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세상의 빛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마5:14)
녹취자: 박지성
산상수훈의 도입 부분에 팔복이 나오고 팔복이 나온 다음에 유명한 빛과 소금의 비유가 나옵니다. “너희는 이 세상의 빛이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이 ‘빛’이라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성경 전체에서 진리 그리고 진리와 관계된 신자의 인격과 삶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씀 드려서 만약에 누군가가 심령이 가난하고 마음이 온유하고 애통하는 팔복의 사람이 된다면 그는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서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 빛은 정관사가 붙어서 ‘그 빛’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빛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빛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모든 하나님의 진리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수렴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진리를 듣고 구원을 받고 구원을 받은 후에 그 진리에 합치하며 살려고 애를 쓸 때에 우리는 완전하지 않지만 결국 우리의 삶의 모습이 어느 정도 이 진리를 드러내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사실 이 빛이라는 이야기는 신약성경에 처음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구약성경에 쭉 나오는 그 빛에 대한 이야기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억하시고 염두에 두시면서 빛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 나오는 그 빛은 진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고 이스라엘을 이방의 빛이라고 부른 이유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진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에서 나오는 율법에 귀를 기울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눈여겨 볼 때에 거기에 구원의 길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 빛을 우리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생각할 때 그리스도인 하나하나가 빛이고 빛나면 많은 사람들이 그 빛을 바라 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시편 119편에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내 길의 빛이요 내 발에 등이니이다.”라고 할 때 그 앞에 나오는 빛은 길 전체를 비추는 큰 빛을 의미하고 등불은 한 걸음 한걸음 밤중에 걸음을 떼어놓을 때에 헛디디지 않도록 비추는 그런 초롱불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빛은 자기를 바라보라고 비추는 것이 아니라 그 빛이 찬란하게 비춰서 빛이 없었더라면 보지 못했을 사물들을 보게 만들어 주고 빛이 없었더라면 알지 못했을 사실들을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빛의 효용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할 때 이 세상 사람들이 보게 하고 싶으셨던 것은 사실 우리가 아니라 우리에게서 비치는 빛을 통해서 이 세상의 이치와 만물들을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빛을 비추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볼 수 없었던 방식으로 새롭게 보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를 빛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화) 잠시 전 우리 목사님들과 함께 이 지역 얘기를 했는데 제가 바로 이 동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제 마음속에는 50년 전의 그림이 생생합니다. 고대 앞까지 도로 포장이 안 되어있는 비포장 도로였고 아침이면 노새가 씩씩거리면서 땔감이나 두부, 비지 이런 것들을 싣고 다녔습니다. 그때는 판잣집들이 가득하고 전부다 산이었습니다. 그런 시절이었는데 그때를 생각해보면 전기가 있기는 있었지만 수시로 불이 나갔습니다. 그러면 항상 촛불을 서랍에 넣어 뒀다가 초를 켭니다. 그러면 캄캄했던 방이 환해집니다. 그때 사람들은 촛불을 보는 것이 아니라 방을 봅니다. 여기에는 가구가 있고, 여기에는 오강이 있고, 이리가면 안 되고, 이렇게 사물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너희는 빛이다”의 뜻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강의할 주제와 관련지어서 이 문제를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이 빛이라는 것은 사상적으로는 진리를 가리키는 것이고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는 그 진리를 삶에 적용했을 때 나타나는 윤리적인 삶입니다. 기독교의 큰 힘이라는 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진리를 다른 데 없는 진리를 또렷하게 알고 있다는 사상의 힘과 그 진리를 따라서 힘차게 살아가는 윤리의 힘인데 이 두 가지를 이어주는 것이 은혜의 힘입니다.
그래서 올바로 알고 올바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야하고 그래서 교회는 아는 진리를 따라서 올바르게 살기위해서 희생과 고난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삶이 행복하고 대중들에게 박수와 갈채와 영광을 한꺼번에 받는 시대에는 아주 드뭅니다. 아는 것은 어느 한 순간에 알 수 있지만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은 실재적인 삶이고 고통을 받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고통을 이길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이 은혜라는 수단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진리를 설교하고 진리를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은 입술에 침만 바르면 할 수 있지만 그 진리를 따라 살기 위해서는 때로는 피를 흘려야합니다. 그리고 진리를 따라 오래 살기보다는 진리를 따라서 한 순간에 죽어야 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자기는 매일 죽노라고 이야기했던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날 이 문제와 관련해서보자면 우리의 조국교회가 비판을 많이 받고 있는데 나는 개신교회만 유독 부패했기 때문에 비판을 많이 받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한 시대에 모든 종교가 다 마찬가지인데 개신교는 유난히 많은 사람들에게 표적이 되어왔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학의 독특성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구원이 없다. 우리에게만 오직 구원의 참된 길이 있고 생명이 있다’는 이런 선포자체가 오늘과 같은 다원주의 시대에서는 아주 독단적인 복음화로 비치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서 천주교나 불교는 아주 유연합니다. 그래서 서로 잘 지내고 진리가 꼭 우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들에게도 있고 우리에게도 있어서 어느 길로 가든지 열심히 불교를 믿으면 열심히 천주를 믿은 사람과 진리의 꼭대기에서 만난다는 이런 생각을 가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용납하지 않으니까 독선적으로 비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동정적으로 말하자면 사실 불교든지 가톨릭이든지 모든 기관들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기 때문에 언론과 이 모든 매체들을 담당하는 통일적인 기구가 있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공을 들이고 상당히 힘을 씁니다. 영향력도 있고 협조도 잘 되어서 신문에서 가톨릭이나 불교를 심각하게 난도질하는 기사를 여러분들이 거의 못 읽었을 것입니다. 혹시 잘못된 일이 있어도 그냥 사실 보도로 끝납니다. 그런데 개신교에 대해서는 상당한 악의를 가지고 보도를 하고 도전을 합니다. 그래서 개신교가 사실은 더 많이 욕을 먹고 배척을 당합니다.
그런 것이 어느 정도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확실히 오늘날 교회는 이런 사회적인 윤리의 문제에 있어서 무딘 양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이점에 있어서 우리는 깊이 성찰하고 우리가 너무 값싼 복음을 전하고 윤리가 없는 복음을 전함으로써 결국은 우리들이 교회를 이렇게 이 세상에서 욕을 먹는 공동체로 만들지 않았는가 하는 것들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책임은 전적으로 지도자들에게 있습니다. 아주 더 정확하게 말하면 목사와 장로들에게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책임은 아주 작습니다.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문제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철없는 사람들이 마치 모든 윤리적인 삶이 모든 복음의 반대가 되는 것처럼 그렇게 제시를 해서 그 모든 것들은 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것과 같이 인간의 의는 넝마와 같고 쓰레기와 같아서 하나님 앞에 우리를 세우지 못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구원과 관련될 때에는 개차반으로 사는 인간이든지 하나님 없이 도를 닦으며 정결하게 살아서 구원을 얻어 보려고 몸부림치는 인간의 덕성이든지 모두 구원에 관한한 쓰레기입니다. 어떤 것으로도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에 관해서는 그렇지만 구원받은 이후의 삶에 있어서는 진실한 성도의 삶을 사는 사람과 막돼먹은 성도의 삶을 사는 사람 사이의 차이는 성자와 짐승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어서 하나님이 구원만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과 섞여서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일반적인 신인생활에 있어서의 공평과 정의 심지어 불신자들의 공평과 정의에 대해서도 밀접한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만약 그런 것에 관심이 없으셨다면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셔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말씀하신 중요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너희들이 그 땅에 들어가면 심지 않은 포도원을 차지하고 그리고 너희들이 거기에서 땅을 누리게 될 텐데 너희가 의로워서 그 땅을 얻었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들이 너무 악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심판을 원하셨고 그래서 이스라엘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심판하시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따라서 너희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것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도 영원히 잊지 말라고 주신 메시지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교회는 교인들을 교회에 모아서 늘리는 데에는 관심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인다운 사람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의지가 현저히 부족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봅시다. 자녀들이 많은 집이 다복한 집이라고 부르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자식들이 장성해서 사람이 많으면 그 집안에 위엄이 되고 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새끼의 수로 결정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낳았는데 술주정뱅이고, 게으름뱅이고, 마약쟁이고, 교도소를 들락거리고 온갖 비리와 범죄를 짓는 자식들이 일곱, 여덟 명이 있다고 그 집에 이것이 다복의 영광일 수 있겠습니까? 사람답게 길러야합니다. 그게 자식 농사 아닙니까?
이 세상에 오는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인해전술로 오는 나라가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모이고 어느 청교도가 이야기했듯이 교회는 사람들로 가득차고 하나님으로 가득하게 되면 그런 세상이 되면 너무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찰스 스윈녹이라는 청교도가 말하기를 ‘하나님은 소수가 예배하는 것보다 다수가 예배하는 것을 통해서 더 큰 영광을 받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소수와 다수가 똑같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그 공식이 성립되는 것이지 하나님을 향해 순수한 경견을 가지고 정직하게 살아가려는 소수의 예배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냐 아니면 그렇지 않은 막돼먹은 인간들의 다수의 예배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느냐고 할 때는 대답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한국교회의 문제는 정말 걱정이 됩니다.
지금 가장 절실한 문제는 관심사가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원래 이 기독교는 사람답게 잘 살기위해서 믿는 종교입니다. 구원을 받는 것은 지옥 안 떨어지려고 받아야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지 않고는 절대로 남은 인생을 사람답게 살 수 없기 때문에 받아야합니다. 구원받은 이후의 사람들이 진실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 분투하고 예수를 닮기 위해서 몸부림쳐야하는 이유는 복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매일매일 구원받았어도 매일매일 자신과 싸우고 진리의 밝은 빛 앞에서 자기를 비춰보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정과 욕심을 그리스도의 사랑 앞에서 포기하고 버리는 자기죽음의 끊임없는 치열한 싸움이 없이는 예수를 믿었어도 금방 부패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성경이 그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도 바울이 그래서 뭐라고 말합니까? 분명히 구원받은 사람인데 ‘선을 행하고자하는 마음은 내게 있지만 악이 가까이 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문에서 건져내겠느냐.’ 불신자 상태에서의 고백이 아니라 신자의 상태에서 부패가 자신의 마음에 엄습했을 때에 토해놓는 탄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했고 그렇게 선교와 목회의 위업을 이루고 신약성경의 절반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을 모두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나는 버림을 받을까봐 두려워한다.’고 말했습니다. 사도바울이 구원의 확신이 없었던 것입니까? 아닙니다.
보십시오. 이것이 진리라는 기준이 또렷이 있어야지만 ‘내가 이 진리에서 벗어나있구나!’ 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일주일동안 잘 모르고 살더라도 예배에 와서는 확실한 진리를 보고 ‘아! 진리의 기준이 어거였는데 나는 이탈했구나.’ 그때에 회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국교회의 심각한 문제는 회개가 사라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장로님들로서 설교청취자가 아닙니까? 언제 예배를 드리든지 간에 ‘아! 지금 하나님이 나에게 회개하라고 이 예배시간에 나에게 촉구하시는구나.’ 설교자인 목사님들은 ‘이 설교가 마지막이 되더라도 내가 이 백성들을 회개하게하지 않고는 안 되겠다.’ 그래서 정말 회개하라는 설교를 전심으로 외치거나 혹은 전심으로 들어본 적이 있는지 우리 모두 함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을 해봅시다.
40년 전부터 사라졌습니다. 주일학교 때 교회를 다니면 전도사님이든지 목사님이든지 간에 설교에 30%이상은 ‘회개하라’였습니다. 지금 그런 메시지들이 사라진 이유가 뭐냐면 진리가 기준점이 안 된 것입니다. 세속적인 종교인과 참된 그리스도인의 관점의 차이가 있습니다. 변화되지 못한 그리스도인은 예수 때문에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참된 그리스도인은 예수 때문에 거룩해지기를 원합니다. ‘거룩함이 없는 행복한 삶을 살겠느냐? 고난의 골짜기를 지나는 거룩한 삶을 살겠느냐?’고 물으면 후자라고 대답하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사고방식입니다. 그 이면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어느 날 교회가 ‘오늘부터 진리를 버립시다’라고 궐기대회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디에 영향을 받은 것입니까? 세상에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진리의 기준이 이 세상자체에 의해서 배척당하고 버림을 받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심각하게 진리의 기준들이 배척을 받는지 한번 생각해 볼까요? 우리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분명한 도덕의 원칙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뜻이라고 말했고, 불교인들은 그것이 내면의 부처의 뜻이라도 말했고, 도교를 믿는 사람은 그것이 자연의 섭리라고 말했고, 그리고 스토아 철학이나 이런 것들을 믿는 사람은 인간 본성이 그것을 말해준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경천애인’의 삶입니다. 누구든지 좋아하는 말이었습니다. 그 ‘천’이 누구고 ‘인’이 누군가는 종교와 철학에 따라 각기 달라도 규범이 뚜렷하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규범이 없습니다. 다 배척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됐습니까? 뭐가 나쁘냐? 친구들을 때리고 왕따를 시킨들 그것이 왜 나쁘냐? 그게 왜 그렇게 나쁘냐? 이렇게 진리의 기준 자체를 기각해버린 것입니다. 그게 이 시대의 정신입니다. 그게 어디 거기에만 그렇게 나타났습니까? 문학이나 예술, 영화, 음악, 수학, 건축, 조경, 모든 속에서 이런 절대적인 기준들을 다 허물어 버리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가정의 제도가 이렇게 허물어지는 것도 그 기준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한테 그런 얘기를 합니다. 자기는 이혼한 사람인데 결혼을 못한 노처녀보다는 이혼녀가 자랑스럽다고 생각한답니다. 예전에는 이혼 같은 것들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요즘은 부부는 살려 고하는데 부모들이 그런 인간하고 살 소망이 없다고 이혼해버리라고 시킵니다. 그뿐 아닙니다. 동성애 같은 것도 그래서 나오는 것이고 피터 징거라는 미국의 대학교수 한 사람은 ‘도대체 사람과 사람이 결혼해야하는 것이 도대체 누가 정한 원칙이냐. 사람과 소, 사람과 말도 얼마든지 결혼해서 부부가 될 수 있다’고 공공연하게 주장을 합니다.
이런 끔찍한 일들이 사회에서 광범위하게 번지고 있는데 우리 교인들은 교회에 와서는 교인인 것 같지만 사실 세상에 나가면 세상 사람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똑같이 섞여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이 세상이 무엇이라고 하든지 진리의 뚜렷한 선이 있고 그래서 그것들을 매번 모일 때마다 듣고 기도 속에서 그 진리를 새기고 그 진리 앞에서 자기를 비추어 빗나간 자신을 보며 회개하고 진리에 합치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이것이 진실한 삶입니다. 오늘날에는 진실하다는 말이 없습니다. 저희 초등학교 때만해도 설날이나 명절 때 어른들이 항상 세배 돈을 주고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진실한 사람이 되거라’ 혹은 ‘훌륭한 사람이 되거라. 혹은 정직한 사람이 되거라.’ 그렇게 해줬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바르거라. 온전하거라. 훌륭하거라. 사회에 이바지하거라. 정직하거라.’ 그런 것이 없습니다. ‘상대를 꺾고 승리하는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우리 딸애가 3년 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처음으로 졸업식 날 학교를 갔더니 급훈이 붙어있었습니다. 대개 교훈, 급훈은 ‘진실하자. 청결하자. 근면하자’인데 급훈이 뭐였는지 아십니까? ‘경쟁은 존재한다. 이겨서 살아남자.’ 이게 급훈입니다. 이렇게 진리의 기준들이 다 무너져 버렸고 이 세상에서 그런 기준들을 거부하기 때문에 교인들이 그런 사상에 젖은 채로 교회에 들어옵니다. 교회에 들어와서 세상과 똑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기독교를 생각하려고 합니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아주 분명한 진리의 선포가 필요하고 진리를 거부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이 진리를 깨닫고 체험하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부끄럽게도 한국교회에는 교회의 재정문제를 가지고 모본이 되어야할 교회들이 현저한 사고와 문제를 일으켜서 재판장까지 가곤합니다. 교회는 왜 그렇게 소송을 좋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쩜 그렇게 재판을 좋아하는지 뻑 하면 재판장으로 가서 원고와 피고로 만납니다. 그래서 그 많은 비리들을 하도 보니까 법원에 근무하는 사람치고 예수 믿는 사람이 별로 없답니다. 왜 그런 일들이 교회에서 일어나야합니까? 뭐 몇 십억이 없어졌느니 아니면 공금을 횡령했느니 이런 일들이 왜 교회에서 일어나는 것입니까?
그래서 저는 오늘 교회의 이런 물질의 정직함의 문제를 이야기해달라고 부탁을 받아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첫째는 진리를 알고 하나님을 올바로 믿으려는 신앙심이 있어야하고 두 번째는 그렇게 믿은 데로 살려는 몸부림이 있어야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올바르게 사는 것은 치열하게 몸부림쳐야하는 것이지만 더럽게 살고 부패하는 것은 노력할 필요가 없고 내버려두면 됩니다. 여름날에 음식을 상하게 하기 위해서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은 없습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그냥 상하는 것입니다. 상하지 않기 위해서는 끓여놓든지 소금에 절이든지 말리든지 냉동실에 넣든지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오늘 신문을 보니까 KNCC에서 교역자들과 목회자들이 세금을 내겠다는 발표를 했는데 저는 이것이 사실 너무 늦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작 그 일을 했어야했고 공평의 원칙에 의해서 이 일들이 진행되어야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몇 가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선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이 교회의 재정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저는 제정을 아끼자 말자 이 문제가 아니라 올바로 그리고 적법하게 운영을 해야지만 이 교회가 하나님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고 올바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분쟁 중 대부분이 교회의 돈 문제, 재정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아주 엄정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제일 먼저 이 문제를 다뤄야합니다.
(예화) 저는 열린교회를 개척하고 지금 18년이 됐는데 개척한 지하실 교회부터 여태까지 회개장부를 한 권도 버리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은퇴하는 날까지 영원히 버리지 않을 작정입니다. 그래서 장부가 너무 많은 것은 스캔을 떠서 매체로라도, 마이크로필름이라도 영원히 보관을 하자고 했습니다. 올바르게 하려고 애를 써왔지만 사실 심각한 결단을 느끼면서 이 문제를 다루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한 10년 전입니다. 무슨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저희 교회는 방배동의 건물지하에서 개척을 했다가 교인이 많아져서 남이 팔려고 내놓은 교회 건물에 사글세로 들어가게 됐습니다. 그렇게 200명이 이사 간 교회의 교인이 정확하게 3년 반 만에 1000명이 됐습니다. 이제 도저히 더 이상 그 건물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평촌으로 이사를 왔는데 그때는 가난해서 돈도 없었습니다. 교인들은 모여 있지만 이제 세워진지 얼마 안 된 교회라서 은혜는 받았어도 돈이 거의 없어 늘 쫓겼습니다. 그래서 교회 땅을 사러 갔습니다. 안 판다는 땅을 사정사정을 해서 간신히 1000평짜리를 구했습니다. 그 땅의 주인은 은퇴하신 장로님인데 그러면 좋다고 해서 그 땅을 사게 됐습니다. 그런데 사건이 하나 일어났습니다. 그 땅이 얼마냐고 했더니 36억이라는 것입니다. 360만원씩 1000평쯤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에 교회 통장에 1500만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재산은 월세 보증금 5억이 전부 다였습니다. 그래도 사자 그래서 우리 집사들을 보냈는데 이상한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36억에 해주는데 30억으로 계약서를 쓰자는 것입니다. 36억을 주는데 왜 30억으로 계약서를 쓰느냐고 했더니 6억은 비자금으로 달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했더니 세금 때문에 36억을 다 받으면 이 할아버지가 땅을 우리한테 넘겨주고도 1억을 보태야한답니다. 무슨 뜻이냐면 이 할아버지가 이 땅을 사실 가지고 있으면 계속 오르는 땅인데 회사를 청산하면서 우리에게 넘겨줄 때 대출받은 것하고 세금하고 다하면 우리한테 36억에 팔아도 세금을 내고 1억을 보태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할아버지는 교회가 불쌍해서 이 땅을 넘겨주는데 그냥 넘겨줄 수는 있지만 내 돈을 보태서 넘겨줄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잠깐 이틀정도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결심을 했습니다. 이것은 아니다. 그것은 안 된다. 그때에 부동산 전문가들에게 물어보니까 85%가 그렇게 이중계약서로 거래를 한다고 합니다. 요즘 장관도 올라와서 더블계약서 문제가 다 그런 일들입니다. 그래서 그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장부를 이중으로 쓰고 속여야하는데 그 땅에다 교회를 짓는다는 것은 신앙고백과는 다른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세금을 포함하면 얼마인지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39억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39억을 주겠다고 해라. 그래서 36억을 달라는 땅을 39억을 주고 샀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제 이 정직성 문제가 그렇게 사회적으로 간단한 문제가 아니구나했습니다. 지금은 제가 이렇게 가볍게 3억을 더 줬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때에 저희에게 3억은 지금의 30억보다도 훨씬 큰돈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 3억은 빚을 얻어서 준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이제 교회의 재정을 보면서 ‘아! 이것은 정말 그저 잘해야 되겠다는 정도로는 안 되겠구나’하면서 이 모든 것들을 합법적인 궤도에 제대로 올려놓고자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일 먼저 어떤 의지를 가져야하냐면 이 모든 것들을 현행법규에 맞게끔 교회재정을 운영한다는 원칙을 세워야합니다. 그 원칙을 세우는데 우선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합리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교회의 재정에 손을 대려고하는 의지를 버리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해서 장로님이나 목사님이나 인정에 이끌려서 교회에 돈을 합법적인 용도 이외에 그저 슬그머니 좀 비슷한 용도로 쓰려고 하는 그런 자세부터 버려야한다는 것입니다. 장로님들도 여기계신데 그런 장로님들이 목회자를 망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여러 교회를 봤는데 교회에서 너무 많이 주지 않는 한 목회자들에게 월급준 것은 문제 안 됩니다. 교회 건축한 것도 뇌물을 받지 않은 한 문제가 안 됩니다. 아무 문제없습니다. 문제가 뭐냐면 항상 영수증 없는 활동비가 문제가 됩니다. 그런 것을 교회에서 왜 만들어야하냐고 저는 묻습니다. 실재로는 어느 목사님은 저한테 자기가 영수증 없이 쓸 수 있는 돈이 한 달에 3,000만원이라고 자랑합니다. 그랬더니 어느 분은 10억이라고 그럽니다. 그게 교회가 평안할 때에는 다 은혜롭게 묻히지만 교회가 어렵게 되어 문제가 되면 그 돈을 어디다 썼느냐고 질문이 나오게 되고 영수증이 없으면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지 해명을 못하게 됩니다. 그것을 해명을 한다면 개인적으로 장부정리를 해 놓기 전에 해명이 되겠습니까?
(예화) 실재로 오래전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교회에서 2,000만원이 없어졌습니다. 목사님이 이 돈이 왜 없냐고 물었더니 재정부에서는 목사님이 가져가셨다며 어떻게 하셨냐고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선교지에 가서 선교사들 나눠주었지만 누구에게 주었는지는 잊어버렸답니다. 진짜 나눠줬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 목사님은 교회를 사임했습니다. 그런 일은 평안할 때 문제가 불거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문제가 있을 때에 불거집니다. 그렇게 하면 교회가 모두 동의를 합니까? 동의를 안 하는 사람이 있어서 교회가 쪼개졌습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왜 자기가 2,000만원을 호주머니에 넣어가지고 가서 마치 개인이 개인에게 선심을 쓰듯이 그렇게 돈을 줍니까? 필요하면 교회의 결제과정을 거쳐서 계좌에서 계좌로 이체를 해주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어느 목사님은 도서연구비를 6,000만원인가 8,000만원인가를 받았다는데 영수증 없는 돈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우선 지도자들이 또렷하게 목사님을 예우해드릴 것은 예우해 드리되 너무 많은 사례금을 책정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장로님들이 그렇게 하면 목사님들과 좋은 관계가 될지는 모르지만 사회적인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어느 정도 합리적인 선에서 되어야합니다. 어느 목사님은 한 달에 십일조를 900만원을 했답니다. 그런 사례금이 어떻게 교회에서 나올 수 있습니까? 교회가 크고 적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확고한 판단을 가지고 이 문제에 대해서 깨끗하게 해야겠다고 다짐해야 합니다. 이 모든 과정이 적나라하게 교인들에게 공개되어도 장로와 목사가 함께 의논을 해서 감추어야 될 만한 것은 없다.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정정당당하게 예산을 세우고 무엇인가 여기저기에다 쑤셔 넣어서 교인들이 보기에 잘 눈치를 못 채게끔 알박기해서 예산을 교인들이 동의할 수 없는 곳에 쓰는 것도 잘못하는 것입니다. 왜 정직하고 순수해야할 교회에서 그런 식으로 하느냐 말입니다. 그것은 안 됩니다. 재정처리를 정확하게 하고 이런 일들에 대해서 아주 분명한 원칙을 가져야합니다.
저희 교회는 정확한 재정처리를 위해 ‘영수증 없는 지출은 없다’라고 명칭을 정했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없다. 예를 들어 교회가 커지면 교인이 2만~3만 명 모이는 목회자는 와서 돈을 달라는 사람도 많고 도와달라는 사람도 많고 교역자들도 많고 수많은 사람들이 사회와 관련이 되어서 도울 사람도 챙겨야 할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면 그분의 활동비가 교인 한 30명 모이는 시골교회의 목회자보다 많아야한다는 것은 온 국민이 다 동의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것은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지출이 아주 투명하고 명백하게 집행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가 가지고 있는 원칙은 ‘영수증 없는 지출은 없다’입니다.
그 영수증이라는 것이 우스운 게 어디 가서 물건사고 영수증을 달라고 하면 백지 영수증을 뚝 떼어 줍니다. 거기에 직원들이나 교역자들이 그려서 냅니다. 그것은 영수증이 아닙니다. 세법상으로 그런 영수증은 인정이 안 되고 30,000원까지만 인정이 되는데 거기에도 영업허가가 있는 가게의 명판이 찍히고 그 가게 소유주인 납세자의 빨간 도장이 찍혀야지만 영수증으로 인정이 됩니다. 우리교회는 그 원칙을 지킵니다. 30,000원까지는 그런 영수증을 받습니다. 그러나 명판이 없고 도장이 없고 납세번호가 없는 영수증은 처음부터 인정을 안 합니다. 그런데 만약 물건을 사거나 지출을 했는데 영수증을 잊어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본인이 그냥 물어내야합니다.
(예화) 그렇게 정확하게 하고 세금을 내야하는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교회에 방송장비가 들어왔습니다. 3,000만원이라고 합니다. 방송장비는 고가라 3,000만원은 요즘 아무것도 아닙니다. 몇 억씩 하기도 합니다. 방송장비를 사러가서 얼마냐고 물어보니까 3,000만원이랍니다. 그래서 3,000만원을 줬더니 영수증을 주지 않습니다. 영수증을 달라고 했더니 문방구에서 주는 그런 영수증을 주는 것입니다. 아니면 거래명세서를 줍니다. 아니 우리는 이런 것 말고 세무서에서 인정해주는 영수증이 필요하다고 했더니 3,000만원이라고 불렀던 값이 3,400만원으로 올라갑니다. 최소한 3,400만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부가세를 내야하기 때문이랍니다. 영수증을 내면 그 영수증은 자동적으로 세무서에 신고가 됩니다. 이럴 경우에 목회자들은 갈등을 느끼게 됩니다. 교회는 영업단체가 아니기 때문에 감사 나오는 세무서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론적으로 3,000만 원짜리를 3,000만원에 주고 사면됩니다. 돈 주고 돈 받았다고 기록해놓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교인들에게 떳떳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사실은 법률에 안 맞습니다. 더 정확하게 법적인 용어를 가지고 이야기하면 부가가치세탈세를 공모한 중범이 되는 것입니다. 부가가치세는 법적으로 최종 소비자가 내게 되어있습니다. 이 납세의 의무는 물건을 판 사람에게 있지만 부가가치세를 내는 것은 최종소비자가 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둘이 협의를 해서 탈세를 한 것이 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것이 계산이 안 되면 이 판매자는 종합소득세를 탈루하는 것이 됩니다. 3%쯤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3,000만 원짜리 영수증을 달라고 하면 3,400만원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사는 물건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저희 교회의 예산이 80억입니다. 그중의 상당수는 금융으로 오가고 월급으로 나가고 하지만 상당수는 물건을 사든지 용역을 살 것입니다. 엄청 갈등을 느끼게 됩니다. 사실 저희 교회는 이것을 완벽하게 실행한지 현재에 한 5년 정도 되었습니다. 제가 마지막까지 그렇게 갈등을 했습니다. ‘이 돈이면 선교사를 수십 명 파송할 수 있는 돈인데…. 투명하게 해야 하는가?’ 그러나 최종적인 결론은 그렇게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이 세상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칼같이 세워야합니다.
또 하나는 교역자들의 납세문제입니다. 세법상으로 교역자와 성직자는 근로자가 아닙니다. 교역자는 세금을 내지 말라고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분류할 때에 근로자로 분류가 되지 않기 때문에 안냅니다. 그러나 이것을 잘 보십시오. 법의 해석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공정의 판단입니다. 저희 교회에 부목사님들이 있는데 연봉을 드립니다. 연봉을 드리는데 작은 교회의 담임목사님 만큼 드립니다. 아주 많지는 않지만 섭섭하지 않게 해드립니다. 그런데 세금을 안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경우가 생겼냐면 직업이 없는 무직자로 목사님인 남편의 이름이 등록되고 따라서 아이들은 영세민혜택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이 집도 그냥 들어가고 혜택이 많습니다. 어느 날 내가 그 현실을 보면서 내가 부목사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공의의 원칙에 합당하겠느냐?’ 당신은 연봉이 이만큼이나 되고 중산충의 삶을 살도록 교회에서 대우를 해주는데 영세민의 자녀가 되어서 너희의 자녀가 거저 그 어린이집에 들어갈 때 진짜 가난한 한 사람은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세금도 안내니 은행에서는 무직자로 여겨서 신용카드를 안 만들어 줍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평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러고 그 다음 몇 달 동안 검토를 해서 다 세무서에 신고를 하고 세금을 냈습니다. 30명의 교역자가 내는 세금이 7,000만 원 정도 됩니다. 그러니 어느 큰 교회에서 교역자가 170명이나 되는데 세금을 4,000만원 냈다는 것은 안냈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세금이 나옵니다. 그 중의 일부는 돌려 받기도하고 일부는 더 내기도 하지만 세금이 그 정도 나옵니다. 그랬더니 모든 혜택들이 다 사라졌습니다. 애들도 돈 다 내야하고 복음자리 아파트 들어가는 것도 이제는 아빠가 월급을 많이 받기 때문에 혜택이 안 된다며 막 끊어집니다. 그래서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그 괴로움을 받으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것은 은행에서 신용카드도 만들어 주고 대출도 해줍니다. 이제는 직장이 있고 퇴직금이 있고 연봉이 있으니까 대출도해주고 전세를 얻을 때 돈이 모자라면 5,000만원까지 4%로 대출해주는 혜택도 줍니다. 그러니까 당연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세금을 내고 정확하게 해야 합니다.
교회에 45평정도 되는 카페가 있는데 일 년에 매출이 한 3억 6,000만 원 정도 됩니다. 영업허가도 물론 냈습니다. 그리고 세금을 내는데 정확하게 1,000원짜리 커피를 먹으면 100원을 납세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헌금으로 쓰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서 수익자부담으로 하는데 세법상으로 완벽하게해서 세금을 납부합니다. 상당한 세금을 납부합니다. 교회가 그렇게 하니까 업자들이 태도가 달라집니다. 또 황당한 일을 당했는데 장비를 사주니까 우리 직원들에게 봉투를 들고 옵니다. 이게 뭐냐니까 5%라는 것입니다. 뭐가 5%냐 했더니 구입 가격의 5%로 1,000만 원짜리니까 50만원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리베이트입니다. 교회에서 이런 것 받는 게 아니라고 했더니 강남에 있는 무슨 교회, 무슨 동에 있는 무슨 신학대학 그 사람들하고 거래했는데 다 받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더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원 스트라이크 아웃입니다. 한번 받으면 그것으로 사직하기로 했습니다. 심지어 연말에 그동안에 우리하고 거래해줘서 고맙다고 상품권, 구두티켓을 가져오는 것도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왜 받습니까? 옳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그렇게 아주 분명한 태도를 보이니까 업자들이 교회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나는 너희들한테 마음으로 끌리는 것이 아니라 용역이면 용역, 물건이면 물건의 질로 승부를 해라. 그리고 너희보다 좋은 데 있으면 우리는 바꿔 탄다.’ 아무도 이익을 얻은 사람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털고 가면 됩니다. 그래서 태도가 달라집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물건을 사든지 공사를 했으면 돈을 빨리 줘야하는데 빨리 안 줍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너희 품삯이 소리를 지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빨리빨리 줘야합니다. 그 대신 정직하고 정확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예산을 세우는 부서, 사용하는 부서, 감사하는 부서를 완전히 독립시켜야합니다. 사람을 겹치게 하지 말고 완전히 독립시켜서 한 해 동안 쓸 예산을 짜고 집행하는 사람은 집행만 하는 것입니다. 그 대신 예산이 짜진 대로 집행을 안 하면 책임을 져야합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는 평신도들에게 과감하게 권한을 줍니다. 예산을 짤 때에 많은 토론을 해서 정확하게 짭니다. 9월부터 예산을 짜기 시작합니다. 예산이 딱 짜지면 1,000만원까지는 위원장 집사가 도장을 찍으면 지출이 됩니다. 본과장 장로는 3,000만원까지 지출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대신 예산에 안 짜진 것은 100만원만 쓸려고 해도 본당회를 해야 합니다. 본당회 당회원이 9명인데 당회원을 모집해서 그것 통과시키기가 쉽겠습니까?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산을 짤 때 정확하게 짜고 그리고 예산이 수립된 것은 과감하게 재량권을 줘서 쓰게 하자. 그 대신 예산에 없는 것은 못 한다.
그리고 두 달에 한 번씩 당회에서 감사를 합니다. 당회 가지고 부족하니까 당회 감사위원과 감사를 도울 수 있는 전문적인 인력 회계사나 아니면 세무사들을 동원하고 은행에 다니는 사람을 동원해서 세심하게 조사를 합니다. 그래서 누구도 그 재정을 허투루 지출할 수 없게끔 정확하게 지출됐는지 증빙처리절차를 보고 연말에 가서는 공인회계사가 감사를 합니다. 이것은 저희가 벌써 6년 됐습니다. 연초에 공인회계사법인하고 우리 교회의 재정 감사를 해주기로 용역계약을 맺습니다. 그래서 11월로 FI가 끝나면 12월 둘째 주경에 공인회계사 사무실에서 회계사 한 사람 세무사 두세 사람, 직원 한두 사람해서 한 4, 5명이 나와서 일주일 동안 감사를 합니다. 그래서 지출한 모든 것들을 놓고 사실 감사를 시작합니다. 그렇게 해서 감사의견서를 1월 첫째 주까지 회계 법인에서 받습니다. 그리고 회계 감사한 책임자가 영상이기는 하지만 공동의회에서 모든 교인들에게 직접 자기가 열린교회의 일 년치 회계를 감사한 감사소견을 발표하고 지적 사항까지 공개를 하고 거기에 법무법인의 도장이 찍힌 회계감사의견서를 정식으로 교회에 전달합니다. 여기에도 원칙이 있는데 그것은 공인회계사는 교회에도 있지만 교회에 있는 사람은 안 됩니다. 우리 교회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사람 중에서 회계 법인을 택하고 그 사람을 책임자로 합니다. 그래서 한 회계 법인에서 저희를 5년 동안 감사하고 이번에 새로운 회계 법인과 계약을 했는데 5년 동안 감사를 했던 이 사람은 사실 부인은 교회에 다니지만 본인은 교회에 잘 안다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교회가 그 일을 해달라고 하니까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라 마지못해서 맡았습니다. 그리고 5년을 감사를 했습니다. 5년 전 첫 해에 감사를 하고나서 소감을 얘기해보라고 했더니 ‘목사님, 저는 교회가 이렇게 깨끗한 데 인줄 몰랐습니다.’하면서 이정도면 중견 주식회사정도 수준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사람이 가이드해주는 대로 모두 수용을 하고 따랐습니다. 회계학을 전공한 사람을 회계책임자로 쓰라고 해서 회계학과 나온 사람을 채용했습니다. 복식부기를 하라고 해서 그 어려운 복식부기도 했습니다. 복식부기를 하는 교회가 거의 없습니다. 복식부기를 안하면 교회가 지출을 감출 수 있는 수많은 통로가 생겨나기에 복식부기를 했습니다.
복식부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예를 들면 교회의 빚이 10억이고 재산이 20억이라면 빚을 빼면 10억이 교회 재산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재산이 10억이라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건물 값, 목사님 차, 목사님 주택, 방송장비 기계 이런 것을 얘기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의 가격을 누가 정하냐는 것입니다. 보통은 대충정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예 그 공인회계사의 지도를 받아서 감정평가회사에다 용역계약을 해서 교회가 가지고 있는 재산 전체를 한 달 동안 법으로 정해진 가격으로 얼마인지 조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복식부기를 해서 일 년에 한 번씩 땅값 오르는 것은 상승시키고 건물 낡은 것은 감가삼각하고 내용연수 지난 것은 재산이 아예 없는 것으로 털어버리고 이렇게 해서 완전히 맞췄습니다. 그랬더니 5년을 감사를 한 이 사람이 드디어 교회를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저희 교회에 세 번이나 출석을 했고 마지막 끝날 때에 그 분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목사님, 정말 한국교회가 모두 이렇게 맑고 투명했으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 사람이 와서 인계를 받고 첫 번째 감사를 했는데 이 회계법인 사람은 뭐라고 얘기했냐면 자기가 교회는 처음으로 맡았는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무슨 충격을 받았느냐고 했더니 이것은 코스닥에 상장된 기업 중에서 우량 기업수준입이라며 코스닥에 상장된 기업에서 회계장부를 가져오는데 열개면 두개 정도의 회사는 감사를 하고 싶지 않은 정도랍니다. 그래서 치열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 그것이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욕심을 버리고 하려고 하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진리를 모르고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사람들도 정직하게 하는 일인데 교회가 그것을 왜 못하겠습니까? 지도자들이 결심을 하면 성도들은 그냥 따라옵니다. 3주 전에 저희 교회의 헌금이 2억이 나왔습니다. 아마 최근 한 3~4년 동안 나온 헌금 중에 가장 많이 나온 것입니다. 교회가 재정을 그렇게 투명하게 하면 교인들은 헌금을 많이 합니다. 거짓말 같지만 사실입니다. 교회가 이것을 투명하게 안하면 십일조를 들고 교인들이 방황을 합니다. ‘우리 교회는 돈도 많은데 다른 데 갖다 낼 데 없을까? 분명히 돈 줘봐야 헛된 곳에 쓸 텐데 가난한 교회에 보내면 안 될까?’ 이렇게 십일조를 들고 방황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교회의 책임입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하고 모든 것을 서류주의로 해야 합니다.
저는 가끔 외국에 출장을 갑니다. 그러면 만날 사람도 많고 다니는 데도 많으니까 택시도 타고 밥도 먹고, 호텔에서 잠도 자서 영수증을 끊는데 어떨 때는 이 영수증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 생활비에서 물어서 냅니다. 불문율입니다. 그러니까 내 돈으로 그냥 써야겠다는 때에는 영수증 안 쓰지만 이것은 너무 부담이 돼서 출장비를 챙겨야겠다면 차곡차곡 영수증을 챙겨서 봉투에 넣어가지고 와서 한 장 한 장 꺼내서 여기는 식당인데 누구랑 가서 밥을 먹었고 몇 명이 먹었다. 이 호텔에서는 잠을 잤는데 누구랑 같이 방 몇 개를 쓰고 잤다. 그리고 여기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간 유럽의 택시요금이다. 이렇게 정확하게 써서 가져다줍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돈은 썼는데 영수증이 없습니다. 가져갈 때 제 돈을 먼저 가져가서 제 돈을 먼저 썼는데 영수증은 2,000불인데 가져간 돈은 4,000불이었습니다. 그러면 2,000불은 그냥 자기가 물어내야합니다. 그러므로 깨끗하게 하려고 우리들이 마음을 먹으면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정직하게 재정을 운영하게 되면 교인들 모두에게 존경받는 교회의 당회가 되고 목회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주님의 교회고 주님의 교회의 성도들이 헌금을 한 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답게 일하도록 헌금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이 세상에서 세금 낸 돈을 다루는 것보다도 더 엄격하고 원칙에 맞게 운영을 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신입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허술하게 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깨끗하고 아주 정직해야합니다. 그래서 우리교회 목사님들이 설교하러 오면 설교 사례를 정확하게 50만원을 드립니다. 세금만 16,300얼마를 딱 뗍니다. 그리고 그 목사님이 우리교회에서 강사료 수입을 올리고 갔다는 것을 세무서에 통지해야 합니다. 그러면 원천징수 영수증을 끊어줍니다. 그러면 그 목사님도 나중에 소득세를 신고할 때 신고해야합니다. 외국인 강사는 세금 안 내지만 국내의 모든 강사들은 완벽하게 모두 세금을 냅니다.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렇게 하면 사람들도 저도 굉장히 기분이 좋습니다. 교회가 이렇게 50만원을 안 주고 100원짜리 1,000원 짜리까지 해서 동전 쩔렁거리는 봉투에 줄 때에 생각이 있는 강사들은 좋아합니다. ‘아! 이렇게 교회가 할 수도 있군요.’
그리고 절대로 교회 안에서 현찰이 오가는 일은 없습니다. 무조건 통장으로 오고가게 합니다. 돈을 받아서 현찰로 주는 것은 아주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이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계좌에서 계좌로 보내줍니다. 문방구를 사용한다면 문방구에 가서 터놓고 얘기합니다. 우리교회와 거래를 하자. 오늘 물건 가져가면 다음 주 주일에 결재해서 월요일에 통장에 넣어주겠다. 모두 통장들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냐면 기장을 하는 사람과 실제로 돈을 지출하는 사람이 완전히 달라야합니다. 그래서 서류를 가지고 다 기장을 합니다. 이 사람은 기장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장된 것을 가지고 결재를 받아서 넘기면 다른 사람이 이 사람이 모르는 비밀번호를 가지고 보낼 계좌에다 입력을 해서 쭉 몇 천 만원 혹은 일억씩 이렇게 입금표가 작성이 됩니다. 여기에서 센딩을 합니다. 입금을 탁 누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입금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게 비서실로 올라갑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작은 지출은 안보고 큰 지출이 부당한 것이 없는가를 확인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비서실에서 OK하고 탁 눌러야지만 돈이 통장으로 들어갑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돈을 얼마 지출해야 할 것인가는 이 사람만 알고 은행 통장과 비밀번호는 두 번째 사람만이 알고 두 번째 사람이 그것을 보냈어도 비서실에서 들어가도 좋다고 내가 딱 도장을 찍어주지 않으면 아무리 입금을 시키려 해도 거기서 그물처럼 걸려서 입금이 안 됩니다. 그렇게 제도를 정비한 이후로는 한 번도 사고가 안 났습니다.
최근에도 제가 아는 교회에 여직원 한 사람이 2,500만 원 정도를 가지고 도망갔습니다. 헌금을 내는 것을 움직이면서 봉투는 내버려두고 돈을 뺀 것입니다. 5만원 헌금한 사람이 2만원 헌금 넣은 것으로 되어있고 10만원 헌금한 사람이 3만원 한 것으로 되어있고. 그렇게 한 돈이 2,500만 원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 마지막의 비난의 화살은 도망간 자매에게 쏟아지는 것이 아니라 장로님과 목회자에게 쏟아집니다. 그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우리가 진리를 말하는 것은 쉽지만 진리에 부합하도록 사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예수를 위해서 피땀 흘려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깨끗하게 하는 것은 피땀 흘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기본적인 가치입니다. 윤리적이고 헌신적인 사람은 아름답지만 헌신하지 못해도 윤리적이기는 해야지 비윤리적이고 헌신해봐야 그 헌신이 값어치가 있겠습니까? 목사님이 저에게 한 시간을 꼭 해달라고 부탁하셨는데 한 시간이 거의 됐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우리 교회가 재정투명성 사례로 CBS에서 보도가 되었던 영상을 한번 보시고 기도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