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회 집회 1
녹취자 : 김세나
사도가 이 편지를 쓸 때에는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는 황혼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그 때였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를 하면서 그 편지의 시작을 자기가 구원받은 이야기로부터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바울을 이방선교의 아버지라고 우러러 보았고 또 이 편지를 받는 디모데도 그 바울을 하늘같이 정말 예수님을 닮은 지상의 가장 아름다운 설공의 모델로서 존경한 것입니다. 그렇게 디모데만 존경했던 것이 아니라 사도바울이 세운 많은 교회, 성도들도 이 사도바울을 지극한 애정으로 존경했습니다. 물론 갈라디아 교회나 혹은 고린도 교회의 기록에 보면 이렇게 사도바울을 향하여 반기를 든 사람들이 없지 않았지만 그것은 목회하면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대체적으로 이 사람이 정말 강한 존경을 받았고 정말 그의 친화력은 누구 이래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아주 탁월한 위치를 갖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도바울은 그런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17년 동안 목회하면서 교회를 세우기 전에도 제가 한 13년 정도 그렇게 부교역자로 살아갔었습니다. 거의 한 30년 정도 가까이 목회라고 하는 사역에 언저리에서 중심에서 생활하였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일을 섬길 때 혼자 섬기는 것이 아니니까 섬기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만남으로서 참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에 봉사하고 있지만 그 봉사와 섬김의 기초까지 탄탄한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는 참 적은 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중의 대표적인 것은 소위 교회의 윤리적인 제도 아닙니까. 교회에서 열심히 충성하고 변함없이 봉사하는 사람들이 온 교인의 칭찬과 그리고 당회와 목회자의 인정을 받으면서 임직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목회자나 혹은 다른 교회 지도자들이 기회를 한번 준다는 의미에서 일꾼으로 삼은 적이 있지 않습니까. 직분을 맡기 전에는 냉랭하고 어디에서도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고 섬기는 흔적을 발견하기 어려웠는데 직분을 맡겨 놓고 보니까 아주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봉사를 합니다. 교회 입장에서야 나쁠 것이 없지만 항상 우리는 건물을 지을 때, 기초를 탄탄하게 하고 세워야지만 그 건물 위에 필요한 또 건물을 올리고, 올리고 올려서 장기적인 안목에서 사용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섬김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이야기하는 이 섬김의 영원한 기초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구원의 감격이에요. 구원의 감격. 그래서 영국의 청교도들은 모든 성화와 그리고 구원 이후의 순종하는 삶의 기초를 언약, 그 언약의 성취인 구원에서 찾았어요. 하나님이 온 땅과 만물 위에 아주 뛰어나게 높으셔서 절대자이신 분을 우리들이 이성적으로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즉각적으로 그분을 섬기면서 살게끔 만들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온 땅과 만물에 지극히 높으시고 탁월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내가 죄인이고 또한 하나님이 사랑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나 같은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그 구원의 영향을 통해서 그 하나님과 내가 그렇게 커다란 피조물과 창조주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계된 것이라는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그것 자체가 은혜의 덕을 입었다. 그래서 도대체 말로 할 수 없는 거죠. 말로 할 수 없는 거예요. 거기에서 하나님이 구원을 주시는 거예요.
(예화) 그래서 소말리아의 해적에게 납치되었다가 그 작전을 펼쳐서 그 우리 동포들을 구출을 했어요. 내가 보더라도 그것은 참 잘한 일이고 그림 같은 작전이었어요. 외국에서는 아무리 훌륭한 부대라도 인질과 인질범들이 함께 섞여 있는 상황에서는 대규모의 피해가 발생하기 때문에 작전을 하지 않는다고요. 그런데 우리는 작전을 했고 세 명이 중상과 경상을 입기는 했지만, 그래도 죽은 사람 없이 탁월하게 그 모든 것들을 끝내고 상황을 끝내고 사람들을 구출했어요. 처음에 그 소식을 듣는데 아주 울컥 하면서 눈물이 나오는 것을 경험했어요. 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들인데도 그들이 구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렇게 기뻤어요. 그러니 그 피를 나눈 가족들은 얼마나 괴로운 시간들을 보내었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들이 가족이라고 생각을 해 보세요. 그렇게 그들이 구출 받았을 때 정말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 했고 하여튼 대한민국이 자랑스럽다고 이야기 하겠죠.
그러면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신 것은 그런 정도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건져내주신 정도가 아니라 사도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이미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죽었어요. 그 사람들을 하나님이 건져주시고 구원해 주신 것이에요. 그러면 도대체 그것이 왜 그렇게 감격적인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죽음에 대해서 이해를 해야지만 오늘 우리가 예수 안에서 찾은 이 생명을 기뻐하게 되는 것이죠. 오늘 아침에 저는 여러분들에게 교리적인 내용의 하나이긴 하지만, 인간 존재라고 하는 것이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인간이 죽음을 경험해도 그 죽음도 하나가 아니라 두 가지라고 우리들은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어요? 자, 육체가 죽어도 영혼은 불멸하기 때문에 계속 살아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도 영혼이 죽는다는 것과 육체가 죽는다는 것은 각각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해석하지 않으면 설명이 안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영적으로 죽었다라고 할 때에는 육체가 죽었다라고 하는 그림을 가지고 성경 구절을 들여다보면 성경이 모순 투성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에요. 자, 육체의 죽음은 무엇입니까. 의학자들 조차도 죽음이 무엇인지를 아직까지도 확실하게 합의를 보지 못했답니다. 뇌의 활동을 기준으로 보는 사람은 뇌의 동작이 멈췄을 때, 또 어떤 사람들은 심장의 맥박이 멈췄을 때, 여러 가지로 해도 사실 심장의 맥박이 멈춰도 죽은 것이 아닌 이유는 심장 태동기 같은 겉들로 충격을 주면 다시 살아나는 경우가 있거든요. 대부분은 그렇게 안 됩니다. 살아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면 그 죽음도 설명하기 어렵죠. 그렇지만 우리가 죽었다는 것은 생명의 기능이 멈췄다는 것, 그것에 대해서 우리들이 누구든지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죽음이 무엇이냐, 그것은 생명의 기운이 회복할 수 없이 완전히 소멸된 것, 그것을 나는 죽음이라고 정의를 해요. 그렇게 생명이 회복될 수 없도록 완전히 소멸되어 버리고 나면 인간은 죽은 것입니다. 영혼은 육체의 갇히지 않고 거기에서 모여 나와서 이제 하늘나라로 가게 되는 것 아니겠어요? 그리고 거기에서 몸의 부활을 다시 기다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사실은 육체도 어떤 의미에서는 영원한 죽음은 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대신 영혼은 영속적으로 죽지 않는 것이고 육체는 영속적으로 죽지는 않고 잠시 죽는 시간이 있다 라고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에요. 어쨌든 육체는 죽고 나면 즉시 아주 중요한 기능인 감각의 작용이 멈춥니다. 원래 이 인간의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뿐만 아니라 생명, 두 개의 작용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첫째는 뭐냐 하면 외부의 환경에 대한 반응, 이것이 생명이 있는 것의 특성이에요. 또 하나는 내부적으로 스스로 자기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작용하는 소위 이야기하는 메타골리즘, 신진대사로 이루어져 있는 거죠. 그것이 아주 하등한 식물이든지 아주 고등한 인간과 같은 동물이든지 간에 마찬가지로 외부에 대한 반응과 그리고 자기 자신 안에서의 신진대사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죠. 이것이 모두 멈추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인간의 경우에는 코, 눈, 입, 귀, 피부, 이런 것들을 다섯 개의 감관을 통해서 외부와 소통하게 되고 그곳에서 외부를 파악하게 하고 그리고 외부의 환경이 자신을 해롭게 하는지 이롭게 하는지를 판단하면서 반응을 하게 되는 것이 생명이 시키는 것이에요. 그리고 자신 안에서 끊임없이 우리의 몸이 이렇게 움직이도록 생활하도록 하면서 이 안에서 자기 조절 작용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서 이제는 자기를 닮은 또 다른 생명체를 계속해서 생산해 나가는 거예요. 이것을 생물학에서 자기변사라고 불러요. 이렇게 하면서 끊임없이 번식을 하고 이렇게 되는 것인데, 그 기능이 모두 끝나고 죽는 거예요. 그러면 불과 몇 시간 지나지 않아서 이제 시체에서 물이 흐르기 시작하고 부패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땅 속에 묻으면 7년이면 중요한 뼈와 시체의 모발과 손, 발톱 같은 눈썹같은 몇 개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완벽하게 흙 속에서 다 분해되어서 없어져버려요. 그게 육체의 죽음이에요. 그러나 영혼의 죽음은 그렇게 생각할 수 없는 거죠. 그래서 영혼은 살아있고 영원하고 영속적인 생명이에요. 불멸합니다. 영이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을 닮은 인간의 영혼의 차이가 있다면 하나님도 인간의 영혼도 불멸하지만, 하나님은 시작이 없이 영원한 생명이고, 인간의 영혼은 시작이 있고 하나님의 생명에 덧입어서 영속적으로 존재하는 그러한 존재일 뿐이죠. 그러니 죽음의 의미도 이제 육체의 의미와 다르죠. 육체에서 죽음 하면 소멸되고 아무것도 못되는 것이 죽음이에요. 그러면 성경에서 사도바울이 말하는 가운데 이해할 수 없는 구절이 있죠. 그것이 뭐냐 하면 죽은 행실, 죽은 행실. 영혼이 죽었는데, 그 죽은 영혼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서 영혼은 어떠한 행실을 계속 하는 거예요. 그래서 죽은 행실들을 생산해 내요. 그러니까 육체는 죽었을 때 모든 활동이 멈추지만, 영혼은 죽었을 때 죽은 행실을 계속 양산해 내서 악한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사실은 영혼의 죽음 그러면 그것은 전혀 다른 의미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에요.
자, 그러면 영혼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인간의 인간이 창조되어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흙으로 사람을 빚으셔요. 그래서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다. 그 흙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아파르라고 하는 티끌이에요. 티끌. 정확하게 말하면 흙이 아니라 티끌. 먼지에요. 먼지. 그 아파르라고 하는 티끌 혹은 먼지는 구약에서 가장 가치없는 것을 존재에 있어서 가장 가치가 없는 것을 언급할 때, 등장하는 명사에요.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사람을 빚어서 그래서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어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만들어진 인간의 육체에 영혼을 창조하시는 행위였어요. 그랬더니 그 둘이 합쳐져서 생명이 된지라 그랬습니다. 히브리 성경에 네페시하야 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생명이 아니라 그냥 살아있는 사람이 된지라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수학공식처럼 발견하게 되는 거예요. 흙으로 육체가 만들어지고 그것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고 하나님이 하늘에서 생기를 불어넣어 새로운 영혼을 창조해서 영혼과 육체를 결합시켰으니 이제 이 인간은 산 사람이 되었는데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있는 그 사람의 모습은 흙도 아니고 영혼도 아니에요. 정말 산 사람이 된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잘 들으세요. 하늘과 땅 사이에 걸쳐있는 존재이고 영혼과 육체가 통합된 존재이고 그리고 무한한 영혼세계와 유한한 시계의 세계를 함께 자기 안에 흔적을 소유하고 있는 존재에요. 그래서 육체는 이 땅에서나 생산되는 자원을 필요로 하고 영혼은 전혀 그것으로서는 만족을 할 수 없어서 하늘로부터 공급되는 자원을 필요로 하겠죠. 그래서 이 인간은 이 세상에서는 도저히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아주 독특한 존재에요. 그렇기 때문에 이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너무나 너무나 소중하고 귀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은 반드시 인간을 향한 사랑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는 거예요. 이것을 설명하려면 너무 시간이 가겠지만, 어쨌든 그것만 공식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보이는 인간을 향한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인간을 향한 사랑으로 나타나지 않는 사랑은 하나의 감상으로서의 사랑이지 그 사람의 인격을 지배하고 있는 그러한 종류의 고유한 사랑이 아닌 것이죠.
여러분들에게도 자녀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자녀들이 그 텔레비전에 나오는 가수들을 좋아하잖아요. 다음달에 가서는 그 사람 버리고 다른 사람 좋아해요. 그 사람들은 얼굴도 모르지만, 그렇게 이 사람 저 사람 왔다갔다 하잖아요. 그것을 우리들이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아요. 기독교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신앙의 대의, 목회의 대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진실하게 경험하고 그 사랑 안에서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느냐, 하는 그것이 바로 신앙의 대의인 것이에요. 자, 그런데 그러니까 그 영혼은 영혼의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 틀림없이 의존하여서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의 영혼 사이에 성령의 작용을 통해서 우리에게 영혼이 영혼답게 아름답게 영혼으로서 아름답게 인간의 육체를 통솔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이 하늘의 은혜를 자원들을 공급해 주시는 상태가 살아있는 영혼의 상태라 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우리 교인들에게 이렇게 가르쳐요. 이제 한번 따라하고 설명할게요. 한 인간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에 있고 한 사람의 가치는 선한 의지의 크기입니다. 그거예요. 그러니까 한 사람의 아름다움은 그의 영혼의 아름다움이에요. 지금은 어때요.
(예화) 죄를 짓고 어떤 여자가 강도짓을 하고 끊임없이 도망을 다니는 거예요. 그런데 이 여자가 도망다니면서 도망을 다녔는데 경찰에서 이 여자를 사진을 찍어서 수배를 했어요. 그랬더니 수많은 팬들이 생겻어요. 그리고 경찰에 편지를 보내서 이 여자를 제발 용서하고 살려달라고 청소년들이. 그래서 경찰서에서 왜 이 사람이 죄를 지었는데 살려줘야 하고 용서해 줘야 하냐. 예쁩니까. 지금 용모 우선 주의는 심각할 정도에요. 우리 어렸을 때는 그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아주 에쁜 사람들을 보면 그저 외계에서 온 사람처럼 생각을 하고 나와는 상관이 없다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요새는 그렇게 안 해요. 계속 너무 예뻐지려고 몸부림을 치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은 그것은 모두 이 세상의 감각주의가 만들어낸 것들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세태에 거스리며 살아야지만 하나님의 백성이에요. 그렇다고 해서 여성들이 그냥 폭탄맞은 머리 하고 다니고 그리고 늙어서 쭈글쭈글 해졌는대도 그 구루마 하나 바르지 말고 다니라는 그러한 뜻이 아니에요. 그것은 경건이 아니라 게으름이에요. 게으름. 게으름.
재미있는 이야기 해줄까요? 이러다가 여러분 점심 못 먹는데, 여러분, 화장품이 영어로 코스메틱이라고 해요. 코스메틱. 이게 희랍어 코스모스에서 왔어요. 희랍어 코스모스는 우주, 질서 그런 뜻이에요. 그래서 화장품이 무슨 뜻이냐 하면 질서 없는 얼굴을 질서 있는 얼굴로 보이게 해주는 거예요. 그게 화장품이에요. 그런데 자신이 질서가 없으면 화장품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좀 질서를 갖추고 교회에 나와야 하잖아요. 그런 것들은 꼭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우리 교회 사모님들이 많이 있는데, 교회 딱 오면 사모구역으로 들어가서 같이 생활하게 됩니다. 오면 제일 먼저 옷 입는 것, 기도하는 것도 가르쳐 주지만 와서 몇 달 지나면 옷 입는 것, 머리 하는 것, 그것부터 가르쳐 줘요. 그래서 목회자의 아내들이 너무 구차해 보이지 않게 그렇게 그들을 잘 가르치는데요. 왜 이렇게 멀리 갔지?
인간의 아름다움이라는 게 영혼의 아름다움이에요. 그래서 그 영혼은 보이지 않죠. 그래서 아무리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고 있어도 어떤 사람이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고 있어도 모든 사람들이 내가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고 있어도 모든 사람들이 나를 부러워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누군가의 아름다운 영혼을 그리워하고 부러워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벌써 복된 사람이에요. 그러한 시선을 가지고 우리는 사람들을 보는 거죠. 그래서 그 아름다운 사람들을 보고 또 아름답지 못하고 추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더럽게만 생각하지 말고 불쌍히 여겨서 그들의 영혼을 곱고 아름답게 만들어서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을 회복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기독교 신앙, 선교, 목회의 목표에요. 그러한 거죠. 그게 아름다운 영혼이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그것이 여러 가지 설명이 필요하지만, 딱 한 가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혼을 주셨을 때 의도하셨던 그 영혼이 되는 것이에요. 그것을 못 되게 만드는 것이 결국엔 죄와 불순종과 이런 것들이 그렇게 영혼을 망가뜨리는 거예요. 그런데 그리고 한 인간의 가치는 무엇에 있다고 했죠? 하나님이죠. 한 인간의 가치는 선한 의지의 크기에 비례해요. 그 한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서 선한 뜻을 가지고 주를 위해서 살려고 하는 그 의지의 크기가 아주 클 때, 그는 그 경건한 성도들에게 아주 소중한 사람이 되고 하나님도 그렇게 보시는 거예요. 하나님도.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사람들의 관점과는 다른 점을 보아요. 돈 많고, 공부 많이 하고 학식이 좋고 그렇다고 그렇게 하나님이 높이 보시는 것이 아니죠. 그래서 여러분들은 그렇게 오늘부터 금년의 목표를 세우는 거예요. 아름다운 영혼, 선한 의지의 크기. 이것을 가진 사람들이 되자라고 하는 것이에요.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끊임없이 하나님 자신은 영원한 생명이시거든요.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언제나 영원히 그리고 아직까지도 잠재되어 있는 것 없이 완전하게 살아계신 분이세요. 그러한 하나님의 완전하고 충만한 생명이 사실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존성, 하나님은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고 당신 홀로 스스로 존재하신다고 하는 그 자존성이 기초가 되는 거죠. 하나님의 생명이. 그런데 그러한 생명을 우리 그러한 생명과 관계를 맺을 때에 하나님을 당신이 살아계신 그 놀라운 효과를 인간의 영혼 안에 끊임없이 부어주시는 거죠.
예를 들어 볼께요. 제가 이러고 살아있어요. 수없이 감기 기운이 침투해서 걸리면 한달 고생하시는 것 알죠? 한달 고생해요. 그래서 우리는 가을이 딱 되면 모든 교역자와 직원, 그리고 교역자의 아내는 의무적으로 독감 예방 주사를 맞아야 해요. 왜, 그게 뭐냐 하면 목회사역에 방해가 되니까 걸리지 말라고. 그래서 저도 독감 안 걸리잖아요. 감기 기운이 자꾸 와요. 와도 어떻게 해요? 이 안에서 생명이 있으니까 이 안에서 말하자면 저항력이, 면역체가 생겨서 서로 싸워서 병과 이기는 거예요. 똑같이 하나님의 생명이 인간에게 되어 있을 때 그 인간이 항상 깨끗하게 살아요? 항상 순결하게 살아요? 항상 선한 것만을 찾으면서 살아요? 안 그런 것 여러분들이 너무 잘 알잖아요. 그런데 그게 자꾸 세균 같은 것들이 침투해서 영혼 같은 것들이 이렇게 아름다움이 손상되는 거예요. 그 때 그때마다 하나님 앞에 말씀과 기도와 교제와 그 다음에 성령의 은혜로 나아가는 주님이 신비하게 당신의 생명을 역사하게 하시는 거죠. 우그러졌던 마음들을 펴주시고 죽은 것과 같은 우리의 영혼들을 불구의 상태에서 다시 새롭게 만들어 주셔요. 그래서 아주 놀랍게 우리의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셔요. 고쳐 주셔요. 그래서 어떤 때는 우리의 생명이 확 하고 들어가서 완전히 죽은 사람이 부활한 것처럼 그러한 경험을 해요.
(예화) 간증을 한번 해 볼까요. 봄이면 가정의 달이잖아요. 항상 가정에 대해서 설교를 한 달 길면 두 달, 짧으면 한 달 내지 한 달 반 정도 설교를 해요. 뭐 자식에게, 부모에게, 남편에게, 아내에게 설교를 해요. 그 날은 이상하게 그 이혼을 하려던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설교 제목을 잡았는데, 이혼을 생각하는 그 대에게 라고 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교회 교인이 있었는데, 자기 친구 생각이 나더래요. 너무 곤고하게 사니까 자기 친구에게 전화해서 한번 만나자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 친구를 데리고 교회로 온 거예요. 점심 먹자 해 놓고 교회를 데리고 온 거지. 생전 교회를 안 다니던 여자분이었는데 남편하고 잘 살다가 지긋지긋해서 이제는 이혼 서류를 작성해 놓은 상태에요. 여자가 자식들도 있는데 남편과 못 살겠다고 헤어지기까지 결심을 하기까지 그게 바람이 난게 아니라면 얼마나 많은 갈등과 죽음을 넘나드는 괴로운 시간이 있었겠어요. 그래서 뜻을 정했어요. 이 인간과는 헤어지겠다. 그리고 생전 처음 교회를 왔는데 오는 날이 장난이라고, 설교 제목이 화면이 뜨는 데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 그런데 하여튼 그날 제가 생각해도 하나님이 이혼하려는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는지 아주 매우 특별한 은혜를 부어 주셨어요. 그 사람이 예수의 예자도. 그 모르던 사람이 설교를 듣고 거기에서 펑펑 울고 회심을 했어요. 그러면 곧바로 집으로 가요. 그리고 남편보고 나좀 봅시다 한 거예요. 그리고 남편이 들어와요. 남편이 누군지 모르지만, 이혼서류를서로 화장대 위에 써 놓고 사는 사이이니, 남편이 들어왔는데 이 마누라가 무엇을 가지고 갈구려고 그러나. 부인이 무릎을 딱 꿇더니 울면서 여보, 정말 내가 나쁜 사람이었어. 내가 잘못했지. 용서해달라고 남편에게 온 거예요. 그런데 남편은 발길로 퍽 차면서, 야 이년아 너 잘못한 것 이제 알았냐. 그랫겠어요? 그랬겠어요? 안 그랬죠. 남편이 무릎을 꿇더니 아니야, 여보. 내가 더 많이 잘못했어. 나를 용서해줘. 그리고 펑펑 울었어요. 아니, 그렇게 할 수 있는데 옛날엔 그렇게 못한 거예요. 왜, 생명이 없으니까 할 수 없는 거예요. 생명이 없으니까. 여러분, 손 하나 깜짝 할 수 없을 정도로 기운이 없는 때 있죠. 평소엔 번쩍 번쩍 들 수 있는 것인데 뚜껑도 못 들어요. 힘이 없으면 못하는 거죠.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인데 그런데 그게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생명을 얻으니까 그럴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이 주신 거예요. 이게 영적 생명이에요. 이것을 잃어버린 것이 영적인 죽음이에요. 이제 이해되시죠?
그러면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사도바울이 영적으로 죽어있을 때 그가 무슨 허무한 삶을 살았습니까. 조상의 도를 따라서 베냐민의 지파의 엄격한 히브리인의 한 사람으로서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그리고 율법에 의해서는 흠이 없다고 자부하고 열심히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러나 그 마지막에 그가 달려가고자 하는 길은 무엇이었어요? 기껏해야 종교지도자의 꿈이었어요. 종교 엘리트가 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얻고 희망을 얻는 것. 기껏해야 자기가 우상처럼 만들어 놓은 그 헛된 하나님을 섬긴다고 자부하는 것, 그것이었어요. 그런 것들은 영혼이 죽어있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들이었어요. 예수님을 만났어요. 그러다가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거예요. 그 의심할 수 없이 정확하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명하게 찬란한 빛으로 뵈었고, 그리고 그는 거기에서 눈이 멀어서 엎드러지고 말았어요. 그리고 또렷이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이에요. 이것이 사도바울의 마음속에서는 일생에 경험해보지 못한 어마어마한 혼란이 일어났던 것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그 전까지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서 십자가에 매달렸다고 그렇게 생각을 하였던 거예요. 그것이 유대인의 음모였기 때문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빌라도의 뜰에 있을 때에 종교지도자들의 사주를 받은 유대인들이 내가 이 예수를 어찌하리요, 하고 빌라도가 말하였을 때 사형시켜주십시오, 사형시켜주십시오. 이렇게 말하지 않고 놀랍게도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외쳤어요. 아니, 죽이기만 하면 되는데 왜 사형집행 방법까지도 알려주었던 것이죠? 십자가 제도는 로마제국이 생겨난 이후에 로마인들이 야만족 시절에 만든 사형집행 방법이었지만, 이 제도를 이용해서 유대인들은 중요한 음모를 꾸몄던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구약에서 나무에 매달아 죽인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니라 그랬어요. 그래서 예수를 다른 방법으로가 아니라 톱으로 켜거나 칼로 찌르거나 아니면 율법에 저기 감옥 속에서 고문을 해서 죽거나 하면, 세월이 흐른 다음에 하나님이 예수는 박해를 당해서 죽었다, 사람들이 실수해서 선지자를 박해한 것처럼 그렇게 해서 예수님이 죽었다라고 하는 운동이 일어날까봐 아예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죽임을 받은 자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나무에 매달아달라고 요구하게끔 사주했어요. 예수님이 죽은 거예요. 사도바울은 사울이었던 시절에 굳게 믿었죠. 아, 예수는 그렇게 해서 십자가에서 죽었구나. 그런데 예수님이 살아나신 거예요. 구약에서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은 거의 예가 없어요. 기껏해야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에녹의 이야기와 그 다음에 엘리야의 이야기, 모세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지만 어쨌든 뭐 그 정도에요. 그러면 무슨 뜻이냐 하면 죽음을 보지 않거나 혹은 죽었는대도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매우 특별한 인정을 받은 것이에요. 그러면 두 개의 모순된 사실,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인정하셔서 예수를 다시 살리셨다는 이 눈앞에 일어난 현실 둘 다가 사울에게는 사실이었어요. 그런데 이제 그 두 개가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없는 거예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서 죽은 사람이면, 하나님이 인정하셔서 다시 살리실 리가 없고 다시 살아난 사람이면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서 죽으실 리가 없잖아요. 이 속에서 사도바울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이 두 개가 모순이 아니라 이 두 개가 모두 사실이라는 충격적인 신학을 발견하게 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에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죽었는데,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대로 예수 자신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아서 죽으셨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거예요. 그러면서 그 순간에 저항할 수 없는 큰 하나님의 강제력이 이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새겨진 거예요. 그러한 죄인을 위해 대신 형벌을 받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바로 자기 같은 죄인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달은 거예요.
그러면서 그는 일평생 이제 자처한 거죠. 그 자처한 것이 뭐냐 하면 자기 정체성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다. 노예이다 라고 하는 것이죠. 구약시대에는 선지자들이 자기를 야훼의 종이라고 불렀어요. 기독론적인 전환을 거치는 거죠. 그러면서 확 사로잡히는 거예요. 그러면서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 예쁘게 보여서 자손만대 복을 받기 위해서, 장가 안 간 사람이라 자손도 없지만 복을 받기 위해서 선교 사업을 한 것이 아니에요. 자기의 입신양명을 위해서 그 일을 했던 거예요. 내 집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왜 그래요? 자기 같은 죄인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이죠.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그것이에요. 일생동안 가족도 없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40의 강한 매를 수없이 맞고, 그리고 삶 소망까지 끊어지고 만물에 찌끼와 같이 되기까지 분투하며 헌신적인 삶을 살았었던 거예요. 그 사람이 오늘 뭐라고 고백하냐 하면 날 나게 하신 우리 주께 감사하며 내가 전에는 훼방의 직분을 맡기시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고행자요. 핍박자였으나 오히려 긍휼을 입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을 가리켜 뭐라 그랬냐 하면 나는 죄인 중의 괴수이다 고백을 하는 거예요. 희랍어 성경에는 프로토스. 첫 번째, 죄인을 죄지은 크기로 순서를 세우면 자기가 일번이 될 것이라.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는 거죠.
앤드류 머레이라고 하는 19세기의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은 정말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정말 아름다운 선물이죠. 그 분이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어요. 우리의 겸손의 기초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의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죄인만 있을 따름인데 어떤 사람은 아직도 용서를 못 받은 죄인들이고, 어떤 사람은 이미 용서를 받은 죄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그 정체가 용서받은 죄인이에요. 그래서 항상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면 넘칠수록 예전에 자기가 누구였는지를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쓰레기같은 죄인이었고, 그리고 모질게 주님께 대적하는 그러한 아주 잡스럽고 추악한 존재였다는 것.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구원해 주셨다는 그 사실을 잊지 않고 간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모든 성화를 위한 노력이고 주님을 섬기는 모든 삶의 기초가 되어야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타락은 그 출발이 어디 있냐 하면 구원의 감격을 잃어버린 것이 타락의 시작이 되는 거예요. 영국 청교도들은 구원의 생생한 감격을 잃어버리는 것이 배교의 시작이라고 보았어요. 그리고 그것이 타락이라고 본 거예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해요. 구원의 은혜는 기본이고, 그 위에 더 좋은 것을 하나님이 주시는데, 그게 세상에서의 성공이라고 말하는 거죠. 그렇지 않아요.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은혜의 감격 속에 있는가. 그래서 목사의 마음속에도 구원의 감격이 넘칠 때에는 목회의 힘이 있어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뭐가 두렵겠어요. 오죽했으면 교인들에게 내가 싫으면 언제든지 이야기 해라 그랬어요. 나는 이 나이가 되었는대도 다시 한번 개척을 해보고 싶어요.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자기같은 죄인을 살려주신 구원의 감격이 넘치게 되면 두려운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찬양) 주 내안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뭐가 그렇게 두려워요. 최악의 경우 죽기밖에 더 합니까. 얼마나 행복한 말입니까. 고생 더 하고 근심과 슬픔이 가득한 이 세상의 수고를 그치고 꿈꾸고 그리워하던 나라로 돌아가는 것 아닙니까. 목회를 하다보면 신경질 날 때 있잖아요. 가끔 우리 집사람에게 근심하고 희망이 없으면 여보, 너무 걱정하지 마. 조금만 더 참아봐. 여보, 좋은 일 있어? 조금 있으면 금방 괜찮아져. 그렇게 하면서 가는 거죠. 그래서 마음속에 항상 첫 번째 내 마음을 떨리게 하는 이 감격의 원인이 구원받았다는 거예요. 어떻게 내가 구원받은 사람이 되었을까. 하나님과 상관이 없던 인간, 이방인이요. 하나님의 생명에서 완전히 멀어진 죽은 행실을 하며 살 수 밖에 없었던 시체와 같은 더러운 영혼을 가진 사람이 이렇게 티끌만큼이나마 주님의 향기를 품으며 살 수 있게 해주신 그 놀라운 은혜, 잠시 머물 이 세상이 우리의 모든 욕심의 밧줄을 내리지 않고 오히려 그렇게 나 같은 죄인을 살려주신 하나님의 그 큰 은혜 때문에 매일 매일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가게 해 주신 그 은혜, 구원의 은혜.
(찬양)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예화) 에이든 윌슨 토저라고 하는 미국의 작가가 있어요. 다 돌아가셨죠. 그 참 깊이 깊이도 있죠. 통찰이 빛나는 그러한 글들을 쓰시던 아주 청교도들을 사랑하시던 작가였어요. 그 분이 자기의 책 속에서 재미있는 질문을 던졌어요. 하늘에 세 천사가 있다. 하루는 하나님이 세 천사를 부르셔서 명령을 내리셨대요. 한 천사에게는 왕이 지휘봉을 주셔서 왕의 지휘봉인 금봉을 주시면서 이것을 가지고 땅에 내려가서 큰 나라를 다스리거라. 명령하셨고, 두 번째 천사에게는 큰 주판을 주시면서 넌 이것을 가지고 돈을 많이 번 큰 회사의 회장이 되거라 그러면서 내려 보내셨어요. 세 번째 천사에게는 육본모자 낡은 것에다가 구멍을 뚫어서 커다란 막대기를 끼워서 손에 들려주시면서 너는 이것을 가지고 가서 똥 퍼라 그렇게 명령을 내리셨대요. 그분이 질문을 하는 게 그거예요. 그래서 세 천사가 각기 한 사람을 금봉을 두 손으로 붙들고 한 사람은 큰 주판을 두 손으로 붙들고, 한 사람은 똥 푸는 철모를 두 손으로 붙들고 구름을 타고 이 땅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이거예요. 그 때 그 사람의 질문이 이거예요. 그 세 사람의 마음이 세 천사의 마음이 다른 마음이었겠느냐. 나는 그 글을 읽으면서 참 부끄러웠어요. 이 세 천사의 마음이 다른 마음이었겠느냐. 하나, 금봉을 쥔 천사의 마음은 나라를 잘 다스려야 겠다는 일념 밖에 없었을 거예요. 저 주판 들고 있는 장사꾼이나 철모 들고 있는 똥 퍼 보다는 내가 훨씬 우월하지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에게 그것을 들려준 것이 그 천사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셨기 때문이에요. 똥 푸는 철모를 들고 구름을 타고 내려가는 사람은 얼마나 가슴이 벅찼겠어요. 아 나 진짜 하나님이 명령하셨는데, 잘 퍼야지. 왜 웃어요. 여러분 우리 어렸을 때, 똥 퍼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커다란 그 구루마에다가 드럼통을 싣고 다니면서 똥을 푸는 사람도 있었고 그것도 없을 때에는 아예 똥을 퍼서 지게를 지고 멀리 밭에 거름 똥을 갖다가 주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것도 굉장히 치열해요. 여러 사람이 똥을 푸려고 해요. 그런데 저희 집은 항상 고정적으로 한 사람이 똥을 펐어요. 그 분이 제일 잘 퍼요. 튀기지 않고.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그 철모를 들고 내려오면서 잘 퍼야지. 주님이 푸라고 하셨습니다. 튀기지 말고 잘 퍼야지. 그러고 내려오지 않았겠어요. 그리고 여러분들은 아까 왕을 이야기 할 때는 안 웃었는데, 똥 퍼 이야기 하니까 웃잖아요. 여러분들이 벌써 건전하지 않은 것이에요.
하나님의 일의 가치는 크기와 사람의 눈에 빛나는 영광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위임하시는 분의 권위에 있는 것이에요. 주님이 맡기시는 거예요. 주님이 맡기시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게 구원의 감격에 넘쳐서 하나님 앞에 나와요.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주님이 죽어야 했습니다. 나는 쓰레기 같은 인간입니다. 주님의 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을 하나님은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너는 목회자가 되거라. 너는 계속 돈 벌어서 교회에 헌금하고 가난한 사람 돕거라. 너는 아무 재주가 없으니 교회 나와서 참석만 하거라. 그리고 너는 머리가 좋으니까 열심히 책을 써서 사람들을 깨우쳐라. 너는 뭐 어떠한 악기에 재주가 있으니까 교회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일러 주시는 거예요. 항상 주님을 섬기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나를 힘들고 어렵게 만드는 사람들이 나에게 이 일을 맡긴 것이라면, 어느 한 순간에 더럽다 그리고 얼굴에다가 일을 집어 던지고 집어 치울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맡기신 분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 일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자기가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지 못했더라면 지금은 얼마나 힘들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즐겁게 십자가를 지고 가려는 노력이 필요해요. 그것이 힘겨울 때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십자가를 지신 삶을 사셨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독립체의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거죠.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것이 믿음 생활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곳에서 주님을 섬길 때, 항상 생각하세요. 벌레같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은혜 때문에 내가 주님을 섬기면서 살 수 밖에 없다, 깊이 생각하고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기쁘게 섬기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