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와 성도의 복된 삶 2
(지난시간 요약)
지난시간에 이야기한 중요한 요점은 대개 몇 가지입니다. 우선 삼위일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말씀드렸고 또 성경이 삼위일체 교리를 증거하고 있다는 것과 그리고 삼위일체 교리의 특성은 신앙의 근본조항이라는 것, 이성을 초월한 신비라는 것, 그리고 삼위일체 교리가 결코 사변적인 교리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본격적으로 삼위일체론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개념들이 본질, 위격, 실재, 본질과 위격과의 관계,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삼위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있는데 성부 하나님은 위격적인 특성이 낳은바 되지 않으심, 성자 하나님은 낳은바 되심, 성령 하나님은 나오심 혹은 발출인데 이 모든 일들이 영원 안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성부 하나님이 먼저라는 것은 시간적인 먼저가 아니라 논리적인 먼저이고 성자 하나님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휠리오꾸베라는 논쟁을 소개했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성부로부터만 나셨느냐? 성부와 성자로부터도 나셨느냐? 성자로부터도 나셨느냐? 그래서 그것이 휠리오꾸베에요. 휠리오는 아들이라는 뜻이고 꾸베는 and에요.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만 나셨느냐? 하나님 아버지뿐 아니라 아들로부터도 나셨느냐? 이것이 동, 서방 교회를 갈라놓은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말씀을 드렸고 그리고 결국은 오늘날 우리는 이제 성령이 성부뿐만 아니라 성자로부터도 나오신바 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삼위로 존재하시지만 우리들이 세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한 하나님이라고 부른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어려운 내용들이 몇 가지 있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렇게 이해하지 못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어요. 그렇죠? 나오면서 물어보니까 아무도 어렵다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그런데 오늘은 머리가 조금 아플 것입니다. 지금 부피로 보면 1/3밖에 안되지만 사실 이것은 절반이 넘는 내용이에요. 그래서 6번에 보면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 그것을 가지고 마지막 C번까지 우리가 다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동안에 이 책은 여러분들이 복잡할까봐 간략하게 요약한 것을 제가 좀 더 확대를 해서 지금 계속 책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짧으면 150페이지 길면 250페이지 정도 되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어쨌든 오늘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Ⅵ.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
A. ‘내재적’ 및 ‘경륜적’의 의미
그러면 이제 우리가 삼위일체를 이야기할 때 삼위일체가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로 이렇게 나누는 것이 삼위일체를 연구하는 것의 오래된 전통이에요. 그러면 도대체 내재적이라는 말은 무슨 말이고 경륜적이라는 말은 무슨 말이냐는 것이에요. 여러분 내재적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알다시피 ‘어디 안에 있다.’는 뜻이에요. 경륜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무엇인가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일을 해나가는데 그것이 생각 속에서 풀어져 나오는 그 전개과정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경륜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에요. 그렇게 이해하면 되요.
그러면 이 두 가지는 어떻게 차이가 나느냐 하면 내재적 삼위일체는 하나님이라는 존재와 관련이 된 것이에요. 그러면 경륜이라는 것은 무엇과 관련이 되느냐하면 그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하심과 관련되어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내재적 삼위일체론을 존재론적 삼위일체 혹은 본체론적 삼위일체 시간과 관련해서는 영원적 삼위일체라고 부르고 그리고 경륜적 삼위일체는 하나님이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그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세계와 하나님과의 사이에 맺은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계속 이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관계를 맺으시면서 사건도 일으키시고 간섭을 하실 것이 아니에요?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알려지는 것을 가리켜서 경륜적 삼위일체라고 표현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존재론적 삼위일체 혹은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 이렇게 나누는 것이에요.
이렇게 생각하면 되요. 내재적 삼위일체는 세계와 상관없이 아까 기도한 것처럼 세계가 없을 때에도 하나님은 계셨잖아요? 그 하나님에 관한 것이 내재적 삼위일체에 관한 것이고 세계가 존재하고 난 다음에 세계와 인간과 어떤 관계를 맺으시고 창조하신 세계를 통치하시고 보존하시고 협력하시는가 하는 그 관계 속에서 밝혀지는 삼위일체에 관한 내용을 경륜적 삼위일체라고 부르는 것이에요.
1. ‘내재적’ 이라는 의미
그러면 도대체 내재적이라는 의미는 무슨 뜻일까요? 네 가지 정도의 뜻이 있는데 우선 첫째는 뭐냐 하면 창조세계에 대한 초월적 존재성이에요. 하나님이 어디에 계셔요?
(찬양)
주 내 맘에 늘 계시고…….
어디에 계셔요? 우리 안에 계셔요? 그럼 나오시라고 그래 봐요. 그게 굉장히 어려운 문제에요. 그래서 요점을 간추리자면 이렇게 얘기해요.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이 이 세계 안에도 계시고 내 안에도 계시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아무데도 안 계신 것이에요. 어떤 의미에서는 계시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안 계신 것이에요. 예를 들어보십시다. 사람 안에 양심이라는 것이 있어요? 없어요? 배를 갈라보면 그 속에 양심이 나와요? 안 나와요? 그렇지요. 해부학적으로는 없는 것이죠. 그러니까 ‘있다’는 말을 사용할 때 그 ‘있다’는 말의 주어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있는 것은 아주 달라지는 것이죠. 돌멩이가 있다고 그럴 때는 명확해요. 그렇지요? 그러나 공기가 있다고 그럴 때는 조금 헷갈리는 것이에요. 균이 있다고 그럴 때는 더 헷갈리고 더군다나 우리 가운데 사랑이 있다고 그럴 때는 더 어려워지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내재하신다고 그럴 때 이 내재는 여러 면에서 다른 것이에요.
우리가 이렇게 생각해야 해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고 생각할 때 계신 것은 틀림없어요.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있다면 말이 안 되지요. 그러면 하나님 밖이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말이 안 되잖아요. 하나님은 어떠한 모든 피조물도 하나님을 벗어날 수는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 안에 그것이 있다고 할 때 그 있다는 개념을 우리가 하나님에다가 기준을 두어야지 다른 것에다 기준을 둔 것처럼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굉장히 이상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에요. 그 대표적인 것이 범신론이에요. 범신론은 이 세계 전체가 신의 덩어리라고 보는 것이죠. 그래서 그 신이 이렇게 이런 속에도 이런 속에도 다양하게 신의 본성들이 내재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죠. 이것은 마치 물이 얼었거나 녹았거나 수증기가 되었거나 마찬가지고 전부 다 통합시켜버리면 결국은 전체가 하나의 신으로 되어있다고 보는 것이죠.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불교에서 작은 생물 같은 것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런 개념도 하나하나 신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죠. 그 속에서 윤회한다고 보는 것이에요. 여러분들이 지금은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잘해야 되요. 잘하면 다시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지만 잘못하면 바퀴벌레로 태어나서 세스코한테 매일 당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쥐로 태어나서 그렇게 사람한테 도망 다니면서 수챗구멍에서 살든지 그래야 되는 것이에요. 좀 더 사람이 마음을 널널하게 쓰면 다음 생애에서 재벌로 태어나고 야박하게 굴면 그 집 식모로 태어나고 그렇게 되는 것이에요. 그런 것들이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에요.
그러면 ‘목사님 결론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됩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되는 것이죠.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벗어날 수 없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 세계에 계시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금 내 마음에도 계시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에요.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다.’고 할 때는 각각 다른 것이에요. 우선 제일 먼저 삼위일체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할 때, 내재한다고 할 때 삼위 안에 하나님이 계신 것 그것은 완전히 차원이 다른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에요. 또 그 하나님이 이 세상에도 계시지만 이 세상에 계신 것은 천국에 계신 것과는 다른 것이에요. 이게 무슨 뜻인지 이해 가시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고 여기도 계시지만 하늘에 계신 것은 이 땅에 계신 것과는 다른 개념이라는 것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이 같이 땅에 있는 것도 땅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을 벗어날 수 없잖아요? 그런 점에서 하나님이 계신 것이죠. 그러나 인간의 영혼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할 때 그 계시다는 것은 우리의 육체와 세계에 계신 것과는 또 완전히 다른 것이에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시죠? 다른 것이에요. 넓은 의미에서는 안 믿는 사람도 하나님 밖에 있는 사람이 아니지요. 그 사람도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의 마음도 움직이시고……. 하나님이 불신자의 마음도 바꾸셔요? 안 바꾸셔요? 얼마든지 바꾸시죠. 움직이시고 변화시키기도 하시고 믿는 사람을 위해 봉사하게도 하시고 다양하게 역사하시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이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하는 것과 우리가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은 다른 것이에요. 더군다나 ‘우리의 영혼이 주님 안에 있다.’ ‘우리의 육체가 주님 안에 있다.’ 이것은 다른 개념이라는 것이에요. 그렇게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된다는 것이에요.
⑴ 창조세계에 대한 초월적 존재성
그래서 첫째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대한 존재의 초월성이에요. 그래서 이 세계는 세계 안에 하나님이 계신 것은 사실이지만 이 세계가 하나님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 창조세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의미와 삼위일체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말이라는 것이에요.
⑵ 성삼위의 상호적 내재성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성삼위의 상호적 내재성이에요.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계신데 하나님은 물질이 아니시니까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우리는 대게 세 쪽으로 나누잖아요? 성부가 이렇게 1/3이고, 성자가 1/3이고, 나누는데 그 그림 자체가 잘못된 것이죠. 그런 그림으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그럼 삼위 하나님 안에서 성부가 시작돼서 끝나는 지점이 있고 성부 끝난 다음에 성자가 시작되고 성자와 성부가 끝나는 사이에 성령이 계시냐는 것은 우리들이 사과를 잘랐을 때 그렇게 이해가 되는 것이지 하나님은 그런 물질이 아니시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존재하실 수 없다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성부는 성자 안에, 성자는 성령 안에, 성령은 성부 안에, 성자는 성령 안에, 그런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죠. 성자, 성부, 성령 누구도 두 위 밖으로 나가거나 아니면 어느 한위가 끝나고 둘이 되거나 이런 것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성부, 성자, 성령이 막 혼합되어서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이 구별이 안 된다는 식도 아니에요. 그런 특이한 방식으로 성부, 성자, 성령님이 삼위 안에서 내재하신다.
⑶ 각 위의 실재들과 관련된 활동
세 번째는 책을 보셔야 합니다. 각위의 실재들과 관련된 활동인데 실재는 지난시간에 배웠지요? ‘한 하나님이시지만 삼위는 성부는 성자를 낳고, 성자는 성부에게서 낳은바 되시고, 그리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하신다. 그러나 이것들은 창조세계와 관계없이 영원 안에서 이루어지는 삼위의 실재와 관련된 삼위일체의 내적 활동이다.’ 삼위일체 안에서 이루어진 활동이라는 것이죠. ‘이것은 하나님의 내재적 사역이며 그 위의 다른 것들이 다른 위와 공유되지 않는 것이니,’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그래서 ‘성자와 성령은 성부가 아니시니까 낳으실 수 없고, 그리고 성자는 발출되실 수 없고.’ 왜? 성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낳은바 되셔야하는 아들이시기 때문에 그렇지요. ‘성령은 낳은바 되실 수 없다.’ 왜? 성령은 낳은바 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발출하셔야 되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분리적 활동 혹은 비공유적활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무슨 뜻이냐 하면 성부, 성자, 성령님이 한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한 덩어리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그랬지요? 그래서 각 성부, 성자, 성령은 본체는 하나인데 그게 쓰부스딴띠아인데 그 본체는 신적 본질이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세 하나님이시면서도 한 하나님이신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신적 본질이 동일하고 하나이시다. 그렇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리스 사람들 같은 경우에는 신이 여럿이 있어도 신의 본질은 같다고 보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 동일한 신적 본질인데 아버지가 아들을 낳은 것이 마치 내가 장가를 가서 아이를 낳은 것 같다면 나와 아들은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지만 낳음으로 말미암아 나와는 별개의 개체가 된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여기에서 무엇이라고 그랬느냐하면 하나님은 인격이 몇이라고 그랬어요? 하나라고 그러면 밤중에 늦게까지 강의한 것을 무엇으로 들은 것이에요? 차라리 가만히 있든지……. 학교를 가도 꼭 공부를 못하는 사람이 대답을 잘해요. 자, 인격이 몇이에요? 셋이에요. 여기에서 어려움이 생기는 것이죠. 인격이 셋이라면 그러면 우리 인격을 가진 존재는 인간밖에 없잖아요? 인간이 인격을 가지고 있다고 그럴 때 그러면 인간은 인격은 한사람 앞에 하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두 인격, 세 인격을 가지면서 한 존재인 것이 이 피조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 삼위일체가 어려운 것이에요. 비슷한 것이 짝이 있으면 그것을 통해서 이해하면 쉽잖아요? 그런데 이게 짝이 없기 때문에 이해가 안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이해를 해야되느냐하면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그런데 한분인 이유는 하나의 동일한 신적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 인격을 가지셨다. 그러나 그것은 구별된 세 인격이 아니라 한 하나님에게서 한 하나님이시면서도 세 인격이신 존재다. 그러니까 이 인격이 우리에게 있어서 인격은 인격을 가졌다고 할 때 아주 딱 잘라져서 다른 개체가 되는 것을 의미하지만 여기에서는 성부, 성자, 성령이 관계를 가지시는 관계적인 그런 의미에서의 인격이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우리 이런 독립된 인격체로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은 인격을 따로 가지고 계시면서도 그 세 분은 나눠진 하나님이 아니라 동시에 하나의 본질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분리되지 않고 한분으로서 세 개의 인격을 가지고 계신 그 인격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실재라고 이야기한다.
그런 실재의 특성이 성부는 아들을 낳는 것, 성자는 낳은바 되시는 것, 성령은 발출되시는 것인데 그 점에 있어서는 성부, 성자, 성령이 딱 엄격하게 구분된다. 그래서 아버지는 낳은바 되실 수 없고 발출되실 수 없다. 이렇게 해서 위격적 관계들이 설명이 되는 것이에요.
⑷ 각 위의 교통과 관련된 활동
그 다음에는 각 위의 교통과 관련된 활동들이에요. 동일한 신적본질이신 삼위가 서로 다른 위를 인식하시고 사랑하시고 교통하시는 활동을 하십니다. 이것은 창조되기 전에도 이루어졌어요. 그래서 이렇게 교통하시는 그 본질이 사랑이며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에요.
2. 경륜적 이라는 의미
그 다음에 경륜적 이라고 할 때 이 경륜적인 의미가 무엇이냐? 이것입니다. 우선 첫째는 무엇이냐 하면 경륜적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시간과 공간 안에서 하나님의 지성과 의지가 삼위 하나님을 통해서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행사되기 때문에 이것을 경륜적이라고 부른다는 것이죠.
경륜이라는 것이 원래 무슨 뜻이냐 하면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요. 좋은 생각이 났어요. 옷감을 이렇게 짜잖아요? 옷감 짜는 것을 옛날에는 보았지만 요즘은 볼기회가 없겠지만 머릿속에 옷감을 이렇게 짜면 모시같이 민짜로 짜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경우 말고 수를 놓으면서 짤 때에는 이 사람 머릿속에……. 더 쉽게 이야기할게요. 뜨개질하는 것을 예를 들게요. 그러면 더 간단하겠다. 뜨개질할 때 스웨터를 짤 때 골을 이렇게 파고 약간의 무늬를 넣어서 짤 수 있잖아요? 그렇죠? 그러면 맨 처음에 여러 가지 색실덩어리를 놓고 바늘 두 개를 가지고 짜기 시작해요. 그러면 그것을 보는 사람은 이제 겨우 한 줄을 짰을 때에 무엇이 나올지 아무도 몰라요. 그런데 그것이 앞으로 나올 것이라는 것은 짜는 사람 머릿속에 있잖아요? 이것이 내재적 삼위일체의 계획이에요. 그 다음에 짜는 것이에요. 그러면 짜는 것은 한꺼번에 보여줄 수가 없어요. 한줄, 한줄 되면서 이 속에 있는 것들이 풀어져 나오면서 무늬를 내면서 옷처럼 짜지는 것이란 말이에요. 이해되시죠? 그러면 그것은 시간적인 순서가 필요해요. 그것을 경륜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에요.
⑴ 시간과 공간 안에서 하나님의 지성과 의지의 삼위적 행사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하면 ⑴을 보세요. ‘시간과 공간 안에서 하나님의 지성과 의지의 삼위적 행사이다. 경륜이라는 말 자체가 시간, 공간 역사의 전개를 전제로 한 표현이다. 그래서 내재적 삼위일체 안에서 필연성이라는 이 접힘이 우연성이라는 펼침으로 나타난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 안에 모든 계획이 있잖아요. 그 계획이 시간 속에서 펼쳐질 때에는 사람들이나 모든 것들을 다 치워버리고 하나님이 혼자서 장기판에 말 놓듯이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는 계획이 딱 짜져있는 것이 실제로 시간 세계 속에서 전개될 때에는 거기에 의지를 가지고 참여하는 사람들이 다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죠.
예를 들자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계획이시잖아요. 그런데 그것들이 어떻게 이루어졌어요? 가만히 있는데 갑자기 손에 힘이 느껴지면서 자기도 모르게 막 걸어 나가서 칼을 들고나가서 예수님을 찔러죽이고 자기는 무슨 일을 했는지도 모르는 그런 상태로 일어난 것이 아니잖아요. 사람들의 마음을 막 움직여서 그래서 예수님을 죽여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만들고, 재판을 하게하고 빌라도는 놓아주려고 했는데 놓아줄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아무도 강제력을 느끼지 않으면서 차근차근 이루어졌고 그래서 필연적인 것들이 쫙 우연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에요. 이루어지는 것은 우연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에요.
⑵ 피조물과 관계에서의 삼위의 활동
두 번째는 피조물과의 관계에서의 삼위의 활동이에요. 아까는 삼위 안에서 삼위가 각각 관계를 맺으시지만 이번에는 삼위 하나님이 피조세계와 관계를 맺으실 때 삼위가 각각 관계를 맺으셔요. 삼위가 서로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지 않으시고 그 삼위 하나님이 함께 관계를 맺으시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셔요. 제가 삼각형으로 예를 가끔 드는데 삼각형이 이렇게 있다면 성부, 성자, 성령이 이렇게 계시다면 그러면 성부, 성자, 성령이 일하실 때 어느 한 위가 일하실 때에 나머지 두 위가 배제되는 그런 경우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만약에 성부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다고 할 때는 성부 하나님이 주가 되게끔 성부 하나님이 관여하시고 성자, 성령이 함께하시는 것이죠. 구속을 할 경우에는 우선적으로 성자가 세계와 관계를 우선적으로 맺으시는 것이죠. 거기에 성령도 계시고 성부도 계신 것이죠. 그 구속이 이루어진 것이 사람에게 적용할 때에는 성령님이 우선적으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시고 그 다음에 성자와 성부가 함께 계시는 그런 형태가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삼위가 이 세계와 관계를 맺으실 때 따로 따로 관계를 맺으시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위가 우선적으로 관계를 맺으시는가 하는 것은 경륜이 펼쳐지는 가운데 각각 그 위치가 계속 바뀐다는 것이에요. 그렇게 바뀌어 나간다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성부와 관계를 맺을 때는 성부로부터 찬란한 하나님의 속성들이 우리 인간들에게 알려지고 성자와 관계를 맺을 때에는 또 다른 하나님의 속성이 알려지고 그 다음에 성령과 관계를 맺을 때에는 또 다른 하나님의 속성이 알려지는데 완전히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겹쳐지기고 하고 함께 하면서 그러면서 전체적으로 삼위 하나님에 의해서 알려진 속성은 삼위 전체에 대한 속성이 되게끔 그런 방식으로 이 세계를 향해서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구약시대에도 성자를 통한 속성의 계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흐리지요. 그러나 신약시대에 와서는 성자를 통해서 아주 찬란한 계시가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속성이 계시되는데 그 빛이 워낙 찬란한 것이에요. 인간의 구속의 역사 전체에서 가장 찬란한 밝은 빛이 들어오는 것이에요. 여기의 중심이 가장 밝고 여기로부터 너무 멀어져서 구약으로 가도 희미하고 여기로부터 너무 멀어져서 종말로 가도 희미해지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중심점이 되는 것이죠.
⑶ 창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의 목적성
세 번째는 창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의 목적이에요. ‘경륜적이라는 말은 창조세계에 대한 삼위의 활동이 우연적이기는 하지만 목적 없이 일어나는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신 궁극적인 목적을 향한 활동임을 지시합니다.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신 것은 당신 자신의 신성에 충만한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심이니 시,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삼위의 개별적 활동은 하나님 자신이 정하신 창조계획과 목적적 연관을 갖는다.’ 세계를 가만히 이렇게 보면 사람들이 너무나 악해지고 세상이 타락하잖아요?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과 분쟁이 그치지 않고 마치 세계가 돌아가는 것이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가 미친 듯이 질주하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에요.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역사가 그냥 인간이 잘못했기 때문에 망가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아무렇게나 가고 있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라는 것이에요. 인간이 악하고 세계가 엉망으로 브레이크 풀린 자동차처럼 달음박질을 해도 하나님은 이 모든 역사의 전개를 통해서 최종적으로 당신이 끌고 가시려고 하는 그 역사가 있다는 것이에요.
⑷ 총체적 경륜의 핵심
네 번째는 총체적인 경륜의 핵심이에요. ‘창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의 핵심은 인간의 구원이다. 따라서 경륜적 삼위일체라는 표현에 있어서 그 경륜은 주로 인간 구원을 위한 역사 속에서의 삼위의 활동과 관련된다.’ 그래서 이게 죄는 인간이 의지를 가지고 타락함으로 범죄 했지만 사실은 죄가 들어오고 그 죄 때문에 파멸에 이른 인간을 구원하고자하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펼쳐지면서 그러면서 하나님 자신이 오히려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인간이 결코 알 수 없었을 하나님에 대한 찬란한 속성의 계시가 말하자면 아주 찬란한 광채로 이 세계에 뿜어져 나오는 것이에요. 그렇다고 ‘죄가 그렇게 하나님의 놀라운 속성을 드러내는구나! 우리가 죄지은 사람들에게 상을 주어야지! 왜냐하면 그 사람 때문에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났으니까…….’ 그러면 안 된다고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이에요. 그렇게 하면 안돼요. 그러므로 ‘은혜를 더하려고 죄를 짓겠느냐? 죄 가운데 거하겠느냐? 죄를 더하겠느냐?’ 그러면서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에요.
⑸ 개별적 경륜의 가치
다섯 번째는 개별적 경륜의 가치에요. 자, 그럼 보세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경륜이 존재해요. 그게 뭐냐 하면 창조의 원인도 하나님의 영광이고, 창조의 목적도 하나님의 영광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당신 자신이 영광이시기 때문에 세계를 창조하셨고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도 세상을 창조하셨어요. 그렇게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셨고 결국은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가는데 그러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경륜 속에서 개별적인 경륜이 있을 것이 아니에요.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세상은 이렇게 타락했지만 열심히 주를 섬기며 몸부림치다 죽었어요. 그런데 결국은 그 세계에 도도히 흐르는 타락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은 나라가 망하게 되었고 심판을 받게 되었어요. 구약의 역사를 보면 그렇잖아요?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갈 때 선지자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그렇게 외치잖아요? 그랬는데도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았겠어요? 그랬는데도 결국은 포로로 끌려가잖아요? 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했던 삶 속에서 몸부림치면서 이루었던 경륜은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것이죠. 그렇죠?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에요.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고 오히려 그런 개별적인 경륜들은 그 나름대로 하나님께서 그 각 사람이 섬긴 바에 따라서 하나님이 소중하게 보시고 그에게 복을 주시고 보상하신다고 봐야하는 것이에요. 그것이 이제 환경 때문에 비관하지 않는 비결이에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그래서 한번 그런 예도 들었잖아요?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되겠지만 열심히 헌금을 했는데 누가 그 헌금을 가지고 도망을 갔어요. 그래도 도망가서 결국은 교회를 위해서 쓰이지 못했어요. 그러면 그 헌금한 사람들의 믿음과 정성을 어디로 가는가? 그것은 그 돈이 어떻게 쓰인 것과는 상관없이 그 하나님 앞에 드린 그 마음과 중심과 섬김에 대해서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갚으신다는 것이에요. 무슨 이야기인지 아시죠? 그렇지 않으면 헌금한 것이 무슨 주식투자한 것처럼 될 것 아니에요. 헌금한 것을 잘 굴려서 굉장한 것을 했다더라. 그러면 내 상이 늘어나고 누가 재정 관리를 잘못해서 떼어먹혔더라! 그러면 나는 헌금 안한 것같이 그런 것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개별적인 경륜은 개별적인 경륜대로 가치가 있는 것이다.
⑹ 신적 지성과 의지로서의 경륜
여섯 번째는 신적 지성과 의지로서의 경륜이에요. ‘따라서 경륜적이라는 말은 세계 안에서의 삼위의 활동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저성과 의지를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역사 속에 개입하시는 각 위의 활동은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함으로써 그래서 아직 보여주시지 않은 뜻을 알게 하심으로써 계시 전달의 수단이 된다.’ 그래서 어떻게 되요? 결국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궁금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전개되는 것을 보면서 아! 하나님의 뜻이 그렇게 된 것이구나! 그러면서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은 역사인데 그 역사 너머에 계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알게 된다는 것이에요. 어려운 것이 하나도 없지요? 그 다음으로 넘어갑니다.
B. 삼위일체에 대한 두 관점
삼위일체에 대한 두 관점으로 넘어가면 이것은 또 무슨 이야기냐 하면 아까는 삼위일체가 다른 피조세계와 관계없이 고찰하는 것을 내재적 삼위일체,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생각하는 것을 경륜적 삼위일체라고 했다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삼위일체의 두 관점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에요. 삼위일체가 있는데 그 기본적인 교리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은 한분이신데 동시에 세 위격을 가지고 계신 한 분이시며 그 세분이 성부, 성자, 성령이시다. 이게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이거든요. 그러니까 삼위일체에서 설명하기 가장 어려운 것은 셋이면서도 하나인 것을 설명하기가 어려운 것이에요. 셋이면서 하나인 유사한 것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아침하고 패션이 바뀌었지요? 아니에요? 삼위일체 강의를 위해서 특별히 갈아입고 왔어요. 그런데 아침에 온 사람이 지금 그 사람이에요. 똑같은 사람이에요. 옷만 바꿔 입은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양태론자에요. 성자, 성부, 성령 이것은 한 하나님이 옷만 갈아있고 계속 나타나신 것이다. 그것이 양태론이고 이단이에요. 그런데 열린 교회에 등록하고 교리 반에 들어와서 둘러앉아서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생각을 물어보니까 80%가 양태론이에요. 옛날 같으면 다 화형 당했어요. 시대가 좋아서 지금 살아있는 것이에요. 그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교리에요.
그래서 양태론은 뭐냐 하면 그림에 나오잖아요. 한 하나님이 계신데 성부도 되시고, 성자도 되시고, 성령도 되시는 것이에요. 그것을 사람들이 설명할 때 무엇이라고 그러느냐하면 너희 아버지가 집에서는 아버지이지만 그러나 인간 김 아무개 아니냐? 그런데 집에 오면 아버지, 회사에 가면 부장님, 교회에 가면 장로님이라고 그러지 않느냐? 그런데 딴 사람이 아니지 않느냐? 그러니까 너희는 아버지라고 부르고 그리고 회사 사람들은 부장님이라고 부르고 교회에서는 장로님이라고 그러지 않느냐? 그런데 사실은 엄밀하게 말하면 아버지도 아니고 부장님도 아니고 그리고 장로님도 아니야. 인간 김 아무개일 뿐이야. 그 설명은 딱 양태론이에요.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보면 안 된다는 것이에요. 틀렸다는 이야기입니다.
1. 서도 다른 두 전통
그 다음에 두 전통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죠. 우선 서방 교회 전통과 동방 교회의 전통이 따로 있어요. 서방 교회에서는 중심점을 어디에다 두느냐하면 한 하나님이시라는 데에 중점을 두어서 설명을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설명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서방 교회에서는 어떻게 보느냐하면 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먼저 강조하면서 한 하나님 성부에게서 성자가 나시고, 성부와 성자에게서 성령이 나셨다. 그러니까 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먼저 논증하고 한 하나님인데 어떻게 셋일 수 있느냐를 그 다음에 증명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동방 교회에서는 반대에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하면 동방 교회에서는 하나님이 삼위라는 것을 먼저 인정하고 셋이신 하나님이시지만 어떻게 그 세 하나님이 한 하나님이실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뒤에 설명하는 것이에요.
이것은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서방 교회의 전승은 플라톤의 철학을 많이 닮았고 동방 교회의 전통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의 방법을 굉장히 많이 따라요. 그러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떻게 차이가 나느냐하면 플라톤의 사유는 이런 것이죠. 이렇게 이 세계를 보면 이 세계는 여러 가지 많은 다양한 존재물들이 있잖아요? 사람도 있고 동물도 있고 많이 있잖아요. 이것은 사람의 정신을 혼동시키는 허상들이라고 보는 것이에요. 이거 너머에 가면 이 모든 것을 있게끔 한 최종적인 근원이 되는 한 일자가 있다고 보는 것이죠. 일자라는 것은 일자사상이라고 그러는데 토원사상이라고 그런데 그 일자라는 사상이 있는 것이에요. 그것은 사실은 우리가 물질세계 속에서 알고 파악하고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니죠.
그런데 사실 이것은 플라톤 자신이 맨 처음에 찾아낸 것이 아니라 이미 그런 사유를 플라톤보다 훨씬 더 앞서 시대에 있었던 파르메니데스라는 사람의 단편들이 남아있거든요. 그 단편 속에 나와요.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에요. ‘자, 사람의 지성이 수많은 사물들을 본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허깨비이고 사람을 혼란시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전체적으로 하나일 뿐인데 그것이 여러 모양으로 탈을 쓰고 나타나서 여러 예인 것처럼 사람을 현혹시키는데 사실은 그 전체가 하나일 뿐이다.’ 이런 이야기에요. 그러면서 뭐냐 하면 아주 재미있는 논리를 제시하는 것이에요. ‘자, 생각해보자. 물체가 있는데 여기에 물병이 있고 여기에 유리가 있다. 그러면 이것은 두 존재다. 너는 이것을 보고 둘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 도대체 존재하는 이것과 존재하는 이것은 어떻게 나눠지느냐?’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그래요? ‘이것 사이에 아무것도 없지 않느냐?’ 그렇게 이야기하면 이 사람은 어떻게 이야기하느냐하면 ‘그러면 너는 이 존재하는 것과 이 존재하는 것 사이에 비존재가 있어서 존재와 존재를 구분한다고 하는데 비존재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 존재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 사이에 구분이 될 수 있겠느냐? 이것은 너희 자신의 끊임없는 착각의 소산일 뿐이지 이것은 모두 다 하나일 뿐이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세계 자체가 하나로 꽉 차있다. 그래서 거기에서 일자사상이 나오는 것이에요. 그것은 뭐 기독교사상에서 보면 굉장히 획기적인 우주관을 그 사람들이 성경의 계시가 아니라 인간의 사유를 통해서 접근해나가는 것이에요. 그렇게 놓고 볼 때 설명이 안 되는 문제가 있어요. 운동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세계가 전체적으로 한 덩어리라면 운동과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런 일자사상을 이 플라톤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일단 인간은 이런 모든 것들로부터 뛰어넘어서 아주 초월적인 역사 속에서……. 그것을 체관이라고 그러는데 직관이라고도 그래요. 인간의 논리를 초월해서 빛이 들어오면서 ‘아, 일자가 있구나! 그리고 이런 모든 것들은 하나의 가시적인 현상일 뿐이고 이것을 뛰어넘는 전체가 있구나! 그것을 먼저 봐야지만 그 다음에 내려오면서 그것들이 어떻게 거기서부터 유출되어 나오면서 다양한 세계를 이루는지를 알게 된다.’ 는 것이 플라톤적인 사고방식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주 현실적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그런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알 수 없다. 우리가 시작해야할 것은 이렇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부지런히 탐구하고 더듬어 나간다면 그런 것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에도 도달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제 이런 사상을 가지고 우리들이 이야기할 때 서방교회는 플라톤의 사유를 닮았고 동방교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를 닮은 것이에요.
그래서 동방 교회의 관심은 삼위의 통일성보다는 다양성이에요. 그래서 ‘성부는 아! 이런 일을 세계와 하시는구나! 그래서 성부께서 하시는 일은 성자의 하시는 일과 구분되는구나! 성령은 이런 일들을 하시는구나! 그래서 성령이 하시는 그 일은 성자가 하시는 일과 구분되는구나! 그렇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세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없지! 그러면 그렇게 각각 다르신 분이 어떻게 한분이 될 수 있을까?’를 설명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나오는 교리가 페리코레시스의 교리에요. 그러면 ‘페리코레시스’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냐? 이것이 동방교회에서 나왔으니까 희랍어인데 이게 뭐냐 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할 때 페리코레시스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삼위가 각각 다른데 어떻게 그 삼위가 하나일 수가 있느냐는 것이에요. 여러분들이 보시기에 왼쪽에 있는 그림을 보세요. 이렇게 나오지요. 성부가 세계와 관계를 맺으시고 성령이 세계와 관계를 맺으셔요. 아까 이야기했듯이 분명히 성부가 세계와 관계를 맺으실 때 성자, 성령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성부가 관계를 맺으실 때는 독특한 특성이 있고 성자가 성령이 세계와 관계를 맺으실 때는 각각 다른 특성이 있잖아요? 그것은 인정할 수 있잖아요? 그럼 그 성부, 성자, 성령이 어떻게 한 하나님이 되실 수 있겠느냐 할 때 성부와 성자가 통하고, 성자와 성령이 통하고, 성령과 성부가 통해서 이것들이 하나의 본질로 같이 공유된다고 보는 것이에요. 그렇게 공유되는 것을 가리켜서 페리코레시스라고 그러는 것이에요.
그 다음에 서방 교회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느냐하면 옆에 보면 세모가 나오잖아요. 삼각형으로 만들어서 설명한 방식은 서방방식일까요? 동방방식일까요? 서방 방식을 많이 닮은 것이죠. 그래서 서방 교회 방식과 동방 교회의 방식이 어느 하나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전통적으로 개혁신학에서는 서방 교회의 설명방식을 훨씬 더 높이 평가해온 것이에요. 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상호보완관계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죠. 그래서 어떻게 보느냐하면 제가 직접 그린 것이니까 그림을 잘 보세요. 성부가 있잖아요? 그 다음에 성자와 성령이 있잖아요? 세계와 관계를 맺으실 때에 성부, 성자, 성령이 아까 삼각형으로 설명한 관계 속에서 세계와 관계를 맺으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세계와 관계를 맺으실 때 서방 교회는 동방 교회보다 훨씬 더 삼위가 함께 관계를 맺으신다는 사상이 훨씬 더 강한 것이에요. 한 하나님이라는 사상이 강한 것이에요. 그렇게 해놓고 중간에 보면 사랑이라고 나오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 각각 한 하나님이시지만 각각 다른 위격을 가지고 있다고 그랬지요? 인격을 가지고 있다고 그랬지요? 위격과 위라는 말은 완전히 동일한 말이에요. 그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같이 관계를 가지고 계신데 그 관계가 서로 사랑하시는 관계에요.
여러분 이것은 지난번에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에서 잘 배우셨을 것이에요. 왜 사랑하시는지 까지 여러분들은 굉장히 어려운 철학적인 문제들을 배웠어요. 하나님이 왜 서로를 사랑하신다고요? 실컷 배워놓고 대답을 못해요? 사랑하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지요? 각 위의 완전하심과 아름다우심 때문에 각 위가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데 그 사랑은 교통적이기 때문에 그 사랑의 교통 그 자체가 하나님을 사랑이시게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할 대상이 없었을 때조차도 하나님은 사랑이셨죠? 이것이 물이라고 할 때 내가 볼 때도 물이어야 하고 안보고 집에 갔을 때도 물이어야지 내가 볼 때는 물이었는데 내가 집에 가니까 이게 시커먼 콜라로 변하면 물이라고 말할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세계가 생기기전에도 하나님은 사랑이셨다. 어떻게? 삼위일체의 영원한 사랑의 교통 속에서 사랑이셨다. 그것이에요. 그래서 설명이 되었고요.
그 다음으로 넘어가면.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서방 교부들은 신론 진술에 있어서 동방 교회의 진술방식을 반대하였다. 그들은 삼위를 진술하기 전에 먼저 한 분 하나님을 말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불변하시며, 무한하시며, 완전하신 한 분 하나님을 믿음으로 연역하여(연역한다는 것은 이렇게 한 번에 점핑을 해서 결론부터 먼저 받아들인다는 것이에요.) 아는 것이 선행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삼위일체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질 수 있다고 보았다. 이 두 가지 삼위일체의 교리의 진술은 배치된다기보다는 보완적인 통찰을 제시함으로써 삼위일체 교리의 신비를 더 깊이 이해하도록 서로 이바지하는 것이다.’
2. 두 삼위일체의 관계에 대한 세 관점
두 가지 삼위일체는 아까 이야기한 것이에요. 다시 돌아가는 것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관계에 대해서 세 가지 관점이 있어요.
⑴ 고전적 관점
첫째가 고전적 관점인데 우리는 고전적 관점을 따르는 것이에요. ‘첫째로 고전적 관점입니다. 이 관점은 인식의 순서에 있어서는 경륜적 삼위일체가 먼저지만 논리의 순서로는 내재적적 삼위일체가 경륜적 삼위일체에 선행한다는 것이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존재론적 삼위일체의 인식 근거이고 존재론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의 존재 근거이다.’ 왜냐하면 내재적 삼위일체는 인간에게 안 알려지거든요. 왜냐하면 경륜을 통해서 알려지니까…….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보면 경륜적 삼위일체가 먼저이지만 인간으로 인식할 수 있게끔 발현되고 나타나려면 존재가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 점에서 존재론적 측면에서 보면 내재적 삼위일체가 먼저라는 것이죠. 그리고 ‘이것은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에서 언급되었고 전통적으로 교회가 믿어 오던 바이다.’ 그래서 어떻게 해요? 존재론적 삼위일체가 먼저이고 경륜적 삼위일체가 그 나중이다. 그러나 우리가 인식할 때에는 경륜적 삼위일체를 통해서 내재적 삼위일체를 인식한다. 이렇게 존재와 인식을 보는 것이 이것이 전통적인 관점이고 우리가 유지해야 되는 관점이에요.
⑵ 새로운 십자가 신학의 관점
‘새로운 십자가 신학의 관점이라는 것은 두 삼위일체를 이론상으로는 인정하지만 실제적으로는 동등하다고 본다. 그래서 경륜적 삼위일체가 내재적 삼위일체이고 내재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라는 이 관점은 몰트만, 에르하르트 융엘의 관점이다.’ 이렇게 되면 문제가 굉장히 많이 생기게 되겠지요? 왜냐하면 이따가 설명이 나오겠지만 무엇이 제일 어려우냐하면 하나님 안에 있는 사건은 필연이고 역사 속에서 전개될 때에는 우연이거든요. 그런데 여기서는 우연이 필연이고 필연이 우연이라고 보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굉장히 복잡한 문제를 던지는 것이에요.
⑶ 경륜적 삼위일체 중심의 관점
세 번째 관점이 있는데 이것은 과격해요. 경륜적 삼위일체 중심의 관점이다. 그래서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경륜적 삼위일체만이 존재하며 내재적 삼위일체는 추상화다. 그것은 괜히 하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경륜적 삼위일체만을 인정해요. 그래서 어떻게 되는 것이죠?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뜻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것이에요. 굉장히 중요한 것이죠. 그래서 심지어 화이트헤드 같은 사람은 과정신학 철학자인데 Process Theology 라는 과정신학이 나와요. 그 사람들은 어떻게 보느냐하면 하나님이 이 세계와 함께 성숙되어 가시는 분으로 보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도 인간의 참여 속에서 인간과 세계가 함께 서로를 만들어가는 것이에요. 그러면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런 하나님하고는 현저히 다른 관점을 가지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자, 이렇게 나뉘어요. 그 정도면 됩니다. 그 정도로 넘어가고 그 다음에 진짜 본론이 나와요.
C.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조화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조화의 문제가 나옵니다. 말머리를 보겠습니다.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는 주로 시, 공간 특별히 공간도 아니고 시간이 문제에요. 시간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전자를 영원적 삼위일체, 후자를 시간적 삼위일체라고 부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 안에서 필연적인 것이 세계와의 관계 안에서는 어떻게 우연적인 것이 되는지에 대한 설명을 요구한다. 또한 삼위일체를 설명함에 있어서 삼위일체 안에서의 하나님의 존재와 시, 공간 안에서의 삼위일체 활동 중 어느 것을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판단을 요청한다. 나아가서 인식론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사유의 출발점이 된 경륜적 삼위일체가 어떻게 내재적 삼위일체와 연결되고 어떤 방식으로 상호 작용하는지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1. 필연성의 신학과 우연성의 신학
그래서 여기에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조화에서 제일 먼저 우리들이 심혈을 기울여서 생각해야 될 부분이 필연성의 신학과 우연성의 신학의 문제에요. 자,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으실 것이에요. 그러면 도대체 예정이 무엇이냐? 구원받을 사람과 구원받지 못할 사람을 하나님이 미리 정하셨다는 것인데 만약에 예정이 되었다면 내가 예수를 열심히 믿을 필요가 없고 만약에 예정이 되어있지 않다면 내가 애써서 예수를 믿지 않아도 결국은 구원받지 않을 것이 아니냐? 그런 이야기를 들어보았어요? 안 들어보았어요? 그런 질문을 받으면 사실 할 이야기가 별로 없어요.
제가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제일 먼저 궁금했던 것이 그것이었어요. 목사님한테 물어보니까 그냥 말씀을 믿으라고 그러시더라고요. 그냥 열심히 믿으라고 그러시더라고요. 그 후로 신학교에 가서도 조직신학시간이 되면 저는 좀 안 그랬는데 학생들이 과격하게 교수님하고 싸웠어요. 그런데 교수님이 지금은 너희들이 다 몰라도 2학년이나 3학년쯤 되면 질문이 없어질 것이라고 그러셨는데 사실은 해결돼서 질문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포기를 한 것 같았어요. 그리고 그런 문제는 너무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으로 그것을 알려고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 무엄하기 짝이 없는 문제이고 마치 그것이 아버지한테 찾아가서 과거를 캐는 것과 같은 그런 것이라고 그러고 그것은 모두 신앙이 부족해서 그렇다는 것을 벌써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덮는 것이죠. 그런데 이제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래서 사실 저도 개인적으로 이 필연성과 우연성의 문제를 가지고 한 3년 가까이 고민을 했어요. 그리고 어느 정도는 풀었지만 사실은 5년 전까지만 해도 사실은 풀지 못한 부분들이 있어서 사실 제가 두 권의 책을 쓰다가 이 문제에 걸려서 집필을 멈춘 적이 있어요. 그래서 이것을 내가 해결을 보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그러면서 사실은 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미국 역사상 쓰인 가장 어려운 책이 있어요. 미국의 역사상 가장 어려운 책인 마이크트웨인이라는 사람이 읽고 하도 짜증이 나니까 집어던지면서 ‘이 책의 저자는 정신병자다.’ 그렇게 이야기한 책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조나단 에드워즈의 The Freedom of Will 이라는 책이에요. 의지의 자유라는 책이고 그 책보다 앞서는 책은 여러분들이 잘 알다시피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유의지론이라는 책이에요. 그런 것들이 머리를 희게 만드는 머리에 쥐가 나게 만드는 그런 책들인데 하여튼 초판이 270권밖에 안 팔릴 정도로 에드워즈 당대에도 그 책을 이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요. 그리고 신학자들 중에서도 아주 신중하게 에드워드 자신도 정리가 안 되었을 것이라고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어요. 그래서 철학을 배운 사람이 그 책을 읽고 와서 나보고 가르쳐줄 수 있겠느냐고 물어볼 정도로 그렇게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그런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고 또 내용들 중에도 비판을 받는데 비판을 하는 사람들도 사실 알고 비판을 하는 것인지 잘 모르고 비판을 하는 것인지 서로 저자도 잘 모르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잘 모르고, 그 비판을 지켜보는 사람들도 잘 모르고 그러는 것이죠. 그런 많은 책들이 있고요 그리고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 복잡한 책들이 많은데 요즘은 그런 것 가지고 별로 논쟁도 잘 안 해요. 필연성 자체가 없다고 그래버리고 전부 다 인간에 달린 자율이라고 그러니까 그 책을 가지고 씨름을 하는 것보다는 지금 제 설명을 듣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간 관계상 내가 더 상세하게는 설명은 못하겠고 필요한 만큼만 해보겠어요.
자, 우선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잖아요. 제 이야기를 들으면서 연상을 잘해보세요. 사람이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일들을 많이 겪잖아요. 이것은 하나님이 이것을 몰랐다고 그러면 말이 안 되잖아요.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한꺼번에 모든 것을 알고계시는 하나님이시죠.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것이 현실이에요. 현실. 시간의 차이가 없으니까 현실이에요. 그것을 어려운 말로 ‘프라이젠트’ 라고 그래서 현전한다는 것이에요. 하나님 앞에 숨김없이 모두 드러나는 것이에요. 우리에게 숨겨지는 것은 무엇 때문에 숨겨지는 것이에요. 모르는 것은 왜 모르는 것이에요. 예를 들자면 이렇게 하면 여러분들은 이 속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잖아요. 물체가 가리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렇죠? 만약에 투명안경을 쓴다면 보이지 않겠어요? 그 다음에 가려진 것은 무엇이에요? 이 책이 여기 이렇게 있는데 이 책이 책상위로 떨어질까요? 땅바닥으로 떨어질까요? 내가 물어보면 그러면 여러분들이 알 수 있겠어요? 모르겠어요? 모르죠. 만약에 ‘이 위로 떨어질 것이에요.’ 그러면 나는 뒤로 던져버리고 ‘뒤로 떨어질 거예요.’ 그러면 이 위에 내려놓고 대답을 두 개하면 가만히 들고 있을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원인과 결과가 연관이 감추어졌기 때문에 사실은 이 결과에 대해서 모른다고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에게는 그런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죠. 시간이나 인과적인 연결 관계 이런 것들이 하나님에게는 감추어진 것이 있어서 모르는 부분이 있다면 그분이 하나님이실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러면 우리는 그분을 향해서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이라고 노래할 수 없는 것이죠. 그런 것이에요.
그러면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여기에서 이렇게 살아요. 살아가는데 이것은 우연히 사는 것처럼 살아요. 그럼 그것이 하나님 안에는 이미 그렇게 우리들을 살게끔 해야겠다는 모든 아는 계획, 최소한으로 양보하더라도 그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앎이라는 것은 존재했을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조나단 에드워드는 이런 반문을 하는 것이에요. 알기만 하고 하나님의 뜻이 없다면 그것이 뭐가 아는 것이냐? 그러니까 하나님에게는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안다는 것과 하나님이 그렇게 되게 한다는 것 사이는 나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죠.
자, 그럼 이런 식으로 그림을 그려보세요. 여기에서 일련의 사건이 일어나요. A라는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의 꼬리를 물고 B에서 C로 C에서 D로 D에서 E로 사건이 막 일어난다고 봐요. 그러면 A라는 사건은 시간적으로 앞섰고 이 사건의 결과로써 B가 일어나고 B라는 사건의 결과로써 C가 일어나고 C라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D라는 사건이 일어나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사건들이 일어날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이것을 시간을 빼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이것들을 다 끌어오면 이쪽 단면에 점으로 표시가 되겠지요? 이해되지요? 시간을 빼버리면 하나의 면에 다 점으로 꽂힐 것이 아니에요? 그 점들이 원인과 결과로 이어질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그런 방식으로 만물들을 시간들을 초월해서 아신다는 것이에요.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설명해줄게요. 여러분도 그런 식으로 만물을 알 수가 있어요. 어떻게 아느냐하면 과거를 알아요.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은 그렇게 몰라요. 그런데 과거에 대해서는 알아요. 그러면 예를 들어봅시다. 여러분 1년 전에 일어난 일은 10년 전에 일어난 일보다 더 또렷합니까? 그러면 10년 전에 일어난 일이 1년 전에 일어난 일보다 더 또렷합니까?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치매 끼랍니다. 치매가 그런 것이랍니다. 치매는 어제 일은 생각이 안 나고 10년 전 일이 또렷한 것이에요. 고개를 끄덕인 사람들은 정신과 진료를 받으셔야 될 것 같아요. 그렇게 일단 일어날 때는 1년 전에 일어난 사건은 지금 일어난 사건보다 1년 먼저 일어났고 1년 후에 일어날 사건은 지금보다 1년이 지나야 발생하잖아요. 그런데 이것이 일단 다 거쳐서 과거가 되어버리고 나면 하나의 기억의 판에 꽂혀버리는 것이에요. 그래서 일주일전의 일을 생각할 때는 0.1초 만에 떠오르는데 7년 전의 것을 생각하려면 부팅이 한참 되어서 한 7초 걸려야지만 떠오르는 것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것이 받은바 인상에 따라서 50년 전의 일도 생생한가하면 어제일도 기억이 가물가물한 일이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의 기억 판에 새겨지는 것이죠. 그러면 그것은 그런 식으로 존재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되요? 처음에 이 사건이 일어날 때는 그냥 몸부림을 쳤고 저 사건이 또 일어난 것이에요. 그리고 저 사건이 또 일어난 것이에요.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몰랐는데 다 일어나고 보니까 하나의 판에다가 그려보니까 아! 이랬기 때문에 내가 이일을 겪었고 이 일을 겪게끔 허락하신 것은 이렇게 하시려고 그랬구나! 이렇게 했기 때문에 결국 이렇게 되었구나!
그러면서 요셉과 같은 사람의 판을 그려보잖아요. 형이 왜 팔았을까? 조금만 일찍 와서 건져가지……. 그런데 벌써 팔려갔어요. 왜 하필이면 보디발의 집에 들어갔을까? 아니 그렇게 충성스럽게 했는데 그 여자가 유혹을 해서 사랑하려면 끝까지 사랑을 하지 그렇게 모함을 해서 옥 속에 처넣고 처넣어도 그 술 맡은 관원장은 자기가 대우를 잘 받았으면 빨리 가서 구해주지 왜 늦게 구해주었을까? 그것이 하나하나 일어날 때는 우리도 뒤의 성경을 읽기 전에는 왜 그런지를 몰라요. 다 일어난 다음에 판에다 놓고 그려보면 기가 막히게 이게 그래야할 필연성으로써 정리가 되는 것이죠. 요셉이 그렇게 꿈을 잘 해석해주었는데도 2년 동안이나 옥에 있어서 은혜를 잊어버리고 있었잖아요? 석방된 나이가 30이었잖아요? 나중에 애굽의 고고학적 자료를 조사해보니까 30이 공무담임 최소연령이에요. 2년 전에 나왔으면 왕이 그냥 돈이나 주어서 돌려 보냈을텐테 그랬기 때문에 공직에 취임할 수 있었던 것이죠. 이런 그림이 하나의 판에 나오는 것이죠.
그러면 이 하나의 판에 그려진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사건이 조밀하면 원인과 결과의 관계는 사건의 연결인 선이 될 것이 아니에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 시간 속에서 쫙 펼쳐지는 것이죠. 펼쳐지는데 그 필연적으로 이것이 펼쳐지면 그러면 사람들이 기계처럼 움직여야 되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움직이면 이것은 하나님이 세계를 향해 간섭하시는 것일 수 없어요. 그것은 사람을 인형극 할 때의 꼭두각시가 되는 것이죠. 인간은 그런 존재가 아니죠. 인간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존재로 의지를 가진 독립적인 존재로 태어난 것이죠. 그것을 하나님이 존중하시면서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이죠.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러니까 신비죠. 그러니까 이것은 아무리 잘 설명을 해도 믿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한 고리를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에요.
그 다음에 이런 한판에 그린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내재적 삼위일체 안에서 발견된다면 이것들이 펼쳐져 나갈 때에는 성삼위가 각각 개입하시면서 아주 아름답게 시간 속에서 이것들을 전개해 가시는 것이에요. 무슨 뜻인지 아시죠? 그래서 우리는 볼 때에 이 판에 그려진 것은 못 봐요. 그리고 시간 속에서 삼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펼쳐져 나가는 것만을 보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펼쳐져 나갈 때 그것은 우리 눈에 필연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연으로 보이는 것이에요. 왜? 내가 거기에 갔기 때문에 그 일이 일어났고, 내가 전도했기 때문에 저 사람이 예수를 믿었고, 이렇게 어떤 요소가 거기에 딱 작용을 해서 그 일이 이루어지니까 이 둘 사이에 혼돈이 생기는 것이에요.
여기에 두 가지 위험이 있는 것이죠. 첫째는 뭐냐 하면 우리가 일어나는 이런 경륜적 삼위일체 안에서 일어나는 우연적인 관계들을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삼위 하나님 안의 영원한 이러한 계획이 내재적 삼위일체 안에 필연성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를 부인해 버리는 것이죠.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하나님이 미리 아셨든지 모르셨든지 그것과 상관없이 저 사람이 예수를 믿는 이유는 내가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고 저 사람이 타락한 이유는 지가 교회를 안 나왔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이 이것을 어떻게 하시느냐? 에 대한 설명들이 사라지는 것이죠. 둘째는 반대로 필연성의 신학만 너무 강조하게 되면 그러면 하나님이 영원한 것을 작정해놓으셨다면 그것만을 계속 강조하게 되면 구원하시려면 혼자 하시지 왜 우리보고 믿으라고 그러실까? 또 우리를 구원하시려면 하시고 말려면 마시지 성령을 받으라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성령을 사오는 것인가? 프로그램에 주시기로 하셨으면 주시고 안주기로 하셨으면 마시는 것이지 왜 우리에게 왜 그렇게 말하시는 것일까? 성화시키시려면 시키시고 말려면 마시지 왜 또 열심히 하라고 그러고 마치 우리 눈에는 열심히 노력을 하면 성화가 되고 열심히 안하면 성화가 안 되는 것같이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그런 결과를 보이실까? 이런 것들 두 개의 질문이 상충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제 이런 모순적인 관계들을 설명하려고 보니까 인간이 머리가 너무 복잡해지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없을까? 그랬던 사람들이 교회사 속에는 늘 있었는데 그중의 한 사람이 16세기에 제수이트파의 신학자인 ‘루이드 몰리나’라는 학자가 등장하게 되요. 이게 철학사에서 굉장히 유명한 것이에요. 이 사람이 내세운 것이 뭐냐 하면 이상한 학설을 발표했는데 사람도 조금 이상해보이죠? 루이드 몰리나라는 사람이에요. 누구한테 몰리는지는 모르는데 몰리나에요. 지금 저한테 몰리고 있어요. 이 사람이 내세운 이론은 뭐냐 하면 하나님에게는 중간지식이 있다는 가설을 세우는 것이에요. 그러면 중간지식이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 실현성과 가능성 사이의 중간이라고 보는 것이에요. 그러면 실현성과 가능성 사이의 중간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그러니까 이런 뜻이에요. 하나님이 인간을 이렇게 다루실 때에 인간은 어떻게 반응할까? 이것에 대해서 그러면 인간은 폭넓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 아니에요. 이것을 선택할 수도 있고 이것을 선택할 수도 있고 또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할 수도 있고 다양한 선택의 가능성들이 선택지로써 존재하잖아요. 그 선택지에 대해서 완벽하게 알고 계시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무엇을 선택하든지간에 하나님이 ‘어! 네가 그런 식으로 선악과를 따 먹느냐? 나는 상상도 못했다.’ 하나님이 이러시지는 않는다는 것이에요. 이렇게 하면 그분이 하나님이실 수가 없잖아요? 그리고 만약에 너는 따먹게 되어있다. 우리가 주장하는 것처럼 필연적으로 삼위일체 안에 인간이 타락해서 선악과를 따먹게 되어있다고 필연이 되어있다면 그러면 인간은 기계가 되어서 이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 것이에요. 그러면 이제 타협하기 아주 좋은 것이죠. 하나님은 모든 선택지에 대해서 다 알고 계세요. 그 대신 그 선택지를 아담과 하와에게 강요하신 적도 없고 하나님이 또 그렇게 하시지도 않아요. 그러나 단 모든 선택지를 알고계시지만 무엇을 선택할지는 하나님도 좀 기다려봐야 한다고 보는 것이죠. 그것이 인간의 자유의지라고 보는 것이죠.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보면 이런 복잡한 필연성과 우연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더 많은 문제를 만들어 놓는 것이죠. 그렇죠. 왜냐하면 선택지가 그렇게 많은데 선택지를 다 알고 있어도 그 선택지를 무엇을 선택할지를 모른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모르신다는 것 아니에요. 그러면 그 다음에 무엇을 선택했을 때 그때마다 하나님은 처방을 내리셔야 되는 것이죠. 그러면 그야말로 하나님은 땜빵 하는 식으로 세계의 역사를 꾸려 가셔야 하는 것이에요. 얼마나 바쁘시겠어요? 이럴 때 과연 그러면 인간이 그렇게 자율적으로 선택하는 선택지가 전체적으로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뜻을 이루어가게끔 인간이 그렇게 선택한다면 그것은 또 어떻게 해서 그렇게 일관성 있는 선택을 하게 되느냐? 하는 더 복잡한 질문들이 많이 나오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신앙으로 믿어야할 것을 이성으로 풀려다가 보면 그 다음에는 이성으로 더 풀기 어려운 모순된 문제들이 계속해서 발생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소위 이야기하는 스캔띠아메디아 라는 이 중간지식은 영어로 Middle Knowledge 라고 그러는데 이러한 사유는 결국은 지금도 이런 것들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여러분 책에는 없고 내 책에 있는데 이렇게 나와요. 읽어볼게요. ‘중간지식이론이란 하나님이 우연히 일어날 일들 특히 발생 가능한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 행사에 대해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선택지에 대해서 알고계시기 때문에 결국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하든지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예지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어떤 선택지를 선택하든지 그것은 하나님에게는 필연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 행사의 우연성으로 하나님의 지식과 의지의 필연성을 제한하려는 시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의 완전한 자율이라는 인본주의 낚싯줄에 걸어놓은 미끼였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이 미끼를 물었고, 종교개혁 시대에는 소키누스주의자들이 이 미끼를 물었다. 그 후에는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이 미끼를 물었고, 근대에는 이신론자들이 미끼를 물었으며, 현대에는 자유주의자들과 반펠라기우스주의적인 개방신론자들이 이 미끼를 즐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설명은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없거니와 더 많은 논리적인 문제들에 의심스러운 씨앗을 기독교 교리 전체에 뿌려놓고 만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소위 개방신론자라고하는 신학자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이 이것을 그대로 내세워요. 그래서 하나님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모르신다. 그것은 하나님이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에게 전적으로 맡기셨다고 보는 것이에요. 그것은 펠라기우스주의적인 것이에요. 그런 속에서 이제 인간중심의 세속주의가 얼마나 커다란 힘을 얻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그 다음에 필연성과 우연성의 문제는 속성과 관련이 되어있어요. 47p로 넘어갑니다. 바로 필연과 우연의 문제로 들어가겠어요. 47p 넷째 줄을 보십시오. ‘우리가 알 수 있는 바는 이것이다. 우리가 시공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경륜과 관련해 생각하는 인간 편에서의 필연과 우연은 영원 자체이신 하나님의 존재와 관련해서도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사실은 자연사물에서도 나타난다. 거시세계에서의 물리법칙이 미시세계에서는 절대로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는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상대성을 생각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자, 아인슈타인이 혼자 한 것은 아니지만 아인슈타인이 전체적인 것을 정리해서 새로운 물리학의 시대를 여는데 아인슈타인이 나타나기 전에는 뉴턴이 지배를 했어요. 뉴턴이 근대 물리학을 지배했는데 천재였어요. 그래서 여러분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다는 그 사람이잖아요? 정말 천재였는데 이 사람이 이제 설정한 세계관은 이런 것이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이 모든 창조세계를 만드실 때에 법칙을 만들어놓으셨다. 그래서 그 법칙에 의해 이 자연의 세계는 철저하게 예외 없이 적용을 받고 있다. 이것이 뉴턴의 물리학의 핵심적인 것이었어요. 그래서 이 세계의 아름다움은 그 법칙의 아름다움에 있다고 본 것이죠.
그런데 사실은 뉴턴이 이러한 것들을 체계를 세울 때 뉴턴이 자연과학계에서 활동을 하면서 이런 이론을 세웠다면 이런 것들을 굉장히 뒷받침해준 놀라운 변화들이 어디에서 일어났느냐하면 철학계에서 일어나고 있었어요. 그게 바로 데카르트의 출현이에요. 데카르트에 대해서는 제가 2년 전에 산상세미나에서 상세하게 말씀드렸잖아요? 잘 모르시면 인터넷에 들어가서 ‘세계화와 진리의 전달자로서의 신자의 역할’이라는 세미나를 꼭 들으셔서 정리를 하세요. 간단하게 정리를 하면서 연결을 시킬게요. 그게 뭐냐 하면 이렇게 본 것이죠. 데카르트 이전까지는 중세에서 사유의 중심이 신이었어요. 하나님은 중심에 계시고 그 다음에 세계와 모든 요소들이 하나님 주위를 돌아가는 것이에요. 그 돌아가는 많은 상대적 개체 속에 인간이라는 존재도 있는 것이죠. 그리고 절대존재가 이렇게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다른 모든 존재는 이 절대존재로부터 존재를 부여받은 것이죠. 그러니까 그 절대존재와 맥을 같이하고 있는 한에서 상대성을 가지고 돌아가는 것이에요.
그러다가 그 다음에 이것을 완전히 바꾸어놓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게 뭐냐 하면 데카르트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하나님이 있어야 되는 중심자리에 ‘나’라는 존재를 갖다놓고 하나님을 밖으로 밀어내서 하나님을 나 이외에 다른 타자들이 함께 내 주위를 돌아가는 개체로 갖다놓은 것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이야기했느냐하면 ‘꼬깃도 에루그숨’ 이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데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랬잖아요. 그런데 그 생각한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회의한다는 뜻이에요. 무슨 직원회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꾸 의심을 하면서 생각한다는 것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하면 계속 끝까지 의심을 하고 회의를 해보라는 것이에요. 남이 믿었다고 그것을 믿지 말고 그냥 끝까지 의심을 해보라는 것이에요. 그러면 모든 것이 다 의심이 된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의심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이 있어요.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이 사실 이것이 의심이 안 되는 것이에요. 그것이 바로 꼬깃도 에루그숨의 의미에요. 데카르트에게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존재는 누구밖에 없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아니라……. 아니 왜 그렇게 은혜가 넘쳐요? 자다가 다리를 긁는 격이지 거기서 하나님이 왜 나와요.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을 수 있는 확실성은 신도 믿을 수 없고 도덕도 모두 다 믿을 수 없는 것이에요. 믿을 수 있는 것은 그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있는 나! 그 나라고 하는 존재는 부인할 수 없는 사유의 끝이에요. 그러니까 당연히 어떻게 되는 것이죠? 그 사람이 싫든지 좋든지 마지막 판단 자가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사실은 이것이 철학하는 사람들은 데카르트의 천재적인 머리에서 나왔다고 믿고 있거든요. 몇 사람하고 대화를 해보았는데 그렇게 믿고 있어요. 그런데 환상입니다. 절대 아니고요. 꼬깃도 에루구숨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데카르트보다 1200년 전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지홀리오르 에루구숨’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겨요. 그 사람하고는 반대에요. ‘내가 만약에 실수를 한다면, 오류에 빠진다면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같은 에루구숨이라도 완전히 다르잖아요? 내가 실수한다면 그러면 거기서 나는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한다는 것이에요. 그것을 변형시킨 것이에요. 그것을 집요하게 물었는데 데카르트가 끝까지 대답을 안했어요.
그래서 이 사람이 메르션분야라는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 진리에 대한 자기의 독특한 견해를 내놔요. 그게 뭐냐 하면 영원진리창조설이에요. 그래서 예전에는 하나님이 진리 자체라고 믿었거든요. 그런데 이 사람은 그게 아니라 하나님과 진리 사이에 간격이 있다고 본 것이죠. 하나님이 진리를 창조하신 것이에요. 그래서 그 자체가 하나의 법칙이라고 본 것이죠.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알 수 없는 저 너머의 세계에 계신 분이에요. 우리가 겨우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진리만 인식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죠. 그렇게 인간을 설정해놓고 나니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다고 저 멀리 보내버리니까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인식하는 자신인 것이죠. 그런데 이런 것들은 결국은 중세철학이 후기에 오면서 이제 여러분들이 고등학교나 대학 다닐 때 역사시간에 배운 인식론, 관념론, 유명론, 실재론, 이론 논쟁들을 배우잖아요? 그때에 이미 벌써 이렇게 전통적인 중세철학이 찢어지기 시작하면서 인간중심적인 사유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이것이 철학사적으로 인문주의와 종교개혁의 에토스라고 할 수 있는 인문주의와 이런 것들의 르네상스의 정신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죠. 결국은 신으로부터 중심점을 인간으로 이동하고자하는 사유의 출발이었던 것이죠. 거기에서 이게 온 것이에요. 그렇게 되고 보니까 그 다음에 (무엇을 하다가 여기로 왔지요? 아인슈타인 이야기 하다가 그랬군요!)
그런 백그라운드 속에서 이 사람이(아인슈타인) 뉴턴은 물리학적으로 접근해서 그 가설을 입증하는 것이에요. ‘법칙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래서 법칙을 하나 발견해서 대입을 해보니까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이 모든 세계는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고 법칙을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이라고 본 것이죠. 그러면서 이 두 사람의 철학과 과학을 토대로 해서 엄청나고 폭발적인 과학의 발전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뭔가 법칙을 발견하는 것 자체를 굉장히 힘들게 생각했고 법칙을 발견해도 그것을 끝까지 믿는 것 자체에 대해서 회의를 많이 했는데 이제는 절대적으로 신뢰하기 시작한 것이에요. 그 신뢰가 결국은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로 나가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때는 무슨 때가 되느냐하면 역사적으로 이것들이 구라파에서 해양시대와 관련이 있게 되요. 그래서 대륙에서 각 나라들이 각축전을 벌이는데 도저히 먹고살 수 없이 가난하니까 배를 타고 죽으면 죽어라 하면서 멀리 나가보는 것이에요. 가니까 다른 사람들이 사는 것이에요. 거기에 보니까 장사도 해서 먹을 수 있고 여러 가지 관계를 맺으면서 일할 수 있는 것들이 벌어지면서 미개한 나라들에 물건을 팔면서 산업화혁명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패권들을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이런 나라들이 나누어 갖기 시작하면서 여러분들이 잘 아는 근대의 치열한 식민지 전쟁들이 일어나는데 그게 15세기부터 시작 되요.
그러니까 사회는 폭발적으로 물질을 생산해서 팔아야하니까 그런 과학들을 필요로 하는 것이에요. 만들어내면 그 과학이 즉각적으로 돈이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과학기술이 폭발적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이런 어마어마한 물질문명들을 이루어가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자신에 차있었던 것이에요. ‘봐라 인간이 이렇게 대단하고 자연의 법칙은 모두 통용되는 것이다.’ 그때에 일단의 과학자들이 나오면서 뉴턴의 이 과학체계 소위 이야기하는 뉴턴이즘 즉 과학에서 시작하지만 이 뉴턴적인 사고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건축을 비롯한 모든 방면에 안 미치는 영향이 없을 정도로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것이에요. 그것이 뭐냐 하면 모든 것은 법칙으로 되어있고 그리고 인간의 이성은 그것을 찾아낼 수 있고 그래서 인간은 위대하고 인간이 찾아낸 것은 신뢰할만하다는 이런 가설이에요. 그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세계정신을 형성하는 것이에요. 지금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이 이렇게 교만해지는 것이죠.
그런데 이제 이미 아인슈타인이 나타나기 전부터 사람들이 이 뉴턴체계에 대해서 회의를 품기 시작한 것이에요. 그러면서 이 아인슈타인이 천재는 천재지요. 16살 때에 상대성이론의 기본토대를 이 사람이 발견한 것이에요. 그러면서 아,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이라고 믿었거든요. 왜냐하면 뉴턴법칙에서는 이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이거든요. 그런데 ‘아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 이것을 생각하면서 이 사람이 소위 이야기하는 특수상대성이론을 내놓는 것이에요. 그래서 특수상대성이론을 내놓는데 그 상대성이론이 뭐냐 하면 이런 것이에요. 책 47p를 보세요. ‘예를 들어보자. 뉴턴의 물리학이 장악하던 시대만 해도 시간과 공간은 어디서나 절대좌표계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요? 시간은 얼마가 흘렀고 그리고 위치는 어디고 하면 이것은 불변하다고 믿었거든요. 그럴 것 아니에요? 그런데 이게 깨지는 것이에요. ‘1905년에 앨버트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이 발표되고 나자 이러한 고정관념은 여지없이 파괴되었다. 그때가지 시간과 공간은 따로 이해되었으나, 아인슈타인에게 와서 시공간이라는 개념으로 정리되었다.’ 그래서 시공간=Time Space 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이에요. 시간과 공간은 절대로 다르게 이해될 수 없다고 했다. 뉴턴의 물리학에서는 이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에요. 그러나 이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 들어가 보면 이 두 개는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이죠.
그래서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라는 사실은 천체물리학의 연구 안에서 밝혀지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어떤 시간과 공간에 자리 잡고 있는 물체를 운동이 변화시킨다고 이해하고 있었지만 반대로 아인슈타인은 운동이 시간과 공간의 변화과정의 속도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에 대해 변함없이 통용되는 좌표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물체의 운동에 따라서 좌표계도 변하여야 한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시간과 공간의 문제는 인과관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다시 말해서 시간과 공간의 좌표가 다르면 한 조건에서 필연적인 것이 다른 조건에서는 우연적인 것이 될 수도 있고 또한 반대도 성립한다. 이러한 사실은 빛과 관련해서도 잘 이해될 수 있다. 지구라는 환경에서 인간의 경험으로 보면 빛은 항상 직진하지만…….’ 그리고 시간은 빛에 의해서 재는 것이에요. 그렇죠? 젊었었는데 한 2년 후에 만났더니 늙었어요. 그런데 그 젊었다, 늙었다는 것을 전달해주는 것이 빛이에요. 그렇잖아요? 그 다음에 시간이 얼마나 흘렀느냐고 할 때 사물이 변하는 것, 없는 것이 더해지거나 있는 것이 줄어드는 것을 보고서 시간을 우리들이 재는 것이지 그런 것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면 우리가 시간을 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지는 것이죠. 예를 들어 우리를 캄캄한 감옥에 처넣고 배고픔과 용변을 느낄 수 없는 주사를 놓았다고 했을 때 우리가 시간을 재는 것은 불가능 한 것이죠. 예를 들어 우리가 배가 고프다면 그래도 시간을 알 수 있잖아요? 배꼽에 시계가 달렸잖아요. 배가 고프니까 저녁때구나! 두 번째로 배가 고프니까 아침이구나! 이렇게 잴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것은 잴 수 없어요. 그래서 무너지게 된 것이에요.
잘 보세요. ‘우주에서는 커다란 질량을 가진 천체에 의해서 빛이 휘기도 하는데 지구에서와는 다른 시간의 개념을 도입한다.’ 그래서 여러분들 보면 우주여행을 가서 3일 만에 돌아왔는데 지구에 오니까 천년이 흘렀다더라. 그러잖아요? 그게 전부 다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이야기에요. 시간이 그렇게 상대적인 개념이 있는 것이에요. ‘이렇게 되면 시간이라는 절대적인 기준이 사라지게 되고 주어진 공간에 따라 시간좌표계가 생기게 되며 모든 공간에서 통용될 수 있는 시간좌표라는 것은 없다. 빛의 속도를 능가하는 속도로 이동을 하게 된다면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공간의 개념은 다 무너지게 된다.’ 그래서 임마누엘 칸트라는 사람이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인간은 물 자체 즉 독일어로 Ding an sich 라고 그러는데 이 Ding an sich를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에요. 이런 물병이 이렇게 보이는 이유는 지금 이 조건에서 이렇게 보이는 것이죠. 예를 들자면 여러분들이 눈을 이렇게 하고 들여다본다든지 아니면 여기에다가 오목렌즈를 쓰고 본다든지 그러면 요만해 보일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뭐가 진짜 이 물건의 원래의 모습이냐? 그것은 사실 아무도 알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예를 들면 여기와 여기 사이의 거리가 이만큼이라고 이야기하고 이 물건은 크기가 이만큼이라고 이야기할 때 그 모든 것들은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인데 만약에 전달하는 것이 빛의 속도로 전달되어 올 때 1초에 300,000㎞를 가는 빛에 의해서 모든 것들을 측정하는데 만약에 우리가 이동하는 속도가 빛보다 빠르게 된다면 그러면 과거에 출발한 것들이 현재의 빛으로 떨어지게 되니까 그런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실제로 가보면 그게 없는 것이죠. 존재하지 않는 것이죠. 그러니까 거리, 시간, 크기, 물질, 이 모든 개념들이 전부 다 무너져버리는 것이에요. 그러면 그때는 존재를 안 하게 되겠느냐? 그것은 우리가 모르는 것이에요. 이런 복잡한 사유의 문제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 다음에 보면 여기에는 안 나오는데 예를 들면 또 하나가 이런 것이에요. 제가 가끔 예를 드는 것인데 우리는 이렇게 보는 것이죠. 어떤 물건을 만든다고 그러면 작은 부속들이 계속 집적을 이루어서 하나의 커다란 물건을 이루잖아요? 그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알기 위해서는 부숴보면 알아요. 부수어서 계속 해체해보면 그것이 원래 무엇이었는지 나와요. 그런데 이런 말은 원래 분자까지만 통용되는 것이에요. 분자는 뭐냐 하면 한 물질의 성질을 유지하는 최소의 단위가 분자에요. 분자에서 내려가게 되면 이제 원자로 이루어지고 원자는 다시 양성자, 중성자로 이루어져요. 지금은 더 발달해서 중성자, 양성자 아래에 쿼크와 렙톤까지 내려가요. 얼마나 내려갈지 우리는 모르는 것이죠. 그러면 이렇게 입자들이 나눠진다고 볼 때에 그러면 렙톤이 모두 모여서 쿼크를 이루고 쿼크가 모여서 양성자와 중성자를 이루고 양성자와 중성자가 집적이 돼서 원자를 이루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나온 것이 유명한 촉근이론이에요. 촉근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원자 이하의 미시 세계 속에서 또는 미립자들이 보이지 않는 끈처럼 운동을 하는 질서를 가지고 있는데 이 떨리는 파장의 크기에 의해서 중성자로 되었다가 그 다음에 양성자도 되었다가 이렇게 변칙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에요. 이런 인과관계는 거시세계 즉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런 거시세계 속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인 것이죠. 이것은 이것이지 이것이 떨려서 물이 불이 되었다가 불이 물이 될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그런 것이 이런 미립자의 세계에서는 여기에서 통용되는 원칙이 적용이 안 되고 아까 이야기했듯이 초 거시세계로 올라가서 우주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여기에서 존재하는 이런 법칙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죠. 대표적인 것이 중력의 법칙이잖아요. 우주공간에서 이것을 던지면 공중에 그냥 떠다닌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법칙이 적용이 안 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면 제가 가끔 설명하잖아요. 사각형을 보면 수학적으로 선분은 두께, 부피가 없이 0이에요. 하나의 똑같은 사각형에 또 하나의 사각형을 이차원에서 포개놓는다는 것은 0+0 이 되는 것이죠. 하나의 사각형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죠. 수천 개를 포개놓아도 존재하지 않지요. 그러나 3차원에서는 하나의 사각형 위에 또 하나의 사각형을 놓을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러면 이차원 밖에 모르는 사람인 경우에는 이 말을 아무리 설명을 해도 못 알아듣는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은 몇 차원에 계신 분이시냐 하면 무한대차원에 계신 분이에요. 무한차원에 계신 하나님이 결국은 사람들은 그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하면 ‘자, 봐라 우리가 이렇게, 이렇게 보편적인 가치가 있고 도덕의 법칙이 있고 신이 있다고 믿었다. 그랬는데 뉴턴이즘이 깨지고 아인슈타인의 이 세계관이 들어오면서부터 결국은 이런 것들은 미립자의 세계로 내려가면 사실이 아니고 초 거시세계로 가도 또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통용되는 것은 상대적인 것일 뿐이라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러면 사실은 어떤 태도를 가져야되느냐 하면 그렇다면 초미립자의 세계가 이렇게 거시세계와 다르고 초 거시세계와 거시세계가 다르다면 이 같은 물질세계도 다른데 영의 세계에 존재하고 무한차원 속에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이 모든 것들을 초월하시는 위대한 분이신가? 라고 생각을 가지면 하나님을 향해 더 잘 믿고 찬송할 제목이 되는 내용들을 이 사람들은 ‘봐라 우리가 이제까지 옳다고 생각했던 자연의 법칙이 미립자의 세계에서도 안통하고 초 거시세계에서도 안 통하니까 우리가 여기에서 만들어놓은 도덕의 법칙, 신, 불변의 가치, 도덕 이런 모든 것들은 결국은 우리의 착각의 소산이지 영원한 존재로부터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이것을 따르고 신봉하는 것 자체는 지극히 미개한 짓이다.’ 그렇게 쇄기를 박으면서 그러면 어떻게 살 것인가? 그러므로 인간은 Free다. 자유로운 존재다. 그래서 영국 사람인 도킨스 같은 사람들이 돈을 모아서 버스에다가 써 붙였더라고요. 'Don`t worry! Probably there is no God!'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왜 하나님이 계신 것이 걱정이 되게끔 사느냐는 것이에요. 그렇게 해서 도덕, 신의 가치 이런 것들을 다 거부하는 것으로 나가는 것이에요.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 것은 뭐냐 하면 이것은 결국은 뭐냐 하면 하나님 안에 있는 어떤 필연들이 우리에게 전달될 때 내질 자체가 틀려서 우리에게 이해할 수 없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죠. 예를 들어볼게요. 하나의 젓가락을 공기와 물 사이에 걸쳐놓게 되면 젓가락이 똑바로 안보이고 굽게 보이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이게 굽은 것이 아니잖아요? 매질이 틀리기 때문에 직선인데 여기서 꺾어져 보이는 것 아니에요. 그것을 새도 알아요. 새가 공중에서 날아서 물고기를 딱 찍어서 먹잖아요. 그게 눈에 보이는 대로 찍으면 걔는 매일 헛방을 칠 것이에요. 왜냐하면 물고기는 공중에서 새가 보는 그 위치에 있겠어요? 안 있겠어요? 안 있지요! 그런데 그것을 계산해서 찍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것을 의심하고 믿지 못하면 새만도 못한 것이에요. 새 머리도 안 되는 것이에요.
그러나 이것이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에요.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런 것들을 고민하다가 아주 아름다운 고백을 해요. 거기에 써놨어요. 보세요. ‘내 하나님이시여 그러면 당신은 무엇이십니까? 모든 것을 바꾸시되 당신은 바뀌지 아니하시며…….’ 앞의 것은 경륜적 삼위일체고 뒤엣것은 내재적 삼위일체에요. ‘당신은 새롭지도 오래되지도 않으시면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늘 일하시지만 언제나 고요하시고, 항상 거두시지만 자신은 요구하시는 것이 없으시며, 당신 자신은 없는 것이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가르시고 온전하게 하시고 찾으시나이다. 당신은 사랑하시면서도 열정에 의해 소란 되지 아니하시며, 뉘우치시되 당신 자신은 아파하시는 적이 없고, 성내시되 당신 자신은 평안하시며, 일은 바꾸시되 자신의 계획은 바꿈이 없으시고, 아쉬운 것이 없으시면 서도 이(利)를 좋아하시고, 인색할 리 없으시면 서도 변리를 요구하시나이다. 당신께 빚지게 하려고 더 바치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당신 것이 아닌 것을 누가 지녔기에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신 빚을 당신은 갚으시고 갚으시면 서도 당신 자신은 아무 것도 잃지 아니하시나이까?’ 감동이지요. 아! 그렇구나! 당연히 하나님은 당신 자신은 변하지 않으시면서도 이 세계를 끝없이 변화시키셔요.
2. 내재적 삼위일체와 신비
그러면서 우리가 내재적 삼위일체가 그렇게 놀라운 신비잖아요? 그런 내재적 삼위일체가 그렇게 신비인데 그러면 그 신비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 신앙을 통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의 삼위일체론에서 이런 고백을 했어요. ‘내가 삼위일체에 대해서 올바르게 설명하지 못한다면 나를 올바르지 못하게 설명하는 이성의 능력의 부족에 대해서는 나를 꾸짖어라. 그러나 내가 그 삼위일체를 믿는 신앙 때문에 나를 꾸짖지는 말라.’ 얼마나 멋있어요. 아멘을 해야지요. 그것은 이성을 초월한 신앙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이에요. 설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누가 지어내지 않았을까요? 나는 누가 지어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도 어렸을 때 누구한테 들은 이야기에요. 삼위일체를 쓰다가 도저히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내재적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을 때 바닷가를 산책했대요. 그런데 조그만 아이가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웅덩이에다가 퍼붓더래요. ‘너는 무엇을 하느냐?’ 그랬더니 ‘아저씨 이 바닷물 전부를 이 웅덩이에다가 담아버릴 것이에요.’ ‘자식!’ 그러면서 한참 걸어가다가 생각이 스쳐서 뒤를 돌아보니까 이 아이가 없더라. 그런데 누가 지어낸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일화가 있어요. 그때 아우구스티누스가 ‘아! 나 자신의 이성으로는 모두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라는 사실을 깨달았대요. 그것을 알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까 그래서 그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시라는 사실을 그 모든 만물을 초월해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하나님의 성경 말씀에 기초해서 우리들이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가 믿을 뿐이지 그 삼위일체 신비 그 자체를 쭉 들어가서 우리가 그 속에서 믿어야 할 만큼 설득될만한 이성적인 그 무엇을, 믿음을 대신하는 그 어떤 이성적인 설명들을 찾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에요. 그렇게 믿어지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런 이야기에요. 더 많은 이야기가 있는데 생략하겠어요. 머리가 아프실 것이에요. 그래서 넘어가요.
3. 경륜적 삼위일체와 송영
자, 그 다음에 3번으로 넘어가면 경륜적 삼위일체와 송영이 나와요. 51p를 보세요. ‘내재적 삼위일체가 말할 수 없는 신비에 싸여있고 오직 신앙으로써만 그것을 알게 되는 것이라면 경륜적 삼위일체는 피조물과의 관계 속에서 일하시는 각 위와 그를 통해 드러나는 신적 본질의 속성을 앎으로써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런 점에서 경륜적 삼위일체는 양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즉, 하나님에 대해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신 존재를 인식하게 하며 세계에 대해서는 내재적 삼위일체에 대한 인식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깨닫게 만들어주신다. 창조세계는 하나님의 속성의 전시장이다. 그러나 그 속성의 전시는 피조물과의 관계를 통해 인간에게 현시되며 이를 통하여 본질상 불가해한 하나님이 인간에게 알려진다는 점에서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의 인식으로 나아가는 필수불가결한 통로이다.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관계는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의 관계이다. 하나님의 속성은 하나님께서 피조물과 맺으시는 관계 안에서 드러난다. 각 위는 각기 고유한 실재로서 피조물들과 관계를 맺으시며 작용하지만 본질을 분할하지는 않는다. 창조세계 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속성의 발현은 하나의 신적 본질의 효과이다.’ 그러면서 쭉 이야기가 나와요.
여기에서 중요한 이야기를 하나 한 번 더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런 이야기에요. 이게 하나님의 아심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요.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여러분들이 내재적 삼위일체가 무엇인지 이해되었으니까 이런 질문을 해볼게요. 그렇다면 결국은 하나님은 이 세계에 일어날 모든 일들을 아신다는 것이에요? 모르신다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모든 것을 알고계신 하나님에게는 새로운 것이 있어요? 없어요? 없을 것 아니에요? 다 알고 계신데 없을 것이 아니에요?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한꺼번에 다 알고계시니까 모든 것이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잖아요? 그렇게 되면 또 무슨 어려움이 생기느냐하면 그러면 우리 인간을 향해서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명령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 때에 느껴지는 하나님의 기쁨, 그 다음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할 때 경험되는 하나님의 슬픔, 심지어 성령이 우리 안에서 탄식하시고 슬퍼하시는 것이 있어요? 없어요? 그러면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들은 다 한꺼번에 아는 바 되셨다고 그랬고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계시고 그리고 하나님은 끊임없이 외부에 의해서 변화되는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이실 수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예를 들자면 ‘오! 그랬어! 아이구야! 나도 너한테 배우는구나!’ 그러시면 안 되잖아요. ‘어! 그랬다고! 상상치도 못했던 일인데…….’그러면 안 되잖아요. 그러면 결국은 무엇인가 설명이 필요한 것이죠. 더욱이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모두 아신다고 그랬는데 그 다음에 소위 이야기하는 비피동성이라는 인패스빌리따스 라고 그러는데 비피동성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모든 인간을 비롯한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존재는 비피동성을 가지고 있어요. 피동성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다른 존재가 그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죠. 예를 들자면 여러분 굉장히 끔찍한 사건을 보았다면 가슴이 아프고 예전에 없었던 더러운 것을 보면 울컥 토하고 싶은 것들이 일어날 것 아니에요. 이것이 정서적 피동성이에요. 정동적 피동성이라고도 그래요. 정동적 피동성은 내가 만든 말이에요. 그 다음에 또 어떤 것들이 있느냐하면 이자식이 그러면서 쳐서 내가 불구가 되었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존재적 피동성이에요. 그것이 뭐냐 하면 나를 망가뜨려버리는 것이죠. 사고를 당해서 내가 팔이 없어진다든지 목이 없어진다든지 참! 목이 없어지면 안 되지……. 팔이 없어진다든지 다리가 없어져서 상처가 남는다는 것은 존재적 피동성이에요. 하나님에게는 존재적 피동성도 없고 정동적 피동성도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파르르 화를 내셨다가 갑자기 ‘그러지 마시죠.’ 그러면서 기도를 몇 번했더니 다시 내가 언제 그랬느냐하면서 풀어지고 그 다음에 아침에 말씀에 순종을 안했다고 삐치시고 계속 이렇게 되면 그 하나님의 비위를 인간이 부지런히 맞춘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어요? 옛날의 이방족속들이 이방신들을 그런 식으로 비위를 맞추거나 우리 조상들이 조상신들과 터줏대감을 그런 식으로 비위를 맞추면서 살았잖아요. 우리들이 그런 신관을 가지면 안 되는 것이죠. 그러면 그렇게 되었다고 볼 때 그러면 굉장히 어려운 문제가 남는 것이에요.
그래서 무슨 문제가 남느냐하면 그러면 도대체 만약에 그렇게 필연적인 것만 된다면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살아라.’ 하는 도덕적인 의무, 구원, 속죄, 용서, 하나님과의 화목, 이런 것들은 설자리가 없어지게 된다는 것이죠. 화목했다는 것은 불화한 적이 있었다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어떻게 해서 불화가 다시 화목이 되느냐? 진짜 하나님이 정통적 피동성이 있으셔서 막 변형이 되었다가 다시 돌아오실 수 있는 거라고 이해하면 안 되는 것이죠. 하나님 이외의 사물들은 관계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요. 나 때문에 다른 존재에게 영향을 주기도 하고 다른 존재로부터 내가 영향을 받아서 변하기도 하는 것이에요. 이것을 가리켜서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우리말로 겪음이라고 그래요. 혹은 피동성이라고 이야기하고 이 피동성은 누군가가 나에게 영향을 주면 거기서 내가 생존해 남거나 행복해지기 위해서 반응을 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그 반응하는 것을 감응이라고 그러는데 이 반응을 계속하다보면 나중에 나 자신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에요. 이것이 변향이에요. 그런 변향이 살아남기에 적합한 상태가 딱 되는 것이죠.
그래서 부모가 아이들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야단을 치면 아이들이 ‘집어치워!’ 그러고 가출을 해버리고 안돌아오는 수도 있겠지만 상당히 많은 아이들은 그 변덕스러운 부모 밑에서 생존해 남는 법을 터득하는 것이에요. 그것을 계속 반복하다보면 인간성 자체가 그렇게 말하자면 양면적인 사람으로 되어가는 것이에요. 그럼 성격형성이라는 이야기 하는 것이 피동성에 의해서 변향이 일어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에요. 이것을 영어로 ‘모드’라고 그렇잖아요? 무슨 냉방모드, 절전모드같이 말이에요. 삶의 방식 자체가 그렇게 인간이 변화가 되는 것이란 말이에요.
자 그러면 보세요. 조금만 더 할게요. 그러면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에요.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되겠느냐는 것이에요. 이것은 굉장히 어려운 문제에요. 왜냐하면 이런 것이 없다고 그러면 하나님은 커다란 바위덩어리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 혼자 생쇼를 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은 아무렇지도 않고 가만히 계신데 ‘하나님 저 때문에 행복하시죠?’ 그러면서 막 박수를 쳤다가 ‘진짜 저를 모른 척 하시는 것이죠?’ 그러면서 막 울다가 ‘잘못했어요!’ 그랬다가 ‘용서해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그러면서 막 뛰어다니면서 혼자 생쇼를 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렇죠? 이건 아니잖아? 이것은 확실히 성경이 이야기하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아니잖아요? 또 반대로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후회하셨다는 이야기도 나와요. 기뻐하셨다는 이야기도 나와요. 제일 웃기는 구절이 창세기 1장에 나와요. ‘6일에 천지를 모두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아니 다 알고 계시는데 또 새삼스럽게…….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해서 영원을 보시는 분이시니까 당신이 천지 창조할 계획을 처음부터 가지고 계셨고 그럼 그것이 어떻게 시간과 공간속에 펼쳐질 것에 대해서 시간과 공간의 인과관계를 모르신다면 없다가 생겨난 것이지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보시니까 하나님은 다 아시는 것 아니에요? 그럼 뭐 새삼스럽게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좋았더라.’ 그러면서 마지막 날에만 ‘심히 좋았더라.’ 뭐 애들 장난도 아니고 뭐에요?
그래서 이런 문제를 어떻게 푸느냐하면 그래서 아름다운 구절 하나를 알려줄게요. 여러분들이 잘 아는 캔터베리의 주교 안셀름 이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이 자기의 ‘포슬로기온’이라는 책속에서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겨요. ‘에스끼베 새큰둥노스토로굼순 에드노세쿰둥 에띠니꿈 에스끼니제로스…….’ ‘진실로 당신은 우리의 경험에 따르면 자비로우시지만 당신 자신의 경험에 따르면 자비로우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우리가 비참한 상태에 있는 것을 보실 때 우리는 당신의 자비의 효과를 느끼나 당신은 어떠한 정동에도 흔들리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야지만 되는 것이지 만약에 하나님에게 울컥하는 감정이 생겨서 이놈을 이렇게 도와주어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다고 칩시다. 그래서 참 좋으신 하나님이 되었어요. 그러면 그것이 없었을 때는 하나님이 모자라는 것 아니에요? 그렇지 않고 옛날에도 완전하셨다고 하면 쓸데없는 것을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피조물에게서는 모자라는 것도 모자라는 것이고 남는 것도 남는 것이에요. 무슨 이야기인지 아시죠? 그런 완전하신 하나님에 대한 모든 상들이 다 깨져버리는 것이죠. 신론의 기본적인 말하자면 전제들이 깨지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은 이 둘 다를 인정해야 되요.
그러면 어떻게 불변하시는 하나님이시면서도 우리에게는 변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실 수 있느냐? 그것이 바로 영원과 시간의 차원의 이질성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란 말이에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믿어야 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성적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정도만 말을 해도 두 개의 이변성이라는 것은 나온다는 것이죠. 그래서 요번에 아자 하우드리안 교수가 와서 이야기할 후치우스라는 사람은 그분은 교재 속에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후치우스라는 사람의 책을 요번에 보게 되었어요. 요번에 화란여행에서 아주 고서방에 가서 뒤져서 진짜 1600년대 판의 책들을 구해왔어요. 이번에 특별히 성도들이 특별헌금도 해주셔서 그 돈으로 구해왔는데 그 판본들이 이번에 아주 논문을 쓰는데 도움을 주었어요.
그런데 그 보에티우스 같은 사람은 이렇게 보는 것이에요.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후회가 없으시다. 변하지 않으신다.’ 그렇게 하나님이 나오는데 또 어느 곳에서는 ‘변하신다, 후회하신다, 기뻐하신다,’ 이런 표현이 나오잖아요? 이런 것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에 대한 아주 중요한 설명을 내놔요. 그것을 이제 라틴어로는 굉장히 복잡해요. ‘스껜띠아 심풀리겐따이…….’ 아주 결론적으로 이야기해서 뭐냐 하면 우리는 만물을 알 때에 대체로 만물을 감각을 통해서 봄으로써, 혹은 상상함으로써 알아요. 그렇죠?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이 가지고 있지 않은 다른 방식으로 만물을 아시는 또 하나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죠. 그래서 그렇게 만물을 시간을 초월해서 영원 안에서 한 번에 현전하는 것 같이 아시는 그 방식을 단순지(단순지식)이고 또 하나는 인간이 사물을 바라보고 변화하는 모든 것들을 바라볼 때에는 자, 예를 들어서 지금 이것이 떨어졌을 때에는 이 떨어지는 것이 안 보이는 상태에서 갑자기 이것이 떨어지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여기에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의 상태에서 이것이 떨어지는 것을 본 것이에요. 그리고 이것이 딱 끝나고 나면 다른 장면으로 바뀌는 것이에요. 이러한 양쪽이 가려진 역동성이 이 사물을 굉장히 새롭게 느껴지게 만드는 것이에요. 무슨 소리인지 모르세요? 그러니까 자기 자녀들을 만날 보면 아이가 자랐는지 모르잖아요? 그런데 오래간만에 출장 갔다가 한 3년 만에 돌아와서 보면 완전히 처녀가 다 되어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잖아요. 그러면 결국은 알지 못하는 것이 가려있기 때문에 탁 비치는 그것이 새로움으로 다가오는 것이라는 것이죠. 이해되지요? 그런 새로움으로 다가오면 하나님은 후회하실 수도 있고, 기뻐하실 수도 있고 심히 기뻐하실 수도 있고, 조금 기뻐하실 수도 있고, 다양한 것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이렇게 되죠. 하나님에게 정말 모르는 것이 있느냐? 그러면 또 안 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두 가지 방식으로 사물을 다 보실 수 있는 것이죠. 그것이 뭐냐 하면 단순지식으로 보시는 방법과 또 하나는 내가 현(現)견(見)지라고 이야기하는데 현견지의 지식과 단순지의 지식으로 보시는 것이죠. 그러면 예를 들자면 이렇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계획을 가지셨을 때 그것은 하나님 앞에 하나의 착오도 없이 완벽하게 드러난 것이죠. 완벽하게 드러나서 창조가 되었을 때에도 하나님에게는 아무것도 새로운 것이 없는 것이죠. 단순지로 볼 때에는 그런 것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또 하나의 지식의 방편을 가지고 계신데 그것은 현견지에요. 현견지로 볼 때에는 하나님에게도 새로운 것이 나타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새롭다고 느끼는 것은 무지하기 때문이고 예를 들면 집을 설계해놓고 지을 때는 머릿속에 설계가 있지만 실제로 나타날 때는 어떻게 나타날지 모르고 미장원에 갈 때는 이렇게 해주세요. 그러면서 머리로 그림을 그리면서 이야기하지만 다 하고났을 때 어떻게 될지는 모르잖아요. 머리를 다 하고 나면 졸다가도 제일 먼저 거울부터 보잖아요. 생각대로 되었나 보잖아요. ‘이게 아닌데…….’ 이렇게 생각하거나 ‘딱 맞아요. 이렇게 됐어요.’ 그러면서 보잖아요. 그렇죠?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이 안다는 뜻이 아니에요. 그러면 인간하고 똑같은 하나님이 되는 것이죠. 그것이 아니라 단순지도 현견지가 필요 없을 정도로 완벽하고 그런 속에서 현견지로 보실 때에 우리처럼 무지 속에 가려있기 때문에 새롭게 느껴지는 그런 방식의 현견지가 아닌 전 포괄적인 앎 속에서의 현견지라는 것이죠. 그 현견지를 가지고 사물을 보실 수 있기 때문에 거기에 하나님의 의지라는 것이 개입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지가 개입하는 것은 단순지 속에서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물론 처음부터 의지를 가지고 계셨지만 그것들을 통치해가는 과정에서의 그 의지는 하나님의 현견지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에요. 이 현견지가 인간이 사물을 보고 알 수 있는 이 지식과 하나님이 사물을 보며 알 수 있는 이 지식이 접촉할 수 있는 Contact Point가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보이시지 않는다는 것들도 이해되지만 하나님이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슬퍼하시고 순종하고 주님을 섬기면 정말 기뻐하시는구나! 그래서 우리들이 기도 열심히 하고 열심히 순종해서 고난을 이기면 하나님이 마치 나타나셔서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정말 잘했다.’ 이것이 나의 상상 속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께로부터 그렇게 응답이 온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충성스럽게 섬기다가 막 고난을 받고 어려워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면 그냥 내가 느낌에 나 스스로를 ‘그렇게 잘하였도다! 착한 종아!’ 그러는 것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이 나를 매순간 성령을 통해서‘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내가 반드시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라는 이런 주님의 확고한 의지와 하나님의 음성들이 나에게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되어 오는 것이에요. 그러면 큰 힘이 솟아나서 다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는 것이에요. 그런 의미에요.
그러니까 우리들이 항상 하나님이 하나님 앞에 내가 이렇게 무엇인가 마음속에 있는 것들을 잘 해드려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면 하나님에게는 ‘내가 뻔히 창조 전부터 내가 이루려고 했던 그것이다. 그래서 나는 네가 새 일을 했지만 나에게는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구나! 시들먹하구나! 무엇이 새로운 것이 있으랴!’ 그러시는 것이 아니라 ‘그래! 네가 그랬니? 정말 장하구나! 네가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 믿음으로 신앙으로 충성되게 네가 고난을 극복하면서 나를 섬기면서 살았구나! 나도 네가 이렇게 훌륭하게 할 줄은 몰랐다.’ 그게 뭐에요?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을 올라갈 때에 주님이 마음을 졸이셨겠어요? 저놈이 말을 들을까? 아니면 딴청을 부릴까? 쿵쾅쿵쾅 주님이 그러셨겠어요? 다 아셔서 그래서 그것을 칼을 대서 아들을 죽여서 주님께 바치려고 그럴 때 주님이 뭐라고 그러셨어요? ‘됐다.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았다.’ 그게 말이 되요. 이제야 알면 하나님이 아니시지요. 벌써 다 아셨어야지요. 그러니까 그것은 무엇이지요? 단순지가 아니라 현견지에요. 그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자체가 누구를 격려하시기 위함이에요? 아브라함을 격려하시기 위함이에요. ‘아, 하나님이 이제야 내 마음을 알아주셨구나!’ 그게 말이 되요? 그러면 우리 모두가 다 모순이지요. ‘하나님 제 형편 아시죠?’ ‘당연히 알죠.’ ‘이렇게, 이렇게 합니다.’ 다 아는 이야기를 무엇 하려 하느냐고요. 그런데 우리의 현견지에 호소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시는 것이 매 순간 확실하게 느껴지는 것이에요.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 하나님이 우리처럼 무지에 가려진채 현실을 인식하기 때문에 새롭게, 새롭게 느껴지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단순지로써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동시에 현견지로써 당신 자신이 마치 정동의 변화를 받으시는 것처럼 그렇게 느껴지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이끄시는 것이죠.
그러면서 잘 봐요. 54p를 보세요. 거의 끝나갑니다. 마지막이에요. 자 얼마나 멋있는지 보세요. ‘그들에게 있어서 세계와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경륜적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를 하나의 지식의 다발로 묶는 일은 내재적 삼위일체에 대한 묵상이었다. 이러한 예는 사도 바울에게서도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경륜을 길게 진술한 후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고백한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이처럼 유한자와의 관계 속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앎은 발현된 속성의 원천이신 무한자에게로 옮겨진다. 그러나 내재적 삼위일체에 대한 대부분의 지식이 알려지지 않은 채 남겨져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지는 못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올바르게 사랑하는 자는 그 사랑을 지속할 수 없을 정도로 내재적 삼위일체에 대한 지식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리를 알게 하는 것이 곧 사랑이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고백한다. Qui nouit ueritatem, nouit eam, et qui nouit eam, nouit aeternitatem. Caritas nouit eam. O aeterna ueritas et uera caritas et cara aeternitas!’ 얼마나 멋있어요? ‘진리를 아는 자는 그 빛을 알고 그 빛을 아는 자는 영원을 압니다. 사랑은 그 빛을 압니다. 영원한 진리요, 참된 사랑이며, 사랑스러운 영원이시여!’ 사랑, 진리, 영원이 하나라는 것이에요. 누구에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에요.
Ⅶ. 결론
이제 끝냅니다. 결론입니다. 56p에요.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자는 구원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하지만 이해하려고 애쓰는 자는 지성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합니다. 이 말은 삼위일체의 교리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교리이며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영원한 신비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줄치세요.
① ‘첫째로 삼위일체의 교리는 신앙의 근본조항이다.’
왜요? 예배에 대해서, 세계의 모든 근원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의 구원의 근거에 대해서 가르쳐주는 조항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② ‘둘째 삼위일체의 교리는 실천적이다.’
사변적인 교리가 아니고 실천적인 교리라는 것을 이미 입증해주었지요?
③ ‘셋째로 삼위일체의 교리는 신비에 속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무한하고 영원한 신비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인간들에게 알리시기를 기뻐하셨다. 따라서 우리가 신학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먼저 하신 신학 곧 계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시에 대한 반응은 믿음이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아는 데 있어서 믿음이 도구적 원인이라면 성령은 작용적 원인이시다. 인간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났다.(거기 줄치세요.) 궁극적으로 우리의 모든 지식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다.
④ ‘넷째로 삼위일체를 아는 지식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것인데 시간이 없어서 못하고 넘어갔는데 이것을 다시 해야겠어요. 이 정도로 해가지고는 되지도 않아요. 요 부분은 제가 설명을 조금 해야겠어요.
어떻게 되느냐하면 세계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이 이루어지고 성부, 성자, 성령이 위격적으로 개입하셔서 역사를 전개해 가시잖아요? 이 전개의 목적이 하나님을 알리시기 위한 것이거든요. 알아야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으니까……. 알려주시는데 그 알려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속성이에요. 이 하나님의 속성이 알려질 때에는 위를 통해서 속성이 알려지는데 그 위를 통해서 알려진 속성은 위에만 속한 속성이라고 이야기하면 안 돼요. 그 위격적 속성의 독특한 특성은 아까 이야기한 낳으심, 낳은바 되심, 발출하심 그것 이외에 다른 존재론적 속성들은 위를 통해서 알려져도 그것은 전체 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을 알려주는 것이지 위에 소속된 속성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에요. 이해되시죠? 그것을 명심하시고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의 속성을 알려주시는데 이 속성을 알려주실 때에 그 경륜 자체가 전체적인 경륜이 물론 일반사적인 경륜도 있겠지요. 하나님이 일단 세계를 창조하셨으니까 세계가 그냥 존재하게끔 하셔야 되잖아요. 그런데 그것은 하위의 목적이에요.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먹이시고 재우시고 입히시고 하시지만 잠을 못 잘까봐 재우시고 배고플까봐 먹이시고 추울까봐 입히신다고 이야기하면 안 되잖아요. 그렇게 해주시는 것은 무언가 목적이 있잖아요. 그렇죠? 자기 자식들한테 그렇게 할 때는 훌륭한 자식이 되라고 그러듯이 여러분들을 그렇게 해주실 때는 여러분들이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해주시는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열린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려면 천지창조의 목적 8개로 된 시리즈를 완전히 이해를 해야 돼요. 해야지만 이런 것들이 빨리빨리 스며들어옵니다.
그렇게 되는데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일반사적인 것이고 그런 모든 경륜을 통해서 풀어져 나가는 그 경륜은 무엇이냐 하면 인간의 구속 경륜이이에요. 그 구속 경륜의 핵심이 누구냐 하면 그리스도 예수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은 시간 안에 오신 영원자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것을 이해해야 되는 것이에요.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에요. 그래서 경륜을 통해서 하나님을 안다고 할 때 하늘을 더듬고 자연을 더듬어서도 하나님의 경륜을 알 수 있지만 그것은 아주 희미한 부스러기들이에요. 그래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렇게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에 핵심이 구속경륜이고 구속경륜의 최고의 계시의 찬란한 정점이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이에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에요. 그래서 내재적 삼위일체에 대한 앎으로 가기 위해서는 경륜적 삼위일체에서 시작해야하고 경륜적 삼위일체에 대한 앎으로 가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에게서 시작해야하는 것이죠. 그래서 제가 교리반에서 반복하고 있는 카다키스무스가 그것이잖아요. ‘자, 우리는 왜 태어났습니까?’ 스투데오 에루구숨=나는 공부한다. 고로 존재한다. ‘당신은 무엇에 대해서 공부하기 위해서 태어났습니까?’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해서 공부하기 위해 태어났는데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는 이 세 가지 대상에 대한 가장 훌륭한 지식의 보고이므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이에요.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하는 것이죠.
그러면 그리스도 예수는 사실 엄격하게 말하면 제2격이신 성자의 인신이잖아요. 성자의 성육신이잖아요. 그런데 그 한분을 통해서 비춰오는 찬란한 속성의 빛깔은 예수님 한 분의 것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것이 함께 드러나는 것이에요. 그럼 왜 굳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그런 하나님의 속성의 빛이 그렇게 찬란하게 드러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게 뭐냐 하면 자, 여러분! 성령을 어떻게 보실래요? 보신 분 있으세요? 보았다고 그러면 그때부터 문제가 되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성부를 어디서 보시겠어요? 그럼 지금은 또 성자는 어디서 보시겠어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볼 수 있었잖아요. 그리고 본 것에 대한 또렷한 증거들이 남아있는 것이죠. 그러면 성부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할 때 어떻게 사랑하셨는데? 어느 목사님이 그 이야기를 하던데……. ‘하나님이 나를 만져주셨어!’ 그랬더니 옆에 있는 교역자가 ‘어디를 만져주셨대?’ 머리를 만져주셨어요? 엉덩이를 만져주셨어요? 어디를 만져주셨어요? 그렇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어디를 만져주셨어요? 그러면 대답이 나오는 것이에요. ‘내 아픈 부위를’, ‘내 연약한 머리를’, ‘그리고 내 저는 다리를,’ 그렇게 생생하게 하나님이 인간의 지성으로만 알 수 있는 하나님이 이 지상뿐만 아니라 감각을 통해서 알 수 있도록 더군다나 눈물과 탄식으로 사랑으로 진리의 말씀으로 섬기시고 모본을 보여주신 이 생생한 광경을 통해서 찬란한 하나님의 속성의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깊이가 경륜적 삼위일체를 아는 지식의 깊이이고, 경륜적 삼위일체를 아는 지식의 깊이가 내재적 삼위일체를 아는 지식의 깊이에요. 그 찬란한 그런 놀라운 것들이 나타나는 것이에요. 그것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 계시사적으로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데오스 매니따뜨스 까르메’ ‘육신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하나님’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별명이에요.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 속성의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올 때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는 그것이 천계와 세상과 우주를 더듬으면서 삼위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족적을 찾아내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고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이고 그러한 하나님의 아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아름다움의 집적들을 모아놓은 것이 바로 신약성경이라는 것이에요. 그것을 통해서 우리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게 되는 것이에요. 자, 그 정도로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⑤ ‘다섯째로 두 삼위일체에 대한 지식은 순환적이다.’
그래서 어떻게? 경륜적 삼위일체에서 시작해서 내재적 삼위일체로 내재적 삼위일체에서 시작해서 경륜적 삼위일체로 순환한다.
⑥ ‘여섯째로 삼위일체는 경배의 대상이시다.’
‘우리는 삼위일체를 탐구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경배의 대상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따라서 삼위일체를 신앙으로 알아가고 이성으로서 그에 대한 바른 교리를 세우는 것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위대하고 거룩하신 성 삼위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배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경배의 염원 없이 삼위일체를 탐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는 마스트리히트의 지적과 같이 교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이성으로 알 수 없다고 할지라도 이성보다 뛰어난 믿음으로서 진리의 기둥들을 붙들고 그리고 서로 아시고, 사랑하시며, 섬기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경배하며 살아야한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은 삼위 안에 있는 이 아름다운 위격적 교통을 닮아 만물을 하나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며 이 일을 위해 교회는 삼위일체의 교통을 세상 속에서 구현해가야 한다. 그 안에서 성도는 이 세상에서도 영원한 행복을 선취적으로 누리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Soli Deo Gloria! 하나님께만 영광을!’
이렇게 해서 강의가 끝났습니다.