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란 무엇인가
(2016년 교역자수련회 설교모음)
설교기간|2016년 12월 5일 - 9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7년 1월 10일
목 차
1. 기도와 사랑의 목회(빌 1:9) 2016.12.5 교역자수련회 저녁 1
2. 지식과 총명의 목회(빌 1:8-11) 2016.12.6 교역자수련회 아침 7
3. 목회의 세 목표(빌 1:10) 2016.12.6 교역자수련회 저녁 16
4. 목회의 궁극적 목적(빌 1:11) 2016.12.7 교역자수련회 아침 24
5. 예수의 심장으로(빌 1:8) 2016.12.9 교직원 예배 31
목회란 무엇인가 1 (2016.12.05, 교역자 수련회)
1. 기도와 사랑의 목회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빌1:9)
녹취자: 최진실
Ⅰ. 들어가는 말
사도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 이 편지를 썼다고 봅니다. 그게 정말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가 로마에 갔을 때 사도 바울이 갇혔던 곳으로 전해 내려온 감옥을 가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예배당 지하에 감옥이 있었고, 정말 개구멍 같은 데로 들어가고, 흙바닥에, 위에는 그래도 구멍이 뚫어져있고, 공기도 들어오고, 햇빛이 약간 비치는 그런 아주 작은 감옥이었습니다. 그것이 사도바울이 감옥이 있었던 감옥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렇게 전해 내려 오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동을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런 감옥에 갇혀 있어 사형을 당할지 모르는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기뻐하라고 여러 차례 권면했습니다. 14번 이상 기뻐하라 말합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읽은 이 구절을 통해서 목회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몇 차례에 걸쳐서 이번 기회에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Ⅱ. 기도로 목회함
사도 바울은 지금 여기에 감옥에 갇혀서 목회자로서 목회의 연장선상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도바울이 오늘 기록한 이 내용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줍니다. 첫째 목회는 기도입니다. 사도바울은 누가 보더라도 자신이 빌립보교회 교인들의 도움이 필요한 처지가 아니겠습니까? 와서 면회도 사고 사식도 좀 넣어주고 추운 겨울이 오면 따뜻한 옷이라도 가져다줘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사도바울이 이 감옥 속에서도 계속하고 있는 목회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노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목회는 목회자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에도 한 가지는 할 수 있습니다. 기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목회는 기도입니다.
여러분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새벽기도에 나오시니까 많이 나아지셨습니다. 기이한 일입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는 건 뭐냐 하면 새벽기도에 나올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강제로 할 수 있지만 기도하게 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이 하는 것이지 제도가 여러분들을 기도하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담임목사가 여러분들을 새벽기도에 나오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기도하게끔 해 주지는 않습니다. 기도의 은혜가 있으면 많은 시간을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됩니다. 단지 의무이기 때문에 나오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대수로 따지면 아마 한 5-6대 정도의 교역자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1-2세대 교역자들은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적어도 뺀질뺀질 거리고 기도를 안 해서 담임목사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능력이 좀 모자라고 분별력이 떨어져서 마음을 좀 힘들게 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기도를 게을리 해서 나한테 지적받은 사람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저는 10년 동안 방배동에서 여기에서 있는 동안 교회 안에 살았습니다. 저녁때면 교회도 돌아볼 겸 내려왔습니다. 그러면 저 구석에서 기도하고 있는 교역자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의무감으로 나온 게 아니라 하도 갑갑하니깐 나왔습니다. 그게 기도입니다. 그러면 저도 기도를 합니다. 그럼 참 신기한 게 그 사람 때문에 마음상하고 힘들었던 게 다 사라지고 너무너무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저는 그게 담임목사 개인의 마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식이 좀 모자라고 리더십이 부족하고 눈치도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의 눈물이 있으면 하나님이 쓰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 분이 하는 설교를 못 받고 별로 동의를 안 한다고 할지라도 세월이 조금 지나고 나면 모든 성도들이 존경합니다. 왜냐하면 기도가 있고 눈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도 가끔 저녁 때 교회를 나와 봅니다. 그 때처럼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없는 시간만 나왔는지 모르지만 2년 동안 거의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제가 아는 선배 목사님, 지금 은퇴하신 분인데 총회장까지 하신 분인데. 그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음세대 한국교회는 망할 것이다. 왜? 다음세대를 맡을 목회자들이 대게 기도를 안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깊이 새겨보아야 할 대목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돌보고 타이르고 가르치고 해도 안 고쳐지는 교인, 거기에 무슨 뜻이 있는 것일까요? 열심히 일하는 우리 사역자들은 항상 일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에 도저히 그 사람을 다룰 수가 없을 그 때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됩니다. 그리고 간절한 기도 속에서 주님께 그 사람을 부탁하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목회하지 않았는데도 놀랍게 그 마음이 변해서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게 됩니다. 그게 목회입니다. 그래서 목회는 기도입니다. 기도!
기도하는 사람이 모두 어마어마하게 큰 목회를 하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그의 사역 안에 생명력이 있습니다. 저는 신학교 다닐 때 E. M. 바운즈의 기도의 능력을 읽으면서 제가 완전히 사로 잡혔던 기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그 때는 기도도 하루에 한 세 시간씩 할 때였으니까 기도에 대해서 도전을 받을 마음도 더 많이 열렸지만 정말 E. M. 바운즈의 그 말을 가슴에 새겨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제도나 방법 위에 부어지는 게 아니라 사람 위에 부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성령의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드물긴 하지만은 주일학교에서 이따금씩 하나님의 놀라운 기름 부으심의 회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공통점이 교역자들이 엄청나게 기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내년에 목회는 기도목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 교역자니깐 새벽기도 나오셔야죠? 금요기도 빠지시면 안 됩니다. 도장 찍고 가세요.’ 이것은 진정한 목양이 아닙니다. 영혼에 대한 깊은 부담 때문에 매달리는 기도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 프로그램을 따라 나오는 기도회가 아니라 자신이 마음을 쏟으며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이번에도 교회 전체적인 어려움이 뭔지 아세요? 구역장들이 교구마다, 어떤 교구는 절반이 이상이 구역장이 바뀌는 겁니다. 물론 거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그 목회자와 함께 목회하는 것이 정말 은혜롭고 신나면 내려놓지 않습니다. 그러니깐 대거 구역장들이 구역장을 내려놓고, 교사들이 교사를 내려놓는 것은 그 사람의 리더십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실하게 필요한 게 기도입니다.
Ⅲ. 사랑을 풍성하게 함
두 번째로 목회는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목회는 한 마디로 말하면 뭐냐? 주님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서 주님을 사랑하지 않던 사람을 사랑하게 만드는 게 전도고, 주님을 조금 사랑하는 사람들을 많이 사랑하도록 만드는 게 목회이고 목양입니다. 목양! 그러니깐 기가 막힌 교회의 제도와 질서가 잡혀있고, 기가 막힌 교육 시스템이 되어 있고, 마치 찬란한 교제들이 쏟아져 나와서 다른 교회에서는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방법에 감탄할 정도라도 그것은 목회가 아닙니다. 모두 도구일 뿐입니다.
(예화) 아이에게 밥을 줄 때, 금수저로 물을 떠주면서 ‘금수저다.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금수저야. 안 먹어도 배부를 거야.’ 하면서 물만 먹이면 아이가 만족할 수 있을까요? 차라리 엄마가 깨끗이 씻은 손으로 죽을 퍼서라도 아이 입에 넣어줘야 아이에게 영양이 되지 않을까요? 그런 모든 도구와 시스템들은 숟가락입니다. 그리고 거기 담겨져야 할 것은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에게 가장 중요한 자격이 뭔지 아십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순수한 인격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예루살렘 교회의 처음 목회자로 세우시면서 물어보신 게 무엇이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였습니다. 이처럼 목회 사역의 가장 든든한 기둥은 목회를 하는 여러분 자신이 단연코 ‘내가 이 교회에서 처음 사역을 할 때보다는 지금 우리 주님을 더 사랑합니다.’라고 고백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목회에 있어서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고난을 이기고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하고 자기에게 복종하고 자기를 존경하는 사람들만 돌보는 것이 아니라 미끄러지고 심지어는 자신에게 힘든 감정을 품은 사람에게도 다가가서 마음에 맺힌 것을 풀어주고 돌볼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그 동기가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목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목적으로 알고 사랑하면 그 사람이 실망시킬 때가 있잖아요? 그러면 더 이상 그 사람에게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없을 때 사랑도 끝이 납니다. 그러나 하나님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할 때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끝이 나지 않으니깐 그 하나님 때문에 그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면 오늘 여러분 자신들이 점검해 봐야합니다. ‘정말 내가 주님과 연애하는 사랑인가?’, ‘주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랑인가?’ 관념적으로, 외형적으로는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마음속에 정말 하나님이 나의 연인이신지, 그리스도가 나의 애인이신지 그래서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모든 길들이 나에게 감당할만한 것인지에 대한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졌을 때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목회지가 하늘의 복을 있는가?’라고 하는 가장 중요한 열매는 한 해 열심히 씨를 뿌리고 목회를 했는데 지난해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더욱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더욱 깊어지는 것입니다.
Ⅳ. 결론
오늘은 두 가지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기도 목회가 되어야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목회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냉담하고 식었던 사람들을 목양을 하면서 주님의 사랑으로 뜨거워지게 만들고, 냉랭한 가슴으로 구역장 모임에 왔던 사람들이 모임이 끝나면 눈물로 기도하면서 주님을 더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목회입니다.
그러니깐 우리는 그런 충만한 사랑과 생명력을 가지고 교인들 앞에 서야합니다. 목회라는 것은 마치 호수에 파문을 일으키는 것과 같습니다. 잔잔 호수 위에 돌을 하늘 던져 퐁당 떨어지면 파문을 그리게 됩니다. 그것은 나에게 없는 사랑을 다른 곳에서 빌려와서 쏟아 넣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이 나를 감화시켜서 물결처럼 번져가는 것이 목회여야 합니다. 교역자들을 보면 은혜생활을 잘 하는 사람이 목회를 잘 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지금은 인정을 받지 못하고 혹 은 사역의 열매가 없어도 시간이 지나면 그 파문이 번져가면서 영혼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역자 자신이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저는 희열의 목회라고 합니다. 환희의 목양 사역! 나 같은 사람이 그 좋으신 주님을 전하고 그 양떼들을 돌보게 하시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에 대한 희열로 인한 목회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목회의 목표 자체를 주님을 사랑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볼 때 너무 가엽고, 그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하시는 주님 때문에 마음 아파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년에 여러분들의 목회는 기도의 목회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그냥 휙 던지면서 ‘기도하면 좋습니다.’ 그렇게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제가 6개월 동안 쉬는 동안에도 여러분들을 그렇게 이끌어 갈 것입니다. 그래서 2017년도는 이제까지 10년, 15년 사역을 해오는 가운데 가장 많이 기도한 해였다고 이후에도 말할 수 있게끔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놀라운 증거를 여러분들의 목회 사역 속에서 보여주시기를 하나님 앞에 간구하며 매달려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양심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아, 정말 저분이 인도하는 저 부서 사역에는 정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구나! 정말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고 계시는구나!’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사역을 꿈꾸며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목양을 받는 많은 사람들이 내년 한 해 뜨거운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게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빕니다.
목회란 무엇인가 2 (2016.12.6. 교역자수련회)
2. 지식과 총명의 목회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1:8~11)
녹취자: 이성도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사랑해 주시고 오늘 이 시간에도 저희들이 하루를 시작하기에 앞서 예배드립니다. 우리의 예배를 받아주시고 또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저희들이 은혜를 받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저는 어제 본문에 입각해서 ‘목회가 무엇이냐’ 이야기 하면서 두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로 목회는 기도입니다. 두 번째는 목회는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도구가 되는 것 그것이 목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주님을 사랑하는 착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의미심장한 구절이 나옵니다. “지식과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점점 더 풍성하게 한다.’고 할 때 점점 더 풍성해 지는 것의 주체가 무엇일까? 무엇이 점점 더 풍성해 지기를 바란다는 것일까? 그것은 당연히 사랑이죠. “사랑을 지식과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그랬습니다. 그런데 희랍어 성경에 보면 정말 재밌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는 ‘에피그노시스’(ἐπίγνωσις)와 ‘노에시스’(no,hsij)라는 두 단어가 나오고 있습니다. ‘에피그노시스’는 어떤 사물에 대한 온전한 앎을 의미합니다.
여러분들은 희랍 철학에서 ‘독사’(do,xa)와 ‘에피스테메’(ἐπιστήμη,)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독사’는 코이네 희랍에서는 ‘영광’이라고 되어있습니다. 고전 Greek에서는 의견입니다. 진리와는 상관없이 자기의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심하게는 억견이라고 합니다. 즉, 억지로 만든 의견. 지나친 견해이고, 사견입니다. 어떤 일에 대해서 결정적인 선포가 될 수 없는, 그냥 참고할만한 개인적인 견해가 ‘독사’입니다. 에피스테네는 어떤 사물에 대해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온전한 앎입니다.
(예화) 희랍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너 혹시 빵을 알어? 너 빵에 대한 지식이 있어?” “그럼 맛있어. 돈 있으면 살 수 있어.” “어디서 팔아?” “한스 케익에서 팔아. 평촌에 고려 빵집에서 팔아.” 물어보면 많은 것을 압니다. 그런데 “이 빵이 뭐지?” 물을 때 그 빵 자체를 설명할 수 없으면 그건 지식을 가진 게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에피스테메는 어떤 사물을 놨을 때, ‘이것이 그렇다, 아니다, 좋다, 나쁘다.’ 이렇게 부분적으로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진술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저런 짓을 하면 저건 정의가 아니다. 이건 어때?’ ‘이건 정의로워. 이건 어때?’ ‘정의로운 집단이야.’ 그렇게 판단을 잘한다고 할지라도 ‘정의가 뭔데?’ 라고 했을 때 정의를 온전히 설명해 낼 수 없으면 그건 에피스테메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에피그노시스가 말하자면 그렇다고 해서 신령한 은혜에 세계에 대해서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지식인데 어설픈 지식이 아니라 진정한 지식을 가진 것을 말합니다. 진짜 앎. ‘에피그노시스’입니다.
두 번째는 노에시스인데, 희랍철학에서는 ‘정신’이라고 보는 건데 여기서는 ‘총명’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코이네 희랍어에서 노에시스라는 것은 판단력을 말합니다. 어떤 사물에 대해 선악을, 그 사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것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가진 것을 노에시스라고 불렀습니다. 근데 더 재밌는 것은 “모든 지식과 총명으로” 라고 되어 있는데 그 ‘으로’라는 단어가 희랍어 성경에는 ‘엔’(ἐν)이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into'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 속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여기서 매우 중요한 이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목회란 지식이다. 즉, 목회란 지식으로 하는 것이고 지식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목회입니다. 근데 그 지식은 어설픈 지식이 아니라 자기가 가르치고 자기가 설교하는 내용에 대해서 풍부히 알고 있는 그런 지식을 말합니다.
(예화) 내가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평신도들에게서 우연히 부교역자들이 설교를 하고나 면 평가들이 나한테 가끔 들어와요. 매번 들어오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 들어와요. 뭐를 얘기 하냐면, 정말 설교준비 안하고들 올라온다. 모든 사람에게 평가가 들어오는 것은 아닌데 일반적으로 박윤선 주석이라도 꼼꼼히 읽고 와서 설교를 하시지.. 말씀에 정리가 되어있는 평신도들의 컴플레인이에요. 설교를 하는 데 새롭게 깨닫는 내용이 없다는 거예요. 늘 듣는 이야기, 설교를 듣고 나면 아 그런 거였구나. 아 본문을 늘 읽었는데 이 단어에 이런 의미가 있구나. 이런 사상이 담겨 있구나. 한 두 가지라도 그런게 나와야 되잖아요. 정말 준비 안하고 설교를 하신다. 그런 이야기가 들려서는 안 되지 않겠어요? 기본적으로 사상이란 것은 지식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이지 무당이 푸닥거리 하듯이 전달되는 것이 아니에요. 지식은 너무너무 중요한 것이에요. 오죽했으면 사도바울이 이전 것은 다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해 달려간다고 할 때 그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이유가 바로 지식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달려갑니다. 한마디로 얘기하면 지식이 없는 목회자는 교회의 재앙이에요.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생전처음 전쟁터에 투입되었는데 캄캄한 밤에 겨우 1주일 훈련받고 적진에 투입되었는데, 지휘관이 거기 한 번도 와 본적이 없는 사람, 방금 처음으로 부임을 해서 얼마나 불안한지, 인솔해야할 지휘관이 자꾸 물어보는 거예요. “여기 어디냐고, 살아나갈 수 있냐”고 그래서 되겠어요? 내년에 여러분들은 이 공부를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열린교회에서 사역을 한다고 하면 굉장한 신학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줄 알아요. 사실이 안그렇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이 알잖아요? 그래서 내년에 목회는 지식의 목회가 돼야 한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열심히 공부시킬 거에요. 5년 정도 나하고 함께 사역하고 나면 한 100권, 내 생각에는 한 200권 정도만 중요한 책들을 여러 번 읽어서 적어도 한 5번 이상 숙독해 놓고 나면 절대로 허튼소리는 안 해요. 은혜가 떨어져서 사람들에게 감화는 못 끼칠지언정 말도 안되는 소리. “저건 정말로 안되는 데 왜 저러지?” 그런 소리는 안 듣습니다. 설교를 여러분이 듣고 은혜를 받는다고 해도 지식으로 잘 쌓여지지 않아요. 역시 공부는 공부에요. 공부를 해야 돼요. 열심히 해야 해요. 이제는 그런 실수를 내가 안하겠지만, 예전에는 열린교회 설교를 많이 들어 본 사람에게 교역자 채용의 우선권을 줬어요. 그런 게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그런데 역시 데려다 놓고 사역을 시켜보면 공부는 공부고 설교들은 건 설교들은 거야. 설교를 듣고 은혜는 받아도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은 아까 이야기한대로 독사는 가지고 있는데 에피스테네가 없어요. 무엇은 무엇이다. 라고 설명을 하지 못해. 그래서 부지런히 배워야 합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얘기하는 지식은 무엇이겠습니까? 에피그노시스라고 하는 게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물어봅시다.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지식의 대상이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도바울이 가지고 있는 도나의 사람이 인생 말년이잖아요. 저는 골로새서가 바울 서신중에 가장 위대한 서신이라고 보는데, 골로새서에서 사도바울은 모든 지식이 한 분에게로 수렴한다고 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으로 인함이라.” 예수만 알고 세상을 모르고 정치는 상관이 없고 문학은 문외한인, 그런 것이 아니라 사도바울은 말년에 그리스도를 아는 모든 지식들이 그리스도의 위격 속으로 수렴하는 위대한 경지를 본 것입니다. 그런 놀라운 경지를 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헤르만 바빙크의 ‘로고스 실제론’을 연구해 보면 네 권으로 되어있는 책『개혁주의 교의학』(Gereformeerde dogmatiek)에서 로고스라고 얘기하는데 (우리가) 학문의 탐구가 가능한 것은 로고스로서 그리스도가 모든 만물가운데 실체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모든 법칙을 만들고 그 법칙 안에서 모든 사물들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이고, 인간은 만물 속에 담겨있는 법칙과 이치들을 터득해 나가면서 그 이치들을 구현하는 것이며 이것을 로고스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학문의 근원이 되십니다. 그것을 헤르만 바빙크 같은 사람이 자기가 스스로 사변적으로 고안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사도바울의 기도문을 보면서 이 속에서 그런 사상들을 찾은 것입니다. 골로새서에 그런 사상들이 아주 풍성하게 나왔고 말년으로 갈수록 그리스도가 온 땅과 만물위의 모든 것들을 수렴하면서 당신 안에서 잘 아는 지식을 가지고 계신 분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화) 예수를 아는 것이 모든 것을 아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사실 현실은 안 그렇습니다. 예수를 부르짖으면서 지금도 계속해서 박대통령을 지지하고, 그리고 속속 자료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기독교 사람들이 비상식적인생각을 가지고 정권을 대했는가 하는 것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확대판이 새누리당입니다. 아주 정확하게 새누리당입니다. 그것도 친박입니다. 비박도 못되고. 그런 주류의 보수적인 기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유난히 예수를 주장합니다. 그 예수를 아는 지식이 모든 만물에 대한 지식을 수렴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를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런 사상들을 나는 주기도문이나, 빛으로 산다는 것은 이런 책 속에서 서술했지만, 얼마나 사람들이 그것을 인식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지식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것을 입증하듯이 바로 그 뒤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이라 하는 고백이 3장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적용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선 하나는 예수 자신을 잘 알아야 해요. 예수 자신을 아는 지식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모든 만물을 붙들고 계시고 모든 만물이 예수 안에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들이 배워가야 합니다. 조금만 더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충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플레로마’(πλήρωμ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파루시아(parusia)는 곧 플레로마의 파로시아입니다. 마지막 파루시아 종말은 충만으로 완성되는 종말이에요. 그러한 종말이 무엇을 얘기하고 있는 것일까요? 에베소서 1장 21절에서 23절입니다.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누구를 말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알쏭달쏭하지 않습니까? ‘충만’이란 말이 계속 반복되는데 이게 도대체 무엇일까? 이게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모든 만물들을 창조하시기 전에 하나님이 질료를 창조하시고 거기에 성령이 운행하십니다. ‘메라헤페케’()라고 되어있는 창세기 1장 2절에 분사는 무슨 의미냐면, 독수리 같은 것이 날개를 펴면 1.5미터 정도 됩니다. 독수리가 자기의 새끼들이 있는 작은 집 위에서 너풀거리는 동작이 ‘메라헤페케’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수면 위를 성령이 왔다갔다 하시는 게 아니라 수면보다 훨씬 더 큰 성령이 그것을 품고 계셔서, 마치 암탉이 작은 알을 품고 있다가 기간이 되면 알이 깨어 나와 병아리가 되는 것처럼 수면보다 더 큰 성령이 그것을 뭔가 새로운 층의 이해창조를 위해 품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상태를 충만한 상태로, 그래서 그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관계를 맺고 있는 그 완전한 상태가 충만입니다. 그 충만은 바로 하나님과 모든 인간 비롯한 창조사물들이 완벽하게 우주적 질서 속에서 그분의 통치와 현존 안에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하지만 그것이 죄가 들어오므로 깨집니다. 그것이 ‘충만’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그것이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고 인간을 구원하신 것이, 그렇게 결핍된 모든 만물을 다시 충만하게 당신 자식으로 채우시는 일을 제일 먼저 하신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에서 충만한 것이 부어지고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께 인도되어 그분께 접붙여지면서 충만이 확장되어 나아갑니다. 확장되어 나아가다가 온 인류에게서 충만이 구현되는, 그래서 다시 온 인류와 만물들이 당신의 충만한 현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플레로마’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종말이 오기 전까지 교회는 충만과 결핍사이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미 모든 사람이 구원을 놓고 회심할 때 성령의 충만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최초의 내주를 경험합니다. 그 그리스도는 이미 교회 안에 계신 그리스도입니다. 그 후로 결핍을 경험합니다. 그 충만의 경험을 가지고 결핍을 경험하면서 충만을 끊임없이 우리의 영혼이 그리워합니다. 그 교회 안에 있는 그 충만의 정도가 각 사람이 성화에 헌신하고 그 헌신이 교회에 봉헌된 가운데 교회는 그런 충만함을 누리게 됩니다.
그것이 가변적인 것을 보며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다짐을 매번 하게 됩니다. 그런 긴장이 없으면 그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의 가르침 전체를 보면, 아주 단순히 보면, 너희가 오늘날 전개되는 모든 너희 앞에 전개되는 삶을, 종말을 빛으로 보라. 그게 바로 종말론적인 윤리입니다. 종말론적인 윤리(eschatological ethics)로 살아라. 그 윤리는 잠정적인 윤리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이해되기 어렵습니다. 나의 한 뺨을 때린 사람에게 손이 아프지 않았니? 이쪽도 때리라고 하고 옷을 벗어주는 예라든지, 가꾸지 않은 자에게 아낌없이 주라든지, 오리만 같이 동행해 달라는 데 십리를 동행한다든지, 이것들이 가능한 이유는 세속적 윤리로는 설명이 안되는데, 종말론적 윤리로는 설명이 됩니다. 그래서 그 충만을 회복하는 것.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들이 교육이란 자기에겐 없는 것을 여기서 갖다 저 사람에게 주는 것이 교육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충만을 경험하고 물이 흘러가듯 그 배에서 솟아난 생수의 강이 또한 사람들에게로 흘러가는, 그것은 내가 준 것이 아니라나는 도구일 뿐입니다. 그것이 선교의 역사고, 우리의 역사입니다.
여기서 이야기 하는 지식은 모든 지식의 포괄하는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입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간절히 빌립보 교회에 원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지식 속으로 들어가라.’ 전치사 하나를 가지고 모든 걸 규정하는 것은 어렵지만 ‘엔’이라는 말은 속으로 깊이 뚫고 들어가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연합을 의미합니다. 지식 속으로 연합되어 들어가라.
(예화) 나는 수많은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한창 때에 아침 7시에 나와서 아리스토텔레스의『형이상학』을, 그리고 10시에 튜레틴의 작품『변증신학강요』를, 2시에 에띠엔느 질송의 작품, 저녁 6시에 리차드 멀러의 작품을 밤 10시까지 가르쳤어요. 한 70명씩 와서 공부했어요. 다 시험보고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학교에서도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내가 설교하거나 가르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공부를 해야겠다는 도전을 받습니다. 그런 방식이 문제가 됩니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진학을 해서 TH.M을 간다든지 해서 가방끈이 길게 하며 들입다 공부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설교에 변화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몸이 너무 약할 때에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건강에 도움이 됩니다. 그것에 조건은 영양가 높고 좋은 음식을 잘 소화시켰다는 것입니다. 속이 안 좋을 때에 음식을 먹으면 맛있게 먹었는데 속에서 마치 어렸을 때 구슬을 먹은 것처럼 속에서 음식이 따로따로 돌아다니는 느낌을 받잖아요. 그렇게 해서는 우리가 그 지식에서 살아나는 사람이 되지 못 합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그리스도로 수렴되게 만드는 것은 학문이 아니라 신앙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설교자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예수를 깊이 만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 일들이 되풀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이 바로 이 지식의 의미입니다. 공부해야 합니다. 그런 공부가 예수를 알게 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 성경만 읽은 사람입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 중에서 올바른 성경해석을 견지하고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공부를 해야 합니다. 내년에는 여러분들이 지식의 진보를 이루는 사람이 되라. 그리고 그것을 신앙 안에서 예수와 예수 속으로 수렴하는 참 지식을 소유하는 사람이 되라. 왜? 바로 목양이 그것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니까. 사도바울이 감옥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깊이 깨닫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그래요? TO DIE IS TO GAIN. 죽는 것이 내게 유익함이라.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여기에서 배우는 것. 더 확장하고 싶지만 여기에서 지식을 정리합니다.
이 지식은 사랑이 지식 속으로 들어갈 때 그 사랑은 아주 풍성하게 되고 잠깐 인간관계를 가지고 아기자기하고 재밌게 지내면 행복할 수 있지만 영적인 성장이 아니라 굶주린 인간애에 대한 충족입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 사역의 목표는 예수에 대해 새로운, 더 깊은 지식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 그것이 여기서 얘기하는 지식을 말합니다.
다음은 ‘총명’입니다. 이것은 헬라어로 ‘노에시스’(no,hsij)라고 하는 총명입니다. 희랍 철학에서 ‘노에시스’는 인간의 정신을 이야기 하는데, 정신 중에서도 특별히 판단과 관련된 정신을 말합니다.
(예화) 예를 들자면 존 칼빈은 상당한 철학적인 깊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기독교 강요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만물을 볼 때에 거기에서 겪는 많은 인상들은 우리의 오성에 맺힌다.” 무슨 뜻이냐면, 우리에게 사물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그 사물이 그냥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음악이 나오는데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나오면, ‘아~ 이런 음악이 나오는 구나.’ 내가 싫어하는 음악이 나오면, ‘저것 좀 누가 끄지’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것이 무슨 뜻이냐면,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내 마음 안에 있는 해석학적인 기재를 가지고 그것들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겁니다. 문제는 사물들이 있는데, 사람이 프로네시스(φρόνησις)에 있는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경향이 있는데, 경향이 육적이고 육욕적입니다. 그럼 사물을 보면 돈을 보면 쾌락을 즐기면 무엇 무엇을 할 수 있는데, 남의 돈이지만 그것을 보는 순간에 자기가 그것을 이용해 쾌락을 즐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그 사람에게 지위를 주셨는데 그 지위에 있으면 누구누구를 누르고 자기 발아래 둘 수 있다는 권력에 대한 의지가 생겨난다는 겁니다.
그런 것들을 올바르게 판단하게 만들어 주는 게 노에시스입니다. 사랑이 가만이 있는 게 아닙니다. 그 사랑이 풍성해지는 것은 사랑을 지식 속으로 들어가게 하고, 총명 속으로 들어가게 하면 지식과 총명 때문에 사랑이 ‘점점 더 풍성’(‘much and much more,’ 말론 카이 말론 (μᾶλλον καί μᾶλλον)해져야 합니다. 목회사역은 하나님의 판단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자신은 이미 그 판단력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기준으로 하는 판단력, 옳으면 하는 것이고 그것이 아니라 그러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화) 나는 이화여대를 참 좋아했습니다. 집안과 상관없지만 인상이 좋았습니다. 27살에 내가 거기 가서 특강도 했는데 이번 일을 보면서 너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비들이므로 누군가 한 사람은 안됩니다. 하고 한 번에 목이 훅 날아가도 선비잖아.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선비집단, 지성집단이 가지고 있는 장점인데 아니었습니다. 사도에서 여러분 봤잖아요. 왕이 ‘네가 나한테 추천서 올려라.’ 저 사도는 ‘영양가가 안되니까 자르십쇼’ 라고 해라. 왕이 치사하게 부하에게 명령을 내리는 데 부하가 ‘왕이시어 그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닙니다.’ 하고 목매어 죽잖아요. 그래서 다른 사람을 시키니까 그 사람이 또 죽었습니다. 그게 선비입니다.
그런 판단을 누군가 내리고 사라져갈 때 판단이 무엇인가 하는 노에시스가 오게 됩니다. 그런 판단을 어기고 제멋대로 갈 수 있는 권력이 있어서 줄달음질치면 나중에 쓰레기로 변합니다. 물론 힘이 잠시는 이깁니다. 잠시 이깁니다. 그렇지만 마틴 루터 킹이 얘기했듯이 “패배한 선은 승리한 악보다 위대하다.” 판단에 의해 정확한 판단을 가지고 판단에 따라 살아가는,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목회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되도록 하기 위해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이런 현실을 보면서 교회가 깊이 반성해야 할 것은 사실 성경의 가르침대로 말하지 않으면 대쪽 같은 그리스도인을 양산해 냅니다. 친정부적이지도 않고, 반정부적이지도 않은, 그러나 올바른 도리를 확고히 알고 있어서 언제든지 그것 때문에 죽는다면 예수의 길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만드는 것이라면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런 점에서 깊은 반성을 해야 하는데, 지도자들이 이렇게 가르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그렇게 가르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을 감정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사랑을 부어주시면 계속 불을 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두 가지의 장작이 있습니다. 에피그노시스와 노에시스라는 장작이 있어서 그 사랑을 지식과 총명 속으로 갖고 들어가야 계속 불꽃처럼 타오릅니다. 에피그노시스와 노에시스는 사랑이라는 불에 의해 연소되는 가연제입니다. 그러면서 불이 지속됩니다. 아무리 어마어마한 불이라도 더 이상 태울 수 있는 것이 없으면 그 불은 꺼집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일시적으로 경험했을 때 그 사랑을 어떻게 오랫동안 유지시키고 증진시키느냐가 목회의 관건입니다. 그 관건을 해결하는 게 그 사랑을 지식 속으로 데리고 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은 역으로도 설명이 되는데,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은혜가 없는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해야지만 배우고 싶고 알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관계는 정말 중요합니다.
(예화) 여러분이 학교 다닐 때 기억해보십시오. 선생님이 따뜻하게 잘해주시면 미친듯이 그 과목만 파지 않습니까? 특히 여학생들. 수학선생님, 우리 이슬이가 그랬습니다. 수학시험 볼 대학 들어가는 것도 아니면서 수학만 해서 엄마가 물어보면 너무 재밌고 선생님이 너무 잘해주신대.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주님에 대해 더 높은 지식과 총명에 도달하고자 하는 갈망이 생겨납니다. 은혜는 치열한 지식의 욕구를 불어넣는 거예요.
(예화) 2002년도에 이전을 하고 좀 지나니깐 2003년도에 교인들이 한창 교만해지는 것이 눈에 보였습니다. 중생과 회심 진리제를 펼쳤습니다. 그때 설교가 반드시 들어야하는 설교 중의 하나인데 제가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사람들이 고백을 하며 일어나는 것이 진정한 회심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4-6주 동안 약 200명 정도 됐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변화가 왔냐면 원래는 교회 등록하고 새가족 공부를 안 했습니다. 교역자들이 아무리 타일러도 새가족 공부를 안했습니다. 그런데 그 시리즈를 듣고 나서 각 교구마다 새가족 공부가 미어터졌습니다. 공부하고 성장반이 다 끝났는데 자기 아무래도 회심을 안 한 것 같다고 다시 해야되겠다고 해서 새가족 공부가 문전성시를 이루었습니다.
사랑이 풍성해지는 것도 에피그노시스와 노에시스 속에 들어갈 때도 그렇지만 사랑할 때 그렇게 되고 싶은 열망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은 지식을 촉진하고 총명하게 되기를 사모하게 만들고 지식과 총명은 다시 사랑을 풍성하게 만듭니다. 순환관계입니다. 지도자로서 정확한 판단력을 갖기 위해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어제는 기도목회와 사랑목회를 얘기했다면 오늘은 지식목회와 총명목회를 이야기 합니다. 사역을 잘하면 하나님이 즉각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도록 보상해주고 담대함을 주십니다. 그래서 자신감 있게, 마음에 떳떳함을 가지고 교회를 섬깁니다. 장기적으로는 하나님이 그 사람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성장해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십니다. 그래서 그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하게 되도록 성도들을 지식과 총명 속으로 데리고 들어갈 수 있는 도구들이 되어야 합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예수를 사랑하고 교훈을 추구하고 매일 올바른 판단을 주시도록 빌며 매달리는 간절한 목회를 여러분들이 해서 하나님의 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십시오. 온 마음을 다해서 우리들이 주님의 사랑 안에서 다시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내년 한해가 지식과 총명의 목회가 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달라고 한마음으로 다같이 기도합시다.
목회란 무엇인가 3 (2016.12.06, 교역자 수련회)
3. 목회의 세 목표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빌 1:10)
녹취자: 방영민
Ⅰ. 들어가는 말
첫째 시간에 목회는 기도이고 목회 사역은 성도들의 마음속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그렇게 풍성해지는 것은 지식과 총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것은 에피그노시스(ἐπίγνωσις)와 노에시스(no,hsij)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 10절이 사랑이 지식과 총명 속으로 들어가서 점점 더 풍성해지는 것이 결국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에 대한 내용입니다. 결국은 목회를 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그 사랑을 예수를 아는 지식과 총명 속으로 들어가게 해서 그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질 때에 그것을 통해 어떤 삶을 기대하시는가에 대한 것과 같습니다.
Ⅱ. 목회의 세 가지 목표
A. 분별함: 아가도스와 선한 것
첫 번째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선한 것’은 ‘아가도스’(διαφέρω)입니다. 무엇이 선입니까? 선한 것을 알고 이것에 대한 정의가 있어야 알 수 있습니다.
(예화) 아이를 유괴하는 유괴범이 아이를 꼬드깁니다. “맛있는 거 사줄게 같이 가자.” “싫어요.” “여기에 같이 가면 맛있는 장난감도 있고 맛있는 것도 있어.” 아이들 마음에는 유괴범을 따라가고 싶어집니다. 그러면 아이는 잠깐만 들르게 됩니다. 유괴범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너 정말 착하구나.”라고 한다면 자신을 기준으로 말하는 것이고. 자기의 이익을 따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선의 기준이 다릅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갑니다. 이것은 악한 것입니다. 선은 목표가 있는데 악은 목표가 없습니다. 악은 마치 군대에서 사격을 하는데 과녁을 벗어나는 모든 것입니다(miss the mark, 곧 하마르티아 ἁμαρτία). 여기서 선한 것이라는 것은 사도바울의 로마서 12장 1절의 권면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여기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여기서 선하다는 기준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 사회, 교회, 국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류, 사역으로 들어가면 나에게 교구사역을 맡겨주셨을 때 나에게 기대하시는 것, 나를 통해 이루기 원하시는 뜻입니다. 모양과 색깔이 달라도 하나님께 매달려 있습니다. 이 기준은 오늘날 현대사상이 없다고 흔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진리에 토대가 되는 모든 것들을 공격합니다. 실존주의자는 누가 우리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왜 태어났는가?” 이것은 의미 없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캐고 들어가서 나오는 것이 허무함입니다. 사실 니힐리즘(nihillism)은 신학적 고민의 결과입니다. 니체와 같은 사람의 고민은 참된 신이라면 존재조차도 없어야 된다고 합니다. 니체는 모든 것을 부정하는 과정 자체가 신을 찾는 해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화) 선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깊이 사유하지 않습니다. 언제 누군가 죄와 은혜의 지배를 읽고 복음과 상황에서 서평을 썼어요. 자기가 공부의 지식이 짧아서 그런지 하나님의 은혜가 창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을 나는 들어본 일이 없고 동의가 안 된다고 합니다. 그것을 보고 자기가 동의하든 안하든 사실은 사실입니다.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선을 찾게 만듭니다. 사랑이 먼저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선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신앙의 일생의 투쟁은 자기를 좋아하는 것을 버리고 예수 좋아하는 것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불순종이 왜 일어납니까? 사역적 패역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패역이라는 말은 굽은 것, 좀처럼 펴지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어떤 도구를 가지고 작업을 합니다. 그때 이 도구로 작업이 안될 때 도구를 바꿔야 합니다. 파인애플을 자를 때 칼이 잘 들지 않으면 칼을 바꾸어야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를 쓰고자 할 때 우리는 바뀌어야합니다. 생긴 대로 쓰라고 때를 쓰면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사역을 하면서 계속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속 자신의 문제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며 ‘너는 어떤 부분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문제가 발생한다.’ 이렇게 된다면 사역을 하면서 계속 반복적인 문제가 발생합니다. 나와 오래 있을 필요 없습니다. 3년 정도 있으면 저 사람이 계속 배울 사람인지 아닌지 금방 보입니다. 이것은 학습자의 수용하는 자세입니다.
그러면 이 선하다는 것은 어디서 발견하냐면 통로가 다양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발견합니다. 성도를 가르치고 신학을 가르치면서 얻을 수 있습니다. ‘솔라 스크립투라’는 성경이 우리의 모든 것에 답을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적 사회학과 같은 학문은 답이 될 수 없습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성경을 더 깊이 보게 됩니다. 물론 진리를 많이 필요로 하지 않는 교회에서는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사람이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신학공부와 목회사역과 선배를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 이것과 훨씬 더 선한 것이 있다고 판단합니다. 절대적인 면에서 상대적인 면에서 배워갑니다. 절대적인 것은 진리와 관련된 것이고 상대적인 것을 어떤 게 더 효율적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예화) 옥한흠 목사가 붕어빵을 팔다가도 잉어빵으로 바꾸는데 안되는 것을 계속 밀고 나가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선한 게 무엇인지 찾아가야 하는데 목회도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을 섬기기에 합당한 게 무엇인지 관심을 가져야합니다. 성도들이 사랑이 지식과 총명 속으로 들어갈 때 무엇이 하나님이 선한 것인가에 대한 분별력이 생깁니다. 이게 신앙입니다. 목회사역을 하면 상담이 필요합니다. 이번에 서든 뱁티스트에서 목회상담학, 성경적 상담학으로 박사를 받은 후배가 찾아왔습니다. 칼빈신학교에 있을 때 돈이 없어서 돌아올 생각을 하다가 그때 열린교회에 장학금으로 공부를 할 수 있었다고 인사를 하러 왔습니다. 이때 상담과 정신과 관련된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때 열린 교회에 상담실이 있다는 것에 깜작 놀랬습니다. 청교도적인 설교로 모든 것을 해결하시는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을 사랑하여 지식과 총명 속으로 들어가면 그것을 분별할 수 있도록 해야지, 하나씩 상담으로 답을 가르쳐주면서 살게 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상담이 필요는 하지만 성숙할수록 자신의 판단과 기준을 가지고 주체성 있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 올바른 판단은 바로 사랑이 지식과 총명 속으로 들어가서 풍성해지는 삶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판단력이 있는 성도로 사람을 길러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성도가 삶의 어떤 상황과 현실에 직면하든지 온전한 신앙적인 판단이 살아있어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지극히’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뚜렷이 드러납니다. 오묘하고 판단하기 어려워서 가려져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뜻이 명료하게 나타납니다. 자기사랑의 두터움과 무지가 걷어질 때 아주 찬란하게 나타납니다. 이게 목회의 목표입니다. (그리고) 디아페론타(διαφέροντα, 선한 것)와 탁월한 것에서 목회자는 이런 면에 있어서 성도들보다 훨씬 앞서 있어야합니다. (목회자는) 신학교에서 배운 어려운 것을 가지고 성도들의 기를 죽이는 사람이 아니라 탁월한 분별의 빛 아래서 살아감으로 저 분의 지혜를 빌리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해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목회자의 그런 분별력이 성도들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그때 그의 리더십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거기에서 많은 허위와 거짓 위선과 권위주의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니깐 까불지마라. 기름 부은바 된 종에게 덤비는 것이다.’ 즉, 내 말을 듣는 사람은 선한 사람이고 내 지시에 거역하는 사람은 악한 사람입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분별력이 떨어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일반 사람보다 훨씬 더 정확한 판단력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보여야합니다.
B. 진실함
두 번째는 진실함 입니다. 진실은 fact(펙트)가 아닙니다. 여기서의 진실은 베티타스(veritas)입니다. 진리가 있는데 이것은 객관적입니다. 진리에 반응하면서 살아가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빛을 받으면서 자기를 객관적으로 봅니다. ‘회개하다’는 단어는 ‘생각하다’는 단어입니다. ‘메타노에오’(μετανοέω). ‘후에 생각하다, 다시 생각하다’는 의미입니다. 원래 고전희랍어는 ‘회개하다’가 아니라 -이 의미는 기독교권에서 해석한 것이고- 아주 명확한 지성의 변화입니다. 어떤 사실에 직면하여 이전의 생각이 변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삶을 뉘우치고 진리에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도와 덕에 합치가 되는 것입니다. 진실(verum, veracity)입니다. 진리에 부합된 상태입니다. 특히 도덕적인 진리에 합치되어 있는 인간의 정신과 마음, 삶의 상태입니다.
그러니깐 진실의 기준이 진리입니다. 예로 “내가 저 사람을 죽이고 싶어요.” “참았어요.” “거짓된 삶을 살 수는 없다.” 그리고 마음에 있는 바를 행하면 진실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욕망대로 실천했지만 진리가 아니기에 진실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목회자를 세우신 이유는 진리대로 믿고 진리대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성육신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목회자의 가장 큰 관심은 진리입니다. 온 인류가 다 그 길을 선택해도 그게 진리가 아니라면 벗어나야 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결심문에도 있습니다. 이 진실은 우리의 마음과 정신, 우리의 행위까지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생각으로만 진실한 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삶까지 이어져서 끊을 수 없는 지경입니다. 정직해지는 이유는 진리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포함한 진실한 사람은 거짓에 분노하고 모두 진실해지기 원합니다. 거짓된 세상을 힘겨워합니다. 이런 사람을 만드는 게 목회의 목표입니다.
그러니 진리가 무엇인지 정확히 가르쳐야합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경험하게 만들어야합니다. 그런데 진리가 항상 우리를 기쁘게 합니다. 진리편에 서 있는 자들에게는 진리가 위로를 주고 용기를 주지만 반대편에서는 언제나 칼이 됩니다. 어거스틴은 찬란한 햇살은 건강한 자에게는 좋지만 안질이 있는 자에게는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음식이 좋지만 입안이 헐은 사람에게는 흰죽이 더 낫습니다. 설악산에서의 바람은 신선한 것이지만 통풍이 걸린 사람에게는 미칠 것 같은 겁니다. 어거스틴은 사람들은 진리가 자신을 인정할 때는 좋아하고 책망할 때는 진리를 버린다고 합니다. 그러면 사람은 진실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 은혜를 받는 것과 꼭 함께 필요한 것은 자기꺾임이 있어야합니다. 회개와 통렬한 뉘우침이 있어야합니다. 목회를 하고 인생길에 당해야하는 어려움을 신앙적으로 소화하는 능력이 있어야합니다. 자기십자가를 기쁘게 짊어지고 걸어가야 합니다. 이게 지식과 총명 속에 풍성해진 사랑이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목회자가 죄와 싸우고 사람들을 진리대로 살도록 섬긴다면 그 사람은 진리에 가까운 합치된 사람이 되어 있어야합니다. 진리의 풍미가 느껴지도록 열매가 맺혀야합니다. 그게 목회입니다. 그래서 목회를 잘못하면 목회가 망가지는 게 아니라, 목회를 하는 사람이 망가집니다. 학교 다닐 때 까불고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었는데 십년 지나고 보니 거룩의 기운이 흐릅니다. 정말 진실한 사람이라는 게 느껴집니다. 이 사람이 사역한 과정을 보니 큰 성공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통해 많은 진실한 사람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면 같이 가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많은 사역자를 만났습니다. 목회를 진실하게 하는 사람치고 성숙한 인격으로 발전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고 사역을 못하면서 신앙이 깊어지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진실이이라는 단어를 기억해야합니다. 그래서 진실한 사람들이 좋고 그들이 친구인 이유는 그 사람들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있는 진리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지식과 총명 속으로 들어간 사랑이 아주 풍성해질 때 선한 것을 분별하고 진실한 사람이 됩니다.
C. 허물없음: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름
마지막 세 번째는 “허물없이 그리스의 날까지 이르고”입니다. 이것은 흠입니다. 파인애플을 자르는데 겉은 멀쩡한데 속이 상해 있습니다. 그것을 보니 기분이 안좋고 파인애플의 가격도 낮은 가격에 팔려버립니다. ‘설교를 잘 못하고 성격이 급하지만 그래도 훌륭한 점이 많은 사람이야’라고 하는 이것은 남이 이야기 해야지 본인지 말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은 모자라는 인격과 목회사역 성품의 어느 부분이 잘못되었는지 집중해야하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을 바라봐야합니다. 그것을 매일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나가야합니다.
특별히 이 허물은 도덕적인 허물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과 자신 속에 있는 잘못된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을 끊임없이 고쳐가야 합니다. 그런데 완전하게 못 고칩니다. 자신에게 익숙해지고 친숙해진 것들은 고치기 힘듭니다. 나의 인생에 방해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게 하나님의 은혜인데 이것을 싫어합니다. 항상 병을 달고 다니는 사람은 항상 조심하는데 건강한 사람이 어느 날 과로사 하듯이 자신의 허물을 아는 자는 항상 조심합니다.
인턴쉽이나 목회자 세미나 할 때 자신을 깊이 반성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허물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아파하면서 조금이라도 고치려면 지금은 못되도 나중에는 지금보다 나은 사람이 됩니다. 반대로 그것을 모르면 지금은 괜찮아도 나중에는 아주 나쁜 사람이 됩니다. 어느 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신앙적인 허물이나 목회사역에 있어서 자기 허물을 보며 정말 가슴 아파하는 사람인가요? 이사야 5장 2절에서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라고 했습니다. 개포도입니다. 개는 품질이 낮다는 것입니다. 그런 들포도가 열립니다. 상품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목회자로 세우셨을 때 명품 목회자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명품은 가격이 문제가 아니라 품질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에 명품 신학생 성도는 얼마나 많나요. 또 목회자에게는 얼마나 드뭅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원합니다. 허물없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원을 그리는데 수학적으로 정확하게 손으로 그리는 것을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머릿속으로 완벽하게 동그란 원을 생각하며 그립니다. 마찬가지로 허물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어느 방향으로 가게 하기 위한 목표(progmatic goal)입니다. 헌법에서 모든 이하의 조항이 거기에 마쳐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기를 꿈꾸고 그리워하며 사는 사람과 그게 무슨 필요가 있게냐하고 사는 사람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스펄젼이 종 드는 사람에게 ‘북두칠성을 따라가라.’ 예수를 본받으라고 하는데 그게 가능한가요? 왜 그런 명령을 합니까? 우리가 그렇게 바라보고 갈 때에 과정적으로 올바른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모든 방면에서 온전해지기를 바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른다는 것은 실제로 예수의 날까지 산다는 게 아니라 종말론적인 선언입니다. 너희 삶과 사람됨을 가지고 예수 앞에 선다는 것입니다. 존 오웬의 말처럼 우리의 일생을 그분 앞에서 설명해야 될 시간이 (언젠가) 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목회사역 때 한없이 게을렀던 이유가 무엇이냐?’ 물으실 때 우리가 그것을 설명해야합니다. 우리 자신을 해명해야 될 때가 올 것입니다. 그것을 염두에 놓고 분별하고 진실하고 허물이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야합니다.
Ⅲ. 결론
정리해봅시다. 목회는 기도입니다. 성도의 사랑이 지식과 총명 속으로 풍성해지도록, 그 풍성한 사랑을 가지고 지식과 총명을 가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삶의 모든 방면에서 분별하고 그 선한 것을 택하고 진리에 부합한 사람이 되고 그렇게 되기를 갈망하면서 매일 자신을 흠과 허물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용서받으며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게 목회입니다.
그래서 칼빈도 이런 말을 합니다. “교회의 영광은 교회의 크기에 달린 것이 아니라 교회의 순성에 달린 것이다.” 빛은 어둠속에 어디에 있든지 드러나게 되고 그 빛은 아주 멀리서도 볼 수 있습니다. 수가 적어도 교인들이 온전한 사람이 되어 가면 그 빛은 굉장히 찬란하게 비춰서 교회와 관계 맺는 많은 사람이 하나님과 진리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어줍니다. 그게 교회의 영광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1000명이 넘는 목회를 하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교회가 500명이 넘게 되면 교회를 조직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성장이 어렵습니다. 내 경험에 의하면 2000명 넘는 교회에서 계속 성장하는 교회는 목회자가 똑똑합니다. 모두에게 배울 게 있습니다. 이게 어느 정도 주님의 뜻에 달려다 하더라도 어느 교회든 주님이 맡겨주실 때 목회를 향한 주님의 기대는 9절과 10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성도들을 분별에 이르게 하라. 그리고 자신도 성도도 진실한 사람이 되라. 마지막은 온전한 사람이 되기를 힘쓰라.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것이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주님께서 염려에 관한 말씀을 하신 후에 마지막에 내리는 결론입니다. 거기에 눈물이 있고 자기의 깨어짐이 있고 주님을 붙들려는 간절한 사모함이 있습니다. 그런 목회를 하기를 바랍니다.
4. 목회의 궁극적 목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빌1:11)
녹취자: 김기훈
마지막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선한 것을 분별하고 진실해지고 허물이 없게 되면 그 결국이 어떻게 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의의 열매가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희랍어 성경을 보면 ‘의의 열매가 가득차서’가 분사로 되어 있는데 그게 어떻게 되어 있느냐면 의의 열매가 가득 찬데 그게 ‘into’로 되어 있습니다. 열매가 가득 찬 것이 의미적으로 어떤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영광과 찬송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목회란 무엇인가 4 (2016.12.07, 교역자 수련회)
여기에서 궁금한 것은 의의 열매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ύνη)라고 되어 있는 의의 열매는 ‘디아데케’(διαθήκη)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학교에서 배운 ‘언약’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경륜을 따라 다르게 계시해 주십니다. 그런데 구약에서 ‘의’라고 할 때 ‘의’를 조직신학적으로 규명한다면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라고 하면 그것은 당신의 거룩함에 도전하는 모든 사람들과 피조물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정당성입니다. 이것이 의입니다. 그러니까 그 의가 상주시는 의로 나타나고 벌주시는 의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공평하게 하나님이 그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조직신학적인 의라기보다는 의라고 하는 것을 지금 우리에게 적용시킨 것입니다. 의의 열매를 맺는 주체가 누구입니까? 물론 하나님이 맺게 해주시지만 전에 말씀드린 대로 사람이 지식과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해져서 분별력이 있고 진실하고 허물이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의의 열매를 맺는 주체는 우리입니다. 우리에게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성서 신학적으로 볼 때 의가 무슨 뜻일까요? 구약에서는 의가 율법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율법에 부합한 상태가 의입니다. 구약에서 의를 이야기할 때는 명료한 잣대가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입니다. 율법이 그 사람이 의로운지 의롭지 않은지를 판단합니다. 율법에 부합한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판단합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는 의의 개념이 훨씬 더 적극적이고 풍성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풍성하고 적극적이게 되었을까요? 핵심적인 것을 간략하게 설명하면 이렇게 됩니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의가 됩니다. 그 의는 예수님이 죄 없이 하나님의 아들로 오셔서 인류에 대한 율법의 모든 요구를 담당하시므로 획득한 율법적인 의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나누어주셨습니다. 바울신학의 새 관점에서는 이러한 전가의 교리를 끊어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세미 펠라기우스주의나 알미니우스 쪽으로 갑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러한 의를 주신 다음에 하나님은 그보다 훨씬 더 높은 차원의 의를 이루면서 살게끔 우리에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옛 계명은 무엇입니까? 십계명입니다. 그 옛 계명을 부정하는 새 계명이 아니라 옛 계명은 과도적인 것이었고 이러한 옛 계명을 통해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더 주시려고 했던 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것이 행동원칙으로 정리된 것이 구약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에는 그 행동원칙으로 제시되는 것 이외에 그 이상의 삶을 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없었는가? 아닙니다. 있었습니다. 있었지만 구약의 성도들은 그렇게 살 수 없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성령의 내주입니다. 그래서 구약은 십계명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지키려고 애를 쓰지만 자신이 그것을 지킬 수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깨닫습니다. 결국은 이 계명을 진정으로 지키기 위해서는 바깥으로부터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하나님은 우리가 율법을 몽학선생 삼아 메시아를 통한 구원을 갈망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율법의 제 3용도입니다. 그런 율법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담겨진 뜻은 그것보다 훨씬 큰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처음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했고 서로를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그들은 결코 십계명을 지키지 않을 리가 없었습니다. 십계명 중에 어떤 것들은 아예 주어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안식일 같은 십계명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가도록 만드셨는데 신약시대에는 사랑의 계명으로 완성이 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이는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인류 속에서 이루어가게 하십니다. 이것이 의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의의 열매라고 하는 것은 -물론 율법에 부합한 상태이기는 하지만- 그 율법을 넘어서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고 인간을 지으신 뜻을 이루어드리면서 사는 모든 인격과 삶의 열매가 의의 열매입니다. 훨씬 구약보다 포괄적입니다. 이런 저런 죄를 짓지 않으면 충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사랑의 원리로써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창조하고 인간을 지으셨을 때 기대하셨던 뜻을 나라는 존재를 통해 성취하면서 살 때 성취된 열매를 많은 사람들이 보며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좋으신 분이시라는 것을 인정하게 하는 것이 의의 열매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일로 맺혀지는 열매가 아니라 존재와 인격, 삶, 사역, 모든 것을 포괄하는 열매입니다. 그 열매가 풍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KJV에서는 ‘being filled with’ 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러한 의의 열매가 가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의의 열매가 거의 없을 수도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것은 교회의 신앙과 목회 사역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의 능력과 의해서 결정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사역의 목표입니다. 의의 열매가 가득하게 되는 것.
그러면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목회사역을 하면서 성도들이 우리의 목양을 받으면서 얼마나 더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는가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고 인격과 삶 속에서 그런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것이 우리 사역의 목표입니다. 여기서 열매를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열매를 보면서 나무를 알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냐하면 열매의 종류를 보면서 그 나무가 그 나무였다는 것도 알게 되고 ‘이 나무는 참 고맙구나, 이렇게 좋은 열매를 우리에게 주니 이 나무는 참 고마운 나무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열매로 그 나무를 알지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열매를 통해서 사람들은 유익을 얻고 열매를 보면서 나무를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열매가 바로 우리를 통해서 맺혀지는 인격적인 열매입니다. 인격이 밖으로 발산되어서 삶 속에서 맺혀지는 열매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나무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누구에게 매달려 있었기 때문에 저런 열매를 맺을 수 있었을까, 그것이 그리스도시구나 하나님이시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독사’(do,xa)라고 되어 있는 ‘영광’은 효과적인 영광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본질적인 영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만 홀로 갖고 계시는 영광입니다. 둘째는 발산적인 영광인데 이것은 어떤 특정한 장소에 임하는 ‘쉐키나’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거기에 있으므로 빛이 발산하면서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시내산에도 그러한 일이 있었고 장소적인 쉐키나들이 구약의 역사에 있어서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마지막 세 번째인 효과적인 영광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어떤 일을 보면서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영어 표현에 ‘I honor you’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은 ‘나는 너를 찬송한다, 영광 돌린다’라기 보다는 ‘나는 너를 인정한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영광 그 자체는 우리가 볼 수 없지만 효과적인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알고 모든 사람들이 그 영광 앞에 굴복하여 그 영광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바로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Effective Glory, 효과적인 영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우리 목회사역의 목표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송하는데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Soli Deo Gloria 가 우리 목회의 목표라는 것입니다. Soli Deo Gloria는 단지 목청을 높이고 누군가를 정죄하는데 쓰이는 구호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현장 속에서 실제로 나타나야하는 명제입니다. 다시 말해, Soli Deo Gloria를 외치면서 남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Soli Deo Gloria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렇게 기도 목회를 통해서 성도들의 사랑을 불러 일으켜 그 사랑이 지식과 총명 안에서 점점 풍부해지고 결국 성도들이 분별력이 있고 진실하고 허물이 없는 삶을 살게 될 때 그것을 통해 의의 열매를 맺게 되고 그 의의 열매를 통해 하나님은 영광과 찬송을 홀로 받으십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Soli Deo Gloria의 목회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럼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해봅시다. 결국 목회자의 영광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돌보라고 맡겨 주신 사람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그래서 그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 사랑이 지식과 총명 안에서 어떻게 점점 더 풍성해지게 되었고 결국 분별력 있고 진실하고 허물이 없는 삶을 살게 되었는지, 그의 인격과 삶 속에 예전에 없던 하늘의 열매가, 그리스도의 열매가 얼마나 많이 맺히게 되었는지 그것이 바로 우리 목회사역의 목표입니다. 물론 한해를 사역했을 때 얼마나 사람이 모였는가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태만한 사람을 꾸짖으시는 하나님의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 그의 하는 일과 사역에 복을 거두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사역이 쇠퇴하고 있으면 목회자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성찰하면서 내가 정말 잘하고 있는데 시련을 당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내게서 목회의 은혜를 거두시는가를 고민해야합니다. 여러 해를 한 부서를 목회했는데 회심이 거의 없다면 근본적으로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인가 혹은 내가 이 땅에 살아있는 것을 하나님이 즐거워하시는가를 다시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심하면 내가 목회사역으로 들어온 것이 부르심이 없는데 나의 주관적인 느낌으로 들어온 것이 아닌가 그리고 더 필요하면 직업도 바꿀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한 사람이 소명을 받은 가장 훌륭한 증거는 그가 전하고 가르치는 말씀을 통해서 사람이 변화 되어 가는 것, 그것도 껍데기가 아니라 본질이 변화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둘 중의 하나입니다. 소명이 아니거나 하나님의 축복이 자신의 목회 사역에서 거둬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을 성찰해봐야 되지 않을까요? 이제껏 목양사역하면서 이런 열매가 얼마나 있었는지 자신을 깊이 성찰하고 ‘목회는 원래 다 이런 것이다’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라헬이 야곱에게 앙탈을 부리면서 처절하게 울부짖습니다. ‘나로 아이를 낳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겠노라’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영혼들의 회심과 변화의 열매를 주시도록 기도해야 되는 사람들이 목회자이고 그렇게 오래 사역하고 나면 그런 거룩한 사람이 되어 갑니다.
마지막으로 전치사 하나가 나옵니다. ‘디아 투 예수 그리스투’(διὰ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여기서 ‘디아’는 원인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의의 열매가 가득해져서 그 의의 열매가 영광과 찬송 속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말씀 전하고 가르치지만 우리가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연합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니오 쿰 그리스토(unio cum Christo),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교회의 본질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교회의 본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 것, 그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교회의 이런 저런 모습을 다 깎아내고 마지막으로 그것을 없애버리면 교회가 될 수 없는 마지막 하나의 요소를 이야기 하라고 하면 그것이 바로 교회의 본질입니다.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이 가톨릭과는 달리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교회의 본질과 관련시켜서 꽉 붙들었기 때문에 신학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학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이니 주께서 친히 하신 말씀대로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과 생명을 성자에게 부어주시고 성자에게 부어진 사랑과 생명은 그의 신부인 교회, 그와 생명적으로 연합된 교회에 부어지고 교회에 부어진 사랑과 생명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접붙여진 신자들에게 흘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없는 개인,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 그리스도가 없는 개인, 이런 것들은 존재할 여지가 없는 것들입니다. 어떤 생명과 사랑이 흘러 들어오면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는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주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고 나는 교회에 접붙여진 몸이니 내가 이것을 받는다고 생각해야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러한 생명과 사랑을 받을 때 나는 예수 안에 있고 다른 모든 형제들도 그 안에 있다고 생각해야합니다. 그 원리에 의해서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이 복음 되는 이유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셨을 뿐 아니라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하늘의 생명과 사랑의 힘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에 복음이라고 합니다. 그 생명은 세상에 있는 자원이 아니라 하늘의 생명입니다. 연애할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사랑을 조금 하면 갈등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깊이 하면 그 사랑이 엄청난 힘을 줍니다. 불신자로서 한 인간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유사생명입니다.
(노래) Why does the sun go on shining
Why does the sea rush to shore
Don't they know it's the end of the world
Cause you don't love me any more
너무 사랑하던 사람과 헤어졌습니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그 사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햇빛이 계속 빛날까? 왜 파도는 해안가로 밀려오는 것일까? 왜 새들은 노래하고 왜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을까? 당신이 나에게 안녕이라고 말했을 때 세상은 끝이 났는데. 사람들이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어 하는 이유는 그것이 유사한 생명을 많이 주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은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모상입니다. 사랑하는 곳에는 언제나 행복이 있습니다. 그것이 빗나간 사랑이라도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삶의 에너지를 줍니다. 그리고 잃어버릴 때 삶에 대한 애착도 함께 놓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랑인데 그 사랑은 항상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이기 때문에 끝까지 그것을 추구해나갈 때 결국 하나님의 사랑에 맞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로 하여금 그 사랑으로 돌아가게 하시고 그 사랑의 힘을 한없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힘으로 온갖 시련과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때 셀린디온이 불러서 히트를 쳤던 ‘The power of Love’라는 곡에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때로는 두렵기는 해요. 그렇지만 당신과 사랑하는 일을 그만 두려고 하는 생각은 몇 광년 보다는 멀리 떨어져 있어요. 그리고 나는 당신과 함께 사랑의 능력을 배우고 싶어요.’ 이런 고백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고백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목회사역을 어떤 사람은 ‘환희와 희열’로 이야기합니다. 물론 바람직하고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외적인 순간들입니다. 목회를 하다가 너무 보람이 있고 기쁠 때는 하나님이 예외적인 은혜를 주신다고 생각해야합니다. 그런데 눈물 나게 고생스럽고 당장 그만두고 싶은 미칠 것 같은 고통을 겪을 때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생명의 크기만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크기만큼 그 사람은 인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목회를 하게 하는 동력이 목회 안에 있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어떤 때는 말씀을 가르치면 사람들이 변화되고 나를 예수님 다음으로 소중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알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열심히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교역자가 아니라 배설물 같이 알 때도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마치 자기 종처럼 취급할 때도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 참지 못하면 안 됩니다. 그런 것을 참게 만드는 힘, 목회를 하게 하는 힘이 목회 자체 안에서 오는 사람은 참 목자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예루살렘 교회를 맡기시면서 물어보신 것이 ‘네가 양 떼를 사랑하느냐?’가 아니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를 물어보셨던 것입니다. 교회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이 목회에 동기가 되는 사람은 참 목자가 아닙니다. 목회의 즐거움을 교인들에게서 찾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말씀 듣고 은혜 받는 사람들만 목양하는 목회는 목회가 아닙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제가 23년 동안 목회하면서 단 한 번도 그런 식으로 목회해본 적이 없습니다. 목회자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왜 그렇게 하는 줄 아십니까? 목회하다가 외로우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회에서의 외로움은 그렇게 달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로부터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찬양)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 밖에 없네
물론 교사들과 성도들을 붙들어 주기 위해서 나의 가정을 개방하고 같이 밥도 먹고 따뜻한 시간을 보내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격려를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매일매일 예수 죽인 것을 내 몸에 짊어지고 나 같은 죄인을 위해 그렇게 사랑해주셨다는 사실이 가슴에 사무쳐서 그 생명으로 목회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어느 정도 외로움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요즘 목회자들의 특징 중 하나가 홀로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가 깊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이 과하면 모자란 것만 못합니다. 여러분이 이런 이야기들을 귀담아 들으면서 어린 나이에서부터 목회자로서의 강직함과 품위를 지키면서 살아가야합니다. 그렇게 그리스도께로부터 부어지는 생명과 사랑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 목회인데 예수와 연합된 교회의 몸인 한 지체로서의 우리 목회자가 다른 지체인 교인들을 돌보는 것이 목회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것이 교회론적인 발언입니다. 온 인류가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하나의 연합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신학적으로 인성적 연합이라고 하는 것인데) 모든 인류를 자신의 몸처럼 사랑해야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인류는 그렇게 됩니다. 멸망할 사람들은 멸망하지만 남아 있는 모든 인류는 그렇게 한 몸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서 또 다른 몸의 한 지체인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여 그 충만한 생명의 힘으로 우리들이 살아갑니다. 저는 이번 수련회에서 네 번에 걸쳐 목회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가르쳐 드렸고 마지막에 한 번이 더 남았는데 맨 앞에 시작되는 구절입니다. 빌립보서 1장 8절입니다. 총 5시리즈로 구성이 됩니다.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한 해 동안 목회가 무엇인가에 대해 잘 기억하면서 완성도가 높은 목회사역을 하여 여러분들도 변화되고 성도들도 변화되는 은혜가 있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5. 예수의 심장으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빌1:8)
녹취자 : 강성경
Ⅰ. 들어가는 말
우리는 9절에서 11절까지 목회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 목회는 기도로 하는 것이고, 목회는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도록 그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고 두 번째 시간에 그 사랑이 지식과 총명 안에서 점점 더 풍성해지도록 하는 것이 목회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목표가 10절에 나오는데 그게 무엇이냐면 세 번째 시간에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고 진실하고 허물없이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 시간에는 11절에서 목회의 궁극적인 목적이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의의 열매가 가득해져서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리면서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야 하는데 여기에서 우리들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네 번 설교한 내용이었습니다. 오늘은 이제 목회의 동기, 목회를 하게 하는 동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살펴보려 합니다.
Ⅱ. 예수의 심장으로
사도는 그런 목회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먼저 감옥 속에 있는 한 죄수로서 목회자로서 빌립보 교회를 그리워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고 나옵니다.
A. 스프랑크나
사실 여기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있는데 심장이라 번역되는 것이 카르디아(καρδια)가 아니라 스프랑크나(σπλαγχνα)라는 단어입니다. 원래 심장은 희랍어로 카르디아이고 스프랑크나라는 단어는 심장이 아니라 창자입니다. 그것도 배에 있는 창자 전체를 가리키는데 대개 의학적으로 잘 모르겠습니다만 대장이든 소장이든 갈비뼈 아래로 꿀꺽꿀꺽하는 그 아래 있는 모든 창자 덩어리를 다 가리켜서 스프랑크나라 얘기합니다. 왜 여기에서 이것을 카르디아인것처럼 심장으로 번역을 했을까 생각을 해보면, 이게 나라마다 각각 문맥이 다른데,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인간의 영혼의 자리가 창자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많은 나라에서는 인간의 영혼이 심장에 있다고 보는데, 아프리카 콩고 같은 나라는 간에 영혼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디 아민(Idi Amin)이라고 하는 아주 잔악한 독재자가 있었는데 자기를 제거하려고 반란을 일으킨 자기의 정적들을 숙청한 후에 실제로 정적의 배를 갈라서 간을 씹어 먹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간에서 또 영혼이 나와서 어떤 짓을 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간을 아예 자기 입으로 씹어 먹어버린 것입니다. 나라마다 각각 인간의 영혼이 어디 있느냐가 다른 것입니다.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면, 고대 그리스로 가면 인간의 영혼이 등, 척추 중간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등 뒤에서 영혼이 있어서 사지를 꽉 쥐고 있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영혼이 떠나고 나면 사지가 탁 하고 풀어지고 고개도 뚝 떨어지는데 그것을 잡아주는 영혼이 등뼈 뒤에 있다고 본 것입니다. 실제로 호메로스의 시 같은 곳에서 사람들을 죽일 때 완전히 죽이기 위해서 사람을 엎어 놓고 등을 때립니다. 칼을 확 찔러서 빼면 칼끝에 영혼이 묻어난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문화마다 각각 영혼의 자리가 어디 있느냐에 대한 생각이 다양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창자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라고 번역을 하면 이해가 안 될 테니 우리 문맥에 맞게 번역을 한 것입니다. 아프리카 콩고에 가서 번역을 한다면 ‘그리스도 예수의 간’으로 번역을 할 것입니다. (창자는) 우리 문맥에 맞게 번역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KJV에 보면 그대로 번역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창자들(복수) 안에서’로 번역을 했습니다. 워낙 KJV은 원문을 그대로 따라가려 했기 때문에 해석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스프랑크나라고 하는 단어와 관련되어서 사용되는 동사가 있는데, 바로 마태복음 9장 36절에 나오는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할 때 에스프랑크니스테(ἐσπλαγχνίσθη)라는 동사 수동태형입니다. 이것은 ‘창자까지 마음이 흔들리도록 감동을 받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말로 등가 번역을 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 혹은 ‘애간장이 녹는 것처럼 아팠다’, ‘애간장이 녹는 듯 하였도다’ 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장이 녹아내리니 그게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자식이 죽었을 때 혹은 부모가 죽었을 때 쓰는 단어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죽었을 때에는 그런 단어를 거의 안 쓰죠? 그렇게 애절하게 아프다는 표현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에스프랑크니스테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유리하는 영혼들을 보시면서 사실 제자들을 사도 삼아서 파송하신 장면이 9장 36절에 나오고, 그 구절이 열린교회를 세우게 된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사도바울이 이 감옥 속에서 얼마나 절실하게 빌립보 교회를 사랑했는가를 보여줍니다.
B. 예수의 심장으로 사모함
여기서 ‘사모하는지’는 ‘그리워한다’는 것입니다. 아주 깊이 빌립보 교인들을 보고 싶어 하는 사도바울의 심경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우선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사도바울은 감옥에 갇혀서 어쩌면 사형에 처해질지 모른다는 그런 위태한 상황 속에서 로마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사람의 모든 관심은 자신이 죽고 사는 것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장 21절 뒤로 넘어가면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시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고백을 하고 그는 이미 여러 곳에서 자신의 성도들에게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사실들을 사도행전 20장에서도 표현하고 많은 준비를 하고 빌립보서에서도 자기가 관제와 같이 하나님 앞에 드려진바 되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바울의 모든 관심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을 향하여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에 대해서 간간히 들려오는 교도소까지 자기가 갇힌 곳까지 들려오는 모든 소식을 들으면서 모든 관심이 어떻게 하든지 빌립보 교회 교인들이 점점 더 사랑이 풍성해져서 지극히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고 진실해서 허물없이 예수의 날까지 이르는 사람들이 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많은 의의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텐데......여기에 모든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은혜가 사라지고 나면 모든 관심은 자기에게로 집중하게 됩니다. 내가 얼마나 서럽게 살았는데 교회에서 나에게 얼마나 섭섭하게 해주었는데, 왜 내 인생만 이렇게 힘들까 등등 안으로 오그라듭니다. 그런 모든 낙심과 고민은 다시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게 만듭니다. 그렇지만 은혜가 넘쳐서 사랑이 가득하게 되면 그 관심사가 밖으로 뻗어나갑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아무래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관심사가 바깥으로 뻗어나가면서 사람들이 행복한가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진정으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기를 바라는 마음이 솟구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빌립보 교회 교인들을 그리워하는 이유입니다. 빌립보 교회 교인들이 열심히 사도바울의 선교사역을 도왔습니다. 훌륭합니다. 그렇지만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그런 것을 받았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빌립보 교회 교인들이 진정으로 예수와 동행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을 원했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빌립보 교회 교인들을 그리워했던 것입니다.
C. 목회의 동인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여기에서 한 사람으로 하여금 목회를 하게 하는 동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보게 됩니다. 객관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이지만, 그 사랑이 사도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부은바 되어서 그 사람으로 목회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목회의 주관적인 동인입니다. 목회는 사람 때문에 목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구원하고 은혜를 베푸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작할 때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 숨을 거둘 때까지 모든 목회의 동기가 예수의 심장, 예수의 무리를 보시며 애간장이 녹으시는 것과 같은 마음이 영혼들을 돌보는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예수를 순수하게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것이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자격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를 실망시키고 낙심하게하고 할 때에도 사람들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자기를 목회로 불러주신 목회자로 불러주신 예수님 사랑 때문에 목회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오늘 상반절에 있는 이 말씀을 통해서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우리 중에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묻는 것은 과연 그 사랑이 스프랑크나까지 이르는 창자의 사랑이냐 물어보는 것입니다. 마음 깊은 곳까지 미쳐서 그 사랑에 사로잡힌 종류의 사랑으로 목회를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곤고하고 방황하는 영혼들을 향해서 예수님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신가요? 예수님이 가슴이 창자가 끊어지는 것처럼 아프셔서 그 영혼들을 바라보시며 목매이던 그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눈물이 있는 목회를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한 번 자신이 힘든 인생을 살고 있다고 자신에게로 마음을 돌리고 나면 깊은 자기연민이 밀려오고 사람들과의 비교의식이 생기고 결국은 지금 자신의 처지에 만족할 수 없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여기에 세워서 목회를 하게 하신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일시에 사라지게 됩니다. 삯꾼과 참 목자의 차이점은 양들을 돌보는데 있지 않습니다. 삯꾼도 때가 되면 양식인 꼴을 양떼들에게 주고 참 목자도 줍니다. 그러나 삯꾼에게는 사랑이 없습니다. 참 목자는 양을 사랑하는 사람인데,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얼마나 깊이 들어가 스프랑크나에 이르기까지 그 사랑이 우리를 깊이 사로잡고 감동하게 할 때, 그 때 우리는 그만큼 많은 목회 사역에 어려움을 참고 인내하며 양떼를 사랑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스프랑크나에 이르기까지 가슴이 저미도록 사랑하게 된 것이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그에게 돈을 주셔서? 직분을 주셔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도바울을 이방인들을 위한 큰 그릇으로서 사용한 것은 맞지만, 이 세상에는 그렇게 큰 사명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순수하게 사랑하다가 이름 없이 죽어간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만약에 사도바울이 그냥 텐트나 평생 수리하면서 사는 사람으로 일생을 마쳤다 하더라도 역시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를 사랑하게 만든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대신해서 예수가 대신 죽으셨다는 깊은 대속의 은혜에 대한 감격,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항상 나와 함께 동행하셔서 환란과 시험을 이기고 모든 고난에서 승리하게 하셨다는 자신의 인생 전체에 대한 간증이 지금의 예수의 스프랑크나를 가지고 빌립보 교회 교인들을 그리워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목회입니다. 모든 것에 있어서 목회자가 성도만 못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보다 공부 많이 한 교인들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보다 능력이 뛰어난 평신도들도 많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양보해도 목회자가 양보할 수 없는 것은 예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 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어디에 있든지 거기 예수님이 함께 하실 것이고, 무엇을 하든지 주님이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심장을 가진 사람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Ⅲ. 증인이신 하나님 앞에서
그 다음에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그랬습니다. 이것은 양심에 거리낌 없이 이 사랑이 아주 정직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목회를 하지만, 교인들을 향해서 내가 이 교회를 당신들을 예수의 심장으로 얼마나 사랑하는지 우리 하나님이 아십니다. 하나님이 증인이십니다. 증인이라는 말을 사용한 이유는 증인은 위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에도 나옵니다. 이스라엘 전통에서 위증은 거의 신성모독에 가까운 죄였습니다. 변호자는 어떤 사람을 감싸는 것이고, 고소자는 어떤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이지만, 증인의 사명은 있는 그대로 진술을 하는 것이 증인의 ‘덕’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증거로 채택해서 사용할 것인가는 재판관의 소관사항입니다. 그래서 오늘 문맥 자체가 법정에 서 있는 문맥입니다. 법정에 서서 시비가 붙었습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의 양심 속에서 일어나는 시비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빌립보 교인들을 사랑한다’, 또 한쪽에서는 ‘아니야’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증인을 불러오자 해서 증인석에 증인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분이 바로 모든 것을 전부 아시고 판단에 있어서 착오가 있을 수 없는 하나님이 증인으로 나옵니다. 그 증인의 증언은 다른 사람에 의해 뒤집힐 수 없는 증언입니다. 그 증언 속으로 하나님을 불러 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증인으로 불러와도 자기 마음속에 두려움이 없을 정도로 그렇게 진심으로 빌립보 교인들을 예수의 마음으로 사랑한 것입니다.
이런 고백이 가능한 것이 많은 갈등 속에서 어느 한 순간에 나오는 감정적인 체험이었겠습니까? 아닙니다. 처음 빌립보 교회가 세워진 것이 자주장사 루디아에 의해 세워진 것입니다. 그가 복음을 듣고 마음이 열려서 예수의 소문을 내면서 생기기 시작한 것이 바로 빌립보 교회입니다. 빌립보 교회에 빌립보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그 교회를 돌보기 시작한 날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사도바울이 이런 그리스도 예수의 창자로서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목회해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증인이신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이 최종적으로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 내가 어떻게 양떼들을 돌보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위해 목메는 마음으로 목회를 했는가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화) 나는 내 생애에 있어서 부교역자로 두 교회에서 섬겼습니다. 세 교회였지만 한 교회는 1년 반 정도 있다가 개척을 했었기에, 두 교회를 섬겼던 곳인데 그 중 한 교회가 오우진 목사가 있다가 온 내수동 교회였습니다. 내 생애에 있어서 그 교회를 잊을 수 없습니다. 그 교회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거기서 정말 예수의 심장으로 목회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본격적으로 배웠습니다. 그 전에도 배웠고 너무너무 교회를 사랑했지만 내수동교회에 와서 깊이 배웠습니다.
Ⅳ. 결론
그래서 부교역자들인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하면 우리들이 보기에는 이 교회가 누구 교회 저 교회는 누구 교회, 앞으로 할 교회는 내 교회 이런 생각이 있을 수 모르지만,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모든 교회가 당신의 교회입니다. 그래서 모세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집에서 충성한 일꾼이었다고 부르는 것처럼 여러분들이 어디에 있든지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충성하라, 진심으로 사랑하면서 목회를 하라. 그래서 먼 세월이 흐르고 지난 후에 교인들이 돌아보고 담임목사가 여러분들을 돌아볼 때에 그 충성스러웠던 삶에 대해서 교인들과 함께 눈물로 회상할 수 있는 사람들로 살면 하나님께서 그의 앞날에도 복을 주실 것입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 진심으로 사랑하며 그렇게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충성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목회자는 그리스도 때문에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이고,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목회를 목회답게 하는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내년 한 해 동안 그렇게 목회를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바라고, 교회의 우리 직원들 할 수만 있으면 여러분들은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어서 교회에 의해서 발탁이 되어서 교회의 일꾼들이 되었으니, 도저히 업무 때문에 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할 수만 있다면 구역장을 하세요. 영혼을 위해서 사는 것만이 가장 오래도록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남을 만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예수의 심장으로 무리를 돌보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목회란 무엇인가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