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만나 주시는 사람
(2000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0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이런 자를 만나 주리라(사66:2下) 2000.6.11 주일오전 1
2. 통회하는 자의 마음(사57:15) 2000.6.18 주일오전 13
3. 하나님께 목마른 자(사42:1-2) 2000.6.25 주일오전 26
4. 낮게 될 때에 구원하시는 하나님(시116:6) 2000.7.2 주일오전 36
5. 가난한 심령을 가진 자의 수가지 은혜(시116:7-8) 2000.7.9 주일오전 46
6. 바라고 기도하는 자를 만나주심(시40:1-2) 2000.7.16 주일오전 58
7.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는 삶(신8:2) 2000.7.23 주일오전 69
8. 끝도 없는 곤고함의 원인(시107:10-11) 2000.7.30 주일오전 80
9. 겸비한 자에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스8:21) 2000.8.2 수요예배 92
10. 겸비한 자에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시107:19-20) 2000.8.6 주일오전 104
11. 구원의 여망이 끊어졌을 때(행27:20-21上) 2000.8.9 수요예배 118
12. 괴로움과 통곡으로 드린 기도(삼상1:10) 2000.8.13 주일오전 126
1.이런 자를 만나 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사 66:2下)
아무리 진실하고 거룩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만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행복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하나님을 만나야 할 필요를 느낀다고 하는 그 말은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진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났기 때문에 다시 하나님을 만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곤고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신앙에 가장 아름다운 이상은 주님을 다시 만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하나님과 친근히 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 늘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전에서, 그 면전에서, 그분의 임재 앞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참된 이상이 아닐까요? 그러나 이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고 꿈은 우리의 현실과 너무나 멉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주일이 다가와야지 비로소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에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지적하는 것들이 슬픈 일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언제고 이런 일은 사실입니다. 때로는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면 안 될 어려움 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이례적인 시련과 그리고 예기치 못했던 시험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날 필요를 재촉합니다. 환경적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큰 어려움이 와서 하나님을 찾게 하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격렬한 내면의 죄의식과 고통 때문에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안 될 때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 같이 무지몽매한 인간들을 향해 하나님 자신을 생각나게 하시기 위해서 강한 방편들을 사용하십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의 길에 예기치 못한 불행에 복병들을 두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복병의 기습을 받아 자신만만하던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신앙의 길에 들어서게 하시기도 하십니다. 견딜 수 없는 시련과 고난 속에서 이제껏 까지 믿었던 많은 사람들을 향한 희망을 끊어버리게 만드시고 하나님 한 분 말고는 이 세상에 의지할 분이 없는 것을 알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신앙의 길에 발을 들여놓게도 하십니다. 어디 하나님을 안 믿던 사람들뿐이겠습니까 이미 하나님을 믿었지만 육신의 안목을 따라서 살다가 시험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했던 사람들도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자기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인생인지를 깨닫게 하셔서 하나님 만날 필요를 느끼게 하십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해나가고 또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 가지 사실을 가슴에 칼로 새기듯이 깊이 새겨 두기만 하면 희망이 있습니다. 그 한 가지 사실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의 그 전능하심을 자기를 부르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시는 분이시다 하는 것입니다.
경건한 시인은 시편 속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니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말입니다. 견딜 수 없이 인생이 슬픈 날에 참을 수 없이 인생이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날에 시인은 눈을 들어서 산을 보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인생을 사는 것이 너무 힘겹게 느껴지고 내가 닥친 환난과 고통이 내가 견디고 인내할 수 있는 한계를 초월한다고 생각될 때에 왜 눈을 들어서 산을 보았을까요? 그리고 어떻게 그 산을 보고 “나의 도움이 여호와께서로온다”고 확신할 수 있었을까요? 시인 앞에 서 있는 산이 시인에게 무엇을 전해준 것일까요?
지금이야 기술이 발달하고 그래서 인간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래서 산을 뚫어서 길을 내고 필요하면 그 산을 부서버려서 계곡을 메워버립니다. 산을 밀어서 큰 비행장을 만들기도 하고 산과 산 사이에 다리를 놓아서 마치 동화에서 보는 길 처럼 차가 산 위에 달리도록 만들기도 하는 것이 오늘 날의 기술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쓰여지던 옛날에 사람들에게 산은 그야말로 산이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옛말에도 그래서 워낙 기운이 센 사람을 ‘역발산 기게세’라고 그랬습니다. 산을 뿌리 채 뽑아버리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람이 기운이 워낙 세면 그 정도로 기운이 센 사람들이라고 중국 사람들이 허풍을 떨었습니다. 아뭍든 산은 그렇게 성경이 쓰여지던 시대에는 그 산은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어떻게 움직일 수 없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역시 어느 정도는 그렇습니다.
(예화) 예전에 대학에서 교수로 계실 때. 학교에서 대학교 인가를 받으려고 하니까 운동 장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땅이 없어서 학교 뒤에 작은 산을 없애려고 하니까 10년 전인 그때에 30억의 돈이 들어야 된다는 말에 느낀 것이 산이 작아도 역시 산은 산이구나 했다는 이야기
보십시오. 시인이 산을 보면서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생각한 것입니다. 자기가 직면하고 있는 죄가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이 그것보다도 훨씬 크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 즉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는 그 믿음, 그것이 시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하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생을 살다가 어떤 시험을 만나고 어떤 시련을 만나든지 하나님을 만나면 된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문제를 초월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도 우리에게 말하기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못 박은 후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무슨 문제를 가지고 있든지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의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될 것입니다. 시련을 만난 사람들에게는 피할 길을 열어주실 것이며, 고난을 당한 사람들에게는 그 고난의 길을 피할 길을 주시고, 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죄 가운데 있어서 고통하는 사람들에게는 사죄의 은혜를 내리실 것이며, 영적으로 목말라 기갈하는 사람들에게는 부요한 은혜를 생수처럼 쏟아 부어 주실 것입니다. 깨닫지 못해서 무지하여 고통하는 사람들에게는 지혜의 빛을 보이실 것이고 어떤 길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인지를 알면서도 그렇게 살 힘이 없어서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순종하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워낙 탁월하게 주님을 의지하고 경건하게 살기 때문에 그렇게 급작스럽게 하나님이 만나주셔야 할 필요를 못 느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깨끗하게 닦아놓은 유리 창과 같아서 특별히 누가 그 유리 창에 더러운 오물을 투척하지 않아도 시간이 흐르면 먼지가 끼고 때가 끼어서 맑고 초롱초롱하게 볼 수 있었던 영적인 세계에 대한 감각들이 흐려집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옵는 건강한 영적인 교제도 그렇게 위협을 받게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한 시련이 없어도 하나님과의 감격적인 만남은 언제나 필요하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어루만져 주시는 영혼에 참된 축복이 있을 때에 그의 더러웠던 영혼의 유리 창은 닦여지고 다시 신령한 세계를 볼 수 있는 마음의 창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시는 것을 가르켜서 성경은 “권고하신다”고 말합니다. 한글로 된 성경을 가지고 있는 분들은 이 말이 흔히 사람들에게 권면하고 충고한다고 하는 말과 한글이 같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을 하시는데 그 말과 그 말은 전혀 틀립니다. 여기에서 “권고하다” 라는 말은 히브리 말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방문해주신다”는 뜻입니다. 혹은 “심판해주신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어째든 이 “권고한다”는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와 주신다”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을 찾아와 주시는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인간이면 누구든지 하나님을 만나야 할 필요가 있고 그들의 상태는 모두 하나님이 그들을 만나주셔야 하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이런 신앙의 감격을 경험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만나주실까요?
오늘 이사야서 66장의 문맥은 이제 이사야가 멸망을 눈 앞에 둔 유대 백성들을 향해서 그들의 형식에 흐른 종교생활을 비판하며 다시 한번 여호와의 종교의 영적인 특성을 강조하는 문맥입니다. 이 당시 하나님의 심판을 눈앞에 둔 가운데 백성들은 모두 탐욕에 치우친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렇게 탐욕에 사로잡혀서 살아가는 방탕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릇된 안전을 심어주고 거짓된 평안을 부추기는 역할들을 했습니다. 그들은 부지런히 절기와 대회로 모였고 그리고 이런 저런 제사로 하나님께 드렸지만 제사를 드리고 절기를 지키는 사람들 속에 마땅히 깃들여야 할 참된 영적인 특성들은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선지자는 아주 강력한 어조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실상 하나님을 버린 신앙생활을 탄핵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말하였습니다. “그들이 절기를 드리고 제사를 드리는 것이 마치 개의 목을 꺽고 가증한 돼지의 피로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는 제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은 제사라기 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모독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에 종교가 그런 내면적인 특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들의 제사가 바로 가장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제사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복수심과 불쾌감을 더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강조하기 전에 선지자는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을 만나 주시는지를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인해서 떠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만나주시겠고 그 사람들이 드리는 예배와 제사가 하나님 앞에 열납될 것임을 강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마음이 가난한 것과 그리고 심령에 통회하는 것, 그리고 말씀을 인하여 떠는 것은 각각에 서로 다른 세 가지 행동이라기 보다는 동일한 한 사람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세 가지 측면에서 관찰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난함”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바라보는 마음의 상태를 초점으로 두어서 본 것이고, “심령에 통회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악된 상태에 대한 영혼의 반응에 초점을 두고 본 것이며, 마지막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라고 하는 관찰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하나님의 백성의 태도에 초점을 두고 관찰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진정한 상태가 어떤 상태이며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한 이상적인 상태로부터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보여줍니다.
저는 여러분들을 목회하면서 여러분들이 ‘어떤 성도가 됐으면 좋겠다’라고 하는 분명한 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상이 여러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그 중에 오늘 말씀과 관련된 한 특징을 말씀드리자면 제가 성경에서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성도가 갖는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애통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늘 하나님 앞에 애통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이상적인 성도의 한 모습입니다. 자신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면 이루어질수록 그는 애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입니다.
그것을 오늘 성경은 차례대로 세 가지로 다른 각도에서 설명을 하고 있는데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 하나님이 찾아와 주고 싶어하시는 사람의 첫 번째 특징은 마음의 가난함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가난함은 부자와 비교할 때에 약간 불편하게 살아가는 종류의 그런 상대적인 가난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 가난함은 절대적인 가난함이라는 것입니다. 즉 아무리 주위를 돌아봐도 자기가 의지할만한 것이 없고 그리고 자기 스스로를 도울 수 없기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에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가난함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히브리 성경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이 번역이 성경 전체의 사상으로 볼 때에 매우 적합하다고 느껴집니다. 가난한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 마음이 그렇게 가난한 사람,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날 만한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서 이런 의구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특별히 가난하고 그 시대에 낙인찍힌 죄인들과 가까이 지내셨을까? 왜 우리 예수님을 감격적으로 맞이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그 시대의 찌꺼기와 같은 사람들, 세상에서 낙인찍힌 세리와 창녀, 기생 이런 사람들이 왜 예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안 자들이 되었을까? 왜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소유했을까? 라고 말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예수님이 답을 주시는데 예수님이 산상수훈 어구에서 이렇게 시작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입니다. 애통하는 자들에게는 위로를 주겠다고 하셨고, 마음이 온유한 자들에게는 땅을 기업으로 주겠다고 하시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배부르게 해주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왜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천국을 몽땅 주겠다고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기독교가 은혜의 종교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천국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을 때에 심령에 가난함을 느끼는 이것이 그들이 도덕적으로 의로운 삶을 살거나 정결한 삶을 사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해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물론 이렇다 하면 가장 하나님 앞에 훌륭할 것입니다. 도덕적이고, 깨끗하고, 정결한 삶을 살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사람, 하나님 앞에 티없이 순결하면서도 자신은 늘 불결하다고 애통하며 정결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눈물에 가득찬 마음을 가진 성도, 이런 사람은 가장 이상적입니다. 그러나 신비스럽게도 그런 사람들은 많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시대에 비교적 정결하게 살았던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너무나 정결하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죄를 정결케 해주시고 씻어주셔야 할 메시아의 필요를 느끼지를 못하였습니다. 의롭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경건하게 산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미 하나님의 왕국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고 하는 예수님의 선포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리와 창기와 그리고 죄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는 아무런 내세울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를 긍휼히 여겨주시는 것이 자기들의 인생에 유일한 희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렇게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구원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시는 유일한 하나님의 목소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은혜의 종교라는 특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겉모습 보다도 우리의 속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조금 의롭게 살면서 마음에 기름기가 낀 사람들보다는 비록 죄의 때가 많이 묻은 사람이지만 자기도 어찌할 수 없이 죄 가운데 살아가는 것을 마음 아파하며 치료하시는 주님의 은혜에 목말라하는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훨씬 더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생애를 보십시오. 주님이 즐겨 찾아가던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주님이 즐겨 마음이 흐르는 눈물을 씻겨 주시고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셔서 어두운 눈을 뜨게 해주시던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사랑을 받았지만 각별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마음이 깨트려진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 한 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구원, 하나 이외에는 자신의 인생에 어떤 소망도 없다고 생각하는 절대 의존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들,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의 불을 끄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자비 이외에는 자신의 인생에 어떠한 희망도 없다고 생각하며 전폭적으로 그 하나님만을 의지했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 가까이 계셔서 그들을 위로하고 고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런 사람들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혼자서 씩씩하게 잘 사는 것입니다. 기도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장 비참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도움이 아니면 불안해 하는 사람들이 가장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매일 매일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 매일 매일 경험되는 하나님의 사랑의 부드러운 만져주심이 자신의 영혼에 느껴지지 않으면 헐떡이는 사슴과 같이 고통해 하는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 사람들은 종교적인 과민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성경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약해서도 문제이지만 사실은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강한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의 은혜 없이도 살 수 있을 것처럼 자만하는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깨트려진 심령으로 고치고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간구해본 적이 언제입니까? 매일 매일 일상적인 삶을 되풀이해 가면서 우리 자신의 힘으로도 넉넉히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인생의 위기가 닥쳐오지 않으면 도무지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할지 모르는 사람들은 마음에 비만증이 걸린 사람들입니다. 회상해보십시오. 우리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모두 주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렇지 못했다면 우리는 그렇게 주님을 만나야 할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만난 우리들은 우리 모두 인생의 절망의 마지막 끝자락에서 주님을 붙든 기억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인생의 어두운 절망에 밤에 마지막 끝에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이 보여주신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붙든 사람들이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닙니까?
오늘 기도자도 우리에게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었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인생의 막다른 벼랑에서 삶의 모든 희망이 끊어지고 낙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던 모든 근거들이 송두리째 사라지고 언제든지 우리들을 도울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조차도 우리의 시야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의지할 분이 없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고 저도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을 뵈옵는 일에 우리의 모든 마음을 걸었습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른 것처럼 한번 주님과 만나고 한번 절망의 벼랑 끝에 서 있는 우리의 인생에 도우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걸었던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난한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찾아 오시는 것입니다. 그가 비록 죄인이라도 찾아오십니다. 그가 비록 어둠 속에 있는 자라도 찾아 오시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런 사람들이 받아야지만 그것이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사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렇게 하나님 이외에는 자신을 도울 분이 없고 자신의 모든 희망이 은혜 베푸시는 우리 주님에게 있다는 사실에 생명을 건 사람,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실 때에 그 사람은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기는 그 은혜에 빚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비만은 우리의 육체의 치명적인 질병들을 가져 옵니다. 뇌졸중, 뇌일혈, 여러 가지 간 질환들을 가져 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죽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의 비만은 우리의 육체의 비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그럽니까? 우리는 왜 그렇게 무엇을 믿고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부요해지는 것입니까? 얼마전 주님을 알지 못하고 인생의 막다른 절벽에서 줄타기를 하던 때에 우리는 아무 희망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절망했기 때문에 우리 주님께 희망을 걸었던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처음 주님을 간절히 부르며 주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애원하던 그때를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며 실락 같은 빛줄기라도 보고 싶어하던 그렇게 하나님을 찾던 때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 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고난이 오히려 주님께 나아가는 촉진제가 되었습니다. 고통 때문에 우리는 더 더욱 하나님을 향해서 우리의 눈을 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우리의 영혼에는 비만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성취한 것들이 우리의 자랑이 되기 시작했고 고난이 사라지고 평안한 삶이 우리를 육체의 방종에 흐르게 만들었습니다. 편안한 우리의 삶은 고통 가운데서도 의무를 감당하던 성실한 신앙생활을 잃어버리게 만들었고 이러한 나태함과 부패함들이 우리의 전 신앙생활에 독소처럼 스며들었습니다. 예배는 있으나 깨트려진 마음이 없고 기도하나 하나님 앞에 매어달리는 애절함이 없습니다. 헌신은 하지만 모두 의무적으로 감당해 나가는 일상적인 직무처럼 변해버렸습니다. 도대체 우리의 감격이 어디로 간 것입니까? 우리 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건져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은 어디로 사라졌습니까? 아무 것도 아닙니다. 비천한 죄인들을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는 끝이라도 붙들게 하셨을 때 한없이 감사하던 그 어린아이 같이 순수한 마음은 어디로 날아가 버렸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이 비만해지면서 우리의 마음에 가난함들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남겨주신 은혜가 있다면 그것은 주님을 찬송하게 하기 위함이오 사라진 은혜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너무나 부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마음에 있는 나라든지, 이 세상에 있는 나라든지 우리를 통해 서는 나라가 아니라 우리 안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서는 나라입니다. 여지없이 무너져 가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우리는 왜 옛날처럼 애통하지를 않는 것입니까? 우리는 왜 자신 안에 강하게 버티고 있어서 주님을 슬프시게 하는 오래된 패역들을 인해 옛날처럼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입니까? 우리가 무엇을 가진 것이 있습니까? 우리가 내세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하나,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는 것말고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우리들이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주님이시지 그 은혜를 받은 죄인인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급격히 마음의 가난함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마음,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가리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흘려 주시니 곧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 앞에 옵니다
거룩한 성도의 특징은 부서진 마음입니다. 때로는 잘 살 때도 있고, 때로는 못 살 때도 있습니다. 충성할 때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할 때가 있고 성공할 때가 있는가 하면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얼어붙은 물과 같아서 모양은 높고 낮지만 녹아내리고 나면 모두 평균적인 물이 되는 하나의 허상에 불과합니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의 가난함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승리하되 성공에 취하지 않고 그렇게 승리하시는 하나님에게 붙들려 있기를 사모하는 사람, 자신 속에 있는 죄악되고 더러운 것들에 대한 강력한 혐오감, 그래서 언제까지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는 마음이 바로 가난한 마음입니다.
주님없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소유하기보다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 하는 마음, 그 마음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이제껏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입고 여기까지 살아왔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어떤 분들은 참 잘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정말 보기드문 성도의 생애를 이어왔습니다. 실패한 사람도 있지만 잘 산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모두 우리를 향한 주님의 은혜를 증거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마음의 가난함을 잃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의 경건생활에 대한 가난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깝게 느낄 수 있었던 영혼의 축복, 이런 것들을 잃어버리고도 마음이 부요하여 자신의 영혼에 상태의 변화를 갈망하지 않는다면 그는 살았으나 실상은 죽은 사람입니다. 옛날에는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자기를 위해서 사는 가장 육적인 사람일 뿐입니다. 그래서 좀더 가까이,
(예화) 교도소에 면회를 가면 제일 안타까운 일은 유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 손을 맞대 고 우는 모습인데 만났으나 가까이 할 수 없는 모습에서 안타까움의 이야기
우리의 경건 생활에 있어서도 그래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험에 있어서도 말입니다.
여러분, 환란과 시련이 오지 않아도 왜 이렇게 내 마음이 건조한 것일까. 예전에 충만하게 느껴졌던 하나님을 요즘은 왜 거의 느끼지 못하면서 내가 왜 잘 사는 것일까? 그런데서 오는 가난함, 그것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가난함입니다. 이런 가난한 마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추구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주님을 잘 섬기고 살아가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오는 가난함, 우리는 개인적으로도 필요하고 교회적으로도 필요합니다.
여러분에게 생전 처음으로 공과책 하나 달랑 들려주고 선생 노릇하라고 그랬을 때 잠못 이루던 밤을 기억하십니까? 영혼들 앞에 섰을 때 그 영혼들이 주님처럼 느껴지던 그 엄숙한 때들을 기억을 하고 있습니까? 구역장으로, 그리고 교역자로 처음 세움을 받던 날, 잠못 이루며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시면 제가 이 일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마음의 가난함을 유지하고 있습니까? 교회적으로 우리는 이런 가난함을 유지하고 있습니까? 개척교회 시절처럼 여전히 한 영혼을 그렇게 귀하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곤고한 얼굴로 쓰러질 듯이 교회당 안에 발걸음을 옮겨놓은 한 지체, 한 영혼이 아직도 우리들의 눈에 주님처럼 보입니까? 그들의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며 그들의 연약한 부분을 함께 아파하고 가슴앓이 하는 것이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삶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라는 생각이 오늘도 우리의 사역을 지배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일꾼들로 부름을 받아 특별히 영혼들을 섬기는 사람들이 정말 그 영혼들을 그 옛날처럼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며 돌아보고 있습니까? 우리가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말고 부요해질만한 어떤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지금 이 시간이라도 주님이 우리를 붙들고 계신 손가락 하나만 놓아도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들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죄는 우리의 교만과 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교만은 바로 이런 영혼에 비만 속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지나가는 순례자들입니다. 꽃 가마 타고 그리고 금팔지 끼고 말 타고 경마 잡힌 채, 부채 부쳐주는 사람들의 바람을 맞으며 천국으로 가게 되어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지팡이 하나, 배낭 하나에 꿈을 싣고 잠시 후 도달할 영원한 종착지를 향해서 지나는 순례자들입니다. 본향을 향한 우리의 흐릿한 생각들은 세상을 향한 수많은 사랑을 잉태하고 그런 수많은 세상을 향한 사랑들은 우리의 영혼에 끊임없는 비만을 가져와서 처음 주님을 믿었을 때의 사랑과 경건과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애틋한 마음들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가난함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그 어떠한 신앙생활에 의무보다도 더 뛰어난 덕목이고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여러분들이 이제껏 어떤 모습으로 살아 왔는지 그 모습이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는 가난한 마음, 그런 마음이 주님을 만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혼의 비만을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그 체중을 줄이도록 노력하십시오. 육신의 체중은 땀이 흘러야 체중이 줄지만 영혼의 비만은 하나님 앞에 흘리는 가난한 마음의 눈물로서만 영혼의 비만이 줄어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것들을 의지하는 마음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한 분이 아니면 우리는 아무 희망이 없다는 그런 마음을 새롭게 하기를 바랍니다.
이어서 성경은 심령의 통회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심령은 한 사람의 인격 중심부에 있는 마음, 그 마음 핵심부에 있는 영혼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곳에 참다운 변화가 일어나면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고 그리고 그 마음에 변화는 그의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거기에 통회하는 작용이 일어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진실하게 살려고 애를 써도 우리는 수시로 범죄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를 회개도 하지 못한 채 잊어버리지만 우리가 지은 수많은 마음과 행동의 범죄들은 우리의 영혼에 어김없는 찌꺼기들을 남겨 놓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점점 납덩어리와 같이 무거운 무게가 되어서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삶을 우리 스스로 움직일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우리 속에 있는 부패한 본성과 죄에 대한 친화적인 성품들은 계속 살아서 역사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에 끊임없는 고통을 줍니다. 그리고 이것은 강한 번식력을 가지고 있어서 적절하게 다스려주지 아니하면 하루 아침에라도 마치 비온 뒤 솟아나는 죽순처럼 장마철에 길같이 일어나는 잡초들처럼 우리의 마음속에서 한없이 자라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서 자라나는 이런 더러운 욕망과 죄의 잡초들을 위한 최고의 제초제는 통회하는 마음이 흘리는 눈물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깨닫고 그분 앞에서 흘리는 철저한 통회의 눈물은 이러한 거짓되고 부패한 죄와 정욕의 씨들을 말려버립니다. 여러분, 만약에 이런 풀들을 뽑지 않고 우리의 신앙의 정원은 거의 쓸모 없는 밭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여러분들은 기억하십시오.
저는 언젠가 시골에 갔다가 망연자실한 농부를 봤습니다. 새로 만든 좋은 씨인데 싸게 판다고 해서 종자로 사다가 뿌렸는데 한참 있다가 보니까 반은 쌀이고 반은 피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고치겠습니까? 어떻게 그 한포기씩을 뽑아내겠습니까? 농사를 버린 것입니다. 아무리 열매를 맺으려고 애를 써도 중요한 것은 정결한 밭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만드는 가장 유일한 해결책은 심령이 깊은 통회를 경험하고 그 깊은 통회 속에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의 밭이 기경되고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를 통해서 우리의 심령이 깨끗해지기를 사모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주님이 만나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아야지만 우리 속에 있는 죄와 부패성들을 누르고 열매를 맺는 삶을 살 수 있을텐데, 지속적으로 주님 안에 거하며 번성할 수 있을텐데 어떻게 해야지만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메마른 밭과 같은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의 은혜로 넘치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통회하는 눈물이 우리의 마음의 밭을 적실 때, 그때에 다시 우리 속에 하나님의 은혜의 다스림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들이 수없이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을 못 만날까요? 왜 매일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을 못 만날까요? 왜 여러 가지 일들을 위해서 애를 써도 그 일 속에서 하나님을 못 만날까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일이 없고 열심히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기의 심령을 비쳐보고 깊이 회개하는 참회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만남이 사라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교회는 바로 교회 밖에서는 막 살아가던 사람들이 이곳을 들어서는 순간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습을 이곳에서 선포되는 진리를 통해서 확인하는 곳입니다. 거울이 없었을 때는 얼굴에 검댕을 묻히고 옷에 온갖 오물을 바른 채 부끄러움 없이 돌아다녔지만 거울 앞에서는 그 순간 황급히 수건으로 얼굴을 씻고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교회가 바로 그런 곳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의 성도들이 그곳에 왔을 때 깊이 통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뉘우치는 회개의 눈물이 있는 예배, 아무도 없는 빈 교회당에서 무릎을 꿇을 때마다 자기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자기의 죄를 사함 받고 싶어하는 간절한 회개의 기도,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의 영광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저와 여러분 속에 끼어있는 영혼의 비만들을 봅니다. 가난한 마음은 사라져가고 우리는 중심에 통회하는 시간들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그 사람 앞에 있는 의자가 적셔지지 않고 있습니다. 건조하게 살아가는 메마른 심령, 그 밭에서 정욕이외에 그 무엇이 자라가겠는지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위해 섬기도록 부름받은 수많은 기회들은 자기를 만족시키기 위한 이기적인 기회로 거듭나고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마땅히 느껴야 할 영혼에 대한 깊은 사랑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깊은 갈망들은 사욕을 위한 모든 기회들로 바뀌고 있습니다. 이런 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할 수 있습니까? 혹시 우리들이 회개하지 않고 계속 산다면 주님을 섬기노라고 인생을 살았던 모든 길들이 자기의 욕심을 채우고 자기의 배를 불린 방종한 기회로 하나님 앞에 기록될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던 때, 우리의 죄와 악함밖에는 하나님 앞에 보여드릴 것이 없었던 때, 늘 울어도 늘 통회하고, 늘 애통해도 언제나 남아있는 우리의 삶과 영혼에 불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신 구속하신 우리 주님밖에 바라볼 마음이 없었던 때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교회가 유능한 사람들이, 돈 많은 교인들이 그런 사람들로 가득차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제가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들, 아니 교회의 주님이신 우리 주님이 간절히 요구하는 사람들은 애통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죄를 인해서 중심에 깊이 통회하고 주님의 진실하신 성품 앞에서 자신의 가증한 생각을 인해서 깊이 뉘우치는 교회, 자기의 죄를 뉘우친 사람들이 이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지체들의 죄와 악함을 마치 자기의 것처럼 생각하고 중보하며 애통해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교회를 위해서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말고 우리가 의지할 분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살아온 인생의 길은 그분을 만난 이후로 그분을 의지하며 살아온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들이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막힌 것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의 죄의 담, 하나님과의 불화한 담을 허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통회하는 마음의 눈물, 우리의 죄와 허물과 불순종에 대한 뉘우침의 눈물 이외에는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담장을 허물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여러분, 우리가 왜 염려 속에서 살아갑니까? 왜 이익이 되지 않는 근심 속에서 우리의 뼈를 삭히고 우리의 살을 말립니까? 이것은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가 불화하기 때문이고 죄와 불순종으로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쌓인 담장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십시오. 좋으신 예수님이 왜 십자가를 지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까? 예수님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죄를 위해 고난을 받으실 때에 그분에게 어떤 희망이 있었을까요? 그것은 오로지 하나 이제는 우리가 불순종과 죄의 길에서 떠나서 하나님과 화해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잃어버린 죄인들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그 죄인을 불러 통회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 이렇게 통회하는 어린아이의 마음을 회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어느 구석에서 무엇을 하며 살고 교회에서 무엇을 하며 살든지 모든 일들이 성공하고 잘 될 때에는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고, 지체들이 고통받고 교회의 어려움이 있고 또 우리 자신에게 어려움이 있을 때에 이 모든 것이 나의 죄악을 인함이라는 통회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건져 주시도록 우리를 만나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자”들을 만나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성경에는 “나의 한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라고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여기서는 가장 작은 한 마디의 말씀이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라는 사실 때문에 두려워떨고 그 말씀의 영향을 받는 성도의 삶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정말 이런 세계를 유지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요즘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하나님이 요즘은 교회의 어떤 것들을 말씀하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의 삶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떤 부분들을 지속적으로 지적하고 계십니까? 혹시 많은 질문에 대해서 단 한 마디도 대답할 수 없는 성도들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말씀을 인해서 떨고 있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인해서 떨고 있느냐고 제가 묻습니다. 여러분, 우리를 무지와 죄악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이 무엇으로 우리들을 건져주셨습니까? 실패를 숙명처럼 알고 죄에 짋밟히는 삶을 살면서도 그 이상의 삶이 있다는 생각도 못하고 살아갈 때에 주님은 무엇으로 우리를 그런 어두운 길에서 건져주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없이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미각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여러분들의 삶이 마지막에 어떤 모습이 될지 아십니까? 여러분들은 견딜 수 없는 뚱보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날 거꾸러져서 목이 부러지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부패성들이 여러분들이 이전에 어떤 은혜를 받았든지 그런 사람이 되게 만들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을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한 마디의 말씀을 깨닫고 듣기 위해서 진리를 모르고 수 십년을 사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아래서 단 하루라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고 싶다고 통곡하며 주님의 말씀을 구하던 그 모습을 오늘 우리들이 아직도 유지하고 있는지 우리에게 되물어봅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에는 성령으로 시작했지만 육체로 마친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지막 신앙의 경주를 마친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지막 이 신앙의 경주를 다하고 천국의 테잎을 끊고 헐떡이는 가슴으로 승리한 사람들에게 면류관을 주시는 주님의 품에 쓰러질 듯이 안기기 전까지는 우리의 신앙의 싸움은 끝난 것도 아니고 쉬고 있는 것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회복하십시오. 저는 여러분들이 얼마나 성경을 안 읽는지 압니다. 여러분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십시오.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 매 시간 울려 퍼지는 주님의 진리의 설교를 분별없이 대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의 생명이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해서 깊이 떨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인격을 느끼도록 노력하십시오.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만나시는 것입니다.
2.통회하는 자의 마음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57:15)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아도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여기서 은혜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사랑해주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각자 여러 가지 주님과의 만남에 사연을 가지고 신앙의 세계에 들어옵니다.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교회에 다니는 사실상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그런 교인들도 있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많은 교인들은 무엇인가는 그래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주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맛을 보았기 때문에 오늘도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 이상의 신앙생활이 없는 것처럼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기쁜 소식을 전파 받고 배우는 말씀과 부르는 찬송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해 하는 수많은 성도들의 고백을 접하면서도 그런 고백들이 현재적으로 우리 안에 없는 것에 대해서 당연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무엇인가가 결핍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의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신앙생활의 모습은 결혼을 했기 때문에, 혹은 자식들 때문에 팔자처럼 할 수 없이 살아가는 싫증난 부부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독교 신앙의 요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내 주 되신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 사랑이 우리의 삶에 전동기가 되어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섬기며, 이렇게 다듬어져 가고 저런 모습을 사모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참다운 사랑의 감격이 없이 건강한 신앙생활을 해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를 오래 다닐수록 신앙의 감격을 잃어 버리고 사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교인들 중에 가장 눈물을 흘리지 않는 교인이 목사 교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장로쯤 되어도 “그 얼굴에 눈물이 흐르느니 석고상에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리는 것을 기대하는 것에 훨씬 낫겠다”라는 소리가 들릴 정도입니다. 깊이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며 흐느끼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신 적이 많으십니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사랑의 경험이 없이 계속되는 교회생활은 그 자체가 우리의 영혼을 황폐하게 만들어갑니다.
흔히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자주 감동을 하고 주님의 은혜에 자주 감격하는 것은 신앙생활에 초보적인 증상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믿은지 얼마 안 되는 신자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말로 다 할 수 없는 사랑, 주님의 그 크신 은혜에 감격하며 기뻐하고 어쩔줄 몰라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 사랑을 자랑하고 때로는 그 사랑에 감격해서 흐느끼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한때는 저랬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 해보고 나니까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면 그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출석 생활, 은혜가 뭔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한 교회를 숙명처럼 생각하며 눌어붙어 앉아서 자기 방종의 기회로 삼는 사람입니다. 그런 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세상에서 불쌍한 죄인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아직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는 죄인들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으면서도 지금은 그 사랑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용서받은 죄인들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중심에 있으니
유혹이 흔들어도 무너지지 않네
주님과 함께 할 때에 두려움은 사라지네
주님이 항상 나를 지켜주시니
성경이 말하는 참된 신앙생활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괴로운 세상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거룩하고 신령한 나라를 사모하는 속되고 야비한 나라 속에서 죄와 유혹으로 인해서 고통받기 때문에 슬퍼 울고 시련과 고통으로 가득찬 가시밭 길과 같은 인생임에도 하늘로부터 부어내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놀라워서 그 사랑에 감격하며 흐느끼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상급을 바라보고 인내하며 믿음의 길을 달려가다가 받은 상처 때문에 울고, 상처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울고 그렇게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것들이 신앙의 초보적인 증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경건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신앙의 경험을 담아놓은 시편을 혹은 아가서를 혹은 에레미야 애가 같은 시가서들을 한번 읽어보십시오. 거기에는 하나님을 처음 믿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러나 연로한 사람도 있고 젊은이도 있고 어린아이도 있습니다. 큰 시련을 당한 직후의 사람도 있고 심지어는 큰 죄에 빠진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연령과 신앙의 경력과는 상관이 없이 그들은 곳곳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뵙지 못하는 탄식도 하지만 어떤 곳에서는 그들이 언제 하나님을 믿었던지와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그 시점에서는 누구든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큰 사랑, 자비하고 놀라운 은혜에 대한 감격을 쏟아 놓는 그런 장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년에 빌립보서를 쓰면서 “이제도 내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옥중에 갖혀서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의 황혼 마당에서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자기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죽게 하시는 그 구속의 사랑에 대해서 어린아이처럼 펑펑 우는 감격을 가지고 “내가 죄인 중에 괴수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함이로다” 감격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계시록의 말씀을 받던 때가 90이 넘은 때라고 합니다. 그때에 5장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가 담겨 있지만 이 인봉을 뜯어서 보여줄 사람이 없다는 천사의 비극적인 선언이 들리자 그 노 할아버지는 통곡하며 슬피 울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인해서 애통해 했습니다.
보십시오. 여러분, 우리는 나이를 먹을수록 얼마나 마음이 강퍅해지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더 신령한 은혜의 감격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젊은이들보다 더 많이 울고, 더 많이 기뻐하고, 더 많이 뜨겁고, 더 많이 주체할 수 없는 기쁨 속에서 살아야지 만 우리들이 성령으로 시작한 우리의 신앙에 일생을 육체로 마치지 않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 왜 사람들이 그렇게 황폐한 심령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그렇게 황폐한 심령을 간직한 채 대책이 없는 신앙생활을 해나갈까? 거기에 대한 답을 오늘 성경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자기를 어떻게 소개하시는가 하면 거룩하고 높은 곳에 계신 분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거룩하고 높은 곳에 계시다고 하는 이 뜻은 주님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자기의 손으로 지으신 피조물과는 구별된다라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초월성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위에 뛰어나고 모든 것을 초월해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신앙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고 나는 땅에 있는 인간일 뿐이라고 하는 이 사실을 먼저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신앙이 출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이웃집 아저씨나 친구처럼 부르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툭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침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지금 하나님이 그러시는데” “성령께서 제 마음에 들려주시기를...” 저의 설교를 여러번 들으신 분들은 여러분이 이런 말을 거침없이 할 때에 목사인 제가 얼마나 여러분들을 불쌍히 여기는지에 대해서 아마 충분히 아셨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말씀하시는 분이고 우리가 그런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감지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매우 복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말조차도 아주 조심스럽게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무슨 고매한 영적인 분위기 속에서 산다고 아침에 자고 일어나서 생각이 났다. 그러면 되지 하나님을 거들먹거리면서 주님이 그렇게 안 해도 여러분들의 신앙의 높이가 어느 정도인지 서로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다 압니다. 설령 모른다고 하면 더더욱 속이는 것이 됩니다. 절대 그러지 마십시오. 좀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할 때는 주님이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쉽게 들먹일 수 없다고 하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좀 가지십시오. 괜찮습니다. 내가 기도하다가 생각이 났는데 그렇게 말하면 다른 사람들이 다 알아듣습니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우리는 좀 그러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허세들을 버리고 진실해지시기를 바랍니다. 알고 있습니다. 벌써. “제가 기도하다가 생각이 났거든요” 그렇게 말할 때 뒷말이 나오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인지 자기가 생각한 것인지 거의 압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 방자한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의 오늘날의 하나님에 대한 이런 태도를 구약에 문맥으로 가지고 가면 우리는 다 맞아 죽었습니다. 진짜 피터진 시체하고 피묻은 돌맹이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두려움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한 분이신지를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하는 것을 압니다. 사람들은 농담을 하다가도 하나님을 개그맨처럼 등장을 시키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자신의 영혼이 자꾸 죽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떨림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한없이 두려움 속에서 경외해야 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이름입니다. 그것을 그렇게 거들먹거리면 안 됩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너무나 경박하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사실은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들이 첫 번째로 정리되어야 할 생각은 하나님은 모든 인간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늘 인간의 모든 삶을 지켜보시고 또 다 알고 계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인생은 성령충만해서 교회봉사를 잘 할 때만 하나님께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뒤에 가서 호박씨를 깔 때도 주님의 눈에는 다 보입니다. 다 하나님의 한 시선 앞에 다 드러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전 삶을 선악간에 다 알고 계시다라고 하는 이것만으로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그러면 뭐가 필요한가 하면 하나님이 종종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거룩하고 높은 곳에 계신 초월하신 그 하나님이 비천한 인간들이 있는 이곳에 그것도 바로 내 안에 찾아오시는 이런 놀라운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예화) 청소년들을 목양할 때 교회를 어려서부터 열심히 다니는 여학생이 하는 이야 기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이 믿어지지가 않는다고 해서 그럼 왜 교회에 성실하게 나오냐고 하니까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것이 확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는 이 야기
그 대답이 진짜 명답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해서 느끼는 것이 흐릿하면 신앙생활도 흐릿하게 합니다. 그것이 분명하면 신앙생활도 또렷하게 됩니다. 수련회에 가서 하나님이 엄청나게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신비한 영적인 경험을 한 지체들만 모았습니다. 그래서 정돈을 시켜주면서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나니까 옛날하고 지금하고 어떻게 다르냐고 하니까 그 여학생 이야기가 또 아주 명쾌했습니다. “전에는 하나님이 하늘에 계셨었는데 그런데 어제부터는 제 안에 오셨습니다.” 그것이 꾸밈이 없고 솔직한 답변이기는 하지만 아주 정곡을 찌른 답변이었습니다.
신자의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 대한 한없는 두려움과 경외심, 그것과 함께 내 안에 계신 하나님과의 신비한 사랑의 교제 속에서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신앙생활의 요체입니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이 교회생활이 오래되고 그리고 기독교적인 분위기에 익숙해질수록 자기 안에 계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참된 감격을 잃어버리고 살아갈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그것에 대해서 오늘 성경이 답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통회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가난한 마음은 곧 통회하는 마음입니다. “통회”라는 번역이 저는 아주 절묘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아플 통”자에다가 “뉘우칠 회”자입니다. 회개라는 표현보다 훨씬 구체적입니다. 회개는 자기의 지난 것들에 대해서 깊이 후회하는 마음을 갖는 그것을 종교적으로 표현했을 때, 회개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통회는 그런 회개 속에서 자기가 주관적으로 느끼고 있는 정서의 상태를 회개와 관련지어서 표현한 것입니다. 그 핵심이 무엇입니까? 아프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아픈가 하면 자기가 이전에 하나님 앞에 잘못하고 불순종하고 살고 지었던 많은 죄악들 때문에 아프다는 것입니다. 그럼 그 아픔의 기원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충만한 교제 속에서 살면 항상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과 유통합니다. 그렇게 유통하니까 설교를 들으면 이해가 잘되고 기도를 하면 기도가 잘됩니다.
여러분, 만나지를 못하면 아주 고통스럽고 괴로울 정도로 친한 친구가 있는데 어려서부터 만나고 시시콜콜 만나 이야기를 하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에게서 전화가 와서 내일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하자고 약속을 하고 끊었는데 무엇을 준비를 해서 만나나, 그리고 나갈 준비를 하는데 원고를 작성해서 나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왜 그 마음이 내 마음이니까 그냥 아무 준비를 안 하고 갔어도 그냥 앉아서 무엇에 대해서 저 친구가 이야기를 해도 그냥 이야기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옵니다. 누가 그랬습니다. 말마려워 죽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만나도 또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마음이 서로 유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기도 한 마디의 기도, 한 편의 설교, 그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신자가 마음의 상태가 그렇게 하나님과 교통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교통하는 상태가 되면 그냥 한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좋은 것입니다. 1부 예배 시간에 말씀을 11시 5분까지 전했습니다. 더 이상 뒤로 갈 수가 없어서 끝낸 것인데 성도 한 분이 나가면서 그런 말씀을 하는데 “목사님, 너무 짧아요” 내 속으로 ‘모든 사람들이 당신과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주일 예배를 한 3시까지 할텐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설교 시간에 하나님과 유통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스며들어오니까 시간도 초월하고 공간도 초월하는 것입니다.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뜨겁게 사랑하는 남녀가 만나서 시계를 재는 것을 보았습니까? 시계를 끌러서 주머니에 넣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유통할 때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과 유통할 수 있는 마음이 죄로 인해서 닫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 하면서 은혜를 유지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환경도 핑계를 대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합니다. 또 그런 것도 영향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근본적으로는 그 환경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에 아담보고 물을 때는 하와 핑계를 댔고, 하와에게 물었을 때는 뱀에게 핑계를 댔는데 하나님이 대꾸를 안 하십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말이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핑계입니다.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의 마음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경과 상황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담장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시편이나 신앙의 고백들이 묻어 있는 수많은 성경의 구절들을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시련 때문에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더 붙잡았고 고난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의 감격 속에서 살았습니다. 이 땅에 나그네와 같이 서럽기 때문에 본향을 더 사모했고 핍박을 받았기 때문에 하늘나라의 상급을 더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혹은 모세와 같이 영화에 처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 영화보다 오히려 더 나은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봤습니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신자의 마음입니다. 마음에 쌓이는 죄의 담장들이 하나님의 마음이 그들 속에 유통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오랫동안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은 불붙어도 설교자의 마음에 하나님이 그런 사랑을 보여도 그 사랑의 마음을 사람들 속에 스며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화) 어느 교회에 설교를 하러 가셔서 십자가 설교를 하시는데 바싹 마른 시체들과 예배를 드리는 느낌을 받으며 설교를 하시는데 하나님이 목사님에게만 은혜를 주 셨는데 그 후에 들리는 말이 교회가 발칵 뒤집혔는데 그 이유는 설교 내용은 틀 렸다고 할 수는 없는데 설교 방식이 문제가 있는 것같다며 왜 자꾸 눈물이 나오 려고 하느냐고 해서 이야기를 전해주는 사람에게 그들이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나 나는 그들이 불쌍하다고 했다는 이야기
그것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이 있으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유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죄입니다. 그런데 이 죄는 결국 어떻게 해결이 되는가 하면 하나님이 치워주시지 않으면 해결이 안 됩니다. 우리는 회개하면 된다고 말하지만 회개는 하나님이 그런 역사를 불러일으키실 수도 있는 조건이 될 뿐이지 우리의 회개 그 자체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놓여 있는 죄의 담장들을 허물어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건 무엇인가 하면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이 주권적으로 하나님이 역사해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워버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십시오. 회개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사죄하시는 은총을 맛보는 사람은 없지만 많이 고통스러워하고 뉘우치는데도 사죄의 자유함을 맛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죄 가운데 있을 때에 이렇게 깊이 오랜 동안 죄 가운데 있다가 그러다가 깊이 어느 기회가 있어서 통회하고 자기의 죄의 담장이 무너지고 나면 갑자기 하나님의 마음이 그 신자의 마음속으로 물밀 듯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처음 확 밀려오니까 그게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기억에 나고 그런 것입니다.
이제 김희철 집사님의 아들도 군대를 갔지만 옛날에는 자식들을 많이 낳았습니다. 왜 둘째 셋째 애들이 엄마 아빠는 형만 좋아한다고 그랬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큰애를 특별히 사랑해서이기도 하지만 모든 것이 처음 경우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애한테 입힐 옷을 사러 나가는 것도 첫 번째 경험입니다. 그러니까 돈도 상관하지 말고 쓰는 것이고 초등학교에 가는 것도 처음이니까 너무 신기한 것입니다. 그래서 학부형들 참석하는 것에도 자기가 무슨 장관쯤 되는 것처럼 그런 느낌을 받는 것과 같은 것이고 그리고 군대도 처음입니다. 헤어져보는 것도 처음입니다. 그러니까 첫 아들이 군대갈 때는 엄마 아빠가 몇 일을 우는데 영장 나올 때 한번 울고, 간다고 머리를 깍을 때 울고, 또 가서 소포가 올 때 또 울고, 면회에 한번 올 때 또 울고 그럽니다. 그런데 이제 둘째가 태어나면 다 해본 것이니까 다 그렇더라는 것입니다. 군대에 가도 다 죽지 않고 오더라. 옷 사러 다니기는 형이 입던 것 그냥 입으라고 합니다.
처음 죄 가운데 살고 하나님의 생명이 무엇인지 몰랐을 때 한번 처음 하나님의 마음이 통회와 함께 우리의 마음에 강물처럼 밀려들 때에 그게 신앙의 수준이 높아서라기보다는 첫 번째 경험이기 때문에 우리들의 반응도 경험만큼이나 극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를 책망하시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강조하시면서 그것을 빨리 회복하기를 촉구하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처음 사랑이 최고로 올라간 사랑이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처음 사랑이 첫 번째 경험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응이 아주 성실했다는 것입니다.
처음 사랑하는 아들이 군대에 가야 한다고 영장이 나왔으면 그래도 그 어머니도 군대에 갔을 때는 우셨을 것입니다. 겉으로 그러시지만. 쳐다보면 눈물 흘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두 번 세 번 된다고 해서 그 애들이 형이 군대에 갔으니까 둘째는 반만 하라 그런 것도 아닐 것입니다. 똑같이 고생해서 낳은 자식인데.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있겠어요? 똑같이 그런 반응을 보여야 되는데 그것도 역시 인간이 무디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처음 밀려올 때 그렇게 우리의 반응이 성실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보십시오. 저는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처음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을 때 그 사랑이 제일 크다고 난 말할 수 없습니다. 그 후에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런데도 항상 “하나님의 사랑” 그러면 그 큰사랑에 대해서 기억이 나는 것이 아니라 처음 사랑으로 기억이 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때 처음 사랑은 처음 사랑이었기 때문에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을 때 내가 그 사랑에 대해서 굉장히 성실하고 아주 적극적으로 반응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던 사람들은 “아 오늘 진짜 하나님이 내게 은혜 주신다.” 그렇게 말하지만 처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여보, 여보 하나님을 만났어”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사랑을 늘 유통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이 죄의 담 이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 죄의 담을 해결하는 길은 오직 하나인데 통회하는 가난한 마음입니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살려고 애를 쓰고 도덕적으로 살고 하나님의 법도대로 살려고 하는 모든 것이 귀합니다. 그런 도덕적이고 성실한 섬김의 생활은 마음 속에 이런 통회하는 마음이 있는 신자일 때, 그때에 이 모든 것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리새인들이 이레에 두 번씩 금식을 했습니다. 금식 기도를 한 자체를 예수님께서 비난하신 적은 없습니다. 십일조를 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일조를 낸 것을 비판하신 적이 없습니다. 뭘 비판하신 것입니까? 십일조를 내고 그 다음에 금식을 하고 기도를 하는 것들은 그 자체가 비판받을 것이 없는데 예수님의 관심은 그렇게 행하게 하는 동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금식을 하게 해야지, 율법을 지켜야 되겠다라는 개인적인 결심이 그것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십일조를 드려야지 “십일조를 내면 하나님이 곱빼기로 주신데.” 하는 얄팍한 보상에 대한 심리가 십일조 신앙을 재촉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이 내 마음 속에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욕구가 나로 하여금 기도하게 시켜야지 그리고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속히 그렇게 회복되기를 열망해야지 기도하면서 ‘누가 나를 쳐다보면서 칭찬하지 않나?’ 하고 거리 어구에서 손을 들고 폼을 잡고 기도하는 것들은 근본적인 동기가 죽어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도덕적이고 의로운 삶은 있었는데 통회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누구도 쫓아갈 수 없는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지만 하나님께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불쌍한 사람들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훌륭합니다.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생활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러분들이 꾸준히 교회에 나온다면 심방 전도사들이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교회에 왜 안 나왔냐고 물어볼 일은 없을 것입니다.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출석생활은 좋은 것입니다. 그 대신 무엇이 없기 때문에 문제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 통회하는 가난한 마음, 신앙의 요체가 사라지고 껍질만 남으니까 그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죄로 말미암아 담장이 쌓여지고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마음이 스며들지 않으면 이제 우리는 황폐해집니다. 황폐해지고 우리는 견딜 수가 없는 고통 속에서 건조하고 메마른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예화) 어린 시절에 형들을 쫓아 논 사이에 있는 도랑에 고기를 잡는데 위를 막고 아래 에 송판을 막아서 고기를 잡았다는 이야기.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전 까지만 해도 고기가 참 잘 놀았습니다. 그런데 물을 딱 막으니까 이제 죽겠다고 길길히 뛰는 것입니다. 애들은 신난다고 뛰고 같이 뛰면서 계속 고기를 주어서 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보가 막힌 위에 있는 물고기는 도저히 잡을 수가 없습니다. 손만 집어 넣으면 쏜살같이 도망가는 것입니다. 그러다 다행히 모래 속에다 고개를 푹 쑤셔박고 끝까지 발각이 안 되고 숨어있던 모래무지 같은 것들은 이 보가 탁 터지고 나면 다시 도저히 우리가 잡을 수 없게 끔 물속을 헤엄쳐 다니면서 생명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 주님의 사랑이 죄의 보로 말미암아 막혀서 우리의 마음 속에 유통하지 않을 때 우리는 마치 물을 잃어버린 물고가 고통스러워 뛰는 것처럼 견딜 수 없는 이상 현상이 우리의 내면의 세계 속에 나타나고 그런 우리의 내면에 건조함은 우리의 삶에 그대로 투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참다운 감격, 하늘에 계신 하나님,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이 수시로 필요할 때마다 우리에게 오셔서 때로는 사랑을 때로는 위로를 때로는 은혜를 부어주시는 깊은 감격이 없는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아무 기쁨이 없는 의무감에 얽매인 신앙생활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까닭은 오늘날의 교회에, 오늘날의 우리 그리스도인들, 오늘날의 우리 자신들이 통회하는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살아가는, 사랑하고 헤어지고 만나고 작별하는 인간 세상 속에서의 그 수많은 인연들을 위해서 슬퍼하고 아파하는 것에 단 반만이라도 우리의 죄를 인해서 애통하고 통회한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질적으로 풍부한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놀라운 사랑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당신의 자녀들이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고 거룩한 곳에 계실 뿐 그들의 마음 속에 오시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통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어디에나 오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아무데나 가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반드시 준비된 곳에 오십니다. 아무데나 오시지를 않습니다.
대통령이 평양에 간 사진이 나오는데 초등학교 때부터 받은 반공교육에 혼선도 생기지만 좋기는 좋았습니다. 참 세상이 많이 변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느날 전화하고 김정일 동무나 지금 가고 있소 그러고 대통령이 가지 않았습니다. 오래 전부터 발동이 걸렸고 벌써 오래 전에 사람들이 가서 다 모든 것들을 준비하고 길을 닦아놓고 그리고 대통령이 가신 것입니다. 일국의 대통령도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 속에 오시는 게 언제든 오실 수 있지만 그러나 준비된 마음에 오십니다.
주님이 하늘에 거룩한 곳에 높은 곳에 계신 주님이 감격을 잃어버린 우리에게 오시도록 하는 가장 훌륭한 준비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통회하는 마음입니다. 통회하는 마음은 우리 속에 있는 잘못된 거짓과 죄악의 담들을 무너트리고 하나님을 향해 가졌던 잘못된 생각들을 파괴해버립니다. 깊이 회개하고 나면 생각이 달라지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매일 우리 가정에 불행에 궁극적인 원인은 그 인간 때문이라고 그러던 사람들이 나와서 깊이 은혜를 받고 나면 그 다음에 생각이 바뀌는 것입니다. “당신 가정에 왜 그렇게 문제가 많아요?” 그러면 은혜받기 전에는 “그 인간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던 사람이 은혜를 많이 받고 나면 “이 인간 때문에 그래요.” 생각이 바뀌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지 못할 때에는 그릇된 생각과 그릇된 삶, 그릇된 습관 이런 것들이 막 쌓이는데 회개는 이런 것들을 무너트려줍니다. 그런 것들을 무너트린 가운데 하나님께서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통회하는 마음이 두 번째로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는가 하면 겸손한 마음을 가져다 줍니다. 이 겸손한 마음이라는 것은 인간과 인간끼리 서로 비교를 해서 저 사람 나보다 공부를 많이 했으니까 잘난체 하다가는 망신당하겠지 그리고 잘난체 하지 않는 것, 또 저 사람 나보다 돈 많은 사람인데 돈 있는척 했다가는 나중에 큰 코 다치겠지 그래서 자기 있는 것을 자랑하지 않는 것, 뭐 등등 이런 모든 비교에서 오는 것은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겸손이라고 하기 보다는 자기 처지를 아는 주제파악 내지는 비굴입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겸손”이라고 하는 것은 그 비롯되는 시점이 어디인가 하면 거룩한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대면하고 그 하나님이 너무 거룩하고 위대하시고 나는 그분 앞에서 너무나 비참하고 더러운 인간일 뿐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식한데서 오는 그 낮아짐입니다. 그래서 나보다 훨씬 못난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 내가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아무 것도 아닌 게 까분다 이렇게 교만해질 수 있는데 그 사람과 대화하면서도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무엇을 발견하는가 하면 하나님 앞에 비쳐진 그 빛으로 자기를 보니까 이 사람의 모습으로 비추어 본 자기를 보면 대단한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빛으로 비추어 본 자신의 모습을 보면 아무 쓸모없는 더러운 인간인데 하나님의 큰 사랑을 입었을 뿐이라고 하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비롯된 낮아진 마음, 그것이 겸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통회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겸손하게 만들어주십니다. 통회의 결과가 이 겸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나면 우리의 마음이 아주 잘 기경되어서 씨앗을 뿌리면 그 씨앗이 거기에 떨어져서 싹을 낼만한 좋은 마음 밭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통회하는 가난한 마음 없이 그런 고운 옥토와 같은 마음의 밭이 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겸손한 자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깊이 가난한 마음으로 뉘우치는 통회를 경험한 사람들이 이 겸비한 마음이 될 때 하나님은 하늘 위 거룩한 높은 곳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비행기가 수없이 하늘을 날아 다녀도 왜 천안에서 비행기를 타려면 김포공항에까지 올라와야 됩니까? 비행기가 하늘을 자유자제로 날아다니지만 내릴 수 있도록 준비된 착륙시설이 있는 곳에만 착륙을 할 수가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자기의 마음속에 와달라고 기도를 해도 하나님은 실제로 단신이 오실 수 있도록 준비된 마음이어야지 만 주님께서 오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무자비하셔서가 아니고 긍휼히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이 그러시기 때문에 그 성품에 맞게 끔 변화된 사람들, 변화되기를 갈망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마음속에 주님께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나타나는 이 겸비한 마음, 그것은 결국은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 것도 의지할 것이 없다고 하는 확신에서 비롯되는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이 겸손함 겸비함도 사실은 가난한 마음의 결정적인 특징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오늘날 우리들이 그런 하나님의 생명이 풍부하게 역사하는 그런 은혜와 감격 속에서 살지 못하는 그 이유를 아주 기가 막히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는 믿는 것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들이 처음 우리의 인생을 우리의 힘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여튼 신앙생활을 안 한다고 했습니다. 어느 한 순간에 주님을 만나기 전에 우리는 도저히 우리의 인생을 우리의 힘으로서는 인생의 무게를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 그리스도 예수를 향해서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그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버려진 존재인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셨구나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주님 이외에는 아무도 의지할 분이 없습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 밖에는 의지할 분이 없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경력도 없고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생활도 없었고 직분도 없었습니다. 아는 사람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누가 특별히 도와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우리들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기도하고 말씀을 깨달을 때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노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혜, 그것 없이는 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의지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새 믿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언제나 들을 수 있는 설교이기 때문에 사력을 다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할 수 있는 기도이기 때문에 생명을 걸지 않습니다. 언제나 가도 거기에 있는 교회니까 교회 출석에 대해서도 그렇게 애달파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주어지는 일거리이기 때문에 처음 하나님께로부터 섬기도록 부름을 받았을 때에 느꼈던 그 견딜 수 없는 감격과 마음에 어쩔 줄 몰라하는 이 황송함, 이런 것들이 사라져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일정한 교회생활에 서서히 익숙해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교회생활, 이런 식의 신앙생활이 바로 겸비함을 잃어버린 교회생활입니다. 마음에 가난함이 없는 교회생활입니다.
주님 없는 세상 평화 없네 오 주 없이 살 수 없네
(예화) 초등학교 때 창경원으로 소풍을 갔는데 아이가 풍선과 사탕을 들고 구경을 하다 가 엄마 아빠를 잃어버렸는데 입술이 새파래지면서 두려움으로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미아보호소에 데려다 주셨다는 이야기.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의 마음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다 있습니다. 사탕도 있고, 풍선도 있고, 옷도 입었고, 돈도 있고 다 있는데 그것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애는 부모가 없다라고 하는 것을 확인하는 그 순간 거기에 온 모든 기쁨이 송두리채 다 사라진 것입니다. 오직 뭐만 있으면 되는가 하면, 구경을 하나도 안 해도 좋고 집에 까지 걸어가도 되는데 누구만 있으면 되는가 하면 엄마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아빠도 별로 필요가 없습니다. 엄마만 있으면 됩니다.
여러분, 우리 한번 곰곰히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가난합니다. 아니 돈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영적으로 가난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매일매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니까 그것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여러분, 십년 전 은혜를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잖아요? 지난 주 말씀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이번 주 기도의 은혜를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가난하고 만나가 내리지 않으면 그날은 쫄딱 없이 굶어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우리는 그렇게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믿고 그렇게 부요해졌습니까? 여러분, 제가 한번 묻고 싶습니다. 저도 마찬가지고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아니면 난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주님이 내게 은혜를 베풀어주시지 않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은 나를 사랑하시지만 나의 죄와 악함은 너무나 크고 내 영혼은 주님의 마음을 공유하기 원하는 사모함이 간절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내 죄와 강퍅함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나는 곤고합니다. 그러면서 정말 하나님 밖에는 의지할 분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여러분, 정말 가슴이 아프도록 울어본 적이 있습니까? 최근에 말입니다. 십년 전에 말고요. 요즘에 말입니다.
시시때때로 날 사랑하사 시시때때로 새 생명 주니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시시때때로 주만 봅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영적인 비만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무엇인가 가장 소중하다고 하는 것을 버림으로서 마음의 가난함을 살 수 있다면 즉시 그렇게 하십시오. 상한 마음, 가난한 심령, 깨트려진 마음, 이것보다도 더 쉽게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는 장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지극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통회를 기뻐하시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겸비해진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높은 하늘에 옥좌를 버리고 내려오셔서 그들과 만나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에 이런 가난함을 일평생 잃지 않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영적인 소생입니다. 하나님이 영적인 소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마음으로 통회하는 사람들에게 소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소생이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어로 보면 ‘살아있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적으로 죽은 자와 유사한 상태 속에 들어가기가 아주 쉬운 것입니다. 밖으로는 유혹을 받고 고난을 많이 받으면서 신앙이 헤이 해지기가 쉽습니다. 안으로는 하나님의 강력한 말씀과 기도의 은혜가, 성령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의 내면의 세계 속에서 끊임없는 부패성과 죄의 본성들이 고개를 듭니다. 그대로 고개를 듭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생명을 얻은 그 순간부터 이 악한 원수 마귀는 우리의 생명을 취소할 수 없고 우리의 영혼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무엇인가 하면 우리를 영적으로 죽일 수는 없지만 거의 죽은 자와 같은 상태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위해서 전혀 기여할 수 없는 사람, 그리고 기여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영적으로 하나님을 느끼고 경험할 수 없는 메마른 신자로 만드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하는 사실을 압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것과 더불어서 열심히 기도하고 그리고 열심히 말씀을 사모하면서 그렇게 하면서 우리 자신을 경건하게 잘 관리해 나가면 그런 것들을 능히 이길 수가 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신자의 영혼이 충만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고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 그 죄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없는 것과 거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살아갑니다.
우리의 건강한 사람의 몸 속에도 암세포가 다 있습니다. 십 만개까지는 괜찮다고 합니다. 우리는 다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문제가 없습니다. 왜 우리의 건강함이 그것을 이기니까.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그런 하나님과의 만남의 감격과 생명 적인 교제가 충만한 사랑을 잃어버리고 나니까 급속히 이 죄에 대한 면역력이 하강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이에 막 비온 뒤에 버섯처럼 뻗어나가고 강력한 힘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도저히 자기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 될 때까지 가는 것입니다. “오라 나는 곤 고한 자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사도 바울의 고백이 그런 고백입니다. 그것은 사실은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살아있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통회하는 가난한 마음을 갖도록 부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생명 없는 것을 인해서 안타까워하고 주님이 내게 많은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주셨는데 내가 하나님 앞에 생명을 누리고 살아있었더라면 주님을 더 많이 기쁘시게 할 수 있었는데 하는 후회하는 마음과 아픔을 가지고 정말 자신의 죄를 슬퍼하고 그 하나님의 생명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인해서 애통할 때에 하나님께서 영혼의 소생함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은 것같이 살아가던 영혼의 상태에서 확 생명을 느끼고 살아나기 전에는 어떻게 하다가 보니까 그렇게 됐다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항상 내적인 진통이 있습니다. 여태까지는 잘 살았는데 어느 한 순간에 내 영혼이 거의 죽어있다라는 것을 보면서 고통스러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만져주시기를 주님이 소생의 은혜를 주시기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때 주님이 그런 영혼의 소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저와 여러분들이 하루에 한번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펑펑 울고 하루에 한번쯤은 이런 은혜를 받았으니까 하나님 이런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하고 비지땀을 흘리며 기도하고 그렇게 정말 주님의 생명 가운데서 열렬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인생이 너무 짧습니다. 섬기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많이 베풀고 주님을 찬송하고 그렇게 살아가기에도 짧은 시간들인데 어떻게 우리들이 짧은 시간을 생명 없이 방황하며 어두운 가운데서 살겠습니까.
치료하시는 주의 은혜 임하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이제껏 어떤 삶을 살았던지 어떤 처지에 있든지 이렇게 가난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아버지 찾기를 원하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하나님께 목마른 자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시42:1-2)
하나님께서는 우리 신자들을 보실 때에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는 마음입니다.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는 마음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모든 것들을 새롭게 바꾸어 버립니다. 일상적으로 예배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드리던 예배자의 마음에 주님을 갈망하는 마음이 생겨나면 그는 상하고 깨어진 마음으로 주님의 은혜에 목말라하며 예배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예배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되는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습니다.
죄 가운데 있어서 용서함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곤고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어떻게 사죄의 확신을 갖게 됩니까? 어느 순간에 죄 가운데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에서 한없이 불쌍하게 스스로 여기고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라고 하는 간절한 열망을 느끼면서 주님의 용서해주시는 은혜를 구하고 주님의 용서를 통해서 새롭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목마를 때에 주님께서 그에게 사죄의 확신을 갖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마름이 없는 신앙생활은 죽은 신앙생활이며 이러한 갈망이 없는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믿되 사실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다름이 없는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이런 간절한 갈망을 가지고 주님을 찾고 하나님께 매달리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들이 읽은 시편 42편은 그런 점에서 볼 때 우리에게 매우 커다란 가르침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 시인이 하나님을 노래한 이 시대와 우리 시대에는 약 3000년 정도의 간격이 있지만 시대를 뛰어넘어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는 하나님의 자녀의 마음에는 변함이 없는 법칙이 있다는 사실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편 42편을 지은 사람을 표제어는 말하기를 고라의 자손이라고 말합니다. 고라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광야로 나아오던 때에 한 족속의 두목이었습니다. 불행히도 이 고라의 족속은 모세의 지도력에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런 고라의 자손들을 기뻐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그 진지가 땅이 갈라지면서 지진이 일어나 그들의 모든 진이 땅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전대미문의 재앙을 맞게 됩니다. 그때에 모든 고라의 자손들이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고 몇 사람들이 살아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살아남은 자손들은 일평생 반역의 무리하고 하는 낙인이 찍힌 채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슬픈 가족 사를 이어와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들의 불명예와 슬픈 과거들을 씻어버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는데 다윗 때였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가름 부음을 받았지만 아직 하나님이 버리신 사울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었을 때에 다윗의 주위로 상처받고 곤고한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대로 이들을 목자와 같이 돌보면서 이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에 이릅니다. 이때 다윗을 도왔던 족속 가운데 고라의 족속이 나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제 이들에게 명예를 회복시켜주고 반역의 무리, 반역의 도당이라고 하는 낙인을 지워버리고 이제 하나님의 성소에서 수종을 들며 성도들을 섬기고 성소에서 수종을 드는 일을 위해서 헌신하는 특별한 사람들로 세워줍니다.
오늘 이 시편 42편은 그런 고라의 자손 중 한 사람이 이 시를 썼다고 믿어집니다. 이 시가 언제 쓰여졌는가 하면 구약을 연구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심심치 않는 논란거리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구약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은 아마 이 시는 다윗 왕 때에 쓰여졌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여기에 나오는 고라의 자손은 다윗 왕의 시대에 성소에서 하나님의 일을 수종들던 사람이었는데 다윗이 자기의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받아서 황급히 요단 강 건너편으로 망명의 길을 올랐을 때, 따라온 그 사람이 이 시를 지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이 시편 속에는 성전에 대한 친숙한 노래와 이제는 그런 성전에서 하나님을 뵈올 수 없게 된 시인의 슬픔이 거기에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문맥에 가장 적합한 것은 다윗 시대에 일어난 압살롬의 반란일 것이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이런 추측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추측이 거의 맞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인은 다윗을 수종들던 망명길에 함께 오른 고라의 자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지금과는 달리 어느 곳에서든지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일정한 장소에서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었고 그 일정한 장소는 바로 하나님의 성소였습니다. 다윗 시대에는 아직 성전이 지어지지 않았으니 이동식 천막으로 되어있는 그 성막에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경배하도록 허락이 되었는데 하나님이 지정하신 장소에서 지정하신 방식대로 예배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을 받으며 황급히 망명의 길에 오른 것은 자기 아들이 자기의 목에 칼을 겨누고 왕위를 내놓으라고 하는 이 반역의 사건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3-4년 전부터 면밀주도하게 왕위를 탈취할 계획을 세우고 종자들을 모으고 무기를 준비했습니다. 재판을 받으러 가는 성문 어귀에서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자신이 풀어주는 것처럼 상담을 하면서 다윗에게로 향하던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이루어진 반란이었기 때문에 다윗은 황급히 망명의 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윗이 황급히 망명의 길에 오를 때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 신앙이 한 가지 엮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법궤를 두고 간 사건이었습니다. 이 법궤는 성전 지성소 속에 있는 것인데 그것은 곧 왕권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을 가져가지를 않고 거기에다가 놔두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는 말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이 일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았는데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내가 다시 돌아와 하나님을 뵈오리라”하는 고백이었습니다. 자식이 반기를 들고 자기의 목에 칼을 겨누었으나 그는 압살롬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자기를 이렇게 다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다윗과 함께 망명길에 오른 이 시에 저자인 고라의 자손 중 한 사람의 마음은 더 아팠을 것입니다. 다윗이 망명의 길에 올라서 요단강 건너 낯설고 물 설은 남의 나라의 땅에 가서 잠시 신세를 질 때, 사람들은 다윗을 비롯해서 이 시인을 향해 말했습니다. “너희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너희 하나님이 있으면 어떻게 왕이 자식의 칼을 받고 도망을 오고 그리고 너희들이 이렇게 피난을 올 수가 있는가. 혹시 하나님이 너희를 버린 것이 아니냐” 견딜 수 없는 고통스러운 조소, 조롱이 섞인 질문들이 있었고 그런 질문을 받을 때에 시인은 아무 말도 대답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말없이 눈물만 흘렸고 “그 눈물이 주야로 그의 음식이 되었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신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그가 무엇을 하고 어떤 모양으로 교회에 출석하는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한 사람의 신자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은 그의 겉모습만 보고는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도 모르게 위선을 해야 하는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화) 세례를 받고도 4년 동안을 담배를 피우셨는데 담배를 피우고 교회를 가기 위해 서 은단이나 껌을 씹어도 냄새가 났다는 이야기
우리가 누구인지를 가장 잘 말해주는 것은 이렇게 치장한 우리의 겉모습이 아니라 우리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욕망입니다. 우리가 겉으로 아무리 경건한 척 하고 교회를 다녀도 우리 속에서 홀로 조용히 있을 때 솟아나는 욕망이 속되고 더러운 욕망이면 우리는 경건한 사람이 아니라 더러운 인간입니다. 그리고 남들이 보기에 우리를 보고 아무리 나일론 신자라고 말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들 속에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처럼 거룩해지고 싶은 갈망이 있으면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거나 앞으로 거룩한 성도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떻게 한 사람의 인격 안에 한 가지 욕망만이 존재하겠는가’ 가장 거룩한 사람들 속에도 아주 더러운 욕망이 깃들 수가 있고 짐승처럼 막 살아가는 막되먹은 인간의 그 욕망 한 가운데도 주님을 잘 믿고 진실한 성도가 되고 싶어하는 갈망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그러한 여러 가지 욕망이 우리 안에 함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주도적인 욕망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순간순간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주님의 뜻을 떠나 살고 싶으면서도 그러나 조용히 살펴보면 우리 안에 흐르고 있는 이 주도적인 욕망이 정말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어합니다. 주님을 향한 간절한 사모함 속에서 살고 싶어합니다. 그러면 그 욕망을 통해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시인은 기도 제목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사랑하고 인자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좋은 왕 다윗의 목에 부자의 정을 무릅쓰고 칼을 겨누고 임금이 되겠다고 반란을 일으킨 그 압살롬이 얼마나 미웠을까요. 일신에 영달을 위해서 주군을 배신하고 반역의 무리에 가담한 장수들과 군인들이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요. 이 시인은 기도하자마자 이런 악한 무리들을 토벌해버리시고 징벌을 내려 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해야지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인은 오히려 하나님 앞에 그러한 기도의 제목으로 나아가는 대신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자신 속에 있는 불붙는 욕망을 진솔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간절한 갈망은 다름이 아니라 “내 영혼이 하나님을 갈망합니다”라고 하는 소원이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간절히 갈망한다”라고 하는 이 표현이 마음에 충분하지 않은지 한 묘사를 덧붙이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라고 하는 표현입니다. 이 말은 배경이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는 사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슴은 가을철이 되면 교미기입니다. 그러면 사슴들은 이제 발정한 수사슴들은 암컷을 찾아서 들판으로 나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한 마리의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서 생명을 건 뿔싸움을 시도합니다. 그렇게 발정할 때에 수사슴의 체질에 아주 강력한 목마른 갈증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런 갈증이 엄습할라치면 처음에는 짝을 찾아 나섰던 수사슴들이 이번에는 짝보다도 더 급한 물을 찾아서 헤매이게 됩니다. 들판을 가로지르다가 그 물을 만나면 다행이지만 물을 못 만나면 이제 신기루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헛 것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은 물이 많은 지역이 아니기 때문에 풍부한 물이 흐르는 샘물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슴들은 목마름 속에서 타는 듯한 갈증 속에서 들판을 가로지르다가는 뜨거운 땡볕 아래서 두 눈을 부릅뜨고 입에 거품을 문 채 쓰러집니다. 죽을 때에는 본능적으로 앞발로 땅을 파면서 죽어갑니다.
시인은 팔레스타인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한 모금의 물을 찾다가 죽어간 수많은 사슴들의 시체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바로 한 모금의 물이 없어서 죽음의 길을 갔던 이 사슴들처럼 지금 자기는 하나님과의 한번의 감격스러운 만남이 없기 때문에 죽어버릴 것같은 처지가 되었으니 자기를 궁휼히 여겨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금이나 은이나 왕국을 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록 반역의 무리들에게 칼 겨눔을 당하고 망명의 길에 올랐으나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 가운데 하나님이 주신 축복에 목마른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에게 목마른 사람은 찾아보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주님과 같이 내 마음을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 밖에 없네
하나님께 목마른 사람들은 주님 밖에는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에게 목마른 사람들은 주님과 함께 하면 모든 것을 만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없이 천국에서 생명수 물가를 걷기보다는 주님과 함께 지옥의 불길 한 가운데를 지나는 편이 훨씬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바로 주님을 향해 목마른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무엇, 어떤 혜택, 어떤 축복의 약속, 어떤 은혜, 그 무엇 때문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너무나 소중하고 사랑스러워서 그분을 뵙고 싶고, 만나고 싶고, 그분의 음성을 듣고 싶은 그런 사람들이 우리들 중에 얼마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냉담하게 드려지는 예배를 한번 보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을 찾을 수가 있습니까? 주님을 만난 감격 속에 흐느끼는 성도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예배를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악함과 더러움 때문에 주님을 뵈옵지 못한 슬픔 속에서 흐느끼는 성도들을 볼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은혜가 무엇입니까? 주님의 자비에, 주님의 아가페의 사랑을 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사랑을 안다는 것은 곧 사랑 받지 못할 때의 목마름을 안다는 말과 동일하지 않습니까? 우리들에게는 이런 순수한 신앙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거짓과 위선과 허위와 형식을 벗어버리고 우리는 주님 앞에 위선과 거짓에 옷을 벗어버리고 정직하게 하나님의 참 사랑 속으로 들어가는 비결들을 배워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인은 하나님을 뵈옵기 위해서 간절히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왕국을 찾기 위해서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관심사는 잃어 버린 왕국이 아니라 왕국 한 복판에 있었던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당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성을 지키는 무리와 함께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송하고 주님을 인해 기뻐하던 때를 그리워하면서 이방의 땅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주님과 그렇게 예배 속에서 만나던 때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목마름이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 무엇 때문이 아니라 주님 자신 때문에 목말라하는 마음이 있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송축하리 내 입술 주를 찬양
나의 눈 보기 원하네 주님 얼굴
주님의 음성듣기를 주님을 만져보기를
전심으로 원합니다. 주여
이 세상에서 주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이 많은 축복을 해주셔서 이런 영화를 누리고 저런 부귀를 누리고 많은 물질을 소유한다고 하더라도 한 가지 행복을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죄인인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는 것, 온갖 죄와 헤아릴 수 없는 불결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어느 한 순간에 주님이 그 임마누엘의 보혈의 샘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주시고 치료하고 고치시는 후에 우리에게 그 큰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시기 때문에 그때에 우리는 그것을 능가하는 어떠한 행복도 우리는 발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마음에 잔이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아무에게나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에 간절히 목마른 사람들에게 옵니다.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마셔도 마셔도 해갈되지 않는 이 세상의 물과 이 세상의 떡이 아니라 우리를 만족하게 하시는 우리 하나님의 큰사랑을 갖고 싶어서 갈망하는 성도들, 그것에 목마른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찾는 성도들에게 주님께서는 자기의 사랑과 넘치는 은혜를 부어주셔서 주님을 만나는 감격 속에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의 소망을 좀 단순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껏 우리들이 가지고 있던 수많은 욕망과 그리고 그 욕망대로 하나님을 움직여보고자 하는 우리의 모든 잘못된 생각들을 한번 내려놓고 정말 우리들이 간절히 원하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일생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하고 꼭 필요한 것인지를 한번 되물어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고 우리의 영혼이 우리를 향한 신실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것, 우리가 무엇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중세 시대에 토마스 아퀴나스라고 하는 교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건한 수도사였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이렇게 내려다 보시니까 간절히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금식하고 고행하고 기도하면서 뭔가를 그렇게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느날 간절히 기도하는 아퀴나스를 찾아 왔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종 아퀴나스야,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랴” 그러자 이 하나님의 사람은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난 아무 것도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원하는 것이 이 세상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간절히 금식하고 고행하며 눈물로 나에게 기도하고 있느냐? 네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때 하나님의 사람은 대답했습니다. “주님, 나는 아무 것도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주님이 제게 무엇을 주신다면 다른 것 말고 주님 자신을 제게 주시옵소서. 주님은 저의 것이고 저는 주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이도 넉넉히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삶은 얼마나 건조하고 고통스러운 삶일까요. 주님이 가장 가슴아파 하시는 것은 혼자서도 씩씩하게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꿋꿋함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비록 오랜 세월을 죄 가운데 살고 그의 삶 속에 의로움이 없다고 할지라도 어느 순간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깨닫고 주님 밖에는 의지할 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주님 없이 살아온 자신의 날들을 기이하게 여기며 간절히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그러한 성도들을 주님은 훨씬 더 잘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나는 것은 도덕 순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경건하고 의롭게 살아온 그 위에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도덕적으로 떳떳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불행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무튼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입니다.
저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면서 뭔가 은혜를 잃어버린 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만났을 때 묻는 공통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요즘 행복하십니까?” 아무도 행복하다고 대답하지 못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우리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요? 천하를 다 주고 우리의 욕망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갖는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속에 죄에 대한 갈증은 무저갱과 같아서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만족은 이처럼 세상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그 큰 사랑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어떻게 행복할 수가 있으며 그 사랑을 되찾기까지 어떻게 그가 진정으로 목마르지 않은 삶을 살 수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전에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이제는 아득하게 잊어버린 옛날이 되었고 오랜 세월동안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을 받음 없이 살아왔기 때문에 이제는 주님없이 사는 일에 이제 제법 익숙해져 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그런 신앙의 모습을 보며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하물며 나보다 여러분들을 더 사랑하시고 여러분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피흘려 죽기까지 여러분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셨던 그분의 마음은 얼마나 아플까요. 주님의 마음은 주님을 모르는 채 살아가는 이방의 백성들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한때 당신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았지만 이제는 그 사랑이 없이도 넉넉히 살아가는 그러한 당신의 백성들 때문에 주님의 마음은 고통을 받으십니다. 행복하십니까? 기쁘십니까? 평안이 있습니까? 행복하십니까? 우리는 이런 말을 들으면서 간절히 부르짖어야 합니다. 아닙니다. 나의 많은 죄와 허물 때문에 주께 나아가지 못하고 있지만 주님을 거스려살면서 저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아우레리우스 어거스틴’이 자기의 고백록에서 고백했듯이 신자는 주님의 품에 안길 때까지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평안을 발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떠난 이후로 행복이 없었고 앞으로도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따금 주님을 등진 가운데 맛보는 세상의 즐거움과 죄악된 삶이 가져다 주는 약간의 쾌락들이 우리를 기쁘게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마취제와 같은 것입니다. 잠시 영혼의 궁핍함을 잊어버리게는 하지만 그러나 그 즐거움이 사라지면 다시 선명하게 떠오르는 하나님과의 관계, 다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그 신앙의 길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떠오르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없이 살 수 없는 사람들이고 주님이 없이는 우리 자신도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과 신앙을 움직이는 우리의 내면의 기초 속에는 하나님 자신을 향한 간절한 목마름, 그리고 주님의 더 깊은 사랑 속으로 더 깊은 주님의 은혜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간절한 만남, 그 목마름이 우리의 모든 삶을 움직이고 우리의 신앙을 움직이는 기초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시인이 도대체 무엇을 갈망하는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이 시인이 간절히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신 하나님을 갈망하나니”하고 말합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을 많이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인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기가 요단강을 건너왔기 때문에 자기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열납되지 못한다든지 이제는 하나님이 자기를 완전히 버리셨다든지 그렇게 생각한 정도로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이 시인은 예배할 수 있는 자유를 모두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이렇게 갈망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시인은 그런 하나님에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간절히 만나고 싶어했던 갈망하는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었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신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느끼면서 생생한 교제의 감격 속에서 살 때에는 자기 앞에 놓여있는 잘못된 상황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 이 상황을 바꾸고 싶어합니다.
오랜 세월동안 엄마 아빠가 예수를 안 믿었습니다. 온 가족이 교회를 안 다니고 혼자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이 교회를 다녀도 그저 진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출석입니다. 자기 영혼이 변화받지 못했을 때에는 그런 것들이 문제가 되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와서 이런 설교를 들을 때마다 ‘아, 전도해야되는데. 우리 집 식구들 예수를 믿어야 하는데.’ 그렇지만 집에 막상 가보고 나면 그 마음은 아주 작고 예수를 믿지 않고 살아가는 가족들의 현실은 너무나 높은 산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상황을 보고 그 상황을 인정하는 방법들을 배우게 되는 것에 익숙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주님의 큰 사랑을 깨닫고 이런 생생한 주님과의 교제의 기쁨을 회복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엄마 아빠는 속히 예수를 믿어야 한다. 그것도 신앙생활이라고 하고 있는 우리 엄마 아빠는 변화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예전에 느낄 수 없었던 살아계신 하나님을 자신이 느끼고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 하나님이 그러한 이제껏 고칠 수 없었던 환경을 고치고 바꾸실 수 있다고 믿는 굳건한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생생한 교제 속에서 살지 않는 사람이 믿음을 가질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그냥 자기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생생한 교제를 느끼면서 그 교제를 토대로 해서 갖는 확신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이렇게 열렬하게 일하고 계시고 하나님이 절대로 살아계시다라고 하는 증거를 마음속에 이처럼 보여주시고 내가 이런 간증을 갖고 있기 때문에 또한 당연히 하나님이 내 환경도 바꾸실 수 있다. 믿는 그 믿음이 진짜 믿음이지 자기는 하나님을 전혀 느끼지 못하면서 하나님이 하실거야. 하기는 뭘 합니까. 남이 할거야 하고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런식으로 믿는 사람들은 실제로 그 일을 하나님이 하셨을 때에 하나님이 위대한 일들을 이루셨다고 감격하고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다 그렇게 됐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시인이 갈망했던 하나님은 성경의 역사 속에 나오는 그런 하나님이나 교리 속에 묻혀있는 차가운 하나님이 아니라 역사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살아계셔서 언제나 자기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 의인의 고통을 들으시고 경건한 자의 눈에 눈물을 씻어주시는 하나님, 마음에 한처럼 품은 기도제목으로 부르짖을 때에 잠잠하지 않고 귀를 기울이시는 그런 살아계신 하나님, 그런 하나님을 이 시인이 간절히 갈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 신앙을 가지고 우리의 삶의 현장에 도전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믿음을 가지고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무너트릴 수 없는 여리고 성을 도는 믿음이 있습니까? 어떻게 일 하실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이 내 눈에 살아계시기 때문에 믿고 간구하는 나에게 위대한 일들을 보이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생생한 교제없이 우리는 믿음을 가진 삶을 살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자명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을 향해서 내기를 거는 마음으로 도박을 하는 사람들을 믿음의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거명하고 있는 그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의 외적인 특성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가운데 엄청난 일에 도전을 하는 것입니다. 핍박과 환난의 칼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도저히 아이를 낳을 수 없는데도 하나님이 그렇게 자식을 주시리라고 믿었습니다. 주를 위해서 고난을 받고 주를 위해서 수치를 당하는 것이 모든 이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도전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내적인 삶의 특성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모세, 기드온, 사라, 혹은 아브라함, 이사야, 누구든지 간에 그런 도전하는 외적인 삶 속에 있었던 그 내적인 특성은 하나님과의 풍부한 교제였습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하나님의 은혜에 목말라 하고 그렇게 목말라 하는 자신에게 만남을 통해서 영혼의 해갈을 주시는 하나님과의 풍부한 교제 속에서 산 그들의 영적 삶이 그런 엄청난 도전의 믿음의 삶을 살도록 만들어주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차가운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우리는 둘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감격 속에 살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런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만남에 목말라 하든지 둘 중에 하나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도, 하나님과의 만남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하나님과의 만남에 간절히 목마르고 간절히 사모하는 갈망이 시인과 같이 우리의 마음속에 느껴지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죄로 말미암은 무감각이 우리로 하여금 그런 갈증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 갈망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작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마음이하나님을 향한 생각보다도 더 커다란 것들이 영향을 미치고 있으면 그러면 이런 갈망이 생겨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예수를 믿고 이처럼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있는 여러분들이 일주일 동안 죄를 지으면 얼마나 큰 죄를 지었어요. 신문에 날만한 것 한건 올렸습니까? 지명수배를 받고 오늘 예배당에 나오신 분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큰 것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도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나태하고 안일한 죄가 살며시 스며들어오면 하나님에 대한 감각은 아주 무디어지고 세상과 육체에 대한 감각은 아주 예민해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목말라야 될텐데 주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것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별로 불편을 느끼지 않으니까 그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간절한 목마름을 느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죄가 들어오니까 세상과 육체에 대한 감각은 아주 예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을 때에는 전혀 마음아파하지 않은 사람이 조금만 자존심이 상하면 교회에 와서도 다 뒤집어 엎는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됩니까? 세상적이고 육적인 욕망이 아주 예민하고 열렬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에 대해서 예민해지고 열렬해지게 되니까 점점 더 죄를 짖게 되고 그러니까 신령한 은혜의 감각들을 점점 상실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버려두면 그 자신의 마음이 죄로 가득하고 결국은 그것이 그의 인격 속에 배이고 삶을 통해서 서서히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잠복기를 거쳐서 그 다음에는 형편없는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문제를 우리들이 직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회개의 경험을 돌이켜보면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나면 대게 세 가지 느낌을 한꺼번에 경험하게 되는데 하나는 무거운 짐을 벗어버렸다고 하는 가벼움,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친밀하게 느껴지는 것, 그 다음에 세 번째는 예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던 죄들이 점점 크고 두렵게 느껴지는 것, 이 세 가지 느낌이 동시에 밀려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함께 감싸안으면서 예전에는 없던 새로운 갈망들이 생겨나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신령한 것들에 대한 갈망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간절한 사모함들입니다. 그것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이런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목마름과 갈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나태한 신앙생활과 게으른 경건생활 속에서 커다란 죄는 아닐지 모르지만 이런 저런 죄들이 우리의 마음을 타고 들어왔고 우리의 심령을 더럽혀서 하나님을 향해서 마땅히 가져야 할 갈망을 잃어버린 채 신앙생활을 하게 끔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어떻게 종식하고 어떻게 버려야할지 여러분들이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비만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영적으로 비만한 몸을 가지고 영적인 군사의 삶을 살아갈 수는 더더욱 없고 영적인 그 비만은 모두 해결하고 퇴치해버리기 전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에 목마른 사슴처럼 이 시인처럼 주님의 더 크신 은혜를 구하며 아버지 앞에 매달리는 깨어진 마음을 가진 성도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는 거룩해져 갈 수가 없고 그는 성결해질 수가 없으며 그래서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고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출석 생활은 가능하지만 깊고 심오한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서 세상을 이기는 거룩한 능력과 힘을 공급받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제 이 말씀 앞에서 어떻게 자신을 추스려야 할지를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의 진정한 만족이 무엇입니까? 주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해주셨을 때에 우리의 영혼이 무엇을 먹고 살 수 있도록 우리를 고쳐놓으셨습니까? 이 세상에 더러운 즐거움의 물이나 아니면 이 세상에 있는 영화의 물을 먹고 살 수 있도록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놓으셨으니까 우리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신령한 은혜와 죄인된 우리들을 고치고 치료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우리는 날마다 새 삶을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은 성도들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슬픔의 이유가 무엇이든지 우리의 힘겨운 삶의 원인이 무엇이든지 우리가 아는 것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만나주시면 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마음이 무엇을 믿고 부요합니까? 무엇을 믿고 우리는 시인처럼 주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주님의 사랑에 목말라 하지 않는 것입니까? 우리의 마음에 가만히 들어온 더러운 죄, 사소하지만 불순종하며 살아서 우리의 영적인 어두움을 더했던 우리의 죄들을 진심으로 고백하고 죄악의 껍질들을 벗겨 주님의 사랑에 목말라 하는 우리의 영혼의 속살을 드러내주시도록 우리는 그렇게 간구해야겠습니다. 그래서 일평생 주님 의지하며 사는 좋은 성도들이 된다면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4.낮게 될 때에 구원하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어리석은 자를 보존하시나니 내가 낮게 될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시116:6)
시편 116편은 고난 중에 있던 성도가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더 알게 된 기쁨을 노래하고 있는 시편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의 음성을 들으심으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에 그 기도를 들어주시는 응답 때문에 주님이 은혜롭고 자비로우신 분임을 새삼 깨달았고 그래서 그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는 그런 고백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셨을 때, 자신의 마음과 영혼의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고백했는데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6절에서 “여호와께서는 어리석은 자를 보존하시며 낮게 될 때에 구원하셨도다”라고 말입니다.
사실 시인은 그 앞에서 자신의 인생 속에 밀어닥친 견딜 수 없는 환난과 시련에 대해서 길게 회상하고 있습니다. 사망의 줄이 자기를 에우고 음부의 고통이 자신에게 밀어닥쳤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원래 이 사망의 줄이라고 하는 것은 성막뜰에서 번제를 드릴 때에 죽은 짐승을 번제단에 올려놓고 이게 흔들리거나 떨어지지 말도록 제단내 뿔에다가 단단하게 묶는 줄을 의미했습니다. 그것이 사망의 줄이었습니다.
이 시인은 자신에게 시련이 닥쳤는데 도저히 자신의 힘과 재능으로서는 어떻게 피하거나 그런 시험든 상황을 개선할 수가 없고, 죽음밖에는 없을 정도로 그렇게 철저하게 시련 가운데 에워쌓인 때를 회상하고 있습니다. “음부의 고통이 밀려닥쳤다”고 하는 이 말은 이 세상에서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아서 자신의 생애 가운데 견딜만한 고통이 아니라 도저히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고 하는 그런 고백을 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비록 하나님을 우리의 목자로 모시고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시시때때로 이런 시련과 환난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왠만한 시련과 환난을 만날 때는 좀 곤고하고 힘들지만 그러나 특별한 환난을 만나고 특별한 시련을 만날 때는 우리는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게 됩니다. 한 사람이 고통의 의미를 모르고는 하나님 앞에서 인생의 의미를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커다란 고통과 시련을 만났을 때에 여러분은 어떻했습니까? 혹시 여러분들에게는 이런 때는 없었습니까? 살아있는 것이 너무나 힘겼고 이 시련과 환난 속에서 생존하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저녁에 눈을 감으면 아침에 눈을 뜨지 말았으면, 저녁에 해가 지면 다시 저 해가 떠오르지 말았으면 하고 바라는 때가 없느냐는 것입니다.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면 이런 표현이 가능하겠습니까?
시인의 처지가 그러했습니다. 환난과 시련 사망의 줄이 자기를 에우고 고통의 사슬이 자기를 얽어맸습니다. 음부를 넘나드는 것 같은 견딜 수 없는 통증이 그의 전 인격과 전 영혼을 엄습했고 그는 견딜 수 없는 아픔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떨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길을 지나면서 이런 특별한 환난에 때를 지날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경제적인 이유, 물질적인 이유, 하여튼 뭔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 있는 물질적인 것 때문에 고통을 받고 견딜 수 없이 괴로워하는 때가 있습니다. 가난해보지 않은 사람은 경제적인 고통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빚에 몰려보지 않은 사람들은 물질로 인해서 고통을 받는 것이 얼마나 처절한 괴로움이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 물질이 넉넉하고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은 고통이 없겠는가.
저는 사실은 꽤 돈이 많은 부자들도 여럿 만나봤습니다. 그들은 크게 세 종류의 사람이었습니다. 첫 째는 무엇을 모르니까 행복한지 알고 사는 사람들, 제일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는 돈이 있으면서도 다른 이유 때문에 고통을 받고 괴로워하기 때문에 그게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돈이 있지만 신앙으로 많은 물질을 소유한 위험을 극복하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 중에서 돈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 꽤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들이 우리의 인생에는 훨씬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인간관계에 있어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은 건강이 나빠서 견디기 힘들게 고통을 받는 사람들은 이 물질 때문에 자신들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이르기를 “육선이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은 차라리 채소를 먹으며 화목한 것보다도 못하다”그랬습니다. 가난하고 물질이 없어서 고통받을 때에 다투는 것은 바가지를 집어던지고 난리를 치며 싸워도 그러나 그것은 심층 깊은 곳에까지 내려가는 갈등이 아닌 적이 많습니다. 그러나 재물이 있고 돈이 있어도 사랑받아야 할 관계 속에서 상처가 가득하고 이해받아야 할 관계 속에서 고통을 받는 그런 관계가 되고 나면 이제 돈으로도 치유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미워하고, 남편이 아내에 대해서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자식이 부모를 용서하지 못하고, 부모가 자식을 용서하지 못하고, 동기간이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는 이런 고통도 견디기 힘든 고통과 괴로움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깨어진 관계 속에서 날마다 그런 사람들을 대면하고 살아야 하는 고통은 그야말로 시련과 환난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닙니다. 많은 물질이 있어도 건강이 나쁘면 그 무슨 물질이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들은 살고 싶고 활동하고 싶습니다. 마음껏 뛰고 싶고, 그리고 인생을 활달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가고 싶은 곳을 가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엔조이하는데 남의 도움이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사람, 남의 도움이 아니면 기동도 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 신체적인 좌절을 통해서 느끼는 그 절망감은 이루말할 수가 없습니다.
(예화) 장애인 선교를 하시는 장로님의 말씀이 많은 장애인들을 만나서 그들의 소원이 무엇이냐고 하니까 살아서 무슨 소망이 있겠는가 하며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 며 인생의 힘든 마음을 나타내던 사람들도 주님을 만나면 놀랍게 변화가 된다며 궁극적인 대안은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는 이야기.
그런데 사실 더 엄밀하게 보면 사실 그런 개인의 건강이나 인간 관계에서 오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나 또 물질적인 어려움 때문에 받는 고난도 사실 그 한 가지 어려움보다는 좀 작습니다. 그 사람이 신앙이 없다면 모르거니와 신앙이 있다면 그 한 가지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고통과 절망입니다. 사실 좀 가난하면 어떻습니까? 좀 부족하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고 그리고 주님의 은혜가 나를 온전히 붙들면 그 가난한 것을 통해서 주님의 부요하심을 바라볼 수가 있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가난한데 처하면서 그것 때문에 주님을 더 많이 의뢰하게 되었다고 말하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크고 놀라우면 좀 가난하면 어떻습니까? 좀 못 생기면 어떻습니까? 좀 사회적인 지위가 낮으면 어떻습니까? 공부 좀 못했으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주님이 계시잖아요. 나 같이 못 생긴 사람도 사는데, 전혀 웃지 않는 것을 보니까 내가 아주 기쁜데. 그래요 얼마나 좋습니까? 주님이 나를 귀하다고 하시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또 건강에 고통도 그렇습니다. 건강이 큰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청교도들을 보면 그때는 의학이 발달되지 않았으니까 질병이 많았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으로 미국 사람들이 넘어갈 때에 평균 연령이 30-31세 밖에 안 되었다고 하니까 얼마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살았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설교 속에 항상 신자가 질병에 걸렸을 때 어떻게 그 병상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지가 아주 굉장히 중요한 설교의 주제였습니다. 일찍 죽으니까. 그러니까 그것들을 보면 진짜 그 성도들은 질병 속에서 고통받는 것을 ‘수련회’라고 그랬습니다. 나를 깨끗하게 하시는 수련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지금은 담담하게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아프면 병원에 가시고 고치십시오. 그래서 좀 더 사십시오. 여태까지도 별 볼일없이 살았는데 어떻게 고쳐서라도 좀더 기회를 가져봐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병원에 가셔서 고치십시오.
그런데 질병이 있고 마음의 고통을 받으면서도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면 살아있는 동안에 그 고통 속에서 힘들기는 하지만 더 주님을 붙들고 그리고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인간 관계에서 깨트려진 것이 너무 힘들다고 그래도 사실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고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넘치면 그러면 곳간에서 인심이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넘치면 그렇게 미워하던 사람들을 용서할 수가 있고 기쁨이 넘치면 기분 나쁘고 괴로운 일도 견딜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화) 처음 아파트를 구입해 인천에 있는 24평의 집에 들어가셔서 사시는데 제일 좋은 것은 욕조에 물을 받아서 매일 아침 저녁에 샤워를 하시는 것인데 가스 요금을 걱정하시는 아내의 걱정도 생각지 않고 한 달을 황홀하게 쓰시다가 가스비가 나 왔는데 많은 가스비로 인해 심장마비 직전까지 간 상태로 화가나서 남편을 기다 리셨는데 학교에서 전화가 와서 박사 과정에 합격을 했다는 기쁜 소식으로 그 렇게 화가 났던 아내의 기분이 나아졌다는 이야기.
기쁨이 고통보다 크면 고통을 잊어버립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위로와 사랑이 넘치는데 그까짓 것 사람 때문에 좀 괴로우면 어떻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은혜를 받지 못했을 때는 남편, 아버지, 엄마, 아들, 딸, 동기간이 용서가 안되고 ‘이런 인간들 싹 쓸어 내거나 무인도에서 혼자 살았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크게 받고 나면 그 사람들이 영혼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내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었던 그 사람들 속에 있는 고통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 아닙니까? 그래서 용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도 사실은 우리의 불행과 고통의 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힘들고 괴로운 것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들이 못 받고 그 충만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는 인격적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우리들이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여앉아서 성도들이 이야기를 하면 무엇이 문제고, 무엇이 큰일이 났고, 무엇이 걱정이 됐고, 무엇이 근심투성이라고 다 이야기하는데 문제는 하나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장 시련과 어려움을 만났을 때에 정말로 고통을 받는 궁극적인 원인은 사실을 환난과 시련 자체 때문이 아니라 환난과 시련을 통해서 껍데기를 벗기듯이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떤가 하는 것이 다 드러나 보이는 것입니다. 그 바닥을 보니까 절망적인 것입니다. ‘아, 내가 그래도 이렇게 신앙생활을 한다고 교회를 왔다갔다해서 그래서 목사님이 나를 보고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신자라고 그랬는데 그렇게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출석 생활을 해봤자 이 문제를 푸는데 아무 도움이 안 되는구나 하나님과 나와의 인격적인 관계의 한계가 여기구나.’ 그리고 절망할 때에 사실 그 절망은 하나님 이외에는 치유책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시인이 사망의 줄이 자기를 에우고 음부의 고통이 미치는 환난과 시련을 당했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 환난과 시련이 우리에게 밀려올 때에 결국 그 환난과 시련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입니까? 환난과 시련을 통해서 그런 불행과 고통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려고 하는 것인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욥이 하나님 앞에 큰 시험을 당했을 때에 그래도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니까 욥의 아내가 뭐라고 했습니까?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려라 무슨 이 지경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느냐’ 이게 바로 시련과 환난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악한 세력들이 우리를 향해 겨냥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모든 시련과 환란이 원수 마귀를 통해서 오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죄를 통해서 왔든 심지어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속에서 우리를 연단하기 위해서 왔든 어째든 신자가 환난과 시련을 당할 때에 악한 원수 마귀들은 그 환난과 시련을 당하는 상황을 보면서 간절히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욥의 아내처럼 우리의 신앙에 종지부를 찍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저주하고 그리고 끝장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왜 이 이야기가 필요한 것입니까? 시인이 커다란 시험과 환난을 만났을 때에 그 시련과 환난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까지 위협을 받고 연단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아무리 괴로움이 오고 어려움이 와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전혀 영향을 미칠 리가 없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어떤 자극도 받지 않는 환난과 시련은 사실 환난이다 시련이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남들은 우리보고 그렇게 말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예화) 친구가 시골 교회에 목회자가 되어 혼자 생활하면서 형편없는 생활 속에서 그곳 에 가신 분들이 그 전도사님이 불쌍하다고 우는데 실제 자신은 하나도 불쌍하지 않다는 이야기.
그것 보십시오. 아무리 환난과 시련이라고 해도 자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을 만나면 “교회를 개척하고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하고 말하면 나는 고생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내가 고생스럽지 않다고 하면 고생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주관적인 것입니다. 시련과 환난이 와서 하나님과 내 관계가 흔들리고 내 영혼에 고통이 밀어닥치고 그러면 그건 고난이고 시련입니다. 그런데 내가 불 속에 들어가도 내가 아무렇지도 않으면 난 아무렇지도 않은 것입니다. 남들이 볼 때 환난이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이 시인이 고백을 하고 있는가 하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게 환난과 시련을 만나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함께 연단을 받는 것입니다. ‘야, 너 이래도 주님을 믿을래. 이래도 너 하나님 의지할 수 있니. 네가 이렇게 충성스럽게 살아서 주님이 너한테 해주신 것이 무엇이 있니? 네가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어떻게 이런 병에 드냐?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는데 사업이 안되고 이렇게 죽을 쓰냐. 하나님 믿을 수가 있겠냐.’ 이렇게 같이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계속해서 적절한 치유책이 없이 오래 계속되면 침체를 가져오고 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사실 시련이고 환난이고 고통입니다.
시인이 그런 위험 속에 처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봅시다. 환난과 시련을 만나고 눈을 감으면 뜨기 싫고, 저녁이 되었으면 아침이 오기 싫은 그런 견딜 수 없는 인생에 시련과 환난이 오면 인간이 어떤 반응을 보일 수가 있을 것 같습니까? 그건 오직 둘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바라 보든가 아니면 그 상황을 바라 보든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제 삼의 선택은 없습니다. 있는 것은 미쳐버리는 것입니다. 진짜 너무 고통받으면 미쳐버립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신의 선택이 아닙니다. 그러니 두 가지 밖에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신자의 경우에는 진짜 하나님을 바라보느냐, 아니면 상황을 바라보고 절망하느냐. 딱 둘 중에 하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봅시다. 신자가 이런 시련과 환난을 만나서 깊이 고통을 받으면서 아파하고 견딜 수 없어 괴로워할 때, 상황을 바라본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상황 속에서 어떤 위로를 받을 수가 있을까요? 여러분, 환난과 시련을 지나 보낸 사람들은 “믿음으로 이겨야 돼. 하나님이 함께 하실거야” 하고 남의 말처럼 쉽게 이야기를 하지만, 진짜 한번 그 가운데 들어가보십시오. 저녁이면 눈을 감고 뜨기 싫은 정도로 한번 시련을 만나 보십시오. 하나님 바라보면서 사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만약에 그런 속에서 우리들이 환경을 바라보면 그러면 우리는 즉각적으로 그 환경 속에서 견딜 수 없는 내적인 고통이 가중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봅시다. 물질이 없고 환경이 어려워서 막 고통받고 고치지 못하는 질병에 걸려서 막 고통을 받으면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그 상황을 바라본다면 그러면 자신은 물질적으로 이런 손해를 입혀서 고통받게 만든 그 사람을 향해 이를 갈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제발로 넘어져서 이런 상황이 된 팔자를 원망할 것입니다. 그리고 몹쓸 질병에 걸려서 불가항력적으로 고통을 받으면 결국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아닙니까?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고 고통을 받으면서 인간 관계 때문에 죽음의 문턱을 오르내리는 환난과 시련을 당할 때에 결국 그 사람이 사람을 원망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을 미워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은 마지막에 가서 그 사람을 미워하고 원망하고 그 사람을 향해 칼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느꼈는데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상황을 바라본다고 칩시다. 그러면 마지막에 도달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한없는 연민과 서러움밖에는 없습니다. ‘내가 옛날에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어쩌다가 내가 이 모양이 됐는가. 내가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 버리고 이러고도 인생을 살아가서 뭐하나’ 하는 그런 자기 연민에 서러움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럼 보십시오. 세상에 대한 원망, 팔자타령, 그리고 자신에 대한 연민, 인간들에 대한 미움, 하나님에 대한 섭한 감정, 이런 것들이 전부 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장벽들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만나야 할 사람이 그 시험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니까 자꾸 죄를 지으면서 그런 것들이 자꾸 쏟아져 나오면서 점점 하나님과의 장벽이 높아지고 하나님을 만날래야 만날 수 없는 사람으로 점점 고립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마지막에는 그 시험 속에서 자신의 마음이 강팍하게 변화되어서 그래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이 되고 그 속에서 타락한 성품들이 자기의 뼛속 깊이 자리를 잡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은 그런 첫 번째 선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택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았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자기가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커다란 시련과 고통을 만나고 슬픔과 괴로움을 만났을 때그는 하나님을 바라보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흔히 모여 앉아서 이것이 없다. 저것이 없다. 이것 걱정이다. 저것이 걱정이다. 밤새도록 신세타령을 하면서 한탄을 하고 근심으로 밤을 새우는데 결국은 여러 가지가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과 함께 하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환난 속에서 아무리 사람을 붙들고 사정하고 이 사람 저 사람을 붙들고 자기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고 안타깝게 이야기 해봐야 인간만 추해지는 것입니다. 그게 도움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아무리 스스로 자기가 불쌍하고 자기가 가엽다고 아무리 자기 연민에 빠져도 마지막에 돌아오는 것은 서러움 밖에는 없습니다. 그 서러움의 감정은 하나님을 향한 섭섭한 감정입니다. 통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어떻습니까? 그래서 결국은 모든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더 큰 상처를 내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더 깊이 파괴하고 담을 쌓아서 이제는 주님의 사랑을 알 수 없는 그런 상황으로 굴러 떨어지도록 만드는 그게 사실은 우리의 시험 당하는 꼴을 쳐다보는 마귀가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노리는 목표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기도할 리가 없습니다. 절대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면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오늘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 가운데도 정신없는 환난 가운데서 괴로움을 당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물질의 문제이건, 사람과의 관계의 문제이건, 자기를 이기지 못하는 자기 속에 있는 패역한 성품과 전투에서 느끼는 뼈저린 패배감이든지,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이든지 하여튼 무엇이든지 간에 여러분의 마음에 고통이 되고 슬픔이 되고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이 되는 모든 것이든지 그런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 분들이 왜 없겠습니까? 인생의 길이 원래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괴로움과 죄가 많고 슬픔이 많은 곳입니다. 지나야 하는 나그네의 길에 서러움이 없을 리가 없고 지나야 하는 나그네의 길에 소외와 견디기 힘든 고통이 없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누가 인생을 지나는 나그네 길이라고 말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만약에 상황을 바라보면 반드시 그 시련과 환난을 통해서 하나님도 잃어버리고 나도 잃어버리고 그리고 사람들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시련과 환난은 신자에게 있어서 당하는 고통과 아픔은 하나님만 바라보라고 주시는 은사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예화) 3년 전에 다니던 총신대 교회에서 수요일 설교를 해달라고 해서 설교를 하시려 고 단에 서셨는데 성경도 읽지 않았는데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쏟아졌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성경 본문이 기도에 대한 것이었고 또 하나는 설교하 시는 그 장소가 하나님 앞에 인생에 어느 한 벼랑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렸던 곳이였는데 그때 아이가 페렴에 걸렸고, 할머니께서는 병에 걸리셨고, 집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쫒겨나가야 하는 신세가 되어서 하나님께 기도하였지만 응답이 없었는데 누구는 옆에서도 도와주고 하는데 전혀 도움이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는데 한달 후에 응답하셔서 교회에 전도사님으로 가시게 되었고 대 학의 전임교수로 가게 되셨는데 예전에 그 어려운 때가 생각이 나서 눈물이 쏟아 졌다는 이야기.
보십시오. 신자가 시련을 당할 때 하나님이 아니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견디기 힘든 고통이 오고 영적인 한계에 몸부림치면서 마음에 참된 하나님과의 행복이 사라질 때 하나님 이외에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 이외에 길을 찾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에는 결국은 다른 길로 가면 아무 도움이 안 되는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도 그래야 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차피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잘해도 이 세상이 천국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럼 왜 우리의 신앙에 선배들이 ‘괴로움과 죄가 있는 곳 나 비록 여기 살아도...’ 찬송했겠어요. 누가 나그네 길이라고 말했겠어요. 누가 본향을 사모했겠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합니다. 여러분의 문제가 무엇이든지 간에 참된 치유책은 우리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높은 벼랑에 서 있으면 서 있을수록 하나님이 거기서 여러분들의 기도를 들으시며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 의지하며 하나님을 바라보며 매달리며 기도한 이 시인이 어떠한 마음의 상태에서 어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시인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어리석은 자를 보존하시며 낮아질 때에 구원하셨도다” 어리석은 자, 여기서 어리석다고 하는 것은 멍청하고 아는 것이 없고 바보 같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어리석다고 하는 것은 시련을 만났을 때에 사람의 잔꾀를 포기했기 때문에 순수해진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어리석은 것은 어느 관점에서 본 것입니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는 세상 사람들의 지혜의 관점에서 볼 때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것 보십시오. 그런 환난과 시련이 생겼으면 어디 돈이라도 꾸러 다니고 어디에 호소문이라도 내고 어디에 가서 한푼이라도 벌어야지 오층 꼭대기에 가서 매일 땀이나 흠뻑 젖도록 기도하고 내려오면 그게 무엇이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 앞에 항복하기 전까지는 하나님만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여러분 기억하셔야 합니다.
(예화) 전대통령 시대에 서진 룸싸롱 사건 때, 폭력배들이 그 당시 정권과 관련이 되어 있으므로 잡혀 있으면서도 높은 분들이 뒤에 있다는 생각으로 거들먹거렸는데 사 회문제로 확대되어서 도움을 받지 못하고 사형을 언도받자 자신만만하던 폭력배 들이 덜덜 떨며 우는 모습은 모든 것을 의지하던 마음을 잃어버린 마음의 상태라 는 이야기.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런 마음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시련을 만났는데 아직까지도 잔머리를 굴리십니까? 기도하고 아버지 앞에 매달리는 대신에 여기저기 집적거리며 찾아다면서 이 사람, 저 사람을 끌어들입니까? 함께 망하려면 무슨 일을 못하겠습니까?
여러분, 시인은 어리석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세상의 지혜를 다 버린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요나를 생각해보십시오. 풍랑이 일었습니다. 그 사람들, 뱃사람들은 평생을 바다 위에서 산 사람들이어서 풍랑을 수없이 만났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우선 짐을 버려야 됩니다. 짐을 버리고 배를 가볍게 하고 그러면 홀수가 높아져서 파도가 많이 쳐도 넘어오지를 못합니다. 짐을 버려서 배를 높이 띄우고 그리고 배를 가볍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돛을 내려서 큰바람을 맞지 않게 하는 등 다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파도가 그쳤습니까? 아닙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일상적으로 오는 풍랑이 아니라 요나를 내어놓으라는 하나님의 의미가 있는 풍랑이었습니다.
여러분, 잔머리를 굴려서 해결이 되고 잔재주로 넘어갈 수 있는 시련은 사실 시련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 앞에 세우시려고 마음을 가지시면 이제는 아무 것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요나를 내어놓기 전까지는 부서질 듯이 풍랑이 난리를 치는 것입니다. 요나를 던지고 나니까 잔잔해집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그 짐을 버리지 않았어도 되었습니다. 그것이 다 잔머리지. 요나를 내어 주었으면 짐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사람도 상하지 않았고 배도 상하지 않았을텐데 요나를 내어놓지 않으니까 그 상황이 된 것입니다. 자기의 지혜를 포기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들이 시련과 어려움을 만나면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지혜를 동원해야 합니다. 불이 났으면 불을 끄면서 기도해야지 타는 것을 보면서 밖에서 ‘믿습니다’라고 한다면 마지막에 잿더미밖에 더 남겠어요.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인간적인 지혜, 잔머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데서 나온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는 지혜입니다.
(예화) 9년 동안 학교에 계시면서 숙제를 내줄때가 되면 성실한 학생들은 꾸준히 하는 데 잔머리를 굴리는 학생들은 농구, 족구를 하고 영화나 보는 등 허송세월을 하 다가 숙제 내 줄때가 되면 친구들의 도움을 구하느라고 잔머리를 굴린다는 이야 기.
그게 다 무엇입니까? 다 잔머리입니다. 그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항복입니다. 나는 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주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 처분만 기다립니다.” 그 마음이 어리석은 마음입니다.
그런데 무엇이라고 하셨는가 하면 “보존하시나니” 이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물건 같은 것들이 외부의 충격을 받을 때에 깨어지지 않도록 이렇게 보호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시련을 만나면 그러면 시련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깨지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우선 시련을 많이 만나면 인간이 깨집니다. 정신 구조도 깨지고, 인간 관계도 깨지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깨지고 아무튼 깨지는 것이 많습니다.
(예화) 친척이 시련과 고난으로 많은 상처를 받아서, 주민등록 초본을 때러 동사무소에 갔는데 자신의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는 이야기.
난 충분히 이해를 합니다. 그렇게 성격도 곱던 사람이었는데 시련을 만나고 짓이겨지니까 황폐하고, 황량하며, 거칠고, 포악스러운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그게 다 무엇 때문입니까? 시련 속에서 자신의 영혼, 자신의 인격이 보존받지 못하고 깨트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시련 속에서 자기 앞에 매달리는 사람들을 보존하시는데 그 폭풍우 같은 시련을 당하고 났는데 사람이 더 거룩해진 것입니다. 시험을 더 많이 받아가지고 그렇게 괴로움을 당하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는데 사람이 온유해지는 것입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더니 고난 당하기 전에는 주의 율례를 배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게 자기의 인간의 잔재주를 포기하고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을 시험가운데서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은혜 속으로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보니까 “낮아질 때에 구원하셨도다”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 체면, 과거의 경험 이런 것들을 다 버리고 하나님 한분에게 목숨을 건 상태입니다. 저는 언젠가 한번 원자력 병원에 심방을 갔는데 제가 방문하는 환자는 그래도 곧 퇴원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괜찮았었는데 무슨 일인지 의사가 와서 뭐라고 이야기를 하고 가니까 환자의 부인이 의사 까운을 붙들고 ‘선생님 살려주세요’ 하며 매달리는데 의사가 못 고치는 병인데도 매달리며 체면이고 뭐고 없었습니다. 나는 그 의사가 만약에 ‘당신 손가락이라도 하나 잘라서 주면 당신 남편을 고칠 수가 있다’고 하면 그 여자는 그 자리에서 칼로 잘라낼 것 같았습니다. 아무도 의지할 수 없어서 의사 한 사람의 옷소매를 붙들고 살려달라고 펑펑 울면서 복도 끝까지 종종 걸음으로 쫒아나가는 그 마음이 낮아진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아니시면 제가 어떻게 합니까?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가리까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것입니다. 주님, 나의 이 문제를 해결해질 수만 있고 나를 만나주실 수만 있다면 난 아무리 낮아져도 괜찮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낮아지는 것입니다. 문제가 많은 성도들을 만나 그 고통하는 장면이 너무 불쌍해서 그러지 말고 나도 기도해줄테니까 기도해라. 새벽에 나와서 기도해라. 밤에 너무 늦게 끝나서 새벽에 피곤해서 나올 수가 없어요. 직장에서 일찍 들어오는 날이라도 아니면 저녁에 와서 기도하라고 하면 일찍 출근을 해야 하기 때문에 금요일날 와서 기도하고 저녁 늦게 들어가면 토요일은 도대체 일어나지를 못합니다. 그것은 낮아진 마음이 아닙니다. 아직까지 한참 높은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 때문에 어리석은 자가 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한없이 낮아진 자가 되어서 주님의 은혜를 바라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이런 마음으로 주님을 찾기만 하면 주님께서 즉시 여러분들을 만나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시인처럼 “하나님 앞에 내가 어리석을 때에 나를 보존하시고 내가 낮아질 때에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도다. 그랬기 때문에 나의 간구하는 음성을 들으심으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도다”라고 고백할 수 있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제물은 낮아진 마음, 하나님 앞에 가난하게 된 심령, 이것이야 말로 주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산 제물입니다. 이렇게 되어서 주님을 만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5.가난한 심령을 가진 자의 수가지 은혜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시116:7-8)
이어서 시인은 자기가 세상을 향해서 어리석게 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낮게 될 때에 하나님이 어떠한 변화를 자기 속에 주셨는지를 회상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먼저 하나님 앞에 마음이 낮아지고 난 후에 처음 경험한 것이 평안이었다고 오늘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 마음이 낮게 될 가난한 때에 제일 먼저 심령에 평안함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향해서 교만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주실 수 없는 축복입니다.
우리들이 어떠한 어려움을 만나고 시련을 당해도 만약에 우리들의 마음속에 평화만 깨트려지지 않으면 우리는 이길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 평안이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화해로 말미암아 비롯된 참된 평화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안녕”이라고 번역을 하면 가장 좋을 것입니다. “안녕하십니까?” 할 때 그런 안녕입니다. 그런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먼저 환경을 바꾸고 고치시기 전에 심령에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향해 마음이 낮아진 사람에게 주시는 참된 축복입니다.
우리모두 하나님 앞에 마음이 가난해지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한 사람들은 평안이 무엇인지를 아마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면서 주님께 기도하다가 보면 이제 나의 모든 희망이 오직 하나님께 있고 그리고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면 아무 희망이 없다. 그리고 지난주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더 이상 인간의 잔꾀나 인간의 잔머리, 잔재주, 이제껏 까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살아왔던 불신앙적인 지혜들, 이런 것들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이제는 주님께 호소하는 것밖에는 대책이 없다 이런 생각이 들었을 때에 실제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릴 때에는 사실 기도를 간절히 하지 말라고 그래도 간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정도 여유가 있어야지 좀 재주도 부리고 그리고 폼도 잡는데 이제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면 곧 죽어버릴 것 같은 그런 상황에 놓였을 때는 진짜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 도움이 없다라고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찹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는 특별한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론 잘 때는 자고 먹을 때는 먹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특별히 하나님 앞에 세우시려고 하는 그때에는 그런 질서를 지키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창조의 원리는 저녁이 되면 자야지 만, 이때는 철야를 하면서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먹어야 살게 마련이지만 금식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평상시에는 기도가 일을 하기 위한 준비운동처럼 생각하지만 정말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 앞에 세우시기 위해서 우리를 기도로 몰아가시고 우리를 낮추실 때, 그때에는 사실 그 모든 것보다도 기도가 가장 우선 순위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기도는 마치 우리의 입에서 기도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액체를 빨아들이는 스펀지처럼 우리의 입에서 기도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 기도가 속히 하나님께로 올라간다라고 하는 뚜렷한 느낌을 우리들이 받게 됩니다. 일단 마음이 낮아진 가운데 기도하기 위해서 부르짖고 그렇게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으며 기도할 때에 주님이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신다라고 하는 강한 확신이 우리에게 밀려오면 제일 먼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은 평안입니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에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그런데 저도 경험을 해봤지만 그렇게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리면서 기도하고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을 정도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나면 전에는 마음을 낮추지 않았을 때는 기도를 하면 꼭 무엇과 같으면 여기서 기도를 쏘았는데 공중에 확 가루가 되어서 흩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환난을 당하고 시련을 만났을 때에 기도를 열심히 해야 된다고 말하지만 그 사람이 특별히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 앞에 관리한 사람이 아니라면 환난과 시련을 만나면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하라고 그럴 때에 아멘 하고 순종하면서 열렬하게 기도를 해서 하나님 앞에 빨려 올라가는 것 같은 그런 기도를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사실 시험에 든 사람이 아닙니다. 어려움을 당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주님께서 그 기도를 빨려 올라가듯이 하나님이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들어주시는데 그런데 그게 결국은 환난을 당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기도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환난이 사람의 마음을 강팍하게도 하고 낮추기도 합니다.
바로의 경우를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주지 않을 때, 그 애굽에서 수많은 환난을 당합니다. 전대미문에 환난을 당하면서 나라가 온통 발칵 뒤집혀서 나중에 신하들이 벌떼처럼 일어나서 왕에게 항론을 합니다. “나라를 어디까지 데리고 가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주지 않는 것입니까?” 그럴 정도가 될 정도로 환난을 당했는데도 바로는 어땠습니까? 환난을 당하면 당할수록 점점 더 강팍해졌습니다. 이게 바로가 불신자이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일어난 것만이 아니라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환난을 당하면 모든 사람들이 가난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환난을 당하면 오히려 더 이를 악물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리고 자기 고집대로 살려고 하고 마음이 강팍해지기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시련에 빠지면 반드시 시험에 들기가 쉽습니다. 시련이 그 무엇을 통해서 왔든지 간에 하여튼 시험에 들기가 쉽고 시험에 들게 되면 악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해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도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어쨋든지 간에 그렇게 환난을 만나면 우리의 기도가 이렇게 허공에 흩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에는 기도하면 그 기도가 환난 속에서 간절히 기도하면 그 기도가 빨려 올라가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마음을 어떻게 가졌는가. 마음이 어떻게 됐는가.
그래서 시인이 경험한 것처럼 어리석은 자가 되고 인간의 지혜와 잔꾀를 포기한 사람이 된 후에 진정으로 낮아진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고 나면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그 기도가 막 빨려 올라가는 것입니다. 사실 기도의 세계를 경험해 본 사람들은 알지만 마음을 완전히 낮추고 이 정신과 생각의 모든 초점을 하나님께로 향한 후에 주님만이 나의 참 소망이시고 나를 이 환난 가운데서 건져내실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이시다는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 우리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 기도라고 하는 작은 통로로 모두 밀리면서 빠져나가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지 않습니까?
(예화) 가래떡을 만드는 과정 이야기.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심령이 정말 가난한 상태가 되면 온갖 우리 안에 있는 수많은 잡다한 생각이 얼마나 많습니까? 심리학자들이 말하기를 일년에 인간의 머리를 스쳐가는 생각들이 십만 가지라고 합니다.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많은 것들이 그냥 기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절구공이로 막 때려 집어넣으면 생각은 그렇게 많은데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 오직 그 모든 것들이 하나로 모아져서 주님을 만나야 되겠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원합니다. 그런 기도제목 하나로 모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쭉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예전에 그렇게 관심이 많던 것들이 이제는 관심이 없습니다. 옷이건, 그것이 아무러면 어떻습니까? 또 사업이 어떻고, 그것이 지금 무슨 문제입니까? 집에 무슨 색깔이 어떻고, 그게 무슨 문제입니까? 구두가 다 떨어지고, 그게 무슨 문제입니까?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 시며 나의 구원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에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그 기도제목 하나로 다 모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가난해질 때에는 기도의 양이 많아지기는 하지만 종류와 제목이 많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입니다. 여자들이 매일 무엇도 떨어지고, 무엇도 없다고 하는 것은 한 가지를 말합니다. 돈이 없는 것입니다. 뭘 그렇게 복잡하게 이야기를 합니까? 가끔 동역자들이 만나서 자신들의 교회에 어려운 점들을 이야기를 합니다. 헌금이 잘 안나오고, 누가 시험에 들었고 뭐도 없고 그러면 제가 말합니다. “간단하네. 하나가 없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 은혜가 많이 있으면 돈이 저절로 나오지. 보십시오. 이번에도 은혜 받은 성도님이 에어콘을 일주일 사이에 마련해주셨습니다. 누가 싸우고 해도 은혜를 받으면 목회자보다 더 가슴 아파하면서 속썩인 것 용서해달라고 빕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정말 심령이 낮아지면 자질구레한 기도의 제목들이 사라지고 오직 하나로 다 집약이 되는 것입니다. ‘아, 진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하구나.’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세상에 있는 모든 유혹과 얽매인 우수사래를 모두 떨쳐버리고 생명을 걸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데, 그 기도를 하나님이 안 들어주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기도를 들으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지,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이든지, 짧게 다닌 사람이든지, 아니면 그 사람이 죄를 지은 사람이든지, 의로운 사람이든지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은 정말 자기를 찾는 사람, 그렇게 간절히 부르짖는 사람들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오해하지 말아야할 것은 우리가 커다란 시험에 빠지고 마음을 낮추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환난을 만나는 것도 아무렇게 하니까 환난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법칙을 따라서 환난을 만나게 되었듯이 거기서 벗어나는 것도 일정한 법칙을 따라서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신뢰하던 착한 성도들이 왜 믿음을 저버리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마음이 일반화되어서 하나님을 거스리고 그리고 어그러진 길로 걸어가며 불순종하였습니까? 그래서 왜 환난을 만나게 되었습니까? 그 모든 시발은 제일 먼저 자신의 마음속에 신령한 평화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해로 말미암아 비롯되는 마음의 참된 평정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평정을 잃어버리고 나니까 이제는 신앙적인 가치관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성도가 은혜를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할 때는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 우선 순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먼저고, 그리고 교회, 사랑하는 지체들, 나 뭐 이렇게 쭉 순서가 있습니다. 무엇을 먼저 해야 되는지도 압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일을 지키고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기도하고 무엇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살아야 되는지 이렇게 가치가 명확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마음의 평정이 사라지게 되면 이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를 모르고 날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동안에 하나님 섬기면서 살아가던 사랑도 다 팽개쳐버립니다. ‘아! 이것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의무이고 이것은 내가 마땅히 해야 할 도리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제는 ‘의무가 무슨 의무야 내가 하기 싫은데 난 못하겠어 힘들어’ 그러면서 다 집어치우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이 평안을 잃어버리고 평정을 상실하면서 이 가치에 대한 생각이 모두 뒤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하나님 앞에서 은혜가 떨어진 사람들은 행하는 행동이나 이런 것들이 아주 불규칙하고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가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죽어야 되겠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까 “난 죽는데 까지 쫓아갑니다. 이 사람들이 다 도망가도 나는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큰 소리를 치다가 조금 있으니까 “나는 예수 같은 사람을 전혀 모른다. 무슨 소리를 하시냐”고 그러면서 저주를 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하던 사람이 조금 있다가 닭이 우니까 펑펑 울면서 엉엉거리는 이렇게 뭔가 앞뒤가 연결이 안되는 이런 행동을 하는 모든 것들이 마음속에 하나님과의 평화로 말미암은 참된 평정을 상실했기 때문에 오는 현상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깨트려진 사람이 그 다음에 차례대로 이제 그렇게 깨트려진 하나님과의 관계가 자신의 삶 속에 투영되고 그 삶을 통해서 불순종하고 죄를 짓고 그런 것들이 오래도록 쌓이면서 배역이 되고 패역이 되는 것입니다. 고칠 때에 어떻게 됩니까? 다시 그 순서로 돌아와서 하나님이 고치시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의 망가진 속 사람부터 하나님이 고치시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고쳐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다시 또 시작되는 것입니다. 다시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치시는 방법이 제일 먼저 파괴된 하나님과의 화해를 먼저 이룩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평정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나면 하나님이 제일 먼저 주시는 것은 환경의 변화가 아닙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말씀에 은혜를 받고 충만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가도 문제는 문제대로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제일 먼저 하나님이 나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화목을 회복하게 하시고 그리고 하나님과의 참 사랑을 경험하게 하신 후에 내 마음에 진정한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평안을 주시는 것, 이것이 마음이 낮아진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사람에게 주시는 첫 번째 축복입니다.
일단 마음의 평화가 오기 시작하면 이제 어떻게 되는가 하면 우리의 마음이 흔들린 상태에서 평정을 되찾으면서 이제 우리의 정확한 모습, 그리고 혼돈되었던 우리의 사고들이 정돈되면서 이제 질서를 찾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해서 이런 환난과 시련이 오게 되었으며 또 이 환난과 시련이 왔을 때에 우리들이 어떻게 해서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항상 모든 문제를 푸는 시발점이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자기 자신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주위에서도 이렇게 보면 불행한 가정생활을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들을 원망하고, 자식들은 부모를 향해서 칼을 갈고, 부인은 남편을 원망하고, 남편은 부인을 미워하고, 동기간들은 또 서로 불화하고 그렇게 살아가는데 해결을 보는 집안을 봤습니까? 자손대대로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방향을 잘못 잡은 것입니다. 항상 신앙을 떠나서 불신앙의 세계에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누군가가 ‘다 나 때문이야’ 그러고 자기를 죽이면 그래도 조금 평화가 오기 시작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신앙의 세계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도움이 없이 뭔가 시련을 극복해보려고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시련과 환난을 당하게 하실 때에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그들이 낮아진 마음이 되어서 자기를 다시 들여다봄으로 깨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참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시려고 주님이 사랑하는 자녀들임에도 불구하고 시련을 주셨는데 하나님과의 관계는 내버려두고 사람들 붙들고 통사정하고 매달리거나 혹은 사람들을 향해서 원망의 말을 퍼부으면서 그래서 그 어려움을 벗어나 보려고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믿음이 있는 사람들로 보시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평화를 제일 먼저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어떤 일로 인해서 환난을 당하고 시련 가운데 있는지, 또 여러분들의 인생을 곤고하게 하는 기도의 제목이 무엇인지 저는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여러분들의 시련이 무슨 이유 때문이든지 간에 항상 동일한 길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해야 하는 통로를 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이 시련을 통해서 나를 하나님 앞에 독대(獨對)하게 하시는구나’ 그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과 대면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용서 빌 것은 용서를 빌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때, 그때에 낮아진 마음을 가진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평안을 소유하고 나면 이제 내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 시인은 두 번째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주께서 나를 후대하심이로다.” “후대” 시련을 만나서 환난가운데 낮아져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더니 주님이 심령에 평안을 주셨는데 그런 평안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깊이 깨달은 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후대하시는 분이시구나’ 후대한다는 말은 자기가 예상치도 못했던 후한 대접을 자신에게 베풀어주셔서 감동했다 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고백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은 시련과 환난을 만나서 자기에게 피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많은 은혜들을 예비하신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시편 31편에서 다윗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위해 쌓아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한 자들을 위해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시인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상처와 실망을 많이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로부터, 자라서는 동기간으로부터, 더 커서는 아내로부터, 그리고 더 장성해서는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로부터, 그리고 심지어는 자신이 아꼈던 부하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인간들로부터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다윗의 주변에 다윗을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들도 있었고 또 요나단과 같이 사랑 어린 교제를 나눌 수 있는 특별한 하나님의 선물로 주신 사람들이 없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것은 다윗의 생애에 있어서 너무나 적은 부분이었고 그는 꼭 사랑받고 위로를 받아야 할 관계 속에서 뼈아픈 배신과 그리고 상처를 경험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시인은 하나님께로 피했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들로부터 신물이 나도록 괴롭힘을 당하고, 믿었던 사람들로 인해서 깊은 상처를 받을 때, 그때 우리들이 그 사람에게로부터 도망쳐서 하나님께로 피할 때, 사실 우리들이 갖는 첫 번째 기대는 ‘더 이상 사람들로부터 받는 이 고난, 아픔, 배신, 상처 이런 것만 없는 세상에서 살았으면 참 좋겠다’라는 단순한 마음에서 사람들에게로부터 피해서 홀로 있기를 원하거나 혹은 하나님께로 도망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항상 사람에게로부터 깊은 상처를 받고 고난을 당한 후에 하나님께로 도망치고 나면 우린 얼마 있지 않아서 정말 이곳에 내가 피난을 온 것인지 휴가를 온 것인지를 모를 정도로 여기가 참 좋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탕자의 비유에서도 잘 입증이 됩니다. 탕자가 남의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해서 모든 것을 버린 후에 이제는 흉년까지 들어서 얻어먹을 길이 막막했고 돼지우리에 함께 기거하면서 돼지가 먹다 남은 쥐엄 열매라도 하나 먹어보려고 찾았지만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그는 낮아진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 가득히 밀려오는 그리움이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그런 적이 없었는데 이제 진정으로 가난해지고 나니까 예전에는 느낄 수가 없었던 그리움이 깊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아버지에 대한 참된 그리움입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집으로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했을 때 무엇을 기대했을까요? 그는 아무 것도 기대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오직 소망하는 것은 한 가지, ‘나는 이 기근 때문에 죽게 되었으니 기근이 없는 아버지의 집으로 도망가리라.’ 아버지의 집으로 도망칠 때에 그가 기대하고 있는 것은 다만 굶어죽지 않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이제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할 수가 없나이다 나를 품꾼 가운데 하나로 생각하십시오. 밥만 먹여주면 일을 하겠습니다.”
사실을 굶주림을 피해서 아버지의 집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겨우 밥을 먹여주던가요? 아닙니다. 돌아왔을 때에 아버지는 밥만 먹여준 것이 아니라 잔치를 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새 옷과 새 신발을 입히고 신기고 가락지까지 끼어 주셨는데, 그 당시에 가락지는 재산권을 행사할 수 있는 도장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유산을 다 타 가지고 갔는데도 아직 까지도 아버지의 재산에 대해서 뭔가를 행사할 수 있는 그 권리를 회복시켜주셨습니다. 명실공히 자기 아들로 다시 회복시켜주신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게 바로 후대입니다. 환난과 시련을 만나서 하나님께 도망칠 때에는 이 슬픔과 눈물이 없는 곳이면 어디든 좋겠다는 마음으로 도망쳤지만 하나님께서는 단지 시련과 환난을 모면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피난처에서 하나님과의 은밀한 사랑을 맛보게 하시고 오히려 환난을 당하지 않고 시련을 몰랐더라면 깨달을 수 없었을 주님의 큰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화) 25년 전에 은혜를 받고 동두천에 있는 기도원에서 어느 권사님이 사랑하는 딸을 사고로 잃어버렸는데 그 딸이 죽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것이라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아무리 가르쳐 주어도 알지 못하니까 그 사랑을 가 르쳐 주시려고 자식을 데려 가면서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해주셨다는 이야 기.
풍랑을 인해서 하나님께로 가까이 간다는 고백입니다.
고요한 바다로 저 천성 향할 때
주 내게 순풍 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사실 이런 고백은 우리 모두가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고속도로 같은 인생일 때, 승승장구 할 때,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덕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할머니가 고백한 것처럼 그런 고백이 그런 찬송 속에 또 나와야 합니다. ‘큰 풍랑이 일어나 내 쉬지 못하나 그 풍랑 인연하여서 주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풍랑이 이는 그 인생의 시련을 통해서 자기에게로 더 가까이 부르시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느끼고 나니까 시련을 만나서 마음이 가난해져 하나님께 기도할 때는 그저 위로나 받고 슬픔이나 모면해보려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는데 주님이 그 시련 속에서 나를 후대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경험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어느 쪽을 택해야 하겠습니까? 시련을 당했을 때에 여러분들이 큰 시련을 만나서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고 마음을 아버지께 낮추지 않으면 시련 속에서 시험에 들고, 사람을 원망하고,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다가 결국은 하나님을 모욕하면서 죽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련 속에서 하나님께 피하면 하나님이 그의 피난처가 되어주시고 그 피난처 속에서 하나님은 밀월의 시간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가만히 보면 가난하던 때를 우리들이 그리워하게 됩니다. 지난 주에 제가 가난 이야기를 좀 했더니 메일에 편지가 막 들어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도 어떤 때는 가난하고 견딜 수 없는 시련 속에서 아파하던 때가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돌아가고도 싶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시련을 만나고 싶어서 돌아가고 싶은 것이 아니라 가난이 그리워서 돌아가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이 있으면 이야기 하십시오. 내가 얼마든지 가난해줄 사람이 있으니까. 다 털어내놔. 그러면 가난해지니까- 더 솔직하게 말하면 겉으로 볼 때는 그렇게 고통스럽고 눈물 골짜기 같은 인생을 지났는데 속을 뒤집어보면 그 속에 요즘과 같이 평안한 때에는 누리지 못했던 하나님과의 그 온전한 평화, 주님의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과 나누는 사랑의 관계가 얼마나 깊어질 수가 있는지. 그런 고백의 진수가 그 삶에 구관 속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고통을 내가 다시 한번 맛보면서라도 그런 온전한 사랑과 온전한 순결, 그리고 순수한 하나님과의 교제 속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 마음뿐만 아니라 아마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고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면 그 때만 하나님이 그러시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들이 만약에 그 때보다도 훨씬 가난하지도 않고 그 때보다도 훨씬 더 평안하게 살면서 신령한 면에 있어서 그런 하나님과의 충만한 사랑, 후대하시는 하나님의 큰 자비를 우리들이 못 느끼고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여유있는 환경이나 삶 때문이 아니라 그런 여유 속에서 하나님 앞에 부패해져 가는 우리의 마음과 정신의 문제이지 환경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아까도 제가 인용한 시가 있습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해서 쌓아둔 하나님의 은혜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 그 고백을 한 사람이 제왕이었습니다. 왕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가질 수가 있고 모든 것을 가진 왕이었는데도 보십시오.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고 인생 앞에서 하나님께 피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니까 그의 많은 권력이나 많은 소유가 하나님을 향해 기울어지는 그의 마음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벌거벗은 모습으로 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가장 작은 어린아이와 같고 그리고 주님께로 돌아가서 그 분의 품에 피하기 전까지는 아무 희망이 없는 인간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며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에 목숨을 건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부자라는 이유 때문에 선대하시는 법도 없지만, 부자라는 이유 때문에 박대하시는 법도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 앞에는 눈에 보이는 그 사람이 물질적으로 부자인가, 가난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정말 마음이 하나님 앞에 낮아진 사람,
저는 실제로 보면 가난한 부자도 많지만, 돈 한푼이 없는 부자들도 많습니다. 진짜 부자인데도 마음이 늘 가난한 것입니다. 깨트려진 심령으로 주님을 고대하고 주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푼도 없고 거렁뱅이와 같은 신세가 됐는데도 무엇을 믿는 것이 그렇게 많은지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으려고도 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도 않는 그런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후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후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시인은 경험했습니다. 평안도 경험하고 하나님이 자기를 후대하시는 것도 경험했습니다. 참 놀랍습니다. 결국 후대해 주신다는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 이상으로 커다란 자비와 은혜를 베푸시는 것인데 사실 이것을 통해서 무엇을 확인하게 되는가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는 그 관계를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예전에 모시던 목사님이 시골로 집회를 가셨는데 그 교회의 중직 자의 집에 가 셔서 긴 시간을 기다리신 끝에 식사 대접을 받으셨는데 너무나 초라한 상을 받으 시면서 느낀 점은 초라한 상이 문제가 아니라 몇 년에 한번 있는 집회에 온 강사 를 이렇게 소홀히 대하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중요하게 생각하겠으며 집회에 대해서 무엇을 기대하겠으며 또 그 사람이 평소에 하나님을 향해 교회와 목회자를 향한 마음을 읽었기 때문에 불편한 심기가 되었다는 이야기.
무슨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까? 후대는 우리들로 하여금 참 넘치는 그런 관계를 확인하게 끔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열린 교회에 다니고 “김 목사님이 나를 참 잘알아. 나를 사랑하셔. 너 우리 교회에 가자.” 그리고 친구를 데리고 와서 문 앞에서 나를 만났는데 “목사님, 안녕하셔요? 제 친구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자네 어느 교회에서 왔어요? 그리고 우리 교회 교인이 맞아요?” 그렇게 물어보면 여러분, 얼마나 상처를 받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야, 너 훌륭하구나.” 옆에 있는 친구한테 “너는 누구의 허락을 받고 이렇게 좋은 친구를 사귀게 됐니?” 이렇게 이야기를 해야지만 좋지 않습니까?
후대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혜택을 주셨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런 은혜를 주시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가 시련을 만났을 때에는 ‘아, 이제 하나님도 나를 기뻐하시지 않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우리들이, 환난을 만나고 누구도 의지할 수 없을 때는 ‘아, 이제 하나님의 은혜가 다했는가 보구나.’ 또 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그런 시련을 만났을 경우에는 더 더욱 가책이 큽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로 피하고 그 하나님께서 평안, 그리고 평안을 넘어서는 후대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시험가운데 들었고 잠시 하나님을 만났으나 그래서 곤고하게 되었으나 여전히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으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삼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시인이 감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관계에 대한 감격이 필요합니다. 신자가 왜 하나님을 떠나서 불순종하고 왜 신령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도록 부름을 받았는데도 더러운 세상의 나라를 기웃거리면서 쥐엄 열매나 찾는 신세가 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깊은 감격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나의 시험에 든 처지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사랑이 여전히 내 마음속에 역사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여전히 내 마음속에 불일 듯 일어나고 환난과 시련을 만났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이제 더 이상 은혜를 받을 수 없는 존재인 것같이 생각되었지만, 하나님 앞에 나아가 마음을 낮추고 주 앞에 포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며 주님의 이름을 불렀을 때, 주님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셨을 때, 주님이 우리의 마음속에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그 관계를 경험하게 해주셨을 때 우리는 비로소 시련 속에 빠졌을 때에 잠시 약화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모두 복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시련 가운데서 다시 만나고 싶어하시는 이유입니다.
시인은 시련을 만나서 하나님께로 피했더니 하나님께 피한 그곳에서 후대하시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경험하면서 시인은 다시 한번 하나님이 세상을 향해 어리석은 자가 되고 인간의 잔머리와 잔재주들을 버리고 마음을 낮추며 주님의 구원을 사모하는 자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경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뒤편으로 넘어가면 이 시인이 이제는 주님만 바라보고 찬송하며 살도록 결심하는 것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이 시련을 만났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이 어떻게 마음을 갖느냐에 따라서 그 시련은 사실 하나님의 큰 은혜를 맛보고 주님과의 관계에 감격을 누릴 수 있는 기회가 될 수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을 성경이 증언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후대하시는 관계의 감격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마음이 낮아진 가운데 하나님의 후대하심을 경험한 다음에 주님이 행하시는 실제적인 구원에 행동들을 그 다음 절이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영혼을 사망에서 눈을 눈물에서 발을 넘어짐에서 하나님이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이것도 보면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나오는 구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선 영혼을 사망에서 건져내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망이라고 하는 것은 물리적인 죽음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가운데서 살아가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도 영혼이 죽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죽음의 상태에 있을 수는 있습니다. 살았다고 하기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졌고 주님의 신령한 은혜의 영향이 거의 미치지 않는 죽어있는 영혼에 상태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시인이 마음을 낮추고 하나님께 간절히 주님의 얼굴을 구하고 주님을 찾는 이 겸비한 마음이 된 결과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의 회복입니다. 아까 이야기가 다시 반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다시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눈에 눈물을 씻겨 주었습니다. 이것은 슬픔을 거두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나서 경험하는 제일 뚜렷한 변화 가운데 하나가 슬픔에 대해서 강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있으니까 그 사랑을 가지고 슬픔을 극복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령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목마르고 눈물을 많이 흘리는 사람들은 세상적인 이유를 가지고는 많이 울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 중에서 주님을 뵙고 싶어서 흘리는 그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리고 닦아주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은 하나님만이 그를 만나주심으로서 그 눈물을 그치시게 할 수가 있거나 혹은 그 슬픔에 눈물이 변해서 감격의 눈물이 되게 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대부분 닦아주어야 할 눈물들은 무엇인가 하면 세상적인 이유 때문에 흘리는 눈물들입니다. 죄인들이 흘리는 눈물이 무엇인지 보십시오. 돈이 없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받아서, 인생이 너무 슬퍼서, 인생의 무게를 짊어질 수가 없어서 그래서 흘리는 눈물들입니다. 그 눈물들을 닦아주기 위해서는 우리는 동일한 이유로 눈물을 흘리는 약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입니다.
그 시인이 그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마음이 낮아진 가운데 주님의 얼굴을 구하고 나니까 하나님이 이제 이 세상적으로 흘리는 눈물을 다 씻겨주시는 것입니다. 전에는 돈에 몰려서 울었고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해서 울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을 만나고 겸비해진 마음으로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나니까 이제는 더 이상 그런 것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이제 흘리는 눈물은 이제 신령한 의미에 눈물로 바뀌는 것입니다. 시인이 그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고백하기를 “발을 넘어짐에서 건져 주셨도다”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예전에 하나님을 모르고 아무렇게나 살다가 걸려 넘어졌습니다. 왜 인생은 시인의 표현에 의하면 인생은 캄캄한 숲 속을 지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항상 작은 등불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큰 빛도 필요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시편 119편에서 말씀하는“여호와의 말씀은 내 길의 빛이요, 내 등이니이다” 그래서 큰 빛으로 우리의 길을 비추어 주시고 작은 등불로 매일매일 살아가는 우리의 이 삶을 비추어야 합니다. 그 비취는 작업에 대해서 ‘정사’라고 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게 비추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트려진 사람에게 무슨 말씀의 빛이 있겠습니까? 이런 것들이 없으니까 갈 수 있는 곳은 모두 가보고 부딪혀서 넘어지거나 피를 흘려 깨어지기 전까지는 그 길이 잘못된 길인지를 알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러지고 깨트려지고 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할 때에 주께로 돌아와서 주의 은혜와 사랑을 구한다고 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런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구할 때에 결국은 상처받고 고통을 받은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다른 사람이 와서 우리에게 입힌 상처도 많지만 우리가 말씀의 빛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스스로 걸어가다가 부서지고 깨트려진 그런 상처도 많은 것입니다. 그것을 혼자 얼싸안고 자기의 연민에 빠져서는 결코 회복될 수 없습니다. 넘어진 것은 우리지만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우리를 건지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시인이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여러분들은 어떤 길을 택하시렵니까? 지난주에 이어서 금주까지 이어지는 성경 말씀을 보면서 환난과 시련을 만날 때에 계속 마음을 세우고 교만한 가운데 하나님을 대적하며 계속 넘어지고 그 눈에 눈물이 흐르고 영혼은 사망 가운데 있는 자로서 살기를 원합니까? 마음을 낮추고 인간의 잔재주를 포기하고 전폭적으로 주님을 만나기를 사모하여 그 시련 속에서 후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고 신령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기회로 삼으시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는 시인이 환난과 시련 속에서 경험한 이 후대하시는 관계의 감격을 여러분 모두가 경험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주 앞에 나아가서 시련 속에서 지는 자들이 되지 말고 시련 속에서 겸비하게 마음을 낮추어 주님을 뵈옵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6.바라고 기도하는 자를 만나주심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시40:1-2)
우리가 비록 거미줄 같은 믿음을 붙들고 살아온 신앙의 길이었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신앙에 과거를 돌아보면 항상 찬송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찬송은 항상 사연을 갖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어떤 시기에는 이런 찬송이 우리의 마음에 고백이 되었고 또 어떤 시기에는 저런 찬송이 우리의 마음에 고백이 되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긴 인생을 살지는 않았지만 늘 손때 묻은 찬송가를 보면 어떤 페이지에는 많이 쭈그러져 있습니다. 거기에 얼굴을 묻고 찬송을 부르다가 운 눈물이 배어 있는 것입니다. 어디 이런 사연이 저에게만 있겠습니까? 여러분 모두에게도 이런 찬송의 사연이 있을 것이고 그런 속에서 여러분들의 신앙이 이어갔을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참 아이러니한 사실 하나가 있는데 역사가 전쟁과 공포, 기근, 질병 이런 것들로 시달릴 때에 오히려 찬송가가 많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 아이러니합니다. 핍박을 많이 받은 시기에 심금을 울리는 찬송이 많이 나오고, 성도들이 고난을 많이 당하는 시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노래들이 많이 지어졌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럴까요? 그것은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그들이 예전에는 도저히 발견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성품과 자기의 백성들을 향한 주님의 섭리를 발견하고 새로운 노래를 마음에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을 만나고 깊은 변화를 경험한 다음에 즉시 느낀 것이 무엇인가 하면 언어의 궁핍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놀라운데 우리는 매일 기도할 때 ‘좋으신 하나님, 존귀와 찬송을 세세무궁토록 홀로 받으시기에 합당한 하나님’ 그런 것들이 내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느낌을 담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고 또 그렇게 기도하는 많은 사람들이 정말 그 하나님의 성품을 느끼면서 기도한다기 보다는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그 틀에 의해 기도하는 것 같은 느낌을 참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저만이 아니라 오늘 시편에 보면 그런 고백을 합니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하나님이 자기의 마음에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새 노래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자기가 맛본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특별하고 놀라워서 예전에 유행하던 가사를 가지고는, 예전에 널리 알려진 가락을 가지고는 도저히 하나님을 찬송할 수가 없어서 새로 지은 노래라는 의미도 되지만 그러나 사실은 이미 있었던 찬송이라고 할지라도 늘 알고 있는 가사라고 할지라도 새롭게 경험하면 그게 새 찬송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난주에도 제가 딸을 잃어 버린 어느 권사님의 간증을 말씀드리면서 그 고난을 통해서 503장 찬송이 가슴에 깊이 밀려왔다.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게 새 찬송입니다. 늘 불렀는데 이제껏 불렀을 때는 그 찬양에 진정한 의미를 몰랐는데 어떤 사연이 있어서 하나님의 새로운 성품과 은혜를 경험하고 난 다음에 자신의 마음에 깊이 파고 들어오는 찬송이 되어서 사실은 이 찬송을 마치 자기가 작곡을 하고 자기가 짓고 그리고 자기가 부르는 것처럼 그렇게 자신의 마음과 합일된 가운데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노래,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새 노래입니다. 하나님께 올릴 찬송입니다. 그런 찬송을 시인이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올릴 찬송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늘 명예를 돌리는 것이고 하나님께 늘 감사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늘 높이는 것이지 하나님을 짜증나게 만들고 하나님을 깍아 내리는 그런 곡조들이 찬송일 수가 없습니다. 찬송은 항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을 경배한 내용들, 감사한 내용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찬양을 드리게 된 배경이 무엇인가 하면 깊은 웅덩이와 수렁에서 그런 찬송을 하나님 앞에 부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깊은 웅덩이와 수렁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그런 찬송을 부를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활동하고 있는 이 시대에는 짐승을 잡는 방법 중에 하나가 웅덩이를 파고 함정을 만들어서 짐승을 거기에 빠지게 해서 포획하는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양떼나 가축들을 노리는 짐승들을 잡기 위해서 사람의 키만한 깊은 웅덩이를 파고 거기에 올무를 놓고 그리고 거기에 짐승들이 빠지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들판을 가로지르면서 표호할 때에 모든 짐승들이 벌벌 떠는 맹수라고 할지라도 이 웅덩이에 빠지고 나면 그는 아무 힘이 없습니다. 웅덩이에 빠지고 나서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깊은 웅덩이에서 두 발을 하늘을 향해 높이 들고 울부짖으며 흙덩어리를 긁어내리지만 그러나 그는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그 수렁에서 벗어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이 수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전쟁을 할 때에 이런 수렁이 있는 곳을 살짝 덮어서 수렁이 아닌 것처럼 만들고 거기에 사람들이 쫓아오게 해서 빠트리는 그런 전술입니다. 늪지대 같은 수렁에 빠진 사람들은 물에 빠졌거나 웅덩이에 빠진 사람들보다 훨씬 더 절망적입니다. 왜냐하면 물 속에 빠진 사람들은 몸부림을 치면 그래도 생명을 연장할 수가 있고 헤엄을 칠 수가 있지만 갑갑하면 물 속에 내려가서 숨이라도 몰아내어 쉴 수가 있지만 그러나 이 깊은 수렁이에서는 불가능합니다. 나오려고 허우적거리며 몸부림치면 칠수록 그는 점점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점점 더 자신의 힘으로 헤어나올 수 없는 늪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내려가는 것입니다.
요컨데 오늘 시인이 깊은 웅덩이와 그리고 기가 막힐 웅덩이와 그리고 그 수렁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해주셨다고 하는 이 고백은 결국은 자신의 인생을 살면서 경험했던 깊은 시련과 침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종류의 시련을 두고 시인이 말하는 것인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쉽게 상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자신의 죄로 인해서 깊이 빠져 들어간 침체의 늪입니다. 시인은 진실로 거룩한 성도였고 우리가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정결하게 일생을 살아온 교과서적인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성경을 볼 때마다 하나님이 허물 많은 인간들을 들어서 사용하시는 복음을 봅니다. 초대교회의 지도자로 세운 베드로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실패한 사도들 가운데 괴수였습니다. 이방 전도에 아버지로서 복음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는 도구가 되어 오늘날에 세계 복음화에 전초를 놓았던 사도 바울이 스스로 고백하기를 핍박자요, 포행자요 그리고 죄인 중에 괴수인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어떤 사람이었고 오늘 이 시를 쓰고 있는 다윗은 또 어떤 사람입니까? 거룩한 인품과 주님을 사랑함에 있어서 우리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일지는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의 죄악에 의해서 깊은 침체를 경험한 사람이었고 그리고 왕으로 제위하고 있는 동안에도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서 왕국이 깊은 고통과 고난의 소용돌이 속에 백성들을 시달리게 만들어야 하는 그런 경험도 많이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결국은 그가 거룩하고 진실한 사람이었지만 인생 속에서 여러 번 자신 안에 있는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부패성과 깊은 죄악의 나락에서 이렇게 기가 막힐 웅덩이와 깊은 수렁에서 절망의 밤을 보내는 때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40편의 시기를 경솔하게 확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 하나는 무엇이든지 이 40편은 이 다윗의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절망적인 난관 속에서 주님의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다음에 쓰여진 시라고 하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어찌 그런 때가 없겠습니까? 남이 알 수 없는 자신만의 뿌리 깊은 죄악으로 인해서 깊이 고통하고 주위에 있는 수많은 사람도 자기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이제껏 인생을 살아왔던 능수능란한 처세술도 자신의 고통스러운 상황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판단될 정도로 깊은 침체 속에서 죄와 더불어 고통하며 기가 막힐 웅덩이와 그리고 깊은 수렁을 경험한 사람들이 왜 없겠습니까? 어쩌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이러한 인생의 밤이 가장 견디기 힘든 밤인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교회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예수에 미친 인간이라고 욕하지만 우리의 마음속에는 그 말이 사실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갈길 모르니 주여 인도하소서
어찌해야 좋을지 나를 가르치소서
어디가야 좋을지 나를 인도하소서
사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몰라서 그렇지 행복이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 시편 73편에서 시인이 고백한 것처럼 “주 외에는 나에 사모할 자가 없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것 말고는 신자에게는 별다른 행복이 없습니다. 인간의 모든 타락과 불순종은 그것 이상의 다른 행복들에 대해서 과다한 기대를 가지고 그것들을 추구하면서 사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다른 사람이 나보고 교회에 미친 사람이라고 말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나를 신앙밖에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내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내가 보기에도 그렇다고 말씀해주시지 않는데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런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서 오는 깊은 절망감, 영적인 깊은 침체를 경험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그런 경험들을 합니다. 여러분, 이런 기가 막힐 웅덩이, 이런 깊은 수렁에 빠졌을 때에 여러분들은 어떻게 여러분들의 영혼에 어두운 밤을 지냅니까? 나의 힘으로는 도저히 헤어나올 수가 없고 아무리 몸부림치며 애를 써봐도 깊은 웅덩이에 빠진 맹수처럼 한때 이 세상이라고 하는 들판을 가로지르며 하나님의 백성답게 울부짖었던 추억을 간직하고 그렇게 주저앉아 있는 상태에 있을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그런 영혼에 밤을 지내십니까?
뿐만이 아닙니다. 꼭 그런 죄만이 우리에게 깊은 침체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이 시인 다윗은 그 외에 다른 상황에서도 견딜 수 없는 깊은 수렁과 웅덩이 같은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특별히 자기를 미워하는 원수들로부터 받는 압제와 견디기 힘든 고난은 사실 이 시인의 인내를 초월하는 무거운 것이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 앞에 밤죄로 말미암아 그런 일들이 생겨나는 때도 있지만, 때로는 범죄와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을 시기하는 원수들이 자신과 시인이 질적으로 다른 삶, 다른 내면의 세계를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박해하고 핍박을 함으로 이 시인이 기가 막힐 웅덩이와 깊은 수렁에서 몸부림을 치는 경험을 해야할 때도 있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하나님 앞에 우리가 온전하고 완벽하다고 말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의 죄 때문인지 아니면 단지 하나님이 우리를 연단하시기 위함인지 모두 헤아릴 수는 없지만, 그러나 수시로 그 문제 앞에 설 때마다 문제는 지극히 커 보이고 우리는 한없이 왜소해 보여서 하나님 앞에 싸우기를 포기하고 살아가게 하는 그런 우리의 인생의 문제들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여러분들을 기가 막힐 웅덩이와 깊은 수렁 속으로 여러분들을 데리고 가지 않습니까?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자극을 받고 하나님의 크신 성품에 대해서 눈을 뜰 때마다 우리가 새롭게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되지만 그러나 순간순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도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기보다는 상황 속에 절망하고 낙담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고 주님과 화목한 가운데 큰사랑을 누리는 성도들이라고 할지라도 역시 고난은 아픈 것입니다. 시련은 쓰라린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인생에 밤을 어떻게 지냅니까? 더 더욱 이런 기가 막힐 웅덩이와 깊은 수렁 속에 빠져들 때에는 항상 공통적으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누구도 내 편이 아니라고 하는 절대적인 외로움입니다. 그런데 사실 신자에게 있어서 외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다시 두 종류로 나뉘는데 하나는 육에 속한 외로움입니다. 이런 것들은 자기가 혼자 있고 아무도 자기를 도와줄 수 없다 라는 생각이 밀려오면 올수록 더 부패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의 상처를 부여잡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을 뜨면 마주하는 현실이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에 어떤 육신의 쾌락이든지 세상에 즐거움이라든지 이런 것들에 쉽게 빠져 들어가면서 자신이 부패해지는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종류의 외로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령한 고독입니다. 원래 이 신앙이라고 하는 그 자체가 두려움에서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움 속에서 경험하는 절대의존의 감정이 신앙으로 그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언제나 하나님이 아닌 세상적인 이유 때문에 생기발랄하고 유쾌하고 그리고 슬픔과 비극이 뭔지를 모르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신앙의 행복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생기발랄하고 그리고 희망에 넘치는 시기를 우리가 청춘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철학자는 말하기를 “청춘이란 무엇이냐 청춘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 인간 세상에서 맛볼 수 있는 비극이 그를 건드리지 않은 상태에서의 삶, 그것이 젊은이라” 인생을 살면서 이런 저런 비극과 슬픔을 맛보면서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맛보면서 우리 인간은 비로소 우리 혼자의 힘으로 살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습니다. 그러면서 절대의존의 감정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구체적인 지식 속에서 표현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절대로 못 만나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하면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도 얼마든지 인생을 잘 살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씩씩한 사람들, 그리고 주님을 절대로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면서도 절대로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불행 속에서도 스스로 매우 강해지는 사람들, 비극을 맛보면서도 좌절을 할 줄 모르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결코 주님을 만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시인이 이런 기가 막힐 웅덩이와 깊은 수렁에서 맛본 그 고통이 변하여 하나님을 향한 새 노래로 변했는데 그러면 시인처럼 기가 막힐 웅덩이와 깊은 수렁 속으로 들어가는 인생의 비극을 경험하고 고통을 경험하고 슬픔과 좌절을 경험하는 모든 사람들은 다 이런 새 노래가 있는가.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젊은이들이 시집 장가를 갈 때, 가끔 자문을 구하러 오는데 제가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시밭 길을 헤치면서 살아온 사람하고는 웬만하면 결혼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가시밭 길을 헤치고 나아온 가운데 가시밭 길은 훌륭히 헤치고 나왔지만 헤치고 나오면서 입은 상처들이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웬만하게 살기가 힘이 들다고 하면서 단 예외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가시밭 길을 헤치고 나오면서 주님을 깊이 만난 사람들은 괜찮습니다.
시인이 그런 경우입니다. 왜 그런 가시밭 길을 헤치고 걸어나온 깊은 시련 속에서 치료하시고 싸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은 온상 속에서 자란 사람들보다 훨씬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죄인을 향해 쏟아 부어지는 하나님의 거룩한 긍휼은 단지 그 사람이 경험한 고통에 비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고통과 견딜 수 없는 시련 속에서 이 시인처럼 기가 막힐 웅덩이와 깊은 수렁에서 울부짖는 고통 속에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라도 주님의 긍휼과 사랑을 거의 맛보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슬픔, 작은 아픔 속에서도 그 아픔과 시련보다 훨씬 커다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시련 속에 있을 때에 맛보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은 고통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마음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집에서도 여러 애들을 기른 부모들의 말을 들어보면 어떤 애가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는가 하면 혼자서 자기의 할 일을 다 잘 알아서 하는 애들이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많이 받는 것이 아니라 툭 하면 엄마를 찾는 애들이 오히려 관심과 사랑을 많이 받는다고 합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오늘 이 시인이 깊은 시련과 고통 속에서 오히려 그 시련과 고통이 이 시인에게 가슴 벅찬 하나님을 향해 부를 새 노래에 간증을 안겨줄 수가 있었던 것은 단지 고통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고통 속에서 마음이 가난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성경은 이 시인이 하나님을 향해 가진 그 가난한 마음이 두 가지로 표출된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기다리고 기다리는 마음에 상태였고, 또 하나는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였습니다. 여기서 “기다렸다”라는 그 말씀은 단지 그저 막연히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를 시간적으로 기다렸다 라고 하는 의미이기보다는 다른 시편에서 고백하고 있는 바와 같이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는 것과 같이 그렇게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몸과 마음에 모든 생각을 그 한 가지에 집중시키고 그리고 그 한 가지의 변화에 인생에 모든 소망을 건 그런 종류의 기다림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단순한 기다림이었다기보다는 하나님을 바라고 또 바랬다 라고 표현하는 것이 훨씬 더 진실에 가까울 것입니다. 하나님께 희망을 두고 또 희망을 두면서 자신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기가 막힐 웅덩이와 허우적거릴수록 더 깊이 빠져 들어가는 그 수렁에서 밧줄 하나를 내려주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그 마음, 그것이 바로 이 시인이 경험한 가난한 마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이 무엇인가 이루어졌으면 하고 바라는 것과 실제로 그렇게 되기를 갈망하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은 있습니다. 그리고 바라는 것도 있습니다.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그런 기도의 제목들도 있습니다. 마치 신년이면 모두 모여서 덕담을 나누며 금년에는 이런 일들이 이루어지기를 저런 일들이 이루어지기를 그렇게 주섬주섬 주어 섬기는 그런 새해 인사처럼 그런 소원이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그런 소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소원이 열망이 된 사람들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예화) 대학에서 교수로 계실 때, 제일 신통치 않게 생각했던 여학생들이 있었는데 그림 같이 화장한 모습으로 단정치 않은 옷차림에 노트 한 권을 옆에 끼고 다니는데 자신들의 모습에는 그런 노트 한 권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마음이 공부에서 떠 난 학생들의 이야기.
보십시오. 하나님께 전심으로 몰두한 사람들은 삶과 사고가 단순합니다. 그게 사실은 경건한 생활에도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기가 막힐 웅덩이와 깊은 수렁에서 지금 사느냐 죽느냐 하는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 있는데 아름다운 이야기, 좋은 시간들, 맞있는 음식, 예쁜 옷, 사람들과 주고받는 내용 없는 대화 그런 것들이 시인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였던 에스라가 생각이 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기적적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을 때에 어느 날 보고를 받았는데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불경건하고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이방 여자들을 전부 첩으로 취하고 사악한 일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이 우두머리가 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바벨론에서의 안정된 삶을 모두 버리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원수들이 에워싸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하나님의 성전을 짓겠다고 할 때에 거기에 함께 동참했던 사람들의 마음은 부흥에 불붙은 마음이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주님의 집을 짖는 그 일에 온 마음을 쏟았고 그 영광을 위해서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올라온지 얼마되지 않아서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는 부패한 그 땅에 습성을 물려받은 그런 타락한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그 때에 이 학사 에스라가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하나님의 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전 문간에 엎드려서 정신나간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헤치고 주저앉아서 그는 울고 있었습니다. 시인의 마음이 바로 그런 마음의 기다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40-60년 혹은 20년 신앙생활을 하다가 하나님 앞에 갑니다. 그렇게 60년 동안 혹은 50년 동안 혹은 30년 동안 신앙생활을 했다고 치고 그 중에서 구원도 못받은 채 흔들거리면서 교회를 다니던 것 빼고 그 알량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출석 생활을 빼고 제 멋에 겨워서 뭐가 뭔지도 모르고 돌아다녔던 그 교회 생활을 빼고 다 빼고 그리고 나서 남은 신앙생활이 도대체 얼마나 되겠습니까? 교회를 오래 다닌 것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신앙의 연조, 진짜 연조가 깊은 사람은 연조 타령을 하지를 않습니다. 자기 부족을 깨닫기에 정신이 없는데 언제 연조를 세고 있겠습니까? 30-40년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정말 이 시인처럼 마음이 물같이 녹고 찢어진 자가 되어서 주님만이 나를 싸매실 수가 있고 여호와만이 나를 고치실 수가 있습니다. 나를 이 기가 막힐 웅덩이와 깊은 수렁에서 건져주실 하나님 한 분을 가난한 마음으로 의지합니다. 내게는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주님 뿐입니다. 이런 마음의 상태가 된 적이 몇 주일이 될까요? 몇 년이나 될까요?
시시때때로 날 사랑하사 시시때때로 새 생명주니
영광에 기약이 이르도록 시시때때로 주만 봅니다
예수 믿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정말 견디기 힘든 시험을 만났을 때 그때 이 찬송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몇 절인지는 기억이 안나는데 하나님이 내가 성령 충만하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할 때뿐만 아니라 다른 때에도 나를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시험을 받을 때와 쓰라린 마음으로 탄식할 때에 그 때도 주께서 같이하사 언제나 나를 생각하시네‘이 찬송이 그렇게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렇게 경험한 그 시련과 고통,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헤어 나올 수 없는 인생의 그 난관이 참 힘겨운 것이었지만 그러나 넘치도록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맛보게 만든 것은 그런 고난 그 자체가 아니라 거기서 하나님만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우리들이 사실 금식기도의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사실 금식 기도하면 기도를 많이 못합니다. 그것도 첫날은 어떨지 몰라도 한 이틀 삼일 한 오일쯤 되면 그러면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도 금식 기도가 가지고 있는 강력한 힘은 무엇인가 하면 집중입니다. 집중하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응시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보십시오. 사실 먹는 것을 포기하고 나면 삶이 그렇게 단순해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먹을 것을 사러 가지 않아도 되고, 그 이전에 사러갈텐데 하고 돈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러 가지 않아도 됩니다. 사러가서 무엇을 살 것인가 고민하면서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되고 사갖고 와서 해먹어야 될텐데 하지 않아도 되고 먹지 않아도 되고 먹고 소화를 시키고 다음에 하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고 그 다음에 먹고 탈이 나는 문제도 없고 그 다음에 사람들과의 만남, 교제 이 모든 것들이 사실은 식사를 중심으로 계속 편성되어 있습니다. 그런 관계로부터 굉장히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금식을 밥먹듯이 할 필요는 없지만 가끔 자신의 영혼에 집중이 필요할 때, 해야 합니다. 큰 위기나 시련을 만났을 때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의 때를 털어버리기 위한 그런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강력한 힘이 무엇인가 하면 집중입니다.
그러니까 깨끗한 삶을 살아서 자신의 영혼에 부패를 털어버린다는 것은 사실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공해 식품은 있지만 이 지상에 무공해라는 것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면 덜 오염될 수는 있지만 그런 삶을 살아서 자기를 정결케 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를 정결케 하시는 분은 그 사람의 영혼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영적인 특별한 은혜, 그것에 의해서 우리들이 정결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을 하나님이 누구에게 행하시는가 하면 하나님께 집중하는 사람에게
행하시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생활 속에서 술 한번 마음놓고 먹어본 적이 없는 도덕적인 삶을 산 사람인데 일생을 살면서 거의 씻겨지는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온 사람과 죄를 많이 지었지만 하나님이 말갛게 씻기시는 사죄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 중에 누가 더 정결하겠습니까?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마음이 가난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그런 사죄와 치료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시인을 보십시오. 왜 이런 깊은 기가막힐 웅덩이와 수렁 속에 들어갔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고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것입니다. 어떻게? 가난한 마음으로 주를 기다리고 기다리며 바라고 또 바랬던 것입니다.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를 민망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소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하나님 앞에 정결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정결한 모든 사람들은 자기를 이런 깊은 웅덩이와 기가막힐 수렁에서 건져주시고 하나님께 가난한 마음으로 집중할 때에 자기를 구원하시고 씻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우리의 영혼 깊은 곳, 우리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신앙의 태도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이것을 정말 유언으로 남기고 싶습니다. ‘진실하라‘ 주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재능을 가지고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지식을 가지고도 하나님을 깜짝 놀라게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다만 주님은 온전히 진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들이 진실한 마음, 진실한 간구, 그런 진실한 인격으로 하나님께 접근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죄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모두 미움을 받은 것도 아니고 의롭게 산 사람들이 하나님께 칭찬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그가 죄가운데 있든지 의롭게 살든지 그가 어떠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갈망하면서 살았느냐 그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에도 여러분들이 이 시인이 고백한 것처럼 이렇게 깊은데서 자신의 힘으로는 벗어나올 수 없는 영적인 한계와 죄악의 구덩이 그리고 절망하고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너무나 오래 계속된 인생에 이 쓰라린 시련 그런 웅덩이 속에서 여러분들은 하나님 변하기를 기다리고 계시지만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변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정말 가난한 마음, 나도 없고 세상도 없고, 심지어는 내 시련도 없고 주님만이 내 인생에 전부이며 그리고 그 주님이 내 인생에 있어서 결국은 주도권을 쥐고 계시다는 이 사실, 깊이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이 변화되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가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인식하는 그 갈망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놀랍게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이 문제는 많지만 여리고 성과 같은 문제는 참 많지만 성 주위를 돌아본 적은 거의 없습니다. 또 돌아본 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믿음을 가지고 돌아본 적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면서 세월이 지나면서 겨우 터득했다고 하는 것이 체념의 지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너희들이 바뀌면 상황도 고쳐진다.’ 그 사실을 깨달으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오기를 원하시는데 기껏 배우는 것이 체념의 지혜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며 불신앙의 소산입니다. 오늘 시인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난한 마음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으로 드러냈습니다. 견딜 수 없는 아픔과 시련 속에서 그는 자신의 문제를 응시했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찾아오실 하나님을 고대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만이 자신을 그 기가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건져내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며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기다리며 인생에 어두운 밤을 지냈습니다. 누구도 나의 인생에 도움을 줄 수가 없고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도 내가 직면하고 있는 이 깊은 웅덩이와 수렁과 같은 이 상황에서 도움을 줄 수가 없다고 믿어졌을 때 시인은 하나님을 대면해야 하리라 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문제에 대부분은 하나님이 당신에게 나아오도록 당신을 찾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선물일 경우가 많습니다. 다만 믿음으로 반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시련이 견딜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남겨주고 그 사람까지 망가트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그렇게 살 사람들이 아닙니다.
보십시오. 이 시인은 기가막힐 웅덩이와 수렁 속에서 하나님께 올릴 새 노래를 찾아 냈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의 때를 감격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두 번째로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가난한 마음을 부르짖는 기도로 표현했습니다. 가난한 마음의 마지막은 가난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작용이지만, 그 가난한 마음이 순간적인 충동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여러분, 왜 이런 것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어떤 일에 생명을 걸고 미친 듯이 몰두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회의에 빠지면서 ‘내가 꼭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하는 그런 회의에 빠지는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손에 맥이 풀리는 적이 있습니다. 그럴 때도 우리들이 순간적으로 어떤 가난한 마음 같은 것을 느낍니다. 가끔 가다가 제정신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돈이면 다인 줄 알고 그 돈 하나를 위해서 짐승 같은 짓도 서슴치 않게 살던 사람이 어느 순간에 정신이 번쩍 들면서 ‘이까짓 것을 해서 무엇을 하나. 이런 것이 있어도 난 행복하지 않아‘ 그런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진짜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그런 가난함이 되기 위해서는 그런 순간적인 충동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구체적인 도움을 청구하는 기도로 이어져야 합니다.
사실 허무주의적인 것이 결국은 무엇입니까? 결국은 사람들이 모두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허무하기 때문에 추구 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을 하고 그러면 무엇을 추구해야 되는냐 하는 대안을 마련하지 못한 인간의 사고 체계가 허무주의입니다. 체계라는 자체도 좀 이상하지만 하여튼 그것이 허무주의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심령에 가난함’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허무주의와는 다릅니다. 자신들이 이제껏 움켜쥐고 추구했던 모든 것들이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다음에 주님만이 그런 사랑을 받으실 자격이 있고 그 하나님만이 내가 그렇게 추구할 가치가 있다고 도달된 결론, 그것이 기도로 구체적으로 표출된 것, 이것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아이가 엄마의 배 속에서 달이 꽉 차면 아무리 나오지 말라고 주위에서 말리고 애를 써도 아이가 때가 차면 엄마의 몸밖으로 나오는 것처럼 가난한 마음이 우리에게 충만하게 되면 우리는 기도할 장소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실제로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정말 가난한 사람들은 사람에게 위로를 받기를 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위로를 받기를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무엘 1장에 나오는 한나를 기억해보십시오. 남편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지만, 자녀가 없었습니다. 견딜 수 없는 슬픔, 그리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이 여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소에 올라가도록 만들었습니다. 남편의 사랑도 위로가 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대면하고 주님께 술에 취한 여자처럼 하나님 앞에 넋두리를 늘어놓으며 주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했습니다. 우리들이 신앙 생활을 해온 과정들을 돌아보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열렬한 기도가 있었을 때는 항상 하나님을 향한 열렬한 마음이 있었을 때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마음이 가난
함이 가득차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께 호소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아무리 마음에 가난함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할지라도 실제로 무릎을 꿇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그것은 단지 스쳐가는 느낌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기가막힐 웅덩이와 깊은 수렁에서 건져내어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긍휼을 맛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위대한 역사는 부르짖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의 역사는 실제로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설교를 듣고 마음에 가난함을 경험하고 기도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을 때 여러분들은 깊이 그 것을 한 계기로 삼아서 지속적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기도하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이 깊은 수렁에서 건져주시고 그리고 기가막힐 웅덩이에서 건져주셔서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찬 마음에 새로운 구원의 은혜를 찬송하는 노래를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인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가난한 마음의 상태를 경험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이런 마음으로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에게 여러 자녀들이 있는데 아이들이 안방에 홀로 고요히 누워서 낮잠을 청하려고 하는데 막 부르는 것입니다. 엄마 나 이것도 해줘. 저 것도 해줘. 칭얼거리면서 여러 애들이 엄마를 부르는데 그 중에 한 아이는 입술이 새파랗게 질리면서 막 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연이 무엇인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그렇게 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칭얼거리던 아이들의 소리에는 일어나지 않던 여러분들이라도 입술이 새파랗게 질리면서 부르짖는 어린아이의 울
부짖음을 들으면서는 벌떡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혼이 실린 기도, 마음이 담긴 간구, 진심이 실려진 부르짖음을 하나님은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천국을 주시마고 약속하신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가난한 마음으로 애통할 때에 위로를 받을 것이고, 가난한 마음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를 때에 배부름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위기 속에서 부르짖을 때에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 건져주실 때에 새 노래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이런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성도들이 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7.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는 삶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알려 하심이라”(신8:2)
모세는 죽기 직전에 다시 한번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놓고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했습니다. 신명기는 바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사십 여년 동안 광야를 방황한 끝에 약속의 땅을 바라보면서 마지막 남긴 유언적인 설교들로 엮어져 있습니다. 여기 ‘신명기’라고 할 때에 ‘신’ 자는 ‘신신당부한다’라고 할 때에 그 ‘신’ 자입니다. 즉 이 신명기는 이미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이지만 그것을 다시 한번 신신당부하는 마음으로 적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이나 유리방황하였다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애굽에서 떠나면 아무리 어린아이들을 거느리고 천천히 걸어간다고 하더라도 두 달이면 족히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인데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을 방황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가리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했기 때문이라고 표면적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불순종했기 때문에 광야에서 사십 년 가까운 세월을 방황하며 세월을 보냈던 것입니다.
그러나 좀더 깊은 하나님의 섭리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은 이 사십 년 가까운 세월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연단하고 연단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특성을 갖추게 하심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간 다음에 그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동질성을 드러내보여 주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신 우상들을 섬기는 우상의 본거지인 가나안 땅에 거룩한 백성들을 들여보내심으로 그들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만천하의 열방들에게 알리고 싶으셨던 것이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보내시기 위해서 사십 년 동안을 유리방황하게 하셨던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아니 살아남아 있어야지만 훈련이지 사십 여년 동안에 애굽에서 떠난 모든 사람들은 다 죽어버렸는데 무슨 훈련이 되겠느냐’고 말합니다. 사실입니다. 가나안에 도착해서 열 두명의 정탐꾼들을 가나안으로 파견하고 그들이 돌아와서 각기 정탐의 결과를 보고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 명의 사람이 보고하는 비관적인 보고를 하나님의 약속보다 더 믿었습니다. 그들의 보고는 간단했습니다. ‘그 땅에 거민이 살고 있는데 엄청나게 키가 크고 덩치가 커서 발달한 병기와 견고한 요세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가봤자 그들에게 경쟁상대가 되지 않는다. 우리 모두 죽을 것이다.’ 말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보고는 달랐습니다. 그건 사실이지만 그 땅은 매우 기름지고 그들에게는 여호와가 계시지 않지만 우리에게는 여호와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이길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희망적인 보고보다는 절망적인 보고를 믿었고 이것이 하나님에게는 커다란 진노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바로 그 시간에 하나님께서는 너희들 중에 애굽에서 나와 살아있는 자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한 명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리고 사십 년 동안에 유리방황하는 비참한 방랑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십 년 동안 그들은 결국은 광야에서 모두 죽었지만 그 조상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껍질이 깨어지면서 광야에서 태어난 수많은 무리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정직하게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이 자기의 조상들을 다루시고 민족들을 다루시는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시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그리고 어떤 동질성을 가진 사람들이어야 하는가 하는 것들을 철저하게 훈련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내신 것입니다.
신앙이 없는 세상 사람들도 인생의 길을 광야를 걷는 나그네의 길에 비합니다. 그만큼 신앙이 없는 사람들의 눈에도 인생의 길은 고통과 슬픔과 아픔이 가득한 길이라고 하는 인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참된 인생이 진정한 의미에서 출발이 쓰라린 고통과 나그네 길의 설움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 할 것 같으면 아직 어린 시절에는 진정한 의미에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완벽하게 만들어진 배라고 할지라도 포구에 묶여 있는 동안에는 진정으로 바다가 어떤 곳인지를 알 수 없듯이 또한 인간도 광야과 같은 나그네 길에서 설움과 고통이 무엇인지를 맛보기 전까지는 인생의 길이 진정으로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러한 우리의 인생의 길 마지막에 들여보내시기를 원하시는 거룩한 천국의 기쁨이 무엇인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걸으면서 만난 많은 시험과 견디기 힘든 그 많은 고통들은 두고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회상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를 할 때와 함께 광야에서 고생하던 시절이 두고두고 하나님 앞에 회고하는 제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기억들은 마지막에 하나님이 위대한 역사와 기적을 통해서 그들을 애굽에서 탈출시키는 그 시기 이외에는 별로 회상할 것이 없지만 광야 길에서 당한 많은 설움과 고난과 고통은 늘 회상할 제목들이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고통도 많았지만 그 광야에서는 함께 하시는 하나님, 만나주시는 여호와의 은혜가 고통과 늘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때로는 하나님이 그들을 연단하시기 위해서 주시는 시련도 있었지만 대부분 자신들의 죄와 불평, 그리고 육신의 정욕 때문에 지은 죄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죄로 말미암은 고통 속에서도 예외없이 결국은 하나님을 만나고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고침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광야에서 경험한 수많은 고통들이 하나님을 향한 찬송의 이유가 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네 인생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정말 풍랑이 이는 바다를 지나는 것과 같이 수많은 사연들을 만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대하소설의 주인공들입니다. 우리 가운데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들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행복한 인생을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들도 없고, 내 인생에는 고통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도 없습니다. 형식적으로 인생을 살거나 형식적으로 신앙 생활을 하거나 하나님을 모르며 산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신실하게 믿음을 지키며 살아온 사람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불신실한 사람들은 자신의 죄와 그리고 불순종으로 인해서 고통을 당했지만 진실한 성도들은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고난과 아픔을 감수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이런 이유 때문에 인생이 고해였고 저런 사람들에게는 저런 이유 때문에 인생이 슬픔의 바다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구원받은 우리들의 인생을 이렇게 곤고하게 하실까? 왜 우리를 푸른 풀밭 그 위에서 아무렇게 뛰어 놀아도 다칠 위험이 없는 아이들처럼 놀게 하시지 않고 구원받은 후에 우리들을 잔잔한 호수가에서 뱃노래나 부르며 놀이를 하는 그런 인생을 허락하시지 않고 어떤 사람들은 불순종과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와 징계를 받으며 슬픈 눈물을 머금게 하시고 어떤 사람들은 의로운 길을 걷기 위해서 고난과 박해와 시험을 당하게 하시고 연단을 경험하게 하실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 때문에 우리의 인생에 고통이 오고 결핍이 찾아오던 그것과는 관계없이 하나님이 광야와 같은 우리의 인생 길에서 고통의 쓴 물을 마시게 하시는 것은 오로지 하나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낮추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흔히 교만하면 그것은 자기는 이렇게 형편없는 인간인데 분수를 모르고 날뛰면서 굉장히 자기가 높은 사람처럼 행세하고 부당한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고 무시하고 모욕하는, 그래서 자기를 높이려고 하는 그런 것이 교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게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그것은 교만이 아니라 정신병입니다. 아니 못난 사람이 왜 잘난척을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니 형편없는 인간이 왜 그런가 하는 것입니다.
(예화) 신학교 다닐 때, 어느 분이 자기의 교회에서 주일 학교 전도사로 있는데 황당 한 일을 당했는데 그 이유는 부장으로 계시는 분이 교사들과 함께 수련회를 가셔 서 하신 말씀이 자기는 겸손하다고 하면서 목사님보다 자기가 낫지만 언제 자기 가 표냈는가 했다는 이야기.
이런 사람들이 정신병자입니다. 이것은 교만한 것이 아니라 정신병에 정신착란 증세에 빠진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비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아주 심각한 정신병자의 증세니까 그래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런 사람들을 그윽한 눈빛으로 쳐다보면 우리는 너무 불쌍해서 그렇게 쳐다보는데 그 사람들은 자기를 존경하는 줄로 압니다. 그래요. 신앙의 세계에서도 착각은 세금이 없습니다.
사실 성경적으로 볼 때에 진정한 교만은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도 살 수가 있다라고 믿는 넉넉한 마음입니다. 그게 사실은 교만입니다. 교만의 정의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이 분수에 모르고 자기를 막 높이고 자기를 사람들로 하여금 추앙하게 만들고 그럴 때에만 하나님이 그 사람을 안 만나 주시는 것이 아니라 늘 돌아다니면서 “나는 못난 사람이야. 아무리 그렇게 고백을 하면서 나는 정말 형편없는 죄인이야. 나는 정말 쓸모없는 인간이야. 나는 진짜 아무 것도 아닌 인간이야.” 그렇게 아무리 돌아다녀도 그 사람이 진정으로 내면의 세계 속에서 나는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인간이다라는 절대 의존적인 신앙의 고백이 없으면 그것이 교만한 인간입니다. 아주 고등의 교만한 인간입니다. 아니 그럼 가만히나 다니지 왜 돌아다니면서 나는 쓸데없는 인간이라고 하는지, 그럼 그렇게 쓸데없는 인간이면 쓸모 있는 하나님만 의지해야지 하나님 없이 넉넉하게 살아갈 수 있는 마음을 가지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잘난 척 하는 사람들만 하나님을 못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못난 짓 하고 돌아 다니는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을 못 만납니다.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너무 많이 절망하는 것도 그것도 교만의 일종입니다. 지나친 열등감 이것도 교만의 일종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낮추고 싶으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실 솔직히 터놓고 이야기하면 뭘 그렇게 교만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누가 하나님보다 자기가 높아지고 싶어한 사람들이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누가 교주가 된 사람이 있습니까? 나는 여호와의 종교는 싫고 다시 하나 종교를 만들어야지 되겠다 그런 사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들이 세상적으로 뭘 내세울 것이 있었습니까? 나라 없는 민족이고 물을 얻어먹으려고 해도 그 나라의 왕에게 가서 사정을 해야되고 길을 좀 지나가려고 해도 한번 지나가게 해달라고 애원을 해야 되는 그런 유리하는 백성들이었는데, 쉽게 이야기하면 집시들이었는데 무엇이 교만할 것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넓은 땅덩어리를 자랑했습니까? 높은 망대를 자랑했습니까? 아니면 철병거와 나무로 만든 마차들을 자랑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뭐가 있어야지 자랑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그 광야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낮추고 싶으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낮추셔서 마지막에 도달하게 하시고 싶으셨던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주님 없는 세상 평화없네
오 주 없이 살 수 없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갖기를 원하셨던 마음은 파산한 마음, 그래서 우리는 왕국도 없고, 왕도 없고, 권세자들도 없고, 우리는 이 광야에서 목표는 있지만 유리하는 백성이기 때문에 매순간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멸망할 백성이다라고 하는 그 마음을 받아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들어오게 하신 그날부터 만나를 내리신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양식을 다 먹고 떨어졌을 때, 그 때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막 탈출해서 뛰어나올 때 주님이 사자를 보내어서 말씀하시기를 ‘계속 뛰어라. 저놈들이 계속 쫓아온다. 염려마라 홍해를 내가 다 갈라놓았으니 빨리 가라.’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목이 마르면 내일 목 마를텐데 지금 내가 지금부터 물을 틀어놓았으니 내일 가서 먹어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막 쳐들어 와서 그냥 도망을 쳤는데 푸른 물이 넘실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목이 말라서 죽을 것 같은데 따가운 햇빛이 내리쬐이는 건조한 벌판입니다. 배가 고파서 양식이 다 떨어졌는데 어디에도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한계 상황에 꼭 직면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거기에서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절대 의존적인 마음을 갖게 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절망합니다. 그러니까 절망하는 마음과 낮아진 마음은 같은 마음이 아닙니다.
키에르케고르 같은 사람이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봤습니다. 그러니까 직면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밤새도록 고통을 당하면서 애굽의 병거들이 막 쳐들어오려고 하는데 불기둥이 계속 움직이면서 그들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절대 안전하다는 느낌은 안 들고 저러다가 저 불기둥이 사라진다든지 이동한다든지 하면 저 사람들이 쳐들어올텐데, 즉각적으로 그 위험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음을 한없이 낮아지게 하신 후에 하나님이 새벽에 바다를 가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무엇을 보게 하시는가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백성들이구나. 우리 안에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구나’하는 것을 깊이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교만은 분수없이 날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보다도 다른 것을 더 필요로 하는 마음, 그리고 그런 것들에 대한 마음 때문에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필요로하지 않는 마음, 이런 것들이 바로 교만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마음을 없애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들으면서도 여러분들 중에 어떤 분들은 인생에 벼랑 끝에 서 있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경제적인 이유로, 어떤 사람들은 인간 관계에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자신의 내면적인 문제 때문에, 혹은 건강의 이유 때문에 인생의 벼랑 끝에 서 계신 분이 있으실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건지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어려움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뢰하게 하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오래동안 잊어버리고 살았던 진정한 의미에 겸손을 되찾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라고 하는 절대적인 고백입니다.
사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것은 우리의 죄와 불순종이지만 멀어진 그 사이를 다시 가깝게 하지 못하는 것은 그렇게 멀어지게 만든 죄와 불순종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상하고 부수어진 마음이 없는 것, 그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자기의 백성들이 사는 날 동안에 많은 축복들을 주십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확실히 보증할 수 있는 것 하나는 여러분들이 진실하게 하나님 믿고 좋은 신자가 되면 하나님이 반드시 여러분들을 복 주십니다. 끼니가 간 곳이 없는 사람들은 해결을 볼 것이고, 사업을 해도 늘 망하고 고통받던 사람들은 형통한 길들을 하나님이 열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런 모든 것들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그런 것들을 의지하며 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마음, 그러니까 하나님을 만나 뵈어야 할 간절한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 그리고 자신의 건조하고 메마른 교회 생활을 보면서 주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에 간절히 목말라할 줄 모르는 사람들, 그런 마음에 변화가 없는 사람들은 거의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신앙의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교회에 와서 자기를 뽐내고 자랑하고 자기보다 못난 사람을 억누르지 않아도 그들의 교만은 극치에 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차라리 늘 자신이 아무 것도 잘난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은 못났다고 생각하면서도 하나님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마음이 한번도 없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보다는 때로는 정신병자처럼 자기가 최고인 줄 알고 길길이 뛰다가 어느 한 순간에 확 꼬꾸라져서 ‘진짜 내가 아무 것도 아닌 인간이구나. 나는 쓰레기구나.’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가끔 매달리는 사람이 훨씬 하나님을 잘 만납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찾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통회하는 죄인들을 찾아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찾아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가난과 고통 속에서 자신을 의지할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뢰하는 사람들을 찾아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낮추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의 세월 사십 년 세월을 지켜보면서 그들 속에 내제되고 있는 부패성들을 보았습니다. 광야의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해서 모세는 장차 이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왕국을 이루고 승승장구하면 어떻게 하나님을 배반하고 주님을 절박하게 필요로 하던 하나님을 향한 절대 의존적인 신앙을 버리고 주님을 분노하게 할 것인지를 이미 읽었다는 것입니다.
잠언 말씀을 보면 “어린아이라도 그 하는 일을 통해서 그 마음을 드러내느니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직 유아시기였습니다. 나라로서는 아직 어린 시절이었지만 그 어린 시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러 사건을 통해서 그들 속에 내재하고 있는 그런 교만함들을 모세가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미래를 향해서 그렇게 애끓는 마음으로 예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만나는 길은 의롭고 단정한 생활만도 아닙니다. 성실과 인내로 꾸준히 교회 생활을 해도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을 많이 배워도 그것이 곧 우리 주님을 만나게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 어두운 세상을 자신 혼자 살기에는 전혀 불가능하다라는 하나님을 향한 의존의 마음, 그것을 읽기 위해서는 자신이 얼마나 악한 인간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면서 적당히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흠 없이 잘 살아야 되겠다라고 하는 목표를 갖지 않은 사람이 왜 자신의 삶에 대해서 절망을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삶을 살고자 하지 않는 사람들은 두 번 하나님 앞에 범죄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목표를 버렸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그런 목표를 상실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가난한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여러분들이 살았던 삶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목표가 없었다면 이 질문에 대해서 답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여러분의 신앙의 인격은 많이 성숙했습니까? 주님을 많이 섬기셨습니까? 목표가 없다면 이 질문에 대해서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는 마음입니다. 먼저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을 나타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새롭게 발견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주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을 때에 우리에게 거셨던 궁극적인 기대가 무엇인지를 주님의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깨달음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대와는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대와 상관이 없이 살아가는 이 삶이 자신에게 매우 불안한 삶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는 매우 불행한 인생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에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고 주님의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면 하나님과 함께 누릴지도 모르는 참된 행복,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그 진실하고 아름다운 신앙 생활, 그런 것들을 비교하면서 자신의 죄와 불순종 때문에 자신의 교만 때문에 그런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깊이 아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런 마음을 갖게 하시려고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낮추시고 싶어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광야와 같은 인생에 길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낮아진 마음들을 가져야 합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아무렇게나 살기에는 우리의 인생이 짧지만 거룩하고 진실하게 살기에는 우리의 인생이 너무나 길어요. 한 열흘 동안 만 살아보는 것이면 어떻게 좀 완벽하게 살아볼텐데 너무 길어요. 그래서 결국은 우리는 나를 구속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십자가의 은혜를 내가 받았지만 그러나 그것으로서 그 십자가의 은혜를 감격하는 것으로서 내가 충분히 주님을 따라 가면서 살 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일용할 양식을 내리시던 하나님의 그 만나와 같이 우리에게도 주님의 자비와 긍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의 하나님 말고, 내일 하나님 말고 지금 하나님, 옛날에 만난 하나님 말고, 이다음에 만날 하나님 말고 오늘 지금 이 삶의 현장에서 내게 말씀해주시는 하나님, 그리고 광야와 같은 인생의 길에서 목자가 되어주셔서 나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인도 없이는 결코 내가 살 수가 없다라고 하는 그 절대의존의 마음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마음을 갖고 매 순간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낮추시고 싶어하시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실제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우리의 마음이 이렇게 가난해져서 우리 안에 우리도 억제할 수 없는 처절한 몸부림으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사랑, 사라진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 그리고 사라진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놀라운 감격들을 다시 달라고 하나님 앞에 애원하는 적이 너무 희귀합니다. 우리는 마치 거대한 잠들어 있는 거인과 같습니다. 주님이 무엇인가 강력하게 말씀하면 눈을 게슴츠레 뜨고 힘겹게 일어나다가는 예전보다 더 깊은 잠에 빠져들곤 합니다.
하나님은 이 시간에도 당신에게 목마른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이 너무나 이것을 원하시기 때문에 때로는 우리를 절망에 벼랑 끝에까지 데리고 가십니다. 거기서 우리가 그토록 자부심을 갖던 우리의 잘나빠진 인격에 밑창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알량한 신앙 생활에 그 부대자루 속에 사실은 아무 것도 들은 것이 없다라고 하는 것들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자신만 의지하면서 사는 인생에 결국이 얼마나 쓰라린 실패로 마치는가 하는 것을 말로 해서 못 깨달으니까 하나님이 친히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거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하나님 없이는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구나. 주님을 잃고 얻을 수 있는 것도 없고 또 주님을 잃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아니구나’ 하는 사실을 철저히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처럼 주님의 팔을 꼭 붙들고 놓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우리의 인생의 길을 걸어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와 하나님의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자면 죄도 아닙니다. 사실은 그 죄도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애틋하게 사죄의 은혜를 구하면 죄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지 못합니다. 환난과 시련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입니다. 정말 마음이 물같이 녹듯이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의 은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주님의 그 은혜가 아니면 안 되겠다라고 하는 그 처절한 마음, 그 밑바닥으로 내려가서 우리가 주님만을 우러러보며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광야에서 이런 커다란 고통과 시련을 당하면서 방황하였던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히브리 말로 “니싸”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뭔가 연단을 가해서 진실을 입증하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사” 할 때 쓰여진 단어가 바로 이 단어 “니싸”라는 단어입니다. 고통스러운 연단을 가해서 진실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있는 그렇게 입증하고자 하는 대상이 무엇인가 하면 “너희의 마음을” 그렇게 했는데 그런데 히브리 성경에서는 “너희의 마음 속에 있는 것들을”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는지 우리 자신도 모릅니다. 정말 우리도 모릅니다. 어느 한 인간이 이제 나는 나에 대해서 모든 이해를 끝냈다면 그것은 곧 이제는 내가 더 이상 하나님에 대해서 배울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똑 같이 교만한 것입니다.
게놈프로젝트를 가지고 사람들이 인간의 모든 인체구조가 손안에 들어온 것처럼 그러는데 옛날에도 그랬습니다. 병원체가 처음 발견되었을 때, 사람이 왜 병에 걸리는지 몰랐는데 어느 날 병원체가 발견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이제 질병은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과학자들의 착각이었습니다. 전자 현미경이 발견되어서도 마찬가지고 과학이 발달되면 이제는 끝이다. 이제는 한 손안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어느 의사가 그랬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의사가 되고 보니까 - 우리 이 자리에도 의사 선생님이 여럿 계시는데 죄송한지 모르지만 - 깜짝 놀란 것이 있는데 의사도 모르는 게 이렇게 많구나.” 이것을 보고 깜짝 놀랬답니다.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훨씬 많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화) 어느 만화가가 제놈프로젝트를 보고 만화를 그렸는데 하나님께 인간을 만들 수 가 있다고 하면서 흙으로 인간을 만들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그 흙은 나의 흙이 니 네 흙으로 만들라는 이야기.
그만큼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 자신의 내면의 세계에 대해서는 더 모릅니다. 우리의 마음에 대해서는 더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수시로 시험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시험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하나님이 드러내 보여 주셔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면서도 하나님이 “이제야 네 마음을 알았다.” 말씀하시는데 사실 그것은 우리에게 이해를 시키기 위한 성경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 있는 것을 모르신다면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라 말할 수가 있겠어요. 하나님은 인간의 혼과 관절과 골수를 말씀으로 찔러 쪼개시고 인간의 내면에 깊은 사정까지 드러내시는 분이신데 그것을 모른다면 하나님이시라고 그럴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것을 시험에서 드러내고 싶어하시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마음을 정직하게 확인하고 하나님 앞에 태도를 결정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알게 하시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럼 보십시오. 하나님이 무엇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드러내시는지 보십시오.“너희의 마음속에 있는 것들”이라고 표현되었는데 사실 우리들이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거짓말이 인격화가 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정말 놀랍습니다.
(예화) 전도사 시절에 결혼 후, 7만원의 월급을 받으며 교회에서 생활하셨는데 힘들었던 것은 매일 구제를 하러 오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인데 적은 월급으로 그들을 일 일이 도울 수가 없는데 매일 여러 가지의 이유를 가지고 오는 사람들을 대하면서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되는 사람도 있지만 또 속으면서 도와주는데 그들은 반복적 으로 오래도록 거짓말을 하니까 인격화되어 진실하게 거짓말이 나온다는 이야기.
우리들이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이야기를 많이 하고 돌아다니면 자기가 예수 믿는 것으로 착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야, 너 진실하게 살아라 착하게 살아라.” 계속 그렇게 돌아다니면 자기가 이미 그런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이 필요한 것인가 하면 마음을 시험해서 그 마음을 입증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드러내 보여 주셔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정확하게 자신들이 지금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시는 목표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속에 있는 것들을 드러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솔직하지를 않습니다. 정직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없으면서 그렇게 있는 척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혼이 죽은 자와 같으면 자신이 그렇다고 하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깊이 인정하고 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하는데, 옛말에 ‘가난 자랑은 하지를 말고 병 자랑은 하라’고 그랬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내가 이런 병에 걸렸다고 자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 누군가에게서 비방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선한 이웃들도 우리의 질병을 도와준다면 좋으신 하나님,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치료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잘 고치시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진실해져야 합니다. 그러니까 외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은혜가 없는 생활을 하면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는 은혜가 뭔지를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은 말씀에 은혜를 받아도 나는 말씀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어떡하면 좋습니까? 나도 변화 받을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일마다 자석에 끌리듯이 신앙이 아니라 습관에 끌려서 나오는 교회 생활이 옳지 않다는 것을 지적 받을 때, “그렇습니다. 바로 내가 그런 사람입니다. 하나님, 내가 어떻게 하면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을까요? 사람들은 저를 보고 참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만 하나님, 저는 형편없는 인간입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이런 진실함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 에 무엇이 있는지를 하나님이 드러내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매 순간 모든 교회 생활, 모든 기도, 하나님 앞에 나누는 대화, 모든 것이 진심에서 흘러나오는 고백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시험하셔야 할 필요가 그만큼 적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무엇을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자기에게 속지 않을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자신의 판단보다는 하나님의 판단을 훨씬 더 신뢰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진실한 사람들로 보시고 그들의 참 모습을 스스로 확인하도록 하나님이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오랫동안 방탕한 삶을 살고 생명이 없는 신앙 생활을 하다가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경험하게 되기 전에 먼저 무슨 일이 있는가 하면 눈이 뜨여지는 일이 먼저 있습니다. 그게 바로 무엇입니까? 우리의 마음을 어느 순간에 하나님이 탁 드러내 보여 주시면서 ‘아! 사실은 내가 정말 하나님 믿으면서 살아왔지만 마음속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들이,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무관심들이 있었구나. 그리고 교만한 마음들이 있었구나.’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깊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지를 않았을 때는 회개를 하지 않은 사람들이 왜 은혜를 받고 나서 회개를 하는 것입니까? 자기가 못 보던 모습을 새롭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처절하게 주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실한 신앙 생활이 인격적인 하나님 앞에서 최대의 무기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가장 깊이 감동시키는 것은 정직한 신앙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잘 살아왔으면 좋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의 하나님만은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그렇게 살아오지 못했으면 차선책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시험하실 때에 정확하게 드러난 우리의 마음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꼭 시련과 환난을 통해서만 우리의 마음을 시험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마음을 그렇게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드러내실 때 그것을 믿고 신뢰하면서 자신의 파산된 마음을 정직하게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솔직한 신앙 생활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요. 죄가 많고 하나님 앞에 잘못 살았으면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더 필요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속히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 속으로 돌아와야지 됩니다.
오늘 모세가 그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당한 그 사연이 많은 시험, 그 사연이 많은 환난들을 통해서 모세가 분명하게 확인할 수가 있었던 것 하나는, 하나님은 우리가 거짓에 매여서 스스로에게 속으며 신앙 생활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눈앞에서 자신의 마음이 온전히 입증된 그런 신앙 생활을 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현재 여러분들이 경험하고 있는 어떤 시련이나 어떤 궁핍, 그리고 마음의 고통들을 통해서 여러분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드러내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자비와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그 마음이 구체적으로 무슨 마음인가 하면 그게 결국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가 혹은 아니 지키는가 하는 것을 입증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하나님 앞에 겸비해진 마음은 그 겸비해지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마음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죄인이 자기의 죄를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간절하게 구할 때, 그 마음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즉 죄로 말미암아서 많은 고통과 시험을 당하고 ‘주께로 옵니다’라고 하고 손을 들며 부서진 그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사는 모든 고통이 나의 죄로 인해서 당하는 이 견딜 수 없는 아픔보다는 훨씬 복됩니다’라고 하는 고백이 동반된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가난하고 아버지 앞에 낮아진 마음이 되는 것도 그렇지만, 또 되어 있는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이 없이 그 마음을 갖게 되거나 유지하게 되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겸비한 마음을 일생동안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그 뜻대로 살고자 하는 순종의 갈망과 의지가 있는 사람들만이 하나님 앞에 겸비하고 낮아진 마음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주님의 요구를 보고 그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그 요구에 부합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말씀을 통해서 그렇게 실패한 죄인들을 어떻게 건지시는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깊은 사모함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겸비한 마음을 가진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항상 성경 앞에 다가 앉았습니다. 가난하고 겸비해진 백성들은 모두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면서 주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그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의지와 마음들을 가졌던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마음이 이런 마음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들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다가오시면 반드시 만나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이런 겸비한 마음이 없이 오랜 세월 동안 고뇌하고 염려하였어도 극복할 수 없었던 여러분들의 인생에 한계들을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낮아진 마음으로 순종의 의지를 가지고 주 앞에 나아올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극복하게 끔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님만 바라보며 살 수 있는 이유인 것입니다.
8.끝도 없는 곤고함의 원인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시107:10-11)
언젠가 한번 텔레비젼에서 야생동물을 좋아하는 우리 한국 사람들의 그 병적인 식성을 비판하면서 야생 동물들이 어떻게 처참하게 밀렵되고 있는지를 취재한 내용을 한번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예화) 밀렵꾼들이 짐승들을 잡기 위해 덫을 놓는데 덫에 걸린 짐승이 조이는 톱날에 고통을 겪는데 묶인 쇠줄과 연결된 나무 껍질이 하얗게 벗겨지며 짐승의 뼈가 보 일 정도로 고통을 겪다가 죽는 모습 이야기.
아무리 이 산 저 산을 누비며 돌아다니던 맹수들이라고 할지라도 한번 그 덫에 걸리고 나면 그 용맹이 소용이 없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떻게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짐승만 이런 덫에 걸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도 자신의 힘으로는 자신을 구출할 수 없는 이런 덫에 걸려서 고통하는 때가 많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남들이 보기에는 이상이 없는 인생이지만 그러나 덫에 매여서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덫에 걸려서 빠져 나오려고 몸부림을 치면 몸부림 칠수록 톱날이 살을 파고 들어가고 마지막에는 뼈가지 긁어서 결국은 벗어나기를 포기해야지만 잠시 평화가 오는 것 같은 그런 인생의 극한 때를 지날 때는 없습니까?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그런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인생의 덫도 수없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경제적인 문제로 이런 덫에 걸려서 일생 동안을 빚진 자로 쫓겨다니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사랑해야 할 관계 속에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망가진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에, 남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비참하게 허물어진다는 피해의식 속에서 일생을 몸부림치지만 진전이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때로는 자기 자신 때문도 아닌 것 같지만 어째든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자기처럼 되어버린 자신의 성격, 그렇게 자신의 어떤 심정적인 결함, 자신의 인격적인 문제들, 자기 자신도 고쳐지지 않는 자신의 어떤 나쁜 습성들 때문에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들마다 고통과 어려움을 주고 그래서 자신이 생산해내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 자기도 동의하기 싫은 그런 인생을 살면서 그런 덫에 매여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정말 우리의 인간이 무엇 때문에 이런 덫에 매이는지에 대한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정말 밀렵꾼들이 야산에 묻어놓은 덫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사슬에 매여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이렇게 사슬에 묶여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수많은 이유들을 말합니다. 그러는 중에 사람을 원망하기도 하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기도 하고 혹은 하나님을 향해서 섭섭한 마음을 품기도 합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자신의 인생이 사슬에 매인 것을 핑계하든지 간에 움직일 수 없는 사실 하나는 어째든 그런 사슬에 매여서 살아가는 인생은 너무나 고달프고 그리고 고통스럽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인정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시편은 우리에게 이렇게 우리의 연약한 많은 사람들과 같이 곤고와 그리고 영혼을 얽어맨 쇠사슬에 묶여서 부자유하게 살다가 하나님이 거기에서 건져주시는 그런 놀라운 은혜를 경험한 한 성도의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취재팀들이 차를 몰고 취재를 갔는데 노루 하나가 덫에 채여 있습니다. 만약에 몇일 있다가 도착했으면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살아있습니다. 그러니까 몸부림을 치다 치다 포기했습니다. 가서 그 덫을 끊고 치료를 해서 다시 산에다가 놓아주었습니다. 구사일생입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그런 곤고와 사망의 닻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는데 하나님이 자기를 만나 주셔서 거기에서 건져주신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만나주시는지는 우리들이 다음 시간에 보더라도 오늘 여기서 우리들이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사람이 그런 쇠사슬에 매여서, 덫에 매여서 살아갈 때에 인간은 비로서 자신의 힘으로 안 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겸손하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인생에 관한 어떤 진리를 입술로 인정하는 것과 마음으로 깊이 경험해서 그 경험이 가르쳐주는 지식을 따라서 자신의 인생을 산다라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오늘 이 시인은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이는 적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흑암과 사망을, 곤고와 쇠사슬에 매이는 것, 이 모든 것들은 병행법으로 같은 말들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굳이 좀 구별을 해서 의미를 파본다면 이 흑암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시련 속에서 경험하는 영혼의 어두움입니다. 우리들이 곤고하다 혹은 덫에 매인 것 같이 고통스럽다 라고 말할 때 그것은 항상 영혼의 어두움을 배경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시험을 만나고 남들이 보기에 진짜 욥이 당하는 것 같이 눈뜰 수 없는 고통의 시험을 많이 당한다고 하더라도 만약에 그가 영적으로 빛 가운데서 산다면 그것은 사실 시련이 아닙니다. 견디기 힘든 고난이 닥치는데도 기도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해주겠다. 원수들이 너를 에워싸고 있지만 내일 아침에 내가 저들을 모두 없는 자와 같이 만들어주리라’ 하나님의 승리의 약속이 들리는 것입니다. 정말 눈만 뜨면 견디기 힘들게 고통이 밀려오고 그리고 정말 정신차릴 수 없는 시련이 폭풍우처럼 몰아닥쳐도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 그렇구나.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시는 것은 나를 온전케 하심이었구나’ 그러고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빛이 계속 자신의 영혼을 두루 비추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 사람의 시련은 시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는 유익이다.’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우리들이 내 마음대로 사는데 고난 당하고 거기에서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그 명백한 영혼의 빛을 경험하고 나니까 이제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게 되었고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지 되는지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시련이 없었더라면 만날 수 없는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는 기회로 하나님이 삼으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자기에게 시련을 주시는 하나님께 찬송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시련이 시련이 아니고, 고난이 고난이 아닙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큰 시련이 닥치면 영혼에 어두움이 함께 찾아옵니다. 그래서 그렇게 가슴을 후벼파면서 들어오던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들이 사라집니다. 지금보다 훨씬 어렵고 죽음을 넘나드는 상황의 골짜기에서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주님의 음성이 들렸는데 영혼의 어두움이 깊게 드리우는 것입니다. 어두워지면 보이지가 않습니다. 이제껏 걸어온 길도 어두움에 가리우고 나면 보이지 않고 걸어가야 할 길도 어두워지고 나면 보이지를 않습니다. 캄캄한 어두움에 싸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에게 시련이 시련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아무리 구원받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많이 경험한 주님의 자녀라고 할지라도 큰 시련을 당했고 영혼의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이 있는데 기도해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고 하나님이 말씀해 주셔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 사면을 둘러보아도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이 언제의 모습입니까? 옛날에 하나님 모르고 살아갈 때, 불신자로 인생을 살아갈 때, 내 인생의 모습입니다. 거기로 내가 돌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를 버린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홀로 두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공공장소에서 엄마가 바로 옆에 있는데도 주위를 둘러보고 엄마 아빠가 사라졌다고 착각하고 펑펑울면서 새파랗게 질려서 울고 있는 어린아이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주시지만 그러나 내가 느낄 수 없는 하나님은 내게 위로를 줄 수가 없습니다. 경험될 수 없는 하나님은 내 인생을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실제적인 면에 있어서는 하나님 모르고 살아갔던 그 때의 우리의 모습과 똑같은 것입니다. 생각하기 싫지만 한번 상상의 날개를 펴보십시오. 주님 없이 살아갔을 때 생각나십니까? 주님의 사랑을 몰랐을 때가 기억이 나십니까?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에 처음 주님에 관한 소식을 듣고 주님의 품으로 달려온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어두움 속에서 많이 망설인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구원이 우리에게 이르기 전에 먼저 갈등과 고통이 우리에게 가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주님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주님을 믿은 사람들입니다. 혼자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았기 때문에 주님을 붙들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영혼에 어두움이 드리우면 바로 하나님 없이 살았던 그 옛 삶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없이 살던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그 때가 너무나 싫고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인격적으로 용납해주시고 자기를 받아주시는 하나님께로 걸어나온 것이 아닙니까? 영혼의 어두움이 드리우게 되면 우리는 다시 옛 삶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두고 온 세상이 그리워질 때도 있지만 두고 온 세상 속에서의 모든 경험이 그리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즐거웠던 기억들, 아름다웠던 추억들, 그리고 맛보았던 행복들, 그것이 그리워지는 것이지 주님 없이 살았던 모든 날들이 그리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보십시오. 영혼의 어두움이 드리워지고 나면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도망쳤던 그 어두운 시절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빛 가운데로 우리를 부르셨고 이제는 그 어두움을 버리고 진리를 아는 지식의 빛 속에서 당신과 사귀도록 우리를 불러주셨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다시 두고 온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기를 사모해야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련에 들게 되면 항상 거의 예외없이 이런 영혼이 어두움이 찾아옵니다. 우리는 흔히 의롭게 고난을 받았던 사람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욥을 들게 됩니다. 그러나 욥기를 조심스럽게 읽어보십시오. 욥은 분명히 의로우면서도 에매하게 고난을 당한 사람이었지만, 거듭되는 고난 속에서 그가 얼마나 커다란 어둠 속에서 혼미함을 느끼고 있는지를 하나님 앞에서 죽기를 청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그의 고백을 보면서 우리는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시련에 들게 되면 이런 영혼의 어두움이 징후로 나타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빛가운데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와의 사귐의 빛이 있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사망의 그늘이라고 하는 것은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삶의 현장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영혼의 어두움과 죽음의 두려움이 자기를 위협하는 삶의 현장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활짝 열리고 그분의 찬란한 은혜와 지식의 빛 아래에서 살 때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내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시련이 오고 영혼에 어두움이 깃들기 시작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자신이 사라지기 시작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면 우리의 마음속에는 스스로 책망할 것들을 많이 소유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는 전에는 내 인생에 위로가 되셨던 그 하나님이 이제는 내 인생에 있어서 뭔가 위협을 느끼는 존재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련 속에서 영혼의 어두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항상 마음속에 ‘이렇게 살다가 하나님 앞에 혼나지’ 이런 생각을 자신이 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죽음의 두려움, 사망의 두려움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이 실제적인 삶은 사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함께 못박으셨던 삶입니다. 죽음의 두려운 죄에 대해서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자유하게 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우리를 위해서 자기를 버려 구속하시고 해방시켜 주신 예수님의 구원의 계획과는 관계없이 다시 이전에 하나님 없이 살던 때에 사망의 공포의 그늘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진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가장 힘써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서 이루신 이 화목한 관계를 원리적으로만이 아닌 실제적인 삶 속에서 어떻게 유지하면서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종에 대해서 많이 배워야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죄죽임에 대해서 많이 배워야 되는 것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시험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우리들이 탐구를 하고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는 이 타락한 부패성이 어떻게 제거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우리들이 많이 고민하고 개인적으로 열렬한 경건의 생활을 유지하며 살아야 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다시 영혼의 흑암이 깃들고 그리고 견디기 힘든 곤고한 위기가 그의 삶 속에 두루 덮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그 삶에 대해서 오늘 시인은 아주 명쾌하게 표현을 하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곤고와 쇠사슬에 매인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의 그림을 우리에게 동시에 보여주는데 하나는 고통이고 또 하나는 절망입니다. 고통과 절망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가장 적절한 그림입니다. 여러분들이 들판을 가로지르던 야생 동물이라고 생각을 하고 여러분들이 그 덫에 탁 채였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전심으로 소리를 지르고 구원을 청해도 어두운 밤하늘에 자기의 울음소리만 메아리칠 뿐 누구도 와서 돕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이 오면 죽음이 기다리는 것이고 동물들이 와서는 자기를 도와줄 수가 없습니다. 수많은 들짐승들은 물어뜯어 죽이던 날카로운 이빨도 이제 자신의 발목을 파고 들어오는 이 덫, 그 칼날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빠른 속도로 들판을 가로지르던 그 힘도 이제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렇게 절망적인 상태의 그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이렇게 무서운 인생의 때가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 기억하셔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자녀들에게도 자신의 힘으로는 절망하는 것밖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덫에 치인 것 같은 곤고한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습니다. 일단 하나님이 그를 한번 하나님 앞에 생애적으로 만나시기 위해서 당하게 하시는 그 시련은 해결이 안 됩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처음에는 돈이 없어서 시련을 당했는데 하나님이 그 시련을 통해서 그 사람을 만나주시려고 하면 누가 보따리로 돈을 싸들고 와서 그 사람을 도와줘도 문제가 해결이 안 됩니다. 사람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불행해졌다고 생각해서 그 사람을 미워했는데 하나님이 그 사람을 데려가셔도 자신의 인생에 문제가 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해결을 하고 싶으셨던 것은 그 문제를 해결하고 싶으셨던 것이 아니라 사람 자신을 하나님이 해결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한번 마음을 먹으시고 계획하신 이 일은 하나님 자신이 아니면 안 되는 것입니다. 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막 몸부림을 칩니다. 그런데 몸부림을 칠수록 그 죄악이, 그 시련으로 말미암은 고통의 톱날이 자기의 살을 파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막 격렬하게 몸부림을 칠수록 더 고통스럽고 그게 결국은 무엇인가 하면 스스로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그런 처지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결국 짐승이 그렇게 밤새도록 살갗을 찢고 뼈를 상하게 하면서 도망치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다가 결국은 기력이 진하여 포기하고 눈물만 흘리며 죽을 때만 기다리는 것과 같이 이 곤고한 인생의 막다른 길목에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기를 그칠 때까지 하나님이 곤고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때에는 누구도 도움이 안 됩니다.
이런 영혼의 고통, 이런 육신의 깊은 고통 속에서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그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자신의 이런 고통을 현실적으로 설명하지만 성경은 아주 간단하게 말합니다. 사람이 그렇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지존자를 멸시하게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흔히 인생에 있어서 자신이 겪는 고통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욥과 비교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세상에는 그렇게 많은 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통을 받는 것은 욥과 비슷할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흠도 티도 없으면서 오로지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매우 특별한 섭리 때문에 고난을 받는 사람들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소수입니다. 우리처럼 평범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순결함에도 불구하고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 가운데 애매히 고난을 당하기보다는 자기의 죄와 불순종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먹어서는 안 되는 그 고기를 먹으러 덫으로 스스로 들어갔기 때문에 걸인 덫입니다.
먼저 회복을 위해서는 자신을 자기에게 예외적인 상황에다가 놓고 자신을 변명하기 보다는 자신을 가장 가능성이 있는 일반적인 상황에 자기를 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자기의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서 영혼의 어두움이 오고 견딜 수 없는 고통스러운 시련이 시작되는데 항상 ‘하나님, 내가 이 고난 속에서 주님을 원망하지 않고 온전히 고난을 감당하게 해주십시오’라고 그렇게 기도하면 하늘에서는 하나님이 너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구나.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설령 자기는 아무 죄가 없이 고난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오히려 하나님 앞에 나 같은 사람이 당하는 고난이 어찌 죄없이 애매히 당하는 욥의 고난과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분명히 나의 불순종과 죄로 인해서 당하는 고난일진데 내가 너무 무지하여 내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내가 무엇을 인하여 이 시련 속에서 아파하는지를 깨닫지 못하오니 하나님 나의 죄를 생각나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기도를 할 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얘야, 아니다. 네가 죄가 있어서 이런 시련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네가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려고 하는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당하게 되는 고난이란다. 두려워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그리고 내가 너를 위한 고난보다도 뛰어난 상급을 하나님의 나라에 준비하고 있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시면 상황이 훨씬 더 낫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변명들을 늘어놓습니다. 왜 그렇게 곤고하십니까? ‘일이 많아서, 사람들이 나를 괴롭혀서, 원래 나는 평안한 사람인데. 나는 문제가 없는데.’ 그러기 때문에 계속해서 어두움 속에 머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제는 어두움 뿌리치고 빛가운데 살겠네 찬양하리
구주 예수 놀라운 구원의 능력 노래하리
갈보리에서 이루신 주님의 사랑
주님 말씀따라 생활하며 주의 사랑 안에 하나 되어
이젠 주님 오시길 간절히 원하네
우리가 정직하게 인정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만나는 길입니다. 사람을 원망하고 그리고 이런 저런 핑계로 이 사람 저 사람 붙들고 신세한탄 해봐야 회복의 때만 지연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만 더 쌓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신앙의 경험을 잘 보면 진짜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변화받기 전에는 항상 우리의 마음에 변화가 먼저 있었습니다. 그것이 주님을 만나기 위한 준비였습니다.
그런데 그 준비되는 과정에서 경험되는 가장 중요한 경험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 앞에 아주 솔직한 자세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변명하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 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나 때문이다 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실제로 자기가 겪고 있는 굉장히 많은 문제들, 실제로 어떤 문제들은 진짜로 다른 사람에 의해서 자신이 피해를 받아서 그런 문제 속으로 들어간 일이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는데 그 사람이 나 때문이다라고 고백을 하는 것은 내가 나쁜 짓을 행했다거나 혹은 내가 뭘 했다거나 그것이 아니라 결국은 이유야 어땠든지 간에 내가 지금 흑암과 어두움의 그늘 아래서 곤고와 쇠사슬에 매이는 이런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을 하고 세상을 향해서는 핑계되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내가 할말이 없습니다라는 자세로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우리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첫 번째 변화입니다.
당연합니다. 집안에 누구 귀한 어른이 와도 이틀 전부터 청소를 하고 난리를 하는데 하물며 거룩한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속에 생애적으로 오셔서 우리를 만나주실 때에 우리 속에 어떤 준비하고자 하는 작용들이 우리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시기의 길고 짧음은 개인차가 있을지 모르지만 반드시 하나님 앞에 생각이 변하고 마음이 변해서 주님을 받아들일 수가 있을만한 그런 준비가 갖춰지는 때는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살던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쪽으로 마음이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마음에 변화가 옵니다.
그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믿고 그 어려움 속에서 헤어 나오기를 원하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 어려움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곤고하고 쇠사슬에 매인 종된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하나님 앞에 이렇게 정직하게 자기를 인정하려고 하는 마음이 결핍된 것입니다. 변명과 그리고 자기 변호, 다른 사람들을 향한 원망, 심지어는 하나님을 향한 도전 이런 것들로 마음이 가득 찬 사람들은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문을 두드리는 그 순간부터 우리들이 배워야 할 신앙의 자세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 앞에서는 솔직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그 불꽃과 같은 눈앞에서는 우리들이 진실해지는 것이 그분의 사랑을 받는 첫 번째의 길이라는 것을 기억을 해야 합니다. 죄인들에게는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을 만한 그 무엇이 없습니다. 여러분, 능력이 많아서 여러분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신데, 물질이 있으면 그 물질로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가 있을 것 같습니까? 온 천하가 주님의 것인데, 지식이 있으면 그 지식으로 주님을 감동시킬 수가 있을 것 같습니까? 전지하신 하나님이신데, 주님이 감동 받으시는 사람들은 놀라운 힘과 능력을 소유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은 진실한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이 너무 부패하고 부정직하고 더럽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하나님이 깊이 감동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가끔 ‘누가 길거리에서 돈 보따리를 주웠는데 주인을 돌려주었더라.’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오고 서울 시장이 표창장을 주고 사진을 찍고 그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의 것이 아니기에 남의 것을 주어서 돌려주는 당연한 것인데, 그런데 상을 주고 하는 이유는 워낙 돌려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것이라도 보고 이런 식으로 사는 것도 한 방법이다 라는 가능성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온 땅을 하나님이 두루 살펴도 진실하게 자기를 찾는 사람이 너무나 소수입니다. 그러니까 진실하게 하나님만 찾으면 죄인이든지, 도둑놈이든지,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든지, 진실하게 살던 사람이든지,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하던 사람이든지, 농땡이를 치던 사람이든지 하나님은 관계가 없습니다. 왜? 그의 과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그 현재 속에서 과거와는 비교될 수 없는 무한한 미래를 하나님이 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터득해야 할 일들입니다. 진실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시련과 고통 속에서 영혼의 곤고함을 경험할 때에 우리는 정말 진실해지기가 힘듭니다. 여러분, 일생을 살면서 여러분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문제를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거꾸러지듯이 엎드리면서 ‘이 모든 불행과 비극이 나 때문에 시작되었습니다.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접니다.’ 그렇게 인격적으로 하나님 앞에 영혼 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고백으로 하나님 앞에 고백한 적이 몇 번이나 되는지 한번 보십시오. 너무나 소수입니다. 그런 기회가 너무나 드물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아주 냉정하고 이렇게 명증하게 정직해지고 진실해지고 투명해지는 그 시간이 그 영혼의 변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늘 좋은 말씀 들으면서 자기가 좋은 사람인 것처럼 살아가고 그것은 외식입니다.(?) 위선하고 그러다가는 결국은 자기가 많은 삶을 흉내내다가 보면 그것이 곧 자기인 것으로 착각을 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런 많은 시간들이 하나님과 우리와의 감격적인 만남을 가로막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단칼에 짜르듯이 아주 담백하게 우리에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이는 삶을 사는 것에 대해서 아주 단칼로 짜르듯이 명백하게 말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지존자를 멸시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인간이 당하는 수많은 시련과 견디기 힘든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기 때문에 우리가 곤고해지고 시련을 만나게 된다고 하는 것은 사실 우리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존자를 멸시하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인정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사실 히브리 어법상으로 볼 때 병행법입니다. 즉 “하나님을 멸시한다”라고 하는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산다는 것을 다른 각도에서 해설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삶이 시련을 당하고 곤고하게 살아가는 삶에 그 사람을 이렇게 겉에서 딱 봤을 때 그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삶을 비집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살아가게 하는 그 내면에 뭐가 있는가 하고 찢고 들어가 보면 그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멸시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대할 때마다 성경은 참 가혹합니다. 왜 이렇게 극단적으로 데려가실까? 나는 사실 하나님 말씀 거역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가끔 거역하지만 하나님 멸시한 적은 없는데 왜 이러실까?
어른이 점점 되어 가면서 어른으로서 모욕을 받는다라고 할 때는 어렸을 때 어른들 밑에서 모욕을 받는 것과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직장에서나 사업체에서 점점 어른이 될수록 이제 모욕을 받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나 혹은 지위가 낮았을 때 받는 모욕은 무엇입니까? 그 셀러리맨들에게 통계를 냈더니 제일 싫어하는 말이 “그렇게 하려면 관둬.” 그것이라고 합니다. 그 표현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합니다. “그렇게 해서 월급 받겠어” 아니면 “집에 가서 애나 봐” “구조조정 때 보자” 별의 별 말이 다 있습니다. 어쨋든지 간에 그런 말이라고 합니다. 제일 좋아하는 말은 “정말 수고했어. 자네가 아니면 이 일을 못했을거야” 이 말을 제일 좋다고 합니다. 그런 말을 자주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나 지위가 낮을 때는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자기를 멸시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일이라고 했어. 그것 밖에 못해. 그것도 일이라고 하고 밥 먹을 생각을 하는 거야? 애들한테 시켜도 그보다 낫겠다” 이런 식으로 안하무인격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식이 되어서 부모로부터 받는 그 모욕감 같은 것, 그런 것은 이런 것이 아닙니까? “야, 너 뒷집에 있는 아무개 봐라. 얼마나 공부도 잘하고....” 저는 절대로 비교를 하지 않습니다. 쓸데없는 비교를 하면 뭐하겠어요. 그런 비교가 모욕이 됩니다. 어른이 되고 난 다음에는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한 기업체의 사장이라고 합시다. 누가 와서 “어이 사장, 그것도 사장이라고 하고 있어. 그래서 월급 받겠어”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짤리려고 맘먹기 전에야 말할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한 집안에서 가장이고, 할아버지이고, 아버지이고, 어른인데 누가 와서 “어이 그대도 가장이야. 자네 정말 가장 하려나?” 그렇게 물어볼 사람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너 할아버지 맞아” 이렇게 물어볼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그런 식으로 우리를 모욕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제 언제 모욕을 받느냐 하면 우리가 어른이고 웃사람인데 아래 사람들이 내가 없는 것처럼 내 앞에서 행동할 때, 그 때 모욕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대로 된 집안에서 자식에 대해서 아무리 화가 나는 것이 있어도 할아버지 할머니 있는 앞에서 그 아버지 어머니가 자기 자식을 때리거나 혼내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면 자기가 화가 나도 할아버지 할머니가 거기 계신데 보는 앞에서 자기 자식을 때리고 하는 것은 그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지 않는 것처럼 그 면전에서 행동하는 것인데 그것은 그 얼굴에 침을 뱉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하나님을 멸시하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서 손가락질을 하면서 배교적인 말을 하고 그 앞에서 노골적으로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그렇게 원망하고 그러는 것이 하나님 멸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분명히 우리를 구속하시고 살아 계시고 그리고 우리를 지켜보시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살아가는 모든 삶의 그 내면에 질이 근본적으로 하나님 멸시하는 삶입니다.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모든 삶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 여러 자리에 가면 나와는 상관이 없이 어른이 되어서 이제 학생들 앞에 앉거나 교인들 앞에 앉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어른이 되어서 자기의 면전에서 자기가 없는 것처럼 사람들이 행동을 하면서 받는 그 모욕감은 차라리 아래 사람이었고, 아이들이었을 때, 사람들에게 머리를 쥐어박혔을 때 “그것도 일이라고 하니?” 하면서 모욕을 받는 것보다 훨씬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그리고 고통스럽습니다.
이 불안전하고 더러운 인간들도 그런데 하물며 지존하신 하나님이 인간들로부터 그런 모욕을 받으실 때에 그 분이 받으시는 그 명예의 회손은 무엇으로도 보상하기가 힘든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기 때문에 계속 곤고하고 계속 쇠사슬에 매이고 계속 흑암의 어두움 속에서 사망의 그늘 속에서 두려움의 위협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정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안되는 것입니다. 돈 몇 푼 가지고 우리 인생의 이 궁극적인 문제가 해결이 안 됩니다. 곤고하고 어려울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우리를 위로하고 뭔가 우리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해도 그것은 결국 잠시일 뿐이지 사라지고 나면 우리들이 다시 곤고한 어두움 속에 홀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왜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의로우신 분이심에도 왜 우리를 위해서 채찍에 맞으시고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시면서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에서 죽어 가셨습니까?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우리들이 죄에 매여 종노릇하면서, 하나님과 사귈 수 있는 찬란한 교제의 빛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두움 속에서 고통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 고통스러우셔서 우리를 위하시는 사랑으로 우리를 위해서 대신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화해를 주신 것입니다. 평화를 주신 것입니다. 그가 찔리고 그가 상함으로서 우리에게 나음을 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이제는 이렇게 병든 사람들, 망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고쳐진 사람들, 성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로 살아가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다신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죄에 매이고 그리고 곤고와 사슬에 매여서 하나님이 없는 것과 방불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현저히 욕보이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들은 이렇게 밖에 살 수 없다고 우리 자신을 변명할지라도 사실은 우리 앞에 난 하나님의 보좌에 이르는 새롭고 산 길이 우리의 이 곤고와 실패가 숙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여러분들을 만나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곤고와 쇠사슬에 매여서 수없이 헤어 나오려고 몸부림을 치고, 그리고 그것을 잊어보려고 수없이 몸부림쳤지만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건질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우리들이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진 마음으로 인정을 해야 합니다. 나를 건지기 위한 나의 모든 노력이 나를 구원할 수 없고 그리고 나를 고치고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그 은혜로운 역사 밖에는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이전에 소망도 없이 세상에 살면서 실패를 숙명처럼 여기며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살았을 때 우리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없었을 때에 누가 우리를 건지셨나요? 누가 우리의 어두운 눈을 밝혀서 우리를 위해 고난받고 죽으신 예수님을 보게 했습니까? 그래서 일생을 강철같은 의지로 살아온 우리들을 꺾어서 우리의 마음을 물같이 녹이시고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의 손길에 고침을 받고 싶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보좌 앞에 엎드리게 하신 분이 누구셨습니까? 지금보다 훨씬 절망적일 때에도 주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고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고치고 우리를 치료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고치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이제껏 우리들이 살아왔고 그리고 그렇게 고침을 받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선한 의지가 있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진리 앞에 우리 자신을 세우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를 민망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소서
그래요. 곤고하게 살아온 것이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환경에 있었더라면 사슬에까지는 매이지 않고 살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난 이야기를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변명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올무에 채인 그 속에서 주님이 우리를 건져 주시고 고쳐주셔서 다시 우리를 들판을 가로지르는 사람들로 하나님이 우리를 새롭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살면서 세상 밖에는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의 고통과 슬픔이 아무리 커도 세월이 흐르면 잊혀질 수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세월이 약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망가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인생의 비극은 세월이 결코 약일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죄인으로 잉태하여 죄인으로 출생했다가 죄인으로 살다가 죄인으로 죽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망가진 채 살아 가다가 한번도 고침을 받아본 적이 없이 망가진 채로 죽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전 이번 한 주간 동안에 깊은 산 속에 있으면서 꿈을 하나 꾸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물결이 많이 치는데 그 물결에 떠내려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보았습니다. 여러분들의 얼굴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의 얼굴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구해주시고 우리를 변화시켜주시고 우리를 고쳐주시지 않으면 남은 우리의 인생은 잘해야지 이제껏 살았던 인생에 반복이 될 것입니다. 그럴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사랑을 입고 일생 빚진 자가 되어서 여기까지 살아왔는데 꼭 한 번만이라도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 그 분에게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드리면서 그렇게 우리의 인생에 종지부를 찍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과정에는 실수도 많고 문제가 많았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우리가 그런 길을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 해결의 길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에 하나님을 우리가 맘을 먹으면 언제든지 만날 수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일생을 살면서 여러분 하나님을 만나야 되겠다고 맘을 먹은 지가 몇 번이나 되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할텐데’ 하는 신앙 말고 “주님이 저희를 만나주시든지 아니면 저희를 죽여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생사일판의 각오를 가지고 주님을 만나야 되겠다고 생각한 적이 여러분의 일생에 여러번 있었다면 우리들이 이렇게 살지 않고 훨씬 더 낫게 살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부분적으로 무엇인가 외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예화) 주님을 믿고 은혜를 받았지만 아무렇게나 살면서 곤고한 마음으로 직장에 다니 면서도 늘 사표를 써가지고 다녔는데 어느 날 같은 회사의 직원이 불러서 따라 간 곳은 윗층에 있는 창고였는데 그곳에 5-6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찬송을 부르 면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고 그곳에 참석하시면서 은혜를 받고 전환의 시기가 되셨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뭔가 외부의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을 만나야 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는 사람들, 자기의 발로 걸어서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고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았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나올 수가 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누군가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누군가 그들의 손을 이끌고 그 어두움이 아니라 빛 가운데로 걸어나오게 할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정말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어영부영 살고 그냥 흘러가면 흘러가는 데로, 좋은 일이 생기면 생기는 데로 이렇게 살면서 살아온 것이 여태까지 인생이었다면 이제는 한번쯤은 ‘더 이상 실패에 익숙해진 삶을 계속해 나가기에는 내 영혼이 너무나 곤고하다.’ 그리고 여태까지 살았던 삶에 독립선언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만나기를 정말 사모해야 합니다. 그것을 기억을 해야 합니다.
(예화) 어느 해 여름에 학생들을 데리고 기도원에 가셨는데 여학생 하나가 늦게 출발해 서 도착했는데 이미 밤이 되어서 어두운 가운데 기도원을 가르키는 표지판은 있 었으나 얼마를 가야할지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망설임과 갈등 속에서 주님을 만 나야겠다는 생각으로 어둠 속을 걸어오면서 하나님만 바라보며 두려움을 이기고 도착해서 울음을 터트리는 그 학생에게 성령께서 임하셔서 은혜를 주셨다는 이야 기.
여러분, 정말 소중한 것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이번 여름 수련회에 정말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더 이상 어두움과 사슬에 매여서 살아가는 곤고한 삶을 계속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서 하나님을 뵈오리라.’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추스리십시오. ‘누가 가는가? 가면 2인용 방을 주나? 10명 짜리 방을 주나? 물은 잘 나오나? 샴푸는 주나? 밥은 괜찮은가?’ 그런 생각하지 마시고, 아무렴 어떻습니까? 그리고 가서 정말 ‘내가 하나님 만나리라.’ 그런 마음을 가지고 각자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자신을 준비하십시오. 기도하고 환경이 막힌 사람들은 환경을 열어주시도록 간구하면서 주의 도움과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나가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번 여름 수련회에 주님 만나고 그런 쇠사슬에서 완전히 자유케 되어서 세상을 가로질러 달리는 주님의 거룩한 전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9.겸비한 자에게 응답하시는 하나님
“때에 내가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것과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스8:21)
오늘 여기서 살펴보는 우리 에스라의 포로 귀환은 역사적으로 볼 때 주전 450년 경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러니까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때가 주전 605년 경이었고,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서 70년 후, 그러니까 530여년 경에 첫 번째 포로 귀환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그 때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의 수가 수룹바벨의 인도를 따라서 이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80여년 동안 다시 포로 귀환이 없다가 두 번째 포로 귀환이 있게 되는데 그 때에 그들을 인도했던 사람이 에스라고 그 후로부터 다시 13-4년 후에 마지막 세 번째 포로 귀환이 있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불세출의 지도자 수룹바벨을 인도자로 해서 따라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포로의 무리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에 나오는 에스라의 포로 귀환은 첫 번째 포로 귀환이 있고 나서 80여년 동안 없다가 이제 비로소 소수의 무리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가도록 아닥사스다 왕의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무리의 수가 거의 2000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니까 첫 번째 포로 귀환에 비하면 아주 소수의 사람이 에스라의 인도를 따라서 이제 포로였다가 고국으로 귀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포로로 잡혀 있다가 고국으로 돌아간다라고 하는 것은 말할 수 없이 커다란 기적과 같은 사건이었고 꿈꾸는 것과 같이 황홀한 사건이었지만, 그러나 그들의 포로 귀환이 그렇게 행복하고 기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난관이 너무나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때는 바벨론에 의해서 메대, 바사, 헬라 이렇게 역사가 이어지면서 지역들을 다스리게 되는데 많은 나라들이 이제 바벨론에게 복속되어 있었고 이어서 메대, 바사 왕국에 의해서 복속되어 있었습니다. 함께 바벨론의 치하에 복속되어 있는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만 유독 왕의 은총을 입어서 고토로 돌아오는 그 광경이 이웃에 있는 동일한 상황에 놓여있는 많은 피지배 국민들, 민족들에게 그것이 그렇게 썩 좋아 보였을리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는데 거기에 들어와서 성을 쌓겠다, 성전을 짓겠다. 하면서 귀환을 하겠다고 할 때에 이미 그곳에 있는 많은 이민족들과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이스라엘이 왕의 특별한 대우를 받아서 정치적인 세력을 키우고 그래서 자신들의 안전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들을 자아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어려움이 1차 포로 귀환 때도 있었습니다.
역사가 많이 흘러갔지만 그 이야기들을 다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그리고 이제 포로 생활에서 고국으로 귀환 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역시 80년 전에 있었던 포로 귀환과 똑같은 어려움들이 그들의 눈앞에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가 있다고 할지라도 실제적으로 사람들이 그들의 길을 막고 훼방하면 그들이 어려움을 당할 수밖에 없었고 왕의 구출은 시기적으로나 장소적으로나 아주 멀리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얼마나 어려웠을까 생각합니다.
특별히 이 에스라는 제가 보기에는 순결한 지도자이지만 그러나 느헤미야나 스룹바벨과 같이 탁월한 리더쉽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아주 경건하고 세속으로부터 분리되었고 하나님에 대해서 아주 통달해 있고 삶이 순결하고 불의를 보지 못하는 그런 경건하고 진실한 사람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러나 세상 물정에 대해서 느헤미야나 스룹바벨이나 모세와 같이 그렇게 밝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이제 사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소수의 무리들을 이끌고 그리고 이제 바벨론 포로 귀환의 길에 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아하라는 강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강가에서 이제 에스라가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아하와 강가에서 함께 포로로부터 귀환하는 모든 백성들을 모아 놓고 그들에게 금식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평탄한 길을 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것을 보면서 야, 참 이 사람은 참 훌륭한 지도자이고 정말 믿음을 가진 지도자이다 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왜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뒷편에 보면 적들이 자기들 가는 길에 어려움을 주리라고 하는 것을 에스라와 일행들은 충분히 예견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포로 생활로부터 본토로 돌아가게 된 것도 왕 몰래 혹은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아닥사스다 왕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떠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그 길을 막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곧 아닥사스다 왕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바사 왕 고레스나, 혹은 아닥사스다나 이런 사람들이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토로 돌아가도록 허락을 했느냐. 이것은 다양한 민족들을 광범위하게 다스리는 제국의 화합을 위해서 종교적인 관용정책의 소산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통치 아래 굴복하게 하려는 정치적인 계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지 간에 하여튼 가로막으면 왕의 명령을 거스르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당연히 우리가 이렇게 길을 걸어가는데 어려움을 만나면 즉시 연락을 해서 왕이여 우리의 가는 길에 이런 악한 자들이 가로막아서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군대를 보내 주시옵소서. 혹은 가기 전에 이런 저런 어려운 일들이 예상됩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군대를 붙여 주시옵소서. 얼마든지 이렇게 청구할 수가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에스라는 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통달한 진실한 신앙의 지도자로서의 인격을 깊이 인정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왕도 존경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든지 그것이 가능했는데 그런데 에스라는 말하기를 그렇게 군대를 왕에게 청하는 것을 우리가 부끄러워하였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훌륭한 믿음입니까? 무슨 의미를 에스라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를 그 오랜 포로의 생활로부터 돌이켜 고토로 돌아가도록 명령을 내리는 사람은 아닥사스다 왕이지만 그러나 우리를 돌아가게 하시는 이는 한 제국의 왕이 아니라 역사를 움직이시는 이스라엘의 선택자요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시라는 이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보다는 누구를 더 의지하고 싶었습니까? 그렇지요.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하고 싶어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사람의 도움을 청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 것입니다. 만약에 이 일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면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의 가는 길을 지켜주실 것이라고 하는 그 확신, 그 신념, 그 믿음이 왕에게 군대를 청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이 사건을 구속사적으로 보면 이렇게 민족이 대이동을 하면서 탈출하는 것이 두 번이 나옵니다. 첫째는 출애굽의 사건입니다. 또 하나는 바벨론의 지배로부터 이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그 광경이 나타납니다. 맨 처음에 있었던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탈출하는 것이 죄악된 세상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천국을 향해 걸어가도록 구출을 맞는 성도의 즉각적인 구원을 의미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을 바라보는 사건이었다고 할 것 같으면 오늘 여기에 나타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묶여 있는 상황에서 거기에서 벗어나게 하셔서 결국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시는 것은 성화의 과정에서 반드시 우리를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의 승리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구원의 은혜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치하에서 노예로 살아가고 있을 때, 그들은 상식적으로,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거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모세가 찾아와서 바로에게 내 백성을 놓아달라고 그랬을 때 바로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여호와가 누구관데 내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주는가?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꺼져라.“ 그러니까 그 엄청난 권세, 그 엄청난 권능, 그 압제 아래서 도저히 어떤 해방의 희망이 없었습니다.
주 하나님은 믿는 역으로 강하고 급한 바람 불어와
무슨 뜻입니까? 모세가 홍해를 어떻게 건너는가. 아이들이 찬송부르는 곡입니다. 그 대답이 무엇입니까? 강하고 급한 바람이 불어와, 그래서 홍해를 가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넌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그렇게 해서 애굽에서 탈출할 때 까지 전폭적인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입니다. 그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보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가만히 앉아서 주께서 행하시는 일을 잠잠히 보았습니다. 그런데 구속사적으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했습니다. 어째든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죄로 말미암아서 다시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이 깃들여 있는 그 땅을 하나님과의 찬란함이 있는 그 복된 은혜의 땅, 그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영광스러운 교제의 땅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죄와 불순종, 그리고 포로로 끌려간 것입니다. 전에는 자기 땅이 없어서 종살이를 했는데 이제는 어떻습니까? 자기 땅이 있는데도 종살이를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갔던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오늘 성화의 과정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까? 주님이 우리를 구해주셨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애굽의 종노릇하는 처지가 아닙니다. 주님을 믿고 거듭났습니다. 주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를 누구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기업이 있습니다. 우리의 땅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이 있고 하나님과의 만남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오래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수많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불순종하고 죄가운데 살아가므로서 하나님과의 임재가 있는 예루살렘에 영광스러운 영적 생활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노예도 아닌데도 포로가 되었고 하나님의 백성인데도 아닥사스다 왕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좌절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이번에도 홈페이지에 보니까 누가 글을 올렸습니다. ‘목사님, 살아갈 모든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얼마나 생존하는 것이 힘겨우면 그런 편지를 썼겠어요. 얼굴도 모르지만, 그런데 그런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 마치 기업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것과 유사한 처지가 아닙니까? 그런데 거기에서 하나님이 놀랍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다시 그 본향으로 돌아가도록 하나님이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그러니까 즉각적인 구원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성화의 과정에 있어서도 정말 우리가 거룩하고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영광스러운 교제 속에서 살아가게 하시는 그 일에 있어서 주도권을 가지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맘 속에 시험을 당할 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때
그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시시때때로 날 생각하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참 놀랍습니다. 그것을 보면, 누가 꿈이나 꾸었겠어요. 누가.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 제국이, 어느 제국이 본토 사람이 본토로 다 삼인 정책에 의해서 흩어버렸는데 본토인을 자신의 본토로 돌아가서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그런 바보같은 정책을 쓸 제국의 왕이 이 세상에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누가 주도하십니까?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예표의 모습을 한번 적용을 시켜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힘으로 하나님께 돌아갈 수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힘으로 영원의 회복을 이룰 수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구원받을 때, 그 때도 여러분 아무 공로가 없었던 것처럼 여러분, 성화의 도상에서 죄와 불순종으로 좌절하고 그 자매처럼 살 힘까지 잃어버리고 모든 기대조차 끊어져서 하나님의 이름이 낮설게 느껴지는 그 순간에 우리를 새롭게 일으켜 세워서 찬란한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도록 그렇게 만들어 주시는 그 일에 있어서 주도권을 가지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이 일을 하실 수가 있고 하나님만이 그 일을 이루실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일을 꼭 하시고 싶어하십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그런 일을 하시는가 하면 그 일을 기대하는 사람들, 사람으로부터 오는 도움과 세상으로부터 오는 힘, 인간으로부터 오는 구원을 의지하기 보다는 하나님 아버지의 도움을 홀로 의지하므로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자신의 구원을 통해 입증하고 싶어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구원의 놀라운 역사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마찬가지입니다.
언젠가 한번 책을 막 뒤적이다가 보니까 조그마한 편지지가 하나 나왔습니다. 누구에게 편지를 쓴 것입니다. 반쯤 쓰다가 무엇 때문인지 하여튼 그냥 거기에 끼어놓은 것입니다.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편지지가 누렇게 바랬습니다. 쓰다가 만 편지는 세월이 많이 흘러도 거기까지 사연이 계속 되었지 그 다음은 백지입니다. 왜 거기서 그쳤으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묻어두면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년이고 후년이고 십 년 후이고 이십 년이고 아니면 죽기 직전이라도 다시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이 가장 빠른 때입니다. 지금이 가장 효과적인 때입니다.
보십시오.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무슨 희망이 있었습니까? 예루살렘에서 맛보는 찬란한 제사의 영광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예루살렘과 시온의 아름다운 땅에서 추방되었습니다. 누구에 의해서도 돌아갈 모든 기약이 없습니다. 그러데 이길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시인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포로를 돌이키실 때에 우리는 어떤 것과 같았다고 합니까? “꿈꾸는 것과 같았도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처지에 있는 사람인지 그리고 각각 어떤 사연을 안고 있는 사람인지 난 다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하게 알 수가 있는 사실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여러분이 어떤 의미에서든지 하나님 없이는 살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이 그 모든 것을 다 여러분에게 준다고 해도 여러분이 그것으로서 하나님 대신으로 생각하며 살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일 뿐이고 실제로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 없이는 살 수가 없다고 하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복됩니까? 우리들이 비록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만큼 순종하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며 사랑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다라고 하는 이 신앙에 확신,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하는 자기 고백, 이것이 얼마나 복된 사람입니까? 선택된 사람들 이외에는 이런 고백을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그 자체로서 이미 복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쓰러진 채로 하나님께서 주신 영광스러운 기업을 잃어버린 것처럼 살아가면서 바벨론의 포로 생활과 같은 그런 억눌리고 침체된 삶으로서 우리는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더 크고 놀라운 일들을 기대해야 합니다.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그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니까 아하와 강가에서 이 사람들이 에스라의 지도를 따라서 모여서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에스라로부터 선포를 받는데 그것은 금식기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강’ 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시편에서 이 강은 시편에도 나오고 그리고 바벨론 강가에서 시온을 기억하는 장면으로 나오기도 합니다. 그것도 나오고 그 다음에 또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에스겔 1장에 보면 에스겔이 선지자로 소명을 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에서도 강가에서 소명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더 또렷한 것은 137편 시편에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에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에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함이로라” 그랬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처럼 강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추측할 수 있는 바는 무엇인가 하면 그 사람들이 하루 종일 고단한 일과를 마친 다음에는 아마 황혼이 깃든 저녁 강가에 나왔던 것 같습니다. 강가에서 한낮의 노역으로 말미암아 흐른 진한 땀을 닦으면서 그리고 지는 황혼옆에서 예루살렘 쪽을 바라보며 흐느껴 울었던 것 같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있고 하나님의 영광이 있었던 그 예루살렘에서의 그 찬란한 기쁨, 그 영광을 잃어버리고 산 날들에 대해서 깊이 후회하는 광경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바로 그런 맥락과 같이 합니다. 성경에 명시는 안 되어 있지만 거의 틀림없이 그 때가 저녁 때였을 것이다 생각합니다. 낮에는 아마 행진을 계속 했을 것이고 저녁 때는 강가에서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경건한 지도자 에스라의 설교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럼 여기에서 금식을 선포하게 된다. 결국은 여기에서 하나님만 바라보며 가는 그 길이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무엇이 보증이 되겠습니까? 그런 상황 속에서 주님의 은혜 밖에는 구할 때가 없었습니다. 주님이 불쌍히 여겨 주시는 긍휼, 이외에는 바랄 때가 없었습니다. 그것을 기대하면서 그것을 기도제목으로 놓고 아하와 강가에서 에스라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식을 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세 가지 요소를 갖춘 금식이 이루어집니다.
우선 첫째는 금식 그 자체입니다. 밥을 굶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의 포로 생활하던 땅에서 자신의 고토로 돌아갔습니다. 특급 열차편으로, 비행기편으로 아주 화려한 황금 마차를 타고 아닙니다. 그들은 대부분 도보로 걸어야 했습니다. 아마 말이나 노새 같은데 짐을 실고 그것을 타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걸어서 도보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이제 걸어서 행진했던 것처럼 그렇게 땅을 걸어서 행진하면서 고토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얼마나 고단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금식을 해도 기도원에 가서 가만히 누워서 금식하는 것도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런데 직장 다 다니고 자기 할 일을 다 하고 그러면서 금식기도 하는 사람들은 더욱 놀라운 사람들입니다. 금식하는 동안에라도 자신 혼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여건이 허락되지 않기 때문에 살면서 금식하는 사람들은 배나 더 힘든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행진을 하면서 그들은 아하와 강가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음식을 끊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이 금식은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을 향한 집중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살빼기 위해서 굶는 것은 금식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돈을 한달에 몇 십만 원씩 내고 체중 조절사의 지시에 의해서 밥을 굶는 것은 우리들이 금식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정치인들이 ‘너희 내 말을 안 들으면 죽어버릴거야.’ 그러고 밥을 굶는 것도 우리들이 금식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금식은 사람에게 나를 보이기 위한 것이나, 사람에게 나를 알리기 위한 것이나, 사람의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자극하여서 자기의 목적을 이루거나 혹은 자신의 건강을 생각하는 그것이 아니라 금식은 살아 계신 하나님 한분만을 주목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 금식하는 것은 굶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앙망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집중하는 마음, 이것이 금식 기도하는 사람의 요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가졌던 것입니다. 왜 하나님 수많은 적군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위협이 우리 앞에 있는데 하나님, 아닥사스다 왕에게 군대를 청하고 사람의 도움을 힘입는 이런 부끄러운 일들을 우리들이 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우리는 아닥사스다 왕의 도움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도움을 원합니다. 그러니까 정말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고 그 은혜와 영광 아래서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기도 응답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응답되느냐도 방식자체도 그들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예화) 신학교 선배 한 사람이 러시아에 선교를 가셨는데 돌아와 선교 보고를 하는데 러시아가 공산당 이므로 반 기독교 정책 아래 있으므로 비밀 경찰들을 동리 구역 마다 배치를 시켜놓고 있는 상황인데 어느 경찰이 지나가는데 누군가 법으로 금 지되어 있는 기도를 하기에 들어보니 하나님께 50루불이 필요하다며 기도하는 사 람에게 경찰이 자기 구역에서 기도하면 자기의 승진에 타격이 있으니 하지 말라 고 하면서 타일러 보냈는데 다음에 또 그렇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운 마 음에 경찰이 돈을 주었는데 그가 다시 기도하기를 하나님께 다음에는 경찰을 통 해서가 아닌 직접 하나님께서 주시기를 기도했다는 이야기.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들, 정말 간구하는 과정이나 응답받는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응답해주시는데도 문제이지만 어떤 방식으로 응답해주느냐가 굉장히 기대가 되는 것입니다.
아니 이럴 필요가 있었습니까? 아니, 분명히 그들에게는 가도 좋다는 통행 허가증 같은 것도 있을 것이고, 이 사람들을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는다는 보증서가 있었으니까 그 많은 사람이 같은 제국 내에서 그렇게 엄청난 무리를 지어서 이동했을 것이 아닙니까? 그것을 보여주면 되잖아요. 그리고 관하에 신고해서 아닥사스다 왕의 명을 좇아서 우리들이 이동하는데 저 사람들이 우리들을 건드린다 이야기하면 되잖아요. 복잡하게 금식을 하는 것입니까? 왜 밥을 굶고 보이는 왕에게 그런 고난을 주셔서 그들의 보호를 받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신데 왜 그 사람들의 도움은 계산에 넣지를 않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도움을 받게 하시는 것일까요? 무엇 때문입니까? 자신들의 포로 귀환이 아닥사스다 왕의 긍휼히 아니라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 때문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문제. 해결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해결되는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까? 돈이 없습니까? 돈이 있는 친척에게 가서 한번 바지자락이라도 붙들고 울고 불고 매달리면 빌려주지 않을까요? 어려움에 처해서 어디 힘있는 사람 여기 저기 찾아보면 도움을 구할 때가 없을까요? 그렇게 하나님이 도와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에스라와 믿음의 사람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다 영광스러운 방법으로 하나님이 자신들을 도와주시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만 집중하며 하나님의 은혜에만 집중하며 주님의 긍휼과 은혜를 입기 위해서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던 것입니다. 금식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번 어떴습니까? 하나님이 직접 역사해주시기를 기대하는 그런 방식에 여러분들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것을 한번 경험하실 의향은 없으신가요? 하나님이 그런 역사를 일으켜주시도록 뭔가 아하와 강가에서 이 사람들이 외로움과 두려움 속에 떨며 하나님의 도움과 은혜를 향해서 금식을 통해 집중했던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만 집중하면서 여러분들의 인생의 문제를 영광스럽게 해결해주시기를 기대할 그런 마음이 여러분들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참 그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빠지기 쉬운 위험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자신이 누리고 있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대한 과도한 신뢰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겸비해져야 할 필요를 간과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로 말미암는 만족 때문에 하나님 앞에 겸비해야 할 필요성을 간과할 위험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거룩한 친밀함이 되어서 주님과의 친밀함이 깊으면 깊을수록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비한 마음을 동시에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만한 마음입니다.
오늘 여기에서 성경이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께 스스로 겸비하여”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들이 늘 누리고 있는 친밀한 하나님을 의미하지만 “스스로 겸비하여졌다”라고 하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의 커다란 사랑과 은혜 안에 살면서도 그것 때문에 자신들의 마음이 방종으로 흘러서 하나님을 향한 가난한 마음, 주님의 은혜에 대한 목마른 마음들을 상실하지 않도록 자기 자신을 추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이들이 어떻게 보면 얼마나 기고만장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천하의 아닥사스다 왕이 그들에게 허락을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뭔가 증서가 있을 것입니다. 누가 감히 나를, 우리를 막을 수가 있느냐. 겸비해지기보다는 오히려 프라이드를 가질 수 있는 그런 요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모든 피지배 민족들 가운데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고토로 돌아가게 했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겸비해졌습니다. 스스로 마음을 낮추었습니다. 이미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했지만 앞으로 하나님께 받아야 할 은혜가 더 컸기 때문에 앞으로 하나님께 받아야 할 긍휼과 도우심이 더 많았기 때문에 그들은 자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음을 낮추고 자기 스스로 겸비하게 되었습니다. 자만할 요소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아닥사스다 왕의 명령도 그들을 교만하게 할 수가 없었고 그들에게 준 증서도 그들을 교만하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도움을 청구할 수 있는 모든 탄원의 힘도 그들을 자만하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결국은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겸비하게 낮추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만나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그렇게 만나 주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에스라를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껏 받은 은혜가 컸지만 그러나 앞으로 받아야 할 은혜가 더 크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이전에 받은 은혜 때문에 교만해지지를 않습니다. 누가 은혜를 받아야 하겠습니까? ‘누가 받아야 하는데, 그 집안은 누가 변해야 되는데,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우리에게는 얼마나 많은 것이 있습니까? 하루 하루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 주시는 성령님의 은혜, 돌보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매일 매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가진 것이 있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가진 것이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이 필요 없을 정도로 우리가 많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이 그렇게 견고한가요? 우리의 신앙은 바람 앞에 휘둘리는 촛불과 같습니다. 주님이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는 긍휼을 그치시지 않으심으로 유지되는 신앙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의 뜻대로 잘 살고 나면 우리는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우리를 하루도 지켜주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님 아버지의 보호 밖에는 없습니다. 역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신앙 생활이 오늘도 승리를 가져다 주었구나. 우리는 그렇게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시시때때로 날 사랑하사 시시때때로 새 생명주니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시시때때로 주만 봅니다
우리는 힘이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까 우리가 마귀도 이기지 주님이 우리를 홀로 놓아두시면 마귀가 꺽으면 꺽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속이면 속을 수밖에 없습니다. 죄악이 우리를 누르면 눌릴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고통을 주면 아픔을 당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오늘 피었다가 지는 들풀과 같고 그 들풀들 중에서 상한 갈대와 같습니다. 매순간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 매순간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것 때문에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더군다나 예루살렘에서 누렸던 탁월한 영광의 교제를 잃어버리고 바벨론에서 오래동안 포로 생활을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뒤로 물러난 생활 속에 우리들이 만약에 있었다면 여기에서는 평범한 은혜가 아니라 일상적으로 볼 수 없는 매우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없네
푸른 하늘을 나는 새들도 먹이는 하나님
진흙과 이 몸은 정금같게 하시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피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순간 발뒷꿈치를 들고 하늘을 향해 손을 벌리고 흐르는 눈물, 타는 목마름으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치 망망한 바다에 떠있는 배, 거기에 목말라 지친 사공들이 물위에 배가 떠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다의 물을 먹을 수가 없어서 먹구름을 기다리고 있는 것과 똑같이 그렇게 우리들이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살 수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특별한 하나님의 구원, 특별한 하나님의 보호와 하나님의 특이한 구원의 은혜를 보아야 할 필요성에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더더욱 하나님을 행해 간절히 겸비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깨어 있는 신자, 살아 있는 신앙을 가진 신자의 결정적인 특징은 헌신도 아니고 무엇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살아 있는 신앙을 가진 신자의 결정적인 특징은 매순간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주없이 살 수 없습니다’라는 겸비한 고백, 주님이 자신을 아무리 높이 들어 써주셔도 그것으로 인해서 자만할 수 없는 것은 앞으로 주님을 섬겨야 할 일이 더 많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믿고 이정도의 세월을 살아온 저도 산전수전 겪은 것 같이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나는 아직 까지 여러분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내가 겪어보지 못한 신앙의 갈등과 고민 속에서 아파하는 사람들은 거의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개인적으로 험악한 세월을 살아온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남은 날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아직 긴 손톱을 기르고 피묻은 손으로 내 면상을 향해서 긁으려고 덤벼드는 악마의 손톱들이 기다리고 있는 광야와 같은 발판을 아직까지도 더 많이 지나야 합니다. 어떤 강을 건너고 어떤 함정을 피해야 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떤 폭격이 퍼붓는 벌판을 가로질러 달려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사랑하고 기대하던 사람들에게 얼마나 더 버림을 받아야 할지, 배신을 당해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확실히 알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제껏 내가 맛본 하나님의 은혜보다 더 많은 은혜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더 아름다운 삶을 살고 주님을 더 훌륭하게 섬기려고 마음을 먹는다고 할 것 같으면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할 것이라는 사실 하나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예전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았던 것, 인도를 받으며 산 그 일들이 자만해서 우리가 오늘 하나님 앞에 겸비해지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겸비해져야 합니다. 어느 정도까지,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칭찬할 때, 어떻습니까? 아부의 달란트를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를 닭살 돋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유, 집사님을 보면 목사님 보다 훨씬 은혜스러워, 아니면 집사님을 보면 예수님을 보는 것 같애. 내 인생은 집사님만큼만 됐으면 좋겠어’ 그런데 가슴이 뿌뜻합니까? ‘주여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자기도 모르나이다’ 죽고 싶을 정도로 공허하게 느껴지는 적이 없습니까?
나는 갈길 모르니 주여 인도하소서
어찌해야 좋을지 나를 가르치소서
어찌해야 좋을지 나를 도와주소서
그렇게 처절하도록, 몸서리치도록 하나님의 은혜에 목마르고 이 상태로서는 살 수가 없다라고 하는 이 처절한 몸부림이 있는데 주위에서 누가 ‘아! 당신 이거야 당신만한 사람이 없어’ 죽이고 싶은 것입니다.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로다.
여러분, 그것이 겸비한 마음입니다. 자신의 비루함을 인해서 자신의 더러움과 자신의 비참함을 인해서 하나님 앞에서 애통할 수 있는 사람이 영혼을 위해서 비로소 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서 흐르는 눈물이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인해서 깊이 좌절하고 아파하는 자기 성찰에 자기 직시의 눈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겸비한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갖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스스로”라는 단어를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지만 그들은 그런 마음을 갖고 싶다고 생각했고 그런 마음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방해하는 것들을 몰아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 속에서 살고 싶어했습니다. 이것이 아하와 강가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두 번째 특징이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이제껏 모든 방법으로도 해결될 수 없는 난관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이 이 문제의 해결에 인생을 걸고 하나님 앞에 깊이 낮아지며 주의 도우심을 향해 목마른 자들이 된다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이 이번에 틀림없이 여러분들을 만나주실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간구합니다” 우리 어린 것들과 우리의 짐승들과 평탄한 길을 주시기를 하나님 앞에 간절히 간구했습니다. 간절히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은 기도와 통하는 것이지만 마치 하늘로 싣고 가기 위해서 준비해 놓은 기도 상자일 수는 있습니다. 생각하는 것이, 그러나 기도는 하늘로 그것을 배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기도를 해야 합니다. 무엇을, 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를 위해서 우리 앞에 평탄한 길을 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들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그 방법이 얼마나 하나님의 백성다운가 보세요. ‘하나님, 주의 뜻인지를 믿습니다. 우리가 가다가 방해하는 놈들은 단칼에 날려주시옵소서. 아니면 아닥사스다 왕의 군대를 몰고 와서 짒밟아버리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자신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간 이 길로 인해서 피해를 보기를 원치를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에스라의 인격을 보는 것입니다. 오늘 날 지도력, 지도력하는데 저도 지도력에 대한 사모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종종 뛰어난 지도력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아직 차가운 인격이 바탕이 된 지도력이 바탕이 된 지도력이 있습니다. 얼음장 같이, 칼날같이 차가운 인격이 바탕이 된 지도력, 기계적인 지도력입니다. 합리를 추구하고 이익을 추구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사람을 추구하는 지도력, 그런 것은 제가 싫습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 에스라의 지도력은 참 뛰어납니다. 보십시오. 나중에 예루살렘으로 가서 사람들이 타락하는데 우리같으면 어떻겠어요? 백성들의 두목들이 이중 결혼하고 자식들을 낳고 그렇게 타락했는데 우리 같으면 이런 나쁜놈들 하나님이 어떤 은혜를 베풀어주셨는데, 이 사람에게 행정적인 권한까지 주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단칼에 짤라서 하나님의 공동체를 정화시키리라. 목을 대라고 하면서 청룡도가 춤을 추신다 하면서 단칼에, 나같으면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도자는 어떻게 했습니까? 성전으로 가서 그 문 앞에 엎드려서 미친사람처럼 흐느끼며 ‘오! 하나님, 주께서 은혜를 주셨는데도 이 백성들이 다시 타락했습니다. 나는 얼굴이 뜨거워서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이제 내가 하나님 앞에 무슨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민족의 죄악을 자기 때문이라고 짊어지고 청룡도 대신에 깍지를 끼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간절히 울었습니다.
이 점에서 에스라의 지도력이 참 뛰어난 경건을 가미한 지도력입니다. 비록 불세출의 지도자는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이 사람에게는 나름대로 아주 경건한 지도력에 힘이 있었습니다. 강력한 감화력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막 우니까 청룡도를 한번도 휘둘르지 않아도 어른들이 옆에 와서 ‘왜 우나.’ 그렇게 지켜보다가 나중에 자기네들도 막 우는 것입니다. ‘에스라 학사가 우리를 위해서 운다.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래. 우리가 율법을 버렸기 때문이래.’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 성전 앞에 모여서, 그 자체가 하나의 기도였습니다. 통회자복하는 기도회가 되었습니다. 아! 정말 놀랍습니다. 우리 시대에 이런 사람들이 그리워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그게 자신들이 가는 길에 권한이 있고 모든 것이 있어도 부딪히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원했고 누구도 자신들을 인해서 범법자가 되거나 비난받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께 무엇을 구했는가 하면 평탄한 길을 주시기를 기도했던 것입니다. 불이나 칼을 구한 것이 아니라 평탄한 길을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 에스라는 백성들과 함께 실제로 간구한 것입니다. 생각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기도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주님과의 만남을 앞두고 여러분들이 실제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할텐데’하고 생각만 하면 안 되고, 부담을 느끼는 것, 그것이 아니고 실제로 기도해야 합니다. 에스라처럼 금식은 할 수가 없어도 기도원에 갈 수는 없어도 새벽마다 나와서 기도해야 합니다. 퇴근하고 집에 조금 늦게 들어가면 어떻습니까? 한 시간 좀 덜 자면 어떻습니까? 특별한 때는 특별히 기도해야 합니다. 나와서 기도해야 합니다. 올수 없는 상황에서 오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예화) 청년 때 많이 다니시던 삼각산 기도원은 올라가는데 1시간 이상의 시간이 들정 도로 힘이 들었는데 그렇게 힘들게 올라가 무릎을 꿇으면 하나님께서 더 은혜를 주셔서 더욱 간절히 기도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우리가 기도할 마음이 준비가 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과거의 신앙의 경험을 보면 준비만 하다가 실제는 기도 없이 끝나버린 때가 얼마나 많은지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열매는 맺었으나 먹도록 충분히 익지 않고 떨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예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십시오. 이제는 부담을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그래, 주님 만나야지. 무슨 길이 있겠어?’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안 되고 실제로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오늘 저녁부터, 내일 새벽부터, 올 수가 없는 사람은 있는 처소에서 시간을 내어서 주님이 이번에 우리를 만나 주시도록,
우리가 많은 식구들을 데리고 이제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는데 어떤 일을 행하실지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 교회 앞에 그리고 우리에게 놓여있는 앞길이 에스라와 이 동족들을 기다리고 있는 앞길보다 더 낫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도 평탄한 길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특별한 인도와 은혜와 사랑과 축복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도 이것이 너무나 필요합니다. 우리는 에스라와 그 동족들이 그런 은혜를 입은 것을 ‘우리도 읽었다’라는 것만 가지고는 우리는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재현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들처럼 하나님 앞에 평탄한 길을 주시도록 간구하여야 할 이유가 얼마나 많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실제로 이들은 기도했습니다. 간구했습니다. 평탄한 길을 주시도록, 우리 어린 것들과 그리고 짐승들을 위해서 연약하니까 하나님 은혜를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세 번째로 겸비한 마음을 위해 실제의 기도를 더하라는 것입니다. 1년 365일 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제 몇일 남지 않았으니까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우리 마음을 살피고 주실 은혜와 우리를 깨우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간구하고 실제로 하나님 앞에 입을 열어서 주님께 아뢰라는 것입니다. 주의 도우심을, 주님의 은혜베푸심을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 보여 주시도록 우리가 하나님의 특별한 도움 속에서 사는 주의 백성인 것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럴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 앞에 간구하다가 하나님 만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0.곤고한 자를 건지시는 하나님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시107:19-20)
고통 중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너무나 단순합니다. 그것은 그 백성들의 부르짖는 기도를 통해서 어려운 속에서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부르짖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그들을 인생의 위기 속에서 건지신다고 하는 증거는 발견하지 않고는 성경을 넘길 수가 없을 정도로 풍부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 항상 ‘기도는 만사 형통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걱정할 것이 없다.’ 이렇게 단순한 공식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은 시편 107편을 보면서 그 단순하고 간단한 공식 속에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시는 심오한 방법들이 깃들여지고 있다라고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정말 우리가 인생의 위기를 만난 상황에서 부르짖는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해주신다는 사실을 분명하지만 그러나 그 간단한 공식 속에 숨어 있는 자기 백성들을 건지시는 하나님의 심오하고 세밀한 계획을 살펴봄으로서 우리들이 인생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 수 있는 비결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에 고통의 원인이 환경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말하기를 우리가 당하는 고통에 대부분이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찾아오는 것이라고 명백히 말하고 있습니다. 에레미야도 이런 사실을 강조했고 에스겔도 강조했지만 오늘 이 시편 107편에서 시인은 우리에게 지난 주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에 그늘에 앉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지존자를 멸시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 아래 앉고 곤고와 쇠사슬에 매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지존자를 멸시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 그것은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거역해야 되겠다고 적극적으로 노력을 하고 그리고 결심을 하므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앞에 불순종 하면서 사는 것은 우리들이 불순종 하면서 살겠다고 결심을 한다고 해서 불순종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고 우리의 마음에 원하는데로 자연스럽게 살면 그 자체가 불순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특별히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기 위해서는 매일매일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고 주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의 빛아래서 자신을 성찰하는 진지한 자기 극복의 삶이 요구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사는 것은 우리의 본성이 시키는데로 그냥 살기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 주에 지존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실제적인 정의를 여러분들에게 내려드렸습니다. 무엇이라고 말씀드렸습니까? 지존자를 멸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침을 뱉거나 모욕적인 언사를 말하는 것, 그것은 이미 배교한 사람들의 이야기고,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멸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참을 수 없는 모욕입니다. 그렇게 하므로서 인간은 곤고와 쇠사슬에 매여서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쇠사슬에 매일 때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산을 뛰어 다니며 자유롭게 살던 들짐승이 올무에 걸려서 매였을 때에 처절하게 울부짖으면서 피를 흘리며 그 올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지만 그러나 그것으로서 자신을 구할 수가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지존하신 하나님을 멸시하므로서 곤고와 쇠사슬에 매여서 사망과 흑암에 그늘에 앉아서 살아가는 불행한 인간들의 고통의 그 위기는 하나님이 아니시면 고쳐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곤고한 위기 속에 빠진 인간들을 구원해주시는 방법을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이 말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요지는 그것입니다.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간절히 부르짖었더니 하나님이 건져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보면 기도의 부르짖음과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동이 이렇게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확실히 하나님은 부르짖어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에 보니까 “저가 근심 중에 부르짖으매” 그랬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성큼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근심, 염려와 기도의 영은 서로 상극이기 때문입니다. 염려하는 마음은 기도의 영을 말리고 그리고 기도의 열렬한 열심은 우리 속에서 염려하는 마음을 쫓아냅니다. 그런데 오늘 왜 시인은 여기에서 “근심 중에 부르짖으매” 라고 하였을까요? 우리들이 실제 기도 생활에 있어서 우리의 기도를 가로막는 여러 가지 장애물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죄도 우리의 기도의 불길을 끄는 훌륭한 물입니다. 무지도 우리의 기도를 타오르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우리들이 가책없이 늘 경험하는 기도의 장애물은 염려하는 마음입니다. 염려는 우리의 마음을 갈라놓고 찢어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이 하나가 되지 못하게 하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수 있는 영을 앗아갑니다. 그래서 염려하는 마음은 기도의 영을 말립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마음을 염려와 근심으로 가득 채우고 나면 우리는 염려와 근심과 걱정 때문에 마음의 어두움이 가득차도 그 염려와 근심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그런 근심 중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하나님이 구원하셨도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근심은 그렇게 조금 아까 우리들이 예를 든 기도의 영, 기도의 영역의 씨를 말리는 세속적인 근심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처음 기도의 시작은 세상적인 염려와 근심에서 시작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염려와 근심을 계속 끌어 안고는 우리들이 결코 열렬하게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열렬하게 부르짖기 전에 먼저 근심하는 우리의 마음에 근심의 성격을 바꾸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바꾸시는가 하면 신령하게 바꾸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동기, 인생의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동기가 참 여러 가지입니다.
(예화) 처음 나가신 교회에 전도사님으로 계시다가 후에 부목사님 되신 연세 많으신 목 사님의 가정이 예수를 믿은지 이 땅에 기독교가 전해졌을 무렵인데 그 때, 그 집 안에 식구가 아파서 무당을 찾아 갔더니 예수를 찾아가라고 해서 서양 선교사를 찾아가 믿게 된 것이 그 집안에 복음의 씨가 떨어졌다는 이야기.
(예화) 아시는 자매 하나는 질이 나쁜 며느리였는데 시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제사를 지 내야 하는데 예수를 믿게 되면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교회를 다녔는 데 그 자매가 모른 사실은 제사는 일년에 한번 지내면 되지만 교회는 매주일 한 번씩 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었다는 이야기.
어째든 다양한 동기에서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그리고 구원을 받습니다.
(예화) 어느 청년이 밤에 교회에 와서 엎드려 있기에 기도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시간이 많이 흘렀어도 그대로 있기에 가까이 갔더니 술에 취해서 잠을 자는 것을 알고 깨워 타일러서 보냈더니 다음에 와서 교회를 다니며 충성스런 성도가 되었 다는 이야기.
사람들은 각기 자신의 인생에 막다른 골목에 와서 위기에 몰리게 되면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려는 심정으로 주님을 찾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매달리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것들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중 누구 한 사람도 인생에 진정한 가치가 무엇일까? 라고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살려고 예수를 믿기 시작한 사람은 여러분들 중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처음 인생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 앞에 나왔을 때에 우리의 몸은 하나님 앞에 나왔지만 우리의 마음 속에는 위기를 만난 자신의 인생이 가져다 준 수많은 염려와 근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더군다나 인생에 그런 시련 속에서 몸부림치면서 살아오는 동안에 망가질데로 망가진 수많은 자아들이 자신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곤고하고 곤고하면서도 자기를 건져줄 누구의 도움도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질로 인해서 근심하고 깨트려진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인해서 근심하고 내면에 쌓인 깊은 시련 때문에 괴로워하고 고통해 합니다. 그들은 근심 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되면서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그 모든 염려와 근심들은 이제 신령한 염려, 신령한 근심들로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이 신령한 염려와 신령한 근심으로 바뀌게 되면서 이제 염려가 많으면 많을수록 예전에는 절망하고 낙심했는데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되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염려가 많고 근심이 밀려오면 밀려올수록 더 간절히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을 바라는 그런 마음이 됩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 바리새인과 함께 성전에 올라 갔던 죄인으로 낙인찍힌 세리의 이야기를 여러분들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는 돈이 좀 있는 사람인지는 몰랐지만 양심도 자기를 정죄했고 이웃도 자신을 정죄하여서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 수가 없는 자책감 속에서 살던 죄인 중에 죄인이었습니다. 그가 성전으로 올라가기 전에 가지고 있는 근심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가 가지고 있는 근심은 아마 이런 것이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세금을 많이 걷어서 로마에 보내서 인정을 받아서 이 자리에서 떨침을 받지 않을 것인가, 혹은 내가 이렇게 세금을 거두면서도 동족들에게 혈세를 빨아먹는 나쁜 놈이라고 욕을 먹을테지, 아! 이 불명예를 어떡하면 좋을까? 동족들로부터 보복을 받지는 않을까? 자기의 자식들이 유대인 속에서 사람 대접을 받으며 성장할 수 있을까? 뭐 이런 잡다한 염려와 근심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성전에 올라 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그의 세속적인 염려와 근심들은 신령한 고민으로 바뀌었습니다. 무엇이었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전에 서서 하나님을 우러러 보고 그분을 생각할 때 자기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이 깨달아졌습니다. 자신은 죄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등지고 살 수 없는 곤고한 인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이 너무나 필요하고 그분의 사랑과 은혜와 긍휼히 필요한데 자기가 행하면서 살아온 인생에 모든 여정은 그런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입기에는 전혀 부적합한 인생이라고 하는 사실을 스스로의 양심에 증거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찌할 수 없는 현실과 그리고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관계 사이에서 슬피울며 통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슴을 치면서 그가 할 수 있는단 한 마디의 말은 “하나님이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밖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습니다. 신령한 근심으로 바뀐 것입니다.
우리가 많이 고통을 받아도 그 고통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게 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럼 왜 많은 성도들이 그 고통 속에서 만난 하나님을 자랑할까? 그리고 우리도 우리의 신앙의 과거를 한번 돌아보면 그 고통이라는 마당에서 주님을 만난 적이 참 많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하나님의 그 독점적인 사랑, 나같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크고 놀라운 은혜, 이런 것들을 받은 때가 언젠가 하고 생각을 해보면 진짜 고통을 만났을 때, 인생의 위기를 만나서 너무 아플 때, 그 때에 아픔보다 큰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때가 참 많습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 만을 섬기리
정말 저 개인적으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을 알았던 때는 고통을 받았던 때입니다. 그런데 또 가만히 돌아보면 고통을 많이 받았던 때라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알았던 때는 아닙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없이 실컷 고생만 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고통 때문에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도 없고 그리고 인간들을 향한 원망과 하나님을 향한 불평이 가득하게 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잘 생각해 보면 거기에는 차이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깊이 경험하면서 그 고통 속에서 환희를 맛보았던 때는 우리의 세속적인 근심이 신령한 근심으로 바뀐 때입니다.
오늘 시인이 그걸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신령한 근심 중에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었더니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기도를 동일하게 생각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저에게 일주일이면 우편물이 이만큼씩 오는데 그것을 보는 시간도 아깝습니다. 그래서 어떤 것은 미안하지만 개봉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재활용 통에 넣어 버립니다. 우리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이 기도하지만 천사들이 우리의 기도를 받아서 어떤 것들은 하나님께 보여드리지도 않고 쓰레기 통에 넣어 버리는 기도도 많습니다. 뭐 올라가기는 하겠습니까. 거기까지. 올라가기는 어디 거기까지 올라가겠습니까. 날아가다가 뚝 떨어지지.
그러니까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냥 자기는 보지 못하고 무지와 어두움 속에서 고통 가운데 사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 하면서 사람들을 미워하고 한 맺힌 마음으로 쏟아놓는 그 푸념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기에는 결함이 많은 기도입니다. 시인이 그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여기서 “부르짖는다”라고 하는 것은 소리를 내어서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기도 시간에 기도 인도자를 통해서 강요받는 통성기도와 같은 그런 종류의 부르짖는 기도는 아닙니다. 이것은 출발 그 자체가 깊은 인간의 내면의 밑바닥에서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화산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밑에서 올라오고 싶어서 난리를 치는데 땅 껍질이 허락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다 도저히 견딜 수 없으면 참고 참았다가 토해내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마음 속에 억눌리고 억눌렸던 기도의 제목들이 울부짖음을 동반하면서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왜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오직 위기 속에서 자기를 건져주실 하나님 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주님을 향해서 그런 기도의 간절한 함성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떠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느냐. 그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도 말씀드렸습니다. ‘11세기의 대주교의 죽음’이라는 책에서 늘 형식적인 기도를 드리던 대주교가 그날도 모든 사람들이 들으라고 “하나님 아버지” 하고 불렀더니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여시면서 “그래 네가 나를 불렀니” 응답하셨더니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런 기도는 근심 중에 부르짖는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의 많은 기도의 날들을 돌아보십시오. 고통 가운데 쓴물을 머금으며 아파했던 날들을 돌아보십시오. 주님이 여러분들의 인생에 멀리 계신 것처럼 원망스럽게 느껴졌던 때를 돌아보십시오. 고통 받았던 때는 많았지만, 이렇게 마음을 물같이 녹이며 여러분들의 마음에 시선으로 하나님 한 분을 고정하고 억누를 수 없는 내면의 세계에 탄식을 기도 속에 실어서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었던 때가 얼마나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때가 있습니까? 그런 때에는 고통 속에서도 고통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았고 위기 속에서도 위기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평안을 누리면서 우리들이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있는 모습 그대로 당신 앞에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마음을 고치기를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정직하고 진실해지고 하나님을 대함에 있어서 그 어떤 부분에 있어서도 하나님을 비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을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이 아무리 기독교적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만남이 결핍된 건조한 신앙 생활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시인을 보십시오. “근심 중에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구원하셨도다”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킨 사람들은 훌륭한 인생을 살다가 온 사람들, 그리고 한번도 실수한 적이 없이 정도를 걸어온 사람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든지 간에 지금 이 시간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필요성, 하나님을 향한 절대의존적인 마음에 자신의 모든 신앙과 인생을 걸고 주님을 뵈옵기를 원하는 간절한 근심 속에서 주님을 찾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찾으시고 그들에게 자기를 보여주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을 위기 속에서 건져 주시기를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를 구원하시되” 하면서 20절에서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응답하셔서 구원하셨는데 그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20절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렇게 부르짖는 자를 하나님이 건졌는지를 소상하게 설명을 하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첫 째는 말씀을 보내시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치료하시는 것이었고, 세 번 째는 위기에서 저희를 건져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특이한 하나님의 법칙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인생에 위기를 만나고 역경을 만나서 고통을 받을 때 우리의 관심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 고통과 어려움으로부터 속히 벗어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의 그런 기대를 무시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일정한 과정을 거쳐서 우리를 건지시지 그렇게 무언칙하게 우리를 구출해주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인생에 위기를 만났다고 말하지만,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인생에 위기를 만난 것이 물질 때문이라고도 말하기도 하고 혹은 사람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 보면 그런 인생에 위기를 만나게 된 근본 원인은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뭔가 망가진 부분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문제 속에 걸려서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물질 때문에 인생에 위기를 만났다고 하지만 그러나 사실 그것을 통해서 만난 문제가 가장 커보일 뿐이지, 그럼 그 사람에게 있어서 물질이 있으면 인생에 모든 문제가 사라지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건강을 잃어버리고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는 건강하기만 하면 인생에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만 그러나 건강한 많은 사람들이 인생에 위기와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보면 역시 그것만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다 자기 좋은데로 사람들이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들이 인생에 어떤 위기를 만났을 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들의 불행에 궁극적인 원인인 우리 자신을 온전하게 고치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계획들을 이해하면서 우리들이 인생에 고난을 보고 하나님의 구원을 봐야지만 그런 고통의 과정들을 통과하지 신앙과 인생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제일 먼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동사가 “말씀을 보내사” 사실 이 표현은 사람을 보내는 것과 유사한 표현입니다. 말씀이 마치 무슨 인격이 있는 것처럼 말씀을 이렇게 “가라” 그리고 보내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구약에서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배경이 무엇인가 하면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인화 해서 가르칩니다. 예를 들자면 잠언 8장 같은 곳에서는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지혜가 소리치기도 하고, 부르짖기도 하고, 지혜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인격화된 것으로 묘사됩니다.
요한복은 1장에서도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의인화되어서 잘 쓰여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하나님의 그 말씀을 인간들에게 전하실 때에 항상 사람과 인격을 사용하셔서 전달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영어의 표현에서 “너 요즘 무엇을 읽고 있니?” 그럴 때 “아리스토 텔레스를 읽고 있어.” 그러면 아리스토 텔레스라는 사람을 읽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아리스토 텔레스의 저서를 읽고 있다라는 그런 표현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보내신다라는 이야기는 말씀을 가진 당신의 종들을 그들에게 보내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직접 말씀하시는 때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백성들은 그렇게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실 때에 그 영광과 위엄을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항상 통상적으로 자기에게 말씀을 받은 사람을 보내어서 그들을 통해서 인격적으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씀의 종들을 자기의 백성들에게 보내신다”라는 표현과 “말씀을 그 백성들에게 보내신다”라는 표현은 서로 같은 동의어라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보내시는 방법은 다름이 아니라 자기의 선지자들을 보내어서 당신이 먼저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백성들에게 전파하심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보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그 말씀이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이유 때문에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받아들여졌던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보면 참 신기합니다.
요즘 우리들이 예레미야서를 읽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서에 보면 예레미야가 가장 고통하고 아파하는 고뇌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끊임없이 자신에게 진실된 것을 말씀하셔서 선지자로 부름받은 소명 때문에 그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하게 전했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도무지 자기가 전하는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해주는 다른 거짓된 선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데 그들은 “무엇을 보았다. 무슨 음성을 들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생각해낸 말씀입니다. 이처럼 어떤 때는 하나님의 백성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보내신 말씀보다는 하나님이 전혀 보내시지 않은 사람의 말이 더 커다란 관심을 끌고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지상최대의 불행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예수님의 한 비유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씨뿌리는 비유입니다. 씨는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이 였고, 밭은 듣는 사람들의 마음이었습니다. 그 씨는 완전한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 씨가 사람들의 마음 밭에 뿌리워졌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은 길가와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씨는 뿌려졌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메마른 길가와 같은 땅이었기 때문에 훅 바람이 불자 그들의 마음 속에 뿌리워진 씨도 모두 날아가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고 살아있는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 밭에는 떨어진 것이나 떨어지지 않은 것이나 아무런 차이점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옥토와 같은 밭에 뿌려졌습니다. 뿌리를 내리고 자랐습니다. 그리고 줄기와 가지가 뻗어가면서 잎사귀가 생기고 열매를 맺었습니다. 커다란 나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고 있는 위대한 능력이 드러났습니다. 그럼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뿌리신 말씀인데 왜 길가에 그냥 떨어졌는데 훅 하고 바람이 부니까 날라가게 만드셨을까? 드릴을 뚫고 씨의 신비한 힘이 있어서 탁 떨어질 때 두루룩 하고 파고 들어가서 그래서 뿌리를 내리고 뻗어가게 하시지는 않았을까? 하나님은 그렇게는 안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에 위기와 고통을 당할 때 너무 불쌍하셔서 여러분들을 그 위기에서 건져내고 싶으실 때에 하나님은 제일 먼저 하시는 일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여러분들의 불행의 원인이 되는 그 문제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때가 되면 예배 시간에 나와도 용서하라는 이야기, 그 다음에 방송을 틀어도 미움의 칼을 버리라는 이야기, 심심해서 책꽂이에서 책을 꺼내도 누군가를 미워하다가 불행해진 사람의 이야기, 구역공과 책을 펴도 용서하라는 이야기, 하다못해 이웃 사람이 은혜를 받았다고 와서 자기의 간증을 해도 용서하고 복받은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려주셔서 집요하게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것을 받아들이냐 안 받아들이냐는 여러분들에게 달린 것입니다. 안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말씀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진리가 두 개가 있는데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위기에 처한 우리들을 건지시는 방법은 먼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요즘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보내고 계십니까? 저는 목회자가 설교를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고 힘든 일이지만 잘 설교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시점에서 자기 교회를 향해서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체득하는 것, 그래서 그 시기 시기에 적합한 하나님의 말씀을 보내는 훌륭한 통로로서 하나님 앞에 역할을 하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지금 여러분들에게 눈물을 흘리고 회개하기를 불붙는데 설교자가 내내 “괜찮다. 상관없다. 하나님이 다 아신다. 사랑하신다. 지나치게 고민하지 말라.” 계속 설교를 하면 거짓 선지자입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에게 그런 것이 있습니까? 요즘 집요하게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동일하게 말씀하시는 것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것들을 말씀하고 계십니까? 우리에게 그런 감각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에 어려운 위기를 만나면 허둥대는 우리의 모습이 이게 정말 신앙적인 모습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자기의 백성들을 인생에 위기 속에서 건져내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말씀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에 위기 속에서 진정으로 구출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먼저 하나님이 이런 인생에 급박한 위기 상황을 통해서 자신에게 무엇을 깨닫게 하시는지에 먼저 관심을 갖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 들풀 하나 사라지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예화) 전도사 때, 7만원의 생활비를 받으며 공부하시던 시절, 어려운 생활에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오직 장학금을 타서 학비를 내는 일인데 어느 학기에 시험을 봤 는데 최고의 점수를 받으셨는데 딱 한 가지의 과목에서 79점을 받았는데 한 과목 이라도 80점 이하가 되면 장학금을 받을 수가 없었는데 누군가 교수님을 찾아가 사정을 하라고 해서 그렇게 하려고 하고 전날 밤 기도를 하시는데 하나님의 주권 임을 깨닫게 하셔서 우연히 아닌 필연이라는 생각이 들어 포기하셨는데 그래서 그 학기는 힘들게 사시면서 고생보다 더 큰 것을 얻은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은 없다는 이야기.
그것을 깨닫게 하시는 비결이 무엇인가 하면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시 한번 힘주어 여러분들에게 말하지만 여러분들이 아무리 악질적으로 살아가고 소문난 범죄자들이 되어서 너절하게 짝에 없이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에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되면 여러분은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고치실 수가 있습니다.
두 가지 사실을 보게 되는데 하나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그럼으로 우리는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우리의 인생에 위기를 벗어날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통이 올 때에 단지 아파하는 것은 짐승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고통을 만나거나 위기를 겪을 때에 그 고통과 위기를 겪을 때에 그 고통과 위기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있는 지혜를 가졌습니다.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무엇 때문에 말씀하시는지 귀를 기울이면서 그것을 깨달으면서 이제 우리의 사슬이 풀려지고 어두운 그늘에 하나님의 인도의 빛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먼저 깨닫고 보내시는 그 말씀을 통해서 먼저 위기 속에서 벗어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치료하시는 과정입니다. “라파”라고 되어 있는 히브리 단어는 “의사”라는 말과 동일한 어근입니다. 하나님이 고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보내셔서 고치시는데 고치신다는 의미는 곧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우리가 병들고 망가졌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말씀으로 고치시는데 크게 세 가지를 고치시는데 첫 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시고, 둘째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고치시고, 마지막에 세 번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의 관계를 하나님이 고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깊이 깨달아질 때에 우리는 그렇게 주님의 말씀을 깨닫기 전에는 우리에게 가장 커다란 관심사는 빨리 이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위기에서 탈출하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최대의 관심사였는데 말씀을 보내셔서 우리를 깨닫고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인격저긍로 만나고 나니까 그 다음에 사실 우리의 인생 보다도 더 커다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망가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림과 같이 성경이 묘사하고 있는 우물가, 사마리아 여인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깊은 대화 속에 빠져들어가는 것은 이 여인의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누군지 모르는 이 분이 말씀하시기를 여기에 매번 물을 길러 올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무슨 신비스러운 일일까? 여기에 사마리아 여인으로서 다섯 번이나 팔자를 고친 여자가 여기에 물을 길러 오는 것도 남사스러운 일인데 전혀 목마르지 않는다고 하니까 도대체 그것이 무엇일까? 집에다가 생수기를 설치해준다는 것일까? 무슨 일일까? 생각을 하면서 점점 예수님과의 대화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과의 대화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랬더니 어떨게 됩니까?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물동이를 팽개치고 먹어도 목마른 우물에는 아무 관심이 없고 자신 속에서 솟아나는 생명의 영생수를 맛보게 되니까 이제 물동이를 버리고 사람들에게 자신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괜찮습니다. 곤고하면 교회에 오십시오. 인생에 위기를 만나면 술에 취해도 괜찮으니까 교회에 오십시오. 나쁜짓을 했어도 좋으니까 곤고하고 너무나 괴로우니까 혼자 살아가는 것처럼 서럽거들랑 교회에 오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호소하십시오. 그런데 말씀을 만나고 나면 진짜 중요한 자신의 인생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데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망가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샬롬이 깨트려졌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런 일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과의 깨트려진 관계, 하나님과의 샬롬이 사라진 관계 속에서 살면서도 부족한 것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행세를 하다가 어느 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통해서 자기의 인생의 진정한 불행이 궁극적인 원인이 하나님을 등지고 살고 있다라는 사실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예수님이 그렇게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이 비참하고 불행한 삶, 위기 속에서도 자기를 도와줄 사람이 없고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자신이 혼자 버림받은 것 같은 이 비참한 고독한 삶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인생을 점령하고 있는 이 모든 불행과 위기, 곤고와 쇠사슬에 매인 것처럼 살아가는 비참하게 이를 때 없는 종된 삶의 궁극적인 원인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렸고 아버지와의 관계가 망가진 것이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물질이나 건강이나 사람으로 당한 불행, 어려움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제는 그것 보다 더 큰 근심이 그의 영혼 속에 파고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아! 어찌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해주셨는데도 주님을 등지고 살아가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모두 박살내버린 이 불행한 자리에서 내가 돌이키고 고침을 받을 수가 있을까? 그래서 큰 근심 중에 부르짖으면서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전에는 자신이 위기를 만나 것에 대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원망했지만 이제는 자신 밖에는 원망할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오히려 하나님, 내가 이런 인생의 위기를 만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내 잘못을 보면 이것보다 더 큰 인생의 위기를 만났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나는 반역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나를 용서해주십시오. 그리고 이 세상에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가장 소중한 분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그 인생에 위기에 불길속에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되찾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을 보내셨을 그 때에 진심으로 그에게 그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회개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끔 자신을 충고하고 경고하고 심지어는 목사가 설교를 통해서 자기를 드리워부수는 것 같은 설교를 해도 무너지지 않던 자신이 이제 그렇게 자기에게 말씀을 보내시는 하나님께서 망가진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자신의 이 불행한 위기 속에서 투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하나님 앞에 이 모든 일들이 나 때문입니다고 하며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 놀랍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에게 사랑과 긍휼을 물붓듯 하나님이 쏟아 부어주십니다.
사실 우리들이 죄가운데 사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하나님을 거역하고 사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그래서 자기를 향해서 핍박하는 사도 바울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너의 고통스러움이 가시를 뒷발질하는 것과 같다. 보이지도 않는 상태에서 큰 가시가 돋아난 덤불을 뒷발질해보십시오. 어떻게 되는가. 종아리며 발이며 피투성이가 되는 것입니다. 이게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사는 일도 인간에게는 행복하고 기쁜 일이 아니라 너무 곤고하고 괴로운 일입니다. 그렇게 해서 상처를 모두 입을 때, 하나님이 우리가 그렇게 입은 상처를 얼마나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시는지를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회개할 그 때에 잘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고쳐주시고 치료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마치 이런 착각에 빠집니다. 내가 이런 인생의 위기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 큰 하나님의 사랑을 맛볼 수가 있었을까? 그렇게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그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니까 이제 사람들과의 관계가 고쳐지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 불행이 저 인간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맺혔던 것을 풀고, 미워하던 마음을 풀고, 그리고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속히 하나님이 고쳐나가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그 큰 사랑에 감격할 때에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저는 저의 짧은 인생을 살면서 미워하는 사람이 전혀 없어지는두 경우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는 죽음 앞에 직면했을 때 미워하는 사람들이 사라졌습니다. ‘내가 이제 죽는구나’ 생각되었을 때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데 모든 사람들에 대한 미움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큰 사랑을 경험할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망가진 사람들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령 그 사람이 진짜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무엇을 보게 되는가 하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그 인간을 보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주님과의 관계가 치료된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사고의 변화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아가페의 사랑을 한다는 것은 이것은 말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그런데 우리도 그렇게 밖에 살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의 모습 속에서 보게 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치료하고 고치시는 것입니다. 참 놀랍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을 고치십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그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정말 변화되기 전까지는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어처구니 없는 태도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주 별볼일 없는 인간인데 자기를 숭배하는 것입니다. 대단한 사람으로 숭배하는 것입니다. 왕자병에 걸려서 자기가 굉장한 사람인지 아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교만입니다. 그런가 하면 아니, 괜찮은데 자기를 그렇게 자책하면서 아주 못살게 괴롭히는 것입니다. 자학하는 열등감입니다. 자기의 진정한 존재의 가치를 공상 속에서 평가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의 박수 갈채 속에서 겨우 확인하는 사람들은 자기는 없는 혼이 빠진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제일 불행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을 보고 희희낙락하고 교만해지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해주지 않을 때는 우울하고 불행한 인생을 사는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이 점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13장을 강해하면서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라는 부분을 설교하면서 아주 상세하게 말씀드렸습니다. 꼭 한번 들어보십시오.
요지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인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모두 착각에 빠지는데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자기만 사랑하신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을 아무리 사랑해도 하나님이 자신의 사랑을 나누셨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교만하던 사람들은 겸손해지고 쓸데없이 자학하며 비굴하게 살던 사람들은 자존감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 있는 자신의 형상을 보면서 어떤 부분들에 대해서는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소망을 갖고, 어떤 부분에서는 자기를 신뢰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살아갈 수 있는 정상적인 사람들로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치료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치료된 사람들만이 다른 사람들을 치료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정형외과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아이가 조금 찢어지거나 아니면 점을 빼거나 그러면 아이들이 어른 치료비보다 더 비싸다고 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어른들은 치료의 협조를 하는데 애들은 막무가내니까 그래서 인건비가 많이 든다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이 붙들어야 하니까 그렇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목회를 이렇게 하면서 느끼는 소감이 좀 표현이 과격하더라도 용서하십시오. 망가져서 왔습니다. 그리고 우기는 것입니다. 난 전혀 망가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명하고 또 설명하고 설득하고 눈물을 흘리며 권고해서 겨우 이 사람이 ‘아 진짜 제가 망가진 사람이구나’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하나님, 저좀 고쳐주십시오. 건강하게 살고 싶습니다. 고쳐주십시오’ 그래서 이제 제가 그러면 말씀의 수술위에 누으십시오. 그리고 누웠습니다. 그래서 이제 말씀으로 고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분 마취를 하고 수술을 하면 서걱서걱 하고 살을 짜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리고 이제 고치는 것입니다. 은혜가 살아있을 때는 누워있습니다.
말씀으로 고치시네 주는 치료자
눈물을 막 흘리면서 나 같이 쓸모없는 죄인을 고쳐주시는 하나님의 칼질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의 칼로 서걱서걱 자르는 것입니다. 보니까 모두 죄악도 드러나고 나태, 태만, 오만가지의 더러운 암덩어리들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아직 창자가 배 밖에 나왔는데 벌떡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기는 가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아니 이것은 어떻게 하고’ 그러니까 ‘이만큼 고쳤으면 됐지 내가 그동안 얼마나 오래동안 누워있었는데.’ ‘그럼 안 된다. 넌 아직 망가졌기 때문에 다시 가서 살아도 예전에 네가 하나님 앞에 고통 받았던 그 삶을 제한하는 사람밖에는 안 된다. 더 고침을 받으라.’ ‘냅둬. 이대로 살거야.’ 그리고 뛰쳐나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덜렁덜렁 거리면서 가는 것입니다.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임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고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그렇게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는데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우리가 죽을 때까지 받으면서 살아야 합니다. 진실하게 신앙 생활을 하면 대수술을 해야 되는 상황은 되풀이 되지 않을 수 있지만 작은 치료는 우리에게 언제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생각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머리를 다 부셔서 골을 새롭게 수술해야 하는 상황도 생길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은 계속해서 동일하게 인생의 위기를 만납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을 불행하게 하는 원인이 항상 되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인생의 위기에서 건져주시기 전에 먼저 고치고 치료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슴을 듣는 것, 주께서 그 말씀을 보내실 때,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도 요한은 자기의 계시록 속에서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서 명령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두루마리를 보내시며 먹으라 두루마리를 먹었더니 입에서는 너무 달았는데 속에 들어가서는 견딜 수 없이 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듣는 것은 즐거운 일일 수 있습니다. 평생에 듣던 말씀 또 들려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여러분 속에 들어가서 역사해서 여러분을 고치는 그 과정은 결코 유쾌한 과정이 아닙니다. 온갖 더러운 것들을 드러내고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므로서 하나님이 우리를 불행한 위기 가운데 들어가게 만들었던 궁극적로 망가진 우리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하나님이 고치시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왜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제 그렇게 살기를 원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좋으신 그분이 우리 대신 징계를 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상함과 그리고 고통을 당하신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렇게 하나님 앞에 망가진 채 살던 인간들을 고치고 치료하기 위한 의사로서 당신 자신이 이렇게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왜 오늘도 하나님께서 자기의 말씀을 우리들에게 보내셔서 우리들이 생각할 수 없었던 우리의 인생에 환부를 드러내게 하시고 우리의 인생에 궁극적인 수치스러운 것들을 밝혀내셔서 그것들에 칼을 대시고 우리를 고치고 싶어하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자기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망가진 채로 살아가며 인생의 위기 속에서 신음하는 우리들을 차마 보지 못하셔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에도 인생의 위기 속에서 고통해 하는 여러분들에게 그 위기를 통해서 치료받아야 할 여러분들의 영혼에 상태에 병든 상처들을 드러내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고 나서 세 번째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그 위경에서 건지시는 것입니다. 위기로 가득찬 역경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기가막힐 웅덩이와 깊은 수렁에서 건지셔서 결국은 그 위기 속에서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불행과 고통이 아니라 은총과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의 완고한 불순종과 망가진 우리의 죄악된 삶이 하나님이 치료하는 거리가 먼 삶을 살도록 만들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병들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은 두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건강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도 건강이라는 실제는 자신의 느낌에 달린 것이 아니라 현실이기 때문에 자신의 영혼에 상태가 얼마나 병들었는지는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로 비추어 보아야 알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이 이번 수련회를 그렇게 자신의 영혼을 치료하는 기회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망가진 채로 돌아다니며 대형 사고를 일으키는 여러분들을 보실 수가 없어서 정비소에 잠시 집어넣기를 원하신다고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여름에 우리들이 주님 깊이 만나고 그래서 우리 속에 있는 망가진 부분들을 온전히 치료받고 그래서 어두운 세상에 하나님을 한없이 기뻐하며 사는 즐거운 백성들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1.구원의 여망이 끊어졌을 때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행27:20-21상)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성경 본문은 사도 바울이 이제 로마로 재판을 받기 위해서 죄수의 몸이 되어서 끌려가는 광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로마 사람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그에게 한 고소로 인해서 황제에게까지 호소할 수가 있었습니다. 물론 그는 얼마든지 중간에 무죄를 입증받고 풀려날 수 있었지만 그러나 다메섹 가는 길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에 그리스도께서 주신 사명이 임금들 앞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증거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었기 때문에 그는 재판을 받아서 무죄로 방면되기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버려서 그리스도 예수를 황제 가이사 앞에 증거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 스스로 죄수의 몸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 속에서 배운 그리스, 성경에서는 ‘헬라’라고 되어 있는 그 반도 아래쪽에 가면 ‘그레테’라는 섬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섬에 ‘베닉스’라는 항구가 있는데 어디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하여튼 항구에서 그 ‘베닉스’라고 하는 항구로 가고 있는 중에 ‘유라굴로’라고 하는 풍랑을 만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때는 그런 폭풍이 흔히 찾아오는 절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도 바울의 예고를 무시하고 자신들의 좋은 뜻을 따라서 베닉스라는 항구로 갔고 가는 길이 유라굴로라는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처음 닻을 올리고 그 항구를 빠져나가서 베닉스로 향할 때에는 바다가 잔잔하고 바람도 배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불어서 그들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우리가 베닉스로 가서 겨울을 나고 로마로 가자고 결정한 것이 참 잘한 것이라고 스스로를 칭찬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가기를 원하시지 않는 길이라고 하더라도 때로는 기가막히게 형통하는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좀 한참 두고 보아야지 압니다. 처음에는 배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무시하고 베닉스로 가기로 결정한 것을 자신들이 스스로 득의한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유라굴로라고 하는 폭풍을 만났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배타고 가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가운데 가장 또 우리에게 실감나는 이야기 요나를 예로 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요나 역시 하나님의 사명을 버리고 그리고 니느웨로 가는 대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지만 그러나 처음에 그 항해는 매우 순조로웠습니다. 바다 한 가운데로 나갈 때까지 말입니다. 얼마나 갔을까. 유라굴로라고 하는 광풍이 불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날 동안을 달빛과 별빛,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만큼 두터운 구름이 그들을 뒤덮고 있었고 그것은 수많은 양에 비를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숱한 바람과 풍랑, 그리고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그들은 유라굴로라고 하는 풍랑과 폭풍과 싸우고 있었지만 그러나 자신들의 힘으로 그 엄청난 자연의 능력을 대신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짐들을 버리고 심지어는 항해하는데 없어서 안 될 항해를 위한 도구들도 모두 바다에 던졌습니다. 배를 가볍게 해서 풍랑으로 인한 침몰을 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많은 몸부림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들은 아무 것도 개선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전히 폭풍은 계속 되고 있었고 파도는 높이 날뛰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배는 곧 깨어질 것처럼 물속에서 뒤웅치고 있었습니다. 결국은 그 노련한 배사람들이 일생동안 바다와 그리고 풍랑과 싸워온 경험을 동원해서 모든 일을 다했지만 마지막 그들이 내린 결론은 구원의 여망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이런 때를 맞이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가정적으로, 국가적으로, 혹은 교회적으로 도저히 구원의 여망을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도저히 붙잡아 보려고 애를 써도 가질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삶의 모든 희망이 끊어진 때,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인간은 고난에 대응하는 본성을 가진 피조물입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인간은 인간으로서는 해서는 안 되는 일까지 할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런 존재입니다. 보십시오. 커다란 폭풍을 만나서 곧 깨어질 듯이 날뛰는 파도 위에서 몸부림치면서도 그들은 배사람들로서 이제껏 살아온 모든 경험을 동원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습니다. 생명만 구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화물도 버렸고 항해에 필요한 기구도 모두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폭풍 속에서 이 배를 구할 수는 없었습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이 오늘 밤에 상상의 날개를 펴시기를 바랍니다. 그 엄청난 폭풍이 불고 그리고 어마어마한 산같은 파도가 휘몰아칩니다. 때는 캄캄한 밤이고, 사방 어디를 돌아보아도 불빛 하나 없습니다. 그리고 작은 배 한척에 타서 이쪽 선측을 때리고 저쪽 선측으로 넘어가는 엄청난 물보라들을 봅니다. 그리고 배는 곧 뒤집혀질 것처럼 요동을 치고 깨질 것처럼 나무로 만든 범선이 물의 압력을 견디는, 충격을 견디는 부서지는 소리같은 것을 내면서 간신히 그 풍랑을 견디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절대적인 고독을 동반한 완전히 무력한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절대적인 도움이 차단된 한계 상황에 있다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죽음이 눈 앞에 있고 누구도 자기를 도울 수 없고 누구로부터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살면서 이런 때는 없습니까? 살 모든 소망이 끊어지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다 해봤지만 그러나 아무 것도 나의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상태를 개선하는데는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절망의 먹구름은 점점 더 두텁게 나의 인생을 뒤덮고 우리의 가정과 그리고 내가 소속된 공동체를 뒤덮고 있습니다. 무엇으로도 이제는 나의 지성과 그리고 나의 삶의 경험, 인생의 바다를 헤치며 살아오면서 체득했던 모든 지혜를 동원해서 다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나 자신을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미친 것처럼 날뛰는 파도를 보면서 바다 위에 휘몰아치는 바람을 원망해봤지만 그것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인생을 포기하고 돌아 누워보지만 눈을 뜨고 나면 삶의 상황을 어떻게 외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대신 누가 풀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사는 것은 참 무서운 것입니다. 인간으로 사는 것은 참 두려운 것입니다.
그런 때 없습니까? 특별히 인간은 이 험한 세상이라는 바다를 사는 동안 혼자 살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배를 타고 가는 것처럼 함께 운명을 공유해야 할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혹은 자녀들, 혹은 부모, 그리고 혹은 남편과 아내, 그리고 여타한 가족들 모두 한 배를 탄 사람들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 때문인지 모르지만 우리의 가정에 큰 풍랑이 불었습니다. 도저히 이제는 더 이상 어떻게 해볼 수가 없습니다.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는 이 날뛰는 풍랑을 제어할 수가 없고 무엇으로도 이 풍랑을 멎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존심도 버리고 그리고 꿈도 버리고 행복해지려고 하는 야망도 버렸지만 그래도 여전히 인생의 풍랑은 멎지를 않습니다.
캄캄한 어두움이 드리우기 시작하면 별빛 조차 사라진 어두운 밤하늘 아래서 등대도 없고 어느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바다에서 휘몰아치는 폭풍과 싸우며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몸부림 친 마지막은 이제는 더 이상 살 구원받을 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모두 이런 식의 항해를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내면의 세계를 파헤치고 들어가 보면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한계 상황 속에서 몸부림치고 도움, 그리고 구원받을 모든 여망이 끊어진 가운데 아무 소망이 없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그 이전에 사도 바울의 이야기가 한번도 안 나옵니다. 배가 떠나기 전에 ‘가지마라. 내가 가만히 보니까 물건도 많이 잃어버리고 그리고 우리의 생명도 아마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가지마라.’ 그것은 사도 바울의 어떤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누린 가운데 그 길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을 하나님께서 미리 알게 하셨던 것입니다. ‘가지마라’ 그리고는 그 다음에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러 날을 죄수의 몸으로 그 배에서 사람 취급을 못받으며 그렇게 폭풍 속에 시달렸습니다.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고 일개의 죄수로서 침묵을 지키던 그가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가 언제였습니까? 구원의 모든 여망이 끊어진 그 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참 놀랍습니다. 그래서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비극, 견디기 힘든 시련, 그리고 모두 포기해버리고 주저앉은 절망의 상황, 그 때는 절망의 상황은 곧 하나님이 그 운명 공동체 속에 자기의 사람을 데뷔시키는 무대입니다. 아니 여기서 침묵을 깨고 아멘을 해야지. 몇 년을 가르쳐도 그래 그것을 모릅니까? 다시 삶의 모든 소망이 끊어진 완벽한 절망의 상태가 하나님이 자기의 사람들을 그들 가운데 데뷔시키는 무대입니다. 이게 얼마나 기가막힙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그 섭리는 참 놀랍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어떤 불행과 고통이 어느 정도 있을 때에는 사람이 말이 많습니다.
한번 조용히 눈을 감고 묵상을 해보십시오. 풍랑이 일어서 막 배가 미친 듯이 날뛸 때 가만히 이러고 앉아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뭐를 해. 뭐를 어떻게 해줘. 못살겠어, 죽을 것 같애. 물이 새. 돛대가 부러졌어, 뭐가 어때, 뭐가 어때. 짐을 버려. 뭘 어떻게. 물이 들어와. 물을 퍼내’ 별의별 이야기가 다 했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느 정도 어려움이 오면 주인이 많습니다. 사공이 열입니다. 아는 사람도 많고, 훈수두는 사람도 많고, 떠드는 사람도 많고, 너 때문이야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모두 자신들의 생각에 그래도 구원의 여망이 남아 있다고 생각할 때, 완벽한 절망이 그들을 엄습할 때는 조용한 침묵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침묵과 그리고 무서운 두려움, 그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침묵을 깨고 사도 바울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입을 열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서부터는 말을 많이 합니다. 왜 무대에 올라왔으니까 말을 해야지요. 그런데 말을 하는 이 사람이 사실은 지금 중죄인으로서 재판을 받으러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장은 나오지도 않고 이 사람, 포박된 사도 바울이 마치 배의 선장이 되는 것처럼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가르쳐 주고, 그들에게 위로하고, 그들에게 지시하고, 그들에게 당부하고, 그들을 권면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 공중에 사는 새 한 마리 떨어지는 것도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소속되어 있는 가정에 풍랑이 불고 어려움이 생길 때, 그 때에 내가 몸담고 있는 직장에 내 사랑하는 동료들, 그리고 때로는 교회, 때로는 우리 구역, 어떤 식으로든지 하여튼 하나님이 한 배를 타고 가도록 우리의 인생에 바다에서 함께 부름받은 사람들이 자신과 더불어서 이런 커다란 풍랑을 만났을 때 거기 어찌 의미가 없겠습니까? 고통받으면서 단지 고통만 하는 것은 짐승도 하는 일입니다. 인간은 그 고통의 의미를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풍랑을 만나고 그 시련이 극도에 달한 나머지 이제 모든 사람들이 포기하고 어떤 구원의 여망도 모두 끊어졌다고 생각됐을 때, 그 때가 바로 여러분들이 그 무대에 데뷔하는 때입니다. 누구로서?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데뷔하는 때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그 배에 선장이 될 기회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그 배를 안전한 포구로 이끌고 갈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이런 때마다 그 배를 움직일 수 있는 선장과 같은 주인공이 되는가. 대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오늘 이 성경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죽을 것 같은 폭풍 속에서 절대적인 죽음의 공포를 느끼면서 완벽한 절망감 속에 휩싸여 있을 때 사도 바울이 입을 열고 말한 것은 무엇이였습니까? ‘무엇을 좀 먹으라’ 사실 그것이 얼마나 썰렁한 소리입니까? 지금 풍랑이 일어서 배가 지금 부서지기 직전인데 생명이 지금 간 곳이 없는데, 냄비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고. 먹던 빵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고, 숟가락이 어디에 갔는지, 포크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도 없는 다 뒤죽박죽 된 상황에서 사도 바울이 마치 모든 폭풍이 끝난 것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좀 먹어라 여러 날 동안 굶었으니까 뭘 좀 먹어라’ 입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사람들에게 그렇게 권위있게 들렸을 것입니다. 왜 배고픔에서 나온 권면이 아니라 이 풍랑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계획을 먼저 이 사도가 발견할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계획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 문제를 결코 죽이지 않고 살리신다고 하는 그 계획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절대적으로 소망이 끊어진 절망적인 소망 속에서 입을 열어 그들을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는 인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노련한 배사공이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눈에 납득할만한 폭풍을 헤쳐 나갈 묘안을 갖고 있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 전날 밤에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자를 보내셔서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왜 ‘두려워말라. 풍랑을 만나겠지만 생명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바울을 분명히 찾아 오셔서 바울에게 해주신 분명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예고하신데로 되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삶의 모든 소망이 사라지고 구원받을 수 있는 모든 여망이 끊어진 상황에서도 사도 바울은 사람들에게 음식을 좀 들기를 권할 여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의 믿음으로 볼 때에 이 풍랑 속에서 그가 두려워서 벌벌 떨었을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이미 삶과 죽음을 초월한 사람이었고 그리고 자신의 사명이 다 하기까지는 자신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는 확신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길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를 가이사 앞에 서서 담대하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보내시는 길이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폭풍이 시작된 첫날부터 자신의 믿음을 과시하지 않았습니다. 이상하지요? 둘째 날도, 셋째 날도, 넷째 날도 그렇게 침묵 속에서 흘러갔습니다. 사도 바울이 구원의 모든 여망이 끊어진 절명에 위기에 상황 속에 입을 열어 그들에게 말하기 시작한 것은 주님이 사자를 보내어서 그를 만나 주신 그 날, 다음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풍랑 속에서 모든 사람을 주인공으로 세우시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사도 바울이 그저 한때는 주님을 믿었지만 믿음을 배반하고 쓰레기 같은 인생을 살다가 어떻게 잘못해서 잡범으로 분리되어서 투옥되기 위해서 이 배에 타서 끌려가는 것이었다면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과의 분명한 만남이 없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는 똑같이 구원의 여망이 모두 끊어진 사람 속에서 그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함께 절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평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는 만남에 축복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었던 이 바울은 구원의 모든 여망이 끊어진 절대적인 위기의 순간에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 모든 사람들을 그의 손에 붙여주셨습니다. 죄수의 손에 그 군인들을 붙여주셨습니다. 죄수의 손에 그 배사공들을 붙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말 한마디로 선장에서 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순종하고 움직이는 이상한 현실을 하나님이 만들어 내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신앙의 묘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 바울이 주님을 만나는 밤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여망이 끊어진 밤이었으나 사도 바울에게는 그 절망의 밤이 그 절망에 관한 하나님의 섭리에 관해서 듣는 계시의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수많은 사람들을 성경에서 봅니다. 그들은 이 번잡한 도시 한복판, 먹고 마시고 뛰어노는 환락에 길 한복판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 고요한 광야, 한적한 강가 그런 곳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까요?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들을 만나시기 이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셔야 할 필요를 느끼게 끔 만드시려고 때로는 우리의 잘못도 아닌데 우리를 그 공동체 속에 함께 있게 하셔서 때로는 폭풍이 이는 바다 위에서 파선할 순간을 기다리며 몸부림을 치는 배와 같은 처지가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살 소망이 모두 끊어지는 상황을 함께 경험하게 만드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하나님이 우리 같은 사람들을 불러서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한 준비일 따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가정에, 그리고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 이러한 비바람이 불어오고 풍랑이 불어와서 우리를 삼킬 듯이 날뛰게 만드는 폭풍이 우리의 삶을 엄습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이 폭풍을 극복하는 남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비밀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물건을 버리고 배의 기구들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폭풍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뛰놀던 바다도 예수님의 생애를 보십시오.“잔잔하라” 한 마디에 풍랑이 멎고 잔잔한 호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아무리 안타까히 불러도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할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주님의 살아 계심을 알리시기 위해서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 폭풍이 이는 한 가운데 데뷔를 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던 사람들, 주님을 만나고 온 사람들로 그들 가운데 세우셔서 그들이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리시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 무엇을 해야 할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바로 그런 일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만나주시고 자기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만나고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경험한 사람들은 모두 사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은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이 풍랑을 만나고 위기를 만날 때에 사실 그 사명은 보다 더 분명해지고 뚜렷해집니다. 그들을 향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사람들, 그 풍랑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풍랑 저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은 죄수에 불과했습니다. 바다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요즘으로 말하면 선비였습니다. 종교 지도자를 꿈꾸는 젊은 학자였습니다. 바다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육지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지식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지식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노련한 경험이나 허풍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침묵을 지켰으나 주님이 그를 찾아 오셔서 그에게 이 폭풍 속에 담겨진 모든 비밀들, 즉 이 풍랑을 통해서 너를 죄수처럼 끌고가는 모든 사람들을 내가 네 손에 붙이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깨우침이 있고 나서 그는 드디어 구원의 모든 여망이 사라진 사람들 앞에서 말할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해주었습니다. ‘안심하라. 그리고 뭐좀 먹으라. 너희 중에 누구도 죽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고 나는 그렇게 되리라고 믿노라’ 그 말을 하고 있는 순간에도 여전히 큰 풍랑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폭풍이 불고 있었습니다.
교회도 그렇고 직장도 그렇고 가정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이 위기를 느끼면서 깊은 공포와 두려움 속에 있을 때 지도자 한 사람의 말 한 마디가 수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걱정하지마라’ 그러면 진짜 안심이 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을 만나고 온 사람, 주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이 이제 그 배에 있는 사람들에게 안심하라고 말할 때 그들이 진정으로 안심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가정 속에 일고 있는 커다란 풍랑, 누가 무엇인가 그들에게 말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누구를 보내서 그 풍랑을 다스리시고 누구를 보내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평강을 선물하실까요? 그것이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그렇게 문제가 많은 가정에서 그리고 구원의 모든 여망이 사라진 공동체에서 여러분들이 그 문제들을 풀고 그리고 그 문제들을 헤쳐나가게 만들어주는 향도로서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바로 그 일을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위기 속에서 그들을 진정으로 인도하고 위기 속에서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로 삼을 때, 사람들은 여러분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위를 한번 살펴보십시오. 예수를 믿게 된 많은 교인들 가운데 태반은 견딜 수 없는 인생에 불행중에서 인생의 벼랑 끝에서 주님을 붙들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주님을 붙들게 된 때는 반드시 누군가가 자신의 삶에 위기 상황에 대해서 말해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위기 상황 속에서 마음이 가난해질 때로 가난해진 사람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파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의 진정한 평강이 무엇인지를 그들의 마음과 삶으로 보여주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사람을 보고 주님을 의뢰할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그냥 있는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풍랑 속에서 지난 4일 동안 바울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들 속에 한 죄수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고 이튿날 그는 그 사람들에게 무한한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여망이 모두 사라져간 바로 그 시간에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구원의 확신을 그 사람들의 마음 속에 심어서 위기 상황 속에서 바울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그에게 드러내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제 무대는 다 준비되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풍랑주신 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해보십시오. 풍랑이 일지 않으면 어떻게 주인공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목사님, 풍랑이 분지 수십년이 되었는데 난 아직 주인공이 못 되었습니다.” 그렇게 사니까 주인공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풍랑이 이는 한계 상황에서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의 음성이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의 가정에 부는 계속되는 풍랑, 하나님,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부서질 듯이 몸부림치는 위기 상황에서 안심하라 말하도록 부름받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우리 아버지입니까? 술먹고 매일 노닥거리는 우리 아버지입니까? 아니면 우리 엄마입니까? 우리 자식입니까? 우리 형입니까? 우리 누나입니까? 누구입니까?” 그렇게 물으면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바로 너”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왜 그런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에게 누가 주인공이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은 벌써 주인공이 될만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목사님, 난 그것이 싫어요” 계속 풍랑 속에서 사세요. 아직은 멀었습니다. 계속 사세요. 계속 사시고 여러분 한번 쾅하고 날아와서 옆에 배가 부서져서 넘실거리는 파도를 한번 보십시오. 목에까지 바다 물이 들어와서 미역줄기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요나의 경험을 한번 해보십시오. 그 때에도 “하나님 나는 아닙니다.” 그렇게 할 수가 있는지.
태국에 가면 이런 포스터가 있습니다. “에이즈에 걸리지 마세요. 조심하세요. 생명은 귀합니다. 절대로 몸조심 하십시오. 에이즈는 무서운 병입니다. 그런데요 걸리면요 그냥 죽으세요.” 진짜 포스터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에이즈를 조심하세요. 그런데 걸리면 죽어버리세요.” 얼마나 의미있는 포스터입니까? 이미 걸린 사람에게는 어떻게 도와줄 길이 없는 것입니다.
헤어나오십시오. 그래서 한번 맑은 날도 보아야 하지 않아요? 햇빛 찬란하게 비치고 쪽빛 바다 위를 잔잔한 수면 위로 항해 하면서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하며 아름다운 바다와 맑은 일기와 이런 여행의 일정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때도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 날이 있었습니까? 사는 것이 너무 희열스럽고 기쁜 때,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 감사해서 어쩔줄 모르던 때, 그 때가 있었습니까? 없었다고 여러분들이 고개를 가로 젖고 계신데 없습니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누구입니까? 누군가는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구원의 모든 여망이 끊어진 가운데 풍랑이는 바다 속에서 누가 건져줄까요?
여러분, 주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복잡하고 그리고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상황이 다양한 이런 때에 한번에- 이번 수련회에 가기 위해 등록된 사람들이 498명 이라고 그러는데 600-700명이 가서- 모인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수천명 모이는 교회에서도 수련회에 2-300명 밖에 안 가는 이유가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입니다.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어마 어마한 에너지를 앗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이런 자리를 만드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교회의 단합’ 그것이 아닙니다. 단합하려면 야유회를 갔습니다. 단합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인가, 그렇게 힘들고 고생스럽게 여름 집회를 준비해도 하나님이 반드시 그 집회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폭풍 속에서 결정적으로 말씀하시는 어제의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만이 아니라 그 사람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오지 아니하면 함께 폭풍 속에서 멸망했을 수많은 사람들을 건져내시는 것입니다. 이번 열린 하늘에도 간증들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건져 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가 문제가 아닙니다. 700명이 참여하면 한 3000명이 참여하는 것입니다. 지금 폭풍 속에 있는 여러분들의 가정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만나고 돌아와서 무대에 데뷔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무엇인가 말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지만 그 상황을 주관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그것을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우리를 얼마나 잘 구원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인생의 한계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교만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보십시오. 주님의 음성을 들은 바울은 더 이상 죄수가 아니었고 이제 그 배에 탄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해주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구원의 모든 여망이 끊어진 캄캄한 밤에 들릴 듯 말 듯 폭풍 속에서 말하는 바울의 목소리는 한줄기 어두움을 가르는 불빛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에 이런 큰 위기가 있다면 여러분들에게 그렇게 꿈꾸고 기다리던 순간이 온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족을 여러분의 손에 붙여주시기 위함입니다. 그 위기 상황 속에서 여러분들이 정말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선한 뜻을 분별하고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아가페의 사랑으로 희생하고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참된 목소리를 들려주는 사람들이 되면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고 이제껏 기도해온 모든 기도들이 성취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래서 여름 수련회에는 가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2.괴로움과 통곡으로 드린 기도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삼상1:10)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에 대한 마지막 설교가 되겠습니다. 오늘 성경에는 ‘한나’라고 하는 경건한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는 엘가나라고 하는 남편의 본부인이었습니다. 남편도 그를 사랑하고 그도 남편을 사랑하는 경건한 여자였으나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문제는 당시로서는 너무나 치명적인 문제였습니다. 그것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서만 그쳤어도 이 여인은 견딜만 했을 것입니다. 더 견디기 힘든 일은 브닌나라고 하는 첩이 있었는데 그 여인에게는 자식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는 “브린나에게는 자식이 있고 한나에게는 없더라”고 했지만 히브리어 성경에는 이 자식이라는 말이 “아이들”이라는 복수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브린나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여럿이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남성 복수로 나오는데 그것이 꼭 모두 아들들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어째든 아들도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었을 가능성이 많고 하여튼 아들 딸 해서 많은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러자 한나의 괴로움은 더했습니다. 브린나는 첩이었을 뿐 아니라 양식이 없는 여자였던 것 같습니다. 아이를 낳아서 이제 그 집안에 손을 보게 했으니 본부인 한나를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 한나를 심히 괴롭게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문맥으로 보면 시집가서 아이를 못낳는 것이 무슨 큰 문제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희도 결혼해서 7년 동안 아이가 없었는데 저희 할머님이 하시는 말씀이 “애는 해서 뭐하냐. 너희 둘이서 행복하게 재미있게 살면 되지.” 워낙 애를 싫어하시는 노인이었으니까. 하루는 진지하게 그렇게 물어보셨습니다. “애야, 천국에도 애들도 있냐?” “그럼요. 천국에 애들도 있지요.” “그럼 거기가 어떻게 천국일 수가 있겠니?” 하여튼 그러셨지만 그래도 증손주들을 귀여워하셨습니다. 그렇게 노인분도 개화된 세상이니까 우습지만 당시로서는 그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 아들이라는 말이 히브리 말로 “벤” 영화 가운데 “벤허”라는 영화를 보셨을 것입니다. 원래 히브리 말입니다. “벤훌” 훌가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벤이라는 말이 히브리어 동사 “바나”에서 왔습니다. 바나는 “집을 세우다”입니다. 그럼 왜 집을 세우는 것과 아들의 관계가 있는가. 여자가 시집을 가서 아들을 낳음으로서 그는 그 집안에서 자기의 집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이 한나는 시집을 갔지만 아직 자기의 집을 세우지 못한 불안전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브린나는 여러 개의 집을 세웠습니다. 그의 위치는 점점 굳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엘가나의 마음은 한나에게 있었습니다. 한나를 깊이 사랑했습니다. 아들을 낳지 못했지만 그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거나 아내를 덜 사랑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사랑 위에 아들을 낳지 못한 한 여인에 대한 동정까지 보태어졌습니다. 그래서 엘가나는 한나를 깊이 사랑하는 표현을 여러 방법으로 했습니다.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나눌 때에도 브린나와 자식들에게는 한 몫을 주었지만 한나에게는 두 몫을 주면서 마음 속에 있는 한나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슬퍼하고 브린나에게 격동을 받아서 번민하며 괴로워하고 있는 한나에게 다가와서 위로했습니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그것을 보면 엘가나도 조금 그런 것같습니다. 아니 그 이야기를 왜 한나에게 와서 하는지, 브린나에게 가서 해야지, “야, 네가 아무리 애를 많이 낳았어도 내 사랑은 한나다.” 그럴 용기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첩을 가진 남자는 호랑이도 안 잡아 먹는다’고 합니다. 속이 하도 썩어서 먹어봐야 맛이 없다고 합니다. 엘가나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브린나의 눈에는 남편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런 상식이 없는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엘가나가 이제 자기 아내 한나에게 속삭였습니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당신 아들이 없다고 슬퍼해.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내가 열명의 아들보다 당신을 더 많이 사랑하니까 내가 더 귀하지 않아” 그러나 인간의 슬픔 속에는 사람으로부터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슬픔이 있고 사람으로부터 도저히 위로가 안 되는 슬픔이 있습니다. 한나의 슬픔은 후자의 슬픔이었습니다.
그럼 이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 무엇 때문에 이름도 착한 한나, 얼마나 발음이 좋습니까? “한나” 얼마나 좋아요. 브린나가 뭐예요. 브린나가, 한나, 난 여태까지 많은 그리스도인을 만나봤지만 브린나라고 이름 지은 사람은 한 사람도 못만났습니다. 한나는 여럿 만났습니다. 인터넷에도 여러번 올라옵니다. “한나”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이 한나에게 그 브린나에게 그렇게 많은 자식들을 주셨는데 한나에게는 왜 자식을 안 주셨을까?
그 당시의 문화적인 맥락에서 보면 태를 열고 닫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여자가 아이를 못 낳는 것은 하늘로부터 임한 저주같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럼 사실인가. 그럼 브린나는 축복받은 여자이고 이름도 예쁜 한나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여자인가. 우리가 문제를 그렇게 획일적으로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였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셨습니다. 브린나가 아이들을 낳은 것은 별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냥 아이를 생산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한나가 아이를 낳는 것은 아주 중요한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큰 계획이 하나님에게 있으셨기 때문에 한나에게 아이를 성태치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부부관계를 많이 가졌는데도 도저히 아이가 생겨나지 않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였는가. 섭리사적인 면에서 이제 이 문제를 살펴보고 본문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는 사무엘이라고 하는 사람은 모세, 다윗과 함께 구약 역사에 구원사의 축을 이루는 아주 중요한 인물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인물입니다. 사무엘을 빼놓고는 우리들이 쉽게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 앞에 있었던 능력이 있는 많은 선지자들을 빼놓고는 구약의 약사를 이야기 할 수 있어도 사무엘을 빼놓고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정도로 중요합니다. 사무엘은 여호수와 이후로 이어지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는 무지한 사사시대가 끝나고 그리고 이제 정통 선지자들의 시대를 여는, 왕정시대를 여는 새로운 시대로 들어가는 수문과 같은 역할을 이 사무엘 선지자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마지막 사사인 동시에 또한 직분으로서의 선지자 시대를 여는 최초의 인물이었습니다. 원래 선지자의 비전은 모세였지만 그러나 선지자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사람이 바로 사무엘이고, 사무엘에 의해서 왕정시대가 도래하는데 사울을 왕으로 세우고 또 다윗을 왕으로 세운 사람도 바로 사무엘입니다. 그렇게 역사를 움직이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인물입니다. 그렇게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이 인물을 태어나게 하시기에 앞서서 먼저 이 아이를 낳을 엄마인 한나를 하나님께서 신앙적으로 한번 강력하게 연단하여 새사람을 만드시는 이런 일들을 하시는 것입니다.
자 이제 중간 결론을 내리자면 이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는 어떻게 보면 하나님 앞에 남다른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한나가 만약에 시집가서 브린나 같이 한번 애를 낳으면 둘씩 셋씩 자동으로 막 쏟아 놓았다면 그냥 애를 낳다가 죽은 여자로 기록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마 기록되었을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그 당시 애를 낳고 죽은 여자가 자기 혼자가 아니고 수없이 많을 것인데, 사람들이 얼핏 보기에는 브린나가 복받은 여자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고 자기의 집도 세우지 못하고 첩에게 괄시를 받고 그리고 남편의 동정과 사랑으로 살아야 하는 비참한 이 여인의 처지를 보면서 누구도 한나를 복받은 여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가 사실은 하나님 앞에 한나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중요한 역사적인 기회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곧 어떻게 보면 인간에게 있어서 문제는 하나님 편에서 보면 충분한 기회였습니다. 그래서 한나를 하나님께서 성태치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브닌나는 자연의 이치를 따라서 하나님이 특별히 간섭하지 않으셔도 그냥 아이를 낳은 여자이고, 한나는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부부생활을 가져도 아이를 가질 수 없도록 하나님이 개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뭔가 자연적인 창조의 섭리, 자연적인 이치를 막으시면서 우리의 삶에 깊이 개입하실 때에는 무엇인가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눈에 보기에는 위기이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커다란 기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한나의 태를 막으신 것입니다. 문제였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1장이 모두 한나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 브닌나가 아이를 많이 낳았습니다. 그리고 여러 세월 동안에 브린나에 의해서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남편에게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래도 이 한나는 하나님께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태를 막으셨는데 그는 그 문제를 결국은 하나님이 막으신 문제니까 하나님이 푸실 수 있다라고 하는 결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갔어야 하는데, 그는 여러 세월을 흘려보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첩으로 들어오고 그리고 아이를 못낳으니까 거기서 아이가 태어나고 그래서 여러 아이가 태어나는 긴 과정이 있도록 한나는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세월을 보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우리로 말하자면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고 불임 클리닉 같은 곳에 다녔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무엇을 삶아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더라’ 안 믿는 사람일 경우에, 그리고 가서 무슨 ‘돌부처의 코를 잘라서 끓여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더라’ 그래서 망부석의 코가 잘라져 있습니다. 다 끓여 먹은 것입니다. 그런 짓을 하면서 다녔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막으셔서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 정답은 하나님이 여셔야 됩니다. 그것은 안 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몸부림치고 애를 써도 마지막 내린 결론은 ‘안 되는구나’ 그것만 깨달을 뿐입니다. 주먹으로 쳐서 깨질 수 있는지는 몇번만 두드려 보면 알지, 주먹뼈가 으스러지고 피투성이가 되도록 두들겨야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되는데도 인간은 하나님이 막으신 문제를 하나님 앞에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방법과 수단으로 해결하면서 귀한 세월을 보내는 것입니다. 아니 처음 시집가서 아이가 생기지 않으면 즉시 하나님 앞에 올라가서 “하나님, 나는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언제나 나는 나의 집을 세울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 아이를 제게 주시옵소서” 간절히 매달렸으면 브린나에게 이렇게 괄시를 받지 않고 잘 살았을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 인간이 그렇지 않습니다. 무슨 베짱인지 하여튼 갈 때까지 가는 그런 심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의 심령이 충만할 때에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헤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은혜의 세계에서 멀어지고 나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고 염려와 근심으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죽이고 찌르면서도 그러면서도 하나님께 호소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뜨끔’ 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 세월이 흘렀는데도 도저히 어떤 난관이 극복되지 않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는데 수없는 세월동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심지어는 신앙까지 버리면서 몸부림을 쳤는데도 전혀 진전이 없고 해결될 것 같다가는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고 고쳐질 것 같다가는 다시 덧나는 그런 인생의 문제를 가지고 계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 것입니까? 오늘 분명해진 것입니다. 한나에게 문제가 시작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데 해결된 것은 순식간에 해결이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응답하셨으니까. 그런데 언제이었는가 하면 하나님 앞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이 문제가 해결되었던 것입니다. 염려하고 근심하고 생각하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자기가 생각하고 염려하는 것을 하나님을 향한 소원으로 품고 그분께 아뢰고 간구하고 그렇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간절히 빌고 주님의 긍휼과 자비를 자극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한나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서 주님 앞에 기도하고 매달릴 때에야 그렇게 오래동안 한나의 피를 말렸던 인생에 있어서 고통스러운 문제에 해결의 빛이 깃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산다. 하나님을 멸시하면서 산다’라고 하는 것은 술먹고 나쁜 짓하고 그런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살아계셔서 당신을 찾으라고 그런 문제를 주셨는데 하나님을 안 찾고 자신의 힘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모든 태도가 하나님을 향한 말할 수 없는 멸시고 모욕입니다. 그것이 불신앙입니다. 한나가 그런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으니까 하나님 앞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에 한나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처음에 하나님 앞에 올라갔을 때에는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고치기 위해서 올라갔는데 그 문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 절박하고 간절히 미친 사람처럼 기도했습니다. 그러니까 엘리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너 술먹었니? 그렇게 물어봤습니다. 신령한 사람의 눈이 어두워지니까 이것이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갔는지 술먹은 것인지 분간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벌써부터 문제가 많은 사람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전히 하나님 앞에 자신을 다 드려서 절박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한나 자신이 그 기도의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고쳐지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고 알 수가 있습니까? 짧은 기도 속에서 ‘주의 여종’ 이라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그러니까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문제, 절박한 이 문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 마음을 물같이 쏟으면서 간절히 기도하는 그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티끌처럼 낮아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에 성패는 하나님께 달렸고 나를 성태케 못하신 이가 하나님이시니 주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시면 내가 아이를 가지려니와 주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지 아니하면 내가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결론을 한나가 내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처음에는 아들 하나를 달라고 올라갔으니까 무슨 그렇게 신령한 기도 제목이 이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통속적인 기도 제목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아이를 위해 아이를 달라는 것입니까? 자기를 위해서 아이를 달라고 하는 것입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후자입니다. 내가 아이를 낳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너무 억울하고 분통터지고 브린나같은 여자에게 멸시를 받고 괄시를 받으면서 동정이나 받으면서 남편에게 이러고 살아야 되는 처지가 너무 견딜 수 없이 괴로우니까 내가 아들 한번 낳아서 저 브린나를 떡으로 만드는 역사를 하나님께서 한번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령하고 고상한 기도 제목이 아닙니다. 한나가 기도했을 때 내 몸에서 태어난 아이가 이스라엘의 구원의 역사를 움직이는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라는 그런 감각이 있었겠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극히 세상적인 기도 제목을 가지고 올라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참 신기한 것이 기도 제목이 아무리 세속적이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하여튼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실 때 우리가 가장 절박한 기도 제목을 가지고 우리를 다루십니다.
‘코 뚫지 않은 소 한 마리를 삼부자가 못 당한다’ 송아지가 어느 정도 큰데 농사일이 바뻐서 코를 뚫지 못하면 그럼 할 수 없이 개처럼 목에다가 줄을 매고 다니는데 그것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산으로 올라가면 막 장정들이 딸려 올라갑니다.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빠르게 달리는 말을 무엇으로 억제시킬 수가 있겠어요. 그런데 코도 마찬가지고 여기 재갈을 먹이는 것도 마찬가지고 이 두 짐승이 결정적으로 약하고 아파하는 부위에다가 재동장치를 만드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기에다가 재갈을 물렸으면 말이 꿈적이나 하겠어요? 그러니까 여기에다가 물리는 것입니다. 막 뛰어가다가 탁 재갈을 낙아채면 말이 가다가 급정거를 하면서 앞발을 높이 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왜 그렇습니까? 사람을 정지시켜 주려고 앞발을 드는 것이 아니라 아구리가 아파서 앞발을 드는 것입니다. 소도 마찬가지입니다. 온순해서 주인을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코를 잡아당기니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없지만 코를 이렇게 뚫고 다니는 애들이 있습니다. 거기다가 실을 이렇게 묶어서 잡아당겨보십시오. 그리고 교회로 당겨보십시오. 꼼짝없이 좇아옵니다. 난 그것을 하고 다니는 애들을 보면 꼭 그렇게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낚시줄 같은 것으로 이렇게 묶어서. 그러니까 쫓아오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간절하지 않은 기도 제목, 인생에 있어서 고통받지 않는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시려고 그래도 다루어지지를 않습니다. 예를 들어보십시오.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생활을 하면서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사람에게 그렇게 신앙 생활하면 ‘너 예수님 닮은 아름다운 신앙의 인격을 가진 사람이 못되게 할거야.’ 그 사람이 겁을 먹겠습니까? ‘어, 그럴 수가 없습니다. 내가 비록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생활을 해도 나는 주님 닮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까? ‘주님 닮은 게 뭔데? 냅둬 이대로 살거야.’ 그러지 않겠습니까?
한나에게 있어서 그 고삐와 같고 재갈과 같은 기도의 제목이 바로 아이였습니다.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신앙도 아니고, 아이 하나만 낳는 것입니다. 아들, 못생겨도 괜찮고 잘생겨도 괜찮고 어째든 아이 하나를 낳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한나를 다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를 했는데 기도의 자세가 ‘통곡하였다’ 그랬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진짜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기도고 한이 맺힌 기도입니다. 통곡하면서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통곡하며 하나님 앞에 아들을 구하며 눈물로 기도하는 한나의 마음에는 어떤 생각이 있었을까요? 그것은 이것입니다. 전에 염려하고 근심만 할 때에는 ‘아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인데 이렇게 통곡을 하며 하나님 앞에 아들을 주시도록 매달리며 기도할 때에는 아들이 없이 이렇게 멸시를 받는 상황자체를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들이 있으면 더 좋겠다가 아니라 아들이 없기 때문에 견딜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사람의 욕심은 참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비가 오면 바가지를 바쳐야 될 정도로 허름한 집에서 살던 사람들은 전세라도 얻어서 가면 참 행복합니다. 지하실에서 사글세로 전전하다가 한 13평짜리라도 아파트를 하나 장만해서 가면 그 모든 것이 새것입니다. 샤시도 새것, 장판도 새것, 옷장도 새것, 하여튼 그렇게 좋아합니다. 바다같이 넓습니다. 그러다가 한 1년 삽니다. 그러다가 이제 시들먹해집니다. 마실을 왔다가 갔다가 하는데 건너편에 있는 32평짜리에 사는 동리 사람의 집에 다니면서 갑자가 자기 집이 불편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좀더 넓으면 좋겠다가 아니라 집을 바꿀때가 되면 도저히 살 수 없다. 그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여기에서 사는 것은 좀더 넓은 집에서 살면 좋겠다가 아니라 이제는 그런 집에 살지 못하는 것이 고통스럽다. 도저히 못살겠다. 그럴 때 빚이라도 내서 집을 장만하는 것입니다.
기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하나님 앞에 매달릴 때가 되지 않으면 ‘했으면 좋을텐데’ 하는 소망입니다. 소망이 점점 커지다가 나중에는 한나처럼 그 소망이 이루어지지 못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견디기 힘들게 고통스러워지는 것입니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으니까 이제는 하나님 앞에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사는 현실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응답해 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것입니다. 한나가 그런 기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오묘합니까?
그 브린나에게 격동을 당하고 무시를 당하고 괴로웠을 것인데 한나의 마음 속에 무엇이 있었을까요? 간단합니다. ‘죽여버려’ 그러거나 ‘내 팔자야’ 그것일 것입니다. 그런 여자에게 역사를 움직일만한 인물을 맡겼다고 칩시다. 제대로 양육이 되겠습니까? ‘누구든지 너를 무시하면 죽여버려’ 그런 정도의 교육밖에 더 받았겠어요. 젖을 먹을 때 까지 아이를 데리고 있다가 젖을 뗄 때가 되었으니까 그저 돌이 되었든지 많으면 두 돌쯤 됐을 것입니다. 그때 아이가 얼마나 귀여울 때입니까? 아이가 엄마 아빠 말하고 이빨이 나오고 해죽해죽 웃고 세워놓으면 뒤뚱뒤뚱 걸을 때, 그때 그 아이를 하나님과의 약속 대로 여호와의 집에 떼어놓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시집 가보지 못한 사람이야 아멘 할 수 있겠지만 시집간 사람은 그것이 안 되는 것입니다. 아이의 생명과 엄마의 생명은 결탁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두고 내려올 수가 있겠습니까? 유치원에 갔다가 맡기는 것도 아니고 이제는 자기 아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실인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만 바쳐진 아이입니다. 자기가 죽어도 그 아이는 자기 곁에 올 수가 없는 그런 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옛날에 한나가 아닌 것입니다.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기 전에 그 한나가 아니라 완전히 변화된 한나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애적인 제목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결단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변화된 놀라운 영적인 변화를 통해서 이 어머니는 젖먹이는 동안에 아이에게 경건한 신앙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부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집에 올려놓은 다음에도 수시로 부모가 올라갔는데 그러면서도 경건한 영향력을 계속 끼쳤을 것이라고 보고 또 한나가 하나님을 위해서 바쳐진 후에 하나님 앞에 잘못 살았던 제사장 엘리를 대신해서 이스라엘을 건지는 위대한 마지막 사사요. 그리고 하나나님의 귀한 종이 되었을 때, 그 모든 과정에 이르기까지 한나가 자기 아들을 위해서 기도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있어서 문제를 통해 하나님을 대면하기 전까지는 한나는 그럴만한 위인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을 대면하고 하나님이 한나를 완전히 새 여인으로 바꾸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고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맡고 계시는 문제는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주님과 해결을 직접 보기 전에는 여러분들의 힘과 능력으로 해결되는 예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막으셨는데 하나님이 다른 일을 하시는 동안에 ‘어! 재네들이 자기들의 문제를 해결해 버렸네. 큰일났네.’ 그러시는 예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문제를 주시는 것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대면하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당시에 아이를 못낳는 여자가 한나 뿐이겠어요? 만약에 한나가 하나님이 이런 큰 계획과 섭리 속에서 그의 태를 막으시고 아이를 갖지 못하게 하셨다고 하더라도 그냥 격동하는 브린나 옆에서 시달리고 남편의 위로나 받으면서 가끔 신세한탄이나 하고 살다가 죽을 뿐 하나님을 대면하고 하나님께 매달리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는 그저 아이를 낳지 못하고 죽은 그런 설음받았던 한 여인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만약에 한나에게 이렇게 문제가 없었더라면 그냥 브린나처럼 쑥쑥 아이를 잘낳고 살다가 죽은 한 여인에 그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브린나에게는 없는 문제를 가졌을 때에 사람들이 보기에는 오히려 한나가 징계를 받는 것같고 한나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 같았으나 그러나 문제가 없는 브린나 보다는 문제가 있는 한나가 하나님의 큰 계획 속에 있는 인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기의 사랑을 보여주실 때에 큰 축복과 은총을 통해서 우리에게 자기의 사랑을 보여 주시기도 하시지만 때로는 하나님께서는 이런 문제들을 통해서 우리를 향한 사랑을 보여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눈으로 볼 때 하나님 앞에 징벌을 받는 것 같은 문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문제를 통해서 우리를 향한 자기의 사랑을 보여주신다고 할 때 이율배반적인 명제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 그것은 여러분들이 문제 앞에서 어떤 태도를 갖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이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도록 그런 문제에 봉착하게 하신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인도하셔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대면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을 구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그 문제를 여러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주님 앞에 매달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기 전까지 그 문제의 해결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을 가만히 살고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결정적으로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시려고 주시는 문제들은 세월도 약이 아닙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갔는데도 저절로 해결되는 문제들은 없습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들으면서도 ‘뜨끔’ 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확실히 저 이야기가 내 이야기구나. 내가 지금 씨름하고 있는 이 문제가 10년 이상 지난 문제인데 ‘진짜 되겠지, 되겠지 운이 없었을거야. 재수가 나빴을거야. 좋은 사람이 나타나면 되겠지.’ 이렇게 하면서 흘려보낸 세월이 10-20년 세월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한나처럼 정신없이 이 세상에서 그 문제를 해결받기 위한 모든 소망을 끊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그 인생의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변화되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문제를 우리의 능력으로 해결하지 못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래로 인간이 범죄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아주 결정적인 원죄의 특징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게으름입니다.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은 분명히 알았는데 그 문제를 보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된다는 것도 알았는데 자신의 수단과 방법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는 것도 파악을 했는데 불행하게도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릴 마음을 안 갖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죄악된 태만함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벌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형벌을 주시지 않아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딱 하나입니다. 한나의 태를 막으시는 것입니다. 아이를 못낳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저희는 어렸을 때 댐을 많이 만드는 것이 굉장히 나라가 부강해지고 신나는 일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너희 종이를 아껴쓰면 일년에 댐을 하나 건설한다’고 했습니다. 요즘 가만히 환경학자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전 국토의 황폐화 현상이 댐하고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옛날에 살던 동리에 가보면 물이 굉장히 많았었는데 물이 없습니다. 다 개천바닥이 드러나 있습니다. 그 주범이 무엇인가 하면 댐입니다. 물론 물을 어느 정도 해서 수리조절을 해서 가뭄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은 인정을 하는데, 비행기를 타고 올라 가서 보면 곳곳에 다 물을 저장했습니다. 이제는 산아래 흐르는 물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댐을 하나 막아서 물을 막고 물을 흘려보내지 않으면 아래는 생태계가 다 파괴되는 것입니다. 물만 딱 막았는데 다 파괴되고 좋은 채소나 풀들은 다 죽고 가시와 엉겅퀴들이 생겨나면서 황폐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하신 일은 한나의 태를 막으신 그 일 하나였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됩니까? 온통 문제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한나의 태를 막으시니까 첩이 들어왔습니다. 첩이 들어와서 아이를 낳으니까 그 첩이 멸시를 합니다. 그 속에서 가장으로서의 지도권을 잃어버립니다. 비교의식이 생깁니다. 견디기 힘든 많은 일들이 부차적으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브린나의 마음에 성령을 주셔서 저 한나를 계속 구박해라. 깨닫도록 그렇게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한가지를 막으시니까 거기에서 파생되는 수많은 문제들이 함께 생겨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문제, 결정적인 것 하나만 딱 막으시면 그러면 그것이 막히니까 나머지 많은 문제들이 거기에 따라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돈이 있을 때, 그렇게 금실좋은 부부가 사업이 안되고 물질에 고통을 받기 시작하니까 깨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건강할 때는 그렇게 효도하던 자식들이 부모가 병드니까 ‘긴 병에 효자 없다’고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가 배신감을 느끼고 자식이 부모를 원망하고 관계들이 막 찢어지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그렇게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입니다. 한나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닙니다. 남편으로도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오직 이 문제를 쥐고 계시는 하나님만이 열쇠를 가지고 계신 것이었고 그 열쇠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부르짖고 매달리는 그 사람에게 주기로 작정하신 열쇠입니다.
우리들이 우리의 인생에 부딪히는 수많은 많은 난관과 어려운 문제들을 가지고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가슴을 조이고 서로를 미워하고 그 문제에서 파생된 또 다른 문제들과 씨름하면서 소진하는 우리의 정욕을 절반만이라도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데 사용했더라면 하나님이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셨을 것입니다. 다시 댐이 열리고 물이 쏟아져 내려오면 다시 꽃피고 새가 우는 아름다운 동산으로 변하고 주위에 있는 메말랐던 수많은 논과 밭에 넉넉히 물대인 동산과 같은 아름다운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다른 것이 무슨 해결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만나시고 여러분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신 해결되지 않은 그 문제를 하나님이 아니면 누구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고통받는 수많은 세월을 흘려버렸지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이런 한나의 마음, 자기는 다 깨트려지고 하나님 앞에 철저히 낮아지면서 ‘내 인생의 문제의 해결이 없으면 내 인생도 없습니다. 내가 더 이상 이 문제 속에 억눌려서 살아가는 비굴한 삶 보다는 차라리 하나님 앞에 매달리다가 죽는 것이 낫겟습니다.’ 그러면서 한나가 하나님 앞에 매달린 것입니다. 통곡하며 기도했다고 했으니까 그는 주위에 시선을 의식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 앞에 물처럼 쏟아져내리는 주체할 수 없는 열렬함과 간절함으로 그간 이 문제로 말미암아 겪었던 인생의 많은 시련과 고통까지 쏟아놓으면서 하나님 한분 앞에 매달렸을 때 이제 한나의 눈에는 브린나의 서러운 박해나 남편의 따뜻한 위로, 그리고 또다른 인간의 인생에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결의 방향들이 떠오른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만이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 아버지시다’라는 것밖에는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간절히 매달려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호소했고 호소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는 한가지 서원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서원이 무엇인가 하면 ‘주의 여종을 기억하셔서 만약에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를 일평생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겠습니다’ 머리를 옛날에는 칼로 깎았습니다. 나실인의 서원입니다. 하나님, 내게 응답해주셔서 아이를 내게 주시면 아이를 내 아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이 서원을 통해서 한나는 인생 전체에 대한 삶의 동기가 새로워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의 꿈이 어디에 있을까요? 하늘나라에 있습니까? 그것은 하늘나라를 위해 많이 바친 사람들은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꿈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유에 있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아니 왜 생전 거울을 안 보다가 양복이라도 하나 사 입으면 거울을 자주 보게 됩니까? 반지라도 하나 끼면 왜 머리가 아픕니까? 그것이 왜 그렇습니까? 소유가 있는 그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나가 ‘아이를 낳아서 하나님 앞에 드리겠다’라고 하는 것은 쉽게 이야기하면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애나 하나 낳아서 설음이나 면해봐야 되겠다’라는 지극히 세속적이던 옛날의 동기가 정화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새로워진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기도 제목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다가 보면 우리의 인생이 진짜 놀랍게 순결해집니다. 삶의 동기가 정화됩니다. 고상한 기도 제목을 통해서만 우리의 삶의 정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우선 세속적인 기도 제목이라도 그것이라도 놓고 자신이 다 깨어지는 기도를 경험한 사람들이 그 단계를 딛고 신령하고 고상한 제목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지 자기 자신을 놓고 그렇게 기도해보지 못한 사람이 단숨에 신령한 기도 제목을 붙들고 마음이 녹는 기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예화) 잘 아는 형제가 있는데 그 형제의 기도 제목은 변을 잘 보게 해달라는 기도의 제목인데 아침마다 변을 보기 위해서 애를 쓰면서 자기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 가를 깨닫는다고 한 이야기.
하나님이 진짜 우리가 문제가 있어도 그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는 것은 한번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그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하나님만 보일 수 있도록 전폭적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기도의 씨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기도를 할 때까지 수많은 번민과 고통과 설음 속에서 인생을 보내었지만 그러나 그 모든 번민과 고통과 서러움이 한나의 인생을 변화시키는데 있어서 아무 도움도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는 마음을 정했고 하나님 앞에 올라가서 간절히 자기의 심령을 쏟아부으며 하나님이 자신의 마음에 맺힌 것을 풀어주시도록 서럽도록 매달려서 인사불성이 되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응답해주셨습니다. 자, 엘가나의 집안에 본 부인이 오래동안 아이를 못낳고 서러움을 받던 한나가 아름다운 사무엘을 낳았을 때에 어땠을까요?
사라가 이삭을 낳자 이스마엘을 낳은 하갈이 쫓겨나는 장면을 여러분 창세기에서 보셨을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은 아닌데 그 당시 고대 근동 사회에서 사회적인 규약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본처가 있고 첩이 있는데 본처가 자식이 없는데 첩이 자식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뒤늦게 본처가 아이를 낳으면 그 본처에게는 첩과 첩의 자식을 쫓아낼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라가 요구한 것이 바로 그런 문화적인 맥락에서, 그 당시 관습에 호소하면서 요구한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선한 행위라고 볼 수는 없지만, 또 그런 일을 당하게 끔 하갈이 무시를 했습니다. 그런 공식을 가지고 본다면 이제 그 한나가 사무엘을 낳는 그 순간에 위세등등하던 브닌나와 그의 슬하에서 태어난 많은 아이들은 이제 졸지에 한나의 말 한마디에 그들의 인생에 처분이 달린 것입니다. 그런 신세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멋있게 한나를 위해 복수해주셨는지 보십시오. 한번에, 아이를 낳기 전까지 그렇게 멸시를 당하고 그렇게 구박을 받으며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못난 남편은 그저 와서 ‘그래도 내가 있잖아’ 왜 그러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정도 밖에는 해줄 수가 없었는데 아이를 나음으로서 한나는 그 집안에 집을 세우게 되었고 그리고 자기의 집이 서자 이제 브린나와 그의 자녀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복수해주신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 앞에 나와서 매달리지 아니하였더라면 아마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저주 받은 여인으로 첩에게 학대를 받다가 한을 품고 죽었더라’ 그런 정도의 전기밖에 쓸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매달리니까 그렇게 존귀한 사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경건한 약속을 지키면서 결국은 사무엘을 잘 길러서 하나님 앞에 바쳐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역사를 움직이는 지렛대로 사용하시도록 하나님께 허락을 해드리는 이런 놀라운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그렇게 해결된 시점에서 보면 문제가 있는 한나를 우리는 얼마든지 위로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의 인생을 미리 볼 수가 있었더라면 아마 한나에게 이렇게 위로했을 것입니다. ‘걱정마라. 문제는 하나님이 너를 특별히 사랑하셔서 브린나는 하나님의 계획에 없다. 아무리 아이를 많이 낳고 자식을 많이 낳는 것은 너의 집안에 짐승이 새끼 낳고 사는 것과 별로 차이가 없다. 그러나 네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중대한 문제가 있다. 네 몸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움직일 위대한 인물이 태어나게 하시려고 그 전에 너를 새롭게 하시려고 네 인생에 남이 모르는 가시와 같이 아픈 문제를 주신 것이다.’ 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안고 있는 그 서럽도록 고통스러운 문제, 너무나 많은 날 동안 그 문제 때문에 고통을 받고 ‘너희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서러움을 받았던 그 문제들이 해결되는 그 날에는 아마 한나가 맛보았던 기쁨을 동일하게 맛보게 하셨을 것입니다. 땀에 젖은 얼굴로 산고 끝에 낳은 아이를 바라보는 산모인 한나의 표정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승리하였습니다. 위기를 기회로 바꿨고 그리고 문제를 하나님 앞에 주님의 열쇠로 해결함으로 말미암아서 문제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드러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히 갑니다. 고통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에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여러분, 믿음으로 사는 사람, 신앙으로 하나님 앞에 매어달릴 줄 아는 사람, 인생에 위기 속에서 주님의 해결의 열쇠로 붙들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그 문제 속에서 고통을 받으며 한나와 같이 구박받고 설음 속에서 살던 실패한 모든 날들은 이제 다 떠내려 보내고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의 인생에 당신의 큰 능력과 편팔로 역사하시고 그래서 그 문제 속에서 오히려 우리를 건져 주시는 하나님의 큰 능력의 역사를 맛보고 여러분도 한나와 같이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만나주시는 사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