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온전함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약 3:2-3)
녹취자: 김순미
지하실 교회부터 시작해서 여기까지 한 15년 간 모든 설교 시리즈 가운데서 거의 부동의 자리를 고수하던 아주 고전적인 설교 시리즈가 있었습니다. 말과 영적 생활이라는 시리즈였고 지금으로부터 한 7-8년 전에 수련회에서도 한번 GBS로 다룬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십니다. 세상이 창조 될 때 우리는 세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그다음에 말이 있고 그다음에 세계가 나온 것입니다. 반대로 피조물들이 있고 피조물들 모두 말하는 것이 성립됩니다. 로마서에 보면 인간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탄식하면서 구속이 완성 될 그날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성경을 보면 비록 인간이 말하는 것 같은 말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도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눅 19:40) 라고 말씀 하십니다. 이 모든 피조물들도 비록 인간의 언어는 아니지만 무엇인가 자기 창조주를 향하여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하신 것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찬송의 말을 가지고 있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있고 말이 있고 영광 받으시는 하나님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너무 너무 중요합니다.
10여 년 전에 교역자 한 사람이 성경학교 때 설교를 안 하고 영화를 틀어 줬습니다. 그래서 저한테 바가지로 혼이 나고 얼마 사역을 안 하고 교회를 떠나게 됐습니다. 그런 어리석은 일들은 어디서 오냐면 말이 의사소통 수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적으로 보더라도 말은 절대로 의사소통에 그치는 수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시편67편에서도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말을 보내어” 103편에서도 “말씀을 보내사”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어로 ‘다바르’는 ‘말’인데, 이것은 사람의 말도 해당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도 해당이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말씀을 하시면서도 말씀 그 자체를 당신과는 동떨어진 어떤 인격체처럼 말씀하시는 경우가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성경에 관해서 사람들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닙니다. 어떤 교회에서 목사님 설교 시간에 새가족 세미나 하는 것처럼 PPT를 띄우면서 설교 하는 것을 봤습니다. 설교시간에 예화를 보여주면서 계속 화면을 띄우는데 저는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설교는 그 자체가 말이 단순히 의사소통 수단이 아니라 그것은 그 이상의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굉장한 것입니다. 연애를 할 때 마지막으로 ‘내가 이 남자한테 헌신할 것인가?’를 결정할 때 그것은 큰 크기의 선물로 되는 것이 아니듯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무릎 꿇게 하는 것은 막연한 하나님에 대한 인상이나 감동에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으로 우리의 지성을 설복하고 우리를 꺾는 하나님의 말이 있는 것입니다. 그 말 앞에서 우리들이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나 하나님에 대한 태도나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사랑한다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완벽한 동의어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까? 우선 성경은 오늘 이야기하기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은 인간이며, 모든 인간은 모든 방면에서 완전 하지 않습니다. 짐직 자기가 보기에는 완전해 보이지만 그것은 매우 불행이고 다른 사람들이 보아도 그는 온전하지 않습니다. 신앙이란 늘 자기의 편만 들면서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객관적인 진리의 빛으로 자신을 비추어서 자신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많은 실수를 하지만 정말 실수를 면하기가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즉, 다른 방면에 실수는 노력을 하면 좀 줄일 수 가있지만 성화가 되어도 매우 어려운 방면이 있는데 그게 말입니다.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약 3:2) 뒤집으면 “세상에 온전한 사람은 없나니 말의 실수가 없는 사람은 없다.”입니다. 그 이야기는 “어차피 실수가 있으니까 대충 살아라.” 그 뜻이 아니라 그 만큼 여러분들은 삶의 모든 방면의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말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많은 노력을 기울여도 지나침이 없다.” 그 이야기를 성경에서 하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성령이라고 하는 은혜의 물에 띄어 놓으면 물속으로 쏙 들어가면 거룩하게 될 텐데 끝까지 물에 안 들어가려고 하는 우리 몸의 지체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입술입니다. 실제로 숨을 들여 마시고 물속에 배영으로 가만히 누워있으면 얼굴이 뜹니다. 성경에 비유를 한다면 입술이 죽어도 안 가라 앉는다는 것입니다.
말의 위력에 대해서 말하기를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3:2) ‘굴레’가 무엇입니까? 벗어나지 못하도록 어떤 짐승들을 포획하는 망이나 혹은 몸을 쉽게 벗어나지 못하도록 옭아매는 도구들입니다. 굴레를 씌우면 움직임이 부자유하게 됩니다. 여기서 이야기 하는 온 몸이라는 것은 육체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빼 놓은 모든 인간의 기능을 가리킵니다. 말을 함부로 하게 되면 그 말이 배설의 작용과 같아서 인간은 하고 싶은 말을 할 때 카타르시스가 생겨서 정서에 좋고 기분이 시원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기억해야 될 것은 그 결과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한 말이 굴레가 되어서 돌아와서 자기를 씌어버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자유라는 것이 사라지고 속박 받게 됩니다. 즉, 사람의 말이 나와서 그 말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속박 할 뿐만 아니라 정신과 영혼 까지 속박해 버립니다.
좋은 사람이냐 나쁜 사람이냐 할 때 이 모든 평가는 말에서 시작해서 말로 들어갑니다. 말에서 받은 인상이 ‘아 저 사람은 참 따뜻한 사람이구나!’ 왜? 따뜻하게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은 꽃과 같습니다. 뿌리를 보면 무슨 식물인지 알 수 없지만 활짝 피어난 꽃과 잎을 보면서 꽃의 이름을 알게 되듯이 말은 그 모든 것의 꽃입니다. 사람은 장기적으로 보면 말과 인격 사이엔 삼투압 현상이 있습니다. 농도가 짙은 쪽과 낮은 쪽이 있으면 농도가 낮은 쪽에서 짙은 쪽으로 올라와서 농도가 똑같아 지는 것입니다. 말과 인격은 잠시는 아주 말하자면은 야비한 인격인데 고상한 말은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순간입니다. 장기적으로 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보면 인격만큼 말하고, 말하는 것 그것이 인격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한 번에 사람을 평가 할 수 없지만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계속 되면서 마지막 우리는 그 사람의 말을 보면서 인격을 평가해도 거의 실수를 하지 않습니다.
무인도에서 혼자 살아가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수많은 사람과 어울려 살면서 문제가 생깁니다. 어떤 사람들은 “왜 이렇게 사람들은 나만 미워할까?” 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사람들은 나만 미워해요.” 특별히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나만 미워해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사랑을 받을 때 그것을 자기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분야에서 찾습니다. 예를 들어서 공부를 많이 했으니까 얼굴이 예쁘니까 회사에 낙하산으로 들어왔으니까 아부를 잘하니까 등등 그런 면도 물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뭐냐면 말은 사람들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게 해 줄 뿐만 아니라 관계를 파괴하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이 가만히 인생을 살아온 것을 보면서 마음이 따뜻하고 기뻤던 일이 생각나서 기억을 더듬어 보면 누군가의 말이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에게도 말이 있습니다. 그때 이 말씀으로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말하셔서 내 마음이 큰 위로를 받았지 하는 등등 또 반면에 가슴이 아프고 분노가 일어나는 상처를 생각해보십시오. 뭐가 있었습니까? 틀림없이 자기를 자지러지게 아프게 만들었던 말이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오래전에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면서 말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목회 현장에서 기도를 참 많이 하고 진짜 예수 위해서 목숨을 내 놓은 교인들도 참 많이 만났습니다. 또한 정말 통제가 안 되는 교인들도 너무 많았습니다. 그 사람들도 심히 험한 세월을 살아 왔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그것을 자신의 삶의 태도와는 연결을 지을 줄을 몰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세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내게 일어나는 모든 나쁘고 어려운 일들은 내가 주님께 속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승화시키고 나면 대책을 찾을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그렇게 하면 안 된다.’하고 깨닫게 됩니다.
3절에서 우리가 “말들을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여러분들은 ‘말(馬)’을 많이 보지 못했겠지만 우리 어렸을 때는 말이 아주 중요한 운송의 수단이었습니다. 부잣집이 말을 가지고 운송을 했고 가난한 집은 노새 당나귀로 현재로 말하면 포터트럭을 대신했습니다. 새끼가 약간 자라고 나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소는 코를 뚫는 것이고 말은 재갈을 물리는 것입니다. 소는 난지 한두 달 됐을 때 코에 구멍을 뚫어 동그란 코뚜레를 끼워서 한쪽에 줄을 매달아 등 뒤로 넘깁니다. 주인이 줄을 잡아당기면 코가 너무 아프니까 소는 순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아프니까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코뚜레는 서양이나 동양이나 다 있지만 신기하게 여기서 코뚜레를 이야기를 안 하고 재갈을 이야기를 합니다. 굉장히 중요한 암시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문학적으로 말은 덜해서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많이 해서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말을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말의 절제가 없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재갈이 말에 씌어 지면 말이 함부로 뺄 수가 없습니다. 소는 코뚜레를 잡아당기면 소가 아프니까 막 딸려오고 주인이 뛰어가면 소도 뛰어가지만 재갈은 말을 빨리 달리게 하는 용도가 아닙니다. 말을 빨리 달리게 할 때에는 등에다 채찍질을 하면 빨리 달립니다. 반대로 달리는 말을 멈추게 할 때 재갈을 잡아당기면 말 입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니까 앞발을 들고 멈추고, 급브레이크를 밟고 싶으면 세게 잡아당기면 말이 거의 수직으로 서면서 아파서 못 가고 멈추는 것입니다. 재갈은 브레이크의 용도입니다. 절묘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말에 재갈을 물린다.” 우리는 말에 있어서 무절제합니다. 정상적인 언어는 마음에서 나와서 위로 올라가서 지성에서 이성에서 걸러지고 그다음에 말을 해야 되는지 하지 말아야 되는지를 생각하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특히 설교자의 경우에는 생각에 있는 것들은 충분히 마음으로 내려가게 하고 그 마음에서 충분히 달궈진 다음에 그 생각에서 말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올바른 것들이 밑으로 내려가고 그 다음에 내려간 것들이 다시 올라오는 이것이 생각 있는 사람의 말의 태도입니다. 문제는 그냥 마음에서 울컥 우러나오는 대로 말을 그냥 이성에 채에 거르지 않고 말을 막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언어의 배설입니다. 우리들이 화장실에서 대변을 볼 때 자신의 안에 있는 것을 확 배설해 버리듯이 그렇게 입으로 쏟아 내는 것입니다. 생각 없이 쏟아내는 많은 말들이 결국은 올무와 굴레가 되어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와 인간관계를 끊임없이 파괴 합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이성에서 소화시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물론 조직을 이끌어 가다보면 때로는 따끔하게 야단을 쳐야 될 때도 있고 상급자들은 그런 것들을 잘 해야 됩니다. 희로애락이 분명 해야지 조직을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광적으로 출렁거리면 조폭이지만 그러나 그런 것들이 분명해야지 뜨뜻미지근해선 안 됩니다.
항상 인간에게는 이렇게 말이 달리는 습성이 있듯이 절제 없이 내버려 두면은 말이 쏟아져 나와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오랫동안 어떤 사람들과 관계를 갖는다고 하는 것은 실로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렇게 소중하게 쌓아올린 인간관계들을 어느 한순간에 배설 하듯이 쏟아내는 언어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공동체를 망가뜨리고 결국은 자기 자신에게로 부메랑처럼 돌아와서 자기를 고립시킵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이 아주 선하고 신앙심이 깊고 인격이 깊은 사람이면 피해자로 남지만 그 사람이 말하는 자신보다 나쁜 사람인 경우에는 엄청난 부메랑으로 돌아와서 자기를 파괴합니다.
보십시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는 고백이 있은 후에 타락합니다. 그 후 들어온 세계의 분열, 인류의 분열상이 말로 나타납니다. 그 화법 속에 온갖 비꼬는 것, 원망, 책임 전가, 불행에 대한 예감 모든 것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 그게 바로 죄가 들어온 다음에 나타나는 화법입니다. 이것이 타락 후 인간관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 하는 말은 어떤 것입니까? 다음시간에도 계속 살펴보겠지만 한 가지만 오늘 정리를 하자면 이것입니다.
우리는 내버려 두면 말의 절제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항상 말에 대해서 절제해야 합니다. 말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말을 하고자 할 때 가슴에서 배설물처럼 확 솟아오르는 것들이 이성에서 필터링 되는 이것들이 우리 속에서 하나의 ‘프로네시스(φρόνησις)’가 되어야합니다. 즉, 마음의 틀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말에는 항상 정동이 묻어 있기 때문에 달음질치고 말을 하다가 보면 맨 처음에는 조금 기분이 나빴지만 말을 하다보면 두 배 세배 네 배 기분이 나쁘면서 말이 많아집니다. 좋은 것도 처음엔 조금 좋았는데 이야기하다보면 더 좋고 더 좋고 더 좋아서 말이 많아집니다. 이렇듯 말은 말이 달려가는 것과 같아서 어느 순간엔 절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항상 속에서 불끈 솟아나오는 언어들을 이속에서 지성과 이성에 의해서 다듬고 나와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 일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일 쉬운 일은 배 아프고 대변을 보고 싶을 때 가서 확 일을 보면 시원하듯이 말도 확 하면 시원해집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을 절제해야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단순히 우리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격과 삶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하도록 부른 존재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말과 행실 모든 것들 중에서 특별히 말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우리와 관계를 맺으신 그리스도를 생각나게 하려고 우리들이 부름을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이 속에서 지성과 이성으로 항상 걸러서 이 말이 어떤 좋은 결과를 가져 올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