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말을 하지 말라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잠 26:22)
잠언은 한 구절씩 떨어져 있어서 문맥을 잡기가 어렵다고 말하지만 꼼꼼히 살펴보면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잠언은 역사를 기록한 성경이나 교훈을 기록한 선지서처럼 딱 떨어지는 문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쪼가리 된 교훈을 아무 생각 없이 화투 섞듯이 섞어서 모아 놓은 것도 아닙니다. 오늘 한 증거로 “남의 말을 하는 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숯불 위에 숯을 타는 장작 위에 또 장작을 얻는 것처럼”(잠 26:21) 21절은 시비를 일으키는 자들이 분쟁을 일으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22절에는 잠언의 유명한 구절 가운데 하나인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별식’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별식은 평상시에 집에서 먹어보지 못하는 특별한 음식입니다. 우리는 주로 밥, 된장찌개나 김치찌개, 김치를 먹습니다. 이러한 집밥을 먹을 때는 특별한 기대도 없고 그렇다고 싫지도 않고 엄청 좋지도 않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빵이나 하나 먹고 나올까?’ 했는데 밥을 다 차려놨으니까 먹으라고 해서 별 기대 없이 먹었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오늘 판교에서 유명한 스테이크 집에 점심 먹으러 가게 된다면 집 밥 먹는 거와 달리 기대를 하게 됩니다. 별식이니까 그렇습니다. 여기서 별식은 ‘사람의 마음을 좋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삭이 에서를 야곱으로 착각해서 축복할 때도 별식을 먹고 마음이 흔쾌하고 즐거워서였습니다. 별식은 우리 마음에 놀라운 정동을 일으킵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보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냄새가 좋다는 이유로 비싼 캔들을 삽니다. 똑같은 음악이어도 더 좋은 음질로 잘 듣기 위해 오디오에 투자합니다. 지갑, 옷을 산다고 할 때 촉감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것은 우리 마음에 가지고 있는 네 가지 욕구입니다. 이게 모두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음식에서는 한 번에 다섯 가지가 만납니다. 음식이 우리에게 주는 감동은 때로 음악과 미술작품이 주는 감동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우리 마음의 전부를 흔들어 놓는 힘이 있습니다. 음식을 보고 냄새를 맡고, 씹고 느낍니다. 소리가 들립니다. 입 속에서 다섯 가지 감각을 함께 체험을 합니다. 그래서 음식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정동의 힘이 매우 강하다는 점에서 음식은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음식을 맛있게 먹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복 받은 사람입니다. 물론 개중에는 아무거나 다 맛있게 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탐욕에 흐를 가능성이 많습니다. 음식은 건강을 위해서 유익하지만 조심해야 합니다. 어거스틴은 날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어서 괴로워하나이다.”라고 하나님께 도움을 호소했습니다. 우리가 조금 금욕주의적인 플라톤주의에 물든 흔적들을 보일 때가 있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둘 사이에 우리가 끼어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의사들은 “링거 한 병보다 한 끼 식사를 맛있게 하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기력이 없고 지칠 때는 꼭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과 함께 교제를 하면서 먹는 맛있는 식사 한 끼가 우리를 즐겁게 합니다. 이러한 그림이 이 본문 속에 들어있습니다.
무엇이 별식과 같을까요? 성경은 ‘남의 말을 하는 것’이 별식과 같다고 말합니다. 악인의 특징은 나쁘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꼭 나쁘게 깎아 내리지 않아도 나쁘게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가 없는 사람의 인격적인 특징입니다. 자리에 앉으면 끊임없이 남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알지도 못하는 어떤 사람을 거명하고 연예인, 정치인까지 거론합니다. 심지어 자기 친구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까지 거론하면서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렇게 남의 말을 하는 사람은 마음의 습관을 끊지 못합니다. 쉽게 얘기하면 그들은 배설하듯이 말을 하고 다닙니다. 그 자체가 그들에게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주기 때문입니다. 상스러운 성품이 그렇게 구성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목사들도 만나면 어디서 그렇게 기괴한 소식을 많이 듣는지 듣고 있으면 새로운 세계입니다. 저는 할 얘기가 없습니다. 통합, 합동, 고신을 넘나들면서 남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중에서 모든 사람이 들으면 기뻐하고 칭찬하고 덕스러운 이야기를 여기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는 남의 헌담, 근거도 없는 상상을 하며 다른 사람의 명예에 흠집을 내고 헐뜯으며 남의 말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 자체가 말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말하는 순간에만 행복을 느낍니다. 심리적으로 왜 그럴까? 왜 그렇게 남의 일에 관심이 많고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할까? 그것도 남의 어두운 면들을 이야기하면서 양쪽 입 꼬리에 거품이 일어날 정도로 좋아할까? 하도 말을 많이 해서 거품이 굳어져서 입 꼬리 끝에 말라붙을 정도로 됐는데도 끊임없이 남의 이야기를 하고 씹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왜냐하면 그들은 살아가는 인생에 대한 의미를 잘못 찾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감과 살아있는 이유들을 그릇된 방식으로 확인합니다. 성경에서 두 절이 나란히 붙어 있는 것을 보면 그런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결국 어떻게 됩니까? 사람들 속에 있을 때 숯불 위에 숯불이 더 하여 지고, 타는 장작 위에 장작이 오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고기 집에 가서 계속 고기를 구워야 되는데 물이 질질 흐르면 “아주머니, 여기 숯불 더”라고 합니다. 숯불을 더 하였더니 열기가 확 올라오면서 고기가 잘 구워지지 않습니까? 분란이 일어나는 곳에 분란이 더 일어나게 하고 열 받는 곳에 더 열을 받게 만들어서 수많은 갈등과 분쟁을 불러일으킵니다.
‘-쟁이’라는 말은 ‘그 일에 매우 익숙해져 있다’라는 뜻입니다. 하나의 기술에 익숙해져 있고 그것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사람을 ‘쟁이’라고 부릅니다. 거기에는 멸시의 표현이 깃들기도 하고 안 깃들기도 합니다. 좋게 얘기하면 장인이고 나쁘게 얘기하면 거기에 코 박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뱅이’라는 말은 자신의 본성으로써는 극복을 못한다는 운명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앉은뱅이는 다시 일어날 가능성은 없습니다. 가난뱅이는 가난이 운명이어서 탈출할 가능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게으름뱅이는 살아있는 동안에 극복을 못하고 게으름과 함께 떡 져서 살아갈 사람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남의 말을 하는 사람도 ‘뱅이’의 기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웬만한 사건을 만나서 충격을 받기 전에는 결코 그런 성향을 그만둘 수 없습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인간관계를 파괴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하나님의 사랑이나 형제 사랑에 대해서 아무리 많은 이야기를 들어도 그런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본인이 자기 생긴 대로 살아가지만 그렇게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사람들과의 관계를 파괴시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신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는 그렇게 갈라지고 찢어진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초대 교회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을 때 헬라인과 유대인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유대인과 헬라인의 차이는 오늘날 경상도, 전라도를 10배를 곱해도 극복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차이를 극복하고 하나가 되어서 서로를 형제로 여겼습니다. 종과 자유인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종과 자유인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할례자와 무할례자도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있는 동안 하신 일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은 죄 때문에 갈라지고 대적하는 사람들의 사회를 하나님 사랑으로 통합하고 싶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서로를 살과 피처럼 여기며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회를 건설하고 싶으셨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이상을 깨달은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내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주님이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을 때는 우주 공간에 던져 버리시거나 높은 산 위에 나 혼자 살게 하시거나 무인도에 던지셔서 나 혼자 생존하게 하신 것이 아니고 사람들과 함께 살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저는 14살 때 세상이 무엇인가 생각했을 때 제 마음에는 ‘세상과 내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예수를 믿고 나서 신앙이 성숙하면서 깨닫게 된 것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세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세계가 무엇인가?’ 질문 속에 이미 있고 ‘세계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라는 존재는 다른 인간들과의 관계에서 이탈된 채로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규정해보려고 많은 실존철학자들이 시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우리가 헤엄을 치다가 조금씩 깊이 들어가면서 발이 땅에 안 닿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수영을 못 하는 사람들은 어마 어마한 공포를 느낍니다. 똑같습니다. 세계와 인간관계 속에서 인간 존재의 의미를 묻지 않고 한 사람의 의미를 규정하는 것은 마치 발이 닿지 않는 물 위에 손들고 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허비적거리는 동안에는 떠 있지만 손을 딱 들면 발이 닿지 않으며 공포를 느낍니다. 마찬가지로 그때 밀려오는 자기 존재에 대한 불안감은 경험해본 사람들이 아니면 모릅니다. 온 몸과 마음에 기운이 탈진해서 종이 한 장조차 올려놓을 힘이 사라집니다. 왜 살아야 되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사람과 함께 사는 관계 속에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규정합니다. 즉, 한 사람의 덕스러움은 다른 사람들과 사랑하며 살아가는 힘의 크기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바깥에서 사는 힘을 모두 잃어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다시 세우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 할 때는 언제나 베드로 사도가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라고 말한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듣고 싶지 않았는데 누군가 부정적인 이야기들을 하고 지나갑니다. 항상 마음속으로 ‘그 얘기는 내가 종착역이다.’생각하고 옮기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그것을 자기의 즐거움의 도구로 삼고 누군가를 끊임없이 뒷담화를 하면 자기는 이야기하는 동안에 뼈 속까지 기쁨을 느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회를 건설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의 말처럼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들리는 모든 것이 사실도 아니고 사실을 모두 말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걸 모두 통치하는 것이 사랑의 원리입니다. 불의나 잘못을 덮어서 그의 편을 들어주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훈련 받은 사람들이 남을 험담을 하는 것에서 기쁨을 느낀다면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삶의 즐거운 의미를 찾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허기짐이 끊임없이 바깥으로 나타납니다. 아파트나 동네에서도 반상회를 하면 말이 많은 사람들은 대개 집안에서 남편이나 가족들에게 존중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깊이 사랑 받지 못 하는 여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의 말을 함으로써 울분이나 서러움을 바깥으로 토해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