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하며 살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
(2002-2003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2-2003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온전한 순종(신1:36) 2002.10.21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저녁) 1
2.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두가지 명령(신6:24上) 2002.10.22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저녁) 15
3. 순종하고 경외하며 살게 하심은(신6:24下) 2002.10.23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저녁) 27
4. 형통할 때 하나님을 잊지 말라(신8:12-16) 2002.10.24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저녁) 43
5. 우리를 복되게 하려는 네 가지 신신당부(신10:12-13) 2002.10.25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저녁) 60
6. 불순종할 백성을 구원하심은(신31:16) 2002.10.27 주일오후 74
7. 불순종하는 백성들을 향한 진노(신31:17上) 2002.11.3 주일오후 84
8. 재앙과 환란이 겹칠 때(신31:17下) 2002.11.10 주일오후 94
9. 불순종의 근원(신31:18) 2002.11.24 주일오후 103
10. 하나님을 잊을 때⑴(신31:19-22) 2002.12.1 주일오후 113
11. 하나님을 잊을 때⑵(신31:20下-21) 2002.12.8 주일오후 124
12. 순종의 사람이 희망입니다(신31:22-23) 2002.12.15 주일오후 134
13. 언약궤 옆에 놓인 율법책(신31:24-26) 2002.12.22 주일오후 143
14. 반역하는 불순종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신31:27) 2002.12.29 주일오후 153
15. 지도자의 순종의 중요성(신31:28) 2003.1.5 주일오후 162
16. 불순종에 이르는 길(1)(신31:29上) 2003.1.12 주일오후 173
17. 불순종에 이르는 길(2)(신31:29下) 2003.1.19 주일오후 181
18. 영원한 노래의 제목이 된 순종(신31:30) 2003.1.26 주일오후 188
1. 온전한 순종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를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 것이요 그가 밟은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 하시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상하게도 모세도 가나안 땅을 밟을 수 없게 하시고 또 이스라엘의 많은 백성도 가나안 땅을 밟을 수 없게 하셨습니다. 단 두 사람의 예외가 있었는데 여호수아와 갈렙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이외에는 모두 죽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기 위해서 정탐꾼들을 지파에서 한사람씩 보냈을 때 열 사람이 와서 그 땅이 악하고 그리고 군대가 너무 강해서 우리는 가면 죽는다. 부정적인 보고를 했고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이 진실을 말하면서 그들이 힘센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에게서 하나님이 떠났고 그리고 하나님의 보호는 떠났고 그리고 하나님은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거기에 들어가면 그 땅을 얻을 수가 있다. 이렇게 보고를 했습니다.
그때에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 명의 진실한 보고에는 영향을 받지 않고 열 명의 비관적인 보고의 영향을 받으면서 방성대곡하면서 통곡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사건을 모세가 다시 한번 거의 사십 년이 약간 안 되는 그 긴 세월 후에 다시 그것을 후손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그 동안 광야를 방황하는 동안에 애굽에서 떠난 세대는 다 죽었고 이제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남아서 이제 가나안 땅에 정복하러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광야에서 다시 태어난 세대들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럼 도대체 그 많은 애굽에서 그 큰 하나님의 기적을 보고 홍해를 건넌 그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정탐꾼들의 보고가 둘로 나뉘었는데, 10대 2였는데 그 10의 보고를 들으며 조금 실망했다고 해서 다 광야에서 죽는다 그러면서 광야에서 그들을 유리 방황하게 해서 결국은 광야에서 그들을 모두 죽게 하신 그것이 정말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옳은 처사였겠는가 하는 의문이 솔직히 생깁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제 좀 심각하게 생각을 해야 할 문제입니다. 즉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흔히 생각하기를 광야에서 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제 30-40년 가까운 세월동안 유리방황 하면서 거기 광야에서 태어난 세대 말고 애굽을 떠난 세대들은 다 죽습니다. 그런데 그 죽는 사건들을 보면 우상을 섬겨서 죽은 사건도 나오고 혹은 하나님을 원망해서 죽는 사건도 나오고 혹은 또 간음을 하다가 죽는 사건도 나옵니다. 그래서 흔히 생각하기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구세대들이 다 죽은 것은 우상을 섬기고 간음하고 범죄 했기 때문에 모두 죽은 것이다. 그렇게 우리들이 흔히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엄밀하게 말하면 그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언약과 관계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그 큰 기적을 보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이끌어내실 때에 그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430년이나 살았던 애굽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그리고 담대하게 가보지도 않은 땅을 향해서 떠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을 믿었기 때문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서 예비하신 땅이 있고 그 땅을 기업으로 주리라고 하는 것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들이 애굽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그랬는데 이들이 지금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그 불 신앙의 정탐꾼들의 비관적인 보고를 들으면서 이들이 깊이 절망하고 낙심하는 것은 결국 무엇을 못 믿는 것인가 하면 새로운 약속의 땅을 주실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그 약속을 못 믿는 것입니다. 그 약속의 땅은 결국 무엇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바라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땅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사귀며 사는 것처럼 결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약시대 백성들이 주님과 함께 살 것에 대한 그림자였습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못 들어간 것을 표면적으로는 모세가 이제 혈기를 부려서 그래서 못 들어간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그것 한번 혈기를 부렸다고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간다면 사실 모세가 그렇게 지극 정성으로 충성한 삶에 비쳐서 본다면 사실 너무 가혹한 형벌입니다. 그런데 더 큰 섭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사실 그것이 아닙니다. 모세의 사명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을 바라보도록 거기까지 데리고 가는 것이 모세에게 부여된 사명이었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준 장본인이었고 그래서 그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까지 데리고 갈 수 없도록 하나님이 섭리 속에서 그렇게 미리 정해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결국 우리를 어디까지 데리고 가는가 하면 구원받기 직전까지 우리를 데리고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영접하고 구원을 받고 그 요단을 건너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이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게 그림 같습니다.
그런데 요단을 딱 건너가고 나니까 그 땅이 야! 다 됐다 이제 깃발을 올려라. 이제 놀자. 빈땅이다 그랬습니까? 그게 아닙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왔는데 약속의 땅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수많은 떡과 고기, 술과 잔치가 아니라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치열하게 가나안 족속과 싸우면서 그러면서 가나안을 정복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게 무엇인가 하면 그 싸움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땅 짚고 헤엄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땅을 이미 주셨기 때문입니다. 반듯이 이길 것이라고 하는 보장이 있는 싸움이었기 때문에 땅 짚고 헤엄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하지 않을 때는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습니다.
똑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 그냥 월요일 날도 신나고 화요일 날도 행복하고 수요일 날은 더 수수하게 신나고 그럴 것 같지만 그러나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딱 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예전에는 나와 더불어서 싸워야 되는지를 몰랐습니다. 나는 언제나 내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보니까 내가 내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어 주님을 거스르려고 하고 옛날 세상에서 살던 대로 살고 싶어하고 그 죄를 다시 물먹듯 마시고 싶어하는 그런 죄에 본성이 있습니다. 그것과 더불어서 싸우고 싶어합니다. 또 싸움으로서 이제 우리가 점점 주님이 다스리시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사실은 그게 아니라 그것은 배경이고 그 가나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들어가고 싶었을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물론 광야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어깃장을 놓고 뻐대면서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생난리를 치다가 애굽 땅도 못 밟고 광야에서 형벌을 받아서 대부분 모두 다 죽고 말았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들이 애굽이 좋아서 지금 돌아가자고 하는 것입니까? 애굽으로 돌아가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습니까? 그렇게 생난리를 치고 나라를 발칵 뒤집어놓고 도망간 그 친구들이 다시 손들고 항복하고 돌아오면 바로가 꽤 잘해주겠습니다. 애고 도망가시더니 다시 오셨습니까? 그렇게 하고 무슨 대신 자리라도 하나 주겠습니까? 아닙니다. 가면 하나님 앞에 살려달라고 몸부림치던 그 비참한 노예의 사역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애굽이 행복해서 가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인가 하면 가나안을 못 들어갈 것 같으니까 그렇게 광야에서 죽어갈 바에야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그런 마음이 들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는 게 너무 재미있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셔서 날마다 진짜 공중을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이 황홀하고 그리고 너무 너무 예수 믿는 것이 행복해서 진짜 지나가는 거지를 끌어안고 뽀뽀를 해주고 싶을 정도로 그렇게 행복하다면 그 사람이 왜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겠습니까? 그래서 코가 비뚤어지도록 술을 먹고 아침에 혼자 일어나서 왝왝대고 대굴대굴 구르면서 다시 또 해장술 먹으로 가고 그렇게 하다가 결국 병원에 가서 위가 펑크 났다고 진단 받고 어느 날 위암이라고 하고 폐암이라고 하는 그런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자꾸 세상으로 갈려고 하는 것은 예수 믿는 게 재미가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행복하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눈물이 펑펑 흐르고 그리고 내 마음에 주님이 가득해서 녹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내가 지푸라기와 같은 나지만 그 지푸라기라도 어떻게 부셔서 하나님 앞에 드리고 싶어. 그런 마음이 있을 때 세상에 가고 싶겠습니까? 주님 만나고 은혜 받고 눈물 펑펑 흘리면서 그렇게 은혜 받고 눈물을 닦으면서 술집으로 뛰어가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허긴 내가 그랬습니다. 있습니다.
(예화: 삼일금식을 마친 후 기념으로 술을 마신 후에 배가 아파 고생했는데 그게 생애 마지막 마신 술이었다는 이야기)
결국은 무엇인가 하면 예수 믿는 것이 너무 시시하니까, 그러니까 세상이 더 즐거워 보이고 좋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니까 무슨 이야기가 나오는가 하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가나안에 못 들어간 것도 이해가 갑니다. 왜냐하면 우상숭배하고 이런 죄는 가나안 땅을 하나님이 안 주실 것이라고 불 신앙보다 훨씬 가벼운 죄였습니다. 훨씬 작은 죄였습니다. 우상을 섬기고 간음을 하고 온갖 나쁜 짓을 하고 하나님 앞에 불평하고 원망하고 그런 것은 가나안을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그랬지만 실제로는 안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불 신앙보다는 훨씬 가벼운 죄였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을 안 주실 것이라고 생각한 이 죄는 사실은 복음을 믿지 못하는 죄였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우리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미래의 영혼의 축복을 안식을 주실 것이라고 하는 것을 믿지 못한 불 신앙이었기 때문에 이것은 용서받을 수가 없습니다. 나쁜 짓 해도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는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 대답해보십시오. 나쁜 짓 해도 나중에 회개하면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회개를 염두에 두고 미리 그럴 수는 없지만 그러나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죄지으면서 살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기회가 있습니다. 왜 용서를 빌고 진심으로 참회를 하면 하나님이 기억도 안 하십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믿지 않은 죄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그게 사함을 받을 수 없는 유일한 죄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 대목이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랬구나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갈렙 이 사람만 들어갑니다. 그래서 도대체 갈렙 이 사람이 어떻게 했기에 들어갔는가? 이 사람은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매우 특별한 사람이었겠다. 그런데 사실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뭐라고 했는가 하면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아들, 갈렙만 이야기를 해서 누군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여분네의 아들, 여분네도 사실 성경에 별로 안나오는데 어째든 갈렙보다는 여분네가 유명했던가 봅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를 댔는데 사실 그 아버지도 별로 이름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별 볼일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나중에 세월이 많이 흐르면서 이 사람이 가나안 정탐꾼 중에 하나가 되어서 지도자의 위치에 올라온 것은 사실이지만 태생 자체로 보면 정말 별로 인 사람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족보를 캐들어 가보면 이 사람은 정통적인 히브리 민족의 사람이 아니라 가나안 원주민 그나스 족속의 후손이었습니다.
그 가나안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해서 애굽까지 갔을까는 우리는 모르지만 모를 것도 없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그 당시 애굽은 워낙 큰 나라이었기 때문에 미국에 가면 캄보디아에서도 식모 살이 하러 오고 월남에서도 품팔러오고 중국에서도 짐 나르러 오고 해서 온갖 사람들이 만나듯이 애굽은 그런 곳이었습니다. 다만 그 사람들은 애굽으로 돈을 벌러 온 사람들이 아니라 애굽에서 포로 같은 것으로 끌고 가서 그렇게 해서 거기서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이 중인들을 가리켜서 하삐루라고 불렀습니다. 그런 하삐루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됐는가 하면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할 때에 그때는 어떤 때였는가 하면 그 큰 열째 재앙을 다 보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자 그러니까 여호와와 함께 가자 그러면서 다 모세를 따라 나섰는데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만 따라 나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과 유사한 처지에서 그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있던 소위 하삐루들이 따라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왜 따라왔을까요? 그냥 따라가자 하고 따라온 것이 아니라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행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보면서 신앙이 생긴 것입니다. 아! 정말 우리는 애굽의 태양신이 최고인지 알았는데 태양도 빛을 잃게 만들고 바로의 장자까지 데리고 가시는 이 위대한 지존하신 하나님이 저들의 하나님이시구나. 나는 그 하나님을 믿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거기에서 굉장히 많은 숫자의 혈통이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사람들이 따라온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복음적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니까 혈통에 매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베드로가 말하니까 “이것을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니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적으로 난 것이 아니오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그런 신앙을 가진 것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특성이 무엇인가 하면 그렇게 하나님께로 한번 신앙을 고백하고 할례를 받고 들어오면 차별대우를 안 하는 것입니다. 차별대우를 했더라면 그나스족 출신의 이 사람이 어떻게 해서 이스라엘의 한 지파의 지도자가 되어서 가나안 정탐까지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들어오고 나서는 일단 그런 것들이 모두 깨트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편견 없이 거기서 진실 된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과 한 공동체가 되어서 이번에는 어디를 정복하러 가는가 하면 자기네 옛 조상들이 땅을 모두 죽이고 진멸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심판의 사명을 받고 가는 것입니다. 이게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으로 보면 대단한 사람이었을지 모르지만 태생이나 모든 것을 보면 이 사람은 오히려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사실 열등한 사람이었다고 우리는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신기하게 이 사람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두 사람만을 모세도 들어갈 수 없는 그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뭐라고 하는가 하면 “모든 온전히 순종하였음이라” 그런데 히브리성경에 보면 ‘밀래 아하래 아도나이’ 라고 나오는데 아도나이는 야훼고 아하래는 뒤에 그런 뜻입니다. 애프터 밀래는 원래 무슨 뜻인가 하면 ‘꽉 차다’ 그런 뜻입니다. 꽉 차다 인데 이 단어가 꽉 차는 게 물이나 이런 것들이 통에 찰 때도 이 단어를 쓰는데 여기에서 쓰여진 것은 정신적인 의미로 쓰여진 것입니다. 마음이 무엇인가로 꽉 찬 상태입니다.
그래서 엄밀하게 말하면 여기서 순종하다라는 말은 안 나옵니다. 이렇게 해서 마음이 하나님을 뒤따라서 꽉 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을 여기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온전히 순종하였음이라고 번역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아주 엄밀하게 번역을 하자면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온전히 하나님을 향한 생각으로 꽉 찼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상 그런 의미입니다.
어째든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이 순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순종했기 때문에 이 갈렙의 태생이 어떻든지 그리고 그가 어느 가문에서 이름도 없는 여분네의 아들로 태어났든지 말든지 그런 것과 상관없이 그가 하나님께 순종했기 때문에 이 사람이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던 그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물론 이 갈렙이 영성이 뛰어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진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까 이야기한 것과 똑같은 논리로 간음도 하고 우상도 섬기고 이런 죄를 지었지만 그 죄보다도 더 큰 죄는 가나안 땅을 줄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그 죄를 용서받을 수가 없어서 못 들어갑니다. 갈렙이 하나님 앞에 좋은 신앙을 가지고 전심으로 주님을 따랐던 사람이기는 했지만 결점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한계가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 가지 결점과 한계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을 오직 하나가 모두 덮어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가나안 땅을 주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과 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믿는 믿음이 그의 모든 약점들을 덮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갈렙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순종의 첫 번째 이 비밀이 무엇인가 하면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믿음과 순종을 거의 동급으로 놓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살아온 그 삶 전체도 여호수아와 갈렙은 의로운 삶을 살았을 것이고 열 명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경건하고 영성이 있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이 사람들이 가나안 땅을 보았다기보다는 오히려 더 결정적인 사건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대로 자신들의 영혼이 쉬게 될 안식 터인 가나안 땅을 주실 것이라고 하는 그 약속을 확실하게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많은 죄와 허물이 있고 잘못이 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의 신자가 인생의 벼랑 끝에 서게 될 때 그 사연은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때에 잘못 살아온 삶도 있고 지은 죄도 많고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거스른 때도 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는 차마 상상할 수 없이 야비하게 살아온 옛 삶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오들이 하나님 앞에 심각한 죄이고 그 모두 회개해야하지만 여러분들이 그런 죄를 많이 지었다고 할지라도 만약에 여러분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이런 죄에서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이런 저런 일로 하나님 안에 불순종하고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내가 너에게 그리스도 예수를 주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살게 하시리라는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믿는 순간에 구원받지 못했을 때 행하던 모든 죄악들을 주님께서 말갛게 씻으셔서 그래서 주님 앞에 새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죄는 여러 군데 돌아다니며 짓지만 회개는 딱 한군데 와서 회개를 합니다. 어디서 회개합니까? 그렇습니다. 십자가 아래서 회개합니다. 주님을 만나고 너무 좋아서 정신없이 좋아서 뛸 듯이 기뻐하면서 교회생활하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신앙이 아직 어릴 때에는 아무리 충만해도 판단이 신중하지 않고 경솔합니다. 교만하기 쉽고 조금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면 이 상태가 쇠로 만든 놋 성과 같이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야금야금 죄와 유혹에 시달리고 신앙의 발걸음들을 양보하다가 보면 어느 날 비로소 자기 자신이 인생에 있어서 불 신앙의 벼랑 끝에 몰린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나 죄악이나를 삼키고 내 영혼 갈 길을 잃었네
그렇게 죄악이나를 삼키고 내 영혼이 갈 길을 잃어버릴 정도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이제 하늘의 모든 좋은 은혜가 막히고 혼자서 살아가는 것이 곤고하고 괴롭기 짝이 없고 잠시나마 내 마음을 달래주던 죄악의 즐거움도 이제는 더 이상 내 마음을 달래줄 수 없게 되었을 그때에 그런 상태가 되기까지 그는 한군데서 죄를 지은 것이 아닙니다. 수없이 돌아다니면서 발걸음 발걸음이 죄악 된 발걸음이었고 불순종의 발걸음이었고 주님의 가슴에 못을 박으면서 살아온 발걸음이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곳을 돌아다니면서 불순종하고 죄는 짓습니다. 그게 오늘 여러분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향해 가지고 계신 생각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이 고통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고싶어하십니까? 여러분들이 정말 생기를 잃어버리고 구원받은 백성으로서의 자존감과 기쁨과 소망을 모두 잊어버린 채 타다만 막대기와 같은 그런 삶을 사는 그런 핍절한 삶을 하나님이 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시시하게 여러분들의 죄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복수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말 여러분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당신과 함께 생명을 누리고 그리고 그분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게 하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세월동안 돌아다니면서 죄를 지었습니다. 가끔 교회에 나왔지만 회개의 눈물도 마르고 말씀의 감화로 내 어둡고 병든 영혼을 후벼파는 그런 말씀의 영향력이 없었기 때문에 진실한 참회의 기도가 없었기 때문에 갚지 못한 부채가 늘어난 것처럼 우리의 영혼은 죄로 싸였고 그것이 깊어졌고 다니는 발걸음마다 우리는 죄악을 쌓으며 피에 피를 잇대이며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한때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 자체가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었는데 이제는 살아있는 그 자체가 주님의 마음에 근심거리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살만합니까? 주님 등지시면 행복하십니까? 불순종하고 주님 거스르면서 살면 정말 그 인생이 맛있습니까? 어디를 다니면서 나는 여러분들을 다 알 수 없습니다. 무슨 죄를 짓고 어떻게 불의 하게 살고 그리고 지금도 눈을 감고 기도하려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도록 여러분의 영혼을 지옥과 같은 고통으로 끌어내리는 그 죄의 궁극적인 뿌리가 무엇인지 나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많은 죄는 돌아다니면서 여러 장소에서 지었을지라도 뉘우치는 곳은 오직 한군데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 나와서 정말 회개하고 그리고 진심으로 뉘우치는 그래서 나의 죄는 주홍과 같이 붉고 나의 죄는 핏빛처럼 붉지만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앞에 나와서 진실 되게 참회하고 용서를 빌며 주님이나를 받아주시고 아버지가 나를 구원하신 그 아버지가 나를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는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바로 이 갈렙이 가졌던 그 약속에 대한 믿음과 동일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순종하는 삶에 첫 번째 요소는 온전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사는 것은 잘사는 사람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못살기 때문에 더욱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믿음? 내가 수많은 곳으로 돌아다니면서 죄를 짓고 그리고 그 죄악의 슬픔이나를 눌러서 에스겔 선지자가 고백했던 것처럼 내가 죄를 많이 지었음으로 어찌 하나님 앞에 나아가겠으며 어찌 하나님이나를 용납하시랴, 그렇게 고백할 정도로 내가 죄 가운데 살았다고 할지라도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그래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그분이나를 이 어두운 세상에서 구원하셨고 지금은 구원받은 내가 죄악에 빠져서 헤매고 있을 때 건져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라.
어디에 가겠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모르신다고 하더라도 주님께 갈 수밖에 없고 심지어는 주님이 우리를 죄를 지었다고 박대하신다고 할지라도 주님 앞에 가서 나를 박대하지 말고 용서해달라고 나를 없이 여기지 마시고 나는 막대기와 같은 인간이고 쓰레기와 같은 인간이고 아주 더럽기 짝이 없는 막대 먹은 사람이지만 그러나 나는 주님 앞에 용서를 구할 자격이 없지만 주님이 나를 박대하시면 내가 어디에 가겠습니까? 내 스스로 주님을 떠났지만 죄 가운데 불순종하며 살다가 보니까 우리 주님밖에는 내 인생을 해결해주실 분이 없어서 주님 앞에 나옵니다. 그 믿음이 오늘도 되풀이되어야 할 갈렙의 믿음입니다.
이 사람은 쉽게 이야기하면 가나안만 믿는 믿음이었고 그 마음을 주시는 하나님만을 믿는 믿음이었고 그 믿음은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굳센 믿음이었습니다. 그 믿음이 모든 사람들이 심판을 받고 광야에서 죽어 가는 그 긴 세월동안 그 사람을 그 광야의 수많은 시체 가운데서도 살아있게 만든 힘이었습니다.
정말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아직까지도 주님을 믿지 않는 분이 있다면 여러분들이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믿고 구원받았다면 그럼에도 여러분들이 죄 가운데서도 주님 멀리 떠났다면 그래도 여러분들이 여전히 믿을 수 있는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분의 십자가의 보혈 앞에 나와서 펑펑 울고 어린아이와 같이 여러분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간절히 빌면서 주님의 자비와 은혜를 구하며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버렸지만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그렇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믿을 분이 없다고 생각하며 그분을 신앙하는 마음을 보시고 여러분들의 죄를 용서해주셔서 다시 살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면 멀리 갑니다. 세상도 한군데가 아니라 이번에는 저리로 가고 이번에는 저리로 갑니다. 어떤 때는 돈 때문에 시험에 빠지고 어떤 때는 정욕 때문에 시험에 빠지고 어떤 때는 명예 때문에 시험에 빠지고 어떤 때는 미움의 시험에 빠집니다. 그래서 각각 다른 방향으로 주님을 멀리 떠납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돌아오는 길은 오직 한길입니다. 길 대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와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분의 그 고난의 모습을 보면서 그때야 비로소 깨닫습니다. 죄를 지으러 씩씩하게 걸어나갈 때는 못 깨닫습니다. 그런데 죄 가운데서 많은 고통을 받고야 비로소 깨닫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나같이 이렇게 불순종하고 주님을 거스르며 사는 흉악하고 더러운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그 십자가에서 죽으셨구나. 예전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까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없는데, 그러면서 살았는데 어느 한순간에 자기가 죄에서 회개하고 예수님 앞에 나오고 나니까 그 십자가는 다른 사람들이 믿는 십자가가 아니라 바로 우리 모두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이 아니라 내가 지은 많은 죄,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그것을 내가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깊이 눈물을 흘리고 회개합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어떤 죄로 인해서 마음이 무거워지고 주님이 주신 영혼의 참된 생명을 잃어버리고 우울하고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지 나는 그것을 모두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한가지 확실하게 아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죄이든지 어떤 이유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었든지 지금 여러분들은 어떻게 불순종 가운데 살고 있든지 간에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내가 붙들고 살수 있는 분이 없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외에는 나를 이 지옥과 같은 고통에서 건져낼 분이 없다고 하는 생각을 하며 주님 앞에 나와서 진실하게 참회하기만 하면 수십 년 동안 지은 죄를 단 한번에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아파하는 마음에 그 토설 하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용서해주시고 그리고 여러분들의 많은 죄악을 기억조차하지 않고 새롭게 살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갈렙이 가지고 있었던 순종의 정체였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두 번째, 갈렙이 가지고 있었던 믿음의 또 다른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그게 바로 ‘밀레’라고 하는 히브리 단어가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으로 그 마음이 꽉 찬 상태, 그것이 바로 이 갈렙이 하나님께 순종했을 때 그 마음의 상태였습니다.
순종이 왜 어려운지 아십니까? 여러분들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순종하는 것이 이상하게 쉽다 라고 느껴지던 때가 여러분들 중에 상당수의 성도들에게는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한번 상상을 해서 지나간 과거를 회상해보십시오. 순종하는 것이 지금처럼 어렵지 않고 굉장히 쉬운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고통스러운 것은 성령 충만 할 때도 싫고 은혜가 떨어질 때도 싫은 것입니다. 성령 충만해진다고 해서 고통이 신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다만 성령 충만하고 은혜 가운데 있을 때는 고통 그 자체보다는 내가 가치 있는 일을 인해서 고통을 받는다라는 확신이 있으면 그것이 신앙적으로 기쁘기 때문에 고통도 내가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까? 고통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을 가만히 돌아보면 우리의 신앙의 생활 과정 가운데 어떤 때는 순종하는 것이 힘들지 않고 쉬워 보이는 때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래서 잠시 하나님께서 내가 하기 싫은 일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평소 같으면 절대로 못하는 표현을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때려죽여도 못한다고 합니다. 진짜 맞아죽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십니까? 그런데 그래도 못한다. 내가 직장에 다닐 때 야유회 가면 꼭 노래를 안 하는 여직원이 있는데 자기는 회사에서 잘려도 노래를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차라리 종아리 걷고 맞으라면 맞지 나는 죽어도 노래 못한다. 때려 죽여도 못한다. 그런데 진짜 은혜가 떨어지고 나면 차라리 그냥 혀를 꽉 깨물고 하나님 앞에서 자결하는 게 낫지 순종은 죽어도 못한다. 그런데 평소에 그렇게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데 은혜를 주시면 하나님이 순종하게 하십니다.
(예화: 어느 형제가 얼마나 구두쇠였는지 고등학교 때부터 저금통에 돈을 모았는데 직 장에 들어가서도 부모님께 돈을 드리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이라며 돈 을 드리지 않았고 열심히 교회를 다녔지만 돈에 대해서 인색했던 그가 말씀에 은 혜를 받고 깨트려지니까 하나님의 눈으로 자기를 보니 너무나 자신이 불결하고 더러워 제일먼저 한 일은 오랫동안 모아온 통장에 돈을 찾아 부모님께 드리며 하 나님보다 부모님보다 돈을 사랑했다며 자기를 용서해달라고 하면서 이제 진짜 자기가 사랑하는 것은 주님이라고 고백했다는 이야기)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못 받았을 때에는 순종하는 게 때려죽여도 안 되는 것입니다. 차라리 그 통장을 부모를 갖다드리고 기쁨으로 사느니 그 통장을 끌어안고 때려죽임을 당해서 길거리에 쓰러지는 게 더 쉬운 것입니다. 참 무서운 것입니다. 이 마음의 집착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순종이 잘 안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순종을 잘 하던 적이 여러분도 있었습니다. 가만히 보면, 그런데 그렇게 옛날에 순종을 잘했을 때에 그때는 순종이 참 쉬웠습니다. 뭔가를 이렇게 하라고 하면 아! 잠시 갈등합니다. 왜 하나님은 내 것만 자꾸 달라고 그러시나. 그런데 어느 한순간에 합니다.
(예화: 예전에 함께 성경공부 하던 어느 형제가 주위에 어려운 지체의 등록금을 자신이 해결하기 위해 기도하고 어느 돈이 있는 집사님을 붙들고 사정을 이야기했지만 자신도 어렵다고 거절을 당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집사님이 돈을 들고 왔다 는 이야기)
처음에는 순종하기 싫은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 안에 있으니까 쉽게 꺾인 것입니다. 처음에는 싫은 게 갑자기 뭘 내노라고 하는데 무슨 예약이 된 것도 아니고 내가 한번 이따 저기에 서서 한번 해볼까? 안됩니다. 그래서 안 된다고 딱 자른 것입니다. 그런데 집에 가서 취침기도를 하면서 도와 주라. 주여, 그렇게 순종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언제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을 때, 그런데 은혜 아래 있을 때 그 마음이 어떤 마음입니까? 하나님으로 꽉 찬 마음입니다. 그게 이 갈렙이 순종한 그 순종의 정체입니다. 하나님을 따라가는 마음으로 그의 마음이 꽉 차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에게는 너무 믿을 수 없는 것도 이 사람에게는 너무 믿어진 것입니다. 왜 주님만 따라가는 마음인데, 주님으로 꽉 찬 마음인데, 주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은 나도 할 수 있다. 왜 주님이나를 통해서 역사 하시니까. 이런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의심하겠습니까? 주님의 마음으로 꽉 차 있는데,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95%를 믿는 사람 천만 명이 모여도 100%를 믿는 한사람의 위대한 역사를 당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해전술로 오는 나라가 아닙니다. 믿음도 없는 떨거지들이 새카맣게 산을 넘어온다고 해봐야 지금 누구보고 웃는 것입니까? 여러분 자신을 보고 웃는 것입니까, 남을 보고 웃는 것입니까?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대체로 마음이 하나님 앞에 바쳐진 일 천만 명의 제사보다는 온전히 하나님을 좇는 마음을 가진 한사람을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결국은 우리들이 쉽게 순종할 수 없을 때에는 언제였는가 하면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은혜에 덜 점령당했을 때, 은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있기는 있습니다. 그런데 은혜에 덜 점령당했습니다.
저는 장작불을 때면서 아주 묘한 인생의 이치를 발견했습니다. 난로에 장작을 때면 다 타지 않고 시커멓게 그슬려서 불이 꺼지면 그것은 종이를 갖다가 놓고 부채를 부치고 입을 불고 난리를 쳐도 불이 안 붙습니다. 그래서 그때 그 생각이 납니다. 옛날에 신앙생활을 처음 할 때 목사님이 매일 기도할 때 우리는 타다만 마른 막대기와 같으니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나는 왜 매일 기분 나쁘게 날 보고 막대기라고 그러나. 그것도 매일 타다가 말았다고 하니, 그게 뭔가 했더니 그게 시골서 산 사람들의 지혜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시커멓게 타다만 그 막대기에 절대 불이 안 붙습니다. 장작에 올려놓고 불을 확 지펴서 그 위에 올려놓기 전에는 거기에 종이를 대고 성냥불을 켜대고 부채질하고 생난리를 해도 일단 꺼져서 나무가 아니라 숯으로 시커멓게 된 나무는 절대 안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숯으로 시커멓게 되었지만 그 속에 장작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안 탑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있기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온전히 가득 차지 않았기 때문에 순종하기가 그렇게 힘든 것입니다. 차라리 손가락 하나 절단하는 것이 나은 것입니다. 너무 너무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하다가하다가 안되면 인생 막판에 몰리면 뭐라고 하는가 하면 하나님 내 생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아니 왜 그런지, 고치고 살아야지. 아니 조금만 고치면 아직까지도 쓸만한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어떤 점에서는 하나님 앞에 그렇게 완고하고 죄를 지었지만 아니 그 점을 고치면 쓸만한데,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이 다 그것을 고쳐서 하나님이 쓰신 사람이지, 태어날 때 순종하며 태어난 사람이 예수님밖에 누가 있겠습니까? 모세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다 종자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냥 너무 너무 이스라엘 백성들이 힘들게 하니까 나를 죽이십시오. 나 이제 세상 살기 싫으니까. 왜 나에게만 맡기고 내가 이들을 낳았습니까? 내가 이들의 유모입니까? 나를 데리고 가십시오. 나 이제 싫습니다. 그게 하나님 보실 때에 아름다울 수 있겠습니까? 데리고 가지 말라고 그래도 주님이 데리고 갈 때가 되면 다 데리고 가십니다. 그것도 성취될 수 없는 기도입니다. 하나님, 내 생명을 거두어주십시오. 그래서 응답되어서 하나님이 거두어간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삶을 고치는 이 하나님 앞에 악한 마음을 품고 두 눈을 부릅뜨고 죽어 가는 것이 훨씬 더 낫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악독한 마음의 깊이라고 하는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 마음이 어떤 마음입니까? 갈렙이 가졌던 정 반대의 마음입니다. 순종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갈렙의 마음은 온전히 하나님으로 꽉 찬 마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신자의 마음이 그러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게 너무 어렵지 않습니까? 주님께 불순종한 사람들을 향해서 성경이 어떤 좋은 약속을 하고 있는지 제게 한번 보여주십시오. 불순종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좋은 것들을 약속하고 있는지 한번 보여주십시오. 불순종해도 괜찮다고 하는 성경의 구절을 한번 보여주십시오. 불순종한 자들이 마지막 받는 상급이나 불순종하는 자들이 마지막에 받는 그 삶의 결과가 바람직하다는 것을 증거 하는 성경의 구절이 있습니까?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오고 창일한 물체로 온 세상을 뒤덮던 그 때로부터 시작해서 불순종에 대한 이 경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이 불순종에 대한 끊임없는 하나님에 심판에 대한 경고는 지속적으로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아서 멸망한 그 수많은 피의 역사들은 바로 하나님이 얼마나 이 불순종을 무섭게 생각하시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불순종을 어린아이가 엄마 젖을 먹으면서 엄마 배를 차는 정도로 생각합니다. 정말 정확한 비유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불순종을 어린아이가 아무 것도 모르고 엄마 젖을 빨다가 뻐대기 위해서 엄마 배를 한두 번 차는 정도로 그렇게 가볍게 생각합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불순종은 곧 그 순간에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고 불순종은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보다 자신이 자기의 삶에 있어서 왕좌를 차지하고 있다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순종하며 산 사람의 끝은 반드시 있습니다. 그래서 불순종 가운데 산 사람들의 삶은 반드시 비참합니다. 현세적으로도 내세에서도 주님을 믿지 않았다면 비참하지만 주님을 이미 믿었다고 할지라도 현세에서 사는 동안 너무 비참합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인생의 고난이 겹칠 때 있습니다. 시련이 계속될 때 있습니다. 어떤 때는 왜 하나님 나에게만 이렇게 모질고 그리고 뼈아픈 시련을 정말 삼각파도처럼(?) 연속해서 나에게 이렇게 허락하시나 그리고 주님을 향해서 기도하던 우리의 손에 힘이 풀어지고 그리고 성경을 들고 그 말씀을 배우려고 하던 마음이 주저앉는 적이 있습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불순종 때문에 그런 일이 계속될 가능성이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고난이 불순종을 하나님이 다루시는 방법으로서 고난을 불러오기도 하지만 순전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데도 고난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이 반드시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그 편에 서 있다고 자꾸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편에 서 있는 사람과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불순종 때문에 고난을 받는 사람들 사이에는 아주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 자를 가지고 재보십시오. 그 시금석을, 그 뚜렷한 차이가 무엇인가 하면 자기의 죄로 인해서 불순종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그를 돌이키기 위해서 징벌하시는 고난의 경우에는 고난을 많이 당하면서도 고난과 고통만 있을 뿐이지 그 고통 때문에 하나님과 가까워진다라는 경험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자신이 비록 완전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러나 자신의 죄와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서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께서 뭔가 특별히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섭리에 의해서 그를 더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당하는 애매한 고난인 경우에는 그에게는 반드시 그 고난을 통해서 잠시 영혼의 어두움이 오는 것 같지만 매달려 기도하면 고난도 막아놓을 수 없는 하나님과의 교통이 있고 거기서 오는 기쁨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사도 행전에서 성령을 충만하게 받은 사도와 그리고 예수님의 사람들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럴 때 그들을 막 핍박했습니다. 모질게 때리고 핍박했습니다. 그랬더니 고난과 어려움이 닥친 게 아닙니까? 그랬더니 뭐라고 했는가 하면 찬송을 한 것입니다. 뭐라고 아! 얼마나 놀라운가. 우리 같은 사람을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을 받을 만한 사람으로 여겨주셨다. 그리고 고난이 오는데 그 얻어맞는 고난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과의 탁월한 교제를 느끼면서 그 고난 속에서 기쁨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스데반을 생각해보십시오. 돌을 던졌습니다. 돌이 온몸에 두들겨 맞으면서 머리가 터져서 피가 흐르고 그 돌맹이가 날라 와서 눈알을 빼버렸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피범벅이 된 가운데서 죽어 가는 데도 뭐라고 했는가 하면 이 사람 속에는 돌맹이 맞으면서 짓이김을 당하면서도 죽는 것이 가로막을 수 없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좌 우편에 서서 계신 것을 내가 보노라. 그러면서 성령으로 충만해집니다.
그런 정도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우리들이 우리의 불순종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뭔가를 특별히 다루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실 때에는 고난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박살이 나버린다거나 고난 속에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완전히 끊어진다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잠시 언뜻언뜻 구름이 지나가면서 해를 가리는 것처럼 고난이 너무 심하면 순간적으로 낙심하는 때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은 잠시이고 반드시 그 사람 안에 은혜가 훨씬 더 그 실망보다 우세합니다. 그러니까 은혜가 죄악보다 우세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믿음이 의심보다 훨씬 더 우세합니다. 그래서 살아갑니다.
보십시오. 여러분, 성경은 아주 분명하게 말합니다. 불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은 마치 태양을 등지고 걷는 사람과 같아서 끊임없는 근심과 걱정, 그리고 헤어날 수 없는 인생의 수많은 고통과 그림자들이 드리워집니다. 요즘도 불순종하면서 살아가는 몇몇 지체들을 이렇게 생각하면서 마음이 그렇게 괴로울 수 없습니다. 뭔가 어두운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는데 저들은 정말 그것을 느낄까? 그런데 이제 우리들이 절대로 그렇게 불순종하며 살아가던 삶을 어느 한순간에 확 꺾어서 내일은 순종하면서 살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100킬로 달리던 자동차 핸들을 세 바퀴 정도 왼쪽으로 강하게 순식간에 돌려보십시오. 전복되어서 자동차가 불타는 것밖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자동차로도 그런 과격한 방향전환을 할 수 있는 자동차는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면 오늘 마지막으로 그 비결을 말씀드립니다. 보십시오. 우리의 마음에 죄가 차는 것과 하나님의 은혜가 차는 것은 같은 원리입니다. 갈렙의 마음이 한번에 이렇게 주님을 향한 마음으로 꽉 찼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래서 제일먼저 우리들이 계속해서 걸어가던 불순종의 길에서 돌이키기 위해서는 먼저 그 불순종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사령탑을 탈취하고 그 핸들을 우리가 빼앗아야 합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사령탑이 우리의 신앙이고 그리고 그 핸들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진실 되게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깊이 참회하고 나면 제일먼저 그 진실한 참회의 영향을 받는 곳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영혼의 변화가 제일먼저 전달되는 곳이 어딘가 하면 우리의 마음의 변화가 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깊이 참회하고 뉘우치면 자기도 어찌할 수 없었던 마음이 이제 마치 고삐를 손에 탁 틀어지듯이 길길이 뛰던 말들을 한번에 감아서 고삐를 틀어지게 됩니다. 그게 회개를 통해서 오는 역사입니다. 그것을 틀어잡아야 합니다. 그리고는 죄로 찼던 마음들이 서서히 그 회개 속에서 녹아지고 변화되어서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 차게 될 때 그때 비로소 옛날처럼 순종하기 좋은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모범이신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분의 전 생애 중 티끌만큼도 하나님을 위해 바쳐지지 않은 생애가 있었습니까? 그분의 전 생애 중 손끝만큼도 우리를 위해서 바쳐지지 않은 생애가 있었습니까 그분이 전 생애는 하나님을 위해 바쳐졌고 그리고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는 일에 바쳐졌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도 그분의 것이 아니었고 그분의 육신도 그분의 것이 아니었고 심지어는 그분의 영혼도 그분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손에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면서 십자가에서 최후를 마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자기를 온전히 다 드린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웠다” 이랬습니다. 그래서 당신 자신을 온전히 드린 순종의 생애를 사셨는데 그런 순종의 생애를 사실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꽉 차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이 사경회에 나와서 뭘 듣고 싶으십니까? 여러분들은 아무 일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데 기적적인 역사가 일어나서 여러분들이 새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향해 말씀하시는 그 은혜의 말씀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반응하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옆에 있는 사람이 모두 변화되고 새사람이 되어도 그 변화가 여러분하고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정말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일생을 당신 자신의 마음을 바치면서 사시기 위해서 그분이 얼마나 많이 노심초사하시겠습니까? 매일매일 그분은 새로운 하루를 맞으시면서 자기의 마음을 하나님 자신으로 채우며 자신의 삶과 죽음, 섬김과 그 모든 고난에 동기까지도 하나님의 것이 되게 하시기를 전심으로 구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마음은 주님으로 가득 찰 수 있었고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는 아멘의 생애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충성된 증인이시며 또한 아멘이시며 창조의 근본이신 자였습니다. 주님의 별명은 아멘이었습니다. 그런 아멘의 생애를 온전히 사실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의 마음에 하나님으로 가득 차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거기부터 이제 우리들이 해결해나가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의 마음을 한번 열어서 주님 앞에 보여보십시오. 정말 여러분들의 마음에는 정말 순전하게 하나님으로 가득 차 있는 마음입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여러분 속에 품었습니까? 그 마음이 여러분 전체를 지배하고 있고 그 마음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순전한 삶을 살게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도 극복할 수 없는 그 마음에 길길이 뛰는 이 불순종과 완고함들을 하나님께서는 참회를 통해서 부어주시는 성령의 은혜와 말씀으로 그 불을 끄시고 이제 그 마음의 고삐를 여러분들의 손에 붙잡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엔드레이 그레이라고 하는 청교도는 자기의 책 속에서 그랬습니다. 신자의 대치할 수 없는 의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매일매일 아침마다 낮마다 밤마다 내 마음을 지키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열렬히 부르짖어야 합니다. 마지막이 재미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이렇게 마음을 고치고 주님을 정말 새롭게 만나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2.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두 가지 명령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로 오늘날과 같이 생활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부분 역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들어가도록 여호수아에게 딸려서 보내시기 직전에 광야에 있었던 일을 회상하며 남긴 부분입니다. 신명기 전체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순종하면서 살도록 모세가 당부하고 있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이 신자가 거듭 ‘신’ 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신신당부한다’ 그럴 때 그 신자 하나가 신명기의 그 신자입니다. 그래서 신신당부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을 전해준 기록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오늘 모세는 문득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어날 미래의 일들을 상기시킵니다. 미래에 너희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형통하게 살면서 복을 누릴 때에 어느 날 너희 자손들이 이렇게 물어볼 것이다. 아빠,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키라고 그러신 계명이 뭐예요? 이렇게 물어볼 것이다. 그때 너희들은 이렇게 말해라. 그리고 그들이 가르쳐주어야 할 교훈의 내용을 일러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훈이 나오기 전에 먼저 그 자손들에게 가르쳐주어야 할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애굽의 치하에서 종살이를 하며 힘에 지나도록 노예로 부림을 받고 고난을 받으면서 살았는데 거기서부터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하나님의 계명이 무엇인가를 알려주기 전에 하나님의 은혜부터 알게 해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알게 하심으로서 이제 비로소 순종할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늘날도 이 같은 원리는 꼭 같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무엇인지를 아는 마음이 있으면 순종하는 것이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를 아는 마음이 없으면 순종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의 경험을 되돌아보면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신자의 마음 안에 가득했을 때에는 언제나 순종하는 것이 쉬웠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구원의 감격과 나 같은 죄인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가 참으로 놀랍다고 하는 그 아름다운 감사의 고백이 있을 때에는 순종하는 것이 참 쉬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먼저 너희자손들에게 상기시키라는 것입니다. 그 날이 오면 상기시켜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우리를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 바로의 치하에서 도망칠 수도 없고 해방될 수도 없었는데 우리를 의존하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으로 주님이 우리를 독수리가 그 새끼를 업어 나름과 같이 우리를 그 애굽에 바로의 치하에서 건져내셔서 그래서 우리를 구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또 이 땅에 들어오게 하셔서 이 가나안의 아름다운 땅을 우리가 누리게 만드셨습니다. 그것을 너희 후손들에게 가르쳐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그 다음에 가서 비로소 하나님의 명령을 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르쳐야 할 내용이 무엇인가. 크게 두 가지를 말하는데 하나는 명령이고, 그 다음에 또 하나는 그런 명령을 주시는 목적입니다. 24절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함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로 오늘날과 같이 생활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부분이 그렇게 잘못된 것은 아닌데 조금 히브리 성경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히브리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라고 명령하셨으니 이것은 그리고 목적이 나옵니다. 이것은 우리를 위하여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해 그랬는데 히브리 성경에는 ‘선’이라고 나옵니다. ‘선’ ‘토브’ 그래서 우리를 위해서 선을 주시기 위함이며, 다시 말하면 우리를 선하게 대우해주시기 위함이며, 혹은 우리로 하여금 선을 따라 살게 하시기 위함이며, 또 여호와께서 또 우리로 오늘날과 같이 살아있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은 명령과 그 명령을 주시는 목적으로 크게 둘로 나뉘는데 명령하신 내용은 첫째는 순종하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경외하라는 것이었고, 명령의 목적인 첫째는 우리에게 선을 주시기 위함이고 그리고 두 번째는 우리를 그때처럼 살게 하시기 위함이라 이런 것입니다. 그럼 하나씩 풀어가겠습니다.
우선 크게 첫 번째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명령 첫 번째로는 순종하도록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첫째 순종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애굽에서 하나님이 종살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지시고 건지신 그 사람들에게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올 수 없는 그 광야의 오랜 세월들을 조상들도 알지 못했던 만나를 먹이시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수많은 나라와 원수들을 꺾으며 가나안까지 오게 하셨습니다.
정말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자마자 경험하기 시작해서 가나안 땅에 도착하기 직전에 이 모세의 신명기를 들을 때까지 겪어온 삶의 발자취를 돌아본다면 정말 역사 속에 어느 민족도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을 정도로 그렇게 치열하게 광야의 길을 걸어왔고 매일매일 기적을 보면서 그 기적의 떡과 기적의 불기둥, 기적의 구름기둥 아래서 기적적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은 은혜는 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점령하려고 할 때에 그들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가나안 땅처럼 발달한 병기도 없었고 높은 산성이나 요새도 있을 리가 없습니다. 광야를 유리하다가 온 오합지졸과 같은 민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있는 것이 오직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단 강물을 말리면서 하나님이 그들의 믿음에 축복해주셔서 여리고 성을 무너트리게 하셨고 중부지방 가운데 허리를 자르면서 들어가서 파죽지세로 도저히 넘나볼 수 없었던 그 큰 땅 가나안을 정복해가도록 하나님이 역사 해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가서 심지 않은 포도나무에서 실과를 먹고 그리고 짓지 않은 집에서 만들어놓지 않은 포도즙 틀을 사용하면서 그렇게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는 그 땅에서 그들이 살게 되었을 때 그들이 받은 은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의 정복을 해나가고 가나안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말 오랜만에 하나님을 향한 뜨겁고 진실한 민족적인 사랑을 가진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유일신 신앙에 불타는 아름다운 영적 상태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의 힘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것이었습니다.
오늘 이 집회에 나온 여러분들은 근심과 걱정도 참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통과 괴로움도 참 많을 것입니다. 어쩌면 여러분들이 기도학교 사경회가 열린다고 했을 때 여러분들은 어쩌면 우리 흔히 이웃에서 듣는 간증처럼 아! 내가 이번에 가서 진짜 한번 세게 기도해서 그래서 내 인생에 있는 이 어려운 문제들을 한번 해결을 받아야 되겠다. 어떻든지 간에 내가 한번 이번에 가서 하나님 앞에 복을 받아야되겠다. 마음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신앙의 이치는 참 신기해서 미래에 대해서 우리들이 어떠한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순결하게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도록 만들지를 못합니다. 다시 말하면 뇌물 개념의 삶을 가지고는 도저히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며 살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 하시며 그런 생각하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아이고! 기도 제목도 많은데 잘 보여야지, 하나님 앞에 찍히면 나만 괴롭지. 그런 생각하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해서라도 마음을 한번 다잡아먹으면 좋겠지만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우리가 어제 지난 시간에 살펴본 갈렙의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가득 찬 그런 종류의 순종은 그런 순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주님과 우리 사이에 주고받는 거래관계로서의 그런 순종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주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주님께 순종하는 그런 인격적인 아름다운 삶을 하나님이 원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은 도저히 순종할 수 없습니다. 또 여러분들의 마음에는 지금 순종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사는 그런 것들보다 여러분 자신이 처한 문제와 인생에 어떤 곤고한 일들이 훨씬 더 여러분들의 마음을 크게 차지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 어떻든지 간에 내 문제를 해결해주시면 모든지 하겠습니다. 얼마나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다급했으면 그렇게까지 하나님 앞에 매달리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를 매어서 쓸 수는 없습니다. 기초부터 천천히 밟아서 올라와야 합니다. 그게 지름길입니다.
그럼 보십시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순종하겠습니까? 정말 우리들이 순종해야한다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잘 알지 않습니까? 어떤 때는 순종하고 싶지만 마치 내 안에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또 다른 내가 있어서 나도 원하지 않게 나를 불순종가운데로 목매어 끌고 가는 것을 경험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올 때쯤 되면 우리 자신이 얼마나 미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모든 불순종의 고리를 끊고 하나님 앞에 새롭게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그 일로 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인도할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가슴에 새겨보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지금 우리들이 안고 있는 문제, 하나님 앞에 시급히 해결 받기를 원하는 문제가 아무리 급하고 큰 문제라고 할지라도 그것보다도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우리가 이제껏 까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기억해보십시오. 우선 우리들이 구원받은 그 은혜는 아무리 반복해서 하나님 앞에 회상을 해도 진력이 나지 않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발자취가 아닙니까?
지푸라기와 같고 쓰레기와 같은 그래서 주님을 모르고 살기를 그 짐승이 도리를 알지 못하고 사는 것처럼 그렇게 막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탐욕과 죄악을 물먹듯 마시면서 인간의 욕심을 따라 사는 일에 충실하기를 그것이 마치 자신의 인생에 본분인 것처럼 살았고 그래서 이 세상에 살아있으면 살아있을수록 우리는 주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더럽히면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목적은 우리를 사람처럼 살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죄가 들어오기 전에 아담과 하와 그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그들에게 살게 하시고 싶으셨던 그런 삶을 하나님이 다시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이 세상의 죄와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져내어 주신 것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을 수박에 없고 영적으로는 범죄 하여 하나님 앞에 진노의 자식이었던 마귀의 자식이었던 불순종의 아들 가운데 역사 하는 악한 영을 따라 살던 불결하기 짝이 없는 저희들을 주님이 구원해주셨습니다. 주님에게 그렇게 하셔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까?
지금 이 시간에도 많은 사람들은 구원의 은혜와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도 그 많은 사람들이 그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을 수가 없는데 우리에게는 믿어지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우리의 어두운 눈을 열어서 우리가 누구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며 그래서 우리를 어떻게 그 지옥의 형벌가운데서 구원해내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낮고 천한 땅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쏟아놓으셨는지 우리는 믿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의 은혜를 힘입게 되었습니다.
처음 주님을 영접하고 죄의 길에서 돌이켜 구원을 얻던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모두 어린아이와 같았고 이제는 예수님이 없으면 살수가 없을 것처럼 믿었고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며 살수 있다면 거기가 지옥이라도 주님 없이 살아가는 천국보다는 훨씬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 세상의 수많은 환난과 시련이 우리를 삼킨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주님을 배반하지 않으리라고 굳게 다짐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보혈과 우리를 위해서 쏟으신 그 피를 기억하면서 이제 주님을 거스르면서 주님 원망하고 대적하면서 살아온 우리의 삶을 그 불순종하며 살던 구원받기 이전의 삶 산만으로도 충분했다고 우리는 생각하고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고 이제는 예수님만을 위해서 살기로 다짐했습니다. 피묻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펑펑 울면서 우리는 물었습니다.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그리고 우리는 너무 억울했습니다. 이런 주님의 사랑을 모르고 살아온 옛날이 너무 억울했고 이렇게 우리를 빛 가운데 살게 하시고 싶었는데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을 어둠 속에서 짐승처럼 방황했던 날들을 후회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주님의 뜻대로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은혜면 우리가 주님 앞에 순종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모두 그렇게 주님을 영접하고 자기가 죄인인지 알며 참회할 때에는 여러분 모두 착한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는 신앙의 의무를 게을리 했고 처음 하나님 앞에 받았던 그 구원의 감격과 은혜가 식어졌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한없는 기쁨과 은혜를 누리며 감사했던 그 사람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광야에서 조상들이 행하던 이방 신에 빠지고 그리고 세상을 사랑하는데 심취해서 여호와를 하나님을 잊어버렸던 것처럼 그렇게 떠났습니다.
그런 가운데 여러분들은 곤고하고 어려온 날들을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여러분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의 그 피로 구속함을 받아서 하나님이 이 땅에 두셨지만 사실은 이 땅 백성이 아니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기의 본분을 상당히 많이 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 은혜생활을 하면서 억제되었던 세상을 향한 탐심과 육체의 자랑을 위한 열망들이 일시에 솟구쳤고 그런 정욕과 욕망들은 여러분 안에 있던 연약해져 가는 하나님의 은혜를 몰아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여러분들의 삶은 교회에 나오고는 있지만 그러나 불순종하는 삶이 되었고 하나님의 참다운 은혜와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한줌도 안 되는 지푸라기와 같은 세상 사랑을 손에 넣기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그 생명주신 아름다운 사랑을 우리는 한편으로 버렸던 것입니다. 그렇게 불순종하며 살아가는 날 동안에 영혼의 곤고함은 찾아왔고 심할 경우에는 우리의 인생에 감당할 수 없는 환난과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사랑해야 될 사람들이 원수를 맺고 사랑 받아야 할 사람에게서 상처를 받고 그리고 우리가 누렸던 많은 좋은 것들을 빼앗기고 고통과 시련 속에서 분노의 쓴 물을 머금어야 하는 그런 어려운 골짜기도 우리들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들은 하나님 없이 그렇게 살아가고 싶어하는 우리로 하여금 정말 주님이 없을 때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비참해지는지를 경험하게 하심으로서 주님 앞에서 사는 행복을 위해서 세상에 대한 사랑을 접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쓰라림을 몸소 경험하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주님을 믿기 전에는 세상에서 주님 없이 그렇게 잘 살았는데 주님 믿고 한번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난 다음에는 그렇게 주님 없이 옛날처럼 행복하게 살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돌아가 봤더니 이미 그 세상은 옛날에 구원받기 전에 내가 놀던 그 세상이 아닙니다. 그런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내버려두셨습니까? 아닙니다. 지칠 때로 지쳐서 이제는 세상을 사랑하는 것도 진력이 나고 마지막에 뜬구름처럼 잡으러 다니던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 없는 행복과 성공, 부에 대한 추구와 지위에 대한 모든 사랑들 어느 한순간 지나고 보니까 얻은 것도 없고 혹은 얻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서는 도저히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진 자신의 영혼의 곤고함을 달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슴아파하고 이번에는 주님을 떠나올 때보다도 더 깊은 어두움 속에서 신음했지만 어디로 돌아가야 할 길을 알지 못했습니다. 어느 순간에 아파하며 눈물을 흘리고 그리고 집을 멀리 떠났던 탕자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난 후에야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게 되듯이 하나님과 화목한 가운데 그 은혜아래서 살던 때에 행복을 회상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곤고해서 주님을 멀리 떠난 어두운 죄악의 길에서 상처받고 찢겨서 흐느끼고 있는 우리에게 내가 너를 보낸 적이 네 발로 걸어나가서 당한 일이니 너는 거기서 죽으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주 여호와 능력의 주 내 영혼의 치료자
말씀으로 고치시네 주는 나의 치료자
그렇게 교만하게 살아가고 있는 어느 날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을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서 자기가 얼마나 위험한 벼랑에 서 있으며 세상 것을 찾아가며 불순종하는 삶을 사는 가운데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영혼의 주인공이 되었는지 깨달았습니다. 거기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했습니다.
참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죄를 지어온 나날들은 머리털보다도 수많은 날들인데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 앞에 지나온 머리털처럼 많은 날 동안에 지은 죄를 생각도 할 수 없어서 하나님 앞에 눈물만 흘리며 보배 피를 흘리니 이 죄인을 받아달라고 주님 앞에 간절하게 진실한 마음으로 참회했더니 머리털보다 많은 날 동안 지었던 죄를 한순간에 하나님이 용서해주시고 그리고 우리를 다시 더러운 옷을 벗기고 당신의 아름다운 옷을 입히시고 하나님 자녀의 가락지를 끼어주시고 새 신발을 신기고 우리를 잃어버린 영혼들이 다시 돌아오는 새 가족 잔치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그뿐입니까? 오늘 우리들이 받고 있는 은혜는 얼마나 놀랍습니까?
오늘 저녁때도 그런 명상을 했습니다. 살아온 날들 중에서 다시 태어나면 꼭 한번 반복했으면 우리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되겠다 라고 하는 날이 별로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별로 없습니다. 정말 놀지 않고 넘어지기도 하고 찢기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했지만 변함없이 주님을 위해서 살려고 분투하면서 긴 세월을 살았는데 왜 내 인생 중에는 다시 한번 반복하고 싶은 날들이 이렇게 없을까? 그렇게 밖에 못 사는 데도 신기한 것은 오늘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날마다 나와서 날마다 우리의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비는데도 우리같이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구하기만 하면 우리 하나님은 한번도 우리가 똑같은 기도제목으로 당신을 조롱하고 있다고 생각하신 적이 없는 분입니다. 일흔 번에 일곱 번이라도 우리의 죄와 악함을 고백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참회하며 주님 앞에 살고 싶다고 고백하기만 하면 우리의 죄와 악을 십자가에 못박으신 그 사랑으로 우리를 다시 불러주시고 용납해주십니다. 그래서 생각해보면 살아온 모든 날들이 주님께 빚진 날들밖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정말 다시 한번 그대로 반복되면 우리 하나님이 정말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하는 날들이 별로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이 땅에 살아있게 하시면 주님께 더 많은 영광을 돌릴 것 같지도 않은데 오늘도 주님이 하신 일은 언제나 죄인들이 있는 곳에 찾아가셔서 그들의 죄를 인내하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며 쓰러진 자를 다시 일으켜 세우셔서 주님 앞에 살게 하시고 벼랑 끝에 서 있는 자들의 손을 이끌어 건져내어서 다시 사슴과 같이 반석 위를 뛰어다니게 하시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오늘 현재도 계속되고 있고 저와 여러분들이 바로 지금 계속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랑의 증인들이 아닙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라고 말했습니다. 환난이나 벌거벗는 가난함이나 시련이나 핍박이나 고난이나 칼이나 그 어떤 환난도 우리 안에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랑을 끊을 수 없다고 간증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전부 빚 덩어리가 된 사람입니다. 그 사랑에 빚지고 일생을 살았고 지금도 그 사랑 때문에 살아서 숨쉬면서 이렇게 소망을 가지고 아버지 앞에 나오는 그런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순종해야되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주님을 위해서 여러분들보고 죽으라고 말씀하십니까? 주님이 여러분들을 보고 여러분들의 모든 재산을 처분해서 건축헌금 내라고 말씀하십니까? 여러분보고 너는 내게 은혜를 너무 많이 받았으니 가족관계 청산하고 캄보디아로 선교사로 가라고 하나님이 그렇게 명령하십니까? 이상하게도 주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되 심지어는 당신 자신의 몸까지도 우리에게 모두 주셨는데도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 순종하면서 살기를 주님이 간절히 바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도의 가장 큰 행복은 주님을 여러분 안에 모시고 살아가는 것, 그것보다 더 큰 행복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큰 행복은 여러분들이 순종의 삶을 살지 아니하고는 오늘 붙잡았다고 할지라도 내일은 다시 여러분의 품을 떠나 보내는 그런 종류의 것입니다. 정말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순종하기 힘들 때마다 그 순종을 위해서 자기를 꺾고 무릎을 꿇은 그 일이 힘겹고 고통스럽게 느껴질 때마다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순종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자기의 생명을 버리기까지 고난을 당하고 죽으시기까지 순종하신 것을 기억하면서 그 순종 덕분에 불순종의 죄의 길에서 구원을 받았으니 여러분들이 이제 예수 따라가며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불순종하는 마음이 들 때마다 바로 내가 지금 실행하려고 하는 그 불순종, 지금 내가 범하려고 하는 바로 그 죄 때문에 내가 그렇게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지금 내가 지으려고 하는 그 죄, 지금 내가 돌이키지 않고 있는 그 불순종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자기를 갈가리 찢어 피 흘려 죽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한번 십자가에 못 박은 것으로 충분하다고 믿고 다시는 주님보다 죄를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보다 불순종하는 것을 더 좋아하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는 그 각오가 여러분들 속에 날마다 새로워지지 않으면 여러분들이 순종의 삶을 살수 없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열렬히 부르짖는 그 기도는 속임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부르는 찬양은 입에 발린 사탕발림이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척 관심을 갖는 것은 지적인 호기심에 불과한 것입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모두 그 관심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그 일에 있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그것도 국부적인 순종이 아니라 총체적인 순종이었습니다. 모든 규례를 지켜 순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주님이 내게 하시는 명령이라면 주님이 내게 하시는 분부라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전심으로 순종하고 그것이 무엇이든지 마음을 다해서 온전히 순종함으로서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베풀어주신 주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무엇을 누리고 어떤 지위에서 살아가는 것은 삶에게는 크게 중요하지만 하나님에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왕처럼 살다가 간 사람들도 하나님의 눈앞에서는 아무 가치 없는 쓰레기와 같은 사람들도 있었고 쓰레기를 치우고 거리를 정화하면서 살던 사람들 중에도 노예처럼 살던 사람들 중에도 지금 주님의 나라에 VIP가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날 동안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며 살려고 하는 사람인가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그 사람의 중요성을 재는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이렇게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두 번째는 주님이 주신 명령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었습니다. 히브리말로 ‘야레’ 라고 되어 있는 이것의 원래 뜻은 ‘두려워하다’입니다. 그래서 ‘이라’라고 하면 그것은 두려움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가나안 땅을 정복함에 있어서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 할 때 사용하신 단어도 똑같이 이 경외하다 에 쓰여진 단어입니다. 이 ‘경외하다’라는 번역은 약간의 해석이 깃들여 있는 그런 번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왜 그러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하셨을까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려워하라고 명령하셨을 때 이 하나님의 마음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벌벌 떨기를 바라셨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이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노예적인 두려움이 아니라 경건한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향한 사랑이 동반된 그런 종류의 두려움입니다. 아주 존경하는 스승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그 두려움, 그러면서도 그분 앞에 있는 것이 기분 나쁘거나 불쾌하지 않고 무엇인가 자신 속에 무한한 감화와 애정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종류의 두려움을 가지라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속에 이런 종류의 두려움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농담이나 하는 이런 시대에 하나님 앞에 선 경건한 두려움을 가리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시대에 뒤떨어져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새로운 것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인정받았던 사람들, 주님의 손에 붙들려 살았던 사람들, 아버지 하나님 앞에 손에 쓰임을 받으면서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했던 그 믿음의 사람들의 인격적인 특징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물론 불타는 삶의 목표가 있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고 무엇을 위해 죽어야 할지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열망으로 불타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지울 수 없는 뚜렷한 인격적인 특징이 있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온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그리고 그 위대한 창조주의 권능으로 이 온 우주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 그리고 그렇게 창조하신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신묘막측한 우주 가운데 한 점에 불과한 이 지구 위에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점보다도 더 작은 나, 그리고 얼마 안 있으면 이 세상을 떠날 유한한 존재인 나, 그 존재와 이 온 우주를 창조하신 위대한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그 사이에 있는 존재의 거리감을 인식하게 될 때 우선적으로 느끼는 느낌은 커다란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주님의 그 거룩하심을 경험하면서 한결같이 그 주님 앞에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의 칼날 앞에 두려워 떨던 그런 노예적인 두려움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오 주님 두렵습니다. 그리고 엎드려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때 만약에 하나님이 나 두렵니?. 예 두렵습니다. 그러면 가버릴까? 그렇게 말씀하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뭐라고 그랬을까요? 예 빨리 가십시오. 아닐 것입니다.
주님을 송축하리 내 입술 주를 찬양
나의 눈 보기 원하네 주님 얼굴
주님의 음성듣기를 주님을 만져보기를 전심으로 원합니다 주여
두려운데도 좋은 것입니다. 너무 두려운데도 좋은 것입니다. 그게 여기서 이야기하는 바로 야레의 감정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살기를 하나님이 명령하십니다.
여러분, 보이는 것이 모두 보이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것이 모두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고 또 눈으로 볼 수 없는 모든 것이 없는 것이 아니듯이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정말 불행한 삶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갈 수 있는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거룩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교회 안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직장에도 계시고 그리고 가정생활 속에도 계시고 은밀한 자리에서도 죄의 낙을 즐길 때에도 거기에도 하나님이 계십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의 삶이 정말 주님을 두려워하는 삶입니까? 정말 하나님이 사랑으로 오래 참으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즉각, 즉각 다루시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없이 여기고 오만 방자하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기 때문에 참으시는데 주님을 마치 사랑의 교리라는 창살에 가두어서 그 옥에서 나오지도 못하는 분으로 보고 오만 방자하게 자기 마음대로 행하지 않고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 그렇게 살아서 좋은 날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서 여러분들의 날들에 행복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지금 이 설교를 듣는 순간도 여러분들은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될수록 두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그 두려움의 감정은 여기서 이야기하는 그 야레의 감정이 아닙니다.
양심의 악을 범하고 죄를 지으며 의식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불순종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하나님이 두려운 존재로 떠오릅니다. 그리고 항상 씩씩하게 살아가는 것 같아도 그것은 겉으로 보일 뿐이지 항상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것 같은 불안감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죄의 낙이 좋아서 더 이상은 하나님 앞에 바칠 수가 없어서, 마음 중심을 하나님 앞에 털어놓을 수가 없어서 이제껏 까지 맛보고 즐기며 살아온 이 삶을 돌이키기가 싫어서 신앙과 불 신앙 그 사이에 어중간하게 서서 세상의 끝도 붙들고 십자가의 마지막 자락도 붙들면서 그렇게 이중인격자처럼 생활하는 사람들의 마지막 결과는 세상의 낙도 못보고 십자가의 은혜의 맛도 못보고 그 사이에서 멸망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심하지 않으면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서 뭐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정말 두려워하면서 살기를 원하시지 않으십니까? 노예적인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아버지를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떨림으로 여러분들의 성화의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이 여러분들을 십자가에서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들에게 바라는 바가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오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하십시오. 나는 오늘 설교를 듣고 있는 여러분들 중에 지금 외줄 타기를 하면서 위험하게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여럿 알고 있습니다. 물론 교인이 많으니까 모두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시야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그러나 내 눈에 파악이 됩니다. 파악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도 상당히 여러 사람들이 벼랑 끝에서 외줄 타기를 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 영혼들을 생각할 때마다 매일 웁니다. 하나님의 그 큰사랑을 맛보고 왜 그렇게 위험한 외줄 타기를 하며 주님의 인내를 시험하고 있습니까?
나는 지금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습니다. 어제 밤에도 밤늦게까지 고민했습니다. 그 사람에게 달려갈까! 그리고 붙들고 통곡할까! 더 이상 가지 마라. 떨어진다. 더 가지 마라. 거기가 끝이다. 두렵습니다. 너무 무섭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한번 택하신 자녀니까 결국은 돌이키시겠고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듯이 왜 맞으면서 돌아올 길을 택합니까? 우리가 종입니까? 우리가 짐승입니까? 나귀도 자기의 주인을 알고 소도 자기가 먹던 구유를 아는데 우리를 누가 구원하셨습니까? 누가 은혜를 베푸셔서 그 죽음에서 건져내서 이만큼이라도 살게 하셨습니까?
정말 보고싶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빛 가운데 살면서 우리 주님을 두려워하며 어떻게 하면 그분을 진실 되게 사랑하며 섬길 수 있을지를 빛 가운데서 함께 고민하고 경외하는 그 아름다운 모습을 너무나 보고싶습니다. 패괴하고 타락한 이 세상의 비참함을 보고는 인생을 접을 마음이 생겨나지 않지만 교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패역함과 마음을 고추세우고 벼랑 끝에서 그것도 모자라서 외줄 타기를 타는 위험한 지체들, 마음을 굳게 하고 예전에 걸었던 옛 신앙의 길에서 떠나서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오만 방자하고 유의 부족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지체들을 볼 때마다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는 위험을 느낄 때마다 너무 슬픕니다.
이제는 어두움을 뿌리치고 빛 가운데 살겠네
찬양하리 구주 예수 놀라운 구원의 능력
노래하리 갈보리에서 이루신 주님의 사랑
주님말씀 따라 생활하며 주의 사랑 안에 하나되어
내 마음에 주님 오시기를 간절히 원하네
어떻게 하면 그대들이 걸어가는 길이 위험한 길이라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한번 칼로 제 가슴을 파헤쳐서 그 길이 정말 잘못된 길이라고 하나님이 제 가슴에 새겨주신 그 말씀의 흔적을 보여줄까요? 손가락을 잘라서 여러분들이 그 죄의 길에서 돌아오고 위험이 명백한 그 불순종의 길에서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 위태한 길에서 돌아올 수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내게서 복음을 듣고 태어나 내게서 복음을 듣고 주님을 만나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자녀들이 주님의 자녀의 삶을 거부하고 주님의 인내를 시험하며 주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생의 벼랑 끝에서 외줄을 타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여러분들은 죽어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절대로 다시 태어나도 여러분들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시는 명령이 큰 것입니까? 오직 하나 내가 너희를 그리스도의 피로 구해 주의 자녀 삼았으니 이제는 내 말을 듣고 순종하여 나와 함께 살자 라는 주님의 당부가 아닙니까? 여러분들이 정말 회개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저는 사경회를 준비하면서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크고 위험한 환난의 마지막 경고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여러분들 중에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주님이 여러분들의 길에서 돌이키라고 하는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만한 길에서 돌이키라고 하는 최후의 도장이 찍힌 통첩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여러분들 때문에 아파하는 것만큼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 자신 때문에 아파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내가 아파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우리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들에게 잘못하신 것이 무엇이 있기에 그분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계속해서 죽기 위한 길로 걸어갑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고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안 주신 것이 없이 모든 것을 주셨지만 주신 것들을 누리며 살기는 거절하고 주님이 갖지 않으시기를 원하시는 것들을 얻기 위해서 여러분들은 주님을 버렸습니다. 나는 너무 가슴이 아프고 두렵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당신이 택하신 그 자녀들을 빼앗기지 않으시기 위해서 때로는 그 자녀들을 강하게 다루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청천벽력처럼 그에게 깨닫게 하십니다. 봄바람처럼 속삭이며 사람들의 마음을 녹여 돌아오게도 하시지만 쉽게 돌이키지 않는 자들에게는 우레와 낙뢰와 같은 하나님의 준엄한 말씀과 충격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그 은혜를 주신 주님이 두 가지를 명하십니다. 하나는 모든 계명을 지켜 순종하기를 원하셨고 또 하나는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사랑하며 살도록 원하셨습니다. 이제여러분들이 이 최후의 통첩 앞에서 어떻게 하시렵니까? 이것은 이제 저의 손을 떠났고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 순종하고 경외하며 살게 하심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로 오늘날과 같이 생활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제 우리는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어떻게 살아야한다라고 하는 명령도 함께 내리신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명령에는 두 가지 명령이 있고 그렇게 하나님이 명하신 것은 또 두 가지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절반을 하고 나니까 시간이 많이 갔고 두 개 목적까지 마저 했다가는 11시안에는 집에 가기가 힘들겠어 그래서 절반을 하고 그리고 오늘 다시 그 절반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루 지나기는 했지만 지난 시간에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들었던 말씀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를 많이 주신 것을 상기시키셨는데 그 은혜를 크게 과거적으로는 애굽에서 건져낸 것이오, 그리고 또 살아온 삶의 과정에서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끄심 속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기까지 온 것이고 지금 또한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는 이 모든 여건들을 볼 때에 주님이 그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는 너무나 컸고 그렇게 그 은혜를 상기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명령의 근거가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두 가지를 명령하셨는데 하나는 순종할 것과, 그리고 또 하나는 당신을 두려워하면서 살 것을 분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매우 힘든데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감격이 없기 때문에 순종하기가 힘들다고 하면서 때려죽여도 순종 못하는 것에 대해서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주께서 자기에게 베푸신 구원의 은혜와 인도의 은혜와 지금도 죄인을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에 대한 감격이 새로워질 때에 순종이 가능해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말씀드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막 보며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리면서 오늘날 사람들이 죄라고 하는 그 자체를 하나님을 향한 반역과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중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하는 대신에 하나님께 뭔가 잠깐 불쾌함을 드리는 정도라고 가볍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하나님 없는 이 삶이 결국은 우리를 영육간에 곤고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어쩌면 하나님의 말씀을 인격적으로 우리에게 들려주셔도 깨닫지 못하는 우리들을 다루시기 위해서 어쩌면 우리 중에 다수에 인생의 벼랑 끝에 세웠을지도 모른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오늘 이 집회는 이런 벼랑 끝에 서 있는 거기서도 하나님 앞에 돌이킬 줄 모르고 위험하게 외줄을 타고 있는 우리를 향한 회개의 최후의 통첩일 후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은혜를 받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어떻게 살아라 하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순종하며 자기가 좋아하고 자랑하는 것 한 두개를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전 방위적인 삶의 영역에서 총체적으로 순종하며 사는 그것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삶이고, 또 하나님을 한없이 두려워하면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살아야 할 바라는 사실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오늘 이제 크게 두 번째로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키며 살도록 순종하도록 또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도록 명령하셨는데 그 명령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이루고 싶어하시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 목적이 오늘 성경에는 두 가지로 나오는데 첫째는 너희를 복 주시고 두 번째는 오늘날과 같이 너희를 생활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하나씩 우선 첫째 목적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히브리 성경에 보면 이 부분은 복이라고 번역된 대부분의 히브리어는 ‘베라카’ 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베라카’라는 축복이라는 단어가 아니라 ‘토브’ 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것은 직역을 하면 선입니다. 굳 넷스 이 선이라고 하는 단어가 제일먼저 쓰인 곳은 창세기 1장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거의 매일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할 때 거기 쓰여진 그 단어가 바로 토브 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가 또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이 단어는 굉장히 흔한 단어이기 때문에 성경에 오 천 번 이상 나옵니다만 시편 23편에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라고 했을 때 그 시인의 마지막 고백 속에 나오는 여호와의 선하심이라고 번역된 그 선하심이 바로 여기서 이야기하는 토브입니다. 그러니까 확실히 복보다는 비슷하기는 하지만 복이라고 번역하기는 조금 그렇다 이런 것을 여러분들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의미를 해설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살게 하시기 위한 목적은 우리를 선하게 해주시기 위함입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우리를 위한 선을 위하여’ 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선하게 대해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순종하고 또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도록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선이라고 하는 것, 히브리 성경에서 토브 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시편 23편에 선하심, 여기서 이야기하는 복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똑같은 단어인데 그러면 그 토브, 즉 선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선은 악의 반대입니다. 그래서 선은 모든 사람들이 선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좀 힘들지 모르지만 자기가 선을 받는 것에 대해서 나는 선이 싫어. 내게는 악을 줘.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선은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갈망인데 그래서 그 선은 결국은 귀착점이 어딘가 하면 인간의 행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것 같으면 고통스러운 선이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선은 항상 행복입니다. 그래서 인류의 공통 ‘선’ 그러면 그것은 행복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그것이 바로 선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선은 이런 개념을 약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전적으로 세상에서 우리들이 하나님 없이 살아가면서 생각하는 진선미 할 때 이야기하는 그 선과는 사뭇 다른 개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개념이 상당히 손질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첫째로 인간들이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행복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데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선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행복만 고려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이 깊이 개입되어 있는 그 한도 안에서 인간의 행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 세상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선이라고 하는 것은 따라서 다분히 자기 중심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이라고 하는 것이 모든 사회와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대체적으로는 일치를 보이고 있지만 완전한 일치를 보는 객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선이라고 하는 것은 다분히 자기 중심적이고 그리고 자기 자신이 그 선에 대한 판단자가 된다는 점에서 하나님이 그 선의 판단자가 되시는 성경이 이야기하는 선의 개념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 번째로 이 선의 목적은 인간 사회에서 이야기하는 선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인간이 만족을 누리면서 사는데 있는 것이지만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이 선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영광을 돌리는 삶 안에서 인간들이 행복을 엔조이하는 조화로운 상태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선과 우리들이 생각하는 선은 사뭇 다르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네 번째로 기준 점에 있어서도 이 세상에 있는 선의 개념은 그저 인간이 인간 사회마다 형성된 가치관과 관습, 그리고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기호들에 의해서 선이 판가름되어지지만 그러나 신앙 안에서 이야기하는 이 선이라고 하는 것이 객관적인 기준이 분명히 있으니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그 하나님의 성경이 원리대로 세워지고 그 성경의 지지를 받지 않는 선은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만족을 누린다고 할지라도 성경은 그것을 선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제 여기서 우리들이 깊이 생각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며 살게 되는 가장 커다란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하나님이 선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을 인간이 기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삼라만상을 포함해서 그리고 인간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언제든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한 그 토브 즉 선의 상태를 유지해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삼라만상들을 모두 창조하시고 마지막에는 당신의 영혼을 나누어주신 당신의 형상과 모양을 닮은 인간을 이 세상에 창조하시고 그리고 그 인간에게 이 모든 세상을 그렇게 조화로운 상태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다스림으로 언제든지 하나님이 자기의 창조하신 세상을 볼 때에 창조한 피조 세계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들이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상태를 유지해야 할 신성한 의무를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왔습니다. 물밀 듯이 죄가 들어왔고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창조의 세계는 하나님이 보실 때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던 그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찬란하고 아름다운 빛을 잃어버렸습니다. 땅은 저주를 받아서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그리고 자연계 속에는 이미 영적인 세계와 연결된 고리들이 파괴되면서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에 본래의 그 아름다운 찬란한 광채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인간들에게 죄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이제 인간들은 이 죄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었고 거기서 인간들은 철저하게 파괴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지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고향인 하나님의 품을 새까맣게 잃어버린 존재들이 되었고 그리고 지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어두움 속에서 희미한 빛줄기를 붙들고 하나님 믿으면서 살아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생각해 보고자 하는 이 설교 주제와 관련된 더 큰 문제가 인간의 내면의 세계 속에서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죄가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 중심적인 인간이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 자기 중심적인 아주 교만한 인간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인간이 하나님 밖에 있는 행복 같은 것은 꿈꾸지도 않았고 또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하나님이 당신의 목적을 위해서 지어 놓으신 피조물의 위치를 지키면서 자기와 함께 창조된 모든 피조 세계와 손잡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고 그 분과 교통하면서 사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안에서 행복을 누리고 그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안에서 그 분께 기여하고 예배하는 삶을 살아가면서 인간은 참다운 만족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그 뜻, 하나님의 그 아름다운 창조의 그 밖에서 그것을 파괴하고 자기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는 그런 쓸데없는 모험심 같은 것들이 인간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고 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자 인간은 야비하리 만치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인 존재가 되었고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 대신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심지어는 나는 때려죽여도 순종 못해 할 정도로 그렇게 막가는 삶을 마다하지 않고 살아가는 그 뜨거운 열심히 바로 예전에 타락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고 주님과 교제하고 주님을 사랑하면서 살던 그런 삶이 바로 오늘날 여러분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가진 사랑입니다.
인간의 역사 속에는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선을 용납하지 못하는 자기 중심적인 인간의 사랑과 포기하지 못하는 자기 중심적인 사고가 들어와서 이제 싸우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기 마음을 비우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다못해 요만한 어린아이라도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을 안주면 교회 땅바닥에 앉아서 대굴대굴 구르며 울고 그리고 갖고 있는 것을 좀 위험해서 뺏으려고 하면 안 뺏기겠다고 몸부림을 치면서 그렇게 엄마 아빠도 심지어는 때리면서까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안 뺏기려고 하는 자기 중심적인 철저한 것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인간 속에 아주 깊이 뿌리를 박고 더군다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 안에 내재하고 있는 부패성의 후원을 받으면서 인간은 더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뭐라고 하였습니까? “저희의 신은 배요” 그랬습니다. 인간의 이 탐욕과 욕망이 신처럼 섬기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 반항을 하고 자기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얼굴에 침을 뱉으면서라도 자기 자신이 만족을 누리고 자기 자신이 만족을 누리고 있는 것을 빼앗기기 싫어하는 그런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인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교회에서 섣불리 복을 가르쳐주면 큰일 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충분히 변화되었을 때는 ‘복’ 그렇게 이야기하면 그게 복이 무엇인지를 아는 감각이 있습니다. 인생에 대해서 탐욕을 모두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들에게 복을 이야기하면 그 사람들이 복을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아! 뭐 좀 해서 한밑천 벌게 해주시나보다. 사기라도 쳐서 대박이 한번 터지게 해주시나보다.’ 그런 생각 안 합니다. 왜 사람이 변했기 때문에 사람이 변하면 말이 예전에 똑같이 쓰던 단어인데도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이 다른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변화되기 전에 여기 젊은 청년들 많은데 하나님 만나고 변화되기 전에 ‘사랑’ 그러면 남녀가 끌어안고 뽀뽀하는 것밖에 더 생각했겠습니까? 뭐 여러분들 뭘 생각했겠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사랑, 러브 그러면 그런 것만 생각했습니다. 예수 만나고 깊이 변화되고 주님의 참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되면 사랑! 그러면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끌어안고 계신 그 아가페의 사랑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단어라도 그가 어떤 사람으로 변화되었는지에 따라서 이해되는 것이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복도 마찬가지입니다. 변화된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가르치면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솔직히 말해서 아니! 세상 사람들도 신들에게 복을 비는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 하나님께 복을 빌지 않으면 어디에 가서 빌겠습니까? 점 집에 가서 빌겠어요, 아니면 무슨 700번에 몇 번 전화 걸어서 핸드폰을 해서 복을 빌겠어요? 그런 것 하면 안됩니다. 장난으로도 하면 안됩니다. 아주 커다란 영적인 간음입니다. 저는 신문에 오늘의 운세도 안봅니다. 그런 것 보는 것 죄입니다.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아니 뭐가 그렇게 앞날이 궁금합니까? 그냥 주님의 손에 붙들려 살면 되지. 하나도 궁금할 게 없는데 뭐가 그렇게 궁금합니까? 일간스포츠에서 그것을 들여다보고, 회개하십시오. 얼마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자신이 없으면 700을 누르겠습니까? 족집게 씨에게 전화해서 아! 참
그러니까 개념까지 완전히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데 삶이 충분히 변화되면 변화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복! 그러면 수준이 그것밖에 안 되는데 뭘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돼지우리간에서 꿀꿀거리고 밥 시간이 되어서 밥을 달라고 턱을 쳐들고 꿀꿀거리는 그 돼지에게 복! 그리고 이야기하면 푸짐한 뜯물 밖에 뭐가 생각이 나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깊이 변화되어 깨어지고 깊이 변화됩니다. 그러면 어떤 정도가 되는가 하면 복 그러면,
만복의 근원 하나님
찬송을 하면 눈물이 펑펑 쏟아집니다. 뭐 복권이 생각나고 아파트 값이 오른 것이 생각나고 부동산 투기가 생각나고 주식 값이 생각나서 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얼마나 좋은 찬송입니까? 1장에 올라와 있습니다.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예배 시간에 빼놓지 않고 부르던 찬송이 그것입니다. 느려 원래 천천히 부릅니다 그게 만복의 근원 하나님,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축복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인간에게 결코 악을 행할 수 없고 그렇게 복만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충분히 변화 받고 나서 만복의 근원 하나님을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는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자신의 삶을 정말 복된 자의 삶이라고 하는 고백입니다. 여호와께 가까이 감이 내게 복이라, 그것을 중심으로 복의 외형이 펼쳐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충분히 변화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복을 가르치니까 무슨 교회에 와서 돈 내고 돈 먹기 식으로 그렇게 해서 내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실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해서 하나님을 아주 거의 귀신 수준의 하등한 신으로 만들어버리는 그런 사람들은 실질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머리 속에서 그려낸 우상을 교회에서 섬기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복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렇게 해서 어쩌다가 황소 뒷발질에 개구리가 맞은 격으로 뭐가 한번 좋은 일이 일어난 것을 마치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신 것처럼 간증이랍시고 그렇게 떠들어서 신앙이 연약한 사람들을 쓰러트리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배나 더 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결국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인간 속에 있는 선에 대한 개념이 얼마나 왜곡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뀌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깊이 깨트려지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복의 근원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그분이 직접 자기에게 주실 수 있는 만족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축복으로 인해서 내가 받을 수 있는 만족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라고 하는 그 신앙고백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 깨어짐을 통해서 이 복의 개념이 선의 개념으로 바뀌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여러 해 전에 제가 그런 예화를 드렸습니다만,
(예화: 중세 수도자 아퀴나스가 금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고 오랜 시간 기도하니 주님 이 만나주셔서 무엇을 원하는가 하니 주님 자신을 자신에게 달라고 했다는 이 야기)
그 사람이 그 후에 교황 임무센트 2세가 어느 날 교황청에 들어가니까 그 교황이 금고를 열면서 어마어마한 금과 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보게 수도사, 보게 이제 우리가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라고 말할 필요가 없게 되었네. 이렇게 많은 금과 은이 교회에 있다네 그랬더니 그 교황 앞에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역사에 길이 남을 명언을 하나 남겼습니다. 그것은 그렇습니다. 교황이시오, 그렇기 때문에 이제 교회는 내가 네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라고도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멋있는 말은 멋있게 산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그게 서금서금하게 한 사람들은 매일 썩는 이야기나 하지, 멋있게 산 사람이 멋있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순발력 있게 이야기를 하는지, 여보게 수도사 보게 이제는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라고 말할 필요가 없게 되었네 그랬더니 맞습니다. 교황이시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예수의 이름으로 내게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 고도 말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정말 감동을 받았습니다. 야! 역시 그렇게 하나님을 추구하면서 사니까 그 결정적인 순간에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인류가 마음에 곱씹을 명언을 남기는 것입니다. 뭐 좀 남겨 보실래요?
그러니까 선은 결국은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단순한 축복이 아닙니다. 축복이 포함이 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일부분이고 여기서 토브 라는 단어를 통해서 강력하게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가나안에 들어간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뭘 기대하셨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뭘 기대하신 것입니까? 기대하신 바가 마치 죄가 들어오기 전에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한 상태가 거기서 재현되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렇게 해야지 만 하나님의 선교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견해를 가지고 살아간다면 여러분들은 세상 사람들이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교회에 왔다갔다하는 사람들뿐이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여러분 자신은 가치관이 분명하게 달라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가치관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그 인생을 살아오면서 자기 나름대로 얻게 된 견해나 자기 나름대로 갖게 된 가벼운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판단을 내리는 그런 데서 오는 그 가치관의 변화가 아니라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깊이 변화되어서 죄가 무엇이고 하나님의 원래의 위치가 어디이고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으로 만든 진흙과 같은 볼 것 없는 존재를 구속하신 그 하나님이 인간에게 무엇을 기대하셨는가 그리고 인간이 어떤 존재가 되고 어떻게 생각하며 어떻게 살 때 하나님 보시기에 좋을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거기에 고정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면서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데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이것이 진짜 하나님의 선이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화: 몇 해 전 반포대교를 건너가는 사람들에게 누가 돈을 뿌리니까 지나가던 많은 차량들이 차를 세우고 돈을 줍느라고 정신이 없었다는 그런 설교를 듣고 이전에 있던 어느 지체가 몇 달 지나서 집에서 나오는데 똑같은 일이 벌어져서 웬일인가 했더니 어느 사람이 돈을 뿌리는 것을 보고 외면하고 갔다는 이야기)
나 세상사랑 버렸네 나 주님만 사랑하네
정말 그렇습니다. 뭔가 달라야 합니다. 그것을 옆에 있는 사람들이 못 봤으니까 망정이지 그게 얼마나 그 광경이 얼마나 멋있겠습니까? 빨간 성경찬송 들고 가면서 막 사람들이 새카맣게 달라붙어서 기어다니면서 땅바닥에 줍는데 이렇게 툭툭 치고 여기 붙은 것 다 떨어트리면서 위를 쳐다보며 ‘더러운 것 버리지 말란 말이야’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밖에 있는 행복을 꿈꾸지 마십시오. 거기서 모든 죄와 불순종이 오기 시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가나안을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하셨던 것은 당신의 계획,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리면서 이 백성들이 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각자 각자에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있습니다. 그 은혜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사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그 자리에 하나님이 반드시 세워두십니다. 사명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하나님이 폐기처분 하시는 것입니다. 끝나면, 살아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뭔가 미션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먹고 마시며 살면 안됩니다. 큰일납니다. 인간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습니다. 인생을 낭비할 권리가 없습니다.
목사님, 내가 이제 현직도 다 은퇴하고 나이가 들었는데 아니 이제 무슨 겨우 지팡이를 짚고 왔다가갔다가 하는데 내가 사명은 무슨 놈의 사명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을 잊어버려서 그렇습니다. 목사님, 저는 몸도 성치 못하고 내 몸을 하나 간수도 못하는데 무슨 사명이 있겠습니까? 그냥 살아갈 뿐이지요. 아닙니다. 목사님 저는 공부도 못하고 어디 가도 사람들에게 폐만 끼치고 생활도 못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으면서 사는데 내게 무슨 사명이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거지 나사로에게도 사명이 있었습니다. 살아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미션이 있다는 표징입니다. 그래서 그 사명이 끝나면 절대 하나님이 한시간도 더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폐기처분하고 다 데리고 가십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왜 살아있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여러분들의 사명이 무엇이고 여러분들이 살아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한번 오늘 말해보십시오. 이렇게 말할 수 없다면 여러분들이 사명이 실제로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리는 없습니다. 그랬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이미 하나님이 데리고 가셨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는 오직 두 가지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는 충분히 하나님의 은혜를 못 받았기 때문에 은혜 받지 못한 사람들은 사명을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생각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사명이 무슨 얼어죽을 사명입니까? 내 몸 하나 챙기기가 힘든데, 보이는 나 위해서 살기도 힘든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왜 사냐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또 한가지 가능성이 있는데 그것은 은혜도 받았고 하나님이 사명도 주셨지만 너무나 오랫동안 주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산 나머지 이제 그 은혜의 빛이 마음속에서 거의 사라져서 주님이 처음에는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에 대한 자각이 있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사명에 대한 자각을 잃어버리고 불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버렸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자의 참 행복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왜 아무리 많이 벌어도 자기 마음대로 못 쓰는데,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여러분의 사업에 축복해주셨다고 그래서 요정에 다니고 바람이나 피고 나쁜 짓이나 하고 정계에 로비나 해서 검은 돈이나 왔다갔다 그러면 큰일납니다. 제명에 못 죽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들을 그렇게 살기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늘 하는 이야기가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칩시다. 여러분들 중에 젊은이들이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칩시다. 그것다 소용없습니다. 공부 열심히 해서 뭐합니까? 공부 열심히 해서 그래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서 23살에 박사가 되어서 그냥 한국을 떠들썩하게 할 정도로 좋은 직장에 들어갔다고 해서 높은 지위에 올라가고 돈을 많이 벌면 여러분 마음대로 쓸 수 있습니까? 높은 지위에 올라갔다고 해서 사람을 짓밟고 돈을 많이 번다고 해서 그것을 가지고 나쁜 짓을 하고 자기 만족을 위해서 그렇게 살 수 있습니까? 살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으려면 무슨 짓을 못합니까? 그러니까 무엇입니까? 그러니까 죽어라 제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젊은이들은 죽어라 하고 공부하십시오. 그렇게 공부해서 남을 주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공부해서 남주냐고 하는데 진짜 남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업하는 사람 열심히 돈벌어서 다른 사람 먹여 살려야 합니다. 어차피 자기 마음대로 못쓰잖아. 그렇게 해서 돈을 죽기살기 버느라고 신앙까지 팔아먹고 돈벌어서 그렇게 자식들에게 외제 승용차를 사주고 그렇게 호화 생활하게 하고 그러면 하나님이 내버려두실 것 같습니까?
그리고 또 설령 하나님이 오래 참으셔서 한참동안 내버려둔다고 해도 얼마나 불행해지겠는지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러니까 그런 것은 꿈을 꾸면 안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순간 이런 행복하고는 끝난 것입니다. 이제 작별한 것입니다. 그게 억울해서 예수님을 너무 빨리 영접했다고 생각하면 그건 여러분 자신의 책임입니다. 왜 그렇게 빨리 영접을 했습니까? 그렇지만 복음은 일수불퇴입니다. 안 물러줍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게 뭐가 행복하겠습니까? 고통가운데 살지 않아 안 누려본 사람들은 해보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들이 직접 살지 않는 삶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체험하게 만들어주십니다.
(예화: 선박 왕 오나시스의 손자가 부모에게 물려받은 유산과 상관없이 평범한 인생을 살고 싶어 빌게이츠 재단에 기부하려고 한다는 이야기)
그런 사람들도 그 부가 자신의 인생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라고 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어린 사람들도, 그런데 이제 나이 들어서 이제 여러분은 인생을 달관할 나이가 된 처지에서 아직까지도 그 평범한 진리를 몰라서 하나님 밖에 있는 행복을 꿈꾸는 삶을 산다고 할 것 같으면 그 불행은 따놓은, 당상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래서 결국은 세상에서도 짓밟히고 신앙 안에서도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일그러진 얼굴로 살다가 결국은 탐욕스러운 눈을 감지도 못하고 부릅뜨고 한번 죽는다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게 하나님의 자녀의 최후일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렇게 살아서 되겠습니까? 그것은 선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아! 이제 다 끝났구나. 이거 뭐 항복하고 예수님 앞에 나왔더니 송두리째 다 뺏기고 이제 공부를 해도 남 주어야 하고 돈을 벌어도 남을 주어야 하고 얼굴이 예쁘게 생겨도 남을 주어야 하고 진짜 아무 것도 아니구나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 뜻을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느끼는 참 행복을 알면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좀 충격적인 질문을 하나 던지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이제껏 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입니까? 잘 생각해보십시오. 언제입니까?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여러분들이 은혜가 떨어졌다고 그래도 고백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때는 돈이 좀 있었던 때도 아니고 시집 장가갈 때도 아니고 정말 내가 행복했을 때에는 주님과 평화를 누리면서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있는 그 아름다운 연합의 삶을 살 때 그때가 정말 행복했습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가리켜서 첫사랑의 때라고 흔히 말합니다. 그냥 행복했습니다. 그때에 우리에게 뭐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까? 우리에게 뭐 모자라는 것이 있었습니까? 주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충만히 오시고 그리고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갈 때 얼마나 행복하고 좋았습니까? 나같이 쓸모 없는 사람을 사용하셔서 주님을 섬기게 해준다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즐겁고 행복했습니까? 그때 여러분, 돈 많이 가진 사람 부러웠습니까? 얼굴이 예쁘게 생긴 사람만 보면 시기가 났습니까?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을 보면 열등감을 느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시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너무 충분히 사랑해주시니까 시기하지 않습니다. 시기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을 알 사람이 없도다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면 하여튼 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아질 수가 없습니다. 절대 똑같아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한번 기업을 하고 돈을 버는데 돈을 많이 벌어봐야 내 마음대로 나쁜 짓 하면서 못쓴다. 이게 신앙으로 굳게 세워진 사람은 돈을 많이 벌어도 그 돈을 항상 객관적으로 봅니다. 좀 번다고 교만해지고 막 낭비하고 잘난척하고 다니고 돈 없는 사람을 멸시하고 그렇지 않습니다. 또 좀 안 벌린다고 해서 그냥 갑자기 인생이 끝장난 것처럼 그렇게 한숨쉬고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 있으니까 주님의 수중 안에 있으니까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게 여기서 이야기하는 선입니다.
보십시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정말 이런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목적해놓으신 이런 선을 이루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분께 경배하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인해서 만족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러니까 모두 헛된 탐욕과 욕망을 움켜쥐고 그러면서도 행복해지기를 원하니까 그게 결국은 주님 안에 있는 참다운 행복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먼저 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 결코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은혜를 받으면서 잠시 누그러지고 지금은 풀이 죽어서 그 욕망이 고개를 못 들지만 그러나 그것을 정리해내지 않으면 여러분이 은혜가 떨어지게 되면 다시 부패한 욕망이 고개를 들면서 그 욕망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안달을 하도록 그 욕망을 채워달라고 하는 그 요구를 여러분들이 거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그것을 끊어내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형통하게 하나님이 해주셔도 건널 수 없는 경계가 있다. 그 안에서 살아가면서 행복을 느껴야 합니다. 그러니까 행복을 그렇게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관점에서 두니까 진짜 성도들이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많은 참다운 기쁨들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을 불러 세우셔서 주님 자녀 되게 해주셨습니다. 은혜를 많이 주셔서 여러분들을 사명의 자리로 세워주셨습니다. 그게 뭐 거창하게 목사가 되고 한나라의 지도자가 되는 그것만이 아니라 은혜주신 대로 하나님이 세워주십니다. 여러분들을 집사로 세워주실 수도 있고 구역장으로 세워주실 수도 있고 아니면 새 가족 위원으로도 세워주실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여러분들에게 전도자로 세워주실 수도 있고 하나님이 다양하게 여러분들의 자리에서 여러분의 사명을 세워주셨습니다. 믿지 않은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로 세워주실 수도 있고, 고통받는 이웃을 위해서 발을 씻기는 무엇이든 봉사할 수 있는 자리에 세워주셨을 수도 있습니다. 가진 것이 있고 생활이 좀 여유롭기 때문에 시간이 없지만 물질로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는 자리에 여러분들을 세워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보고 자신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인해서 행복해지는 방법들을 배워야 합니다. 영혼을 구원하라고 하나님이 세워놓으셨는데 영혼을 구원하고 섬기라고 목사를 세워놓았는데 가서 부동산 투기나 하면서 오른 것을 보고 행복하고 불행하고 제가 그런다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럼 그게 되겠습니까? 안되잖아요. 그래서 갈리지 않는 마음으로 내 모든 행복이 교회에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성도들이 회심하면 기뻐하고 감사하고 흔들리는 사람들이 견고해지면 너무 기뻐하고 감사하고 또 잘 믿던 지체들이 미끄러지고 그러면 가슴아파하고 그렇게 하면서 살고 그 안에서 행복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을 목회 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지만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갖고 계신 마음이 목회 하는 제 마음과 같을 때에 그게 목회고 뭐고 되는 것이지, 하나님은 양떼들이 잘 자라기를 원하시는데 목사는 쭉 미끄러지기를 바란다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행복하면 난 불행하고 나 행복하면 하나님이 불행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자존심 상할까봐 말도 되지 않는 예를 든 것입니다. 그것을 각자 자기에게 적용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영혼들을 돌보라고 새 가족이라도 돌보라고 거기 세워주셨는데 새 가족 돌보는데 관심도 없고 어떻게 매일 일간신문 펴놓고 그것도 일면도 아니고 이면도 아니고 저 가운데 열어서 주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철렁 하고 말이지 이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것은 결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기대하시는 삶이 아닙니다.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리는 삶을 살기를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과감히 이참에 여러분들이 기도제목을 가지고 나왔다고 할지라도 그 기도제목이 정말 여러분의 양심이 하나님 앞에 허탄한 것이라고 느껴지면 단번에 도끼로 끊어서 날려버리는 것이 하나님 앞에 금식하고 매달리는 것보다 훨씬 더 여러분들이 행복해지는 비결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이 살게 하시려고 주님이 그 백성들에게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당부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안에서의 행복을 꿈꾸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살면 하나님이 정말 행복하게 해주십니다. 만족하게 해주십니다. 즐거워하게 해주시고 그리고 샘솟는 기쁨이 있도록 하나님이 만들어주십니다.
마지막 두 번째 오늘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좀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생활하게 하기 위함이라” 그때에 모세가 말하는 그 오늘날이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그 가나안 땅을 바라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모여서 모세로부터 마지막 설교를 듣는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생활하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날이라는 것이 뭘까? 아직 땅을 얻지는 못했으니까 땅을 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고 오늘날 이 사람들이 그러면 그 당시 거기서 뭐 특별한 행복이 있었는가, 아직까지도 광야 생활입니다. 만나를 먹고 그리고 살아가는 광야 생활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오늘날과 같이 그래서 마치 그 오늘날을 굉장히 중요하고 의미 있는 날로 이렇게 묘사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이때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고 홍해를 건넌 다음부터 시작해서 가나안에 정착해서 부패하기 전까지 그 시대를 통틀어서 모세가 운명하기 직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 신앙이 가장 좋았던 때입니다. 가장 순수하고, 그러면서 그 증거가 무엇인가 하면 전에는 기적을 보고도 안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어떤가 하면 하나님이 홍해를 건널 때는 기적을 먼저 보여주시니까 믿음이 생겨서 건넜습니다.
그런데 요단강을 건널 때는 요단 강물이 마르니까 건넌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모세도 없으니 얼마나 갈비뼈가 빠진 것처럼 허전했겠습니까? 그래봐야 여호수아는 그 교회 부목사입니다. 40년 담임목사가 사라졌으니 불안한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믿음은 더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법궤를 메고 물이 시퍼렇게 흐르는데 발을 들여놓으니까 물이 짝 마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홍해를 건널 때는 기적이 앞서고 믿음이 뒤따라왔는데 요단을 건널 때쯤은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믿음이 앞서면서 기적을 창출하면서 걸어간 이런 수준으로 나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때 신앙이 그렇게 좋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후에 선지자들이 이때를 자꾸 회상합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마지막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호수아에게 넘겨줄 때부터 시작해서 치열한 싸움으로 가나안을 정복해 가는 그 초기까지 그때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따르던 정말 하나님과 열렬히 연애하던 그런 때였습니다. 구세대는 다 죽고 새로 태어난 세대들이 그렇게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런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같이 살아있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과의 동행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과 동행하던 때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계명을 지켜 순종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동시에 그 하나님을 깊이 두려워하면서 삼가면서 매일매일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어떤 은혜들이 주어지는가 하면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게 당신 명령에 순종하고 당신을 두려워하면서 살라고 명령하신 이유는 그 사람들을 선하게 대해주시기 위함이고, 또 하나는 그들과 동행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정말 여러분들의 인생에 있어서 최상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야말로 말로 다할 수 없는 최선의 가치이고 진짜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입니다.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에녹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65세에 므드셀라를 낳고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고 그리고 자식들을 더 낳고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데리고 가셨음으로 이 땅에 없었다 그랬습니다. 그가 위대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아마 그저 농부로 태어나서 농경사회에서 살아가는 필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부패한 그 세상에서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알릴 수 있는 메신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알렸고 그런 메신저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고 그렇게 평범한 사람인데도 하나님이 동행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지위나 소유의 유무를 보고 동행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학식이 많고 재능이 뛰어나다고 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과 동행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동행해주시는 사람은 하나님께 깊이 순종하고 그분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동행해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지위가 높고 가진 것이 많을수록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는 그 말로는 너무나 비참합니다. 돈이 많이 사람이 하나님 없이 살아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의 영혼은 정말 거렁뱅이의 영혼보다 더 비참하게 될 것이며 지위가 높은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기 때문에 교만해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마지막의 패망이 얼마나 클 지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많은 불행한 사람들보다 진짜 행복한 사람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비록 이 세상에서 하찮은 직업에 종사하고 많은 재물과 뛰어난 재능이 없다고 할지라도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사랑 받는 사람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그 사람들은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디에 가든지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난관과 시련을 자기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극복하고 자신의 추함과 더러움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주셔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으로서의 찬란한 빛을 나타내 보여주어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감화를 불러일으킵니다.
죄인들에게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주님의 뜻대로 살려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사는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와 동행해주시는지를 보여줌으로서 그 사람들을 부러워하도록 만들어서 거룩한 삶을 재촉하도록 만들어주는 위로자가 됩니다. 이런 빛과 같은 삶이 이런 등불과 같은 삶이 바로 주님이 자기의 백성들에게 기대하셨던 삶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여러분과 항상 함께 하시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 이것이 지금 최대의 고민이 아닙니까? 정말 여러분들이 인생의 벼랑 끝에 서있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거기에 여러분과 함께 계시다고 여러분들이 확신할 수 있고 실제로 거기서 하나님이 여러분들과 동행해주시고 계신다면 벼랑 끝에 서면 어떻습니까? 벼랑 끝에 서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거기가 벼랑이면 하나님이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벼랑 끝으로 몬 대적들은 천길 만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질 것이고 여러분들은 독수리가 그 새끼를 업어 나름과 같이 그 벼랑에서 구출을 받아서 인생의 많은 날들을 두고, 두고 그 벼랑 끝이 기억나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만들어 줄 것입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말씀을 들어도 깨달음이 없습니다. 어린아이처럼 진리의 말씀을 받아먹으며 자기 자신의 깨트려짐을 경험한 은혜로운 시간들은 지나가 버리고 강퍅하고 굳어진 마음으로 주님을 만나서 변화되었던 그 아름다운 신앙의 지식들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판단하는 하나의 차갑고 날카로운 칼이 되고 그리고 교만을 향해 올라가는 사닥다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여러분, 그런 삶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아닙니다.
그래서 미가 선지자는 말하기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의 특징을 뭐라고 설명하는가 하면 겸손히 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 겸손함입니다. 그래서 진짜 겸비해져서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닌데 자기와 같이 쓸모 없는 인간에게 베풀어주신 그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그래서 주님이 자신과 함께 해주시지만 그러나 주님이 함께 해주시기 때문에 더더욱 그 하나님을 붙들려고 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 그것이 주님과 동행을 꿈꾸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대공원에도 가끔 보면 봄철에 가면 아이들이 먹을 것 장난감도 들고 입술이 새파래서 길거리에서 우는 애들이 가끔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엄마 잃어버린 애들입니다. 엄마 아빠 잃어버리고 손을 놓친 애들입니다. 그 일순간에 놀이기구도 필요 없고 손에 들려준 장난감 그것을 사달라고 그렇게 엄마 치마 붙들고 매달렸는데 그것도 필요 없고 먹다만 아이스크림이고 뭐고 다 필요 없습니다. 오직 필요한 것은 우리 엄마 어디에 갔을까? 여러분들에게 정말 그런 마음이 있습니까?
그렇게 해서 좀 여러분들이 그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 삶보다도 더 가치 있는 삶이 어떤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싫어서 그렇습니까? 목사님도 한번 우리처럼 한번 고달프게 살아보십시오. 직장에 가서 고생하고 사업하느라고 뼈가 부러지고 경기는 안 좋아서 사업은 계속 꼬나 박고 한번 업치락뒤치락 해보십시오. 그렇습니다. 이해가 갑니다. 또 어떤 부분에서는 이해가 안 갈 수도 있습니다. 사업을 별로 안 해봤으니까. 그렇지만 내가 이해하면 뭐하고 이해를 안 하면 뭐합니까! 그렇게 사람들에게 심치 않은 소리를 해서 아! 그래 정말 이해가 간다. 어떻게 그렇게 힘들게 살면서 하나님과 동행하겠는가. 그런 위로를 받아서 그 위로가 됩니까? 뭐하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온 세상이나를 옳다고 도장찍어줘도 하나님이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그러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위로를 받는다면 그 사람도 이상한 사람이지 하나님 이외에 무엇으로 성도가 만족을 할 수 있습니까?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다음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너는 왜 내가 준 그 고귀한 구속받은 인생을 그렇게 방황하고 그렇게 불순종하면서 살았는가 했을 때 사업이 잘 안되어서 나는 주님과 동행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아! 우리 자식들이 하도 속을 썩여서 주님 붙들고 살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해가 된다 그렇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저도 동행하고 싶었지만 제가 원래 이 성질머리가 못되고 그래서 동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그것을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자기를 고치고 부단한 자기 깨어짐 속에서 새사람이 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도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마음이 굳어져서 도무지 깨닫지 못하면 수없이 진리의 말씀으로 다가오셔서 그렇게 살면 안 된다. 심지어는 최후 통첩이다.
나는 정말 어제의 말씀을 되풀이하고 싶습니다. 저는 요즘 너무 두렵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정말 하나님 앞에 어디까지 갈 것인가. 왜 저렇게 하나. 정말 두렵습니다. 여러분들을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은 끝까지 막 가도록 하나님이 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특히 은혜주신 사람들은 하나님이 은혜 받지 못한 사람보다 더 큰 기대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실망도 더 크고 그를 결코 망가진 채로 살게 내버려두시지 않으시려고 하는 의지가 하나님에게는 은혜 받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의지가 더 강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삶을 흔들어 놓으실 수 있습니다. 정말 두렵습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최근 6-7년 동안에 개개인에 대해서 이런 위기감을 느낀 것은 처음입니다. 매일 두렵습니다. 마음속으로 항상 기도합니다. 이런 두려움이 실현되지 않도록 기도합니다. 왜 그렇게 삽니까? 하나님이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찾아오셔서 그렇게 살면 안 된다. 마음이 완고할 때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녹이기도 하시고 또 마음이 풀어졌을 때는 하나님이 준엄하게 경고하시면서 각성을 촉구하시는 데도 마치 술에 취해서 깊이 담든 사람이 발길로 차면 눈을 게슴츠레 뜨다가 다시 길바닥에 엎드러지는 것처럼 그렇게 신앙생활 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어떻게 하려고 그렇게 삽니까? 주님이 주신 은혜가 두렵지도 않습니까? 그렇게 순종 안하고, 하나님을 많이 가르쳐주니까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은혜가 많으신 분이니까 이 정도 방황하고 불순종하는 것쯤은 하나님이 봐주신다. 그런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것은 초보적인 신앙의 때이고 이제 성숙했으니까 나도 그런 것쯤은 안다. 그렇게 활용하라고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까? 전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저는 굉장히 두렵습니다.
여러분, 정말 하나님이 회개하기를 원하시고 설교를 듣고 있는 여러분들 중에 정말 하나님께서 굉장히 여러분들에게 회개하기를 원하시고 그리고 정말 이것이 최후 통첩일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이 어제 처음 든 생각이 아니라 수개월동안 계속 목회하고 나서 이렇게 진지해지기는 처음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안됩니다. 하나님은 정말 당신 자신이 양보하시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 자신을 위한 계획은 양보하시지 않습니다. 은혜주신 자기의 백성이 당신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살고 싶어하시는 이 하나님의 계획은 포기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다가 안되면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이 당신 자신의 이름의 명예를 위한 그 의지가 얼마나 강한 것인가를 보여주시고서라도 우리로 하여금 굴복하게 만드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오늘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이것을 묻고 설교를 끝내겠습니다. 여러분 한번 가슴에 정직하게 손을 얹고 오늘 한번 이 시간에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지금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는 것이 다른 사람 때문입니까? 정말 여러분들은 아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정말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며 사는 것이 여러분들이 놓여 있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나 생활 여건 때문입니까? 정말 여러분들이 거기에 대해서 그렇다고 대답하면 이제는 여러분들이 정말 최후 통첩이 실현되는 것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까? 왜 회개하지 않으십니까? 절대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는 것이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니지요? 여러분들이 동행하지 못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의 잘못 때문이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는 것이 여러분의 고통스러운 삶이나 불만족스러운 생활의 여건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게 대답하라고 배웠습니까? 아닙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옛날에 지금은 비교도 안 되는 어려운 때에도 주님과 손잡고 살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폭풍과 시련의 바람이 불고 가난과 결핍이 우리를 비참하게 만들고 사랑하던 사람들이 우리를 실망시키고 사랑 받아야 할 사람에게서 고임을 받지 못하고 따돌림을 당하면서도 예수 한 분 의지하며 산 적이 있었습니다.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제게도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그런 때가 있을 것입니다. 가난하고 굶주리고 외톨박이가 되고 어디서든지 위로 받을 수 없고 눈도 뜰 수 없는 시련의 한복판에서 원인도 알지 못한 채 원수들의 집요한 공격을 받으며 온 몸이 그 화살에 맞으면서 고슴도치처럼 된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마음에 있는 생명을 이 환경과 원수들이 빼앗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도 살았습니다. 왜 주님이 내 안에 동행하시니까. 그래서 그분의 손을 잡고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장난이었습니까? 농담이었습니까? 우리의 인생에서 주님을 빼면 우리에게 무엇이 있었습니까? 물론 우리가 전심으로 그분만 사랑하지 못했지만 그러나 한번도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은혜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이 명제 앞에서 자유로운 적은 없었습니다. 범죄하고 주님의 계획 밖에서 만족을 누리면서도 우리는 언제나 돌아가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랑을 주사 너희를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고 이제껏 까지 인도하셨는지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정말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사는 것이 우리의 인생의 최고의 기쁨이고 가치라는 사실을 깨닫지 않았습니까? 다 소용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누구를 미워하면 그 미운 사람 모두 용서하십시오. 왜냐하면 그것이 여러분들이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삶의 작은 한 원인일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핑계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피할 수 없는 상황이면 끌어안고 감사함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참회해야 합니다. 그리고 단 한번만이라도 진실하게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눈물을 머금고 하나님, 이제껏 제가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지 못했던 것은 어떤 사람의 잘못이나 저의 환경이나 여건 때문이 아니라 제가 마음 중심에서 주님께 순종하기를 마다하며 불순종으로 살았고 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 밖에 있는 만족을 추구하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정직하게 고백하고 순종과 두려움이 없었던 삶을 깊이 뼈아프게 생각하며 뉘우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결코 여러분들의 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단절되어버린 하나님과의 동행하는 삶을 복구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으로도 복구할 수 없습니다. 불만족과 고통은 여러분의 친구가 될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소외되었다 라고 하는 은혜의 거절감들은 계속 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 집회가 시작되기 전에 걸었던 그 발걸음으로 계속해서 가던 길을 갈 것이고 그리고 최후의 통첩이 끝나고 나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불같이 징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한순간에 비로소 십자가의 사랑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상처받은 몸을 이끌고 걸어나와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붙들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거기까지 가야 합니까? 그래야 할 필요가 무엇입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셨고 우리에게 진리의 말씀을 주셨고 성도들이 함께 기대며 살 수 있는 교회도 주셨고 슬플 때 서로 눈물을 닦아주고 고난받을 때 서로 몸에 상처를 싸매 주며 살수 있는 아름다운 영혼의 보금자리도 주셨고 여러분의 눈에는 차지 아니하지만 그러나 목자도 주셔서 힘닿는 대로 여러분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돌볼 수 있게 만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안 해주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주님이 여러분들을 위해서 아끼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이제는 어두움을 뿌리치고 빛 가운데 사십시오. 그리고 정말 주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고 그분을 두려워하므로 여러분들이 주님 안에서 행복하게 되고 그리고 그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그 은혜의 아름다운 빛을 수많은 이방인들에게 선전하는 그런 삶을 살게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 형통할 때 하나님을 잊지 말라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 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 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된 것은 모세에게 말할 수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비록 자신은 그 가나안 땅을 바라보기만 할 뿐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러나 그토록 꿈에 그리던 아름다운 땅에 사랑하는 자기의 자녀들이 들어가게 되었다 라는 그 확신을 갖게 되었을 때 모세의 마음은 한없이 기뻤을 것입니다.
저는 같은 목회자로서, 물론 모세와 저는 비교가 안됩니다. 남전도회 만 60만 명했으니까 비교는 안되지만 그러나 같은 목회자의 입장으로서 모세 생애에서 가장 행복하던 때가 이때가 아니었을까 저는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제 주님의 부르심이 가까웠기 때문에 행복했을 것이고, 왜 수고와 슬픔이 모두 끝내고 이제 안식에 들어간다라고 하는 그 희망이 영적인 사람에게 없었을 리가 없고요, 또 하나는 그 애굽에서 출발한 이래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이렇게 어린아이처럼 부드러워진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이 많은 이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정말 이 광경이 선하게 떠오릅니다.
그래서 마치 오늘날 은혜 많이 받은 성도들이 설교를 들으면서 빠져 들어가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이런 식의 그런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개인적으로는 아마 이때가 가장 마음이 평온하고 행복하던 때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서 모세는 정말 행복했고 기뻤지만 모세는 하나님 다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아가게 될 전망이 이 모세의 마음속에 보입니다.
그래서 슬기로운 부모는 어린아이가 자라는 것을 보면서 이놈이 앞으로 커서 어떻게 살겠다 라고 하는 삶의 판도를 거의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긴 세월동안 이 사람들과 함께 고통받고 울면서 아파하면서 이들의 양육자로 또 이들의 영적인 스승으로 또 이들의 목회자로 또 이들의 인도하는 지도자로서 그렇게 살아오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고 그들이 비록 광야에서 태어난 새대라고는 하지만 그러나 명백히 조상들의 피가 그 속에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모세가 가장 염려한 것 중에 하나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풍족한 삶을 살게 될 때 이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 그것이 모세가 가장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일먼저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에서 모세의 경고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모세의 경고를 첫 번째 생각해보고, 두 번째는 모세의 회고를 생각해보고, 그리고 세 번째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끄신 이유에 대해서 차례대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첫째는 경고입니다. 그것은 또한 모세의 근심이기도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농사를 잘 지어서 배불리 먹고 곡식이 풍부해지고 은과 금이 많아지고 부를 많이 싸게 되고 근심과 고통이 없는 삶을 살게 되면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모세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상상이라기보다는 특별히 노력하지 않는 한 당연히 일어날 일들에 대한 예견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은 특별한 조치가 없는 한 당연히 일어나게 될 일에 대한 예견이었습니다.
역사는 어떻게 증명이 됩니까? 모세의 근심이 현실로 이루어졌습니다. 구약의 학자들이 이해가 가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는데 역사적으로는 신명기 다음에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는 이야기가 여호수아서에 나오고 그리고 거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착하고 그 다음에 사사시대가 옵니다. 그리고 사사기는 바로 사사 시대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사사기를 읽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의 신앙이 없는 사람으로 나옵니다.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유일신 신앙을 가진 사람들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거의 하나님을 향한 어떤 경외심도 없는 막가는 사람들로 나옵니다.
그래서 자유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구약의 학자들은 이것은 틀린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수아서까지는 유일신 신앙이 나오는데 사사기에는 거의 다신교 신앙에 가까운 것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류의 종교 역사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항상 다신교가 제일 먼저였고 그 다음에 일신교가 나오고 그 중에서 하나를 택해서 섬기고 그 다음에 가장 고등한 종교가 유일신 신앙이다. 일신교와 유일신 신앙의 차이는 일신교는 많은 신들이 있고 거기 내가 믿는 신도 있는데 내가 믿는 그 신이 제일 세다. 이것이 일신교고 유일신 신앙은 내가 믿는 그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시며 신이시고 나머지는 다 신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유일신 신앙입니다.
그런데 그런 보편적인 인류의 종교 경험의 역사를 깨트리고 유일신 신앙으로 잘 갔다가 갑자기 다신교 적인 분위기가 나오니까 그래서 자유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여기에 나오는 여호수아서를 비롯해서 신명기 그리고 출애굽기에 나오는 많은 내용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간 다음에 나중에 유일신 신앙을 사사기가 훨씬 지나도 다윗 시대쯤 가서 유일신 신앙을 갖게 되는데 그 유일신 신앙을 갖고 나서 옛날에 우리 조상들도 이런 신앙을 가졌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희망을 거꾸로 집어넣은 것이 출애굽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조금만 생각을 해보면 이런 주장이 모두 쓸데없는 공허한 주장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아무리 유일신 신앙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타락하니까 그 유일신 신앙을 버리고 이방의 신들을 섬기면서 그 이방의 많은 신들에 대한 숭배 사상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내가 예전에 하나님밖에는 없는 것처럼 그렇게 열렬하게 신앙생활 했다고 하더라도 어느 날 내가 은혜가 떨어지고 신앙을 다 팔아먹고 나면 그러면 막판에 가서는 세상을 하나님보다도 더 사랑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난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이름을 갈러 다니고 그리고 점 집에 찾아가서 점이나 치고 말이지 애 낳다 고 해서 작명소에 가서 이름지어달라고 하고, 나에게 가지고 오십시오. 내가 져주겠습니다. 내가 얼마나 잘 짓는데. 그거 뭐 거기에 가서 이름을 짓고, 부끄러워서 그 이름을 그 애가 달고 다니겠어요. 그렇습니다.
그럼 결국은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종교적인 역사의 법칙이라기보다는 그 한 사람이나 한 나라가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그 신앙을 지키는가 못 지키는가에 따라서 이런 양상이 시간 순서에 상관없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보면 사사기 시대에 얼마나 편안한 시대였습니까?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징계하시기 위해서 수시로 이방족속을 일으켜서 전쟁을 경험하게 하시고 거기에서 고통을 당하게 하셨지만 그러나 그런 일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발뻗고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광야의 삶이 어땠습니까? 판벽한 집에서 살수가 없었습니다. 늘 텐트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왜 오늘은 또 어디로 떠나야 할지 내일은 또 어디서 묶어야 할지 아무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떠돌아다닐 뿐이었습니다. 거기에 무슨 평안이 있고 안전이 있겠습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텐트를 치고 지내는 그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불안정하고 가난한 삶이었겠습니까? 물로 흔하지 않고 먹을 것도 많지 않은 그런 광야를 지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었을 그 고통스럽고 비참한 삶을 한번 생각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가나안의 생활은 얼마나 행복한 생활이었습니까? 이제 먹고 입을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고 그리고 당시에 얼마 되지 않았을 문명하고 개명한 나라와 어깨를 겨루며 인류 문명의 시발지라고 일컬어지는 그 메소포타미아 문명 지역에서 한자리 펴고 나라 행세를 하면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대단한 것입니까?
요즘으로 말하자면 판자 집에 판자 집도 없어서 옆에다가 광목으로 텐트를 치고 그리고 시멘트부대 자루를 깔고 살던 사람이 강남에다가 한 28-35평 짜리 아파트를 장만한 것이나 똑같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대학 나오고 그래도 인텔리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어깨를 겨루면서 살 정도가 되었으니 이제 하나님의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유하자면 그런 놀라운 신분의 상승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렇게 형통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축복으로 그들은 짓지 않은 집에서 심지 않은 포도나무 실과를 먹으면서 그리고 가나안 원주민들을 쫓아내고 그 땅을 송두리째 차지하면서 그렇게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모세가 염려한 이것이 노파심에서 나온 기우가 아니라 정확하게 미래에 이루어질 일들에 대한 예고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정말 부유하게 되고 정말 그들이 먹고 살만해졌을 때 그들은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그리고 마음이 교만해져서 그 하나님을 배반하는 그런 삶의 현장들이 펼쳐졌습니다.
이미 여호수아가 자기 인생의 말년 가나안 정복의 역사가 거의 끝나갈 때에 절규하듯이 외친 그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오늘날 섬길 자를 택하라 여호와를 섬기든지 아니면 네 열조가 광양에서 섬겼던 그 이방 신들을 섬기든지 너희는 오늘날 섬길 자를 택하라 그러나 나와 내 집은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 이게 역사를 보면 파죽지세로 가나안을 정복하기 시작한 그 이후로 불과 5-6년밖에 안된 시점입니다. 그때 벌써 가나안 정복이 마무리되어갈 때쯤 되었는데 벌써 이 청정한 유일신 신앙을 가진 여호수아의 눈에는 이 백성들이 말할 수 없이 많이 변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간다고 하는 이 삶이 이 경건한 여호수아의 마음에는 역겹기 그지없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대신해서 고고한 함성을 외쳤는데 그것이 “오늘날 섬길 자를 택하라” 그렇게 하지 말고 하나님을 떠나려면 아주 노골적으로 우상을 섬기라고, 그리고 그럴 수가 없다면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돌아 오라. 노구를 이끌고 거기에서 쩌렁쩌렁하게 외쳤습니다. 여호수아에 이 외침은 사실은 여호수아의 외침이 아니라 당신의 그 크고 놀라운 은혜를 잊어버리고 형통하게 되고 부요 하게 되자 이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반역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처절한 외침이셨습니다. 이런 일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도 그대로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들이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할 때 눈물나도록 주님을 붙들었던 것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참 대견할 것입니다. 저도 저의 옛날의 신앙을 돌아보면 후회되는 것이 훨씬 많지만 그러나 가끔 참 그때는 나는 착했는데,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생명 걸고 하나님을 매달릴 수 있었을까? 지금은 내가 너무나 내 영혼에 기름기가 너무나 많이 낀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가난하고 헐벗고 그리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도 모르고 그리고 지금 당장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쓰러질 것과 같았던 때에는 주님을 잘 붙들고 살던 사람들도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매달리면서 주님이 은혜를 주셔서 굶주리던 사람들을 먹을만하게 만들어주시고 영혼이 핍절해서 거의 죽을 것 같은 사람들을 하나님이 변화시켜주셔서 주님의 사람으로 세워주시고 나니까 어느 순간에 시간이 흐르면서 그렇게 마음을 낮추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던 그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잃어버립니다.
여러분들은 그럴 때 없습니까? 인생이 벼랑 끝에 내몰리고 거기서 외줄까지 타야하는 상황이 되고 나면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마음으로 주님을 붙들고 놓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한번만 살려달라고 매달렸습니다. 그때 우리는 마음을 다해서 기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고 결단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도 터득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가난해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고 진액을 짜듯이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것이 무엇인지도 배웠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매달리며 주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대해주셨습니까? 우리가 인생에 막다른 골목에서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을 때 무릎을 꿇고 어린아이처럼 처절한 심정으로 목놓아 울며 주님의 발을 붙들었을 때 주님이 그 발을 우리에게 뿌리치시며 버리고 지나가신 적이 있습니까? 그분은 우리가 그렇게 부르짖을 때 단 한번도 고아와 같이 우리를 버려 두신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비록 우리가 잘못해서 인생의 벼랑 끝에 내몰리고 우리가 잘못해서 그 벼랑 끝에서 떨어질 듯이 외줄을 타야 하는 신세가 되었는데도 언제나 그렇게 부르짖을 때면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 앞에 나아갈 수도 없고 주님께 다가갈 수도 없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무엇을 하나님 앞에 행해 보일만한 힘도 없는 때였습니다. 마치 깊은 웅덩이에 빠진 어린아이가 제 힘으로 나올 수 없어서 그 웅덩이에서 울부짖는 것처럼 그냥 그 인생의 깊은 수렁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탄식하고 통곡하며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한번도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무엇 때문에 깊은 인생의 수렁에 빠졌든지 간에 언제나 먼저 팔을 내미신 분은 주님이셨습니다. 그래서 그 크신 팔로 우리를 그 깊은 웅덩이에서 건져내셔서 그래서 우리를 다시 살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그 매달렸던 때 우리의 마음이 어떠했습니까? 인생의 그 벼랑 끝에서 이제는 더 살수도 없고 그렇다고 더 죽을 수도 없는 그런 인생의 막다른 외나무다리에서 우리의 마음이 어떠했습니까? 세상도 없고 나도 없었습니다. 행복해지고 잘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눈을 뜨면 마주하는 이 인생에 처절한 위기에서 한번만 벗어나서 단 하루라도 살고 싶었습니다. 거기서 우리들이 얼마나 어린아이와 같이 주님을 의지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깊은 수렁, 견딜 수 없는 영혼의 고갈 속에서 주님이 건져주셨을 때 여러분의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였고 여러분들의 마음에는 기쁨이 가득했고 여러분의 눈에는 예배시간마다 어린아이처럼 눈물이 샘솟듯이 솟아 나왔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가르쳐주어도 깨닫지 못했던 세상 사랑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배웠습니다.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마음이 물같이 녹으며 주님이 아닌 것들에게 사랑을 바치며 살아왔던 날들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며 주님의 품에서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보고 우리의 악함을 고백하면 이제는 주님 품안에서 화목하게 신앙생활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필요 없습니다 라고 말했을 때 신기하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내버려두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곤고하게 부르짖을 그때에 우리의 영혼만 건지고 우리의 영혼만 부요 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직장의 문제를 놓고 그렇게 기도하던 우리에게 직장을 주시고 새로운 직업을 갖게 하시고 어떻게 해야될지 모르고 방황하면서 살 때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어린아이처럼 매일 주님을 의지하고 세상에 있는 것들을 많이 소유해도 그것보다는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우리를 착하게 여기시면서 주님이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정말 많이 베풀어주셨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마음에는 처음 그렇게 처절하게 매달렸던 하나님 없이 살아가던 삶의 고통도 희미하게 잊혀졌고 그 견디기 힘든 몸부림 속에서 우리를 살려주시고 건져주신 은혜의 그 뜨거운 감격도 우리의 마음속에서 식었습니다. 그런 동안에 주님으로 가득 차 있던 우리의 마음은 이 세상에 있는 물질과 세상의 염려로 점령되었고 어린아이처럼 부드럽고 주님의 마음과 주님의 생각, 그리고 주님의 의지에 쉽게 영향을 받던 우리의 마음은 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부서지지 않고 주님이 마음을 보여주셔도 그 마음에 동요하지 않는 그 옛날 주님을 멀리 떠났을 때 굳은 마음으로 변해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험과 똑같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제는 마음속에서 주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격조차도 모두 잊혀져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한번 경제적으로 곤고하고 고통받던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믿기로 결심하고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베풀어주셨던 복을 한번 기억해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들이 가난할 때나 부요할 때나 언제나 동일하게 사랑하셨습니다. 지금처럼 넉넉하지 않고 버스 회수권 하나 가지고 교회 나와서 헌금 시간에 교회를 숙이며 눈을 감고 기도할 때도 하나님은 사랑하셨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물질 때문이 아니라 죄 가운데로 행하다가 슬피 울며 예수 사랑 붙들고 살겠다고 주님 앞에 나오는 우리들을 보시면서 주님이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새 삶을 살려는 우리들에게 놀라운 물질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모자라는 것들이 없도록 날마다 핍절해지지 않도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주셨고 지금 누리고 있는 대부분의 것들은 기도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이 알아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공급해주신 것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하나님을 잊고 살아가십니까? 정말 우리들이 이렇게 주님 잊고 살아가도 옳은 것입니까? 주님이 우리들이 곤고하고 인생의 막다른 길에서 신음할 때 우리를 어떻게 살려주셨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이제 부요 하게 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주님을 잊어먹고 살아가는 이것은 주님에게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을 보시는 것만큼이나 처절한 아픔입니다.
여러분들은 흔히 타락이라고 하면 바람이나 피고 살인이나 하고 형무소에나 들어가야지 타락이라고 생각하고 교회도 안나가고 그렇게 주정뱅이가 되어서 거리를 헤매야지 만 타락이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타락은 그런 것만이 타락이 아니라 오늘 주님을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고 주님을 의지하면서 주님과 동행하면서 사는 삶에서 미끄러져 나간 모든 삶이 타락입니다. 그것이 타락입니다. 만약에 주일에 한번씩 교회에 나오는 것으로서 그것이 타락이라고 아니한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가 믿는 신앙을 어떻게 생명의 종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수많은 성경 속에서 너희는 마음을 지키라, 네 마음을 내게 달라. 마음을 다하라, 마음을 바쳐서 마음과 뜻과 성품과 네 목숨을 다하여 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보십시오. 정말 여러분들이 곤고하던 때에 여러분들을 만나주셨던 어린아이처럼 고사리 같은 손으로 주님을 붙들고 다시는 놓지 않겠다며 결심하며 칠흑과 같이 어두운 인생의 길을 헤쳐가던 그 믿음의 때에 주님을 향해 가졌던 그 생각과 마음이 동일합니까? 정말 그 하나님을 잊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한번 여러분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는 손해나는 일이 없습니다. 정작 불행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그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힘입어야 겨우 살수 있는 여러분들이 그 하나님과 이어진 생명의 관계를 버리고 그렇게 살아갈 때 그 신자의 삶 속에 생명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껍데기밖에 없는 신앙생활을 해나갈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인생이 너무 곤고한 위기 속에 있을 때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며 주님께 약속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나의 인생에 이 곤고한 길에서 주님이나를 건져주신다면 내가 하나님 앞에 이런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바치겠습니다. 혹은 내가 이렇게 살아가기를 힘쓰겠습니다. 지불 만기가 끝났는데 왜 지불하지 않으십니까? 이제 하나님이 구원의 행동을 펼치셨고 여러분들을 그 곤고하고 고통스러운 가운데서 건져내셔서 이제는 넉넉하게 만들어주셨는데 그 고통 속에서 부르짖었던 하나님과의 약속을 왜 지키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왜 약속했는지 나는 그 약속의 사정을 다 알 수 없지만 오늘 여러분들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그때 무엇을 하나님 앞에 약속했는지 모두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미 지불 만기가 지났는데 여러분들은 왜 부도냈습니까? 정말 여러분들의 인생이 곤고하고 먹을 것도 없고 쓰러져 잘 때도 없을 정도로 곤고하고 빚쟁이에게 시달리며 견디기 힘든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나를 형통케 해주시고 축복해주시면 이렇게 신앙생활 하겠다고 서원 했습니까?
저는 여러분들에게 해준 것이 없고 제 삼자로서 여러분들을 하나님이 그 인생에 막다른 길에서 어떻게 축복해주셨는지를 지켜본 증인이오, 제 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의 그 축복된 삶을 여기에서 지켜본 제 삼자의 제 마음에도 여러분들이 그 인생의 곤고한 때에 하나님 앞에 수많은 약속을 남발하며 산 그 때에 약속을 이제 형통해지니까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이 제 마음에도 이토록 분노가 일어나는데, 저는 분합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곤고 할 때 하나님이 그 위기와 어려움 속에서 건져주셨고 어린아이처럼 흐느끼며.
주님의 뜻대로 나 항상 살리라
그때 고백했던 그 삶을 그 약속한 것을 제가 분명히 알고 있는데 안 지키면서 사는 것을 옆에서 보면서 분노를 느낍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그렇게 비참한 골짜기, 사람 구실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그 사람을 하나님이 그렇게 놀랍게 건져내서 존 귀와 그리고 명예를 누리게 하시고 물질의 축복을 누리게 하셨는데 그때는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람들을 향하여 낮아지던 사람이 그런 처음 모습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분노를 느낍니다.
우리는 흔히 주님의 은혜를 잊고 사는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그렇게 말하는데 말이 됩니까? 그 기도가 말이 됩니까? 아니 주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그렇게 살아가면서 그 사람이 자기 입으로 불쌍히 여겨달라고, 그게 말이 됩니까? 말이 되는 이야기를 기도해야지 응답이 되지, 그게 말이 됩니까? 아니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자기를 건져주셔서 하나님의 그 큰 은혜를 입었는데 그 은혜를 잃어버리고 이제는 주님보다 자기가 더 잘났다고 생각하고 제멋대로 살아가면서 오만해져 있는데 그렇게 살아가는 삶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나님이 혼내셔서라도 나를 고쳐달라고 기도해야지, 불쌍히 여길 것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그렇게 해야지, 그게 어떻게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습니까? 남이 기도하면 그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많이 입었는데도 저 인간이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제 멋대로 살고 오만 방자해서 하나님의 심판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저 영혼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어떻게 자신이 전혀 돌이킬 기세를 보이지 않으면서 스스로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습니까? 불쌍히 여겨주시면 배나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어디로 갈지는 우리 모두 지켜보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마음 아파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곤고하고 가난할 때 주님 앞에 약속하고 부요 하게 되면서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저 잘난 줄 알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살아가는 그런 삶 속에서는 예수님과의 동행함이 없습니다. 그것을 오늘 이유가 뭐라고 가리키는가 하면 교만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교만하여져서”
교만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겸손히 무엇인지 알면 교만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교만’이라고 하는 것은 별로 잘나지도 않은 사람이 제 잘난 척 하면서 사람들을 뒤흔들고 그리고 사람들 앞에 자기를 뽐내고 뻐기는 그런 것을 흔히 우리들이 교만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교만 정도가 아니라 정신병입니다. 그런 것은 교만 속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정신병입니다. 아니 못났으면 자기 분수를 알아야지, 못났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제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자기가 중요한 일군이라고 하면서 하는 말이 저는 겸손하게 살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모든 면에서 우리 목사님이나를 따라올 수 없습니다. 공부도 제가 더 많이 했고 그리고 신앙생활도 목사님보다는 내가 더 오래했고 그리고 교회를 위해서 희생한 것도 내가 더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인품도 내가 좀 더 낫습니다. 그러나 나는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내가 목사님보다 더 훌륭하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살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겸손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들은 이야기입니다. 제가 그때 전도사 때니까 그랬지 지금처럼 강퍅했으면 내가 조용히 끌어안고 속삭였을 것입니다. 제 7병동으로 같이 갑시다. 제 7병동이 정신병원입니다. 그것은 교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냥 신앙적으로 교만한 게 아니라 정신구조를 분석해보면 음으로 말하자면 ‘도’ 그렇게 내고 싶은데 ‘또’ 그렇게 나는 사람 있잖아요. 음치에 그렇게 뭐가 정신적으로 자꾸 미끄러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사람들을 약간 경미한 정신병자로 분류합니다.
아닙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교만은 그런 교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겸손하지 않은 모든 것이 교만입니다. 그럼 그 겸손이 무엇인가? 겸손은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먼저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존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도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 것이 기억이 나서 그것이 굉장히 잘한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러니까 자기가 사랑한 것에 굉장히 사랑의 화신처럼,
내가 정신병자들 수없이 만납니다. 전도사 때 한번은 청년을 다루는데 청년 애 하나가 와서 전도사님 큰일났습니다. 저는 정말 감당할 수가 없다고 해서 왜 그런가 했더니 제가 좀 착하거든요. 기숙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저보고 천사라고 해요. 천사 아니야. 자기가 천사라고 하면 천사가 섭하지. 참 정말 많습니다. 자기 자신이 정말 하나님 앞에 더러운 죄인일 뿐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저는 항상 가슴속에 울려 퍼지는 그 말은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주셔도 우리는 즉시 뭐라고 그렇게 해야 되는가 하면 아니예요. 하나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예요. 저는 그저 주님 앞에 용서받은 죄인일 뿐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가서 아버지가 막 끌어안고 펑펑 울었습니다. 이 아들아 너 어떻게 왔니 그랬을 것입니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안 울었으면 이상하지, 그 다음에 목욕을 시키고 옷을 입혀주고 신발을 신기고 가락지를 끼우고 그럴 때 그 아들이 어떻겠습니까? 야! 옷 입자 그럴 때 뭐라고 그렇게 하겠습니까? 아이 크잖아! 가락지는 왜 빨리 안 가져와. 신발이 도대체 이게 뭐야. 좋은 것 하나 사지, 내가 탕자로 있다가 돌아올 줄 알았을 것 아니야. 신발을 좀 좋은 것 마련해나야지. 아니 그렇게 오래도록 기다렸다며, 이게 옛날 신발이잖아. 소는 벌써 잡았어야지 이제 잡으러 가면 어떻게, 한번 더 탕자 할까보다. 그렇게 했겠습니까? 그랬다면 정신병자지,
오죽했으면 뭐라고 그랬습니까?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일컬음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얼마나 가슴 저미는 고백입니까? 아들이 틀림없습니다. 아버지가 그 아들을 기다리지 누구를 기다리겠습니까? 그런데 뭐라고 합니까?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나를 아버지의 집에 있는 품꾼의 하나로 여겨주십시오. 그래서 거기에 입에 풀칠하면서 먼발치에서나마 우리 아버님 바라보면서 그렇게 행복하게 살수 있다면 저는 다 됩니다. 그랬을 것입니다. 옷 입자고 하면 그냥 마지못해서 팔을 끼고 너무 황송해서 어쩔 줄 모르고 형이 돌아와서 막 성질 부렸습니다. 그때 그 동생이 뭐라고 했습니까? 형이 이따위야! 뭐 그래. 내가 탕자로 있다가 돌아왔으니까 이 정도는 당연하지 그랬습니까? 형이 길길이 뛰면서 저놈 아버지의 재산을 다 창기하고 말아먹은 놈에게 저렇게 잔치를 베풀어준다고 그랬을 때 그 아들이 죽고 싶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이 맞으니까. 그런 마음이 겸손한 마음입니다. 우리들이 세상 끝 날까지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유언중 한마디가 ‘나는 죄인일 뿐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입니다. 겸손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많이 사용하셔도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 때문에 교만해지는 사람은 바보입니다. 그게 아니고 그런 것 다 하나님이 필요해서 잠시 입혀주시는 옷과 같은 것입니다. 다 벗어버리고 나면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죄인일 뿐입니다. 야! 너 정말 훌륭하다. 어떻게 그렇게 크고 놀라운 일들을 했는가. 하나님 저는 죄인일 뿐입니다. 냄새가 나고 너무 더러운 죄인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보기에는 크게 섬겼고 큰일을 하면서 사는 것 같지만 저는 하나님 앞에 제가 이런 존재밖에 안 되는 것을 인해서 너무나 마음이 아픕니다. 그리고 결국은 어떻게, 그렇게 은혜를 베풀어주셨는데 이런 존재밖에 안되고 그리고 이렇게 교만합니다. 자기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빈손 들고 앞에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주심 바라고 생명 샘에 나가니 나를 씻어주옵소서 그리고 거기서 깨트려지면서 자기를 깨끗이 씻고 세상이 뭐라고 하든지 흔들리지 아니하고 예수님 십자가 붙들고 예수님 중심으로 그렇게 살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마음이 모두 교만한 마음입니다.
최근에 제가 아는 어느 노 회에서 장로투표를 해서 당선된 사람이 시험을 보러 노 회에 왔습니다. 그래서 고시원들이 물어봤습니다. 집사님은 이제 투표를 해서 장로를 장립 하려고 하는데 왜 장로가 되시려고 뜻을 생각하셨습니까? 그런데 그 질문을 받는 순간에 그냥 가만히 있어서 부족하지만 그냥 좀 섬겨보려고 기도하다가 응답 받고 되었습니다. 그랬으면 무사합격인데 거기서 무심코 본색이 나온 것입니다. 뭐라고 했는가 하면 우리 목사님이 뭘 좀 몰라서 아무래도 내가 장로가 되어서 좀 돌봐주어야 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아주 혼이 났습니다.
여러분, 교만은 먼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통회하는 심령이 히브리말로는 무엇인가 하면, 상한 심령은 히브리말로 ‘레브 미슈바’라고 합니다. 그리고 통회하는 심령은 히브리말로 짓이겨진 심령입니다. 그게 얼마나 그림 같습니까? 상한 심령은 히브리말로 사발이 깨지듯이 탁! 깨진 심령이고 통회하는 심령은 고기처럼 짓이겨진 심령입니다. 그게 짓이겨졌다는 것은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통회하는 마음을 가진 것입니다. 깨어진 것은 그런 모양이라도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고기를 짓이겨보십시오. 뭐가 남겠는가. 다 짓이겨져서 그냥 말하자면 반죽처럼 되어버린 그런 상태, 그게 통회하는 심령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우리들이 그렇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모든 일을 행하면서도 날마다 그분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같이 쓸모 없는 인간들에게 베풀어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우리들이 아무 것도 아니오, 이 쓸모 없는 인간을 구원해놓으셔서 주님이 영광보다는 멸시와 모욕을 받고 계시다라고 하는 뼈저린 자기 후회, 짓이겨진 마음, 그런 마음으로 매일매일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고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고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엇이라도 조금이라도 잘 산 것이 있다면 모두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고 뭔가 주님의 이름에 누를 끼치고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고 사람들에게 고통과 상처를 준다면 그것은 주님 때문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환경 때문이 아니라 나의 선택이었고 나의 적극적인 의지였으며 그리고 내가 모두 저지른 잘못이었습니다 고백하는 것이 겸손한 마음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형통하게 해주실 그때가 시험에 들기 아주 쉬운 때입니다. 그리고 평소보다도 더 많이 자기의 마음을 지켜야 될 때가 바로 하나님이 축복해주실 때입니다. 경계경보가 등급이 높아지면 한번 돌던 초병들이 두 번을 돌고 세 번을 돌고 아주 위급하면 전 병력이 경계선에 달라붙어서 24시간 수십 배나 많은 병력들이 경계를 서고 공중에는 조기 경보기가 뜨고 레이더는 바쁘게 움직이고 첩보령이(?) 시작이 되는 것과 같이 그렇게 하나님이 축복해주실 때에 미끄러지면 안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축복해주셨을 때 미끄러지지 않도록 배나 마음을 살피면서 주님이 우리에게 아무리 많은 것을 주셔도 주님이 주시는 것보다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주님 자신이 우리에게는 훨씬 더 소중합니다’ 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마음을 지키면서 살지 못해서 주님이 축복해주셨는데 여러분들이 만약에 교만해져서 주님을 잊어버린 삶을 오늘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뼈저리게 참회하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이 이제껏 살아오면서 좋으신 그 하나님을 어떻게 대우해왔는지를 생각해보며 겸비해지고 이어서 그렇게 하나님을 막 대하는 여러분들을 변함없이 선대하신 하나님의 그 은혜 베푸심을 생각하면서 여러분들은 더 면목없이 하나님 앞에 죄송한 그런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면목이 없고 죄송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교만하게 하나님을 잊으면서 곤고할 때 하나님과 했던 그 수많은 약속들을 지불 만기가 끝났는데도 지불하지 않고 부채를 안고 살아가는 여러분 자신의 삶을 인해서 깊이 애통하고 지금 갚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무엇인가 곤고하던 때에 주님과 한 약속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지금 갚아야 합니다. 그것이 만약에 여러분들의 영혼의 변화였다면 지금 하나님 앞에 간절히 그때 그 약속을 회상하면서 저 좀 새사람이 되어서 주님과의 약속을 지키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고 그것이 만약에 여러분들의 어떤 사명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지금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 결단하고 거기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서 이제는 다시 떠나지 말고 죽도록 충성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혹시라도 만약에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어떤 물질을 약속했다면 갚아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음성입니다.
신실하신 주님을 여러분들이 그렇게 무책임하게 대하고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 주님만을 의지하는 겸비한 삶을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모든 부채는 하나님 앞에 갚을 수 있는 부채들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뭐라고 변명하든지 간에 그렇게 주님께 진 빚을 갚을 수 있는지 없는지는 하나님이 홀로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과 농담이나 하고 여러분들이 장난치고 가지고 놀아도 되는 그런 어리석은 사람 중에 하나가 아닙니다. 갚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진실 되게 참회하고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물질이나 그리고 내 생긴 고집대로 살아가는 인생의 즐거움보다도 주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 전 압니다.
여러분들이 지금은 제 설교를 듣지 않고 교만하게 거스르지만 그러나 확실히 압니다. 여러분들은 주님 없이 결코 살수 없습니다. 문제는 빨리 돌아오는가 많이 맞고 그리고 오랜 세월 후에 쓸모 없는 사람이 되어서 돌아오는가 그 차이일 뿐이지 여러분들은 주님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저는 할 수만 있으면 여러분들의 착한 면만을 하나님이 기억해주시기를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어린아이처럼 그 곤고하던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매달리던 그때처럼 그때는 정말 여러분 주님 없이 살수 없었습니다. 주님 없이 살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밤마다 문 열어놓고 마음 졸이시며
나간 자식 돌아오기만 밤새 기다리신다오
정말 돌아오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회상입니다. 그 회상은 여기서도 다시 반복이 됩니다. 그 회상은 크게 세 가지였는데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구원의 은혜였고, 두 번째는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걸어올 수 없었던 광야의 길에서 베푸신 도우심의 은혜였고, 그리고 세 번째로는 특별히 부각되고 있는 그들을 하나님이 만나로 먹여 살리심으로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오 오직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 것임을 가르치신 사건을 모세가 회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 세 가지를 우리의 삶에 적용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신명기에서 얼마나 모세가 지루할 정도로 ‘너희는 잊지 말아라’ ‘애굽에서 너희를 건져내신 그 하나님이 너희의 여호와이시니라’ ‘애굽에서 너희를 건져내셨은 즉’ ‘애굽에서 건져내신 여호와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그 여호와가 너희를 바로의 손에서 구원하셨느니라’ 같은 이야기들이 수없이 되풀이됩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역사에 그냥 새겨놓아야 할 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개인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해서 경험되고 감격해야 할 사건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여러분들을 십자가에서 구해주신 그 은혜는 우리들이 죽을 때까지 반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어렸을 때부터 죽 생각해오기를 마지막 하나님이 죽기 전에 한 장 찬송을 부르라면 전 그 찬송을 부르고 싶었습니다. ‘갈보리 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주께서 고난을 당한 표라 험한 십자가를 내가 사랑함은’ 하나님 앞에 그 찬송을 부르고 싶었습니다. 결국 마지막에 이렇게 형편없이 산 죄인들을 천사들이 우리의 영혼을 받들어 주님의 품으로 데리고 가실 때 우리들이 어떻게 기다렸다는 듯이 천사의 손을 잡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한 것이 있습니까? 살아온 길은 부끄럽기 짝이 없고 주님은 크신 은혜를 보여주셨는데도 하나님 앞에서 보여진 우리의 삶에는 변덕이 더 많았습니다. 단 1년이라도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렇게 흠 없이 점 없이 주님을 사랑한 적도 없었습니다. 아무 공로 없는 죄인을 그 천사들이 우리를 위해 흘리신 아들의 고결한 피를 보고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르자고 말할 때 우리가 어떻게 염치도 없이 그 손을 덥석 붙들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살아온 모든 삶이 부끄러워도 우리를 그 쓸모 없는 죄악에서 건져주시고 그 십자가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피 흘리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그 구원의 은혜가 커 보이면 세상은 작아 보입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우리의 눈 안에서 사라지고 나면 우리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이 우리의 고향이 아닙니까? 우리가 소금이지만 바다와 같은 세상에서 온 사람이 아닙니까? 잊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이 그 십자가에서,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이렇게 밖에 못사는 사람들을 이렇게 비겁하게 주님을 배반하고 곤고하던 때에 주님을 붙들었다가 살만하니까 주님을 팽개치고 저 좋은 대로 살아가는데 두려운 심판을 눈앞에 두고도 최후 통첩을 받으면서도 까불면서 주님을 대드는 파렴치한 죄인들인 데도 그 사람들을 위해서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히셨습니다. 그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왜 날 사랑하나 이 쓸모 없는 인간을 위해서 왜 고결하신 그분이 대신 멸시와 욕을 당하고 죽으셨을까? 그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살아 계신 하나님과 그리고 은혜로 살아있는 나밖에는 그 사랑의 빚 덩어리 채로 살아가고 있는 나밖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늘도 어느 목사님이 오셔서 교회를 예쁘게 지셨는데 빚을 얼마나 지셨습니까? 걱정되시겠습니다. 저에게는 빚이 400억입니다.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그분은 담임목사님도 아닌데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에 무거운 부담을 가지고 고백을 합니다. 사랑의 빚에 대해서 이런 부채의식을 느껴보셨습니까? 갚아야 되는데, 갚기는커녕 이렇게 형통할 때 교만하게 살아가면서 우리를 지켜보시고 인내하시는 그 주님 앞에서 사랑의 빚이 더 쌓여가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들은 다만 용서받은 죄인일 따름입니다.
두 번째는 회상하고 있는 것이 광야의 길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도우심이었습니다. 중요한 사건을 몇 가지만 다루고 있지만 그러나 이것만이 아니라 일일이 필설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도움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받았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만 사랑해야 할 이유를 말하면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처럼 하나님이 가까이 대해주신 민족이 어디에 있는가.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거의 독점적이었다. 혼자서 도저히 걸어갈 수 없는 광야의 길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시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을 위해 수고하는 것보다 더 많이 수고하셨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위대하신 하나님이 째째하게 그 백성들을 물 먹이는 일까지 신경을 쓰셔야 했고, 심지어는 그들의 끼니를 때워야 하는 일, 심지어는 태양 볕에서 그들이 일사병이라도 걸리면 어떻게 하나 그런 것 염려하시고 밤이면 추우면 어떻게 하나, 어두우면 어떻게 하나, 가다가 광야에서 넘어지지나 않을까 이런 것을 염려하셨습니다. 이 대목에서 사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대신에 어머니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로 그렇게 살 깊은 사랑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고 입히고 신기고 그들을 달래고 유모와 같이 돌보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업어서 가나안까지 날라주셨습니다.
광야와 같은 우리의 인생 길을 여러분들은 지금은 교만해져서 혼자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살아가지만 여러분들이 잠시 후면 지금 잘 살아가고 있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어린애처럼 사탕 집어던지며 엉엉 울면서 힘들다고 나 좀 도와달라고 그럴 것입니다. 안 그렇게 된다면 여러분들은 거듭난 자녀가 아닙니다. 광야의 인생 길은 혼자 걸을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특히 믿는 자들에게는 더더욱, 그래서 우리들이 걸어온 인생의 길은 주님 빼면 아무 것도 없고 인생의 굽이굽이마다 매 순간마다 그렇게 우리를 붙들고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빚을 지며 살아왔습니다.
돈이 몰리고 그리고 빚쟁이들에게 독촉을 받으면서 인생 막다른 골목까지 갔을 때 여러분, 누구에게 매달렸습니까? 건강이 나빠지고 죽음의 선상을 오고갈 때 누구에게 매달려 기도했습니까? 직장도 없고 사업도 없이 실업자처럼 떠돌아다니며 끼니를 이을 수 없었을 때 은혜를 받고 나서 여러분들이 누구에게 도움을 구했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도움을 어린아이처럼 구할 때 뿌리친 적이 있으십니까? 그 도움을 힘입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 은혜를 잃어버리면 하나님 앞에 벌받습니다.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인생의 위기 때마다 하나님께 어떻게 은혜를 입었는지 하나님의 팔이 어떻게 나타나서 여러분들을 건져주시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그런 놀라운 팔의 도움을 입으면서 어떻게 하나님 앞에 반응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우리는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광야와 같은 인생의 길에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받은 도움을 회고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지금 형통할 때에 우리가 짓고 있는 교만의 죄를 회개하고 낮은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세 번째는 광야에서 만나를 먹이신 사건입니다. 누구도 이런 방식으로 먹을 양식을 공급받은 적이 없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기적적인 방법으로 먹을 양식을 공급받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진 사면에 하얗게 서리가 내렸고 그것들을 한 되 박씩 모두 어 가지고 모아서 빻아서 떡도 만들어먹고 과자도 구워먹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신 것은 모든 먹을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가르쳐주시는 것일 뿐 아니라 거기에 담겨져 있는 더 깊은 의미는 ‘인간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하는 교훈을 그들에게 일러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회상해보십시오. 우리들이 물질적인 만나는 먹은 적이 없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건조하고 메마른 땅에서 물도 없고 떡도 없고 입을 옷, 신을 신발도 없이 친척과 이웃도 없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할 때 주린 여러분들을 어떻게 만나로 먹여주셨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곤고하고 죽을 것 같아서 하나님 앞에 나아와 말씀을 깨달으며 주님을 만났을 때 여러분들은 비로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의심치 않고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나는 하나님이 버리셨을거야 주님께 돌아가기에는 너무나 먼길을 떠나왔어 이젠 내게는 다시 주님께로 돌아갈 기약이 없어’ 라고 여러분들이 생각했을 때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거기서 주의 진리의 말씀으로 건지셨습니다.
사람이 흑암의 그늘 아래 앉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지존자를 멸시했기 때문이라고 시편 107편에 나온 것처럼 여러분들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지존자를 멸시하는 죄를 지음으로 영혼은 곤고해지고 심령은 파리해졌습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 있을 때 이 세상이 주는 즐거움이나 행복, 육신의 양식으로는 영혼의 고갈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행한 일들로 보자면 영혼이 영원히 핍절해서 하나님 앞에 쓰러져야 마땅하거늘 하나님께서는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찾아오셔서 주의 말씀으로 먹여주셔서 그래서 주님 앞에 살아가게 만드셨습니다.
일주일씩 거리를 헤매며 끼니를 잇지 못하던 집나간 아이가 집에 와서 엄마가 차려준 따듯한 밥상 앞에서 허겁지겁 물도 마시지 않고 밥을 먹듯이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그런 말씀의 식탁을 차려주셨고 그리고 여러분들은 그 식탁에서 배불렀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어린아이처럼 깊이 결심했습니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보지 않겠네
나 어디 가든지 순종하리 나 어디 있든지 순종하리
주 나의 하나님 왕 되신 주 나 어디 가든지 순종하리
눈물을 흘리며 어린아이처럼 고사리 같은 손을 가슴에 품고 그 동안 불순종과 그로 말미암는 뼈아픈 방황을 후회하며 주님이 주신 고귀한 인생을 낭비한 것을 하나님 앞에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것이 마지막의 뉘우침이 되기를 바라고 그래서 하나님의 집에서 주님을 사랑하며 인생의 황혼이 깃들여서 세상의 수고가 끝날 즘에는 주님의 품으로 편안히 가야지 되겠다 라고 하는 소박한 결심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깊이 깨달은 자들이 미끄러지고 타락했을 때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길은 무지한 자들이 돌아오는 길보다 더 피나는 가시밭길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많이 맡은 자들에게는 많이 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좋습니다. 불순종을 계속 할 수밖에 없는 뼈아픈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되 마음은 도저히 드릴 수 없는 설명할 수 없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가 없이 살던 그 핍절하고 저주받은 것처럼 지리멸렬하고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들도록 정신적으로 고뇌하고 방황하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으십니까? 그럼 돌아가십시오. 저는 여러분들을 말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번에 여러분들이 미끄러져서 주님을 멀리 떠나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신앙생활로 돌아가시면 예전에는 여러분들이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하였지만 이번에는 피를 흘리며 아플 것입니다. 한번 진리의 비침을 받고 그 주님을 배반한 즉 다시 죄 사함을 받을 길이 없다고 했는데 하물며 진리의 빛을 많이 받고 그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수한 깨어짐을 경험하고 난 다음에 다시 미끄러져서 강퍅해지고 하나님의 진리를 등진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서 살기를 원한다면 정말 이제 그는 눈물을 흘리며 아파하는 정도가 아니라 피를 토하며 괴로워하고 미친 듯이 신음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언제 말씀드렸을 것입니다. 저는 그 깨달음이 어떤 의미에 있어서 성화에 있어서 저의 쓸데없는 미련을 단칼에 끊어버리는 아주 훌륭한 깨달음이 되었습니다. 언젠가 성화의 교리들을 붙들고 싸울 때 마음속에서 양심의 외침이 들려왔습니다. 너는 희망이 없다. 너는 죽을 때까지 짐승처럼 살다가 죽을 것이다. 그런 양심의 외침이 들려왔습니다. 네가 아무리 진리를 가르치고 까불어도 너는 절대로 그 진리대로 못살 것이다. 사실 저를 좌절시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제 안에는 견디기 힘든 고통과 그리고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넘을 수 없는 그 거룩의 벽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사도 바울이 고백한바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내게는 더욱 좋으니” 라는 고백이 생각났습니다. 예전에는 죽으면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서 무엇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싶었는데 마음속으로 그럴 리는 없지만 제가 다시 태어난다면 다음에는 절대로 인간으로 태어나지 말고 생각도 없고 이렇게 하나님 앞에 괴로워하지도 않아도 되는 들풀로 태어나게 해달라는 기도가 목구멍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그때 문득 제 마음속에서 이런 놀라운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원하는 것도 아닌데 어느 한순간에 생각을 돌리면서 주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짐승처럼 이 세상에서 헐떡이면서 죽어가고 있는 인간을 어떻게 그분이 오셔서 나를 구하셨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분이 오셔서 얼마 안 되는 인생 길에 드라마처럼 곤고한 일도 많았고 가슴 저미고 쓰러지는 일도 많았는데 그 인생의 수많은 난관들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이 도우셨는지가 생각났고 그리고 무지와 어두움 속에서 실패하고 죄에게 지는 것이 인간의 사명이나 되는 것처럼 살던 이 동물과 같은 인간에게 주님의 찬란한 진리의 빛을 주셔서 오늘까지 살아오게 하셨는지가 일순간에 생각이 났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는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며 하나님 앞에 고백했습니다. 맞습니다. 하나님 나는 참된 신자가 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이 멍에가 내게는 너무나 무겁고 주님의 자녀로 이 죄악 된 세상에 부패한 심령을 끌어안고 사는 일이 내게는 형벌을 받는 것보다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렇지만 주님, 예수님 모르고 이 세상에서 죄인으로 살던 때보다는 훨씬 살만합니다. 훨씬 쉽습니다.
한순간에 내 양심의 송사는 박살이 났고 사단의 조롱소리도 그쳤습니다. 그리고 매일 가슴에 새기려고 합니다. 그렇다. 지금 내가 주님의 자녀로 참된 주님의 신자가 되기를 원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성도들을 섬기며 살아가는 이 길이 결코 쉽지 않고 때로는 정말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것이 더 좋아 보이지만 그러나 이것이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 없이 주님을 등지고 그렇게 비참하게 살아가던 죄인이던 시절보다는 훨씬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만약에 내가 이 사명의 삶을 버리면 돌아갈 수 있는 삶은 바로 옛날 죄인들의 삶일텐데 그 삶은 죽어도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마치 생명 걸고 탈북한 사람들이 이북으로 돌려보낼지도 모른다고 하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여기서 죽겠다고 엉엉 울던 그 광경처럼 말입니다. 이런 간증이 제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주님이 무엇을 안 주셨습니까? 구원의 은혜를 주셨고 우리들이 도저히 건널 수 없을 것 같았던 홍해도 건너게 해주시고 광야의 같은 세상 길에 혼자 두지 않고 이제껏 데리고 오셨습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먹이셨고 미력이나마 여러분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주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목자가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주님 없이 살던 그 옛날의 고통으로 돌아가고 싶으십니까? 회상하십시오. 어떻게 여러분들이 고난 속에서 주님을 만났고 그 말씀으로 여러분들이 어떻게 고치심을 받았는지를 생각하고 회상하며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크게 세 번째로 이렇게 하나님이 그들을 이끌어오신 마지막 이유였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두 가지를 말하고 있는데 하나는 ‘너희의 마음을 낮추시기 위함이었다.’ 또 하나를 말하는데 그것은 ‘너희에게 복을 주려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이 얼마나 중요하기에 당신의 백성들을 때로는 하나님이 인생의 위기 앞에 몰아넣으시고 때로는 죽음 앞에도 몰아넣으시고 그래서 실제로 수많은 백성들의 목숨을 거두어 가시기까지 남은 백성들에게 간절히 받고 싶어하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의 낮아진 마음 그것을 하나님이 받고 싶어하셨습니다. 교만하고 높은 마음이 아니라 철저하게 낮아진 마음, 그래서 주님이 아니면 살수가 없다고 하는 고백, 그리고 주님이 아니면 나 혼자 설 수 없다라고 하는 고백, 그래서 매일 새벽마다 나 좀 도와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저 혼자 두고 가시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 애원하고 저 혼자 버려 두고 가시면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그런 마음 가지고 살게 하시려고 주님이 이렇게 혹독하게 훈련시키시고 이렇게 풍성하게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다윗이 범죄 한 후에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번제가 아니오,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은 통회하는 자를 멸시치 아니하시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시인의 고백이오, 경험이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을 드리면 다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드리지 않으면 드린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께 그 마음을 드리면서 삽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이유는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마음을 그렇게 낮추셔서 그 다음에는 우리를 복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주님의 본색입니다. 때로는 주님을 원망하고 그리고 나를 혹독히 다룬다고 불평하지만 그러나 그 모든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오직 한가지 우리를 당신의 사람으로 만드셔서 당신 앞에서 복을 누리며 살게 하시는 것, 그것이 주님이 정말 여러분들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을 보면서 어떨 때 제일 안타까운가 하면 90%를 순종했습니다. 사실 주님 거스를 때는 마이너스로 순종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거역했으니까. 그러다가 그게 회개를 통해서 제로 베이스가 되고 그러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오는 동안에 90%까지 순종할 정도면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예수에 미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시각에서 이렇게 보면 90%쯤 순종했는데 너무 안타까운 생각이 드는 게 무엇인가 하면 마치 어린아이가 미끄럼을 한번 재미있게 타보려고 큰애들은 다 알기 때문에 뒤로 돌아서 계단으로 올라가는데 이 녀석은 땀을 비적비적 흘리면서 바지에 흙을 다 묻히면서 철판에 침까지 발라가면서 그러면서 고무신을 신고 기어서 거기까지 올라갑니다. 거기까지 올라가면 되는데 90%까지 올라갔는데 거기서 미끄러지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아! 마지막에 저 마무리를 하면 하나님이 왜 저에게 그렇게 연단 하시고 그리고 마지막에 내 마음까지 다 바쳐서 나에게 온전하게 순종하라고 원하시는지를 저 사람이 경험하고 하나님이 원대한 계획을 볼텐데 이제까지 신앙생활 하면서 항상 그랬습니다. 은혜 받으면 90%쯤 턱걸이하다가 팔다리 다 풀어져서 나동그라지고 피투성이가 되어서 다시 회복하고 기어올라와서 90%쯤 올라가다가 다시 미끄러지고 이러면서 상처뿐인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저는 깊이 연민의 정을 보냅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행복한 날을 볼 수 없습니다. 온전한 순종, 거기에 하나님이 역사 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을 복 주십니다.
그래서 어느 집에 신방을 갔을 때는 그런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너무나 어린아이처럼 순종합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들을 복 주시기 않고 곤고하게 살도록 내버려두시면 주님이 손해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순종하려고 애를 썼는지를 주위의 사람들이 봤으니까, 거기서 만약에 하나님이 그에게 축복해주시는 것들을 본다면 그 사람의 삶을 애처롭게 지켜보았던 그 사람을 사랑하던 사람들이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여러분들이 주님 앞에 그렇게 축복 받음으로서 주님의 살아 계심을 여러분들을 통해 드러내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빛 가운데서 살았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 우리를 복되게 하려는 네 가지 신신당부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신명기는 그야말로 신신당부하는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신명기는 다른 어떤 성경보다도 반복이 많이 나오는 성경이고 그 반복도 신명기 속에서 다양한 것들에 대한 반복이 아니라 동일한 하나님께 대한 순종에 대한 요구가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장면 역시 모세의 이어지는 설교인데 그 속에서 오늘 읽은 이 성경 구절 두 개는 신명기 전체의 요절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신명기 전체 내용을 핵심적으로 압축해 놓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이 주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할 삶의 지침 네 개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미 앞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누구인지를 상기시켜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들을 선택하셔서 자기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과, 그들을 애굽의 비참한 종살이에서 강권적으로 건져내신 것과, 도저히 생존할 수 없는 광야에서 하나님이 시시때때로 도와주셔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이제껏 살아오게 만들어주셨던 그 큰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이제껏 까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그 축복 위에 더 큰 축복을 주셔서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을 누리게 하시고 대적들을 이기게 하실 모든 미래의 은혜까지도 바라보게 하시고 모세는 이 백성들에게 이 네 가지 요구를 전달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네 가지 요구는 첫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었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었으며, 그리고 네 번째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첫 번째로 모세는 앞에서 이미 여러 번 반복되었던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히브리말로 ‘야레’ 하여야 할 백성들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야레의 일차적인 의미는 이미 ‘두려움’이라는 사실을 며칠에 걸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경외’라고 하는 이 번역은 좋은 번역이기는 하지만 원래 히브리어가 가지고 있는 ‘야레’라고 하는 말에서 두려움의 의미를 많이 떨어트린 번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이것을 피어라고 번역했습니다. 두려워하다. 그래서 물론 그것은 아주 노예적이고 공포스러워 기분 나쁘고 공포스러운 그런 말입니다. 그렇지만 역시 야레 라는 단어의 우선적인 의미는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입니다. 피어입니다. 두려움입니다.
참 이상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일먼저 가르쳐준 것은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광야 교회 시절에도 모세가 오십 부장 백 부장 이렇게 광야 교회에 중요한 일군들을 세울 때 그 자격 가운데 빼놓지 않고 들어갔던 자격이 무엇인지 기억나십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 중에서 일군을 뽑았던 것입니다. 왜 모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라고 말하지 않고 혹은 ‘하나님께 사랑 받는 자’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를 그렇게 광야 교회 중요한 일군들로 먼저 조건을 잡았을까요? 이것은 우리 기독교 신앙 전체적인 구도하고도 맞물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고 두려우신 분인지를 미처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사실이 강조되니까 그 하나님을 공정하게 올바르게 믿지 못하는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이 막 바로 아주머니 당신을 위해서 우리 예수님이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아십니까? 그 예수님이 당신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셔서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습니다. 이 아줌마가 뭐라고 하는가 하면 아니! 왜 그렇게 하셨을까? 그러실 필요까지 없었는데, 부담스럽다.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 왜 이 세상까지 오셔서 죽기까지 하실까? 부담스럽습니다. 다음에는 그렇게 하지 마시라고 하세요. 그런 것입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제일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의 사랑을 말하기 전에 먼저 어떻게 해서든지 죄인들에게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과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이 그 죄인들을 지옥의 형벌로 징벌하실 것이라고 하는 죄에 대한 자각을 갖게 하는 것이 전도의 첫걸음이라고 봤습니다. 그러니까 나 지금 이렇게 잘 사는데, 내가 왜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분은 괜히 오셔서 날 위해서 죽었다고 그래서 자꾸 날 부담을 주시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라든지 죄에 대한 강한 도전 같은 것이 없는 상태에서 그냥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고 당신 너무 사랑하신다고 그러니까 썰렁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를 주실 때에도 제일 먼저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율법을 통해서 물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도 나오지만 그러나 오늘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교훈이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시고 그 하나님이 그 위대하신 분이고 순결하신 분이기 때문에 죄와 죄인을 용납하실 수 없는 분인지에 대해서 깊이 깨닫게 될 때 자기의 죄의 심각성에 대해서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그 죄의 문제를 들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함을 받고 그때 비로소 괜히 왜 돌아가셨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게 아니라 아! 정말 예수님이 그렇게 돌아가실 수밖에 없었구나 그리고 결국 예수님이 그렇게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나의 죄와 악함이었구나 하는 것을 아주 뼈저리게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오늘 우리들이 분명하게 하나님 앞에 깨달아야 하는 것은 먼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깊이 두려워하고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정말 티끌과 같고 그리고 자신의 죄를 끊임없이 참회하면서 살아야 하는 그런 존재, 그 자체가 하나님께 기대어 있는 지극히 연약하고 티끌과 같은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을 것, 그 정신 속에서 일생을 살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은 곧바로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이니 하나님께서는 우선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죄인들이 끊임없이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는 이유가 결국은 두 가지로 집약이 되는데 하나는 죄에 대한 끊을 수 없는 달콤한 사랑 때문이고, 또 하나는 내가 이렇게 죄를 짓고 불순종해도 하나님은 나를 쉽게 용서해주실 것이라고 하는 두 가지 생각 때문에 인간이 죄를 지으면서도 담대하고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좀처럼 돌이키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사랑은 정말 끊기 어렵고 죄가 주는 그 유혹은 뿌리치기가 굉장히 어렵지만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은 그 사람보다는 훨씬 쉽게 그 유혹을 이기고 그 범죄 하고자 하는 내면의 욕구들을 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죄에 대한 달콤한 사랑이 있고 동시에 아울러서 하나님은 이 정도는 사랑이 많으신 분이니까 그냥 넘어가실 것이며 또 안 넘어가신다고 하더라도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간단하게 이 죄에서 벗어나게 해주실 것이다. 나는 언젠가는 이 죄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것이 불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아주 공통된 심정입니다. 아주 복잡하지 않습니다. 아주 간단하고 단순합니다. 그런 심리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 속에서 영혼이 핍절하게 되어가면서도 잘 되어가고 있는 한 두 가지 일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실 지도 모른다고 하는 막연한 낙관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교활한 삶의 한복판에는 하나님을 향한 엄중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 역사를 보면 대게 부흥이 언제 일어났는가 하면 하나님의 아주 엄위로우신 심판과 진노를 설교할 때 죄에 대한 각성과 회개가 일어나면서 부흥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1741년도로 기억이 됩니다. 8월인데 미국에서 조나단 에드워드의 목사가 도구가 되어서 쓰임 받던 그 일차 대 각성이 결국 ‘엔 필드’ 라고 하는 곳, 마음에서 신명기 32장에 나오는 한 절을 붙들고 설교를 했습니다. 지금도 그 원고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 설교는 하나님이 범죄한 자들을 지옥의 형벌로 다스리실 것이라고 하는 아주 준엄한 심판에 관한 설교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정말 메인플라워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서 신앙의 자유를 찾을 때 가졌던 청교도적이고 아름다운 신앙은 다 사그러들고 젊은이들은 술집으로 삼삼오오 몰려다니면서 허랑 방탕하고 사회는 도덕적으로 많이 썩어있던 그런 때였습니다. 신앙에 대해서 냉담해졌던 사람들이 그 설교를 들으면서 폭탄이 떨어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하나님을 만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런 일들을 보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이런 하나님의 커다란 두려움, 1907년에 있었던 장대현 교회에서의 평양 대 부흥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사람 길 선주가 와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면서 자기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이렇게 어렵게 모였는데도 주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는다고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자기의 죄를 토설했을 때 그때에 하늘이 열리고 부흥의 소낙비가 쏟아져 내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결국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물론 노예적인 두려움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이 경건한 두려움은 그 사람의 영적인 깊이를 아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해도 그렇게 하나님에 대한 깊은 경건한 두려움이 있는 사람들이 말하는 그 사랑은 정말 체험된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전혀 없이 사랑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이미 그것을 증언하는 속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 사랑에 대한 생각이나 영적인 그 깊이 자체가 아주 하찮다고 하는 것들을 결국은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 시간 여러분 자신들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정말 나는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지식 속에서 신앙생활하고 있는가. 성경에 끊임없는 교훈은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입니다.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면서도 전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이런 삶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 의해서 확인되지도 않은 자기만의 공상의 기초에서 온갖 교리를 만들어내고 그리고 자신의 불순종과 죄악을 합리화하면서 적당히 살아가는 막대 먹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결국은 살았으나 죽은 자 같은 영혼의 상태를 모면할 수 없을 것이며,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과의 깨트려진 관계를 붙들고 눈물 흘리나 그러나 그들이 참 하나님을 올바로 알기 전까지는 그들의 영혼에 어떤 안식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깊이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의 그 엄위하신 눈빛 앞에서 그분을 두려워하고 그분을 의식하면서 사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오늘날 여러분들에게 회심에 관한 설교를 하면서 오늘날 여러분들이 회심하지 않는 가장 커다란 이유, 한때 하나님의 은혜와 그 사랑을 그렇게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교만하여져서 영적인 생활을 게을리 하고 그리고 벼랑 끝에 서있으면서도 좌석 펼쳐놓고 술잔이나 벌리면서 임박한 영혼의 고통을 잠시나마 잊어보려고 하는 어리석은 행락객과 같은 여러분들의 행동을 보면서 지금이야말로 여러분들에게 회복되어야 할 신앙이 두려움의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고 그리고 날마다 그분과 함께 동행하는 착하고 행복한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나는 정직하게 말해서 여러분들의 영혼이 망가지고 여러분들이 회심치도 못한 채 지옥에 가면서까지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게 해달라고 기도할 욕심은 저에게 추호도 없습니다. 우리의 몸은 이 세상에서 멸한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영혼은 구원을 받아야 될 것이며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일생에 비록 부요 하고 영화롭고 그리고 기분 좋고 행복하지는 않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영혼은 언제나 살아 있어서 우리의 구원의 주님을 바라보고 기뻐하고 그분을 즐거워하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일을 좋아하는 그런 영혼으로 살다가 주님 앞에 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다시 한번 제 마음속에 워낙 강하게 밀려온 느낌이기 때문에 그리고 생각지도 않게 하나님께서 이 신명기의 말씀을 주시는 것을 보면서 나는 다시 한번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을 깊이 두려워하십시오. 그리고 그 두려움의 빛 앞에서 오늘날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그 삶, 하나님을 향한 관계, 교회를 향한 관계, 그리고 목회자를 향한 관계, 그리고 여러분들의 가족을 향한 관계까지 모두 비쳐보면서 하나님이 아무리 두려우신 분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그 두려우신 하나님 앞에서 신앙과 양심을 따라서 거룩한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그 은혜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라고 답변할 수 있는지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적당히 상황이나 핑계되고 사람들이나 핑계되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며 교만하여져서 형통할 때에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안일하게 나태하고 세상 사랑에 빠진 삶이 계속되고 있다면 여러분들 중에 어떤 분들에게는 이것이 하나님의 최후의 통첩일 수 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인격적으로 부르셔서 주님의 말씀으로 여러분들의 마음에 가르쳐주셔서 돌이키기를 간절히 원하시며 끊임없이 그 일을 위해서 지루할 정도로 긴 날 동안 여러분들을 설득시키시고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자존심이 상할 정도로 여러분들에게 때리시고 어루만지시면서 돌아오라고 흐느끼시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시지만 어느 순간에 그런 인격적인 방법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될 때 하나님의 인내는 끝나고 그리고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다루시기 시작하십니다. 그 환난의 날에 오늘의 설교를 기억하고 오늘 뉘우치지 못한 것을 후회하지 말고 오늘 정말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눈물겨운 경고를 들으면서 내게는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설 자리가 없을 정도로 구두 발뒤꿈치가 벼랑 끝에 와 있다 라고 하는 고백을 하나님 앞에 하면서 간단하게 고백하십시오. 주여, 내가 살기를 원합니다. 다시 나를 찾아오셔서 나를 용서해주시고 다시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살수 있도록 은혜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깊이 두려워하고 그래서 그 두려우신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든지 아니면 진실하게 참회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커다란 심판을 받아서 망하든지 세 중에 한가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을 향한 깊은 두려움은 우리의 일생동안 계속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경험해보셨습니까? 신자가 심령이 온전히 청결해지고 주님의 신으로 가득 차 있을 때는 다른 사람들이 범죄한 것을 보면 두려워서 떱니다. 그런데 심판을 받을 당사자는 너무 담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교통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두려움에 떱니다. 가슴이 벌벌 떨립니다. 그리고 그 영혼을 생각할 때 한없이 눈물이 쏟아집니다. 죄인들이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는데 그런데 그 죄인들은 자신들이 행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엄청나고 무서운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남의 죄를 보면서까지 두려움으로 떨며 그 죄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황무한 이 땅을 위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무너진 교회들을 위해서 부르짖도록 하나님께 택함 받은 사람들이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깊이 두려워하는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께서 근거 없이 당신을 사랑해달라고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인 우리로부터 홀로 사랑을 받으실만하도록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들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지신 것처럼 우리를 도저히 소망이 없는 죄의 어두운 그늘에서 건져내셨고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해방시켜주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일평생 죄의 종이 되어서 악의 노예가 되어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분의 이름을 훼방하며 살기를 마치 우리의 일생의 과제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평생을 주님과 원수 맺으면서 살아왔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를 그 희망이 없는 죄인의 길에서 내버려두시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그 피로 우리를 건져주셨습니다. 그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를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그 피로 구속해주셔서 주의 진실하고 아름다운 착한 자녀가 되게 해주셨습니다.
여러분,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주님이 그 위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불순종하고 죄 가운데 살면 하나님께서 즉시 행동을 개시하시고 우리를 이 세상에 두시면서 마음고생 하시는 우리의 생명을 거두어버리시면 간단하실 텐데 주님이 죄 가운데 있고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고 그 피로 구속을 받았으면서도 다시 그 피를 더럽히고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막대 먹은 짐승과 같은 우리들을 이 세상에서 여전히 내버려두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아니함으로 주님이 손해보실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시간에도 돌이킬 줄 모르고 인생의 벼랑 끝에까지 물러선 여러분들을 떨어지도록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여러분의 손을 붙잡으려고 내미시는 그리스도의 그 피묻은 손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내미시는 손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었습니까? 숙명처럼 여러분들을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크신 사랑 때문에 주님은 그 놀라운 구원의 은혜 그 광야와 같은 인생의 길에서 시시때때로 도우셨지만 주님의 그 은혜를 배신으로 갚는 우리들을 진멸시키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그의 성실하신 사랑으로 오늘도 우리를 불러서 오늘은 돌이키겠지, 내일은 돌아오리라 주님이 그렇게 하염없이 기다리면서 지내온 세월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 많은 세월동안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서 죄악의 낙을 즐겼고 그리고 그 악을 기뻐했지만 자기의 거룩한 이름으로 택한 백성인 여러분들이 죄의 낙을 즐기며 파리한 영혼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면서 주님이 얼마나 아파하시는지 여러분들은 절대로 모릅니다. 어느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지나간 자신의 모든 잘못들을 인격적으로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그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이지를 뼈저리게 깨닫는 순간에 움켜잡았던 세상 사랑에 욕망들을 내려놓고 이 세상에서 주님을 버리고 신앙을 팔아서 대신 얻은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을 버려 두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걸어올 그 날을 기다리시면서 주님이 이제껏 까지 사랑해주시고 참아주신 것입니다.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나도 용서할 수 없는 나를 내가 얼마나 내편입니까? 그런데도 아무리 내 편이 되어도 나도 용서할 수 없는 나를 예수님은 용서하시고 지었던 많은 죄의 악함을 기억하시고 우리를 징벌하시기 위해서 칼을 가시는 대신에 언젠가는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그 고통이 얼마나 뼈저린지를 깨달아서 주님 앞에 나와 뜨거운 눈물로 참회하고 새사람의 길을 걸어가면 그 후에 당신께 돌릴 영광이 예전에 당신의 이름을 더럽혔던 것보다 훨씬 클 것이라고 기대하시는 그 주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하고 오늘도 당신의 세계를 더럽히고 있는 우리들을 기다리시면서 우리들이 돌이키기를 고대하십니다.
세월은 흘러가고 우리의 인생은 점점 연수가 더해가고 우리의 남은 날들은 점점 짧아져 가는데 깊은 가을날에 햇볕과 같이 그렇게 짧은 시간밖에는 우리의 인생이 남지 않았는데 언제까지 우리들이 이 인생을 허비하며 하나님을 거스르며 사는 삶을 반복되는 일과처럼 되풀이해야 하겠습니까? 정말 지나온 세월들이 정말 스쳐 가는 필름처럼 우리의 머리 속에 지나갈 때는 우리의 남은 날들을 인해서 우리들은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렇게 빨리 지나가는 인생인데 그런데 주님을 사랑한 날들은 별로 없고 우리의 인생 전체가 그분에게 근심거리가 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그 사랑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분의 가슴에 더 많이 못 박히게 하시는 그런 삶을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분이 뭘 잘못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뭘 잘못하셨습니까?
그래서 미가서 6장에 보면 미가 선지자가 그렇게 말합니다. 오늘날 내게 말해보라 내가 너희를 위해 무슨 나쁜 일을 했는가. 내가 너희를 위해서 옳지 않게 행한 것이 무엇인가. 그런데 왜 너희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나를 대적하고 나를 거스르기를 너희들의 본분처럼 그렇게 행하며 사는가 물으시던 그 질문이 오늘 우리에게 똑같이 되풀이되어야 할 질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여러분, 주님도 사랑하시는 것 아닙니까?
손과 발 날 위해 못 박혔네 왜 날 사랑하나
죄 용서받을 수 없었는데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아무 이유 없이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지만 우리에게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 그 사랑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주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좋은 것은 그분께 다 드리고 절대로 좋으신 그분의 마음에 눈물이 흐르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산을 옮길만한 능력, 바다를 가를만한 권세, 이 세상에서 수많은 위대한 업적을 이를 수 있는 훌륭한 달란트 그런 것 없어도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그리고 어린아이처럼 그분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려고 애를 쓰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무명한 자 같으나 위대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위대한 역사는 바로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자기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오늘 나는 여러분들이 모두 위대한 권능이나 남보다 뛰어난 달란트가 없어도 오늘 여러분들이 정말 착한 마음을 회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그래서 주님이 우리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그렇게 낮고 천한 이 세상에 오셔서 멸시와 모욕으로 가득 찬 생애를 사시면서 고난을 당하시고 마지막에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면서까지 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던 그런 사랑을 우리들이 받은 것을 기억하고 그래서 그렇게 큰사랑을 하나님께 받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온전한 제물로 드려도 좋고 어떻게 하든지 그저 소시민적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하늘의 위대한 권능으로 산을 옮기고 큰 권세로 바다를 갈라서 위대한 기적의 주인공들이 되어서 그분께 영광을 돌리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지만 그 모든 일보다도 내가 쉽게 할 수 없는 그 일을 꿈꾸고 그 일이 아니면 무엇으로도 하나님을 섬기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 마음을 다해서 어떻게 하든지 주님의 사랑을 가슴에 새기면서 하나님 사랑하고 그래서 주님이 나밖에 없으셨던 것처럼 나도 주님밖에는 없는 삶을 살고 주님이 그 동안 내가 불순종하고 죄악 가운데 살아오면서 그분의 가슴에 너무나 많이 못박고 우리를 향해 내미시는 그 사랑의 손에 너무나 많은 상처를 주었다 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면서 이제라도 내가 크고 위대한 능력으로 그분께 영광은 못 돌려도 어린아이처럼 주님 사랑하고 그분의 마음에 근심은 되지 말아야지 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의 가장 큰 행복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것이고, 두 번째 행복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위대한 하나님과의 사랑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사랑을 받고 그분의 사랑 때문에 감격하며 자신의 삶의 전 영역에서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께 자신의 중심을 다 드리며 그분을 위해서 순결해지기를 힘쓰고 그분을 위해서 자신의 온 마음이 점령되기를 원하고 그리고 그분에게만 자신의 온 삶이 바쳐지기를 원하는 그런 독점적인 사랑의 소원을 가지고 주님 앞에서 사는 그런 성도들,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 사도 바울은 고린도서에서 말하기를 ‘누구든지 오래 믿은 사람이나 적게 믿은 사람이나, 신자나 불신자나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지니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크리스토퍼 러브’라고 하는 청교도는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를 회피하기 위한 유일한 도피 수단이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죄인들이 진노의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랑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우리의 의무이고 우리의 사랑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곧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우리를 위하는 것이라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삶의 전 영역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그런 백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세 번째 당부입니다. 너는 나를 섬기는 자가 되라. 우리들이 아무리 강퍅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이 정직하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주님이 그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구해주신 것은 천당 가는 티켓 하나 들고 이 세상에서 방탕하고 행복하게 살다가 죽어버리라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못 박혀죽으신 것은 절대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도 동의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여러분이 거듭난 신자라고 한다면 그런 망발에 가까운 생각을 할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값없이 우리에게 거저 주신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도 그리하고 때로는 광야와 같은 인생 길을 걸어가는데 있어서 하나님이 도우시는 사람도 어떤 때는 하나님이 열렬하게 회개하고 참회하면서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에 대한 보상으로 하나님이 광야와 같은 세상 길에서 도움을 주시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기도할 힘조차 없고 순종할래 야 순종의 길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들인데도 그들의 영혼이 멸망하는 것을 차마 보실 수가 없어서 하나님이 그 고통스러운 곳에서 건져내시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은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기도도 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바라보지도 않았기 때문에 좋은 일이 생겨났을 때 여러분들은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가소롭게도 아! 운이 참 좋았어. 아! 진짜 이번 주에 진짜 재수 대게 좋은데, 야! 그거 정말 요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말 마, 내게 찾아온 행운이 아니겠어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주님 앞에 도와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때만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길에서도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멸망하고 나면 여러분들이 뉘우치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아름다운 본분으로 돌아올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저는 만나의 사건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듭니다. 성경 어디를 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내일 만나를 달라고 기도한 구절은 안 나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만나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매일 그 만나가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 못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날마다 하나님 앞에 주님을 사랑하고 겸손하게 섬기면서 광야의 40년 길을 걸어왔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렇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하나가 있으면 그래도 그 이튿날 아침에 변함없이 만나를 내려 주실 만하지요. 어떤 것, 한날 동안 지은 모든 죄를 밤에 진실 되게 참회하므로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는 눈물로 쓰린 가슴을 안고 잠들었더라면 그 다음날 아침은 하나님이 죄는 미웠지만 뉘우치는 눈물로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셔서 그래서 새로운 만나를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어떠했든지 간에 심지어는 그 전날 밤 이방 신들을 섬기고 이방여자들과 간음을 하고 못된 짓을 하면서 불피우고 난리를 치고 술도 처먹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빠져 잤을 것입니다. 그리고 곤드래가 되어서 떨어진 그래서 그 새벽에 간신히 몸을 비틀고 일어나던 그 불순종의 한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매일 그날도 변함없이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이게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도우시는 그 일반적인 은혜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할 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여러분들이 하나님 얼굴에 침 뱉고 신발 거꾸로 신고 인생의 벼랑 끝으로 달려가도 하나님께서 가는 길에 넘어지지 않도록 보호하시고 하나님께서 지켜주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독한 마음을 품고 하나님 앞에 죄지은 그 이튿날도 하나님이 일용할 양식을 내려주십니다. 일주일 동안 그렇게 부실하게 살고 죄와 싸우기는커녕 가슴을 벌리고 죄를 환영하면서 그렇게 더러운 삶을 살았는데도 하나님이 그 주일에도 어떤 때는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인정하기 싫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지금 영적으로 너무 곤고 하고 인생의 벼랑 끝에 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사실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것도 은혜입니다. 한 대로 따지자면 여러분들은 이미 벼랑에 떨어져서 박살이 났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벼랑 끝이 몇 년 전에도 벼랑 끝이었는데 지금도 여전히 벼랑 끝입니다. 하나님이 다시 돌이킬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당신의 심판을 연기하시면서 어떻게 하든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악인이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돌이켜 다시 살기를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이 오늘 이렇게 나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의 빚을 지면서 여러분들이 지금껏 살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실 때는 반듯이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로 구원해주셨고 우리들이 살아온 우리의 일생도 광야와 같은 세상의 길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제껏 살았습니다. 여러분들이 그 은혜를 느끼던 못 느끼던 그것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오늘까지도 그 은혜로 붙들어주셨습니다. 뭐하시면서 살았습니까? 한번 가슴에 정직하게 손을 얹고 주님이나를 이 땅에 살려두시지 않으면 안될 만한 섬김이 우리에게 있는지 한번 물어보십시오.
저 좋아서 저 벌어서 저 먹고 그리고 자기 육신을 만족하기 위하여 심지어는 주일날 교회에 나오는 것도 자신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나오는 것이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이 아닙니까? 주일날 예배당에 나와서 꺼덕이며 졸면서 교만으로 예배를 드리고 간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섬김입니까? 예배를 향한 모욕입니까? 집사라는 이름이나 걸어놓고 공 예배도 제대로 나오지 않고 일주일이 지나도 교회와 목회자를 위해 단 한마디도 기도하지 않는 교인인 그 사람이 단지 집사의 직분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가 교회를 섬기고 있는 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까짓 것 주일날 내는 몇 푼의 연보가 여러분들의 섬김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은 여러분들로부터 적선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섬기고 있는 중입니까?
교인들은 많아도 교회는 언제나 일손이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 사람들, 그리고 이 자리에 하나님이나를 세워주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만 그 사명을 느끼고 그 사랑을 느낀다는 죄 하나 때문에 힘에 지나도록 성도들이 던지고 간 십자가를 짊어지고 교회에서 충성합니다. 뭐 하는 것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차가운 교회 바닥에 엎드려서 단 한번이라도 교회와 목회자를 위해서 교구의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서 치고 올라오는 추위를 견디면서 하루 밤을 새워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정말 남들이 모두 사라지고 난 그 예배당에서 성전 한 모퉁이를 몽당비로 쓸면서 하나님을 섬겨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들 중에 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치 공연장에 주일날 왔다가 사라지는 사람들처럼 호텔의 커피 숍의 로비를 이용하는 사람들처럼 우르르 몰려와서 연보 몇 푼 내고 그리고 다음 주에 다시 올지 말지도 모르는 마음으로 떠나갑니다. 그러고도 제때 집사 시켜주지 않으면 마음이 상하고 교회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면 심지어는 교회를 떠나겠다고 위협을 합니다. 떠나십시오. 여러분들은 내 양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염소지, 가십시오. 그것도 신앙생활이라고 합니까? 무엇을 하는 것이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들을 위해 모든 것을 주시고 그리고 자신의 피 한 방울까지 짜서 모든 것을 아까워하지 않고 섬기셨는데 무엇을 하는 것이 있습니까? 소수의 사람들은 여기서 만난 주님의 사랑 때문에 그 사랑에 매어서 넘치도록 섬겼습니다. 교회를 짓고 옮길 때도 그들은 생명을 바쳐 섬겼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렸습니다. 목회자가 좋아서도 아니고 교회를 지으면 무슨 보상이 주어져서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자기를 그렇게 섬겨주신 예수님 때문에 그리고 지금은 이름은 알 수 없지만 그렇게 자기를 돌보지 않고 힘에 지나도록 물질로 섬긴 이름 모를 성도들 때문에 내가 이 교회에서 주님을 만나고 새 삶을 찾았다는 그 사랑의 부채 의식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다 드렸습니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들은 아무 것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흘러가 버린 건축 이야기를 마음에 품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한 것이 있습니까?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과 그 은혜를 깊이 맛보고 그 사랑에 붙잡혔다는 그 죄 하나 때문에 여러분들이 팽개치고 간 그 무거운 십자가를 성도들은 짊어졌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알아주든지 알아주지 않든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아파트 경비원들에게 모욕과 창피를 당하면서 아픈 발목을 이끌고 예수의 복음을 전했고 그리고 힘써서 가르침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 무지몽매한 죄인들을 위해서 매일 눈물로 기도하며 그들이 오라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서 예수의 십자가를 전했습니다.
지금도 여러분들이 평안히 잠자는 시간에도 교회를 섬기고 있는 사람들의 발길은 그쳐지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평안하게 생활하고 있는 동안에도 교인들이 더 모이면 교회는 어떻게 하나. 교회를 짓기 위해서 지은 그 많은 부채는 어떻게 갚아야 하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이 교회가 그런 수많은 성도들의 피 어린 희생 속에 지어진 그 보람을 느낄 수 있어야 되는데, 여러분들이 모두 잠든 밤에도 밤잠을 이루지 못하며 뒤치는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성도들이 소수지만 있습니다.
뭐하셨습니까? 정말 여러분들은 그 별명이 섬기는 자입니까? 여러분들이 회사에서 사장일수도 있고 직장의 직원일 수도 있습니다. 가정의 주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을 기억해보십시오. 그 사람의 직업은 바벨론의 국무총리였습니다. 공사 다망한 생애를 보냈을 것이고 바쁜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간교한 간신 배들의 주청으로 다리오 왕 시절에 사자 굴에 던져졌을 때 그 좋은 충성스러운 신하를 사자 굴속에 넣은 것이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밤을 지새우다가 어린애처럼 새벽이 되자 사자 굴에 와서 다니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사신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항상 섬기는 하나님이 너를 지키셨는가 물었습니다. 다리오 왕 앞에서 다니엘은 사심이 없이 국사에 충실했지만 다리오 왕은 항상 한 분 앞에서는 그분을 생각하면 소외감을 느끼고 질투를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국무총기가 되어서 자기가 그를 그렇게 총애해주었는데도 그는 자기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국무총리였지만 그는 사신 하나님을 섬기는 종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이 열심히 사업해서 밥 벌어먹고 죽은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렇게 큰 상급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도 여러분들이 이중 장부나 쓰고 안 믿는 사람처럼 비윤리적으로 기업을 운영한다면 그렇게 밥 벌어먹은 것 때문에 하나님께 심판 받습니다. 그것도 정직하게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질서 속에서 의롭게 그 사업을 했을 때 겨우 본전입니다. 문제는 여러분들이 사업을 하고 직장을 다녀서 끼니를 이어간 것이 하나님 앞에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하나님은 교회에서만 섬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어째든 여러분들이 어떻게 있든지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았는가 그것에 의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심판하시고 여러분들을 하나님께서 대우해주십니다.
여러분들은 이 교회에서 생활하면서 불편한 것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별로 없이 생활하셨을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직원들은 밤을 새는 날이 많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여러분들이 버리고 간 그 많은 쓰레기, 망가트리고 간 교회의 기물들, 어지럽히고 간 모든 집기들, 심지어는 쓰레기통 하나 비우지 않고 지나간 더러운 공간들, 그것을 여러분들을 책망하지 않고 섬김의 정신으로 교역자들이 직원들이 치우고 불편하다는 이야기가 인터넷에 한번만 올라오면 없는 돈이라도 갖다가 고쳐놓고 새로 비치해서 그렇게 여러분들을 섬겨왔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열린 공간에서 자매들이 왜 깊은 밤까지 일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새벽부터 나와서 김밥을 만들고 식당에서 그렇게 성도들이 밥을 하고 직원들이 교회를 단장하고 그렇게 하는지 압니까? 여러분 새사람 되라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가 무슨 호텔입니까? 열린 공간에서 커피 한잔을 타고 도서관에서 책 한 권을 빌려주고 퀴즈랜드에서 아이들 데리고 한번 뛰어 놀아도 궁극적으로 그 모든 섬기는 사람들의 소원은 여러분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커지면서 이제는 섬기는 사람들이 너무나 소수가 되었고 섬김이 모자란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의 수많은 사연들이 교회에 들어옵니다. 어떤 때는 제가 착각에 빠집니다. 내가 무슨 호텔의 사장인가. 이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이기에 자신들은 섬기지 않고 주일날 왔다가 가면서 뭘 요구하는 것이 이렇게 많은가. 쓰레기통이 입을 벌리고 쓰레기를 다 토해놓아도 그 위에다가 깡통이나 먹은 것을 버리고 지나가는 사람이 바로 교인들입니다.
여러분, 정말 주님이 우리에게 왜 이렇게 꿈과 같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이 구원의 세계로 우리를 보내셨습니까? 그렇게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그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를 대속 했음에도 불구하고 죄가 많고 유혹이 많은 이 세상에 아직까지도 살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주님도 우리와 함께 교제를 나누고 그 사랑을 받으시면서 계시는 것이 행복하심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주님의 사랑에 눈물 흘리는 우리들을 등 밀어서 어두운 세상에 할 일 많은 이 세상에 우리를 보내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어떻게 하든지 이렇게 고통스럽고 할 일 많은 세상에 주님 섬기고 예수님 위해서 살게 하시려고 주님이 우리를 그 큰 은혜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내어보내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무엇인가 섬기면서 살아야 합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하나님, 언제든지 하나님이나를 데리고 가실 수 있고 언제든지 제가 죽어야 하지만 제가 지금 여기 살아있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내게 맡기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고백이 있으신 분은 한번 여러분 마음속으로 손을 들어보십시오. 정말 있습니까? 하나님 제게 맡겨주신 이 섬김 때문에 저도 주님께 빨리 가고 싶지만 조금 더 살아야 되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한 바와 같이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내게는 더 좋으나 너희를 위해서는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더 낫다. 그것이 없는 사람들은 정말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그 큰 은혜를 뜨겁게 안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이 없겠습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지금 없다면 여러분들이 주님을 못 만났다든지 아니면 주님을 만나서 예전에는 주님의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사명을 가지고 살았지만 여러분들의 마음에 어두움이 찾아오고 타락했기 때문에 주님의 그 사명을 잃어버린 것이지 어떻게 없을 수가 있습니까?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그 사명이 모두 완수되었거나 끝난 사람들은 하나님이 데리고 가십니다. 폐기처분 하십니다. 남겨두시면 뭐하겠습니까. 자리만 차지하지, 데리고 가십니다. 정말 한번 가슴에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니까 뭐가 없는가 하면 가슴에 사무치는 기도제목이 없는 것입니다. 사명이 없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입니다. 사명이 없으니까 가슴에 사무치는 기도제목이 없습니다. 내가 기도시리즈 하면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지금 여러분들에게 주님이 즉시 오셔서 너 내가 너에게 기도 제목을 들어주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기도제목이 뭐냐고 말할 때 나는 여러분들 중에 몇 명이나 즉시 하나님, 제 가슴에 피가 맺히도록 새겨진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지 나는 궁금합니다. 에, 또, 지금 잘 생각이 안 나는데, 여러분, 그것을 가리켜서 성경은 아주 간단하게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의 삶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뭡니까? 그것이 큰일일 필요는 없습니다. 하다못해 새 신자 하나 붙들고 7주 동안 양육하면서 그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는 일이라도 좋습니다. 열린 공간에 자매들처럼 김밥을 말고 커피를 타는 일이라도 괜찮습니다. 모두, 누구도 사람을 섬긴다고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중입니다. 정말 여러분들에게 그런 사명이 있습니까?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고, 기도하기를 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섬김, 나를 세워주신 그 자리가 너무나 소중해서 내 마음에 있는 예수님을 향한 진실한 이 섬김의 현장을 편지지 삼아서 나의 이 핏빛 삶으로 써야지 되겠다 라고 하는 그런 것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예 제직회가 없으니까 그렇습니다만 오늘 조국 교회를 한번 보십시오. 집사라는 사람을 세우면 뭐합니까? 제직이 400명인데 제직에 나오는 사람이 5-60명도 안됩니다. 뭐 하러 집사는 하겠다고 손을 듭니까? 아무 것도 섬기는 것이 없고 마치 극장을 이용하는 사람들처럼 주일날 밀물처럼 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관람료를 내듯이 몇 푼 연보를 던지고 가는 그것이 정말 주님을 섬기고 있는 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나가는 사람들이 삶의 현장에서 사도 바울처럼, 그리고 다니엘처럼, 그리고 미가 선지자처럼 그렇게 처절하게 죄와 더불어 싸우면서 하나님 섬기면서 살수 있는 것입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입고 그리고 구원의 반열에 들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여러분들이 어디에 있든지 어떻게 살든지 간에 주님 앞에 간절히 기다리고 매달리면 그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는 특권을 여러분들이 받았습니다. 그 모든 하나님의 축복은 여러분들이 주님을 섬기며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교회는 좀 낫다고 하지만 아직까지도 주일 학교로 내려가면 돌볼 선생들이 없어서 돌봄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영혼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렇게 하나님 앞에 인색하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물질이 있는 동안에 주님이 자신의 전부인 것처럼 그렇게 드리고 시간이 있을 때 그 시간을 하나님 앞에 기쁘게 드리고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예화: 어느 목사님이 불치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는 어느 자매에게 전도를 해서 주님을 영접하여 자매가 주님의 은혜를 알게 된 가운데 은혜를 받은 자신이 섬기고 싶은 데 무엇으로 섬길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자기가 알고 있었으나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의 40명의 명단을 적어놓고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중보 기도했는데 놀랍게 도 그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 구원받고 마음이 열려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는 중 이었다는 이야기)
여러분, 돈이 없다고요, 별로 특별한 재능이 없다고요, 나이가 너무 많아서 늙었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젊고 돈 많고 능력 있고 싱싱한 사람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주님은 언제나 당신을 섬기는 사람들을 가까이 하십니다. 그래서 여기서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충성스러운 삶입니다. 여러분들이 모세를 기억해보십시오. 그 사람은 정말 충성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일평생 그를 가까이 하시면서 친구처럼 대면하는 특권을 만드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목마르게 그리운 사람들이 누군지 압니까? 충성스런 사람들,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 자신에게 부여된 그 섬김에 생명을 건 사람들, 자기가 세워진 그 자리에서 쓰러져 혹은 돌처럼 굳어져 화석이 될지라도 그 섬김의 자리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비바람을 맞으면서도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섬기겠노라고 다짐하는 그런 사람들, 너무나 많이 그리워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우리에게 이 큰 구원과 은혜의 축복을 주신 것은 이렇게 항상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께 충성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이런 놀라운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순종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키도록 다시 한번 모세가 당부하고 있는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그 큰 은혜와 사랑을 입었으니까 이제는 이 순종하는 삶으로서 이제까지 깨달은 모든 말씀에 인을 치시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순종은 결코 과한 것이 아니고 불순종하면서 걸어갈 때에 필연적으로 우리들이 맛보게 될 쓰라린 고통과 아픔에 비하면 순종하는 대 따르는 고통과 희생은 너무 가벼운 멍에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그렇게 잘 순종해서 결국은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 주님이 주신 그 성화의 영역 안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하나님이 원하고 계십니다. 탐욕과 거짓을 버리고 날마다 진실해지기를 사모하며 주님의 사랑과 그 은혜 안에 거하면서 사는 아름다운 삶,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와 그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그 앞에서 살아가는 진실한 삶, 이것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정말로 원하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불순종하고 주님을 거스르면서 살아가는 삶이 잠시는 달콤하지만 그 후에 얼마나 쓰라린 영혼의 고통과 그리고 스스로 벗을 수 없는 무거운 멍에를 지고 살아야 되는지는 여러분들이 이제껏 까지 불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경험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는 여러분 모두가 빛 가운데로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함께 손에 손을 잡고 진리와 그 은혜의 빛 가운데 살면서 날마다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서로를 격려하고 혹시 우리의 부족이나 죄악이 있으면 함께 기도하고 참회해서 자기 깨어짐 속에서 새로운 은혜를 힘입고 그래서 미력이나마 주님이 부르시는 날 동안에 주님을 섬기고 영혼들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우리 자신을 주 위해서 사용하며 그렇게 사는 정말 아름다운 성도들로서 우리들이 주님 앞에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6. 불순종할 백성을 구원하심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열조와 함께 자려니와 이 백성은 들어가 거할 그 땅에서 일어나서 이방 신들을 음란히 좇아 나를 버리며 내가 그들과 세운 언약을 어길 것이라(신31:16)”
오늘 이 말씀도 역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남기는 유언적인 설교와 그때 나타나셨던 하나님과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모세의 유언 중에서도 끝 부분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섬김이 끝나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통고하셨습니다. “너는 이제 죽어야 된다. 그러니까 이미 너에게 이야기했듯이 너의 후계자인 여호수아와 함께 내 앞에 나와서 내 말을 들어라” 쉽게 이야기하면 광야 교회의 담임목사가 갈리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때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이 이 두 지도자의 가슴에 칼을 꽂는 것같이 정말 아픈 이야기로 시작됐습니다. 그것은 “너희들이 이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고 모세는 여기에서 죽어서 열조와 함께 묻힐 것이다. 그런데 그 가나안에 들어가서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너희에게 이야기 해주겠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결국은 하나님을 버리고 방탕한 길로 떠나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는 것으로서 그 두 지도자의 임무 교대 식의 인사말씀을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모세와 여호수아 두 사람 사이에 오갔던 마음에 교차하는 감정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두 사람이 같이 아파하면서 종류가 좀 달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선 모세의 마음에는 백 이십 세가 되도록-길게 보면 팔십 년의 긴 세월을, 짧게 보면 사십 년의 세월을- 이 민족만을 위해서 살아왔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자기 동포를 위해서 살아왔습니다. 물론 동포들이 자기를 해방자로 불러준 것은 아니라고 해도 주님께 소명을 받았고, 그 주님께 충성한 생애였지만 구체적으로 주님께 받은 소명은 자기의 동포들 속에서 나타났습니다. 정말 그 민족을 사랑했고 구약에서 머리가 숙여지는 커다란 인물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은 이 모세에 대해서 상당히 긴 부분을 할애하며 믿음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받기를 애굽에 있는 모든 보물을 누리는 것보다 더 낫게 여겨서 고난의 길을 간 믿음의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절한 광야생활 연단의 40년 섬김 동안에 편안하게 눈 한번 붙일 사이 없이 모세의 생애는 전부 그 백성들을 위해서 소진한 생애였습니다. 그런 지도자가 성경에 거의 없었는데도 그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주 근본적으로는 모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이 모세를 싫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광야의 40년 동안 외국과의 끊임없는 전쟁에 시달려야 했고 자기 손으로 주님의 능력을 좇아서 애굽에서 건져내 온 그 백성들로부터 끊임없이 도전을 받으며 고달프기 짝이 없는 긴 세월을 보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보면 모세에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시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그의 분냄 같은 것 때문이었지만 더 깊은 하나님의 섭리에서 보면 그렇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않고 가나안을 앞두고 그를 데려가신 것은 모세를 위한 하나님의 위로였다고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생스럽게 40년의 사역을 했는데 마지막에 주님께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이 “조금 있으면 그 백성들이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나를 버리고 이방 신을 음란히 섬기면서 나와 맺은 언약을 짓밟을 것이다”였을 때 늙은 모세의 마음은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을 때 여호수아의 마음에 밀려들었던 아픔은 모세와 동일한 것이었지만 방향이 조금 달랐을 것입니다. 모세는 회고의 아픔을 경험하면서 열조에게로 돌아가는 심정이었다면 이 여호수아는 앞으로 예상되는 이 백성들의 완악함과 하나님을 떠나는 음란함과 불순종, 그 전망은 바로 자기가 지도자로서 이 백성들을 이끌고 살아야 할 그 때에 일어날 일들이었기 때문에, 아마 모세처럼 카리스마적이지도 않고 모세처럼 강력한 능력을 가진 사람도 아니고 권위면 에 있어서는 더더군다나 모세와 비교도 안 되는 이 여호수아가 짊어져야 할 영적인 부담이라고 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시종일관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하셨습니다.
이 때는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발한 이래로 이례적으로 신앙이 좋았던 때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 좋은 신앙의 껍데기 속에서 그들 속에 아직까지도 깃들여져 있는 이런 하나님을 거스르는 불순종의 씨들을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형통하게 되면 하나님을 버리게 될 것을 하나님은 보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의문을 하나 갖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뭐 하러 그 사람들을 애써서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시나’ 하는 의문입니다. 그런 어두운 전망 밖에는 없는데 하나님은 왜 그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시는 것입니까?
여기에서 두 가지로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유는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의 성격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가서 하나님 섬기는 신앙의 깃발을 높이 꽂고 의롭고 하나님께 사랑 받는 백성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백성들이 들어가서 살아갈 때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신들을 좇고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을 어길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그들을 가나안에 보내주신 것은 구원에 있어서 은혜적 성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당신이 요구하는 대로 충분히 살아드리지 못해도 하나님께서는 전지 전능하시기 때문에 그것을 다 아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게는 미래, 과거라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라 과거에는 현재를 몰랐고 현재에는 과거가 잘 기억이 안 나고 미래는 전혀 모르지만 하나님은 한번에 모든 것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는 영원히 현재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모두 당신을 거스를 것을 아시면 서도 그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그 백성들을 인해서 그렇게 불순종하고 살면서 마음 아파하시고 그 백성들이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가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아파하신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하나님을 전혀 모르고 멸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그들을 은혜로 구원해주시는 광경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고 주님께 불순종하면서 이방의 신들을 섬기며 사는 것을 하나님이 지켜보시는 것이 얼마나 마음 아프셨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지켜보시는 것이 마음이 많이 아프셨다고 할지라도 애굽에서 노예로 비참하게 하나님도 모르고 죽어 가는 것을 바라보는 것보다는 덜 아프셨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적용을 시켜보자면 여러분들이 구원받고 하나님 앞에 잘 못살고 불순종하고 심지어는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면서 하나님의 마음은 정말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실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진실한 참회가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그렇게 가슴 아파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쇠같이 굳은 얼굴로 돌 같은 가슴을 안고 시련과 고난을 당하면서도 두려움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은 그렇게 구원받고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지 않고 살아가는 여러분을 보시면서 마음 아프시지만 ,여러분들이 구원받지 못한 채 짐승처럼 이 세상에서 예수님도 모르고 살아갈 때에는 주님의 마음이 더 많이 아프셨다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하나님의 사랑이 그 교회 안에 있는가 하는 것은 수재의연금이나 몇 푼 내고 경로잔치나 몇 번 해주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이렇게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서 멀어진 채 살아가고 있는 이 비참한 영혼들에 대해서 얼마나 아픈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 그 교회가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이고 그것이 곧 그 교회의 영성의 척도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보시면서도 하나님이 너무 마음 아프십니다. 그러니 구원받지 못한 이 세상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구원해놓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당신의 뜻을 따라서 당신의 이름을 드높이지 못하는 삶을 사는 것을 인해서도 주님의 마음이 찢어지리만큼 비통하시다면 하나님의 이름도 모르고 예수님이 왜 이 세상에 내려오셨는지,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자신들의 불순종과 죄를 짊어지고 엄위하신 주님의 심판에 복종하셨는지, 그래서 자기의 몸을 으깨어서 우리를 위한 화목의 제물이 되셨는지, 아무 것도 모르는 채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주님이 없는 이 세상의 백성들을 보시면서 주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저는 생각합니다. 교회가 그 영혼들을 위해서 더 많이 울고 순결해지면, 정말 그 수많은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커다란 은혜를 그들에게 베푸실 것입니다.
넘치소서 은혜와 긍휼을 열방 중에
비추소서 빛 되신 주의 말씀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너무 개인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공동체적인 성격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지체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지체들뿐 아니라 한번 더 나아가서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에 대한 주님의 뼈저린 아픔을 이해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0장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밖에 내 양들이 있어서 그들도 인도하여 함께 있어야 할 터인즉”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신 것을 그래도 후회하지 아니하시고 이런 전망이 눈에 보이는 데도 그래도 그 애굽의 치하에서 그 백성들을 이끌어내어서 주님이 약속하신 대로 그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님 앞에 끊임없이 범죄하고 하나님 앞에 그 언약을 어기고 불순종하며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하나의 공동체적인 현상입니다. 하나님이 공동체 전체적으로 보시면 이렇게 언약을 배반하고 이방 신들을 음란히 좇고 하나님의 계명에 불순종하지만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 모두를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두시는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이것이 구약에서 이야기하는 ‘남은 자 사상’입니다. 그러니까 그 남은 자는 항상 하나님의 새 역사의 종자 씨가 되는 것입니다.
(예화: 시골에서 추수하지 않고 남겨두는 열매는 씨를 받으려는 것이다)
그것이 남은 자, 혹은 남은 백성 사상입니다. 그 남은 자들을 하나님께서 항상 남겨두십니다. 두가 남은 자가 될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떻든 그 시대에 유행하는 대중적인 불신앙을 따라가지 아니하고 오히려 소수가 되고 그 시대에 따돌림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물려받은 참된 신앙을 간직하면서 진리의 말씀대로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나 안보는 곳에서나 살아 계신 하나님의 면전에서 몸부림치는 사람을 그 남은 자의 종자 씨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호박밭에는 호박씨를 심어야 호박을 거둡니다. 씨도 안 뿌리고 무슨 종자 씨를 거두겠습니까? 그러니까 일단 뿌려보시고 그 중에서 종자 씨를 거두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저히 이 백성으로서는 당신 자신을 사람들에게 알릴 수가 없고 이 백성들을 통해서 알려지는 당신 자신에 관한 지식에 관해서 당신이 도저히 동의할 수 없을 정도가 되면 하나님이 청산하시는 것입니다. 종자 씨만 남기고 다 쓸어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종자 씨로 다시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들을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시 그들의 악이 성해서 불법하고 방종하게 되면 하나님이 다시 종자 씨를 모으십니다. 그 종자 씨를 모으시는 과정을 다른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을 심판하시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이 위대한 구원의 역사는 다수의 사람들을 따라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그 종자 씨처럼 남은, 그 시대에 물들지 않은 순전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서 전수되고 전수되면서 내려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통일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저도 속히 그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통일이 되면 북한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들 하는데 저는 참 걱정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북에는 교인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들은 그야말로 치열한 추수를 통해서 마지막 남은 종자 씨들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거의 40년대 중반에서 멈춘 순수한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 엉터리 같은 신자들이 교회에 헌금이나 좀 있다고 까불고 올라가서 교회를 세운다고 할 때 아직 멀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정치 전문가는 아니지만 목회자로서 신학자로서 신학적이고 성경적인 입장에서 이 역사를 제 나름대로 해석하라고 한다면 통일 안 되는 것은 여러분 신자들 때문입니다. 이 상태에서 만일 통일이 되면 백두산에 카바레 짓고 금강산에 콘도 짓는 것 밖에는 일어날 일이 없습니다. 도와준다고 하는데 그런 소리하지 마십시오. 저는 이북 사람이 쓴 편지도 받아보았고 중국 공산당 치하에서 그렇게 혹독하게 고난을 받으면서 핍박을 견딘 사람들의 고백도 들어봤습니다. 그런데 아주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북에는 세속적인 신앙은 없습니다. 세속과 접할 수 없으니까, 신자는 분명한 신자이고 불신자는 불신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도 40년대의 주님께서 구름 타고 오시리라는 신앙,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욕을 당했으니 우리도 주를 위해서 욕을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는 십자가 신앙, 일제의 핍박을 이기게 만들고 공산 치하에서 변절하지 않도록 만들었던 그 종말 신앙과 십자가 신앙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남한에 내려와서 처음에는 감탄할 것 같습니다. 상상할 수 없이 엄청나게 큰 교회, 그리고 교회가 누리고 있는 이 엄청난 부, 몰려드는 그 수많은 인파들을 보면서 입을 벌리며 부러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잠시 시간이 지나서 그들은 깊이 실망할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기독교 신앙일 수 있을까’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일제시대의 박해를 통해서 이북이 공산화되게 만드셨는지 그것을 정확하게 해석하기는 어렵지만 많은 한국교회의 목사님들은 두 가지 점에서 거의 합의를 보았습니다. ‘일제 36년의 치욕스러운 커다란 박해의 역사는 선교사들의 피를 흘린 까닭이고 공산침략으로 그렇게 거룩했던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일컬어지던 평양이 모두 점령당하고 붉은 깃발이 나부끼게 된 것은 신사참배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고 합니다. 그 역사에 대해서 동의하는 사람도 있고 안 하는 사람도 있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주님이 그렇게 그 땅을 심판하시며 키질을 하시면서 날려버리신 이후에 지금은 아주 순결한 종자 씨들을 거기에 감추고 계시는 것입니다.
저는 오히려 반대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입증되겠습니다만 모르기는 몰라도 이북에서 기독교 지도자들이 많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아마 남한의 교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또 그렇게 되는 것이 적어도 남한의 교회가 북한에 영향을 주는 것보다는 영적으로는 훨씬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그런 종자 씨를 남기시기 위해서 그 타락할 것을 아시면 서도 그 백성들을 거기에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런 종자 씨는 언제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여호수아와 갈렙 같은 사람이 그런 종자 씨였고, 광야에서도 그런 종자 씨였고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에도 변함없이 그런 종자 씨로 남은 것입니다.
그래서 시대가 다 변해서 이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고 방탕하고 이방 신들을 섬기는 상황이 대중적인 신앙이 되었는데도 칼날 같은 양심을 가지고 노구를 이끌고 그들 앞에 선 여호수아가 그 노령에도 불구하고 쩌렁쩌렁 울리는 음성으로 “오늘날 너희는 섬길 자를 택하라. 여호와냐 저희 조상들이 광야에서 섬기던 그 이방 신이냐. 그러나 나와 내 집은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하는데 이것이 종자 씨의 신앙입니다.
인간풍조는 나날이 갈리어도 나는 내 믿음 지키리니
인생 살다가 죽음이 꿈같으나 정령 내 꿈은 참되리라
나의 놀라운 꿈 정녕 나 믿기는 장차 큰 은혜 받을 표니
나의 놀라운 꿈 정녕 이루어져 주님 얼굴을 뵈오리라
우리는 구원받은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종자 씨가 되어야 합니다. 그 종자 씨가 되지 않으면 어떤 의미에서 구원도 너무 허망한 것입니다. 계속 불순종하고 짐승처럼 살아가는데 구원받았으면 뭐합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그렇게 뜨겁게 사랑하셨는데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압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그에게 긍휼을 베푸시는데 그 짐승이 긍휼을 아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그렇게 섬김을 받고 싶어하시는데 그 마음을 아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말씀 드리지만 구원받는다고 해서 다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No holiness no happiness’ 거룩함이 없이는 행복도 없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가나안에 들어가면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버릴 줄 아시면 서도 하나님이 그들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런 종자 씨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많기도 하고 거의 사라지기도 하는 이유는 그 교회의 신앙과 영적인 상태에 따라서 다른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그들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신앙생활하고 충성스럽게 살았나 하는 것들이 입증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든지 교인들을 잘 돌보고 그 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분투하면서 피나게 노력하면서 정말 마음을 지키며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하면 종자 씨들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부패하면 떨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 없어지게는 안 하십니다. 없어지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전달해줄 자들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그렇게 안 하십니다. 그래서 어느 시대든 교인들이 다 잠들어있는 시대는 없습니다 깨어있는 소수가 항상 있습니다. 많을 때는 많은 사람을 통해서 적을 때는 적은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이 캄캄한 세상에 빛으로 비추게 하셔서 그들을 주님의 백성으로 돌아오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런 종자 씨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크게 두 번째로 그들이 하나님을 버린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긴 것입니다. ‘언약’을 말할 때 염두에 두는 것은 시내 산에서 모세를 중보자로 해서 맺은 옛 언약입니다. 그 언약 속에서 율법이 주어지는데 그 율법은 다시 의식법과 민법과 도덕법으로 나뉩니다. 그런데 그것은 구체적인 실천사항이고 그 실천 사항 말고 그 모든 것들을 하나로 집약하는 하나님과의 언약은 “너희가 이하의 율법의 말씀을 잘 지켜 순종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하는 약속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그러면 지켜야만 겨우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말인가’하는 의문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해도 누가 여러분에게 구원받은 사람답다고 말해주는 것은 주님을 한번 영접했어도 짐승처럼 살면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그렇게 주님의 사랑 받는 자녀요 주님이 물고 빨지 못하셔서 안타까워하시는 자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사랑 받는 사람들은-그 표가 다른 사람에게까지 드러나는 사람들은- 특별한 순종의 삶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말하자면 “너희는 내 백성이지만 그러나 이하의 율법을 잘 지키면서 살면 너희는 내 백성다운 백성이 되고 그리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된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드러나도록 보여주겠다”는 것이 하나님과의 언약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깨트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보고 그들이 당신과의 언약을 깨트렸다고 생각하신 것입니까? 그 백성들이 ‘나는 하나님의 백성 되기 싫습니다’ ‘하나님은 이제는 우리 하나님이 되지 마세요’하면서 하나님께 항거한 백성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나와의 언약을 깨트렸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을 통해서 그들이 그런 하나님과의 관계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이미 입증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남편과 아내가 살고 있는데 둘이 혼인의 정절을 지키며 살기로 서약을 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한번도 ‘당신의 아내 되는 것도 싫고 당신이 내 남편인 것도 용서할 수 없어’라고 말한 적이 없다고 하더라도 나가서 바람을 피우고 부정한 짓을 한다면 그것으로서 이미 부부관계로 살기 싫다고 하는 것을 입증한 것입니다.
똑같은 논리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어김으로 말미암아서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이 그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싫다고 하는 것을 입증하고 드러낸 것입니다.
여러분 중 교리적인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이런 의문이 떠오를 것입니다. ‘인간은 도저히 율법을 지킬 수 없다고 했는데, 이들이 율법을 지킬 수 없는 것은 이들에게 그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은혜를 하나님께서 안 주셨기 때문이고 율법을 모두 지킬 수 있었다면 그리스도가 오실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 결국은 그리스도가 오시려면 누군가는 율법을 어겨야 했고, 그렇다면 이 백성들이 율법을 어긴 것이 어떻게 하나님을 향해서 “당신은 내 하나님 되지 마십시오. 나도 당신 백성 되지 않겠습니다”라는 의사표시가 될 수 있습니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지키는 문제에 대해서 가지고 계시는 시각은 관점 자체가 인간 안에 있는 율법을 어길 수밖에 없는 부패성과 같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지금 경건한 백성으로서 살려고 노력하는데 율법을 못 지킨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율법을 어긴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시편 78편에 나오는 아삽의 시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시인은 “나는 아침마다 징책을 보나이다”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썼는데 아침마다 말씀을 펴면 하나님께서 혼내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물론 죄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쓰는데 인간이 가지고 있는 나약함과 율법을 어떤 방법으로 사용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큰 섭리 안에서 나타나는 문제점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언약을 어긴 것이 구체적으로 두 가지인데 ‘나를 버린 것’과 ‘이방 신들은 섬긴 것’입니다. 그래서 “일어나서 이방 신들을 음란히 좇아 나를 버리고”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 두 가지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불순종하며 살아가는 그들의 삶 전체를 지배하는 정신이었던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이방 신들을 음란히 좇으며 나를 버린 것과”는 연약해서 짓는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도 새벽기도 하려고 애를 쓰는데 육신이 너무 약해서 1년을 살고 나서 보니까 빼먹은 날도 많고 하나님 앞에 죄송합니다. 이것은 허물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신을 좇아가며 음란히 하나님을 버린 것은 그런 종류의 허물이 아닙니다. 주님 앞에 충성스럽게 살고 싶고 자기를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그렇게 충성스럽게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을 드리고 마음을 드리고 물질을 드려서 충성스럽게 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모난 성격 때문에 함께 동역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도 하고 애를 썼는데도 지혜가 모자라서 하나님의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지 못하고 그르칠 때도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연약함으로 인한 허물입니다.
(예화: 새벽 기도 끝나고 절대로 올라가서 자지 않는다. 응급실 실려갈 정도가 아니면 취침 시간과 상관없이 새벽기도에 나온다)
(예화: 교회 지을 때 하얀 침대에서 이틀만 자는 것이 소원이었다-하늘 나라에서 하고 싶은 것 세 가지는 찬송하는 일, 두고 온 열린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일, 자는 일 이다)
민방위 훈련 통지서 들고 새벽길 걸어가는 사람들 보셨습니까? 새벽마다 하나님께서 비상소집 하신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러나 ‘도저히 나올 수 없다. 하나님이 이해하셔야 한다’하며 기도 안 하기로 뜻을 세우는 것입니다. 심하면 ‘때려 죽여도 못해’합니다. 그것은 연약함이 아니고 불순종입니다. 연약해서 이방 신을 섬기게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이방 신을 더 열렬하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저 신을 사랑해야지’하고 의지적으로 결심을 하고 그 이방 신을 향해서 달려가서 그 더러운 품에 덥석 안긴 것입니다. 그것이 연약함입니까?
히브리 성경과 번역 성경에 보면 복수로 나옵니다. 하나님을 향해 따라가는 신앙에는 일관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일단 하나님을 버리고 나면 하나님 이외에 어느 하나를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모든 것은 다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돈 좋아하는 사람이 권력을 싫어합니까?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이 부를 싫어합니까? 부를 좋아하는 사람이 쾌락을 싫어합니까? 하나님께 속한 것 빼놓고는 다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이방 신을 따라갔는데 따라간 신들이 다 제각각 입니다. 이방 신들을 섬긴 것에 있어서 일관성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아세라신을 섬기는 사람, 몰랙 신을 섬기는 사람, 바알 신을 섬긴 사람, 바알의 집안에도 관계가 보통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중구난방으로 섬기는데 사람마다 각각 음란하게 자기 신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를 많이 받고 순종하며 살 때에는 사랑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랑은 주님을 향한 그 사랑에 예속되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관계없는 것들은 관심에서 점점 멀어집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하나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불순종하기 시작하면 사랑하는 것이 하나가 아니고 자기도 뭘 사랑하는지 모릅니다. 확실히 아는 것 하나는 하나님을 안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관계없는 것들은 그렇게 좋은 것입니다. 그 삶을 가리켜서 음란한 삶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성경에 ‘자나’라고 나오는데 그 원래의 의미는 이스라엘 남자들이 이방 여자와 몸을 섞는 창기의 행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인 간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순결함과 정직함보다도 더 뛰어난 가치가 있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그 순결함과 정직함이 궁극적으로 사랑이라는 뿌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언제가 제가 순결에 대한 정의를 묘사했었습니다. 순결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자기 자신의 내면의 세계가 가득 차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순결이 있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순결이라고 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보다 더 뛰어난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고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순결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사용하지 않으시고 또 사용하신다고 하더라도 그 사용하시는 것은 당신 자신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예화: 두 개의 그릇이 있는데 하나는 질그릇인데 깨끗하게 씻었고 다른 하나는 금 그릇인데 개밥그릇을 했던 그릇이라면 금 그릇에 밥을 말아먹겠습니까, 질그릇 에 밥을 말아먹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사용하시고 그 사용하시는 사람과 갖고 있는 원리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마지막에 그것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언약을 어긴 구체적인 삶 또 하나는 ‘하나님을 버린 것과’입니다. ‘아자브’라고 하는 단어인데 ‘떠나다’고도 묘사가 됩니다. 이 단어는 창세기 2장에 보면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합하여”라는 구절의 ‘아자브’인데 ‘떠나다’ 혹은 ‘버리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리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버린다’는 말의 반대는 ‘하나님과 부종 하여 있다’ ‘다바크’입니다. 하나님과 연합되어있는 상태입니다. 그것이 버린 상태의 반대입니다. 하나님을 부종하고 하나님과 연합된 ‘다바크’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삶의 궁극적인 특징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정서가 가득 차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삶이 바로 하나님과 연합된 삶이고 그 연합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적인 영향력들이 신자의 영혼 속에 흘러 들어오는 것인데 그것은 결국 신약시대에 가서 성령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의 정반대가 하나님을 버린 삶입니다.
하나님을 버린 사람의 특징은 불순종하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범죄 하는 일에 대해서 담대함을 가지고 있어서 죄와 하나님을 동시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버린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구원해내시고 그것이 눈에 다 보이는 데도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위해서 가나안 땅을 주신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들을 당신을 배반할 것이 뻔한데도 하나님은 그들과 하신 약속을 하나도 어기지 아니하시고 그대로 지키실 것을 하나님이 작정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래도 그 백성들을 거기에 심으셔서 종자 씨를 거두시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깊이 생각하십시오. 어떻게 하시렵니까?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대부분 불에 태워서 없어지는 작물들이 되어버리시겠습니까, 아니면 주님 손에 마지막까지 추수되어서 남겨진 종자 씨가 되시렵니까? 여러분들이 어떻게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며 주님을 순전히 사랑하고 주님께 부종하며 그분께 순종하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7. 불순종하는 백성들을 향한 진노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그 재앙이 우리에게 임함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뇨 할 것이라(신31:17上)”
우리들이 아무리 성경을 배우고 기도하고 진지하게 진리가 무엇인지를 탐구한다고 할지라도 이 세상 끝날까지 다 알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지금 모처럼 만에 신앙이 아름답게 고조되어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시면서 그들의 타락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그들의 손에 붙이시고 그들이 그 가나안 땅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시겠다고 약속해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끊임없는 반역으로 주님의 오래 참으심을 방종의 기회로 삼고, 주님의 사랑을 타락의 기회로 삼을 것이었지만, 주님은 당신이 약속하신 것을 이 불신실한 백성들에게 신실하게 갚으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그러셨어야 했을까 하는 것이 지난주에 설교 속에서 다루었던 내용입니다.
오늘은“그 때에 내가 너희에게 진노하여”하십니다. 그들을 사랑하신 것도 사실이었고 또 진노하시는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두 개의 정서는 사랑, 그리고 그 사랑하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이것으로 사랑도 진노의 불을 끄는 것이 아니고 진노도 사랑의 불을 끄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하나님의 한 인격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이 진노는 변형된 사랑이 표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이 격정에 사로잡혀서 분노하는 것을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택한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사랑의 변형된 표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이것을 더 노골적으로 묘사하신 부분이 “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하신 것입니다. 성경의 어디에서도 이 ‘질투’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곳은 없습니다. ‘투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신이 당신을 가리켜서 “나 여호와는 질투-투기-하는 하나님이라”고 스스로 자칭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게 될 때 우리는 투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3장에서 “사랑은 투기하지 아니하며”했습니다. 왜 그러냐하면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다면 그것은 세상도 없고 나도 없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독점적인 사랑입니다. 그래서 저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다고 해서 내가 그 사랑 때문에 시기가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만 사랑한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니까 독점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때에 사람은 투기하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고 말씀하실 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받고 싶으신 사랑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독점적인 사랑을 받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진노하시도록 내버려둘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면 그 하나님이 진노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보여주시는 그 진노는 성경 속에서 사랑만큼이나 다양하게 묘사됩니다. 왜냐하면 진노는 사랑만큼이나 인간들에게 직접적으로 가슴에 와 닿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반응이시기 때문에 인간들이 가장 예민하게 느낄 수 있고,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인간들이 그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그 진노가 흐느끼며 우시는 하나님의 정서로 표현되기도 하고 혹은 그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내시는 그 진노가 마치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종식시킬 것 같은 커다란 공포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더 이상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냉담하게 끊고 단절이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묘사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표현의 방식은 아주 다양하지만 어떻든 우리들이 그 다양한 표현 하나 하나에 너무 많이 현혹되어서 진노에 대한 성경 전체의 신학의 균형 자체를 잃어버리게 되면 우리는 매우 곤란한 상태에 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6-7년 전 시리즈 가운데 ‘전능하신 하나님의 진노’라는 시리즈를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들으시면 여러분들이 진노 자체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더 많이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명쾌한 결론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표현은 매우 폭이 넓지만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서 가지고 계시는 진노는 굉장히 크고 강렬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은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성경의 표현들이 너무 격렬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택한 백성을 적대자처럼 다루시는 광경을 보게 되는데 그 속에서도 우리는 항상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진노에 대한 성경의 신학을 이해할 수 있게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죄는 미워하시지만 그 죄인들은 사랑하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인들을 다루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개인을 다루시기도 하시고 또 전체를 다루시기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떻든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따라서 신실하게 그들을 가나안에 들여보내 주실 것도 약속하시고 그들이 배교의 길을 갈 때에 진노하실 것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진노하시는 것은 구체적으로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그들을 버리시는 것과 그들에게서 당신의 얼굴을 가리우시는 것으로 나타나십니다. 즉 이하에 나오는 17절 상반 절부터 18절까지의 모든 묘사는 하나님의 진노의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즉 하나님이 진노하시면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시고 그들에게서 얼굴을 가리우시는데 그렇게 하나님이 그들을 떠나고 영적으로 그들에게 얼굴을 가리우시는 것과 같은 교제의 단절이 있을 때에 그들은 큰 재앙과 환난 속에서 비로소 자신들에게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상반 절만을 다루고 다음 주에 다루겠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며’하셨는데 ‘버린다’는 말은 히브리말로 ‘아자브’인데 ‘떠난다’는 의미입니다. 창세기 2장에 ‘그러므로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할 때의 그 ‘떠나’가 이 ‘아자브’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버리시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성경에 보면 “그가 나를 버리면 나도 그를 버리려니와”하는데 굉장히 많이 나오는 단어입니다. 제가 기억하기로 5천번 이상 나오는 단어입니다. 우리의 개념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쓰레기처럼 모아서 버리는 것입니다. 쓸모 없는 사람들로 여기셔서 던져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흔히 하나님의 진노와 관련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다고 생각할 때 우리를 커다란 공경에 몰아넣으셔서 빗자루 같은 것으로 우리를 쓸어서 지금 삶의 기반, 자리에서 우리를 어디론가 옮겨버리시고 내동댕이쳐 버리시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셔서 우리를 홀로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홀로 있게 하시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주인이 되도록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무신론은 사실 없습니다. 문제는 그 절대자의 자리에 누가 들어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그 절대자의 자리에 신이 있다면 그것은 유신론입니다. 그런데 양태가 다양합니다. 신들이 수없이 많이 들어가면 다신론입니다. 신들이 많이 있지만 그중 한 신이 제일 강하다고 여겨 그 신을 수석 신으로 임명하면 그것은 일신론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 신이라고 여기면 범신론입니다. 무신론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인데 그렇게 신들이 다 빠져나가고 아무 것도 없는 자리에 감히 올라가서 신들은 없다고 선언하는 그가 바로 신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신론은 아신론입니다. 자기가 그 자리에 앉아서 절대적인 판단자가 되는 것입니다.
프리드리히 니이체가 ‘신은 죽었다’고 할 때 마지막 살아남은 것은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어느 철학자가 말하기를 ‘신들은 지구를 떠나라’고 했는데 신이 지구를 떠난 다음에 그 지구에는 바로 자기가 있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무신론이라고 하는 것은 공상 속에서나 가능한 것이지 실질적으로 무신론은 없습니다. 무엇인가는 그 자리에 앉아서 자기를 다스리고 온 세계를 다스리고 그 존재가 자기의 인생을 재편하고 자기의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궁극적인 동력이 되게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정신 속에 깊이 들어가 보면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떠나고 불순종하는 그 모든 삶의 궁극적인 뿌리를 캐들어 가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피조물로서의 위치를 지키면서 그 위치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그 하나님이 주신 본분에 충실하면서 인생의 행복을 얻고 창조의 질서를 따라서 그분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을 행복으로 삼겠다고 한 서약을 깨트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든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간섭 없이 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불순종과 모든 죄의 뿌리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은 하나님 앞에 가장 커다란 반역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 기대는 마음이 없습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대한 절대의존적인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혼자 살라고 놔두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버린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고 타락한 다음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은 처음 창조될 때부터 죄가 들어오기 전 아담과 하와 때부터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고, 무죄 상태에서도 하나님을 기대며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람들을 이 세상에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죄가 없는 상태였지만 얼마든지 타락하고 그 죄에 굴복할 수 있는 개연성이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에도 아담과 하와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입니다. 죄가 들어옴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필요성이 엄청나게 증대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아담과 하와에게는 주님이 자기들을 창조하실 때에 세워두신 그 자리에서 자신의 본분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그런 모종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가 들어온 다음의 그 은혜의 정의는 자격이 없는 죄인들에게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호의 내지는 은총이지만,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죄인이라는 말만 빠질 뿐이지 죄 가운데 빠질 수 있는 연약한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대가 없이 베푸시는 은총이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하나님의 은총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은총을 의지하면서 아담과 하와는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죄가 들어오기 전이나 죄가 들어온 후나, 더더욱 우리는 홀로 하나님 앞에 살 수 없도록 되어진 존재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인들이고 또 신자입니다. 또 여러분들은 성도라고 일컬음을 받고 있습니다. 성도가 무엇입니까? 혼자 살기를 포기한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혼자 사는 것을 포기 한 사람이 바로 성도요 혼자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줄을 알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그분이 내 마음에 오셔서 내 삶을 다스리시는 내 마음의 주인이 되어 주시도록 그렇게 자기를 주님 앞에 내어드리고 그분을 자신의 인생의 주재자로 모신 사람들이 크리스천입니다.
그러므로 이 원리를 하나님 앞에 파기하는 즉시, 이 원리를 우리의 삶으로 파기하는 즉시, 주님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와 함께 다스리시는 그 모든 행복들은 한꺼번에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엄청난 혼돈과 무질서가 신자의 마음과 영혼과 삶 속에 먹구름처럼 번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나서 정말 주님을 내 안에 모시고 살지 않으면 예수 안 믿을 때보다 더 혼란스럽습니다. 열심히 죄를 짓고 나서 죄지은 손도 씻지 않고 다시 교회에 가야합니다. 짐승처럼 제 멋대로 살고 입술로는 거룩한 생활을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너무 좋고 그분이 싫은데 무릎을 꿇고 ‘사랑하는 하나님’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보통사람이 이런 이중적인 생활을 하면 돌아버려서 나중에는 자기가 머릿속에 옳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그렇다고 말해야 하는지 픽션과 논픽션이 뒤섞여서 정신 착란까지 갑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올바르게 신앙의 원리를 따라서 살지 않으면 그는 결코 이 세상에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홀로 살 수 없는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셨고 죄가 들어 온 다음에는 전혀 혼자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혼자 살아갑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접하면서 '이제는 정말 못살겠구나'하며 백기를 들고 항복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 우리 왕이여 이곳에 오소서
보좌로 주여 임하사 찬양을 받아주소서
항복하고 주님이 우리 안에 오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듭남입니다. 이 때 우리 영혼의 내부 속에는 죄인이었던 때와는 또 다른 강력한 변화가 일어나서 속에 있는 정신 구조를 다 뜯어 고쳐서 정말 예수님이 오셔 계셔야만 적합하게끔 재개발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변해서 혼자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주님 나가시라는 것입니다. 빵 가게 하려고 지어놓은 집을 하숙친다고 하면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화장실 하려는 방을 침실로 만든다면 할 수는 있겠지만 얼마나 복잡하겠습니까? 하물며 주님이 오셔서 ‘너 정말 나와 함께 있고 싶으냐?’하시며 모두 재개발을 하셨는데, 다시 싫다는 것입니다. 계속 불순종하면서 자기 자신을 주님이 계셔야할 자리에 놓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 없는 삶을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를 홀로 놔두십니다.
조금만 성경을 알고 신앙의 이치를 알면 이런 의문이 듭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진노하실 때 제일 잘 일어나는 일은 전쟁입니다. 전쟁으로 나라가 거의 거덜나고 반쯤 죽는 일입니다. 아니면 갑자기 재앙이 일어나서 한꺼번에 질병에 걸려서 죽어가거나 비가 오지 않아 모두 굶어죽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물론 어느 한순간에 갑자기 화를 내시면서 즉각적으로 사람들을 심판하실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이런 하나님의 진노에도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항상 묻어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그들을 홀로 내버려두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하나님이 ‘내가 정말 싫으면 너 혼자 있어라’하시면 금방 두려운 생각이 듭니다.
(예화: 가자고 해도 가지 않겠다고 떼를 쓰는 아이에게 혼자 있으라고 하며 가면 갑자 기 울면서 좇아온다)
그러나 모든 아이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아무 소리 않고 자기 할 일만 하는 침묵형이 있고, 인사하며 잘 가라고 하는 결별형이 있습니다. 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가 남아있을 때는 하나님 손을 자꾸 놓고 싶다가도 하나님이 손을 놓으시면 갑자기 돌아서서 손을 잡으면서 ‘안돼요’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완전히 떠나시는 것은 그도 원하는 바가 아니고 주님 보시는 앞에서 죄를 조금만 짓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면전에서 죄를 조금만 짓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 계시며 죄의 즐거움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시다가 회개하면 손 닿는 곳에 계시기를 간곡히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신자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약속의 백성들이 얼마나 고대했으면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을 때 ‘임마누엘이라 하라’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별명이 된 것입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가장 위대한 일이 하나님과 떨어져서 홀로 살았던 우리들을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신 그 일입니다.
그런데 계속 범죄 하면서 불순종하면 하나님이 놔두십니다. 그때 죄인들은 순간적으로 굉장한 자유 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기하게 자신의 마음과 삶이 범죄와 불순종에 적합하도록 구조 조정이 이루어집니다. 작은 죄에도 예민했던 양심이 무뎌지기 시작합니다. 죄에 적합하도록 구조 조정되는 것입니다. 작은 불순종에도 그렇게 여러 시간동안 괴로워했는데 이제는 커다란 불순종에 대해서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 생기고 그 불순종이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마음의 담대함은 더해져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더 큰 불순종도 능히 행할 수 있도록 악을 향해서 자기 자신의 마음이 잘 준비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없이 홀로 있는 동안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하나님 없이 인간을 홀로 내버려둘 때 그 인간이 돌아가는 최종 귀착점은 하나님 만나기 전의 옛 삶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보다 훨씬 더 악한 상태로 갈 수도 있습니다.
죄와 은혜가 한 신자 안에 공존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죄 가운데 있어도 하나님 앞 매달려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죄와 은혜가 비율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신자 안에 공존합니다. 죄와 은혜가 공존하면 신앙과 불신앙이 싸우기 시작하고 육신에 속한 성품과 신령한 은혜에 속한 성품이 싸우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싸우는 동안에는 우리들이 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싸우는데도 불순종하면서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잘못 살아가는데, 만일 우리들이 그런 은혜의 작용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져서 하나님이 우리를 홀로 내버려두신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브레이크 망가진 자동차가 산꼭대기에서 직선으로 난 도로를 타고 달려 내려오는 것처럼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망가질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주님의 그 진노는 우리들을 은혜의 작용 없이 홀로 내버려두십니다. 그 다음에 오는 결과들은 정말 비참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끊임없이 불순종하며 돌이키지 않았을 때 주님이 그들을 향해 발하신 진노의 첫 번째 표현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얼굴을 감추시는 것입니다. 얼굴은 히브리말로 ‘타닌’이라고 하는데, 복수로 되어있습니다. 얼굴이 복수인 이유에 대해서 여러 이야기들을 하는데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히브리어에서 장엄하거나 신비스러운 것은 모두 복수로 씁니다. 또 추상명사도 모두 복수로 사용합니다. ‘청춘’ ‘물’ ‘하늘’ ‘하나님’ ‘사람의 얼굴’ 등은 모두 복수로 사용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얼굴을 이 세상에 있는 백성들을 향해 정면으로 대면하실 때는 두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그들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대면하시는 것이고, 자기의 백성들을 축복하시기 위해서 그 얼굴빛으로 그들을 대면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택하지 않으신 민족들을 대면하실 때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워옴을 의미하는 것이고 택한 백성들을 향해서 대면하실 때에는 영적인 회복입니다.
그래서 시편에서 “주의 얼굴빛으로 당신의 백성들에게 비추사 그 도를 만방에 알리게 하옵소서”라고 시인이 고백합니다. 그러니까 얼굴빛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그 백성들에게 보여주셔서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받아서 그 영광의 영향으로 그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내면의 세계를 갖춘 사람들이 되고 그래서 그 하나님과의 관계를 절대적으로 붙들면서 주님 앞에 회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이 얼굴빛의 축복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얼굴빛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비추인다고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주님의 영광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하나님과 자기 백성들과의 독점적인 영적인 교통의 축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거두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슬퍼하시고 우리의 불순종하며 살아가는 모습에 대해서 가슴 아파하신다는 불쾌감을 보여주실 수 있는 가장 쉽고 언제나 빼놓지 않는 방법은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더 이상 말씀하시지 아니하심으로 당신과 그들 사이의 관계를 단절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자신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자신들이 그 하나님께 거절 받고 있다는 느낌을 주심으로서 그들 자신의 삶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전체적으로 돌아보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패한 가운데에서도 그나마 지각이 있고 복된 사람은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기도가 막히고 말씀의 은혜가 마르고 하나님의 은혜의 감화가 자신 속에 없는 것에 대해서 깊은 위기 의식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것은 무엇인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어있다고 하는 중대한 싸인이라고 생각하고 자기에게 있어서 무엇이 문제인지 하나님 앞에 묻기도 하고 말씀을 통해서 그것을 깨달아보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미끄러진 가운데에서도 -언덕을 내려가다가 나무 뿌리에라도 걸린 것처럼-뭔가 붙들고 다시 하나님 앞에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기도 안 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기도 안 하는 것은 못하기 때문에 안 하는 것입니다. 새벽에 일어났는데 가슴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열렬한 언어들이 끓어오르는데 기도 한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잠을 안 재우십니다. 수많은 언어가 속에서 솟구쳐서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기도 생전 안 하는 사람들이 주일예배나 모임에서 애처롭게 기도를 이어가는 것을 한번 보십시오. 얼마나 불쌍합니까? 기도할 수 없는데 강제적으로 해야되는 상황을 만났을 때 그 마른땅에서 솟아나는 것 같은 견딜 수 없는 건조함들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것들이 꼭 공적인 모임에서의 기도뿐 아니라 자기 개인의 기도생활에 있어서도 입증됩니다.
기도하려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는데 할게 없습니다. 이런 것들이 올 때 이것이 나의 온전치 못함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한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와 당신과의 관계를 돌아보고 삶 전체를 조망하면서 내가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변화되고 이러한 영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결단해야한다고 하는 것을 느낀 사람들은 그나마 복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기도가 안 되는데, 기도할 수 없는데,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데,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회피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안 되는 것은 요즘 내가 사업에 바쁘기 때문이다’ ‘몇 달째 기도 못하고 있는데 내가 마음을 안 먹어서 그렇지 마음만 먹으면 당장 잘된다’ 심지어는 ‘이렇게 기도가 안 되는 것은 누가 내 신경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안 들리면 ‘요즘 설교가 신통치 않아서 안 들린다’고 간단하게 처방하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도 깨닫는 바가 없는 것은 요즘 내가 속상한 일이 많아서 그런 것이지 영적인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고 하는데 모두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이것을 여러분 자신의 삶이 입증합니다. 제가 정말 질적인 삶을 살고 싶어서 일을 줄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일을 줄여도 줄여도 피할 수 없이 일이 밀려오고, 외부의 집회를 사절하려고 해도 어떤 때는 의심할 여지없이 -모이는 사람의 수에 관계없이- 여기를 가지 않으면 직무유기라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내가 전심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 바쁜 때문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 일생일대에 가장 치열하게 하나님을 찾고 가장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믿은 이래로 전혀 마음이 갈리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마음이 하나님 한 분께로 모아져서 그분을 전심으로 찾고 구했던 때가 언제인가를 생각해보니 시간이 많아서 놀던 때는 한번도 없었습니다. 치열하게 바쁘게 살고 네 시간 이상 자지 못하고 몸부림치면서 살던 때, 교회에 가면 학교일 때문에 통곡하고 학교에 오면 교회일 때문에 통곡하고 배우러 가면 가르치는 일 때문에 흐느끼고 가르치는 현장에 와서는 배우는 일 때문에 흐느끼고, 변화되지 않는 영혼을 보면 괴로워하던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환경의 문제가 아닙니다.
불이 기름과 섞여서 치열하게 타오를 때 물을 한바가지 끼얹으면 기름이 번지면서 불길이 치솟습니다. 그러니까 환경이 어렵고 상황이 어려우면 그 속에서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을 바라는 마음이 레이저광선처럼 더 집요하게 실선을 그리면서 그 목표지점들을 녹입니다.
성경을 읽어서 깨닫는 바가 없으면 자신의 마음에 더러움이 없는가를 생각하고 진리의 말씀으로 마음의 거울을 깨끗이 닦아내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릎을 꿇고 진실하게 그 말씀을 대면해야지, ‘요즘 신경 쓰는 일이 많아서’ ‘성경이 안 읽히는 것은 다 누구 때문이야’하고 성경을 덮어버리면 그 순간 하나님과의 관계도 덮는 것입니다. 설교가 안 들리면 토요일 날 금식하십시오. 적어도 설교자가 설교를 위해서 고뇌하는 것만큼 여러분도 똑같이 들으려고 고뇌해야 합니다. 토요일 밤늦게까지 쓸데없는 일에 몰두하다가 피곤한 몸을 이끌고 늦게 교회에 와서 어느 구석에 앉아서 반은 졸면서 화면을 쳐다보다가 아무 것도 얻어지는 것이 없으니까 ‘요즘 설교가 영 맛이 없구먼’하며 돌아갑니다. 새로 들어와서 은혜 받는 새 신자들 앞에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그런 식의 마음가짐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주일 예배를 위해 기도하십니까?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변화를 주시기를 간구하십니까? 여러분들이 간구하지 않는 이유는 둘 중에 하나입니다.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거나 설교자의 재주를 의지하거나 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향해 얼굴을 가리우고 계시다고 하는 증거라고 정직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까? 그런 식의 반응을 보면서 여러분들의 영혼의 회복의 때가 가까워 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저는 그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한줄기 흘러가는 개울이나 강물처럼 살고 싶을 따름입니다. 와서 먹고 가는 사람도 있고 거기 누워 자는 사람도 있고 그 물에서 노는 사람도 있습니다. 상관없습니다. 어느 설교자에게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제가 마음 아픈 것은 왜 그렇게 정직해지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정직해지지 않으면 희망이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 기도도 하고 철야도 하고 고달픈 직장 생활 속에서 금식도 하고 자기의 마음의 거울을 닦아보려고 애를 쓰고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하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당신의 음성을 내게 들려주시지 않았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구도의 정신이 없는 신앙생활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트려지고 불순종한 가운데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향해 얼굴을 가리고 계신 것을 상황의 핑계를 대면서 적당하게 문지르면서 나가려고 하는 비겁하고 야비하고 지능적이고 뻔뻔스러운 회피적인 태도에 대해서 바리새인들이 여러분의 선배입니다.
좀 다 벗고, 주님이 잘못했다고 하시면 고치면 되지 않습니까? 주님이 당신의 피로 우리를 구하셨는데 우리를 버리시기야 하겠습니까? 고쳐서 쓰시지 않겠습니까? 속속들이 썩었다고 칩시다. 하나님이 버리시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고 싶다는데, 과거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든지 정직하게 인정하고 이제 남은 삶만이라도 빛 가운데에서 살고 싶다는데 하나님께서 버리시겠습니까?
주님의 음성 듣기를 주님을 만져보기를
전심으로 원합니다 주여
(예화: 6년 전에 철저하게 망가진 그리스도인 한 사람을 대면했다. 아무도 모르게 두 번씩 결혼을 하고 철저히 파괴되어 알코올에 중독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 이 교회가 다 썩었다고 말했다. 더 이상 할말이 없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다 벗고 ‘이것이 나 자신의 전부입니다. 감춘 것도 없고 이 것이 내 모습입니다’하며 진실해본 적이 얼마나 있는 지 생각해보십시오. 죄를 지어도 눈물을 펑펑 흘리는 진실한 사람들이 좋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회개도 참 잘합니다. 너무나 가슴 아픈 것은 넘어진 성도들의 죄의 고백들을 종종 듣습니다. 그때 저는 항상 그의 손을 꼭 잡고, 혹은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며 말합니다. ‘넌 다시 살 수 있다. 내가 보증한다. 왜냐하면 정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네 영혼은 안전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피했기 때문에. 나는 너보다도 더 나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성도 만드시는 것을 너무나 많이 봤다’
우리 모두에게는 천부적으로 우리가 주님의 얼굴빛 앞에 사는 지 주님을 외면하고 사는 지를 감지할 수 있는 감각을 주셨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정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도 보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한번 벌판에 서보십시오. 우리가 살아야 몇 년을 살겠습니까? 자신의 인생에 스톱 스위치를 걸어놓고 빈들에 한번 서보십시오. 단 3일이라도 삶의 모든 흘러가는 물줄기를 끊어버리고 교회에 나와서 3일을 지내며 강단에 엎드려 기도한다든지 건전한 기도원에 혼자 올라가서 한번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면서 내 모습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든지, 그렇게 하나님 앞에 자기를 비춰보고 추슬러서 주님의 인정을 받으면서 살아야지, 상황이나 핑계 대고 사람이나 핑계 대면서 사는 사이에 벌써 6-7년이 흘러왔지 않습니까? 앞으로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하는데 변화를 기대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변화를 기대한다고 할지라도 변화 받고자 하나님 앞에 힘쓰지 않는 사람이 변화 받을 가능성은 그만큼 적습니다.
자기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비춰보고 그 속에서 주님이 내려주시는 자신의 신앙과 삶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가지고 처방을 따라서 하나님이 고치실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맡겨드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살아야 할 날이 많습니다. 내일이나 모레 죽는다면 그냥 내버려두겠지만 아직 한참 더 살아야 하니 고치면서 살아야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런 식으로 하나님 앞에 그렇게 긴 세월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한번쯤은 ‘택하라’는 여호수아의 목소리 같이 칼날같이 결단을 하고 ‘신앙을 포기해버릴까, 새 삶으로 돌아가 버릴까,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이렇게 믿어서 되겠는가’하면서 자기 쇄신이 있어져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향해서 얼굴빛을 가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깊이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 새로운 각오로 나올 결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예고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다음에도 이어집니다만 저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던 지간에 지금 여러분들이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지금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향해 그 얼굴빛을 향하여 들고 계십니까?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답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8. 재앙과 환난이 겹칠 때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이 우리에게 임함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뇨 할 것이라(신31:17下)”
지난 시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범죄 하게 되면 범죄한 그 이후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노하시게 될 것을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진노하시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첫째는 하나님이 그들을 떠나시는 것과 두 번째는 그들에게 얼굴을 가리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사실은 같은 것인데 하나님이 그들을 떠나시는 것은 하나님이 더 이상 그들 가운데 계셔서 그들과 함께 하시는 다양한 증거들을 그들의 삶 속에서 보여주시지 않는다는 것이고, 얼굴을 가리우신다는 것은 그 백성들의 은밀한 영적 특권들을 하나님께서 빼앗아 가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얼굴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비추시는 것은 곧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영적인 교통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 교통을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은 함께 사귀면서 살도록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하반 절은 하나님이 그들을 떠나시고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실 때에 그들에게 일어나는 현상들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상세히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흔히 성경에 보면 ‘칼에 삼키게 된다’ ‘재앙에 삼키게 된다’ ‘원수가 나를 삼킨다’는 묘사가 많이 나옵니다. 좋은 의미로 ‘사망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고’를 제외하고 결국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수요일마다 보고 있는 민수기서에 보면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재앙이 밀려오고 그 재앙의 밥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칼에 삼킨 바 되었다고 하는 것은 그 칼에 의해서 희생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저항할 수 없이 희생되어버리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읽은 17절 하반 절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볼 수 있는데,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주님을 떠나간 백성들에게 반드시 임하는 환난이 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 환난 속에서 하나님이 생각나게 하시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각은 항상 육적이기 때문에 환난이라고 할 때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은 ‘나는 예수 이렇게 믿었다’ ‘아무개 집사의 성공수기’에서 보듯이 완전히 망해서 길가로 쫓겨날 정도가 되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하나님을 깊이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배나 축복해 주셔서 배나 잘 살게 되었다는 것일 것입니다.
사실 남의 이야기니까 그렇게 간단하지 환난을 만났다면 굉장히 힘든 것입니다.
(예화: 어릴 때 아버님이 사업하시다 망하셔서 빚쟁이들이 찾아와 마구 때려부술 때 ‘빚이 얼마나 무서운가’ 생각했었다. 그때 두 가지를 결심했는데 빚을 지지 말자는 것과 빚을 줘도 저렇게 악덕 채권자는 되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런 것들이 큰 환난이지만 사실 환난은 환난 당하기 전에 이미 신자의 내면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리차드 백스터는 ‘회심하지 않은 자는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이미 지옥을 맛보는 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그 속에서 부딪기면서 살아가는 고통스러운 삶, 돈이 있으면 가족 관계가 깨졌고, 화목하면 돈이 없고, 그렇게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시달리면서 살아가는 그 모든 삶이 지옥을 방불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환난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그런 환난과 괴로움이 오고 그것으로도 자신의 영혼의 곤고함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곤고한 것을 느끼고 괴로워한다는 것은 복입니다.
(예화: 새가족 환영회에서 자신들의 곤고한 삶들에 대해서 여러 사람이 간증했다)
아직 자기에게 환난과 재앙이 임하지 않았는데도 마음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짐을 인해서 고통을 느끼고 그것을 인해서 곤고하고 괴롭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커다란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곤고와 괴로움 자체가 이미 인간에게는 견디기 힘든 내적인 환난입니다. 그 때에 복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 속에서 일어나는 고통을 보면서 ‘하나님의 자녀의 삶이 왜 이럴까? 하나님 자녀의 내면의 삶이 왜 이렇게 괴롭고 곤고하고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삶을 살아갈까?’하고 괴로워하며 자기 자신의 중심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이 상정하는 이스라엘백성들의 미래는 그렇게 녹녹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히는 데서 오는 괴로움으로 마음이 갈급해지는 정도가 아닙니다. 이상하게 죄인들 중 상당히 많은 수는 참을 만 하면 환난을 끝까지 견디는 것입니다. 그리고 갈 때까지 가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상정하는 미래의 패역한 이스라엘백성들은 이미 하나님이 그들을 떠나고 얼굴을 가리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면서 하나님이 자신들 가운데 계시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내적인 고통 속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곤고함을 깨닫고 ‘우리 내면의 세계 속에 하나님이 안 계시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살았으면 우리를 위해서 이 아름다운 땅을 거저 주신 하나님, 만나로 먹이시고 메추라기로 배부르게 하시고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요단의 물을 말리시고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신 그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곤고하게 내버려두시겠느냐?’하며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가야 하는데 그런 정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갈 때까지 가는 것입니다. 갈 때까지 가면 하나님도 갈 때까지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적으로 깊이 곪고 뭉그러졌던 더러운 불순종과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반역이 환난이라는 껍질을 깨고 바깥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고치시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에 순종하면 하나님이 축복하신다는 이야기보다 더 확실한 것은 불순종하면 하나님이 혼내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순종하면 축복을 받는 진리만큼이나 명백하게 사실입니다. 이들이 재앙과 큰 환난을 만난 것입니다.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했습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그리고 그들이 그것을 만날 것입니다” ‘라우트’는 ‘라아’의 복수로서 ‘재앙’ 혹은 ‘악한 것’입니다. ‘라보트’는 큰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큰 재앙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를 만나고, ‘짜로트’는 ‘괴롭히다’에서 온 명사인데 외부적으로나 내부적으로나 굉장히 고통스러운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재앙과 환난이 오는데 한 개가 온 것이 아니라 여러 개가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모종의 무엇을 하나님 앞에서 깨달을 때까지 환난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환난과 시련을 만날 때에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예화: 달팽이 둘이 기어가다가 충돌을 했는데 목격자 굼뱅이에게 어떻게 사고가 난 것이냐고 경찰이 물으니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잘 모르겠다고 했다- 달팽이는 한 시간에 1미터밖에 못 간다)
환난이 그렇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그리스도인이 불순종하다가 하나님 앞에 환난을 당하면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환난을 만났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자존심이 상할 정도로 길고 지루한 수많은 날 동안 돌이키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고 그 경고의 음성은 점점 더 다급한 헐떡임으로 우리에게 전달되어 왔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후에 하나님이 그 환난과 재앙을 주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복수로 되어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번 환난을 만나고 하나님을 생각할 정도로 말랑말랑한 존재가 안될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화: 고등학교 다닐 때 학교에서 무척 때렸는데 한 대만 맞고도 데굴데굴 구르면서 잘못했다고 하면 덜 맞는다. 이를 악물고 버티는 아이는 더 많이 맞는다)
은혜를 받고 확고히 서야 할 때는 갈대처럼 나부끼던 사람이 환난이 시작되면 그대로 엎드려서 이를 악물고 맞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에 대한 진정한 참회나, 환난과 재앙을 통해서 그 백성들을 돌이키셔야 할만큼 막바지에 간 자기 자신의 불순종에 대해서는 깨닫지 않고 미련하리 만치 그렇게 맞는 것입니다. 그렇게 견고한 인내의 정신을 은혜를 지키는데 사용했으면 그런 환난과 시련은 안 만날텐데 환난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앞에서 말씀드린 전자의 학생과 같은 심성을 가지고 한 대만 맞으면 데굴데굴 구르면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아니라 반쯤 죽어도 ‘늘 일어나는 일이겠지’ ‘일반적인 상황이겠지’ 생각하면서 자기 자신을 어루만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런 정도에서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그들이 불순종한 것에 대해서 그들에게 당신 자신의 화를 푸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들을 돌이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환난과 시련을 만날 때에 함부로 ‘나는 연단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일단 환난과 시련이 닥치면 즉시 하나님 앞에 ‘하나님, 제 인생에 이런 고통스러운 일들이 생겨납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 앞에 뭐 잘못한 거 있습니까?’를 묻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아니다. 너의 죄 때문이 아니라 특별한 섭리에 의해서 내가 너를 더 견고하고 아름다운 사람 만들려고 정금과 같이 너를 단련하려고 내가 너를 연단 하는 중이니 내가 너를 단련한 후에는 네가 정금과 같이 나오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은혜롭지, 자기가 실컷 잘못해서 반쯤 죽는 상황에서 ‘하나님, 이것은 아마 하나님께서 저를 더 아름답고 고귀한 사람으로 만드시려고 연단 하시는 것이겠지요’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아니, 너는 맞을 짓을 했다’하면 얼마나 부끄럽습니까?
(예화: 개척교회 시절에 교회를 잘 나오지 않는 지체의 집에 심방을 가서 자신에게 맞 는 교회를 찾아가라고 했더니 교회가 자기를 필요로 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못한 다고 했다-우리 교회에 머무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좋은 신자가 되는 것이라고 권면했더니 교회가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사람들은 모두 간음 죄 지으면 자기가 다윗이라고 생각하고, 환난을 만나면 자신이 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구약에 그 두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자기가 잘못해서 직장에서 왕따 당하고 고생 억수로 하면서 항상 그때는 자기가 요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일단은 아닌 쪽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환난과 시련이 겹치고 고난과 폭풍이 몰아치면 ‘나의 불결이 무엇인가’ ‘내가 하나님 앞에 정결케 되어야 할 부분이 있구나’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런 상황을 만났는데 거의 기도하지 않고 기도할 수도 없으면서 자기가 당하고 있는 시련과 환난이 의로운 고난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종교적 돈키호테입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사실 하나는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그 영혼을 돌이키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이 반드시 환난과 재앙을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보면 대개 하나님이 즉각적으로 행동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느낌이고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고 돌이키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외적에게 침략을 당해서 망할 때 예고 없이 망한 적은 거의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은 말씀을 보내셔서 ‘너희 이러면 안 된다. 내 백성아 돌아 오라’ 하시며 환난을 당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흘릴 피눈물을 하나님이 먼저 흘리시면서 그 마음을 가진 당신의 종들을 보내셔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게 하시고 그들을 위해서 부르짖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뒤에 하나님께서 실행에 옮기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순종하면 안됩니다. 불순종하는 사람이 ‘오늘도 불순종하면서 죄악을 얻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불순종하지는 않습니다. 불순종이 불을 지필 때 불길이 타오르는데 그것은 죄악의 즐거움입니다. 그 죄악의 불꽃이 사위고 나면 그 다음에는 시커먼 재가 덩어리가 되어 남는데 그것이 죄이고 패역입니다. 그러니까 불순종을 하는 이유는 불순종에 매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편리함과 안락함, 심지어는 죄의 달콤함과 즐거움을 안겨주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즐거움에 탐닉하면서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짧은 순간의 불순종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불꽃과 같은 짧은 순간의 즐거움에 비하면 숯 덩어리처럼 남는 그 죄의 비참함과 고통은 그 한순간의 즐거움이나 한순간의 편안함과 바꾸기에는 너무나 길고 너무나 고통스러운 영혼의 무거운 짐이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지만 언젠가는 오래 참으시는 가운데에서도 인간에게 내적인 환난과 재앙이 시작되고, 그것으로도 자기의 죄를 토설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으면 하나님이 환난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큰 풍파 일어나는 것 세상 줄 끊음일세
선조들의 지혜가 이렇게 놀랍습니다. 큰 풍파가 일어나는 것은 자신들의 무수한 경험들을 생각해보니까 죄를 사랑하고 세상과 인연을 끊지 못하고 살아가는 마음의 더러운 정 때문에 하나님이 큰 풍파가 일어나게 하시고 그렇게 괴로운 것은 결국 세상 줄을 끊고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일에만 매진하는 순결한 백성이 되게 하시려고 환난과 시련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제일 미련하고 정말 불쌍한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 성공해보려고 껄떡이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몸부림치면 칠수록 하나님 없이 성공하든지 아니면 하나님 없이 망하든지 하는 것인데 둘 다 영혼의 고통입니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백성에게 하나님 없이 성공하도록 하나님이 내버려두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삶에 있어서도 하나님 앞에 투명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감춘다고 하나님 앞에 감춰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해서 이익이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등지고 자기가 잘못되었는데 그 속에서 자기가 부해보려고 하고 잘돼보려고 하고 성공하려고 하는 삶처럼 애처로운 삶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하나님 없이 살면서 성장하고 잘살아보려고 하는 삶을, 하나님과 그 사람이 관계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도모를 성공하지 못하게 하실 것이고 만일 그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어있다면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공개하면서 맑은 유리 통에 들어있는 것 같은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결국 손해보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붙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영위해나가는 최선의 정책이라는 것을 가슴에 새기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화: 교회 재정도 마찬가지이다-공신력 있는 기관에 감사 받아야 한다)
사업이나 모든 삶을 다 하나님 앞에 까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눈빛 앞에서 주님이 자기를 인정해주시고 자기를 도와주시고 자기를 변화시켜 주시는 만큼 자신도 똑같은 정도로 축복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 고난과 시련을 이기면서 살아야겠다고 하는 정직하고 투명한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이 우리에게 복 주시면 우리들이 축복된 삶을 살 수 있고 주님이 우리에게 재앙과 환난을 허락하시면 환난과 재앙을 당하면서 살수밖에 없다는 정직한 신앙의 고백을 하고, 지금은 완전하지 않아도 부단한 자기 깨어짐 속에서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말씀 앞에서 끊임없이 몸부림치는 사람이 그런 태도를 취해서 손해볼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몸부림을 쳤는데도 안되면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는 것이고 그래서 고난을 받으면 바르게살기 위해서 고난을 받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뒤에서 호박씨 까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그러니까 진실하지 않고 탁월하게 도덕적인 사람보다는 차라리 진실하게 뉘우치는 소문난 죄인들이 훨씬 소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성경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하는 환난과 모든 재앙은 그들이 불순종했기 때문에 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결코 행복하고 번영하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이런 의문이 생겨날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정말 분투하고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려고 애를 쓰고 목사님이 말하는 대로 말씀 잘 깨달으면서 사는데도 찢어지게 가난하고 여전히 환난을 당하는 지체들이 있고, 적당히 형식주의로 살아도 수단이 좋아서 번성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기다려 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성경은 약속했습니다. ‘악인의 최후는 벤 풀의 마름과 같다’ ‘의인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서 잎이 무성하고 시절을 따라서 열매를 맺는다’ 누가 그것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예화: 뚝방에 있는 풀을 베어서 뉘어놓으면 처음에는 베었는지 알 수 없으나 세시간 만 지나면 모두 지푸라기로 변한다)
자기가 올바르게 살면서도 시련과 고난을 당하는 것 같으면 기다리십시오. 야고보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농부가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림과 같이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인내하고 기다리십시오. 기다리면 하나님이 반드시 은혜를 주시고 그들의 고난을 기쁨으로 바꿔주시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런 환난은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생각나게 하시고 싶으시기 때문에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이라고 고백하는지 보면 ‘허다한-불일 듯 확 일어나는 것을 의미, “엄청난” 혹은 “커다란”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 환난과 재앙이 그들에게 임할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들이 우리에게 임함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뇨’하는데 ‘그럴까?’하는 의문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떠나신 지는 이미 오래 전이고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신 것도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 그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을 전혀 모르다가 환난과 시련을 당하고 나서야 새카맣게 잊어버렸던 하나님이 생각나고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확신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안 계시다’ ‘오,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가셨도다. 재앙이로다 이스라엘이여. 그분은 우리 가운데 없도다. 그분이 없는 우리가 무엇이랴. 오호통재라’해야 하는데 ‘안 계신 것이 아닐까?’하는 정도입니다. 아직 맛을 덜 본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들에게는 이것도 엄청난 진전입니다.
여러분들이 설교를 듣는 가운데, 회심하지 않고 살아가던 여러분들이 왜 그렇게 사업이 잘 안되면 술만 퍼먹고 괴로워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성질 낸 적도 많지요? 그러던 사람이 ‘하나님이 나를 안 도와주시나 봐’하는 것은 보통 변화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깊이 인정하고 그분이 자신의 생사화복을 주관하고 계시다는 고백을 할 마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것은 무신론자가 유신론자로 돌아서는 중요한 전기입니다. 그전까지는 교회에 나오면서도 ‘그 자식, 재수 없는 놈 만나서 되는 일이 없어’ ‘어느 놈은 줄 좋고 빽 좋아서 은행 대출도 많이 얻는데 빽 없으면 죽어야지. 줄 없는 놈 서러워서 살겠나’하면서 ‘뇌물이라도 주고 어디 줄 댈데 없나’ 하고 찾아보며 살던 사람이 ‘아니다. 내가 이렇게 곤고하고 괴로운 일을 많이 만나는데 주님이 나의 삶 가운데 안 계신 것이 아닐까? 어쩌면 그럴 지도 몰라. 내가 농담처럼 들었던 열린 교회의 그 무수한 설교가 어쩌면 진실일지도 몰라. 그럼 난 어떡하지. 준비된 것이 없는데’하는 것은 보통 진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신 것과 안 계신 것이 어떤 차이가 있는 지는 우리가 은혜 생활 할 때에는 너무 쉽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화: 직장 다니던 시절 점심 시간에 창고에 모여서 예배드리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은혜를 주셨다. 한 자매가 고난 주간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은혜를 많이 받았 는데 금요일에는 전혀 은혜가 없자 끝난 후 고백한 내용- 고난 주간에 금식하기 로 했는데 그날 유혹에 넘어가서 점심을 먹고 성령님이 슬퍼하시는 것이 느 껴졌다고 했다)
하나님에 대한 영혼의 감각은 신앙의 경륜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자기의 영혼이 살아있으면 하나님을 느끼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못 느끼는 것입니다. 엘리와 사무엘의 이야기를 기억하시지요? 하나님이 부르시는데 사무엘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것에 대한 경험이 없으니까 하나님이 부르시는데도 엘리에게 가서 부르셨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엘리는 하나님이 부르시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하라고 시킵니다. 저는 그것을 읽으면서 매번 가슴이 아팠습니다. 신앙의 경륜과 경력에 있어서 엘리와 사무엘은 하룻강아지와 호랑이의 차이입니다. 그런데 엘리는 이미 그런 모든 하나님의 계시가 끊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통하지 않고 그 어린 아이 사무엘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을 보면서 이 엘리가 느꼈을 영적 소외감과 쓰레기처럼 폐기 처분되는 방기감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많이 불순종했으면 하나님은 얼마나 많이 느끼셨을 것이며 자신의 영혼도 많이 느낄 수 있는데 이 세상의 죄악과 유혹이 자기의 마음을 밟고 지나가서 완전히 돌멩이 같이 굳은 마음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무리 입김을 불어넣으셔도 그 하나님의 마음이 지킬 수 없는 마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다 결국은 환난을 만나는데 그때서야 비로소 깊이 묵은 감정과 사고들이 떠오르면서 자기가 지금 당하고 있는 것을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이 당하는 그 환난과 고난의 경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순종한 자기의 백성들을 재앙과 환난 가운데에서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처음 시작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들의 마음에 변화를 주시는 것입니다.
마음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신기한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강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 엄청난 재앙들과 환난들이 폭풍우처럼 몰아쳐서 삶의 기반 자체를 송두리째 날려버렸는데도 마음은 이제서야 아주 조금 움직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일 수도 있지 않을까?’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그 위대한 능력보다 농부가 홍수 철에 물길을 돌림과 같이 우리의 마음을 이리저리 돌리시는 그 하나님의 능력이 사실은 우리를 더 감탄하게 만듭니다. 참 신기한 것이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바꾸십니다. 하나님이 죄인의 마음을 돌리실 때 어떻게 됩니까?
예수 예수 내 맘을 녹이셨네
예수 예수 예수 내 맘을 녹이셨네
확 녹고 나면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환난을 통해서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이 안 계시구나’할 때에 멈출 수 없는 엄청난 두려움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엄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두려움을 느껴본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불순종하며 산 날이 많기 때문에 참 많이 느꼈습니다. 파스칼이 자기의 ‘팡세’에서 말하기를 ‘무한한 우주의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환난과 시련이 무서웠었는데 환난과 시련도 당할 대로 당하면 인간이 강해집니다. 그런데 회심하고 변화 받을 때가 되면 큰 환난과 시련이 몰아닥치는데 여태까지는 ‘이 환난을 어느 놈이 가져왔나. 반 죽여야지’하며 욕을 했었는데 어느 순간 ‘아니야. 달리 생각해봐.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내가 이런 환난을 당하는 게 아니야?’할 때 밀려오는 두려움은 환난이 더 올지 모르기 때문에 오는 두려움이 아니라 환난 앞에 홀로 서있다는 고독감이 그를 무섭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실 그 고독감이 모든 일류철학의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불순종 가운데 계속 살아가면서 삶을 돌이키지 않는 여러분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환난이 문제가 아니라 재앙이 문제가 아니라 거기에서 내가 내 재산을 잃고 건강을 잃고 사업에 위기를 만나고 가족들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의 외아들을 주시기까지 나를 그렇게 뜨겁게 사랑하셨는데 지금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나를 떠나셨고 그때는 하나님이 내가 기도하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셨는데 이제는 부르짖어도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에게 응답하시지 않는다’라고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형벌은 하나님이 우리를 홀로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무서운 형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가 이 세상에서 맛볼 수 있는 최악의 고통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떠나서 자신 혼자 남아있는 것입니다. 자신 혼자 남아있으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교회도 없고 사랑하는 지체들도 없습니다. 목자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도 없고 기도의 은혜도 없고 영생의 소망도 없습니다. 그리고 고난을 이길 성령의 힘주심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과 시련을 당해도 하나님이 자기 가운데 계시면 모든 것이 다 있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심방하면서 환난을 당해서 괴로워하는 지체들을 만나면 위로를 합니다. ‘뭐가 염려냐. 없는 게 무엇이냐. 다 있지 않느냐. 지금 조금 시련을 당해서 어렵다는 것인데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께서 극복하게 해주시지 않냐. 이것이 우리 과거의 경험이 아니냐. 교회가 있고 그대를 위해 기도하는 지체들이 있고 목자가 있고 말씀하시는 주님이 너의 삶 가운데 계시는데 없는 게 무엇이냐. 잠깐 동안 지나가는 것이다. 시련이 쓰고 맵지만 기다려. 그러면 주님께 뿌리박고 살아가는 그대의 삶에 하나님이 반드시 의인의 번성함, 물가에 심은 나무의 번성함을 보여주시지 않겠느냐. 그것을 믿고 바라며 사는 것이 신앙이 아니겠느냐’고 위로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한번 하나님 앞에 -완전하지는 않지만- 감추지 말고 유리통 속에 넣고 살아봅시다. 정직하고 깨끗하게.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감히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예화:신학교에 있을 때 컨닝을 전혀 용납하기 않고 처벌했는데 시험 전 기도내주는 내용-뿌린 대로 거두게 해달라고 할 때 아무도 '아멘'하지 않는다)
저는 오는 여러분들이 그런 기도를 용기 있게 해보도록 권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도 않든 데도 승승장구하고 성공의 길을 걸어가게 하셔서 자만에 빠지게도 마옵시고, 주님을 열심히 찾고 바르게 살려고 하는데 거듭되는 환난과 시련으로 인해서 주님을 찾고자 하는 제 영혼이 지치지 않게 하옵소서. 나의 건강도 나의 사업도 나의 개인적인 삶의 축복도 꼭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에 비례하게 해주시고 내 삶의 열매를 보면서 주님과의 관계를 늘 돌아보도록 도와주셔서 내 영혼이 내 온 삶과 함께 주님 앞에서 살아나도록 도와 주시옵소서’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시련과 환난 속에서 당신의 자녀들의 아픈 울부짖음과 쏟아지는 눈물을 보면서도 당신의 자녀들을 순종의 길로 돌이키고자 하시는 아버지의 애절하고 애틋한 마음을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불순종의 길에서 순종의 길로 돌아서서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아브라함과 같이 복의 근원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9. 불순종의 근원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을 좇는 악행을 인하여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신31:18)”
17절 하반 절부터 18절까지 세 가지 중요한 진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계속 불순종할 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재앙을 만나게 하신다는 사실을 17절 하반 절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재앙이 히브리어 성경에는 복수로 나와있으니까, 불순종하는 사람들을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그들을 다루어나가시는 하나님의 징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완고하게 불순종하는 자기의 백성들을 이렇게 계속되는 재앙으로 다루시는 이유는 그 재앙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징벌이 하나님께서 그들이 불순종한 것에 대해서 가지고 계신 분노만을 나타내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만약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진노에 복수의 개념만 포함되어있다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여러 차례 재앙을 내리실 필요가 없으실 것입니다. 딱 한번만으로도 더 이상 재앙이 필요 없게끔 만드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쓸어 진멸해 버리면 재앙이 더 이상 필요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복수로 나오면서 하나님이 계속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는 이유는 재앙을 목적 자체가 그들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보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불순종에 대해서 하나님이 징벌하고 재앙을 내리심으로서 그들을 돌이키고자 하는 데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돌이킬 때에 그 돌이키는 결국은 그들로 하여금 자기 안에 하나님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형식적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고 고백하는 것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듭니다. 형식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마음에도 없이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을 해서 손해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고 고백하고 나면 그 말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합니다. 우선 거짓말로라도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하면 내 양심이 ‘사랑하는데 주님을 위해서 한 게 뭐 있지?’ 라고 즉각적으로 물어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믿고 이제껏 의지하면서 살아왔다고 고백하는 그 하나님이 내 안에 없다고 진심으로 고백하면 그 다음부터 내 양심은 큰 혼란에 빠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오늘도 교회에 나왔는데 지금 이 순간 ‘내 안에 하나님은 없다’고 고백하는 것이 됩니다. 거기에는 대답이 있어야 합니다. ‘예전에 내가 하나님을 믿었던 것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말하든지 아니면 ‘내 안에 하나님이 없는데 그 이유는 이러이러한 나의 죄, 이런 불순종, 하나님을 향한 이러한 배반 때문이고 나는 이 죄를 가슴아파한다’하며 회개하는 후속적인 절차가 따라야 됩니다. 그러니까 형식적인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진실해지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입니다.
형식적인 신앙이나 외식하는 신앙이라고 할 때 여러분들이 머릿속에 그리는 것이 바리새인입니다. 그들이 순전히 존경과 영광을 받기 위한 동기에서 으스대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너무 가혹한 상상입니다. 실제로 그런 바리새인이 존재했을 수도 있지만 여러분들이 그려내 그런 바리새인은 일부러 그려낸 신파조의 바리새인입니다. 왜 그런지는 ‘참된 신앙과 외식’시리즈를 들으시면 좋으리라고 봅니다. 거기에서 이야기하는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는 오늘날의 평균적인 그리스도인들보다 그들이 훨씬 진실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그 사람들은 십일조라도 하고 금식이라도 했지 않습니까? 형식적인 신자라고 분류되는 사람 중에서 금식하고 십일조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시간을 정해서 기도하러 올라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지금 바리새인들로 교회가 가득 찼다면 신문 잡지에 스포트라이트 받느라고 정신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진실해지기가 그렇게 힘든 것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 없다’고 고백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는 하나님을 안 섬기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이방의 신들도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입장이 다릅니다. ‘나만 섬기는 것이 아니면 그것은 섬기는 것이 아니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그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을 섬기는 모양을 갖추고 내용적으로는 하나님을 안 섬기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그렇게 생각을 안 했습니다. 근본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이방 신과는 적대적인 관계는 되지 말고 친선의 관계를 유지하자는 정도의 생각이었습니다. 이것이 일종의 부분적인 배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분적으로나마 이런 식으로 배교에 들어가게 되면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잘 굴러갈 때에는 그것을 인정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는 감사하지도 않으면서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잘하는 것도 형식적인 신자의 특징입니다. 그 종교심리를 파헤쳐 들어가 보면 거기에는 정말 마음에서 깊이 우러나서 정말 감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하나님이 없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한 심리적인 몸부림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깊이 감사하지도 않는데 부풀려서 감사한 것처럼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자기 안에는 하나님이 없다는 고백을 감추고 자기 안에 하나님이 있다고 스스로 암시하는 것입니다. 감사에 담겨진 고도의 위선입니다. 그렇게 느끼지도 못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다’ 그렇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이 요즘 나에게 말씀하신다’고 생명도 없으면서 꿰 맞추는 것은 자기 안에 하나님이 없는 데서 오는 영적인 열등감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예화: 방문해서 전자제품을 파는 한 사람을 만났는데 약올리면 잘 팔린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자기 안에 하나님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말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 어떡하지’하고 근심하는 마음이 바로 상한 심령이고 그 심령이 바로 가난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한번도 가난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상한 정도로는 안되고 통회하는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히브리말로 상한 심령은 깨트려진 심령이고 통회하는 심령은 짓이겨진 심령입니다. 그래서 짓이겨질 정도로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고사하고 상한 심령이 되는 것도 힘든 것입니다.
형식적인 신자에게서 자기 안에 하나님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이렇게 괴로워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까?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자신 만만하고 쾌활한 영국의 젊은이들을 보면서 늘 절망한다’고 했습니다. 죄에 대해서 근심하고 통회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살 수 있을까’하고 괴로워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교회에 나와서 부요한 마음으로 자기 안에 하나님이 없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형식적으로 이끌려서 예배드리면서 말씀에 빗겨가고 하나님의 은혜에 빗겨 가는 생활로 시종일관하느니 차라리 예배를 드리고 집에 가다가 자기 안에 하나님이 없는 것이 너무나 괴로워서 술을 퍼먹고 뒹굴다가도 그 다음 주에는 상한 마음으로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술이 그 사람을 상한 마음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매일 똑같은 태도로 하나님의 말씀도 빗겨가고 자신 안에 하나님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정도로 정직해지지 않으면서 그렇게 교회에 출석해서 남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성공하면 외식이고 실패하면 배교입니다. 그에겐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성공해서 외식하면 교회 안에서 그가 고통이 될 것이고 실패하면 배교인데, 배교해서 맛을 잃고 세상에 버려지면 세상에서 쓸모 없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어느 것이 더 낫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하나님이 없는 것 같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이런 일을 당한다’하는데 하나님이 언제부터 없으셨습니까? 17절에서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하실 때에 벌써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안 계신 것입니다. 진작부터 없으셨는데 그들은 그것도 모르고 계속 살면서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재앙을 만나고 수없이 고통을 당하면서 비로소 우리 안에 하나님이 없는가보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진실해지기 위해서 치른 대가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있어서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실해지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희망이 있습니다. 죄를 지어도 진실한 사람에게는 돌이킬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래서 시인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무수히 기도한 기도의 제목 가운데 하나가 자기를 진실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서 배우는 성품이 히브리말로 ‘에메트’인데 ‘진실’입니다.
주는 토기장이 나는 진흙
날 빚으소서 기도하오니
항상 진실케 내 맘 바꾸사
하나님 닮게 하여주소서
하나님 나라의 좌판에 재물과 능력과 진실과 명예가 있다면 달려가서 제일 먼저 가슴에 끌어안아야 될 것은 진실입니다. 진실한데 능력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 그 능력을 받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진실해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데, 어떻게 하든지 주님 섬기면서 살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든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려고 하는데, 그래서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매달리는데 하나님께서 능력 뒀다가 뭐하시려고 그런 사람에게 안 주시겠습니까?
그런데 능력이 있고 진실하지 않으면 굉장히 불행해 지는 것입니다. 이단교주의 공통된 특징이 능력은 있었는데 진실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진실하면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단에 속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능력은 성령의 능력이 아닙니다. 조작이거나 악령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런데 참된 그리스도인 속에서 우러나오는 영적인 능력은 평강 가운데에서 그 사람의 인격을 통해서 흘러나옵니다. 그런데 이단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사람을 노예적으로 굴복시키는 이적은 있을 수 있어도 사람의 마음을 깊이 감동시키며 사로잡는 힘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실의 결핍입니다. 그러니까 이단에 속해서 충성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참된 사랑보다는 노예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리고 교리의 체계 자체를 그런 식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진실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마지막까지 붙들어야할 가치가 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가운데 죄를 짖는 형제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한번 잘못한 것을 가지고 낙인을 찍으면 안됩니다. 교회에서는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이 일흔 번의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주라는 이야기는 전제가 걸려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진실하게 자기의 죄를 뉘우칠 때 용서해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렇게 힘든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큰 능력을 행사해도 하나님이 그것을 보고 놀라실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선 당신의 능력과는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고, 놀랍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당신이 이미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실은 다릅니다. 진실은 진실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만 하나님이 진실해질 수 있는 용기도 주시고 마음에 힘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능력이 많은 사람들도 두려움 속에 살아야하는 때가 있지만 진실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사니까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런데 최초로 이 백성들이 그것을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없나보다’ 이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그것은 겨우 시작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안 계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이 재앙보다 더 큰 재앙이다’하면서 가슴아파 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노하시면서 “내가 너희와 함께 가나안으로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시니까 “이 황공한 말씀을 인하여”라고 하였는데 히브리 성경에 보면 ‘재앙의 말씀을 인하여’라고 합니다. 그것을 자기들이 지금 당하고 있는 재앙보다 훨씬 더 큰 재앙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비로소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자신들의 최대의 관심사로 떠오르게 되는 것이 회개로 들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첫 번째로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이 재앙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들의 영적인 상태의 진실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재앙들을 보내셔서 그들을 징벌하시는 것입니다. 이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분들이 이와 비슷하게 하나님 앞에 징벌을 당하면서 고통 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피할 수 있는데 까지는 피하고 막을 수 있는데 까지는 막아보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참 영악합니다. 그리고 쉽사리 자기에게 일어난 이 어려운 일들이 하나님이 자신의 불순종을 인해서 자신을 책망하시는 것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오랫동안 그 마음이 굳어졌기 때문에 영적인 분별력이 현저히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삶의 상황을 영적인 안목에서 해석하는 영적 사색력은 은혜의 상태와 영적인 성숙에 비례합니다. 자신의 영적 상황을 신령한 안목으로 분석해낼 수 있는 영적 사색력은 은혜의 상태와 은혜의 깊이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의 큰 은혜 가운데 있고 그런 은혜를 여러 번 경험하면서 신앙적으로 깊어지게 되면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매개체로 보입니다. 그래서 눈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들 속에서 수시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은 직통파와는 다릅니다.
(예화: 어떤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자기 교인 중 한 자매가 너무 영적이 되어서 시장 갈 때도 항상 하나님께 무엇을 사야 하는지 물어보는데 어느 날 잡채를 하려고 했는데 시금치를 빠트리고 사오자 그 남편이 ‘너희 하나님은 잡채에 시금치 넣는 것도 모르시느냐’고 했다는 내용) 그것은 아닙니다.
(예화: 교회를 건축할 때 감당할 수 없이 엄청난 일을 결정해야 하는 복잡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응답 받고 하는 것이냐’는 아내의 질문에 ‘그렇다’고 하자 ‘하나님이 이렇게 많은 돈을 들여서 지으라고 하시느냐’고 했다-‘아는 것이 부족하고 어려 서 고민도 많이 했지만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리신 결론은 그 공 장 건물을 고쳐서 교회 만들어서 쓰는데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해라’하는 것이 응답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포괄적으로 해주셨으니 이렇게 지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하나 결정할 때마다 응답을 받아야 했다면 아직도 여기에 못 들어 왔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과정을 인도하시면서 기가 막히게 함께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머리가 모자라서 업자들에게 당한 경우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버려두시지 않으시고 깊이 개입하셔서 절대로 우리를 혼자 놔두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결정할 수 있도록 여유를 주시면서 하나님께서 이끌어 나가셨습니다. 성경이 쓰여질 때도 그 사람의 기질과 교육의 정도, 취향, 그 사람의 인격, 학식, 언어, 이런 모든 것들을 활용하셔서 쓰게 하셨는데 하물며 교회를 지을 때에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 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각자를 사용하셔서 하나님께서 해나가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직면하고 있는 제일 큰 문제는 하나님이 자기 안에 안 계시다는 것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직통파와는 다릅니다.
(예화: 한 목회자가 돈이 없으면서 카드 빚을 잔뜩 내서 하나님이 새 의자를 사 놓으 라고 했다고 교인도 없는데 새 의자를 수백 개 사놓은 이야기)
그런 직통파 계시가 아니라 진실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서 언제든지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시니까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수시로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진실한 마음이 없으면 돌이키지 않습니다.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계속 되는 재앙을 통해서 다루고 싶으신 것은 그들이 정말 정직하게 자기의 상황을 보게 만드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당신의 품으로 부르시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중 지금 현재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분들이 있을 텐데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쉽게 진실해지지 않습니다. 사물을 보는 영적인 사색력이 은혜의 깊이와 은혜의 상태에 비례하는 것인데, 그런 상태에 있으면 앞에서 말한 그런 직통파가 아니라 하나님이 수시로 함께 하시는 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은행에 있는 한 사람을 만나도 기가 막히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계시는 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어느 업자에게 거의 속을 뻔했는데 그 사이를 깨고 예상치 못했던 사람이 나타나서 그 사람이 정보를 다 주고 자기의 이익과는 상관없이 그 사기성이 깃들여 있는 제안의 이면을 발견할 수 있도록 전문가적인 눈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수시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황을 통해서 그것들을 영적으로 사색할 수 있는 능력이 은혜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안에 있을 때는 하나님이 약간만 야단을 치셔도 금방 압니다. 기도만 되지 않아도 압니다. 그런데 너무나 오랫동안 하나님을 떠나서 형식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이런 영적인 사색력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건이 일어나면 물리적인 인과관계만 생각합니다. 교통사고가 나면 ‘그 자식이 신호 위반하고 달려와서 옆구리를 박는 바람에 내 갈비뼈가 나갔잖아’ 하는데 그런 것은 육적인 사색력입니다. 물론 그런 분석도 필요하지만 그 이면에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오랫동안 하나님이 안 계셨는데도 ‘하나님이 안 계시다. 우리는 어떻게 할까? 주님이 안 계시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일 수 있느냐? 주님이 없으시면 우리는 이스라엘일 수 없다. 이것은 이방 신들과 화해를 하면서 지내느냐 안 지내느냐 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보다 더 중대한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지금 우리 안에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것이다’하고 진작 인정했어야 하는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만약에 영육 간에 그런 곤고한 일들을 끊임없이 만나고 고통을 받으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과거에 잘못 산 것에 대해서 복수하고 계시는 중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다 내 죄 값을 받는 것이지요’라고 말하는 사람 치고 회개하는 사람 못 봤습니다. 그것은 체념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과거에 대한 복수 때문이 아니라 지금 새 삶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돌이켜야 합니다. 그렇게 계속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생각하는 것이 없습니까? 박차고 나와서 새벽기도하고 말씀 사모하고 자신의 삶을 개혁하면서 하나님 앞에 새롭게 살 진지한 각오와 실천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됩니다.
두 번째 18절에서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을”했는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엘로힘 아하림’이라고 ‘다른 신들’이라는 복수형이 나옵니다. “다른 신들을 좇는 모든 악행을 인하여” ‘좇는’이라는 말이 쫓아간다는 말인데 히브리여 성경에는 ‘타나’라는 말로 나오는데 그것은 ‘turn the face’입니다. 얼굴을 돌려서 그쪽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많은 신들을 향해 얼굴을 돌리는 그 모든 악행 때문에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떠나가시고 그들이 그렇게 영적인 분별력이 없는 상태가 된 이면에 두 번째로 우상 숭배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일단 떠나고 나면 이 세상의 어떤 것을 향해서도 마음을 오로지 향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방 신들’이라고 되어있는 복수형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바알만 섬긴 것이 아니라 아세라도 섬겼습니다. 그리고 몰렉도 섬겼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신들과 접하면서 그들을 향해 얼굴을 돌리고 그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에게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을 믿던 사람들이 세상을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오로지 세상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늘 말씀드리듯이 자기는 세상으로 돌아갈 때 옛날에 놀던 세상이려니 하고 돌아가지만 그 세상에는 여러분들이 이미 배신자로 올라 있기 때문에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면 받아는 주는데 신앙을 다 팔아먹을 때까지만 받아주고 그 다음에는 뱉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하나님의 자녀인 사람이 배교하고 세상에 가서 잘 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렇게 세상에서 잘 살다가 죽으면 그는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게 행복해 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화: 정지용의 “향수”라는 시-그렇게 사모하다가 고향으로 돌아가서 쓴 시는 “고향 에 돌아왔건만”이다)
고향에 돌아왔건만 고향은 그 고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그런 식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온 사람이 신실하게 자기를 받아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감격하는 것은 세상에 대한 그 배신의 체험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그렇게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는데 그 중에서 몇 사람이 ‘한번 돌아갔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랬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애굽에서 그들을 받아주기는 했겠지만 첫날은 잘 먹여줬다고 하더라도 채찍 맞으면서 일하는 노예로 살면서 그리워하던 고기가마 옆에서 불 때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뻔한 일입니다.
그런 최후를 생각해보면 이런 이치가 너무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떠나서 하나님이 자기 안에 없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아가는, 그러면서도 재앙을 끊임없이 당하게 되는 그 비참한 상황의 이면에는 이방 신들을 향한 숭배가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근본적으로 신령한 삶입니다. 그런데 그 신령이라는 것은 다른 것을 사랑하면 신령이 아닙니다. 그것은 치명적인 죄입니다. 그리고 뿌리 깊이 박혀서 그 사람 속에 있는 모든 거룩한 빛과 신령한 지혜와 신령한 모든 은혜를 앗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의 본분을 “마음과 뜻과 성품과 네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라고 하셨던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거기에서 모든 신령한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끝까지 변화가 안 되는 가장 커다란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괴로워는 하는데 변화는 안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말고 자기가 집착하며 사랑하는 다른 것이 있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하나님 말고 내가 사랑하는 것이 있다고 하는데 무엇을 사랑한다는 것입니까? 증거를 대보십시오’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묻는 것 자체가 증거입니다.
사랑한다고 해서 꼭 이렇게 열렬하게 노골적으로 사랑하는 것만이 사랑이 아닙니다. 물론 여러분들보고 돈에 미친 사람, 돈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동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명예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렇지 않다고 웃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돈, 명예, 부, 이 세상의 영화, 이런 것들은 사랑의 대상으로서 대표적이라는 것이지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여러분들이 이제껏 가지고 있는 여러분 자신의 자존심 같은 것들이 무너지기 싫어하는 것, 그런 것들도 하나님이외에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열렬한 사랑일 수 있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편견, 그리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아집, ‘저렇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요즘에 내게 필요한 말씀은 저것이 아니야’하는 판단 같은 것들, 그런 것들에 집착하고 사는 것 자체가 넓은 의미에서 우상입니다. 왜냐하면 미치는 효과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거의 같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오로지 사랑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하나님을 의지할 수 없게끔 만드는 힘이 그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이외의 것들을 향한 사랑이 반드시 이렇게 우리로 하여금 영적 분별력을 잃어버리게 만들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 속에 신령한 모든 것을 상실하게 만드는 그런 파괴적인 힘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 속에서 살았던 때에는 예외 없이 하나님만 사랑하던 때입니다. 그리고 갈등, 변화되지 않은 아집, 지루할 정도로 진전이 없는 성화생활의 지지부진함, 이 모든 것들은 결국 근원을 캐 들어가 보면 사랑입니다. 하나님 이외의 것들에 대한 사랑인데 그 사랑도 일관된 사랑이 아닙니다. 세상을 사랑하다가도 금방 실증이 나고 하나님의 사랑이 그립지만 완전히 돌아가기에는 자기가 사랑하는 것들이 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나라 안으로도 들어가지 못하고 밖으로 나오기에는 너무 두려워 그 문지방에 버티고 선 가엾은 거짓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 생명이 항상 질식되어 있는 것입니다. 풍성하게 부어지는 것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흐립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아침구름과 같아서 언제 없어질 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타이르면 눈물을 흘리는 순수함이 있는가 하면 어느 순간 가슴이 돌멩이처럼 딱딱해져서 하나님 앞에 대드는 막돼먹은 강퍅한 사람으로 돌변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두 얼굴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에는 최상의 상태였을 때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러면서 이중으로 위선 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우리 신앙의 최고의 화두는 하나님만을 진실 되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인하여 내가 그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정령 숨기리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화자의 필연적인 의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외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대면해주실 때에 그 영광의 빛으로 능력을 공급받으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더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수시로 이런 삶을 살라는 말씀을 듣지만 그런 삶을 훌륭하게 살 수 있는 힘이 우리 안에 없습니다. 살려고 애를 쓰지만 그러나 우리의 힘만으로 그렇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살아야된다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는데 자신이 너무 못사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의 무능력함은 여러 방면에서 나타나지만 그 중에 하나가 미운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저는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한 존재라고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 주위에서 깊은 신앙을 가진 사람을 제외하고 10년 전에 뼛속 깊이 미워했는데 10년 후에 뜨거운 형제처럼 사는 사람이 있습니까? 거의 없습니다. 남편을 증오하다시피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남편을 뜨겁게 용서하고 끌어안고 사는 사람을 보셨습니까?
(예화:팔십세 된 할머니가 이혼 신청을 했는데 스물 일곱 살 때부터 이혼하려고 했다 고 한다)
이 세상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의 미움을 다 끝내지 못하고 죽어서라도 그 집안에 나타나서 ‘귀신이 되어서라도...’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너무 무서우면 살아있는 사람이 그 귀신을 불러서 화해합니다. 그것이 한의 개념입니다. 그것이 과장이 아니라 사실 우리 안에는 그렇게 절망적인 본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대면해주시는 삶을 살 때, 아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굴을 가리시지 않고 은총과 영광의 빛을 비춰주시는 삶을 살 때에는 누군가가 미우면 그것을 끓어 안고 계속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도 ‘저 인간이 내게 와서 무릎꿇게 역사 해 주시옵소서’ ‘저 인간 반쯤 죽여서라도 제 잘못을 깨닫고 기어오게 해 주시옵소서’하고 기도하면 안됩니다. 사랑은 시비 이전에 긍휼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불쌍하게 보셨을 때 왜 불쌍한 존재가 되었습니까? 자기가 잘못하고 불쌍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그 치명적인 당신을 향한 반역을 생각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의 결과로 인해서 당하게 된 비참한 상태를 보시면서 너무 아파하시는 것입니다.
(예화:어린 시절 편도선이 심하게 부었는데 할머니께서 돈이 없으시니까 병원에 데리고 가셔서 3일 뒤에 돈을 가져올 테니 치료해달라고 부탁하시는 것을 문틈으로 보았다)열이 나서 고생하는 손자를 보시면서 너무 불쌍해서 무엇이라도 하고 싶으시다 는 마음이 생기신 것입니다. 그것이 긍휼의 마음이고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서는 그런 긍휼의 마음이 풍부한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형편없이 비참한 인간이 되었고 짓밟힌 인간이 되었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까? 우리가 주님께 나오기 전에 그렇게 짓밟힌 영혼이 되었을 때에는 사실 하나님의 공의의 측면에서 보면 그 자체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그것을 물리적인 인과관계로만 보셔서 당연하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병들어 있고 짓밟힌 인생이 바로 자기가 택한 백성이라는 생각을 하신 것입니다. ‘내가 택한 백성, 내가 낳은 자식’이라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 긍휼의 마음이 바로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것이 기도하는 가운데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는구나’를 느끼는 것입니다.
수십 년 동안 원수지고 살수밖에 없는 그 사람인데 그 순간 확 녹으면서 그 인생이 그렇게 불쌍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못하지도 않은 사람이 찾아가서 ‘나를 용서해달라’고 말합니다. 사과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찾아가서 ‘내가 너를 긍휼히 여긴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한계를 하나님께서 은혜로 극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얼굴빛을 비춰주시는 백성들 삶 속에 있는 놀라운 자산입니다.
살다보면 절망될 때가 왜 없겠습니까? 선지자들도 사역을 하다가 절망을 했는데 낙심되는 일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더 온전히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악함을 인해서 더 많이 절망하게 되고 주님을 정말 온전히 섬기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 섬김의 무능함 때문에 하나님 앞에 정말 많이 낙심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얼굴빛을 비추시고 힘을 주시면 어느 한순간에 그 절망이 지나갑니다.
(예화: 언젠가 세상적으로 너무나 불길한 꿈을 꾸어서 순간적으로 불안이 밀려온 적이 있다. 그러나 침대에 엎드려 ‘하나님, 제가 이런 꿈을 꾸었는데 제가 이렇게 불안 해 하는 것은 제 마음이 어둡다는 것 아닙니까. 잘못이 있으면 돌이키게 하시고 잘못이 없으면 마음에 담대함을 주시고...’간절히 기도하고 나니 불안함이 확 사라 졌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불길한 일은 무슨 불길한 일입니까? 다 마귀의 장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굴빛을 비추실 때에는 이런 식으로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상황들을 극복하면서 살게 해 주십니다. 그런데 그 축복을 하나님께서 거두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 살아있는 신자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불순종하면서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지만 순종하며 사는 삶이 너무 힘들고 자기의 것은 아무 것도 없이 하나님만 섬기면서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 같지만 그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주셔서,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을 뛰어넘고 개척할 수 없는 상황을 개척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게끔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10. 하나님을 잊을 때(1)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쳐서 그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한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그들이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날에 나는 그들의 상상하는 바를 아노라(신32:19-22)”
여기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과 불순종에 대한 이야기가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역사 속에서 신앙이 가장 좋았던 때 중의 한 때에 주어진 말씀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이미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주신 말씀이지만 하나님과 함께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아주 좋은 신앙의 때에조차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밑바닥에 깔려있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으면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불신앙적인 본성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본성 때문에 나중에 주님을 거스르고 불순종하게 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불가항력적인 면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경고의 말씀이 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그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자신 속에 그런 위험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 안에 있는 것들을 깊이 이해하고 깨닫게 될 때에 그만큼 앞으로 다가올 불순종과 타락의 죄들은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를 더 하나님 앞에 준비하고 다스리는 가운데 피할 수 있는 시험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그것은 중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러한 이야기를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려주실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각하게 이것을 듣고 있었지만 사실 실감하기는 참 어려웠을 것입니다. 지금 가나안의 정복을 앞두고 이렇게 마음이 가난해져있고,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갈 것이고 이제 새 지도자를 따라서 저 가나안을 정복해가야 하는데, 정말 하나님밖에는 의지할 분이 없는 상태에서 이렇게 “너희가 그 땅을 얻게되면 배부르고 살져서 나를 멸시하고 언약을 어기고 타락할 것이고 불순종할 것이다”라고 하는 경고가 그들의 마음에 얼마나 뼈저리게 다가왔을까 하는 것은 의심이 가는 대목입니다. 그렇지만 모세는 오랫동안 그 백성들을 목양 하는 가운데 -이미 일어나지 않은 일들도 예측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자식을 잘 아는 부모처럼- 그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 뼈 속 깊이 그들의 미래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노래를 만들어서 백성들 속에 계속해서 울려 퍼지게 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노래는 하나님이 인도하신 은혜에 대한 찬송과 그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살아야할 은혜에 대해서 노래한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 하나님이 모든 면에서 전지 전능하시지만 교육학자로서도 탁월하신 면이 있습니다. 저는 구약을 읽으면서 가장 감탄하는 것이 제사제도입니다. 진리를 가장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은 역시 말과 글이지만 인간의 가슴에 깊이 새겨지는 것은 말과 글이 아니라 그림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못 받은 설교는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고 쓸데없는데 관심을 가졌던 설교는 예화만 생각나고 은혜를 조금 받고 나면 노트를 펼치면서 대지 1,2,3이 생각나는데 정말 가슴에 깊이 와서 꽂힌 설교는 그림이 생각납니다. 그 그림이 가슴에 생각나서 그 그림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설명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가 막히게 착안하신 분이 벧엘성서 교재를 쓰신 분입니다. 제사 제도를 보면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죄인이 자기 눈앞에서 짐승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죄의 심각성과 누군가가 자기를 위해 대신 희생하므로 값없이 용서를 받는 체험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유월절은 또 얼마나 극적입니까? 그런 것들을 통해서 소위 ‘real play’ 실연식 교육방식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정한 진리를 계속 생각나게 하시는 방식이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노래를 지어서 부르는 것입니다. 원래 히브리 사람들의 시는 노래로 된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노래를 부르기를 좋아했느냐면, 노래 그 자체는 가락을 타고 흐르면 그 내용이 잘 보존이 됩니다.
(예화: 장사들이 개수를 셀 때 노래로 세면 잘 잊어버리지 않는다)
(예화: ‘뿌리’에서 족보를 보존하기 위해서 외우는 내용)
시편도 곡조에 맞추어서 불려진 것입니다. 그것의 강점은 내용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더 극대화하기 위해서 시편 가운데에는 알리터레이션이라고 해서 두문법의 시가 있습니다. 그런 노래를 지어서 가락을 붙여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수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세심하게 배려하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잊는 것은 참 안 좋은 것이지만 인간이 타락한 뒤 부패성과 무능함 가운데 하나가 잊기를 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 잊는 것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섭섭하게 하신 일은 절대 안 잊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정말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불순종하면서 사는 교인들을 보며 가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 사람은 그러면 안 되는데,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왜 저럴까’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그러는 것은 남은 기억하고 있는데 자기는 벌써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런 일을 막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노래로 불려지게 하신 것입니다 노래 그 자체가 그것을 간직하게 할 수는 없지만 그 후손들까지도 그 노래를 부르면서 평생에 듣던 그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도구가 되어서 그들을 일깨워주시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그 뒤편에 보면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들처럼 되리라...” 히브리 성경에는 “이 노래가 그의 앞에서 증인으로서 대답하리라. 왜냐하면 그 노래가 그의 자손들의 입으로부터 잊혀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내가 약속한 그 땅으로 그들을 인도해들이기 조금 전인 오늘날에조차도 그가 행하는 마음의 계획을 내가 알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들에게 노래를 지으라고 명하신 하나님의 이유였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것이 두 개가 있습니다. 우선 깨닫게 되는 첫째는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이스라엘 백성들, 두 번째는 당신을 다시 생각나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20절에 보면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한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지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하면서 죄가 많이 나옵니다. 첫째는 ‘돌이켜’, 둘째는 ‘다른 신을 섬겨’, 세 번째는 ‘멸시하여’, 네 번째는 ‘언약을 어겨’입니다.
먼저 돌이킨다는 것은 이제껏 걸어왔던 일관된 신앙의 자세를 흐트러트려서 방향을 바꾼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인간이 죄로부터 회심하는 것과 은혜로부터 죄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거의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껏 까지 걸어가던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불순종을 향해서 자신의 삶을 돌이키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가 이해가 잘 안가면 죄 가운데 살다가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 죄 가운데 있는 것과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를 생각하면 불순종 가운데에서 순종으로 돌이키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차이가 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가던 길들을 이렇게 돌이킬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잊어버린 삶의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걸어가던 길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던 신앙의 삶들을 돌이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돌이킴에는 마음의 돌이킴이 먼저 있었고 이 마음의 돌이킴은 곧 하나님을 향해서 자신의 마음이 돌아앉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 하나님을 떠난 그 삶의 실체입니다. 이런 돌이킴이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보다 기적을 적게 보았습니까? 우리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적게 들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보다 덜 헌신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돌이킨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린 구체적인 모습니다.
두 번째는 우상을 섬긴 것이었습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방향 없이는 살수가 없습니다. 삶의 목표가 없이는 그 사람이 돈이 아무리 많고 지위가 아무리 높아도 그 사람의 인생은 생기가 없습니다. 그리고 정말 비참한 인생입니다. 그러니까 인생의 참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분명한 자기 자신의 삶의 목표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대치할 수 없는 목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돌이키게 되면 자기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하나님 이외의 것을 향해서 추구하고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이 있기 때문에 사실은 그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돌이켜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의 논리적인 순서나 시간적인 순서라기 보다는 하나님을 향해 등돌리고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실제적인 삶과 내면의 세계를 해부해서 분해한 것입니다. 그것이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는 동기가 무엇 때문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는 동기는 우상을 위해서도 아니고 우상을 섬기는 그 자체가 행복해서도 아니고 자기 자신의 행복이었습니다. 그래서 우상을 섬기는 것은 극단적 이기심의 표현입니다. 오늘날도 가난한 동네에 갈수록 이런 미신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돈을 그렇게 많이 들여서 궂을 하고 절을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조상신을 만나서 달콤한 인격적인 교제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의 문제를 해결해보려는 시도이고 도전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복하고 싶으면 하나님께 빌지 왜 이방 신에게 빌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오리엔트를 지배했던 신관 중 하나가 소위 ‘local god’이라고 하는 개념입니다. 지역신의 개념입니다. 그래서 지역마다 신들의 테리토리가 있어서 그 영향권 안에서는 그 신이 최고라는 사상이 이미 희랍신화에도 나옵니다. 바다에 가면 태풍의 여신인 포세이돈이 판칩니다. 잔치 상에서는 술의 여신인 박카스가 판칩니다. 연애하는 사람에게서는 에로스나 주피터가 판칩니다. 이렇게 인류의 역사가 모두 지역신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부뚜막에는 부뚜막을 다스리는 신이 있고 장독대에는 장맛을 주관하는 신이 있고 화장실에도 그곳을 주장하는 신이 있어서 쓰러져 죽는 사람은 의학적으로 규명이 안되니까 그 신이 잡아당겼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신들이 맡은 서식지가 있어서 그 안에서 주장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일신 신앙이 충만했던 때에는 문제가 안되었지만 그 신앙이 떨어지고 나면 ‘여기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역이 아니다’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속 많이 말씀하신 것이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온 천지에 여호와 하나님이라”하시면서 당시의 통치권이 온 세상에 모두 미친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억하게 하시려 했던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고 애굽에서 일어난 그 일을 계속 반복하신 것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신들 중에서 그래도 정상을 차지한다고 생각했던 신이 그 당시에 레신(태양신)이라고 믿었는데 태양이 빛을 잃게 만들고 애굽에 장자들을 치시면서 계속 생각나게 하신 것도- ‘그 때에 너희들이 여호와는 모든 세상을 다스리시는 신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는데 그것을 그 때에도 생각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지역신 개념 때문에 하나님께 안 빌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비는 대신 이방 신에게 빌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 비는 것보다 이방 신에게 비는 것이 훨씬 쉬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높은 도덕을 요구하셨습니다. 제물을 잘 가져왔어도 ‘너의 진심이냐?’ ‘네가 그 제물을 드리기에 합당하냐?’ ‘천천의 수양과 강수와 같은 기름을 드린다고 할지라도, 네 몸의 열매를 드린다고 할지라도 네가 겸손하냐?’ ‘하나님과 동행하느냐?’ ‘공의를 사랑하고 인자를 행하느냐?’하시며 자꾸 파고 들어가서 묻는 것이 이방 신에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 신은 마치 생각 없이 뇌물 받는 신들이었습니다. 머리가 텅 비고 뇌물만 받는, 파리 떼처럼 시체에 몰려드는 도덕성이 없이 걸근대는 신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을 축복해준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훨씬 쉬웠던 것입니다.
(예화: 무당 했던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들의 삶이 지저분하고, 정결한 것과는 거 리가 멀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쉽게 이방 신들을 섬기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사실 섬긴다는 개념이 어차피 이기심을 가지고 접근을 하는 것이니까, 높은 도덕성을 가지고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종류의 섬김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든 당신에게만 돌려야할 그 마음의 진심을 이방 신들에게 나누어드리는 것조차 불결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들의 삶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충만하게 지배하고 그 은혜 아래 우리들이 있을 때에는 우리에게 하나님 이외에 귀한 것이 없습니다.
(예화: 어릴 때 은혜 많이 받은 어떤 아주머니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아니? 저 은행빌딩을 줘도 안 바꾼다’라고 하신 말씀)
그것이 바로 하나님 은혜가 있고 하나님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 때에 성도들의 마음입니다. 물론 유혹을 받기는 하지만 하나님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그분이 자신의 전부이고 그분이 자기를 기뻐하시기만 한다면 자기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도 좋다라고 하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저는 설교자가 되기 직전에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하나님의 영광의 은혜를 경험한 다음에 언젠가 혼자 기도하는 가운데 그런 탄식이 터져 나왔습니다. ‘왜 하나님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그렇게 신경을 많이 쓰실까? 우리를 행복하게 하시기 위해서 신경 쓰시는 것을 모두 모아서 당신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신경을 더 많이 쓰시면 하나님이 얼마나 더 영광을 받으실까? 그렇게 하시면 우리가 더 행복할 텐데’ 어린아이와 같은 생각이지만 그런 생각이 들어서 간절히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시기 위해서 너무 신경 많이 쓰지 마시고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많이 일하십시오. 우리의 행복은 우리의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웃으시지만 십여년 전 제 마음속에는 그 기도가 뼛속 깊이 사무치는 노래가 되었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모두가 그런 정신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본주의적인 갈망인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인본주의는 이기주의가 아닙니다. 누구를 위해서 살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관심이 없고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데 만 관심이 쏠린 그것이 바로 인본주의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 대신 하나님 이외의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하고 사랑함으로서 자기가 행복해질 수 있는 그런 것들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삶을 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인데 그 일이 하나님을 잊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일어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세 번째는 ‘나를 멸시하여’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 억울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 보고 하나님을 멸시하지 말라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앞뒤를 돌아보면서 ‘누구야. 네가 멸시했니?’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자기가 멸시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멸시는 하나님께 대한 노골적인 도전과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악한 소문을 내는 종류의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배교자의 멸시이고 여기에서 말하는 멸시라고 하는 것은 넓은 의미로 보자면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지 않는 모든 삶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당신의 이름이 드높임을 받는 것이 이 땅에 자기의 백성들을 두신 이유입니다 우리를 향해 특별한 사랑을 베푸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를 통해서 당신이 특별히 존귀히 여김을 받고 싶으신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존귀히 여김을 받으신다고 하는 것은 율동이나 어떤 교회적인 행사나 거창한 성가대 같은 것들을 통해서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존귀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경배자로서 무릎을 꿇게 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두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보다는 숫자적으로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하나님이 더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을 좋아하시겠느냐 두 세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좋아하시겠느냐 한다면 물어볼 필요도 없는 말입니다 그리고 두 세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좋아하시겠느냐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좋아하시겠느냐 하는 것도 두말할 필요도 없는 질문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더 많이 영광을 받으시는데 조건은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히 여김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나머지 삶은 멸시하는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이 이렇게 빛을 발하면서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이 우리의 영혼에 그 빛을 비춰주시면 그 빛으로 사람들에게 비추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가장 잘 알리는 방법은 하나님의 백성이 진실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은 타락한 이후에는 자기의 백성들을 통해서 보여주시는데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리는 가장 훌륭한 방법, 어떤 의미에서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백성이 실로 하나님의 백성이 됨으로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가장 잘 알려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이 하나님을 높이는 삶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냥 살수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을 보면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생각하거나 혹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믿는다고 떠버리고 거지같이 사는 사람들 보면 참 창피합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 믿는다는 티를 안내고 성경 찬송 봉투에 넣어서 다닙니다’ 그 양심 참 훌륭합니다. 그런데 개떡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졸렬하면 성경 찬송을 봉투에 넣어 가지고 다니면서 예수 믿는다는 사실을 감춤으로서 하나님께 덜 수치를 돌려드릴 길을 택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 어두움 가운데에서 불러내셔서 빛 가운데 들어가게 하신 것은 우리를 그 빛 가운데로 이끌어내신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그렇게 택하셨는데 왜 기껏 해서 자기 자신의 삶은 예수 믿는다고 티를 내면 하나님이 욕먹을 것이라고 하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성경 찬송을 봉투에 넣어 가지고 다니는 삶을 살아갑니까? 그렇게 살아서 뭐하겠습니까? 그러니까 객관적인 삶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불신자들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없구나'를 생각합니다.
(예화: 버틀란트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행복의 정복자’와 같은 책을 열 심히 읽으며 참 대단해 보였었다-그런 것을 보니 신앙이 들어갈 리가 없었다)
사람은 사람을 보면서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확신을 더 갖거나, 하나님이 계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거나,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확신하거나, 어떤 쪽으로든지 그리스도인과 심지어 불신자들도 그런 사실에 대해서 증거 하면서 사는 일종의 들리는 노래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지 않다는 사실이 자기를 통해 전파되어 나아가도 그 사람들에게는 투덜거릴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믿는 여러분들을 보면서 사람들이 ‘그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다’ 혹은 ‘그 하나님이 계시다고 해도 나는 믿으면 안되겠다’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겠다’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그 삶이 바로 하나님을 멸시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참된 행복을 이렇게 하나님을 멸시하는 삶 속에서 찾으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높이는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주님을 높이는 삶이고 그 삶을 위해서 주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애쓰시면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이방인들의 채찍아래 사라지고 말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내시고 그들을 번성하게 하셔서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보내신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의 존재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리시고 하나님 자신이 존귀히 여김을 받으시기 위해서 그들을 거기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계획과는 아랑곳없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삶을 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잊어버릴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언약을 어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마음에 가득할 때 그때 여러분들에게 제일 소중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소중한 것만큼 하나님과 맺은 약속, 하나님과 맺은 언약, 더 넓게 말하면 그 언약 관계 속에서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모든 말씀인 성경, 이런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깊이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일생의 문제를 경솔하게 약속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위 서원 하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서원은 특히 어려울 때 많이 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께 잘 보여서 탈출해볼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심해야 될 점이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 앞에 하는 약속을 매우 신중히 해야하고 약속을 했으면 그것을 정확하게 지키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신실한 하나님의 성품에 부응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일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이 무엇인가를 알고 싶으면 의롭게 살려고 애를 쓰고 하나님 안에서 의롭게 되는 길이 무엇인가를 가지고 고민을 하면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에 대해서 많이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깨달으려면 여러분들이 사람들을 깊이 사랑하고 그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닫고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자기 안에 있는 미움과 증오의 감정들을 꺾고 순종하면서 사랑하는 길로 나아가 보면 여러분들이 비로소 하나님 안에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닫게 되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하고 반대로 생각합니다. ‘내가 죄를 많이 지으면 하나님의 그 의에 대해서 깨달을 것이다’ ‘주님의 순결에 대해서 깨달으려면 지금처럼 깨끗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더러워져보고 아주 지저분해보면 순결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하는데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모르게 됩니다.
언약을 지키는 것도 똑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그들의 태도를 당신과 맺은 언약에 대한 태도를 보면서 확인하게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언약을 어겼다는 것은 결국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람들의 삶 속에는 신실한 믿음이 사라져버린 상태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백세에 낳은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쳤을 때 기꺼이 그를 죽이기 위해서 칼을 들게 만들었던 것은 그 씨로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네 자손을 많게 하리라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 약속이 이 아이가 죽는데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 지는 몰랐지만, 어떻든 이 상황이 주는 절망보다는 그 약속이 주는 소망이 훨씬 컸기 때문에 하나님의 그 약속을 따라서 이삭을 하나님 앞에 드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언약을 지킨 믿음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은혜가 사라지고 하나님을 잊어버릴 때에는 믿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대로만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면 결국은 눈에 보이는 대로만 합리적 이상의 삶을 전혀 살지 않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이나 상황을 초월해서 인간들에게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큰 은혜의 강권하시는 역사, 그리고 당신을 믿는 자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힘, 능력, 이런 것들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믿음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지키면서 살면, 그 삶이 평범한 삶인데도 믿음이 없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아주 전투적이고 모험적인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바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이렇게 네 가지로 자기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을 드러낼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늘 하나님이 염려하시는 것처럼 네 가지를 행하게 되는데 즉, 돌이키고, 다른 신들을 섬기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멸시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게 되는 이 같은 일들이 궁극적으로 가능했던 환경은 배부르고 살지고 편안하게 된 환경에서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됩니다. ‘그러면 늘 고달프게 살아야지 살지고 배부르면 안되겠구나’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환경이 아니라 그 환경과 쉽게 야합하고 영향을 받는 자기 안에 있는 부패성이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고달프고 가난했을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심으로 하나님만 의지했습니까? 아닙니다. 물이 없었을 때 얼마나 고달팠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 의지했습니까? 아닙니다. 메추라기가 얼마나 먹고 싶었겠습니까? 고기가마, 고기가마 하는데 애굽에서 그들이 고기를 얼마나 먹었겠습니까? 기름국물이나 한 숟가락씩 떠먹었을 것입니다. 어떻든 그것마저 못 먹으니 얼마나 결핍되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고 하나님께 매달리게 되었습니까? 불평하고 불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배부르고 살진 가운데에서 하나님께 타락의 길을 걸어가고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지만 이것을 순전히 환경과 상황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배부르고 살지면’했는데 이 ‘살지면’ 이라는 단어는 마음과 관련되어서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배부른 것이 육체의 포만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살짐은 영혼에 기름기가 끼어서 예민함을 잃어버리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신적인 만족이 영혼의 게으름과 무감각을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해주셔서 누리게 된 좋은 환경이 그들을 이렇게 영적으로, 그리고 내면의 세계에 있어서 기름지고 하나님을 향한 예민한 마음을 만들게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렇게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부할 때에도 하나님을 찾을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고, 가난하고 결핍할 때에도 하나님께 매달릴 수 있고 결핍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 더 대적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순수한 상황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과 많이 관련되어있는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 하나는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가난하고 결핍한 데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보다는 부요하고 형통할 때에 변함없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훨씬 더 확률적으로 힘들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것들에 대한 많은 증거로 가득 차있었습니다.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아직 왕이 되지 못하고, 빚진 사람, 마음이 억눌린 사람, 가난한 사람들과 끌어안고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동분서주하고 하나님께 어린아이처럼 매달렸을 때에는 그는 배부르지도 않았고 따라서 그의 마음이 살지지도 않았습니다. 시종일관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은혜를 갈망하면서 살았습니다. 왕이 되고 환경이 나아지고 형편이 좋아지자 그의 영혼도 기름진 영혼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주님을 멀리 떠나고 범죄 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 일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잘되가고 형통하게 될 때에는 그만큼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항상 시련이 많이 닥치면 기도를 열심히 합니다. 시련이 모두 물러가고 평안해지면 기도를 안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때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늘 말씀드리는 것이 영력은 설교할 때 필요한 것이 아니라 휴가 갈 때 더 많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나오고 열심히 봉사할 때는 하나님께서 조금만 은혜를 주셔도 되지만 집에서 안락하게 뒹굴 뒹굴 구르면서 텔레비전이나 보고 비디오나 볼 때에는 하나님이 은혜를 더 주셔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뒹굴 뒹굴 구르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은혜를 주시겠습니까? 성경도 안 읽고 기도도 안하고 그런 사람에게 어떤 방법으로 은혜를 주시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잘되어나가는 때가 안 되는 때이고 잘 안 되는 때가 되는 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러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환난과 시련, 재앙과 고난, 그 속에서의 아픔 회심치 못한 자들의 영혼의 위험을 설교하면 ‘어쩌면 요즘 모든 말씀이 화살처럼 나만 비껴갈까. 나는 도대체 해당되는 게 없다’고 생각할 지 모르는데 그러면서도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는 생각합니다.‘나는 회심도 했지 환난과 풍파도 안 만나지 모든 것이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모든 것이 잘 되나갈 그 때가 가장 위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항상 폭풍 가운데에서만 정신 차리고 운행하는 것이 아니라 섬 하나 보이지 않는 망망 대해를 항해하면서도 항상 먼 곳을 바라보며 태풍이 오지나 안는지 일기에 어려움은 없는 지 해적선은 나타나지 않는지 늘 그렇게 생각하면서 바라다보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 좋은 환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되어서는 안됩니다. 환난과 시련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주님을 열심히 찾으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그 환난과 시련이 오히려 여러분의 인생에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계기가 되도록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평안하다고 생각되고 모든 것이 있어서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이 되시면 여러분들은 지금이야말로 더 특별히 기도해야 될 때라고 생각해야합니다.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 자신을 이길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항상 기도하고 기도에 깨어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형통하기 때문에 기도의 제목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그 사람의 기도의 제목이 얼마나 세속적이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깨어있어야 할 이유가 환난, 풍파, 부도, 사업의 어려움, 직장에서 잘릴까 말까 하는 것들이나 겨우 자기로 하여금 깨어있게 하는 요인이라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정말 은혜의 사모하는 마음으로 눈을 들어서 한번 우리의 삶을 바라보십시오. 정말 우리들이 기도해야 할 제목들이 얼마나 많고 우리들의 눈물을 요구하는 기도의 제목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가졌고 부족한 것이 없고 ‘은혜 가운데’라는 말로서 우리 자신의 안일한 삶을 합리화하지만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실 때에 그 주님의 마음은 어떨까요? 우리 가정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마음에 기도 제목이 없을까요? 교회를 바라보고, 나 자신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단지 내 사업이 잘 되가고 있고 평안한 물질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 이상 베푸셔야 할 것이 없다고 하나님이 생각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기르시는 것이 아니라, 돼지우리에 짐승을 먹이시는 것처럼 사육하시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모든 기대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성품을 더 많이 닮고, 그분의 마음을 품고, 그분처럼 이 세상에 살기를 힘씀으로 주님이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기도하셨을 그런 제목들을 마음에 품고 주님과 함께 기도에 동참하고, 주님이 이 땅에 세우고 싶어하셨던 그 나라의 완성을 보기 위해서 주님처럼 그렇게 눈물로 땀으로 힘쓰고 애쓰면서 사는 사람되기를 너무나 원하시는데 단지 우리의 좋은 환경 때문에 우리가 넉넉하게 그런 삶을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신앙이 얼마나 건강하지 않은 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분명한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서 떠나가시고 나니까 주님이 그들에게 준 축복은 그들이 타락하는 훌륭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런 축복들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 자신이 그들에게 기념되게 하시기 위해서 주신 축복이고 당신을 생각나게 하시기 위해서 주신 축복인데 그들은 그 축복 때문에 하나님을 잃어버렸고 주님이 주신 은혜 때문에 하나님을 속히 떠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어리석은 삶을 되풀이해서 주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 없어야 되겠습니다.
11. 하나님을 잊을 때(2)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한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지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그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날에 나는 그들의 상상하는 바를 아노라(신 31:20下-21)”
‘살지면’ 다음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신부터 21절 마지막까지를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신, 두 번째는 그 배신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 세 번째는 그 배신을 다루시는 수단-노래-, 네 번째는 그들이 계획하는 바를 미리 아심, 이 네 가지로 요약 될 수 있습니다.
먼저 그들의 배신의 문제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배부르고’는 육체에 관한 것이고 ‘살진다’는 것은 마음이 살져서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부요한 마음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배신하게 되는데 어떻게 배신이 이루어지는 지 네 가지가 나옵니다. ‘돌이킨다’ ‘이방 신을 섬긴다’ ‘나를 멸시한다’ ‘언약을 어긴다’라고 나오는데 사실 둘씩 짝을 이룹니다.
그래서 돌이킨다는 것과 이방 신을 섬기는 것이 짝을 이루고 있고 멸시하는 것과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는 것이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어떻게 짝을 이루고 있는냐면 돌이키는 것과 멸시하는 것이 같은 의미로 반복되고 있고 뒷부분의 두 개가 다시 짝을 이루는데 앞에 나오는 두 동사 돌이킨다는 것과 하나님을 멸시한다는 것은 배교의 상태의 안쪽에서 들여다 본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 신을 섬기고 언약을 어긴다고 하는 것은 바깥에서 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이방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모습이 있기 전에 먼저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돌이킴이 있습니다. 즉 자신의 내면의 세계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돌이킴이 먼저 있고 난 후에 그것이 구체적으로 그들의 삶 속에서 바깥으로 흘러나오게 되는데, 그것이 이방 신을 섬기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돌이킨다는 말은 죄에 대해서 돌이킨다고 할 때에도 쓰여지는데,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렇게 살수밖에 없게 하는 내면의 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즉 한 사람의 삶은 그 내면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라는 것입니다.
(예화: 원래부터 큰 회사에서 사장노릇하며 살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 삶을 사는데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어느 날 높은 사람 흉내를 내려고 하면 코메디거 리가 된다)
마찬가지로 가지고 있는 생각을 따라서 사는 삶은 자연스럽지만 자신이 마음에 가지고 있지 않은 생각과 내면의 질과 상반된 다른 삶을 살려고 할 때는 그만큼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돌이키는 일이 먼저 있고 우상숭배가 구체화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돌이킨다는 것은 배교적 돌이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섬기고 따라가다가 인간이 연약해서 늘 넘어지고 신앙에서 미끄러지고 마음 아파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비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총체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생각을 바꾸면서 인격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닫고 돌아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잘 회복이 안됩니다. 또 그런 죄를 지었던 사람들은 돌이켜 서는 데 굉장히 힘이 듭니다. 그래서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믿으면서 살아가다가 자기의 연약함을 인해서 미끄러지거나 부지중에 범죄 하는 것과, 또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며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과, 어느 순간 마음을 닫고 ‘나는 이 길로 가지 않을 테야’하며 돌이켜 서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의지를 가지고 총체적으로 하나님을 신실하게 따르지 않기로, 세상에서 막 살기로 담대하게 인격적으로 결단하는 것은 배교적인 행동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무서운 영혼의 무디어짐을 가져오게 됩니다.
모든 죄가 마음의 무디어짐에 똑같은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각각 다릅니다. 부지중에 범죄하고 연약함 때문에 넘어지는 것은 무디어짐을 가져오기는 하지만 회개하면 다시 부드러움을 회복할 수 있는데 의지적으로 결단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반역하는 마음을 가지고 확 돌아서는 것은 그의 마음과 영혼에 굉장히 무서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리고 회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죄에 빠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져서 배부르면 그런 때가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 앞에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가 '너희는 섬길 자를 택하라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할 때에 그것이 의지적인 강력한 선택이었던 것처럼 의지를 가지고 뚜렷하게 그런 식의 돌이킴을 이방 신들을 향해서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나는 섬길 자를 택했다. 나는 이방 신을 섬기련다’하고 결단하고 돌이켜서는 것은 굉장히 무서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배교인데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런 배신 행위가 있을 것을 하나님이 경고하십니다. 이 예언은 가나안에 들어간 후 훌륭하게 성취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겼던 그 무수한 신들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을 섬기는 사람들은 결단하고 그 신들을 택하기로 정했고 자신 안에 계신 하나님을 몰아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허물이나 단순한 죄가 아니라 의지를 가지고 돌이켜 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첫 번째 배신이었습니다.
배신의 두 번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무시하고 어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은 다름이 아니라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시점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 속에서 흔치 않았던 신앙이 돈독하고 하나님을 향한 백성들의 마음이 낮아지고 겸비하게 모아졌던 은혜의 때였습니다. 그 때에 모세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그 율법의 말씀이 이들의 마음에 아주 존중히 받아들여졌고 그래서 그 말씀을 지키면서 살려고 애를 쓰는 순수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기를 꺾으시려는 듯이 ‘너희가 가나안에 들어가면 나를 멸시하고 이 율법을 어기게 될 것이다’고 백성들에게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위험한 경고를 지금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바로 그 죄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으며 여전히 그 하나님이 자신의 마음의 중심에 계시다는 것을 입증하는 유일한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렇게 반문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율법을 열심히 지켰어도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만 깊이 경배했던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바리새인과 같은 방식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이 율법을 주실 때 기대하셨던 방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실 때나 복음을 주실 때, 즉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을 때 주님이 그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면서 살 것을 기대하시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생각은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거룩해져 가는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지, 자신이 거룩해져 가는 것과는 상관이 없이 자신을 지키는 조문에 얽매인 행동주의자가 되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도 청교도들의 입장에서 보면 배교적인 신앙의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 신앙을 가르쳐주셨는데 그것을 뷔페라고 생각하고 그 속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만 빼내어서 신앙이라고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가 ‘부분적인 배교’입니다. 이런 신앙의 상태에 들어가면 여러 가지 많은 문제가 나오지만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과의 영적인 깊은 교제나 그 교제로부터 비롯되는 거룩해지는 효능이 사라집니다.
말씀 가운데 자기가 원하는 것만 뽑아서 기독교 신앙의 틀을 만드는 것에 대해서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런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자기 깨어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어질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와 생각이 틀리면 안 받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각과 똑같은 것을 이야기하는데 깨어지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예를 들어서 교회봉사를 열심히 하고 자기 자신이 교회봉사를 잘한다고 늘 생각하며 사는 사람에게 ‘당신은 교회 봉사를 참 잘하고 있습니다’고 얘기할 때 깨트려지면서 ‘그렇습니다. 저는 너무 잘나서 하나님 앞에 어떻게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하며 깨어지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자기의 생각과 다른 것이 들어올 때-자기의 살아가는 것과 다른 것이 들어올 때- 깨어짐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골라 먹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신령한 세계가 별로 없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거룩해지는 작용이 없고, 거기에서 오는 자기 깨트려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도 확장해서 말하자면 한없이 길지만 그것은 굉장히 위험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또 다른 네 번째 특징은 자기 의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상당히 대견스럽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자만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일단 자기 의가 가득 차게 되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도저히 만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또 다른 의이신데 자기 자신이 의로 가득 찬 사람은 또 다른 의가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정말 안 바뀝니다. 소문나게 죄 지은 사람이 바뀌는 경우는 많이 봤어도 그런 사람은 거의 바뀌지 않습니다. 정말 무섭습니다. 그런 부분적인 배교의 상태에서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의 대다수의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선명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못 깨달은 것입니다. 굉장히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율법을 지키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자신의 영혼 안에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영향력이 동기가 되어서 그것이 자신의 거룩한 삶을 촉발하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온전해지고 거룩해지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하나님 앞에 율법을 지키고 의롭게 살아가는 그런 삶을 기대하시는 것이지 이런 것을 제쳐놓고는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율법을 제대로 지키면서 살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하찮게 여기고, 내면세계의 뚜껑을 열어보면 결국 하나님을 우습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복도 자기 자신을 위해 기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끔 엄청난 문제를 가지고 오는 분이 있습니다. 남편은 사업에 망했고, 자신은 병들었고, 아이들을 사고 치고 다니는 것이라 사업이 다시 일어서고 자신의 병은 나았으면 좋겠고 가출한 아들은 빨리 나았으면 좋겠다고 말할 때, ‘그 모든 것이 해결되면 당신은 굉장히 행복하겠다’고 하면 ‘그렇게만 되면 바랄 것이 없겠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이득보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달라지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대목에서 그런 질문이 나올 줄을 몰랐다는 듯이 한참동안 가만히 있습니다.
대개 침체에 빠지거나 신앙이 떨어지고 나면 관점 자체가 집요하리 만치 자기 중심적입니다. 그러니까 하늘에 있는 하나님도 데려다가 심부름을 시킬 각오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침체에 깊이 빠지고 신앙이 식은 사람들은 사람에 대한 원망이 가득 차있습니다. ‘저 인간들이 내 행복에 기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제일 가는 목적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인데 어떻게 너희들이 너 자신을 위해서 살 수 있냐? 나를 위해서 살아야지. 동생 너도. 형 너도...’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기여하지 않는 그 사람들에 대해 원망과 미움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자신이 주인이고 자신이 최고라고 하는 인생관만 버리면 원망하고 싶은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살아본 적 있습니까? 그러면서 남보고만 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서 살아가는 것은 마음속에 하나님을 우습게 보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최고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와서 내 심부름을 해야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하나님을 보좌에서 끌어내리고 자기가 그리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목적 자체가 완전히 뒤바뀐 것입니다.
미래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축복들을 누리게 되는데, 그 때 땅도 주시고 심지 않은 포도나무에서 열매도 따게 해주시고 짓지 않은 집에서 살게 해주시면, ‘하나님이 이렇게 많이 베풀어주시는데 이것이 하나님께 어떻게 보탬이 될 수 있을까’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 이렇게 축복해주신다고 해서 하나님께 무슨 영광이 돌아가겠습니까? 그냥 비렁뱅이처럼 살다가 죽지요’라고 기도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모든 것을 주시겠다고 하신 다음에 보태는 말씀은 ‘그러나 한 가지 잊지는 말아라 죄인 된 너희를 구원하신 여호와를’이었습니다. 축복을 누리면서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 아무 것도 아닌 인생들이었는데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애굽의 종 되었던 자리에서 건져내셔서 많은 것을 주셨지’라고 생각하면 거기에서 살지고 기름 진 마음으로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남의 집에서 냉수 한 잔만 얻어먹어도 길에서 그 사람을 만나면 보따리라도 들어주고 싶은 것인데 어떻게 그렇게 큰 은혜를 받았다는 사람이 대충 개기면서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어기면서 막 사는 이유는 하나님을 막보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미리 아셨던 그 사람들의 배신이었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이 어떻게 다루시냐면 재앙과 환난으로 다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축복을 주실 때에는 배부르고 잘 살라고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번에 대통령 후보에 나온 사람들의 한결 같은 이야기는 자기를 찍어주면 잘 먹고 잘 살게 해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물질적인 것들을 세우는 일도 중요하겠지만 이제는 그런 것 말고 정신적인 것을 세워주는 굵은 지도력을 가진 통치자들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국민 소득 3-4만불 되는 나라가 된다고 칩시다. 그렇게 엄청나게 잘 살게 된다면 세상이 어떻게 될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은 더 많이 방황하고 신앙을 더 많이 필요로 하면서도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향해서 대항하는 사회가 될 것 아닙니까?
(예화: 미국 대법원에 십계명 돌판 때문에 재판이 붙었다- 어느 목사님이, 공립학교에 서 기도 못하게 하고 성경 못 가르치게 하고 진화론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미 국 사회가 어떻게 도덕적으로 무너졌는지에 대해서 글을 썼는데 깊이 감동을 받 았다)
돈 많고 정신적으로 갖추어진 것이 없으면 마지막에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부요하게 살뿐이지 물질에 의해서 그들의 인간적인 삶의 행복이 좌우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기본적인 가치들이 다 상대화되고 권위는 권위대로 다 박살나고 전통적으로 우리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치의 체계들이 모두 붕괴되어서, 단지 잘먹고 잘사는 것만으로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이나 잘 사는 나라는 부러워하지만 정말 부러운 나라는 오히려 가난한 나라 속에 많습니다. 끈끈한 가족 관계와 좋은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소수민족 사회도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물질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나 분명합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상상할 수 없이 놀라운 축복들을 누리게 하시는데, 그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는 궁극적인 목적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가진 당신의 백성을 선교적인 존재로 이 땅에 세워놓으셨는데 하나님을 기껏 거룩하고 성결하게 섬기고 나니까 하나님께서 ‘실컷 먹고 돼지처럼 잘 살아라’하시고 끝내신다면 사실 하나님이 하실 일이라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축복하고 복 주실 때에는 그 축복과 하나님이 주신 기회들을 사용하여 그들이 더더욱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아름답고 신실한 존재들로 주님 앞에 빚어져 가기를 원하시면서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면 그들이 그것을 받고 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바르게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만일 그들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하나님의 가치라면 그 목적이 실현되었으니까 하나님이 더 이상 그들을 손보실 필요가 없지만 궁극적인 것이 그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주신 부와 축복 때문에 그들이 배부르고 마음이 살져서 돌이켜서 하나님을 배신하여 이방 신을 섬기고 마음에 하나님을 멸시하면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마구 어기면서 살아가는 상황이 되면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자기 백성답게 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백성들을 환난과 재앙쯤에 몰아넣는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두려워하실 만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백성을 그 백성답게 만드는 것은 그 백성을 행복하게 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의 삶을 뒤흔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흔히 ‘순종하면서 살자’라고 많이 설교하니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잘살려면 순종해야지, 쪽박 안차려면 시키는 대로 해야지’하는데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바는 그것이 아닙니다. 순종도 어떻게 보면 거룩한 백성으로 이 세상에 살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훈련하시는 한 방편입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순종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주님이 바라시는 존재들로 주님이 바라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자신과 일치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땅에서 선교적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아무리 뒤져보고 백 번 생각해봐도 교회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최상의 봉사는 교회가 진실로 교회 되는 것입니다. 또, 신자가 이 세상에서 세상을 위해서 섬기는 최고의 섬김은 진실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화: 외국에 다니다 보면 신호등 같은 시설이 보기에는 어설퍼 보인다-그러나 불만 잘 들어 오면 된다)
그래서 재앙과 환난으로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기억해야될 것은 하나님께 받은 우리들이 처한 고난이나 어려움도 영원한 상태가 아니고 주님께로부터 받은 축복도 영원한 상태가 아닙니다. 만일 고난이 상당히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다면 자기가 돌이킬 길을 찾지 못하니까 계속되고 있는 것이고 아무 것도 하는 것이 없는데 축복이 계속되고 있다면 자신은 하는 것이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그를 어여삐 보셔서 그를 축복하시는 것이든지 하나님이 아예 내버려두신 것입니다.
(예화: 개 훈련소에서는 개를 고달프게 한다. 아무리 무서운 개라도 훈련소에 오면 혹 독한 훈련을 통해 개다워진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대로 안 살면 하나님이 우리를 흔들어서라도 우리를 당신이 기대하시는 바대로 살게 하십니다. 결코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들을 행복하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가끔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우리의 신앙적인 원칙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미국이나 영국이 신앙 때문에 잘 살게 되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부분적으로는 동의하지만 그것을 공식처럼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일본이 잘 사는 것은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어느 선에서 때로는 내버려두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신앙적인 원칙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 당신이 거룩하게 하고자 하는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안 살면 이 세상에서 고달픕니다. 절대로 떵떵거리면서 매우 행복하게 살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놔두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는 자기 백성들을 그렇게 하시는 것보다 더 높고 중요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애타하는 문제가 있을 때 그것이 해결되면 그 사람은 행복하겠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뭐가 바뀌는 게 있습니까? 자기 인생을 바라보는 자체에 전환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환난과 재앙으로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 복수로 나오는데 한두 번으로 안되니까 계속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기에서 자기가 그토록 사랑하고 의지했던 배부르고 살지고 이방 신들에게라도 빌면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고 자기 중심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 삶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깊으면서도 환난과 풍파를 많이 겪으면서 산 사람들은 인생에 대해서 관조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에는 돈 조금 벌면 안하무인이고 권력이 좀 떨어지면 죽고 싶어도 나이가 많이 들면 인생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나이가 들면서 정말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이해해 가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그렇게 하나님이 다루실 때의 방법이 있는데 “네 자손들이 잊지 않고 부르게 될 그 노래가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하는 것입니다. 32장에 그 노래가 나오는데 신앙이 사라지면서 이 노래가 가슴에 안다가오는 것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을 때는 찬송가 가사가 살아서 역사 합니다. 이 죄와 유혹이 많은 세상에 살아가면서 자기의 신앙을 지키는 훌륭한 방법 중 하나가 -성경을 외우는 것도 더 없이 중요하지만 그것과 함께-찬송을 외우는 것이 굉장히 큰 힘이 됩니다. 그래서 그 찬송을 조용히 부르면서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습니다. 가사를 외우면서 그 가사가 가슴에 스며들 때, 자기 자신의 신앙이 살아있을 때는 무슨 찬송을 불러도 그 가사의 내용이 살아서 역사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설교 들으면서 눈물 많이 흘렸던 때가 기도하면서 눈물 많이 흘렸던 때이고, 기도하면서 눈물 많이 흘리고 회개하던 때가 찬송가 부르면서 많이 울었던 때입니다.
(예화: 어느 성도가 열린 교회 처음 와서 예배당에 휴지를 둔 것이 참 기이했는데 한 번 예배를 드리고 그 이유를 알았다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고 기도가 살아있을 때에는 노래를 통해 항상 살아있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떨어질 때는 찬송을 부르다가 잠이 듭니다.
(예화: 어느 교회에서 목사님이 은혜가 되어서 주보에 적힌 것보다 찬송을 더 불렀더 니 어떤 성도가 따졌다고 한다)
그것은 찬송을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부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노래를 가르쳐줘봐야 전수가 안됩니다. 이런 신앙의 내용들이 경험되고 있는 동안에는 이 찬송이 살아있지만 은혜가 떨어지고 나면 그냥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잘못 살아서 환난과 재앙을 만나게 될 때, ‘어떻게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안 계실 수 있단 말인가’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방 신을 섬기면 그 뒤에서 이방 신을 섬기는 우리를 지켜주실 줄 알았는데’, 아니면 ‘경배 받으실 순서를 기다리면서 이방 신 뒤에서 무릎꿇고 기다리실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안 계시네’와 같은 번뜩 깨는 각성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앞에 깊이 돌이키는 영적인 각성의 상태입니다. 아무 문제없이 살아가다가 어느 한 순간 ‘아, 내 안에 하나님이 안 계시구나’ ‘내 삶은 하나님이 없는 삶이구나’를 깨달으면서 갑자기 이방의 신들이 자기를 지켜줄 수 없다고 하는, 그 모든 것들이 헛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종교적인 외로움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 때에 비로소 이 노래가 생각이 난다는 것입니다.
‘Amazing grace’라는 찬송은 찬송가 들어오기 전부터 많이 알려진 영국에서 나온 노래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갈 길을 얻었네’ 그냥 그런 내용인가보다 했는데 예수님 믿고 깊이 변화되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는 흥얼거리면서 부를 수 없습니다. 그 가사 한 절, 한 절이 가슴을 후벼파듯이 들어옵니다.
이 노래를 하나님이 수단으로 사용하셨는데, 이 노래를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이키는 수단으로 사용하시면서 생각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육학적인 배려가 정말 탁월합니다. 왜 부피가 많은 말씀으로 남겨주시지 않고 이렇게 노래로 남겨주셨을까요? 안 듣기 때문입니다. 노래도 건성으로 부르는데 듣겠습니까? 예를 들면 환난을 당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다가 하나님께 돌아와서 ‘주님을 바로 믿어야지’ 하는 사람에게 150개 테이프를 다 듣고 오면 만나주겠다고 하면 다 듣고 리포트 써 가지고 옵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이 주신 축복 속에서 신앙은 다 팔아먹고 한참 잘났다고 살면서 교회도 안 나가는데 ‘참 신자가 되는 길을 가르쳐주겠다’고 하면 ‘참 신자가 되는 것은 싫다’고 합니다. 가짜 신자가 얼마나 행복한데, 세상 가서도 대접받고 교회에 와서도 대접받는데 듣겠습니까? 교회에 나온 것도 간신히 나왔는데 참신자가 될 마음이 있겠습니까?
조나단 에드워즈도 “짐승 같은 사람일수록 예절바르게 대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그들이 교회에 남고 그래야만 그들이 변화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신자가 되는 길은 절대로 그렇게 간단한 길이 아니다. 이 정도의 책은 읽어야지 참신자가 되는 길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이다’하며 청교도 책 스물 일곱 권을 싸줬는데 읽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노래로 남기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건성으로 부르다가 환난과 재앙의 날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가까이 있는 가족들, 특히 할머님의 죽음을 보면서 한 때 많이 가슴에 다가왔던 찬송이 있습니다. ‘눈물 흘림을 몇을 더 당하고 행할 길을 다가다가 끝 날에 나를 오라 하실 때 영광 중에 나아가리 열린 천국 문 내가 들어가...’ 그러니까 무엇인가 자신의 신앙의 세계에 어떤 영향이 다가와 자기를 깨우게 되면 아무 것도 아닌 노래들이 뼛속 깊이 사무치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믿고 났으니 찬송가를 부르면서 경건하게 눈물 흘리지 예수 믿기 전에는 대중가요가 그랬습니다. 아직 세상사람들은 그것이 심각합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 안에 있는 것들을 밖으로 끌어내고 그것을 풀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노래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나게 하고 주님이 주신 축복과 주님의 경고와 주님이 그 백성들에게 어떻게 은혜 베푸셨는지를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늘 생각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인생을 살면서 날마다 우리의 마음이 무뎌질만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을 향한 노래가 우리의 마음을 찌르고 그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셨던 은혜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원래 어떤 사람들인지를 생각나게 해줄 때에 우리들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다시 하나님께 세움을 받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하나님이 미리 아시는 작용이 나옵니다.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날에 나는 그들의 상상하는 바를 아노라” 히브리 성경에는 “내가 약속한 그 땅으로 그들을 인도해 들이기 조금 전인 오늘날에조차도 그가 행하는 마음의 계획을 내가 알기 때문이다”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없이 좋은 신앙의 상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 안에 있는 부패성을 미리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미리 그것을 경계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님이 많은 축복을 주시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떠나고, 그것을 타락의 기회로 바꿀 수 있는 요소들이 이미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타락하기 위해서는 특별히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내키는 대로 살면 나중에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방탕한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되려고 애를 써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을 미리 말씀해주시는 이유는 “너희가 그런 존재들이다”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자기가 그런 부패성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배교에 흐르게 될 가능성에 대해서 늘 경계하면서 스스로 선 줄로 생각하지 않는 겸손함이 필요하고, 또 하나는 그러한 부패성을 누르고 대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밖에 없으니까 주님이 강력한 은혜를 주셔서 그 부패성들을 어거해 주시는 은총의 작용들이 자기 안에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세우신 은혜의 수단들, 제사를 지내고 율법을 배우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들, 지금으로 말하면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은혜 받는 것들이 자기 안에 있는 필연적인 부패를 누르며 살 수 있도록 공급해주시는 통로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막가는 상황에 가면 이런 은혜의 수단들을 다 멸시해버립니다. ‘예배, 참석하면 뭐해’ ‘설교, 들으면 뭐해’ ‘기도, 한다고 다되냐’ ‘성경, 맨날 공부하면 뭐해’하면서 은혜의 수단들을 다 팽개쳐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은혜의 작용들이 다 끊어져버리고 나면 안에 있는 부패성들은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체를 지배하고 그를 배교의 삶으로 사로 잡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이 겸손해져서 자기 자신을 누르고 사는 것과 그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져서 그 은혜의 작용들이 자기 안에 있는 부패성이 우세하지 못하도록 역사 하는 것입니다.
존 오웬이 배교에 관한 글에서 배교를 방지하기 위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한 다음에 궁극적으로 쐐기를 박는 대목이 있는데 “내가 지금 믿고 있는 진리의 내용들을 지금 체험하면서 살아가는 것 이외에는 배교를 막기 위한 또 다른 장치는 없다”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의 축복을 위해서 이방 신들에게로 갔는데, 끊임없는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 속에서 하나님께 목을 맨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내 인생에 축복해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그러니 내가 굳이 거기에 가서 복을 빌 필요가 없다’
왜 바보같이 일간스포츠에 나오는 오늘의 운세를 들여다봅니까? 그럴 시간 있으면 기도를 한마디 더해서 복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것은 읽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인터넷에 들어가서 그런 것을 하는 것도 다 쓰레기 같은 짓입니다. ‘만복의 근원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주시면 주시는 것이고 안 주시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고 구해도 안 주시면 ‘내가 쓸데없는 것 구하나’하는 생각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는가를 돌아보면서 주님의 축복을 받으려는 마음을 가져야지, 자기는 고치려고 하지는 않고 안되니까 ‘안되겠구나. 이방 신에게로 가보자’하는데, 옛날에는 이방 신에게로 갔지만 여러분들이 설마 잘 안 해주신다고 십일조 내고 남은 돈 가지고 굿하러 갈 것은 아닐 테고, 다른 데로 갑니다. 신앙으로 해결하지 않는 모든 것은 불신입니다.
뭐가 안되면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주님이 만복의 근원입니다. 주님이 축복해주셔야 겠습니다’하며 주님 앞에 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그런 부패성을 안고 그 진리의 내용들을 경험하면서 사는 사람이 왜 이방 신에게 가서 빌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 언약을 따라서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그 친밀함을 날마다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은 복이 있는 사람이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요 돈 많이 버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복이 있는 자는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고백하며 삽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지금 알고 있는 진리의 내용들을 끊임없이 감격 속에서 체험하며 살아가는 것 이외에는 배교를 막을 수 있는 다른 장치는 없습니다. 그것을 청교도가 정확하게 증명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런 부패성들을 하나님이 아시고 또 다행이 우리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우리 자신이 분투하면서, 끊임없이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우리들이 이 부패를 누리고 더 거룩하고 진실한 사람이 되어가기를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 재앙과 환난들을 경고로 삼고, 또 이 경고를 우리의 거울로 삼아서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살아나갈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12. 순종의 사람이 희망입니다
“모세가 당일에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쳤더라 여호와께서 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 자손을 인도하여 내가 그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신31:22-23)”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신 후에 노래를 만들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원히 들려주시기를 원하셨고 그 내용들이 22절에 다시 한번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노래는 다음 장에 길게 나오고 있습니다. 22절은 앞 절에 나온 상황에 대한 설명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오늘 주목해보고자 하는 것은 23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모세가 살아있는데도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네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내가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할 것이다”하십니다. 고달팠던 모세의 사역은 이제 끝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새로운 지도자를 세우셨습니다. 그 새로운 지도자를 세우셔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밟게 하신다고 하는 확인을 다시 한번 해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도 하지 못했던 이 위대한 일을 여호수아에게 지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모세는 여호수아에 비해서 능력도 뛰어나고 탁월한 영력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모세의 특징은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데 하나는 뛰어난 영력입니다. 두 번째는 고매한 인격이었습니다. 물론 후에 변화되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씀을 나누었던 하나님과의 탁월한 친교입니다. 이 세 가지가 모세의 신앙인격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여호수아는 모세와 같은 탁월한 영력이 있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또 모세의 신앙의 인격에 대해서는 여러 군데에서 칭찬하고 있지만, 여호수아에 대해서는 성경이 그의 아름다운 인격에 대해서 찬송하는 장면들이 많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는 하나님과 탁월한 친교를 나누는 장면들이 많이 나오는데 여호수아를 포함해서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친밀함이었다고 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 자신께서 증거 해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여호수아에게 빛을 비추며 따라갈 때 여호수아에 대해서 나타내주고 싶어했던 특징과 모세를 비추면서 모세를 통해서 나타내 보여주고 싶어했던 신앙 인격의 특성의 초점이 달랐습니다.
모세를 비출 때에는 뛰어난 영력, 카리스마,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온유한 신앙의 인격들을 비췄는데 여호수아에 와서는 보다 더 단순하게 여호수아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로 집약시켜서 말합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그래서 스펄젼과 같은 설교자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해내었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비스가산 꼭대기에서 죽는 장면을 해설하면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큰 능력으로 애굽에서 이끌어냈으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여보내지 못한 것은 율법이 우리를 위해서 어디까지 해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율법이 모세에 의해서 상징되었고 여호수아는 예수의 모형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호수아’라는 말 자체가 ‘예수’라는 말과 어원이 같은데 ‘야샤(구원하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예수의 상징인데 율법이 가나안 앞까지 데려왔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천국으로 인도하실 때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놀라운 기적이나 놀라운 역사가 아니라 온전히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우리들을 구원하실 것임을 예표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던 때에는 모세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큰 능력을 받아서 큰 기적을 일으키면 백성들은 그제서야 하나님을 찬송하고 ‘아멘’하며 믿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믿음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지팡이만 바라보면서 광야의 길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애굽을 탈출할 때에도 홍해가 갈라지는 사건이 일어나고 광야에서 가나안에 들어갈 때에도 물이 갈라지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홍해에서는 모세가 손을 내밀어서 바다를 갈라놓으니까 ‘아멘’하고 믿으면서 사람들이 갔는데 이번에는 하나님이 미리 말씀을 주십니다. 말씀을 주시니까 그렇게 되리라고 하는 것을 믿고 행동을 옮기니까 요단강 물이 마르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가나안으로 들어가면서 기적과 능력보다는 믿음의 중요성이 많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경륜이 그러하니까 모세와 같이 강한 능력을 가진 카리스마적인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어린아이처럼 온전히 의뢰하는 신앙의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순수한 믿음의 사람을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로 보시고 여호수아를 택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수요일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민수기 사건과 연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탐했을 때에 열두 지파에서 한 사람씩 나와서 정탐하고 난 다음에 모든 정탐꾼들이 비관적으로 보고했습니다. 그리고 그 비관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그들은 거짓으로 보고를 했습니다. 이유는 그 땅은 너무나 좋지만 그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할 때에 그것이 너무나 겁나고 무서웠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 땅이 무슨 좋은 땅이냐. 우리 가지 말자’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영적인 삶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쳐서 주님의 은혜 안에 들어갈 때에 그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면서 누리게 되는 축복이 얼마나 큰 것인가, 예를 들면 불순종하던 사람이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얼마나 큰 축복이 있는가 하는 것을 다 누리지는 못해도 조금 맛보며 정탐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잘 가르쳐 주면 순종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축복해주시는지를 잘 들을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나라는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빠질 수 있는 죄가 나태입니다. 그래서 못난 사람이 자신이 못나다고 하는 것은 겸손한 것이 아니라 사실고백입니다. 또 게으르고 태만하게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부족하다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노력하지 않아서 바보처럼 살고 성실하지 않아서 찌들어진 삶을 살면서 그것을 겸손과 낮아짐으로 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볼 때 겸손과 낮아짐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가 찌그러지는 것이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주님이 주시는 은혜 안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고 성실하게 사는데 자기가 아무리 살아도 자기가 사랑하는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고 하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며, 이렇게 열심히 분투하면서 하나님 믿으면서 살아가지만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겸손이고 낮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게을러서 무엇을 해도 열심히 안하고, 새해면 한해에 봉사할 것을 적어 내놓고 6개월 이상 가는 사람을 별로 못 봤습니다. 화장실 청소를 하겠다고 해놓고 두세 달은 잘 하는데 봄이 와서 꽃잎이 떨어질 때가 되면 그 맹세도 같이 떨어집니다. 그렇게 게으르고 태만한 것이 우리의 습성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면서 하나님과의 달콤한 교제 속에서 영적인 큰 축복을 받으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참된 신자가 되는 세계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거짓신자로 살기로 뜻을 세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모두 원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이 필요합니다. 많은 싸움을 하고 희생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싫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탐을 하고 돌아와서 ‘나는 그들과 싸우기 싫어’라고만 해서는 동조를 얻을 수 없으니까 멀쩡한 땅을 악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좋은 신앙의 세계가 있다고 할 때 ‘들어가자’고 하지만 막상 진실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치뤄야할 고생도 많고 버려야 할 것도 많고 내려놓아야 할 것도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고 짊어져야 할 것도 많은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생각해보니 실증이 나고 게을러져서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뭐 꼭 그렇게 해야만 신앙생활 하는 것인가. 다 생각하기 나름이고 사람마다 스타일이 있는데’하며 ‘그렇게 회개하고 깨트려져도 별로 좋은 것이 없다’생각하고 돌아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탐꾼들이 다 그랬고 그 믿음 없는 보고를 들으면서 꺼이꺼이 울던 이스라엘백성들을 통곡소리가 ‘아멘’하는 소리였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가슴 아픈 눈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통곡하며 울어댈 때 ‘그것이 아니다’하고 보고한 사람이 두 사람이 있었는데 갈렙과 여호수아였습니다.
어떻게 그들만 그렇게 바른 보고를 할 수 있었을까요? 그들도 가나안에 들어가면 그 큰 아낙 자손들과 더불어서 전투를 해야하는 것을 알았을 텐데 어떻게 그들은 그 땅의 아름다운 것을 그대로 보고하고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우리는 반드시 그 땅을 얻을 수 있다’고 담대히 보고 할 수 있었을까요? 상황은 그렇게 연설할 수 없게 만들었고 그렇게 비관적인 보고가 훨씬 현실적이었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이 아닌 이 두 사람이 그렇게 담대하게 외치면서 말한 것입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모세를 대신해서 사람을 쓰실 때에 여호수아를 고르신 것입니다. 가문이 뛰어났기 때문도 아니고 모세처럼 뛰어난 학식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카리스마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고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교통하는 면에 있어서도 여호수아는 모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은 수준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모세 자신이 워낙 영적인 거목이었기 때문에 웬만큼 커서는 큰 사람으로 안보였겠지만 어떻든 그랬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사람을 택하실 때 모세를 택하셨던 것과는 다른 기준을 가지고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 기준을 가지고- 여호수아를 택하셨으니 그것은 믿음이라는 기준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여호수아가 가지고 있는 믿음은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도박적인 기질이 있는 종류의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예화: 월남전에서 높은 지위의 미군 장교가 포로가 되었는데 포로교환이 되어서 돌아 온 후 어떻게 살아올 수 있었는가 하는 질문에 ‘소망이 있었는데 그것은 믿음이 었다. 비현실적인 희망론자들은 다 죽었다’고 말했다)
우리들은 흔히 믿음을 생각할 때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오래 가지 않고 바르르 끓었다가는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 생기면 금방 무너져버리고 믿음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현실적인 이상론자들의 믿음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넣어주었지만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 하셔서 거의 공짜처럼 가나안 땅을 얻을 것이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꼬득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호수아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메시지는 “내가 너희에게 준 이 땅을 너희는 싸워서 정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싸우는 것만큼 그 땅을 취하고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사람 자신이 ‘그 땅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가 그 땅에 들어가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공짜로 성취되는 믿음이 아니라 주님이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고 예배당에 모여 기도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도를 놓고 작전을 세우고 전투해 나아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양쪽의 극단으로 가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는 사람은 비현실적인 이상론자적인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현실적인 노력은 도외시하고 세게 기도하면 하나님도 꺾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예수님 팔 비틀기 하듯이 ‘주여 주시옵소서’하면 예수님이 ‘항복. 가져라’하는 식의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인격적인 믿음입니다. 그런 것들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런 종류의 믿음을 가진 사람이 오랫동안 그 믿음을 견지하는 것을 못 보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허공에 뜬 비현실적인 이상론자적 믿음이 어느 한순간에 와르르 끓는 것처럼 굉장히 강하고 혼자 세상을 삼킬 것 같지만 몇 달 안갑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의 은혜의 작용이기 때문에 주님이 무엇인가 계속 우리 속에 넣어주실 때 그 믿음이 지탱되는 것입니다.
(예화: 주유소 앞에 세워놓은 형상-헝겊을 매달고 바람을 계속 집어넣으면 움직이는데 스위치를 끄면 형체도 없는 헝겊일 뿐인 것)
우리의 믿음도 하나의 은혜의 작용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계속 믿을 수밖에 없는 영적인 은혜와 힘을 주실 때에 그 믿음이 견고하게 버티는 것이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은 없고 자기가 붙들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결심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그런 믿음은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든든히 붙들고 그분께 자신의 온 마음과 삶을 의탁하는 종류의 인격적인 의탁이 있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치 내기하는 것과 같은 요행수의 믿음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향한 신뢰나 하나님을 향한 의지는 없고 자기 자신이 합리적으로 계획하면서 해나가는 사람들의 특징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 정답이 나와있으니까 기도할 때도 하나님을 항상 가르쳐 드리는 식입니다. ‘하나님,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계획은 제가 짤 테니까 그저 은혜만 주시면 되고 제가 이끄는 대로 오시면 됩니다. 제가 만들어놓은 길대로 역사 해 주시옵소서’하니까 기도할 것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의지가 없는 합리주의입니다. 하나는 신비주의 쪽으로 갔고 하나는 합리주의 쪽으로 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야기하는 믿음은 그것이 아닙니다. 여호수아가 그런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극히 빛나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현실을 도외시하지 않았습니다.
(예화: 전도사 시절에 한 고등학생이 의대를 가기로 응답 받았다며 학력고사를 봤는데 170점을 맞았다-하나님 뜻이 아니라고 충고하자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면 못할 일이 뭐가 있느냐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을 믿음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믿는 내용과 삶의 방향이 같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정의 어려움을 기억하셔서 올해는 경제적으로 축복해주실 것을 굳게 믿습니다’고 기도해놓고 자기는 매일 집에서 논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의 인격으로 하여금 그것을 행하도록 하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했으면 뭐라도 해야지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지 않겠습니까?
(예화: 몇 해전 택시 기사에게 ‘할 만합니까?’하고 물었더니 오전 열 한시인데 벌써 10 만원 벌었다면서 할만 하다고 했다)
일찍 일어나서 벌러 나가야지 만 하나님도 축복을 해주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화: 어느 전도사님이 개척교회를 하며 너무 어려워서 복권이라도 좀 맞게 해달라고 기도했더니 ‘복권을 사놓고 기도하라’는 응답을 받았다는 이야기)
하나님이 주시려고 해도 그릇이 있어야하는데,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요행입니다. 몸이 약한 사람이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시리라고 믿으면서 매일 늦게 자고 술 먹고 건강에 안 좋다는 일만 골라하면 그것이 어떻게 믿음입니까? ‘죽은 자도 살리셨다는데’하며 그렇게 사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믿었으면 삶도 그 방향으로 같이 나아가야 합니다. 진실한 신자가 되는 것이 목표이고 하나님 앞에 진실한 신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더니 ‘장족의 발전이 있게 해주마’하는 응답을 받았다고 합시다. 그래서 그 약속을 굳게 믿고 ‘아멘’했습니다. 그렇다면 진실한 신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 그렇게 하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나안을 주신 것은 완료형입니다. “그 땅을 내가 너희에게 주었다”입니다. 지금이 아니라 옛날에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누리는 것은 오늘 전투를 통해서 미래에 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들을 믿는 사람을 위해서 그 약속을 성취해 가시는 방법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비현실적인 이상론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현실적인 신앙론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 사람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모세보다 열등했던 것은 숨길 수 없습니다. 사실 모세가 죽고 나서 여호수아가 지도하겠다고 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옆구리가 시렸을 것입니다. 물론 모세에게 대들기도 했지만 모세는 거목이었고 여호수아는 모세에 비하면 모든 면에서 부족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할 수 없었던 그 일을 여호수아를 통해서 하신 것입니다. 그의 믿음을 보고 하신 것입니다. 그 믿음 하나로 여호수아와 갈렙이 이스라엘 역사의 한복판으로 떠오르는 것입니다.
열두 지파 중에서 가나안에 가서 정탐할 대표로 뽑혔으니까 아무나 뽑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지혜롭고 총명하고 오랫동안 사람들 속에서 신망을 얻고 판단이나 지도력을 어느 정도 인정받은 사람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열 사람들은 그런 믿음이 없으니까 역사 속에서 자연스럽게 사라져간 것입니다.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쯤 되면 따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 비해 여호수아와 갈렙은 쉰세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한 세대 차이가 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세대차이가 문제가 안되고, 여호수아와 갈렙이 실질적인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모세와 비교해 그런 열등한 요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있는 아름답고 순수한 믿음 하나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이들을 지도자로 떠오르게 하신 것입니다. 모세의 카리스마를 가지고도 이룰 수 없었던 이 일의 도구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서 나타난 능력은 모세에게 주신 능력에 불과했지만 이들을 통해서 나타난 능력은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행하신 능력이었습니다. 요단강 물이 마르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일들은 모세의 시대에서도 애굽에서 나온 이후로 좀처럼 보기 쉽지 않았던 위대한 역사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세가 이끌고 나올 때 기적을 행했을 때 -믿음이 없어서도 그랬지만- 모세가 워낙 카리스마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보기보다는 모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누가 여호수아를 높였습니까? 아무도 여호수아가 그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직접 역사 하시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와 동행했던 사람들은 모세와 동행했던 사람들보다 더 생생하게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하시는 살아있는 증거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모든 것보다 믿음을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시는가 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여호수아의 인격에 대해서 ‘온전히 순종하였은 즉’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믿는 온전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비현실적인 이상론자적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경건하고 현실적인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이 여호수아는 순종하면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순종은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를 담보하는 모험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자판기 같은 것은 아닙니다. 돈을 집어넣을 때 자판기 주인의 신실함을 생각하면서 돈을 집어넣지는 않습니다. 집어넣고 누르면 바로 나오든지 아니면 빨간 불이 나와서 돈을 넣지 말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것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자판기처럼 반응해주실 때도 있지만, 순종했다고 바로 반응해주시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종하는 동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보상 자체를 바라는 것은 낮은 신앙의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예화: 한 부모가 아이들의 말이 너무 거칠다고 어린 전문 상담가에게 상담을 했는데 도표를 만들어서 용돈을 정하고 잘하면 돈을 주고 잘못하면 다시 빼도록 정하 라고 했다-돈 한푼 안 줘도 아버지가 사랑스러워서 구두 한번 닦을 수 있고 아무 것도 안 했어도 아들이 사랑스러워서 돈 천 원을 줄 수 있는 것이지 잘하 면 얼마씩 주고 못하면 벌금으로 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배팅 하는 식으로 순종해서 성공을 거둔 것을 간증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순종해야 할 필요를 말씀하실 때에는 미래를 보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거를 보고 말씀하십니다. ‘순종하면 이것도 저것도 해주겠다’는 개념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적이 없지는 않지만 그것보다는 훨씬 더 많은 무게를 순종을 명령하시는 대표적인 율법인 십계명을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나 여호와는 너희를 애굽에서 종 되었던 곳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하나님이라”를 상기시키십니다. “너희가 받은 은혜를 생각해라.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하나님 앞에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은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효성스러운 마음의 발로입니다.
(예화: 목욕탕에 가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등 좀 밀라고 하는데 ‘등 한쪽 미는데 오 천 원입니다’하면 안 된다- 등 밀면서 ‘아버지 많이 늙으셨네요’하면 눈물을 훔치 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 개념을 버리고 오히려 무게중심을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진실한 사랑과 효성스러운 마음의 발로라고 생각해야합니다.
(예화: 한 분이 패역한 아버지를 두셨는데도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인데 어떻게 하겠느 냐며 지성으로 섬겼다)
못된 아버지여도 사랑으로 인내하면서 효도해야 하지만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그런 아버지가 아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이만큼 사는 것도 다 아버지 때문이지 아버지가 안 계시다면 고아인데, 여러분들이 지금 가지고 누리는 것, 여러분들이 지금 소유하고 있는 좋은 것 중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관계없는 것이 어디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예수 잘 믿고 신앙생활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래도 사람답게 살기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예수 믿고 나서 비로소 먹고 살만하도록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셨습니다. 그래도 마음의 평안을 누리면서 인생의 진정한 가치와 목적이 무엇인지-가끔 아는 대로 안 살기는 하지만-깨닫게 된 것도 하나님 아버지 때문에 깨닫게 된 것 아닙니까? 그 아버지의 집에서 인간의 도리가 무엇이고 어떻게 섬기고 살아야 하는가를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경마장에서 마권 사는 식으로 믿음을 내기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기초가 하나님의 인격과 그분과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믿음으로 믿으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와는 비교도 안 되는 열등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이 여호수아를 들으셨습니다. 그 시대의 젊은 세대들에게 얼마든지 왕따를 당할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이 왕따 당하기는커녕 그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게 하셨고 하나님의 역사 하시는 위대한 역사를 보여주는 도구로 이 사람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고 순진한 믿음 때문에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오늘도 찾고 계십니다. 그런 사람들을 사용하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지난 2002년은 기쁘고 감사한 일도 참 많았지만 고난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광야와 같은 한해였습니다. 다가오는 2003년은 가나안과 같은 한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다가오는 한해를 불순종과 불신앙과 더러움으로 한껏 더럽혀서 이 주님이 주신 거룩한 시간들을 조잡하게 만드느냐, 아니면 정말 아름다운 믿음과 어린아이 같은 순종으로 지나가는 곳마다 승리의 깃발을 꽂으면서 가나안을 정복하듯이 2003년의 넓은 세계를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사람으로서 정복해나가느냐 하는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향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느냐에 많이 달려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내년을 준비하면서 내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셔야 할 축복 중에서 가장 큰 축복은 믿음의 축복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너나 할 것 없이 여러분 모두가 비현실적인 이상론자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실천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서 정말 이 한해를 철저하게 정복해서 우리 하나님 앞에 열매로서 돌릴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했습니다.
한사람 여호수아의 이 아름다운 믿음을 보고 하나님께서 역사의 새장을 쓰셨다면 여러분 모두가 이렇게 충만한 믿음을 소유하고 그 믿음 때문에 하나님 앞에 잠시는 손해가 나는 것 같아도 효성스러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주님께 순종하며 살기로 깊이 다짐한다면 도저히 난공불락처럼 점령할 수 없었던 여러분 삶의 많은 영역들을 이미 정복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 손에 붙이시기만 하면 우린 반드시 정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붙여주시지 않으니까 -인간으로 노력을 하니까- 그렇게 힘이 들지 하나님이 우리 손에 붙여주시기만 하시면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그 일을 감당해나가서 이기게 하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도 도저히 안 된다고 생각되실 때에는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돌 때 하나님이 역사 하실 수 있는 방법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정들에게 세배정도의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면 상황이 좀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여리고 성이 무너질 리는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예 뒷정리까지 말끔하게 해버리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믿음 있는 사람에게 현실을 개척해나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금년까지 정복하지 못했던 여러분들의 삶의 상황과 문제들을 내년에도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슬픈 비관주의자입니다. 어디에서 여러분들의 믿음을 하나님이 보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역사 해주셔서 우리가 정말 현실적이고 믿음 있는 사람들이 되고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인격적인 부르심에 순종하면서 효성스러운 마음으로 그분을 섬기면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도구로 쓰임 받고 싶어할 때 그 순수한 마음과 어린아이와 같이 정결하게 된 그 믿음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이제껏 까지 도저히 내 인생에서 넘어보지 못했던 한계를 뛰어넘게 하시고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하나님께서 보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13. 언약궤 옆에 놓인 율법책
“모세가 이 율법의 말씀을 다 책에 써서 마친 후에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사람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율법책을 가져다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곁에 두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신31:24-26)”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좇았던 순종의 사람 여호수아가 능력과 카리스마에 있어서는 모세에 견줄 수 없었지만, 그 사람을 하나님이 택하셔서 모세가 이루지 못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는 일에 지도자로 삼으셨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주님이 사람을 쓰시는 훌륭한 조건이 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24절부터 26절 사이에는 모세가 율법을 다 기록한 후에 그것을 레위 사람들에게 주어서 언약궤 옆에 두라고 당부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모세가 ‘율법을 다 기록하였다’고 했을 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율법의 핵심은 십계명입니다. 그리고 그 십계명을 해석해놓은 것이 모세의 오경입니다. 나머지 구약에 나오는 역사서들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오경에서 약속하신 바를 따라서 그 백성들을 섭리하셨는가 하는 것이 나오고 선지서들은 이 모세 오경인 율법을 그 시대에 적용하려고 했던 구체적인 노력이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바깥에 있는 것이 선지서라면 그 선지서의 핵심은 율법이고 율법의 핵심은 십계명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율법을 쓰기를 마쳤다’고 할 때는 모세가 모세 오경을 완성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뒤에 34장까지 나오는 부분은 어떻게 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32장은 모세가 기록을 마쳤다고 설명한 다음에 모세가 남겨놓는 시를 인용한 것이라고 보고 33장과 34장의 모세의 죽음이후에 나온 기록들은 누군가가 기억했다가 후기로서 그 뒤에 써서 붙였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모세가 직접 쓴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영감 된 가운데 모세의 기록들을 마무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었을 것이라고 보고 성경으로 받아들입니다.
그 율법을 모두 기록했다고 했을 때는 오경을 마쳤다는 것이 되고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남긴 많은 설교들, 그의 가르침,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패역하고 불순종하는 삶과 더불어 싸우는 모세의 지도자로서의 처절한 모습,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이루고 싶어했던 신정 사회의 궁극적인 면모, 이런 모든 것들은 결국 십계명으로 집약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십계명이 어떻게 하면 구체적으로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이라고 하는 삶,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잠시 후에 차지하게 될 이방 신들이 들끓는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니면서 살아가게 할 수 있을까 에 대한, 그 모든 것들을 고민하는 가운데 만들어 낸 적용들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모세 오경 전체가 십계명에 대한 해설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것을 다 써서 레위 자손에게 주어서 당부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레위 자손은 물론 레위의 후손들인데 법궤(증거궤, 언약궤, 여호와의 궤, 만군의 여호와의 궤 등의 표현으로 쓴다)를 꿸 채에 꿰어서 이동합니다. 이 법궤는 높이가 67센티 정도 너비가 67센티 정도이고 길이는 112센티 정도 되는 궤짝입니다. 그 궤짝을 이동할 때에는 꿸 채를 꿰어서 이동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이동할 때에는 레위 지파 가운데 고핫족속이 메고 이동하고 보따리를 싸는 것은 제사장들의 몫이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부터는 제사장들이 직접 메고 이동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법궤를 보관할 때에도 가나안에 들어간 후 성전이 아직 완성되기 전-성막시대-에는 꿸 채를 꿰어놓은 채 보관했습니다. 그리고 성전이 지어진 다음에는 꿸 채를 빼어서 따로 보관을 하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언약궤의 이동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레위 자손 중 고핫족속이었기 때문에 그 들에게 모세가 자기가 써놓은 이 율법 책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당부하는 것이 이것을 언약궤 옆에 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성막에 대해서 설명할 필요가 있는데 성막은 이동식 성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동하게 되는데 그때 제일 먼저 성막부터 치는 것입니다. 성막이 쳐지는 전체적인 울타리가 45미터에 25미터정도 되었으니까 축구장 반만 하다고 생각하면 거의 크기가 맞을 것입니다. 그렇게 성막 뜰이 있고 성막에서 열고 들어가면 성소가 나오고 그 성소를 지나가면 지성소라고 하는 곳이 나오는데 성소의 크기가 열두 평 정도였고 지성소의 크기가 여섯 평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지성소는 가로 세로 높이가 반듯한 장소였는데 가로가 4.5미터 세로가 4.5미터 높이가 4.5미터로 천장을 가진 가죽이나 헝겊을 씌워놓은, 자연채광이 전혀 안 되는 방이었습니다.
그 속에는 법궤가 있었는데 그 법궤는 나무로 짜서 안팎으로 모두 금을 쌌습니다. 그리고 금으로 테두리를 둘러서 단단한 궤짝의 모양을 하고 있었고 그 법궤 속에는 십계명의 돌 비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 맛나 금 항아리가 들어있었습니다. 십계명의 돌 비는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명하시면서 주신 그 돌 비이고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아론의 지팡이에서 싹이 났으니까 신비한 것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른 지팡이와 같은 이스라엘의 가문에서 사람의 몸을 입고 태어나서 제사장이 되실 것을 예표하는 것이었습니다. 만나는 하루가 지나면 썩었는데 여기에 보관된 만나는 특별히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광야에서 직접 먹이신 것을 기억하도록 특별한 하나님의 계획으로 썩지 않게 보존되도록 만드신 맛나 입니다.
그것을 법궤 속에 넣고 그 법궤를 꿸 채채 나두고 그 위에는 천사 둘이 서로 마주보는 형상을 한 60키로 그램 정도의 대단히 무거운 금으로 된 상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속죄소 혹은 시은소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그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데 그 사람도 일년에 딱 한번 속죄 일에 거기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를 대신해서 하나님께 용서를 빌며 하나님께 제사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는 자연적인 태양의 채광은 없었지만 그 태양의 채광보다 더 뛰어난 하나님의 임재의 빛이 경험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율법 책이 있다는 이야기는 구약의 지성소에 대한 설명에서 잘 나오지 않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성소의 모습과 거기에 대한 물건들에 대한 설명은 이 율법 책이 완성되기 전에 주어진 것이었으니까 안나오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을 아람어로 번역한 탈굼이라는 번역서가 있는데 그것은 옛날에 아람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이 모세 오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해석적인 성격이 깃들여 있는 번역서입니다. 유명한 탈굼에는 ‘요나단 탈굼’과 ‘옹켈로스 탈굼’이 있는데 요나단 탈굼의 가장자리에 보면 ‘하나님의 법궤 옆에 모세가 쓴 율법 책이 있었다’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마도 모세가 율법 책을 다 기록한 다음에 자기가 죽은 후에는 완성된 것을 책으로 만들어서 지성소 속에 놓아두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궤 옆에 율법 책을 놓아두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 율법 책이 지성소 속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고 대제사장은 그 속에 들어가서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그 거룩한 법궤 옆에 율법서가 있다는 것을 상기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떻게 하든지 그 율법을 설교하고 가르치고 그대로 살게 하기 위해서 목양적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모세의 가르침을 생각나게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십계명이 담긴 돌 판은 언약궤 속에 있었지만 그 십계명의 긴 적용과 해설이라고 할 수 있는 율법 책은 그 법궤 옆에 있었다고 하는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들이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한가지입니다. 이 법궤 옆에 율법서를 남긴 모세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렇게 놔두는 것을 기뻐하셨던 하나님의 마음에는 어떤 생각이 있으셨기에 이렇게 법궤 옆에 모세의 율법을 기록으로 남겨서 보관하는 전통들이 여기에서 시작되게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 우선 법궤 위에 있는 속죄소가 무엇 하는 곳인가 하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입니다. 이 속죄소는 시은소라고도 불리었는데 속죄소는 죄를 속하시는 곳이라는 뜻이고 시은소는 거기에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다는 의미인데 어느 쪽 방향에서 이 속죄소의 기능을 받느냐의 문제이지 똑같은 곳입니다. 그래서 법궤는 단순한 기념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만나주시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백성들이 이 궤를 ‘여호와의 능력의 궤’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어디든지 계신 하나님이시지만 특별히 하나님을 쉽게 만날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주일날 이렇게 교회당에 와야지 하나님을 만나지 모여서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하나님을 만나기가 참 힘듭니다. 거기는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아닌데, 하나님이 하실 수 있지만 하나님은 주일날 자기 백성들이 교회에 와서 당신을 만나기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드리는 시간에도 교회 바깥에서 여러 사람에게 당신을 만나게 해주시고, 지금도 그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순결한 영으로서 장소에 매이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중심적으로 일하시는 장소가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교회는 나름대로 독특성을 갖는 것입니다. 장소라기 보다는 그의 백성들과 만나기로 약속하는 장소를 정하시고 거기를 중심으로 하나님이 당신을 보여주시고 계시해주셔서 당신의 백성들이 거기에 올 때 하나님과의 만남을 기대하게 하시고 그 하나님을 갈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개인적으로든지 국가적으로든지 무슨 문제가 있으면 모두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예화: 6-70년대에 우리도 무슨 문제가 있으면 기도원으로 올라갔었다-어느 목사님이 교인들이 하도 기도원에 가니까 교회 지하실을 기도원과 똑같이 만들었다)
그래서 그 성전은 그들의 모든 삶에 있어서 항상 중심 자리에 있었습니다. 성전 자체 때문에 성전이 그들의 인생의 중심자리가 된 것이 아니라 거기서 만나주시는 하나님의 임재 때문에 그 성전이 중심이 된 것입니다.
교회 가까이에 사는 것이 큰복입니다. 그래서 멀리 사는 사람들은 기도해서 가까이에 살게 되면 참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가까이에 사는 사람들은 교회 가까이에 사는 유익을 최대한 누리면서 살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많은 희생을 무릅쓰고 교회 가까이에 옵니다. 교회 가까이 에서 기도를 많이 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오는데, 기도하지 못하는 것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것입니다. 나태와 게으름 속에서 안주하려고 하는, 하나님 앞에 열렬히 기도하면서 살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자기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까이 와서 기도하지 못했던 더 커다란 문제가 자기 안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화: 가까이 사는 사람들이 항상 지각한다고 예배위원들이 말한다)
그래서 교회 가까이에 있는 혜택을 최대한 누리면서 신앙생활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기도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자기 교회가 멀면 정말 기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화: 집 가까이에 있는 타 교회에서 기도할 때의 어려움)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나중에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남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이동하면 제일 먼저 성막이 쳐졌는데 열두 지파의 진이 가장자리에 포위해서 정 중앙에 하나님의 성막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성막을 회막이라고도 불렀습니다. 히브리말로는 ‘오헬모에드’인데 ‘오헬’은 텐트라는 뜻이고 ‘모에드’는 만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오헬모에드’를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여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이 성막인데 죄인들이 성막 뜰에 가서 제사를 드리게 되면 제사를 드리며 참회하고 하나님을 만나고, 제사장들은 성소에 들어가서 제사하며 하나님을 만나고, 그 중에서도 대제사장들은 성소의 휘장을 지나서 지성소에 들어가서 만나게 되는데 이것은 정말 하나님과의 독대이고 일년에 딱 한차례만 이런 일들이 가능했습니다. 만나주시는 분은 모두 하나님이셨지만 성막 뜰에서 제사를 지내며 죄인들이 회개하며 만나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강도와 지성소에서 대제사장이 속죄일에 하나님께 제사하면서 만나는 그 만남의 강도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만난다고 할 때 그 만남의 강도가 다 일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지성소는 얼마나 엄숙하고 지엄한 곳이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대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리다가 하나님 앞에 죽임을 당하는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곳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총도 베푸시지만, 하나님이 당신의 눈빛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의 마음과 삶을 모두 비추셔서 그들을 정확하게 달아보시는 일들이 함께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고난을 받으면서도 의롭고 거룩하게 살아온 사람들-물론 인간이 완전히 거룩할 수는 없지만-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을 때에 하나님의 큰 축복과 그 만남을 통해서 얻게 될 은혜와 자비를 기대하지만 반대로 양심을 거슬러서 하나님 앞에 불의 하게 살아온 사람에게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매우 두려운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중에 신학적으로 ‘여호와의 날’의 양면성과도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날’은 여호와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심판하시는 날입니다. 더 멀게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 주로 이 세상에 다시 오셔서 이 세상을 모두 깨끗이 정리하시는 그날입니다. 이 날이 국부적인 여호와의 날이든 우주적인 그리스도의 날이든 지간에 그 두 날의 공통점은 하나님이 직접 자기의 백성들을 찾아오셔서 그 임재로 그들과 대면하신다는 개념입니다. 그 때에 경건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살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오셔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을 위로해주시고 자기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자들을 멸하여 줄 터이니까 그 날이 자신이 이제껏 까지 고통받았던 많은 원한을 푸는 날이고, 반대로 하나님을 거스르며 불순종하며 살던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이 불의한 사람으로 분류되어서 주께서 임재하시는 그 날에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그날은 준엄한 형벌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양면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성소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대제사장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이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대제사장이 이 속죄소에 들어가기 전에는 먼저 자기의 죄를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고 나서 지성소로 들어가게 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대제사장이 자신의 죄를 회개할 때에 속죄 받기 위해서 바치는 제물의 크기와 이스라엘 전체가 범죄 했을 때 드리는 속죄 제물의 크기가 똑같았습니다. 그런 정도로 이 대제사장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중요한 위치에 있게되는 것입니다.
그 지성소 법궤 위에 있는 시은소에서 이 대제사장이 경험하는 일은 지존하신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언약궤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큰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법궤 있는 곳에 하나님이 있다라고 하는 경각심이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깊이 깊이 새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법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축복의 상징이기도 했고 두려움의 상징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법궤가 가까이 있는 것이 축복이 될지 모르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그 법궤를 중심으로 임하실 하나님의 임재로 말미암는 준엄한 심판 때문에 두려움을 느껴야되는 곳이 이 법궤였고 그 장소가 바로 지성소였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이 언약궤가 의미하는 것은 속에 무엇이 들어있느냐하는 의미보다 하나님께서 그 법궤를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찾아오셨다는 것, 이 대제사장들을 만나주셨다는 것, 그래서 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하셨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율법서를 모두 작성하신 다음에 그것을 법궤 옆에 두기를 명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대제사장의 입장이 되어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과의 영광스러운 만남이 있는 법궤 앞에 대제사장의 옷을 입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들어갑니다. 들어가서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경험하는데 법궤 옆에 있는 상당한 분량의 율법 책이 두루마리로 쌓여있는 것을 보았을 때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법궤와 시은소 앞에 서서 하나님의 임재의 큰 영광을 경험하고 난 후에 즉각적으로 그 법궤 바로 옆에 놓여있는 율법서를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과의 영광스러운 만남을 경험한 후에는 이 대제사장이 자신도 그 율법서대로 살아야 하고 자신의 백성들도 그 율법서대로 살도록 그들을 가르치는 것이 제사장의 직무였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의 직무는 제사 드리는 것만이 아니라 백성들을 잘 가르치는 것이 제사장의 중요한 직무였습니다.
그래서 여호사밧 시대를 보면 제사장들이 모두 상근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들의 수가 상당히 많아서 당번과 비번으로 나누어서 당번은 성소에서 시중을 들고 비번은 각자 돌아가서 자기 생업에 종사하다가 당번이 되면 다시 돌아오는 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비번인 제사장들을 활용해서 전국을 돌면서 율법을 순회 강좌 합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고유한 기능을 가장 많이 활용한 임금 중 하나가 바로 여호사밧이라고 하는 임금이었습니다. 그렇게 제사장의 직무는 율법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은 그 제사장들 중에서 택함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대제사장의 모형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취되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최종적인 대제사장으로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제물로 드려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해 주시는 유일한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런데 그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기 직전까지 힘닿는 대로 하시던 일이 자기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예수님은 구약에 기름부음을 받아야했던 3직,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의 직을 모두 가지고 오셨는데, 왕처럼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을 다스리셨고 그 왕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 더 궁극적으로 구체화되었고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예수님은 제사장으로서, 동시에 선지자로서 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몸을 대속제물로 주시기 직전까지 심지어는 십자가에서 죽어 가는 그 강도에게 이르기까지 마음과 뜻을 다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 시대에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당신 자신의 삶과 말씀, 그의 행동과 모든 존재 전체를 교재로 삼으시면서 일하시고 역사 하시면서 자기 자신을 다 주시는 삶을 살아가셨던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것은, 우리들은 하나님을 많이 만나고 싶어합니다. 물론 신앙이 떨어지고 마음이 강퍅해지면 하나님 만나고자 하는 소원도 거의 사라지지만, 정상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은혜를 받지 못해서 갈급할 때에는 갈급하기 때문에 하나님 만나고 싶고 그 갈급함에서 어느 정도 해방되면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향한 갈망이 다시 생겨나기 때문에 더 깊이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그런 갈망들은 우리들이 하나님 나라 가는 날까지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 이 정도면 되지’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날마다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고 그 은혜에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주님을 만나는 그 만남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져다주고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로 하여금 보다 신자다운 삶을 살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렇게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남으로서 주님의 성품을 본받고 신자다운 참신자가 되어서 참으로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는 그것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최근에 네덜란드 신학자 베크박사가 와서 강연을 하는 가운데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구라파에서건 아시아에서건 기독교에서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문제들이 많이 강조되고 사회에 선행을 해야되고 사회에 봉사를 해야된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베크 박사가 지적한 것 중, ‘교회가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교회가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었습니다.
교회가 참으로 교회가 되면 교회는 자연스럽게 사회 속에서 책임을 다하는 교회가 됩니다. 교회가 사회적인 책임을 다해야한다고 하는데 교회가 어떻게 사회 속에서 책임을 다합니까? 엄격하게 말하면 교회가 아니라 교회에 소속된 각 지체들이 신앙과 양심을 따라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고 진리 편에 서서 생활하는 것이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자신의 전 성질이 본질적으로 변화되지 않고는 절대로 이 세상 속에서 신자이기 때문에 고난을 받으면서도 그 길이 옳다는 이유 때문에 그 옳은 길을 위해서 살고 정직할 수밖에 없다는 이유 때문에 수많은 박해와 고난을 당하면서도 정직하게 살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보다는 믿는 것은 믿는 것이고 사는 것은 사는 것이라고 분리해놓고 세상에 나아가서는 세상 사람들이 사는 것만큼 영악하게 살고 교회에 와서는 교인처럼 사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그러면 피 흘릴 일도 없고 눈물 흘리며 기도할 이유도 없고 땀 쏟으면서 고생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편리한 때에 편리한 모습으로 변신하면 어떠한 희생과 고난도 없습니다. 세상에 가서는 설탕이 되고 교회에 와서는 소금이 되고,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 모였을 때는 빛처럼 행세하고 밖에 나가서는 빛으로 나타나면 사람들이 구박하니까 어두움처럼 삽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 모였을 때는 누룩처럼 행동하고 안 믿는 사람들과 모였을 때는 자기도 가루라고 하며 그렇게 변신하면서 살면 믿음 때문에 고난받을 이유가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변화되지 않고 그런 식으로 익숙해진 사람들을 데리고 교회보고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책임을 다하겠습니까? 전쟁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큰 전쟁을 할 수가 있습니까? 절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참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 사회적인 책임을 감당하는 가장 지름길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사실은 변화되지 않는 교인들에게 우격다짐으로 예수 믿으니까 똑바로 살라고 윽박지르는 것보다 본질적으로 훨씬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이 세상에서 창피 당하지 않고 정말 존귀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싶으면 어떻게 하든지 교회는 자기 자신들이 변화되기를 힘쓰고 그 일을 위해서 많이 애를 쓰면서 그 사람들 하나 하나가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도록 가르쳐야 하고 그렇게 그 자신의 전 성질이 변화되고 본성적으로 성령과 진리의 말씀에 의해서 새사람으로 성화 되어 감으로서 신자의 참모습을 회복하는 그것이 그 사람들이 모인 교회로 하여금 참된 교회가 되게 하는 지름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참으로 교회 되고 신자는 참으로 신자가 되어서 신자가 정말 하나님이 이 땅에 두고 싶으셨던 그런 존재가 되는 것이 교회가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변화를 위해서 우리들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가운데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하고,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회심해서 거듭나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하게 되는 이 지성소에서 그 옆에 잔뜩 쌓인 율법서를 한번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그 율법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살았던 기록들이고 그렇게 살기를 원했던 모세의 기록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백성들이 순종할 때에 어떻게 그 백성들을 축복하셨고 불순종할 때에 어떻게 그 백성들을 다루셨는지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들이 함께 남아있는 것이 율법서였습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만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그 말씀을 따라서 순종하면서 그 율법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바보 같은 질문일 지 모르지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들이 정말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하고 정말 신자다운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깊이 만나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깊이 여러 번 만나고 계속해서 불순종하며 살아간 사람보다는 하나님을 한번밖에는 깊이 만난 적이 없어도 그 하나님께서 한번 만난 그 은혜를 통해서 자기에게 주신 말씀을 붙들고 살기 위해서 분투하고 애쓰면서 살아온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훨씬 더 많이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신앙생활 하면서 ‘이렇게 기도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성령의 체험을 했는데도 왜 나의 신앙에는 성장이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 없습니까? 그런 의문을 제기해본 적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성장하고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전적으로 필요합니다.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이 주님을 깊이 만나고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전적인 믿음, 그리고 하나님의 물 붓듯 쏟아 부어지는 그 놀라운 긍휼과 사랑을 경험하지 않고 어떻게 그가 새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정말 묵고 묵은 더러운 심령이 깨트려지고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 위에서 씻겨지는 놀라운 생애적인 변화가 없이 어떻게 그 사람이 새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 일상적으로 죄인의 가슴을 두드리고 지나가는 그런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심령을 쪼개시고 물같이 자기의 죄를 녹이시고 하나님의 하늘을 열고 부으시는 기이한 은혜의 빛으로 그의 썩은 심령들을 치료하시는 이 강권적이고 쏟아지는 빛줄기와 같은 은혜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것들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질 수 있고 하나님을 거스르고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던 사람들이 그 인생의 길을 돌이켜서 순종하는 길로 방향 전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비칠 때에 오랫동안 포기하고 살았던 변화되지 않은 자신의 본성에 거룩한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며 거기에서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와 회개하는 자들에게-순종하는 자들에게- 쏟아 부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과 긍휼이 무엇인가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많은 사람들이 모두 거룩해지지는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기까지의 역사를 보십시오. 그들은 아론의 싹 난 지팡이를 보았고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호의를 받았습니다. 광야생활은 기적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 때문에 그 사람들이 거룩해질 수 있었습니까? 그래서 모세가 간절하게 그 백성들에게 신명기 전체에서 다시 한번 신신 당부하며 그들에게 이른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으니 그것은 “순종하라”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것도 죽으려고 만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살려고 만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만나면서 경험하는 그 몇 십분 동안의 짜릿한 은혜의 경험을 인해서 하나님의 만나려고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들이 주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고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이 캄캄한 밤하늘, 별빛조차 사라진 외로운 어두운 광야에 홀로 버려져 있어도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으면 살 수 있습니다.
(예화: 예전에 삼각산 기도원에 다닐 때 길을 잃은 이야기-그런데 혼자 다니면서도 주 님과 함께 하니 무섭지 않다는 20대 처녀가 있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 사실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고 하나님이 언제나 동행해 주시면 문제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자신들을 만나주시는 경험들을 수없이 했습니다. 그런데 순종하는 삶이 없으니까 하나님이 만나주셔도 그것이 하나님이 자신들을 만나주시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은혜에 대한 갈망도 중요하지만 그것과 함께 주님을 만나고 나면 그만큼 더 많이 순종하면서 살아야 할 책임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주님을 많이 만난 사람들은 많이 순종해야 합니다. 주님을 적게 만난 사람들은 불순종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을 아는 모든 사람들이 순종해야 하지만 주님을 많이 만난 사람들이 불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더 심하게 다루신다는 이야기입니다.
많이 맡은 자들에게는 많이 구하시고 적게 맡은 자들에게는 적게 구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항상 하나님을 만나고자 간절히 기도할 때는 동시에 ‘이렇게 하는 기도가 응답되면 나는 더 많이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살아갈 꺼야’ 하는 자기 결심이 있어야 하고 또 하나님과의 새로운 만남을 하나님 앞에 기대하고 기도하기에 앞서서 이제껏 자기를 만나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자기가 유지하고 순종하면서 주님이 자기를 만나주신 그 은혜에 합당하게 살아왔는가 하는 것을 반성하는 마음을 아울러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의지하고 순종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당신을 만나고 싶다고 부를 때 언제든지 쉽게 그들과 만나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삶의 핵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금년 한해도 저물어갑니다. 여러분들은 이 교회에서 지난 한해동안에도 거의 아무리 적게 잡아도 170편 가까운 공적인 예배에서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 중에서는 여러분들이 주님을 깊이 만난 예배도 있었을 것입니다. 한해를 돌아보면서 주님이 여러분들을 어떻게 만나주셨는가 하는 것과 주님의 그 만나주신 은혜를 따라서 어떻게 순종하는 삶을 살았는지를 생각하고 한번 대차대조표를 만들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한쪽 변에 주님의 만남을 통해서 입은 은혜와 또 한쪽 변에는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렸던 삶을 아울러 적어보고 그래서 그 대차대조표를 작성해서 누구에게 손해가 되는 삶을 살았는지를 보고 정말 우리 자신을 성찰하는 일이, 무조건 자신을 만나달라고 계속 기도하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한해가 저물어 가는 이 때에 우리 한번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지난 한해에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면서 주님의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던 때를 되새기면서 ‘올해에는 지난 해 보다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받았고 그래서 더 많이 순종하면서 살려고 애를 썼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더 많이 기뻐하셨을 것이다’고 하는 고백을 우리 모두 할 수 있는 지 자문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헛되이 쓰지 아니하고 주님이 주시는 모든 은혜가 순종한 삶의 열매로 나타나서 하나님의 만남이 있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율법 책을 아울러 기억했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그렇게 주님과의 만남이 삶의 순종의 열매로 이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린다면 하나님은 언제나 여러분이 부르실 때 여러분 가까이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참모습인 것입니다.
14. 반역하는 불순종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내가 너희의 패역함과 목이 곧은 것을 아나니 오늘날 내가 생존하여 너희와 함께 하여도 너희가 여호와를 거역하였거든 하물며 내가 죽은 후의 일이랴(신31:27)”
이어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다시 한번 상기시키고 그들의 미래에 대한 염려를 피력하고 있습니다. 언약궤 바로 옆에 율법 책을 둔 비밀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그곳에는 항상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 상기되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오늘 27절에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남기는 이야기 또 한 마디가 나오는데 두 가지로 나누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기시킨 이스라엘 백성들의 본성이고, 두 번째는 목자로서의 모세의 사역의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기시킨 것은 그들의 패역과 그들의 목이 굳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내가 너희의 패역함과 목이 곧은 것을 아나니”했습니다. 여기에서 패역은 히브리말로 ‘메르카’라는 말인데 이 말은 ‘마라’라는 말에서 왔고 ‘다투다’는 의미입니다. 패역이라고 번역된 말이 성경에 여러 번 나오지만 그 말이 모두 똑같지 않습니다. 번역의 한계입니다. 여기에서는 패역이라고 번역하기보다는 ‘반역’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훨씬 좋을 것 같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도 ‘rebellion’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의 반역과 너희의 목의 굳음을 아노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반역하는 삶과 목이 굳은 모습이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선 이 의미를 해설하기에 앞서서 우리들이 누구인지를 깊이 아는 것이 순종에 이르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모세가 이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줄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교적 신앙의 상태가 좋았을 때였습니다. 이 모세가 운명하기 전부터 시작해서 가나안을 정복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던 그 얼마동안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참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모세가 그렇게 신앙이 좋고 잠시 후면 이루어질 가나안 정복의 위대한 역사의 대열에 함께 참여할 그 아름다운 신앙의 백성들에게 우울하고 슬픈 이야기를 남긴 것은 결코 그들의 기를 꺾거나 그들의 마음을 약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깊이 깨닫게 해서 자기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전심으로 의지하며 순종의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놓여있는 삶의 상황이나 환경은 다양하고 제가 또 그것을 다 알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고 이전에 어떤 인생의 길을 걸어왔던지 간에, 그리고 지금의 신앙상태가 어떻든지 간에 공통적으로 알 수 있는 것 한가지는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항상 하나님을 향한 반역의 기질을 가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모세의 이 같은 발언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의문을 갖게 합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런데, 한가지는 하필이면 이 때가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가장 신앙이 순수하고 하나님을 연애하던 아름다운 때인데 왜 이렇게 발언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구시대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그런 전적을 많이 가지고 있으니까-그 광야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가나안을 정복하려고 할 때에도 그 정탐군들의 거짓보고를 믿으면서 절망했던 전적이 있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어느 정도 깊이 가슴에 와 닿는다고 해도, 그 구세대와는 구별된 광야에서 태어난 새로운 세대인 이들에게도 이렇게 가혹하게 광야에서 멸망당하고 죽은 조상들과 똑같은 평가를 해도 괜찮은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할 수는 있지만 모세는 뛰어난 영적인 통찰력으로 그 선조들의 반역의 피가 그 후손들에게 흐르고 그들이 광야에서 태어난 세대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의 피 속에 죽은 조상들의 반역의 기질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모세는 깊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기에 가지고 있는 혈통적인 문제가 아니라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반역을 한 그 이후에 인간 모두 속에 물려진 반역의 기질입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아도 자신의 뜻을 꺾지 않으려고 하는 인간의 오만함과 자기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자기 중심적인 고집과 극도의 자기 사랑이 그러한 반역의 원인이 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하나님을 반역하는 삶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실질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많이 가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순종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가장 잘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나타내시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당신이 빚고자 하는 대로 빚어지고 당신이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는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그 백성들의 삶을 통해 가장 잘 보여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반역의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거의 불가항력적인 기질이었습니다. 주님이 주신 그 많은 은혜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반역의 기질이 발동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대들고 짐승처럼 항거하면서 주님 없는 백성들보다 더 악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의 놀라운 기적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반역하고자 하는 기질들은 꺾일 줄 몰랐습니다. 밟아도 밟아도, 뽑아도 뽑아도, 베어도 베어도 다시 나는 잡초처럼 그들 속에는 수시로 하나님을 향한 이 반역의 마음들이 용솟음 쳤고 그래서 그 용솟음치는 반역들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순종하며 살아야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주님을 거스르는 것을 하찮게 여기며 살도록 만들어주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기질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항상 깊이 인식하고 겸비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했든 교회에서 아무리 여러 직분을 맡고 봉사를 했든 또 우리들이 아무리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았든지 간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너나할 것 없이 모두에게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반역의 기질들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메르에카’라고 하는 반역은 불순종보다 훨씬 더 강한 개념입니다. 불순종은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일을 안하고 어기는 정도인데 ‘메르에카’는 그렇게 위에서 명령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마음이 내키지 않거나 연약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향한 반감을 가지고 대드는 것을 의미하는 불순종입니다. 그래서 불순종하는 사람들보다는 반역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악을 행하는 일에 담대하고 죄를 짓는 일에 있어서 훨씬 더 고의적입니다. 그래서 연약함은 불순종으로 발전되고 불순종은 이런 패역함으로 발전되어서 섬겨야 할 하나님을 적수로 알고 그분께 노골적으로 대적하는 삶으로까지 나아가는 것이 바로 은혜 밖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의 마지막 종착역인 것입니다.
이러한 반역한 기질들 이면에는 반드시 또 하나의 정신적인 작용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교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목의 뻣뻣함’이라고 되어있는 이 부분은 경배할 때에 겸비하게 머리를 숙이는 자세를 염두에 두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머리를 깊이 숙이고 인사를 공손하게 하는 사람 중에서 교만한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마음에 있는 것이 바깥으로 흘러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경배하고 싶어하는 사람들 중에는 교만한 사람들이 없습니다. 사람들 중에서도 깍듯이 인사를 잘하는 사람들은 마음이 대부분 거칠고 포악하지 않고, 자기보다 조금 나은 사람에게는 아부하느라고 어쩔 줄 모르고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지위가 낮으면 깔아뭉개려고 하는 포악한 기질과는 거리가 좀 먼 사람입니다. 마음의 교만이 반역의 첩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재앙스러운 마음의 죄 중 하나가 교만입니다. 이 교만의 정체는 자기 자신을 높이는 것인데 높이는 방식이 ‘내가 알고 있는 것이 궁극적인 지식이다’하는 경우에는 지적인 교만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을 우상화해서 더 이상 그것에 대해서 비판을 허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그 지식에 영향을 미치는 자체를 아주 불쾌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직한 자세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마다 누구든지 옳다고 믿는 것과 마음이 더 좋다고 생각하는 호 불호의 감정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겸손한 사람이라고 해서 줏대 없이 휘둘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는 이것이 더 옳다고 생각하고 이것이 더 좋고 이것이 진리라고 믿지만 비판적인 것들을 깊이 생각하고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줏대가 흔들리지 않으면서 또한 자기를 비판하는 소리를 통해서 자기가 믿고 있는 이 지적인 확신이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서 다른 지식들을 통해서 다시 한번 점검해보는 마음을 가진 사람, 그래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 더 온전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이것이 지적인 교만을 극복하는 겸손의 비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부정확 하느냐면 어느 학자의 이름을 주민등록보다 더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음에도, 그래서 십여 년 이상을 그렇게 믿고 쓰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책을 찾아보니 그 사람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또 맞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그 한자를 계속 사용해왔는데 어느 날 보니 아닐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인간이 그런 지적인 교만에 사로잡히면 안 되는 것입니다.
지적인 교만과 함께 종교적인 교만은 더 큰 문제가 됩니다. 종교적인 교만이라고 하는 것은 ‘나는 신앙생활을 참 잘하고 있으며 내가 잘 못하고 있는 것들은 종교의 영역에 있어서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교만을 가지고 있으면, 자기보다 신앙생활을 더 온전하게 하는 사람을 만나면 시기심에서 그를 깎아 내리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만나게 되면 아주 하찮은 사람으로 취급하는 종교적인 교만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깊이 감화를 받으므로 세워진 신앙이 아니라 신앙의 많은 가르침들이 성경 속에 있는데 그 중에서 자기가 특별히 잘할 수 있는 것 몇 가지를 뽑아서 자기 나름대로 자기 중심의 신앙관을 확립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인 교만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이 끊임없이 영적인 영향을 받고 거룩함으로서 자기가 새로워져 갈 수 있는 거룩의 작용들이 사라져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이 참으로 온전해지기 위해서는 오직 성경만으로 모든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신앙의 요소들을 총체적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서 총체적으로 온전해지기를 힘쓰는 노력이 선행되어야지 만 성경이 말하는 진실한 신앙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종교적인 교만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는 결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은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인생관에 부합한 말씀을 들을 때 깊이 박수를 치고 감동을 받지만 그로 하여금 거룩한 영향 아래서 살아가게 만드는 진리의 영향력들이 그의 마음속에서 사라집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자기 깨어짐이라고 하는 것은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종교적으로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종교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교만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가진 어떤 영적인 은사 때문에 자기는 매우 특별한 그리스도인으로 분류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자신이 하나님과 이런 저런 탁월한 만남을 이전에 경험했기 때문에 지금 자신은 신앙에 있어서 질적으로 자기보다 우월한 영적인 경험을 갖지 못한 사람들과는 차별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런 영적 귀족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영적 교만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고린도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중 대표적인 교회였습니다.
각양 많은 은사들을 하나님 앞에 받았습니다. 그 은사들 중에는 자연적인 은사도 있고 특별한 초자연적인 은사도 있습니다. 어떤 것이든지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남보다 공부를 잘하면 그것도 하나님이 주신 은사이고 주님이 하루아침에 천치 바보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 징벌을 받아서 순식간에 총명을 잃어버린 사람이 나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을 볼 때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영적인 특별한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주님이 주신 것들입니다.
그것들로 말미암아서 교만해질 수 없는 이유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신 하나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이러한 영적인 은사들보다 더 소중한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이 은혜는 은사보다 훨씬 고귀하고 값진 것입니다. 한사람이 많은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을 향한 아름다운 신앙을 보증해주지 않지만 영원을 구원하시고 그 영원의 온 본성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은 그를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고 예전보다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도록 만들어줍니다.
은사를 별로 못 받았다는 것 때문에 깊은 콤플렉스에 걸린 교인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몇 가지 은사를 받아봐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은사를 사모하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말릴 이유가 없고 권장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어떤 은사를 주시면 그 삶이 정말 고달프다는 사실도 여러분들이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각오를 하고 구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1장에 보면 아들 같은 디모데에게 사도 바울이 이렇게 권면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능력이 싫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능력 충만한 사람의 삶은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어려움이 올 때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눈물 흘리며 기도할 뿐이지만 능력이 많은 사람들은 명하여 그 어려움을 물러가게 합니다.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병든 자를 위로해주러 가지만 능력이 많은 사람은 고쳐주러 갑니다. 능력이 많은 사람들의 사람이 얼마나 화려합니까? 그런데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디모데가 이미 받았던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서 살아가야 할 삶이 있는데 그것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삶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특별하게 은사를 받은 사람들, 그 사람들 중에 한가하게 살다가 죽은 사람 있습니까? 또 그런 사람이 있다손 치더라도 하나님이 그렇게 놀라운 영적인 은사와 능력을 주셨는데도 그렇게 게으르게 놀고 태만하게 살다가 제 명에 죽은 사람이 있습니까? 이것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그런 영적인 은사가 우리들에게 있어도 교만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영적인 은사보다 더 뛰어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은혜로 말미암아 온전해지지 않은 사람들이 은사로 말미암아 자만해지고 교만해진다고 하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이야기라는 것이고 또 그것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 때문에 내가 높아져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영적인 교만 역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반역하는 삶을 재촉하는 요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들이 이런 교만에 얼마나 쉽게 빠지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예화: 일본에서 바둑을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정도로 잘 두는 사람이 적수를 만 나 지게 되어 정처 없이 길을 떠나서 일어난 이야기-꿈이었다)
인간의 잡기를 연습하는 사람들도 그 잡기를 통해서 인간이 욕망을 버리고 겸손해지지 않으면 그 오락의 도리조차도 터득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교만이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를 하찮은 사람으로 만들고 파멸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교만한 삶이 그런 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하나님도 능히 대적할 담력을 그 교만한 삶 속에서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조금이라도 낫습니까?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비해서 비할 데 없이 크고 많지만 이스라엘 백성들만큼 기적을 본 사람들도 아니고 모세처럼 카리스마로 충만한 사람의 목양을 받은 적도 없는 사람이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여러 모로 이스라엘 백성 못지 않게 이런 하나님을 향한 반역과 교만의 기질들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청교도가 말했습니다. ‘나는 60해가 넘도록 살아왔지만 한번도 내 기억력이 나를 실망시켜준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한번도 내 기억력을 믿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신뢰하지 않는 것이 참된 신자가 되는 가장 중요한 비결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반역한 삶을 살면서도 거기에서 돌이킬 줄 모르는 사람, 그리고 부분적으로 배교에 가까운 삶을 살면서도 하나님 앞에 회복될 줄 모르는 삶을 사는 사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앙관과 아집에 사로잡혀서 그것이 성경말씀이라고 하더라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에 부합되지 않으면 뜯어내어 버리는 정도의 결단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이 교만입니다.
그런 교만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면 그런 교만으로부터 벗어나고 하나님을 향한 반역의 삶을 살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 비결이 무엇일까요? 그런데 사실은 그런 삶을 안 살 수 있는 특별한 비결은 없다는 것입니다. 태생이 그렇고, 생각하는 것이 그렇고, 기회만 닿으면 고개를 쳐들고 교만해지는 본성과 그 교만이 극에 달하면 하나님을 반역하며 살아도 자기 중심적으로 살고 자신의 인생과 온 우주에 자기가 중심이 되려고 하는 제왕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힌 인간들이기 때문에 모두 황제병에 걸린 인간들입니다. 그런 기질들을 가기고 있기 때문에 똑부러지게 그가 그렇게 살 수 있는 길이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환경이 좋아지면 더 좋은 삶을 살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 중에서 최대의 실수는 공산주의라고 합니다.
(예화: 소련에서 ‘공동경작제’를 하다가 하도 농업 생산성이 떨어지니까, 자기 집 울타 리 쪽으로 올라간 호박은 개인이 가질 수 있다고 했더니 공동경작밭에서 자라난 호박은 야구공만 한데 각 집에 넝쿨을 타고 올라간 호박은 모두 농구공 만했다)
성경에서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 공산주의를 이야기합니다. 재물들을 모두 갖다놓으면 사도들이 각기 필요에 따라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개념은 나눠준다는 개념이 아니라 나눠 갖는다는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나눠 갖는 일이 일어나려면 희생적으로 받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공산주의가 다 벌어서 바치는 나라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다 함께 나눠 갖는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 탐욕의 기질들이 그렇게 간단하게 파악되는 기질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제왕적 질병을 가지고 있는 인생이 어떻게 하나님을 반역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어떻게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 둘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많이 반역하고 주님을 거스르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무엇일까요? 특별한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고두고 하나님 앞에서 싸워야 할 일입니다.
보십시오. 오늘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은혜를 많이 받고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마음이 가난해져서 주님의 약속만을 바라보아야 하는 온순한 처지가 되었을 때에는 모세가 이야기를 할 때 현실과 거리가 먼 것처럼 들릴 정도로 그들의 신앙이 순수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예견한 이 하나님을 향한 반역과 영적으로 교만한 기질들은 가나안 정복의 역사가 거의 마무리되어갈 때쯤 해서 다시 솟구치기 시작해서 하나님과 그 위대한 일을 보았던 기라성 같은 세대가 죽은 후에 교육조차 휘청거리기 시작하자 사사시대의 어두움이 들어오게 되었고 그 시대는 거의 무신론 내지는 다신론 시대로 접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마음에 이 교만함을 꺾는 비결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비천한 존재인지를 알고 주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를 깨달아서 항상 엎드려지고 주님을 반역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쓰라린 열매를 머금으면서 순종하는 삶의 행복에 배해서 불순종의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미리 경고 받고 하나님 앞에 자기의 불순종이 반역으로까지 자라지 않도록 깊이 깨트려지고 회개하며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 아래서 사는 것 이외에 다른 길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순종에 이르는 비결입니다.
이세상의 누구도 희생을 요하는 고통스러운 순종의 명령에 대해서 룰루랄라 노래부르면서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모두 자기를 부인해야 하고 고통스러운 짐을 짊어지면서 이 고통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상주시는 은혜를 바라보아야 하고 시련의 아픔을 머금으면서도 이 아픔보다 훨씬 컸던 주님이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사랑과 은혜를 내다볼 때 비로소 순종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해마다 내년이 오면 좀더 잘할 것 같지만 수많은 원수들이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끊임없는 분투와 전쟁이 없이는 내년 중 단 한 평의 땅도 우리의 것으로 얻을 수 없고 주어진 365일 그 많은 날 중에 단 하루도 순종으로 아름답게 색칠해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날이 없습니다.
괴롬과 죄만 있는 곳 나 비록 여기 살아도
빛나고 높은 저곳을 날마다 바라봅니다
내 주여 내 발 붙드사 그곳에 서게 하소서
그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에서 제일 덜 행복한 때에도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때보다는 낫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것들을 이기면서 이런 악한 기질들을 꺾고 나아가기 위해서는 항상 주님이 주시는 이 땅에서 성실하게 살면서도 항상 마음속으로 ‘나에게는 이 죄 많은 세상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나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하면서 적당하게 이 세상을 무시하면서 살아가는 경건한 기질들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패역과 불순종을 꺾고 꼭 이기는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모세가 아주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생존하여 너희와 함께 하여도 너희가 여호와를 거역하였거든 하물며 내가 죽은 후의 일이랴” 언뜻 보면 모세가 ‘나 없이 뭐 되겠느냐’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그 목이 굳은 교만에 아주 질리고 질린 것입니다. 정확하게 그들의 본성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모세가 나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교만보다는 오히려 우리는 모두 본성상 하나님을 향한 반역과 한없이 교만해질 수 있는 악한 기질을 가진 이스라엘 백성과 똑같은 사람들이었는데 목양이 이것들을 억제시키는 효과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조금 패역하니까 다니는 교회도 있고 존경하는 목사님이라도 있지 반역이 극에 달하고 교만이 하늘을 찌르면 아무도 존경하는 사람도 없고 귀를 기울여 들을만한 설교를 하는 사람도 없고 삶에 있어서 본받고 싶은 사람도 없고 함께 자신의 신앙의 문제를 겸손하게 물어보아야 할 선생이 될만한 작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를 묶고 있는 모든 고삐를 풀어버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화: 야생마는 고삐에 묶인 채 살려고 하질 않는다. 강제로 재갈을 물려서 능숙한 마 부가 타고 몇 일을 타고 때리면서 길들이는 것이다-등에 사람을 태우는 것이 자 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하면서 받아들이게 된다)
오늘 성경에 보면 모세가 교만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역하기 좋아하는 기질과 천성적으로 고개를 들기 좋아하는 기질들을 다스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기와 같은 목자를 사용하셨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성도가 누릴 수 있는 축복들이 많이 있지만 그중에서 훌륭한 축복 가운데 하나가 여러분들을 야단쳐줄 수 있는 여러분들의 영혼의 목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단을 치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여러분들의 의무이기는 하지만, 여러분들이 모든 의무를 의무라고 해서 다 받아들이고 삽니까? ‘네가 뭔데’하고 뛰쳐나가면 하나님도 말릴 수 없습니다. 누가 그 사람을 말릴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신앙으로 맺어져서 거기에서 말씀과 은혜를 받고 교훈을 받고 책망을 받고 바르게 되고 의로 교육함을 받고 살아가는 것이 여러분 자신이 혼자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여러분 안에 있는 북받치는 반역의 기질과 은혜가 떨어질라 치면 영락없이 고개를 들고 잡초처럼 자라나는 여러분들 마음속에 있는 그 교만을 그나마 다스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정말 불쌍한 사람은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만이 아니라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사람들입니다. 목자가 없어서 그럴 수도 있고 혹은 목자가 싫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혹은 두 개가 다 결합이 되어서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간에 그렇게 살아가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정말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거룩의 길은 그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정욕의 길은 가까우며 교만해지는 것은 매우 쉽고 겸손해지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이며 은혜로부터는 멀어질 것이고 은혜로부터 멀어질수록 죄로는 더 가까이 다가가는 삶을 숙명적으로 살게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살든 지간에 제일 먼저 이렇게 좋은 교회를 만나고 거기에서 자기를 목양해 줄 목자를 만나서 자신의 영혼의 악함과 마음의 더러움과 심령의 교만함 들을 정확하게 지적을 받고 목양을 받으면서 사는 그 길이 그나마 하나님의 진노를 면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삶을 살 수 있는 중요한 비결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개를 들고 교만하고 하나님 없는 것처럼 포악을 떨면서 공개적으로 반역하는 삶을 살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러나 오늘 이처럼 모세의 유언적인 설교를 들으면서 깊이 감동을 받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깊이 깨닫고 그러면서 자신들 안에 있는 이 반역의 기질과 교만함이 주님이 자신들에게 약속으로 주신 땅을 얻지 못하게 하는 불순종으로 작용하지 않기를 깊이 사모하며 겸손하게 이 설교를 들을 수 있게 된 것도 사실은 모세의 목양을 받으면서 살았기 때문에 그들 안에 여전히 반역의 기질과 하나님을 향한 교만의 기질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그것을 은혜로 적절히 다스리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릴 수 있는 신앙의 시기를 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새해가 다가온다고 해서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하는 생각은 다 쓸데없는 생각입니다. 해 아래 세월이 어디 다른 세월이 있겠습니까? 마가릿 데쳐 여사가 ‘희망은 참 좋은 말이다. 왜냐하면 희망은 대책을 세우지 않은 바램일 뿐이고 비젼은 구체적인 대책을 세운 현실성이 있는 희망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내년 한해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한해만 더 우리에게 기회를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렇지만 올해의 실패를 내년에도 반복하지 않을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어떤 대안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지에 대해서 금년 한해에 잘 했던 삶을 통해서, 혹은 잘못 살았던 삶을 통해서 공통적으로 반성하고 평가해서 우리 나름대로 대안을 가져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그렇게 뚜렷하게 일년동안 살아온 삶에 대해서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내년 한해가 성공하면 올 같은 한해가 될 것이고 실패하면 올보다 훨씬 나쁜 해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반역하고 교만한 기질들은 세월이 흘러가면서 점점 더 크게 역사하기 때문이고 이런 것들이 크게 역사 할수록 우리를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는 은혜의 작용들은 점점 더 힘을 잃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책을 세우는 것입니다. 생각 없이 한해를 맞지 말고 금년 한해에 묶인 것이 있으면 풀고 하나님 앞에 매인 것이 있으면 모두 해지하고 회개를 통해서든지 하나님 앞에 한 서원의 약속을 갚음으로서든지 모든 것을 해지하고 자기 속에 있는 이 반역의 기질과 교만이 무엇인가를 깊이 깨달아 알아서 과거의 어리석음과 태만과 무지가 새롭게 주어지는 한해를 더럽히지 않도록 충분히 대책을 세우고, 실패했을 때에는 내 마음과 정신의 어떤 구조를 타고 그런 실패들이 흘러 들어왔는지를 면밀히 살펴서 시험에 드는 경로들을 추적하고 어떻게 내 자신을 파수하고 지켜야 될 지를 가늠하면서 그렇게 새해를 맞는다면 분명히 내년 한해는 금년보다는 더 많은 열매를 맺어서 순종함으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15. 지도자의 순종의 중요성
“너희 지파 모든 장로와 유사들을 내 앞에 모으라 내가 이 말씀을 그들의 귀에 들리고 그들에게 천지로 증거를 삼으리라(신31:28)”
지난 시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신앙이 좋았던 때에 모세가 그들의 타락을 미리 예고했고 또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율법의 말씀을 기록해서 증거궤 옆에 두게 하였고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을 때마다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대 제사장이 율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거기에 순종하게 만들어야 된다는 사실을 터득하게 하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을 향한 반역에 있어서 목양이 얼마나 그것들을 억제하는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있는 동안에는 모세의 목양을 받았습니다. 모세가 항상 어머니와 같이 웃는 얼굴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목양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진노한 얼굴로 책망하기도 하고 알아듣지 못하는 그들에게 차근차근 교훈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잘못 걸어가는 길을 하나님의 심판을 간구하면서라도 바르게 잡기도 했고 아직 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의를 가르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을 교육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목양을 받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내재하고 있던 하나님을 반역하는 부패성과 패역함은 억제되었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감당할 수 없는 교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보다 더 훌륭하게 신앙생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분량에 지나친 생각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 때보다 더 많이 패역한 시대를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고 주님이 새 생명의 원리들을 우리에게 심어놓으셨지만 우리들이 적절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살지 못하면 반드시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더 소문나고 패역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깊이깊이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양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제대로 목양을 받고 거기에서 주님을 알아가고 그렇게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야단을 치는 사람이 있고 무릎을 꿇고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교훈을 들을 수 있고 때로는 말도 되지 않는 엉터리 같은 일을 했을 때에 어쩌면 좋으냐고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릴 수 있는 목자가 있다고 하는 것은 말할 수 없는 행복입니다.
저는 오늘 아침에도 마음에 비감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에게 그런 분이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가까이 있어서 나를 목양해 주고 잘못했을 때에는 눈물이 쏟아지도록 야단을 쳐주고 그렇게 해서 바른 길로 걸어가게 해주는 분이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깊이 주님의 사랑으로 목양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의 신앙생활은 제조회사도 없고 유효기간도 표시되어있지 않고 생산 일자도 기록되어있지 않은 불량식품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구멍가게에 가보면 아무 것도 쓰여있지 않고 투명한 봉지에 들어있는 것들이 있는데 언제 들어왔는지 어느 회사인지도 없고 볼펜으로 값만 적어놓은 것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사먹는 것은 모험하는 것입니다. 중금속이 들어있는 중국제인지 사료용으로 나온 것인지 어떻게 압니까? 말하자면 그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역자를 청빙하거나 동역자를 고를 때 언제나 물어보는 것이 ‘누구에게 신앙을 배우셨습니까? 세례는 누구에게 받으셨습니까?’입니다. 목양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양을 받을만한 교회를 찾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전혀 목양을 받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왜 교회에 남아있는지 저는 이해가 안갑니다. 사실상의 교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존경하고 사랑하면서 목양받을 수 있는 교회를 찾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가서 목양을 받아야지, 신앙생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우리에게 무엇이 있습니까? 그렇게 하면서 우리 속에 있는 패역의 기질들이 억제되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모세가 이 율법을 다시 한번 들려주겠노라고 각 지파의 모든 장로들과 유사들을 모으라고 했습니다. 장로는 오늘날의 장로와는 좀 다릅니다. 이 때에는 국가와 교회가 일치되던 시대였으니까 장로의 기능이 신앙적인 데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일반 행정적인 데에도 그 기능이 확대되었고 일정한 사법권을 가지고 있는 재판장의 역할을 수행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재판장으로서 백성들의 문제의 시시비비를 말씀에 입각해서 판단해주고 공의를 세우는 지도자였습니다. 종교적이고 동시에 정치적인 지도자였습니다.
유사는 히브리 말로 ‘쇼테르’라는 사람인데 어원이 어디에서 왔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사람들이 추측하기에는 ‘쇼타르’라는 아람어에서 왔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쇼테르’는 구약성경에서 여러 개로 번역되었습니다. ‘방백’ ‘두령’ ‘두목’ 오늘 여기에서 보는 것처럼 ‘유사’등으로 번역되었는데 장로보다는 약간 밑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장로가 재판을 하거나 일을 처리하면 그 밑에서 서기처럼 거들어주고 실무를 맡아서 처리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장로는 지금의 장로이고 유사는 지금의 집사 정도로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어떻든 장로와 유사들은 광야 이스라엘 교회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첫 번째 깨닫게 되는 사실은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신앙적인 중요성입니다. 지도자들이 잘못하면 백성들 속에 불순종과 반역이 촉진되고 반대로 지도자들이 신앙적으로 잘 살면 백성들의 순종하는 삶이 증진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지도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터넷에 참회의 방을 만들었는데 어떤 분이 죄를 지으며 사는데 사는 것이 너무 힘드니까 그나마 하나님께로 돌아가 있다고 생각되는 그 5분 동안 하나님께서 생명을 거두어 달라는 기도를 한 것을 보았습니다. 어떻든 그 분에게 오늘 공개적으로 답변하겠습니다. 그 상태는 죄에 완전히 진 상태인데, 하나님의 사죄를 열심히 구하는 것은 소용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용서가 아니라 그렇게 자기를 삼킬 듯이 짓누르고 있는 죄의 세력이 약화되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어차피 주님이 십자가에서 자기의 죄를 용서해주셨는데 -물론 사죄의 확신을 갖게 되면 다시 뒤돌아보지 않고 확신 가운데 하나님 앞에 힘차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또 죄를 지으니까 오늘 확신이 주어져봤자 내일은 소용이 없고 그것을 두 번 세 번 되풀이하다 보면 확신을 갖는 것 자체에 대해서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는 문제를 낳게 됩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5분만에 그렇게 죄를 짓게 만드는 커다란 세력으로까지 죄의 능력이 자라게 된 것이므로 그것을 약화시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약화시켜서 그 죄가 더 이상 자기를 주장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큰 음성으로 ‘너 용서해 줬다’고 말씀하지 않으셔도 자기에게 사죄의 확신이 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초부터 다시 다루어서 자기가 어디에서 넘어졌는가 하는 것을 보고 반드시 그 죄를 이길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당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해방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다시 살아서 극복해야 합니다.
(예화: 필리핀에 반군들이 장악한 한 섬이 있는데 나라가 힘이 없으니까 그런 일이 생 기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일이 우리에게 생길 때 매일 눈물 흘리고 인터넷에 들어와서 통회자복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죄의 용서보다 자기를 억누르고 있는 죄의 세력을 꺾어달라고 기도하고 그 죄의 세력을 꺾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빨리 자신의 영혼의 문제를 적절히 치료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내서 목양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고쳐질 수 있습니다.
‘죄 죽임의 교리’를 설명하면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죄를 죽이지 못해서 불순종으로 악에 거하면서 살면 이것은 나의 영혼만 망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면서 신앙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을 망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람들이 왜 나를 쳐다보면서 신앙생활 할까? 누가 나 보래?’하는 것은 다 쓸데없는 것입니다. 전도하다 보면 정말 복음이 안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예수 믿는 사람에게 깊이 실망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반드시 자기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만은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그 사람을 실족시킨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실족시킨 그 사람의 이름도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은 엉터리구나’하는 것들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보면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실족되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때문에 많은 영혼들이 함께 실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지도자일 경우에는 책임이 더 크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분란이 일어나면 그 악함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한 교회에서 한쪽에서 찬송 부르면 한쪽에서는 통성 기도하고 한쪽에서 설교하면 한쪽에서는 손뼉 칩니다. 일단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가 끝나고 나면 세상 밖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은 교회에서 다 일어납니다. 교회에 담 하나 쳤다고 해서 죄가 못 넘어 들어오겠습니까? 죄인들이 주일에 몰려와서 앉아있는데, 일주일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경건하게 있는 그 사람들이 세상 속에 있는 그 사람들인데 무슨 일인들 안 일어나겠습니까? 그러니까 교회에서도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주일에 나와서 대예배나 잠깐 드리고 축도하기가 무섭게 도망가는 사람들은 문제의 주인공들이 아닙니다. 문제를 일으킬 능력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어느 수준에 도달해야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킬 정도가 되면 교인으로서 상당히 지위가 높아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교회를 사랑하지 않고 아무 관심도 없는 사람은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희생적인 봉사입니다.
아이들이 몸살감기에 걸려서 죽도 못 먹고 있을 때는 그 집이 갑자기 성화 된 집 같습니다. 그렇듯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은 다 교회의 지도자들입니다. 지도자들을 비롯해서 장로나 집사입니다. 세례 받지 않은 사람이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켜서 교회가 갈라지는 것을 보셨습니까? 지난달에 등록한 사람들이 연합해서 목사를 쫓아냈다는 이야기 들어보셨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니 지도자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이 이야기한 것처럼 선생 소리 듣기를 너무 좋아하지 말아야 합니다. 굉장히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지도자가 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모세가 이 사람들을 부른 것입니다. 장로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남아있지 않으면 재판을 엉터리로 할 것이고 공의가 굽을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고난을 받으면서도 바르게 살아야 할 당위성 같은 것들을 발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공의의 시행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 그 당시의 장로들이었습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장로님을 뽑겠지만 장로가 되든 집사가 되든지 간에 술 담배 안 먹으면 진실한 교인이라고 하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심지어는 심각한 죄를 짓고 교회 안에서 형사처벌을 받고 구속되고 구금된 사람들이 버젓이 장로가 되는 시대입니다. 깊이 뉘우치는 진실한 회개를 입증할만한 열매도 없이 중직에 오르내리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 교회에서 분란을 일으켜서 교회를 심한 고통의 상태로 몰아넣은 사람이 서너 달도 되기 전에 다른 교회에 가서 장로가 되는 상황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런 것들은 그들을 바라보는 많은 성도들에게 결코 좋은 영향을 끼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해 안가는 것은 연말이 되면 집사나 구역장을 놓고 목사님과 그렇게 실랑이를 합니다. ‘싫다고 하는데 뭐 저렇게 주려고 애를 쓰시나’하고 전도사 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격적으로 하려고 ‘이러한 사람을 집사로 세웠으면 좋겠다’고 공고를 합니다. 할 마음이 있으면 한달 간 교육을 받으라고 합니다. 이렇게 했을 때 사람들이 거의 안 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부교역자들이 말했었습니다. 안 오면 그것도 하나님 뜻 아니겠느냐며 했는데 명단에 오른 사람은 거의 다 옵니다. 그래서 한달 간 교육받고 시험도 봐서 85점 이상 맞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십일조 하겠습니다’ ‘주일을 잘 지키겠습니다’ ‘목양 잘 받겠습니다’하는 서약서를 쓰고 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으니까 주님의 교회에서 그 직분이라도 감당해야겠다 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하겠다고 응답을 할까’ 상당수의 사람은 임명을 해줘도 ‘저는 정말 자격이 없습니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제가 어떻게 집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신앙이 아직까지도 멀었습니다’하는 사람들은 왜 별로 안나올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교육까지는 다 받고 시험까지는 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 집사라는 직분으로 일컬음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하는 사람이 왜 안나올까. 그것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아십니까? 집사가 집사 같이 못살면 안 믿는 사람들이 잡사라고 합니다. 이미 모든 신자들의 한 지도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를 통해서 신앙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여부를 사람들이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이것입니다. 장로나 집사나 지도자가 된 사람들은 순종하면서 사는 일에 있어서 모든 교인들의-백성들의-모범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가 하는 기업은 평신도들이 그 기업을 들여다보면서 그 정직함과 순결함, 그러면서 하나님의 법대로 살려고 하는 원칙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삶을 보면서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신앙이 보이는 자신의 생업에 연결되는지를 깊이 배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예화:‘아름다운 사람 최태섭’이라고 하는 책 내용-크리스천으로 큰 유리 회사를 경영 하는 분의 일화-전쟁이 나서 폭격이 시작되자 은행 문 닫기 전에 빌린 돈을 갚 아야 한다고 은행으로 달려갔다는 이야기 등)이것이 지도자의 삶입니다.
지도자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장로와 집사들을 모아놓고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가르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많이 선생 된 사람들은 심판 받을 일이 많습니다. 지도자가 되면 자신이 기억도 나지 않는데 전도한 사람이 많고 기억도 안 나는데 발로 차서 지옥으로 던져 버린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너무 쉽게 집사 되려고 하고, 장로 되려고 하고, 심지어는 답답한 일이 있으면 목사 되겠다고 막바로 올라오는데 목회자가 되는 것은 기도 응답 받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겨우 기도해서 응답 받을 정도 가지고 무슨 목회자가 되려고 합니까? 또 한참 걸어가다가 그만둔다고 합니다. ‘한참 살아보고 기도해 보니까 그 때 그 결정이 틀렸다’고 합니다.
(예화: 어느 교회 목사님이 사찰이 말을 안 들어서 야단을 쳤더니 너무 그러지 말라며 목사 증명서를 보여줬다고 한다)
천천히 지도자가 되어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 있든지 어떤 자리에 있든지 정말 진실한 신자의 삶을 살아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의 존재를 통해서 참 신앙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면서 사는 삶이 참 아름다운 삶입니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어떤 의미에서 좀 엽기적인 데가 있어야 합니다. 도덕적인 삶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서 사는 순종하는 삶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지도자를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 어떻게 순종하며 살아야 할 지에 대해서 깊이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지도자들을 불러서 모세가 대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금년에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집사로서, 선생님이면 선생님으로서, 그 위치에서 정말 자신이 주님이 세우신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며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 아름다운 모본이 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자녀들의 경우에는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녀들을 향해서도 어떻게 보면 부모가 지도자입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의 면전에서 부모의 말을 들으면서 배우지만 시간이 지나 아이들이 자라면 부모의 뒷모습을 보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부모가 기도 많이 하면 아이들도 기도 많이 합니다. 부모가 거짓말 살살 하고 편법으로 살면 아이들 스스로도 ‘신앙은 엉터리다. 신앙에는 아무 내용이 없다’하는 생각을 합니다. 지도자가 그렇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는 지 모본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돈이 좀 없고 사회적인 지위가 좀 낮고 공부 많이 못한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서 깊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주는 생활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들을 불러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내가 이 말씀을 그 귀에 들려줄 것이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비극은 일정수준까지 신앙생활을 해서 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하려고 들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그 영혼에 만족을 주지 못하는 강단도 문제일 수 있지만 기본적인 자세 자체가 정말 잘못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예화: 한 목사님이 교회에 청빙을 받으셨는데 뛰어나게 설교를 잘하시는 분인데 ‘장로 님 중 한 분만 내 설교를 듣는 사람이 있어도 행복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대개는 ‘내 나이가 몇인데 젊은 너에게 목양을 받으랴’하는 마음이 깔려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우리의 임무는 자네에게 목양을 받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신 목사님의 유지를 받들어서 잘 세워 놓은 교회가 잘못하지 않는지 교인의 편에서 잘 감시하는 것이다’하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그러니까 부흥회를 해도 안나오고 새벽 기도는 물론입니다. 왜 그렇게 신앙생활 하는지 정말 이해가 안갑니다.
그러니까 기본적인 신앙을 아는 지식들이 왜곡되어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선포하는 사람의 학식이나 혹은 그 사람의 사람 됨됨이나 혹은 그 사람이 그 교회를 원래 세웠느냐 나중에 들어왔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전파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하면 예수님만 제외하면 거기에 모든 사람들이 와서 인정을 해야 하는 것이 말씀의 권위입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면 웃고 떠들다가도 ‘주께서 말씀하시기를’하고 성경을 펴면 고개를 푹 숙인답니다. 그런 지도자들에게서 우리들이 무엇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가 얼마큼 섭취하고 나면 더 이상 별볼일이 없을 정도로 고갈되는 세계일까요? 그리고 우리의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어느 정도 말씀을 듣고 나면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깨달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렇게 탁월한 말씀의 지식 속에서 이미 사는 사람들일까요? 말도 되지 않습니다.
제가 요즘 개인적으로 청교도의 저작들을 틈틈이 보면서 일주일에도 몇 번씩 ‘어떻게 이렇게 하나님에 대해서 풍부히 알고 죄인들에 대해서 이렇게 잘 알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그래도 청교도에 대해서 읽느라고 읽고 청교도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해왔는데도 펴서 읽기만 하면 그 탁월함에 대해서 감탄을 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터져 나오는 말이 ‘나는 정말 짐승이야. 어떻게 이것도 모르고 이렇게 살았을까. 어떻게 머릿속에 정리도 안되고 먼지처럼 떠돌아다니던 생각들을 이렇게 정체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정확하게 인간이 어디서부터 미끄러지고 어떻게 하나님을 반역하게 되고 그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되는지를 어쩜 이렇게 생생하게 파헤쳤을까’ ‘의사로 말하자면 이분은 전문의이고 나는 애 많이 낳아본 뒷집 할머니 정도이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화: 무지하므로 행하던 많은 민방요법-체하면 그 음식을 태워서 먹였다)
(예화: 아프리카에서 죽지도 않은 아이를 파묻고 귀신 들어 발작하는 아이의 입에 모 래를 퍼 넣는 풍습)
그래서 하나님 앞에 참 죄송합니다. 전에는 여러분이 변화되지 않으면 참 많이 미워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다 제 탓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짐승에 방불합니다. 그래서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세월이 더 흘러가기 전에 하나라도 더 많이 깨달아서 비슷하게라도 목양을 하고 기르면서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지도자들이 더 많이 그래야 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험하고 교회에 인간 같지도 않은 교인들이 판을 친다고 하더라도 목사를 비롯한 장로들이나 집사들이나 지도자들이 늘 깨트려지는 마음으로 가슴아파 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 앞에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으며 자기 깨어짐 속에서 산다면 아직까지도 이 세상은 변화시킬만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변화시키지 않을 만한 때가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인류 역사상 참된 신자가 아주 많았을 때가 언제였습니까? 별로 없었습니다. 언제나 참된 사람은 수로 승부 하는 것이 아니라 질로 승부 하는 것입니다.
캄캄한 밤바다에 등대 하나만 있어도 수많은 풍랑을 만난 배들이 안전하게 피합니다. 수천 개의 등불이 있고 조명탄을 수억 원어치 쏴 올려서 항만이 대낮과 같이 밝아야만 피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개만 제대로 빛나면 됩니다. 천 개의 등불이 있으면 뭐합니까? 불이 꺼졌는데. 나침반이 백 개가 필요합니까? 남과 북을 제대로 가르쳐주는 나침반 한 개만 필요합니다. 비슷하게 만든 것 일만 개가 있으면 뭐합니까? 다수결로 할 것도 아닌데.
그래서 정말 여러분들이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말씀을 깨닫고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예화: 어느 교회 사경회에 갔었는데 그 교회 목사님이 전 교인을 다 일어나라고 하고 그 다음날 저녁에 올 사람만 앉으라고 했다. 끝난 후 한 장로님이 목사님에 다음 부터는 그러지 말라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고 새로워져야 할 필요성은 지도자가 될수록 더 많아집니다. 왜냐하면 첫째는 지도자가 되면 자기 착각 속에서 살기가 굉장히 쉽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많이 말하다 보면 여러분이 예수님이 된 것 같은 착각 안 일으킵니까? 똑바로 살아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많이 가르치면 ‘난 이미 완벽하게 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지 않습니까? 죄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많이 가르치다보면 자기는 그 죄에서 초연한 사람이라고 하는 착각 속에 빠져들지 않습니까? 그렇게 착각 속에서 살 위험이 지도를 받는 어린 신자들보다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훨씬 더 많습니다.
두 번째는 교만의 가능성입니다. 지도자가 되면 사람들을 많이 가르쳐야 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항상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사람들을 많이 가르치다보면 자기 자신이 신앙이나 모든 면에 있어서 그 사람보다 월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돈이 많이 있고 그 재산에 뒤받침 할만한 인격이 갖추어진 사람들은 재산이 많다는 이유 때문에 교만해지지 않지만 재물이 많고 인격이 안 되 있으면 겸손해지지 못합니다.
세 번째는 지도자가 되면 배우는 것과 가르치는 것을 혼돈할 위험이 있습니다. 지도자가 아니었을 때는 무엇을 깨달으면 그것을 가슴에 새기면서 내려가기를 잘 하는데 지도자가 되어서 사람들을 많이 가르치는 위치에 있다보면 무엇을 깨닫게 되면 그 깨닫게 되는 것을 모두 주관적으로 생각을 안하고 객관적으로 생각합니다. ‘네가 이렇게 살아야지 만 하나님 앞에 참사람이 된다’라고 하면 자기가 지금 참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저 가르침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저것을 이렇게 가르치면 되겠구나’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이 들어왔는데 생각 속에서 정리가 되어서 묵상을 통해서 깔때기를 타고 가슴으로 내려가고 피가 되고 살이 되어서 그것이 삶의 정신이 되어 자기 삶을 움직여야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들어오기 전에 정리되어서 다시 튀어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밥을 삼켜야 하는데 계속 씹어서 토해놓는데 무슨 영양가 있는 작용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되기가 굉장히 쉬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런 식으로 듣기 때문에 항상 섭취가 잘 안 되는 것입니다.
90년대 초만 해도 목회자 세미나를 많이 다녔었는데 깊이 회의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목회의 경험이 미천했으니까 설교에 대해서 이야기했었습니다. 설교가 변하려면 설교자가 변해야 하는데 수강하시는 목사님들의 태도를 보면 변화될 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리 꼬고 앉은 것이 마치 새마을 연수 교육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그런 것 안 합니다. 굳이 갈 기회가 있으면 ‘목사님 우리 함께 신앙생활 잘 합시다. 그러면 설교는 저절로 됩니다’하니까 오히려 은혜를 받습니다. 논문처럼 설교는 이렇게 해야한다고 말할 때는 눈만 반짝반짝 하시다가 제가 신앙생활 못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눈물도 흘리고 간증도 하면 그 목사님들이 숙연해져서 ‘우리 같이 신앙생활 못한 것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시다. 그러면 설교가 저절로 됩니다. 신앙이 떡인데 설교가 좋아진다면 얼마나 좋아지겠습니까? 우리 기도합시다’하면 목사님들이 함께 형제가 되어서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회개합니다.
지도자의 중요성이 바로 그런 데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듣고 깊이 변화 받아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성경도 안 읽고 개인적인 성격지식도 없고 설교 시작하면 다리 꼬고 푹 자는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면 안됩니다. 말씀에 항상 예민하고 말씀에 깊이 깨트려지고 변화 받는 그런 사람들이 어린아이 같은 신앙을 가지고 지도자가 될 때 그 교회가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백성들이 사는 길입니다. 그래서 죽을 때가 된 모세가 백성의 지도자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것을 가르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서 그 귀에 들려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교회에서 지도자들은 교회를 섬기는 일들 중 특별히 영혼을 잘 섬기는 사람들이 교회의 행정도 하고 목회자도 가까이서 도와야 합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들을 잘 돌보고 목회하는 사람들이 운영을 해야만 목회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교회를 운영하지, 영혼들을 위해서 거의 돌보지도 못하고 그 영혼들을 위해서 눈물 흘려보지도 못하고, 쉽게 말해서 목회자적 심성이 없는 사람들이 교회를 하면 법대로 가거나 요령대로 갑니다. 그것이 합리적일 지 모르지만 교회는 그런 목양적인 정신이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만 교회 전체의 하모니들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장로교 헌법에 보면 ‘장로는 교인들의 신령적인 사무를 총찰하고’라고 되어있습니다. 말이 무척 어렵지만 장로의 역할은 누가 죄 가운데 있다는데 그 영혼의 상태는 어떠한가, 누가 회개했다는데 그것이 참된 회개인가, 저 사람이 자신의 지난날의 상처로 인해서 아파하는데 그 영혼이 회복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하는 것들을 총찰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신령한 삶을 살아본 적이 있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깊이 변화되지 않고는 그 사람들 속에 들어올 수 없는 경험입니다.
그런 것에 대해서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이 신자가 되어서 도저히 교인들의 신령적인 사무를 총찰할 능력이 없거나 현저히 떨어져서 교인들의 신령한 사무를 돌보면서 목회자를 도와서 쓰러진 교인들을 세우고 넘어진 사람들의 눈물을 씻어주는 목회적인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돌보고 하는데서 거룩한 기쁨과 신령한 보람을 많이 느껴야 될텐데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없으니까 그렇게 교회 안에서 다투고 쓸모 없는 일에 힘을 소진하고 교회를 권위주의적으로 만들어가고 목회자들과 더불어 교회를 비합리적인 구조로 데려가는데 일조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고유한 일거리를 놓치고 집사들이 해야할 일들에 매달려서 자기의 자리를 못 찾는 것입니다.
그 모든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할 수 없으니까 못하는 것입니다. 돈을 세고 제정을 관리하는 일은 오랫동안 돈을 만지면 하게 되는 일이지만 영혼들을 돌보고 교인들의 신령적인 사무를 총찰하는 일은 자기 자신이 말씀에 의해서 깊이 변화 받은 사람이 아니면 안됩니다. 그리고 한 두 번 변화를 받아서 멈춘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 말씀의 공급을 받으면서 자신도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깨닫고 또 깨달아 가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이 진실한 신자가 되어 가는 거룩한 삶의 진전이 있을 때 그 모든 것들이 영혼을 가르치는 훌륭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세계가 없으니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은혜 받고 그 말씀 속에서 변화를 받는 모습들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이 자기 자신이 자각하는 것입니다.
처음 예수 믿기 시작한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 졸 수도 있고 일주일이 지나도 성경 한 장 안 읽고 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장로, 집사, 교회의 선생 된 사람들이 그렇게 살면 하나님이 혼내십니다. 그렇게 살아서 뭐합니까? 기도도 안하고 새벽기도는 하겠다고 해놓고 하나님 아버지를 우롱하는 것입니까?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지 아이들 장난도 아니고 뭐 하는 것입니까? 헌금을 떼어먹는 것만 하나님 앞에 잘못인줄 압니까? 더 나쁜 것입니다. 돈이야 없으면 못내는 것이지만 기도는 걸어나오면 하는 것인데 무슨 핑계 거리가 있습니까? 아무리 작정을 했어도 돈이 없으면 헌금 못합니다. 그렇지만 아파서 드러눕지 않은 다음에야 새벽기도 약속했으면 나와야지 그런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앉아서 무엇이 순종하는 삶인지 들으면 뭐합니까? 음식 먹기만 좋아하고 단 10미터도 뛰지 않으려는 사람이 다이어트 요령 배우는 것과 같습니다. 어떻게 새사람이 되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지도자인척 하고 사람들에게 자기나 알아주기를 바라고 하는 것이 부패한 지도자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처럼 청결한 양심을 가지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자기를 어느 자리에 세워두셨든지 자기는 오직 하나님의 자녀요, 매일매일 부어주시는 주님의 은혜로 순종하면서 살아야 할 한 마리의 어린양이라는 그 흐느끼는 고백 속에서 우리들이 신앙생활 해야 하지 않습니까? 차라리 ‘평생새벽기도 싸인한 것 실수였습니다’하며 찾아가든지 아니면 순종하든지 해야 합니다. 아이들이 무엇을 보고 배우겠습니까? 하나님과의 약속은 뭔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모든 것들을 모세가 알았기 때문에 지도자들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은혜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제삼 강조했던 것입니다.
세 번째로 “그들의 귀에 들리고 그들에게 천지로 증거를 삼으리라” 이것을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 근동의 문화를 이해하면 이 구절이 살아서 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하나님이 계시의 말씀을 전달해주실 때에 허공 중에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문화를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한 교인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미련하게 행할 때마다 하나님이 꿈에 돼지를 보게 해 주신 답니다. 우리 사람들에게는 돼지는 미련한 짐승의 대명사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돼지는 절대로 미련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이 문화의 맥락을 타고 전해주시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둘이 언약을 맺고 나서 언약서를 낭독하고 둘이 함께 쪼갠 짐승 사이로 흐르는 피를 저벅저벅 밟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 때 많은 증인들이 거기에 서서 봅니다. 둘이 약속을 맺고 쪼갠 짐승 사이로 지나간다는 것은 죽음을 맹세한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그 약속을 어기면 그 사람은 죽어 마땅하다는 의미입니다. 그 때 사람들이 증인을 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증인이면 그 사람들이 죽을 수도 있고 사라질 수도 있으니까 증거력이 한정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세계의 사람들은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천지신명을 증인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인간이 수백 번 죽고 증인들이 단합을 해서 사기를 쳐도 그 모든 것을 본 하늘과 땅, 그리고 신명이 그것을 구별하여서 자신들이 맺은 이 언약에 대해서 무엇이 정당한 지를 증거 해주는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언약서를 낭독하고 사본을 하나씩 가지고 있고 나머지 하나는 신당에 보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도 천지를 증거로 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방사람들의 생각이고 우리의 생각은 천지를 하나님이 지으셨고 천지는 불변합니다. 사람은 수없이 사라져서 없어진다고 할지라도 산하는 말이 없지만 다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천지를 증거로 불러들인다는 것은 결국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증인으로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다 들려주었고, 무엇을 지키고 순종하며 살아야 될 지를 다 들려준 것을 하늘도 보았고 땅도 알았다’는 것입니다. ‘창조하신 하나님도 다 지켜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다 들은 너희의 책임이다’를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들이 이렇게 다 들려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살 때에 그들이 받게 될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에 대해서 모세가 손을 씻는 장면입니다. ‘다 들려주었고 전심으로 들려주었고 이렇게 너희에게 전심으로 모든 것을 들려준 것을 율법으로 만들어서 너희에게 또 들려주었는데-그것이 신명기입니다- 그 광경을 하늘도 보았고 땅도 보았고 그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도 지켜보셨다. 이제는 너희 책임이다’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안다는 것은 책임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몰라서 못살았을 때는 하나님께서 조금 야단을 치시지만 알고 못살았을 때는 하나님이 많이 혼내십니다. 말씀을 많이 깨달아 알고 많이 지도자가 된 사람들은 더 많이 깊이 생각하면서 반성하고 뉘우치면서 더 많이 순종하며 살려고 할 때 하나님께 더 많이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16. 불순종에 이르는 길(1)
“내가 알거니와 내가 죽은 후에 너희가 스스로 부패하여 내가 너희에게 명한 길을 떠나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너희 손으로 하는 일로 그를 격노케 하므로 너희가 말세에 재앙을 당하리라 하니라(신31:29上)”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계속 우리의 마음이 부패해 미끄러지지 않고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지속해나갈 수 있기 위해서는 목양이 필요합니다. 그 목양을 통해서 마음의 악함과 불순종을 향해서 치달아가려고 하는 우리들이 어느 정도 제동되어서 하나님 앞에 붙들린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모세가 살아있을 때조차도 모세의 명령을 따라서 목양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모세 자신도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목양이 이렇게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 매우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기꺼이 목양을 받으려고 하는 양떼들의 마음이 함께 공존할 때 목양을 통해서 우리들이 순종하는 삶의 유익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말이 40년이지 여기쯤 왔을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말 산전수전 다 겪었고 하나님의 예고대로 애굽에서 출발했던 모든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그리고 새로 태어난 세대의 사람들만이 남아서 모세의 유언적인 설교를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정말 순한 양과 같이 마지막 모세의 설교를 듣는 광경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도 이 모세는 분위기에 휩싸여서 사리판단을 그르칠 정도로 순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도 40년간 강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서 목회하는 동안 통찰력이 깊어졌습니다.
그러면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한번 우울한 경고를 주는 것입니다. 이 경고를 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참 어린아이처럼 신앙이 좋은 때에 이들을 우울하게 만들기 위해서 이런 경고를 주는 것이 아니라 너희 자신을 알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믿어야지 여러분 자신을 믿으면 반드시 실패합니다. 여러분 중 한사람도 이런 실패에 떨어지지 않은 적이 없었던 분은 한 분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할 때가 되면 항상 놀라는 것이 -하나님이 죄인을 향해 베푸신 사랑과 은혜에 대해서 놀라고 또 한번 놀라는 것은- ‘내가 이렇게 악한 인간이구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미스터리는 ‘내가 도대체 누구인가? 어느 정도까지 나쁜 인간이 될 수 있나? 내가 어느 정도까지 하나님 앞에 소망이 없는 인간일 수 있나?’하는 것입니다.
지금 모세가 그것을 자각시켜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기를 꺾고 ‘너희가 가나안에 들어가 봤자다’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 자신을 알아라’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렇게 40년 동안의 뼈저린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된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그들 자신보다 모세가 더 잘 알았습니다. 그것을 가르쳐주면서 마지막 유언적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남긴 많은 이야기 속에서 반복되었던 이야기지만 여기에서 다시 한번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미끄러져서 속에 깃들여 있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성향을 따라서 살게 되는가 하는 것을 순서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부패, 두 번째가 불순종, 세 번째가 악을 행하는 것, 네 번째가 진노를 사는 것, 다섯 번째가 재앙을 만나는 것입니다.
첫째로 부패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부패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의 부패가 불순종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순종도 두 가지인데 하라는 것을 하지 않는 불순종이 있고 하여야할 마땅한 의무를 안 하는 불순종이 있습니다. 어느 것이든 불순종인데 적극적인 불순종과 소극적인 불순종이 있는 것입니다. 소극적인 불순종은 그야말로 소극적이어서 뭔가 게을렀기 때문에 안 하거나 연약했기 때문에 미끄러지는 것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너희에게 명한 길을 떠나서’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반드시 그 사람의 마음을 굳어지게 해서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대항하는 악한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악행입니다. 거기에서 발전되면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들이 큰 환난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공식이 있기 때문에 너희들이 주의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제일 먼저 경계해야 할 것이 마음의 부패입니다. 부패한다는 것은 썩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질 자체가 완전히 변하는 것입니다. 썩는 것은 아니고 발효이기는 하지만 포도에서 어떻게 포도주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포도에 설탕을 뿌려서 밀봉하여 창고에 넣어두면 포도 알갱이는 하나도 없어지고 껍질만 남는데 껍질과 씨를 긁어내어 버리면 아주 맛있는 포도주가 되는 것입니다. 성질이 전혀 다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있으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으나 썩히면 독이 되는 음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썩으면서 성질이 완전히 변한 것인데, 마찬가지로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도 일단 부패하게 되면 완전히 다른 성질의 마음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렇게 마음이 부패해진 가운데서도 겉모양까지 완전히 불순종하는 삶으로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다닐까 말까, 신앙생활을 할까 말까 하는 사람들은 교회에 왜 안 오셨습니까? 하면 귀찮아서 안 왔다거나 힘들어서 안 왔다고 핑계를 대지만 어느 정도 신앙이 들어가고 나면 그 껍데기를 걷어치우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교회에 와서 자는 한이 있더라도 주일에는 교회에 와야 됩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지 안 받으시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시간에 차마 집에서 푹 자지는 못하고 불편하더라도 교회에 와서 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주 발전하면 새벽기도도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새벽에 와서 기도도 못하고 중언부언하고 가도 그 시간만 되면 눈이 떠지는 것입니다. 교회 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든 하던 일을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식의 삶을 계속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껍데기의 삶이 속의 마음이 부패해 가는 것을 전혀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그 껍데기만 보고 예수에 미쳤다고 하는데 미쳤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양심이 괴로우실 것입니다. 미치고 싶은데 안 미쳐서 미칠 것 같을 것입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껍데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데도 마음이 먼저 부패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삶으로 나타난 불순종이 있기 전에 먼저 마음의 부패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일단 변하면 옛날의 그 사람이 아닙니다.
(예화: 처음 신앙생활 할 때 무척 가난한 형제가 있었는데 항상 뜨겁게 신앙생활 했다. 낮에는 군고구마 팔고 밤에는 교회에 와서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엎드려서 밤을 샜다. 그를 잘 모르는데도 그 옆에만 가면 항상 주눅이 들었고 목사님께서 신학 시켜서 어린이 부흥사를 만들고 싶다고 하실 정도였다-몇 년 후 다시 만났는데 그때의 그 모습이 아니었고 교회도 잘 안나가고 있었다)
근본적인 것은 마음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자기 자신을 볼 때 참된 신자냐 아니냐고 하는 것에 있어서 교회에서 무엇을 하고 얼마나 인정을 받았으며 얼마나 열심이 있느냐로 봐서는 안됩니다. 짐승처럼 살면서도 교회에서 뼈빠지게 일하는 사람을 많이 봤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진실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 교회에서 일은 절대 안 한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뭘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초점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자기 자신의 영혼과 마음의 상태가 어떠한가 하는 것을 보면서 그것을 향해서 유쾌하게 생각하고 불쾌하게 생각하고 기뻐하고 가슴아파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느끼면서 마음속에 있는 이 죄가 실제로 불순종으로 나타나고 그것이 악으로 치닫고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하나님 심판을 받는 데까지 진전하지 않도록 자기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치 있게 생각하면서 그런 관점을 가지고 보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항상 인생을 생각할 때 그 사람이 어떤 지위에 올랐는가,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가졌는가 하는 것에 과도하게 신경을 쓴 나머지 그 사람의 속이 하나님 앞에 어떤 상태인가 하는 것을 보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똑같이 예수를 안 믿어도 거렁뱅이 하면서 예수 안 믿으면 비참해 보이고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좋은 차 타고 다니고 호화롭게 살면서 예수 안 믿으면, ‘예수를 믿으면 좀더 좋아질텐데’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복음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예화: 6.25때 한국군인으로서는 최초로 29세에 별을 단 어느 장로님의 간증-별을 달고 어머니에게 나타나자 ‘내 아들이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고 하시며 어머니께서 문을 닫고 들어가셔서, 아들을 위해 기도하시 다가 헐은 당신의 무릎을 보이셨다는 내용)
그런 시각을 가지고 인생을 바라보는 마음이 없는 이유는 그 사람이 좀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하는 가치 기준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정말 귀한 것들이 교회에 와서는 하찮게 여겨지기도 하고 세상에서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 교회에 와서는 너무나 소중하게 생각되는 가치관의 격차를 사람들이 교회에 왔을 때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내면의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모세의 생각이 얼마나 답답합니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노예살이도 끝나고 광야에서 나라가 없어서 이 구박 저 구박받으면서 싸우고 고생하던 것도 끝났구나’하며 번영에 대한 생각으로 가슴이 벅차있을 때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너희는 정말 좋겠다. 광야 40년 생활을 옛말하며 살 때가 온다. 저 넓은 땅과 저 많은 포도밭, 저 많은 과수원, 심지 않은 실과를 먹고 짓지 않은 집에서 살게 되니 정말 좋겠다’고 여기는 정도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그들을 보면서 모세는 지금 그 땅에서 누릴 번영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 부패할텐데 어떻게 하나’를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그 마음의 순전함은 가나안 땅을 다 주고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가치 있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그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불순종이 오기 전에 제일 먼저 마음의 부패가 일어납니다.
장마철에 둑이 터져서 물이 밀려들면서 논밭을 뒤덮고 주택지하까지 물 천지가 되었습니다. 그때 동네 물을 퍼내는 일은 먼저 하겠습니까, 둑을 막는 일을 먼저 하겠습니까? 먼저 둑을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불순종 하나 하나를 쫓아다니면서 회개하는 것보다 어디에서 이렇게 하나님의 명령을 떠나 불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는 힘이 밀려오는가 하는 것을 보고 터진 둑을 막아야 하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시작되는 것은 마음의 부패입니다. 여기 이렇게 똑같이 앉아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어도 여러분들의 은혜의 상태는 똑같지 않습니다. 이렇게 예배드리면서도 불순종을 밥먹듯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그 언저리에 있는 사람이 있고 거기로부터 아주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경계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 지킴의 교리'가 그만큼 중요합니다. 이것 없이는 성화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마음을 잘 지켜서 마음 자체가 부패하지 못하도록 저항하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일단 아무리 부패하게 하려고 마음을 공격해도 거기에 굴복하지 않고 싸우는 동안에는 절대로 그 마음이 완전하게 부패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져버리면 급속하게 마음이 부패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이 부패되기 시작할 때는 신앙의 경력 같은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사람들이 광야에서 만나 먹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일반적인 섭리 속에서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일용할 양식으로 살았지만 이 사람들은 일반적인 섭리가 아니라 기적을 통해서 매일 공급되는 만나를 먹으면서 산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은 겨우 말씀을 들으면서 진리의 말씀의 빛을 받지만 이 사람들은 이적의 빛이 비치는 불기둥 아래서 생활했던 사람들입니다. 구름기둥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엄청난 기적을 보고 놀라운 일을 본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미래를 보장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영원한 현재입니다. 날마다 오늘 이기면 이겼나보다 오늘의 승리가 내일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다 알던 신앙의 사람들이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잘 감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우리의 마음이 어떤 상태이며 어떤 때 부패하고 어떤 때 그 부패를 퇴치하고 이 영혼 속에 주신 하나님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실질적으로 배우고 또 그렇게 살아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렇게 마음이 부패하게 되면 불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라고 했는데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주님만 사랑했었는데 마음이 부패하면서 다른 것들도 사랑하게 되고 주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겨주신 사명감을 가지고 자신을 세워주신 자리에서 마음을 드려서 충성스럽게 살았는데 어느 한 순간에 마음이 부패하면서 하나님이 세워주신 그 자리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이유는 오직 하나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당하는 수고와 고통, 더 번영할 수 있는 기회의 상실, 이런 것들이 너무 아깝게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 소극적인 불순종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어느 한순간에 우발적인 불순종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철저하게 마음 자체가 지배되면서 변화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항상 마음의 부패가 오면 그 뒤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 불순종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부패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행하는 뒤따라오는 모든 삶은 철저하게 불순종의 삶입니다. 왜 그렇게 될까요? 왜 마음이 부패하면 노력을 하지 않아도 불순종의 삶이 자연스럽게 따라올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 아래서 마음이 지배되면서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자연스러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의 마음이 부패한다고 하는 것은 마음에서 이런 은혜들이 사라지고 거듭나기 전에 인간의 죄악 된 본성들이 싹트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악 된 본성의 정체는 자기에 대한 뿌리 깊은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뿌리 깊은 적대감입니다. 자기를 너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은혜에 압도당하면 자기보다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골골짝 가면 안됩니다. 거기는 죽는 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고 싶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보다 주님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명을 주신 분은 주님이고 아골골짝 가는 것은 나니까 나는 죽어도 주님은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것입니다. 또 십자가를 지는 것은 싫은데 지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질 때 나는 고통스럽지만 고통스러운 그 아픔보다 내가 십자가를 짐으로 받으시는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내가 더 기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사랑을 버린 신자의 삶입니다. 그런데 부패하게 되면 이것이 다시 다 살아나게 됩니다.
치유 받았다고 하는데 이 세상에 치유는 없습니다. 어느 한순간 불순종하고 죄 가운데 살고 하나님을 향해 쓴 마음이 돋아나기만 해서 죄가 우리를 지배하게 되면 다 들고일어나게 됩니다. 끊은 지 10년 넘은 술을 다시 먹고 싶고 담배끊었는데 다시 피우고 싶고 세상행실 다 끊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미친 듯이 그것으로 치닫는 것입니다.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다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간이 황폐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부패가 반드시 있고 그 부패가 그 불순종하면서 사는데 있어서 그렇게 살지 못하게 우리를 붙들고 있는 여러 가지 끈들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죄책감도 사라지고 은혜에 대한 갈망도 사라지고 하나님의 심판도 두려워하지 않고, ‘내가 이렇게 불순종하며 살다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못 받는데’하는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되고 언덕 위에 세워놓은 자동차가 브레이크를 풀자 뒤로 돌진하듯이 신자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마음의 부패 뒤에는 반드시 불순종이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악한 마귀는 마음의 부패 그 자체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불순종한 삶으로 데려가기를 너무나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기에서 자연스럽게 불순종하는 삶이 나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 불순종의 삶이 상대적이고 소극적인 것에 국한됩니다. 작은 것입니다. 섬김에 있어서 전에는 마음을 다했었는데 이제는 마음을 다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중심으로 기도했는데 지금은 중심이 아닙니다. 변두리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자기 양심도 ‘교회도 잘 다니고 맡은 일도 열심히 하고 있는데 무슨 문제가 있는가’ 하지만- 사실은 마음의 부패를 통해서 서서히 불순종이 잠식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그 말씀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많이 받고 마음이 아직 부패하지 않았을 때에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살아갈 때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길 때 기쁨이 있고 말씀대로 살았을 때에는 ‘나를 이겼다’라고 하는 환희 같은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을 좋아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말씀에 붙어있는 삶입니다. 말씀에 영향을 받고 영향을 받은 그 사람이 다시 말씀을 지키면서 살고, 그래서 말씀에서 떨어질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서 떠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관심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 욕망을 더 많이 생각하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당하는 괴로움을 더 많이 생각하거나 눈앞에 있는 이익 같은 것들을 더 많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고 주님의 사람으로 내가 날마다 변해간다고 하는 영적인 기쁨들이 자신의 삶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 절대 아니라 세상적인 욕망, 하나님의 말씀과는 상관이 없는 자기 자신의 행복, 이런 것들이 자기 자신의 인생을 움직이는 중요한 변수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생활입니다.
삶이 이렇게 떠나고 나면 마음의 구조 자체도 많이 바뀝니다. 마음이 부패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가 쏟아지는 자리에 가고 싶어할까요, 싫어할까요? 싫어합니다. 인간은 항상 자기 속에 있는 내면의 성질과 맞는 동일한 환경에 있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마음이 부패했으면 부패한 곳에 있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해지면 그런 부패한 사람들과 부패한 자리에 있는 것이 견디지 못하게 괴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상황 속에서 두 신자가 한 사람은 그 상황을 너무 엔조이하고 한 사람은 너무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내면의 세계가 차이가 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떠난 사람인가 하나님의 명령에 붙어있는 사람인가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아주 몰두하고 그 말씀에 은혜를 받으면서 말씀으로 정말 새로워지는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더 말씀대로 살고 싶어지고 말씀대로 살면 살수록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하다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살아도 관심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말씀을 배워도 관심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진짜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한 사람들은 말씀을 섭취하고자 하는 욕망이 없는 것입니다. 병들어서 죽기 전날까지 힘이 펄펄 나면서 맛있게 식사하는 사람 보셨습니까? 사고로 죽기 전에는 그런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죽는 것을 ‘밥숟가락 놓는다’고 말합니다. 대부분 죽을 때가 되면 이런 모든 육체적인 욕망이 다 사라져 버립니다.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마음이 부패한 정도를 넘어서서 삶과 그 사람의 신앙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떠난 사람들입니다.
회개해야합니다. 그렇게 교회에 다녀서 무슨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은 하나님 앞에 돌아서는 사람들을 향해서 쏟아 부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마음이 완전히 멀어진 사람들, 하나님을 갈망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결심도 없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은 정말 냉정할 정도로 분명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분명한 원리와 법칙을 따라서 우리들이 살아야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모세가 간절히 기대했던 것은 큰 나라, 아름다운 왕국,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정말 꿈꾸었던 나라는 온 이스라엘이 그 마음이 하나님께 연합되어 있는(다바크), 그래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며 사는 것이 너무 좋고 그렇게 지키면서 순종하면서 살면 살수록 주님의 말씀을 더 많이 알고 싶은 갈망을 느끼게 되고, 그런 갈망을 더 많이 느끼게 되면 느끼게 될수록 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는 것이 모세가 꿈꾸는 그런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모세가 가나안을 앞두고 가나안에 대해서 자랑할 수 있는데, 자기가 못 들어가서 안 그러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관심사가 무엇이어야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땅 때문에 감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땅을 자기들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하나님이 신실하게 약속하시는 것을 보여주심으로 입증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 이런 것들을 보면서 즐거워하고 행복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명령대로 사는 백성들이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맺으면서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내일부터 사경회를 할텐데 들뜨면 뭐합니까? 자기가 말씀을 받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지금 상태는 어떻습니까? 정말 건강한가, 아니면 마음이 부패해가고 있는 상태인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진전되어서 이미 불순종의 삶을 살고 있고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의 떠난 삶인가, 하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성경 읽으십니까? 그리고 그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어떻게 살라고 하시는가를 생각합니까? 그것도 하지 않고 여러분들이 어떻게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신자는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이 자기 인생을 향해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믿고, 그분이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구원해주셨다는 것을 믿고, 그래서 자신의 인생의 모든 계획이 그분의 수중 안에 있고 자신의 인생의 참된 가치는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먹고 마시다가 자기 뜻대로 살다가 죽는 사람이 교회에서 죽으나 세상에서 죽으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안 살고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신 계획에 전혀 부합하며 살지 않은 사람이 교회에서 죽든 하나님 보시기에 차이기 나겠습니까?
매일매일 성경을 읽는 것은 기본입니다. 성경 매일 읽으면서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사람이 되라고 하시나, 어떻게 살라고 하시나’하는 사람이 백 명 중 네 명이라고 통계가 나와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에 와서 ‘나는 집사다. 나는 권찰이다’하는 것이 세상 즐거움이지 어떻게 신앙적인 즐거움입니까? 자기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려고 하는 의지가 없고 그 길을 걸어가는 기쁨이 없는 사람들이 선생이 되어서 누구를 가르친다고 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자기도 가지 않는 길을 왜 남보고 가라고 하는 것입니까? 다 내려놓으십시오. 그런 거짓과 허위에 싸여서 신앙생활해서 마지막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1년을 살다가 죽더라도 단 한번만이라도 진실해져 보십시오. 그래서 정말 주님이 보시는 눈으로 자기를 보고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대가 어둡고 형식적인 신앙이 만연되어 있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도 진실한 신자들이 절박하게 필요한 때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최고의 의무는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세상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이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살아가는 인생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가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의무입니다.
그 일을 잘 하고 죽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빌어먹다가 죽어도 하나님이 그를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런 삶의 목표와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제왕의 면류관을 쓰고 황금의 홀을 휘두르다 죽어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짐승이 죽은 것과 방불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이 정말 말씀에 연합되어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한 주간동안 강원도에서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정말 비감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서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사람들일까, 한 때 말씀에 은혜를 받고 생각은 잘 다듬어져 있고 입을 열면 말은 청산유수이고 신앙생활 잘못하는 사람들의 단점이 잘 보입니다. 그런데 남을 진단해주라고 하나님께서 우리 만나주신 것 아니지 않습니까?
주님의 뜻대로 나 항상 살리라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붙어있고 순종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주님이 우리를 복음으로 변화시켜주시고 인격적으로 만나주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새롭게 살아서 마음의 부패 없이 정말 정숙한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에 굳게 부종해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17. 불순종에 이르는 길(2)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너희의 손으로 하는 일로 그를 격노케 하므로 너희가 말세에 재앙을 당하리라 하니라(신31:29下)”
마음이 부패하는 일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명령을 떠나는 불순종이 있습니다. 모든 불순종은 마음이 하나님의 생명을 잃어버리고 오염되고 부패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마음이 충분한 준비를 갖추게 되면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저버리면서 사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는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기 때문에 더 보태지 않겠습니다. 그 후에는 하나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는 일이 있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진노하게 되시고 심판의 재앙을 받게 된다는 말씀이 모세의 유언적 설교의 거의 결론 부분입니다.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한다”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모든 것을 살피시는 하나님의 전지 전능하심을 보게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다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은밀히 행하는 일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구속받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면전에서 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항상 당신의 백성들의 삶을 당신 앞에서 사는 삶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에 인간이 외면할 수도 없고 돌아앉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불순종을 조금 더 귀엽게 보실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뒤에서 호박씨 까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고 더군다나 신자들의 정면에 계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기에 돌아앉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는 그런 개념이 없습니다. 어디든지 안 계신 곳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진실해지지 않는 것은 굉장히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회에만 계시고 교회 밖의 일은 전혀 모르시는 분이시라면 그 분이 하나님이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이 어디서든지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의식하기만 하면 그렇게 죄 지을 수 없습니다. 저는 그런 접근을 찬성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남미에 있는 어느 카톨릭 국가 도시에서 마약, 밀매, 폭력, 강도 등이 너무 많아서 제일 죄를 많이 짓는 동네에 예수님 상을 크게 세워놓았더니 범죄가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말 못하는 상을 깎아 세웠는데도 범죄가 줄어들었다는 것입니다.
(예화: 우리 나라의 퇴폐업소를 없애기 위한 아이디어-그 곳에 30초에 한번씩 아름다 운 음악과 더불어 ‘아빠 거기서 뭐해?’하는 아이 목소리를 틀어주게 하는 것)
‘내가 어디서 어떤 일을 하든 신자인 나의 인생은 하나님의 목전에 있다’고 하는 하나님 면전 의식을 가지고 있으면 그렇게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이 높이 치켜들었던 기치 가운데 하나는 ‘꼬란데오’였는데 라틴어로 ‘하나님 면전에서’라는 뜻입니다. 저는 나이가 들수록 어두운 것은 너무 싫습니다. 전기 값이 문제가 안 된다면 머리털까지 보이게 찬란한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찬란한 빛 가운데서 하나님이 모두 보실 수 있도록 어디서든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죄 아래 있을 때에는 그렇게 하나님이 자기를 내려다보고 계시는 시선이 의식되지 않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면서도 거기에 하나님이 지금 계시다는 사실이 인식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는 것입니다.
(예화: 신학교 있을 때 채플 시간에 사회 보시는 분이 코까지 골고 잤다)
우리들이 죄 아래 있으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도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은혜 아래 있을 때에는 골방에 있어도 하나님이 뚜껑을 열고 나를 내려다보고 계시다는 인식을 분명히 합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요셉이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너와 나밖에 누가 있냐’고 했을 때 요셉은 ‘여호와 앞에서 내가 어떻게 득죄 하겠느냐’하였습니다. 이 청년은 은혜 가운데 있으니까 하나님이 보이는데 그 여인은 정욕에 눈이 멀었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안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얼마나 깊은 영성을 가졌는가 하는 것은 자신의 삶의 모든 시간, 모든 장소, 모든 영역 안에서 그 분의 시선을 느끼면서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이 부패하고 불순종하면서 악해지니까 하나님이 보시는 면전에서 자기 속에 있는 죄의 욕망이 너무 크고 불순종하고자 하는 욕망이 너무 큰 나머지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머리 속으로 인식하면서도 불순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은밀한 죄가 아니라 노골적이고 도전적인 죄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은밀한 죄는 그를 은밀하게 약화시킵니다. 노골적인 범죄는 순간에 그의 마음을 굳어지게 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불어 일으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는 모두 질적으로 똑같지만 하나님을 향한 은밀한 불순종인지 노골적인 대적인지를 판단하시고 두 가지 죄를 다른 것으로 받아들이시고 다른 방식으로 다루신다는 것입니다.
양심에 거슬리는 줄을 모르고 지은 죄보다는 다 알면서 양심을 거슬린 죄가 자기의 영혼에 미치는 파괴적인 영향력이 열 배는 더 큽니다. 그리고 전자의 죄는 비교적 죄를 용서받았다는 확신이 쉽게 오는데 후자의 죄는 용서를 받았다는 확신이 쉽게 오지 않습니다. 꼼꼼히 계략을 꾸며서 치밀하게 저지른 죄는 절대로 쉽게 사죄의 확신이 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작용이 마음속에서 충분하게 일어났고 일어나는 동안에 은혜의 질서들이 수없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연약함이나 핑계할 수 있는 것들이 없기 때문에 더 강력하게 죄책감들이 뒤따라오는 것입니다.
어떻든 그런 노골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버리고 떠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지나가서 이제는 자신의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하나님 앞에 정당한 일을 행하듯이 뻔뻔스럽게 타락하고 죄를 짓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부패가 불순종으로, 불순종은 하나님 면전에서 아랑곳하지 않고 범죄 하는 막 나가는 타락으로 이어지는데 이것은 이미 배교에 가까운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 때 네 번째 단계로 하나님이 격노하신다고 되어있습니다.
신자들이 죄를 짓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한번에 화산이 폭발하듯이 진노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는 이미 부패, 부패에서 불순종, 불순종에서 노골적인 배교로 이어지는 데까지 하나님이 아무 감정이 없으시다가 배교에 가까운 죄를 저지르고 노골적으로 배교하면 갑자기 평안하던 하나님의 마음에서 화산이 폭발하듯이 진노가 솟아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에 그런 것 같다는 경험을 가지고 있으면 그 이전 격노하시기 전까지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의 상태의 변화와 삶의 불순종의 정도에 맞게끔 그때 그때마다 가지고 계셨던 하나님의 정서를 못 읽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이 변질되려고 하기 시작하면 하나님께서 먼저 근심하기 시작하십니다. 근심을 많이 해보셨으니 근심이 무엇인지 아실 것입니다. 생각나면 마음을 어둡게 하고 염려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근심입니다. 사랑하니까 근심이 되지 사랑하지 않으면 근심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밥을 먹네 굶네 해도 우리들이 그렇게 근심하지 않지만 우리 부모나 형제가 밥을 먹네 못 먹네 하는 이야기가 들리면 근심하게 됩니다. 청소년 문제가 심각하다고 하지만 우리 아이가 타락하지 않으면 그렇게 뼈저리게 근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피붙이인 내 자식이 헛된 길로 걸어가고 부패하는 것이 보일 때 부모의 마음은 근심하기 시작합니다. 근심하다가 조금 더 지나고 나면 그 근심이 도를 더해서 아프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걱정될 때에는 자식에게 야단을 쳐도 고쳐지지 않고 마음의 부패정도가 아니라 부모의 말에 불순종하는 상황이 되면 아픕니다.
(예화: 아이는 돌 때부터 시작해서 일곱 살까지 때리고, 초등학교 다닐 때도 가끔 때 려도 된다. 그러나 사춘기가 오기 시작하는 5-6학년쯤 되면 때리지 말아야 한다) 저는 너무 화가 나면 아이를 불러놓고 ‘네 생각만 하면 너무 아프다’고 합니다. 교인들도 많이 아프게 합니다. 처음에는 아프게 하지 않고 근심을 시킵니다. ‘저러면 안 되는데. 걱정이다’하다가 마음이 미끄러지는 것이 보이고 결국 불순종합니다 그러면 영혼이 곤고해지고 하나님의 축복이 없습니다. 그러면 아픕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보시면서 그러십니다. 처음에는 근심하시다가 우리들이 계속 불순종하면 아파하십니다. 사랑하시니까 근심도 되고 아프기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좀더 진전이 되면 섭섭하면서 걱정이 됩니다. 화가 약간 나면서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영어로 vex라고 합니다. 그럴 때 ‘아빠 내가 잘못했어요’하면 보이는 인간의 반응은 ‘그래 이제 마음이 놓인다. 나도 사실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이다’하거나 눈물이 와르르 쏟아집니다. ‘그렇지 않아도 말은 못하고 내가 너무 아팠단다. 네가 내 아픔을 덜어주는구나 정말 잘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잘해라’합니다.
자녀들이 너무 말썽을 부리면 ‘그 따위로 하려면 나가’하는데 자녀가 소리를 지르면서 문을 쾅 닫고 나가면 그 때 느끼는 감정은 굉장히 화가 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vex입니다. 그때 자녀가 돌아와서 ‘잘못했어요’하면 ‘그래, 밥 먹어라’합니다. 왜냐하면 풀어지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좀더 지나고 나서 두 번 세 번 잘못했다고 빌면 ‘내가 너를 미워해서 그랬겠느냐’하며 감정이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 단계를 넘어서면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단계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기계가 아니라 인격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정서적인 상승작용이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 많으시기 때문에 우리가 계속 죄를 지어도 ‘왜 그러지, 왜 그러지’하시면서 눈물만 흘리고 계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반대로 사건이 터져서 문제가 되기 전까지는 하나님은 아무 감정 없이 일의 추이만 지켜보시는 분이시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렇다면 사도가 무엇 때문에 우리보고 “너희 안에 있는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표현했겠습니까?
노아 홍수 때 땅을 심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세상에 사람 지으신 것을 한탄하시면서 또 후회하셨다고 되어있습니다. 인간적인 화법이기는 하지만 하여튼 하나님 속에 있는 그런 정서를 성경기록자들이 성령의 영감 속에서 읽어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무지몽매하니까 주먹이 날아오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서 어떤 감정을 가지고 계신지 그 상승하는 과정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막바로 주먹만 안 날아오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이라는 교리의 창살에 갇혀서 우리가 하나님을 막보면서 배교적인 망나니짓을 하며 다녀도 돌아오라고 눈물만 흘리시면서 창살을 붙들고 흐느껴 우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으로 묘사하는 것은 교리적으로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도 그런 식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도들이 다 간 후에 엎드려서 교회 마루 바닥이라도 걸레로 닦고 카페트라도 청소하고 가지런히 하면서 땀이 뻘뻘 흐르도록 청소라도 하고 가면, 가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신다고 하는 느낌이 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이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시면서 “이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들려왔던 그것과 정도에 있어서 같겠습니까? 다릅니다. 그것도 그런 상승의 단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 아래 있어서 하나님의 정서에 매우 민감해져서 신령한 삶을 영위하기 전에는 그것을 잘 모릅니다. 다른 사람은 압니다. 다른 사람은 그를 위해 기도하면서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근심하시는데...’하는 것이 느껴지고, 정도가 지나면 본인은 아픈 것을 못 느끼는데 기도해 주는 사람은 자기 일도 아닌데 가슴을 칼로 후벼파는 것처럼 아파합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그에게 달려가서 ‘하나님을 봐서 네가 그렇게 불순종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다면, 내가 기도할 때마다 이렇게 마음이 후벼파는 것처럼 아프니까 나를 봐서라도 그만해라’라고 말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더 지나가면 아픈 정도가 아니라 무슨 일이 지금 오고 있다고 하는 두려움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그런 일이 임하지 않게 도와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 단계가 더 지나고 나면 하나님이 더 이상 기도하지 않게 하시는 것 같은 단계까지 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보면 더 이상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는 악에 사람들이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단에 빠진다든지 전혀 개전의 정이 없어서 교회로부터 출교를 당하게 된다든지 하는 경우입니다. 성경은 출교된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말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교제를 끊어버리라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 반영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 단계가 다 지난 것입니다. 그 과정이 하루나 일주일간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장구한 세월을 지난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죄의 싸움에 아직 피 흘리기까지 싸우지 아니하였다’ 죄인들 위해서 오래 참으신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뭔가 참는 것이 힘들 때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를 위해서 얼마나 오래 참으셨는가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사랑의 장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참고’, ‘견디고’, ‘견디고’, 사랑에 있어서 인내의 요소를 세 번이나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수시로 이야기하는 것이 “일체 오래 참으심으로 긍휼을 보여주셨느니라”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참으신 것입니다. 지루할 정도로 긴 시간동안을 참으시면서 근심하셨고 아파하시고 근심하면서도 분노하시고 그러다 결국은 진노하시고 그들을 포기하시는 이런 단계에까지 이르는 동안에 하나님이 근심만 하시고 가만히 계시는 것이 아니라 그 근심 어린 상태를 되돌리기 위해서 말씀을 보내시고 깨닫게 하시고 격려하시고 사랑을 보여주시고 낙심하지 않도록 채근하시는 일들을 계속 하시는 것입니다.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하나님이 그렇게 끊임없는 인내로 기회를 주시는데 그 시간들이 모두 돌아설 수 있는 시간입니다. 심지어는 진노 중에서도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진노 중에도 긍휼을 잊지 마옵시고”했습니다. 그런데 격노의 상태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정서가 인간을 향해서 이렇게 강력하게 진노하게 되면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심으로서 하나님 자신의 성품 중 하나인 공의를 충족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진노’라는 시리즈를 꼭 들으셔서 진노의 교리에 대해서 깊이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전파의 화급성도 하나님의 진노의 신학에서 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언제 터질 지 모르는 하나님의 진노가 아직 폭발하지 않았을 때 그들을 건져내는 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그러니까 전도를 열렬하게 할 때는 사랑이 넘쳐날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눈뜨면서 그 진노 중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그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가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깨달았을 때 사람들이 다급한 마음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까 하노라”할 때 그 화에 대한 확신이 한편으로는 영혼에 대한 자신의 소명에서 온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복음 전파의 화급성을 그 소명이 느끼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 복음 전파를 위해서 처절하게 헌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음에 하나님의 진노가 오는 것입니다. 그 격노가 있으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에서의 끊임없는 기도의 제목은 ‘우리의 원한을 언제 신원하시겠습니까?’ 하는 것이어서 성도들이 이 불의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하늘에서 기도가 올려지는데 그렇게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공평하게 해주시는 것이 공의에 목마른 성도들의 마음의 원한을 풀어주시는 것이라고 묘사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잊지 말아야 될 것은 하나님이 진노 가운데 심판하실 때는-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겨냥하셔서-어떤 의미에서든지 하나님의 심판은 단순한 복수의 개념이 아닙니다.
(예화: 고등학교 때 선생님들이 많이 때리셨는데 수학 선생님 한 분은 때리느라고 힘 이 드시다고 ‘군은 다음 주에 쇠고기 한 근 사오세요’하며 무섭게 때리셨다. 또 어떤 선생님은 ‘내가 너희들 사람되라고 때리는 것이 아니라 성질 풀려고 팬다’하 며 때리셨다)
인간의 심판에는 그렇게 복수의 개념이 있습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십시오. 자식들 때릴 때 ‘내 피붙인데 어떻게 때릴 수 있겠어. 그러나 안 때리면 이 아이가 사람이 되겠는가’하면서 “초달을 차마 못하면 아이를 망치는니라”는 잠언의 말씀에 깊이 순종하기 위해서 옛 자아를 꺾고 아이를 때립니까? 그 정도로 성화의 상태에서 매를 드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 정도 성화 되었으면 기도로 변화시켰지 몽둥이로 변화를 시키겠습니까? 성질 나니까 때리고 나중에 시간이 지난 다음에 해석을 하기를 ‘널 미워서 때리겠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징계 속에 항상 복수의 개념이 깃들여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자식을 원수 보듯이 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순간 순간 복수의 개념이 거기에 개입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진노와 인간의 진노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징계가 단순히 복수의 개념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복수의 개념이라기 보다는 징계를 통해서 그들을 돌이키게 하시려는 목적이고 또 하나는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이 거기에서 불신앙의 백성들을 털어 내시고 순전한 남은 백성들을 세우셔서 그것을 그루터기로 삼아서 다시 그 백성들을 꽃피우시는 것입니다. 그런 두 가지 개념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고된 “하나님의 재앙을 만나리라”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먼 후일에 있을 이스라엘의 멸망과 유다의 바벨론 포로를 내다보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 때가 주전 1500년경인데 그 때에 이미 주전 722년, 586년에 일어날 일들을 예고하면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패와 부패에서 불순종, 불순종에서 노골적인 범죄, 노골적인 범죄에서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진노에서 하나님의 심판까지 갈 것을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그 얘기를 하고 싶었으면 유언에서 그 얘기를 했겠습니까? 그렇게 얘기한 것은 ‘기다려라 하나님의 심판이 온다’를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너희가 그렇게 무한한 타락의 가능성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자기를 지키면서 여호와께 연합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라. 그것이 이 큰 고통을 막는 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의 참된 복이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부종 하면서 사는 것이다. 그래서 순종하라’를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18. 영원한 노래의 제목이 된 순종
“모세가 이스라엘 총회에게 이 노래의 말씀을 끝까지 읽어 들리니라(신31:30)”
사실 오늘 읽은 이 마지막 절은 32장에 붙어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32장의 노래의 말씀을 모세가 끝까지 읽어서 들렸다는 것입니다 이 32장에 나오는 노래가 그냥 저절로 붙은 노래가 아니라 31장까지의 교훈을 전부 종합해서 노래를 지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하여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슴에 새길 노래가 바로 이 32장의 노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 짤막하게 보이는 이 마지막 절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특성과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강력한 빛을 던져주고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여기에 ‘이스라엘의 총회’라고 되어있는 부분은 ‘모임’ ‘회합’이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교회를 의미하는 단어로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이스라엘의 총회는 곧 나라인 동시에 또한 교회였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가 성립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들이 깨달을 수 있는 바는 순종에 대한 요구는 개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일 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를 향한-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분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인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 신앙은 항상 개인에게 위탁된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게 위탁된 것이기 때문에 내가 순종을 잘하고 믿음으로 살면 그것이 바로 내가 그렇게 사랑하는 교회가 바로 서는 길이고 교회가 그렇게 바로 서게 되면 그것이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을 기쁘게 하고 그분의 몸을 보존하는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 대한 사랑과 그리스도 자신에게 대한 사랑은 머리에 대한 사랑과 몸에 대한 사랑이 나뉘어질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예화: 여행해서 돌아와서 어린 딸에게 ‘아빠의 어디가 제일 보고 싶었니?’라고 물으면 ‘눈도 보고 싶었고, 코도 보고 싶었고......’하다가, 조금 더 커서는 늘 ‘전부 다’라고 대답했었다)
그래서 칼빈 선생이 “교회를 어머니처럼 사랑하지 않는 성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어머니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안 사랑할 수도 있지만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는 몸이시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통합니다. 그래서 내가 불순종하는 것은 교회적 사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문제가 있다’고 하는데 자기 문제도 교회 문제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나 한사람만 순종하면 안됩니다. ‘나만 잘하면 되지’하는 얘기는 쓸데없는 일에 나서서 교회에 풍파를 일으키지 않고 자기의 분수를 지킨다는 면에서는 맞는 말인데 무관심하다는 점에서는 옳지 않습니다. 나만 잘 믿으면 안됩니다. 다 잘 믿어야 합니다. 나만 할 도리 다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 할 도리를 다해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잘 세워가야 합니다. 그래서 순종이 교회 전체에게 위탁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주일 저녁에 꼭 기도해야할 기도 제목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은혜 받은 모든 성도들이 그 말씀 속에서 깊이 받은 은혜대로 순종하면서 살아서 -모여 있을 때만 교회가 아니라 흩어졌어도 그 영적인 연결이 어디 가겠습니까? 장소와 거리가 무슨 상관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몸이 온전히 세워지도록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교회가 되기를 꼭 기도해야 됩니다. 그것이 공동체 교회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순종하는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그 중심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아버지의 뜻을 받드는 것이 되는 그 교회가 정말 주님이 그 가운데 계신 교회인 것입니다. 이런 교회를 하나님께서 꿈꾸셨기 때문에 모세를 통해서 이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의 믿음과 삶의 대 도리를 개개인이 아니라 어린아이부터 시작해서 나이 많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스라엘 총회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노래의 말씀을”이라고 했습니다. 노래를 담은 가락으로 되어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다시 두 가지를 만나게 되는데 하나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순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으면 어떻게 순종해야 하는지를 알아도 제대로 순종할 수가 없지만 반대로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할지라도 말씀을 모른다면 어떻게 순종하는 것이 순종하는 것인지 잘 모릅니다.
(예화: 사랑 받는 강아지와 망아지의 우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살고 싶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거짓고백입니다. 단 하나, ‘내가 원하는 대로 주님을 섬기게 내버려 둬’라고 하며 자기 나름대로 주님을 섬기고 싶어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지정하신 방법대로 경배를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순종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많은 말씀들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시편에서 감동 받는 부분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 119편은 제가 죽기 전에 그 전편을 설교해보는 것이 소원입니다. 시편 119편은 176절로 되어있는데 시인이 하나님의 율법으로 말미암아서 놀랍게 영혼이 회복되는 아름다운 감격이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었으면 짐승처럼 살았을 사람이었는데 그런 말씀의 깊은 감화와 깨달음이 있으니까 죄악 된 세상에 살면서도 인생의 초점 자체가 다릅니다. 그래서 죄 많은 세상에서 죄인들이 살아가는 그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혀 다른 각도를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서 주의 율법을 어기면서 살아갈 때 피 섞이고 살 섞인 사람도 아닌데 눈에 눈물이 시냇물처럼 흐르는 것입니다.
(예화: 아이들이 예배당에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는데, 방배동 예배당에서 초등학교 6학 년 아이가 앞자리에서 그림같이 말씀을 들었는데 ‘충성 시리즈’에 무한히 은혜를 받는다고 했었다. 오늘 새가족 환영회에서 초등학교4학년 아이가 말씀에 깊은 은 혜를 받고 아빠까지 열린 교회에 정착해서 신앙 생활하게 했다는 말을 들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감화를 받는 것은 이 세상의 지혜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영혼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살고 그 은혜를 갈망하는가 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종하는 삶을 위해서는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너무나 필요하고 그 말씀에 의해서 감화를 받고 은혜를 받는 삶이 너무 소중한 것입니다.
어느 형제와 잠깐 이야기를 했습니다.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고 새로운 생명과 그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발견하고 나니까 예전에 주님을 인격적으로 못 만났을 때는 돈벌고 사는 것이 목표였는데 지금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 은혜 아래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나니까 이제는 몇백 억을 줘도 그 생활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 아래 있을 때에 우리는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이다’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 줍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만 가르쳐주고 ‘너희끼리 살아라’하며 가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을 소생케 하는 능력이 있어서 진리를 알기는 알지만 그 진리를 따라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그 진리대로 살아갈 수 있는 거룩한 힘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험악할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어느 지체가 이번에 ‘죄와 은혜의 지배’를 들으면서 죄가 자기 속에서 애통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했습니다. 너무 오랜 동안을 어두움 속에서 기고만장하게 자신을 지배했는데 어느 날 껍데기가 확 벗겨지면서 기관총 달린 탐조등이 내리 비췬답니다. 갈 길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역사 하니까 우리는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고 그래서 정말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노래의 말씀’이라고 되어있습니다. 노래를 왜 부르게 합니까? 말씀이 한번 들렸다가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이 우리 속에 계속 남기 위해서는 노래로 우리에게 들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찬송이든 복음성가든 그것이 오래도록 신자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성경에 나와있는 말씀을 토대로 가사가 작성된 것이 금방 뜨는 것 같지는 않지만 두고두고 사람들의 마음에 울려 퍼집니다. 수많은 복음성가가 떴다 사라져도 찬송가가 계속 성도들에게 사랑 받는 이유 중 하나는 성경의 내용들에 충실하고 신자의 신앙의 경험을 성경적으로 충실하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에 곡조는 구닥다리지만 그 곡조를 타고 오래 동안 전해져 내려온 것입니다.
그렇게 잊기 쉬운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세가 이미 안 것입니다. 이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거의 최고도에 달하는 아주 놓은 때였는데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어도 곧 잊을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진리가 잊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노래가 되게 한 것입니다. 소설은 한번 읽고 버리지만 노래는 반복해서 계속 합니다. 할 것이 많고 시간이 많아서 그렇지 할 수만 있으면 같은 것들을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것이 너무 좋은 것입니다. 신명기 자체가 신신당부하는 부탁입니다. 모세가 노파심에서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다 한 이야기인데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의 구조가 그렇습니다. 한번 들려줘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다가 깊이 감동을 받아서 생애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새 말씀 듣고 변화 받습니까, 평생에 듣던 말씀 듣고 변화 받습니까? 다 아는 평생에 듣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늘 듣던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 다가오는 것입니다.
(예화: 무디가 굉장히 유명해졌을 때 영국에서 설교를 하고 내려오는데 17세 청년이 다가와서 한번 무디의 교회에서 설교하게 해달라고 했다. 건성으로 대답했는데 정말 와서 설교를 할 때 무디가 생애적인 충격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 요한복 음 3장 16절을 가지고 일주일을 설교한 후 ‘아직도 요한복음 3장 16절은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고 무디는 설교자로서 자신에게 심각한 결함이 있음을 깨닫게 되 었다)
저도 그 이야기를 듣고 요한복음 3장16절을 펴고 7번을 설교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들여다 보고 이리 저렇게 잘라봐도 답이 안나왔습니다. 그래서 이 무어하우스라는 풋내기의 설교를 들으면서 참담했던 무디의 마음이 이런 마음이었겠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새 말씀이 아니라 늘 듣던 말씀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잠재되었고 묻혀있었던 그 하나님의 말씀을 끌어내어서 새로운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지른 것입니다.
전에는 제가 집회를 가면 따라오는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시편 23편을 설교하는데 따라와서 네 번째 듣는 것이었습니다. 예화를 하려고 해도 그 사람이 눈에 띄면 ‘그 얘기 또 하는구나’할 것 같아서 싫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마다 하나님이 이미 하신 말씀을 가지고 자기에게 다시 말씀하신다고 했습니다.
(예화: 공부 못하는 아이들은 공부하라고 하면 다 했다고 하고 숙제하라고 하면 없다 고 한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 들어보라고 하면 이미 들었다고 하고 시리즈 제목만 바뀌었지 그게 그 얘기 아니냐고 합니다. 제가 시편 23편을 30번 넘게 설교했고 1절부터 6절까지 정확하게 20시간에 끝납니다. 그런데 정말 은혜 받은 성도는 똑같은 설교를 해도 새롭게 자신에게 도전하시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세가 깊이 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의 굉장한 질병 중 하나가 말씀이 진부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우리의 영혼이 아주 진부한 것입니다.
솔직한 고백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어떤 때 심령이 건조해지면 성경을 열어도 설교할 것이 별로 없습니다.
(예화: 기도원에서 한 목사님을 만났는데 성경을 읽으시는 것이 아니라 계속 넘기고 계셨다-설교 때문에 목회 못해먹겠다고 하셨다)
성도들도 똑같습니다. 어느 날 그것이 그것인 것 같고 진부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심령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 것을 갖다 줘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명은 평생에 듣던 말씀을 늘 반복해서 들으면서 순종하며 살아야할 자신의 도리를 깊이 가슴에 새기고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본분입니다.
세 번째는 “끝까지 읽어 들리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순종하면서 사는 백성들이 되기를 간절히 원했는데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자기의 구미에 맞는 몇 가지를 간추려 내어서 무장을 하는 것을 가지고는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삶을 살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우선 총체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순종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물질에 대한 탐욕 때문에 신앙을 더럽히고 마음이 불결해져서 미끄러지고 영혼이 침체에 빠지는 사람을 많이 봅니다. 그런 물질에 대한 욕망 때문에 신앙의 정절을 손상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은 물질에 대해서는 굉장히 강직하고 청렴합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살아있다고 말하기가 굉장히 힘든 것입니다.
(예화: 어느 전도사님의 이야기- 교회 전체에서 존경을 받으시는 한 분이 세무서장이 었는데 노후에 작은 전세방에서 살 정도로 청렴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분 이 정직하게 살았고 물질에 의해서 자기를 더럽히지 않았다는 사실은 인정이 되 고 깊이 존경하는데, 목회자로서의 영적인 느낌으로는 그 사람이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왜 그렇습니까? 어느 한 방면의 순종이 우리의 영혼을 강하게 하고 우리의 인생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부분에서만 순종을 잘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들이 순종한 것을 정확하게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순종한 것에 대해서 강력한 자부심을 가집니다. 그런 영적인 자만이 있다는 것은 곧 자기 의를 의미하는 것이고 그런 삶을 살게 한 원동력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죄를 죽이는 삶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저분한 오물들을 다 모아놓고 튼튼한 비닐을 덮어서 새어나오지 않게 단단하게 한 다음 부피를 줄이기 위해서 위에서 밟았습니다. 수십 명이 열심히 밟고 있는데 한쪽에 구멍이 뚫렸다가 그 물이 올라와서 더 악한 상황이 된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말하자면 그런 것입니다. 순종이 필요한데 자기가 잘하고 있는 것 몇 개를 골라서 순종하는 것은 우리 안에 복음적인 거룩을 산출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순종하던 것들을 좀 불순종해서 전체적인 균형을 맞춰야겠다고 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모든 방향에 있어서 불순종 이면에 있는 죄를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총체적인 순종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범위와 인식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려고 하는 자세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더 이상 성경을 읽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성경을 꽉 잡고 있지’하는 상태는 이 세상에서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섭취할 때에 비로소 온전히 순종하는 삶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잘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사랑, 그 다음은 지속적이고 진실한 기도의 세계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가끔 보면 우리 보다 성경 지식을 적게 아는데도 훨씬 잘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 지식을 아는 만큼 기도를 통해서 다 순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알기는 그보다 훨씬 더 아는데 순종은 거의 하지 않는 사람보다 앞의 사람이 훨씬 더 풍성한 삶을 누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을 안 배우면 더 온전하게 순종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더 깊이 더 정확하게 배워가면 거기에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모세가 마지막에 눈을 감으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탁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저 역시 31절의 말씀으로 여러분들에게 그것을 부탁하고 싶습니다.
순종하며 살아야할 하나님의 백성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