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이 있는 복음
(2014년 청년수련회 저녁)
설교기간|2014년 7월 27-29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4년 8월 8일
사명이 있는 복음 1 (2014.7.27 청년 여름수련회 저녁)
목 차
사명이 있는 복음 2 (2014.7.28 청년 여름수련회 저녁)
1.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 2014.7.27 청년 여름수련회 저녁 1
2.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보물(벧전 2:9) 2014.7.28 청년 여름수련회 저녁 22
3. 그의 덕을 선포하라(벧전 2:9) 2014.7.29 청년 여름수련회 저녁 38
사명이 있는 복음 1
사명이 있는 복음 1 (2014.7.27 청년 여름수련회 저녁)
사명이 있는 복음 2 (2014.7.28 청년 여름수련회 저녁)
사명이 있는 복음 3 (2014.7.29 청년 여름수련회 저녁)
2014 온가족여름수련회 2014.07.27.(주일) 첫째날 저녁
<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9)
I. 본문해설
- 54~68년 네로의 박해시대에 기록된 듯함
- 로마에서 쓴 듯 "바벨론에 있는 교회" (벧전 5:13)
- 박해를 받고 있는 교회들을 격려함
- 실패의 경험: 소망 중 인내를 격려함
II. “산돌”이신 그리스도
- 장별 주제: 1장 소망, 2장 하나님의 백성
- 연결점인 그리스도: "산돌" (벧전 2:9)
- 예수 그리스도: 생명 돌+모퉁이 돌이 되심 (행 4:11)
- 예수께 접붙여져 함께 지어져 감 (엡 2:21)
- 영적 생명(중생을 통한 성화)+불완전함
- 중요한 소명은 세상 속에서 존재하는 것
- 영혼의 변화와 온전한 인격과 생활
- 이 모든 일이 그리스도 통해 성취됨
- 그리스도와 연합+물처럼 흐르는 삶
- 예수는 세상의 거치는 돌 (벧전 2:8)
III. 신자의 정체1: “택하신 족속”
A. “택하신 족속”
1. 이 구절의 의미
- genos eklekton "선택 받은 족속"
- a "한조상의 후손", b "민족, 족속"
- 당시 보편교회의 그리스도인들 지시
2. 당시 기독교인에 대한 인상
- "(이방인이나 유대인)아닌 제3의 족속이 나타났다"
『베드로의 설교』
- "기독교인이라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건한 족속들이
있다"
『폴리캅의 순교』
- "신성한 판결의 피고가 된 그리스인들은 선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족속입니다"『플루타크의 도덕론』
-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건한) 사람들"
=유세비우스의 멜리토=
3. 기독교인의 구별: 존재적 특성
- 하나님 사랑과 독특한 삶의 방식
- 구약 이방나라와 이스라엘의 구별
- 제의, 나라 크기와 제도가 아닌 존재의 다름
- 로마시대 때: “새로운 족속”, “제 3의 족속”으로 불림
B. 신자의 존재와 선포적 사명
- 교회의 언어적 선포와 존재적 선포
- 세상과 구별: 사상+삶의 방식 ⇒ 은 거룩한 인격
- 이 모든 구별을 지배하는 것: 사랑(은혜)
- 많은 사업보다 존재론적 선포 중요
- 예수님을 닮음: 정의-사랑 이상 인격임
- 예수님과의 만남: 새로운 방식의 삶+사랑
- 공동체 규합이 아닌 영적 엽합으로 보여줌
IV. 신자의 정체2: “왕 같은 제사장”
- basileion hieratuma
A. 두 가지의 해석
a. "왕의 제사장, 왕께 봉사하는~"
b. "왕 같은 제사장, 왕적 제사장"
- 루터의 새 해석으로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 긴장
- 루터는 말씀과 성례에 관한 동등 자격 강조
- "mamleket kohannaim"에서 유래 (출 19:6)
- "제사장들의 나라" 다른 표현임 (Calvin)
- 이방인에게서 성별됨 → 제사장
- 이방인을 향해 승리, 심판함 → 왕 같음
B. “제사장들의 나라”의 은유
a. 하나님의 특별한 민족적 선택
b.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의 중재자
c. 하나님이 특별히 아끼시는 족속 (호4:6)
- 제의/문화 일원론: 원뿔 구조임
- 둘의 분리는 없으나 제의적 사명이 우선임
- 건전한 종교의 기반 위에 문화사명 가능
C. 신약의 “왕 같은 제사장들”
a. 하나님께서 우주 만국의 왕이심
b. 교회는 하나님을 위한 봉사 공동체
- 봉사의 대상: 하나님+교회+세상
- 봉사의 핵심: 신적 경륜의 지상적 성취
- 세상을 향한 신적 경륜을 앎+자기를 앎
c. 신자를 통해 세상이 구원 받게 하심
- 구약 이스라엘의 존귀한 구원사적 지위
- 구약에서는 왕과 제사장 겸직 불가함
- 신약에선 예수 안에 두 직분이 만남
- 신자: 영적 연합 통해 두 직분을 계승함
- Clemens Alexandria의 설명
* 그리스도 왕국을 유업으로 받음: “왕 같음”
* 섬김의 기도와 가르침: 제사장
- 신자의 세상의 구원을 위한 섬김의 소명
- 세상의 중보자 예수 성육신의 모본을 봄
V. 적용과 결론
- 이미 대대적인 신앙의 박해가 시작된 때임
- 조직적 핍박과 함께 변절자들이 속출함
- 불신현실에 비관하지 말고 신자 정체성 숙고
- 어차피 참 신자 일생은 이 세상에서 거치는 돌임
- 예수님 생애의 고난과 소명의 영광을 숙고함
2014 온가족여름수련회 2014.07.28.(월) 둘째날 저녁
<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보물 >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9)
I. 본문해설
- 잘못된 신자의 삶: 신앙의 원리를 떠남
- 엉클어진 삶: 생각+실천+영적 오류 때문임
- 신자: 세계관/인생관의 혁명적 변화를 겪은 사람
- 무너진 옛 관점 위에 새로운 관점을 수립해야 함
- 자기관점 아닌 하나님 관점을 수용함이 신앙고백
- 신자 정체에 대한 인식의 유지가 요구됨: 지식+은혜
II. 신자의 정체3: “거룩한 나라”
- ethnos hagios “거룩한 나라”, “거룩한 민족”
- ta ethne “이방인들”, ethnos “이스라엘”
- “왕, 문화, 전통 의해 연합된 무리”를 뜻함
A. “거룩한”: hagios
- hagos(종교적 경외심)에서 유래함
1. 주께 바쳐진 구별 (마 4:5, 27:53)
- 하나님과 그분 봉사위해 미리 점유됨
- 또 다른 소유권이나 사용권이 허락되지 않음
2. 주님과의 관계 (수 5:15, 고전 3:17)
-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과 관련됨
a. 존재적 초월성: 미천 인식+경외심
b. 도덕적 완전성: 비참 인식+의존심
- 하나님의 거룩함, 체험 없이 신앙은 성립하지 않음
- 하나님의 거룩함의 체험: 속성+시행방식의 경험
- 진정한 경건은 비밀스런 종교적 원천을 가짐
- 이 보이지 않는 경건의 원천에서 세상과 구별됨 가능
- 예화: 일본의 국사된 젊은이 모친에 편지함
- 모친의 탄식 "피안의 다리 원했으나 명리승이 되다니..."
- 소명의 오해: 이런 저런 일하나 존재적 변화가 목표
- 신자는 존재로써 하나님의 누구이심(whoness) 알게 함
B. “나라”: ethnos
1. 거룩함의 소명: 공동체 독특한 특징
- “택하신, 왕 같은, 거룩한”: 모두 신적 관계를 의미
- 사회의 개혁과 도덕적 개선 말하나 신자는 속이 허함
- 교회가 하나님보다 세상 평가에 더 마음을 씀
- 사상, 윤리, 은혜를 추구하지 않고 대리만족을 구함
-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하나님 사랑” (마 22:40)
- "하나님 사랑, 의롭고 득특한 백성"
2. 네 가지가 필요함
a. 철저한 자기 성찰
b. 말씀의 빛이 필요
c. 마음을 쏟는 기도
d. 의로운 삶의 용기
III. 신자의 정체4: “하나님의 보물”
- "그의 소유가 된 백성"
A. 이 구절의 의미
- "laos eis peripoiesin"
- Heb. segula “자기 기업의 백성”(leam segullah, 신 14:2),
“나의 특별한
소유”(segullah, 말 3:17)
- segullah는 sagal(감추다)에서 유래 ('보석'KNJ)
- 전치사eis(into) 종말론적 구원 뜻
- "(하나님 자신)의 보물이 될 백성"
- 오류: "하나님께 속한 백성"(NIV), “하나님의 백성”(RSV)
- already~but not yet의 성격임
- "하나님 백성~긍휼 얻은 자" (벧전 2:10)
B. 주께 보물같은 백성들
- 이미 하나님 백성이나, 아직 완전치 않음
- 이미 소중한 자들이지만, 더욱 소중하게 됨
- 사랑 받고 있지만, 더욱 사랑받게 됨
-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된 교회의 소중함을 앎
- 그리스도의 언약의 성취로 통한 사랑을 받음
- 예수, 교회를 사심으로써 소중한 존재되게 하심
a. 애굽의 바로: 기적들과 희생 지불
b. 세상의 사탄: 구속과 희생으로 삼
- 교회의 사랑을 통해, '보물 같이' 여기시는 사랑 미리 맛봄
- 신자를 소중한 보물처럼 여기시는 사랑의 하나님
- 이 사랑은 개인적으로 뿐 아니라, 공동체로써 누림
- 그런 사랑으로 종말까지 영원토록 교회를 보존하심
- 수준 높은 영적 삶, 거룩한 의무: 사랑이 표지가 됨
IV. 적용과 결론
- 신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명료히 인식해야 함
-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거룩한 특권과 위로를 누림
- 이 세상은 버려도 그대는 보석 같은 존재임
- 소중한 것을 은밀히 숨기시고 보호하시는 주님
- 당신을 위해 그리스도가 지불한 희생을 잊지 말라
2014 온가족여름수련회 2014.07.29.(화) 셋째날 저녁
< 그의 덕을 선포하라 >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9)
I. 본문해설
- 구원을 개인적 차원에서만 생각하는 편견과 무지
- 신자의 구원을 새로운 언약 공동체의 성립 안에서 이해함
- 신자의 새로운 정체성은 그리스도 통한 은혜 언약의 산물
임
- 세계의 완성을 위한 하나님 경륜에 참여할 소명
- 이를 위한 신적 경륜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시려고
II. 우리에게 행하신 일
- hopos "어떤 식으로‥하기 위하여"
- 신자에게 새 정체성들을 주심은~선포하게 하기 위해
A. 어두움에서 불러 냄
- ek skotous hymas kalesantos
- "너희를 어두움으로부터 불러내" (벧전 2:9)
- 여성 skotia와 남성 skotos의 차이
- 자연적, 지적, 영적, 도덕적, 어둠의 담지자
1. 지성적 어두움
- "어둠에 감추인 것을 드러내시고" (고전4:5)
- 이방인으로 하나님에 대해 무지함
- 따라서 자신, 이웃, 세계에 무지함
- 또한 "조상의 망령된 행실"을 좇음 (벧전 1:14, 18)
- 무지 위에 구축한 세계와 삶에 대한 잘못된 견해
2. 영적인 어두움
-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간 이성으로 파악 불가함
- 이 세상 신이 복음의 광채를 가림(고후4:4)
- 자연인의 신령한 세계에 대한 무지와 오류들
- 거듭난 영적 감각 (영광+죄+사랑) 없음
- "빛이 있으라“ (창 1:2)
- 인간의 재창조는 세계의 창조를 따른 재창조 (고후 4:6)
- 초대교회: 이교도 회심의 증거 “어두움⇒빛”
- "어두움에서 빛으로" (행 24:18)
- 영적 어둠은 사탄의 권세를 동반함 (눅 22:53)
- "그로 인하여 우리의 어리석고 어두워진 총명이 빛을
향해 피어난다" (클레멘트 1서 36:2)
- “(신자는) 이방의 빛이 되게하며, 눈먼자를 보게하며, 족쇄
에서 끌러주며, 어둠에 앉았던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바나바 14:5-7)
- 십자가 사건은 사탄의 영적 권세를 무력화함 (골 2:15)
- 신자에게 자유를 주심은 결국 자율적 존재되게 하시기 위
함
- 영적자유⇒자율화⇒진정한 자유
3. 도덕적 어두움
- 영적 어두움과 결탁됨 (요 3:19, 롬 13:12)
- 이방인의 영적 무지와 부도덕한 삶
- 성도의 삶의 반복적 표현으로서 "단정함"이 나타남
- 롬 13:13등 신약에서만 6회의 용례
- 성도, 시민, 교인, 여성으로(롬 13:13, 딤전 2:2, 딤전 3:2,
딤전 2:9)
B. 빛으로 들어가게 함
- eis to thaumaston autou pos
- "그의 놀라운 그 빛 속으로"
- 전치사 eis(into)는 종말론적 진입을 의미함
- 그러나 already~but not yet의 성격임
- 영적 소경이 눈을 떠 하나님 알게 되는 것과 같음
- 이제 그 빛으로 인간과 세계와 자신을 새롭게 알게 됨
- 비로소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이끌린 인생 가능해짐
- 연약한 존재: 성경+교회+목양 통해 인생을 살아감
- 은혜에서 삶으로 잃어 버린 것은 어둠에 속한 것들임
- 찬란한 진리의 빛 안에 주신 거룩한 복락을 생각함
III. 하나님의 덕들을 선포하라
- hopos tas aretas exaggeilete
- 그리하여 “ 그 덕들을 사모하게 하시려고”
A. “그 덕들을”
- tas aretas: “그 덕들을"
1. 그리스적 문맥
- 도시국가가 높이 평가한 인간의 탁월한 성품
- 시민적 유익을 위해 칭찬 받을 가치 있는 인간 정신의 힘
2. 기독교적 문맥
- 영광의 나타남: 신적 구원 행동을 통해
- 세계에 드러난 영광: 신적속성+시행방식
- 하나님의 지혜, 선함, 권능, 공의 등을 가리킴 (Calvin)
- "날 위해 지었나니~찬송 부르게 하려함~"(사 43:21)
- "tehillati"와 "yesapperu" 해설
B. “선포하게 하려고”
- "너희로 상세히 말하게 하시려고"
- 인류에게 행하신 위대한 구원 경륜
- 신자만을 위한 예배 속에서의 선포가 아님
- 언어+존재(신자의 인격)+삶의 방식을 망라한 선포
- 교회의 존재론적 선포: 사상+윤리+은혜
a. 사상적 전투: 성경 진리를 확신함
b. 윤리적 전투: 신적 정의를 확신함
c. 신령한 전투: 은혜 필요를 확신함
- 세상을 살면서 고난, 희생, 수고를 일상으로 여김
- 믿음을 따라 살 때 고난을 일상적으로 여기게 가르침
- 믿음에 대한 댓가 아닌 이득만 가르침: 신앙의 힘을 상실
- 땀으로 읽고, 눈물로 쓰고, 피로 외치며 살아감
IV. 적용과 결론
- 세상에서 충성하되 때때로 세상을 멸시함
- 세상을 위해 섬기지만 영원한 나라의 영광과 비교함
- 그리스도의 고단한 삶과 하늘 영광을 묵상함
사명이 있는 복음 1
사명이 있는 복음 1 (2014.7.27 청년 여름수련회 저녁)
사명이 있는 복음 2 (2014.7.28 청년 여름수련회 저녁)
사명이 있는 복음 3 (2014.7.29 청년 여름수련회 저녁)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녹취자: 박지성
I. 본문해설
베드로전서는 54년∼68년 역사적으로 네로황제가 로마를 다스리던 박해의 시대에 기록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아마 이 서신을 베드로사도는 로마에서 쓴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전서 5장 13절에 보면 “바벨론에 있는 교회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니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자신과 함께하고 있는 교회를 지칭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아마도 로마를 암시하는 은유로써 바벨론이라는 이 역사적인 나라의 이름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가지고 있었던 당시의 로마를 향한 인식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타도되고 다시 세워져야 할 그런 죄가 가득한 인간 중심의 세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미 박해는 시작되었고 이제 이 박해를 앞두고 혹은 이미 받고 있는 교회들을 격려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편지를 썼습니다. 더욱이 베드로는 체포되고 처형당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과거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실패의 결국이 어떠함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베드로는 사랑하는 성도들을 격려하면서 소망 중에 인내하도록 강력히 촉구하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이 유서 깊은 2장 9절을 삼일동안에 걸쳐서 살펴보기 전에 먼저 1장과 2장을 연결해주고 또 3장과 4장의 중요한 피벗 포인트(Pivot point)가 되고 있는 이 2장의 앞부분에 언급되고 있는 산돌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개념부터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1장의 주제는 명백히 소망이고, 2장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3장에서는 가정으로 돌아와서 아내와 남편의 문제를 다루고, 그리고 4장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청지기로서 일생을 살 것인가를 가르치고, 마지막 5장에서는 다시 교회로 돌아와서 교회 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의 양 무리를 잘 목양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II. “산돌”이신 그리스도
이 바로 1장과 나머지 2, 3, 4, 5장을 연결해주는 중요한 개념이 하나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베드로 전서 2장 5절에 나오는 ‘산돌’의 개념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성경을 한번 보겠습니다. 2장 5절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너희도 산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 돌은 특별히 사도행전 4장에 나타나는데 이것이 바로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써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건물이 이쪽에서 벽이 쌓아올려지고 저쪽에서 벽이 쌓아 올려지려면 이 두 벽이 만나서 흔들리지 않도록 자리를 잡아주는 돌이 있어야 되는데 그 서로 다른 방향의 벽을 연결해주는 것을 ‘모퉁이 돌’이라고 합니다. 그 모퉁이 돌로써 이쪽 벽과 서로 방향이 다른 두 벽이 연결이 되어서 힘을 지탱하고 건물 전체를 떠받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자, 이것은 얼핏 보면 단순한 비유 같지만 아주 의미심장한 비유를 담고 있습니다.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면 당시의 이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유대인들의 지경을 넘어서 이방 나라에까지 전파되기 시작했고 다민족 사회인 로마제국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에 한 쪽으로는 이미 유대인들이 어떤 사람들이 이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그리스도인이 되기 시작했고 또 한 쪽에서는 유대인들이 전혀 종교적으로 상종하지 않는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을 처음에는 유대인들이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대인들 중에서 이름 없는 사람들을 들어서 이 편견을 깨뜨리신 것이 아니라 당시 예루살렘교회의 최고지도자였던 베드로를 직접 깨뜨리셔서 그래서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이 복음을 베푸시고 유대인과 꼭 같이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백성들을 만들어 가신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상들을 가지고 이제 유대인들을 설득했고 이것이 이제 기독교신학의 아주 중요한 주제가 되었습니다. 한 쪽 벽은 유대인들이었고 또 한쪽 벽은 이방인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벽이 그리스도 예수의 모퉁이 돌(Cornerstone) 되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로 연결되었는데 오늘 이것을 산돌이라고 말하는데 생명의 돌입니다. 즉, 무슨 뜻이냐면 건물은 그저 생명이 없는 건축자재들로 만든 것이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보통 모퉁이 돌이 되셨다고 할 때에 그 돌은 단순히 건물을 있게 하는 종류의 돌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돌로서 이제 유대인들이든지 이방인들이든지 각자가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동일하게 접붙여지고 그분께로부터 오는 삼위일체의 생명과 사랑을 공급받음으로써 사실상 하나의 몸으로 건축되어 간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는 것은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개인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하고 거듭나서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여지면 그때 접붙여질 때 이미 나 혼자가 아니라 이미 접붙여진 수많은 성도들과 함께 영적으로 연결이 되어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져 한 부분이 되는 것이니 그 지체들이 없이 자신도 없고 자신이 없이 지체들도 없고 더욱이 그리스도 없이 우리 모두는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와 삼위일체 하나님 그리고 그 안에서 만난 모든 교회의 지체들이 하나의 연결을 이루면서 한 영적인 공동체인데 이것이 바로 모퉁이 돌인 예수 그리스도, 산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과 사랑을 공급받아 우리도 또한 산돌이 되어서 그래서 또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전달해주는 통로가 되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질 때까지는 어차피 이 세상에 죄와 불안전함이 공존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구원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여전히 죄의 영향력들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불안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자의 소명이, 신자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 수련회의 주제를 보면서 여러분은 아마 이런 생각을 했을지 모릅니다. ‘목사님이 이번 수련회 때 우리 모두 모아놓고 교회일 열심히 하라고 한번 심하게 아마 밀어붙이실 모양이다. 아니면 나를 보고 선교사로 가라 그러시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취직도 잘 안되는데, 진학도 잘 안되는데, 신학교를 가라고 하시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혹시 나보고 사모가 되라고 그러시는 것이 아닐까?’ 등등. 우리 주변에 보면 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정말 이 세상은 할 일 천지입니다. 진짜 우리가 평균수명의 열배를 더 살아도 온 인류가 그렇게 다 살아도 다 할 수 없을 일들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왜? 그렇게 오래 살면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에 또 사명이 자꾸 새롭게 생겨날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어차피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소위 이야기하는 패러다임 시프트(Paradigm Shift)를 하라는 이야기입니다. 뭐냐면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차대한 사명은 뭐냐면 선교를 하고 교회의 이런 봉사를 하고 저런 봉사를 하는 그것이 가장 중차대한 사명이 아닙니다. 그것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하찮게 취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것들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가장 중차대한 사람은 그냥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가복음 4장에서 제자들을 처음 부를 때 왜 부르셨는지 여러분은 기억하십니까? 왜 부르셨습니까? 제일 먼저 두 가지가 나오는데 그것이 뭐냐면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뭐냐면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의 가장 중요한 소명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존재한다고 해서 있다고 해서 모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이 붙어있다고 해서 모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게 우리들이 이제 앞으로 삼일동안에 그러면 ‘도대체 그리스도인으로서 참으로 중요한 사명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러면 도대체 어떠한 사람으로 존재하고 어떠한 방식의 삶을 영위해가는 사람이 될 것인가?’라는 문제를 집중해서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뭐냐면 그리스도인이 어떠한 모습으로 어떠한 존재가 되어서 이 세상에 있고 어떠한 방식의 삶을 사는 것이 자기의 사명이라고 생각을 해도 이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왜냐면 그런 존재를 세상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세상 사람들이 다 좋아하느냐 안 좋아합니다.
(예화) 우리 장인어른이 아주 오래 전에 돌아가셨는데 이분은 경제적인 여유도 있으신 분이었는데 병원에 가서 진찰이라는 것을 한 번도 안 받아보셨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암이나 이런 질병은 아니고 어쨌든 장이 좀 안 좋아지셔서 결국은 돌아가셨는데 그래서 왜 가서 진찰을 받아보시지 그러냐고 했더니 이분 하는 말이 재미있습니다. “그냥 모르고 살다가 죽지 가서 사진을 찍었는데 덜컥 암이다 당신 얼마 못 산다 그런 진단을 받으면 얼마나 끔찍하겠느냐.” 그것이 병원에 안 가신 유일한 이유입니다. 사람들이 병을 미리 발견하고 치료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 기술이 좋은 것임을 인정하지만 모두 다 그렇게 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어떤 존재로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 그것이 제일 큰 소명이고 사명이고 또 그런 존재가 되면 거기에서 자연스럽게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삶의 방식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를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는 것이 압니다. 물론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화) 제가 맨 처음에 서른넷에 교수가 되었을 때 그냥 어느 강의실에 들어가든지 저를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아주 확연하게 구분이 되었습니다. 그때 좋아하던 사람들은 25년이 지난 지금도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때 싫어하던 사람은 아마 지금도 싫어할 것입니다. 확인은 안 해봤지만. 왜? 커닝하는 것 무지하게 싫어해서 반드시 잡아내서 처벌을 받게 만들었고 그리고 커닝 같은 것도 이렇게 책상에 미리 와서 써놓으면 전부다 책상에 뭐 쓰인 것은 복도 밖으로 내놓게 하고 다른 교실에서 책상을 가져다 시험을 보고 그러니까 내가 어느 반에 시험 감독을 들어가느냐에 따라서 장학생 분포도가 변한다고 했습니다. 어떤 학생들은 참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싫어합니다. 나를 나쁜 사람이라고는 이야기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좋아하지 않는 것은 너무 분명합니다.
나는 이제 계속해서 이 용어를 많이 쓸 것입니다. ‘존재적 선포’ 따라해 보십시오. ‘존재적 선포’ ‘The present is best proclamation.’ 현존하는 것이 최고의 선포다. 그것을 나는 존재적 선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Ontological proclamation’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웅장한 울림이 됩니다. 나는 그것을 존재적 선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것, 하나님의 뜻에 맡게끔 존재하는 모든 인간은 우렁차게 울려 펴지는 선포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가 죽었을지라도 여전히 그의 현존이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의 가장 위대한 사명이라고 나는 결론부터 말씀을 드립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명이라고하면 각자 자기의 취양에 따라서 이 일 저 일을 합니다. 그것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다양한 섬김이 필요합니다. 여기에 와서 편안하게 예배를 드리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섬김이 있었습니다. 재능을 따라서 수많은 사람들이 섬겼습니다. 그런 일들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에 기초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존재가 되어서 그 사람이 아무 일하고 있지 않아도 그 자체가 선포가 되는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위대한 사명입니다.
III. 신자의 정체1: “택하신 족속”
그러면 이제 오늘 사도 베드로는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 신자들을 어떤 사람이라고 정체성을 자리매김하느냐 이것을 오늘과 내일에 걸쳐서 살펴보고 마지막 날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문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네 가지 정체성을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성경을 보셔도 괜찮습니다. 첫째는 너희는 택하신 족속, 두 번째는 왕 같은 제사장, 세 번째는 거룩한 나라, 네 번째는 그의 소유가 된 백성,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정체성입니다.
A. “택하신 족속”
그러면 제일 먼저 첫 번째 정체성인 ‘택하신 족속’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게노스 에클레크톤’(γένος ἐκλεκτόν)이라고 희랍어로 되어있습니다. ‘선택받은 족속’이라는 뜻입니다. ‘게노스’라는 희랍어 단어는 한 조상으로부터 한 핏줄로 태어난 확장된 가족입니다.
그래서 구약 히브리어 성경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디아스포라가 되고 난 다음에 히브리어를 못하는 애들이 많이 생겨나니까 그 사람들에게 성경을 읽히기 위해서 그것을 희랍어로 번역을 합니다. 그때에 약 70여명의 열두지파 대표들이 모여서 번역을 했기 때문에 ‘70인역’이라고 불립니다. 예수님 시대 때에 많은 사람들에게 아주 폭넓게 읽히던 성경책이 히브리어 성경책보다 오히려 70인역 성경책이었습니다. 그래서 70인역 성경책을 가지고 사람들이 설교할 때 그 기억을 가지고 설교하기도 했고 이랬습니다. 더욱이 구약에서 어떤 단어들이 신약의 개념으로 넘어올 때는 말하고자하는 것이 그 당시에 코이네 희랍어 방언이었기 때문에 희랍어로 된 성경을 가지고 생각할 때는 이것이 유통이 빨리 빨리되었습니다. 그래서 70인역 성경이 그런 것이라고 이해를 하고 3일 동안 설교를 들으면 될 것입니다. 70인역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70인역에 보면 이제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셉스토리에 보면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었고 형들이 양식을 구하러 갔을 때 요셉이 너희들이 누구냐고 물으니까 “우리는 한 아비에게서 태어난 족속들입니다.”라고 할 때 바로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핏줄로써 한 조상아래 태어난 커다란 패밀리(family)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렇지 않더라도 왕이나 국가적인 경계, 혹은 동일한 문화에 의해서 하나의 유닛(unit)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의 무리를 가리켜서 그 사람들을 ‘게노스’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자, 그렇게 놓고 보면 이것은 오늘날처럼 이렇게 영토로 줄그어진 그런 하나의 나라라기보다는 한 조상을 가진 동일한 사상과 문화를 가진 한 덩어리로 된 어떤 공동체적인 족속들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을 바로 이 족속으로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사도 베드로가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라고 할 때 이것은 어느 지역에 있는 한 교회나 수신자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당시에 로마제국 전체에 흩어져있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을 하는 모든 신자들의 영적인 연합인 보편교회의 신자들을 가리키는 용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러분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오늘날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표지, 즉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그리스도인이 이런 것이 있어야지만 그리스도인이지 아 저것을 보면 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라는 소위 이야기하는 싸인, 표지라는 것이 있을까요? 그리고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우리입장에서 생각해보지 말고 여러분이 불신자였던 시절을 생각해 보면서 예수 믿는 사람들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인상, 누구 김 자매, 박 형제, 누구 아저씨 이런 개별 사람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다는 족속 전체를 하나로 놓고 볼 때 그들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오늘날 불신자들의 인상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어떤 것일까요? 좀 얘기를 해봅시다. 형제에게 기회를 주겠습니다. 일어나서 큰 소리로 이야기 해 주십시오. “착한 사람입니다.” 그대는 예수 믿기 전에 그리스도인은 착한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까? “네” 유병언 씨같은 사람도 있는데. 어떻게 하지? “잘 몰랐습니다.” 다행입니다. 또 한 사람이 얘기해 봅시다. 예수 안 믿던 시절에 예수 믿는 사람에 대해서 가지는 인상을 어떤 것이었나요? “그리스도인들은 부처님을 싫어하는 사람, 부처님과 싸우는 사람들이라는 인상이었습니다.” 나는 예수 안 믿을 때도 부처님이랑 싸우지 않았는데. 자, 그러면 우리 변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들어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불신자이던 시절에 받은 인상은 무엇이었습니까?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 “기도 열심히 하는 사람”, “술, 담배 안하는 사람”
자, 그러면 이제 타임머신을 타고 한 1800∼1900년 정도를 거꾸로 올라가서 그 때 사람들은 기독교인을 뭐라고 생각했는지 한번 그 때 사람들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재밌지 않겠습니까? 별로 기분 좋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베드로의 설교’라는 외경이 있습니다. 성경 비슷하게 쓰였지만 그 내용이나 역사적인 권위 같은 것에 있어서 신빙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성경 속으로 들어오지 못한 외경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일반적인 문서로밖에 취급을 안 합니다. 그러나 가톨릭에서는 그것을 성경의 일부라고 봅니다. 제2정경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거기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스도인의 출현에 대해서 초창기에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도 아닌 제3의 족속들이 나타났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면 이 증언에서 우리들이 어떤 생각을 할 수 있느냐면 유대인들이 본 관점에서 이 이방인들에게는 아주 뚜렷한 삶의 방식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방식이죠? 철저하게 인간 중심적인 사고입니다. 그들이 신들을 수 없이 만들어 냈지만 그 신들도 사실 인간을 위한 신들입니다. 그리스의 신들을 보면 모두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집트의 신들을 보면 개도 나오고 소도 나오고 주둥이가 삐죽하게 나온 동물들의 모양이 많습니다. 그렇게 다릅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 나름대로 아주 뚜렷한. 이방인, 유대인을 구별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사람들 대화해보고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보면 완전히 다르지 않습니까? 유대인은 유인의 방식으로 유대인의 존재로 살아가고 이방인은 이방인의 존재로 이방인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라는 제 3의 족속들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독특한 존재들이고 독특한 삶의 방식이 있는 족속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방인처럼 살다가 유대인 얘기를 들으면 유대인처럼 행동하고 이러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존재가 있었고 독특한 방식이 있었는데 그것은 이제까지 우리들이 이방인이나 유대인들에게서는 못 보던 방식이다. 상당히 신선한 충격 아닙니까?
또 들어보겠습니다. ‘폴리캅의 순교’라는 외경이 있습니다. 폴리갑은 사도요한의 제자입니다. 속사도 교부라고 부르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순교라는 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건한 족속들이 이 세상에 있다.’ 그 사람들이 볼 때 기독교인에 대해서 가진 인상은 뭐냐면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세상과는 구별된 경건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증언들이 교회 안에서 하는 증언이 아니라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그리스도인을 보았을 때 받는 인상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완전히 불신자입니다. 플루타크 영웅전을 쓴 ‘플루타크’를 아실 것입니다. 그 사람이 쓴 유명한 책 가운데 ‘도덕론’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제 위험한 사상을 퍼트린다는 이유로 여기저기서 고소를 당했습니다. 로마는 법제도가 잘 되어있는 나라니까 고소를 당하니까 정당하게 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로마의 법정에 의해서 내려지는 판결을 이 사람들은 디바인 저지먼트(divine judgment) ‘신성한 판결’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플루타크가 ‘신성한 판결의 피고가 된 그리스도인들은 선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족속들입니다.’ 이것이 불신자의 눈에 비친 예수 믿는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이 비록 로마의 법을 어겼다고 의심이 되어서 재판을 받고 있지만 그들은 선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족속들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족속들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인상이었습니다.
‘유세비우스의 멜리토’라는 인물이 있는데 거기에는 그리스도인을 뭐라고 표현했냐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방 사람들이 볼 때 그리스도인을 딱 볼 때 어떤 인상을 받은 것이냐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입니다. 로마 황제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들이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사람들. 그래서 사람들이 볼 때 방탕하게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아주 경건하게 사는 사람. 그것이 불신자들의 눈에 비친 1세기, 2세기 시대 때의 그리스도인에 대한 인상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동네에 가서 도랑을 쳐주고, 우물을 파주고, 청소를 해주고 받은 인상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것도 포함되어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그냥 그 자리에 서있는 그리스도인의 존재 자체가 자기네랑은 종자가 다른 종자라는 것을 인식을 한 것입니다. 성품과 인격도 다르고 그 다음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인생관과 세계관도 완전히 판이 달라서 자신들이 너무나 좋아하는 것들을 이 사람들을 싫어합니다. 자신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행하는 것들을 이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안하겠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죽기보다도 싫어하는 일을 그리스도인들은 기쁘게 합니다.
제가 시간이 있다면 더 이야기하고 싶은데 진도를 나가야합니다. 지금 설교를 4/1밖에 못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여기서 맺습니다. 그래서 얼기설기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 한 것을 끝까지 한 것을 전부 다 얽어 묶어서 하나로 간절히 이야기하고 여러분에게 깨우쳐주고 싶은 내용이 뭐냐면 당시에는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라는 족속을 보면서 그들이 강한 인상을 받은 것이 뭐냐면 종자가 다른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종자가 다르다는 것이 교회의 성경찬송을 들고 간다든지 착한 일을 한다든지 그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자신들과는 다른 종자들이다. 거기에서 울려 퍼지는 어떤 웅장한 울림이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 생각해 봅시다. 기독교가 전파될 때에 저 상층부에 있는 사람부터 예수를 믿기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부르신 사람들은 하층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복음이 하층민에게만 파고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상층부까지 파고 들어갔습니다. 상당히 지체 높은 사람도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왜? 복음은 만약에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기쁨을 준다면 그것은 진정한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모든 세대와 계층을 넘어서는 기쁜 소식입니다. 왜?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먹고 사는 것 차이가 날지 모르지만 인생의 근본적인 소외의 문제,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는 공통분모를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모두 그런 것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도들이 복음을 전했을 때도 아주 가난한 평민들만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라 지체 높은 사람들도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의 집단이 아주 탁월한 인텔리겐치아들로만 구성되었다고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무슨 이야기냐면 머슴 노릇을 하고 남의 집에서 종살이를 해도 기독교인이 되면 확고하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붙들고 살 때에 이 사람들은 비천한 사회적인 처지에도 불구하고 존재적인 울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도대체 무슨 힘일까? 오늘 우리들을 생각해봅시다. 우리들에게는 그런 울림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이제야 반성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이렇게 나쁜 인상을 주었구나.’ 그러면서 뭐냐면 소위 회사에서 많이 사용하는 이미지개선 작업을 하자고 합니다. 그러면 회사가 계속 부도가 나고 도덕적인 추문에 휘말리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주가가 막 떨어지지 않습니까? 자금조달이 어려워지고 그 다음에 투자했던 사람들이 돈을 다 빼갑니다. 그러면 회사는 경영에 위기에 처하게 되고 은행은 돈을 안 빌려주고 외국은행에서 돈을 빌리려고 해도 신용이 떨어져서 많은 이자를 물게 되거나 혹은 대출을 받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외국에서 그런 행위를 해도 나라에서 보증을 안 해줍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합니까? 이미지 개선 작업을 합니다. 어떻게? 이제 광범위한 앙케트 조사를 해서 우선 CI를 바꿉니다. 회사 로고를 바꿉니다. 그 다음에 사장이나 이런 임원들을 바꾸고 그 다음에 돈만 알았던 기업이 돈도 좀 풀어서 가난한 사람도 주고 휴일이면 직원들 나오라고 해서 가난한 동네에서 연탄배달도 하고 그때는 신문사에 다 연락을 해서 봉투 다 주고 기자들 오라고 해서 사진도 찍어서 잘 좀 부탁한다고 하고 이런 일을 몇 년 동안 합니다. 그러면 이미지가 개선이 됩니다.
오늘날 교회가 하고 있는 일이 그것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나의 이런 이야기들에 대해서 동의를 안 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주 나쁜 것이다 하지말자 그런 뜻이 아니라 긴급동의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그것이 바로 초대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에 대해서 가졌던 그 인상의 뿌리는 무엇인가? 왜 그것이 지금은 없어졌는가? 이 문제를 고민하고 답을 찾는 것이 교회에 대한 이미지개선 작업보다 훨씬 더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동의한다면 아멘을 해보십시오. 열린 교회에서 이정도 소리가 나는 이것이 동의가 되겠습니까? 동의합니까? 결국 기독교인의 구별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저런 행동을 하는 것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화) 설교 속에서 내가 한 번 정도 인용을 한 기억이 있는 예화인데 예수 믿는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직업이 뭐였냐면 감정사였습니다. 감정사의 힘이 막강한 때가 있습니다. 기업이 이제 위기가 와서 자금을 은행에서 빌려야 하는데 부동산이 많지 않습니까? 그러면 감정사가 이것을 감정을 해주는데 감정사에 따라서 몇 배씩 차이가 나고 그럴 수는 없지만 한 10%나 심하면 20%정도 차이나는 것은 가능합니다. 감정사의 재량입니다. 그래서 감정사가 예를 들어 1000억을 대출을 받을 것을 10%만 감정을 높이 평가해주면 1100억을 대출을 받을 수 있습니다.
감정사라는 형제가 지방에 감정을 하러 내려갔습니다. 당연히 여관방을 잡고 가서 앉았는데 그날 밤에 감정 받을 대상이 된 기업체의 사장이 찾아온 것입니다. 보자마자 무릎을 꿇고 도와달라고 간절히 빌더랍니다. 그러면서 가방을 하나 주더랍니다. 그래서 가방을 열어보니까 신문지로 싼 이만한 덩어리가 나왔는데 그때는 5만 원짜리가 없었으니까 딱 놓고 펼쳐보니 다 낡은 돈입니다. 백만 원씩 묶은 것 15묶음이 나왔습니다. 1500만원입니다. 그러니까 일부러 이 사장이 은행에서 새 돈을 찾아서 직원들 시켜서 다 헌 돈을 모은 것입니다. 번호가 추적이 안 되도록 한 것입니다. 그것을 주면서 한번만 살려달라고 합니다. “정말 어려운 때 사업하시는데 제가 꼭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이 돈은 가지고 가십시오. 아,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저도 너무 너무 갖고 싶습니다.” 왜? 그 당시의 봉급으로 일 년 연봉이 더 되는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받으면 안 됩니다.” “왜 그러십니까?”, “좀 일찍 가져오시지. 제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 전에 가져오셨으면 받았을 텐데 죄송합니다.” 그 때에 여러분이 그 사장이라면 안타까운 마음에 가서 도와달라고 하니까 친절하게 잘 해주는데 자기를 다 받아주면서 “사장님 제가 정말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러면서 돈 가방을 밀어놓을 때에 여러분이 사장의 입장이라면 밀려오는 울림이 어떤 것입니까? 저 사람이 돈을 나한테 안 받았다는 행동입니까? 아니면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이구나 하는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그것이 존재적 선포라는 것입니다. 이러면 존재적 선포가 안 됩니다. “사장님, 남들이 다 보고 있는데 여기서 이것을 어떻게 받습니까? 가져가세요.” 이것은 존재적 선포가 아닙니다. 이것은 다음에 여건이 갖춰지면 받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뭡니까?
그것이 내가 이야기하는 존재적 울림입니다. 그 형제는 1500만원이었기 때문에 안 받은 것이 아닙니다. 150만원을 가지고 왔으면 받았을까요? 1억5000만원이면? 액수하고 상관이 없습니다. 이 머리의 구조와 마음과 정신 자체가 그런 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얼마짜리 봉투냐 이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이 내가 이야기하는 존재적 울림입니다. 돈이 싫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돈이 얼마나 우리를 편리하게 해주는지 아십니까? 여러분, 돈 조금 더 내니까 넷이서 방을 쓰지 않습니까? 형제들이 단체로 들어가는 방은 쌉니다. 자매들을 위해서 형제들이 희생을 한 것입니다. 항상 그것을 기억해서 만날 때마나 고맙다고 해야 합니다. 아이디어는 내게서 나왔지만 희생은 형제들이 했습니다. 돈이 얼마나 좋습니까? 싫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존재 자체가 다릅니다. 사실 이것이 삼일 설교할 내용의 전부 다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존재적인 장엄한 울림이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돌아갈 것인가? 이런 존재적인 울림은 ‘에이, 세상이 더러우니까 나는 깡다구로 그렇게 안살거야.’ 이런 사람에게서 울려나오는 그 울림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그날 그 돈 안 받은 것을 돌아다니면서 얼마나 자랑하겠습니까? 그것은 존재적 울림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이 이방 나라들과 뚜렷이 구별이 됐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나라의 크기? 군인들의 숫자? 다윗왕국의 영광이라고 말하지만 세계 역사에서 보면 얘기했지 않습니까?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 이스라엘은 두 줄밖에 안 나옵니다.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인 아주 코딱지 같은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역사상 가장 큰 나라였던 이집트나 중국이나 로마를 선택하셨으면 참 효과적이었을 텐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습니다. 놀랍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 세상에 알리시기 위해서는 그렇게 큰 무리들이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왜? 그 존재적 울림은 사람들의 숫자에 의해서 그 울림의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순수한 울림인가에 의해서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듣기에 기분이 안 좋을지 모르지만 하겠습니다. 들어보십시오. 여러분이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아직도 성철스님에 대한 존경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비록 그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아니지만 신, 불신자를 막론하고 성철스님이나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깊은 존경심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 분이 무슨 일을 했는지 아는 사람이 우리가운데 몇 명이나 될까? 고향이 어디인지 아세요? 무슨 일을 했는지 아세요? 아주 높은 불교의 지위에 오를 수도 있었는데 아주 젊은 나이에 다 그만두고 공부에 몰두하셨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사람이 이런 저런 행동을 해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것은 오래 안 갑니다. 그런데 존재 자체가 울림이 되어서 감동을 받은 감동은 마치 명작과 같아서 세월이 흐를수록 명작의 가격이 떨어지는 법은 없습니다. 모나리자의 모조품이 많이 나올수록 진짜 모나리자의 값은 계속 오릅니다. 왜? 진품이고 이것이 작품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명품가방이나 액세서리는 모조품이 많이 나올수록 진품의 가치가 높이 올라갑니다. 그것이 바로 존재적인 울림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선택하실 때 하나님이 그들을 이 세상에 도드라지게 하신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제사제도나 나라의 크기, 국가제도 이런 것이 아니라 존재자체가 너희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어라.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소명이었습니다. 그 유명한 것이 바로 무엇입니까? ‘구약’이라고 할 때 그 구약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옛날 언약입니다. 새 언약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죄가 속해지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인데 이것이 새 언약인데 옛 언약은 바로 뭐냐면 출애굽기 19장 6절에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이게 바로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하나님이 되리라 이것이 바로 약속입니다. 신약도 이 구약의 약속을 새로운 방식으로 실현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최고의 사명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자신들의 하나님이 되는 것이고 자신들은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 되는 것, 이것이 최고의 사명이었습니다.
B. 신자의 존재와 선포적 사명
그래서 로마시대 때에 그리스도인들을 새로운 족속의 등장, 제3족속의 출현이라고 불렀던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존재와 존재의 선포적 사명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선포는 언어적인 선포와 그리고 존재적인 선포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를 믿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라는 말의 선포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믿을 수 없고, 믿지 못하기 때문에 고백할 수 없고, 고백할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의 선포, 언어의 선포가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존재적 선포가 있어야합니다. 어떤 것을 했다 안했다 그 문제가 아니라 사람 됨됨이가 예수 안 믿는 사람과는 판자체가 다른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거기에서 울려 퍼지는 장중한 울림 이것이 바로 존재적 선포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구별된 사람이고 또 앞으로도 구별된 사람으로 살아가야 될 소명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 대표적인 구절이 “너희는 세상을 본받지 말고” ‘수스케마티조’(συσχηματίζω)라는 단어인데 틀에 부어서 찍혀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시대에 살면 사람들이 다 똑같은 생각을 합니다. 유행이 대표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흐름에 항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에서 찍혀 나오는 사람들이 아니어야 됩니다. 결국은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구별되도록 부름을 받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은 우선 사상적으로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사상적으로 다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서 완전히 새로운 세계관과 인생관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교회 다니면서 요새 책들 안 읽는 사람들은 절대 안 보고 읽는 사람들을 진짜 열심히 읽습니다. 대단합니다. 우리교회 지체들을 보면 얼마나 열심히 책을 읽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소수입니다. 대부분은 음식 한 끼 먹을 때 2만원 그러면 맛있게 먹어도 책 한권이 2만원 그러면 너무 비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고는 내려놓습니다. 책을 안 읽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무리 깊이 만나도 이후에 탄탄하게 교리를 공부하고 지식에 기반이 세워지지 않으면 남다른 사상을 가질 수 없습니다.
(예화) 제가 벌써 오래된 일입니다. 어느 교회에 갔는데 설교하러 갔는데 교회가 꽤 컸습니다. 로비가 꽤 컸습니다. 차가 어떻게 들어왔는지 교회 로비에 자동차가 들어와 있습니다. 승용차, 오토바이 등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1등, 2등 경품을 붙여놓았습니다. 이것이 뭔가 했더니 6개월 동안 전도를 해서 제일 많이 한 사람에게 승용차를 준다고 합니다. 2등은 오토바이, 3등은 자전거 해서 쭉 경품을 세워놓았습니다.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전도해야 되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사상이 제대로 안 새겨지니까 경영학적인 경품논리가 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자동차를 사다가 거기에 놓고 전도 제일 많이 하는 사람은 그것을 주겠다고 하고 교회에 사람들은 전도 많이 해서 저 자동차를 타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을 아무리 만났어도 착실하게 지식으로써 사상의 골격이 세워지지 않으면 예수님 만났어도 존재적인 울림이 안 나올 수가 있습니다. 알고 보니까 그것을 자동차를 교회의 헌금으로 산 것이 아니라 다 사람들이 전도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헌신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자동차는 장로님이 내놓으신 것입니다. 그분도 예수님을 만나고 교회를 사랑하는데 신학이 없으니까 그런 식으로 밖에 표현을 못 합니다.
(예화) 최근에 어느 교회에서 엄청나게 많은 돈에 대한 문제들이 일어나면서 재정을 담당하던 어떤 사람이 아파트에서 뛰어 내려서 투신자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웬 돈이 이렇게 많으냐? 연초에 세배하러올 때 목사님께 20억도 가져다 놓고 가고, 10억도 가져다 놓고 가고 “이 돈을 내가 가지고 있으면 보람 있게 쓰지 못하지만 목사님은 쓰실 수 있을 것입니다.”하고 놓고 갑니다. 그 사람이 매우 나쁜 일을 하고 간 것입니까? 돈 있는 사람들에게도 10억, 20억은 큰돈입니다. 주님을 만났습니다. 목사님을 보니까 굉장히 신실하십니다. 자기가 이 돈을 가지고 있으면 세속적으로 쓸 텐데 목사님 드리면 잘 쓰겠다고 드렸습니다. 뭐가 문제가 있습니까? 문제없습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서 다 순수한 동기에서 해도 마지막의 결과는 울림이 안 나옵니다.
그래서 뭐냐면 예수님을 깊이 만난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신학이 세워져야 합니다. 인생을 어떻게 바라보고 교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하는 것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교회의 성도들의 수준이 떨어지지 않는데 그런 사람을 한 번도 못 만났습니다. 세배하러 온 사람도 없었고. 왜 세배하러 와서 10억, 20억 놓고 가면 나는 꼭 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진짜 내가 해보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목사님, 저희 전 재산이 100억이 있는데 이것 제가 쓰면 아무래도 허투루 쓸 것 같아서 목사님께 한번 맡겨보겠습니다. 목사님이 이것을 가지고 잘 써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꼭 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신앙생활이나 잘하세요.” 휙 던져버리고 돌려보내고 싶은 것, 그것을 꼭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연출을 안 해줍니다. 도와주지를 않습니다. 어떻게 한번 도와주세요.
그래서 꼭 필요한 것이 뭐냐면 사상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기독교 사상의 학교에 입학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배우지 않으면 그는 짐승 같은 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나마 잘 몰라도 똑 바른 것 하나라도 꽉 붙들고 신앙생활을 하면 되는데 인간이 그렇게 항상 꽉 붙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닌 것을 잘 알지 않습니까? 내 마음이 새벽에 나와서 눈물로 기도하고도 오후에는 잊어버려서 자기 욕심대로 행합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사상이 주요합니다.
두 번째가 뭐냐면 삶의 방식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유명한 책 가운데 ‘기독교인의 삶의 방식과 이교도의 삶의 방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확고하게 비교하는 것입니다. 왜? 성경적으로 볼 때 한 사람의 삶의 방식이라고 하는 것은 일관성이 있습니다.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다하는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그 방식이 달라야합니다.
그러면 이런 사상, 그 다음에 삶의 방식,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그 사람의 존재에서 오는 것입니다. 사람의 됨됨이에서 오는 것입니다. 아까 이야기 했듯이 그 돈 가방을 밀어놓는 젊은 감정사에게서 받는 그 사람의 큰 충격이 어떤 것이었겠습니까? ‘아! 이 사람이 뇌물을 이번에 거절했구나.’ 그것이 아니라 이 사람이 아주 겸손하게 “아니 사장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좀 일찍 가져오시지 제가 이미 그리스도인이 되었거든요.” 하고 이렇게 밀어 놓을 때 이 청년이 한마디도 자기에게 돈을 주는 이 사장에 대해서 비난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너는 그런 식으로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장중한 울림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도 나무라지 않았는데 장중한 울림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존재적 선포입니다. 이 세상에 이런 존재적인 구별을 계속 유지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를 깊이 만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왜? 예수 믿는 우리들도 유혹을 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수시로 받습니다.
(예화) 여러분이 아무리 선교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직장생활을 한다고 하는데 연말에 친구를 만났습니다. 좋은 회사를 다녀서 늘 부러워하는데 “연말에 어떻게 잘 지냈니?” 그랬더니 “어우, 되게 힘들고 바빴어.”, “그래?”, “그래도 위로는 좀 있더라.”, “뭔데?” “우리 사장님이 나 고생 많이 한다고 1000%보너스를 줬어.” 내가 그렇게 받는 사람들을 몇 사람 봤습니다. 연말에 가서 월급 십일조를 한 1000만 원 정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1000%나 1500%를 받는 것입니다. 희귀한데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겨우 250만원, 300만원 받고 사는데 얘는 나보다 월급을 400만 원 정도 받는데 사장님이 1500%정도 챙겨서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6000만 원쯤 받았습니다. 나는 그것을 하려면 5년을 적금을 부어야 하는데 얘는 인센티브로 받아서 챙겼습니다. 부러워요 안 부러워요? 다 부럽다고 하지 않습니까? 교회에 와서는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안 부러운 척 해야 합니다. 유혹을 받지 않습니까?
나는 그래도 매일 교회에 가서 장가보내달라고 기도하는데 안 생겨요. 만날 건들건들하게 돌아다니는 형제가 어느 날, 예수 안 믿는 아인데 내가 밥 한번 살게 만나자고합니다. 만났더니 “야, 인사해.” 너무 예쁘게 생기고 대화해보니까 어떻게 위로를 했냐면 ‘에그, 머리는 텅 빈 애를 어디서 데려왔겠지’하고 대화를 해보니까 꽉 찼습니다. 나는 그렇게 기도해도 안 되는데 얘는 기도도 안하고 건들거리고 사는데도 잘 풀릴 때 부러워요 안 부러워요? 부럽지 않습니까? 그렇게 우리 자신은 자꾸 자존심이 상하기는 하지만 비교의식 속에서 열등감을 느끼기도 하고 그리고 또 때로는 유혹을 받기도 합니다. 내버려두면 어떻게 되냐면 자꾸 그런 비교 속에서 어떤 생각이드냐면 ‘정말 하나님이 나 사랑하는 것 맞아?’ 그런 생각이 듭니다. ‘관심도 없이 내가 내동댕이쳐진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뭐냐면 매일 매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은혜, 주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사랑, 그런 것들이 그것을 씻어내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보고 싶은데 한 번도 못해봤습니다. 그 백억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나는 내가 그렇게 세배할 때 몇 십억씩 가지고 오는 목회자들을 한 번도 부러워해본 적이 없습니다. 부럽지 않습니다. “그래도 조금 부러울 때가 있겠죠?” 아니요. 없습니다. “진심입니까?” 진심입니다. “왜 그렇게 어떻게 안 부러워 할 수 있지요?” 부러워해도 일어날 가능성이 없는 일이니까요.
(찬양)
이 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그것은 어느 한 순간의 객기나 호기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구별을 지배하는 것, 존재론 적인 선포가 장엄하게 울려 퍼지게 하는 것, 그것이 결국은 깊이 파고 들어가 보면 무슨 문제냐면 사랑의 문제와 맞물립니다. 그러니까 결국 이런 저런 어떤 일을 해야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보다 더 중요한 것은 뭐냐면 자신이 팔복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존재론적인 울림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계속 기도도 안하고 뺀질거릴 때 옆에 앉아서 지체랑 예배를 드리는데 계속 은혜를 달라고 울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배 끝나고 나서 간증을 하면서도 계속 “나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해 내가 왜 이렇게 교만해서 미끄러졌는지 모르겠어.” 라고 계속 흐르는 눈물을 닦을 때 그 입에서는 단 한마디도 나에 대해서 “너 신앙생활 똑바로 해”라고 이야기 안했습니다. 그런데 바가지로 신앙의 선배한테 욕을 먹은 것보다도 더 커다란 울림이 그날 밤 집에 가서도 잠을 못 자게 합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업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인 선포가 중요한 것입니다.
사실은 이것이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난 후에 제 신앙의 화두였습니다. 지금도 계속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나는 실패한 목회자가 아닐까하는 회의가 들 때도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뭐냐면 이 존재론적인 선포의 울림이 너무 미약한 교회가 아닌가하는 것입니다. 이 일 저 일 하면서 이렇게 해야지만 교회에 대한 세상의 이미지를 개선할 수 있다고 막 애를 쓰고 몸부림을 치고 난 다음에 그 사역이 탁 끝났을 때 뭔가 곤고하게 밀려오는 그 무서운 단절감 같은 것들을 경험해 본적이 없습니까? 그러니까 그 다음부터는 다 집어치워버립니다. 그리고 나면 신앙이 바닥까지 떨어져 버립니다. 그만 두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본래의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교회에 예수 믿겠다고 온 사람들이 주님 깊이 못 만납니다. 또 만났다고 하더라도 지속적으로 자신의 성화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사상의 체계를 수립하기 위해서 깊이 몸부림치지 않습니다. 만날 핸드폰이나 들여다보고 살지 않습니까? 가끔 찻집이나 이런데 가보면 자주 갈 때도 없지만 어른들이 머리가 허연 사람들이 핸드폰을 들고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예쁜 자매들이 산책하면서 산책하는 시간에도 정보에 저렇게 열심히 인가하고 보면 삑삑이 가지고 게임을 하면서 산책을 하면서 그것을 합니다. 뇌구조 자체가 이미 그런 어떤 쾌락에 젖어있기 때문에 사색을 하고 자기를 성찰하는 것을 못 합니다. 제일 무서운 것이 혼자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을 못 참습니다. 정신에 어떤 힘이 남아있을 때 그런 시간이 그리운 것이지 그 힘이 상실되어 버리면 그런 시간이 무서운 것입니다. 혼자서 못 있습니다. 텔레비전이라도 켜놔야지 살수가 있습니다. 그런 문제가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간절히 기도하지 않습니다. 경건생활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런 선포적인 울림이 울려 퍼지지 않습니다. 옛날에 주님만나고 회심한 것을 계속 추억처럼 붙들고 있는데 그것 가지고는 울림이 나오기 깨지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때는 그랬을지 모르지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하나님이 선택한 족속이라는 것. 무엇을 위한 선택이었느냐면 바로 이런 존재론적인 선포를 위한 선택입니다. 그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IV. 신자의 정체2: “왕 같은 제사장”
두 번째는 신자의 정체성에 대해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표현합니다. 희랍어 성경에 보면 ‘바실레이온 히에라테우마’(βασίλειον ἱεράτευμα)라고 나옵니다.
A. 두 가지의 해석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것에 대해서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는 ‘바실레이오스’(βασίλειος)라는 이 형용사를 ‘왕 같은’이라고 해석을 안 하고 ‘왕과 관련된’ 혹은 ‘왕의’ 이런 의미를 가진 형용사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어떻게 되냐면 제사장이 곧 왕이라는 뜻이 아니라 ‘왕의 제사장’, ‘왕께 속한 제사장’ 어떤 사람은 바실레이온 자체를 하나의 영역으로 보고 ‘그 왕국에 속한 제사장’ 혹은 ‘왕에게 봉사하는 제사장’ 이렇게 해석을 하고 있는데 그렇게 되면 이 왕은 예수님이나 하나님이 되는 것이고 우리는 왕과 상관이 없는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해석을 별로 지지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해석은 바실레이오스를 ‘왕 같은’, ‘왕적인’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왕 같은 제사장’ 혹은 ‘왕적 제사장’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사실은 이 해석을 가장 강력하게 했던 사람이 누구냐면 마르틴 루터였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이 해석을 새로 발견한 것은 아니고 그 이전에 교부시대부터 이미 다 있었던 해석이지만 마르틴 루터가 이 해석을 다 정리해서 소위 만인제사장의 교리를 주창하고 이것이 개혁교회의 대표적인 교리로 등장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명백히 역사적으로 가톨릭의 사제계급제도에 대한 새 해석이었습니다. 그러면 가톨릭에서 어떻게 보느냐하면 교회를 가르치는 교회와 배우는 교회로 나눕니다. 가르치는 교회는 성직자계급이고 그 아래에 배우는 교회가 있는데 이것이 레이맨, 평신도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그리스도의 중보가 필요한 것처럼 또한 우리들은 너무나 타락하고 부패하고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도 중보자가 필요하다 그 사람들이 바로 성인이나 혹은 가톨릭의 사제들이다.
그래서 여러분, 성찬이 완전히 다릅니다. 가톨릭의 성찬에 참여해 본 적이 있습니까? 참여한 적은 없지만 본적은 있을 것입니다. 이 떡을 들고 사람들에게로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옵니다. 그리고 절대로 이 성체, 말하자면 떡과 포도주는 평신도가 그것을 붙들거나 만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릎을 꿇고 앉으면 입에 넣어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성찬이 간다는 것,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전통적으로 개혁교회에서 화란개혁교회를 보면 성찬을 할 때 목사와 장로들이 먼저 성찬을 하고 그 다음에 돌아갑니다. 나는 제일 마지막에 합니다. 이것도 의미를 가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성직자와 장로들이 먼저 성찬을 떼는 그것이 교인들에게 올바른 의미에서는 교회의 질서를 가르쳐주면 좋지만 그것이 계급으로 인식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왜? 그들은 이미 목사이고 장로이기 때문에 이미 구별된 사람이라는 것이 그렇지 않아도 인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들어도 괜찮다. 내가 어디서 배운 것이 아니라 나는 독자적으로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맨 처음에 이 해석이 주어지고 나서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 묘한 긴장관계가 생겨나게 됩니다. 이에 대해 마르틴 루터가 이제 ‘만인제사장’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사제의 도움 없이 인간이나 누구의 중보 없이 오직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육체로 찢으신 휘장을 지나 은혜의 보좌 앞으로 우리가 당당히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지 교회의 질서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리고 이것을 말씀과 성화에 관한 동등한 자격으로 국한해서 해석을 하게 됩니다.
많은 주석가들이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이 구절이 출애굽기 19장 6절에서 왔다고 봅니다. 거기에 뭐라고 나왔냐면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어로 말하자면 ‘마믈레케트 코하님’(מַמְלֶכֶת כֹּהֲנִים), 그래서 ‘제사장들의 나라’ 이렇게 됩니다. ‘제사장들의 나라가 되며’ 이렇게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나옵니다. 결국 이것은 칼빈 같은 사람의 해석에 의하면 이것은 구약에 나오는 ‘제사장들의 나라’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설교시간에 다 이해하기는 어려운데 이것이 그 70인역으로 번역될 때에 구약 본문이 약간 다르게 번역이 되고 그것을 신약에서 사도들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런데 결국은 많은 학자들이 같은 표현이라고 봅니다.
B. “제사장들의 나라”의 은유
원래 구약에서는 이 제사장들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이방인들은 이방인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스라엘이라는 말로써 구분이 되고 또 그 중에서 제사장들은 일반 이스라엘 백성과 거룩하게 구별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에 쓰인 제사장이라고 하는 이 말은 이방인에게서 성별되었다는 의미이고 왕 같다고 하는 것은 이방인들을 향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역사 속에서 승리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질 때 하나님의 심판에 우리 성도들이 함께 참여할 것이라고 하는 승리에 대한 사상이 깔려있는 것입니다. 왕 같다고 하는 말에. ‘제사장들의 나라’라는 이 구약적인 표현이 가지고 있는 은유가 있습니다.
‘제사장들의 나라’, 나라를 생각하지 말고 제사장을 먼저 생각해보십시오. 제사장은 뭐하는 사람이었습니까? 결국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데 그래야지만 제대로 된 인간이 될 수 있는데 죄 때문에 그 관계가 끊어집니다. 그런데 인간이 자신의 능력이나 어떤 선함을 가지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를 주도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제사장을 세우셔서 제사제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한시적으로 교통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사장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죄로 불결해진 인간이 제사라는 제도를 통해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만나게 해주는 것, 이것이 이 중보자적인 일이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제사장의 사역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나라의 단위로 선택한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장들의 나라가 되면 이것을 통해서 이방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전파되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그들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와 구원을 얻는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상이 잘 나타난 것이 예수님이 성전을 정결케 하실 때 사건입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쫒으면서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죠?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56장에 나오는 예언의 인용입니다. 히브리어본문으로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왜냐하면 나의 집은 모든 백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옵니다. 재미있는 것은 ‘레칼 하아밈’(לְכָל־הָעַמִּֽים), ‘모든 백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고 할 때 이 모든 백성이 뭐냐면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복수입니다. 수많은 족속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그런 기도의 집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언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그날에.
과연 어떤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고 결국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부어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전망을 확실하게 갖게 되자 그들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별이 없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위한 애끓는 기도로 교회를 가득 채웠습니다. 역사적으로 부흥이 일어나는 교회마다 부흥이 일어나는 시대마다 동일한 일들이 이루어졌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들입니까? 이런 일들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 선교적인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봐야합니다.
자, 그러면 그런 구약의 구도를 시프트해서 신약으로 데려와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구약의 혈통적인 이스라엘은 이미 끝났고 새 이스라엘이 있으니 그것이 누구입니까? 그것이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이 사람들이 이번에는 어떤 족속들이냐면 제사장들의 나라를 이루게 됩니다. 이제는 이 족속들이 구원받지 못한 모든 민족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그래서 그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고 무지한 그들에게 복음을 실어 날라서 예수께 돌아오게 하고 이런 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와 이 세계 사이에 어떤 중재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사장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특별히 제사장의 나라라는 말 속에는 하나님이 특별히 아끼시는 족속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호세아서 4장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음으로 망하는 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뭐냐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들을 제사장이 못되게 한다는 것이 진노였다면 그들이 제사장이 되게 한다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제사장들이라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사랑하고 정말 은혜 안에서 살면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을 그냥 지나갈 수 없지 않습니까? 너무 괴롭지 않습니까? 누가 시키지 않아도 결국은 중재자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복음도 전해주고, 내 마음에 품고, 구원받지 못한 내 가족을 위해서 빌고, 어떤 때는 자신이 구원받지 못한 것처럼 눈물이 쏟아지고 가슴이 찢어집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받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역할입니다. 이해되십니까? 정말 하나님 사랑하고 주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지 구원받지 못한 자기 가족을 그냥 버려두지 않습니다.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목숨과 바꾸고 싶습니다. 누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역할들을 하는 것입니다.
C. 신약의 “왕 같은 제사장들”
신약의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는 이것은 결국 무엇을 보여 주냐면 왕이라는 이말 ‘바실레이온’이라는 이 말이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는 왕이 아니라 그 왕적인 통치에 참여하기 때문에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는 아예 로열패밀리라고 부릅니다. ‘왕족’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왕족이 되는 것이다. 왕은 아닙니다. “왕 같은”, “로열”, “왕가의”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보여 주냐면 하나님이 온 우주 만국의 유일한 통치자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왕국은 왕을 중심으로 모든 질서들이 세워지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바로 한 왕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봉사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에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충성스러운 백성들이라면 혹은 충성스러운 일꾼들이라면 우리 희망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왕의 통치에 이념이 자기의 나라, 방방곡곡에 그대로 실현되는 그것이 바로 왕을 깊이 공경하는 신하의 마음속에 있어야 할 소망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을 단순하게 예배하는 행위로만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 하나님의 왕적인 통치가 교회 속에서 실현되고 그 교회를 넘어서 이 세상 속에서 실현되고 그런 것이 우리의 마음속에 기쁨을 주고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아까 이야기하는 그 존재론적인 장엄한 울림들이 있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세워지고 그런 울림들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핍박의 요인이 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정말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계기가 되는 것, 그런 속에서 확장되어가는 하나님의 왕국을 보면서 기뻐하는 것, 그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그 속에서 행복과 보람을 느끼면서 사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일들은 결국 핵심을 요약하면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사람을 전도해서 예수 믿고 구원받게 만드는 것은 이 일에 아주 원초적인 시작에 불과하고 그 시작에서 더 지나가서 왕이신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서 그 통치가 나라 구석구석에 실현되는 이상을 보는 것, 그 속에서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기꺼이 만족할 수 있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소명이고, 존재론적인 울림과 이런 소명의식은 같이 갑니다. 이런 존재적인 울림을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이면 그에게는 확고한 이런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아주 분명한 표가 있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드라마를 볼 수 있는 시간이 성실하게 드라마를 볼 수 없는 입장입니다. 그래도 정도전을 못 봤는데 계속 좋다고 하는데 못 보다가 마지막에 한 5번 정도를 성실하게 봐서 마지막 마무리하는 장면을 봤습니다. 그런데 정도전에 대한 이야기는 예전에는 듣기는 했는데 아주 깊은 울림이 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만약에 정도전의 꿈이 그대로 이루어졌다면 역사는 정말 얼마나 놀랍게 바뀌었을까? 사실을 그 당시에 정도전의 생각은 내가 보기에는 거의 입헌군주국수준이었습니다. 정도전 보셨습니까? 안 봤습니까? 무슨 뜻이냐면 왕은 있되 말하자면 제상은 누구나 능력이 있으면 발탁되게 하고 능력이 있으면. 그래서 제상이 요즘말로 말하자면 책임총리제입니다. 중요한 것만 왕의 허락을 받고 경륜과 능력을 가지고 왕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그러나 이 제상은 절대로 왕위를 넘보면 안 되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왕을 진심으로 공경하면서도 민본의 정치를 저 구석구석까지 그대로 실현되는 나라를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도전의 꿈이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그 하나님의 통치가 구석구석에서 실현되는 것을 볼 때에 기뻐할 수 있어야하고 감격할 수 있어야하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애통해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팔복의 사람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을 통해서 좋으나 싫으나 신자들을 통해서 이 세상을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존귀한 직위가 있는데 그들을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이 예루살렘에서 나온다고 이사야 선지자가 노래한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왕직과 선지자직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사람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제사장의 가문의 출신에서 선지자가 나오기는 하지만 왕과 제사장의 직분을 함께 가질 수는 없습니다. 이런 일을 하려다가 하나님 앞에 크게 벌을 받은 사람이 있었는데 누구입니까? 사울입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셨던 다윗도 그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개의 별개의 직분이 신약시대 예수 그리스도에 와서 통합이 되고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그분께 접붙여진 우리에게 한정적으로 이 두 가지 통합된 직분이 승계되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초대교부들 중의 한 사람인 알렉산더의 클레멘스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가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을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유업으로 받는 다는 점에서 우리는 왕 같은 존재들이고 세상을 위해 중제의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전해준다는 이유에서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에 대하여 제사장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 세상 사람들은 여러분을 통해서 참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참 인간이 무엇이고, 참 세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통일적인 설명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바로 그러한 일을 하고, 아울러서 그 영혼을 위해 진지하게 눈물로 기도하도록 하나님이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소명입니다.
그래서 어떤 진리를 습득하고 깨달을 때 그것이 사람들에게 베풀어 말할 수 있는 논리를 갖추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똑같이 뭐라고 이야기 합니까? “너희에게 누군가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대답할 것이 있도록 준비하면서 살아라.” 누군가 물어볼 때 그것을 말로 대답하기 위해서는 치료가 되어 있고 이 안에서 논리화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의 존재적인 울림이 결국은 사상과 나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사람이기 때문에 결코 그런 삶을 살 수 없다.
(예화) 가끔 황당한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이 옛날에 한번 이러이러한 설교를 하셨지요? 이러이러한 설교 속에서 이런 이야기하셨죠?” 내가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이 5400편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난 정확하게 “아니요.” 라고 이야기 합니다. “당신이 잘못 들었습니다.” 그 설교를 기억하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사상 속에서는 나올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사상도 바뀌지만 골격이 바뀐 것이 아니니까 그때나 이때나 내가 그 사상을 받아들였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찾아보십시오. 찾아서 오십시오. 내가 그러면 상품을 줄 테니까 찾아오십시오. 절대로 잘못 들었을 것입니다.” 알고 보니까 다른 사람의 설교를 듣고 나한테 들었다고 착각을 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그렇게 이 세상을 향해 존재적인 울림을 주는 것과 확고한 사상 속에서 사는 것, 그리고 윤리적인 생활, 이것은 삼위일체적으로 나뉠 수 없는 것입니다. 아까 그 청년이야기를 또 해서 미안한데 돈 가방을 밀어놓을 때에 이 형제의 마음속에 어떤 것이 있습니까? ‘요즘 그렇지 않아도 욕을 많이 먹는데 내가 이것을 만약에 받으면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기독교를 욕하겠어.’ 이런 것 전혀 의식이 없습니다. 내 존재가 그것이 싫은 것입니다. 나의 사고와 정신의 골격으로는 그 일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액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의미가 문제입니다. 남에게 신세지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큰 것만 신세지기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도 신세지기 싫어합니다. 왜? 사람이 원래 그러니까. 그런데 그렇게 살아갈 때마다 이 삶은 쉬운 삶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때마다 우리에게는 위로가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예수님이 사셨던 삶이 바로 그런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삶 전체는 존재적인 울림의 연속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벧세다 광야에서 떡과 물고기로 수많은 사람을 먹이셨지만 진정으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 기적의 능력을 보면서 임금삼고 싶어 했습니다. 그 기적의 능력으로 로마에 대항해서 조국의 광복을 이루도록 말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본 것이 아니라 먼 길을 와서 허기지고 힘이 없어하는 불쌍한 인간들을 위한 예수님 안에 있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 그 존재적인 울림이지 그분의 인격 속에서 나오는 존재적인 울림이지 그 떡과 물고기를 받은 것에 대한 감격은 아닙니다. 기왕 기적을 일으키려면 보리떡과 물고기이겠습니까? 좀 장엄한 뷔페를 차려버리지요.
이미 예전에 신앙의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조직적인 핍박과 함께 변절자들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현실에 대해서 너무 비관을 하면 안 됩니다. ‘세상이 다 그렇더라. 정말 믿음대로 사는 것이 힘들다.’ 믿음대로 사는 것이 힘들지만 지금은 죽이지는 않지 않습니까? 옛날에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손가락질을 하고 욕을 할지는 모릅니다. 함부로 손대지 못합니다. 법원에서 판결이 나왔는데 멱살을 잡으면 100만원, 따귀를 때리면 200만원입니다. 한번 당해볼 만한 가치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현실을 비관하지 말고 우리 신자됨의 정체를 생각해야합니다. 어둠 가운데 있던 사람들이 옮겨져서 이제 빛의 나라의 백성이 되고 그리고 은혜 생활을 잘해서 신자로서 하나님 앞에 약속받은 특권들을 현실적으로 누리면서 살아야합니다.
(찬양)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밖에 없네
이런 것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죽었다 깨어나도 부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부를 수 있는 노래입니다. 우리가 예전에 주님 모르고 이 세상에 방황했을 때 그렇게 죽을 것 같을 때 이런 위로, 이런 사랑, 환경을 비관하면서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렇게 핍절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것을 매일매일 누리면서 사는 사람은 복음 때문에 이 세상에서 멸시를 받음으로써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 계실 때 모든 사람이 예수님 좋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런 존재적인 울림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존재적인 울림 때문에 어떤 사람들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왔지만 어떤 사람은 죽이려고 칼을 갈았습니다. 예수님이 무슨 그렇게 나쁜 일을 하셨습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미워한 이유는 그 존재적인 울림이 너무 너무 싫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결론에 도달합니까? 그런 존재적인 울림을 이 세상에 울려 퍼지게 하면서 우리는 참다운 그리스도인으로 살면 세상에서 박해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환영받고 어떤 사람에게 존재적인 울림을 주어서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할 수 있고 그 자신의 삶에 대해 깊은 영혼의 자각을 갖게 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에이! 그러고 짓밟아버리고 싶은 미운 물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참된 신자는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환영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제가 팔복을 설교하다가 희랍의 이야기 한 토막을 인용했습니다. “당신이 왜 그 사람을 싫어합니까?” 자기의 정체를 숨기고 오스트라카(ostraca)를 하려는 사람에게 물어봤더니 “난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몰라요. 그런데 그 인간이 단지 의로운 사람이라고 불리는 것 자체가 싫어요. 그래서 내쫓아야해요.” 그러고 오스트라카를 던지는 것입니다.
V. 적용과 결론
어차피 참된 신자가 돼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환영을 받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거치는 돌’이 됩니다. 그러면 불분명하고 어중간한 신자가 되면 고난이 없을까요? 더 많습니다. 어떻게 많으냐면 핍박을 받는 방식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가도 이방인 같고 교회에 와도 이방인 같고 신앙적인 의무를 행해도 확신이 없고 안 해도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든 것을 행하고 확신을 가지고 삽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생애의 고난과 영광을 묵상합니다. 주님은 참된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런데도 거치는 돌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버렸지만 하나님은 그를 하나님의 교회의 모퉁이 돌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 위에 건설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때는 여러분을 목양하면서 ‘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여기까지인가 보구나!’하는 깊은 좌절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존재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말 단 몇 명이라도 우리 사회의 이런 존재적인 울림이 있다면 이 존재적인 울림은 사회적인 지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인 지위가 아니라 그 사람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사람됨에서 울려 퍼지는 장엄한 울림입니다.
종소리는 그 종이 큰 교회에 옥상에 있을 때도 종이고 가난한 집 판자촌에 매달려 있을 때에도 종입니다. 동일한 종소리를 울려 퍼지게 합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존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이 이제는 좀 더 성숙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주신 그 부르심에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이 세상에 그런 존재적인 울림을 주면서 살 수 있는 그런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 이것을 우리 모두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의 가장 기본적이고 모든 사명의 토대가 되는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많은 지식, 예수 그리스도와의 깊은 만남, 영적인 신비, 은혜의 세계에 대한 지식과 비밀들 신앙생활을 하면서 쌓은 많은 경험과 체험들,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서 마지막에 나타나야 할 것은 이런 존재적인 장엄한 울림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그리고 우리는 그의 형상으로 지은바 된 인간입니다.’라는 장엄한 울림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그런 울림을 울릴 수 있다면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핍박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도움을 구할 것입니다. 도와달라고. 이런 존재론적인 울림을 가진 신자들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보물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녹취자 : 조원정
Ⅰ. 본문해설
지난 시간에는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이 두 가지가 우리의 정체성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이어서 나오는 두 개의 내용이 있습니다.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라고 했습니다. 잘못된 신자의 삶은 결국 신앙의 원리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기차가 어디든지 갈 수 있지만 레일 위로 지나가도록 기차가 설계되었듯이 그리스도인도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삶을 영위해 가기 위한 원리가 있습니다. 그 원리에서 떠날 때 마치 우리의 삶은 선로를 이탈한 기관차가 아무리 강력한 동력을 발휘해도 결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삶도 혼란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엉클어진 삶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 실천, 영적인 생활의 오류가 합쳐져서 나오는 작품입니다.
신자라고 하는 것은 단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자라고 하는 것은 인생관과 세계관에 있어서 혁명적인 변화를 겪은 사람입니다. 그 점에서 그 사람은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말해도 좋은 사람입니다. 우리들이 진심으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빠질 수 없는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한다고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이 모든 세계를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주인이시고 따라서 자신의 인생도 그분의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만 주님의 주되심 앞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앞에 펼쳐진 온 세계가 주님의 주되심 앞에 복종하고 그의 통치에 순종하여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에 존재의 가치와 목적, 그 이유가 발견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께 온전히 순종하고 내가 살아있는 것이 이 세상을 그리스도께 순종하고 그의 통치에 복종하게 하는 데에 이바지하면서 살기 위해서 태어났고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예전에는 인생의 관점이 자기중심이었던 인생의 관점이 하나님 관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고백입니다. 한 사람이 신앙에서 미끄러져 살아가는 가장 확실한 표는 이런저런 죄를 짓고 신앙의 의무에서 이탈함으로서만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 속에서 관점이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던 그 관점이 변할 때 신자의 타락이라고 우리는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신자의 외적인 삶의 미끄러짐은 마음을 지키지 못하는데 있고 마음을 지키지 못하는 데는 생각이 미끄러져 있는 데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죄와 속임의 교리라는 시리즈가 있습니다. 그 시리즈가 수련회 때 선포되어진 말씀인데 열린 교회 제 10회 수련회였습니다. 그 수련회 끝나고 사역을 한다고 한 2년 동안 수련회를 안했습니다. 그 해에 하나님이 정말 십년 동안 있었던 수련회 중에서 가장 강력한 성령의 은혜를 부어주셨던 수련회였습니다. 설교를 수련회에서 하고 돌아와서 계속 이어서 설교를 했는데 그 시리즈를 꼭 한번 들어보길 바랍니다. 아마 여러분에게 커다란 충격을 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죄와 은혜의 지배보다도 훨씬 현미경적인 접근을 한 설교시리즈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의 등불이 될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스도가 내 인생의 주인이시라고 하는 인정을 하고 이것이 변하지 않으면 좋은데 죄가 우리 속에 들어와서 자꾸 우리의 생각을 속이며 이탈하게 만듭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신앙에 변질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신자의 정체, 어제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설명을 두 시간에 걸쳐서 들었는데 우리가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다. 오늘은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 나라의 소유다. 하나님의 소유라고 하는 우리의 정체성이 한번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우리 속에 계속 그 인식이 유지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생애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도 매일매일 그 은혜 안에 거하며 살고자 하는 경건한 생활,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는 기도, 말씀의 빛 앞에서 매일매일 자기가 깨닫는 기쁨, 이런 것이 없는 상태에서 그런 정체성을 유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니까 당연한 것입니다. 한때는 나라를 위해서 그렇게 민주화 운동을 하고 감옥에도 가고 사형선고도 받고 했던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런데 정치하고 나니까 다 부패합니다. 뇌물 받고, 자기가 바로 그런 사회의 구조를 개혁하기 위해 감옥도 가고 핍박도 받았는데 자기가 그 자리에 오르니까 그런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신자라 할지라도 여전히 죄의 영향력 아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이런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로드십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원리로 계속 지속적으로 남기 위해서는 매일매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마음을 드리고 그 은혜 속에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보다도 더 쉬운 길이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모두 그릇된 가르침입니다.
Ⅱ. 신자의 정체 3 : “거룩한 나라”
A. “거룩한” : hagios
신자의 정체성 세 번째가 뭔가 하면 거룩한 나라입니다. 희랍어 성경에 ‘에뜨노스 하기오스’(ἔθνος ἅγιος)라고 나옵니다. ‘에뜨노스’(ἔθνος)라고 하는 것은 민족입니다. 겨레, 민족, 족속보다 좀 더 큰 단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희랍어 성경에서 이것은 ‘테 에뜨네’(τη ἔθνη), 이것은 여성형 복수입니다. 복수로 쓰면 이것은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단수로 사용이 되어서 ‘에뜨노스’, 이렇게 단수 남성명사로 사용이 되면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에뜨노스가 무슨 뜻인가 하면 왕이나 문화, 전통, 이런 것에 의해서 뭔가 공통분모를 가지고 한 덩어리가 된 공동체를 지칭하는 것이 에뜨노스입니다. 헬라인은 헬라인대로 에뜨노스가 되는 것이고 유대인은 유대인대로 한 에뜨노스가 되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 안에는 수많은 종족들이 모여 살았고 이스라엘을 제외한 이방인들을 모두 싸잡아서 복수로 ‘테 에뜨네’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하기오스’(ἅγιος)라고 하는 이 단어는 원래 ‘하고스’(ἅγος)라고 하는 단어에서 옵니다. 하고스는 희랍어로 종교적인 경외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두려움, 거기에서 형용사가 파생이 되어서 ‘하기오스’, ‘거룩한’이라는 형용사가 태어나게 됩니다.
1. 주께 바쳐진 구별 (마 4:5, 27:53)
성경적으로 거룩하게 하다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일까? 크게 두 가지로 설명을 할 수 있는데 우선 마태복음 4장 5절이나 27장 53절 같은 데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에 마귀가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27장 53절에도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여기에서 거룩하다 하는 의미는 구별되었다는 그런 뜻입니다. 히브리말로 ‘카도쉬’(v/dq)라고 하는 것이 구별된 이런 의미입니다.
거룩하다는 말의 첫 번째 뜻은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위한 구별인가 하면 하나님께 바쳐진 것으로서 구별되었다. 좋은 비유가 하나 생각이 납니다. 우리나라도 예약 문화가 발달해서 음식점에 예약을 하고 가지 아니하면 별로 대접을 못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외국에는 철저합니다. 더군다나 사람 수가 열 명 넘게 되면 예약을 안 하고 그냥 들이닥치면 밥 못 먹기 일쑤입니다. 예약을 하면 거기에다 푯말을 갖다놓습니다. 아무도 못 앉습니다. 이것이 구별된 것입니다. 누군가가 이미 벌써 선점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위해서 이것은 따로 떼어 놓은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하다는 첫 번째 의미입니다. 그래서 구별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기로 다른 용도로부터 구별되어 있는 상태를 가리켜서 거룩하다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 종종 여러분이 거룩한 이라고 하다가 명사로 쓰고 싶으면 거룩이라고 그럽니다. 거룩을 위해서 이러는데 사전을 잘 찾아보면 거룩 자체가 우리말에서 형용사입니다. 은밀하게 국어 적으로 말하면 거룩 신자, 이렇게 불러도 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신자, 그런 뜻입니다. 거룩이 형용사라는 것입니다. 명사로 쓸 때는 항상 거룩함이라고 사용을 해야 합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구별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분께 봉사하기 위해서 미리 하나님에 의해서 선점이 된 것입니다. 또 다른 소유권이나 사용권을 주장할 수 없고 만약에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침범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학적으로 하나님이 당신의 거룩함이 침범당하는 것을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에 의해서 거룩함이 침범되면 하나님이 이에 대해서 반응을 하십니다. 그 반응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공의,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해서 침범을 하면 하나님이 그에 대해서 반응을 하시는데 그것이 의, 혹은 공의인데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 자기의 몫을 침범하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도전하는 것 같지만 은밀하게 말하면 그 의도 인간의 행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침범할 때 하나님이 그에 의해서 징벌을 받는 것이 마음이 안 좋으셔서 내버려 두시면 인간은 계속 하나님의 거룩함을 침범하게 될 것이고 그 불행한 결과는 인간이 짊어지기 때문에 그것을 못하게끔 막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성품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약을 사서 보면 써있습니다. “아이들 손닿지 않는 곳에 두시오.” 그리고 잘 만드는 회사는 병을 아이들이 못 열게 어른이 위에서 눌러야만 열리는 이런 병들이 나옵니다. 외국은 그런 것에 대한 소송이 하도 많이 걸리니까 철저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 약을 아이가 손을 대어서 먹었습니다. 치명적일수가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부모가 따끔하게 때려주고 절대로 손을 못 데게 하는 것은 약이 아까워서라기보다는 그 아이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인간의 행복이 조화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의미입니다.
2. 주님과의 관계 (수 5:15, 고전 3:17)
두 번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관계는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으로 관련된 것인데 두 가지로 이루어지는데 첫째는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시다. 우리와 관계하여 거룩하신 분이시라고 할 때 그 의미는 존재적인 초월성입니다. 아까 장수영 교수님이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사람 굉장히 재밌는 사람입니다. 정말 과학에 있어서 획을 그은 사람입니다. 그 이야기가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더 하모니 오브 더 유니버스라고 하는 우주의 조화라고 하는 요하네스 케플러가 쓴 책입니다. 물리학에서 케플러의 법칙도 있습니다. 아주 놀라운 책입니다. 그런 은혜로운 과학책인데 과학자들이 그런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제가 어느 책에서 인용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자료를 안 가지고 와서 못 읽어주는데 정말 아름답습니다. 돌때 정확하게 동그란 원으로 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별들의 위치가 안 잡히는 것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모든 궤도가 정확한 원으로 360도 원으로 도는 천구가 없는 것입니다. 전부다 타원형으로 도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중력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이 행성들의 운행들을 다 조사해가지고 주기율표를 만들어서 그것을 오선지에 옮긴 다음에 건반을 탁 눌러보니까 기가 막힌 하모니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주가 무질서한 것처럼 보여도 놀라운 질서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미생물의 세계나 세포의 세계, 또 서버아톰, 원자 이하의 세계에 들어가 보면 아주 놀라운 사실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원자 밖의 세계까지는 아주 질서정연합니다. 원자 이하의 세계는 아주 무질서합니다. 그 자체가 편견입니다. 원자 이하의 세계에 대해서 너무 모르니까 원자 이상의 세계에서 보든 법칙을 가지고 그 안으로 들어가서 들여다보니까 그게 너무 무질서하고 법칙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하나씩 그 안에서 법칙이 발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법칙 또한 아주 아름다운 질서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무질서한 것 같이 보여도 사실은 무질서한 것이 아니라 알고 보니까 놀라운 질서가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밝은 별들이 갑자가 확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저건 뭘까? 하늘에 특별한 계시가 있나보다. 알고 보니까 몇 백 년 만에 한 번씩 찾아오는 혜성입니다. 몇 십 년 만에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혜성입니다. 아주 질서 있게 도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우주의 세계를 보면서 요하네스 케플러가 하나님을 향한 찬송으로 꽉 차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계에 이 아름다운 질서를 두시고 우주의 조화를 두셨는데 여태까지 하나님 당신 혼자서 보셨는데 이제 깨닫고 보니까 제가 이것을 발견하고 당신의 창조에 위대한 솜씨에 감탄하도록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할렐루야.
우주와 자연의 세계를 보면 하나님이 정말 높고 위대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너무나 놀랍습니다. 과학자들이 파라과이에 가서 이과수 폭포를 관찰해서, 전 아직 못 가봤습니다. 화면에서 보면 일년 내내 어마어마한 물이 떨어집니다. 매년 조사를 하니까 강수량이 폭포수 떨어지는 양이 매우 편차가 큽니다. 이유가 뭘까 계속 궁금증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태양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태양의 흑점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클 때는 지구 몇 배씩 되는 흑점이 생기는 것입니다. 흑점이 생길 때는 어떻게 됩니까? 빛이 덜 나옵니다. 증발을 덜하고 비가 덜 내립니다. 이것이 아주 뚜렷한 함수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태양이 지구의 백만 배의 크기랍니다. 목성이 천배, 태양이 목성의 천배입니다. 거기에 흑점 하나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지구상에 내리는 강수량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주어서 홍수가 나기도 하고 가물게도 하는 것입니다.
우주를 생각해 보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어마어마한 우주의 공간, 끝없이 흘러가는 시간과 영속, 영혼은 무엇일까? 우리 인간이 여기에 사는 것은 얼마나 웃긴 것일까? 머리 위에 있는 별들, 아무리 나이가 어려 보여도 다 몇 십 억년은 된 것인데 우리는 기껏해야 70년 80년 살고 사라집니다. 그 다음에 세상은 어떻게 될까? 당나라 시대 때 진자앙(陳子昻)이라는 사람이 시를 썼습니다. 전불견고인(前不見古人), 앞에선 옛 사람을 볼 수 없고, 후불견래자(後不見來者), 뒤에서는 올 사람을 볼 수가 없구나, 염천지지유유(念天地之悠悠), 천지에 유유함을 생각하니, 독창연이체하(獨愴然而涕下), 홀로 외로워 눈물이 흐르는 구나, 이것이 뭔가 하면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경험입니다. 명확한 계시가 없으니까 그 근원이 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찬양)
온 땅과 하늘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그런 큰 위대하신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는 자신이 아주 미천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면서 어떤 마음이 생기는가 하면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거기에 부복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경험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무엇으로부터 시작합니까? 하나님이 높고 위대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분을 두려워하는 것으로부터 신앙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 두려움에 대한 인식이 없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감동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도덕적인 완전성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 살면서 결국은 하나님을 본뜨면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시니까 우리도 혼자서 살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섞여서 삽니다. 행복한 가족들이 모여 사는 집안은 부럽습니다. 마음을 정말 나눌 수 있는 친구들에 에워싸여서 살아가고 있는 이웃을 보면 부럽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삼위일치를 본뜨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악한 방식으로 본뜨느냐, 선한 방식으로 본뜨느냐의 차이지, 결국은 하나님을 본뜨면서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 존재입니다. 사람들이 막 사치스럽게 사는 것도 알고 보면 하나님을 본뜨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넉넉하셔서 우리에게 많이 주십니다. 많이 주시는 것을 이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주는 것입니다.
요새 자기에게 선물하는 것이 유행이랍니다. 카드까지 다 써서 정말 고생했어, 너에게 주는 선물이야, 포장집에 가서 예쁘게 포장해서 들고 가서 자기 책상에 놓고 아침에 열어 보는 것입니다. 아주 값비싼 해외여행 티켓을 끊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준 선물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으로부터 선물을 받을 일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한테 줘야지 저 사람도 주는데 자기한테 선물을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외로우면 그러겠습니까?
제가 신학교 교수하고 있을 때였는데 15초짜리 광고를 보면서 가슴이 뭉클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시집가서 중년 아줌마가 되었는데, 심은하가 한참 젊었을 때인데 무슨 광고인지 아십니까? 그때는 핸드폰 이런 것도 별로 없을 때였는데 기껏해야 자동응답기 있을 때였습니다. 비가 막 오는 날에 공중전화 박스에 딱 들어갑니다. 뭐라고 얘기를 하는데 저게 무슨 광고인가 했더니 집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비 묻은 머리를 털고 의자에 기대어 앉습니다. 자동응답기를 탁 누르는데 조금 아까 자기가 공중전화에서 한 녹음입니다. 힘들지? 얼마나 외로우면 그 말을 해줄 사람이 그렇게 없습니다. 여러분 만나면 그런 얘기 좀 많이 해주십시오. 아무나 만나서 힘들지? 몇 사람 그렇게 손잡고 얘기하면 그 중에 한 사람은 눈물 흘립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우리에게도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참 나는 제대로 된 것이다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아까도 밥을 먹는데 지체 하나가 와서 물어봅니다. 가족들이 서로에 대해서 기대를 많이 가지면 상처도 많은데 쿨 하면 상처는 안 받는데 그러면 가족이 너무 썰렁한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내가 명쾌하게 답변을 해 줬습니다. 그대는 가족에게 기대를 걸지 말고 나머지 가족들은 당신에게 기대를 많이 갖게 해주고 언제나 만족하게 해주라. 여러분 기대를 가지면 실망할 거 아닙니까? 우리 엄마가 나한테 이렇게 해줘야 하는데 아빠라면 이 정도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아빠도 딸이라면 그 정도는 해야 되는 거 아닌가? 서로 기대가 높습니다. 서로 계속 실망하는 것입니다. 기대를 걸지 마십시오. 그 대신 저 사람들은 나한테 기대를 많이 걸게 해주는 것입니다. 언제나 기대 이상이 되게끔 해주는 것입니다. 아멘. 왜 대답이 힘이 없습니까? 그런 표정 같습니다. 위로 받으려고 왔는데 저렇게 부담만 준다고 말입니다. 그것이 사는 길입니다. 나 보십시오. 여러분한테 상처 안 받습니다. 기대를 안 합니다. 그러니까 요만큼만 잘해줘도 너무 감동이 옵니다. 그러면 계속 손해 보는 삶 같은데 그게 아니라 그렇게 안하는 사람들은 전혀 알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놀라운 기쁨을 주십니다. 가곡 가운데 내가 부를 수는 없고, 산에 올라갔는데 너무 맑고 예쁜 옹달샘이 있는데 차마 너무 맑아서 마시지 못하고 도로 덮고 내려오는 이 기쁨이여, 그는 남을 위해서 그렇게 자기를 줘본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사랑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굉장한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살아오는 것입니다. 아내로서, 남편으로서, 혹은 지체로서 자부심이 있는 것입니다. 나같이 구역장 섬긴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나 같이 순장한 사람들 교회 다니면서 만나봤어? 내가 얼마나 희생적인지 한번 봐. 이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주님을 깊이 만나고 나면 자기의 사랑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분의 사랑은 그분의 도덕적인 성품은 자기가 흉내 내며 살아온 것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이발소 그림을 보다가 르느와르의 그림을 보는 것처럼 어차피 소양이 없는 사람은 두 개다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렇게 보면서 무한한 격차를 느낍니다. 그때에 어떤 마음이 드는가 하면 자기는 너무 비참하고 더러운 인간이다. 그래서 이제껏 자부하며 살았던 모든 자신의 삶의 덕들이 하나님의 덕들 앞에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반딧불 봤습니까? 정말 예쁩니다. 빛을 내면서 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밤에만 보입니다. 낮에는 안 보입니다. 낮에는 걔가 불을 켜지도 않겠지만, 켜는지 안 켜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찬란한 햇빛 앞에 반딧불의 불이 보이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존재적인 초월성 앞에서는 자기가 미천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며 엎드려지는 것이고 하나님의 도덕적 완전성 앞에서는 자기가 정말 불결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사랑을 만나는 것입니다. 자기 같은 죄인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고백을 합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체험이 없이는 신앙이 성립을 안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체험 없이는, 체험을 제외하고는 신앙의 깊이를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거룩함에 체험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체험입니다. 자기가 가난한 심령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간절히 구할 때 자기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통해서 자비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매번 속이고 하나님을 떠났는데 돌아보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없이 거기 계셔서 나를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인도해 오신 일관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이 진실한 분이시라는 것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체험은 허공에서 체험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과 이 세상과 내가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삶의 다양한 사태 속에서 체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체험은 이 성품이 우리에게 시행되는 방식에 대한 체험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 어려운 말로 말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하나님의 속성과 속성의 시행방식에 대한 지식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 하나님의 속성과 속성이 어떻게 시행되는지 그 방식에 대한 삶이 우리의 삶의 방식을 결정합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감당할 수 없는 계명을 주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거기까지만 하셨으면 격려가 되는데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불가능한 일 아닙니까? 예수님 같이 그 말씀은 왜 하셔서 아무리 사랑을 해도 이 정도면, 이렇게 말 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도달할 수 없는 표준으로 우리의 기를 죽이십니다. 사실은 기를 죽이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방향성입니다. 이 사람이 이 사람을 사랑하는데 그냥 자기 좋은 대로 사랑을 한다고 칩시다. 그러면 아주 복잡한 사랑이 통일성이 없는 각자의 관점에서 육욕적인 사랑으로 엉클어진 집단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그래서 이 사람이 이 사람을 사랑할 때도 예수님 때문에 사랑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막 사랑하면서 살지만 저 위에는 보이지 않는 예수님이 계셔서 모두 예수님과 관계를 맺으면서 예수님 같이 사랑하게 되어서 많은 사람이 사랑을 하는데 이것이 많은 사랑이 아니라 하나의 사랑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숙제는 하나님의 속성과 속성이 어떻게 시행되는지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내가 항상 하는 이야기가 젊었을 때부터 세상은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을 빨리 배워야 됩니다. 괜히 헛바람이 들어가지고 어렸을 때부터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가 하면 꿈을 펼쳐라, 마음을 먹으면 그대로 된다. 거짓말입니다. 마음 안 먹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마음먹은 것이 아니라고 빠져 나갈 때야 다 있겠지만 마음먹어도 안 되는 것은 안 됩니다. 그냥 인생은 원래 잘 안 되는 것이라고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서커스 선수들이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 뭐라고 했습니까? 떨어지는 것입니다. 실패하는 것부터 먼저 배우기 시작합니다. 실패해도 두개골이 쪼개져서 죽지는 않는 다는 것을 먼저 배웁니다. 두려움을 없애고 연기를 하는 것입니다.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이 인생에 있어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삶의 에너지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막 짜증나는 일들이지만 삶의 에너지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물도 흘러가면서 돌멩이에 부딪히면서 소리가 나듯이 우리 인생도 뜻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먹은 대로 안 돼서 매우 나빠 보이는 현실이 이 돌멩이고 하나님은 그 속에서 당신의 섭리의 물을 흘려보내셔서 안 되는 것들과 부딪히면서 소리가 나게 하시는데 그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의 시행방식을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먹은 대로 모든 것이 형통하게 잘된 것을 통해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배운 것이 많지 않습니다. 아프게, 아프니까 성도입니다. 성도 아닌 사람은 안 아픕니다. 안 보면 되고 때려치우면 됩니다. 성도는 아픕니다. 하나님이 정말 놀랍게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그 상황을 통해서 어떤 때는 내 살을 찢는 것처럼 아픔을 느끼게 하시면서 거기서 내가 평탄했더라면 전혀 못 만났을 그 하나님의 위대한 속성을 보여주시고 속성이 어떻게 시행되는지를 보여 주십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진정한 경건이라고 하는 것은 비밀스러운 종교적인 원천을 갖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룩함의 체험입니다. 기도를 안 해서 못하는 것인지 못해서 안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못해서 못하는 것인지 안 해서 안하는 것입니까? 못해서 안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신앙인이 은혜에서 미끄러지게 되면 기도가 막 쏟아져 나오는데 안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도하려고 앉아 있으면 철벽이 내려오는 것 같은데 어떻게 기도를 하겠습니까? 결국 우리의 경건이라고 하는 것은 비밀스러운 원천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로 설명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제 설교할 때 존재적 울림, 무엇이 존재적 울림이 우러나오게 하는가? 잘 정돈된 신학지식, 열렬한 기도생활, 성령의 은혜, 이런 것들은 모두 한 요소이지 그것이 모두를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감지해야 됩니다. 어떤 사람에게서 그런 존재적인 울림을 보는 것입니다. 분석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가 있는데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체험의 깊이, 그리고 그런 것들이 정돈된 신학의 지식, 열렬한 기도생활, 성령의 도우심, 이런 것들로 인해서 인격 속에 어우러질 때 깊이가 있는 항아리처럼 되어서 장중한 울림이 울려나오는 것입니다.
(예화) 일본의 역사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일본이 불교의 나라였습니다. 젊은 스님이 있었는데 불심도 탁월했지만 승승장구해서 아주 젊은 나이에 국사가 되었습니다. 나라의 스승이 된 것입니다. 너무 가슴이 벅차서 이 젊은 나이에 일본의 국사가 되었다는 것이 너무 자랑스러워서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어머니, 어머님이 지성으로 기도해주셔서 제가 이렇게 젊은 나이에 모든 사람이 부러워 할 가장 높은 일본의 국사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엄마가 편지를 보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너에게 스님이 되라고 한 것은 이 차안에서 고통 받는 중생들을 피안의 세계로 인도하는 다리가 되라고 너에게 불가의 길을 가도록 허락을 했는데 너는 겨우 명리승(名利僧)이 되고 말았구나.” 탄식하는 장문의 편지를 썼습니다. 그 사람이 그 자리에서 그 오랜 세월 동안 도를 닦으면서 깨우치지 못했던 번쩍 하는 깨달음이 엄마의 편지 한 장에서 발견이 된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왕에게 청하여 국사의 자리를 사양하고 낙향하여 이름 없는 절에 들어가서 평범한 도를 닦는 불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존재적인 울림이 있는 신자가 되어야 할 이 소명을 우리들이 다 못하고 있으니까 보상의식이 생기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마치 비즈니스 하듯이 하는 것입니다. 아까 장수영 교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과학이, 내가 만든 기술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인가, 내가 하고 있는 사업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인가를 생각안하고 돈 많이 벌어서 그 중에 일부 선교비 내자, 이렇게 하나님도 사업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를 밀어주시면 십분의 일은 제가 드리겠습니다. 십분의 이를 선교비로 드리겠습니다. 바꾸어 말하지만 그렇게 사업을 해서 바치는 수십억의 선교비보다 한 사람으로서 달동네에 살면서 그 동네주민에게 울려 퍼지게 하는 존재적인 작은 울림이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연히 만들어 낸 말인데 어디서 배운 용어가 아닙니다. 존재적 울림, 오늘도 하루 종일 그 단어를 생각을 했는데 진짜 좋은 것 같습니다. 존재적 울림, 그 울림이 바로 우리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고 예수 믿게 하시고 우리 각자 있는 곳에 하나님이 우리를 두신 이유입니다.
여러분은 모르겠지만 나는 그랬습니다. 예수를 믿고 이렇게 살아오면서 나에게 기독교에 대해서 좋은 인상을 준 사람이 높은 사회적인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집안에 매우 어려운 일이 일어났는데 같이 사는 사람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인줄 알았는데 어려운 일을 당하니까 주여 하며 주님을 간절히 부르며 뛰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 정말 살아 계시구나, 신앙의 힘은 저렇게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나오는 구나,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지위와는 거의 상관이 없이 그런 울림을 그때마다 그 사람에게 찾아가서 당신에게 존재적인 울림이 있습니다. 존경합니다. 이렇게까지는 말을 못했지만 정말 사회적으로 하찮은 사람에게서 그런 울림을 들을 때에 나 하나님은 살아있다고 하는 장엄한 음성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분들은 여러분에 비하면 신앙지식도 형편없는 사람들이고 그렇지만 그런 존재의 울림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대하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세워놓으신 것입니다.
신자는 결국 존재로서 자기가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사람이라는 것, 또 이 세상이 하나님을 위해 구별되었다는 것, 또 하나님이 온 땅과 만물위에 아주 높으신 초월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께 복종하는 것이 마땅하며 그분은 도덕적으로 완전하신 분이기 때문에 아름다우신 분이라는 것, 그것을 보여주는 울림이 있는 존재가 되라고 우리를 구원받는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무엇을 해 먹고 살 것인가? 어떻게 해야지 돈을 많이 벌 것인가? 어떻게 해야지 인생을 노동을 덜하고 신나게 보낼 것인가? 이런 것들하고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돈 많이 벌고 높은 지위에 올라도 쓰레기 같은 인생을 살면서 아무런 존재의 울림이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장 천한 일에 종사하며 살아도, 쉽게 얘기하면 돈도 많고 사회적인 지위도 높은 주인집 마나님은 존재의 울림이 없어도 매일 새벽기도하고 주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자매가 그 집에 파출부로 가서는 존재적인 울림이 있습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인이 높은 지위에 올랐다고 해서 효과적인 선교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진리에 대한 울림은 그런 것들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한 나라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B. “나라” : ethnos
1. 거룩함의 소명 : 공동체 독특한 특징
여러분 ‘나라’라고 하는 것은 ‘에뜨노스’(ἔθνος)인데 이런 거룩함의 소명이 개개인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너희는 거룩한 나라다. 거룩한 ‘에뜨노스’, ‘민족’이다. 무슨 뜻입니까? 이 거룩함이 공동체적인 소명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의 상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거룩한 울림이 우리가 몸담은 작은 교회가 이 시대의 교회가 전 세계의 보편교회가 이런 존재의 울림을 어느 정도 울려 퍼지게 하는지 그것에 대한 관심이 있는 것이 신자의 의무입니다.
교회 잘못된 일이 있고 했을 때 막 욕설을 퍼붓고 하라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교회의 영적인 번영과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효과적인 하나님의 나라의 성취를 위해서 교회의 현재적인 영적인 상태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영적인 상태라고 하는 것이 귀신을 내어쫒고 이적을 행하고 이러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의 상태입니다. 그 거룩함의 상태는 사랑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거룩하심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비천하다고 하는 것, 하나님이 도덕적으로 완전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도덕적으로 완전하신 분이 이렇게 불결한 죄인들을 용납하시는 것이 결국은 거룩함이 사랑으로 완성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은 높고 초월하시고 도덕적으로 완전하시기 때문에 이 쓰레기들아 하며 확 불태워 버리시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바로 그 거룩하심이 그렇게 높고 위대하고 완전하시면서도 그렇지 못한 나를 용납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체험이 있는 사람들은 항상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사회의 개혁과 도덕의 개선을 말하지만 신자는 속이 허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 것인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세우신 본래의 의도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것을 생각하기 보다는 이 세상의 평판에 더 많이 마음을 쓰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신자의 정체성으로서 거룩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본질적인 것은 설명할 수 없는 신비에 쌓인 것이지만 하나님의 그 거룩하심을 생각할 때 한없는 감동을 느끼면서 두려움과 사랑을 함께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의 경험 없이는 경건이라는 것이 생겨나지 않는 것입니다.
경건이라고 하는 시리즈가 있습니다. 꼭 들어보십시오. 경건의 비밀 시리즈입니다. 책도 조그만 공과공부 교재로 나왔습니다. 그것은 사실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사상, 사상적으로 잘 정리되고 윤리적으로 아주 올바른 삶을 살고 다음에 은혜 생활을 해야 됩니다. 교인들이 얼마나 이상한 사람인지 자기가 사상적으로 잘 정리되고 지식의 깊이를 더해야 된다고 이야기를 하니까 목회자가 그런 것으로 대리만족을 느낍니다.
어느 교회에서 사역자로 있던 사람 이야긴데 자기네 교회가 윤리적으로 아주 올바른 교회로 널리 알려졌답니다. 온 교인이 다니면서 항상 자기네 목회자 자랑을 합니다. 자기네 목사님은 프라이드 타고 다닌다고, 목사님만 그러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 교회가 강남에 있습니다. 교인들은 다 외제 승용차, 대형 승용차 타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럼 그것이 무엇입니까? 대리만족입니다. 자기는 그렇게 안 살지만 우리 대표가 그렇게 산다. 우리는 거기에 참여한다. 얼마나 웃기는 것인지, 여러분 기도해야 합니다고 하니까 기도 강사 불러다가 기도 듣고 아멘 하고 끝입니다. 진짜 죽어가는 영혼 위해 복음 전해야 됩니다. 전도 잘한 사람 간증 듣고 할렐루야, 이러고 끝나는 것입니다. 신학 공부 열심히 해야 합니다 하니까 공부 많이 한 교수 데려다가 한번 이야기 듣고 암, 그래야지. 하고 끝입니다. 뭐가 변한 것이 있습니까? 자다가 남의 다리 긁는데 그 사람이 아프지 내 다리가 시원합니까? 자기가 가려우면 자기 다리를 긁어야 합니다. 전혀 아닙니다. 그래서 다 대리만족을 구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직접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제 초대교회에 대한 불신자들의 인상에 대해서 몇 구절 외경에서 읽어 보았습니다.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지고 인용한 것은 아닙니다.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이웃에게 선한,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의 존재에 자신이 있어서 울림이 있는 사람들은 남에 대해서 너그럽습니다. 아무리 까불어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의 놀라운 특징이 뭔가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2. 네 가지가 필요함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철저한 자기 성찰, 하나님의 말씀의 빛에 자기를 비춰보는 자기 성찰, 마음을 쏟는 기도, 올바른 삶을 위한 용기, 성령의 능력으로 이것이 가능합니다. 충성스러운 사람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습니다. 초대 교회 교인들이 다른 것 로마의 정책에 다 순종했습니다. 심지어 세금 내는 것 까지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로마가 두 가지만 어기지 않으면 다 봐줬습니다. 첫째가 세금, 또 하나는 황제 숭배입니다. 황제 숭배는 동의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 주님이 왕이라고 고백을 하고 무릎을 굻고 우리 모든 것을 다 드렸는데 황제가 우리 보고 무릎을 꿇고 다 바치라고 하는데 이미 다 예수님께 바쳤다. 바칠게 없다는 것입니다. 한 왕에게 경배하지 두 왕에게 경배할 수 있느냐 입니다. 못한다. 그래서 죽어가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 것입니다.
로마에 가면 세바스티아노(San Sebastiano)라는 사람의 무덤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요즘으로 말하자면 경호실장 쯤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의 전도에 의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너무 놀라운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매일 나가서 보면 그리스도인이 맹수에게 찢겨 죽고 창에 찔려 죽고 도륙당하는 꼴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입니다.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감옥 속에서, 카타콤 속에서 숨어서 도망 다니는 것입니다. 거기는 굴이 석회석 이런 것으로 되어 있어서 굴이 몇 키로인지 알 수가 없답니다. 일본 기자 두 명이 그것을 끝까지 조사하겠다고 들어갔다가 실종되었답니다. 못 찾았답니다. 이 사람이 자기 지위가 있으니까 먹을 것을 사 가지고 정성껏 카타콤에 있는 성도들에게 공급했습니다. 나중에 발각이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처형당하는데 자기 신앙을 고백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카타콤에서 그리스도인을 섬기고 나오는 세바스찬을 활로 쏩니다. 온몸이 고슴도치처럼 화살을 맞고 신앙을 고백하고 죽습니다.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은혜가 없어서, 제가 요즘 은혜가 떨어져서, 요즘 은혜가 떨어졌다는 것이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회피하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비겁한 핑계입니다. 여러분이 왕의 시대에 살고 있는 신하라고 한다면 적국 나라의 임금한테 가서 경배를 하고 뇌물을 바치고 온 것입니다. 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하니 제가 요즘 임금님을 향한 은혜가 좀 떨어져서 그랬는데 곧 정상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제가 기본적으로 왕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면 임금이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참 일리가 있다고 그렇게 말하겠습니까? 그렇게 따지면 신앙의 정절이고 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일 병신 같은 사람이 순교하고 죽은 사람입니다. 주님한테 가서 내가 은혜가 좀 떨어져서 그랬는데 다시 은혜 받으면 잘 할 것입니다. 그렇게 왔다 갔다 하고 그렇게 살지 왜 한 번에 장렬하게 죽어버립니까? 그것이 신자의 세 번째 정체성입니다. 거룩한 나라입니다.
Ⅲ. 신자의 정체 4: “하나님의 보물”
A. 이 구절의 의미
네 번째 정체성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희랍어 성경으로 ‘라오스 에이스 페리포이에신’(λαὸς εἰς περιποίησιν)이라고 되어 있는데 좀 어려운 말입니다. 이것은 신명기 14:2절에 보면 같은 구절이 나오는데 ‘레암 세굴라’(לְעַם סְגֻלָּה) 히브리어로 나옵니다. ‘레’(לְ)는 무엇 무엇을 위하여 이런 뜻이고, 혹은 무엇 무엇이 되다는 뜻이고 ‘암’(ְעַם)은 백성이고 ‘세굴라’(ַסְגֻלָּה)는 ‘샤갈’이라는 동사에서 왔습니다. ‘샤갈’은 ‘감추다’입니다. ‘세골라’는 피동분사입니다. ‘감추어진 것’이라는 뜻입니다. 보물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말라기 3장 17절 같은 것을 NIV성경에서는 보석, 'jewels'라고 번역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소유가 된 사람들이라는 이야기입니다. 'eis into'라는 전치사가 붙여져 있는데 하나님의 소유 속으로 들어가는 백성입니다. 이것을 학자들이 어떻게 해석을 하는가 하면 이것은 종말론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미 하나님의 보물 같은 존재이지만 마지막 구속이 모두 완성되는 날에는 더더욱 빛나는 보석과 같은 더욱 완전 소중한 백성이 될 것이다. 지금은 소중한 백성, 그때는 완전 소중한 백성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해석을 합니다. 상당히 동의가 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already',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고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 졌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자녀입니다. 보물과 같은 백성들입니다. 'but not yet', 그렇지만 마지막 날에는 지금보다 훨씬 아름다운 존재들이 될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소중히 여기는 그것이 지금보다 훨씬 더 증가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받는 사랑입니다.
지금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이 자꾸 끊어집니다. 시련이 오고 믿음이 약해지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각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시험에 들면 끊어지는 것 같은, 시련이 밀어닥치면 하나님의 은총이 다했는가? 아버지가 나를 버리셨는가?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의심이 들어오면서 사랑의 멜로디가 툭툭 끊어집니다. 그 나라가 완성될 때에는 끊어지지 않는 멜로디가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완전한 사랑의 질서 속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B. 주께 보물 같은 백성들
우리의 정체성은 하나님께 보물 같은 백성입니다. 전 보물이 없습니다. 평생 살면서 보물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감각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끼는 것이 딱 하나 있습니다. 산지 40년 된 성경책, 그것은 지금도 보물처럼 간직을 하고 있습니다. 회심하던 해에 샀습니다. 너무 낡아서 못 봅니다. 어느 날 내가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을 만약에 누가 돈 주고 산다고 하면 내가 얼마쯤이면 양보를 할 수 있을까? 2억 원을 준다고 해도 난 안 팔 것 같습니다. 누가 그 성경을 2억을 주고 사가겠습니까? 두고두고 물려주고 죽을 것 같습니다. 나의 숨결이 거기에 다 담겨 있습니다. 보물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있습니까? 하다못해 목걸이라도, 아니면 뭐라도 하나쯤 있을 텐데 없습니까? 그 보물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겠습니까?
‘뭉크전’을 외국에서 한번 봤습니다. 근처도 못 오게 합니다. 유리로 둘러싸여서 멀리서 보게 합니다. 그림 한 장에 천 백억이랍니다. 그게 바로 보물을 간수하는 방법입니다. 사람들이 표사서 그리로 다 직행합니다. 막 절규하는 그림 한번 보는데 뭉크가 그것을 세 개를 그리고 죽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경매에 올라왔는데 천 백억에 팔린 것입니다. 나도 그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것이 보물을 간직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지금도 충분히 소중한 사람들이지만 그날에는 우리를 더욱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그때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사랑의 완전한 정도에 비하면 지금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얼마나 보물같이 여기는가 하는 가를 체험하면서 그렇게 하나님이 자기를 소중하게 여기시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을 해 보십시오. 적합한 비유일지는 모르지만 용서하고 들어보십시오.
언젠가 보험회사 아줌마가 나를 보험을 들게 해준다고 왔습니다. 피를 뽑는다고 하는데 보험회사에 소속된 간호원인가 봅니다. 피를 뽑아서 당뇨 검사를 하고 보험을 받아줄지 말지 하겠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한 40세쯤 되어 보이는데 손이 너무 예쁩니다. 그래서 제가 정말 손이 예쁘시네요, 부분 모델이라도 한번 해보시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손만 예쁘지만 여러분은 모두가 예쁘다고 생각해 봅시다. 사실 안 그렇지만 그렇게 생각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살점 하나만 뚝 떼어 놓았을 때 그것도 예쁘다고 합니까? 그렇게 말하지는 않을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우리가 그렇게 아름다운 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따로 떨어져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물론 우리가 개인으로서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존재이지만 하나님이 성도들이 죽는 것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가 예전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담지 했지만 찢어진 채로 살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져서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바라보시는 것입니다. 당신을 가장 완벽하게 닮은 아들을 보십니다. 아들은 거울에 비친 당신 자신입니다. 아들은 하나님 자신의 의식입니다. 아들이 너무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아들에게 하나님이 삼위일체 사랑을 아낌없이 쏟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의 신부가 있는데 교회입니다. 생명적으로 그 아들과 신부가 연합되어 있습니다. 아들 없는 신부, 신부 없는 아들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아들은 그 신부의 머리입니다. 생명적인 연합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그 아들이 그렇게 사랑스러우니까 신부는 그 아들 때문에 아주 존귀한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 아들에게 부어진 사랑이 신부에게 부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받는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그렇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참여함으로서 우리가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언제가 제일 예쁜 때인가 하면 원리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교회의 한 지체로서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되어 있을 때, 연합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그 연합 안에서 여러분이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 아름답고 예쁘다는 것을 하나님이 계속 입증해 보여주시는데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사랑의 자각, 교회 들어왔어도 사랑 받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순장이 기도 많이 하고 있는데 챙겨주고 이렇게 하면, 연초에 1부 지체들하고 MT를 갔습니다.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2부, 3부에 있는 지체들은 직장도 다니고 하는데 사실은 한 순에서 다들 부자일 필요가 없고 순장만 부자면 되는데 순장 수입을 공적 자금으로 쓰면서 살면 됩니다. 그런데 1부 애들은 다 학생입니다. 집에서 돈 몇 푼 받아 가지고 간신히 다니고 그나마 집에서 못 줍니다. 일주일 동안에 점심을 몇 번 씩 굶고 그 돈을 모아서 간식을 사 가지고 와서 주일날 자기 순에서 섬기는 것입니다. 그 얘기를 하는데 마음에 눈물이 났습니다. 나도 가난한 시절 지내봤기 때문에, 그래서 잘 해결을 해 주었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 받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어디서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예뻐하시고 사랑받게 하시는가 하면 그리스도의 몸의 아름다운 한 지체로 있을 때입니다. 그 손도 몸에 달려 있으니까 예쁜 거지 손목만 뚝 잘라서 접시에 담아서 올려놔보십시오. 족발도 아니고 얼마나 징그럽겠습니까? 교회의 사랑하는 지체들이 나의 아름다움을 빛나게 해주는 요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이런 것이 단독 독립 이런 것 없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대상이 있어야지 사랑이 있는 것이지 그래서 태초부터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계셨다고 하는 것이 이성적인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니면 하나님이 원래 사랑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가지고 종말까지 영원토록 하나님이 교회를 보존하시는 것입니다. 수준 높은 영적인 삶, 거룩한 의무, 이런 것들은 반드시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표지로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Ⅳ. 적용과 결론
신자는 자기의 정체성을 명료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누리는 거룩한 특권, 위로, 이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를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살아가면서 사람들이 나를 실망시키고 많이 의지하지는 않았지만 가까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멀리 떠나가고 혹은 죽음으로 떠나가고 기대했던 가족들에게서 실망을 느끼거나 그럴 때마다 불렀던 찬송이 있습니다.
(찬양)
이 세상에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나를 사랑하는 이 예수뿐일세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잖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이 세상 사람이 다 버려도 혹은 다윗이 고백한 바와 같이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해도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 앞에 보석과 같은 존재입니다. 너무나 소중한 보석과 같은 존재, 그래서 하나님이 여러분이 시련을 당하거나 고통을 겪을 때 큰 바위에 숨기시고 그 손으로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은밀한 곳에 숨기시고 여러분을 보호하십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매일 보면서 나는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올바르게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듯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알듯 모를 듯 한 말을 합니다. 자기를 자기방식대로 사랑하는 것은 정말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 방식대로 사랑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는 나를 올바르게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에 거울을 보면서 저 인간 너는 왜 사니? 쓰레기 같은 인간, 도대체 왜 태어난 거니? 왜 하필이면 내가 여기에 이러고 있는 거야? 이렇게 나를 향해서 막 쏟아 붓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러분을 보실 때 세골라처럼 여깁니다. 감추어 두고 싶으신 분, 아주 소중한 존재로 하나님이 여기십니다. 하나님에게 놀라운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자라오면서 열등감이 무지하게 많았습니다. 생각의 구조도 좀 평범하지 않았고 이상했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자면 몇 년 동안은 내가 노래를 못 부른다는 것 때문에 열등감에 빠졌는데 파바로티의 노래를 들으면서 열등감에 빠집니다. 다른 사람은 안 그러는데, 그럴 필요가 뭐 있습니까? 파바로티 같은 사람은 전 세계에 몇 명 안 됩니다. 에베레스트 산에 올라갈 사람이 전 세계에 몇 명 됩니까? 에베레스트 산에 내가 왜 못 올라갈까? 이런 것 때문에 열등감을 안 느꼈습니다. 그게 일관성이 없고 지 마음대로 막 가는 것입니다. 자아상을 막 파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자기를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치르신 댓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낼 때 수많은 어린양을 희생시키시고 애굽의 병사들을 희생시키시고 애굽에 10대 재앙으로 초토화시키면서 까지 건져내고 싶을 정도로 사랑하셨다면 예수님은 이 세상에 사탄으로부터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서 당신 자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서 화목제물로 버려 구속과 희생을 이루게 하십니다.
오늘 가슴에 새깁니다. 나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된 하나님의 보물이다. 하나님이 숨기고 싶은 아주 존귀한 존재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도 하나님은 나를 그렇게 소중히 여기시는 분이시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자녀의 정체성입니다. 이렇게 거룩한 나라요, 소중한 보물인 우리를 향해서 하나님이 어떤 인생의 계획을 가지고 구원하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어떤 계획을 가지고 우리를 구원하셨을까? 내일 계속하겠습니다.
그의 덕을 선포하라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녹취자: 김경애
Ⅰ. 본문해설
이제 마지막 세 번째 시간입니다. 한번으로 다루기에는 너무 긴 내용이 앞에 있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어쨌든 한 시간 이 한 번의 설교에 모든 내용들을 담아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무슨 뜻입니까?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보물이 된 백성들로 하나님이 삼으셨는데 왜냐하면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내용입니다. 아직까지도 구원을 순수하게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생각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너무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런 구원은 반쪽짜리도 안 되는 사분의 일 쪽짜리 구원입니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혼합주의적인 사고의 영향을 받아서 개인주의에 대한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에 신앙의 관심사 자체가 내가 천당을 갈 것이냐 못갈 것이냐, 내가 지금 죽으면 구원을 받은 것이냐 못 받은 것이냐 이런 것에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정죄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렇게 구원이 개인적인 측면도 가지고 있지만 두 사람이 맷돌을 갈다가 한사람은 들려올라가고 한 사람은 남습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은 분명히 그런 개인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지만 그 구원의 한 측면이지 구원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래서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나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내가 있는 그곳에 이미 예수께 접붙여진 지체들이 있고 그 몸에 내가 접붙여진 것이고 그래서 예수의 생명을 받은 것이고 그래서 그 지체들이 있는 곳에 예수가 계시고 예수가 있는 곳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살던 우리가 예수님께 접붙여지는 것을 보면 구원이 개인적인 것일 수 있지만 이미 예수의 몸을 이루고 있는 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한 사람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는 것은 공동체에 진입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는 매우 뚜렷한 소명을 가진 공동체입니다. 그러니 구원에 참여할 때 이미 공동체에 주어진 소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 소명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소명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주기도문에서 배웠고 사실은 이미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에서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갖지 않으면 구원에 대해서 그런 이상한 망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철저히 하나님의 나라라는 'Context'에서 거기에서 구원의 의미를 되짚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의 소명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이 사실은 응축해서 녹아있는 것이 주기도문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을 여러분이 이미 공부했지만 여러분이 얼마나 정리되어 있는가하는 것은 의문입니다. 요즘은 구역공부를 하러 와도 책을 읽지 않고 오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가 들리는데 이것은 정말 말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없으면 그러면 e-book이라도 해서 손에 넣고 다니면서 읽어야지 그리고 와서 해야지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이 되겠습니까? 안됩니다. 그 주기도문을 보면 결국은 우리의 소명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주기도문 속에 응축되어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룩하시려고 했던 초대교회의 공동체의 이상을 당신의 기도 속에 담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제자들에게 반복하게 하심으로써 자신의 삶의 이유, 구원의 이유, 존재의 목적을 주기도문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오늘부터 집에 가서 주기도문을 다시 한 번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새롭게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가 구원의 의미를 되짚어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자의 구원을 새로운 언약공동체의 성립 안에서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은 그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라고 하는 그 소명의 언약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새로운 정체성은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위한 언약관계 속에서 해석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결국은 세계의 완성을 위한 하나님의 경륜에 참여할 소명을 받은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완성되어 가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주도권을 쥐고 당신의 나라를 완성해가시지만 그것을 하나님이 처음부터 구원받은 당신의 백성들과 그들을 사용해서 당신의 나라를 이루어가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최종적인 완성은 당신 혼자서 하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해가는 가장 중심에 뭐가 있느냐하면 그리스도의 덕을 선전하는 것입니다.
Ⅱ. 우리에게 행하신 일
그 선전하는 방식이 무엇이냐 하면 존재의 울림입니다. 우선 하나씩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시니’ 그러면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미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일들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두 가지가 나오는데 하나는 어두움에서 불러내신 것과 그 다음에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이는’ 이라고 나오는데 희랍어로 ‘호포스’(ὅπως)라는 단어인데 ‘어떤 식으로 무엇 무엇을 하기 위하여’ 이런 뜻입니다. 'So that may' 이런 뜻일 것입니다. 신자에게 이러한 새로운 정체성을 주신 것은 이렇게 이렇게 선포하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 구절을 깨끗이 정리를 세 토막으로 하면 제일 처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셔서 새로운 정체성을 주셨다. 4가지입니다.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보물이 된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무엇을 하게하시려고? 그의 덕을 선포하게 하시려고 그런 새로운 정체성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덕은 어떤 덕입니까? 그 덕은 그리스도의 덕인데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가? 그것이 바로 가운데 토막인데 그것이 바로 어두움에서 너희를 건져내어 빛으로 들어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정체성 선포하게 하신분이 누구? 그분이 바로 우리를 어두움에서 건져내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무엇을 선포하는 것입니까? 덕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A. 어두움에서 불러 냄
그러면 제일 먼저 ‘어두움에서 불러내어’ 입니다. ‘에크 스코투스 휘마스 칼레산토스’(ἐκ σκότους ὑμᾶς καλέσαντος) 이렇게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스토코스’(σκότος)라는 단어입니다. 희랍어로 어두움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남성명사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스코티아’(σκότία)라는 단어가 있고 ‘스코토스’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둘 다 어두움이라는 것인데 ‘스코티아’는 여성형이고 ‘스코토스’는 남성형입니다. 이 둘의 차이가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스코티아는 어두움은 어두움인데 그 스코티아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어두움의 의미가 한정적입니다. 그래서 자연적인 어두움과 영적인 어두움 이 두 가지를 스코티아라는 여성형단어가 표현합니다. 그런데 남성형 단어는 훨씬 폭이 넓습니다. 그래서 자연적인 어두움 이외에 지적인 어두움, 영적인 어두움, 도덕적인 어두움, 심지어는 어두움을 담지하고 있는 그 누군가조차도 스코토스 남성형으로 불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여성형이 쓰이지 않고 남성형이 쓰인 것은 눈여겨볼만한 대목입니다. 우리들이 희랍어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없는 일이지만 그러나 의미의 차이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이 단어의 선택이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남성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어두움이라는 의미는 훨씬 폭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합니다. 그 ‘에크 스코투스’(ἐκ σκότους) “그 어두움으로부터” ‘휘마스’(ὑμᾶς) “너희를” ‘칼레산토스’(καλέσαντος) “불러내심”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1. 지성적 어두움
그러면 그 어두움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제일 첫 번째는 무엇이냐 하면 지성적인 어두움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고린도전서 4장 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주께서 오시기전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춰진 것을 드러내시고 마음에 뜻을 나타내시리니’ 이때의 감춰진 것 이것이 바로 어두움인 것입니다. 그러면 감춰진 것이 어두움이 아니라 감춰진 것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알지 못하도록 감추고 계시니까 우리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옛날에 이 편지를 받고 있는 수신자들도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면 이방인이었고 한때는 불신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무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올바른 지식을 갖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무지하니까 당연히 이 세계가 어떻게 해서 존재하게 되었는지, 인간은 왜 생겨나게 되었는지, 사회는 무엇인지, 그리고 이 사회는 어떻게 되어야하는지, 또 이웃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존재하는 것인지, 이 자연세계는 무슨 목적으로 있는 것인지, 그런 것들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여러분이 성경을 공정하게 보고 구원의 의미를 올바로 알게 되면 나는 여러분 모두가 환경을 파괴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는 영혼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인간과 운명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연을 학대하면 그것이 메아리가 되어서 인간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는데 그래도 해야겠습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위기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벌의 수효가 어마어마하게 감소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무선통신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떤 결과가 오느냐하면 자연적으로 벌의 수가 어마어마하게 감소하니까 이것을 수정을 시켜줄 매개체가 없으니까 자꾸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농사나 이 모든 열매 맺는 작물의 경우에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것도 또 부메랑이 되어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것뿐이겠습니까? 우리들이 쓰다가버린 플라스틱부터 시작해서 원자력발전소 같은 것, 4대강 개발하는 것, 이런 것들이 다 부메랑이 되어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심지어 예수를 믿는 젊은이들도 너무 생각이 없고 비판의식이 없습니다. 조선일보나 동아일보를 달달 따라서 하고 KBS를 따라서 하는 것입니다. 항상 반대편 이야기도 들어봐야 합니다. 반대편 이야기도 무조건 믿어도 되는 것은 아니지만 들어봐야 합니다. 그리고 이 미디어의 시대에는 이런 것들에 의해서 사람들이 세뇌되는 시대이기 때문에 자기를 종교적으로 헌신하듯이 언론에 자기를 내어맡겨서는 주체성이 있는 판단을 가진 사람으로 살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뜬소문을 붙들고 종교적인 맹신을 하면 안 되겠지만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다가 이런 이야기까지 나왔습니까?
세계와의 관계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성적으로 어두웠던 것입니다. 무엇을 몰랐던 것입니다. 어두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에 의하면 무엇이라고 하느냐하면 그런데 그 무지한 속에서 너희들은 조상의 망령된 행실을 쫒으면서 살던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설상가상입니다. 무지한데다가 잘못된 습관을 쫒으면서 망령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망령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까?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을 모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왜 무지한데다가 그런 삶을 고집하면서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설상가상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지적이 어두움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내신 것입니다.
나는 지금도 너무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를 생각하면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지만 나는 너무 안타까운 것이 있습니다. 스물한 살 때 회심을 했는데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일반적인 우리나라 사회에서 21살짜리보다 내가 평균보다는 조금 성숙했던 것 같습니다. 책도 그 사람들보다 많이 읽었고, 철학책도 많이 읽고, 문학책도 많이 읽고, 사상서도 많이 읽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젊은이가 예수 믿을 토양이 잘되어있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딱 만났습니다. 인생을 그렇게 불행하게 여기면서 내가 살았었는데 결국은 정말 예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아 정말 아멘이다. 그러면서 주님을 믿었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때에 정말 기독교적인 지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 누군가를 만났다면 그러면 내가 여태까지 알고 있는 인생에 대해 정말 나는 철이 든 16살부터 시작해서 21살까지 인생에 대해서 아주 치열하게 고뇌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19, 20, 21살은 매일 매일 내 피를 펜촉으로 잉크로 찍어가면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21살이 되던 해에 큰 노트를 펴놓고 나의 인생론을 써내려갔습니다. 그 원고가 있었으면 재미있었을 텐데 반 권정도 노트를 했는데 우리 친구가 오더니 그 친구는 그때 초등학교 선생이 되는 길을 가던 친구였는데 한참 읽어보더니 ‘야 남준아! 네가 21살에 이것을 쓰니 너는 40세에는 내세에 대해서 쓰겠구나!’ 그러더니 정말 내세에 대해서 썼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얼마나 토양이 잘되어있겠습니까? 그런데 몰랐습니다. 무슨 책을 읽어야할지도 모르고 그러면서 방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모든 사상은 다 쓰레기라고 생각했는데 확실한 것 하나는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정말 무지했는데 예수님을 믿고 나니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예수님이 나를 그렇게 사랑하신다는 것, 그리고 내가 이제껏 살아온 모든 삶은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데려오시기 위한 계획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을 계속 의지하면 하나님이 나를 계속 선한 길로 인도할 것이라는 생각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무지하던 사람인데 하나님이 우리를 거기서 건져내주신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2. 영적인 어두움
두 번째는 무엇이냐 하면 영적인 어두움입니다. 이 지적인 어두움과 영적인 어두움은 두 개가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은 떼어놓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빛이 들어오면 그것은 반드시 지성의 빛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양의 크기는 다릅니다. 그러나 반드시 영적인 빛은 지성의 빛을 동반하게 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어차피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왜 불가능하냐하면 너무 어렵기 때문에 불가능한 측면도 있지만 성경이 핵심적으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고린도후서 4장 4절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 세상의 마귀가 그 찬란한 복음의 광채가 우리의 영혼에 비취지 못하도록 가리는 것입니다. 어두움으로 가려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무리 밝은 빛을 내리쬐어도 덮어놓으면 캄캄하듯이 비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우리는 영적인 어두움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지 못한 자연인이던 시절에는 우리는 신령한 세계에 대해서 아주 무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기껏해야 귀신들의 이야기, 공상 속에 나오는 영들의 세계에 대해서 막연한 인상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 신령한 세계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하는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의 영적인 감각은 대부분 죽어있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비유하느냐하면 맹인들보면 시신경이 완전히 죽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어떠한 빛에 대한 감각이 없습니다. 그런데 시신경이 조금 살아있는 사람들은 사물은 보이지 않는데 사람들을 데리고 밝은 빛으로 가면 뿌연 빛이 비치는 것이 느껴지고 다시 건물 속으로 데리고들 어가면 사라지고 어두움이 내려지는 것이 느껴진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영적인 것들에 대해서 완전히 감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그런 상태였기 때문에 영적인 어떤 것들을 분별해 낼 수 있는 안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영광, 인간의 죄,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 이런 것들에 대한 감각이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제일 먼저 질료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이제 빵도 만들고 여러 가지를 만드는데 먼저 밀가루가 있어야하지 않습니까. 그렇듯 질료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 질료의 상태가 창세기 1장 2절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하나씩 만드시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빛이 있으라.’ 그것을 제일 먼저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빛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 창조였듯이 그 천지창조에 비견될 수 있는 두 번째 창조가 어떻게 이루어지느냐하면 하나님을 등진 죄를 범한 죽은 영혼 속에 이루어지는데 그 첫 번째에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시는 그 첫 번째도 역시 동일하게 빛을 주심으로써 재창조의 시작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제일 먼저 예수님을 믿고 회심하게 될 때에 제일 먼저 들어오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빛입니다. 그 빛이 무엇이냐 하면 영적인 빛입니다. 그래서 신령한 세계에 대해 아주 절망적일 정도로 희미한 감각밖에 없던 사람이 눈을 떠서 뚜렷하게 모두는 아니지만 신령한 세계에 대해서 뚜렷하게 볼 수 있는 그 빛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 빛은 바로 재창조입니다. 그래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 최초의 의미는 무엇이냐 하면 예전의 영적이 어두움에서 벗어난 빛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 오늘날은 소위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의 사인 즉 표지에 대해서 뒤범벅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내가 썼지만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은’ 이라는 책이 사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려워서 읽지를 않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낙심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는 그보다 어려운 일들을 더 많이 하면서 컴퓨터의 게임은 그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런데 잘합니다. 그런데 어려운 것은 하나도 없는데 매우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오래간만에 인터넷에 들어가 보았는데 서평이 없습니다. 서른 통은 서평이 많습니다. 매달려서 ‘그렇게 생각해 어쩌고저쩌고’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은 없습니다. ‘어렵다.’ 그리고 눈물표시 ‘비추’ 참 낙심이 됩니다. 제일 먼저 들어오는 것이 영적이 빛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역사로 돌아가 보게 되면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 증거가 무엇이냐? 이교도에서 예수 믿는 기독교인으로 회심한 증거가 무엇이냐고 할 때 우리는 그 대답이 애매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불신자이거나 혹은 이교도였다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할 때 사인을 한 가지만 들으라고 하면 무엇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만 이야기해보십시오. 평소에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무엇이 다릅니까? 하나만 이야기해보십시오. 불신자와 신자는 무엇이 다른지 눈에 보이는 것 하나만 이야기해보십시오. 형제 무엇이 다릅니까? 말씀대로? 과연 그럴까요? 어디에 그런 그리스도인이 있습니까? 뒤에 있는 자매가 이야기해보십시오. 기쁨? 그런데 여러분은 왜 그렇게 우울합니까? 그 옆에 이야기해보십시오. 차이가 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삶에서? 세상 사람들이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그 사람들은 말씀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기쁘다? 개콘 보는 사람들은 다 기독교인 같습니까? 삶에 있어서 차이가 난다? 그것은 소망사항입니다. 초대교회 때에는 이견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두 가지인데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하나님께 사랑을 받거나 입니다. 두 번째는 빛입니다. 지혜의 빛이 있는 사람입니다. 물론 그것에 대해서 자신들이 동의할 수도 있고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떤 자칭 지혜의 새로운 빛을 따라 산다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클레멘트 1서라는 외경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그로 인하여’ 그가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은 것으로 인하여 우리의 어리석고 어두워진 총명이 빛을 향하여 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총명이 빛을 향하여 활짝 피어난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과 비기독교인을 가르는 또렷한 사인이었습니다. 바나바의 서신이라는 외경이 있습니다. 14장 5절에서 7절을 찾아보니까 이렇게 나옵니다. ‘신자는 사람들을 이방인의 빛이 되게 하며 눈먼 자를 보게 하며 족쇄에서 끌러주며 어두움에 앉았던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내는 사람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에 대한 초대교회 사람들의 인상이었습니다. 공통적으로 모두 등장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어두움에서 빛으로입니다. 자기가 나왔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사람을 그 어두움에서 빛으로 이끌어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빛이 무엇이냐 하면 사람들을 말로 설득해서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그런 종류의 빛이 아니라 존재의 울림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구나!’ 인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구나!’ 그 무엇인가를 울리게만 들어주는 그 울림, 그것이 빛을 가지고 있는 효과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그런 사람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영적이 어두움에서 건져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자유를 이야기합니다. 자유(Free)입니다. 오늘날도 교육에 대해서 자유를 많이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자유는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일수 없습니다. 옳지 않은 속박과 억압 하나님이 응당 우리에게 주지 않으신 억압들은 우리가 그것을 끌러내야 합니다. 그 억압에서 우리가 자유로워져야합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신앙의 목표가 아닙니다. 교육에 있어서는 특히 그렇습니다. 어떤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편견, 그 다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명히 자유를 주셨는데 무엇인가 잘못된 선입견으로 그 자유를 박탈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전부 다 우리들이 타도해야하는 것들입니다. 싸워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만 그 자유가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닙니다.
교육사에 보면 한때 아주 커다란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인물가운데 몬테소리라는 학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교육방식은 아주 혁신적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느냐 하면 1학년, 2학년, 3학년 이렇게 반을 짜는 것이 아니라 6학년에서 한명, 5학년에서 한명, 그렇게 각 학년에서 1명씩 6명을 묶어서 한반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어떤 효과를 거두느냐하면 선생님한테 배울 뿐만 아니라 3학년이 5학년 형에게 배우고, 1학년이 3학년 형에게 배우고, 3학년이 1학년을 돌보면서 배우고, 6학년에게서 돌봄을 받으면서 배우는데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썸머 힐이라는 교육학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을 자유롭게 함으로써 사람들을 아주 훌륭한 사람 말하자면 스스로 인간들이 억압으로부터 풀려나와 자유를 얻음으로써 이제껏 제도권이 교육을 시킬 수 없었던 아주 탁월한 어떤 것들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도 별 볼일이 없어졌습니다.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이렇게 교육을 받는 사람, 이렇게 여러분처럼 신앙을 배우는 우리들, 나를 포함해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교육을 받는 피교육자로서 교육학적인 면에서 보면 신자는 모두 하나님 앞에 피교육자입니다. 그래서 오늘 새벽에도 ‘알자 여호와를 알자’ 그랬습니다. 그 사람들은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어떤 자유를 가로막는 것이 그에게 있어서 문제가 되고 그것이 잘못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그릇된 억압으로부터 그것들 풀어주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러나 모든 것을 풀어주었을 때 주어진 것을 올바르게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을 아직 갖추지 못한 미완성체입니다. 그래서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람들을 자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유조차도 또 다른 가치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 놀라운 가치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율입니다. 그것을 우리 기독교적인 우리 신학의 맥락에서 이야기하면 세상 사람들이 진보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밖에 절대적인 진리의 체계가 있다는 것을 일단 부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거기도 층차는 있겠지만 그런데 그런 것들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자율이 궁극적이지만 인간 자신이 주체가 되고 인간자신이 주인이 된 것은 자율이지만 우리와 같은 신학적인 입장에서 볼 때는 진정한 자율이라는 것은 신율을 받아들이는 자유입니다. 거기에서만 인간이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찬양)
주의 사랑의 줄로 나를 굳게 잡아매소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일평생 피를 토하듯이 부르짖었던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자율적인 존재가 되어야하는데 그 인간의 진정한 자율의 가치는 신율에 붙잡힐 때 우리들이 진정한 자율을 그 안에서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그 속박이 이 세상 사람들은 돈이나 권력, 완력, 이런 것으로 짓밟고 누르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의 그것은 뭐냐 하면 사랑에 의해서 강제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설명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을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면 오늘 밤새도록 이야기해도 모자랍니다. 그런데 두 시리즈를 소개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인간의 이해>, 그리고 또 하나는 <십자가와 구속>이라는 시리즈입니다. 두 개를 들어보십시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사건이 자기를 영적인 어두움에서 건져내는 것입니다. 부활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죽으셨다는 것이 강하게 깨달음이 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나무에 매달려 죽었고 저주를 받은 것이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이해를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이외에는 죽은 자를 살릴 자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한 사람이면 저주를 받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죽은 것도 'Fact'였고 다시 사신 것도 'Fact'였습니다. 왜? 다시 사신 사건은 자기가 직접 목격을 했습니다. 두 사건의 조화를 찾았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죽임당한 것과 다시 살리심을 받은 것은 양립할 수 없는 사건이지만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가 자기의 죄 때문이 아닌 우리의 죄 때문에 죽은 죽으심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렇게 순종해서 죽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살리실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어두운 지성이 찢어지면서 찬란한 빛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확 비치면서 이 사람도 철학과 모든 것에 대해서 통달한 사람입니다. 한순간에 빛이 들어오면서 쫙 열리면서 이 세계의 모든 의미들이 찬란한 빛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신학적인 발전의 단계가 있습니다. 나중에 나이가 들수록 더 원숙하게 찬란하게 나오는 것입니다. 평생을 그런 빛 속에서 산 사람입니다. 고난은 당했지만 사실은 더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어떻게 되었느냐하면 하나님이 이렇게 나를 사랑하시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류를 이렇게 사랑하시는 사랑에 강력하게 붙들렸습니다. 어느 정도로 붙들렸느냐하면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를 당할 것 같은 정도로 붙들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번도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그것을 붙들어 맨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사랑이 시키는 강제력은 폭력의 강제력과는 다른 것입니다. 내가 지금 저 사람을 사랑합니다. 너무 사랑합니다. 그런데 지금 아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옛날의 한국영화에서 보면 달려가서 흔들어도 안 깨어나니까 입을 벌리고 여자가 자기 손가락을 깨물어서 피를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의학적으로 말이 됩니까? 그러면 그것을 받아먹고 이 사람이 깨어납니다. 뻥입니다. 그런데 어쨌든 그런 것입니다. 저 사람대신 내가 죽어야할 것 같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강제력을 느끼는 것입니다.
내가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아침마다 한겨레신문을 읽다보니까 첫면을 넘기면 항상 눈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이쪽에 단원고등학생들 하나씩 나오는데 언제 끝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맨 위에는 엄마, 혹은 언니, 아빠가 쓴 편지가 나오고 밑에 아이의 약력이 나옵니다. 그런데 어제도 잠깐 유튜브에서 음악을 들었는데 단원고여학생이 평소 꿈이 가수였다는데 김장훈씨하고 거위의 꿈을 불러놓은 것을 믹싱해서 취입을 했습니다. 노래를 잘 부릅니다. 그 아이는 아마 살았으면 가수를 할 만한 아이였습니다. 두 번을 들었는데 자꾸 울컥거리며 눈물이 났습니다. 질문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지금 만약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누군가가 지금 그 바다에 빠져죽은 아이를 위해서 대신 죽으면 그 아이가 살아난다고 한다면 대신 죽으러갈 사람들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문제가 많은 가정에서 자랐습니까? 왜 대답이 없습니까? 최소한 자기네 엄마 아빠는 갈 것입니다. 걔네들을 잃어버리고 사는 엄마 아빠의 삶이 삶이겠습니까? 그런 것이 무엇이냐 하면 가야할 의무를 아무도 부과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랑은 그것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기에서 진정한 자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Autonomic'입니다. 그럴 때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조금 더 덧붙이자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성화를 자꾸 이야기하는데 성화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런 철학적인 견지에서 성화를 이야기하면 이런 것입니다. 한칼에 쳐줄게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그렇게 되기를 원하시는 존재가 되는 것이 자기도 기쁜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성화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 하나님이 너는 이런 존재가 되고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했는데 성화라는 것은 많이 변화되어서 자기도 그런 존재가 되는 것이 좋고 자기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일을 하는 것이 자기에게도 행복이 되도록 본심이 바뀌는 것이 성화입니다. 그것이 쉽겠습니까? 어떠한 강제력도 사랑의 강제력 이외에 아무것도 안 느끼는 것입니다. 최고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학생들을 교육할 때에도 자유를 주되 그 사람들을 자유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책임이 있는 자율적인 존재가 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육의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독교적인 목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사랑에 붙들려 신율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자율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그런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지는 그것이 신앙교육의 목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가 예전에는 그런 영적인 어두움 속에 있던 사람들인데 하나님이 건져내주신 것입니다.
3. 도덕적인 어두움
또 어떤 어두움에서 건져주시겠습니까? 도덕적인 어두움에서 건져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요한복음 3장 1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의 행위가 악하기 때문에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는 것이니라” 이것은 윤리적인 어두움입니다. 어두움의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방인이었던 시절에 우리는 영적인 무지와 지적인 무지와 도덕적인 어두움까지 함께 한 덩어리가 되어서 부도덕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놀랍게도 신약성경을 찾아보면 성도들의 삶에 대한 반복적인 표현으로써 단정함이라는 말이 신약에서만 6번 이상 나옵니다. 그 단정함이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옷을 풀어헤치고 이러고 잠자는 사람을 가지고 우리는 단정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름철이 다가오면 사람들이 개고기를 많이 먹습니다. 여름에 100만 마리씩 먹는다고 하니까 굉장한 것입니다. 옛날에는 먹었지만 지금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개를 먹습니다. 제가 우체국장할 때 개를 먹으면 개고기로 유명한 집이었습니다. Word Play 가 아니라 여름철이면 하얀 천막을 쭉 치고 즉석 음식점들이 계곡을 따라서 쭉 생기는 것입니다. 그때는 나라에서도 그냥 두었습니다. 개를 잡아서 탕을 끊입니다. 재미있습니다. 가면 음심적마다 일단 옷을 벗어야합니다. 음식점에서 주는 옷을 입어야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개고기를 먹는 복장입니다. 그것은 하얀색의 속이 약간 비치는 파자마입니다. 위에는 자기가 입고 온 러닝셔츠입니다. 그리고 옷을 벗어 걸어놓고 파자마바람에 러닝셔츠를 입고 거기서 개고기를 먹는 것입니다. 개를 놓고 된장을 올려놓고 큰 개를 잡아서 바구니에 담아주면 그것을 뜯어서 여기에 찍어서 먹는 것입니다. 폼이 개폼입니다. 좋다고 먹고 술을 먹고는 항상 싸웁니다. 그 계곡에서 개고기를 먹으면서 마지막에는 개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런 것들을 가리켜서 단정하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외국의 어느 식당에 멋도 모르고 갑니다. 정장을 하지 않으면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도 음식은 팔아야하겠으니까 그 앞에 정장을 걸어놓았습니다. 하나 꺼내어 빌려 입습니다. 그것을 입고 들어가서 밥을 먹고 나오면서 벗어놓는 것입니다. 단정한 것은 바로 그렇게 질서를 갖추어서 단정하게 됩니다. 성도의 삶과 관련해서 단정한 삶이라는 표현이 여섯 번 이상 나옵니다. 그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두 번째로 초대교회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발견하게된 것은 무엇이냐 하면 단정한 삶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생활하고 살아갈 때에 어떤 분명한 규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반복되고 반복되고 반복되면서 울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예전에 우리가 바로 그런 무지 속에서 영적인 어두움 속에서 이것이 기회라고 생각하고 도덕적인 어두움에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서도 일정한 즐거움이 있었으니까 뇌물을 받는 즐거움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유병언씨가 죽은 이야기들도 험한 이야기들이 다 나오는 것입니다. 입에도 담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타살이라고 믿습니다. 의외로 많습니다. 나도 그렇게 믿습니다. 누가 죽였습니까? 내가 말할 수는 없지만 힌트는 줄 수 있습니다. 그가 죽어서 가장 이득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용의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가 살았더라면 까발려져서 고통을 받을 사람들도 용의선상에 올라와있습니다. 그가 살아있으면 재산이 날아가기 때문에 이득이 사라지는 사람들, 뇌물을 먹은 사람들, 모든 사람들이 용의선상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어두움에서 우리를 불러내주셨습니다. 자 그러면 생각해봅시다. 하나님도, 세계도, 인간도,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다행히 그 사람이 비틀거리면서 살면서도 돈 좀 벌고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 아주 거지같이는 살지 않고 품위 있게 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렇지만 어둠속에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유병언씨가 마지막에 입고 죽은 옷이 천만 원짜리라고 하는데 그것도 잠바가 말입니다. 무슨 잠바인지 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어두움 속에 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모든 어두움 속에서 살던 우리들을 그리스도께서 그 어두움에서 건져내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지금 여러분이 생각하기에는 별것이 아닌 것 같지만 회심하기 전에 저같이 매일매일 인간으로 사는 것이 무서웠던 젊은이가 그리고 내가 왜 이 세상을 살아야하나 그리고 이 끊임없는 인간의 번뇌와 고통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이런 것에 대해서 고통 하는 사람들이었을 때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생명과도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회심하기 전에도 돈을 많이 벌어서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습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 가치 있는 삶인가를 생각했습니다.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1학년 걔네들을 여러분이 우습게 하수처럼 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말을 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래서 선배들에게도 물어보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한테도 물어보고 선생님한테도 물어보고 그랬습니다. 만족스러운 답을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불교신자인 선생님 한분만이 그래도 비교적 들을 가치가 있는 내용을 말해주어서 집에까지 몇 번을 찾아가서 자문을 구했지만 시원하지는 않았습니다. 교회에 눈을 돌려보니까 이 사람은 이렇게 믿고, 저 사람을 저렇게 믿고,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나보다 행복해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주신 것입니다. 생명과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어둠속에서 살고 있는 여러분의 전도대상자를 한번 보십시오. 그것이 정말 사는 것일까?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이 삶의 주체가 되어서 삶을 영위해가는 것이 사는 것이지 목숨이 붙어서 무엇인가 끌려서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어두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건져주신 것입니다.
B. 빛으로 들어가게 함
두 번째 하신일이 무엇이냐 하면 어두움에서 건져주셨을 뿐만 아니라 빛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무엇이라고 하느냐하면 “그 기이한 빛으로 들어가게 하시니” 그랬는데 희랍어 성경에서 직역을 하면 그의 기이한 혹은 놀라운 혹은 신기한 그 빛 속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Into'라는 전치사가 쓰이는데 그것도 역시 똑같이 현재를 이야기하는 것과 동시에 종말론적인 성취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미 빛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아직은 충분한 빛이 아닙니다.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합니다. 종말에는 그것이 더욱더 찬란하게 밝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압니다. 눈을 수술해봤기 때문에 압니다. 눈이 얼마나 나빴는지 교회의 사무실에 앉았는데 어떤 사람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옵니다. 속으로 저렇게 무례한 사람이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무엇을 팔러오는 사람인줄 알았습니다. “어디서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쳐다보면서 말을 하니까 “집에서 집안일로 왔습니다.” 우리 집사람이었습니다. 실화입니다. 심방을 하는데 식당에 가서 아깝게도 접시 옆에 양배추가 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얼른 주워서 먹었는데 휴지였습니다. 밤에 자동차를 몰고 가면 신호등 앞에서 한참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빨간불이 여섯 개로 보이는 것입니다. 자동차가 여러 대가 앞에 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한 대입니다. 여러 번 큰 사고가 날 뻔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병원에 가서 검진을 했더니 절대 못 고친다고 하더니 우리교인이 소개해준 친척이라고 그래서 갔는데 자기 의사의 명예를 걸고 목사님 눈을 못 고친다고 합니다. 못 고치면 못 고친다고 하면 되지 무슨 명예까지 겁니까? 그런데 너무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너무 우울한 것입니다. 아침에 “여보, 날이 흐렸지?” “아니 햇볕이 활짝 났는데.” 직원들에게 “얘야 날이 흐렸나보다.” “아니에요. 목사님, 저 태양을 보세요.” 그렇게 살았습니다. 교회만 오면 항상 어둑어둑합니다. 계속 전등을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안 되더라도 한번 가보자고 무조건 병원을 갔습니다. 그 병원에서 누가 못 고친다고 그러느냐고 내가 고쳐준다고 그랬는데 그 선생님을 평생 은인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수술을 했습니다. 수술을 하는데 앉혀놓고 기계로 수정체를 갈아버리는 것입니다. 주사를 놓는데 눈알 속으로 팔뚝만한 주사를 꽂는 것입니다. 나는 실명하는 줄 알았습니다. 실명해도 좋다고 각서까지 써놓고 했습니다. 그리고 팔뚝만한 주사액을 다 집어넣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공포는 너무 무시무시했습니다. 마취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눈알에다가 확 찔렀습니다. 그리고 마취를 하고 그 다음에 눈을 벌리고 물을 계속 부으면서 기계가 내려와서 긁는데 유리를 긁는 소리가 납니다. 끽끽 그러는데 움직이지 말라고 계속 그럽니다. 정말 무서웠습니다. 그런데 수술이 끝났습니다. 의식은 말똥말똥했습니다. 그런데 보지 못하도록 안대로 가렸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요렇게 해서 보는데 달에 정말 토끼가 보이는 것입니다. 난생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 한눈을 마저 수술하고 교회로 돌아왔는데 너무 충격을 받았습니다. 내가 애들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청년이었고 내가 집사님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다 노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마다 계속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아니 왜 이렇게 늙었어요?’ 한 달 동안 우리 집사람 얼굴이 적응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할머니를 데리고 살았구나!’ 그리고 거울을 보니까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한 3일 동안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서 살았던 것 같았습니다.
(찬양)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지금도 일 년에 한 번씩 안과에 가는데 선생님께 깍듯이 인사를 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를 어두움에서 건져내셨을 뿐만 아니라 빛을 주셨는데 그 빛은 이미 들어왔으나 완전한 빛이 아닙니다. 결국은 마지막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에 지금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한 빛이 비치게 되는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것이 내가 눈이 마이너스 16디옵터입니다. -16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3M에 놓고 이것을 재는 것입니다. 간격을 잘라서 한 칸을 갈 때마다 마이너스 1디옵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력 판을 30센티 앞에 놓고 봐야 보일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일시적인 현상이기는 했지만 눈을 뜨고 보는데 0.9가 나오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0.7로 내려갔는데 그때에 보니까 어쩜 사람들이 그렇게 얼굴에 티가 많습니까? 점투성이입니다. 점을 막 뿌려놓은 것 같았습니다. 나는 그런 줄 몰랐습니다. 그냥 허예서 흰둥이인줄 알았는데 점을 깨처럼 뿌려놓은 것입니다. 얼굴에 간장을 뿌려놓은 것처럼 덕지덕지 점입니다. 광명을 얻었다는 것이 이렇게 놀라운 것입니다. 똑같습니다. 예전에는 ‘그런 것이 무슨 문제야? 그렇게 살면 좀 어때?’ 그런데 확 밝아지니까 ‘아 이것은 아니구나. 이것은 더럽다. 이것은 먹을 수가 없다.’라는 인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는 그 빛이 더 찬란하게 들어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최종적으로 빛의 나라이고 동시에 사랑의 나라입니다. 빛의 나라인 동시에 사랑의 나라입니다. 이제 그 빛이 비록 완전히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과거에 비하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빛 속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데려가십니다. 마치 영적인 소경이 눈을 떠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그 빛으로 인간과 세계와 자신을 새롭게 알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이끌리는 인생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 하면 이 지성적인 빛, 영적인 빛, 도덕적인 빛인데 반대로 말한 것입니다. 지적인 어두움, 영적인 어두움, 도덕적인 어두움에서 우리를 건져내주셨는데 그런데 그게 뭐냐 하면 한번 얻었다고 해서 그것이 영원히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얻은 사람에게는 일정부분 이 세 가지 빛 중 일정부분은 결코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말 한번 진실하게 구원받은 사람은 다시 하나님이 없다고 확신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만약에 그런 경우가 있다면 처음부터 자기는 믿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믿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 빛이 남아있지만 그러나 그것을 언제나 풍부하게 누리면서 그 빛 속에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매일 매일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씻어내는 것입니다. 제가 음식점을 찾아갈 때 맛이 없는 것은 용서하는데 제가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깨끗하지 않은 집입니다. 그래서 일단 식당에 들어가서 유리창이 깨끗하면 저는 인정합니다. 유리창이 지저분하면 거미줄이 걸려있고 그러면 거기서 먹으면 안 됩니다. 아무리 맛있어도 더럽게 맛있는 것입니다. 먹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어느 집에 갔는데 아주 깨끗합니다. 그러면 맛이 없어도 맛이 없을 뿐이지 몸에 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됩니다. 그런 집에는 기꺼이 들어갑니다. 똑같이 우리의 마음에 있는 이 거울은 이것은 심방을 가면 유리창부터 봅니다. 그 주부의 살림살이를 봅니다. 보면 아주 무엇인가 가려놓은 집이 있습니다. 그것은 뭔가 보여주기 싫은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집은 유리창을 반짝반짝 닦아놓은 것입니다. 굉장히 부지런한 것입니다. 똑같이 우리가 처음 하나님께로부터 지성의 어두움에서부터 벗어나서 지성의 빛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뭔가 깨달음이 있고 교리도 잘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배웠다고 해서 그것이 항상 우리의 마음속에 살아서 역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살아서 역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보면서 계속 자신의 마음의 거울을 씻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이 명료해지는 것입니다. 영혼의 어두움에서 벗어났지만 우리가 다시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고 자기의 욕심을 따라서 살면 영혼의 어두움이 다시 찾아옵니다. 그러면 다시 닦아내야합니다. 회개의 눈물로 닦아내야합니다.
도덕적인 어두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받은 다음 성경말씀의 도움이 필요하고, 교회의 도움이 필요하고, 목양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지체들이 서로에 대해서 베풀어줄 수 있는 훌륭한 세 가지 자선행위가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물질적인 나눔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곤궁하고 가난한 형제, 자매들을 보면 돕는 것입니다. 그것도 티를 내지 않고 돕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천 원씩 모았어.” 그렇게 말하면서 주면 그러면 얼마나 받기가 그렇겠습니까? 모았으면 조용히 성경책 같은 곳에 끼워주고 숨는 것입니다. 누가 주었는지 묻지 마라. 어느 날은 나를 가르치던 교수님 한분이 영국에서 유학하셨는데 너무 곤궁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집에 가서 책속에 봉투 하나가 뚝 떨어지는 것입니다. 영국학생들이 모아서 준 것입니다. 물질적인 나눔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영적이 나눔입니다. 내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해주는 것입니다. 'giving forgiving'입니다. 용서해주는 것입니다. 훌륭한 영적인 자선입니다. 또 하나가 있는데 지적인 나눔입니다. 무지한 사람들에게 한수 가르쳐주는 것처럼 위에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무릎을 꿇고 발을 씻기는 마음으로 그에게 어떤 자기 안에 주신 진리의 지식을 겸손하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셰어 링입니다. 육적인 나눔, 영적인 나눔, 지적인 나눔 이것이 하나님 앞에 교회에서 칭찬받을 만한 것입니다. 그것이 왜 가능하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질을 주십니다. 그것이 세상적인 안목에서 보면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입니다. 재능 같은 것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안의 지체라고 생각해보면 공동체에게 주신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금 돈이 없는데 저 사람이 돈이 있는 것을 보며 ‘공동체에게 주신 돈 좀 내놔’ 이러면 안 되겠지만 그러나 가진 사람은 그렇게 생각해야합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교회의 공동체적인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은혜 안에서 살면서 뭔가 잃어버린 것 같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 대부분 어두움의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안타까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하나님이 찬란한 진리의 복락 안에서 주시는 거룩한 행복 우리가 오늘 수련회에 와서 이렇게 은혜를 나누고 교제하고 말씀을 받고 기도하고 너무 괴롭고 힘든 일이 있는데 마음을 쏟아놓으며 하나님이 나를 돌아보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영적인 복락입니다. 이런 것들의 가치를 깊이 숙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전에 주님을 모르고 살 때에 어렵고 힘든 일들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런 것들 때문에 지금은 기쁨과 설움을 함께할 지체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그리고 우리가 어려움 속에 있을 때 도움을 구하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 힘들어하고 어려워하는 지체들을 만나면 가끔 “당신이 부러운 것이 무엇이 있느냐? 내가 보기에는 다 가졌는데. 결혼도 했지, 직업도 있지, 아직 젊지, 말씀의 은혜도 받았지, 다니는 교회도 있지, 기도해주는 지체들도 있지.” 그러니까 “그런 것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많습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 앞에 만족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은 못 받은 것을 생각하면서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주신 것들에 감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시간에 식이요법 하는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생각나지 않습니까? 고기가 너무 먹고 싶으면 몇 점 먹으라고 했습니다. 4점, 그리고 뭐라고 말하느냐하면 ‘충분해, 충분히 즐겼어.’ 그리고 또 뭐라고 그럽니까? ‘내가 원하면 내일 또 먹을 수 있어.’ 이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돈 낸 것이 아까우면 싸달라고 해서 내일 먹으면 됩니다. 그리고 한꺼번에 먹고 살찌지 말고 말입니다.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옛날에 박영선 목사님의 책에서 봤는데 아부는 원래 마음에 없이 하는 것인데 마음에 없이 계속 아부를 하다보면 그것이 습관이 되는데 그것을 충성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마음이 조금 떨어져도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충분해.’ 그러라는 것이 아니라 ‘고기도 이만큼 먹었으면 충분해.’ ‘잠도 이만큼 잤으면 충분해.’ 그렇게 생각해야합니다. 감사하게 생각해야합니다.
Ⅲ. 하나님의 덕들을 선포하라
A. “그 덕들을”
바로 그렇게 우리를 어두움에서 이끌어내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덕들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희랍어 성경에 보면 ‘호포스 타스 아레따스 엑사게일레테’(ὅπως τὰς ἀρετὰς ἐξαγγείλητε)라고 나옵니다. 그리하여 그 덕들을 ‘엑사게일레테’라고 나옵니다. “그 덕들을 사모하게 하시려고” 아주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덕들, ‘타스 아레따스’(τὰς ἀρετὰς)라고 나옵니다.
1. 그리스의 문맥
‘아레떼’(ἀρετή)라는 희랍어 단어가 희랍철학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단어입니다. 예를 들자면 플라톤의 이상국가가 아레떼가 무엇인가를 구명하는 것입니다. 니코마스의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도 맨 처음의 시작이 아레테가 무엇인가부터 규정하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레테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일단 이 단어가 생겨난 그리스의 문맥에서 보자면 당시 그리스는 어떤 사회였느냐 하면 폴리스였습니다. 작은 종족들이 모여 사는 도시국가였습니다. 그런 도시국가들의 문맥에서 도시국가니까 나라가 크지 않으니까 많은 위협에 에워싸여 있습니다. 지금처럼 초대형 국가가 아닙니다. 인구가 만 명 되는 데부터 시작해서 십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폴리스에서 서로서로 얼굴을 알 수 있을 정도의 규모로 사는 사회였기 때문에 어떻게 이런 작은 국가들이 존립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인가가 숙제였습니다. 그것이 공동체 최고의 가치였습니다. 그러니까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을 보면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부다처제도 나옵니다. 막 사람들이 욕하는데 이것은 문맥을 보면서 이해를 하면 사실은 지금 플라톤이 그렇게 하자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존립이라는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어떤 사람들이 되어야하는 것을 설명해나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의 최고의 가치는 도시국가를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도시국가의 시민들에 대한 덕도 당연히 어디에 초점이 맞춰져있겠습니까? 국가를 유지하게 하는 데에 맞춰져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어떤 개인의 성품이 국가를 존립하고 유지하고 행복하게 하는데 이바지하면 그것을 덕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시민적인 유익을 위해서 칭찬을 받을 가치가 있는 인간정신의 힘을 탁월성을 아레테라고 불렀습니다.
2. 기독교적 문맥
여기에 기독교적인 문맥에서 그리스도의 덕이라고 할 때는 이것은 좀 다릅니다. 그런 개념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남 그것이 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멸망한 이 세상을 향해 하나님이 구원을 행동으로 옮기시는데 그 구원행동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남 이것이 결국은 말하자면 덕인 것입니다. 덕의 실체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 9절을 해석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 선함, 권능, 공의 이 모든 것을 가리키는 말이 바로 덕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혜, 선함, 권능, 공의 이 모든 하나님의 속성이 이 세계에 작용함으로써 인류를 구원하고 행복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계획이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인류의 행복에 이바지하는 훌륭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신 행동에 대해서 도덕적인 평가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을 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이 많은 학자들은 이사야 43장 21절에서 온 것이라고 대부분의 일치를 봅니다. 거기에 여러분이 잘 아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함이라.’ 그래서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함이라’ 여기에 나오는 찬송 이것은 히브리어로 ‘테힐라티’(תְּהִלָּתִי) 입니다. 나의 찬송이라는 뜻인데 결국은 무슨 뜻이냐 하면 히브리사람들이 생각할 때 이사야가 이 글을 쓰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 행동하시는 그 위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행동 그 구원의 행동을 통해 나타난 거룩한 성품은 우리의 찬송의 제목이라는 뜻입니다.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그것을 오늘 여기에서 그 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아마 이것은 그 당시의 사람들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이 이렇게 쓸 때 훨씬 더 이해를 잘할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쓴 것이라고 봅니다.
B. 선포하게 하려고
그런데 여기에 보면 뭐라고 쓰였느냐 하면 찬송을 부르게 하려함이라 라고 할 때 ‘예사페루’(יְסַפֵּֽרוּ) 라는 히브리어단어인데 ‘세파르’(rp's)라는 명사와 같이 쓰이는데 ‘세파르’는 책입니다. ‘소페르’(rfevo)가 되면 서기관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또 ‘사파르’(rp's;)가 되면 헤아린다는 뜻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어떤 사실들에 대해서 진술하는데 기록을 하듯이 낱낱이 빠짐없이 상세하게 말하는 것을 사파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행하신 위대한 구원행동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들이 있습니다. 그 속성들이 시행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덕입니다. 그 덕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아주 상세하고 선명하게 사람들에게 말하게 하기 위해서 여기서 선포라고 번역을 했는데 말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로운 정체성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말을 여기서는 무엇이라고 하느냐하면 ‘선포하게 하시려고’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행하신 위대한 구원이 그리고 그 일에 나타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행동 행동 속에는 하나님의 성품이 묻어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덕인데 그 덕을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빼놓지 않고 상세하게 사람들에게 알게 하기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선포하다는 이것은 예배시간에 국한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위대한 일들을 말하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이 선포의 사명은 목회자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것은 그것은 아니라 신자들만이 모인 예배 속에서 전문적인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들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행동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 신자의 존재, 삶의 방식, 모든 것을 망라해서 글이나 말이나 행동이나 모든 것을 망라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경륜을 위해서 이 세상에서 하신 위대한 일들을 상세하게 선포하는 것이 신자의 의무인데 그 모든 선포적인 활동 중심에는 존재의 울림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존재의 울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글을 쓸 수밖에 없고, 사람들에게 말할 수밖에 없고, 어떤 식으로든지 그것을 사람들에게 표현할 수밖에 없고, 노래할 수밖에 없는 그 모든 것들이 울림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저는 사실은 가스펠송을 거의 부르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모여서 찬양을 하면 아는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찬양사역을 하시는 분에게 상처가 될지 모르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마음이 드라이해지는 것을 느끼는 가스펠송이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가끔 ‘어?’ 하는 곡이 나옵니다. 어떤 곡이냐 하면 그 안에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울림이 있는 것을 금방 알겠습니다. 어떤 것은 금방 알겠습니다. 작곡자나 연주자나 모든 사람이 아무것도 전달해주는 울림이 없는 것입니다. 계속 들으면 은혜로웠던 마음이 오히려 드라이해지는 것입니다. 차라리 베토벤을 듣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베토벤을 틀면 오히려 더 나을 때가 있습니다. 내가 잘하는 것인지 못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그렇습니다.
그러한 선포를 하게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한걸음만 더 나아가봅시다. 그러면 이렇게 내가 어느 곳에서 서있든지 존재의 울림이 있습니다. 그런 존재의 울림이 있고 그 울림이 구체적으로 글이나, 말이나, 노래나, 인격이나, 이런 것을 통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도 공동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비록 장소적으로는 흩어져 살아도 우리 모두 영적으로 하나의 연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내가 이 한구석에서 달동네 골목에 살면서 뭔가 존재의 울림을 사람들에게 들려준다면 그것은 성례전적으로 모두 그리스도께 봉헌이 되어서 사실은 교회 전체의 울림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확고하게 ‘정말 저 사람이 진짜 목사인가?’ ‘내가 하나님은 누군지 잘 모르지만 정말 저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인가?’ 그럴 때 불신자들이 보면서 ‘어느 교회 다녀? 광림교회야? 소망교회야? 열린 교회야?’ 그렇게 묻는 불신자들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은 이단도 다 우리와 한패거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 유병언씨 때문에 전도가 되지 않습니다. 안산에서는 난리랍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울림이 개인이 울려고 그 울림이 개인의 울림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적인 울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결국은 이 소명도 공동체에게 주신 소명인데 그러면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을 선포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명을 우리에게 주셨다면 교회에도 어떤 이런 존재론적 선포, 'proclamation of the presence' 교회가 교회되어 있음으로 말미암아 울려 퍼지는 장중한 울림, 비록 교회 안에는 돈이나 칼이나 세상의 권력 같은 것이 없어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어떤 진리의 공동체로서의 울림이 있어야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확고한 사상입니다 .그 사상으로써 전투하고 세상과 맞서서 하는 것입니다. 할 수 있으면 평화로워지기를 원합니다. 되지도 않는 사상으로 밀고 들어올 때는 우리들이 전투적인 자세로 기독교를 변증하고 사상적인 전투에 임하는데 거기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진리를 확신함으로써 가능합니다. 윤리적인 도전들은 수없이 밀려옵니다. ‘현실적으로’ 이러면서 타협을 하면 안 됩니다. 교회까지 그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정의를 확신할 수 있어야합니다. 신령한 전투가 있어야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영적으로 너무 많은 것들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이때에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성령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 능력으로 이 모든 것을 이기며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너희들은 그런 존재의 울림으로 선포하라.”고 할 때 이 세상이 우리의 선포를 들으려고 사모하는 착한사람들로 우리의 선포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우리의 선포를 듣고 싶지 않다고 소리 지르고 혹은 우리의 입을 닫지 않으면 우리의 멱통을 끊어버리려는 도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세상에 살면서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조용히 기다리며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각기 자기생각을 가지고 삼킬 듯이 기독교와 복음의 하나님의 지혜에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들이 선포라는 것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가 울리는 것이고 방해하거나 도전하는 사람들과 응전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오는 고난과 희생, 수고, 이런 모든 것들을 일상으로 여겨야하고 그래서 믿음을 따라 살 때에 고난 받는다는 것을 늘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로드십을 인정할 때에 이미 통과한 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으로 존재의 울림으로써 선포하면서 살겠습니다. 이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과 싸울 텐데 죽어도 나는 이 길을 가겠다는 것이 신앙고백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한다는 뜻은 이 질문에 나를 위해 죽었습니다. 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당신을 위해 죽겠습니다. 그것을 시인하는 것이 주라 시인하는 것입니다. 주는 누구입니까? ‘도미누스’ 주인입니다. 통치주입니다. 소유권을 가지신 분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믿음에 대해서 죽기까지 희생을 치러야한다는 이 믿음의 대가를 가르치는 대신에 이득을 받는 종교라고 잘못 해석했기 때문에 기독교신앙의 힘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기회주의자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들이 집을 질 때에 돈이 얼마나 들어가겠는지 생각한 후에야 집은 짓기로 결정하지 않겠느냐? 너희도 나를 따라오려거든 너희도 영생이 있을 것이다. 천국이 기다리고 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마. 내가 너를 도와주마. 세상 끝날 까지 너를 지켜주마.’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이 도와주고, 지켜주고, 붙들어주시는 사람들이 다 고난의 길을 갔습니다.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이 사람도 결국은 로마에서 순교했습니다. 그러면 공정하게 다 가르쳐주어야합니다. 한쪽만 가르쳐주면 안 됩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생각해야합니다. 군대에 가는 사람은 아침 일찍 “기상!” 할 때 “씨 잠 좀 자려는데 아침부터 나팔 불고 깨우고 난리야.” 그러는 군인이 있습니까? 집에서는 엄마가 “일어나 인마.” 그러면 “에이 씨 잠 좀 자려는데 일요일인데 왜 시끄럽게 깨우고 그래.” 집에서는 그럽니까? 안 그럽니까? 충분히 그럽니다. 군대에서는 안 그럽니다. 왜? 이미 군대가 어떤 곳인지 생각하고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신앙 생활할 때 그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데 존재의 울림으로 선포하고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너무 힘든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군대 보내’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아유, 아직 하나님 나라 안왔구나! 참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지.’ 이렇게 생각하면 그 현실을 이상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당연하게 받아들여야합니다. 제가 얼마 전에 설교할 때 그런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모든 것이 잘 풀리면 당연하게 원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고 ‘이것이 웬일일까?’ 기이하다고 생각하면 조금 잘될 때 너무 감사한 생각이 들고 어려움이 생기면 ‘이것이 일상적인 삶이구나!’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예수를 믿어도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야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런 식의 종교를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한 박사님과 점심을 같이 먹었습니다. 저에게 그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은퇴하셨으니까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서 기독교TV도 많이 보실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기독교TV를 보면 산상수훈을 설교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판을 바꾸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예를 들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이것을 전부 다 이상하게 해석해서 안 바뀐 판에 맞추어야하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하십니까? 산상수훈이나 주기도문을 한 줄이라도 제대로 해석을 하고 하나하나 가면 무엇을 발견하느냐하면 우리의 신앙의 판이 주기도문의 판과는 다른 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다 바꿔야합니다. 그러면 자기가 살고 지금 목회하고 신앙생활 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판을 이야기하면 심하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제대로 해석하면 이단처럼 느낀다는 것입니다. 왜? 판이 다르니까 말입니다. 버전이 다릅니다. 판이 같아야지 판이 다르니까 그런 설교를 못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석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해석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온유한자는 복이 있나니” “앞집의 김 집사가 그렇게 너그럽더니 우연히 강남의 땅을 샀는데 갑자기 땅값이 올라서…….” 이런 식으로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판을 바꾸지 않아도 맞아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팔복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고귀한 가치를 붙들고 구원받은 백성으로 살기위해서 치러야할 희생이라는 대가를 가르치는 대신에 그렇게 예수님을 믿으면 달콤한 이득이 있을 것이라고 가르치니까 신앙의 힘이 없는 것입니다. 힘을 상실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군대를 제일 빡세게 훈련시키는 데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특전사와 해병대입니다. 나의 지론은 무엇이냐 하면 군대를 반 정도로 줄이고 그냥 전부 다 해병대와 특전사 수준으로 만들어야합니다. 나머지는 그냥 집에 가서 놀고 있다가 일 년에 한 달씩만 훈련을 받고 전쟁이 나면 나오고 그리고 그런 사람들 한 30만 명만 데리고 있으면 됩니다. 그 사람들은 다릅니다. 나는 그 프로그램을 다큐멘터리로 보면서 그러면서 거기에 쓰여 있습니다. ‘실제훈련을 모두 보여드리지는 못했습니다.’ 마지막에 해병대 프로그램에 무엇이 있느냐하면 136시간을 잠을 재우지 않는 것입니다. 구두도 벗지 않고 모든 옷을 한 번도 벗지 않고 물속에 들어갔다가, 진흙 속에 들어갔다가 136시간동안 한잠 자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미국의 네이비씰이나 우리나라 UDT 같은 곳은 더합니다. 네이비씰은 100명이 들어가면 40명이 졸업한답니다. 그런 사람들이 9000M 꼭대기에서 스카이다이빙을 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생각을 가지고 그런 사람들은 이미 ‘군대는 그러려니’ 하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기독교인의 삶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고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매순간 죽느냐 사느냐하는 전투 모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소한 일에는 목숨을 거는데 치명적인 일에는 너그럽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땀을 흘리며 ,눈물을 흘리면서 쓰고, 피로 외치면서 사는 것입니다. 최인훈 씨가 『광장』이라는 소설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신이 이제껏 살아온 삶은 피로 쓴 삶이었다.” 저도 읽었습니다. 매 순간 하나하나를 우리가 최고의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해서 사는 것입니다. 한주 한주를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금시발복을 하고 계속해서 행복한 일만 일어날 것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충분히 입증되지 않았습니까?
Ⅳ. 적용과 결론
그러면 그런 'Context'를 모르고 오늘 주님이 너희는 이 세상의 존재의 울림으로 나를 선포하는 사람들이 되라고 부르셨겠습니까? 세상에서 충성스럽게 살되 때로는 이 세상을 멸시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세상을 위해서 섬기고 이 세상을 하나님이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믿지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과는 비교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셨던 고단한 삶과 하늘나라의 영광을 대비하면서 그러면서 우리의 소명을 따라 사는 그 일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주시면 주실수록 우리에게 피 흘리는 전투적인 삶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셔서 택한 족속,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보배, 왕 같은 제사장들로 불러주신 이유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찌 하나님께 간절히 도움을 구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주님의 은혜에 목마르지 않은 사람이 될 수 있겠으며 진리의 빛을 갈망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소명대로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빌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명이 있는 복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