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장 강의: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
사경회에 참석해서 은혜를 받으신 분들은 아마 이 새 공과를 놓고 막막한 느낌이 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을 저는 기대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있는 책의 원고가 설교 테잎을 녹취한 것이겠지 하시면 안됩니다. 이것은 전혀 그렇지가 않고 아마 설교 테잎을 귀에 꽂고 책을 보면 어어어어 이럴 것입니다. 그렇게 내용이 다릅니다. 왜 그렇게 달라 졌는가 하면 사실 이 사경회 준비할 때 제가 광림 수도원에 갔는데 제가 홀로 원고를 쓰고 사경회를 하는 적은 없지는 않지만 많지 않은데 그때는 그렇게 쓰고 싶은 마음을 주셨습니다. 우리 교역자 한 사람이 타이프를 잘 치는 사람이 있어서 숲 속에서 눈을 감고 불렀습니다. 3일만에 원고지 1000매 정도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것을 정리해서 가지고 있었고 거의 그것을 보지 않고 사경회를 했는데 그것을 묻어 두었다가 이번에 그러면 안되겠다 제대로 된 지식들을 넣어 주지 않으면 안되겠다 그렇게 생각을 해서 다시 이것을 꺼내서 제가 다시 또 원고를 썼습니다. 그래서 책으로 냈는데 좀 더 자료를 모으고 보충해서 보다 더 완결된 신학책으로 내기 위해서 내부 출판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테잎을 듣고 은혜 받은 것을 믿고 그것을 꼼꼼히 안 읽으면 공부하면서 어어어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테잎은 듣고 분위기만 잡고 은혜를 받은 다음에 그 가닥은 전체적으로 일치를 이루니까 그 다음에 책을 펴 놓고 꼼꼼하게 읽으면서 정리해 가라는 이야기 입니다. 사실은 이 사상 전체가 아우구스티누스가 가지고 있는 교회론에 대한 생각을 전부 다 라고 할 수는 없지만 상당부분의 그 골격을 반영했는데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느 책에서 이런 목차를 세워서 쓴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제 복음서 설교와 신국론 그리고 기타 그의 여러 저작속에 나타나 있는 것들을 전체적으로 종합해서 우리의 실정에 맞게끔 이렇게 나름대로 만들었는데 나름대로 독창성 있다 생각합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우리들이 하나하나 꼼꼼하게 생각해 보면 오늘 밤 세워도 못할 테니까 비행기를 타고 산맥을 도는 마음으로 전체적으로 윤곽을 보면 여러분들이 책을 읽거나 테잎을 듣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우선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했는데 제일 먼저 여러분들이 강의를 들으면서 책속에 들어 있는 조그만 책을 꺼내시면 좋을것 같습니다. 그것을 열어서 1장을 펴 보십시요. 저는 개인적으로 엄청난 도전이었고 한꺼풀이 열리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도 이 책을 들고 들어 오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하나님이 쓸모 없는 인간들에게 가르쳐 주신 그 진리의 세계가 이렇게 큰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선 여기서는 기본적으로 여러가지로 교회를 다룰 수 있겠지만 우선 하나님의 삼위의 교통의 모상으로서 교회를 보고 그리고 그 교회가 이 땅에서 어떤 모습이 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가 하는 것을 안으로 바깥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구체적인 어떤 교회의 활동 상황을 묘사하는 전략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교회가 내적으로 일치를 이루고 바깥으로 뻗어 나가는 그 모든 원동력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찿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가지고 삼위일체 그 다음에 교회 그 다음에 그 교회의 내부적인 일치 그 다음에 교회가 바깥으로 확장되어 가는 선교 이런것들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신학의 맥락에서 이 문제를 보도록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시작 자체를 삼위일체 하나님에서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이제 본격적으로 삼위일체를 다루려고 하기 보다는 사랑을 이야기 하다 보니까 그 사랑의 본질이 무엇이고 기원이 어디로부터인가 라고 하는 문제를 거론하면서 그것을 삼위에서 찿는 것입니다. 그 삼위 안에 있는 사랑을 세가지로 보았는데 사랑의 근거, 방식, 목적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근거는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인데 이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은 두가지로 이루어 지는데 개별적 위의 완전하심입니다. 헤버 바빙크라는 신학자에 의하면 일단 하나님을 우리들이 한 하나님이다 라는 것을 놓고 시작하는 방식이 있고 일단 하나님은 세분으로 나뉘어 지지만 성부, 성자, 성령이 계시다 여기로 부터 시작하는 입장이 있는데 사실은 전자를 유지 하면서 후자 쪽으로 설명하는 방식이 가장 견실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삼신론으로 떨어 지든지 사신론으로 떨어 지든지 아니면 양택으로 떨어 지든지 복잡한 문제들이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일단 어떻게 보는가 하면 하나님의 존재 양식 자체가 하나님의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존재 하신다. 그런데 본질은 한 본질이시다. 그래서 성부도 성자도 성령도 본질에 있어서는 일체를 이루시지만 삼위로 존재하신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해서 성부, 성자, 성령이 계신데 이런 하나님이 서로 교통하시는 이 본질 자체를 사랑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무엇인가 하면 성부도 완전하시고 성령도 성자도 완전하시고 또 성부와 성자 거기에서 성령은 성령이 아닌 또 다른 어떤것이 될 가능성이 없이 가장 완전한 하모니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성부, 성자 사이의 교통의 본질을 사랑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랑이 에드워드 같은 사람은 생명이라고 보기도 하는데 사랑과 생명은 제가 보기에 똑같은 것을 어느 쪽에서 보느냐와 관련이 된다고 생각 됩니다. 더 설명 하자면 복잡하지만 그래서 이러한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여기서는 이야기가 빠지는데 사실은 이것이 두개의 유비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가지고 이것은 영원에 속하는 것입니다. 여기는 무공해 입니다. 시간도 없고 그 다음에 공간도 없는 상태 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께서 여기서 공간이라는 문제가 나오는데 결국은 인간의 감각을 통해서 사고로 육체를 볼 수 있기 위해서는 결국은 부피와 크기와 넓이와 색깔 이런것들을 가져야 합니다. 어려운 말로 대상일반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배치 해 보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공간이 필요 없고 그것이 영원이지만 그러한 사물들을 눈에 보이는 감각적인 사물을 배치하기 위해서는 공간이라고 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리고 공간속에 들어 와 있는 것은 모두 시간속에 속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생겨난 모든 것들은 결국은 감각적인 것들은 없어지게 되니까 다 달아서 없어지게 마련이니까 그래서 이런것들을 팔아서 하나님이 처음 만드신 것이 무엇인가 하면 창조세계 입니다. 그러면 이 창조세계가 있는데 창조세계도 삼위의 모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옛날에 설명 했지만 여기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수 많은 피조물들이 있는데 피조물들이 전부 서로 연결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상호교통이라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전부 다 이런 연결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연결의 관계가 사실은 사랑의 관계일 수도 있고 물리적인 관계일 수 있는데 사랑이라기 보다는 이 모든 피조물들은 사랑의 이런 관계를 본 딴 이런 의존적인 관계로서 서로의 존재로서 서로에게 기대는 의존성을 가진 관계를 제시 하는데 이런 관계들의 차원이 모두 획일적으로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과의 연합은 다시 이런 인간을 제외한 모든 영원이 없는 피조물들이 이루는 일치와 구성과는 또 다른 차원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지난번 리카피탈라치오의 교리에서 설명하면서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을때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고 하는 것은 부부 사이에만 그런 고백을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모든 인간들을 여기에서 부부사이의 사랑도 이야기 하지만 그러나 더 넓게 보면 모든 인간들이 이러한 사랑의 고백을 이루는 가운데 하나의 일체를 이루도록 이렇게 하나의 바디 몸으로서 이 세계의 일류들을 창조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들이 결국은 사랑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모상이 이렇게 들어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좀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들어 오게 되고 그리고 여기는 이런것들이 좀더 간접적인 방식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러한 것들 무생물 그 다음에 식물, 동물 이런것들은 점점 뚜렸해지다가 인간에게 와서는 아주 찬란하게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을 가진 인간에게 있어서는... 그래서 이러한 사랑의 경험이 우리를 영혼으로 데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비극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인간이 사랑하는 모든 것들은 순간에 사랑하는 것들을 좋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순간에 사라지는 그것이 순간에 사라지기 때문에 자기를 끄는데도 그것을 영원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인간은 계속 허상을 쫒으면서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공간은 우리에게 사랑할 대상을 제시하지만 시간은 우리에게서 그것을 빼앗아가 버립니다. 그래서 결국은 공간속에 있는 이것들을 이 자체를 사랑하게 되면 아주 쉽게 이야기 하면 하나님과 관계속에서 이것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지식 없이 이것이 최종적인 목적인것처럼 살아가게 되면 그 인간은 불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곁가지로 나갔지만 이러한 사물들이나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사람들이 속지 않고 알게 되는 비결이 무엇이냐 이것이 진리입니다. 진리의 빛이 이 사물에 비치고 관계에 비치게 될 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고 어느 만큼이 우리가 유한하게 사랑해야 하고 어느 만큼이 영원히 사랑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인가 하는 차이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이렇게 보여 졌는데 이것들이 죄로 말미암아 다 망가지고 깨뜨려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예전으로 돌아가서 타락이전으로 돌아가서 본다면 인간을 참다게 사랑하면 결국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도 중요한 설교를 했습니다. 참된 휴머니즘으로 돌아 가려면 하나님 중심주의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중심주의로 참된 하나님 중심주의로 돌아 갈때 인간은 손해 보는 것 같고 자기가 희생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께 돌아 가게 될 때 참된 인간의 인간됨은 활짝 피어나게 되어서 인간이 가장 행복한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공간의 관점에서 보면 이 사랑이 복 입니다. 더이상 행복할 수 없는 지복의 상태 입니다. 그러니까 이 하나님과 관련을 맺는 것 만큼 인간은 올바르게 행복해 지게 되는데 타락한 다음부터 인간이 그런 방법으로 이 참된 복을 찿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방법으로 하나님을 찿고 하려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정도만 하겠습니다. 그 다음에 이렇게 되면 그래서 결국 하나님이 이 창조의 세계속에서 결국은 교회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국은 이런 인간들이 예전에는 인간을 참답게 사랑하면 하나님이 알게 되고 하나님에 관해 올바른 지식을 가지면 인간을 사랑하게 되는데 이제는 인간을 참답게 사랑할수록 참답게 라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됩니다. 왜냐하면 진리 자체를 배격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인간을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하는 자체가 방향성 자체가 자기 만족을 위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사랑하게 되니까 오히려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될 수록 참된 사랑의 원형인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는 멀어지고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방해 한다고 느껴지게 만드는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효과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재물에 대한 사랑 그 다음에 가족에 대한 사랑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원래는 그런것이 아니라 원래는 사랑할수록 하나님의 나라와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 오게 되면서 그런것들이 불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때문에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셔서 이렇게 망가지고 타락한 인간들을 여기에서부터 중심부에서부터 이것들을 고쳐 나가는 과정입니다. 이카프트엘라추 교리를 말하면서 이미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망가진 교회들을 고치시는 방법인데 그래서 제가 설명하기를 이렇게 하나님께서 하나의 모형으로 세계를 창조하시려고 인류 사회를 구성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사람의 아들로 오시는 것은 필연이었다 그래서 그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제 다시 약이 되어서 몸 전체를 고쳐 가시는 과정이다 그 과정속에 있는 것이 바로 교회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면 이 교회는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이렇게 해서 세상을 창조 할 때 성부에 의해서 성자를 통해서 그 다음에 성령안에서 이렇게 세계가 창조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똑같이 이렇게 죄로 말미암아 망가진 세계를 고치기 위해서 교회를 선택하실때 똑같이 이 교회를 삼위 하나님과 관계를 갖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성자, 성령, 성부라면 똑같이 성부에 의해서 성령안에서 성자를 통해서 세상을 창조하신것처럼 이번에는 교회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천상과 관계를 맺고 있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들은 두가지 사실을 건져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 교회가 내부를 들여다 보게 되고 그 다음에 또 하나는 이 교회가 바깥으로 확장되어 나가는 확장을 보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이 교회 안에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이런 지역교회지만 모든 보편적인 교회의 머리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머리라고 할때는 열린교회의 머리라는 그런 뜻이 아니라 보편적인 교회 전체의 머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교회는 망할 수 있습니다. 개교회는 망할수도 있고 문을 닫을 수도 있고 파괴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편 교회는 부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이렇게 인간들이 있습니다. 죄인들이었던 사람 옛날에 오네시모였던 사람 요즘 오네시모인 사람 다 이렇게 모여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서 교회를 어떻게 이루어 가야지만 이것이 하나님이 이러한 타락한 인간들 속에서 교회를 세우신 그 본래의 소기의 목적에 이바지 할 수 있는가 이미 이 속에서 여기에 교회가 있고 그 다음에 개인의 신자가 있습니다. 그러면 무슨 뜻인가 하면 신자가 하나님 앞에 참된 신자가 되는 것과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참된 교회가 되는 것은 불가분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이 사람이 참된 신자가 되면 교회가 참된 교회가 되는데 자기가 원하지 않아도 이바지를 하는 것이고 그리고 만약에 이 사람이 그렇지 못하면 자기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교회가 참된 교회가 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속에서 사람들이 있는데 이 사람들이 전부 다 다른 사람들 입니다. 이별적인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별적인 사람들이 이 안에서 이루는 일치의 내용이 무엇이고 그 다음에 이 속에서 이루는 교제의 내용이 무엇이고 그 다음에 이 속에서 결국은 그리스도 예수께 통치를 받는 그 통치의 본질이 무엇이고 그 다음에 이 사람들이 뻗어 나가서 선교적인 공동체로 사는데 이런 선교의 본질이 무엇인가 라는 것을 볼 때 가장 핵심부에는 오직 하나가 있는데 그것이 뭐냐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에 의해서 다른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일치를 이루고 그 다음에 교제는 이 사랑 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하면 교회안에 사람들이 있는데 설명을 하면 이해가 아마 빠르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있는데 서로 관계를 맺습니다. 그런데 천상에서 완전히 성화된 다음에는 티끌만한 악의나 죄도 없으니까 죄를 지을 수 없는 사람들이 될 테니까 그러면 이 속에서 완전한 사랑의 연합을 이루면서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공동체의 교제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일들이 누구도 저항하지 않음으로 이것들이 이렇게 교제를 이루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사람들 속에서 이렇게 계속해서 흘러서 이들을 풍부하게 하고 이렇게 사랑이 풍부하게 될때 관계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랑이 넘치게 될 때 그 때 이 사랑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실때 당신 자신안에 있는 존재의 특성이 당신 이외의 피조물들과 관계를 맺으시기를 원하기 때문에 이런 창조의 세계가 이루어진 것처럼 한 성도의 마음에 사랑이 가득차면 이것이 폐쇄적이 되지 않고 계속해서 관계를 맺을 사람들을 찿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가 떨어지고 사랑이 병들기 시작하면 안으로 안으로 오그러 들어서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도 싫고 그 다음에 저 사람이 내 구역장인것도 싫고 목자인것도 싫고 심방 오는 것도 싫고 전화하는 것도 싫고 기도해 주는 것도 싫고 그래서 안으로 안으로 오그러 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반대의 상황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여기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이 사람도 또 다른 사람과 넘치는 사랑과 은혜 때문에 관계를 맺게 되지 않습니까? 결국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 자체가 점점 퍼저 나가게 되는 형태를 그려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영적인 의미에서 선교라는 것입니다. 선교가 사랑의 확장이라고 보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 몸집만 커지고 사람들의 생각이 다른데 있어도 교회에 집어 넣어서 모아 놓으면 그것은 진정한 영적인 교회의 모습은 아닙니다. 그것은 세속적인 단체의 모습이지 영적인 모습은 아닙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는가 하면 이런 것입니다. 교회는 커서 나쁘거나 작아서 좋은 것이 아니라 큰 교회든지 작은 교회든지 간에 얼마나 이런 진리와 사랑이 뭉쳐져서 그래서 성도들 간에 아름다운 연합으로 주님을 위해 충분히 봉사 할 수 있느냐 거기에 재빠르고 훌륭한 사람들이 되느냐 하는 그것이 그런 큰 그리스도의 몸이 되느냐 그것이 하나의 관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다고 건강한 것도 아니고 크다고 병든것도 아니고 그것은 별개 입니다. 우리도 40킬로 나가는 사람이 항상 건강 합니까? 골골 할수도 있고 옛날에 무하마드 알리는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았다고 하는데 15라운드 내내 나비처럼 뛰어 다니지 않습니까? 그 사람은 130킬로 였습니다. 그 사람을 보고 누가 비만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까? 한번 휘두르면 몇톤의 주먹이 나가는데... 그러니까 이런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다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여기에서 우리들이 이것을 가르킬때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가 하면 여기서는 지금 교회의 입지, 교제, 선교, 통치 모든것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랑을 그럼 우리들이 현실적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랑의 기원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교회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 성도들이 이렇게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사람들을 계속 이렇게 확장하면서 아름답게 이 사랑이 물 흐르듯이 유통되고 이것이 생명력을 얻어서 바깥으로 계속 관계를 맺으면서 뻗어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문제는 이러한 사람들이 두가지 요인 이기심과 그 다음에 영혼에 대한 무관심 이런것들로 인해서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목마름이나 그리움이 없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이런 사랑이 흘러 들어 올때 이것들이 이렇게 흘러 나가는 대신 여기에서 막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자원, 영적인 자원이든지 아니면 육적인 자원이든지 간에 이런 자원들이 이런 사랑이 있을 때는 자체가 계속해서 확대 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 들어 가지만 이런 사랑이 사라지고 나면 인간은 각자 자기 자신을 이 모든 자원을 사용하는 최종적인 사용처가 되도록 만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만족적 신앙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중요한 요소가 나오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아가페와 까리따스의 문제 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아가페의 사랑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고유한 사랑이라고 한다면 까리따스의 사랑은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반응으로서의 사랑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가페의 사랑이 하나님의 고유한 사랑이라면 까리따스의 사랑은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화를 입은 사람의 반응으로서의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하나님과 관련이 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랑하게 만들어 주는데 여기에 인간도 포함됩니다. 그랬을때 어떤 학자들은 이 까리따스를 아가페의 사랑이 하나님의 고유한 신애이고 에로스가 여기에서 에로스라고 하는 것은 우리는 에로영화라고 하는데 원래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인간들 사이에 신과는 관계가 없이 인간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사랑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에로스의 사랑이 인애라고 한다면 까리따스의 사랑은 이 두 지평의 통합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도 까리따스안에 들어 있고 그 다음에 그 사랑이 인간들에게 적용이 되어서 사람을 향한 사랑도 들어 있는데 이 두개가 합쳐진 것이라기 보다는 지평의 통합을 이루면서 이 까리따스의 사랑안에서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을 안 사람이 구체적으로 인간들에게 적용점을 가지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 가는 그런 삶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까리따스 입니다. 이 까리따스는 결국 은혜의 산물 입니다. 은혜가 결국은 이 까리따스를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고 그 다음에 은혜를 받으면 이 까리따스의 사랑을 가져 오는 것입니다. 이 까리따스의 사랑은 자기를 자원을 소비하는 최종적인 목적지로 삼지 않고 이것들을 계속해서 흘려 보내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무슨 문제가 나오는가 하면 이 사람들이 이렇게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아름다운 신앙의 상태가 항구적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 변하는 것입니다. 이기심과 영혼에 대한 무관심 때문에 은혜에서 식어지고 진리의 빛에서 멀어짐으로 말미암아 자꾸 사람들이 여기에서 이렇게 완전한 일치를 이루면서 계속해서 뻗어 나가는 이런 아름다운 계획에 항구적으로 참여 하는 것이 아니라 변질한다는 것입니다. 변질하게 될때 여기에서 무엇이 나오는가 하면 헬핑, 도움이 필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도움은 둘로 나뉘어 지는데 쉐어링, 나누어 주는 것과 용서해 주는것 이것이 이제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전체를 우리 몸이라고 할때 이런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은 몸에 질병이 들어 오는 것입니다. 그럼 한번 우리들이 생각해 보십시요. 손가락을 다 사용하다가 칼에 베이든지 못에 찔려서 피가 나고 힘들게 되면 붕대로 감는데 그러면 그때에는 이것이 병들었기 때문에 더 천대를 받는것이 아니라 아주 귀하게 여김을 받아서 여러분들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물도 묻히지 말라 하고 같이 설걷이를 해야 하는데 너는 물도 묻히지 말라 하고 보호해 주고 이것은 손톱도 안 깍아 주는데 설걷이만 끝나면 다 벗겨 가지고 소독해 주고 감고 이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몸에 망가진 부분에 대한 태도 입니다. 그래서 하다하다 안되면 다른 사람의 콩팥이라도 가져다 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우리 몸에 대한 태도 입니다. 그런 몸에 대한 태도를 교회의 몸에 대해서 가져야 합니다. 장애인 문제도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장애인에 대하여 가장 극단적인 정책을 폈던 사람들이 독일 사람들입니다. 독일 사람들은 어떻게 보는가 하면 장애가 있거나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게르만족에서 계속 속아 내는 것입니다. 아예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씨를 말려 버리는 것입니다. 그 씨가 퍼지지 못하도록 그럼으로서 민족의 우수성이 보존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청나게 많은 장애인들을 살해해 버립니다. 그 다음에 족보가 계속 죄를 짓는 족보가 있는 사람들을 다 갖다 재판 없이 다 정리해서 쓰레기처럼 처단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은 전혀 비슷하지 않습니다. 역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인류 전체의 측면에서 본다고 하면 사회의 그런 병들고 완전히 망가진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는 계속해서 범법행위를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들을 벌주고 심지어는 사형도 시키고 아니면 감옥에 가두고 징역도 살리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 사회가 가지고 있는 것은 이것들이 쓸데 없는 인간들이다 하는 그것들을 짤라 버리기 위한 방식들로 이것들을 접근하면 안되고 이 전체가 하나의 몸이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접근해야 합니다. 그것을 제일 잘 하고 있는 나라중에 하나가 캐나다 같은 나라입니다. 그래서 장애가 생기면 지체 없이 캐나다로 이민 오라고 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재미 있는가 하면 정상적인 사람들이 역차별을 받는다고 느낄 정도로 그렇게 시스템이 완벽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집에다가도 내 땅인데 그 앞에다 주차를 그릴때 장애인것을 하나 그려 놓아야 합니다. 내가 그 땅 주인인데 내가 거기에 차를 대도 딱지가 곧바로 날라 옵니다. 그러니까 그런데에서는 정신 자체가 내가 이야기 하는 것을 다 이해하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제 사랑의 눈으로 보고 인류 전체에 이것을 확대해서 자기가 몸에 병들었을 때 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인류 전체를 그렇게 돌보면서 그렇게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 자체를 이상하게 생각하면 안되고 나도 도저히 할 수 없어서 그런데 엘리베이터를 너무 설치하고 싶은데 장소도 안되고 너무 어렵습니다. 그래서 장애인들이 1층이고 2층이고 3층이고 다른 사람의 도움없이 오르내릴수 있도록 그렇게 시스템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교회를 볼때 그런식으로 되어야 됩니다. 지금은 솔직히 교회론이 엉터리 입니다. 정말 엉터리 입니다. 그러니까 저렇게 가르쳐서 저 사람들이 은혜를 받아도 저렇게 위하는 사람들이 될까 그럴 정도로 교회론이 짓밟히고 무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안되는 것입니다. 제가 그래서 이야기 했습니다. 나는 내 설교에 대한 매니아들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도 한때는 나도 잘 몰랐을 때는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누구의 설교에 매니아가 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이바지 하기 위해서는 이런 건전한 교회론에 터를 닦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설교에 상당히 영향을 끼쳤던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보면 그 이후에 그 사람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보면 교회론이 잘못 되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떠났다고 교회를 형성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미국 캐나다에서 그분이 보내 주는 설교 테잎을 듣고 성도들의 거실에서 모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있는 교회들은 자기가 들어 가기에 너무나 잘못되고 그런 교회들이다 라고 생각하고 자기들이 그런 식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목회자도 없이... 그런것들은 잘못 배운 것입니다. 물론 한 사람의 성도가 진리를 듣고 그 진리의 빛 아래서 영혼이 거듭나고 변화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고 부지런히 노력해서 아름다운 신자가 되어가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을 교회의 목양이나 그 다음에 진리, 설교 이런것들을 통해서 배우는 것은 더 없이 중요하고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떤식으로든지 그 자체가 좋다는 이유 때문에 이런 교회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시되거나 부숴지거나 그렇게 되는 것이어서는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 암는 것으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그런 말씀의 지식을 주셔도 사용하는 것은 사람입니다. 올바른 교회의 토대를 가지고 그렇게 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런속에서 이런것들이 주어지게 될때 어떤 사람이 변심해서 모든 자원들을 자기를 최종적인 사용처로 생각을 하고 더이상 흘려 보내려고 하지 않으려고 하고 이 사람이 부패하기 시작할때 교회 전체는 굉장히 많은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고통을 그러면 어떻게 다루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우리의 시리즈에 나온것이 하나님의 통치와 교회의 질서라든지 형제의 교정에 관한것, 성도의 공동생활이라든지 이런 시리즈들이 이런것들을 치유하는 방법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이런것들이 치리라는 것들도 방법이 될 수 있지만 궁극적인 해결은 아닙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가 이 사람을 이겨서 이 사람이 다시 자기가 싫어하고 멀어졌던 진리의 빛 가운데로 돌아와서 자기를 정직하게 보고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에 대한 해결책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끊임없는 참회를 통한 성도 각자의 깨어짐입니다.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마 그런생각 많이 했을 것입니다. 뭐라고 뭐라고 성도가 그래서 싸운다든지 아니면 목회자에게 대들고 이의를 제기하고 했는데 집에 가서 가만히 생각하고 말씀을 듣고 기도하다 보니까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아서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 와서 화해하고 용서를 빌고 그래본적 있을것 아닙니까? 그러면 이런 작용이 어느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다 일어나게 될때 마치 별이 깜빡거리는 것처럼 이 사람이 미끄러질만하면 저 사람이 참회해서 용서해주고 끌어 안고 참아주고 이 사람이 다시 불이 들어올만하면 옆 사람이 불이 꺼지면서 심통을 부려 그러면 이제 그 옆사람이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십자가를 질 만한 마음이 생겨서 또 용서하고 발을 닦여 그러다 보면 이 사람이 다시 회복을 하고 그러면서 별이 깜빡이는 것처럼 수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도 가능한 최대한 흔들리지 않고 주님의 일에 견고히 서는 사람들로 그런 견고함 자체가 성숙의 징표 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것 자체가 성숙의 징표 입니다. 그런 성숙한 사람으로 계속해서 자라가서 교회의 전체가 그런 건강함을 유지하게 될 때 그 때 하나님이 건강하게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또 못되먹은 사람을 계속해서 들여 보냅니다. 그래서 못되먹은 인간들이 들어 와서 여기에서 어떤 인간은 꺽어져서 좋은 인간이 되지만 붙어 달라 붙기는 붙었는데 계속해서 심통을 부리면서 말썽을 부리는데 이러한 인간은 이 세상에서 내 놓아 보아도 오네시모처럼 아무 쓸모도 없는 인간입니다. 그런 인간을 교회가 받아 주고 참아 주고 무가치 하고 아무 일에도 도움을 안 주지만 하나님은 이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이 사람을 끌어 안고 사랑하면서 그렇게 사랑과 오래참음으로 끌어 가는 것이 이 인간에게는 생명이 역사하게 하는 비결인데 정작 그렇게 하는 사람의 속은 죽음이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에서 사도바울이 생명은 너희 안에 역사하고 사망은 우리안에 역사함이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도 금년에 장로도 뽑고 하겠지만 여러분들도 가서 한가지만 아십시요. 구역장을 눈물로 하던 사람을 장로로 세우면 문제 없습니다. 그런데 노라리 비슷하게 그냥 교회에 오라가라 하고 우리 교회에 그런 사람 별로 없지만 밥이나 사주고 돈이나 쓰면서 사람들에게 인심이나 얻고 그런 사람을 세우면 안되는 것입니다. 성숙한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망이 자기 안에서 역사해 본 사람들은 영혼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고 그리고 자기가 죽어서 교회가 아름답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이 댓가로 주어지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면 결국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이 왜 주시느냐 하나님은 왜 그런 사랑을 주시고 우리가 그런 사랑을 갖도록 그런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느냐 그 목적은 하나입니다. 죽으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잘 죽으라고 하나님이 사랑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을 많이 받는다고 자랑하지 말고 잘 죽었노라고 자랑해야 합니다. 진짜 죽은 사람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진짜 죽는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랑은 이런 사랑으로 교회 전체가 이런 아름다운 사랑으로 교통을 하게 될 때 여기에서 아까 이야기 했듯이 놀라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 두사람만 묶어 놓으면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까부는 아이 둘을 갖다 놓았는데 이 아이들이 세시간 동안 둘이 마주 앉아서 얼굴만 보고 있으면 이 아이들이 굉장히 심각한 병에 든 것입니다. 생명이 넘치기 때문에... 어떤 학자가 그것을 해 보았습니다. 두세살 먹은 아이들이 까불고 돌아 다니지 않습니까? 그 행동을 어른이 똑같이 따라해 보십시요. 반도 못 따라 하고 녹초가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그런 생명이 아주 역사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똑같이 살아 있는 신앙을 가진 성도 둘을 묶어 놓으면 무슨 사고라도 계속 칩니다. 전도하러 간다든지 기도해서, 원격조정을 해서 누구를 변화시킨다든지 아니면 무엇을 하든지 생명의 역사가 일어 납니다. 가만히 있을 수가 있습니까? 이렇게 해서 계속 도는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는데 그럴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랑의 역사가 생명을 낳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계속 흘러 가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현실 교회에 있어서 은혜가 식어지고 부패한 인간이기 때문에 결국은 진리의 빛으로부터 스스로 멀어지는 일들은 언제나 있을 수 있는 일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것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사람들의 몫이다. 그래서 그 사람들을 향해 오래도록 참고 인내하고 하면서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 하면 결국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가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게 되는데 이것은 진리를 통해 주어 집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고 은헤를 받으면서 감당할 수 없는 이러한 환경들을 감당하면서 살아 가는데 하나님이 더 많이 은혜를 주신 사람에게 더 많은 십자가를 지어 주시고 죽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늘 깨닫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책 맨 뒤편에 보면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통의 모상이며 재창조를 통하여 회복될 세계의 종자 씨이고 성도간의 교제는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교통의 모상입니다. 사랑은 영적 성장의 최종적 열매이며 성도의 신앙은 공동체적 지평에서 펼쳐져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최고의 영성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최고의 영성입니다. 그래서 결국 목회를 하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 학문이 모자라서도 문제가 아니고 물론 그것도 문제가 될 때가 있지만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것도 문제가 아니고 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마지막에 무엇인가 하면 내안에 필요한 하나님의 사랑 그것이 있으면 모든 것을 이기면서 갈 수 있는데 그것이 없을 때는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상위의 사람이라는 것 하나 가지고 이런 모든 것들을 다 관통하면서 확장까지 이것을 끌고 나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