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 소금으로 산다는 것
(2013년 설교모음)
그리스도인이 소금으로 산다는 것 1 (2013.10.21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그리스도인이 소금으로 산다는 것 2 (2013.10.22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그리스도인이 소금으로 산다는 것 3 (2013.10.23 가을말씀사경회저녁)
그리스도인이 소금으로 산다는 것 4 (2013.10.24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설교기간|2013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11월 5일
그리스도인이 소금으로 산다는 것 1
그리스도인이 소금으로 산다는 것 1 (2013.10.21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그리스도인이 소금으로 산다는 것 2 (2013.10.22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그리스도인이 소금으로 산다는 것 3 (2013.10.23 가을말씀사경회저녁)
그리스도인이 소금으로 산다는 것 4 (2013.10.24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그리스도인이 소금으로 산다는 것 5 (2013.10.25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목 차
1.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마5:13) 2013.10.21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1
2. 세상의 소금으로 부르심(마5:13) 2013.10.21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14
3. ‘그 소금’이신 예수 그리스도(마5:13) 2013.10.21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29
4. 세상에 맛을 내는 소금(마5:13) 2013.10.21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41
5.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마5:13) 2013.10.21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56
그리스도인이 소금으로 산다는 것 1
그리스도인이 소금으로 산다는 것 1 (2013.10.21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그리스도인이 소금으로 산다는 것 2 (2013.10.22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그리스도인이 소금으로 산다는 것 3 (2013.10.23 가을말씀사경회저녁)
그리스도인이 소금으로 산다는 것 4 (2013.10.24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그리스도인이 소금으로 산다는 것 5 (2013.10.25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그리스도인의 소금으로 산다는 것 2013.10.21(월) 첫째날 저녁
1.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I. 본문 해설
-본문의 맥락: 병자들을 고치심, 팔복: 하나님 나라 백성의 특징
-“소금과 빛”: 생존을 위한 필수품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요긴한 자임
II. 세상의 ‘소금’(ἅλάς)
A. ‘소금’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들
-방부제, 소독제, 조미료, 비료, 지혜의 상징, 언약, 도덕 등
B. 성경에 나타난 ‘소금’의 용례
1. 구약성경에서: חלמ
a. 거룩함: 제사와 관련하여(출 30:35)
b. 불변함: 언약과 관련하여(민 18:19)
c. 저주함: 심판과 관련하여(신 29:23)
2. 신약성경에서: ἅλάς
-짠 맛을 내는 물질
a. 부패를 방지함
b. 음식 맛을 냄
C. ‘그 소금’(τὸ ἅλάς)인 신자들
1. 소금의 본질
-식염; 염화나트륨
-천일염외에 염암, 함호, 염정에서 채취함
-굴착하거나, 물을 주입하여 녹인후 정제함
-체내의 삼투압 유지: 쓸개즙, 이자액, 장액 소화액 분비
-부족 시: 분비액 저하, 식욕 저하, 칼륨과의 조화 깨짐
-단기적으로 식욕 감퇴, 장기적으로 무력, 권태, 불안
2. ‘소금’이 가리키는 바
-구약의 용례에 익숙한 유대인들
-두 이미지(거룩함+언약의 불변성)에 새로운 개념이 추가됨
-부패를 방지함 + 음식의 맛을 냄: 본문에선 후자가 강조
-짜게 먹는 습관: 손님들에 대한 접대(아랍인: “소금 친구”)
-소금은 빛과 함께 생존의 필수품임을 강조
III. ‘소금’의 신학과 윤리
A. 신학적 의미
a. 소금이신 그리스도: 불의를 고치심, 세상에 맛을 내심
b. 맛을 내심: 율법에 대한 새 해석, 새 삶과 새 관계를 주심
c. 팔복: 하나님 나라 백성의 인격적 특성- 성육신 안에서 계시됨
d. 모든 하나님 성품을 그리스도를 통해 경험함
B. 윤리적 의미
a. 빛과 소금의 대조
-빛: 소극적(무지를 밝힘), 적극적(진리를 보임)
-소금: 소극적(부패를 방지함), 적극적(맛을 냄)
b. 적극적으로: 세상에 맛을 냄
-음식이 맛을 가짐으로써 즐겨 먹게 됨
-세상에서 사는 보람과 기쁨을 가져다 줌
-하나님 통치가 궁극적으로 행복함을 보여줌
IV. 결론
-빛보다 소금이 먼저 나옴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라
-세상 행복에 이바지하게 하는 은혜
그리스도인이 소금으로 산다는 것 2013.10.22(화) 둘째날 저녁
2.세상의 소금으로 부르심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I. 본문 해설
-소금: 부패의 방지와 맛을 냄
-하나님 통치의 실현을 위해 부르심
II. 세상의 소금으로 살게 하심
-“그 세상의 그 소금”(τὸ ἅλάς της γης)
A. 세상에 있는 소금
-세상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
B. 세상을 위한 소금
-신앙의 초월성과 역사성
-초월성은 역사성에 이바지하고
-역사성을 초월성을 갈망하게 함
-세상에 희망인 그리스도인
III. 세상은 소금을 필요로 함
-죄로 말미암은 부패성과 부조화 때문에
A. 세상의 부조화 때문에
1. 인간의 조화
-영혼과 육체의 조화: 타락으로 깨짐
-정신의 조화: 판단+기개+욕망
-본성과 은혜의 조화
2. 사회의 조화
-개인과 공동체의 조화: 타락으로 깨짐
-정치+군사+경제의 조화
-율법(본성+도덕)과 복음의 조화
-온전한 사랑의 질서로 돌아감
B. 짠맛으로 완성되는 조미(調味)
-미각의 다섯 가지: 쓴, 신, 짠, 단, 기.
-소금으로 인해 각 맛이 살아남
C. 맛을 내는 그리스도인
-죄로 인해 깨어진 질서를 회복함
-자연과 본성을 존중하는 humanism
-하나님이 즐겨 드실만한 음식 같은 세상
-도덕을 넘어서는 사랑과 헌신이 필요함
IV. 결론
그리스도인이 소금으로 산다는 것 2013.10.23(수) 셋째날 저녁
3.‘그 소금’이신 예수 그리스도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I. 본문 해설
-세상을 소금을 필요로 함
-소극적: 부패 방지, 적극적: 맛을 내기 위함
II. ‘그 소금’이신 그리스도
-빛과 소금 모두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해석해야 함
A. ‘너희는’
-일차적 청중: 병고침 받은 자들과 따르던 무리들
-이차적 청중: 교회와 모든 그리스도인들
-실제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소금처럼 살지는 않음
B. 팔복의 사람이 ‘세상의 소금’임
-“너희는 소금이라”는 선언 앞에 팔복이 나옴
-팔복은: 세상에 있는 천국 백성들의 인격적 특징
-팔복적 특징은 오랜 수양이 아닌, 영혼의 변화
-죄 때문에 부패하고, 맛을 잃은 세상에서 천국 통치 받은 표징
III. 온전한 팔복의 사람이신 그리스도
A. 성육신은 하나님 속성을 가시적으로 보여줌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을 드러내심
-반대되는 세상의 부패하고 맛 잃은 세상과 관계 맺음으로써
B. 지상생애를 통하여 팔복을 보여주심
-가난함: 부요한 세상에서, 애통함: 즐거워하는 세상에서
-온유함: 거친 세상에서, 의에 주림: 불의에 배부른 세상에서
-긍휼함: 무정한 세상에서, 청결함: 불결한 세상에서
-화평함: 다투는 세상에서, 핍박 받음: 불의를 따르는 세상에서
C. 팔복의 사람들로 세상의 맛을 더함
1. 맛의 절대적 기준이신 하나님
2. 인간들도 그 맛을 원하지는 않음
3. 예수 그리스도는 팔복의 인격으로 세상에 맛을 더하심
-율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 죄인들의 희망, 사랑으로 돌아감
4. 기독교만이 참 된 휴머니즘: 헤겔주의, 실존주의, 기독교.
III. 결론
그리스도인이 소금으로 산다는 것 2013.10.24(목) 넷째날 저녁
4.세상에 맛을 내는 소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I. 본문 해설
II. 신약에서 강조된 소금의 역할
A.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1. 좋은 것, 짜게 하는 것(눅 14:34)
2.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막 9:50)
B. 사도 바울의 가르침
-맛을 내는 것(골 4:8)
-말의 중요성이 은혜와 관련해 나타남
-은혜의 결과인 사랑: 교회에 대한 신적 계획을 이룸
III. 맛을 내는 소금
A. 음식을 맛을 고르게 함
-소금은 단지 짠맛을 낼뿐 아니라
-다른 네 가지 맛을 온전히 드러나게 함
-음식의 다른 요소들을 조정하고 일치시켜 조화를 이룸
B. 맛의 기준: 하나님과 사람
-사랑의 대상이 맛을 판단하는 주체가 됨
-절대적; 하나님, 상대적; 사람
1.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
-세상: 하나님으로부터, -의 것, 위하여, 향하여 존재함
2. 세상으로 향기로운 제사가 되게 함
-세상을 하나님의 선과 일치시키는 섬김
-단순히 세상에 만족을 주기 위함이 아님
-인간은 그러한 섬김 안에서 가장 행복함
IV. 영혼의 미각을 바꾸시는 하나님
IV. ‘소금이 되는 것’은 존재의 변화임
A. 중생과 거룩함
-중생과 회심을 통해 새로운 성향이 심겨짐
-하나님과 하나님이 세우신 것들을 사랑함
-참 된 신자는 행복보다 거룩함을 구함
-영광, 사랑, 진리, 죄에 대한 감각
-참 된 도덕의식과 도덕 의지가 심겨짐(사랑, 중생한 양심)
B. 중생과 회심을 통하여
-영혼의 변화가 미각의 변화를 가져옴
-변화된 영혼의 미각: 하나님에 대한 경험(“맛보아 알라”-시 34:8)
-미각적 경험의 총체성: 시각+청각+촉각의 결합과 정동
-성경 진리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정수: 정동을 통한 변화
-원래의 선한 상태로 돌아가게 하심
-모든 것을 짓밟지 않고 온전하게 하심
C. ‘참된 것’에 대한 미각
-하나님의 말씀, 신적 아름다움을 경험함
-자연과 학문 안에 있는 파편적 아름다움과 그 원천에 대한 감각
-진리에 대한 미각이 선한 욕구를 불러일으킴
D. 세상에서 맛을 내는 방식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함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통하여 그것들을 경험함
-자기 안에 이뤄진 하나님의 통치의 다양한 빛깔들
-그것들이 자기밖에 구현되기를 갈망함; 주기도문의 삶
-복음은 짓밟는 획일화가 아니라 이미 주신 선한 것을 온전케 함
V. 결 론
그리스도인이 소금으로 산다는 것 2013.10.25(금) 다섯째날 저녁
5.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마 5:13)
I. 본문 해설
II. 소금이 맛을 잃는다면
-소금을 맛을 잃을 수 있는가?
A. 당시 문맥에서 본 해석
-유대인들의 소금 생산에 관한 이야기
-사해바다, 혹은 남서쪽 4,000 ha 넓이를 가진 ‘소돔산’이 있음.
-‘소금기둥’이라고도 불리는 산에서 채취함
-암염은 염화나트륨외에 다른 혼합물질을 함유하고 있음
-소금기는 공기 중 수분을 흡수하여 잘 녹아버림-불순물만 남음
-소금광산의 내층에 비해 외층은 짠맛이 결핍되어 있음
-물에 녹여서 다시 정제하여 소금으로 만듦
B. “맛을 잃으면”의 해석
1. 이러한 이유로 맛을 잃는 것이 가능함
2. 맛 잃은 염석(鹽石)의 잔재물을 비료로 사용했다고 함.
3. “맛을 잃으면”(μωρανθη)-‘어리석게 되면’(롬1:22, 고전1:20)
-염석에 다시 염분을 주입할 수는 없음
-주후1세기 랍비: “짠맛 잃은 염석을 어떻게 다시 짠기운을 넣을까?”
“노새의 태반으로 짜게 하라”(노새=암말+당나귀;수컷과 대부분의 암컷
번식력 없음)
III.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소금은 맛을 잃을 수 없으나 염석은 가능함.
-신자가 윤리 상실하면 회복 불가하다는 말이 아님
-단지 짠맛 잃으면 염석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다는 의미임(밟힘)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짠맛을 유지하며 살 때 가치가 있음
IV. 짠맛의 가변성과 불변성
A. 짠맛의 불변성
-중생과 회심을 통해 심겨진 사랑의 성향은 도덕을 지향함
-도덕(道德): 도(道: 객관적인 기준)+ 덕(德: 주관적 힘)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 앞에 살고자 하는 의지는 파멸되지 않음
-비중생자: 단일의지, 중생자; 복합의지로 죄를 지음
-따라서 이것을 단지 밖으로 드러난 행위만으로 판단하면 안 됨
-이에 대한 훌륭한 증거가 바로 양심의 강한 압박과 회개임
-회개할 때, 생기는 선한 의지는 하나님의 도덕을 지향함
B. 짠 맛의 가변성
-역사적으로 교회의 도덕적 상태가 다름
1. 신자의 내적 요인
-거듭나도 부패할 수 있는 죄인의 남은 본성
-죄를 이기는 은혜의 정도가 서로 다름
2. 신자의 외적 요인
-사상적 무신론: 세상과 불신앙의 고집
-실천적 무신론: 교회와 불경건한 생활
V.결론: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그리스도인이 소금으로 산다는 것 1
그리스도인이 소금으로 산다는 것 1 (2013.10.21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그리스도인이 소금으로 산다는 것 2 (2013.10.22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그리스도인이 소금으로 산다는 것 3 (2013.10.23 가을말씀사경회저녁)
그리스도인이 소금으로 산다는 것 4 (2013.10.24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그리스도인이 소금으로 산다는 것 5 (2013.10.25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1.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녹취자: 백지영
I. 본문 해설
여러분은 저희들이 지난해에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은』이라는 시리즈로 사경회를 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마음속에 그 앞에 나오는 소금을 언제 꼭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이 짧은 한 절에서 어떻게 5일 동안 설교를 할 재료가 나올 수 있을까? 자신이 없어서 계속 미루어 두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번 가을 사경회 때 이 말씀을 전해야 되겠다는 강력한 소원이 생겼고, 그리고 여러분이 기도 많이 해 주셔서 말씀을 하나님께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금요일까지 저녁에 다섯 번 설교를 마태복음 5장 13절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이 말씀을 들으면서 깊이 은혜를 받고, 그리고 여러분이 이 세상에 소금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맥락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본 후에 이 말씀을 해설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는 산상수훈이라고 불리는 장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다름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이 어떤 사람들이며 또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은 어떤 태도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본문입니다.
이 말씀이 시작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 앉으시고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서 산에 같이 올라와 죽 둘러앉은 가운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입을 열어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읽은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팔복에 관한 이야기이고,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로부터 시작되는 팔복이 있고 난 후에, 소금과 빛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5장에서 예수님이 팔복을 말씀하신 것으로 시작되는 산상수훈을 들었던 최초의 청취자들은 누구였을까요? 바로 4장에서 예수님이 만난 사람들이었습니다. 4장에서는 예수님이 병을 고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많은 사람 - 귀신들린 자, 간질 하는 자, 중풍병자, 약한 자 - 이 많은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나아왔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갈릴리와 데가볼리, 예루살렘과 유대, 요단강 건너편에서까지 수많은 무리가 와서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고, 예수님은 이 무리들을 모두 모으셔서 산으로 인도하시고 거기 올라가 앉으셔서 이 사람들에게 산상수훈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학자들 중에는 5장부터 7장까지 이어지는 산상수훈이 예수님께서 한 번에 하신 설교라고 하는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의 설교하신 내용의 골자만 모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 설교는 아주 굉장히 긴 설교였을 것이고, 이때에 모든 무리들이 예수님의 설교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맨 처음에 이들은 설교를 들으려고 진리의 말씀을 알려고 예수님께 나온 것이 아니라 몸이 너무 아프고 괴로워서 병 좀 고쳐보려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었다면 예수님은 그저 병자를 고치는 의사 혹은 마술사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병 고침을 통해서 예수님을 알게 된 모든 사람들을 모아 예수님께서는 병 고침보다 더 중요한 그들의 영혼을 고치는 진리의 말씀을 들려주시기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예수를 믿게 된 이유가 다양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결국 그것은 모두 과정이었고, 궁극적으로는 이렇게 진리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여러분이 진정으로 예수 믿는 사람다운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일 먼저 팔복에 대한 설교가 있고 난 후에 첫 번째로 하신 말씀이 바로 소금과 빛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빛과 소금’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소금과 빛’, 소금에 대한 말씀이 먼저 나옵니다. 소금과 빛이라고 하는 것은 생존을 위한 당시의 필수품입니다. 그때만이 아니라 요즘도 이 소금과 빛은 생존을 위해서 필수적으로 있어야 하는 사물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소금과 빛을 말씀하시고 너희들이 바로 이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 반드시 요긴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II. 세상의 ‘소금’(ἅλάς)
A. ‘소금’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이 ‘소금’은 희랍어로 ‘할라스’(ἅλάς)라고 하는 단어인데, 여기서 가리키는 이 소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학자들 사이에 많은 해석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여러분이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이 소금은 “썩는 것을 방지하는 방부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살균을 하는 소독제의 역할로 여기에서 제시되고 있다.” 또는 “음식에 맛을 내는 수단으로서 제시되었는데 이것이 가장 합당한 해석이다.”, “여기에서 소금은 비료를 의미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이 소금은 곧 지혜를 상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 곧 언약을 상징하는 것이다.”, “도덕을 상징하는 것이다.” 등등 학자들마다 많은 이야기들을 쏟아놓고 있습니다.
B. 성경에 나타난 ‘소금’의 용례
1. 구약성경에서: חלמ
구약성경에서 ‘소금’이라는 단어는 ‘멜라흐’(חלמ) 인데, 이 소금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많이 쓰였습니다. 그 쓰여진 것을 전부 정리를 해 보면, 구약성경에서 이 소금이 세 가지 의미로 사용이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거룩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것에(제물)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출 30:35), 그 성결이 바로 거룩함입니다. 이것이 구약에서 소금이 상징하는 바이니, 이 소금은 거룩함을 의미하는 상징으로 사용이 된 것입니다.
둘째로, 변하지 않는 ‘불변성’을 가리키는 상징하는 것으로서 소금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소금 언약이니라”(민 18:19),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언약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소금언약’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소금이 의미하는 것은 불변성을 상징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이 소금이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되어서 사용될 때에는 ‘저주 한다’, ‘저주 받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 온 땅이 ... 소금이 되며”(신 29:23), 하나님이 심판한 그 땅이 소금의 땅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소금의 땅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알다시피 염기가 땅에 많이 있으면 아무 작물이 안 됩니다. 즉, 그 땅이 저주를 받아서 어떤 농산물도 생산해 낼 수 없는 불모의 땅이 된다는 의미로 이 소금이 사용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게 그 땅이 저주를 받게 된 것이, 결국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을 때에 인간의 죄와 땅의 저주가 한 몸이 된 것으로, 우리들이 이야기하는 소위 신토불이(身土不二)의 개념이 성경에도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타락했을 때 하나님이 땅도 저주하셨습니다. 땅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인간이 흙으로부터 지음을 받았고, 그래서 인간과 땅은 아주 밀접한 신토불이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구속이 모두 완성될 때 이 땅에 맺혔던 저주가 풀리면서 이 세상이 하나님의 저주로부터 벗어나서 본래의 아름다움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본다면 이 소금이라는 단어가 심판과 관련하여 저주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은 사실은 거룩함의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론을 맺자면, 구약성경에서 소금이라고 한 단어를 모두 확인해 본 결과, 거룩함과 불변성의 상징으로서 소금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전해져 내려왔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2. 신약성경에서: ἅλάς
그런데 신약성경에서는 와서는 이 ‘소금’이 ‘할라스’(ἅλάς)라는 말로 사용이 되는데, 거룩함과 불변함이라고 하는 구약의 개념 위에 하나가 더 추가가 됩니다. 그것은 그냥 음식의 맛을 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선입견 속에서, 방부제로서 이 썩어가는 세상에서 썩지 못하게 하는 그것이 바로 “너희는 소금이니”라고 부르신 것의 의미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 의미로 해석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모든 학자들이 그것은 우리가 적용할 수 있는 의미이고, 예수님께서 5장 13절에서 말씀하시려는 핵심적이고 가장 중요한 요지는, 썩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소금이 들어감으로 음식이 맛있어진다는 것을 말씀하고 싶은 것이 가장 첫 번째였다는 것입니다.
C. ‘그 소금’(τὸ ἅλάς)인 신자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결국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소금인 신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라고 하실 때 “너희는 세상의 그 빛이니”라고 하셨던 것처럼, 여기에도 정관사가 붙어서 ‘토 할라스’(τὸ ἅλάς)라고 말합니다. 곧 “너희는 세상의 그 소금이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 소금’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것을 해석할 때는 “너희는 세상의 그 빛이니”라는 말씀을 해석했던 것과 꼭 같은 생각을 이 소금에 적용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그 빛이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사람들이 생각하고 말하는 주장에도 소위 ‘일리’(一理)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어떤 때는 진리처럼 보이고 아주 지혜롭게 보이고 우리의 인생을 행복하게 할 놀라운 지식처럼 보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빛일 뿐이지, ‘그 빛’은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빛’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하셨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우리가 소금이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원래의 소금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영향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원래는 이 세상에서 소금이 아니었던 사람들이 어떤 변화가 일어나서 소금이 되었고, 그래서 예수님같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사셨을 때만큼 우리들이 그렇게 훌륭하게 살고 그렇게 훌륭하게 믿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와 유사한 그와 동질의 맛을 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비유를 한 번 해 보겠습니다. 넓은 평야가 있고 그 평야 저쪽 끝에서 태양이 환하게 떠오릅니다. 이쪽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이 모두 거울을 들고 지평선에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저쪽에서 햇빛이 비취입니다. 어떤 사람은 대문짝만한 거울을 들고 오고 어떤 사람은 창문만한 거울을, 어떤 사람은 손거울을, 혹은 티스푼만한 거울을 들고 그것을 비췄습니다. 커다란 대문짝만한 거울에는 큰 빛이 환하게 반사가 될 것이고 작은 거울에는 작게 반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빛의 크기는 각각 거울의 크기에 비례해서 달라지겠지만, 그 빛은 모두 하나의 태양에서 반사되는 것이므로 동일한 품질의 빛이 아니겠습니까?
이 소금을 해석함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큰 소금일 수 있고 혹은 작은 소금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변화되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의 모든 삶과 생활 속에는 그 소금의 맛이 동질의 것이 느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수십 가마를 쌓아놓은 소금도 소금이고 부뚜막에 티스푼 하나만큼 떨어뜨린 소금도 소금입니다. 수십 가마 쌓아놓은 소금은 짜지만, 티스푼 하나 떨어진 소금이라고 해서 짠맛이 아니라 다른 맛이 나올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크기와 양은 달라도 그 품질은 동일한 것이니, 소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1. 소금의 본질
그러면 도대체 여기서 이 소금이 무엇일까요? 우리들이 흔히 먹는 식염, 먹는 소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화학식으로는 염화나트륨입니다. 제가 알기로 이 소금은, 우리가 사용하는 천일염 외에 우리나라에서는 광산에서 캐는 소금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염전이 풍부하고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햇빛의 양이 많기 때문에, 바닷물을 퍼서 염전에다 놓으면 햇살이 굉장히 좋을 때는 일주일이면 된다고 합니다. 그 소금을 긁어모은 것이 천일염입니다. 그리고 대충 긁어낸 것은 거무스름한 소금으로 배추 절이고 할 때 쓰이고 가격도 쌉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점점 더 깨끗한 소금을 먹고 싶어 하니까 그것을 다시 정제해서 하얀 소금이 나오는 것입니다. 요즘은 소금에다가 허브도 넣고 마늘가루도 넣고 별 것을 다 집어넣어서 조그마한 소금 하나에 3000원씩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먹어보면 비싼 소금이 확실히 맛있기는 맛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천일염보다도 염암(鹽巖) 그래서 염석(鹽析)이라고 하는데, 광산에서 캐냅니다. 그리고 염정(鹽井)이라고 땅 아래에 소금광산이 있는데, 거기 물이 들어가서 우물처럼 된 것으로 그것은 엄청나게 짠 것입니다. 그것들을 퍼 올려서 정제하고, 그 다음에 바위처럼 캐낸 것들은 그것을 그냥 캐내기도 하지만 캐내기 어려울 경우에는 거기다가 물을 주입을 해서 광산 속에서 녹여버립니다. 녹여버려서 계속해서 물을 퍼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물이 바닷물 같은 것이 쏟아져 나올 것이 아닙니까? 그것을 다시 끓여서 정제를 해서 소금을 만드는 것이 그 당시의 통용되던 소금 채취 방식이었습니다.
이 소금은 안 먹으면 사람이 죽습니다. 설탕을 안 먹어도 살 수 있지만, 소금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소금의 가장 중요한 역할로는 체내의 삼투압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삼투압이라고 하는 것은 액체의 농도가 진한 것과 옅은 것이 있으면 진한 것은 옅은 것 사이에 서로 스며들어서 그것이 평균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러한 체내의 삼투압을 유지하는데 소금의 성분이 절대적입니다. 그리고 우리 몸에는 수많은 장기가 있어서 이것들이 각종 액을 내는데 체액을 분비합니다. 쓸개에서는 쓸개즙이 나오고 이자에서는 이자액이 나옵니다. 장에서도 장액이 나오고 소화액이 분비됩니다. 이것들을 제대로 나오도록 조절해 주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 소금입니다. 그래서 소금이 현저하게 부족하게 되면 분비액이 저하되고 식욕이 떨어지고 몸 안에 있는 칼륨과의 조화가 깨지게 되는 것입니다. 평균 권장량으로 하루에 12-15그람 정도를 먹어야 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까딱 잘못하면 그 양을 못 채우기가 쉽고, 우리나라같이 모든 식품에 소금을 많이 사용을 하는 사람들은 과다섭취해서 건강에 위협을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침에 직장에 일찍 나가서 컵라면 하나 하고 김밥 하나를 먹으면 그 날은 더 이상 소금기를 먹지 말아야 할 정도로 충분히 섭취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밥에다 짠 반찬을 먹으면서 또 짠 국과 옆엔 찌개까지 있고 그것도 소금 뿌린 김을 싸서 먹으니, 소금이 과다섭취가 되어 위험해 지는 것입니다. 유럽이나 미국을 여행해 보면 우리나라같이 소금에 대해서 예민한 사람들은 깜짝 놀랄 정도로 빵 위에다 일부러 소금을 잔뜩 뿌려서 먹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사람들은 우리처럼 김치, 짠지, 찌개, 장아찌, 된장, 고추장, 된장찌개, 고추장 볶음, 이런 식으로 반찬을 놓고 먹는 사람들이 아니고 아예 반찬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그래서 까딱 잘못하면 소금 섭취가 모자라게 되고 그래서 의식적으로 빵에다가 소금을 뿌려먹거나 심지어 빵을 먹으면서 소금을 손가락으로 집어서 먹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소금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 ‘소금’이 가리키는 바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유대인인 이 사람들이 어떤 생각으로 예수님의 이 소금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 있었을까요? 이것은 본문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이 사람들은 유대인들이기 때문에 소금에 대한 이야기를 기본적으로 이미 그 문화 속에서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이들의 문화는 성경이 기본이 된 문화입니다. 그렇기 때문에게 구약에 면면히 내려온 소금에 대한 압도적인 두 개념, 즉 거룩함 그리고 언약의 불변성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들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상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구약에서 소금에 대한 이야기들이 풍부하게 나오고 있고 그것들을 익숙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너희는 이 세상의 소금이니”라는 말씀을 소금에 대한 아무 생각이 없이 “너희는 세상의 꽃이니, 물이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면면히 내려오는 소금에 대한 생각을 말씀을 듣는 사람들도 이미 가지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도 아시면서 말씀하셨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 그렇구나. 우리보고 거룩하게 살라는 말씀이구나. 또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언약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구나.” 이 두 가지, 거룩함과 불변성이라고 하는 개념을 염두에 두면서 소금이니, 소금이니, 소금이니 하는 이 말씀을 예수님께로부터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거룩함과 언약의 불변성이라고 하는 두 이미지를 유대인들로서 모두 가지고 있는 그 위에 너무나 상식적이고 편안한 의미를 추가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음식의 맛을 내는 도구로서의 소금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중동에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소금은 그 당시에 흔하지 않고 귀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나라나 소금 없이는 살 수 없으므로 이 소금은 중요한 국가의 수입원이었습니다. 그래서 국가에서 직접 관장해서 파는, 옛날의 우리나라 담배같이 전매청에서 나온 담배만 써야지 몰래 외국에서 담배를 갖다가 핀다든지 하면 벌금도 물고 영창도 가고 구속도 되고 심지어는 그런 담배를 만드는 사람들은 커다란 죄로 처벌을 하는, 전매품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잘 모르시겠지만 이 소금이 돈이 되었기 때문에 일본사람들이 전매품으로 나라에서 통제하던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이 소금이 늘 부족했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할 수만 있으면 짜게 먹으려는 습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소금을 아껴 쓰다가도 귀한 친구가 오면 소금을 듬뿍 넣어주었다고 합니다. 우리 같은 경우에는 욕이겠지만, 지금도 아랍인들 사이에는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우리가 남이니? 너와 나 사이에는 소금이 있어.” 곧, “우리는 소금 친구다.” “우리 둘이는 보통 사이가 아닌 친구다.” 그런 뜻입니다 . “We have a salt between us.”, “너와 나 사이에는 소금이 있는 사이야.”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어법입니다. 그만큼 이 소금은 손님들에 대한 접대, 환대의 수단이었기 때문에 귀한 손님이 올수록 소금을 왕창 넣어서 짜게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곧, 이 소금이 빛과 함께 생존의 필수품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입니다.
III. ‘소금’의 신학과 윤리
A. 신학적 의미
그러면 이 소금이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신학과 그리고 윤리는 무엇이겠는가? 우선 신학적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너희는 이 세상의 그 소금이니”라는 말씀은 우리가 원래 소금이었던 사람이 아닌 것이, 마치 우리가 예수님 모르고 살아갈 때 원래 이 세상에서 결코 빛이 아니었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셔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을 삼으심으로써, 우리가 바로 소금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소금이 된 것은, 원래의 소금이신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그분의 성품을 본받음으로서 그분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감으로써, 예수님같이 완벽하고 예수님같이 무한한 의미에서 예수님처럼 불변하는 의미에서 소금은 아니지만, 우리들이 또한 그래도 예수님 닮은 그 소금이 될 수 있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악한 것들을 멸하시고 세상을 바로 잡아 불의를 고치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이 세상에 맛을 내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식으로 맛을 내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잘 알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석의 전적인 권한도 자신들에게 있고, 심지어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문들을 열고 닫을 수 있다고까지 생각을 했으며, 자신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고까지 생각을 했습니다. 이에 비해서 평범한 많은 죄인들을 자신들은 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에 절대로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그들을 죄인이라고 멸시해서 만나주지도 않고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친구가 되어주기는 더 더욱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이 율법 하나하나를 새롭게 해석해 주시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에게 핍박과 혹은 오해를 받으면서까지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그들도 믿음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고,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은 자신들의 의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결과, 하나님의 그 큰 은총, 구원의 은총에 대해서 완전히 소외되었기 때문에 세상을 살아갈 아무런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던 창기와 세리 그리고 많은 병든 자들과 비천한 사람들에게 삶의 소망을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이 비참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예수님이 그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의학도 발달되지 않고 돈이 없어서 의원의 도움도 구할 수 없는 사람들이 귀신 들리고 간질하고 중풍 병을 앓고 눈먼 맹인이 되고 문둥병에 걸렸을 때, 과연 그들에게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요? 여러분이 조금만 마음에 큰 고민이 있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어도 살고 싶지가 않은데, 이렇게 간질에 걸려 중풍에 들어 눈이 멀어서 문둥병에 걸려서 고통을 받는 이 사람들에게 이 세상은 살아갈 아무 맛이 없는 무미건조한 세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절망적인 그들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고쳐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우리 같은 인간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너희들이 그런 병이 걸렸으니 이제 너희들은 율법에 의하면 부정한 자다. 그러니 너희는 이스라엘 회중 가운데 오지 마라. 전염된다.” 이렇게 구박받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래서 문둥병 걸린 사람들을 하나하나 고쳐주시고,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해 주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셨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이 무미건조한 이 세상에 맛을 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세상을 느끼게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님 모르고 교만해서 자기가 이 온 우주의 중심인 줄 알고 자기 행복이 최고의 가치인 줄 알고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다 그것이 뜻대로 안 됩니다. 좌절하고 낙심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지고 몸도 마음도 병들게 됩니다. 그때 이 세상은 여러분에게 살만한 세상이었습니까? 살맛나는 감칠맛 나는 세상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그 고통 속에서 나 혼자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방황하고 있을 때 복음이 들렸습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큰 은혜를 받으면서 이 모든 불행과 고통이 나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눈물 흘리며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바로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피로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당신의 사랑의 품으로 안아주시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눈을 뜨고 보니까 세상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눈을 뜨고 나니까 세상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아무 희망이 없는 것 같은 세상에서 희망을 발견했고, 아무 의미가 없는 것 같은 나의 인생에서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고, 이제 내가 무엇을 위해서 일생을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순간 이 쓰레기 같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확 감격이 떠오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이 세상에 새로운 맛을 주신 것입니다. 밤새도록 해도 다 할 수 없지만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을 모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가까워올수록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성경은 마음과 뜻과 성품과 네 목숨을 다해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했는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이웃도 사랑하느니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를 제자들도 다 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도 잘 몰랐습니다. 그저 신앙이 있다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그렇게 사랑한 예수님이 죽은 것이 너무 슬퍼서 가슴 아파하고 울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믿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오셔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의미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커다란 감동이 일어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부활을 통해,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그들은 찬란한 햇빛처럼 느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고 나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유대인은 헬라인들을 보고, ‘저런 모세의 기적도 모르는 무식한 놈들 같으니.’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저들은 개 같은 이방인들이고, 이방인 중에 정말 경건한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의 발이나 씻길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헬라인들은, “너희들이 우리의 위대한 조상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아느냐? 인류의 모든 지혜가 그들에게서 나왔는데 너희들이 아느냐?” 믿는다고 열심을 내지만 철학적 지혜는 없는 무식한 것들이라고, 이것이 헬라인들이 유대인들을 보는 시각이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맞습니다. 극도로 지역감정이 충만한 두 사람이 만나서 도저히 대화도 안 되고 고양이처럼 싸우는, 그런 사람을 아주 극대화 시킨 것이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 십자가에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여 하나님 백성 만드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계획을 발견하고 나니까, 놀라운 깨달음이 밀려오면서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서로 끌어안고 나의 형제라고 부르는 사이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세상에 소금으로서 맛이 나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앞에 보면 팔복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핍박 받는 자가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참 복이 있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 자신의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바로 당신 자신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경험한 내면의 세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참 백성이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셨는데, 예수님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온전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의 인격적인 특징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서 계시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이 세상에 계실 때 심령이 가난한 자로 사셨습니다. 늘 애통하며 사셨습니다. 온유하게 사셨습니다.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사셨습니다. 긍휼히 여기면서 사셨고, 마음이 청결해서 언제나 하나님을 뵈옵고, 화평케 하면서 사셨고, 박해를 받으면서 사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너희는 이 세상의 그 소금이니”라고 말씀하시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금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한 사람들인데, 그 하나님의 성품을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을 통해서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그분을 온전히 사랑하고 그 은혜에 꽉 잡혀있을 때 똑같은 특징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해서 하나님만을 앙망하게 됩니다. 원수들을 향해 온유하고 친절한 마음을 가져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끼칩니다. 그리고 악한 세상을 보면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갈망하고 그것에 목마른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조차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되고, 내면의 세계는 일체의 더러운 욕심들을 버리며 청결한 자가 되어서 기도와 말씀 속에서 언제나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자기가 진리 편에 서 있어도 할 수만 있으면 불화를 일으키지 않고 사람들을 화평하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의를 위해서 기꺼이 박해를 받으면서도 그 의를 따라 살려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완전했고 우리는 비록 완전하지는 못할지라도, 그러나 동질의 것을 우리의 인격 속에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믿고 변화 받아 본 사람이면 누구나 다 부분적으로 경험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서 예수님 밖에 모르고 기도 없이는 살 수 없던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만 드리면 울음이 터져 나오고 눈물이 쏟아지던 때가 왜 없었습니까? 원수를 향해서도 모두 용서해 줄만한 아량을 가진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바로 이런 말씀인 것이니,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의 인격적인 특징은 이런 것이란다. 너희들이 이런 사람이 된다면 틀림없이 이 세상의 소금이니라.”
B. 윤리적 의미
그러면 이제 이 소금이 가지고 있는 윤리적인 의미를 마지막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13절에서부터 16절까지 빛과 소금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빛은 소극적으로는 어두움을 밝히므로 무지를 밝히는 것이고, 적극적으로는 “진리가 이것이다.” 라고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소금은 소극적으로는 부패를 방지하는 것이지만, 더 압도적인 의미는 적극적으로 맛을 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저 세상을 썩지 않게 하는 그것이 아니라, 소금을 쳐서 맛을 내는 것입니다.
소금은 음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세상에 아무리 좋은 재료로 만들어도 간이 딱 맞지 않으면 밍밍하고 토할 것 같습니다. 또 아무리 고급 재료로 만들어도 소금을 너무 많이 넣어서 소태가 되어버리면 먹을 수가 없습니다.
(예화) 학교에 교수로 있을 때 교수들이 자주 내려가는 밥집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흔치 않았는데 돌솥에다 밥을 해서 반찬 몇 가지하고 나오는 영양밥입니다. 참 좋아했습니다. 그 집에서 매일 내 오는 반찬 중에서 제일 인기 있는 반찬이 돼지고기 장조림이었습니다. 돼지고기 엉덩이 살로 장조림을 해서 그것을 다 찢어놓아 줍니다. 돌솥밥을 비벼서 먹고 나중에 물 말아서 장조림과 함께 먹으면 얼마나 맛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것 좀 더 주세요. 더 주세요.” 하니까 고기가 너무 많이 들어가는 것이지요. 어느 날은 평소 생각하고 먹었는데 소금덩어리인 것입니다. 고기가 워낙 많이 들어가니까 소금을 왕창 넣고 진한 간장에다가 조려서 장조림이 아니라 장장아치 고기를 만들어서 조금씩밖에 못 먹게 한 것입니다. 그것 먹는 맛으로 언덕에서부터 걸어 내려가서 먹는데 무척 속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좋은 방법이 떠올랐습니다. 엄청나게 짜게 해서 가지고 오면 제가 슬며시 물을 잔뜩 부어서 빨았습니다. 그래서 물을 딸아 내고 먹으니 먹을 만했습니다. 그리고는 “우리 하나 더 주세요. 하나 더 주세요.”
설탕도 넣고 깨소금도 넣고 참기름도 넣고 좋다는 것은 다 넣고도 뭔가 2% 부족한 것 같을 때, 그때 마지막으로 소금이나 간장을 쳐서 나물이나 잡채를 무친 후에 먹으면서 “아, 그래 바로 이 맛이야.” 그러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맛을 내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맛을 내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음식이 맛을 가짐으로써 즐겨 먹게 되듯이,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로부터 깊은 감화를 받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삶으로써, 무미건조하게 살아가게 하는 많은 사람들의 삶 속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세상을 사는 보람과 기쁨 그리고 인생은 아직 살만하다고 하는 그 무엇을 가르쳐 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저는 이 소금이 부패를 방지하라는 의미가 본문에 전혀 없다고는 해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다 더 확실한 것은, 그런 의미도 물론 있겠지만 그것이 적어도 예수님이 말씀하시려는 일차적인 의미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온 세상에 소금을 뿌려 장아찌로 만들어라.” 그런 뜻으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에 있는 가장 커다란 강조점은 이 세상을 장아찌로 만들어서 절대로 상하게 하지 말라는 뜻이 우선적인 것이 아니고, 소금이 음식 속에 들어가서 골고루 맛을 내게 하는 것처럼, 무미건조하고 하나님 없이 살아감으로 아무 희망이 없는 이 세상에 너희들이 들어가서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그리고 희망을 잃은 사람들에게는 희망을, 좌절하고 낙심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소망을, 병들고 아무 도움을 받지 못해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는 기쁨을 주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저는 어느 날 차를 타고 가다가 라디오를 듣고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작은 가게를 하다가 완전히 망했습니다. 빚쟁이들은 매일 몰려오고, 노점에서 장사를 하다가 그것도 결국은 다 망하고, 아무 희망이 없어서 면도칼로 동맥을 끊고 죽으려고 하는데 ‘딩동’, 누군가가 20만원을 통장에 입금했다는 문자 메시지가 들어온 것입니다. 그것을 받고는 울면서 인생을 다시 살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그것이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오 분만 늦게 들어왔어도 면도칼로 그었을 텐데, 누군가가 20만원을 보내면서 위로의 메시지를 보낸 것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 자리에 엎드려서 울면서 왜 이렇게 쉽게 절망하려고 하느냐고 자기를 책망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아주 작은 착한 일도 이렇게 아무 희망이 없는 세상에 희망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신학대학원 다닐 때 얼마나 가난했는지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분별하는 법을 잊어버렸었습니다. 양쪽 다 먹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미각을 잊어버렸습니다. 어느 겨울 날 집사님 한분이 소고기를 교회 사택에다가 놓고 갔습니다. 드셨냐고 해서 고추장에 볶아서 맛있게 먹었다고 했더니, 왜 그 비싼 한우를 고추장에 볶아 먹었느냐고 하십니다. 그것이 한우인지 몰랐습니다. 먹으면서 생각은 했습니다. ‘진짜 좋은 고기라 비계가 없네.’
(예화) 집은 불법한 사람들에 의해서 빼앗겨 길거리로 쫓겨나게 되었고 참 가난했습니다. 너무너무 슬플 때 돌아가신 교수님이, 96세에 돌아가셨는데 저를 참 사랑하셨습니다, 제가 그분 조교였는데 김전도사 우리 집에 잠깐 오너라고 해서 갔더니 심부름을 시키셨습니다. 갖다 드렸더니 “김전도사, 생활이 매우 어렵지. 보태 쓰거라.” 하시며 봉투를 하나 주셨습니다. 받아가지고 나오는데 너무 너무 궁금한 것입니다. 얼마가 들었는지. 그래서 버스를 타기 전에 길거리에서 봉투를 꺼내서 세어보았습니다. 저는 한 오만 원 주셨나보다 생각했습니다. 그때 5만원도 큰돈이었던 것이, 신대원 등록금이 50만원밖에 안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25만원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길거리에서 봉투를 붙들고 한참 울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합니다. 제가 일생 사는 동안에 나와 같이 곤궁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특히 신학생들에게 힘닿는 대로 갚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내에게 그대로 갖다 주니까 그렇게 기뻐하고 감격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25만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곤궁한 나를 지켜보고 계시고 불쌍히 여기신다고 하는 하나의 표였습니다. 그래서 건조하고 힘들던 생활 속에 맛이 나는 것입니다. “아, 그래 우리가 지금 이렇게 힘들어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찬양)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그저 단지 이 세상을 썩지 않도록 보호하는 그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는 썩어서 없어져 버려야 나쁜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순한 방부제가 아닙니다. 그 정도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살 희망이 없고 맛도 나지 않은 이 세상에 침투해 들어가 소금이 되어서, 자기 자신을 녹여 사람들 속에 스며들어서 죄인들에게는 희망을, 가난한 자들에게는 기쁨을, 고통 받고 슬퍼하는 자들에게는 위로를, 이렇게 하면서 사람들이 삶의 희망을 갖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역할을 하도록 예수님께서 “너희는 이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불러주신 것입니다.
IV.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빛보다 소금이 먼저 나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진리가 가장 중요하지만, 진리는 때로는 너무 어려워서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선 이 세상을 그들이 진리가 무엇인지 몰라도 살맛나는 세상으로 만들어라. 그래서 왜 이렇게 좋으냐고, 당신이 우리에게 소금처럼 스며들어서 무미건조하던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놓았고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하셨다고, 그런 소금의 역할이 어디서 나왔느냐고 물을 때, “여기 있다. 빛이란다.”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순서가 이 속에 가미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교리를 잘 꿰고 책을 열심히 읽어서 많은 지식을 가지는 것 훌륭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최고인 것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은 생각을 한번 바꾸어 보십시오. 비록 사경회를 뒤에 것을 먼저 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 빛보다 먼저 소금이 나온다는 것을, 이 세상을 장아찌로 만들라는 의미에서의 소금이 아니라 아무 희망이 없는 세상에 들어가서 맛을 내는 소금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오늘 당장 집에 돌아가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기도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 아무 살맛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쉽게 이야기해서 그 사람 자체가 소금치지 않은 음식과 같아서 아무도 와서 먹어주지 않는 그러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을 해 보십시오. 무엇으로서 그들을 고칠 수가 있겠습니까? 한번 생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무엇으로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소금만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런 소금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 사람들 속에 스며들음으로 이 세상이 아직 하나님 의지하며 살 만하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으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기쁨과 희망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분명히 물을 것입니다. 여러분 때문에 어쩌면 이렇게 우리의 인생이 기쁨으로 변했습니까? “여기 있다. 빛이란다.”
2.세상의 소금으로 부르심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이 세상의 소금으로 부르셨습니다. 소금이라는 말이 부패를 방지한다고 하는 의미가 아주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여기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려고 하는 것은 부패의 방지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 속에 스며들어 세상을 맛있게 만들고 그리고 이 세상에 희망을 잃고 아무런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 들어가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 그러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맛을 내는 사람들이 되도록 우리를 이 세상의 소금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II. 세상의 소금으로 살게 하심
A. 세상에 있는 소금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 이 세상의 소금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오늘 성경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할 때 ‘이 세상의 소금’이라는 단어는 희랍어에 ‘세상’에도 ‘소금’에도 정관사가 붙어있습니다. ‘토 할라스 테스 게스’(τὸ ἅλάς της γης) 정확하게 말하면 ‘그 땅의 그 소금’ 그런 뜻입니다. 이 이야기는 두 가지를 우리에게 함의하는데 첫째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 있는 소금이라는 의미이고, 두 번째는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위한 소금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제일 먼저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 있는 소금이라는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늘로부터 다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구원해 주신 것이 아니라 성경의 표현에 의하면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이미 죽어 있었던 우리들을 하나님이 말씀과 성령으로 살려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속에 있지만 사실은 이 세상에서 온 사람이 아니며 또 우리들이 비록 이 세상 속에 있지만 우리는 이 세상의 통치를 받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통치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 속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 속에 살고 있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꼭 같은 가치를 가지고 꼭 같은 목표를 찾아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마치 그리스도인들은 물 위에 배가 있고 거기에 떠 있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온 세상이 물 천지지만 그 물을 먹고 살수는 없습니다. 또 그 물이 아니면 어디인가 의미 있는 곳으로 항해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속에 있는 사람들이고 그러면서도 이 세상의 일부가 아닌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세상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지만 소금은 변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자꾸 변할 수가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들이지만 원래는 이 세상에 있던 사람들이었는데, 허물과 죄 가운데 태어났던 사람들인데,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사람들인데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그들을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게 하심으로써 그들을 그리스도인들로 삼으신 것입니다. 원래는 소금이었던 사람들이 아닌데 주님이 그를 구원하여 팔복의 사람들이 되게 하심으로 소금과 같은 사람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소금은 변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변하기 때문에 소금으로 부름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사실은 소금으로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서 우리의 신앙에 긴장이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는 두 가지 성품이 함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새롭게 주신 성품입니다. 하늘로부터 온 성품, 그리스도인의 신적인 성품입니다. 그 성품은 하나님 사랑하기를 원하고 거룩해지기를 원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고 사람들을 사랑하기를 원하는 선한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사랑의 본성입니다. 이것이 이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은 거듭난 신적 성품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그를 소금답게 살아가서 무미건조하고 아무 살 희망이 없는 세상 속에 들어가 희망을 주고 살만한 세상이 되게 만드는 바로 그 성품입니다. 만약에 이 성품만 가지고 있다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이미 모든 것이 이루어져 성자가 된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이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조차도 그 속에 옛 사람의 본성을 남겨두셨습니다. 그 옛 사람의 본성은 여전히 하나님보다는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가 이 온 우주의 중심이고 자기의 행복이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는 자아입니다. 많은 사람을 섬기기보다는 오히려 섬김을 받으려하고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봉사하기보다는 그들을 지배함으로 만족을 얻으려고 하는 자아입니다. 이러한 옛 자아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 속에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과 죄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네 가지로 분류를 하였습니다. 제일 처음 인류에게 죄가 들어오기 전에 무죄 상태에 있었던 사람들을 가리켜 ‘죄를 지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제 죄가 들어와서 타락을 하고 난 후에는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생겨났는데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불쌍히 여겨주셔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들은 죄 짓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건이 있습니다. 그들이 믿음의 원리를 따라서 하나님께 순종하여 살며 죄와 불신앙을 이길 수 있는 거룩한 은혜를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끊임없이 공급받으며 살면 그들은 충분히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완전한 천사나 하나님처럼 완전하게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자기를 구원하신 목적대로 혹은 창조의 계획대로 살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는 생기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그 죄와 싸워 이기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 사람 마음 안에 충만하게 있을 때에 그때에 그 죄를 이기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모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우리가 영화롭게 되는 그 때에는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라고 하는 것도 아무리 죄를 지으려고 애를 써도 죄를 못 짓는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워낙 강하게 그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그 자신이 죄를 지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그런 상태로 하나님이 두신다고 하는 의미에서 죄를 지을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옛 사람이 우리 안에 옛 성품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구원받은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옛 사람과 새 사람 사이에 긴장이 있습니다. 말씀을 잘 깨닫고 기도 많이 하고 예배 시간에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고 성령 충만하면 넉넉히 충분히 그 모든 죄와 유혹을 이길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죄를 이기는 것이 불가능하게 느껴질 정도로까지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말했고 자신은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고 자신은 구원받지 못할까봐 두려워한다고 했던 이유도 그것 때문이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너희의 구원을 이루어 가라고 마치 구원이 미완료형인 것처럼 말해야 했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염전을 하는 어느 장로님의 경험담입니다. 이제 여름에 햇빛이 바짝 나면 일주일정도면 벌써 소금이 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것을 염전에서 다 긁어서 가마니에 담습니다. 그리고 배에다가 옮겨 실습니다. 사람들이 어깨에다 메로 이렇게 던지는 것처럼 옮기면 저쪽에서 받아서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못해서 그것을 바닷물에 떨어뜨린 답니다. 그러면 불과 몇 분 만에 아까워서 꺼내도 소금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소금이 빨리 녹아서 없어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장로님이 하시는 말씀이 성도는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인데 성도의 원래의 고향은 세상입니다. 그래서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을 동안에는 성도가 성도답지만 일단 세상으로 돌아가면 성도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빨리 확 풀어져 세상 속에 동화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품의 달가운 맛을 느끼며 하나님의 말씀에 기쁨을 얻고 하늘의 신령한 것으로 말미암아 만족을 누리며 살아가는 삶은 노력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절제가 필요하고 수시로 마음을 쏟아 부어 자신을 정결케 하는 일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하는 시간이 없으면 인간의 마음은 속히 부패해집니다. 놀랍게 선한 일은 숙달하기가 매우 어려운데 악하고 부패해지는 것은 굳이 어떻게 하면 악을 행할 수 있을까 하고 열심히 배우지 않아도 부패하고 신앙에서 미끄러지는 비결이 없을까? 누구한테 배워서 한번 나쁜 사람이 되 볼까?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그냥 가만히 아무 생각 없이 살면 미끄러져서 부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음식을 상하지 않게 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냉장고에 넣는다. 아니면 끓여놓는다. 아니면 말려 버린다. 뭐 여러 가지가 필요하지만 상하게 하기 위해서는 특별히 조치할 것이 없습니다. 그냥 뚜껑 열어놓고 아침에 와서 하루 종일 놀다 집에 들어가면 충분히 상해 있습니다. 인간이 그런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는 이 세상의 그 소금이니 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것은 “너희가 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소금은 변할 수 없지만 그러나 사람은 변한다.” 이것을 말씀해 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 즉, 자신이 빛이 되려고 애를 쓰지 않아도 진리에 꽉 붙들려 살면 그 사람이 어디에 있든지 빛이 되는 것처럼 주님이 원하시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분투하면 분투하는 만큼 그가 어디에 있든지 소금이 될 것이지만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세상에 있지만 그는 맛을 잃은 소금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분이 세상에 있는 소금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두려워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믿음을 갖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세상을 위한 소금
두 번째는 세상을 위한 소금입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할 때 그것은 소금과 세상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소금은 하늘나라를 위하여 있는 소금이 아니라 세상 나라를 위하여 있는 소금입니다. 절대로 썩지 않는 물건에 소금을 뿌려 부패를 방지하게 하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 소금은 방부를 목적으로 한다면 썩기 쉬운 음식을 절이는데 사용할 것입니다. 이처럼 소금은 오히려 소금 자신이 아니라 소금을 필요로 하는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소금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소위 신앙의 초월성과 역사성 문제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초월성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 세상을 넘어서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초월하여 있는 그런 것들이 신자에게 계속 영향을 줄 때에 그가 진정한 신앙을 가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하나는 자신이 불완전하고 더러운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하여 언제나 정결하게 되어야 합니다. 이 정결하게 되는 것은 세상에 있는 것들로 말미암아 정결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얀 옷을 입는다고, 그리고 깨끗이 목욕을 한다고, 검정 예복을 입는다고, 심지어는 성직자의 제복을 입는다고 해서 정결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 있는 물질, 세상에 있는 자원이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은혜, 성결케 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의 은혜, 그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그의 마음을 온전하고 새롭게 만들어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을 때에 그때에 그는 하나님 앞에 순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으로 태어나서 또 하나 해야 하는 의무는 자신이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과 모든 이웃에게 유익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티끌만큼이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가 내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없는 것보다 더욱 빛나고 아름답고 그리고 맛이 있는 세상이 되도록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초월성과 역사성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염려와 근심을 모두 끊고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온 마음을 다해 찬양하고 심령을 기울여 간절히 기도하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지혜의 말씀에 은혜를 받는 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초월적인 세계에 접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로부터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소금답게 살게 하는 그 무엇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받지 못했을 때에는 죽고 싶었던 사람들이 은혜를 받은 후에는 생각이 바뀌어서 살 희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고 회개하고 집에 돌아가면 교회 나간다고 핍박하던 남편이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고 용서해 달라고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공부 못하던 애가 1등 했다고 성적표를 무릎팍 아래에 놓고 엄마를 기다리는 것도 아닙니다. 그 남편 그대로 있고 속 썩이던 자식들은 그대로 속 썩이고 가서 장롱을 뒤져봐도 떠날 때 없던 돈은 은혜 받고 돌아와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변한 게 없습니다. 그런데 살만합니다. 왜냐하면
(찬양)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어떻게? 이 험악한 자신의 환경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전에는 없어서 죽고 싶었는데 그런데 은혜를 받고 나니까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핍박하는 남편의 영혼도 불쌍하게 보이고 공부는 못해도 튼튼하잖습니까? 머리는 나빠도 운동은 잘하잖아요. 그렇게 감사한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초월적인 은혜가 우리에게 부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비밀을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모릅니다. 그래서 어떻게 그렇게 새로운 힘을 매일매일 얻는지, 눈을 감으면 뜨기 싫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그 환경 속에서 어떻게 그것을 이기면서 사는 기쁨을 유지할 수 있는지 세상 사람들은 모릅니다. 그게 신앙의 초월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넘치도록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매일매일 하늘을 우러러 보며 “그런 은혜를 나에게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그렇게만 하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그 은혜를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이 역사적인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이바지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1장 3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한때 제가 너무너무 좋아하던 찬송이 있었습니다.
(찬양)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같이 있으려 하나
신앙의 초월성입니다. 너무 주님이 좋습니다. 그 은혜가 너무 좋습니다. 그 다음에
(찬양)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이게 바로 역사성입니다. 그래서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있으면서 하나님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사랑의 밀월을 나누게 만들어 주신 그 놀라운 특권과 은혜는 그것을 힘입어서 그것 자체를 엔조이하고 그렇게 은혜를 경험하면서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을 멸시하라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그런 은혜를 많이 받았으면 문제가 많은 이 세상에 나아가서 그 문제 때문에 아무 살맛이 없어진 무미건조하고 고통스러운 이 세상의 소금처럼 스며들어 이 세상을 고치고 그래서 살만한 세상,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재물과 같은 세상으로 변화시키게 하시기 위해서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못 받은 사람들은 자기가 여기 왜 살아야 되는지 그 이유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도 느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무엇인가 그것을 쓰고 그것을 헌신하면서 분투하면서 살 때에 “아, 내가 은혜가 떨어졌구나. 내가 은혜를 더 많이 받아야 되겠구나. 하나님 나는 은혜가 부족해서 하나님 뜻대로 못 삽니다. 내게 은혜를 주십시오.” 이럴 수 있는 간절한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 각자는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대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19세기가 어떤 세상이었는지 우리 책임이 아닙니다. 우리 태어나기 전에 이미 지나가 버린 세상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들의 책임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함께 그 시대를 따라서 시간의 물줄기를 타고 흘러서 언젠가는 우리도 고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자앙’(陳子昻, 661-702)이라는 중국의 시인이 이런 시를 지었습니다. “앞에서 옛 사람을 볼 수 없고 뒤에서 오는 사람을 볼 수가 없구나. 천지의 유유함을 생각하니 눈물만 흐르는구나.” 이게 흘러가는 역사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시대에 태어나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이 아름답고 하나님이 기뻐할만한 세상이 되도록 살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고, 구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사랑해 주시고, 사랑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성령의 은혜를 주셔서 이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그렇게 하나님이 기뻐하고 좋아하는 세상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빛보다는 어두움이 훨씬 많고 그리고 맛을 내는 소금 같은 사람보다는 무미건조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살만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세상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어두움은 보편적이고 빛이 예외적이듯이 맛없고 부패한 세상은 일반적이고 소금과 같은 사람들은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희망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의 독특성을 유지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분투하는 신앙생활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성령의 은혜 안에서 살려고 애를 쓸 때에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핍박받는 자에게는 핍박을 이길 힘을, 외톨이가 되는 사람들에게는 그 외로움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이 세상을 무엇인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으로 바꾸게 하기 위하여 헌신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모든 역경과 시련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그 무엇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에 있어서 초월적인 성격은 역사 속에서 사명을 이루어 가는데 이바지 하게 만들어 줍니다. 은혜를 많이 받아야 소금답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렇게 이 세상에서 소금의 역할을 하며 진리와 더불어 분투하며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비로소 기도는 간절해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 은혜를 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리스도인이 매일매일 하늘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고, 매일매일 자기가 살고 있는 삶의 현실 속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기 위해서 분투하면서 산다면 바로 그 사람이 진정한 세상을 위한 소금인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III. 세상은 소금을 필요로 함
그러면 왜 이 세상은 그렇게 소금을 필요로 할까? 예수님이 우리를 “너희는 세상의 그 소금이니”라고 말씀하실 때에 결국은 이 세상에 소금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이것은 세상의 부조화 때문에 소금인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 부조화라고 하는 것은 개별적으로는 인간 자체의 부조화이고 그 다음에 집단적으로는 사회 이 자체가 부조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무엇인가 음식을 만들었을 때, 쓰고, 시고, 달고, 맵고 한 이런 맛이 제대로 나지를 않아서 먹을 수가 없는 음식 같은 세상이 되었기 때문에 소금의 역할을 하는 그리스도인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A. 세상의 부패성 때문에
그러면 제일 먼저 인간의 조화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영혼과 육체가 결합되었을 때에 그 사람이 진정한 인간 존재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후’ 하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더니 그가 산 사람이 된지라고 말합니다. 옛날 성경에 “생령이 된지라”고 했는데 ‘네페쉬 하야’(ay;j} vp,n), “살아있는 사람이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을 하나님이 만드실 때에 땅으로부터는 물질적인 재료를 취하여 몸을 만드시고 그리고 하늘로부터는 영혼을 불어 넣으셔서 하나님의 ‘후’하는 숨이 영혼이 아니라 후하고 하나님이 불어 넣으신 것은 하나의 동작이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개별적인 영혼이 그 사람의 육체 속에 들어가 산 사람이 되었고 그 영혼이 결합되었기 때문에 흙으로 만든 육체가 이렇게 심장이 뛰고 피가 흐르고 신경이 작용하는 영혼과 결합된 육체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어서 영혼이 떠나가고 나면 육체의 모양은 똑같은데 지금의 육체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래서 기능이 멈춥니다. 즉, 육체를 사용하던 주인인 영혼이 떠나가고 나면 마치 로봇이 벗어놓은 갑옷처럼 그냥 아무 힘없이 흘러내리고 몇 시간이 지나면 썩기 시작하고, 냄새가 나서 결국은 흔적도 없이 흙으로 돌아가 버리는 것이 인간의 육체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과 육체가 잘 조화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좋은 육체, 영혼이 만나 결합이 될 때에 이 두 개가 아주 아름답게 결합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정신 속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B. 세상의 부조화 때문에
자, 이런 것입니다. 어떤 인간이 정말 좋은 인간일까? 이것은 아름다운 육체와 아름다운 영혼이 만나 정신이 아름답게 작용하고 있는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물론 이제 얼굴을 예쁘게 뜯어고쳐서 그래서 돈 많이 들여서 그런데 그게 위험한 게 뭐냐 하면 원래 돈 없는 사람들이 가서 이제 옷 가게를 지나가다 보니까 치마저고리 허름한 거 입고 다니는데 청바지가 너무 예쁜 것입니다. 그래서 가서 탁 한번 입어 보니까 몸에 착 붙고 너무 예쁩니다. 그리고 좋다고 뛰어 오는데 지나가다가 쇼 윈도우에 비친 자기를 보니까 분홍 저고리에다가 청바지를 입고 그 다음에 버선을 신은 거예요. 그래서 이것은 아닌 것 같다 그래 가지고 그 다음에 또 가서 이제 저고리 벗고 티셔츠를 하나 사 입으니까 그 다음에는 이제 버선이 안 어울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 가지고 옷을 세트로 싹 갖춰 입고 보니까 그 다음에 얼굴이 받쳐 주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똑같이 코 고치면 코는 예쁜데 눈이 예쁜 사람한테 붙어 있을 때 그게 예쁜 거지 눈이 못 생겼는데 코만 뜯어고친다고 그게 미인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눈을 또 고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입이 안 어울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입을 예쁘게 고쳤더니 이 세 개의 위치가 안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형 중독이라는 것이 생겨난 것입니다. 제일 좋은 것은 그냥 사는 것입니다. 그 돈 가지고 헌금하고 그냥 사는 것입니다. 찬송가도 나오지요. “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만날 기도하면서 찬송하면서. 인간은 과도하게 그런 것에만 신경을 씁니다. 그런데 진짜 아름다운 사람이란 바로 육체와 영혼이 잘 결합되어서 조화로운 상태의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자, 그러면 조화로운 정신의 상태라는 것이 어떤 것이겠느냐? 생각해 봅시다. 우선 제일 중요한 건 뭐냐 하면 인간이 지혜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하나님은 살아 계신가? 그래서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세상은 왜 창조되었을까? 나는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 것인가?’ 이런 것들은 ‘오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면 그런 것들을 판단을 잘 하기 위해서는, 그런 아주 높은 판단을 잘하기 위해서는 생각할 때에 더러운 욕망이나 수치스러운 욕심 같은 것에 휘둘려서는 그런 것들을 판단할 수 있는 선명한 정신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은혜 생활을 많이 하고 눈물로 기도를 많이 하면 설교를 듣거나 성경을 읽을 때 쏙쏙 들어옵니다. 왜냐하면 이 머리가 가슴속에서 일어나오는 쓸데없는 욕망이나 번잡한 세상 근심과 염려에 오염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정신을 선명하게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판단할 때 욕심도 없고 세상의 모든 것도 없고 그리고 선명하게 다 판단해서 ‘아, 이것은 선한 것이구나. 악한 것이구나. 이것은 당장 사람 보기에 좋지만 이대로 살면 나중에 자기도 불행해지고 다른 사람도 불행해지게 하는구나. 이것은 눈에 보기는 좋지만 하나님이 싫어하시는구나.’ 이런 것을 선명하게 판단하기 위해서는 마치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이 아닌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 판단을 내리면 사람들은 다 미쳤다고 그럽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이 세상 속에서 세상에 있는 것들을 위해서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이기 때문에 그런 지혜로운 판단을 내리는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눈물로 회개하고 그리고 마음의 욕심을 버리고 매일매일 주님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절제하고 이런 삶을 삶으로써 명정한 판단력을 유지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자, 예를 들어봅시다.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예쁘고, 돈도 많고, 펄펄 날라서 진짜 감기 한번 안 걸리고 흠 잡을 데가 없고, 말도 기가 막히게 잘하고, 너무 너무 잘하는데 근데 사람이 계속해서 악한 일만 하면서 산다면 그러면 우리는 그 사람을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그것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첫 번째 요소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요소도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소위 이야기하는 기개입니다. 용기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아까 이야기한 판단이 머리의 역할에 해당된다면 용기, 이런 것은 가슴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옳다고 판단을 정확하게 했는데 그렇게 조금 살려고 하는데 옆에 있는 사람이 화를 내면 “안할게요. 잘못했어요.” 그러면 안 됩니다. “내가 옳은데 그래서 내가 하겠다는데 네가 뭐냐? 나는 내 길을 간다. 나는 신념을 따라 살지 않으면서 이 세상에 황제가 되기보다는 내가 옳다고 믿는 신념을 따라서 종처럼 살다가 죽는 것이 난 더 행복하다.” 이럴 수 있는 용기, 그래서 신앙적으로 말하자면 언제나 진리의 편에 설수 있는 거룩한 용기, 이것이 있어야 됩니다. 은혜 받아서 해 보겠다고 그래서 “오늘 이것도 한번 해보시고, 이것도 섬겨보십시오.” 며칠 섬기다가 쿵하고 “어우, 사람들이 뭐라고 그래요. 그리고 어려운 일이 있습니다. 저는 못하겠어요. 저 같은 사람은 그런 것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판단은 올바로 내렸어도 그것을 행할 수 있는 용기와 그리고 옳은 것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전투적인 마음이 부족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조화로운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이 약할 때에 사람은 판단은 올바로 내리면서도 계속해서 갈지 자 걸음의 인생을 살면서 변절에 변절을 거듭하게 됩니다. 변명과 변명, 변절에 변절을 거듭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 두 개가 다 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일까? 아닙니다. 그것 가지고 충분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법정 스님이 계셨습니다. 그 분이 무소유라는 책을 쓰셨습니다. 정말로 돌아가실 때까지 산속에서 사글세 사시면서 다 부서진 이상하게 생긴 의자위에 앉으셔서 기껏해야 그 분의 소유라고 하는 것은 불경하고 책 몇 권 그리고 녹차는 그렇게 좋아하셨답니다. 늘 녹차를 드셨답니다. 그런데 그 집을 한번 보여주는데 아무 가구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텔레비전은 물론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굉장히 훌륭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 모든 사람이 법정스님처럼 산다면 어떻게 될까요? 나라가 무너질 것입니다. 저는 사실은 보험 그런 것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고 그리고 옛날부터 교육을 잘못 받아서 그런 거 너무 많이 들면 믿음이 없는 사람인 것 같은 그런 식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보험 설계사가 와서 나보고 생명 보험을 들으라고 이제 권유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으면 누군가가 처리해 주겠지 무슨 생명 보험이 필요합니까?” 그랬더니 “목사님 법정 스님 아세요?” “예, 알죠.” 그 분이 일평생 무소유를 외치면서 사셨는데 마지막에 삼성병원에서 운명하셨는데 병원비 8000만원을 밀려서 못 갚고 돌아가실 그 순간에 어떤 회장 부인이 대신 내주었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무소유도 좋지만 그렇게 죽을 때 민폐를 끼치시렵니까?” 그러고 보니까 민폐를 끼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나야 그렇게 빛나겠지만 평생 무소유고 김 목사님 살다가 죽어서 통장 뜯어보니까 10원도 없더라 그러면 존경 받을지 모르지만 누군가가 어쨌든 병원비를 갚아줘야 될 것 아닙니까? 민폐를 끼치는 것입니다. 무소유도 좋지만 민폐를 끼치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뭐가 필요하냐 하면 이 세상에서 적당히, 이 뱃속에서 적당히, 절제된 가운데 적당한 욕망이 움직여야 됩니다. 그렇게 할 때에 하면서 돈도 벌고 사업도 하고 하면서 무엇인가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사업하는 사람 심방 가서 항상 물어보는 게 “사업이 잘 됩니까?”, “아, 목사님 입에 풀칠을 합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입니다. 입에 풀칠 제가 해드릴게요. 문방구에서 풀 하나 사서 내가 붙여 줄게요. 사람으로 태어나서 오죽 할 일이 없으면 입에 풀칠이나 하려고 그 힘든 일을 합니까? 조금 나은 사람은 “먹고는 삽니다.” 우리가 개, 돼지입니까? 겨우 먹고 살게? 아니 사업을 한다고 그러면 그냥 먹고 산다고 그러지 말고 열심히 비전을 가지고 이 사업을 가지고 일구고 일을 해서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고 자신도 그 사업을 통해서 재물을 많이 돈을 벌고 사회적인 신망을 얻고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되어야 되잖아요. 그래서 그 사람들을 주님의 사람으로 잘 기르고 만드는 그런 일들을 하는 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소금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풀칠은 합니다.” 그게 무슨 소금이 그런 소금이 있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진짜 영혼과 육체가 아름답게 결합이 되어서 조화로운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냉철하고 영향을 받지 않는 냉철한 선악에 대한 판단과 옳은 가치를 따라서 살 수 있는 용기와 그리고 그 다음에 적당히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 욕망이 움직여서 그래서 절제된 가운데 내가 사업을 하되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초월적인 성격이 너무 깊어서 그냥 돈을 막 벌어서 돈이 들어오는데 “이 진흙 같은 세상, 휴지 같은 돈을 벌어서 이게 하늘나라 갈 때 내가 이것을 가지고 갈 건가? 그러니까 이제 더 이상 이 사업을 해서 뭐하랴?” 그러는 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열심히 버십시오. 쓸데없으면 교회에다 가져다주십시오. 그럼 대신 뜻 있는 일에 사용해 주겠습니다.
CRTS 학생들이 와서 같이 은혜로운 시간을 갖고 있지만 여러분, 5년 동안 우리가 CRTS를 하면서 거의 10억이 넘는 투자를 했습니다. 첫 해에는 14명의 학생을 뽑아서 두 명이 휴학을 했는데 6주 교육하는데 한 학생당 1만 불이 들어갔습니다. 1만 불이면 우리나라에서도 그 돈 가지고 대학원 다니고도 돈이 남습니다. 매일 학교 가는데도. 그런 헌신이 없이는 이 세상이 바뀌지 않습니다. 절대로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안에서 무엇인가 계속 꿈틀거리는 욕망이 있어서 그것들이 절제된 가운데에 여기의 통제를 받으면서 그래서 내 사업을, 내가 직장 다니는 것을, 나의 가정생활을 무엇인가 더 잘 해보고자 하는 욕망이 이속에서 꿈틀거리지 않고 ‘오늘 저녁에 하나님이 날 데려가시면 정말 좋을 텐데.’ 장사 집에 가서 계속 흐느껴 울면서 그 사람 부러워하고 그러면 과연 그리스도인의 삶일까요? 하나님 그런 사람 보시면서 얼마나 한심해 하시겠습니까? 이 시대를 우리에게 맡겨주시고 역사 속에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라고 주셨는데 죽은 사람 부러워서 눈물을 흘리는 이런 사람을 데리고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런 것이 바로 조화로운 인간입니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어도 거기에 마음이 뺏겨서는 안 됩니다.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은혜를 받지만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사업에 대해 관심을 잃어버리고 직장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하는, 밥이나 먹기 위해서 겨우 다니는 직장, 회사는 그런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모두 조화가 깨뜨려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구원하셔서 그래서 은혜를 많이 주시고 그래서 세상 욕망을 버리고 예수 믿기 전에는 나의 영광을 위해 살던 사람을 바꾸어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게 만들어 주시고, 또 이 세상에서 예전에는 용기 없이, 지조도 없이 살던 사람을 하나님 앞에 받은 말씀을 따라 핍박도 불사하며 살 수 있는 용기를 하나님이 주시고, 그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헌신적으로 일해서 무엇인가 이 세상을 바꾸어 놓을 그런 사람들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사업을 통해서 이렇게 이 세상을 바꿀 꿈을 꾸면서 사업을 합니다. 또 직장을 다니는 사람은 직장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이렇게 이 세상을 맛을 잃은 음식 같은 이 세상에 소금처럼 뿌려져서 스며들어가서 사람들이 살만한 세상, 그리고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사 음식과 같은 그러한 세상으로 만들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미친 듯이 돈 벌어서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묻고 싶습니다. 그렇게 돈 벌고 신앙 없으면 마지막에 타락하는 것 밖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무엇인가 분명한 비전과 뜻을 가지고 그렇게 하면서 사업을 하고 이 세상에서 직업 활동을 하면서 살아가는 이것이 조화로운 인간인데 인간들이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을 세워서 그런 역할들을 하게 하심으로 다른 사람들이 망가뜨려 놓은 이 다 깨진 질서들을 그리스도인들을 소금 삼아서 다시 그것을 회복시키시려고 우리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과 공동체의 조화가 깨집니다. 일본 군국주의 시절을 뉘우치지 않는다고 우리는 만날 비난하잖습니까? 그때는 어땠습니까? 개인과 공동체가 아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어서 공동체는 개인 때문에 아름다워지고 개인은 공동체 때문에 아름다워지고 해야 되는데 그게 아니라 이 균형이 자꾸 깨집니다. 그래서 공동체를 위하는 데서는 인간을 아예 기계처럼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술 한 잔씩 먹여가지고 비행기를 태워서 그 젊은이들에게 폭탄을 매달아 가지고 연합군의 배 같은데 가서 쳐 박고 그래서 죽어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이 할 짓입니까? 그보다도 더한 일도 합니다. 정신대 같은 사건들을 저지를 수 있는 것도 결국은 사람들이 개개인이 얼마나 존엄하고 중요한 존재라고 하는 것을 한 번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군국주의 목표를 위한 재료이고 그리고 말하자면 부속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거기에 이바지하는 한도 내에서만이 인간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지 쓸모가 없으면 쓰레기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모든 균형이 깨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깨진 것들이 어떻게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왜 오늘날 이 세상에 남아있는 많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그렇게 기독교를 여전히 박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불교는 그렇게 박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독 그렇게 기독교를 박해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두려움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들어가면 처음에는 살살 들어가는 것 같은데 일단 들어가고 나면 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고 민주주의의 이상에 맞지 않는 이 세상을 확 뒤집어 버리는 놀라운 힘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십시오. 우리 옛날에 선교 초기에 보면 양반들이 전부다 축첩을 했습니다. 그래서 부인을 몇씩 거느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의 양반으로서 위세입니다. 어떻게 해서 결단이 났냐하면 선교사들 때문입니다. 선교사들이 그것은 안 된다고 강력하게 외치고 그리고 첩을 얻으면 치리를 해버렸습니다. 1920년대 같은 때에 출교시켜 버렸습니다. 처음에는 경고하고, 경고하고, 경고하다가 그러다가 이제 ‘아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라는 그 사상이 푹 젖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이슬람이나 아프리카 같은 곳은 복음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이슬람에는 지금 네 명까지 부인을 거느릴 수 있답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진짜 좋겠다.” 그러니까 옆에 있는 사람이 “하나 데리고 사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넷이 얼마나 힘들까?” 힘들 것입니다. 그런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들어가지 않는 곳에서는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짓밟고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아도 사람들이 별로 항거하지 않는데 복음이 들어가고 나면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그것을 제일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그 힘은 그저 적당히 타협하는 힘이 아니라 끝장을 보기까지 몸부림치는 힘입니다. 그래서 사회주의 국가들, 그리고 이슬람 국가들에서 이 기독교의 복음을 철저하게 싫어하는 것입니다. 지금 선교사들 이야기를 들으니까 이슬람 쪽에서는 여자들이 그렇게 복음을 잘 받아들인답니다. 여자들은 희망이 없습니다. 거기에 익숙해져서 포기한 사람들은 그것을 좋아라하고 살지 모르지만 일단 자유의 맛을 복음을 통해서 본 사람들은 그런 현실 속에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막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선교사 와서 얘기하는데 이란에만 약 3000개의 지하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나는 믿어지지 않는데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걸리면 그냥 사형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그렇게 강력한 매력을 가지고 사람들 속에 스며들어가는 것입니다. 특히 여자들을 중심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이렇게 우리 교회는 좀 덜하지만 우리 교회는 남자들이 많이 나오는 편입니다. 한국 교회에서 여자들이 대부분입니다. 남자들이 소수입니다. 이것이 선교 초기부터 생겨난 현상입니다. 복음을 전하면 상민들, 학대받던 사람들, 특히 한 맺힌 여자들이 이 복음을 열렬하게 받아들이고 그리고 새벽기도 나가가지고 눈물을 흘리면서 시어머니한테 욕먹은 거, 구박 받은 거, 그 다음에 첩얻어서 속 썩이는 남편에게 받은 수모와 설움을 다 쏟으면서 그것이 신앙으로 승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성들이 이렇게 우세해지는 그런 선교의 양상을 낳은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그것이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바꿔 놓는 놀라운 힘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바꿔놓는 것은 결국 어느 날 하늘에서 갑자기 뚝하고 떨어진 변화가 아니라 그런 맛을 먼저 보고 자기 안에 소금을 가진 사람들이 그 소금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에게 이런 삶이 있다 것을 가르쳐주고, 이런 삶이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그것을 사모하게 만들어서 그래서 그들이 이 세상과 저항하면서 살게끔 만들어 주시는 놀라운 힘입니다. 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이런 세상의 부조화 때문에 필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개인적으로는 영혼과 육체 사이에 조화가 깨지고 정신의 조화가 다 부서져서 그래서 원래는 하나님이 선하게 창조하신 이 본성들이 죄에 의해 다 짓밟혀 그래서 참으로 인간이라면 그렇게 하면 안 되게끔 망가진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니까 사회 속에서도 조화가 깨지는 것입니다.
권위에 대해서 인정을 안 합니다. 유럽을 갔는데 사람들이 허름한 사람이 명색이 한 나라의 대통령인데 “근혜가 말이야. 명박이가 말이야.” 상식적으로 그러면 되겠습니까? 사회 속에서도 이런 조화들이 다 깨집니다. 권위에 복종도 안합니다. 그렇다고 그러면 자기는 엄청나게 양심적으로 사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그리고는 자신은 자신대로 살면서 그렇게 말하자면 사회자체가 조화가 다 깨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침투해 들어가서 살아보면 너무 힘듭니다. 살맛이 안 납니다. 오히려 산 속에서 조용히 명상하면서 사는 것이 더 행복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것 못 느끼세요? 그것이 바로 맛을 잃은 세상입니다 왜? 희망을 조금 가졌다가도 사람들 속에 들어가면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해볼 수 있을 거야.” 그러고 들어가 보면 아 “역시 안 돼.” 그러고 뛰쳐나오고 싶고 수많은 사회 부적응자들이 생겨납니다. 또 적응한 사람들은 사실은 선한 것이 있어서 적응한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그 죄에 물들고 부패한 성향에 물들면서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조화들이 다 깨뜨려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이 어디에 가서 살아도 일단 사람들이 모인 세상에 가서 살면 무엇인가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혼자 사는 것보다 함께 사는 것이 쉬워야 되잖아요. 너무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면서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이런 세상의 부조화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 세상이 그렇게 되어서 맛없는 세상이 되어서 그래서 그 속에 들어가서 사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이런 세상을 누군가는 바꿔놓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거기에 소금과 같은 존재가 되라고 하나님이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똑같은 죄인에 불과한 사람들에게 왜 그런지 내 옆에 있는 사람은 그냥 지나가시고 나를 구원하셔서, 저 사람에게는 은혜를 주시지 않는데 나에게는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게 만들고, 진리를 사랑하게 만드는 그래서 사명감을 느끼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은 소금을 필요로 하는 세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생의 보람이라고 하는 것,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부조화한 이 세상 속에서 무엇인가 이 세상을 조화로운 세상을 만드는데 영향을 미치면서 사는 그 안에서 인생의 행복도 찾고, 삶의 보람도 찾아야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안일하게 사는 그 속에서 삶의 보람과 기쁨과 영광을 찾는다면 그것은 사회도 행복하지 못하고 자신도 행복하게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되라고 주님께서 남이 알지 못하는 사랑을 여러분에게 보여주셨고, 남이 받지 못한 은혜를 주셨고, 다른 사람은 받지 못한 진리의 말씀을 여러분의 마음속에 새겨주시고 여러분을 목양 받게 해 주셔서 주님의 사람으로 빚어 가신 것입니다.
C. 짠맛으로 완성되는 조미(調味)
원래 우리 인간들은 네 가지의 기본적인 맛이 있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쓴맛, 신맛, 짠맛, 단맛 이 네 가지입니다. 매운 맛 그것은 기본적인 맛이 아니라 가미된 것입니다. 그래서 쓴맛, 신만, 짠맛, 단맛, 이게 기본입니다. 그래서 혓바닥이 있으면 뒤쪽에는 쓴맛을 맛보고, 양쪽 옆은 신맛을 맛보고 그 다음에 혀끝은 단 맛을 맛보고, 나머지는 짠맛을 느낍니다. 이 네 가지 미각이 전부라고 생각을 했는데 최근에 과학자들이 인간에게는 자신도 잘 모르는 다섯 번째의 미각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무수한 실험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상하게 쓴, 신, 짠, 단 똑같이 들어가도 그것이 안 들어가면 잘 안 먹고 들어가면 더 맛있게 먹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름 맛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학설이 쓴, 신, 짠, 단, 기 이렇게 다섯 개의 맛입니다. 이게 재미있는 게 뭐냐 하면 이 다섯 가지 맛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맛이 짠맛입니다. 그래서 쓴 음식, 신 음식, 단 음식, 쓴 음식은 씀바귀 같은 게 있습니다. 그 다음에 단 음식 이런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항상 그 맛이 소금을 적절하게 집어넣을 때 쓴맛은 독특하게 쓰게, 신맛은 더 독특하게 시게, 그리고 단맛은 독특하게 더 달게, 기름 맛은 소금이 들어갈 때 그 기름 맛이 입에 착착 붙는 맛있는 맛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커피를 정말 잘 끓이는 사람은 커피에다가도 소금을 넣습니다. 왜냐하면 커피에는 쓴맛, 약간 신맛 그 다음에 쓰고 시고 한 여러 가지 맛을 내는 커피 종류가 다 있습니다. 소금을 살짝 뿌리면 그 맛이 확하고 살아납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처럼 소금으로 말미암아서 각 맛이 다 살아납니다.
D. 맛을 내는 그리스도인
그래서 소금의 역할은 사람들을 다 짓밟아서 획일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이 소금의 역할을 해서 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그래서 맛 잃은 소금 같은 자신의 인생을 아주 아름답게 만들어서 그래서 그 속에서 자신의 맛이 확 살아나서 그래서 무엇인가 원래 하나님이 주신 나쁜 것들은 진리와 성령의 은혜 속에서 불태워 없어져버려도 원래 하나님이 좋게 주신 것들은 그 그리스도인이 그와 접촉함으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무력화시키고 짓밟아서 모든 사람을 나하고 똑같은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려주는 것입니다.
오늘 오셨는지는 모르지만 사실이니까 와도 할 수 없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누군가 소개로 청년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철학을 공부하는 박사과정에 있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래서 만나서 대화를 했는데 결혼했으니까 청년은 아닙니다. 이 친구가 제 책을 거의 다 읽었습니다. ‘거참 신기하다.’ 그리고 대화를 나눴는데 깊은 침체에 걸려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듣고 가르침을 받으면 자기 철학하고 이 기독교의 가르침하고 어떻게 조화되는지 이게 자기가 알고 있는 철학의 내용하고 그 다음에 교회에서 가르치는 내용이 합쳐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이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친구는 나한테 철학을 가르쳐 주고, 나는 그 친구한테 신학을 보상으로 가르쳐 주고 그러면서 한 2년반을 같이 공부를 했습니다. 플라톤도 읽고 아리스토텔레스도 읽고,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의 철학자도 읽고 철학적인 사실은 자기가 더 잘 알지만, 그것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은 내가 더 전공이잖아요. 그러면서 학교 가도 예수 믿는다고 그러면 철학하는 사람이 이방인 취급하고 교회에 오면 철학한다고 그러면 이방인 취급하고 너무 괴로워서 “목사님, 전 이제 아무래도 신학을 해야 하겠습니다.” 절대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 신학을 하냐? 너 아니래도 이 세상에 신학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문제인데 절대 신학하지 마라.” 그리고 내가 용기를 주었습니다. 왜? “너마저 철학계를 버리고 신학계로 오면 그러면 신학계에서 당신의 존재는 그렇게 드러나지 않을 것이고 철학을 하는 사람은 이제 조금만 예수 잘 믿는 사람들은 전부다 힘들다고 뛰쳐나와서 신학으로 가버리면 그러면 그 철학은 안 믿는 사람들의 판이 되지 않느냐. 절대로 안 된다. 계속해서 공부해라.” 그렇게 해가지고 외국에 가서 그게 벌써 한 7-8년 전의 일입니다. 시련과 고난 끝에 좋은 대학에 가서 박사학위 받고 돌아와서 우리 교회에 등록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의 신학 인재 양성 프로그램에 들어가서 우리들이 장학금도 1년 넘게 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돌아와서 이제는 이 학교, 저 학교 강의 다니면서 젊은이들에게 유능하게 철학을 가리켜서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이 기독교 신앙이 얼마나 이성적으로도 신뢰할 만한 아름다운 종교인가 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얼마나 빛나고 아름다운 것입니까?
소금이 된다고 하는 것은 가서 사람들을 다 짓밟아서 자기하고 똑같은 사람 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공부 잘하는 사람이면 우리들이 기독교의 영향을 미쳐서 그 사람 공부하게 놔두고, 요리를 잘하는 사람이면 요리사가 되게 하고, 노래를 잘하는 사람은 가수의 길을 가게하고, 글을 잘 쓰는 사람은 가게 해야지, 모두 다 짓밟아서 요리 잘하면 “교회 식당으로 와라.”, 글 잘 쓰면 “너 열린 신문 편집부로 들어와라.”, 직장 다 그만두고 “힘세면 교회에 와서 일해라.”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공부 잘하면 “연구 자료실에 와라.” 세상 직업 놓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짠맛을 통해서 모든 하나님이 원래 개인에게 주신 그 맛들이 아주 아름답게 살아나게 하는 그 역할을 하라고 하나님이 여러분을 소금과 같은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좋은 선교는 가서 복음을 잘 전하고 은혜를 끼쳤더니 공직에 있던 사람들은 신실한 공직에 있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을 해야지, “아, 공직사회가 너무 타락해서 나 그만두고 교회 사찰로 들어오겠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거기는 누가 지키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됐다는 것이라도 알고 안 그렇게 하려고 몸부림치려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어야지 그 사람은 괴롭겠지만 그러나 그 사람 때문에 그곳이 무엇인가 소금과 같은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변화될 가능성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캄보디아의 선교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여태까지 선교사들이 가서 열심히 전해서 대학생들이 전부 똑똑한 학생들이 모두 선교사한테 와서 눈물을 흘리고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럼 전부 다 “넌 선교사 되라. 넌 목사 되라. 넌 선교사 되라.” 똑같이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나는 그러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 중에 그런 일을 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러지 말고 “넌 뭐가 되고 싶냐?” “컴퓨터 전문가가 되겠습니다.” “예수를 잘 믿는 컴퓨터 전문가가 되라.” “넌 뭐가되고 싶냐?” “크리스천 사업가가 되고 싶습니다.” “그래 너는 크리스천 사업가가 되라” “너는?” “정치가가 되고 싶습니다.” “그래 그 길로 가라. 그 대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치가가 되라.” “디자이너가 되고 싶습니다.” “그래 너 열심히 해서 좋은 디자이너가 돼서 수많은 제자들이 너에게 오면 그 사람들에게 신앙의 영향을 끼치는 디자이너가 되어라.” 이렇게 해서 있는 그대로 만들어서 그 사람들을 사회 각계각층으로 파송을 해서 거기서 그들이 온전한 사람들이 될 때에 그때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소금을 음식이 있으면 소금을 뿌린 다음에 이것을 섞어야지 위에다가 고명을 얹듯이 소금을 한줌 딱 얹어놓으면 누구보고 먹으라고 하는 것입니까?
IV. 결론
결국 그리스도인은 맛을 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죄로 인해 깨어진 질서를 회복하고 그래서 하나님이 보실 때에 맛없는 음식 같았던 이 세상 속에 스며들어서 정말 하나님이 즐겨 드실만한 음식과 같은 세상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한 도덕을 넘어서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헌신,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보고 사랑하는 긍휼과 자비,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진정으로 그들이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어떤 헌신의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되라고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남이 모르는 복음을, 남이 받지 못하는 십자가의 사랑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이 소금으로 부르신 주님을 찬양하고 이 부르심을 따라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3.‘그 소금’이신 예수 그리스도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5:13)
녹취자: 김경애
Ⅰ. 본문 해설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 유리하고 방황하는 인간들로 말미암아 소금을 필요로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원래 하나님의 창조는 다양하면서도 아름다웠고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영광을 잘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고 인간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기를 거부하면서부터 이 세상에는 많은 무질서와 부조화가 생겨나게 되었고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는 많은 것들이 다양하면서도 아름다운 조화와 일치를 이루고 있었지만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는 사람들이 획일화되면서도 오히려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이상한 세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중 누구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도 세상이 너무나 즐겁고 재미있고 행복한 사람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런 행복을 느껴도 그 행복이 내일이나 모레 영원토록 계속될 것이라는 보증은 더더욱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맛없는 음식과 같고 그리고 조화를 상실하고 차마 사람들이 입에 떠 넣기 싫은 음식 같은 세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Ⅱ. ‘그 소금’이신 그리스도
하나님은 이런 세상에 맛을 내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이 세상에 소금으로 부르셨고 그리고 이 소금이 제대로 맛을 내고 작동함으로써 이 세상의 부패에 방지 역할을 한다는 것은 부수적인 효과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당연히 그 소금이신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소금과 빛의 비유를 말씀하셨고 그 빛이 틀림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면 이 소금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을 해야 맞는다는 것입니다.
A. ‘너희는’
오늘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소금이 맛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시면서 ‘너희는’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너희는’ 누구입니까? 마태복음의 ‘너희는’의 일차적인 청중은 마태복음 4장에서 병 고치는 자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온 많은 무리들 제자들, 이 팔복산에서 산상수훈의 설교를 들었던 그 많은 사람들이 일차적으로 ‘너희’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높고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거의 성자와 같이 성화된 극소수의 사람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고 이제 방금 믿은 사람, 병 고침을 받고 이제 방금 예수님을 따르게 된 사람, 얼마 전에 제자로 부름을 받아서 이제 막 예수님을 따라다닌 이 모든 어린 신자를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너희는 이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일차적인 청중은 이런 사람들이었지만 이차적인 청중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이 말씀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음성을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믿고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할 때 바로 내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 시대 이후의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를 포함하는 모든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말씀하실 때 바로 그 ‘너희’인 것입니다. 문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혹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실제에 있어서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소금처럼 사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성경을 읽을 때에 너희는 소금이 되라. 빛이 되라. 지금은 비록 빛이 아니지만 언젠가 이다음에 은혜를 많이 받고 신앙생활을 잘해서 언젠가는 빛이 되라는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또 실제로 성경말씀을 그렇게 변형시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보고 이 세상의 빛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라고 그러지만 아닙니다. 빛이 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너희는 빛이라” 현재직설법입니다. 지금 너희는 빛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너희는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합니까? 매우 난해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해석을 좋아합니다. 즉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할 때 우리 그리스도인이 항상 빛인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작년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것을 설교할 때 빛의 가변성과 불변성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기억이 전혀 나지 않으십니까? 그것이 제게는 기쁨입니다. 무엇을 다시해도 늘 새롭게 들으시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나 제가 바라는 것은 제가 더 열심히 공부 할 테니까 여러분이 나에게 부담을 덜어주려고 애쓰지 말고 그냥 기억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가르쳐주었으면 여러분이 천재가 아니니까 복습을 해야 합니다. 가게의 외상장부도 쳐다보지 않으면 얼마를 갚아야할지 모르고 통장의 돈도 예금통장을 열어보아야 얼마인지를 아는데 2년 전에 듣고 지나간 말씀을 지금까지 기억하려면 수시로 들여다보아야 그것이 기억에 남지 않겠습니까? 잊어버린다고 그러는데 잊어버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에 다시 듣고 다시 들어야 합니다. 찬송가도 있지 않습니까? 평생에 듣던 말씀을 어떻게 합니까? “또 들려주시오.” 또 듣고 들어서 외워야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빛이라고 할 때에는 어떤 경우에도 사라지지 않는 빛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라지는 빛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그 사람이 빛을 많이 드러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어떤 때는 그 빛을 매우 덜 들어내서 불신자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사는 그것이 우리끼리 이야기하지만 솔직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소금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어떤 때는 아주 맛을 잘 내서 그 사람이 있는 효과가 잘 드러나고 어떤 때에는 그 사람이 있어도 소금인지 설탕인지 모릅니다. 맛을 잃은 소금이 어떻게 맛을 잃을 수 있는지는 마지막 날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맛을 잃은 소금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으니까 이것을 어떻게 생각해야하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이 문제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중요한 핵심은 이 시제가 직설법 현재입니다. 너희는 지금 세상의 빛이라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 직설법 현재가 왜 그렇게 중요하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사도들을 봅시다. 예수님의 사도들의 발자취를 보아도 어떤 때는 전혀 빛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떻습니까? 사도들이 기껏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라고 불렀더니 자기들끼리 모여서 서로 다투면서 “네가 제일 높으냐? 내가 제일 높으냐?” 그러고 있고 예수님이 모든 로마제국을 두드려 부수고 새 나라를 건설하실 때 내가 높은 자리에 올라갈까 쟤가 높은 자리에 갈까를 마음속으로 교만하게 다투고 있을 때 과연 그들을 빛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고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이 모두 예루살렘에 모여서 기도하다가 성령을 받고는 그리고는 주는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외치며 큰 핍박을 받으며 자기 동료들이 죽어 가는데도 조금도 굴복하지 않고 그 사도들이 사도 요한 한사람을 남겨놓고 모두 순교했습니다. 그것은 빛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들 자신이 그런 가변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이 소금을 해석할 때도 당연히 소금다울 때가 있고 소금답지 못할 때가 있다는 것이 사실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도 사실이고 성경적으로도 사실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근거로 해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라고 하셨습니까? 나는 이것의 결정적인 암시가 현재직설법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4장에서 수많은 병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소문은 온 수리아에까지 퍼져서 모든 앓는 자,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받는 자, 귀신들린 자, 간질 하는 자, 중풍병 걸린 자 모두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다 건너편에서 많은 무리가 따라왔습니다. 그런 놀라운 치료의 사역이 있고난 다음에 예수님께서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랬더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그랬는데 여기서 제자는 12제자만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열렬히 따르던 사람들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제자라는 말이 크게 세 가지 의미로 사용되는데 첫째는 12제자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을 열렬하게 따르던 그런 무리들입니다. 예를 들면 70인의 전도대원 같은 사람들입니다. 열렬히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제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두 번째 용례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4장에서 병 고침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다 집에 가지 않고 며칠을 묶으면서 팔복산까지 따라온 것이 아니라 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은 남고하면서 예수님을 열렬히 따르던 무리들이 산으로 올라왔고 예수님은 산위에 앉으셔서 왕처럼 좌정하신 가운데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B. 팔복의 사람이 ‘세상의 소금’임
그러면서 가르치신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팔복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시작되는 팔복이 나옵니다.
나는 이것이 막연히 예수님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누군지 모르지만 복이 있다.”라는 뜻이 아니라 당신 앞에 나아온 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들으면서 영적으로 변화 받은 모습을 그 특징을 천국백성의 특징으로 보고 여덟 가지 인격적인 특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거기에 모여 있는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팔복의 사람들이었다고 나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 희망 없는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이 왕으로 계시는 그 하나님의 나라 그 나라에 가고 싶다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그 나라에 들어가고 싶고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입고 싶어 하는 심령이 파산선고를 받은 것과 같은 그래서 우리 하나님만을 어린아이처럼 의지하는 사람들이었고 예수님을 만나고 그 놀라운 복음을 들으면서 변화되었기 때문에 이제 아직도 이미 왔으나 아직은 오지 않은 그 하나님의 나라를 인하여 애통하고 자신의 죄를 인하여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깨닫고 나니까 원수도 사랑할 수 있을 정도로 온유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의 소원은 돈을 많이 벌어서 이 세상에서 떵떵거리면서 살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불의가 가득차고 죄가 관영한 이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 가득한 하나님의 정의가 물같이 공법이 하수같이 흐르는 그런 공평하고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인가 하는 것에 목마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설교시간에 정치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지만 요즘 돌아가는 나라의 형편을 보면 정말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게 도대체 무엇입니까? 나라에서 세운 정부기관 심지어 군인들이 동원되어서 선거에 개입을 해서 그렇게 난잡한 일을 하고 그게 정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군인은 그리고 공무원은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는 이런 정치에 있어서 공정한 중립 자가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후진국일수록 그런 현상이 많은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러니까 정말 너무 수준 이하의 나라를 신문에서 매일 매일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물론 잘못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 끝났는데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통령 뽑은 것을 무효로 하자는 이야기냐 하고 하니까 뭐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처벌할 사람들을 강력하게 처벌하고 정의를 세워야하는 것입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불의입니다. 이런 불의한 세상에 살면서 불편을 느끼지 못하고 그저 먹을 것 입을 것 자신의 행복을 찾던 사람들이 예수를 제대로 만나고 나니까 이런 세상에서 사는 것이 너무 싫은 것입니다. 왜? 검은 고무신을 신고 죽을 먹어도 한번 정말 공평과 정의가 흐르는 그런 의로운 세상에서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누가? 예수님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모여 있는 그 사람들입니다. 이런 죄인들을 변화시켜 그 하나님의 나라에 사는 은혜를 생각하니까 자기 같은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감사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전에는 가난하고 병들고 비참한 사람들을 하잘것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자신들도 그렇게 취급을 받았는데 지금 보니까 그런 사람들은 우리들이 불쌍히 여기라고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물질을 누리고 지위를 가지고 치열한 경쟁 속에 살면서도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리고 주님을 뵈옵기를 원하는 간절한 갈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찬양)
주님을 송축하리. 내 입술 주를 찬양 나의 눈 보기 원하네
주님 얼굴 주님의 음성듣기를 전심으로 원합니다 주여
그런 주님을 뵈옵기 원하는 간절한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심령이 깨끗하고 순결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면 갈등과 다툼으로 가득한 이 세상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나를 버려 그 일을 이 세상에 이룰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의를 위해 기꺼이 박해를 받을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누가? 예수님 앞에서 지금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얘들아 너희는 팔복의 사람이구나. 너희는 이 세상의 그 소금이란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평생 소금으로 살아간 사람도 있고 나중에 좀 변질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변질했다고 다시 돌아온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하실 때에는 이 사람들이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팔복의 특징은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백성의 인격적인 특징인데 이것은 오랜 세월에 걸친 수양을 통해서 도달하게 되는 그런 종류의 인격적인 완성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경험하는 영혼이 변화된 사람의 인격적인 특징입니다. 여러분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 학생도 어느 한순간에 주님을 깊이 만나고 회심하고 영혼이 놀랍게 변화되면 팔복의 사람입니다. 주일학교 학생이 사경회 때 주님을 만나고 회심을 했습니다.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자기의 죄를 하나님 앞에 자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어보았습니다. “무슨 죄가 너를 그렇게 아프게 하니?”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이 죄를 지으면 얼마나 큰 죄를 짓겠습니까? 더군다나 유치부 아이들은 말입니다. 얼마나 큰 죄를 짓겠습니까? 그런데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자기가 동생을 너무 미워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이 싸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래서 하나님이 저를 용서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은혜를 그리워하면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은혜를 받으니 동생이 어떻게 보이느냐고 했더니 “너무 가엾어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너는 앞으로 어떻게 살래?” “이제는 절대 싸우지 않을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는 것입니다. “또 장난감을 가지고 먹을 것을 가지고 동생하고 싸울래?” “아니에요. 동생한테 다 양보할거에요.” 온유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니 여러분 웃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는 수많은 세월동안 사람들이 변화된 것을 보았는데 이 팔복의 사람이 30년, 40년을 믿어서 팔복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순간에 깊이 주님을 만나고 그리고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고 애통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유치부 아이들은 깊이 회심하고 주님을 만나도 걔네들이 죄라고 고백하는 것은 우리들이 이렇게 보기에는 “에고. 눈물을 흘릴 것도 많다.” 그러는데 이것이 나이가 먹을수록 “무슨 죄를 그렇게 애통해하느냐?” 그러면 털어놓는 것이 나이가 들수록 심각해지고 완전히 어른이 되면 거의 충격적인 이야기들을 털어놓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이만 차이가 있는 것이지 한순간에 팔복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도 팔복을 그대로 느끼면서 산적이 많습니다. 여기에 많이 있습니다. 하나하나 읽어보십시오. 다 있었습니다. 십 년 전에 그런 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깊이 만나고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모든 사람이 다 용서되고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10년이 지났으니까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깊은 팔복의 사람이 되었습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닙니다. 그때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여러분이 자꾸 첫사랑 탓을 하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세상이 소금이니” 할 때 현재 직설법입니다. 지금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그렇게 영혼의 변화를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너희는 정말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구나. 너희에게는 이런 특징이 있구나. 그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란다. 이 세상의 빛이란다.” 그것입니다.
죄 때문에 부패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났기 때문에 맛없는 음식 같은 세상이 되어버린 세상에 여기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인격적인 특징이 팔복의 사람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지금부터 한 20년이 넘는 이야기인데 저기 성남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설교를 하러 와달라고 해서 갔습니다. 갔는데 쪼그만 교회입니다. 교인은 50명 정도 모이는데 가서 열렬히 설교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많은 사람이 은혜를 받는데 머리를 빡빡 깎은 바짝 마른 중학교 학생이 키로 따지면 초등학교 4학년 정도밖에 안 되는 학생이 앞자리에 티셔츠 바람으로 앉아서 똘똘하게 말씀을 듣더니 회개하기 시작하는데 ‘정말 어쩜 저게 천국 백성의 표징이구나.’ 그러니까 그 중학교 학생에게 나중에 물어보니까 1학년이라고 그랬습니다. 그 학생이 이 팔복의 것을 하나가 갖지 않은 것이 없는 그것이 그 순간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 학생보다 훨씬 더 팔복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상태의 문제입니다. 그 당시의 영적인 상태가 주님을 만나고 어떻게 변화되는가 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유지하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하신 말씀을 우리가 읽을 때에 뭔가 격차를 느끼는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론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영혼의 깊은 변화를 받고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이 그 사람에게 부은바 될 때 그는 팔복의 인격적인 특징을 갖게 되고 그때 그는 현재적으로 세상의 소금이며 현재적으로 세상의 빛이라는 것입니다.
Ⅲ. 온전한 팔복의 사람이신 그리스도
그러면 빛을 해석할 때 “너희는 세상의 그 빛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소금도 “너희는 세상의 그 소금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시느냐 하면 빛이신 원래의 빛은 그리스도이신데 그 빛을 받아서 그 빛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빛을 비출 수 있는 수준에 있어서는 예수님의 빛과는 비교될 수 없는 빛이지만 그러나 질적으로는 유사한 그 빛을 비출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날 거울의 비유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된 것처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할 때도 원래의 소금은 그리스도입니다. 그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혼의 변화를 받음으로써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에 부어져 그 동질의 수준과 정도에 있어서 예수님은 무한하고 우리는 지극히 적지만 동질의 소금이 우리 속에서도 있게 되어서 그래서 우리들이 살아가는데 그것이 바로 천국백성의 인격적인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은 온전한 팔복의 사람이신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온전한 팔복의 사람이십니다.
A. 성육신은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심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두 개의 성품을 한 인격 안에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첫째는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온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신성을 가지셨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그분은 인성을 또한 동시에 가지셨습니다. 그런데 신성은 신의 인격과 함께 취하여졌지만 인성은 사람의 인격은 없이 그냥 사람의 인성만을 취하셨습니다. 만약에 신성을 취할 때 하나님의 인격을 취하신 것처럼 인성을 취할 때 사람의 인격도 취했다면 예수님은 다중인격자가 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록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때에도 인격으로서는 하나님의 인격 하나를 가지신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 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기의 아들을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신 것은 첫째는 우리를 위한 대속 제물로 죽으시게 하시기 위함이었고 또 하나는 우리에게 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참 사람이 누구인지 이 둘 다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시대에 말로만 듣던 하나님의 사랑, 자비, 공의, 긍휼 이런 모든 것들을 스스로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는 사람의 몸을 입으신 분으로서 그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몰랐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들을 위해서 병을 고치시고 주릴 때 먹여주시고 우리를 위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눈물로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보이는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 보이는 그리스도를 보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마음 안에 있는 그 사랑과 그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우리 인간은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의 몸을 입으셨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지만 또 한편으로는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형제의 모습으로 사심으로써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이 되고 어떻게 살아야할 것을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 우리들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병든 자를 고치시는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병든 사람들을 병신이라고 욕하지 말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야겠구나. 이것이 인간의 도리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간음하다 잡혀온 여자를 용서해주시고 세리를 용납해주시고 창기도 용서해주시는 것을 보면서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면 저렇게 살아야하는 것이구나.” 하는 것까지도 예수님이 성육신을 통해서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육신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성품, 즉 속성을 우리에게 가시적으로 드러내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좋은 비유일지 모르지만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서 자연시간에 프리즘을 가지고 빛의 성질을 공부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빛은 지나가면 그냥 지나갑니다. 그런데 까만 마분지로 통을 만들어놓고 여기에 삼각형 프리즘을 놓고 여기서 빛이 들어오게 만듭니다. 그리고 까만 통속에서 이 빛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보면 들어올 때는 그냥 빛이 아무런 색깔 없이 들어오는데 프리즘을 통과하면서는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가지 색깔로 변하면서 이 빛이 분광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빛이 원래 이렇게 일곱 가지 색깔로 이루어졌구나. 야, 정말 놀랍다.” 이런 것을 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알게 된 하나님은 빨간 분이었어. 아 하나님이 주황색이었어. 아 하나님이 노란색이었어. 하나님은 빨간 사랑을 가지신 분이었어. 하나님은 정말 고귀하신 주황빛의 성질을 가지신 분이야.” 이런 것을 우리가 깨닫게 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깨닫게 해주신 것은 프리즘인데 그것이 바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 이 세상 속에서 살면서 우리에게 우리는 직접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찬란한 무지갯빛 같은 하나님 안에 있는 마음을 우리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설명이 매우 탁월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만약에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 하나님 안에서 너무나 행복하고, 누구도 병들지 않고, 누구도 아프지 않고, 누구도 다른 사람을 핍박하는 사람이 없는 완전히 아름다운 세상이었더라면 그 빛을 비추실수가 없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좀 더 설명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나같이 비참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시구나! 하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누군가 비참한 사람이 있어야합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십니까? 긍휼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비참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그것을 전달하는 재료로써 비참한 사람이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은 그 비참한 사람을 찾아오셔서 높여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 저 더러운 인간이라며 짓밟아버리는데 하나님이 그들을 불쌍히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긍휼의 성품이 바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자가 있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돌로 쳐서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돌로 쳐라 그러나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그렇게 해라.” 사람들이 돌을 놓고 다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이 그 여자에게 가서 “나도 너를 용서하나니”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은 돌로 칠 권리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이시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나도 너를 용서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거라.” 그래서 이 여자는 돌아가면서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아 나는 이제 죽는구나.” 그러면서 돌에 맞아 죽는 여자들을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너를 돌로 치려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느냐?” “이제 다 가고 없습니다.” 고백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깨닫게 해줍니까? ‘아 그렇구나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분이구나.’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그렇게 해서 정 반대의 사람들이 있어야지만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 그렇게 하나님을 멀리 떠나 유리하고 방황하는 양떼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하나님의 속성이 무엇인지를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지금 이 이야기를 설명하면 가슴에 와 닿겠습니까? 그런데 그 광경을 직접 보면서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중국에 가서 직접 들은 이야기인데 제가 지난 9월에도 대사를 스위스에서 직접 뵈었는데 그런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전의 이야기인데 아마 그분이 대사로 계실 때 있었던 일입니다. 그래서 직접 어떤 사람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사스가 났습니다. 병원에서 의사와 간호사들도 걸려서 죽으니까 어디에선가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집단탈출을 하기도 했습니다. 거리가 한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걸리면 죽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다니면서 그 의사와 간호사들이 버리고 간 사람들을 들것에 싣고 수용소에 옮기면서 그들을 정성껏 돌보았습니다. 그때 중국 사람들이 엄청나게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특히 상해에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공산당 간부들이 텔레비전을 보면서 “저 사람들이 누구냐?” 그러니까 거기에 있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너무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자기네 사람들도 심지어는 간호사들도 그 사람들을 버리고 살겠다고 도망을 가는 사람들이 속출하는 처지인데 피도 살도 섞이지 않은 남의 나라 사람들이 와서 이렇게 사람들을 돌보고 희생적으로 하는 것은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사스가 잠잠해진 다음에 그렇게 일한 사람들을 수십 명을 초청해서 그 시장이 만찬을 베풀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물었답니다. 그때가 기회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주었다고 했습니다. “정말 그러느냐?” 그게 진짜인지 모르지만 그 사람에 의하면 그 자리에서 “당신 그리스도인들이 이 시에서 활동하는 데에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내가 적극 도와주겠다.”라고 해서 한동안 예수 믿는 사람들이 편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똑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사태가 났습니다. 거기서는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큰일 납니다. 가서 우리끼리 기도만 많이 하면서 가서 어린이들을 정성껏 사랑으로 돌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마지막 날 한국에서 온 자원봉사자들 그들이 보기에는 우리가 자원봉사자들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먹을 것을 베풀면서 부시장이 와서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지도에서도 너무 너무 멀리 떨어진 한국 그것도 평촌에 있는 조그마한 열린 교회에서 당신들이 왔는데 부시장이 공식적으로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생전 만나보지도 않던 사람들이 일주일동안 아이들을 돌보는데 사랑이 뚝뚝 흐르는 것이 보이더랍니다. 그런데 나는 도대체 그 사랑이 사랑이라는 것은 분명한데 어디서부터 그 사랑이 왔는지 나는 지금도 너무 궁금하다고 그러는데 우리 지체들이 모두 입으로는 말을 못하고 마음속으로 “예수님이요.” 그러고 싶었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로부터 온 사랑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소금이 된다는 의미이고 이렇게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불신자도 그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슬람교도들인데도 그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당신네 열린 교회 지체들은 내가 책임진다. 언제나 어느 때나 어느 곳이나 우리나라 원하는 곳으로 오겠다고 하면 내가 허락해주겠다.” 그것을 자기가 아예 써서 사인까지 해주어서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있지 않아 아프가니스탄사태가 터졌습니다. 그것입니다.
B. 지상생애를 통하여 팔복을 보여주심
이게 바로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을 나도 영혼의 변화를 받고 그 예수님과 같은 마음이 되었을 때에 나타나는 현상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상생애를 통해서 당신 자신이 완벽한 팔복의 사람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인간은 은혜를 많이 받았을 때는 정말 팔복의 사람 가까이 갑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가난하기는 뭐가 가난합니까? 가난할 때는 기도할 때도 눈물을 뚝뚝 흘리고 그 고단한데도 새벽에 나와서 여기에 앉아서 기도하는 것도 충분하지 않으니까 시키지도 않았는데 여기에 엎드려서 대리석에 얼굴을 묻고 실컷 눈물 콧물을 흘리고 닦지도 않고 그냥 갑니다. 그런데 은혜가 떨어지면 가난하기는 무엇이 가난합니까? 이렇게 자꾸 팔복의 사람으로 가까이 가는데 자꾸 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불변하시는 분으로서 완전한 팔복의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일생동안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요한 세상에서 가난한 자가 되고 모든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세상에서 예수님은 늘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항상 모든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죄는 미워하셨지만 죄인들은 긍휼히 여겨주셨습니다. 다투는 세상에서 화평함을 이루시고 불결한 세상에서 정결하게 하시고 그리고 불의를 따르는 세상에서 박해를 받으시면서 일생을 삶으로써 당신 자신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인격적인 특징이 무엇인지를 당신의 온몸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순간까지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흉악무도한 죄인인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아버지 저들이 잘 몰라서 그럽니다. 하나님 용서해주십시오. 그러면서 변명을 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면 누구도 한순간에 깊이 변화를 받으면서 팔복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식의 문제라기보다는 주님을 만나고 깊이 변화되고 성령으로 충만해지고 복음에 사로잡힐 그때에 이 팔복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마음의 상태를 기도를 많이 하고 늘 회개하고 성령 충만하게 살아가는 그 팔복의 인격적인 특징을 유지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리를 많이 배우고 공부를 많이 하고 일을 잘하고 가서 성형수술하고 아니면 돈도 많이 벌어서 18평에서 30평으로 30평에서 50평으로 자꾸 가고 예쁜 자매를 만나서 결혼하고 멋있는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고 이 모든 것이 변해도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에게 강력하게 사로잡힌 복음의 감격과 충만한 상태에서 미끄러지게 되면 이 팔복의 특징이 희미해지거나 상실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눈물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나 자신을 모두 버려서라도 천국을 얻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고 싶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이 없고 핍박이 오면 두려움이 생겨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얼마나 오래 예수를 믿었느냐는 경력이나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상태의 문제인 것입니다.
C. 팔복의 사람들로 세상의 맛을 더함
하나님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팔복의 사람들을 통해서 이 세상의 맛을 더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맛의 절대적인 기준은 하나님입니다. 이 세상의 입맛이 아닙니다. 그래서 정말 소금이 되면 하나님은 언제나 좋아하시지만 세상 사람들은 언제나 우리를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은 우리들을 너무 좋아할 것입니다. 왜? 그들은 이미 이 세상이 어떤 맛이 되어야할지를 안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북한을 두 번 다녀왔습니다. 갔다 온 지 하도 오래되어서 지금은 이야기를 해도 감시를 하지 않을 것 같아 이야기를 합니다.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말로만 듣던 옥류관이 정말 대동강 강변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가면 워낙 명소니까 외국 사람들이 다 옵니다. 우리도 올라가서 먹었는데 북한사람이 들어가는 식당이 따로 있고 관광객이 들어가는 식당이 따로 있는데 관광객이 들어가는 식당은 북한사람이 들어가는 식당과 똑같은 음식을 주면서 10배 정도를 더 받습니다. 북한사람이라고 슬쩍 들어가서 먹으면 싸게 먹을 수 있을 텐데 잘못하면 감옥에 갇히는 수가 있어서 올라갔습니다. 그 유명한 냉면을 시켜보았습니다. 그래서 먹는데 사람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면서 먹습니다. 그런데 좀 제 입에는 아니었습니다. 아주 맛이 없는 것은 아닌데 그런 정도의 냉면은 어디에 가도 쉽게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하지 않기를 잘했습니다. 거기에는 북한에 있는 우리를 인솔하는 사람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한국에 있는 조선일보, 무슨 일보 기자들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옥류관에 가서 냉면이 유명하다니까 냉면을 잔뜩 시킨 것입니다. 기자들은 이렇게 무엇을 느끼면 말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격인가 봅니다. 그중에 한사람이 개념이 없이 “맛이 뭐 이래? 맛있다더니 맛이 뭐 이래?” 그런 것입니다. 그랬더니 냉면을 갖다 주던 아가씨가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젊은 기자양반.” 물론 더 젊습니다. 기자보다 더 젊은 새파란 아가씨가 “젊은 기자양반, 당신 혓바닥이 미제 빠다에 닳았는데 우리 공화국의 이 고고한 냉면의 맛을 알겠소까?” 한발로 밟아버리고 가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만히 있기를 얼마나 잘했는지 모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누구든지 이 세상을 맛보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 사람의 혓바닥이 죄의 빠다에 발라져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이게 천국의 고고한 맛을 알겠느냐는 것입니다. 기가 막힌 비유입니다. 졸다가 일어나서 좋다고 막 웃는 것입니다. 무슨 문맥에서 지금 이 예화를 들었는지는 모릅니다. 평양 이야기에 눈이 떠졌습니다. 하나님이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 이런 맛이구나. 정말 이런 맛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로구나.”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옵니다. 죄가 혀에다가 계속 빠다를 바르는 것입니다. 발라서 죄의 세상의 맛에 착착 붙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변화를 받아서 원래의 그 맛으로 돌아가게 하려는 그런 은혜를 하나님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주십니다. 그 사람들이 그런 세상을 만들어갑니다. 그런데 이게 변화를 받아서 거듭난 사람들은 그 입맛을 회복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예수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아서 변화를 받았을 때 맛을 보았던 말입니다. 너무 달콤한데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사람들 속에 모여서 그 맛을 보니까 그 맛이 내가 혼자 기도할 때 그 맛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맛이 이 세상 전부에 퍼진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게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는 동기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변화를 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옆에 있어서 세상이 자꾸 변해가기는 하는데 뭐라고 욕을 할 수는 없는데 혀를 뻗어서 먹어보니까 옛날 세상에서 내가 먹던 그 맛하고 자꾸 다른 맛이 여기에 섞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박해를 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근본적으로 그 맛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 맛 중에서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어떤 것은 원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어느 대학교 교수가 그랬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강남에 돈 많은 여자들이 하는 짓이 딱 두 가지인데 춤바람이 나든지, 교회바람이 나든지, 둘 중의 한 가지인데 그래도 교회에 다니는 것이 춤바람이 나서 가정이 파탄되는 것보다 낫지 않겠느냐?” 그 이야기는 기독교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비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그렇게 입맛을 가지고 있는데 그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입맛에 맞는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입맛은 그 사람들의 맛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맛의 절대적인 기준이시고 하나님이 어떤 맛이 나는 세상을 좋아하시는가 하는 것을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섬기며 사셨던 그 생애를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자신이 완전한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는 온전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팔복의 인격으로서 이 세상에 우리가 진정으로 보태야할 맛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온전한 팔복의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예수님 닮은 소금이 될 수 있었던 이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정말 이 세상이 맛없는 세상이고 절대로 살만한 세상이 아니라 정말 이 세상이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셨을 때의 그 아름다움과 조화를 잃어버린 무미건조하고 고통스러운 세상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거기에서 바로 사명감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부르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에 자신이 얼마나 비천한 죄인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팔복의 사람이 됨으로써 이 세상의 소금의 역할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Ⅲ. 결론
그러니까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이 본문을 읽으면서 세상의 소금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으니 우리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살아야합니다. 부패한 세상에서 우리가 진한 소금이 되어서 더 이상 세상이 부패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라는 해석이 완전히 틀린 해석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 문맥에서 말하려고 하는 본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신 것은 이 세상을 장아찌를 만들려고 우리를 소금으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맛을 잃어버린 이 세상에 스며들어서 정말 맛난 세상이 되도록 그렇게 하라고 우리를 불러주셨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윤리운동을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은혜를 많이 받고 팔복의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들이 비록 소수의 사람이라도 그 소수의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아무 무미건조하고 조화와 질서가 깨진 이 세상에 스며들어서 아주 소수의 사람들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시는데 마치 적은 누룩으로 가루 서 말을 부풀리게 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이 이 세상을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깊이 변화되어 이 팔복의 사람들이 되셔서 잠시 한때만이 아니라 언제나 이 팔복의 사람들이 되어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언제나 소금으로 살게 되기를 저와 여러분이 함께 빌어보는 것입니다.
4.세상에 맛을 내는 소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녹취자: 박지성
I. 본문해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제는 이 소금과 관련해 살펴보면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라고 할 때 그 빛이 우리들 자신이 빛이 아니라 빛이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들이 빛이 된 것처럼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하실 때 역시 그 원래의 소금이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셨는지 그리고 우리가 그 성품을 본받고 팔복의 사람이 될 때에 우리는 이 세상의 소금임에 틀림이 없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II. 신약에서 강조된 소금의 역할
신약에서 소금이 몇 차례 언급되고 그 소금의 역할도 함께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약에 나타난 소금의 용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속에 나타나고 또 사도바울의 가르침 속에 나타납니다.
A.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 나타나는 소금은 누가 복음 14장 34절에 의하면 소금은 좋은 것이고 음식의 맛을 짜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소금을 무엇으로도 대신 할 수 없다는 것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9장 50절에 보면 이 소금과 화목하게 사는 것이 연결이 됩니다. 그래서 이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매우 어려운 구절입니다. 아마도 이 구절, “너희가 너희 중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한 이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너희들이 각자 각자가 팔복의 사람들이 되고 그래서 이 세상을 향하여 소금과 같은 존재가 되라. 그것이 바로 너희가 화목하게 사는 길이다.”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의 가능성은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는 이 말씀이 그냥 이 세상적인 차원에서 너희들이 화목하고 사이좋게 사는 것이 나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 아니라 너희들이 이 세상에 진정한 소금이 되는 것이 나의 뜻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서 너희들이 서로 화목하게 살되 너희들이 화목하게 살기위해서 하나님이 너희들에게 주신 사명, 즉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리지 마라.” 즉, 소명을 따라서 살면서 또한 영적인 교만에 빠지지 말고 너희들이 서로 화목한 사람들이 되라는 가르침입니다.
자,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보더라도 방부제라는 역할이 강조되기보다는 오히려 이 세상이라는 음식의 맛을 내는 소금, 그리고 그런 소금의 독특성을 유지하면서도 영적인 교만에 빠져 서로 다투는 사람들이 아니라 화목한 사람들로 살아가라는 이것이 예수님이 강조하시는 바입니다. 종종 우리는 신앙적으로 뛰어나고 영적으로 아주 뛰어난 사람들이 서로 화목하지 못하고 반목하고 심지어는 이 세상 사람들이 다투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그렇게 험하게 서로 다투면서 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소금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팔복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지금 다툰 것을 잠시 후에 통회하며 회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을 미루어 보더라도 소금이라는 이 단어는 이 세상을 썩지 않게 만든다는 개념보다는 오히려 이 세상을 맛있게 만들어서 아름답고 화목하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하는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B. 사도 바울의 가르침
사도바울의 가르침을 봅시다. 골로새서 4장 8절에서 그는 맛을 내는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즉, 은혜로써 너희의 말을 소금이 맛을 고르게 하는 것처럼 은혜로써 너희들의 말을 그렇게 고르게 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가 교회 안에서 다른 지체들과 함께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 말의 중요성이 은혜와 관련해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역시 여기서도 방부제의 이야기는 안 나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여기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할 때 그것이 세상을 썩지 않게 하는 방부제적인 역할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문맥을 공정히 놓고 보면 우선적인 예수님의 가르침의 의미는 이 세상을 썩지 않게 하는 방부제의 역할로써의 소금보다는 맛을 내어서 그래서 모든 것을 이롭게 하고 소금 때문에 모든 것들이 아름답고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것이 되게 하는 그런 선한 영향력을 나타냅니다. 복음의 영향력, 선한 생활의 영향력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이 말의 중요성이 은혜와 관련하여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은혜의 결과가 사랑입니다. 결국 너희들이 은혜로써 소금이 그 모든 맛을 고르게 하는 것처럼 그 은혜로써 너희 말들을 통제해서 그렇게 모든 공동체에 유익을 끼치는 사람들이 되라는 것은 결국 이 맛을 낸다는 그것이 결국은 공동체의 두루두루 미치는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결과가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은혜를 많이 받으면 사랑이 충만해집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서 예수님이 성육신하신 채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들을 드러내셨던 것처럼 그렇게 예수그리스도의 성품을 드러내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이것을 통해서 이 세상은 살맛나는 세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소금으로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러니까 종합해서 설명하자면 구약에서 강조된 소금이 그 하나님 앞에 성결과 거룩함과 성별, 그리고 불변성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바울의 가르침 모두를 종합해 볼 때 구약이 말하는 소금의 개념보다는 훨씬 적극적인 개념이 도입되어서 음식의 맛을 고루 내어서 먹을 수 없는 음식을 먹기 좋은 음식으로 만드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생활로써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영향을 끼치는 것, 이것이 바로 소금의 역할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III. 맛을 내는 소금
이처럼 소금이라고 말씀하실 때 이것은 일차적으로 이 세상을 장아찌와 같이 만들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 세상의 맛을 내는 소금이라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A. 음식을 맛을 고르게 함
그래서 이 소금을 통해 음식의 맛을 고르게 하는 것입니다. 소금이 음식의 맛을 고르게 하는 것처럼 너희들도 이 세상에서 그렇게 이 세상의 맛을 고르게 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소금은 단지 짠맛을 낼 뿐만 아니라 다른 맛, 다른 네 가지 쓴맛, 신맛, 단맛, 기름맛 이 나머지 네 가지 맛을 온전히 드러나게 만들어서 음식 안에 있는 다른 맛의 요소들을 조종하고 일치시켜서 조화를 잘 이루는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 소금이고 이 소금을 대치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음식을 하다가 소금이 모자라면 간장을 넣을 수도 있는데 그것은 간장 속에 소금이 들어있기 때문에 소금을 대치할 수 있는 것이지 소금기가 간장 속에 없다면 그것이 어찌 간장일 수 있겠으며 더욱이 소금을 어떻게 대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소금은 무엇으로도 대치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맛을 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불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구절을 보면서 어제도 잠깐 살펴봤습니다만 항상 논리적으로 혼란을 느끼는 것이 예수님이 우리를 이렇게 불러주시는데 우리는 너무 부끄럽습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내가 빛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소금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주님은 우리에게 빛이 되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아닙니다. 빛이 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너희는 빛이다 너희는 소금이다 현재직설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제 이런 성경구절과 현실 사이의 모순들을 극복할 수 있는 해석을 발견했다고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이 사람들이 진정으로 영적인 변화를 받고 팔복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 있게 “너희가 바로 이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빛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중에 신앙에서 미끄러져 팔복의 사람으로부터 멀어지면 당연히 멀어진 그 기간 동안은 진정한 소금, 진정한 빛으로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소금이 맛을 잃는다면”, 혹은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는 사람이 없나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소금인데도 맛을 잃고 빛인데도 주위를 비췰 수 없는 가능성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B. 맛의 기준: 하나님과 사람
결국 이렇게 맛을 낸다고 할 때 이미 이 세상은 나름대로의 맛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음식을 해서 아무리 망친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거기에는 맛이 있습니다. 그것이 좋아하는 맛이 아니어서 그렇지 이 세상도 역시 맛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만든 맛입니다. 그것을 어떤 사람들은 좋아할 수도 있고 더 다른 것을 좋아할 수 있어서 세상을 다른 맛으로 바꾸어보고자 나름대로 몸부림치며 헌신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의 맛의 기준은 결국은 사람입니다. 자신들 뿐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이 맛의 기준은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무엇을 맛있게 여기시는지 그 기준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대상이 맛을 판단하는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신 예수님,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신 하나님만이 그 모든 맛을 판단하는 진정한 주체가 되는 것이고 절대적으로는 하나님이 이 맛의 절대적인 기준이고 또 사람들도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예수그리스도를 만나 변화가 되어서 팔복의 사람이 된다면 그 사람이 좋아하는 그 맛이 하나님께도 좋아하는 맛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이 주기도문은 이미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 세상의 맛이 무엇인지를 경험한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세상에서 그런 세상이 되게 해달라고 몸부림치는 그 사람 안에 있는 초월적인 맛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모두들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때에 이렇게 주님의 맛을 안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만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기도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왕국을 건설하기 바쁜데 하나님 안에 있는 이 참맛을 본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되었을 때에 바뀐 그 입맛을 알았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맛대로 이 세상이 이루어지기를 그렇게 되지 않은 세상에서 몸부림치는 모습이 주기도문의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주님을 깊이 만나 팔복의 사람이 된 사람들은 자신만 팔복의 사람이 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한 결 같이 팔복의 사람들이 되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가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사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팔복의 사람들은 그렇게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갈망하고 자신의 죄와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애통하며 모든 사람을 향해 친절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마음이 청결하여 하나님을 우러르고 핍박을 받더라도 하나님 그 믿음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세상을 하나님의 선과 일치시키기 위해서 섬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 때문에 열심히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그가 하고 있는 일이 여러 가지 다양한 일이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일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기 위해서는 많은 종류의 일이 필요합니다.
한 나라가 전쟁을 수행한다고 칩시다. 창이나 칼이나 혹은 폭탄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군인들이 싸우기 위해서 먹을 음식, 이불, 옷도 필요하고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이 바로 국민들이 그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헌신하여야 할 일인 것입니다.
(예화) 무슨 기회에 그것을 먹게 되었는지 저는 기억이 없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신 아버님이 하나 어디서 구해다주셨습니다. 그것을 박스를 뜯어보니까 신기하게 네모반듯한 도시락 같은 것이 나오는데 깡통으로 되어있습니다. 그것을 돌려서 따면 도시락 같은 크기의 깡통인데 열어보면 진짜 신기한 것이 많이 들어있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빵도 있고, 비스킷도 있고, 심지어 과일도 있습니다. 과일을 말려서 이렇게 반쯤 말린 과일도 있고, 그 다음에 사탕도 있고, 그 다음에 커피도 있습니다. 잼도 있고, 너무 신기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것을 동대문 시장에서 팝니다. 그래서 중학교 다닐 때인데 돈을 모아서 동대문시장에 나갔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진짜 별견했습니다. 이름하여 ‘시레이션’이라고 하는 말하자면 군인들 전투식량이었습니다. 미군들 전투식량. 그것을 어떻게 미군부대에서 빼가지고 와서 시장에서 파는 것입니다. 가서 열어보면 그것이 미군들이 평상시에 먹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나거나 밥을 만들어서 공수해줄 수 있는 여건이 안 되는 먼 지역으로 훈련을 나갈 때 밥 대신 그것을 먹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줄만 확 잡아당기면 밥이 되고 뜨거운 국이 되는 것도 있고 요즘에는 새로운 것이 나왔다고 합니다. 신신파스같은 것을 준답니다. 그것을 가지고 전쟁을 하거나 훈련을 하다가 너무 상황이 급박해서 앉아서 한가하게 도시락을 먹을 수 없는 상황이면 며칠 동안 밥을 못 먹으면 기력이 떨어져서 쓰러지지 않습니까? 그러면 팔을 걷어서 그것을 파스 붙이듯이 붙이면 그 속에서 핏줄을 타고 영양분이 들어가서 마치 링거주사를 맞은 것같이 힘이 난다고합니다. 우리도 그것 하나씩 붙여볼까요? 금식할 때 하나씩 붙이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맛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몇 번을 몰래 사다가 아무도 안보여주고 혼자 먹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어린 마음에도 ‘참 신기하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뭐냐면 ‘야, 이 사람들은 전쟁에 나가서도 커피를 마시는구나!’ 총알이 날아오는데. 이쑤시개도 들었습니다. 그 속에. 그러니까 겉으로 보면 그것 커피 만드는 것과 전쟁이 무슨 상관이 있겠으며 거기에 담배도 들었더라고요. 담배와 이쑤시개와 전쟁이 뭔 상관이 있을까하지만 결국은 그 모든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그 모든 것들이 협력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간다고 할 때 그때 모든 사람들이 목회자가 되고 선교사가 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목사는 그저 한 천 명 중에 한명만 나오면 됩니다. 그러면 1000명교회가 될 것 아닙니까? 그렇지도 않지 천명이 모두 예수 믿는 것이 아니니까. 10%만 된다면 만 명 중에 한명만 나오면 그러면 그 중의 천명이 예수 믿으면 그 중에 한명만 예수를 믿으면 부목사님도 있어야 될 테니까 좀 더 많아야겠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열심히 자신의 영역에서 좋은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서 매일매일 살고 교회에서도 모두 성경만 가르치기를 좋아하면 안 되고 성경을 가르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성경공부가 시작되기 전에 청소하기를 즐겨하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가하면 성경공부하기 전에 맛있는 간식이라도 따뜻한 차라도 대접하고 싶어 하는 마음과 물질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도 있어야합니다. 그러면서 그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싸워 가는데 하나의 커다란 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들이 정말 이 세상을 맛있는 세상이 되도록 소금으로서 그들 속에 스며들어 영향을 끼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팔복의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것이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는 것이 좀 적고 그리고 좀 모자라는 것이 있어도 팔복의 사람이 되면 그는 소금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느냐는 그것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어쨌든 소금이 뿌려지면 그 소금이 들어간 음식들은 소금의 영향을 받아서 맛이 살아나게 되듯이 그 사람 주위에 있는 사람들 접촉하는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된다고 하면 그러면 우리가 그런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진정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맛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하지 않습니까? 다시 말하면 우리들이 먼저 진정한 소금의 맛에 의해서 점령되는 것, 우리도 항상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좋은 것들만 우리가 가지고 있어서 우스운 말로 항상 간이 딱 맞은 상태는 아니지 않습니까? 간이 딱 맞은 상태는 아니지만 몇 달 전까지는 간이 잘 맞았는데 그래서 은혜생활도 잘하고 해서 팔복의 사람 같고 하여튼 그런 대로 간이 괜찮았는데 마음이 변해서 기도도 안하고 딴생각하고 까불고 그랬더니 교회도 잘 안 나오고 그러면 이게 맛이 변한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 사람을 다시 간을 절여서 그래서 딱 간이 맞게 하려면 어쨌든 뭔가 내가 저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 이런 것들을 전달하는 도구가 되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면 자신이 그런 사람이 누구인지 그 맛을 알고 있어야지만 ‘저 사람이 이렇게 되어야 할 텐데.’라는 강력한 소원을 가질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요는 이것입니다. 우리들이 영혼을 섬긴다고 해도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눈물 흘린 사람만 남의 영혼을 위해서 울 수 있지 자신의 영혼이 불쌍한지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남의 영혼을 불쌍하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섬기면서 그들에게 거는 영적인 성장에 대한 기대는 자신이 도달한 것만큼만 할 수 있지 자신도 돼보지 못한 것에 대해서 그 사람에게 기대를 걸고 그 기대가 현실적인 것이 되어서 눈물이 나오고 그를 위해서 희생하게 만들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만약에 그렇게 한다면 허원 그냥 서툴게 말로만 하는 것이지 실제 그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영혼을 가장 잘 돌보는 사람이 누구냐면 자신의 영혼을 잘 돌보고 있는 사람이 남의 영혼도 가장 잘 돌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남을 위해 기도한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자신의 영혼의 비참한 처지에 대해서 슬퍼하고 애통할 수 있는 사람만이 남의 영혼을 위해서 애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리처드 백스터라는 청교도가 말하기를 “회심하지 못한 사람의 영혼을 위해 눈물 흘릴 수 없는 사람은 누군가가 그 사람을 위해 대신 울어주어야 할 만큼 불쌍한 사람입니다.” 왜? 자신이 진정으로 변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변화되지 못한 영혼을 위해서 흘릴 수 있는 눈물, 애통할 수 있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여기에 있는 이 사람들을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그들을 팔복의 사람들로 만드셔서 그들을 진정으로 변화된 영혼을 가진 사람들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소금과 관련시켜서 이 말씀을 적용하자면 하나님은 영혼의 미각을 바꾸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IV. ‘소금이 되는 것’은 존재의 변화임
A. 중생과 거룩함
중생과 거룩함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중생은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는 것이고 회심은 내 죽었던 영혼이 살아난 것을 내가 마음으로 자각해서 나의 지성과 감정과 모든 의지의 영향을 받게 되는 첫 번째 영혼의 움직임을 우리들이 회심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중생, 곧 거듭남은 우리가 의식할 수 없는 영혼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하나님 홀로 행하시는 은밀한 사역이지만 회심은 그 속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가 나의 의식 속에 전달되어서 내 마음에 영향을 미쳐 나로 하여금 자신의 죄에 대해서 진정으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진심으로 믿게 만들어 주는 최초의 영혼의 움직임입니다. 하나님은 이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우리에게 두 가지 놀라운 변화를 주십니다.
첫째가 뭐냐면 사랑의 변화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이렇게 중생하고 회심하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나를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수단으로써 이 세상을 사랑했는데 이렇게 중생하고 회심한 다음에는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이유는 이미 복음을 통해서 알게 된 2000년 전에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나를 사랑하던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사랑하기를 원하는 모든 것을 또한 함께 사랑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니까 하나님이 사랑하길 원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고 그런 나의 모습을 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모습이 나에게도 기쁨이 되기 때문에 그것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결국은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따라하게 됩니다.
(예화) 우리 교회에 자매 하나가 직원으로 근무를 했는데 시집갔습니다. 그런데 몇몇 형제가 프러포즈를 했는데도 거절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자매의 특징은 채식주의자, 절대 고기를 못 먹습니다. 정확한지 모르겠지만 제 기억으로는 생선도 안 먹고 게 이런 것들 속살만 발라놓은 것 정도만 먹고 일체 고기를 못 먹습니다. 좋아하는 형제를 만나서 연애를 하는데 이 형제는 고기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같이 우리가 수련회도 다니고 하면서 수 없이 그 자매에게 고기 좀 먹어보라고 권했는데 정절을 지키고 안 먹더니 그 형제가 주니까 스테이크를 먹었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어떻게 그 입에 그렇게 오랫동안 고기를 안 먹던 그 입에 피가 살짝 배나오는 포크로 꼭 찌르면 피가 약간 배나오는 그 스테이크를 피를 흘리면서 먹을 수가 있습니까? 왜? 사랑에 빠지니까 미각도 변한 것입니다. 그래서 못 먹던 고기를 먹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이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사랑스럽게 느껴져서 자신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은 모두 행복에 미친 시대입니다. 그래서 뭐든지 말끝마나 행복을 붙입니다. 그런데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변화되지 않은 신자에게는 여전히 행복이 최고의 관심사지만 진짜 변화된 신자에게는 행복보다 거룩함이 더 큰 관심사입니다. 그래서 세속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믿어서 행복해지기를 원하지만 그러나 진정한 신자는 행복해지기보다는 거룩해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주는 행복과 거룩하기 때문에 관계를 맺게 되는 하나님이 주시는 그 행복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속적인 신자는 여전히 행복을 추구하지만 변화된 팔복의 사람들은 거룩함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B. 중생과 회심을 통하여
그래서 이제 하나님은 이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우리에게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주십니다. 그래서 이 변화는 이 세상에 있는 것으로써는 설명할 수 없는 놀랍고 비밀스러운 변화일 뿐만 아니라 마치 천지가 개벽하는 것 같은 놀라운 변화가 우리의 영혼 안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은 회심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사건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예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새것이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예전에 없던 것들을 새롭게 창조하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회심하는 그 순간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진리, 자신의 죄, 이 네 가지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감각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감각 같은 것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서 엄마 젖을 먹는 아이가 술맛을 모르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맛을 몰랐던 것입니다. 마치 이제 막 유치원에 귀엽게 다니는 아이가 비가 부슬부슬 오는 날 커피를 한잔 마시고 담배를 물고 니코틴을 쫙 빨아들였을 때 그것이 우리의 허파 혈관 사이사이에 배이며 밀려오는 니코틴이 주는 담배의 만족감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각에 있어서도 완전히 무지한 자들이었습니다. 진리에 대해서 전혀 우리는 감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디에서 세상살이의 일리가 있는 이야기를 들으면 고개를 끄덕거리고 감동을 받았지만 그 감동의 근원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몰랐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고 회심하는 그 순간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리의 맛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전에는 죄가 무엇인지 불순종이 무엇인지 모르고 내가 원하는 대로 가고 내가 원하는 대로 짐승처럼 살던 사람이었는데 어느 한 순간 우리가 구원받고 변화되니까 죄에 대한 감각 불순종에 대한 감각, 성령이 내 안에서 슬퍼하시는 이 모든 감각들이 생겨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서 미각으로 작용을 해서 이 세상을 한번 혀로 맛을 보면서 이 세상이 지금 하나님이 원하시는 맛인지 아닌지 이 사람과 교제에서 혀로 핥아보면서 그렇다고 해서 만나는 사람 얼굴을 혀로 핥으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혀로 이 사람을 핥아보면서 그러면서 이 사람이 정말 그 맛을 가진 사람인지 아닌 사람인지 그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런 감각을 우리에게 주셔서 그래서 우리 자신을 스스로 맛보면서 ‘아!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 죄가 있구나. 하나님이 나를 지금 정말 사랑해주시는구나. 내가 정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고 싶다. 아! 이것이 진리이구나. 아 바로 이 맛이구나!’라는 감격과 후회, 회개와 하나님께 감사 이런 것들이 막 풍부한 작용들이 이 안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이런 것들이 당연이 없습니다. 당연히 없습니다.
(예화) 이번에 우리가 9월 달에 성도들과 함께 열린교회 최초로 종교개혁여행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종교개혁여행을 해서 이제 성도들을 만나서 여행을 했습니다. 당연히 거기에는 여행사에서 인솔자도 따라오고 가이드 하는 사람도 따라왔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 사람들이 20년씩 한 사람들이라고 하니까 나는 옆에 앉아서 설명하는 것을 지켜봤습니다. 30분 설명을 들으니까 이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내가 하겠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여기 있고 내가 하겠다. 왜? 갔는데 그것이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듣거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으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가 설명을 시작해서 마지막 헤어져서 돌아오는 때까지 내가 계속 다 설명을 했습니다. 설명을 쭉 듣기 전까지는 그냥 있는 교회당입니다. 그냥 있는 그저 허름한 예배당이고 그냥 있는 마당입니다. 그런데 이제 설명을 쭉 하기 시작하면 마음속에서 감동이 일어나면서 ‘여기서 마르틴 루터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목숨을 걸고 종교개혁을 한 곳이구나. 아! 여기서 바로 하나님의 사람 츠빙글리가 장렬하게 전사를 하고 그러면서 죽어가면서도 “우리의 육체만을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과 육체를 함께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 한분을 두려워하라.”는 말을 남기고 그렇게 종교개혁의 푸른 꿈을 안고 결국 순교의 길을 갔구나!’ 이런 것들이 어떻게 말을 하고 설명하느냐에 따라서 확하고 밀려오면서 감각들이 살아나는 것 아닙니까? 비텐베르크 예배당 앞에서는 길거리에서 교인들을 모아놓고 잠깐 얘기를 했는데 나중에 어떤 사람이 보니까 자기들도 잠깐이었는지 알았는데 한 시간이 지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감동과 이런 것들이 출렁거리는 것은 이게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구원받지 못하고 살았을 때에는 우리가 무엇 때문에 비텐베르크 예배당에 가서 눈물을 흘리고 그 카펠 전투지에 가서 눈물을 흘릴 이유가 무엇입니까? 츠빙글리 아저씨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고 루터라는 사람이 무엇이 관대 오늘을 살아가는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우리 할아버지 죽은 곳에 가서도 눈물이 안 나는데 내가 그 할아버지 볼 생각을 하면서 눈빛도 다르고 혈통도 다르고 서양사람, 코큰 사람 보면서 우리가 가보지도 못한 그곳에 가서 눈물을 뚝뚝 흘릴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 말입니다.
이런 마음의 풍부한 정동 같은 것들이 예수 믿기 전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마음속에서 막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 이미 무엇이 참 하나님이 원하시는 맛인지를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기도 많이 하고, 은혜롭게 예배를 들이고 순종하고 말씀생활하면서 살아가면 그 감각이 계속 유지가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런 것들이 사라져버립니다. 그것이 이제 문제인 것입니다.
C. ‘참된 것’에 대한 미각
그래서 이제 영혼의 변화가 미각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변화된 영혼의 이 미각을 따라서 매일매일 살아감으로 우리들이 이 세상의 소금이 되고 이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34편 8절에 말하기를 “너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맛본다는 이 단어가 정확하게 음식의 간을 보기 위해서 맛을 보는 그때에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흔히 이야기할 때 우리의 감각이 육체의 감각이 다섯 가지가 있는데 뭐가 있습니까? 시각 눈으로 보는 것, 후각 코로 냄새를 맡는 것, 청각 귀에 들리는 것, 접촉하고 만져지는 촉각, 그리고 마지막에 입으로 먹는 미각입니다. 그런데 이 다섯 가지 감각 중에서 가장 탁월한 것이 이 미각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하나님을 눈으로 보아 알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을 맛보아 알라고 말합니다. “너희는 그 하나님을 귀로 들어서 알아라. 너희는 그 하나님을 코로 냄새 맡아서 알라. 너희는 그 하나님의 보드라움을 만져보고 알라.” 그러지 않고 “너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 왜? 이렇게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지워버릴 수 없는 기억을 남겨놓고 그 하나님의 선하심이 사람을 붙들리게 만드는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는 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그저 음식이 사람 먹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음식에 대한 책을 읽고 미식학에 대한 책들을 읽으면서 아 이거 음식은 그런 것이 아니구나. 마치 우리들이 어렸을 때 바이올린을 한다, 피아노를 친다, 클래식은 어떻고 음악이 나오면 그냥 인간 즐겁게 하기 위해서 부르는 것인데 그런데 예술이 무엇인지를 철학적으로 이해하고나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헤겔이라는 사람은, 그 이야기는 기독교 신앙적으로 깊이 생각하면서 받아들일 필요는 없는데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진리를 인간의 지성을 가지고 인식하면서 경험하는 방법이 있는데 이것이 철학이고 진리를 모르는 사람도 그 진리를 감각을 가지고 경험을 하는데 그것이 예술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거기서 말하는 진리라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진리라기보다는 어떤 규칙성과 질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과 우주의 질서를 지성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이 철학의 역할이라면 그런 것들이 어느 순간에 음이나 색깔, 무용 이런 것들로 표현되어서 우리의 마음속에 어떤 규칙성을 가지고 막 떨어져서 ‘아! 저것 참 예쁘다.’라고 만들어주는 그런 질서에 대한 감각들을 경험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음식은 말입니다. 그러한 어떤 예술 속에 깃들여 있는 규칙성과 질서 그것에 대한 아름다움, 이런 것들의 종합적으로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기분이 마음이 아무 감정이 없는 것 같고 무미건조하다가도 아침에 나와서 탈칵하고 음악을 틀었는데 라디오에서 혹은 전축에서 음악이 쭉 나와서 한 10분 15분 동안 깊이 음악에 빠지다보면 마음속에서 감동이 확 되면서 삶의 희망이 솟기도 하고 혹은 자신에 대해서 반성하게 하기도 하고 혹은 지금은 어디로 가버린 어떤 내 기억 속에 남는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생겨나기도 하고 또 찬송가 같은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생각나게 만들어서 우리들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도 하고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것이 뭐냐면 그런 것들이 예술들이 우리의 마음속에 출렁출렁하는 정동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음식은 이 다섯 가지 요소가 모두 들어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냉면은 스테인리스로 된 그릇에 혹은 사기그릇에 혹은 해장국은 뚝배기에 그렇게 담아서 먹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양식을 담을 때에는 플라스틱 바가지에 파스타를 담지 않고 왜 은테 두른 접시에 담아서 나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숲을 담는 접시와 과일을 담는 접시의 모양이 다르고 마지막에 후식으로 먹는 초콜릿이나 아니면 케이크를 담는 그릇이 서로 다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시각입니다. 시각으로 그것을 딱 보면서 아 예쁘다! 정말 먹음직스럽다. 그것을 딱 보면서 딱 볼 때 마음에 출렁거리는 정동이 일어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 음식은 그 나름대로의 독특한 냄새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된장국을 구수하게 끊입니다. 탁 문을 열고 들어가면 보지 않았는데 냄새가 확 나면서 ‘야, 이 맛이야.’ 그러면서 어머니의 손맛이 느껴지고 돌아가신 어머니 시골집이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딱 보면 보글보글 소리를 내면서 끊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후각으로 느끼면서 이 속에서 정동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제 맛있게 무친 아삭아삭하게 무친 요리들을 먹으면서 탁 입에 집에 넣습니다. 그러면서 꽉 깨물면서 뭐가 느껴집니까? 입에서 촉각이 느껴집니다. 그것을 식감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물크덩 물크덩 하는 것은 좋아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딱 씹을 때 아삭아삭 하거나 고기가 씹힐 때 육즙이 나오면서 확 퍼지면서 이 마음속에서 출렁거리는 정동이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그런 다섯 가지가 음식 안에서는 모두 작용을 합니다. 향수는 그냥 하나만 작용을 하는데 그림은 하나만 작용을 하는데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작용을 하니까 이것이 음식이 우리에게 일으키는 이 정동의 출렁거림은 놀라운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유난히 둔한 사람이 있습니다. 두 가지로 둔한데 무엇을 먹어도 먹는 것은 입에 들어가면 다 맛있는 사람, 그 사람이 맛있다는 것은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뭐든지 입에 들어가는 것은 다 맛있다고 합니다. 흰죽을 먹으면서도 맛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음식에 대한 욕망이 너무 강해서 무엇을 조금만 집어넣어도 출렁출렁 정동일 일어납니다. 진짜 맛없는 것을 먹으면서도 마음이 출렁출렁합니다. 마치 이런 사람들을 비유하자면 남자들이 여성을 너무 좋아해서 무조건 치마를 두른 사람을 보면 가슴이 출렁거리면서 짝사랑할 것 같은 충동을 받는 그런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둔한 사람입니다. 욕망만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무엇을 먹어도 맛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음식을 먹는 것을 보면 다 괜찮다고 먹고 욕구가 없습니다. 음식에 대해서 그것이 요즘같이 비만으로 고생하는 시대에는 하나의 은사일지도 모르지만 사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중요한 기쁨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욕망에 의해서 과하게 남용될 때 우리의 영혼에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적절히 그것을 느끼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의 건강과 그 다음에 생기와 활기에 얼마나 커다란 좋은 영향을 주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당신을 모두 버리고 떠났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후 세 번째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갈릴리 바다에 오셔서 고기 잡는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이 사랑하는 서먹해하는 그 제자들과 다시 소통하기 위해서 준비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떡과 물고기, 생선을 준비하셨습니다. 어디서 준비하셨는지 어쨌든 그것을 가져다 놓고 구워서 와서 먹으라고 너희들이 잡은 것도 가져와서 같이 굽자고 하시며 사람들에게 먹이시면서 그러면서 교재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도 죄인들을 불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에 있어서 음식이 주는 정동을 당신이 그들과 함께 교제하는 좋은 통로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중등부 사역을 하는 전도사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중등부, 고등부하는 사역자들이 돈이 많이 들어가는데 왜 그러냐고 했더니 특히 중등부는 입이 충분히 열려야 요즘 애들은 마음도 연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게 입을 열기위해서 얼마나 많이 집어 넣어야하겠습니까? 다양한 것들을 여러 가지 정동, 신맛의 정동, 단맛의 정동, 짬뽕의 정동, 케이크의 정동, 그렇게 해서 입이 계속 열려야지 마음도 열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음식에 대한 미각을 통해서 이것이 모두 시각, 청각, 후각, 촉각이 결합해서 정동이 일어나기 때문에 미각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D. 세상에서 맛을 내는 방식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이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을 때 그것은 이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그리스도인의 역할이 얼마나 총체적이어야 하는가. 세금만 잘 내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 나는 절대로 남의 시험지 보고 안 쓴다.” 그것만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 난 전도는 열심히 한다.” 그것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이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맛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맛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는 놀라운 변화를 우리에게 주시는데 이것이 결국은 사랑의 맛, 은혜의 맛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들이 예를 들자면 예배를 드릴 때 우리의 영적인 혓바닥으로 예배를 이렇게 맛봅니다. 너무 맛있습니다. 그것은 예배자체의 맛이 아니라 예배 속에 묻어있는 진리와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만나주시는 데서 오는 맛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 세상에서 그 뿐만이 아닙니다. 은혜를 많이 받고 말씀 안에 굳게 서있는 사람과 교제를 하면서 그 사람의 인격과 성품이 어떤지를 우리가 영적인 혓바닥으로 맛을 보면 너무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계속 만나고 싶습니다. 자기가 은혜생활을 하는 한 미끄러져도 항상 그 사람이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힘들 때는 그 목사님이 생각이 나고, 그 전도사님이 생각이 나고, 그 형제가 생각이 나고 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찬양을 드려도 그 맛이 느껴지고 또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봉사해도 그 맛이 느껴지고 구역에서 성경을 공부해도 느껴지는 것이 무엇이냐면 그 속에 깃들여있는 진리의 맛 때문에 그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두 모여 있는 엑기스가 바로 성경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예수님을 만나고 영혼의 미각이 바뀌어 팔복의 사람이 되면 당연히 그 팔복의 아름다운 사람의 변화된 영혼의 한 복판에는 진리의 말씀에 대한 깊은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에 은혜를 받고 계속 변화되고 새로워지면서 그러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정수가 성경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어떻게 되냐면 이 세상을 맛봅니다. 그런데 내가 성경에서 맛본 그 하나님의 아름다운 그 미각과는 다릅니다. 그 차이가 무엇인가를 발견하니까 그들에게는 복음이 없고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변화된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절대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 그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복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영혼의 변화가 무엇보다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 부족하니까 자신이 그 세상 속에 들어가서 그 복음의 정신대로 그 말씀의 정신대로 진리의 뜻을 따라서 이 말씀을 그들에게 전하며 그들의 영혼의 진정한 변화를 위하여 애쓰고 수고하고 눈물 흘리며 기도하며 주기도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소금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참된 것에 대한 미각을 그들에게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가 하는 것을 경험함으로써 그러면서 우리가 예전에 예수 믿기 전에도 들었던 감동적인 이야기들의 진정한 감동의 뿌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무엇인가 하나님의 입맛에 합치하는 것이 약간이라도 있었을 때 그 이야기는 우리에게 감동을 주었고 하나님의 뜻에 합치하는 그 무엇이 있을 때, 아름다움에 합치하는 그 무엇이 있을 때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면서 정말 아름답구나 하는 것을 마음속에서 깊이 느끼며 감동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자연과 세상학문 안에 있는 파편적인 아름다움들 그리고 그 파편적인 아름다움들의 원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하는 감각들이 생겨나게 되고 그래서 이 진리가 너무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이 진리에 내가 계속 영향을 받음으로써만 팔복의 사람이 되고 팔복의 사람이 됨으로써만 사람들에게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깊이 변화된 사람들, 진리를 사랑하게 되고 그 진리를 사랑하는 것과 이 세상에 소금이 되는 것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영혼이 변화된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소금으로서의 맛을 내어 이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그 방식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자, 우리가 음식을 만들 때 이렇게 특히 여러 가지 재료로 샐러드 같은 것을 무친다고 할 수도 있고 생채 같은 것을 무친다고 할 때 여러 가지 음식 재료의 맛이 각각 살아있고 그러면서도 그 식자재 하나하나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 음식의 요리법입니다. 그렇게 해서 맛을 내지 않습니까? 똑같이 그런 음식들을 그렇게 무쳐놓고 소금을 뿌려서 원재료의 맛들이 그대로 살아난다고 할 때 소금은 결국은 뿌려져서 그 모든 것들 속에 자신의 형체를 잃어버리고 녹아들어서 음식의 맛을 내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세상에 맛을 내는 가? 이것은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이 세상에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맛보게 하신 것과 꼭 같은 방식으로 우리도 그러게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맛을 내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제일 먼저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게 되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어떤 인격으로 어떻게 살아가셨는지를 발견하면서 다양하게 비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의 빛깔들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설명한 대로 비참한 사람들을 만났을 때에는 하나님의 긍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불쌍히 여겨주시는 행동을 통해서 나타나고 죄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에는 그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인들을 용납하시는 구원하고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지한 사람들을 만났을 때 그들을 쓰레기처럼 취급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이 친절하게 가르쳐주시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 안에 있는 충만한 진리가 드러난 것처럼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이 진리의 말씀을 무지한 사람들에게 가르쳐줄 때 그 사람들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하나님의 진리가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하며 하나님도 무지한 우리들을 쓰레기처럼 취급하지 아니하시고 사랑하셔서 진리로 가르쳐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통치가 자기 안에 있는 것만큼 다른 모든 만나는 사람들 속에도 하나님의 그 아름다운 통치가 이루어 져서 그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이 사랑을 받기 전까지는 생이 무미건조하고 아무 의미가 없고 살아가기 힘겨웠던 사람들이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변화를 받고 이 세상이 아직 희망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세상이 비록 죄가 있고 시련과 고난과 역경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붙들고 믿음으로 살면 아직은 살만한 세상이라고 하는 것 그리고 일어나는 고난과 시련과 역경, 죄와 그리고 불신앙과 이 모든 이 세상의 상황들은 그 자체로는 나쁜 것이지만 내가 그 모든 어려운 환경 속에서 믿음으로 살 때 오히려 하나님은 그 나쁜 것들을 통해서 더 좋은 것들을 보여주시는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그렇게 예수를 믿었을 때 우리가 죄가 없었더라면 그래서 우리가 지고 있는 이 죄의 짐에 애통하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감격으로 다가올 수 있었을까요? 우리가 그 당시에 가난하지 않았더라면 간절한 기도의 응답 속에서 우리의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실 때 우리가 그렇게 감격하며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이렇게 사랑하며 돌보시는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겠습니까? 우리가 성격이 이상해서 어디를 가든지 따돌림을 당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소외를 당할 그때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지 않는 나를 그분은 한없이 용서하고 받아들여주시고 불쌍히 여겨주셨다는 것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만을 붙들면서 살게 되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기준으로 보면 우리가 그렇게 세상에 탐나는 존재가 아니었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버리면서 까지도 우리를 사랑해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고귀하고 존귀하고 아름다운 존재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여기에 감격할 수 있게 된 것은 우리가 정말로 쓸모없는 인간이었기 때문에 주님의 존귀함을 알게 되었고 이 구원이 하나님의 순전한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종종 어떤 사람들은 “나는 성격이 너무 소심해.” 혹은 “나는 성격이 너무 숫기가 없어.” “나는 너무 사람이 성급해.” 혹은 “나는 키가 너무 커.” “나는 얼굴이 못생겼어.” 등등을 가지고 불평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여러분을 불행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지금보다 좀 더 잘생겼다고 하더라도 무슨 인생이 그렇게 엄청나게 달라지겠습니까? 아무리 잘생겨졌다고 해도 역사이례 몇몇 안 될 정도로 그런 사람은 되지 못할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렇게 된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행복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것은 그런 외적인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나도 이 세상에 필요에 의해서 만드셨다. 심지어는 내가 가진 자연적인 약해보이는 것 까지도 결국은 사도 바울이 말했던 것처럼 “내가 부득불 자랑할 것이 있다면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니 자랑할 것이니 왜냐하면 여기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랬습니다.
V. 결론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세상에 맛을 내며 살도록 우리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잊지 맙시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주님은 우리를 소금으로 부르셨고 이미 그 맛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람들이고 그래서 참된 것에 대한 미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이외에는 우리에게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모를 때까지는 많은 삶의 가능성이 있었지만 이제는 우리에게 있는 가능성은 오직 두 개밖에 없습니다. 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서 밖에 버려져 사람들의 발에 밟혀버리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그 맛을 유지함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정말 아름다운 삶을 살아서 그래서 주님이 우리 같은 사람을 구원해내신 그 은혜를 이 세상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며 그렇게 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진리로 돌아온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나 한사람에게 일어난 이 일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데 여러분이 비록 목사가 되지 못했어도 위대한 선교사나 신학자가 되지 못했어도 여러분이 이런 소금이 되어서 삶이 무미건조하고 아무 의미가 없는 삶을 살던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영향을 미쳐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고 이 무의미하고 거친 세상에서 인생의 참맛을 발견하고 쓰디쓴 인생의 시련 속에서도 아름다운 열매의 맛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신앙 안에서 여러분 때문에 발견하게 된다면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비록 꽃처럼 향기 나는 생화가 아닙니다. 그래도 여러분은 정말 주님이 사랑하시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소금으로서 살아가서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여러분이 태어나지 않은 것보다도 티끌만큼이라도 나의 이웃에, 이 세상에 궁극적으로 우리를 창조하신 우리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마 5:13)
녹취자: 김인철
I. 본문해설
이처럼 참 소금이신 예수그리스도는 당신을 통해 하나님의 다양한 성품의 빛을 우리에게 비추어 주심으로써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변화되어 팔복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팔복의 상태를 유지할 때 우리들이 분명히 이 세상에 그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이 세상이 어떤 맛으로 돌아가야지만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세상이 될지 알게 하시고 그래서 그 맛을 따라 살 수 있는 은혜를 진리의 말씀과 함께 우리에게 공급해 주십니다. 그 은혜를 충만히 받고 말씀을 받음으로써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소금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씀을 지난시간에 드렸습니다.
II. 소금이 맛을 잃는다면
아마 이 5장 13절에 나와 있는 이 구절 가운데 가장 난해한 구절은 바로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소금이 맛을 잃는다면 어떻게 할까?” 하는 것입니다. 과연 이 질문이 가능합니까? 소금이 정말 맛을 잃을 수 있겠습니까? 또 만약에 소금이 맛을 잃어버리고 나면 과연 그것이 소금일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신학 학자들 사이에서도 이 구절은 난해한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A. 당시 문맥에서 본 해석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문맥을 우리들이 살펴본다면 이 성경 구절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들의 소금 생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땅에는 정 중앙으로 요단강이 흐르고 그리고 두개의 커다란 호수가 있습니다. 북쪽에 있는 호수는 갈릴리 호수 이고 남쪽 맨 아래에 있는 호수가 사해입니다. 갈릴리 호수는 저 위에서 산 위에서 물을 받아서 끊임없이 아래로 흘려보냅니다. 약 길이 70km정도 되는 폭은 가히 넓지 않은 그런 하나의 커다란 물이 계속 흘러 들어오고 흘러 내려가는 호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보고 자신들은 엄청나게 넓은 호수라고 생각해서 갈릴리 바다라고 불렀습니다. 거기에서 더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이번에는 사해가 나옵니다. 문자 그대로 죽음의 바다입니다. 놀랍게 이 사해는 위에서 내려오는 유입되는 물 보다 공기 중에 뜨거운 태양을 받고 증발해 버리는 물이 많거나 혹은 같기 때문에 그래서 이 민물 속에 있는 적은 염분들이 계속 축척이 되면서 그러면서 엄청나게 짜서 아무 생물도 살 수 없는 사람이 바다 속에 자신의 몸을 던져도 그냥 위로 둥둥 떠오르는 그런 바다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 사해 바다는 단지 민물이 모여서 사해가 된 것이 아니라 사해 바다 남서쪽에 약 4,000헥타르 넓이를 가진 소돔산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혹은 소금기둥이라고 불리는 산이 있는데 이 산에서 사람들은 소금을 채취하는 것입니다. 소금은 우리 천일염처럼 이렇게 완전히 순수한 99.99 %의 소금이 아니라 이 소금 기둥은 암염이라고 하는 것인데 바닷물이 모여서 일시에 증발이 되면서 지하층에 말하자면 광물의 맥처럼 갇혀서 소금이 된 것입니다. 이것을 암염이라고 합니다. 혹은 염석이라고 합니다. 이 염석에서 계속 물이 녹아 주변을 짠 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암염은 다시 말해서 암석 상태의 소금은 소금의 순수한 원료인 본질인 염화나트륨 이외에 다른 혼합 물질들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즉 대부분이 염화나트륨으로 되어 있지만 다른 성분도 함께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소금기는 공기 중에 있는 수분을 잘 흡수합니다. 그래서 장마철에 소금뚜껑을 열어 놓으면 질척질척할 정도로 습기가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굵은 소금을 습기제거제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소금기는 공기 중에 수분을 흡수하고 수분을 계속 흡수하게 되면 염화나트륨은 그 물에 녹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녹아서 계속 소금물이 염석에서 흘러 나와 버리고 나면 마지막에 소금 성분, 공기와 결합해서 액체가 되어 흘러 버리고 나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염석 속에 있는 불순물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금이 맛을 잃어버린다면 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여기에서 소금은 우리들이 사용하는 그 소금이 아니라 소금의 성분이 들어 있는 암염 혹은 염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소금은 그 맛을 잃어버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여러분이 소금을 사서 만약에 다른 음식을 사서 혹은 고춧가루를 사서 찬장에 오래도록 잘못 보관을 하면 몇 개월이 지나면 먹을 수가 없습니다. 벌레가 생겨 다 썩어서 먹을 수가 없어 쓰레기통에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소금을 찬장에 잘못 보관 했다고 하더라도 그 소금이 상하거나 썩거나 변질되는 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 소금은 불변성을 의미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맛을 잃을 수 있다면 소금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소금은 맛을 잃어버릴 수 없지만 오늘 유대인들의 소금 생산에 관한 이야기를 염두에 두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소금이 우리가 사용하는 정제염이 아니라 염석 혹은 암염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염석은 얼마든지 소금기를 잃어버릴 수 있고 그러고 나면 마지막에 소금기가 모두 빠져 나가고 그 염석 속에 깃들여 있던 광물질 성분만이 가루처럼 남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소금기를 완전히 빼낸 후에 이 광물질을 화분이나 밭에 뿌려서 비료로 사용하면 그 속에 광물질속에 깃들여 있던 여러 가지 비료의 성분이 식물들을 잘 자라게 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에 이것을 비료로 사용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소금 광산의 경우에도 밑으로 깊이 들어 갈수록 그 염석이 순도가 높은 소금이 되고 지표면으로 올라올수록 염석이 소금의 함유량이 적어서 짠 맛이 결핍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 유대인들은 이 염석을 캐서 혹은 염석을 파서 깊은 구덩이를 만든 다음 그곳에 물을 주입해서 그것을 녹여 소금물을 끌어내서 끓여서 소금을 만들어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끓일 때 하얀 소금이 나오는데 그 소금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소금이 아니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거기에서 염석을 캐내어 그것을 끌어내어 물에 녹여서 그러면 물에 다 풀어지고 나면 소금은 물속에 다 녹아 버렸고 광물질만 밑에 떨어집니다. 그러면 그 물을 잘 따라서 광물질이 안 들어가게끔 소금물만 따르고 나머지 찌꺼기는 버리고 이렇게 마치 쌀 조리질을 하듯이 그렇게 해서 맑은 물만 따른 다음에 그것을 끓여서 정제염을 만들어서 소금으로 사용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B. "맛을 잃으면"의 해석
그렇다면 이제 이 성경구절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소금은 맛을 잃을 수 없지만 여기에서 맛을 잃는 것이 소금 자체가 아니라 소금을 함유하고 있는 염석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맛을 잃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 맛을 잃은 염석의 잔재물들은 소금기를 완전히 제거하고 나면 훌륭한 비료였고 또 그럴만한 가치가 없는 것은 밖에 버려서 그냥 흙처럼 버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에서 매우 어려운 문제가 나오는데 “맛을 잃으면”이라는 이 구절입니다. 이 구절이 희랍어로 ‘모란대’(μωρανθη)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 ‘모란대’라고 하는 단어는 로마서 1장 22절, 고린도 1장 20절에 같은 단어가 사용되는데 이 똑같은 단어를 두 성경 구절에서는 “어리석게 되다”라는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는 “소금이 맛을 잃으면”이 아니라 “소금이 어리석게 되면”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소금이 어떻게 어리석게 될 수 있느냐? 이 소금은 따라서 진짜 소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지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즉, “너희는 이 세상이 의지하여야 할 하나님의 지혜이니 만약에 그 지혜가 어리석게 된다면 무엇으로 지혜롭게 하리요 결국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두지 못할 것이요”라고 나가서 이 소금과 빛의 비유 두개가 아니라 전체가 하나의 진리와 지혜를 가리키는 하나의 비유가 바로 소금으로 등불로 나타난 것이라고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해석이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이 해석을 따르는 것은 아니고 일부의 사람들이 이 해석을 따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 어디에도 소금이 지혜를 가리키는 어떤 은유나 상징으로 사용된 경우를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여기에서 ‘모란대’, ‘맛을 잃어버리면’이라는 이 단어는 돌이킬 수 없는 변화이고 한번 그렇게 되면 다시 그런 일들로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염석이 공기와 접촉하여 염석 안에 있는 소금기가 액체로 다 흘러가 버리고 나면 마지막에 부스러기 같은 광물질만 남는데 그렇게 된 광물질속에 다시 짠 기운을 집어넣은 것은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주후 1세기에 랍비들에게 이러한 말하자면 속담이 있었습니다. “짠맛을 잃어버린 염석이 여기에 있다. 어떻게 하면 이 염석을 다시 짠맛이 나는 소금기를 가진 염석으로 환원시킬 수 있을까? 그때 노새의 태반으로 하면 된다.” 노새가 무엇인가 하면 암말과 숫당나귀 사이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노새는 번식력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혹시 노새가 태어나 암노새라고 할지라도 그 속에 태반이 없습니다. 마치 이런 것입니다. “짠맛을 잃어버린 염석을 어떻게 다시 짜게 할 수 있을까? 남자의 자궁을 옆에 두어라.” 이런 속담하고 똑같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혹시 노새는 태반이 있을지 몰라도 짠 맛을 잃어버린 염석을 다시 짜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해석을 해놓고 나면 굉장히 힘든 상황이 벌어집니다.
III.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그러면서 이제 예수님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염석이 소금을, 소금은 맛을 잃어버릴 수 없지만 염석이기 때문에 맛을 잃어버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들이 이제 해석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어려운 것은 “이 염석이 맛을 잃어버리면 무엇으로 이 염석을 짜게 하리요? 너희는 세상의 염석이라. 그런데 그 염석이 맛을 잃어버릴 수 있다. 그런데 만약에 맛을 잃어버리면 무엇으로 그 염석을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게 하겠느냐? 불가능하다.” 어떤 해석이 나오는가 하면 “무서운 말씀이구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한번 팔복의 사람이 되면 우리는 세상의 소금일 수 있는데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미끄러지거나 불순종하거나 죄를 지어서 그 짠맛을 잃어버리게 되면 다시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하구나.” 이런 해석을 하지 않을 수 없게끔 우리에게 이 성경이 강요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를 믿고 팔복의 사람이 지금 되어서 아직 미끄러지지 않은 사람에게는 희망이 있지만 여기에 이렇게 이 추운 날 그래도 덜덜 떨면서 나와 본 것은 팔복의 사람이 충분히 되었기 때문에 나온 사람도 있지만 감사해서 나온 사람도 있지만 어떻게 맛을 잃어버리고 여러분도 자신이 맛을 잃어버린 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맛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어떻게 그것을 해 보았으면 좋겠는데 “차라리 노새의 태반으로나 해라. 한번 잃어버린 그 소금 맛을 네가 어떻게 회복할 수 있겠느냐? 그러면 마지막에 남은 것은 무엇이냐? 밖에 버려져서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니라.” 이렇게 결론이 일어나면 사경회에 나온 보람이 너무 없는 것입니다. ‘한번 맛을 잃어버리며 결국은 이제 끝이구나. 일수불퇴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 성경구절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래서 “신자가 염석이 한번 맛을 잃어버리며 짠 기운을 회복할 수 없기 때문에 만약에 염석이 짠맛을 잃어버리면 그것으로 가치를 상실한다.”라고 하는 의미 “밖에 버리워져 사람들에 밟힐 뿐이니라.” 성경에서 사람들에게 밟힌다고 하는 것 무엇인가 땅에 떨어져 붙어 버렸다고 하는 것은 비참, 무가치, 절망, 버림받음 그런 의미입니다. 짠맛을 잃어버리며 염석으로 아무 가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밟혀 버려서 무가치 한 것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한사람이 주님을 깊이 만나고 은혜의 세계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천국과 지옥도 모르고 내 원하는 대로 살았는데 어느 날 주님의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고 우리의 죄와 강퍅함에 대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우리에게 자비로운 구원을 베푸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이 깊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꼭 붙드는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만 사랑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가난한 마음이 되었고 자신의 죄와 이웃의 죄를 위해서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로 인해서 애통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잠시 머물다가 갈 이 세상에서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며 갈망하는 가운데 사랑하는 이웃들에게 선을 행하고 그들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게 되어서 그들에게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돈 벌고 떵떵거려 풍요로우면 모든 것을 얻은 것처럼 생각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공의를 잃어버린 죄 많은 세상에서 황제로 살기 보다는 차라리 간절히 주님의 나라와 그 통치를 받으며 살고 싶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팔복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매우 가치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짠 기운을 가지고 이 세상의 맛을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믿음으로 살려고 해도 이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세상의 풍조가 그렇게 사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말합니다.
(예화)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쌀을 한말 두말씩 잔뜩 방앗간에서 빻아 가지고 쌀가루를 만들어 놓아도 그 쌀가루를 만들기 이전에 쌀에 소금을 집어넣을 때 쌀의 분량만큼 소금을 넣는 것이 아닙니다. 쌀 한말에 한줌 소금 집어넣어도 충분합니다. 한가마를 빻아도 그저 몇 공기 퍼서 집어넣으면 충분히 짠 맛이 나는 것입니다. 한가마니 떡을 해도. 빛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두움이 대부분이어야지만 빛은 빛을 내지 대부분이 빛이며 빛은 빛을 내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의 현실이 어떻다 하더라도 그것이 대다수이고 소금이 소수이고 빛이 작은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은 서 말의 가루라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선한 그리스도인의 영향력은 서 말의 가루에 넣은 한줌의 누룩과 같은 것입니다. 가루가 너무 많아서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성분의 누룩이 없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어렸을 때 가난하고 먹을 것이 없던 시절에 할머니는 종종 저를 위해서 간식 해 주었습니다. 저녁때 밀가루를 항아리에서 한 바가지 꺼내어 물을 붓고 버무리면서 술약 한 숟가락을 미지근한 물에 타서 다 으깨어서 붇고 밀가루 반죽을 하면 주먹 서너 개 합친 만큼 사발 한 덩어리만큼 됩니다. 그것을 커다란 양푼에 넣고 뚜껑을 닫은 다음에 아랫목에 덮어 놓고 이불로 덮어 놓고 하루 저녁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요만한 밀가루가 양푼에 가득 부풀어 오릅니다. 그것을 밀가루로 치대서 그것으로 빵도 쩌 먹고 호떡도 해 먹고 했습니다. 그것입니다. 한 숟가락 밖에 안 되는 누룩이 들어가서 커다랗게 부풀어 오르는 것입니다. 빵 반죽을 만들듯이 소금도 역시 그렇게 맛을 내서 이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구절은 신자가 한번 미끄러져서 맛을 상실하게 되면 회복이 불가하다 하나님이 한번 신자가 은혜에서 미끄러져서 죄를 짓거나 불순종해서 예수 믿는 사람다운 삶은 못 산다면 밖에 던져서 그래서 짓밟히게 만든다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애들아 너희들은 이제 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느냐 그리스도인이 너희가 되었다면 너희가 이 세상에서 가장 빛나고 가치 있는 존재로 이 세상을 살아 갈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줄게 이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노력 한단다 이 세상 누구도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멸시 받고 그러는 것을 좋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번에도 미국에서 일어난 12살 난 아이가 저지른 총기 살인 사건은 지금 수사 중이지만 아마 그 아이를 왕따 시키고 멸시했기 때문에 깊은 소외감을 느끼고 이 아이가 자살한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을 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에게 총을 쏘기 전에 너희들이 왜 나를 이런 식으로 대하느냐고 소리치며 총을 쏘았다고 하니까 아마도 이 아이는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받으면서 깊은 설움을 느꼈고 그것이 살인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예는 우리나라에도 종종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렇게 사람이 따돌림을 당하고 멸시 받기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일에 많은 노력을 하게 됩니다.
실제로 통계를 냈는데 어떤 통계가 나왔는가 하면 쇼핑한 사람을 모두 앙케이트 조사를 하니까 남자의 경우 집에서 입던 옷, 운동화 신고 쇼핑센터에 나가서 물건을 흥정한 사람보다 단정하게 양복을 입고 품위 있는 옷차림으로 가서 물건을 흥정한 사람이 훨씬 잘 흥정하고 싸게 샀고 여자도 머리에 폭탄 맞은 것처럼 그렇게 눈곱도 안 띠고 간사람 보다는 미장원에서 머리 하고 예쁘게 화장을 하고 곱게 하고 우아한 옷을 입고 나간 사람이 훨씬 물건을 싸게 사고 종업원들에게 기분 좋은 대우를 받고 돌아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외적인 처지가 어떤지에 대해서 이 세상은 이렇게 우리를 다르게 평가합니다.
한번 일이 있어 중국으로 출장을 가는데 공교롭게 비행기 맨 앞에 앉았습니다. 물론 비즈니스 클래스는 아니고 3등석의 첫 번째 열에 앉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제가 처음으로 내렸습니다. 그런데 공항에 내려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 조그만 공항에 한 이백 명 삼백 명 될 만한 젊은이들이 모여서 손에 꽃다발을 들고 저를 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무리 책을 썼다 해도 한글로 쓴 것 밖에 없는데 막 손을 흔드는 것입니다. 손을 들려고 하다가 아무래도 그런 일은 없는 것 같았습니다. 뒤를 이렇게 쳐다보니까 어떤 청년이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하고 같이 내리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비즈니스 클래스 저쪽 구석에 앉았다가 꾸물거리느라고 내가 먼저 나오고 뒤 따라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꽃다발을 흔들고 이 사람은 손을 한번 흔들더니 내 옆으로 지나가더니 외제 승용차를 타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이제 나는 쳐다보지도 않고 차가 서서히 움직이니까 그쪽으로 몰려가면서 공항을 빠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구나. 그래서 나중에 하도 궁금해서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 보았더니 한국의 아이돌 가수 중 한사람이라고 합니다. 저는 본 적이 없는 젊은이입니다. 무엇인가 조금 나으면 사람들은 열광을 하면서 그 사람의 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끊임없이 가치 있게 해서 사람들 앞에 빛나고 고귀한 존재가 되고 싶어 합니다.
갑자기 인격적으로 아름답게 하루아침에 할 수 없지 않습니까? 너절한 사람이 어떻게 마음먹는다고 하루아침에 고상하게 되겠습니까? 머리에 든 게 없는 교양 없는 사람이 어떻게 두세 시간 만에 뭔가 깊은 내용이 들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끼칠 수 있는 그런 교양이 풍부한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온전히 금방 해낼 수 있는 것 용모, 외모 그 다음에 이 세상에서 쌓아 온 재산, 권력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자신을 끊임없이 높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깊이 대접을 받게 되고 사람들은 그를 가치 있게 생각합니다. 세상에서는 그런 식으로 우리 자신의 존재가치를 높입니다. 예수님 말씀하기에 “하나님의 나라에는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단다. 그것은 너희가 맛을 잃어버리지 않은 염석으로 남는 것이란다. 그러면 너는 정말 그리스도인으로서 짠맛을 유지하며 살 때 진정으로 너는 가치가 있는 존재란다. 이 세상에서 너희를 그렇게 가치 있게 해 주지는, 여겨주지 않지만 그러나 내가 너를 가치 있게 여겨서 그래서 너희들이 그 짠맛을 많은 사람들에게 흘려보내 몸이 건조하고 살아가야 할 아무런 이유와 목적도 없는 이 세상을 변화시켜서 살만한 세상 살고 싶은 세상 그리고 주님이 받으실 만하지 않는 이 세상을 바꾸어 주님이 받으실만한 세상으로 변화 시킬 때 너의 존재의 가치가 거기에 있단다.”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화) 예수님을 처음 믿고 들은 간증이라서 그런지 잊히지가 않습니다. 어느 날 예수 믿고 변화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직장에서 모여 예배를 드리는데 어떤 집사님이 오셔서 간증을 했습니다. 이 집사님은 군에서 얼마 전에 예편하신 분이셨는데 육군 사령관이었습니다. 별 셋이었습니다. 이 분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사단장으로 있을 때 어느 날 가만히 생각하니까 예수 믿고 교회에서 집사라고 불러 주는데 그냥 전방으로 열심히 다니면서 군대생활을 하기는 했는데 가만히 생각하니까 주님이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는 너무나 많은데 나라를 위해서 충성한답시고 주님을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래서 어느 날 조용히 생각하니까 사단장으로 전방에 있으니까 언제 북한군이 쳐들어올지 모르니 휴일도 없고 휴가도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꼬박 부대를 치키는 것입니다. 가족들은 가끔 자기를 만나러 오고 그리고 자신은 그곳에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살다가 주님 앞에 가면 주님이 그래 너 뭐 하다가 왔냐? 라고 할 때 예수님 그래도 제가 이 세상에 있을 때 쓰리스타였습니다 투스타였습니다 하면 주님이 어이구 장군님 이제 오셨습니까? 그럴 것 같지는 않더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계급으로 보더라도 예수님은 별들보다 훨씬 높이시니까 그렇지 않을 것 같더랍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내 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더랍니다. 교회에 가서 주일날 예배드리고 헌금한 것 밖에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더랍니다. 그래서 어느 날 운전병을 불렀답니다. “너 이리로 와라.” “예.” 장군은 차가 두 대가 나오는데 지프차 한대하고 승용차 한대가 나옵니다. 승용차 좋은 것을 운전하는 사병에게 “너 이 차를 끌고 목사님께 가라. 목사님이 주일날 세 군데인가 네 군데인가 다니는데 그곳을 오토바이 타고 다닌다는데 그것이 되겠냐? 그러니까 네가 가서 목사님을 태워서 예배 끝나면 다음 예배당으로 가라 네가 만약에 목사님을 못 싣고 이 빈차 가지고 돌아오면 너는 영창에 갈 줄 알아라.” 그리고 차를 몰고 갔는데 그 교회 목사님이 막 중위로 방금 임관한 새파란 젊은 총각이었습니다. 밥풀 두개하고 별 둘은 여러분은 이 세상을 살면서 상상도 못해 보는 차이입니다. 그런데 별 두개 달린 차가 별만 가림판으로 가리고 온 것입니다. 저 차가 사단장 차인데 왜 왔나? 경례를 하더니 “중위님 목사님 사단장님 명령입니다. 예배가 끝났으니까 이 차를 타시죠. 다음 예배당으로 모시죠.” “어 그래. 아무개 집사가 철들었구먼.” 하고 뒷좌석 문을 열고 덜컥 탔겠습니까? 아니면, “내가 그것을 왜 타냐?” 했겠습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당연합니다. 감히 어떻게 타겠습니까? “아이 싫다. 안탄다.” 그랬더니 “목사님, 제가 그냥 돌아가면 영창갑니다. 제 생각해서 제발 타 주십시오.” 그리고 씨름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탔는지 안탔는지 저는 모릅니다. 어쨌든 관심이 없습니다. 이 분이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것이라도 하면 “너 뭐 했냐?” 하면 “별 둘 달았습니다.” “잘 났다. 별 둘 달고 뭐 했냐?” “제 차를 항상 목사님께 빌려 드려서 목사님이 원활하게 이 부대 저 부대 다니며 예배 인도하게 해 드렸습니다.” 그 말이라도 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목사님께 사정을 했는데 성체가 아직 안 되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결국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우리에게 주신 자연적인 재능 때문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 때문에 또 유능하게 사업을 잘 했기 때문에 또 어떤 사람은 부모로부터 예쁘게 태어났기 때문에 대접을 잘 받습니다. 소피 마르소라는 여자 아십니까? 프랑스 배우입니다. 이제 50을 바라보는데도 그림처럼 예쁘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텔레비전 방송국에 나오니까 기자가 물었습니다. “이렇게 나이가 들어도 예쁘신데 우리도 어떻게 예뻐지는 비결이 없을까요?”라고 물으니까 너무 매정하게 “엄마 아빠에게 예쁜 유전자를 달라고 하세요.” 아니 태어났는데 어떻게 달라고 합니까? 그리고 엄마 아빠가 유전자를 줘 봐야 뭐 그 판이 그 판인데 무슨 변화가 있겠습니까? 정말 낙심됩니다. 남자 배우 중에 멋진 사람이 있습니다. 콧날이 오똑하고. 텔레비전에 나왔는데 옆에 있는 사람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아름다운 외모를 간직하고 수많은 여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시는데 무슨 비결이 있습니까?” 그랬더니 “비결이 뭐 특별히 있겠습니까? 평소에 착한 마음을 가지고 살면 되지요.” 그랬더니 그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많은 청년들이 슬리퍼를 집어 던지면서 “그러면 우리 마음은 도둑놈 마음이냐?”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계속 높이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높아져 봐야 그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가 아니라 잠시 있다 사라질 썩어져 가다 사라질 썩어져 갈 이 세상의 가치입니다. 그래서 저는 텔레비전도 많이 보지 않지만 가끔 이렇게 보면 저 여자가 언제 저렇게 늙었나. 그런 것 밖에 안 보입니다. 그래서 맨날 “참 많이 늙었네. 옛날에는 그래도 한 인물 했는데 저렇게 늙었네. 세월이 가니 어쩔 수 없구나.” 이런 생각 밖에 안 듭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그래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높여서 이 세상의 나라에서 인정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렇게 잠시 머물다 가는 세상에서 나날이 쇠잔해 가는 육체를 지닌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영광은 들풀의 꽃과 같이 사라지고 이슬과 같이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이 이 세상에서의 가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그런 것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돈이 많아서 나쁠 이유가 없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부자라는 사실 그 자체가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그 부를 어떻게 짠 맛이 나게 사용해서 무미건조하고 고통스러운 이 세상을 변화시켜 하나님 앞에 받으심 직한 세상이 되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희망을 가지고 살아 갈 수 있는 복된 세상이 될 수 있게 하느냐 이것에 성경은 더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점에서 가치 있게 사는 비결이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처음 회심하고 팔복의 사람이 되었을 때에 가졌던 그 정체성, 이 세상의 학벌이나 재산의 유무, 용모의 아름다움과 외모의 미추에 관계없이 그렇게 팔복의 사람들을 예수님이 “너희는 이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불러 주셨던 것처럼 그 정체성을 유지하고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리스도인은 가치가 있는 것이고 이것을 잃어버리고 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는 의미로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자가 한번 미끄러지거나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상실하거나 불순종하게 되면 회복이 불가 하다고 하는 그런 의미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IV. 짠맛의 가변성과 불변성
그러면 이제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우리가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지라도 그 짠맛을 잃어버릴 수 있는 가변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주님이 우리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불러 주셨으니 무엇인가 우리 안에 불변하는 그 짠맛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고 실제의 우리의 삶에서 보면 예전에는 세상의 소금과 같아서 정말 그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이 구역장으로만 가면 구역원들이 다 생기가 돌고 살아나고, 그 사람이 교사가 되면 시름시름하고 다 병들어 가는 아이들이 새록새록 살아나고, 그래서 정말 희망을 가지고 예수님 믿으면서 사는 아이들이 됩니다. 그 선생님, 구역장은 진짜 소금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지난해 신년 사경회에 참석 하셨던 분들은 아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은』이라는 시리즈를 사경회 시간에 들은 기억이 날 것입니다. 그때 거기에서 저는 분명히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라고 말씀하셨는데 왜 현실은 교회가 빛이 아닐까 그러면서 저는 이 빛의 불변성과 가변성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역시 저도 우리가 그렇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A. 짠 맛의 불변성
먼저 짠맛의 불변성입니다. 염석은 소금기를 공기 중에 다 상실하고 광물질만 남을 수 있지만 우리가 일단 회심하고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팔복의 사람이 되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이것은 외형적으로만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외형적으로 죄인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진노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사랑 받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그렇게 변화 된 것이 아니라 외적인 변화 보다 더 놀라운 내적인 변화가 일어 난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떠한 경우에도 사라지지 않는 사랑의 성향을 우리에게 넣어 주셨고 이 사랑은 하나님과 신령한 것과 사랑이고 또 하나님 안에서 이웃들을 향한 사랑이기도 합니다. 이 사랑의 성향을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속에 심어 놓으셨는데 어떠한 경우에도 이 사랑의 성향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이 사랑이 풍성해지기도 하고 이 사랑이 희미해지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이 사랑이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항상 도덕을 지향하는 성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자에서 ‘길 도’(道)자에다 ‘큰 덕’(德)자를 쓰는 이 ‘도덕’은 ‘도’라는 말과 ‘덕’이라는 말 두 가지가 합쳐진 것입니다. ‘도’는 모든 인간이 걸어가야 할 객관적인 기준이고 이것은 자기 밖에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덕’은 주관적인 힘이고 이것은 그 사람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덕’은 엄밀하게 말하면 선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이 ‘덕’이라고 하는 것은 이웃과 선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려고 하는 영혼의 힘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도덕적인 사람이 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고, 덕의 사람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걸어가니까 ‘도’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객관적으로 올바른 우리 인간의 살아가야할 하나님이 지정하신 길이 있고 내 마음속으로도 그것을 기뻐하면서 걸어가니까 덕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도’와 ‘덕’은 떨어지면 진정한 의미에서 ‘도’가 아니고 떨어지면 진정한 의미에서 ‘덕’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한 열망은 있는데 올바른 길이 아니다 라면 진정한 덕이 아닙니다. 그리고 도가 있는데 내가 그것을 걸어가지 않는다고 하면 도는 도이지만 내 마음속에 그 도를 받아들이며 사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도덕은 이렇게 때로는 근거가 애매하고 모호합니다. 때로는 이 시대가 흘러가면서 이 도의 기준이 자꾸 바뀌고 따라서 덕의 기준도 자꾸 변화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예화) 여러분은 어렸을 때에 절약교육을 많이 받으셨을 것입니다. 절약교육 받은 것 중에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치약을 쓸 때에는 맨 뒤에서부터 꼭꼭 눌러서 써야 된다. 왜냐하면 그때 치약을 알루미늄 튜브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중간을 눌러서 쓰면 뒤에 것은 나오지 않아서 못 쓰고 버려야 합니다. 그러니까 밑을 손톱으로 긁으면서 일자로 그리면서 밑에 있는 것을 밀어내서 치약을 반쯤 쓰고 나면 밑쪽에 손톱에 긁혀지는 알루미늄 조각이 나오고 위는 두툼하게 치약이 모여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아무데나 눌러도 됩니다. 아이들에게 뒤에서부터 눌러서 쓰라고 하는데 보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지금은 물컹물컹한 플라스틱 튜브이기 때문에 아무데나 눌러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렇게 자꾸 기준이 바뀝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기준이 계속 바뀌기 때문에 도덕이 계속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면서 우리들이 어디에 기준을 맞추어야 될지 모를 정도로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덕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기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도를 성경 속에서 보여 주셨고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객관적인 도덕의 기준입니다. 동시에 그 성경을 읽으면서 내가 비록 하나님께로부터 이것이 길이라고 제시를 받았어도 나는 그렇게 살아갈 힘이 없습니다. “예수여 나를 도우소서” 하며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는 순간에 영혼에 힘을 넣어 주셔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참을 수 없는 고난을 인내하고 긍휼히 여길 수 없는 사람을 긍휼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을 주셔서 영혼에 힘을 주셔서 덕이 일어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성경은 객관적으로 우리에게 도를 보여 주시고 덕도 우리가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강한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말씀에 성령님이 역사 하실 때 우리의 마음에 큰 변화가 일어나고 우리가 객관적인 기준인 그 도를 따라 갈 수 있는 덕의 힘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은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시는 이 라는 사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야 된다는 사실 이것을 지워 버릴 수 없도록 가슴에 새겨 주셨고 그 성향을 아울러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떠한 경우에도 팔복의 사람에서 미끄러져 흔적이 거의 남지 않은 상태에서도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도를 따라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덕의 삶을 살아야 되겠다는 의지는 파멸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나기 전에는 구원받기 전에는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을 때 하나의 의지로 죄를 짓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다음에는 어떤 경우에도 이 마음속에 하나님께 순종하고 선하게 살려고 하는 의지가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중생과 함께 영혼 속에 심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선을 행하고자 하는 소원은 내게 있으나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이 소원이 구원 받은 신자의 마음속에서는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불순종할 때가 있습니다. 죄를 지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어떤 이유로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죄를 지으려는 강한 의지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하고 싶어 하는 의지가 그 안에 있어서 이 두개가 복합적으로 작용을 하면서 후자가 전자를 이기기 때문에 죄를 짓고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신자는 혼란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지 이 도덕이라고 하는 것을 단지 바깥으로 드러난 행위만을 가지고 판단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이 훌륭한 증거가 무엇인가 하면 나의 어떤 행위가 바깥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내안에서 양심의 강한 압박과 회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저지르지 않은 죄에 대해서도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아직 저지르지 않았지만 내 마음이 이미 그 마음을 품었기 때문에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가책을 느끼며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진심으로 회개하게 될 때 이런 중생과 회심을 통해 심겨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각들이 다시 살아나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의지가 다시 발동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게끔 만들어 주는 도덕을 다시 지향하게 되는 작용들이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경우에는 강하게 침체에 빠지고 은혜에서 미끄러졌을 때에는 힘이 희미하게 나타나지만 어떤 경우에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이 짠맛을 완전히 잃어버리지는 못하고 항상 그 안에 남겨두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B. 짠 맛의 불면성
그러나 또 이 짠맛은 끊임없는 가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교회의 이 세상에 대한 선한 영향력의 상태는 항상 변했지 똑 같은 정도로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때는 교회가 심하게 부패해서 이 세상에 소금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이 세상에 썩은 상태가 교회 속으로 들어오게 하기도 하였는가 하면 어떤 때는 사도 시대처럼 종교개혁시대처럼 청교도시대처럼 그렇게 이 교회가 강한 맛을 발휘해서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때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한 시대의 교회의 짠맛은 그 시대에 살고 있는 모든 교회 짠맛의 합계이고 그 교회의 짠맛의 합계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지체들의 짠맛의 총화입니다. 그러면 결국 이 신자 자신에게 이 짠맛의 가변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부패할 수 있는 죄인의 남은 본성이 잔재하고 있고 이것들이 충분히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로 열렬한 기도 속에서 죄를 이기며 살 때에는 은혜가 이 모든 죄인의 남은 죄 된 본성을 이기기 때문에 역시 그 하나님의 은혜로운 짠맛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러나 그렇게 죄를 죽이고 하나님 앞에 열렬한 생활에 게으른 생활을 하게 될 때 신자라도 자기 안에 있는 이 죄된 본성이 융성해지고 죄를 이길 수 있는 은혜는 소멸한 상태가 됨으로서 실제로 짠맛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다시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깊이 받고 인격적으로 하나님 앞에 결단하고 성령의 은혜로 돌아 갈 때 그는 다시 또 팔복의 사람이 되어서 짠맛을 회복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신자는 이 세상에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그때 이 세상에 맛을 내는 재료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신자를 에워싸고 있는 이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부인하는 무신론과 불신앙의 고집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열렬하게 주님을 믿고 신실하게 예수님을 의지하면 이 세상에서 언제나 따돌림을 받고 그리고 눈에 띄어 배척되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잠시 따뜻하게 환영을 받는다고 해도 그것은 세상의 환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자신처럼 변화된 사람들이 간직한 같은 하나님의 나라의 특성 때문에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이지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불신앙의 고집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이 그 사람을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상적으로 아무리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뭐 합니까? 실제로 이 세상 이 교회에서는 세상적인 무신론을 따라 가지 않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교회가 이런 실천적인 무신론으로 가득 차 있고 먼저 믿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맛을 잃은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믿은 사람들의 이러한 생활을 보면서 ‘우리도 충분히 저렇게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구나.’ 하는 암시를 받으면서 살아감으로서 점점 더 이 세상과 접촉하면서 교회 안에 있는 소금기는 점점 빠져 나가면서 그러면서 결국은 마지막에 쓸모없는 것들만 남아서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 너무나 가치가 없는 교회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 되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을 성령 충만하고 맛 나는 소금일 때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맛을 잃어버릴 때에도 사랑하셔서 여러분을 다시 짠맛을 회복하게 만들어 주시고 은혜로 돌아가게끔 그리스도의 교회를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짠맛을 날마다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 불러 주신 소금의 소명을 따라 살지 못할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V. 결론 :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그러면 결론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입니까? 어떻게 살아야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 주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서 내어 주신 화목제물로서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 앞에서 우리는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긍휼히 여기고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케 하고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우리를 가리켜 “너희가 바로 이 세상의 소금이구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소금은 결코 이 세상이 썩지 않도록 장아찌같이 만드는 여기에 소금의 사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 문맥 속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의미는 우리들이 이렇게 소금이 음식 속에 녹아서 흩어져 무미건조하고 조화를 잃어버리고 아무 맛도 없는 음식을 살아나게 하고 그 음식 속에 깃들여 있는 여러 맛들을 다시 생기 있게 만들어서 먹기에 좋은 음식처럼 주님이 받으시기에 향기로운 음식으로 만들라고 이 소금을 내신 것처럼 우리들이 그렇게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 한번 보십시오. 성경은 우리들을 이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깊은 영혼의 변화를 받은 사람 그리스도의 이 자상생애를 통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어떻게 이 세상 불쌍한 인간들에게 나타났는지를 아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소금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이 세상을 맛있게 하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삶이 어떤 결과를 가져 오는가 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죄악이 가득하고 진리가 없어 어둡고 무미건조하고 맛없고 조화를 잃어버린 세상이라고 해서 낙심하지 마십시오. 어두움이 있기 때문에 빛은 빛나는 법이고 빛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어둠은 필수적입니다. 우리가 소금이기 때문에 소금으로 불러 주셨기 때문에 이 세상이 맛을 잃어버리고 조화를 상실해서 먹기에 역겨운 음식같이 이 세상이 부패해 버린 것 혹은 맛을 잃어버린 것은 진정으로 소금의 사람들에게는 기회가 아닐 수는 없는 것입니다. 비참한 사람들을 만나기전까지는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보여 줄 길이 없습니다. 불의한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는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인격적인 특징이 무엇인지 구별되지 않습니다. 난폭하고 포악한 사람들을 만난다면 온유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이 더욱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 주기에 적합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물질과 번영에 희희낙락해 하고 그 이상의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는 동물적인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의와 우리의 죄를 인해 그리고 이 세상의 사람들을 위해 애통하는 그 모습이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 주기에 얼마나 적합하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하나님은 이 세상을 우리에게 기회로 주셨고 주님이 이 세상을 향하여 절망하기 보다는 오히려 세상이 이러하기 때문에 우리의 사명이 훨씬 크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래서 우리를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속에서 살아가는 마음으로 주님의 은혜를 갈망하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한번 눈을 떠서 여러분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이 세상이 살아갈 아무가치가 없는 것처럼 여기는 여러분의 희망을 잃어버린 가족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교회에 나왔으나 그 참된 소금의 맛, 소금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무미건조하게 인생을 힘겹게 이어가고 있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를 어렵게 감당하고 있는 영혼의 핏기를 잃어버린 수많은 지체들을 보십시오. 여러분 주위의 이웃들 아무도 전해주는 사람들이 없어서 인생의 참 맛이 어떻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빛날 수 있는지를 전혀 모르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도 맛있는 음식과 같은 세상을 살아 본 적이 없는 두려움과 공포, 좌절과 낙심, 고독감과 소외감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의 이웃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래전부터 그들은 그렇게 살았고 아무도 돌보는 사람 없이 그렇게 이 세상의 낙엽처럼 버려졌습니다. 맛없는 음식처럼 버려졌습니다. 여러분이 아니면 누가 그들 속에 스며들어서 그들에게 인생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인생의 참맛은 이런 것이라고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이 여러분 말고 누가 있겠습니까?
(찬양)
이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간절히 주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여러분이 어디에서 미끄러졌든지 여러분이 버린 그 말씀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래서 염석은 한번 짠맛을 상실하면 돌이킬 수 없지만 맛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들을 다시 짠맛이 나게 하시는 일은 예수님이 날마다 하고 계신 일입니다. 그래서 실패한 베드로도 이 짠맛을 회복하고 그리스도의 교회의 위대한 신앙의 발자취를 남기고 예루살렘 교회의 첫 번째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이 은혜로 이 사람으로 돌아와서 일평생 여러분이 어디에 살든지 그렇게 맛을 잃은 세상에서 아무 살맛이 나지 않는 무미건조하고 조화를 잃어버린 이 세상에 참다운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기쁨과 그 영광스러운 은혜의 세계를 하나님 사랑의 세계를 보여주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소금으로 산다는 것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