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의 삶
(2006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6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신자의 기쁨(시4:7) 2006.1.25 수요예배 1
2. 기쁨과 은혜(고후8:1-2) 2006.2.1 수요예배 16
3. 기쁨과 관용(빌4:4-5) 2006.3.1 수요예배 24
4.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의 소원(시37:4) 2006.3.8 수요예배 31
5. 성도가 누릴 기쁨(빌2:17-18) 2006.4.5 수요예배 41
6. 고난을 피하지 않는 신앙(마27:34) 2006.4.12 수요예배 48
7. 진리와 기쁨(요삼1:3) 2006.7.5 수요예배 54
8. 돌아봄과 기쁨(빌2:4) 2006.7.12 수요예배 62
9. 기쁨과 순종(요15:10-11) 2006.7.19 수요예배 70
10. 하나님의 기쁨이 될 때(잠16:15) 2006.11.29 수요예배 78
1. 신자의 기쁨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시 4:7)
I. 본문해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한결 가치 우울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원하기보다는 기쁘고 그리고 행복한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런 삶을 누리는 사람보다는 자신의 바람과는 달리 고통스럽고 어두운 밤을 지내는 것 같은 불우한 인생을 지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신자들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는 모든 자녀들이 기쁨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모든 자녀들이 기쁨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신자는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도 자신이 어떻게 해야지만 진실하고, 그리고 기쁨에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을지 탐구해야 하고 또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신자가 기쁨의 삶을 사는 것은 꼭 필요합니다. 왜냐면 신자가 넘치는 기쁨의 삶을 살 때에 그 때에 많은 사람들이 그 기쁨에 찬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을 보면서 자신의 기쁨을 잃어버린 삶과 비교해보고 그래서 우리의 기쁨의 근원들을 향해서 눈길을 줄 것이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시인이 탄원하는 시입니다. 이 시 속에서 시인은 하나님 때문에 느끼는 그 기쁨을 아주 감격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곡식과 도포주가 풍성할 때보다도 더합니다.” 라는 것이죠. 당시에 이 곡식과 포도주는 그 사람들의 생존을 위한 아주 기본적인 조건인 것입니다. 곡식은 그들의 양식을 위해서 꼭 필요한 생명의 보존을 위해서 꼭 필요한 양식이었고, 그리고 이 포도주는 잔치 집 분위기를 연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생존을 위해서 예비한 넉넉한 양식, 굶주림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는 넉넉한 양식과 그리고 이 땅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라고 할 수 있는 잔치 집과 같은 그러한 때, 맛보는 그 즐거움보다도 주님이 내 마음 속에 두신 기쁨이 더 큽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잔치 집에서는 우선 그 잔치가 경사니까 기쁘고 그런 잔치가 벌어질 때는 모든 음식과 인심이 후합니다. 그래서 넉넉한 공급이 있어서 행복하죠. 그런데 하나님이 이 시인에게 주신 기쁨은 그러한 물질이 주는 보장과 그리고 잔치 집의 그 경사스러운 날들이 주는 그 많은 공급의 기쁨보다 주님이 자기의 마음 안에 두신 기쁨이 훨씬 크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II. 인간의 두 기쁨
A. 타락한 기쁨
성경은 우리에게 이 기쁨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이야기합니다. 두 가지 기쁨을 이야기 하죠. 인간이 누리는 그 두 기쁨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데 하나는 타락한 기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탄핵하실 때 “이제 너희 기뻐하던 사람들은 슬피 울지어다.” 이제 너희들이 기쁨이 끝났다고 자주 선언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배제한 채,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가운데 느끼는 그런 종류의 기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타락한 즐거움입니다. 이런 종류의 즐거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배역하게 만들고, 이런 즐거움에 탐닉할수록 우리의 영혼은 아주 놀랍게 파괴됩니다. 그래서 이런 즐거움은 하나님께서 경고하고 있는 즐거움입니다.
B. 신령한 기쁨
성경이 또 하나의 즐거움을 이야기 하는데 그것은 이렇게 타락한 즐거움이 아니라. 신령한 즐거움입니다. 이 신령한 즐거움은 하나님 때문에 얻게 되는 즐거움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또 즐거움이 즐거움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잘 섬기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하는 그런 종류의 즐거움을 성경이 또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셨죠.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위로를 베풀어 주실 때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기쁨을 얻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을 찾아보면 이 “기쁨”이라는 단어가 신약 성경에도 엄청나게 많이 나옵니다. “기쁨” 뿐만 아니라. “기뻐하여” 라는 이 단어를 찾아보면 엄청나게 많은 용례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신앙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그 기쁨들은 거의 모두 하나님 때문에 느끼는 신령한 기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성령님이 오셔서 신자에게 하신 일이 바로 기쁨을 주시고 그를 위로하시는 일이 성령님이 하시는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주 성령의 위로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그다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이야기 하고 동시에 성령의 위로, 성령의 기쁨을 이야기합니다. 그처럼 성령님께서 신자들의 마음속에 오실 때에 그들에게 기쁨을 주시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마음에 성령이 임하셨을 때 그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 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이런 종류의 기쁨, 사랑의 감화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C. 누리게 하심
이렇게 성경은 하나님을 배향하고 등지면서 느끼는 인간의 타락된 기쁨, 그리고 또 하나는 그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느끼는 이 신령한 기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제 이렇게 묻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느끼는 모든 기쁨은 타락한 기쁨, 즉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등지고 하나님을 배향해서 느끼는 기쁨과 그다음에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 그런 신령한 기쁨, 딱 둘 중에 하나밖에 없습니까? 이렇게 물어볼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하나님을 등지거나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도록 느낄 수 있는 즐거움들이 우리 주위에는 많이 있습니다. 모든 즐거움이 반드시 하나님을 등지고 배반해야지만 느끼는 즐거움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어루만져서 아주 신령한 은혜 속에서 우리에게 역사 하셔야만 우리가 비로소 기쁨을 누리는 그런 종류의 극단적인 두 즐거움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에게 그런 적극적인 도덕적 결단 없이도 얼마든지 하나님 앞에 범 죄 하지 않고도 우리가 느끼는 즐거움, 자연을 통해서 느끼는 즐거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환경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 이런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제 신자의 기쁨의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주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많은 것들을 공급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육신의 생명을 계속해서 연장해주시고 육체의 원기를 주셔서 오늘도 기동하며 살아있죠.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육신의 생명만을 연장시켜 주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자원들을 공급해주셔서 우리들이 그것들을 가지고 참으로 인간으로 존재하고 또 하나, 하나님이 자기를 불러주신 그 목적대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 수 있도록 그 물질들을 사용하죠. 이런 물질적인 자원들을 하나님이 공급해주시죠.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늘의 자원을 공급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정신과 영혼이 마음이 안정되고 평안한 가운데 그 은혜로 말미암아 사랑에 감동을 받으면서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그리고 그 은혜의 힘으로 우리가 마땅히 해야 될 의무들을 즐겁게 이행하며 살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살아갈 동안에 주신 육체의 건강, 그리고 영적인 자원, 그리고 육체를 위해서 하나님이 일반적인 사물의 질서 가운데서 우리에게 주시는 이 땅의 자원들, 이런 것들을 사용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들이 기쁨과 관련해서 어느 두 극단에 치우치면 아주 영적으로 해로운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 극단이라는 것이 뭐냐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죠. 하나님이 나에게 이 땅에서 나에게 생명도 주시고, 또 나에게 물질도 맡기시고, 영적인 은혜도 주시는데 이런 것들은 두 가지 국면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모든 것들을 맡기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 “나”라고 하는 특별한 존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을 때 나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일들이 있거든요. 그것들을 이루어 드리면서 또 나라는 존재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을 때 나 라는 인간이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라시는 그 모습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것 없이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다르게 지으셨을 리가 없죠.
만약에 우리 모두를 똑같은 존재, 똑같은 계획, 똑같은 목표가 있을 뿐 개별적인 목표와 계획이 없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각각 지문처럼 다른 영혼을 가진 사람들로 만들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공장의 기계처럼 찍어내시지. 그러니까 이 인간의 개별성은 영혼의 개별성입니다. 이 개별적인 영혼을 가지고 개별적인 본성들을 가지고 보편적인 본성과 개별적인 본성을 각기 가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다 틀려요. 그러니까 여러분 각자는 이 세상에 전무후무하게 딱 한 명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시집장가 가서 애기를 낳아도 여러분과 비슷하게 닮을 수는 있지만 여러분과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유일한 작품입니다. 그러니까 얼굴 안 고치고 그냥 놔둬도 그것은 골동품적인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진귀한 물건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자부심을 가지고 사세요. 그런 개별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이잖아요. 그것들을 따라서 살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계획을 따라서 사는데 하나님이 주신 모든 자원들을 활용해서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내가 되고,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하고 싶은 그 일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라고 하나님이 나에게 자원들을 맡겨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어느 정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런 것들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우리에게 허락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로 구원해 주셨을 때 우리를 종으로 부르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의 집에 후사요. 그리고 친 자식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입양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이 신분 자체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정당하게 주신 그 기업들을 어느 정도는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과 또 우리에게 주신 물질과 우리에게 주신 이 영적인 자원들을 가지고 우리가 그것들을 누리며 즐거워하고 행복해 하면서 사는 것은 전혀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으로 살아야합니다.
D. 두 극단
그러나 이제 잘못하면 두 가지 극단에 치우치게 됩니다. 두 가지 극단은 뭐냐면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인식할 때 그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라고 하는 자유 함은 완전히 잃어버린 채 하나님이 자녀로 받아주셨는데도 노예처럼 종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종의 정신으로 어떤 면에서는 그것이 필요하지만 그러나 속속들이 그런 정신에 사로잡히면 아들의 자유가 그 안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육신의 생명도 주시고, 이 세상의 물질도 주시고, 하늘의 자원인 은혜도 우리에게 주셨는데 이런 것들을 아버지께로부터 왔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들은 아버지의 은혜다. 라고 생각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이 모든 것을 나는 하나도 누릴 수 없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 내가 어떠한 기쁨도 취해서는 안 된다. 라고 생각하는 이것들은 아들의 정신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열심히 생활해서 벌어서 정정당당하게 여러분들이 수입을 가졌으면 그러면 그것들을 어느 정도 여러분들이 누리면서 사는 것은 하나님이 결코 여러분들에게 허락하지 않으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허락해주신 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렇게 열심히 노동을 해서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고 그래서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 그러면 아주 헐벗었던 사람이 조금 나은 옷을 입고, 그리고 지하실에서 세 들어 살았던 사람이 지상으로 올라오고, 그다음에 조금 더 낳은 집을 쓰고, 자동차도 없이 그렇게 걸어 다니고 버스 타던 사람이 하나님이 물질을 주시면 자동차도 사고, 사서 타고 다니다가 소득이 좀 나아지면 또 조금 나은 차를 타고, 이렇게 하고, 처음에는 아이들을 위해서 교육을 하는데 여력이 없었는데 생활이 좀 낫게 되면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나은 교육을 시키고 하는 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녀로서 우리에게 주신 많은 분깃들을 누리면서 사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이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조건이 붙는데 그것은 뭐냐면 지나치면 안 된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은 그 지나친 것의 기준이 뭡니까? 라고 물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획일적으로 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치면 안 됩니다. 절대로 지나치면 안 됩니다. 그래서 그것이 양쪽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지나치면 무슨 문제가 생기느냐면 그러면 집착이 생겨나고 그리고 거기에서 얻는 기쁨이 하나님 자신을 통해서 얻어지는 기쁨을 능가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주신 많은 사물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즐거워하기 위해서 사용하도록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않고 하나님이 수단으로 주신 것들이 목적이 되어버리는 잘못된 삶이 생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런 것들을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두 가지 극단적인 삶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자녀로 불러주셨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이 거기에 있는 많은 것들을 맡겨주셨으니 그것들을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는 사랑과 자유 안에서 누리면서 살 수 있는데 아직까지도 종의 정신이 있어서 도저히 그렇게 못하면서 사는 극단, 또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주신 모든 것들이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것인데 그것을 아버지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방종에 흘러 그것에 탐닉하는 탐욕에 빠지게 될 때 양쪽 극단 모두 다 옳지 않은 것입니다.
자, 어떤 가게가 있습니다. 방금 생각이 났는데 좋은 비유입니다. 가게가 있는데 저희도 가게를 해 보았습니다. 만은 장날 같은 때는 진짜 엄청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그 앞에 점원들이 대여섯 명이 서서 물건을 파는데 정신이 없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이렇게 가서 보면 아버님이 항상 그 돈을 어디에다 관리 하시냐면 탄약통에다 관리를 하셨습니다. 그 총알 집어넣는 깡통 있잖아요. 왜 그때 그것을 썼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군대에서 쓰는 탄약통을 구하셔서 거기에다 돈을 세어보지도 못하고 장날이면 돈을 거기에다 구겨서 집어 계속해서 그러면 그런 가게가 있다고 칩시다. 그래서 가게가 있는데 그래서 주인이 앉아서 물건을 팔면 돈을 가지고 오고 거스름돈을 주면서 돈은 자기가 다 모아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커다란 양철통에 덜컹하고 잠겨 있어요.
그런데 일어서서 물건을 막 파는 것을 보면 그 집 아들인지 종업원인지, 머슴인지 구별이 안가요. 그런데 종은 차이가 뭐냐면 물건을 파는 것은 아들과 그 모습은 똑같은데 그것을 돈 통에 넣을 수 있을 뿐이지 함부로 그것을 열수가 없습니다. 아들은 그것을 열어서 밥도 사 먹고, 차도 마시고, 이렇게 그것을 쓸 수 있는 권한을 아들에게 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종은 열 권리가 없고 집어넣을 의무는 있지만 아들은 집어넣을 뿐만 아니라. 열고 그것을 꺼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아버지가 잠깐 가게를 보라고 맡겼는데 돈 통을 다 털어서 주머니에 넣고 가서 술을 먹고 요리를 먹으면서 허랑방탕하게 보냈다고 하면 그러면 참 아들이 아니죠.
비록 아들은 오늘 밥을 먹기 위해서 돈 통을 열어서 돈을 꺼내가지고 갔지만 그 가게를 정말 그 사업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이 종업원이 아니라. 아들입니다. 그러니까 그 둘 사이에 균형이 필요하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을 등지고 하나님을 등져야지만 탐욕을 만족시켜서 얻을 수 있는 타락한 기쁨과 그다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더 온전히 의지하게 되는 그런 신령 기쁨 사이에 다른 많은 기쁨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면 기쁨을 느끼는 그 자체는 정당한 권리이고, 또 정당하게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주어진 권리이지만 그 기쁨을 누리는 방식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 기쁨을 누리는 방식이라는 문제가 된다. 라고 하는 것이 뭐냐면 비록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에게 허락을 하신 기쁨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에게 죄가 되지 않는다고 충분히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허락하신 기쁨이라고 할지라도 거기에서 기쁨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이 거기로부터 끊어진 것이 되면 처음에는 그렇지 않은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즐거움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시겠습니까.
이런 예를 들면 조금 이해가 잘 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자면 정욕 적이고 죄를 짓지 않으면 안 되는 기쁨, 남의 물건을 훔친다든지, 아니면 육체적으로 깊이 향락에 빠지는 그러한 죄 짓는 쾌락을 찾는다든지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이지만 정당한 것, 스포츠 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누리실 수 있도록 주신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또 스포츠를 적절하게 하면 몸도 건강해지고 좋아지겠죠. 그뿐만이 아니죠. 예술, 취미 이런 것들, 다 괜찮습니다. 왜냐면 우리의 이 정신은 무엇인가 한 가지에 아주 오래도록 그렇게 집중할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지지가 않고 가끔은 이런 것들을 풀어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마치 바이올린이나 첼로의 줄처럼 연주할 때는 팽팽하게 줄을 당겨서 아름다운 소리를 내지만 끝나고 난 다음에는 풀어 주어야합니다. 그때에 하는 것입니다.
휴식이 뭐냐고 그러는데 저는 휴식의 의미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휴식은 일 때문에 할 수 없었지만 자기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하는 것, 그것을 휴식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무조건 그냥 수면제 먹고 두꺼운 이불 뒤집어쓰고 퍼질러 드러눕는 것, 그것이 휴식이 아니라. 그러면 오히려 병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하고 싶었지만 그러나 하고 싶고 또 재미있었지만 그러나 해야 할 중요한 의무 때문에 그것을 할 수 없었던 그것을 하는 것, 그것을 저는 휴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진짜 일이 바빠서 그렇게 못했던 사람이 오랜 만에 휴일을 만났는데 등산을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침에 일찍 갔다가 오후에 와서 헉헉대면서 오자마자 툭하고 쓰러져서 코를 골아요. 그러면 옆에 있는 사람들이 생각할 때 아니, 휴일인데 좀 쉬어야지 그 고단하게 산을 올라갔다. 오나. 그렇게 얘기하지 마세요.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휴식입니다. 너무나 하고 싶었던 일이었기 때문에 자기가 하고 싶은 그 일을 하면 휴식이 되는 것이죠.
제가 존경하던 선생님 가운데 한분이 휴식을 새롭게 정의하기를 당신은 학자니까 휴식은 뭔가 쉬운 책을 읽는 것, 그래서 공부할 때는 어려운 책을 공부하고 쉴 때는 드러누워서 쉬운 책을 읽는 것, 그러니 사모님이 얼마나 외로우셨겠습니까. 일평생, 그러다가 책을 여기에 올려놓고 잠이 드신데요. 그러면 사모님이 책을 뺐으면서 “아, 이제 나이도 그만 먹었으니까 이제 텔레비전도 좀 보시고 쉬세요.” 그러면 목사님 하시는 말씀이 “여보 천권을 읽어야 한 권을 쓸 수 있는 거야” 그러시더래요. 그런 분들은 아주 굉장히 탁월한 분이죠.
언젠가 한번 공부를 잘 하는 아이가 나와서 신문에서 인터뷰를 하는데 자기는 수학문제 푸는 것이 휴식이래요. 그래서 참 고장 나도 많이 고장 났다. 우리 애들은 노는 것이 휴식인데 그 아이는 어떻게 수학문제를 푸는 것이 휴식이냐고요. 그 아이는 막 다른 공부를 하다가 아, 이제 너무 피곤하다. 그러면 수학 책을 펴놓고 그것을 푼대요. 그러면 정신이 쇠락해져서 다시 다른 공부를 할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신병자지 이게 정상적인 사람이냐고요. 휴식입니다. 그래서 모두 다 때가 있지만 교회를 짓고 막 이러면서 힘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보람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엊그제도 누가 왔기에 그랬습니다. 아이고, 내가 이렇게 교회를 지어놓고 한 3년 지나가니까 그 때는 머리에 꽂혀서 누가 뭐라고 해도 귀에 안 들어왔는데 지금 이렇게 보니까 내가 참 바보 같은 짓 많이 했다.
그러면서 저것도 발로 툭툭 치면서 내가 이런 것을 왜 만들었는지 이해가 안 간다. 그런 반성들이 생겨나기는 합니다. 만은 한참 힘들면서도 그래도 하여튼 보람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내가 이제 너무 힘든데 목회도 이제 10년쯤 했으니까 1년만 안식년 휴가를 얻어서 저 시골에다 기도원이나 하나 지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1년 안식년 휴가 받아서 거기에서 헬멧 쓰고 가서 도면 그리고 안식년 끝날 때 예쁜 기도원 하나 지어놓으면 참 좋겠다. 그것이 안식년이겠습니까. 내가 하고 싶으니까 정말 그 때 누가 하라고 했으면 했을지 모릅니다. 다행히 하라고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만 그것이 휴식입니다.
기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누리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런데 그것에 깊이 탐닉하다보면 그 자체는 죄가 되지 않는데 그것이 결국은 우리의 부패한 본성과 연루되어서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마음에 부패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묻고 싶겠죠.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그것을 누리라는 말입니까? 말란 말입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항상 정답을 요하거든요. 그런데 이렇데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누리세요. 괜찮아요.
그러니까 누리시고요.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까 누리시고요. 그리고 힘들면 쉬세요. 그리고 시간 사용도 주님을 위해서 충성되게 살다가 가끔은 좀 쉬세요. 그리고 영화 구경도 하시고, 그리고 잡지도 보시고, 죄 짓는 것 아닙니다. 수입이 넉넉해지면 된장만 드시지 마시고, 고추장도 가끔 드시고, 그리고 가족들과 어울려서 한 달에 한번이라도 좀 나은 음식점에서 식사하시고, 괜찮습니다. 그런데 늘 말씀드리지만 우리 인간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보다 훨씬 복잡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몸에 익숙해지다 보면 자기가 처음에는 안 그랬는데 그것이 집착이 되고,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는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골초였다고 하면 여러분들이 깜짝 놀라시겠죠. 구라파 사람들은 사실은 담배 피는 것에 대해서는 자유롭습니다. 아주 보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자유롭습니다. 목사님이 빨 뿌리 담배를 굉장히 많이 피우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느 날 끊으셨습니다. 끊으신 간증을 하는데 항상 그 여성 연을 물고 그리고 이제 성경 연구도 하고 그랬는데 어느 날 이것이 떨어졌데요. 떨어졌는데 금방 어떻게 구할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데요. 그런데 담배 피워본 사람들은 다 이해를 하지만 이것이 딱 떨어져서 구할 수 없을 때 막 견딜 수 없는 심리적인 불안이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쩔 줄을 모르고 그 불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아주 심하게 겪으신 것입니다. 그 때에 당신이 깨달은 것이 뭐냐면 자기가 얼마나 담배에 인 배겨 있는가 하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언제든지 공급될 때에는 그런 것을 못 느끼는데 이것이 못 피게 되는 상황에 들어갔을 때에 금단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자기가 얼마나 이 담배에 인 배겨 있는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끊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통 결심 가지고는 안 되는 것이죠. 저도 해 보았지만 보통 결심 가지고 안 됩니다.
제가 직장 다닐 때 그런 일이 있었는데 두 직원이 오더니 답배 갑하고 라이타 하고 다 갖다 놓으면서 “내가 담배를 피우면 다시 피우면 네 아들이다.” 그래서 나는 당신 같은 아들 필요 없는데. 그리고 둘이서 내기를 했습니다. 서로 그런데 둘 중에 한 사람이 너무 견딜 수 없으니까 옥상에 올라가서 몰래 담배를 피우는데 굴뚝 앞에서 둘이 만났습니다. 그렇게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끊었습니다. 그분 말씀이 뭐냐면 무엇에도 우리들이 그렇게 매여서는 안 된다. 그것이 죄가 안 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무엇에도 우리들이 그렇게 매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면 이제 두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 기쁨이 있는데 누릴 것들을 누려도 괜찮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들보다 조금 넉넉한 생활을 하는 것 그 자체를 죄악시 하거나 부도덕하게 생각하거나 이런 것들은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를 정죄하고 이러는 것들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 사람들이 여러분보다 훨씬 소득 수준이 높고 경제수준이 뛰어나면 여러분보다 훨씬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을 정죄하고 마치 그것이 전적으로 그 사람의 탐욕의 소산인 것처럼 그렇게 정죄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 태도는 버려야 됩니다. 그렇지만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중요한 것은 우리 안에 있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누리는 것은 괜찮은데 무엇도 아까 존스 목사님이 경험한 것처럼 무엇도 인 박이지 아니하도록 그렇게 누리는 것에 인 박이지 아니하도록 우리들이 절제 속에서 살아야 된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III. 신자의 기쁨
A. 근원: 하나님
그러면 신자의 기쁨, 두 기쁨이 아닌 기쁨입니다. 신자의 그 기쁨은 어떤 것이냐? 우선 신자의 기쁨은 오늘 성경에 보면 그 기쁨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신자의 기쁨은 아까 이야기 한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누리도록 허락해주시잖아요. 그렇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누리도록 허락해주신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누리면서 사는 것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사실 전도사 생활을 할 때에 목사님을 따라서 심방을 하면 그 참 아주 불편하던 때가 있었어요. 목사님이 누구 네가 새 집을 샀다. 그러면 이사를 가시는데 가시면 그냥 조용히 예배드리다 오시면 좋은데 얼마나 부산을 떠시는지 두 목사님이 다 그러셨습니다. 마치 자기네 집에 온 것처럼 일어나서 야, 이 방 좀 열어봐라. 저 방 좀 열어봐라. 저 다용도실도 좀 열어봐라. 그리고 심지어는 지하실까지도 내려가셔요. 온 집 안을 다 돌아다녀요. 그러면서 문 열 때 마다 오버를 하시는 것입니다. 야, 방도 크다. 야, 좋다. 야, 넓다. 야, 진짜 좋다. 그러셔요. 그래서 내가 야, 너무 오버들 하시는구나. 그런데 나중에 제가 목회를 하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뭐냐면 정말 성도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뭐냐면 그 집이 그렇게 좁은데서 지하에서 고생하는 것을 알고 그 후에 집이라도 한 칸 장만해서 이사를 가시면 이 목사님이 그 성도보다 더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 방 문을 열어서 다 보셔야지 직성이 풀리시는 것입니다. 지하실까지 내려가고. 맨 날 물어봐요. 이것 몇 평이냐?
그런데 나중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 이것이 진짜 자기의 성도들이 좀 여유로운 삶을 살게 되는 이 복된 환경에 대한 기쁨이구나. 저희가 집을 샀을 때에도 24평형 인데 생전 머리털 나고 처음 아파트를 하나 샀는데 목사님이 오셔서 똑같이 그렇게 오버를 하셨어요. 그렇게 부자연스러울 수가 없어요. 그런데 나중에 목회를 해 보니까 알게 되요. 야, 그래서 그렇게 좋아하시고 기뻐하셨구나. 그러면서 심방 끝나고 가시면서도 몇 번을 그래요. 아, 정말 그 집 정말 좋다. 나는 맨 처음에 목사님이 뭐 사택에 불만이 많으신가 보다. 아니 진짜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왜냐면 굉장히 자격지심 같은 것 있으시고 되게 부러워 하시나보다. 그랬는데 그것이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것이 아니고 정말 성도들을 사랑하셔요. 진심으로 자기가 집을 장만한 것처럼 그렇게 기뻐하신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것들을 우리에게 분복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축복, 또 저런 축복 또 감탄하잖아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에게 좋은 옷을 주시고, 뭐 어쨌든지 기분 좋은 것 많잖아요. 선물 하나만 받아도 기분이 좋은데 지난주에도 어느 지체가 중국에 갔다 오면서 녹차 케익을 사와서 한 박스 갖다 줬는데 얼마나 고맙게 먹었는지 몰라요. 또 어떤 자매는 사경회에 은혜 받았다고 A. B. C. D 모양으로 뭐 내가 A. B. C. D모르나 A. B. C로 해서 쿠키를 구워서 박스에 담아서 가지고 왔어요. 얼마나 맛있고, 감사하게 먹었는지 몰라요. 그런 것들을 누리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감사하게 우리들이 누리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이것들이 이런 것들이 우리들이 마음에 많이 새기면서 그러면서 이 주시는 모든 것들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에서 그것들은 수단일 뿐이고, 그 너머에서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선물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들이 읽으면서 그것들을 누리게 되면 그것이 우리에게 영적인 유익을 가져다주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분에 넘치도록 많은 것들을 하나님이 주시는데 우리가 그런 방식으로 감사하면서 사는 때가 얼마나 되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내게 누리도록 주신 것들이 익숙해지게 되면 그런 깊은 마음속에서의 감사, 그런 것 잘 안 나오잖아요. 맨 처음에 아파트라도 하나 웬만한 것 장만하고 갈 때는 심방가면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 예배를 드리는데 나, 그 집 요즘도 그렇게 눈물 흘리시는지 내가 묻고 싶어요. 한 2년 지났는데. 아마 안 그러실 것입니다. 어쩌면 아마 “아이 씨, 조금만 더 큰 것을 살 걸” 그러면서 아마 대문을 가끔 발로 찰리도 몰라요. 인간이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기쁨의 이유는 될 수 있지만 원천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그 신자의 기쁨의 원천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오늘 뭐라고 했느냐면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그렇게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얼굴을 들어서 우리에게 비추어 주시옵소서. 주께서 나의 마음에 두신 기쁨은 곡식과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 큽니다.
B. 자리: 마음
그러니까 결국은 기쁨의 근원이 어디에 있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에게 있다. 라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셔도 그것을 누리며 살 때에 우리들이 기쁜 것은 누리고 있는 그 물질 때문에 기쁜 것이 아니라. 그 물질에 담겨진 의미, 그것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죠. 우리들이 이렇게 선물을 받으면 뭐 뇌물성 선물도 있고, 또 아니면 그냥 의뢰 적으로 보내는 선물도 있고, 내가 이 자리에 안 있었더라면 절대로 보낼 사람이 아닌데 여기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보내는구나. 이런 인상을 주는 선물도 있잖아요. 그런 선물들은 빼 놓고, 마음이 깊이 담긴 선물이 우리에게 올 때에 그 때에 항상 보면 항상 우리는 선물이 아니라. 선물 너머에 있는 그 사람의 마음이 전달되는 것이죠.
오늘도 책상 위에 선물이 이만한 것이 하나 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까 양말이 두 켤레도 아니고 한 켤레가 들었는데 인턴쉽을 마치고 간 가난한 전도사가 정성껏 편지를 써서 편지는 양말인데 사연은 왜 그렇게 긴지 그것을 넣어서 보냈어요. 잊혀 지지가 않아요. 그 가난한 전도사가 그것을 사러 시장에 갔을 것 아닙니까. 마음 같아서는 넥타이라도 하나 사고 싶었을 텐데 넥타이를 살려면 양만 몇 배의 값이잖아요. 양말을 딱 한 켤레를 겨울 양말은 겨울 양말이에요. 편지를 써서 그렇게 보냈어요. 그것은 그 자체는 불과 한3-4000원 이나 될까할 가치지만 마음은 전해지는 것이죠. 그렇죠.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누릴 때에도 항상 삼가야 하는 것이 바로 그런 대목입니다. 주님이 주셨으니까 작은 것이라도 우리가 이것을 누릴 권리가 있다. 라는 식으로 누려서는 안 돼요.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있어요. 아버지의 것이니까.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있는데 항상 생각해야합니다. “아, 이것들을 내가 누리면서 살지만 이것들은 기쁨의 수단일 뿐이고, 전달해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일 뿐이고, 나의 진정한 기쁨은 이것이 아니라. 이것을 나에게 보내어주신 하나님 자신이 기쁨의 근원이시다.” 라는 생각을 가져야합니다. 하나님 자신이 기쁨의 근원이시다. 라는 이야기는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은 많은 물질이 있어도 기쁨의 도구는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기쁨의 원천을 소유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지 못한 사람들은 아무리 우리가 이 기쁨을 누리자고 제안해도 그들은 이 기쁨은 누릴 수가 없는 것이죠. 그렇지 않겠습니까. 누릴 수가 없는 것이죠.
한번 생각해보세요. 기가 막힌 비유가 떠올랐습니다. 저희 학교 다닐 때 제가 작년 제 작년에 스승의 날 때 30년 만에 찾은 선생님은 영어 선생님이었는데 아주 굉장히 무서웠습니다. 하여튼 아이들을 요즘 그렇게 때리면 유치장 가셨을 것입니다. 정말 개 패듯 패셨습니다. 그래도 애들이 그렇게 선생님을 존경하고 좋아했습니다. 숙제를 안 해 오면 의자를 다 치우고 바닥에다 아이들을 눕혀놓고 패든지 아니면 숙제 해온 아이가 타고 경주를 하든지 선착순으로 그렇게 하여튼 무자비하게 아이들을 다루셨습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서 한번 생각해보세요. 선생님이 이제 너무 무서운 선생님이 오시자마자 얘들아 우리 오락회 하자. 항상 오자마자 숙제 검사부터 먼저 하거든요. 벌주고 그다음에 수업을 하는데 그날따라 왜 그러셨는지 기분이 좋으셨는지 얘들아 우리 오늘 오락회 하자. 그러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애들이 야, 오늘 숙제 검사를 안 하는구나. 이러고 있는데 선생님의 말씀이 그러시는 것입니다. 오락회 하고, 그다음에 숙제 검사하고, 맞을 사람은 맞고, 집에 갈 사람은 가자. 그리고 모여서 오락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숙제 안 해온 애들이 신이 나겠습니까. 이게 지금 걱정이 태산인데 차라리 먼저 맞고 오락회를 하는 것이 낫지. 오락회 하고 딱 30분만 오락회 하고 숙제검사 하고, 숙제 해온 사람은 집에 가고 나머지는 실컷 맞고, 청소하고 가자. 이것이 신이 나겠느냐고요.
우리는 뭔가 굉장히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뻐합시다. 할렐루야. 아, 기뻐합시다. 자 기쁘시죠. 웃어보세요. 자 끌어안아 보세요. 서로. 자, 씽긋 웃으시고, 이런다고 기쁨이 옵니까. 숙제 안 했는데. 아니 지금 자기 양심에 하나님을 굉장히 속상하게 해드리고 그리고 어쨌든지 자기도 하나님이 잠시 외출하셨으면 이렇게 바라는 관계 속에서 겨우겨우 살아가는데 자. 기뻐합시다. 할렐루야. 얼마나 좋은 날입니까. 서로 한번 옆 사람 끌어 안아보세요. 씽끗 웃으시고, 이것이 뭐 코미디입니까. 그렇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모두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여러분 그런 적 없으십니까. 저는 변화 받기 전에 그런 때가 참 많았습니다. 교회에서 지체들과 함께 모여서 막 찬양하고 웃고 떠들 때에는 뭔가 이렇게 가슴이 꽉 차는 것 같은데 하나 둘씩 야, 나 먼저 간다. 그리고 다 흩어지고 나면 갑자기 견딜 수 없이 가슴이 공허하죠. 그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고, 살아가지 않으면 우리들이 어떻게 기뻐질 수 있겠습니까. 한번 생각해보세요. 왜냐면 기쁨의 근원이 하나님이신데 그 근원과의 관계가 잘 못되었는데 어떻게 기쁠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모두 그런 경험 있죠. 어렸을 때 시험을 잘 보면 애들이 엄마가 시험 봤니 하고 물어보기도 전에 저쪽 골목에서 시험지 들고 달리지 하죠. 요즘 애들은 촌스러워서 그렇게 안 하죠. 옛날에는 우리는 그렇게 촌스럽게 살았습니다. 막 달려와요. 그런데 엄마 아빠가 원하지 않는 잘못된 일을 해서 화목이 깨뜨려졌을 때 그 기쁠 수가 없습니다. 똑같습니다.
오늘 시인을 보십시오. 시인이 뭐라고 합니까. “주님 얼굴을 들어서 우리에게 비춰주세요. 주님이 내 마음에 주신 기쁨은 곡식과 포도주가 풍족할 때보다도 더 큽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하나님이 얼굴을 마주 대하고, 비추신다. 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냐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딱 주목하실 때에는 두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사랑스러우셔서 그다음에는 손 좀 보시기 위해서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여기의 경우에는 첫 번째 경우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하나님 주님의 얼굴을 우리에게 주님의 얼굴을 드시옵소서. 우리를 봐주시옵소서. 그리고 우리에게 당신의 임재를 비춰주시옵소서. 주님이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곡식과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도 더 큽니다. 이것이 기쁨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다. 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인에게 그렇게 극단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얼굴 안 드시고도 뭐 다른 것으로도 계속 채워 넣으면 그래도 보충이 될 수 있지 않겠니. 이렇게 물어보면 시인이 미쳤다고 하죠. 왜냐면 기쁨의 원천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에 보면 수많은 시편 속에서 “너희는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너희는 하나님을 기뻐하라.” “너희는 하나님을 찬양하라.” 찬양하는 이유도 그 하나님을 기쁘고, 그 하나님이 즐겁고, 그 하나님이 사랑스러우니까 찬양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그 잘못된 모순된 모습은 어디에 있느냐면 숙제를 안 해오고도 오락시간이 재미있기를 바라고, 그리고 숙제 검사는 안 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안 하십니다. 하나님은 은혜와 긍휼에 풍성한 분이시지만 은혜와 긍휼에 풍성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각자 각자를 향해서 목적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를 향해 여러분들이 이 아이가 정말 좋은 아이로 자라서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와 국가와 그리고 가족의 명예를 높이는 그런 쓸모 있는 자녀로 자라기를 바라듯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해서도 하나님이 그런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뜻대로 살아가기를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의도를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당신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의 근원입니다.
IV. 기쁨의 삶
그러니까 진짜 기쁨의 삶을 사시려거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잘못한 것은 진실하게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받도록 그러면 하나님이 언제나 거기에서 기다리십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면서 눈물을 흘리지 아니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대목 아닙니까. 우리는 언제나 떠난 쪽은 우리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십니다. 하나님은 예측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언제 어떻게 토라지고 변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십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돌아오면 언제나 거기 계십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가 오랫동안 먼 나라에 가서 그렇게 허랑방탕하고 고생하고 아버지의 집이 생각나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니까 아버지가 동구 밖에서 기다리다 만났다. 그러잖아요. 그렇게 하면서 스토리가 이어지잖아요. 그런데 아버지가 연락도 없이 다른 곳으로 이사 갔다고 하면 그 스토리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는 거기에서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떠나온 집으로 돌아가면 되지. 우리 몰래 아버지가 이사 갔을지도 모른다. 그것부터 먼저 수소문을 해야 된다. 아버지를 찾아 나서야 된다. 그것은 아닙니다. 언제나 예측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일관성 있게끔 우리들을 대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못 되었으면 하나님이 얼마든지 회개하면 다시 사랑해주시고 다시 기쁨을 주실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잖아요. 그러니까 이 원천은 변함이 없는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할 때 그 안에서 기쁨의 삶이 엄청난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들이 이 세상을 이제껏 살아오면서 기뻤던 날도 많고, 슬펐던 날도 많잖아요. 이 원천에 잇대어서 기쁘고 슬펐던 날들은 오래도록 열매로 남아요. 그런데 이 원천이신 하나님과 별로 관계가 없이 그렇게 가슴이 짜릿하도록 기뻤던 일 지금 뭐가 남았는지 한번 물어보세요. 없습니다. 또 주님 없이 그렇게 슬펐던 일들, 우리에게 뭐가 남았는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없습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은 “시간의 고귀함” 이라는 자신의 글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우리가 어떤 의무에 충실해서 많이 일하다가 쉬는 경우가 있는데 그 쉬는 것은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자기가 하고 싶지만 일 때문에 할 수 없었던 그런 일들을 하는 것이 휴식입니다. 에드워즈 목사님은 제가 알기로는 휴식하는 시간이면 말을 타는 것이 취미였다고 합니다. 그분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우리가 쉴 때가 있는데 그 쉬는 것은 이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어떤 사람은 그림을 그리는 것일 수도 있고, 사진을 찍는 것일 수도 있고, 음악을 듣는 것일 수도 있고, 등산을 하는 것일 수도 있고, 뭐 수영을 하는 것일 수도 있고, 그런데 그분이 하시는 말씀은 그다음에 이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새로운 것들을 잘 시작할 수 있기 위한 준비여야 합니다. 그런 것입니다. 새롭게 시작 할 수 있도록 잘 준비되고 충전되는 것 이것이 휴식의 의미입니다. 그러면 그 휴식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죠. 이렇게 기쁨의 도구와 원천을 잘 분별해서 하나님이 기쁨의 원천이니 도구 때문에 도구에 탐닉하다가 원천을 잊어버리는 어리석은 일이 없어야 하고, 그리고 도구를 아무리 잘 활용한다고 할지라도 원천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으면 신자는 진정으로 그가 기쁨의 삶을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쁘게 살고자 하는 여러분들은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지 간에 먼저 기쁨의 원천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두 번째는 그 기쁨의 자리가 오늘 성경은 인간의 마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수많은 행동들을 만들어내는 공장과 같은 곳입니다. 이 마음은 물건을 만들어내는 공장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 기계가 아주 새 것이고, 그다음에 기계가 아주 충분한 에너지를 가지고 활발하게 움직일 때 좋은 재품들이 막 쏟아져 나오겠죠.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선한 것과 그리고 기쁨으로 꽉 차 있을 때에는 이것을 사용해서 작용하기 때문에 아주 훌륭하게 덕스럽고 좋은 행동들이 나옵니다. 우리의 마음에 이런 기쁨이 없고 불만족과, 고통, 괴로움, 슬픔 이런 것들이 꽉 차 있게 되면 그다음에 나오는 많은 행동의 열매들이 불친절, 마음의 여유가 없게 되면 불친절하게 되죠. 그렇죠. 마음에 여유가 있으면 친절하겠죠. 마음에 여유가 없게 되면 불친절합니다. 시기 질투 원망, 이런 것들이 막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속에 기쁨이 꽉 차 있게 되면 덕스러운 행동들이 끊임없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기쁨을 두실 때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그리고 덕스러운 행동의 열매를 맺으면서 사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기쁨이 있게 마련입니다. 기쁨이 없이는 그런 덕스러운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모두 똑같이 보이지만 실제로 내면의 세계를 들어가 보면 하나님을 향해서 의무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기쁨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자의 사람들은 생각의 창의성이 없습니다. 그냥 남이 하던 대로 해 가면 그것으로서 다행입니다. 그런데 후자의 사람들은 항상 창의성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으니까 창의성이 있고, 그런 기쁨이 가슴 속에서 샘솟는 사람들은 절대로 직장에서 이것이 너의 일이지 어떻게 나의 일이냐. 그러면서 옆에 있는 사람과 싸우거나 다투지 않습니다. 항상 아량과 충만한 기쁨 속에서 생활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쁨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은혜를 많이 받게 되면 사실 우리의 마음에 얼마나 많은 슬픔이 오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은혜를 많이 받게 되면 그때 비로소 우리가 얼마나 부족한 인간이가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게 되면 우리가 얼마나 부족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고 그리고 이렇게 살다가도 나 같은 인간을 사랑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부족한 삶을 사는지가 뼈저리게 느껴져요. 그때는 마음이 아파요. 내가 받은 은혜가 이렇게 큰데 내가 이렇게밖에 못 사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게 임하면 우리의 마음에는 까리따스의 사랑이 차게 되죠. 까리따스의 사랑이 꽉 차게 되면 사람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육욕적 자기 사랑에 사로잡혀 있으면 자기밖에는 눈에 안 들어옵니다. 사람이 눈에 들어와도 어떻게 그들을 이용해서 나에게 만족을 줄 수 있을까? 이런 식으로밖에 생각이 안 들어오지만 까리따스의 사랑이 꽉 차게 되면 사람들 하나, 하나가 우리의 사랑의 목표인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하나님 때문에 내가 너무나 행복하고 기뻐요. 그 때에 그런 기쁨으로부터 소외된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슬프고 가슴 아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 그렇게 눈물을 흘리시는 생애를 사셨던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자신의 부족을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마음 아파하고, 또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저들이 모르는 것 때문에 내가 슬프고, 이래서 신자가 눈물을 흘리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마음 아파한다고 해서 그 신자 속에 기쁨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런 은혜의 세계 속에 못 들어 가본 사람들의 결론입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게 이 세상에 있는 정서는 슬픔이 있는 곳에는 기쁨이 함께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영적인 신령한 정서 속에는 이 신령한 기쁨과 신령한 슬픔은 공존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신령한 슬픔이 없다면 신령한 기쁨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 인격 안에 두 개가 함께 공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우리의 신앙의 과거를 쭉 돌아보면 언제 가장 기쁨의 삶을 살았느냐면 마음이 가장 아플 때 그 때 기쁨의 삶을 산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픔의 이유가 불만이나, 괴로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신령한 아픔이 있는 곳에 신령한 기쁨이 있고요. 또 이해하실런지 모르겠지만 여러분은 이해하실 것입니다. 나는 굳게 믿습니다. 역설입니다. 가만히 보면 역설이 성립하는데 그것이 뭐냐면 우리가 신령한 이유로 인해서 마음이 아플 때 그 때가 가장 행복했고요. 또 어떤 역설이 있느냐면 우리가 날마다 신령한 외로움에 있을 때에 사실은 그 때에 내가 결코 홀로 있지 않고 주님과 함께 있다고 하는 것을 가장 풍부하게 경험하던 때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십니까?
그러니까 주님의 뜻을 깨닫고 온전해지기 위해서 진리를 따라서 우리가 구도의 길을 걸어갈 때 그 때 사실은 자기를 정말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잖아요. 어느 지점까지 들어가 보면 그들이 나를 어떻게 도울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홀로 단독자로 그분 앞에 서는 것이 신앙인데 어떻게 나를 도울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깊이 들어갈 때 그 때에 정말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친구도 없는 것 같은 구도자로서 그 벌판에 서 있는 것 같은 외로움을 느끼죠. 그런데 그 때에 항상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으면 그 때에 세상도 없고 나도 없지만 그러나 주님은 계시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이런 영적인 이치를 터득하기만 한다면 사람들이 그렇게 경솔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거룩한 외로움을 아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해 주시는 충만한 기쁨, 그 기쁨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하나가 된 그 즐거움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고요.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신자가 마음이 많이 아플 때 그 때 비로소 하나님 때문에 신자가 얼마나 행복해지고 기뻐할 수 있는지 그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과거를 이렇게 보면 눈물을 많이 흘렸을 때가 정말 행복했던 때입니다. 회개의 눈물이 있었던 때, 회개할 때는 아프지만 씻고 나면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막 밀려오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제가 설교자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 제 생애에 깊은 체험을 했고요.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설교자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경험이 그것입니다. 토요일 저녁 밤이면 선생님들이 모여서 누가 오라고 한 것도 아닌데 아이들과 모여서 추운 겨울에 옥탑 방 같이 생긴 그 예배당에서 우리가 밤새도록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성령님이 하신 것입니다. 성령님이 그렇게 영혼들을 위해서 애통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밤새도록 그 아이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를 해요. 기도회 한번 하고 나면 화장지 한 통이 항상 없어지다 시피 했습니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할 때에는 이게 가씀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픕니다. 그렇게 막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던 어느 날인데 주님이 기도하는 우리의 마음에 그런 응답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의 마음을 안다.” 그런데 그렇게 가슴아파하면서 지체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에는 그 사람들만큼 슬픈 사람들이 없습니다. 눈물을 씻고 나서 기도회가 다 끝나고 나면 얼굴이 천사 같은 기쁨이 밀려와요.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말이죠. 하나님 등진 기쁨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기뻐하시려고 하면 그 마음이 주님이 주신 기쁨으로 꽉 차서 그래서 얼마나 기쁜지 이 세상에 돈 많은 사람 부럽지 않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좋은 환경 속에 있는 사람, 아무것도 부럽지 않은 그런 기쁨을 여러분들이 가지시려고 한다면 기쁨의 도구에서만 찾지 말고 원천이신 하나님에게서 찾아야합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모든 자녀들이 당신 때문에 말할 수 없이 행복한 삶을 살게 되기를 원하고 당신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 마음 안에 큰 기쁨을 주셔서 기쁨을 이기지 못한 삶을 살게 하시고 싶어 하시는 분이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런 기쁨이 넘치기 위해서는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항상 명징하고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빛 가운데 살아야합니다. 태양을 등지고는 자기 앞에 드리워진 그 그림자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면 그림자가 없습니다. 그 안에서 기뻐하면서 하나님 앞에 늘 살아가야합니다.
V. 결론과 적용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 자신의 더 온전한 삶을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베풀어주신 십자가의 은혜 때문에 울고, 한편으로는 그런 십자가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밖에 못 사는 자신 때문에 슬퍼서 울지만 눈물을 씻은 후에는 이 세상의 누구에서도 볼 수 없는 놀라운 기쁨, 강물처럼 밀려오는 기쁨,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도저히 알 수 없는 하나님 자신을 기쁨의 근원으로 삼은 사람의 행복,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합니다. 그 때 아, 그렇구나. 이 세상의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평화, 돈이 많고, 좋은 기회가 많이 주어졌어도 느낄 수 없는 그 평화가 저 예수의 사람들에게는 있구나. 그 기쁨이 있구나. 환경과 상황에 의해서 빼앗기고, 상실될 수 있는 기쁨이 아니라. 영원하고 완전하시고, 불변하시는 하나님께 깊이 뿌리를 박은 그 기쁨이 있구나. 그러면서 그 기쁨 속에서 사람들에게 너그럽게 그들을 깊이 사랑하고 배려하고, 그렇게 해서 마음에서 흘러넘치는 이 기쁨 속에서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 기쁨과 은혜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인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게 하게 하였느니라” (고후 8:1-2)
I. 본문해설
지난 시간에는 그리스도인의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만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 그 밖에서는 기쁨을 생각할 수 없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혹시 그런 기쁨이 있을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누리며 살게 하신 그래서 우리를 그 기쁨 속에서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그런 종류의 기쁨이 될 수 없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기쁨과 은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의 배경은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는 가운데 연보에 대해서 언급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지금같이 이렇게 건물을 짓고 조직적으로 교회가 운영되던 그런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사실은 교회 자체를 유지하는데 그렇게 큰 비용이 들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때는 기본적인 단위가 가정 교회였고, 그 가정 교회들을 모두 모아놓은 것을 가리켜서 그 지역 전체를 가리켜서 마게도냐 교회 혹은 빌립보 지방에 있는 교회들은 빌립보 교회, 이렇게 불렀죠. 지금처럼 이렇게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큰 공회당에 모여서 함께 예배드리고 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에 내는 헌금들은 대부분 그야말로 선교를 하고 구제를 하는데 사용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 발전되면서 교회당 건물을 짓고 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각 시대마다 교회들을 이렇게 인도하시는데 또 이렇게 가정으로 이루어진 교회가 아니라. 이렇게 함께 모여서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보다 더 조직적으로 교육이 이루어지고 함께 예배드림으로 한 공동체라는 의식들을 갖고 그리고 체계적으로 교육이 이루어지고 할 수 있는 또 역동적인 힘을 합쳐서 조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 할 수 있는 이런 좋은 점도 가지고 있으니까 사실은 일방적으로 어느 한쪽이 좋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II. 마게도냐의 곤경과 헌신
어쨌든지 그런 맥락에서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각 교회들이 십시일반으로 부조를 하여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에 있는 어려움에 처한 성도들을 돕게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고린도 교회에 하면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헌금을 하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헌신하되 미리미리 준비해서 그렇게 하나님께 드리고 그래서 그것들을 드릴 때에는 항상 하나님께 바친다는 마음으로 바치도록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죠. 그러면서 이제 마게도냐 교회의 예를 들면서 마게도냐 교회가 당한 처지와 그들이 헌금에 있어서 모범을 보였던 사실을 이야기 하는 가운데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기쁨이라는 주제가 여기에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마게도냐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를 섬기는데 넘치도록 헌금을 해서 사도바울의 마음에 큰 감동을 주었던 그런 헌신적인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마게도냐 교회가 그렇게 넘치는 많은 헌금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가운데 마게도냐 교회의 곤경과 헌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A. 곤경
먼저 이 마게도냐 교회가 당한 곤경은 무엇인가? 오늘 성경에 보면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랬습니다. 이 교회는 환란을 많이 당한 교회였고, 그 속에서 복수로 나오는 끊임없는 시험을 당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니 교회가 환난을 한번 당하고 또 그 환난 속에서 시험을 한번 당해도 그것이 견디기 힘든 고통인데 이 마게도냐 교회는 마치 큰 파도를 헤치고 지나가는 배의 앞머리처럼 수없는 물보라와 파도에 부딪히고 찬바람을 맞는 그래서 겨울이면 얼음이 잔뜩 어는 그 배 앞 분처럼 교회의 역사의 한 마당을 지나가면서 이 교회는 처음 주님을 믿는 믿음의 열매들로서 수없는 환난과 그리고 시련을 당한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마음에 마게도냐 교회 하면 환난을 많이 당하고 시련을 많이 당한 교회라는 인상이 이 사랑하는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는 그런 종류의 교회였습니다. 이런 곤경에 놓여있는 것이 바로 마게도냐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의 곤경은 단순히 환난과 시련을 당한데만 있지 않습니다. 이 교회는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가 마게도냐 교회를 이야기 하면서 극한 가난 가운데 있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많은 교회가 있지만 다른 교회들은 그렇게까지 생각이 되지 않았는데 마게도냐 교회 하면 극도로 가난한 교회라는 인상이 사도바울의 마음에 박혔고, 그래서 사도가 거액의 헌금을 이 마게도냐 교회를 통해서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를 도와달라고 바쳤을 때 더 크게 감화를 받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B. 헌신
편지를 받고 있는 고린도교회는 부자 교회였습니다. 고린도가 항구 도시였고, 무역이 아주 발달했고, 문화가 번창한 곳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 살았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들도 그 잘 사는 고장에 있는 사람들이니 예외가 있었겠지만 교회 전체적인 수준은 잘 사는 교회였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 잘 사는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사도바울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연보생활을 하도록 당부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마게도냐의 교회의 예를 들면서 그 교회가 넘치는 연보로 예루살렘에서 흉년을 만나 고통하고 있는 그 교회를 향한 마게도냐 교회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곤경에 처한 교회였으니 환난에 많은 시험을 당한 교회였고, 게다가 극도고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그런 깊은 곤경에 처해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또한 성경은 그렇게 곤경에 처한 교회의 헌신을 이야기 합니다. 그 헌신을 이야기 하면서 오늘 사도바울은 넘치는 연보였다고 말합니다. 결국 여기에서 넘친다는 이야기는 이중의 의미를 갖겠죠. 한편으로는 마게도냐 교회를 기준으로 볼 때 그들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그 이상의 것을 헌금했고, 또 예루살렘 교회 성도를 기준으로 해서 보면 이 마게도냐 교인들에게 돌아갈 그 몫 보다는 훨씬 더 넘치는 헌신을 했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환난을 만나고 시련을 당하고 가정에서 핍박을 받기 때문에 하나님을 잘 못 섬긴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신앙의 원리는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환난을 당하고 시련을 많이 당한 이 마게도냐 교회가 오늘 하나님 앞에 그 환난 때문에 시련 때문에 헌신을 못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이 환난과 시련을 비웃듯이 하나님 앞에 넘치게 섬겼습니다.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총체적인 것입니다. 마게도냐 교회가 결정적인 위기에 이처럼 넘치는 헌금으로 사랑하는 예루살렘 교회의 고통 받는 형제들을 도왔다면 평소에도 그들이 이처럼 섬겼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치에 합당하지 않겠습니까. 평소에는 아무것도 섬기지 않던 성도들이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운 일을 만났다니까 딱 한번 헌금만 힘에 넘치게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이성적으로도 옳지 않은 추측이고 우리의 경험상으로도 타당하지 않는 판단입니다. 한 사람의 어떤 섬김의 삶은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그 섬김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 섬김이라면 다른 때에도 그만큼 섬기는 것만큼 하나님 앞에 섬기는 되는 것입니다. 늘 하나님 사랑하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몸으로서 시간으로서 섬기려고 하던 사람이 결정적인 때에 물질로도 섬기고 늘 물질로 섬기고 재능으로 섬기던 사람이 어느 결정적인 때에 주님을 위해서 박해와 고난을 받아야 할 때 비겁하게 파하지 아니하고 그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 교회가 바로 그렇게 하나님 앞에 환난의 시험을 많이 당했는데4도 하나님 앞에 넘치도록 헌신했습니다. 넘치도록 헌신했습니다. 뿐만 아니죠. 이 교회는 매우 가난한 교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마 바울이 그 마음속에 있는 세워진 많은 교회들 가운데 이 교회가 가장 가난한 교회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에 보면 그냥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극한 가난 가운데 있는 교회라고 그렇게 지칭 하였습니다 이렇게 극한 가난 속에서 곤경을 당하던 이 사람들이 넘치도록 헌신하였습니다. 그래서 환난이 없고 시련을 만나지 않은 사람, 핍박이 없고 가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신앙생활을 이해하고 협조해주는 사람들이 많이 섬기는 것이 아니라. 돈이 많고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많이 섬기는 것이 아니라. 곤경에 가운데 있는 사람이라도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기만 하면 그 역경과는 상관이 없이 이렇게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섬김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오늘 여기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궁금한 것은 그러면 이 마게도냐 교회가 그렇게 환난의 시험들 가운데 고통을 받으며 극한 가난 가운데서 괴로움을 당하는 가장 열악하고 고통스러운 처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넘치도록 하나님을 섬기게 만들었던 그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바로 오늘 성경에서 기쁨이라고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사도가 언급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이 마게도냐 교회가 넘치도록 주님을 섬겼는데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그리고 기쁨과 극한 가난, 그 속에서 주님을 섬기게 되었으니 가난해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만 가난 하다고 누구든지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말은 논리적으로 성립이 안 됩니다. 환난을 당하고 시련을 당해도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다는 말은 성립하지만 환난을 당한 사람들은 모두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훌륭하게 섬기기 위해서는 시련을 당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라고 하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정작 환난의 많은 시련들 가난 기쁨. 이 세 가지의 특징이 마게도냐 교회에 언급되고 있지만 앞뒤에 있는 두 특징은 말고 가운데 있는 이 기쁨이라고 하는 적극적인 특징이 이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을 넘치도록 섬기게 했다는 결론에 우리들이 자연스럽게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교회가 이러한 큰 환난과 시련들 가운데서 그리고 말할 수 없이 극도로 가난한 그 극한 궁핍한 가운데서 이렇게 넘치도록 섬겼으니 그들 가운데 있는 기쁨이 얼마나 컸었는지는 우리는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만약에 우리에게 이러한 신령한 기쁨이 없다고 한다면 아마 10일 섬기던 사람이 환난과 시련을 만나게 되면 10섬기던 사람이 아마 5나 3으로 줄어들고 웬만큼 경제적인 생활을 하던 사람이 큰 어려움을 당해서 극도로 가난해지게 되면 10을 섬기던 사람이 2, 3을 섬길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은 우리들의 자연스러운 경험 아닙니까. 그런데 이 교회는 환난의 많은 시련과 사도바울도 가난한데 처할 줄 알았던 사람이었지만 그 고난을 많이 받은 사도가 생각하기에도 정말 극한 가난가운데 있는 교회라고 하는 마음이 가슴 속에 깊이 있었습니다. 그런 가난한 교회였는데 부자인 고린도교회가 부끄러울 만큼 사도바울이 이 교회를 많은 교회에게 자랑하고 싶으리만치 그렇게 넘치도록 헌신했으니 그들의 기쁨이 얼마나 컸기에 가난을 딛고 환난의 시련들을 이기고 결국은 하나님을 훌륭하게 섬길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을 우리들이 생각하게 되지 않습니까.
III. 기쁨의 근원: 은혜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전에 사실 이러한 상황이 정말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을 갖지 않습니까. 인간의 일반적인 경험은 기쁨과 슬픔이 한 인격 안에 공존하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쉽지는 않습니다. 대부분 일반적인 경우에는 슬픔이 있었는데 큰 기쁨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슬픔과는 비교 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기쁨이 들어와서 그 슬픔을 몰아내버려야 됩니다. 그리고 기쁨이 있다고 하더라도 슬픔이 들어오게 되면 기쁨이 그 슬픔에 의해서 녹아서 사라지고 슬픔이 차게 되어 있는 것이 이것이 이 세상에 있는 대부분의 인간들의 일반적인 경험입니다. 지극히 예외가 있지만 그러나 대부분 일반적인 경험은 인간의 마음에 밀려오는 슬픔은 기쁨을 축출하고 밀려오는 슬픔은 기쁨을 사라지게 만드는 효과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 슬픔과 기쁨은 신비스럽게도 한 인격 안에 공존합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이 두 가지가 함께 공존하는 기쁨만이 진짜 신령한 기쁨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만치 이것이 놀라운 사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경험은 이러한 사실을 잘 입증합니다. 여러분들이 지난 날 하나님 앞에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왔던 은혜의 날들을 회고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회고해보면 이 세상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공식이 성립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생애중 주님을 만나고 가장 기뻤던 때는 많이 눈물을 흘리던 슬픈 때였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중에 은혜의 경험이 있는 모든 사람들은 저의 생각에 동의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늘을 열고 부어주시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놀라울 때 그냥 그 은혜가 놀랍고 크다는 것으로만 끝난 때가 우리에게 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기쁨을 느낄 때 마다 한편으로는 가치 없는 인간인 우리 자신에 대한 슬픔, 주님의 그 크신 은혜, 값없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에게 부어주시는 그 은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나의 죄 인된 삶, 이런 것에 대한 슬픔이 늘 있었고, 그런 슬픔이 있는 그 인격 안에 신령한 기쁨이 공존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 안에 있는 이 기쁨이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인 자신 속에 오고가는 기쁨과 슬픔의 논리를 가지고는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기쁨과 슬픔입니다. 그것이 신자인 우리 안에 있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마게도냐 교회가 환난의 많은 시련들, 그리고 극한 가난 가운데 거하면서도 그것은 이들에게 끊임없는 고통과 슬픔을 안겨 주었을 것입니다. 그렇죠. 끊임없이 계속 되는 환난, 그리고 밖으로부터 오는 수많은 시험과 핍박들, 어디든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유대인들이 있었고,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방인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그들에게서 찢겨져 나간 이단들이 있었고 또 비슷한 가르침을 가지고 그들을 맞서고자 하는 열 교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안팎으로 많은 환난과 시련에 처하면서 교회는 연약한 신부처럼 그렇게 많은 모욕과 시련을 당할 때에 그 교회에 접붙여진 성도들은 함께 그 환난과 시련의 고난에 참여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끼니를 이을 수 없을 정도의 극한 가난이 그들에게 기쁨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죠. 그래서 그들은 안팎의 많은 환난과 시험, 그리고 내적인 시험과 물질적인 가난 때문에 그들은 많이 고통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과 함께 그들은 넘치는 기쁨을 소유했습니다. 그래서 그들 안에 넘치는 기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주신 환난과 시련의 고통을 주님 앞에서 교회가 더 온전해져 가는 과정으로 삼고, 극한 가난 속에 살면서 예수 의지하며 사는 비결들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환난의 시련들과 극한 가난은 고통은 고통이었지만 그 고통 때문에 예수로 말미암아 누리게 되는 그 기쁨의 신령한 가치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당신이 사랑하는 교회들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신자가 똑 같습니다. 하나님이 잘못했기 때문에 징계로서 환난과 시련을 당하게 하는 지체들도 있지만 오히려 하나님이 많이 사랑하시고, 그리고 많이 인정해주시는데도 평범하지 않는 길을 걸어가면서 속에 근심, 밖에 걱정, 환난과 시련이 끝없이 겹치도록 그렇게 연단하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고난을 당한다고 할 때에 애정이 없이는 그 사람의 고난의 의미에 관해서 경솔하게 말하면 반드시 죄를 짓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하지 말아야합니다. 교회가 환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할 때에 항상 교회가 썩었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훈련을 위해서 징계를 하신 때는 있지만 잘못한 것에 대해서 보복을 하시는 경우는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참 많이 받고 있는데도 그 그리스도의 몸인 그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으셔서 그래서 하나님이 많이 연단하시는 교회가 있습니다.
마게도냐 교회 사도바울의 마음에 이렇게 보석처럼 빛나는 교회였다면 하나님의 마음에도 기쁨교회였겠죠. 그런데도 고린도 교회보다 못 살았고요. 정말 극심하게 가난한 교회였고, 환난과 시련이 그치지 않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바다에 밀리는 파도가 조개껍데기를 더 단단하게 하고, 풀무에 지펴지는 그 뜨거운 불길이 제련하는 그 쇠를 더 순수하게 하고, 끊임없는 비바람 속에서 오히려 그 나무가 그 폭풍을 인해 더 단단하게 되듯이 하나님께서는 이 사랑하는 마게도냐 교회를 그런 환난의 시련과 극한 가난 속에서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이 날마다 새롭게 되었다는 사도바울의 고백과 같이 그런 정말 교회다운 교회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축복되다. 라고 말할 때에는 그냥 평안한 상태에 있는 그것이 축복이 아닙니다. 우리의 축복은 하나님이 그 교회나 신자들을 향해서 가지고 계신 목적을 향해 활발하게 움직여 가게 하실 때 그것이 축복입니다. 경제적으로는 고린도교회가 부자인 교회였고, 학식 높은 사람이 살고 있기로도 마게도냐 교회하고는 비교되지 않는 도시였지만 그러나 신앙에 있어서만큼은 이 환난을 많이 만나고 시련에 처한 교회, 가난뱅이 들이 모여 사는 이 마게도냐 볼품없는 교회로부터 고린도교회는 배워야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교회에도 하나님이 사랑하실 때 이런 시련과 환난을 주셔서 깨끗하게 하십니다. 연단하시고, 또 정결케 하시고, 그래서 당신과 더욱 실제적으로 연합 속에 살도록 하나님이 신자 각 사람을 다스리시는 것처럼 그렇게 교회를 하나의 몸으로 보고 다루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교회가 그런 극한 가난과 많은 환난의 시련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이처럼 섬길 수 있었으니 그들에게 임한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보여주지 않습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아도 우리가 가장 기쁠 때에는 가장 많이 가슴 아파 하던 때였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영혼을 위해서 그렇게 가슴아파할 때만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충만한 기쁨의 삶을 산 때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꿀과 같이 달게 느껴지고 말씀을 들을 때마다 진리를 소유한 희열을 느끼던 때 우리는 그 진리를 알지 못하는 이 세상에 있는 얼굴을 알 수 없는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기억하며 얼마나 많이 아파했습니까.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에 대해서 눈을 뜨고, 그분의 지극히 지엄하고 높으심을 찬양할 때 그래서 그 신령한 그 영과의 기쁨으로 우리가 가득 찰 때 언제나 그 기쁨 끝에는 이런 좋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세상을 보며 슬퍼하던 마음이 우리에게 있지 않았습니까. 때로는 이 슬픔이 너무 지나쳐서 그래서 가슴이 찢어지고 심령이 메임을 받는 것처럼 그렇게 아플 때도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아플 때에 가장 기뻤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신자의 기쁨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회심 이후 이렇게 돌아보면 기도 속에서 눈물을 많이 흘리던 때가 가장 기쁨이 충만한 때였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너무 기쁘기 때문에 눈물 흘린 때는 누구나 그렇게 많지 않을 것입니다. 대부분 가슴 아파서 눈물을 흘리죠.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살려준 이 죄인에 대해서 넘치는 은혜, 그 크신 은혜를 받고도 주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나의 부족, 이런 것을 발견하면서 가슴아파하며 눈물을 흘리게 되며 자기 깨어짐의 눈물이라고 하는 것이 이런 아픔의 눈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깨뜨려지는 것은 아픈데 깨뜨려지고 나면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아주 향기로운 기쁨입니다. 옥합이 깨뜨려질 때 옥합은 아프지만 깨뜨려지고 흘러나오는 그 향유는 온 방안에 가득 향내를 퍼뜨려 가득 차게 하고 거기에서 그 향취가 온 방안에 가득하게 되지 않습니까.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의 못된 부분이 깨뜨려질 때 우리의 옛 자아는 아파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새 사람은 그것을 즐거워하고 그 깨뜨려짐 속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놀라운 능력으로 기뻐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마게도냐 교회가 누렸던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궁금한 것은 그러면 이 기쁨이 마게도냐 교회를 그렇게 넘치도록 헌신하게끔 만들었다면 바로 이 기쁨이 극한 가난아도 불구하고 많이 헌신하게 하고,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미끄러지지 아니하고 주님을 위해 섬기게 만들었다면 도대체 이 기쁨은 어디에서 온 것이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습니까. 이 기쁨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에 대해서 오늘 사도바울은 그 기쁨의 원천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합니까?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에게 주신 은혜를 너희에게 알게 하려 하나니. 그랬습니다. 마게도냐 교회가 극한 가난과 환난의 많은 시련 속에서도 그렇게 힘에 넘치도록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기쁨 때문이었는데 그 기쁨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불러 일으켜진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항상 우리의 기쁨을 신령한 방법으로만 공급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일반섭리 속에서도 좋은 일이 일어나면 사람들이 기뻐하게 되고, 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잘 되었다는 소식을 들어도 마음에 기쁨이 있고, 또 어렵던 살림에 물질이 보태어져도 기쁨이 있고, 그렇게 많은 기쁨들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고난도 이기며 순종의 길을 가게하고 극한 가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변함없이 섬기게 만들어주는 이 놀라운 기쁨의 원천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에 은혜를 베풀어주실 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기뻐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던 때가 세상 적으로 우리들이 반드시 많은 복을 받을 때하고 비례하느냐면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넘치도록 부어주셔서 분에 넘치는 것을 누리며 살면서도 터럭만큼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 않던 때가 있는가 하면 시련의 가시밭길을 걷고, 그 고통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하나님 앞에 충분합니다. 하나님 충분합니다.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던 때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혼을 일깨워 신령한 기쁨을 부어주실 때입니다. 돈이 없어도 감사했고요. 사물들의 질서가 내 마음에 좀 안 들어도 거기에서 연단 받으면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고요.
이 풍랑 인연 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마게도냐 교회가 이렇게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어느 부자가 등록해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거액의 헌금을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제 환난이 그치고 시련이 사라졌다는, 핍박이 그쳤다는 소식이 들려와서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들은 그대로 있었어도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을 어루만지셨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그들을 어루만지시며 그 교회를 두루 어루만지시며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를 그들에게 끊임없이 부어주셨습니다. 이 은혜는 정체가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 있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 있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 있는 그곳에는 항상 그런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다고 하는 자기 인식이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를 받는 그 곳에는 항상 하나님을 향한 섬김이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고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 왜 자체가 사랑의 감화이기 때문에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 은혜가 이들에게 기쁨이 되었고, 그 기쁨이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그 화난의 많은 시련, 극한 가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섬기게끔 만들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할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주셔서 그래서 우리를 일깨우시고, 그 사랑으로 우리를 감화시켜 주셔서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의 감격 속에 살게 할 때 그 때 이렇게 가난한 교회가, 이렇게 시련을 많이 당한 교회가 하나님을 섬겼듯이 우리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바라보면서 언제쯤이면 모든 환경이 좋아져서 내 마음이 기쁨으로 꽉 차고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요. 그렇게 바라보지 말고 문제는 하나님의 은혜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간에 마게도냐 교인들 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극한 가난 속에 삽니까? 그래도 이 교회처럼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 있지 않지는 않습니까. 이 두 가지가 겹쳐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 핍박은 없지 않잖아요. 순교의 위협이 순간순간 다가오고 있지는 않잖아요. 그러니 우리에게 있어서 마게도냐 교회에 있어서 정말 마게도냐 교회를 마게도냐 교회로 만들었던 것은 기쁨이었고, 그 기쁨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시고, 그 은혜로 말미암아 사랑의 감화로 말미암아 그들의 마음속에 신령한 기쁨이 꽉 차니까 환난의 많은 시련이 마게도냐 교회를 잠재울 수 없었습니다. 극한 가난이었지만 이 마게도냐 교회가 사랑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섬기려고 하는 그 섬김을 그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IV. 결론과 적용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환경과 처지에 희망을 걸지 말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희망을 가지세요. 우리에게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니 언제든지 그분께 나아가면 자기를 낮추고 진실하게 그분의 도움을 구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다는데 환난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섬기고 싶다는데 극한 가난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위해 봉사하겠다는데 하나님이 은혜를 안 주실 리가 있습니까. 고난도 이기고 시련도 이기면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 위해서는 세상이 알 수 없는 기쁨이 필요하니 하나님의 은혜로서 그 기쁨을 달라고 그래서 그 은혜로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맛을 내면서 살게 해달라는데 하나님이 안 주실 리가 있겠습니까. 핵심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돈도 없고 가난하기 가난하고 또 환난과 시련을 많이 만난 이름 없는 교회였지만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시니까. 기쁨이 넘치는 교회가 되게 하셨고, 그래서 돈 많은 교회, 환난과 시련이 없어서 편안한 교회가 할 수 없는 위대한 일을 하게 하셔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형편과 처지가 여러분들이 마게도냐 교회 같다고 하더라도 소망을 가지세요. 우리의 궁핍함은 그리스도 안에 부요를 맛보게 하시기 이한 기회이며 환난과 많은 시련은 그 속에서 우리를 건지신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보게 하시기 위한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그들을 기쁘게 해서 그것들을 비웃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넘치는 은혜로서 기쁨의 삶을 살아서 고난도 이기고, 시련도 극복하고 가난도 물리치며 주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 기쁨과 관용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빌 4:4-5)
I. 본문해설
이 빌립보서를 쓸 때에 바울은 감옥에 있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이제 바울의 마음은 이제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마음으로 확정되었기 때문에 평안에 넘쳤습니다. 그래서 이 빌립보 작은 편지에는 기뻐하라는 말이 무려 18번이나 나옵니다. 그래서 혹자는 이 서신을 가리켜 기쁨의 서신이라고 부릅니다. 가장 고난이 넘치는 때에 그리고 복음을 인하여 갇힌바 되어서 이제 생명을 기약할 수 없는 그 때에 사형수로 옥에 갇혀있는 바울이 옥 밖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는 수많은 성도들에게 기뻐하라고 이렇게 당부하는 일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생각나게 만들어줍니다. 우리는 흔히 기쁨이 우리의 육신의 편안함이나, 물질의 많음, 그리고 우리를 즐겁게 하는 기쁜 소식 때문에 기쁨이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쁨이 없는 것은 우리 주변에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기쁨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이 서신을 쓴 배경을 보면 우리의 이러한 추론이 상당히 빗나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장 곤고하던 때에 그리고 가장 고난이 넘치던 때에 그리고 이미 관제와 같이 부음이 되고 죽음의 날이 가까워온 그 순간에 사도바울은 그 많은 옥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유로운 마음으로 기뻐하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기쁨은, 이 참된 기쁨은 자기가 원하는 바대로 정위된, 사물들의 질서가 주는 즐거움에서 오는 기쁨도 아니며, 혹은 자기 마음을 자극해서 스스로 자기를 기쁘게 한 대서 오는 감정적인 즐거움도 아닙니다. 바울이 옥 속에서 누렸던 이 놀라운 기쁨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평화를 이룬 그런 상태에서 오는 기쁨인 것입니다. 모든 참된 기쁨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통해서만 오는 것이며 하나님과의 평화를 통해 오지 않는 모든 기쁨은 가치가 별로 없거나 우리의 영혼에 해로운 것들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하나님과의 평화 속에서 인생의 가장 어려운 시기를 기쁨에 넘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바울이 오늘 누리가 있는 이 참되고 놀라운 기쁨은 그리스도를 통한 소망이 가져다준 기쁨이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를 통한 기쁨이 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과의 평화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능해졌고, 또 그리스도를 통한 중보의 평화가 그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입니다. 옥에 갇혔지만 바울을 가슴 아프게 하는 일들은 계속 되고 있었습니다. 밖에 있는 그 유대인들의 끊임없는 교회를 향한 핍박과 자신을 향한 모함, 그리고 또 자기가 옥에 갇혔기 때문에 일어났던 많은 오해와 그리고 많은 일들이 사도바울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통과는 비교될 수 없는 놀라운 기쁨을 그가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소망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복음을 전하다가 한 많은 인생을 여기에서 마감을 하는구나. 생각한 것이 아니라. 관제와 같이 자신이 부음이 되어서 이제 육체를 떠날 날이 가까워 왔는데 이 육신을 벗는 그 날이 예수를 뵈옵는 날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바울은 가장 인생의 어려운 고비 속에서 기쁨에 넘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II.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그런데 오늘 여기에 보면 기뻐하라고 빌립보 교인들에게 당부하면서 관용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관용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이죠. 이 관용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을 온화함으로 너그럽게 대하는 마음의 여유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누구에게 대한 것일까?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여기에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우리가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혹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죄를 지어서 우리에게 악을 행할 때, 그리고 나는 올바른데 다른 사람이 나에게 악의를 품고 미워하거나 말로 나를 부끄럽게 해서 나를 수치스럽게 만들 때, 그 때 우리는 어느 정도는 그 사람이 우리의 행한 죄와 악에 대해서 그것을 심판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보고, “너희가 너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해주어라.” 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결국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권한이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에 보면 어떤 사람이 사람에게 손해를 입히게 되면 손해를 입힌 사람은 손해를 입은 사람에 대해서 의무를 지게 되고 새로운 의무를 지게 되고 손해를 당한 사람은 자기를 그렇게 고통스럽게 한 사람에 대해서 권리를 갖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율법의 중요한 내용입니다. 사람이 만약 나에게 상처를 냈다면 과실이든, 고의든 상처를 냈다면 그 사람은 나에게 책임을 져야하고, 나는 내가 받은 손해에 대해서 그 사람에게 권리를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것이죠. 이런 것들은 오늘날 법의 정신이기도 하죠. 그래서 다른 사람의 명예를 상하게 하거나 혹은 그 사람을 헤치면 국가 앞에도 책임을 지지만 동시에 그 개인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하는 것입니다. 성경도 똑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인간들에게 주신 가장 중요한 계명은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나누어지지 않는 의무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누군가 이웃에게 해를 입히거나 그를 부당한 대우를 해서 고통을 주게 되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만 책임지면 되는 것이 아니라. 또한 그 사람 앞에서도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정신들이 매우 약합니다. 그래서 신앙이 지나치게 내제화되고 주관화 되어서 다른 사람에게 어떤 손해를 입혔든지 내가 하나님 앞에 참회하고 하나님이 용서해주시기만 하면 난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면서 흔히 하는 말이 하나님이 의롭다 하신 자를 누가 정죄하리요. 이런 성경구절을 들이댑니다. 그러나 그것은 칭의로 말미암는 구원을 이야기 할 때 쓰는 것이지 하나님께서는 깊이 회개한 삭개오도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기가 이웃에게 손해를 입힌 것에 대해서 배상하게 될 때에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용서하는데 그까짓 것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들에게 매우 결핍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하려고 하는 내용은 그 얘기는 아닙니다만 그래서 다시 본 논지로 돌아가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나를 이치에 어긋나도록 부당하게 대우하거나 나에게 악을 행하거나 고통을 주었을 때에는 그가 그 지은 악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책임을 져야하지만 동시에 내게도 책임을 져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사람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나도 그 사람이 나를 고통주고 악을 행한 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관용은 그럴 때에 이것을 포기하고 그를 너그럽게 대해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것을 포기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율법은 그것이 너의 권리이기 때문에 행사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만 그러나 사랑은 너에게 손해를 입히고, 너의 마음에 고통을 주고, 그리고 너의 명예를 떨어뜨리고, 너에게 악을 행해서 너를 많이 아프게 하고, 너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은 그 사람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그 사람을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사랑은 그것을 포기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포기의 모본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사신 동안 보여주신 것이죠. 그래서 자기를 미워하고 부당하게 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계셨고, 그분은 동시에 또한 하나님이셨으니까 그렇게 악을 행한 것에 대해서 그들을 심판하실 수 있는 권한을 우리와는 비교될 수 없는 전권적인 권한을 가지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은 그것을 스스로 포기하신 것이죠.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관용은 바로 그런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여유 있는 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III. 관용이 영적 생활에 유익한 이유
이 관용은 우리로 하여금 미운 마음을 품고, 그 미움에서 다시 원수를 맺고, 그리고 그것으로 악을 악으로 갚는 그래서 그 사람이 그 악을 당함으로 상처를 입고 또다시 복수심을 느끼고, 그래서 그 악을 악으로 갚아요. 이러면서 계속해서 악을 악으로 갚고 또 그 악을 입은 사람들이 그 악을 악으로 갚는 이 끊임없는 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리는 역할을 관용이 하는 것입니다. 이 관용은 사랑의 기초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 관용은 사랑보다는 더 넓은 삶의 태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손해를 입히거나 고통을 준 사람을 여유를 가지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해줄 때 그것이 바로 관용에 넘치는 삶입니다. 이 관용이 왜 그렇게 우리의 영적 생활에 유익한가 하면 이 관용은 저의 비유에 의하면 이 관용은 미움의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그 문을 지키고 있는 수문장과 같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전혀 그래야할 이유가 없는데 어떤 사람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습니다. 그리고 나를 헐뜯고, 그리고 다른 사람 앞에서 내 명예를 실추시켜요. 그리고심하면 나에게 악을 행해서 내가 원하지 않는 사물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게 만들어요. 그 때에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런 공격을 받을 때에 자기를 보호하고자 하는 본능이 발동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그 때에 사람들은 그런 공격을 받을 때에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무엇인가 마음을 먹거나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 때에 관용이 없으면 그 사람이 나에게 손해를 입히거나 고통을 주었을 때 그것이 마음에 들어와서 내 마음에 고통을 주자마자 즉시 미움으로 바뀝니다. 아주 즉시 미움으로 바뀝니다. 이 미움은 사랑과 같아서 일단 마음에 한번 박히게 되면 떨어버리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관용은 그 사람이 나를 부당하게 대할 때에 그 사람을 너그럽고 여유 있게 대함으로서 그 사람을 통해 날아온 미움의 화살이 이 문을 뚫고 내 마음에 와서 박히지 못하도록 중간에서 방탄제의 역할을 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관용입니다. 더 이해하기 쉽도록 말씀드리자면 이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매우 부당하게 대해요. 그 때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을까? 하면 방탄제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곧바로 그 사람의 악한 행동이 내 마음에 화살로 꽂혀서 즉시 미움을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화살을 쏘아요. 그런데 마음에 “아, 이 세상에 인간이 얼마나 많은데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으니 나도 이해할 수 없는 인간도 많겠지. 인간이 그럴 수도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방탄복을 입은 것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살이 거기에 와서 맞으면서 떨어져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느냐면 똑같은 일들이 일어나는데 관용이라는 태도를 가지고 있으면 그 미움의 화살이 마음에 와서 꽂히지 못하게끔 방탄복을 입은 것 같은 효과를 가려다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저 사람이 나를 부당하게 대해서 화살이 날아왔는데 가슴에 이미 꽂힌 다음에 그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쉽겠습니까. 아니면 아직 화살을 쏘아 보냈지만 방탄복을 뚫지 못해서 부러져서 떨어진 상태에서 그럴 수도 있겠지 하면서 그를 사랑하는 것이 쉽겠습니까. 전자는 매우 어렵습니다. 일단 미움의 화살이 가슴에 쾅 하고 꽂혀서 그래서 그 사람에 대한 미움이 뿌리를 내리게 되면 그것을 뽑아버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한번 여러분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십시오. 5년이나 10년 20년씩 이렇게 여러분이 정말 치열하게 미워하던 사람을 사랑으로 바꾼 적이 있습니까.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절대 쉽지 않습니다. 미움과 사랑은 인간의 본성에 뿌리를 내리기 때문에 그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의 표현에 의하면 이 관용은 자기를 향해 부당하게 대하는 많은 사람들의 이 미움의 화살을 막는 방탄복과 같습니다. 그러니 관용의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수없이 화살을 맞으면서 그것을 뽑아버리고 다시 미움을 털고 용서하기 위해서 피를 흘리듯 많이 고통을 받아도 이것이 성화의 길에 진전이 없습니다. 그런데 관용의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 미움의 화살이 갑옷에까지 와서 맞지만 심장을 뚫고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그러니까 에너지가 많이 남아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것을 자신의 성화를 위해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죠. 우리의 일생을 가만히 보면 어느 한 죄에 꽂혀서 인생 온데간데없이 인생을 다 허비해버리는 경우,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삶의 태도가 중요하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너그러운 태도를 가지세요. 그리고 여러분들이 동의할 수 없는 정말 부당한 일을 만나도 항상 마음속에 그럴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그러면 경건에 유익이 됩니다.
제가 중국에 집회를 갔을 때의 일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많이 모여서 이제 집회를 하고 있는데 오전 내내 강의를 해서 다들 좀 피곤했어요. 그래서 제가 농담을 하나 하겠다고 그랬습니다. 그래 뭐냐? 그랬더니 옛날 중국 사람들은 어쩌면 그렇게 뻥이 세냐. 내가 중국영화를 한번 보니까 어떤 사람이 손바닥으로 딱 때리니까.그 사람이 도망을 가더라. 그 손바닥이 바위에 맞았는데 손자국이 쾅 나더라. 아무도 안 웃어요. 혼자, 정말 썰렁했죠. 경상도 말로 뻘쭘 했죠. 그러더니 그 중에 한 사람이 그래요. 아주 심각하게 하나도 웃지 않으면서 목사님 그것 진짜에요. 그래서 어찌 그리 뻥이 세냐. 그랬더니 하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땅이 하도 넓은데 하여튼 임금도 자기가 다스리는 땅을 끝까지 가본 임금이 아무도 없으니까. 땅이 하도 넓으니까. 로마 같은 나라는 정복을 하면 제일 먼저 길부터 닦았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진창이기 때문에 길이 안 닦이면 반란이 일어나면 충동을 못해요. 그래서 제일 먼저 길부터 닦아요. 그러니까 2만 명, 3만 명, 심지어는5만 명 되는 병력이 역사 기록에 보면 하루에 60킬로미터씩 이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것이죠. 장정이 짐 보따리 하나도 안 들고 부지런히 걸어야 40킬로밖에 못 걷습니다. 그런데 60킬로를 이동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60킬로를 이동을 했다니까 엄청나죠. 그러니까 어디에서 반란이 일어나도 신속하게 달려가서 제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국은 도로를 만든 것이 아니라. 성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여행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죠.
그러니까 이 사람들의 생각에 뭐냐면 땅이 이렇게 넓은데 무슨 일은 안 일어나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중국 뻥의 원천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해도 그것을 아니라고 이야기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너무 땅이 넓으니까 여러분 쌀알에다 산수화를 그린다면 여러분 저보고 뻥이라고 하겠죠. 전 세계에서 중국밖에 없습니다. 중국에 가면 쌀알 하나에다 산수도를 그립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이것도 뻥이라고 하지. 땅이 넓으니까 일평생을 쌀알 가져다 놓고 그림을 그리는 이상한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경건에 도움이 되려면 그런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어, 이상하다. 저 인간이 어쩌면 저럴 수가 있냐? 사람들에게 막 고소하면서 저러는 것은 있을 수 없지. 있을 수 없지, 있을 수 없지. 그렇게 생각해서 동의를 구하지 말고, 세상은 넓고, 그리고 사람은 많으니 별의 별 인간이 다 있겠지. 그래서 너무나 이해되지 않는 엄청난 일을 당하고 괴롭고 아플 때에는 새로운 형태의 인간을 발견했다는 기쁨 속에서 즐거워해야합니다. 아, 이것이 새로운 인류를 발견하게끔 만들어주셨구나. 아, 그렇구나. 그러니 그 새로운 인간이 얼마나 잘만 사용하면 우리의 성화에 얼마나 큰 도움을 주겠습니까. 그렇게 하면서 그럴 수도 있다. 그렇게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면서 나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미워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놀라운 경건입니다.
저는 가끔 이렇게 생활할 때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사람들이 모두 흥분해서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느냐고 펄펄 뛸 때 그 때 누군가가 그럴 수도 있다. 그렇게 얘기해주면 사람들이 숙연해지는 것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사람의 종류보다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누군가를 판단하는 우리도 한 때는 누군가에게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바울을 생각해보십시오. 자기에게 이렇게 악을 행하는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고 용서하며 너희도 관용을 배우라고 가르치는 이 사도바울이 옛날에 어땠습니까. 그 사람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었습니까? 도대체 종교가 다르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식이 틀리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을 옥에 가두고 죽여 버리고 돌을 던져서 사람을 살해하고 하는 이런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짐승도 할 수 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일을 선두에 서서 자행하던 사람이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그 당시 사울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모두 예전에 사울이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한번 지금 여러분들에게 20년 전에 여러분들이 살아나서 성화되지 않았던 그 때에 행했던 그 행실로 여러분을 대해준다면 아마 여러분도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얼마나 관용이 필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그 악을 선으로 갚음으로 말미암아 한편으로는 자신의 영혼을 보존하고 한편으로는 그 사람에게 삶의 새로운 방식, 그것을 보여줄 수 있는 것,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인들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IV. 기쁨과 관용
이러한 넘치는 관용, 이것은 기쁨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쁨과 관용에 대해서 우리들이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옛 말 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인심은 곳간에서 난다. 그러니까 물질적인 여유가 많아야지만 누군가에게 자비를 느낄 때에 실제로 베풀 수가 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이런 원리는 어느 정도 통합니다. 우리도 아마 그런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아주 분명하게 알았는데 그리고 그렇게 하고 싶은데 그렇게 할 힘이 없을 때가 있었죠. 그렇죠? 머리로는 도저히 변명할 수 없어요. 그런데 정말 그렇게 해야 될 것 같아요. 그리고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을 것 같아요. 그것이 틀림없는 이치인 것 같고. 내 논리와 이성으로는 그것을 깨뜨릴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것을 행할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똑 같습니다. 관용이라는 것이 그렇게 좋지만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자기에게 부당하게 대우하는 사람들을 미워하는 것은 노력하지 않아도 가능하지만 그럴 수 있는 상황에서 너그러움을 보이는 이것은 많은 인내와 희생이 필요한 것이죠. 그리고 그러한 희생과 인내라는 비용을 지불할 수있게 만들어주는 그 힘의 원천이 바로 기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택시를 한번 타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여튼 아침에 택시 운전수가 콧노래를 부르면서 기분이 좋아요. 그러면 이리 갑시다. 저리 갑시다. 아이고, 잘못 찾았네. 어떻게 하죠. 뒤로 돌아갑시다. 골목으로 들어갑시다. 해도 네네 하면서 잘 움직입니다. 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여튼 택시를 타고 뒤에 탔는데 갑자기 뭐 옆에 있는 차에다 창문을 열고 소리소리 지르면서 침을 뱉고 에이 씨, 저이 씨 하면서 막 씩씩 거리면서 액셀을 밟아요. 그러면 얼마나 불안합니까. 아니 제가 잘못 알았는데 저 아래 골목인데 저 아래 골목으로 백 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별의별 이야기를 다 하죠. 한번은 공항에서 택시를 탔는데 말이죠. 운전수가 꼭 그런 사람을 만났습니다. 택시를 탔는데 타고 뒤져보니까 돈이 4천원 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집 앞까지 와야 되는데 그래서 할 수 없이 저기 은행 앞에까지만 가자고 그랬더니 아, 막 투덜대고 혼자 욕을 하면서 아니 40분이나 기다렸는데 별 거지같은 것을 태웠다고, 지금 생각하면 나도 바보였어요. 사정 이야기를 하고, 현금 인출기 앞에 기다려라. 돈을 찾아 올 것이니 나를 태워 가면 한 2천원이라도 더 주마 이랬으면 서로 기분이 좋았을 것을 이상하게 그 때는 왜 그랬는지 신경이 아주 꽉 막혀서 내가 여기서 내릴 수밖에 없다. 라고 그렇게 폭언을 당하고 나니까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나도 한번 하면 하는데 그 사람은 또 그러다가 또 텔레비전이라도 봐서 내가 나오면 어떻게 하겠어요. 극동방송 켰다가 나오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래서 참았죠.
그런 말이 있습니다. 판사가 부부싸움하고 온 날 걸리는 죄수들은 몇 년씩 더 받는다는 것입니다. 일단 더 받고 보는 것입니다. 기쁨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죠.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스스로 마음에 기쁨을 누리려고 하는 사람, 그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웃을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마음에 기쁨이 넘쳐나면 거기에서 관용할 수 있는 힘들이 생겨납니다. 그러니까 내가 스스로 어떤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발견하고, 그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잘 보호하는 것은 아주 훌륭한 이웃을 위한 섬김의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기쁨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이것이 사람을 미워하고 분노하는 것은 평소에 저장한 것이 없어도 잘 되는데 자기에게 고통을 줄 때에 그 사람을 향해서 잘 참고 관용하는 것은 평소에 꾸준히 애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말이 어떤지 여러분들 가슴에 새겨보세요. 그래서 신자 안에 있는 분노는 신자 안에 있는 분노의 감정은 쇠로 만든 그릇에 담은 물과 같고, 신 안에 있는 기쁨은 헝겊으로 만든 그릇에 담은 기름과 같다. 그래서 술 술 술 새요. 분노는 어느 한 순간에 확 하고 감정이 치밀면 텅 비었던 마음에 분노가 한 번에 꽉 차요. 그런데 이 기쁨은 관용은 그냥 별로 관용이 없고, 기쁨이 없는데 어느 한 순간에 생각하면 한순간에 꽉 차는 그런 것 잘 안됩니다. 좋은 것은 천천히 되고 나쁜 것은 금방 됩니다.
그러니까 신자는 기뻐해야 하고, 기쁨을 잘 간직하도록 노력해야합니다. 이 기쁨의 원천이 오늘 성경에서 보면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절망 가운데서도 소망을 갖는데서 오는 기쁨입니다. 그 기쁨이 사도 안에 가득 넘치게 되니까 자신을 고통가운데 몰아넣는 모든 상황을 제공한 사람들에 대해서 너그러운 마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우리도 똑 같습니다. 관용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날아오는 미움의 화살을 막아주는 방패와 같고 방탄복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 관용이 관용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야 됩니다. 그래서 항상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사람은 그럴 수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면서 살아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쁨에 가득한 삶을 살아야합니다. 하나님과 평화하십시오. 그리고 소망 가운데 사시면서 이 기쁨을 누리십시오. 이것이 바로 관용의 비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의 기쁨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시편 37:4)
I. 본문해설
다윗이 이 시를 언제 지었는지 알 수 없지만 시의 내용으로 미루어보자면 이 본문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질서, 그 환경 속에서 살면서 무엇인가 만족하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사람을 염두 해두고 위로하면서 이 시를 썼다.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악을 행하는 사람을 보면서 불평하거나. 또 그런 마음을 품지 말라고 그렇게 권고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도 이런 사실을 우리들이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제 오늘 시인은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이렇게 말합니다.
II. 최고의 미덕
A. 하나님을 기뻐함
신자의 삶에서 가장 최고의 미덕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삶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가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행하면 그 행하는 일 때문에 하나님께 칭찬을 받고 그 행하는 일이 하나님께 덕이 되고, 그래서 하나님께 사랑을 받죠. 그런데 그 모든 하나, 하나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미덕은 그 사람이 하나님 자신을 기뻐할 때 하나님이 그를 통해 가장 크게 기쁨을 얻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한 사람이 하나님 자신을 기뻐한다고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주신 것들은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당신이 주신 것을 기뻐하는 것,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당신이 주신 것을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지 않죠. 무슨 의미냐면 하나님은 무엇인가 그 사람에게 주시면 그것을 좋아하고 사랑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을 딛고 그것 때문에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뻐하기를 원하시지 하나님은 안 기뻐하고 하나님이 주신 것만을 기뻐하는 것을 하나님이 좋아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신자의 세상 사랑도 하나님이 주신 것을 사랑하는 것 아닙니까. 눈앞에 존재하는 모든 것 가운데 하나님이 존재하게 하지 않으신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 자신은 기뻐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것만을 기뻐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을 향한 배반 행위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인간의 모든 종교적인 삶이라고 하는 것이 대부분이 자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그런 종류의 종교생활입니다. 그래서 중심축은 신에게로 가지고 간 그런 종교생활이 아니라. 중심은 자기에게 그냥 있는데 인간이니까 자기를 중심에 놔도 자기 만으로서는 이 중심을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자기 사랑의 중심을 놨는데 이것을 붙들고 계속 살아가려고 할 때에 이 사랑을 그대로 이룰 것이라는 확신도 없고 또 이렇게 설정된 자기 사랑의 중심축이 옳은 것이라는 확신도 부족해요. 그래서 신들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면 그 신에게로 인간이 귀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신을 자기에게로 오히려 자기가 필요한데로 그 신들에게는 있고, 우리 인간에게는 없는 어떤 힘이나 자원들을 그 신들의 이름을 빌어서 끌어다가 쓰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 있는 대부분의 모든 종교의 공통성입니다. 신을 이야기 하는 모든 종교와 신앙의 공통점입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나라의 토속 신앙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집을 지을 때에 땅에다 돼지 머리를 갖다 놓고, 왜 하필이면 그 돼지 머리인지 나는 이해가 안가요. 그 돼지가 이렇게 보면 눈웃음을 치면서 씽긋 웃고 있어요. 그래서 누가 그래요. 그 남대문에 보면 돼지 머리들이 쭉 있는데 상도 참 교인들 얼굴만큼이나 여러 가지입니다. 누가 그래요. 저 돼지들이 왜 저렇게 실눈을 뜨고 저렇게 웃고 있는지 아느냐고. 그래서 나는 모르겠다고 했더니 칼에 맞을 때 목이 간지러워서 웃은 거래요. 어쨌든 그런 돼지를 갖다놓고 김이 무럭무럭 나는 시루떡을 갖다 놓고, 그리고 공사하기 전에 터줏대감 에게 절을 꾸벅 꾸벅 하면서 제사를 지내고, 술을 그 땅에 뿌려요.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무슨 뭐 터줏대감을 마음과 뜻을 다해서 사랑하고, 평소에 무슨 끊임없이 터줏대감을 추구하고 그런 것 아닙니다. 생각도 안 하고 있다가 집을 지으려고 보니까 터줏대감이 심술이라고 부려서 지붕이라도 한쪽 뽑아버리면 그러면 이게 주저앉는 날에는 큰 손해가 나겠으니까 갑자기 생각이 나서 그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 제사를 받아먹는 터줏대감이라는 작자도 뭐 이렇게 제사를 드려줄 때 진짜 이 제물에 돼지 머리와 시루떡에 네 마음과 뜻과 성품이 담겼느냐. 그런 것 물어보지 않습니다. 너의 평소의 삶이 나의 이 고사의 삶에 합당치 않도다. 그렇게 안 합니다. 뭐 무슨 노름을 하다 왔든, 바람을 피우다 왔든지. 부부싸움을 하다가 왔든지 그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이것이 뭐냐면 신들과의 거래 행위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는 곳에는 신들이 많겠습니까? 적겠습니까? 많지 하나가지고 불안한 거죠. 신들에 대한 존경심이나 존중심, 이런 것 하나도 없고. 그냥 거래 관계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많은 신들을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신들을 해야지만 수요 공급의 법칙에 의해서 신들도 주가가 좀 내려갈 것 아닙니까. 그 뭐 수틀리면 “나 너하고 안 섬긴다. 그런 식으로 대우해주면 나는 다른 신에게 간다.” 그리고 고무신 거꾸로 신는 것이죠.
이번에 아테네에 가니까 재미있었습니다. 신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아테나. 라고 하는 신입니다. 이것은 제우스의 머리에서 나온 그 여신입니다. 그 신 하고 바다의 신이라고 하는 포세이돈 하고 둘이 아테나에 와서 서로 자기를 섬겨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신화가 얼마나 재미있느냐면 시민들이 모두 모여서 그러는 것입니다. 두 신을 보고 우리는 하나만 섬겨야 되는데 너희 둘이서 그러니 왜 그러는지 정경 발표를 한번 해 봐라. 우리가 누구를 섬겨야 될지 한번 생각해보도록 유리한 것을 제시하는 신을 우리가 섬기도록 하겠다. 말해봐라. 포세이돈 이 너희가 만약에 나를 신으로 섬겨주면 모든 전쟁에서 너희를 늘 이기게 해주겠다. 그랬어요. 사실 국가에는 그것보다 큰 게 없잖아요. 그랬더니 이 머리 좋은 아테나가 나타나서 나는 너희에게 아예 전쟁이 없는 평화를 줄게. 그러니까 전쟁 없는 평화가 나아요? 아니면 싸워서 이기는 것이 나아요? 당연하지 그래서 단칼에 쫓겨났어요.
그래서 우리는 아테네에 아테나 신을 이룩하자. 그렇게 해서 결국은 아테나가 신이 된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도 수많은 신이 있고, 일본에는 800만의 신이 있다니까 200명이 한 신만 섬겨도 일본에는 신이 모자랄 정도입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신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보면 스케일이 또 너무 작아요. 바다의 신이라든지, 육지의 신이라든지, 강의 신이라든지, 구역을 좀 넓게 잡아야지. 부뚜 막신 신, 마당 신, 또 화장실에도 신이 따로 있고 말이죠. 장독대 신 따로 있고. 스케일이 그렇게 작아요. 화장실에나 앉아 있으면 뭐해요. 장독대에 있는 신의 주된 역할은 뭐냐면 장맛을 좌지우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 장맛을 망쳐놓으면 가문이 흔들려요. 장맛이 안 좋으면 반찬이 다 맛이 없잖아요. 식욕이 떨어지고 건강이 상해서 집안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잘 보이지 않은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장을 데리고 장을 담글 때도 일단 절을 하고 제사를 지내도 장을 담아요. 화장실 귀신은 가끔 똥 눌 때 잡아갑니다. 변 볼 때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굉장히 무서운 것입니다. 대게 힘주다가 뇌출혈 같은 것으로 죽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신들 천지입니다. 그러니까 언제나 그 신에 대해서 전전긍긍하는 것입니다. 이런 문맥에서 나오는 그 제사가 뇌물 개념의 제사입니다. 그러니까 제사 자체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부분 뇌물 개념의 제사입니다. 그러니까 뇌물을 주어서 신들을 달래야 된다.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도 가끔 보면 그런 것 있잖아요. 아무게네 집 후손이 되게 안 된다더라. 그래서 왜 안 되나. 그랬더니 뭐 제사를 몇 년 째 안 드렸더라. 아니면 밤에 칠 대조 할아버지가 나타나서 “얘야, 우리 집에서 물이 계속 나온다. 나를 이렇게 둘래. 그리고 야단을 치기에 벌떡 일어나서 가서 무덤을 파보니까 그 밑으로 물이 세 들어와서 물이 줄줄 흐르더라. 그래서 그것을 갖다. 무덤을 다른 곳으로 옮겼더니 자손이 흥하더라. 그런 얘기 많이 들어봤잖아요. 이런 것들이 전부다 뭐냐면 중심축을 자기에게서 신에게로 옮기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으로서는 행복하게 살아갈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다른 신들에게서 그런 것들을 끌어오는 것입니다.
이런 개념을 그대로 기독교 신앙에 가지고 들어오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한국 사람은 특히 더 그렇다고 하는데 한국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의 사람들이 제대로 신앙이 들어가지 않은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습니다. 한국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이 들어와서 기본적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자기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 사랑에 중심축을 옮긴 다음에 그다음에 이제 신앙의 설계와 인생의 설계가 일치 되어 가는데 그래서 이제 파문을 하나님 중심에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파문을 그려가면서 그래서 하나님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그런 새롭게 형성된 질서를 따라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아랑곳없고, 하나님하고 흥정하려고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면 십일조를 드릴 테니까 복을 조금 더 주십시오. 무슨 애들 장난입니까. 십일조라고 하는 것은 십분의 일인데 결론은 뭐냐면 하나님은 1 줄테니. 나에게 9를 더 달라는 것 아닙니까. 100만원을 벌었는데 10만원을 하나님께 드리고 90만원을 가지면서 이 십일조를 드리는 나에게 갑절의 복을 주십시오. 그러면 그다음에는 자기가 180만원 갖고 하나님은 20만원 드린다는 것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거래의 개념을 끌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뭐냐면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태도를 바꾸는데 관심이 있지, 하나님을 향해 자기 태도를 바꾸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열심히 기도해도 하나님의 팔 꺾기지. 팔 꺾는 것 알죠. 무슨 얘기냐면 어느 그림책에 나왔는데 현대의 신앙을 풍자하면서 예수님을 뉘여 놓고, 팔을 꺾으면서 아멘. 믿습니다. 믿습니다. 이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야, 야, 됐다. 나 아프다. 항복한다. 이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팔 꺾기의 기도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뭐냐면 그 중심축을 하나님께로 옮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나머지 것은 별 의미가 없거나, 있어도 매우 적은 의미밖에는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중심축을 하나님께 옮겼다.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인생의 이유이고, 목적이 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것이 삶의 이유이고, 존재의 가치가 된 사람은 무엇 때문에 가장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 때문에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 때문에 기뻐하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 때문에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해서 돌아선 신앙입니다.
회심한 사람의 결정적인 특징은 하나님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이 기쁨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사랑의 특성입니다. 사랑의 특성이 두 가지 인데. 기쁨과 소중히 여김, 이 두 가지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특성입니다. 사랑을 하면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아주 하찮게 생각하는 것을 사랑하는 그것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특성입니다. 그러니까 기뻐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따로 있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아첨하고 하나님 앞에 뇌물을 드리고, 하나님 앞에 무슨 거래를 하고 흥정하려고 하는 그런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무슨 문제를 가져다주느냐면 영원한 기쁨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들로 인한 기쁨은 우리에게 영원한 기쁨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영원한 것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뻐하라는 이 계명만큼 쉬우면서도 어려운 계명이 없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기쁨은 하나님을 향해 진정으로 회심한 사람, 그래서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관상하는 사람, 그 사람들만이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많은 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맨 처음에 주님을 만나고 회심한 때는 기억해보세요. 주님을 만나고 여러분들이 깊이 회심했을 때 그 때 생각을 한번 해보세요. 그렇게 여러분들이 주님을 만나고 깊이 회심하게 되었을 때, 여러분에게 어떤 마음이 있었죠?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마음이 있었죠. 그것이 무슨 오랜 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다음에 무슨 문제가 발생했어요? 처음 신앙생활 할 때에는 하나님을 그렇게 기뻐했는데 지식도 쌓이고, 신앙의 수준도 높아졌다고 생각이 되는데 그 때처럼 하나님을 안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사람이 다시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게 되는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다시 회개하면 다시 하나님이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기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들이 흔히 생각할 때 하나님을 기뻐하지 못하는 것은 근심이 많기 때문이다. 또 걱정거리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일까? 사실 우리의 경험은 사실 하나님을 기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냥 곤고하기 때문에, 뭐 시련을 만났기 때문에. 근심이 있기 때문에. 걱정이 있기 때문에. 이런 것 때문에 하나님을 못 기뻐하는데 왜 그것이 아니라고 할까? 그러면 제가 왜 아닌지를 입증하고 정답을 가르쳐 주겠습니다. 왜 아닌지를 입증해보겠습니다. 그러면 근심과 걱정이 없는 사람이 신자라면 하나님을 예외 없이 사랑해야 되겠네요. 그래야지 논리적으로 맞잖아요. 그런데 사실 그렇게 되요? 안돼요? 안 되죠. 안 되잖아요. 근심과 걱정이 없고, 평안한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하나님을 기뻐합니까? 아니죠. 그러면 이제 입증이 된 거죠. 그러니까 근심이나 걱정 고통 때문에 하나님을 기뻐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요인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기뻐하지 못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또 이렇게 묻겠죠. 아니 그냥 고난이 오고, 시련이 오고 막 이렇게 눈을 뜰 수 없이 고난과 시련이 있어서 하나님을 기뻐하지 못하는데 다른 것을 제가 뭘 사랑하는 것이 있습니까? 뭘까요? 그렇지. 그렇게 시련과 고통을 당하는 자기를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자기를 사랑하지 않으면 시련과 고통쯤 당할 때 그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슬픔과 고난이 많은 세상, 내가 주님의 뜻대로 살다보면 이런 일을 당하지 않겠어, 욥의 고난처럼 주신이가 여호와시니 가져가시는 이도 또한 주님이 아니실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믿음으로 이기는 것이죠. 환난과 고난을 만난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을 못 기뻐합니까? 안 그렇습니다. 오히려 환난 중에 기뻐하던 성도들은 많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회상 해봐도 언제 그렇게 기뻤느냐면 고난이 많았을 때 기쁨도 가득 찬 때가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사물의 질서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고통이 없어져버린 그런 종류의 기쁨은 아닙니다. 그런 기쁨만 기쁨은 아니거든요. 예를 들자면 우리가 환난을 많이 만나요. 오늘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이 복음을 전한다고 끌고 가서 실컷 두들겨 맞거든요. 맞을 때 기뻤겠습니까. 맞으면 안 아프겠습니까. 맞아서 피투성이가 되고 죽음의 위협까지 있는데 아프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아프잖아요. 아니 뭐 우리 학생들이 은혜 많이 받고 성령 충만 하다고 해서 학교에서 숙제 안 해왔다고 선생에게 두들겨 맞는데 은혜 받은 사람의 엉덩이는 살이 아니라고 하던가요. 아픈 것은 마찬가지잖아요. 그런데 뭐냐면 고통이 있는데 고통보다 큰 기쁨이 속에서 넘쳐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라고 하느냐면 예수를 위해서 고난을 받기에 합당한 자로 하나님이 인정해 주신 것에 대해서 너무 기뻐하는 것입니다. 육신은 고통스럽지만 영혼은 한없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신령한 기쁨의 특성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님을 기뻐하지 못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결국은 사랑이 하나님께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우리들이 내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성도가 누릴 수 있는 참된 기쁨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기쁨이며 이 기쁨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기쁨입니다. 이렇게 가르치는 것은 잘못된 것이죠.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하든지 우리는 문제 삼지 않는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기쁨이다. 내가 그 기쁨을 주겠다.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타락한 기쁨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고 새롭게 하는 사람들만이 그 안에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B. 하나님의 모든 것을 받아들임
그런데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기쁨의 특징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 때문에 자신이 맞닥뜨려야 하는, 하나님 때문에 자신이 가져야 하는 모든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에게 복이 되든지, 혹은 고통이 되든지 간에 내가 그것을 무엇인가 좋은 것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든지, 그것 때문에 고통을 얻게 되는 것이지는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이 일단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은 하나님 때문에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기뻐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은 하나님 때문에 또한 기뻐해야할 모든 것들을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자신을 기뻐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것들, 교회는 하나님이 아니죠. 그런데 하나님과 관계를 갖고 있어요. 그래서 교회를 기뻐해요. 일은 일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잖아요. 그 일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겨주신 일이기 때문에 기뻐해요. 그런데 그 기쁨의 원인은 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과 관계를 맺고 계신 하나님께 있는 것이죠. 이것이 단절되면 이제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죠. 여러분들이 부부생활을 하는데 가정이 화목하지 않아요. 그래서 매일 싸우고 말이죠. 뭐 어떻게 해서든지 한번 안 살아보려고 말이죠. 그렇게 애를 써요. 그러다가 은혜를 받아요. 그래서 깊이 변화되고 나면 그 남편이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스러운 것이 어떻게 사랑스러워지느냐면 하나님이 주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 사람 자신은 자기가 뭐 오늘 은혜를 받고 새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집에 있는 남편도 새 사람이 된 것은 아니잖아요. 막 그 전날까지 술 먹고 술 상 집어던지고, 쥐어 패고, 터프한 남자 좋다고 해서 시집갔더니 너무 터프해서 말이지 매일 쥐어 패고 그러다가 오늘 와서 사경회 은혜 받고 집에 돌아갔더니 남편이 무릎 꿇고 기다리고 있어요. “여보, 내가 잘못했어.” 그렇게 될 것 같지만 그런 일은 잘 안 일어납니다. 그것은 간증 집에나 가끔 나오는 얘기지. 안 일어납니다. 내가 은혜 받아도 그 인간은 그냥 있거든요. 전에는 뭐냐면 그냥 내 남편이었습니다. 그 때는 내 남편으로서 자격을 다하지 못하면 이 인간이 싫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존재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고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니까 이 사람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 그 사랑이 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교통적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남편은 자기를 향한 태도가 하나도 안 바뀌었어요. 그런데 그 남편이 그렇게 사랑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실제로 나는 목회를 하면서도 그냥 뭐 몇 번을 물어봐요. “목사님 정말 이혼이 죄입니까? 남편이 이러는데도 이정도면 하나님이 이정도면 이해해주시지 않겠느냐고” 나를 아무리 설득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러다가 은혜를 받고 그냥 나 보는데서 남편 손목을 붙들고 때가 밀릴 정도로 문지르면서 남편이 소중하다는 사람 내가 여럿 보았습니다. 그것은 가식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그 마음이 바꾸기 전에는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기쁨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그렇게 기뻐하는 것입니다. 여기 내려오기 전에도 우리 집 사람과 식탁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제 자기가 이 교회, 저 교회 좋은 교회를 가서 우리 집사람이 설교를 들었는데 뭐 그러면서 수시로 나에게 얘기를 해줘요. 아, 어느 교회에서는 뭐 만 명이 모이고, 어느 교회에는 최근 석 달 사이에 이천 명이 늘어나고, 저는 계속해서 한없이 작아만 지죠. 이렇게 그러면서 우리가 나눈 이야기가 그것이었습니다. 뭐냐면 우리들이 사랑의 크기가 작을 때에는 남이 무엇이 잘된다. 그러면 항상 뭔가 깎아 내리고 있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뭐 그것 뭐’ 그래서 남의 교회가 부흥하면 인간적인 수단을 써서 부흥한 것이고, 내 교회가 안 되는 것은 너무 말씀대로 하니까 부흥이 안 되는 것이다. 하하하 남의 교회가 부흥이 안 되는 것은 하나님이 별로 안 기뻐하셔서 부흥이 안 되는 것이고 내 교회가 부흥이 되는 것은 그것은 진짜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그렇게 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려고 하죠. 그런데 조금만 더 넓게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이렇게 너그럽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기쁨의 마음을 가지고 내려다보면 그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그렇죠. 저도 맨 처음에 설교한답시고 하고, 목회한답시고 할 때에는 항상 다른 사람들이 나와 다른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저 교회는 왜 저렇게 찬양만 하는 거야? 뭐 저 교회는 왜 저럴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뭐냐면 야, 이 얼마나 참 감사 하냐, 어디가든지 진리의 말씀은 들을 수 있어야 되겠지만 그러나 교회마다 이렇게 다르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서 축복해줍니다. 우리 집 사람도 그런 이야기를 해요. 높은 자리에서 자기만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뭔가 사랑을 베풀고 관용을 베푸는 것은 참 쉬운데 모든 면에서 자기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사람에게 관용을 베푸는 것은 너무 어렵데요. 사실 그렇구나. 그런 생각이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보다 훨씬 잘 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렇게 박수 쳐주고 기뻐해주고, 그리고 저 교회는 우리 교회가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구나. 그러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 박수를 보내고 그들을 위해서 진심으로 축복하고, 그렇죠. 그리고 우리 모두 등수 먹이지 않고, 각각 크고 작고, 그리고 어떤 사역에 능하고 어떤 사역에 쓰임 받는 모든 것들을 보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신 요소들을 발견하고, 위해서 축복해주고 본받으려고 하고 혹시 그 속에서 완전하지 않는 부족한 부분들을 본다면 그 부분을 내가 보태주기 위해서 여기에 이렇게 살아있다.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꺼이 그들의 조연이 되기를 기뻐하는 마음, 이것이 정말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들을 기뻐하는 마음입니다.
제가 오래전에 회심하기 전에 세상 노래를 너무 좋아했습니다. 너무 좋아해서 당시에 유행하던 대부분의 팝송이나 이런 노래들을 거의 외우다시피 벽에다 가득 써 놓고, 사진은 모으지 않았지만 그렇게 꾀고 있었습니다. 그 때 내가 아주 좋아하던 노래 가운데 하나에 이런 가사가 있어요. 그런데 지금은 뭐 염불하는 것인지, 뭐 하는 것인지 뭐 따라 가지도 못할 노래인데 옛날에는 참 좋은 가사가 많았습니다. 특히 외국에서는 시험지의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저 대중가요 가사를 써서 내려 보내요. 그러니까 아주 굉장히 대중가요들이 고상해지는 것이죠. 우리나라도 그렇게 해야 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 가사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이제 어떤 여자가 그 사람이 한 남자를 사랑했어요. 사랑하다가 그 사랑이 그만 깨진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 노래의 제목이 “이 세상의 끝” 이라는 노래 제목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뭐냐면 “이상하다. 왜 태양은 계속 빛날까? 왜 바닷물은 어제와 다름없이 계속해서 해변으로 밀려오는 거지. 왜 저 하늘의 별들은 어제와 다름없이 빛나고 있을까? 저 별은 내 마음의 슬픔을 모르는 것일까? 아마 저 태양, 저 바다, 저 별들은 내가 그 사람과 안녕하고 헤어졌을 때 이 세상이 끝난 것을 모르나봐.”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반대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랑을 하게 되면 울던 새는 노래하고 피를 토하던 석양은 환희를 내뿜어요. 같이 새가 소리를 내도 시련에 빠진 사람은 운다고 하고 사랑의 마음이 꽉 찬 사람은 노래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사물을 보는 모든 것들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유한자에 대한 사랑도 그렇다면 무한하고 모든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대한 전심의 사랑이 사물을 보는 마음과 생각들을 바꾸어 놓지 못한다면 믿을 수 없는 것이죠. 그렇죠. 그러니까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은 하나님 때문에 존재하게 된 모든 것들을 그렇게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오후에 사색을 하면서 느낀 것인데 말이죠. 번뜩 머리에 이런 것이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어떤 사람이 한 사람을 주님의 사랑으로 깊이 사랑해요. 주님의 사랑이 아니더라도 어쨌든지 한 사람을 깊이 사랑해요. 그런데 그 사람의 과거를 지금 그 사람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과거가 너무 불행하고 아팠던 날이었어요. 이 일은 이미 과거에 끝났어요. 그래서 그 사람도 덤덤하게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그 사람을 사랑하면서 듣고 있는 그 사람은 이미 있지도 않은 과거의 일인데 그 사람의 아팠던 과거를 그대로 동참하면서 함께 아파해요. 이것이 사랑 안에 있는 초시간의 특성입니다. 시간을 뛰어넘어서 이미 끝난 일인데 그 사람을 사랑하니까 그 사람 때문에 그 사람이 느꼈던 고통을 함께 느끼며 아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기뻐하고 사랑하던 것들도 그렇게 느낄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한 사랑을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이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함께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그 사람이 좋아하는 질서까지도 완전하게 함께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 변하는 것은 사랑에 아직 덜 빠져서 그래요.
하나님과의 사랑에 깊이 빠지게 되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설 빠지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에 설익게 되면 하나님이 자기를 향해 특정한 태도를 가지실 때만 기분이 좋은 것입니다. 용돈 타가는 애들처럼 용돈 때문에만 부모를 만나는 아이들에게 그 부모의 권위는 용돈 주는 날만 있습니다. 아버지를 기다리는 마음은 용돈 타기 전날 밤, 그리고 권위가 가장 높게 추앙될 때 돈이 손에 쥐어지는 그 순간, 그것도 아니지 부스럭 부스럭 거리면서 나올 때 일단 자기 주머니에 들어가고 나면 다시 권위는 실추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은 하나님 때문에 존재하게 되는 모든 것들을 기뻐하고 그 질서 자체를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하나님을 기뻐하라.” 그랬습니다.
III. 소원을 이루시는 하나님
A. 기뻐하는 자를 기뻐하심
그러면 오늘 뭐라고 했느냐면 “그리하면 소원을 이루어주시리라.” 그러거든요. 어떻게 보면 굉장히 쉬운 요구에 어마어마한 보상이 걸린 것입니다. “나 기뻐해. 그러면 내가 너의 모든 소원을 이루어주마”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정말 모든 소원을 다 이루어십니다. 그럼, 정말 다 이루어 주실 거죠. 그럼, 그러면 이제 하나님을 기뻐하기만 하면 되겠네요. 그럼, 정말 다 들어 주실 건가요? 그럼, 이 세상을 다 달라고 그래도 주실 건가요. 아무렴, 나 황제 한번 하고 싶은데 황제 시켜 줄 건가요? 그럼, 뭐든지 구하면 온 세상의 돈을 내게 주실 수 있어요. 한번 해보십시오. ‘저가 기뻐하면 네 소원을 이루어 주리라’ 이는 쉬운 요구인데 비해, 어마어마한 보상이 걸린 말이다. 정말 다 이루어 주실까? 돈도? 명예도? 황제가 되고 싶다고 해도? 그렇다. 문제는 뭐냐 하면, 정말 한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게 되면, 그와 같은 것들을 기뻐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찰스 스펄전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누가 나더러 제왕의 면류관을 쓰고 왕이 되라고 한다면, 나는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을 쓸 시간이 없다고 답하겠습니다. 좋으신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에도 바쁩니다.”
예) 개척 교회를 하는 친구 목사님의 교회 살림살이의 고충, 노무현 대통령의 나라 살림살이의 고충
신자가 세상에 눈이 팔리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만 눈에 들어오다가, 주님께 눈을 돌리면 ‘저 사람은 초신자인데, 어떻게 저렇게 기뻐합니까? 저 사람은 나보다 어린데 어떻게 저렇게 열심일까?’ 라는 식으로 관심의 초점이 바뀐다.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뻐하기 때문에 그분에게 뭔가를 달라고 구하면, 누구를 기쁘게 하려고 구하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구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지 않으실 리 만무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의 관심의 초점이 됩니다.
B. 기뻐하는 자의 소원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이유는, 소원은 올바른데 기도를 열심히 안 해서, 혹은 소원은 올바른데 지혜가 없어서라기보다 많은 경우는 목표 설정이 올바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위해 소원을 가져 보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동원해서 나를 사랑 하셨으니, 나도 그분께 다 드리리라’고 목표를 설정해 보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소원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열렬한 기도 생활을 강조하기 전에 먼저, ‘나의 삶과 기도의 방향이 하나님을 기뻐하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지체들을 섬기다가 교회에게 물의를 빚고 지체에게 상처 주는 일은 그 사람이 하나님을 안 기뻐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면, 하나님께서 보내 주사 머리가 되게 하신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머리로 모신 동료 지체들을 사랑하게 된다. 그 신자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향한 소원을 마음에 품게 되고 아무리 어렵더라도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이 전정으로 하나님 사랑할 때, 도대체 여러분이 안 가진 것 무엇입니까? 어려분이 진정으로 하나님 사랑하지 않을 때, 도대체 여러분이 가진 것은 무엇입니까?”
예) 목사님이 어릴 때, 할머니가 복주머니 가득 100원짜리 동전을 주신 적이 있다. 할머니가 손주를 사랑해서 교회 나오면서 늘 봉투 두 개를 가지고 오셔서, 액수가 큰 것을 손주에게, 액수가 좀 적은 것을 헌금으로 드렸다.
IV. 결론과 적용
눈을 들어 주위의 모든 것을 바라보라. 하나님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어디를 둘러 봐도, 하나님이 안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을 소유한 사람은 어디를 둘러 봐도 하나님이 보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교회를 기뻐합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지켜주셨구나’ 하고 감사하며 기뻐하는 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신자가 하나님을 기뻐하면, 그 소원도 하나님을 위한 것을 테니,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도 기뻐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기쁘게 한 우리를 기뻐하시고, 우리는 우리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기뻐하게 되는데, 이 교통과 연합이 바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입니다.
예화) 언젠가 목사임이 큰 수술 앞둔 지체에게 ‘하나님이 생명도, 가족도, 교회도, 지체도. 주셨잖아요.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위로함.
5. 성도가 누릴 기쁨
“만일 저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2:17-18)
I. 들어가면서
건강해지기 위해서 요즘 얼마나 사람들이 열심인지 모릅니다. 어저께도 심방을 갔더니 어느 자매님 한분이 도저히 얼굴을 몰라보겠어요. 새로 나온 신자인가. 그랬더니 15킬로를 뺐데요. 다이어트하고 운동을 해서 말씀을 전할 때는 안 놀라더니 누가 킬로 뺐다니까 그렇게 놀라요. 15킬로를 빼서 완전히 새 가족이 되었습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되었어요. 얼굴의 혈색도 아주 좋아지고 그랬어요. 이 건강에 대한 관심들이 보통 많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제 운동들을 열심히 하는데 이것이 또 무슨 문제가 생기냐면 운동 중독증에 걸린다는군요. 그래서 이 운동중독증에 걸리면 그것은 마약 중독보다 더 무섭데요. 왜냐면 운동 중독에 걸리면 돌연사 하기가 십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위험하데요. 최근에 코미디언 하면서 살 많이 빼서 김 아무게인가 있었잖아요. 그 사람이 돈도 많이 벌어서 강남에다 빌딩을 크게 짓고, 거기에다 “공포의 삼겹살” 집이라고 해서 밑에 삼겹살 파는 집을 만들어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런데 운동해서 엄청나게 뺐죠. 그런데 빼면 뭐해요. 심근경색인가, 심장마비로 헬스클럽에서 운동하다 죽었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이 운동을 하는 것은 좋은데 그것도 너무 많이 해도 그것도 문제가 됩니다. 그러니 뭐 어떻게 해야지만 잘하는 것인가. 그래서 건강에 대해서도 너무 많이 신경 쓰면 그것 때문에 건강이 상해요. 그러니까 너무 지나치게도 말고, 또 너무 경솔하게도 말고, 중용을 지키면서 우리들이 살면 그냥 그러다가 오래 살면 하나님의 은혜고, 일찍 죽으면 또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뭐 그렇게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일어나는 일들이 나쁜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아등바등하지 말고 널널하게 사세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최근에 나온 이야기에 보니까 이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의 건강을 위해서 주신 최고의 선물이 웃음이래요. 그래서 1분을 마음껏 웃으면 10분을 전 속력으로 달려서 운동한 것과 같은 효과가 나타난대요. 그런데 10분을 전속력으로 달리면 잘못하면 쓰러지거든요. 평소에 운동을 안 하던 사람들이 그렇게 하면, 운동하다 돌연사하고 그러는 사람들을 보면 대게 40대거든요. 왜 그러느냐면 몸은 40대인데 생각은 아직까지도 20대입니다. 저기 안양 공설운동장에서 텔레비전에 나오도록 내가 한번 뛰었잖아요. 이렇게 뛸 때 사람들은 내가 뛸 때 막 웃더라고요. 그런데 얼마나 우습게 보였겠어요. 그런데 내 마음 속에 그리는 것은 말이죠. 아주 날렵하게 말이죠. 운동선수들이 올림픽에서 마지막에 골인하면서 팔을 쫙 벌리고 테이프를 끊는 그 장면이 연상이 되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그렇게 생각이 떠오르는 거죠. 그런데 이게 40대가 되면 생각은 그런데 몸은 아니거든요. 벌써 이미 한풀 꺾여서 늙어가거든요. 그러니까 그 몸에는 맞는 정신이 어느 정도 있어야지만 몸이 늙으면 정신도 약간은 늙어야지만 뭐 나쁜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래야지만 몸하고 맞거든요. 그런데 이게 그러면 안 되는데 정신은 젊은이야. 그러니까 무리하고 뛰는 거죠. 그래서 돌연사를 많이 하는 것입니다. 축구하다가 죽는 사람, 무슨 뭐 달리기 하다가 죽는 사람, 많잖아요. 그런데 1분을 마음껏 웃으면 10분을 달리기한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 웃다가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사람 내가 아직까지 못 들었습니다. 그런데 달리다가 죽었다는 사람들은 많이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기쁨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쁨도 마찬가지입니다. 웃기만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땀을 밖으로 내보내면 몸에 좋다는 것은 여러분들 상식이잖아요. 그런데 의사들에 의하면 열심히 운동을 하면서 흘리는 땀과 사우나에 가만히 누워서 흘리는 땀은 땀의 성분이 다르데요. 무슨 소리냐면 사아누에서 그림 같이 앉아서 땀을 흘리면 땀은 삐질, 삐질 흘리는데 맹물만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킬로수는 줄었는데 노폐물이 빠져나와야만 좋은데 오히려 수분만 쫙 빠져나오니까 노폐물은 진하게 몸속에 쌓여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밭을 갈거나, 운동을 하거나 열심히 교회에 와서 청소를 하거나 봉사를 해서 땀을 뚝뚝 흘리잖아요. 그 땀을 받아보면 그 물방울 속에 온갖 몸의 중금속을 비롯한 노폐물들이 함께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웃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웃음도 내면의 근원적인 내면의 기쁨의 샘에서 터져 나오는 기쁨이어야지 이것이 진짜 그 기쁨 때문에 우리의 육체에 활기가 돌고, 우리 온 몸과 인격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지, 가끔 자주는 볼 시간도 없어요. 가끔 이렇게 보면 텔레비전에서 웃기려고 그러는 개그맨 들이나 코미디 하는 사람들 나오잖아요. 그런데 어떤 때는 웃기는 것이 아니라. 슬퍼요. 아이고, 저렇게 안쓰럽다. 저런 정도의 소제를 가지고 우리가 웃어줄 것이라고 이렇게 생각하니 우리를 얼마나 우습게 본 것일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웃음도 좀 고품격의 웃음이 있고, 진짜 자지러지는 웃음이 있습니다.
나는 의학적인 조사는 안 해봤지만 나 자신의 신체적인 경험에 의하면 말이 안 되는데 억지로 웃기는 것을 보면서 웃으면 진짜 웃을 때에 우리의 몸이 좋아지는 이런 효과가 안 나타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진짜로 행복하기 위해서 되찾아야 할 기쁨은 싸구려 기쁨이 아니라. 진짜 기쁨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근원을 깊이 터뜨리면서 나오는 한참 웃고, 낄낄대다 보면 다시 견디기 힘든 공허함이 밀려오는 그런 종류의 기쁨 말고 그래서 여러분들이 저도 잘 못하는 사람이 이런 얘기 해봐야 말발이 안 선다는 것도 압니다. 만은 사람이요. 누구를 웃길 때 그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품격이 드러나요. 웃길 때 왜냐면 웃길 때 나사가 풀어지거든요. 나사 풀어졌을 때 품격이 진짜 품격입니다.
그러니까 양복 잘 입고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 야유회 같은 곳에 가서 반바지 차림으로 겅중거리고 뛸 때. 아니면 예비군복 입고 땅바닥에 구르면서 예비군 훈련을 받을 때, 아니면 파자마 바람으로 런닝셔츠 휘두르면서 개고기 먹을 때. 그럴 때에 그 사람의 품격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품격이라는 것이 뭐냐면 어느 정도 격조 높게 사람을 웃길 수 있느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게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을 웃기기는 웃기는데 기가 막히게 웃고 나면 스트레스가 더 많이 쌓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뭔가 웃고 났는데 웃었지만 돌아서고 나면 많이 생각하게 되는 그래서 여운이 남는 인생에 뭔가 의미가 담겨있는 이런 것을 가리켜서 영어에서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개그가 아니라. 그렇게 다릅니다. 그러니 만약에 우리가 정말 기뻐하고자 한다면 기쁨, 우리의 영혼의 근원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그 참되고 아름다운 그러한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원천이 우리의 모든 기쁨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그 기쁨을 이야기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II. 기쁨의 근원: 하나님 중심에서 오는 기쁨
그래서 오늘 사도가 감옥 속에 갇힌 사형수의 신세로 사랑하는 교인들에게 너희도 내 기쁨에 동참하라. 나와 함께 기뻐하고 또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빌립보 교인들에게 동참하기를 바라는 그 기쁨이 무엇이었습니까? “너희의 몸을 제물로 드리고 내가 그 위에 관제와 같이 뿌려질지라도 내가 기뻐하고 기뻐한다. 너희는 나의 이 기쁨에 동참하라.” 그것 이었습니다. 이 관제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액체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래서 전제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제물을 바치고 그 제물을 하나님 앞에 태워드리는 가운데 그 위에 붓는 액체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대게 기름도 붓고 포도주도 붓고 이렇게 됩니다. 그런데 저의 견해로는 거기에 붓는 포도주가 아주 알코올도수가 높은 그런 종류의 술이었다고 보는 것이죠. 기름도 그렇고, 그다음에 술도 그렇고, 번제를 드려서 다 타오르는데 그 위에다 독한 술을 확 뿌리면 어떻게 되겠어요. 불꽃이 확 일어나서 제물을 태우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사도가 자신의 순교로 형상화 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빌립보 교회의 교인은 참 아름다운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을 정말 진심으로 사랑한 교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헌신과 희생에 대해서도 아주 뛰어난 교역자에 대한 사랑과, 배려가 아주 많은 애정이 있는 그런 정말 탁월한 사랑, 그리고 탁월한 헌신, 그리고 탁월한 목양의 관계, 이런 것을 가지고 있는 정말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이 빌립보서에 보면 사도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책망하는 광경이 안 나옵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그렇게 예쁜 교회였습니다. 뭐 어디 교회인들 결점이 없겠어요. 그렇지만 정말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의 그렇게 예쁜 교회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벌써 그 하나님 앞에서 아주 헌신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1장에서 뭐라고 했느냐면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한다.” 그것이 무슨 얘기입니까? 사람은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할 때 이렇게 기쁨을 주면서 기도하게 하는 사람이 있고, 아주 근심과 괴로움을 주면서 기도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쁨을 주면서 기도하게 하는 사람은 뭐냐면 하나님 안에서 예쁜 신앙을 가지고 자라가요. “아이, 진짜 목회 너무 힘들다. 아, 언제나 이 짐을 벗어야 되나. 때로는 아, 이 목회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다 했나.” 생각이 드는데 그런 사람들이 생각나요. 그래서 위로가 됩니다. “아, 아직까지도 하나님이 나를 쓰시는구나.” 여러분들이 구역장을 하면서도 그런 느낌 받잖아요. 빌립보 교회가 그런 교회였습니다. 이미 빌립보 교회가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리듯이 많이 희생해서 헌신함으로 번제처럼 아버지 앞에 바쳤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번제처럼 아버지 앞에 바쳤는데 사도바울은 지금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옥중에 있는데 사형수의 몸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죽는다. 너희가 그렇게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 헌신하기를 마치 제물이 죽음같이 그렇게 헌신했는데 이번에는 내가 순교의 피를 그 독한 술처럼 뿌려서 활활 타올라 나의 이 순교와 너희의 헌신이 함께 어우러져서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물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내 기쁨이다. 그래서 만약에 나의 죽음과 너희의 헌신이 전제와 번제처럼 어우러져서 확 타올라 주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면 얼마나 기쁘겠냐. 나는 이것을 기뻐하고, 기뻐한다. 그러니까 너희도 나의 이 기쁨에 참예 하라. 나와 함께 기뻐하자.” 이런 종류의 기쁨을, 이런 종류의 기쁨은 결코 싸구려 기쁨이 아닙니다. 영혼을 뒤흔드는 기쁨입니다. 이런 기쁨만이 정말 영혼을 흔들어놓는 근원적 기쁨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이런 기쁨의 원인을 전혀 나 중심의 행복에서만 찾으려고 해요. 그러다보니까 어떤 일이 생기냐면 내가 생각하는 대로 환격과 모든 것들이 풀리지 않으면 기뻐할 수가 없고, 또 그런 좋은 일들이 생겨서 기뻐할라치면 그 기쁨 때문에 마음이 빼앗겨서 하나님을 훌륭하게 섬기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 중에도 곤고할 때는 하나님을 잘 섬겨요. 시련과 박해가 오는 대도 굴복하지 않다가 평온하게 되고 복을 받게 되니까 마음이 물러서서 미끄러지는 경우 여러분들에게도 많이 있잖아요. 늘 있는 일이잖아요. 그렇죠? 그러니까 우리의 이 기쁨은 오늘 이 사도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 편에 두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러면 기뻐할 일이 참 많습니다. 주위에 돌아보면 하나님이 놀랍게 일하고 계시죠. 우리 한 사람을 위해서만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계셔요.
그런데 만약에 내가 나의 기쁨을 나 자신의 행복한 삶에서만 찾으면 그러면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눈을 떠서 까리따스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우리 많은 사람들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성취를 보면 놀라운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나는 지금 핍박을 받고 고난을 당하고 있는데 내 주위의 어떤 사람들은 그 핍박에서 승리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그들을 주님께 굴복시켜요. 나는 물질적으로 곤고하고 고통을 당하지만 하나님의 일에는 충만한 하나님의 부어주심이 넘쳐서 그래서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고 일하셔요. 그렇게 놀랍게 역사하셔요. 정말 놀랍죠. 그런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그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대목이 많은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사도바울은 순교의 순간을 기다리는 감옥에 있는 사형수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옥 밖에 있는 사람보고 기뻐하라고 외칠 수 있었던 이유는 뭐냐면 그 기쁨이 자신의 행복에 근원을 두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에 기쁨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옥 속에 갇혔어도 하나님의 역사가 그 시위대 안과 밖에서 일어나는 소식들이 다 들려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일하시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을 들어서 한번 생각을 바꾸어보세요. 아, 그렇구나. 하나님께서 눈을 들어서보니까 내가 이 교회의 한 지체인데 이 몸을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그리고 이 몸을 보양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 지체들 가운데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구나. 나는 어려워도 많은 지체들에게 복을 주시고 나는 힘들어도 많은 지체들에게 형통함을 주시고, 나는 핍박을 받아도 다른 지체들 속에서는 복음이 승리하게 하시고, 다른 지체들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나는 부족한데도 하나님이 교회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구나. 아, 기쁘다. 나는 아웃리치 가지 못했지만 거기에서도 하나님이 일하시는구나. 나는 이것을 못했고, 현장에 없었지만 거기에 있는 지체들이 거기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보는구나. 이렇게 눈을 들어보면 기쁨의 이유가 너무, 너무 많은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은 아주 작은 일들입니다. 그래서 능히 그것 때문에 이기고, 승리하고, 이기고, 감사하고, 이럴 수 있는 놀라운 힘과 능력들이 계속해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III. 하나님의 시야로 바라보는 기쁨
여러분들이 은혜를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생각과 마음, 그리고 눈이 넓어져요. 그래서 다른 사람을 많이 생각하게 되요. 그래서 누가 은혜를 받았다. 그럴 때 그렇게 기뻐하고, 뉘 집의 남편이 회심했다. 그럴 때 그렇게 좋아하고, 누가 실족했다. 그럴 때 그렇게 아파하고 그럴 때 자신의 삶은 아랑곳없는 것 같은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의 기쁨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성도의 삶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눈을 넓게 뜨면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마음 아픈 것도 많지만 그 아픈 것과는 비교될 수 없는 놀라운 기쁨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신령한 기쁨은 경박함 속에서 솟구치는 것이 아니라. 진지함 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는 그 시기의 기쁨이 있고, 주님의 나라를 염려하는 가운데 거기에 기쁨이 있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분투할 때 자신의 능력의 부족을 느끼며 주님의 도움을 구해야 하는 그 진지함 속에 거기에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기쁨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충만한,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면 우리의 악함과 약함을 인해서 아파하던 그 때, 그 때 사실은 기쁨과 소망이 충만했었습니다. 그렇잖아요.
오늘 여러분들의 관점이 어디에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교회의 지체로 부르셔서 함께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게 하시는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용하시기를 원하시잖아요.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실 때 거기에 여러분들이 동참하기를 원하시잖아요. 몸인 교회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함께 깨어나고 그분이 우리를 데리고 섬기러 가실 때 함께 거기에 가서 지성으로 섬기고, 고난을 받을 때에 거기에서 진심으로 함께 그 고난에 동참함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가고, 이렇게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고, 교회와 한 몸을 이루는 이 일체 속에서 우리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기쁨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기쁨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있지. 다른 사람들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싸구려 기쁨입니다. 다시 한 번 하겠습니다. 진정한 기쁨은 마음을 드려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거기에 진정한 기쁨이 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도 무효가 되지 않은 기쁨, 환난과 시련이 와도 삼켜버릴 수 없는 기쁨, 고난이 와도 사라지지 않는 기쁨, 이 세상의 무엇으로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그런 기쁨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길 때, 그 때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기쁨,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환희가 사람들 속에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 저는 사람이 부족해서 그런지 그 정도는 아닙니다. 만은 옛날에 제가 전도사 할 때 모셨던 교회 목사님. 교인들이 적게 나온 날은 힘이 하나도 없으셔요. 그리고 밥을 드셔요. 항상 우리는 목사님과 같이 밥을 먹는데. “목사님 좀 더 드시죠.” “밥알이 모래알 같군요.” 나는 교인들 조금 안 나와도 밥 먹었는데. 그 목사님은 교회에 교인들이 많이 나온 날은 만면에 웃음이 가득하셔. “목사님 식사하셔야죠.” “아, 오늘은 안 먹어도 배가 부르구나.”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섬기는 삶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섬기는 삶
주님을 섬기길 간절히 원하네.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섬기는 삶
IV. 결론과 적용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쁨의 근원을 거기에 두는 것, 그러면서 신자는 주님이 기뻐하실 때 함께 기뻐할 수 있고, 주님이 아파하실 때 함께 울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진짜 주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 이외에 누가 참된 기쁨을 소유할 수 있을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만약에 기쁨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고 산다면 우리가 안 가진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세요. 또 그런 기쁨의 주님이 우리에게 없다면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것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한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이 없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또 그것도 모르고 아무렇게나 살던 우리를 예수의 피로 구원 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섬기며 기쁘게 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눈을 들어서 넓혀 보면 진짜 기쁜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선교지에서 들려오는 기쁨의 소식, 지체들 안에 놀라운 회심의 이야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들, 그 기쁨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기쁨들이 우리에게 많이 일어나도록 주님이 우리를 위해 당신을 다 드리신 위에 우리를 관제와 같이 부어서 그래서 그 사랑의 불길이 타오르게 해서 그래서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라고, 얼마나 기뻐요.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일생동안 이런 저런 일로 섬기면서 하나님 앞에 가요, 그 자체가 승리하는 인생입니다. 내가 오죽하면 우리 장로님들에게 가끔 그런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언젠가 하나님 앞에 갈건대 그 때에 무엇을 한 것이 있을지 한번 생각해보라. 교회 하나를 섬기다가 온 것이다. 대부분의 시간과, 노력을 거기에서 보냈습니다. 거기에서 한 교인으로 양육을 받으며 세상에 나아가서 주님을 섬기면서 산 것과 그리고 한 교회를 섬기면서 산 것 그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가 죽고 교회가 건강하게 서 있고, 살아있는 동안에 우리가 눈물 뿌려 섬기는 섬김을 통해 여기에서 옛날에 우리처럼 방황하던 영혼들이 주님을 하나씩, 하나씩 믿으며 변화될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적은 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우리의 인생의 본질적인 소명입니다. 그 본질적인 것을 우리의 기쁨으로 삼으면서 살아가야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사도가 자신의 기쁨에로 사랑하는 빌립보 교인들을 동참시키려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같이 기뻐하자. 나의 기쁨에 너희도 함께 참여하자. 나와 함께 기뻐하고, 또 기뻐하자. 왜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계획들을 이루어 가시니까. 얼마나 기쁘냐? 이것들을 생각하면 순교의 순간이 다가오는 것도 그에게는 그렇게 대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언젠가 어차피 누구든지 한번 살다가 가는 것인데.
그래서 마음에 불만과 불평으로 차 있던 여러분들이 있다면 눈을 들어서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고 여러분 주위를 보세요. 감사할 제목이 얼마나 많은지 한번 보세요. 사랑하는 지체들이 옆에 있죠, 변화 받는 지체들이 옆에 있죠, 미약하나마 우리의 섬김을 사용하시죠. 사랑하셔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셨죠.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 한 지체가 되게 하셨죠. 오늘도 진리의 말씀을 주셔서 우리의 마음을 찌르고 우리를 새롭게 인도하시잖아요. 얼마나 감사해요. 기뻐하고 또 기뻐함으로서 우리 주님의 기쁨에 동참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6. 고난을 피하지 않는 신앙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여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 하시더라” (마 27:34)
I. 본문해설
오늘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실 때에 일어난 일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요즘 우리의 시간으로 말하자면 금요일 날 9시 경이었습니다.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못 박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의 떡을 떼셨고,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서 땀이 비가 되기까지 기도하셨습니다. 몇 시인지 알 수는 없지만 밤 깊은 새벽 시간에 예수님은 체포되셨고, 그래서 빌라도에게로 빌라도에게서 다시 헤롯에게로 가셨으니 이는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이었고, 마치 그 지방을 다스리던 총독 헤롯이 휴가차 예루살렘에 와 있었기 때문에 헤롯에게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거기에서 많은 고난을 당하신 후에 빌라도에게 끌려가셨고, 빌라도에게서 재판을 받으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으니 그 때는 금요일 아침 이른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이 그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셔서 못 박히셨으니 이때가 아침 9시였고, 예수님은 6시간동안 십자가에 매달려 계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오늘 이 예수님의 장면이 그 6시간 중 어디에 해당하는지는 우리들이 알 수 없지만 비교적 후반에 속하는 오후에 일어난 일임을 우리들은 추측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그 형벌은 인류 역사에서 사람이 고안해낸 가장 잔인한 사형 집행 방법이었습니다. 사람을 가로 막대기에 못을 박고 그 사람을 도르레로 올려 이미 땅에 심어놓은 세로 막대에다 끼우는 방식으로 사람을 나무에 매달아 죽이는 형벌이 스타우로스 곧 십자가의 형벌이었습니다. 이 형벌의 잔인함은 십자가에 못 박힌 채로 매달려 있는 동안에 서서히 피가 흐르게 되고, 출혈은 견디기 힘든 통증을 가져오고, 상처뿐 아니라. 특별히 견디기 힘든 두통을 가져와서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들은 죽기 전에 여러 번 혼절했다가 깨어나고, 깨어났다가 혼절하는 일들을 반복한 후에 서서히 죽어갔다고 합니다. 생명이 살아있는 동안 최대한의 고통을 끝까지 맛보게 하는 것이 십자가 사형 방법이 가진 강점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사람들은 스타우르스 곧 십자라는 말만 들어도 아주 끔찍하게 생각했고, 기분나빠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무서운 형벌은 로마 사람들에게는 가해지지 않았고, 또 로마 사람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나라의 반란을 일으키거나 큰 형벌 받을 죄를 지은 사람이 아니고는 이 형벌에 처해지는 법이 없었습니다.
알다시피 예수님의 일생은 누군가에게 손해를 끼친 일생이 아니라 유익을 주는 생애였습니다. 병든 자의 친구가 되셨고, 고통 하는 자의 위로 자가 되어주셨습니다. 굶주린 자를 먹이셨고, 가난한 자들의 동무가 되어주셨습니다. 버림받고 외로운 자의 이웃이 되어주셨습니다. 병자에게 의사가 되어주셨던 그 분을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잘못한 일이 없는 그분이 흉악한 사람들이 아니면 매달리지 않는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은 그분에게 있는 죄를 보여주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분이 대속해야 했던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섬기시던 그 손에 굵은 못이 박혔고, 죄인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걸어가시던 그분의 발에도 못 나무에 깊이 매달렸습니다. 자나 깨나 늘 영혼들에 대한 생각, 하나님의 영광과 그 나라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던 주님의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이 써졌습니다. 모진 채찍과 고난으로 피투성이가 된 채 하늘 아래 매달려계신 그리스도 예수, 그분이 오늘 보여주신 이 행동은 오늘 우리에게 시사 하는바가 많이 있습니다.
II.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
그 당시 십자가 형벌에 죽어가는 사람들은 모두 흉악한 죄인들이었지만 그러나 그들에게도 마지막 자비는 베풀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잠언에 나와 있는 말씀을 기초로 이렇게 고통가운데 죽어가는 죄수들에게 마지막 고통을 덜게 해주기 위해서 짐승의 쓸개에다 독주를 섞은 그 독한 술을 스펀지 같은 곳에 묻혀서 그래서 막대기를 길게 꿰어서 그래서 높이 매달린 죄수의 입에 갖다 대어주면 그 죽어가는 사형수는 그것을 좀 빨아먹고 고통을 잠시 잊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것은 일종의 마취제와 같은 효력을 가진 쓸개 섞은 독주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남기신 말씀가운데 당신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유일한 말씀이 하나 있으니 그것이 바로 5번째 말씀인 “내가 목마르다.” 라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남기신 7마디의 말씀은 모두 불쌍한 죄인들을 향한 말씀이거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향한 기도의 탄원이었는데 5번째 말씀인 이 한 마디만큼은 당신 자신이 십자가에서 당하는 고통을 피력하신 개인적인 말씀이었습니다. “내가 목마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남기신 7마디 말씀가운데 이 5번째 말씀 안에서 그분이 참 사람이었음을 봅니다. 우리의 죄를 속하시기 위해서 그분은 흠 없는 분이셔야 했으니 흠 없으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이셔야 했지만 우리들을 위해서 대신 죽어야 했으니 죽으시기 위해서는 그분이 참 사람이셔야 했습니다. 참 사람이셨기 때문에 그분은 십자가에서 못 박히실 때에 다른 모든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과 같이 똑같은 고난을 당하게 되었고, 그분은 하나님 자신이셨으니 그런 치욕스러운 고통이 그분에게 더더욱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생명이신 그분이 사명에 종속되어 십자가에 매달려 서서히 육체의 생명을 소진해 가면서 “아, 나는 목마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생명이신 그분이 무엇 때문에 죽음에 삼킨바 되고,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신 그분이 무엇 때문에 한 모금의 물 때문에 마른 목을 참아야 했습니까. 무엇 때문에 존귀하신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쓰레기 같은 강도들과 함께 동류가 되어서 서서히 죽어 가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분 자신의 무능함이나 부족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 때문이었습니다. 이 지혜는 바로 우리들이 지은 죄를 그리스도 예수께서 대신 담당하고 죽으심으로 주님은 버림을 받으시고, 우리는 주님 앞에 용납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마련해놓으신 대속의 지혜를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 고난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육체에 드리워지는 죽음의 그림자를 감지하시면서 그분은 심지어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한 번도 떨어져 본적이 없고, 단절 되 본적이 없는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이 단절되어 가는 극한 고통을 느끼시면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까지 외치셨습니다. 이 모두 우리의 죄를 우리 스스로 구속할 수 없는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하고자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구원의 지혜 때문에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이었습니다. 더러운 죄인들에게는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당신은 죽음을 대신 맛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내가 목마르다.”는 주님의 이 고백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위해 자기의 생명을 버리신 참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을 봅니다. 우리가 가진 구원, 우리가 이룬 성화, 오늘도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좋은 것들, 우리가 가지고 소유하고 있는 모든 아름답고 선한 것들이 오직 그리스도 예수 그분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졌고, 우리와 같이 하나님을 모질게 배역하던 인간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길도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대목은 바로 이 대목입니다. 예수님도 참 사람이셨으니 견디기 힘든 고통 속에서 혼절하실 것 같은 영혼의 괴로움을 당하셨을 것입니다. 그 때에 쓸개를 독주에 담가 건네주는 그 한 모금의 포도주, 그것은 아마도 예수님이 그것을 받고, 마시셨다면 훨씬 그 고통을 경감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무엇인가 잠시 맛보신 후 그것이 쓸개를 탄 술이라는 것을 알자 주님이 그렇게 목마르심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절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은 무엇인가 가슴에 와 닫는 교훈이 없습니까? 주님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셨을까요? 십자가에 매달려서 살이 찢어지고 뼈가 갈라지는 것 같은 그 고통 속에 한 모금 그 독주를 마시고, 고통을 면한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공로가 퇴색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져야할 십자가의 고난을 거의 당하시기 위해서 마취제와 같은 방법을 사용해 당신의 고난을 피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은 아버지의 강요에 못 이겨서가 아닙니다. 누군가의 억압에 의해서 할 수 없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기꺼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시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드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그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십자가를 지시면서도 당신의 이 고난을 통해 나타나게 될 미래의 많은 열매들을 보시며 기쁜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당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이 견디기 힘든 고통의 형벌은 단지 그 형벌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바로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잉태하는 산모의 고통과 같은 것이었기에 기꺼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몫에 태워진 누구도 나누어 질 수 없는 이 십자가를 달게 지시기 위해서 거의 그 잔을 거절하시고, 당신 자신의 온전한 몸으로 그 고통을 뼈 속 깊이 맛보시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셨기에 그분은 우리를 위해 승리하셨습니다.
III. 우리도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 예수께만 십자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그분을 따라가며 살려고 하는 한 우리들 모두에게 십자가가 있습니다.
뉘 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우리에게도 십자가가 있습니다. 누군들 그 십자가가 없겠습니까. 그래서 그 십자가만을 생각하면 우리는 겸손해집니다. 그 십자가를 생각하면 이 고통스러운 세상을 떠나 속히 주님께 날아갈 욕망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우리들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고유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섬기며 한 사람의 신자로 살아가려고 할 때에 우리 앞에 내밀어지는 수많은 이 포도주들이 우리에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때로는 세상의 유혹으로 때로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이 십자가를 피해가려는 그런 유혹으로 혹은 육신의 욕망에 대한 유혹으로, 다양한 것들로 우리에게 쓸개 탄 포도주를 내밉니다. 우리들이 그것을 마시면 아마 잠시 십자가를 지는 고통을 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바보 같은 사람이 ‘십자가는 즐거운 것이라고 말합니까. 정신병자입니까.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고통을 싫어합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행복하게, 평안하기를 원하지 고통 받고 괴롭힘을 당하고 피눈물을 흘리는 아픔을 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즐겁고 기쁘지 않습니다. 고난 길을 가는 사람은 그 길이 즐겁다고 하는 것은 다 가고 난 다음에 회고할 때의 일이죠. 당하는 그 때에는 견디기 힘든 괴로움과 고통과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우리는 그 십자가를 우리들에게 맡겨주신 그 십자가를 나 아니면 질 사람이 없다는 마음을 가지고 즐겁게 질 수는 없어도 정말 기꺼이 그 십자가를 피하려고 하지 말고 우리들이 그 고난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위대한 신학자는 말하기를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의 종교요, 고난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고난을 통해서 교회는 교회일 수 있었고, 그 고난을 통해서 신자들은 비옥한 신앙의 토양을 가질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에게 못 박혀 죽으실 때 마취에 쓰이는 포도주를 거절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정신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구원을 얻고, 그분의 뒤를 따라오는 우리 모두를 향한 하나님이 바라시는 바입니다. 우리들이 만약에 고난을 당하여야 할 그 자리에서 고난의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우리가 과연 그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의지할 리가 있을까요? 우리가 그 십자가를 지고 이 세상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그리고 잠시 머물 이 세상을 떠나 영원히 계시는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 되기를 원하는 그 소망이 독주를 마신다면 우리의 마음에 그 천상의 소망이 불탈 수 있겠습니까. 매일, 매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고난 속에서 자신의 본향이 이 땅이 아닌 것을 배우고, 그 고난 속에서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자기를 다 바치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고난의 발자취를 우리들이 따라갈 수가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조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돈을 주시지만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고난을 주십니다. 날마다 예수 생각나게 하시고, 평탄한 길을 걸어가면서 주님을 잊고 살게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고난의 길을 가면서 언제나 당신을 생각하게 하십니다. 세상에 할 일도 많고 사랑해야 될 사람도 많고, 아껴야 할 사람도 많고, 해야 할 사명도 많지만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궁극적인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이 고난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 고난 속에서 영원한 하늘나라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이 세상이 주는 표상에 속지 아니하는 사람이니, 소망을 하늘에 둔 사람들만이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정말 자녀들의 눈에 때때로 눈물이 흐르게 하십니다. 왜냐면 그 눈물에 이 세상의 욕망이 씻어져서 눈물 젖은 눈동자로 하늘나라를 볼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고난을 당할 때에 그 고난이 모두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후려치시는 노예의 채찍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은 정말 믿음이 없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을 조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돈과 명예를 주시지만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고난을 주십니다. 그래서 그 고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나게 하시고, 그 고난을 통해서 목마르게 주님을 찾게 하셔서 그 부르짖는 영혼을 하나님께서 어루만지심으로 그들의 영혼을 만족하게 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사람이 누구일까요? 하나님이 가까이 하시고, 그가 입을 열어 무엇인가 말할 때에 들어주시는 사람이 아닐까요? 어떤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이렇게 하겠다고 약속 하셨는지 기억하시나요?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계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들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고난을 주십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보십시오. 주님께서 견딜 수 없는 고난의 잔을 마실 그 때에 십자가 고난의 잔과 함께 그 포도주의 잔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당신의 고난을 대하는 태도였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면 거기에는 항상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묻고 싶겠죠. “목사님 우리가 피하면 어떻게 되나요?” 고생이 있습니다. 둘 중에 하나를 택하는 것입니다. 고생을 택하든지, 고난을 택하든지, 사명을 빗겨감으로 고생을 택하든지, 사명을 다 이루기 위해서 고난을 택하든지.
지방에 말씀을 전하러 내려갔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저를 보면서 그래요. “저는 정말 이 교회에 있기 싫습니다.” 그래서 “왜 그러세요?” “아, 이것도 불만이고요. 교인들이 너무 수준이하고요. 사모도 힘들어하고요. 제가 교인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은 참을 수 있는데 이렇게 한번 밖에 없는 인생을 이렇게 쓸모도 없는 일로 인해서 괴로움을 당하고 소모전을 벌이니 제가 언제 정말 목회에만 전념해 볼 수 있겠습니까.” 제가 물었습니다. “목사님 그것이 뭔데요? 목회에만 전념하는 그것이 뭔데요?” “말씀만 깊이 탐구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사명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그 일에만 전심하는 거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있던가요?” 그랬더니 한 사람이 있데요. 누구냐고 그랬더니 김 남준 목사님이래요.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우리 하늘나라 가 봅시다. 가면 우리들이 걸어온 모든 길이 보일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보여주고 싶었지만 사람들이 보지 않는 길, 사람들에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았지만 그 때는 볼 수 있는 그 길들이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우리 조금만 더 참으십시다. “조금 참으면 무슨 일이 있는데요?” “죽잖아요.” 그때가지 조금만 더 참으십시다. 참고, 또 참고, 또 참고,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입니다.
뉘 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고난을 당할 때, 피하려고 하지 말고 피하려고 하면 꼭 죄를 짓게 되거나 불순종하게 됩니다. 피하려고 하지 말고 오히려 이렇게 기도하세요. “그렇습니다. 주님, 예수님이 죽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처럼 나도 주님 위해 죽기 위해 구원을 받았습니다. 진흙과 같은 나를 빚으셔서 주님의 뜻대로 만드시고, 나를 한 알의 밀알과 같이 사용하시옵소서. 저는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맨 정신으로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고난을 기꺼이 감당하며 그 때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예수 죽인 것을 날마다 우리의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의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러면서 매일, 매일 걸어가는 것입니다.
IV. 결론과 적용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개인적인 생활에 얽매여서 오직 그것 하나면 해결하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지만 주님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삶 전체를 보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먼저 십자가를 붙드세요. 그리고 먼저 자기 것 찾지 말고 주님 것부터 찾으세요. “하나님, 내가 주님이 내게 주신 자리가 어디였습니까. 내가 어디에서 미끄러졌습니까. 주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나에게 은혜를 주실 때 나에게 세워주셨던 그 원래의 자리가 어디입니까. 내가 거기를 떠났습니까? 그냥 있습니까?” 고난이 싫어서 떠났다면 예수님처럼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쉽게, 쉽게 살라고 하는 모든 유혹의 포도주 잔을 거절하고 내게 지워진 그 십자가의 몫을 감당하고 가는 그 길이 가장 지름길이고, 가장 좋은 길입니다. 그 길이 가장 지름길이고, 가장 좋은 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7. 진리와 기쁨
“형제들이 와서 내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내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요삼1:3)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요한 사도가 가이오라고 하는 지체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누구인지 잘 알 수 없지만 가이오와 그 집안의 사람들을 잘 알고 있고 아주 친숙하게 신앙 안에서 사귐을 갖던 사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는 이 사람을 마음 깊이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사도 요한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가 나이가 얼마인지, 누구인지 알지 못하지만 그 지체를 ‘사랑하는 자녀’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친밀한 성도의 교제를 이루는, 어쩌면 목양을 받던 그런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사도에게 와서 가이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가 진리 안에서 살고 있다고 전해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자 요한의 마음에 큰 기쁨이 솟아나게 되었고, 그것 때문에 사도 요한은 이 사람에게 목회적 기쁨에 가득 찬 마음으로 이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II. 기쁨의 이유
이 서신은 매우 짧은 글이지만 이 글 속에서 우리의 진정한 기쁨이 무엇이고, 우리가 무엇 때문에 기뻐해야 하고, 우리가 진정으로 어떻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기쁨의 이유를 우리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A. 하나님 자신
첫째는 하나님 자신이 기쁨의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가이오라는 사람이 진리를 인해서 기뻐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내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그러니 이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할 수 있었던 것은 기쁨 때문이었고, 기쁜 마음으로 진리 안에서 행했기 때문에 그를 목양하고 있던 사도의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되었던 것입니다.
기쁨의 이유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모든 기쁨의 원천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들은 사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 기쁨은 사랑에서 오는 것입니다. 사랑의 정체 자체가 기쁨과 소중히 여기는 것, 그것이 사랑의 정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의 기쁨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면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기쁜 일들을 많이 만납니다. 물론 슬픈 일도 만납니다. 기쁘고 슬픈 일을 만날 때에 우리들이 기쁘고 슬퍼하는 이유가 자칫하면 우리의 인생 속에서 출렁거리는 사물의 표양이기가 쉽습니다. 우리의 눈앞에 보이게끔 출렁거리는 사물의 모양, 사물의 생김새를 보고 우리가 기뻐하고, 슬퍼하고, 울고, 웃게 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으로 기쁨의 근원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기쁨은 잠시 있다 사라지는 일시적인 기쁨이나 혹은 사물을 착각한데서 오는 종류의 기쁨이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 갖고 싶어하는 기쁨은 아무리 누려도 우리의 영혼에 해가 되지 않고, 또 아무리 그 기쁨 때문에 즐거워해도 나중에 후회할 이유가 없는 그런 종류의 기쁨, 내가 기뻐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불행이나 고통의 이유가 되기 때문에 기뻐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향해 죄의식을 느끼는 그런 종류의 기쁨이 아니라,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사랑한 것을 후회할 일이 없는 종류의 기쁨, 그런 종류의 사랑, 그리고 지금 사랑하는 그것이 오랜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그냥 있는 그런 종류의 기쁨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자신 이외에 어떤 것도 그렇게 완전한 기쁨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자신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쁨의 근원으로 삼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기를 기쁨의 근원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는 ‘자기’라고 하는 것도 일정한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자기’입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육체는 우리의 ‘자기’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영원히 있는 ‘자기’가 아닙니다. 공간은 우리에게 사랑한 사물을 제시해주지만 시간은 그 공간에게서 그 사랑하는 대상을 빼앗아 가버립니다. 왜냐하면 시간의 흐름과 함께 우리가 사랑하는 그 사물들은 점점 더 완전성을 소멸하고 사라져가고 죽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은 자기 자신에게 배반을 당하는데, 공간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고 제시해주지만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도 우리의 영혼을 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든 인간은 결국 이 세상에 육신을 벗어놓고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 돌아가게 되어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인생의 많은 시간들을 헛되이 버리고 떠나갈 자기를 사랑하는데 자신의 생명을 바치고 있으니 모든 것들이 인간의 허무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 자신 때문에 기뻐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존재의 안전감과 행복을 누리게 되고,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자신이 늘 변천하는 자기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 늘 불안하고 정함이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가장 큰 행복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것은 곧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결국은 자기 자신을 향해서 돌아오는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올바로 사랑할 때에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사랑의 궁극적인 대상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거기서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가이오 안에 있는 이 진리를 따라 생활하고 순종하는 삶을 보면서 사도가 그렇게 기뻐했던 이유는, 바로 가이오 안에 하나님 자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사도에게는 비교할 수 없지만, 사도와 똑같이 영혼들을 가진 여러분을 돌보는 목자로서 내 마음에 있는 소원도 똑같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 있는 것, 나는 여러분에게 잊혀져도 좋으니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 있는 것, 그래서 불변하신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 그래서 진리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저의 기쁨이고, 그것이 바로 우리 주님의 마음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즐거움의 근원으로 삼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B. 하나님이 통치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 그러니까 기쁨의 이유가 하나님의 통치 때문에 기뻐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가이오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 가운데 행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면 이 가이오가 왜 예전의 헛된 삶을 다 버리고 오늘은 진리에 순종하며 진리 가운데 행하는 삶을 살게 되었던 근원적인 비결이 무엇이었습니까? 가이오가 무엇 때문에 진리 안에서 행한다고 목회자인 사도 요한에게까지 소식이 미칠 정도로 그렇게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이 그의 기쁨의 이유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고, 하나님만을 기쁨의 근원으로 삼았기 때문에 진리 안에서 행할 수 있었습니다.
신자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은 완전히 신뢰할 수 없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마음이 감정적으로 꽉 차게 느껴진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진짜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을 똑같이 반영하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조금밖에 사랑하지 않아도 어떤 때는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사랑을 고백할 때 호떡집 앞에서 사랑을 고백하거나 버스 안에서 사랑한다고, 일평생 나의 반려자가 되어 달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게 안합니다. 그런 고백을 하려면 분위기를 잘 잡아야 합니다. 언젠가 잡지를 봤는데, 호텔에서 두 시간 동안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빌려주는데 두 사람이 간단한 식사를 하나 하는데 60만원이래요. 그래서 뭐가 이렇게 비싼가 하고 보니, 그 상품 이름이 ‘사랑의 고백이 있는 식사’예요. 그 방 하나에 아주 예쁜 장식을 해놓고, 거기서 바이올린, 첼로, 플룻 같은 악기를 연주하고, 조명을 비춰주면서 분위기를 잡아주며 거기서 사랑고백을 하도록 해주는데 60만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걸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중요한 고백을 할 때 진실이 중요하니까 아무데서나 해도 될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고 분위기를 잘 잡고 고백을 하는구나!’
참 이상해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실제적으로 조금밖에 없는데도, 분위기와 모든 것이 맞으면 우리가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또 어떤 때는 하나님을 참 많이 사랑하는데도 왠지 모든 환경이나 마음이나 관심사 같은 것들이 변동이 될 때는 ‘내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일까?’하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 사랑하고, 안 사랑하고의 문제라기보다는 순발력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신뢰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러면 무엇으로서 그것을 알 수 있느냐하면,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들이고, 하나님을 진정 기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다스려주시는 것을 기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자신을 향한 기쁨으로 꽉 차 있을 때에는 아주 흔쾌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나를 인도해주신 은혜가 너무 감사합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찬송하고, 하나님을 좋아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지게 되면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싫어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는 기꺼이 순종합니다. 어떤 때는 순종하기 위해 피나는 희생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도, 하나님이 자신의 기쁨이기 때문에 즐겁게 순종합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다 피투성이가 되어도 즐거워하고 기뻐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니까, 하나님이 기뻐하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면서 고난을 당하는 것을 불순종하면서 편안한 길을 걸어가는 것보다 훨씬 행복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게 될 때 하나님을 기뻐하게 되고, 하나님의 통치에 기꺼이 순종하게 될 때 하나님의 엄위를 즐거워하게 됩니다. 엄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위엄 있고 엄격하심, 사실 그것 때문에 죄인들이 두려워 떱니다. 하나님의 엄격하심 앞에서 죄인들이 두려워 떨고, 그의 위대하심 앞에서 모든 인간들이 떨며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이 기쁜 사람.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를 즐거워하는 사람, 흔쾌히 하나님께 복종하며 살아가려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위엄을 향유합니다. 그 엄격하시고 뛰어나게 높으시며 위대하신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 때문에 한없이 즐거워합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하나님 앞에 기꺼이 복종하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오히려 불꽃 가운데 임하시는 주님의 엄위하심을 즐깁니다. ‘하나님이 정말 위대하시구나!’하면서 그를 즐거워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정향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불순종과 죄 가운데서 하나님을 등지고, 하나님을 대항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엄위를 기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면 불안하고 마음에 근심이 생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등지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참으로 이 가이오가 진리 가운데서 행하고, 그것이 사도 요한의 마음에 큰 기쁨의 이유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사람이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을 다스리시는 통치의 방법이 무엇입니까? 율법과 은혜를 통해서 통치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할 표준을 보여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살 수 있는 은혜를 공급해주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나는 부패하나 주님을 의존하면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당신의 목적을 따라 살 수 있도록 은혜를 공급해주십니다. 은혜로 우리에게 하나님이 공급해주십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면서 살아갑니다.
이 통치에 거역하고 불순종하고 살아갈 때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들고 괴롭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기를 끊임없이 대적하시는 것처럼 적대감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뻐하고, 온전히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의 통치가 행복하게 ‘아, 하나님이 나를 다스리시는구나!’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고, 하나님을 향해 정향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지 않을 것이라는 마음을 갖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성경이 이야기하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입니다.
성도의 즐거움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데 있는 것이지 그분을 등지는데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즐거움은 결국 우리에게 고통이 되어 다가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쁨의 삶을 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 때문에 기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기쁨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하나님의 통치를 즐거워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엄위를 즐거워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즐거움을 잃어버린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행복을 생각할 때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을 등지고 얻을 수 있는 기쁨의 마음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우리의 즐거움이 아닙니다. 잠시는 그것을 통해 기쁨을 얻고 자유를 누리는 것 같아도 그것은 결국은 사슬이 되어 돌아와 우리의 영혼을 얽어맵니다. 하나님의 뜻을 떠나 이탈하여 기쁨을 찾는 그 순간부터 우리의 영혼은 속박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하며 사는 것이 우리의 분복입니다.
III. 진리를 기뻐하는 사람
그러면 이런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진리를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진리는 하나님 자신이시고, 성령은 이 진리를 보게끔 비춰주시는 빛이시며, 계명은 진리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보여주신 의지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하나님 자신을 기뻐하게 되면 진리를 기뻐하게 되고, 진리를 기뻐하면 진리이신 하나님이 보여주신 당신의 의지인 계명을 즐거워하게 됩니다. 그런데 진리 자신이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없으면 그 진리이신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인 계명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그 계명대로 산다면 다른 이유 때문에 사는 것일 겁니다. 나의 의를 세우기 위해 산다든지, 혹은 하나님이 복 주실 것이라고 하는 기복적인 생각이라든지... 이런 등등의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지 사랑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보이는 삶 속에서 구체화됩니다. 제가 회심하고 30여년의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어떤 때는 주님을 많이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한 순간에 사실은 그것이 나의 느낌에 지나지 않고, 내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멀어졌다는 것을 하나님이 내게 보여주실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인정하고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잘 모릅니다. 똑같이 우리 안에 있는 기쁨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만을 그 기쁨의 근원으로 삼은 기쁨인지 우리도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기뻐할 때도 오히려 근심하며 이 기쁨의 근원이 무엇인지 물어야 합니다. 만약에 이 기쁨의 근원이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세상이라면 우리는 이 기쁨도 절제해야 합니다. 사라질 것들로 인한 기쁨은 우리의 영혼에 유익도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만약에 이것이 하나님 자신에게서 오는 기쁨이라면 우리는 온 영혼으로 하여금 이 기쁨을 한없이 누리게끔 허락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최고의 행복은 우리의 지성으로 하나님 자신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행복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기뻐한다면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행하시는 것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고, 유익이 되고, 행복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창조의 목적을 이루어 가시고 그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동안에 인간의 영혼에 말할 수 없는 행복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과 삶의 경계선도 갈라놓을 수 없는 그런 종류의 행복을 누리면서 신앙생활을 해나가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정말 기뻐하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보이는 삶 속에서 구현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곧 진리를 기뻐하는 사랑으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쁨을 원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쁨을 전해주시는 통로이고 동시에 목적이 되시는 진리 자체를 즐거워하는 방법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진리를 기뻐하는 기쁨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누리고 있는 많은 기쁨들은 영원하고 불변하는 행복에서 오는 기쁨이라기보다는 변전하고 사라져가는 이 세상의 사물들 때문에 기뻐하는 세속에 속한 기쁨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오늘 보십시오. 가이오가 진리 가운데서 행한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한번만 진리 가운데 행한다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변화를 받고, 진리 가운데서 계속 순종하는 삶을 살아서 선한 삶을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목적을 좇는 삶이었습니다. 가이오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렇게 진리 안에 지속적으로 거하는 삶을 살 수 있었겠습니까? 지성으로 진리를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삶으로 진리에 자기를 합치시키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면 거짓말입니다. 지성은 진리를 찾아가지만 진리를 깨달은 그의 마음은 진리를 깨달은 것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삶을 다 바쳐 그 진리에 부합하는 삶으로 선을 찾아갑니다. 이렇게 해서 지성은 진을 구하지만 마음은 행동으로서 선을 구해서 결국은 진리를 잘 깨닫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그 길을 걸어가서 덕스러운 삶을 살게끔 자신을 바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기뻐하는 성도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성도이고, 진리를 기뻐하고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는 성도는 자신의 인생의 참된 행복이 변천하는 이 세상의 사물로 인한 만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자기를 부합시키는데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매일 매일, 날마다 날마다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행복해하고 좋아하고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고통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들이 어디서 올까요?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 본능적으로 몸부림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기쁨을 얻기를 원합니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모든 사람들은 행복하기를 원하고, 모든 사람들이 기쁨의 삶을 살기를 원하지만 기쁨을 줄 수 없는 것들을 가지고 기뻐하려고 하기 때문에 정말 행복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기쁨의 근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진리이신 주님 자신 이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기쁨의 삶을 살고 싶으면 기뻐하려고 애쓰기만 해서는 절대로 기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연료가 없이 끊임없이 불을 지피려고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기쁨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그곳에 주님의 기쁨이 있습니다.
오늘 가이오를 보십시오. 진리 가운데 행한다는 소식이 들려서 목회자인 요한의 마음에 큰 기쁨을 주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가이오의 마음속에 진리에 대한 사랑과 기쁨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그 진리에 합치되기를 원했고, 그래서 그의 모든 삶이 진리 안에서 거하는 삶이라는 소식이 요한에게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제게도 그 소식이 전해지게 해주십시오. 여러분들이 진리의 말씀을 너무 사모하기 때문에, 그래서 여러분 자신이 진리 안에 거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제 마음이 기쁘게 해주십시오. 우리 많은 인간들은 특히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조차 영혼이 괴롭고 곤고할 때만 약을 찾듯이 진리를 찾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진리의 목적은 우리의 고통을 더는데 있는 게 아니라 이 속된 세상에서 영혼을 해방시켜 전능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하는 데에 그 진리에 참된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렇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진리의 빛을 주셨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을 많이 가지고 있고, 젊음도 있고, 지혜도 있고, 용기도 있고, 모든 것이 있습니다. 지식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가 그에게 없습니다. 그래서 그 지혜는 세속의 지혜가 되어버렸고, 하나님을 향해 눈멀고, 진리를 향해 어두운 자가 되었습니다. 정말 행복해질 수 있습니까? 기뻐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이 세상 사람들이 헛된 것을 찾아 사는 이유입니다.
왜 그랬는지 어제도 그 일이 생각났습니다. 몇 해 전에 터키를 갔었습니다. 선교사님들이 저를 데리고 이슬람, 터키 제국 시절에 황제들이 거하던 궁을 보여주었습니다. 거기에는 엄청난 경보장치가 달려서 도저히 훔쳐갈 수 없도록 커다란 보석이나 진기하고 중요한 물품들을 소장하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눈길을 끄는 게 왕이 앉던 금으로 만든 의자였습니다. 60킬로 정도 되는 엄청난 금으로 의자를 만들었습니다. 그 의자 옆에 그림이 있는데, 날이 쌀쌀한 겨울처럼 보이는데 사람들이 죽 거기 서 있기도 하고, 무릎 꿇고 있고 왕이 금 의자에 앉아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허무하다!’ 저것이 무슨 필요가 있나?
인생이 그렇게 허무한 존재입니다! 참된 기쁨의 근원이 어디인지 몰라서 그런 겁니다. 우리도 세상에서 그렇게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늘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쓸모없는 인간, 두더지같이 태양을 볼 수 없는 비참한 인간들이 어두움 가운데 사는 것이 너무나 불쌍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진리의 빛으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해주셨고, 우리의 영혼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처음 본 순간 이 세상에 아름다움은 모두 사라지고 오직 주님만이 참된 아름다움의 근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분이 진리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에 우리는 진리를 향해 목마르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금과 은을 얻었을 때보다 진리의 말씀 하나를 깨달았을 때 더 좋아했습니다. 이 세상에 부귀영화 얻을 때보다 하나님이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나의 영혼을 밝혀주셨을 때에 더 행복했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이 주는 행복은 금방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진리가 주는 행복과 자유는 영원히, 그 아름다움 속에서 기뻐하며 사는 삶이 신자의 행복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간곡히 당부합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깊이 사랑하세요. 진리를 깊이 그리워하고 목마른 사람들이 되십시오. 거기에서 얻는 참다운 행복을 기쁨으로 알고 그것을 좋아하는 성도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IV. 결론과 적용
오늘도 우리 교역자들과 대화를 나누는데, 어느 성도님 한 분이 전주에서 등록을 해서 심방을 다녀왔다고 했습니다. ‘너무 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멀다고 느끼지 않고, 진리를 사모하고 오는 사람이 있으니 얼마나 복됩니까? 그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전주보다 가까운데 사는데 얼마나 더 진리의 말씀을 사모하고 그것을 즐거워하고 기뻐해야할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참다운 행복은 말씀의 미각을 잃어버리지 않는데 있습니다. 말씀을 깊이 사랑하십시오. 그 이외의 다른 것에서 기쁨을 기대하지 마시고 참된 기쁨이 진리로 말미암는 기쁨에 있다고 여러분 스스로에게 타이르십시오. 그래서 여러분들의 영혼이 진리의 말씀을 사모하게 하시고 그 진리가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가득 있게 해주십시오.
이제 곧 여름이 다가옵니다. 분주해지고 영혼의 유익이 되기보다는 손해가 나기 쉬운 계절중의 하나가 여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름에 실족합니다. 이때 여러분들은 오히려 신앙의 옷깃을 여미고 진리를 깊이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으로 여러분들의 영혼의 양식을 삼으십시오. 그래서 이 세상에 그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참되고 영원한 기쁨이 여러분들의 가슴에 아로새겨지길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8. 돌아봄과 기쁨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하라”(빌2:4)
I. 본문해설
이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옥중에서 쓴 편지입니다. 4장으로 되어 있는데 1장에서는 사도 바울이 자신이 옥 속에 갇혀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그리고 순교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옥살이 중에서도 자신이 어떻게 기쁨의 삶을 살고 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의 비결은 그리스도와 온전히 하나 된 마음과 삶으로 자기의 생애를 살아가는 것, 바로 그것이 기쁨의 이유였습니다. 그러면서 고난 중에서도 기뻐해야할 이유를 잘 설명하면서 우리들이 고난을 당해도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붙들고 그리스도와 하나 된 삶을 살므로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1장 마지막에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너희 안에 무슨 일이 있든지, 무슨 기쁨이 있든지, 어떠한 것이 있든지 너희들은 서로 사랑하고 섬기면서 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신약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서신 중 유명한 기독론,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로 이어지는 유명한 기독론을 말하기 전에 사도 바울은 다시 애정 어린 마음으로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 권면합니다. 이미 빌립보 교회로부터 칭찬할만한 아름다운 소식이 들려오고 있었지만 사도는 다시 한번 “너희는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고 했습니다.
II. 기쁨의 길
옥 속에 갇혀서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는 순간을 기다리는 사도 바울이 옥 바깥에서 자유로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기뻐하라고 권면하는 모습, 그리고 자신이 왜 그렇게 기뻐할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하는 충만한 기쁨의 생활과 태도를 보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웁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기쁨으로 충만해지기 위해서는 자신의 양들과 다름없는 빌립보 교인들이 이런 일을 해주도록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보는 것과 또한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사도 바울은 “자기 일을 돌아보라”고 말합니다.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그랬으니까 자기 일을 돌아보는 것도 필요하고, 도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는 것도 필요한데 그렇게 돌아볼 때에 목회자인 자신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기쁨이 충만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A. 자기 일을 돌아봄
그러면 여기에서 ‘돌아본다’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희랍어의 의미를 보면, 주의 깊음이나 애정을 가지고 주의 깊은 생각으로 무엇인가를 잘 주시하거나 애정 어린 마음으로 어떤 것들을 보살피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너희 자신들을 잘 돌아보라, 즉 너희 자신들을 주의 깊게 잘 살피고, 주시하고, 또 너희 자신들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는지 돌보도록 사도 바울이 분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거의 본성에 속합니다. 예를 들어 충돌 사고가 일어났을 때 운전석과 조수석에 앉은 사람 중에서 항상 운전수보다는 조수석에 있는 사람이 사망률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옆에 자기 부인이 앉았어도 충돌할 때는 반사적으로 자기를 중심으로 핸들을 돌려 피하기 때문에 조수석에 앉은 사람들이 사고를 많이 당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거의 본능적입니다. 애정을 가지고 자기를 돌아보고, 사랑을 가지고 자기를 아끼는 것은 훈련시킬 필요가 없을 정도로 거의 인간의 본능에 속한 것입니다. 그만큼 자기를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애정을 가지고 자기를 돌아보고, 주의 깊음 속에서 자신을 살핀다’고 하는 것은 이런 편파적인 사랑으로 부당하게 자신을 대우하는 그런 종류의 돌아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종류의 사랑은 자기 사랑에 붙잡힌 돌아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기에서 돌아봄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진 삼위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삶, 그런 삶을 살아가기에 적합하도록 자기 자신을 공정하게 돌아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들이 아이들을 양육할 때, 아이는 때로는 먹어서는 안 될 것을 달라고 하고, 때로는 가지고 놀면 매우 위험한 그릇을 갖겠다고 웁니다. 그리고 그의 몸과 건강에 매우 해로워 보이는 환경 속에 자기를 들어가게 해달라고 부모를 조릅니다. 그러나 지각이 있는 부모는 아이의 요구를 거절합니다. 아이를 돌보는 부모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때 아이는 자기의 욕망이 좌절되니까 깊이 고통을 느끼면서 부모를 원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고통을 주는 한이 있더라도 아이에게 진정으로 이로운 것을 행하는 것이 진짜 아이를 돌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을 방임하고 만족시키는 것이 우리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정말 좋은 것, 필요한 것을 나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에서 절제도 하고, 억제도 하고, 그것들을 공급도 하는 것이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자기의 일을 돌아본다’하는 것은 단순히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관련된 모든 일과 사물 또 그 일과 사물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자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악한 일을 하고 있다면 그것으로서 우리의 영혼은 계속 파괴되고 육체의 건강도 망가집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우리 자신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지의 끊임없는 선택은 우리의 본성을 형성하고 우리 안에 있는 본성은 우리의 행동으로 흘러나오려고 합니다. 흘러나온 행동은 우리의 본성을 그런 것들을 행하기에 적합한 본성으로 발전시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고 있는 일과 우리 자신의 사람됨은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사도가 “각각 자기의 일을 돌아볼 뿐만 아니라”는 말을 보십시오. 인간은 모두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가지고 자기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몰두하는 것만큼 자신을 공정하게 돌아보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기를 돌아봄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은 자기를 향한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자기를 돌아보게 될 때에 자신을 가장 공정하게, 지금은 덜 행복하지만 나중에는 나에게 정말 행복하게 되는 방식으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돌보는 것, 그것이 오늘 사도의 마음에 큰 기쁨이 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의 마음의 큰 기쁨은 ‘누가 은혜를 받았다더라!’, ‘누가 삶이 많이 고쳐지고 변화되었다더라!’, ‘누가 주님을 만나서 온전하게 변해서 새사람이 되었다더라!’ 그것보다 기쁘고 좋은 소식이 없습니다. 그때에 목회자의 마음에 들려오는 그 기쁨은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곤궁한 영혼을 곤궁하게 버려두고 있는 동안에는 진정 하나님의 기쁨 안에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만약에 자신의 일을 돌아보고, 일과 관련을 맺고 있는 여러분 자신의 영혼을 돌아보고, 또 여러분들의 영혼과 관계되어 있는 모든 삶을 성찰하고 돌아보게 될 때 여러분들은 점점 더 온전해져 갈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쁨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기쁨이 있는 것이지, 그 영혼이 하나님을 등진 사람들에게는 이런 기쁨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사람,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 하나님을 좋아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기뻐하고,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계획을 따라 살려고 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런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 생각이 없는 사람들은 이런 기쁨이 올 것이라고 꿈도 꾸지 마십시오. 그건 여러분들의 기쁨이 아닙니다. 기쁨의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기쁨이 두 종류인데, 기쁨을 누릴 때 영혼을 파괴하는 것이 있고, 기쁨을 누려도 영혼을 건강하게 하고 온전하게 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영혼을 행복하게 하고 온전하게 하는 기쁨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기쁨, 하나님 면전에서 사는 즐거움, 그것 이외에 어떤 것도 우리의 영혼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B.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 봄
두 번째로 빌립보 교인들에게 부탁한 것은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사도 자신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기쁨으로 충만할 것이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른 사람을 돌아본다는 것도 역시 똑같이 주의 깊게 다른 사람들을 잘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관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것만큼 나쁜 것이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점점 도시의 삶에 익숙해지고 교회가 점점 커지면서 극도의 무관심속에서 살아갑니다. 자기중심적이 되는 것입니다. 옆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아랑곳하지 않고, 교회도 자신의 편의를 위해 나옵니다. 교회에서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차려놓으면 와서 뷔페접시를 들고 음식을 담는 사람처럼 필요한 것을 떠서 자기에게 활용하고 만족을 얻고 교회를 떠납니다. 이런 식의 신앙생활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성도의 삶은 공동체의 삶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아픔을 함께 느낄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는 우리의 몸에서 마치 죽은 세포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썩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일을 주의깊게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주의 깊음은 다른 사람을 감시하고 감독하기 위한 살핌이 아닙니다. 사람들을 살피는 것은 사람들의 필요를 자신이 먼저 발견하고, 그 필요를 채우고, 그들의 요구에 부합하고, 그들을 도우려고 하는 마음, 이것이 바로 신자의 마음 안에 있는 다른 사람을 돌아보는 마음입니다. 사랑을 가지고 섬기려고 하는 마음, 실제로 그런 마음을 사람들에게 행동으로 나타내 보이는 것, 이것이 바로 성경이 이야기하는 다른 사람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자기를 돌아볼뿐더러 또한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그랬는데, 그것이 주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고, 우리 자신이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이기심과 강한 자기 사랑에 붙들려 사는 탐욕적인 사람들의 마음에는 항상 불만이 가득하지만 자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강물처럼 흐르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풍부하고 풍성합니다. 이런 생각을 해보십시오. 리비아같은 나라는 거의 사막으로 되어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이 사막을 풀이나 작물을 심을 수 있는 평야로 만들어서 거기서 작물을 일구고 소득을 올리느냐 하는 것이 숙제입니다. 기름만 난다고해서 행복한 나라가 될 수는 없습니다. 관건은 물입니다. 그러니까 5400킬로미터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거리를 배수로 공사를 하고, 바닷물을 끓여 담수로 만들어 그것들을 수증기로 받아서, 그것을 개울물로 흘려 사막을 가로질러 보냄으로 옥토를 만드는 작업들을 하고 있습니다. 국운을 걸고 하고 있습니다.
맨 처음 물이 있어서 그 물로 풀 한포기 없는 메마른 광야 한복판에 물길을 내고 그 물을 흘려보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물이 흘러가면 바짝 메마른 평야의 흙들이 그 물을 얼마나 빨아들일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어마어마한 물을 흘려보내도 강바닥, 강 양 옆의 물들이 그 물을 빨아들일 겁니다. 또 계속해서 자기를 빼앗기며 강물이 굽이쳐 흐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세월이 많이 흐르면 그 강물들이 흘러간 언저리에는 풀이 돋아날 겁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가지 않아도 즉각 풀이 돋아날 것입니다. 그리고 물속에서는 수초들이 생길 겁니다. 어디서 생겨났는지 물고기들이 오고가겠죠! 풀들이 돋아나는 그곳에는 좀 더 큰 나무들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숲을 이룰 겁니다. 그리고 모래 언덕 밖에 없던 구릉으로 푸른 풀밭들이 펼쳐져 나가면서 커다란 숲을 이루겠죠! 언덕으로 계속해서 나무들이 자라가고 생태계가 뻗어나가면서 푸른 산처럼 변해갈 겁니다. 그렇게 세월이 많이 흘렀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다음엔 어떻게 될까요? 처음에는 강바닥을 흘러가는 물을 바닥과 양 옆에서 흙들이 빨아드리기만 했는데, 그렇게 생태계가 형성이 되고 강 주변으로 숲과 그늘, 수풀이 생겨나게 되면 그 물을 머금고 있던 그 나무들이 가뭄의 때가 되면 물을 움켜잡고 있던 숲이 물을 다시 쏟아냅니다. 가끔이라도 비가 올라치면 그 비를 머금고 있다가 가물었을 때 물을 쏟아냅니다. 그러면서 강 주변에는 수많은 작은 개울들이, 더 거슬러 올라가 실개천이 만들어집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는 움켜쥐는 삶이 아니라 강물처럼 흐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삶입니다. 내게 있는 물질적인 여유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여유, 내게 있는 육신의 건강, 내게 있는 지식이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유익을 끼칩니다. 그들에게 좋은 일을 하고, 아름다운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매순간 자기 자신을 강물처럼 흘려보내는 삶을 살아갑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라”고 한 것은, 단지 보기만 할뿐만 아니라 사랑과 애정을 가지고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용서하고, 돕고, 사랑하고, 후원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사도의 마음에는 그리스도의 기쁨이 가득하게 될 것인데, 내 마음이 그렇게 되도록 너희는 너희들이 서로 섬기고 사랑하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III. 온전케 하는 교통
그러면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왜 그러면 사도의 마음은 이렇게 자신을 돌아볼뿐더러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볼 때에 사도의 마음에는 그런 주님의 기쁨, 신령한 기쁨이 가득 차게 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의 교통이 온전하게 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온전하게 하는 교통 때문에 사도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각각 자신의 힘과 자원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살아갑니다. 오늘도 여러분이 산 하루를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깨워서 일어난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 자신의 힘으로 일어났습니다. 자신의 핸드폰에 자명종을 맞춰놓고 자신의 핸드폰이 울리니까 일어났습니다. 자기 돈으로 사온 식량으로 아침을 먹고, 자기 힘으로 걸어서 출근을 했습니다. 자기 힘과 능력으로 하루 종일 회사에서 일하고 자기 발로 자기 교통비 들여서 걸어서 교회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집에 갈 때도 자신의 힘으로 갈 것입니다. 이렇게 모두 각각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원을 가지고 자기 스스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편으로 이 자원을 아끼려고 애를 씁니다. 뛰어가는 것보다 걸어가려하고, 걸어가는 것보다 버스를 타고, 버스를 타는 것보다 택시를 타려고 합니다. 자원을 아끼려는 겁니다. 젊었을 때는 자원이 많기 때문에 사람으로 치면 호주머니에 돈이 두둑해서 누가 달라고 하면 만 원도 주고, 이만 원도 주려고 하는데 나이가 들면 천 원짜리 몇 개가 달랑달랑 하는 겁니다. 아껴쓰는 겁니다. 나이가 들면 사람들이 점점 더 편안해지려고 하는 것이 타락해서도 그렇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인간의 본성이 자기에게 자원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본능적으로 아끼려고 하는 것입니다.그것을 싸잡아서 ‘다 썩었다’고 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그렇게 조절을 해야만 살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20대처럼 아무 집에 가서 먹고, 일하고 싶으면 밤새도록 일하고, 하기 싫으면 퍼질러 자고, 나쁘게 말하면 절제가 없고, 좋게 말하면 열정이 넘치는 삶을 살면 50대도 못돼서 요절합니다. 그러니까 대게 요절하고 일찍 죽는 사람들은 열정이 충만하고 의욕이 앞서는 사람들이 돌연사를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호주머니에 들은 자기 자원을 잘 계산하고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안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항상 이십대인 것처럼 삽니다. 돈이 있어도 없는 척하는 사람이 있고, 돈이 없어도 무조건 누구하고 밥 먹으면 계산대에 먼저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듯이 인생을 사는 데도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받고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는 사람들도 영적으로 한 몸이 되었다고 하지만 자기 자원으로 여전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에 모여 하나님께 경배하고 예배하고 기뻐합니다. 우리는 또 다시 교회에서 흩어지면 다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교회가 공동생활을 하는 것은 영원히 계속되어야 할 교회의 불변하는 규칙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공동생활의 정신들은 살아남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우리의 자원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예전처럼 한 집에서 공동생활을 하지 못하지만, 정신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피와 살을 받은 한 형제들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주의 깊게 다른 사람들을 돌아봅니다. 그들이 정신적으로 받는 고통이 눈에 띄면 우리가 받은 하늘의 자원을 나눠줍니다. 실망한 자들에게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증거해서 그들에게도 하늘의 자원을 나누어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외롭고 곤고한 자들에게도 이런 종류의 하늘 자원이 필요합니다. 우리도 주님을 몰랐을 때는 곤고하고 외로운 삶을 살았는데 주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보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제가 모시고 있던 교수님이 생각이 납니다. 그분은 은퇴하시고 금년에 94세예요. 작년에 로스앤젤레스에서 집회를 다 끝내고 하루가 남아 선생님을 뵈러 갔습니다. 사모님은 7년 전에 돌아가시고 94세이신 할아버지가 잘 걷지도 못하시고 밀고 다니는 기계에 의지해서 힘겹게 걸으며 생활을 하고 계셨습니다. 굉장히 건강하셔서 3년 전 91세까지 혼자 자가용을 몰고 다 다니셨는데, 이젠 다리가 아파서 못 다니신다고 합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큰 절을 하고 나서 “목사님, 얼마나 외로우세요?” 했더니, “외롭긴 뭐가 외로워, 나 혼자 있나?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아무도 없는 빈 공간에서 혼자서 책도 보시고, 차도 마시면서 하루하루 하나님이 부르실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계셨습니다.
그런 삶은 하늘자원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 것을 사람들에게 나눠주어야 합니다. 오늘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가슴이 뭉클하지 않습니까? 여기는 진짜 교회가 없는 지역에 전도를 간 겁니다. 교회가 없고 마을회관에서 자고 그렇게 다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저런데 산다는 것 때문에 아무도 찾아와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인생의 참된 행복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저것을 보면서도 제 마음에 간절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저런 마을이 너무 많으니까 교회는 다 못 세울지 몰라도 누군가가 선교사를 파송해 저런 마을을 대여섯 개 정도 돌면서 복음도 전하면서, 주일이면 10시, 12시, 2시... 예배를 드리면서 목자 없는 양 같은 사람들을 돌아볼 목자는 없을까하는 고민을 합니다. 하늘자원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교회 안을 돌아보면 정말 경제적으로 곤궁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하는 것, 그것이 돌아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게 되면 공동체가 온전해집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낙심해서 갈 길을 모르고 미끄러져 신음하고 있는데, 내버려두면 계속 병든 채, 병든 살로 교회에 붙어 있을텐데 누군가가 가서 위로하고, 사랑으로 권면하고, 진리의 말씀을 들려주고, 그의 마음을 다독이며 위로하고 도와줍니다. 그래서 그 영혼이 다시 살아나고 하나님을 기뻐하게 됩니다. 그 한 사람이 살아나고 변화될 때 교회는 점점 더 온전해져 갑니다. 그럼 누가 기뻐하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가 교회의 머리이시니 온전하게 되는 자신의 몸을 보시면서 기뻐하실 것이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교회를 이 땅에 세우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고, 성령께서 그 교회 안에 늘 함께 하시니 병든 영혼들이 변화되고 새로워져서 궁핍하고 고통을 당하던 사람들이 형제들로부터 도움을 받아 안정되고 평안한 삶을 살게 될 때 머리이신 그리스도,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뿐만 아니라 신자 안에 영원히 계신 성령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렇게 삼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한도 안에서 우리도 기쁨을 누리면서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철저하게 삼위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삶,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살아가는 삶, 그것이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입니다. 그 곳에 신자의 참된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희락과 평화입니다. 하나님의 면전에서 살아가면서 행복을 느끼는 것, 그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악은 인간에게 참된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자신이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인간의 모든 고통과 불행이 있고 괴로움과 아픔이 있습니다. 매순간마다 마음에 결심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기쁨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한 가지 길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면전에서 사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태양을 등진 사람이 자기 가는 길 앞에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등지면서 기쁨과 행복을 찾는 것은 미친 짓입니다. 거기에는 불안과 고통, 속박과 억압이 떠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여 살며,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면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만 주시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엄위하심까지 즐거워하면서, 향유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행복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 이외에는 누구도 이런 행복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혜 없어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신앙의 고무신을 거꾸로 신고 기쁨의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바보입니다. 행복해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깊이 생각하면서 그렇게 살지 말아야 합니다.
IV. 하나님을 기뻐함의 정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는 것 이외에는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기쁨이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그 기쁨이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하는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기뻐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어떤 때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하게 됩니까? 그 정체가 뭡니까? 그것은 지식이 주는 기쁨입니다. 무슨 지식이 주는 기쁨이냐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히 알게 되는 지식이 주는 기쁨입니다.
제가 그 할아버지 교수님을 잊어버리지 않는 이유는, 제가 신학대학원 3학년 때 너무 가난해서 아이가 우유를 잘 먹는 것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셨는지 학기말에 교수님이 저를 부르시더니 봉투를 내미시면서, 과묵하신 분이 하신 말씀이 “써라” 그러셨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집에 가다 궁금해서 봉투를 열어봤습니다. 그때 신학교 등록금이 50만원 정도였는데, 25만원 정도가 들어있었습니다. 그걸 보고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은혜가 넘쳤습니다. 돈 25만이 기쁨을 넘치게 한 것도 아니고, 그 교수님이 나를 기쁨에 넘치게 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시는구나! 하나님의 자녀인 내가 곤궁하고 고통당할 때 돌아보시는 하나님이시구나! 이런 하나님의 성품을 생각하니까 눈물이 났습니다. 거기서 기쁨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기쁨이 지식의 기쁨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방법은 굉장히 많습니다. 큰 사고가 일어났는데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세요. 하나님이 나를 지키시는구나! 물질적으로 곤궁한데 경제적으로 채워주세요. 하나님께서 나를 기억하시는구나! 등등의 방법으로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들이 알게 될 때마다 마음속에 기쁨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사건을 통해 하나님을 깨닫는 것은 가슴에 다가오긴 하지만 작은 부분들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본격적으로 가르쳐주십니다. 이렇게 비유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중국 사람에게 한국 노래를 한 소절만 가르쳐 주었어요. “송아지, 송아지, 송아지......”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전곡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이런 분이구나를 깨닫는 것을 한 소절을 가르쳐주는 것에 비유하자면, 전곡을 가르쳐주는 것은 바로 성경이 하나님에 대해 전체적으로 가르쳐주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하나씩 체계적으로 배워가는 것에서 오는 지식들이 우리에게 충만한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내가 온전해지고, 내가 다른 사람을 온전하게 하고, 공동체 전체를 온전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큰 환란을 만났을 때 술이나 퍼먹고 방탕한 것이 나을까요? 아니면 이럴 때 내가 무슨 말씀을 들어야하나 하면서 열린교회 도서관을 찾는 것이 나을까요?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왜 꼭 고난을 당할 때만 와서 ‘인생의 벼랑 끝에서’라는 시리즈를 찾습니까? 평소에 들으면 안 됩니까? 그러면 그렇게 인생의 큰 위기를 만나지 않으면 하나님께 돌아오는 길에 대해서는 공부할 필요가 없습니까? 왜 꼭 시험에 들었을 때만 시험을 이기는 시리즈를 듣습니까? 왜 하나님의 사랑에서 완전히 미끄러졌을 때에만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시리즈를 찾습니까? 신자의 삶 전체가 하나님에 관해 날마다 알아 가면, 그러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날마다 새롭게 보여주세요. 거기에서 충만한 기쁨을 누리면서 살고, 자기도 하나님 앞에 온전해지고, 다른 사람도 돌아보아서 온전하게 할 수 있는데 왜 그렇게 하지 않고 꼭 그 상황이 닥쳐야지 말씀을 듣고 연구할 생각을 합니까? 그것도 다행이지만 더 좋은 것은 “복 있는 사람은 주야로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는 자로다”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갈 때 충만한 기쁨이 생겨나고, 그 기쁨을 통해서 자신이 온전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그러면 자기도 더 잘 돌볼 수 있고, 다른 사람들도 잘 돌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공동체는 더 온전해져가고, 온전해가는 성도의 교통 속에서 그리스도와 성도들과 자기 자신이 함께 그 즐거움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기쁨의 삶입니다.
V. 결론과 적용
오늘 이 시간 내가 정말 기쁨의 삶을 살고 있는가를 가슴에 손을 얹고 돌아보십시오. 만약 기쁨의 삶을 살고 있다면 그 기쁨이 어디로 오는 기쁨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내가 정말 하나님을 기뻐하지 못하다면 그 이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신앙생활은 온 몸이 유기적으로 되어 있는 것처럼 총체적인 것입니다. 하나만 한다고 해서 신앙생활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즐거움 자체가 하나님, 즉 진리로 말미암는 즐거움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진리를 사랑해야 합니다. 진리를 향하여 살 때에 진리를 알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면서 우리는 매일매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순종하고 사랑하는 신실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자신이 기쁨으로 가득 차고, 그 기쁨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때문에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그렇게 자기를 돌아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돌아보는 기쁨의 삶을 통해서 우리 주님께 기쁨을 드리게 됩니다.
9. 기쁨과 순종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15:10,11)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남겨주신 그 유명한 포도나무의 비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는 포도나무와 포도나무의 가지와 같은 관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와 예수님 사이에 우리가 신자가 될 때 생명적인 관계가 수립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생명적인 연합의 관계가 이루어지게 되는데, 이 생명적인 연합의 관계가 이루어지고 그 생명적인 연합의 관계를 통해서 예수님의 생명이 신자의 삶 속에 흘러들어가게 될 때에 우리는 예수님이 맺은 것과 같은 동질의 포도나무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 비유를 해석하면서 우리들이 조심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언젠가 제가, 지금으로부터 약 25년 전에 책을 한권 샀는데 굉장히 은혜롭게 읽었습니다. 그 책에서 이 포도나무의 비유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라고 말씀하셨다. 가지의 할 일이 대체 무엇이 있겠는가? 예수께 붙어있기만 하면 되지 않겠는가? 포도나무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기만 한다면 열매를 저절로 맺게 되고 저절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우리가 할 일은 없다. 우리는 그저 예수님께 붙어있으면 되는 것이다.”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때는 신학적인 판단이 없으니까 굉장히 은혜를 많이 받았지만 나중에 보니 완전히 틀린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책을 잘 읽지 않으면 신앙이 휠 수도 있습니다.
[예] (교회를 지으면서 퓨리탄 라이브러리를 만든 것은 깊은 뜻이 있습니다. 저기에 있는 책은 여러분들이 아무거나 읽어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 책을 놓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 식의 의견은 잘못된 성화관입니다. 예수님이 분명히 우리를 포도나무가지라고 말씀하시고, 당신 자신을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런 비유를 해석하는 데는 항상 예수님이 말씀하시려고 했던 비유의 한계를 넘으면 안 됩니다. 그중에 하나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인데, 언젠가 예배를 드리는데 청년 때였나, 전도사 때였나... 어느 설교자가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했습니다. 소금 이야기를 계속하는데 설교가 진행될수록 아주 곤혹스러웠습니다. 마지막에는 “소금을 국에 풀어 보십시오. 소금이 남습니까? 이처럼 예수님이 우리를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을 때에는 우리도 뭔가 선한 일을 하면서 티를 내지 말아야 합니다.”라고까지 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아멘”하고 은혜를 받는데, 저는 참 거북스러웠습니다. 이런 것들은 예수님이 비유를 주신 의도의 한계를 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중국에서는 소금이 자살하는데 쓰였습니다. 여자들이 살다가 너무 힘들면 소금을 먹고 죽었습니다. 소금이 사람을 죽이는 약으로 쓰였습니다. 그러면 이런 것은 어떻게 할 겁니다. 어떻게 해석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해석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소금이라고 하시는 것은 빛과 함께 하나를 염두에 두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부패를 방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하실 때는, 너희는 다른 본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부패하는 세상과 더불어 싸운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너희는 빛이요”하신 것은, 빛은 어두움을 비추는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을 포도나무로, 우리를 가지로 표현하신 것은 중요한 개념은 하나입니다.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은 가지는 말라서 죽는다. 그러니까 너희와 나 사이에는 생명적인 연합이 있다. 그리고 이 연합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나의 열매가 있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열매를 맺는다는 뜻이 아니라 너희와 나 사이에는 생명적인 연합의 관계가 있다는 것이 초점입니다. 그것을 강조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연합의 관계가 있는데 그것을 포도나무 비유에서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 연합을 통해서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교리적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 한번 접붙여진 사람은 잘라내어질 수가 없습니다. 항상 접붙여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 접붙여진 사람은 모두 전부 주님이 기뻐하시는 풍성한 삶의 열매를 맺고 살아갑니까? 아니라고 하는 것이 교리적으로 명백합니다. 이 비유에서 말씀하시려고 하는 결정적인 강조점을 항상 염두에 두면서 해석을 해야 합니다. 곁가지로 이야기가 많아졌습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는 이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해 열매를 맺는 삶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켜 내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계명을 지켜야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께 붙어있기만 하면 되는데 우리가 할 일이 뭐가 있습니까?”하는 식으로 말하면 안 됩니다.
II. 기쁨의 삶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가르쳐준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처럼 너희도 나의 계명을 지켜서 내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너희에게 이것을 가르쳐주는 것은 너희 안에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라” 기쁨의 비밀에 대해서, 기쁨의 삶에 대해서, 그 정체가 무엇인지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A. 사랑 안에 거함
그러면 그 기쁨의 삶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사랑 안에, 예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켜 내 사랑 안에 거하라”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은 삼위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삼위 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들이 보지도 못했고, 또 그 분이 어떤 분이신지 듣기는 들었지만 어떤 분이신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보이지 않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과 삶을 통해서, 특별히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의 눈에 생생히 보일 수 있도록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버리시고 십자가의 못 박히신 모든 우리를 향한 희생적인 생애를 보면서 우리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깊이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나타나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와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는 당신이 사랑을 받으시고, 우리는 당신의 사랑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말씀을 하시는 이유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나의 사랑을 통해서 삼위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라는 것입니다.
40년 정도로 거슬러 올라가, 70년 되기 전의 일입니다. 그때를 생각해보면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래도 거의 모든 가정이 가족들과의 유대와 연대, 자식들에 대한 부모의 장악력이 지금보다 훨씬 뛰어났습니다. 제 기억에도 생생합니다. 항상 부모의 말이 아이들에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지금은 부모의 권위가 없습니다. 지금의 부모가 옛날 부모보다 돈도 더 많이 쓰고, 환경도 더 잘 해주려고 애를 쓰는데도 아이들은 점점 더 부모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느낌이 없습니다. 이런 요인들은 물질문명에서 비롯됩니다.
요즘 급식 가지고 난리를 쳤는데, 많은 학생이 그걸 먹고 병에 걸리고, 음식을 해준 회사가 도산을 하고 이러는데 정말 미개한 나라에서나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나라 사회가 얼마나 부정직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떻게 먹는 것을 가지고 그럴 수가 있습니까? 왜 그렇게 급식을 하느라고 난리를 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집에서 도시락 싸주기 싫어서 그러는 거잖아요? 집에서 가져온 밥 먹고 식중독 걸렸다는 사람 본 적이 있습니까? 어머니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밥을 새로 하고 반찬도 담아 가방에 넣어주시면,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면 장갑을 두 개 끼고 아이들 도시락을 다 거둬서 탑을 쌓듯이 난로에 놓죠. 그런 이것들을 먹으면서, 이런 것을 통해 어머니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요즘 엄마들은 리모콘 양육입니다. 핸드폰으로 전화 걸어서 “뭐하니? 숙제하니? 학원 갔다 왔니? 엄마는 두 시간 후에 들어간다”고 하면서 리모콘으로 양육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런 약점을 하나님께서는 아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들이 머리 속으로 그리고만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무엇인지 예수님의 지상 생애를 통해서 생생하게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신데,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신 그 분은 사람 자신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넘치는 사랑을 가지고 뭘 하셨다구요? 당신의 지혜를 이루셨습니다. 똑같이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사랑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이 목적이 있는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고 사랑하시는 생애를 사셔서 마지막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섬기시고 사랑하셨는데 거기에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그러면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기쁨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삶입니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기쁨의 삶일 수가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돈이 많으면 행복해질 것처럼 생각하지만 돈이 많은 사람들은 인생의 행복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러니까 깊이 생각해 보면 기쁨의 삶이라고 하는 것을 요약하면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삶입니다. 그 삶이 기쁨의 삶입니다. 신앙생활의 과거를 보면 고난이 왔다고 슬픈 것도 아니고 시련이 왔다고 슬픈 것도 아니고 돈을 많이 벌고 만사가 형통해졌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정말 인생을 살면서 행복할 때, 기쁨으로 가득 찬 때는 시련의 비바람이 부는 때였을 수도 있고, 평안한 때였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때에든지 간에 그 기쁨의 궁극적인 원천은 있다가 사라지고 소멸하는 외적인 조건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 하나님께 우리가 사랑을 받을 때 우리는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고난을 받으면서도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 때문에 기뻐할 수 있었고, 시련을 당하면서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자의 가장 큰 기쁨의 유일한 원천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참된 기쁨의 원천 때문에 기뻐하게 되면 우리의 영혼도 건강해지고 우리의 마음에도 행복이 찾아옵니다. 기뻐해서는 안 될 것 때문에 기뻐하게 되면 우리의 영혼이 망가지고 마음은 파괴되고 우리의 삶에는 슬픔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 이외에 다른 데서 기쁨을 찾으면 안 됩니다. 먹는 것, 입는 것, 좋은 곳을 여행하는 것, 반가운 사람을 만나는 것, 갖고 싶던 것을 갖게 되는 것, 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들이지만 이것들로 너무 많이 기뻐하면 안 됩니다. 조금만 기뻐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기쁨은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사랑을 받음으로서 누리는 기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께 사랑받을 수 있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면 이런 기쁨쯤은 버릴 수 있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신의 영적인 건강을 진단해보자면 기쁨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찾아보세요. 내가 요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기쁨이 솟아난다, 기도를 할 때 내 마음속에 은밀한 기쁨이 있다, 내가 주님을 섬기려할 때에 기쁨이 솟아난다, 참 이상하게 내 마음속에 기쁨이 샘솟는다면 건강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이면 영혼의 건강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뻐하는 것은 자기가 욕망하는 것을 만족시켜줄 때에 기쁨이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홍수가 나서 물이라면 지긋지긋한데 누가 물을 먹이려고 한다면 그것이 싫지만, 목이 말라 한 모금의 물을 간절히 생각하고 있는데 누가 맑은 생수를 가져다주면 기쁘잖아요! 이것 때문에 기쁘다고 하는 것은 이것에 대한 욕망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기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욕망이 있는 것이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기쁜 것은 하나님과 교통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기쁨의 삶이 결국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사람이 건강한 영혼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기쁨의 삶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삶입니다. 다른 것들은 모두 영원한 기쁨이 아닙니다. 어떤 것들은 기뻐할수록 우리의 영혼을 파괴합니다. 잠시는 즐겁지만 후에는 고통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B. 계명에 순종함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기쁨의 삶이라고 예수님이 가르치셨는데 그런 사랑을 받는 비결이 무엇인지 예수님이 말씀해주십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처럼 너희는 내 계명을 지켜 내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거한다는 말은 머무른다는 것을 말하는데 잠깐 사랑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계속해서 그 사랑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지속적인 삶을 이야기합니다. 포도나무가 한번 붙어있다고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계속 붙어있어야지 열매를 맺게 되잖아요! 예수님이 아버지께 사랑을 받는다고 말씀하시는데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아버지의 계명을 잘 지키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에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잘 지키므로 아버지께 순종하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나님께 그렇게 많이 사랑을 받으실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먹고 마시고 사시고 마지막에는 우리를 위해 섬기고 궁극적으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이유까지도 자신을 위한 이유가 따로 있고 하나님을 위한 이유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은 이 세상에 내려오실 때부터 두루마리에 기록되어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내려오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예수님 자신의 뜻과 완전히 일치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셨지만 별도의 당신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두루마리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그분은 완성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당신 자신은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흠이 없이 모든 것을 지키신 분이셨고 그랬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범죄 한 우리를 대신해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실 수 있는 순결한 어린양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전체가 계명에 순종하는 순명의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사신 생애는 절대 복종하며 사신 생애였습니다. 율법 아래 태어나셔서 모든 율법을 다 지키며 사신 이 세상에 유일한 인간이었습니다. 율법을 범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대신해 죽을 수 있는 화목제물의 자격을 갖추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를 섬기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명에 순종하신 삶을 똑같이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한 것처럼 너희는 내 계명을 지켜서 내 사랑 안에 거하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켰고, 우리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면 되는 것입니까? 그게 아닙니다. 아버지의 계명이 따로 있고, 예수님의 계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모든 계명이 있는데 그것이 예수님에 의해 더욱 새롭고 완전하게 해석이 되어서 우리에게 새로운 계명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굳이 하나님의 계명이 무엇인지를 애써서 배우려고 하지 않아도 예수님이 주신 계명들을 잘 지키면 그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지키도록 주신 계명들을 모두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된 것처럼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에게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노니 너희는 사랑하라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너희는 사랑하라 그러면서 이 사랑 안에서 너희는 이렇게 살아라”고 하신 것처럼, 친히 권위를 가지고 새 계명을 주셨는데 이 새 계명을 우리가 잘 지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그 모든 계명을 그 계명 안에서 성취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순명의 삶을 살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사랑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께 순명의 삶을 살므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통해 삼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 사랑을 받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계명에 정말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은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가지고 주님이 나에게 주신 계명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반대는 불순종이겠지만 이것과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처럼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께 아첨하는 삶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동기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아닙니다. 계명을 지키는데 기쁨으로 온전히 그 계명을 따르는 것이 자신에게 선이라는 것을 아는 지식에서 나오는 순종이 아닙니다. 자신이 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더 큰 복을 주실 것이라는 얄팍한 생각, 마음 깊이 예수님을 향한 사랑,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애정에 대해 순종을 해야 되겠다는 마음이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면 받게 될 더 큰 보상에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가리켜서 신앙에 있어서 아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진실한 신앙인이 아닙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그런 것을 계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나의 계명을 지켜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했습니다. ‘이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크게 진노하실 것이고, 우리에게 큰 형벌을 내릴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두렵기 때문에 이 계명을 지킨다.’라는 것은 복음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계명을 순종하는 원리가 아닙니다. 그럼 어떤 것이 계명에 순종하는 원리일까요?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듣고 깨달아도 지혜와 지식이 하나님의 것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명은 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탁월한 지혜를 가지고 우리에게 무엇이 가장 선한 것일까를 생각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믿음을 가져야 되냐하면 아직은 내가 이성적으로 다 이해가 안 가지만, 그리고 이것을 지킬 때 힘들지만, 주님이 나에게 “지켜라”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나는 알 수 없는 주님의 탁월한 지혜 속에서 이렇게 계명을 지키고 사는 것이 나에게 가장 선한 것이고 나에게 유익한 것이라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에 나에게 주셨을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계명이 힘들고 어려운 계명으로 느껴지지 아니하고 참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선한 계명으로 느껴지게 되고, 하나님께 순종하게 됩니다. 그때에 우리는 주님께 많은 사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 자신 안에 있는 지혜가 무엇이고, 사랑이 무엇인지를 창조를 통해 드러내신 것처럼, 또 인간이 타락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놀라운 사랑과 지혜를 보여주신 것처럼 당신의 자녀들도 그 안에 있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과 지혜를 바깥으로 드러내 보여주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십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그 아이를 제물로 드리려고 합니다. 그때에 주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제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알았노라”하시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습니다. 그때서야 아셨다는 것이 아니라 다 알고 있었지만 안에 있는 사랑이 밖으로 흘러 넘쳐서 삶으로 표현될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시면서 기뻐하신 것입니다. 사랑의 질서가 형성되어서 그 질서 안에서 당신 자신이 그 사람의 중심이 되신다는 것을 입증이 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계명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한번 계명을 지킨다고 해서 자판기에서 동전이 쏟아지듯이 돈이 쏟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의 계명을 지킨다고 해서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거나 박수갈채를 받는 성공의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계명을 지키는데 핍박의 칼날이 돌아올 때도 있고, 고난과 시련이 찾아오고, 가시밭길이 도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이 그런 순종의 길을 걸어가는 이유는 그렇게 순종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언제나 즉각적으로 부어집니다. 우리가 계명에 순종하기 힘들 때 계명에 순종하게 해달라고 기도해보세요. 그러면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순종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면서 계명에 순종하는 삶과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삶이 일치를 이루어 갑니다. 그 안에 성도의 참된 기쁨이 있습니다. 성도의 참된 기쁨의 근원은 삼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랑입니다. 그 이외의 것은 성도에게 참된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자녀들이 공부를 잘 하고, 사업이 잘 되고, 교회가 부흥할 때 우리들이 기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런 일들은 일반 섭리에 속한 것이지만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 자체보다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아직도 생각하시는구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이런 것들을 느끼기 때문에 감격하는 것입니다. 느끼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을 돌리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기쁨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간절히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이 여러분들의 기쁨의 근원이 되지 않을 때 여러분들의 영혼은 방황하기 시작합니다. 방황한다기보다 병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제가 학교에 선생으로 있을 때는 학생들에게 선물을 참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학생이 노란 국화꽃을 예쁘게 만들어서 선물로 가져왔습니다. 그것을 집에 가져가서 물을 계속 갈아주었습니다. 그런데 국화가 시들지를 않았습니다. 이상해서 봤더니 그 속에서 수경재배가 된 것이었습니다. 생수를 계속 정성껏 갈아주니까 국화가 뚝 잘라진 곳에 뿌리가 나왔습니다. 똑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꽃꽂이에 놓은 꽃하고 비슷합니다. 맑은 생수로 갈아주고 그 맑은 물을 빨아들이면 꽃꽂이 같지 않게 뿌리를 내리면서 잎도 꽃잎도 싱싱해집니다. 그런데 그 물이 더 이상 신선한 물이 공급되지 않으면 잎도 시들고 꽃잎도 마르기 시작합니다. 얼굴에도 나타나잖아요! 화장을 아무리 해도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늘나라 화장품만 하겠습니까? 은혜를 받고 얼굴이 활짝 피는 그런 화장품이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서 은혜의 물에 뿌리를 내리고 거기에서 기쁨이 계속 솟아나야 합니다. 그럼 순종하면서 살기가 너무 쉬워집니다.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내 주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
정말 말씀의 은혜에서 미끄러지지 마세요. 말씀을 꽉 붙들고 생명이라고 생각을 하십시오. ‘이 말씀의 은혜를 받지 않으면 내가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다. 말씀의 은혜를 내가 받아야 한다.’ 말씀의 은혜를 받게 되면 하나님이 사랑스러워집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말씀을 공급해주실 때에 느껴집니다. 그래서 말씀의 은혜를 계속 받습니다. 기쁨과 은혜가 충만해지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꽉 차게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기가 쉬워집니다. 그럼 그 다음에는 주님께 사랑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있는 사람은 점점 더 풍성해지고, 없는 사람은 비참하게 됩니다. 왕년에 받은 은혜 사랑하지 말고 금주에 받은 은혜를 사모하세요. 그래서 까마득히 잊혀진 옛날을 회고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오늘,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경험하면서 살아가십시오. 그것이 순명의 삶입니다. 그런 순명의 삶을 살게 될 때에 하나님께 사랑을 많이 받습니다. 그러면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이 기쁨을 가리켜서 영원한 기쁨이라고 합니다. 영원에 이르는 기쁨, 아무리 기뻐해도 우리의 영혼에 해가 되지 않는 기쁨, 이것 때문에 주님을 잊어버리게 되거나 주님을 배반하게 되는 그런 종류의 기쁨이 아니라 이 기쁨 때문에 주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 기쁨, 이것 때문에 시련과 고난도 이기게 하는 기쁨, 이것 때문에 아픔과 고통을 이기게 하는 놀라운 기쁨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III. 결론과 적용
우리의 주위를 돌아보면 곤고한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런데 곤고한 이유도 다 틀립니다. 어떤 사람은 시험이 들어서, 어떤 이는 고난을 만나서, 어떤 사람은 돈이 없어서, 어떤 사람은 교회에 와서 분쟁이 생겨서...... 그런데 주님을 위한 고난이 있잖아요!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고통을 받는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 속에서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기쁨을 잃어버린 모든 사람들의 공통점은 순명의 삶을 살지 않는 것입니다. 이유가 어떻든지 간에 비록 내가 시련을 당하고 박해를 당해도 내가 계명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면 그 안에 기쁨이 있습니다. 물론 핍박을 당하면 아프죠! 그리고 주님의 일을 하면서 십자가를 지고 갈 때 어떻게 눈물이 없겠습니까? 그런데 눈물을 흘리는 것과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기쁨은 함께 한 인격 속에 공존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서 눈물이 나요. 주님은 내게 큰 일을 맡기셨는데 자신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찢어집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기비하에서 오는 눈물을 흘릴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비탄의 사람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슬픔 속에서 사는 것 같지만 그 슬픔을 능가하는 기쁨이 그 사람 속에 계속 솟아납니다.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계명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손을 모아 여러분들에게 간곡히 부탁을 드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기쁨이 여러분들의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게 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위해 가장 먼저 기도하십시오. 내 영혼이 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영혼의 기쁨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신랑의 음성이 들릴 때 신부의 마음이 뛰듯이 주의 음성이 들릴 때 나의 영혼이 기뻐서 뛰게 하시옵소서. 그런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세요. 미끄러지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로 돌아오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0. 하나님이 기쁨이 될 때
“왕의 희색에 생명이 있나니 그 은택이 늦은 비를 내리는 구름과 같으니라”(잠16:15)
I. 본문해설
잠언은 짤막짧막한 경구들을 모아 둔 것이기 때문에 사실 앞뒤의 문맥을 따지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오늘 이 성경 구절은 우리에게 왕이 살던 시대의 배경에 대해서 지식을 가지면 이해가 더 쉬울 것입니다.
얼마 전에 성경을 읽으면서 그런 광경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큰 잘못을 하고 왕 앞에 끌려가서 이제는 죽음이구나하고 눈을 감고 인생을 깊이 체념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왠지 왕이 그날 기분이 좋아서 죄인에게 “죄인은 고개를 들라” 하는데 목소리가 다릅니다. 그 얘기는 뭐냐 하면, “한 번 봐줄께”라는 뜻이거든요. 고개를 들어보니 왕의 만면에 웃음이 가득한 거예요. 그럼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몇 달을 감옥에서 기다렸다가 재판을 받는 날이 오는데, 제일 재수 없는 죄수가 누구냐 하면 아침에 부부 싸움하고 온 판사한테 재판을 받는 사람, 아침에 차를 몰고 오다 다른 운전수하고 시비가 붙어서 옥신각신하다가 온 판사... 이미 짜증이 나 있겠죠! 물론 법과 양심을 따라 재판을 한다고 하지만 마음이 열을 받았는데 그때 사람들을 곱게 보면 얼마나 곱게 보겠습니까?! 무기징역 할 만한 사람은 사형, 십년 할 사람은 15년, 5년 할 사람은 7년 이렇게 판단을 내리지 않겠습니까?! 반면에 너무 행복한 일이 생겼어요. 아들이 좋은 대학에 합격한 발표가 난 날이라든지, 딸이 좋은 집에 시집을 가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든지...어쨌든지 무엇인가 좋은 일이 일어난 날에 재판을 받는 죄수들은 아무래도 혜택을 받지 않겠습니까!
II. 왕의 희색
하물며 하나님이신데, 판사는 모든 권력을 갖고 있지 않지만 하나님은 모든 힘을 가지고 계신 분이신데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활짝 웃으시면 그야말로 우리에게는 행복입니다. 그런 사람 중에 하나가 에스더입니다. 그 시대에는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 왕 앞에 나아가면 죽임을 당하는 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죽을지도 모르지만 ‘죽으면 죽으리라’하고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왕의 마음이 그때 기쁨이 가득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유대 민족이 큰 구원을 얻는 은혜로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A. 생명의 보증
그러면 이 세상에 있던 신하들의 왕은 자기네 나라의 임금이지만 우리의 임금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잖아요! 신앙생활은 바로 그 하나님의 왕국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사는 삶입니다. 그 왕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신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왕의 희색입니다. 왕의 희색이 가득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것이 바로 생명의 보증입니다. 왕에게 큰 기쁨이 될 때, “그 왕의 희색에 생명이 있나니” 죄를 짓고 형벌을 받아야 할, 스스로 불행해져서 고통받아야할 처지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십니다.
우리가 원래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지난 몇 주간의 설교의 골격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본성적으로 원 수되었던 사람입니다. 그것도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하나님과 속속들이 반감과 대적하는 감정으로 가득 찬 원수 맺은 사이였는데 그때에 우리는 생명이 없었습니다. 아무 생명이 없고, 영혼은 어두움에 굳게 붙잡혀 있고, 우리의 지성은 눈멀었고, 우리의 감정은 충동에 의해 움직이고, 우리의 의지는 헛된 것에 굴복하는 아무 희망이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생명이심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을 멀리 떠난 채 절망적인 인생을 살아가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어두움 가운데서 행하는 일은 어두움의 행실밖에 할 수가 없었습니다. 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어두운 영혼, 죽은 마음으로부터 수많은 악한 행실과 죄악들이 자연스럽게 솟아나서 우리는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더욱 하나님 앞에 진노를 받아야 하는 대상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전에 살았던 생명이 없는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직 여전히 죄인인데도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셨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보다 훨씬 더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많았고, 우리보다 먼저 교회에 다닌 사람도 많았고, 우리보다 더 선하고 지식이 많은 사람도 많았는데, 이상하게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희망 없이 어두움 속에 살고 있었던 비천한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불러내셨습니다.
누구에게도 믿어지지 않는 복음인데, 어느 날 그 어리석은 복음이 내 귀에 들릴 때, ‘아, 그렇구나! 나는 정말 더러운 죄인이구나! 나는 정말 무익하기 짝이 없는 더러운 인간이구나!’를 뼈저리게 느끼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한 것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서 회개하게 하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을까? 그 큰 은혜로 구원받은 후에 이렇게 하나님을 향하여 온전하게 살지 못하는 미력한 인생인데 왜 나같이 쓸데없는 인간을 구원하셨을까? 하나님이 왜 나 같은 사람을 기뻐하셨을까? 이 모든 것에 대한 대답을 지금은 모두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다만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는 것을 기뻐하셨다는 것을 알 뿐입니다. 나의 의로운 행위나 나의 지식이나 나의 이 세상에서의 지위를 보고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피 공로를 보고 우리를 구원해야겠다고 하나님께서 마음을 먹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죽으셨지만 주님이 죽으신 희생의 공로를 우리에게 전가시킴으로서 우리들이 구원을 얻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엄밀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이 우리를 왜 기뻐하셨는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를 기뻐하시기보다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생명을 버리신 예수의 희생을 기뻐하셨기 때문에 그 희생의 공로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처럼 왕이신 하나님의 기쁨은 오늘도 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생명의 역사를 불러일으킵니다. 한 해가 저물어갑니다. 우리들이 금년에 가장 많이 기도했던 기도제목 가운데 하나가 가족들의 구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의 회심이었습니다.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놀라운 은혜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남편의 회심, 사랑하는 딸의 회심, 이제껏 강퍅하던 우리 아들의 회심... 이런 간증들을 많이 갖게 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이 그 일을 위해 기도하는 우리를 기뻐하셨기 때문에 생명의 역사를 일으켜 주셨습니다.
아이들이 여름에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회심하더니 요새는 은혜가 떨어져서 다시 까분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엄마, 아빠가 그런 아이들을 보며 “회심했는데 왜 저래?”하는데, 자기들도 그랬던 것을 잊어버려요. 신년 사경회 때 은혜 받고 가을 사경회 가기 전에 은혜에서 미끄러진 사람들이 자기면서...! 그래서 제가 엊그제 교역자들을 불러놓고 겨울에 또 한 번 집회를 하자고 했습니다. 회심 집회가 아니라 회심 보존 집회. 그런데 보십시오. 회심 안 한 아이들보다 은혜 떨어진 아이들이 아주 쉽게 은혜를 받습니다. 자기 엄마, 아빠가 그러면서 신앙이 깊어져갔던 것처럼 그렇게 깨어지고, 회개하고, 다시 성화의 길을 가고 하면서 아이들이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돌보지 않고 야생초처럼 내버려두면 죄의 지배 속으로 들어가지만, 부모가 수시로 위해서 기도하고, 교회에서 말씀으로 다그치면 아이들 속에 놀라운 은혜가 일어납니다. 이번에 12월 방학하자마자 영아부부터 전 주일학교가 대심방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한 사람, 한 사람 타일러서 변화시키면 어른하고 똑같이 은혜의 길을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 아들이 2003년도에 “죄와 은혜의 지배”라는 설교를 다 듣고 은혜를 받은 다음에 엄마, 아빠가 주는 용돈을 모아서 그 테잎을 샀습니다. 제가 걱정이 되서 “얘야, 굉장히 어려운 설교인데 이해가 되니?” 하고 물어봤습니다. “아빠, 이제껏까지 들은 설교 중에서 가장 이해가 잘 돼요.” 하고 대답을 해요. 그래서 속으로 ‘네가 은혜에서 미끄러지니 그게 그렇게 이해가 잘 되지’ 그랬어요. 그것이 우리 작년 한 해 동안의 가장 간절한 기도제목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일을 가장 기뻐하셔서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에 구원받지 못한 나의 남편과 우리의 부모님, 내 아내, 우리의 자녀들을 위한 눈물이 계속 흘러내려야 됩니다.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우리가 그렇게 구원받지 못한 가족을 위해 눈물을 흘리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심령이 주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할 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쉬지 않고 계속할 것입니다. 이번 겨울에도 회심하지 못한 아이들은 회심에 이르도록, 회심한 아이들은 회심의 은혜를 보존하도록 열렬히 기도해서 그 아이들이 정말 변화되도록 해야겠습니다. 이번 청년 집회 할 때에도 생명의 역사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어렸을 때 마음이 부드러웠을 때에 기도하지 못했던 부모들이 그들을 위해 마음 아파하며 기도했습니다.
B. 은택을 입음
이 생명의 역사는 구원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왕의 얼굴에 희색이 가득하면 하나님의 은택을 입게 됩니다. 이 은택은 “늦은 비를 내리는 구름과 같도다”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지방은 강수량이 매우 적은 지방입니다. 그래서 비가 오면 그 물을 받아서 먹는 나라입니다. 정기적인 비가 두 번 오는데, 이른 비가 오면 그 비의 덕을 입어 씨를 뿌리고, 막 결실하려는 마지막 때에 늦은 비가 오면 그 비를 머금고 곡식들이 열매를 맺습니다. 햇빛이 따사롭게 비치면 추수하게 됩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제때에 내리시는 것으로 여러 번 묘사됩니다. 이것이 농경사회에 있어서 풍년이 드는 비결입니다. 사람들이 바알 종교를 섬겼던 이유도 이른 비와 늦은 비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바알을 잘 섬기면 비를 제 때에 내려준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신앙이 떨어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힘이 아니라 바알의 힘도 의지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비를 내려주는 구름이 하늘에 가득한 거예요. 맑은 하늘에 늦은 비가 내리지 않아서 뿌려놓은 씨앗들과 무럭무럭 자라난 곡식들이 마지막 결실을 못할까봐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에게 시커멓게 밀려오는 구름은 그야말로 그들에게 기쁜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의 삶은 이런 은택으로 입혀지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면! 여러분, 살라고 태어난 인생인데 죽겠습니까? 살죠. 그런데 그냥 사는 것과 정말 행복하게 사는 것은 틀리잖아요! 그냥 살면 그냥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면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면서 삽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의 마음에 많은 근심을 끼쳐 드리고, 주님의 마음에 도저히 기쁨이 되지 않아요. 그리고 주님의 마음에 끊임없는 근심을 안겨드려요. 심지어는 주님의 마음에 큰 고통이 되는 존재가 됩니다. 그러면 무엇을 해도 하나님의 축복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안 되는 사람은 돈도 못 벌고,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하나님이 그런 유치한 방법으로 당신의 살아계심을 보이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사람도 돈을 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냥 돈만 주어질 뿐이지 생명이 없습니다.
어젯밤에 오랜만에 메일을 열어보니 열두 명이 메일을 보냈어요. 그래서 오랜만에 답장을 썼는데, 그런 편지를 받을 때 마음에 큰 위로가 되는 편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이제껏 자신의 생활은 어두움 속에 칙칙하고, 왜 사는지도 모른 채 곤고한 인생이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까 자신이 너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가 인생의 어두운 길에서 자신을 살렸다는 거예요. 그리고 주님이 자신의 마음에 살아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에 찬양이 꽉 차 있는 거예요.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그렇게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의 마지막 부탁은 항상 똑같습니다. “목사님, 오래 사세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들 위해서 하는 소리지요! 오래오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달라는 뜻이겠죠!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행복하게 했을까요? 돈? 아닙니다. 명예가? 아니요. 젊음이? 아니죠! 뭐죠? 거기에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 생명은 곧 우리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면 내가 하는 모든 일이 그냥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생명의 역사를 불러일으킵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속에 그런 일이 더 많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기뻐하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기뻐하시게 되면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거들던 사람들이 그 일을 하면서 주님을 만납니다. 처음에는 누가 시켜서 했는데, 직분을 주어서 할 수 없이 부담감 때문에 맡았는데 하나님이 그 교회를 기뻐하시고, 그 사람을 기뻐하시면 그 사람을 돕는 사람들이 그를 돕는 가운데 생명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돌아볼 필요가 없습니다. 너무나 하나님의 생명으로 가득 차서 그 일을 시킨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 잘하고 싶어요? 거기서 생명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무엇을 해도 거기에서 은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우리의 간증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생명의 은택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직장 생활에서 주님을 만나는 기쁨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사용하셔서 이곳에서 주님의 일을 이루시는구나!’ 가정에서 은혜의 간증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가정과 함께 하시는구나! 우리에게 생명의 은택을 입히시는구나! 우리는 그렇게까지 하나님을 섬기지 못했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복은 너무나 놀랍구나!’ 매일매일 이웃을 만나서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이 아름다운 간증을 이야기해도 모자라리만치 많은 간증.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예수 예수 귀한 예수 믿음 더욱 주소서” 이러한 간증의 은혜로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것이 뭐죠? 하나님이 은택을 입히시는 것입니다.
III.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가 되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사람의 인생은 개울은 파져있지만 물이 흐르지 않는 개울과 같습니다. 생명이 없습니다. 아무 물도 흐르지 않고 그 메마른 곳에서 밑을 내려보니 가까이 가기도 싫을 정도의 악취가 나는 더러운 오수가 절절절 흐릅니다. 시커먼 색깔의 오수가 흐르고, 그 가장자리에서는 이름이 뭔지도 모르는, 향기도 없고 모양도 없는 더러운 가시 덩굴이 가득 자라서 인간의 접근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사람의 인생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사람의 인생은 얼마나 무미건조하겠습니까? 물질이 많으면 그것 때문에 교만해져서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지겠죠! 물질이 없으면 세상에 대한 염려와 근심 때문에 주님을 의지할 시간이 없겠죠! 마음에 여유가 없겠죠! 고난과 어려움이 오면 그것 때문에 사랑해야 할 사람들끼리 서로 물고 뜯으면서 원수 맺으면서 고통스런 시절들을 보내겠죠! 그리고 모든 것이 형통해서 여유가 있으면 타락하겠죠!
우리 주위에 일어나는 모든 환경의 변화는 우리 마음이 가지고 있는 주된 본성에 의해서 활용되어집니다. 그러니까 참된 행복은 우리 주변의 여건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본성 자체가 변화되어서 영혼이 올바르고 아름다운 힘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런 기쁨을 드리는 사람이 될 때에 생명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의 인생은 맑은 물이 콸콸 흐르는 커다란 개울과 같습니다. 막힌 것이 없이 형통한 인생의 길을 지날 때에는 도도히 흘러서 그 개울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평화를 줍니다. 시련과 어려움이 와서 많은 방해물들을 만나게 되면 그 돌멩이들을 지나면서 개울이 노래를 하는 거예요.
오늘 수요예배 시간에 조경의 권위자이신 한희동 집사님이 여기 나와 있는데 이런 설교를 해서 쑥스럽지만, 미국에 집회를 갔을 때 그곳 목사님이 제게 산책을 좋아하냐고 물으시면서 저를 어딘가로 데리고 갔습니다. 어딘지는 모르지만 언덕 위로 조그만 전철을 타고 올라갔더니 숲 속에 예쁘게 지은 도서관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예쁘게 지은 도서관은 처음 봤습니다. 거기를 산책하면서 인생과 신학, 성경,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건축물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습니다. ‘어떻게 돌멩이로 이렇게 예쁘게 지었을까?’ 그러면서 걸어가며 돌멩이를 두드리며 ‘이것은 무슨 돌멩이일까? 이것은 무엇으로 만들었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깜짝 놀랄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돌멩이로 죽 지어진 건물 옆에 잔디밭과 나무를 심은 정원을 넓게 만들고 거기에다 인공 개울을 만들었어요. 개울이 휘돌아서 흐르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어느 한 곳을 지날 때에 돌멩이를 걸리게 놓고, 그러다 한참 똑바로 흘러가다 저기다 몇 개를 놓아두었어요. 그래서 목사님께 물어봤죠. “목사님, 저 개울을 보십시오. 건축하는 사람이 이렇게 휘돌아서 지금 s자로 개울을 만들었죠. 그런데 왜 커다란 돌멩이 몇 개씩을 군데군데 놨을까요?” “모르겠는데요.” “소리입니다.” 물이 흘러가면서 돌멩이가 있으니까 와글와글 하면서 내려오다 또 조용히 내려오다 저 밑에 폭포쯤에 가서는 큰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거예요. 얼마나 재미있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의 인생은 항상 형통한 게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난을 주십니다. 흐르는 물이 없는 마른 개울과 같이 하나님이 안 기뻐하는 사람은 그러한 인생의 때에 원한과 상처, 고통과 아픔으로 꽉 찬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그렇게 큰 고난의 때에 아름다운 소리가 납니다. 마치 바이올린 연주가가 천천히 연주하다가 절정에 가서 강하게 연주하며 아름다운 소리가 막 쏟아져 나오듯이 인생의 고난과 고통의 시기를 지날 때에 가장 아름다운 노래가 나옵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아름다운 수많은 찬송가들이 가장 고통스런 시기에 씌어졌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백합화와 같습니다. 가시에 찔리면 찔릴수록 향기를 발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가 인생의 시련을 만날 때는 노래합니다. 평탄할 때는 도도히 흘러서 보는 사람의 마음에 평안을 주고, 시련을 만날 때는 아름다운 멜로디로 우리 주님을 찬송합니다. 그러면서 막 흘러갑니다. 그렇게 개울이 그 물을 가득 끌어안고 흘러갑니다. 개울은 그것만 할 뿐인데, 그 물을 먹으면 물속에서도 생명이 생겨나고, 물 밖의 언덕에 시뻘건 땅에서도 풀들이 돋기 시작하고, 꽃들이 피기 시작하고, 나무들이 자라기 시작하고, 새들이 깃들기 시작하고, 벌레가 깃들고, 짐승들이 깃들고 이윽고 사람들이 이주를 와서 기름진 개울 옆에 밭을 일구면서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합니다. 다만 물은 흘러가기만 했을 뿐인데 이런 생명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그래서 이상하게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은 일을 많이 합니다.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자기가 일을 많이 해서 하나님을 섬겼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주님을 믿으면서 살 뿐이었는데...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게 주 밖에 없네
그 사랑 강 같이 흐르고 그 손길 치료하네
아무것도 없고, 그냥 날마다 주님이 나같이 더러운 인간을 위해 생명을 버리고 십자가에서 자기를 다 버리셨는데 나는 무엇을 하고 살까? 그러면서 매일매일 주님을 더 사랑하려고 애썼을 뿐인데 그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자체가 흘러가는 강물이 된 것입니다. 강물이 흘러가면서 철새들 보고 날아오라고 손짓 한 적 없고, 산에 있는 나무들 보고 내려와서 같이 살자고 부른 적이 없어요. 그냥 흘러가기만 했는데 그렇게 수많은 생명이 깃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택의 역사입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관건은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소원, 그것은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머저리 같은 사람들은 “목사님, 담배 피는 것이 죄인가요?” 하고 묻습니다. “목사님, 취하지 않게끔만 술을 먹는 것은 죄가 아니겠죠?” 왜 그렇게 주님이 주신 자유를 가지고 죄의 벼랑 끝에서 재주를 부리십니까? 하나님이 슬퍼하시지만 않으면 갈 데까지 가보겠다는 인간과, 반대편으로 가서 ‘나는 아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중에 못해 드린 것이 너무 많아’하고 생각하는 사람 중에 누구의 영혼이 더 안전하겠습니까? ‘내가 주님을 위해 안한 게 뭐가 있나?’하고 생각하는 사람과 ‘내가 주님을 위해 해드리지 못한 것이 얼마나 많은가?’하고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 영혼의 건강함의 차이가 얼마나 크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겨우 죄 안 짓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여기 있으나 떠나 있으나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 ” 이것이 우리 마음에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께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인생의 자리에 처해 있든지 간에 그 상황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상황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고 있습니까? 그러면 염려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큰 교회를 목회하면서 주님께 영광을 돌려요. 주님이 그 종을 아주 기뻐하세요. “너는 내 마음의 기쁨이구나!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로구나.” 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세요. 어느 날 모든 사역이 끝나서 은퇴하고, 이제는 중풍에 걸려서 지팡이를 짚고 간신히 기동하며 시골에서 아무 할 일 없이 성경이나 읽으면서 지내는, 아무것도 자신에게 사역이 주어지지 않는 시골 할아버지가 되었어요. 그때에도 그는 하나님의 기쁨이 됩니다. 하나님은 그가 무엇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그 사람이었기 때문에 기뻤던 것입니다. 다윗을 만날 때 하나님의 마음이 그런 마음이었죠!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그는 내 마음에 합한 자라. 참 기쁘구나!”
반대로 가난할 때에 주님의 마음에 깊은 고통을 드리는 신자였어요. 그런데 그가 돈을 많이 벌어서 고급 승용차를 타고 어마어마하게 큰 집에서 일꾼들을 거느리면서 호화스런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환경이 바뀌었으니까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 사람은 그 사람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IV. 결론과 적용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는 것, 우리에게 있어서 그 이상 소중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제왕의 면류관을 쓰고 주님의 마음에 슬픔을 주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는 가난한 농부로 살면서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는 인생이 더 많은 생명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항상 무엇이 잘 안 될 때에는 하나님 앞에 이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정말 주님의 마음에 내가 기쁨이 되고 있을까?’ 곳곳에서 내가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된다는 표징을 보여주실 때 우리의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의 삶 속에는 꿈꾸는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간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만 사랑하시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집니다. 그러면서 인생을 매일 매일 걸어갑니다. 물론 그 길은 고난의 가시밭길을 지날 때도 있고, 마실 물이 없어서 마라와 같이 쓴 물을 머금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기 위해 살던 사람, 그래서 어떤 환경에서도 주님을 굳게 붙들고 세상의 명예와 권세와 재물 대신 주님을 간절히 찾던 사람, 주님이 내 마음에 기쁨이 되고, 내가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기 원했던 사람들만이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기뻐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을 버려야 됩니다. 그리고 무엇 때문인지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기뻐하고 계시다면 더욱 더 주님의 십자가를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실 때에만 우리가 주님의 사람이지, 분초라도 주님이 우리를 놓으시면 우리는 가장 더러운 인간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의의 근거가 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굳게 붙들고, 우리는 다만 예수 죽인 것을 우리의 몸에 짊어지고 모든 생명이 예수 통해 나타나는 것을 믿으면서 매일매일 살아야 합니다. 때로는 넘어져도 최후 승리를 믿으며...... 믿음으로,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기쁨의 삶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