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에 목마르십니까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로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15:25-28)
뭔가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매우 기뻐하시는 것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그래서 이 가나안 여인이 칭찬을 받았던 것처럼 네 믿음이 크도다 이스라엘 중에서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예수께서 그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렇게 뭔가를 간절히 구하는 그런 태도를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보일 때 주님이 가장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은 믿음이에요. 믿음. 그런데 우리가 이 믿음이 얼마나 없는지 몰라요. 기도하면서도 이 믿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분명한 약속이 있는데도 약속을 의심합니다. 적극적으로 의심을 하고 싶어서 의심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사라지고 나면 의심이 들어오는 거예요. 사람과 사람사이도 마찬가지예요. 신뢰하면 의심이 들어오지 않아요. 근데 일단 서로가 서로를 인격적으로 깊이 믿는 관계가 깨뜨려지고 나면 그 틈 사이로 의심이 들어오기 시작해요. 의심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겉 잡 을 수 없는 부피가 큰 불신으로 자라나서 결국은 관계 자체를 파괴해 버리는 것이에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구할 때에는 하나님이 믿음이 있는가 그것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을 하셔요.
그런데 우리들이 항상 성경을 읽을 때 믿음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면 거기서 말씀하고 있는 믿음이 도대체 어떤 믿음이냐 하는 의문을 가져야 해요. 왜냐하면 믿음은 하나일지 모르지만 예수님이 무엇을 보고 믿음이 있는지를 확인하셨는가 하는 것을 보면 한결같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오다가 빠져버렸을 때 믿음이 없어서 그랬죠? 그 때의 그 믿음과 여기서 예수님이 그 여자의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실 때의 믿음은 본질은 같지만 나타나는 방향은 매우 달랐어요. 중풍병자를 들것에 들어서 지붕 뚫어서 달아 내리는 그 이웃들을 보면서 믿음을 칭찬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서 나오는 믿음의 본질은 모두 같지만 나타나는 방향은 달랐다고요. 어떤 때는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을 보고 믿음이 크도다 하시고, 어떤 때는 의심하지 않고 굳게 신뢰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시기도 해요. 다양하게 또 경우에 따라서는 더 좋은 기회가 있는데 그 좋은 기회를 그리스도를 위해서 포기하고 오히려 나빠 보이는 것을 기회를 선택하는 것,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을 많이 받으면서도 피하려고 하지 않는 것. 이런 것을 얼마든지 믿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믿음은 눈감고 굳게 믿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문맥에서 믿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규명하려고 애쓸 때에 하나의 믿음에 다양한 색깔들을 파악하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 믿음이 다양하게 우리의 삶 속에서 적용되어야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를 파악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오늘 여기에 보니 여자의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셨는데 그 믿음이 무슨 믿음인가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죠? 자기의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렸으니까 도와달라고 애원을 하고 있지요. 도움이 필요한 것은 자기가 아니고 자기 딸인데 저를 도우소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까 딸에게 생겨난 문제이지만 그 딸을 너무나 사랑하니까 딸 문제가 아니라 이젠 나의 문제가 되어 버린 것이지요. 이렇게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저 사람의 문제가 나의 문제가 되어가는 것이지요. 어쨌든 이 어머니는 딸을 위해 간절히 예수님께 간구했고 예수님은 너무나 뜻밖에도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 여기서 떡이라고 하는 것은 긍휼을 의미해요. 긍휼. 마땅히 자녀들에게 돌아가야 할 하나님의 은혜, 예수님의 긍휼을 이스라엘 자손도 아닌 이방 여인 너에게 주는 것은 마치 자녀의 떡을 취해서 개에게 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너는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다 ... 예수님이 정말 그렇게 생각하셨겠는가 그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이 여인 속에 있는 예수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대하고 바라는 마음이 얼마나 절박하고 간절한가 하는 것을 예수님이 보고 싶어서, 확인하고 싶어서, 그래서 확인해서 그 여자로 하여금 그 믿음이 밖으로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처럼 약간은 무자비해 보이는 말씀을 하신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고운 유리그릇처럼 다루시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질그릇이나 유리그릇처럼 다루시지 아니하시고 플라스틱 바가지처럼 다루시는 때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오늘 예수님께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 라는 개인적으로 심히 인종차별의 모욕을 받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 여인에게 예수님의 긍휼을 바라고 하나님을 바라는 은혜를 바라는 소망의 마음이 열렬하고 간절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아마 예수님의 이와 같은 인종차별적인 가슴 아픈 발언을 통해서 그러한 갈망이 모두 사라져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갈망이 워낙 크고 간절하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셔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 여인은 한 가지 논리를 제시해요. 그 집에서 자라는 개가 개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주인의 자식들과 함께 먹는 그 상에서 떨어지는 그 찌꺼기를 먹으면서 사는 것을 생각하면서 이 여인은 주님께 호소했습니다. 내가 주님이 보시기에 개와 같아도 좋습니다. 그렇지만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을 먹지 않습니까? 개의 주인인 인간들도 자기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서 개를 배부르게 하거든 하물며 나를 보고서는 그런 긍휼을 베풀어주실 가치가 없지만 주님은 개의 주인인 인간들보다 훨씬 자비로우신 분이 아닙니까? 라고 하는, 예수님은 이 여인을 한없이 깎아 내리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 여인은 예수님을 한없이 높여 드리는 신앙의 고백을 한 거예요. 우리가 궁금한 것은 이것이죠? 무엇이 이 여인으로 하여금 이런 아름다운 고백을 하였는가? 그것은 다름 아니라 주님의 은혜 주님이 불쌍히 여겨 주시는 긍휼이 아니면 아무것도 자기의 인생의 희망이 없다 라고 하는 절박함이 이 여인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높이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찾는 마음은 분명히 간절한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있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만약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 없다면 우리는 썩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부패하게 되면 우리를 근심하게 되는 것들은 많아도 우리의 가슴을 저미게 하는 열렬한 기도의 제목들은 상실됩니다. 걱정과 근심에 오랫동안 잠겨 있다는 것과 열렬한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많이 근심해도 뜨거운 기도의 제목이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좆아서 아무 염려 없는 삶을 살아가면서도 무릎을 꿇으면 가슴이 뻐개지는 것 같은 열렬한 기도의 제목을 가진 사람들이 언제나 있는 법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한 성도가 날마다 날마다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지 아니하고 앞으로 앞으로 피투성이가 되면서라도 전진하는 신앙, 주님을 향한 보다 깊은 사랑 속에서 자라는 것을 무엇으로 입증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열렬한 기도의 제목입니다. 마음의 한이 되기까지 아로새겨진 기도의 제목, 그러면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고 주님의 긍휼과 은혜 밖에는 소망할 것이 없다고 굳게 믿는 그것이, 날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 속에서 자라가고 있는 성도의 아름다운 성숙의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 이 여인이 주님이 큰 칭찬을 받은 것은 모욕을 견뎠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주님이 이 여자를 이렇게 칭찬하신 이유는 모욕을 견디게 한 그 무엇이 이 여인의 마음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우상은 자존심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까? 우리의 자존심 우리의 자만감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일을 많이 그르칩니다. 정말입니다. 저는 주위에서 주님을 위해서 피한방울까지도 남김없이 드리고 싶어 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이루어 놓은 수많은 업적을 한 순간 자기의 자존심을 버리지 않는 오기 때문에 무너뜨려 버리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우리의 자기 사라이라고 하는 것은 뼈 속 깊이 번져가는 암세포와 같습니다. 이 암세포가 뼈 속으로 퍼져 가면 대책이 서질 않아요. 뼈에까지 침투하잖아요? 근데 이 여인에게서 그런 걸 찾아 볼 수 없는 거요. 왜? 나도 없고 내 자존감도 없고 나를 주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든지 주님의 이런 모욕을 받으며 주님께 매달리는 나를 주위의 사람들이 어떻게 보든지 그런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오직 하나 무엇이냐 하면 절박한 기도의 제목- 흉악하게 귀신이 들려서 의원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고 당시 귀신을 내어 쫒으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고 오직 이 예수님이 자기를 불쌍히 여겨주시는 그것만이 도움이 될 수 있다 라고 하는 이 벼랑 끝에 선 마음 - 이 마음이 이 여인으로 하여금 모욕을 받으면서도 모욕을 주목하는 대신 모욕하시는 주님이 아직까지도 긍휼을 베풀어 주실지 모른다는 기대를 걸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때 이런 마음이 몇 번이나 들까요?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께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를 위해서 주님의 그 기도의 응답이 없이는 인생도 없고 나의 꿈도 없고 심지어는 하나님과의 관계조차도 없다는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린다면 이 여인을 그렇게 모욕을 주시면서도 결국은 기뻐하셨던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그렇게 찾아오시지 않겠습니까? 기도하는 과정에서 하늘을 열고 긴 힘을 쏟아부어주셔서 우리가 지상에서 무릎을 꿇었지만 하늘의 사람처럼 기도하게 하시는 것은 우리가 아니에요. 그건 우리의 권한에 속한 것이 아니에요. 우리 모두 그런 것을 사모하지만 그건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에요. 근데 우리에게 달린 것은 무엇이냐 이것이지요. 왜 그런지 우리의 마음이 알 수 없는 그 무엇으로 하나님 앞에 부요해지는 것이에요.
분명히 우리의 인생은 막다른 벼랑 끝에 몰린 것 같고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막다른 골목까지 뒤로 밀려와서 등에 벽이 닿았는데도 거기서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무릎을 꿇고 주님의 도움이 아니면 살 길이 없다는 고백을 안 하는 거예요. 이것이 우리가 안고 있는 가장 커다란 문제입니다. 저는 일생을 살면서 세 번 네 번 정도 인간으로서는 더 이상 내려가지는 못할 것이다 라고 느껴지는 그 지점까지 내려가 본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그것을 마지막으로 경험하던 때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제가 제 인생에서 이 마지막 지점까지 내려가는 이 기도를 인생의 결정적인 선택의 기로, 혹은 위기의 길목에 있을 때 세 번만 더 기도할 수 있다면 아마 대가없이 제 인생을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라는 기도를 드린 적이 있어요. 그리고 그 기도는 아직까지도 제 마음에 살아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오늘 보십시오. 이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께 나와서 간절히 간구하고 부르짖은 것으로 보아서 하나님께 기도했을 가능성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래도 아마 오늘 이 순간처럼 이렇게 처절할 정도로 이렇게 주님의 모욕도 주위의 자기를 향한 헤아림도 사람들의 자기에 대한 평가도 모든 것도 안중에 없고 종이 상전을 바라봄과 같이 그렇게 주님의 손에서 한 조각 떨어질지도 모르는 그 긍휼, 아무리 작은 조각이 떨어져도 주님은 마땅히 주셔야 하고 나는 받을 만 했다 라고 하는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도저히 받을 수 없는 그러한 마음, 그렇게 처절하게 주님의 긍휼과 사랑을 위해 매달리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세월이 흘러갈수록 더 많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약해지는 것이 신앙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요. 정말 약해지는 것을 배워요. 오늘 낮에도 대전 극동방송에서 인터뷰를 전화로 하는 데- 매일 묻는 질문이지만- 어떻게 목사님은 목회도 하고 그렇게 글도 쓰고 밖에 강연도 다니고 남들이 못하는 그런 일을 하냐고. 제가 그랬어요. 그러니까 셋 중에 아무것도 제대로 하는 것이 없습니다. 지나친 겸손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겸손이 아니에요. 매일 매일 그런 가책이 있어요.
나의 생명 드리니 주여 받아 주셔서
세상 살아 갈 동안 찬송하게 하소서
정말 하나님이 아십니다. 진심이에요. 입에서 나오는 고백이 아니라 진심이에요. 그래서 날마다 날마다 절망이에요. 교회를 보면서 내 글을 보면서 나의 사역을 보면서 그리고 그 사역 한가운데 있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근데 그 절망은 낙망에서 오는 절망이 아니에요. 낙망에서 오는 절망은 절망하면 절망 할수록 모든 삶의 소망의 끊어진 것 같아요.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더 많이 버림을 받는 것 같아요. 그러나 복된 절망은 절망하면 절망 할수록 아무 희망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똑같은데 오직 하나의 가능성에 대해서 더 절박한 마음이 생기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우리 주님의 긍휼이에요. 이제껏 산 것도 주님의 은혜로 살았고 앞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 텐데 하나님의 긍휼 밖에 우리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하고 더 간절히 이 여인이 그랬던 것처럼 쓰다듬으시든지 나를 던지시든지 하나님이 나를 다루시는 것 때문에 내가 상처받을 여유가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그런 건 다 한가할 때 하는 일이에요. 내가 지금 이 여인과 같이 인생의 벼랑 끝에 몰리고 하나님의 불쌍히 여겨주시는 긍휼이 아니면 아무 희망이 없는데,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다루셨으면 좋겠는데 저렇게 다루고 계신다는 이유 때문에 토라지고 화내고 하나님께 상처받고 그럴 수 있겠느냐 이거예요. 이 여인에게서는 그런 것을 찾아 볼 수가 없어요. 예수님은 그걸 믿음이라고 보신 거예요.
우리에게는 이런 마음이 필요해요. 그래서 사람이 볼 때에 불쌍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볼 때에 너무 불쌍한 사람, 주님이 안도와 주셔도 도와줄 사람이 많고 그런 사람들에 대한 기대가 있고 불쌍히 여겨 주시리라고 기대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너무 불쌍한 사람.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저는 정말 버림받은 사람이리라 이렇게 생각되는 사람. 인간의 도움과 인간의 위로를 거절하고 오로지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매달리는 사람. 그런 사람을 믿음이 크도다 말씀하셔요. 뒤의 스토리는 더 나오지 않지만 이 여인은 응답을 받아서 이 아이가 나았고 우리 주님과 보다 더 깊은 관계를 갖게 되었을 것임에 틀림이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 한 없이 비참하리만치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낮아진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존귀하게 만드셔요. 그래서 높여 주셔요. 여길 보세요. 주위에 사람들이 있었잖아요. 동네 한 가운데를 지나가셨으니까. 단 둘이 계신 장면이 아니거든요. 쫒아 다닌 사람들이 있었잖아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주는 것이 마땅치 않도다 이렇게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 안하시지만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 정말 개인가보다 그렇게 생각했을지 몰라요. 그렇지만 잠시 후 이 여자의 믿음이 크다고 말씀하실 때 이 여인을 한없이 높여 주신 것 아닙니까?
우리가 아무 능력이 없어도 괜찮아요. 우리의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과 비교될 수 없어요. 땅에 있는 것과 하늘에 있는 것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으며 우리 스스로 활용할 수 있는 것과 하나님이 활용할 수 있는 것 사이에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지금도 이렇게 간절히 자기를 향해 눈을 드는 사람, 그래서 풀무불과 같은 연단 속에서도 하나님의 긍휼의 떡 한 점을 바라며 세상의 도움과 의지를 거절하고 무릎으로 하나님께 매달리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오늘도 찾으십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교회 그래서 어디서든지 무릎을 꿇고 그런 마음으로 목회자를 위해 기도하고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우리에게 분깃으로 주시는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성도들이 모여 있는 교회는 마귀들이 에워싸고 수많은 어둠의 세력들이 진 쳐도 그 교회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그들을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