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의 대답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잠 15:28)
오늘 성경을 보면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람은 사랑할 때만 마음이 뛰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거나 화가 날 때도 마음이 뜁니다. 사랑의 정동과 분노의 정동의 공통점은 수많은 언어를 쏟아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속에서 언어가 되어서 막 솟아나옵니다. 사랑을 하면 누구나 다 글을 쓰고 싶어 하고 시인이 되고 싶어 합니다. 물론 그런 걸 실제로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지만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분노하게 되면 수많은 말이 쏟아져 나옵니다. 너무 화가 나면 밤새도록 잠이 안 오고 수많은 가상의 대화를 합니다. ‘내가 이렇게 물어보면 그 인간이 이렇게 말하겠지? 그럼 난 이렇게 대답할 거야 그럼 그 인간은 이렇게 핑계를 대겠지? 그럼 난 이렇게 말할 거야.’ 밤새도록 가상의 대화를 나누고 그 대화 한마디 한 마디에서 마음의 분노의 정동들이 계속 일어납니다. 그것이 사랑의 감정과 분노의 감정의 공통점입니다.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제일 힘든 것이 마음의 없는 것을 이야기 하거나 행동하는 것은 인간에게 굉장히 힘이 듭니다. 마음이 없이 하는 행동은 비자루질 하나를 해도 금세 표가 납니다. 그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마음의 정동이 마구 일어나는데 아무 표현을 안 하는 것입니다. 이거는 훨씬 더 어려운 것입니다. 군자는 마음의 정동이 일어나도 절제력으로 이것들을 이 속에서 통제를 하고 소리는 그것을 빡 치듯이 한 순간에 쏟아내는 것입니다.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악을 쏟는다는 것은 ‘나쁜 것을 쏟느니라’라는 뜻입니다. 즉 ‘나쁜 말’입니다. 자기 속에 있는 쌓인 악을 생각과 말로 바깥으로 쏟아냅니다. 생각을 넘어서 말로 쏟아냅니다. 성경은 절제가 없는 게 악인이라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더 나쁜 짓을 하려고 조금 나쁜 짓을 참고 견디는 것을 절제라고 하지 않습니다. 절제는 ‘프로갈리따스’인데 단어 자체가 이미 선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악인은 절제가 없습니다. 자기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나 확 일어나는 정동을 쏟아냅니다. 주로 짐승들이 그렇게 행동합니다. 인간은 짐승과 다릅니다. 하지만 인간도 마음속에 일어나는 정동을 통제할 수 있는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도처에서 한 순간에 통제력을 잃고 말을 쏟아 내거나 행동해서 오랫동안 쌓아왔던 자신의 아름다운 경력이나 평판들을 한 번에 깎아내리는 일을 봅니다. 악인은 절제 없이 출렁 거리는 대로 마음을 막 쏟아냅니다. 왜 그렇습니까? 워낙 자기 방식대로 하고자 하는 고집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또 그렇게 쏟아내지 않으면 배가 너무 부르고 변이 마려 운데 그 똥을 참는 것만큼 고통스러워합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변을 참는 것만큼 더 힘든 것은 없잖습니까? 먹고 싶은 것을 참는 것 보다 더 어려운 일입니다. 악인은 그런 욕구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쏟아내며 동물적으로 삽니다.
동물은 본성에 의해 움직입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들을 “이성 없이 태어난 짐승과 같다.”라고 말합니다. 악인의 모습입니다. 자기 속에서 이걸 참지 못하고 말이 마렵기 때문에 배설해 버리므로 자기 시원함에 도달하기에 그렇게 비유합니다. 그는 사려 깊지 못하기 때문에 이 말과 행동이 자기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 공동체 속에서 혹은 가족 속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이성이 없이 동물적 본능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그러나 ‘의인의 마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이 의인이라고 할 때는 항상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윤리적인 측면에서 의인은 선한 사람이고 진리의 측면에서는 지혜로운 사람이고 평가론적인 측면에서는 덕 있는 사람입니다. 같은 사람이어도 어느 측면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여기서 의인은 법적인 측면에서 보고 있습니다. 법적인 측면에서 보면 의인이지만 윤리적으로는 선한 사람이고 덕 있는 사람이고 지적인 측면에서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의인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수많은 인생의 과정을 거치면서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우리들은 판단 내린 것에 따라서 말로만 좋은 이야기를 하고 표리부동한 사람들을 의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순간순간 판단이 정확해야 합니다. 판단을 따라 자신을 그 위에 삶을 얹을 수 있을 정도로 어떤 것들을 가치 있는 것을 향할 수 있는 힘이 그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게 없으면 성경에서 그 사람을 현자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현자는 지혜롭게 판단을 할 뿐만 아니라 그 판단 위에 자신의 삶을 얹을 수 있는 능력까지 있어야지만 현자입니다. 현자는 온 몸으로 지혜의 삶을 살아 낸 혹은 살아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의인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한다.” 의인도 지혜로운 사람도 악인도 죄인도 모두 정동이 일어납니다. 누구는 안 그러겠습니까? 자기한테 편안하고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좋고 불편하고 싫은 얘기 하고 나쁜 이야기를 전해서 자신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사람은 싫지 않겠습니까? 그런 정동이 일어날 때 악인은 즉각 적으로 동물적인 본능으로 반응을 합니다. 그에 비해서 현자인 지혜로운 자는 내가 어떤 이 말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해야 될 것인가? 이러한 정동이 일어났을 때 내가 어디까지를 말하고 어디까지를 말하지 말아야 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샤브’라고 하는데 골똘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 마음속에 있는 정동이 언어와 결합될 때 배설하듯이 쏟아내는 게 아니라 말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지 허공에 말하는 것이 아니니 다른 사람의 관계 속에서 이 말이 만들어낼 결과들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판단을 한 결과 거기에다가 자신의 말하고 싶은 정동과 욕구를 맞추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먹는 것과 비슷합니다.
지금은 제가 그렇게 많이 먹지 않지만 옛날에는 정말 많이 먹었습니다. 옛날 사진을 보면 돼지처럼 나왔습니다. 정말 먹는 게 절제가 안 되었습니다. 운전을 할 때 옆에 스낵이 없으면 불안했습니다. 계속 먹으면서 가야 했는데, 강릉까지 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먹겠습니까? 가다가 휴게소에서 한 봉지 사고, 가다가 한 봉지 더 사고, 과자 봉지 큰 거는 600-800 칼로리 정도 됩니다. 또 하루라도 고기를 안 먹으면 견딜 수가 없습니다. 교역자를 데리고 건너편에 갈비 집에 가서 맨날 사주고 맨날 먹으니까 맨날 찌지 않겠습니까? 어느 순간에 절제가 안 되는 게 느껴졌습니다. 말씀 준비하러 갔다 오다가 나오면서 거울을 보다가 너무 싫었습니다. 결심을 하고 두 달 만에 12킬로그램을 뺏는데 바보짓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몸이 계속 늙어 갔습니다. 어떻든 간에 절제가 안 되었습니다. 분명히 뇌에서는 먹으면 안 된다고 얘기하는데 뱃속에서 자꾸 들어오라고 하는데 배도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목구멍에서 그러고 나서 돌아서서 가스명수 마시고 후회하고 다이어트 프로그램을 보면서 ‘do today for tomorrow’ 다이어트 그러면서 위로를 받습니다.
절제훈련을 하면 통제하는 게 어렵지 않습니다. 길들여지고 나면 매우 어렵습니다. 길들여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한때 제가 음식을 절제 못하는 교역자들에게 “음식을 객관적으로 보는 연습을 해라. 화려한 색깔 달콤한 냄새에 취하지 말고 ‘이 음식의 성분이 뭔가? 내 몸에 들어가면 무슨 작용을 일으키나?”라고 했습니다. 음식을 객관적으로 대하고 먹어야 하고, 음식이 남으면 아깝다 생각하지 말고 남은 음식도 굉장히 귀하지만 ‘내 몸이 쓰레기통은 아니다.’하고 숟가락으로 딱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한참 그런 생각이 정점에 다다랐을 때 소고기 네 점만 먹으라고 그랬었습니다. 그렇게 절제를 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계속 연습하면 됩니다. 계속 연습하지 않아서 어려운 것입니다. 일생이 뭐냐면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를 확 쏟아낼 때는 화장실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느낌입니다. 너무 시원합니다. 그 결과가 모두 부메랑이 돼서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그래서 나는 잊어버렸지만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것을 아주 또렷하게 기억을 하면서 상처를 곱씹고 폭발합니다. 복수를 하고 복수가 또 다른 복수를 낳으면서 마지막에 생각합니다. ‘이상해요. 사람들은 나만 미워해요.’ 나만 미워하는 게 아니라 삶의 태도가 잘못 되어있는 것입니다. 말 한마다를 해도 같은 말을 해도 따듯하게 사람들을 깊이 존중하며. 김정은씨도 그랬잖습니까? 진지하게 대접받고 싶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입니다. 찌그러지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정당한 대우를 받고 싶어 합니다. 본인도 그렇습니다. 더욱이 그 상대방이 아주 높은 사람이어도 그런 마음이 되는데 별로 높지도 않은 사람이 자신에게 함부로 대할 때 마음이 닫히고 미워지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사람이 인간관계에서 원수가 생기는 것은 아주 깊고 심오한 원한 관계에 의해 생기는 게 아닙니다. 말 한마디에서 시작됩니다. 사람도 따듯한 말한 마디 미소 하나에서 시작이 됩니다. 사랑이 싹트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똑같이 사람들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두실 때는 어떻게 하든지 망가지고 깨뜨려진 관계들을 치유하고 관계들을 화평하게 자로 부르셨습니다. 거기에서 ‘화평’이 ‘샬롬’ 입니다. 우리가 만드는 화평은 사람들과의 평화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눈을 뜨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서 만물은 선의로 대하고, 안녕한 사회가 되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직 심오한 복음의 비밀이나 하나님의 말씀에 이치를 잘 모릅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그런 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사람의 진정한 평화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언제 그런 거 해봐도 좋을 텐데 예전에 제가 중고등부 사역하고 그럴 때 가끔 했는데 사람들이 투표지를 다 나누어가지고 누가 싫은지를 순서대로 적습니다. 그럼 거의 1번부터 10번까지 적으면 대개 같은 사람에게 10명에게 몰립니다. 표를 다 받아볼 때 완전히 다른 이름들이 중구난방으로 나오는 법이 없고 이 사람에게 1위가 A사람이면 저 사람 저 사람에게 모두 다 집중 포격이 갑니다. 그 순서가 삶의 태도입니다. “그 교역자는 인격적이더라. 그 직원은 참 인간미가 있더라.” 하는 사람들은 말입니다.
우리가 말로 접촉하는 모든 사람들이 행동으로 접촉하지는 않습니다. 말 자체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어주는 다리의 역할을 합니다. 다리가 더럽거나 매우 위험해 보이면 누가 위험한 다리를 건너려고 하겠습니까? 그런 태도로 오래도록 인생을 살면 어떤 말을 하게 되냐면 “참 너는 인덕이 많다. 가는 곳마다 너를 돕는 사람이 나타나니?” 그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게 성경으로 말하자면 뿌린 대로 자신이 거두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화평케 하는 자로 부름을 받았다면 나를 가장 잘 알고 이해하는 사람들 속에서 먼저 화평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먼데 있는 사람들에게 화평을 전하기에 앞서서 먼저 함께 늘 부딪히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화평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참 따듯하다.’ ‘정말 친절하다.’이러한 인상을 남겨서 헤어지더라도 그 사람들 마음속에 생각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왠지 생각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한 순간에 만남이 영원을 향해 기억나는 그런 향기로운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런 일에 모본이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여러분들이 되짚어 보면 그 분이 말 많은 분은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그 분이 울컥하고 우러나오는 정동대로 막 쏟아버리시는 그런 분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언제나 온유하기만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성전을 정결케 하시는 사건을 보면 그 분은 마치 여과 없이 당신 속에 솟아나는 어떤 분노를 막 쏟아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의에 대한 정동을 가감 없이 쏟아내심으로 하나님의 공의의 마음을 보이십니다. 그러나 그런 면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항상 말이 많지 않으신 분이고 입을 여실 때는 항상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게 기지에 의해서 충분히 다스려지는 이성에 의해서 충분히 다스려지고 있는 마음의 언어의 기질을 보여줍니다. 오늘 돌아서 깊이 반성하면서 ‘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칠까?’ 그렇게 한 번 반성해 보고 화평케 하는 자로 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