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려를 극복하는 길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2)
녹취자: 김경애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믿는 것이죠. 그렇지만 일단 믿고 나면 자신이 믿는 그것이 왜 그렇게 옳은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을 때 믿음은 오히려 견고해지는 것이죠. 그래서 잘 믿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그 믿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 하고 또 자신이 믿는 신앙의 근거를 잘 이해할수록 자기가 배운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더 잘 믿어야 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에요.
오늘 이 시인이 하나님을 자신의 인생의 목자로 고백했습니다. 그 사실은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시인은 2절부터 5절까지 자신이 왜 하나님을 자신의 인생의 목자로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지에 대한 근거를 체험적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2절에서는 공급해주시는 은혜 때문에, 3절에서는 영혼을 소생시켜주시는 은혜 때문에, 4절에서는 절망 속에서 건져주시는 은혜 때문에, 5절에서는 더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주님을 자신의 인생의 목자라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여기에는 최소한 3개의 작은 그림들이 들어있습니다. 첫 번째는 필요한 양식을 공급해주시는 것이고 두 번째는 자신을 쉬게 해주시는 것이고 세 번째는 자신을 물가로 인도해주시는 것인데 약점을 알고 이끌어주시는 인도입니다. 이렇게 공급, 안식, 인도 이 작은 세 개의 그림이 합쳐져서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이라는 큰 그림을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풀밭이 공을 찰 수 있는 운동장이나 소풍갈 수 있는 놀이터 정도일지 모르지만 이스라엘 지방에서 양떼들에게 이 풀밭은 그야말로 양식입니다. 이스라엘을 다녀오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스라엘은 끝없이 넓은 초지로 이어지는 호주나 혹은 뉴질랜드의 풀밭과 같은 그런 풀밭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군데군데 풀들이 있으면 그것을 그저 푸른 초장이라고 사람들이 부르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시인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목자로서 시인의 인생을 인도해오시면서 시인이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의지하게 된 계기가 있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자기의 육신의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시는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이 아버지같이 자기를 돌보고 계시다는 은택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마다 신앙의 단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단계의 수준에 맞게끔 우리들을 대해주심으로써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를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경험하게 만들어주셔서 그로 하여금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시는 것이에요.
저는 결혼을 하고 7년 동안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벌써 특전사로 제대를 하고 이제 장가갈 궁리를 하고 있으니까 세월이 참 많이 흘렀지요. 우리 아들이 5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때 아이들이 하도 좋아하던 TV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닌자 거북이’라는 프로그램이었어요. 캐릭터들도 많이 나오고 그럴 때였는데 우리는 가난해서 그 아이에게 그런 것도 별로 잘 사주지를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쨌든 그럴 때였는데 아침이면 이 아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호들갑을 떨면서 아빠를 찾는 것이에요. ‘아빠!, 아빠!’ ‘왜?’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셔!’ 조그만 아이가 그래요. 그래서 ‘왜 그렇게 생각해?’ 그랬더니 ‘내가 어저께 밤에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잤어 아빠.’ ‘무슨 기도를 했니?’ ‘하나님! 나는 닌자거북이를 너무 좋아하는데 꿈에도 한번 만나게 도와주세요. 그렇게 기도했어. 그랬더니 꿈에 거북이나 나타나서 밤새도록 같이 놀았어.’ 그러면서 이 아이가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시고 자기를 사랑하신다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거예요. 나는 지금도 그게 정말 하나님이 응답을 해주셔서 그 아이에게 꿈으로 보여주셨는지 그냥 꾸게 된 것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하나 깨달은 것이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각자 자기의 수준에 맞게끔 응답해주실 때 그 응답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과 선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의 마음에 아로새겨진다는 것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시인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고 그리고 사울에게 쫓겨 도망을 다니는 기간 중에 정말 인간이 넘기 어려운 고난의 골짜기를 지났습니다. 그리고 굶주림의 경험도 여러 번 했기에 제사장들 이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까지 손을 대었습니다. 이러한 인생의 많은 경험을 거치면서 그는 신앙의 초기 단계에서 아마도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서 하나님만이 나를 돌보신다는 그 은혜의 경험을 절실하게 했던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찾으면서도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하는 존재에요. 그래서 화란의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 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참으로 불가해한 존재이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갈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치는 존재다.’ 라고 말입니다. 똑같이 인간은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을 매우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그 염려와 근심을 놓아버리지 못하는 것이 인간존재입니다. 그래서 한때 실존철학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인간 존재의 근원을, 인간 실존의 근원을 불안에서 찾았어요. 그리고 그 불안은 자유에서 온다고 믿었어요. 하나님이 없다고 뿌리까지 다 부정하고 나면 인간은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아주 자유로운 존재인데 그런데 그 자유는 즐겁고 달콤한 자유가 아니라 무시무시한 자유라고 말했어요. 그게 인간의 존재에요. 잠시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그릇된 삶을 살 때에는 그것이 자신에게 즐거움과 행복을 가져다주지만 그것이 극단화되고 보면 무시무시한 자유가 되어버립니다. 오히려 그때는 속박이 즐겁습니다. 아침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때, 주님께 혼나는 때가 그립고 교회에 와서 올바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을 때 목사님께 야단을 맞던 시절이 그리워지는 것이죠.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은혜에 있어서도 거의 비슷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염려와 근심을 싫어하면서도 그 염려와 근심을 스스로 쫒아가서 붙들고 살려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에요. 어느 권사님이 꿈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꿈을 꾸었는데 참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옛날에 여러분들은 아마 망태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어요. 넝마주이들이 어깨에 메고 다니는 싸리나무가지나 대나무로 만든 커다란 망태입니다. 기다란 집게를 손에 들에 걸어 다니면서 그 망태에다가 휴지나 폐지로 팔 수 있는 것들을 넣고 심지어는 나무 찌그러진 것, 못대가리 등을 다 집어넣어서 메고 다녀요. 물론 사람이 들어가면 대여섯 명이 들어갈 정도의 커다란 망태에요.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가서 다시 분류해서 그것을 팔아서 끼니를 잇던 넝마주이들이 있습니다. 권사님인 자기가 그것을 메고 어딘가를 가는데 그 앞에 시커먼 옷을 입고 누군가가 가면 끊임없이 시커먼 보자기를 집어던지는데 자기는 쫒아가면서 그것을 열심히 집어서 망태에 집어넣더라는 것이에요. 나중에 집어넣다, 집어넣다 무거워서 그 망태에 깔려서 엎드려졌는데도 계속 앞에 떨어진 그 검은 보자기를 집게로 집어서 짓눌린 자기의 망태기에 그것을 집어넣더라는 것이에요. 그것이 바로 인간이에요.
6.25때 미군들이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아이들을 많이 미국으로 데려가서 새 삶을 살게 해주었습니다. 그중에 벤 토이프 라는 장군이 있었고 이 사람이 미국으로 실어가는 고아는 30,000명 정도 되었다고 하니 참 큰일을 한 것이지요. 그 때의 일이었어요. 아이들이 전쟁 통에서 부모를 잃고 이리저리 헤매는 것을 미군 병사들이 데려다가 미군부대에다가 집어넣어 주었습니다. 우선 깨끗이 씻기고 미국에서 가지고 온 구호물자 옷으로 애들을 다 갈아입혔습니다. 배불리 먹고 일찌감치 취침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누워서 불을 끄고 눈을 감았는데도 꼼지락거리면서 자지를 않는 것이에요. 찬송도 불러주고 기도도 해주었건만 그 아이들은 자지를 않았어요. 그래서 미군병사가 통역을 세워서 아이들에게 물어 보았어요. ‘너희는 왜 잠을 이루지 못하느냐? 이제 자거라.’ 그랬더니 그중의 한 아이가 자신들이 자지 못하는 이유인 것처럼 보이는 문제를 제기했어요. ‘아저씨, 좋은 옷을 입고 따뜻한 방에서 자니까 참 좋은데 잠이 오지 않아요. 그런데 내일 아침에 우리는 무엇을 먹지요?’ 이 아이들이 전쟁 통에서 끊임없이 고통을 받으면서 불안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오늘은 맛있는 것을 먹고 편안히 자도 내일 아침에는 무엇을 먹을지 모르는 처지가 된 것이지요. 그래서 그 미군병사가 말했습니다. ‘내일 아침도 여기에는 먹을 것이 많이 있으니 너희를 먹여 줄 것이고 세 밤만 자면 미국에서 비행기가 와서 너희들을 싣고 전쟁도 없고 아무 고통이 없는 곳에서 새 엄마, 아빠와 살게 해주마!’ 라고 말했어요. 그래도 아이들은 잠이 들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이 미군병사가 지혜를 발휘했어요. 커다란 빵 하나씩을 비닐봉지에 넣어서 아이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이게 너희들이 내일 아침에 먹을 양식인데 미리 나누어준다.’ 면서 아이들에게 주었어요. 그랬더니 그 아이들이 그 빵을 받고 나서야 품에 그 빵을 안고 나서야 잠이 들었답니다. 이게 인간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염려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먹고 입고 마시는 그것에 대한 염려는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그 이후로 형벌처럼 짊어져야하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마의 땀이 잔뜩 흘러야 겨우 먹을 수 있는 처지가 되었기 때문이지요. 그 다음부터 인간은 끊임없이 염려합니다.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그것을 끊임없이 고민하는데 이것이 바로 물질문제로 인한 고민이에요. 없는 사람은 그것을 갖지 못할 때 미래에 닥치게 될 불행한 고통 때문에 물질을 끊임없이 욕망하게 되고 이미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에 닥치게 될 고통과 어려움 때문에 잃지 않기 위해서 더욱 불안해하는 것이죠. 그러면서 사람들은 때때로 그 물질로 자신의 육체의 삶을 보증하기 위해서 때로는 범죄하거나 이웃을 해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 것이죠. 실제로 우리 인간은 물질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에 육체는 육체에 필요한 자원을 요구하고 영혼은 영혼에 필요한 하늘의 자원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알맹이가 중요하면 싸고 있는 껍질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육체는 영혼을 싸고 있는 단순한 껍데기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과 정신이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고 영혼이 아무리 예쁘다고 할지라도 그 예쁨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기 위해서는 우리의 육체가 생명과 기력을 유지하고 있어야하는 것이죠. 생명이라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가능성을 매일 매일 실제의 현실로 나타나게 해주는 연결하는 힘이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런 육체의 생명이 있어야지만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일들을 수행하면서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여 살 수 있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살고 섬기고하는 이 육체를 가진 삶이 한정되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아무리 주님의 일을 하려고 애를 써도 나이가 많이 들면 아무도 써주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육체는 매우 중요해서 성경도 성령의 거하시는 전이라고까지 묘사를 하면서 육체를 소중하고 중요하게 돌보도록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죠.
자, 그런데 여기에서 기독교 신앙에서 아주 미묘한 한계점이 두 한계가 여기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처럼 우리의 육체는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그러나 이 육체는 연장과 같아요. 칼이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지만 선한 목적에 사용될 때에 아주 유용하고 선한 것이 되는 것처럼 우리의 육체가 건강과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의 기회에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육체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겨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이 육체를 가지고 탐욕의 기회를 삼아서 교회를 수치스럽게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이웃에게 해를 끼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지으신 목적에 배치되는 삶을 사는 것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영혼과 육체를 공정하게 사랑할 수 있어야 해요. 영혼은 하늘 자원을 필요로 하고 육체는 이 땅의 자원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이 둘 사이에 균형을 이루면서 육체를 부양하기 위해서 먹을 것과 적당한 추위와 더위를 피하고 사람들에게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의복과 그리고 마실 음료, 그리고 거기에는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받을 수 있는 교육의 필요까지 포함이 되는 것이죠. 그런가하면 우리의 영혼은 이 땅에 있는 자원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자원을 필요로 합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곡식을 많이 거두게 되고 창고가 부족했을 때 창고를 지어놓기로 하고 그는 말했습니다. ‘내 영혼아 이제는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그렇게 잔치를 하고 먹고 마시고 쌓아둔 많은 물건을 소비함으로써 영혼은 평화를 누리는 것이 아님을 말씀해주시고자 하신 것이죠.
그래서 한편으로는 우리들이 육체를 잘 보살피고 또 한편으로는 영혼을 잘 보살필 수 있는 인간 존재에 관한 중요한 필요로써 육체를 학대하는 삶을 사는 것은 그것은 잘못된 신앙이에요. 그러나 명심하셔야 될 것은 인간은 가만히 내버려두면 눈이 어두워져서 편견을 가지고 편애를 하게 마련이에요. 그래서 육체만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그것을 막아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진리의 찬란한 빛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의 찬란한 빛이 비칠 때에 그것은 이 세상이 빛으로는 알 수 없는 모든 사물들의 정체를 보게 만들어주고 또 그 빛은 우리가 바라보아야할 세상만 비춰주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사물을 바라보는 마음까지 비춰주어서 그래서 그 무엇이 영원한 것이고, 무엇이 잠재적인 것이며, 무엇이 하늘에 속한 것이고, 무엇이 땅에 속한 것인지 무엇이 근원이고, 무엇이 근원에서 나온 우연한 것들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신 것이죠. 그래서 이 빛은 인식과 존재 사이를 가로질러요.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빛이 되어서 우리의 영혼 안에 빛나서 우리로 참된 것을 보게 만들어 주는가 하면 또 진리의 빛은 우리가 보고자하는 사물을 밝게 비추어서 우리로 하여금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만들어주는 것이죠. 여러분들은 어려움 속에서 끼니가 간데없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으며 간절히 주님을 찾고 섬기던 신실한 성도들이 물질의 여유가 생기고 먹고 살만해지면서 신앙을 버렸다는 이야기는 여러분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의 찬란한 빛이 여러분 마음속에 들어와서 이 눈의 비늘을 벗겨내고 날마다 새롭게 자기 안에 빛을 받고 자신이 보는 사물이 그 빛에 노출되지 않으면 누구도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 은혜를 한없이 받았던 인물들이 마지막에 육체로 마치며 가장 어두운 생애를 마감하는 장면들이 많이 등장해요. 아사와 같은 사람, 히스기야처럼 청사에 길이 빛날 현군들도 마지막에는 어두움 속에서 죽어가지 않았습니까? 심지어 다윗 같은 사람을 생각해보십시오.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 목사님은 성경에서 다윗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인물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다윗이라는 이름에는 전혀 어울릴 수 없는 파렴치한 죄를 저지르지 않습니까? 남편이 있는 여자를 겁탈하고 간음하고 그리고는 그 죄를 은폐하기 위해서 지극히 충성스러운 우리야를 살해하는 끔찍한 일을 저지르지 않습니까?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신바와 같이 그에게 왕비가 부족했습니까? 아니면 비들이 부족했습니까? 현금이 모자랐습니까? 더 원했으면 하나님이 더 주셨을 것입니다.
(찬양) 하늘 위의 주는 높이 들리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저는 정말 다윗이 상처 받은 삶을 부럽지 않지만 그가 가지고 있었던 우주에 가득한 하나님을 볼 수 있었던 그 놀라운 이 통찰과 이 말하자면 이 철학적인 경지에 대해서는 깊은 존경심을 가집니다. 시편을 읽으면서도 그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어요. 그가 그런 문제에 어울리는 사람입니까? 날마다 하나님 앞에 눈물로 제사를 드리던 사람이에요. 그래서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함과 철학함에 전봉이 되었던 인물인데 그런 삶이 어울리기나 합니까? 그런데 그런 죄에 떨어지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진리의 빛에서 멀어질 때 인간은 동물보다 더 악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짐승들이 그 짐승 이하가 될 수 있거나 이상이 될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인간만이 인간 이하의 짓을 할 수 있는 것이에요. 사실은 역설적으로 말하면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어떤 면에서 위대한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진리의 찬란한 빛이 필요한 것이에요. 그래서 매일 매일 이 진리의 말씀이 여러분의 눈을 통해서 귀를 통해서 그리고 여러분들의 마음속에서 가득 채워져서 심지어는 이 진리의 체취를 여러분들의 코로 맡을 수 있어야 됩니다. 거기에서 그리스도인의 품격 있는 삶이 나오는 것이에요. 그것이 신앙이에요. 그래서 인간은 진리의 빛으로부터 멀어지고 나면 영혼과 육체 중에 육체만을 편애할 수밖에 없는 아주 추악한 인간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죠.
제가 회심을 처음 경험하고 예수를 믿게 된 교회는 여러분이 다니는 이 교회보다도 훨씬 조그만 교회에요. 교인이 2, 30명 모이는 교회에요. 오늘날 새벽기도는 5시에요. 5시면 이교회도 빠른 것이에요. 우리교회는 6시가 새벽기도에요. 5시에도 새벽기도를 하고 6시에도 새벽기도를 1, 2부로 합니다. 대개 저는 2부에 나오거든요. 직장 다니는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고 교회 커피숍에서 빵이라도 하나 사먹고 차 한 잔 마시고 출근을 하면 되지요. 그때는 왜 그랬는지 새벽기도가 4시 반이에요. 4시 5분에 초종을 뎅그렁, 뎅그렁 치고 30분 직전에 한 번 더 치면 초종소리를 들으며 새벽기도 갈 준비를 하고 재종소리를 들으면 이제 새벽기도가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그때 새벽기도를 나오는 사람들은 정말 신앙의 용사였지요. 제가 다니던 교회는 허허벌판 한복판에 있어서 인근에는 집이 없어서 가장 가까이 올 수 있는 사람들이 15분은 걸어와야 되는 거리에 있었습니다. 집사님 한분이 계셨는데 둑방의 판자촌에 사는 분이었는데 정말 신앙의 아줌마였지요. 풀빵을 구워 팔면서 애들을 데리고 사는데 그 추운 겨울에 코트 하나도 없이 목도리 하나 걸치고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스웨터에 몸베를 입고 그리고 신발하나를 신고 그 추운 겨울에 바람은 어떻게 그렇게 지독하게 부는지 그 눈길을 걸어서 새벽기도를 다녔어요. 목사님이 이렇게 새벽예배를 드리는데 그저 한 7, 8명 모여서 새벽기도를 드리는데 그 신앙 좋은 집사가 방석을 들고 자꾸 옆으로 이동을 하는 거예요. 목사님이 저 집사가 예배 중에 가만히 앉아있지 왜 저러나? 게처럼 자꾸 옆으로 이동을 하더래요. 어떻게 된 것인지 그리고 나서 말씀을 전하고 찬송가를 부르는데 그런데 그게 뭐 ‘복의 근원 강림하사...’ 찬송이었대요. 그 찬송을 부르는데 그 찬송가 2절인가 3절인데 ‘우리마음 연약하게 범죄하기 쉬우니...’ 그 찬송을 부르는데 갑자기 옆으로 이동하던 이 집사가 앞으로 콱 꼬꾸라지면서 계속 통곡을 하면서 우는 것이에요. 뭔가 그랬더니 방석을 들춰보니까 거기에 오천 원짜리가 있더래요. 새벽기도를 나왔는데 신앙으로 가려고 그랬는데 이렇게 보니까 오천 원짜리가 떨어져있는 것이에요. 그때 오천 원이면 굉장히 큰돈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정부미 한 부대에 1,200원하던 시절이었으니까 굉장히 큰돈이죠. 그것을 보고 찬송을 부르는데 설교를 들으면서 계속 옆으로 이동해서 그것을 방석으로 덮었는데 하필이면 찬송가가 ‘우리 마음이 연약하여 범죄하기 쉬우니 하나님이 받으시고 천국 인을 치소서.’ 그 찬송이에요. 그게 우리 인생살이에요.
팔레스타인에서 목동들은 양들을 데리고 풀을 뜯게 합니다. 좋은 목자는 양이 풀을 뜯는 동안에 높은 언덕에 올라가서 사면을 두루 살피며 그 다음에 이 양떼들을 데리고 어디로 이동을 해서 풀을 뜯게 해야 할지를 미리 생각합니다. 그래서 양떼들은 염려의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계획을 목자가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를 신뢰하고 따라가면 그러면 이 양떼들은 푸른 초장을 만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목자의 손에 이끌려 오늘은 여기에서 풀을 뜯고 염려할 필요 없이 그 풀을 다 먹고 나면 목자는 ‘이제 우리 가자.’ 그리고 양떼들을 인도합니다. 불안하고 염려할 필요 없이 손에 이끌려 이 양떼들은 또 다른 초장으로 인도되는 것이죠. 인간의 이 염려와 근심이라는 것도 사실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생기는 것이죠. 그리고 미래에 대한 염려와 불안은 미래가 아니라 오늘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충분하지 않은데서 오는 정신적인 증상이에요. 그러니까 오늘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주님이 살아계시고 그 하나님이 우리와 맺으신 그 언약 안에서 그분이 선하신분이시라는 사실을 깊이 신뢰하고 나면 염려할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그것이 잘 안 되는 것이에요. 아주 쉽게 이야기해서 신앙이 서있기는 서있는데 부실건물이에요. 그렇게 될 경우에는 자신이 없는 것이에요.
(찬양)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라
이렇게 노래하려면, 이 노래가 자기의 마음에 큰 위로가 되려면 잘 믿어야 되요. ‘천만인이 나를 에워쌀지라도 나는 두렵지 않습니다.’ 라고 고백하려면 대충 믿으면 안 되고 잘 믿어야 되요. ‘사람들은 왕과 방백을 의존하나 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라고 고백하려면 신앙이 자신의 운명의 전부가 되어야 그 고백을 진정으로 하고 그 고백 안에서 위로를 얻을 수 있는 것이에요. 그게 안 되니까 미래가 불안한 것이에요. 그래서 보면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을 예수 믿게 만들어서 구원받은 자녀가 되게 해주시는 것은 두 가지 목적도 아니고 궁극적으로는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그의 나라와 의를 추구하면서 사는 것이에요. 더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온전히 다스리고 인간들은 기쁘게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하는 세상을 만들어 가실 때에 하나님이 혼자 그 일을 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거기에 참여시켜서 함께 그 일을 해나가게 하시는데 그 하나님의 나라가 먼저는 사람의 마음속에 그리고 그의 삶 속에 물이 흐르는 것처럼 흐르게 하셔서 통치하십니다. 이 일에 이바지하게 하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이에요.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해주신 목적이고 오늘 우리를 입히고 먹이고 필요한 것들을 주시고 또 우리를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교육해주시고 교회를 통해서 목양을 하시는 것도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이죠.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다투는 가장 중요한 대적이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물질 사랑이에요. 그것을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에서 말씀하시면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에요. 그 두 주인이 하나님과 물질이에요. 그렇게 우리의 삶에 있어서 큰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죠. 신앙이 아주 뛰어나고 영적으로 깨어있게 되면 하나님이 자신에게 친밀함을 보이시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에 깊이 고통을 받는 일종의 영적 상사병에 걸리는 것이에요. 그래서 시인이 42편에서 그렇게 노래했잖아요?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것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목마릅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런 간절한 갈망 속에서 사는 것이 신앙생활인데 신앙이 식게 되면 그 다음에는 육체의 결핍에만 예민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것이 바로 모든 각양 탐심의 요인이 되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난하고 그리고 고통스럽게 사는 것을 성경 어느 곳에서도 미담으로 묘사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이 번영을 누리고 이 세상에서 많은 물질을 소비하며 사는 것을 칭찬하고 있는 성경구절도 아무데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칼빈 생이 말했던 바와 같이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누리면서 살 수 있는 권위가 있어야 해요. 그리고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요, 후사로서 우리에게 주신 권한이기도 해요.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에게 무임으로 주시는 것들을 누리면서 사는 것에 대해서 가책을 받을 필요가 없어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너무 지나치면 안 돼요. 지나치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보다 물질을 사랑하는 표징이고 또 처음에는 그렇지 않아도 그 물질을 점점 누릴수록 사랑하게 되기 때문이에요.
금욕주의는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여러분 금욕주의와 그리고 복음적인 절제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금욕주의는 이런 것입니다. 음식을 먹으면서 맛있다고 느끼는 것 그 자체를 아주 죄악시하는 것이에요. 그게 금욕주의에요. 그러나 칼빈 선생이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쳐주었어요. 음식을 먹을 때에 어떤 맛있는 것을 느끼게 되면 그것을 느끼면서 그런 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그리고 이웃을 배려하면서 사는 것 그것이 바로 복음적인 절제에요. 그러니까 음식의 맛을 보면서 그 맛을 느끼는 것 자체를 죄악시하는 것이 금욕주의라면 그 맛을 느낄 때에 ‘아! 정말 감사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맛있는 식물을 주셔서 오늘 이 맛 때문에 내 몸이 음식을 끌어당기고 나에게 건강을 주시는구나!’ 참 감사하다. 이렇게 생각해야 되는 것이죠. 그러나 주의해야 될 것은 생각 없이 그 일이 반복되면서 혀가 그 맛의 도락에 빠져버려서 그 맛의 종이 되어버리는 것은 복음적인 절제를 뛰어넘는 것이고 치우치는 것이에요. 이 둘 사이에 있는 차이를 미묘하게 파악하고 살아야지만 우리들이 물질사랑에 빠지거나 혹은 금욕에 빠지지 않고 복음적인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는 신앙인이 되는 것이죠.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시간이 없어서 이 절을 모두 여러분들에게 설교하지는 못하지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제껏 여러분들이 살아왔을 때에 이제까지 먹고 살고 입으면서 살고 오게 된 모든 것들이 누구로부터 온 것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힘으로 애쓰고 노력하는 것 같아도 정말 주님이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은혜를 공급해주시는 그 공급하시는 물질의 은혜 때문에 우리들이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우리의 영혼만 사랑하시고 육체는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병들었을 때조차도 우리의 육체를 귀하게 여기셔서 회복케 해주시고 물질을 주셔서 이제껏 살아오게 하셨습니다. 저는 오늘 아침에 오면서도 이 설교를 생각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지하실에서 7명의 성도들과 함께 교회를 개척하고 18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정말 가난한 성도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교회가 정말 가난하던 때도 많았습니다. 교회를 건축하고 부채에 시달리면서 세상에! 목사가 되어서 돈 때문에 울어보기는 태어나서 처음이에요. 그런 마음을 찌르는 고통을 많이 경험했으면서도 마지막에는 결국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 같아도 날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때문에 먹고살고 고비를 넘겨왔어요. 저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생을 살아오면서 참 굽이굽이 많은 인생의 길을 거쳐 갔어요. 제가 대학에서 교수생활을 9년을 했습니다. 그런데 선배 학과장님이 제 이력서를 받으시더니 그래요. ‘김 교수님!’ ‘네!’ ‘교수님은 우리학교에 교수로서 임용되셨는데 이력서가 한 칸 한 칸 연결이 안 되는군요.’ 제가 너무 너무 가난해서 떡 장사도 했었습니다. 떡을 팔러 시장에 나가면 떡을 팔러 사람들에게 갔더니 어느 할머니가 와서 예언적인 말씀을 하셨어요. ‘이보게, 젊은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니…….’ 그래서 내가 ‘떡도 먹어야 삽니다.’ 그리고 또 어떻게 하다가 우체국장도 하고 어떻게 하다가 교수도 되고 그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았어요. 제가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 한 가지 자신 있는 것이 있었어요. 주님을 위해 무한대로 가난해질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그것이 몸에 배서인지 지금도 뭐 이렇게 분에 지나치는 그런 숙소에서 자면 되게 불편해요. 살아온 세월을 이렇게 돌아보면 내 힘으로 버르적거리면서 먹고 사는 것 같지만 언제나 하나님이 돌봐주셨어요. 교회는 80억을 들여서 교회를 만드는데 통장에 1500만원이 있었어요. 그런데 한 번도 그런 고통의 고비를 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매일 매일 이끌어 주셔요. 그래서 나는 자신을 푸른 초장에 눕게 하신 그 하나님을 찬송했던 이 시인 다윗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요.
(찬양)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먹이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 없네. 푸른 하늘을 나는 새들도 먹이는 하나님 진흙 같은 이 몸을 정금 같게 하시네.
그렇게 생각을 해야 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염려가 없을 수는 없지만 주님을 잘 믿으십시오. 그러면 그분께 충분히 맡겨 드릴 수 있어요. 왜냐하면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우리 하늘 아버지는 나를 더 많이 사랑하시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분께 온전히 맡기고 그리고 매일 매일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죠. 그래서 잠시 장마철의 햇볕처럼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우리의 인생의 날들을 무엇을 먹고 마실까 염려와 근심으로 채우는 대신 그 모든 것을 주님께 온전히 맡기고 가난한 것도 무섭지 않고 이 세상에 있는 안이함을 잃어버리는 것도 두렵지 않은 그래서 주님께 온전히 맡기는 생명이 있는 날 동안에 티끌 같은 목숨이나마 우리 주님을 위해서 우리 예수님이 아직도 이 땅에 계셨더라면 섬기셨을 그 섬김을 이루어가면서 사는 것 그것이 신앙이고 그것이 기쁨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염려와 물질의 모든 고통에서 오히려 벗어나게 해주는 것은 더 많은 물질이 아니에요. 그러면 또 다른 근심이 생겨나요. 그 이야기는 인격적인 신앙, 하나님을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로 깊이 신뢰하고 나의 모든 인생을 그분을 통해 맡기며 주님은 나의 목자라고 내가 그분을 따르는 어린 양이라고 고백하는 신앙, 그것이에요. 주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아침에 그런 인격적인 신앙을 가지고 주님을 믿고 따라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