하라.’ 그래서 비추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티끌만한 도덕적인 삶을 살고 박수갈채를 받고 싶어 한다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이 말씀에 의미하려고 했던 바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존재의 의는 어둠속에서 그 사물을 비춰 이 빛이 없었더라면 사람들이 보지 못했을 것을 보게 만들고 오해했을 것들을 이 빛을 비추어 사람들로 하여금 올바르게 깨닫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 빛으로 부름 받은 이유입니다. 성경은 이 사람들이 마음에 가지고 있는 이 어두움의 심각성이 문리적인 어두움보다 훨씬 더 크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물리적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지만 진리의 밝은 빛을 보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눈이 2.0이 되어서 날아가는 새 발톱의 주름까지 본다고 할지라도 지혜가 없어서 영적인 어둠속에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두말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이러한 진리와 관련된 어두움을 두 가지로 가르쳐요. 하나는 객관적인 어두움인데 이것은 누군가가 진리를 가르쳐주기만 하면 받아들여서 물러갈 어두움입니다. 시편 119편 18절 같은 데 나와 있는 어두움입니다. ‘내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여주십시오.’ 알려만 주시면 눈이 떠질 텐데 깨닫지를 못해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눈은 몸의 등불이니 네 눈이 성하면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어두움이 얼마나 더 크겠느냐’ 말씀하십니다. 이건 뭐냐하면 눈 어두운 것이 주관적인 어두움입니다. 죄에 빠지고 말씀을 싫어하고 욕망을 쫒고 헛된 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생겨나는 그런 무지고 어두움입니다. 뇌물을 받고 사람들이 신문지상에 오르내리고 하는 이런 추문들이 공직자들 속에 많은 것도 뇌물을 보는 그 순간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그런 부끄러운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인의 소명: 지혜의 빛
그러면 보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진리의 빛을 밝게 비쳐주셔서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도 알고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랑도 알았다고 칩시다. 그것이 언제나 동일하게 여러분의 마음속에 살아있습니까? 아닙니다. 은혜 많이 받고 뜨겁게 기도할 때에는 그 진리의 빛이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계속 작년에 지혜로웠던 사람이 올해도 지혜로와요. 그런데 기도 안하고 말씀의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지 않고 주님이 그에게 주신 축복들을 자기의 이욕을 위하여 사용하는 방탕한 삶을 살게 될 때 그의 영혼에는 어두움이 깃듭니다. 그래서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살고 진리의 빛과는 멀어지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진정한 빛의 사람으로 어두운 밤 방안에 하나의 등불로 살기 위해서는 두 가지에요. 하나는 뭐냐 하면 하나님만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해서 주관적인 어두움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됩니다. 그래서 진리를 깨닫기에 가장 적합한 마음은 좋은 대학 나온 마음이 아니라 예수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면 그 진리를 다 깨닫고 놀랍게 그 진리에 대한 이해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객관적인 어두움을 물리치는 건데 이것은 뭐냐 하면 부지런히 성경을 배우고 진리를 배워서 그래서 우리의 어두운 이성을 밝혀서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지혜 없이 사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현명한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성경의 말씀을 공부함으로 객관적인 어두움에서 물러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IV. 결론: 세상을 비추게 하심
결국 예수님이 우리를 ‘너희가 어두운 방안에 등불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진리와 함께하는 사람 속에 있는 지혜에요. 신령한 지혜를 가득 가진 사람이 되어서 우리가 누군가 옆에 있을 때에 사람들이 우리의 삶과 우리의 존재를 통해서 우리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고 우리가 우리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올바로 알 수 없었던 가치의 질서들을 올바로 보게 되어서 그래서 사물들을 분별하고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 하나님에게 속한 것과 사람에게 속한 것 진리 안에 있는 것과 거짓 속에 있는 것 사이를 구별하여 살게 만들어주는 그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우리를 은혜 주셔서 이 어두운 밤과 같은 세상에 두신 이유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바로 이 지혜의 핵심을 전하는 것이니 우리가 이 복음을 따라 사는 삶을 복음 전하는 것과 함께 증거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웅장한 복음 선포가 될지 한번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다시 한 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헛된 꿈을 붙드는 사람되지 말고 예수님이 여러분들을 진리의 사람으로 빛으로 불러주신 그 목적대로 사는 거기에 행복이 있음을 굳게 믿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3.‘그 빛’의 가변성과 불변성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녹취자 : 김세나
I. 본문 해설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미 앞에서 설교하신 산 위에 있는 동리와 등경위에 있는 등불을 토대로 이제 그 분의 시선을 제자들에게로 옮기십니다. 산 위에 있는 동리가 모든 사람의 눈에 띄는 것처럼, 또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렇게 모든 사람들 앞에 눈에 띄게 되고, 등경 위의 등불이 어두운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비추어 자신을 보게 하고 또한 사물을 보이게 하는 것처럼 꼭 그와 같은 방식으로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취게 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II. 비추게 하여야 할 ‘그 빛’
A. “그 빛으로 비추게 하라”
그와 같은 예수님의 뜻은 너희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게 하여 비추게 하여야 할 그 빛으로 우리들을 데려갑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을 합니다. 너의 빛이 빛나게 허락을 하라고 말 입니다. 즉, 너의 빛이 빛나도록 하거라는 그러한 뜻입니다. 그 빛으로 비추게 하라는 우리말 성경이 이러한 의미라고 하는 것 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허락을 의미하는 명령입니다. 산위에 있는 동리는 그냥 사람들 눈에 보이는 것이고, 등경위에 있는 등불은 불을 끄지 않는 한 그 빛이 비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빛이 그대로 비추도록 허락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처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기독교의 진리에 대해서 깨닫습니다. 물론 그것은 우리의 신앙과 인생에 있어서 충분한 지식은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지식은 이미 맨 처음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에게 대부분 다 주어집니다. 예전에 이 세계 이외에는 아무것도 영원한 것이 없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타락한 존재이고,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멀어진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인 죽음을 통해서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성경에 기록되어져 있고, 그 진리를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을 위해서 우리의 인생이 올바른 인생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거의 중요한 진리들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에 우리의 마음속에 빛으로 주어지게 됩니다. 충분한 것은 아니지만, 치명적으로 중요한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면 만약에 그 때 처음 믿은 그 은혜와 놀라운 사랑을 간직하며 산다면 우리가 이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어떻게 그 분을 알고 사랑해야 하는지를 모두 가르쳐 주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진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부인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살아계심을, 인간이 자신을 위해 살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 정도를 가르쳐 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 후에 우리가 자꾸 변심하는 것입니다. 맨 처음 받았던 그 선명한 진리의 빛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희미해지고 확신도 사라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던 사람들이 은혜가 떨어지고 변심하면서 세상을 사랑하게 됩니다. 마음이 가난하여 하나님을 앙망하던 사람들이 주님이 주신 축복 때문에 마음이 부요해 지고, 자신의 죄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애통하던 사람들이 부요한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의 번영에 만족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고 온유해졌던 사람이 포악하고 이 세상의 이익을 위해 사람들과 치열하게 다투는 사람들이 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던 사람들이 이제는 자신의 행복과 평안을 위해서 목마른 사람들이 됩니다. 이런 모든 우리의 변화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빛을 완전히 감출 수야 없겠지만, 많은 빛들을 가리워 마치 불을 켜서 말 아래 두는 것과 같은 그러한 행동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 스스로 빛나라고 말하는 대신 하나님이 이미 너희에게 주신 빛이 빛나도록 내버려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 빛을 너희의 빛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모든 진리의 빛의 근원이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빌립보서 1장 13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빌립보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복음에 대해서 말합니다. 여러분 복음이 누구의 복음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복음을 소유격으로 말할 때, 예수 그리스도, 혹은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기록을 합니다. 그런데 충격적으로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 속에서 사도는 내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1장 16절, 그리고 16장에도 보면 나의 복음이라고 사도가 분명히 말합니다. 이 복음이 어떻게 사도의 것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복음이시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 그 자체가 복음이고, 이 복음은 예수를 위한 복음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는다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러 곳에서 사도바울이 나의 복음, 혹은 내 복음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여러분들은 아십니까. 사도바울의 이 전철을 따라서 우리도 이 복음을 나의 복음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의 기원이 나에게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나와 복음이 떼어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일체가 되어서 내가 복음 안에 용해되고, 복음이 내 안에 녹아들어서 나와 복음이 함께 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계신 것과 같은 그런 일체를 이룬 상태를 사도바울이 내 복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복음은 인격화된 복음입니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로고스로 이 세상에 오신 것처럼 복음은 우리의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나 좋아하고 그 사랑과 나의 마음이 일치된 나머지 그 복음 때문에 내가 일치를 이루어서 그 복음이 감히 나의 복음이라고 말할 정도로 내가 그 복음, 그 예수와 일체를 이루고 있는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빛을 사람 앞에 비추게 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자, 우리는 이 유서 깊은 성경 구절을 본격적으로 해석하기에 앞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주실 때 우리가 복음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9세기에 유럽이 한창 자유주의 신학의 물결에 떠밀려 복음을 버리고 인본주의적인 신앙으로 돌아섰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적이나 이적,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놀라운 이적적인 증거들은 과학적으로 입증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모두 부인하였습니다. 그 때, 교회 안에서는 이러한 제목들이 주일날 주보에 올라왔습니다. 한 잔의 커피를 마시는 즐거움. 주일날 설교제목이었습니다. 감자를 주식으로 하는 문화의 행복함. 양들은 우리에 가두지 말고 방목하는 것이 좋다. 부활절 날에는 생매장 당하는 것의 위험. 예수님은 왜 총각이셨을까. 실제로 이러한 제목들이 주일날 설교되었던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예수가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하는 것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놀라운 초자연적인 역사적 사건과 함께 묻어서 우리에게 계시로 전달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과학적 합리주의로 재보니까 원인과 결과 사이에 증거가 없습니다. 다 거부해 버리고 나니까 마지막에 남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 행복하게 살게 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좋은 선생님으로 이 세상으로 보내신 것이다. 이러한 결론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당시에 그래도 복음을 파수하고 있던 교회는 없었는가. 물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교회들 속에서 소수의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신학자들과 힘을 합쳐서 열심히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성경에 나오는 기독교의 위대한 진리들을 여전히 설교하였던 것입니다. 인간은 죄인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이외에는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다라고 설교하였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은 이러했습니다. 그래, 누가 아니라고 했나? 그런데 그게 어떻게 되었다고 하는 것인가. 그게 지금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하는 것인가. 쉽게 이야기 해서 강단에서 외쳐지는 그 복음이 성도들에게 나의 복음이 될 수 없을 때, 그 때 그 복음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허공을 떠돌다 지나가는 공허한 외침이 되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강단에서 설교하는 사람들에게까지도 그것을 설교하지만, 듣는 사람들이 저 외침이 저 사람 마음 깊은 곳에 함화되어 있는 자기의 복음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 느껴질 때에는 이러한 괴리는 훨씬 더 심각해졌던 것입니다. 이미 시대는 발 빠르게 변하고 있었고 계몽주의와 그리고 과학적 합리주의의 물결이 노도와 같이 밀려들어서 온 유럽 사람들이 그 물결에 떠밀려가고 있었습니다. 개인주의와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고 인간이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절대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이 노도처럼 밀려들어왔을 때, 그러한 고전주의적인 외침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아무런 접촉점도 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아무리 올바른 것을 설교하고 참된 기독교의 진리를 정갈하게 전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듣는 성도들의 마음속에 강하게 박혀서 그 상황을 바꿔놓고 그래서 그 복음이 나의 복음이라고 고백할 수 있기 전까지는 진정으로 그 빛을 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기독교의 진리를 들었고, 개혁신학을 사랑하고 청교도를 좋아하고 그리고 어떻게 하든지 이 시대에 물들지 않는 확고한 성경적 기독교 신앙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들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정말 우리가 그 복음이 나의 복음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 이르렀습니까.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그 참다운 지혜의 진리가 우리와 일체를 이루어서 나의 진리라고 나의 지혜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는지 묻는 것 입니다. 그 빛이 사람들에게 비춰지기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대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명령형이 의미하는 바는 비추게 하거라. 빛나게 내버려 두거라. 비추게 되도록 허락을 하거라. 이 빛이 정말 너희와 일체를 이루어서 그것들이 환하게 비쳐 너희를 통해 기독교의 진리를 지성적으로 알고 너희의 삶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그 빛 때문에 예전에 보지 않던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고 세상과 자신의 인생과 영원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라 하는 그러한 의미인 것입니다.
III. ‘그 빛’의 불변성과 가변성
A. ‘그 빛’의 불변성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빛나게 하라고 강하게 촉구하셨던 우리가 가진 그 빛의 불변성과 가변성을 아울러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선 그 빛이 불변하다는 불변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한 사람에게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회심의 그 순간에 주님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기둥들이라 할 수 있는 중요한 진리의 빛을 우리의 마음속에 주십니다. 그 중에서 가장 탁월한 것 중의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대속의 교리와 이 성경이 사람의 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거룩하고 타협할 수 없는 확신입니다. 이 빛의 불변성은 바로 이렇게 주님이 처음 회심하는 순간 우리에게 주시는 확신과 관련이 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그리스도인들이 타락을 하거나 영적으로 미끄러져 부패하게 된다 할지라도 이렇게 주님이 주신 기본적인 진리에 대한 확신은 좀처럼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혹은 죄 짓고 방황해도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 예수가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 우리의 마음 속에 좀처럼 떼어 놓을 수가 없습니다. 은혜가 떨어져서 우리가 성경을 안 읽을지라도 그의 마음 속에 어느 한순간 이 책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요, 인간들의 작품일 뿐이다라고 마음 속에 그러한 확신이 들지는 않는 것입니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그는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한 어떠한 경우에도 신자는 그것을 마음 속에서 떼어낼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하나의 등불이 심지를 올려 환하게 빛날 수도 있고, 기름이 신통치 않고 심지가 신통치 않아서 결국은 이사야 42장 3절에 나오는 바와 같이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그러한 등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환하게 타오르는 등불과 거의 꺼져서 파란 불꽃을 내면서 연기를 내면서 마지막에 꺼지기 직전에 사위어가는 불빛 사이에는 둘다 빛이지만, 그 차이는 이루 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어떠한 경우에도 그 기본적인 빛이 교회에서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빛의 불변성입니다.
B. ‘그 빛’의 가변성
그러나 문제는 그 빛의 가변성입니다. 하나님은 이 빛을 교회에 위탁하셨고 성도들 각자 마음 속에 있는 불꽃은 공동체의 불꽃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물론 교회 전체가 진리로 활활 타오르고 말씀의 부흥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들이 마음 속에서 탁월한 진리의 빛, 지혜의 빛을 뿜어내며 살아가는데 어떠한 사람들은 주관적으로 죄악에 사로 잡히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마음을 강퍅하게 함으로 그 일체의 빛을 장시간 동안 거절함으로 현저한 어둠 속에 있을 수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인데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인 경우로 본다면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진리의 밝은 지혜의 빛은 교회 전체를 밝히고 있는 불꽃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거의 복음이라고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상적인 선포가 사라진 교회에도 성도들은 회심한 순간에 하나님께서 주셨던 하나님의 그 지식의 불꽃, 진리의 불꽃을 사위어 할지라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가 불붙는 진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데, 사람들의 마음 속에 그 진리라 활활 타오른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아마 그 사람은 세속주의가 설교되고, 복음이 복음답지 못하게 설교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가르쳐지지 못하는 현실 에서 그는 아마 남의 교회의 설교를 듣거나, 남의 책을 보거나 아니면 그 시대의 거룩한 불꽃이 없으면 저처럼 옛날 시대의 불꽃을 보면서 마음에 불을 집히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강단에서 활활 타오르고 그 불꽃을 받은 사람들이 그 불꽃으로 자신의 마음 가운데 불을 켜서 찬란한 빛으로 지혜롭게 인생을 살고, 성경이 하나님의 진리인 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를 통해 확신으로 다가오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정착하게 되고 거기에서 진리를 배우고, 신학을 배우고 교리를 배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함으로 그것을 순종하고 살아감으로, 그 노력에 축복하시는 성령의 감화로 사람들의 마음 속에 그 하나님의 진리의 불꽃이 계속 타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일주일동안 세상에 마음 빼앗기고,마음 속으로 은혜에서 미끄러져서 죄와 짝하며 제멋대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마음의 불꽃이 어두워졌습니다. 주일날 교회에 나옵니다. 함께 예배드리는 많은 성도들의 마음을 보면서 저들이 얼마나 진리를 사모하는지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 자신의 죄를 회개하게 되고 뉘우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습니다. 그 불꽃이 자기에게 다시 당겨지고 성령의 기름부으심으로 불꽃이 타오르게 됩니다. 함께 모여서 주일날 교제를 나누는 시간에 진리를 따라 살아온 일주일의 삶을 간증하는 사랑하는 지체들을 보면서 자신이 진리의 빛에서 멀어져서 살아가는 이 삶이 전혀 행복한 삶도 아니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회개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를 갈망합니다. 그 은혜를 간구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립니다.
여러분, 아이들이 밥을 안 먹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 버릇을 고치는 방법이 세 가지가 있는데 사정 보지 말고 두들겨 패는 방법이 있고, 그것보다 진보된 방법은 아이를 굶기는 것입니다. 배가 고파서 아이가 밥을 먹지 않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세 번째 지혜로운 방법이 있는데 먹는 것을 대게 좋아하는 친구를 붙여 놓습니다. 그래서 밥 먹을 때 장난치는 시간에 얘가 너무 맛있게 칭찬을 받으며 먹습니다. 그러면 이제 자기도 먹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은혜가 떨어졌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막 먹으려 하는 성도들 옆에 있으면 우리도 그렇습니다. 밥 먹기 싫은데 옆에 있는 사람이 자꾸 숟가락 들려주면서 그러지 말고 한 숟가락 먹어보라고 차린 사람 성의 생각하면서 먹어 보라고 그러면서 마지못해서 숟가락을 떴는데, 그래도 몇 숟가락 먹으니까 먹을 만합니다. 한 그릇을 뚝딱하고 비우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은혜가 떨어지면 성령충만한 성도들과 사귀고 싶어 합니까. 아니면 자기처럼 병든 사람과 사귀고 싶어 합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은혜가 떨어졌을 때, 성령충만한 형제, 자매와 만났을 때 굉장히 불편합니다. 불편합니다. 지체들이 그럽니다. 자기가 게으르게 살았고, 늦게까지 잠을 잤고 하는데, 자기 이야기 하는 것 줄 알았던 것입니다. 자기는 그렇게 일주일간 그렇게 살았는데, 내가 그랬었는데 정말 그게 얼마나 더럽고 죄악 된 삶인지를 깨달았어. 불편합니까 편합니까. 맞습니다. 아, 난 왜 그런지 모르겠어. 은혜 떨어진 성도 만나면 위로가 됩니다. 아, 인생이 다 그래. 나도 그래. 뭐 특별한 사람 있어? 진리의 위로가 아니라 너절한 친구들의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1. ‘그 빛’을 교회에 위탁하심
그래서 교회의 이 빛과 그 다음에 개인이 이 진리의 빛을 밝게 비추고 살아가는 것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리를 교회에 위탁하셨습니다. 성경으로 진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교회에 위탁하셔서 그 성경이 진리를 풍부하게 해석하고 진리의 저자이신 진리의 말씀의 저자이신 성령님께서 교회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면서 그 말씀이 불꽃처럼 아주 풍성하게 활활 타오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당신의 계시의 저장고를 세 개를 두셨는데, 그게 뭐냐 하면 성도의 마음, 하나님의 계시의 책인 성경, 그리고 목회 사역, 이 세 개의 저장고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놓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의 책을 목회 사역을 통해서 풍부하게 해석을 해서 그 빛을 떠서 성도들의 가슴에 담게 할 때, 성도들은 그 불길을 가슴에 간직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이 찬란한 진리의 빛의 확장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그 순간에 우리가 가장 후회하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인생의 너무나 많은 날들을 짐승처럼 살았다고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사랑할 수 있는 능력도 있었고 자기가 마음 먹은 것을 실행할 수 있는 의지의 힘도 있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어느 방향으로 그렇게 하면서 살아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무지의 어두움이 가득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에 인생을 어느 방향으로 살아야 할지 몰랐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짐승같은 삶을 살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 우리들이 가장 미워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세상의 어떠한 권력이나 우리를 억압했던 힘이 아니라 자신의 영을 에워쌌던 그 어두움을 가장 미워하게 되고 그 어두움을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을 이러한 어두움에서 건져내어서 그래서 진리의 빛이 언제나 풍부해서 누구도 진리가 없기 때문에 참다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다고 변명할 수 없는 사람은 아무데도 없게끔 만드는 나라고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박국 2장 4절에서 말하기를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땅에 가득하리라. 그것이 바로 하박국이 꿈꾼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의 그림이었습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가득하게 되어 누구도 진리의 빛이 부족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일들이 없는 나라, 그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진리의 빛을 교회에 위탁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의 가장 중요한 사명중 하나는 이 진리의 빛과 운명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알게 해준 이 복음의 빛, 성경 계시의 빛, 이것을 통해서 이 자연의 모든 세계를 비추어 하나님이 살아계신 참되고 유일한 우리의 여호와이시라는 사실을 날마다 배워가고 날마다 그 지식안에 살면서 너희가 우리와 같은 세상에 살면서 왜 너희들은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살고, 다른 가치를 추구하면서 살고, 또 다른 나라를 소망하며 사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우리 안에 계신 소망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말할 수 있도록 그렇게 준비하면서 우리는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운데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누가 여러분 보고 왜 예수를 믿어야 됩니까. 예수를 믿고 당신은 행복해 보이시는데, 그 기쁨의 근원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을 때 그 사람이 서너 시간은 조용히 앉아서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논리적인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신자의 의무의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이 교회 와서 종교적인 자극이나 받으려 하고, 신비적인 경험이나 받으려 하고 아니면 자신의 마음을 어르는 좋은 이야기나 들어서 위로나 받으려 하고 심지어는 자신이 꿈꾸는 이 세상에서의 번영을 예수 덕 좀 받으려고 하는 그러한 동물적인 신앙생활을 해서는 예수 믿는 것이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어 한 교회의 지체가 된 이후에는 자신의 사는 것이 이 진리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것, 이 진리와 함께 알고 사랑하고 이 진리와 함께 살아가는 그것이 아니면 참 인생이 아니다라고 하는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러한 참다운 진리의 빛, 그것이 없어서 어리석게 인생을 살아감으로 불행하고 파멸된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많은 인간들을 예수의 사랑으로 깊이 사랑하며 그들에게 무엇인가 나눠 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진리의 빛입니다. 그것이 바로 전도의 동기입니다. 그것이 바로 선교의 동기입니다. 무슨 사업을 하듯이 운동을 하고 경영을 해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어떠한 성과를 이루어 내는 것이 선교, 전도, 목회가 아니고 그 진리의 빛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모였어도 만약에 그들이 거의 진리의 빛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사람이 인간들을 모아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치 진리의 운명이 교회에 달린 것처럼 경륜하십니다. 진리는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인데, 그 진리를 발견하고 깨닫고 그 진리 때문에 진리를 사랑하게 된 사람들의 진리에 합치된 삶을 통해서 여전히 그 진리가 있다는 것과 이 진리에 감동을 받고 이 진리를 사랑하며, 이 진리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든든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그 진리와 함께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교회가 성도들이 내는 많은 헌금, 성도들이 교회 와서 하는 봉사하는 많은 노력, 그리고 성도들이 하나님께 올리는 많은 기도를 가지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것을 사용해야 하는데 집중적으로 사용해야 할 방향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진리의 빛을 교회 안에서 언제나 활활 타오르도록 누구도 교회 안에서 진리가 올바르게 혹은 충분히 가르쳐지지 않기 때문에 어둠속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부지런히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려고 하고 진리의 말씀을 깨달으려고 하고 그 진리의 말씀을 받아먹으려고 애를 쓸 때에, 그 때에 교회가 그 성도들의 요구를 느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목회자들이 탐구하고, 성도들이 그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살도록 하기 위한 실제적인 목회의 방법들을 연구하고 그리고 변화된 사회 속에서 예전에는 맨주먹 붉은 피로 싸웠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맨주먹 붉은 피로 싸울 용기와 군인 정신만 있으면 됩니다. 지금은 총도 있고, 칼도 있고 최신 병기들이 많습니다. 그런 것들을 가지고 어떻게 성도들이 이용하면서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서, 어떻게 최종적인 목표는 진리를 알고 그 진리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사랑하고, 거기에 자신을 합치시켜서 그 진리대로 살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믿는 이 진리가 참되다는 것,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이 진리를 주신 것은 우리에게 칼을 주신 것이 아니라 죄수의 멍에를 입힌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자유하게 하신 것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우리의 전 존재로 입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교회의 사명입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선생님들이 아주 잘 가르치면 신통치 않은 학생들이 아주 좋은 학생들이 됩니다. 믿으십니까. 믿으십니까. 그렇습니다. 저는 종종 정말 학문이 깊은 교수들을 가끔 만나는데 사기가 침체되어 있습니다. 뭐냐 하면 어떤 교수는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가 정말 잘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관심이 있고 정말 자기가 많이 아는데, 이것을 대학원에서 개설을 해도 들어줄 학생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공부하냐 물었더니, 그래도 나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 계속 공부합니다라고 그럽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불행한 선생님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학생들을 형성하기도 하지만, 학생들이 선생님을 만들어가기도 합니다.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쫙쫙 빨아들이면서 질문이 깊이가 있고 날카로워서 위협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이게 들통이 나면 어떻게 하나. 그러면 말씀을 더 깊이 탐구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말하자면 교회를 진리의 빛으로 계속 타오르게 하는 것입니다. 어디 그것이 지식뿐이겠습니까. 목사님, 지난번에 이러이러한 교리를 설교하셨는데 실제로 그것을 실천하면서 한 1년 살아보니까 이러이러한 때는 그 말씀대로 살아지지 않고, 이러이러한 때는 그 말씀을 지키기가 너무 힘들었는데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면 그 다음 시리즈들이 나올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성도들을 보면 정말 게으릅니다. 저 사람 좀 게으르게 살지 않게 해달라고, 저는 누구든지 게으른 사람을 보면 마음이 괴롭습니다. 왜 저렇게 살까. 바둑을 두다가도 지면 피를 토하고 죽는다고 하는데 왜 저렇게 살까. 한번 밖에 없는 인생을. 저 시간이 있으면 나나 주지.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 사람들 좀 게으르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는데 응답이 안 됩니다. 토요일 청소 하러도 안 나오고 주님의 일 게을리 하는데 대단한 일 하느라 그런 줄 알았는데 진리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어느날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게으름이 뭔지 탐구를 해서 게으른 인간들 가슴에 폭탄을 한번 터뜨려야지 했던 것이 바로 게으름이라는 시리즈입니다. 불신자도 그 책을 읽고 펑펑 울었다고 하니까 어쨌든 그 사람이 정말 내 마음 같은 마음을 가지고 울었는지 모르지만, 보람을 느낍니다. 어떤 사람은 보면 게으르지는 않는데 그것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느낌이 안 드는 것입니다. 싫증입니다. 싫증. 싫증을 내지 말고 열열해 지라고 소리소리 질러도 목만 아프고 불이 안 붙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싫증을 파헤치리라. 그래서 가슴에 폭탄을 떨어뜨려야지. 그리고 안식년 휴가를 줬는데, 집사람과 여행을 하다가 그것을 썼습니다. 새로산 성경책에 빽빽하게 썼는데 그 성경책을 여행 중에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와보니까 없는 것입니다. 진짜 있다고 하면 다시 가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수소문해도 못 찾았습니다. 결국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나보다 하고 탐구를 한 것이 그게 싫증이라는 시리즈입니다. 이렇게 어떻게 하든지 목회자도 그리고 성도들도 우리의 교회의 중심, 우리의 관심의 모든 중심을 성경에 놓고 그 성경의 진리의 빛을 예전에 보지 못했던 진리의 빛을 우리의 마음에 더 많이 받아서, 그래서 그 진리를 따라서 우리들이 살려고 애를 쓰는 것, 이것을 교회가 열열하게 힘쓰고 이 일에 일치해서 불탈 때, 그 때 그 교회는 찬란한 불꽃이 타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몇 십년 동안 방황하고 그러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탁 깨달으면, 자신의 인생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를 수많은 친구를 만나고 수없는 밤을 고민하며 친구들과 막걸리 타령을 하면서 신세타령을 해도 해결이 안 되던 문제가 진리의 빛이 비취면 한방에 아, 나의 인생이 왜 이러했구나 하는 것들이 확 깨달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유익을 이세상의 무엇이 그 사람에게 줄 수 있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날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고 나는 이제껏 돈도 많았고 건강도 있었고, 젊음도 있었지만 내가 왜 이 길을 걸으면서도 행복하지 않았는지를 알았습니다. 나에게는 진리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깨닫고 올바른 길을 따라서 돌아서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을 해줄 수 있는 것이 다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진리의 빛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 진리를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가슴을 깊이 파 보고 파 보고 파 봐 보면 진리가 없어서 많은 사람들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피곤하고 허전한 인생을 살아가고, 허무한 인생을 살아가는데 매일 매일 직면해야 할 그 허무가 두렵고 무섭기 때문에 쾌락에 빠지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신경을 다른 것에 돌려서 두려움을 잊으려 해보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그러한 진리에 대한 그리움들이 남아있기 때문에 어제 말씀 드렸듯이 그 포르노그래피 주인공 되고 싶은 사람에게 새벽부터 찾아가서 인생의 스승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빛을 교회에 위탁하신 이유입니다. 그래서 마치 이 진리의 운명이 교회와 사람에게 달린 것처럼 그렇게 교회가 진리의 아무 관심이 없이 냉담해지고 성도들이 진리와 아무 상관없이 살아가게 되면 누가 그 교회에 아무리 가난한 가슴을 안고 그 교회에 돌아와도 자기 인생을 돌이킬 진리가 없는 것입니다.
(예화) 옛날에 김진홍 목사님이 당신 간증에서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너무나 사는 것이 힘들어서 그래서 주님 앞에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은 잘 모르겠지만, 나에게 진리가 있으면 진리를 좀 보여 주십시오. 그랬답니다. 나는 종이 될 준비는 다 되어 있는데 주인을 못 만났습니다. 그러면서 기도를 하다가 너무 괴로우니까 내가 오늘 수요일 아무 교회에나 들어가겠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나에게 진리를 들려주십시오. 그랬답니다. 그리고 나서 수요일 날 어느 교회를 찾아서 들어갔답니다. 들어갔더니 진리는 아무것도 없고 교회 짓자고 열렬하게 설교하더랍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연수가 몇 년이 지연 되었다고 그렇게 간증을 하셨습니다.
2. 인간의 불의로 진리를 가로막음
그 뿐만이 아닙니다. 인간의 불의가 이 진리를 자꾸 가로 막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 18절에 보면 인간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심판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불의로 진리를 가로 막는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가 있다고 성경은 아주 분명하게 못 박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진리가 얼마나 위대한데,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의해서 찌그러질 수 있나? 아닙니다. 찌그러지거나 변형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드린 것처럼 진리의 빛이 비취지 못하도록 이 세상이 모든 인간의 불의와 거짓으로, 경건치 않음과 불의로서 이 진리의 빛을 가리고 훼방하는 것입니다.
(예화) 아주 경건한 신학생이 있었답니다. 이 학생이 이제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가 신부가 되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신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신학공부를 해서 불쌍한 영혼들을 돌보아야지, 그리고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야야야야. 나 너무 놀라운 발견을 했다. 그게 뭔데? 야, 우리는 여태까지 하나님을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배웠잖아? 그랬지.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발견했어. 그러면서 책을 꺼냈는데 다윈의 종의 기원이었습니다. 그 친구의 논리적인 말에 설득을 당하고 이 경건했던 신학생이 신학교를 스스로 자퇴했습니다. 그 다음에 그가 유명한 정치가가 되었는데 스탈린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 치하에서 수백만 명이 죽어가고 유물론 사상을 퍼뜨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 진리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는 살아있습니다. 그런데 그 진리가 하나님은 그냥 진리 자체가 사람들에게 정오의 햇빛처럼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통해서 그 진리가 마음을 움직인 그 진리가 그들의 확신과 그들의 신념과 사상과 삶을 통해 드러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식으로 사람들이 그 진리의 말씀이 사람들 속에서 비추지 못하도록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로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기존의 가치관이 다 무너져서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올더 헉슬리라는 사상가가 인간은 자유다. 인간이 가장 신뢰할 수 있을 만한 가치는 자신이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다. 약물은 우리가 행복을 느끼는데 굉장한 도움을 준다. 이렇게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면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마약에 중독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진리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분명하게 가르치는데 불의와 경건치 않음이 진리의 불을 계속 끄고 가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 말씀은 영원히 살아있고 변함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임에 틀림이 없지만, 성경을 그렇게 신봉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이게 우리의 마음속에서 등불처럼 타올라서 이것이 진리인 것이 우리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내 진리, 내 복음의 형태로 빛이 비추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라는 고백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식으로 불신자들이 강력하게 이 진리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게 사상적인 도전이 제일 큰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밀어 닥치면서 사람들을 세뇌시킵니다. 진리란 없다. 그 모두 옛날 사람들이 자신들의 지배의 구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것이다. 그 진리라는 것 미명하에 사람들이 얼마나 흉악하게 사람이 사람을 수탈하고 억압하고 살아왔는지를 보아라. 그러면서 종교적인 진리를 신뢰하려는 사람들에게 역사를 들추면서 진리를 진리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결국은 십자군 전쟁을 일으켜서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하고 결국 죽어가지 않았는가. 진리를 찾는 종교가 우리에게 해준 것은 아무것도 없고 인류에게 그 비참한 고통과 좌절, 살육과 전쟁만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그렇게 감성으로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홀딱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진리가 그러한 일들을 자행을 했겠습니까. 오히려 그 진리를 올바르게 몰랐던 사람들이 비 진리 때문에 그러한 일들을 행했던 것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사상적인 도전들이 도처에서 일어나서 그래서 우리들이 기존에 성경을 통해 가지고 있던 모든 진리의 체계들, 질서들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깨버리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닙니다. 윤리적인 도전이 밀어닥칩니다. 도덕 교육이 안 됩니다. 학교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데려다 놓고 성추행을 하고 신문에 막 나오고 이러는데 아이들에게 올바른 도덕교육이 될 수 있겠습니까. 가능하겠습니까. 그러니까 결국은 교육이라고 하는 그 자체가 각자 자신이 가치를 발견하고 자기가 알아서 살 수 있도록 하는게 교육이라는데, 그게 무슨 교육이 되겠습니까. 교육은 인간이 누구이고, 하늘이 무엇이고 인간의 도리가 무엇이고, 도덕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야지만 그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준들을 무시하면서 이 세상이 윤리적으로 도전해 와서 우리들이 신앙 안에서 지키려고 하는 윤리적인 덕목이나 삶 같은 것들을 비웃는 것입니다. 전근대적인 미명에서 벗어나지 못한 야만적인 생각들이 만들어낸 미신적인 확신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예전에 선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마구 넘나들고 마치 그것을 짓밟는 것이 자신의 존재의 이유이고 목적인 것처럼 그렇게 짓밟고 넘나드는 것입니다. 그런 끔찍한 윤리적인 도전들, 그러한 속에서 불신자들의 방해가 일어나고 이러한 세상의 정신들은 교회에까지 스며들어와서 결국 자신의 의를 취하고, 자신의 육신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의 일을 도모하는 그릇된 풍조들을 교회 안에서까지 도입되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진리를 심각하게 방해하는 것입니다. 어디 불신자들 뿐입니까. 신자들도 끊임없이 방해를 받습니다. 그것이 바로 잘못된 교훈입니다. 사상들은 자유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진리의 복음, 성경적인 기독교는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부담스럽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굉장히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보면 예수를 믿으면 왠지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을 비틀어 버릴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예수를 안 믿는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회심하지 않은 형제에게 예수 믿고 회심하라고 했더니 자신이 회심하면, 목사 되라고 할 것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떡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기는. 그런 예감이 든다는 것입니다. 예감일 뿐이니까 걱정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어서 이제는 자기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라, 뉘우치고 하나님 앞에 새로운 삶을 살라, 이러한 것들을 요구하는, 하나님이 거기 계셔서 일방적으로 나에게 손가락질 하셔서 오라고 부르시는 이런 종교는 싫은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에게 적응해주시는 하나님. 누가, 나한테 공부를 배우는 대학 학생 하나가 레포트를 썼는데 이런 이야기를 썼습니다. 자기가 예전 같았으면 이런 친구의 이야기에 깊이 동조하고 함께 은혜를 나눴을 텐데 이제 수업을 듣고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안타까워하게 되었다는 쓰는 것입니다. 야, 너 요즘 어떻게 사니? 나 요즘 하나님 은혜 많이 받아. 어떻게 받는데? 그러니까 하나님이 내 약점과 단점을 다 아시는 것 같아. 그래서 하나님이 나에게 적응하시는 것 같아. 참 돌겠습니다. 하나님이 회개한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눈물을 글썽 거리는 감정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즐겨 부르고 싶은 찬송이 있습니다.
(찬양)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그게 정말 은혜 받고 자기가 깨뜨려진 사람이 부르면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고백의 노래이지만, 그 사람 같은 마음을 가지고 부르는 노래는 배째라의 노래입니다. 배째라. 배째라. 이 모습 이대로, 주님이 싫다고 하는데 자기도 싫잖아. 남들이 싫다고 하는데 주님이 혼자 받으시래. 그러니까 얘가 수업 시간에 많이 생각이 변화되고 나서 그러한 고백이 얼마나 엉뚱하고 황당한 것인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불의로 진리를 가로 막는 것입니다. 주님이 적응하시는 것 같다. 그게 결국 뭐냐 하면 우리 같은 사람 표현에 의하면 주님도 널 표현하신 것 같다는 것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러한 도전들이 계속 오는 것입니다. 자유화와 세속화가 교회 안에, 세상 바깥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 안에 자유화되고 싶은 마음, 세속화 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깨뜨려져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는 것이 감동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제껏 내가 너를 너무 몰랐구나. 정말 미안하다. 나를 이 모습 이대로 받아다오. 하나님이 돌아오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망상입니다. 망상. 그래서 진리가 확고히 서 있으면 진리의 빛이 비추면 자기가 어디로 잘못 나갔는지 압니다. 자동차 운전할 때 네비게이션을 찍어 놓으면 딴 길로 가면 띵띵띵띵 그러면서 경로를 이탈했습니다라고 알려줍니다. 그리고 요새 새로 나온 버전은 너 계속 말 안 들을래? 말 안 들을래? 그런 버전도 있다고 합니다. 내가 뭐라 그랬어? 그곳으로 가지 말라 그랬지, 말라 그랬지, 말라 그랬지. 네비게이션이 그런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기준이 있으니까 이탈 했을 때 책망이라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예 진리 자체를 몰라, 그리고 싫어. 그러면 진리는 뭐냐 하면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것이 진리입니다. 이 진리가 굳게 서 있을 때 아, 내가 멀리 갔구나. 회개하고 가슴 아프고 고통스러운 일들은 내가 진리에서 멀리 떠났기 때문이다. 그렇게 깨닫는데 이 자체가 처음서부터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대조 자체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가장 큰 비극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불편하다고 진리를 버리면, 그 진리를 버린 것에 대한 최대 피해자는 자기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등불이 귀찮다고 등불을 치워 버리면 어둠 속에서 이리 걷다 부딪히고, 저리 걷다 부딪히는 것이 자신에게 피해 오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이 빛이 이렇게 비취지 못하도록 한편으로는 교회 자신이 그 진리에 불 타지 못하기 때문에 그 빛이 가변적이고, 한편으로는 이 세상의 정신이 교회를 삼키기 때문에 여기에 삼켜지게 되면 그 진리의 빛이 흐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어떻게 됩니까. 내 안에 있는 진리를 파수하기 위해서 날마다 말씀의 은혜를 받고 성령으로 충만하고 그 진리에 합치하지 않는 자신의 삶을 회개하며 주께로 날마다 더 가까이 가야 할 것이요, 또한 한편으로는 세상에서 밀려오는 이러한 사상적인 도전, 윤리적인 도전, 우리 안에서 자유롭게 살려고 하는 자유주의적인 정신, 세속화되려는 우리의 마음, 이런 것과 끊임없이 세상의 물결과 더불어서 자기 안에서 바깥에서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하는 사람들, 진리를 변증하고, 이단들을 협파하고 잘못된 사상들을 꾸짖으면서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다 하는 것을 외치며 사는 그러한 학자들이나 외치면서 사는 많은 사람들을 성심껏 도와서 그들이 그 빛 아래에서 살도록 우리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IV. 교회의 ‘그 빛’, 가변성의 경륜
A. 인간 창조의 경륜과 조화됨
그래서 결국은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러면 도대체 그러한 빛이 그렇게 교회 안에서 가변적이라면 왜 하나님이 그렇게 내버려 두셨을까. 왜 하나님이 교회의 그 빛을 가변적으로 되도록 내버려두시는 경륜이 무엇일까 배우게 됩니다. 시간이 없어서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고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제일 먼저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경륜과 조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의 진리를 보는 사람 없는 하늘에 메달아 놓은 별빛처럼 그렇게 이 세상에 존재하기를 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 진리는 처음부터 사람에게 인식되기를 원하셨고 그리고 사람들이 그 진리를 인식하고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두려워하고 기뻐함으로 거기에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순종함으로써 진리를 인간 속에 일치시켜 그 진리를 드러내고 사람에 의해서 그 진리가 휘거나 굽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로 사람들을 돌이켜 그 진리에 합치시키는 생활을 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B. ‘그 빛’의 공동체적 성격
그래서 이 빛은 공동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교회는 모두 그 빛에 참여하고 그 빛을 위탁받고 있으면 성도들은 그 지체로서 그 빛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의 말할 수 없는 축복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 가서는 자기의 인생이 불행하게 살아도 불행과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추어도 알 수 없는데 교회 와서는 자기가 그 진리를 열렬히 알려고 하지 않고 최소한 진리를 거부만 하지 않으려는 자세로 교회에 나와도 진리의 빛이 비추어서 자신의 인생의 불행이 무엇이고 이 세계 속에 있는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진리의 빛들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C.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함
그래서 이러한 빛을 하나님이 가변적으로 남겨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하시기 위하여 가변적으로 남겨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 진리라는 빛을 믿는데, 그것을 가르치는데 사람들이 마음들이 강팍해서 그 진리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 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진리의 빛을 누리는 이 누리는 것이 하나님께 온전히 의존하고 있구나를 깨닫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교회가 진리를 위해 헌신하고 성도들의 공동체는 그 빛의 공동체가 되어서 어둠속에서 있는 사람들은 흔히 볼 수 있는 일들이 교회에서는 나타나면 안 된다고 하는 윤리적인 결단들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진리를 더 철저하게 깨닫고 우리가 아직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더 심오하고 깊은 진리들을 깨닫고 이 진리를 사람들의 마음에 비추고 이 진리를 성령이 역사하셔서 그들의 마음 속에 감동받게 하시고 그 진리로 말미암아 그들을 깨어지게 하실 그 때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역사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드십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예화) 작년엔가 언제 화란의 유명한 신학자 한 명이 우리 교회에 오셨습니다. 설교도 했고 우리가 말씀을 들었었습니다. 제가 같이 교제 하는 시간에 질문을 했습니다. 나는 정말 당신의 나라를 대단한 나라라고 생각한다. 이 성경적인 기독교를 추구했던 개혁신학의 자산들이 가장 풍부하게 남아있는 나라, 바로 화란입니다. 화란. 네덜란드. 가끔 네덜란드에 가서 책방에 가보면 정말 보석 같은 그 시대의 말하자면 이 개혁신앙의 전성기를 이루던 때의 아주 심오하고 요즘 우리 같은 목회자의 지성을 가지고는 그러한 분들의 서재를 걸레질 하기에도 모자를 정도입니다. 그러한 엄청난 사장을 가지고 쉽게 따라올 수 없는 거대한 기독교의 자료들을 정리해 놓은 것입니다. 그것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비싸기는 하지만, 많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어마어마합니다. 학교마다 도서관을 가면 즐비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신학적인 학문적인 개혁신학의 유산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어떻게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모두 자유주의로 돌아설 수 있는가. 그랬더니 그 분이 그랬습니다. 계몽주의 때문입니다. 나는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다 동의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배우겠지만, 계몽주의 때문에 그랬겠지만, 사실은 이런 이야기와 똑같습니다. 이런 것입니다. 요새 감기가 많이 돌고 겨울이면 독감에 걸리는데, 모든 사람이 독감에 걸리는 것은 아닙니다. 저항력이 떨어지고, 피곤하고, 몸의 기력이 쇠해진 사람은 한번 걸리면 덜컥하고 들어와서 열이 40도 까지 올라오고 구토를 하고 설사를 하고 난리를 피우는데 저항력이 든든한 사람은 그 정도 들어와도 끄덕없습니다. 뭘 배우게 됩니까. 아무리 훌륭한 학자들과 유식한 목회자들이 신학적인 풍부한 결과물들을 만들어 놓고 교회에 훌륭한 설교들이 있고, 도서관에 수없이 훌륭한 책들이 쌓인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거기에서 저절로 생명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인간들이 자만할 수 없도록 만드십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열렬한 기도. 그래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목회자나 성도들이 열렬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고, 목회자는 열심히 탐구하고, 공부하고 신학생들이 그래야겠지만, 그것은 기껏해야 갈멜산에 올려놓은 장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장작을 산더미처럼 쌓아놓아도 불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지, 장작에서 솟구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아멘 이렇게 해야지, 교회의 수준이 인터넷을 통해서 전파될 텐데. 별로 이렇게 대단하지 않는 이야기 할 때에는 아멘 그러다가. 다시 하겠습니다. 기껏해야 장작입니다. 장작. 그 불은 장작 안으로 위에서 떨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우리나라의 훌륭한 신학교가 많다. 우리 담임 목사님이 박사학위를 몇 개를 가졌다. 우리 요새 책을 부지런히 모으는데, 도서관에 책이 몇 만권이다. 그것은 자랑 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장작입니다. 장작. 그런데 장작이 없어도 좀 그렇습니다. 불을 내리셨는데 장작이 없어, 바케스에 물이 있습니다. 확 하다가 불이 꺼집니다. 장작이 있어야 합니다. 장작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장작만 있어서 뭐 합니까. 불이 없는데. 둘 다 있어야 합니다. 그 장작위에 항상 확 불이 떨어집니다. 그러한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훌륭한 장작을 가진 교회가 되도록 신학교도 돕고 훌륭한 사람들이 되도록 미래를 위해서, 훌륭한 목회자가 되기 위해 나는 중학생 때부터 목사가 되겠다고 소명 받은 애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초등학교 때 그 때부터 인턴십을 해서 그래서 철저히 해서 그렇게 해서 불 받은 사람이 되어서 역사를 뒤집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위에서는 장작을 열심히 패야 합니다. 그러나 항상 기억할 것은 불을 내려 달라는 간절한 부르짖음이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간절히 해야 합니다.
V.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A. 하나님의 의존하는 경건
그러면 마지막으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일 먼저 우리들이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의존하는 간절한 경건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며칠 동안 듣고 보니까 교회는 진리의 빛의 공동체로 부름 받았고 이제껏 나의 신앙생활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수단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자신이 교회가 공동체적으로 이 진리를 충만히 누리면서 살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첫째는 뭐냐 하면 산 같은 사상입니다. 산 같은 사상. 그래서 모든 삶을 지식의 기반 위에 세우고 모든 지식을 삶의 실천과 관계를 지우면서 그러면서 내가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고 이렇게 믿을 수밖에 없고 내가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다는 분명한 신념과 확신을 가지고 우리들이 살아가야 합니다. 언제 기회가 주어지면 약속하겠습니다. 왜, 오랫동안 계속되어 오던 최소한 1600-1700년 계속 되어오던 이 세계와 하나님과 인간과 역사, 모든 것을 함께 볼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을 만드는 것이 목회의 목표이던 기독교 신앙이던 왜 이렇게 시장 꺼리 같은 이러한 신앙이 되었는지 언제 내게 기회를 주면 여러분들에게 한 3시간에 걸쳐서 알려 주겠습니다. 결국은 우리에게는 산과 같은 사상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성경의 진리로 이 시대를 알고 그리고 이 시대의 표적을 구별하고 이 시대가 원하는 바가 무엇이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떠났고 이 세대의 진정한 희망이 무엇인가 진리를 통해 발견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을 이 어두운 세상에 비춰서 어느 방면 삶, 한 구석도 주님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예수 믿는 사람답게 먹고 살고 숨 쉬고 기도할 수 있는 사람으로 죽을 때까지 우리의 신앙의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열심히 진리를 탐구하고 우리의 신앙을 겨우 상처받은 마음을 교회에 나와서 위로나 받고 죄 짓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나 우리의 신앙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전쟁을 할 때 군인이 안 죽는 것이 목표인 군인이 나라를 지킬 수 있겠습니까. 적이 한번 도발하면 지도에서 너희 나라를 지워 버리리라 할 정도의 군인 정신을 가져야지 나라가 든든한 것이지, 안 죽는 것이 목표다. 이것은 뭐. 어떻게 하겠습니까. 두 번째는 물 같은 마음입니다. 어떻게, 주님이 우리에게 이미 알게 하신 진리의 빛이 많다고 하더라도 불신자 보다는 훨씬 더 지혜롭다고 믿을지라도 개념없이 신앙생활하는 사람들보다는 할아버지다 할지라도 물 같은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들어주랴 그러면 하나님 더 큰 집, 더 많은 재산, 보다 더 큰 지위라고 이야기 하지 말고 오늘 밤에라도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주랴 그러면 더 많은 진리를 주시면, 더 진리에 부합하게 살겠나이다. 나를 통해 영광을 받으소서. 그렇게 외웠다가 대답을 하면 주님이 정말 기뻐하실 것입니다. 내 기도가 되도록 그렇게 대답하면 더 기꺼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우리에게 이미 많은 진리의 빛을 주셨지만, 우리의 삶은 그 지식처럼 온전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진리의 빛이 없어서 어둠 속에 타락하고 사는 사람보다 많은 진리의 빛을 받으며 살았는데도 이렇게 온전하게 살지 못하는 우리가 더 나쁜 사람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고칠 수 없사오니 성령의 은혜를 부어 주시옵소서.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세 번째는 불꽃 같은 삶이 나오겠습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
(찬양) 이 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간절히,
(찬양)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함께하리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에게 순교자의 삶을 사는 이에게 조롱하는 소리와 세상 유혹 속에도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
그래서 마음에 깊이 결단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진리를 싫어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나는 외톨이가 되어도 그러한 투철한 삶의 정신을 우리에게 주시도록, 그럴 수 없는 능력이 우리에게 없으니까 매일 눈물로 기도하고 도와달라고 나를 붙들어달라고 이 세상은 군대와 같고 나는 홀로 있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그렇게 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B. 우리의 시대 안에서 충성함
마지막으로 우리 시대 안에서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은혜를 받으면 뭐라고 합니까. 죄악된 세상. 멸망 받을 세상, 이 세상은 음녀의 도성이요 바벨론, 나는 하나님의 신부 예루살렘의 백성, 세상과 교회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입니까. 은혜를 많이 받은 후에는 어깨를 쭉 늘어뜨리고 가서는 안 될 세상으로 은혜 받았어도 죄 지을 것이 뻔하다는 식으로 걸어나갑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시대가 죄악되기는 하지만, 죄는 미워하되 그 죄의 영향을 받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세상인데도 짓밟히고 있는 이 세상을 가엾이 여기면서 마치 내 아이가 넘어져서 온 몸에 진흙 천지가 되었는데 그 아이의 옷을 벗기면서 그 아이가 다쳤는지 불쌍히 여기고 끌어안는 엄마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이상하게 사람들이 은혜를 좀 받으면 세상에 대해서 앙갚음 하고 싶은 마음을 갖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세상을 정말 미워하고 주님의 뜻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러느냐, 여러모로 볼 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결국은 그 시대를 깊이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다 버리고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눈물이 아니라, 에클라우센, 통곡하셨습니다. 왜, 죄는 밉지만 그 죄 때문에 멸망할 사람을 보시면서 예수님이 너무 마음이 아프셨던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이 시대를 깊이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잘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현실을 버리면 안 됩니다. 현실과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난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라고 하는 순간 신앙과의 연관성이 탁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순결하게 기도하면서 죽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때 묻기 전에 죽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순교해 달라고 기도하는데 순교할 기회 별로 안 옵니다. 그러니까 다음부터 기도할 때 순생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죽음의 정신으로 매일 매일을 살도록 그렇게 헌신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세상 현실을 깊이 인정해야 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타협하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든지 이 현실을 내가 끌어안고 그리스도의 진리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녹여내리라고 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 야 버려라. 모세야 저 인간들 지겹다. 다 버려라. 너를 으뜸 삼아서 다시 한 번 나라를 창조하리라. 그랬을 때 뭐라 그랬습니까. 하나님 안 됩니다. 차라리 나를 생명책에서 지워버려 주십시오. 하나님이 그렇게 버리시면 많은 사람들은 욕합니다. 저 여호와가 막상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냈는데 광야에서 가나안 까지 이끌어낼 자신이 없으니까 중간에서 버렸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나는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 기도를 받으시면서 감동을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세상을 버릴 수 없습니다. 주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계입니다. 하나님 고쳐 써 주시옵소서. 자기 남편, 예수 너무 안 믿으니까. 남편 어떻게 되었습니까. 목사님, 말도 마세요. 그 인간 하나님이 손을 좀 보셔야 합니다.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복음화가 되겠습니까. 마음이 그러한데, 하나님이 손을 좀 봐야 되겠다고 하더라도 저를 손을 보시옵소서, 그래야지 우리 남편 손 좀 봐야 된다고. 그러면 안 됩니다. 복음의 정신이 아닙니다. 복음을 세상에 전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가족을 깊이 끌어안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녹여놔야 합니다. 그래서 그 시대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시대를 움직이는 정신을 꾸짖을 수 있는 지혜와 지식, 용기 그리고 시대 속에 있는 사람들을 버리지 않을 수 있는 불변하지 않는 뜨거운 사랑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그러진 시대에 우리들이 빛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매일 매일 성경을 공부하고 교리를 공부하고 신학을 공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가고 이러면서 하나님을 매일 매일 힘써 알아가야 합니다. 아는 것만큼 매일 매일 진리를 따라 살고자 몸부림 치면서 살아가고 우리가 몸담은 교회들이 모두 한 마음이 되어서 열심히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많은 복들을 어디에 사용해야 하는가 하면 이 진리의 말씀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그 진리의 빛을 교회 안에 더 밝게 빛나게 하는 그 일에 헌신하며 살 수 있도록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VI. 결론: 진리의 사람으로 남음
주님은 마치 등불이 어두운 방 안을 밝혀 많은 식구들을 그 밤 중에 함께 교제하고 일하게 한 것처럼 우리가 이 어두운 세상에 그러한 불빛이 되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고 계십니다. 정말 이 빛, 이 빛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충성되이 살면 찬란하게 빛나게 해 주실 수도 있고 게으르고 나태하고 우리들이 방향 없이 살게 되면 우리들은 살아 있는데 교회 전체에 꺼져가는 심지의 불꽃과 같이 사위어 가는 심지의 마지막 남은 불꽃과 같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 뿐 아니라 교회, 이 교회 뿐 아니라 조국의 교회, 보편 교회를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교회가 어디서든지 이 진리의 빛을 드러내는 교회가 되도록 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그렇게 살고 헌신해야 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4.‘그 빛’과 선한 행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5:16上)
녹취자: 김경애
Ⅰ. 본문해설
어제에 이어서 계속 말씀을 드려야 되겠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그 빛을 비추게 한다는 의미를 오늘 여러분들에게 더 설명을 드리고 그리고 착한 행실을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설교하려고 합니다.
Ⅱ. ‘그 빛을 비치게 한다’는 의미
A. 사람들 앞에 (ἔμπροσθεν τϖν ἀνθρώπων)
우선 제일 먼저 ‘너희 빛을 사람 앞에’ 그랬는데 희랍어 성경에는 ‘사람들 앞에’ 라고 복수로 나옵니다. 우리말에서는 단수와 복수가 그리 중요하지 않지만 복수로 나옵니다. 앞에 라는 ‘엠포스덴’ 이라는 이 희랍어는 장소적으로 앞선 것도 가르치고 시간적으로도 다른 사람보다 앞서서 행하는 어떤 것도 가르칩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사람들 앞에 빛을 비춘다는 이야기는 장소적으로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비춘다는 뜻도 되지만 시간적으로 아직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후일에 일어나게 될 일을 알 수 있도록 진리의 빛을 비추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또 ‘사람들’ 이라는 이 복수 앞에 정관사 ‘그 사람들’ 이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결국 많은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라 그 시대의 사람들 앞에 빛을 비추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시대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영향을 끼침으로 다음 세대에 영향을 끼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우리가 직접 접촉하고 만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직접 접촉하고 만나는 사람들은 바로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이 사람들은 그 시대에 태어나서 그 시대의 아들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최근에 북극곰에 대한 새로운 과학자들의 탐사결과가 나왔습니다. 지구 온난화 현상이 일어나면서 북극에 현저하게 얼음이 많이 녹아내리면서 먹잇감을 찾지 못하는 북극곰들이 스스로 체중을 줄이기 시작했다는 보도였습니다. 그래서 80년도 초까지만 해도 평균 260㎏ 상회하는 것이 북극곰의 평균체중이었는데 30년이 흘러가면서 온난화가 그 80년대 이전의 30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온난화가 촉진되면서 몸무게가 약 30㎏ 정도 줄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못 먹어서 준 것이기도 하지만 식량을 조달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보면서 스스로 감량한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동물들의 모습입니다.
B. 그 시대의 ‘사람들’ 앞을 비춤
1. 그 시대의 아들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렇다면 오늘 이러한 사실들을 우리 인간에게 한번 적용해보십시다. 한 시대에 사람이 태어나면 자기도 모르게 우리가 코로 숨을 쉬고 공기를 들이마시듯이 우리의 정신도 그 시대의 풍조를 호흡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코로 호흡하는 것은 우리들이 늘 느끼고 알고 한 몇 초만 코를 막아도 불편을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가 정신으로 호흡을 하면서 이 시대의 정신을 우리 안에 수용하고 받아들이면서 산다는 것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많이 흐르고 나면 우리도 바로 그 시대정신에 깊이 세뇌되고 감염되어있다는 사실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도 어느 한순간 우리에게 커다란 악을 행하라고 도전이 오는 것은 우리들이 쉽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늘 예배가 끝나고 난 뒤에 집으로 가는 길에 여러분들의 귀에 마귀의 유혹이 속삭인다고 합시다. ‘심심한데 오늘 가다가 사람을 하나 죽이자!’ 그것을 그런 속삭임이 자기 마음속에 들어왔을 때 그것을 즉각 순종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죄와 유혹이 항상 그렇게 우리가 수납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우리에게 유혹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유혹은 언제나 우리의 마음 안에 있는 그렇게 하고자하는 크고 작은 성향들을 자극해서 그것이 스스로 힘을 얻고 일어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유혹입니다. 자, 보십시오. ‘오늘 가다가 심심한데 사람 하나를 죽이자!’ 그런 것은 유혹이 될 수 없겠지만 ‘야, 추워죽겠는데 횡단보도로 건너지 말고 그냥 뛰자!’ 그런 유혹은 받을 수 있습니다. ‘아! 저는 그런 유혹은 절대 안 받습니다.’ 착합니다. 착해! 인정하겠습니다. 그런데 착하지 않은 사람도 많습니다. 그처럼 한 시대를 살면 그 시대를 호흡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서서히 서서히 들어오면서 그것들이 호흡하는 것처럼 서서히 들어오면서 우리들의 정신의 세계를 오염시키고 이 시대의 정신에 물든 사람들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시대의 아들들’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아들이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딸은 왜 안칠까요? 시대의 아들들이라는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 하면 가업이나 유산을 물려받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에게 태어나서 그 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으면 살아가니까 그 당시의 문맥에서 딸은 별로 해당이 안 됩니다. 시집을 가면 그만이니까 말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면 그냥 농사일을 짊어지면서 하듯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시대의 아들로 태어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시대를 숨 쉬면서 그 문화 속에 그 사상과 정신 속에 젖으면서 그 시대와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반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신자들도 그런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이 경건한척하고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만 그러나 교회 안에도 덜하기는 하지만 세상의 풍조들이 흐르고 있고 밖에 나가면 훨씬 더 노골적으로 세상의 풍조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세상 속에 숨 쉬듯이 먹고 마시며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몇 년 전에 온 교인이 광림수도원에 올라가서 ‘세계화의 시대에 진리의 전달자로서의 신자의 역할’ 이라는 산상세미나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2시간 20분 동안 근대 이후의 현대사를 설명하면서 우리 현대인의 정신사 속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고 오늘날 우리들이 왜 이런 의식구조 속에서 살아가는지를 철학사와 지성사를 훑으면서 2시간 20분 동안 여러분들에게 강의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여러 교인들을 심방하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죄와 은혜의 지배나 십자가 설교를 들으면서 충격을 받았다는 것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충격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고 그런가보다 하고 살아가고 있었던 이 세상에서 습득한 많은 지식과 인생관, 가치관 거기에 입각한 삶의 많은 태도들이 사실은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이 세속적인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커다란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사실은 그날 이후로부터 여러분들이 설교를 듣거나 혹은 독서를 하거나 교회의 교육에 참여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겸손해지셨고 그리고 교회에서 많이 가르쳐도 훨씬 덜 투덜거리는 사람들로 변했습니다. 예전에는 어떤 사람은 이과 출신은 열린 교회에서 신앙생활하기가 힘들다고 할 정도로 투덜거렸는데 이제는 많이 그런 점에서는 나아졌습니다. 겸손해졌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우리 인간을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가지 방면의 영향력이 인간을 끊임없이 어떤 틀에 넣고 그것을 본받게 만드는 두 주체가 있습니다. 셋도 아니고 딱 두 주체입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을 한번 해봅시다. 여러분 떡을 만듭니다. 떡을 만드는데 여러분! 봄에 소풍을 갈 때 바람떡을 가지고 소풍을 갑니다. 요새는 그런 것을 가지고 가지 않지만 옛날에는 그랬습니다. 그런 것은 어떻게 만드느냐하면 쌀로 된 떡을 잘 익혀서 다 먹어도 좋은 그런 절편 같은 떡 반죽을 만들고 그것을 국수반죽처럼 편 다음에 거기에다가 팥이나 혹은 소를 넣고 그것을 뒤집어 덮습니다. 그리고는 그 위에 떡을 찍는 기계를 놓고 천천히 하지 말고 한 번에 팍 찍으면 놀랍게 딱 찍히는 동시에 바람이 자기 스스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아는 그렇게 일부러 빨대로 바람을 집어넣은 것이 아닙니다. 딱 찍으면 바람이 들어가면서 많은 떡들이 나오는데 그 떡이 쑥으로 만든 것도 있고 분홍색 물감을 들인 것도 있고 그냥 하얀색도 있고 여러 가지 색깔이 있지만 일단 그것들이 나오는 모양은 이 동그란 것을 가지고 딱 찍을 때에 이 원래 기구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서 똑같은 모양으로 찍히는데 해보지는 않았지만 네모난 것으로 찍으면 아마 네모반듯한 바람떡이 되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렇게 찍으면 한말을 해서 찍으면 1300개 정도가 나옵니다. 전직이 다 나옵니다. 그렇게 해서 찍어서 떡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틀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그대로 찍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태어나면 경험주의 철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순수한 상태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 안에 죄성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 성경적인 인간관입니다. 증거는 많습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인간이 정말 선하게 태어나면 내버려두면 선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악만 안 가르쳐주면 선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그냥 가만히 내버려두면 악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선한 인간으로 만들려면 교육을 많이 시켜야하는데 짐승 같은 인간을 만들려면 그냥 내버려두면 됩니다. 그냥 자라게 내버려두면 반드시 나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인간은 이미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그 인간이 두 개의 주체가 자기의 틀로 인간을 찍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는 세상이라는 틀이고, 하나는 그리스도라는 틀입니다. 하나는 세상이라는 틀, 그리스도라는 틀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여기서 ‘세대’, ‘세상’은 다 같은 말입니다. ‘본받지 말고’ 의 그 본받는다는 것이 그렇게 틀로 찍어내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미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신 속에 세상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죄,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니까 세상이 그것을 찍을 때에는 별 특별한 노력 없이 기분 좋게 찍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안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러니까 그 태어난 사람을 그리스도로 찍어서 예수표가 되게 만들려면 인간 속에 혁명적인 변화가 도입이 되어야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중생과 회심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고 자기의 죄를 진실하게 회개하고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절실하게 믿는 그런 아주 강력한 변화가 그 사람의 영혼 안에서 일어나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된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본받은 사람들이 한번 세상이 찍힌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세상과 접촉하고, 세상과 합치를 이루고, 세상의 기준을 따라 살고, 세상의 기준을 따라가고, 세상이 추구하는 목표를 자기도 자신의 목표인 것처럼 알고 살아가고, 이 세상을 사랑하는 동안에 서서히 세상을 닮아서 아주 철저한 세속적인 인간이 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세상보다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귀고, 그분의 은혜를 받고, 그분의 말씀에 감동을 받고 하면서 날마다 변화되어가는 가운데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을 본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성화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이 ‘너희들이 빛을 비춰주어라.’ 그렇게 빛을 주어야 되는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바로 그 시대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을 이미 가지고 태어나고 세상의 틀에 의해서 부지런히 세상이 찍히는 사람들, 물론 신자들도 그 안에 있겠지만 여기서 세상이라고 할 때 그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불신자들의 대명사로써 예수님이 ‘그 사람들’ 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교회에 있는 사람들이건 불신자들이건 간에 그 시대 속에 태어나서 밥 먹고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그 시대의 정신을 따라 살아가는 그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 ‘그 빛’을 비취게 한다는 의미(1)
자, 그러면 이제 빛을 비추라고 말씀하시는데 도대체 그런 여기에는 어제 설명 드린 바와 같이 이 빛은 그냥 빛이 아니라 ‘The Light’ 그 빛입니다. 그 빛을 비추게 하라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냐는 것입니다. 이게 뭐냐 하면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어서 누구에게? ‘그 사람들 앞에’ 입니다. 그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골목을 걸어가는데 예전에 서울시내에 가로등이 별로 없어서 후레시가 없으면 못살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때에 착한 사람들이 그런 일을 했는데 내가 이렇게 걸어가면 워낙 캄캄한 길인데 앞에 가던 사람이 여기는 위험하니 길이라고 생각하니까 뒤에 오는 사람을 위해서 후레시를 켜서 그 사람 앞에 비춰주는 것입니다. 눈에 대는 것이 아니라 발에다가 이렇게 비춰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걷는 사람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돌멩이도 있고 웅덩이도 있는데 후레시를 앞에다가 이렇게 비춰주니까 그 빛을 따라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구절을 보면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많은 그림들이 이 속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내 길의 빛이며’ 그 빛이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오르’ 라는 말입니다. 광명이라는 뜻도 됩니다. 그것은 굉장히 큰 것입니다. 햇빛 같은 것, 조명탄이 비치는 그런 모습입니다. 그리고 ‘내 길의 빛이요.’ 라고 그리고 그 다음에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내 발의 등불이니이다.’ ‘네르’라는 단어인데 그것은 막대기 같은 데에 끼어서 들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떻게 됩니까? 저 멀리는 여전히 어두움인데 그런데 한걸음 한걸음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비춰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따라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그 사람들 앞에서’ 장소적으로 시간적으로 그 사람들 앞에 빛을 비추게 하라고 할 때 아마도 예수님은 구약에 아주 익숙하신 분이고 히브리적인 정신을 가지신 분이셨기 때문에 아마도 시편 119편에 나오는 그런 빛, 그런 등을 생각한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저 멀리 있어서 나에게 눈에 들어오도록 비추는 그 빛, 그 빛만이 아니라 나와 같은 방향에서 빛을 비춰줘요. 혹은 내 위에서 빛을 비추어 그 빛을 직접 나에게 보여주기 위한 빛으로 비추는 것이 아니라 나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구별하고 분별하도록 오히려 사물을 비춰주어서 나의 판단에 도움을 주는 그런 종류의 빛 그것이 빛이 어두운 때에 그 빛이 가지고 있는 효용성입니다. 그럼 생각해보십시오. 어제 한참 걸려서 이스라엘 문화와 방안의 등불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등불을 어두운 방에 들어갔는데 후레시 하나밖에 없는데 그 후레시를 눈에다가 들이댈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방안을 비춰주어서 어디 문지방이 있고 턱이 있으니까 그쪽으로 가면 넘어지고 저쪽에는 요강이니까 밟으면 쏟아진다고 그렇게 가르쳐주어야지만 사람이 그 빛의 도움을 받을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너희들이 그 사람들 앞에 빛을 비추게 하라.’는 그 의미가 바로 너희들이 알고 있는 진리, 그리고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삶, 이것을 통해서 너희가 진리를 전달하는 사람이 되어서 그 진리가 빛이 되어서 확 비추어서 너희가 없었더라면 그 사물, 이 세상의 가치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사람들이 달리 생각하도록 만들어주는 사람이 되라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여러분들의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아주 훌륭한 비유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여러분들이 잘 아는 1500년대 말에 태어나서 1600년대까지 살았던 프란시스 베이컨이라는 철학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신 오르가논’ 이라는 책을 썼는데 거기에서 동굴의 비유를 말했습니다. 인간은 모두 그 동굴에 갇혀있는 존재다. 그래서 쉽사리 진리에 대해서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다고 동굴에 사로잡혀있는 인간을 이야기했습니다. 이 원판이 어디냐 하면 플라톤이라는 철학자가 이상 국가 혹은 국가론이라는 책을 씁니다. 거기에 보면 그 책 전체를 걸쳐서 아주 유명한 두 개의 중요한 비유가 등장하는데 하나는 동굴의 비유이고 하나는 태양의 비유입니다. 사실 이 두 비유는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두 개가 함께 연결되어있는 그런 종류의 비유입니다. 내용은 이런 내용입니다. 동굴이 하나가 있는데 동굴에 죄수들이 전부 밧줄에 묶여있습니다. 그리고 이 앞은 커다란 벽입니다. 벽을 이렇게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벽에 수많은 그림자들이 막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면 토끼 그림자도 나오고, 이렇게 하면 부엉이 그림자도 나오고, 이렇게 하면 박쥐 그림자도 나오고 어려서 많이 해보았습니다. 그런 그림자가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수로 묶여서 그것만 들여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 그림자 다음에는 무슨 그림자가 나오고, 저 그림자 다음에는 무슨 그림이 나오고, 저 그림자 두 개가 합쳐지면 무슨 그림이 된다. 그리면서 열심히 배워서 그림자가 나오기만 하면 다음에 무슨 그림자가 나올지 딱 알아맞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돈도 많이 벌고 아주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성공하고 남다른 대접도 받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는 모르는데 그 묶여있는 죄수 중 한 사람이 모든 사람들이 다 앞만 쳐다보면서 열심히 벽면을 왔다 갔다 하는 그림자를 공부하고 있는데 이 한 사람이 몸을 돌려서 뒤를 볼 마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뒤를 보니까 야트막한 담장이 자기들 뒤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뒤에는 횃불이 타오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놀랍게도 저기서 사람이 막 걸어갔는데 그림자를 보고 그림자만 보았는데 그때 뒤를 딱 돌아보니까 사람모양하고 똑같이 생긴 인형을 횃불 앞에 들고 있기 때문에 거기 사람 그림자가 보였던 것입니다. 또 박쥐인줄 알았는데 거기에 박쥐모양의 인형을 놓고 흔드니까 박쥐가 날아가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이 사람이 너무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을 보니까 알고 보니까 저 그림자는 이것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고 저 그림자는 바로 이 사람인형, 박쥐인형, 새 인형에 불빛을 비추어서 그래서 거기에 떨어진 그림자라는 사실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돌아서서 거기를 걸어가 보니까 이 계단이 생겼는데 저 위에서 이 횃불 빛과는 전혀 다른 생전 처음 보는 눈부신 빛이 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를 걸어 올라가 보는 것입니다. 생전에 그런 빛을 못 보았기 때문에 햇빛이 찬란하게 막 쏟아질 때 눈이 쓰라리고 고통스러워서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서 거기를 걸어 올라가서 딱 밖을 보니까 거기는 완전히 동굴하고는 다른 세상인데 인형으로 본떠서 만들었던 사람이 진짜 거기를 걸어 다니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가 날아다니는 것입니다. 박쥐가, 고양이가 진짜로 날아다니고 기어 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그림자를 보다가 인형을 보았을 때는 그림자가 아무것도 아니구나 생각했는데 인형을 보다가 가서 실제 사람을 보니까 이제 이 인형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거기에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 그림자를 보고 감탄하고 그 순서를 헤아리면서 돈을 벌고 사람들에게 지혜 있는 인간이라고 인정을 받고 그렇게 대접을 받던 것이 얼마나 더럽고 추한 것인가 하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 찬란한 햇빛이 확 쏟아지는 그 대지위에서 너무 너무 아름다운 것입니다. 너무 너무 행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을 느낀 것은 잠깐입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 행복을 자신 혼자 누리면 큰 벌을 받을 것 같은 두려움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어두움 속에서 그렇게 인생을 의미 없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서 ‘너희들이 보는 그림자는 그림자일 뿐이고 뒤에 실체가 있다. 그 실체도 실체인 것 같아도 사실 그것은 모형일뿐이고 이렇게 동굴 밖으로 나가보면 그림자를 보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찬란하고 눈부신 아름다운 세상이 있다.’ 그리고 전해야지! 그리고는 그 속에서 죄수로 갇혀서 살고 있는 우리 형제를 구원해야지! 그러면서 내려오면서 이런 이야기는 조금씩 각색을 한 것입니다. 급해서 막 뛰어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어둠속에 들어가니까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 햇빛이 막 쏟아지는 한낮에 친구들하고 영화구경을 가자고 해서 그래서 극장에 갑자기 들어가면 어떻게 됩니까? 넘어질 것 같아서 더듬더듬 합니다. 극장 안에 있는 사람들이 보면 웃기는 것입니다. 훤하게 잘 보이는데 넘어질듯 뒤뚱거리면서 내려오는데 이 사람은 급하게 내려온 나머지 굴러 떨어지고 갑자기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원래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볼 때는 ‘저것들은 꼴값한다.’ 그러는 것입니다. 이것 공부도 안하고 지 잘났다고 어디로 튀어서 뛰어 올라가더니 이제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이 세계에 적응도 못하는 낙오자라고 하면서 머저리 같은 녀석이라고 그러는데 그가 딱 내려오더니 ‘너희들이 이 그림자를 보고 감탄하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냐! 이것은 그림자일 뿐이고 이것과 똑같은 물체가 너희 바로 뒤에 있어! 그리고 그 물체도 다가 아니라 이 동굴 밖을 나가면 찬란한 빛이 쏟아지는데 거기에는 모형이 아닌 진짜 실체가 살아있다.’ 고 전합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떻게 되느냐하면 거기서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 모형을 보고 빛의 세상으로 찬란한 태양 아래 비추는 빛을 보기 위해서 올라가는 그것을 ‘아나바시스’ 그것을 보고 운명에 사로잡혀서 저 인간들을 구원해야겠다고 내려오는 것을 ‘카다바시스’라고 그럽니다. 올라가고 내려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올라가는 사람에게는 내려오는 것이 숙명입니다.
사실 이러한 비유는 인간에게 있어서 이 진리와 인간간의 관계를 아주 이해하기 쉽게끔 만든 유명한 비유인데 이 부분의 상당부분이 사실은 기독교에 많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십시다.
(찬양) 죄악된 세상을 방황하다가 천국과 지옥도 나는 몰랐네. 고집대로 영 죽을 험한 세상이 왜 이리 더러운지 이제야 아네.
그리고는 하나님의 찬란한 은혜의 진리의 세계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무엇이라고 그럽니까? ‘아! 여기가 좋습니다. 정말 행복합니다. 나는 만족합니다.’ 절대 그러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아픔과 그리움, 목멤, 안타까움, 슬픔이 이 속에서 폭포수처럼 솟구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그 다음 가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찬양) 불속에라도 들어가서 불속에라도 들어가서 세상에 널리 전하리. 주의 사랑을
사도 바울이 뭐라고 그럽니까? ‘내가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빚진 자로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으리로다.’ 그 운명에 강하게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보십시오. 다른 시대는 말고 오늘 우리 시대만 생각해봅시다. 이 시대의 빛으로 보는 인생과 진리의 빛으로 보는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다른 판단을 가져오는지 한번 대조해보기를 바랍니다. 시대의 빛은 인간 자신에게서 나온 빛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를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인간이 타락하고, 그 인간을 구원하고, 그 인간을 구원하여 세계를 완성시키시는 하나님의 4중의 계획을 가지고 오늘날 이 세속적인 인간의 인본주의적인 사고를 가지고 보면 이런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창조라는 것이 무엇이냐? ‘그런 것은 없다. 인간은 원래 있었고 물질로부터 진화했는데 물질은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지만 영원 전부터 있었고 신이란 것은 없다. 그리고 무한한 무수한 진화의 과정을 거쳐서 원인과 결과의 연결로써 인간은 그냥 왜 태어났는지는 모르지만 마치 인간이 그냥 인간으로서 존재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마치 강아지보고, 발아래 구르는 돌멩이보고, 하늘에 있는 구름을 보고 네가 왜 태어났니? 라고 묻는 것과 똑같다. 그래서 인간은 단자적인 그냥 하나하나 쪼가리 떨어진 개체로써 그냥 물질적인 필연을 따라서 여기에 있는 존재일 뿐이다.’ 이것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빛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아니다. 원래는 하나님 한분만 계셨고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영광을 보이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두 개의 세계를 창조하셨는데 하나는 하늘의 영적인 세계와 이 땅의 물질의 세계를 창조하셨고 인간은 하나님이 특별히 당신의 형상을 부여하여 이 모든 세계를 하나님의 뜻에 맞게끔 다스리게 하시려고 하나님과 가족관계를 이루면서 살게 하시려고 인간을 창조하셨고 그 창조된 하나의 인간 안에서 태어나는 모든 인류들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요.” 라고 하는 일치된 사랑의 고백 속에서 한 덩어리의 인간으로 이 세상에 창조하신 것이다.’ 단자적인 인간이 아니라 우연히 있는 인간이 아니라 물질로부터 진화된 인간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타락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인간이 이렇게 비참하고 고통 받고 괴롭게 된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이 시대의 빛은 이렇게 말합니다. ‘종교의 억압 때문이다. 도덕이라는 체계를 세워놓고 인간에게 이 도덕에 맞춰서 살라고 강요했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가 억압받는 바람에 모든 인간의 불행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니까 타락은 진리를 강요하고 도덕을 개입시켜서 인간으로 하여금 동의할 여지없이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하고 강요하는 억압 때문에 인간이 불행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이성의 빛으로 비추어본 이 세상의 불행의 원인이고 곧 타락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어떻게 말합니까? ‘하나님은 이 세상을 아주 아름답게 창조하셨고 인간과 물질, 세계와 그리고 인간의 영혼, 이 모든 것들을 아주 아름다운 그물망처럼 네트워크를 이루는 가운데 아주 질서롭게 창조했고 그래서 인간은 처음부터 단자적인 존재가 아니라 위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좌우로는 사람과 관계를 맺고 아래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만물과 관계를 맺으면서 그 관계를 사랑으로 그리고 이 지성으로 잘 돌보고 가꾸어서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아주 아름다운 세계가 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에게 주어진 사명이었는데 인간이 하나님을 버리고 계명을 어기고 타락해서 자신이 그 모든 질서의 주인공이 되려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징벌하셔서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되었고 죄의 징후가 이 세상에 수많은 악과 부조화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래서 바로 그것이 인간이 타락의 본질이고 이 세상이 악하고 불결해진 이유다.’ 이것이 진리의 빛을 비추어본 타락의 개념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의 지식의 빛으로 비추어 본 구원의 개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은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인간의 동의가 없는 다른 사람, 다른 근원에서 부여된 모든 도덕질서에서 벗어나서 무엇이든지 해도 괜찮은 완전한 인간으로 자유를 부여하고 인간 스스로를 믿어주는 것만이 그것이 바로 인간의 구원의 상태라는 것이 이 세상의 빛으로 본 구원관입니다. 성경은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고 깨뜨리게 하는 주범은 자기를 하나님 삼아서 살려고 하는 인간의 죄성, 자기가 온 우주의 중심이고 모든 가치의 최고봉이라고 생각하는 자만심과 교만, 무지 때문에 그런데 인간은 자신을 그런 비참한 곳에서 구원해낼 수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들을 그 모든 죄에서 벗어나게 하셔서 그래서 원래의 인간의 창조의 질서로 돌아가도록 만들어주는 그것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시대의 빛으로 비춰보면 이 모든 세계의 행복한 완성은 인간이 원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원래 그런 것은 존재하지도 않고 왜냐하면 창조 자체를 부인하기 때문에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이 좋으냐? 인간은 하나님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이 점점 인간 안에 있는 신적인 성질을 개발해서 우주 안에 가득한 신과 일체를 이루면서 신화되어서 하나님과 합일을 이룰 그런 존재가 되어가는 것이 이 모든 세계 불행의 궁극적인 행복으로의 완성의 본질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진리의 빛으로 보면 어떻게 됩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은혜를 모두 힘입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죄에서 벗어나 정결한 사람으로 되어가다가 마지막 인류역사의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이 모든 사람들을 부활하여 심판과 영광의 부활로 가르시고 그리고 이 땅에 있는 모든 죄를 제거하고 창조의 원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었던 아주 아름다운 질서를 다시 회복시켜 죄를 영원히 멸하시는 그것이 세계의 완성이고 인간의 진정한 행복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고 거기에서 인간은 본래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그 시점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충만하게 드러내는 이 세계로 가꾸어 갈 것이라고 하는 것이 성경의 진리의 빛으로 본 세상의 완성입니다.
자, 짧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이제 오늘날 이 시대의 정신으로 보는 창조, 타락, 구속, 완성이라는 것과 불변하는 성경 진리의 빛으로 보는 창조, 타락, 구속, 완성이라는 것이 도저히 합의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빛을 비춘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너희의 그 빛을 그 사람들 앞에 비추라고 할 때 그것은 눈에다가 들이대라는 뜻만이 아니라 그 앞에 비추어 ‘엔프로스덴’ 장소적으로 시간적으로 그들의 앞을 비추어 그 빛이 없었더라면 넘어지고 쓰러지고 웅덩이에 빠질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 올바르게 보게 만들어주려고 너희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이 땅에 남아있는 것이다. 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3. ‘그 빛’을 비취게 한다는 의미(2)
그래서 그 진리의 빛, 다시 말해서 성경 진리의 빛,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인간이 타락했고 그리스도께서 구원주로 오셨고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만들어주셨고 세상의 종말이 있고 성경이 진리라고 하는 이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어디에다가 비추는가하면 한 사람이 어두움 속에 있습니다. 캄캄합니다. 캄캄한데 머리위에서 빛이 환하게 비춥니다. 왜 사람들이 보면 지프차 위에 무지하게 센 라이트를 대여섯 개씩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냥하는 차입니다. 다른 때도 폼으로 달고 다닐지 모르지만 그것은 원래 사냥하는 차입니다. 밤에 가면서 사냥을 하는데 밤에 지프차에 달고 밤길을 달리면서 스위치를 넣으면 이 위에서 비치는 것입니다. 그럼 생각해보십시오. 라이트도 끄고 달린다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 자동차 위에 달린 너무 센 빛을 스위치를 올린다고 생각하면 찬란한 빛이 확 비칠 것 아닙니까? 동물만 비춥니까? 식물만 비춥니까? 아니면 길가에 떨어진 돈만 비춥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빛이 환하게 비추면 나무도 보이고 돌멩이도 보이고 어두울 때 보이지 않던 실개천도 보이고 밤에 풀숲에 있다가 도망치는 쥐새끼도 보이고 온갖 것들이 다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진리의 빛을 어디에다가 비춰야하는 것입니까? 모든 영역에 비춰야하는 것입니다. 모든 영역에 비추는 것입니다. 제가 평소에 아주 좋아하는 찬송을 아까 불렀습니다.
(찬양) 온 천하 만물이 그림책 같으니 그 고운 그림 보아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교육이 정말 문제인 것입니다. 신은 없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것은 사기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쳐놓고 자연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자연에 아름다운 질서가 있는지 그렇게 사시사철이 규칙적으로 변하고 이 땅에 있는 모든 만물들이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갖고 생활하고, 살고, 죽고,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고 하는 그 만물의 조화로운 관계에 대해서 그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마 아빠들이 잘 들으십시오. 엄마 아빠들이 자녀들의 교육을 무조건 교회에다가 밀어 놓지 말고 아이들을 그렇게 사육하면 안 됩니다. 영양분이 있는 것만 먹이고 막 그러면 사육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안되고 아이들에게 제일 먼저 기도할 것은 이 아이들이 어렸을 때 회심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구원주이시라는 것을 믿고 회심하게 만들어야합니다. 믿고 간절히 기도해서 얘가 주님을 만나고 너무 기뻐합니다. 얘도 영혼이기 때문에 그 애도 마음에 세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은혜를 받으면 평균 6개월이라고 그러는데 6개월이 안 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 6개월 후에 또다시 은혜를 받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 마음대로 잘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들도 영혼인데 안변하겠습니까? 변합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이 두 가지인데 계속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돌봐주어야 하고 두 번째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만나고는 너무 기뻐하고 그리고 무엇이든지 아멘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성경과 과학을 함께 가르쳐야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르치면서 ‘인간은 이렇게 믿고 이렇게 살아야한다.’ 그리고 과학을 가르치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이렇게 예쁘단다. 하나님이 아니면 이렇게 예쁜 세계를 창조할 수 없었단다.’ 하나하나 가르쳐야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다윈의 진화론이고 무슨 만들어진 신이고 그런 것이 다 필요 없고 이 아이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너무나 믿으니까 몰랐을 때는 모르는데 이렇게 꽃잎이 있으면 이것이 어떻게 아름다운 질서를 가지고 있는 줄 아느냐고 하면서 이파리를 따서 이렇게 보면 여기에 아주 줄기들이 정확하게 배열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면 아이들이 너무 신비해합니다. ‘엄마! 그러면 이것이 왜 이렇게 되는 것이야?’ 그러면 ‘하나님이 살아계시니까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만드셨단다.’ ‘아멘.’ 하게 되면 학교에서 아무리 다윈의 진화론을 가르쳐도 이 아이는 믿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두 개를 같이 가야하는 것입니다. 성경과 과학을 가르쳐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간으로 만들려고 하는 이 세상의 교육을 완전히 헛되게 만들어야합니다. 그러니까 시집갈 생각만 하지 말고 과학 공부도 열심히 하란 말입니다. 뭘 알아야지 갑니다. 형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빠 저 별이 뭐야?’ 그러면 ‘별이 별이지 뭐야?’ 그러지 말고 말입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과학을 배우면서 아이들에게 설명을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그런 찬송을 하는 것입니다.
(찬양) 사랑의 하나님 내 나이 비록 어려도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계를 보면서 감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속의 교육을 뛰어넘어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교육이 아주 우습게 보이도록 이 아이들을 교육시켜야합니다. 그래야지 이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증거는 믿음이 생생하게 살아있을 때에만 보이지만 그렇게 교육을 받고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볼 때 어디서든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의 고백록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에게 하나님을 보여 다오! 나는 외쳤습니다. 그랬더니 공기가 나에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만물을 낸 원인이 아니란다. 아낙시네스가 틀렸단다.” 아낙시네스는 공기가 만물의 근원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아니라고 그래서 나는 별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별들이 나에게 이르기를 “나도 모든 만물의 근원이 아니고 나도 누군가가 만드셨단다.” 천사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천사들도 나를 보지 말라. 사실은 나도 누가 만드셨다.” 묻는 것은 나의 이성이었고 대답하는 것도 나의 이성이었습니다. 이 모든 만물은 스스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 위에 있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내셨다고 크게 크게 크게 소리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이런데서 아멘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는 이제 헌신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을 이렇게 교육시켜야겠구나! 이것을 언제 해야하느냐하면 그림책을 가지고 놀 때 그때부터 시켜야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꾸준히 교육을 시켜서 확고한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관에 사로잡힌 사람으로 만들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것이 눈에 들어오고 나면 하나님이 교회만 만드신 것이 아니라 나라도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그러니까 정치하는 사람들을 욕만 하고 투표장에는 나가지도 않는 그런 무책임한 행동은 안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치도 하나님이 이 세상 사람들이 안정적으로 살게 만드시기 위해 만드신 제도이니까 정치도 결국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이 나라를 다스려야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기도하게 되고 그러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라서 그렇게 온 땅과 만물위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가슴에 품고 세계 구석구석에서 하나님이 거기도 계시다는 것, 하나님이 교회만 만드신 것이 아니라 가정만 만드신 것이 아니라 국가도 만들고, 그리고 예술도 하나님이 주신 재능이고 이 시대의 문화도 하나님께서 가꾸어가도록 만드신 것이니까 이 모든 것들이 전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우리는 그렇게 헌신하면서 살아야 된다는 것을 불붙는 사람으로 태어나서 한 사람이 예술의 재능을 가진 사람은 예술의 세계에서 정치가의 재능을 가진 사람을 정치가로서 돈을 버는 재능을 가진 사람은 돈을 많이 벌어서 나쁜 사람의 손에 들어가면 사람들을 지배하고 나쁜 짓 할 사람들의 재물을 정당하게 빼앗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이 세상의 굽어진 것을 활짝 펴게 하는 그런 놀라운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 것에서 소명을 느끼면서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아가는 사람들로 살아갈 때 그가 장사를 하고 있어도 비추는 것은 돈만 비추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빛을 비추는 것이고, 정치를 하고 있으면 권력만 비추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나오는 모든 일체된 빛이 거짓되게 정치하려는 사람에게 저렇게 하면 안 되겠다고 하는 생각을 갖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을 갖게 하신 이유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삶의 전 영역이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그 빛을 받게 될 때 모든 사람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아, 인간이 주인이 아니구나! 나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진 저 사람이 하나님의 종이 되어서 섬기는 것을 보면, 그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을 보면 인간이 궁극적인 주인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 모든 하나님이 창조하신 영역들이 올바른 질서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은 그것 자체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움직이는 사람이 아주 중요한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것이 충분하지 않은 것을 알기 때문에 열렬하게 기도하면서 그러면서 전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정말 진리 중의 핵심적인 진리인 이 복음으로 돌아와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그렇게 만들어주는 일을 위해서 헌신하려고 교회가 전도하고 설교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크기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어느 교회에서는 전도하지 않는 것을 자랑했습니다. 마치 그것이 교회를 더 크게 할 욕망이 없다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어둠속에 있는 사람들이 사슬에 매여서 노예처럼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는 충분히 빛을 본 사람들이 많다는 이유 때문에 내려갈 마음이 안생기면 그것은 진정으로 빛을 본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면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들이 전도할 것 같지요? 아닙니다. 여러 해 전 한 8년 전에 통계를 냈습니다. 교회에 등록한 사람들이 누구 때문에 등록했는가를 조사해보았더니 다 통계를 냈더니 66%가 열린 교회에 온지 일 년 미만 된 사람들에 의해서 전도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래 교회에 다닌 사람들의 전도한 사람의 수는 헤아릴 정도였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인간의 말발이나 지식의 크기가 진리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주님을 만나고 진리 안에 사는 이 따끈따끈한 행복, 그리고 그 진리가 없어서 어둠속에서 살던 기억이 생생하게 있어서 그 어둠속에서 자신이 살아온 날들을 서럽게 느끼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 진리가 전해지고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통계를 내보지 않았는데 내보나마나입니다. 새가족반, 성장반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제일 열렬히 전도합니다. 통계를 보면 말입니다. 왜? 지금 방금 주님을 만났습니다. 따끈따끈합니다. 지금 방금 빛을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둠속에 막 내려가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 어둠속에 있는 한사람이라도 건져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에 열렬한 부담을 느끼는 것입니다. 물론 개중에는 열린 교회를 오래 다녀도 열렬히 전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열렬히 전도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냉철한 시각으로 세상을 보아서 대적해야할 세상이 무엇이고 끌어안고 끝까지 눈물을 흘리며 사랑해야할 세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판단해야하는 것입니다. 마귀와 사탄과 이 세상을 하나님을 부인하며 살아가게 하는 사람들 속에 미혹하는 악한 정신은 화해하면 안 되고 대적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큰 권능의 말씀으로 꾸짖어야 하는 것입니다. 담대하게 꾸짖어서 소리만 지를 것이 아니라 그들이 왜 잘못되었는지, 왜 그들이 어리석은지, 왜 그들이 어두운지, 왜 진리의 빛을 감당할 수 없는지를 명백히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사람들이 개똥철학을 통해서 말도 안 되는 진리를 붙들며 살기위해서 몸부림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몸부림쳐야하는 것입니다. 헌신해야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과 마귀, 이 세상의 정신은 대적하되 가장 악한 사람들조차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고, 인내하고, 설득하고, 꾸짖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감동과 감화를 끼쳐주시도록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몸부림쳐야만 하는 것입니다.
Ⅲ. ‘착한 행실’과 ‘그 빛을 비춤’
A. ‘착한 행실들’(καλὰ ἔργα)
이어서 우리들이 살펴볼 것은 착한 행실과 그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보면 ‘너희 착한 행실을’ 그랬습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칼라엘가’ 라고 나오는데 직역을 하면 ‘착한 행실들’ ‘착한 일들’ 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의 착한 행실이 아니라 여러 개의 많은 착한 행실들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바로 공동체적 행위자들이 착한 일을 행하는 공동체의 행위자들이 다수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두 번의 착한행실로 신문에 대서특필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착한 행실을 한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세상이 바뀐다고는 생각하지 말아야합니다. 오히려 바뀌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런 착한 삶을 살아가게 만들었던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가치관, 인생관, 진리의 기준에 대한 확신,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물을 보는 빛, 그것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번 밤중에 고속도로 휴게소를 갔습니다. 어디를 가다가 밤중에 멎었는데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트럭을 세워놓고 온갖 잡동사니를 파는 상인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이것을 한번 써보라고 주는데 보니까 망원경입니다. 그런데 칠십만 원을 달라고 그래요. 그래서 살리는 없지만 이게 무엇이냐고 그랬더니 이것이 말로만 듣던 러시아제 야간투시경이랍니다. 그래서 생전 처음 보았습니다. 그것을 쓰고 보니까 참 신기했습니다. 빛이 있는 데는 안보입니다. 그런데 빛이 없으면 없을수록 잘 보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쓰고 자동차 밑으로 이렇게 내려가서 보았더니 캄캄한 자동차 저 밑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숲을 쳐다보면 다른 사람의 눈에는 시커먼데 이것을 쓰고 보면 그 숲속에서 들고양이나 이런 것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보이고 물체들이 다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제 같이 행군을 하거나 싸운다고 칩시다. 아니 싸운다기보다 빛이 하나도 없는 캄캄한 어두운 숲속 길을 걸어서 어느 지점까지 가기로 내기를 했다고 칩시다. 한 사람은 진리가 없어서 이렇게 더듬으면서 갑니다. 군대에 가면 어둠속에서 부딪히지 않고 걸어가는 방법을 배웁니다. 그런데 한사람은 그 망원경을 썼습니다. 그 사람은 대낮처럼 걸어가는 것입니다. 뚜벅뚜벅 걸어갑니다. 둘이서 서로 경쟁할 상대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한쪽은 캄캄한 어둠속에서 걸어가는 사람이고 한 사람은 그 빛을 보면서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왜 그럽니까? 거기서 전파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적외선이 나오는 것을 감지해서 태양의 빛이 없어도 그것을 볼 수 있게끔 망원경을 만든 것입니다. 그것을 쓰고 걸어가면 다 보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착한 행실이 세상을 바꾸어 놓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착한 행실이 마치 물체가 적외선을 뿜어내는 것처럼 뿜어내면 그것들이 전파로 사람들의 망원경에 붙잡혀서 행실들을 보게 되는 것처럼 우리 속에서 우리의 이런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어주는 궁극적인 우리를 움직이고 있는 진리의 빛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착하다는 것은 결국은 어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만물들을 창조하셔서 그래서 이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고 또 인간과 모든 만물들은 하나님의 돌보심과 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그 안에서 가장 안정되고 행복한 쉼을 얻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착한 행실들이 이 세상의 빛이 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결코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미담을 만드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의 도덕성이라는 것은 교회의 거룩함을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계를 창조하시고 타락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큰 뜻을 인간이 이해함으로써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뛰어난 철학과 그리고 인간의 모든 근본과 창조 세계의 본래의 뜻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지성이 뛰어나지 못한 사람들이라도 상관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그 복음의 소식을 들으면서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가 하는 것을 그리스도 예수의 그 끔찍한 죽음의 고난 속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열어놓은 구원의 길을 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아버지의 분에 넘치는 사랑의 대상인가 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 큰 사랑과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그 말할 수 없는 은총과 그리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죄의 끔찍함 사이에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신 그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갈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두려움을 알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살고 하나님의 그 사랑을 알기 때문에 주님을 온전히 섬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아야 되겠다든지 사람들이 비난을 하면 어떻게 하나? 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교회가 세상의 비난을 받는 것은 두려워하면서도 설교자에게 책망 받는 것은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칭찬을 받는 것에는 가슴이 뛰면서도 우리가 정말 주님께 인정을 받고 있는가 하는 것을 가지고는 고민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에 깊이 들어와 있는 세속의 정신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한 미담을 위해서 창조된 공동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종말론적인 기대 속에서 살아가면서 그러면서 우리는 이 세상은 죄 많은 세상이고 쓸데없는 세상이라는 완전히 타계적인 신앙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도 하나님이 선하게 창조하셨으니 하나님이 이 세상을 원래의 아름다운 세상으로 회복하실 것을 기대하며 섬기며 사는 것도 우리 인간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구를 생각해도 ‘어차피 마지막 날에 다 불타서 없어질 것인데 일회용 쓰듯이 아무것이나 쓰자.’ 그리고 자연을 파괴하고 그렇게 사용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저 인간 어차피 예수를 안 믿어 지옥에 갈 텐데 살아있을 동안에 내가 좀 고통을 준들 그게 뭐 무슨 큰 문제가 되겠는가? 이것은 미리 지옥에 대한 예고편이지!’ 그리고 악을 행한다면 여러분은 그것을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하나님이 영원히 존속하게 하시고 결국은 새롭게 하셔도 이 세상을 새롭게 하시지 이 세상을 부숴버리고 다른 우주를 창조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런 점에서 완전히 타계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스스로 하나님 없이 이 세상으로 충분히 자기를 완성할 수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면에서 보면 타계적인 신앙을 가지는 것입니다. 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워하고 이 세상 안에서 이루어질 영광스러운 성취를 바라보면서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와 계속되는 이 세상의 나라 그 사이에서 종말론적인 기대를 가지고 저 세상에서 오는 축복과 능력을 가지고 지금 있는 이 세상을 바꾸면서 다가오는 새로운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전망 속에서 사는 것이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인데 거기에 어울리는 거기에 이바지하는 모든 행실들을 가리켜서 착한 행실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 때에 어떤 일이 있었느냐하면 나라가 독립을 하고 광복이 되어서 조금 살게 된 다음에 비로소 한숨을 돌리고 나서 일제 강점기 때에 나라를 위해서 투옥당하고 고문당하고 죽어간 사람들을 보상할 테니까 신고하라고 제안했습니다. 그런데 여러 순교자의 가족들이 그것을 신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순교하지 않았어도 감옥에 끌려가서 혀가 뽑히고 손톱이 뽑히고 불구가 된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런데 유족들이 끝까지 나라에 ‘우리가 일제 강점기 때에 이런 고문을 받고 항거를 했습니다.’ 라는 신고를 안했습니다. 왜 안했는지 아십니까? 우리는 나라를 위해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고 그랬기 때문에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고문을 받고 박해를 받으면서도 믿음을 지키고 대한민국 만세를 외친 것인데 그것 때문에 국가가 일제식민지를 벗어났는데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지만 우리의 의도는 그것이 직접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나라로부터 보상을 받거나 상을 받을 이유가 없고 우리의 섬김은 철저히 하나님을 향한 섬김이라고 줄을 그은 것입니다. 나는 그것이 성경적인 판단을 한 것이라고 봅니다. 몰론 상당히 많은 액수의 돈을 포기해야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올바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을 보고 ‘아, 어쩌면 이 타락한 세상에서 저렇게 올곧게 살 수 있을까? 아, 그리스도인은 정말 양심적인 사람이구나! 아무리 외상을 주어도 꼭 갚는 사람이구나! 그렇구나!’ 그런 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우연히 덕을 본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주님 한분 앞에서 올바르게 살아가려고 애쓴 거룩한 신앙의 실천 때문에 그것을 법적용어로 반사이익이라고 그럽니다. 반사적으로 이익을 본 것입니다. 반사이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유소를 세웠는데 갑자기 법을 만들어서 관내에는 하나밖에 못 세운다. 그러면 이 사람은 가만히 있었는데 땡을 잡은 것입니다. 왜? 3㎞안에 주유소는 절대 못 들어오고 하나만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돈을 많이 벌게 됩니다. 이것을 반사적 이익이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으려고 믿음을 실천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덕을 본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도덕, 윤리 그런 것입니다. ‘아, 저렇게 저 사람들이 저렇게 신실한 삶을 사는구나!’ 그런데 그런 삶을 살려고 우리들에게 보여주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아, 당신 정말 대단한 일을 하셨어요!’ ‘아 이제야 발견하셨습니까?’ 그러면 안 되고 ‘그런 일을 제가 한 적이 있습니까? 나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그냥 생긴 대로 살았을 뿐입니다. 그것 때문에 당신이 이익을 보았다면 다행입니다. 나는 특별히 당신에게 감동을 주려고 그런 것은 아닌데 하나님 앞에 살다보니까 어떻게 그렇게 되었네요.’ 그런 일이 있으면 있는 것이고 없어도 나는 나대로 사는 것이고 그런 속에서 그들이 움직이고 있는 진리의 빛이 무엇일까 하는 깊은 감동과 감화를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정말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 발견하는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과 우리들이 이제껏 알고 있는 그런 기복신앙의 빛 아래에서 본 그리스도인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현저히 다른 것인지 한번 보십시오. 다른 것만큼 여러분들의 사상이 이 현대정신에 물들고 그리고 더럽혀져있기 때문에 참다운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들의 귀에 들어올 수 없었던 것입니다.
B. ‘그 빛을 비추는 것’과의 관계
그러면 이 시간에는 그 착한 행실들을 통해 빛을 비추게 한다고 했는데 그러면 그 빛을 비추는 것이 착한 행실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랬습니다. 그러면 앞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 ‘너희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게 하라.’ 이 뒤에 있는 이야기는 앞에 있는 이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추게 해라. 그런데 그렇게 빛을 비춘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너희의 착한 행실을 저 사람들로 하여금 보게 해라.’ 그런 뜻입니다. 빛을 비추는 방식이 바로 착한 행실이라는 것입니다. 어제 설명 드린 바와 같이 밝게 전등을 사람 앞에 비추는 것은 전등의 불빛을 보라고 눈에다가 쏘아대는 것이 아니라 길을 걸어가라고 그 앞에 빛을 비추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착한 행실을 한다고 하더라도 착한 행실을 하라고 명령하시는 우리 주님의 의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너희의 착한 행실을 바라보고 너희들이 얼마나 착한 사람인지 감동을 받게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착한 행동으로 감동을 주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기독교인이 아니고도 기독교인보다 착한 사람들이 많이 있고 또 기독교를 믿지 않고 다른 종교를 믿는대도 욕심에 사로잡힌 예수 믿는 사람들보다는 훨씬 이웃을 사랑하고 헌신적인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더 헌신적으로 더 철저히 더 착한 행동을 해서 그 사람들보다도 더 찬란하게 빛나라는 뜻입니까? 세상 사람들과 누가 더 도덕적인지 경쟁하라고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반짝반짝할 때 너희들은 번쩍번쩍 하라고 예수님이 우리를 지금 경쟁시키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착한 행동으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서 우리가 정말 착한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어쩜 저렇게 이웃을 위해서 철저하게 헌신할 수 있을까? 저 사람은 참 대단한 사람이다.’ 그것을 보게 하라고 착한 행실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전등을 비추어서 그 사람의 눈에다가 들이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도덕의 실천은 그 자체가 영혼의 생명을 대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보고 이 세상의 빛이 되라고 하실 때에 정말 마음속에 의도하셨던 것은 우리가 비취는 그 빛을 보고 우리의 착한 행실에 감동을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착한 행실은 어둠속에서 살던 그 사람들에게 진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규범이 되어서 예전에 그런 진리의 빛을 못 받았더라면 결코 그렇게 살지 않았을 그런 삶을 살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이러한 사실에 대한 증거를 성경의 한 이야기에서 제시하고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실 때 양쪽에 두 강도가 함께 매달렸습니다. 복음서를 종합해보면 시기적으로 맨 처음에는 두 강도가 함께 예수님을 욕했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그 중의 한 강도는 여전히 예수님을 욕하고 있었지만 한 강도는 회심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히려 함께 욕하던 자신의 동료를 꾸짖으며 예수가 죄 없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변증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그리고 내세가 있다는 것과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과 죄에 대해서는 내세에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까지도 믿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십자가에서 강도에게 장시간 동안 조직신학을 가르쳤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위엄 있는 모습으로 설교하고 계신 모습이 아니라 십자가에 매달려 자신들보다 더 비참한 모습으로 죄인으로서 십자가에서 흉악하게 매달려 죽어가고 계시는 중이었습니다. 존경할만하고 흠모할만한 어떤 것도 죽어가는 그분의 모습 속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이 한편 회심한 강도는 무엇을 보고 그렇게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 예수님이 옳으신 분이시라는 사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그 어떤 한편 강도를 위한 봉사나 한편 강도를 위해서 물질을 주거나 그런 것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인정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죽어 가시는 그분, 십자가에서 죽어 가시면서도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죄인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뵈옵고 일체의 평정을 잃지 않고 그 끔찍한 고난 속에서도 기도와 성경구절을 외우는 간구로써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시는 광경을 지켜보았습니다. 물론 하늘에서 징조도 있었습니다. 날이 캄캄해지고 태양이 빛을 잃은 흑암이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이 사람은 예수님이 지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데 그분은 옳지 않은 일을 했을 리가 없는 분이고 하나님은 그분 가장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느끼면서 인생의 규범이 되는 진리에 대한 태도가 바뀌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비추어진 그 빛의 효과라고 하는 것입니다.
진리로 비친 그 빛이 사물을 판단하게 만들어주고 진리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어떤 착한 행실들을 우연적이고 단속적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한쪽으로 계속 올바른 일을 해나갈 때 불신자들은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런 확신에 찬 삶이 부럽기도 한 것입니다. 가치판단의 기준과 상벌이 있음을 보여주고 그렇게 철저하게 착한 삶을 살며 자신들처럼 방탕하지 않은 도덕 생활 속에서도 많은 재물을 허비하지 않고 그리고 이 세상의 부에 탐닉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누리는 즐거움들을 배제하면서 사는데도 그들이 자신들에게는 없는 행복을 느끼며 살고 있다고 생각될 때 말할 수 없는 평안, 내적인 평안과 기쁨, 확신과 관용, 이런 것들을 깊이 느끼게 될 때 그때에 사람들은 진리의 빛을 통해서 자신을 보게 되고 또 자신이 이제껏 바라보았던 사물에 대한 관점이 옳은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진리의 빛은 착한 행실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신자의 모습을 보면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가 지극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실제적인 착한 삶의 행실들을 통해 자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그분이 계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착한 행실로 그 빛을 비춘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단순한 이 세상 사람들이 착하게 살아가니까 다투듯이 우리도 한번 흉내를 내서 그 사람들을 능가해야겠다는 무슨 달리기 경주하는 것 같은 착한 행실의 다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하지 않은 사람은 착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이 착한 행실은 진리라는 기준이 있고 그 진리가 바로 도입니다. 거기에 자신의 마음과 행실을 끊임없이 부합하도록 맞추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나의 욕심은 이탈하는 것이 편합니다. 그러나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이 그 진리에 부합하는 삶을 살려고 애를 쓰고 마음이 그 진리에 붙어있는지를 확인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지 않다고 할라치면 회개하고 뉘우치면서 그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도덕이고 그것이 바로 진리에 부합하는 진실한 마음과 행동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분명한 진리의 기준 때문에 그가 도덕적인 생활을 하고 그 도덕적인 생활의 열매가 착한 행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진리인 도가 있고 그 다음에 그 도에 합치하게 살려고 하는 한 사람의 덕스러운 의지가 있고 그 후에 착한 행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멀리서 그렇게 먼 예를 들지도 맙시다. 여러분들은 지금 혼자 앉는 개인의자를 우리교회에서는 채택해서 쓰고 있습니다. 제가 옛날에 전도사 생활을 할 때에는 이런 의자를 쓰는 교회가 전혀 없었고 대부분 4사람이나 5사람이나 혹은 10사람이 앉는 긴 장의자를 사용했습니다. 전도사로 있을 때 담임목사님이 저를 참 좋아하신 이유가 하나 있었는데 줄을 잘 맞춘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줄을 맞추는 것이 마음에 안찼는데 내가 줄을 맞추면 목사님 마음에 꼭 들었던 모양입니다. 어떻게 하느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냥 툭툭 밀면서 줄을 맞추는데 저는 앞에 있는 의자에 압정을 꽂고 실을 묶어서 저 끝까지 가지고 갑니다. 그리고 맨 뒤에 있는 의자에 압정을 꽂고 고정을 합니다. 그 일은 귀찮은 것 같은데 그 일을 해놓으면 그 다음에는 정확하게 줄이 생깁니다. 그러면 그 줄을 따라서 의자를 툭툭 치거나 잡아당기면서 끝을 맞추면 칼로 두부를 잘라놓은 것처럼 정확하게 맞는 것입니다. 멀리서 제가 의자를 밀고 당기는 툭툭 치는 모습을 보는 사람들 눈에는 낚싯줄 같은 그 실이 보일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렇게 맞추는 것을 계속해서 보면 툭툭 쳤다가 너무 갔으면 잡아당기고 하는 나의 작업하는 광경을 보면서 그는 분명히 아, 저기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저기에는 분명히 저 사람이 줄을 띄어놓고 그 다음에 의자를 움직이고 있는 것을 알지 않겠습니까? 준비하지 않은 비유인데 아주 적합합니다. 이정도입니다. 정확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착한 행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가끔 보면 착한 행동을 하기는 하는데 변덕스러워서 왠지 나에게 잘해주면 불안하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분파들입니다. 그것은 왜 그렇습니까? 일관성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느 때 자기가 기분이 좋을 때는 확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인데 기분이 상했습니다. 그러면 배 째라는 식으로 나자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진리 자체가 그 사람에게 없기 때문에 기분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행실을 착한 행실이라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날 개척교회에 있을 때인데 어떤 교인이 목사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목사님 어제 어떤 사람이 와서 교회에 오천 원을 놓고 갔는데 (그 당시에는 굉장히 큰돈이었습니다.) 그것을 헌금으로 올릴까요?’ ‘누가 교회에 오천 원을 놓고 갔느냐?’ 그러니까 몇 명이 모여서 기도하는데 웬 술 취한 사람이 오더니 문을 두드리더랍니다. 기겁을 해서 문을 열었더니 술을 먹고 ‘너희들 뭐하냐?’ 그러더랍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여기는 기도하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해? 하나님께 기도한단 말이지?’ 그러면서 지갑을 꺼내더니 ‘야 기분이다. 야, 이것 너희 뭐 사먹어라’ 그러면서 돈을 휙 주고 가더랍니다. 그러니까 목사님이 뭐라고 그러시느냐하면 ‘술주정뱅이가 와서 선심이라고 던지고 간 돈을 하나님이 받으시겠느냐? 너희들 빵 사먹어라.’ 그런 것들을 우리들이 가리켜서 착한 행실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절대 감동받지 마십시오. 그것을 받고나서 나중에 대가를 치룹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일관성이 있게 진리에 끊임없이 부합하기 위해서 행하는 것이 선한 행실입니다.
또 하나 좋은 예화가 생각났습니다. 직장에서 입사동기였는데 방황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들어주고 성경 공부하는데 인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많이 받고 결국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신학대학원을 갔습니다. 그렇게 가난한데 그 교회의 웬 집사님이 등록금을 대주겠다고 그러더랍니다.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사람이 참 좋은 대신 오지랖이 조금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친구가 또 신학교를 간 것입니다. 그리고 등록금 때문에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같으면 ‘열심히 기도해보자’ 그러면서 기도나 해주었을 텐데 얘는 ‘그래? 너 등록금 없어? 너 잠깐 기다려봐.’ 그러면서 자기 등록금을 도와준 집사님을 보자고 그랬습니다. 그리고는 ‘얘 좀 도와주세요.’ 그런 것입니다. 이분이 화가 났습니다. 그때의 그 돈도 작은 돈이 아니었는데 ‘아니 형제! 내가 형제를 도와주는 것도 허리가 휘는데 누구를 전도해 와서 또 도와주라고 그러느냐?’ 아주 굉장히 기분 나쁘게 더 이상은 못한다고 그러면서 갔습니다. 그러니까 ‘아이 안 되나 보다. 다른데서 구해보자.’ 그러면서 고민을 하고 있는데 그 다음날 아침 일찍 전화가 왔더랍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갔는데 밤새도록 잠이 안 오더랍니다. ‘물론 네가 그 학생을 도와주는 것은 좋지만 아직도 돈이 남지 않았느냐? 다른 사람보다는 그래도 네가 여유가 있지 않느냐?’ 끊임없이 밤새도록 괴로움으로 싸우다가 새벽에 ‘하나님 제가 주님께 순종하겠습니다.’ 그리고 전화해서 ‘그 학생도 내가 도와주겠습니다.’ 그랬답니다. 그것이 착한 행실입니다. 그것입니다. 동의가 안 됩니까? 그것이 착한 행실입니다. 누구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도와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착한 행실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세계가 아닌 불신앙의 세계에서는 착한 사람이 이웃에게 잘해주는 사람이 착한 사람이지만 기독교신앙 안에서 착한 사람은 회개 잘하는 사람이 착한 사람입니다. 회개를 잘하면 하나님이 항상 그러지 말라고 그러십니다. 아니면 ‘해라.’ 그러십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데 하지 말라고 그러시고, 자기는 안하고 싶은데 하라고 그러십니다. 거기에서 나오는 도덕적인 행실 그것이 바로 착한 행실입니다. 그러니까 어제 그렇게 뿔을 내고 간 그 사람이 ‘제가 어제는 미안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도우라고 그러시더군요.’ 그럴 때 사람들은 무엇을 보게 되는 것입니까? 그 사람이 참 착한 사람이라고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셨구나!’ 그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선행으로 진리의 빛을 비추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도와줄 때는 항상 튕기다가 도와주라는 뜻이 아닙니다.
IV. 결론: 비취게 한대로 살아감
그래서 착한 행실을 통해 그 빛을 비추어 줄 때 사람들이 이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그를 움직이고 있는 삶의 기준, 그가 일치하고 싶어 하는 이 살아가는 삶의 규범, 이런 것들을 보여주어서 그것이 있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정말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가! 하는 것을 느끼면서 깨닫도록 만들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착한 행실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5.세상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녹취자 : 김세나
I. 본문 해설
오늘은 이제 세상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 행실들을, 복수로 나옵니다. 너희의 선한 행실들을 보고, 그랬습니다.
II. ‘너희 선한 행실들을 보고’
A. ‘보고’(ἴδωσιν): 보다 + 알다.
1. ‘보다’; 문자적 의미 뿐 아니라, 상징적으로 여러 번 사용
‘보고’ 라는 단어가 이도싱이라는 단어인데, 이게 무슨 단어냐 하면 ‘보다’라는 뜻도 있고 ‘알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보다’라는 말이 문자적인 의미로도 쓰이지만, 오히려 상징적인 의미로 자주 사용됩니다. 그래서, 야, 여기 있던 돈 어디 있어? 저기 있네, 저기 보이네. 그런 의미에서 보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눈으로 그 물건이 형체와 모양을 가지고 특정한 공간에 있다는 것입니다.
2. 마음으로 봄: 사물의 배후를 통찰함
그런데 무엇입니까. 너가 오늘 나에게 왜 이렇게 아부를 하는지 너 마음이 보인다. 돈 꿔달라는 거지? 이때에 본다라고 하는 것은 돈이나 꽃이나 물병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는 볼 수 없지만 앞뒤에 일어난 일들을 보면서 저 사람이 마음의 무슨 의도를 가지고 움직이는지를 직관적으로 바라보아서 파악을 했다는 뜻입니다. 움직이는 사물들의 배후에 있는 의미를 통찰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들, 그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 어떠한 신념이 너희들로 하여금 그렇게 살게 하는지 어떠한 기준이 있어서 너희들이 이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되도록 그렇게 착하게 살게 하는지 그것을 보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보인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리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고 싶은 사람들 눈에는 우리의 착한 행실들을 그들이 볼 때에 그 이면에 있는 우리를 그렇게 살도록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게 살도록 움직이고 있는 이 기준, 이 힘, 그리고 이 법칙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그것을 통찰로서 볼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B. 도덕적 행동의 특성
1. 개별적 실천들을 통해 배후를 알게 함
여기에서 도덕적인 행동의 특성을 보게 됩니다. 개별적인 실천들을 통해서 그 사람 속에 있는 마음, 경향, 정신, 의도, 이런 것들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예화) 고등학교 다닐 때, 동경제대를 나오신 분인데 우리 학교에서 수학 선생님을 하신 분이 있었습니다. 굉장히 잘 안 풀리셨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 당시 그 분이 잘 안 풀린 줄 알았습니다. 60세쯤은 되 보이셨는데 동경제대를 나오셨는데 그 당시 조선 사람으로서 공부할 수 있는 최고의 공부를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학교 선생님 밖에 안 되셨으니까 별로 그렇게 출세하신 것은 아니셨습니다. 선생님이라는 직업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항상 학생들을 올바르게 가르치고자 하는 의욕이 있으셨고 그래서 많이 학생들을 때리셨지만 학생들이, 많이 때리셨습니다. 아주 많이 때리시고 그리고 항상 큰 몽둥이로 힘차게 때리신 후에는 항상 우리보고 너희를 때리느라고 이렇게 힘이 드니까 다음에 올 때는 닭을 한 마리 사오라고 아무도 사 준 사람 없지만, 항상 그러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하루는 중간고사인가 기말고사 볼 때였습니다. 모두 시험지를 나눠주고 문제를 풀고 감독으로 들어오셔서 그 다음에 ‘그만, 끝났습니다. 모두 손을 얹으세요.’ 그러더니 ‘맨 앞에 있는 학생들 모두 일어나세요. 시험지를 거두십시오.’ 그랬습니다. 그래서 주루룩 시험지를 거뒀습니다. 다 거둬서 앞 테이블에 가져다 놓고 갑니다. 나는 혹시나 해서 시험지를 거둬서 머릿수를 세어 보니까 열 몇 명이었습니다. 시험지를 넘기면서 그 숫자와 시험지 숫자가 맞는지 세었습니다. 그러다가 선생님이 뒤에서 물끄러미 보시더니 제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군은 참 사람이 되었군요. 사람은 그렇게 틀림없어야 합니다. 군은 이 다음에 훌륭한 사람이 될거야.’ 그런 칭찬을 얻으려는 의도는 없었는데, 다른 애들은 시험지를 걷어서 시험지를 접어 추리지도 않고 툭 하고 가져다 두니까 선생님이 두들기면서 이것을 정리를 하시는데, 한 학생이 가지런히 시험지를 거둬서 시험지 매수와 사람들 머릿수를 세어보고 챙겨서 가져다주니까 그 선생님 눈에는 그 당시에는 일제 시대 각진 교육을 잘 받았을 때였습니다. 요즘에는 창의력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요즘에는 입사 원서 쓸 때에 개근했다고 쓰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 떨어진다고 합니다. 얼마나 융통성이 없고 창의력이 없으면 개근을 했을까. 그것도 상이라는데 그것을 써 놓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다른 상도 없고 그 상 하나 있다고 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냥 와서 개기면서 정년하려고 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쓰지 말라고 합니다. 그 당시에는 안 그랬습니다. 개근 하면 최고의 상처럼 하고 12년 개근했다고 하면 그냥 회사에서 그 사실 만으로도 성실하구나 생각하고 써 주던 시대였습니다. 그런 시대에 그 분의 눈으로 보니까 정말 틀림없는 학생이구나 하면서 어깨를 두드려 주셨습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행동이라고 하는 것은 쭉 해서 시험지를 거둬서 헤아리는 행동을 보면서 무엇인가 정확하게 하려하고 맞추려 하고 하는 그것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정을 심방하고 방문을 하게 되면 이 집이 어떤 집인가, 물론 그 집에 언제 간다고 통보하면 안 되고 불시에 가야 합니다. 불시에 딱 갔는데 빨래와 지저분한 것이 너저분하게 있으면 주인 아주머니분께서 살림에 별론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분이 밖에서 돈을 벌고 하는 일에 관심이 있는 것이지, 살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살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항상 반짝반짝 하고 모든 것이 깨끗합니다. 정돈이 잘 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깥으로 드러난 어떤 물건들의 상태나 사람들이 행한 행동 하나하나 개별적인 것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 배후에 무엇이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쉽게 파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덕스러운 성품을 가진 사람인지 아니면 그 사람이 얼마나 신통치 않은 사람인지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제가 어느 책을 읽으면서 참 기이한 기록을 보았습니다. 때는 18세기입니다. 18세기 중엽쯤 되었을 때, 교회에서 세례를 줄 때에는 교회의 일꾼들을 세례 받으려는 사람 동네에 보내서 몇 집을 방문하면서 이 사람이 좀 괜찮더냐고 물어보고 세례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사람이 이상하게 이사갈 때 전기세를 흐지부지 하고 간다든지 아니면 물세를 흐지부지 하고 간다든지, 암튼 무엇인가 망가뜨리고 말없이 간다든지, 이웃집 구멍가게 잔돈 푼돈 남겨놓고 간다든지, 아니면 아예 큰 돈을 빌려서 그냥 간다든지 이런 사람들은 결국엔 반복되는 행동을 통해서 무엇을 보여줍니까. 정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행동 하나하나는 그 사람이 어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인지, 또 그 사람이 어떤 성품을 가진 사람인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뿐만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신봉하는 가치 체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화) 언젠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점심을 먹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주 싸구려 스테이크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 분들은 거기로 안 데려가겠다고 하는 것을 고집을 써서 한번 싼 음식을 먹어 보고 싶다고 하면서 들어갔습니다. 6명이 앉아서 각기 이것저것 스테이크를 시켰습니다. 그리고 2/3쯤 먹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제가 시킨 것 같지 않았습니다. 이런 것을 원하지 않았는데, 웨이터를 불러서 그림을 보여 주면서 내가 이것을 시켰는데 이게 지금 2/3쯤 먹었는데 이게 아닌 것 같다고 하니까 다시 가서 점표를 가지고 와서 보더니 아주 정중하게 사과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시킨 대로 나오긴 나왔는데 접시를 내 것를 저 사람 것과 바꿔 놓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아니, 다 가져다 드렸는데요.’ 하고 끝났을 텐데 정중하게 머리 숙여서 인사하면서 정말 죄송하다고, 이 접시가 선생님에게로 오고 선생님 접시가 저 사람한테 가야 하는데, 선생님 것을 저 사람이 먹는 바람에 그랬으니까 즉시 다시 구워 올 테니까 기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서 스테이크를 구워 왔는데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자르기 전에 잘못 왔다고 했어야 했는데, 2/3쯤 먹고 이야기 하니까 그것을 가져오면서 탁 마음에 드는 게 무엇이냐 하면, 이게 사람들 속에 있는 책임이라고 하는 것이구나. 책임. 올바르게 가져왔지만 마지막에 접시를 시킨 사람에게 제 자리에 가져다 놓는 것도 자신의 책임이었다는 것입니다. 한국 같았으면, ‘가져다 줬는데, 바꿔 드셨네요.’ 아니면, ‘잘못 놨는데 바꿔 드시지 그냥 드셨어요?’ 그랬을 것입니다. 절대로 다시 가져다 주었을 리 없습니다. 그런 것들 하나하나가 그 사람이 신봉하는 가치 체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 사물들과의 관계로써 영적 실재를 알게 함
이렇게 사물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개별적인 하나하나의 행실들 그것들이 모두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계획에 매달려 일관성 있게 계속 그것을 따라 가려고 할 그 때에 확연하게 우리가 누구인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가치의 절대적인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것들이 아주 확연하게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저는 오늘도 교회 마당에서 있으면서 거의 10년 전에 이 허허벌판에 다 부서진 몇 십년된 공장을 수리해서 이사 왔던 때를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참 감사했습니다. 얼마나 후진 공장이었는지 공장을 다 정리하고 그리고 천막을 걷고 그리고 이 건물을 담보로 대출을 할 수 있는지 은행에 가서 물어보니까 1500만원 대출을 해준다고 했습니다. 그럴 정도로 아무 값어치가 없는 건물이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수리를 하였습니다. 제가 무슨 건축을 알겠습니까. 배우면서 이것을 홀로 진두지휘 하면서 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내버려 뒀더니 일 하는 사람이 중구난방으로 일을 하는데 이랬다가는 큰 시험에 들것 같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새벽기도에 아예 군화를 신고 와서 한 시간 기도하고 그 다음에는 지휘봉을 들고 안전 모자를 쓰고 진두지휘를 했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건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한 사건입니다. 여기 옆에 보는 아래 하단을 나무로 쭉 붙이는 것입니다. 봤는데 정말 잘못 붙였습니다. 엉터리같이 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해 놨는데 이렇게 하면 되겠지 하면서 자기네들이 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왜 이렇게 했냐고 심히 나무랐습니다. 그 사람들이 보는데 큰 빠루로 이미 만들어 놓은 것을 푹 뜯어 버렸습니다. 한번 보여줬습니다. 이것을 당신들이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하라는 대로 하지 않았다. 어떻게 이 비싼 자제를 사다가 시간 낭비하고 인력 낭비하고 이렇게 하냐, 나는 이런 것을 못 본다 하면서 뜯어 버렸습니다. 그 다음서부터는 이 사람들이 나를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뭘 생각했냐 하면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들한테 이 일을 시킨 목사의 마음 속에 뭐든지 똑바로 원칙대로 해야된다 라고 하는 줄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더니 그랬답니다. 우리 이경호 장로님한테 목사님, 어떻게 건축에 대해서 잘 아시느냐고, 저 분이 뭐 하시던 분이냐고, 그래서 그 때 이경호 집사님이 현대건설에서 오래 계셨으니까 시키는 대로 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이 건물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개별적인 행동은 사람 그것이 옳고 진리에 부합할 경우에는 사람을 딱 굴복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언젠가 교회 물건을 삽니다. 물건을 사는데, 얼마 얼마 그럽니다. 우리는 세금 영수증, 세무서 발행한 것을 줘야 합니다. 그러니까 뭐 천 만 원 달라고 한 것을 당장 천 백만 원 달라고 한 것입니다. 천 백만 원 내지 천 백오십만 원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 너무 비쌉니다 그랬더니, ‘목사님, 아 그럴 필요 없습니다. 교회에서 영수증 없이 물건 받아 가시면 백만 원 쌉니다.’ ‘우리는 그렇게는 하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 직원이 그렇게 하면 자신이 문책을 받고 물어내야 합니다.’ 태도가 싹 바뀌는 것입니다. 워낙 심각하게 그렇게 하는 것은 탈세합니다 라고 딱 정의하니까 이야기도 못 꺼냅니다. 우리의 개별적인 하나하나의 행동은 그것이 도덕적인 것일 경우에는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일관된 우리를 움직이고 있는 규범을 보여줍니다. 그 규범을 보여줍니다. 그것을 보여주라고 우리보고 어떻게 하든지 너희들은 선한 행실들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라고 하는 것입니다.
C. 도덕은 우리의 종교의 참됨을 입증함
도덕은 우리의 종교가 참된 진리에 입각한 종교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 기독교 신앙을 위협하는 두 개의 세력이 있습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교만한 이성과 거만한 불신앙입니다.
1. 세상의 교만한 이성: 진리의 체계로 굴복시킴
교만한 이성은 그래서 이 세상의 이성보다도 더 믿을 만한 것이 없다고 교만하게 하면서 성경의 진리 같은 것은 아예 하찮은 것으로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학자들이 더 열심히 공부하고 그리고 성경의 진리를 통해서 이 세상의 이치를 더 지혜롭게 깨달아서 진리의 체계를 세우고 그리고 그들이 알지 못하는 더 깊은 학문과 논리를 통해서 진리의 세계를 세워 그들을 굴복시키는 것이 교만한 이성에 대한 훌륭한 대처 방법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제 여러분들의 자녀가 어렸을 때 회심하자마자 한 쪽으로는 성경, 한 쪽은 과학을 가르치라고 여러분들에게 설명 드렸습니다. 그런데 교만한 이성 말고도 또 하나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거만한 불신앙입니다.
2. 세상의 거만한 불신앙
불신앙은 뭐냐 하면 믿으려는 데 안 믿으려고 하는 것은 회의입니다. 불신앙은 고집입니다. 의지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회의는 아직 의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고 불신앙은 의지를 굳건히 해서 들어오는 모든,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성경이 진리라고 하는 증거들을 의도적으로 짓밟고 무시하면서 고집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꺾는 두 가지 방법을 성경이 제시합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너희가 안 믿겠다고 거부하면서 살아도 믿는 우리들이 있다는 것을 삶의 열매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삶의 열매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두움은 어두움만 있을 때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도 빛이 비치기 시작하면 어두움은 힘 없이 물러납니다. 그래서 성경은 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한다 그랬습니다. 어두움은 빛을 비춤으로 물러가지만 빛이 있는 그곳에는 어두움이 빛을 물러가게 할 수는 없습니다. 빛 자체를 제거하기 전 까지는. 진리는 제거되지 않는 것입니다.
또 하나가 뭐냐 하면 고린도후서 10장 4절에 의하면 성령과 복음의 능력으로 거만한 사람들을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강력한 성령의 역사와 복음의 큰 능력이 그 사람을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도덕은 우리의 종교의 참됨을 입증하는 한 방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선한 행실을 사람들에게 보여야 할 이유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경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합니다.
III.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함
A. 하늘에 계신 하나님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라고 말합니다. 먼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늘에 대해서 이런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 유대인의 ‘하늘’ 개념
세 개의 하늘로 이루어졌다. 첫 번째 하늘은 새들이 날아다니는 하늘입니다. 두 번째 하늘은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의 영적인 하늘입니다. 그 위에 가면 이제 이 모든 더러운 것들이 전혀 범접할 수 없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세 번째 하늘이 있었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모든 삼라만상,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사물들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더 나아가서 이 영적인 것들 까지도 초월해서 있는 하나님 홀로 보좌에 계신 그 하늘이 바로 여기에서 말하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입니다.
2. ‘하늘’에 계신 하나님
그래서 이 하늘은 장소적인 하늘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 이러한 장소, 저러한 장소에 뻗어 계신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고 하는 이 뜻이 땅은 하나님이 비워두시고 당신 자신이 외출하셨다는 의미가 전혀 아닙니다.
그래서 피조물과 하나님이 존재하심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계 안에 계시지만, 돌이나 흙, 물병이 있는 것과 같이 계신 것도 아니고, 우리의 영혼, 정신 것들이 있는 것처럼 계신 것도 아니고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모든 피조물을 품고 계시지만, 그러나 어느 피조물도 하나님을 간직하고 있는 피조물은 없고 피조물 매우 가까이 계시지만, 피조물 어디에도 안 계시고 피조물 아무 곳 그 속에도 하나님은 뻗어 계시지 않지만, 다른 어떠한 피조물보다도 가까이 계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모든 세계를 다스리고 통치하고, 이 모든 만물이 하나님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그러나 어디에서도 그 피조물은 하나님과 섞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러한 초월적인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멀리계신 하나님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과는 완전히 구별되시는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계신 것이 바로 그렇게 초월적인 성격으로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이 인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실 때 그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면서도 우리 가까이에 있는 어떠한 살을 맞대고 있는 어떤 사람들보다도 우리와 더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인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시고 나 자신보다도 하나님이 나 자신에 가까이 계시면서도 그 하나님은 전적인 타자이고, 완전한 타자이고 우리, 나를 초월하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위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보다도, 내 자아보다도 나에게 더 가까이 계신 그러한 특별한 존재이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뵈오면서 우리는 그 하나님이 내가 늘 느낄 수 있도록 가장 가까이, 나의 자아는 오히려 나로부터 먼 것 같은데 그 분은 나의 자아보다도 더 내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을 느끼면서도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주님께 부복하고 엎드리는 엄위로운 인정, 그분의 위엄 앞에 굴복하고 경배하고 그분 앞에 두려움으로 떨고 그분 앞에 티끌 같은 존재라고 하는 이 고백을 방해하지 않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너희는 땅에 있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느니라. 하나님은 이 땅에서 외출했고 너희는 아직 하늘나라에 못 갔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외출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 너 사이는 좁힐 수 없는 큰 격차가 있으니 그 분의 존재 앞에서 너는 티끌이고, 그분의 완전하심 앞에서 너는 소망이 없는 죄인일 뿐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B. ‘너희 아버지’이신 하나님
1. ‘너희의 그 아버지’(τὸν πατέρα ὑμϖν)
그런데 하나님이 너희의 아버지 시라고 예수님이 가르치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말합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너희의 그 아버지라고 말합니다. 너희는 복수인데, 아버지는 단수입니다. 많은 자녀들이 있는데 하나님은 그 모든 자녀들에게 아버지입니다. 이것은 가족관계에서 사용된 바테르라는 호칭입니다. 여기에는 많은 복음적인 그림들이 들어있습니다만, 간단하게 몇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극히 개인주의적인 정신이 시대를 움직이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태어나서 개인주의에 물들었기 때문에 개인주의의 안경을 쓰고 성경도 읽고, 복음도 읽고, 심지어 하나님도 그 안경으로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우리가 타락했고 죄 지었는데 우리가 회개하니까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고 사랑해 주신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의 회개는 개인적인 것일 수 있지만, 그렇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만물들을 창조하실 때에 놀라운 연결을 이루면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과학자들이 이 세계 자체가 거대한 어떤 지적인 설계도를 따라서 지어진 것이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먹는 과자 가운데 ABC로 그려진 과자가 있습니다. 가나다 라고 쓰여진 과자가 있습니다. 어느날 여러분들이 식탁에 갔는데 과자 봉지가 쓰러져 있고 그 과자가 기역, 니은이 있는데 그 글자를 딱 맞춰서 우리 열린교회 사랑해요가 써 있다면, 쥐가 와서 툭 쓰러뜨려서 써진 것입니까. 아니면 애들이 일부러 엄마 보라고 써 놓고 간 것입니까. 전자 입니까, 후자입니까. 후자입니다. 그것을 수천 년을 쏟아 부은들 그 글자가 나올 리가 있겠습니까. 그 과자가 다 부스러져서 가루가 되어서 쏟아도 안 나옵니다. 이 세계 모든 것들이 사람들에게는 우연적인 것처럼 보여도 이 모든 세계는 하나님이 놀랍게 질서롭게 이 모든 것을 만드셨습니다. 가을이면 단풍이 붉게 물들고 떨어집니다. 여러분, 가을이 따뜻하면 단풍이 늦게 옵니다. 추우면 나무가 나뭇잎을 빨리 떨어뜨립니다. 자기를 유지하기에도 힘든데 잎이 달려 있으면 그것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더 많은 양분을 빨아들여야 하는데 이미 땅은 차가워지기 시작합니다. 기후가 추워지기 시작합니다. 잎을 막 떨어 버리고 그리고 그 다음에 최소한의 수면 상태로 들어갑니다. 나무의 겨울나기입니다. 그러한 모든 작용들이 철저한 지적한 설계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라고 보여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도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아무런 관계가 없는 하나하나의 물건처럼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온 인류에 대한 창조의 계획이 있었고 그들을 영적으로 모두 연결하여서 서로 사랑하게 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와서 사람들이 그 관계를 깨뜨리고 가장 사랑해야 할 사람들의 관계가 가장 괴롭고 고통스러운 관계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에서 여러분들을 굉장히 힘들게 하는 또 다른 사람은 미국에 있는 사람이나 몇 년에 한 번씩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사람이나 아니면 몇 달에 한 번씩 수금하러 오는 사람들이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관계없는 사람이 여러분을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함께 사랑하며 살아야 할 사람이 여러분들의 가슴을 그렇게 고통스럽게 만들고 인생 사는 이 길에 있어서 쓴 물을 마시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이렇게 죄 때문에 쪼가리 쪼가리 찢어져서 미움과 시기 속에 살아가면서 악악 거리고 죽고 죽이는 이런 인간들을 참된 사랑의 질서로 회복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온 인류를 그러한 사랑으로 다시 하나로 묶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에 대하여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교회를 만드신 것입니다. 여러분, 겨울에 눈이 많이 왔을 때 눈사람을 만들 때 어떻게 합니까. 눈사람을 만들만큼 많이 긁어와서 가루처럼 잔뜩 쌓여 있는 그 눈을 가지고는 눈사람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제일 먼저 춥지만 두 손으로 장갑을 벗고 꽁꽁 눈을 눌러서 그래서 작은 공처럼 만듭니다. 그래서 그것을 놓고 발로 굴리면서 눈을 그 위에 묻힙니다. 그래서 그것이 꽤 크게 되면 언덕 아래로 굴리면서 내버려 두면 눈에 눈이 묻으면서 크게 되는 것입니다. 이 큰 눈이 세상이고, 작은 처음의 굴리는 눈 덩어리가 교회입니다. 교회에서 눈덩이처럼 만들어서 사람들을 사랑하게 하고 해서 그 눈을 굴려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믿고 영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져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서로 연결된 가운데 그 사랑이 확장되어 가다가 마지막에 하나님이 사람들 속에 있는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 버리고 완전한 사랑으로 온전한 인간이 되어서 그들이 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게 하신 것이 하나님이 교회를 세워놓으신 경륜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랑의 연결에 마지막 원천에는 하나님이 계신 것이 분명한 사실입니다. 바로 그렇게 하려고 인간을 만드시고 사랑하는 제자들을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던 것입니다. 재미있습니다.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도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도 하나님 아버지, 손자인 내가 믿었는데도 하나님 아버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보면 모두. 어느 청교도가 그랬습니다. 하나님께는 손자가 없다. 하나님께는 손자가 없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가 예수 믿었기 때문에 저절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면 그는 하나님의 손자이고 혹은 손녀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법은 없고, 각자 각자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어서 우리 할아버지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우리 엄마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나도 우리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는 족보가 이상하게 돌아가지만 그러나 영적으로는 그 족보가 가장 정상적인 족보입니다. 그래서 우리 할아버지도 내 형제이고 우리 아버지도 내 형제가 되는 그러한 신령한 족보가 생겨나게 됩니다.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 한 가족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 앞에 친 아들이 되는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2. 친아들이 되는 감격: 사생자가 아님(히 12:8)
그래서 히브리서 12장 9절은 우리가 사생자가 아니다. 우리를 친 아들로 삼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법적인 자격이 있는 후사들로 삼으셨기 때문에 에베소서 3장 6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들을 법적으로 자격이 있는 후사들로 삼으셨기 때문에 요한복음 1장 12절이 이야기 하는 것처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해 주셨기 때문에 친하들이 되는 감격이 있고 친아들과 사생자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유업을 받느냐 못 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의 친밀함. 그것입니다. 그래서 친 아들이 되는 깊은 감격을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사실을 명심하면서 그 분은 온 땅과 모든 만물위에 우리를 초월하시는 위대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고 또 한편으로는 그 분이 나의 친 아버지시라는 사실 때문에 예수님 앞에 감격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아버지는 우리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을 수도 있고 완전한 아버지가 아니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아버지들은 완전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전한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완전한 사랑의 아버지로서 우리를 옳은 길로 이끄시고 온 땅과 만물위에 초월하신 지극히 위대하신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그것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멀리있는 사람들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친밀히 다가가시는데 신앙을 통해서 다가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하나님을 영원한 아버지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우리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신 것입니다.
C. 영광을 돌림
지금은 윤리가 다 부서졌고 가족관계도 많이 훼손되고 깨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옛날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면 어떤 한 사람 앞에서 그의 아버지를 모욕하는 것은 그것은 그 사람과 원수를 맺기로 각오한 것입니다.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자신이 찾고 있는 검을 모욕하면 목숨을 걸었다고 합니다. 우리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모욕하는 사람 위에 목숨을 겁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우리의 친 아버지이신 그 분이 하늘에 계신 거룩한 신이시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 분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1. ‘영광을 돌리다’(δοξάσωσιν)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기를,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일에 이바지하는 일에 이바지 하며 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자신이 인정하고 또 많은 사람들이 진리에 합치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통해서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그 하나님이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나고 탁월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도록 만들어 주는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광을 돌리는 것은 이 세상의 크고 높은 지위나 많은 물질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보기에는 정말 착하고 위대한 일을 했는데도 하나님을 인정하게 해주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 돌린 행동이 아니고 비록 아직 작은 행실이었으나 그것을 보고 어떤 사람이 그를 움직이고 계신 하나님, 그의 가치관과 모든 정신세계를 붙들고 있는 절대적인 기준인 진리를 생각나게 해 주었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더 많이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나면, 완전히 새로운 가치관과 질서가 생겨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없었을 때에는 사람들이 보는 것 이외에서는 아무렇게나 살 수 있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치를 따라야 살 수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질서와 새로운 가치를 따라 사는 삶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나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모여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저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고, 이 시대의 정신에 붙들린 사람들이고, 불신자들이고 예수님의 제자들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그 사람들을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도록 이바지하며 살도록 만들어 주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위대한 삶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이나 자신의 전하는 진리의 도를 통해서 자신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을 사람들이 하나님을 정직하게 인정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2. 세상의 존재 목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
교회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도록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전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타락했고, 인간이 악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멀리 떠났으나 원래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본래의 이 세상이 지어진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 안에서 성경의 계시를 통해 하나님이 누구시고 인간이 누구이고 세계가 무엇이고, 인간이 마땅히 서야 할 자리가 어디이고 질서가 무엇이고 그래서 좌우로는 누구를 사랑하고, 아래로는 누구를 돌보고, 위로는 누구를 공경해야 할지 알게 된 사람들이 인생의 참된 도를 알고 그 인간의 사는 올바른 법도를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파함으로써 이 모든 세상이 변하여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교회를 먼저 세워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구원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몸에 접붙이셨으니 우리는 교회를 위해 있고 교회는 이 세상을 위하여 있고 이 세상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뿐만 아니라 이 세상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사실 안에서 우리의 소명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결국은 이 세상이 우리들이 많이 애쓰고 힘쓰고 노력해도 우리의 힘으로 이 세상을 모두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복음이 전파된 곳 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마다 이 세상의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헌신한 모든 사람들의 수고와 노력위에 하나님은 항상 축복하시고 항상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나는 아직 지극히 작은 것 밖에 한 것이 없는데 이 작은 것을 사용해서 완악한 죄인들을 회개하게 하시고 고집스러운 불신앙에 사로잡힌 죄인들의 마음을 꺾으시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도록 그의 의지에 역사하십니다. 어두움으로 이 세상의 정욕으로 어두워진 그들의 눈을 진리의 말씀으로 열어주시고 우리가 전하는 진리의 말, 증언은 어눌하기 짝이 없지만 성령께서 역사해 주심으로 그들의 어두운 지성을 밝혀 우리의 초라한 복음의 증거를 통해 저들의 마음속에 아주 훌륭한 열매를 맺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도 완전히 이 세상이 주님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마지막 날에 주님이 완성시키는 것입니다. 그 때까지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렇게 우리가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나신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의 영광과 위엄 앞에 우리가 얼마나 하찮고 티끌 같은 존재인 것을 깨달은 것처럼 그 분의 완전하심 앞에서 주님의 용서와 자비를 필요로 하는 철저한 죄인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을 의지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찾고 살 때에 그들이 지혜로운 삶을 살고, 궁극적으로 그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영광을 돌리는 삶 안에서 그들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거기에서 이 세상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나오고, 인간의 영혼에 대한 지극히 불쌍히 여기는 예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 속에 싹트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서 이 모든 세상을 완성하시는 날까지 당신을 사랑하는 자녀들로 하여금 그 때까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진실된 지를 보시기 위하여 이 땅에 있는 동안에 헌신되게 주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살도록 하나님이 그들에게 소명을 주시고 진리의 빛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열렬한 복음 전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는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어야 된다는 이 복음을 우리의 입술로 어눌한 입을 열어 이웃들에게 명백하게 확신에 찬 음성으로 전달하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진리가 무엇인지를 쓰는 본문입니다. 그리고 본문 밑에 해설을 다는데, 그 해설이 바로 우리의 윤리적인 삶입니다. 이것이 진리인데 진리가 무엇인가 하면 이렇게 살고, 이렇게 사는 사람들에게 이러이러한 기쁨과 행복이 있다는 사실을 주석처럼 보여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교회와 교회 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만물, 인간을 포함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인간들을 창조하신 목적이 바로 그 주권을 드러내시기 위함이었고, 인간은 이러한 목적에 부합하도록 하나님께 큰 능력을 받았습니다. 무한한 사랑을 하나님이 입혀 주셨지만 아직도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를 내신 하나님을 미워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진리의 빛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가 무엇인지를 맛보아 안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감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아름다움과 온 땅과 만물위에 높고 뛰어나신 주님의 흔적들이 여기저기에 묻어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들은 감탄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뻗힌 아름다운 무지개를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이렇게 아름다우니 이 아름다운 것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얼마나 아름다우실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탁월하고 높고 무한하신 사랑을 우리들이 알도록 만들어 줍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안 사람들에게는 진리가 그렇게 기쁘고 달콤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은혜 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감격할 때보다도 더 큰 즐거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까. 어느 분이 예수님을 만나고 복음을 발견하고 너무 기쁜 나머지 그러한 고백을 했습니다. 서울에서 제일 큰 빌딩을 주어도 이 기쁨과는 바꾸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너무 당연하지 않습니까.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모든 사람에게 진리가 그렇게 기쁘지 않을까.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기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말만하면 사람들이 진리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침에 찬란하게 비추는 빛은 만물을 정말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들어 줍니다. 단풍이 들어 곱게 물든 설악산도 구름이 잔뜩 끼고 비가 쏟아지는 날에는 그렇게 예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찬란한 햇빛이 내리 쬘 때 그 때 빨간색은 빨갛게, 노란색은 노랗게, 파란색은 파랗게 그렇게 색깔들이 각각 자기의 고유한 빛깔을 드러날 때에 정말 아름다운 단풍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의 눈이 건강할 때에는 빛이 찬란하게 비치는 것이 그렇게 아름다운 것들을 보게 만들기 때문에 고맙습니다. 그런데 눈에 안질이 걸리면 아침의 찬란한 햇빛은 고역이고 안대를 해서 빛을 가리워야지만 편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이 망가졌기 때문에 진리의 빛을 비춘다 치면 그렇게 괴로워하고 진리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왜 죽였습니다. 우리는 한번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물어 보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뭘 잘못하셨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무슨 피해를 보셨기에 예수님을 죽이셨나요?’ 그러면 그들이 과연 이런 피해를 봤다고 대답할 것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무엇인가를 훔치셨습니까. 누구 것을 빼앗아 잡수셨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쳤습니까. 왜 그렇게 싫어했겠습니까. 착해서 싫어한 것입니다. 착해서. 착하셨기 때문에 싫어한 것입니다. 왜, 예수의 그 착함이 진리를 찬란하게 빛나게 해 주고 있었기 때문에 눈에 안질이 걸린 사람들은 자지러질 듯이 괴로워서 빛이신 예수를 죽여 버린 것입니다. 죽여 버린 것입니다.
하나 더 해보겠습니다. 귀에 병이 생겼습니다. 평소에는 아름다운 음악, 따라라라라라 쾅쾅쾅, 울려 퍼지면 마음에서 정동이 일어납니다. 아, 위대한 감정이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고막이 너덜너덜 합니다. 쾅쾅쾅 찌릿찌릿하게 아파옵니다. 왜, 망가져서. 그 소리는 그 소리인데 고막이 찢어지고 귀가 망가지니까 아름답던 그 가락이 고막을 떨리게 하면서 귀를 쓰라리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또 있습니다. 많습니다. 맛있는 음식, 짭조름한 게장, 얼마나 맛있습니까. 그런데 입이 헐어서 너덜너덜 해진 사람에게 그 짭조름한 게장은 고문입니다. 그게 게장이 잘못됐습니까. 음식이 잘못됐습니까. 아름다운 음악이 잘못됐습니까. 찬란한 아침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그게 아닙니다. 자기가 망가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살갗을 보드랍게 만져줄 때 좋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확 긁혀서 어둠속에서 예쁘다고 만져줬는데 확 긁힌 상처 자국이었다면 자지러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길이 잘못되었습니까. 아픈데 만졌으니까 잘못했습니다. 손길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살갗이 망가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진리를 전할 때 어디가든지 환영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핍박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그게 참된 사랑입니다. 그래서 추루한 사랑은 진리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참된 사랑은 진리를 기뻐합니다. 진리를 좋아합니다. 진리와 함께 사랑하고 즐거워하고 기뻐합니다.
그래서 신자는 교회를 위해, 교회는 세상을 위해, 세상은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세상이 주님이 완성하시는 그날까지 어떻게 하든지 우리가 이 진리를 우리의 말과 삶으로 전달하고 찬란한 빛을 그들에게 비추어 어리석고 무지한 그들을 돌이켜 좋으신 하나님께로 돌아와 영적인 지혜와 빗속에서 살게 하는 것, 그 일을 잘하면 그가 이 세상 사람들에게 박수갈채를 받는 유능한 사람이 되지 않아도 그는 하나님을 훌륭하게 섬긴 사람, 우리의 직업, 지위, 하나님이 주신 좋은 성품, 우리가 지닌 물질, 건강, 시간, 언변, 말주변, 이 모든 것들은 바로 우리의 생명까지도 이 모든 것들은 바로 우리 시대의 이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우리의 삶으로 마음으로 전하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누리게 해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전할 뿐만 아니라 이 진리를 우리 시대에 전할 뿐만 아니라 다음시대에 진리가 궁핍할지도 모르는 어느 시대를 위해서 이 진리를 잘 가꾸어서 그래서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교육시켜서 그래서 그들이 어떠한 경우에도 진리의 빛이 없어 어두움 속에 살지 아니하도록 그렇게 해주는 소명을 위해서 하나님이 혹시나 이제나 저제나 진리를 위해서 살까 하고 추루한 인간들을 이제껏 사랑하시고 아직까지도 기대를 가지고 지켜보시는 것입니다.
IV. 결론: 세상의 빛으로 살아감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어디에 있든지 지금 어떤 영혼의 상태이든지, 어떻게 살든지, 여러분들은 영원히 이 세상의 빛입니다. 빛으로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