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 정말 목회자가 되려나?
저는 이 학교를 다녔고, 그리고 졸업을 하고는 신학생들을 가르쳤고, 그후에는 목회를 개척해서 교회를, 목회를 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계속되는 관심은 무엇인가 하면, 역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가는것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에 의해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당신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주체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반드시 사람을 사용하셔서 그 일을 해나가신다는 것입니다. 해마다 여러명의 교역자가 필요한데, 쓰겠다고 광고를 내면 원서는 많이 들어오는데 아무리 두번, 세번 생각해봐도 꼭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들이 너무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들이 저만 느끼는 현상이 아니라, 조국교회의 모든 교회가 공통적으로 느끼는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많은 것들이 이야기 될수 있겠지만, 저는 오늘 이시간 여러분들에게 두가지만 말씀드리고 가겠습니다. 우선 첫째는 부지런한 지적인 탐구의 생활과 기도생활에 대해서, 어떻게 보면 상반되어 보이는 두가지를 오늘 말씀드리고 가려고 합니다.
우선 첫째 중요한 것은 신학교를 다니는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소명을 느꼈기 떄문에 신학교에 들어왔다고 하는데 소명은 상황이 인도해서 신학교 오는 것은 소명이 아닙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기도를 해서 응답을 받고 지시를 해 주는 것도 소명이 아닙니다. 또, 다른 여러 가지 일들을 해보려다가 상황이 막혀서 이렇게 하는것 밖에 없기 떄문에 이 길로 들어서는 것도 소명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 시점에서 하나님 앞에 할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자신의 소명을 점검해 보고 만약에 소명이 아니라면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반응을 하면서 신학의 길을 그만두고 목회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8세기 위대한 영적인 각성과 부흥을 불러오는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었던 조지 위필드는 말하기를 “교회의 가장 커다란 어려움은 하나님을 향하여 진실로 돌이켜 서지 않는 사역자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 소명이라고 하는것은 무의식 세계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의식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성화적 사건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건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든 사람들에게 영혼에 대한 불쌍한 여김, 하나님에 대한 사랑,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길 원하는 소원, 이런것이 다 있다는 것입니다. 다 있는데 소명은 무엇인가 하면 그것이 너무 강해서, 질적으로 다르기 보다도, 질적으로는 같은데 정도에 있어 너무 커서,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지않고,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서 돕지않고, 복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지 않으면 마치 내 인생에 화가 있을 것 같은 그런 강력한 다급함,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당연히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동기가 되어야 되겠고 그러한 동기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소명의 핵심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소명은 다른사람들이 그 사람을 보면서 충분히 확인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하면 자신은 주관적으로 소명이 있다고 생각을 하고 다른 사람들이 볼떄에는 소명이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을 경우, 그럴 경우는 둘중에 하나인데, 하나는 처음부터 그사람이 복음사역을 위해 소명되지 않았거나 혹은 소명되었지만 소명 받은 사람으로서 합당한 삶에서 심히 빗겨나간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영적인 원리를 따라서 바르게 성화의 길을 걷지 못하므로 잘못된 삶의 모습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둘중에 하나를 정직하게 인정을 해서 지금이라도 이길이 소명의 길이 아니다라는 확신이 들게 되면 기도를 깊이 한 후에 빨리 새로운 길을 찿는것이 굉장히 좋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학대학도 아니고 신학대학원에 들어왔는데 어찌 그런일이 있을수 있겠냐 하고 여러분이 말씀 하실 수 있을지 모르지만 충분히 있을수 있는 일이고 제가 아는 사람들 중에는 목사가 되었는데도 이 문제를 가지고 괴로워하다가 결국은 사역을 그만두고 일반적인 직업으로 돌아간 분들도 있습니다. 그렇기떄문에 이것은 절대 경솔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에 그가 하나님이 부르시지 않았는데 자신의 사역을 그렇게 하게 되면 자신도 굉장히 불행해지게 되고, 교회에도 커다란 누를 끼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여러분들이 만약에 진정으로 소명되었다 라고 하면 자기자신이 소명받았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첫사랑의 경험을 더듬고 신학교에 올 수밖에 없던 상황에 움직였던 옛 추억을 더듬는 것보다는 교회에서 만나는 사람을 붙들고 “너 나 소명 받은것 같니?” 그렇게 물어보고 앙케이트 조사를 하는것이 훨씬 정확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그 문제를 진지하게 탐구하고 시간이 더 이상 가기전에 분명하게 결정을 하는것이 좋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문제를 더 말씀드릴수 있겠지만 이 정도에서 끝내겠습니다. 그런데 확실한것 하나는, 성경적으로 본다면 하나님이 부르시지 않는 사람들이 이 진리의 말씀을 들고 사역을 했을떄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온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반드시 그 마지막 마침은 파국 이었습니다. 그렇기떄문에 절대로 그렇게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마지막으로 딱 하나, 그렇다면 내가 소명을 받았다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통해 확인이 될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가지로 그 시금석을 이야기 할수 있겠지만 제가 읽은 자료중에 가장 저를 감동시킨 소명에 관한 부분은 크로메시대의 청교도였던 존 오웬입니다. 제가 신학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성학중에 한사람인데 저는 그분이 사도시대 이후로 하나님의 계시를 누림에 있어서, 거의 다섯 손가락안에 들 정도의 사람이었다 라고 생각됩니다. 그분이 자신의 전집 제4권에서 이야기 한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말씀 사역을 위해서, 특별히 목회를 위해서 부른 사람들의 결정적 표는 ‘The mystery of gospel’에 대한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의 비밀을 알고있는 지식이야말로 그사람을 말씀의 사역자가 되게 만드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라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비밀, 사도바울이 고린도서에서 이야기 하고있는 복음의 비밀, 질그릇과 같은 우리들에게 맡겨진 그 복음의 비밀이라고 하는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이야말로 정말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비밀입니다. 우리들이 복음이라고 할때 복음은, 넓은 의미에서의 복음은 좁은 의미에서의 복음과 그밖을 포괄하는 좀더 넓은 의미에서의 복음을 함께 싸잡아서 우리들이 복음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즉 복음 그 자체와 거기에서 파생된 복음 교리를 합쳐서 그것을 우리들이 흔히 복음이라고 말하고, 우리들이 복음 사역이라고 말할때에는 복음과 복음 교리를 아울러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이라고 하는것은 우리들이 말할 때 복음 그 자체는 그렇게 복잡하거나 방대한것이 아닙니다. 아주 간단하게 진술될수 있는 그러한 진리입니다. 그것이 초대교회의 퀘리그마가 되었습니다. 그런것이 복음이라면, 복음 자체라면, 그다음에는 복음의 교리들이 있습니다. 이 복음은 교리 자체의 진술인데, 사람들이 영적으로 거듭나지 못하면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를 못하니까 뭐가 오냐면 영적어두움(Spritual Darkness)이 옵니다. 영적인 어두움속에 있는데, 영적인 어두움 속에 있으니까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지성이나 세계관이나 이런것들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일단은 영적인 어두움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성령의 계시(Illumination)에 의해서, 오직 다른것으로는 안됩니다. 다른 어떤 학문으로도 안되고, 잔재주로도 안되고, 오직 성령에 비추시는 계시(Illumination)에 의해서만 이 어두움(Darkness)이 벗겨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교리 라는것은 복음을 모르면 영적어두움(Spritual Darkness)이 오는데, 이것은 무엇인가하면 지적인 눈멀음(Intellectual Blinded)이 옵니다. 그러니까 무엇이냐면 사역을 할때는 이것만을 가지고는 사역이 안됩니다. 이것만 가지고는 축하 전도 나가서 사람들에게 예수님 영접하게 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목회사역은 이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복음으로 승부하겠다 할때는 굉장한 지적 기반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반 지적이거나, 탈 지적인 경향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지적인 자산을 필요로 하는데 그것이 복음 교리에 대한 이해입니다. 이것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어마어마하게 방대한 책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말입니다. 그래서 이 두가지를 다 이해하고 있어야 되는데, 복음의 비밀이라고 하는것은 무엇인가 하면 이런 복음 자체에 대한 경험은 여러분이 다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이시다. 그리고 그분이 동정녀 몸에서 나셔서 우리의 죄를 구속하셨다. 하나도 과학으로 설명 할수 없지만 우리는 아멘하고 믿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여러분이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목회가 되는것은 아닙니다. 그런정도는 누구든지 다 알고 있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다음에는 무엇인가하면 그 복음에서 파생되는 많은 교리들을 통해서 조직신학의 체계들이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의 성화와 신자들이 모든 삶, 영적인 변화, 이 모든 구원 이후의 삶을 다룰수 있는 교리의 체계들이 여기에서 나오게 되는 것인데, 이 교리의 체계들이라는 것은 단순히 진술된 체계들이 아니라 이것들이 전부다 경험을 통해서 수립된 신학들이기 때문에 자기자신이 이것들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으니까 우리는 죄의 도구가 되지말고 의의 병기가 돼서 살아야 된다는 것까지 복음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죄가 신자들의 삶 속에 들어와서 신자들의 영혼에 생명을 고갈시키고 죄을 융성하게 만들어서 내 안에 분명히 본성상으로는 선을 행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고자하는 소원함이 강력히 있는데도 죄의 한법이 거슬러 올라와서 나를 계속 죄아래로 사로잡아가는 현상들을 경험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당신의 모든 죄를 위해 죽으셨다라는 간단한 복음 가지고는 그사람에게 도움이 될수 없습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되냐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2000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안에 계신데 우리가 어떻게 구속받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을 받은 우리인데도 여전히 죄의 법이 우리안에 있을수 있으며, 또 그 죄의 법이 어떻게해서 우리들이 효과적으로 제압을 할 수 있고 그 죄가 여전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우리들이 그 죄와는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면서 살게 되는가, 그 처절한 사도바울의 고백에 나오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도다’라고 하는 처절한 투쟁, 그런 속에서 어떻게 승리를 거두고,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것이 아니오, 그리스도께서 내가 사는 것이다’라고 하는 승리의 노래를 부를수 있는가 하는 것은 미스테리입니다. 청교도의 위대한 선학의 표현에 의하면 ‘The mystery of gospel’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부른 사람들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혼을 돕지 않을수 없다라는 내적인 처절한 요청, 그러니까 김세현 박사님이 자기의 'Origin of force gospel'에서 이야기 하는 Devine & Forcement(신적인 강제력)을 이렇게 썼습니다. 다메서 도장에서 만났던 그 체험이 사도바울의 소명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느끼는 신적인 강제력, 이런 것들의 출처가 어디에 있냐하면 ‘mystery of gospel’에 대한 이해(understanding)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말씀드리고 싶은것은 ‘mystery of gospel’은 어떻게 습득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평면적인 신학을 통해서는 습득되지 않습니다. 도움을 줄 수는 있습니다. 도움을 줄 수 있고, 그것들이 여러갈래의 신앙의 체험을 바로잡아 줄수 있습니다. 그러니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mystery of gospel’에 대한 이해를 자져다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어디에서 오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자신을 향해서 자신이 참된 신자가 되고자 하는 구도자적 추구에서 오는 것입니다. 한사람의 신자로서 하나님 앞에 온전해 지고자 하는 구도자적 추구 속에서 획득되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도자적 추구라 하는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면, 온전한 신자가 되고자 하는 구도자적 추구란 무엇인가 하면, 구원받고 난 다음에 목표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국 교회에 있는 어느 목사님이 신학적으로 그 말씀에 대해서 무게를 둘순 없지만 한국교회는 요한복음 3장 16절 떄문에 망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분의 이론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기 때문에 구원받고 하나님 자녀가 되었다는 것만 계속 가르쳤기 떄문에 그 다음에 사람들이 목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자꾸 망해가는것을 어떻게 일으켜 세워야 하는가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로 다시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우직하고 직설적으로 표현하기는 했지만 그 발언속에는 상당히 곱씹을 만한 내용이 깃들여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제까지 예수의 복음을 전하면서 항상 무엇을 전했냐하면 즉각적인 구원을 굉장히 강조했습니다. 믿으면 천당을 가지만 안 믿으면 지옥을 간다. 그래서 전도의 동기 자체를 “당신 가족이 지옥으로 가는것을 보고만 있을테냐” 이렇게 그 사람이 살아가는 삶을 건너뛰어서 피한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니 무슨 문제가 나오냐하면 여기에 대해 많이 알아야 될 필요성이 적어 지는 것입니다. 방향이 그렇게 되니까... 간단한 복음을 가지고 승부를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번지냐 하면 이것을 가지고 승부를 하면 되는데, 실제로 성경적으로 본다면 구원받은 이후에 신자들이 살아야 할 삶이라고 하는것은 요청 받고 있는 소명이라고 하는것은 또다른 구원입니다. 성화의 구원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화의 구원에서 그 구원을 이루어 가는 자기성숙이 없으면 이례적으로 받은 직각적인 구원 그 자체에 대해서 사람들이 전혀 기쁨을 느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좋은 예가 다윗이 범죄하였을때 경험한것이 그것입니다. 구원의 기쁨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옵소서, 죄가 들어와서 거룩한 삶이 파괴되고 나니까 구원받은 기쁨 자체가 송두리쨰 날라가는것을 경험했고, 그가 기도했지만 항상 자기앞에 자기의 죄가 있는것을 경험했고, 심지어는 주님께서 부어주신 성령을 하나님이 거두어 가실 것 같은 위기를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이 현세적인것과 피한적인 것이 역사성과 초월성이 조화를 이루어야지 어느 한쪽으로만 가는것은 복음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어떻게 보면 구원 받은 사람들을 위해서 쓰여진 책입니다. 성경의 요청을 보면 구원 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절대적인 명제가 있는데 그것이 거룩(Holiness)입니다. 이 거룩은 세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는데 하나는 본체적 거룩이고, 둘째는 율법적 거룩이고 세 번째는 복음적 거룩입니다. 본체적 거룩이라고 하는것은 하나님의 속성과 관계된 것이고, 초월성과 도덕적 완성성으로 구성 됩니다. 율법적 완전성은 여러분들이 흔히 잘 설명이 되는 카도시이 가지고 설명이 되는데 분리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적 거룩은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 옷입혀지는 거룩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화라고 하는것은 율법과 복음을 통해서, 율법을 통해서 기준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서 입혀진 거룩을 가지고 율법을 토대로 해서 본체적 거룩을 우리들이 똑같이 흉내 낼수 없지만, 그 성품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거룩입니다. 우리들이 추구해야할 거룩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화를 통해서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화 그 자체가 인간 속에 있는 부패한 죄의 본성들을 계속해서 순결하게 하시는 성령의 작용입니다. 죄를 지어서 죄책은 해결이 됐지만 부패성(Corruption) 문제는 해결이 안됐습니다. 그러니까 죄책(guilt)의 문제는 칭의에 의해서 해결이 되었고, 부패성(Corruption)의 문제는 성화에 의해서 해결해 가시는 가운데 우리들의 형상이 계속해서 새로워져서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이 거룩의 과정입니다. 그리고 성도는 그렇게함으로서 행복을 느낄수 있고, 그렇게 살아감으로서 존재가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잘 보여줄수 있고, 안팎으로 순결해져서 그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 자신의 삶의 좌표를 맞추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 라고 생각하는 것은 복음적 사고방식이 아닙니다. 똥을 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수 있고, 거룩한 설교단에서 설교를 해도 하나님이 욕을 받을수가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 일이라고 하는 미션의 출처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며 살 수있는 사람, 이것이 바로 신학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포괄적 사고방식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러니까 제가 안심하고 신학교에서 9년동안 학생들을 신학교에서 내보내려고 애썼던 이유가 그것입니다. 정말 저는 사명감을 가지고 그 일을 해왔고, 200여명 이상 제 권유를 받고 학교를 나갔습니다. 그렇게 나가는데 기여한 책이 ‘자네 정말 그길을 가려나’ 라는 책 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중에 상당수의 학생들이 잘 살고 있습니다. 자동차 세일즈맨도 하고, 가게도 하고, 직장도 다니고 합니다. 성실하게 생활합니다. 보십시오. 우리들이 그런점에 있어 강박 관념을 느끼고 있으면 안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두 번째로 이야기 하고 싶은것은 복음교리들을 이해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교리를 잘 이해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몇가지가 필요합니다. 우선 첫째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성령의 감화속에서 학문을 해야지만 이 복음교리에 대한 이해가 깊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복음교리 자체가 직접 체계를 갖추고 있지만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직접 체계라는 자체가 학문의 형식을 빌었지만, 이 학문 속에서 신학이라는 학문속에서 다루고 있는 컨텐츠 자체는 영적(Spritual)이라는 것입니다. 순수한 학문적인 탐구만을 가지고는 안됩니다. 그래서 칼빈이 기독교 강요 시작 하자마자 신지식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은 호기심이나 지적 교만을 위한 동기로 알려질 수 없는 분이다 라는 것이며, 그렇게 탐구되어서는 안되고 그렇게해서 탐구 될 수도 있는 분도 아니다 라고 못박은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참되게 경배하고 그분을 섬기기 위한 동기에서 추구하는 학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래야만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학문적 진전이 있을수 없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그늘에서 벗어난 현대의 신학이 어디로 갔는지를 보면 여러분이 알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교인들에게 복음의 확신 대신에 복음의 회의를 불러 넣어 주었던 18세기 계몽주의 이래로, 19세기 합리주의 시대를 거쳐 오면서, 20세기 과학주의 시대를 거쳐 오면서 그렇게 현실과 야합한 것이 결국은 성도들이 아니라 강단 이었단 말입니다.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수한 학문적인 추구 가지고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필요한 것이 성령의 감화가 학문속에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필요한 것은 체험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쭉 살펴보면 조그만 신학자는 남의 신학을 공부하다가 태어 납니다. 조그만 신학자는 남의 신학을 열심히 공부해서 태어나는데 위대한 신학자는 성경을 대면하다가 태어 납니다. 그러면 성경을 대면하다가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다 신학자가 되느냐 하면 그럴 수는 없습니다. 머리에 든 것이 있어야 신학자가 됩니다. 그러니까 어거스틴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티루터도 마찬가지입니다. 존 칼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성경을 대면하다가 하나님을 획기적으로 만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획기적으로 만나고 위대한 신학자가 되었는데 왜 그렇게 될 수 있었냐 하면 사도바울이 그 시조입니다. 사도바울이나 어거스틴, 마틴루터, 존 칼빈, 이런 모든 사람들 속에 거대한 학문의 체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존 칼빈 같은 경우는 스티거베르거의 자선전 전기를 읽어보면 22세때 이미 파리 대학에 있으면서 유럽 제일의 지성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의 학문을 축척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찬란하게 빛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성경을 통해서 만난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학문속에 스며들게 해서 장엄한 체계를 갖춰 놓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체험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학문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가지 모두 아까 말씀드린 구도자적 탐구의 과정에서 우리들이 몰두해야 할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뭐냐하면 이런것들에 불을 지피고 뜨겁게 만들어 주는 것이 뭐냐면 신앙입니다. 그래서 신학을 하려면 신앙생활을 잘 해야 합니다. 그런데 얼마나 우스운 일이 일어나냐면 목사쯤 되면 신앙을 거의 졸업한 사람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김 목사님 요즘 신앙생활 잘해”라고 물어보면 굉장히 썰렁합니다. 저희 교회에서 최근에 목사 두사람이 됐는데, 노회에서 면접을 보는데 마지막 비젼이 뭐냐고 물어 봤더니 한 친구가 “저는 진실한 신자가 어떻게 하든지 되고 싶습니다.” “이사람 목사를 시켜줬더니 신자가 되겠다고 나가봐!” 그 다음에 또 들어왔는데 같은 교회의 강도사 였습니다. 그런데 둘이 서로 짠것도 아닌데 마지막 비젼이 뭐냐고 물어보니 “하나님 앞에 사랑받는 진실한 신자가 됨에 있어 성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랬더니 “이사람들이 지금 뭐하고 있는거야 목사를 시켜줬더니 말이지 신자가 되겠다고 나가!” 그런데 사실은 신앙이 목회에서 어려움을 당하는 이유는 신학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신앙이 없어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 생활을 잘 해야 합니다. 저는 누가 저보고 묻는다면 저의 궁극적인 비젼은 큰 교회의 목사가 되는것도 아니고, 유명한 저술가가 되는것도 아니고, 관심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다 털어버리고 시골교회에 내려가서 7-8명의 지체들과 생활하라고 하면 저는 기쁘게 내려 갈 수 있습니다. 중요한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건 저의 비젼이 아닙니다. 그 이야기를 했더니 교인중에 몇몇이 시험에 들기도 했는데, 저는 정말 하나님 앞에, 오늘 오후에 교정에 앉아서 기도했습니다.
(찬송) 신자되기 원합니다. 참마음으로
다 껍데기입니다. 목사도, 교수도, 전도사도, 무슨협회 회장, 다 껍데기입니다. 다 벗어두고 마지막에 갈때에는 한사람의 신자로서 중요하게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적 추구가 없이는 이 세가지가 줄어 질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를 한데 엮어서 훌륭하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준비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은데 신앙생활을 잘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에 의하면 신앙이 제일 나빠지기 쉬운 사람이 목사고 그다음이 신학생입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신학교를 많이 경험 했습니다. 너무 비판한다고 해서 맘 상해하지 말고 서로 이해 합시다. 여러분 동료들 이렇게 모아놓고 이게 교회다 하면 가겠습니까? 나는 솔직히 월급 오백만원 줘도 안갑니다. 내가 차라리 달동네가서 개척하고 말지... 한번 학교생활 하면서 보십시오. 정직 합니까? 성실합니까? 구령의 열정 있습니까? 기도생활을 많이 합니까? 말씀을 뜨겁게 사랑 합니까? 참됩니까? 그리스도의 영원한 타는 가슴을 가지고 있습니까? 여러분 1,2,3년 동안 여기 다니면서 1학년 떄는 신앙이 형편없었는데 3학년 떄는 놀랍게 변했다, 그런사람 본사람 있으면 한번 손들어 보십시오. 여러분 지금 친구들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인상 있죠, 다들 뭔가 정치나 하려고 하고, 맨날 머릿속에 하나도 든것은 없으면서 기도원에 들어가서 불이나 떄고, 그 다음에 또 맨날 교수 한다고 하면서 맨날 실력도 되지않는 영어 테이프 끼고 다니고, 원서 끼고 다니고, 20년 후에 똑같이 살아갑니다. 그대로 살아 갑니다. 제가 보증할 수 있습니다. 확실하게 그대로 살아갑니다. 20년전에 신학교 1학년 제가 다닐때에 내가 다른교회에 추천해 줄 수가 없었던 전도사는 지금도 담임목사로 추천해 줄수가 없는 사람으로 계속 남아 있습니다. 아주 특별한 예외는 있습니다. 그런데 희귀합니다. 아주 희귀합니다. 저희 class에서 75명이 A-1반 이었습니다. 우열반까지 편성을 했는데, 70여명이 공부를 했는데 확실하게 내가 75명을 다 알지는 못했지만, 내가 학생들하고 어울리지를 못해서,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정말 다른 사람이 되었다 하는 사람은 세사람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내가 증명 할 수가 있습니다. 확실히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는 그대로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그대로입니다. 그것이 왜 그러하냐면 신앙생활을 잘 안해서 그렇습니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여러분들이 사역지를 구하는데 자기 신앙생활을 그 교회에 가서 하면서 사역을 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우습니까? 사역이 끝나면 옮겨 버리지 않습니까? 사역을 안 하더라도 그 교회를 떠나 버리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때문입니까? 신앙에는 아무 도움도 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것들이 주님을 향한 신앙적인 추구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 꿈꾸지 마십시오. 다 쓸데 없습니다. 뭐 그렇게 꿈을 꿈니까? 꿈을 꾸지 말고 꿈을 받으려고 하십시오. 많이 자신이 깨트려지고 변화되면 하나님이 무엇을 해야할지 보여 주십니다. 사도바울의 체험이 그것을 보여 줍니다. 먼저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그랬더니 뭐라하냐면 “주여 누구십니까? 내가 어찌해야 합니까?” 너무나 잘 알던 사람 아닙니까? 와르르 무너져 뭘 해야 좋을지 모르는 것입니다. 꿈을 세우기 전에 먼저 자기가 가지고 있던 것들이 허무러져 버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성경에 뭐라 했습니까? “너 잠깐 기다려라 내가 뭘 해야 될것인지 보여 줄 것이다” 예수님이 성경을 통해서 그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너는 복음을 전해라 하면서 지까라라는 거리에 가기 전에 소명이 주어집니다. 그러니까 교수가 되고싶다, 목회를 하고싶다, 또 뭐가 되고싶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그것을 점검해 보셨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까? 정말 정직하게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는 가장 간절한 갈망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까? 그러한 점검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한 영적인 은혜와 감화와 체험들이 필요한데, 이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이것은 불입니다. 불이 타오르려면 연료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지적인 것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부를 부지런히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면서 조심해야 될것은 마구잡이로 책을 읽는다고 되는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도 조심스럽습니다. 워낙 안 읽으니까, 이 말에 격려를 받아서 그나마도 팽개칠까봐 겁이 납니다. 마구 읽어대는것만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제 주위에 목사님들 중에는 책 읽기에 빠져서 목회가 건강하게 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모두다 정욕입니다. 그래서 간단히 이야기 하면 폭 넓게 독서를 하면 좋은데 너무 늦었습니다. 그래도 지금 여러분은 조금 시간이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너무 늦었습니다. 그래서 이안 머래이라는 저자가 이야기 한 것처럼 그렇게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넓게 독서하기 보다는 좁게 독서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어떻게 독서 하냐면 능력이 닿는데 까지만 나가야지 능력도 안되는데 마구 나가면 안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지식의 한가운데에는 항상 뭐가 있어야 하냐면 ‘a book’이 아니라 ‘the book’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성경입니다. 그래서 저는 김희복 목사님을 굉장히 깊히 존경했습니다. 그 분 성경책을 펼치면, 그분이 항상 강조한것은 무엇인가 하면 성경을 펼치면 신학서적의 폐기수들이 새카맣게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신학지식으로 ‘the book’을 향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신학책 싸들고 가서 설교하고 목회할꺼 아니니까요. 그렇게 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 하나씩 해야 하는데 제가 이야기 하고 싶은것은 책을 읽어가는것도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인데, 지식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항상 고린도전서 8장에서 이야기 하는것처럼 지식은 반드시 사람을 그 자체안에 교만하게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간에... 왜냐하면 인간의 타락성이 남아있는한 지식은 그것이 무엇에 관한 지식이든지 간에 반드시 사람을 교만하게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성경을 아는 지식은 물론이고 신학을 아는 지식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학문이니까... 심지어는 복음의 비밀을 아는 지식도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 무시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학문은 자체가 그런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교만한 습득으로 인해서 교만해 질 수밖에 없는것이 우리의 속성이라면 그 지식을 습득하면서 끊임없이 우리를 엄하신 하나님의 위엄앞에 우리를 세움으로 우리들이 수시로 이사야가 말했던 것과 같이 자기가 하나님 앞에 정말 더럽고 불결하다는 사실과 다윗이 스스로 고백했듯이 하늘의 궁창에 가득했던 하나님의 진리, MF인데, 나는 그것을 페이플리스라고 번역하기를 좋아합니다만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 앞에서 티끌과 같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물리적인 외소함과 도덕적인 비천함을 경험하면서, 그것이 거룩의 경험입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것을 처절하게 경험하는 은혜의 물속에 그 지식을 담궈야 합니다. 그런데 아멘하기 쉬운데 그것을 삶에 실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뭐냐면 지식을 습득함에 있어서 원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자랑을 위한, 지적인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많은 지식보다는 실제적으로 나를 거룩하게 하고 진실하게 하는 작은 지식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지식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학 다닐떄 책을 많이 읽었어야 합니다. 방대하게 읽었어야 되고 신학대학원에 들어와서는 신학책들을 방대하게 읽으면서 정리를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굉장히 가슴아픈게 뭐냐하면, 신학교를 졸업을 하고 신학교 선생이 되고나서 3,4년 지나고 나니까 비로소 신학을 어떻게 하면 되겠구나하는 길이 보이기 시작하다가, 목회를 몇 년 하고 나니까 길이 또렸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시간을 많이 낭비한 것입니다. 똑같은 종류의 방황을 여러분도 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학문에 전념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느정도까지 공부해야 되겠느냐 가끔 저한테 묻는 분들이 있는데, 저는 이렇게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대학원때, 학부때부터면 목사가 되기위해서 뜻을 세우고 공부했으면 좋은데, 다 지나간 이야기 이니까, 지금부터 시작을 해서 본격적으로 목회를 하기 직전까지 생명의 위험을 느낄정도까지 공부를 해야 합니다. 아주 행복하면 7년정도, 그렇지 않으면 최소한 3년정도. 건강에 심각한 위기를 느낄수 있을때까지 공부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목회를 하면, 여러분 보다는 제가 얼마나 바쁘겠습니까? 그래도 항상 정신은 이렇게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가슴에 새겼습니다. 나는 기준이 고3이다. 거기에 맞춰서 내 모든 삶의 스타일을 고3에 맞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 하는 것입니다. 건강이 허락하는 모든 여유를 다 사용을 해서 목회와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목회에는 기본적인 일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안하면 안됩니다. 그것을 팽겨치면 안됩니다. 그것이 사역인데 앞으로 어떻하려고 합니까? 그 다음에 외부에 돌아다니는 것을 안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될수 있으면 안가는 것입니다. 30군데 정도 들어오면 한군데만 가고 안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글을 써달라고 원고 청탁이 와도 잘 생각을 해서 동기가 이름을 내는 거라든지 아니면 나 아니어도 얼마든지 좋게 할 수 있겠다 생각되면 다른 분들한테 기회를 드리도록 하고 난 자꾸 빠지는 것입니다. 무슨 방송에서 출연 요청이 오고 해도 일체 그런 욕망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부에 몰두 하는 것입니다. 저는 말이죠 신학교 다닐때는 책을 살 돈이 없었습니다. 점심 먹을돈을 몇일 모아서 가서 원서 한권 사가지고 기쁨으로 집에 뛰어온 경험이 있습니다. 지금은 책 살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시간이 없습니다. 몇 달에 한번씩 책꽃이를 붙들고 펑펑 웁니다. 이제는 지적으로 방황하지 않고 , 이제는 내가 교만을 위해 학문을 하는것이 아니고, 나도 이 정도 지식이 있다 이것을 나타내기 위한 학문을 하는 모든 동기는 신앙속에서 버렸는데, 내가 어느날 말이죠 나의 신학적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존 오웬 목사의 책을 보면서 치욕감 떄문에, 그 지적인 충격에서 몇 달 동안을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기도하면서 나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원하는 것이 오직 딱 하나 밖에 없습니다. 목회의 성공도 아니고 탁월한 건강도 필요없고, 책이 많이 팔려 유명해지는 것도 싫고, 사람들이 나를 기억해 주는 것도 싫고, 나는 다 싫다. 하나님이 하나만 나에게 주셨으면 좋겠다. 그것이 뭐냐하면 내가 거룩하게 살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복음의 그 광대하고 그 장엄한 복음의 세계 앞에서 나는 너무너무 짐승처럼 살아왔고...
(찬송) 내 생애가 가장 귀한건 주 앎이라. 내생애가 가장 귀한건 주 앎이라. 주님을 알기를 간절히 원하네. 내 생애가 가장 귀한건 주 앎이라.
저는 2년을 여기서 다녔고 1년을 XX까지 다녔습니다. 진짜 열심히 살았습니다. 저는 여기 다시 입학을 시켜주셔도 나는 그 3년을 반복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서 이를 악물고 살았습니다. 교회 섬기는 일에 있어서나, 공부하는 일에 있어서나, 기도하는 일에 있어서나... 내가 오늘 오후에 여기와서 산책을 하면서 그렇게 눈물이 났습니다. 왜냐하면 20년 가까이 세월이 지났는데 그때 내가 어땠을까? 착한 짐승 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을 아는 일에 있어서 무지했을까? 그리스도의 복음의 아름다운 세계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적었는가 입니다. 그래서 지독하게 탐구해야 합니다. 학문적인 탐구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적은 부주의와 게으름입니다. 이 부주의는 뭐냐면 게으름과 짝을 이루는 것입니다. 주의 깊으면 노력이 많이 들어 갑니다. 그러니까 부주의함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선택한 것입니다. 그것이 게으름입니다. 게으름은 소명 받지 못한자의 결정적인 표 입니다. 그 증거가 에서게 34장에 나옵니다. 거짓 목자들의 특징이 강한 정욕과 자기 이욕을 채우고자 하는 강한 정욕과 게으름입니다. 그래서 잠언에 보면 ‘게으른 자의 정욕이 그를 죽이느니라’라고 나옵니다. 두 개가 따라 나옵니다. 그래서 쉬고 싶은대로 쉬고, 자고 싶은 마음대로 자고, 이렇게 하면 안됩니다. 이것이 방탄한 삶입니다. 졸려도 일이 있으면 일어 나야 합니다. 그래서 항상 하는 이야기가 몸에 특별한 이상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5시간내지 6사간이상 자는 것은 범죄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그렇게 태만하게 살고 거둘수 있는 성공은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사기를 치든지 부동산 투기를 하든지, 뭔가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돈 버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그렇게 육체가 원하는 대로 자기를 방탕에 방임하면서 성공 할 수 있는 직업은 없습니다. 더군다나 퍼펙트한 사회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내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 “목사님 힘드시죠?”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나는 항상 무정하게 “안힘들다”라고 말합니다. 이 만큼도 안 움직이고 밥을 먹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기름 때 묻히고 정비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그 정도는 다 합니다. 그러니까 소명을 받은 사람에게는 그 소명을 따라 사는 일에 대한 열정이 있습니다. 그것이 없으면, 둘중에 하나입니다. 소명이 아니든가 병 들었든가 둘중에 하나입니다. 고쳐야 합니다.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벌써 금년이 시작하고 석달이 지났는데 책을 몇권이나 읽으 셨습니까? 일년에 자기 키 하나는 읽어야 합니다. 리퐁데떼오로지칼세미갈 이라고 하는 미국 신학교가 있는데, 거기서 신학생 모집 광고를 냈는데 강대 위에 낡은 목사 의자 하나를 놓고, 위에 타이틀에 'Is not an easy chair' 아무나 쉽게 앉을수 있는 의자가 아닙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많은 신학생들이 너무 게으릅니다. 새벽기도 나가십니까? 학교 오는날은 굉장히 힘들겠습니다. 그렇지만 학교 안 오는 날은... 부지런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뭔가 하나님을 향해 간절히 타오르는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과학잡지에 보니 빌딩을 만들고 거울을 붙여서, 여기서 빛을 받아서, 한 6,7층 되는 빌딩인데 열을 모았는데 쇠가 구멍이 뚫어졌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열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 지성과 의지와 정서가 모든 것을 모아서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향해서 빔처럼 쏴서, 그분을 알고자 하는 거기에 쭈욱 비쳐서 다른것들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가운데 터득되는것이 ‘The mystery of gospel’입니다. 그것을 알아가는 도중에 우리들이 ‘The man of god'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룩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 거룩의 길을 걸어가면서 자신과 안밖에 있는 수 많은 죄와 더불어 싸우면서 악마의 손톱자국으로 가득한 가운데 길이 이것이고 진리가 이것이다 라고 가르치도록 소명된 사람이 바로 복음 사역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희 교회에 교역자들이 있는데 다 이야기 합니다. 설교를 못하면 가르쳐주고, 도덕적으로 좀 모자라면 용서해 주고, 일을 잘 못하면 격려를 해서 세워 줍니다. 그런데 용서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절대로 돕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돕지 않습니다. 그것은 도움을 줄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이기 떄문입니다. 그러면 지적으로 좀 모자라도 배우면 됩니다. 모두 다 바보같이 되겠습니까? 재능이 좀 모자라도 어차피 모든 사람이 교회를 하면 온누리교회나 사랑의교회처럼 되겠습니까? 그사람은 그사람대로 쓰시는거 아닙니까? 그런데 가장 가슴이 아픈게 무엇이냐면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주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함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여 붙들에 바라보고 달려가는 그것이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 많은 지식은 교만하게 하는 자랑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지식은 무시하는 그런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까 그런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그사람이 거룩해 질수 있겠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인격적으로 사람들에게 감화를 끼칠수 있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할수 없이 권위를 도입하는 것입니다. “목사를 뭐로 보고!”하면서 교회를 단계로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고 철저한 통제가 이루어지는 우민정치를 펼치는 것입니다. 공부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로이드존스 목사님에 전적으로 동의하는데 진리에 대한 탐구의 정신이 없는 사람들은 소명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공부하기 싫으면 소명이 아님을 입증하는 중요한 징표입니다. 그러니까 공부 할 필요가 없는 직업을 선택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직업은 그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뼈가 쓰러지도록 공부해야 합니다. 이 팔꿈치가 닳아야 합니다. 방학때 같은때에는 13시간씩 14시간씩 매달려서 고시공부 하듯이 공부해야 합니다. 건강에 위협을 느낄정도로 말입니다. 내가 이것을 눈물을 흘리면서 말합니다. 목회 시작하면 공부 못합니다. 내가 할 수만 있으면 3학년 졸업 할 때 까지는 사역을 하지 말고, 그대신 교회에 가서 교사라도 하면서 성실하게 신자로서 영혼을 섬기십시오. 그런데 그래도 너무 힘들다 하면, 그래도 안된다 하면, 2학년 까지는 하지 마십시오. 그 2년동안에 오직 공부와 신앙, 거기에 매달리면서 하나님 앞에 무릎에 이상이 생겨서 통증 크리닉에 갈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 팔꿈치로 씨름하면서 공부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학의 얼개를 제공해주는 원서들을 거의다 읽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뭡니까 이게... 레포트 때문에 할 수 없이 읽은책, 시험 볼 때 할수 없이 범위만 줄 그은책, 배껴쓰느라고 급히 읽지도 않고 여기저기 띄엄뜨엄 해서 읽은책, 그런거 빼놓고 진짜 자기 나름대로 신학적 고민해 읽은 책들이 얼마나 됩니까? 정신 안차리고 하면 3학년 졸업할때 10권도 못읽고 졸업을 합니다. 그런 속에서 무엇인가 영적인 유산을 남기는 목회자가 나올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올바른지 않은 목회자가 되는 방법은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그대로 지금처럼 살면 옳지 않은 목회자가 됩니다. 그럴 가능성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신학적으로 정리가 안됐고, 복음의 비밀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으며, 그러니까 교인들이 영혼의 문제들을 가지고 오면 외과의사처럼 그것을 갈라가지고 실핏줄과 실핏줄을 잇고, 심줄과 심줄을 잇고, 신경과 신경을 결합해야 하는데, 그렇게 다루지를 않고 푸줏간의 고기 덩어리 처럼 다루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수많은 영혼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많은 성도들이 헤매는 것입니다. 세미나가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자기네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면 되지... 그런데 해갈을 합니다. 영혼들을 유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희랍어와 히브리어는 반드시 해야 합니다. 나는 현학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여러분들에게 분명히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그것 하기 싫으면 정말 곤란합니다. 반드시 해야 합니다. 그래서 유창하게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한글 성경하고, 희브리어 성경, 희랍어 성경, 사전하고 갔다놓고 번역이 어디가 틀렸는지는 확인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성경을 다루는 전문가 아닙니까? 전문가이면 오리지날 텍스팅해 다루어서 진리를 찿아낼수가 있을 정도가 되어야 됩니다. 그런 무책임한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심지어는 옛날에 보니 점수 안준다고 헬라어 교수 물러나라고 데모하고 말이죠 이렇게 해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얼마나 어려운데... 한해 방학만 투자 하면 됩니다. 한 두달동안 완전히 다 끊었다 생각하고 희랍어하고 희브리어에 매달려서 밤을 세우면 됩니다. 그럼 평생 진리에 가까이 다가가서 목회를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청교도가 말하기를 성경을 샘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원어의 샘은 오염되지 않은 샘이다. 물론 거기에는 충족되어야 할 여러 가지 조건들이 학문적으로 있읍니다만 거기에서 평하됩니다. 성도들이 여러분들을 말씀해석에 있어 최종적 권위자로 교회에서는 알지 않습니까? 또 그렇게 행동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거기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공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먹는거 너무 밝히지 말고 책 사는 일에 투자해야 합니다. 책 사는 일에 투자를 많이 해서 열심히 읽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기도생활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진실로 추구하는지 아닌지는 기도생활을 통해서 잘 나타납니다. 그런데 기도생활이 잘 안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다른것이 없고 죄 때문입니다. 자기안에 내재하는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존 라일리라는 청교도는 말하기를 “기도는 죄를 죽이지만 또한 죄는 기도를 죽인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죄가 기도를 계속 죽입니다. 원리가 어떻게 되냐하면 죄라고 하는것은 인간의 마음이 있다하면, 죄라고 하는것은 마음 밑에 흐르는 경향입니다. 그래서 어디로 가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이런 경향이 있는데 죄의 정체는 복잡한 설명이 필요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Enemy to god)입니다. 이것이 죄의 정체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조직신학에서 안 다루어지니 문제입니다. 청교도들을 연구하면서 터득한 결론입니다. 그래서 이제 영적인 강력한 파워와 복음의 비밀에 대한 깊은 체험들이 18세기 이후 급속히 빠져나가기 시작하면서 얼개만 남은것이 19세기 말부터 20세기까지 이어오는 정통 신학입니다. 그러니까 섬세한 쉐이들이 사라진 것입니다. 어쨌든 그 정도로 논하고, 이것이 적대감입니다. 이것이 죄의 정체(Identity)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어디로 가고 싶어 가는가? 이것은 악을 향해 가고 싶어합니다. 이 자체가 하나님을 거스리는 강력한 경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가 깨달았다고 하는 로마서 7장에서 한 법입니다. 그런데 신자에게는 이보다 우세한 법이 있습니다. 이것이 뭐냐하면 선을 행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이것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서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선한 것입니다. 이것도 하나의 법입니다. 이것은 어디로 향해 가느냐하면 의를 향해서 가고자 합니다. 선을 향해서 가고자하고, 의를 향해서 가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신자 안에서 같이 공존합니다. 이것이 워낙 강하게 존재하고 이것이 약한 원리이긴 하지만 그것이 가만히 있는것이 아니라 죄 죽임의 실천이나 경건생활을 통해서 이것을 계속해서 풍성하게 하고 약화시키면 죄가 실제 생활에서 거의 문제가 안되는데, 기도생활 안하고 성경도 제대로 안읽고 하나님 앞에 참회의 삶도 별로 없고 자기 깨어짐도 없게 되면 이것은 지속적으로 계속 약해지고 강해지게도 됩니다. 그래서 이것이 극도에 달했을때에 사도가 고백한것이 두 개가 있는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누가 나를 사망의 몸에서 건져 내겠느냐?” 그렇게 고백했고 또하는 “죄의 법이 나를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아 오는것을 보는도다” 사로잡으면 전쟁에서 꼼짝 못합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적대감의 요소는 무엇인가 하면 소위 이야기하는 반감과 대적으로 이루어 집니다. 반감은 하나님과 하나님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반감입니다. 그다음에 대적은 딱 맞서서 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정체입니다. 이것이 그 사람의 생각과 정서 그리고 의지에 모두 배어서 인격을 전체적으로 이런사람이 되게 하고 싶으신 것이 죄가 가지고 있는 궁극적 계획입니다. 그래서 대적이 풍성해지면 기도생활이 쉬워지는데 반감이 풍성해지면 기도생활이 힘겨워 집니다. 그런데 이제 어떤 문제가 나오냐 하면, 그래서 한사람이 기도를 안하고 있다라고 하는것은 좋은것을 하나님이 못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기도생활을 안함으로 말미암아서 자신의 마음의 프레임이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가 지속적으로 자라기에는 나쁜 환경이 되고 죄와 정욕이 자리기에는 아주 좋은 환경이 되어가는 그런 일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고자 하는 강한 은혜의 법이 있고 죄의 법이 있는데, 은혜의 법의 먹이는 은혜의 수단에 믿음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성경읽기, 기도, 묵상, 경건생활, 하나님 앞에 자기 깨어짐, 이런것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진, 자기부인, 내세를 명상함등을 통해 참여함으로써 은혜의 법이 강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정욕을 통해서 이법이 강화가 되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의 경향성이고 정욕은 실제인데 정욕은 죄의 경향성을 강화시켜주는 계속되는 보급로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각종 정욕들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내가 목사될 사람인데 내가 왜 이렇게 살지...” 소용이 없습니다. 죄는 누구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사람들의 기대를 모으던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와르르 무너지는 이유가 뭐 때문인지 가리지 않습니다. 죄는 그런 것에 겁내지 않습니다. 경계선이 없습니다. 파고드는 것입니다. 빈부나 귀천이 없이 하나님의 은혜가 파고들듯이 죄도 그렇게 파고 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껍질을 가지고 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자체가 하나의 적대감이기 때문에, 이 적대감이 이렇게 죄라는 것이 있는데, 본성을 공격해서 파괴시키려고 하지 않는 한 껍데기가 어떤 것으로 쌓여 있든지 간에 그것에 대해서는 죄가 거의 하지 않습니다. 껍데기가 어떻게 쌓여 있던지 간에 영적으로 본질적으로 파괴시키려 공격하지 않는한 죄가 양해를 합니다. 목사가 되든, 강도사가 되든, 신학교에서 졸업을 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셔서 졸업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졸업하는 것이 아닙니다. 넓게보면 하나님의 은혜 이겠지만 그냥 점수 나왔으니 졸업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신적인 표징을 부여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도속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제도라는 틀속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를 하게되면 마음속에, 마음이 이렇게 있는데 은혜생활을 잘해서 이것이 은혜의 법이 강력하게 흘러서 청교도들의 영성에 진수 부분을 제가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런 확신을 가지고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해 왔기 때문에 영적인 거장들이 나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 제가 이 아름다운 유산들이 전부다 유실되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저에게 엄청난 지적인 충격 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약 400년 거슬러 올라가면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게 우세할 때는 은혜가 우세하게 우리를 지배하는 동안에 우리의 지,정,의의 질서가 정연 합니다. 가지런 합니다. 그럼 뭘 생각하면 되냐면 신학적으로 신학을 공부했으니 이해 할 것입니다. 아담이 사물을 인식하는 것과 타락한 이후에 아담이 인식하는것 사이에는 생각 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격차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혼과 지,정,의의 관계가 최대한 조화로운 상태에 있었습니다. 우리보다도 더, 우리는 아직까지 거듭났지만 내재하는 죄가 있었지만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생각하는대로 느끼고, 느끼는 대로 행동하고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영혼과 질서로 유지하고 있었는데 죄가 들어오면서 이 질서가 다 깨트려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은 하는데 정서는 다른것을 느낍니다. 나는 이것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몸은 다른것을 합니다. 이반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가 들어가서 하나님의 은혜가 강력하게 그사람을 지배하면 처음에 가지고 있었던 그 질서가 어느정도 회복이 됩니다. 상당히 회복이 됩니다. 그래서 영적인 침체에 빠진 사람이 잘하는 말이 뭐냐면 “몰라요”입니다. “너 신학교 끝나고 목사 될거냐?” “몰라요” “유학 갈꺼야?” “몰라” “교회 구해야 되잖아?” “몰라” “졸업은 할거야?” “몰라” “교회는 어떻게 할거야?” “몰라” “등록금은 어떻게 할거야?” “몰라” 모릅니다. 은혜를 받는 질서가 정연해 지면 죄가 들어올때 이것이 죄라는 것이 정확하게 인식이 됩니다. 그런데 죄에 지고 있을때에는 이 전체가 혼탁해 집니다. 혼탁해져서 죄가 자리하고 있는데도 인식이 안됩니다. 인식이 안되는 이유는 두가지 때문인데 영적인 어두움 때문에 많이 어두워졌기 때문이고, 또하나는 마음의 밭이 죄와 친화적이 되어서 입니다. 그런데 이런것들은 누구에게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매일매일 일어날 수 있는 일인데 기도생활이 이것들을 해결해 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이 속에 잠재되어 있는 죄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것이 없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반드시 있습니다. 그래서 성화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하기 위해서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기도를 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 기도가 아무 기도로 되는것은 아닙니다. 두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됩니다. 첫째는 지속적(constant)이어야 합니다. 간헐적이고 파성적인 기도로는 은혜의 질서 속에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가 하고 싶을때 하는 체제를 갖추면 안되고 하기 싫으면 자기 육체를 천한 종을 다루듯이 후려 때리면서 다루어야 합니다. 그게 사도 바울이 이야기 했던 '내몸을 쳐서 복종시킨다' 입니다. 그러니까 노예를 다룰때 쓰는 용어입니다. 그렇게 마구 거칠게 다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원칙을 정해놓고 나와 협의를 하려 하지말고 무자비 할 정도로 가혹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그렇게 가혹하게 다룰수 있는 사람과 다룰수 없는 사람의 차이는, 주님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렇게 못합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그렇게 하는데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렇게 못하는 것입니다. 다른 차이는 없습니다. 학문이고 그런거 다 필요 없습니다. 오직 그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그렇게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못합니다. 그리고 믿음이 좋은 사람은 하는데 믿음이 식은 사람은 못합니다. 그렇게 거칠게 다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새벽기도에 다 가야 합니다. ‘새벽기도의 신앙’이라는 책이 나온 학교에서 말입니다. 새벽기도 가야 합니다. 새벽기도를 전도사이기 때문에 간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전도사도 또 안 나갑니다. 부목사가 아니라서 괜챦은데... 전부다 다 사기꾼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경건을 자기의 직업으로 팔어 먹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목사가 아니었으면 절대로 새벽기도 할리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이 나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크리스챤이 될 수가 없습니다. 사역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면 새벽에 안되면 밤에라도 하겠죠? 어차피 새벽기도 해야 될 테니까... 그러니까 쳐서 복종 시켜야 합니다. 그러니까 새벽기도 못 간 날은 자기를 인간으로 생각 안 하면서 괴로워하는 자책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교회에서 다른건 다 용서해 주는데 새벽기도 안 나오는 것은 용서하지 않습니다. 몸이 아파 새벽기도 못나온다 하면 죽지 않을 정도면 나오라 합니다. 새벽기도 나오다 거리에서 쓰러졌다는 소리가 들리게 하라고... 내가 그렇게 안 살면 안됩니다. 그래서 나는 원칙이 정해져 있습니다. 자는 시간과 상관없이 새벽기도 나온다. 걸어 내려오다 쓰러지지 않는 한 나온다. 그래도 아침에 일어나기 너무 힘들어, 그렇다면 어떻게 하냐하면 내가 터득한 것은, 우리 집사람이 유혹을 합니다. “여보 옆방에 있는 교역자 한테 전화를 할까? 여보 쉬어여” 이렇게 유혹을 합니다. 그때 군인을 생각합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충성”, 그리고 박차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쓰러지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죽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매 순간을 그렇게 살다가 어느날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속적이어야 합니다. 전도사 생활 하고 있는 동안에만 그것이 아닙니다. 여기 기숙사에서도 새벽기도 하죠. 새벽기도를 하든지, 아니면 보따리 싸가지고 산위에 올라 가서 말이죠, 데이브드 브레인 처럼 산기도회, 얼마나 좋습니까? 추운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두 번째는 'from bottom of heart' 마음의 밑바닥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이어야지만 이 틀을 변화 시킬수 있습니다. 기도하러 가서 딴 생각으로 계속 왔다갔다 하고 졸다오면 기도 안한것과 똑같은 효과입니다. 전혀 기도한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무장해제 시키는 단계가 4단계가 있습니다. 그것이 첫째가 준비성(readiness)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필요한데 딱 준비 되어 있어야 합니다. 기도가 필요하면 팍하고 튀어나와야 하는데 그것이 제때에 안됩니다. 그것이 첫 번째 낭비입니다. 두 번째는 기도하기 싫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기도의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기도의 의무를 완전히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격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신학적으로 잘못되었다고 하고 멋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하면 이제 거룩하고는 결별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하면서 가슴 깊은곳에서 기러오르는, 기도가 꽉 찻을 때에는 펑하고 터지지만, 꽉 안찻을때는 우물위에 바가지를 던지면 달락달락 하는데 그래도 기러내어야 합니다. 시간이 걸려도 좋으니까 천천히 기러올리기 시작하면 그 다음에 다시 기도의 물이 기러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매달려서 기도해야 합니다. 형식적으로 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자기를 완전히 망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기도의 샘을 기러오는 것입니다. 기도를 기러오는 동안에 자기에게 두가지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데 기도하는 순간에 마음으로부터 지속적으로 기도하기 시작할때 혼재되어 있던 것들이 명료하게 정리되면서 인식되기 시작합니다. 죄가 없는지 알았는데 어느 한순간에 죄가 정확하게 인식되기 시작합니다. 인식되면 이제 미워할 마음이 생깁니다. 그 다음에 그 죄를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 씨름하는 그 순간이 죄를 향해서 칼을 든 순간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죽이면서 거룩해져 가는 것입니다. 지금 이야기한 것이 청교도의 기도생활의 집수행입니다. 그렇게하면서 거룩한 삶으로 향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꼭 필요한 것이 뭐냐면 철저한 자기 꺠어짐,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정말 죄인이고 내가 하나님 앞에 은혜 가운데 살려고 애를 쓰지만, 매 순간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가 없이는 내 힘으로는 거룩한 신자로서 성숙해 갈수 없고, 사역은 커녕 한사람의 신자로서의 신앙에 실패 할 수밖에 없다는것을 철저하게 느끼는 그 속에서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깨트려져야 하고 깨트려 짐이 다시 두가지 방향으로 꺠트려짐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사람에 대한 깨트려짐이고, 하나는 자기의 의에 대한 꺠트려짐 입니다. 자기가 사랑하던 것들을 그 깨어짐을 통해서 하챦게 여기고 버리게 되고 자기는 굉장한 사람이다 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다 꺠트려 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그렇게하면서 거룩한 성화의 길을 걸어 가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하면 됩니까?” 숨거두는 순간까지 이렇게 하면서 가는 겁니다. 칼빈과 루터와 종교개혁자들을 비롯해서 많은 영적인 거성들이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삶이 있습니다. 성경으로 보면 ‘내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나리라.’ 목회는 여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방법을 가지고 던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들이 깊이 변화되고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추구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저 나름대로 영적인 순례의 길을 걸어오면서 정리한 ‘마음지킴이’라는 책이 이제 나옵니다. 한 380페이지내지 390페이지 되는 각주와 본문의 비율이 10:7인 책이 나옵니다. 각주가 7입니다. 하나의 논문입니다. 그것이 이렇게 살아가는데에 있어서 수시로 변하는 마음을 어떻게 지키고 살 것인가에 대해서 청교도들의 신학과 종교개혁자들의 신학, 나 자신의 체험과 성경 탐구를 통해 쓴 책입니다. 4월말에 나오니까 한번 사서 보고 거기에 많은 책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청교도 책들이 한 4-50권 수록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이 영어로 되어있긴 하지만 꾸준히 구해서 읽으면서 여러분 자신들이 지적인 세계와 영적인 세계를 아울러 넓혀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