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김에로 부르심에 감사함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내게 직분(diakonian)을 맡기심이니”(딤전 1:12)
참 생각을 좀 바꾸어서 가만히 묵상해 보면 감사한 일이 참 많습니다. 우리들이 구원의 은혜도 감사하고 일년 동안 먹여주시고 입혀주셔서 살려 주신 것도 참 감사하고 때로는 가장 불쌍한 것은 인간이 살면서 빚에 시달리는 것, 막 시달리면서 그 부채에 짐을 벗어버렸을 때 참 감사합니다. 질병에 걸려서 오랫동안 병상에 누었다가 새 생명을 얻게 되어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어려운 일이 닥쳤다고 괴로워했는데 요셉이 창세기에서 고백한 것처럼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하였으나 하나님이 그 악을 선으로 바꾸사 만민을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그렇게 고통스러운 어려움을 좋은 것으로 바꾸어주셨을 때에도 참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 그래서 눈을 열고 감사한 것을 생각하면 참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입에다가 항상 달고 살아야 합니다. 아! 참 감사하다. 아! 참 감사하다. 아! 정말 감사하다. 이렇게 늘,
그런데 오늘 이상한 것을 가지고 사도 바울은 감사한 것입니다. 이제 순교할 때가 다가오고 있는 때였는데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 그 복음 때문에 고난받는 상황 때에도 감사의 제목 하나를 찾았습니다. 그에게도 감사한 게 참 많았을 것입니다. 그도 인간이니까 먹고살아야 했고 일행들의 쓸것도 좀 조달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많은 것 말고 우리가 흔히 하나님 앞에 감사하기 어려운 다른 것을 이 사도가 오늘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게 직분을 맡기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직분을 맡기신 것에 대해서 감사한다. 나를 능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내가 감사하는데 이는 나를 충성 되이 여겨서 나에게 직분을 맡기셨다. 다른 이야기는 전부다 수식어고 내가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직분을 맡기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부분이 참 재미있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이 ‘직분’이라고 하는 것이 희랍어 성경에 ‘디아코노이아 (diakoniva)’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영어의 ‘deacon’이라고 하는 ‘집사’라는 말이 왔습니다. 이 디아코니아 라고 하는 것은 신약 성경에 어디에 또 나오는가 하면 사도 행전 6장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 할 때 그 공궤하다 라고 하는 것이 이 디아코니아 같은 단어는 아니지만 디아코님이라는 말로 나옵니다. 그래서 공궤를 일삼다는 디아코네임 트라페자이스라는 구절인데 트라페자이스(trapezai")는 테이블, 밥 먹는 밥상이고, 디아코네임은 밥 먹는 밥상을 차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공궤를 일삼다 라는 말은 식탁을 차려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디아코노이아(diakoniva) 라는 말은 종, 노예 그런 말에 또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과 같은 파생어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을 번역하면 섬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직분’ 그러면 직함 명함에 찍히는 무슨 장, 무슨 국장, 무슨 사장, 회장, 대표 이사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그것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난 직분이 아니라 직분을 가진 사람이 행하는 일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 일 중에서도 특별히 섬김, 혹은 사명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번역의 뉘앙스가 좀 다릅니다. 내게 섬김을 맡기심이니 그랬는데 또 더 재미있는 것은 희랍어 성경에는 “하나님이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라고 되어 있는데 “하나님이 나를 신실하게 평가하셔서 섬김 속으로 밀어 넣으셨으니” 그랬습니다.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섬김 속으로 나를 밀어 넣으셨음이니 그것을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언제 사도가 되겠다고 그랬습니까 오대양 육대주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겠다고 그랬습니까? 지중해를 누비고 유럽을 복음화 해서 신약 성경의 13번 이상의 저자가 되겠다고 하나님 앞에 서원 했습니까? 그는 그럴 계획이 없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께 사로잡히자 사도 바울은 인생관과 그 모든 신앙관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유대교의 거짓된 가르침 속에 잠들어 있던 자기를 깨우셔서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그의 엄위와 능력이 무엇인지 보이시고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인가 하는 것도 깊이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부르심의 체험에 강력하게 사로잡혀서 그래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바울로서의 일생을 살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이렇게 뼈저리게 주님을 만나고 완전히 자신이 초토화되어진 다메섹의 체험 하나에서만 구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바울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 크신 은혜를 그에게 베푸신 것만은 틀림이 없지만 그것 하나 때문에 바울이 바울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그에게 섬김을 맡기심이니” 그러셨는데 어떻게 했다고요? 자기를 능하게 하시고 그 다음에 또 어떻게? 자기를 신실하게 여기셔서, 충성되게 여기셔서 이런 것 모두 시간적인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시간적인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물론 주님이 내가 너를 이방인과 임금들 앞에서 복음을 전하는 나의 그릇으로 삼겠다 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때 이미 하나님이 그를 사도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렇게 불러주셨다고 하더라도 불러주셨다는 그 하나만으로 그가 그렇게 풍요로운 사역을 하면서 수많은 영혼에게 유익을 끼치면서 사역을 저절로 할 수 있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여러분들에게 집사다 권사다 맡겨주면 그것이 여러분에게 자신이 없으면 여러분이 받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그것을 덥석덥석 받는 사람들 이해가 안갑니다. 그거 여러분, 교회가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여러분들을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렇게 직분을 맡아서 하나님이 그렇게 직분을 맡겨준 사람들이 모두 훌륭하게 그 직분을 맡아서 충성하고 헌신하는 삶을 삽니까? 이름은 걸어놓은 집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일도 지키지 않는 집사를 집사라고 부르는 교회의 서글픔을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도도 하지도 않는 권사를 권사로 세우는 것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정말 잘 생각해야 합니다. 직분을 맡겨주셨는데도 감당이 안되고 섬기도록 섬김의 기회를 주었는데도 안 섬깁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부어주셨어도 능하게 되지도 않고 그리고 충성되게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는 그냥 자기 하나 생존하는 것도 못해서 그렇게 물에 빠진 사람이 꼴깍 꼴깍 하듯이 그렇게 삽니다. 그러고도 항상 이것은 자신의 연약함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나중에 어떻게 하나님을 뵈오려고 합니까? 너 평생 뭐하다가 왔냐? 하나님, 면목이 없다고 쓰러집니다. 뭔지 모르지만, 뭘 하다가 왔냐? 그저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계속 하다가 왔습니다.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좀 강하게 살아야지. 이제 그런 것입니다. 직분을 맡겨주셨어도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잘 감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에게 그런 직분을 하나님이 사명을 주셨다고 할지라도 그를 능하게 하시고 그를 충성 되이 여기시기 위해서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주님이 그렇게 맡겨주신 사람이 모두다 하나님의 뜻을 훌륭하게 이루어 드리다가 죽었습니까? 아닙니다. 그가 비록 하나님의 일군이라도 아닙니다.
가룟 유다를 생각해보십시오. 똑같이 사도의 직분을 받았고 처음에 헌신했습니다. 막판에 예수님을 노예의 몸값인 은 삼십에 팔고 그 돈도 못 써보고 죽었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자기가 스스로 그 길을 택하고 주님을 십자가에 매다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이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주님을 만나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크게 예수님을 경험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경험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살아가려고 주님이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려고 애쓰면서 사는 동안에 하나님이 그를 능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세우신 예수님이 그를 바라보니까 그가 정말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름 속에서 그의 신실함, 그의 충성스러움이 입증이 되고 그러자 주님께서는 더 많은 섬김 속으로 이 사람을 밀어 넣으셨습니다.
보십시오. 이것을 오늘 바울이 하나님 앞에 무한히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자기를 섬김 속으로 밀어 넣으셨을 때 자신의 삶은 디아코노이아의 삶 밖에는 없었습니다. 노예처럼 앞치마를 두르고 훌륭하지도 않은 사람들의 식탁을 차리면서 수종드는 노예와 같은 삶 이외에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그렇게 섬김 속으로 밀어 넣으신 우리 주님께 감사했던 것입니다.
정말 은혜를 깊이 받고 주님을 만나고 나면 하나님이 우리를 섬김 속으로 밀어 넣으시는 것이지 내가 눈에 좋은 대로 이것을 섬길래 저것을 섬길래 하고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뼈저리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의 태도를 보면 정말 이것은 교만인지 아니면 겸손인지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도저히 능력도 안 되는 사람들이 큰 섬김을 탐하다가 시험에 드는가 하면, 능히 담당할 수 있는 데도 불구하고 직분이 성에 안 차는 것인지 섬김이 자기를 높일 수가 없어 그런지 직분을 주고 섬김을 주어도 이리 발로 차고 저리 발로 차는 그런 어리석은 교인들이 많습니다.
저는 그래서 교회에서 우리 교역자들에게 항상 가르칠 때도 항상 그렇게 합니다. 절대로 섬김을 구걸하지 말아라. 교인들을 그렇게 훈련시키면 그러면 나중에 정말 낭패를 만난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섬기려는 사람들에게는 기회를 주고 그리고 섬김의 자원함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설득은 할 수 있지만 절대로 교회가 그 사람의 섬김을 너무나 필요로 하는 것처럼 그렇게 무릎을 꿇고 섬김을 구걸하는 태도로 교인들을 다루지 말아라. 그렇게 해서 교인들의 영혼에 이로울 것이 없다.
정말 우리 한번 생각해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한 사람들 치고 주님이 어떤 섬김에로 그 사람을 밀어 넣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은혜 받은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사명이 있고 주님이 섬김 속으로 그들을 밀어 넣으십니다. 비인격적으로 찍어눌러서 노예처럼 섬기지 않을 수 없도록 발로 밟으시며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난 그 은혜가 자신에게 족쇄가 되어서,
주의 사랑의 줄로 나를 굳게 잡아매소서
그 사랑에 매어서 그 사랑이 우리를 섬김 속으로 밀어 넣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 사도는 무한히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가 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의 욕심 때문에 이것저것 선택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 사역이라고 하는 것은 하다가 보면 참 나중에는 내가 도저히 이런 것 할 생각이 없었는데도 할 수 없이 하게 되는 그런 상황이 생겨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아는 선교사님 한 분은 선교를 하기 위해서 중국에 갔는데 열심히 선교를 하는데 사람들이 자꾸 하나씩 둘씩 조선족도 또 핍박받는 한족도 심지어는 선교하겠다고 오는 한국 사람들도 자기 가까이 모여들었습니다. 붙어 다니면 공안 당국에 걸리고 좋을 게 하나 없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빵공장을 차렸습니다. 그래서 빵공장 사장이 되어서 월병도 굽고 작년에도 자기들이 구운 월병이라고 한 이십 개 보냈습니다. 올해는 보내준다고 하고 왜 안 보내주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그 사람들을 빵공장에 직원으로 해서 선교를 하는 것입니다.
웨슬리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웨슬리가 무슨 영국을 부도덕의 늪에서 건져냈다고 합니다. 웨슬리만큼 다양한 측면을 가지고 검토되는 인물도 흔치 않습니다. 교육학자들은 교육적인 측면에서, 신학자들은 신학자 측면에서, 그리고 선교학자들은 선교학자 측면에서, 목회자들은 목회학 측면에서 뭐 다양하게 접근을 합니다. 그가 원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가 영국을 구했다고 그렇게 말하는데 그가 영국을 구하는 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을 만나고 나니까 저렇게 하나님 모르고 살아가는 무지몽매한 인간들, 그리고 형식적인 신앙가지고 살아가는 막대 먹은 인간들이 너무나 불쌍해서 열심히 예수 사랑전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이 강력한 회심을 경험하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눈을 뜨고 보니까 이 세상이 너무나 더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보니까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는데 그 선생들이 모두 부패해서 믿을 수가 없습니다. 가리키는데 거기서 하나님 경외하는 법은 안 가르치고 모든 세상 속에서 세상 적인 지식을 가리키는데 그것도 뭔가 이렇게 좀 아이들이 어째든 그 학교 교육을 가지고는 도저히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씨가 될 수 없다라고 하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서 은혜를 받은 많은 교사들이 모여서 보수를 초월해서 주님 앞에 받은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우리에게 아이들을 보내주면 하나님 사상으로 이 아이들을 가르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말하자면 초등학교가 생겨났습니다. 가리킨 학교가 진학을 해야 되는데 할 수 없이 중학교가 생기고 대학이 생기고 하면서 교육 기관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런 섬김 속으로 하나님이 자연스럽게 밀어 넣으시고 밀어 넣으시고 또 밀어 넣으신 것입니다. 일평생 우리들이 그렇게 섬기다가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 섬김 중의 대부분은 그가 선택한 섬김이 아니라 시간이 흘러가면서 상황이 섬기지 않을 수 없도록 그를 만들었고 또 하나님은 그런 방법으로 그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나가시는 도구가 되게 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사도 바울도 오늘 똑같은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나를 충성 되이 여겨서 그 섬김 속으로 나를 밀어 넣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처음에는 얼마나 힘든 것이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유대민족을 그렇게 사랑했는데 그 복음 때문에 버림을 받았고 가족들로부터도 버림을 받았고 그렇게 사랑하는 동족들에게 원수가 되어서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고 박해를 밥먹듯이 하면서 그렇게 고통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더 많이 섬김 속으로 밀어 넣을수록 더 많이 고통받는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사명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도대체 그 섬김이 바울에게 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바울에게 준 것이 도대체 뭐가 있기에 그는 자기를 이렇게 섬김 속으로 밀어 넣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을까요? 이방인들에게 보냄을 받았는데 핍박밖에 돌아오는 것이 없었고 유대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했지만 오해밖에는 돌아오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십에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고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고 그리고 폭풍우를 지나고 그리고 광주리에 담겨진 채 성밖으로 내동댕이쳐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철저히 두들겨 맞는 그런 비참한 생활밖에 사도 바울에게 그 섬김이 가져다 준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사도는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참된 가치는 그가 어떤 사명을 가지고 있는가 거기에 달린 것입니다. 여러분 위해서 고통 당할 수 있는 인생의 목표가 있다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것입니다. 짐승들에게는 이런 것 없습니다. 오늘 하루 배부르고 등 따뜻하게 들어 누어서 주인에게 얻어맞지 않으면 그 날은 강아지에게, 돼지에게, 말에게 가장 행복한 날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것이 가축들이 경험하는 일생입니다. 인간은 다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정말 여러분들에게 주님이 밀어 넣으신 섬김이 있습니까? 주님이 여러분들을 만나주시고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그 사랑의 강권하심 때문에 밀어 넣어진 바 되어서 떠맡을 수밖에 없는 그 어떤 섬김이 여러분들에게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없을 리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의 분량을 따라서 하나님이 이렇게 섬김을 맡겨주셨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없다면 여러 번 그 섬김을 거절한 불순종의 흔적들이 있을 것입니다. 반드시 그런 섬김에로 하나님이 은혜 받은 여러분들을 밀어 넣으셨고 여러분들에게는 그 섬김이 있습니다.
집사가 부담스러우십니까? 권사가, 장로가, 교역자라는 이름이 부담스러우십니까? 구역장 이라는 직분, 영혼을 돌보고 그 영혼들이 바로 서지 않으면 가책을 느끼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자니 자신의 영이 살아 있지 못하고, 기도 안하고 그 영혼 앞에 서자니 너무 가책이 느껴지는 그런 부담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그래도 그 부담이 있는 동안에는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그렇게 섬김에로 하나님이 밀어 넣으신 사람들은 모두 행복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종 되라고 섬김 속으로 밀어 넣었는데 어떻게 행복하겠으며 섬기라고 밀어 넣으셨는데 어떻게 기분 좋을 수가 있습니까? 허리를 굽히고 섬기고 내 영혼도 추스르기 힘든데 지체들을 영혼들을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하고 그 영혼들 하나 하나 세우기 위해서 눈물로 애쓰고 힘쓰는 그 삶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 삶입니까?
저는 이 다음에 목회자가 되어서 뭘 해야 되는지를 저는 사실 25-6살 때 다 배웠습니다. 거의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주일학교 교사를 할 때인데 총각 때였습니다. 그런데 주일날 예배를 드리면 우리 교회처럼 여건이 좋아서 어디서 쉴 수도 있고 밥도 먹고 그럴 여건이 안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예배를 마치고 그리고 점심은 성가대니까 조금 한 숟가락 주면 먹고 그리고 주일학교 오후 예배 시작할 때까지 부지런히 집으로 돌아와서 한시간 반 두 시간 쉬었다가 다시 성경 찬송 들고 설교하러 주일 학교 오후 예배에 가곤 했습니다.
그때 교사를 하는데 점심이고 뭐고 간에 하여튼 집에 걸어오는 동안에 그렇게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습니다. 왜냐하면 왜 아이들을 보내주셨는데 저 아이들이 그렇게 변화되지 않을까? 그리고 도대체 그 아이들이 정말 변화되고 뭐 더 깊은 것이야 모르지만 예수님 사랑 알고 십자가 앞에서 좀 깊이 은혜 받고 이랬으면 좋겠는데 아무리 가르쳐도 효과가 없고 그리고 또 명색이 전도사가 아니고 집사가 인도한다고 교사라고 하는 사람들은 말도 안 듣고 많이 마음이 갈기갈기 나뉩니다. 돌아오면서 하여튼 참 너무나 마음이 아파하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지금 똑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인 것을 그때 다 배웠습니다. 그런데 섬김 속으로 하나님께서 밀어 넣으신 사람들에게는 그런 무거운 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마음에 이런 생각이 교차합니다. 무엇인가 하면 내가 이렇게도 잘 감당도 못하는데 이렇게 신통치 않게 여기에 서서 영혼을 섬기기보다는 차라리 깨끗이 물러나는 것이 양심적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물러나는 것보다 더 양심적인 것은 자기가 변화되어서 충만한 사람이 되어서 잘 감당하는 게 더 양심적이지, 뒤로 물러나서 그러면 이제 영혼들을 돌볼 때도 그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는데 이제 그만 두고 뒤로 물러나서 구역장도 그만두고 영혼을 섬기는 직분도 그만두고 각자 자기 맡겨진 섬김의 자리에서 뒤로 발을 빼고 물러나 버렸는데 그것을 위해서 열렬히 기도한다면 그건 거짓말입니다. 그럴 사람 같았으면 뒤로 물러나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 교사가 모자라고 구역장이 모자라서 여러분들에게 사정하는 것 아닙니다. 교회 끝 날까지 여러분들에게 그런 것 가지고 사정하는 날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만 두시고 싶으면 깨끗이 그만두십시오. 그렇지만 우리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이 밀어 넣으신 그 섬김의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복되고 감사한지 아십니까? 사실 뭐 요즘이야 여기서 설교하러 오라, 저기서 설교하러 오라, 어떤 때는 귀찮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밤에도 또 설교하러 갑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가 아는 목사님 생각이 났습니다. 그 목사님은 아주 성격이 정갈하신 분이었습니다. 칼같이 깨끗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세월이 흐르고 누구에게 십 원 하나 빌리거나 이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아주 성품이 깨끗하고 진짜 선비같이 그렇게 꼿꼿한 분이셨는데 그분의 약간 후배 되는 목사님이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김 목사, 그 아무 아무개 목사님 은퇴하시더니 정말 이상해지셨어. 전화만 오면 겁이나. 왜요? 강직하고 깨끗하신 분인데, 아니 그게 아니라. 황당해. 다짜고짜 전화해서 야, 나 아무개 목사인데 설교 한번 시켜 줘. 내가 돈 안 받아서 가겠으니 나 좀 설교 좀 시켜 줘. 일주일에 한번씩 전화가 온다는 것입니다. 일년에 1-2 두 번은 시켜줄 수 있지만 별로 잘하는 설교도 아닌데 어떻게 매주 그 부탁을 들어주겠는지,
그런데 무엇입니까? 세월이 다 지나고 아무도 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고 그리고 어떻게든 주님을 섬기고 싶은데 자기를 부르는 사람이 없을 때 그나마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독자적인 은혜의 세계라도 많으면 그 안에서 글을 쓴다든지 이렇게 자기 사역을 해나갈텐데 그러니까 거기서 밀려오는 견딜 수 없는 공허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때 제가 무릎을 치면서 깊이 느낀 게 무엇인가 하면 아! 그렇구나. 정말 그렇구나. 정말 꽃이 활짝 펴면 열흘 이상 가는 꽃이 별로 없듯이 주님이 필요해서 우리를 쓰시는 것도 한때이구나.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집중적으로 쓰고 싶어하실 때, 그때에 주님이 우리를 사용하시고자 할 때에 그래서 섬김의 자리로 우리를 밀어 넣으실 때에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성가대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가대가 없습니다만 이제 무슨 안수 식을 한다든지 노 회를 한다든지 하면 성가대를 합니다. 그러면 평일 날이니까 젊은 청년들이다 직장에 가고 없습니다. 그러면 성가대는 4-50대 연세가 드신 집사님 권사님들이 합니다. 그럼 벌써 목젖에서 떨려나오는 소리가 다릅니다. 같은 찬송가인데도 20대 창창한 사람들이 모여서 찬송할 때는 찬송가가 정말 쨍쨍하게 울립니다. 그런데 전부다 이렇게 타령조로 늘어집니다. 그거 어떻게 합니까. 세월이 지나면 누구든지 다 노쇠해가고 목소리도 변하고 모든 것이 변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이 쓰시고자 할 때, 그때에 우리를 섬김의 자리로 밀어 넣으셨을 때 우리의 인생에 기회가 많을 때, 그때 하나님도 우리를 쓰시고 싶어하십니다.
그러니까 죄 조차 죄인을 버렸을 때는 하나님 앞에서도 별로 쓸 때가 없는 때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가실 것입니다. 죄를 짓고 싶은데 능력이 없을 정도로 사람이 다 망가지거나 노쇠해버리거나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문제를 교인들이 일으킨다는 것도 큰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그게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전혀 없는 교회보다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오죽했으면 문제를 일으킬 기력도 없겠는가 그것입니다. 주님을 뜨겁게 섬기든지 뭐가 모자라서 말씀에 일어나든지 둘 중에 하나가 되어야지 교회가 소망이 있는 것이지 너무 기력이 없어서 주님을 섬길 수도 없고 문제를 일으킬 수도 없을 정도로 교회가 되면 그게 송장 예치실이지 그게 어디 교회인가 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아직 젊고 돈도 있고 그리고 생각도 선명하고 이럴 때에는 죄도 여러분들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돈이 떨어지고 젊음도 다 사라지고 이제 침해가 걸려서 기억마저 사라지면 죄도 여러분들이 별로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왓슨이라고 하는 청교도는 죄도 인간을 버릴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왕성한 유혹들이 있을 때 하나님도 동시에 우리들을 부르십니다.
이상하잖아요. 왜 하나님이 사도 바울을 모세처럼 한 80이나 120된 다음에 부르시지 왜 젊은 날에 부르셨을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젊은 날에 부르셔서 주님 만나게 하셔서 큰일을 주신 다음에 섬김 속으로 밀어 넣으시려고 젊은 나이에 부르셨습니다. 모세도 주님의 사명을 잘 감당했지만 가나안을 정복하는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시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 주셔서 섬길 수 있는 자리에 우리를 세워주셨다는 그 자체가 우리에게 부담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감사의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작년에 제가 이맘때쯤 새롭게 밝아오는 한해를 바라보면서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발 다가오는 올 한해는 좀 아멘으로 삽시다. 오죽했으면 제가 직장 다닐 때 천주교 다녔던 형제의 예를 들면서 그렇게 신앙이 별로 인 형제가 신부님이 말씀하셨다는 이유 때문에 순종하면서 성당을 섬기는 것을 보면서 제가 감화를 받은 예화까지 들었습니다.
여러분, 좀 생각해보셔야 합니다. 주님이 밀어 넣으신 섬김의 자리가 있어서 그 사명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사실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그래요. 하나님 사랑 모르고 하나님 은혜를 모르고 또 그런 은혜를 받았어도 불충하게 사는 사람들은 세상 즐거움 속에서 안락하게 살도록 내버려두십니다. 언젠가는 그들이 사실은 자기가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주님을 위해서 충성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부러워할 날이 올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입니다. 여러분들이 말씀에 아무리 많이 은혜를 받아도 여러분들이 자신을 바쳐서 섬기는 섬김의 터전이 여러분들에게 없고 주님이 그 은혜를 통해 밀어 넣으신 사명의 자리가 무엇인지를 찾지 못하고 그렇게 여러분들을 필요로 하는 자리에 세워주신 것을 인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할 줄 모른다면 여러분들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그 말씀을 통해서 받는 그 많은 은혜도 여러분들을 결코 견고할 수도 없고 오래 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정말 하나님이 세우셔서 이 사명을 감당해나가게 하신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이 자기를 섬김에로 밀어 넣으시자 그 섬김이 자신의 생명처럼 부둥켜안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부족을 인해서 그 섬김이 망가지지 않도록 그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이 충분히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멸시와 모욕도 기꺼이 당했고 그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좀 이런 자세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나는 정말 여러분들이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교인들이 많이 있지만 그러나 여러분, 우리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은 교인들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은혜를 많이 받고 섬김의 자리로 밀어 넣으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사람들은 감사함으로 천방지축 날뛰고 다니는 그 철없는 교인들을 무릎을 꿇고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정말 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지만 교회의 좋은 환경이나 화장실 여러 가지 편의시설 이런 것을 보면서 자꾸 교회가 편해진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인데 그렇게 이해를 못하십니까? 절대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정말 천막이라도 치고 공터에 나가서 설교해도 난로불 하나 없이 두꺼운 코트를 걸쳐 입고 와서 말씀드릴 사람이 여기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이 교회 내버려두고 공터에 나가서 말뚝 박고 비닐 장판 깔고 천막 쳐도 거기에 따라와서 신앙생활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오히려 그렇게 은혜 받은 사람들은 사라지고 오히려 정말 짐승과 방불한 사람들이 와서 이 교회가 자기들을 위한 교회인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선교적인 구조를 가진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언젠가 한의원에 가니 무슨 탕이 많았습니다. 꼭 음식점하고 비슷합니다. 십전대보탕, 사물탕, 무슨 약탕 그런데 그 탕 중에서 총명 탕도 있습니다. 그것은 공부를 못하는 애들이 그것을 먹으면 머리가 총명해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물어봤습니다. 회심 탕은 없냐고, 먹으면 회심하고 싶은 그런 탕은 없냐고. 이렇게 머리도 집중이 안되고 하여튼 참 옛날 같지가 않습니다. 영어 단어도 두 번만 보면 거의 외웠었는데 이제는 일곱 번을 봐도 안 외워집니다. 그래서 좌절할 때도 있는데,
우리 교회 어느 지체가 아로마 삽을 합니다. 향기 삽 향기를 몇 개 갖다주었는데 사실 전에도 받았습니다. 어느 지체가 신혼여행 갔다가 오면서 사왔는데 이게 무엇인가 하며 여기다 이렇게 뿌리면 향기가 나는데 시커먼 통에 찍찍 뿌려 났는데 냄새가 나지 않아 병을 들어서 다 부어버렸습니다. 그런데도 냄새가 안 나서 뭐 이런 것을 사다주었나 하고 버렸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그게 아니고 촛불에다 이렇게 부어서 증발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식해서 뭘 알아야지, 그런데 진짜 갖다준 것을 한번 펴보니까 허브 향인데 진짜 책을 읽을 때 집중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이미 이 향은 불면증에 좋고 어깨 결릴 때 좋고 이건 뭐에 좋고 뭐에 좋고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집중하는 향은 없냐. 설교 시간에 졸지 않고 말씀들을 수 있는 향, 그 향기를 현관에서 맡으면 왠지 마음이 가난한 향은 없는가. 내가 그 한 통에 몇 만원이라도 하면 내가 사제를 털어서라도 내가 피어놓을 용의가 있습니다. 그런데 확실히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사명이 없으면 주님도 없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한 사람들은 주님을 연애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제가 결혼 주례를 서면서 빼놓지 않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연애와 결혼이 어떻게 다른가. 연애는 바닷가에서 둘이 어깨동무하고 자기야, 저 노을이 정말 아름답지? 아! 멋있다. 그리고 차 한잔 마시는 게 연애고, 결혼은 뭐 하니 빨리 바지 걷어라. 그리고 가서 쪽배 타고 죽으라고 손이 부르트도록 노를 저으면서 그 바다를 항해하는 게 결혼입니다. 하나님과 연애하는 사람들은 사명이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는 참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은 그런 낭만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정말 사랑한 사람들에게는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도저히 물러설 수 없는 자기의 자리가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일으킨 후에 신성 로마 국의 황제인 독일 칼 5세 황제에게 불려갔습니다. 보름스 의회에 섰습니다. 그리고 아주 심한 질타를 받았습니다. 종교 개혁 외치는 게 잘못됐다 그랬습니다. 고쳐라, 너 입장을 수정해라. 그때 마르틴 루터가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폐하, 그리고 그 다음날 다시 보름스 의회에 섰습니다. 거기서 그는 교회 역사 속에 길이 남을만한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God help me, Amen. I can not otherwise. Here I stand! God help me, Amen." (내가 여기 서 있습니다. 그러나 달리 어찌할 도리가 나도 없습니다. 오! 예수여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그리고는 자기의 모든 개혁적인 입장에서 자신의 생명도 물러설 수 없다고 단언했던 것입니다. 이게 살아있는 사람의 표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있다면 그 은혜가 우리를 섬김에로 밀어 넣었을 것입니다. 저는 정말 염려가 됩니다. 여러분, 이제 교회가 이만해졌는데도 벌써 그렇게 온상 속에서만 자라려고 하고 교회에 와서 섬김을 받으려고만 하고 모든 것들이 갖추어진 속에서만 살려고 하는 그런 것, 어제오늘 등록하고 교회에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말씀이 무엇이고 진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오락가락 하는 교인들이 그러면 애교로 봐줍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다 그랬으니까. 그런데 그래도 제법 하나님 만난 사람들이 그렇게 자신의 몸을 아끼고 섬기지 않는 것을 보면서 전 정말 걱정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이 여러분들을 만나주신 그 은혜가 얼마나 크고 여러분들의 영혼 안에 행하신 하나님의 그 기이한 일들이 얼마나 큰데 그런 것들을 하나님 앞에서 내가 네게 준 은혜로 무엇을 했느냐고 물으실 때 여러분,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자신의 생명을 걸고 이루어드려야 할 삶과 섬김의 초점이 없으니까 마음은 갈리고 나뉘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치 전쟁과 그리고 외적으로부터 침입이 없는 군인들이 부패하고 썩듯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정말 나는 오늘 여러분들이 사도 바울과 같은 마음이 저와 함께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하나님의 은혜는 좋았고 그 은혜가 밀어 넣은 섬김은 귀찮고 싫었는데 정말 하나님 앞에 마음이 바뀌어서 나를 이렇게 주님의 은혜로 섬김 가운데 밀어 넣으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나같이 쓸모 없는 사람을 주님이 능하게 하시고 충성 되이 여기시려고 나에게 이렇게 섬길 기회를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든지 죽든지 자신이 맡겨진 자리에서 사명을 잘 감당해나가서 주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복된 주의 자녀들이 다 되어서 하나님 앞에 시원하도록 충성스럽게 사는 복된 주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