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존재의 울림
녹취자: 김세나
프롤로그
사도 베드로가 베드로전서를 기록한 것은 로마의 황제의 네로에 의한 핍박이 있던 시기였습니다. 주석가들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라고 한 말씀을 근거로 이 서신의 기록 장소가 로마라고 봅니다. 교회에 대한 박해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 서신을 씀으로써 핍박 가운데 있던 교회들을 격려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아시다시피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였던 뼈아픈 실패의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교회가 믿음을 배반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굳건히 하도록 격려하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베드로전서는 핍박을 견디는 성도들의 이야기만을 다루고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베드로 사도는 이 서신에서 우리의 일상생활에 대한 실천적이고 교훈적인 내용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 또한 그리스도의 교회의 목양의 원리가 무엇인지 가정 안에서 남편과 아내는 어떠한 관계를 맺어야 하고, 또한 이웃을 향해서는 신자가 어떠한 태도로 그들을 섬기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가르침은 매우 포괄적이고 그리스도인의 지혜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은 세상의 교훈과 달랐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가르침에는 유일하고 확실한 토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토대 위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하나님과 세계와 또 인간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는지 보여줄 수 있기 떄문입니다. 그 확실한 토대가 바로 신자에게 산 소망이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전서가 다루고 있는 주제들을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 1장에서는 ‘소망’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2장의 주제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3장에서는 ‘남편과 아내의 문제’를 다루고 4장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청지기로서 인생을 살 것인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5장의 주제는 ‘교회’입니다. 어떻게 교회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양 무리를 목양해야 할지 권면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과 나머지 2장에서 5장을 연결해주는 중요한 신학적 주제 하나가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산 돌’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5절,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려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산 돌이신 그리스도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산 돌’, 'Living Stone'으로 묘사합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이의 머릿돌이라고 말합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사도행전 4장 11절, 베드로전서 2장 6-7절) 모퉁이 돌은 대게 한 쪽 벽과 또 다른 벽이 만나는 건물 모퉁이를 서로 연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부터 오는 벽들을 연결하여 힘을 지탱하고 건물 전체를 떠 받쳐 주는 돌입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비유입니다. 당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인들의 지경을 넘어 이방 나라에까지 전파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은 다민족 사회였습니다.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였으나 그 영향력은 로마제국 전체에까지 미쳤습니다. 교회 안에는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 있었고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사고방식과 삶의 양식, 세계관과 인생관에 있어서는 너무나 많은 차이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참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고 또 이웃과 어떠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성경을 통해 배워가야 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문화적인 종교적인 토양을 가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접붙여져서 유대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닌 완전한 새로운 관점을 받아들여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서로 다른 두 방향의 벽이 만나 하나의 건축물을 이루는 것처럼 이방인과 유대인이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하나의 건축물처럼 그러한 관계를 갖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감당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이의 머릿돌이라 부르는 이유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바로 이 모퉁이 돌인 예수 그리스도를 ‘산 돌’, ‘생명을 가진 돌’로 묘사하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유대인과 이방인을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양쪽에 생명을 불어넣는 역할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생명을 주시는 연결점이 되심으로써 서로 다른 두 부류의 사람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고 계십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인바 되어 그 분께로 오는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공급받음으로 한 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또한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온전한 몸으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11절, 에베소서 2장 21절)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루어지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각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지만 그 구원의 실현은 이미 존재하는 교회에 접붙여짐으로써 이루어집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에 주신 생명에 참여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여 구원을 얻으면 그것은 자기 혼자만의 구원이 아니라 많은 성도들과 함께 영적으로 연결된 구원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교회의 한 몸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는 교회가 사람들을 구원할 권세를 홀로 가지고 있으며 더욱이 그렇게 인간을 구원하는 권세를 교회의 성례에서 찾는 가톨릭의 신학적 주장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분명히 우리의 구원은 교회를 통해서 주어지지만 교회의 사제들의 성례성사나 그들이 인정하는 공로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을 생각할 때 개인적인 측면과 공동체적인 측면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은 개인적인 것일 뿐 아니라 교회론적인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개인적인 구원을 받지만 이미 그 구원은 함께 구원받은, 그리고 구원받기로 예정되어 있는 지체들과 함께 하는 것이고, 또 그 지체들 없이는 자신도 없고, 자신도 그 지체들 없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교회를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라고 부르는 심오한 의미입니다. 신자가 모두 그리스도께 접붙여져 영적인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구원받은 이후 신자의 삶에서도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신자에게 사명이 주어집니다. 사명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마땅한 의무이고 소명입니다. 이 의무로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신자의 소명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것이며 각기 그 소명의 종류는 달라도 그 부르심은 하나로 화합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헌신으로 우리를 초청합니다. 이러한 소명을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사명의 삶을 살아갑니다. 사람마다 다양한 개별적인 사명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 사명들의 모든 총화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삶입니다. 우리는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몸인 교회에 접붙여진 지체들입니다. 다른 지체들과 함께 진리와 사랑으로서 한 몸을 이루며 자신에게 주어진 개별적인 사명 안에서 교회전체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것입니다.
사명이 있는 복음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여전히 현실적으로 죄와 불완전함이 공존합니다. 이는 구원받은 자는 이미 거룩해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면의 세계 속에 죄의 영향력이 잔존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처지는 이미 구원받은 거룩한 신자로서 죄로 가득 찬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죄악과 불완전함 때문에 교회는 고난을 겪으면서도 자신에게 주신 새 생명의 원리를 따라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도록 헌신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모순적으로 보이는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으로서 또한 이 세상의 나라에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이바지하면서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신자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이 사명은 단지 한 사람이 목회자가 되거나 교회에서 중요한 일로 봉사하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이 사명은 먼 나라로 떠나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의 삶은 그 자체가 사명자로서의 삶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던 사람들이었는데 은혜로서 그리스도를 알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전에 우리는 멸망 가운데서 죄의 종 노릇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교회에 접붙여졌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들을 그리스도께서 생명으로 살리셨습니다. 죄인들을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향해 죽어있었던 사람들을 살리신 이 놀라운 생명의 역사는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이 생명의 본질은 그리스도를 통한 삼위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입니다. 그 분과의 교통을 통해 우리는 충만한 생명과 사랑을 누립니다. 그것은 우리가 진리를 인식하고 성령 안에서 은혜를 받음으로써 현실화됩니다. 이로써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듭나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이유와는 전혀 다른 이유를 가지고 이 세상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생의 소망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또한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를 따라 우리 자신을 부인하며 살아가려고 애씁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들에게 선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은혜가 부족하기 때문에 세상의 악을 이기지 못하거나 하나님의 용서가 모자라기 때문에 버림받는 일은 없습니다. 모두 우리가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간절히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는 은혜를 주시고 또한 죄를 지어 침체에 빠진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자들의 특권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사명을 따라서 주님을 섬기며 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이면 누구든지 인생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만약에 누군가가 구원의 경험은 있는데 인생의 의미에 대한 깨달음이 없다면 그 구원의 순수성은 마땅히 의심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순수한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있으면 우리의 삶의 방향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던 사람들이었고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의 방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앞에 있는 현실은 다릅니다.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불신자보다 더 악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탁월한 체험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도 아무런 사명감 없이 사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그 현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겠습니까? 첫째로는 이들의 구원의 진실성을 의심해 보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구원 받았다고 할지라도 워낙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지식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셋째로 그러한 구원의 의미를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 그 의미를 따라서 감격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신자가 얼마나 하나님께 순종하고 은혜 안에서 살아가느냐 하는 영적인 생활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존재한다는 것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사명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신자가 되게 하실 때 의도하셨던 바로 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사명은 전도와 선교, 교회 안에서의 이러저러한 봉사가 아닙니다. 이것들이 무가치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절대적인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구원을 통해 의도하신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3장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신 목적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마가복음 3장 14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최우선의 목적이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능력 있는 전도자, 설교자, 치유자로 일하게 하시는 것을 우선적으로 제시하시지 않고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이것은 바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참으로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사람답게 존재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와는 다른 존재로서 이 세상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신자가 현존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성품입니다. 나는 이것을 ‘존재의 선포’(proclamation of existence)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 세상의 사람으로 현존하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웅장한 울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울림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살아있어야지만 울리는 울림만은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미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울려 퍼지는 울림을 들을 수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움직인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학식이 뛰어난 사람들만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사람들을 사용하셨습니다. 학식이 뛰어난 사람도 있었고, 그것이 부족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으니 바로 ‘존재의 울림’이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존재의 울림’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한 마디로 인간 존재의 울림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으로서 존재하는 것은 이러한 것이라고 하는 울림입니다. 사람이 산다고 해서 모두 사는 것이 아닌 것처럼 존재한다고 해서 모두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 내용은 바로 우리가 이 책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룰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여 그리스도인으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참된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은 누구도 그리스도의 구원을 통하지 않고는 참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구원하신 후에도 성화의 삶을 살도록 부르십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를 구원하심으로써 참 인간이 될 길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고 그 신학적인 토대를 우리 안에 이루셨지만 우리가 이미 그렇게 온전한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결국 한 인간이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을 완성하심으로써 성취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는 날 동안 끊임없이 죄로부터 우리의 본성이 순결해지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 형상을 닮게 하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들이 보다 더 온전한 삶이 되게 하시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교회를 부르신 목적이기도 합니다. 결국 이 ‘존재의 울림’은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의도하신 참 인간이 무엇인지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울림입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은 그러한 지위에 오르고 싶어 하는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울림이 됩니다. 재능이 아주 뛰어난 사람은 그러한 재능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울림을 들려줍니다. 그러나 그 어떠한 것도 오늘 여기에서 말하는 ‘존재의 울림’과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에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존재의 울림’은 경력과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됨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존재의 울림’은 이러한 것입니다. 그 사람 앞에 설 때 인간으로서 내가 이것 밖에 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그러한 종류의 감동이 바로 울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불완전한 세상에서 현존하는 삶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고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보여주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교회의 한 지체로서 목양과 선교, 봉사에 참여하는 이유는 바로 이 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그것을 자각하든지 못 하든지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참된 행복은 이 사명을 발견하고 사명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사명은 ‘존재의 울림’을 들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신자는 어떠한 사람이며 누구이겠습니까? 그리고 또한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베드로전서 2장 9절)
1부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1장 택하신 족속
그리스도인이 사명을 따라 살지 않는 것은 자기 정체성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그것이 자신의 인생의 의미하는 바가 깨닫는다면 그는 결코 목적 없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더욱이 인생의 모든 일들이 자신의 뜻대로 될 때에는 하나님 없이 넉넉히 살다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성경 구절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행동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핍박을 받고 있는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쓰면서 그들의 정체성을 상기시켰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택하신 족속, 둘째로 왕 같은 제사장, 셋째로 거룩한 나라, 넷째로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었습니다. 바로 이 정체성에서 그들의 사명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이 세상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택하신 족속의 의미
첫째로 택하신 족속입니다. 신자의 첫 번째 정체성은 택하신 족속입니다. 우리말 성경에 ‘택하신 족속’이라고 번역된 구절은 헬라어 성경에 ‘genoV eklekton’이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선택받은 족속이라고 나옵니다. 여기에서 ‘genoV’라고 하는 단어는 ‘한 조상의 핏줄로 연결된 후손’, 혹은 ‘한 왕의 통치를 받는 같은 문화를 가진 한 백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택하신’이라고 번역된 희랍어 단어는 ‘eklekton’인데 ‘선택된’이라는 의미를 가진 ‘eklektoV’에서 나온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족속’이라고 번역된 ‘genoV’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genoV’라는 단어의 용례는 구약 히브리어 성경의 헬라어 번역인 70인역에 나오는 단어입니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이야기에 등장합니다. 결국 온 땅에 흉년이 들었고 요셉의 형제들은 애굽으로 양식을 구하러 내려갑니다. 이 때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애굽의 국무총리가 이미 되어 있었습니다. 요셉은 그 형제들에게 “너희는 누구인가?”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에 요셉의 형제들이 대답하였습니다. 우리는 한 아비에게서 태어난 족속들입니다. ‘genoV’라는 단어는 반드시 핏줄로 연결된 자손들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같은 임금 아래 통치를 받거나 혹은 문화, 역사 등의 공통적 기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genoV’라고 불렀습니다. 베드로가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라고 말하였을 때 “너희는” 어느 지역 교회의 한 무리들인 수신자들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로마제국 전체에 흩어져 있었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모든 신자들의 영적인 연합, 곧 보편 교회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이렇게 한 ‘족속’이라고 부를 만큼의 공통된 표지가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볼 때 ‘아,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들이구나!’라고 알아차리는 그 표징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 표징이 주일마다 교회에 모이는 것, 혹은 직장에서 신우회를 만드는 것, 가정의 행사에서 목회자를 초청하는 것에 그친다고 한다면 이것은 매우 슬픈 대답이 될 것입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잠시 초대 교회 시대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이 능력 있게 선포되고 기독교의 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던 1, 2세기로 가보는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누구라고 하였는지 들어보는 것은 흥미 있는 일입니다.
당시 기독교인에 대한 인상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쓴 『잡록』에는 “베드로의 설교”라는 작품이 실려 있습니다. 이 책은 성경과 같은 권위를 인정받지는 못한 책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참고자료가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위경이라고 부르는 책인데 여기에 기록된 그리스도에 관한 당시 사람들의 인상이 있습니다. “유대인도 이방인도 아닌 제 3의 족속이 나타났다.”라는 표현입니다. 당시 유대인과 이방인은 매우 뚜렷하게 구별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유대교 사상의 틀이 잡혀 있었고 이방인들에게는 이방의 세계관과 종교를 중심으로 그들 나름대로의 체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과는 다르게 아주 뚜렷한 세계관과 인생관을 가지고 유대인들과도 이방인들과도 다른 길을 가는 무리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족속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독특한 존재로서 이제껏 유대인에게서도 이방인에게서도 보지 못하였던 삶의 방식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의 제자 폴리캅은 로마가 기독교를 핍박하던 시기에 사도들에 뒤이어 교회를 보살폈던 인물입니다. 소위 속사도 교부라고 불리는 사람들 중에 속해 있습니다. 그의 순교의 이야기를 다룬 『폴리캅의 순교』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평가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족속들이다.”라고 말입니다. 『영웅전』으로 잘 알려진 플루타크가 쓴 책 가운데 『도덕론』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위험한 사상을 퍼뜨린다는 이유로 고소를 당해 법정에 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들은 로마의 법정의 피고가 되어서 유무죄를 판결 받습니다. 당시 로마 사람들은 그 로마의 법정에서 내리는 판정을 신성한 판결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책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로마의 신성한 판결의 피고가 된 그리스도인들은 선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족속들입니다.” 유세비우스의 『멜리토』라는 글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위의 내용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또 다른 그리스도인을 칭송한 내용이 아닙니다. 교회 밖의 불신자들의 눈에 비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불신자들이 보기에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을 받는 사람들, 거룩하고 경건하고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그리스도인의 특징이었습니다. 비록 그리스도인들이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할 자유를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들은 자신들과는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심지어 핍박을 받아 순교의 길을 가면서도 지울 수 없이 울려 퍼지는 어떤 웅장한 ‘존재의 울림’을 그들에게서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구별 : 존재적 특성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존재의 울림’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교회에 출석하는지, 혹은 가정의 행사를 기독교 예식으로 치르는지에 따라 그를 기독교인으로 혹은 비기독교인으로 부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울림은 아닙니다. 한 사람이 일평생 유지한 삶의 방식은 그의 확신의 소산입니다.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한 신념, 사상의 체계가 바로 그로 하여금 어떠한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존재의 울림’은 인간의 삶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깨우치고 일관성 있게 사상을 가지고 그 길을 걷는 사는 사람들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존재의 울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존재의 울림은 기독교 사상과는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존재의 울림은 기독교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극단적인 세속주의를 부르짖는 철학자나 신념을 가진 사상가들 속에서도 이런 존재의 울림들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 읽은 한편의 글이 깊은 인상을 제게 남겼습니다. 어느 고등학생이 시골에 놀러 갔습니다. 그리고 우연히 그 근처에 있는 한 유명한 절에 들렀습니다. 절을 구경하고 잠시 쉬어가려고 절간 툇마루에 앉았는데 저기서 한 젊은 스님이 걸어왔습니다. 그리고는 함께 옆자리에 앉아 말을 건넸습니다. “얘야, 너는 누구니?” “스님, 저는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는 학생입니다.” “여기에 왜 왔니?” “이 절이 하도 유명한 절이라고 해서 구경하러 왔습니다.” “얘야, 인생을 왜 사니?” 이렇게 대화가 시작되었고 한 시간 남짓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바로 이 아이는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이 아이는 부모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저는 비로소 인생의 길을 찾았습니다. 출가하게 허락해 주세요.” 그 집안은 대대로 가톨릭을 신망하던 가정이었기 때문에 발칵 뒤집혔습니다. 그 때 마침 일본에 유학을 하고 있던 사촌 형이 있었습니다. 그는 유학시절 일본 불교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아이의 부모에게 말하였습니다. “이 아이가 인간으로서 자각이 생겨서 자기 길을 가려고 하니 허락을 하십시오.” 이렇게 출가한 고등학생이 어느덧 70세가 넘는 노승이 된 후에 그 글을 쓴 것입니다. 그때 이 어린 학생에게 다가와 선문답을 건네던 그 스님이 바로 성철 스님이었다고 합니다. 저는 그 글을 읽는 내내 한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생각 없이 절간을 찾은 어린 학생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한 두 시간 내에 그 마음을 움직여 60년 동안 후회 없이 그 길을 걸어오게 하던 그 힘은 무엇이었을까? 물론 그것은 완전한 하나님의 진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들으며 무심코 제게서 흘러나온 말이 있었습니다. 존재의 울림이다.
본래 이 존재의 울림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것은 바로 이 세상 사람들에게 이러한 존재의 울림을 들려주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탁월한 사상과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사랑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은혜를 한 없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른 존재의 특성을 가지고 이 세상 모든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습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들과 뚜렷이 구별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탁월한 것은 나라의 크기나 군인의 숫자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다윗 왕국의 시대가 영광스러운 때라고 말하지만, 세계 역사의 맥락에서 보면 그것은 아주 하잘 것 없이 작은 나라의 역사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작은 나라가 어두운 세상을 밝히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당신의 나라를 세상 나라의 규모로 이루신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집트나 로마 영국이나 중국, 혹은 몽골을 택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 이 세상에 들려주고 싶었던 것은 존재의 울림이었기 때문에 외형적인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방 나라들 한 가운데 있어서 이스라엘은 그들과 다른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은 말 그대로 하나님의 옛날 언약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애굽기 19장 6절) 이것이 바로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하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예레미야 11장 4절) 구약은 이에 관한 옛 약속이며 신약은 이에 관한 새 약속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약은 이 구약의 약속이 새로운 방식으로 실행된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으로 우리를 하나님 백성이 되게 하시고 그리하여 우리를 이 세상에서 참 사람이 누구인지 보여주는 백성들로 삼으신 것입니다.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의 최고의 사명은 모든 이방의 나라와는 달리 하나님이 자신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자신들은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 됨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천국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높은 지위를 갖은 부자들부터 예수를 믿기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반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낮고 천한 사람들 가까이 다가가셨습니다. 하층민들에게만 파고든 것이 아니었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은 모든 세대와 계층을 뛰어넘는 기쁜 소식입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과 부요한 사람이 먹고 사는 것은 차이가 날지 모르지만 인생의 근본적인 소외와 고통의 문제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노예를 부리는 주인도 그 주인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는 노예도 모두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회적인 지위와 상관없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붙들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존재의 울림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힘일까요? 오늘날 우리에게 그러한 울림이 사라졌기 때문에 이 질문은 더욱 절박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욕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어떻게 하면 세상 사람들에게 준 나쁜 인상을 불식시킬 수 있을지 고민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노력을 합니다. 그렇게 애쓴 방법이 무엇일까요? 경영의 위기에 처한 기업이 대처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기업이 위기에 처하면 주가는 폭락하게 되고 자금조달이 어려워지게 됩니다. 이럴 때 기업은 이미지 개선 작업을 시작합니다. 제일 먼저 구조조정을 실시합니다. 직원들에게 해직을 통보하고 임원진을 교체합니다. 광범위한 앙케이트 조사를 통해 기업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로고까지 바꿉니다. 그리고 사회에 선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직원들은 가난한 달동네에 가서 연탄배달을 하기도 하고 무료 급식소를 방문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이러한 변화를 적극적으로 언론을 통해서 알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하는 일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교회는 잃어버린 좋은 평판을 회복하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벗어나 보려는 교회의 노력이 모두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본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초대교회 때 이방인들이 기독교인들에게 받았던 그 인상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러한 인상을 줄 수 있었던 교회는 오늘날의 교회와 무엇이 다른가? 그리고 우리는 오늘날 이러한 고민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 답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것은 이런 저런 행동을 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의도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지만 오래 가지는 않습니다. 존재 자체가 울림이 되어 나오는 감동은 명작과 같습니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한 선행은 상품과 같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상품은 가치가 떨어지고 명작의 가치는 상승하게 됩니다.
신자의 존재와 선포적 사명
우리는 신자의 존재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선포적 사명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진리를 언어로 선포할 수도 있고 존재로 선포할 수도 있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우리가 말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라는 선포는 항구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 이 복음을 듣지 못하였고, 듣지 못했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고, 믿지 못했기 때문에 고백할 수 없습니다. 고백할 수 없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쉼 없이 전파하는 일이 신자의 사명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복음은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말로써만 복음을 선포해서는 안 됩니다. 언어로 선포한 복음이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전파하는 신자의 존재적 선포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한 사람의 됨됨이가 불신자들과는 다른 판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상과 삶의 방식이 다른 신자로부터 울려 퍼지는 장중한 울림, 이것은 언제나 이 세상에 낯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낯섦을 이 세상에 선포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이러한 존재적인 울림을 사는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이 구원을 말하지만 그것은 죄에 대한 진실한 회개와 심오한 뉘우침을 동반하는 복음적인 구원이 아닙니다. 더욱이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 회개와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강조되지 않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은 후에는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될지에 대한 삶의 방향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구원의 의미는 어디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보이는 세상에서 구원을 바라다보면 그것은 이미 일어난 사건이고 놀라운 일이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 바라다보면 겨우 시작에 불과합니다. 구원 받은 사람이 본성에 있어 순결하게 되고 견고한 사상과 지식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그가 그렇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 속에서 한 줄 한 줄 자신의 피를 찍어 글을 쓰듯이 치열한 삶을 살아갈 때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존재의 울림을 들려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존재의 울림은 그 사람의 지위나 소유와 상관이 없습니다. 높은 지위에서 어떠한 울림이 있다가 내려오니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와 같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바로 이러한 존재의 울림을 들려준 인물입니다. 일제 시대 때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고문을 하다 지친 일본 경찰이 타협안을 내어 놓았습니다. 일본 신사에서 절은 안 해도 되니 그 옆을 지나갈 때 차창을 열고 눈길을 주며 고개라도 한번 까딱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대가는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석방이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그 제안을 거절하였습니다. 심문을 하던 일본 순사들은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두려움들을 느꼈다고 증언하였습니다. 그 분이 어디에서 목회를 하였고 얼마나 큰 일을 하였는지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존재의 울림은 역사를 뛰어넘어 우리에게까지 들립니다. 하지만 교회의 유명한 인사들 가운데 한 시대의 권력의 줄을 타고 신문을 장식했던 수많은 사람들은 더 이상 사람들에게 아무 울림도 들려주지 못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고 물질을 소유하고 남보다 뛰어난 재능을 갖는 것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단하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가 어떤 위치에서 무엇을 하며 살든지 존재의 울림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살도록 부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인 여러분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바로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성경은 여러 곳에서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또한 구별된 사람으로 살아갈 것을 기대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장 2절) 여기에서 ‘본받다’라는 의미로 쓰인 헬라어가 ‘suschmatizesqe’입니다. 이 단어는 ‘틀에 맞추어 찍어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모두 그 시대의 아들들입니다. 원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세상의 흐름에 항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세상과는 다른 사상, 다른 삶의 방식을 고집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과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인생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예전과는 다른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두 가지 점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첫째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남다른 사상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렇게 깊이 만난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의미를 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신학이 필요합니다. 성경과 신학에 대한 견고한 지식과 확실한 교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한 지식 위의 기반 위에 세워질 때 그리스도인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관과 인생관을 갖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견고한 삶은 확고한 사상의 기반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은혜의 수단에 참여하는 우리의 모든 열심 있는 순종은 바로 이러한 사상과 지식이 현재적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역사하도록 만들어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우리는 기독교 사상의 학교에 입학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성숙해지지 않으면 우리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에게는 남다른 삶의 방식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책 『보편교회 교인의 생활방식과 마니교인의 생활방식』에서 두 부류의 사람들을 비교합니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며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며 다른 한 종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그 사랑 안에서 질서를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삶의 방식은 그가 믿는 사상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참다운 삶의 방식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사상을 이 세상을 향해 입증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 사상에 귀를 기울이는 것보다는 우리의 삶을 목격하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삶의 방식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보여줍니다. 신자가 이 세상에 들려주어야 할 존재의 울림은 바로 이렇게 삶의 방식을 통하여 들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이렇게 변함없이 이 세상의 사람들과는 구별된 존재로 존재의 울림으로 들려주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은혜 아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우리들도 역시 수시로 이 세상의 유혹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침체를 가볍게 취급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지속적인 침체 속에 있다면 어떻게 우리의 사상을 따라 새로운 방식의 삶을 보여줄 수 있겠으며 교회가 이 세상과 구별되는 특성들을 나타내 보여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단지 지식과 사상만이 아니라 그 지식과 사람 속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를 필요로 합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개인에게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에 풍성하게 부어질 때 그리스도의 교회는 성결해 질 것이고 이 세상과는 다른 존재의 울림을 들려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존재의 울림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면 그것은 사랑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과 다른 사상에 대해 그렇게 깊은 인상을 갖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사상들이 한 세대 안에도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사상을 깊이 이해하는 것은 시간과 탐구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쉽게 인식됩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다른 방식의 삶을 살아가게 만들었던 것은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사랑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당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라고 말하였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존재의 구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는 구별입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이러한 충만한 사랑 속에서 살 수 있을까요? 어떻게 교회가 모든 이기심을 버리고 순전한 사랑으로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으면 우리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우리가 하나님만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자각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우리가 새로운 존재로서 구별되는 방식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분께로부터 오는 충만한 생명과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것들이 없었을 때와는 다른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그 말씀대로 살게 도우시는 성령의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택함을 받은 족속의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의 생애는 자신을 끊임없이 내어주신 생애였습니다. 높은 지위의 권력자들 앞에서나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앞에서나 언제나 한결같은 존재의 울림을 들려주셨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을 닮은 성품을 가진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러한 존재의 울림을 들려주기 위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사명에 충실하지 않고는 우리는 결코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맨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충만한 사랑 속에서 주님을 붙들고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보다 더 큰 고난과 시련을 겪으면서도 존재의 울림을 들려주는 사람들이 되었고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을 보면서 그리스도 예수가 누구신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도 예전처럼 주님을 붙들고 계십니까?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붙들며 살지 않고는 존재의 울림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는 바로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참 인간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사람들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 자리에 사람과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울려 퍼지는 존재의 울림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은혜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보여주셨던 존재의 울림에 동참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