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은 말을 버리심
“구부러진 말을 네 입에서 버리며 비뚤어진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하라”(잠언 4:24)
사람과 대화할 때 우리의 언어생활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마도 4장 24절은 잠언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 중 하나일 것입니다. 성경에서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잠4:23)라고 말합니다. ‘지킨다’는 히브리어로 ‘샤말’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에서 율법을 지키는 데도 사용되고, 전쟁에서 고지나 혹은 중요한 지역을 사수하는데도 사용되었습니다. 즉, 우리의 마음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전투적인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 마음 안에는 버려야할 마음과 지켜야할 마음이 공존합니다. 지켜야할 마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는 마음이고, 버려야할 마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마음입니다. 마음은 수많은 행동들을 만들어내는 공장과 같습니다. 공장이 한번 세워지면 어마어마한 양의 똑같은 물건들이 생산되어 나오기 시작합니다. 공장에서 나온 제품이 수없이 팔려나간 것처럼 우리 마음에서 생산해낸 행동들은 회수할 수가 없습니다. 자동차는 리콜이라도 하지만 한번 쏟아진 말은 다시 담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마음을 지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중요한 가르침에 이어서 오늘 읽은 말씀이 나옵니다. “구부러진 말을 네 입에서 버리며 비뚤어진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하라”라고 말입니다. 그 의미를 상세하게 알려드리겠습니다.
‘구부러진 말’은 히브리어로 ‘이케슈트’입니다. 가장 가까운 의미의 우리말은 ‘패역’입니다. ‘패역’은 선악의 기준, 하나님의 뜻을 기준으로 떠올렸을 때 올바른 말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벗어난 말은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해 굽어 있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굽어 있는 마음에서 나오는 말을 구부러진 말이라 합니다. 사람의 말은 마음의 거울이어서 속일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과 잠시 대화를 해보면, 어떤 사람인지 거의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저는 한 10분 정도만 어떤 사람과 대화를 해보면 이 사람이 계속 교제를 해야 하는 사람인지, 멀리도 말고 가까이도 말고 그렇게 두어야 할 사람인지, 자주 만나서 교제하며 유익을 나눌만한 사람인지, 공부를 얼마나 한 사람인지, 성격이 어떤 사람인지 등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말은 마음의 반향입니다. 마음과 말은 미묘한 관계가 있어서 마음을 고치기 전까지는 말도 바뀌지 않습니다. 하지만 말을 바꾸기 시작하면 놀랍게도 마음에 영향을 줍니다. 놀랍습니다.
교회에 정말 예쁜 나무들을 사왔습니다. 나무의 가격을 매길 때에는 직경으로 가격을 매깁니다. 그 당시에 우리가 사온 나무의 직경이 20cm정도 되는 단풍나무였는데, 가격이 20만원부터 400만 원까지 있었습니다. 저는 ‘같은 나무의 값이 저렇게 다를까?’ 생각하며 놀랐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나무를 심고 시간이 조금 지나서 두 그루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교환하기로 했습니다. 외국에 출장을 다녀와 보니 여배우 같은 나무가 심겨 있었는데, 머슴 같은 나무가 심겨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돈을 더 줘도 좋으니까 다른 나무로 바꿔달라고 했습니다. 그 중 한 그루가 또 시름시름 반쯤 죽어가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아침마다 새벽기도 끝나고 성경을 읽고 묵상을 했는데, 그 때마다 어루만지면서 나무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얘야, 너는 하나님의 교회 마당에 심겨진 나무란다. 자부심을 가져라. 죽지 말고 살아라.” 라고 매일 어루만졌습니다. 놀라운 것은 ‘저 나무 또 죽어가네 저것도 빼버려야 하나보다’ 라고 생각했는데, 매일 나무를 만지면서 대화를 하니까 그 나무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말은 마음에서 나오지만, 말을 바꾸면 마음이 놀랍게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말을 바꾸는 것은 중요합니다. 굽은 말은 패역한 말입니다. 우리가 정신 줄을 놓지 않는 한 자기가 말을 뱉고 돌아서서 내가 쏟아 놓은 말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말이었는지 안 기뻐하시는 말이었는지 모른다면 거짓말입니다. 우리가 양심의 판단, 하나님의 말씀의 판단을 외면하기 때문에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은 분명히 알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이 성령 충만하면 그 자리에 있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지 기뻐하시지 않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그런 영적인 민감함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첫 번째로 드릴 수 있는 말은 “패역한 말을 버려라”입니다. 명백히 하나님의 법도에 어긋나고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말을 버리는 것은 말의 내용과 태도, 마음의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예를 들자면, 비아냥거리는 말인 경우에는 말 자체에는 하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말 때문에 마음이 비아냥거립니다. 모두 잠언이 말하는 패역한 말입니다. 버려야합니다. 다른 것은 그렇지 않아도 선물을 누구에게 과하게 한다고 한다면 오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뇌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전 찾아오지도 않던 사람이 과일 바구니를 사 갖고 오면 일주일 뒤에 추천서를 써달라고 합니다. 선물은 사람의 마음에 오해를 줄 수 있습니다. 선물하는 게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과하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말은 아무리 친절하게 해도 문제를 일으키게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굽은 말을 버리고 올바른 마음과 말의 태도를 가지라는 것이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비결입니다.
마지막 두 번째, “비뚤어진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 하라”입니다. ‘비뚤어진 말’은 앞의 ‘구부러진 말’과 다른 말입니다. ‘비뚤어진 말’은 히브리어로 ‘라쥬트’인데, 영어로 ‘corruption’ 즉, ‘부패’, ‘오염’, ‘변질’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나오는 ‘비뚤어진 말’은 사람의 마음에 부패성에 의해서 오염된 말입니다. 어떻게 그럴까요? 사람은 누군가가 좋으면 말도 곱게 합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맘에 안 들면, 말이 거칠어지고 딱딱해지면서 함부로 말합니다. 더욱이 사람은 자기보다 권력이 없거나, 더 낮은 위치에 있거나, 자신에게 혜택을 받는 입장에 있을 경우에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무시하면서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친절하게 말을 하고, 따뜻하게 말을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그런 인격을 갖추기 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증거입니다.
여기서 ‘라쥬트’라는 말은 넓게 보면 사랑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모든 말입니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따뜻한 사랑으로 하는 말은 순수합니다. 식품으로 말하자면 신성한 식품과 같습니다. 그런데 말과 달리 그 사람의 마음이 부패하여 사람을 섬기고 친절하며, 존중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지면, 좋은 말이어도 부패한 마음에 오염됩니다. 우리가 공식적인 시간에 모여서 드리는 예배만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가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 우리 입술의 모든 말과 우리 마음의 묵상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예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이 세상에 흘려보낼 때 사람들에게 똑같은 말을 하고, 어떤 태도를 가져도 얼마나 따뜻하고 바른지에 따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모습이 예배도 될 수 있고 모욕도 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는 사람은 말하는 태도가 다른 사람과 다릅니다.
상갓집에 문상을 하러 갔습니다. 두 사람이 앉아서 돈을 받고 있었습니다. 누가 죽었고, 누가 조문하러 갔습니다. 접수를 받고 있는 사람은 돌아가신 분의 아들의 친구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친구가 문상을 왔습니다. “야, 이게 도대체 몇 년 만이냐!”라고 반가워합니다. 그 다음 말이 황당하게만 들렸습니다. “야, 너 왜 이렇게 살이 쪘냐? 돼지가 되었네!”라고 말합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저는 정말 기분이 언짢았습니다. 몇 년 만에 친구가 왔고, 죽은 사람이 있는 상가 앞에서 기껏 하고 싶은 말이 그것뿐이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 말을 한 사람은 밖에 가도 여자들이 관심도 안 줄 얼굴이었습니다. 남자들 100명중에 70이나 80위할 정도의 몰골의 사람이 수년 만에 만난 친구한테 그런 말을 합니다. 그 친구는 그냥 얼버무리고 지나갔는데, 그런 사람들은 어디에 가서도 사랑받을 수 없습니다. 아마 험난한 인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한 순간에 쏟아져 나오는 말은 그 사람의 일생의 흔적입니다. 말을 보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되고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알게 됩니다. 자기를 이해하고 같이 살아온 가족들은 그러려니 하고 포기를 했으니까, 그러니까 용납해주는 것인데 그게 사회에서 자신이 일반적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특수한 집단에서는 특수한 대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 망가진 사과인데, “이거 우리 할머니께서 집 마당에서 키우신 건데 첫 번째로 딴 것입니다.”라고 여러분들에게 나누어 준다고 합시다. 아마 우리는 담임 목사님의 할머님이 기른 첫 번째 사과라며 의미 있게 생각하면서 사과를 깎아 먹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장에 망가진 사과를 내다 놓으면 사람들의 관심도 못 받습니다. 돼지 사료로 쓰이면 다행입니다.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부 사이에는 통할 수 있습니다. 그냥 한쪽이 포기하고 사니까 말입니다. 좋아서 그걸 포기하는 게 아니라 배우자를 도저히 꺾지 못하겠으니까 포기하는 것입니다. 똑같이 주어진 인생을 왜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지금의 행정실 직원들은 모두 친절하게 교인들을 대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있었던 교직원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릿합니다. 생활비도 말도 안 되게 조금이고, 휴일도 없이 야근을 밥 먹듯 하고, 추운 데서 일을 했습니다. 저는 직원들을 늘 안쓰럽게 생각하고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음이 확 상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직원이 행정실 문에 이렇게 써 붙였습니다. ‘여기 와서 칼, 풀, 종이, 호치키스 그런 걸 빌려달라고 하지 마시오.’라고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엇 좀 빌려줘. 무엇 좀 빌려줘.”라고 자주 찾아오니 이해하지만 마음이 상해서 행정실에 들어가 직원들에게 한마디 했습니다.
제가 100%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제가 전도사 때 사택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자다가 물을 마시는 습관이 있어서 머리맡에 물을 한 그릇 떠놓고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돌멩이처럼 얼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교회에서 사역자를 그렇게 대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아직도 이해가 안 됩니다. 비가 오면 그릇을 9개씩 놓고 찬송을 부르며 밤을 지새웠습니다. 거기 앉아 있으면, 살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우리 교회로 말하자면 열린 공간 자리가 우리 가족이 살던 사택이었습니다. 딱 방 한 개가 있었고, 화장실도 없고, 부엌도 없고 신발 신고 내려가는 땅이 푹 꺼진 곳이었고 창호지 문하나 열면 바로 교회 마당이었습니다. 집안에 물건이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분께서 화장실에 휴지가 없어서 “사모님, 휴지 좀 주세요.”, “바늘 좀 빌려주세요.”, “풀 좀 빌려주세요.”, “가위 좀 빌려주세요.”, “커피포트 좀 빌려주세요.”라고 부탁을 하곤, 절반을 되돌려 주지 않았습니다. 월요일이 되면 빌려준 것을 찾으러 다니곤 했습니다. 그래도 짜증 한 번 내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런 삶을 살아봤기에 백 번 이해가 됩니다. 무엇 좀 하려고 하면 빌려달라고 오는 사람이 많아서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랬던 기억이 나서 행정실 직원들에게 “내가 그대들의 처지를 이해를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어떻겠니?” ‘호치키스, 칼, 자, 종이, 봉투 이런 것들이 필요하신 분은 바로 앞에 비치했으니, 사용하시고 제자리에 놓아 주십시오. 그리고 더 필요한 것이 있으면 저희에게 말씀해주십시오.’ 호치키스를 못 갖고 가게 줄로 묶어 놓고, 칼은 위험하니 좀 높은데 두고, 종이 좀 가져가면 더 사다 놓으면 되고, 봉투 좀 가져가면 더 가져다 놓으면 되는 것이 큰 문제가 되겠습니까? 지나가는 담임 목사가 볼 때에도 “세상에”라는 말이 나올 정도니, 성도들은 어떻게 느꼈겠습니까? 성도들과의 관계를 대척점에 서 있는 피해자와 가해자인 것처럼 보고 같은 말을 그렇게 해야 했습니까? 행정실 직원들에게 다시 따끔하게 말했습니다. “우리들은 성도들을 섬기라고 여기에 있는 것인데, 불편함은 이해를 하지만 같은 말이라도 이렇게 하면 안 된다.”라고 말입니다. 행정실장은 정말 많이 혼났습니다. 직원들이 그런 걸 써 붙이게 만들게 한 것은 직원들 지도를 잘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불편하니까 이 속에서 부패한 마음이 나오면서 언어를 오염시켜 버린 것입니다. 그런 정신을 가지면 안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런 정신을 가지면 안 됩니다. 올바르지 않고 정의에서 벗어났을 때에는 우리가 따끔하게 이야기 할 수 있고, 그것도 사랑의 원리에서 그렇게 말해야 합니다. 그런 언어의 오염이 여러분에게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성경은 성화의 거의 끝을 “말에 실수가 없으면 그는 온전한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말의 온전함이 지상에서의 성화의 거의 끝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온 몸의 신체 중에서 혀를 길들이기 가장 어렵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고도 마음속에 굽고 어두운 것이 가득 있는 사람들은 한 번에 그것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배설물처럼 교회에 쏟아냅니다. 그리고 관계를 계속 파괴합니다. 여러분들이 한 1년만 말을 함부로 하고 살아 본다고 상상해 봅시다.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합니다. 진짜 센 사람을 만나 죽고 살고 결판이 날 일이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정신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피합니다. 자기 자신이 올바른 줄 알지만, 매우 외로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가까이 있는 몇 사람들이 자기를 따뜻하게 대해주겠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소외당한 채 살게 됩니다. 우리는 존재 자체로 선교적인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따뜻하게 말하고,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우리에게 참 평안과 기쁨을 주신 분이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불러 주셨습니다. 그러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몇 달 동안 잘 섬기고 마지막에 말 몇 마디로 다 관계를 깨뜨리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상당히 오랫동안 신뢰 관계가 쌓였는데, 말 몇 마디의 실수라도 찾아가서 잘못했다고 사과해도 회복되지 않는 인간관계가 참 많습니다. 시인은 그런 일을 본 것입니다. 지혜자가 자기 아들의 일생을 염려하면서 “이 마음을 잘 지켜라”, “네 입의 말을 가꿔라” 라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아들은 장차 왕이 될 텐데, 누가 감히 대들겠습니까? 왕도 사람의 마음을 사지 않고는 한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공포에 의한 정치, 권력에 의한 지배는 언제나 한계가 있습니다.
가장 확실한 지혜는 사람의 마음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사람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행해가는 것입니다. 듣기만 하지 말고 반성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씩 고쳐나갈 때, 그게 힘듭니다. 때로는 회개하는 눈물이 납니다. 그런데 그게 미래의 자신의 인생에서 피 흘리는 것을 막아주는 길이니 실전에서 그렇게 피를 흘리는 것 보다는 훈련해서 눈물과 땀을 흘리는 것이 훨씬 더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믿음으로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