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를 잊지 말라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신 8:11)
녹취자: 백지영
그동안에 수요일 날 신앙과 참된 은혜체험이라는 주제를 어떻게 보면 조금 딱딱하기도 하지만 우리 머리를 두드리는 작업들을 12번 정도 했나 그렇습니다. 아직도 할 게 많지만 한 가지 주제만 계속하면 너무 물리니까 이것으로서 신앙과 은혜체험은 일단락을 짓고 내년이라도 혹시 기회가 닿고 교회적으로 필요가 생기면 제 2부를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수요일 날 시리즈도 끝났고 주일날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라 시리즈로 한 것도 지난 주로 끝났고 주기도문도 끝났고 모두 끝났습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주일설교, 오후설교, 수요설교가 각각 다른 시리즈를 시작을 하는데, 오늘은 그 시리즈와는 상관이 없이 감사절이 다음 주일 우리가 지키기 때문에 감사에 관한 것을 오늘 말씀을 드리고 그리고 새롭게 각 시리즈 별로 다시 설교가 시작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시리즈가 시작이 되도록 위해서 꼭 기도를 해주셔야합니다.
14절을 한 번 더 보겠습니다. 13절에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아멘.
이 신명기는 신명기에서 이 ‘신’(申)자가 한자로 아주 어려운 신자입니다. 납신, 거듭 신이라고 하는데, 하여튼 히브리말로 성경의 제목으로 본다면 이 신(申)이라는 말은 두 번째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서는 듀트로노미(Deuteronomy)라고 그러는데 듀트로(Deutero)라는 말은 두 번째라는 뜻이고 노미(nomy)는 노모스(nomos) 율법이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 율법입니다. 가만히 신명기를 읽어보면 출애굽기에 다 나온 것들이 많습니다. 신명기에 중복되는 것도 많고. 그런데 이 신명기는 그럼 왜 그런 명령이 붙였느냐 하면 신명기 이 전체가 역사적 사건의 기록보다는 모세의 메시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미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다 말씀을 주셨는데도 모세가 죽기 전에 다시 한 번 이스라엘 백성에게 종합정리해서 유언적 설교를 남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신명기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오늘 이 8장에 보면, 그러니까 이 신명기의 구도는 과거를 회고하고 앞날을 전망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제 모세가 죽을 때에는 가나안 정벌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요단강 가까이까지 왔고 요단강을 건너서 공격을 하면서 그 땅에 쳐들어가서 차지함으로써 하나님이 그 아브라함 때로부터 땅을 주리라고 한 그 약속이 성취될 것이었단 말입니다. 그런 상황에 놓여 있을 때 이미 애굽에서 자기가 80이라는 나이에 믿지도 않는 백성을 향해서 나는 하나님이 보냈고 그리고 너희들은 나를 따라서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으로 가야한다고 이렇게 말할 때에 백성들이 코웃음도 안치던 그 때로부터 시작을 해서 4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모세로부터 이 낭랑한 설교를 들을 때 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광야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광야길이 한 달 반이면 갈 수 있는 그 길을 하나님께서 39년이 넘는 세월, 40년이 약간 안 되는 세월동안 광야에서 유리방황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똑같은 광야인데도 한 광야에 있으면서도 그 광야에서 똑같이 일어난 일인데도 예전에 일어난 일은 다 잊어먹기 쉬운 것이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신명기에서 총 주제는 ‘잊지 말라.’, ‘잊지 말라.’ 계속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잊으면 큰일 난다.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잊지 않는 것입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뭔가 새로운 것을 찾아갈 생각만 하면 안 됩니다. 항상 뒤를 돌아다보면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잊지를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잊지 말도록 상기시키면서,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미 약속을 받았기 때문에 요단강 건너편에 아무리 기라성 같은 족속들이 살고 그들이 그 땅을 강력하게 지키고 있어도 모세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는 약속에 신실하시기 때문에 그 백성에게 그 땅을 주시고야 말리라 분명히 주시리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러니까 모세의 눈에는 뭐가 보였느냐 하면 들어가서 살게 되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이 보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도자의 통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통찰력 있는 지도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뿐 아니라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전과 통찰이 있는 지도자의 뒤를 따라서 사는 백성들을 안정감이 있고 복이 있고 고난의 받아도 가치 있는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도자가 비전이 없고 통찰이 없고 이리 헤매고 저리 헤매면 큰일 나는 것입니다.
(예화) 옛날에 군대에서, 여기 특공대출신 계신데 잘 아실 것입니다, 밤에 독도훈련이라고 지도보고 찾아가는 그래서 지도 한 장씩 주고 너희들 몇 월 며칠 몇 시까지 아무개 산으로 오라고 풀어놓았는데 새까만 밤중입니다. 그런데 소대장이라고 와서 자기는 사관학교에서 열심히 배웠다고, A학점 받았다고 이제 나만 따르라고 하는데 사람들이 그쪽으로 가는 것 아닌 것 같다고 하면 잔소리 말고 나만 쫓아오라고 그래서 밤새도록 고생을 해서 약속한 시간에 산꼭대기까지 올라가서 하는 말이 “여기가 아닌가벼.”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만약의 우리들의 지도가자가 그런 식의 지도자라고 한다면, 그렇게 당한 사병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죽이고 싶다고 합니다. 너무 너무 고생을 하고 갔는데 아닌가봐 하니까, 그러니까 그런 지도자와 살아가는 백성들은 고달프고 고통스럽습니다. 더구나 그런 것들이 신앙생활에서 그렇다면 얼마나 고달프겠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국가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하나님께서 정말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고 그리하여 깊은 미래를 향한 통찰을 가진 지도자들을 하나님께서 세워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요즘 보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금방 전쟁이 날 것같이 난리를 치다가는 또 돈을 왕창 내야 되는 것처럼 그러다가는 또 갑자기 판문점을 통해서 장사꾼들이 왔다 갔다 한다고 그러고 도대체 혼란스러워서 신문을 못 보겠습니다. 자꾸 그렇게 혼란스러우니까 좋은 소식이 많이 생겨도 마음이 적지 아니 불안합니다.
그런데 이 모세는 그런 통찰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도 않았을 때에 들어간 다음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통찰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들어가면 들어가서 정말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짓지 아니한 집에서 살고 심지 않은 포도나무를 먹고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놓은 포도즙 틀에서 포도즙을 짜고 이제는 구지 돌아다니면서 유리 방랑하는 일을 하지 않고 내 집을 짓고 살아야 하겠다고 그런 생각을 할 때에 그때에 그 사람들이 얼마나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가나안 땅을 바라보았겠습니까? 멀리서 바라보면서. 더군다나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불릴 정도로 아주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물론 상대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니까 이제는 먹고 사는 모든 문제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이 눈앞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것 밖에 안 보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선지자적인 통찰을 가지고 있던 모세에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곳에 들어간 다음에 겪게 될 말하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직은 생각지도 못하는 그러한 위험과 불신앙의 장애들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풍부에서 오는 망각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옥토로 너희에게 주실 텐데 그러면 너희가 거기서 배불리 먹고 하나님을 찬송할 텐데 그러나 너희는 스스로 두려워하고 스스로 삼가 해야 하느니라. 왜? 풍부할 때에 즉 배불리 먹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우양이 번성하고 은금이 증식되고 소유가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그런데 이것이 아주 정확한 통찰입니다. 그리고 이 예상대로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이 설교를 할 때만해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평면적인 느낌으로 아멘은 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이것이 지금 얼마나 절박하고 미래에 신앙을 따라 사느냐 아니면 신앙을 버리느냐 하는 그러한 갈림길에서 절박하게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메시지인가 하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온전히 느끼지 못한 것입니다.
선지자는 통찰로서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마지막에 죽을 때 그 모든 전망들을 바라보면서, 왜 그랬습니까? 물론 모세가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람이었기 때문에 미래의 일을 예견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지도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구인지를 모세처럼 철저히 경험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40년 동안 보았습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할렐루야 찬송 부르고 놀랍게 주님을 경배하고 찬송하고 하나님 밖에는 참 신이 없다고 노래 부르던 그 사람들이 그 입을 가지고 삼 일 만에 마라에서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지 않았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군가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모세는 어떤 의미에서 절대 이스라엘 백성들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신뢰하지 않은 것만큼 모세는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가끔 목회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이 교인들 때문에 속상한 이야기하고 누가 배반했다고 그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여러분, 모세를 보십시오. 진짜 초대형 교회를 담임했습니다. 남전도회원만 60만 명이었습니다. 여전도, 유년주일학교, 노년부 빼고 남성만 60만 명을 목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결국을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속에서 죽도록 고생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면서 모세가 당했던 그 대부분의 고난이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도사리고 있는 한없는 불순종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가 하고 따르면 곧 그 믿음을 따라 살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변덕 많은 종교심 때문에 고난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것을 바라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었기 때문에 그랬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었기 때문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약점을 동일하게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합니다. 더욱이 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크게 경험했고 광야로 들어서기 전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크게 경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요할 때에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신앙에 있어서 잊어버리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우리로 하여금 자꾸 기억해야 될 것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것도 말하자면 사탄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억하지 말아야 할 것은 자꾸 기억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억하고 잊는데 있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들이 들어가면 풍부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만나도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유리방황할 때는 저축하고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오늘 쌀이 다섯 가마 생겼다고 칩시다. 그것을 어떻게 유리방황하는데 가지고 다니겠느냐 이 말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이 있어도 소용없습니다. 6.25때 이야기 들어보면 사람들이 한없이 피난 가다가 너무 못 견디겠으면 짐 싣고 가던 소를 잡습니다. 잡으면 한 끼 먹고 끝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계속해서 가야 하는데 그 죽은 소를 지게에다 지고 가겠습니까?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유리방황할 때에는 그런 것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부요해 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정말 매일 매일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순종했는데 이제 농사를 짓게 되면 그러면 그득 그득 쌓아 놓는 것입니다. 절여 놓고, 구어 놓고, 쌓아 놓고, 말려 놓고 하면서 광에 가득 쌓아놓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가 축적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금과 은을 바꾸고 보화가 늘어납니다. 그러면서 양 새끼를 치고 번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 땅을 차지하면서 땅에서 계속해서 장막의 터가 넓혀지면서 부요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을 깊이 추구하고 찾으면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부요함 속에서 하나님을 신실한 마음으로 찾고 구하며 사는 것은 가난한 가운데서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받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을 모세는 정확하게 간파를 했습니다. 우리는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도 이렇게 이 말씀에 비추어서 우리 자신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과거를 추억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와 같이 물질이 부요해지고 환경이 여유로워지고 고민이 없는 평탄한 상황이 될 때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들을 인도하여 여기까지 데려왔는지 하는 그 역사를 잊어버렸기 때문에 결국은 그 하나님 앞에서 물질의 부요함 때문에 부요한 삶을 살면서 영적으로도 부요한 사람들이 되는 불행한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살아온 삶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의 땅 종 되었던 곳에서 이끌어내고 인도해서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건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습니다. 이 광야는 아주 거칠고 커다란 광야였습니다. 아마 그곳에서 당한 시험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을 지도하던 모세에게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험이 아마 불뱀과 전갈과 물이 없는 목마름 이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먹는 것은 만나가 언제나 내렸으니까. 그런데 그러한 불뱀과 물리면 온 몸이 펄펄 열이 나고 죽어버리는 그러한 때에 이것을 생각할 적마다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순종함으로 그 뱀에 물려서 다 죽어갈 그 때에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방법으로 모세의 지팡이에 구리 뱀을 매달아서 높이 쳐들고 그것을 보는 자를 살게 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불뱀을 이야기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는 말하자면 신앙이 제대로 있는 사람들 속에는 확 와 닿았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설교를 들으면서 그것을 체험한 세대가 그 설교를 듣고 있었다면 불뱀에 물려서 완전히 소망이 없고 이제는 온 몸에 열이 펄펄 끓고 말하자면 24시간 내에 죽음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기적적인 방법으로 구리뱀을 쳐다보면서 치유의 은사를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한 것입니다. 모세는 무엇을 알려주고 싶어 하는 것입니까? 네가 살아있는 이유가 바로 그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살아있고 또 너희 조상이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오늘날 너를 낳았고 네가 오늘 여기에서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받기 위해서 요단 이편에 네게 서 있는 것이 아니냐고 그것을 깨닫게 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 혹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살아오면서 이와 같은 절망할 때가 없었습니까? 곧 이 세상에 있는 환난이나 혹은 자기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어떤 죄의 수렁에서 그 시험에서 불뱀에 물린 것처럼 물려서 자기의 힘으로 도저히 치료할 수 없고 가서 세상에서 친구들을 만나도 약이 되지 않고 좋은 것들을 사 먹어도 약이 되지 않고 진짜 약을 먹어도 약이 되지 않고 세상에 있는 어떤 것도 그러한 불뱀에 물린 것과 같은 육체와 영혼의 고통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아무런 해결이 없을 때 누가 우리를 건져 주셨습니까? 주께서 우리가 아직 우리를 모르던 시대에 그야말로 정말 병든 자가 되어서 소망이 없이 완전히 문둥병자를 방불할 정도로 그렇게 소망 없이 살아갈 때에 찾아오신 분이 누구셨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나는 누가 말하든지 예수 믿고 사람 됐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내 이름 자체가 간증입니다. 그래서 작년인가 설교하면서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끔찍하게 죄를 지으며 하나님을 반역하고 있을 때에도 그 새벽에 들판에서는 하얀 만나가 내렸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주홍과 같은 죄를 짓는 가장 더러운 죄인이라도 하나님이 그를 용납하시고 그리고 그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리고 그를 새롭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주 앞에 옳다함 없음은
확실히 믿기는 어린 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이 세상에 죄의 불뱀에 물려서 죄 가운데 살아가면서도 고통을 알지 못하고 또 고통하면서도 구원자를 원하지 않던 그러한 무디어지고 아무런 영적인 감각도 없고 신앙의 아무런 감각도 없는 모든 것이 그야말로 죽은 자와 방불한 인생에게 주님께서 치료의 구리 뱀을 들고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그 광야에서 치료해 주셨던 것처럼 우리의 인생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치료해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이것을 잊어버리니까 세상이 살맛이 안 나고, 예수 믿어도 가끔 세상의 모든 곤고한 짐을 홀로 다 짊어진 것 같고 감사가 없습니다. 감사가 없다는 것은 그 신앙 자체가 죽어 있거나 깊이 잠들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지 않으니까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고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착각에 빠지니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구주라 부르고 그 안에서 구속함을 누리고 이렇게 수요일 날 모든 사람이 텔레비전 앞에 있는 이 시간에 이 길을 걸어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의 만나를 먹으며 새 힘을 얻는 것을 인하여 감사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전갈의 위협도 받았습니다. 저는 중동을 가보지 않았으니까 전갈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는데 전설에나 나오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진짜 나온답니다. 성경에도 나오지 않습니까? 한 뼘 정도 되는데 큰 것은 25센티까지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놈이 꼭 가재비슷하게 생겼답니다. 모래 속에 사는데 한번 딱 물면 엄청나게 아픈 것도 아니고 바늘로 콕 찍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답니다. 그런데 24시간 내에 죽는 다고 합니다.
(예화) 한번은 제 동생이 이라크로 해외근무를 나갔는데 한국에서 온지 얼만 안 된 사람들을 놀려먹은 것입니다. 온지 얼마 안 되는데 꾀도 부리고 왠지 사람이 조직의 쓴 맛을 보여주어야 되겠다 생각을 하고 그래서 반장인가 누가 새로 왔는데 인간성이 교정을 해야 되겠다고 일꾼들이 장화 속에다 전갈을 가져다 넣었습니다. 이 사람은 온 지 얼마 안 되가지고 일 나가려고 장화 속에 발을 집어넣었는데 ‘아야.’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그러느냐고 사람들이 와서 발을 빼고 장화를 터는데 전갈이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한 30명이 뺑 둘러서 큰일 났다고 물리면 24시간 안에 죽는데 큰일 났다고 다들 30명이 그러니까 이 사람이, 그런데 물렸다고 해서 갑자기 아픈 것은 아니니까 서서히 벌겋게 부어오른답니다, 약이 없느냐고 이것은 이 지방에서는 약도 없다고 그래서 일 나갈 것도 없고 방에 들어가 벽을 쳐다보면서 나는 아직 더 살아야 하는데 더 살아야 하는데 그러면서 울더랍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 밖에서 가만히 보니까 하루 종일 벽을 쳐다보면서 아무개 엄마 나는 여기서 이러고 죽는다고 그러면서 한없이 울더랍니다. 예수를 믿었으면 회개할 텐데 예수를 안 믿었으니까 한없이 울더랍니다. 그래서 다섯 시간쯤 지난 다음에 바지를 벗기면서 주사를 놓아주었답니다. 8시간 안에만 맞으면 아무 관계가 없는 그런 주사약이 있답니다.
그 전갈에 물려서 약이 없던 그 시대 모든 사람들이 다 죽었습니다. 그런 위협이 이 샌들을 신고 지나가던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엄청난 위협이었습니다. 모래에 수북이 깔려 있는 그 엄청난 전갈의 떼들이 득실거리는 그 광야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났습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셨습니다. 지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지나면서 그 광야 길을 지날 때에 그들은 자신들은 재수 없는 민족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우리를 대적하는 악한 나라의 공격들이 가득 찬 이 벌판을 지나고 그리고 우리를 위협하고 공격하는 이 자연의 수많은 재앙이 기다리고 있는 이 고통스런 광야를 우리들이 지나야 하는가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 그런 회의, 왜 그런 고통, 왜 그런 아픔 속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원망하고 불평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광야 길을 지나야 하는 그 가치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광야 길을 지나게 되면 기다리고 있는 유업에 대한 가치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광야 길을 지나는 이 광야의 행진의 참다운 가치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몰랐기 때문에 이 광야를 걸어가는 인생길이 고달프고 고통스럽고 아픈 인생길이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안 그렇습니까? 똑 같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는 그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그 가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을 한번 보십시오. 신앙생활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의 신앙생활은 고달프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를 믿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한없이 거치적거리는 것입니다. 속박이 되고 구속을 받은 것 같고 자유로워지고 싶은 그런 유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맛이 가서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에 맛이 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이 예수를 믿는 것이 마치 하나님을 위해 믿어주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다가 우리는 이런 위험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에 깊이 깨닫고 이 신앙의 가치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애굽에서 나오지 아니하였더라면 우리는 이런 고통은 안 받았을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그 인생이 얼마나 소망 없는 인생입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 원망하고 불평하는데 돌아가면 안 된다 이것입니다. 또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이제는 한번 건너오면서 돌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용감한 사람들은 가끔 돌아가려고 시도를 합니다. 그러나 세상으로 돌아가 보았자 애굽으로 건너 가 보았자 예전의 그 애굽이 아닙니다. 가곡 가운데서도 “고향에 가보았건만 예전의 그 고향이 아니네.” 그러지 않습니까? 거기가 고향이 아닙니다. 그때는 애굽으로부터 나오기 전까지는 거기가 고향이었을 수 있지만 이제는 거기는 고향이 아닙니다.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건조한 땅을 하나님께서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서 건너오게 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의 고생스러운 과거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너희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건너서 여기까지 왔다. 보라, 하나님께서 너희를 어떻게 인도하셨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는 너희를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신실하게 대해왔는지를 보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전갈의 위험이 있고 물이 없어 건조한 땅을 지날 때 우리는 목말라 죽는 것 같았습니다. 세상에 있는 즐거움들이 우리의 목마름을 채워줄 수가 없었습니다. 허망하고 허망합니다. 채워질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은 땅거미가 지면 어둑어둑해지면 사람들은 그 어두움에 다가오는 공포를 잊어버리기 위해서 먹고 마시는 것을 보십시오. 우리나라에도 불면증 환자들이 꽤 있지만 국민소득이 높아지면 불면증 환자가 상대적으로 늘어납니다. 그래서 미국 같은데서 24시간 텔레비전 방송을 하는데 그 텔레비전 방송을 듣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면증 환자들입니다. 그래서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기 싫어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이 참된 위로와 참된 평화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마치 물이 없는 건조한 땅을 지나서 물을 얻기 위해서 몸부림 쳐도 물을 낼 수 없는 그런 건조한 땅을 지나는 것은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애였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과 같은 것이 우리가 예수를 믿기 전에 변화를 받기 전에 살아온 인생길이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아니한 사람들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이러한 길을 지납니다. 그래서 물이 없는 건조한 땅에서 물을 먹기를 사모하나 그러나 마른 목을 축일 수 없는 물이 없어서 고통 받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굳은 반석에서 물을 내셔서 그 물을 터쳐서 우리의 목을 축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생기를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들이 예수를 믿고 예수를 믿는 것이 힘도 없고 소망도 없고 그러면서 살아가다가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아직 안 찾아오신 분 있고 아직까지도 이 건조한 땅을 지나는 것 같으면 빨리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십시오. 그렇게 계속 살아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예수를 믿고 회심을 감격적으로 하고 은혜도 많이 받았는데 다시 세상으로 갔습니다. 물론 교회는 다녔지만 그러나 하나님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께서 나를 다시 교회로 부르시고 그 안에서 은혜를 주시고 새 삶을 주셨습니다. 그러한 신앙생활의 경험이 우리에게는 말할 수 없는 생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기 전에 살아가는 게 왜 내 인생은 이렇게 막장까지 왔을까, 이제는 소망이 없는 것 같고, 예수를 믿어도 도무지 진전이 없고, 예수를 믿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별로 도움도 되는 것 같지 않고 하는 고통스러운 계곡을 지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 은혜를 받을 때 우리는 마치 우리 앞에서 샘물이 솟아나는 것 같은 기쁨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살아갑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살아가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열린 교회가 여기에 서고 꼭 1년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11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동안에 추수감사절 때만 되면 기껏 하나님 앞에 감사한다는 것이 월급이 오르고, 직장에서 직위가 오르고, 아파트평수를 늘려가고, 아들이 생기고 그런 것들도 물론 감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물질을 주고 하는 은혜는 하나님 앞에 한없이 감사하지만 육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우리가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지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시때때로 주셨던 그 한없는 하나님의 영혼을 향해 베풀어 주신 그 은혜를 한번 기억해 보십시오. 알지 못했던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몰라서 헤매던 인생에게 주님의 뜻을 알리시고 순종하지 않고 불순종하던 강퍅한 나의 마음을 주님의 사랑으로 녹이셔서 순종하게 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를 원하는 진실한 소원을 마음속에 넣어주신 이런 것들을 인해서 하나님 앞에 한없이 감사한 것입니다.
저는 엊그제 교회 세운지 1년도 안됐는데 테이프를 보면서 입을 벌렸습니다. 계산해 보니까 테이프가 1시간짜리 300개 가까이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두 가지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300개가 나왔는데 그것을 하루에 근로기준법에 준해서 8시간씩 설교 테이프를 들으면 40일을 들어야 할 분량입니다. 1년 설교한 것이. 그러면 10년을 설교를 하면 400일을 들어야 합니다. 40년을 설교를 하면 1600일을 들어야 하는데 그것은 밥 먹고 설교만 듣는 것만 업으로 삼을 때 25살에 듣기 시작해서 30살에 끝나는 것입니다. 20대에 듣기 시작해서 30대에 들어와야지 다 듣는 분량입니다. 그러면서 느낀 가슴에 눌림이 오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과연 내가 30년 후에도 성도들이 아, 새롭다 그렇게 설교를 할 수 있을까. 3000개를 토해놓고도. 그런 것이 가슴이 크게 와 닿았고, 또 하나는 열린 교회를 세우고 나서 나는 그렇습니다. 나는 지난 일 년 동안에 일어난 하나님이 먹여주시고 입혀주시고 그런 것도 하나님 앞에 한없이 감사하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가장 커다란 감사는, 지난 일 년 동안 이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자격도 없고 아무 희망도 없고 도무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종을 들 만한 자격도 없는 인생을 통해서 가끔 생수를 터트리시고 영혼들을 흡족하게 하시는 은혜를 매일은 아니지만 그러나 필요한 때마다 하나님께서 베푸셨다는 그 사실보다도 한없이 감사한 것은 없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살아온 삶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그리고 하나님을 붙들며 살 수 없는 인생이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나는 이번에 여러분들에게 이 추수 감사의 한없는 조건을 밖에서 시작해서 안으로 들어오지 말고 안에서 시작해서 밖으로 한번 가보라고 권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갈 길을 모르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소원을 주시고 그리고 그 말씀을 우리에게 주셔서 그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감사함으로 살 수 있는 이런 구원의 은총과 깨달음의 은총을 주신 것을 인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사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불평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영적으로도 하나님 앞에 항상 감사가 넘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더 큰 은혜와 더 큰 사랑과 더 큰 깨달음들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지내왔는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지막으로 하시는 말씀이,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가 맛있었을까요? 30년 후에는 30년도 필요 없고 몇 달 지나지 않아서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는 언제까지 이런 맛대가리 없는 만나만 먹느냐고 고기 좀 먹게 해달라고 소리 지른 게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꿀 섞은 과자 같았다고 했는데 세끼만 먹어보십시오. 어떻게 되겠는지. 그러니까 이 만나는 맛이나 영양가나 그런 차원에서 따질 문제가 아니라 이것이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기적적으로 광야에서 생존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만나가 축복이라는 사실은 사실 만나로 사는 것보다는 진수성찬으로 사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영적인 의미를 다 빼버리고 이야기하자면. 매일 아침 하나님께서 만나로 살게 하시지 마시고 복잡하게 아침에 일어나서 바구니를 들고 주우러 가고 각자 한 호멜씩만 가지고 오고 안식일 전날은 둘씩 가져오고 복잡하게 그러지 말고, 아침에 하나님이 교자상에다 이스라엘 정식으로 차려서 먹고 끝나면 설거지할 필요도 없이 사라지고, 점심식사 시간이 되면 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점심시간이다 하면 먹고 또 사라지고 그렇게 만약에 한다면 영적인 의미만을 빼버리고 계산한다면 그것이 훨씬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또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니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것을 몇 번 먹으면 물릴 것이다 안 물릴 것이다 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수시로 한식 중식 양식 일식 이스라엘식 바꿔가면서 하나님께서 식탁을 제공해 주셨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광야 길은 훨씬 더 기분 좋은 여행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런 식탁을 배설해 주셨다면 매일 하나님을 찬송했을 것입니다. 만나를 5년 10년 매일 먹어서 만나 냄새만 맡아도 질리는데 그것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겠습니까? 하여튼 무슨 공부를 한답시고 두 달을 라면만 먹었는데 몇 년 동안 라면 끓이는 냄새만 맡아도 속이 다 뒤집힙니다. 만나도 비슷했을 것입니다. 오늘 이 답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만나밖에는 살 수가 없었습니다. 만나를 안 먹고는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경작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오직 매일 아침마다 내리는 그 만나, 불평하던 투덜대던 그러니까 투덜대면서도 주우러 나가는 것 그것밖에 없습니다. 투덜대면서도 새벽의 시간에 일어나서 만나를 주우러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으로 밖에 살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나오는 것 재미없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먹기 싫어도 가서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조금이라도 은혜를 받아야지 사는 것이지 그것 말고 여러분이 살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살 수 있으면 한번 해 보십시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주제파악을 했으면 그렇게 쪽박을 깰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애굽에서 종 되었다가 나왔는데 하나님이 돌아보시지 않으시면 광야에서 다 죽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리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실 때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리실 때 그 만나를 주우러 그 광야로 나갔습니다.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 광야에서는 그렇게 애굽 땅에서 먹던 고깃국에다가 정욕에 좋은 마늘 먹고 부추 먹고 참외 먹고 그러면서 살 수 있게끔 되지를 않은 것입니다. 그것은 다 애굽 땅에 있을 때 먹던 주식입니다. 그리고 이제 광야에 딱 들어서게 되었을 때 이는 싫든지 좋든지 광야를 지나게 하는 유일한 양식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어디로부터 내리는, 하늘로부터 내리는 그 만나를 먹고 사는, 그러니까 그 자리에서 그 만나와 애굽에서 먹던 고깃국을 비교하는 것 그 자체가 비교될 수 없는 것을 비교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래요? 만나하고 애굽의 고깃국을 비교를 하는데, 물론 입맛은 살아 있어서 고깃국이 좋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만나를 손에 들고 있는 그 사람이 옛날에 고깃국을 먹던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듭났습니다. 구원받았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뒤집어서 이야기하면 그렇게 고깃국 먹고 싶어서 부러워하는 사람을 애굽 땅에 가 놓으면 그러면 애굽 땅에서 살 수 있느냐? 잠시 살 것 같은 착각이 들지만 가 보아야 못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도 돌아가지 못하도록 경륜하신 것입니다. 살 수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일치감치 우리는 예수를 믿고 거듭났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이제는 우리가 애굽의 땅에서 먹고 마시던 그런 것들로 우리의 삶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른 새벽이 이슬처럼 땅에 내리는 그 하나님의 만나를 먹고서야 살아갈 수 인생이라고 하는 자기 신분에 대해서 확신을 갖고 그리고 그 유혹을 끊임없이 뿌리치며 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것을 정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리를 안 하고 살아있는 입맛만 가지고 자꾸 고기 생각하고 정력에 좋은 마늘 생각하고 부추생각하고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유혹을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끊임없이 받았던 것처럼 우리도 받는 것입니다. 제가 늘 말씀드립니다만 이미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는 재물과 명예가 높아지는 것과 넓은 땅과 집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구 얼굴 뜯어고쳐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미인이라고 아무리 추켜세워도 그것 가지고는 참다운 영혼의 만족을 얻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잠시는 그럴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옛날의 입맛이 살아있으니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잠시입니다. 그리고는 곧 광야로 돌아가고 싶은 사모함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험해 보기 위해서 얼마니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데 시험을 해 볼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 성가에 나와 있는 것처럼 “꽃처럼 향기 나는 나의 생활이 아니어도 나는 주님이 좋을 수밖에 없어요.”,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의생활이 그렇게 화려하고 끗발 날리는 생활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원합니까? 하나님이 필요하면 그렇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광야를 지날 때에 이스라엘 백성 한 가운데에 무엇이 쳐져 있었습니까? 성막이 쳐져 있었습니다. 그 성막이 화려하고 아름다웠습니까, 추레하고 너절했습니까? 그러나 두 가지 대답이 필요한데, 속에는 화려하고 찬란했습니다. 그러나 겉은 어땠습니까? 가죽 같은 것으로 껍데기를 했으니까 비 맞고 바람맞고 햇볕 내리쬐고 또 그것을 걷어가지고 또 피고 또 피고 그것을 몇 십 년을 했는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 탔고 누르퉁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휘장을 들추고 지나가보면 청색 홍색 아름다운 실들이 있고 여기저기 금보석이 있고 향로에 불이 타고 아주 찬란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지성소로 들어가면 60kg이 넘는 금덩어리의 시온좌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생활이 그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아무런 신나는 일이 없습니다. 술을 먹을 줄을 압니까? 노래방에 갈 줄 압니까? 그런 것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는 하지만, 그런 모든 즐거움을 다 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을 모든 것을 버리고 살아가는 삶을 기쁘고 즐겁게 여길 수 있는 그 무엇이 내면에 있을 때에 그 때에 광야 길을 지나면서도 애굽의 삶을 부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할 때에는 애굽에서 먹던 고기를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해 있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보라, 이 세상에 어떤 민족이 하나님과 이렇게 가까이 한 민족이 어디 있으며 하나님께서 자녀라고 불러주신 민족이 어디에 있느냐, 백성들이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가까이 귀를 기울어주시던 특권을 누린 민족이 어디 있느냐.” 그러면서 무엇을 먹고 그런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소유하고 있고, “보라, 눈을 들어서 보라. 너희 앞에 타오르고 있는 이 불기둥과 너희 앞에 떠오르고 있는 이 구름 기둥을 보라. 오늘 아침에도 내리고 있는 이 광야의 이 놀라운 만나의 잔치는 오직 누구만을 위한 것이냐. 이것을 보면서 우리에게는 화려한 노래나 아름다운 음악이나 꽃처럼 향기나는 삶이나 아니면 고깃국의 끓는 냄새나 마늘이나 정욕에 좋은 부추나 그 맛있는 참외나 이런 것들은 없지만 그러나 그 모든 것들 보다 더 소중한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기업이 되시지 않느냐.” 이것을 매일 아침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리신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 만나는 그러나 엄청나게 맛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만나만 먹으면서 사는 일이 고난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미리 다 알려 주셔서 교육하시고 철저하게 하나님이 입을 열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께서 하늘을 열지 아니하면 우리는 굶어죽는다 바꾸어서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말씀을 주시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소망이 없다 그렇게 철저하게 훈련시킨 다음에 복을 주시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열린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이 신앙의 분량에 넘는 복을 받기를 원치 않습니다. 이것이 기도제목입니다. 신앙의 분량을 넘어서는 복을 주시지 마시옵소서. 이것이 기도제목입니다. 신앙의 분량은 유치원 같은데 복을 만약에 재벌 복을 받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 가지고 하나님이 주셨는데도 하나님이 주신 그것 가지고 하나님을 향해 범죄하고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교회에 가시가 되고 상처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큰 복을 받으면, 그렇게 내린다고 해서 물질의 복을 많이 받는다고 해서 그것이 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러나 어쨌든 신앙이 없는데 풍부한 누림을 갖게 되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아십니까? 교회에 와서 세속적인 눈으로 교회 사람들을 재고 그리고 금시발복(今時發福)한 것 자랑하면서 다닙니다. 허무한 인생들입니다. 교회는 그런 것 자랑하는 데가 아닙니다. 들어올 때 맨발 벗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길을 따라서 걸어 들어온 것입니다. 무릇 자랑하려거든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 가지고 그런 것이나 자랑하려고 하고 그런 어떤 자부심에서 헌금이나 하는 것 가지고 자기를 내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 교회에 이익이 안 되고 본인에게 불행한 것입니다. 언제든지 돌려줄 테니 십일조 다 가지고 가십시오. 철저하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은 이 세상에서 받는 그 복과 이 세상에 있는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임을 분명히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정돈을 철저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신앙이 있는 모든 성도들이 물질적으로 이 세상에서 축복받기를 기도합니다. 물론 그렇게 신앙이 많아도 물질의 축복을 받지 않음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작정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좋으실 대로 하시되 그러나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신앙의 분량만큼 복을 내리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어떤 복을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나중문제인 것입니다. 사람이 깊이가 있고 신앙이 깊이 들어가서 하나님에게 감동된 사람이면 주님이 축복을 주시면 주실수록 그 축복을 가지고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자랑하는 그러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40여년이나 만나를 먹이시면서 철저하게 훈련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거기 통과된 사람이 몇 안 됩니다. 얼마나 이 세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는 것이 불가능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매일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매일 매일 만나 앞에서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만나를 받을 적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나로 하여금 살게 하는 유일한 힘이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 있으면 교인들 몇 명 안 되니까, 아니 많아져도 다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보면, 또 맛이 가기 시작하는구나. 이쪽 동네가 맛이 가는구나. 저쪽 동네가 맛이 가는구나. 많은 수는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만나에 대한 사모함이 없고 그 만나가 거칠고 그것을 먹는 것이 힘들게 느껴지고 그것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기대가 사라질 때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있을까요? 불 보듯 뻔한 것입니다. 애굽 생각하고 고깃국 생각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염려와 근심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생이 하나님을 향한 감사로부터 한없이 멀어지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엔빌딩의 주인 록셀러가 매년마다 기자 회견을 하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올해 얼마나 버셨습니까?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벌었지요. 만족하십니까? 아니요. 내년에는 조금 더 벌고 싶습니다." 인간의 욕망이 한이 없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모든 감사로부터 철저히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한없는 조건 속에 살아가면서도 원망과 불평이 가득차서 자기의 영혼을 해치고 육체를 해치고 급기야는 독한 말을 사람들을 향해 뿜어내고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고 하면서 살아가는 이러한 인생으로 전락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광야로 불러내신 이 인생을 향해서 얼마나 크고 위대한 계획들을 가지고 계신 줄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광야로 불러내셨을 때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계획이 얼마나 위대한지, 우리에게 가나안을 기업으로 주고 거기에서 이방의 모든 문화들을 부수고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의 십자가의 깃발을 높이 세우고 우리로 말미암아서 모든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주님을 경배하는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계절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렀는데, 만나를 보면서 어떤 영적인 감각을 가져야지 들어와 가지고 순종하고 광야에 들어왔으니 이제는 하나님께서 하늘을 열고 고깃국을 내려부으시겠지, 뜨거운 고깃국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머리 위로 쏟아 부어지면 전부 다 머리 벗겨지는 것밖에 남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 신앙들을 일찌감치 청산을 안 하니까 예수 믿는 것이 이 고난스런 인생길을 살아가는데 조금도 도움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추수감사절 때도 감사할 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거울을 보아도 더 예뻐진 것도 없고 기도를 많이 했다고 해서 호박이 수박되지도 않았고 돈을 벌었기는 하지만 말로는 하나님이 주셨다고 하지만 월급타고 보너스 타고 남들도 다 타는데 복권이 당첨되었다면 모르지만 그런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감사라고 하는 것이 빨래 짜듯이 하라고 하니까 그냥 감사라고 말이라도 해야지, 그것이 무슨 감사입니까? 그런 손으로 바치는 감사헌금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하박국 선지자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없으면 어떻게 합니까? 농경문화 속에서 사는 사람이 그것이 다 없으면 알거지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요즈음으로 말하자면 보너스도 없고 본봉도 없고 그런 이야기하고 똑같은데 그러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런데 뭐라고 합니까?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그러면서 장엄한 영적인 시각에서 자기의 인생을 인도하시는 이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업이 조금 어려움이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가족이 병들고 고통 하는 일도
(찬양)
그 풍랑 인연 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고 무엇보다도 1년 동안에 주셨던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더 큰 축복은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을 받아서 이 열린 교회 식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저는 일어나면 매일 감사합니다. 새벽에 일어나면서도 나 같은 죄인이 이 순결한 영혼을 가지고 살아가려고 하는 이 성도들에게 설교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감사한가! 이 속에서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찬양합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부족한 모든 것들이 부족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낮아지는 것입니다. 더 낮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해 지고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해도 시험해도 시험의 결과는 ‘진짜’ 이렇게 밖에 안 나오는 것입니다. ‘모조품’ 이렇게 나오면 얼마나 비극이겠습니까? 우리를 하나님이 여러모로 갈아서 집어넣어도 “소속 열린 교회, 이름 아무 아무개, 진짜.” 항상 진짜라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제 시험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보증이다. 그러면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복을 가지고 일생동안 그 복을 통해서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다가, 복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한없이 자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한없이 주셨는데도 우리는 그 한없이 주신 것을 인해서 주님이 주신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축복은 언젠가는 녹슬고 그 다음에는 좀이 슬고 그리고 사라져가고 누군가 우리 후손이 취할 것입니다. 그때 변하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 하나를 가지고 주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아멘 하면서 우리가 주 앞에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한없는 감사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오늘서부터 다음 주 추수감사절 지킬 때까지 이런 영적인 시각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베푸신 한없는 은혜를 생각해 보십시오. 감격 없이는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이름을 높이 찬양하고, 감사헌금 하라고 지금 이 이야기 하는 것 아닙니다. 목표? 우리 교회는 그런 것 없습니다. 내고 싶으면 내고, 말고 싶으면 마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한없는 감사는 우리의 영적인 삶 속에서 되돌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다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