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위한 마음의 고통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1-3)
I. 본문해설
로마서 8장에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생명과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저희를 해방하였음이라”고 말입니다. 이후로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을 얻은 사람들의 행복과 승리에 대해서, 성결한 삶에 대해서 노래한 후 8장 마지막에 와서는 “환난이나 깊음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그 모든 것들로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승리에 찬 감격으로 노래했습니다.
II. 골육지친을 향한 고통
9장에서 갑자기 슬픔에 찬 음성으로 울먹이듯이 자신 속에 일어나는 어떤 마음의 움직임을 토로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의 골육지친, 사랑하는 동포들을 향한 견딜 수 없는 근심이었습니다. 그 근심에 대해서 그는 골수에 사무치는 근심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원래 이 골수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등뼈 가운데 있어서 거기에서 피를 구성하는 중요한 생명적인 성분들이 생산되는 곳입니다. 골수는 우리의 육체에 있어서 생명의 근원이라고 할 만큼 매우 중요한 곳이 바로 골수입니다.
1. 골수에 사무친 근심
오늘 여기서 선지자가 자신의 골수에 사무친다고 이야기하는 이것도 육체가 아니라 정신이니 하나의 비유입니다. 이 ‘골수에 사무친다’라고 하는 이야기는 자신의 마음과 영혼의 깊은 중심의 치명적인 자리에서부터 시작되는 근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도 위로 받을 길이 없는 견딜 수 없는 치열한 고통과 아픔이 자신 속에 있다라고 하는 것을 이 사도가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도 한때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단의 괴수라고 생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나사렛에서 자라난 목수인 이 젊은이가 결코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독생자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랜 세월을 그렇게 하나님 대적하는 원수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에 이 사람의 생각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자기의 죄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며 구약의 많은 역사가 이 한 사람을 보고 달려왔고 이 땅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는 육적 이스라엘의 왕국이 아닌 영적인 왕국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이 사람의 눈은 떠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라보니까 주위에는 이러한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짐승처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사도는 주님을 만난 이후로 복음을 전파하는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이 복음을 전했을 때에 정말 하나님을 모르는 무지와 어둠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오는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 놀라운 회심을 볼 때마다 그의 마음속에는 아련히 떠오르는 동족의 대한 슬픔이 있었습니다. 그것들이 오늘은 이 사도의 골수에 사무치도록 경건한 근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내 동포, 내 골육, 내 친척, 내 겨레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로 선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주신 가장 중요한 선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골수에 사무친 근심은 완강하기 짝이 없어서 결코 예수 믿지 않는 이 고통스런 현실을 보면서 사도는 이어서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고통을 묘사를 합니다.
2. 아나데마의 정신
만약에 내 골육 친척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내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나는 원하는 바로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여기에서 “저주를 받아” 이 부분이 희랍어 성경의 아나데마(ἀνάθεμα) 그야말로 천벌을 받아서 몸과 마음과 온 영혼이 하나님의 형벌을 받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끊어진다고 했는데 이것은 지옥 형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러한 삶의 태도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이런 마음의 태도는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물려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사람의 몸을 입어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일생을 영혼들을 섬기다가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구약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표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저주를 담당하신 이유는 우리들이 지은 모든 죄가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을 죄인데 만약에 그 저주를 우리에게 부으시면 우리는 아무 희망이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구원의 은총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하나님 앞에 형벌을 받아 저주 받은 자가 되신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저주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는 내가 당하여야 할 모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의 형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받으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번도 하나님 아버지와 끊어져 본 적이 없으신 분인데 스스로 이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끊어 내침을 당하므로 말미암아 죄를 지어서 하나님과 끊어진 우리를 다시 하나님과 붙여주시는 역할을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고백하고 있는 것은 자신을 하나님과 다시 연합시켜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처럼 이번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주 받을 자기를 위해 대신 죽으셨으니 그 예수 그리스도께 사람들을 인도하기 위해서라면 예수님이 죽으신 것처럼 자기도 저주를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진짜 영원한 형벌인 지옥에 들어가겠다고 하는 뜻이라기보다는 십자가에서 백성들의 죄를 지고 하나님과 영적인 단절에서 고통을 받으심으로써 백성들을 구속하셨던 것처럼 자기도 또한 하나님 앞에 희생의 제물로 바쳐져 영혼을 하나님께 인도하고 싶다라고 하는 고백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이것이 아나데마의 정신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람들에게 말할 때 우리 남편은 아직 마음이 강퍅해서 하나님께 돌아올 때가 되지 않았다. 우리 가족들은 추수할 때가 되지 않았다. 우리 자녀들은 아직은 하나님 앞에 회심할 때가 이르지 못하였다라고 말합니다. 누가 그렇게 잘 알 수 있겠습니까?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는 주님만이 아시고 우리는 추수를 해 봐야 합니다. 사실은 가족들이 강퍅해서 안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 이 아나데마의 정신이 부족하기 때문에 가족들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아나데마의 정신을 가지고 산다고 이야기하니까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평안하고 기쁨이 넘쳐야 하는데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를 받아서 끊어지는 것같은 고통이 있다면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묻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적인 정서에서 보면 기쁨이 있는 인격 그 속에 슬픔이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세계에서는 동시에 이 두 가지 감정이 함께 있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가거를 돌아보면 우리가 가장 행복했던 때는 사실은 가장 고통스러웠던 때였습니다. 다만 그 고통의 이유가 자기 중심적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이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난 다음에 그 사랑과 은혜를 깊이 깨닫고 그 사랑을 체험하고 나니까 이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서 그들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이 생겨나고 그들을 위해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되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영혼, 하나님을 향하여 배역하는 영혼들을 향해 흘리는 그 눈물이 어떤 아픔인 지는 경험해 본 사람이 아니고는 모릅니다. 애를 낳아보기 전에는 해산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모르듯이 영혼을 위해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찢어본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고통입니다. 그런 고통이 있었을 때에 그 고통을 느끼는 순간에는 아팠지만 그러나 그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바로 그때에 우리는 이 세상 어느 때보다도 예수께 가까이 있었고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있는 합일을 경험하면서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뜨거운 고통의 눈물로 기도를 시작했다가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 벌레 같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형벌 받고 저주받을 그 자리에서 당신이 대신 받으시고 구원해주신 그 은혜 때문에 기뻐하는 눈물로 변할 때가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우리의 가족들, 우리의 친척, 우리의 이웃이 강퍅해서 예수를 안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이 아나데마의 정신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이 바로 아나데마의 마음입니다. 이 영혼이 진정으로 예수를 믿고 변화되어서 생명과 사랑이신 하나님께 접붙여질 수 있다면 난 아무래도 좋다라고 하는 이 아나데마의 마음이 영혼을 위한 깊은 구령의 기도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마음이 있습니까? 아직까지도 믿지 않고 있는 내 남편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내가 저주를 받아서 예수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나는 원하는 바입니다. 회심을 하지 않은 내 아들이, 내 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때문에 펑펑 울고 교회에 있는 사랑하는 지체들처럼 예수님 사랑할 수 있다면 나는 그 일을 위해 지금 눈을 감아도 좋습니다. 일평생 완고하게 살아온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노년에 예수를 믿고 그 생명의 은혜 가운데 살 수 있다면 나는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그러면 누가 불쌍한 사람들입니까? 그런 기도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불쌍합니까? 아니면 그런 기도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심령이 부패해 버린 우리들이 불쌍한 사람들입니까? 이 세상에서 신자의 영혼, 마음이 가장 순결할 때가 영혼이 불쌍해서 뜨거운 눈물을 흘릴 때 그때 그에게는 세상 사랑이라고는 없습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영혼을 뜨겁게 사랑한다면 거기 하나님이 안 계시면 누가 있겠습니까? 또 한 사람의 신자가 우리 주님을 뜨겁게 사랑한다면 거기에 잃어버린 영혼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가정을 주님께 인도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족들은 가족에 대해서 권위가 없습니다. 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뻔히 다 보니까 어느 날 정색을 하고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이 아나데마의 정신이 있다면 나는 저주를 받아 끊어질지라도 더 이상 가족들이 구원받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 엄밀한 의미에서 죽어가는 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 아나데마의 정신으로 살아갈 때 우리의 가족들은 반드시 구원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3. 주님의 정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의 시간과 정열을 바치셨던 몇 가지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렇게 영혼을 위하여 아나데마의 정신으로 섬기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고 슬퍼하신 것은 바로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영혼들을 향한 눈물이었습니다.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영혼들을 보시면서 그분의 심령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셨습니다. 그렇게 아파하실 때 주님의 마음은 내가 그 고통을 당하더라도 내 양떼들이 하나님께 돌아와 행복을 누릴 수 있다면 기꺼이 하겠다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신 철저한 자기희생은 바로 이런 아나데마의 정신이 예수님의 마음에 가득 찼던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을 때에 그것은 우리가 올라야 될 언덕이었는데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세상 모두 사랑없어 냉랭함을 아느뇨 아이들도 소리질러 사랑요구하도다]
태어나서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분이 아나데마의 정신으로 십자가를 대신 지시고 죽으시고 우리에게는 생명을 주셨습니다.
기독교의 영성은 사랑의 영성입니다. 산을 옮길 만한 믿음도 이 영성의 고매함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천사의 말이나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는 능력도 그가 얼마나 깊이 십자가의 사랑에 감화된 사람인지 보여주지 못합니다.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 헌신도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을 입증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영혼을 향한 사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하나님의 놀라운 십자가의 은혜 때문에 이런 크신 구원의 은혜를 못 받은 방황하는 영혼들에 대한 슬픔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은 그 사람 안에 이미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영성의 최고봉은 온전히 예수 닮은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주님이 지금 살아계셨더라면 내 자리에서 부여안고 눈물을 흘렸을 영혼들, 사랑하며 섬기셨을 영혼들을 보기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그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에 자기를 소진하는 것, 이것이 바로 기독교 영성의 핵심입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버려진 영혼들을 위해서 특히 내 골육, 친척, 내 가족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제일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말로써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전하는 그것은 우리가 간접적으로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 알게 해 주는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구원의 도구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다. 화요 여리고 전도 거의 100명이 나옵니다.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아직 멀었습니다.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이 수십 만 명의 사람들이 인근에 있습니다. 화요일에 2시간 정도 봉사합니다. 직장 출근으로 도저히 섬길 수 없는 사람, 질병에 누워있기 때문에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 할 수 없는 사람, 피치 못할 일로 가정에 묶여있는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여기에 나와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집이 먼데 잠간 복음 전하려고 멀리 갈 수 있습니까? 이것도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선한 목자는 산 넘고 물 건너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예수 믿게 만드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절실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많은 것 가운데 일부를 드린 것은 하나님께 귀한 것이 아니지만 아주 적은 것 가운데 전부를 드린 것은 하나님께 소중한 일입니다.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이 복음을 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마 저는 조사해보지는 않았지만 나올 수 있는 분이 500명도 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와 핑계로 섬기지 않습니다. 있는 처소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며 사느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지금부터 한 20년 전에 제가 이름 모를 병에 걸렸습니다. 머리가 아픕니다. 사역이 많았고 공부도 많았습니다. 그냥 아픈 정도가 아니라 두통약을 한줌씩 먹어도 멎지를 않습니다. 마치 면도칼을 뇌 속에 집어넣고 살살 찢어내는 것처럼 아픕니다.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프기 시작해서 계속 아픕니다. 500m만 걷고 오면 몸이 천근처럼 무거워지면서 드러누워야 합니다. 병원에 가서 진찰을 해 봐도 별 소견이 없습니다. 어떤 지체가 소개를 해 주어서 동네 약국에 갔습니다. 진맥을 하더니 약사 하는 이야기가 내가 확실히 고쳐줄 테니까 투자를 하겠냐고 합니다. 한약을 200첩을 먹으라고 합니다. 한재를 지어주면서 7만원을 받는데 이것은 한 달 사례금이었습니다. 먹을 수가 없어서 교회에 있는 한의원 약사에게 부탁을 해서 똑같은 것을 지어달라고 했더니 한재에 12,000원이라고 합니다. 정말 200첩을 먹었습니다. 이것을 먹고 씻은 듯이 낫습니다. 그 후에 일입니다. 나처럼 비슷한 병에 걸려 고통을 받는 사람이 꽤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콩팥이 나빠지면 그렇게 된다고 합니다. 콩팥과 폐가 몸의 산소를 공급하는 중요한 호흡기 역할을 하는데 산소가 걸러지지 않으니까 골이 그렇게 아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내 말을 안 믿습니다. 당신 나와 증세가 똑같기 때문에 그 약을 먹으면 낫는다고 하는데도 말을 안 듣습니다. 답답해서 그때나 이때나 내가 한가롭게 산 적이 없지만 그 사람을 데리고 청량리까지 가서 지어주고 그 중에 우리 교인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내가 가서 약을 지어 선물을 해 준 사람도 있습니다. 내가 먹어서 분명한 효과를 보고 체험이 있으면 사람들이 불쌍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 고통에서 벗어날 길이 있는데 왜 그렇게 사나? 하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우리로부터 복음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불쌍합니까? 그 십자가의 사랑이 식어졌기 때문에 복음을 안 전하고도 살 수 있는 우리 영혼이 불쌍합니까? 의무가 아니라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식어진 십자가 사랑, 복음에 대한 적은 열정,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 같은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이 복음 앞에 감격을 하며 어린 아이처럼 눈물을 흘리던 순수한 사랑을 잃어버린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누가 더 불쌍한 사람들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전해야 됩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진지하게 말하고 싶습니다. 직장 다니는 남성들은 어쩔 수 없지만 집에서 화요일 그 시간에 가만히 있는 자매들은 왜 그렇게 합니까? 나와서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전하면서 내 속에 불이 생깁니다. 왜 거기는 전부 다 아줌마들만 나와야 합니까? 직장 안 다니는 청년들 나와서 복음을 전하면 안 됩니까? 나와서 하나님이 나에게 직장 주실 때까지 천국 사역하라고 나를 이렇게 시간을 주셨구나 하고 나와서 결혼한 성도들과 함께 손잡고 다니면서 아이들에게 청소년들에게 만나는 동네 아줌마 아저씨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살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반드시 결혼해서 애 가진 아줌마들만 나오는 것이 여리고 전도입니까?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III. 골육지친의 구원을 위해
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깨어 일어나 복음을 전하는 여러분들 되길 바랍니다. 이렇게 말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3가지를 해야 합니다.
1. 사랑하라
영혼을 깊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 가족들에게 복음을 못 전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복음을 전하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자신 있게 전할 수 있으리만치 사랑하는 것이 힘들어서 이 복음이 안 전해집니다. 이제 다음 주부터 가정의 달입니다. 열린교회에서 예외 없이 가정 시리즈가 시작됩니다. 그렇게도 슬퍼하고 회개하고 울 것 아닙니까? 깨뜨려진 부모와 자식의 관계, 조각난 남편과 아내의 관계, 삐뚤어진 자기 자식과 부모인 자기와의 관계, 파산난 동기간들의 관계 이것들 때문에 아파하면서 눈물 흘릴 것 아닙니까? 사연은 무지개빛깔처럼 여러 가지이지만 해결책은 오직 하나입니다. 모두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나 혼자 회개할 뿐 아니라 내 남편도 아내인 나에게 잘못한 것을 회개하고 올바른 길로 돌아오고 우리 부모도 우리 자식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한사람 한사람이 예수 찾아 가니까 예수님을 중심에 놓고 모두 모이는 것이 됩니다. 가장 빠른 해결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족들에게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맺힌 것을 풀어야 영혼이 삽니다. 용서해야 합니다. 깊이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예수 믿는 사람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에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그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 복음 듣고 눈물 흘리며 회개할 사람들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선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 정신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깊이 사랑해야 합니다. 내가 마음으로 우리 아버지를 미워하는데 복음 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엄마하고 맺힌 것을 못 풀고 있는데 그 영혼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 수가 있겠습니까? 내가 내 자식을 정말 용서하지 않는데 그들의 영혼을 진정으로 축복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이 모자랄 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랑으로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끊임없이 참으시고 오래도록 견디신 그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2. 기도하라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헌신하셨던 대부분의 시간들이 기도에 바쳐졌습니다. 이 땅에 계실 때에도 많은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셨지만 특별히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시기 전날 밤 심한 통곡과 눈물로 올리신 기도의 제목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영광과 이 땅에 남겨둔 자기의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이 온 마음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를 열둘을 불러 사도로 보내시기 전에도 예수님은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의 영혼이 가장 순수 할 때가 두 번 있습니다. 한번은 십자가의 사랑 앞에서 눈물을 흘릴 때와 또 한번은 영혼이 불쌍해서 울 때 그때에 신자의 영혼은 가장 순수한 상태가 됩니다. 그렇게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울고 영혼에 대한 사랑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동안에는 이 세상에 대한 욕심이나 자기 사랑 같은 것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주님이 원하시는 뜻이면 다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쪽지에다 몇 사람 이름 적고 덜렁덜렁 들고 다닌다고 절대로 구원에 이르는 것 아닙니다. 영혼을 위해서 깊이 눈물을 흘리며 그 영혼을 가슴에 품고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날 위해 기도하셨던 것처럼 깊은 사랑으로 구원받지 못한 영혼의 고통 하는 신음하는 소리를 느끼기까지 하나님 앞에 가슴을 쥐어짜는 탄식으로 그 영혼의 고통을 내 고통인 것처럼 느끼며 기도할 때, 그때에 하나님은 그 기도에 귀를 기울이셔서 그렇게 기도하는 동안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시고 간절하고 절실한 기도 속에서 얼음장같이 차가왔던 그들의 마음을 녹이셔서 십자가의 사랑 앞에 무너지게 하십니다. 주님의 은혜 앞에 녹아지게 하셔서 십자가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이 세상에 정말 복 된 사람들은 누군가로부터 이런 애절한 사랑을 받아본 사람입니다. 나는 날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없는데 누가 내 영혼의 고통을 알아주고 깊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 준다는 것 말할 수 없는 행복입니다. 그 탄식과 눈물로 가슴에 품은 영혼을 깊이 적실 때 거기에서 영혼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닭이 알을 품고 21일 동안 꼭 품고 떠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품은 달걀은 병아리가 되고 품다 포기한 달걀은 곤달걀이 되고 아예 품어보지도 않은 달걀은 그냥 그야말로 계란으로 남는 것입니다. 똑같이 우리가 그 영혼을 가슴에 깊이 품고 주님 앞에 기도한다면 강퍅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돌아오지 않는다고 쉽게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모두 불쌍히 여기는 영혼들인데 그 영혼을 당신 대신 가슴에 품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영혼을 위해서 눈물 흘리는 사람들을 보실 때 주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골육, 우리의 친척, 내 주변에 있는 늘 만나는 사랑하는 사람들, 이 세상에 누가 그들의 이름을 이렇게 품고 기도해 주어 보았을까요? 주님의 사랑을 안 우리가 해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3. 희생하라
희생해야 합니다. 주님의 생애가 우리 마음을 그렇게 녹인 것도 바로 그것 때문 아니었습니까? 흠도 없으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당신에게 있는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쓰셨습니다. 마지막에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복종하시되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했습니다.
자기는 그 고통스런 인생의 과정 때문에 예수님 만났으면서도 여전히 용서하지 못하는 부모에 대한 미움을 품고 어떻게 그 영혼을 주님께 인도할 수 있겠으며 몇 푼 안 되는 돈이나 이해관계 때문에 형제들과 척지고 살면서 어떻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도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손해를 봐야 합니다. 어차피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은 충돌을 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고 남이 받지 못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 양보해야 합니다. 그들을 깊이 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모르고 상처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품는 다는 그 자체가 가시넝쿨을 품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의 사랑을 받는 것은 재미있지만 그 사랑을 사람들에게 펼치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의 십자가를 지고 희생의 길을 걸어갈 때 그 사람 속에는 예수님이 항상 살아있습니다. 그 희생의 길을 걸어가면서 그것이 힘들 때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자기를 버리신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을까요? 그것이 힘들다고 생각될 적마다 우리는 자기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죄를 발견합니다. 정말 무지하고 몽매한 인간이구나 하는 것을 깊이 깨닫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참회하고 뉘우치고 새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희생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할 사람들을 위해서 항상 희생해야 합니다. 마음에 맺힌 가족들이 있으면 용서하고 여러분들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들이 있으면 손해를 주목하지 말고 그들이 받았을 고통을 생각하면서 오히려 여러분들에게 손해를 입힌 형제들에게 더 보태주세요. 사랑을 베푸세요. 그것이 결국은 자기 자신의 영혼을 향하여 돌아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를 얻기 위해서 바로 그런 희생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Ⅳ. 결론과 적용
사랑하는 여러분, 영혼을 가슴에 품으십시오. 특별히 골육, 친척, 내 사랑하는 형제들, 내 부모, 내 동기간, 내 자신, 회심하지 않은 우리 새끼들, 남편과 아내를 가슴에 품으세요.
하나님, 이들이 아직까지도 주님께 돌아오지 않은 것은 이들의 강퍅함 때문이 아니라 내가 이들을 위하여 아나데마의 정신으로 기도하지 못하는 나의 강퍅함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나를 녹여주시옵소서.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이 길에 희생하는 그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어여삐 보시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