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성장과 미래의 역할(2)
녹취자 : 조원정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제일 처음 죽었던 영혼으로 살다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회심을 하고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에서 전도 설교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오래 교회를 다녔는데 목회자들은 일단 사람이 교회에 오면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치는 것입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교회를 오랫동안 다녀도 한 번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정직하게 듣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십자가 앞에서 회개하고 거듭나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구원파가 많은 사람들에게 나름대로 매력을 주고 있는 이유가 여러 가지 있지만 그중에 하나가 이런 점들을 굉장히 강력하게 다루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었는데 구원파의 문제점은 성화를 안 가르칩니다. 목회는 복음을 전해서 사람을 거듭나 새사람이 되게 하고 두 번째는 거듭나 새사람이 된 그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도록 가르치는 것, 지도하는 것, 이것이 목회 사역의 전부입니다. 두 번째가 바로 성화라는 주제입니다. 한국 교회는 성화를 안 가르칩니다. 이것이 심각한 문제라고 봅니다.
한국교회의 60년대 70년대 엄청난 성장을 거두면서 복음을 강조하고 회개를 강조하고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이런 것들은 굉장히 적절한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예수 믿고 거듭났으면 거듭난 신자의 최고의 가치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면서 진실한 신앙을 가지고 사는 것, 마음에 있는 모든 더러운 부패성을 계속해서 버리고 하나님 의지하면서 사는 성화를 가르쳤어야 됩니다. 안 믿는 사람을 예수 믿게 해서 구원 받는 설교는 전도 설교를 하면 되지만 성화에 대한 설교는 훨씬 더 많은 공부와 집중, 많은 교리들에 대한 연구들이 필요합니다. 아시다시피 한국 교회가 그 일에 힘쓰지 않는 것입니다. 그 열매를 오늘날 우리들이 거두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었습니다. 뚜렷하게 회개하고 주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체험도 많습니다. 그런데 삶이 개판입니다. 도덕의 관념이 없습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단순히 사회적으로 사람들이 모범시민이 아니라고 얘기하지만 가장 큰 책임은 교회에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산상수훈에 대부분의 가르침이 천국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 예수님이 오셔서 제일 처음 하신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라고 말씀 하셨는데 이것이 사람들로부터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선포였다면 그렇게 당신 앞에 나온 사람들을 향해서 천국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시고 그 하늘나라는 이 세상 나라와 어떻게 다르고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서신서 전체에 깔려 있는 대지입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서를 공정하게 읽어보면 흠 없고 티 없는 사람들이 되어서 주님 앞에 영광을 드러내라는 권면입니다. 그러면 집요하게 가르쳤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진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증거는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되고 성공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향기가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쳤어야 합니다.
오늘도 그랬는데 출판실에서 일하는 직원들인데 여기 책을 가지고 와서 책을 판다고 생각하는데 어젯밤 새벽 한시에 일 끝내고 와서 호텔에서 잤습니다. 다 팔아도 원가도 안 남습니다. 여러분 섬기려고 온 것입니다. 엄청나게 좋은 호텔에서 잔 것도 아닙니다. 밥 먹고 기름 값 하고 다 팔고 가면 십만 원 정도 적자가 납니다. 저거 다 팔고 가야 합니다. 여기서 여러분이 책 안 사도 제 책은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섬기려고 그럽니다. 왜냐하면 너무 안타깝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큰 문제는 목사님들이 공부를 안 합니다. 내 나이 육십을 넘어서 칠십을 바라보는데 제가 교만한 마음으로 이 얘기를 하겠습니까? 내가 사십대도 아닌데 공부를 안 합니다. 목자의 임무는 제일 중요한 것이 무르팍이 닳도록 기도하는 것이고 팔꿈치가 닳도록 책상에 붙어 앉아 있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는 생각해봐야 합니다. 공부를 해야 합니다.
나는 최근에 작년에 주기도문인가 책을 썼습니다. 오늘 그 책을 목사님들에게 소개를 시켜 드리고 싶은데 책이 다 팔리고 없다고 합니다. 주기도문만 제대로 가르쳐도 한국교회가 이렇게 되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주기도문이 얼마나 중요한 내용인가 하면 예수님이 기도하시던 내용입니다. 주기도문 속에 예수님이 이상형이라고 생각했던 교회의 모습, 그리스도인의 모습, 이 세상의 모습이 그 안에 다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이 예수 믿겠다고 하면 일 년 동안을 카데큐먼의 상태에서 일 년 동안을 주기도문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 책도 어렵다고 안 읽습니다. 너무 안타깝습니다.
정말 이 세상은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변화가 일어나는데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빌 브라이트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한번 생각을 해 봐라. 우리가 개미라고 치자. 커다란 마차가 온다. 우리 모두 밟혀 죽게 생겼다.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이겠는가? 내가 인간이 되어서 아무리 개미에게 소리친들 개미가 듣겠는가? 개미 중의 하나가 되어서 소리를 치고 마차가 온다는 얘기를 전해야 되지 않겠는가?” 심정이 그런 심정입니다. 그래서 책을 쓰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가장 중요한 것이 영혼이 복음을 듣고 정말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깊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원의 길이라고 믿고 회심하는 것이 목회의 밭을 가는 것입니다. 밭을 갈아야지 씨를 뿌립니다. 어떤 미친 사람이 산에 올라가서 아무데나 씨를 뿌리고 가을에 가서 왜 아무것도 열매가 없냐고 투덜거리는 어떤 미친 사람이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겠습니까? 농사를 지려면 땅을 갈아야 하는데 신학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하나님 앞에 선을 행하라. 이렇게 살아라. 이렇게 영적으로 깨어 있으라.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이 어떻게 영적으로 깨어납니까?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향해 선한 삶을 살 수 있겠느냐 말입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우리는 신학교에서 그렇게 안 배웠습니다. 그 정신을 가지고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지 봐야 합니다.
제가 몇 회 전에 우리 총회에서 목사 장로 기도회에서 강연하라 해서 강연 했는데 그 내용은 예배에 대해서 피를 토하듯이 강연한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나도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이고 여러분도 예배를 인도하는 목회자입니다. 지난주일 예배 어떻습니까? 백화점에서 세일을 한다고 하면 십오 분전에 가서 줄서서 기다리고 영화 구경 전에도 십분 전에 가서 표도 사고 팝콘도 사고, 사이다, 콜라도 사서 표 끊고 기다리는데 예배당은 십오 분전에도 안 옵니다. 정시가 되면 도떼기시장처럼 밀려오고 그렇게 예배가 시작됩니다.
우리 어렸을 때 예배는 두 시간 예배가 기본이었습니다. 열한시에 시작하면 한시에 예배가 끝났습니다. 시간이 좀 지나더니 목사님의 설교 속에는 여러분이 일주일에 두 시간 와서 예배드리면 예수 믿는 사람이냐고, 점점 줄어듭니다. 한 시간 반와서 예배드리면 그것이 예배드리는 것이냐고, 지금 한 시간 반 예배드리는 교회 없습니다. 거의 없습니다. 한 시간 내에 다 끝납니다. 설교 시간이 엄청 줄어들었습니다.
설교 시간에 교인들의 예배드리는 태도를 위에서 한번 내려다보십시오. 민방위 교육 온 건지 예배드리러 온 건지 구분이 안 됩니다. 고개 숙이고 성경책 들여다보는 사람, 주보 꺼내 놓고 빨간펜 가지고 고치고 있는 사람, 고쳐서 뭐하는지 이미 다 나와 있는데, 헌금 낸 사람 또 숫자를 셉니다. 가로 몇 명, 세로 몇 명, 곱하기해서 나누어라 한사람이 얼마나 했는지, 제가 그 꼴 뵈기 싫어서 23년 동안 우린 주보 없이 예배드립니다. 주보가 뭐 필요합니까? 찬송 부르자고 하면 부르고 설교한다하면 듣고 축도하면 끝난 줄 알고 가면 되고 광고는 예배 끝나고 뉴스로 나오면 들으면 됩니다.
하늘 보다 더 높은 어디서 연락이 왔는지 예배드리다가 냅다 뛰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배당에 엎드려서 고개를 숙이고 전화를 받는 것입니다. 그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매들 때문에 억지로 끌려 온 남편들은 저 뒤에 앉아서 아이폰 꺼내 놓고 게임하고 앉아 있습니다. 문자 보내고, 이게 무슨 예배입니까? 나는 목회자로서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확신하는데 거기 하나님 없습니다. 거기 오신다고 하면 내가 말리겠습니다. 거기 왜 오시겠습니까? 예배 끝나고 나면 교인들이 우르르 빠져 나갑니다. 설교시간에 다 졸거나 딴 짓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래도 모범적인 교인들이 넋 놓고 멍하게 쳐다보다가 운이 좋으면 설교가 일찍 끝나는 것이고 운이 나쁘면 대개 길게 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열심히 안 전하려면 눈치가 있어야 하는데 눈치도 없어서 교인들이 싫어하거나 말거나 할 얘기 다합니다. 급기야는 당회에서 정식으로 설교 길다고 문제제기합니다. 그리고 교인들이 우르르 빠져 나갑니다. 그중에 95퍼센트는 무슨 설교 했는지 기억도 안 납니다. 그게 예배입니까?
매일매일 그런 일이 반복이 되는데 잘 들어보십시오. 매일 그러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때때로 사람이 깨뜨려지고 변화되지 않으면 좋은 그리스도인이 못되는 것이 아니라 나쁜 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도 눈에 눈물이 마르기 시작하면 나쁜 목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타락한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나가는데 밖에 나가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예배 속에서 주님을 만났으면 예배의 감격 때문에 간절히 기도하고 못 만났으면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살았기에 우리의 예배 속에 은혜가 없나하고 회개를 해야 합니다. 올 때는 그렇게 늦게 왔던 사람들이 갈 때는 서로 먼저 나가려고 예배드릴 때는 그렇게 우울하던 사람들이 예배 끝날 때에는 그렇게 행복합니다. 나도 목회자이지만 목회자는 그렇게 예배를 인도해 놓고 무슨 면목으로 까만 가운을 입고 거기 가서 온 성도들 하고 활짝 웃으며 악수를 합니다. 감사합니다. 뭐가 감사합니까? 여기가 음식점입니까? 그렇게 예배를 드리는 속에서 어떻게 중생의 회심의 역사가 일어납니까?
(예화) 에도시대 때 일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양쪽 가문의 대표들이 나와서 바둑을 두었습니다. 한쪽 가문이 졌습니다. 너무 원통하니까 바둑판 위에 피를 토하고 엎드려져서 죽었습니다. 자살 한 것이 아니라 너무 억울하니까 그 분에 못 이겨서 울컥 하고 피를 바둑판 위에 쏟아 놓고 절명을 해 버렸습니다.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이고 토혈국이라는 유명한 기보가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옵니다. 오락을 두다가도 너무 원통해서 울컥하고 피를 토하고 죽는데 목회자가 이럽니다. 교인들을 너무 살살 다룹니다. 진리의 매운 맛을 봐서 아 내가 죄인이구나,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고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가끔씩은 예배당에 주저앉아서 흐느끼게 만들어야 합니다. 최소한 왜 나의 목회 사역에는 이런 거룩한 충격이 없는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게 안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변화되어서 회심하고 그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 부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 죄 죽임과 은혜 살림에 의해서 계속 변하고 새로운 은혜를 받고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살고 하면서 그런 속에서 날마다 하나님을 새롭게 하라. 어거스틴이 자신의 고백론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너무나 오래된 그러나 너무나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하나님이 너무 오래된 분이신데 어떤 면에서는 너무나 새로운, 아름다운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많은 말을 하고 인간의 귀를 즐겁게 해도 거기에 생명 없습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도에서 나옵니다. 진리에서 나옵니다. 그 진리를 설교하기 위해서는 집요하리만치 성경을 붙들어야 합니다. 성경 본문 읽고 세상 지나가는 이야기, 교인들 즐겁게 하는 이야기 하면 하나님 앞에 그 책임을 어떻게 지려고 그럽니까?
(예화) 6-7년 전의 일입니다. 교인 한명이 등록 했습니다. 어디에서 왔는지 어느 교회에서 왔는지? 자기는 교회 다닌 적이 없답니다. 절에서 왔답니다. 누가 절에 다니는 당신을 여기에다 전도했느냐고 했더니 전도한 사람이 없답니다. 어려서부터 절에 다니다가 아무리 다녀도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불교신자들은 기독교신자들보다 신사적인 면이 있습니다. 교인들은 슬그머니 안 나오는데 주지 스님을 찾아 갔습니다. 오래 그 절에 다녔습니다. 스님 전 아무래도 불교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 왜? 아무리 다녀도 감동도 없고 효험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기독교로 옮겨야 할 것 같습니다. 가지마라는 얘기도 안 하고 그럼 그렇게 해라고 합니다. 어느 교회 나가려고 하느냐? 제가 뭘 알겠습니까? 찾아봐야 합니다. 주지스님이 너희 집 가까운 곳에 열린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로 가라. 이 사람이 너무 황당한 것입니다. 주지스님이 우리로 말하자면 담임목사입니다. 주지스님이 가지마라고 해도 시원찮은데 교회까지 정해 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너무 황당해서 스님 왜 나보고 그 교회 가라고 합니까? 내가 기독교 설교를 많이 들었는데 그래도 그 교회는 경전을 설교하더라. 기독교를 나는 잘 모르지만 진리는 어차피 하나인데 그래도 세상 이야기 안하고 경전이야기를 하면 네가 거기 가서 진리를 배울 수 있지 않겠느냐. 신앙생활 잘하고 있습니다.
불교 신자도 기독교의 설교를 들으면서 경전을 생각하는데 우리는 목사입니다. 윌리엄 포사이스라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설교자는 설교의 성과로 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 상을 받는다. 설교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느냐에 의해서가 아니라 설교를 하고 설교 할 때까지 어떻게 씨름하고 말씀을 붙들고 자신이 그렇게 살아보려고 몸부림치고 얼마나 충성스런 마음으로 그 일을 했는지를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상을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은 설교를 위해서 예배를 위해서 깊이 고민하고 피를 토하는 마음을 가지고 설교하셔야 합니다. 이것을 나는 토혈의 목회라고 부릅니다. 피를 토하는 목회,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 저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사람들, 이 경전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고 적어도 이곳이,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곳이 하나님이 임재 해 계시다고 하는 것을 인식할 수 있도록 피를 토하듯이 설교하고 살다가 죽어야 합니다.
우리 중에 누가 완전하겠습니까? 우리 중에 누가 하나님 같겠습니까? 우리도 죄인 중에 하나이고 끊임없이 흔들리고 욕망에 시달리고 늘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전하지 못한 것을 당연하게 살아가는 것과 그렇기에 괴로워하면서 어찌하든지 나를 쳐서 복종시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따라 살려고 하는 것, 그것이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확신합니다. 여러분이 말씀에 대한 태도가 바뀌면 교인은 변합니다. 진리는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일수가 없습니다. 진리는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고 그러나 어디서든지 정말 피를 토하는 열정으로 그 진리를 참으로 외치면 그 어둠속에서 그 말씀을 붙들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수일수도 있고 소수일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닙니다.
큰 교회 해보니까 재미없습니다. 제 생애 가장 행복했던 때는 250명 정도 교인들이 모였을 때입니다. 그 교인들은 정말 말씀 사모했습니다. 주일 설교를 두 시간 반쯤 해도 요동도 안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목회자의 행복이라는 것이 뭐겠습니까? 교회가 커지면 대우도 좀 낫게 해주고 편한 것도 있겠지만 그게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찬양)
이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교회가 어둡고 침체되어 있는 것은 교인들 책임이 아닙니다. 목회자의 책임입니다. 목회자가 목숨을 걸고 그렇게 해야 합니다. 내가 보기에는 한주만 그렇게 해봐도 교회는 느낄 것입니다. 6개월만 그렇게 하면 교회가 뒤집힐 거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또 하나 강조해야 할 것은 교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교리를 잘 가르쳐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강한 힘은 어디에서 있는가 하면 두 가지입니다. 지식의 힘과 윤리의 힘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사상의 힘과 도덕의 힘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웬만하면 흔들리지 않더라. 왜? 자기 나름대로의 확고한 사상과 세계관과 인생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있습니다. 그것을 요즘은 젊은 교인들이 교회에서 지적인 것이 안 채워지니까 자기들끼리 모여서 이 책 저책 읽으면서 보충을 합니다. 원래는 설교를 통해서 그것들을 심어줘야 합니다. 이 세계가 어떤 곳이고 인간이 누구이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설교하는 것입니다.
장중한 울림과 외침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하고 그 후에 필요한 것이 교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교리를 차근차근히 가르쳐야 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거듭나지 않고 교리를 모르는 사람은 목회자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목회자가 세례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교회를 허무는 아주 중대한 범죄입니다. 철저히 가르쳐야 합니다. 교인 하나가 교회 오면 와준 것 자체가 너무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빨리빨리 세례를 줍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허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거듭나지도 않고 하나님의 교리도 모르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성장해서 집사가 되고 안수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어서 그건 아닙니다.
그럼 물으실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합니까? 우리 교회 이야기를 하자면 우선 교역자들이 면밀하게 살펴서 정말 이 사람이 구원 받은 사람인가를 검증합니다. 검증이 되면 학습교육을 받게 합니다. 한 달 동안 매주 한 번씩 모여서 교육을 받고 책도 읽고 리포트도 내야하고 설교 테이프도 들어야 하고 당회에서 문답을 합니다. 목사 한사람, 장로 한사람, 이렇게 해서 교리를 물어 봅니다. 총회에서 나온 교리문답, 세례문답을 완벽하게 외워야 합니다. 못 외우면 떨어트립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다시 시험 볼 기회를 줍니다. 그러면 당회에서 면접한 결과로 합격을 시킵니다. 그리고 일 년 후에 세례문답을 합니다. 그때 교육을 받고 똑같은 시험을 다시 봅니다. 안 되는 사람은 떨어트리고 세례를 줍니다. 교리교육을 철저하게 시킵니다. 결혼을 한다고 하면 그 남녀가 결혼교육을 받고 교리교육을 받고 교리문답을 통과해야 합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 시험을 통과해야지만 교회를 빌려줍니다. 물론 세례교인이라야 하고 주례를 서줍니다. 시집 장가가서 아이를 낳습니다. 첫 아이를 유아 세례 때도 똑같이 부부가 나와서 한 달 동안 교육 받고 그 대신 3년 안에 결혼했으면 안 받아도 되고 시험만 보면 됩니다. 시험보고 당회에 면접하고 유아세례를 줍니다. 서리집사 될 때도 똑같이 그 과정을 거치고 안수집사 될 때에는 교리반에 들어와서 6개월 동안 루이스 벌코프의 『조직신학개론』을 가지고 공부해서 중간고사, 기말고사, 95점을 맞아야 합니다. 그리고 안수집사가 됩니다. 장로가 될 때에는 고급 교리반에 들어와서 기독교 강요 2000페이지를 가지고 14주 동안 교육을 받고 그 책을 모두 한번 읽고 시험도 보고 리포트도 냅니다. 90점 이상 나와서 자격이 주어지면 선거에 나올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그렇게 해도 만족스럽지가 않은데 완벽하게는 할 수 없지만 최선을 다해서 이 교리를 가르치고 기독교인은 어떤 사상을 가지고 살아야 되는가라고 하는 것을 확고하게 수립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번에 주기도문 책을 내놓으면서 간절하게 목회자들에게 촉구했던 것이 그것입니다. 이것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가르치자. 주기도문만이라도 잘 가르치면 교인들이 이렇게 황당하게 신앙생활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간절히 붙잡아 놓고 네 달 내지 육 개월 동안 잘 가르쳐서 예수 믿는 근본 도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하고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기도하면서 예수님을 본받아야 될 것인가 하는 큰 골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한 번에 짧은 시간 안에 기독교의 진리가 무엇이고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떤 삶이어야 하는 것을 배워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다 파편적인 이야기를 듣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정리가 안 되고 소화되지 않은 음식처럼 떠돌아다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힘은 사상의 힘입니다. 그 다음에 윤리의 힘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 사람한테 욕먹을까봐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그게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잘 드는 비유인데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맛보기입니다. 그 대표적인 도시가 빌립보입니다. 빌립보는 로마가, 로마는 정말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도시인데 로마제국이 너무 넓어서 다 와서 로마를 한번 보고 갔으면 좋겠는데 보여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 비슷하게 만들어서 세운 도시가 빌립보입니다. 빌립보에 와서 보면 로마가 이렇게 생겼겠구나. 하고 자부심을 얻고 돌아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로마를 생각나게 하는 빌립보 도시처럼 하늘나라를 생각나게 하는 영적인 빌립보가 어디냐 하면 교회입니다. 우리는 그 하늘나라를 생각나게 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이 세상 나라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윤리적인 생활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손가락질하니까 교회가 이런 착한 일도 한다. 이런 일도 한다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때문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독교인의 독특성입니다. 당연히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세금 잘 내고 정직하게 기업을 운영하고 뇌물주고 그러면 안 되고 정직하고 꼿꼿하게 걸어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은 저렇게 살아가는구나. 이 세상에 잘못된 세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소명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러한 삶을 살다가 세상에 미움을 받고 장렬하게 순교하는 상황이 와도 그냥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 복음서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종합하면 매순간 죽을 각오로 하고 살아가는데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사상에 있어서 구별되고 윤리에 있어서 구별되는데 똑같은 죄의 본성을 가진 우리들이 어떻게 올바른 사상을 갖고 그 사상을 삶으로 구현해 낸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핍박도 받고 손해를 받습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브리지의 역학을 해주는 것이 하나님이 은혜입니다. 이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예배 시간에 주님을 깊이 만나고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고 새사람이 되고 하면서 사상과 윤리가 하나의 조화를 이루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그런 일들의 모본을 보여주어야 할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다음에 그림을 보면 어느 학교가 나옵니다. 독일의 할례 대학교입니다. 지금은 엄청나게 큰 대학교인데 이게 경건주의가 일어나면서 슈페너 같은 사람들이 경건주의를 일으키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복지에 대해서 마음을 쓰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최고의 자선의 행위는 자녀들을 교육시키는 것입니다. 한 달에 생활비 몇 푼 도와주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잘 교육을 받고 대를 물려서 계속되는 실패한 삶을 사회주류 속에 들어가서 회복할 수 있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누가 그러는데 개천에서 용 나오는 일이 옛날에는 가능했는데 지금은 안 된답니다. 왜냐하면 서울대학교 들어가는 아이들 거의 60%가 강남 출신입니다. 부잣집에서 충분한 지원을 받으면서 학원 다니고 미리 공부하면서 실력을 키워가는 것입니다. 그런 애들은 자식을 낳아도 또 교육을 그렇게 시키고 해서 교육의 불균등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위해서 복지 시스템을 만나고 그 일환으로 만든 것이 할례 대학입니다.
그림을 보여주는 이유는 그때에 경건주의 운동을 하면서 우리가 교리에 너무 치우치지 않았느냐, 교리보다는 삶이다. 교리를 무시합니다. 이백년 후에는 저 대학이 처음에는 경건주의로 세워졌는데 자유주의를 받아들이는 선두의 대학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완전히 자유주의입니다. 뒤에 보면 프란시스 튜레틴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이 사람은 17세기의 신학자인데 칼빈이 세운 제네바 아카데미를 운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명한 학자입니다. 이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모든 교리적은 삶이 실천을 수반하지 않는다면 어떤 지식도 참된 것일 수가 없다. 모든 삶은 지식의 기반위에 모든 지식은 삶의 실천으로 이 수난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그 당시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이치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철저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오늘날 무너진 교회의 도덕생활과 교인들의 파고들어오는 세속주의 이런 것들은 단지 사람들이 나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그런 삶 말고 어떤 식의 삶을 살고 우리들이 알고 있는 지식과 그리스도인의 헌신된 삶이 어떻게 연결되어져야 하는 것들을 고민하면서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다음 사진을 보면 페트루스 판 마트리히트라고 하는 17세기 화란의 신학자가 나옵니다. 우트레히트 대학의 교수로 있었던 사람이고 굉장히 훌륭한 학자였습니다. 신학적으로 엄청난 깊이의 책을 쓴 분입니다. 이 사람이 TPT라는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썼습니다. 교리는 혹은 신학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향해서 사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 여기서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신학교의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를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교리를 배우게 하는 것이다. 혹은 신학을 공부하게 하는 것이다. 중요한 모든 지식의 본질을 하나님을 향해서 사는 것입니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입니다. 교회에서 교리교육을 시작하셔야 합니다. 목사님들이 먼저 잘 배우시고 철저하게 배우시고 교리를 온전하게 가르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이런 일에 정말 진실하게 헌신했던 사람이 16, 17세기에 영국의 청교도들이었습니다.
세 번째를 넘어가면 리처드백스터의 글이 나옵니다. 화면에 보면 리처드백스터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 분이 바로 그 유명한 키더민스터에서 목회하던 17세기의 청교도였습니다. 옆에 보면 마더스캐터키즘이라는 책이 나옵니다. 다음 그림 보면 키더민스터에서 목회하던 곳이 있는데 동상이고, 리처스 백스터가 시무하던 교회가 바로 그 다음에 나옵니다. 굉장히 큰 교회이고 저기에서 목회하다 쫓겨나게 됩니다. 청교도들에게 설교권을 박탈하면서 영국 왕실이 축출합니다. 아직까지도 사백년의 세월이 지났는데 저 목회자를 그리워하는 성도들이 있다는 사실을 제가 확인을 하면서 많이 놀랐습니다. 역사적인 상황을 이야기하면 훨씬 더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다음에 어머니의 교리문답이 나옵니다. 여기에 그대로 쓰여 있습니다. 얘야, 이리 오너라, 교리 문답 배우자. 아이가 엄마 교리 문단이 뭐야? 엄마가 대답합니다. 교리는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네가 꼭 알아야 되는 것들이다. 아이가 왜 그것을 꼭 알아야 되요? 엄마가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너에게 알라고 하셨고 그 지식이 없으면 좋은 사람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을 향해 복된 사람이 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아이가 묻습니다. 다른 애들은 그런 것 안 배우고 잘 지내는데요? 엄마가 대답합니다. 얘야, 신경 쓰지 마라 그 사람들은 모두 짐승이란다. 너는 사람이니까 배워야 한다. 청교도들은 기독교에 관한 지식을 모르면 짐승과 같다고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여러분이 먼저 목회자들이 모여서 그런 교리 학교를 하십시오. 그것은 강사가 안하고 신학교에서 배운 것이니까 여러분 스스로 공부해야 합니다. 잘 정리한 다음에 교재를 만들어서 성도들에게 담임목사님이 직접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 사람들이 교리를 배우는 즐거움을 가질 수 있도록 그것을 어떻게 삶에 적용하며 살아야할지를 배우게 하는 것입니다.
다음다음 그림을 보시면 제가 말씀드린 사상과 윤리 은혜의 관계를 설명하는 도표가 나옵니다. 한쪽 기둥은 사람입니다. 한쪽 기둥은 윤리입니다. 알게 하고 아는 것을 그대로 살게 하는 실제적인 힘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오늘날 기독교 교육의 수준을 너무 형편없이 낮게 잡아서 교인들을 설교 이외에는 거의 가르치는 것이 없습니다. 그나마 제자훈련을 하는 교회에서는 나름대로 뭘 가르친다고 하지만 그런 정도의 가르침 가지고 안 됩니다. 훨씬 더 깊이 있는 가르침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여러분이 다음 그림을 보시면 헤르만 바빙크가 마그넬리아데이라는 책을 보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일, 혹은 개혁주의 신학서론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이 된 책인데 대학생들도 꽤 읽기 어려워하는 책입니다. 화란에서 맨 처음에 나왔는데 화란 농부들이 밭 메러 갈 때에 구르마 뒤에다가 실고 가는 책이었답니다. 하루 종일 밭 메다가 나무그늘에서 새참을 먹을 때 농부들이 저책을 펴놓고 읽던 책입니다. 교회 교인이라고 하는 것은 목회자가 어떤 방향으로 잡고 가르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교육을 초등학교에 들어가지 않는 아이들에게 가르칩니다. 어려서부터 굳건하게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뚜렷이 가지고 살아가도록 만들고 1년에 한 번씩 담임목사와 함께 하는 회심 집회를 엽니다. 온 교회와 목회자들과 교사들 부모들이 아이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어쨌든지 복음을 전해서 아이들이 회심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방법은 끊임없이 만들 수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기독교의 본질적인 모습으로 돌아가려고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많은 성공을 못 거둘 수는 있지만 그 모습을 하나님이 얼마나 예쁘게 보시겠습니까? 시류에 휩싸이지 않고 모두들 편안한 길을 가려할 때 토혈의 정신을 가지고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길을 가려고 몸부림치는 그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겠느냐 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다음에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교회에서 책을 읽혀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 중에 도서관을 가지 있는 교회가 얼마나 됩니까? 큰 교회만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쪽 구석에라도 책장을 놓고, 성도들이 기증하는 책을 갖다 놓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책은 검증이 안 된 책입니다. 모르면 신학교 교수님의 도움을 받아서 정통적인 신앙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요긴한 책들로 한 아름 가득 채우고 성도들에게 끊임없이 그 책을 읽도록 요구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그런 운동을 안 합니다. 가장 커다란 이유가 목사님들이 독서를 안 합니다. 독서를 안 하는 이유는 교인이 독서하는 것 싫어합니다.
어느 교인이 서점에 갔다가 목사님 생각이 나서 앤드류 머레이의 『겸손』이라는 책을 샀답니다. 목사님한테 선물했는데 그것 때문에 목사님하고 관계가 깨어진 것입니다. 이 성도는 너무 좋은 책이어서 아무 생각 없이 포장을 해서 목사님께 드렸더니 어느 날 부르더랍니다. 내가 교만해 보입니까? 아니 왜 그럽니까? 또 하나 있습니다. 어느 성도가 제가 초창기에 쓴 책 중에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는 책이 있습니다. 은혜를 받고 우리 목사님 읽었으면 좋겠다고 선물했는데 관계가 깨어져 버렸답니다. 부르더니 요즘 내 설교가 마음에 안 듭니까? 목사님들이 왜 그럽니까? 사다주면 감사하다고 읽으면 됩니다. 저 자식이 나를 교만하게 보는구나, 내 설교가 아무래도 신통치 않다고, 자격지심입니다. 얼굴이 예쁜 여자는 얼굴도 못생긴 게 해도 생글생글 웃습니다. 진짜 못생긴 사람은 잘생기지도 않은 얼굴이 하면 화를 내며 내 얼굴이 어때서 그럽니다. 어떻긴 뭐가 어떻습니까? 자기도 거울 보면 못 생겼습니다. 결국 자기 자신의 자격지심입니다. 목사님들이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권해야 합니다.
서 네 장 넘어가면 다니엘 웨프트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이 18세기 미국의 정치가요 법률가였는데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만약 신앙서적들이 우리나라 대중들에게 광범위하게 유포되지 않고 신앙적인 사람이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진리가 확산되지 않는다면 오류가 지배할 것이고 말씀이 전파되지 못한다면 마귀가 승리할 것입니다. 복음서적들이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타락하고 음란한 책들이 판을 치게 될 것입니다.
마귀가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능력이 아니라 밝은 진리의 빛입니다. 여러분 깨끗하고 소독이 잘 되고 햇빛이 잘 들어오는 집에 지렁이가 사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진리의 빛이 사라지는 곳에서 온갖 더러운 마귀의 권세가 힘을 얻는 것입니다. 일단 그대로 살지는 못해도 진리를 참답게 가르쳐서 이것이 참 진리구나를 깨닫기만 해도 말도 안 되게 살지는 않습니다. 가르쳐야 합니다. 열심히 독서해야 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그랬습니다. 책읽기가 싫으십니까? 목사의 소명이 아닐 것입니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진리를 다루는 사람이니까 열심히 읽고 좋은 책을 소개해 주어서 잘한 사람은 칭찬하고 상도 주고 그 책에 대해서 평가도 내려주고 읽은 사람과 함께 대화도 하고 목사로서 권위도 서지 않겠습니까? 중요한 것입니다.
앞으로 사회는 정말 심각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떠밀리듯이 이 세상의 쾌락과 세속주의 물결 속에서 흔들리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점점 예수를 안 믿으려 할 것입니다. 낙심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절대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 속에서 정말 곤고하고 허망하게 느끼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기독교가 얼마나 위대한지 기독교 신앙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사람들이 쿵 하는 충격을 받으며 하나님 앞에 새로운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