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03. 20. 교역자 특강 두 번째 시간
22페이지 인간으로서 신자의 삶으로 넘어가는 것이죠? 그래서 여기에서는 사랑이라는 근원을 하나님 자신의 삼위일체 내에서의 교통에서 찾고, 사랑의 원천을, 그래서 그러한 사랑을 염두 해 두고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신자의 삶은 어떠한 것인지 여기에서 다루고 있어요. 자, 22페이지 넘어가서 우리 김경혜 전도사님 읽어주세요.
<본문 내용>
신자는 교회의 지체이기 이전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안에서의 한 피조물입니다. 그가 하나님에 의하여 무로부터 창조되었다는 점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과 동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존재에 있어서 구별되며, 또한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그분을 대신하여 다스리고 가꾸도록 위임되었다는 점에서 더욱이 그 지위가 다른 사물들과 구별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다른 모든 피조물들에게는 주지 않으신 영혼을 부여하심으로 당신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은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 닮은 지혜와 사랑으로써 만물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도덕적 목적을 따라 세상을 다스릴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존재목적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존재의 근원일 뿐 아니라 자신과 만물이 속한 세계의 근원이시며 또한 그들을 향해 도덕적 목적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 그분을 알고 경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인간의 의무에 관해서 알아야 합니다.
<김남준 목사님>
자, 아우구스티누스가 Solioquies라는 작품이 있어요. 독백이라고 번역이 되는데, Solioquies라는 책이에요. 독백이라고 번역이 됐는데, 이 책은 뭐냐 하면 자신의 영혼과 이성 두 개에서 서로 대화하는 거예요. 영혼과 이성과 대화하게 되어 있어요. 거기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해요. 이성이 이제 니가 무엇을 알고 싶으냐 하니까 대답하는 게 뭐냐 하면, 나는 하나님과 나의 영원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그 이외에 알고 싶은 게 있느냐 영원이 물어봤어요. 나는 필요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과 나의 영원에 대하여 알고 싶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거예요. 그것이 내가 알고 싶은 전부입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래서 이것은 뭘 보여주는가 하면 근본적으로 인간이 알아야 할 대상이 하나님과 그다음에 자신의 영혼이라는 사실을 알게 돼요. 이 두 관계가 가장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관계에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하면, 이 영혼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전부이긴 한데, 그런데 문제가 뭐냐하면 영혼이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는 이 자체가 인간의 몸이라고 하는 것 속에 있는 거예요. 그리고 몸과 연장선상에 있는 이 모든 사물 세계 속에 이렇게 존재한다 이거죠. 그래서 인간의 존재를 보면 인간이 이렇게 존재가 있는데, 인간이 참 독특한 것이 뭐냐하면 영혼이 있고 육체가 있어요. 이 영혼은 하나님 닮은 영적 존재이고, 육체는 사물이라, 물질이라 이거예요. 그러면 육체가 완전히 물질이냐, 그렇지는 또 않아요. 그래서 이게 영혼과 육체 사이에 밀접한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어요. 여기에 인간의 마음이라는 function이라는게 작용을 해요.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떻게 표현했는가 하면, 인간의 마음을 뭐라 그랬냐 하면 인간의 마음을 divinity, 신성과 humanity, 인성이 만나는 것이다. 누가 이것은 뭐야 너무 내재주의적인 해석이 아니냐 그러는데, 그게 아니라, 진짜 하나님의 신성에게 들어왔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통한다는 의미에서 신성적 요소와 인간의 마음과 교통한다는 인성적 요소가 인간의 마음에서 만나는 거예요. 여기에서 생겨나는 각종 은혜의 작용들이 있잖아. 은혜가 뭐라고 했지? 누구한테 물어볼까. 은혜가 뭐야. 인간으로 하여금 마땅히 행할 의무를 행할 수 있도록 선한 의지를 불러일으키시는 선한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에요. 그것은 humanity한 것이 아니라 divinity한 거잖아. 그치. 그러한 divinity한 영향이 하나님의 영향이 여기에 미쳐서 그래서 그것들이 결국은 그 영향에 와서 그것들이 작용되어 나타나는 것이 humanity안에서 나타나는 거야. 이러한 아주 탁월한 독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인간 밖에 없는 거야. 인간 밖에. 모든 사물 속에는 영적인 요소들이 있거든요. 예를 들자면,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식물도 생명이 끊어졌다, 아직 살아있다는 이러한 표현을 쓰잖아요. 그러면 식물이 살아 있다 라고 하는 것은 그 안에서 살아 있다 라고 하는 생물의 작용은 두 가지를 반드시 내포해야 돼요. 첫째는 무엇이냐 하면 외부에 대한 반응이에요. 환경에 대한 반응이고, 그 다음에 자기 자체 안에 있는 Metabolism이라고 하는데, 신진 대사라고 해요. 신진대사를 일으켜요. 자기 조절 작용이라고 해요. 이것 두 개는 생명의 요건이야. 그런데 식물과 동물은 이 두 개에 대한 작용의 차원이 훨씬 더 높죠. 그런데 Metabolism에 대한 작용, 외부에 대한 작용 이러한 것들은 굉장히 영적인 요소잖아. 제가 미국에 갔을 때 일인데, 어느 산인지 이름은 잃어버렸는데, 이렇게 나무가 무지하게 커요. 500년 정도 되어 보이는 나무인데 나무테가 쭉 되어 있어요. 나무테마다 세계 역사를 써 놨어요. 놀라운데 1차 세계 대전, 2차 세계 대전 그 부분을 확대를 해 놨는데 나무결 자체가 틀려요. 그래서 나무결 이라는 게 진하게 된 것은 겨울에 생겨난 것이고, 이쪽 많이 자란 부분은 여름에 생겨 난거잖아. 이게 어떤 그 재앙이 있거나 아니면 고통스러운 일들이 있거나 하면 나이테가 반영을 해요. 그게 어떻게 알고 2차 대전이 일어났다고 해서 미국에 폭탄이 떨어진 것은 아니잖아. 나무는 그것을 세계의 역사를 알고 있다 이거야. 이러한 것들은 굉장히 신기한 요소 아니야?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자기의 저작 속에서 굉장히 어려운 말을 하나 찾아내요. ‘Sprit'이에요. ‘Sprit'은 우리가 영이라고 하잖아. 이것을 모든 것에 다 사용해요. 나무에도 ‘Sprit'이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정령숭배 사상처럼 보이는데, 그러한 개념이 아니야. 번역하기 굉장히 어려운 단어야. 정신이라 번역을 해야 하는데, 아주 독특하고 어려운 단어야. 그런데 그러한 생명을 하게 하는 것, 이러한 ‘Sprit’의 궁극적인 원천은 결국 하나님이 다스리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설명이 있는 거잖아. 그런데 이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이야기를 해요. “인간으로서 알아야 할 대상이 있다.” 여기에서 Solioquies에서 이야기 하지만, 그것은 본질적인 것이고, 알아야 할 대상이 뭐냐 하면, 지의 대상이 뭐냐 할 때 첫째는 하나님,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인간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이 인간 안에서 ‘나’라고 하는 개별적 인간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이 ‘나’라고 하는 개별적 인간에 대한 이해와 인간 일반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으로 같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나’라고 하는 개별적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인간에 대한 이해가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는 도움이 안되고, 반대로 ‘나’에 대한 이해가 있어도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이 ‘나’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진정으로 ‘나’를 아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세 번째가 뭐냐 하면, 그 다음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창조세계, 자연세계에 대한 이해. 그래서 어떻게 되죠? 이것은 문사철로 대변되는 인문학의 대상이 되는 거야. 문사철이라 그러죠? 뭐지? 문학, 역사, 철학으로 대변 되는 것. 법, 사회학 모두 여기에 들어가는 거야. 자연 세계, 자연학에 들어가는 거야. 이것은 어떻게 될까. 이것이 인간이 알아야 할 대상이라 생각하는 거야. 그러면 이제 여기에서는 같이 보겠습니다. 자, 인간의 의무에 대해서 들어갑니다. 그 다음,
이 신학을 통해서는 전체적인 목적을 알고, 인문학을 통해서는 그 목적에 반응하는 인간을 알고, 자연학을 통해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목적에 반응하면서 살 때에 도구들로 사용될 것들을 알아서, 왜냐하면 이 사람이 살아간다고 하는 것 자체가 이 인간들 속에서 ‘나’라고 하는 개별자로서 이 자연세계에서 주어진 자원들을 사용해서 살아가는 것이 삶이잖아. 삶을 산다는 게 먹어야 살잖아. 자연세계에서 나오는 거잖아. 그렇잖아. 삶이잖아. 그러니까 삶 자체가 이 세 가지를 밀접하게 오가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어느 하나를 배제하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거야. 그래서 내가 신학 공부의 목적이 뭐라고 했죠? 누가 우리 대답할까, 이성호 목사님, 신학공부의 목적이 뭐라고 했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삶의 교리, 그것이 바로 신학이라. 신학 공부의 목적은 비베레아드데움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through Christ, 그리스도를 통하여. in Sprit 성령 안에서 사는 것이다. 이게 가장 훌륭한 답변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마스트리히트가 이야기 했고, 이렇게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이야기 했고, 이렇게는 내가 이야기 한 거예요. 그래서 종합해서 내가 이야기 한게 가장 완전성이 높죠. 삼위일체적인 답이라 이거야. 너무 명쾌해. 너무너무 명쾌해. 그래서 마스트리히트가 자기의 책, 맨 첫 번째 조직 신학책에서 신학의 목적을 이야기 했는데,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다’라고 할 때에 이것은 정신이 번뜩 뜨이게 하는 명제에요. 그게 뭐냐 하면 이제껏 역사 속에서 논의되었던 모든 철학에서 고민하였던 것을 한마디로 해결해주는 거죠.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니까, 아드데움이 없으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다 결론을 내는 거죠. 그래서 제가 사실은 몇년전부터 에드워즈를 공부하고 나서 철학과 신학의 문제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하거든요. 멀러의 테재를 공부하고 3년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서 긍정적으로 내리는 결론이 뭐냐 하면 철학에 대한 앎 없이, 철학의 도움 없이 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것이다. 말도 되지 않는다. 그것이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이에요. 그러니까 종교개혁자들이 철학을 멀리 하고 경계했던 것은 알았기 때문에 그나마 할 수 있었던 것이고, 알고 경계하는 것과 모르고 경계하는 것은 택도 없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깊이 있는 문제를 가지고 짧은 시간에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여러분들은 진지하게 지성적인 고민을 해야 해요. 이번에도 새벽에 나와서 월요일날 메타피지컬 가르쳐 보니까 우리는 전혀 머리 자체가 정돈이 안 되어 있어. 그러니 이제 말하자면 신학이 담겨지기가 굉장히 어려운 거죠. 여러분, 신학을 공부하면서도 어려운 책들은 절대로 안 읽는 거야. 그러니까 맨 예화 부스러기나 가지고 설교를 해야 한다는 게 거기서 나오는 거예요.
어쨌든 이렇게 되는 거예요. 자, 그 다음에 우리들이 좀더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질문>
마음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동물에게는 마음이 없는 것인지, 또 하나는 하나님이 항상 말씀하시면서 영혼을 말씀하시는데, 영혼이 곧 하나님의 형상인지. 퀴리라고 하는 것은 형상 개념에서 어떻게 봐야 하는지..
<김남준 목사님>
우선 동물에게서 마음이 있는지 물었는데, 없다 라고 봐야하는 게 맞습니다. 인간의 마음 안에서는 지, 정, 의 모든 것들이 함께 만나 이 속에서 작용이 일어나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번 주가 파고 들어가면 굉장히 복잡한 문제에요. 왜 그러냐 하면, 가시고기가 어떻게 하는지 알죠? 결국 자식을 낳아놓고, 암놈은 도망가요, 수놈이 계속해서 부화할 때까지 물질을 해서 부화할 때까지 기다리고, 먹지도 않고 물질을 해서 새끼가 부화할 때까지 외부의 침범을 막아주고, 물질로 계속해서 산소를 갈아줘서 이것이 썩지 않고 고기가 부화하도록 만들어 준단 말이지. 부화한 다음에 이것이 물질을 하도 해서 이게 결국은 목숨을 잃고 쓰러져요. 날개가 너덜너덜 해지게 됩니다. 지느러미가. 그러면 새끼들이 이것을 뜯어 먹고 다시 일주일쯤 살아. 그러면 이제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의 크기가 되는 거야.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인간이 자식에게 할 수 있잖아. 안하는 못된 부모도 있지만 하는 부모가 있잖아. 부모가 자식에게 A라는 행동을 할 때에 그 의미를 알면서 하는 거야. 그런데 의미를 알면서 한다고 그렇게 알 수 없는 거야. 프로그램 되어 있는 어떠한 범상에 의해서 우리가 배설작용을 하듯이 그와 유사하게 하는 거라 이거야. 그렇기 때문에 마음 자체를 영혼의 길이라 보아야 되는 거야. 영혼이 길이 나는 것을 보아야 한다 이거야. 그러한 종류의 마음은 없다 이렇게 보는 것이죠.
그 다음에 그러면 순수하게 그거냐. 그게 아니라 이러한 본성도 또한 인간에게 주어진다 이거야. 이러한 본능적인 본능 같은 거 있잖아. 이렇게 인간은 이러한 면에 있어서는 하나님안에 속한 존재이고, 이러한 면은 자연 만물 안에 속한 존재임을 동시에 보여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거야. 그게 이러한 내용이야.
그 다음에 형상? 마음과 형상? 형상?
<질문자>
형상과 영혼 특히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영혼 구원.
<김남준 목사님>
어, 이것은 하도 정신이 없으니까, 이 형상을 아주 초 간단하게 생각할 것이 뭐냐 하면 영혼 안에 있는 이성의 기능이라는 거야. 이성 이라기보다는 정확하게 지성의 기능. 믿음도 받아들이니까. 지성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야. 이것이 전통적으로 교부들과 개혁자들이 보아오던 형상의 가장 proper한 개념이야. 여기서 이제 좀더 나아가서 논의들이 자연적 형상, 도덕적 현상, 초자연적 형상 이렇게 나뉘어 지긴 하지만, 일단 지성 속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야. 일단 믿지 않는 사람에는 어떻게 될까요. 그 형상이라고 하는 것이 죽어있는 거죠.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여전히 형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죠. 왜 그러냐 하면, 여기에 이러한 형상이 있다고 쳐. 그런데 죽어 있어. 이것은 살아날 수 있는 가능태로서의 형상이에요. 이것이 살아난다고. 중생이잖아요. 그렇죠? 이것은 이것에 대한 필연성은 하나님만이 아시잖아요.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 보면 이것이 죽어있는 것과 살아있는 것 사이에 가능태로서 되어 있으면 이렇게 살아있는 것으로, 죽어있는 것 안에서 살아있는 것으로 보잖아. 그렇지 않겠어요? 그러면 인간이 caritas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이 사물들을 보는 것 같은 마음으로 본다 이거예요. 그렇게 될 때 죽어있는 이 사람도 지금 여기에 사랑하고 복음을 전하는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살리시면 다시 살아나게 될 아름다운 영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형상의 어떤 아름다운 모습을 투영시켜서 볼 수 있는 것 아니에요, 그러한 의미에서 이 사랑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고 영적으로는 죽었지만, 넓은 의미의 이러한 자연적 형상은 아직도 살아있고 또 이렇게 살아날 가능태로서의 형상이기 때문에 이 형상을 우리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로써, 넓은 의미에서 이렇게 본다 이거야. 그래서 그것들을 사랑하게 되는 것 자체가, 전에 설명했잖아. 칼빈의 경우에는 아주 아름답게 어떻게 인간을 향한 사랑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일치를 이루는가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의 caritas의 사랑이 있는 사람이 인간을 사랑하게 되면, 이 인간의 이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 사람의 형상을 보도록 만들어 준다 이거예요. 그래서 그 사랑의 그것을 사랑하게 되는데, 이 하나님의 형상은 이 피조 세계에서 가장 하나님을 닮은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다. 일직선상으로 연장선상으로 설명하는데, 칼빈의 독특한 설명이라기 보다는 아우구스티누스적인 해석의 원용을 한 거예요.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의 작품속에서 그러죠.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게 될 때에, 그 안에 형제 이외의 누가 있겠습니까. 형제를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하게 될 때에 그 안에 하나님 말고 누가 있겠습니까. 이것을 세련된 형상의 개념으로 설명한 사람이 칼빈이라 이거야. 그래서 늘 이야기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를 잘 이해해야지만, 칼빈을 이해할 수 있다 이야기에요.
그 다음에 보면 밑에 의무가 나오는데, 그 다음 읽어보세요.
<본문 내용>
신자는 교회의 한 지체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다음과 같은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알며, 또한 사랑하는 것입니다. 비록 불신자로서 아직 그리스도께 접붙여지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인간의 의무로부터 멀어질수록 그의 삶은 죄로 인해 더욱 비참해지며, 고통 가운데 있게 됩니다. 물론 비중생자들이 영혼의 변화 없이 단지 정신활동만으로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교제를 누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의 의무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기억함
첫째로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본래적으로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이게 이제 종교의 씨, 칼빈이 이야기하는 종교의 씨를 이야기하는 것이야.
<본문 내용>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게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행 17:27)
<김남준 목사님>
이것은 양심과 자연 계시를 통해서 입증되는 되는 것이죠? 그것의 한계는 어디 까지라 그랬지? 자, 우리 지난 시간에 공부했잖아. 곽 전도사. 학생이 뭐한 거야. 질문까지 했잖아, 지난 시간에? 이야기해봐. 하나님을 알고 경배하기에는 절대로 충분하지 않기에, 그러나 모른다고 핑계하기에는 불가능하게 마치 분명하게 그것이 바로 종교의 씨, 자연계시의 한계라 이거야. 그래서 외워야해. 메모하면서 외워야해. 외우지 않은 지식은 끈 떨어진 가방이야. 외워야해. 얼마나 설교할 때 좋은데 외우면 쭉쭉 전개해 나가면서, 힘을 얻게 되지. 그 다음 계속 읽어요.
<본문 내용>
비록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들의 영혼이 어두움으로 가득 차고, 생각은 허탄한 데 굴복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영혼 안에 당신을 향한 기억의 씨를 남겨 두셨으니, 이로써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찾고 그분 안에서 안식을 찾기까지 불안을 떨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자기 영혼 안에 심겨진 기억의 씨로 인하여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자에게 당신 자신을 보여 주십니다.
<김남준 목사님>
인간이 무엇인가를 사랑하게 마음의 평안이 오잖아. 사람이 사랑 할 때나, 혹은 자기 자신이 집중할 수 있는 취미 생활이 있다거나 그러잖아. 이때에 편안함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그러한 사랑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가까이 사랑하는 것의 모상이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그러한 효과가 나타나는 거야. 그러나 이제 사랑의 대상 자체가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잠시 그러한 불안을 떨칠 수는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참되고 영원한 안식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다 이거야. 그 다음,
<본문 내용>
인간이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은 지성으로 하나님을 인식하는 초기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인간이 참된 행복으로 가는 첫 걸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에 창조주 하나님의 신성이 남아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교제의 사랑으로 들어가기에 충분치는 않은데 이는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피조물 자체가 지니고 있는 신성의 충만한 아름다움과 영광이 희미해졌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그 자연적인 아름다움이 어느 정도 남아있다 할지라도 영혼의 어두움과 지성의 눈멂으로 말미암아, 그 자연의 아름다움을 통해 그 아름다움 너머에 있는 하나님 당신과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의 아름다움을 지각하고 기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성경이 필요합니다. 성경이야말로 인간을 하나님에 관한 가장 분명한 기억으로 인도하는 도구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러니까 인간의 그 기억을 이끌어 내는 것이 종교개혁의 목적이야. Education, 거기에 대해 여러 가지 학설이 있지만, 대게 합의를 보는데, educare, 이끌어내다에서 왔을 것이다라고 봐요. 그래서 기억 속에 이미 있는 것을 이끌어 내는 거예요. 그것이 교육이에요. 그런데 무엇이 기억되고 있는지를 사람에게 생각나게 해주는 가장 좋은 자극제가 있는데 그게 바로 성경이에요. 성경의 진리 자체는 인간의 기억 속에 들어 있는 것인데, 죄로 말미암아 망각되어진 것들을 이제 그 생각나게 해주는데, 예를 들면 이거잖아. 몽타주 사진 있잖아. 탁 보고 지나갔어. 이것을 자기 스스로 재연할 수 없잖아. 그때 뭐야 몽타주 사진을 보여 주잖아. 얼굴 모양이 어떻습니까. 얼굴 형체를 보여줘, 수백개를. 저런 계란 형입니다. 입의 모양은 어떻습니까. 그러면서 수백개의 입의 모양을 붙여주는 거야. 비슷합니다. 눈의 모양은 어떻습니까. 코의 모양은 어떻습니까. 머리의 모양은, 그러면서 가장 근접한 것을 찾아내는 거지. 아, 저 사람이에요. 그러한 몽타주 사진이 성경이라 생각하면 돼.
자, 그 다음에 이제 그러한 하나님의 창조하신 모든 세계를 인간의 지성으로 인식하면서 하나님께로 들어가기에 충분하지 않은 것이 두 가지인데, 결국은 주관적인 인간의 기능의 타락과 지성적인 지식의 기능적인 타락과 피조물 자체가 본랭의 하나님을 들어낼 수 있는 영광을 상당 부분 상실한 것이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 다음, 그 다음 사람.
<본문 내용>
2. 알아감
둘째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남겨두신 당신에 대한 기억을 성경의 계시와 이성의 추론을 통해 명료화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계시에 대한 믿음을 통해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보다 분명한 지식을 갖게 되고, 그 지식의 빛 아래서 자신의 존재와 본분을 알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배우는 것만큼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아가게 되는데,
<김남준 목사님>
여기에서 있잖아. 제일 중요한 게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거든요. 그게 왜냐하면 들어봐요. 자, 인간이 태어나면 누구든지 간에 인간에 대한 어느 정도 지식을 가지고 있잖아요. 없을 수가 없잖아. 그 다음에 이제 나라고 하는 개별적인 지식도 가지고 있잖아요. 태어나면서부터 만나는 숟가락, 밥, 나무, 풀, 돌, 공기 이러한 것들에 대한 자연 사물에 대한 지식도 가지고 있잖아요. 그 모습이 이렇게 쪼가리쪼가리 다 흩어져 있는 거예요. 그래서 무슨 얘기냐하면 존재의 질서가 난립한 상태야, 마음속에서. 이 존재의 질서는 곧 가치의 질서거든. 이러한 것들이 난립해 있는 상태인데, 여기에서 이러한 것들을 사물을 본 인간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거야. 거룩하신 하나님을. 그때 이 모든 것들이 모두 자기 자리를 찾게 되는 거야. 이 지식이 으뜸 되는 지식이 되는 이유가, 파편처럼 흩어진 모든 인간과 자기 자신, 사물들에 대한 질서를 정리해주는 역할을 하는 거야. 그래서 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존재의 질서와 가치의 질서를 다시 새우게 되는 거야. 그러면 그 다음에 어떻게 생기냐 하면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누구인가에 대한 의미를 올바르게 알게 된다 이거야. 그때와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인간, 그 다음에 타인 이웃, 자연 사물들 이러한 것 속에서 나는 어떻게 여기에 있나, 그리고 사용해야 할 것과 그 다음에 향유해야 할 것들이 어떤 차이가 있는가에 대한 모든 것들에 대한 질서가 생겨나게 된다 이거야.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중요하다. 그 다음.
<본문 내용>
하나님을 바로 알 때 그는 우주 속에서 자신의 진정한 자리를 찾게 되며, 자신의 분수를 알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인간의 의무이며, 인간이 하나님 자신을 합당한 방식으로 잘 알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함으로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삼위의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장 분명하게 계시되었으니, 그리스도를 앎으로 삼위 하나님을 알게 될 뿐 아니라 그분과의 교통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아는데 있어서도 성경이 가장 훌륭한 안내서가 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것은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되는 거야. 인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이 어떠한 분이신지 알리시는 성경을 썼는데, 성경을 쓰는 펜이 그리스도라 생각하면 되는 거야. 그래서 그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아는 수많은 사연들이 나오는 거야. 그래서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원천이 되는 거지. 그러기 때문에 이렇게 그리스도, 하나님 아버지, 그 다음에 성령이시잖아. 이렇게 그리스도에 의해서 인간에게 그리스도에 의해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에 대해서 상세한 계시와 설명들이 그리스도의 성육신 안에서 인간에게 전달이 된 거야. 그러니까 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전체적인 지식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렇게 계시된 성육신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찾아갈 때,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접근할 수 있게 되는 거죠. 자,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을 안다라고 하는 것은 뭘 뜻한다고 했죠? 두 가지. 하나님의 속성과 속성이 실행되는 방식에 대해서 안다는 거야. 왜냐하면 이게 시간세계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되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시간세계안에서 관계를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되는 것이기 때문에 경험적으로 우리들이 알게 되는 거야. 속성이라는 것 자체가 관계를 통하지 않고서는 들어나지 않는 거야. 예를 들면 긍휼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속성이 있으면, 불쌍한 사람이 있어야지만 이 속성, 하나님이 불쌍한 사람과 관계를 맺으셔야지만, 긍휼이라는 속성이 드러난다. 다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슨 뜻이라고요? 속성과 속성이 실행되는 방식에 대해서 아는 거예요.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속성과 속성이 실행되는 방식이다. 또 다른 말로 이렇게 할 수 있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죠. 지식. 존재에 대한 지식, 속성에 대한 지식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죠. 이것은 형이상학적인 지식일 것이고, 이것은 선험적이고 경험적인 지식이지. 우리가 인간이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안다라고 할 때에 이것은 속성과 속성이 실행되는 방식이다.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자, 그 다음
<본문 내용>
그러므로 인간은 성경을 통하여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을 보여주시는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게 됩니다. 그러한 만남을 통하여 그분을 알아갈수록 신자는 삼위 하나님과 사랑의 연합을 더욱 깊이 이룰 수 있습니다.
3. 사랑함
셋째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한 대상을 목표로 정하고 그 것에 고착하여 그를 끊임없이 즐거워하고자 하는 마음과 영혼의 움직임이기에, 궁극적인 사랑의 대상은 하나일 수 밖에 없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것이 바로 사랑의 한 정의죠.
<본문 내용>
다른 모든 사물들을 향한 사랑은 그 궁극적인 대상을 누리기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참된 행복은 자기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자신을 알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것은 예를 들자면, 옛날에 어느 가수가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다 그랬잖아. 설교를 그러한 식으로 하면 안된다 이거야. 그러면 한없는 그 설명이 되는 거야. 이렇게 핵심을 찔러서 모든 요소들을 다 포함하고 어떠한 경우에든지 사랑의 속성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 드러내야 된다 이거야. 사랑은 눈물의 씨앗입니다. 그것을 이야기 하면 안되지, 이야기 하면 안되지. 그 김명철 변호사가 최근에 책을 하나 썼잖아. 삼성을 다시 생각한다. 뭐라 했냐면, 여러분 목사님들 잘 기억을 해둬요. 절대 분에 넘치는 영광을 받으려고 하거나 그 다음에 자기에게 허락되지 않은 이익에 눈을 뜨면 안돼요. 그러면 반드시 실패하게 돼. 그 사람이 쓴 책을 이야기 하겠어요. 이건희씨가 생일이었대나, 회갑이었대. 그래서 집안에서 지인들을 초청해서 작은 파티가 아니라 성대하겠지? 집안에 왔으니까 수천명이 모이는 것은 아니고, 아주 친밀한 사람들 모아놓고 파티를 열었대. 방송계에서 누가 유명하냐, 그러니까 아무개가 유명합니다. 와서 사회좀 보라 그래라. 다 아니까 이건희씨가 부르는데 안 갈 사람 어디 있겠어요. 너도 나도 다 가는데, 이건희씨가 나훈아를 좋아한대. 나훈아씨한테 우리 이건희 회장이 이렇게 이렇게 행사가 있는데, 이러한 이러한 시간에 당신 와서 노래좀 불러 달라고. 그러면 왔겠냐 안왔겠냐. 가수들에게 그렇게 하면 그 사람이 식사 시간에 한잔 마실 때, 포도주가 천만원짜리라고 하는데, 그것은 만약 자네가 가수라면 가겠어, 안가겠어? 가야겠지. 그리고 가면 돈을 얼마나 주겠어? 그래서 전화했더니 전화를 받더니만, 여보시오. 대중가요 가수는 대중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지, 개인 앞에서 부르는 것 아닙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어. 대중 가요 가수만도 못한 목사들이 우리 나라에 너무나도 많아. 대중 가요 가수는 대중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김대중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거지 개인앞에서 부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말이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대중 앞에서 노래를 부르면 대중 가요 가수이지만, 내가 개인 앞에서 노래를 부르면 딴따라입니다, 탁 그러는거야. 그래서 김명철 변호사가 그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하더라고. 누가 안오겠어, 그분하고 관계를 가져서 나쁠 것이 뭐가 있겠어. 유명한 연예인, 클래식, 가수, 전부 다 예, 하고 돌격앞으로 했는데 이 사람은, 참 이러한 이야기 들으면서 목사인 나에게도 이러한 기가 있어야 되겠다 하는 생각을 했지. 그러면서 옛날에 전두환 대통령 정권 뒤엎고 나서 줄줄이 가서 예배 드렸지. 누구 하나 우리는 독재자 앞에서 예배 인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과연 있었을까 그러한 생각을 해보는 거지. 자 그다음.
<본문 내용>
인간의 참된 행복은 자기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자신을 알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본분이며, 하나님을 사라앟지 아니하고는 참으로 이러한 쉼과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넘어가겠습니다. 26페이지.
<본문 내용>
인간 밖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즐거워해야 할 대상과 그 즐거움을 위하여 사용해야 할 대상으로 나뉘는 것이니, 인간이 참으로 즐거워해야 할 대상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사물들이 아니라, 영원히 있으며 불변하며 완전한 존재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존재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그분 이외에 다른 것들은 모두 원래는 없었으나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 생겨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 죽고 소멸하여 결국 무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영원하지 않은 것들을 궁극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며 그것을 즐거워하고자 하는 인간은 항상 사랑하는 것들을 잃어버리거나 상실하게 되므로 끊임없는 불안과 고통에 시달리게 됩니다.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들은 즐거워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사용해야 할 대상이어야 합니다.
<김남준 목사님>
즐거워하다는 뭐냐하면 누림이에요. 누림. 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이제 더 이상의 목적이 없는 최종적 사랑의 상태를 가리키는 거예요. 누림이라는 것. 누림. 그래서 각주 5번에도 나오죠. “공간은 우리에게 사랑할 대상을 끊임없이 제시하지만 시간은 그것을 빼앗아 버린다.” 이게 무슨 뜻이죠? 결국은 영원한 하나님 이외에는 모든 것들이 영원한 사물이 아니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고, 기원과. 여기서 하나님이라면 여기에 어떤 사물이 있다고 쳐요. 사물이 있잖아. 그래서 사랑하게 되잖아. 이것을 사랑하게 되는 원인도 하나님으로부터 오고, 그리고 이것을 사랑하는 목적도 하나님으로부터 가게 될 때, 이것은 하나의 과정이고 이것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사라지게 되거나 없어져도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성에는 변화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이것이 사라지고 나타나는 것을 통해서 더 확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되는 거야. 그러니까 고통을 통해서,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많이 알아가는 것도 이러한 것에 속하는 거잖아.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오라, 우리가 사랑하자. 사랑하되 그 분 안에서 사랑하자꾸나.” 그렇게 우리를 부르는 거야. 그 분 안에서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면, 우리 중 누구도 잃어버릴 것이 없나니, 왜냐하면 그분은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수없이 하등한 거야. 이게 목표가 되게 되면 끊임없이 인간은 출렁거리게 되는 거야. 그래서 이렇게 되면 안되는 거야. 이것을 사랑하는 것도 하나님 때문에, 원인, 목적. 기원, 그 다음에 목적. 기원, 목적 이렇게 해서 끊임없이 바뀌어 끼고 사라져도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것은 오히려 있고 사라지는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이죠. 어떤 경우죠?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은 영원히 계시구나.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시구나를 깨닫게 되는 거죠. 변화되는 것을 통해서 아, 하나님은 진짜 불변하는 구나. 배신을 당하면서, 아, 하나님은 신실하시구나. 정반대의 것을 끊임없이 깨닫게 되는 거야. 또 동일한 것들을 깨닫게 되는 거지. 이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아. 아, 사람이 이렇게 사랑을 하니 이 사람의 사랑이 원인이 되는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더 많이 사랑하실까. 동의적으로 혹은 동류적으로 그리고 반의적으로 혹은 반류적으로 서로 유비하면서 어떠한 경우에든지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 거야. 이러한 구조로 가게 되는 거야. 그러면 오히려 수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없어지는 많은 것들이 아름다운 거야. 아프긴 해도. 왜냐하면 하나 하나 나타날 때마다, 잘 들어요. 하나 하나가 나타날 때마다 이 속에서 나타나는 관계의 형상들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경험들을, A는 A를 가르쳐주는 거야. 이것이 사라질 때마다 alpha라고 하는 경험은 여기에서 하나님에 대한 또 다른 A' 라고 하는 경험을 나타내 주는 거야. 그러니까 이것이 어떠한 것들이 지나가고 사라지던지 간에 이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자기에게 온 하나님에 대한 앎의 원천으로 돌아가게 하고, 목적을또 하나님께 향하게 하는 거야. 그래서 세상이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불변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게 되는 거야. 악하기 때문에 선하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고, 고통받기 때문에 지복이신 하나님을 사모하게 되고, 결핍이 있기 때문에 풍족한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고, 그리고 또 무엇인가 공급하게 되면, 넉넉함 때문에 이 넉넉함을 가져다 주신 원천적인 넉넉함이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고 이렇게 끊임없이 돌아가게 되는 것이야. 이해가 돼? 그다음.
<본문 내용>
인간에게 이러한 사랑의 질서를 가장 잘 가르쳐 주는 안내서가 성경입니다. 이러한 삶을 향한 구체적인 생활의 법칙이 무엇인지,
<김남준 목사님>
여기서부터 성경 이야기가 나오죠. 그래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이 그러한 사랑의 질서를 가르쳐 준다. 악이 뭐예요? 악의 형이상학적 본체가 뭐예요? 악이 뭐냐니까. 악. 선의 반대, 선의 결핍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죠. 인간 속에서 인간에 의해 저질러지는 evil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하면, 외워놔요. 입력해 놔요. 그릇된 사랑의 질서를 따르는 것. 이게 바로 evil이에요. 그릇된 사랑의 질서를 따르는 것. 오르도 아모리스. 그릇된 사라으이 질서를 따르는 것 그것이 바로 악이에요. 선하게 되기 위해서는 자기 깨어짐의 이야기가 나오는 거야. 자기가 깨뜨려질 때에 무엇과 무엇에 대한 깨뜨려짐이지? 자기의에 대한 깨어짐, 죄에 대한 사랑의 깨어짐. 두 개에 대한 깨어짐이죠? 이 두 개가 나뉘어 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두 개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거든. 자기 의도 사실은 사랑의 또 다른 측면이야. 왜냐하면, 사랑하는 것이 자랑꺼리 이기 때문에, 자기 의를 자랑하는 것은 결국엔 사랑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야. 죄에 대한 사랑이야. 이게 깨뜨려져서 결국은 올바른 질서로 끊임없이 돌아가는 거야. 그것이 바로 성화야. 자, 기독교 교육의 최고의 목표가 뭐라고 가르쳐줬지? 뭐라 그랬어요? 그것을 철학적으로 설명하면 뭐라고 그랬어요? 인간의 의무와 관련해서. 기독교 교육과 모든 목양, 모든 설교, 모든 것의 궁극적인 목적이 성화와 관련되어 이야기하자면, 인간에게 무엇을 심어주고자 하는 거야? 중생과 모든 회심까지 다 포함하는 거야. 모든 하나님의 구원의 과정 모두를 포함하는 거야. 뭐야?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형상 회복. 아, 이게 무슨 얘기인가 하면, 틀린 것은 하나도 없잖아. 그리고 맞는 것도 하나도 없잖아. 이것은 인간의 의무와 관련하여 이야기 하자고 했잖아. 결국은 뭐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구원 실행과, 구원 실행인데, 목양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을 구원해서 실행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에 이바지 하고 도움을 주는 것이 목양이잖아. 인간을 타락에서 구원하여서 참 사람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 계획인데 이게 어그러진 인간을 돕기 위해 목양을 하는 거 아냐, 결국엔. 그러면 궁극적으로 마지막 목표는 뭐냐하면, 창조의 목적이지. 그것인데 설명하면 인간론과 관련지어서 생각하면 이렇게 되는 거야. 메모를 해, 적어. 인간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의무가 그가 좋아하는 성향이 되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결국은 이 모든 인간의 구원과 목양의 마지막 목표에요. 그리고 그 창조의 목적이라는 커다란 틀 안에 있는 것이지.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아야 할 인간의 의무를 실천하는 것이 그 사람 자신에게도 기쁨의 성향이 되는 것, 그것이 결국은 마지막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거야. 그리고 목양은 바로 그 일을 돕는 거라 이거야. 방해하는 요소가 너무나 많잖아. 그러한 상황속에서 분투하면서 살아가고 목양을 하게 되는 거지.
<본문 내용>
B. 인간의 구원 : 사랑의 완성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의 구원은 곧 하나님 사랑의 완성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구원은 삼위 하나님 안에 있는 창조의 지혜를 따라 인간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지혜를 성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 가지고 계신 지혜는 개별적으로 인간존재를 향한 지혜이지만, 그 지혜는 또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의 계획과 나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연적으로는 모든 창조세계의 일부분이지만, 도덕적으로는 그 모든 창조된 세계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 돌보고 가꾸도록 임무를 부여받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이러한 창조의 목적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많은 자원이 필요합니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다 알지 못하는 사랑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앎이 필요하고, 또 그 지혜를 창조세계에 구현해 갈 수 있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이 모든 지혜와 사랑을 각 피조물 하나하나에 대하여 적용하고,
<김남준 목사님>
똑같아요. 이렇게 연결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여기 계시잖아. 하나님이 여기 모든 세계를 창조하실 때, 무엇과 무엇으로 창조하셨다고 했죠? 하나님의 ‘영원한’이라는 단어를 항상 붙어야 해. ‘영원한’ 지혜와 사랑으로 창조하시잖아? 이것은 지성에 해당되는 거고, 이것은 의지에 해당되는 거야. 사랑 그자체가 의지이거든.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영광의 본질을 하나님의 지성과 의지로 본 거야. 의지의 나타남, 이것이 바로 창조 세계에 나타난 영광이라 보는 거야. 이러한 지식과 사랑으로서 모든 창조 세계가 창조되잖아. 이렇게 다양하게 창조가 되잖아요. 여기에는 다른 사람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인류가 있고, 또 뭐가 있어요? 인류도 있고 자기 자신도 있고, 그 다음에 영혼에 대한 앎도 있고, 자연 세계에 대한 앎도 있고 등등이 다 있잖아. 그런데 이제 이러한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모든 것들은 어쨌든 인간이 사용하는거 아니야,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경우에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을 해요. 인간, 즉 덕 좋게 이야기 해서 인간의 영혼이 결국에는 도구인가. 도구인가 아니면 목적인가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을 해요. 인간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한 도구인가, 목적인가를 고민해요. 처음에는 이쪽을 택하게 돼요. 철학에 많이 기울여지죠? 나중에 이쪽을 택하게 돼요. 그러면 인간의 목적이라 할 때 이것은 분명하게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불멸성과 관련지어서 봐야 된다 이거야. 올바르게 해석을 해서 받아들이게 되는 거야. 오늘날 이야기하는 인도주의적인 사랑 그것이 목적이다 그러한 뜻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참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안에 포함된다 그렇게 보는 거야. 그때에 이것은 목적으로서의 기능을 본다고 보는 거죠. 그래서 어쨌든, 이렇게 많은 것들이 대부분 사용되어 지잖아. 여기에 인간이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담는 인간이 이렇게 있어서 이 인간이 이제 하나님이 이렇게 창조하신 것들을 이 안에서 다시 수렴해서 이것들을 사용하는 거죠. 그래서 이것들을 새로운 질서로서 이것들을 토해 놓는 거야. 새 질서. 새 질서로서 이것들을 정돈해 내는 거죠. 이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에 선한 질서들을 만드는 거야. 사람이든지 사물이든지 간에 이러한 일들을 하기 위해 인간이 지음을 받고 능력없는 인간을 구원해 주신 것인데, 이러한 것들을 함에 있어서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지혜와 그 다음에 뭐지? 사랑이란 말이에요. 이것은 결국 지성과 관련이 되고 이것은 의와 관련이 돼. 그런데 지성과 관련된 근본을 뭐라고 하죠? 지혜의 근본이 뭐라고요? 그렇지 하나님을 향하여 경외하는 거야. 경건해 가는 거야. 하나님을 경배하고 두려워한다. 핵심이 뭐야, 이게? 두 가지가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끌리는 사랑이에요. 이것이 바로 지혜에요. 그리고 이것이 사랑. 이 두 가지가 계속 주어지게 되는 것이지. 이것이 결국은 우리 열린교회 목회에서 계속적으로 되어 왔던 커다란 두 기둥이 뭐지? 객관적인 진리와 영. 목양에 있어서 커다란 두 가지 뭐지? 성경의 진리와 하나님의 은혜 이러한 식으로 표현하지. 지식과 성령. 다 이렇게 두 기둥이 나아가는 거야. 두 기둥이 이렇게 이렇게 연결이 되고 이렇게 연결이 되는 거야. 창조의 하나님의 창조 세계, 그 자체가 둘에 의해서 이어지는 것이고, 이 둘의 나타남이 세계관이라 이거야. 이것들이 목양에서나 예배에서나 기도에서나. 기도에서도 나타난다 이거야. 율법의 깨달음이 없는 기도는 가증함이라. 그러니까 정확하고 객관적인 지식의 빛이 있고, 그리고 자신이 깨달아야 되는 거야. 진실해지는 것도 마찬가지잖아. 객관적인 진리의 기준이 있고 나를 거기에 부합시켜야 되는데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어. 할 수 있는 힘을 성령이 주시는 거잖아. 그래서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진실해 질 수가 없는 거야. 자기 자신을 통로할 수는 있는데, 진실해 질수는 없는 거야. 그렇게 해서 이 두 개의 기둥이 계속 기도, 설교도 마찬가지잖아. 설교의 중요한 중대한 두 가지 직무가 뭐야? 진리를 올바르게 가르치고 그 안에 영으로 역사해서 사람들을 일깨우는 것, 그거잖아. 이 두 가지 기둥이 농축된 형태로 기독교의 모든 사역속에서 스며들고 심지어 우리 자신도 이 두 가지가 스며드는 거예요. 그래서 정확한 교리의 지식, 그리고 그 다음에 성령의 역사하시는 은혜 이렇게 두 개의 기둥이 나아가는 것이 전체적인 모상이라 이거야. 이것을 성육신 안에서도 보여주시는 거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역시 진리와 은혜안에서. 성육신 자신이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 두 가지의 확신이야. 그러면서 구원사 전체, 아니, 세계 역사 전체 자연 과학을 풀어가는 모든 원리가 바로 이 두 개의 기둥이야. 객관적인 진리와 주관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영의 역사, 이 두가지를 가지고 쭉 풀어가는 거야. 모든 게 그렇게 되는 거야. 자, 그 다음
<본문 내용>
또 그 모든 피조물들을 합당한 지혜와 능력으로 질서 있게 하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이 끊임없이 하나님과 교통하고, 그 교통을 통하여 인간의 본분을 다 할 수 있는 자원을 공급받는 일이 필요합니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영적 교통이 있어 이러한 자원들을 공급하셨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자, 그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그 다음 사람.
<본문 내용>
영적인 의미 : ‘아버지와 그리스도를 아는 것’
첫째로 영생의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생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4).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 신애 사상의..
<김남준 목사님>
신애 사상, 신애 사상이 그게 뭐냐 하면, 신애. 하나님 사랑. 그 다음.
<본문 내용>
신애 사상의 핵심이 그리스도에 대한 앎이라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앎은 곧 그분에 대한 지식과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생의 의미는 다음과 같은 고유한 의미와 적용된 의미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고유한 의미는 영원히 사는 것이에요. 죽음의 기운이 침투하지 않는, 침투하지 못하는 영원히 사는 것, 끊임없는 생명의 솟아남, 그것이에요. 제가 6살 때 치과에 가고 48년 만에 치과에 갔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2년 만에 치과를 갔는데 의사가 그래요. 몰라보게 치아를 잘 관리하셨다고. 그런데 이러 이러한 문제가 있습니다. 잇몸이 계속 내려 앉아. 그래서 이뿌리가 자꾸 뒤에서 드러나. 그래서 오면서 그랬어. 이제 죽음의 기운이 이빨에도 서서히 스며드는 구나. 영생은 이러한 죽음의 기운이 스며들게 하는 거야. 그래서 이러한 영생에 가까울 때에 모든 것이 다 아름다운 거예요. 자매들은 언제가 제일 아름답지? 곽 전도사, 몇 살 때 쯤이 제일 아름다워? 우리 이슬이 때가 가장 아름다운 것 같아. 18, 19 때가 가장 아름다운 것 같아. 세수만 하고 와도 얼굴이 뽀얗고 예뻐. 그런데 나중에는 변장을 안하면 볼수가 없는 거야. 죽음의 기운이 스며들어가서 그래. 몇 년전에 간사 수련회를 갔는데, 김기성 형제가 밤중에 도착해서 새벽에 모이니까 자매들이 세수하고 얼굴에 화장을 하나도 안하고 쭉 모였는데 아침에 심각하게 새벽예배를 드리려고 하는데, 목사님, 왜. 저 앞에 있는 아줌마들 누구에요? 죽음의 기운을 화장이 가려준다. 화장품이 영어로 뭔지 아니? cosmetics에요. cosmos에서 온 거예요. 질서야. 질서 없는 얼굴, 질서 있는 얼굴. 얼굴에 질서가 없으면서도 화장을 안하는 것은 오만의 극치야. 오만한 자는 반드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지. 그래서 이제 읽어봐요.
<본문 내용>
인간 역시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피조물로서 죄와 그 죄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시간 세계 안에서 창조된 당시의 완전삼을 상실한 채로 늙어가고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영원히 사는 것은 이미 영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것은 영생, 영생 아니에요. 인간의 수명을 계속적으로 연장시킬 수 있다고 하는데, 나는 싫어. 왜냐하면 뇌 세포같은 것은 계속 파괴되어서 세포가 다른 것은 다 살아나는데, 뇌 세포는 한번 죽으면 살아나지 않아요. 그래서 뇌 세포가 계속 파괴되어서 그 지능이 열등해 지는 그러한 몸을 끌어안고 생리적으로만 오래 산다고 할 때, 삶의 질이 어떻겠는가. 그러한 것은 영생이라고 볼 수 없다 이거야.
<본문 내용>
영생은 완전함 속에서 영생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당연하죠. 완전한 생명의 끊임없는 넘침. 그것이 바로 영생이에요.
<본문 내용>
b. 적용한 의미: 삼위와의 교통을 통한 공급
<김남준 목사님>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것이 개혁파 스콜라주의에서 논의 많이 되었던 것인데, 하나님을 영원한 생명이라고 보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생명이라고 하는 자체는 무엇인가 하면 소멸되거나 멸절되거나 죽지 않도록 계속 어떠한 영향력과 기운이 생명적 요소가 계속 발산되는 것을 의미하는 거거든요. 그것이 다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의존해서 생명을 부여 받게 되는 거잖아. 그래서 다른 모든 것들의 생명은 전기와 같아. 전원이 차단되면 없는 거야. 하나님 자신은 이렇게 끊임없이 솟아나는 생명력이시면서 이 생명력을 누구에게로부터 공급받지 않고 당신 자신이 이 생명이 원인이 되셔서 계속해서 솟아나시는 거야. 이 생명이 아니시라면 사랑이실 수 없는 거야. 왜냐하면 사랑 그 자체가 끊임없는 이러한 작용이기 때문에. 그래서 사랑은 끊임없이 관계를 맺는 거죠. 그래서 인간의 영혼이 좋은 상태가 하나님의 이러한 자가성, 자가성을 갖는 거야. 가는 가동한다 이거예요. 자가성을 담는 거야. 어떻게 되냐 하면 이 속에서 사랑의 에너지가 떨어지면,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고 먹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것도 없어. 제가 가장 힘들 때 우리 집사람한테 나를 즐겁게 하면 즐거워할 때 최악의 경우 쓰는 말이 그래, 여보 나는 가고 싶은 데도 없고, 만나고 싶은 것도 없고, 먹고 싶은 것도 없어. 가장 의욕을 잃어버린 상태이지. 이 안에 에너지가 넘치면 많은 사람들과 더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거야. 그래서 선교에 대한 생각까지도 뻗쳐 나가는 거야. 교회는 그러한 에너지를 계속 사람들에게 불어 넣어 주어서 진짜 제대로 된 영생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인데, 그게 바로 <목자와 양>에서 배운 풍성한 삶의 핵심이 그 생명의 충만이 넘쳐남이야. 그러면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께 은혜를 받으면 이러한 하나님의 자가성을 상당히 많이 본뜨는 거야. 이것은 하나의 느낌이지. 심지어는 그러한 생명력을 누구로부터 공급받는 거야? 하나님께로부터 공급 받죠. 그런데 이상한 게 뭐냐 하면, 찬송을 부를 때 뭐라 하는가 하면, 내 안에서 샘 솟는 기쁨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자가성이에요. 자가성. 자가성. 이렇게 써요. 가동한다고 할 때 쓰는 거예요. 이 속에서 내 안에서 계속 샘 솟는다고 느끼는 거예요. 그래서 내 안에서 샘 솟는다고 느껴지는 거야. 그래서 이러한 하나님의 생명을 어떻게 해요? 그게 바로 풍성한 삶의 본질이다 이거야. 그 다음.
<본문 내용>
둘째로는 영생의 적용한 의미는 삼위와의 교통을 통한 공급입니다. 영생은 단지 시간 세계 속에서 수학적인 길이의 끝없는 연장이 아닙니다. 영생은 영원히 살되 다른 존재의 방식으로 영원히 사는 것을 가리킵니다.
<김남준 목사님>
거기 줄쳐요. ‘영생은 영원히 살되 다른 존재의 방식으로 영원히 사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몸이 계속 오래 사는 것 그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영원히 산다. 그 다음에.
<본문 내용>
무엇보다 이 영생의 근거는 불멸하도록 창조된 인간의 영혼 안에 있습니다. 거기서 삼위 하나님과 교통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영혼을 불멸하도록 창조하셨으며,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후에도 이러한 하나님의 경륜은 계속됩니다. 비록 죄로 말미암아 영혼으로 완전성을 잃어버리고 본래의 아름다움에서 멀어졌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완전하게 고치셔서 영생불멸 하게 하십니다. 모든 영혼이 그 본래의 아름다운 완전함을 회복하는 것은 아니며, 오직 하나님을 기억하고 자각하며 사랑하게 된 영혼들만 그리스도 예수의 공로를 통해 그 완전함을 회복하게 하십니다. 구원받은 이후 성화의 과정과 마지막 영화를 통해 그 완전함에 이르게 하시고, 영원히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생은 이러한 세계를 향하여 유보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죄와 슬픔이 가득하고 창조의 질서를 잃어버렸지만 이 시간 세계 안에서도 구원 받은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의 적용한 의미에 해당됩니다.
영생의 적용한 의미의 핵심은 삼위와의 교통을 통한 자원의 공급입니다. 무엇보다도 영적인 연합을 통한 생명의 누림이며, 인간 존재에 필요한 신령한 은혜들을 공급받음으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 수 있는 내적 자원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교통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혼을 향해서는 직접적으로 이런 신령한 자원을 공급해 주시지만, 일반섭리 속에서 그 삼위와의 교통을 반영하게 하셔서 이 땅에 있는 자원들을 새로운 질서 속에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공급하십니다.
이렇게 두 자원으로 육체와 영혼의 필요를 채우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창조의 목적에 맞게 도덕적으로 통치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대리자로서 창조하신 세상을 돌보도록 부르셨다면 그 일의 성취를 위한 자질들과 능력, 도구들을 주셔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창조 목적을 따라 존재하기 위하여 자원을 필요로 하는 이유입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죄는 이러한 자원의 고갈과 공급의 단절을 가져왔습니다. 반대로 영생은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관계를 통하여 그분의 생명과 이러한 자원들을 공급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존재목적은 하나님이 정하신 의도를 따라 이 세상을 도덕적으로 통치하도록 그 질서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신의 존재와 삶 속에 구현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삶을 살게 하는 삼위와의 교통이 바로 영생인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안에 있는 지혜를 발견하고 그 지혜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피조세계 안에 완성하고 또 즐거워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게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산다는 뜻이에요. 자, 그 다음에 이제 영생의 도구. 그 다음 사람.
<본문 내용>
둘째로, 영생의 도구입니다. 영생은 지식과 사랑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 처음 시작은 중생을 통해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 지식과 사랑을 심으심으로써 시작되고,
<김남준 목사님>
중생과 도입되는 두 가지 변화가 뭐라고 했지? 이신론적 변화와 인식론적인 변화. 그 본질이 뭐야?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새로운 인식능력을 회복시키시는 것. 그 다음에 두 번째가 뭐지? 존재론적인 변화. 그 본질이 뭐지? 성향의 변화. 어떤 변화지? 자기 사랑에서 하나님 사랑으로 방향을 변화시키는 것. 그래서 없던 사랑의 성향이 인간에게 주어지고, 있던 사랑의 성향이 파괴되는 것. 그래서 아주 쉽게 이야기 하면, 사랑의 성향이 방향을 바꾼다는 것. 성향이 바뀌면 존재도 바뀌게 되는 거야. 존재가 그 존재가 아닌 거야.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할때에 핵심적인 의미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인간의 성향이 바뀌게 된 것을 의미해. 그 다음.
<본문 내용>
이후에 계속되는 하나님과의 생명적 교통도 지식과 사랑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진리를 아는 지식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과 그 지혜를 알고, 은혜를 통하여 사랑으로 감화 받음으로써 영생의 실재를 누리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생은 이 둘을 소유하는 것이고 성화는 그 지식과 사랑의 성장이며,
<김남준 목사님>
거기 줄 치세요. 영생은 이 둘을 소유하는 것이고, 성화는 그 지식과 사랑의 성장이며, 영화는 이러한 지식과 사랑의 최종적 완성이다. 영은 이 둘을 소유하는 것인데, 중생은 이것이 시작되는 것이고, 성화는 이것이 성장하는 것이고, 영화는 그것이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것이라고 그렇게 정리하면 돼. 중생이 빠졌는데, 앞에 나오지만 심기는 것, 이러한 지식과 사랑이 심기는 것, 성화는 그것이 성장하는 것. 영화는 그것이 완성되는 것. 그 다음
<본문 내용>
인간은 창조될 때부터 자기 밖의 존재를 사랑할 수 밖에 없도록 창조되었으니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된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끊임없이 사랑하고 그 사랑 안에서 창조의 지혜를 따라 살게 하시기 위해서는 이러한 사랑의 본질을 인간에게 부여하셔야 했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이러한 사랑이 뭐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의 세 본성. 그 다음에
<본문 내용>
타락으로 말미암아 자기사랑에 빠진 존재가 되었으니, 인간은 이러한 사랑의 본성을 따라 참다운 사랑의 대상을 찾기에 목마른 자가 되게 하심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지순의 충만한 사랑이 아니면 공허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따라서 영생의 핵심은 지식과 사랑이며, 신자의 삶은 이 지식과 사랑을 완성해 나갑니다.
<김남준 목사님> 거기 줄 치세요. 중요한 결론이에요. 그 다음에.
<본문 내용>
사랑안에 있는 하나님의 창조히례를 구현하는 존재로서 이 지식과 사랑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행복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이것이 곧 영생이다는 것이죠. 그러면 목회적으로 어떻게 해야 겠어요? 두 가지에 충실하도록 구현해 나가야 겠죠? 그 다음에.
<본문 내용>
C. 신자의 삼위일체적 삶
인간의 행복은 소유에서 옵니다. 시간에 매여 사라지고 소멸하거나 변전하지 않으며, 상실의 두려움이 없는 또한 악이 없는 완전하고 영원한 선, 그것을 소유하고 누림으로써만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소유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은 이 조건을 충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즐거워하고 누리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순결한 영이시나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그 온전함을 잃어버린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위해서는 끊임없는 변화가 필요합니다.
신자의 영혼은 사실상 하나님을 향하여 죽어 있다가 다시 살리심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는 중생을 통하여 전적으로 변화되었고 그의 영혼의 힘과 경향성들은 하나님을 즐거워하여 사랑하는 질서로 재편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자안에도 잔존하는 죄성이 있어서 끊임없이 영혼의 순전함을 위협합니다. 그리하여 그 영혼이 온전함을 잃어버리게 하고 또한 중생과 함께 받아들였던 사랑의 질서들을 따라 살지 못하게 합니다. 끊임없는 자기사랑과 육욕들이 삼위 하나님과의 교통을 방해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삼위일체적 삶이 필요합니다.
1. 회개함
첫째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는 단지 자신이 지은 죄를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죄로부터의 전향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뉘우치고 그 죄를 싫어하며, 배향하였던 하나님께로 전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회개는 항상 자기 깨어짐의 경험을 동반합니다.
자신 안에 있는 죄된 부패성을 발견하고, 그 죄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자신을 미워하고, 전심으로 하나님께 의존하려는 믿음은 갖는 것, 이것이 회개의 핵심입니다. 이를 통하여 신자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하여 돌이키게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안에 합당하지 않은 사랑의 질서를 재편하게 됩니다.
이러한 회개는 그의 영혼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주어 순수한 지성을 갖게 하여, 참으로 사랑하여야 할 것과 단지 사용하여야 할 것들을 옳게 분별하게 합니다. 감각적 사물의 아름다움에 매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관한 판단을 따라 이 둘을 구분하여 가치 없는 것들을 추구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김남준 목사님>
그래서 이제 두 번째 단락에서는 회개가 지성에 영향을 끼치는 거예요. 순수 지성에 대한 설명을 <도덕적 통치> 옆에다 갖다 놓고, 뒤져서 찾아내도록 해. 자 그 다음에.
<본문 내용>
끊임없이 가치 있는 것들을 향하여 자신의 마음과 삶을 정향하는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정향, 그래서 세 개의 중요한 단어가 나오는데, 그게 뭐냐 하면, 배향, 하나님을 향하는 인간이 돌이켜 서는 거예요. 그것을 뭐라 하는가 aversio라 하죠. 이러한 인간이 돌아 서는 거야. 그것을 전향이라 이야기 하잖아요. 이것을 회심이라 이야기 해. conversio. 그 다음에 이렇게 되는 상태를 계속 유지하며 살아가는 데에는 강한 힘이 필요한 거예요. 왜냐하면 잘 봐. 여기 하나님이 있잖아. 여기 인간이 있고 이렇게 이렇게 가. 이게 배향의 삶이야. 배향의 삶을 이리로 돌이키기 위해서는 엄청난 힘이 필요하겠지. 이러한 힘이 하나님의 신적 힘이 작용하는 거야. 이것을 이제 개혁파 정통신학에서는 physical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물리적인이 아니라 힘적인이야. 영혼에 가해지는 힘적인 작용을 통해서 이게 이렇게 해서 배향하던 사람이 이렇게 전향을 하게 되는 거야. 여기에서 우리들이 회심이라고 부르잖아. conversio. 자 이렇게 됐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여기에서 이 놓여있는 상황 자체가 삶의 상황이 세상이야. 세상이 유혹하는 것도 힘이고, 핍박도 힘이고, 강한 힘이 가해지는 거야.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이게 이렇게 못살게 하는 거야. 그런데 이 사람 안에 있는 유전자도 남아 있어. 남아있는 유전자가 뭐냐 하면, 하나님을 등지려고 하는 자기 사랑의 유전자야. 자기애의 유전자, 이것에 의해서 이렇게 살도록 계속해서 힘으로 작용하는 거지. 그러면 이러한 힘의 작용에 방해를 받지 않고 올곧게 이렇게 하나님을 향해 살기 위해서는 이 자체가 끊임없이 공급되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거야. 이것이 실제적으로 사랑의 힘이라는 거야. 이것들이 영원안에서 끊임없이 가해지지 않으면 이러한 길을 따라 살수가 없는 거야. 생각해 보세요. 바람이 끊임없이 불어 오는데, 사람이 흔들리지 않고 걸어가기 위해서는 상당히 큰 힘이 필요하지. 굳건한 힘이 필요한 거지. 엄청난 힘이 필요한 거야. 그래서 올바르게 가로 막는 것을, 나는 이제 라틴어에는 적당한 말이 없는데, 정향이라고 해. 이게 이제 일관성 있는 성도의 삶. 정향의 삶이란 거야. 이러한 정향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의 빛과 그 다음에 하나님의 은혜의 사랑이 계속해서 인간에게 주어질 때 그러한 힘으로써 정향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거야. 그래서 흔들리지 않고 견고해지기 위해서는 지식의 밝은 빛과 은혜의 강력한 사랑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 다음에
<본문 내용>
이러한 회개의 실천은 지상에서 신자로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행해야 할 것이니 이는 신자가 비록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을 통해 거듭나고 새로운 본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여전히 옛사람을 짊어지고 가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창조의 목적을 따라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구현하며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큰 방해는 자기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를 통하여 끊임없이 자기를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지 못하게 하는 자신과 결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러한 회개는 기도 속에서 가장 잘 나타납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자기를 부복하는 진실한 기도 속에서 창조주 앞에서 자신의 본분을 스스로에게 행동으로써 상기시키는 것이며, 그 앞에서 누구의 강요도 없이 자신의 죄와 불결을 발견하고 그것을 슬퍼함으로써 그의 영혼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고개를 돌게 되는 것입니다. 순수하고 꾸밈이 없는 참회의 기도를 통하여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을 향하여 가던 길에서는 전진하고, 그분을 등졌던 길에서는 돌이키게 되는 것이니, 한 인간이 회개하는 것만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2. 쇄신됨
둘째로, 쇄신됨입니다. 이는 중생을 통하여 새롭게 된 영혼이 자신에게 고유하지 않은 것에서 구별되어 영혼의 온전함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자의 성화에 있어서, 이것은 진실한 회개의 분리되지 않는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구원하신 신자들의 영혼을 끊임없이 아름답게 하시어 당신이 처음 창조하신 영혼의 아름다움을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인간존재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에 있으니 인간존재 자체가 무로부터 창조된 것이라면, 그 아무것도 아닌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누리는 그 모든 외적인 영화와 영광이야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김남준 목사님>
인간 전체의 아름다움은 무엇에 대한 아름다움이라고? 영원의 아름다움. 그리고 한 인간 존재의 가치는 무엇에 의해 결정된다고? 선한 의지의 크기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래서 목회하면서 현혹되지마. 좋은 학교 나온 거, 돈 많은 거, 그 다음에 무슨 사회 특수 직에 종사하는 거, 이러한 것에 대해서 너무 많이 현혹되면 안돼. 본질을 볼 수 있는 마음이 목회자에게 있어서 그러한 사람들이 일부러 다가오게 하면 안되지만, 그러한 마음이 있어서 사람들이 사람을 바라보는 또 다른 견해를 갖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거야. 다시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은 무엇에 대한 아름다움? 영원의 아름다움. 한 인간의 가치는? 선한 의지의 크기. 올치 잘했어. 그 다음
<본문 내용>
a. 쇄신과 영혼의 아름다움
영혼의 쇄신은 영혼의 아름다움을 회복시켜 줍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니 하나님에게 있어서 인간존재의 가치는 영혼과 정신의 아름다움에 있는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쇄신, renovatio라는 말이 나오죠. renovation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오는데, 이건 뭐냐하면 없는 것을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덕지덕지 붙은 것들을 떼어 냄으로써 원래 하나님이 주신 것들이 최대한의 생명과 완전함을, 최대한의 생명을 나타내고, 완전함을 향하여 발전되도록 하는 그것이 쇄신의 목적이에요. 그 다음에
<본문 내용>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과 세계의 목적을 구현하고 주님의 본부를 따라 창조세계를 가꾸기 위해서는 반드시 육체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가 없이 영혼만 있는 존재를 인간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육체는 벗어버릴 육체이며,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모두 완성된 그 날에 우리들이 입을 육체는 이렇게 죄와 부패, 결핍과 고통에 종속되는 육체 아닙니다.
<김남준 목사님>
이것이 우리가 육체를 미워한다고 할 때, 육체가 물질이라는 이유 때문에, 잘 정리해놔요. 인간이 육체를 미워한다 그럴 때 그 육체를 미워하는 이유가 물질이라는 이유 때문에 미워하면 안돼. 거기에 붙어있는 죄성, 그것 때문에 미워해야 해. 그것과 결별지을 수 없는 육체의 속성을 미워하는 거지. 하나님이 창조하신 물질 세계 때문에, 모순이 어디에 존재하냐 하면, 인간이 육체를 미워하는데, 이것이 플라톤이 생각했었던 것처럼 물질이기 때문에 만약에 미워하고, 이것이 영을 제한한다는 이유 때문에 이것을 미워한다고 하면 이것은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물질로써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 행위 자체를 비난하는 것이 된다 이거야. 그렇게 되면 안된다는 거지. 그래서 우리가 인간에 대한 사랑을 영혼이 주이지만, 영혼이 주된 것이지만, 인간에 대한 사랑은 총 포괄적인 사랑이어야 된다 이거야. 육체와 영혼을 아우르는 사랑이어야 된다 이거야. 그때 진정으로 그것이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 볼 수 있는 거야. 그러니까 물질의 세계 이 자체는 아주 아름다운 것이라고 봐야 되는 거야. 하나님이 당신의 성품과 아름다운 속성을 이 피조 세계 속에 새겨 놓으신 것, 그러한 점에서 우리 육체도 아주 소중한 거지.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우리는 봐야 하는 거야. 물질 자체가 사라져간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거야? 사라져 간다는 것 자체에 물질은 아름다움이 있는 거야. 다만 그렇게 사라져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어느 만큼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냐 생각할 때에 불멸하는 영혼이나 영혼과 관계를 맺고 계시는 불변하신 하나님과 가치를 비교해가면 된다 이거지. 그러한 점에서 잠재적인 가치를 기억해야 된다는 거지.
<질문>
궁금한점이 있는데요, 하나님께서 모양이 바뀌었던 것인데 단지 나중에 영광의 몸으로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활용하여서 만들어내실 것이다. 육체 안에도 죄성이 있고 벗어버릴 육체이지만, 어짜피 영혼도 완전한 영혼이 아니라 죄성이 있는 영혼이기 때문에 모든 죄성을 육체에게만 귀속시키고 영혼은 죄가 없는 것처럼 묘사되는 것도 문제가 되는 것 아닌가.
<김남준 목사님>
우리가 문제가 되는게, 항상 terminology 문제가 되는게 그래서 우리들이 육체라고 이야기 할 때, 이것을 두 가지를 의미하는데, 물질로서의 육체와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인간의 영혼 안에 깃들여 있는 순수한 영의 요소와 대치되는 개념으로서의 그 영혼의 부패성을 함께 이야기하는 거야. 육체라는 말 그 자체가 함께 들어있는 거야. 그 두 개를 같이 이야기해야 되는 거야. 항상 용어를 사용할 때는 terminology를 어떻게 사용하겠다는 것은 한정을 짓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거야. 우리들이 성경적으로 볼 때 일반적으로 육에 속한 것은 육이요, 영에 속한 것은 영이라. 육신을 좇는 자는 그렇게 나오잖아요. 육신을 좇는 자는 죽을 것이요 나오잖아. 이것은 단순한 물질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거든. 그러면 왜 그렇게 이야기 하는가 하면 잘들어요. 왜 그렇게 설명하냐 하면 영원 안에 있는, 개혁파 정통 주의자들은 영원 안에 있는 기능들을 이렇게 나눴거든, 우등한 기능과 열등한 기능으로 이렇게 나눴어요. 이렇게. 우등한 기능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등등의 진리를 아는 기능, 초자연적 기능이라면, 먹고 싸고 더 좋은 것들을 보고 싶어하는 이러한 것들은 열등한 것들이잖아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우리의 몸이 이렇게 있을 때 육체가 이 열등한 기능이 육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거야. 왜냐하면 짐승도 배고프면 먹고 싸잖아. 짐슴도 욕구를 느끼잖아. 짐승이 욕구를 느끼지 않으면 뭐, 움직이겠어? 욕구를 느끼니까 사냥도 하는 거잖아. 육체와 긴밀하게 연결이 되어 있는 거야. 그러면 타락한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감화를 받으면서, 이 기능이 이 기능에 의해 침범되지 않도록 순수하게 보호되고 이것에 의해서 이러한 것들이 통재가 되어야 해. 이것이 바로 육신을 따르지 않는 삶이야. 그런데 이러한 기능이 깨뜨려지면, 육신을 따르는 삶을 사는 거거든. 그러니까 육신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이러한 것들을 포괄해서 단순하게 물질이라는 것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사실은 물질과 영혼이 확연하게 구별이 됩니까. 물질은 존재론적으로는 물질 안에 인간의 영이 섞일 수 없기 때문에 확연히 구별이 되죠. 우리의 영혼은 머리카락이나 콧구멍이나 살 갖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러나 이 영혼이 서로 작용한다 라고 할 때, 그게 나누기가 굉장히 어려워지는 거죠. 그러면 뭐냐 하면, 예를 들면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고 하는 것은 영적인 작용이잖아. 배가 안고파. 밤새도록 기도해도 힘이 안 들어. 이것은 육체적인 작용이잖아. 이게 어떻게 구분이 되냐 이거야. 어떻게 구분이 되. 막 흐른다 이거야. 그러니까 여기에서 육신이라고 이야기할 때 성경에서는 할 수 없이 이러한 개념을 포괄해서 이야기 하게 되는 거라 이거야. 그래서 육신에 속한 지체를 땅에 속한 지체를 끊임없이 죽여라. 그 지체라는 말도 육신에 속한 지체라고 하는 것이거든. 이러한 욕망이 일어나는 이러한 열등한 영혼의 작용 자체가 물질인 이 육체의 작용과 밀접하게 동물적 작용과 연결되어 있는 거라는 거야. 이것을 이렇게 지혜롭게 보는 거지. 그러면 만약에 영원한 것이냐 문제가 나왔는데, 영원하죠. 결국은 인간이 하나님께서 물질은 불변이거든요. 하나님께서 만드신 물질의 총량은 불변이야. 물질의 총량은 불변이야. 물질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물질 보존의 법칙이잖아. 원소에서 다시 뭉쳐져서 가시적인 사물로 사물에서 다시 분해되어서 다시 원소로 이렇게 회귀할 뿐이지, 총량은 변하는게 아니에요. 그러면 이때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럴 뿐이지, 우리가 뭐 죽어서 뼈 가루가 되어서 다 없어져도 원소가 남아있는 거죠. 하나님께서 모으셔서 다시 물질의 몸을 창조하시고, 그 물질은 하나님의 덕 입음으로 말미암아 불변하게 되는 거죠. 그때에도 정확하게 물질이죠.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이러한 물질은 아니죠.
<질문>
영혼의 우등한 기능은 죄로부터 자유로운가.
<김남준 목사님>
자유롭지 않고 끊임없이 영향을 받는다니까.
<질문>
영향을 안 받더라도, 그 자체 그 자체는 죄로부터 자유롭게 존재하는 것이 심겨져 있다라고 봐야 하는데,
<김남준 목사님>
그럴 수 없지. 죄의 영향은 <죄와 은혜의 지혜> 교리에서 이야기 했잖아. 죄의 영향은 총제적이야. 거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거야. 이렇게 벗어날 수 없는 거 이거지. 문제는 뭐냐 하면, 우등한 기능의 죄가 미치는 방식과 열등한 기능의 미치는 방향이 다르다 이거지. 무슨 얘기인지 알죠?
<질문>
성경에서 말하는 사르크스(σὰρξ, sarx), 육체라고 하는 것은 물이 아니라 소마(σώμα, soma)가 아니라, 정욕과 관련된.
<김남준 목사님>
그렇게 쓸때도 있고 안 쓸때도 있어. 예를 들자면, 이렇게 되잖아. 이게 예수 그리스도에서 이것을 쓰거든. 그때에는 죄와 상관이 없는 거야. ὁ λόγος σὰρξ ἐγένετο 말씀이 육신이 되어.. 죄와 상관이 없는 거야. 대부분의 다른 한 인간들에게 사르크스(σὰρξ, sarx)하면, 함께 맞물려서 이야기하는 거지. 육신이라고 할 때에 마지막으로 부활 할 때 회복되어야 할 육신이라고 할 때는 사실은 이러한 육신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죄로 말미암는 이러한 부정적인 작용과 이러한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진 상태에서의 그러한 물질 상태라고 봐야 되는 거죠. 그때에 그 물질 상태는 지금의 물질 상태와는 현저히 다르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체를 보면 알 수 있잖아요. 그러한 종류의 물질일 것이다라고 보는 거죠. 그 다음에.
<본문 내용>
신자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날마다 그 영혼이 쇄신 되어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영혼의 쇄신으로 가시적 사물들의 표상에 매여 사랑함으로 창조의 목적을 이탈하는 일을 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영혼 자신은 그렇게 됨으로써만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 안에는 스스로 완전함으로 돌아가려는 성질이 있습니다. 그 완전성을 논함에 있어서 영혼의 완전함은 정지적 개념이고, 영혼의 온전함은 이행적 개념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줄 치세요. 그래서 영혼의 완전함은 정지적 개념이고, 영혼의 온전함은 이행적 개념이다. 그 다음에.
<본문 내용>
이러한 완전함 속에서야 영혼은 아름다울 수 있는데, 하나님은 이렇게 아름다운 영혼의 지성에 말을 건네시며, 애성에 당신의 사랑을 느끼게 하시고, 의성에 당신의 뜻을 행하며 살 능력을 주십니다.
<김남준 목사님>
애성이 뭐냐고, 지성이 뭐냐고 질의가 나올 수 있어요. 지성은 지식 자체와 그 다음에 지적인 능력. 애성과 의성은 내가 만든 개념인데, 하나님께서 처음에 인간에게 사랑을 주셨을까, 아니면 사랑할 수 있는 능력만 주셨을까. 둘 다 주신 거죠. 그러니까 그 사랑, 하나님이 부여해 준 사랑 그 자체와 사랑할 수 있는 가능태로서의 사랑의 능력, 이 두 가지를 합쳐서 애성이라고 보는 거지. 의성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맨 처음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의지를 주셨을까 안 주셨을까. 당연하죠. 사랑을 주셨으니까. 사랑은 또 하나의 의지이니까, 그래서 주어진 의지와 의지 능력 그 자체를 가리키는 거죠. 의지의 능력. 그래서 사랑의 능력은 어떤게 있다고 했지? 기억을 하는 사람 없겠지. 뭐가 있다고 했지? 애호 능력과 혐오 능력.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애호하고, 그 다음에 추해 보이는 것은 밀치고 싫어하는 혐오 능력이에요. 자 그다음에.
<본문 내용>
완전하게 창조된 영혼은 끊임없이 온전하게 되어 본래의 완전함에 이르고 싶어하며, 이렇게 되지 않고서는 영혼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결코 쉼과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에도 그러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으나 불순종과 죄 가운데 살아갈 때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쇄신의 은총을 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즐겨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자신의 쇄신을 위하여 은총을 구하는 사람들은 추루하던 영혼에게 돌이켜 아름다운 영혼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창조목적에 순종하며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b. 두 회복 : 순결과 감화
이러한 영혼의 쇄신은 두 가지 핵심적인 작용으로 이루어집니다. 소극적인 작용과 적극적인 작용이 그것입니다. 첫째로 소극적으로는 영혼의 순결의 회복이니, 이는 곧 영혼의 불결을 떨어내는 것입니다. 영혼의 존재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인간으로 존재함에 있어 육체를 살아있고 또 살아가게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영혼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지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러니까 영혼의 존재 목적은 두 가지인데, 육체를 살아있고 살아가게 하는 것. 살아있고라는 것은 하등한 능력을 가리키는 거지. 살아가게 하는 것은 뭐냐하면, 삶 자체를 영위해 나가는 도덕적인 생활을 가리키는 거지. 또 하나는 하나님 안에서 지복을 누리는 것. 그 다음에.
<본문 내용>
영혼이 이러한 자신의 고유한 존재목적을 따라서
<김남준 목사님>
두 가지 줄치세요. 영혼이 이러한 존재의 목적 두 가지. 그 다음.
<본문 내용>
영혼이 이러한 자신의 고유한 존재목적을 따라서 작용하기를 원한다면 영혼의 고유한 본질들이 최고도로 기능하고 고유한 목적을 따라 작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영혼의 이러한 작용은 영혼과 마음 안에 존재하고 작용하는 불결로 말미암아 방해 받습니다. 영혼의 쇄신은 영혼 자신에 고유하지 않은 것들을 털어내고 그것들로부터 스스로 분리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적극적으로는 사랑의 감화이니, 이는 인간존재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리는 것입니다. 영혼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사랑받을 때에라야 자신이 감당한 기능을 가장 잘 수행하며 창조목적을 따라 살 수 있습니다. 영혼의 쇄신은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삼위하나님의 사랑에 감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랑의 감화를 통하여 인간의 선한 의지가 불러일으켜지고, 사랑 안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기쁨으로 섬기게 됩니다.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에도 쇄신이 있지만, 이는 자연적 본성의 쇄신일 뿐이며 영혼의 근본적인 쇄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던 경건한 사람들의 경험을 생각해 보십시오. 고난과 시련 속에서 그들을 행복하게 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비참과 억압 속에서 그들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한 것은 영혼의 쇄신이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시인은 말합니다. “주의 증거는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모사이니이다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시 119:24-25). 고난의 골짜기를 지나던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3).
그러므로 신자는 이렇게 끊임없이 자신의 영혼을 진리와 성령으로써 쇄신함으로 삼위 하나님과의 교통 속에서 살게 되고, 그로 인하여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쇄신된 영혼 안에서 그의 지성에 말을 건네시고 애성에 사랑을 부으시며 의지에 능력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날마다 자신의 영혼이 거룩한 방식으로 쇄신되는 것은 구원을 통해 이루어진 삼위 하나님과의 보다 충만한 교재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비결이며,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신자의 삶입니다.
3. 발견함
셋째로 발견함입니다. 이는 회개를 통한 자기 깨어짐과 영혼의 쇄신을 통하여, 새로운 지식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지식의 발견의 최종적 목적은 모든 진리의 원천이신 하나님 자신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존재하게 하신 것들에 대한 지식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을 알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가 당신 자신을 더 많이 알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분이 하나님을 향한 앎이고, 그 앎이 깊어질수록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와 창조의 목적을 잘 이해하게 될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그러한 통치의 주체이신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이처럼 하나님을 아는 데서 자라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두 가지 어두움과 더불어 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주관적인 어두움과 객관적인 어두움이 바로 그것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주관적인 어두움은 뭐야, 자 빨리빨리.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에 다 나오는 거지? 주관적인 어두움은 뭐야? 누가 대답할까? 객관적 어두움은 뭐야? 내적인 어두움은 spritual darkness에서 오는 거야. 이것은 뭐냐 하면, 영혼이 올바르지 않은 것들에 대해 집착하고, 사랑함으로써 도입되는 어두움이야. 그 다음에 객관적인 어두음은 뭐야? intellectio blindness야. 지적인 눈 멂이란 말이야. 그건 뭐야? 어떤 거야? 가르쳐주면, 물러갈 어두움이야. 지식이 전달되면 물러갈 어두움이야. 그래서 시인이 뭐라 그랬지? 시편 199편에서 나의 눈을 열어 주의 법에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할 때에, 눈이 감겨져 있는 상태가 객관적인 어두움의 상태야. 내 죄악으로 인하여 내가 눈 멀었나이다. 이것은 주관적인 어두움의 상태란 말이죠. 말도 구유를 알고, 나귀도 주인을 아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도다. 이것은 뭐야, 주관적인 어두움이지. 율법을 다 주었는데도 모르잖아. 정리를 해 나가야 돼. 이 다음에 뭘로 목회를 해 나가려고 해... 훤하게 알고 있는 줄 알았더니. 그 다음
전자는 죄를 사랑하는 데서 오는 내적인 어두움이고, 후자는 지식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갖게 되는 지성의 어두움입니다. 영혼의 어두움과 지성의 어두움으로 인하여 인간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하여도 그렇게 될 수 없는 속박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창조하시고 이 세상을 맡기신 그 계획을 따라 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신자는 이 세상을 맡기신 그 계획을 따라 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신자는 끊임없이 모든 종류의 어두움을 미워함으로 자신이 빛에 속한 자녀임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신자의 삶에 있어 두 빛은 두 가지를 은유하는 것이니, 하나는 윤리적인 삶이며, 또 하나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거기 줄치세요. 우리는 후자에 대해서는 잘 생각을 안 하지. 너희는 세상의 빛 된 삶을 살아야 해. religion의 삶만 이야기 하는 건데,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야. 둘 다. 이 하나님의 지혜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야기 한 것이 이 <자기 깨어짐>에서 현자로서의 삶, 그것을 이야기 하면서 2장인가 3장을 이야기 하는데, 그것들을 여러분들이 읽어봐야 해. 공부 많이 해야 돼. 자, 그 다음.
후자가 없이는 전자는 불가능한데, 이는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윤리적인 삶은 세상이 기준으로 세운 윤리적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지혜를 따르는 윤리적인 삶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이처럼 끊임없이 회개하고 영혼이 쇄신되어 감으로써 자신이 어떤 존재이고, 또 무엇을 믿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아갑니다. 이 과정이 바로 하나님을 발견해 가는 과정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발견하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은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하나님께 발견되고자 하는 소원을 갖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9)
신자가 찾는 진리는 단지 사색에 의해서 찾을 수 있는, 움직이지도 않고 생명도 없는 객관적 실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진리는 살아있는 생명에 있어서, 신자는 끊임없이 그 진리에게서 비치는 빛과 생명, 사랑을 통해 자신이 진리이신 그리스도께 발견됨으로써 진리를 찾아가고 또 그 진리와 합일됨으로 자신의 존재에 합당한 진실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Ⅴ.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하심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신자의 행복을 보존하시기 위하여 그를 교회의 한 지체가 되게 하셨는데, 이는 교회 안에서 그런 행복을 보존할 뿐 아니라 증진하게 하심으로써 다른 지체들과 함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게 하셔서 이 세상을 섬기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처음부터 그리스도 없이 신자일 수 없는 것처럼, 또한 교회의 지체됨 없이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를 즉각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이심으로 그분의 몸의 일부가 되게 하시고, 그 몸을 통하여 신자 개개인의 존재목적을 성취해가게 하십니다.
A.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심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신자를 삼위와의 교통 속으로 불러들이시되 그를 개인으로 부르지 아니하시고 공동체적으로 부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마 6:9)
신자가 구원을 통해 삼위 하나님과 이루는 그 교통은 곧 교회가 삼위 하나님과 더불어 갖는 신적 사랑의 교통입니다. 그 안에서 이미 구원 받았으나 아직 온전케 되지 못한 신자를 온전함에 이르도록 보양 받게 하십니다. 그 교통 속에서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는 교회와의 연합이 있고, 그 연합 안에서 자신을 참된 신자로 세우기에 필요한 수많은 자원들과 섬김을 누리게 하십니다. 그리함으로 묘목과 같은 자들을 교회라는 산 속에서 온갖 돌봄을 받으며 자라게 하시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그가 자신의 성장과 받은 은혜를 따라 다른 지체들을 형제로 부르며 교회의 품 안에서 하늘 가족으로 살아가게 하시는데, 이는 그들로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에 각 지체가 되어 사랑의 일치 속에서 신자 각자를 부르신 그 창조의 목적을 이루어가시기 위함입니다.
신자는 교회의 지체이며, 그는 ‘개인적으로’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니라 ‘공동체와 함께’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모든 사랑과 지혜를 공동체 속에서 배우고 실천하여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온전한 신자가 되어가고 교회도 또한 온전한 교회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렇게 그리스도의 온전한 지체가 되어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고, 교회 안에서 자기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공동체적으로 실현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참으로 진실한 신자로 살아가는 실제적인 삶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목회자와 성숙한 지체들을 통해 보고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B. 사랑 안에서 자라게 하심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을 이렇게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이심으로 사랑 안에 자라게 하십니다. 이 사랑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향한 사랑이며, 그 머리를 통해 삼위 하나님과 누리는 사랑의 교통에서 자비가 비롯됩니다. 그 자비와 사랑 안에서 교회는 공동체적으로 삼위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며 그 사랑의 본을 따라 지순의 사랑으로 연합되는데, 이 사랑 안에서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지혜를 배우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사랑의 연합을 이루게 하시고 진리를 주셨는데, 이것이 바로 사랑 안에 있는 삼위 하나님의 지혜의 모상입니다.
세계와 인간을 향한 모든 지혜가 삼위 하나님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당신과의 교통을 통해 교회에 주십니다. 이미 주신 진리에 담긴 부요한 의미를 끊임없는 사랑 속에 조명을 통하여 찾게 하시는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 지혜를 실행하시는 것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 실행하시고, 그것이 다시 교회에 위탁이 되어서 하나님이 교회를 다루시는 그 경륜 안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와 사랑이 드러난다 이거예요. 그 다음.
<본문 내용>
그리하여 교회로 하여금 그 찬란한 진리의 빛 아래서 하나님이 인간과 교회와 세계를 창조하신 계획과 목적을 발견하게 하시고 사랑 안에서 그것들을 성취해 감으로 능히 하나님 자신의 도구가 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이 이런 지혜를 교회와 상관없이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그 모든 사랑과 지혜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속에서 배우게 하심으로 그 안에서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더욱 결속되게 하시고, 그로 말미암아 삼위 하나님과 사랑의 교통을 누리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자신 안에 있는 사랑을 따라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지혜로 알게 하시며, 그 지혜를 따라 세상과 만물을 섬김에 있어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을 충분히 반영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모든 신자들에게 있어서 그 태어남과 자라남, 마지막 죽음에 이르기까지 떨어질 수 없는 운명체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 다음 과는 어디까지이지? 2장 전체를 한번에 한다고? 다 못할 것 같은데, 57페이지까지 하는게 가장 좋을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