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고와 환란 중에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시 25:18)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자리하고 있는 시편 25편은 시편의 분류상 ‘탄원시’ 입니다. ‘탄원시’는 무엇인가 안타까운 사정이 있어서 하나님께 호소하는 시를 분류해서 탄원시라고 부릅니다. 표제에 보면 이 시가 다윗의 시라고 나옵니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다윗이 매우 고통스럽던 시기에 이 시를 썼던 것 같습니다. 오늘 시인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렇게 말합니다. “곤고와 환난중에 있습니다” 자신이 곤고와 환난을 당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곤고가 만약 시련을 당하는 사람의 내면세계에 대한 묘사라면, 이 환난은 시련을 당하고 있는 사람의 외적 환경을 가리키는 것이죠. 내면으로는 견디기 힘든 고통과 참기 어려운 외로움과 그리고 아픔들이 계속 밀려오고, 환경적으로는 소망을 갖기 어렵게 만드는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 상황이 바로 곤고와 환난을 만난 상황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환경적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 있다 할지라도 마음이 곤고하지 않다면 우리는 그것을 환난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자기집을 짓기 위해서 신이 나서 마음에 큰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 하루종일 못을 박고 벽돌을 쌓고 노래를 부르며 일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단지 그 사람이 고단하다는 이유 때문에 환난을 만난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환경의 깊음과 영혼의 깊음이 결합되어서 우리가 당한 시련이 환난이 되는 것이죠.
이러한 환난과 곤고함을 만날 때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오늘 성경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인은 뜬금없이 ‘내가 곤고와 환난중에 있으니 나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뭔가 이 사람이 자기의 죄를 깊이 확신했을 수도 있지만 이것은 오히려 곤고와 환난을 통해서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돌아보는 기회로 삼는 시인의 전형적인 신앙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실 이 일에 있어서 구약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 있다면 바로 이 시인 ‘다윗’이었습니다. 또 한 사람을 그래도 꼽으라면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다스리심이 하나님의 정한 목적을 따라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과의 모든 하나님과의 관계가 자신의 삶 속에 투영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바로 이 시인 다윗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복음이 도래하게 된 이러한 영적인 축복의 시대에도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익숙해지지 않은 그러한 신앙의 방식이었단 말이죠.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창조된 모든 것들의 작용과 운동이 하나님 손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도 떨어질 수 없다’고 단언하셨습니다. 세상의 하찮은 모든 미물들도 주님의 다스리시는 자연적인 질서 아래 있다면 하물며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서 살아가게 되어있는 이 인간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더 많은 주권을 행사하시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수천마리의 참새가 떨어지는 것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오늘 하나님을 기억하고, 알고, 사랑할 수 있는 영혼을 가진 우리 인간 마음안에 일어나는 작용이 이것이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죠. 그렇다면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인데 만약에 우리가 환난과 시련을 당하였다면 여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없을 수가 없는거죠.
어리석은 사람은 이 세상에 있는 사물 그리고 사람, 이 세상에 눈에 보이도록 존재하는 감각적인 질서 이외에는 눈에 보이지를 않아요. 왜냐하면 워낙 육적으로 생각하는 데에 익숙해진 사람이기 때문에 육신의 눈으로 눈이는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져 있어요. 이런 눈으로 보면 자신이 보이는 원인이 하나도 없이 환난과 곤고를 만나게 되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원인을 사용하셔서 곤고와 환난을 만나게 하시지 아무 원인없이 곤고와 환난을 만나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내가 그런 곤고와 환난을 만나기 위해서 도구로 사용되어졌던 환경이나 사람, 처지 이런 것들이 있지 않겠어요? 어리석은 사람은 이것들을 바라보면서 감정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거죠.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이라고 하는 것은 늘 출렁거리는 법이고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것들이예요.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과 사물의 질서도 마찬가지예요. 한때는 나를 많이 사랑하던 사람이 한때는 나를 떠나요. 한때는 매우 좋아하던 사람이 지금은 나를 싫어해요. 한때는 그 사람을 통해서 내가 기쁨을 많이 얻었는데 지금은 그 사람 때문에 마음에 깊은 고통을 당하게 되요. 이런 일들이 이 세상의 일반적인 상황이예요. 그러니까 만약에 우리가 이러한 변하는 이 세상에 있는 관계나 사람, 물질의 유무 이런 것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불행하게 하는 원인의 전부 다라고 생각하면, 출렁거리는 것에 우리는 목숨을 걸게 되는 거죠. 그리고 그것에 따라서 울고 웃고 하는 일들을, 그 어리석은 일들을 계속 반복하면서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영혼의 피곤함 속에서 안정과 평화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거예요.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한번 육체를 미워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육체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한번 육체를 미워하는 것은 쉬워. 그런데 육적인 방법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은 이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육적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그 환경에 의해서 교만해 지거나 절망하거나 하는 일들을 계속 되풀이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내 주위에 있는 모든 환경들을 움직이는 것 같지마는 그러나 그 모든 눈에 보이는 존재 저 건너편에 있는 하나님의 주권을 생각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 모든 것들을 움직이시는 거죠.
(예화) 전두환 정권시대의 코미디언에 대한 예화. 작가가 써준 각본대로 코미디언은 연기할 뿐이라는 이야기.
바로 그거예요. 사람들이 다 자기가 주인인 것같이 움직이고 이 세상에 있는 환경들이 다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나를 에워싸서 나에게 환난과 시련을 주지만, 그러나 그 너머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계세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것을 움직이십니다. 그래서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은 환난과 시련을 당할 때 정신을 차립니다. ‘아~ 내가 지금 한동안 눈에 보이는 것들에 정신을 팔고 살았구나. 아~ 저 뒤에 계시는 믿음의 눈이 아니면 볼 수 없는 하나님이 계시지. 그 하나님 앞에 나는 지금 어떤 사람일까?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어떠하길래 이런 환난과 시련이 내게 계속 임하는 것일까’ 그러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환난과 시련에서 벗어나는 첫 번째 시작이예요. 그렇게 뒤에 계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면 우리의 의식 속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요. 첫 번째 일어나는 변화가 뭐냐하면, 사람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사라지는 것이죠. ‘아~ 그래, 저런 사람들이 나에게 끊임없는 고통과 시련을 안겨주지만 저 사람은 나를 괴롭히는게 목표가 아니라 자신의 질서대로 살고 싶어하는 사람인데 결국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하니까 하나님이 저런 사람들을 사용해서 나를 시련과 환난을 만나게 하심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게 하시는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럼 그들이 미워지지 않는거예요. 미워지지 않는거야. 그러니까 하나님의 섭리, 선한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들은 아주 호방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거예요. 그런 사람이 바로 요셉이었잖아요. 요셉을 애굽에 팔아먹고 그렇게 형들이 두려워했죠? 요셉을 만난 후에, 아버지도 돌아가신 후에.... 그때 요셉이 근심하다 근심하다 거짓말까지 하는 형들을 향해 뭐라고 말합니까? “당신들은 나를 애굽에 판 것 때문에 두려워하지 마십시요. 당신들은 나에게 악을 행했으나 하나님은 그 악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그들로 말미암아 받았던 지난 날의 모든 상처를 씻을 수가 있었어요. 상처가 있었어요, 없었어요? 그렇죠. 뭘보고 아냐하면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므낫세’라고 지었어요. 그게 뭐냐면 ‘잊어버리고 싶다’예요. 얼마나 쓰라린 날들이었으면 총리가 되서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므낫세라고 지었겠어요? 잊어버리고 싶다, 망각하고 싶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직까지도 그 상처가 치유가 안된거죠.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가 다 전개되는 것을 보면서 깨달은 거예요. ‘아~ 그렇구나.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데려오시려고 그 혹독한 환난과 시련을 만나게 하셨구나. 그 풍랑과 시련의 물결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흘러오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는 생각. 그러면서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이 생겨난 거예요. 일단, 우리의 마음이 인간에 대한 부당한 미움에 사로잡히게 되면 거기에는 반드시 그 사람을 거기에 두신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내포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미움, 그 인간을 향한 그 미움 그 속에는 반드시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내포되어 있어요.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될 수 없는거죠. 그런데 그렇게 환난과 시련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하게 되면 그렇게 되면, 이 인간을 향한 원망이 사라지게 되요.
또 한가지 어떤 변화가 오냐하면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되고 싶다는 열망이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생겨나게 되요. 그러면서 아주 또렷하게 자신의 인생의 이 모든 질서들이 자기를 둘러싼 사람이나 환경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가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게 되요.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되고 싶다’ 즉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라는 갈망이 생겨나게 되는거죠. 야고보서에서 환난, 시련을 당할 때 어떻게 해야지만 그 시련이 끝난다고 가르쳐요? ‘하나님 앞에 옳다 인정함을 받을 때까지’ 이 시련과 환난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보복성 분풀이를 하시는 것이 아니예요. 하나님은 그렇게 옹졸하신 분이 아니예요. 하나님의 의도는 뭐냐하면 우리를 바른 사람이 되게 하시는 것이예요. 바른 사람이 되게 하시는 것...그러니까 환난과 시련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면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 다 사라지고 ‘아~ 이 모든 것은 나때문이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예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되고 싶다는 아주 간절한 소원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예요. 거기에서 참회가 나오는 거예요. 참회가... 이 세상에서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문제는 누가 얼마나 올바르게 살았느냐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잘 들으세요. 누가 얼마나 올바르게 살았느냐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얼마나 참회하였는가가 문제가 되는 거예요. 테틀리아누스라는 교부는 말하기를 “나는 회개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랬어요. 그만큼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빗나가려고 하는 존재라는 거죠. 지(제)가 똑바로 살아보려고 많이 노력해도 참회가 없으면 그러면 그 똑바르게 살려고 하는 많은 노력이 그를 올바르게 하지를 못해요. 올바르게 하는 노력이 있어도 참회가 있어야지만 그것이 끊임없이 올바르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올바르려는 의지의 올곧은 행사와 참회하는 마음의 관계는 모루위에 놓인 쇳조각과 같아요.
(예화) 대장간의 모루와 쇳조각. 모루(올바르게 하는 노력) 쇳조각(참회)
그러니까 두 가지가 같이 병행이 되어야 해요. 뜨거운 불 속에 자주 들어가서 노골노골 해지는 것과 함께 적당한 때에 부지런히 두드려서 정해진 모양을 만들려고 하는 실천적인 노력이 필요하죠. 그러니까 이 두가지가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는 중요한 비결이예요. 저는요, 사람이 조금 눈에 차지 않고, 조금 성실성도 떨어지고 또 지혜가 조금 부족한 것같아도 진실한 참회가 있는 사람을 그 모든 것을 갖추고 있으나 결코 참회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훨씬 더 귀중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참회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하나님 뜻 가까이로 계속 다가가기 때문에 언젠가는 지금보다 훨씬 발전된 모습을 가질 수 가 있어요. 어디에 있어서? 영혼과 마음의 덕에 있어서 하나님께 훨씬 가까이 더가가는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어요.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은 변화될 수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는 거예요. 그러면서 올바르게 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면서 하나님 앞에 참회하게 되는 거예요.
환난과 시련을 만났을 때 마음을 세우고 ‘하나님,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 그리고 고개를 세우고 ‘저 인간때문이야.’ 이러면서 쌈박질이나 하려고 대드는 사람이 그 곤고함에서 벗어나는 걸 본 일이 있습니까? 반대로 어떤 환난과 시련을 만났는데 사람에 대한 원망을 모두 거두고 ‘나는 베델로 올라가리라’ 하고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모든 죄 때문이옵나이다. 내가 진실하게 참회하오니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옵소서. ’ 그리고 진실하게 통회하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비는 사람이 그 환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환난 가운데 있지요? 영혼이 곤고하시죠? 아직도 이 사람 저 사람 손가락질 하며 마음으로 미워하고 욕합니까? 아직 멀었습니다. 더 곤고해지셔야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우리의 육체가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고 우리의 마음입니다. 마음을 낮춰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요. 나의 곤고한 것과 모든 환난은 내 아내 때문도 아니고 돈 못버는 내 남편 때문도 아니고, 속썩이는 내 자식 때문도 아니고, 회심하지 못한 우리 부모 때문도 아니고, 동기간 때문도 아니고, 더욱이 내게 맡겨주신 사명이나 직분 때문도 아니고, 내가 잘못됐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앞에 진지하게 고백을 해보세요. 그러면 마음이 이제 녹아내리게 시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봐야 한다 이 얘깁니다.
마지막 두 번째는 이 성경 구절 전체가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죠. 그러니까 이 시인은 환난 가운데서 자기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리고 있는 것이예요. 그러나 우리의 신앙의 경험을 돌아보면 기도가 정말 필요할 때는 기도가 잘 안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래서 꼭 기도가 필요할 때에는 기도가 안되요. 그것이 이제 어려움이예요. 그런데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너무 당연한 거죠.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과의 정말 아름다운 교통 속에서 충만한 은혜와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 올바른 삶을 우리들이 살아갔다고 한다면 우리들이 어떻게 기도의 문이 막혔겠으며 우리의 기도의 문이 활짝 열렸더라면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그러한 곤고함과 환난 가운데 들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처지가 이런 열렬한 기도가 필요할 때, 기도가 잘 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죠. 그런 상황 속에서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챨스 스펄전 목사님은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기도할 수 없다면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어느 시점에 가서 저절로 기도가 되는 그런 날은 오지 않아요. 결국 깨뜨려진 하나님과의 관계는 풀지 않은 숙제처럼 남아 있어서 언제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가던지 그 지점에서 다시 시작하게끔 되어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기도가 되지 않으면 기도가 되지 않는 그 자체가 하나님이 기도되기까지 하나님께 집중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의 경향과 마음의 틀들을 바꿔나가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내적인 쇄신을 경험하게 하시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게 하시는 것이예요. 그런 과정 없이 영혼의 무거운 짐이 벗겨지고 자유를 얻게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굳은 마음을 가지고 살았던 모든 날들에 대해서 회개하게 하시고 그리고 자기 눈에 좋은대로 사는 그것이 행복한 줄 알고 살았는데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와 보니까 그것이 고스란히 자신의 영혼에 커다란 독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예요. 그래서 그 죄를 미워하고 그 죄를 택했던 자신을 불신하게 만들어서 하나님이 바꾸시는 거죠.
인간이 마지막에 믿는 건 누구예요? 아버지...? 아버지가 뭘 믿어? 자기를 믿는 거예요. 자기를...끝까지 내 편인 사람이 누구예요? 나... 그런데 그걸 배반해야 되요. 그 연대가 끊어져야 된다 이거야. 어떤 과정을 통해서 그것이 끊어지는지는 오늘 내가 말씀드리지 않겠어요. 너무 길어져서... 그런데 그것이 끊어져야 되요. 끊어져서 나를 불신해야 되요. 그러면 그 다음에 어떤 일이 생기냐하면 내가 옛날처럼 ‘야~ 이거하자’ 그러고 나한테 제안을 해요. 예전에는 내가 철저히 내 편이었어요. 그런데 ‘그렇지 않을래’ 이런 경험을 통해서 내가 하자고 제안을 하면 어때요? ‘또 나를 환난 가운 몰아넣으려고 네가 나를 꼬이는 구나. 내가 네 말을 들을 줄 아냐?’ 하고 내가 나를 부인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자기 부인이예요. 그러면 자기가 자기를 부인하지 않을 때 마지막은 의지할 분은 누구 밖에 없어요? 하나님 밖에 없는거죠.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거예요. 하나님을 의지하게 돼요. 그래서 우리들이 끊임없이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를 불신하게 될 때 신앙심이 아주 깊어지는 거예요.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되요.
그러면 사람들이 왜 그렇게 자기를 신뢰해요? 자기를 신뢰하고 자기를 사랑하는게 왜 나빠요? 자기를 사랑하잖아요. 사랑하는데, 이 자기가 영원히 있는 존재가 아니야. 사라진단 말이예요. 그러니까 결국은 그렇게 사라지는 것은 완전하고 영원한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어요. 완전하고 영원한 사랑의 대상은 오직 없어지지 않고 변하지 않는 하나님 한 분이예요. 나머지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은 그 사랑에 종속되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대항하는 거라 이거예요. 어쨌든 더 길게할 수 없지만 그런 정도예요. 그럼 진도를 나갑시다. 그런데 그렇게 자기를 끊임없이 불신하게 될 때 우리의 마음은 의지가 할 곳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를 의지하는게 나아 삼촌을 의지하는게 나아? 대답을 왜 못해. 앞에 앉았으면 수강료를 내야될 것 아니야? (웃음) 자기를자기를 의지하는게 나아 삼촌을 의지하는게 나아? 자기가 훨씬 낫지. 자기가 훨씬 낫지. 그러니 자기도 의지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것이 판가름이 났는데 이 세상에 의지할 사람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죠. 어디로 가는 거예요?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한 걸음씩 나가네]
그렇게 그냥 대충 이야기 했지만, 더 자세히 얘기할 수 있는데 그게 원리가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를 버리는게 이 세상에서 마지막이야. 또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그래서 그것을 버리는거야. 그러면서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나는 하나님만을 의지합니다. 원수들은 나를 에워싸고 나를 모욕하나 여호와는 나의 방패시오 나의 영광이시며 내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아멘 아멘.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한 걸음씩 나가네]
그러면서 다가가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세요. 그런데 그 하나님께 나아가는 가장 탁월한 방식이 사색이나 공상 그런게 아니라 그 다음에 몸의 헌신 이런게 아니라, 뭐라고요? ‘기도’ 기도예요. 기도. 그래서 우리들이 주님 깊이 만난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가 뭐하고 있었냐면 모두 기도하고 있었어요. 노동하고 있었던게 아니라... 노동하다가도 그때는 주님을 꽤 만났을 때지만 무릎을 꿇고 매달려 기도할 때 주님 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었던 거예요. 하나님과의 모든 합일을 경험해요. 이 기도로 이어지게 되는 거예요. 기도 속에서 이루어지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환난을 당했을 때 기도해야 합니다. 딴데가서 아무리 버리졌거리고 그래봐야 이 사람 저 사람 붙들고 시비걸고 원망하고 욕지거리 하고 대판 싸우고 해봐야 인간만 아주 추하고 더러워져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거예요. 주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나는 이 세상에서 아주 더러워진 인간이지만 자기 의의 신발을 벗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뿌리신 십자가의 보혈의 핏길을 걸어서 위로부터 찢어진 휘장을 지나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보좌로 나아가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당신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당신의 자녀들을 기다리시데 있어요. 기다리시데 있어.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도전하고 싶어요. 딴데 갈데 있어요? 가보세요. 충분히 가보십시요. 아무도 여러분 사랑하는 존재는 없어요.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의 외아들을 우리를 위해 화목 제물로 주셨느니라’ 아직도 사람 붙들고 원망하고 미워하고 환경 탓하고 재수 핑계대고 그렇게 살아요? 인생은 짧아요. 그거 다 죽은 시간이예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