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성숙과 묵상
(2004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4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말씀을 깊이 생각함(시119:11) 2003. 10. 5 (산상기도회) 1
2. 지켜 순종하게 하는 힘(수1:8) 2003. 12. 28 (주일오후) 14
3. 영적 침체를 이기게 하는 힘(시77:12) 2004. 1. 4 (주일오후) 26
4. 사랑은 생각하는 것입니다(시104:34上) 2004. 1. 18 (주일오후) 32
5. 하나님 속으로 기뻐함(시104: 34下) 2004. 1. 25 (주일오후) 38
6. 기도의 실천을 촉진하는 묵상(시119:148) 2004. 2. 1 (주일오후) 45
7. 말씀의 욕구를 촉진하는 묵상(시119:147-148) 2004. 2. 8 (주일오후) 53
8. 묵상하게 만드는 것①:지성의 깨달음(시119:27上) 2004. 2. 15 (주일오후) 60
9. 묵상하게 만드는 것②:묵상의 의지(시119:27下) 2004. 2. 29 (주일오후) 71
10. 묵상과 마음의 틀(시119:36) 2004. 3. 7 (주일오후) 81
11. 묵상과 잠언(전12:9下) 2004. 3. 14 (주일오후) 89
12. 묵상과 쓰여진 삶(전12:10) 2004. 3. 21 (주일오후) 95
13. 감화력의 비밀(전12:11上) 2004. 3. 28 (주일오후) 102
14. 불망의 감화 (전12:11下) 2004. 4. 18 (주일오후) 109
1. 말씀을 깊이 생각함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119:11)”
시편이 가지고 있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의 유리한 강점은 모두 시인들의 경험을 토대로 우러나온 사실들이 진리로 조직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편을 통해서 건조하게 하늘로부터 주어진 차가운 계시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시인들의 피와 살을 머금고 태어난,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주신 동일한 계시들을 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영적 성장의 진전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충격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할 수 있으면 저는 여러분들이 충격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이 말씀 자체가 여러분의 지성과 여러분들의 내면의 세계 안에서 폭발적인 혁명을 불러일으키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고, 변화된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옛 삶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우선 오늘 읽은 성경구절 하반 절에서 은혜 받은 성도의 소원을 발견하게 됩니다. 시인이 119편을 기록하면서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라고 고백하면서 그 이후부터 하나님께 은혜 받은 성도로서 마음에 가지고 있는 소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온전한 삶’입니다. 하나님께 은혜 받지 못했을 때에는 아무리 개판으로 살아도 양심에 가책이 없고 아무 문제가 안됩니다. 그러나 일단 은혜를 받고 나면 누가 강요하고 시켜서가 아니라 ‘이렇게 살면 안되겠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성도의 마음에 소원이 생겨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온전한 삶을 꿈꾸는 사모함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니까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했습니다. 히브리 성경에 보면 ‘레만 로 에하타 라크’라고 했는데 ‘당신 앞에서(혹은 당신께 대하여)내가 죄를 안 짓기 위하여’입니다. 여기에서 쓰인 히브리 단어 ‘로’는 강한 부정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당신께 대하여 내가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강한 부정입니다. 은혜 받은 신자가 얼마나 온전한 삶을 꿈꾸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오전까지는 예배시간에 졸고 정말 엉터리없는 인생을 살았다고 해도 저녁에 말씀을 듣고 깊이 찔리고 하나님 앞에 내장까지 쏟아놓는 것처럼 회심하고 나면 그 다음에 정말 간절한 소원이 여러분 속에서 솟아나기 시작합니다.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닮는 것
그렇게 주님을 닮고 온전해 지고 싶습니다. 그렇게 주님 닮고 온전해지고 싶어질 때에 마음에 죄에 대한 강한 부정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완강하게 거부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에헤타’라고 되어 있는 동사는 ‘하타’라고 하는 ‘죄를 짓다’는 의미 동사의 변형인데 원래 히브리어의 의미는 ‘미스 더 마크’입니다. ‘표적을 빗나가다’입니다. 멀리 보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에게 주신 창조의 목적이 있고, 가깝게 보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았을 때 은혜 받은 사람이 그 은혜를 통해서 창조의 원래의 목적을 따라서 살 수 있는 마음들이 생겨납니다. 마음이 그러면 그 사람의 마음을 따라서 삶도 그렇게 움직이는데 그 때 분명히 표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멀리로는 창조해 놓으신 목적, 가깝게는 하나님이 지금 내게 은혜를 주신 그 목적을 따라서 살아가는 삶이 온전한 삶입니다. 그리고 거기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 모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온전하게 살아가는 데서 빗나간 것입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주의 법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은혜 받은 성도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서 살고자 하는 소원이 생겨나고 그렇게 됨으로서 자신이 온전한 삶을 살고자 하는 욕구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때로는 이 욕구가 너무나 강한 나머지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생명을 버려야 하는 상황이 온다고 하더라도 성도는 기꺼이 그렇게 할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주께’라는 말은 히브리 성경에 ‘라끄’라고 되어있습니다. ‘to you’ 혹은 ‘for you’ ‘당신 앞에서’ ‘당신께 대하여’의 뜻입니다. 최소한 두 가지의 의미를 갖는데 은혜를 받고 나면 비로소 자신의 삶의 표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뜻입니다.
예전에는 살아가는 삶의 표준이 세상과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만족하면 선한 것이고 내가 만족하면 행복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맞추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인정해주고 다른 사람이 자기를 이해해 주고 다른 사람에게 칭찬 받는 것이 자신의 영광이고 자신을 스스로 행복하게 하는 요소가 되니까 그렇게 살아갔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표준을 따르는 것이 사람들과의 불화를 불러일으키게 될 때 그 사람은 아주 망설임이 없이 세상의 표준, 혹은 사람의 기준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고 나면 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하여 하나님의 표준을 따라서 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지 못했을 때에는 자기의 이익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신앙의 정절이 충돌을 일으킬 때 언제든지 간음하고 하나님을 버립니다. 나중에 회개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때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합니다.
(예화: 오래 전에 우리 교회를 떠난 젊은 부부 이야기-헤어지려고 하기에 그러지 말라 고 충고했더니 남편과 헤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해야겠다고 말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래서 목회하고 나서 몇 번 안 될 정도의 호된 야단을 쳤습니다. 그런 고백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완전히 축출해버리는 영혼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모르고 연약하기 때문에 지은 죄와 이미 그것이 명백하게 하나님 앞에 범죄라는 사실을 알고 지은 죄를 똑같이 다루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막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 속에서 사라질 때 이런 일이 생겨납니다. 자신이 모든 것의 표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고 나면 하나님 앞에서 살고자 하는 소원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주님이 나의 표준이 됩니다. 너무 힘들고 그 자리에 서있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운데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그 일이 쉬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 앞에서 살고자 하는 마음의 소원을 불러일으켜 주심으로서 하나님 면전에서 사는 사람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주께’라는 말의 또 하나의 의미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눈빛 앞에서, 하나님의 면전에서 살아가는 삶,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나는 범죄 할 수 없습니다’하는 고백입니다. 신자의 가장 커다란 행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행복이 얼마나 큰지를 안 사람이 비로소 성도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을 맛본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신앙적인 의무를 많이 행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기쁨을 모른다면 그것은 노예적인 복종에 불과한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묘사하는 그 큰아들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오랫동안 아버지를 섬기고 동생처럼 방탕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이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사는 진정한 즐거움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작은아들은 집을 나간 탕자였고 큰아들은 집에 있는 탕자였습니다. 그러나 작은아들은 그 방탕한 삶을 통해서 아버지의 집에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줄 알고 돌아왔을 때 아버지로부터 고임을 받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 때문에 행복해하는 사람들을 가장 기뻐하시고 당신 자신 때문에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있는 그곳에서 가장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자신으로 말미암는 진정한 기쁨과 행복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살아가는 삶,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최고의 불행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그 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119편의 저자가 다윗이라고 대부분의 구약학자가 확신하고 있는데, 연대도 다윗 생애의 후기라고 봅니다. 저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다윗 생애의 거의 말기의 작품이라고 봅니다. 이 119편에서 시인은 영적 생활에 있어서 산전수전 다 겪은 것입니다. 그래서 죄와 싸워서 승리하기도 하고 지기도 하고 무지 속에서 물러나기도 하고 회복되기도 하고 영혼이 죽은 자처럼 되었다가 소생을 경험하기도 하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도달한 결론은 ‘은혜 받았을 때는 내가 하나님 앞에 범죄하지 않고 온전히 주님의 그 눈빛 앞에서 그 말씀의 표준을 따라 그분과의 교제 속에서 살고자 하는 소원을 갖게 되는데 나는 그렇게 사는 중요한 비결을 터득했습니다’하는 것입니다. 그 비결은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입니다.
히브리 성경에 보면 거꾸로 나옵니다. ‘나의 마음에 두었나이다. 당신의 한 말씀을. 당신께 내가 범죄하지 않기 위하여’ 앞에 나옴으로써 ‘내 마음에’라는 것이 강조되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서 어순을 설명 드린 것입니다. 본문을 하나하나 풀고 거기에서 교리를 이끌어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내 마음에’라는 구절입니다. ‘in my heart’ 혹은 ‘in to my heart’의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시인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 온전한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을 때에 시인의 관심사가, 마음이 그러한 은혜 받은 자로서의 소원을 이루기에 가장 중요한 관건이라고 하는 사실을 이 시인이 체험적으로 터득한 것입니다. 마음은 모든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사령부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배로 말하자면 방향타를 움직이는 조타실과 같습니다. 항해사가 배의 핸들을 움직이는 것에 따라서 배 뒤편에 있는 방향타가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배가 항로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60만 톤 되는 배를 수만 명의 사람이 밀어도 그 방향을 바꿀 수 없는데 한 사람이 핸들을 움직이면서 그 배의 항로를 바꾸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조타실이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은혜를 받았을 때에 온전한 삶을 살고 싶은 강력한 소원, 하나님의 말씀의 표준을 따라서 하나님과의 찬란한 빛의 교제 속에서 살고 싶은 소원이 생기는데 그러한 삶을 실제로 살기 위해서는 마음이 가장 커다란 관건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랑스럽게 마음을 지키면 우리들이 그렇게 은혜 받았을 때에 터득하게 된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살고자 하는 소원을 유지할 수 있고, 소원이 유지되면 그런 쪽으로 우리의 삶이 가게 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마음을 지키는 일이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두었나이다’라고 나오는데 히브리말로 ‘차판티’라는 것입니다. 이 번역은 적합한 번역이 아닙니다. ‘차판’이라고 하는 것은 놔두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감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덮개 같은 것을 사용해서 그것을 보호하기도 하고 은폐하기도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발견되거나 원래에 감추어둔 어떤 물건이 손상되지 않게끔 시선을 피하고 비밀스럽게 보호하는 기능과 함께 커버를 해서 그것을 씌워버리는 것입니다. 덮어버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속에 감추어두었나이다’의 뜻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이해하기 쉽게 이 동사를 설명하면 옛날 시골에서 저녁에 불을 때서 밥을 해먹은 다음에 불씨를 아궁이 속에 집어넣고 고운 재로 잔뜩 덮어둡니다. 그러면 잘하면 속에 불씨가 남아서 아침에 일어나 불 피울 필요 없이 ‘훅’하고 솔가지를 얹으면 불이 붙습니다. 그렇게 불씨를 고운 재 속에 깊이 감추듯이 감추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감춥니까? ‘이메라 테카’에서 ‘이메라’라는 말씀 뒤에 ‘당신의’라고 하는 소유격이 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your word’ ‘당신의 말씀을 감추어두었나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히브리어에서 말씀을 가리키는 대표적인 단어가 두 단어가 있는데 하나는 ‘다바르’라고 하는 단어이고 하나는 ‘이메라(혹은 에메라)’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다바르’라는 단어는 반드시 밖으로 흘러나와서 언어화된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고 ‘이메라’라고 하는 단어는 하나님의 심중에 있는 생각까지도 그것을 말이라고 생각해서 표현한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 말의 동사가 창세기 1장에 쓰입니다. ‘바이오메 엘로힘 예히오르’ ‘빛이 있어라 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입니다. 언어가 없고 아무 것도 없는데 하나님이 누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울려 퍼지는 언어로 ‘빛이 있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것까지 포함하는 단어가 바로 ‘이메라’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번역되었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어떤 생각을 포함해서 그런 종류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수입니다. 이 시인의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이것은 지금 모든 시험을 극복하고 은혜의 상태에서 회고하면서 쓴 것인데, 결국 이 사람이 은혜를 받은 다음에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삶을 꿈꾸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마음속에 감추어두었더니 자기가 이겼다는 것입니다. 그런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온전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는데 많은 말씀이 아니라 한 말씀을 마음에 두었고 그 말씀이 자기를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삶을 살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의미는 이런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많은 말씀에 관한 지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하나나 두 개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우리의 마음에 두기만 하면 우리가 충분히 죄를 이기고 온전한 삶을 살 수 있겠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무리한 해석입니다.
이 말은 우리들이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을 때 온전한 사람이 되고 온전한 삶을 살고 싶은 욕구가 생겨나는데 그 욕구가 우리의 마음에서 계속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많은 지식이 필요하지만 실제로 그 많은 지식 중에서 상황에 적합한 한 말씀이 자기의 마음속에 깊이 묻혀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때에 그 때 비로소 온전하게 살고자 하는 소원이 신자들 속에서 계속 유지되고 실제로 그런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적용을 하면서 교리를 진술하겠습니다. 스스로 자기의 신앙을 자가진단 해보십시오. 다음과 같은 사람은 오늘 분명하게 정리를 해야합니다. 아무리 방황해도 마지막에 이 지점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는데 성화의 삶에 진전이 없고 은혜를 너무나 쉽게 잃어버린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이 말씀이 아주 중요한 지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거의 없고 영혼의 어두움이 계속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사경회를 하거나 성경을 공부하거나 특별한 기간을 정해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자 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놀라운 깨달음을 주십니다. 그 말씀이 자기를 찌르는 것들을 경험합니다. 저는 청교도들을 공부하다가 워낙 강력한 진리의 충격을 받을 때에는 온몸의 살갗이 비늘처럼 일어서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합니다. 어쩌면 여러분들이 예배 시간에 와서 그런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의문은 ‘그렇게 놀라운 은혜를 받았는데, 그리고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그런 은혜가 주어지는데 그 은혜의 효력이 지난번 사경회에서 다음 사경회까지도 이어지지 않을까?’입니다. 5년에 한번쯤 사경회를 하는 교회에서 이야기하면 이해가 되겠지만 우리는 1년에 4번을 하니 석 달만 지나면 다음 사경회로 이어지는데 두 달쯤 가면 약발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사경회에서 충격 받을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경회에 가면 정말 하나님께서 은혜를 또 주십니다.
그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하는 생각은 ‘이렇게 사는 것이구나.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일시적으로 우리의 영혼을 자극하고 불러일으키기는 하지만 필연적으로 그것은 마치 횃불을 쳐들면 불이 서서히 붙기 시작해서 활활 타오르는 시기가 있고 시간이 지나고 나면 서서히 사이어 가다가 어두움 속에서 그 빛을 잃어버리듯이 말씀의 효용도 그런 것이구나’입니다. 그러면 대안은 무엇입니까? 약발이 두 달 간다면 계속 충격적인 불을 두 달에 한번씩 지피면 됩니다. 약발이 한달 밖에 안 간다면 한 달에 한번 불을 지피면 됩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누가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 가는 여러분들의 지성에 엄청난 충격을 주면서 계속 불을 지펴서 약발이 계속 받도록 해줄 것인가, 그런 뛰어난 설교자가 이 세상에 있을까, 있으면 왜 하필 여러분 같은 사람과 목회를 하겠습니까? 그러니 이것은 아닙니다.
물론 여러분과 저와는 조만간 결별할 가능성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개척 당시부터 제가 은퇴할 때까지 약 5-6천 편 정도의 제 설교를 듣게 될 것입니다. 그 설교를 진지한 청취자로서 끝까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과 마지막 예배를 드리는 고별 설교에서 본문을 읽었을 때 도저히 무슨 설교가 나올 지 여러분들이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설교를 하다가 죽는 것이 제 간절한 소원입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해 줘야합니다. 해가 거듭될수록 날이 갈수록 세월이 흐를수록 설교가 쉽게 들리는 것이 아니라 더 예리하고 벼리어져서 수많은 말씀의 폭풍우도 견딘 여러분의 내면의 세계를 예리하게, 10년 전의 말씀의 칼로는 힘줄 하나나 두 개 정도를 묶어서 칼로 갈랐다면 10년 뒤에는 여러분들의 세포까지도 말씀의 칼로 가를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벼려진 하나님의 말씀과 그 위에 강한 능력이 나타나서 정말 그 말씀의 칼로 여러분들의 두개골 뚜껑을 열고 여러분들의 갈빗대를 통째로 가를 수 있는 능력을 동시에 소유한 설교자로서 인생을 살 수 있다면 저는 모든 것을 다 양보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도 좋고 무엇을 견뎌도 좋고 어떠한 대접을 받아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의 몫입니다. 거룩한 삶은 그렇게 해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일까요? 그래서 여기에서 두 가지를 아주 균형 있게 같이 추구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 두 가지라는 것은 끊임없이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새로운 신앙의 세계를 알아 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의 비밀을 아는 지식에서 새로운 것들을 깨닫고 알아야할 필요를 깊이 느끼면서 언제든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앞에 새롭게 깨트려지고 새롭게 알아가야 하겠다고 하는 지적인 열망을 갖는 동시에, 지금 여러분들이 결핍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경고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경험을 시인은 ‘내가 주 앞에 범죄치 않기 위해서 주님의 그 한 말씀을 내 마음 깊은 속에 누구도 볼 수 없게 불씨를 감추듯이 감추어 두었나이다.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 그것이 들어와서 지속적으로 계속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두었더니 주님 앞에 범죄하지 않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설교나 하나님의 말씀을 인터넷에서 정보를 검색하는 방식으로 훑고 ‘내가 그것을 읽었다. 이해했다’하며 접고 새로운 정보를 계속 찾아다니는 것은 거룩한 삶의 실천과 영적 성장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교회에서 계속 책을 가지고 공부하고 설교를 선포하고 수련회 가서 공부하고 다시 책이 나와서 공부하고 하는 방식에 대해서 이해를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러한 이치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3단계에 거쳐서 습득하게 되는데 그 3단계 말고 또 다른 단계에서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스며들도록 그렇게 여러분들을 도울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너무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익히는 이유는 많은 정보를 습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자기를 거룩하고 진실한 신자가 되게 못하거나, 만들어주는 그 일에 매우 적은 도움밖에 주지 못하는 지식을 찾아서 많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범죄입니다. 우리에게는 인생을 그렇게 사용할 자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여 앉았을 때에 이런 책 읽었다 저런 책 읽었다고 자랑하기 위해서 독서하는 것은 지성을 파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됩니다. 자기를 거룩하게 하고 하나님을 더 경외하게 하는 그런 참된 지식들을 습득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사용하고 자기를 거룩하게 하지 못하는 많은 양의 지식보다는 자기를 진실하고 거룩하게 만드는 작은 양의 지식을 훨씬 더 소중하게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비결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그 말씀을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세 가지의 지침이 여기에서 주어지는데 첫째는 잊혀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더 깊은 뜻을 알게 되도록 계속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영향을 받을 수 있도록 반복해서 계속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자신에게서 떠나가지 않고 계속 그 말씀이 자신의 거룩한 삶을 위해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하는 비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공부하면서 생애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했던 말씀들이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도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강력하게 충격을 받고 깊이 회심하게 한 하나님의 말씀들이 있고 또 그런 시리즈들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그 순간에 강력한 은혜를 경험하고 여러분들의 생의 방향이 전체적으로 뒤바뀌는 뚜렷한 회심을 경험하게 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지속적으로 여러분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들 속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의 차가운 지식으로 지성의 창고 속에 가두어지게 됩니다. 물론 그 지성의 창고에 가두어진 그 말씀도 유용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성에 가두어둔 그 하나님의 말씀은 비록 지금은 나를 강력하게 움직이지 못하지만 무언가를 판단하게 하는 아주 중요한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화: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간 사람이 보신탕이 먹고 싶었는데 슈퍼마켓에서 개 가 그려져 있는 통조림이 보신탕인 줄 알고 먹었다)
지식이 없으면 엄청난 혼란을 빚게 되는데 지식이 있으면 그런 혼란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냉전시대에 소련 사람이 미국에 가게 되어 백화점에서 밀크 파우더에 물을 타면 밀크가 되고 오렌지 파우더에 물을 타면 오렌지주스가 되는 것을 보고 놀랐 는데 베이비 파우더를 보고 졸도한 이야기)
지식은 마음을 움직이지 않아도 정리되어 있으면 판단하게 합니다. 그래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람이 다 범죄 하려고 해도 밝은 빛이 비치면 범죄가 줄어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식은 여전히 중요한 자산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일단 내 생애를 움직인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지라도 지성의 창고에 들어가서 차곡차곡 드러눕고 마음에 더 이상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 오늘 나의 삶을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하고 범죄 했는데 그가 우리아의 아내와 범죄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엄위하심에 대해서 경험하지 못했을까요? 아닙니다. 주님의 탁월한 성품을 많이 경험하면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범죄 했습니다. 머릿속에 드러누운 지식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을 정돈되게 살아가는 데에 길을 이탈하지 않을 정도의 정보는 제공해줍니다.
시골길을 달려가다 갈림길이 나왔을 때 한길은 포장이 되어있고 한길은 돌멩이밖에 없어도 포장된 길의 표지판에 낭떠러지라고 써놨다면 그 길로 가겠습니까? 아무리 가고 싶어도 안갑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은 지금 내 마음에 뜨겁게 역사하지 않아도 우리에게 분별력을 갖게 해주고 넘지 못할 선들을 규정지어줍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많은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거룩한 삶을 사는 것과 한도를 넘지 않고 일정한 통로 안에서 운행하듯이 인생을 사는 것은 별개입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도둑질하지 않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까? 감옥에 안 들어가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까? 세상 사람들로부터 죽일 놈이라고 손가락질 받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그렇게 조잡하고 졸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여러분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여러분들이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피조 세계가 되기 위해서 섬기는 삶을 사는 것, 그런 성화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여러분들을 향한 뜻입니다. 일정한 인생의 항로를 이탈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하나님께 구속의 목적에 부합하는 만족을 드릴 수 있는 삶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은혜를 많이 받았던 지식들이 계속 지성의 창고에 가서 드러눕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의 말씀을 두었나이다’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제가 많이 읽는 책 가운데 하나가 제가 쓴 책입니다. 사람들은 미쳤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쓰기 전까지는 내 마음에 있는 내 생각이었지만 토해져내서 바깥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내 것이 아닙니다. 한동안 자기 전에 ‘마음 지킴’을 계속 읽었습니다. 불과 2-3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여러분들에게 설교하고 글을 쓰고 연구한 그 하나님의 말씀이 지성의 창고에 드러누우려고 하는 것을 저자인 저도 발견하는데, 여러분은 얼마나 더하겠습니까? 그렇게 해서는 주께 범죄 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많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많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기에 말씀을 많이 알고 지성의 창고에 말씀이 드러누워 있을 때 통행로도 모르고 좌충우돌하면서 다니는 초보 신자들이나 말씀의 빛 없이 살다가 이제 처음 시작하려고 하는 좌충우돌의 신자를 바라보면 한심하고 기가 막힐 것입니다. 언제 교통정리가 되나 하는 생각이 들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그 사람들보다 훨씬 거룩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교만입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신자의 거룩한 삶은 지성의 창고에 드러누운 하나님의 말씀의 분량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움직이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지성의 창고에 드러누운 수천 마디의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지금 신자의 마음속에 살아서 불씨로 역사하고 있는 그 하나의 단순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때 그가 전자의 사람보다 훨씬 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에서 보면 말씀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는 정말 동의할 수 없는데 아주 뛰어나게 경건한 사람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나는 저 사람보다는 훨씬 정리된 지식을 가지고 있는데도 은혜로부터 멀어져 있는데 저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삽니다. 그 때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기가 굉장히 힘듭니다. 그런데 오늘 여러분들에게 드리는 충고는 아주 정직하게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많은 말씀을 깨닫고 정리가 잘 되었지만 모두 지성의 창고에 드러누운 말씀이고 그 신자는 아직 죄와 구원의 교리도 잘 모르지만 어떤 복음의 한 말씀이 그의 마음에 깊이 감추어지고 불꽃처럼 그 속에서 타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부족하나마 단편적인 그 진리의 인도를 받고 삶 자체가 경건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룩한 삶을 위해서 지식이 필수적이다’ ‘지식을 따라 거룩해져 가라’고 하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저를 아는 은혜와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할 때 그 지식은 지성의 창고에 드러누워 있는 지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감추어진 불씨와 같은 지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오늘밤에 당장 돌아가서 실험을 해보십시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아무 것이라도 좋습니다. 공부한 마음 지킴의 교리 책도 좋고 아니면 오늘 들은 설교 말씀 중 전체 뼈대 말고 그중 하나 즉 ‘발산적 영광에 대한 경험이 우리에게 효과적 영광에 대한 갈망을 불어 일으킨다’와 같은 단순한 진술 하나라도 좋습니다. 그것을 깊이 반복해서 계속 생각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되는 것과 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생각이 되기까지는 계속 생각하는 일들이 있을 때에 비로소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계속 생각하다보면 어느 순간에서는 생각이 되고 그렇게 반복적으로 생각하고 생각되는 과정을 통해서 그때 우리는 신령한 방법으로 생각되는 성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spiritually mindedness’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신령한 방향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계속 생각하게 될 때 그 속에서 그 진리에 대한 보다 깊은 깨달음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배웠다고 해서 휙 집어던지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예화: 지난 열린 신문에 실린 한 형제의 간증-죄와 은혜의 지배 설교를 듣고 ‘설마 내 가’하는 결론을 내렸는데 지체들과 스터디를 하면서 놀랍게 변화되었고 죄와 더 불어 싸울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게 되었다는 내용)
그런 역사가 일어나는 이유는 마음에 담기니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형제가 그런 일들을 한번 경험하고 지나갔다고 해서 그것이 영원히 그대의 말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착각입니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새처럼 날아가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성의 창고에 가서 드러누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계속 반복해서 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의 훌륭한 증거가 시편 119편입니다. 시편 119편은 176절입니다. 왜냐하면 22×8입니다. 히브리어의 자음 글자가 22개이고 그것에 8을 곱한 것입니다. 1절부터 8절까지는 가라는 단어로 시작하게끔 의도적으로 시를 쓰고 9절부터 16절까지는 나라는 단어로 시작하도록 쓴 것입니다. 그렇게 22×8이 된 것입니다. 왜 그렇게 힘들게 시를 썼을까요? 아이들에게 구구단처럼 이 말씀을 외우게 하려고 그랬던 것입니다. 자음 글자를 더듬으면 외우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 암기가 바로 ‘마음에 두었나이다’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요즘 만나는 사람들에게 항상 하는 말이 말씀을 듣고 공부한 것들을 외워두라고 합니다. 물론 다 외울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매우 치명적으로 중요한 것들을 계속 외워두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마음 지킴의 교리에서는 ‘통회하는 마음이 깨트려진 마음이라면 도대체 무엇에 대해서 깨트려진다는 것인가?’ 죄의 사랑, 자기 의에 대한 깨트려짐입니다.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외워두는 것입니다. 그것의 효과는 드러누워 있을 때나 차를 타고 갈 때나 밥을 먹을 때나 아무런 들쳐보는 자료 없이 그것을 묵상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이 어려서 기억력이 좋을 때 이 토라를 거의 암기시키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예화: 어느 교수님이 통곡의 벽에 갔는데 한 학생이 토라를 외우면서 기도하는 것을 보았다)
마음 지킴의 교리나 죄와 은혜의 지배 교리를 다 배웠는데 아무 것도 외운 것이 없으면 깊이 생각하기 위해서 책을 다시 들춰봐야 하는데 어느 부분을 생각해야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와서 한번 자신에게 은혜를 주고는 지성의 창고 속에 계속 저장되기만 할 뿐 옛것을 사용해서 다시 쓰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비유하자면 장인이 물건을 만들기 위해서 많은 연장을 수시로 만들어서 창고에 비치해 놓았는데 사용할 때마다 새 연장을 만들어서 사용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예전에 만들어놓은 연장을 사용할 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 때, 다시 말해서 묵상 할 때 자신에게 강력하게 움직이는 힘을 주는 것은 모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어느 말씀을 사용하셔서 나를 움직이실 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적으로 자신이 모르고 있는 말씀보다는 지식적으로 자신이 알고 잘 정리된 말씀을 묵상할 때에 오히려 더 깊이 있는 묵상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이 더 많이 움직이는 것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성 속에 드러누우려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면 그 깊이 생각하는 활동을 통해서 그것이 지성의 깔때기를 타고 자신의 마음속으로 부어져 내려서 주의 말씀을 자신의 마음 깊은 속에 감추게 되는 효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놀라운 변화를 계속 가져옵니다.
지속적으로 동일한 시험에 계속 넘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에는 많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결정적으로 그 죄를 극복하고 이기게 하는 경험을 가져다주었던 하나의 말씀을 붙들고 계속 기도할 때 마음에 깊이 들어간 그 하나님의 말씀이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는 것을 많이 경험합니다.
실제로 제가 지도하던 지체 가운데 동일한 죄에 계속 빠지는 지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권면했습니다. ‘성령이 하시는 역사는 죄가 무엇이고 그 죄의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보여주시는 것인데, 너는 이제부터 기도할 때 그런 유혹을 받을 때마다 그 순간에 손을 모으고 간절히 “하나님, 지금도 제가 유혹을 받습니다. 간절히 빕니다. 그 죄와 죄의 비참함이 어떠한지를 제게 알게 해주셨사오니 지금 내가 그것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해라’하는 간략한 충고를 받고 몇 년 동안 벗어날 수 없었던 그 어두운 수렁에서 벗어났습니다. 무엇 때문인 줄 아십니까? 사실 그런 충고를 받고 돌아가면서 그렇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을 안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유혹 받을 때 그 기도를 해보니까, 그 기도 자체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에 마음으로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유혹 받던 마음을 한순간에 거둬가 버리시고 그 말씀이 자신의 마음 깊은 곳으로 뚫고 들어와서 타오르는 것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죄의 영향력이 강하니까 그 불이 다시 사이어 집니다. 그 때 다시 기도하는 것입니다. 전철 안에서든지 직장에서든지 길거리를 걸어갈 때든지 생각 속에서 그런 유혹이 일어나면 다시 가로수를 붙들고라도 기도하는 것입니다. 몇 년 동안을 그렇게 사경회 때 은혜 받고 책 읽으면서 은혜 받고 어떤 때는 너무나 회개해서 목이 퉁퉁 부은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죽어도 떨어질 수 없었던 이 죄가 떨어지는 것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 다니고 있습니다. 지금 이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그 형제가 열린 교회에서 설교된 많은 중요한 시리즈들 전체를 이해하는 면에 있어서 교회에 있는 평균적으로 은혜 생활하는 사람들보다 더 탁월하게 이해한다고 보증할 수는 없습니다. 말씀을 사모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체계적인 말씀을 많이 배워도 이길 수 없었던 그 사람이 그 하나의 말씀을 계속 자기의 마음속에 불씨로 지피니까 그 말씀의 소나기 속에서도, 말씀에 의해서 자신이 불바다가 되는 것 같은 경험을 해도 죽지 않던 그 죄가, 마음속에 아주 단순하고 치명적으로 중요한 상황에 맞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 속에 집어넣고 그것을 붙들고 살려고 하니까 하나님이 죽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이렇게 간단하게 죽는 것을 처음 알았다’고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최신 미사일과 요격 탄을 수없이 퍼부었는데도 살아나는데 소총을 가지고 한군데를 계속 겨냥해서 쏘니까 결국은 죽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고 지나가고 또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 속에 부어져야지 만 자신은 겨우 살 수 있다고만 생각하고, 그렇게 힘들게 지성을 동원해서 깨달았던 하나님의 말씀들은 지성의 창고에 차갑게 누워버리는 것입니다.
계속 그 말씀을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 이러한 교리들을 잊혀지지 않도록, 더 깊은 뜻을 알도록 반복해서 생각하면서 적용할 때에 성령의 삼중적 역사가 나타납니다. 말씀을 깊이 생각할 때에 나타나는 성령의 삼중적 역사는 첫째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정서를 느끼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순종할 마음을 주십니다.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지시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저 사람을 통해서 이야기했는데 굉장히 마음이 상하고 강력한 반발심을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당사자가 직접 만나서 왜 그렇게 하게 되었는지를 충분히 이야기하니까 그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런 것들은 지식이 전달되었어도 마음이 전달되지 않으니까 반발심을 느꼈는데 마음이 전달되니까 그 요구를 수용할 마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한다고 하는 것은 깨달은 내용이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는데 깨달은 말씀을 잊혀지지 않도록 반복해서 계속 의식적으로 깊이 생각하게 되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데 그것은 그 말씀에 담겨진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순종하지 않던 사람에게 순종할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실 때에 마음이 없이는 말씀해주시는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빈말은 없습니다. 그 속에는 모두 분노하거나 눈물 흘리거나 열렬하거나 뜨겁거나 아니면 가슴 아프거나 가슴 저린 하나님의 마음이 모두 담겨져 있습니다. 지성적인 깨달음과 함께 그 마음의 경향을 전달받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아무리 그렇게 말씀하셔도 그 뜻대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누구의 얘기를 듣고 ‘참 좋다. 그렇겠다. 괜찮겠네.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하기 싫어’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할 때 일어나는 성령의 첫 번째 역사는 반복되는 묵상 속에서 하나님이 그 말씀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전달해주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할 때 -반복적으로 깊이 생각할 때에- 어떤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가 하면 보편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매우 개인적인 자신의 삶의 상황과 연결되게끔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런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어떤 때는 설교를 듣거나 공부를 하다가 ‘바로 하나님이 지금 내게 말씀하시는구나. 바로 나의 이 상황을 향해 말씀하시는구나’하고 직방 은혜를 받아서 자신의 삶의 실생활에 꽂힌 경우도 있지만 어떤 때는 ‘저게 아마 최집사 들으라고 하는 이야기지’ ‘우리 아버지가 바로 그 설교에서 묘사하고 있는 그 게으른 사람이야’ ‘저것은 우리 동생이 들으면 딱 인데’라고 생각하며 들었는데, 두 번째 다시 테이프를 듣고 세 번째 책을 읽고 공부를 하면서 사실은 그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이었는지 깨닫고 사실은 그것이 자기의 이러이러한 특별한 상황을 두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하신 말씀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보편적인 말씀을 자신의 개별적이고 특별한 상황과 relation 갖게끔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은 계속 반복해서 깊이 깊이 생각하게 될 때 풍성하게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삶과 관련짓게 됨으로서 순종할 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첫 번째 성령의 역사는 말씀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해주심으로서 완고하던 사람에게 순종할 마음을 주시고, 두 번째 성령의 역사는 그 말씀을 개별적인 자신의 삶의 상황과 연결시켜 주심으로서 순종할 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그 과정을 통해서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해주심으로서 순종할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계속해서 반복해서 더 깊이 깨닫도록, 잊혀지지 않도록 계속 반복해서 그 말씀을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두려고 하는 생각하는 노력을 통해서 그 과정에서 성령이 역사 하는 세 번째 역사가 놀랍게 순종할 마음과 순종할 지혜뿐 아니라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아울러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고아처럼 이 성화의 벌판에 홀로 버려 두시고 ‘재주 있으면 성화 되어봐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무한한 자유를 주시고 능력을 아울러 함께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성화의 삶을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을 뿐만 아니라, 새로 보는 성경뿐만 아니라, 이미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분 부분을 묵상하면서 살아간다면 그 말씀이 여러분들 마음속에 들어가 있게 되고 그렇게 되면 거기에서 여러분들이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변화되는 성화의 놀라운 진전들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면서 여러분들이 터득하고 깨닫게 된 진리의 말씀들이 한번만 여러분들을 움직이고 지성의 창고에 드러눕지 않고 지속적으로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역사해서 여러분들의 삶을 바꿔놓을 수 있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라고 사경회에 이런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2. 지켜 순종하게 하는 힘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그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수1:8)”
몇 주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삶과 그 능력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번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을 깊이 만나는 적이 있습니다. 한번이 아니더라도 하나님께서 특별한 시리즈들을 통해서 혹은 특별한 예배 시간에 한번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큰 은혜를 주시고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기도 합니다. 때로는 신년부터 시작해서 여러 번 있는 사경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깨우시고 변화시키시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왜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은 이렇게 힘들까요? 그리고 왜 한번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은혜를 받기는 그렇게 힘들고 더 많은 마음과 영혼의 준비가 필요한데, 그렇게 힘들게 내게 찾아온 하나님의 말씀은 어쩜 그렇게 쉽게 그 은혜가 내게서 멀어질까요? 도대체 이런 모든 것들을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을까요? 아마 조금만 성화의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본 사람들은 이런 질문에 대해서 정말 간절히 알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혼에 있는 또 다른 죄의 흔적들은 우리의 영혼으로 하여금 쓸데없는 질문에는 집착하게 만들고 정작 우리의 영혼이 살고 죽는 일에 매우 요긴한 질문들에 대해서는 금방 답이 주어지지 않으면 포기해버리는 싫증들을 느낍니다. 그래서 대부분 ‘신앙이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내가 은혜 가운데 계속 살 수 있을까?’ ‘내가 왜 그런 죄에 빠졌을까?’ ‘내가 왜 주님이 주신 은혜를 잃어버릴까?’ ‘왜 어린아이처럼 부드러웠던 마음이 이렇게 굳어질까?’ 하는 많은 의문은 우리에게 떠오르지만 대부분 거기에 대한 답을 찾기도 전에 영혼이 그 질문에 싫증을 느껴서 그 질문들이 다시 사라져 버리고 뒤로 물러가 버립니다. 또 다행이 한 두 가지 문제에 대해서 질문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그 얻은 답이 이미 알고 있는 다른 신앙의 원리, 영혼의 원리, 우리 안에서 역사 하는 죄의 작용의 특성과 방법, 원리들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연결이 될 것인가 하는 전체적인 얼개를 이해하면서 이후에 비슷한 시험에 들었을 때 그것을 극복할 수 있을 정도까지 지적으로 무장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즘 오전 설교가 쉽습니다. 그런데 쉬운 설교만 들으려고 하지 말고 어려운 설교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책을 읽을 때 한번 읽어서 모두 이해되는 책은 여러분들에게 발전을 덜 가져다주는 책입니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 조금은 이해 안가는 부분이 있어야만 여러분 자신이 고민을 하게 되고 다시 보게 되면서 접근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있고 거룩한 삶에 대한 성찰이 있어서 뭐가 잘못되었을 때에 ‘왜 그럴까?’하고 집요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은 단답형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전체를 알고 싶어집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죄를 지어도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 용서해 주시나요?’할 때 ‘응’이라고 대답한 것으로 ‘정말 고마워요’하며 돌아갈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왜 내게는 용서의 확신이 안 오나요?’ ‘무엇이 하나님 앞에 용서받기 위해서 나아가는 내 영혼의 최초의 움직임들을 방해할까요?’ ‘하나님이 용서해주신 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두려워하는 마음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하는 많은 질문들이 떠오릅니다. 그런 많은 질문들이 떠오르는 사람들에게는 질문할 때마다 ‘응’ ‘아니’ ‘그렇지’ ‘해봐’하는 식의 단답형의 대답은 도움이 안됩니다.
(예화: 교수 시절 다섯줄에 걸쳐서 시험문제를 냈는데 답을 한 줄로 쓰고 간 학생이 있었는데 다른 답도 모두 틀린 것으로 처리하고 그 이름을 졸업할 때까지 기억 했다)
우리에게 정말 의문이 있다면 우리는 쉽게 만족을 안 합니다. 청교도들의 설교는 그렇게 단답형의 답을 주는 설교가 아니라 설교 몇 편을 모으면 한편의 논문이 되는 설교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들을 때는 굉장히 힘겹고 어렵지만 일단 전체를 공부해서 이해하고 나면 그 안에서 무수한 빛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청교도적인 설교였습니다.
묵상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그런 약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전에 내 영혼을 뒤흔들어놓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서 그것이 내 일생에 두고두고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적도 역시 마찬가지로 똑같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우리를 넘어트렸던 것도 죄이고 그 죄가 약화되어 있다가 기회가 되면 다시 일어나서 역사 하는 것입니다. 똑같이 그 죄를 이기고 누를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옛날에 내 인생을 뒤바꿔놓을 정도로 강력하게 내 영혼에 영향을 주고 스쳐갔다고 해서 그 영향이 계속 남아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한번 하나님의 말씀이 강력하게 스쳐가도 계속 그 말씀의 지배와 영향 아래서 살아가는 현재적인 그 은혜의 경험이 그 죄를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깊이 받기를 사모하지만 막상 은혜를 주시면 그 은혜들 안에서만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쉽게 싫증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택하게 되고 게으름과 야합하게 되는 부정적인 특성들이 우리의 마음과 인격 속에 항상 깔려있습니다.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그런 정도가 좀 경미하고 은혜밖에 있을 때는 그런 정도가 훨씬 더 강력해지게 되지만 누구나 이런 특성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에 대한 예방책 중에서 아주 중요한 것을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사전적인 이해가 없는 분은 ‘말씀을 깊이 생각함’이라는 제목으로 시편 119편 11절을 설교한 테이프를 들으시고 이 시리즈를 계속 청취하시면 큰 도움이 되리라고 봅니다.
본문의 배경은 모세가 죽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인도를 따라서 요단강을 건너가서 가나안을 정벌할 참이었습니다. 40년 전에 들어갔어야 할 이 땅을 하나님 앞에 불순종과 죄로 인해서 광야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고, 광야에서 태어나지 아니한 이전에 태어난 세대들은 몇 사람을 남겨놓고 모두 죽고 광야에서 태어난 새로운 세대들만이 이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되었지만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시는 방법은 전쟁을 통해서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너희들은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어. 나 혼자 가서 정리하고 올께’하시고 하나님께서 가나안 사람들을 훅 불어서 모두 죽이신 다음에 돌아오셔서 ‘다 죽였으니 가서 시체만 치우고 살아’ 하셨으면 좋은데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들이 가나안 땅을 하나님께로부터 이미 받았지만 그러나 가나안을 정복하는 과정을 통해서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가, 다시 말하면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그 때 또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가 하는 것을 확실하게 경험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가나안을 건너가게 되는 것입니다. 건너 갈 때부터 이런 믿음의 중요성은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홍해를 건널 때는 기적이 일어나서 바닷물을 가른 다음에 비로소 건너갔지만 이 요단강을 건너갈 때에는 믿음으로 발을 들여놓으니까 물이 마르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다시 말하면 전자는 기적이 믿음을 불러왔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믿음을 통해서 기적을 가져오는 믿음의 중요성들이 대두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떻든 전쟁이었고 이후의 역사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도 많이 죽습니다. 그런 전쟁의 역사가 펼쳐지게 될 때니까 이스라엘 백성으로 볼 때는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사건이었겠습니까? 만감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믿음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정말 하나님이 주신 이 땅을 우리가 차지할 수 있을까? 정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보다 훨씬 강한 가나안 원주민을 우리가 퇴치할 수 있을까?’ 그들은 믿음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정말 전투 대열도 정비하고 무기도 정비하고 한판 전쟁을 치를 각오를 하면서 가나안을 건널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이 매우 한가한 명령을 여호수아에게 내리십니다. 그것이 오늘 성경에서 읽은 말씀입니다.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당시에 ‘율법 책’은 책이라기 보다는 두루말이였는데 두루말이를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는 것은 고리를 만들어서 입에 묶고 다니라는 것이 아니라 외우라는 것이었습니다. 외우면 입에서 떠날 수 가 없습니다. 입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입에서 계속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외워야 합니다.
성경이 우리처럼 책으로 묶여져서 나온 것은 얼마 안됩니다. 더군다나 종이가 발명되기 전까지 이렇게 얇은 데 쓰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죽했으면 1611년에 킹제임스버젼 초판이 나왔을 때 현대의 인플레로 계산하면 4억 6천 만원이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조그만 성경은 저녁 한 그릇 값보다 더 쌉니다. 지금은 편해져서 한꺼번에 가지고 다닐 수 있지만 옛날에는 두루말이로 되어 커다란 방에 한 가득 이었으니 실제로 예수님과 사도들 시대에만 해도 성경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구약을 설교할 때도 모두 외워서 설교한 것입니다. 외워서 입에 돌게 한 것입니다.
지금 큰 전쟁을 앞두고 있는데 율법 책을 외우라는 것입니다. 물론 전쟁을 앞두고 본격적으로 외우라는 뜻은 아니겠지만 ‘특별히 그 말씀을 더 네 입에서 떠나게 하지 말아라’고 하는 것입니다. 상황에 비해 얼마나 한가로운 명령입니까?
그래서 가끔 심방을 하거나 면담을 하다보면 어려운 일을 크게 당했기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없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도 마음에 잘 담기지 않는다고 얘기하는데 그런 식으로 아무리 버르적거리며 애를 쓴다해도 상황이 해결되겠습니까? 마음의 걱정과 근심, 시련, 이런 것들을 덜어내고 나면 마음이 ‘이제는 걱정도 물러가고 고민도 물러가고 환난도 사라졌으니 말씀 너 들어와. 그래서 나를 꽉 채워’라고 합니까? 근심 걱정 거둬내고 나면 그 속에는 정욕과 갖은 죄악이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제든지 우리 마음이 집어넣었다 꺼냈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전쟁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면 죄악 된 생각이 침투해 들어오려고 할 때 피비린내 나게 싸우고, 정욕과 죄가 우리 마음을 지배하고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의 지식이 들어가려고 할 때 피나게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죽고 죽이는 피나는 혈투가 벌어지는 것이 우리 마음의 언저리입니다. 그런 피비린내 나는 혈투 극이 벌어지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면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사령부를 차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다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 생각에는 뱃머리를 박살 내든지 옆구리를 쏴서 구멍을 뚫어서 물이 들어가게 할 것 같지만 적군이 공격하는 곳은 작전실이 있는 함교를 날려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통솔 기능이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우왕좌왕할 때 돌격해서 대포로 공격하고 미사일로 공격해서 적군을 제압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쟁 나면 제일먼저 땅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작전사령부입니다. 모두 다 죽고 부대가 부서져도 사령부는 살아 남아야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통제가 가능합니다. 그렇게 죄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점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요지는 이것입니다. 우리들이 거룩한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은 한번에 불끈 솟아오르는 객기로 거룩한 삶이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승리한 사람이 내일도 승리한다는 보장이 없고 요즘 은혜 생활하는 사람이 내년에도 잘 살 것이라는 보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이 모두 끝날 때까지는 결코 쉬지 않는 싸움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이기기 위한 아주 효과적인, 이제껏 까지 잘 설교되지 않던 그 한가지를 이 시리즈에서 말씀드리려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묵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묵상이라는 말 자체는 지금 말씀드리려고 하는 모든 것들을 포함하는 말은 아닙니다. 저는 묵상보다 오히려 좋은 말은 ‘말씀을 마음에 두는 것’ 더 노골적으로 하면 ‘말씀을 마음속에 깊이 묻어두고 간직하는 방법’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 묵상의 첫 번째 요소가 오늘 나오는데 그것은 “그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인데 외우는 것입니다. 외우는데 그것이 외워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이해되어져야 합니다. 이해되어지면 외워지기가 쉽지만 이해하지 못한 것을 외우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예화: 직장 생활할 때 바둑을 잘 두는 후배가 있었는데 그는 바둑을 한판 하는 꿈을 꾸고 나서 그대로 바둑알을 놓을 수 있었다)
바둑을 두는 이치를 알기 때문에 바둑판이 쏟아져도 복기가 가능한 것입니다. 이해를 하니까 잘 외워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입술에 늘 달려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들이 흘러나오는 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승리하는 삶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유혹을 당할 때 적당한 성경말씀을 알고 있다든지 시련을 만날 때 적절한 성경구절을 알고 있다든지 억울한 일로 비난을 받을 때에 위로가 되는 성경구절을 외우고 있다든지 아니면 큰 핍박을 받을 때 핍박받은 자들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을 암기하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무한한 힘을 줍니다.
그래서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암기하고 있는 것, 그래서 이것들이 언제든지 필요할 때에 꺼내서 쓸 수 있는 것과 같은, 그래서 제 스스로 만들어낸 비유에 의하면 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잘 외우고 있는 것은 잘 갈린 칼을 준비한 것과 같고, 외우지 못하고 있는 것은 자루가 달리지 않은 칼을 사용하는 것과 같이 부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완벽하게 성경구절을 외우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교리 하나를 알아도 완전히 제대로 알고 있는 것, 그래서 그것들을 꺼내어서 쓸 수 있게끔 이해하고 있는 것이 거룩한 삶을 승리로 이끌어 가는 데 있어서 매우 요긴한 조건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 시리즈를 설교하면서 ‘이런 부분들은 외워야합니다’ 하고 구역장들이 구역원에게, 혹은 구역장에게 교구 사역자들이 가르쳐주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서 외우고 있으면 그것이 계속 입에서 돌고 흘러나올 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살아가는데 있어서 커다란 도움을 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것들이 외워지기 위해서는 먼저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모든 강력한 힘은 이해하는 데서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이해하려고 해야합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것을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이 은혜를 받을 때 그것이 신뢰할 만한 것이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는 없고 어느 한순간에 다가오는 감정적인 터치 같은 것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무엇을 느꼈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마치 은혜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런 감정적인 작용들이 살아있을 때에는 제법 잘 사는 것 같은데 그것이 사라지고 나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탄탄한 연료가 쌓여있어서 그 위에 불이 붙을 때에는 불길이 잠시 스러지는 것 같아도 그 연료가 이미 있기 때문에 다시 불을 붙이면 불이 붙지만 가스 불이 탈 때 가스를 꺼버리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 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 암기하기 위해서는 잘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하나 하나님의 말씀의 이치를 잘 이해하고 나서 교리나 전체적인 뼈대들을 외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60%이상의 교인이 매주 하나 이상씩 테이프를 듣고 65%이상 70%가까운 교인이 매일 매일 성경을 읽고 있다고 통계가 나와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여러분들에게 질문하고 싶은 것은 똑같은 노력을 들인다고 할지라도 그 노력을 들이는 방식이 체계적이면 체계적일수록 아주 효율적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창세기부터 읽어갈 때 창세기 전체의 뼈대가 무엇인지 어느 정도 머리에 그림으로 넣고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읽을수록 그 지식이 기억력의 책꽂이 속에 잘 쌓이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한 시리즈의 설교가 끝나고 나면 기왕에 테이프를 듣는 것인데 들을 때 그 뼈대가 어떻게 되는지를 깊이 이해하고 그 골격을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들어나가는 훈련을 하게 되면, 그리고 그 골격들을 외우게 되면 아까 말씀드린 대로 계속 입에서 그것들이 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뼈대들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있으면서 수시로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꺼내어서 외울 수 있을 때 그때 그것이 말씀의 묵상을 통해서 우리들이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는 아주 중요한 첫 번째 규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것이 금방 됩니까?’라고 질문할 것입니다. 금방 안됩니다. 그러니까 마치 주간지 읽듯이 성경을 읽는다든지 아니면 설교를 들을 때 연속극 듣는 것처럼 한번 죽 듣고 ‘그것 내가 다 들은 것이다’해서는 그 말씀이 우리의 생각을 스쳐갈 수는 있지만 들었다는 추억만 남을 뿐 실제적으로 우리의 삶을 지속적으로 움직이는 일들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책을 많이 읽어보신 분들은 제 말씀을 이해하실 수 있을 텐데 여러분이 읽은 책 가운데 한 권을 읽고 나서 모두 덮고 상대방에게 ‘이 책은 크게 4부로 나눠져 있는데 1부에는 대개 이런 내용들을 이야기하고 있고 이것을 전개해가기 위해서 저자는 이런 현실들을 저렇게 비판하면서 그런 결론을 내리고 있다. 2부에서는 방향이 바뀌면서 새로운 문제들을 다루고 있는데...’하면서 책 한 권을 다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묻고 싶습니다. 제 경험에 의하면 한번 책을 읽어서는 그렇게 분석하고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 정도의 실력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런 정도의 사람들이 가끔 있는데 그 사람들은 아주 비상한 사람들입니다. 보통 평범한 사람들은 한번 읽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책을 주관적으로 한번 읽고-동의하고 은혜 받기 위해서 한번 읽고- 두 번째는 객관적으로 읽으면서 이 책의 내용이 어떤 것들을 담고 있는지를 생각하고 메모하고 정리해본 사람들만이 그것을 머리 속에 암기해서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한다고 하는 것은 영화의 한 장면을 기억하는 식으로 ‘그것 옛날에 들었는데’ 하는 것 말고 하나하나 교리적으로 정리하면서 체계적으로 지식적으로 그것들을 이해해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논리적인 설교가 진행되면 어렵다고 하는 이유는 그 설교를 공부하고 공부한 것들을 통해서 체계화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1회용으로 잠시 스쳐가고 그 속에서 내가 필요한 것들만을 얻어 가면 된다고 생각하면 설교가 논리적일 필요가 없고 그냥 지나가는 바람 같아도 됩니다. 책 한 권을 모두 읽고 나면 첫 번째에는 골격 전체가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대개 한 문장이나 두 문장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내 마음에 강한 인상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강한 인상을 준다고 하는 것도 저자가 강한 인상을 주고 싶어하는 그 메시지가 읽는 사람에게 강하게 갔느냐고 하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입니다.
산을 오르는데 화가 한사람이 올라갔고 지질학자 한 사람이 올라갔고 식물학자 한사람이 올라갔다면 똑같은 산을 봤는데도 세 사람이 파보는 곳이 다 다릅니다. 화가는 멀리서 구도를 잡습니다. 지질학자는 절벽 끝으로만 가서 계속 지층만 쳐다봅니다. 식물학자는 땅에 관심이 없고 거기에 난 풀, 꽃, 나무, 나이테, 줄기, 잎 모양, 이런 것들을 관측하게 됩니다.
책을 제시했을 때도 그 메시지는 A였는데 읽는 사람이 B라는 상황에 근접하게 가있을 때 저자는 의도하지 않았던 매우 엉뚱한 데에서 사람들이 자극을 받고 가슴에 충격을 받을 수 있는데 원저자의 의도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상관이냐는 것이 요즘 새롭게 나온 ‘독자 비평학’이라는 비평학의 새로운 분야입니다. 저자가 무엇을 의도하고 썼든지 그것은 저자의 마음이고 독자는 독자들끼리 읽는다는 것입니다. ‘독자는 독자 나름대로 그것을 인식하고 비평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것을 잘못 읽었다고 이야기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다 주관적이다’라고 생각하는 학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대할 때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것을 정확하게 이해해서 거기에서 메시지를 찾는 것이 중요하지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라고 독자 비평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성경을 대할 때는 항상 ‘원래의 성경이 기록될 때 원저자와 첫 번째 수신자 사이에 의미했던 내용이 무엇일까’를 기초로 해서 파고 들어가서 ‘하나님이 그 말씀을 주셨을 때 하나님의 심중에 있는 의도가 어떤 것으로 확정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이 성경이 쓰여지던 시대와는 다른 오늘날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자세를 여러분들이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주일날 한번 나오는 것도 얼마나 힘든데, 와서 예배드리고 설교 들어주고, 구역 예배 참석하고 하는 것만 해도 정말 대단한 것인데 또 무슨 공부를 하라고 하고 그렇게 힘들게 합니까?’한다면 저는 리차드 백스터 목사의 이야기를 되풀이하고 싶습니다. ‘천국은 당신이 가기에는 너무 높습니다’ 그래서 지적인 자랑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것으로 계속 숙고하면서 살기 위해서 계속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말씀드립니다. 1년에 한번씩 운전 면허 시험 보는 것만큼만 공부해도 여러분은 거룩한 삶에 있어서 탁월한 진보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화의 삶을 사는 신자의 자격증을 매년 갱신할 수는 없지만 1년에 한번쯤이라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데 여러분들이 온힘을 기울이면서 그렇게 이해될 때 그 말씀이 외우기가 쉬워지고 말씀과 교리들을 외워서 그것이 여러분들의 입에서 떠나지 않게 될 때 두 번째 단계가 나오는데 주야로 묵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말로 ‘하가’라는 단어인데 시편 1편에 나오는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에서 쓰여진 단어입니다. 원래 이 ‘하가’라는 말은 ‘혼자 생각하다’ 혹은 ‘스스로에게 말을 걸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묵상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말을 걸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입술을 떠나지 않게 하는 것은 머리 속에 있는 것이지만 우리로 하여금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게 하는 힘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가슴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머리로는 그렇게 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속에서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머리는 알아도 뱃속으로 불순종하면서 불순종을 실천합니다. 그러니까 지식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데, 머리에 있는 지식이 흘러 내려와서 뱃속에서 살아서 역사 할 때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머릿속에 있는 지식을 가슴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통로가 묵상입니다. 묵상이라는 깔때기를 통해서 지식이 가슴으로 내려와서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에너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깔때기는 준비되었는데, 가슴에서는 받을 준비가 되었는데, 지식이 없다면 무엇을 묵상하겠습니까?
(예화: 어느 교회에서 평신도들의 설교대회를 했다고 한다-시편 23편을 설교하면서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무로 만들었으니 펄프로 만든 신구약 성경말씀이라고 말했다)
깔때기는 충분히 준비되어있으나 지식이 없어서, 불이 붙었어도 지식이 내려온 것이 아니라 상상 임신과 같은 것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묵상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대부분 공상이나 망상이 되기 쉽습니다. 탄탄하게 성경을 알고 있는 사람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이 주로 했던 것은 교리 묵상이었습니다.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볼 때는 위험할 정도로 무모하고 이상하게 나온 결론을 이상하게 살아가는 자기의 이상한 생각과 연결시켜서 자기에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해괴망측한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런 식의 묵상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이 안전하게 교리를 묵상했습니다. 교리는 성경을 통해서 진리임이 입증된, 성경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게 하는 지적인 체계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교리들을 묵상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혼자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또 하나의 자기에게 타이르면서 말을 거는 것이 묵상입니다. ‘자신에게 말 걸기’가 묵상입니다. 스스로에게 깨우쳐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을 이루었거든.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하게 하기 위해서 돌아가신 것이란 말이야.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그렇게 화목하게 해놓고 싶으셨던 이유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불화 했기 때문이 아니겠어? 그 불화라고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적대감과 거리감이었지. 그래서 그 적대감을 파해버리고 거리감을 좁혀버려서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사이에 뜨거운 사랑의 친교가 흐르도록 만들어준 것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화목이었지’ 그러면 ‘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이유 중 하나가 하나님과 불화한 우리를 화목 시키기 위함이었구나.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있는 적대감과 거리감을 없애기 위해서 예수님이 대신 형벌을 당하셨구나. 그런데 지금 나는 또 죄를 짓고 불순종함으로서 하나님과 원수 되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경건한 의무를 이행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무한한 거리감이 느껴지는데 이 삶은 바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정말 욕보이는 삶이구나’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야기한 것을 묵상한다면 거의 한달 분량이 될 정도로 많은 내용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거리감’ 한가지만 해도 묵상하기 충분하지 않을 정도로 ‘그 거리감이 왜 생기는가’ ‘어떻게 그 거리감이 해소되는가’ ‘예수님이 해소시킨 거리감과 그렇게 하나님과 화목 된 우리 사이에 지금 느끼고 있는 거리감은 무엇인가’하면서 집요하게 캐 들어가는 가운데 탄탄한 체계들이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웬만한 공격을 받아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성을 쌓아가게 되고 지성적으로 그렇게 탄탄한 성을 쌓아가면서 그 속에서 성령의 역사가 계속 일어나서 그렇게 탄탄하게 쌓아올린 지식의 체계들 속에 계속 성령의 불이 붙을 때 그 때 비로소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견고한 성도들이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천막집이나 세우고 살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설교를 듣고 공부를 하고 그것을 묵상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성경을 묵상하는 방법이 많이 보급되어있지만 문제는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제대로 하려면 어떤 때는 한 시간이 넘게 걸리고 두 시간 걸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젊은 층 사이에서 기도 시간을 그것으로 대신해버리는 문제가 나옵니다. 기도는 기도고 묵상은 묵상입니다. 그러니까 기도가 아주 건조하게 되고 짧아지고 그렇게 되다보니까 자신의 삶의 필요에 의해서 요구되는 기도의 양들을 채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그런 묵상 생활이 풍성한 성령의 은혜로 다가오지 않고 의무처럼 다가오는 경우도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3-4분 동안 교리를 체계적으로 묵상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도록 교리 묵상집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장시간 시간을 내지 못하더라도 차에서 시동 걸어놓고 이해될 때까지 읽고 운전대 붙들고 엎드려서 2-3분 기도하면 훌륭한 묵상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주부들도 밥 뜸들이는 동안에 펼쳐놓고 식탁에 앉아서 3분 정도 읽고 간절히 기도하면 짧은 내용이니까 가슴에 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낮에 또 한번 읽어보고 밤에 잘 때 펴놓고 보는 것입니다. 잠이 안 와도 자려고 애쓸 필요 없이 취침 기도 먼저 하고 묵상집을 펼쳐서 읽으면 됩니다.
저는 청교도들의 책이나 혹은 제가 쓴 책으로 저녁마다 한동안 계속해왔습니다. 너무 좋습니다. 텔레비전 보다가 끄고 잠이 들면 아침에 일어나서 그 생각부터 납니다. 그러나 말씀을 묵상하다가 은혜로운 장면이 새겨진 채 자면 우리는 잠들어도 무의식 세계 속에서 움직이고 역사 합니다.
(예화: 1초에 10개 이상 필름이 돌아가면 비로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속에 물 먹는 장면을 한 장면 넣으면 눈에는 안보이지만 물을 찾게 된다고 한다-잠재 의식을 자극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잠들 때 하나님의 말씀을 펴놓고 은혜를 받으면서 잠이 들면 밤에 자는 동안에도 무의식 속에서 작용을 일으킨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화: 한 신자가 밤에 자다가 일어나 정장을 입고 무릎을 꿇고 앉아 성경을 보고 있 었다는 이야기)
파자마바람으로 읽어도 괜찮습니다. 중심이 문제입니다. 성경을 대하고 은혜를 받고 덮어놓고 다시 한번 간절히 기도하고 ‘그렇습니다. 창조의 원래의 목적대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앞에 아름다움이었고 선이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하며 하루하루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설교를 듣고 ‘뭔가 가슴에 다가왔어’해도 ‘뭔데?’하고 물으면 ‘뭔지 모르지만’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그 사람을 움직입니다.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어성경에는 거꾸로 나옵니다.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기 위하여 그것을 묵상하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예리하셨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가운데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기 위해서, 그것은 어느 한순간 불끈 솟아오르는 충성심 같은 것으로는 안되고 일관된 삶을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살기 위해서는 그것을 지켜 행하려면 반드시 에너지가 있어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지식이 있고 지식이 묵상의 깔때기를 통해서 마음속으로 내려와서 역사하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제시하고 싶습니다. 오늘 저녁부터 당장 해보십시오. 하루 저녁에 3-40분씩 소비해야 되는 것이라면 이행하기 매우 힘들겠지만 어디서든지 누워서 잘 때 머리맡에 ‘마음 지킴의 교리’ 책을 갖다두고 잠들기 직전에 펼치십시오. 그리고 읽으십시오. 마음속에 명확한 메시지가 새겨질 만큼만 한 단락이나 두 단락정도를 읽고 -필요하면 한 줄만 읽어도 됩니다-눈을 감고 생각하고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상한 마음과 깨어진 마음은 이렇게 다르네요. 제가 상한 마음만 되지 말게 해주시고 제가 정말 깨트려진 마음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하면서 생각하고 묵상하면서 잠이 들어보십시오. 그러면 아침에 일어나서 마음을 지키는데 훨씬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매일 그렇게 하는 사람과 안 하는 사람 사이에 별로 차이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지 모르지만 거룩한 삶에 있어서 두 사람은 엄청난 진보의 차이를 보일 것입니다. 열 달이 걸린다고 해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어차피 내용은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뭐가 들어있는지 조사하기 위해서 읽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담아 두기 위해서 읽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맨 뒤까지 가면 앞에 읽은 것이 마음에서 떠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면 다시 마음에서 살아납니다. 필요한 때에 언제든지 그것들을 꺼내어서 묵상하면 됩니다. 항상 잠자리 위에는 그 책이 한 권 있어서 펼쳐서 읽고 해야 합니다.
어제 잠자리에서 기도에 관한 책을 펼쳐서 불과 두 페이지 밖에 안 읽었습니다. 그런데 밤에 잘 때 그렇게 마음이 따뜻해질 수가 없었습니다. ‘진짜 이 메마른 시대에 최고의 대안은 하나님이 부흥을 주시는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구나’ 한가지 사실만을 깨닫고 가슴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계속 살아가는 것입니다.
폭포수처럼 말씀이 부어졌지만 다 흘려보낸 사람과 보슬비처럼 왔지만 그것을 품고 있는 사람 가운데 누가 더 거룩한 삶을 살겠는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격렬한 반응은 전자의 사람에게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뭐하겠습니까? 화초가 있는데 물이 확 쏟아지고 나서 다 빠져나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다른 화초에는 그렇게 쏟아지지 않았지만 보슬보슬 내렸는데 잘 담겨져서 뿌리를 잘 적십니다. 궁극적으로 보면 어떤 것이 더 식물이 성장하고 열매 맺는데 도움을 주게 될 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내가 아무래도 마음을 지키면서 좋은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은 격렬한 신앙의 체험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하면 더 격렬하게 체험할 수 있겠는가’고 생각합니다. 다 쓸데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는 절대로 격렬하게만 역사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얼마든지 사람의 기질을 따라서 이슬비와 같이 바람과 같이 폭풍과 같이 불과 같이 방망이와 같이 이슬과 같이 다양하게 다가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것이고 여러분에게 맞는 은혜를 각자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가슴에 품고 사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고 예배당을 떠나면 바로 한시간 뒤에 무엇을 설교했는지도 모르고 60%이상이 구약을 설교했는지 신약을 설교했는지도 모른다고 하니, 그들의 삶이 어떻게 그렇게 교회 다니면서도 안 변하냐고 하는데 반대로 그만큼 변해서 사는 것도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아두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이 없어서 할 수 없이 구역장으로 썼는데 놀랍게 변화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듣기만 할 때는 준비 없이 갔는데 60분 동안 떠들어야 하니 구역장 성경공부 가서 열심히 배우고 집에서도 성경을 들추게 되고 그러다 보니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그냥 듣고 왔을 때는 변화가 안됐는데 뭔가 제대로 가르쳐야겠다고 준비하다보니 그것이 마음에 담긴 것입니다. 그래서 변화된 것입니다.
(예화: ‘벤허’ 시나리오를 쓴 사람이 기독교가 가짜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성경을 읽 다가 ‘나의 하나님’을 고백하고 만든 작품이 바로 ‘벤허’이다-영화를 만든 후 ‘하 나님, 정녕 이 영화를 제가 만들었다는 말입니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셔서 그 영화를 보고 회심하고 돌아온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담겨질 때 그때 어떤 변화가 오는 것입니다. (예화: 집회를 인도하는데 탁월하게 집중하던 한 자매가 이틀 후에 회개를 하고 나중에 용서를 빌고 싶다고 했다. 말씀에 집중하려고 쳐다본 것이 아니라 설교가 평소 자 신이 생각했던 기독교 신앙과 너무 반대 방향으로 말하는 설교자가 너무 미워서 반감의 표시로 쳐다봤는데 와르르 무너지고 은혜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집중력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 속에 담기게 되고 그것이 묵상을 통해서 깔때기를 타고 아래로 내려오게 될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머리는 텅 비어도 가슴에만 불붙이면 된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나를 감동시켜봐. 그대로 살께’하며 머리는 닫고 배만 열고 말씀을 채워달라고 하는 것들은 안됩니다. 먼저 내용이 있는 탄탄한 진리의 말씀들이 들어가서 묵상을 통해서 가슴으로 내려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머리에만 가득 있고 가슴에서 전혀 에너지가 없고, 알기는 너무나 잘 아는데 전혀 거룩한 삶을 살지 않고 불순종하는 삶이 일어나는 것은 우리의 실패의 아주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지만 우리가 과소평가하고 있는 원인들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집에 가서 한 권을 갖다 놓고 조금씩 읽으면서 묵상하고 기도하십시오.
이번에 처음으로 묵상집을 만들었는데 1월 1일부터 묵상하고 하루를 시작하며 하나님 앞에 새로운 은혜를 구해보십시오. 그래서 계속 말씀이 여러분 마음속에 담겨서 속에서 불붙는 역사가 일어날 때, 놀라운 은혜의 경험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아주 탁월하지 않았는데도 여러분 보다 더 진실한 믿음 생활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말씀을 아는 지식도 별로 뛰어나지 않은데, 교리적으로도 그렇게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지 않은데, 어떻게 저렇게 시종일관된 삶을 살까?’하는데 그것은 여러분들은 많은 것을 알고 있는데 배에까지 내려온 것이 별로 없고 그 사람은 조금밖에 몰랐는데 그 조금이 배에 내려온 것입니다. 그러면 실질적으로 누가 더 거룩하고 진실 된 삶을 살겠습니까?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머릿속에 있는 것으로 승부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내려와서 뱃속에서 역사 하는 것이 말씀입니다.
계시록에 보면 요한 사도를 향해서 천사가 두루말이를 먹으라고 합니다. 먹으니 꿀처럼 단데 뱃속에 들어가니 심히 쓰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적으로 습득하는 것은 쉽고 재미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들이 속에 들어가서 말씀과 맞지 않는 자신을 죽이고 무너뜨리고 부숴뜨리고 자기 깨어짐을 경험하게 하고 하는 대변혁은 항상 견디기 힘든 통증과 아픔과 자기 깨어짐의 고통을 수반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통해서 그 사람이 진실한 신자가 되어갈 수 있고 말씀의 능력을 가지고 어두운 세상을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이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뱃속으로 내려와야 하는 것입니다.
‘배’라고 하는 이유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영혼의 자리가 배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심장이 아니라 창자에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말씀하실 때 너희 속이 뜨거워지지 않더냐”할 때 그 ‘속’이 바로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있는 그 자리가 뜨겁지 않더냐 하는 것은 뭔가가 와서 터치했다는 것입니다. 역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배에서 모든 삶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배에 악이 가득 차 있으면 악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하나님의 의에 대한 갈망이 차있으면 의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이라고 하실 때 주리는 것도 배에서 일어나는 작용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수하게 많이 깨닫고 엄청나게 은혜를 받아도 견고함이 없었던 사람들은 이번에 신앙생활에 있어서 대대적인 방향전환을 좀 하십시오. 그래서 말씀을 묵상하는 규칙적인 시간을 갖으십시오. 그래서 내년부터는 온 교회가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일에 모두 훈련시키고 힘을 기울이려고 합니다.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아주 단순하고 간단한 작업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미치는 영향력과 효과는 엄청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큰 일을 앞두고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게 되면 반드시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순종할 수 있고 그때 하나님은 더 많은 은혜를 주시고 펼쳐진 그 가나안 땅에서의 수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내년 한해를 이렇게 말씀과 승리하는 한해를 살아갈 수 있도록 스스로 자신을 격려해야 합니다. 그렇게 말씀을 마음에 품고 살아갈 때 여러분들의 앞으로 남은 1년이 가나안 정복과 같이 손쉬운 것이 될 것입니다. 거기에서 진정한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3. 영적 침체를 이기게 하는 힘
“또 주의 일을 묵상하며 주의 행사를 깊이 생각하리이다(시77:12)”
우리에게 영적인 침체는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습니다. 영적인 침체가 찾아오는 원인은 여러 가지로 분류해서 말씀드릴 수 있지만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영적인 침체의 원인이 아니라 그 영적인 침체가 찾아와서 우리의 마음의 틀들을 흐트러트리고 그 영적인 침체를 가속화할 때 어떻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가 하는 한 방법을 묵상과 관련지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오늘 이 시인은 무슨 의미에서인지 모르지만 침체 속에 들어있는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얼마나 오래된 침체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시인의 마음속에는 두 가지가 싸우고 있었습니다. 한가지는 믿음이었고 한가지는 회의였습니다. 영혼이 침체에 떨어지지 않고 은혜 안에서 충만할 때에는 의심과 회의가 거의 구석으로 밀려나고 충만한 확신 속에서 생활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성품, 그의 말씀의 신실함이 자신의 삶 속에서 계속적으로 경험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침체에 빠지면 이러한 경험들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런 모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경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험,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 이런 모든 것들을 가져다주는 것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지식들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그런 경험을 가져다주시는 것입니다. 은혜 안에 있을 때는 성령으로 말미암는 은혜의 경험이 풍부하고 침체 속에 있을 때는 이러한 성령으로 말미암는 은혜의 경험들이 현저히 줄어들게 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은혜 아래 있을 때는 우리 마음의 경향성들이 성령이 우리 안에서 행하고자 하시는 경향성과 상당히 많이 일치하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성령님이 자유롭게 역사 하시고, 침체 가운데 있을 때에는 우리 안에 있는 내적 경향성 내지는 우리 마음의 지향성-제가 설교 속에서 틀이라고 말씀드리는-들이 성령이 역사 하시는 지향성과는 상당히 관계가 먼 잘못된, 신령한 틀이 아닌 육적인 틀들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자유로이 역사 하시기 어려운 환경이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품, 그리고 그 은혜에 관한 경험들이 줄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확신이 많이 줄어들고 한편에 믿음이 있지만 또 한편에는 확신이 없는 데서 비롯된 회의가 공존하게 됩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도 회의가 있을 수 있고 회의가 있는 곳에도 한쪽 구석에 믿음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경험입니다.
오늘 바로 이 시인이 그런 중간적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믿음을 이런 식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니 하나님이 내 음성으로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실 것이로다” 이것은 믿음입니다. ‘침체에 빠졌지만 나는 기도할 것이고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주님은 내 목소리를 들으시고 나에게 응답해주실 것이다’라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회의가 깃들여있습니다. 어떤 회의입니까?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내게 귀를 기울일 것이다’는 믿음과는 달리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분명한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차가운 거절감이 느껴지고 예전에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나누었던 열렬하고 뜨거운 사랑의 교제, 하나님 앞에 많이 기도하고 난 다음에 느끼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인격적 감화로 자신의 영혼이 충만해지고 마음이 그 교제로 말미암아 신령한 영향을 받게 되는 경험들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또 회의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다하였는가’ ‘하나님이 나를 이제 잊어버리셨는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은 나에게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시기로 작정하셨는가’ ‘이제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봐’ ‘하나님께 가기에는 나의 죄가 너무 커’ ‘너무나 오랫동안 하나님을 잊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았어.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대해주시는 것이 마땅해’하는 자책과 회의 속에서 이 영혼은 믿음과 회의를 동시에 한 인격 속에 가지면서 자기를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께 담대해 나아가지 못하고, 그렇다고 강퍅해서 뒤로 물러서지도 않는 어중간한 상태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 속에서 영혼은 당연히 신음하게 됩니다.
이러한 경험을 가리켜서 죤 칼빈은 ‘인내와 고집의 경계선 사이에 있는 경험’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지만 아직 만나지 않은 하나님을 기다리는 인내와 무엇인가 더 깨트려지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매달려야 하는데도 과거의 옛 성품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옛 방식을 고집하고 있는 불경건한 고집, 깨어지지 않는 자아를 고수하는 고집과 은혜 베푸시지 않는 하나님을 그래도 떠날 수 없는 인내, 이 사이의 경계선상에 있는 경험이라고 말했습니다.
시인이 이런 경험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시인은 도대체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 한구석에는 믿음이 소리치고 현실은 하나님 앞에 차가운 거절감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자기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기도할 때에 경험되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의 음성을 듣고 귀를 기울이신다는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신 것 같고 이제 그 은혜가 다한 것 같다고 하는 경험이 자신에게 응답으로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때 정말 신자는 진퇴양난의 기로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에게도 그런 때가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회의가 없고 확신으로만 가득 차거나 콩알만한 믿음도 없고 의심으로 가득 찬 때보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경우의 때가 훨씬 많을 것입니다. 그것을 극복하는 한 통로를 시인이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은 묵상입니다.
여러분이 말씀 사경회를 인도하는 강사라면 가정주부만 단출하게 모이는 아침집회에 승부를 걸겠습니까, 입추의 여지없이 가득 들어차는 저녁집회에 승부를 걸겠습니까? 당연히 대포알은 저녁 대포에 장전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저녁에 아무리 쏴도 폭탄이 안 터지는데, 아침에는 부담이 좀 적은 마음으로 살살 설교해도 사람들이 흐느끼기 시작하고 드디어 여기저기서 울음이 터지기 시작합니다. 대포로 갈겼을 때는 안 무너지더니 부채질을 살살 하니까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어떤 때는 의례적인 폐회 예배에서 성령이 역사 하십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계획표와 맞추어서 역사 해주시면 체면도 살고 할텐데 왜 그러실까’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발견한 것은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달아올라서 젖어진 상태가 될 때는 잘 되는데, 아직 스며들지 않은 상태에서 생전 처음 보던 사람이 갑자기 나와서 잡아먹을 듯이 설교 하니까 첫 시간은 ‘저 사람이 누군가’ 하다가 끝나고 둘째 시간은 ‘저것이 맞나’ 하다가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다 마지막 시간에 ‘정말 그러네’ 하면서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포알을 꼭 저녁에만 장전할 것이 아니라 대포알을 여러 개 가지고 가서 아무 데나 설치해놓고 주님이 기관총을 쓰시려면 쓰시고, 대포를 쓰시려면 쓰시고 부채를 쓰시려면 쓰시라고 맡기고 최선이 다하는 것이 좋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옛날에 장터에 가면 대장간에서 풀무에 불을 확 붙인 다음에 쇠 조각을 집어넣고 시뻘겋게 달굽니다. 그러면 쇠가 빨갛다 못해서 하얗게 됩니다. 그때 올려놓고 빠른 솜씨로 망치로 두들기면 순식간에 그 넓적한 쇠 조각이 낫이 되어 나오기도 하고 칼이 되어 나오기도 하고 호미가 되어 나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무쇠를 그렇게 달구지 않고 시커먼 틀에 올려놓고 큰 망치로 두들긴다면 그 무쇠의 형태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부러져 버리게 됩니다.
묵상에 기대하는 효과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잘 스며들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생각과 정서로 가득 차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면 그 말씀에 의해서 신속하게 영향을 받고 변화가 빨리빨리 됩니다. 그런데 이 속에 세속적인 생각이 가득 차있고 은혜가 언제 불을 때고 지나갔는지 차디차면 안됩니다. 찬찬히 얘기하면 별로 가슴에 와 닿지 않으니까 졸고, 세게 하면 반발심이 생기는, 어떻게 다룰 수 없는 차가운 감자입니다.
그렇게 믿음과 회의가 공존했을 때 이 시인이 세상 돌아가는 생각이나 하고 ‘정말 내가 하나님 믿고 따라가서 쥐뿔이나 얻은 것이 뭐가 있나’ 생각하면서 반역하는 마음을 품었더라면 범죄 하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이 두 가지를 결심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하신 일을 진술하리이다’ ‘내가 하나님의 하신 일을 묵상하리이다’ ‘진술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회의가 함께 섞여 있는 영적 상황 속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진술할 수 있는가’한다면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신앙고백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찬양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마음이 세상의 헛된 욕심 같은 것들로 가득 찰 때 단번에 우리의 마음을 돌려놓는 아주 훌륭한 방법 중 하나가 찬양입니다. 세상의 욕심으로 인해 마음이 부요해질 때 그때 조용히 눈을 감고 1분만 찬양해 보십시오.
주 달려 죽으신 십자가
우리가 항상 생각 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못 박힌 손 발 보오니
큰 자비 나타내셨네
가시로 만든 면류관
우리를 위해 쓰셨네
이 시인의 마음은 믿음과 회의가 공존하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을 말할 수 있는 처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알고 있는 그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아마 그 고백하는 방법이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가르치는 것이기도 했고 이 시를 이용해서 노래하는 것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죽 노래한 것입니다. 그것이 가져다주는 효과는 머리에 있는 생각을 묵상이라는 작용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에 불을 붙이게 한 것입니다.
젊은이들을 보면 음악을 탐식 하듯이 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 음악이나 듣는 것은 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날 어느 지체가 이 메일로 음악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들어보니 이상한 음악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그 음악은 아니었습니다. 그 음악을 들으면 이상하게 사람의 마음이 멜랑콜리 해지고, 달콤하지만 무기력해지게 하는 음악이었습니다. 그래서 회신을 보냈습니다. ‘고맙지만 이 음악은 내가 안 듣는 음악이다. 예전에는 몇 번 들었는데 나에게 그런 효과를 가져다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지금은 안 듣는다. 그리고 이런 음악은 마음을 지키는데 도움을 주는 가락이 아니다. 그 대신 내가 몇 개 추천해 줄 테니 들어봐라’했습니다. 그 속에는 찬송가도 있지만 찬송가 아닌 것도 있었습니다. 일반 음악 중에서도 있습니다. 그랬더니 ‘정신이 번쩍 난다’는 답장이 왔습니다.
천지 창조 시에 벌써 음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음에 가까이 갈수록 우리를 맑게 하고 새롭게 하고 우리의 마음과 정서를 창조의 원 질서로 돌아가게 만들어주지만 그렇지 않고 타락한 인간의 정서가 추구하고 목말라 하는 음률을 따라가게 되면 우리의 정서가 하나님을 묵상하고 생각하기에 적합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음악이라 할지라도 니나노 틀어놓고는 하나님의 은혜가 묵상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헨델이나 모차르트의 음악 중 어떤 것을 틀어놓고는 훌륭하게 묵상이 됩니다.
그 다음에 “또 주의 모든 일을 묵상하며 주의 행사를 깊이 생각하리이다”했는데 반복입니다. ‘모든 일’과 ‘행사’는 같은 것이고 ‘묵상하리이다’와 ‘깊이 생각하리이다’가 같은 것입니다. 반복하면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 시의 병행법입니다. 어떻든 묵상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제는 은혜 베푸시지 않는가’ ‘이제는 끝났는가’하다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묵상한 것입니다.
자기가 죄 가운데 있으면 죄를 용서하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긍휼히 여기셨던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들, 그리고 자기의 개인적인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주의 용서를 받고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받던 회복의 순간들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민족의 경험과 개인의 경험을 통해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계시의 신실성을 확신하는 데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진리를 통해서 개별적인 경험으로 나오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선하시다’할 때 ‘진짜 그럴까? 그렇구나. 우리 민족도 이렇게 사랑하시고 나도 사랑하시고...’하며 나오기도 하지만, 거꾸로 자신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경험, 용서받았던 경험을 보면서 그것을 통해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이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긍휼히 여기신다는 진리를 붙드는 동기로 삼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쌍방적인 것이 모두 필요합니다. 그것을 깊이 묵상하고 반복해서 계속 생각하니까 ‘은혜가 다하였는가. 하나님이 나에게 더 이상 긍휼히 여기지 않기로 하셨는가.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는가’하는 회의는 묵상 속에서 점점 사라져 가고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내 음성을 듣고 내게 귀를 기울이실 것이다’라고 하는 믿음이 점점 강화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이 그렇게 나를 다루어오셨기 때문에 오늘 내 안에 일어나고 있는 이 모든 회의와 의심은 사실이 아니라고 하는 것들을 이 영혼 속에서 일어나는 현재적이고 실제적인 경험을 통해서 추출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마음이 하나님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따뜻하게 달아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은 믿어지기 시작하고 기도의 문은 열리기 시작하고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 이제껏 보여주시지 아니하셨던 놀라운 친교가 자신 속에 회복되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묵상이 전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예화: 한 목사님이 우리 교리 묵상집을 가지고 가서 하루에 다 읽으시고 너무 탁월한 책이라고 전화 하셨다)
이 교리가 바로 하나님이 하신 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 이런 것들을 체계적으로 묵상해서 오늘 묵상한 것이 어제 묵상한 것과 연결되고 오늘 묵상한 것이 내일 묵상할 것과 연결되어서 하나하나가 계속 묵상 속에서 고리가 되어서 그것이 머리에서 가슴을 타고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끊임없이 영혼을 새롭게 하는, 이 말씀의 작용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는 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이것은 의무입니다. 모두 사고 다른 사람에게도 줘서 매일매일 교리를 묵상하게끔 만들어야 합니다. 이 책을 다 묵상하기 전에, 정말 이상하게 연약하고 말씀에 은혜를 받으면서도 이상하게 실제적인 힘이 발휘되지 않던 사람들이 정말 새 힘이 생기고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승리하게 되는 경험들을 보고 싶습니다. 주일에 들은 말씀도 그냥 잊혀져 가서는 안됩니다. 간략하게 메모하거나 인터넷이나 테이프에 담긴 말씀을 한 번 더 듣고 묵상해야 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주님이 우리를 지켜주신다고 했지. 우리가 만일 죄가 있어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들어갔다면, 회개하고 용서를 빌면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신다고 했지. 아멘’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말씀의 묵상으로 인해서 영혼에 커다란 새 힘을 얻기 바랍니다.
4. 사랑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의 묵상을 가상히 여기시기를 바라나니...(시104:34上)”
시편 104편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노래하고 있는 장입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위대하심, 창조주이시고 그 창조한 모든 세계를 보존하고 계신 영광스러운 주관자 하나님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104편 전편은 창세기 1장의 반복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하나님이 온 우주 사물을 창조하신 것과 그 모든 존재가 하나님께 기대어 있는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창조하신 이 세상을 통해서 또 그 창조된 세상을 보전하시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그 위대하심과 그 위엄을 마음껏 당신 자신이 창조하신 세계에 드러내고 계시고 당신이 창조하신 그 세계의 위대함 때문에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시인은 그 하나님이 창조하신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세계에 속한 가장 연약한 한 피조물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온 세계에 존재하는 가장 연약한 미물로서 그저 입을 벌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아름다움과 그 위대한 권능과 그 엄위하심을 보면서 자신을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만물들이 그 하나님에 의존해 있고 들에 피어난 한 포기 풀과 굴러다니는 한 개의 돌멩이로부터 시작해서 표호하며 들판을 가로지르는 사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하나님의 은총주시는 얼굴빛 앞에서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모든 천지의 아름다움과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것을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권세를 경험한 다음에 시인이 마지막으로 ‘하나님만이 찬송을 받으실 여호와로시구나’하면서 하나님을 진실하게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 찬양을 하면서 시인은 오늘 우리가 다루는 성경구절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결심, ‘나의 묵상을 하나님이 가상히 여기시리니 내가 여호와를 인하여 기뻐하리로다’고 한 묵상과 기쁨의 고백이 그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한 권세와 보존자 여호와의 그 위대한 위엄을 노래하고 난 다음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흔히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우리 인간 속에서 일어나는 사랑의 경험과 많이 견주어서 설명하기도 하고 또 성경이 그러한 사랑을 빌어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 “아비가 그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나니”처럼 아비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을 빗대어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말하기도 하고 또 자녀가 아버지께 돌아가고 그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처럼 자녀의 아버지를 향한 사랑을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사랑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것보다 더 흔하게 나타나는 경우는 아내가 남편을 남편이 아내를 서로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비유를 들면서 그것이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사랑하는 것이고 또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에 속한 교회의 백성들을 사랑하는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유비들은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버지를 사랑할 때에 우리가 그 아버지를 어려워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아버지가 위대하기 때문에 그 위대함을 동시에 느끼면서 사랑하지 않습니다. 아내로서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으로서 아내를 귀하게 여기지만 그러나 위대해서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유비는 하나님이 직접 사용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한계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왜 그런 오해받을만한 한계점이 있는 유비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성경에서 이야기했을까요? 이 창조주요 보존자이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유비를 이 세상에서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여호와같이 위대하신 분이 이 세상에 존재하신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또 존재했다고 한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한 적이 있습니까? 존재한 적도 없고 사랑한 적도 없으니 그런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사랑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유비가 인간 경험 속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중에 가장 가까운 것을 유비로 들어서 우리에게 설명하시고 싶어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사랑을 많이 강조하고 주님을 사랑하다가 보면 마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구걸하시는 분 같은 측은한 연인 같은 차원으로 하나님을 끌어내리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독적인 생각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무슨 영향을 받으십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이 무너집니까? 하나님이 세우시기로 한 위대한 계획들이 좌절됩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의 목적들이 수포로 돌아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하나님이실 뿐이고 우리는 그분의 손에 의해서 지은바 된, 하나님이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창조주요 우리의 보존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미물일 뿐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받고 또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한 채 이 세상에 왔지만,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되어서 또한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되었고 하나님의 이름 속으로 연합되어 주님과 어떤 면에서 하나되었지만, 그러나 이점에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좁힐 수 없는 불연속성이 있으니,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우시고 지존하신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그 앞에서 가장 연약한 피조물일 따름이라고 한 불연속성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말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말하면서 우리가 사랑해야 하고 또 우리가 사랑 받기를 원하는 그분이 우리와 대등한 차원에 있는 한 이웃이 아니라 지존자이시고 거룩하시고 엄위로우시며 위대하신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항상 가슴에 새기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위대하심을 깊이 묵상하면서 그 위대하심과 영원의 빛 아래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깊이 이해하게 되었으니, 우리들이 수시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살아가면서 마음속에 하나님의 위대함을 노래하는 찬양들을 마음에 많이 익히는 것이 묵상에 도움이 됩니다.
만유의 주재 존귀하신 예수
인자가 되신 하나님
나 사모하여 영원히 섬길
내 영광되신 주로다
이러한 하나님,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실 뿐 아니라 지존하셔서 그분 앞에 엎드려 그분을 섬길 수밖에 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사랑을 이야기하게 될 때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가 대견하게 보이지 않고 그렇게 우리로부터 사랑을 받으시는 하나님이 위대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 한가지를 유의하면서 두 번째로 넘어가서 도대체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본분인데 그러면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예화: 중 고등학교 다닐 때 학교를 늦게 가게 되어서 수업시간에 자리에 들어가 앉아 보니 친하게 지내던 짝이 노트 가득 ‘김남준......’이라고 써놓았던 이야기)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에 늘 보일 때는 저 사람을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잘 모르지만 사라지고 나면 그때 비로소 사랑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화: 아들이 집에서 빈둥거리며 말도 안 듣고 돈만 달라고 하니 군대가기만 기다리 지만 막상 군대가 버리고 난 다음에 아들의 빈방을 열어보며 눈물이 핑 돌며 잘 해주지 못했던 것으로 인해 마음 아파한다는 이야기)
그래서 같이 살 때에는 사랑하는 것인지 사랑하지 않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떠나가고 나서 그 존재가 사라졌을 때 비로소 ‘내가 정말 그 사람을 그때 사랑했구나. 그런데 그 사실을 내가 몰랐구나’합니다. 이것은 수 백년 동안 유행가 가사에도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입니다. 인간의 보편적인 경험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정의하자면 사랑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묘사하자면 사랑은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만일 생각을 거의 안하고 사는데 그 사람을 엄청 사랑한다면 그것은 뭔가 흑심이 있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목적을 가지고 사랑하는 척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가 우리의 영적인 원리를 아주 선명하게 이야기했습니다. “누구든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여기에서 ‘아버지의’는 ‘아버지가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목적격인 속격입니다. ‘아버지를 향한 우리의 사랑이 그 속에 있을 수가 없다’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도 일치합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다”와 같습니다.
똑같은 원리에 의해서 사랑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저의 그 친구는 저를 참 사랑한 것입니다. 수업시간에 보이지 않으니까 ‘오다가 무슨 일이 생겼나’ ‘집안에 무슨 일이 있나’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서 어디로 도망갔나’ 등등 생각을 하면서 노트에 이름을 적어 내려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오늘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여러분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여러분들은 스스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평소에 얼마나 생각하며 살아가는지, 아침에 눈을 뜨면서 무엇이 생각났습니까? 그리고 하루를 살면서 혼자 있는 조용한 시간에는 무엇을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있는 욕구는 궁극적으로 누구를 위한 욕구일까요? 그리고 깊은 밤 잠자리에 들 때는 누구를 생각하시면서 잠이 드십니까? 그리고 순간수간 살아가는 삶의 발자취 속에서 그 가치와 생각의 기준이 누가 되고 계시나요?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그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에게서는 하나님을 향한 싫증이나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권태감 같은 것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이 시인이 바로 그러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위대하심과 보존자로서의 지존하심을 깊이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사랑하게 될 때 그 사랑은 시인 속에 묵상으로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속에 “하나님이 나의 묵상을 가상히 여기시리니”라고 되어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가상히 여기시리니’라는 단어가 ‘에레아브’라는 단어로 되어있습니다. ‘에레브’라고 하는 단어는 창세기 1장에서 채소를 가르칠 때 쓰여진 단어였습니다. 여기에서는 그 의미와는 다르게 ‘달콤하다’의미로 쓰였고, 예레미아 6장 20절에 나오는데 거기에서는 ‘달가와하다’ 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히브리 성경대로 직역을 하면 ‘나의 한 묵상이 그분께 대하여 달콤하기를 원한다.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참답게 사랑하는 관계는 그 속에 있는 묵상이 사랑하는 대상에게조차도 받아들여지기를 원하는 소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사랑을 받는 사람에게 모든 것이 소유되기를 원합니다. 특별히 이 시인은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보존자 여호와의 지존하심을 노래했습니다.
그는 이미 자신은 그 위대한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니고 티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스쳐 가는 바람의 한 끝과 같고 흘러가는 긴 시간의 한 끝자락과 같은 존재, 마치 들판에 피었다가 사라지는 풀 한 포기가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한 채 태어났다가는 검불이 되어서 흩어지는 것처럼 거기에 매달린 아름다운 꽃도 누구의 시선도 붙잡지 못한 채 사라져 가는 것처럼 또한 우리 인간도 그렇게 허무한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시인이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노래하면서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참다운 가치가 자신의 외적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나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피조물로서 아무 것도 아닌 이 세상의 삼라만상 중에 가장 연약한 한 피조물로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데 있다고 하는 사실을 시인이 깊이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하나님 앞에 노래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하나님이 이 만물을 향해 베푸시는 인자하심을 앞에서 노래하고 생명이 없는 이 삼라만상, 하나님의 형상도 나누어주지 않은 이 세상에 있는 짐승과 그리고 넘실거리는 파도와 드넓은 바다, 높은 하늘과 이 천지 우주 세계를 향해서도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신실하심이 궁창에 미친다면 그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인간을 향해서는, 특별히 언약을 맺은 그 백성을 향해서는 이 자비와 인자가 얼마나 클까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에 이 시인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렇게 사랑할 때에 이 시인은 자신의 온 삶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전 존재는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마음에 있는 묵상까지도 그분에게 즐거운 것이 되기를, 달콤한 것이 되기를, 그분에게 흠양할만한 것이 되기를, 그렇게 사모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다른 곳에서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했습니다. ‘열납’이라는 말은 제사를 드릴 때에 사용되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인은 짐승을 잡아죽여 피 흘리는 생체만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의 묵상과 자신의 입술의 모든 말과 자신의 머릿속의 모든 생각이 올바로 태어나고 바쳐지기만 한다면 소나 짐승을 잡아죽인 제사 못지 않게 하나님에게 소중한 제물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제물 중에 열납되는 제물과 열납하실 수 없는 제물이 있었던 것처럼 동일하게 인간의 마음에 있는 생각과 묵상, 그리고 입술의 말이 열납될 수 있는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었다는 사실을 시인은 경험한 것입니다.
제사를 드릴 때, 그 제사가 열납되지 못했을 때 그것은 헌제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불쾌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리고 그 불쾌는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니 시인이 자신의 입술의 모든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한다고 할 때 그 영적인 깨어있는 상태가 실제로 사람을 찔러 피 흘리지 않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아무렇게나 짐승처럼 생각하고 동물처럼 말하고 짐승처럼 먹고 마시는 우리의 피폐한 삶과는 얼마나 대조가 되는 삶입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의 생각과 그리고 자신의 모든 의식 세계가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지식에 의해서 지배되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깊이 간직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그 마음의 뜻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그것을 마음에 품고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이 시인이 그런 위대한 하나님을 묵상한 다음에 자신의 마음에 있는 묵상이 하나님께 대하여 즐거움이 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의 묵상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향기로운 것이 될 때 그 묵상에 의해서 지배되는 인격이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인격으로 거룩해져 갈 수 있었고 그 거룩한 인격에 의해서 지배받는 삶이 경건하고 거룩한 삶이 되어서 존재 전체가 하나님이 받으심 직한 그러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시장바닥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는 너저분한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내가 생계를 위해서 시장바닥에서 일하고 죄인들에게 에워싸여서 살아가지만 그러나 우리를 더럽힐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우리의 외면만을 더럽힐 뿐이고 우리의 마음까지도 더럽히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비록 내가 높은 지위가 없고 낮고 천한 직업에 종사한다고 할지라도 내 마음의 묵상과 내 입술의 모든 열매는 오히려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이 되어서 그것과 함께 우리 자신이 열납되는 축복된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 이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계속 두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마음에 두고 살아갈 때 비로소 그 말씀이 무의식 세계 속에서도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묵상의 유익은 바로 그런 데 있습니다. 반복적으로 들은 말씀을 마음에 깊이 간직하려고 애를 쓸 때 처음에는 내가 그 말씀을 붙잡으려고 애를 쓰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말씀이 나를 굳게 붙잡아서 나를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사람으로 만들어갑니다. 내가 만일 그 말씀에 붙잡힌 사람이 되어간다고 할 것 같으면 나의 삶도 주님의 손에 의해서 붙잡힌 삶이 되어가지 않겠습니까?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정말 마음에 항상 품은 말씀이 있게끔 사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에 품은 말씀이 있어서 그래서 그 말씀을 불씨 삼아서 자신의 마음의 화로에 깊이 간직하고 세상에 요동치는 물결에 의해서는 영향받지 않아도 내 마음에 지펴진 그 말씀의 불씨를 통해서 영향을 받으며 산다면 결국은 일렁거리는 내 인생의 파도가 나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꺼지지 않도록 불붙여진 불씨와 같은 그 하나님의 말씀이 결국은 이겨서 우리로 그 말씀을 인하여 지혜롭게 하고 우리가 그 말씀을 인하여 척박한 세상에서 은혜로우신 주님을 의지하며 살 수 있게끔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이기는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5. 하나님 속으로 기뻐함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로다(시104:34下)”
시편에 보면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한다’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시편뿐만 아니라 하박국서에 바도 “외양간에 송아지가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어도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리라”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한다’는 표현이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에는 많이 나옵니다. 성경의 어느 한 곳을 열어봐도 그런 표현을 발견하지 않고는 성경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책마다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에 대해서 많이 나와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흔하게 나온 그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에 대해서 우리들이 낯설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영어로 ‘rejoice into the Lord’라고 번역할 수 있을 정도로 ‘여호와 속으로 즐거워한다’ 혹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워한다’가 되는데 여호와라는 말 앞에 전치사가 붙어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호와 속으로 즐거워한다‘는 번역을 즐겨 취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 번역이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이 일의 특성에 대해서 많이 알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기뻐할 일은 참 많습니다. 그 기쁨이 크면 굉장히 근심스럽고 걱정스러운 일이 있어도 기뻐할 만한 상황이 됩니다.
(예화: 15-6년 전에 지하실 방을 전전하며 살다가 아파트로 이사를 가서 더운물을 욕 조에 받아 늘 목욕하다가 가스사용료가 15만원-월급이 20만원이었을 당시-나오 자 아내가 무척 화가 났었는데 박사과정에 합격했다는 전화를 받고 기뻐서 용서 했다는 내용)
기쁜 일이 생기면 열 받을 일도 없어지는데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일들은 종류가 너무 많고 다양합니다. 매일 공치던 장사꾼이 오늘 왕창 남았다면 기쁠 것입니다. 공부를 늘 못하던 아이가 80점만 맞았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81점을 맞았다면 기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두 다 영원한 기쁨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들의 참된 즐거움은 무엇일까요? 영원한 가치가 있는 진정한 즐거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속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정말 무딘 존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꿈에도 그리던 일이 현실로 이루어졌다고 칩시다. 아이가 공부를 못했었는데 은혜 받고 나더니 정말 공부를 열심히 해서 여러분 소원대로 좋은 대학을 들어갔다고 칩시다. 며칠쯤 행복할 것 같습니까? 아무리 크고 기쁜 일이 있어도 감사의 여운은 오래 갈 지 모르지만 가슴이 벅차 오르는 기쁨과 감격은 모두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심장이 멎을 것 같은 행복한 일을 만나도 순간이고 잠시 지나고 나면 당연한 것처럼 살아갑니다.
(예화: 방배동에 있을 때 교회가 좁아서 점심 먹으려면 앞사람 먹고 일어날 때까지 기 다려야 하고 예배 드리고 나면 차가 견인되어가고 하다가 감격적으로 평촌 교회 당이 완공이 되어서 입당 예배 때 눈물 흘리며 감격했지만 요즘은 아무도 눈물 흘리는 사람이 없다)
그렇게 하나님이 축복해주시고 은혜 주셔도 인간이 얼마나 속히 잊어버리는 지 생각해보십시오. 오히려 요즘은 ‘좁다’ ‘정신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감사하고 기쁜 일이 생겨나도 그 기쁨은 잠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세월이 지나가도 진부하지 않고 영원히 마르지 않는 기쁨이 있는데 하나님 속으로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속으로 즐거워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인데 하나님의 자녀 된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품이 어떤 지를 깨달으면서 체험하게 되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알고 나면 항상 우리에게 기쁨이 샘솟습니다. 예수 믿은 지 30년이 되어서 30년 동안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왔으면 이제 좀 질릴 때쯤 되었습니다. 예배당 지은 지 30년 되었다면 지겨울 때도 되었습니다. 그것이 세상의 기쁨과의 차이입니다.
젊었을 때 형제들은 그림같이 예쁜 자매 만나서 결혼하려고 합니다. 잠깐 만나면 기쁘겠지만 30년 지나서 자기 부인 얼굴 뜯어먹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꽃같이 아름답고 곱던 얼굴도 30년 지나면 변합니다. 영원한 즐거움이란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만일 영원한 즐거움이 세상에 있다면 ‘만물의 피곤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한 성경의 기록을 바꿔서 써야할 것입니다.
30년 동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알아왔어도 진력이 나거나 하나님의 사랑에 싫증이 난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그 뜨거운 사랑에 면역이 되어서 불로 지져도 자극이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그 은혜를 경험하고 나면 언제나 그것이 처음 경험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첫사랑’타령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처음 하나님이 사랑해주시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고 깨달은 데서 오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아니라, 곤경에 처하고 불의한 세상을 보면서 분노하던 사람들에게는 하박국 선지자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공평하시고 의로운 성품을 경험하면서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당신의 의로움을 보이사 악인은 멸하시고 당신을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언젠가는 드러내시니까 그것이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악한 자에게는 별을 주시는 의로움과 선한 자들에게는 상을 베푸시는 의로 다시 나뉘어집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신자인 우리들이 경험하게 됩니다. 그 성품에서 은혜를 받게 됩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을 하셨지만 신실하셔서 언제나 동일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찬양
언제나 동일하신 주
정말 언제나 동일하십니다. 그리고 변함없이 신실하십니다. 그것이 요동치는 삶의 상황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큰 위로가 됩니다. 언제나 하나님께 찾아가는 길은 시대가 변해도 항상 동일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은 2천년 전이나 2천년 후인 지금이나 언제나 동일합니다. 세상은 변천해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은 불변하시는 방법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무한한 기쁨이 솟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구나. 주님이 우리를 찾아 나서실 때 우리가 그 자리에서 이탈해서 도망가버린 적이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면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우리를 위해서 역사 하십니다. 그때에 우리의 마음속에 밀려오는 기쁨은 한 두 번 경험한다고 해서 마르는 기쁨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수천 년을 두고도 찬송의 제목이 되어오고 여호와의 존재에 있어서 진실하심은 수많은 세월이 흐르고 수많은 민족들이 바뀌어도, 나라가 변하여도, 모든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경험한 성도들에게 그 하나님의 속성이 찬송의 제목이 되는 것입니다.
(예화: 새가족환영회 때 어느 자매의 간증-하나님을 믿은 후 기도만 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셔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부인할 수 없는데도 하나님 앞에 똑바로 살 수 없고 자신의 영혼은 기쁘지 않았다고 했다. ‘내 영혼을 부요하게 하시는 하나 님’ 시편 23편에서 시인이 고백한 ‘내 잔이 넘치나이다’의 고백이 없었다)
(예화: ‘십자가’라는 책을 쓴 후 한 중년 여집사님의 전화를 받고 만나게 되었는데 이 세상에서 부족한 것이 없이 자라고 살아왔고 지금도 남편이 굴지의 벽지 회사 회 장이라고 했다. 남편의 사랑과 목사님의 사랑을 받으며 부족함 없이 살고 있지만 목사님의 이사 심방을 받은 후 ‘목사님이 아무리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이렇게 축 복을 빌어주셔도 내 영혼은 너무 피곤합니다. 죽을 것 같습니다’하며 대성통곡하 고 울었다고 한다. 3년에 한번씩 해야하는 배속에 있는 혹을 떼 내는 수술을 하 기 위해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마침 ‘십자가’ 책을 읽게 되었고,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한없이 울었다는 내용)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저희 원하는 대로 주셨으나 저희 영혼은 파리하게 하셨도다’하는 고백이 나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많은 것들, 그 자체가 우리에게 만족이 될 수 없습니다.
방 청소하다보니 지체들의 크고 작은 선물들이 나왔습니다. ‘양말 두 켤레 밖에 안되지만 나를 생각하며 사서 포장을 하고 사연을 하나 적어서 집어넣었구나. 감사하다’했습니다. 양말이 주는 기쁨은 솔직히 그 양말이 들어왔는지도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그 지체가 나를 그렇게 생각했구나’하는 것은 남아서 기쁘고 감사합니다. 신앙생활을 1년 동안 하면서 은혜 받은 이야기,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신 이야기가 짧지만 들어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 사람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양말 한 두개는 도구였고 이것을 통해서 알게 된 그 사람의 마음에 대한 기쁨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수준이 낮으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돈을 주시면서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한다’는 것을 보이고 싶으신 것입니다. 때로는 여러분들이 어려운 문제를 놓고 기도할 때 그 기도를 응답해 주심으로서 ‘나는 너를 사랑한다’를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돈만 달랑 받고 응답만 달랑 받고 그것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서는 잘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치 손자들이 할아버지께서 오신다고 하니까 전부 옷 입고 할아버지를 기다렸는데 할아버지가 오시자 손에 들려있는 선물만 탁 빼앗아서 자기들 방으로 들어가서 문 닫고 뜯어놓고 서로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그 할아버지에 대한 생각은 하나도 없고, 그렇게 좋아서 옷 입은 이유는 선물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위해 하신 크고 위대한 일들을 감사하라고 계속 말하고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계속 묵상한 이유는 그 위대한 일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성품, 그래서 택한 자들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성품, 자기의 백성들이 난관에 처했을 때 바다를 가르시고 바위를 터트려서 물을 내신 하나님의 그 전능하심, 이 하나님의 성품을 계속 경험하고 그 속에서 마르지 않는 기쁨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당신이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생각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 응답을 많이 받았으나 메마른 심령으로 살아간 사람들보다는 오히려 이 세상에서 ‘예수 믿고 얼마나 부자가 되었느냐’고 말할 때 특별히 내놓을만한 업적은 없어도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신 주님의 신실하신 성품을 경험하고 삶의 상황 구비마다 드러나는 하나님의 그 신비한 성품을 보고 감탄하며 하나님 속으로 알아 가는 지식이 쌓였던 사람들이 오히려 더 견고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핵심은 이 마지막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행하시는 많은 일들 속에서 일 자체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달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그 고유한 성품을 경험하게 만들어 줍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많은 축복, 혹은 난관일수도 있습니다. 혹은 시련일수도 있습니다. 그 모든 섭리적인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은 당신을 전달하는 도구들로 그것들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이 축복해주셔도 생각 없이 덜렁이며 ‘아이고 주님 또 주시고’ ‘감사하시고’하며 살고 ‘또 주셔야 되겠네’하다가 응답과 축복이 주어지면 ‘또 한번 쏘세요. 기왕 쏘실 것 팍팍 쏘시고’ ‘사건은 제가 터트렸지만 이 사건에 대한 모든 책임은 주님이 쏘십니다’하며 살면 만성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고 하나님 앞에 타락하게 되었을 때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애달픈 마음을 보이십니다. ‘내가 너에게 땅도 주고 여인들도 주고 모든 것을 너에게 주었고 무엇이 부족하였더라면 내가 너에게 더 주었으리라. 그런데 무엇이 부족해서 네가 그 일을 했느냐’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물러갈 때쯤 되어서는 그 많은 축복에 에워싸여서 살아가고 있었는데 그 축복이 그의 영혼을 지켜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지켜주는 것은 섭리 가운데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신 환경적인 축복들이 아닙니다. 만약에 다윗이 왕이 되어서 누리게된 모든 것을 장사에 비유한다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을 믿은 것이 거래였고 장사여서 그렇게 많은 이문을 남겨서 한나라의 제왕이 되고 그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그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면 다윗의 밑천은 양치는 막대 하나입니다. 아버지도 안 알아줬습니다. 형들도 안 알아주던 동생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제사장 이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까지 먹어야될 정도로 가난한 세월을 보낸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왕궁에 있으면 그 궁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신하들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그 비빈들과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자기 것이 어디 있습니까?
제가 가끔 여러분들에게 우리의 인생은 부채 덩어리라고 말씀드립니다. 여러분 것이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자원들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자원이든 땅의 자원이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주님이 허락해주셨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예수 안 믿을 때나 믿을 때나 누리고 산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소유나 여러분들에게 놓여있는 환경을 통해서 정말 하나님을 느끼십니까? ‘내 자식, 이 자식 하나님이 주셨지. 정말 감사하다’합니까? ‘이 직장, 다른 사람이 다니는 것은 실력 없어서고 내가 다니는 것은 재수 없어서지’하며 다니는 직장이 있다고 칩시다. 하나님을 그 속에서 느낄 수 있습니까? 모든 것 다 하나님이 주셨는데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느끼면 인간이 그렇게 범죄하고 뒤로 물러가서 은혜로부터 부패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섭리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만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충분히 기뻐할 수 없다는 논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별도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생각하기’입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사랑은 생각하는 것이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랑하면 계속 생각이 납니다. 반대로 사랑하고 싶으면 생각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결혼한 신부의 가장 큰 의무는 신랑 생각하기입니다. 밥해주는 것, 빨래해주는 것은 가정부의 의무입니다. 그런데 내 사랑하는 신랑을 딴 여자가 계속 생각한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랑은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영원히 사랑해야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그 하나님을 묵상하고 그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깊이 생각할 때, 주님이 섭리 속에서 우리에게 주신 많은 축복들은 하나님이 당신 자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시기 위한 교재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아 우리의 사업을 이렇게 축복해주셨구나.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더 많이 알기를 원하시는구나’하고는 그 축복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성품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서, 하나님 속으로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그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 하나님과 연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생각하는 일에 열심을 내었던 것입니다.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묵상하고 심지어는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 되기를 바란다’고 하는 간절한 고백이 묻어 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을 많이 생각하게 되면 점점 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갑니다 그리고 영적 사고력이 증진됩니다. 어려움을 만났는데 육적 사고력밖에 없을 때는 ‘누가? 어느 놈이 이렇게 만들어 놓은거야? 그 인간, 저 죽고 나 한번 살아봐?’ 하며 인간을 향한 미움과 복수심밖에는 안 생깁니다. 그런데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었을 때 ‘왜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셨을까?’하면 내게 어려움을 준 사람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나에게 메시지를 전달하시고자 하는 수단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 대한 미움이 안 생깁니다. 오히려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관용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을 하나하나 더 많이 알아가게 됩니다.
바로 요셉이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요셉이 형들이 자기를 팔아서 보디발의 집에 끌려가서 그렇게 더럽도록 고생하면서 노예살이를 해서 자수성가해서 집안의 총무까지 됐더니 이번에는 보디발의 아내가 자기를 유혹해서 자기에게 덮어씌워 감옥에 집어넣고 감옥에 들어가서 술 맡은 관원장 떡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줬더니 그 은혜도 잊어버리고 하면서 파란만장한 세월을 겪으면서 인생의 굽이마다 자기 인생이 곤두박질 칠 때는 항상 자기 인생을 그렇게 망쳐놨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한번도 자기가 겪은 사람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 보디발의 아내가 얼마나 원망스럽겠습니까? 그러나 그로 말미암아 모함을 당하고 옥 속에 갇혔습니다. 우리라면 아마 보태서라도 다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히브리에서 끌려온 종이고 우리 상전 보디발의 집에서도 옥에 갇힐만한 일을 한 적은 없습니다. 왕께 그렇게 전해주십시오’합니다. 저는 그 부분을 읽으면서 ‘이것이 정말 신앙의 인격이구나’ 생각했습니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요셉이 특수 인간이어서가 아니라 그런 사람을 사용하셔서 자기를 어떠한 목적으로 데려가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하고 그것 때문에 위로를 받고 행복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을 향해서 그렇게 관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형들에게 ‘당신들은 나를 해하기 위해서 악을 행했지만 하나님이 그 악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날 우리 가족과 많은 이 세상의 사람들을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내가 당신들도 섬기고 당신의 자식들까지 다 기르겠습니다’하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끊임없이 알아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이 모든 환경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매개체들입니다. 묵상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살아간다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슴에 새기고 날마다 그분을 알아 가는 지식을 타고 그분 속으로 들어가서 그분과 함께 연합되는 것, 그러면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과 하나된 사람들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여러분 많은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고 또 하나님의 축복 속에 있기도 합니다. 오늘도 새가족환영회를 하는데 모두 하나님이 자기를 만나주신 은혜, 어두움 속에서 불러주신 십자가의 사랑, 이모든 것들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마음에 저절로 우러나오는 기도는 ‘하나님, 저 사람들의 저 고백이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좋겠습니다’였습니다. 은혜를 받고 보면 고난을 당한 것도 하나님이 이 교회로 인도하시기 위한 은혜였고, 어려움을 당한 것도, 건강이 나빠진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는데, 고난이 기분 좋고 시련이 유쾌해서가 아닙니다. 은혜를 받고 영적으로 깨어있으니까 이런 모든 고난과 어려움은 매개체였고 그 매개체를 통해서 하나님 속으로 점점 더 알아가게 되니까 그것이 가져다주는 놀라운 힘과 은혜가 가슴속에서 벅차 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매사에 그렇게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타고난 부패성과 세상중심의 사고방식 때문에 자꾸 그런 것들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서울에 공부하러 간 자식에게 어머니가 구구절절 사랑의 편지를 썼는데, 눈물어린 사연은 보지 않고 그 속에 있는 돈만 세느라 정신이 없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앞에 그렇게 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게 살아서는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지 못합니다. 그 편지를 읽어보면서 ‘어머니는 건강하신가, 어머니가 나 같은 불효자를 이렇게 생각하셔서 이 못쓰시는 글씨로 이렇게 쓰셨구나. 정말 어머니가 보고싶다’하며 편지를 잘 접어서 어디 넣어두려고 하다보니 돈이 있는 것을 발견해야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늘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하면서 유혹을 이기고 마음을 지키면서 살아가야 새 힘을 얻게 됩니다.
6. 기도의 실천을 촉진하는 묵상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시119:148)”
오늘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삶이 기도생활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 앞에 있는 147절과 연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다음 시간에는 묵상이 어떻게 말씀생활을 촉진하는지에 대해서 연속적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시인이 “새벽에 내가 부르짖었사오며......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실 147절에서 나오는 아침이 있고 나서 148절의 밤이 왔는지 148절의 밤이 있고 나서 147절의 아침이 왔는지를 따지는 것은 재미없습니다. 시니까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데 어떻든 시인이 밤에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기 위해서 깨어 일어났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묵상하는 사모함들을 가지고 있으니까 새벽에 부르짖게 되었고, 또 반대로 새벽에 그렇게 부르짖으니까 밤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마음의 소원이 생겨서 주의 말씀을 묵상하고 싶은 사모함 때문에 야경이 깊기 전에 일어나서 그 캄캄한 고요 속에서 주의 말씀을 대면하는 장면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묵상과 기도가 깊은 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은 이미 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배워도 성화의 진전이 없는 그리스도인이 참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화의 진전이 없는 대부분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사실 하나님의 말씀에 있어서 지식적으로도 많이 알지 못합니다. 언젠가 누가 제 설교를 평가하면서 설교내용이 너무 지적이라서-제 자신의 생각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지식주의로 가서 머리만 커지는 것이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사람에게 ‘지식주의의 위험에 빠질 만큼 한국교회 성도들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학교에서 낙제하는 아이보고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머리가 돌까봐 염려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화: 후배 목사님이 아들 둘을 데리고 영국으로 유학을 갔는데 둘 다 캠브리지에 들 어갔다)
(예화: 캠브리지에 다니는 학생의 글을 읽고 영국이라는 나라를 다시 생각했다-학기말 고사를 치르고 나면 기숙사 한 동에서 두 사람 정도는 정신병으로 병원에 실려 간다고 한다. 얼마나 지독하게 공부하는 지 알 수 있다)
옥스퍼드에 가봤는데 학생들이 느끼는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헤리포터’에 나오는 식당이 옥스퍼드 식당입니다. 지금도 1200년 전에 밥을 먹던 식당에서 학생들이 밥을 먹는데 벽에 보면 그 사람들을 빼고는 인류역사를 이야기할 수 없는 선배들이 걸려있습니다. 그래서 거기 가면 한순간에 오그라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것을 보면서 ‘선배들이 여기에서 공부하고 이 식당에서 밥을 먹어서 인류의 정신사를 움직여 왔다. 그 시대는 그 선배들이 그렇게 영향을 미쳤고 이제 이 시대는 우리의 어깨에 있다’는 것을 생각할 것입니다. ‘얼른 졸업해서 IT회사나 취직해서 벌어먹고 살아봐야겠다’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한국교회 교인들이 그 정도로 성경공부를 하면서 지성주의를 이야기하면 이해하겠습니다. 그런데 미안한 얘기지만 아무 것도 모릅니다. 앞으로는 교리반을 제가 안 가르칩니다. 오프닝 맨트만 하고 부목사님들이 돌아가면서 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교리반에서 쓸 책들을 원고지 2300매 정도로 책을 만들었습니다. 교리반을 하면서 물어보면, 헌신에 있어서는 한 가닥 하던 사람들인데도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인지 정리가 안 되어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이 한 분이냐, 세 분이냐고 물어봐도 대답을 못합니다. 이단들이 예전에 믿다가 화형 당했던 교리를 믿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무슨 지성주의의 위험을 이야기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은 교육받아서 한글은 읽을 줄 알고, 책을 읽고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면 부지런히 배워야합니다. 하다못해 핫도그를 파는 사람도 호텔에 가서 교육을 받고 스파게티 만들어서 파는 사람도 그것 배우겠다고 이태리까지 가서 배워오고 어떤 사람은 2년 6개월 동안 가서 피자 굽는 것만 배워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부지런히 구도자의 자세를 가지고 공부해야 합니다. 공부하기 싫은 그리스도인은 길을 잘못 찾았습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뭔지 아직도 정리 안된 사람이 태반입니다.
그러나 지식주의의 위험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사람들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 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말씀에 대한 지식은 계속 늘어나는데 이상하게 성화에 있어서 진전은 별로 안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계속 섭취되는 지식이 머리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인적인 섭취가 아닙니다. 취미에 빠진 사람이 취미에 대한 정보를 모으듯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엔조이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절대로 변화되지 않고 이러한 말씀의 능력 안에서 살아가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체득되는 방식 자체가 그렇게 지식을 머리에서 머리 사이로 주고받는 그런 종류의 방식으로 체득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격적인 방법으로 체득되는 것입니다. 인격에 있어서 핵심은 마음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영향을 주고 그 마음속에서 지성과 의지와 정서를 사용해서 경험되고 결단되고 정리되어 가는 가운데 어떤 지식이 터득되어서 그것이 머리 속에 남고 그 남은 것들이 계속 인격에 영향을 미치면서 살아갈 때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경험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해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우리들의 삶에 정말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머리 속에만 남는 것이 아니라 자신 속에 강력한 지식으로 남고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충분히 적셔서 우리의 적셔진 마음을 통해서 그 말씀이 우리의 말과 생각, 행동, 결정, 이 모든 것에 다, 마치 우리 모든 몸에 혈액이 흘러서 영향을 주듯이, 그렇게 영향을 미치는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 그 사람이 크리스천이 되어 가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예화: 네 살 짜리 여자아이와 남자아이가 복도에서 말로 싸우다가 남자아이가 ‘너 우 리가 왜 이렇게 싸우는지 알어? 우리가 이렇게 싸우는 것은 우리가 더러워서 그 래’ 옆에 있던 어른이 ‘아니야 너 더럽지 않아’하자 ‘우리가 얼마나 더러운데요. 나도 더러워서 친구 것 뺏고도 싶고 때리고도 싶고 또 이렇게 싸우고도 싶어요’ 라고 했다고 한다-전적 타락의 교리이다)
그 아이가 전적 타락의 교리만 배웠지 성화에 있어서 인간책임에 관한 교리를 못 배운 것입니다. 자기 안에 그렇게 더러운 것이 있으면 ‘그래 나 더럽다’라고만 하면 안되고 끊임없이 ‘죄 죽임의 교리’에 의해서 성화 되어가야 합니다. 그 아이가 좀더 표현력이 있었다면 싸우다가 인류 전체 속에 스며들어있는 이 전적타락에 비애를 느끼고, 굳이 상대편 아이를 꺾어서 이겨야겠다는 의지를 포기하고 ‘이 잠시 머물 세상, 싸워서 뭐하나. 영아부 가서 은혜나 받자’했을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자라야 합니다. 그래서 한 세대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은 그 세대에는 잘 안 나타나고 다음 세대에 나타납니다. 그 세대가 산 것만큼만 영향을 줄 수 있고 영향을 준 것만큼만 다음 세대가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서 아끼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지나치게 되면 그냥 지나가지 말고 ‘야 너 너무 착하다. 너무 예쁘다’하며 아이들을 계속 사랑해줘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것을 못 받아봤으니까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앞 세대는 더했습니다.
(예화: 아버님 세대에서는 아이를 안고 나가면 팔푼이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내가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보여줄 너희들이구나’ 바울이 말했듯이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자랑이요 면류관이 될 수도 있구나’하며 아이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아이들도 자라서 그 후손들에게 똑같이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안 받아봤으니까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머리에 저장된 것 가지고는 우리들이 절대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만들어주는 원천으로 활용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적시면서 내려와야 하는데 그렇게 하게 하는 것이 묵상이라고 했습니다. 묵상이 강력하게 그것을 돕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묵상집을 만들면서 몇 명이나 활용할까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그것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성경보다 더 많이 활용하고 심지어는 중학교 고등학교 학생들까지도 그것을 활용하면서 너무 좋다고 합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일들이 왜 그렇게 좋은가하면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마음에 없이 예배 한번 참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보게 만들어주고 우리로 하여금 그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에 맞게끔 살아가고 싶어하는 소원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묵상을 통해서 마음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살 수 있는 분량은 머리 속에 저장된 분량보다 훨씬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 머리 속에 저장된 분량보다 훨씬 못할 수는 있지만 마음에 담겨져 있는 말씀의 분량보다 못할 수도 없고 그것을 능가할 수 없이 정확하게 마음에 담겨져 있는 그 분량만큼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화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계속 설교를 듣고 또 가르침을 받지만 고도의 성화 된 사람, 그래서 여러분들이 생각할 때 거의 온전에 가깝게 되어진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텅 빈 마음을 가진 거룩한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진짜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 고여있는 사람, 그 상태가 바로 고도로 성화 된 사람들의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그 마음에 가득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산 것입니다. 악마가 가득하면 악마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상이 가득하면 세상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진공은 없습니다.
그러면 결국 순결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있는 상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뭐가 밀고 들어오지 않는 한 빠져나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한 깊은 생각은 묵상을 통해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묵상이 어떻게 기도에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론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야경이 깊기 전에 눈을 떠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사람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니까 새벽에는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수가 있었습니다. 부르짖는다는 것은 소리를 지른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기도 속에 깃들여 있는 열렬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 열렬함으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부르짖을 수 있을 수 있기 위해서는 그가 하나님 앞에 묵상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런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묵상된 마음이 기도하기에 적합한 마음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로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말씀에 대한 묵상을 통해서 가져오는 마음의 상태가 기도하기에 필요한 마음의 상태와 동일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누가 쪽지라도 건네주면 버리지 않고 모두 모아두는 성격입니다. 편지를 정리하다보니 여러 사람의 편지가 나오는데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게 되는 이유는 글이 사람을 생각나도록 만들어주기 때문에 그 글에 강력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하얀 것은 종이이고 까만 것은 글씨인데 무엇을 묵상한다는 것입니까?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고 하는 것은 그 말씀의 주인이 되신 하나님을 묵상한다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보내주신 편지를 오늘도 계속 생각하면서 지냈습니다’하는 것은 결국 어머니를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묵상하는 첫 번째 대상은 말씀이지만 말씀을 통해서 마지막에 우리들이 생각하게 되는 것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되시는 하나님 자신을 묵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정서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할 때에는 하나님 생각이 잘납니다. 그리고 말씀 한마디만 하시면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하는지 잘 알아듣습니다. 그런데 은혜가 떨어지면 하나님을 생각하려고 해도 생각이 잘 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정서적인 일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묵상은 결국은 말씀을 매체로 해서 그분의 성품과 인격을 깊이 생각하도록 만들어주고, 그 인격과 성품의 영향이 우리의 영혼과 인격 안에 미치도록 만들어주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한 신자가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그 인격에 대한 영향을 깊이 가지면서 그 하나님의 인격적인 감화를 온전히 누리고 있을 때 그 마음의 상태가 기도가 잘되기 위해서 요구되는 마음의 상태와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끔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고 하고 허겁지겁 교회로 달려왔는데 기도가 잘 안되고 몇 마디 하다가 공상이 계속 떠오르고 한참 있다보면 깊은 묵상으로 들어가고 코고는 소리가 납니다. 그것은 기도를 해야하는데 마음의 상태가 하나님에 대한 생각으로 스며들어서 -영어로 쎄큐레이트(circulate?)-젖어진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머리는 머리대로 돌고 마음은 마음대로 도는 것입니다. 기도하다가 마음이라도 데워지면 되는데 안 따라올 때는 계속 횡설수설하다가, 아니면 자다가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허무합니다. 그래도 그렇게 하는 것이 집에서 퍼 자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영혼을 깨우려고 애쓰고 있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예화: 시골에서 불을 때서 밥을 하면 방이 절절 끓는다. 그런데 새벽 5시쯤 되면 구들 장이 싸늘하게 식고 방이 추워지기 시작한다. 불을 때려고 아궁이 앞에 앉으면 찬 공기는 무거우니까 아래로 가라앉으며 찬바람이 아궁이를 타고 밖으로 나와서 성냥을 붙이면 불이 밖으로 나온다. 겨우 불을 붙여 장작불이 활활 타기 시작 하 면 굴뚝과 아궁이가 불길을 빨아들이는 소리를 내는데 뜨거운 공기가 위로 올라 가면서 불길을 잡아당기는 것이다. 아침 해먹고 불이 다 꺼졌어도 다시 불을 때 야할 일이 생겨서 불을 붙이면 아궁이가 데워져 있었기 때문에 잘 타들어 간다)
마찬가지로 차갑게 식어진 마음을 가지고 기도의 보좌로 나아가서 데우면서 기도하려고 하면 장난이 아니게 힘이 듭니다. 여러분들도 경험해보셨을 것입니다. 저는 젊은 날 그런 영적인 침체를 만나서 하나님 앞에 그렇게 마음이 건조해지는 것들을 자주 경험했습니다. 그때마다 제가 어떻게 이것을 극복해야하나 하는 고민을 했는데 나름대로 터득한 방법이 있습니다. 이상하게 성경을 읽어도 마음에 스며들지 않고 기도를 해도 허공을 치는 것 같을 때는 둘 다 그만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게 가장 감동을 주었던 은혜로운 책들을 읽는 것입니다. 하루나 이틀 읽기 시작하면 마음이 그렇게 따뜻해질 수가 없습니다. 그때가 기회다 하고 책을 덮고 성경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건 서적은 불쏘시개입니다. 경건 서적으로 마음을 따뜻하게 데운 다음에 성경을 펼쳐서 보기 시작하면 성경이 비로소 읽히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묵상하고 가서 기도하면 기도가 되기 시작합니다. 묵상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에게 영향을 받는 마음이 열렬한 기도를 하나님 앞에 실천하기 위해서 필요한 그 마음과 같기 때문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수영 선수들이 두꺼운 타월로 자신의 몸을 싸고 있다가 ‘준비’ 하면 풀고 나와서 수영하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것이 온 몸을 뜨겁게 하는 땀복입니다. 뜨거운 데 서 땀을 맺히게 한 다음에 뜨거운 것을 보존하기 위해서 두꺼운 것을 뒤집어쓰고 있다가 땀이 배어있고 근육조직이 늘어난 상태에서 입수를 하면 물의 저항을 덜 받으면서 속도가 훨씬 많이 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활용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물론 차갑고 돌 같은 가슴으로 기도하러 나가서 다 녹이고 뜨겁게 한 다음에 말씀으로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닌데 경험적으로 보면 후자가 훨씬 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 그것을 통해서 은혜를 받고 마음이 따뜻해질 때, 나를 한번 뜨겁데 데운 말씀이 또 나를 데워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시 한번 묵상하면서 마음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정서로 가득 찰 때에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할 수 있는 영적인 소원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에 대한 묵상이 기도를 촉진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말씀은 묵상을 통해서만 개인에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묵상을 통해서만 진정으로 개인에게 적용될 수 있지 생각을 통해서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말씀에 대해서 똑같이 생각을 해도 ‘정직하게 살아라’하는 시리즈의 설교를 들었는데 ‘하나님께서 정직하게 살라고 하시는구나. 하나님께서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구나’하고 묵상을 하면서 ‘박 집사 그렇게 살면 안 되는데. 최 집사는 왜 맨날 거짓말만 하고 다니는 거야. 유 집사도 그렇게 살살거리고 속이다가 혼나지’라고 하루 종일 생각해도 그것은 묵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묵상은 항상 초점이 자기 자신입니다. 그래서 변화시키는 놀라운 말씀이 자신 속에 적용되는 놀라운 힘이 이 묵상 속에 있는 것입니다.
시인이 119편에서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고난 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더니 고난을 당한 후에는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했는데 이것은 자기에게만 해당되는 공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저가 고난 당한 것은 저에게 유익이라. 두드려 맞더니 새사람 됐구나. 너 같은 죄인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 참 놀랍다’하는 것은 묵상이 아닙니다. 묵상의 지향점들은 항상 하나님과 자기 자신입니다. 그래서 묵상을 일상화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절대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쓰레기 같은 인간인가 하는 것을 매일 묵상을 통해서 경험하는데, 하나님이 매일 말씀하시는데, 어디서 고개를 들고 스스로 교만해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묵상을 통하지 않고 머리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항상 말씀이 객관적인 것이 되어서 사람들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도구밖에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타고 내려와서 가슴을 움직일 때는 자신에게 적용하는 놀라운 힘이 있는 것입니다.
묵상을 통해서 그 말씀이 우리에게 적용된다고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인생의 어떤 사안에 관해서 하나님이 당신이 가지고 계신 이해와 당신이 가지고 계신 그 의지를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뭔가 개인적으로 적용이 된다는 것은 그 말씀을 통해서 내 인생의 어떤 특별한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이 이해를 가지고 계신 그 이해와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의지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게 된다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생각과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의지를 파악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거기에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묵상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그것이 넘칩니다.
내 인생에 어떤 특정한 문제가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 가졌던 내 생각은 A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묵상하고 나니까 하나님은 B라고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하나님 생각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나 자신의 생각을 포기해야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기의 힘으로 쉽게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적용은 우리로 하여금 구체적인 기도를 가져옵니다. 또 이 문제에 대해서 나는 A라고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은 B라고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내 의지를 꺾고 하나님의 의지에 순종하고 싶습니다. 그때 우리는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됩니다. ‘내 의지를 하나님 앞에 꺾고 싶습니다“하는 첫 번째 고백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도와달라고 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가 쏟아져 나올 수 있게 하는 매우 결정적인 요소와 효과를 묵상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묵상이 기도를 촉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묵상을 해서 그 묵상을 통해서 자신의 삶의 상황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듣게 되면, 그래서 그것이 마음에 움직이게 되면, 얼마나 유리합니까? 이미 묵상을 통해서 마음이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뜨거운 아궁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열렬하게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음의 싫증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열렬히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그렇게 열렬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도, 기도 제목이 추상적이거나 하나님의 이해와 의지와는 다른 쪽으로 기도한다면 많은 시간을 허비할텐데, 말씀의 묵상을 통해서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찾아냈습니다. 그러면 그 문제를 곧장 기도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개인적으로 자기에게 지적해주셨기 때문에 그 기도가 가장 간절한 자신의 직접적인 문제로 부각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묵상의 세계가 없이 하나님을 추구하는 세계라고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을 추구한다는 것이 결국은 나의 이해와 의지를 꺾고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이해와 의지를 따라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가정한다면,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불결과 더러운 것들을 정결케 하는 성령의 작용에 협력하는 것이 성화 시키려고 하는 하나님의 의지에 순종하는 성도의 의무라고 한다면, 그러한 의무를 계속 부여받고 그렇게 하기를 원하는 마음을 어떻게 성도가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마음을 열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말씀의 적용의 작용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와 회심의 역사를 보존하는 것에 더 많은 어려움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조금 은혜 받고 다시 뒤로 미끄러집니다. 말씀이 구체적으로 자신 안에 적용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그냥 분위기가 좋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분위기가 좋았다고 하는 것과 구체적으로 내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이 터치하고 지나갔다고 하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적용될 때에만 우리가 하나님의 나를 향한 강력한 의지를 느낄 수 있고 하나님이 나를 향해 가지고 계신 강력한 정서를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회개도 하게 되고 우리의 삶을 고치기도 하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묵상에 대한 실천이 없이는 여러분들이 결코 열렬한 은혜 생활을 유지해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혼자서 묵상하기는 너무 힘들까봐 완벽에 가깝도록 준비해놓았습니다. 그러니 게으르지 말고 매일 밤, 매일 아침, 여러분들이 그 책을 활용하면서 자신의 마음에 항상 담겨진 하나님의 말씀이 있도록 힘쓸 때 여러분들이 그렇게 힘겨워하는 기도 생활의 복구가 가능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제가 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해서 여러분들에게 체험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체험은 여러분 자신이 실천할 때에 그 체험이 여러분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부터 집에 돌아가서 묵상집 펼쳐놓고 천천히 읽으십시오. 가능하면 두 번 읽고 그것을 마음에 담고 잠자리에서 기도하십시오. 최악의 취침은 리모콘으로 텔레비전 끄면서 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짐승처럼 사는 것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잠들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전혀 몰랐던 사람도 1일 3선을 해야지 만 명경지수와 같은 마음이 된다고 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잘 수 있습니까? 성도가 그렇게 취침해서 되겠습니까? 달라야 합니다. 하루를 기도로 마음의 문을 연 다음에는 하루의 끝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문을 닫고, 낮 동안에는 여러 가지 세상 일로 번잡했다고 하더라도 저녁때에는 좋으신 주님에 대한 깊은 묵상 속에서 인간답게, 성도답게 잠들어야지 만 그 다음날 깨어나는 그 아침이 성도의 아침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그러면 안됩니다.
아침에 눈을 떠서 제일 먼저 어제 밤의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조금 늦게 일어나도 괜찮습니다.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아, 어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말 인간의 이 물밀 듯 밀려온 죄가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하는 정욕 때문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내게 말씀해주셨다’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동일한 위험에 빠지지 않게 해 주십시오’하고 경건하게 하루의 아침을 여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가 어렵습니까?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지 않고 참된 사람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정말 우리가 그렇게 하고 싶으면 이것은 어마어마한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새로운 갈증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어떻게 말씀에 대한 갈증들이 묵상 가운데에서 생겨나게 되는지 다음 시간에 하겠습니다.
7. 말씀의 욕구를 촉진하는 묵상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시119:147-148)"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묵상이 어떻게 우리의 영혼 안에 기도에 대한 갈망을 촉진하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말씀에 대한 묵상이 어떻게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망을 촉진하는 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깊이 스며들어서 우리의 뼈 사이에 이르기까지 구석구석 배일 때에 비로소 거룩하고 진실한 신앙생활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뼛속 깊이 스며들도록 까지 그렇게 말씀의 은혜가 배어야지 만 비로소 거룩해지느냐면, 죄를 생각하면 여러분들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원래 자신의 마음을 다 바친 감정과 사상은 뼈 사이까지 배는 법입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누군가를 사무치도록 사랑해본 적이 있습니까? 반대로 누군가를 진저리치도록 미워해 본 적이 있습니까? 한 사람이 미워지면 그 미움에서 오는 독기는 혀끝까지 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싫으면 그 사람을 생각나게 하는 모든 것이 싫습니다. 그 사람의 냄새, 말투, 입고 다니는 옷, 심지어는 그 사람이 지나가는 그림자도 안 밟습니다. 더러워서 그렇습니다. 그렇게 미움이 뼈 사이까지 배입니다. 사람을 사랑하게 돼도 그렇습니다. 적당한 때가 되어서 여러분들이 뼈에 사무치도록 그리워하게 되는-사랑하게 되는- 때가 오면 인간이 얼마나 바람 앞에 갈대와 같이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많은 부정적인 것도 있지만 또 믿음으로 잘 극복하면 그 속에서 많은 성숙을 보기도 합니다. 하여튼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들을 그렇게 뼈에 사무치도록 사랑하게 될 때 영혼이 안전하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어떻든 꼭 그렇게 정욕적인 사랑이 아니더라도 누군가를 그리스도 안에서 깊이 사랑하면 뼈에까지 사무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늘 볼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될 때 그 그리움이 사무친다는 말이 무슨 뜻이고 보고 싶어서 가슴이 저미도록 아프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우리에게 배일 때 그렇게 배입니다. 만일 죄가 우리의 겉에만 있다면 습관적인 행동으로 씻어내기만 하면 우리가 새사람이 될 수 있겠지만 죄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 안에 자리를 잡고 안으로는 영혼에 영향을 미치고 밖으로는 우리의 지성과 감정, 의지의 체계에 영향을 미쳐서 우리의 인격에 영향을 주고 결국은 바깥으로 흘러나와서 우리의 삶을 만들어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본거지는 우리의 영혼과 마음 깊은 곳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4장 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어서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고 말한 것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내면 깊은 곳을 헤아리고 파고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가 자리잡아서 그것이 전포괄적으로 우리의 내면으로부터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사실 죄는 우리의 심장에 있으니까 어떤 면에서 안전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들을 몰아낼 수 있는 방법은 외면을 어떻게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내면 깊은 곳에까지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침투시켜서 그것들을 박살내고 죽여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 죄가 자리하던 자리에 은혜가 자리해서 그 은혜가 마음에서 안으로는 영혼에 깊이 스며들고 바깥으로는 우리의 지, 정, 의, 그리고 우리의 인격, 우리의 삶으로 흘러나오게 하는 것이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하는 성화의 비결입니다.
저는 형제나 자매 모두 예쁘고 깨끗하게 하고 다녔으면 좋겠습니다. 원판이 떨어지는 것은 자기가 부지런해진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판을 잘 다듬는 것은 부지런하면 됩니다. 그런데 특히 자매들이 세수도 했는지 말았는지 머리는 폭탄 맞고 바지는 전투하다가 찢어졌는지 하고 다닐 때 왜 그렇게 하고 다니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어떤 여성이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진찰을 했더니 폐는 썩어가고 간은 곪았고 위는 뚫어졌고 장은 꼬였다고 진단이 나왔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그러면 폭탄 맞은 머리여도 괜찮고 세수 못해서 얼굴이 인디안 비슷해도 괜찮습니다. 우선 병원에 드러누워서 썩은 폐는 도려내고 뚫어진 위는 반창고라도 부치고 꼬인 장은 풀어주고 곪은 간에는 머큐롬이라도 발라서 고쳐서 건강해진 다음에 여력이 돌면 얼굴도 씻어내고 머리도 정리하고 할 수 있습니다. 며칠 못산다고 진단이 나왔는데 병은 안 고치고, 미장원 가서 머리하고 마사지하고 한다면 사람입니까? 이렇게 해서 인간이 본질적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 분명합니다. 아름다움도 중요하고 외모도 중요하지만 속을 함께 고치면서 바깥으로 나와야 합니다.
저는 좀 교만했었습니다. 그래서 얼굴을 보면 성령 충만한지 죄 가운데 있는지 거의 안다고 말했었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는 나타납니다. 그런데 호언장담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의 정확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를 겸비하게 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제가 굉장히 성령 충만했던 때인데 보는 사람마다 얼굴이 왜 그러느냐고 했습니다. 제가 거울을 보니 죄 가운데 사는 사람의 얼굴과 똑같이 푸석푸석하고 머리는 폭탄 맞은 것 같았습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등뼈가 안 맞으니까 신경을 자극해서 핏기를 다 거둬간 것입니다. 그래서 치료를 받으면 치료받는 가운데 혈색이 돌아옵니다. 그래서 치료받으러 갈 때는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의 형상이었는데 치료받고 나면 은혜 가운데 있는 사람의 모습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전도사 시절에 한번은 제 영혼이 정말 곤고해서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저와 전혀 상관없는 어떤 사람이 ‘전도사님 얼굴을 뵈니까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바깥으로 흘러 넘치는 것 같군요’ 그래서 제가 ‘네가 내 맘에 들어오면 지옥인 줄 알리라’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안 맞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요즘은 죄 가운데 사는 것같이 푸석푸석해 보이는 지체들을 만나면 ‘어디 아프니?’하고 묻습니다. 전에는 ‘너 시험 들었니?’했었습니다.
죄의 영향력이 그렇게 은밀하기 때문에 말씀이 표피적으로만 우리에게 은혜를 끼쳐서는 절대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오늘 성화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지식 하나를 여러분에게 넣어주려고 합니다. 아마 이 지식이 여러분들의 순례자의 삶을 좀 단축시켜 줄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끔 보면 예배 시간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 같고 모일 때마다 은혜를 받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어느 한 순간에 보면 자신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도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 현상들이 왜 일어나느냐 하면 은혜가 표피적인 경험이어서 그렇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댐은 숲입니다. 숲이야말로 세계에서 담수 용량이 큰 어떤 댐보다 더 커다란 댐입니다. 그래서 물을 잔뜩 머금었다가 내보내는 것입니다. 우리 어린 시절보다 지금은 개발하느라 산을 깎아서 산이 적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홍수가 나면 산이 우리를 보호해주는 것이 아니라 산이 우리를 뭉개버렸습니다. 그래서 홍수가 나면 산아래 있는 동네는 홍수의 밥이었습니다. 항상 재난의 표적이었습니다. 민둥산이니까 산이 물을 머금지 못하고 물을 한곳으로 모아서 흘려보내 버리니까 어마어마한 흙탕물과 함께 민가를 덮치거나 산이 무너져서 사태를 일으키거나 했습니다.
산이 세계 최대의 담수 용량을 가진 댐이라고 할 때 그것은 보통 산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산을 파보면 빨간 흙이 나오는데 그것을 가리켜서 처녀토(virgin soil)라고 부릅니다. 문명이 건설되거나 부엽토 같은 것들이 섞이지 않은, 사람이 살 지 않았던 순순한 흙입니다. 그 흙은 어떠한 물도 제대로 머금지 못합니다. 그 위에 나뭇잎이 떨어져서 썩고 모래가 날아오고 흙이 덮이고 다시 나뭇잎이 떨어지고 하면서 미생물이 활발하게 살면서 분해작용을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썩으면서 부엽토가 됩니다. 미생물은 처녀토 속에서는 살수가 없고 그 부엽토 속에서 양분을 먹으면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는데 그 미생물의 활동으로 인해서 흙과 흙 사이에 공간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서 그 부엽토가 점점 많이 쌓이고 거기에 미생물의 작용으로 많은 공간이 생겨나서 깊은 숲 속에 들어가서 밟으면 땅이 쑥 들어가는 느낌이 듭니다. 공간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비가 쏟아지면 미생물에 의해서 생긴 공간을 소유하고 있는 두꺼운 층의 토양들이 모두 스펀지 역할을 해서 물을 빨아들입니다.
태백산에 50센티에서 1미터 되게 스펀지를 덮어놓고 물을 붙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한없이 물이 들어가도 그 스펀지가 못 빨아들일 만큼 물을 부을 수는 없습니다. 그랬다가 천천히 내려보내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습기를 머금은 흙에는 다시 미생물이 깃들 기에 좋은 환경이 되고 물이 빠져나가고 나면 더 활발한 미생물의 활동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다시 낙엽이 쌓이면서 부엽토가 형성됩니다. 그러면서 더 많은 공간이 생깁니다. 그래서 비가 더 많이 와도 물을 머금고, 머금으면서 그 산에 생태계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여름날 몇 달 동안 비가 안 와서 바짝 가물고 땅에서 지열이 후끈 하고 올라오고 타박타박 걸으면 먼지가 푹푹 납니다. 그러다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까맣게 모이기 시작하더니 쏵 하고 소낙비가 쏟아집니다. 20분 정도 쏟아지고 나니까 거리거리에 물이 넘쳐서 도랑을 이루면서 흐르고 포장되지 않은 길은 온통 진창이 됩니다. 하수구에 소리를 내면서 물들이 흘러갑니다. 그러다 비가 그치고 해가 났습니다. 그때 질척질척한 땅 위에 서서 곡괭이를 하늘 높이 쳐들고 힘껏 내려쳐 보십시오. 그러면 불이 번쩍하고 납니다. 왜냐하면 20분 동안 비가 왔지만 단 5센티 정도도 물기가 스며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밑에는 아직도 딱딱하게 마른땅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의 은혜를 주시면 예배 시간이나 기도 시간에 은혜를 받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확 내려도 금방 쓸려 내려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반복은 되는데 이상하게 깊이 실려져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표피적으로는 죄의식도 다시 생겨나고 양심도 생겨나고 모든 것들이 활발해져서 화장은 되었는데 속에 벌레 먹은 폐, 꼬인 장, 뚫어진 위는 아직 해결이 안된 것입니다. 해결되려면 그 은혜가 그렇게 표피적인 데 그치지 말고 깊이 머금고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이렇게 표피적인 은혜의 경험들을 계속 흘려보내게 되는 것은 은혜 자체가 능력이 없어서 그런 다기보다는 그 은혜를 붙들고 계속해서 그 은혜 안에서 살려고 하는 노력들이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의 기회들을 표피적인 은혜의 체험으로 바꾸어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말씀의 묵상은 20분 동안 쏟아진 그 비를 흘려서 하수구로 보내지 않고 땅이 그것을 머금고 표피에 쏟아져서 흘러가 버릴 그 물을 붙들고 안으로 안으로 서서히 스며들게 하는 그런 작용입니다. 묵상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거룩한 성화의 삶을 사는 신자들에게 성경 읽기와 개인 기도생활이 하늘을 날아오르는 두 날개였다면 묵상과 간절한 기도는 세상의 바다를 헤엄치는 두 손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만일 목욕탕이나 수영장에 가서 한 손을 묶고 한 손으로 헤엄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한쪽으로 계속 돌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물 속에서 계속 뒤집어질 것입니다. 한 손으로는 효과적으로 헤엄칠 수 없습니다. 두 손으로 헤엄칠 때 비로소 이 열렬한 기도생활과 말씀에 대한 깊은 묵상이 헤엄쳐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의 체험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는데 이상하게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너무 표피적인 체험으로 계속 끝나면서 신앙생활 자체가 불안정하고 인격적으로도 아주 충동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생활의 습관이 몸에 배어버리고 나면 일평생동안 정말 쓸모 없는 신자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젊은 시절에 깊어지는 비결들을 터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었을 때 그것을 흘려보내지 않고 그 은혜의 경험들을 살아있는 메시지로 계속 자기 안에 흘려보내서 죄의 본거지인 마음에까지 다다르게 해야합니다. 죄가 오늘 왔다가 내일 출장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거기에 자리를 잡고 있으니까 그놈 못지 않게 오랫동안 마음에 자리를 잡아야지 만 서식지 싸움이 벌어지고 결국 축출할 것 아닙니까? 그렇게 되어서 은혜가 죄를 몰아내고 지배하게 되면 그 은혜가 안으로는 영혼에 바깥으로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 전 인격에, 그리고 삶에 영향을 주어서, 성도의 삶을 살아가도록 성화 된 크리스천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영향은 전포괄적이고 전인격적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만 전포괄적이고 전인격적인 죄의 영향으로부터 거룩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화의 길을 걸어가려고 애를 쓰면서도 묵상의 기술을 익히지 못한 사람들은 외팔로 수영을 하면서 대양을 가로지르려고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는 결코 두 팔로 헤엄치는 사람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는 많이 실패할 것이고 부지런히 애쓰나 지극히 적은 성화의 진전 밖에는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과거에 많이 은혜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 말씀이 마음에서 사라지고 퇴장해서 지성의 창고에 드러누워 있으면 성화의 삶에 조금밖에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모든 말씀이 마음의 저장고 속에서 살아 역사 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오웬이라고 하는 청교도는 하나님이 한 시대에 말씀을 보존하시는 그 고귀한 저장고를 세 개 들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책, 두 번째는 목회자의 말씀 사역, 세 번째 성도의 마음입니다. 그런 것들이 마음 안에 저장되어 있을 때 우리들이 죄를 이기고 효과적인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장인은 연장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기술자는 연장을 탓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거짓말입니다.
(예화: 동생이 친구가 하는 미장원에서 가위로 코털을 깎으려했더니 말렸다고 한다. 4 개 세트인 가위가 1200만원인데 망가질 때까지 써도 숫돌에 갈지 않는 가위라고 했다)
전문가의 세계는 끝이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도 성경을 연구하기 위해서 책을 살 때에는 한번도 책이 비싸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 사람은 머리 깎아주기 위해 1200만원을 주고 가위 네 개를 사는데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 그것을 비싸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몇 해전에는 200페이지 정도 되는 책을 6만원에 샀습니다. 그런데 제가 공부해야할 성경분야와 치명적으로 중요해서 첫날은 만지작거리다 그냥 왔지만 다음날 가서 샀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가서 한 권 더 사서 한 권은 책꽂이에 꽂아두고 한 권은 들고 다니면서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예화: 집에서 쓰는 칼은 과도와 도마 위에서 쓰는 칼 두 개면 되지만 일식 집에 가면 칼이 수도 없이 많다-광어 잡을 때 쓰는 칼, 가죽 벗길 때 쓰는 칼, 포 뜰 때 쓰 는 칼, 포 다듬을 때 쓰는 칼, 다듬은 포 썰 때 쓰는 칼, 뼈 섞인 살 자를 때 쓰는 칼, 뼈 없는 살 저밀 때 쓰는 칼, 다 틀리다)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6장에 의하면 검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악한 영들의 세력들이 도전하고 수많은 유혹이 도전하고 마음의 모든 부패한 성향과 더불어서 싸울 때 과도 하나밖에 없다면 그 싸움이 되겠습니까? 또 청룡도 하나만 마련했다면 겨드랑이 사이로 파고 들어오는 작은 병균과 같은 적을 어떻게 떨어트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다양한 칼들을 준비해야합니다. 그래서 한번에 목을 쳐야 하는 것은 청룡도가 적합하지만 가까이 다가오는 것도 싫어서 10미터 밖에서 한번에 심장을 꿰뚫으려면 표창이 적절합니다. 사람과 죄가 섞여서 죄의 포만 뜨고 사람은 살리고 싶으면 사무라이 칼로는 안되고 사시미 칼이 적합합니다. 암 덩어리가 붙었다면 암 덩어리만 떼어내야지 사랑하는 환자까지 쓰레기통에 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말씀의 다양한 칼들을 준비하고 사는 사람이 바로 성화의 길을 걸어가는 전문가입니다. 성화의 길을 걸어가는데 있어서 가끔 아르바이트처럼 나와서 한번씩 성화의 도상에 서는 날라리가 되고싶습니까, 아니면 전문가가 되고 싶습니까?
여러분 속에는 이런 질문이 떠오를 것입니다. ‘목사님, 여태껏 들은 설교가 얼마고 읽은 책이 얼마고 읽은 성경이 한 두절이 아닌데 어떻게 마음속에 다 들어가겠습니까? 286 컴퓨터에 586을 걸으라는 것인데 프로그램이 작동되겠습니까?’할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그 사람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인간의 생각이 얼마나 많은 지 아십니까?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속을 스쳐 가는 생각이 하루에 10만 가지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들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합쳐봐야 아마 600메가 짜리 디스켓 몇 장 안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없이 살 때, 또 하나님 안에서 살아도 지금 세상을 향한 염려, 세상을 향한 근심, 정보, 지식, 쓸데없는 소식, 이런 것들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습니까? 벼룩 시장에서 방 구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일간스포츠 기사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눈앞을 스쳐 가는 많은 정보들이 얼마나 여러분들 생각 속에 많이 있습니까? 우리의 이 마음은 어마어마한 저장 능력을 가진 쌓아도 쌓아도 끝이 없는 어마어마한 지식의 창고입니다. 다만 그 지식이 속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저장하고자 하는 지식이 거룩할 때에는 조금만 들어가도 버겁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많이 들어가도 항상 부족하다고 하는 것을 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황이 마음을 지켜야 할 상황이면 열고 ‘마음지킴’을 꺼냅니다. 그것으로 자기를 고치고 적들은 물리칩니다. 또 마음지킴과 상관없이 거룩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상황이 되면 용기와 결단의 청룡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정리가 됩니다. 죄가 신앙 속에 묻어서 한꺼번에 파고 들어올 때 청룡도를 꺼내면 팔을 잘라야 합니다. 그때는 칼을 꺼내서 벗겨내야 합니다. 외식을 벗겨내어 살갗 하나 안 상하게 하고 죄만 떨어트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태워버리고 새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런 칼이 많을수록 자기를 고칠 뿐 아니라 만나는 모든 사람도 고쳐주니까 복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 만든 묵상집이 다 나갔습니다. 어느 지체가 그 묵상집을 사서 나눠줬더니 지방에 있는 어떤 교사가 자기 반 학생들에게 그 묵상집의 굵은 글씨 부문을 매일 이메일로 보내준답니다. 기존에 활용했던 묵상 방법은 3월 1일에 묵상한 것과 4월 8일에 묵상한 것이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하나 묵상해가면서 교리 전체를 휘감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마음의 저장고 속에서 역사 하도록 만들어줍니다. 해라해라 해도 안 하니까 아예 한번에 하나씩 먹을 수 있도록 도시락에 넣어서 색깔별로 넣어줬습니다. 그런데도 안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스스로 성도가 되기를 포기한 삶입니다.
여러분들의 성화를 위한 삶이라고 하는 것을 가끔 보면, 운동을 해서 건강을 유지하라고 했더니 덜덜 떨리는 기계 위에 누워서 주스 마시면서 살빠지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왔으니 목사님, 어떻게 나 좀 성화 시켜 봐’ ‘목양을 통해서 어떻게 한다며. 예배의 감격으로 날 성화 시키고 목양을 통해서 날 새사람 만들어 봐’ ‘굳이 하시겠다면 내가 한번쯤 봐줄 수 있지’ 이런 식으로 해서는 성화가 안됩니다. 총체적인 순종과 일체의 부지런함으로서, 성실함으로서, 주님이 거룩한 삶을 향해 나아가도록 예비하신 은혜의 방편들을 부지런히 활용해야 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매일 묵상집을 읽으면서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그 말씀이 한번에 흘러 내려가는 민둥산의 흙탕물처럼 되게 하지 말고 빨아들이십시오. 그래서 서서히 그 말씀을 흡수하면서 이 땅을 새로운 땅으로 만드십시오. 그래서 바람에 날아온 수많은 씨앗들이 땅에 떨어져서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기에 적합한 변화된 산과 같은 심령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러면 지금은 황폐하지만 그렇게 묵상하는 가운데 여러분들의 심령에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지면서 새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좋은 것은 결코 쉽게 얻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서 성도들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그들을 당신 자신의 형상 본받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성화 되지 않고는 그 형상에 부합할 수 없고,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부단히 하나님의 말씀의 받은 은혜를 마음 깊은 곳을 실어 나르려고 하는 묵상의 실천이 필요하고, 스며들어간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자리한 죄보다는 훨씬 더 오래도록 여러분들의 마음에 깃들도록 마음을 지키고 마음을 열어서 또한 그 말씀을 흡수하는 삶이 여러분 속에 실천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여러분들은 효과적으로 죄를 이길 수 있고 죄에 지면서 사는 것이 숙명처럼 여겨졌던 삶에서 해방되어서 새 언약 안에서 그 영혼의 참된 자유를 누리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쓰레기 같은 사람들이 향기로운 사람들로 변하게 될 것이고 쓸모 없는 인생을 살아서 자신의 가치를 도무지 느낄 수 없었던 사람들이 주님께로부터 들려오는 보좌의 음성을 들을 것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8. 묵상하게 만드는 것①: 지성의 깨달음
“나로 주의 법도의 길을 깨닫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기사를 묵상하리이다(시119:27)”
지난 두 주 동안 묵상은 기도의 욕구를 촉진하고 말씀의 욕구까지 불러일으킨다고 배웠습니다. 묵상이 그렇게 좋은 것이라면 어떻게 그렇게 묵상을 할 수 있도록 자극할 수 있을까요? 묵상이 그런 것을 자극한다면 묵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좋지만 묵상이 잘 안 되는 나는 어떻게 해야지 만 묵상을 하도록 자신을 자극할 수 있을까를 가지고 몇 주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지성적인 깨달음이 있어야지 만 묵상이 된다는 말씀을 오늘 드리려고 합니다. 신학자들간에도 논쟁이 되는 것이 ‘믿음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속 시원하게 설명한 신학자가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토마스 아켄피스 같은 사람은 ‘나는 차라리 그것을 설명하려하기 보다는 뭐가 믿음인지 보여주겠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믿음을 분석하는 일 보다는 믿음이 가지고 있는 기능적인 설명에 오히려 더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믿음이 무엇인가?’는 인간의 사고 기능과 어떤 관련이 있냐는 문제와 관련지어서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엄청난 토론의 장입니다. 이것이 철학과 맞물립니다. 소위 인식론(epistemology)과 맞물립니다. 그래서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는 부분입니다.
전통적으로 믿음은 세 경로를 거친다고 봅니다. 첫째는 지적인 동의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 죄를 위해서 돌아가셨구나. 아 그렇다’하고 아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찬동입니다. 영어로 consent라고 하는 것인데 이것은 아주 적극적인 마음의 움직임이 있는 것입니다. ‘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구나. 죄 없으신 그분이 나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다니’하는 마음의 감동이 함께 일어나는 것이 찬동입니다. 세 번째 단계가 trust 혹은 어피언스 라고 말하는데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내가 어떻게 내 뜻대로 살 수 있겠는가. 나는 이제 주님만 의지하며 살아야겠다’ 자기를 맡기는 것이 세 번째인 의뢰입니다. 이것이 믿음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죠나단 에드워즈 같은 신학자는 이런 구분이 올바른가에 대해서 심각한 회의를 표명했습니다. 왜냐하면 순서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지.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하고 며칠 있다가 ‘아 나를 위해 죽으시다니’하고 또 며칠 있다 ‘이제는 내가 주님 앞에 맡겨야 되지 않겠는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식하는 것과 찬동하는 것과 의뢰, 이 모든 것들이 함께 영향을 주면서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식과 관련지어서 어떤 영향을 인간에게 미치느냐 하는 것은 하나의 커다란 철학적인 범주에 속합니다.
그래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정의하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자체를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오늘날 신앙 생활은 믿음 놓고 구원 먹기 식입니다. 좀 심하면 구원의 자판기에 믿음을 집어넣고 버튼을 누르면 구원이 탁 떨어진다는 식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일수 불퇴라는 것입니다. 야바우적인 기질입니다. 이런 식의 믿음의 정의에 대해서 성경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런 식의 믿음에 대해서 가장 강력하게 반대의견을 표명했던 사람이 죤 칼빈입니다. 칼빈은 그런 믿음은 있을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지성과 의지, 감정이 있는데 언제나 감정은 의지에 많이 속해있습니다. 감정적으로 나는 너무나 하기 싫은데 의지가 ‘나는 좋아’하며 그 일을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항상 둘이 꿍짝이 잘 맞아서 감정이 싫은 일은 의지도 안 하게 되면서 두 개가 한쪽으로 쏠려있습니다. 그리고 지성이 있습니다. 타락하기 전에는 이 지성이 셋 중에서 제일 우위입니다. 형입니다. 지성이 정확하게 인식해서 ‘저것은 옳다’하면 그 옳은 것을 인해서 감정이 기뻐하고 의지도 그 옳은 것을 유지하는 일에 봉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왔습니다. 죄가 들어오니까 이런 질서가 다 깨져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감정과 의지 두 개가 작동을 하면서 ‘지성 지가 뭔데’합니다.
그것이 오늘날 입증됩니다. 사람들이 술을 왜 먹는지 아십니까? 이성의 기능을 잠시 잠재우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욕구대로 한번 살아보려는 것입니다. 이성이 자꾸 불편하게 만드니까 술을 먹는 것입니다. 술을 먹어서 이성을 재워놓고 술김에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 것입니다. 감정과 의지가 짝이 되어서 평소에 이성 때문에 억눌려 있던 감정들이 다 쏟아져 나오면서 술 먹기 전에는 넥타이 매고 점잖던 사람이 술만 먹으면 아무 데나 오줌 눕니다. 그리고 술 먹기 전에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던 행동들을 하는 것입니다. 이성을 술 먹여서 출장 보낸 것입니다. 이러면서 인간의 모든 죄악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제가 예언하건대 주님 오시는 날까지 이 술은 절대 안 없어질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이 술을 못 먹게 하려고 수 없는 시도들이 있었지만 성공은 한번도 못했습니다. 노아 때부터 있었던 일입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우리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교육을 잘 시키면 이 이성이 발달하고, 그 두 개를 복종시키는 훈련을 받으면 어느 정도 사회의 질서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지금처럼 다 풀어버리면 말 갈 데 소 갈 데 다 가면서 말로 할 수 없는 짐승 같은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의지가 감정과 짝해서 반란을 일으켜서 이성을 타도하고 뒤집는 짐승적인 충동을 따라 사는 일들도 인간 안에 부지기수로 일어납니다.
신자인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성적으로는 그렇게 하면 죄라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그런데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고 싶으니까’ 나중에 후회할 것이라고 해도 ‘그때는 산수갑산을 가더라도 일단 하고 봐야겠다’하며 막가는 것입니다. 죄 자체가 그런 담대함과 맹렬함, 무모함, 광기 같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그렇다면 이성은 제대로 되었냐면 아닙니다. 왜냐하면 총기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이성이 하나님 앞에 깨끗한 영혼과 연결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기능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영혼이 타락하게 된 것입니다. 죄의 영향을 받아서 영적인 세계의 신령한 것들을 분별할 수 있는 총기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총명,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오성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런 영적 총명을 잃어버리고 나니까 이성이 뭔가를 판단하기는 하는데 하나님과 관련되어서 선한 것이 무엇이고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고 탁월한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기능들은 거의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이성도 원래 총기를 가지고 있을 때에는 힘있게 이것들을 통수했는데 이제 못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사상이 주입되면 약 먹은 이성이 되어서 이상하게 작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감정과 의지를 억누르고 지배한다고 할지라도 엉뚱한 방향으로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이데올로기 같은 것들이 그런 것입니다.
요즘 설교에 성화에 있어서 지성적인 이해, 의지적 결단, 이런 것들을 강조하니까 그런 것을 강조하는 것만큼 성령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냐는 신학적 혼란을 일으키는 분들이 있는데 잘못된 것들이 머릿속에 너무 많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쓸어내야 합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참된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로운 삶은 그렇게 놀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도’입니다. 도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추구하는 삶입니다. 그러니 공부를 해야합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끊임없이 탐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논리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인식할 수 있는 내적인 원동력과 내적인 가능성 두 가지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내적인 원동력은 지성과 의지입니다. 혹은 이해와 의지입니다.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둘 다 거듭난 사람들도 마찬가지지만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더욱 막가는 죄성 때문에 의지가 충동질을 하고 지성도 영적 총명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군다나 거듭난 신자에 있어서도 역시 그런 사람들보다 훨씬 더 뛰어나기는 하지만 이런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내적 원동력만 가지고는 불가능합니다. 내적인 힘을 주시는데 그 힘이 성령의 은혜입니다. 성령의 은혜가 작용할 때 그때 지성이 하나님의 참된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려고 지성적으로 탐구하고 의지가 거기에 복종하려고 할 때, 이런 노력만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역사 할 때 성령이 역사 하는 것들을 사용하셔서 어두운 눈을 뜨게 하셔서 영적인 총기를 잃어버려서 볼 수 없는 신앙의 세계를 보게 하고, 믿게 하고, 의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때 모든 동의, 의지, 찬동, 전적인 신뢰 같은 것들이 함께 구분은 할 수 있고 그것은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동시적으로 일어나면서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구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식론에서 이 문제는 치열한 논쟁의 대상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분명하게 알아야 될 것은 이것입니다. 지성의 깨어남이 있는 곳에 반드시 구원이 있지 지성의 깨어남이 없는 곳에서는 성령이 홀로 역사 하셔서 인간을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성이 구원한다는 것인가? 그것은 아닙니다. 지성을 사용하셔서 성령님이 홀로 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사도들이 성령을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구원받지 못한 새카만 불신 세계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얼마나 바쁩니까?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어디나 계실 수 있지만 먼저 가셔서 거듭나게 하시고 사도들이 가보니 이미 다 거듭나게 되어 목회만 하면 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까? 아닙니다. 사도들이 가서 외친 것입니다. ‘너희 예수 알지? 너희가 나무에 못 박아 죽인 그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보내신 메시아다’ 시편을 설명하면서 ‘고로 너희들이 나무에 못 박아 죽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자기의 죄 때문이 아니라 형벌 받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이사야의 예언대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다. 그를 믿는 자마다 하나님이 용서해주시고 구원해 주신다’할 때 ‘아 그렇구나’하는 것과 함께 성령이 역사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두 가지 극단을 절대로 조심해야 됩니다. ‘내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지성적으로 알아가려고 하고 의지가 거기에 복종하려고만 가면 내심으로 이 지성과 의지의 힘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성화 될 수 있다’고 믿는 극단적 성령 배제주의와, 또 하나는 ‘이런 모든 것들은 썩어빠진 인간의 결점 투성이 이고 허물 투성이로 구분된 것이기 때문에 아무 짝에도 쓸모 없다. 오직 영의 역사 하나면 된다’고 생각하는 극단적 지성 배제주의, 양쪽 다 경계해야 합니다.
지적인 이해가 있는 그곳에 반드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해하기만 할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아서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되고 깨닫기는 했을 뿐 실제적으로 그 지식이 그의 영혼을 움직이지 못해서 성화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상황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지적인 이해와 함께 성령이 역사 하시는 것이지 홀로 역사 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번 리져널레이션(?)이라고 하는 중생에 관한 논문 속에서 고백했습니다. 그 문제를 가지고 많이 씨름하고 ‘성령 홀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신다’를 확신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말씀의 도구 없이도 하나님이 사람을 거듭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유아 같은 경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경우에 구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거듭나지 못했을 때 자신이 어떤 멸망에 처했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해야지 만 거듭나는 지도 모르는 아무 지식이 없는 사람이 중생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기만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두 극단을 모두 조심하면서 한편으로는 성령님의 끊임없는 도우심을 의지하면서 우리 자신이 끊임없이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아가야 합니다. 불신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에는 가슴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를 먼저 겨냥해야 합니다. 복음의 총이 있다면 머리에 대고 쏴야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왜 하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지, 그래서 왜 그분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이 되었는지,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그분의 됨됨이와 그분의 행하신 일에 참여하게 되었는지를 선명하게 알도록 가르쳐줘야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이해를 해야합니다.
그런데 그러면 저절로 구원받는가? 그렇게 믿으면 지성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기가 막히게 설명을 해도 성령이 역사 하셔서 이 지식을 통해서 저의 영혼에까지 이르게 변화시켜 주시지 않으면 그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가르쳐야 합니다.
성화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성화는 처음부터 하나님이 우리를 지배하고 행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만일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정결해지고 순전해지기 위해서 마음을 먹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은 죽을 때까지 뒤로 점점 물러가서 패역한 자식들이 될 수는 있어도 시간이 흘러가면서 연륜이 여러분들을 순결한 사람으로 만들어줄 수는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의 신자가 있는데 한 사람은 아무런 생각 없이 교회 왔다 갔다 하며 신앙 생활하고 한 사람은 부지런히 지성적으로 탐구하면서 죄가 어디로부터 왔고 내가 누구이고 복음의 비밀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이치가 무엇이고 어떨 때 내가 죄를 이길 수 있고 또 실패할 수 있는지 하나하나 이치적으로 깨달으면서 신앙생활 하는 두 사람은 몇 달이 되지 못해서 좁힐 수 없는 격차를 이루면서 한 사람은 성화의 길로 들어서고 한 사람은 죄의 길로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지성을 방치한 채 신앙생활 하는 것은 아주 더러운 게으름입니다. 혐오할만한 더러운 게으름입니다.
인식론의 측면에서 보면 이렇습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자연적인 것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스위치를 올리면 불이 켜지고, 새가 날아다니니까 땅에 기어다니는 짐승이 아니라 들짐승이구나, 이것은 1이고 이것은 2구나 하는 것들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가 세워지고 선교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세상에 죄악은 가득 찼는데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창조하신 목적은 무엇일까?’하는 것들은 영적인 총명 없이는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듭난 사람도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밝게 해주셨지만 영혼의 눈을 떠서 예수도 누구신지 알고, 창조주 하나님도 알고, 죽으면 그분 앞에 서야하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총명은 뜨여졌습니다.
그런데 지적인 눈멂은 한순간에 떠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해도 ABC공부 안한 사람은 영어 할 수 없습니다. 성령 충만해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그 은혜를 체험했어도 성경 목록을 자기가 시간 내서 직접 외우지 않으면 외워지지 않습니다. 지적인 눈멂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성적인 노력이 계속 될 때 그 지성의 틀 안에서 영적 총명도 보존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영적으로 어두움을 벗어버리고 지적으로 총명해져가기 위해서는 지적으로 끊임없이 탐구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게으르게 방치해버리는 것입니다. 성화의 삶에 있어서는 더더욱 이런 것들이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이 지적인 눈멂을 극복하는 것 없이는 영적인 총기를 보존할 수가 없습니다. 자꾸 죄로 들어가고 뒤로 물러나고 죄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뒤로 물러가서 침윤에 빠지게 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정욕을 따라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의 밝은 빛이 없기 때문에 그 빛을 통해서 역사 하시는 성령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고 뒤로 쉽게 물러가서 타락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옛 생활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죽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말입니다.
오늘 여기에 보면 바로 그런 이치를 잘 보여줍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만드시는데 성령님이 주도권을 쥐고 계십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혼자 사용하지 아니하시고 거룩하게 되려고 하는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려고 하는 사람이 깨닫게 되는 것이지, 어느 날 벼락 맞듯이 불가항력적으로 벼락을 맞아서 새 사람될 것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것은 종로를 헤매면서 자기 머리에 벼락이 떨어질 것을 기대하는 것만큼이나 가능성이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찾고 그것을 깨달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깨달음을 주시고 깨닫는 그 사람들에게 성령이 역사 하셔서 죄를 이기고 신령한 삶을 살 수 있는 힘들을 제공해주시는 것입니다.
시인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나를 깨닫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주의 기사를 묵상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묵상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그 무엇이 먼저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성적인 깨달음입니다. 제가 묵상을 정의할 때 지성에 있는 지식을 마음으로까지 끌어내리는 것이 묵상의 역할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아까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똑같은 원리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의 거성이라고 할 수 있는 칼빈이나 에드워즈같은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 성경이 이야기하는 믿음이 결코 신비적인 믿음, 믿음 내고 구원 따먹기 식의 믿음이 아니고 믿음 그 자체가 이미 순종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말씀을 깨닫습니다. 지성적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영적인 총기가 모자라서 그 뜻을 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역사 하십니다. 그래서 그 영적인 총기를 회복시키셔서 말씀의 깊은 의미를 깨닫게 해주면 그것은 머리에만 머물러있지 않고 가슴에 심겨지게 됩니다. 가슴에 심겨지면 지성과 의지가 정복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심겨진 이것이 영혼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번에는 영혼에 그런 거룩한 영향을 미친 것이 거꾸로 영혼에서 마음에 영향을 줍니다. 그 마음에서 영향을 미친 것들이 지성과 의지에 영향을 줍니다. 그 지성과 의지에 영향을 준 것이 인격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 인격에 영향을 받은 것이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기는 하는데 그 믿는 것에 대해서 순종을 안 한다든지 식의 것은 처음부터 믿음의 통전적인 성격을 이야기한다면 인식으로부터 마음의 변화, 영혼의 변화, 그래서 삶 전체의 변화를 이르게 하는 통전적인 믿음의 기능을 이야기한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그런 것들이 그렇게 분리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머릿속에만 머무르는 지식은 지성의 창고에 드러누울 수 있지만 마음에 심겨진 하나님의 말씀은 조용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역사 하는 것입니다. 지성의 창고에 가만히 드러누워 있는 이 지식은 아무 일도 안하고 누워있을 수 있지만 가슴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가만히 누워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그 말씀에 사로잡혔는데 어떻게 가만히 그 마음에 누워있겠습니까? 마음은 그렇게 가만히 누워있는 곳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면 돈이 없어도 최소한 그 가게에 가서 그 물건을 들여다보기라도 합니다. 사는 것으로 전제하고 무엇을 희생하면 될 것인지를 생각합니다. 머리의 창고에 누워있는 지식은 안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성의 창고에 드러누운 하나님의 말씀은 가만히 있을 수 있지만 가슴에 심겨진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영혼에 영향을 주고 영혼에 있는 것이 다시 바깥으로 나와서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이런 통전적인 성격을 이해하면 인식론에 있어서 모든 의문이 다 풀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변화된 사람의 소유이고 또 그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새 사람이고 새 사람만이 새 삶을 살 수 있지 헌 사람이 새 믿음 갖고 헌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물론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완전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주도적인 지향성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묵상이 이성에 갇혀있는 지식을 묵상이라는 깔때기를 통해서 마음에 흘려보내는 것이라고 할 때 새로 성령의 역사로 깨닫게 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지성의 창고에만 있는 법은 없습니다. 은혜 받았다고 할 때는 단지 깨달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래서 설교 시간에 노트 쓰는 것도 저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꼭 필요한 것은 몇 자 적지만 다리 꼬고 앉아서 강의 시간에 필기하듯이 계속 적는 것은 강의실이지 예배 장소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목사님 한 분이 이스라엘에 가서 회당에 들어가려고 했더니 노트를 두고 가라고 했답니다. 강의실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했답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 하셔서 은혜를 주시면 지성에만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설교 시간에 묵상하라는 것이 아닌데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서 이것이 자기의 심령을 찌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깊이 찌릅니다. 영혼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속에 살아 역사 합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들었는지 또렷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체계적으로 수 없는 말씀을 들어야지 만 은혜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만나주신 것이 놀랍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나를 깨닫게 하셔서 정말 새사람의 길을 걸어가도록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깨달았냐고 하면 ‘그것이 문제냐 내가 은혜를 받았는데’한다면 당장은 진실하겠지만 내일의 신앙에 도움이 되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마음에 은혜가 사라지고 나서 지성의 창고를 뒤져보면 아무 것도 남아있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은혜를 받은 다음에 도대체 내게 임한 이 마음의 은혜, 이 영혼의 변화의 정체가 무엇일까를 탐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지성의 창고에 정리되어 있을 때 언젠가는 마음에서 은혜가 사라져도 창고를 열어보니까 그 지식의 말씀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그럴 경우는 묵상이 필요한 것입니다. 깔때기가 있어서 깔때기를 타고 내려오면 몇 년 전에 깨닫고 지성의 창고에 드러누웠던 말씀이라 하더라도 묵상하는 과정에 성령이 역사 하셔서 다시 마음에 부어 줘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로 마음이 갱신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음에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영혼에 다시 스며들면서 죄들을 죽이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옛날처럼 새로운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만들어버리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 체험이 첫 번째 체험보다 더 강렬할 수도 있고 증폭된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동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연말에 도서관에 부탁해서 한번도 도서관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 명단을 작성해서 교회 마당에 붙일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것은 야비한 신앙생활입니다. 거칠고 제멋대로 라는 뜻의 야비(野卑)입니다. 단정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부지런히 지적으로 탐구해야 합니다. 지성을 방치시키는 것은 영적인 게으름과 싫증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깨닫게 해줘도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무슨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좋은 일이 있어봐도 그가 정말 그 좋은 일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는데 좋은 일이 일어나면 얼마나 좋은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기가 막힌 회사에 취직하면 그 가슴 벅차는 감격이 몇 달쯤 갈 것 같습니까? 첫 월급 타면 다 사라집니다. 클레오파트라 같은 자매 만나서 결혼하면 하나님이 인도하셔서 이 자매를 만나게 해주셨다는 그 뜨거운 감격이 언제까지 갈 것 같습니까? 신혼여행 갔다오면 사라집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모든 축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 귀합니다. 원저자가 하나님이라 모두 소중합니다. 그렇지만 영혼에 내리시는 그 축복과는 비교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이 세상의 축복은 일반적인 섭리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지만 영혼의 축복(spiritual blessing)은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피 묻은 손으로 그의 영혼을 어루만지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두 달 가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그렇게 하나님을 갈망하는지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한때 예수님을 만나고 십자가를 경험했고 목자와 양의 관계가 무엇인지 깨닫고 어두움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러면 뭐합니까? 지성의 창고에 모두 누워버리고 지금은 다시 부패한 욕망을 따라서 살아가고 귀는 높아져서 복음이 아닌 설교를 듣지도 못하고 그러면서 살아가는 그 삶이 성공하면 외식하는 삶이고 실패하면 배교의 삶입니다. 마지막 종착역은 마찬가지입니다.
왜 끊임없이 탐구하지 않습니까? 왜 끊임없이 기독교에 대한 지성을 칼 갈듯이 예리하게 갈고, 주님의 말씀의 그 교훈과 깊이와 진리들을 알아가려고 영적 성장을 도모하지 않습니까? 오늘 시인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런데 필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성적 깨달음, 하나님의 말씀들, 하나님의 교훈들의 한 길을 나로 깨닫게 해주십시오’ 사역형동사입니다. 히브리어의 ‘빈’, 인식하다 혹은 통촉하다입니다.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는데 왜 지성의 창고에만 남아있느냐는 것입니다. 애매모호 하고 희미한 그림자같이 남아있는데 묵상을 하려고 해도 묵상이 안 되는 것입니다. 지성의 창고에 묵상의 깔때기를 걸고 내려보내려고 했더니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좋은 아랍 산 병에 미제 깔때기를 꼽고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런데 기름병이 빈 병입니다. 그러면 내용이 없는데 깔때기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저는 이 한 주간 동안 몹시 앓았습니다. 누워있으면서도 마음속에서 계속 솟아나는 참회가 있었습니다. ‘내가 젊은 날 얼마나 나의 지성을 방탕하게 사용하고 심지어는 그것도 하기 싫어서 내팽개치면서 살아왔는가’ ‘창조주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고 주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가 어떤 것이고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될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 시인은 간절히 원했습니다. 묵상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있기 전에 먼저 필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지성적인 깨달음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 지성적인 깨달음은 항상 영적인 광명을 동반해야지 만 빛을 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잠이 온다는 사람이 있는데 굉장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예화: 어느 어르신에게 어느 아랫사람이 오면서 잣을 사왔는데 껍질 채 아무리 우물 거려도 아무 맛도 없었다. 다시 와서 껍질을 까주니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마찬가지입니다. 글자는 알아서 성경을 읽을 수 있지만 껍질 싸인 잣을 우물거리는 것처럼 말씀 속의 비밀을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역사 하실 때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글 모르는 사람이 성경을 읽다가 자는 것이 아니라 한글 모르는 할머니들이 은혜 받고 외우고 있는 말씀에 글자를 하나씩 맞추다가 한글을 터득합니다. 성령님이 도와주십니다. 결국 성경 읽다가 글자를 깨우치는 것입니다. 외우고 있던 요절을 찾아서 글자와 대입시키다가 글자를 깨닫게 됩니다. 은혜 받고 나서 졸릴 때 성경 읽으면 정신이 새록합니다.
지난주에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기 위해서 야경이 깊기 전에 내가 깨었습니다’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는 것이 바로 그런 지성적인 노력을 통해서 성령이 역사 하시니까 깨닫는 것입니다. 깨달은 내용들을 차곡차곡 정리해서 체계를 세워놔야 합니다. 그래서 은혜가 떨어지면 지성의 창고를 열어서 정리되어있는 것 하나를 꺼내어서 주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계속 묵상합니다. 그러면 성령이 역사 하셔서 깨닫게 하십니다.
‘주의 기사를 묵상하리이다’라고 되어있는데 ‘기사’는 ‘니플라’입니다. 기이한 일이라는 뜻인데 복수로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into라는 전치사가 붙어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을 누구는 모릅니까? 주일학교 학생들도 다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다 알았습니까? 사도 바울이 죽을 때까지 알아도 다 알 수 없었던 그 비밀들을 여러분들이 다 알았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열린 교회에서는 네 살 짜리가 전적 부패의 교리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 안 것입니까? 그렇게 깊은 묵상을 통해서 깨달을 때에 하나님의 기이한 일을 이렇게 표면적으로 knowing about하는 것이 아니라 know into하는 것입니다. 그 깊은 속을 깨달아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얼마나 쉽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 구원받는 것, 천당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다가 어느 한순간 복음의 비밀을 열고 한 꺼풀 한 꺼풀 벗겨 내려갈 때 우리는 그 오묘한 복음의 세계, 그 복음의 비밀스러운 신비의 세계를 접하면서 너무 감탄하게 됩니다. 그러한 복음의 비밀들을 터득해 가는 과정 속에도 역시 동일하게 지성적인 탐구와 의지의 복종, 그리고 그것을 축복하시는 성령의 강력한 선도적인 역사, 이것들을 통해서 그 복음의 비밀들을 알아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자 했다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시스 크리스트’ 즉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핵심이고 그것의 구약적인 표현이 ‘다트 엘로힘’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만 그가 신자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지성적인 탐구가 우리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떠한 지적인 탐구도 없고 신앙에 있어서 은혜를 받으면 그냥 받은 것이고 -소 뒷다리에 개구리 맞은 격으로- 어떻게 하다가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죄에 미끄러지면서도 자기가 왜 미끄러지는지 탐구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물어보면 맨날 모른다고 합니다. 모른다는 말 잘하는 사람들이 다 지옥에 있는 사람입니다. 지적으로 게으른 사람들입니다. 방탕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 세상에 대해서는 얼마나 치열하게 알려고 지성이 활동하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핸드폰 하나만 사도 매뉴얼 갖다놓고 밤새 익힙니다. 그런데 영적인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그렇게 탐구합니까? 수치스럽게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교육의 혜택을 잘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자라던 40년 전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을 정도로 교육을 잘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에게는 더 큰 책임이 있습니다. 이 시대를 본받으면서 그렇게 육체적인 충동을 따라가며 사는 젊은이들과 같이 허울좋은 신앙생활을 하면 솔직히 이야기해서 교육관 사기 위해서 헌금하는 성도들의 돈이 아깝습니다. 그 속에서 무슨 미래가 있겠습니까? 차라리 핸드폰이나 만들어서 팔아먹는 게 낫지 짐승과 같은 후세를 양산해서 이 세상에서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그러니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여러분 손에는 성경이 있고 한 손에는 하나님의 이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책과 그 은혜가 적용되어서 정복되어야 할 세상에 대한 지식들이 함께 들려져 있어야 합니다. 부지런히 탐구하고 공부해서 각자 있는 그 영역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드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살아가고 밤늦게까지 시간을 방탕하게 사용해서 인터넷에나 빠져서 보내고 이렇게 저렇게 이 세상의 향락을 즐기는 데 여러분들이 벌써 탐닉하고 있다면 이미 여러분들은 맛 잃은 소금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꺼져 가는 등불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눈빛 속에는 하나님의 눈빛이 빛나고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총기가 그 눈동자 속에 서려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의에 대한 갈망이 그의 가슴속에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부패와 죄에 종속된 채로 살아가는 인간이, 부패성도 여전히 지니고 있는 이 유한하고 더러운 본성을 가진 인간이 그렇게 거룩하고 진실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매일매일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고 죄의 정체를 해부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지적인 갈망과 도전의 의욕이 없이 어떻게 그런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아무렇게나 얻어지는 법이 있지만 참으로 소중하고 귀한 것들은 힘들이지 않고 얻어지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반드시 거기에는 희생이 필요한 것입니다. 탐구가 필요합니다. 다시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손에는 성경 어느 부분이 펼쳐져 있습니까? 여러분의 손에는 여러분들을 거룩케 하는 어떤 지식들이 쓰여진 책들이 들려져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여러분의 마음의 창고에는 어떤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 움직이고 살아서 역사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여러분들의 영혼에 끊임없이 변화를 가져다주고 영혼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여러분들의 인격과 거룩한 삶에 전달해주고 있습니까? 어떤 말씀입니까?
젊은 날에 허황된 세계 선교를 꿈꾸고 세상 변혁의 꿈을 꾸다가 정말 하찮고 쓸모 없는 그리스도인으로 전락해버리는 수많은 젊은이들을 봤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진실한 성도의 삶, 거룩한 신자의 길, 그것은 결코 희생 없이 아무렇게나 획득되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는 진지한 탐구 속에서 지성을 연마하고 받은 바 은혜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믿게 되었으니 하나님의 은혜지만 나는 왜 이 기독교를 믿을 수밖에 없는지를 스스로 변증하고 자기에게 확신시키고 은혜의 비밀이 무엇이고 복음의 비밀이 무엇인지 어렸을 때는 형체만 알아보던 복음의 진리들을 묵상을 통해서 깊이 그 비밀들을 터득하게 되는 그런 놀라운 깨달음의 진전이 없이 영적 성장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저는 요즘 몇 주간동안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한때 교회에 와서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났던 많은 지체들이 그럭저럭 교회 생활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분통이 터져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깨달은 복음의 진리이고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럭저럭 신앙생활하고 있습니까? 지금도 그 빛을 던져주면 정말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 빛 가운데에서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지 아십니까? 우리는 일평생 빛의 사람들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와 스치듯 만난 사람들이 이 영적 광명을 전달받고 영혼의 어둠 속에 있던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비치는 이 참된 하나님의 빛을 발견하고 지적으로 눈먼 사람들에게 우리의 지성을 나눠줘야 합니다. 외치는 자 많건마는 생명수는 말라 있는 이 시대가 불쌍하지 않습니까? 그들 가운데는 진리를 가르쳐 주어도 짐승처럼 살 사람이 물론 많이 있지만, 우리처럼 복음의 빛을 받으면 정말 충성스럽게 일평생 주님만을 위해서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이 빛이 세상의 부귀 영화보다도 너무 소중한 것입니다.
로마에 가면 성 쎄바스티아노 시신을 모신 예배당이 있습니다. 전해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그 사람은 로마 황제의 근위 대장이었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약혼녀를 통해서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내노라 할만큼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신분을 감춘 채 카타콤에 있는 성도들에게 먹을 것들을 공급해주기 위해서 힘썼습니다. 결국은 비리 아닌 비리가 탄로 났습니다. 황제의 명에 의해서 수많은 부하들이 그를 세워놓고 활을 겨누었습니다. 결국은 수백 개의 화살을 맞고 고슴도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십니까? 하늘을 향해 눈을 뜨고 웃으면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가 이 세상의 무엇보다 귀하기 때문에 그분의 그 속죄의 은혜 안에서 누리게 된 이 구원의 은총이 잠시 있다 사라질 황제의 근위 대장과는 비교될 수 없는 영광스러운 명분이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버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장난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의 명분을 얻은 이것이 장난입니까? 우리가 이미 얻은, 그리고 앞으로 얻게 될, 그리고 누리게 될 하나님 나라의 이 영광스러운 유업과 기업이 그렇게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이 주신 바 유업을 누리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진리를 탐구하고 영적인 성장을 도모하는 그런 지성적인 그리스도인의 길을 걸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은 묘목 같은 여러분들을 거목처럼 만들어서, 여러분들이 지금은 나같이 부족한 사람에게 신앙의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이 되었지만 후일 저와는 비교될 수 없는 거목들이 되어서 수많은 제자들이 여러분 앞에서 인생의 참된 도리와 복음의 비밀 듣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나라도 가까울 것입니다.
9. 묵상하게 만드는 것②:묵상의 의지
“나로 주의 법도의 길을 깨닫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기사를 묵상하리이다(시119:27下)”
지난주에는 묵상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성의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가지고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묵상하기 위해서는 지성의 깨달음이 있어야지 만 묵상이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묵상은 지성에 있는 것을 마음으로 내려 보내는 깔때기와 같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 깔때기에 부을 말씀이 위에 없으면 아무리 묵상을 해도 그것이 가슴에 내려갈 수가 없습니다. 이 중요성을 말씀드리면서 짤막한 한 문장으로 설교를 요약했는데 ‘머리에 가만히 드러누운 지식 치고 우리의 삶에 역사 하는 것이 없고 마음에 살아 역사 하는 지식 치고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지식이 없다’ 그래서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우리의 영적인 성숙을 위해서 너무나 필요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말씀의 묵상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두 번째 필요한 요소가 무엇이냐면 의지적인 노력입니다.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랑은 생각되는 것입니까, 생각하는 것입니까? 정말 사랑하면 그 사랑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생각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사랑인데 그러면 왜 목사님은 몇 주전에 사랑은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까?’하는 질문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생각되는 것이 원래 진정한 사랑인데 우리는 하나님처럼 그렇게 완전하지 않아서 무엇인가 올바르고 선한 것을 향한 좋은 사랑은 수시로 위협을 받습니다. 그때에 생각되는 것을 보호하고 그 생각에서 멀어지는 것을 붙잡기 위해서 의지적으로 생각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처음 커피를 마시는데 맛이 있었습니까? 맛 하나도 없습니다. ‘어른들은 왜 이렇게 쓴 것을 그 비싼 돈을 내고 이 컴컴한 지하실에 와서 마실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맛이 있습니다. 우리 몸에 이미 커피의 성분을 좋아하는 기운이 구석구석 배어있기 때문입니다. 커피를 아주 좋아할 때는 커피를 제시간에 안 먹으면 심정적으로 불안을 느낄 정도로 그렇게 커피가 좋고 비가 오는 날에는 꼭 마셔야 합니다. 마시고 집에까지 걸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마셔야 됩니다. 그럴 정도로 우리의 몸이 커피를 부르는 것입니다.
담배를 맨 처음 배울 때 즐거웠습니까? 재미 하나도 없습니다. 담배를 처음 배울 때 하나 사서 빨아들이면 기침이 나오고 콧물이 나오고 눈이 맵습니다. 몸 전체가 그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얼마나 그 담배가 피우고 싶은지 모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눈을 아직 뜨지 못했는데도 손을 뻗어서 윗목에 있는 담뱃갑과 라이터를 찾습니다. 아침에 눈을 떠서 ‘어찌 담배를 피우지 않고 하루를 시작하리오’하는 결심을 가지고 담배를 찾는 것이 아니라 깨고 나면 몸이 담배를 부르는 것입니다.
술 먹는 사람들이 아침에 해장술을 마신다고 하는데 웃기는 것입니다. 어제저녁에 먹은 술이 덜 깨서 숙취 기운이 남아있는데 거기에 술을 집어넣어서 내장 속을 푼다는 뜻입니다. 사실 그것이 말이 됩니까? 사람의 몸이라는 것이 술에 취하고 알코올기가 남아있는 가운데 깨게 되면 뜨뜻한 국물을 부릅니다. 뜨뜻한 국물을 먹고 나면 그 다음에 술을 부릅니다. 그래서 핑계 김에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아침에도 먹고 낮에도 먹고 밤에도 먹다가 알코올 중독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 늘 생각난다는 것은 최상의 영적인 삶입니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해보면 알지만 그 사람이 있어야지 만 그 사람이 생각나는 것은 확실히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없는데도 계속 생각나는 것, 무엇이든지 그 사람과 연관이 되고 나는 안 그러고 싶은데 계속 사랑하게 되는 것, 그리고 그렇게 생각이 이루어지는 것, 그것이 진짜 깊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사랑하는지는 함께 있을 때는 잘 모르고 헤어져보면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회심의 은혜를 경험하고 주님과 깊은 사랑을 나누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에 빠졌을 때와 똑같은 연애감정이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배이게 됩니다. 이런 경험을 못해본 사람에게는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 속히 회심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고 이런 열렬한 사랑에 한번 붙잡혀 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무엇을 봐도 주님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꽃을 보면 ‘어쩌면 이렇게 아름다울까. 주님이 창조 하셨구나’하고 2-3주 지나도 계속 꽃이 있으면 ‘어쩌면 주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모습을 잃지 않고 이렇게 3주씩 있니. 난 3주 동안 세 번 변했는데’합니다. 다음 날 왔더니 다 시들었습니다. 그러면 ‘세상에 너는 어쩌면 너 자신을 다 시들게 하기까지 주님을 섬기냐. 나는 내 몸을 너무나 많이 아끼는데’합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정신이 좀 나가고 얼빠진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누구든지 사랑을 하면 그렇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하면 돌과도 대화하고 흐르는 물과도 대화하고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과도 대화하고 불어오는 바람 속에 함께 실리는 풀벌레 소리와도 대화를 합니다.
그렇게 사랑에 빠지게 될 때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생각이 되는 것이 고도의 성화의 삶을 살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최선의 영적인 삶이 그렇게 생각되는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서로 감정적인 연합이 없이 생각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예화: 결혼한 부부가 한사람은 우리나라에 있고 한사람은 지구 반대편에 있어서 만 날 기약도 없이 산다고 했다)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는 자체가 참 신기합니다. 사랑은 연합의 감정입니다. 연합의 감정은 노력을 해서 생각이 나는 것이 아니라 연합되어 있으면 저절로 생각이 납니다. 계속해서 생각이 납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으로 생각되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를 받고 믿음 생활 잘 해보려고 하는데 자꾸 세상 생각이 납니다. 특히 봄이 다가오고 있는데 이 때는 젊은이들이 아주 쉽게 영적 침체에 빠집니다. 그래서 사단이 대목 보는 때입니다. 함께 연애하고 같이 사귀면서 지내도 사랑을 워낙 뜨겁게 하고 연합이 튼튼하면 봄이 와도 문제가 안 됩니다. 꽃 보면 상대방이 생각나고 하니까 아무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런데 연합이 약간 느슨해지면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가을보다 봄에 헤어집니다. 왜냐하면 심리적으로 여자의 변심은 봄에 이루어지고 남자의 변심은 가을에 이루어집니다. 그것을 방지할 수 있는 비결은 ‘너는 나에게 속한 사람이고 나는 너에게 속한 사람이라’고 하는 충분한 사랑의 표시를 하고 연합의 감정을 갖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단이 아무리 ‘폭탄 세일’ 써 붙이고 여러분의 영혼을 노략하려고 소리를 질러도 여러분들이 이 시기에 예수님과 깊은 연합을 갖고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너는 내게 속한 사람이라’고 증거를 받고, 또 여러분들은 주님을 향해서 ‘나는 주님에 속한 사람입니다’라는 성령의 인침의 싸인을 가지고 살아갈 때 봄이 무슨 상관이 있고 가을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봄에 꽃이 활짝 피고 사람들의 마음이 흔들릴 때 ‘나는 주님과의 연합이 있기 때문에 꽃처럼 아름다운 계절에 나도 주님처럼 사랑스러운 꽃과 같은 신앙을 가진 신부가 되겠다’고 생각하면 흔들릴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서 가을에 변심하는 많은 남자들이 있는데 다 바보들입니다. 신앙적으로 손해를 보는 사람들도 바보입니다. 그렇게 주님과의 연합을 굳게 이루고 살면 떨어지는 낙엽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낙엽 속에 맺혀있는 아름다운 열매가 보입니다. ‘이 가을이 쓸쓸한 계절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 고독 속에서 맺히는 열매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고 주님께 더 사랑 받고 싶습니다. 과실을 많이 맺으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린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연합을 이루고 나 자신의 신앙의 인격이 여물어 가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하면 봄이면 봄이어서 주님을 사랑하게 되고 가을이면 가을이어서 더욱 주님과 연합되는 것입니다. 사단이 봄에 오던 가을에 오던 아무리 ‘폭탄 세일’이라고 써 붙이고 소리를 질러도 울고 가는 영적인 승리를 경험하게 됩니다.
사랑은 그렇게 생각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나 그렇게 생각이 되어집니까? 이 세상을 생각하고 죄를 생각하고 부패한 욕심에 따라서 떠오르는 생각에 빠지면서 주님을 멀리 떠나기 위해서는 결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일날 은혜 많이 받고 하나님 생각만 하다보니까 월요일 화요일까지 예수님 생각밖에 안 나는데 너무 치우쳤다. 화요일부터는 세상 생각도 좀 해야지’한다고 세상 생각이 됩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리 성화 되어도 안에 내적인 부패성이 살아있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언제나 쉽습니다. 그리고 진짜 마음속에서 저절로 하나님이 생각되어지는 삶은 고도의 분투하는 성화의 삶의 결과이고 그것도 안전이 언제나 확보되어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새 언약에 깃들여있는 우리를 향한 약속의 보증의 한계입니다.
새 언약을 주셔서 우리들이 그 언약 안에 믿음과 함께 들어오게 되었지만 자동적인 성화나 저절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누리면서 실제적인 사랑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도록 자동으로 그 모든 것을 보장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항상 분투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세상은 애써서 생각하려고 하지 않아도 은혜가 무너지면서 부패성이 작동을 하면서 계속 세상에 대한 생각이 우리에게 밀려와서 생각되어집니다.
그러나 신령한 것과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다릅니다. 여전히 부패한 본성이 있기 때문에 노력을 하고 이것을 지키려고 애를 쓰면 계속 하나님이 생각되어지고 그 하나님을 생각하는 묵상 속에서 살 수 있지만 마음을 지키지 않고 죄에 자기 자신을 방치하고 게으르게 살게 되면 미끄러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신뢰하던 마음도 잊어버리고 사랑해야할 자기의 본분도 망각하고 계속해서 죄 가운데로 빠져 들어가고 세상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급기야 하나님이 생각되던 사람이 하나님이 생각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죄가 생각나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은혜의 상태도 여러 가지입니다. 주님의 신령한 은혜로 가득 차서 영적인 사고 자체가 하나님을 끊임없이 생각하게 되는 영혼의 상태를 유지하는 사람들은 죄를 지을 수 있는 환경에 갖다 놓아도 죄를 안 짓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요셉입니다. 죄를 지을 수 있는 충분한 환경이 갖춰졌습니다. 아무도 없는 방에 보디발의 아내와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은혜로 무장을 했습니다. 항상 하나님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여자가 '우리 둘밖에 누가 있느냐. 함께 자자'했으나 요셉이 하는 말이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계시는데 어떻게 내가 하나님 앞에 죄를 얻을 수 있겠느냐’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의 정상적인 영적인 삶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생각되어지고 그런 상태가 되면 죄를 지을 수 있는 환경에 갖다 두어도 분투하고 싸우면서 죄를 절대 안 짓습니다.
그런데 은혜가 많이 떨어져서 하나님이 저절로 생각되는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저절로 죄가 많이 생각되는, 마음의 틀 자체가 이미 신령한 순결을 잃어버리고 세속적인 틀을 많이 소유하고 있으면 죄를 지을 수 없는 환경에 놓이면 죄를 안 짓지만 지을 수 있는 환경에 놓이게 되면 죄를 짓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다윗입니다. 산책을 하다가 여인이 목욕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 사건이 안 일어났었으면 다윗은 범죄 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범죄 할 수 있는 여건이었습니다. 또 범죄를 해도 목욕하는 사람이 왕비이고 자기가 신하였다면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할 수 있는 환경에 있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살아 역사하기 때문에 아무리 할 수 있는 환경에 놓였다고 하더라도 거기를 피했을 것이고 그 죄에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가 남아있었지만 그 은혜가 죄를 지을 수 있는 환경에서 그것을 극복하고 뿌리치기에는 이미 약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죄 지을 환경에 놓이게 되면 죄를 택하는 것입니다. 더 심해지면, 은혜가 모두 사라지고 죄에 대한 욕망이 가득 차서, 하나님이 잘 생각이 안 나는 정도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서 죄 지을 수 있는 환경이 되면 당연히 죄를 짓고,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환경, 죄를 짓기 힘든 환경에 그를 갖다 놓으면 황무지를 개척해서라도 죄를 지을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합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짐짓 범죄 하는 것’입니다 ‘짐짓’이라는 말이 ‘계획 속에서 범죄 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죄는 구약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여러분에게는 이런 질문이 생길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이 땅에는 그런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데 어마어마한 죄가 저질러지겠네요?’ 사실입니다. 어마어마한 죄가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엄청나게 많은 죄가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황무지에서 건수를 개척해서라도 죄를 짓고자 하는 강력한 죄에 대한 욕구가 있다고 하더라도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가져다주는 기쁨과 즐거움이 그 죄를 짓기 위해서 여건을 조성하는 데에 지불되는 수고와 불편함보다 작을 때는 죄를 안 짓습니다. 예를 들어 물질적인 욕망을 강력하게 가지고 있는데 누가 ‘1억을 금방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알려줍니다. ‘옆에 있는 사람의 주머니에 1억 짜리 수표가 있어’하면 ‘그것을 어떻게 하면 꺼낼 수 있을까? 나갈 때 골목에서 어떻게 할까?’하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행을 합니다.
또 ‘1억을 확실하게 훔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몇 년 전에 등산 대원 하나가 수표 1억 짜리를 넣고 등산을 하다가 산에서 실족되었는데 그 시체가 지금도 확실히 거기 있다. 가면 분명히 찾을 수 있고 호주머니에 수표도 들어있다. 그런데 그 산이 8800미터 에베레스트 산이다’한다면 그것을 훔치러 가겠습니까? 가면 확실히 찾을 수 있지만 네팔 비자 내야지 비행기표 끊어야지 산소통을 메고 8800미터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를 생각합니다. 불편함이 죄가 가져다 줄 즐거움보다 훨씬 크면 안 합니다. 그것이 죄에 대한 교리 중 ‘불편함의 논증’이라는 제목 속에서 거론되는 내용입니다.
그렇게 측량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수많은 사람들의 죄가 마음에 가득 찼는데도, 아이가 막 달이 된 것처럼 죄가 가득 찼는데도, 이것이 산출되지 못하도록 측량할 수 없는 수많은 방법으로 하나님이 이 죄의 산출들을 막으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이만큼이나 단정한 가운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과연 안전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차선책은 우리가 어떻게 하든지 유혹 받지 않는 환경 속에 있는 것, 경건한 환경 속에서 자라는 것이 두말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안전한 것은 어느 환경에 있던지 우리 안에 역사 하는 은혜의 통치가 워낙 강력해서 범죄 하지 않을 수 있게 되는 삶입니다.
어떻게 그런 삶이 가능하다는 것입니까? 시인이 시편 119편에서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했습니다. 히브리말로 ‘차판’ ‘감추는 것’입니다. 부드러운 재로 불씨를 묻어두듯이 마음속에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차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그 은혜의 강력한 통치를 받으면서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하나님을 생각하고자 하는 의지적인 욕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첫 번째 말씀드린 상태에서 세 번째 상태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는데 과정을 차단하는 것이 의지적인 노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젊은 시절 주님을 만나고 은혜의 길에 들어서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정말 싫은 사람을 만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복음을 전하는 위치에 있고 또 직장에서도 영적인 인도자의 위치에 있으니까 세상사람 직장 생활하듯이 수틀리면 멱살을 쥐고 이 자식 저 자식 하고 아니면 옥상에 올라가서 주먹다짐을 하거나 저녁 때 술집에 가서 거나하게 걸치면서 형님 아우 할 수 있는 처지는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살면서 싫은 것은 싫은 것입니다. 힘들게 하는 사람은 몰상식하게 힘들게 합니다. 그럴 때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뭔가 언짢은 관계 속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기도의 문이 자꾸 막힙니다. 그때 제가 하는 방법은 선물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한번 실천해보십시오. 선물을 하면 마음이 좀 풀어집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받게 됩니다. 싫지만 마음을 열고 한 장의 편지를 써 보내면,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편지를 썼는데 마지막에 마침표를 찍고 나면 항상 움직이는 것은 내 마음입니다.
이런 것은 결혼하고도 제가 실천을 했습니다. 아내가 항상 내 마음속에 생각되면 좋은데 그렇게 안 됩니다. 그러니까 힘들 때는 편지를 쓰거나 선물을 줍니다. 그렇게 함으로 제 마음속에서 ‘내가 누군가에 속해 있고 누군가가 내게 속해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입니까? 결혼을 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백년을 해로해야 합니다. 해로한다는 것은 한 굴에서 산다는 뜻입니다. 한 구덩이에서 같이 살다가 그냥 한 사람 한 사람 죽는 것이 결혼 생활입니다. 그런데 요즘 젊은 여성들은 옛날 같지 않습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다 감정이 살아있는데 키도 크고 사람도 괜찮아 보이는 남자를 만나면 생각을 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유부녀라고나 할까’하며 접어야 합니다. 남성도 마찬가지입니다.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 잘생긴 배우들을 보면서 한없이 넋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항상 ‘나는 이미 가정을 가졌다고나 할까’ 생각을 해야 합니다. (예화: 나이 칠십이 넘으신 분이 ‘세계 만국을 돌아다녀 봐도 우리 아내처럼 자상하고 나를 사랑하고 싹싹한 사람이 없다. 오십 년이 넘게 살아와도 한번 다투지도 않고 내 말은 거스른 적도 없고 정말 그런 사람이 없다. 그런데 이 늙은 할머니가 마지 막으로 나를 위해서 할 수 있는 분명한 봉사가 하나 있는데 그것을 왜 빨리 안 하 는지 모르겠다’고 농담으로 말했다)
웃자고 하는 얘기지만 그 속에 우리 인간의 감정의 체계들이 묻어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본성에 한편으로만 어울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안 어울립니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그분의 손에 의해서 빚어졌고 창조되었고 우리의 원래의 아버지여서 마음속에 그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리워하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본성에 부합합니다. 그것을 칼빈은 종교의 씨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본성에 잘 안 어울립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는 부패한 존재로 이 세상에 태어났고 태어나면서부터 부패한 존재로 하나님에 대한 반감을 가진 채 주님과 주님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세상과 어울려 짝하면서 일생을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성 상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이 내 마음에 생각되는 것이 잘 안 어울립니다. 그러니까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세계의 대표적인 특징이 contradiction입니다. 수많은 모순율로 가득 차 있어서 자기 자신도 자기를 설명할 수 없는 불규칙적인 불가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죄인의 내면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헤르만 바빙크 같은 신학자가 ‘인간은 정말 불가해한 존재다. 한편으로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말할 수 없이 열망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거절하고 완고하게 도망 다니는 것이 인간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본성상으로 하나님을 그렇게 깊이 생각하고 그분이 생각되는 이것이 어떻게 보면 우리의 본성에 부합하지만 오히려 본성에 부합되지 않는 면이 훨씬 더 많은 것입니다. 본성에 부합되는 면이 너무나 많다면 한번 거듭나고 나면 성화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그 본성에 부합해서 ‘한번 만난 주님을 내가 왜 버리랴 그분밖에는 없다’하며 열렬하게 붙어서 살 것 아닙니까?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습니까, 아니면 그 반대입니까? 오히려 그 반대가 현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 중심에 있으니
유혹이 흔들어도 무너지지 않네.
주님과 함께 할 때에 두려움 사라지듯
주님이 항상 나를 지켜주시리
그래서 주님을 생각해야합니다. 깊이 생각되기 위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잊지 않기 위해서 주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저절로 생각되는 상태에서 세상이 저절로 생각되는 상태로의 이동을 막는 차단제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물이 흐르는데 기울어져 있을 때는 아래쪽에 물이 고입니다. 그러나 돌을 막으면 못 흘러갑니다. 묵상을 통해서 의지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생각되는 상태에서 세상이 저절로 생각되는 상태로 전이하지 못하도록 그 물길을 막는 보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오직 믿음을 따라 살았던 구름같이 허다한 수많은 사람들의 영웅적인 삶을 이야기한 다음에 그러므로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이 우리에게 있으니 믿음의 주여 온전케하는 이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생각이 되고 그래야지 예수 그리스도께 사로잡히고 그래야지 그분께 붙들려서 믿음의 허다한 증인들과 같은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지킴의 교리’는 우리들이 마지막 숨이 떨어지기 직전까지 붙들고 살다가 죽어야할 지팡이와 같은 교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을 계속하면 나중에 생각이 되는 상태가 되지만 생각하기를 그만두면 하나님이 생각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세상이 저절로 생각이 나게 됩니다.
영의 생각은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희랍어 원어로 ‘영의 생각’은 동사로 되어있습니다. ‘spiritually mindedness’입니다. ‘mind’가 ‘생각하다’ ‘생각나게 하다’이고 거기에 ‘ed’가 붙어서 수통태가 되었고 ‘신령하게 생각되어지는 것’ ‘영적으로 생각되어지는 것’은 ‘life’, ‘생명’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fleshly mindedness’입니다. ‘육’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육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과 부패성으로 물든 욕망을 가진 부패한 육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육신적으로 생각되어지는 것, 그것은 곧 ‘death’,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욱신적으로 생각되어집니다. 그러면 ‘사망’인데 영혼의 생명이 모두 고갈되어버리고 사망의 상태가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마음과 육체가 원하는 대로 살면 거듭난 사람이라도 영혼이 파산하고 사망의 상태에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마 자신의 영혼의 상태가 완전히 고갈되어버린 상태를 경험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death입니다. 그것은 마치 로마서 8장에서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으려니와’에서의 death입니다.
그러니까 가만히 내버려두면 안 됩니다. 회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부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에서 신자가 부패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와 경로가 있습니다. 회심의 은혜의 통로가 막히고 그 은혜로부터 멀어져서 부패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한 가지는 신앙이 머리 속에서 지성적으로 개념으로만 축적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비밀을 이미 터득했던 시인이 그렇게 주의 말씀을 자기의 마음에 두려고 애를 썼던 것입니다. 밤중에 일어나서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고 하루에 일곱 번씩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연단한 은보다도 더 귀하게 이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려고 했던 이유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렇게 지성의 사고 속에서 지식이 차가운 개념으로 축적되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부패하는 이 일은 절대로 영적인 체험이 깊지 못하거나 말씀에 대한 깊이가 거의 없는 신자에게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워낙 무지하면 지적으로 쌓이지도 않습니다. 그냥 깡통 들고 왔다 갔다 하는 격입니다. 1, 2, 3번하며 정리되려면 그래도 왕년에 하나님을 찾았던 사람입니다. 저절로 하나님을 찾게 됩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 없이 하나님에 관한 교리를 축적해놓을 수 있겠습니까? 경험이 전혀 없이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다못해 탁구를 쳐도 재미있어야 계속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만난 경험은 있는데 그것이 머릿속에서만 정리되고 가슴으로 안 내려오는 것입니다. 책은 수없이 읽고 번역하고, 혹은 번역한 것을 읽고 공부를 하고 1, 2, 3권 책을 떼어도 머리 속에서 개념으로만 남을 때 그것이 은혜로부터 부패하는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원인입니다.
저녁에 집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회개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조금 생각한 것입니다. ‘새벽에 생각하고 하나님을 새카맣게 잊어버리고 있다가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야 주님이 생각 나서 다시 일어났습니다. 제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고 고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여러분들을 잊어버린 적이 있습니까? 어느 날 기도하러 갔는데 ‘너라는 인간도 거기에 있었느냐’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내가 너를 알았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태어나기 전부터 만세 전에 내가 네 이름을 알았노라’하셨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생각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성품 속에서 하나님도 우리에게 그렇게 생각되어지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에게 우리가 저절로 생각되어지고 또 우리에게 하나님이 생각되어져서 서로 생각나야 합니다. 시편 42편에 나오는 시인의 고백이 그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야로 눈물을 음식으로 삼았습니다’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생각에 깊이 빠진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환경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환경이니까 더 하나님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가진 사람입니다. 진정으로 살아있는 신앙은 이런 갈망이 살아있을 때 진정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 영적인 관리를 잘못해서 올바르지 않은 방법으로 연애할 때 백발백중으로 영혼에 커다란 패배를 가져다주는 이유는 그런 것들에 대한 이치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마음이 어느 한쪽으로 쏠려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고 하나님 안에서 장래를 약속한 연인으로서 연합을 이루는 것들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과의 연합과 형제자매와의 연합이 대결관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결국은 세상 사랑입니다.
의지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너무나 사랑스러우면 더 이상 얘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가변적입니다. 수시로 세상이 이것을 빼앗아가려고 합니다. 노략질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형 동사가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의 나약함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되는 것과 세상이 저절로 사랑되는 것, 둘밖에 없다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을 사랑하라’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라’ ‘여호와를 공경하라’ ‘세상을 미워하라’는 말씀을 주님께서 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루를 사는데 주된 기도 시간이 새벽이고 새벽에 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은혜를 받습니다. 은혜의 체험에 따라서 틀리지만 오후에 고갈이 오기 시작합니다. 저녁 때 집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잠자리를 정리하는 기도도 간단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혼은 새벽에 잠깐 기도한 것으로 24시간을 지키기는 너무 힘겨운 것입니다. 그때는 결국 하나님이 생각되어지는 것이 점점 쇠퇴하고 세상이 생각되어지는 것들이 점점 많아집니다. 신령하게 생각되어지는 ‘spiritually mindedness’는 점점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fleshly mindedness’가 많아집니다. 하루 중 적절한 순간에 수시로 맥을 끊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출근길에 붐비는 전철의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하나님, 오늘 이 아침의 시간에도 주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아무 것도 아닌 인간이 구원의 은총을 입은 것을 생각하면, 이 기차가 달려가는 것처럼 제 인생도 달려가는데 내려야할 종착역이 확실한 것처럼 제 인생의 끝도 너무나 분명하고 제 인생의 열차가 멎을 때 그 플랫 홈에서 주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떻게 살아야 주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합니다. 1-2분밖에 안 걸리지만 이것이 아주 치명적으로 중요하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생각나게 만듭니다. 이것은 생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의지적으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을 생각되는 상태를 유지하도록 만들어주는 훌륭한 보강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댐 공사를 할 때 무너지지 않도록 보강제를 바쳐놓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중요할 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다시 점심 먹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잠깐이라도 ‘하나님, 제 마음이 굳어지고 있습니다. 아침에 주님께서 주셨던 말씀을 다시 내 마음속에 스며들게 해 주십시오’하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혼의 권태감과 싫증 같은 것들을 순간적으로 털어내지는 것입니다. 크게 털어내는 것은 규칙적인 기도 시간에 하고 조금씩 털어내면서 추스르는 것은 삶의 현장에서 순간순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안에 일어나는 수많은 원수들의 유혹,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냉담해지기 쉬운 우리의 이 부패한 경향성과 맞서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의 원군을 우리에게 보내주십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새벽에 2시간 기도해도 움직이지 않던 마음이 차창에 고개를 기대고 잠깐 기도하는 동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깊이 배어서 마음속으로 파고들어서 ‘내 영혼이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불안해하느냐. 너희 하나님을 바라라’하고 우리 영혼 스스로에게 강력한 힘을 불어넣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는 자기 자신의 실천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자기 자신이 직접 그 일을 실행하고 실천할 때 그 속에서 그 진리의 말씀 속에 담겨진 그 참된 비밀들이 우리의 영혼 속에 전수되고 터득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묵상해야 합니다. 30분 전에 끝난 설교를 완벽하게 프레임을 만들어서 나눠주는 이유는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파일을 만들어서 끼워두고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바로 그것이었지’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물론 머리에는 정리되고 가슴까지 내려와서 체계적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줍니다. 필요한 상황이 되었을 때 수시로 머리 속에서 그것들을 끌어내어서 묵상하면서 살아가는 이 사람이 바로 시편 1편에서 이야기 했던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함으로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사람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항상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있었고 하나님의 사람의 마음속에는 그 하나님을 생각나게 해주는 지성적인 깨달음이 동시에 내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의지적으로 그 깨달음을 붙들면서 살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죄와 유혹이 가득 찬 세상에서 주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간직하고 승리하면서 사는 비결입니다.
이렇게 듣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오늘 저녁이라도 당장 집에 가서 하나님을 조금 생각한 것에 대해서 회개하고 내일 아침부터라도 들은 말씀을 정리해서 수시로 생각하고 이것으로 마음을 적셔 내려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실천만한다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것은 경험한 사람만 이렇게 확언하여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인도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10. 묵상과 마음의 틀
“내 마음을 주의 증거로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치 말게 하소서(시119:36)”
지난 두 시간에 걸쳐서 효과적인 묵상이 되기 위해서는 첫째는 지성의 깨달음이 있어야 하고 두 번째는 의지적인 실천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지난 주 전한 말씀 가운데 우리들이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젖어들고 온전한 성화로 나아가게 되면 영적으로 생각이 되는 것, spiritual mindedness가 생겨나게 되는데 그것은 안정적이고 항구적인 상태가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미끄러져서 육적인 방향으로 사고되어지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묵상하기,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은 그 영적으로 생각되어지는 것과 육신적으로 생각되어지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며 그러한 의지적인 실천을 통해서 마음의 미끄러짐을 보호하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신령한 사고가 계속해서 생겨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36절 본문을 가지고, 묵상하게 될 때 마음에 미치는 효과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인은 “나의 마음을 주의 증거로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치 말게 하소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두개가 구분이 안 되지만 ‘증거’라고 하는 부분이 히브리어 성경에는 복수로 되어있고 ‘탐욕’은 단수로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심각한 의미가 있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명백한 성경의 표현을 놓고 보면 시인은 지금 하나님이 당신 자신에 관해서 가르쳐 주시는 많은 증거-여기서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들 중에 자기 마음에 맞고 생각에 맞는 한 가지를 향해서 마음을 열고 거기로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자신에게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 자신에 관한 모든 증거의 말씀으로 자신의 마음이 향하고 싶다고 하는 내적인 욕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대로 ‘그 하나의 탐욕으로 향치 말게 하소서’라는 것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며 온전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그마한 탐욕이라도 자신의 마음속에 두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의 경향성을 가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666이 무엇이고, 종말은 언제 올 것이고, 3차 세계대전은 일어날 것인가, EU가 종말론적으로 무슨 의미를 갖는가, 교황은 누구인가, 적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이런 것들에 대해서 골몰하는 것이 깨어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이런 우주적인 징조와 마지막 때에 될 일들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만 깨어있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자신이 현재적으로 어떤 사람인지 마음과 경향이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고 있는 자체가 깨어있는 것입니다.
(예화: 2002 월드컵 때 스페인을 무승부로 비기고 승부차기로 이긴 게임-경기 전 완 전 비공개로 승부차기 연습을 시켰다고 한다. 모든 상대편 선수들의 승부차기 자 료 화면을 입수해서 습득하고 각선수가 차는 방향으로 차게 해서 막는 연습을 시 켰다고 한다. 평범한 때에는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지만 아주 결정적으 로 중요한 순간에는 항상 하던 대로 하기 때문이다)
(예화: 개척하고 나서 제일 곤혹스러운 것이 서울에서 하는 집회 때 교인들이 따라오 는 것이었다-타 교회 집회 때는 본 교회에서 한 설교 중 능숙하게 오랫동안 반 복해서 한 설교를 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 오늘은 A라고 하는 지점에서 실패하고 다음 주에는 지난번에 성공한 지점에서 실패하고 또 그 다음 주에는 지난번에 성공한 지점에서 실패하는, 일정한 통일성이 없이 파죽지세로 이기고지지 않습니다. 대개 물질에 약해서 시험에 들었던 사람들은 30년 신앙생활하면서 계속 물질로 넘어집니다. 이성으로 인해서 연약한 사람은 이성 때문에 계속 넘어집니다. 은혜만 받으면 이상하게 마음 빼앗길만한 사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면 또 쓰러질만한 사람이 나타나고 합니다. 그 사람이 자기를 쓰러트렸다고 생각하는데 사람이 쓰러트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연약함입니다. 사람을 쉽게 사랑하고 마음에 하나님 두기보다 사람두기를 더 좋아하는 성향들로 인해서 하나님을 향한 간절하고 신실한 마음을 상실하고 하는 것들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반복해서 그런 것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어있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자기 자신의 틀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철학적으로는 틀(프레임)을 가지고 인간의 경향성을 다 설명했습니다. ‘헥시스’ 혹은 ‘하비투스(habitus)’ 라는 단어로 설명했는데 ‘헥시스’는 지속적인 습관에 의해서 형성된 경향성입니다. ‘하비투스’도 비슷합니다. 그래서 이런 ‘헥시스’나 ‘하비투스’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향성이나 경향성 같은 것들이-인간의 본질의 한 성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후에 로코와 흄에 의해서 영국의 경험철학이 대륙을 휩쓸고 지나가면서 이 자체가 그 사람의 본질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경향성 자체가 그 사람의 본질이라고 본 것입니다. 본질로 보든지 안보든지 어떻든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으면 그 성향을 따라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걸어온 과거의 발자취를 보면 현재를 알 수 있고 미래에 그 사람이 어떻게 갈 것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깨어있다고 하는 것은 그런 자기 자신 안에 있는 헥시스 혹은 하비투스 같은 것들을 잘 이해를 해서 ‘어떤 상황에 들어가면 나는 이런 식으로 반응하기가 굉장히 쉽다’ 그래서 그런 상황이 자신에게 영적으로 좋은 효과를 가져다주는 상황이면 그 상황 속에 자기를 자꾸 두려고 하고 반대로 그런 상황이 나쁜 상황이면 그런 속에 자기를 두지 않으려고 하는 적극적인 자기 자신에 대한 앎을 깨어있다고 하는 것이 포함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다음으로 공부를 많이 해야 되는 것이 자기 자신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에 대한 지적인 탐구,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에 대한 깊은 이해, 영적 경험에 대한 세밀한 지성적 분석, 이런 것들을 통해서 얻어내는 결론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쓰려고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일차적으로는 나를 위해서 쓰려고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런 길을 걸어가서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게 된 경험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여러 곳에서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일평생 그 하나님의 도를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겠습니다’ 자기는 그 빛을 전달해주는 한 통로나 도구, 날아온 빛을 거울로 비춰서 다른 사람들에게 날아가게 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 빛을 자신이 먼저 받고 그 지식의 빛의 혜택을 받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변화된 삶으로서 그 빛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삶을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보람 있는 일이 지식의 빛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입니다. 참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진정한 지식의 빛, 그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주어서 어둠 속에서 그 사람들을 건져내고 그 사람들을 빛 가운데서 살게 해주는 그 일이야말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하나님 다음으로 할 수 있는 정말 소중한 일입니다. 천사들도 할 수 없는 소중한 일이 바로 그 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런 저런 직업에 종사하면서 사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그 지식의 빛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현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현자로서 인생의 갈 길을 묻는 많은 사람들, 그 지성과 영혼의 어두움 속에서 갈 길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참 빛을 나눠주고 그들도 빛 안에서 살게 하는 이것이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아주 중요한 소명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어두움 가운데 살고 일반 계시의 빛 아래서 어떻게 자기 나름대로 철학들을 만들어내어서 인생의 조잡한 일들을 엮어서 그것을 사상으로 체계화하고 이것이 빛 가운데에서 인생을 사는 비결이라고 터득한 사람들조차도 오만하게도 수많은 사람들의 자신의 이 지식의 빛 아래 살아야 한다고 믿었고 자기가 그 지식의 빛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그것이 자신의 인생의 보람이라고 생각했다면 a light 한 빛이 아니라 the light 그 빛인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그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우리는 더더욱 그런 소명감을 느껴야 합니다.
그런데 전해줄 빛이 없습니다. 아는 것이라고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잘 믿으면 천당 가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지식은 그 이상입니다. 그 이상의 무엇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끊임없이 그 빛을 지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현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는 삶은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말도 되지 않는 개똥철학을 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피 튀기게 공부하고 인생의 원리를 궁구하고 삶을 끊임없이 명상하면서 ‘그것이 인생의 갈 길이고 나는 이 안에서 참된 평안을 찾았다’고 말하는데 진정한 철학의 원조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 빛의 원조인 참 빛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고 그 진리가 무엇인지를 안 사람들이 무지한 상태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 대한 가학행위입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경향성을 따라서 행동을 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헥시스나 하비투스같은 그런 경향성들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어떤 사람들은 그 은혜를 잘 간직하면서 신실한 삶을 오래도록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오늘 은혜 받고 며칠 있으면 다 잊어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6-70년대에는 보따리꾼들이 많았습니다. 부흥회만 하면 사람들이 벌떼처럼 모였습니다. 그러니까 오늘은 여기 와서 은혜 받고 보따리 싸서 또 다른 교회 갑니다. 철새처럼 부흥회만 계속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악의 보따리를 다 풀어 회개하고 집회 끝나면 눈물을 닦고 다시 그 죄악을 다 보따리에 싸서 다른 교회 가서 또 합니다. 그러니 성화가 되겠습니까?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기질에 대해서 굉장히 좌절하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자신은 뭘 해도 끈기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은혜를 자주 주시기는 하는데,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잘 간직하는데, 자신은 민둥산에 비온 것처럼 한번에 황토 물과 함께 확 쓸려 내려가고 그 다음에는 민둥산이 되어버리는 것처럼 그렇게 너무나 자주 그렇게 되는 자신이 싫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기질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기질의 문제를 그렇게 좌절하지 마십시오. 두 가지 면에서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기질이 죄로 말미암아서 부패함으로 말미암아 생겨나게 된 변형적인 기질이라면 그것을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그런 죄악의 요소들이 빠져나가게 됩니다. 또 하나는 그런 것들이 빠져나가게 되면 그 다음에 있는 기질은 지문과 같이 자기에게 독특한 것입니다.
퀴즈 하나 내겠습니다. 죄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아담과 하와가 자녀를 낳았겠습니까, 안 낳았겠습니까? 낳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여러 자녀들의 성격이 다 똑같았겠습니까, 달랐겠습니까? 당연히 달랐을 것입니다. 우선 아담과 하와가 둘 다 무죄 상태였지만 성격이 다릅니다. 하와가 훨씬 더 감성적입니다. 유혹에 쉽게 넘어갔습니다. 아담은 그렇게 쉽게 넘어가지 않고 상당히 더뎠습니다. 기질은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독특한 은사(gift)입니다.
예를 들어 다혈질적인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화끈합니다. ‘누가 나를 위해 죽으러 갈꼬?’ 하실 때 다른 사람들은 주판 튕기면서 계산할 때 화끈하게 ‘날 보내십시오’하며 주를 위해서 죽는다면 그것이 얼마나 훌륭합니까? 문제는 그 다혈질에 죄의 요소가 들어가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혈질 때문에 다툼을 만들어내고 시기를 만들어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냉정한 것도 좋은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기질의 문제를 가지고 낙담하지 말고 기질 속에 깃든 죄의 문제를 가지고 낙담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회심을 통해서 하늘을 열고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그리고 넓은 의미에서 이 회심은 계속 반복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위에서 계속 부어주시는 일도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계속 자신 안에서 간직하면서 사는 거룩한 생활도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옛날에는 공동 수도와 우물이 있었습니다. 공동 수도에서 돈을 내고 수돗물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물 값이 비싸니까 수돗물로 목욕하는 것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여자들이 수돗물에 목욕했다고 자랑하며 만져보라고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그 공동수도에서 물을 길러갔습니다. 한 사람은 큰 물지게에 매다는 통 두개를 들고 갔습니다. 다른 사람은 힘이 없어서 도저히 그렇게 들 수 없어서 노란색 양은 들통 두개를 들고 갔습니다. 물을 담았습니다. 물지게에 매단 통은 원래 노란 들통 두개 분량입니다. 각자 두개를 들고 출발했는데 물지게에 매단 통에 구멍이 나서 밑으로도 새고 출렁이며 위로도 다 새서 집에까지 가는 동안 점점 가벼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노란 들통에 물을 담았으니 앞사람의 반밖에 안되는 물을 들고 갔지만 구멍도 뚫어지지 않았고 걸음도 한 방울이라도 흘릴까 조심하며 갔습니다. 집에 도착했을 때 큰 물통을 가지고 출발한 사람은 두 바가지밖에 안나오고 뒷사람은 두 들통을 그대로 가지고 집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부어주신 은혜의 크기와 깊이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보존하고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서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너희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나를 배반하지 아니하였으니’하시면서 하늘의 열린 문을 그들에게 두셨습니다. 그에 비해서 에베소 교회는 적은 능력을 받은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엄청난 능력을 받은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은혜가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갈망해야 하지만 동시에 이미 받은 은혜를 간직하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는 결정적으로 궁극적으로 우리의 영혼에 영향을 미치고 영혼 안에 깃듭니다. 그러나 영혼의 그 은혜는 마음이라는 그릇에 담기고 그 마음이라는 그릇을 싸고 있는 껍질이 외적 의무입니다.
(예화: 해장국의 유래-각종 귀한 것을 다 넣고 끓인 것을 하인이 무명 솜으로 수십 번 싸서 안고 가져와서 먹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은혜의 불은 우리의 영혼을 움직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이라고 하는 용기가 올바르고 구멍도 안 뚫어지고 잘 된 용기입니다. 거기에 반듯하게 담겨지고 그 위에 외적인 의무의 준수라고 하는 포대기에 싸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은혜가 오래 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 은혜를 받았는데 마음이 뚫어진 물통같이 되고 그것을 싸고 있는 껍질은 아무 것도 없다면 금방 그 은혜를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어느 지체가 석 달에 한번 사경회 하는 것이 너무 멀다고 했습니다. ‘한달에 한번씩 하면 새나가기 전에 보충하고 새나가기 전에 보충하고 할 텐데’ 했습니다. 얼마나 게으르면 그렇게 이야기하겠습니까? 제가 사경회를 하는 이유는 사경회가 필요 없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사경회를 합니다. 우리가 매일매일 진실하고 분투하는 삶을 산다면 주일마다 모여서 사경회를 하고 수요일에 사경회를 하는데 무슨 사경회가 또 필요하겠습니까?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유지하고 가야합니다.
문제는 마음의 틀에는 지성과 감성과 의지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지성 혹은 이성이 있고 감정이 있고 의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고 나면 질서로운 상태가 유지됩니다. 마음의 틀이 질서로운 틀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의 경향성 자체가 그러니까 당연히 질서 있는 틀을 따라서 행동이 나오게 됩니다. 그 질서로운 틀이라는 것이 신자에게 있어서는 the frame of grace 은혜의 틀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가득 차고 그것에 의해서 다스려진 마음의 틀, 그것에 의해서 정돈된 마음의 경향성들이 여기 깃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감정이 어느 순간 외부로부터 자극을 받아서 충동을 느껴도 이성이 ‘그것은 죄야. 버려’하고 지시를 하면 감정이 그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성이 ‘이것은 네 의무야. 해야지’하면 의지가 복종합니다. 그런데 이런 은혜의 틀들이 깨트려지게 되면 이속에서 각기 전부 반란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질서가 깨집니다. 감정적인 충동이 확 일어날 때 이성이 ‘그것은 죄야’해도 감정은 ‘그래도 난 하고 싶어. 내가 좋으니까’하고 감정이 정욕으로 치닫는 것입니다. 의지가 ‘이것이 네 의무다. 해라’해도 ‘안 해. 싫으니까’합니다. 그리고 마음 안에 깃들여있는 감정과 손을 잡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성을 왕따 시킵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술을 없애려고 노력한 나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절대로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주님 오시는 날까지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술을 그렇게 마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이성을 왕따 시키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 술을 붓는 것입니다. 만일 맛도 똑같고 색깔도 똑같고 냄새도 똑같은데 먹으면 먹을수록 정신이 또렷해지는 술이 있다면 팔리겠습니까? 절대 안 팔릴 것입니다. 그렇게 서너 시간 동안 이성을 내쫓아버리고 감정과 의지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하는 것이 술입니다. 이성이 출장가지 않았으면 어떻게 사거리에서 바지 벗고 소변을 보겠습니까? 그런데 합니다. 이성이 출장 갔기 때문입니다. 이성이 돌아오면 혼나는 것입니다. 후회하는 것입니다. 이성이 의지를 야단치는 것입니다. ‘어떻게 나를 약 먹여서 출장 보내고, 창피하지도 않냐. 너 때문에 못살겠다. 어떻게 얼굴을 들고 돌아다니냐’할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 묵상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말씀 묵상은 속에서 깨달은 하나님의 진리를 묵상이라는 깔때기를 통해서 물 붓듯이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마음에 계속 비를 내려 부어버리는 것입니다. 부어버리면 은혜의 원리를 떠나서 생겨난 못된 생명력들은 마치 소금물에 배추를 절일 때에 배추의 기운이 푹 죽는 것처럼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성도 마찬가지이고 정서도 마찬가지이고 의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지성은 하나님의 은혜의 물에 잠기지 않으면 허탄한 것을 자꾸 생각합니다. 그 허탄한 것의 극치가 전쟁입니다. 그래서 규모적으로 거대한 허탄함에 빠지기도 하고 소심한 허탄함에 빠지기도 합니다. 건축을 보면 역사 속에서 도시마다 다 탑을 만듭니다. 그래서 희랍의 문헌을 보면 바벨탑의 크기에 대해서 나오는데 66미터 정도 되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 옛날 창세기 10장에서 66미터의 탑을 쌓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22-23층 되는 높이입니다. 왜 쌓았겠습니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런데 그런 일에 복종합니다.
이태리에 갔을 때 성당에 철문 하나가 있는데 150년 동안 만들었답니다. 크지도 않고 보통 우리가 드나드는 문 만합니다. 그런다고 거기에 주님이 오시겠습니까? 그 소중한 인생을 왜 그것을 두들이면서 150년 세월동안 몇 명을 잡아먹습니까? 인간이 그런 식으로 허무하게 삽니다. 베네치아에 가보면 건물을 쭉 지어놓고 그 건물을 짓기 위해서 수고한 사람들을 모두 목 베어서 죽여 버렸습니다. 살아서 어딘가에 똑같은 것을 또 지을까봐 그랬다고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광기입니다. 은혜의 물에 안 잠기면 생각이 그렇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감정은 정욕을 위해서 치닫고 탐욕으로 치닫고 의지는 제멋대로 합니다.
그런데 묵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잠기게 하면 그것에 잠길 때에 은혜의 원리를 벗어나서 살아난 생명은 죽고 은혜의 원리에 맞게 자라난 생명은 북돋워지는 것입니다. 그 놀라운 새 생명의 단비를 묵상이 내려주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묵상을 통해서만 오는 것들이 아닙니다. 기도 속에서도 올 수 있고 이렇게 말씀을 듣는 가운데 올 수도 있고 경건한 교제를 통해서도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강력한 영향은 역시 묵상을 통해서 옵니다.
그래서 여러 달 동안 새벽기도를 열심히 나오면서도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에 푹 젖는 일 없이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경우를 비유하자면 물통은 새는데 싸고 있는 껍데기는 튼튼한 경우입니다. 물론 조금은 도움이 되겠지만 해결이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그 놀라운 회심의 은혜들을 보존하지 못하고 자꾸 상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깨달은 것은 묵상해서 그것들이 가슴으로 흘러내려가서 속에 있는 다양한 요소들을 푹 적셔줄 때 그 때 그것들을 통해서 속에서 모든 것들이 질서를 다시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효과가 묵상 속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묵상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것입니까?
요즘 구역에서 게으름 공과를 하고 있는데 그 책을 백번 뗀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게으름과 작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다 외우고 마지막에 토시까지 달달 외워서 수많은 사람 앞에 여러분들이 공개강좌를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게으름과 작별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이 여러분의 마음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때 그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합니다.
개척 후 제가 2300편정도 설교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놀라겠지만 2300편의 설교가 거의 모두 완벽하게 텍스트로 풀려있습니다. 원고지 약 18만매 이상 되는 분량입니다. 교인 4-50명밖에 안모일 때 그것을 위해서 헌신할 사람을 세워서 헌신자들과 함께 설교를 풀어나갔습니다. 그리고 제가 최선을 다해서 독려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오랫동안 교회에 나와도 거의 변화가 잘 안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을 불러서 녹취를 시켰습니다. 말씀을 듣고 은혜는 되는데 뭐가 뭔지 잘 모르겠는 사람에게 녹취를 시켰더니 설교 들을 때는 잘 변화 안 되던 사람들이 녹취하면서 변화되었습니다. 정말 어려운 작업입니다. 처음 하는 사람들은 테이프 하나 푸는데 열 몇 시간 씩 걸렸습니다. 그러나 예배 시간에는 계속 머리로만 오가던 지식들이 반복하면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새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입증하는 바는 머리에 머물고 있는 지식은 조금밖에 도움이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들이 묵상이라는 깔때기를 통해서 자기 자신 속에 두루 푹 적실 때 그 때 이런 진정한 변화가 안에서 나타납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죄와 은혜의 지배를 서너 번씩 듣고 마지막에는 공부까지 해서 깨알 같은 강의안을 써서 많은 구역원들에게 가르쳐줬다고 하더라도 그 형제 그 자매가 죄의 지배 아래로 다시 안 들어간다는 보장은 없는 것입니다. 책을 쓰고 말을 하고 하나님에 관해서 가르치는 것은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현재적으로 자신 속에서 계속 은혜의 원리를 따라서 생명력 있는 말씀으로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은 보통 치열한 결심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죤 오웬이 이 문제와 관련지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궁극적으로 사랑의 대상이신 하나님에 대해서 깊이 의지적으로 묵상하지 않고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들을 많이 생각하는 것은 신성 모독이다. 그렇게 되어서는 어떠한 성화의 진전도 기대할 수 없다’고 못 박았습니다.
여러분들은 얼마나 좋은 위치에 있습니까? 출판부에서 열심히 만들어서 여러분들에게 나눠줍니다. 하나씩 읽고 묵상하기만 하면 됩니다. 오늘은 마태복음 내일은 창세기 글피는 레위기를 읽을 때 하나하나야 도움에 되겠지만 전체가 연결이 안 됩니다. 이제는 그것을 꼼꼼하게 연결하고 예쁘게 디자인하고 더군다나 두 번째 나온 책은 첫 번째 나온 책의 피드백을 받아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보완하고 더 좋게 만들어서 저렴하게 공급을 합니다. 그것도 여러분들이 활용하지 않으면 결국 여러분 자신이 마음에 계속해서 하나님 두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그래서 단순한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자기 자신이 의지를 가지고 성취하는 그 묵상이 그 사람의 마음에 가져다주는 효과는 놀랍다는 말입니다. 그런 효과를 누리면서 그 안에서 우리들이 주님을 닮아가고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제가 실천을 해보면 밤에 그 묵상집을 천천히 읽어도 3분밖에 안 걸립니다. 기도하는데 몇 분 걸립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다시 들여다봅니다. 잊혀지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을 지속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여호수아서에서 그토록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도록 분부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생각되어지는 그 마음의 경향성들이 육적으로 생각되어지는 쪽으로 흘러가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역할들을 하도록 계속해서 우리를 격려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창조주요 온 세상 만물 위에 뛰어난 지존하신 하나님과 시종일관 영광스러운 교통 속에서 사는 것은 마음 내키는 대로 아무렇게나 사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는 경험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는 매 순간 그리스도의 신부처럼 자신을 단장하고 깨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의 단비로 끊임없이 뒤틀리려고 하는 자기 자신의 내면을 적시는 그 묵상의 실천 속에서 끊임없는 하나님의 은혜의 원리에 복종된 마음의 경향성들을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속에서 마음에 반듯한 은혜의 틀들은 유지되고 그 유지되는 속에서 우리들이 효과적으로 죄와 싸울 수 있고 은혜의 세계를 보다 더 자신의 내면에서 보존할 수 있는 강력한 보호 장치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에서 거룩한 삶을 위한 샘들이 끊임없이 솟아나게 된다고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설교만 듣지 말고 직접 실천을 하고 그리고 그 능력을 경험하는 여러분들이 되기 바랍니다.
11. 묵상과 잠언
“또 묵상하고 궁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전12:9下)”
예수 믿기 전에는 ‘잠언’이라는 단어도 잘 몰랐습니다. 이 ‘잠언’이라고 하는 것은 지혜로운 말, 지혜롭게 하는 교훈, 지키며 살아야 할 법도라는 의미입니다. 이 잠언은 대개 기다란 논문이나 수필, 간증 형식으로 되어있지 않고 어느 나라든지 시 구절 같이 짧은 구절로 되어있는 것들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에 어디든지 다 이 잠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명심보감’이라고 해서 가슴에 새겨두고 보배처럼 들어다보고 살라고 하는 교훈을 통해서 인간이 살아가는 이치와 도리 같은 것들을 터득하게 한 것입니다.
(예화: 지방에 집화 갔다가 호텔 서랍에서 빨간 책이 나오기에 성경책이라고 생각 했 는데 불경이었다. 그 내용을 보니 성경에서 보았던 내용이 많이 나왔다)
‘기독교 이외에 그런 진리가 있을 수 있을까’하고 생각이 되는데 원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타락한 후에 아담과 그로부터 이루어지는 모든 후손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을 계속 주십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계시’라고 합니다. 그런 계시 속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 것과 동시에 인간이 누구고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원뜻에 부합하는지 하는 내용들이 종합적으로 모두 실려 있습니다. 또 양적으로 그렇게 종합적이고 많지 않다고 할지라도 내용 자체가 종합적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풀어서 해석함으로서 다 적용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 속에는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에 대한 흔적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계시를 잘 보존하기 위해서는 신앙이라고 하는 그릇에 담겨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정체성 가운데 매우 중요한 정체성이 계시의 담지자(擔持者)입니다. 영어로 말하자면 ‘the bearer of revelation’ ‘하나님의 계시의 담지자’입니다. 계시를 맡아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앙이 좋으면 하나님이 주신 계시를 변질시키지 않고 그대로 잘 보존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계시를 잘 담지할 수 없을 정도로 신앙이 나빠지게 되면 하나님께서 둘 중에 한 방법을 택하시는데 심판하시거나 부흥을 주시는 것입니다. 심판하시면 하나님께서 모두 다 날려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 심판하는 과정을 통해서 일단의 무리들을 순결한 무리들로 고르시고 그릇은 작지만 그 작은 무리들 안에 당신의 풍부한 계시를 변질되지 않게 담아서 순수한 계시의 담지자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고 오는 세대에 그것을 전해주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이 올바로 알려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심판하실 때 잘려져 나가는 사람들은 멸망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예 떼어내시는 것입니다. 아담의 자식이었지만 가인을 떼어내시는 것처럼 자꾸 떼어내시는 것입니다. 불신앙으로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 속에서 계속 떨어져나가는 것입니다. 떨어져 나가도 이 사람들에게는 원래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에 대한 희미한 기억들이 있습니다. 그 있는 것이 가만히 보존되기에는 이미 신앙을 버렸기 때문에 계시의 혼잡화 현상이 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면서 자기들 나름대로 인생관과 세계관과 우주관을 갖게 됩니다. 그 속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신앙이라는 그릇에 담겨야지만 순수한 형태로 변질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렇게 담지 않고 불신앙이라고 하는 그릇에 담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인생관, 우주관의 틀 속에 담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을 보기는 봤는데 그것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개똥철학 같은 인생관, 우주관에 의해서 왜곡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 속에 약간의 파편들이 있습니다. 그 파편이라도 붙들고 살면 아무 것도 없이 짐승처럼 사는 것보다 조금 나은 삶을 살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고 창조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고 그 하나님을 찾아가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하니까 결국은 부분적으로는 무엇을 발견해서 거기에 생명을 걸지만 하나님이 그 인간을 만들어놓으신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더 알고 싶으시면 ‘거룩한 부흥’이라는 책에서 ‘구약을 보는 새 시각’이라는 부분부터 읽어 내려가면 구약을 보는 눈이 열릴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부흥을 주셔서 쇄신시키셔서 순순한 계시의 담지자가 되도록 만드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세계관과 인생관은 달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비슷한 것과 같은 교훈들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동양에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데 서양에서는 ‘부모를 반 죽여라’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도 살다보니 경험에 의해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최초의 계시입니다. 그런 것들이 다른 세계관, 역사관 속으로 흘러들어갔는데 신기하게 그런 것들이 깨트려지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어느 나라에든지 이런 잠언이 있습니다.
아주 작은 분량인데도 음미할수록 계속 실타래같이 수많은 교훈들이 쏟아져 나온다는 것이 잠언의 매력입니다.
(예화: 오렌지 주스는 오렌지가 많이 나오는 나라에서 오렌지를 짜서 농축 시킨 다음 에 가져와서 물을 섞는 것이다)
논문이나 소설은 한번 읽어서 어렴풋한 기억밖에 안 나지만 짧은 것은 두고두고 사탕처럼 빨아먹으면서 계속 음미를 합니다. 예를 들자면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믿지 않는 사람들의 하나의 잠언입니다. 열 몇 자밖에 안 되는 말이지만 살아갈수록 무릎을 치게 만듭니다. 열길 물속이어도 잠수복 입고 내려가 보든지 들여다보면 알지만 그렇게 믿었던 사람이 자기를 배반할 때 새삼스럽게 깨닫는 것입니다. 파고들어가자면 20cm도 안되는 사람 속을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다 다음에 어떤 사람이 와서 친절을 베풀 때 ‘한길 사람 속 알 길이 없지’하며 악인을 경계하는 마음이 생겨나고 어리석게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손해를 보거나 이용당하는 불행한 일을 막아줍니다. 이런 것들이 잠언이 가지고 있는 효용성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그런 똑같은 방식으로 잠언이 쓰여졌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나오는 전도자가 바로 그렇게 잠언을 많이 지어서 사람들을 지혜롭게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잠언이라고 하는 것이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입니까? 잠언과 같이 인생의 지혜가 농축된 어떤 말들을 누구나 다 기록할 수 있습니까?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산전수전 화생방전까지 다 겪고 뭔가 인생의 고난을 다 경험하고 쓴맛 단맛을 다 본 사람이 비로소 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쓴맛 단맛 다 본 사람들은 이것을 저절로 쓸 수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잘 쓴다면 감옥에 있는 사람은 수없이 잠언을 낼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다고 써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저에게 존경에 찬 눈빛이 아니라 의심에 찬 눈빛으로 ‘목사님, 어떻게 죄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아세요?’하고 물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포도주를 몇 사발을 먹고도 ‘모두 그 맛이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감별하는 전문가들은 냄새만 맡고도 어느 년도 어디 산 포도주인지 압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별의별 고난을 많이 겪었다고 해도 그 고통 받은 것만 가지고 우리들이 그런 지혜가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화: 포도주는 어느 회사 제품인가 보다 어느 해 어느 지방에 최고의 일조량으로 포 도가 대풍이었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와 마찬가지로 많이 경험해도 정리된 지식을 못 갖는 사람이 있고 작게 경험해도 그것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정리된 지식을 갖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주는 것이 묵상입니다.
기독교 신앙 바깥에서도 역사 속에 현자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역할은 자신이 인생을 살면서 깨달은 깨달음의 빛을 사람들에게 나눠주어서 사람들을 각성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깨닫게 만들어서 그들도 지혜로운 자로서 살아가게 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하고 살던 현자들, 혹은 빛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현자들, 혹은 빛의 사람들이라고 할 때, 인생에 대해서 명상을 하지 않는 현자를 생각할 수 있습니까? 인생에 대해서 명상하지 않는 인생의 현자, 인생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하고 명상하지 않는 인생에 있어서 깊은 지혜를 터득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현자는 모두 명상의 세계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창조의 목적이 무엇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는 참되고 진실한 계시의 빛은 없었지만 그것이 없어도 역시 이 인생에서 자기가 경험한 많은 경험들, 그리고 이미 자신에게도 다른 인생의 선배들로부터 배운 지식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과연 그러한지를 생각하고 그 지식에 기초해서 자신이 살아온 수많은 기쁨과 즐거움, 배신과 사랑, 미움과 용서, 행복과 불행, 고통과 슬픔, 분노와 기쁨, 이런 것들에 대한 수많은 경험들을 재해석하는 명상의 작용이 있을 때에 비로소 그것들이 그들에게 현자가 되게 만들어주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에 있어서도 그런 일반 원칙들이 그대로 적용됩니다. 더욱이 사람이 자신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부딪치며 살아오다가 제 나름대로 깨달은 지식들을 인생을 사는 지식으로 전수해주었을 때 그것을 명상할 가치가 있었다면 하나님의 순결한 말씀은 얼마나 더 묵상할 가치가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그래서 솔로몬으로 믿어지는 이 지혜자는 잠언도 많이 쓰고 인생의 영고성쇠(榮枯盛衰)를 다 겪은 사람입니다. 그런 많은 신앙의 실패와 승리, 순결한 삶과 부패한 삶, 이 모든 것들을 넘나든, 최고의 영화를 누리고 하나님과의 교통을 누리고 타락하기도 했던 이 사람이 인생의 깊은 맛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삶의 경험들을 깊이 묵상할 때 비로소 인간을 지혜롭게 할 수 있는 잠언이 그 입에서 흘러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도 잠언을 지어서 여러분들에게 가르쳐준 적이 있습니다. ‘신자가 은혜에서 멀어질수록 죄에 가깝다’ 신령한 은혜 가운데 거하는 사람들은 은혜가 촉진되는 비결을 물어보고 바리새인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은 대개 죄가 되는지 안 되는지를 물어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하고 물어보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사람이고 ‘이 정도 까지는 죄가 아니지 않습니까?’하고 묻는 사람은 하나님이 화만 안내면 하는 데까지 제 마음대로 살아보고 싶은 사람입니다. 시인이 그렇게 잠언을 쓰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을 통해서 알게 되었을 것이고 인생을 살면서 자기 나름대로 경험을 통해서 터득한 지식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들을 깊이 묵상하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사니까 그 사는 과정을 통해서 지식들이 더 풍성해질 것입니다. 또 많은 생생한 경험들을 가지고 있으니까 풍성해질 것입니다. 그것이 묵상을 통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발간한 묵상집에 보면 ‘Consideration & Application’이라고 되어있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두 단어입니다. ‘consideration’은 ‘숙고’입니다.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application’은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묵상이 가져다주는 크고 놀라운 유익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것을 통해서 자신이 지적으로 깨달은 진리의 말씀들이 가슴으로 내려오면서 실제로 분투하는 삶을 살면서 속에서 풍부한 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궁구’는 논리적이고 지적인 분석의 과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어떤 진리를 깨닫고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수많은 깨달음들이 와서 더 달라붙어서 깨달음이 더 커졌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느 한순간 확 쏟아서 사람들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뭔가는 보았는데 중구난방으로 이말 저말 할 것입니다. 이 사람이 잠언을 쓸 때는 탁 뜯어 쏟아놓고 지식으로 이것들을 분류하는 것입니다. 비빔밥처럼 섞어서 확 쏟아놓지 않고 하나하나 잘 정리해서 놔주는 것입니다.
지금은 좋은 세상이 되서 음식점에서 비빔밥을 싸달라고 하면 하얀 용기에 밥을 넣고 위에 올려놓을 것과 고추장을 따로 싸줍니다. 집에 가서 비벼 먹으면 됩니다. 그런데 제가 직장 다닐 때는 음식을 집에 가져가는 문화가 없었습니다. 백화점 스낵코너에서 밥을 먹는데 상급자 심부름을 왔는지 어느 여직원이 비빔밥을 싸달라고 하자 비빔밥을 비벼서 비닐봉지에 넣어 묶고 검은 봉지에 넣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먹을까 생각했습니다. 똑같은 비빔밥이어도 남이 비벼놓은 것은 먹을 수 없습니다. 깨끗한 그릇에 하얀 밥을 담고 갖가지 나물을 놓고 가운데 달걀을 놓으면 깨끗합니다.
그러니까 이것 저것 많이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지적인 궁구함이 없이 뜯어서 확 쏟아놓으면 비닐봉지 속에 넣어둔 비빔밥 같이 되는 것입니다. 뭐가 있기는 있는데 한참 얘기를 듣고 보면 뭔가 체험하기는 했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고 정리가 하나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남에게 지식을 전수해서 그들을 현명한 삶을 살게 만들어주려면 자기가 깨달은 것들을 다 쏟아놓고 야채는 야채 고기는 고기 고사리는 고사리대로 다 분류해서 깨끗한 그릇에 하얗게 밥을 푸고 그것을 얹어서 줘야만 ‘맛있겠다’ 하며 비벼 먹는 것입니다. 시인이 그런 과정을 ‘궁구’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자들은 두 가지를 계속 힘써왔는데 하나는 자기가 터득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터득한 것을 사람들에게 올바른 방식으로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배우는 것과 가르치는 것, 이 두 가지가 현자들의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이 전도자가 바로 그런 삶을 산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잠언을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생을 살아가는 순종의 삶 속에서 묵상을 통해서 풍부히 경험하고 그래서 많이 획득하게 된 추가적인 지식들을 궁구라고 하는 지적인 활동을 통해서 잘 정리해서 그것을 잠언이라는 형태로 사람들에게 전해준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읽는 많은 사람들이 진리의 빛 가운데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우리의 선교적인 삶이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재산이 많고 좋은 학벌에 탄탄한 앞길이 보장되어있으면 편안한 인생을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이 몰지혜화로 흘러가는 지식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이 인생을 결코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지식은 반드시 지혜의 책꽂이에 차곡차곡 쌓여야 합니다. 그리고 지혜라고 하는 물길을 통해서 지식이 부지런히 흘러 다녀야 합니다. 물이 매우 소중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물길을 타고 밭으로 논으로 돌아다닐 때는 농사에 도움이 되지만 길 없이 밀려들어올 때는 홍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식이 있고 우리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것 같아도 그런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가 없는 몰지혜적인 상황에서 밀려드는 지식의 범람들은 우리 인생을 절대 행복하게 하지 못합니다. 물질도 마찬가지이고 모든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물질의 많고 적음은 그 사람을 부유하고 가난하게 할 수 있지만 인생의 참다운 가치를 높이고 낮출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도 사람을 고를 때 ‘이 사람이 정말 지혜 있는 사람인가. 그리고 그 지혜의 근본이 하나님이신가. 이 사람의 성품이 정말 사람과 함께 살아가기에 적합한 품성을 가진 사람인가’하는 것을 봐야 합니다. 성품이 좋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고치시는 과정이 없다면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조금 부족해도 하나님께서 계속 고치셔서 거룩하게 해나가시는 수리하는 세계를 가진 사람의 성품이면 희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먼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 전도자가 바로 그런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피나는 체험 속에서 더 풍부하게 깨닫고 묵상을 통해서 그런 것들을 더 많이 체득하고 궁구라고 하는 지적 활동을 통해서 정리해서 잠언이라는 형태로 나눠주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도자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선교적인 삶 아닙니까? 그래서 도저히 망가진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는 인생을 우리들이 고치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전도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변화된 인생을 살아가게 만들어주는 것까지 모두 포함합니다. 예수 믿게 되면 저절로 성화됩니까? 그 사람에게 인생의 현자로서 하나하나 인생을 사는 이치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주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으로 거룩하게 변화되어 갈 것인가 하는 인생의 길과 영적인 이치와 사회적인 분별, 이 모든 것들을 성경에 나타난 진리를 토대로 가르쳐서 여러분 나름대로의 잠언의 속편을 써서 자신이 그렇게 살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Consideration’과 ‘Application’이 필요합니다. 그 두 가지가 여러분들의 삶 속에 계속해서 있지 않으면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여러분들의 삶 속에는 열매가 없는 삶이 계속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여러분이 그런 ‘Consideration’과 ‘Application’을 끊임없이 찾으면서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려고 할 때 결국 여러분들은 많은 진리들을 더 많이 깨닫게 될 것이고 더 많이 깨달은 진리들을 여러분의 지적인 작업 속에서 궁구해 낼 때 여러분들은 또 다른 지혜서의 속편을 쓰면서 많은 사람들을 빛 가운데 살도록 돌아오게 할 수 있는 예수 안에서의 현자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 삶입니까?
우리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바뀌어 진다면 얼마나 보람 있는 삶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12. 묵상과 쓰여진 삶
“전도자가 힘써 아름다운 말을 구하였나니 기록한 것은 정직하여 진리의 말씀이니라(전12:10)”
이 전도자가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진리의 진액이 계속 나오는 농축된 잠언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진리를 깊이 묵상해서 마음의 영향력을 행사하게 하고 그 마음의 영향력을 따라서 실천하는 삶을 살고 또 그것을 지적으로 궁구해서 농축한 결과 잠언이라는 것이 나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10절은 9절 하반절을 좀더 상세하게 확대해서 설명하는 기능을 가진 구절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전도자가 힘써 아름다운 말을 구하였나니 기록한 것들이 정직하여 진리의 말씀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결국 그렇게 많은 것을 체험하고 지적으로 정리가 되고 나니까 기록될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글을 쓸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전도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경험하고 또 경험하는 과정, 또 경험한 후에도 지적인 탐구를 통해서 잘 정돈하고 나니까 그것들을 글로 쓸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결국 잠언이라는 것이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쓰여진 것들이 어떻다고 그랬습니까? ‘정직하여’라고 했습니다. 히브리말로 ‘요쉘’이라고 하는 단어인데 올곧다는 뜻입니다. 올곧다는 것은 질서가 있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그 지성과 이해에 부합하는 내용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이 의로운 자라고 이야기할 때 ‘야샤르’라고 나오는데 그 의로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탁월하게 의를 행하며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인간을 올곧게 창조하셨고 그 올곧은 내면의 질서 안에서 그들은 올곧은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올곧은 개개의 개별적인 삶은 창조의 전체의 목적에 부합하는 기능들을 수행해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개개의 존재들이 모두 올곧은 존재, 올곧은 삶을 살아갈 때 그 모든 것들이 합쳐져서 장중한 교향곡을 연출하면서 그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영광을 더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타락하기 전이나 타락한 후나 인간이 하나님처럼 무한히 완전하게 창조된 인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얼마든지 불완전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완전하고 올곧은 존재로 남고 올곧은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사랑,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전폭적인, 전존재적인 의지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잠언까지 포함해서 시가서에 보면 거기에 나오는 의인은 바로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공경하고 그분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을 가지고 그 올곧은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고 또 올곧은 삶을 살아가는 지향성을 이 내면의 세계에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의인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여기에 쓰여진 단어가 바로 그 단어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쓰여진 것은 올곧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쓰는 문학은 다분히 자기의 사상의 종을 삼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종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문학적인 영향력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자기 생각에 동조하게 해서 똘마니가 되게 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데서 문필가들은 희열을 느낍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 전도자나 또 그 뒤를 잇는 진지한 신앙을 가진 글 쓰는 사람들은 그런 목표를 가지면 안 됩니다.
이 전도자, 혹은 지혜자가 가지고 있었던 그 소망이 무엇일까요? 자신의 글을 읽고 계속 유지하였으면 하는 그런 진실한 소원이 무엇이었던 것 같습니까? 잠언 첫머리에 나옵니다.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이는 지혜와 훈곌ㄹ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지혜롭게 의롭게 공평하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어리석은 자로 슬기롭게 하며 젊은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모략을 얻을 것이다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것을 깨달으리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목표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생각을 항상 가져야 합니다.
가끔 어떤 사람들이 자기가 제 팬이라고 하는데 저는 모욕을 느낍니다. 저는 그런 것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사람도 잊혀지게 하라. 저자의 이름도 사라지게 하라. 오로지 그 책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만 기억하게 하라’ 이것이 기독교 문필가의 정신입니다.
그런데 어떻든 그것이 올곧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흔히 지성이라는 말도 쓰고 이성이라는 말도 사용합니다. 우리 말 성경에 지성이라는 말은 안나옵니다. 그렇지만 지성이라는 말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는 이 히브리어, 희랍어 성경에 여러 번 나옵니다. 지성이라고 하는 것과 이성은 비슷한 기능인데 각각 차이가 납니다. 먼저 공통점은 이성과 지성은 모두 정신적인 기능으로서 계속 발전합니다. 그런데 이 두 기능 다 지식을 자원으로 해서 발달하는 것입니다. 지성은 사물을 통찰하고 판단하고 분별하는 기능이고 이성은 사물을 논리적으로 추론해가는 기능입니다. 그러니까 이 지성은 어떤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데 판단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 가지 인식 작용을 주셨는데 하나는 그것을 보고 옳다 그르다를 느끼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것을 보고 좋아하는 감정과 싫어하는 감정을 갖게 하심으로 말미암아서 그 사물을 인식하고 판단합니다. 지성이 뛰어나면 그런 것들에 대한 판단과 통찰이 정확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지식을 통해서 이 지성이 발달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식이 계속 축적되면 반드시 지성을 산출하느냐면 그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에도 족집게 과외가 아주 유행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족집게 과외가 우리는 대입 때부터 시작되는데 일본은 유치원 시험부터 족집게 과외 교사들이 나온답니다. 그런데 예를 들면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을 상대로 족집게 과외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귀신입니다. 문제가 출제될 개연성이 전 과목에 걸쳐 있는데 짧은 기간 안에 그것을 어떻게 집어내서 가르쳐 주겠습니까? 이 사람 속에 얼마나 많은 지식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족집게 과외 교사들이 모두 지성적입니까?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공부를 많이 했어도 이 지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들이 적용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발달 능력입니다. 그러니까 공부를 많이 했어도 그 지식이 그런 적용의 작용이 없으면 지성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초등학교 밖에 못나왔어도 적은 지식이지만 그 지식들을 가지고 끊임없이 삶을 적용하고 사물을 판단하고 통찰하려고 애를 쓰고 반성하면 지성이 발달합니다. 그래서 공부를 많이 못했어도 지성적인 사람이 있고 공부를 많이 했는데도 전혀 지성적이지 않은 사람이 존재합니다. 그러니까 공부를 하고 못하고에 의해서 지성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은 있는데 그 지식이 몰지혜화를 지향하는 지식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 지식을 통해서는 그가 결단코 지성인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하나 이성은 추론하는 능력입니다. 저는 학교 다닐 때 제일 재미있는 과목이 국어였고 제일 싫은 과목이 수학이었습니다. 더하기 빼기 나누기 곱하기 이 네가지만 하면 마르고 닳도록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로그가 어떻고 체적을 구하라고 하는데, 왜 구합니까? 이런 것들을 왜 배우는지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철이 들고 보니까 학문 가운데 이 수학만큼 인간에게 추론하는 능력을 길러주기 좋은 학문은 흔치 않습니다. 그것이 이성입니다. 이런 추론도 대부분은 지식을 통해서 그 추론하는 능력이 성장하게 됩니다. 공부를 많이 하면 모든 학문은 이론이라는 얼개로 엮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론의 얼개를 배우는 동안에 그 학문의 정신, 아카데믹 마인드가 형성됩니다. 그것은 학문의 분야에 따라서 전혀 분야는 다르지만 형성되는 논리의 마인드는 유사합니다. 그런 마인드를 서서히 형성해 가면서 논리적인 추론의 능력이 발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추론 능력이 발전하려면 역시 지식을 계속 생각하고 자신의 삶 속에 적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활용하는 가운데 논리적인 능력이 생겨납니다. 우리가 지금 필요한 것은 논문 쓰는 능력이 아니라 삶을 논리적으로 살아가는 것 아닙니까? 현대인들에게 특히 영적인 변화를 못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즐겨서 뭔가 인간의 사는 이치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가장 잘 쓰는 단어가 있습니다.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생각해본 적이 없어’ ‘아무래도 괜찮아’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압니까?
일본 최고의 지성인이라고 불리우는 다찌바나라는 사람은 ‘나는 이런 책을 읽었다’라는 ‘지적호기심’이라는 책 속에서 소위 얘기하는 지식의 오토마톤 현상을 이야기했습니다. 자판기를 만드는 사람은 어떻게 커피와 물을 넣고 전기가 통해서 더럽펴지지 않은 물이 끓어서 커피가 나오게 되는 지 다 알아야 하지만 사먹는 사람은 ‘300원 넣고 누르면 나온다’만 알면 됩니다. 이것이 오토마톤적 지식입니다. 이런 지식은 우리의 삶을 결코 부요하게 하지 못합니다. 짐승처럼 살아가는데 있어서는 오토마톤적 지식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진짜 그 삶을 올바르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추론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자신의 행동 양식을 성찰할 때는 그 행동이 다른 상황에서 적용될 수 있는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러한 발달은 논리적인 추론을 학문을 통해 터득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 속에 적용해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올바른 것이 아닌데 왜 이렇게 사냐?’ ‘냅둬’ ‘왜?’ ‘이게 좋으니까’식으로 비논리적으로 나갑니다. 또 ‘이거 해’ ‘왜?’ ‘하나님의 명령이잖아’ ‘싫어’ ‘왜?’ ‘싫으니까’하면 안됩니다. 이러면 공부를 많이 했어도 실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이성적인 능력이 전혀 발달하지 않습니다. 공부를 못했어도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인간의 사는 도리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이것이 내 도리에 맞는가’를 추론하면서 살아가면 이성적인 인간이 되어갑니다. 공부 잘한 것을 너무 부러워하고 할 필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생은 그런 것으로 승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다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어떻게 우리가 이성적으로 발달하며 살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지성을 우리말 성경에서 총명이라고 번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understanding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면에 있어서 올곧은 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글을 쓸 때에는 냉정과 열정을 동반해야 합니다. 불같이 펄펄 끓는 용광로적인 열정과 얼음같이 차가운 냉정, 두 가지를 같이 가지고 글을 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그 글이 개판이 되고 올곧지 못한 글이 됩니다. 사람이 어느 순간 글을 쓸 때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를 토해놓고자 하는 열정이 있을 때 그것을 토해놓으려고 애를 쓰는데 그 토해놓는 통로는 냉정한 논리라고 하는 통로를 통해 흘러가는 뜨거운 쇳물이어야지 이 통로를 통해 흘러가지 않고 넘치는 쇳물은 여러 사람을 데게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가 하고 싶은 논리를 막 쏟아놓고 싶을 때는 그 토해놓고 싶은 열정이 흘러가기 위하여 자기의 논리를 왜곡시키려고 하는 성향이 인간 누구에게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통제가 안 되고 너무 심해지면 인간 모든 사람들이 자기와 같은 열정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읽을 때 두세 번만 보편적인 논리의 틀에서 이탈하는 것으로 보이고 각각 이탈된 것들이 독특한 틀을 형성하고 있지 않다고 총체적인 틀들이 의심되게 되면 그 다음은 그 작품 버리는 것입니다. 휴지조각이 돼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답답한 사람의 울화통 터지는 하소연과 같은 글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언제나 이 두 가지, 냉정과 열정이 글 쓰는 사람들에게 공존해야 합니다. 그런데 가끔은 그런 격식들을 깨트리면서도 위대한 글 쓰는 사람이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보편적인 논리에서 튕겨져 나갔는데 열정 때문에 튕겨나간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논리를 뛰어넘는 자기 나름대로의 신 논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에서 이탈된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서도 이탈되고 이탈된 각각의 개별적인 것들은 서로 기가 막힌 연결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사상의 출현입니다. 지성과 이성의 사이에서 이런 것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잠언과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바로 잠언이 그렇게 쓰여진 글이라는 것입니다. 경험과 지적인 탐구를 씨줄과 날줄로 해서 지성과 이성이라고 하는 새로운 실을 가지고 다시 짜서 이 놀라운 잠언을 지어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올곧은 것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죄로 가득 찬 이 인간, 편견과 학문적 오만, 사상적인 편견들에 쉽게 사로잡히고 성향 자체가 부패한 인간이 글을 썼는데 그 글이 올곧은 글이 되어서 그 글을 읽는 사람들마다 창조의 원래의 질서로 돌아가게 하는 힘이 있는 글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흔히 될 수 있는 글이 아닙니다.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그런 글을 쓴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문필가들이나 말씀을 묵상하면 되지 우리같이 쓰는 것이라고는 일기 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서에서 자기의 사랑하는 교인들에게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의 편지라’했습니다. 쓰여진 것보다는 그리는 것이 그리는 것보다는 보이는 것이 인간에게 호소하는 호소력이 훨씬 더 강력한 것입니다. 그런 강력한 영향력을 갖는 것입니다. 한번 글을 써서 수백만의 사람의 가슴에 불을 지르고 수백만의 사람의 머리에 물을 끼얹어서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일은 수십 년에 한 두 사람 나와서 그 일을 한다고 칩시다. 그러나 우리의 삶 자체가 문필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이미 우리의 심비에 그리스도 예수의 편지가 쓰여 졌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걸어가는 인생의 발걸음으로 편지를 쓰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올곧게 쓸 수도 있고 뒤틀리게 쓸 수도 있습니다. 거짓과 위선에 가득 찰 수도 있고 오만과 부조리에 가득 찰 수도 있습니다. 결국 그 모든 것들은 우리의 내면에 무엇이 들어있느냐에 의해서 우리의 삶의 산출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확히 깨닫고 그것을 가슴으로 길어 내리는 묵상을 통해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게 하고 그래서 살아서 그 실천적인 체험 가운데에서 그 진리를 풍성하게 터득하고 그 경험한 진리를 지적인 탐구를 통해서 정돈해서 그 지성의 씨줄과 이성의 날줄로 정리를 해서 전도자는 글을 썼고 우리는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들이 바로 묵상과 그리고 지적인 탐구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두 번째로는 그것이 진리의 말씀이니라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복수로 나옵니다. ‘진리의 말씀들이다’ 그래서 우리 앞에 잠언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이 전도자처럼 성경을 쓰도록 부름받지는 않았지만 일평생 주님의 진리를 따라서 살려고 몸부림친 성도의 삶은 거짓보다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삶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는 아니지만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고자 많이 애쓸 때 그 분투하고 치열하게 몸부림치는 거룩의 추구로 얼룩진 그 삶은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보여주기에 적합한 또 다른 말씀의 국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스승이 누구냐가 그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스승이 없다면 그 사람은 스승이 필요없으리만치 매우 뛰어나게 훌륭하거나 아니면 생각이 없거나 그냥 특별한 일관된 가르침을 필요로 할만큼 어떠한 분명한 본보기를 찾을 필요가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전도자는 깊은 묵상과 지적인 탐구를 통해서 글을 썼고 그 글은 올곧은 글이 되었고 그 글은 또한 진리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구약에서 진리라고 할 때 그것은 우선적으로 율법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이라고 불리는 그 진리, 그것을 완성하신 분이시고 그것이 표상했던 진정한 진리의 실체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는 곧 길이요 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곧 길이요 진리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 모든 무지한 인생들을 하나님 앞으로 정확하게 인도해주시는 진리, 율법이 그것을 희미하게 인도했다면 예수는 우리를 정확하게 인도해주는 진리가 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모두 기독교 문필가는 아니지만 우리의 삶이 예수께 사로잡히고 예수님을 정확히 보여주는 삶이 된다면 우리는 길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존재들이 될 것입니다. 이런 모든 일들이 전도자의 체험에 의하면 묵상과 지적인 탐구를 통해서 가능해진 일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묵상을 통한 체험적인 지식과 그것들에 대한 지적인 탐구를 통해서 글을 썼고 그랬더니 그 글은 올곧고 진리이신 주님을 반영하는 글이 되었습니다. 그 두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그 두 사실 사이에 ‘아름다운 말을 구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아름다운 말’이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말로 ‘헤페츠’라고 하는 단어인데 영어로 번역하자면 acceptable(받아들여질만한), 혹은 suitable(적합한)의 뜻입니다. 어떤 사물이 있는데 그것에 정확하게 맞는 말을 내가 찾았다는 것입니다. ‘구하다’라고 하는 것은 ‘카바스’라고 하는 단어인데 쓰레기 더미 같은 데서 특정한 물건을 찾기 위해서 뒤지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하나를 찾아내는 것이 ‘카바스’입니다.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을 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똑같이 현장에 있었는데 다른 사람은 ‘봤다’라고 밖에 이야기를 못하는데 글 쓰는 사람은 그것으로 책을 한 권 쓰는 것입니다. 모든 사실을 새로 가르쳐 주는 것은 아니고 다 알고 있는 사실을 가르쳐주는데 그것이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온 편지를 한통 받았는데 그 내용은 열린교회 설교를 계속 듣고 있는데 설교자가 쓰여진 글을 읽고 있는 느낌이 드는데 설교를 다 써서 외워서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하는 것인지 묻는 내용이었습니다.
18세기 죠지 윗필드라고 하는 순회설교자가 있었습니다. 죠나단 에드워즈와 같은 시기에 부흥의 도구가 되었던 영국의 설교자입니다. 그 사람의 전기에 보면 그 사람의 설교에 놀라운 묘사력을 입증하는 두 가지 예화가 나옵니다. 이 사람은 원래 술집 종업원이었는데 그가 온 동네 사람 흉내를 다 내는 것을 보려고 저녁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가 나중에 주님을 깊이 만나고 세기적인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거구의 사람이 얼마나 묘사를 잘하는지 한번은 설교를 하는데 영국의 한 귀족이 앞자리에 앉아있었고 죄인의 무조력한 상태에 대해서 묘사를 했습니다. ‘맹인이 인도견을 끌고 가고 지팡이도 들고 가다가 넘어져서 개도 놓치고 지팡이도 놓쳤습니다. 개를 불러도 돌아오지 않고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지만 도울 사람이 없고 지팡이를 찾기 위해서 어둠 속에서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갑니다. 그런데 그가 걸어가고 있는 곳은 벼랑 끝이었습니다. 한발을 내딛었습니다. 벼랑 끝에 닿았고 흙이 부스러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또 한걸음을’하는데 그 귀족이 벌떡 일어나서 ‘안돼’하고 외쳤답니다.
또 한번은 죄인을 조그만 배를 타고 가다가 난파당해서 바다에서 허위적거리는 사람에 비유했습니다. ‘큰 파도가 치고 이 사람은 난파되었고 사면을 돌아보아도 어두운 밤바다 위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붙잡았던 나무 조각마저 놓치고 커다란 파도에 휩쓸려 떠올랐다가는 바다 깊이 곤두박질치곤 하였습니다. 허우적거렸지만 모든 팔다리에 힘이 빠지고 그는 이제 그 캄캄한 밤바다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잠시 머리가 물 위에서 올라오고 나면 사람 살려라고 외쳤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무자비한 파도는 그 사람의 머리를 바다 속으로 쳐박았습니다. 이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고 그 짠물이 목구멍까지 넘어오고 그는 이제 모든 저항할 수 있는 기운을 읽어버리고 바다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파도가 한번만 더 밀려오면 그는 더 이상 물 위에 떠오를 수 있는 어떤 힘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이 때 파도가 확-’하자 어떤 사람이 벌떡 일어나 ‘애들아 구명 보트를 내려라’하고 소리질렀답니다. 그 묘사가 얼마나 놀라웠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끔 저에게 적합한 묘사를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말을 할 때 빨리 하려고 하지 말고 정확하게 단어를 사용하고 풍부한 묘사를 하려고 노력하라고 말해줍니다. 말이 잘 생각이 안나면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 생각을 한다음에 말을 하는 버릇을 해라고 합니다. 그러면 시간이 지나면서 말을 빨라지고 묘사도 정확해지게 됩니다.
노랗다는 단어 하나밖에 모르는 사람은 누런 것보고도 노랗다고 하고 누르퉁퉁한 것을 보고도 노랗다고 합니다. 그러나 각각 다르다고 느끼는 사람은 노랗다는 표현 하나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노란 것, 누르퉁퉁한 것, 누런 것, 샛노란 것, 여러 가지 단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언어의 패러다임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것을 느꼈을 때 그 패러다임 속에서 적합한 단어를 찾습니다. 찾아갔는데 아는 단어가 노랗다 밖에 없는 것입니다.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복음을 깊이 경험한 다음에 느낀 첫 번째 큰 좌절이 이런 것입니다. ‘인간의 언어가 이렇게 엉성할 수가’ 내가 지금 주님을 만났고 그분의 사랑과 그분의 은혜를 생생하게 경험했는데 여태껏 내가 배운 어떤 말을 가지고 표현해도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을 반영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계속 ‘말로 할 수 없도다. 말로 할 수 없도다’만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청교도 역사 가운데 질레스 피라고 하는 인물이 나옵니다. 그들이 예배당에 모여서 회합을 가졌는데 그 회합을 갖게 된 계기는 신앙고백을 작성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날 회의에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신앙고백을 작성하기로 계획되어있었습니다. 그때 거기 모인 사람들이 ‘오늘은 질레스 피 목사님이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겠습니다’했고 질레스 피 목사님이 기도했습니다.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시며......’하며 우리들이 기도하듯이 하나님에 대한 서술을 붙여가면서 마지막에 그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우리가 이제 하나님 자신에 관하여 신앙고백을 작성하고자 모였는데 우리에게 은혜와 지혜를 주십시오’하고 기도를 마쳤습니다. 그랬더니 그 자리에서 동의가 들어왔는데 ‘이태껏 인생을 살아왔고 많은 책을 읽었지만 오늘 이 질레스 피 목사의 기도의 서두에 나온 언어처럼 이렇게 정확하게 전능하신 하나님을 묘사한 그 서술을 읽어본 적이 없다. 이 목사님의 기도의 앞부분에 나온 것을 하나님에 관한 성품을 묘사하는 신앙고백으로 체택하기를 동의합니다’했습니다. 그 날 그 목사님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흔히 오늘날 대예배에 사람을 세워놓으면 ‘찬송과 영광을 세세무궁토록 받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아버지’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그러한 것처럼 거기 모인 많은 사람들에게 뭔가를 과시하고 감동을 끼치기 위해서 그날 급히 조작해낸 하나님에 관한 서술이었겠습니까? 그 안에서 느끼고 그 안에서 탐구하고 그 안에서 생각하고 그것을 흡수하고 그 안에서 숨쉬며 살던 것들이 신앙고백으로 나온 것입니다. 많이 느꼈고 많이 탐구했기 때문에 하나님에 관한 정확한 신앙고백의 내용들을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묘사 속에 적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헤페츠’입니다.
마당에는 아직 나무에 잎사귀도 안 났는데, 얼까봐 실내에 들여놓은 화분에서 꽃이 피었습니다. 봐주는 사람도 없는 화장실 옆에서 꽃이 피는 것이 안타까왔습니다. 그래서 들어 내려다 놨습니다. 그랬더니 아침에 새들이 날아와서 노래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여러분들이 예수는 믿고 뭔가 확신은 있는데 냄새도 안 나고 읽어도 내용이 별로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삶을 보면 콘크리트 더미 사이를 지나가는 것 같다면 여러분들의 삶은 정말 예수를 보여주는 삶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꽃도 피고 시냇물도 흘러야 합니다. 나무 몇 그루 심어놓고 꽃 한다발만 갖다 놔도 새들이 모여 드는데 우리의 삶이 그렇게 정말 비옥하고 문학의 향기가 있고 논리의 정연함이 있고 지성의 견고함이 있으면서 아름다운 동산처럼 창화만발한 정원과 같은 삶이 될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안에서 주님을 엔죠이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엔죠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즐거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러한 아름다운 삶을 주신 하나님을 자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힘이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묵상과 탐구를 통해서 흘러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쓰여진 편지와 같은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13. 감화력의 비밀
“지혜자의 말씀은 찌르는 채찍 같고(전12:11上)”
하나님에 대한, 혹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풍부한 경험은 아름다운 말을 찾게 만들고 적절한 언어를 선택하게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지혜로운 말씀이 되고 그것이 전도자의 지혜로운 글들을 쓰게 된 내면의 변화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앞부분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래서 인격적으로 자신이 그것을 체험하고 지성적으로 그것들을 탐구하고 그 적절한 언어를 찾아내고 하는 과정을 통해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쓰게 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어서 전도자가 ‘지혜자의 말씀은 찌르는 채찍 같고’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것은 ‘채찍’이라기보다는 ‘막대기’라고 번역하면 맞습니다. 막대기를 채찍으로 썼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줄로 된 것이 아니라 곧게 되어있는 막대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구절이 번역상 논란이 되는 부분인데 ‘회중의 스승의 말씀은 박힌 못과 같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을 찾아보면 이 회중은 ‘모아진 것들’이라고 되어있고 스승은 히브리어로 바알인데 바알은 히브리어에서 ‘master’ 혹은 ‘lord’(주인, 주, 지배자)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 난하주에 보면 ‘수집된 명담은’ 이라고 번역되었는데 그것이 훨씬 더 비슷한 번역일 것 같습니다. 그래서 ‘회중의 스승’이라기보다는 ‘한 편 한 편 쓰여진 지혜로운 글들을 모두 모았을 때 모아진 글들 중 으뜸이 되는 것들은 박힌 못과 같고’라고 해석할 수 있고 또 ‘of’를 동격으로 해석해서 ‘모아진 말씀들, 곧 뛰어난 교훈들은 박힌 못과 같고 이는 한 목자에서 나왔음이라’라고 번역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앞부분만 보겠습니다.
‘지혜자의 말씀’은 히브리 성경에서 복수로 나옵니다. ‘지혜자의 말씀은 찌르는 채찍과 같고’ ‘모아진 말씀 곧 뛰어난 교훈들은 잘 박힌 못과 같다’ 이 두개가 병행법입니다. 그래서 찌르는 막대기는 감화의 힘을 가리키고 박힌 못이라고 하는 은유적인 비유는 그 감화의 능력을, 그리고 감화의 지속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어내어서 지혜로운 글이 되었을 때 그 지혜로운 글이 주는 효과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지적으로 탐구해서 만들어낸 그 글이 미치는 차세대의 효과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효과가 하나는 찌르는 막대기와 같은 강한 감화를 주고 또 하나는 그 감화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이 지혜의 글들이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받은 은혜를 잘 보존하는 것은 그것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오늘날은 부흥회 같은 것이 거의 없어진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참 많이 했습니다. 최소한 신년 축복성회와 가을 부흥성회 이 두건은 꼭 지나가는 행사였습니다. 그때 성도들이 보따리 싸가지고 다니면서 참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강퍅하고 신앙에 대해서 무감각해졌지만 그때는 말만 하면 사람들이 울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눈이 퉁퉁 붇도록 은혜를 받았는데 왜 울었냐고 물으면 ‘몰라. 하여튼 눈물이 났어’합니다. 물론 성령님이 전달되는 지식이 많지 않아도 그것을 사용해서 죄인의 마음을 찌르시면 그렇게 회개가 나올 수도 있고 은혜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은혜의 감정이라고 하는 것은 지식의 연료에 불이 붙어서 타오르는 것입니다. 그 두개가 분리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무지한 소산입니다. 신앙생활이 너무 곤고하고 괴로우니까 (아주 뛰어난 지성인들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열광적인 집회에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도 아니라고 생각되니까 ‘저것은 아닌 것 같은데’ 생각하면 그것이 은혜 받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성의 스위치를 끄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친 듯이 열광해보려고 하지만 돌아올 때 얼마나 허무한 지는 경험해본 사람만 압니다. 저도 왕년에는 손바닥 치다가 피도 맺혀보았습니다. 다 소용없는 것입니다. 지적인 내용들을 가지고 은혜의 불이 타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항상 자신이 신앙에서 미끄러지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받은 은혜가 작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적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에 자신이 뒤로 물러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올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물론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을 때 어느 순간 성령의 능력과 함께 진리의 말씀을 깨달음으로 주어지는 그 은혜의 크기가 모두 똑같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크게 은혜를 받은 사람도 있고 작게 은혜를 받은 사람도 있고 이런 종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있고 저런 종류의 은혜를 받은 사람도 있으니까 그 색깔과 다양성이라고 하는 것은 참 큽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애적인 은혜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적합하게 잘 관리하지 않으면 그 받은바 큰 은혜를 금방 상실하게 되지만 받은 은혜가 그렇게 생애적으로 큰 은혜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그 은혜를 마음에 잘 유지하면서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게 살려고 애를 쓰고 분투하면 그 은혜의 불이 처음에는 성냥불 같아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 불길이 점점 활활 타올라서 우리의 마음에 생애적인 은혜를 받은 사람보다 더 많이 은혜의 영향아래 살아가게 되는 변화가 일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이것은 물론 우리가 묵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크게 우리에게 생애적인 은혜를 부어주시는 그런 기회로 삼으시기도 하십니다. 한국 교회사에서 나오는 일화인데 어떤 깡패가 선교사가 주는 전도지를 받아서 그 자리에서 코를 풀어버리자 ‘당신이 이 귀한 하나님의 말씀이 적힌 종이로 코를 풀었는데 오늘 밤 하나님께서 그 코를 가만두시나 보라’고 헤어졌는데 밤새 잠을 못 이루면서 코가 어떻게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면서 ‘서양귀신에게 밉보여서 혼나면 그것이 만만하지 않을 것이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답니다. 소위 율법적인 회개를 경험한 것입니다. 밤새 두려워서 떨다가 날이 밝자마다 자기 발로 선교사에게 찾아가서 용서를 빌고 주님을 영접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면 무슨 일인들 우리에게 안 일어나겠습니까? 조나단 에드워wm가 그렇게 걸출한 지성적인 신학자가 되기에는 1733년 어느 날 건강을 위해서 말을 타고 숲속을 지나가다가 디모데전서 1장 17절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한 구절을 묵상하면서 그가 온 몸이 성령의 임재로 사로잡히는 개인적인 부흥을 경험하게 됩니다. 유명한 전도자의 설교를 듣거나 부흥강사의 외치는 설교를 듣다가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한 구절을 묵상하다가 그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사실 교회사에 이런 예는 지루할 정도로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말씀 자체가 우리에게 이런 강력한 은혜를 불러일으키는 도구가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일반적으로 볼 때에는 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묵상은 경건한 신자들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그 은혜를 보존하고 받은 바 그 은혜를 더욱 불러일으키는 수단으로 훨씬 더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악인은 범사에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지만 지혜롭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주님 말씀을 마음에 두며 살기를 힘썼고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훌륭하게 보존했을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뜨거운 은혜들이 공급되는 통로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지금은 모두 다 좋은 시대가 되어서 바뀌었습니다만 옛날 우리 어릴 때만 해도 증기기관차가 있었습니다. 기차 앞에는 석탄이 있어서 석탄으로 계속 불을 때면 그 때는 불의 힘으로 물을 끓이고 그 증기력으로 기차가 달려가는 것입니다. 기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힘차게 연기를 내뿜으면서 달리는 기차도 화로에 불이 꺼지면 더 이상 가지 않습니다. 그 커다란 덩치가 아무 소용이 없고 기계의 정밀함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행선지가 정해지고 유능한 기관사들이 요소요소에 달라붙어서 기관실을 점령하고 기계를 움직여도 화로에 불이 꺼지면 기차는 더 이상 안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바로 그런 화로입니다. 마음에 그런 은혜의 불이 계속 타지 않고도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이념으로의 삶이지 신앙의 삶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념은 아마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삶은 그 자신이 거룩한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그런 감화력의 불이 유지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의 빛과 은혜의 열이 함께 필요합니다. 그런 것들이 계속 우리 안에서 유지되어갈 때 우리들이 힘차게 연기를 내뿜으며 달려가는 기관차처럼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통해서 깊이 은혜를 받고 거기로부터 깊은 깨우침을 받으면서 충분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진리의 길을 터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고백은 그 사람의 지적인 수준 여하와는 상관없이 성경을 홀로 읽기만 해도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인 골격들을 알아내고 구원에 이르기에는 충분하다고 고백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홀로 쓰인 채로 가만히 있는 것, 직접 대면하는 것에서도 우리들이 능히 변화 받을 수 있고 은혜 받을 수 있지만 그 이상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한다면 지혜자가 글을 쓸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그 자체가 빛이기도 하지만 성경이 정확하게 해석될 때 강력한 은혜의 빛들을 더 풍부하게 쏟아내기 시작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심히 근심 중에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을 거셨더니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그 일을 모르느냐면서 이야기하기에 예수님께서 야단치시면서 구약의 선지서로부터 시편에 이르기까지 되어있는 메시아에 관한 성경들을 풀어주셨고 그렇게 예수님이 풀어주실 때에 제자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했습니다. 성경 자체를 가지고 있을 때는 뜨거워지지 않았던 마음이 예수님의 해석에 의해서 성경이 풀려지기 시작하자 거기로부터 감추었던 찬란한 진리의 빛들이 드러나면서 성령께서 그 해석의 과정을 사용하셔서 마음이 굳고 더디 믿던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마음에 확신을 주시고 뜨거운 감화를 불러일으켜 주셨습니다. 찌르는 막대기와 같이 그들의 마음을 성경의 해석으로 찌르시자 그들의 마음은 자극을 받고 불붙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은 설교사적으로 보면 해석의 영이 부어진 순간입니다. 구약의 닫혀있었던 성경들이 이 성령을 받은 사도들에 의해서 해석되기 시작되었고 풀려지기 시작하자 그것을 듣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들도 예상치 못했던 어마어마한 영혼의 변화를 불러일으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신학적으로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면 그 성경을 풀어서 한 설교나 가르침은 하나님의 말씀인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마틴 루터는 ‘만약에 설교나 가르침이 성경을 성경대로 해설하고 있는 한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요한 칼빈은 그것보다 정교하게 언급합니다. ‘성경말씀을 성경말씀대로 해설하고 그것을 설명하고 그 설명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면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권위에 있어서 성경 그 자체는 궁극적인 권위이고 인간의 해석은 그 권위에 종속되는 권위를 갖는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결국 성경은 해석되기를 기다리는 책이고 성경 그 자체가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쳐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을 해석할 때에 거기에서 나오는 자신의 실천적인 삶과 용해된 가르침이 되고 그렇게 될 때 그 가르침은 찌르는 막대기와 같은 강력한 감화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곤고한 지체들을 만나서 상담을 하면 가끔 그런 질문을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힘들고 잘 모르면 목사님께 물어보고 해결을 받는데 목사님은 어떻게 합니까?’하고 불쌍하다는 듯이 물어봅니다. 거기에 대해서 저는 세 가지 정도의 방법을 가지고 있다고 일어줍니다. 첫째는 훌륭한 스승을 찾아서 자문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나이가 들면서 스승들이 한분한분 세상을 뜨십니다. ‘나는 그분들의 제자일 뿐이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선생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은 점점 죽음 건너편으로 건너가고 나는 그럴 의지가 전혀 없었는데도 저보고 선생님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비극스러운 상황이 도래하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성령께 직접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성경이나 교리를 공부하다가 모를 때 그때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러 이러한 이치에 대해서는 제가 정말 생면부지인데 조금만 가르쳐주십시오. 은혜를 주십시오’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신기하게 성경이나 다른 계기를 통해서 깨닫도록 만들어주시기도 합니다.
세 번째는 성경을 읽을 뿐 아니라 성경을 보면서 나와 같은 처지에서 고민했던 걸출한 사람들의 신학적인 유산들을 탐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적인 모든 탐구의 중심에는-many books 한복판에는-항상 the book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탐구들을 해나가는 동안에 내가 스스로 성경을 보아서는 잘 알 수 없었던, 성경 속에 있었지만 해석을 통해서 찬란하게 빛을 발하게 된 결과들을 내 것으로 활용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빛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에만 들어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에 하나님의 이 지식의 빛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의 빛은 한편으로는 인간의 타락과 함께 오염되어서 빛의 상당부분을 상실했고 그것을 인식하는 인간도 부패로 인해서 많은 것들을 잃어버려서 거기에서 비치는 계시의 참된 빛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불행한 처지가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성경 아닌 다른 책들이나 지식들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정확하게 알고 인간의 처지가 어떤 처지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지를 이해하고 배우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것을 기대하면 안됩니다.
그렇지만 반대로 성경의 진리의 말씀의 빛을 밝게 받은 사람이 일반 학문들을 보게 될 때 놀랍게 성경말씀을 잘 믿고 따른데 도움을 주게 됩니다. 그래서 선교학에 보면 엘렌틱스라고 하는 과목이 있는데 원래 희랍어 ‘책망하다’에서 온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학문을 하는 자세는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정확히 알고 그 최종적인 빛 아래서 자신이 탐구하는 학문을 비춰보면서 이것은 옳고 이것은 그르고 하면서 갈 길을 정해주고 책망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쳔들이 해야 하는 학문의 자세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 이외에 그 어떤 것도 굴복적인 권위를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잘 이해하는 것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인생이 무엇인지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절대적인 비결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그 말씀을 통해서 자기가 깊이 깨닫고 나면 그 다음에 이 세상의 학문을 잘 이해하고 있으면 놀랍게 기독교적인 지성과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말할 수 없이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더 뛰어난 통찰들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벌써 세월은 흘렀고 그렇다고 해서 세계 소년 소녀 문학전집을 읽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와서 생각하면 젊은 시절 애쓰고 살아온 것은 사실이지만 부분적으로는 게을렀고 부분적으로 방향을 잘못 잡아서 인생의 많은 날들을 낭비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여태까지는 목회자는 특별한 사람이 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대대적으로 수정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특별한 사람이 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제 자신은 너무 자격이 없는 것 같아서 하나님 앞에 죄송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렇다고 지식과 담쌓고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항상 저는 인생의 이런 문제를 해결해가는 데 있어서 가장 건강하고 정신이 집중되고 몸의 컨디션이 최적일 때는 성경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학문을 탐구합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이 목사를 찾아오는 것과 방불한 것입니다. 그래서 미리 그것을 깊이 깨닫고 그런 작업들을 통해서 내 자신 안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성경이 아직 닫혀 있어서 그 찬란한 빛을 보지 못한 부분들의 뚜껑을 열어가면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줄 때 이런 역할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만들어낸 비유입니다. 여러분들을 기둥하나 없는 커다란 돔형 체육관 같은 곳으로 데려갔다고 칩시다. 그리고 거기에 모두 의자를 놓고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드디어 설교시간이 됩니다. 모두 캄캄합니다. 그런데 이 돔 전체가 유리로 되었고 바깥에는 찬란한 빛이 비치는데 새카맣게 도배가 되어있어서 도저히 빛을 볼 수 없고 옆 사람 얼굴도 겨우 불만큼의 빛 밖에는 없다면, 설교란 그 캄캄한 돔 천장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미켈란젤로가 베드로성당에 그림을 그린 것 같은 자세로 신학적 활동,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서 천장을 벗겨낼 때 까만 필름에 하얀 글씨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써있고 그 뚫어진 사이로 찬란한 빛이 들어와서 그 의미를 알게 해 주는 것,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 은혜의 세계, 지혜의 세계를 터득하고 그 앞에서 결단하고 그 하나님을 몰랐던 삶에서 돌이키게 해주는 것, 그것이 목회자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죤 오웬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말씀을 저장하는 세 개의 창고가 있는데 하나는 성경책 자체이고 또 하나는 신자의 마음이며 또 하나는 목회 사역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목회 사역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의 참된 의미를 그렇게 드러내 주어서 신자의 마음에 끊임없이 찌르는 막대기를 제공하는 것, 그래서 어제 받은 은혜는 어제 산 것으로 족하고 오늘은 다시 그 말씀이 우리를 찔러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지성의 폭을 넓히고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던 세계를 보여주고 우리들이 체험하지 못했던 그 신비한 은혜의 세계의 정체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그 자각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찔림을 받게 될 때 우리는 늘 결단하게 됩니다. ‘이렇게 살면 안 된다. 우리는 아직까지도 너무 무지한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빛, 하나님의 사랑의 빛, 주님의 그 도움의 빛이 필요하다’는 자각을 계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저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도 한때는 여러분처럼 그러했습니다. 시간이 흘러가면 결국은 앞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씩 죽고 여러분들은 원하지 않아도 선생님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 지식의 빛,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의 빛을 소유하지 못한다면 여러분들은 얼마나 부끄러운 사람들이 될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이 우리를 아직 안 데려가시고 이 땅에 남겨두신 것이 바로 이런 빛을 나눠주는 현자의 삶을 살게 하시려하심이 아니겠습니까? 겉 사람은 어차피 다 후패하게 되어있고 다 시들게 되어있습니다. 가끔 제자들을 만나면 10년 만에 만나도 ‘목사님 하나도 안 변하셨습니다’하는데 ‘무슨 창조의 교리에 어긋나는 말이냐. 겉 사람은 다 후패하게 되었고 나는 아첨하는 자를 친구로 두지 아니하였다’고 제가 야단칩니다.
인생이 80이라면 40이 중간이 아닙니다. 30쯤이 중간입니다. 생산성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10대 때는 영어단어 60개씩 집어넣어도 그 다음날이면 30개는 생각납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예 외우기를 포기합니다. 그때그때 찾자고 합니다. 왜냐하면 안 외워지는 걸 어쩝니까? 그렇게 하며 사는 것입니다. 여기저기 아프고 건강도 발목을 잡습니다. 그런 것들이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냥 자기가 기르던 새끼들이라 생각하고 사랑하며 끌어안고 자족하며 살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비관이 되어서 살 수 없습니다. 눈은 안보이고 기억은 희미하고 이해력은 떨어집니다. 결국은 점점 후패해져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양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월이 많이 흘러서 파파할아버지가 되고 호호할머니가 돼도 두 눈은 예지로 영롱하게 빛나야 합니다. 그것이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흐르는 진실한 참회의 눈물로 인간 본연 속에 깃들어있는 부패성의 때를 벗겨내고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경험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지식과 탐구로, 정제된 언어로 자기만의 잠언을 소유하고, 그래서 그 삶 속에서 구현한 바를 다시 가르침에 순화시키는 그런 지혜자의 구도자적 삶이 계속 이어질 때 이 육체의 노년에도 불구하고 이 두 눈은 거룩한 예지로 영롱한 지혜자의 눈이 되는 것이고 그 때 그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갈 길을 잃은 많은 사람들에게 참 빛을 나눠줄 수 있는 현자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지혜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렇게 감동을 받아서 그렇게 아름다운 말을 연구하고 지적인 탐구와 하나님 말씀에 대한 깊은 묵상을 통해서 잠언을 길어냈고 우리는 그 글을 통해서 은혜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똑같습니다. 우리도 그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고 우리가 또한 이 어두운 세상에서 우리 인생의 제자가 될 많은 사람들에게 이 어두움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나눠주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현자의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묵상하고 그 말씀을 가슴에 두는 삶의 실천 없이는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어갈 리가 없습니다. 우리 안에 이 부패성과 더러운 본성이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거룩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거룩하게 사는 길에 대해서 부단히 탐구해야 되지만 타락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타락할 수 있을까 하는 제목의 책을 가지고 공부 안 해도 됩니다. 그러니까 경건한 믿음의 사람들이 그렇게 자기와 싸우면서 마음을 지키고 그 마음에서 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살기로 매일매일 새롭게 새롭게 다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살아야지만 빛을 나눠주는 현자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14. 불망의 감화
“...회중의 스승의 말씀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의 주신 바니라(전12:11下)
지난 시간에는 ‘지혜자의 말씀은 찌르는 막대기와 같고’에서 묵상을 통해서 깊이 체험하고 학문적으로 궁구하여 정리된 말씀을 지혜자가 전하였을 때 그 말씀이 강력한 감화력을 가진 말씀이 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의 설교제목은 감화력의 비밀이었습니다.
오늘은 바로 그 뒤편 하반절 이야깁니다. ‘수집된 말씀 중 으뜸이 되는 말씀들은 잘 박힌 못들과 같으니 다 한 목자의 주신 바니라’ 이부분을 통해서 오늘 우리들이 생각해보고자 하는 제목은 ‘불망의 감화’입니다. ‘불망’이 무엇입니까? ‘물망’은 잊지 말라는 것인데, ‘불망’하면 ‘오매불망’이 생각납니다. 그 오매불망(寤寐不忘)은 오(寤)자가 잠깰 오자이고 매(寐)자는 잠들 매자입니다. 그러니까 잠을 깨나 잠이 드나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잠을 깨나 잠이 드나 잊을 수 없는 마음의 상태를 가리켜서 오매불망이라고 표현합니다. 교회사에서 초대교회로 거슬러 올라가면 많은 신앙의 인물들의 기록 속에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잊지 못하는 자신의 심사를 ‘오매불망 주님’이라고 표현한 기록이 많이 나옵니다.
감화력의 크기가 그 감화를 지속하게 하는 것과 상관이 있는 것은 틀림이 없지만 감화력의 강도가 곧 저절로 그 감화력을 오래 지속하게 한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래서 감화를 아주 강력하게 받은 것 같은데도 그 감화력이 지속되지 않는 경우가 있고 그렇게 충격적으로 받아들인 것 같지 않은데 오래도록 은은하게 가슴에 남아서 잊혀지지 않는 불망의 감화를 가져다주는 말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 중 하나가 간증입니다.
웬만하면 간증집회를 잘 안하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들을 때는 참 쉽고 편합니다. 이렇게 설교하는 것처럼 복잡하게 해서 나중에 자기 노트 필기한 것과 출판부에서 나오는 것과 대조해볼 고생을 안 해도 되고 넋 놓고 앉아서 가만히 들으면 인생사는 이야기가 줄줄 나오고 감화를 받게 되니까 간증이 참 재미있고 흥미 있는 것입니다. 그런 간증을 들을 때 사람들이 순간적으로는 감화력을 꽤 강도 있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찌르는 막대기와 같이 찌르면서 ‘억’하는 감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데 간증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그 감화력의 문제는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그것은 내 삶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기억력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발달해야 될 부분에 있어서는 참 발달한 사람입니다.
저는 인생을 살 때 머리의 용량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정보를 접할 때 이것을 입력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아니면 전혀 기억할 필요가 없나 다른 사람의 머리 속에 대신 집어넣어야 되나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정보를 판단해서 집어넣습니다. 그중에서 잊혀지지 않는 것은 책이 수천 권이 돼도 그 낱권 하나하나의 값을 거의 기억합니다. 요즘은 책이 한꺼번에 박스로 들어올 때가 있어서 기억이 잘 안 나지만 가난하던 시절 점심 값을 아껴서 사온 원서들은 지금도 그 가격을 기억합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정보들을 입력하는데 저는 영화 본 것이 기억이 안 납니다. 영화를 보고도 봤는지 안 봤는지를 판단하다 끝나는 영화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때 본 것인지 지금 본 것인지 잘 생각이 안 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 영화나 다시 봐도 늘 새로우니까 편리한 점도 있습니다.
간증은 자기가 산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산 것입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보면서 여러분 눈물 꽤나 흘렸을 텐데 지금도 눈물이 납니까? 감정적인 자극이라는 것이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정의 자극이 없이 교훈이 심겨지는 법은 없지만 겨냥을 할 때 머리를 겨냥한 것과 가슴을 겨냥한 것 사이의 차이가 그렇게 큰 것입니다.
언젠가 집사님들과 차를 타고 가다가 테이프를 하나 들었는데 훌쩍 훌쩍 울기에 보니 예배시간에 말씀 들으면서는 절대 안 우는 사람들이 울더군요. 그러니까 그 순간 감화가 큰 것 같아도 오래도록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너무 선정적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을 이야기할 때 채찍에 맞고 피 흘리고 옆구리에 창 찔린 것보다 더 놀라운 고난은 율법 아래서 그분이 태어나셔서 그 치욕 속에서 그 율법을 절대적으로 순종하면서 사시면서 치르신 그 희생과 그 치욕, 하나님이시면서도 죄인들을 위해 만들어놓은 그 율법 속에 종속되어서 그 율법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인간들이 어긴 그 죄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율법을 준수하면서 사신 그 피나는 예수님의 생애에 치러진 그 고난, 이런 것들을 통하여서 마지막 십자가에서 그 율법의 요구대로 죽으심으로 우리의 구원이 완성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을 모두 통전적으로 고려하고 받아들여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의 수준이 제각각이니까 그것이라도 보면서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이 있다면 감사한 일입니다.
그래서 찌르는 막대기와 같은 감화의 강도가 반드시 그렇게 강하게 감화를 받은 모든 깨달음들이 계속해서 오래 가느냐면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관련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또 다른 방면에서 고찰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지혜자가 사람들에게 전한 많은 말씀들이 있는데 그 말씀들 중에도 우열이 있을 것입니다. 성경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말씀이 똑같은 볼륨으로 우리에게 구속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우리에게 영혼을 변화시키고 강력하게 힘을 발휘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점에 있어서 하나님이 쓰실만한 말씀들은 똑같은 정도의 중요성을 가진 것들이 성경에 모두 골고루 흩어진 것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읽다가 회심하는 사람들은 있지만 마태복은 1장의 족보를 읽다가 회심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잡니다. 그러니까 각각 다릅니다.
그런데 그 수집된 말씀 가운데 뛰어난 말씀들-으뜸이 되는 말씀들-은 찌르는 막대기와 같은 감화력의 강도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감화력을 오랫동안 지속시키는 불망의 감화의 지속적 능력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불망의 감화를 지속시킬 수 있는 힘을 수집된 말씀 중 으뜸이 되는 교훈들이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강력하고 찌르는 말씀인 동시에 또한 그것은 오랫동안 그 감화를 지속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나오는 ‘박혔다’고 하는 것은 ‘내트윔’이라고 하는 히브리 단어인데 ‘나타’라고 하는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이 단어는 텐트 같은 것을 치기 위해서 뽈대 같은 것을 박아 포장을 칠 때 사용하는 단어이고, 혹은 식물을 심을 때 쓰는 단어입니다. 나무 같은 것들이 뿌리를 내려서 심겨지는 것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잘 박힌 못과 같다는 것은 못을 살짝 박은 것이 아니라 깊이 박혀서 웬만한 충격을 주어도 빠질 수 없는 깊이 박힌 못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박혀져 있으면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간증을 듣는 순간에는 눈물을 훌쩍거렸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되어버린 것이 아니라 잘 박힌 못과 같아서 지속적인 감화를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받은 감화를 잊지 않도록 불망의 감화력을 계속 지속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의 능력이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들이 깨닫고 도전을 받는 것, 그래서 깊이 깨닫고 여러분들이 깨트려진 것, 그 말씀이 영원히 자기 말씀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오전 설교 중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bad Christian이라면 말씀이 자기를 한번 깨트렸다고 해서 그 말씀이 영원히 자기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foolish Christian-바보 같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좀더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멍청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말씀이 자기의 마음 안에 살아있을 때만 자기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얼마나 많이 내면의 세계를 주님을 위해서 활용을 하여야지만 신자의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내면의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작용에 대해서 거의 무지하게 내버려둔 상태에서 살 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생각이 진리의 빛을 붙잡고 그 빛을 우리의 마음에 적용하면 총명이 생기고 마음은 그 총명한 지식을 붙들고 작용함으로서 거룩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언제나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대로 순종합니까?
생각은 자꾸 죄의 영향을 받으면서 허탄한 생각을 합니다. 쓸데없는 생각, 죄악 된 생각을 하면서 인생을 낭비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내면의 작용은 그렇게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붙들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나마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지식이 우리에게 걸렸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적용을 해야지만 그것이 총명화합니다. 그런데 적용을 안 합니다. 적용을 한다는 자체는 말씀 앞에 자신의 삶을 계속 투명하게 비춰보는 것입니다. 못생긴 사람이 제일 괴로운 시간이 거울 보는 시간인 것처럼 그것이 잘 사는 사람에게는 즐거운 일이지만 개떡같이 사는 사람에게는 정말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 앞에 안나옵니다. 그나마 엉겹결에라도 적용되어서 총명이 조금 생겼어도 마음이 그것을 붙들지 않습니다. 이런 모든 반역적인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내면의 세계를 가지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다 내버려두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소리쳐도 안 됩니다. 해보면 안 되는 것이 뻔합니다.
죤오웬은 그것을 가르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가 마음속에서 계속 역사하고 있는데 수없는 맹세, 결단, 각오, 결심, 어떤 사람은 혈서를 쓰는데 백번해도 안됩니다. 결국은 자신 속에 있는 이러한 죄의 영향력들을 말려버려야지만 넘실거리는 죄의 강물들이 우리를 덮쳐서 우리를 죄의 법 아래서 살아가지 않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져서 총명을 갖게 되었고 마음이 한참 붙들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상황이 벌어지면 또 다른 말씀을 붙들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그 말씀이 지식의 저장고에 있으면서 시기마다 우월한 것이 다릅니다. 어떤 때는 성결에 대한 말씀이 도전을 줄 수 있고 어떤 때는 물질에 관해서 도전을 주실 수 있고 어떤 때는 성실에 관해서, 이렇게 다양합니다. 그렇지만 방향이 다를 뿐이지 이 말씀에 자극을 받으면 이전에 깨달았던 말씀과 연결되어서 마음속에 깨달아지는 세계를 가져야지만 우리들이 죄를 누르고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우리를 새 언약 아래로 불러주셨지만 구원받은 사람이 참여한 이 새 언약 안에는 자동적으로 우리를 세상 끝날 까지 좋은 믿음생활하게 해줄 것이라는 그런 보증 같은 것들은 없습니다.
이런 진실한 복음에 대한 증언을 제가 25년 전에만 들었더라면 아마 훨씬 다른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괜찮다. 너 잘 믿는다. 너 특별하다. 하나님이 사랑하신다’하는 얘기만 자구 들으니까 자신도 그런 사람처럼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허위와 거짓 속에 싸여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불행하고 후회되는 나날들입니까? 한번가면 다시 오지 않는 인생인데 인생을 그렇게 살아서 되겠습니까? 그래서 결국은 그 하나님의 말씀 앞에 한번 깊이 깨트려졌다고 하더라도 지성의 창고에서 드러누워 있는 한 또 다른 말씀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움직인 그 말씀이 예전에 깨달았던 말씀과 연결이 되어서 함께 엮어져서 작용하는 이 역동적인 말씀의 작용들이 여러분 속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절대 성화의 길을 걸어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오래 예수를 믿어도 잘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면 그 말씀을 가지고 자신의 마음속에서 계속 곱씹어서 박힌 못과 같이 그 말씀이 깊이 자기 속에 불망의 감화력을 유지하도록 보존하는 그 일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암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같이 총명한 머리로 그것을 암기하면 얼마나 커다란 힘이 되겠습니까? 외우면서 가슴에 담아두는 것입니다.
어떻게 원고 없이 설교할 수 있느냐고 묻는데, 마음속에 외우는 것입니다. 무엇을 설교할지 가닥을 잡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노력하니 여러분도 노력해야합니다. 그렇게 해서 말씀을 담아야 하는데 거기에서 우리가 고려해야 될 것이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찌르는 막대기와 같이 강력한 상처를 말씀으로 우리의 가슴에 입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박힌 못과 같이 계속 보존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가지 작용이 우리 안에서 함께 작동되어야 합니다. 그 첫째는 consideration(숙고)입니다. 숙고(熟考)라는 것을 한자로 쓰면 재미있습니다. 익을 숙(熟)자입니다. 푹 익도록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명이 푹 숙성되도록 그렇게 충분히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숙고해야 합니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의지를 가지고 노력하지 않으면 부패한 인간의 마음이 진리를 깊이 곱씹어서 반복해서 생각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부패한 죄인의 내면세계가 언제나 낯섭니다.
어느 목사님이 공부하려고 외국에 갔는데 구약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뇌졸중으로 갑자기 쓰러지셔서 병원에 누우셨답니다. 식물인간이 된 것입니다. 학생들과 함께 병문안을 갔어도 알아보지 못했답니다. 오랜만에 의식이 없는 채로 입을 열고 희미하게 하시는 말씀을 어느 학생이 귀를 기울이고 한참 들었더니 시편 1편을 히브리어로 외우고 계셨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과 자신이 하나가 된 세계 속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이 숙고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어느 순간 저절로 숙고되리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숙고하려고 노력해야합니다. 세상을 생각하는 것은 노력하지 않아도 되지만 이 세상 속에 살면서 주님을 생각하는 것은 정말 노력해야합니다.
정규적인 기도시간은 새벽이나 밤 시간에 하지만 공부를 하거나 직장 일을 하거나 무엇을 하다가 생활하면서 잠깐 잠깐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합니다. 바쁘게 일하다가 어느 한순간에 잠깐 두 손을 얼굴에 모으고 불과 몇 분 동안 간절히 ‘주님, 제가 오늘 여기 있습니다. 제 마음에 주님 생각나시옵소서. 그리고 제가 여기 있는 것을 기억해주십시오. 한순간이라도 주님에게 붙어있지 않으면 쓰러지는 죄인입니다’하고 다시 일을 합니다. 자주 할수록 좋습니다. 그렇다고 일은 안하고 기도만 하고 있으면 쫓겨납니다. 순간순간 간절히 마음을 쏟아서 할 때 마음에서 갱신의 작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숙고하는 것입니다. 깊이 숙고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 속에서 깊이 익게 되는 것입니다. 무르익어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말씀이 아니라 마음 깊이 말씀이 나와 하나 된 친밀감입니다.
‘오늘은 설교가 좋네, 오늘은 어떻게 성경이 눈에 잘 들어오나. 종이 질도 좋고 인쇄술도 발달하고’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누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면 입에서 나오는 것인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그런 familiarity가 있는 것입니다. 친밀감이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authority(권위)가 나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깊이 숙고해야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객관적으로 돌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 배는 것입니다.
음식물을 먹고 체하면 속에서 덩어리가 되어 돌아다니는 것이 느껴집니다. 소화불량입니다. 토하든지 소화제를 먹어 부숴버리든지 쏟아내 버려야합니다. 그러기 전까지는 속이 편하지 않습니다. 소화되지 않은 말씀을 간직하고 사는 것도 그런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잘 소화되면 기분이 좋습니다. 사랑하는 친구들과 함께 웃고 재미있게 교재하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맛있는 음식을 스케쥴에 매이지 않고 편안하게 앉아서 즐거운 대화 속에서 먹게 면 얼마나 힘이 나겠습니까? 밥을 먹었는데도 계속 더들어갑니다. 소화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듯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속에 들어가서 박힌 못과 같이 되기 위해서는 consideration하는 숙고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할머님이 저에게 해주시던 먹거리 가운데 맛있는 먹거리가 하나 있습니다. 장떡입니다. 고추장을 넣고 부친 빈대떡입니다. 장떡은 반찬이 하도 없어서 반찬 대용으로 밥과 함께 먹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본적으로 짜야합니다. 그래야 반찬이 됩니다. 그래서 고추장과 밀가루의 비율이 거의 같이 넣어 물에 개서 기름을 두르고 부칩니다. 부칠 때는 얇게 부치는 것이 기술이고 가장자리는 약간 두껍게 부칩니다. 빈대떡이 마르면 가장자리부터 마르기 시작하니까 가장자리를 두껍게 부쳐야만 마르지 않고 촉촉한 기운이 오래 동안 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매운 고추를 잘게 썰어서 뿌립니다. 얼얼하고 짭짭하게 만들어서 잘라서 도시락 옆에 싸주십니다. 짜고 매운 고추장과 고추의 맛이 함께 있으면서 반찬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음식점에 가서 빈대떡이 나왔는데 먹으려고 젓가락을 대었더니 익지 않아 허연 물이 나왔습니다. 그 순간 빈대떡 먹을 맛이 달아났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습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하고 마음의 감동도 있었습니다. 막대기로 찌르는 것처럼 감화도 받았습니다. 그래도 그것이 숙고되어져서 여러분들의 내면의 세계 속에서 깊이 익어서 여러분들의 살 속에 깊이 스며들어가지 않는 한 여러분들의 신앙은 마치 맛있게 잘 구워졌지만 젓가락으로 찌르면 흰 물이 나오는 덜 익은 빈대떡과 유사합니다. 그것을 베어 먹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어떻게 참겠습니까?
하나님께 온전하지 못한 것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불결한 것입니까? 그래서 하나님 말씀의 은혜를 조금 받는 것이나 하나도 못 받는 것이나 결국은 마찬가지입니다. 맛보고 안 사나 안 맛보고 안 사나 마찬가지입니다. 변화되려면 그 말씀이 깊이 박힌 못과 같이 자신 속에 꽂혀서 오래도록 그 감화가 불망의 능력을 가지고 그 자신을 오랫동안 어거해나갈 때 그의 삶에 변화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호세아서를 보면 호세아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가리켜서 뒤집지 않은 전병이라고 말했습니다. 밑은 다 타도록 익었는데 위는 아직 생가루가 있어서 밑은 타서 못 먹고 위는 날것이어서 못 먹는 모습이 된 신앙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잘 익은 신앙에서 인격적 성숙이 오는 것이고 우리의 부패한 본성을 깨끗하게 순화시키는 성결의 작용도 잘 익은 신앙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양적으로 많이 깨닫는 것도 중요하고 그것을 자신의 마음속에 계속 곱씹어서 그것을 소화해서 살 깊이 배이게 하는 것도 신앙생활에 있어서 더할 수 없이 소중한 것입니다.
시편 119편에서 시인이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라고 할 때 쓰여진 ‘짜판’이라고 하는 히브리 단어가 바로 덮어서 감춘다는 뜻입니다. 덮어서 마음에 깊이 스며들게 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하니까 자기가 청년의 유혹을 이기면서 경건하게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 수 있었다고 하는 간증이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말씀으로 말미암아 인격이 변한다고 하는 것은 그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의 영혼을 비롯해서 관계되어있는 모든 기관에 깊이 스며들어서 죄가 영향을 미치는 것을 대치하여 총체적인 은혜의 영향을 미침으로써 그의 인격이 정말 변화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의 존재는 그리스도 예수를 머리로 하는데, 신비한 몸이라고 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 몸의 머리십니다. 동시에 한 몸이 된 지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지체들로서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붙어있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가 각각 지향하고 있는 신학적 강조점이 다릅니다. 그래서 교회가 신비한 몸이고 그리스도가 머리라고 할 때는 그리스도와 신자가 떨어질 수 없는 한 몸으로 이루어진 것을 말하는 것이고 이것이 이루어지는 방식은 신령한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이것을 매개시키는 성령의 은혜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신자들을 거룩하게 성화시키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은 신자들은 모두 구원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구원을 체험합니다. 그 구원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서 신비하게 떼어놓을 수 없는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몸을 이루면서 한 덩어리가 되는데 이 한 몸이 되는 방식이 아주 신령한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들이 똑같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신령한 은혜에 의해서- 성화되면 성화될수록 그리스도 예수의 머리와 몸인 교회와의 실제적인 연합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실제적인 연합이 증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만 잘 사랑하고 주님이 내안에 내가 주님 안에 있다고 고백하는 성도들이 많아져서 ‘주님 우리 교회 안에 우리 교회가 주님 안에’ 이런 고백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하시는 은혜와 거기에 기초해서 이후에 주어지는 성화시키는 은혜를 통해서 그렇게 그리스도와 신비하게 한 몸을 이루어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밑에 나오는 그리스도 예수가 머리라고 할 때 지금 말씀드린 것에 있어서는 모든 권위와 모든 권세의 우두머리이신 예수입니다. 부활하신 그 예수께 접목되어서 그리스도와 같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하는 것이 교회의 존재적 사명입니다.
그 다음에 그리스도 예수를 머리로 하고 교회가 지체라고 표현하는데 그때 그리스도는 통치하시는 분으로서 머리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머리됨은 이중적 지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통치주로서의 머리가 되시고 거기에 모든 기관들이 달라붙어서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머리와 지체들을 연합되게 만드는 것은 성령의 은사입니다. 성령의 은사가 함께 연결을 꿰뚫으면서 하나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아주 유능한 교회가 되도록, 하나님을 위해서 놀랍게 역사하는 교회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창조론과 연결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모든 피조물 사이에 영적인 아름다운 연결이 있었는데 죄가 들어옴으로 말마암아 희미하게만 남고 다 파괴 되어버렸습니다. 오염되어버렸습니다. 그것들이 선취적으로 복구되는 모델 케이스가 바로 교회입니다. 구원하시고 성화시키는 은혜에 의해서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게 하시는 사역적 작용에 의해서 은사가 연결되면서 교회 각 지체들이 연결되면서 그 속에서 거룩한 성화의 은혜 속에서 살아갈 때 찬란한 불들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흐름 속으로 은사가 같이 흐르면서 자신은 그런 능력이 없는데도 다른 지체가 받은 은사가 흘러 들어와서 교회의 지체로서 주님을 섬길 때 교회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훌륭하게 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항상 같이 추구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온전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죤 오웬이나 칼빈이나 모든 걸출한 개혁가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한 것은 밖에서 부어지는 성령의 은사보다 뛰어난 것은 자신을 구원하고 거룩케 하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구속적 작용을 가져다주는 은혜가 사역적 작용을 가져다주는 은사보다 훨씬 더 뛰어난 가치를 인정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 모두에 의해서 교회는 온전해지지만 여전히 강조점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그것을 받은 사람들, 그렇게 변화되어가는 사람들에 의해서 은사가 행사되어질 때 성숙한 섬김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consideration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깊이 자신 속에 스며들어서 구원하고 성화시키는 작용을 지속적으로 행할 수 있도록, 그 말씀이 우리 자신을 충분히 익히도록 그렇게 만들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말 쓸모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적용(application)입니다. 적용은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 속에 대입시켜서 자신을 고치고 새롭게 하는 구체적인 작업입니다. 그 일을 통해서 더 많은 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는 노는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고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다보면 하나님께서 그 과정을 통해서 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지혜와 함께 짝을 이루면서 늘 같이 어깨동무하고 등장하는 단어가 충성입니다. 지혜는 충성된 사람의 것이지 놀고 있는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인류 역사에 있어서 연장의 역사를 보면 한 사람이 어느 하나의 일에 계속 종사할 때 그 사람에 의해서 연장이 만들어졌지, 오늘은 땅 파다가 내일은 물 긷고, 내일은 놀러 다니고 글피는 사냥 다니고 그글피는 물고기 잡는 사람에 의해서는 어떠한 도구도 새롭게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 속에 적용해야 합니다. 비춰보고 그것이 살 깊이 스며들고 그 말씀을 적용하면서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은 빛나게 됩니다. 아름다운 삶이 됩니다. 우리가 변화되어가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더 아름답고 온전한 모습으로 변화되어갑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구역장도 있고 교사도 있고 새신자 교사도 있고 영혼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이 말씀을 더 깊이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 안에 있지도 않으면서 영혼을 가르친다는 것은 삯군의 행동입니다.
넓은 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어도 그 위에 물을 가득 머금은 저수지가 있으면 가뭄이 와도 염려가 없습니다. 때가 되면 저수지 문을 열어서 그 물을 흘려보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철따라 시절을 다라 열매와 과실을 맺으면서 그 땅의 주인들을 기쁘게 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구역장이나 가르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그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숙고하고 그것들을 적용하며 살면서 더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추구하려고 하는 구도의 정신을 갖지 않은 사람이 무엇을 가르치겠습니까? 만일 사람들을 모아놓고 가르치는 위치 그 자체에 대해서 우쭐한 마음을 가지고 그 가르치는 직분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매우 교회에 해를 입히는 것이고 bad Christian입니다. 분명하게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 있어서 그 진리를 사람들에게 퍼주고 싶은 감화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끊임없이 받으면서 사는 사람일 때 비로소 그가 진리를 따라서 가르칠 수 있는 것이고 6일동안 그 진리와 더불어 살고 진리와 함께 동일체가 되려고 하는 진지한 고뇌와 거룩하고 진실한 성도의 삶을 살기 위한 감명 깊은 분투가 있을 때에 비로소 7일 째 되는 날 와서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 유모가 젖을 풀어서 자녀들에게 먹이는 것과 같은 양육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가화 조각만 날리는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일뿐입니다. 그 밑에서 배우는 사람들은 너무나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삯군의 삶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깊이 하나님의 말씀을 숙고하고 그것들을 적용해서 말씀의 영향력 아래 계속 살아가야 합니다. 지혜자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그런 감화를 주었습니다. 그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지식적으로 궁구했기 때문에, 또 그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대로 사는 가운데 지혜를 터득했기 때문에 세월이 흘러갈수록 지혜자의 말씀은 날을 벼린 칼과 같고 살을 뾰족하게 갈아서 벼린 화살촉과 같이 되어서 우둔한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 진리를 가르쳐줄 수 있는 힘을 주고 빠지지 않고 깊게 박힌 못과 같은 불망의 감화를 심어줄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빛을 전하는 현자의 삶이어야 합니다. 어두운 이 세상에서 돈보다 먹고 마시는 것보다 더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현자들이 나눠주는 진리에 대한 지식의 빛입니다. 그 빛에 의해서 사람들은 해갈할 수 있고 굶주림을 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그렇게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는 빛을 가진 현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 깊이 배이도록 끊임없이 consideration하고 또 그 말씀을 자신의 삶 속에 application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때 여러분들이 지금은 비록 매우 연약하고 미숙하지만 앞으로는 원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빛을 나눠줄 수 있을 것이고 그 위에 하나님 앞에 열렬히 구해서 하나님의 여러분들을 능하게 하는 은사까지 여러분들이 소유하게 될 때 여러분들의 인생은 이 땅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아름다운 인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영적 성숙과 묵상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