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단과 정결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
오늘 우리가 읽은 이 구절은 욥기 전체에서도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유명한 구절입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알다시피 이 욥은 애매히 고난당한 사람의 대표였습니다. 그는 물론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죄가 없다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이렇게 극심한 고난을 당하고 삶이 가히 파멸에 이를 정도까지 하나님 앞에 징벌을 받아야할 허물은 그에게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욥이 이렇게 커다란 고난과 시련을 당했다는 점에서 볼 때에 애매히 고난 받는 사람의 대명사로 이 사람이 인용되는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에는 애매하게 고난을 받은 사람이 이 사람만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고난을 이야기 할 때 이 사람을 잘 거론하는 이유는 애매히 고난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비교적 믿음으로 순전하게 자신의 신앙을 지킨 사람 속에 들어간다는 점에서 이 욥이 고난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잘 거론되는 이유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당하게 되는 고난이 있고 주시는 때가 있고 또 죄가 없는데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고난을 당해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자기는 죄가 없지만 그러나 공동체 전체를 다루시기 위해서 고난이 오는 때가 있고 자신은 잘못이 없지만 가족들 중에 어떤 사람을 다루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강한 강권하심에 의해서 이런 고난과 시련을 간접적으로 당하게 되는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고난에 관한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모두 다 명쾌하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에 고난 그 자체가 죄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냐 아니면 죄가 아니라 애매하게 당하는 고난이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과 다름없이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은 뭐냐 하면 그 고난에 대한 태도올시다. 태도. 태도. 물론 그 고난이 정말 그 우리에 죄와 그리고 불순종에 대해서 하나님이 불쾌함을 보이시기 위하여 우리를 훈련시키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징계라고 할 때에 그때 그 고난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그렇지 않은 고난과는 다르지요. 그 고난은 우리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 고난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보이기에 앞서서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이 모든 고난이 자기의 죄와 허물과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왔다는 사실을 깊이 인정하고 거기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고 돌이켜 섭니다. 그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나 잊지 말고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성경은 그런 고난뿐 아니라 애매하게 당하는 고난도 말하고 있죠. 애매하게 당하는 그 고난은 우리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신은 죄가 없지만 애매하게 당하게 된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보며 고난 속에서 오히려 더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쫓기를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요지는 이것입니다. 그 고난이 죄로 말미암은 고난이냐 아니면 죄가 없는데도 당하게 되는 고난인가? 이것도 이 구분도 중요하지만 문제는 그 고난이 비록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온 고난이라고 할지라도 그 고난을 경건하게 감당하면 하나님께서 그 고난을 통해 축복을 주시고 만약에 그 고난이 애매하게 오는 고난이라고 할지라도 그 고난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마음으로 경건하게 잘 견디지 아니하면 자신의 영혼에 커다란 누가 된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을 성경적으로 입증할 수 있을까요? 두 가지 예를 한번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처음에 신앙을 잘 받아들였지만 핍박이 오자 곧 그 신앙을 버리거나 쓰러지는 사람을 두고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씨 뿌리는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씨를 뿌릴 때에 그 씨가 돌짝밭에 떨어졌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뿌리를 내렸는데 햇빛이 나니까 타져서 그래서 곧 쓰려져버렸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예수님께서는 잠시 기쁨으로 그 말씀을 받지만 그러나 핍박이 오고 그러면은 그 신앙을 지키지 못하는 것을 그런 종류의 사람들을 그렇게 비유할 수 있다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인제 거기에서 잠시 기쁨으로 말씀을 받은 그 믿음이 정말 구원 받은 자의 신앙이냐 하는 문제는 별개의 문제일 것입니다. 논란의 여지는 있을지 모르지만은 어쨌든지 간에 신앙을 잠시 받아들였고 핍박이 왔는데 그 무슨 뭘 잘못해서 인격적인 문제나 아니 면은 다른 것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그가 믿는 신앙이 잘못됐다고 하는 그가 믿는 신앙이 싫어서 사람들이 박해를 한 거죠. 그거를 애매히 당한 고난인데 그 고난을 받을 때에 끝까지 믿음으로 붙들고 인내하지 못하니까 즉시 그 믿음을 버리게 되는 것이죠. 반대의 예를 들어보자면 다윗이 말년에 당한 많은 고난이 그에 이미 예고된 고난이었습니다. 그가 범죄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집안에서 칼싸움이 그치지 아니할 것과 그리고 재앙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말년에 자기의 자녀들의 다툼과 그리고 여러 가지 국가적인 재앙을 인해서 한없이 고통을 받습니다. 그건 분명히 자기의 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내어 주신 징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징계를 받을 때에 이 다윗이 어떠한 태도로 이 고난과 징계를 감당하였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경건하게 인내하면서 그 고난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의지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비록 그 고난은 징계로 말미암은 고난이었지만 그 고난을 경건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잘 감당하고 인내했더니 하나님께서 그 고난을 통해서 그를 거룩의 사람으로 빚어 가셨습니다. 범죄하고 실패한 적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 고난을 통해서 그 사람은 더더욱 거룩하고 아름다운 신앙 인격의 사람으로 빚어져 갔습니다. 그리고 주옥같은 아름다운 시 속에 신앙의 비밀들을 담아 우리들에게 전해 줄 수 있는 뛰어난 선지자 중에 한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의 고난이 오늘 우리들이 경험하고 있는 고난과 고통, 그리고 우리들이 당하고 있는 시련과 견디기 힘든 아픔들, 이런 것들이 어디로부터 왔는가를 헤아리는 것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의 죄인가 아니면 섭리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애매히 당하는 고난인가 이런 것들을 헤아리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과 함께 오늘 우리들이 강조 받고자 하는 것은 그 고난을 받아들이는 태도에요. 오늘 이 욥이 그가 나의 가는 길을 아시나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나는 모르겠다 이거에요. 그는 아시지만 나는 모르겠다 이거에요. 나는 모른다. 너가 의로운데도 왜 고난을 당하냐? 나는 모른다. 그는 아신다. 오직 그가 나의 가는 길을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아오리라. 이 사람은 자신이 어떠어떠한 죄가 있어서 이러한 고난을 당한다고 하는 것을 아주 명쾌하게 알 수 있었으면 정말 오히려 스스로 행복해 했을 것입니다. 스스로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지력을 동원하고 자신의 지각을 동원해도 자기가 왜 이런 고난을 받아야 되는지 자기는 알 수 없었습니다. 욥의 모든 친구들은 아주 단순하게 모든 인간의 고통은 모든 인간의 죄 때문이라는 공식을 가지고 욥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세계에 깊이 들어가 볼수록 고난의 문제는 아주 쉽게 우리가 그렇게 단정적으로 이야기 할 수 없는 때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고난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따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히려 그 고난의 때에 하나님을 향해서 어떠한 태도를 갖느냐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욥이 말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자신은 이제 더 이상 나의 이 고난이 나의 죄 때문인가? 아니면 내가 죄가 없는데도 이 고난을 당하게 되는가? 이런 것들을 묻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게 뭐냐 하면 분명히 이 고난에는 이 고난의 이유가 나의 죄 때문인지 아니면 애매히 당하는 고난인지 그걸 모두 버선목처럼 내가 뒤집어서 사람들에게 입증해 보일 수 없지만 이 고난에는 목적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됩니다. 여기 23장에 와서 눈을 뜨게 되요. 그게 뭐냐 하면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 고난이 나의 죄 때문에 오는 것인지 아니면 애매히 오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은 그러나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사실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나는 정결케 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이다 이걸 본 거예요. 우리는 아주 분명하게 믿기는 이런 고난을 당하기 전에 욥이 자신의 신앙이 더 정결해지기 원하는 마음이 없었다고는 우리 그렇게 말할 수 없지만은 그러나 관념적으로 우리들이 그랬으면 좋겠다 라고 하는 생각하는 것과 간절히 갈망하게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에요. 여러분들이 간절한 기도의 제목과 하나님 앞에 호소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같이 마음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그러한 기도의 제목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기도 할 때에 그 기도가 막 쏟아져 나오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때도 우리는 기도 잘 하기 원하고 기도가 소중하다는 것은 압니다. 그러나 정말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될 때에 그 기도 할 수 있을 그 때에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알게 되는 것처럼 욥도 정결하게 되기를 평소에 원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없지만 그러나 이 고난을 통과하면서 그는 이 고난의 과정, 그리고 그 고난에 대해서 친구들이 이 욥에 대해서 폄하하고 욥을 비난하고 뭔가 욥을 깨닫게 하기를 원해서 욥을 정신적으로 이 고통을 주는 이 변론의 많은 과정을 통해서 욥은 비로소 이 고난을 당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볼 수 없었던 자기 자신을 보게 된 거죠. 그게 뭐냐 하면 자기는 정결케 될 필요가 있는 사람이다를 본 거예요. 그래서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즉 내가 이 고난을 얼마나 더 당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 고난의 기원이 어떻게 된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그분은 아신다. 이 고난을 다 당하고 나면 하나님께서 한 목적을 이루실텐데 그가 나를 연단하셔서 그가 나를 정금 같게 만드실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에요. 그죠? 우리 부모들도 보면 자식을 인해서 아파하고 힘겨워하는 부모들이 너무나 많아요. 자식이 모두 자식이 아니에요. 어느 자식은 마음에 늘 고통과 근심을 주어요. 어떤 자식은 부모에게 한없는 기쁨과 자랑거리가 되요. 그럼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실로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의 집에 자녀들 중에서 쓸모 있는 자녀가 되기를 갈망해야 되요. 아주 쓸모 있는 자녀. 근데 보세요.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우리가 직접 만나지 못한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뿐 만 아니라 하나님의 집에서 아주 요긴하게 쓰임 받도록 그렇게 된 사람들, 공통점이 뭐예요? 모두 이 고난의 풀무 불을 통과한 사람이에요. 고난의 풀무 불을 통과한 사람. 물론 고난을 통과한 모든 사람이 이렇게 순결해 진 사람이 아니고 고난을 통과한 모든 사람들이 정결해진 사람은 아닙니다. 고난이 우리를 정결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 중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이 우리를 정결하게 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신앙 없이 고난을 통과하고 나면 사람이 아주 포악해져요. 독선적이 되고 그리고 아주 강퍅한 사람이 되요. 하나님 없이 고생만 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을 봐요. 아주 강퍅하고 그리고 가슴 속에 주절이, 주절이 한이 맺혔어요. 쉽게 사람을 신뢰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고난이 우리를 정결케 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 중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의 이 자세가 우리를 연단하여 우리를 정결하게 합니다. 정결하게 합니다.
(예화) 작년에 캐나다에 갔을 때, 집회가 끝나고 나서 마지막 날 그 빙하가 있는 계곡을 이렇게 들어갔어요. 근데 산은 어마 어마하게 큰데 나무는 전부 다 애들 키만 해요. 요만해요. 그런 나무들이 산에 가득 있어요. 그런 걸 볼 때마다 저는 궁금한 게 저 산이 오래 전서부터 있었을 텐데, 왜 전부 나무가 저렇게 작을까? 그랬더니 그런 생각을 마침 하고 있는데 안내원이 쭉 해설을 하는데 이게 뭐냐 하면 거기 서 있는 어린아이 키만도 안 되는 그 작은 나무들이 모두 200년 넘어서 300년 이상 된 나무들입니다. 한번 우리나라에서 태백산맥 같은데서 300년이 된 소나무를 한번 생각해보세요. 뭐 엄청 기품 있는 나무로 자랄 것 아니에요. 근데 요만큼 밖에 안 자랐어요. 왜 그냥 모진 바람을 맞으면서 추운 기후에서 연단을 받으면서 자라지를 못한 거예요. 가지들이 막 휘어있죠. 저는 뭐 음악을 깊이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 속사정이야 다 알 수 없지만 어떤 분이 그런 얘기를 하더라구요. 대부분의 악기를 나무로 만드는데 바이올린이나 첼로 이런 울려서 소리가 나는 이런 악기들을 만들 때에는 가장 중요한 재료가 나무래요. 그런 것들을 악기를 만드는 나무는 이렇게 좋은 환경 속에서 쭉쭉 자란 그런 나무 가지고는 그런 명기를 만들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냥 모진 바람이 부는 곳에서 이 나이를 많이 먹어도 잘 자라지 못하고 속으로, 속으로 단단하게 연단된 나무. 진짜 못을 박아도 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아주 안으로, 안으로 뭉쳐진 나무. 그런 나무들을 선별해서 특별한 그 가공의 과정을 거쳐서 그런 명기가 나온다는 거예요. 100년 200년 가까이 써도 형태가 변하지 않고 변함없이 맑은 소리를 내는 그런 명기가 명장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이거에요.
우리 이 하나님의 자녀들도 똑같습니다. 고난이 없이 어떻게 진실한 신앙의 인격을 가진 사람이 태어날 수 있을까요? 고난과 시련을 당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 사랑을 배울 수 있을까요? 시련과 아픔 속에서 눈물 흘리는 연단이 없이 어떻게 이 내면의 세계에 있는 부패한 본성과 그리고 죄악 된 성품이 정결케 되어 빠져나가고 그리고 깨끗하게 되는 이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수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욥과 같이 정결하게 일생을 살아오고 그의 순전함에 대해서 하나님이 자랑하셨던 사람도 고난을 당하면서 그는 자신이 정결케 되어야할 사람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부족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다운 사람으로 만드시는데 있어서 우리에게 고난과 시련을 주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거에요. 그래서 이 고난과 시련도 어떻게 보면은 하나님의 선물이에요. 선물. 하나님의 선물이에요. 그리고 그것을 잘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만으로도 할 수 없는 그 일들을 하나님이 그 고난을 통해서 하시는 거예요. 고난을 통해서 하시는 거예요. 그 고난을 통해서 모난 우리들의 성품을 다듬으시고 얇고 천박한 우리의 영성을 깊게 하시는 늘 기회주의적으로 살아가기 쉬운 우리의 내면의 본성들을 잘 다듬으셔서 하나님 앞에 살게 만드는 거예요. 고난을 통해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방법을 배우게 하시고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도에 행하며 살아가는 진실한 성도의 행복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해요. 고난을 통해서 인생의 행복이 무엇이지에 대해서 새로운 생각을 갖도록 만드십니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주님을 만난 날부터 이제 것 까지 하나님께서 내게 끝없이 형통함을 주셨던 때에는 그저 좋았던 기억밖에는 남은 것이 없어요. 그러나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고난의 계곡을 통과하며 그 속에서 어찌하던지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치고 이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려고 몸부림칠 때 그때 항상 그때가 지나고 나면 깨닫게 되는 사실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그 고난은 단지 하나님이 나를 새사람 만드시려고 하는 방법이었어요. 그리고 고난당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보여주시기 위한 준비였어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결하게 하시고 고난을 통해서 내 인생의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게 만들어요. 여러분, 고난이 없이 우리의 마음의 초점이 모아져서 하나님 한 분에게로 간절히 향하고 녹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그분을 앙망하고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그분의 은혜를 갈망하는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일어날 수 있습니까? 물론 그런 고난이 물질적인 궁핍이나 외적인 시련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마음이 하나로 모아져서 주님을 간절히 바라며 만져주시고 고쳐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목마를 쯤에는 반드시 내면의 극심한 고통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을 앙망하는 거예요.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여러분들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제가 설교 중에 참된 신자에 표에 대해서 빼 놓을 수 없는 결정적인 특징이 상한 심령, 깨트려진 마음이라고 말씀을 드린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고통이 없이 상한 마음이 될 수 있나요? 아픔이 없이 깨트려진 마음이 될 수 있습니까? 마음에 통증이 없는데 물같이 녹아내리는 일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럴 순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인생을 살면서 말초적인 태도를 가지고 감각을 가지고 신앙생활 할 때가 많습니다. 돈 많고 큰 어려움이 없고 모든 것이 잘 돼 가면 그저 평안하다. 평안하다. 그런 것이 아니에요. 진실로 살아있는 신자는 고통을 찾아가요. 찾아가요. 그렇다고 해서 이것은 하나의 고행주가 아니에요. 고통을 찾아간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죠. 그렇지만 그 감사하는 마음 때문에 감사하다고 할 때 그 감사한 마음 하나 때문에 하나님이 아파하시는 부분도 느낄 수 없다면 그 감사는 하나님께로 온 감사가 아니에요. 한번 사도를 생각해 보세요.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서신서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가슴 벅차오르는 끓어오르는 감사와 그리고 하나님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이 통증을 표현하는 것들이 같은 서신에서 여러 차례 반복이 되요. 보세요. 빌립보서를 예로 들어보십시오. 빌립보 교인들에 믿음에 진보를 인해서 하나님 앞에 한없이 감사하며 그들을 위해서 기도 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감사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하나님을 진실 되게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이제도 자기는 눈물을 흘리며 그들에게 말한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렇죠. 그래 바로 그거에요. 그것이 살아있는 신자의 표에요. 그것이 살아있는 신자의 표에요. 단지 먹을 것이 있고 입을 것이 있고 쓸 것이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모든 것이 만족하고 감사할 뿐 아무것도 통증이 없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건 짐승과 같은 사고방식이다 이거에요. 목회를 하게 하셨어요. 하나님께서 제가 워낙 불비하고 이 땅에 내버려 둬봐야 사람 될 것 같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목사를 만드셔서 목회를 하게 하셨어요. 그게 참 저는 보면 정말 신비해요. 그리고 정말 내가 목회 안했더라면 정말 사람 안됐을 거라는 생각을 해요. 보세요. 왜적으로 얼마나 좁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저희 교회 보고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모입니다. 오늘도 교회 출석의 기록을 갱신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성도들이 모입니다. 교역자들이 자기를 돌보지 않고 열심히 일합니다. 아무 불만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저는 주일날마다 여러분들을 보면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어요.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정말 감사해요. 죄인 중에 괴수와 같은 쓸모없는 인간들을 불러서 이렇게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고 우리같이 불비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수 있게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선택해도 이보다 더 좋은 인생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주일날이면 너무 마음이 아파요. 감사하지 않아서 마음이 아픈 게 아니라 아파요. 깨트려지지 않은 깨트려져서 새 사람 되는 지체들을 보면 그렇게 깨트려지지 못하는 사람들을 봐서 아프고 깨트려지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고 영혼의 변화가 없는 지체들을 만나면 이 내 속에 들려오는 음성이 그래 내가 안 깨뜨려지는데 그대가 깨트려지겠는가? 그대가 변화되지 않는 모든 죄는 내게 있다. 근데 주일이면은 한없는 기쁨과 견디기 힘든 통증이 함께 교차해요.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민망히 여기사 치료에 은혜 허락하소서.
그래요. 언제쯤이면 저 변화되지 않는 지체들이 이렇게 나와 함께 한마음으로 우리의 죄와 강퍅함을 주님께 아뢰고 거짓과 위선과 쓸데없는 자기 자랑을 다 벗어버리고 겸비하게 주님의 은혜에 보좌 앞에 죄를 무릅쓰고 하나님의 긍휼를 입고 만져주시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새 사람 되기를 갈망할까? 어떡하면 거짓과 위선을 벗어버리고 정직하고 진실한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다시 설 수 있을까? 감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감사는 감사고 아픈 건 아픈 거예요. 그러니까 뭐 혼자 잘 하는 것 같다가도 몇 년째 변화되지 않는 지체들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겸비해져요. 그래 나는 사람이 아니요 벌레라. 사람이 아니요 벌레라. 그러면서 때로는 그런 생각도 해요. 하나님 내가 아니라 정말 그 저 사람을 움직여서 어떡하든지 움직여서 변화 받게 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만났더라면 저 지체가 그렇게 긴 세월 동안 하나님 앞에 아픔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이런 것들이 계속 찔림으로 다가와요. 그러니까 이거는 교인이 늘어나고 안 늘어나고 그건 상관이 없어요. 어딜 간들 이런 아픔이 없겠어요? 전 제 얘기를 했습니다만은 여러분들의 아픔은 무엇입니까? 변하지 않는 여러분 자신이 야속해 보이고 여러분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여러분들의 약점에 대한 아픔이 있습니까? 그게 연단이에요. 그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신앙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몸부림치면서 겪는 아픔, 그것들이 여러분들을 연단해요. 연약한 사람들을 강하게 하고 불결한 사람들을 정결하게 두 마음 가진 사람들을 한 마음 되게끔 만들어 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연단하시는 거예요. 근데 이제 문제는 뭐냐 하면 오직 그가 나의 가는 길을 아시나니, 오직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이게 무슨 얘기에요? 이거는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를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자기를 맡긴 사람들만이 고백할 수 있는 말이에요. 맡긴 사람, 그런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고백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연단을 받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태도는 나를 단련하시는 하나님께 자기를 다 맡기고 완전히 맡기고 그리고 그 속에서 철저하게 자기를 포기하고 나의 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면 나는 감격할 수 있다하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가져요.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가져요. 고난 속에서 여전히 자기를 고치고 바꿀 생각을 하지 않고 하나님을 고치고 바꿔서 무엇인가를 해결해 보고자 하는 육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고난에 대해서 경건하게 반응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런 사람들이 그 고난 속에서 유익을 받을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 다 맡기고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면 나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라고 해결을 맡겨요. 그리고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정결하게 하시려고 하는 것을 봐야 되요. 그것을 봐야 되요. 보십시오. 우리가 그 고난에 대해서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가에 따라서 하나님의 이 고난의 때는 단축되기도 하고 연장되기도 해요. 보십시오. 목적이 이루어진 뒤에 까지 지속적으로 고통을 주는 부모는 없어요. 무엇인가 자기의 자녀에게 고치고 싶은 것들이 있을 때에 그를 때리기도 하고 징계하기도 하고 야단을 치기도 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의 고통과 연단이 여러 방면으로 올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떤 방면으로 오느냐, 기원이 어디인가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에 대해서 그것이 여러분들의 죄로 말미암았든지 애매히 당하는 고난이든지 무엇이든지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으로 그 고통을 감당하고 연단을 감당하고 경건하게 그 고난에 대해서 반응을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만약에 자신의 죄와 불순종을 인하여 당하는 것이라면 이렇게까지 징계를 해서 훈련을 시켜서라도 나를 새사람을 만드시고자 하는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감사하며 그 고난을 감당해야 할 것이며, 만약에 그 고난이 애매히 당하는 고난으로 하나님께서 그 고난을 통해 여러분들을 축복하시기를 원한다면 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커다란 은혜를 주실 것이라는 신앙을 가지고 그 고난을 통과하고 이겨야 할 것입니다. 매 순간마다 우리는 이러한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면서 고난과 시련의 때를 지나야 합니다. 신기하게도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가장 기쁨을 누리고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던 때에는 고통을 많이 받던 때였습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 보이는 물질들로 말미암는 고통이든지, 혹은 영혼을 섬기는데서 오는 내적인 고통이든지 간에 어쨌든 고통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봤어요. 정결케 하시려고 하는 하나님은 오늘도 여러분들의 신앙에 만족하지 않으세요. 여러분들이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 순간, 아니 그 이전에서부터 이제 그때를 시작으로 해서 여러분들을 정결한 사람, 정금과 같이 순전한 사람, 하나님을 사랑하되 순전하게 사랑하는 사람, 주를 섬기되 온 마음으로 섬기고 주님이 여러분들을 자신의 전부로 여기신 것처럼 하나님을 그렇게 자신의 전부로 여길 수 있는 사람들로 하나님은 빚고 고쳐나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우리에게는 이런 단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이 단련을 통해서 속히 우리 자신을 고치고 다듬어서 어찌하든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드려야 하는 것이에요. 살아드려야 하는 것이에요.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신앙 중에 하나는 나는 생긴 대로 살테니까 하나님은 이것으로서 만족을 하십시오 라는 배교에 가까운 신앙생활이에요. 오늘 이 욥기를 보십시오. 그는 정금과 같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고난의 풀무불 속에서 연단된 신앙의 인격, 그 속에서 하나님의 눈물과 탄식을 배우고 정결한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하고 정직과 공의를 배우면서 하나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자기의 사랑하는 자에게 눈물을 머금고 고통을 주시는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당하고 있는 고난이 욥과 같이 죄 없이 당하는 순전하고 의로운 사람의 고난이 아니어도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허물과 죄를 인해 당하는 고통이라도 좋습니다. 문제는 여러분들이 그 고통을 당할 때에 정말 경건하게 그 고통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고난 속에서 여러분 속에 마음에 남아있는 더러운 찌끼들과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에 형식은 있지만 내용이 없는 그런 거품과 같은 신앙들을 정직하게 살펴서 그래서 오로지 단련하시는 하나님께 잘 단련 되서 예전에는 쓸모없었던 쇠붙이가 이제 이 단련을 통해서 정금으로 나아와 모든 사람들에게 귀한 보배가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 그렇게 보배로운 존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어떡하든지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고난을 당할 때에도 하나님 붙들고 의지하며 살려고 몸부림쳐야 합니다. 고난이 올 때에 누구도 나의 고난과 시련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될 때에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한 구석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부르짖는 그 진심을 토해놓는 간절한 기도와 정직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비춰보며 그 말씀 앞에서 자신의 삶을 고치고 새롭게 하려고 하는 이 정직하고 진실한 신앙, 그것을 끝까지 지키면서 살려고 애를 써야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죄인들 가운데서 우리보다 못한 그런 사람들을 대하면서 우월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를 그 피로 구속하셔서 거룩한 백성 삼으신 것이 아닙니다. 완전하고 순전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우리의 죄와 부족을 주님 앞에 깨닫고 고난이라는 선물을 통해서 잘 연단을 받아서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잘 사는 그런 진실한 백성들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주님을 놓칠 수 없다 라고 하는 진지한 열망 속에서 그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갈망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그 고난을 통해서 여러분들을 정결한 사람으로 빚어서 쓸모없는 사람을 아주 쓸모 있는 사람으로, 불결한 사람을 순결한 사람으로, 주님의 마음에 슬픔이 되었던 사람들을 기쁨이 되는 사람들로 하나님께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이때까지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께 여러분들의 고난을 아뢰며 시련의 때를 지혜롭게 지내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