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다스리는 믿음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 43 : 5)
녹취자 : 정은숙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지난 5일 동안도 하나님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지켜주셨습니다. 오늘, 금요일 기도회를 맞이하여서 저희들이 이렇게 주 앞에 나아왔습니다. 머리를 숙이고 기도하오니 하나님, 저희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 도와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 시편 42편과 43편은 짝입니다. 그래서 쌍둥이 시편이다, 이렇게 불리워지는 그런 시편입니다. 그런데 42편 마지막에서도 그렇고, 처음에서도 그렇고, 43편 마지막에서도 그렇고, 무엇인가 우리가 평소 생각하는 것과는 잘 안 맞는 그런 느낌이 듭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영혼과 자기 자신이 대화하고 있는 그런 어법을 사용해서 이 시편을 풀어나간다는 말이죠. 그런데 사실은 거기에는 굉장히 깊은 진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모든 성경에 다 진리가 숨겨져 있겠지만 특별히 기도, 혹은 하나님을 향한 소망, 이런 것과 관련해서 아주 깊은 진리를 담고 있다 그런 말씀인 것입니다.
사실 영혼은 우리의 인격을 움직이고 우리의 인격은 우리의 삶을 움직입니다. 인격이 경박하면 삶도 경박합니다. 인격이 인자하면 그의 삶도 인자한 인격에서 흘러나옵니다. 성격이 포악하고 변덕스러우면 살아가는 삶도 그렇기 마련이죠. 그렇게 움직인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움직이는데 그 인격을 움직이는 중심부에는 영혼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혼이 인격을 움직이고 인격이 우리의 삶을 움직인다는 말입니다. 그 영혼이 하나님의 사랑에 감화를 받으면 인격이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되고 그래서 삶도 하나님의 사랑을 펼치게 됩니다. 영혼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고 어둠이 드리워지게 되면 지식에도 어둠이 드리워지고 생각하는 것과 모든 일에 어둠이 드리워지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어둠이 드리워지게 되면 결국 그의 삶도 어둠이 드리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자기의 영혼을 향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말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이고 또 내 영혼아, 라고 부를 때 그렇게 불림을 받는 영혼은 누구인가, 물론 문학적으로 볼 때 이것은 논문이나 신문기사가 아니라 말하자면 시입니다. 그러니까 문학적인 기법으로 볼 때 이것은 분명히 논문이 아니고 시이기 때문에 이 시를 가지고 논리를 따지는 것은 한계가 있으리라고 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이 시인과 같은 경험을 신앙 속에서 할 때가 많다는 얘기입니다. 왜냐하면 깊은 속에서 살고 싶어 하는 나와 얕은 곳에서 살고 싶어 하는 나가 다릅니다. 새벽에 나와서 기도할 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안에 내가 하나가 있는 게 아니라 몇 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건 사실 나만의 고백이 아니라 바울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하나님 앞에 그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정말 제가 이렇게 살지만 진정으로 내가 살고 싶어 하는 나는 이런 게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은 알고 계시죠. 정말 내가 하나님을 향해서 얼마나 변할 수 없는 소원을 품고 주님이 나를 만져주신 이후로 그렇게 내가 정말로 살고 싶어 하는 내가 있다는 것을 주님은 아시죠. 나는 다 설명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 그런 기도를 하나님 앞에 합니다. 그런데 그런 기도가 가슴 깊이 다가올 때는 예외 없이 가슴이 터지는 것 같은 그러한 것이 있습니다. 무언가 막힌 게 펑 터지는 것과 같은 분출을 항상 경험합니다. 그 때 어떤 일이 있느냐하면 두 개, 혹은 세 개인 것처럼 느껴지던 내가 하나로 채워지는 것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여기도 이런 이야기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네가 어찌하여 불안하여 하는고, 그런데 사실 여기서 영혼아, 영혼아 이렇게 부르고 있는 게 사실은 히브리말로 네피쉬입니다. 번역을 영혼이라고 했지 네피쉬는 마음이라고도 번역이 되고 심령이라고도 번역이 되고, 심지어는 사람이라고도 번역이 되고 혼이라고도 번역이 되고 어려가지로 번역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그런 말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보면 ‘생령이 된지라’라고 창세기에 나오죠. 생은 살았다, 령은 네피쉬 그래서 네피쉬 하야 이렇게 히브리성경에 나옵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을 영혼, 영혼 이렇게 번역을 했지만 사실은 제가 보기엔 마음이라고 번역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내 마음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오히려 하나님을 바라라’ 하는 것이지요. 무슨 뜻입니까?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이전에 내가 하나님을 만났고 그리고 이제껏 까지 배웠고 그래서 이렇게 끊임없이 나에게 증거를 주시는, 하나님의 가르치시는, 그 하나님께로부터 배워 온 여태까지의 가르침으로 미루어 볼 때는 소망이 있습니다. 낙심하면 안 되는 자리입니다. 희망을 갖고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지만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마음이 자꾸 낙담합니다. 이 마음은 정말 눈에 보이는 것만 보지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선 그런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거울 너머의 세계를 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거울을 이렇게 들여다보면서 여러분은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없을 겁니다. 저 너머엔 뭐가 있을까? 이런 것을 보면서 밖에 뭔가? 문서선교부인가? 하수도인가? 이런 생각은 하지만 거울을 보면서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을 것입니다. 거울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게 바로 우리들이 쳐다보는 눈, 육신적인 마음의 눈이 갖는 인식의 한계입니다.
이게 자꾸 믿음이 떨어지고 나니까 말하자면 믿음이 떨어지고 신앙이 떨어지고 그러면서 눈앞에 환란과 어려움, 그리고 고난과 역경, 가망이 없어 보이는 하나님과의 관계, 어떻게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육신적인 어려움, 이런 것들이 눈앞에 쫙 펼쳐질 때 그 때 거울을 보는 것처럼 그것을 보고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우리의 마음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저앉는 것입니다. 마음이 그런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그렇게 반응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마음, 영혼이라고 말한 우리의 내면의 세계가 그렇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때 만약에 우리가 그 마음이 그렇게 말하는 대로 우리의 모든 의식이 다 지배되어버리면 우리는 물러가서 침윤에 빠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뒤로 물러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신앙적인 어려움에 빠져서 깊이 뒤로 물러간 사람하고 가만히 앉아서 얘기해보면 사실은 그 사람을 욕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너무 딱하고 그럴만한 상황인 것입니다. 벗어나보려고 애를 쓰고 몸부림쳐보지만 안 되는 것입니다. 거울을 쳐다보면서 그 너머에 뭐가 있을까 그 세계를 질문하지 못하듯이 결국 믿음이 없이 바라본 우리 마음의 눈의 인식의 한계가 그런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많은 경건한 성도들이 물러가 침윤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적절히 대처해서 그러한 마음을 고쳐먹지 않으면 시궁창에 구르는 것처럼 신앙 생활하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잘 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고 은혜가운데 사는 사람도 가만히 보면 자기 힘으로 그렇게 되는 것 같지 않고, 웅덩이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거기에서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고 거름 투성이가 되고 헤어 나오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한참 들여다보면 저것도 인간의 힘이 아니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얘기가 그것입니다. 마음을 지키기 싫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작년인가 재작년에 우리가 수요예배 시간에 잠근 동산에 대한 설교를 들었지요. 여러분 다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아가서입니다. 마음을 지키기 싫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가면 파멸입니다. 우리는 수시로 우리의 마음이 세상을 향해 반응합니다. 낙망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마음을 털어버릴 수 있어야합니다. 아니다, 보라 하나님이 나에게 어떠한 사랑을 주셔서 여기에까지 인도하셨는가, 참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다른 사람 앞에 기죽을 필요도 없고 투기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절대적으로 사랑하시는가, 그것을 생각하면서 내 마음 속에서 낙망하고,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그 너머를 보지 못하는 것 같은 짧은 소견으로 좌절하는 우리의 마음을 다스려야합니다. 아니다, 부정해야합니다. 우리의 머리로 부정해야합니다. 그러면 생각 속에서 우리의 마음이 부정이 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계속 부정이 되면 그 다음엔 우리의 마음이 사라집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건 이렇게 될 거야, 그렇게 될지도 몰라, 왜?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 그런데 누가 자세히 설명하면서 그건 그렇게 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얘기를 들으면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그것도 그럴 것 같네. 그러면서 이해가 바뀌면서 마음이 다시 바뀝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이렇게 될 때 그 때 책망으로 우리의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낙망하면 아니다, 죄를 지어도 괜찮아 그러면 아니야, 낙심하고 싶으면 아니야, 기도하기 싫어, 왜, 그냥 몰라 하여튼 싫어, 그런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이게 마음속에서 이렇게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는 올라와서 머리까지 지배를 합니다. 그래서 안 해도 돼, 왜냐하면, 하고 조목조목 이유까지 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그럴 때 기도하기 싫어 부인하는 것입니다. 아니야, 해야 돼. 그러면서 마음을 부인하고 부정하고 버리고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마음을 다스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가 주님 앞에 풍성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오히려 네 얼굴을 도우시는 네 하나님을 바라라 영어성경에는 'hope in God' 하나님 안에 소망을 가져라,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거기에 소망을 가지고 아니라고 말하는 내 자신의 마음을 부인하고 그래서 마음을 다스리고 지킬 때 진정한 영적인 생활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번 수난주간에 이렇게 여러분들의 마음을 잘 다스려서 하나님 새로 만나고 그래서 생애적인 풍성한 생명의 세계,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